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멘의 <루이 루이>(1963) ~ “가사 내용 알아들을 수 없음”
1963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극히 이례적인 사건의 조사에 착수했다. 외설적인 노래 하나가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진정이 빗발치자 에드가 후버 국장이 수사관을 파견한 것이다. 연방통신위원회도 가세했다. 인디애나 주지사 매튜 웰시는 “그 포르노 같은 것”을 금지시키라며 방송국에 압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문제의 노래는 무명 로큰롤 밴드 킹스멘의 <루이 루이>였다. 수사는 31개월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러나 그 결과로 연방수사국이 제출한 보고서는 허탈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가사 내용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음.” 수사가 종결되고 역사가 시작되었다. 구설은 전설이 되었다.
<루이 루이>는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제외하고 역사상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노래로 기록되고 있다. 온전히 이 노래만을 위해 개설된 누리집(루이루이닷넷)에 따르면 현재까지 다른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부른 것을 합치면 발표된 곡이 1500곡이 넘는다고 한다. 주류의 슈퍼스타부터 무명의 인디 밴드까지, 헤비메탈에서 테크노까지, 그 연주자와 스타일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이 노래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만 책 한 권을 통째로 바쳤고, 1983년 캘리포니아의 한 라디오 방송은 각기 다른 가수가 부른 <루이 루이>를 63시간 연속으로 방송하는 진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킹스멘 스캔들’의 여파였다.
킹스멘을 통해 유명해지긴 했지만 <루이 루이>는 본래 그들의 노래가 아니다. 당시 시애틀과 포틀랜드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북서부 지역에서 이 노래는 아마추어 밴드라면 누구나 한번씩 연주하는 통과의례적 넘버였다. 파티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곡이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과정도 복잡하다. 원작은 흑인 리듬 앤 블루스 뮤지션 리처드 베리가 1957년 만들어 발표한 것이었지만 곧 잊혀졌고, 5년 뒤 시애틀의 로킹 로빈 로버츠가 리메이크해 지역에서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많은 무명 밴드들이 <루이 루이>를 레코딩하기 시작했는데, 킹스멘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킹스멘 버전의 <루이 루이>를 유명하게 만든 요인이 그것의 조악한 수준에 있었다는 점이다. 지역방송 디제이 켄 체이스의 제의로 단돈 35달러를 받고 녹음한 킹스멘의 <루이 루이>는 애초 발매할 만한 게 아니었다. 엇나간 박자와 불평 섞인 욕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구설의 원인이 된, 가사를 외우지 못한 보컬리스트 잭 엘리의 얼버무림이 고스란히 담겼다. 결국 노래가 라디오 전파를 타면서 가사의 진위를 둘러싼 논란이 시작되었고, 온갖 추측이 난무하면서 갖가지 외설적인 문장들이 진짜 노랫말인양 퍼져나갔던 것이다. 기성세대의 비난이 쏟아졌고 마침내 연방수사국까지 움직였다.
킹스멘의 <루이 루이>를 둘러싼 해프닝은 로큰롤에 대한 주류의 매카시즘적 시각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편견에 눈먼 기성세대가 사태를 우스꽝스럽게 부풀려놓았던 것이다. 생존권을 외치며 촛불을 든 청소년들에게 배후를 대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이 나라의 정권을 향해 들려주고 싶은 우화 같은 스캔들이다.
로네츠의 <비 마이 베이비>(1963년) ~ 허스키·당돌함으로 ‘기존관념’ 파괴
유명한 교향곡 5번의 도입부에 관하여 베토벤은 “운명은 그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부연했다. 인생의 비장함을 묘사한 음악적 어휘였다. 하지만 현대의 청소년들에 이르러 그런 해석은 고루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춘기 아이들에게 운명의 두드림이란 첫사랑에 설레어 고동치는 심장박동 쪽에 더 가까운 법. 그 느낌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게 된 시대에, 인생은 경쾌하게 생동하는 리듬으로 내달았던 것이다. 로큰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트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비 마이 베이비>의 도입부에서 드럼의 바이욘 비트(브라질에서 유래한 리듬양식)가 만들어내는 진폭 큰 파장은 바로 그 상징적 음향이었다.
1963년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오른 <비 마이 베이비>는 3인조 걸 그룹 로네츠의 데뷔곡이자 최대 히트곡이다. 베로니카와 에스텔 베넷 자매, 그들의 사촌 네드라 탤리로 구성된 로네츠는 기존의 여성중창단들과는 대척적인 개성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당대에 “신은 노래하는 흑인 소녀의 형상”이었다고 한 작곡가 제리 고핀의 표현에 빗대자면 그들은 ‘추락한 신’ 쪽이었다. 맑고 순수한 목소리로 수줍게 노래하던 여타 걸 그룹들과 달리, 로네츠는 베로니카 베넷의 위태로운 허스키로 당돌하게 주장하는 ‘되바라진 계집애’들이었다. 시렐스가 “내일도 날 사랑해줄 건가요”라고 요청했던 데 반해, 로네츠는 “당신이 내게 한 번 키스할 때마다 난 세 번씩 되돌려줄 것”이라며 “나의 연인이 되어주”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소녀들의 ‘배후’에는 필 스펙터가 있었다.
그 자신 뛰어난 프로듀서인 제리 웩슬러가 “가장 위대한 프로듀서”라고 칭했던 필 스펙터는 약관에 이미 히트곡 제조기이자 “청년 거물(틴에이지 타이쿤)”로 불린 인물이다. “독자적인 사운드의 정경”을 “선율과 가사만큼이나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잡게 만듦으로써, 프로듀서의 역할과 위상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눈 기준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펙터의 사운드 혁명은 흔히 ‘월 오브 사운드’로 요약된다. 각각 두 대 이상의 기타, 베이스, 드럼, 퍼커션에다, 현과 혼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는 물론이고, 캐스터네츠와 탬버린까지 동원하여 벽돌처럼 촘촘하고 단단하게 쌓아 올린 거대한 ‘소리의 장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음악을 필 스펙터 본인은 “아이들을 위한 작은 교향곡”이라고 했고, 비평가 로버트 파머는 “온갖 장식을 곁들인 바그너 풍의 로큰롤”이라고 했다.
<비 마이 베이비>는 필 스펙터가 최대치를 발휘한 노래다. 캐롤 킹과 제리 고핀 부부에 쌍벽을 이루는 송라이팅 커플 엘리 그리니치와 제프 베리를 파트너 삼아 곡을 썼고, 모타운의 ‘펑크(funk) 브라더스’와 스택스의 ‘멤피스 그룹’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세션맨 그룹으로 꼽히는 ‘레킹 크루’에게 연주를 맡겼다. 로네츠의 방점으로 완성된 이 노래는 결과적으로, 미국 팝의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인 비치 보이스의 <굿 바이브레이션스>에 영감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신디 로퍼의 <걸스 저스트 원트 투 해브 펀>와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을 배태한 바탕이 되었다.
조운 바에즈의 <위 섈 오버컴>(1963년) ~ 60년대 인권운동의 오벨리스크
1955년 흑인 여성 로사 팍스의 작은 저항이 촉발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버스 보이콧’은 60년대 미국 사회를 뿌리째 뒤흔든 거대한 인권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 같은 움직임은 때마침 확산한 음악계의 ‘포크 리바이벌’ 경향과 만나 비폭력 평화시위의 강력한 연대를 구축했다. 그 결과, 당시 모든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빠지지 않고 불렸던 노래 <위 섈 오버컴>은 곧 인권운동의 음악적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인터내셔널>이 노동자 운동을, <임을 위한 행진곡>이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을,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 촉구 촛불집회를 상징하듯이.
하지만 <위 섈 오버컴>은 실체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만든 노래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여타의 ‘운동가’들과는 태생이 다르다. 20세기의 여명에 흑인 목사 찰스 틴들리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노래는 본래 찬송가 용도였다. 녹음수단이 미비했던 시절, 세월을 거쳐 민중에 구전되고 수정 혹은 보완되면서 민속음악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노래가 저항과 희망의 송가로 탈바꿈한 데는 피트 시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미국 포크 리바이벌의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시거는 매카시즘의 여진이 남아 있던 50년대 후반에 이 노래를 처음 녹음했을 뿐만 아니라 흔히 <위 윌 오버컴>으로 불리던 제목을 <위 섈 오버컴>으로 바꿔놓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조운 바에즈의 역할은 <위 섈 오버컴>을 민중에 각인시킨 일이었다. 밥 딜런의 반전가 <블로잉 인 더 윈드>가 피터, 폴 앤 메리의 버전으로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것처럼, 피트 시거가 발굴한 <위 섈 오버컴>의 가치는 바에즈의 “백만 명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소프라노를 통해 시대의 울림으로 구체화했다. 그의 목소리는 연옥 같은 지상에 내린 천상 복음의 매개였다.
조운 바에즈는 이 노래를 1963년에만 세 번 이상 녹음하였다. 모두 공연 실황이었고, 두 번은 집회 현장에서의 공연이었다. 그 첫 번째는 수많은 시위자들이 연행된 5월의 버밍엄대학 인권운동 집회였고, 두 번째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저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이 행해진 8월의 ‘워싱턴 행진’이었다. 특히, 링컨기념관의 계단참에서 노래한 후자의 경우는 주최 쪽 추산 30만(경찰 추산 20만)의 민중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를 합창하는 장관을 연출함으로써 60년대 인권운동사에 오벨리스크와 같은 이정표를 남겼다.
음악 저널리스트 콜린 어윈은 “역사를 통해 다수의 포크 리바이벌이 있었다”고 전제한 뒤, 60년대의 그것은 “사회문화에 대한 학구적 관점”에서 비롯한 전 시대의 경우에 비춰 “자연발생적인 유기작용”이라는 점에서 차별된다고 평한 바 있다. 전례가 없는 유형의 촛불집회 양상에서 10대 소녀들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현재진행형인 그 한 예라고 할 것이다. <위 섈 오버컴>의 의미는 미국의 60년대에 살 것을 강요받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터무니없는 현실에도 그렇게 살아있다.
보브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1963년) ~ 격조 높은 저항음악의 상징
“귀가 얼마나 많아야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을까?” 먼저 묻는다. 이에 응한다. “친구여, 대답은 바람결에 날린다네.”
불가의 선문답이 아니다. 도가의 무위자연을 이르는 말도 아니다. <블로잉 인 더 윈드>의 노랫말은 해답이 너무도 명백해서 의중이 도리어 모호해진 질문과 같다. 해답은 실상, 질문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라는 것이다. 노랫말의 다른 구절들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이 바다를 건너야 비둘기는 모래밭에서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날아다녀야 대포알은 영원히 금지될 수 있을까?” 대포알과 비둘기로 환유한 그 질문에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이 선명히 아로새겨져 있다.
<블로잉 인 더 윈드>는 흔히 “가장 유명한 프로테스트 뮤직(저항음악)”으로 일컬어지는 노래다. 뒷날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와 함께 대중음악 만신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는 보브 딜런의 이력이 만개하기 시작한 것 또한 이 노래와 함께였다. 여기서 딜런은 시대와 맞서는 양심을 고양함으로써 당대 인권운동과 반전시위의 가장 강력한 연사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특히, 여타의 저항음악들과는 격이 다른 노래를 만들어낸 것으로 평가 받았다. 직접의 정치적 메시지 대신 은유의 문학적 수사를 차용한 <블로잉 인 더 윈드>의 노랫말은 대중음악의 수준마저 격상시킨 것이었다.
실제로, <블로잉 인 더 윈드>에서 보브 딜런이 상정한 것은 구체적인 정치의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가치였다. “최악의 범죄자들 가운데 일부는 잘못된 것을 보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려버리는 자들이다.” 이 노래를 수록한 앨범 <프리휠링 보브 딜런>의 라이너노트(속지)에 직접 밝힌 바와 같이, 보브 딜런은 무관심이라는 비인간적 처사를 각성하는 것이 궁극의 해답이라고 판단했다. 음악학자 래리 스타와 크리스토퍼 워터맨의 지적처럼, 이 노래가 “시대와 장소에 제한받지 않고 공명하는 울림”으로 저항음악의 상징처럼 자리잡은 것은 바로 그 보편성의 가치 추구에 있었다.
물론, <블로잉 인 더 윈드>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피터, 폴 앤 매리였다. 그들이 리메이크한 감미로운 팝 버전은 발매 첫 주에만 30만장이 팔리며 1963년 7월, 빌보드 싱글 차트 2위까지 오름으로써 포크의 대중적 잠재력을 확인시켰다. 하지만 가장 탁월한 송라이터로서 보브 딜런의 존재감을 대중과 시대 앞에 부각시킨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성공은 딜런의 어눌한 웅얼거림에 담겼던 본래의 진정성을 희석시키고 얻은 것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노래의 가치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있었기 때문이다.
<블로잉 인 더 윈드>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촉구하는 노래다. 그것은 1964년의 이른바 ‘프리덤 서머(자유의 여름)’에 동참했던 이들의 열망과 함께 울려 퍼졌다. 2008년 대한민국에도 여름이 시작됐다. 촛불로 타오르고 있는 해답을 찾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눈이 필요한 것일까?
샘 쿡의 <어 체인지 이스 고너 컴>(1964년) ~ 성속과 흑백 아우른 ‘난장’
세계적 흥행작이었던 영화 <블루스 브라더스>(1980)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초반부에 등장한다. “솔 음악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이 목사로 출연하여 가스펠을 부르는 부분이다. 비록 과장된 연출이나마, 거기에는 미국 흑인의 수난사와 흑인음악의 발전사가 중첩된 교집합적 영역으로서 교회의 위상이 반영되어 있다. 그 속에서 음악은 성과 속의 경계가 사라진 난장의 매개로 드러난다. 가스펠과 솔 음악의 불가근한 동시에 불가원한 관계적 특수성이 화해하는 지점이다.
물론, 가스펠의 솔 음악적 변용 혹은 솔 음악의 가스펠 차용이 처음부터 환영을 받은 건 아니었다. 종교적 경건과 세속적 욕망의 구분에 엄격했던 흑인사회 내부의 윤리적 갈등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큰롤을 둘러싼 백인사회의 반목이 그랬듯이, 그것은 ‘다가오는 변화’ 앞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았다. 인권운동의 매개라는 역할이었다.
역사가 테일러 브랜치는 솔 음악이 60년대의 정치에 중대한 의미를 만들어냈다고 평한 바 있다. 백인 청중과의 교감이라는 측면에서 “솔 음악 스타들이 마틴 루서 킹 목사보다 앞에 있었다”며 “킹 목사가 염원했던 (흑백간의) 감정공유를 그들이 풀어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백인 뮤지션들과의 차별점이기도 했다. 요컨대, 백인 포크가 이성적 정의감으로 당위의 권리를 인식시키고자 했던 것에 비해 흑인 솔은 현실적 절박감으로 당면한 투쟁을 공감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샘 쿡의 <어 체인지 이스 고너 컴>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근거도 거기 있다. 복잡하게 얽힌 성속의 유별과 흑백의 차이를 아우르고 이뤄낸 성취였기 때문이다.
샘 쿡은 스스로가 사회적 모순의 피조물이었다. 성공한 흑인의 역할 모델인 동시에 그 딜레마의 상징이기도 했다. 가스펠 그룹의 일원으로 출발해 솔 음악의 스타덤에 오른 그는 교회와 클럽을 오가며 균형을 유지하려 애썼고, 레코드회사를 설립하여 흑인 음악가들의 권익을 도모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인기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백인 소유의 메이저 레이블에서 활동해야 했다. <어 체인지…>는 바로 그 경계선상에서 탄생했다. 맬컴 엑스와의 교유와 밥 딜런으로부터의 자극을 통해 마침내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찾은 결과였다. 특히,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에 대한 샘 쿡의 반응은 복잡미묘했다. “흰둥이가 이런 노래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를 각성시켰던 것이다.
<어 체인지…>는 <블로잉…>에 대한 답가였다. 가스펠과 블루스와 솔과 팝의 요소들이 뒤섞인 음악적 크로스오버였고, 슬픔과 회한과 인내와 희망이 뒤엉킨 감정적 정화였다. 그것을 샘 쿡은 인간의 육성으로 화한 신의 의지로 노래했다. “결코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지 / 하지만 이제 나는 전진할 수 있다네 /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 변화가 다가오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네”. 느끼건대, 그 뭉클한 뜨거움은 시청 광장의 시국미사가 전한 메시지와 닮은 것이다.
Luther Vandross
비틀스의 <쉬 러브스 유>(1963년) ~ 영국 바꾼 ‘비틀마니아’의 발화점
처음엔 누구도 짐작지 못했다. 현상이 그토록 엄청날 것으론. 비틀마니아(Beatlemania). 문자 그대로 ‘비틀스 열풍’을 몰고온 그 현상은 상식과 경험의 범주를 단숨에 뛰어넘어 버렸다. 일개 대중음악 가수가 연령, 성별, 계급, 취향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거대한 사회적 흐름을 만들어낸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비평가 닉 콘의 지적처럼 “비틀스는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그것은 일종의 경이였다.
비틀마니아란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영국 타블로이드 일간지 <데일리 미러>의 1963년 11월11일치 헤드라인을 통해서다. 비틀스가 출연한 <로열 버라이어티 퍼포먼스>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다음날이다. 유서 깊은 왕실 자선콘서트의 실황녹화인 그 프로그램을 영국 방송 역사상 최대기록인 1500만명이 시청했다. 콘서트에서 존 레넌은 일생의 가장 유명한 코멘트 가운데 하나를 왕실 가족과 상류 지배층 귀족들이 대거 포진한 객석으로 날렸다. “값싼 좌석에 계신 분들은 박수를 쳐주시고, 나머지 분들은 그저 보석장신구나 짤랑거리세요”라는 냉소였다. 이에 대해 비평가 제임스 밀러는 “관객들은 킥킥거렸고, 언론은 갈채를 보냈으며, 영국 전체가 미소를 지었다”고 썼다. 그것은 대중의 애정에 힘입은 발언인 동시에 대중 정서의 반영이었다.
비틀마니아는, 아직 그 표현이 등장하지 않았을 뿐, 이미 시대의 공기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비틀스 평전인 <캔트 바이 미 러브>에서 작가 조너선 굴드는 그 같은 대세는 1963년 8월을 기점으로 뚜렷이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쉬 러브스 유>가 발매된 시점이다. 비틀마니아의 본격 발화점이라는 것이다.
비틀스의 네 번째 싱글이었던 <쉬 러브스 유>는 1963년 9월, 영국의 싱글 차트를 평정했다. 이 노래 이전에도 비틀스는 차트 1위 곡을 보유하고 있었다. 각각 두 번째와 세 번째로 발표했던 <플리스 플리스 미>와 <프롬 미 투 유>가 그것이다. 하지만 당시 영국의 차트들은 아직 단일한 체계로 통합되지 않았고, 그 두 곡은 몇 개의 차트에서 1위에 올랐을 뿐이다. <쉬 러브스 유>는 모든 차트를 정복한 최초의 실질적인 넘버 원 싱글이었고, 영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많이 팔린 레코드로 기록되었다(기록은 폴 매카트니가 1977년 솔로로 발표한 <멀 오브 킨타이어>에 의해 깨졌지만, 이 곡은 아직도 비틀스의 최다판매 싱글이다). 작은 클럽 공연을 중단하고 대형 극장만을 무대로 삼기 시작한 것도 이 노래의 성공 이후 달라진 비틀스의 위상이었다.
비틀마니아는 1960년대 서구사회의 이상과 변혁을 설명하는 축소판이라고 할 만하다. 과연 역사는 반복되는가. 비틀마니아를 촛불로 치환하면, 그것은 곧 2008년 대한민국의 알레고리가 된다. <쉬 러브스 유>의 발랄과 생기와 신선에는 <대한민국헌법 제1조>를 대입할 수 있다. 음악은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비틀스의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1963년) ~ 록음악의 변혁 알린 신호음
1964년 2월7일, 미국 본토에 대한 영국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첫 공습에 나선 선봉대는 비틀스라고 불리는 네 명의 청년이 전부였다. 교전 따위는 없었다. 오후 1시35분, 뉴욕 케네디 공항에 내린 그들은 자발적인 항복 의사를 표시한 3천명의 환영인파 속으로 무혈 입성했다. 라디오 방송들은 디 데이를 축하하는 특집을 마련했고, 수백명의 기자가 공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법석을 이뤘다.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첫 장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란 비틀스를 필두로 한 영국 뮤지션들이 미국 음악계를 점령했던 60년대의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침공’이라는 극단적 어휘 선택에 담긴 뉘앙스는 미국인들의 충격을 반영한 것이다. 오늘날 영국은 미국과 함께 대중음악의 양대 축으로 자연스럽게 간주되지만, 당시로서는 누구도 그런 날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로큰롤은 전적으로 미국 문화의 산물이었고 영국은 일방적인 수입국에 불과했다. 그런 나라로부터 전대미문의 새로운 음악이 창조되었고, 그 음악에 본고장 사람들이 광적으로 호응했으니 경악한 것도 당연하다. 비틀스는 태풍의 눈이었고 지각변동의 진앙이었다.
당시 몇 가지 기록만 살펴봐도 비틀스가 얼마나 철저하게 미국 음악계를 유린했고 초토화시켰는지 확인할 수 있다. 미국 도착 이틀 뒤 출연했던 <에드 설리번 쇼>는 미국 방송 역사상 최고기록인 7300만명이 시청했다. 이는 당시 미국 전체 인구의 40%, 전체 시청자의 60%에 해당하는 수치다. 빌보드 차트에서도 전무후무한 기록이 작성되었다. 그해 4월4일치 싱글차트에서 비틀스는 1위부터 5위까지를 휩쓸었다. 100위까지 집계하는 차트 전체에는 무려 14곡이 올라 있었다. 같은 날, 빌보드 앨범차트 1·2위, 영국 싱글차트 1위, 영국 앨범차트 1·2위도 모조리 비틀스의 차지였다.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는 그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다. 비틀스에게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1위 자리를 안겨준 이 노래는 비틀 마니아가 미국 시장마저 접수했음을 알린 최초의 승전보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에 대한 언론의 반응이었다. 전문가들조차도 비틀스의 음악적 독창성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컨대, <뉴욕타임스>는 비틀스의 음악이 “기본적으로는 로큰롤이다. 덜 정격적이지만 더 창조적이다”라고 에둘러 썼을 뿐이다. 다른 매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완전히 새로운 음악적 지평을 열게 되리라고 전망한 이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로큰롤은 비틀스를 통해 ‘록 음악’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영역을 아우르는 명칭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아이 원트…>는 그 변혁을 상징하는 신호음으로 기록에 남았다. 소설가 톰 피아자가 <아이 원트…>의 도입부 기타 연주에 대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오프닝, 혹은 베토벤의 5번 교향곡(<운명>)의 첫 소절과 비견할”만하다고 평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50년대의 ‘스테이터스 쿼’(현상 유지)에 머무르던 세계가 비로소 ‘진짜 60년대’에 진입하기 시작했으니까.
애니멀스의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1964년) 영국 블루스 록의 이정표
작가 노먼 메일러가 1950년대 후반의 미국 청년문화에서 주목했던 어떤 경향은 60년대 영국에서 되레 완연한 현상이 되었다. 이른바 “하얀 검둥이”(화이트 니그로)들을 통해 조성된 ‘브리티시 블루스 리바이벌’의 붐이다. 블루스와 리듬앤블루스를 모방하는 데서 시작한 그것은, 독창적인 재해석판을 내놓으며 비틀스를 위시한 머지비트(머지는 리버풀을 흐르는 강이다) 진영과 함께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한 축을 형성했다. 로큰롤의 빈자리를 알맹이 없는 아이돌 팝 상품과 과장된 낭만주의의 걸 그룹 사운드로 채우는 데 급급했던 미국 음악업계가 영국 뮤지션들에게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배경에는 인종적 편견 때문에 근원을 왜곡한 모순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니멀스는 영국의 블루스 리바이벌 붐이 배태한 최초의 국제적 성공작이었다. 동물적인 거침과 격렬함이 곧 밴드의 이름이 된 데서도 알 수 있다시피, 애니멀스는 블루스의 원초적인 에너지를 로큰롤과 현대적으로 결합시킨 주인공이었다. 특히, 보컬리스트 에릭 버든의 울부짖음은 당대에 있어 흑인보다 더 흑인다운 질감을 담아낸 것이었다. 그래서 비평가 레스터 뱅스는 화이트 니그로로서 에릭 버든의 등장이 “검둥이 자신들이 흑인으로 변해갔음을 고려할 때 특히나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평했다. 순화된 당대의 흑인음악보다 탄광촌 노동자 계급 출신 백인 에릭 버든의 노래가 오히려 더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은 애니멀스의 최초이자 최대 히트곡이다. 영국에서는 물론이고,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와중에 비틀스와 관련이 없는 노래로는 처음으로 미국 차트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비평가 제프리 스톡스는 그 과정에서 이 노래가 “거의 모든 팝 음악의 규칙을 혁파했다”고 썼다. 우선, 노랫말이다. <하우스…>는 본래 미국의 오래된 구전가요로서 어린 창녀의 한탄이 그 골자다. 비록 관점을 남성형으로 바꿔놓기는 했지만 청소년 시장을 겨냥한 노래로 삼기에는 위험한 시도였다. 4분30초에 달하는 연주시간도 극히 이례적이었다. 3분이 넘는 노래는 방송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당시의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3분이 채 못 되는 길이의 싱글 버전으로 편집되어 발매되고 말았지만 과감한 도전이었다.(오리지널 버전은 앨범에만 실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혁신적인 면은 그 사운드에 있었다. 애수 띤 기타의 아르페지오와 출렁거리는 해먼드 오르간의 론도가 에릭 버든의 야수 같은 절규와 만나는 지점에서 “최초의 포크 록”이 탄생했고 영국 블루스 록의 이정표가 세워졌다. 롤링 스톤스의 거친 리듬 앤 블루스와 밥 딜런의 걸작 <라이크 어 롤링 스톤>, 도어스 특유의 오르간 사운드가 어떤 식으로든 그로부터 영향 받았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우스…>는 온고지신에 토대한 새로운 표준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영국의 블루스가 모방에서 재해석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블루스가 포크 록과 블루스 록으로 변이하는 면모를 전시하는 살아 있는 화석으로 남았다.
킹크스의 <유 리얼리 갓 미>(1964년) ~ 파괴적 사운드의 원조
“온 세상이 무대”라고 했던 셰익스피어의 비유는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통해, 무적함대의 식민정복 이래 가장 강력한 양상으로 구현되었다. 그래서 세계 최대의 시장인 미국에서는 단지 영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성공을 거두거나,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영국 출신이라 오인되는 해프닝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17~18세기 모든 영국 함선이 정복전쟁에 나서지는 않았던 것처럼, 당시 모든 영국 그룹이 해외 진출에 안달했던 것은 아니다. ‘휘청대는 런던(스윙잉 런던)’의 절정기에조차 무신경으로 일관했던 런던 토박이 킹크스가 그 대표격이다.
킹크스는 흔히 비틀스, 롤링 스톤스, 후와 함께 당대의 ‘빅4’로 불리는 밴드다. 레이와 데이브 데이비스 형제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그들은 영국 ‘뮤직 홀’(일종의 버라이어티 쇼) 전통을 로큰롤과 결합해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했고, 그 덕분에 자국민들에게서 누구보다도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킹크스의 영국 문화에 대한 천착과 외국 진출에 대한 무관심은 미국에서의 활동금지 사건으로도 명백히 드러났다. 단 한 번의 미국 순회공연 이후 석연치 않은 이유로 4년 동안이나 음악활동을 거부당했음에도 별다른 이의제기도 없이 본국에 눌러앉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그 결과 킹크스는 대중적 성공에 심각한 타격을 입긴 했지만, 비평가 니컬러스 샤프너의 지적처럼 “모든 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영국인”이 되었고, 밴드의 리더인 레이 데이비스는 켄 에머슨의 평가처럼 “마르크스주의자의 관점으로 사회를 기록하는 팝 음악의 발자크”로 성장했던 것이다.
<유 리얼리 갓 미>는 킹크스의 세 번째 싱글이었고 최초의 히트곡이었다.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톱10을 기록한 이 싱글은 당시 비틀스의 노래들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100만장 넘게 팔린 기념비적 레코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래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는 무엇보다 그 거칠고 파괴적인 사운드에서 돌출한 것이었다. 일그러진 기타음을 생성시키는 과정에서 퍼즈박스(소리를 뭉그러뜨리는 이펙터 장치)의 개념을 만들어냈고, 그 지글거리는 소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파워코드(3도 음을 배제한 약식 코드)를 도입함으로써 이후 등장하는 모든 강력한 사운드의 원조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유 리얼리 갓 미>는, 이론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지미 헨드릭스보다 앞서 헤비메탈의 방법론을 제시했으며 엠시5보다 먼저 펑크 록의 전범을 마련했다는 견해에 모자람 없는 혁신이었다.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와 딥 퍼플의 존 로드가 이 노래의 녹음 세션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은 전설로 남았다. 게다가 평자에 따라서는 90년대의 브릿팝조차 이 노래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 리얼리 갓 미>는 무엇보다, 킹스멘의 <루이 루이>와 대서양 너머 짝을 이뤄, 청춘의 이미지를 구체적인 사운드로 귀착시켰다는 점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다. 책상머리의 입시경쟁에 내몰린 요즘 청소년들이 잃어버린 무엇이 그 속에는 살아 있다.
라이처스 브러더스의 <유브 로스트 댓 러빙 필링>(1964년) 전문가들이 주조한 최고의 ‘뉴욕 음악’
“기분이 좋지 않아요.” 영화 <맨해튼>(1979)에서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우디 앨런)에게 사춘기의 어린 연인(마리엘 헤밍웨이)이 내뱉은 답이다. 구구한 대사보다 외려 더욱 절절한 감정이다. 그렇게, 때론 문장 한 줄이 책 한 권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해주기도 한다. “내가 입맞춤할 때 당신은 더 이상 눈을 감지 않는군요.” 심장을 뛰게 만들던 설렘이 사라지고 머리로 인지하는 관성만 남은 연인의 관계를 이보다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유브 로스트 댓 러빙 필링>의 첫 소절은, 역사상 최고는 아닐지언정, 신시아 웨일과 배리 만 콤비가 써낸 최상의 문장임에 분명하다.
신시아 웨일과 배리 만은 캐롤 킹과 제리 고핀, 엘리 그리니치와 제프 배리의 경우처럼, 부부이자 작곡 파트너로 시대를 풍미했다. 당대 최고의 프로듀서 필 스펙터의 요청으로 두 사람이 써낸 <유브 로스트…>는 듣는 이의 폐부에 아련한 통증을 남기는 노랫말로 즉각적인 히트(65년 2월,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40년 넘는 세월 동안 줄곧 상심한 연인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불멸의 고전 반열에 올랐다. 통산 천만 회를 훌쩍 넘는 방송 횟수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제치고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애청된 노래”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유브 로스트…>는 당대 뉴욕 음악산업의 분업화된 전문가 시스템이 만들어낸 궁극의 성취였다. 웨일과 만 콤비의 작곡에서 스펙터의 녹음과 레킹 크루의 연주까지, 각 분야 최상의 인력이 동원되어 이른바 ‘월 오브 사운드’의 완결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주목할 것은, 흑인 여성 그룹을 음악적 매개로 삼아왔던 60년대 초반 뉴욕 음악계의 일반적 관례를 벗어나 이 노래를 백인 남성 듀오가 불렀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라이처스 브라더스는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과감한 변화의 포석이었다.
당시 녹음세션에 참여했던 기타리스트 바니 케셀에 따르면, 필 스펙터는 “마치 모스크바를 폭격이라도 하려는 듯, 전략을 짜내는데 전력했다”고 한다. 스펙터가 라이처스 브라더스를 선택한 배경에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흑인보다 더 흑인다운 목소리를 지녔다는 게 근거였다. 푸른 눈을 가진 백인의 솔 음악이라는 의미에서 ‘블루-아이드 솔’이라 일컬어지는 하위 장르가 바로 빌 메들리와 바비 햇필드로 구성된 라이처스 브라더스를 원조 삼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다. 스펙터의 전략은 성공했다.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유브 로스트…>는 60년대 초반을 지배했던 뉴욕 음악계의 ‘스완 송’이 되고 말았다. 비틀스를 필두로, 직접 노래를 만들고 연주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이 도래함에 따라 뉴욕이 자랑하던 전문가 분업조직은 변화에 뒤처진 비대한 공룡의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음악산업의 ‘게임의 규칙’이 송두리째 뒤바뀐 것이다. “뭔가 아름다운 것이 죽어가고 있어요/ 당신은 그 사랑스런 느낌을 잃어버렸군요.” 어쩌면 <유브 로스트…>는 시대의 변화를 예감한 데자뷔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수프림스의 <베이비 러브>(1964) ~ 비극 부른 ‘거대한 성공’
모타운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와중에도 타격을 입지 않은 보기 드문 미국의 레코드회사였다. 오히려 더욱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갔다는 점에서는 이변의 주인공이라고 할 만했다. 모타운의 그런 이례적인 성공은 특유의 시스템에 힘입은 것이었다. 백인 청중을 겨냥한 팝적인 솔을 음악적 특장으로 내세운 것도 그렇지만, 회사 내부의 조직체계가 끈끈한 인적관계로 결속되어 있었다는 점이 더욱 강력한 요인이었다. 관계의 꼭지점에는 물론, 사장이던 베리 고디가 있었다.
베리 고디는, 배우들을 “가축처럼 다뤄야 한다”고 했다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과는 달리, 휘하의 가수들을 가족처럼 연대시키고자 했다. 실제로 그는 소속가수이자 친구인 스모키 로빈슨을 부사장으로 앉혔고, 그의 여동생이자 동업자인 안나 고디는 역시 소속가수였던 마빈 게이와 결혼했다. 회사에 속한 하우스밴드에게는 “펑크(Funk)의 형제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모타운은 결혼과 교우로 얽힌 일종의 유사가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약한 고리는 있었다. 인기와 성공이라는 목표 아래서, 가수들은 가족인 동시에 상품이기도 했던 때문이다. 레코드 제작과정을 “생산라인”으로, 가수들의 훈련과 통제를 “품질관리”로 칭했던 베리 고디의 표현에서 드러나듯, 모타운도 결국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라는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수프림스는 바로 그 모타운 시스템의 명암을 가장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준 3인조 소녀 그룹이다. <웨어 디드 아우어 러브 고?>(1964)를 필두로 다섯 곡을 연달아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려놓은 그들은 60년대에만 열두 곡의 넘버1 싱글을 기록함으로써, 비틀스를 제외하곤 당대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대중적 성취의 금자탑을 쌓았다. 96년 머라이어 캐리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여성으로 가장 많은 1위곡을 보유한 기록도 수프림스의 것이었다.
반면, 그들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드림걸스>(2006)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상업적 성공을 위해 그룹 내부의 유대관계를 희생시켜야 했다는 측면에서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영화와는 달리, 결국 멤버였던 플로렌스 발라드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갈등은 비평가 리치 운터버거의 말마따나 “록 역사상 최악의 비극 가운데 하나”였다. 게다가 간판 격이었던 보컬리스트 다이애나 로스는 유부남이던 베리 고디의 아이를 임신한 대가로, 다른 남자와의 위장(에 가까운) 결혼을 받아들여야 했다. 가족의 해체라는 아이러니였다.
그런 점에서 수프림스 최대의 히트곡이었던 <베이비 러브>는 일종의 분수령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 곡은 빌보드 차트 정상에서 수프림스의 연속적인 히트 퍼레이드를 연계한 핵심적 매개였고, 영국 밴드들이 전세계를 호령하던 당시(64년에서 65년 사이)에 영국 차트를 정복한 유이한 미국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동시에, 모타운과 수프림스의 내부적 갈등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지나치게 거대한 성공이기도 했던 것이다. 밝고 맑은 사랑 노래의 이면에 자리한 어둡고 음습한 운명의 반면교사다.
마사 앤 더 반델라스의 <댄싱 인 더 스트리트>(1964년) 거리의 저항 낳은 ‘반골적 보컬’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와 탭 댄서 그레고리 하인스가 장르 경계를 허물고 동반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영화 <백야>(1985)에서, 춤은 자유를 향한 열망의 형상화로 제시된다. 체제에 억압받는 몸과 속박에 저항하는 영혼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움튼 춤사위가, 현대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의 정의처럼, “몸의 정수에 담긴 내밀한 언어”를 드러내는 것이다. 단 한 줄의 정치적 메시지조차 담기지 않았음에도 <댄싱 인 더 스트리트>가 미국 공민권운동의 찬가로 폭발적인 환영을 받았던 이유를 그로부터 유추해볼 수 있다. ‘거리에서 춤출’ 자유의 메타포와 터질 것 같은 에너지의 리듬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시너지를 대중이 읽어냈다는 것이다.
1964년 여름, 빌보드 싱글 차트 2위까지 오른 <댄싱 인 더 스트리트>는 마사 앤 더 반델라스의 최대 히트곡이다. 공민권운동이 절정을 향해 급박하게 치닫던 분위기 속에서 상승기류를 탄 이 노래는, 같은 이유 때문에 필라델피아에서 와츠(로스앤젤레스)까지 인종폭동을 확산시킨 원흉이라는 비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본래 <댄싱 인 더 스트리트>에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노래가 모타운에서 발매되었다는 사실부터가 그렇다. 모타운은 강경파들로부터 “백인에게 흑인을 파는 기업”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상업주의의 낙인이 찍히기도 했을 만큼 인권운동의 현실로부터 한발 비켜선 자세를 고수한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노래의 가사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춤을 춘다”는 내용을 시종일관 변주할 뿐이다.
그럼에도 <댄싱 인 더 스트리트>가 정치적 표명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반델라스의 리더이자 리드 보컬리스트인 마사 리브스의 목소리에 녹아들어 있는 반골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윌리엄 스티븐슨과 함께 이 노래를 만든 원작자 마빈 게이가 지적한 바가 그것이다. 그는 반델라스의 ‘색깔’이 “의식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하면서도 “<댄싱 인 더 스트리트>와 같은 노래에서 그들이 포착해낸 핵심이 내게는 정치적으로 느껴졌다”고 덧붙인 바 있다. 결국, <댄싱 인 더 스트리트>에 정치색이 있었다면 그것은 비평가 데이브 마시의 평가처럼 “인권운동의 일환으로서 열정을 가지고 거리에 나선 수많은 미국인들에 대한 언급”이라는 측면에서 “제작 시점의 상황과 결코 완전히 유리될 수 없다”는 태생적 여건에서 비롯했다고 할 것이다. 마사 리브스의 활력 넘치는 보컬이 화학적 상승작용의 촉매로 기능하며 <댄싱 인 더 스트리트>를 저항가로 느끼도록 만들었다는 말이다.
모타운에 가수로 지원했으나 비서로 채용되었던 마사 리브스는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마침내 자신의 꿈을 관철시켰던 사람이다. 베리 고디의 ‘빅 브러더’ 식 통제에 반발한 최초의 모타운 소속 가수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부당함에 맞서는 당당함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노래는 그런 그의 열망을 형상화한 도구였다. 이 여름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시민들의 몸짓이 말하는 내밀한 언어를 <댄싱 인 더 스트리트>에서 가늠할 수 있다.
제임스 브라운의 <파파스 갓 어 브랜드 뉴 백>(1965년) ~ 흑인음악 새 좌표…미국의 검은 왕
1960년대 솔 음악의 전성기를 이끈 원동력은 주로 세 레코드회사로부터 나왔다. 어리사 프랭클린을 배출한 어틀랜틱, 수프림스의 모타운, 그리고 오티스 레딩의 스택스가 그들이다. 서로 경쟁하고 때로 공조하며 세 레이블은 각각의 고유한 사운드를 발전시켰고, 인권운동의 열기와 함께 흑인음악의 인기가 고조되면서 대중적 성공을 누렸다. 믿기 힘든 것은, 달콤한 성공의 열매가 정작 그 주인공인 흑인 뮤지션들에게는 가져다준 게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여전히 백인 중심의 시스템이 음악산업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브라운은 그런 현실과 맞선 끝에 독립을 쟁취한 최초의 흑인 뮤지션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평가 넬슨 조지의 말로 “혼자만의 힘으로 흑인음악이 제공할 수 있는 예술적 자유와 경제적 자립의 가능성을 증명해낸” 인물이었다.
제임스 브라운은 ‘솔의 대부’, ‘펑크의 제왕’, ‘디스코와 힙합의 가능성을 제시한 혁신가’ 등 다양한 애칭으로 일컬어진다. 그의 거대한 음악적 영향력의 범위를 짐작게 하는 수사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딱 떨어지게 브라운을 소개하는 별명은 ‘연예산업계에서 가장 정력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고 할 것이다. 밴드와 함께 1년에 300회가 넘는 공연을 치러내곤 했던 육체적 에너지는 말할 것도 없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자신을 채찍질했던 정신적 강인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백인 레코드사와 매니저의 통제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관리했던 자존적 태도, 흑인의 인권과 빈자의 소외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던 사회참여적 의식을 빼고 제임스 브라운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흑인 소유 기업으로 드물게 높은 성과를 올린 모타운이 백인 청중이 떠날 것을 우려해 현실을 회피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래서 넬슨 조지는 “모타운은 아마 젊은 미국의 사운드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제임스 브라운은 분명 검은 미국의 왕이었다”고 평했던 것이다.
<파파스 갓 어 브랜드 뉴 백>은 제임스 브라운의 전성기를 열었다는 개인사적 의미와 최초의 펑크 히트곡으로 꼽히는 음악사적 가치를 동시에 얻은 노래다. 여기서 브라운은 두툼한 관악부와 찰랑거리는 일렉트릭 기타를 바탕으로 강력한 리듬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독자적인 사운드를 세웠다. 결과적으로 솔을 재확립하고, 펑크를 발명하는 동시에, 디스코와 힙합에 영감을 준 스타일이었다.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가 “팝 음악의 조합에서 리듬을 최상위의 것으로 밀어 올린 비전과 야심을 가졌던 최초의 뮤지션”이며 “가장 위대한 로큰롤러”라는 찬사를 제임스 브라운에게 바친 근거도 마찬가지다.
제임스 브라운은 흑인음악의 역사를 전과 후로 나누는 일종의 기준이다. 재즈, 블루스, 리듬 앤 블루스의 유산이 그를 거쳐 솔, 펑크, 디스코로 진화했다. 트렌드를 좇은 게 아니라 그것을 낳은 결과였다. 그러고 보면 <파파스 갓 어 브랜드 뉴 백>은 그 모든 변화의 시작을 알린 기준점이었던 셈이다.
밥 딜런의 <라이크 어 롤링 스톤>(1965년) ~ 순혈포크에서 포크록으로
예술가의 변신은 무죄다. 언제나 관건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각적인 충격과 반발을 불렀던 예술적 모험이 때로, 궁극적인 찬사와 호평을 끌어낸 역사적 선택으로 재평가받는 경우도 생긴다. 안온한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대중과 새로운 가치창출을 꿈꾸는 예술가의 눈높이가 어긋날 때, 해결책은 오직 시간뿐이다. 1913년 파리 샹젤리제 극장 초연에서 성난 관객들의 폭동으로 난장판이 되었던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오늘날 현대음악의 위대한 전환점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그 한 예다. 밥 딜런이 일렉트릭 기타를 잡았을 때, 세상이 보인 반응도 그랬다.
1965년 7월25일,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은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록 밴드를 대동한 그에게 관객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포크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록의 상업성과 타협했다는 것이다. 이날 밥 딜런은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을 비롯하여 세 곡의 록 넘버를 연주했을 뿐이지만, 그사이 지난 2년 동안 같은 무대에 선 그를 민중의 영웅으로 환대했던 관객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밥 딜런의 변신을 옹호했던 비평가 폴 넬슨은 그것이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슬픈 갈림길이었다”고 썼다. 이념이 예술의 뒷덜미를 붙잡았던 것이다. 밥 딜런은 변절자 유다였다.
그러나 시간은 밥 딜런의 편이었다. 페스티벌을 며칠 앞두고 싱글로 발매되었던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은 그로부터 몇 주 후 빌보드 차트 2위, 영국 차트 4위에 올랐다. 딜런의 화려한 경력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절정으로 남은 당시 기록은, 그가 소수 포크 순혈주의자들의 지지를 잃은 대신 다수 음악 애호가들의 열광을 얻었음을 증명한다. 작가 마이크 마쿠시는 그것을 <봄의 제전>에 비견했다. 그러면서도 “스트라빈스키가 원초적인 것을 즐기는 모더니스트 지식인인 반면, 딜런은 모더니스트를 노리갯감으로 여기는 의식적 반지식인에 더 가까웠다”고 덧붙였다. 록은 밥 딜런의 새로운 무기였던 것이다.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은 미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2004년 ‘롤링 스톤’은 로큰롤 탄생 50주년 특집에서 이 곡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로 선정했을 정도다. 포크의 오랜 전통이 포크 록이라는 혁신적 가치로 진화함으로써 록의 음악적 표현 범위를 풍성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평가 마이클 그레이는 “포크의 논리 개연성과 록의 남성성 사이의 심원한 결합을 만들어냈다”고 평했다. 록 음악은 더 이상 청소년 비행의 전유적 배경음악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의 예술적 작업도구였다. 그러한 가치의 전화는 비틀스에서 지미 헨드릭스까지, 동시대의 뮤지션들에게 강렬한 영감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도 거대한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의 말처럼 록을 연주하는 데 자격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변신은 다만 결과물로 말할 뿐이다. 밥 딜런이 누군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다.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롤링 스톤스의 <(아이 캔트 겟 노) 새티스팩션>(1965년) 60년대 풍미한 변혁의 역설
로큰롤이 청소년들의 열광 속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것이 반백 년 세월을 넘겨 생존해나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청소년 비행이 일으킨 반항적인 악취미의 일시적 유행에 불과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롤링 스톤스가 블루스 리바이벌 붐을 타고 데뷔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로큰롤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 이들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시사지 <라이프>가 ‘록 음악의 탄생’을 “지난 천 년의 100대 사건”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을 만큼 인식이 바뀐 세상에서, 롤링 스톤스는 “구르는 돌에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금언을 입증하는 상징적 존재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그 같은 사실은 롤링 스톤스에게 새삼스러운 의미를 갖는다. ‘이유 없는 반항’과 거침없는 일탈을 록 음악의 이미지로 영원히 고정시킨 사람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위시한 초창기 스타들이 단지 로큰롤을 연주했다는 이유만으로 반사회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던 데 반해, 롤링 스톤스는 애초부터 반사회적인 태도로 로큰롤을 연주하기로 작정한 이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음악지 <멜로디 메이커>는 1964년 3월14일치에 “당신의 누이를 롤링 스톤스와 어울리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롤링 스톤스의 거칠고 불량한 태도가 전략적으로 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비틀스의 네메시스가 되기를 자임했다. 비틀스의 친근하고 붙임성 있는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역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위악적인 태도가 궁극적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도록 만든 동력은 음악적 성취였다. 그리고 <(아이 캔트 겟 노) 새티스팩션>은 이를테면, 그 방점이었다.
<새티스팩션>은 롤링 스톤스를 진정한 스타덤에 올린 노래였다. 그래서 뒷날 믹 재거는 이 곡이 “현재의 롤링 스톤스를 만들었다”며 “그저 그런 밴드 중 하나였던 우리를 거대한 괴물로 변화시켰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음악적 성과는 더욱 두드러졌다.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는 그들이 “<새티스팩션> 이후 모방자라는 혐의로부터 벗어났다”고 평한 바 있다. 블루스를 흉내내던 단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지향점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 핵심에는, 비평가 데이브 마시가 “척 베리의 <조니 비 굿> 이래 로큰롤 역사상 가장 훌륭한 리프”라고 칭한 키스 리처즈의 기념비적인 기타 연주가 있었다.
더불어, <새티스팩션>은 노래 부르기의 다른 방식을 보여준 센세이션이기도 했다. 신랄하고 신경질적인 믹 재거의 창법은 70년대 말의 펑크 록 밴드들을 십 년 이상 앞선 시연이었다. 미국 사회의 상업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직설적으로 묘사한 노랫말도 그렇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본가로 등극하는 ‘록 스타의 패러독스’는 그로부터 정형화하기 시작했다. 변혁의 60년대 한복판에서 롤링 스톤스는 자기모순의 변증법을 통해 혁명조차 사고파는 시대가 도래하리라고 예언했던 것이다. 그런 시대에는 누구도 “만족할 수 없을” 테니까.
비틀스의 <예스터데이>(1965년) ~ 세계인 사로잡은 ‘친숙함의 기적’
당연한 말이겠지만, 표절은 창작자의 태도에서 결정된다. 악의가 없는 무의식적 표절의 경우라고 다르지 않다. 머릿속에 떠오른 영감들을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리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다. 때문에 그 아이디어들 가운데 완전히 나만의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회의하는 일은 창작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레너드 번스타인은 작곡가로서 새로운 노래를 만들 때마다 지휘자로서 기억에 담아둔 악상을 지우기 위해 동등한 노력을 해야 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폴 맥카트니가 <예스터데이>의 멜로디를 처음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부지불식간에 다른 노래의 선율을 베낀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했다는 것이다. 대중음악사상 가장 유명한 노래가 될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 <스크램블드 에그스>라는 엉뚱한 가제의 초안으로 1년 반 동안이나 데모 테이프 속에서 삭아야 했던 이유다.
<예스터데이>는 기네스북이 공인한, “세상에서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노래”다. 무려 3천 개 이상의 다른 버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발표되자마자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랐음은 물론이고 이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노래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것은 돌이켜보면, 흥미로운 방식으로 폴 맥카트니가 느꼈던 불안감을 방증한다. <예스터데이>의 멜로디가 원작자로서도 무의식적인 표절을 의심할만큼 경이적인 친숙함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침내 폴 맥카트니가 <예스터데이>를 “내가 만든 가장 완벽한 노래”라고 언급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찬사가 쏟아졌다. 기사작위까지 받은 영국의 작곡가 겸 지휘자 피터 맥스웰 데이비스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예스터데이>를 꼽았고, 음악학자 윌프레드 멜러스는 그것을 “작은 기적”이라고 불렀다.
<예스터데이>의 단순한 구조와 단출한 연주는 ‘적은 것이 많은 것’이라는 명제의 화신과도 같다. 불과 2분 남짓한 연주시간에 담긴 풍성한 의미는 이후 40년 넘는 세월 동안 끊임없는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발라드의 역사는 <예스터데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음악 외적인 의미도 크다. 무엇보다 비틀스로서는 처음으로 개별 멤버의 솔로 작품을 앨범에 수록한 경우였다. <예스터데이>는 전적으로 폴 맥카트니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작사와 작곡, 보컬과 기타 연주까지 혼자 담당했다. 그의 유일한 조력자는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었다. 이 노래의 유명한 현악 앙상블은 마틴이 제안하고 작업한 결과물이었다. 이는 이후 조지 마틴과 비틀스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이정표이기도 했다. 비틀스 후기의 작품들이 담고 있는 음악적 실험은 스튜디오의 마법사로서 마틴의 기여가 있었기에 완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노래라는 것은 없다. 다만 거기에 근접하려는 시도가 있을 뿐이다. <예스터데이>는 대중음악이 그런 ‘불가능한 임무’의 달성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지점이었다.
후의 <마이 제너레이션> ~ 로큰롤과 청년정신의 ‘핵 융합’
“서른 살이 넘은 사람은 아무도 믿지 말라.” 과격하고 파격적인 행동주의 좌파 정당 ‘유스 인터내셔널 파티’(흔히 ‘이피’라 칭한다)의 공동 설립자 제리 루빈이 한 말이다. 동료들과 함께 1968년 시카고에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직후 했다는 그의 발언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물론이고 사회문화적인 면에서 더욱 주목할 명제였다. 요컨대 그것은 60년대를 관통한 청년문화의 이념적 등뼈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청춘의 이상주의는 기성세대와 불화하고 단절하는 지점에서 싹텄던 것이다. 후의 노래 <마이 제너레이션>에 당대 젊은이들이 열광했던 근원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나의 세대’는 부모의 그것과 다르리라는, 달라야 한다는 본능의 표출이었다.
<마이 제너레이션>은 흔히 ‘모드(Mod)의 송가’로 불린다. 60년대의 영국 청년문화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양상이었던 모드는 모더니스트의 약칭으로, 동시대 청소년들의 생활규범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부분의 문화학자가 동의하듯, 모드는 광범위한 규모로 발현한 최초의 하위문화 현상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탈리아산 스쿠터, 프랑스풍 헤어스타일, 그리고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음악으로 대표되는 모드족의 취향은 계급문화가 잔존하는 영국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한 반항적 태도였던 따름이다. 멤버들 스스로가 그 일원이었던 후는 모드의 상징적 존재였고, <마이 제너레이션>은 그들을 동세대의 대변인으로 발돋움시킨 선언문이었다.
<마이 제너레이션>은 무엇보다, 질풍노도의 청춘을 구체화한 노랫말로 대중음악의 역사에 굵은 획을 그었다. “난 늙기 전에 죽고 싶다.” 이 노래의 핵심 구절을 통해 후는 로큰롤과 자이트가이스트(시대정신)의 접점을 음악적 구호로 요약해냈던 것이다. 주목할 것은, 거칠고 공격적이며 원초적인 이 노래의 사운드가 세련된 리듬 앤 블루스를 선호한 모드족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후가 발표한 노래들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 제너레이션>이 엄청난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그 메시지의 폭발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펑크 록과 헤비 메탈의 전형을 보여준 파괴적인 사운드는 자체로도 유의미하다. 그래서 비평가 그렉 쇼는 “그럼에도 메시지는 신경 쓰지 말라. 그냥 레코드를 들어보라”고 쓰기도 했다. 실제로, 줄을 끊을 듯 긁어댄 피트 타운센드의 기타와 세트를 부술 듯 두들겨댄 키스 문의 드럼은 전례가 없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의도적으로 가사를 더듬은 로저 달트리의 괴상한 보컬도 그렇다. 사운드의 파격은 메시지에 조응하는 피드백이었던 셈이다.
누구나 한 번은 청년기를 거친다. 기성세대가 “청년을 이해한다”고 오해하는 근거다. “젊은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해봐서 안다”며 젊은이들의 발언을 억압하는 지도자의 심리기저도 마찬가지일 터다. 후의 <마이 제너레이션>이 ‘우리 세대’에도 젊은이들을 소구하는 강력한 언명으로 남아 있는, 그리고 다음 세대에도 남아 있어야 할 이유의 당위다.
비치 보이스의 <굿 바이브레이션스>(1966년) ~ 스튜디오 사운드의 새 천지창조
1966년 10월 비치 보이스는 전대미문의 제작비를 쏟아 부은 싱글 <굿 바이브레이션스>를 발표했다. 6개월 동안 캘리포니아 인근 5개의 스튜디오를 전전한 끝에 완성시킨 노래였다. 그것을 위해 비치 보이스는 6만달러 안팎을 지출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야구 선수 연봉이 사상 처음 10만달러를 넘어선 것이 같은 해였다. 엘에이 다저스의 전설적 투수 샌디 코펙스가 12만달러짜리 계약에 성공하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사실을 고려할 때, <굿 바이브레이션스>의 제작비는 그야말로 “정신 나간 액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굿 바이브레이션스>는 역사상 가장 값비싼 레코드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하지만 보상 또한 거대했다. 미국과 영국 차트를 석권하며 밀리언셀링을 기록했다. 대중적 성공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방법론의 신기원으로 평단의 극찬까지 획득했다. 실제로, 발표 즈음 <굿 바이브레이션스>는 비교 대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정교한 작품이었다. 20명이 넘는 세션 뮤지션이 참여한 90시간 분량의 녹음을 3분35초의 연주시간으로 압축 편집해낸 이 노래는 당대 스튜디오 기술의 집대성이기도 했다. 악기별 분리 녹음, 무수한 반복 세션과 오버더빙, 기묘한 음향장치인 ‘테레민’의 사용, ‘컷 앤 페이스트’(자르고 붙이기)와 다단계 믹스의 편집방식까지,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방식들을 광범위하게 적용한 결과였다.
그 미로 같은 작업 공정의 추동엔진은 밴드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의 집요함이었다. 필 스펙터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그는 비치 보이스를 스타로 만들어준 서프 사운드를 용도폐기하고, 스튜디오의 사운드 실험에 몰두했다. 미국 팝의 가장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앨범 <펫 사운즈>(1966)의 제작에서부터 본격화한 윌슨의 실험은 극단적인 한계 지점에 이르러 <굿 바이브레이션스>의 우주를 창조해냈던 것이다.
필 스펙터가 자신의 작품을 “청소년을 위한 작은 심포니”라고 칭했던 것처럼, 브라이언 윌슨은 이 노래를 “주머니 속의 오케스트라”라고 불렀다. 그래서 비평가 토비 크레스웰은 “스펙터가 스튜디오를 악기처럼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면, 윌슨은 <굿 바이브레이션스>를 통해 그것을 진일보시킨 주인공이었다”고 평했다. 데이브 마시는 그들 사이의 차이점이 “록을 감성의 음악에서 기술의 음악으로 바꿔놓은” 전환점이라고 분석했다.
<굿 바이브레이션>의 성공에 고무된 브라이언 윌슨은 역사상 최고의 걸작을 만들겠다는 야심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지나친 집착이 발목을 잡았다. 지지부진하게 앨범 <스마일>의 제작을 진행해가던 윌슨은 이듬해 발표된 비틀스의 앨범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를 들은 뒤 급기야 작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들이 먼저 거기에 도달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중음악사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서전트 페퍼스…>가 애초 브라이언 윌슨과 그의 작품에서 궁극적인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굿 바이브레이션스>가 남긴 또 다른 유산인 셈이다.
지미 헨드릭스의 <퍼플 헤이즈> (1967년) ~ 기타 연주·음향의 ‘일렉트릭 혁명’
기타는 오늘날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은 악기로 꼽힌다. 하지만 전체 음악사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위상은 극히 최근에야 정립된 것이라고 해야 옳다. “작은 오케스트라”라는 베토벤의 찬사처럼 뛰어난 기능성에도 불구하고, 기타는 작은 음량으로 쓰임새가 제한된 실용성 때문에 오랜 세월 변방의 악기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런 인식을 극적으로 반전시킨 계기는 전기 장치들의 발명이었다. 마이크와 앰프를 통해 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게 되면서 기타의 잠재력이 음악의 혁신과 맞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렉트릭 기타는 대중음악의 핵심적 악기로 자리잡았고, 그것의 음악적 가능성은 록 음악을 통해 만개했다.
머디 워터스를 위시한 시카고 블루스 연주자들로부터 시작된 일렉트릭 기타의 르네상스는 1960년대 영국의 젊은 뮤지션들을 통해 정점에 다다랐다. 미국의 흑인 음악을 모방하던 그들은 독자적인 블루스 록의 기틀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렉트릭 기타의 연주 기법과 사운드 프로덕션에 혁명적 발전을 가져왔다. 에릭 클랩튼, 제프 벡, 그리고 훗날 ‘레드 제플린’을 결성하는 지미 페이지 등이 서로 자극하고 경쟁하는 속에서 획득한 성취였다. 미국인 지미 헨드릭스가 영국에서 먼저 스타덤에 올랐던 배경도 거기 있다.
지미 헨드릭스(1942~1970)는 록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에게 바쳐진 무수한 헌사들이 증거다. 시사주간 <타임>은 헨드릭스가 “일렉트릭 기타의 음향적 가능성을 재정립하고 확장시켰다”고 썼고, 음악방송 ‘브이에이치1’은 그의 연주가 “일렉트릭 기타의 마력에 대한,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하고 영향력 있는 시연이었다”고 했다. 동료 연주자들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에릭 클랩튼은 그를 질투하면서도 존경했고, 그룹 ‘후’의 피트 타운센드는 “질투하지 않았다. 근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얘기한 바 있다. 27살에 요절할 때까지 (리틀 리처드 등의 반주자로 전전했던 기간을 빼고는) 불과 3년 동안 활동했을 뿐인 인물에 대한 평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퍼플 헤이즈>는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 혁명을 알린 일성이었다. 그것은 블루스에 바탕하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노래였고, 당대의 연주 기법과 음향 실험을 전대미문의 음악 형식으로 일체화시킨 연주였다. 데뷔작 <헤이 조>가 다른 가수의 커버곡이었던 반면, 두 번째 싱글이던 <퍼플 헤이즈>는 헨드릭스의 창작곡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달리한다. 그래서 영국의 음악지 <큐>는 2005년 이 노래를 “가장 위대한 기타 연주”로 선정했고, <롤링 스톤>은 올 6월 비슷한 기사에서 척 베리의 <조니 비 굿>에 이은 두 번째 순위에 이 곡을 올려놓았다.
<퍼플 헤이즈>의 혁신은 대중음악의 새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1967년 3월 영국에서 먼저 발표되어 하드 록의 탄생 분위기를 조성했고, 3개월 뒤 미국에서 열린 ‘몬터레이 페스티벌’을 통해서는 사이키델릭 반문화의 싹을 틔웠던 것이다. 일렉트릭 기타와 록 음악의 역사를 바꾼 기점이었다.
도어스의 <라이트 마이 파이어>(1967년) ~ 사이키델릭으로 ‘인식의 문’ 활짝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1954년 펴낸 저서 <인식의 문>에서,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약물이 인간의 의식세계를 확장시켜 “충만한 정신”(마인드 앳 라지)에 이르도록 도움을 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헉슬리는 “인식의 문들이 정화되면 만물이 본래의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라고 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자유롭게 ‘인식의 문’(도어스 오브 퍼셉션)을 넘나든 블레이크처럼, 약물의 도움을 통해 보통 사람들도 그와 같은 정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수사부터가 ‘환각적’인 사이키델릭의 시대에 어느 밴드가 스스로를 ‘인식의 문’으로 자청한들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사이키델릭은 60년대 후반 미국 사회의 표정이었다. 반전과 인권운동이 상징하는 현실비판적 태도, 비트 문학과 실존주의와 동양 철학이 공급한 이론적 배경, 자유 연애와 자연 회귀의 삶의 방식 등이 약물을 매개로 뒤엉켜 파생한 복잡한 성격의 하위문화였다. 온갖 진보적인 인식의 실험장이었던 60년대의 산물인 것이다. ‘사이키델릭 록’ 혹은 ‘애시드 록’은 당대의 사운드트랙이었다.
헉슬리의 <인식의 문>으로부터 이름을 차용한 밴드 도어스는 사이키델릭의 60년대가 낳은 스타였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사이키델릭했다. 비트 시인과 교유했던 짐 모리슨과 대학의 초월 명상 수업에서 만난 다른 세 멤버 로비 크리거, 레이 맨저렉, 존 덴스모어의 연결 고리부터가 그랬다. 팝 음악의 명료한 선율과 어둡고 관능적인 태도 사이에 위치한 도어스의 음악 또한 사이키델릭의 극단적 절충주의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도어스는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애시베리를 거점으로 했던 동시대의 주류와는 거리가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클럽가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에 이미 일탈적인 행동과 파괴적인 에너지로 여타의 ‘꽃의 자식들’(플라워 칠드런)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시킨 상태였다. 말하자면 도어스는 절충주의의 또다른 절충이었던 셈이다. <라이트 마이 파이어>를 탄생시킨 특질이었다.
로비 크리거의 곡과 짐 모리슨의 글이 만난 <라이트 마이 파이어>는 마치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던 존재들간의 우연한 충돌이 점화한 화염 같은 것이었다. 경쾌하고 선명한 오르간과 대화를 시도하는 듯한 인상의 기타가 펼치는 최면적인 연주 위로, 짐 모리슨의 바리톤이 노골적인 성적 도발을 외친다. 그것은 이질적인 조합이었던 만큼이나 낯선 인상이었다. 그럼에도 이 노래가 빌보드 차트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대중문화잡지 <롤링 스톤>이 “사춘기 소녀들을 사로잡은 모든 반우상(안티-아이콘)의 원조”라고 평한 짐 모리슨의 존재감 덕이었다.
짐 모리슨은 스스로를 “에로틱한 정치가”라고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성공작이었던 <라이트 마이 파이어>는 모리슨과 그의 밴드가 대중 정치의 소통을 시작한 지점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60년대 후반의 사이키델릭 하위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인식의 문’으로 남았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화이트 래빗>(1967년) ~ 사이키델릭 록의 대중화 전도사
“한 알은 네 키를 크게 만들어주고/ 또 한 알은 작게 만들어줄 거야.”
그룹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화이트 래빗>은 동화 속의 마법 같은 구절을 읊조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앨리스에게 물어봐. 그녀는 알고 있을 테니까.”
루이스 캐럴의 판타지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빌려 마(법의 알)약의 효과를 노래함으로써,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1967년 사이키델릭의 성도 샌프란시스코에 모여든 젊은이들을 ‘사랑의 여름’(서머 오브 러브)으로 인도했다. 대중음악을 전대미문의 ‘이상한 나라’로 이끈 ‘하얀 토끼의 발자국’이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1960년대 사이키델릭 문화의 선명한 방점이다. 그들은 사이키델릭 밴드로서는 처음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했고, 맨 먼저 텔레비전에 출연했으며, 최초로 유럽에 진출했다. 그들의 성공을 통해 사이키델릭 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전역으로, 다시 전세계로 번져나갔던 것이다. <화이트 래빗>과 그 곡이 수록된 앨범 <서리얼리스틱 필로>가 바로 기폭제였다. 그래서 비평가 크리스 스미스는 “<서리얼리스틱 필로>가 발표되었을 때, 그것은 마치 샌프란시스코의 전체 언더그라운드 음악계가 세상을 향해 메가폰으로 외친 함성과 같았다”고 평했다. “그것은 ‘사랑의 여름’에 벌어진 첫 번째 대형사건이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이 ‘소퍼모어 앨범’(2집)인 <서리얼리스틱 필로>를 통해 사이키델릭 록의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새로이 합류한 보컬리스트 그레이스 슬릭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재니스 조플린과 함께 ‘최초의 여성 록 보컬리스트’로 첫손 꼽히는 그는 인형의 얼굴과 마녀의 음성과 장부의 배포를 한몸에 내재한 기이한 피조물이었다. 비평가 아리엘 스워틀리가 그를 가리켜 “그 이름마저도 완벽했다. 우아한 위선자: 물렁거리는 금속, 고전적인 플라스틱”이라고 칭한 것은 그런 연유다. 준 프로 밴드 ‘그레이트 소사이어티’에서 활동하던 그레이스 슬릭은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승무원으로 탑승하는 동시에 강력한 엔진까지 탑재시켰다.
이전 밴드에서 자신이 만들고 불렀던 노래 <화이트 래빗>을 가져왔던 것이다. 빌보드 싱글 차트 톱10에 오른 이 노래야말로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고공비행을 추진시킨 폭발적인 원동력이었다. 중동 색채의 선율이 <볼레로> 양식의 구조를 따라 점진 상승하는 독특한 스타일의 <화이트 래빗>은 그 자체로 약물의 효과를 음률화한 도상과 같았다. 거기에 그레이스 슬릭의 주술적인 보컬과 불길한 분위기의 ‘스네어 드럼 비트’(합주의 중심을 잡아주는 작고 납작한 드럼의 비트)를 덧씌움으로써 이 노래는 청자를 ‘충만한 정신’(마인드 앳 라지)의 영역으로 밀어 넣었다.
<화이트 래빗>이 무조건적으로 약물을 찬양했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1960년대 시대 상황이 요구하던, 각성에 대한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하얀 토끼 문신의 여자를 따라간 주인공이 파란 약과 빨간 약 사이에서 운명의 갈림길에 직면하는, 영화 <매트릭스>의 초반 플롯을 보라. <화이트 래빗>의 메시지를 제대로 포착하여 알레고리로 삼은, 창조적 변용의 좋은 예다.
비틀스의 <어 데이 인 더 라이프>(1967년) 기묘한 구성·반전…‘팝 음악의 역사적 이벤트’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해’를 꼽는다면 아마도 1967년이 될 것이다. 도어스, 지미 헨드릭스, 핑크 플로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데뷔작을 선보였고, 제퍼슨 에어플레인, 아레사 프랭클린, 러브, 크림이 대표작을 발표했던 그해 대중음악은 양과 질에서, 깊이와 너비에서 공히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비틀스의 앨범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는 화룡점정이었다.
<서전트 페퍼스…>는 흔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앨범’으로 일컬어진다. 최초의 콘셉트 앨범이며, 가장 유명한 커버 디자인으로, 복잡한 스튜디오 테크놀로지의 이정표로 꼽히는 이 앨범을 통해 비틀스는 대중음악을 예술의 경지로 격상시켰다는 찬사를 얻었다. 물론 발표 당시에는 논란도 있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리처드 골드스타인은 <서전트 페퍼스…>가 “사기극”이라고 비판함으로써 모두가 이 앨범을 좋아한 것은 아님을 선언한 동시에, 엄청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주목할 것은, 그런 골드스타인도 “중요한 하나의 예외”로 언급한 노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 데이 인 더 라이프’였다.
‘어 데이…’는 앨범 <서전트 페퍼스…>의 대미를 장식하는 곡이다. 5분33초의 연주 시간 동안 전례 없이 기묘한 구성과 드라마틱한 반전을 들려주는 이 노래의 경이로움은 작곡 단계에서 이미 운명 지워진 것이었다. 존 레넌이 만든 뼈대에 폴 매카트니가 쓴 짧은 소절을 물리적으로 삽입함으로써 만들어진, 완전히 다른 두 노래의 결합으로 조성된 긴장감부터가 그렇다. 게다가 노래 중간과 말미 부분에 자리한 오케스트라의 고조되는 불협화음은 긴장감을 고조시키다가, 혼돈의 정점에서 급작스럽게 끝나버리기를 반복하며 생경함을 가중한다. 비평가 앨릭스 로스는 ‘어 데이…’가 리게티, 슈토크하우젠 등이 주축을 이룬 현대음악의 산실이었던 독일의 ‘다름슈타트 여름 강좌’에서도 청취와 논의의 대상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이키델릭풍의 도입부에서 ‘뮈지크 콩크레트’(구체음악)의 결말부로 이어지는 형식 구조를 통해 이 노래가 당대의 모든 음악적 시류들을 연계한 통로였음을 방증한 것이다. 리처드 골드스타인조차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며, 팝 음악의 역사적 이벤트”라고 칭할 도리밖에 없었던, 이 노래의 업적이다.
작가 앤드루 오헤이건은 “모든 예술은 완성된 시점부터 동시대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어떤 것은 훌륭하게 나이 먹는 반면 어떤 것은 볼품없게 늙어 간다. 지오토(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와 거장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비틀스가 전자라면,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툴루즈) 로트레크, 롤링 스톤스는 후자”라고 쓴 바 있다. 2007년 세계 유수의 언론 매체들이 앞다퉈 <서전트 페퍼스…> 앨범 발매 30돌을 기념하는 특집 기사들을 쏟아냈던 이유도 거기 있다. 실험성과 보편성, 음악성과 사회성을 아우르는 문화적 상징으로서 <서전트 페퍼스…>의 의미와 위상이 현재에도 유의미함을 되새긴 일이었다. 그 핵심에 ‘어 데이…’가 있었다. 찬사만으로도 책 한 권을 쓸 분량이었다.
어리사 프랭클린의 <리스펙트>(1967년) ~ 흑인인권 요구한 ‘정치적 솔 음악’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약간의 ‘존중’뿐이에요.” <리스펙트>의 도입부는 말한다. 하지만 애원이나 간청의 목소리가 아니다. 단호할 뿐만 아니라 당당하기까지 한 어조다. 스스로가 사회적 약자인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어리사 프랭클린은 존중받을 권리에 대해 소리 높여 노래한다. 인권 운동의 약진에 힘입은 사회적, 정치적 각성이 1960년대 후반 솔 음악의 지형도를 바꿔놓은 순간이다.
<리스펙트>는 문자 그대로, ‘존중’에 관한 노래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주장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요구하는 음악적 권리장전이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듯, 인종 차별의 이데올로기는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 본능의 발현이 아니라 인간 탐욕의 발명품이었다는 말이다. 미국의 흑인들을 “역사상 가장 잔인한 형태였던 노예제”(하워드 진)로 몰아넣은 이론적 배경에도 인종 우열의 가공된 신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존중의 결여였다. 60년대 미국의 인권 운동은 결국, 당연한 존엄권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셈이다. 그 속에서 솔 음악을 통한 흑인들의 발언은 점차 강력해지기 시작했으며, 그 줄기는 어리사 프랭클린의 <리스펙트>에서 분수령을 이뤘다.
본래 <리스펙트>는 ‘서던 솔’의 대가 오티스 레딩이 1965년 발표한 노래다. 60년대 전반을 주도한 모타운 중심의 ‘노던 솔’이 팝의 방법론으로 ‘표백한 흑인음악’이었던 데 비해, 스택스 레이블을 거점으로 한 서던 솔은 가스펠의 자취가 강한 ‘좀더 검은 음악’이었다. 레딩을 통해 60년대 중반 흑인음악의 주류로 진입한 서던 솔은 어리사 프랭클린을 거쳐 백인 관객들에까지 침투하는데, 그들 사이의 연결 고리가 바로 <리스펙트>였던 것이다.
어리사 프랭클린은 “역사상 가장 노래를 잘하는 가수”로 흔히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오리지널을 능가하는 리메이크는 없다는 속설에도 불구하고, <리스펙트>가 레딩이 아닌 프랭클린의 버전으로 더욱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압도적인 가창 능력에 힘입은 바였다. 레딩조차 “그 아가씨가 내 노래를 앗아가 버렸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2004년 음악지 <롤링 스톤>이 “역사상 가장 훌륭한 노래 500선”의 다섯 번째 순위에 <리스펙트>를 올려놓으며 어리사 프랭클린의 버전을 지목한 이유도 마찬가지다.(참고로, 여성 뮤지션의 노래로서 가장 높은 순위이기도 했다.)
열네 살에 데뷔한 재능과 열 장의 앨범을 발표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어리사 프랭클린은 <리스펙트>를 통해 순식간에 당대 가장 중요한 뮤지션으로 대두했다. 비평가 브라이언 워드는 이 노래가 “정치적인 솔 음악의 확산을 유도한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했고, 언론인 필 갈랜드는 심지어 “새로운 미국 국가”라고 칭송하기까지 했다. <리스펙트>에 담긴 인간 존중의 메시지가 인종 차별 사회에 미친 파장과 영향을 평가한 찬사들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당선자를 맞이한 이 즈음이기에 이 노래의 의미는 더욱 새삼스레 가슴에 와 닿는다.
오티스 레딩의 <더 독 오브 더 베이>(1968) 직접 저항보다 더 통절한 ‘고뇌의 노래’
제시카 랭과 할리 베리가 눈물의 호연을 펼친 영화 <루징 아이제이어>(1995)는 백인 가정에 입양된 흑인 아기의 양육 문제를 매개로 미국 사회의 인종적 편견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10살 남짓한 백인 누이 한나가 피부색이 다른 의붓동생 아이제이어에게 묻는다. “내 손과 네 손이 어떻게 다르지?” 동생이 답한다. “내 손이 좀 작네.”
그 짧은 대화를 통해서 영화는 색깔에 먼저 반응했던 관객의 가슴을 내려앉게 만든다. 인종차별이란 선천적으로 발현되는 본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편견이라는 사실을, 때묻지 않은 동심의 눈으로 투영한 것이다. 세속에 물든 어른들의 ‘스코토마’(편견에 눈멀어 자명한 사실을 보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에 대한 폭로다.
인종적 스코토마는 흑인 가수에 대한 백인 관객의 시각을 규정한 요인이기도 했다. 로큰롤에 대한 억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던 그것은 시간을 거치며 완화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치유되지는 않았다. 요컨대, ‘말초적인 엔터테이너로서의 흑인성’의 고착화다. 벌거벗은 감정을 드러내는 동물적 본능은 흑인만의 특질이라는 편견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흑인 가수들을 통해 더욱 견고해졌다. 백인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흑인 가수들의 생존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뮤지션 조니 오티스의 다음과 같은 냉소가 증언하는 바도 그것이다.
“블루스 혹은 블루스적인 것을 연주하면 그들(백인 관객)을 놓쳤다. 하지만 아주 활기찬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하면 그들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리듬 앤 블루스를 ‘겉핥기’로 연주하면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었다.” 비평가 브라이언 워드는, 그 결과로 “흰둥이에게 몸 팔기”가 흑인 음악의 오랜 전통처럼 비쳐졌다고 썼다. 오티스 레딩 또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솔 보컬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오티스 레딩은 60년대 중후반 흑인 가수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원초적 에너지와 폭발하는 감성을 동시에 갖춘 그는 백인 관객이 원하는 흑인 쇼맨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브라이언 워드는 그런 관점에서 “오티스 레딩이 1967년 사망 당시 백인 관객들로부터 가장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는 사실은 괄목할 일”이라고 평했다. 죽음마저 쇼맨십의 일부로 받아들인 백인들의 왜곡된 시각을 꼬집은 말이다. 레딩의 유작 <(시팅 온) 더 독 오브 더 베이>가 더욱 서글프게 들리는 이유다.
<더 독 오브 더 베이>는 무엇보다, 고뇌하는 인간으로서 오티스 레딩을 ‘마침내’ 드러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흑인에게는 “동틀 무렵의 제방에 앉아” 삶을 반추하는 일조차 사치스럽다고 간주하던 시대의 그늘이, 레딩의 절제(함으로서 더욱 큰 울림이)된 음정 사이에 스며 있다. 솔 음악의 아이콘이었던 그의 번민은 당대 모든 흑인 가수들의 딜레마를 대변한다. <더 독 오브 더 베이>의 호소가 직접적인 저항의 노래보다 더욱 통절한 이유다. 하지만 그것은 피부색에 관한 한 색맹이 되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은현 메시지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이 인종에 우선한다는 자명한 진리가 쓰여 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헤로인>(1967) 펑크 록 낳은 현실주의적 음악 실험
“누구나 15분 동안 세계적 유명인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 인물답게,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주변은 인기와 명성을 꿈꾸는 이들로 넘쳐났다. 워홀은 그들을 ‘슈퍼스타’라고 부르며 자신의 ‘공장’(팩토리)에서 함께 작업했다. 그로부터 워홀은 장미셸 바스키아나 줄리언 슈너벨처럼 반짝이는 재능의 원석들을 세공해냈는가 하면, 에디 세즈윅이나 발레리 솔라나스처럼 비참한 운명의 노예들을 생산하기도 했다. 더불어 그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같은 이례적인 산물을 세상에 선보이기도 했다. 슈퍼스타가 되기를 거부한 슈퍼스타였던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시대성을 탈피한 시대성으로 세상에 홀로 선 독보적 존재였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960년대 후반을 휩쓴 문화적 열쇳말은 사이키델릭이었고, 67년은 그 열풍이 절정에 이른 시점이었다. 비틀스의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를 필두로, 도어스와 지미 헨드릭스의 데뷔작,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서리얼리스틱 필로우’와 러브의 ‘포에버 체인지스’ 등 걸작들이 대중문화의 표정을 결정하던 당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모든 기존성과 단절하는 방식으로 로큰롤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거리의 시인을 자임한 싱어송라이터 루 리드와 고전 음악을 전공하고 현대 음악의 세례를 받은 ‘레너드 번스타인 장학생’ 존 케일을 축으로 하는 멤버 구성부터가 미증유였다. 거기에 앤디 워홀의 재정적 도움과 창작적 간섭이 얽히면서 저 유명한 노란 바나나 표지의 데뷔 앨범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 니코>의 특이점이 완성되었다. 요컨대, ‘헤로인’은 앨범의 그 같은 성격을 대변하는 집약판이다.
‘헤로인’은 65년 제작한 데모 테이프에도 수록된,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만든 최초의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 7분이 넘는 연주시간 동안 음악과 소음의 경계를 유령처럼 배회하는 이 노래는 로큰롤의 작법 자체를 거부한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끊임없이 신경을 거스르는 케일의 일렉트릭 비올라와 시종일관 무신경한 리드의 읊조림은 모린 터커의 기괴한 드럼 연주를 타고 청자의 귀를 교란한다. 약물을 내세운 타이틀과 그것의 증후를 묘사하는 노랫말은 얼핏 사이키델릭 록의 전형을 따른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점으로 한 사이키델릭 록이 낭만적 이상주의자들의 도피처였던 반면, 뉴욕을 배경으로 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은 지성적 현실주의자들의 전위였던 것이다.
‘헤로인’은 흔한 오해처럼, 약물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약물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60년대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그것의 실재를 현상적으로 바라본 냉정한 시각이었다. 그래서 비평가 클린턴 헤일린은 “‘헤로인’의 비참한 정서는 철저한 사실성에 있다”고 지적했고, 그런 측면에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가장 심중한 의미로서의 포크 음악 창작자”라고 했던 웨인 맥과이어의 견해도 힘을 얻는다.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실제 거리의 삶에 부합하는 눈높이로 포착해냈다는 말이다. “펑크 록과 얼터너티브 록의 원조”로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영향력은 그로부터 비롯한 것이었다.
프로콜 하럼의 <어 화이터 셰이드 오브 페일>(1967년) ‘고전음악+록’의 호황시대를 열다
현대 음악과 대중 음악의 접경에서 독창적 일가를 이룬 거인이자 기인이었던 프랭크 자파는 “예술이란 별게 아닌 것으로부터 뭔가 있는 것을 만들어 팔아먹는 일”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그것은 “돈 되는 사업이야말로 최선의 예술”이라 했던 앤디 워홀과 “예술은 사기”라고 했던 백남준의 견해를 뒤섞어 1960년대란 시공간에 적용한 결과로 얻어낸 명제처럼 보인다. 이상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뒤엉켜 사이키델릭의 이름으로 만들어낸 특이한 해프닝이 주류 문화의 양상을 뒤집는 히트 상품으로 등극했던 시절의 이면이다.
‘프로콜 하럼’이라는 독해 불가의 기묘한 이름을 가진 밴드가 피상적 서술의 노랫말과 유명한 고전 음악의 선율을 짜깁기하여 완성시킨 <어 화이터 셰이드 오브 페일>은 그와 같은 관점에서, 비평가 지안카를로 수재너의 표현처럼 “1967년 ‘사랑의 여름’에 안성맞춤인 레코드”였다. 무명이던 프로콜 하럼을 단숨에 세계적 스타덤에 올려놓은 이 노래는 ‘사랑의 여름’이 그랬던 것처럼 우연한 폭발이었고, 비평가 토비 크레스웰의 말마따나 그 자체로 “해프닝처럼 들렸던” 것이다.
프로콜 하럼은 1967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밴드다. 리듬 앤 블루스 밴드 출신의 보컬리스트 개리 브루커와 가사를 전담하는(그러나 연주는 하지 않는) 멤버 키스 리드가 주축이었다. 두 사람은 밴드의 이름을 정하기도 전에 함께 곡 만들기를 시작했는데, 그 최초의 산출물이 바로 <어 화이터 셰이드…>였다. 시작부터 유별난 곡이었다.
<어 화이터 셰이드…>는 바흐의 칸타타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와 관현악곡 에서 주선율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먼드 오르간의 아련한 사운드와 몽환적 연주로 풀어내어 단번에 청자의 귀를 낚아챘다. 게다가 수수께끼 같은 노랫말로 거기에 신비주의를 도금했다. “해변을 떠나던 베스타의 여사제들”이라거나 “넵튠을 속여 넘긴 인어 아가씨” 따위의 추상적 구절들이 영국 속어로 ‘만취상태’를 가리키는 노래 제목과 어울려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60년대 말 사이키델릭의 아이들이 <어 화이터 셰이드…>에 열광했던 것은 일견 당연하기까지 하다. 이 노래는 영국 차트 정상을 석권한 데 이어 빌보드 차트 5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어 화이터 셰이드…>는 사이키델릭의 노블티(유행상품)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정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고전 음악과의 크로스오버를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음으로써 대중 음악 지형도에 프로그레시브 록 사운드의 발원을 그려 넣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음악전문지 <롤링 스톤>은 이 노래가 “무디 블루스에게 세상을 안겨준 (프로그레시브 록의 한 지류인) 클래시컬 록의 호황 시대 개막에 일조했다”고 평했다. 같은 레이블(데럼) 소속이던 무디 블루스가 <나이츠 인 화이트 새틴>으로 혜성처럼 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이었다는 것이다. <어 화이터 셰이드…>의 의도하지 않은 도발이 결과적으로 대중 음악사를 바꾼 단초가 되었던 셈이다. 따지고 보면 로큰롤은 태생부터가 그랬다.
무디 블루스의 <나이츠 인 화이트 새틴>(1967년) ‘프로그레시브 록’의 직접적 원형
“역사의 진보는 불복종과 반항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했던 문예비평가 오스카 와일드의 견해를 누구보다 신봉한 집단은 대중음악 비평가들, 특히 베이비붐 세대 미국인 비평가들이었을 것이다. 기성과 권위를 거부하는 상징으로서 로큰롤의 탄생을 목격했던 그들은, 불복종과 반항이 곧 시대의 공기였던 1960년대에 대중음악 비평의 논리적 바탕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70년대 후반 펑크 록의 탄생을 열렬히 환영했다. 더불어 그들은 논거의 선명성을 위해 태도와 양식의 차이라는 명목으로 특정 장르의 음악을 철저히 배격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름마저 ‘진보적’이라 불린 프로그레시브 록이 바로 그 공격 대상이었다.
당대의 미국 비평가들은 프로그레시브 록이 무엇보다, 고전 음악의 방법론을 차용했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라고 비판했다. 블루스에 뿌리를 둔 록 음악의 전통과 배치된다는 것이었다. 모순이었다. 외부로부터의 음악적 영향을 흡수함으로써 성장해 왔던 로큰롤의 진화 과정을 부인하는 꼴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고전음악의 전통이 부재한 미국사의 특수성에서 생겨난 무의식적 배타성의 발현이라고 할 것이었다. 대중음악사에 족적을 남긴 굵직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 가운데 미국 출신이 단 한 팀도 없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디 블루스가 흑인음악을 연주하는 영국 밴드들에 대해 “소니 보이 윌리엄슨(20세기 초의 미국 흑인 블루스 뮤지션)이 아서 왕의 전설을 노래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얘기한 배경도 다를 바가 없다. 거기에는 무디 블루스의 경험담이 함께 담겨 있다.
1964년 ‘고 나우’라는 리듬 앤 블루스 노래로 슬리퍼 히트를 기록했던 무디 블루스는 이후 3년 동안 침체만을 거듭했다. 새로운 멤버 존 로지와 저스틴 헤이워드의 영입을 계기로 그들은 밴드의 활동사는 물론이고 대중음악사에서도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하는 노선 변화를 감행했다. 프로콜 하럼의 ‘어 화이터 셰이드 오브 페일’과 함께 프로그레시브 록의 직접적 원형으로 꼽히는 노래 ‘나이츠 인 화이트 새틴’은 무디 블루스가 수정한 좌표 위에서 도달한 신천지였다. ‘나이츠 …’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음악적 특성을 규정한 지침이었다.
한 남자의 일생을 하루의 일상으로 은유한 앨범 <데이스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트랙으로 포진한 이 노래는 7분30초를 넘는 장대한 연주시간, 런던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대동한 심포 사운드, 신시사이저의 원형으로서 멜로트론의 전면적 사용, 그리고 내레이션을 통한 서사의 접목 등을 통해 록 음악 스타일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했던 것이다. 불과 6개월 앞서 발표된 ‘어 화이터 …’와 비교해도 괄목할 만한 형식적 진보였다.
‘나이츠 …’와 그 수록 앨범 <데이스 …>는 애초, 새로운 음향 기술을 선전할 목적으로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을 록버전화하려던 레코드사의 의뢰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무디 블루스는 방침을 따르지 않았다. 음반업계의 상업적 전략에 대한 불복종과 저항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냈던 셈이다.
헤비메탈 일그러진 사운드에 ‘방아쇠’ ~ 크림의 <선샤인 오브 유어 러브>(1968년) &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인-아-가다-다-비다>(1968년)
1968년은 현대사의 줄기에 맺힌 굵은 옹이다. 세상을 격동케 한 사건들로 숨가빴던 시간의 결절점이다. 체코의 ‘프라하의 봄’, 베트남 전쟁의 ‘구정 공세’, 미국의 마틴 루서 킹 목사 암살 사건, 프랑스의 ‘5월 혁명’ 등은 극단적으로 대립한 정치적 행위와 뚜렷하게 엇갈린 사회적 행동이 만들어낸 역사의 파편들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깊고 선연한 흔적으로 세계에 내재한 성취와 상처의 진원이다.
반면 대중음악사의 1968년은 이상하리만치 가라앉았다. 1967년 절정을 이뤘던 대중음악의 반문화(카운터컬처)적 영향력은 이듬해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세상으로부터 은둔, 도피하는 수동적 양상이 두드러졌다. 극심한 사회적 혼돈의 연쇄작용 혹은 반작용이라고 할 것이었다. 마하리시 요기를 만나기 위해 인도로 간 비틀스의 행보는 당대의 상징적 사건이었고, 마이크 니콜스의 연출과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음악이 완성시킨 영화 <졸업>은 당대에 대한 은유적인 작품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사이키델릭의 초월적 특성은 불가사의한 낭만으로 마지막 불꽃을 뿜었다. 특히, 크림의 ‘선샤인 오브 유어 러브’와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인-아-가다-다-비다’는 완벽한 1968년의 배경음악이었다.
에릭 클랩튼,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의 결합으로 처음부터 ‘슈퍼그룹’이라 불렸던 영국의 크림과, 그저 그런 클럽 밴드에 불과했던 미국의 아이언 버터플라이는 애초 닮은 구석을 찾기 힘든 이종이었다. ‘선샤인…’과 ‘인-아…’가 발표되기 전까지 그들 사이의 공통점은 같은 레코드사(애틀랜틱)와 계약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결국, 시대상이 그들을 함께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선샤인…’과 ‘인-아…’(‘인 더 가든 오브 이든’을 음차하여 비튼 표현)의 탈속적 분위기 물씬한 제목과 가사는 무의식을 통해 투영한 시대적 반응이었다. 그에 열광한 젊은이들의 심리적 기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옳고 그름의 경계조차 모호해진 현실로부터의 탈피였던 셈이다. 판매 기록이 그것을 입증한다. 당시 기준으로 <선샤인…>은 ‘애틀랜틱’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었으며, ‘인-아…’가 수록된 동명 음반은 같은 레이블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었다.
두 작품이 헤비메탈 양식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결과적 동질성이다. 무엇보다, 심하게 일그러진 사운드의 일렉트릭 기타 리프(반복 악절) 연주가 노래의 특징을 결정짓는다는 점이 그렇다. 그것은 사이키델릭 록과 블루스 록의 요인들을 흡수하여 좀 더 직설적이고 파괴적인 사운드로 전이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방법론이었다. 공동체적 이상의 좌절이 ‘개인주의의 70년대’(미 디케이드)로 변이하던 과도기의 음악적 반영이었다. 한 시대의 끝이 다음 시대의 시작과 맞물리는 귀결과 다름 아니었다.
Sunshine of your Love ~ Cream In-a-gadda-da-vida ~ Iron Butterfly
킹 크림슨의 <트웬티 퍼스트 센추리 스키초이드 맨>(1969) ~ 최초의 완전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대중음악사의 60년대는 1969년 12월6일에 급히 막을 내렸다. 롤링 스톤스가 개최한 무료 공연 ‘알타몬트 콘서트’가 유혈 사태로 얼룩지면서, 사랑과 평화를 자양분 삼아 피어났던 ‘플라워 무브먼트’의 시대가 극적인 종언을 고했던 것이다. 반면, 대중음악사의 70년대는 1969년 10월12일에 이미 막을 올렸다. 킹 크림슨의 데뷔 앨범 <인 더 코트 오브 더 크림슨 킹>이 발표된 이날, 대중음악의 ‘60년대성’은 미래적인 새 경향으로부터 결별을 선언당했다.
비평가 크리스 스미스의 말마따나, 킹 크림슨은 “최초의 완전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였다. 그리고 앨범 <…크림슨 킹>은 “프로그레시브 록이 독자적 장르로서 출현한 지점”이었다. 고전음악의 선율을 차용하거나 악기 편성을 도입함으로써 프로그레시브 록의 전범을 마련했던 프로콜 하럼, 무디 블루스, 제스로 툴 등의 사운드 실험을 킹 크림슨은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장대한 구조와 복잡한 구성을 뼈대로 삼았고, 멜로트론과 각종 관악기를 외벽으로 둘렀으며, 강렬한 기타 음향과 다양한 사운드 이펙트를 덧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록 어법의 중추인 블루스의 요소를 제거해 버림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음악적 표준을 마련했다. 앨범 <…크림슨 킹>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노래 ‘트웬티 퍼스트 센추리 스키초이드 맨’은 그 선제적인 포고문이었다.
킹 크림슨은 자작한 새로운 소리를 불길한 미래의 전망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스스로를 60년대의 이상주의와 차별하고자 했다. 실상, ‘트웬티 퍼스트 센추리…’는 심포니와 재즈와 아방가르드가 뒤섞인 어둠의 심연이다. 잔뜩 일그러뜨린 그레그 레이크의 보컬과 거칠게 포효하는 로버트 프립의 기타는 혼돈에 휩싸인 미래상의 음악적 구현이었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시구로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묵시하는 피터 신필드의 노랫말은 잔뜩 벼린 비수처럼 섬뜩하게,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경고했다. “시인들은 굶주리고 아이들은 피흘리는” 기계와 물질의 세상이 도래하리라고 비관했다.
1969년 7월, 미국인들이 달 표면을 향해 아폴로 11호를 쏘아 올리며 “인류의 거대한 도약”에 감탄하고 있던 바로 그때 영국의 록 밴드 킹 크림슨은 이 노래를 녹음하며 21세기에 도래할 문명의 끔찍한 파멸을 예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평가 매니시 아가월은 이 노래가 “거대한 리프와 울부짖는 색소폰과 종말론적 비전을 담지한 최초의 대안적 송가”라고 했다.
불행하게도, 탐욕에 눈먼 “21세기의 광인”들이 “순수한 영혼들을 폭약의 불꽃으로 난자하는” 시대에 대한 ‘트웬티 퍼스트 센추리…’의 예견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단 한 번만 봐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미지의 잔상을 남기는 <…크림슨 킹>의 표지 속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거기 있다. 그것은, 가진 자의 물욕이 초래한 경제 한파와 성장 만능의 구태의연한 발상이 자초한 사회 분열이란 안팎의 위기를 살아야 했던, 올해 2008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월터 카를로스의 <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 넘버 3>(1968년) ~ 음악+공학 ‘신시사이저 혁명’의 전주곡
1967년 연말에 공개된 영화 <졸업>은 혼란스런 시간 속을 표류하는 젊은 커플의 이야기를 통해 60년대 청년 문화의 붕괴 양상을 폭로한 문제작이었다. 영화는 다가올 시대에 대한 불안감 또한 감추지 않았다. 감독 마이크 니콜스는 그것을 극중 주인공 아버지의 친구 입을 빌려 “그냥 한 단어로” 요약해 내놓았다. “플라스틱!” 그 단말마처럼 차갑고 짧은 낱말 속에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리라는 불길한 전망을 담아냈다. 청년세대의 이상주의적 혁명 정신이 기성세대의 자본주의적 시장체제 속으로 함몰되어 가던 60년대 말의 격류 속에서 탄식처럼 내뱉은 나지막한 비명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되돌릴 수가 없는 법이다. 그것은 대세였다. 문화의 영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마이크 니콜스의 경우부터가 그랬다. 60년대의 종말을 선언함으로써 그의 영화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란 흐름의 탄생을 이끄는 결과를 낳았다. 시대 변화의 반영인 동시에 그것의 여파였다. 정세 파악에 능했던 미술가 앤디 워홀은 벨벳 언더그라운드 등과 함께 66년부터 <불가피한 플라스틱의 폭발>이라 이름 붙인 발표회를 개최해 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현격한 양상은 음악계에서 나타났다. 바로 신시사이저의 등장이다. 음악과 공학의 결합이 만들어낸, 기계를 악기 삼은 플라스틱 사운드가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전 음악을 연주한 작품으로는 극히 이례적으로 밀리언셀링을 기록한 월터 카를로스의 앨범 <스위치드-온 바흐>가 바로 그 신호탄이었다.
60년대의 끝자락에 ‘데우스 마키나’의 상징처럼 돌출한 월터 카를로스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 음악가였던 그는 로버트 무그 박사를 도와 신시사이저의 개선 작업에 참여한 공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바흐의 고전들을 신시사이저로 연주한 소품집 <스위치-온 바흐>는 말하자면, 카를로스의 지적 모험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 하이브리드였다고 할 것이다. 특히 ‘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 넘버 3’는 카를로스가 완성시킨 최초의 녹음 가운데 하나였으며 <스위치드-온 바흐>에 수록되어 발매되기 전 이미 미국 ‘음향공학회’에서 한 시연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전자음악의 시금석이라 할 것이었다. 그것은 센세이션이었다.
물론, 오늘날 카를로스의 ‘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 넘버 3’에서 감동과 감흥을 느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실제 악기를 능가할 만큼 발전한 신시사이저 기술과 고전음악의 요소까지 흡수한 대중음악 저변을 고려하자면 오히려 촌스럽게 들린다고 해야 옳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의 최고 걸작”을 신시사이저로 연주한 최초의 기록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데이비드 보위의 ‘플라스틱 솔’에서 브라이언 이노의 ‘앰비언트’ 실험에까지 두루 미친 음악적 영향력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역사의 발전이란 시행착오 과정을 담보하기 마련이다.
참고로, 월터 카를로스는 1972년 여성으로 성전환수술(플라스틱 서저리!)을 감행해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제 그에 대한 자료는 웬디 카를로스라는 이름을 통해 검색하는 쪽이 빠르다.
딥 퍼플의 <콘체르토 포 그룹 앤 오케스트라> (1969년) ~ 고전음악 어법의 ‘록-오케스트라 협주곡’
대중음악의 일각에서 고전음악의 양식과 요소를 변용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만 그 접근법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양상을 달리해 왔을 뿐이다. 예컨대 팝 음악이 형식적 틀을 갖춰나가던 20세기 초의 브로드웨이에서는 선율을 차용하거나 선법을 활용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고 1930년대 전성기를 누린 재즈 빅밴드들은 오케스트라의 구성을 형식적 바탕으로 채용했다.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의 결합이 음악적 실험으로서 정점에 도달한 것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 사이의 일이다. 록 음악 구조 안에 체화된 형태로서의 고전음악 양식들을 애용했던 비틀스를 거쳐, 록 밴드의 구성으로 교향악을 구현하려 시도했던 프로그레시브 록 계열로의 진화가 이루어진 때였다. 딥 퍼플의 <콘체르토 포 그룹 앤 오케스트라> 또한 그런 흐름 가운데서 탄생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 곡은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생래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록 뮤지션이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한 콘체르토였다는 사실이다.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밴드는 이전에도 있었다. 록 사운드를 통해 심포니를 구축한 작품도 전례가 있었다. 그러나 고전음악의 어법으로 협주곡을 만들고 오케스트라와 경연한 사례로서는 전대미문이었다.
<콘체르토 포 그룹 앤 오케스트라>는 딥 퍼플의 건반주자 존 로드의 작품이다. 다섯 살 나이부터 피아노를 연주한 그는 고전음악과 블루스의 이질적인 양식을 두루 섭렵하며 독자적인 노선을 정립했다. 해먼드 오르간을 주력 악기로 택한 이유도 거기 있었다. 블루스의 짙은 향취를 풍기는 악기의 음향적 특성을 바로크 선율에 기반한 자신의 연주 패턴과 결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록 밴드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위한 콘체르토를 작곡한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만큼의 개연성을 갖는다.
<콘체르토 포 그룹 앤 오케스트라>는 콘체르토 그로소와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구조의 3개 악장으로 구성된, 연주시간만 53분에 이르는 대작이다. 1969년 9월24일, 영국 고전음악의 심장부인 로열 앨버트 홀에서 맬컴 아널드가 지휘하는 “국민악단”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펼친 공연의 실황을 음반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당대의 반응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비평가 마틴 스트롱은 “다행히도 이 작품의 상업적 실패는 상식의 우위를 확인시켰고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로 하여금 (밴드의 지향을) 좀더 강력한 록 사운드로 선회하도록 만들었다”고까지 했다. 일종의 해프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평가도 바뀌어 갔다. 1999년 이 작품의 탄생 30돌을 기념하는 공연과 녹음이 행해졌으며, 2000년대 이후 여러 나라에서 더 빈번하게 무대에 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방증이다. 팝페라와 같은 퇴행적 스타일이 겪게 될 (것으로 사료되는) 미래의 운명과는 딴판이다.
Concerto for Group & Orchestra 1st. Mov.
레드 제플린의 <홀 랏 오브 러브>(1969년) ~ ‘록의 신’ 탄생시킨 블루스 헤비메탈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에서 가장 열렬한 환호를 받은 인물은 전설적인 록 밴드 레드 제플린의 설립자 지미 페이지였다. 다음 개최지인 런던을 홍보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그는 앞서 중국의 예술가들이 펼쳐낸 장대한 스펙터클의 잔상을 일렉트릭 기타 하나로 간단히 지워버렸다. 대중음악 강국으로서 영국의 위상과 국경을 넘는 젊음의 찬가로서 록 음악의 위력을 새삼 확인시킨 존재감이었다. 이날 공연에서 페이지는 신예 팝 스타 리오나 루이스와 함께 레드 제플린의 고전 ‘홀 랏 오브 러브’를 연주했다. 당연한 선곡이었다. 그것은 레드 제플린이 언제나 공연 마지막에 연주했던, 그들을 상징하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지미 페이지의 레드 제플린은 에릭 클랩튼의 크림이 그랬듯, 처음부터 슈퍼 그룹이었다. 당대 최고 연주자들의 집합이었던 그들은 당시 최신 트렌드였던 하드 록의 어법을 정립하며 대중음악사의 물길을 바꿔놓았다. 1969년 1월 발표한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으로 단숨에 소속사 어틀랜틱 레코드의 음반 판매 기록을 갈아치웠고, 같은 해 10월 공개한 두 번째 앨범 <레드 제플린 2>로 순식간에 세계 최고 인기 밴드의 왕좌에 등극했다. ‘홀 랏 오브 러브’는 그 기념비적인 두 번째 앨범의 오프닝 트랙이자 첫 번째 싱글이었으며 레드 제플린 최초의 톱텐 히트곡이었다.
‘홀 랏 오브 러브’는 무엇보다 지미 페이지의 기타 리프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된 노래다. 느슨하지만 원초적인 블루스의 에너지에 바탕한 페이지의 연주는 강력한 리듬 패턴과 동반하여 록 기타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했다. 물론 ‘홀 랏 오브 러브’의 혁신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의 말마따나 “자주 모방되지만 결코 복제되지 않는” 레드 제플린 사운드의 독창적 전형은 페이지의 기타에 맞서 긴장감 넘치는 갈등 구도를 형성한 다른 멤버들의 조력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교성과 괴성 사이를 긴박하게 넘나든 로버트 플랜트의 보컬은 <롤링 스톤>의 표현처럼, “블루스 연주자와 바이킹의 신격(神格) 사이를 가로지르는” 미스터리였다. 게다가 플랜트는 신화적 모티프와 성적 판타지를 노랫말의 양 축으로 삼음으로써 서사 시인인 동시에 섹스 화신으로서 자신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신비주의와 물신숭배의 매개로서 레드 제플린의 환상을 창출해냈다. 그래서 비평가 토비 크레스웰은 레드 제플린을 향해 “신격화한 최초의 록 밴드”라고 평했던 것이다.
한편, 비평가 톰 문은 “로큰롤 산업에 있어서 필요가 실제로 발명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홀 랏 오브 러브’를 꼽은 바 있다.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지는 공연 여행의 와중에 각지의 스튜디오들을 전전하며 완성시킨 앨범의 제작 과정이 그랬고, 블루스의 고전을 재활용한 ‘홀 랏 오브 러브’의 창작 배경이 그랬다. 본래 이 노래는 윌리 딕슨이 작곡하고 머디 워터스가 히트시킨 ‘유 니드 러브’의 요소들을 창조적으로 변용한 결과물이었다. 그런 적용 과정의 어느 지점에서 블루스와 헤비메탈이 분기하기 시작한 일은 우연한 필연의 부산물이었다.
블랙 새버스의 <패러노이드>(1970년) ~ 누가 헤비메탈 선구자를 저능아라 했는가
전체 예술 분야의 모든 하위 영역을 통틀어 헤비메탈만큼 격렬한 비난과 자극적 질시를 받은 장르는 없다. 1970년대 초반 태동 당시에는 심지어 록 비평가들로부터조차도 비토를 당했을 정도다. 일례로 대중음악사가 로이드 그로스먼은 “저능아의 음악”이라고 비웃었고, 음악전문지 <뮤지션>은 “음악적 천치들의 농담”이라고 비아냥댔다. 그들의 힐난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기성 사회와 기존 문화계는 이구동성, 장황한 수사와 집요한 논리로 그것의 존재방식을 문제 삼았다. 헤비메탈은 그 압도적인 음량만큼이나 시끄러운 논란거리였고 그 공격적인 연주만큼이나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런 파행의 근원에 블랙 새버스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격적인 헤비메탈 사운드의 설계자인 동시에 그 하위문화의 도안자가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평가 폴 바티스트는 블랙 새버스가 “우연히 록 밴드의 장비를 발견한 네 명의 크로마뇽인들”이며 그들의 “가당치 않은 억지 연주”가 헤비메탈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당대 비평가들의 그런 평가는 결국, 오판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블랙 새버스 최초의 히트 싱글이었던 <패러노이드>가 바로 그 증거다.
두 번째 앨범의 타이틀 트랙이며 싱글로 먼저 공개된 <패러노이드>는 블랙 새버스가, 헤비메탈 장르 자체와 마찬가지로, 심각하게 오해되었음을 방증하는 노래다. “진정한 헤비메탈의 원조”로서 사운드의 독자성부터가 그렇다. 블루스의 자취가 여실했던 당대의 하드 록 밴드들에 비해, 골간만 남긴 채 그것의 흔적을 지워버린 블랙 새버스의 헤비메탈은 새로운 방식이기 때문에 거부당했던 것이다. 오늘날 <패러노이드>가 레드 제플린의 <홀 랏 오브 러브>, 딥 퍼플의 <스모크 온 더 워터> 등과 함께 대중음악사상 가장 유명한 기타 리프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90년대 후반 크게 유행한 다운튜닝 방식의 선구적 연주로 꼽힌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더불어 오지 오스본의 날카롭게 비틀린 보컬 또한 전례가 없다는 점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 블랙 새버스의 새로움이었다.
게다가 ‘검은 안식일’이라는 밴드명의 불경과 ‘13일의 금요일’에 데뷔 앨범을 발표한 도발을 꼬투리 삼아 블랙 새버스를 악마주의로 몰고 갔던 세평도 곡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공포영화의 제목에서 빌려온 블랙 새버스의 이름이 실상은 냉전시대에 과학기술의 음침함을 겨냥한 포석이었으며, 밴드의 작사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베이시스트 기저 버틀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배경을 호사적으로 왜곡했던 것이다. 실상 <패러노이드>는 오컬트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편집적 정신병리를 다룬 최초의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에서 현실이성적이었다. 영국의 음악지 <모조>가 싱글 <패러노이드>와 그 앨범을 “아이작 아시모프풍의 순수한 에스에프”와 비견했던 연유다.
이제 <패러노이드>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다. 음악이 새로움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다. 현실이 음악보다 파괴적이라는 사실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패러노이드>는 그 분열적 증후를 먼저 포착했을 뿐이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1970년) ~ ‘자아’ 발견한 음악, 주류 진입하다
‘뉴 저널리즘’의 선구자격인 작가 톰 울프는 미국의 70년대를 “미 디케이드(개인의 시대)”라고 칭했다. “40년대 이후 30년간 지속된 호황”의 토대 위에 출현한, 세계사 최초의 “돈과 여가와 개인적 자유의 이상적 결합을 누리는 보통사람”들의 시대라는 것이었다. 박물적 에세이스트 찰스 패너티의 말마따나, “미 디케이드의 스타는 자아(셀프)”였다. 정치에서 종교까지, 영역을 막론하고 미국 사회에 불어닥친 자아 발견과 자기 계발의 열풍은 시대적 현상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60년대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이상적 공동체주의의 실험과 좌절을 경험한 사회가 현실적 개인주의로의 안주와 침잠으로 보수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1970년대 초반 대중음악계를 주도한 싱어-송라이터의 붐은 시대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싱어-송라이터라 함은 문자 그대로, 직접 곡을 만들고 노래하는 뮤지션을 통칭한다. 하지만 시대 배경을 70년대로 국한하면 그것은 당시의 음악적 경향을 특정하는 용어로 통용된다. 모던 포크와 스탠더드 팝의 음악적 전통에 개인적 성찰과 내면적 응시를 담아냄으로써 60년대와 갈라선 뮤지션들의 전면 대두를 지칭하는 것이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최대 히트곡이자 대중음악사상 가장 유명한 노래 가운데 하나인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는 바로 그 시대의 분수령에서 70년대를 가리켰던 이정표다.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가 수록된 동명의 앨범을 마지막으로 해체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시피, 사이먼 앤 가펑클의 활동 반경은 물리적으로 1960년대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싱어-송라이터 경향의 직접적 원조로서 평가받는 이유는 시류의 바깥에 머물렀던 국외자적 성향에서 기인한다. 1970년대의 대표적 싱어-송라이터 가운데 하나인 제임스 테일러는 사이먼 앤 가펑클이 “(음악에) 그들 자신을 이입”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가져왔다”고 얘기한 바 있다.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시대의 구호가 아니라, 사랑과 이별의 성정을 새긴 개인의 구도를 노래함으로써 스스로를 차별화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이먼 앤 가펑클은 60년대를 통틀어 롤링 스톤스보다도 많은 앨범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는 질풍노도와 같은 이념의 시대에도 정서적 위안과 같은 개인의 가치를 갈구하는 대중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물론, 그런 개인적 태도는 60년대 후반 이후 밥 딜런의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사이먼 앤 가펑클은 메인스트림 팝 사운드를 방법론의 일부로 취했다는 점에서 딜런과 달랐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당대의 인기와 후대의 영향력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었다. 피아노 반주만을 배경으로 시작하여 오케스트레이션을 동반한 웅대한 연주의 절정에서 끝을 맺는, 이 노래의 치밀한 구조와 섬세한 구성이야말로 그 표본이다. 비평가 션 이건은 그것을 “반문화가 주류로 진입한 순간”이라고 썼다. 그것은 또한 캐롤 킹과 제임스 테일러에게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지점이기도 했다.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는 미국의 60년대와 70년대 사이에 놓인 가교였던 셈이다.
데릭 앤 더 도미노스의 <레일라>(1970년) ~ 순애보-스캔들 사이에 핀 ‘기타 예술’
영화로도 제작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닉 혼비의 소설 <하이 피델리티>에서 중고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주인공은 실패로 얼룩진 자신의 연애사를 떠올리며 이렇게 푸념한다. “내가 비참했기 때문에 팝 음악을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팝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내가 비참했던 것일까?”
음악광인 자신이 사랑의 낙오자로 남은 현실을, “수많은, 문자 그대로 수많은 노래들이 상심, 실연, 고통, 비참, 상실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에 빗대 자조한 것이다. 그럴 법도 하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의 대다수가 사랑을 주제 삼은 변주니까.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실패한 사랑에 관한 것이니까. 지난 2004년, 음악 전문지 <롤링 스톤>은 로큰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 500곡을 선정한 바 있다. 조사 결과 그 노래들의 제목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낱말은 ‘러브/러빙’인 것으로 나타났다. 모두 43곡이었다. 다음으로 즐겨 사용된 단어인 ‘록/로킹’과 ‘베이브/베이비’가 각각 8곡씩이었으니 현격한 빈도차다. 게다가 제목에서 직접적으로 ‘사랑’을 언급하지 않았을 뿐, 종국적으로는 ‘사랑 얘기’라고 할 작품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역사상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증명해 온바, 인간사의 흉금과 정리를 농축한 화두로서 사랑보다 높고 넓은 가치는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러니 “로큰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랑 노래”라는 별칭이 얼마나 대단한 찬사인지 논하는 일은 새삼스럽다. 데릭 앤 더 도미노스의 ‘레일라’를 두고 하는 말이다.
데릭 앤 더 도미노스는 70년대와 함께 시작된 에릭 클랩턴의 새로운 프로젝트였고, ‘레일라’는 그들의 유일한 정규 앨범이자 대중음악사의 걸작으로 남은 <레일라 앤 어더 어소티드 러브 송스>의 타이틀 트랙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노래는 에릭 클랩턴이 순애보와 스캔들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던 자신의 사랑 얘기를 토로한 것이라는 사실로 유명해졌다. 친우 조지 해리슨(비틀스)의 아내였던 패티 보이드에게 일방적으로 사로잡힌 클랩턴은 ‘금지된 사랑’의 늪에 속절없이 빠져든 대가를 절망과 비탄으로 치르고 있었고, ‘레일라’는 그가 7세기 페르시아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레일라와 마즈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 결과물이었다.
여느 사랑 노래들과는 다른 이 노래의 활화산 같은 격정은 결국, 응축된 연정의 분출인 셈이다. 물론, ‘레일라’에는 호사적 배경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격렬한 전반부와 수려한 후반부가 양립하는 대칭적 악곡 구조는 오늘날에도 독특한 신선함을 풍기는데, 특히, 확장된 코다 형식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인스트루멘털은 일렉트릭 기타의 명연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여기서 협연자로 나선 슬라이드 기타의 명인 드웨인 올먼은 에릭 클랩턴의 존재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선율을 펼쳐내기도 했다.
‘레일라’는 사랑에 눈먼 남자의 상심과 비참이 예술적 성취로 승화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 덕분이었을까? 1979년 클랩턴은 마침내 패티 보이드의 사랑을 쟁취해냈다. 초콜릿 따위로 밸런타인데이를 허비하는 시대에선 상상하기 힘든, 동화 같은 사랑 얘기의 귀결이다.
제임스 브라운의 <겟 업 (아이 필 라이크 비잉 어) 섹스 머신>(1970년)
당당한 흑인 정체성 ‘펑크’를 쏘아올리다
당연한 말이지만, 1960년대 미국 사회의 격변은 흑인들에게 더욱 현저한 영향을 미쳤다. 흑백 분리 차별법의 폐지와 투표권 획득 같은 제도 개혁의 성과는 무엇보다, 흑인들 스스로가 문화적 뿌리에 대한 자긍심과 인종적 특질에 대한 자부심을 인식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변화상은 전방위에 걸쳐 있었다. ‘블랙 파워 무브먼트’와 같은 극단적 양상도 나타났다. 그러나 오랜 세월 억압과 차별에 길들여진 흑인 사회를 변화시킨 가장 강력한 동력은 대중음악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제임스 브라운이 있었다. 그는 솔 음악을 당대 정치·경제·문화적 인식의 집약체로 격상시킨 혁명가였다.
제임스 브라운은, 차트 분석 전문가인 조엘 휘트번에 따르면, 60년대와 70년대를 통틀어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흑인 뮤지션이다. 주목할 것은 성공의 크기만이 아니다. 성공의 방식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브라운은 스스로 시대의 흐름을 만들어낸 뮤지션이었다. 펑크, 디스코, 힙합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영향력을 남긴 혁신적 스타일의 창조자였던 것이다. 또한 브라운은 직접 자신의 레코드 회사를 운영한 사업가였다. 백인 소유의 어틀랜틱 레코드나 흑인 소유임에도 백인 관객을 겨냥했던 모타운 레이블과 같은 동시대 경쟁자들과 달리, 그는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당당히 내세웠다. ‘세이 잇 라우드? 아임 블랙 앤 아임 프라우드’(1968)는 브라운이기에 발표할 수 있었던 노래다.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브라운이 “아마도 열 번째로 뛰어난 보컬리스트쯤이었고 어쩌면 열두 번째로 훌륭한 작곡가 정도였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솔 음악의 황제였다”고 평했다. 단순히 뮤지션의 자질이나 재능만으로 가장 위대한 솔 뮤지션의 지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편적 흑인들이 성취하고자 시도했던 지위 향상의 움직임을 흑인 사회 내부에서 구체화시킨 영웅이었다”고 한 비평가 리처드 리패니의 진술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무료 콘서트를 개최함으로써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피살 사건으로 비등한 폭동의 분위기를 가라앉혔던 일에서도 드러나듯, 제임스 브라운은 뮤지션을 넘어 흑인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로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겟 업 (아이 필 라이크 비잉 어) 섹스 머신>은 제임스 브라운의 당당한 흑인 정체성이 음악적 표현의 신기원을 통해 분출한 기념비적 노래다. 여기서 브라운은 리듬의 형식과 구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임으로써 흑인 음악의 아프리카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구현해냈다. 비평가 로버트 파머의 말마따나 “모든 악기와 보컬 파트를 드럼처럼 연주”함으로써 전례가 없는 폴리 리듬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통해 솔 음악의 한 지류이자 본격적인 장르로서의 펑크의 태동을 알렸다. 그것은 리듬 앤 블루스에서 디스코와 힙합으로 이어지는 흑인 음악 발전사의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섹스 머신’이라는 도발적인 제목도 그렇다. 여기서 ‘섹스’는 성적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의미로 파악해야 옳다. 생명체로서 느끼는 활력이야말로 당시 흑인 사회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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