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키 브렌스턴의 <로켓 88>(1951년) ~ 원조논쟁 풍파 겪은 ‘최초의 로큰롤’
2004년, <롤링 스톤>은 로큰롤 탄생 5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기사 시리즈를 내놓은 바 있다. 논쟁이 뒤따랐다. 관건이 된 것은 1954년을 원년으로 삼은 점이었다. <롤링 스톤>의 기준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댓츠 올 라이트>(1954)가 ‘최초의 로큰롤 레코드’라는 주장에 토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같은 견해에 동의한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상당수는 <롤링 스톤>이 권위를 앞세워 대중음악 역사에 대한 게리맨더링을 취한 것으로 간주했다. 최초의 로큰롤 레코드에 대한 음악사의 해묵은 쟁점이 재연된 것이었다.
<로켓 88>은 <댓츠 올 라이트>가 최초의 로큰롤 레코드라는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의 증거로 거론되는 곡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엘비스 프레슬리를 발굴해낸 전설적 프로듀서 샘 필립스가 “최초”라고 공언했으며, 1955년 로큰롤로서 사상 처음으로 팝 차트 1위에 오른 <록 어라운드 더 클락>의 주인공 빌 헤일리가 이미 1951년에 리메이크했던 노래라는 사실이 그 배경에 있다. 그래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은 완곡한 표현으로 <로켓 88>이 “많은 이들에게 최초의 로큰롤 레코드로 인정받는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로켓 88>은 진짜 원작자에 대한 쟁점으로도 유명하다. 이 곡의 공식적인 크레디트는 재키 브렌스턴이 만들고 그의 밴드인 ‘델타 캐츠’가 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상은 아이크 터너의 작품이라는 게 정설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곡을 만들고 녹음했을 당시 브렌스턴은 터너가 리드하던 밴드 ‘킹스 오브 리듬’의 색소폰주자였다. ‘델타 캐츠’는 이름뿐인 유령밴드였고 실제 연주를 담당한 것은 ‘킹스 오브 리듬’이었다. 레코드 회사와의 계약관계 때문에 터너의 이름을 내세울 수 없는 상황에서 브렌스턴이 대역을 맡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로켓 88>에 대한 자료는 어느 것이나 재키 브렌스턴을 표제로 달고 아이크 터너를 얘기하는 표리부동의 아이러니로 채워져 있다.
출렁이는 부기우기 리듬과 경쾌한 홍키통크 피아노의 경합으로 시작하는 <로켓 88>은 일그러진 전기기타 사운드가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녹음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강력한 존재가치를 갖는다. 또한 관행을 깨고 백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이 곡을 방송했다는 사실은, 음악이 인종의 벽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다가올 로큰롤의 폭풍을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의외인 것은 뒷날 아이크 터너(1931~2007)가 최초의 로큰롤 레코드 논쟁에 보인 시큰둥한 태도였다. 그는 로큰롤이 “부기우기를 윤색한 것에 불과”하다며 “흑인들은 그것을 리듬 앤 블루스라 불렀고 백인들은 로큰롤이라 칭했을 뿐”이라고 일축한 바 있다. 터너의 본심은 아마도 흑인음악을 빌어다 쓰면서도 원조는 백인이라 주장하는 미국사회의 보수적 편견을 꼬집으려 했던 것일지 모른다.
오늘날 아이크 터너는 티나 터너의 전남편이었다는 사실로 먼저 인지된다. 80년대 이후 티나 터너가 거둬들인 거대한 성공의 여파에다 그녀가 자서전을 통해 폭로한 성차별적 폭력남편으로서 아이크 터너의 실체에 대한 여론의 반감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그래서 <타임스>는 지난 12월 12일 아이크 터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음과 같은 추모기사를 게재했다. “아이크 터너가 훌륭한 인간이었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개인사적 실패가 대중음악 발전에 기여한 바를 무색케 할 수는 없다.”
존 케이지의 〈4’ 33”〉(1952년) ~ ‘침묵도 음악’ 전위적 도발
1952년 8월 29일, 뉴욕주 우드스탁의 ‘매버릭 콘서트 홀’에서 있었던 현대음악 피아노 연주회에서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연주자 데이빗 튜더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계를 보며 악장마다 피아노 뚜껑 여닫는 일을 반복했다. 창밖을 서성이는 바람과 빗방울의 아련한 소리만이 공연장을 채우고 있었다. 잠시 후 웅성거림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퇴장하는 관객들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튜더는 “4분 33초” 동안 그 어떤 연주도 하지 않았다.
보이코트가 아니었다. 데이빗 튜더는 악보에 기재된 내용을 고스란히 수행했을 뿐이다. 작곡자의 의도에 충실하게 퍼포먼스를 펼쳤다는 것이다. 다만 그 의도와 내용을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작곡자 존 케이지는 1980년대의 어느 인터뷰에서 초연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관객들은 웃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연주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짜증을 냈을 뿐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그때 일에 화를 낸다.”
<4’ 33”>를 발표했을 당시 존 케이지(1912~1992)는 이미 명성 높은 현대음악가였다. 1946년 설립되어 유럽 현대음악의 산실로 자리매김한 ‘새로운 음악을 위한 다름슈타트 국제 여름학교’에서 테어도어 아도르노, 칼하인즈 스톡하우젠, 에드가 바레시 등과 강의하며 ‘우연성 음악(찬스 뮤직)’과 ‘구체음악(뮤지끄 콩크리트)’ 사조에 깊숙이 관여했다. 더불어 뉴욕에서는 라몬트 영, 백남준 등과 함께 전위예술 집단 ‘플럭서스’를 이끌기도 했다. <4’ 33”>는 그의 위명(혹은 악명)을 드높인 해프닝이었다.
존 케이지는 <4’ 33”>를 통해 소리와 음악의 관념과 관계를 재설정하고자 했다. 그는 완전한 묵음(默音)이란 없다고 믿은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이 작용했다. 완벽한 방음시설이 돼있다는 녹음실에서 케이지는 자신의 심장박동과 머릿속 이명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기묘한 ‘침묵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통해 케이지는 음악을 연주한다는 의식적 행위가 없더라도 이미 우리는 끊임없이 소리에 노출되어 있고, 그 소리들의 우연한 조합이 생성시키는 음악을 통해 “인생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도가와 불가의 사상에 심취했던 이답게, 단지 주변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음악적 호접몽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케이지는 화가이자 동료교수였던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하얀 그림>에서도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오브제가 아닌 관상의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라우센버그의 그림은 그가 음악에 접근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야스미나 레자의 연극 <아트>(1994)에서 백지와 다름없는 하얀 캔버스가 세 친구에게 그랬던 것처럼, 존 케이지의 <4’ 33”>는 음악에 대한 우리의 오랜 고정관념을 시험하고 도발하고 있다. 이 곡은 세상 어느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인 동시에 지금 이 순간 모두가 듣고 있는 음악이기도 하다. 뒷날의 앰비언트, 인더스트리얼, 노웨이브, 포스트록 따위 경향은 케이지의 관점에서 대중음악에 접근했던 록 뮤지션들의 전위적 실험결과물이었다. 또한 녹음된 소리를 싫어했던 존 케이지가 그 후예들에 의해 레코드에 ‘봉인’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성 음악의 필연적 아이러니기도 했다.
조니 레이의 ‘크라이’(1951년) ~ 엘비스를 예고한 ‘백만불짜리 눈물’
영국출신 뉴웨이브 밴드 ‘덱시스 미드나이트 러너스’의 1983년 히트곡 <컴 온 아일린>은 몇 가지 면에서 기억할 만한 얘깃거리를 남긴 노래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마이클 잭슨의 메가 히트곡 <빌리 진>과 <비트 잇> 사이 틈바구니를 비집고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라섰다는 점이 그랬고, 피들과 밴조를 전면에 내세워 신서사이저 사운드가 대세이던 동시대의 경향을 거스른 독특함이 그랬다.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니 레이에 대한 당대의 관심을 부활시켰다는 점이다. “가여운 조니 레이”로 시작하는 노랫말과 조니 레이의 전성기 기록필름을 사용한 뮤직비디오 도입부는 박물관의 (전시실도 아닌) 수장고에서 잠자던 유물을 사람들 북적대는 쇼핑몰의 진열장으로 옮겨놓은 것과 비슷했다.
조니 레이(1927~1990)는 오랫동안 잊혀진 이름이었다. 불꽃같은 전성기를 보내고 이내 후발주자에 밀려나는 일이야 연예계의 속성상 비일비재한 일이지만, 레이의 경우에는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었다. 귀가 멀었기 때문이다. 사고로 왼쪽 귀의 청력을 잃어 14살 때부터 보청기를 끼고 다녀야 했던 그는 성공가도에 있던 1958년 수술을 결행했지만 오히려 나머지 한쪽 귀마저 잃는 최악의 상황과 맞닥뜨렸다. 뮤지션에게 귀란 반 고흐가 잘라낸 그것과는 다른 의미다. 이후 레이는 한동안, 청각을 상실한 이후의 베토벤이 그랬던 것처럼, 전업 작곡가로서의 인생을 살았지만 대중으로부터 잊혀지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조니 레이의 위상이 대중음악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의미를 갖는 것은 그가, 비평가 마크 페이트리스의 말마따나 “프랭크 시나트라와 엘비스 프레슬리 사이의 미싱링크”라는 점 때문이다. 스탠더드 팝의 감미로운 크루닝과 리듬 앤 블루스의 강렬한 샤우팅이 주류에서의 위상을 맞바꿈 하던 과도기에 양자의 미덕을 고루 갖춘 조니 레이의 등장은 시대의 변화를 상징했다. 히스테리에 가까운 열광으로 그를 맞은 젊은 팬들의 반응은 시나트라 열풍의 재연인 동시에 엘비스 혁명의 전조였다. 그래서 페이트리스는 조니 레이가 “2차 대전 이후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청소년들로부터 진정한 환호성을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이라고 평했다.
마이크스탠드를 잡고 흔들거나 무대바닥에 드러눕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조니 레이의 신들린 듯한 쇼맨십 또한 미문의 것이었다. 스스로가 ‘새로운 세대’의 일원이었던 밥 딜런이 “난생처음 목소리와 스타일 모두에 탐닉하게 된 뮤지션”으로 레이를 꼽은 이유다. 또한 “흐느낌의 대가”라거나 “백만 불짜리 눈물” 같은 애칭에서도 알 수 있듯, 절정에 이르러 종교적 초월에 북받친 자를 연상시켰던 울음 섞인 목소리 연기는 조니 레이만의 전매특허였다. 제의적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보다 열광적 분위기를 끌어내는 요즘 대중음악의 공연기법이 그에게 빚진 바다.
<크라이>는 조니 레이의 최초이자 최대 히트곡이다. <빌보드>가 “1951년의 최고 인기곡”으로 공인했던 이 노래는 레이의 독특한 개성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표본이다. 당대 흑인음악의 트렌드를 차용한 ‘두웝’ 스타일 사운드와 울음이 배어나는 특유의 열정적 창법에서 우리는 엘비스 프레슬리 등장의 징후를 찾을 수 있다.
Johnny Ray ~ Cry
빌 헤일리의 ‘록 어라운드 더 클락’(1954년)(상)~‘이유없는 반항’의 노래, 로큰롤 빅뱅
로큰롤이라는 명칭을 누가, 언제 처음 사용했는지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애초 뒷골목을 떠돌던 은어가 시간의 검열을 통과하며 양성화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최초의 인물이 앨런 프리드였다는 사실이다. 클리블랜드의 라디오방송 디제이였던 그는 전향적인 태도로 흑인음악을 백인대중에게 소개한 선구적 인물이었는데, 리듬 앤 블루스에 담긴 인종적 선입견을 누그러뜨릴 대안으로 로큰롤이라는 표현을 차용했다. 1951년, ‘문독 로큰롤 파티’로 개명한 그의 프로그램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로큰롤이라는 명칭 또한 폭넓게 인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앨런 프리드는 또한 최초의 대규모 록 콘서트를 기획하고 개최한 인물이기도 했다. 1952년 3월 21일, 일만 석 규모의 ‘클리블랜드 아레나’에서 펼쳐진 <문독 코러네이션 볼>에는 흑백을 아우르는 2만5천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는데 제한된 좌석을 차지하려는 관객들의 몸싸움으로 폭동에 가까운 혼란이 야기됐다. 출입구와 유리창이 모조리 파손되는 상황에서, 경찰의 제지에 따라 공연은 단 한 곡만을 연주하고 막을 내려야 했지만 그 여운은 길었다. 비평가 마크 페이트리스는 당시의 해프닝이 “사상 최초로 로큰롤을 신문 헤드라인에 올린” 사건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더욱 주목할 사실은 그런 야단법석조차도, 결과적으로, 다가올 충격에 비하면 가벼운 기시감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불과 3년 후, 빌 헤일리의 ‘록 어라운드 더 클락’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반응은 전대미문인 동시에 전세계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빌 헤일리의 ‘록 어라운드…’는 1955년 로큰롤로서 사상 최초로 팝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곡이다. 본래 1954년 녹음되었으나 당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잊혀졌던 이 노래는 이듬해 3월 개봉한 영화 <폭력교실(원제는 <블랙보드 정글>)>의 시작 장면에 삽입되면서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선풍을 일으킨 영화와 함께 인기가 동반상승한 것이다. 그 결과 이 곡은 초여름 무렵 차트 정상을 정복했고, 궁극적으로는 로큰롤 시대의 본격 개막을 알리는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록 어라운드…>와 <폭력교실>이 만들어낸 시너지가 괄목할 만한 것은 로큰롤과 할리우드의 결합을 통해 청소년 하위문화를 수면 위로 분출시킨 지각변동이었다는 점에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청소년’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그 전조는 진작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제이디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1951)은 사춘기 소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보여주었고, 말론 브랜도 주연의 영화 <와일드 원>(1954)은 청소년 갱단의 폭력을 화두로 삼았다. <폭력교실>보다 7개월 뒤에 공개된 제임스 딘 주연의 <이유 없는 반항> 또한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다루어 거대한 성공을 거뒀는데, 그 제목은 심리학자 로버트 린드너가 이미 1944년에 발간한 해당 소재의 동명 저서에서 빌어온 것이었다.
로큰롤의 등장과 성공은 청소년의 급부상이 가져온 사회변화 과정의 산물이었다. 바야흐로 전세계의 홀든 콜필드(<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들은 이제 ‘동세대의 송가’를 갖게 된 것이다.
빌 헤일리의 <록 어라운드 더 클락>(1954년)(하) ~ 로큰롤 몰랐던 ‘로큰롤의 아버지’
청소년 문화의 탄생과 로큰롤의 부상 사이 상호연관성은 특정한 시공간적 배경에서 양립했다. 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이다. 경제성장과 베이비붐이 일으킨 시너지가 버팀목이었다. 그로써 여가시간과 여윳돈을 갖게 된 50년대의 미국 청소년들은 ‘호모 루덴스(유희의 인간)’의 본능을 완벽하게 체현한 인류 첫 세대로 등장했던 것이다.
빌 헤일리(1925~1981)는 그 같은 변화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일찍 감지한 인물 중 하나다. 그는 본래 컨트리 뮤지션이었다. 그러나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까지 지방 라디오방송국의 디제이로 일하며 젊은 백인대중의 음악적 취향이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3살 때부터 돈을 받고 노래 부르는 일을 시작한 베테랑이었음에도 헤일리는 변신을 주저하지 않았다. 1951년부터 그는 트레이드 마크이자 클리셰였던 카우보이 모자를 벗어 던지고 리듬 앤 블루스 스타일에 천착했다. 그러므로 헤일리가 처음 녹음한 흑인음악 넘버가, 샘 필립스로부터 “최초의 로큰롤 레코드”라 일컬어졌던 재키 브렌스튼의 <로켓 88>이었다는 사실은 필연적 상징성을 갖는다.
비평가 닉 토스키스는 이 시기의 빌 헤일리를 <록 어라운드 더 클락>으로 ‘대박’을 터뜨린 이후의 그보다 높게 평가했다. 그는 헤일리가 “로큰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2년쯤 전에 이미 로큰롤 역사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구현했다”고 주장했다. 멤피스 슬림, 지미 프레스턴, 조 터너 등 흑인 뮤지션의 곡들을 자신의 음반에 담아냄으로써 빌 헤일리가 로큰롤에 대한 주류 백인관객의 형성에 기여했다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엘비스가 등장할 무대를 마련해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빌 헤일리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과 함께 과거의 인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록 어라운드…>가 청소년들을 열광시키고 있던 무렵에 이미 헤일리는 삼십대로 접어든 세 아이의 아빠였다. 로큰롤이라는 새로운 어법과 문화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성세대였다는 것이다. 비평가 닉 콘은 그것이 “잔인한 반전”이었다면서도 헤일리가 본인이 만들어낸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썼다. 실제로 헤일리는 1955년 발간한 악보집에서 “우리는 컨트리 음악에 사용하는 악기로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했고 그 결과로 ‘팝 음악’이 나왔다”고 말했다. 맙소사! 정작 그는 자신이 본격 로큰롤의 시대를 개막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였다.
따지고 보면 <록 어라운드…>와 빌 헤일리를 둘러싼 모든 정황이 과도기적 혼재 양상이었다. 청소년 비행에 대한 염려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자막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 <폭력교실>이 정작 문제의 원천으로 지목된 로큰롤을 배경음악 삼은 것이 그랬고, 그 결과로 극장마다 청소년들이 폭동에 가까운 소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그랬으며, 로큰롤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상승한 것이 그랬다. 로큰롤에 대한 청소년의 열광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지속될 로큰롤에 대한 기성세대의 몰이해도 빌 헤일리와 <록 어라운드…>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댓츠 올 라이트>(1954년) ~ 위대한 ‘로큰롤의 전설’ 탄생하다
적어도 로큰롤에 관해서라면 “역사적 진보는 불복종과 반항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정의가 진리에 가깝다. 인종에 대한 우열의 잣대가 엄존하던 시절 흑인의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백인 청소년들의 태도가 그랬다. 본능이 원하는 바를 규범으로 제어하기는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솔직하게 인정했던 것이다.
프로듀서 샘 필립스(1923~2003)는 그런 정황에 공감한 극소수의 ‘어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50년, 뒷날 선 레코드사의 기반이 되는 ‘멤피스 레코딩 서비스’를 설립한 이래 필립스는 흑인 뮤지션의 블루스와 아르앤비를 녹음하고 제작하는 일에 전력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흑인처럼 노래할 수 있는 백인을 찾아낸다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대 사회의 변화와 그 한계를 간파한 선견지명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 1953년의 어느 여름 날, 엘비스 프레슬리가 선 레코드사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샘 필립스의 예견은 현실로 나타났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트럭운전사로 일하던 18살의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는 어머니에게 선물할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 선 레코드사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이날 샘 필립스는 자리에 없었다. 하마터면 두 사람은 영영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그 진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이날 엘비스는 두 곡을 녹음했는데, 필립스의 비서였던 마리온 케이스커가 그를 눈 여겨 봐두었던 것이다. 역사가 시작된 지점이었다.
당초 엘비스 프레슬리가 노래한 곡들은 평범한 발라드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범상치 않은 무언가를 발견한 필립스가 연락을 취했고 두 사람은 녹음세션에 들어갔다. 1954년 늦봄이었다. 작업은 순조롭지 않았다. 필립스에 따르면, 이후 몇 주간 발라드에서 컨트리와 블루스까지 수많은 곡을 함께 녹음했지만 어느 것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는 전설로 변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성과 없는 세션에 지친 휴식시간, 엘비스가 갑자기 마이크를 들고 겅중겅중 뛰더니 아서 크루덥의 ‘댓츠 올 라이트’를 부르기 시작했고 연주자들이 자연스레 거기 동참하면서 저 유명한 레코드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사건은, 비평가 제임스 밀러에 따르면, 7월 4일을 전후해서 일어났다고 한다. 마치 미국 현대사의 문화적 독립기념일을 선포하듯이 말이다.
전설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그 속에 담긴 함의마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롤링 스톤>이 공언한 바대로 이 곡이 “최초의 로큰롤 레코드”였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관건은 대중음악의 역사가 이 노래 ‘댓츠 올 라이트’를 기점으로 분기한다는 사실이다. 유투의 보노는 엘비스가 “사람들이 세상을 느끼는 방식을 바꿔놓았다”고 했다. 그것은 비단 50년대의 미국 사회에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이 노래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선입견을 격발시키고는 보다 나은 무엇으로 그것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로큰롤의 진보는 그렇게 엘비스의 작은 한 걸음에서 시작하여 젊음의 거대한 도약으로 이어져온 것이다.
리틀 리처드의 〈투티 프루티〉(1955) ~ 욕망·젊음 ‘로큰롤의 문법’ 쓰다
“어-왑-밥-어-루-밥, 어-롭-뱀-붐.” 의미 없는 음절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이 구절에 대해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록의 우주적인 의문 가운데 하나”를 제공한다고 했고, 닉 콘은 “로큰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요점정리”라며 대중음악사를 다룬 주요 저작으로 꼽히는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또 혹자는 그것이 드럼 연주를 본뜬 스캣이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난삽한 거리의 언어를 얼버무린 것이라고도 했다. 진의가 무엇이건 그 자체로 로큰롤의 캐치프레이즈이자 아이콘적인 일성이 된 그것은 리틀 리처드의 노래 <투티 프루티>를 여는 첫 구절이다.
1955년 리듬 앤 블루스 차트 2위, 전체 팝 차트 17위까지 오른 <투티 프루티>는 리틀 리처드(1932~)의 첫 번째 히트곡이었다. 스타덤을 향한 고속열차의 티켓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로큰롤 판테온의 입장권이 되었다. 하지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리처드는 무명에 가까웠다. 이미 1951년부터 음반을 발표하기 시작했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그가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뒷날의 한 인터뷰에서 리처드는 “당시 흑인 관객들은 블루스를 더욱 선호했다”고 말했다. 만약 로큰롤의 시대가 오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가 영웅을 낳는 법이다. 흑인음악에 대한 관심이 봇물 터져 나오던 시기, 로큰롤이 새로운 음악적 대세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려 리틀 리처드는 백인 청소년들한테 발견되었다. 그의 선구적 행보가 비로소 동시대의 관심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투티 프루티>는 전례가 없는 엄청난 템포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결합된 곡이었다. 리틀 리처드는 피아노를 부술 듯이 건반을 두드렸고, 야성적인 샤우트와 교성 같은 팔세토를 번갈아 노래했다. 게다가, 이탈리아어로 “온갖 과일”을 뜻하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그 노랫말은 성적인 은유들로 위험수위를 넘실거렸다. 그 모든 양태가 욕망의 분출구이자 젊음의 언어로써 로큰롤의 문법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리틀 리처드가 가져온 문화적 충격은 비단 음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외모와 의상과 무대 액션과 성 정체성이 모두 전대미문의 종합세트였다. 덕테일로 치켜세운 머리와 짙은 메이크업이 그랬고, 번쩍거리는 수트와 갖가지 보석 장신구들이 그랬으며, 피아노 위에 뛰어오르거나 발굽으로 건반을 두들기는 연주가 그랬다. 더불어 그는 최초의 공개적인 동성애자 뮤지션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심지어는 인기의 절정에서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하고 대중으로부터 사라진 결정에서조차 선구적이었다. 그래서 음악사학자 아놀드 쇼는 1974년 펴낸 책에서 제리 리 루이스와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의 센세이션이 리틀 리처드가 이미 선보인 것들의 재현에 불과했다고 썼다. 쇼가 생존하여 다시 평가를 내릴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 목록에 하드 록과 뮤직비디오와 힙합까지 포함시켰을 게 분명하다.
오늘날 리틀 리처드는 몇 안 남은 ‘살아 있는 전설’로 대접받고 있지만 그 위상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에 불과하다. 1962년 영국에서 열린 그의 컴백공연 오프닝 밴드가 비틀스였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그 이듬해의 영국공연 오프닝은 롤링 스톤즈였다.
로니 도니건의 〈록 아일랜드 라인〉(1955년) ~ 영 대중음악 현대화 이끈 ‘스키플 열풍’
영국에 있어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지위는 허울뿐이었다. 패전국 독일과 일본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시작한 반면,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렸던 대영제국의 하늘에는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시대의 표정은, 윈스턴 처칠의 아기 같은 미소가 아니라, 당대 존 오스본의 희곡 제목처럼 “성난 얼굴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문화의 영역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이미 영국적 전통이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미국화(Americanization) 현상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윌리엄 휴이의 소설과 그것을 영화화한 줄리 앤드루스 주연의 <아메리카나이제이션 오브 에밀리>(1964)는 미국화의 영향이 물질적인 면에 국한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사회학자 앤드류 케인은 “50~60년대의 영국 대중문화에 대한 어떤 논의도 반드시 미국화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 “그 같은 추이의 핵심 촉매는 로큰롤의 등장”에 있다고 했다.
세계대전 당시부터 5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영국 대중음악의 상황은 ‘1920년대의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스탠더드 팝과 뉴올리언스 재즈가 대세를 장악하고 있던 보수적 영국 사회에는 리듬 앤 블루스나 로큰롤이 발붙일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청소년들의 욕구가 상승하면서 문화적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마침내는 기성의 통제도 한계에 다다랐다. 이런 갈등 국면에 절충적 타협점을 제시하며 등장한 인물이 로니 도니건이었다. 재즈 밴드의 멤버였던 그는 기성세대에게는 안전해 보이고 청소년들에게는 새로워 보이는 음악적 출구를 선보임으로써 모두의 환영을 받았다. 스키플이다.
스키플은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아마추어적 방식에서 출발한 음악이다. 기타와 밴조에 더해, 빨래판으로 만든 타악기와 나무쟁반으로 만든 베이스와 담배상자로 만든 피들 따위의 원시적 악기 편성이 전통이었다. 그것 역시도 원류는 미국이었지만 로니 도니건(1931~2002)은 변형을 꾀했다. 로큰롤의 에너지와 속도감을 접목하여 미국에서와는 다른 양상으로 블루스와 컨트리의 현대화에 접근했던 것이다. 레드벨리가 불러 유명해진 곡을 스키플로 변형한 <록 아일랜드 라인>은 그 최초의 시도였고 최대의 히트가 되었다.
<록 아일랜드 라인>은 영국 대중음악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팝 차트 1위에 오른 이 곡은 데뷔작이면서 골드 레코드 판매량을 기록한 영국 최초의 사례였으며, 미국 차트 톱텐에 진입한 최초의 영국노래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몰고 온 스키플 열풍이 대중음악 창작의 저변을 넓혔다는 사실에 있다. 단순하지만 명쾌하고, 경박하지만 경쾌한 그 스타일은 누구나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하라”는 펑크 에토스의 선현이었다고 할 만한 것이다. 그래서 비평가 이언 체임버스는 스키플이, 당시 대두하기 시작한 “여러 가지 음악적 가능성을 보다 대중적이고 접근이 용이한 형식으로 전화시켰다”고 평했다. 실제로 당시 영국 전역에서는 스키플 밴드 결성 붐이 일었다. 그 밴드들 가운데는 리버풀 출신의 ‘쿼리멘’도 끼어 있었는데, 그 멤버 중 세 명은 뒷날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다.
프랭키 라이몬 앤 더 틴에이저스의 <와이 두 풀스 폴 인 러브>(1956년) ~ 또래집단과 소통한 ‘진정성의 힘’
신동이 거장으로 성장할 확률은 생각만큼 높지 않다. 연예산업 내부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자본의 탐욕과 대중의 기대는 어린 연예인의 희생을 요구한다. 주디 갈런드는 십대 초반부터 각성제를 복용했고, 셜리 템플은 불과 스물한 살에 연기활동을 접었다. 최근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보이고 있는 광기도 그와 다를 바 없다. 반면, 스티비 원더와 마이클 잭슨은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경우다. 로큰롤 1세대 스타 가운데 하나였던 프랭키 라이몬은 불행하게도 전자의 대표 격에 해당한다. 그는 극적으로 파멸한 신동이었다.
1956년 자작곡인 <와이 두 풀스 폴 인 러브>가 빌보드 팝 차트 3위에 올랐을 때, 프랭키 라이몬(1942~1968)은 불과 열세 살이었다. 뒷날 1963년의 스티비 원더와 1971년의 마이클 잭슨이 그와 같은 나이에 음반 데뷔를 하게 되지만, 당시만 해도 전례가 없는 기록이었다. 소프라노를 방불케 하는 변성기 전의 고음미성으로 라이몬은 틴에이저스의 ‘두웝’ 하모니를 이끌었던 것이다.
당대 흑인음악 스타일의 전형 가운데 하나였던 두웝은 ‘덤-두-다-우-워’와 같이 의미 없는 음절들로 보컬 하모니를 치장하는 방식을 일컫는데, 리듬 앤 블루스 연주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오직 목소리만으로 구성되는 아카펠라의 방법론과 구분된다. 그 차이를 지적해서 비평가 찰리 질레트는 두웝 스타일을 ‘보컬 그룹 로큰롤’이라고 칭했다. 그는 <와이 두 풀스…>가 “당대의 결정적인 보컬 그룹 로큰롤 음반”이라고 평하며,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청소년들에게 진심을 설득시키는” 노래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와이 두 풀스…>는 뛰어난 노래가 아니라 일등급 마케팅의 산물이었을 뿐”이라고 단언한 비평가 데이브 마시의 역설적 견해도 결론은 비슷하다. 그는 이후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지만 오직 프랭키 라이몬만이 그것을 “예술에 근접한 상품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라이몬의 존재감이 노래를 구했다는 의미다. 그의 존재감은 동시대의 동년배들에게 동질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하게 부각된 종류다. 당대 뮤지션들인 빌 헤일리와 척 베리는 이미 삼십 줄에 접어들었고, 패츠 도미노와 리틀 리처드 또한 이십대 중반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큰롤의 급부상을 청소년 또래집단의 동류의식 분출이라고 한다면, 라이몬은 관객의 눈높이에서 소통한 그 최초의 스타였다고 할 수 있다. 질레트가 언급한 ‘진정성’의 바탕이다.
데뷔곡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던 프랭키 라이몬은 그러나, 이후 추락을 거듭하며 약물에 의존하는 생활을 했다. 군복무가 그를 구원하는 듯 보인 때도 있었다. 심신을 일신하고 제대한 뒤 레코드 계약을 따내고 활동재개에 나섰을 때였다. 그러나 운명의 가혹함은 바로 그 순간에 라이몬의 발목을 잡았다. 1968년 2월 27일, 재기작의 녹음을 앞둔 밤에 새로운 시작을 자축한다며 손댄 약물이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불과 스물다섯. 라이몬은 가파르게 성장하던 음악산업의 꿈과 악몽을 그 짧은 인생으로 연기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와이 두 풀스…>는 로큰롤이 작품과 제품으로 분기하던 지점에 그가 세운 이정표로 남았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운드 독>(1956) ~ 50년대 성모럴 뒤흔든 불멸의 고전
1956년 초여름 어느 날, 소년 검프는 읍내에 나갔다가 가게 진열창에 놓인 티비를 통해 낯익은 사람의 모습을 본다. “아이들이 볼 게 아니”라며 어머니가 그의 눈을 가렸지만, 티비 속의 젊은이가 자신을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을 소년은 이미 알고 있다. 티비 속 청년의 이름은 엘비스 프레슬리로 밝혀진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의 도입부 한 장면이다. 미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질료 삼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 검프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과 조우하는데, 그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포레스트 검프는 물론 가상의 캐릭터다. 하지만 영화 속에 묘사된 그 저녁의 일화는 전미국을 경악하게 만든 실제 사건이었다. 정확히는 1956년 6월5일의 일이었고, 당대의 인기 프로그램 <밀튼 벌 쇼>의 방송 내용이었다. 4천만 명이 시청한 이 방송은 경련하듯 하반신을 흔들어대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모습을 송출한 대가로 곧장 스캔들에 휘말렸다. <뉴욕 데일리 뉴스>의 저명한 매체비평가 벤 그로스는 엘비스가 “선정적이고 상스러우며, 동물적 쾌락으로 채색된 구경거리를 전시했다”고까지 썼다. 이후 프레슬리에게는 ‘엘비스 더 펠비스’(골반을 흔드는 엘비스)라는 낙인이 찍혔고, 더불어 그날 방송된 <하운드 독>은 역사상 가장 떠들썩하게 등장한 노래로 기록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하운드 독>을 둘러싼 섹슈얼리티 논란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4주 후 방영된 <스티브 앨런 쇼>는 엘비스에게 점잖은 턱시도를 입혔고, 당대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는 엘비스의 상반신만을 찍어 방송했다. 인기는 사되 논란은 피하자는 방송사의 고육책이었지만 기성세대의 반발과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로큰롤에 대한 반감의 표출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성 모럴의 급변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이었다. 그 기저에는 두 편의 킨제이 보고서-남성편(1948)과 여성편(1953)이 발간되고, <플레이보이>(1953) 등 성인잡지들이 창간되면서 성에 관한 프로테스탄트적 믿음을 뒤흔든 50년대의 사회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성의 권위는 로큰롤 특히, 스타로 부상한 엘비스 프레슬리를 통해 불온한 성의식이 확산될 것이라는 판단에 패닉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는 <하운드 독>을 음악으로 평가했다. <하운드 독>은 대중음악계 최고의 송라이팅 콤비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제리 리버와 마이크 스톨러가 만든 노래다. 흑인 여성 블루스 가수 빅 마마 손튼이 발표하여 이미 1952년 리듬 앤 블루스 차트 상위권에 올랐던 이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통해 불멸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1956년 7월13일 발표된 엘비스 버전의 <하운드 독>은 무려 11주 동안이나 팝 차트 정상을 지켰는데, 1992년 보이즈 투 멘의 <엔드 오브 더 로드>가 13주 연속 1위의 신기록을 수립하기 전까지, 무려 36년 동안이나 빌보드의 최장기록으로 남았던 것이다.
<하운드 독>에 얽힌 스캔들은 이제 구시대의 해프닝으로 퇴색했다. 하지만 몰입상승이 초래하는 판단착오에 대한 우화로서의 가치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의 표현처럼, “비범하게 평범한 청년” 엘비스 프레슬리가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다.
버디 홀리의 <댓 윌 비 더 데이>(1957년) ~ 로큰롤의 ‘상식’을 깨다
돈 맥클린의 노래 <아메리칸 파이>(1971)는 1959년부터 1970년에 이르는 기간 미국의 사회와 문화를 훑어낸 서사시다. 여기서 맥클린은 ‘혼돈의 60년대’를 회의하고 ‘순수의 50년대’를 추억하는데, 버디 홀리의 죽음을 그 시대적 경계의 분수령으로 간주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아주 오래 전”의 사건을 되새기며 그는, 버디 홀리가 세상을 떠난 그날 음악도 함께 죽었다고 노래했다.
버디 홀리는 1959년 2월3일, 순회공연을 위해 임대한 경비행기가 이륙 직후 추락하면서 현장에서 사망했다. 홀리와 동승했던 리치 발렌스와 빅 바퍼까지, 세 사람의 로큰롤 스타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사고였다. 리틀 리처드의 은퇴선언(1957), 엘비스 프레슬리의 군입대(1958)에 이어 발생한 이 사건은 당사자들의 개인적 불행을 넘어 로큰롤 1세대의 종말을 고하는 상징이 되고 말았다. “음악이 죽은 날”이라는 돈 맥클린의 언명이, 비극적 역사와 낭만적 신화가 교차하는 지점에 세워진 로큰롤의 묘비명이 되어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된 이유다.
불과 2년 남짓한 기간을 활동했을 뿐인 버디 홀리(1936~1959)에게 그토록 막대한 함의가 부여된 까닭은 그의 특별한 존재감에 연유한다. 무엇보다 그는 최초의 백인 로큰롤 싱어-송라이터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위시한 동시대의 스타들이 전문 작곡가들로부터 곡을 받거나 흑인 뮤지션들의 노래를 다시 부르는데 치중했던 것에 반해, 홀리는 로큰롤의 문법을 온전히 체화하여 새롭게 변용시켰던 것이다. ‘백인 로큰롤’으로서 그의 음악적 방법론은 비틀스에게도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1964년,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비틀스의 첫 번째 미국방문에서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존 레넌은 “이곳이 버디 홀리가 섰던 그 무대인가요?”라고 질문을 던졌을 정도다. 외모에서도 버디 홀리의 독특함은 두드러진다. 그는 안경을 착용한 최초의 록 스타였다. 후광효과에 따른 선입견을 무용지물로 만든 그의 이미지는 로큰롤 최초의 반영웅적 표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댓 윌 비 더 데이>는 버디 홀리의 등장을 알린 첫 번째 히트곡이었다. 존 포드 감독의 수정주의 웨스턴 걸작 <추적자>(1956)에서 주인공 존 웨인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을 제목으로 삼은 이 노래는 미국과 영국의 히트차트 정상을 나란히 석권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딸꾹질을 하는 듯한 특유의 창법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주효했던 성공 요인은 노래 자체의 동시대성에 있었다. 타고난 멜로디 메이커로서의 자질에 더해, 버디 홀리는 로큰롤의 수용자 집단인 청소년들의 눈높이에서 소재를 찾고 가사를 만듦으로써 공감대의 울림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비평가 말콤 존스는 “모든 이들이 대세를 추종하고 있을 때, 버디 홀리는 눈부신 ‘최초’의 기록들을 작성했다”고 쓴 바 있다. 사실이 그랬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입지, 밴드 편성의 방식, 음악작법의 혁신,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기타의 사용과 안경의 착용까지 모든 것이 최초였다. 거기에 더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뮤지션으로서도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는 점은 운명의 아이러니일 터다.
척 베리의 <조니 비 굿>(1958년) ~ ‘보이저’에 실어보낸 세기의 로큰롤
1985년 최대 흥행작이었던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사건의 대부분이 벌어지는 시공간은 30년 전의 과거, 곧 1955년이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댄스파티 장면의 배경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주인공 마이클 제이 폭스는 요란한 쇼맨십으로 로큰롤을 연주하여 극중 관객들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리고는 “여러분은 아직 그것(로큰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군요. 하지만 여러분의 아이들은 그걸 사랑하게 될 겁니다”라고 덧붙인다. 그가 연주했던 곡은 척 베리의 <조니 비 굿>이었다.
<조니 비 굿>은 1958년 처음 발표된 노래다. 영화가 굳이 발표연도를 왜곡하면서까지 이 노래를 사용한 이유는 분명하다. 시간여행이라는 소재에 재미를 더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노랫말에 있었다. “배운 것은 없지만 기타 연주만은 끝내주는” 소년의 얘기를 담은 <조니 비 굿>의 가사는 극중 주인공이 록 스타를 꿈꾸는 소년이라는 점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50년대의 청소년들이 로큰롤을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도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척 베리 본인의 성공담이기도 했다.
척 베리(1926~)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 기타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단 한 번만 들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특유의 연주로 일렉트릭 기타의 신기원을 이룩한 그에게 <기타 월드>지는 “로큰롤 기타 연주를 발명했다”며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실제로 베리의 기타는 블루스와 컨트리의 전통을 황금비율로 연계하는 지점이었다. 로큰롤이 흑백 간의 음악적 인종통합의 산출물이라고 할 때, 척 베리는 버디 홀리와 함께 각각의 피부색을 대표하는 궁극의 뮤지션으로 우뚝 선다. 흑인으로 빌보드 컨트리차트 정상에 오른 <조니 비 굿>의 연주가 바로 그 표상이다.
더불어, 척 베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작사가로서의 능력이다. 그의 절충적 감각은 노랫말을 다룸에 있어 더욱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베리가 써낸 가사들은 블루스의 운문적 성격보다 컨트리의 산문적 특성에 가깝다. 서정보다 서사를 중시하는 작법은 짧은 기타 솔로의 마디마디에 엮여 정곡을 찌르는 드라마가 된다. 그래서 에어로스미스의 조 페리는 그를 “로큰롤의 어니스트 헤밍웨이”라고 했고,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고는 “미국적인 극단성”이라는 측면에서 월트 휘트먼과 비교했다. 척 베리의 노랫말은 무엇보다, <조니 비 굿>의 경우처럼 사춘기 청소년들의 심리를 다루는 방식에서 로큰롤의 전형으로 남았다.
존 레넌은 “로큰롤에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척 베리라고 할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로큰롤이 척 베리에 이르러 완성을 보았다는 의미다. 그 같은 견해를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사례도 있다. 1977년 미국이 발사한 우주탐사선 ‘보이저’는 지구 문명을 압축 수록한 골든 레코드를 싣고 떠났다. 세계 각국의 인사말과 민속음악을 담은 그 음반에 로큰롤로는 유일하게 수록된 노래가 바로 척 베리의 <조니 비 굿>이었다. 이에 “외계인들이 척 베리의 곡을 더 보내라는 메시지를 전해왔다”고 주장한 코미디언 스티브 마틴의 농은 덤이다.
Chuck Berry - Johnny B. Goode
성과 속 경계 허문 ‘솔’의 탄생 ~ 레이 찰스의 <왓드 아이 세이>(1959년)
뉴 저널리즘의 선도적 작가 노먼 메일러는 1957년, 좌파 계간지 <디센트>에 흑인문화의 역동성이 백인 주류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에세이를 게재했다. 여기서 메일러가 그 활력의 핵심으로 제시한 것은 “미국 흑인의 음악과 섹슈얼리티”였다. 그러나 흑백 통합에 동조하는 개방적 시각에도 그의 주장은 시대의 급변을 제대로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당시 서른다섯 살이었던 메일러의 인식에 흑인음악은 여전히 재즈 시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과 섹슈얼리티의 관계가 성과 속의 경계마저 허물고 있던 상황을 따라잡기에 그는 이미 기성이었다. 메일러는 레이 찰스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레이 찰스(1930~2004)는 54년 발표한 <아이 갓 어 우먼>에서 가스펠과 리듬 앤 블루스를 결합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담하게도 종교음악의 선율을 빌려다 관능적 사랑 노래를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리듬 앤 가스펠’이라고 불렸던 찰스의 음악은 <아이 갓 어 우먼>의 모티프에서 시작하여 <왓드 아이 세이>의 사운드로 완성되었고, 6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솔의 탄생이다.
흑인 뮤지션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솔 음악의 핵심은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스펠의 전통은 바로 그 느낌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솔 창법의 근간이 되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노랫말이 종교적 메시지와 세속적 서사로 구분된다는 점이었는데, 레이 찰스가 <왓드 아이 세이>에서 들려준 도발적 시도는 바로 그 명백한 예시다.
<왓드 아이 세이>에서 레이 찰스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남녀간의 애정을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교음(嬌音)과 기성(奇聲)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보수층의 비난과 청년층의 열광을 동시에 받았다. 비평가 넬슨 조지는 찰스가 “종교적 각성의 환희와 육체적 충족의 쾌락을 동일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며, 그것을 통해 “토요일 밤의 죄인과 일요일 아침의 교인이 동일한 사람이라는 현실”을 각성케 했다고 평했다.
<왓드 아이 세이>의 폭로적 솔직함은 당시로서 전례가 없는 형식과 사운드를 통해 증폭되었다. 이 곡은 기승전결이 희박한 즉흥적 연주의 다층구조로 ‘모자이크’되었는데, 6분30초에 이르는 연주시간 때문에 한 면에 3분 남짓한 싱글 레코드의 수록 한계에 맞춰 두 파트로 음반 앞뒤에 나뉘어 담겼다. 게다가 일렉트릭 피아노라는 (당시로선) 생경한 악기를 전면에 사용했고, 스튜디오 녹음임에도 뮤지션과 관객이 얘기를 주고받는 듯한 설정 부분을 삽입하기도 했던 것이다.
<왓드 아이 세이>의 혁신은 우연의 산물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낸 성과다. 제이미 폭스에게 아카데미 주연상을 안겨준 찰스의 전기영화 <레이>(2004)가 잘 보여주고 있다시피, 이 노래는 예정보다 공연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시간을 때우려고 즉석에서 만들어낸 연주였다. 59년 피츠버그 교외의 브라운즈빌에서 펼쳐졌던 공연을 재현한 그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솔의 탄생”을 경험하는 간접 기회를 제공했던 셈이다.
Ray Charles - What'd I Say
리치 발렌스의 <라 밤바>(1958년) ~ ‘라틴 록’의 효시…인종불문 열광
로큰롤은 미국 대중음악의 산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미국 대중음악의 뿌리가 다국적·다민족적 문화의 토양에서 발생했다는 것 또한 기정 사실이다. 그래서 교과서적 모범답안은 그것이 유럽 백인과 아프리카 흑인의 음악적 이종교배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특히, 중남미의 전통음악이 미국 대중음악에 끼친 영향력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것을 놓친 답이다. 1880년대 미국과 유럽의 댄스홀을 휩쓸었던 쿠바 전통의 ‘하바네라’에서부터 이미 라틴 음악은 서구 대중의 취향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리치 발렌스는 그 중남미의 음악 전통과 로큰롤을 결합시킨 선구자였다. 열일곱 살에 데뷔하여 1년도 채 못 되는 기간을 활동했을 뿐인 그에게 “최초의 라틴 록 스타”라는 기념비적 수사가 붙은 근거다. 가난한 치카노(미국에서 태어난 멕시코계) 노동자의 후예였던 발렌스에게 ‘라틴’은 혈통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 정체를 지칭하는 틀이기도 했던 것이다. 최대 히트곡이었던 <도나>가 아니라, <라 밤바>를 그의 대표곡으로 꼽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히스패닉 리치 발렌스의 영혼과 심장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 밤바>는 빌보드 팝 차트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스페인어 노래였다. 리치 발렌스는 수백 년 동안 중남미에서 구전되던 민요에 강렬한 로큰롤 리듬과 기타 연주를 가미하여 인종 불문의 히트곡을 탄생시켰다. 주목할 것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발렌스가 스페인어를 구사할 줄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가사를 암기하면서까지 이 노래를 부른 것은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었다. 그것을 통해 로큰롤의 어법에 새로운 가능성을 덧붙인 것은 덤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라틴 록이 60년대 후반 산타나의 등장 이전까지 거의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것은 리치 발렌스의 때이른 죽음에서 기인한다. 그는 1959년 2월 3일 사망했다.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기도 전이었다. 게다가 죽음의 성격에서조차 불운했다. 비행기에 동승했다 함께 세상을 떠난 버디 홀리의 거대한 존재감 때문이었다. 비평가 리치 운터버거가 발렌스는 “무엇보다도 버디 홀리와 함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두 명의 록 스타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평했을 정도다.
하지만 리치 발렌스는 80년대 후반 기적적으로 부활했다. 전기영화 <라 밤바>(1987)를 통해서였다. 급증한 미국내 라틴계 인구의 시장성을 간파한 영화사의 전략과 역할 모델을 필요로 했던 히스패닉 커뮤니티의 문화운동이 조우하여 산출한 수확이었다. 허레이쇼 앨저의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성공신화를 체현한 발렌스의 삶이 소수 이민족의 가슴속에 아메리칸 드림의 구체적 표상으로 거듭난 것이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했던 산타나와 로스 로보스는 물론이고, 90년대 후반 리키 마틴과 제니퍼 로페즈의 성공에까지 드리워진 발렌스의 자취다.
시렐스의 <윌 유 러브 미 투모로>(1960년) ~ 청소년 겨냥 ‘걸 그룹’의 전형
1950년대 말 로큰롤 1세대의 극적인 퇴장 이후, 미국 대중음악계는 보수성을 강화했다. 로큰롤을 사회문제로 치부했던 지배적 여론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거대한 규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청소년 소비시장의 무궁한 가능성이었다. 레코드업계는 로큰롤의 리듬과 선율을 차용하되 고전적인 창법과 얌전한 자태로 그것을 윤색함으로써 시대와 타협했다. ‘틴 아이돌’과 ‘걸 그룹’이 그 대표적 산물이었다.
틴 아이돌은 이른바 ‘비디오형 가수’의 원조 격이다. 출중한 외모를 앞세운 ‘오빠’들이 필라델피아에 거점을 둔 당대 최고의 인기 티브이쇼 ‘아메리칸 밴드스탠드’를 통해 시장을 지배했다. 음악적 새로움과는 무관한 슈도로큰롤이 그들의 노래였다. 반면, 걸 그룹은 전통적 음악 중심지 뉴욕의 노하우가 만들어낸 일련의 여성중창단을 가리킨다. 최고 실력의 작곡가들과 프로듀서들이 포디즘적으로 분화된 작업을 통해 세련된 팝 음악을 세공해냈다. 포스트-로큰롤의 두 양상은 가수의 성성과 음악의 속성에서 드러나는 그런 극명한 차이만큼이나 상반된 평가를 받았는데, “이 시기 최고의 레코드들은 뉴욕에서 나왔고, 최악의 것들은 필라델피아로부터 왔다”고 단정한 비평가 그레그 쇼의 정의는 여전히 미국 대중음악사를 지배하는 관점이다.
네 명의 소녀로 구성된 시렐스는 바로 그 걸 그룹의 전형이었다. 가창의 기교마저 불순하게 느껴질 정도로 순수한 목소리와 하모니로 사춘기의 감성을 노래했던 그들은, 흑인 여성중창단으로 사상 처음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른 <윌 유 러브 미 투모로>를 통해 이후 등장한 모든 걸 그룹의 모범이 되었다. <윌 유…>는 “내일도 날 사랑해줄 건가요”라고 묻는 제목 그대로,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의 불안감이라는 시대 불문의 소재를 그들 눈높이에 맞춘 감정이입으로 풀어냄으로써 성공을 거뒀다. 그래서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뛰어난 가수라면 누구나 도전해보고 싶어 할 아름다운 선율 때문이 아니라, 소녀의 성적 정체성의 특정한 단계를 규정한 가사 덕분”에 이 노래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썼다.
<윌 유…>의 절절하게 실감나는 노랫말은 당대 최고의 송라이팅 콤비였던 원작자 캐럴 킹과 제리 고핀의 자기고백을 통해 극대화한 것이었다. 특히 연인 사이기도 했던 고핀과의 관계에서 혼전임신을 경험한 킹의 번민은 이 노래에 사실성을 불어넣은 요인이었다. 당시 킹 자신이 십대 후반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노래를 부른 시렐스와 노래를 들은 청소년들 사이를 연결한 킹의 매듭은 또래집단의 동질감으로 묶인 것이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포 룸>에 참여하여 널리 알려진 여성 감독 앨리슨 앤더스는 (느슨하나마) 캐럴 킹과 시렐스의 얘기를 바탕으로 영화 <그레이스 오브 마이 하트>(1996)를 만들었다. “걸 그룹의 음악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커다란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는 연출의 변을 통해 그는 노래와 세상을 조응하게 한 통로가 진정성에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 ~ the shirelles
처비 체커의 <더 트위스트><1960년> ~ ‘춤+음악’ 트위스트 열풍의 원조
대중음악과 유행 춤의 밀월관계는 연원이 오래다. 19세기 말 ‘찰스턴’의 대유행 이래, 미국의 대중음악은 새로운 춤의 유행을 낳고 다시 그 춤을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되는 단계를 거치며 시대의 경향을 만들어내곤 했다. 로큰롤과 함께 성장한 50년대의 ‘합’이 그랬고, 음악 장르와 춤의 형식이 근원적으로 결합한 70년대의 ‘디스코’가 그랬다. 트위스트는 60년대(특히, 전반부)를 대표하는 율동이자 음악이었다.
트위스트는 파트너 없이 혼자서도 출 수 있다는 점에서 전례가 없는 춤으로 인기를 누렸다. “엄지발가락으로 담배를 비벼 끄는 동작”이면 족한 단순한 형식도 남녀노소 없이 사랑 받은 요인이었다. 더불어 수많은 관련 음악이 쏟아져 나오며 인기가 끝없이 치솟았는데, 그 유행의 원조이자 열풍의 진앙은 처비 체커의 <더 트위스트>였다. 행크 발라드가 1959년 발표했던 것을 리메이크한 이 노래는 발표 직후인 1960년 9월에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데 이어 1962년 1월에 재차 정상을 밟을 정도로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1942)와 함께, 동일한 노래로 2차례 이상 빌보드를 정복한 역사상 단 두 번의 경우 가운데 하나였으니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처비 체커와 트위스트의 성공 이면에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도 있었다. 비평가 닉 콘은 트위스트가 본질적으로는 “기껏해야 6개월이면 수명이 다할 3류 유행”이며 “또 다른 훌라후프”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그것이 전세계적인 유행으로 웃자랄 수 있었던 것은 “진짜 음악”이 부재한 상황에서 등장한 데다 “미디어의 호들갑”이 더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더 트위스트>는 막강한 매체권력이 스타와 트렌드의 공백을 파고든 결과였다. 필라델피아에서 송출한 인기 프로그램 <아메리칸 밴드스탠드>가 그 매개였다. 널찍한 스튜디오에서 청소년들이 인기가수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방식의 수많은 아류를 낳은 이 프로그램은 당대 가장 강력한 유행전파 매체였는데, 진행자 딕 클락이 배후를 조종했다. 그는 ‘건전한 청소년 문화’를 구호 삼아, 로큰롤의 파격과 저항을 거세한 유행가를 홍보함으로써 주류 미디어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을 무기로 음반업계에 개입하여 막대한 수익을 챙겼다. <더 트위스트>는 그가 지분을 소유한 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되었고 그의 프로그램을 통해 선전되었다. 심지어 처비 체커라는 예명은 그의 부인이 낸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시사지 <라이프>는 딕 클락을 군복무중이던 엘비스 프레슬리와 대비하여 “독재자는 집에, 제왕은 전장에”라는 제목의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다.
트위스트의 이상열풍과 처비 체커의 과장된 성공은 기성과 미디어의 통제 속에서 산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음악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 힘들다. 그러나 비평가 래리 스타의 지적처럼, 그 결과로 파생한 “새로운 춤 문화”와 “유행가를 사회적 바디 랭귀지와 조합시킨” 원형으로서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Chubby Checker - The Twist Chubby Checker - Let's Twist Again
미러클스의 <숍 어라운드>(1960년) ~ ‘모타운’ 퍼레이드의 도화선
대중문화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산업도시의 성쇠가 대중문화의 양상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이라고 할 것이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대명사였던 도시 디트로이트의 부침에서 그 단적인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전성기에 미국 4대 도시로 꼽혔으나 지금은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이곳의 과거와 현재는, 록밴드 키스가 활기차게 노래한 <디트로이트 록 시티>(1976)와 래퍼 에미넴이 암울하게 그려낸 <8마일>(2002) 사이에서 거대한 단절면을 드러낸다. 두 작품을 13년 간격으로 반분하는 시점에 서 있는, 쟁점적인 다큐멘터리인 마이클 무어의 데뷔작 <로저와 나>(1989)는 그 간극이 미국 자동차산업의 쇠퇴로 시작된 균열의 여파임을 보여주는 기록인 셈이다. 좋았던 시절의 디트로이트를 상징하는 ‘모타운’에 대한 해석도 그와 같은 맥락에 있다.
모타운은 전직 권투선수이자 재즈 음반상이었으며 작곡가와 프로듀서로도 활동하던 베리 고디가 1959년 설립한 솔 음악 전문 레이블이다. 모타운은 무엇보다 솔의 감성을 팝의 감각과 결합하여 음악의 인종적 색채를 희석시킴으로써, 흑백 구분 없이 폭넓은 사랑을 받은 독자적 스타일로 유명해졌다. 비평가 리치 운터버거가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로 인지된 레이블은 오직 모타운 하나뿐이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모타운은 하나의 경향이었고 태도였다.
모타운의 성공은 또한 적시적소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로큰롤 1세대의 퇴장과 비틀스의 역사적 미국 상륙(1964) 사이, 트렌드의 공백기에 등장하여 60년대 후반 흑인 인권운동의 절정기에 상한가를 구가한 타이밍이 우선 그렇다. 대표적인 흑인 노동자 밀집지역인데다 거대도시임에도 변변한 지역 기반 레코드사가 없던 디트로이트의 상황 또한 모타운의 발판이었다. ‘모터 타운’, 즉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의 애칭을 축약한 그 이름부터가 태생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미러클스의 <숍 어라운드>는 모타운 최초의 밀리언셀러였다는 점에서 노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빌린 돈 800달러로 회사를 설립한 베리 고디의 미약한 시작을 창대한 성공의 반석에 올려놓은 이 노래는 빌보드 싱글 차트 2위까지 올랐는데, 모타운이 이후 10년 동안 펼쳐 보이는 98곡 톱텐 히트 퍼레이드의 ‘기적’을 촉발한 도화선이기도 했던 것이다.
베리 고디는 모타운의 음악을 “디트로이트 사운드”라고 불렀다. 그러나 비평가 찰리 질렛은 어디에도 “딱히 디트로이트적이라고 할 게 없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모타운이 1972년 본사를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한 뒤 점차 쇠락해 갔다는 사실에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모타운을 60년대 가장 성공적인 독립 음반사이자 한때나마 모든 부문을 통틀어 최대의 흑인 기업체로 만든 요인 가운데는 디트로이트의 자동차산업이 발전시킨 분업적 생산라인을 음반 제작 공정에 도입한 절충주의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프림스,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그리고 마이클 잭슨을 ‘생산해낸’ 그 가공할 시스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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