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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1975년 대마초 파동...

by Wood-Stock 2009. 8. 17.

일순 연기처럼 사라진 ‘통기타·록 울림’

 

» ‘한국판 우드스톡’이라고 불릴 만한 청평 페스티벌이 1971년 8월 17일부터 6일 동안 열렸다. 이렇게 무르익던 청년 문화는 75년 12월 ‘대마초 파동’으로 된서리를 맞는다. 사진 여운택씨 제공.

 

1970년대의 정오(正午). 당시 청년문화의 총아였던 일군의 톱 스타들이 신문지상을 장식했다. ‘문화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그것도 ‘대마초 연예인’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70년대 전반기에 화려하게 꽃피며 알토란같은 열매를 맺던 청년문화는 75년 겨울의 ‘1차(!) 대마초 파동’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 직격타를 맞은 대중음악계는 대마초 파동 ‘이전과 이후’가 뚜렷이 나뉘어질 정도였다. 새로운 가요(통칭 ‘한국 팝’)는 69년께 ‘님아’, ‘늦기 전에’, ‘하얀 손수건’을 신호탄으로 등장한 솔, 사이키델릭 록, 포크로 트로트와 재래 가요가 쌓아온 아성을 강하게 허물어 갔다. 특히 대마초 파동이 일어난 75년은 ‘청년문화의 사운드트랙’이던 록과 포크가 파란을 일으킨 해였다.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 ‘검은 나비’의 ‘당신은 몰라’, 송창식의 ‘왜 불러’가 3대 히트곡으로 등극했다. ‘미인’과 ‘왜 불러’는 앨범 판매 10만장을 돌파하는 대박을 기록했다. 같은 뿌리의 ‘로크와 포크’ 곡들이 차트 상위권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몇몇 히트곡은 ‘한층 정제되고 성숙된 한국적 록·포크’란 찬사를 받으며 ‘외래풍조 모방’이란 습관적 딴지를 무색케 하는 등 상업적 성공 그 이상을 견인하는 중이었다.

 

‘한국팝’ 막 꽃피우려는 때 불온·퇴폐라는 이름으로 밑둥치까지 싹뚝 잘라
‘75년이전’ 은 망각의 늪으로…

 

얄궂게도 이 모든 것은 대마초 파동이란 ‘찬란한 슬픔의 봄(아니, 겨울!)’을 지나며 일거에 동사하고 말았다. 계속되는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에 살벌한 긴급조치가 발표되는 등 조짐은 이미 심상치 않았다. 75년 6월 가요 정화조치가 시작돼 ‘불신풍조 조장’, ‘창법 미숙’ 등 갖가지 어이없는 이유로 수많은 금지곡이 붙고 음반의 판금조치로 희귀 음반이 무더기 양산됐다. 금지곡 리스트는 무한 업데이트됐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금지곡이 수록된 음반을 제작·배포했다는 이유로 전체 10개 음반사 중 7개사에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말하자면 대마초 파동은 박정희 정권의 ‘불온’과 ‘퇴폐’라는 문화적 처단을 수렴하는 ‘결정타’였던 셈이다. 청년음악 아이콘들을 일거에 ‘문화적 금치산자’로 만든 파동 이후 수많은 록·포크 음악인들은 대마초란 주홍 낙인이 찍힌 채 방송출연과 녹음은 물론 밤무대(생업!)조차 금지된 기막힌 세월을 기약 없이 보내야 했다. 혹여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비, ‘신화’, ‘에스지 워너비’, 이수영, 자우림, ‘크라잉 넛’ 등이 일시에 사라졌다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음반점과 공연장 그 어디서도 이들의 모습과 음악을 접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해일처럼 휩쓸고 지나간 대마초 파동 이후의 정황에 대해서는 예컨대 ‘들을만한 음악이 없었다’는 당시 청년들의 증언이나 ‘틀을 음악이(또는 출연시킬 가수가) 없었다’는 방송국 피디의 증언이면 족할 지도 모른다. 70년대 후반은 트로트를 중심으로 한 기성 가요의 감성이 다시 대세를 장악한 시기였다. 다만 중고등학생들과 청년들에게 대학가요제 음악은 마른땅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당시를 대표하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오동잎’, ‘사랑만은 않겠어요’, ‘난 정말 몰랐었네’ 등 이른바 트로트 고고가 70년대 전반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떠올리게 했던 건 그 노래의 주인공이 하나같이 그룹 사운드 출신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마초 파동은 록과 포크로 대변된 청년음악의 열매와 가지는 물론 밑둥치까지 자른 ‘문화적 벌목’이었다. 거대한 문화적 패닉 혹은 진공상태에 빠뜨린 쿠데타였다. 그 사건 이후 젊은 대중음악은 허리가 잘리거나 조로(早老)했고 ‘75년 이전’은 깊은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70년대 청년문화가 아직도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란 앙상한 기호로 향수되는 데 머무는 걸 보면, 기억상실의 후유증 벗어나기는 아직 먼 것 같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금지당한 5년’ 지나니 발붙일 곳 없더라

‘대마초 파동’ 대표적 피해자 신중현씨

 

1975년 12월21일치 <일간스포츠>는 “신중현의 ‘미인’과 송창식의 ‘왜 불러’ 두 곡 다 방륜(한국방송윤리위원회)과 예륜(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금지곡으로 선정돼 히트곡은 금지곡이라는 연예계의 전통 아닌 전통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고 보도했다. 이른바 ‘가요정화 대책’의 대표적인 피해자로 신중현을 꼽을 만한데 “69~74년 4곡, 75년 한해만 17곡이 금지됐다.”(노재명저 <신중현과 아름다운 강산>)

 

이유도 해괴하다. ‘거짓말이야’는 불신감 조장, 건전가요로 내놓은 ‘뭉치자’는 이유가 바로 결과인 ‘방송 부적격’이었다. 신중현에게 계속 잽을 날리던 정부는 75년 12월 ‘대마초 파동’으로 결정적 타격을 준다. 서대문구치소에서 보낸 넉 달 동안 “밧줄에 묶여 면회 나갈 때, 옆에 새도 날아가질 않아, ‘새마저 날 무시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던 그에게, 풀려난 뒤 삶 이야기를 들어봤다.

 

1976~79년 뭐든지 하지 말라고 했어. 앨범도 못내고 녹음·연주도 안돼. 항상 사람이 따라붙었어. 술만 퍼마셨지. 악기며 집 다 팔고 셋방살았어. 한창일 때 금지돼 버리니까 온통 절벽이야. 오직 미8군과 송탄 미군기지에서만 받아주더군.

 

75년께 우리나라 음악이 세계적인 수준이었다고 생각해. 그런데 그 뒤 5년 동안 금지곡이 많으니까 방송국에선 흘러간 노래를 틀었지. 트로트가 다시 왔어. 실업자가 돼서 서울 남영동에 자장면 먹으로 갔는데 방 안에서 고등학생들이 트로트를 불렀어. 다른 노래들은 잊혀진 거야. 너무 슬퍼서 자장면도 다 못 먹고 나왔지.

 

80년~90년대 후반 79년 금지가 풀렸지. 거창하게 9인조로 ‘신중현과 뮤직파워’를 결성했어. 그런데 5년 사이 강산이 변했더군. 댄스음악 위주로 돌아가는 거야.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면 웨이터가 “빨리 좀 연주할 수 없냐”고 해. 발이 안 맞아서 춤을 못 춘다고. 결국 그만 두게 됐지. 그런 적이 3~4번 됐어. 그 뒤로 라이브만했지. 서울 종로 5가 ‘솔트레인’이라고 고등학생들한테 입장료 2천원 받으며 콜라 팔던 곳이었지. 미어터졌지만 단속에 경영난에 없어졌어.

 

그 다음에 ‘세 나그네’를 만들었어. 드럼·베이스만 두고 다 없앤 거지. 세상이 정말 싫더군. 봉고차에 악기 싣고 산으로 들어갔지. 40일 동안 여기 저기 떠돌며 곡 만들었어. 그래서 노래제목이 다 ‘길’, ‘바다’, ‘떠나는 사나이’ 이런 식이야. 그걸 누가 부르겠어. 이후에 ‘록 월드’ 같은 라이브 공연장을 했는데 경영 경험이 없으니 곧 문 닫았지.

 

왜? 1972년에 청와대에서 전화 받았어. ‘대통령(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탁한다’고. 나는 그런 노래 못 만든다고 그랬어. 가뜩이나 밉보였는데 그해 ‘아름다운 강산’을 텔레비전에서 거창하게 발표한 거야. 반항적은 그림으로.(출연 당시 멤버 중 한 명은 머리를 삭발했고 신씨는 긴 머리를 핀으로 꽂아올리고 있었다.) 현대 록을 퇴폐로 몰아 조여들기 시작했지. ‘그럼 건전가요 만들지 뭐’ 하고 ‘뭉치자’를 내놨는데 앨범 재킷 사진을 경복궁에서 양복 입고 차렷 자세로 찍었어. 그 자체가 기분 나빴나봐.

 

글·사진 김소민 기자

 

유해-무해성 논란 식지않아

헌재 “대마초 처벌은 합헌” 판결 나왔지만

지난해 10월 영화배우 김부선(44)이 “대마초는 사회적으로 위험하지 않고 대마초 처벌규정은 헌법의 행복추구권과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며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신청을 내면서 대마초 ‘비범죄화’ 논란은 달궈졌다.

 

이에 대해 최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김효종 재판관)가 전원일치 의견으로 합헌결정을 내렸다. “대마는 술과 담배보다 더 심각한 폐해를 일으키고 환각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를 위험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논쟁은 누그러졌지만 김부선의 주장은 이제까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있던 대마초 흡연 문제를 30년만에 공적인 토론의 장으로 끌어냈다는 데 여전히 의의가 있다.

 

이전에도 습관성의약품관리법 안에 대마초 흡연을 규제하는 조항은 있었지만 단속은 1975년 대마초 파동을 시작으로 76년 대마관리법이 마련되면서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그 뒤 대마초 흡연을 옹호하는 건 금기시됐다.

 

김부선에 이어 지난해 12월엔 문화예술인 113명이 “대마에 대한 합리적 논의” 등을 요구했다. 이어 지난 3월엔 문화연대, 한국독립영화협회 등이 681명의 서명을 받아 ‘대마 비범죄화 요구 선언문’을 발표했고,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 등이 위헌 신청에 대한 지지선언을 했다. 여기에 김부선의 항소심을 담당하고 있던 수원지검 강력부는 간담회를 열어 대마의 유해성을 주장하며 맞불을 놨다. 한국마약범죄학회가 주최한 마약정책 토론회가 열리는가 하면 <문화방송> ‘100분 토론’은 이를 주제로 삼았고 <한국방송> ‘추적 60분’도 이 문제를 다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나왔지만, 논란의 불씨는 남아있다. 대마의 유해성에 대한 시각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유현씨는 <대마를 위한 변명>이란 책에서 “대마초는 환각에 빠뜨리지 않는다”며 “담배·술처럼 단순한 기호품인데 대마초만 처벌하는 건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책에서 “1994년 미국 국립약물중독연구소에서 낸 자료를 보면 의존성, 금단성, 내성, 강화성, 독성 항목에서 담배의 니코틴이 3~6을 나타난 데 비해 대마초는 이보다 훨씬 약한 1~3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이와 반대로 조성남 국립 부곡정신병원장은 “대마초는 담배보다 타르 등 암 유발 요소가 5~10배는 더 많다”며 “또 대마초에 함유된 테트라하이드로 카나비놀 성분 탓에 시공간 감각이 왜곡된다”고 말했다. 그는 “정자수 감소·월경주기의 변화·호르몬체계의 변화·면역체계의 약화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는 우울증이 4배 이상, 정신분열증 발병이 2배 이상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소민 기자

 

 

대마초 파동 30년 청년문화 ‘해피스모크’ 에 데다

 

 

그해 겨울, 거짓말처럼 스타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대마초를 쉽게 피던 시절, ‘언제부터 단속하겠다’는 한마디 경고나 예고도 없이 수사당국은 ‘대마초 단속’을 시작해 50명이 넘는 가수·연주자·작곡가들을 잡아들였고 풀어준 뒤에도 활동금지령을 내렸다. 서양음악의 단순 번안을 넘어선 한국 팝이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직후였다. 만개를 앞두고 있던 그 꽃은 ‘퇴폐’라는 이름으로 뿌리째 잘려나갔다. 대통령 영구 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이 선포됐고 반대자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붙잡혀가던 때였다.

 

정확히 30년전, 75년 12월 3일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이장희·신중현·윤형주·김추자….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던 음악인들을 굴비 꿰듯 엮어 넣어 훗날 ‘자유로운 청년 문화를 풍비박산 낸 일격’, ‘대중음악 발전의 맥을 끊은 사건’으로 기록된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은 당하는 처지에선 난 데 없는 홍두깨였다. 요즘과는 달리 당시만 해도 ‘해피스모우크’라고 불렸던 대마초는 그들에게 길거리고 다방에서고 나눠 피우는 소일거리 정도였다고 한다.

 

이 파동으로 구속됐던 박광수(65·‘신중현과 더 맨’의 전 보컬)는 이렇게 말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길바닥에 앉아서도 피웠어. 한번도 단속당한 적 없지. 그게 ‘망국적 연기’일지 누가 알았겠소. ‘소주 한잔 하자’랑 비슷하게 여겼는걸. 죄의식을 가질 이유가 없었던 거지.”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날아든 히피 청년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신중현(67)은 그 친구들에게 밥·술 사준 보답으로 대마초를 받았다. “한창 사이키델릭 음악이 유행이어서 알아보려고 68년께 6개월 정도 해봤지. 별 재미없어 끊었어. 나중에 후배들이 ‘대마초 가진 거 있어요’라고 물으면 ‘우리 집에 산처럼 있다’ 그랬지.” 그때까지 대마초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건 음악인들만은 아닌 듯하다. 1970년에 제정된 습관성의약품관리법엔 대마초 흡연을 규제하는 조항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단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1975년 12월3일치 <동아일보>는 사회면에 큼지막하게 ‘해피스모우크 흡연자 첫 구속’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대마초 단속은 이 파동을 시작으로 1976년 4월 대마관리법이 제정되면서 본격화됐다.

 

“소주 한 잔” 처럼 대수롭지 않았는데 75년 12월3일 느닷없이 단속 시작
이장희 신중현 윤형주…줄줄이 구속
정신병원으로 구치소로 박정권 끝날때까지 꼼짝 못했다


방망이질은 살벌했다. 75년 12월3일 ‘그건 너’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이장희를 비롯해 윤형주·이종용이 습관성의약품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다음 날 저녁 신중현은 반포아파트 자신의 집에 죽치고 있던 수사관들과 맞닥뜨렸다. 하루 뒤 그는 서울 중구 남장동 여성문화회관 지하로 끌려갔다. “누구랑 같이 피웠냐고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어. 예전에 히피애들, 조지, 마이클, 닉…. 그랬더니 미국 사람은 안 된대. 매달아서 물에 넣는 거야. 죽겠다 싶어서 불러주는 대로 ‘맞다 맞다’ 그랬지.” 이날 저녁 7시께 박광수도 여성문화회관 지하행을 탔다. “뉴스에서 대마초 이야기가 계속 나와. 서울 명동에 있던 로얄나이트클럽에 일하러 들어섰는데 장정 3명이 엘리베이터 안에 밀어 넣고 뒤지는 거야.” 그도 고문을 당했고 그 이야기는 6일치 <동아일보>에 “‘해피스모우크 흡연 자백하라’ 마약단속원이 폭행”이란 제목으로 보도됐다.

 

신문들은 연일 숨 가쁘게 대마초 관련 소식을 전했다. ‘김추자·권용남·손학래 구속, 가수 박인수 수배’(6일치), ‘30여명 연예인 명단 입수… 정미하(배우) 구속, 남성듀엣 어니언스의 임창제 자수’(8일치), ‘가수 장현 자수’(9일치) ‘코메디언 이상해·이상한, 가수 정훈희·이수미 자수’(10일치), ‘가수 김세환 김정호 불구속 입건’(22일치). 76년 1월30일치 <조선일보>는 “75년 11월 26일부터 76년 1월20일 사이 대마초 관련 연예인은 모두 54명으로 구속 20명, 불구속 11명, 수용중 13명, 훈방 10명”라며 “그 가운데 가수는 23명, 배우 3명, 코디미언 2명, 악사 26명”이라고 보도했다. 그물망에 잡힌 건 연예인 뿐만이 아니었다. 23일 서울지검은 “지난달 27일부터 30일까지 밀매조직 12개파 가운데 5개파 35명과 흡연자 101명 등 모두 136명을 적발해 이중 65명을 구속, 22명은 불구속, 13명은 정신병원 등에 수용, 나머지 32명은 훈방조처했다”고 밝혔다.

 

수사 휘몰이는 잦아든 듯했지만 잡혀 들어간 사람들의 고초는 여전히 호됐다. 서대문정신병원에서 신중현이 보낸 1주일은 이렇다. “처음엔 독방에 있다가 나중엔 정신질환자들과 같이 놀았어. 사방이 창살이고. ‘이렇게 미치게 하려는구나’ 생각했지.” “고문받은 뒤 정신병원에서 한달동안 갇혀있었다”는 기타리스트 강근식(59)은 이렇게 기억한다. “감독, 가수, 디스크자키…. 30여명 같이 있었어. 밖으로 연락도 안됐지. 불안했지만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래도 재밌던걸.”

 

벌금 내고 풀려난 강근식과 달리 구속기소된 사람들은 서대문구치소로 옮겨졌다. 신중현은 “넉달 동안 도둑들하고 같이 있었다”고 했다. “하루 종일 도둑질한 이야기만 들었어. 레파토리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똑같이 낱말하나 안 바꾸고 말해. 어찌나 지겨운지….”

 

12월23일 이장희·김추자 등은 벌금형을, 그 다음해 3월께 신중현·박광수·윤형주 등은 징역1년~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풀려났다. 벌의 경중을 떠나 박정희 정권이 끝날 때까지 이후 4년 동안 그들은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자수해서 벌금만 냈던 ‘어니언스’의 임창제(59)는 이렇게 말했다. “방송이고 공연이고 다 금지야. 나이트클럽에서도 안 받아줘. 받아줘도 출연료가 그전에 반 토막이야. 먹고 살기 힘들어서 정신 없었지.” 박광수는 “그 뒤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 그만두고 고향에서 살려고 했는데 거기서도 폐인 취급이던걸. 대마초꾼으로 찍힌 거지.”

 

‘대마초 파동’의 큰 푸닥거리는 지나갔다. 그 잔물결은 멈추지 않았다. 76년엔 김도향이, 77년엔 하남석·이동원·채은옥·조용필 등이 대마초 탓에 곤욕을 치렀다. 금지곡이 너무 많아 방송사 피디들마저 “틀 곡이 없다 갈팡질팡”(<일간스포츠> 75년 12월26일치)하던 사이 빈 자리는 흘러간 옛 노래들이 메웠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