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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한겨레 연재) 세상을 바꾼 노래 (1981~1991)

by Wood-Stock 2009. 9. 9.

엠티브이가 만든 흥행법칙, 그 첫번째 신화 ~ 올리비아 뉴튼존의 <피지컬>(1981년)

 

1981년 8월1일 대중음악의 역사는 다시 한 번 혁명적인 변화를 맞았다. 24시간 음악만을 방송하는 케이블 텔레비전 채널 ‘엠티브이’가 개국한 이날 이후, 대중음악 산업의 ‘게임의 규칙’은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다. 영상이 음악만큼 중요해지고 외모가 능력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물론, 엠티브이가 뮤직비디오를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1975) 클립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래, 뮤직비디오는 이미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음악 산업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뉴 웨이브 듀오 버글스가 라디오 시대의 향수와 비디오 시대의 우려를 담은 노래(‘비디오 킬드 더 라디오 스타’)를 1979년에 벌써 발표했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엠티브이 혁명의 본질은 실상, 뮤직비디오에 대한 태도 변화를 요구한 데 있었다. 엠티브이가 개국 방송의 첫 곡으로 다름 아닌 ‘비디오 킬드 더 라디오 스타’를 송출했다는 사실은 그 방증이다. 노래의 인식적 배경을 역이용함으로써 시대가 바뀌었음을 기정사실화했던 것이다. 비디오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고,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올리비아 뉴튼존의 ‘피지컬’은 엠티브이 시대의 본격적인 서막이었다. 뮤직비디오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거대한 성공을 가져온 최초의 사례였던 것이다.

 

‘피지컬’의 비디오는 전신 윤곽을 드러낸 레오타드 차림의 뉴튼존이 피트니스 클럽을 누비는 영상으로 일관한다. 그의 빼어난 외모를 적절히 활용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그럼에도 이 비디오가 섹시함이 아니라 코믹함을 강조했다는 점에 있다. 이는 무엇보다 노랫말 때문이었다. ‘피지컬’은 여성 화자가 섹스를 종용하는 내용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전례를 찾기 힘든 파격적 시도였던 것이다. 방송 금지 조치가 속출했고 그런 상황을 무마하기 위한 자구책이 필요했다. 더불어 올리비아 뉴튼존의 경력도 고려해야 했다. 1971년 데뷔한 이래 그는 ‘컨트리를 노래하는 이웃집 소녀’로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존 트래볼타와 함께 출연한 영화 <그리스>(1978)의 성공으로 변신의 가능성을 확인했다고는 하지만, 뉴튼존의 청순함과 ‘피지컬’의 관능성 사이에는 여전히 현격한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대응 전략으로서 ‘피지컬’ 비디오의 신화가 탄생한 지점이다.

 

‘피지컬’의 뮤직비디오는 섹스 텍스트로서의 육체를 운동 이미지로서의 육체로 치환함으로써, 내용의 자극을 희석시키고 뉴튼존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힘입어 ‘피지컬’은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무려 10주 동안이나 지배함으로써 그 해 최대의 히트곡으로 자리매김했을 뿐만 아니라, 그래미상의 ‘올해의 비디오’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까지 누렸다. 뉴튼존의 변신을 정당화시킨 것은 덤이었다. 비평가 스티븐 토머스 얼와인은 ‘피지컬’이 “단순한 히트곡이 아니라 하나의 팝 문화 현상”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이 노래가 불러일으킨 에어로빅 열풍과 워크아웃 비디오 제작 붐을 통해 당대 대중문화의 단편들을 엿볼 수 있다는 뜻이다. ‘피지컬‘은 80년대가 엠티브이와 키치의 시대가 되리라는 예언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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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리즘’ 모난 턱에 훅을 날리다 ~ 스페셜스의 <고스트 타운>(1981년)

 

정확히 일 년 전, 세계를 공황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금융 위기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실패로 드러났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곪아 터진 자본주의의 환부를 들추는 과정은 두 개의 익숙한 이름을 역사의 심판대로 소환했다.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 1980년대 세계를 물질주의 무한경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두 엔진이었다. 요컨대, 촌스러울 만큼 거대하고 화려했던 동시에 도금 장식처럼 경박하고 단소했던 당대 주류 문화의 양상도 거기서 추진력을 얻었다. “우리는 물질적인 세상에 살고 있어/ 그리고 나는 물질적인 여자야”(‘머티리얼걸’)라고 노래한 마돈나가 당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필연적 귀결이었던 셈이다.

 

그런 정황은 역설적으로, 시대의 그늘을 비판한 노래들의 봇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80년대가 발행한 동전의 양면이었다. 물론, 상황의 치열함이라면 레이건의 미국보다 대처의 영국에서 훨씬 강했다. 당시 영국은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요청할 만큼 경제 위기 상태였기 때문이다. 영국 음악계의 사려 깊은 현실 인식은 펑크 록의 광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나타났다. 광산 노동자 파업을 소재로 한 빌리 브래그의 ‘비트윈 더 워스’, 열에 하나꼴로 치솟은 실업률을 다룬 유비포티의 ‘원 인 텐’, 포클랜드 전쟁이 가져온 선박 특수에 일자리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복잡한 심정을 다룬 엘비스 코스텔로의 ‘십 빌딩’ 등은 그 자체로 대처리즘에 대한 비판적 매니페스토들이었다. 여기 꿈꿀 기회마저 박탈당한 도시의 젊음을 노래한 스페셜스의 ‘고스트 타운’은 그것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것들 가운데 최고였다.

 

‘고스트 타운’에서 스페셜스는 자신들의 고향이자 영국의 디트로이트 격인 공업도시 코번트리의 현실을 직설적으로 묘사했다. “정부는 젊은이들을 방치하고 있어/ 이곳은 마치 유령도시처럼 변해가고 있지/ 이 나라에는 일자리가 없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지/ 사람들의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네.” 이처럼 신랄한 노래가 3주간이나 영국 싱글 차트 정상을 지켰다는 사실은 당시 시민들의 절망과 울분이 어떠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타이밍도 완벽했다. 브릭스턴에서 시작된 빈민 폭동사태가 영국 전역의 도시들로 확산되고 있었고, 그 와중에 펼쳐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초호화판 결혼식은 보통 사람들의 상실감을 극대화시켰다. 그래서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이 노래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 25돌이던 1977년에 발표된) 섹스 피스톨스의 ‘갓 세이브 더 퀸’ 이후 최적의 정치적 시의성과 심대성을 띤 싱글”이라고 평했다.

 

자메이카의 스카 리듬과 펑크 록의 에너지를 결합시킨 사운드를 통해 새로운 음악적 표준을 만들어낸 스페셜스는, 탐욕스러운 음악 자본을 비판한 데뷔 싱글 ‘갱스터스’부터 남아공의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한 ‘프리 넬슨 만델라’까지, 시종일관 날카로운 사회 비판의 시각을 견지해왔다. 인종을 망라한 멤버 구성을 통해 스스로 흑백 통합을 실천했던 그들은 ‘고스트 타운’으로 마침내 범시민적 연대까지 끌어냈던 것이다. 행복도시라는 아이러니한 약칭 탓에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세종시 계획의 분열상에서 21세기 대한민국에 나타날지도 모를 유령도시를 떠올린다면 이 노래는 안성맞춤의 사운드트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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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예술의 부스러기 ‘낯선 전율’ ~ 로리 앤더슨의 <오 슈퍼맨>(1981년)

 

뮤직비디오의 등장이 비주얼 이미지를 음악적 기호의 핵심적 인자로 보편화시킨 사건이긴 했지만, 그 실재적 연원은 음악의 탄생 시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역사가 오래다. 주지하다시피, 레코드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음악은 무대 예술의 범주에 속해 있었고 음악 감상은 필연적으로 시각적 경험을 동반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레코드가 상용화된 이후에도 변한 것은 없다.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무대 공연은 더욱 현란한 양상으로 진화해갔고, 커버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 따위의 요소를 포함한 앨범 패키지가 일반화하면서 대중음악에서 시각적 소구력의 효용은 외려 더욱 강력해졌다. 그래서 때론 미술가의 창조적 영감이 음악적 형식에까지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예컨대, 앤디 워홀의 경우가 그랬고 로리 앤더슨이 또한 그랬다.

 

로리 앤더슨은 1980년대의 전환점에서 나타난 워홀의 업그레이드 확장판 격인 존재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조각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앤더슨은 1970년대 후반부터 뉴욕 전위 예술계에서 활동하며 미술과 기술, 연주와 연극을 결합한 퍼포먼스 아트 분야로 두각을 나타냈다. 비평가 마크 데리는 롤랑 바르트를 인용하여 앤더슨의 당시 작업이 “이미지, 제스처, 음악적 사운드, 오브제,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복잡한 조합으로서의 기호작용”이라고 평한 바 있는데,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라는 제목의 여덟 시간짜리 무대 작품의 부산물로 파생한 ‘오 슈퍼맨’은 그와 같은 창작행위의 총아였다. 대중음악 작법의 전통과는 무관한 창작물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오 슈퍼맨’은 유례가 없을 만큼 독특한 형식의 음악적 콜라주다. 쥘 마스네의 오페라 <르 시드>(1885)에 담긴 아리아 ‘오 군주여, 오 판관이여, 오 아버지여’에서 차용한 선율에,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노자의 <도덕경>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엮어, 보코더로 왜곡시킨 자동응답기의 메시지 형식에 담아낸 이 노래의 방법론은 생경한 전율 그 자체였던 것이다. 주목할 것은, 그럼에도 ‘오 슈퍼맨’이 보편성에 호소하는 정서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비를 들여 소량으로 제작한 이 노래가 대양 너머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그래서 비평가 길리언 가는 이 노래가 “당대의 어떤 ‘대안적인’ 레코드와도 완전히 달랐다. 뻔한 유행 상품이라 일축하기에는 너무나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편안하게 주류의 틀에 끼워 맞추기에는 너무나 파격적이었으며, 젠체하는 엘리트주의나 예술가연하는 태도라고 쉽게 평가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친근했다”고 평했던 것이다.

 

로리 앤더슨의 작업과 ‘오 슈퍼맨’의 성취는 매체와 정보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더욱 각별한 상징성을 띤다. 시뮬라크르(모방 현실)가 생산해낸 하이퍼리얼리티(극사실성)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원본을 만들어낸 방식은 예언적이었다고 할 만큼 시대를 앞선 시도였기 때문이다. 마크 데리는 그것을 가리켜 현대 사회에서의 “의미의 위기를 결정화시켜” 보여준 것이었다고 썼다. 페티시와 패스티시를 작품으로 포장해내는 이즈음의 세태를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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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문법’ 혁명적 설계자들 ~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의 〈더 메시지〉(1982년)

 

200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식은 특별했다. 3월12일, 미국 뉴욕의 월도프 애스토리아 호텔에서 펼쳐진 행사를 통해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가 힙합 뮤지션 사상 최초로 대중음악사의 판테온에 영전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명예의 전당은, 데뷔작을 발표하고 25년이 지나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하는 데서 알 수 있듯, 시간의 시험을 거치며 음악적 영향력을 검증받은 뮤지션들에게만 입회를 허락하는 최고 권위의 영예다.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의 헌액은 말하자면, 기성의 권위가 힙합의 가치를 최종 추인한 상징적 사건이었던 셈이다. <로이터> 통신이 관련 소식을 타전하며 “로큰롤이 힙합을 받아들였다”는 의미를 강조했던 이유도 거기 있다.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는 무엇보다 힙합의 문법을 체계화한 기록자로 최우선의 평가를 받는 존재다. 비트를 조합하는 체계와 라임의 전달 방식을 개선하고 정착시켜 힙합의 단편적 요소들을 완결된 형식으로 다듬어낸 혁신적 중재자들이었다. 디제이 쿨 허크와 아프리카 밤바타, 그리고 슈거힐 갱과 커티스 블로의 음악적 성취들을 모조리 매개해냄으로써 리듬과 래핑, 사운드와 메시지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통해 힙합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의 노래 ‘더 메시지’는 바로 그 완성형 모델이었다.

 

‘더 메시지’는 흑인 사회의 불안과 불만을 표출하는 저항의 언어라는 측면에서 랩의 인식적 기반에 이정표를 세웠다. 1981년 발표한 싱글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온 더 휠스 오브 스틸’에서 커팅과 스크래칭 등의 진일보한 브레이크비트 운용법을 담아낸 데 이어, 이 노래를 통해서는 사운드의 혁명에 필적하는 메시지의 혁신까지 이뤄냈다.

 

이 노래는 게토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묘사(“깨진 유리가 사방에 널려 있어/ 사람들은 계단에다 방뇨를 해대지”)로 시작해서, 감옥에서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냉소(“너의 싸늘하게 식은 몸뚱이가 (목매달려) 앞뒤로 흔들리지/ 하지만 이제서야 네 눈은 슬프고도 슬픈 노래를 부르네/ 네가 얼마나 성급하게 살아왔고 얼마나 미숙하게 죽었는지에 대해”)로 끝을 맺는다. 흑인 동네의 파티 문화에서 파생한 랩 라임의 통속적 언어 유희를 거부하고 흑인 사회의 살벌한 현실을 직시하는 생생한 증언들을 쏟아낸 것이다. 거리의 현실을 다룬 랩이 전례 없던 것은 아니지만, 냉정한 태도와 음악적 지향을 동시에 충족시킨 경우는 ‘더 메시지’가 처음이었다. 비평가 게리 멀홀랜드는 이 노래가 “힙합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하룻밤 사이에 뒤바꿔놓았다”고 평했다.

 

‘더 메시지’의 양상이 충격적일 만큼 새로웠다는 점은 밴드 멤버들조차 애초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 반신반의했다는 사실에서 미뤄 짐작해볼 수 있다. 창고에 처박힐 운명으로부터 이 노래를 구해낸 것은 메인 엠시 멜르 멜의 개인적 노고였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의 이력뿐만 아니라 힙합 역사 전체를 가름한 선견지명이 되었다. 이 노래가 아니었다면 힙합의 표정은 오늘과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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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 접수한 ‘아프리카 하이브리드’ ~ 아프리카 밤바타의 <플래닛 록>(1982년)

 

“임신부를 위한 모차르트” 류의 음반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시대에 음악을 통한 인성 교육은 더 이상 낯선 개념이 아니다. 예컨대, 베네수엘라의 빈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엘 시스테마’ 프로그램이나 (상당한 수준의 연주자로도 유명했던) 철학자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름을 기린 팔레스타인의 국립 콘서버토리는 그 효과를 입증해 보인 가장 성공한 사례들로 손꼽힌다. 물론, 그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대중음악을 매개로 한 프로그램들도 존재한다. 이른바 ‘줄루 네이션’은 그것들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이다. 갱생한 전직 갱스터들이 조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심장한 이 커뮤니티는 힙합을 바탕으로 종교적, 문화적 가치관의 공유 집단을 구축한 특별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중산층 흑인 청년들이 스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갱스터 출신으로 행세한다는 코미디 영화 <시비4>(1993)의 풍자에서 볼 수 있듯, 오늘날 힙합은 폭력적이고 마초적인 하위 문화의 대명사로 인식되곤 한다. 인종적 갈등과 반영웅적 환상을 마케팅 수단으로 왜곡시킨 탓이다. 그런 측면에서 ‘줄루 네이션’은 힙합의 본래 지향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확인시키는 역사적 증거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갱스터의 우두머리였으나 힙합의 개척자로 인생 행로를 수정한 아프리카 밤바타가 프로그램 설립자라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2007년 그랜드마스터 플래시와 함께 힙합 뮤지션 최초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헌액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영전에는 실패했)던 데서도 알 수 있다시피, 아프리카 밤바타는 힙합 형성기의 가장 중요한 뮤지션 가운데 하나였다.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의 영향력을 자각한 그는, 힙합을 매개로 거리의 청소년들을 감화시키는 사업과 새로운 음악적 가능성을 개척하는 실험을 병행했고 마침내 스타덤에까지 올랐다. 골드 레코드(100만장 판매. 현재는 50만장으로 기준 축소)를 기록한 최초의 힙합 싱글 가운데 하나인 ‘플래닛 록’을 통해서였다.

 

‘플래닛 록’은 대중적 성공을 넘어선 음악적 성과로 더욱 두드러진 자취를 남겼다. 솔과 펑크(Funk)와 디스코의 고전들에서 발췌한 브레이크 사운드에 안주하던 대부분의 동시대 힙합 디제이들과 달리, 밤바타는 프로그레시브 록에서 펑크(Punk) 록까지, 크라우트 록에서 뉴웨이브까지 흑인 음악의 전통 밖에 존재하는 음악적 양식들을 적극 수용했다. 더불어 당대의 첨단 하드웨어들을 사용하여 창작적 방법론을 확장시키기도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밤바타의 절충주의가 창조해낸 하이브리드였다.

 

실제로 ‘플래닛 록’은 최초의 프로그램 가능한 드럼머신 중 하나였던 롤랜드 티아르-808과 최초의 다중화음 샘플링 신서사이저였던 페어라이트 시엠아이를 통해, 크라프트베르크의 ‘트랜스-유럽 익스프레스’(1977)와 ‘넘버스’(1988)를 하나의 유기적 결합체로 구성해낸 밤바타식 절충주의의 극단이었다. 비평가 데이비드 하워드의 말마따나 밤바타는 이 노래를 통해 “기계도 펑키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빌 브루스터와 프랭크 브로튼의 지적처럼 “하우스의 기원에는 공인된 영감을, 미래의 힙합에는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대륙에서 거둔 줄루족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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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낭만주의’ 뮤직비디오 날개 달다 ~ 듀란 듀란의 <헝그리 라이크 더 울프>(1982년)

 

대중음악사의 1980년대를 관통한 핵심 키워드는 뮤직비디오와 신시사이저다. 음악 창작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 후자와 음반 홍보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전자의 결합은 대중음악계를 1970년대 후반의 슬럼프로부터 탈출시킨 활력소였다. 하지만 논란도 많았다. 신시사이저의 미학적 정격성과 뮤직비디오의 공공연한 상업성에 대해 평단이 보인 의구심 때문이었다. <뉴욕 타임스>의 저널리스트 존 릴랜드에 따르면, 반항과 반기성의 표상으로서 록의 미학을 구축해온 베이비붐 세대가 어느덧 기성세대로 편입하면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엉덩이 춤에 질색했던 자신들의 부모와 비슷한 입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화적 세대차였다.

 

그럼에도 당대의 물신이 과거의 정신을 압도하는 경향으로 대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레이건과 대처가 주도한 세계상이 있었다. 스프레이로 곧추세운 헤어스타일과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패드를 넣은 재킷이 대표하는 80년대식 패션은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선전했던 레이건-대처 시대 이념의 형상화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비평가 솔 오스털리츠가 얘기한 “모든 것의 과잉”으로서 뮤직비디오와, 건반 하나로 오케스트라를 구현하는 기계로서 신시사이저는 철저하게 ‘80년대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화려한 비주얼 이미지와 경쾌한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결합시킨 ‘신낭만주의자들’(뉴 로맨틱스)이 ‘새로운 흐름’(뉴 웨이브) 속에서 ‘새로운 팝’(뉴 팝)의 기수로서 등장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던 셈이다. “레이건-대처의 80년대가 낳은 적자”(오스털리츠)이며 “엠티브이가 생성해낸 최초의 아이돌”(마크 웨인가튼)로 평가받는 듀란 듀란이 그 핵심에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애초 뉴 로맨틱스는 철저하게 영국적인 현상이었다. 포스트펑크의 실험이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발했고, (역시 영국적 현상이던) 글램 록의 영향이 남아 있었으며, 패션의 차별성이 하위 문화의 경계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던 배경이 영국에서 뉴 로맨틱스를 탄생시킨 요인이었다. 그런 국지적 유행을 국제적 흐름으로 안착시킨 매개가 다름 아닌 뮤직비디오였고, 무엇보다 듀란 듀란의 ‘헝그리 라이크 더 울프’였다.

 

‘헝그리 라이크 더 울프’는 듀란 듀란이 미국 차트에서 거둔 최초의 성공이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좀처럼 미국 시장 진출의 활로를 뚫지 못하던 그들은 유례없는 대자본을 투자한 이 노래의 뮤직 비디오를 통해 비로소 스타덤에 올랐다. 그들의 성공은 패셔너블한 영국 뮤지션들의 미국 시장 진출에 견인차 구실을 했다는 측면에서 더욱 중요하다. 이른바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발화였다.

 

스리랑카 밀림에서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장면들을 차용해 완성시킨 ‘헝그리…’의 뮤직비디오는 제작 기법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선형적 내러티브와 비선형적 편집을 병치하고 이국적 풍물과 성적 판타지를 버무려냄으로써 뮤직비디오라는 새로운 미디엄에 문법적 전형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래미 위원회가 1984년 신설한 ‘최우수 단편 뮤직비디오’ 부문의 첫 수상자로 이 노래를 지목한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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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황제의 ‘위대한 유산’ ~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1982년)

 

마이클 잭슨의 죽음은 그의 삶만큼 논쟁거리다. 그럼에도 어떤 긍정성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건 이제 비로소 객관적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잭슨을 향해 미디어가 보여준 조소 어린 태도는, 연예계의 냉정한 생리를 고려하더라도 지나친 것이었다. 인격체로 크기도 전에 스타로 키워졌고, 인생을 알기도 전에 무대를 살아야 했던 한 인간의 뒤틀린 삶에 대한 공감은 그만두더라도, ‘팝의 황제’로 사랑받았던 예술가에 대해 일말의 존중도 보이지 않았던 잔인함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니까.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사랑받는 자가 되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했다. “인간이라는 이해타산적 족속에게 사랑은 손쉽게 팽개쳐버릴 수도 있는 가치지만,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 유지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라는 그의 통찰은, 유폐된 황제로서 잭슨의 말년에 대한 완벽한 메타포다.

 

그런 점에서 <타임>의 비평가 조시 타이런기엘의 관점은 모범이 될 만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그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대중음악 작품들을 꼽으며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얼마나 훌륭하냐고? 지금 당장 앨범을 (플레이어에) 올려놓으면 알 수 있다. (잭슨의) 20세기 말 가장 기괴한 대중적 이미지가 얼마나 쉽게 사라져 없어지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잭슨에 대한 피상적 관념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의 음악적 위업을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뮤지션이자 엔터테이너로서 마이클 잭슨의 위대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스릴러>만으로도 족하다. 단일 앨범으로 역사상 유일하게 판매량 1억장을 돌파했고, 7곡을 히트 차트 톱텐에 올려놓았으며, 8개의 그래미 트로피를 쓸어 모은 이 작품은 잭슨 이력의 정점일 뿐만 아니라 팝 음악 역사의 고원이기도 하다. 예술적인 혁신은 말할 것도 없다. 비평가 게리 멀홀랜드의 말마따나 이 앨범은 “그 이전 30년 동안 미국 팝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솔/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놓음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 그러므로 <스릴러>의 성공을 촉발한 기폭제로서 ‘빌리 진’의 가치는 그 자체로 심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앨범의 가장 독보적인 트랙으로서 ‘빌리 진’의 아이콘적 위상은 전방위의 자취를 남겼다. 미니멀하게 축소시킨 다양한 사운드 요소들의 중첩을 통해 아르앤비의 미래를 연 파격은 말할 것도 없고, 흑인 뮤지션의 곡으로는 최초로 엠티브이의 집중 방송을 끌어낸 비디오의 파괴력 또한 거대했다. 문워크를 처음 선보인 1983년 3월 25일의 ‘모타운 레이블 창립 25주년 기념 콘서트’는 티브이로 방영되어 5000만명의 시청자를 사로잡기도 했는데, 비평가 앤서니 디커티스는 “그날 이후, 더 낫게든 혹은 더 나쁘게든,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평했을 정도다.

 

잭슨의 죽음 이후 ‘빌리 진’은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광적인 여성 팬의 스토킹에서 가져온 노래의 소재가 스타의 삶에 드리운 그늘을 상징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모든 이를 즐겁게 했으나 스스로는 결코 즐겁지 못했던 잭슨의 인생이 거기 투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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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 리듬에 ‘인류애’를 녹이다 ~ 유투의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1983년)

 

1972년 1월30일,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벌어진 인권 행진이 유혈사태로 얼룩졌다. 영국군 특수부대가 비무장 시위 군중에게 화기를 발포해 27명이 부상하고 13명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사망자 7명은 청소년이었고, 부상자 5명은 등에 총을 맞았다. 구교도 민족주의자와 신교도 연방주의자의 대립으로 오랜 내분을 겪어온 북아일랜드의 파란만장한 현대사에서 이른바 ‘피의 일요일’로 일컬어지는 이날의 사건은 단연코 최악의 것이었다. 정치적 신념과 종교적 신실을 음악적 메시지로 통합하고자 했던 아일랜드(공화국) 출신 록 밴드에게 그것은, 외면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는 동족상잔의 비탄임에 분명했다. 유투의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가 무엇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불사른 비장한 호소문인 이유다.

 

주목할 것은, 유투가 이 노래를 개별 사건에 대한 비판으로만 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피로 물든 일요일에 대한 성찰을 인류애의 회복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촉구로 전화시켰다. “오늘 수백만이 울부짖고 있어/ 우리는 먹고 마시지만 그들은 내일 죽겠지.” 거기에는 이란과 이라크의 중동 전쟁,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등 당시 눈앞에서 벌어지던 살육과 파괴의 참상 또한 반영되어 있었다. “참호는 우리들 가슴속에 파였고/ 어머니들과 아이들과 형제들과 자매들은 갈가리 찢겼지.”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는 가사와 음악이 빚어내는 시너지의 표본이기도 했다. “가사를 제대로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음악에 있어서는 분명히 성공했다”고 술회한 보컬리스트 보노의 말마따나, 이 노래의 탁월함은 메시지를 형상화한 사운드의 성취에서 비롯했다. 군악대의 진군가처럼 기계적인 드럼 비트와 불길함을 부추기는 단속적인 바이올린 선율, 터질 듯 팽팽한 베이스 라인과 거칠게 파열하는 기타 코드는 노랫말의 긴장감을 총체적으로 묘사해낸 음악적 이미지다. 그 음표들의 행간에 보노의 뜨거운 목소리가 궁극의 균형자로 개입한다. 살벌한 전장 풍경에 따뜻한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다. 유투의 음악을 “마침내 록의 에너지를 건설적인 무엇에 사용하려는, 실로 긍정적인 펑크”라고 했던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의 평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이 노래를 수록한 앨범 <워>가 영국에서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를 밀어내고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이 증언하는 바도 마찬가지다.

 

‘선데이…’와 <워>가 불러일으킨 반향을 발판 삼아 유투는 세계적인 밴드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투를 최고의 밴드로 만들어준 세상은 그때와 지금 별반 다를 게 없다. ‘선데이…’의 첫 구절이 지금 여기 섬뜩한 예언처럼 들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오늘의 뉴스를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눈을 감고 떨쳐버릴 수가 없네/ 얼마나, 얼마나 더 이 노래를 불러야 하나?” 용산 참사, 촛불 진압, 그리고 법치를 빙자한 일련의 폭력적 조치들 속에서 ‘피의 일요일’을 살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그래서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더 이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더 이 노래를 부르며 각성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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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 잣대’ 꺾어버린 팝 음악의 혁신 ~ 프린스의 <웬 더브스 크라이>(1984년)

 

밀로시 포르만의 영화 <래리 플린트>(1996)는 도색잡지 발행인의 좌충우돌을 통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여준 바 있다. 여기에 이른바 ‘래리 플린트의 패러독스’가 나온다. 요컨대, “살인은 불법이지만 그런 장면을 촬영하면 <타임>에 이름을 싣거나 퓰리처 상을 받을 수도 있다. 반면에, 섹스는 합법이지만 그런 행위를 촬영하면 감옥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사일 폭격 장면을 컴퓨터게임처럼 보여주는 텔레비전 뉴스가 대중문화의 폭력성을 문제 삼는 일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정작 무서운 일은 자의적으로 남용되는 검열의 잣대가 아닌가?

 

그런 논쟁이 1980년대 불붙은 바 있었다. 장본인은 티퍼 고어. 뒷날 미합중국 부통령 자리에 오르는 앨 고어의 부인으로, 대중음악계의 우상이었던 마돈나의 대척점에서 대중음악계의 공적이라는 악명을 얻었던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히트곡으로 스타덤에 오른 마돈나와 달리, 하나의 로비 활동만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학부모 음악 조사 센터’(PMRC)를 설립해 음반업계로 하여금 특정 레코드의 표지에 경고 스티커를 붙이도록 압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조처는 즉각 반발을 불러왔다. 무엇보다 ‘언론, 출판, 종교의 자유’를 명시한 ‘수정 헌법 1조’에 역행하는 사전 검열의 성격이 농후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티퍼 고어가 피엠아르시 활동에 나서는 직접적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프린스였다. 고어는 당시 11살이던 딸이 그의 노래 ‘달링 니키’를 듣고 있는 것에 충격을 받고 행동에 나섰는데, 노랫말의 성적 묘사 때문이었다. 물론, 고어는 프린스가 성적인 환상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프린스가 실상, 마약과 알코올을 혐오하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며 그의 음악이 전례 없이 독창적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달링 니키’를 수록한 앨범 <퍼플 레인>은 두 곡의 넘버원 싱글 포함 네 곡의 톱텐 히트곡을 쏟아냈다. 그래미 두 개 부문과 아카데미 ‘최우수 주제가’상을 휩쓸고, 미국 내에서만 1300만장 판매고를 기록함으로써 대중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 피엠아르시 파문은 오히려 앨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더욱 높이는 작용만 했을 뿐이다.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앨범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퍼플 레인>은 프린스의 음악적 혁신을 결집한 역작이다. 동명 영화의 사운드트랙이기도 한 이 앨범에서 단연 백미는 원초적 단순함을 고도의 복합성으로 승화시킨 마법 같은 노래 ‘웬 더브스 크라이’다. 프린스는 이 노래에서 전위적인 인트로와 클래시컬한 아우트로를 병치했고, 음악적 효과를 위해 베이스 라인마저 삭제해버리는 파격을 시도했다. 비평가 브렌트 디크레센조는 이 노래가 “계획과 통제라는 기준에 있어 프린스의 천재성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준다고 했고, 개리 멀홀랜드는 “미래주의적 팝 음악의 기념비”라고 평했으며, 데이브 마시는 “현대적 히트곡이 갖춰야 할 리듬과 구조의 새 지평”이라고 썼다. 노랫말은 문제가 아니었다. 가사의 단어 몇 개로 음악 전체를 판단하려는 일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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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긴 욕망’ 계산된 성공 ~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1984년) 

 

전성기의 찰리 채플린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나를 안다”고 자랑했고, 비틀스의 존 레넌은 “우리는 예수보다 유명하다”고 자신했다. 물론 그 발언들은, 당연한 수순처럼, 서구 사회에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거기에 어떤 종교적 의미가 있었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기독교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대량문화 시대의 스타덤이라는 물신의 과시였다는 점이다. 불타는 십자가와 성직자의 섹스를 묘사한 뮤직비디오(‘라이크 어 프레이어’)에서 마돈나가 의도했던 바도 그와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애초부터 논란을 겨냥했다는 점이다.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의 말마따나 “유명세를 예술로 승화”시킨 “대량문화 그 자체”인 인물로서 마돈나는, 금기에 도전했다기보다는, 금기에 대한 도전을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마돈나는 레이거노믹스의 1980년대에 탄생한 물질주의의 화신이다. “우리는 물질적인 세상에 살고 있고 난 물질적인 여자”(‘머티리얼 걸’)라는 식의 자기 패러디조차 당당하게 환금시킨 현실주의자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여성 엔터테이너인 동시에 가장 악명 높은 스캔들메이커로서 마돈나의 양면은 그와 같은 태도에서 비롯했다. 그는 완고한 프로페셔널이자 철저한 완벽주의자로 자신을 경영했다. 스스로 연기자인 동시에 연출가였고, 스타인 동시에 ‘스벤갈리’(누군가를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매니저 등 스타를 통제·관리하는 이들을 일컫는다)였다. ‘라이크 어 버진’의 거대한 성공이 그 표본이다.

 

‘라이크 어 버진’은 1984년 11월 발표된 동명 앨범 수록곡으로, 마돈나에게 싱글 차트 정상을 안겨준 최초의 노래다. 결과론이지만, 이 곡의 성공은 같은 해 9월14일 펼쳐진 1회 ‘엠티브이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보장받은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이크 어 버진’을 처음 대중에게 선보인 이날 공연에서 마돈나는 속이 비치는 백색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무대 위를 뒹굴었다. 면사포를 벗고 머리를 헝클어뜨린 그가 레이스 스타킹과 가터벨트를 드러낸 채로 무대에 누워 노래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자 스캔들이었다. 게다가 장면들은 노골적인 노랫말과 결합하여 전례 없는 강도의 섹슈얼리티를 시청자의 안방으로 중계했다. 노래는 발표도 되기 전에 이미 히트곡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모든 것은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이었다. 비평가 조이스 밀먼은 마돈나가 “전통적 제도를 공격하거나 고전적 백일몽을 타락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라고 썼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중산층의 감춰진 욕망을 이용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라이크 어 버진’은 ‘성녀-창녀 콤플렉스’에 대한 여성의 적극적 대응을 구체화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세계를 뒤흔들었다. ‘워너비’라는 말을 유행시킬 만큼 강력한 팬덤을 구축하여 마돈나를 지지한 세력은, 그의 섹스 어필에 매료된 남성들이 아니라, ‘보이 토이’ 버클과 검은 브라톱과 십자가 귀고리를 따라 한 여성들이었다는 사실이 방증하는 바다. 그들에게 마돈나는 “자신을 표현하라”고 말해준 최초의 스타였다. 폴라 압둘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까지, 이후 등장한 모든 여성 댄스 팝 퍼포머들을 창백한 모조품으로 만들어버린 카리스마의 핵심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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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비’ 벌주려다 횡재만 안기다 ~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머니 포 너싱>(1985년)

 

아이러니는 뮤직 비디오의 생래적 특성이다. 음악을 담은 영상인 동시에 영상에 담긴 음악이고, 역동적인 영상 작품인 만큼이나 효과적인 상품 광고이며, 난해하리만치 진보적일 수도 있고 짜증날 정도로 진부할 수도 있는 기이한 매체인 것이다. 그런 속성을 통해 뮤직 비디오는, 비평가 솔 오스털리츠의 말마따나, “아방가르드 영화와 텔레비전 광고 사이의 어디쯤”에서 대중음악의 작품성과 상품성 사이 역학 관계를 측정하는 저울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뮤직 비디오를 비판하기 위해 뮤직 비디오를 제작한 록그룹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방식과 그렇게 만들어져 뮤직 비디오의 혁신을 이룬 ‘머니 포 너싱’의 성과는, 그러므로 엠티브이 시대가 만들어낸 아이러니의 극치라고 볼 것이다.

 

영국 저널리스트 돈 왓슨은 뮤직 비디오가 선전하는 것은 비단 레코드뿐만이 아니라고 썼다. “팝 문화가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상업 광고에 이보다 근접했던 적은 없다.” 선망과 질투의 대상으로서 스타라는 물신을 홍보하는 뮤직 비디오의 그런 이면을 ‘머니 포 너싱’은 전자상가 노동자의 일인칭 서술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건 일이라고 할 수도 없어 / 엠티브이에 나와서 기타나 튕기며 /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돈을 벌고 마음대로 여자들을 얻지.” 반반한 얼굴 덕에 불로소득을 얻는 스타를 꼬집은 것이다. 그런 구절은 주인공의 ‘진짜 노동’과 그가 처리하는 ‘진짜 상품’을 다룬 후렴 부분에서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우린 전자레인지를 설치하고 주문제작 주방기구를 배달해야 해 / 우린 냉장고를 옮기고 컬러 티브이를 날라야 한다고.”

 

노래의 직설적 메시지로 판단할 때, 애초 다이어 스트레이츠가 비디오를 제작할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로 보인다.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뮤직 비디오라는 미디엄 자체를 믿지 않았던 그룹 리더 마크 노플러의 태도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머니 포 너싱’의 성공은 그를 설득해 비디오를 만들게 한 연출가 스티브 배런의 역할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배런은 ‘머니 포 너싱’의 클립에서 당시 첨단 기술인 3디(D) 애니메이션을 도입해 뮤직 비디오의 기술적 수준을 격상시켰는데, 같은 해 선풍적 인기를 누린 아하의 ‘테이크 온 미’ 비디오 또한 그의 작품이었다. 노래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언급된 엠티브이가 ‘머니 포 너싱’의 화제몰이에 조연 노릇을 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개국 방송 첫 곡으로 ‘비디오 킬드 더 라디오 스타’를 송출했던 채널답게, 엠티브이는 이 노래의 뮤직 비디오에 담긴 풍자를 도리어 홍보에 사용해 예의 상업적 감각을 발휘했던 것이다.

 

사실, ‘머니 포 너싱’은 그 자체로 훌륭한 노래이기도 하다. 특히, 노플러의 예리한 리프는, <롤링 스톤>이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타 연주 100선” 가운데 하나로 꼽을 정도로 돋보인다. 게다가, 얘기를 건네듯 읊조리는 그의 음성은 뮤지션 스팅의 백그라운드 보컬과 결합해 노랫말의 냉소를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머니 포 너싱’은 대중문화사상 가장 아이러니한 두 가지 매개인 로큰롤과 뮤직 비디오를, 가장 완숙한 단계로 끌어올림으로써 각각의 근본을 성찰하도록 만든 당대의 화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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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브러더’ 향해 내리친 죽비소리 ~ 폴리스의 <에브리 브레스 유 테이크>(1983년)

 

1984년 벽두를 장식한 것은 두 편의 영상물이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기획한 미디어 아트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영화감독 리들리 스콧이 연출한 애플사의 컴퓨터 광고 ‘1984’. 전자는 뉴욕과 파리를 위성 연결한 초대형 이벤트였고, 후자는 에스에프(SF)적 상상력을 동원한 1분짜리 스펙터클이었다. 용도와 규모에서 완전히 상이한 두 작품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예견했던 불길한 미래의 청사진에 대한 당대적 정서의 응답이었다는 측면이다. 백남준은 테크놀로지의 현재에 기반한 장치로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비관한 오웰의 우려를 반박했고, 리들리 스콧은 ‘빅 브러더’가 통제하는 세상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수단으로 컴퓨터 혁명을 형상화했다. 테크놀로지의 낙관주의가 두 작품을 관통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르는 동안 상황은 급변했다. 이제 오웰의 우려가 기우였을 뿐이라고 코웃음 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폐쇄회로 티브이 영상과 컴퓨터 로그인 기록과 휴대전화 통화 내역이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감시하는 시대에, 남루해진 것은 오히려 기술의 미래 혹은 미래의 기술에 걸었던 희망이다. ‘스타 워즈’가, 블록버스터 영화의 제목으로서가 아니라, 첨단 군사전략의 별칭으로서 더욱 빈번하게 거론되던 시대의 불온한 움직임을 간과했던 탓이다. 폴리스의 1983년 작 ‘에브리 브레스 유 테이크’를 당대의 은유로 읽는 이유도 거기 있다.

 

물론, ‘에브리 브레스…’는 직접적인 현실비판의 메시지를 내세우지는 않는다. 표면적으로 이 노래는 애정이 집착으로 화한 관계를 그린 사이코드라마다. “모르겠어? 넌 내 것이란 걸/ 네가 내딛는 발걸음마다에 내 가련한 마음이 얼마나 상처받는지를 말이야.”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스토커의 폭력, 나아가 관심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한 파파라치의 압박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모티브는 작곡자(이자 보컬리스트)인 폴리스의 리더 스팅이 실패한 자신의 결혼 생활과 악화일로의 밴드 내부 인간관계에서 느낀 환멸의 반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수동공격(패시브-어그레시브)적 자기방어의 기제를 작동하며 ‘빅 브러더’를 떠올렸다는 사실이다. 인간 감시와 통제의 문제가 노래 행간에 자리한 것이다.

 

요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네가 행하는 모든 움직임과 네가 깨뜨리는 모든 맹세를/ 네가 가장하는 모든 미소와 네가 주장하는 모든 권리를/ 나는 지켜보고 있을 거야.” 개인적 집착의 문제를 통해 사회적 억압의 장치들을 환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이 노래가 “당대 모든 독재자들을 향해 총구를 겨눈 이미지로서, 빛나는 심리정치학적 메타포”라고 했고, 개리 멀홀랜드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해석할 때 더욱 강렬하게 작용한다”고 평했다.

 

이 노래가 무려 8주간 빌보드 정상을 석권했으며, 당대 가장 인기 있는 결혼 축하곡 가운데 하나로 환영받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비수 품은 단어들을 곡진한 사랑의 언어로 곡해한 때문이기도, 신랄함을 감춘 선율의 명료함을 친근하게 받아들인 때문이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이 노래를 정치/자본/언론 권력에 대해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의 지침이라고 의도적으로 오역한들 이제 궤변이라고 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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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처럼 등장한 ‘인디 록의 교본’ ~ 스미스의 <디스 차밍 맨>(1983년)

 

1990년대 이래의 대중음악계에 나타난 가장 흥미로운 의미의 전화 사례는 ‘인디’(인디펜던트)와 ‘얼터너티브’라는 개념의 용례 변화·분화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과 ‘(주류에의) 대안’이라는 포괄적 에토스의 범주로 우선했던 각각이, 구체적 스타일을 가리키는 장르의 의미로 파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폭제는 물론, 너바나의 성공이었다. 인디가 메이저로 진출하고 얼터너티브가 메인스트림을 장악하는 현상이 불붙은 결과, 인디 록과 얼터너티브 록의 음악적 특이점에 대한 논의가 대두했고 그것은 다시 음악사적 맥락에 소급적용 되었던 것이다.

 

비평가 웬디 포나로는 태도의 측면에서 인디와 얼터너티브가 공유하던 동질성이 장르의 측면에서 어떻게 이질화하는지를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얼터너티브 록은 주로 미국 밴드들의 “신경질적이고 무거운 사운드”인 반면에 인디 록은 영국 밴드들의 “좀더 화성적인 팝 사운드”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차이는 1980년대 중반 영미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계가 각기 독자적으로 행보하는 가운데 분기하기 시작했는데, 그 지점에서 일종의 이정표 구실을 수행한 것이 바로 맨체스터 출신의 4인조 밴드 스미스였다. 얼터너티브 록이 당대 대중음악의 전위이던 하드코어 펑크에서 진화한 것이었다면, 인디 록은 스미스의 난데없는 등장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이 “진정한 불멸성을 지닌 80년대의 유일한 밴드”(닉 켄트)이며, “(아르이엠과 함께) 당대 가장 중요한 두 밴드 가운데 하나”(사이먼 레이놀즈)라는 상찬을 아끼지 않았던 연원이다.

 

불과 5년 남짓 단출한 기간을 활동했을 뿐인 스미스가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을 만큼 거대한 영향력을 전사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보다, 비교 대상이 없을 만큼 독창적인 개성이었다. 밴드 이름부터가 그렇다. 오케스트럴 매누버스 인 더 다크, 시그 시그 스푸트니크 따위 장황한 작명의 유행을 거스르고자, 그들은 “가장 평범한 이름”이라는 이유로 스미스를 택했다. 현란한 색채와 과장된 장식이 패션을 지배하던 시절에 1950년대 스타일을 고집한 감각이나, 당대의 필수품목과도 같았던 신시사이저와 뮤직비디오를 경원한 태도는 또 어떤가. 스미스는 논리의 모순과 모순의 논리 사이 경계에서 자존과 자학으로 돌출한 스핑크스였다.

 

밴드의 중추이며 각각 작곡과 작사를 전담한, 기타리스트 조니 마와 보컬리스트 모리시의 경이로운 파트너십도 마찬가지다. 온갖 실험을 마다하지 않는 가운데 명료하게 찰랑거리는 기타 사운드의 규범을 세운 조니 마와 오스카 와일드식 언어유희에다 이류영화의 대사들을 병치하여 카리스마적 모호함의 시구를 써낸 모리시의 결합은, 유례없이 기이한 시너지를 뿜어냈고 그 자체로 인디 록의 원형질이 되었다. 그러므로 ‘디스 차밍 맨’의 가치는 스미스 최초의 히트곡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족하다고 할 것이다. 포스트 펑크의 딜레탕트와 뉴웨이브의 키치 사이에서 “인디의 시대적 개념을 정의한 노래”(스티븐 트라우스)였기 때문이다. 음악전문지 <모조>가 이 노래를 ‘영국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인디 레코드’로 꼽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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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비메탈 ‘푸대접 시대’ 끝내다 ~ 콰이어트 라이엇의 ‘컴 온 필 더 노이즈’(1983년)

 

<빌보드>가 지금의 ‘닐슨 사운드 스캔’ 집계 방식을 적용한 것은 1991년 3월26일치 차트부터다. 전산망으로 판매 기록을 추적하는 시스템이다. 그 효과는 즉시 드러났다. 급격해진 순위 변동이 차트 풍경을 바꿔놓은 것이다. 예컨대 이전까지 연평균 10장 안팎에 불과했던 넘버원 앨범이 이후 20장 이상으로 대폭 증가했다. 이는 음반 판매점에 대한 전화조사로 통계를 내던 예전 방식의 오류를 여실히 드러냈다. 조사 대상자의 편견, 조작 혹은 태만이 통계의 정확성에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이다. 대중적 인기의 객관적 척도라는 대표성에도 불구하고, 빌보드 차트의 신뢰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근본적 이유다. 유명세는 반사이익을 동반했고, 무명/비주류/신인은 평가절하를 감수해야 했다. 비평가 척 클로스터먼에 따르면, 그 최대 피해자는 헤비메탈 밴드였다.

 

콰이어트 라이엇의 성공을 두드러진 이변 가운데 하나로 꼽는 이유가 거기 있다. 그들의 앨범 <메탈 헬스>는 1983년 11월26일 앨범 차트 정상에 올라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는 <빌보드>의 낡은 집계 방식이 야기한 ‘순위 디플레이션’이 극에 달한 시기였는데, 1983, 1984년을 통틀어 앨범 차트 정상에 오른 작품이 10장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단 3장의 앨범?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폴리스의 <싱크로니시티>, 프린스의 <퍼플 레인>이 전체 기간의 80%인 76주간을 점유했다. 그런 조건에서 사실상의 데뷔작(앞서 낸 앨범 두 장은 일본에서만 발매)을 발표한 무명인데다 비주류 헤비메탈 밴드가 차트를 정복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무엇보다 본격적인 헤비메탈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 하드록과 1980년대 헤비메탈 사이에 단층면을 형성함으로써, 당대 대중음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진앙으로 위치했던 것이다. 요컨대 <메탈 헬스>를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최초의 헤비메탈 앨범”으로 평가하는 시각은 (이미 앨범 6장을 차트 정상에 올려놓았던) 레드 제플린의 표준을 배제한 것이다. 물론, 견해차가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콰이어트 라이엇이 헤비메탈의 음악적 경계 변화를 웅변한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비평가 세라 파는 80년대 들어 헤비메탈의 장르 경계가 좁아졌고, 그 결과 “헤비메탈을 발명했다고 평가받는 레드 제플린의 음악이 더 이상 장르 기준에 편안하게 들어맞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고 평했다. 비평가 디나 와인스타인 또한 “1983~84년 헤비메탈에 두 하위장르가 등장했다. 하나는 멜로디를 특화했고, 다른 하나는 리듬을 강조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진화한 사운드의 현재성과 멜로디를 강조한 대중성. 콰이어트 라이엇이 제시한 헤비메탈의 새로운 기준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컴 온…’은 <메탈 헬스>를 밀리언셀러 반열에 올린 견인차였다. 영국 밴드 슬레이드의 1973년작을 커버한 이 노래는, 헤비메탈 싱글로는 이례적으로 차트 5위까지 올라, 앨범의 정수일 뿐만 아니라 시대의 이정표이자 장르의 송가로 자리매김했다. 머지않은 뒷날 본 조비와 모틀리 크루가 이룩한 80년대 헤비메탈 데카당스는 바로 이 노래의 성공에서 발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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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 기타의 ‘콧대’를 세우다 ~ 잉베이 말름스틴의 <이카루스 드림 스위트 오퍼스 4>(1984년)

 

베토벤이 재림하여 신시사이저를 발견한다면 어떤 연주를 펼칠까? 키아누 리브스를 스타덤에 올린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처>(1989)는 당대적인 클리셰를 인용하여 대답했다. 헤비메탈을 연주했을 것이라고. 이를테면, 시종일관 에어 기타(맨손으로 기타 치는 시늉을 하며 입 소리를 내는 행위)를 해대는 메탈 키드 주인공들에 의해 현대로 소환된 베토벤이 쇼핑몰의 악기 매장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데자뷔처럼 보였다. 고전 음악의 비르투오소(거장) 개념과 헤비메탈의 파괴적 연주를 결합시킨 혁신의 표상으로서 잉베이 말름스틴의 등장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그를 가리켜 “고전음악 연주자가 왜곡된 시공간에서 헤비메탈을 연주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쓰면서 비평가 데이비드 코노프도 아마 같은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말름스틴은 1980년대 헤비메탈 트렌드에 클래식 크로스오버 열광을 몰고 왔던 주인공이다. 스웨덴 출신으로 1982년 약관의 나이에 미국으로 스카우트됨과 동시에 기존 연주자들을 경악시키기 시작한 그는, 솔로 데뷔작 <라이징 포스>를 통해 불과 일년 남짓 만에 새로운 유형의 기타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미 헨드릭스와 리치 블랙모어(딥 퍼플의 기타리스트)의 방법으로 바흐와 파가니니의 선율을 연주함으로써 이른바 ‘네오 클래시컬 메탈’이라는 새 경향의 창조적 주체로 등극했던 것이다. “좋게든 나쁘게든, 록 기타의 새 시대가 열렸고”(피트 브라운), 그 결과로 “1985년께는 말름스틴의 영향력에 견줄 만한 것이 에드워드 밴 헤일런의 그것밖에 없는”(<기타 월드>) 정도의 상황이 되었다. 말름스틴은 기타 비르투오소의 동의어였고, <라이징 포스>의 수록곡 ‘이카루스 드림 스위트 오퍼스 4’는 네오 클래시컬 메탈의 시대를 상징하는 송가였다.

 

이 노래는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지(G)단조’를 변주한 곡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헤비메탈의 폭발적 사운드와 바로크 음악의 대위적 선율을 병치하고, 어마어마한 속도의 스윕 피킹(빗자루질 하듯 기타줄을 쓸어내리는 주법)과 우아하게 공명하는 아르페지오(한음 두음씩 기타줄을 뜯는 주법)를 대비시켜 드라마틱한 연주곡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탁월한 키보디스트 옌스 요한손과 함께 연출해낸 현과 건의 불꽃 튀는 경합도 마찬가지다. ‘이카루스 드림…’은 ‘장르의 관습’을 세운 기념비였고, 말름스틴은 무수한 아류를 낳은 오리지널이었다.

 

주목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름스틴의 연주 혁명은 주류 평단의 전폭적 환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과도하게 음을 낭비한다”거나 “지나치게 기교적이다”라는 이유였다. 블루스의 뿌리와 로큰롤의 본성을 옹호하는 베이비붐 세대 평론가들의 이데올로기적 프레임이 작동했던 탓이다. 그러나 사운드의 카타르시스를 메시지의 차이트가이스트(시대정신)보다 우선시하곤 했던 젊은 청취자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말름스틴에 대한 동경으로 기타를 잡은 전세계의 잠재적 연주자들이 그것을 방증했다. 문제는 오히려 그의 유아독존적 태도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자신을 제외하곤 세상 어느 기타리스트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극단적 자존심이야말로 그의 야망을 ‘이카루스의 꿈’으로 추락시킨 원인이었다. 말름스틴의 콧대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대중음악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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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향해 ‘나눔’을 노래하다 ~ 밴드 에이드의 <두 데이 노 이츠 크리스마스?>(1984년)

 

비평가 앤서니 디커티스는 1980년대를 ‘김미(Gimme) 디케이드’라고 칭했다. 1970년대를 ‘미 디케이드’라 이르는 데 빗대어, 당대가 “무자비한 천박과 탐욕”의 시기였다고 비꼰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디커티스는 1980년 겨울의 두 사건-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과 존 레넌의 피살이 향후 10년의 “정조와 태도를 투사하는 렌즈”로서 “상징성의 무게를 지닌” 일이었다고 되짚었다. 실제로 그랬다. 레넌의 이상주의가 스러지고 레이건의 신자유주의가 솟아오른 그때로부터, 냉전의 기운은 우주로까지 뻗어나갔고 물질/소비주의는 극에 달했다. 소외된 세상을 향한 사상 최대의 자선활동이 이 시기에 이뤄진 것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는 지구상에서 지옥과 가장 근접한 곳이다.” 1984년 11월, 영국 <비비시>(BBC)가 전세계에 타전한 에티오피아의 기아 참상은 동시대인들을 충격과 비탄으로 몰아넣었다. 내전에 지친 땅에 가뭄이 내습하여 600만명이 아사 직전에 놓였다는 내용이었다. 소련의 지원을 받는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지원을 끊어버린 서방의 대응이 끔찍한 파국의 소실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방송을 접하고 “무력감에 분노한” 밥 겔도프는 뮤지션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레코드를 팔아 수익금을 기부하는 것이었다.

 

뉴웨이브 밴드 붐타운 래츠의 리더였던 겔도프는 친구인 미지 유어(울트라복스)와 함께 작업에 착수했다. 겔도프가 글을 쓰고 유어가 곡을 붙인 노래 ‘두 데이 노 이츠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더 큰 효과를 내리라고 판단한 두 사람은 동료 뮤지션들을 설득하는 한편, 방송에 출연해 여론의 지지를 끌어냈다. 그런 노력의 소산으로 밴드 에이드가 출범했다. 폴 매카트니, 데이비드 보위, 필 콜린스, 스팅, 조지 마이클, 듀란듀란, 바나나라마, 컬처 클럽 등 영국·아일랜드 출신의 당대 인기 밴드·뮤지션 40여명이 참여한 초유의 슈퍼그룹. 목표는 하나였다.

 

밴드 에이드는 1984년 11월25일, 24시간 연속 녹음 세션을 거쳐 ‘…이츠 크리스마스?’를 완성시켰다. 반응은 놀라웠다. 발매와 동시에 영국 차트 1위로 올라선 이 노래는 5주 동안 정상의 자리를 고수했고, 300만장 이상 팔려나가며 영국 음악사상 최다판매 싱글로 우뚝 섰다(엘턴 존의 ‘캔들 인 더 윈드 1997’이 발매되기 전까지 최고 기록). 지구촌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엄청난 기금이 답지했다.

 

‘…이츠 크리스마스?’는 뮤지션의 사회적 활동에 새로운 표준을 제시한 전범으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노래의 형식을 좇은 자선음반으로 ‘위 아 더 월드’와 ‘티어스 아 낫 이너프’ 등이 제작되었고, 그것을 토대로 “대중음악사상 최대의 단일 이벤트”인 ‘라이브 에이드’ 콘서트가 기획되었다. 뒷날 ‘밴드 에이드 2’(1989)와 ‘밴드 에이드 20’(2004)의 이름으로 재녹음되어 각각의 버전이 모두 차트 정상에 오르는 진기록을 남기며 성탄절의 신고전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이츠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세상을 바꿔놓았다. 그때 거기부터 지금 여기까지,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이념의 차이를 빌미로 재앙의 위험을 외면하는 정치 권력의 비인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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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에 눈 부릅뜬 ‘음악 연대’ ~ 아티스츠 유나이티드 어게인스트 아파르트헤이트의 <선 시티>(1985)

 

20세기 후반 아프리카 대륙에 세워진 ‘태양의 도시’는, 톰마소 캄파넬라(1568~1639)의 이상향과는 무관한, 백인 부유층 별천지였다. ‘선 시티’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대 도시 요하네스버그 인근 가난한 흑인들의 땅에 들어선 호텔, 카지노, 골프장을 갖춘 리조트였던 것이다. 세파와 동떨어져 보이던 이 인공낙원이, 중앙집권적 신정국가를 주창한 캄파넬라의 저술처럼, 시대의 정치적 쟁점으로 대두한 사실은 공교로운 아이러니였다.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대한 유엔 제재를 배경으로, 선 시티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양립 가능성을 다투는 1980년대의 전위에 직면했던 것이다.

 

리틀 스티븐이란 애칭으로 유명한 뮤지션 스티브 밴 잰트는, 남아공 인종차별 정책에 대응하여 문화적 보이콧을 권고한 유엔 결의가 선 시티의 막대한 자본력 앞에 무력해지는 상황을 수긍할 수 없었다. 당대 슈퍼스타들- 퀸, 로드 스튜어트,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물론, 심지어 흑인 레이 찰스조차 선 시티의 부름에 응하여 콘서트를 벌였던 현실을 밴 잰트는 부조리한 정치놀음이라고 판단했다. 앞에서는 인종차별 정책을 비난하면서 뒤로는 시장논리 명목으로 유엔 제재안에 반대표를 던진 상임이사국들(미국, 영국, 프랑스)의 행태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예술가 연대’(아티스츠 유나이티드 어게인스트 아파르트헤이트)를 싹틔우고 ‘선 시티’를 열매 맺게 한 뿌리는 그런 문제의식의 토양에서 자라났다. 밴 잰트가 만들고 ‘… 예술가 연대’의 여러 뮤지션이 노래한 ‘선 시티’는 밴드 에이드 성공 이후 유행처럼 번진 당대의 올스타 자선음반과 대규모 자선공연들에 비춰, 비평가 윌리엄 룰먼의 말마따나, “기금 마련을 위한 노력이라는 닮은” 점보다는 “정치적 선언을 의도했다는 측면에서 다른” 점이 더욱 두드러졌다. 메시지 또한 명료했다. 요컨대 “나는 선 시티에서 공연하지 않겠다”는 후렴구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선 시티’는 음악적으로도 여타 자선음반들과 차별화한 가치를 지향했다. 스타 라인업의 화려함은 닮았으되, 다양한 장르와 새 영역을 포용한 실험성은 달랐다. 재즈 거장에서 힙합의 신성까지, 레게 뮤지션에서 펑크 로커까지를 망라하여 전례 없는 ‘그루브’(한 음악이 자아내는 특유의 고양된 리듬과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이 노래의 “정치적 즉시성은 희미해질지도 모르지만 그 돋보이는 라인업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것은 “단순한 절충적 성취가 아니라 예술적 연대의 두드러진 약진”이었고 “최소한 팝 음악 내부에 존속해온 나름의 아파르트헤이트에나마” 변화를 가져온 진보였기 때문이다. 영국과 미국 뮤지션들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중남미, 대양주, 북구 출신들까지 한데 어우러진 ‘선 시티’의 인적 구성은 그 증거다.

 

‘선 시티’는 남아공은 물론이고 레이건 정권의 보수적 미국 사회에서 방송금지 조처와 맞서야 했다. 돌이켜보건대, 그것이야말로 이 노래가 획득한 최상의 찬사였다. ‘선 시티’에 참여했던 49명 뮤지션의 면면을 통해, 역사의 반동에 임하는 이 나라의 대중음악 스타들을 다시 생각하며 2009년 말미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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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음악, 백인들에게 호령하다 ~ 런-디엠시의 <워크 디스 웨이>(1986년)

 

캐머런 크로의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2000)는, 스틸워터라는 가상의 록 밴드를 통해, 1970년대 대중음악계의 이면을 담아내 호평을 받았다. 여기서 크로는 특히, 대중음악 비평가로 활동했던 자신의 전력을 고증 근거로 삼아, 레코드 업계와 음악 미디어가 맺는 공생 관계의 불가근불가원한 속성을 실감 나게 비춰냈다. 스틸워터가 대중음악전문지 <롤링 스톤>의 표지 모델로 실릴 예정이란 소식에 멤버들이 환호하며 닥터 훅의 1973년 히트곡 ‘더 커버 오브 더 롤링 스톤’을 합창하는 장면이 그 한 예다. “우린 부자가 돼가고 있지만/ 아직 <롤링 스톤>의 표지에 사진을 싣지는 못했지/ 내 사진이 그 표지에 실린 걸 보고 싶어.” 비평가의 리뷰가 뮤지션의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었던 시절, 음악계 최고의 권위지인 <롤링 스톤> 표지에 모델로 등장한다는 것은 곧 주류 스타덤에 오름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요컨대, 런-디엠시는 1986년 12월4일치 <롤링 스톤> 표지를 장식함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 힙합 뮤지션으로서는 처음이었다. 그것은 이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최초’의 기록들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성과였다. 무엇보다, 보수적 권위지로 하여금 대중음악계에 힙합의 시대가 열렸다고 선언하도록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괄목할 일이었던 것이다. 런-디엠시는 대도시 게토에서 탄생한 흑인 전유의 하위문화를 백인 주류의 제도권으로 진입시킨 전위였고, 그 배경에는 힙합 앨범으로서 사상 처음 멀티 플래티넘 판매고를 기록한 <레이징 헬>이 있었다. 싱글 ‘워크 디스 웨이’의 성공이 견인차였다.

 

‘워크 디스 웨이’는 빌보드 싱글 차트 톱5를 돌파한 최초의 랩 음악이다. 그런 기록의 행간에는 백인 대중이 런-디엠시의 노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방법론의 성공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워크 디스 웨이’는 하드 록 밴드 에어로스미스의 1975년 히트곡으로 백인 대중에게 이미 친숙한 노래였다. 런-디엠시는 거기에 브레이크 비트와 랩 라임을 얹어 새로운 퓨전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른바 ‘로큰랩’ 스타일이었다. 1990년대 후반 대세를 이루게 되는 랩 메탈/얼터너티브 메탈의 음악적 기원이었던 것이다.

 

주목할 것은, 런-디엠시의 전략이 상업적 염두나 정략적 의도 따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1984년 발표한 셀프 타이틀 데뷔작이 그 증거다. ‘록 박스’ 같은 곡에 선명히 드러나 있듯이, 그들은 시작부터 기존 힙합과 다른 독자적 노선을 견지했다. 록 음악 요소를 효과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이 수단이었다. 그런 의도는 두 번째 앨범 <킹 오브 록>에서 더욱 명백해졌다. 제목 그대로 그들은 새 시대의 록 스타를 꿈꿨던 것이다. ‘워크 디스 웨이’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유의성을 갖는다.

 

런-디엠시는 기존 힙합을 올드 스쿨로 격리시키며 랩 음악사를 전후로 나누는 척도로 대두했다. 단속적이고 공격적인 비트, 록 음악과의 퓨전, 거리의 언어로 구성된 라임, 창의적인 스트리트 패션, ‘투 턴테이블스 앤 어 마이크로폰’으로 요약되는 무대 구성에 이르기까지, 현대적인 힙합의 외양과 내실이 그들을 통해 확립된 것이다. ‘워크 디스 웨이’는 힙합 황금기의 시작을 알리는 축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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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래시 메탈’로 거둔 반골의 승리 ~ 메탈리카의 <마스터 오브 퍼피츠>(1986년)

 

대중음악사의 1980년대를 정의하는 개념들 - 보수성, 상업주의, 파티음악, 엠티브이, 신시사이저 등은 역설적으로 당대 하위문화를 전례 없이 강화시킨 요인들이기도 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로큰롤 본래의 반기성과 비주류의 정서를 결합한 음악적 생태계가 물밑 활력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하드코어 펑크와 얼터너티브 록은 대학가를 잠식해갔고 랩과 힙합은 인종의 벽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래시 메탈이 있었다. 잠재성을 지닌 동시대 음악적 대안 가운데 가장 먼저 가시적 성과를 거둔 경향이었다.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스래시는 헤비 메탈의 하위장르로 대두했다. 그러나 배다른 형제 격인 당대의 팝 메탈과는 애초 성격부터 달랐다. 팝 메탈이 파티와 섹스를 노래하며 엠티브이의 데카당스 이미지에 보조를 맞춰 주류로 올라선 반면, 스래시 메탈은 사회 문제와 개인 의식의 극단성을 파고들며 언더그라운드의 반문화적 연대에 집중했다. 그런 측면에서 스래시 메탈은 펑크 록의 사회성과 헤비 메탈의 사운드를 결합한 전례 없는 하이브리드였다. 가장 열성적이고 배타적인 “하위문화적 자본”을 가진 두 영역을 가로지름으로써 ‘1980년대성’에 맞선 것이었다. 그 전위에 메탈리카가 있었다.

 

비평가 톰 문은 메탈리카가 헤비 메탈을 “생각하는 자의 음악으로 완전히 재구성해냈다”고 평한 바 있다. “저능아의 음악”이자 “음악적 천치들의 농담”이라 비난받아온 헤비 메탈의 인식 수준이 메탈리카의 문제의식을 통해 새 지평을 얻었다는 것이다. 사운드 자체의 성과 또한 극찬받았다. ‘두들기다’ 혹은 ‘깨부수다’라는 사전적 정의가 가리키는 바, 스래시는 대중음악사상 가장 강력하고 위압적인 스타일을 지향했다. 메탈리카는 거기에 서정적인 선율과 빈틈없는 구성과 대가적인 연주를 병치시켜 음악적 모범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래서 톰 문은 그들의 음악을 바그너의 작품에 비유하기도 했다. 앨범 <마스터 오브 퍼피츠>가 기준이었다.

 

<마스터…>는 메탈리카의 메이저 레이블 데뷔작이자 스래시 메탈로는 최초로 플래티넘 판매를 기록한 앨범이다. 헤드뱅어들의 뇌리에 남은 고전들로 가득한 이 앨범에서 하나의 대표곡을 꼽기란 난망하지만, 상징성이란 점에서 두드러진 것은 역시 타이틀 트랙인 ‘마스터 오브 퍼피츠’다. 악몽 같은 상황을 생생하게 내면화한 이 노래의 가사는, 표면적으로 마약의 폐해를 다뤘지만, 궁극적인 면에서 인간을 꼭두각시로 전락시키는 현대 사회의 병리에 대한 앨범 주제의 함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협적인 리프와 상쇄적인 솔로, 강력한 베이스와 복잡한 드럼이 8분 38초를 질주하는 이 노래는 엠티브이와 라디오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도 괄목할 성과를 거뒀다. 그것은 “(우리가 주류에) 맞지 않는다면 (주류가 우리에게) 맞추도록 하겠다”며 싱글 발매와 비디오 제작을 거부한 태도가 거둔 수확이었다. 인형으로 살기를 거부한 밴드와 대중이 함께 쟁취한 승리이자, 음악지 <스핀>의 말마따나, “작은 기적”이었다. 우리의 오늘은, 음악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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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음악 ‘흑백 색맹’ 시대로 ~ 비스티 보이스의 <파이트 포 유어 라이트>(1986년)

 

비평가 넬슨 조지는 “힙합 구매자가 전적으로 흑인들뿐이던 시절이 있었다는 건 오류”라고 주장했다. “숫자가 전설을 배신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레코드 판매량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최초의 힙합 히트곡 ‘래퍼스 딜라이트’가 골드 레코드를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전미 음반판매업자연합’이 선정한 ‘올해의 싱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첫손에 꼽았다. “백인 청소년 관객층의 지지가 존재했음을 증언하는” 사례라는 것이다. 그 밖에도 증거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힙합에 관한 그릇된 신화가 유포된 이유는 뭘까? 그는 메이저 레이블과 신디케이트 방송의 보수성에서 원인을 찾았는데, 흥미롭게도 1980년대 헤비메탈에 대한 비평가 척 클로스터먼의 분석과 닮았다. 자본이 투자를 꺼리고 방송이 편성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객관적 지표가 당대 청소년 하위문화의 역동성을 반영한다는 의미다.

 

그런 측면에서 주목할 것이 힙합과 메탈, 두 장르의 가장 격렬한 극단인 하드코어 힙합과 스래시 메탈의 ‘아래로부터 혁명’이다. 방송 횟수가 차트 순위를 결정하는 핵심 인자였던 당시에 그것들은 거리와 공연장 밑바닥을 훑으며 주류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이제와 1986년을 기억하게 만드는 매개도 그것이다. 대중음악사상 가장 따분한 양상에 접근해 있던 당대 주류의 유행에 벼락처럼 내리친 몇 장의 앨범 - 메탈리카의 <마스터 오브 퍼피츠>와 슬레이어의 <레인 인 블러드>, 런-디엠시의 <레이징 헬>과 비스티 보이스의 <라이선스드 투 일>이 각각 스래시 메탈과 하드코어 힙합의 대중화 원년을 각인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슬레이어의 기타리스트가 참여한 비스티 보이스의 노래 ‘파이트 포 유어 라이트’의 성공은 특별한 상징적 가치를 갖는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비스티 보이스는 음악 자체의 혁신을 넘어 문화 전반의 변혁을 체화한 뜨거운 감자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유대인 혈통의 백인 래퍼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힙합이 백인 청소년들에게도 유의성을 띤 음악으로 이미 수용되어왔음을 스스로 방증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반면에, 그들의 데뷔작 <라이선스드…>가 힙합 앨범 사상 처음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은 다른 얘기를 한다. 여전히 공고한 인종의 장벽이 주류 시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평가 알렉스 오그는 “비스티 보이스의 흰색이 시사논평가들에게는 두통을 안겨준 동시에 힙합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도 일조했다”고 썼다. 중요한 것은 그런 쟁점조차 힙합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소속사이자 힙합 황금기를 연 최초의 레이블인 데프잼의 설립자들은 그와 같은 정황을 활용했다. 런-디엠시의 ‘워크 디스 웨이’를 합작해낸 두 사람 - 흑인 매니저 러셀 시먼스와 백인 프로듀서 릭 루빈은 비스티 보이스를 통해 흑백 간 크로스오버를 더욱 증폭시키려 했던 것이다. ‘파이트…’에 헤비메탈 리프와 기타 솔로를 삽입함으로써, 비평가 제프 챙의 말마따나, “런-디엠시가 백인 시장을 넘어서고 비스티 보이스가 흑인 시장에 어필하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힙합에 대한 대중의 색맹화는 그렇게 촉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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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비메탈 ‘원초적 본능’ 깨우다 ~ 건스 앤 로지스의 <스위트 차일드 오 마인>(1987년)

 

건스 앤 로지스의 성공은 이른바 ‘블랙 스완’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블랙 스완이란, “모든 백조는 희다”는 널리 알려진 사실에 빗대, 존재할 수 없는, 혹은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은유로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오스트레일리아 서안에서, 우리말로는 자체가 형용모순인, ‘검은 백조’가 실제로 발견되면서 그 의미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고, 2008년 금융위기를 예견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동명 저작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검은 백조를 역사의 해석에 적용하여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이른바 세 가지 속성으로 규정할 수 있다. 희소성, 엄청난 충격, 그리고 소급적 예측 가능성. 문화비평의 논리 구조와도 닮은꼴이다. 예컨대, 경제학자에게 1987년 10월19일의 증권시장 붕괴(블랙 먼데이)가 검은 백조의 사례라면, 대중음악 비평가에게는 같은 해 7월 발매된 건스 앤 로지스 앨범의 충격파가 그에 상응하는 사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침내 검은 백조로 밝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건스 앤 로지스는 엘에이 음악계의 ‘검은 양’에 가까웠다. 그들은 당대 엘에이 메탈 밴드들과 닮은 점이 거의 없었다. 요란한 글램 스타일도, 달짝지근한 멜로디도, 엠티브이가 선호하는 뮤직비디오도 없었다. 반면에 파괴적인 공연과 폭력적인 태도와 자극적인 언행은 그들을 모두의 기피 대상으로 만들었다. 저널리스트 모리스 치텐든은 록 밴드들에게는 전설적인 일탈 행위들이 회자되게 마련이라면서도 “건스 앤 로지스에 관한 전설들은 모두 사실이라는 점에서 달랐다”고 썼다. 그들은 “과잉의 도시 엘에이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불량 소년들”이었다는 것이다. 비평가 크리스 스미스 또한 “앞선 어떤 밴드와도 다른 방식으로 엘에이 뒷골목과 시궁창에서 영감을 찾았다”고 했다.

 

음악적인 면에서도 그랬다. 건스 앤 로지스는 처음부터 스스로를 당대의 경향과 차별화시켰다. 크리스 스미스는 그들을 설명하기 위해 에어로스미스의 연주와 섹스 피스톨스의 태도, 라몬스와 뉴욕 돌스의 분노, 모터헤드의 열정과 롤링 스톤스의 이미지를 거론했다. 이언 크리스티는 에이시디시와 섹스 피스톨스와 메가데스와 하노이 록스를 언급했다. 어느 쪽 분석이 더 정확하다고 볼 게 아니었다. 요컨대, “건스 앤 로지스는 달랐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들의 데뷔작 <에피타이트 포 디스트럭션>이 대중에게 발견되기까지 무려 일년 가까운 시간을 필요로 했던 이유도 결국은 거기에 있었다.

 

싱글 ‘스위트 차일드 오 마인’은 앨범 <에피타이트…>를 정상에 올린 원동력이었다. 먼저 발표된 ‘웰컴 투 더 정글’이 달궈놓은 분위기를 절정으로 분출시킨 히트였다. 상대적으로 온화한 분위기도 대중적 저변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그러면서도 그들 특유의 사운드 조합은 결코 훼손하지 않았다. 액슬 로즈의 비할 데 없이 독특한 보컬, 슬래시의 인상적인 리프와 솔로, 이지 스트래들린의 맛깔스런 리듬 기타까지, 이 노래는 로큰롤의 원초적 본능을 생생하게 펼쳐냄으로써 1980년대의 인공성을 돌파하는 대중적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냈다. 헤비메탈에 적대적인 비평가들조차 거부할 수 없었던, 검은 백조의 마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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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고 붙이고…‘샘플링 혁명’ 기폭제 ~ 마스의 <펌프 업 더 볼륨>(1987년)

 

짧지만 거셌던 디스코의 열화는 현대적 댄스 음악의 실마리들을 잿더미 속에 남기고 산화했다.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가 그 육감적 뉘앙스를 주류 팝 사운드와 크로스오버하여 슈퍼스타덤에 등극했다면, 그 원초적 리듬감을 테크놀로지와 접목시켜 댄스 클럽 마룻바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은 주인공은 언더그라운드의 디제이들이었다. 요컨대, 뉴욕의 힙합, 시카고의 하우스, 디트로이트의 테크노는 그들 디제이를 매개로 탄생한 음악 창작의 새로운 방법론이었다. 특히 하우스와 테크노는, 음악적 주도권이 엠시로 급격히 이동한 힙합과 달리, 샘플링으로 기성 음악의 표본을 추출해 그것을 ‘자르고 붙이는’(컷 앤 페이스트) 기법을 발전시키면서 이른바 ‘디제이 레코드’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디제이 레코드의 붐에는 저렴한 하드웨어의 등장과 보급이 큰 몫을 했다.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그것의 음악적 속성이 “래핑을 배제한 대신에 부조리한 사운드의 파편들을 우선하는 한편 템포에 민감히 대응하도록 만든, 브레이크 비트와 샘플의 콜라주”라고 정의했다. 그것은 곧 빌 브루스터와 프랭크 브로턴의 말마따나 “힙합을 사랑하지만 스크래치나 랩을 할 줄 몰랐던 이들도 이제 레코드를 만들 수 있다는 청신호가 켜졌다”는 의미였다. 그것이 미국보다 영국에서 더욱 활발한 흐름으로 대두한 이유도 거기 있었다. 힙합 레이블이 1986년에야 처음 등장한 데서도 알 수 있듯, 영국은 힙합적 양식의 전통이 부재한 상황에서 하우스와 테크노를 동시에 수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스의 ‘펌프 업 더 볼륨’이 기폭제 구실을 했다.

 

마스(M/A/R/R/S)는 샘플링 기법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뮤지션들의 프로젝트 밴드였다. 컬러박스와 에이아르 케인이라는 기성 팀 멤버들이 참여했고, 그들 이름의 머리글자를 조합해 마스라 자칭했다. 애초 공동작업을 목표로 했던 그들은 견해차와 작업 방식의 상이함 때문에 화학적 상승효과를 기대하기 힘들게 되자, 개별 작업의 결과물을 물리적으로 결합시켜 절충에 합의했다. 그 결과 두 개의 트랙이 완성되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샘플링을 사용한 노래로는 영국 대중음악사상 최초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펌프 업…’이었다. 멤버들의 역할마저 ‘자르고 붙인’ 과정부터가 샘플링의 본질과 맞닿아 있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성과물이었다.

 

‘펌프 업…’은, 에릭 비 앤 라킴의 노래에서 가져온 타이틀 프레이즈를 비롯해 제임스 브라운의 솔과 퍼블릭 에너미의 랩은 물론이고 낡은 에스에프 영화의 대사까지, 30개 가까운 음원 샘플을 사용해 완전히 새로운 사운드를 재구성해낸 음악적 콜라주의 결정판이었다. 더불어, 당대 힙합보다 격렬한 템포는 하우스의 폭발적 리듬과도 맞닿아 있었다. 현대미술의 ‘파운드 아트’(일상용품을 예술품 소재로 활용한 팝아트의 일종)처럼, 이 노래는 결코 새로울 게 없는 개별적 요소들을 하나의 유기적인 악곡으로 통합시켰다는 점에서 독창적이었다. 그래서 비평가 토비 크레스웰은 이 노래가 “샘플링 기법의 로제타 스톤”이라고 평했고, 더글러스 월크는 “이후 몇 년간 등장한 거의 모든 댄스 음악이 이 노래에 빚을 졌다”며 “최초의 의미심장한 하우스 뮤직 레코드”라는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중도와 통합에도 창의성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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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같은 록음악 ‘슈게이즈’의 탄생 ~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유 메이드 미 리얼라이즈>(1988년)

 

예술의 영역에서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더욱 중요할 때가 많다. 형식이 내용에 우선하는, 방법이 목적을 견인하는 경우다. 다른 어떤 예술 장르보다 그런 측면이 두드러진 영역이 로큰롤이다. 태생부터가 그랬다.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 식으로 비유하자면, 소음과 음악적 환희를 동격화시킨 측면에서다. 기타를 모든 악기의 총아로 만든 매개가 로큰롤이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작은 음량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구석 자리도 배정받지 못했던, 잠재력은 뛰어나나 활용도는 형편없던 악기의 위상을 (전기의 힘을 빌려) 극대화한 것이다. 일렉트릭 기타의 혁명적 발전은 연주법의 혁신을 도입한 예술가들의 덕이었다.

 

1980년대 기타 연주의 대세는 화려한 솔로와 현란한 속주였다. 에드워드 밴 헤일런과 잉베이 말름스틴에게서 나온 방법론의 혁신이 보편적인 형식으로 유행한 결과다. 한 박자 안에 수십 개의 음표를 몰아넣는 경이로운 속도전의 불바람 앞에서 기타의 잠재력이 마침내 그 한계를 드러내는 듯 보일 정도였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등장이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기타리스트 케빈 실즈의 연주가 핵심이었다. 그는 기타의 사운드를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처(질감)로 인식했다. 무정형의 거대한 음향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온라인 음악지 <피치포크>의 편집장 스코트 플라젠호프는 그가 “작렬하는 백색 소음과 희미하게 명멸하는 멜로디를 조합한, 선율과 리프가 아니라 질감과 음량을 더욱 강조한” 접근법으로 록 기타의 연주 형식을 즉각적으로 바꿔놓았다고 했다. 그래서 비평가 제임스 헌터는 실즈를 “영웅적인 반영웅 기타리스트의 90년대 모델”이라고 했다. 1980년대에 이미 1990년대를 시연했다는 것이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실험은 기타 연주의 형식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보컬 파트조차 음향적으로 접근했다. 흔히 “천상의 것”이라는 수사를 헌정받곤 하는 여성 보컬리스트 빌린다 부처의 몽환적이고 순진무구한 음성은, 케빈 실즈의 소용돌이치듯 범람하는 기타 소음 이면에서, 꺼질 듯 호흡하며 극적으로 대조하는 질감을 직조한다. 이른바 슈게이즈(슈게이징) 혹은 드림 팝이라 불리는 새 하위장르의 시발점이었다. 이에 비평가 존 해리스는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이 “추상 미술에 대한 록 음악의 등가물”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유 메이드 미 리얼라이즈’는 그 새 방법론의 원형이었다. 플라젠호프에 따르면 ‘…리얼라이즈’는 “(향후) 슈게이즈로 알려지게 되는 (새로운 경향의) 최초 완성형”이며 “기타 중심의 음악이 하우스와 테크노의 최신 사운드로부터 도망하기는커녕 그것에 조응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잠재력은 있으나 결과물은 신통치 않았던 밴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영국 인디 차트 2위까지 오른 이 노래의 성공적인 실험을 통해 시대의 비전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발표하는 노래마다 표절 시비를 일으키는 작곡가 때문에 최근 우리 대중음악계가 뒤숭숭하다. 그는 아마 ‘어떻게 하느냐’의 중요성을 곡해하고 있는 듯하다. 한 번은 운이고 두 번은 우연이며 세 번은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대중은 바보가 아니다. 시스템이 멍청하고 거기 기생하는 자가 어리석은 것이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경우를 반면교사 삼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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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후예들의 도발적인 변칙 음악 ~ 소닉 유스의 <틴 에이지 라이엇>(1988년)

 

이른바 ‘노 웨이브’라 불렸던 1970년대 후반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동향은 구체적 작품이 아니라 인적 유대를 통해, 성취가 아니라 실패를 통해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대중음악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었다.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노 웨이브는 뉴 웨이브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비평가 마이클 애저래드의 말마따나, “펑크의 단물을 뽑아내 뉴 웨이브라고 내뱉은 음악업계에 분노한 소수”가 공유하던 태도를 가리킨다. 반동적 음악자본에 대한 거부의 연대로서 노 웨이브는 로큰롤의 문법을 해체하는 극단적인 아방가르드를 추구했다. 물론 한계도 명백했다. 급진적인 실험이 대체로 그렇듯, 일관성을 결속하지 못하고 단명했던 것이다. (뒷날 유투의 작품들로 찬사를 받게 되는)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가 그와 관련한 최초의 편집앨범 <노 뉴욕>(1978)을 마침내 완성했을 때, 노 웨이브의 연대는 이미 해체에 이른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웨이브는 유의미한 시행착오였다. 1980년대 전반의 하드코어 펑크와 1990년대 초반의 얼터너티브 록을 연계하는 미싱링크, 소닉 유스를 배태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노 웨이브의 세례를 받고 태어나 현재까지도 건재한 그들은, 비평가 토비 크레스웰로부터 “얼터너티브 록의 대부”라는 헌사를 받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소닉 유스는 노 웨이브의 프리즘을 통해 로큰롤의 방법론을 투과하고자 했다. 미니멀리즘의 구조 안에서 전위적 소음과 독자적 음향을 실험했던 그들은 통산 여섯 번째 앨범인 <데이드림 네이션>을 통해 그 완성형을 제시했다. 로큰롤의 오래된 미래 혹은 새로운 과거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비평가 제스 하벨은 <데이드림 네이션>이 “아방가르드에 경사된 그들의 과거를 순수 로큰롤의 황홀한 마력으로 결합해낸 난장”이라고 평했고, 크리스 스미스는 그것을 통해 소닉 유스가 “대학가 라디오 방송에 노 웨이브 파급의 근거지를 세우고 다가올 얼터너티브 록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구실을 했다고 썼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포토리얼리즘 회화를 사용한 표지에서부터 레드 제플린의 경우를 차용한 4개의 심벌까지, 팝 컬처의 레퍼런스로 가득한 이 앨범은 또한 소닉 유스 식 시대정신의 반영이기도 했다. 이란-콘트라 게이트 등의 정치 스캔들과 금융 위기 같은 국내정책 실패로 얼룩진 레이건의 두 번째 임기가 미국을 ‘백일몽의 제국’으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판단한 그들은, 거기에 맞서 자신들의 백일몽을 풀어내는 것으로 당대 사회에 항의했다. ‘로큰롤을 대통령으로’(로큰롤 포 프레지던트)라는 워킹 타이틀 아래 완성된 수록곡 ‘틴 에이지 라이엇’이 그 상징이다.

 

‘틴 에이지 라이엇’은 기성의 시대에 불화하는 청춘의 욕구가 만들어낸 한낮의 미몽이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언어의 파편들이 변칙 튜닝의 기이한 하모니와 펑크의 도발적인 리프를 넘나드는, 새로운 형식의 인디 록 송가였던 것이다. 이 노래의 기대 이상 성공으로 소닉 유스는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했다. 상업적 타협이 아니었다. 음악작업의 전권을 보장받은 창조적 절충이었다. 마이클 애저래드는 그것이 인디 음악계에 “영향이 아니라 영감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너바나의 1990년대를 가능케 한 발상의 전환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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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맞는 루카’ 메시지와 음악성의 승리 ~ 수잰 베가의 <루카>(1987년)

 

현대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아동 학대의 유형은 무관심과 방치다. 그런 것도 학대냐고 생각하는 기성세대가 만성화시킨 현실이다. 과외시킬 돈은 있지만 대화할 시간은 없는 부모들, 나 아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어른들이 만들어낸 세상이다. 그런 마당에 동네 꼬마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놀이터 구석에 웅크린 아이의 얼굴에서 그늘을 살피는 이들은 또한 몇이나 될까? 수잰 베가의 ‘루카’가 환기하는 것은 그런 질문들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가 19세기 영국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 노래는 유소년 인권 문제를 공론화하여 당대 미국 사회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루카’는 아동 학대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최초의 노래는 아닐지언정, 최고의 노래다. 무엇보다 관점과 정조의 차이가 이 노래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요컨대, 수잰 베가는 부모에게 학대받는 이웃집 소년을 이야기하면서 3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방백하는 대신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독백함으로써 감정 이입을 극대화했다. “제 이름은 루카입니다/ 2층에 살지요/ 당신의 위층 말이에요/ 당신도 아마 절 본 적이 있을 테지요.” 베가의 보이시한 음성과 담담한 억양이 설득력을 더했다. “그들은 제가 울 때까지 때리죠/ 그러고 나서도 이유를 물어서는 안 돼요.” 그건, 비평가 엘리사 가드너의 말마따나, “1980년대 후반의 개선된 사회적 인식을 감안하더라도” 대중음악이 다루기엔 “대담한 주제”였다. 누구도 이런 노래가 빌보드 싱글 차트 3위까지 오르는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비평가 데이비드 웰스는 ‘루카’의 “믿기 힘든 히트”가 “끔찍한 단어들로 솜씨 좋게 직조해낸 노랫말을, 전염성 강한 멜로디와 생동감 넘치는 포크 팝 어레인지로 위장한” 덕분이었다고 했다. 청자들에게는 사운드의 상큼함이 메시지의 무거움에 우선했다는 분석이다. 주목할 것은, 그조차도 문제의식의 반영이었다는 점이다. 그와 같은 이율배반적 작법을 통해 수잰 베가는 동정이 아니라 관심이 필요한 아이의 심층에 완벽하게 조응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비평가 데이비드 브라운은 “수잰 베가처럼 능숙하고 미묘한 작가만이 아동학대를 주제로, 발 박자를 맞추며 흥얼대는 와중에도 내용의 핵심을 공감케 하는, 강력한 노래를 만들 수 있다”고 평했다.

 

수잰 베가는 1987년 4월1일, 만우절에 발표한 앨범 <솔리튜드 스탠딩>과 수록곡 ‘루카’의 거짓말 같은 성공을 통해 당대의 음악사적 변혁에도 기여했다. 시네이드 오코너, 트레이스 채프먼 등과 함께 여성 뮤지션의 약진을 이끌었고, ‘신시사이저의 80년대’에 어쿠스틱 기타의 매력을 상기시켜 싱어송라이터 전통을 부활시키는 데 일조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이들 먹을 밥을 두고 나라가 시끄럽다. 부끄러운 일이다. 결식 아동 지원을 정치 쟁점 삼은 자치단체와 무상 급식을 경제 논리로 취급하는 국회, 거기 높으신 어른들의 냉담과 무심은 아이들에게 상처보다 쓰라린 모욕을 안기는 새로운 유형의 아동학대와 다름 아니니까. 다시 한번 이 노래를 곱씹을 일이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루카’들에게 필요한 건 동정과 적선이 아니라 관심과 애정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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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각성제’ 채프먼의 용감한 노래 ~ 트레이시 채프먼의 <패스트 카>(1988년)

 

오늘날 기회 균등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실은 한스페터 마르틴이 <세계화의 덫>(1997)에서 경고한 ‘20 대 80 사회’를 향해 날로 고착화하는 형편이다. 인구의 80%가 좌절을 맛봐야 하는 세상. 그러나 요컨대, 문제를 느끼는 것과 비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트레이시 채프먼의 ‘패스트 카’를 1980년대 가장 용감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는 이유도 거기 있다. 레이거노믹스의 허울과 ‘미국의 비극’을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한 노래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당대에 없었다.

 

‘패스트 카’에서 채프먼은 빈곤의 악순환을 노래한다.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와 가출한 어머니,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편의점에서 일하며 아버지를 돌보는 딸. 꿈을 찾아 도시로 나섰지만, 비루하게 생존하는 고단함과 술에 빠져 허송하는 남자 친구를 통해 반복되는 악몽 같은 삶의 데자뷔. 그것은, 비평가 질리언 가의 말마따나, “증대하는 노숙자 대열, 폭등하는 범죄율 등 80년대 내내 미국 정부가 묵살해왔던 문제들을 제기하는” 증언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 채프먼은, 스프링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질주하는 자동차’를 통해 현실 극복의 의지를 표상한다. 하지만 낭만적인 귀결이나 감상적인 전망은 없다. 담담한 어조와 객관적 서사 속에서 그것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드러내는 매개일 뿐이다. 고향을 떠나 달리는 차 안에서 미래를 꿈꿨던 연인들. “당신은 직업을 구하고 나는 승진할 거예요/ 그러면 빈민 보호소를 나와/ 큰 집을 구해 교외에서 사는 거죠.” 그러나 그들은 현재에 쫓겨 또다른 기회를 찾아야 할 판이다. “당신은 빠른 차를 갖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날아오를 수 있을 만큼 빠를까요?/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 해요/ 오늘밤 떠나든지 이런 식으로 살다가 죽을지.” 물론,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이 노래가 궁금증을 유발한다고 했다. “우리가, 음악이 아니라, 문학에서 기대하는 물음”을 성공적으로 로큰롤에 접목해냈다는 것이다.

 

싱글 차트 6위까지 오른 ‘패스트 카’의 성공으로 채프먼은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랐지만 스스로 “유명세를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만델라의 고희를 축하하는 기념 공연에 올라 ‘토킹 어바웃 어 레볼루션’을 불렀다. 그럼에도 그 노래들이 담긴 그의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은 차트 정상을 정복하고야 말았다. 질리언 가는 “현실도피적 주제를 노래한 백인들”이 주류를 장악한 당시에 그것은 “문자 그대로 충격적” 결과라고 평했다.

 

카터 행정부에서 안보 담당 보좌관을 지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20 대 80 사회’에서 ‘티티테인먼트’(엄마 젖을 뜻하는 티티(Titty)와 엔터테인먼트의 합성어)가 대두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좌절한 8할을 달래기 위한 ‘양식과 오락’, 히틀러가 얘기했던 ‘빵과 서커스’를 연상시키는 조어다. 요즘 티브이를 장식하는 오락물들이 그런 징후를 드러내는 인식의 마취제라면, 흑인이고 여성이며 동성애자로서 소수자(중의 소수자)를 대변한 채프먼의 체험적 진술로서 ‘패스트 카’는 현실의 각성제라기에 모자람이 없다. 생각건대, 로큰롤의 사회적 가치란 그런 것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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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권력을 향한 음악적 도발 ~ 퍼블릭 에너미의 <파이트 더 파워>(1989년)

 

미국 위스콘신대학 교수이자 역사가인 크레이그 워너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재임 기간이 “인종 간 관계에서 1890년대 이래 최악의 시기였다”고 썼다. 부자와 빈자의 위화감, 백인 기득권층과 흑인 소외계층의 갈등이 “미국인들을 공습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을 ‘우리’와 ‘저들’로 이분한 레이건의 보수적 가치관,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뉜 냉전의 적대적 분위기가 결합해 만들어낸 시대의 공기가 고스란히 내정에 반영된 결과였다. 여파는 부익부 빈익빈으로 가속화했다. 시사평론가 케빈 필립스가 당시를 돌이켜 “1980년대는 미국 상류층의 승리였다”고 한 근거다. 워너의 말마따나, “공허한 향수가 암울한 현실보다 낫다는 확신을 심어준 레이건”의 시대에 “치유의 동력으로서 음악은 저점을 찍었다.” 당시 로큰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하나였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공공의 적’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퍼블릭 에너미는 나쁜 길을 가기로 결심한 소수 용감한 뮤지션들 가운데 하나였다. 1988년 발표한 앨범 <잇 테이크스 어 네이션 오브 밀리언스 투 홀드 어스 백>을 통해 일찌감치 음악적으로 가장 중요한 힙합 그룹 가운데 하나의 위상에 도달한 그들은 “권력에 대항하라”고 외친 노래 ‘파이트 더 파워’를 통해 정치적으로도 가장 첨예한 존재가 되었다. 비평가 에릭 하비는 이 노래가 “퍼블릭 에너미를 올바른 형태의 ‘공공의 적’으로 재정립시켰다”고 평하며 “아프리칸-아메리칸의 정치적 정체성에 관한 음악사상 가장 강력하고 논쟁적인 성명 가운데 하나”라고 덧붙였다.

 

‘파이트 더 파워’에서 퍼블릭 에너미는 레이건의 미국을 향해 ‘함무라비식’ 대응을 선택했다.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다/ 아니 우리는 같지 않다/ 우리는 (저들의) 계략을 모르기 때문이다.” ‘저들’이 ‘우리’를 배제시키려 한다면 똑같이 대응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조화된 백인 자본의 흑인 문화 수탈을, 엘비스 프레슬리와 존 웨인이라는 아이콘들을 통해 쟁점화시켰다. “대부분의 사람에겐 엘비스가 영웅이지/ 그러나 내게는 손톱만큼의 의미도 없지/ 그는 철저한 인종주의자였고/ 단순하고 무지한 녀석일 뿐이었어.” 물론 그것은 문자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 메타포였다. 그래서 비평가 개리 멀홀랜드는 “엘비스에 대한 묘사에 동의할 수는 없다”면서도 “백인 미국을 최면 상태에 붙잡아놓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상징으로 엘비스와 존 웨인을 겨냥한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고 썼던 것이다.

 

‘파이트…’의 폭발력은 스파이크 리의 영화 <두 더 라이트 싱>과의 화학적 결합을 통해 배가된 것이기도 했다. 당대 흑인 문화정치의 전위를 대표하던 문제적 주체들로서 퍼블릭 에너미와 스파이크 리의 만남은 그 자체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가 연출한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는 1963년 ‘워싱턴 행진’을 비판적으로 패러디해 다시금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금도 도처에서 자행되는 자본과 권력의 야만을 살벌하게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이 노래의 유통기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정권이 앞장서 부자와 빈자의 위화감, 기득권층과 소외계층의 갈등을 부채질하는 이 나라의 상황이 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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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 바닐리-MTV-그래미 ‘립싱크 공모 사건’ ~ 밀리 바닐리의 <걸 유 노 이츠 트루>(1989년)

 

“32회 그래미 어워드는”, 음악사가 루크 크램튼과 대피드 리스에 따르면, “좋은 면에서나 나쁜 면에서나 공히, 그래미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시상식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제 와 1990년 2월21일 벌어진 시상식의 “좋은 면”이 무엇이었는지 얘기하기 위해서는 객관성을 담보하고 자료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쁜 면”이라면 굳이 그런 수고가 필요치 않다. 같은 해 11월19일, 그래미가 ‘최우수 신인상’ 시상을 철회하면서 명백해진 사실이다. 지금까지도 그래미 52년 역사에 유일한 사례로 남은 오점. ‘최우수 신인상’ 부문 최고의 선택이 1965년의 비틀스였다면, 최악의 선택은 바로 1990년의 밀리 바닐리였다.

 

독일 출신 남성 듀오 밀리 바닐리는 1989년 혜성처럼 나타났다. 유럽에서만 발표한 앨범 <올 오어 너싱>(1988)의 성공에 힘입어 미국 시장 진입에 성공한 그들은, 수록곡 일부를 교체하고 타이틀을 바꾼 메이저 데뷔작 <걸 유 노 이츠 트루>로 순식간에 슈퍼스타덤에 올랐다. 앨범을 6백만장이나 팔아 치웠고, 3곡의 빌보드 넘버원 싱글 포함 5곡의 톱5 히트를 만들어냈다. 첫 싱글로 차트 2위까지 오른 타이틀 트랙 ‘걸 유 노 이츠 트루’는 그 거대한 성공의 시발점이었다. 유럽의 댄스뮤직 전통과 미국의 뉴 잭 스윙 경향을 결합한 대중적 절충주의의 산물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츠 트루’가 몰락의 신호탄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발단은 그해 엠티브이 프로그램 ‘클럽 엠티브이’가 기획한 순회공연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밀리 바닐리가 사전 녹음된 음원에 맞춰 ‘…이츠 트루’를 부르(는 척하고 있)던 중, 기기 오작동으로 립싱크가 탄로났던 것이다. 처음에는 문제가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찰스 쇼라는 뮤지션이 “밀리 바닐리의 앨범에서 노래를 한 것은 자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재점화됐고 급기야 사태는 수습 불가능한 지경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1990년 11월14일, 프로듀서 프랑크 파리안의 기자회견을 통해 밝혀진 진실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공연만 립싱크를 한 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앨범 제작에는 참여조차 하지 않았다. 무명 가수들을 기용해 완성한 앨범에 이름을 올리고 뮤직비디오에서 춤춘 게 전부였다. 그들의 근육질 몸매와 잘생긴 얼굴에서 상품성을 발견한 파리안의 제안에 따라, 밀리 바닐리의 두 사람은 영혼을 팔고 명성을 얻는 악마의 거래에 동의했던 것이다. 비평가 짐 파버는 “80년대 후반 차트를 지배한 댄스 집단의 재능이란 노래와 연주가 아니라 (그나마 나은 경우) 춤 실력이었고 (그마저 아닌 경우) 화면발 좋은 얼굴뿐이었다”고 비판했는데, 밀리 바닐리야말로 그 상징적인 사례였다.

 

밀리 바닐리 파문은 실상, 성공 지상주의에 물든 음악업계의 합작품이었다. 대박의 꿈만 좇은 프로듀서, 그와 결탁한 메이저 레이블 아리스타, 립싱크를 알고도 공연을 계속한 엠티브이, 논란을 알고도 시상을 강행한 그래미가 모두 공범이었다. “춤추며 노래까지 하기는 힘드니까 립싱크도 상관없다”는 식의 맹목적 팬덤 또한 마찬가지다. 업계 전체가 한통속인 위험한 관계. 어쩐지 익숙한 풍경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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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체스터’ 그 굵고 짧은 흔적 ~ 스톤 로지스의 <풀스 골드>(1989년)

 

1980년대 말 영국의 대중음악계는 창조적인 혼란 속에 있었다. 안팎의 조건에 대한 불가피한 반작용이었다. 3기에 접어든 대처 행정부를 향해 누적된 불만이 팽배했고, 뉴웨이브와 신스팝의 유행 이후 더욱 보수적인 방향으로 선회한 시장 주류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과 태도에서 공히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1988년부터 1989년 사이에 진행된 그 일련의 문화적 변화 양상을 가리켜 ‘두 번째 사랑의 여름’이라 칭하는 데서 알 수 있듯, 그것은 1960년대 후반 미국의 반문화 운동과 여러모로 닮은꼴이었다. 사회적 현실에 대한 부정과 음악적 가치에 대한 재고가 동시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주목할 점은 미국에서 시작된 흑인음악의 새로운 조류가 영감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힙합의 샘플링 기법과 하우스의 리듬 패턴이 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데, 1990년대 전반 영국에서 광범위한 문화 현상이자 심각한 사회 문제로까지 웃자라게 되는 레이브의 기초가 그로부터 마련되었다. 방송 진행자이며 인디 레이블 설립자인 토니 윌슨이 “1990년대는 블랙 박스의 ‘라이드 온 타임’이 영국 차트 1위에 올라 있던 6주 사이(1989년 9~10월)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 근거도 거기 있다. ‘열광하는(매드) 맨체스터’라는 의미의 조어인, 이른바 ‘매드체스터’는 그런 영향 관계에서 탄생한 유니크한 하이브리드였다.

 

매드체스터는 비단 음악적 성향만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니다. 패션에서 약물까지,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한 하위문화 전반의 트렌드를 포괄하는 명칭이다. 거기에 배경음악을 제공한 것이 매드체스터 사운드였고 그것은, 단순히 말해, 펑크(Funk)의 그루브와 기타 록의 어법을 결합한 독특한 뉘앙스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비평가 존 해리스는, 역동적 리듬과 명료한 선율을 결합한 그것의 에너지를 통해 “한때 후기 산업사회의 더께이며 눅눅한 날씨의 동의어와 다름 아니었던 도시가 쾌락적인 총천연색 파라다이스로 변형되었음을 전파했다”고 평했던 것이다. 스톤 로지스의 ‘풀스 골드’는 그 아이콘 격인 노래다.

 

‘풀스 골드’는 일종의 반전이었다. 절찬을 획득한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 <더 스톤 로지스>(1989)의 후속 싱글로 공개되었으나 음악적 지향은 그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음악지 <엔엠이>와 주간지 <옵저버>가 나란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국 뮤지션의 앨범”으로 1위에 올린 바 있는 데뷔작이 영국 기타 록 전통의 정수였다면, 비평가 개리 멀홀랜드가 “영국 밴드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펑크(Funk) 레코드”라고 극찬한 이 노래는 매드체스터의 본격적인 공세를 알린 신호탄이었다. 꿈틀대는 베이스 라인과 맛깔나는 기타 리프가 어우러져 10분에 가까운 연주 시간을 넘실대는, ‘풀스 골드’의 흡인력은 평단의 찬사와 대중의 열광을 동시에 획득한 궁극적 성취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배금주의를 냉소한 이 노래의 성공이 곧장 레코드사와의 계약 분쟁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혜성처럼 나타난 탁월한 밴드가 법정 공방에 묶여 백색왜성으로 사그라지면서 매드체스터의 짧은 영화도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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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메아리 ‘매드체스터’ 품다 ~ 프라이멀 스크림의 ‘로디드’(1990년)

 

개별 음악 장르에 특정 지명을 붙이는 것은 새로운 경향의 발상지로서 지역 음악계(local scene)의 역할과 성격을 반영한 결과다. 애팔래치안 포크나 머지비트처럼 지역의 상징적 자연지물에서 이름을 차용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서던 록과 노던 솔의 경우처럼 광역을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것은 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명명이다. 뉴올리언스 재즈부터, 시카고 블루스, 필리(필라델피아) 솔, 디트로이트 테크노, 브리스틀 사운드까지. 구체적인 사례들이 부지기수다. 맨체스터 사운드 혹은 매드체스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목할 점이 있다면, 매드체스터가 음악 자체의 독자성은 물론이고 하위문화의 전후 맥락을 연계하는 과도적 매개로서의 개연성에서도 유의성을 띤다는 점이다.

 

매드체스터는 영국 인디 록의 요람으로서 맨체스터 음악계가 발육시킨 전통의 필연적인 산물이었다. 버즈콕스가 설립한 영국 최초의 본격 인디 레이블 뉴 호르몬스를 필두로 1980년대 가장 중요한 구실을 인디 레이블 팩토리가 모두 이 도시에서 첫발을 내디뎠다. 게다가 영국 최초의 인디 록 스타인 스미스와 영국 인디 역사상 최대의 성공작인 오아시스가 공히 맨체스터 출신이기도 하다. 영국 제2의 도시이자 잉글랜드 북부의 핵심이면서도 런던의 위세에 눌리고, 비틀스의 리버풀과 헤비메탈의 버밍엄에 뒤처져 있던 맨체스터가 영국 대중음악계의 중심에 다가갈 수 있었던 배경에 펑크 록과 인디 레이블이 있었던 것이다.

 

펑크(Punk)와 펑크(Funk)를 결합한 매드체스터의 독특한 음악적 실험도, 미국 흑인음악에 강한 영향을 받은 노던 솔의 중심지로서, 맨체스터의 전유적 산출물이었다. 매드체스터의 영광이 불과 3년 만에 영락을 맛봤음에도 1990년대 전반의 영국 음악계가 그것의 자장 아래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이유도 거기 있다. 펑크(Punk) 기타와 펑크(Funk) 리듬의 결속, 록과 춤의 결합, 라이브 클럽과 디스코텍의 통합을 통해 레이브 문화의 확산과 정착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다. 프라이멀 스크림의 ‘로디드’는 바로 그 진화의 증거다.

 

프라이멀 스크림이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사실부터가 그렇다. 매드체스터의 전국적 임팩트를 방증하는 것이다. 1987년 발표한 그들의 데뷔 앨범이 펑크 록 색채를 띠고 있었던 반면에 이 노래가, 댄스뮤직 전문지 <뮤직>으로부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디 댄스 레코드”라는 찬사를 받은 데서 알 수 있다시피, 매드체스터의 그루브를 전향적으로 수용했다는 점도 그렇다. 더구나 ‘로디드’가 두번째 음반 수록곡인 ‘아임 루징 모어 댄 아일 에버 해브’의 골간을 재활용한 노래이며, 영화 <더 와일드 에인절스>(1966)에서 샘플링한 피터 폰다의 대사­“우리는 자유로워지고 싶어 /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자유로워지고 싶어” ­를 인용해 대처 행정부 말기의 영국 젊은이들의 정서를 포착한 점도 마찬가지다. 음악지 <엔엠이>가 이 노래를 “(지난 50년의) 역사적 순간을 포착한 40장의 레코드” 가운데 하나로 꼽은 음악적, 사회적 근거다.

 

지역색이 창조적 영감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이 노래의 입지는 특별하다. 모든 것이 서울로 통하는 우리 현실에서 지역의 독자적 문화발전이란 언감생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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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젊은 반란 이끈 ‘브릿팝’ ~ 라스의 <데어 쉬 고스>(1990년)

 

1997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은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뒀다. 418석을 확보함으로써 165석에 그친 보수당을 압도했던 것이다. 18년 만에 정권을 탈환한 노동당의 지도자 토니 블레어는 43살의 젊은 나이로 총리직에 오름으로써, “의회가 자체적인 유스퀘이크(젊음의 반란)를 겪고 있다”는 <배니티 페어>의 촌평처럼, 영국의 이미지 변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새로운 노동당’(뉴 레이버)과 ‘영국의 쇄신’(리-브랜딩 브리튼)을 앞세운 블레어의 승리는 또한, 대중문화계와의 교감을 통해 ‘쿨 브리태니카’의 양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영화에서 스포츠까지, 영국적 대중문화의 새로운 활기를 의미하는 캐치프레이즈. 그것의 중추는 ‘브릿팝’이었다.

 

브릿팝은 1990년대의 영국 대중음악 전반을 포괄하는 명칭으로도 사용되지만, 구체적으로는 기타 연주를 앞세운 모던 록 스타일을 가리킨다. 국가적 긍지의 뉘앙스가 다분한 명명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전적으로 영국 대중음악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1960년대 전세계를 강타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주역이었던 비틀스, 후, 킹크스 등의 사운드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고, 거기에 영국적 삶과 틀을 강조한 서사를 담았다. 신시사이저와 샘플링이 폭주했던 1980년대에 대한 반발이자 극단적 양극화를 초래한 대처리즘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셈이다. 전통의 현대화가 낳은 현대적 전통. 블레어의 노동당은 그것에 주목했다. 실제로 블레어는 1996년의 ‘브릿 어워드’와 ‘머큐리 뮤직 프라이즈’ 시상식에 잇따라 참석함으로써 젊은 영국과 소통했고 브릿팝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라스의 ‘데어 쉬 고스’에 대한 때늦으나마 정당한 평가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데어 쉬 고스’는 브릿팝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기도 전에 브릿팝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었던, 브릿팝 최초의 히트곡이었다. 애초 1988년 싱글로 발매되었다가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졌던 이 노래는 2년 후에 발표된 라스의 데뷔 앨범에 다시 소개됨으로써 대중에게 알려졌고, 1990년대 중반 브릿팝의 전성기에 마침내 판테온으로 영전했다. 그래서 <빌보드 음악사전>은 “브릿팝의 근간이 1990년 리버풀 출신 밴드 라스의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과 함께 도래했다”고 했는데, 해당 작품의 정수를 함축한 것이 바로 ‘데어 쉬 고스’였다. 찰랑거리는 일렉트릭 기타와 경쾌한 어쿠스틱 기타를 배경으로 매혹적인 팔세토와 위악적인 육성이 번갈아 넘나드는 이 노래는, 3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연주 시간에도 불구하고 “90년대의 브릿팝이 차용한 멜로디와 멜랑코리의 정미한 결합”(음악지 <큐>)을 보여줌으로써 브릿팝의 “시금석”(존 해리스)이자 “청사진”(토비 크레스웰)을 완성시켰다. 특히, 후렴구만으로 구성된 독특한 노래 형식과 단순 명료한 인트로의 멜로디는 ‘데어 쉬 고스’의 선구적 독창성을 입증하는 인장과도 같다.

 

라스의 리더인 리 메이버스는 자신들과 여타 밴드들의 차이점을 묻는 질문에 “우리의 것은 영혼이지만 그들의 것은 패션일 뿐”이라고 답한 바 있다. 창작자의 자존심과 자의식에 투철한 그의 태도에서, 정권이 자본을 볼모로 예술계의 영혼을 요구하는 우리의 상황을 떠올린다. 대한민국 문화의 미래에 대한 불길한 시금석과 암울한 청사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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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서사시’ 크로스오버의 상징 ~ 페이스 노 모어의 <에픽>(1989년)

 

1980년대의 대중음악 특히, 주류의 대중음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미디어를 통한 표준화의 양상이, 경박한 패션으로 점철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체제를 강화시켰다는 점 때문이다. 개성보다는 유행을, 음악보다는 외모를 중시한 메이저 제작사들의 행태는 그에 대한 원인인 동시에 결과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 과정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인종 간 이성 간 음악적 크로스오버의 일반화가 그것이다. ‘모두에게 어필하는 보편적 음악’이라는 업계의 화두가 미국 사회의 다문화주의적 관점 확산과 만난 지점에서 얻은, 우연한 발견이었다.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의 거대한 성공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인종성의 탈색이라기보다는 혼색이라고 할 것이었다. 백인 주류의 포크 영지에 입성한 흑인 여성 트레이시 채프먼과 흑인 특유의 힙합 영역에 안착한 백인 그룹 비스티 보이스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음악적 혁신이었고 1990년대의 진보적 자유주의를 잉태한 움직임이었다.

 

변화의 물결은 가장 보수적인 장르,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헤비메탈에까지 밀려들었다. 흑인 그룹 리빙 컬러와 여성 밴드 빅슨의 성공이 개별적 사례라면, 문자 그대로 메탈 기타와 펑크(Funk) 리듬을 결합한 ‘펑크 메탈’의 유행은 1980년대 후반의 포괄적 경향이었다. 흑인 보컬리스트와 동성애자 키보디스트가 포함된 5인조 라인업으로 출발한 페이스 노 모어는 그와 같은 크로스오버 메탈 경향의 상징적 존재이자 최대의 승리자였다. 비평가 이언 크리스티에 따르면, 그들은 무엇보다 “스래시 메탈과 랩의 영향을 가장 현명하게 결합한” 밴드였다.

 

데뷔 음반 <위 케어 어 랏>(1985)으로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두며 가능성을 확인한 페이스 노 모어는 세 번째 음반 <더 리얼 싱>으로 스타덤에 등극했다. 빌보드 차트 9위까지 오른 싱글 ‘에픽’의 성공 덕분이었다. 1989년 여름 발표된 이후 변변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던 음반이, 8개월 뒤인 1990년 3월 싱글로 공개된 ‘에픽’의 인기에 힘입어 밀리언셀러 대열에 올랐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에픽’은 스스로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가르는 분수령이기도 했다.

 

‘에픽’은 기이한 ‘서사시’였다. 메탈 기타와 펑크 리듬에다 랩 보컬과 클래시컬한 키보드를 결합한 이 노래의 개성은, 비평가 지나 아널드의 말마따나,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 나타난 그룹”의 독창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안’(얼터너티브)이었다. 그래서 비평가 매니시 아가월은 이 노래가 “드라마틱한 포켓 심포니”이며 “(1990년대 등장하는) 콘, 림프 비즈킷 등 뉴 메탈 계열의 밴드들에게 시금석”을 제공했다고 평했던 것이다. 더불어, 새로운 보컬리스트 마이크 패턴의 괴상한 유머감각 또한 ‘에픽’의 위상을 1980년대의 끝이 아니라 1990년대의 시작에 위치시킨 요인이었다. 예컨대 시종일관 “그것”에 대해 묘사하는 이 노래의 가사는 결국 “그것이 뭔데?/ 그것은 그것이지”라는 후렴구의 반복으로 귀결하는데, 스래시 메탈의 거창한 이념이나 힙합의 과장된 문제의식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였다고 할 것이다.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했다”던 페이스 노 모어의 술회는 ‘에픽’의 참신성이 분방한 태도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화정책의 수장이 네티즌의 농담에 고소를 남발하는 나라에선 언감생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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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음을 밀어낸 ‘감성’의 승리 ~ 시네이드 오코너의 <너싱 컴페어스 투 유>(1990년)

 

비평가 롭 셰필드에 따르면, 1990년은 “마그네틱 테이프가 발명된(1928년) 이래 음반(제작) 역사상 최악의 해”였다. 물론 그것은 1990년의 난맥상에 대한 역사적 증언이라기보다는 너바나가 등장한 1991년의 상징성에 대한 수사적 발언이라는 쪽에 가깝다. 그럼에도 주목할 것은, 1991년이 되기까지 대중음악사의 새로운 십 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논점이다. 요컨대, 시네이드 오코너라는 존재의 유의성이 두드러진 이유도 거기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과도기에 나타난 징후라는 맥락이다. “마돈나의 ‘보그’와 재닛 잭슨의 <리듬 네이션 1814>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런지 록이 대안적 뮤지션들을 위한 지원체계를 미처 갖추기도 전이었던 1990년에, 시네이드 오코너는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비평가 스티븐 듀스너의 견해 또한 그것을 뒷받침한다.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시네이드 오코너는 두 번째 앨범 <아이 두 낫 원트…>와 수록곡 ‘너싱 컴페어스 투 유’로 영국과 미국의 앨범과 싱글 차트를 모조리 석권하며 1990년의 최고 스타로 등극했다. 누구의 예측도 불허한 결과였다. 의외성은 성공의 크기뿐만 아니라 작품의 깊이에도 있었다. ‘너싱 컴페어스…’가 증거다. 거대한 성공의 요인인 동시에 심원한 작품의 요체로서 이 노래의 미덕은 단순함과 간결함에 있다. 낮게 공명하는 신시사이저의 배경음과 느리게 흐르는 힙합 비트가 만들어내는 여백의 공간감. 그리고 그것을 채우는 ‘인간의 육성’. ‘너싱 컴페어스…’는 무엇보다, 샘플링과 기계음이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데 사용되는 단계를 지나쳐 구태의연한 상품을 제조하는 데 남용되는 사태에 다다른 1980년대적 증후군의 막장을 향해, 노래하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일깨움으로써 음악적 가치의 본질을 재고케 했다. 말초적 감각에 대한 인간적 감성의 승리를 통해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갈라놓은 것이다.

 

‘너싱 컴페어스…’가 오코너의 오리지널이 아니라 프린스의 리메이크라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런 평가를 강화한다고 할 것이다. 프린스가 자신이 제작한 밴드 패밀리에게 주었으나 아무런 관심도 얻지 못하고 사장됐던 노래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건 전적으로 오코너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오코너 버전의 성공에 자극받은 프린스가 뒷날에야 비로소 이 노래를 자신의 앨범에 수록한 일은 또 어떤가? 비평가 게리 멀홀랜드는 그들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오코너는 노래의 모든 어휘에 진심을 담아낸 것처럼 들리는 반면에, 프린스는 그렇지 않다”고 평했을 정도다.

 

거기엔 노래의 이면에 녹아든 시네이드 오코너의 개인사가 변별점으로 작용했다. 이별한 연인에 대한 회한을 소회한 프린스의 원작에 대해, 오코너는 사별한 어머니를 향한 애증을 주석함으로써 근원적 모성에의 갈망과 학대받은 유년기의 원망이 교차하는 감정의 혼란을 고스란히 담아냈던 것이다.

 

‘너싱 컴페어스…’의 음악적 방법은 뮤직비디오의 시각적 접근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대중음악사상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를 담고 있는 이 노래의 비디오에서 오코너는 슬픔의 정화를 드러낸 ‘인간의 얼굴’만으로, 카를 드라이어의 무성영화 <잔다르크의 열정>(1928)에서 마리아 팔코네티가 보여준 것과 같은 감동을 재현했던 것이다.

인간의 회복과 음악의 복귀라는 1990년대적 경향은 어느새 그렇게 조용히 부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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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의 창조적 세포분열, ‘트립합’ ~ 매시브 어택의 <언피니시트 심퍼시> (1991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친 ‘힙합의 황금기’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시기는 런 디엠시가 <레이징 헬>을 발표한 1986년부터 닥터 드레가 <더 크로닉>을 공개한 1992년까지의 기간에 집중된다. 힙합이 대중적 성공과 음악적 성취를 아우르며, 인종의 장벽과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문화적 현상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무엇보다 다양한 하위 장르를 낳은 음악적 세포분열이야말로 힙합의 급속한 진화에 양분을 제공한 원천이었는데, 이른바 ‘트립합’은 그와 같은 진화의 과정에서 발생한 돌연변이였다.

 

몽환적 체험을 뜻하는 속어 ‘트립’과 ‘힙합’의 조어라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 트립합은 느린 비트와 환각적인 무드를 표면화한 새로운 유형의 사운드였다.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트립합의 혁신성을 “연주곡 중심의 추상적인 사운드… 래핑과 분노를 제거한 힙합”이라고 분석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런 변별적 요소들이 지역성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트립합은 사상 처음으로 미국 외부에서 도래한 힙합의 창조적 변용이었다. 실제로 트립합의 원산지가 미국이 아닌 영국, 대도시 런던이 아닌 지방도시 브리스틀이라는 사실은 그것의 창의성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요인이다. ‘브리스틀 사운드’라는 명칭이 트립합의 등가적 표현으로 흔히 사용된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영국 남부 서안의 항구도시 브리스틀은, 노예무역의 거점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영국에서 흑인 문화의 연원이 가장 오래고 흑인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 가운데 하나다. 블루스에서 레게까지 다양한 흑인음악의 양상들이 지역문화의 저변에 녹아들어 있었는데, 그런 풍토가 “미국 힙합의 가난한 사촌”(비평가 조 머그스)에 불과했던 영국의 힙합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바탕이 되었다. 브리스틀 사투리의 억양이 래핑과 위화하는 측면에서 연주와 보컬을 선호했고, 하우스 음악과 레이브 문화에 조응하는 지점에서 몽환성과 추상성을 강화했던 과정으로부터 파생한 절충적 부산물이 바로 트립합이었던 것이다. 매시브 어택은 그 새로운 장르의 창조자였고 ‘언피니시트 심퍼시’는 그 새로운 장르의 문법이었다.

 

음악지 <모조>로부터 “영국 댄스(음악)계가 배출한 가장 영향력 있는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은 데뷔작 <블루 라인스>의 수록곡으로, 매시브 어택의 최대 성공작인 ‘언피니시트 심퍼시’는 아직 트립합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전에 그것의 특장을 집약해낸 선구적 싱글이었다. 비평가 네이트 패트린의 말마따나, “1960년대의 모타운 솔과 1970년대의 디스코와 1980년대의 하우스와 1990년대의 힙합”을 결합한 이 노래의 “혁명적이라기에 충분한 프로덕션”은 브리스틀식 흑인음악 절충주의의 완성판이었다. 래핑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게스트 보컬리스트 샤라 넬슨을 중용함으로써 도달한, 댄스 음악도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크로스오버적 성취였다.

 

참고로, 이 노래의 싱글 커버에는 ‘집중공격’을 의미하는 본래 이름 대신 ‘매시브’란 단어만 표기되어 있다. 당시 진행중이던 걸프전과의 연관성 논란을 피하려는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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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터너티브 록 알린 ‘위대한 탄생’ ~ 아르이엠의 <루징 마이 릴리전>(1991년)

 

1991년 그래미상은 ‘최우수 얼터너티브 뮤직 앨범’ 부문을 신설하고 시상했다. 이른바 ‘얼터너티브’라는 용어와 범주를 주류에 안착시킨 계기였다. 그래미를 주관하는 ‘미국 리코딩 아카데미’는 그것을 “메인스트림의 외부에 존재하는 비전통적 형식”의 음악이라고 설명했고, <뉴욕 타임스>는 거기에 “대학가의 록 음악을 인지하려는 카테고리”라는 주석을 달았다. 1990년대 대중음악의 주요한 흐름을 가리키는 범주로서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하위 장르는 그렇게 공식화되었다. 19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에서 태동한 인디 록과 칼리지 록의 음악적 모색이 마침내 주류시장 진입에 성공한 것이었다.

 

인디 록과 칼리지 록과 얼터너티브 록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세 형제와 같다. 나이와 외형과 개성이 조금씩 다르지만 태생적으로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가지들이다. 개별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보적인 층위다. 장르의 명칭이 음악적 스타일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그것들은 장르의 경계가 모호하고 포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류에 대한 거부의 입장을 각각 뮤지션과 제작자(인디 록), 미디어와 소비자(칼리지 록), 비주류와 반주류(얼터너티브 록)라는 필터에 투과시킨 결과였다. ‘독립 음반사’가 제작하고 ‘대학 방송국’이 선호하는 ‘대안적인’ 록 음악이라는 교집합적 개념을 형성하는 세 원소였던 것이다. 요컨대, 그와 같은 통합적 관점을 촉발시킨 존재가 바로 아르이엠이었다. 인디 록과 칼리지 록과 얼터너티브 록의 핵심을 관통하며 당대 언더그라운드의 범주를 아우른 결정적 역할이었다.

 

아르이엠은 1980년대가 낳은 1990년대의 설계자였다. 미국 남부 소도시 애슨스의 초라한 클럽에서 출발한 그들이 대중음악사상 가장 중요한 록 밴드 가운데 하나로 우뚝 서기까지의 과정은 자체로 하나의 교범이 되었다. 그래서 비평가 피터 밀러는 아르이엠이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 모델 가운데 하나”라고 했고, 찰스 에런은 이른바 ‘아르이엠 모델’이 “펑크 록의 영향을 받은 언더그라운드 밴드가 예술적 진정성을 팔아먹지 않으면서 얼마나 멀리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했던 것이다. ‘루징 마이 릴리전’은 바로 그 상징적 증표다. 후렴구가 없는 특이한 구성에 만돌린을 주력 악기로 사용한 이 노래는 아르이엠의 음악적 대안 혹은 대안적 음악의 총아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 최대 히트곡으로 대중 일반에게 얼터너티브 록의 도래를 알린 촉매이기도 했다. ‘루징 마이 릴리전’의 성공이 앨범 <아웃 오브 타임>의 영미 차트 정복과 그래미 ‘최우수 얼터너티브 뮤직 앨범’의 수상으로 이어진 결과도 마찬가지다.

 

비평가 조 카두치는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부흥을 “전략 핵무기의 시대에 백병전으로 맞선” 싸움에서 거둬들인 승리라고 평한 바 있다. “거대 연예-오락 복합기업/거대 매니지먼트/거대 미디어의 시대에 승합차를 타고 미국 전역의 싸구려 클럽을 도는 공연여행”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성공한 ‘아르이엠 모델’의 유산이었다. 기성과 권위에 대한 비판적 태도야말로 대안을 대세로 자리매김케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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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를 전복한 비주류 ‘너바나’ ~  너바나의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1991년)

 

1992년 1월11일, 너바나의 메이저 데뷔작 <네버마인드>가 마이클 잭슨의 <데인저러스>를 정상에서 밀어내고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그건, 대중음악사의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공식적으로 분기시킨 작용이라는 점에서,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팝의 황제’와 자본 귀족의 지배를 끝장낸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이라는 측면에서, ‘혁명적’ 상징이었다. 이에 대중음악 저널리스트 지나 아널드는 “우리가 승리했다”고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란 대체 누굴 가리키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그토록 다른 점은 무엇인가?” 거기에 보태어 스스로 반문을 제기한 비평가 마이클 애저래드는 “메인스트림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10여년 전부터 성장해온” 언더그라운드와 인디펜던트와 아웃사이더의 저변이야말로 승리의 주체였다고 지칭했다. 너바나는 그와 같은 비주류 연대의 총아였다.

 

주지하다시피 너바나는, 비평가 짐 디로거티스의 말마따나, “펑크 록 앨범으로 사상 처음 차트 정상에 오른” <네버마인드>를 통해 “얼터너티브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이 신호탄이었다. 앨범의 첫 싱글로 차트 6위까지 오른 이 노래는 <네버마인드>를 미국에서만 1000만장, 전세계적으로는 2600만장 이상 팔려나가게 만든 원동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비주류로서 주류를 전복시킨 의외성, 평단의 찬사와 대중의 호응을 아우른 포괄성, 대중음악사의 흐름을 뒤바꾼 시대성에서 공히 1960년대의 반문화 절정기 이래 가장 두드러진 역사적 유의성을 획득한 혁명가요였다.

 

그렇게 ‘…틴 스피릿’은 세상을 다시 바꾸고 음악사를 새로 썼다. 록 음악은, 거칠게 말해서, 이후 현재까지도 이 노래가 남긴 영향력의 자장 안에 있다고 할 정도다. 그렇기에 음악전문 방송 ‘브이에이치1’은 이 노래를 “록 시대의 가장 뛰어난 노래”로 꼽았고, ‘엠티브이’는 비틀스의 ‘예스터데이’와 롤링 스톤스의 ‘새티스팩션’에 이어 “역사상 최고의 팝송” 3위에 올려놓았으며, ‘롤링 스톤’은 1990년대 작품으로 유일하게 “역사상 최고의 싱글 500선”의 톱10에 선정했던 것이다.

 

이로써 ‘세상을 바꾼 노래’의 연재를 일단락한다. 반역의 시대를 살아가며 하나의 노래가, 그리고 그런 노래에 대한 언급이 도대체 어떤 구실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하며 작성한 원고들이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뒀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대중음악이 레코드라는 매체를 통해 일상화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지금 여기의 음악적 현상을 배태한 1990년대의 도입부까지를, 더러 고의로 배제한 노래가 있었고 간혹 실수로 누락한 노래도 있었지만, 일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나마 작은 의미를 찾을 뿐이다. 아무쪼록, 2년 8개월 동안이나 지면을 할애해준 <한겨레>에 감사드린다. 나로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연재를 지속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변변치 않은 글을 관심과 애정으로 지켜봐 주신 독자들께도 역시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있다면 여기로부터 21세기의 첫 10년을 결산하는 시점까지도 다뤄보겠다는 다짐으로 끝인사를 갈음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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