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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한겨레 연재) 세상을 바꾼 노래 (~1950)

by Wood-Stock 2009. 6. 17.

빌리 홀리데이 <스트레인지 프룻>(1939년) ~ ‘인종폭력 광기’ 고발한 피울음

 

“화사한 남부의 목가적 풍경 속에/ 눈이 튀어나오고 입이 뒤틀려 (포플러 가지에 매달린 검은 몸뚱이)/ 달콤하고 청명한 목련 향기와/ 불현듯 코를 찌르는 살이 타는 냄새….”

 

에드가 앨런 포의 괴담 한 토막이 아니다. 로트레아몽의 잔혹시 구절도 아니다. <스트레인지 프룻>의 노랫말은 차라리 사건기자의 르포르타주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이 고문하고 목 매달달아 죽인 흑인의 주검을 “남부의 나무에 열린 괴상한 열매”로 비유한 이 노래는 미국현대사의 치부인 인종차별 폭력의 참상을 소름 끼치도록 세밀하게 묘사한다. 대중음악의 정서적 임계점을 넘어서는 날카로운 단어들의 충격파는 그러나 빌리 홀리데이의 나직한 목소리와 맞닿는 순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울림이 된다.

 

빌리 홀리데이의 <스트레인지 프룻>은 인종차별에 최초로 현대적이고 직접적으로 저항한 음악이다. 이전에도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노래는 있었다. 루이 암스트롱이 부른 <블랙 앤 블루>나 어빙 벌린이 만든 <서퍼 타임>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곡은 앞선 전례들을 순진한 동요로 만들어버렸다. <스트레인지 프룻>은 감성이 아니라 각성에 부친 노래였다는 점에서 본질부터가 달랐다.

 

이 노래의 원작자는 뉴욕 브롱크스의 고등학교 교사였던 유대계 백인 애벌 미로폴이었다. 린치 현장의 기록사진에 충격을 받은 그는 1937년 루이스 앨런이란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악보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 홀리데이다. 1939년 1월, 뉴욕 최초의 인종개방 클럽인 ‘카페 소사이어티’에서 열린 초연은 그 자리에서 이미 팝음악의 전설이 되었다. 홀리데이는 곧바로 이 노래를 녹음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논란을 두려워한 소속사 콜럼비아는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결국 홀리데이는 인디레이블 코모도를 통해서야 레코드를 발매할 수 있었다. 1939년 4월 첫 번째 세션에서 빌리 할리데이는 최고의 버전을 만들어냈다.

 

비평가 요아힘 베렌트는 “재즈에서는 ‘무엇을’ 하느냐 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게 진리”라고 전제한 바 있다. 그리고 홀리데이가 바로 그 “진리의 화신”이라고 덧붙였다. <스트레인지 프룻>은 마치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홀리데이는 이 곡을, 치밀어 오르는 울분과 설움을 억지로 삼켜내고서야 겨우 목구멍 너머로 내놓을 수 있는, 고통스럽게 토해낸 한숨처럼 노래했다. 그의 해석에 원작자 미로폴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홀리데이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스타일로 내가 이 노래에 바랐던 비탄과 충격의 질감을 완전하게 구체화시켰다.”

 

<스트레인지 프룻>은 예상대로 엄청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홀리데이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 힘겨워하면서도 모든 공연 마지막에는 이 곡을 불렀다. 노래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노래에 담긴 아픔을 두려워했지만 그조차도 끝내 떨쳐냈던 것이다. 홀리데이는, 적어도 이 노래에 관한 한, 위대한 가수 이전에 용감한 인간이었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그는, 비평가 랠프 글리슨의 말처럼 “인생을 통해 <스트레인지 프룻>의 가사를 체화”했던 것이다. 뒷날 유색인종/여성/동성애자라는 이름의 ‘괴상한 열매’들이 천부의 인권을 외치며 거리에 섰을 때,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이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마음을 울리는 노래는 세상에 많다. 하지만 영혼까지 흐느끼게 하는 곡은 흔치 않다. 빌리 홀리데이의 <스트레인지 프룻>이 그런 노래다.

 

 

 

 

베시 스미스의 〈세인트루이스 블루스〉(1925년) ~ 블루스로 토해낸 흑인여성의 운명

 

“아일랜드인은 유럽의 검둥이고, 더블린 사람은 아일랜드의 검둥이니까.”

 

더블린의 후락한 뒷골목을 배경으로 한 영화 〈커미트먼트〉(1991, 앨런 파커 감독)에서 레코드 제작자를 꿈꾸는 주인공은 자신들이 흑인음악을 ‘연주해야만 하는’ 이유를 그렇게 풀이했다. 그 표현을 빌리면 1920년대 블루스 초창기의 유명한 가수들이 죄다 여성이었던 까닭을 설명할 수 있다. ‘흑인여성은 검둥이 중의 검둥이였기 때문’이다. 블루스는 인종차별로 억압받은 미국 흑인역사의 산물이었고, 흑인여성은 거기에 성차별의 중압까지 부과받은 열등한 피조물이었던 것이다.

 

1920년대 최고의 가수였고 현재까지도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의 하나로 꼽히는 베시 스미스(1894~1937)는 인생을 통해 블루스를 살았던 인물이다. 1923년 80만장이 팔려나간 싱글 〈다운하티드 블루스〉로 파산 직전의 ‘콜럼비아’ 레코드사를 기사회생시키며 극적으로 데뷔한 스미스는 당대 가장 성공한 흑인 예술가였다. 후대의 영향력도 거대하다. 빌리 홀리데이, 마할리아 잭슨, 아레사 프랭클린, 재니스 조플린- 각각 재즈, 가스펠, 솔, 록을 대표하는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들이 하나같이 그를 영감의 원천으로 꼽았을 정도다. 풍부한 성량과 세밀한 표현력을 동시에 갖춘 스미스의 보컬은 블루스의 미묘한 본질, 즐거운 노래에도 눈물이 담겨 있고 슬픈 노래에도 낙관이 실려 있는 운명적 아이러니를 감동적으로 설득한 궁극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는 베시 스미스 최고의 노래일 뿐만 아니라, “재즈의 〈햄릿〉”이라 불리는, 더블유시 핸디 원작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해석이다. 주지하다시피, 1920년대는 아직 블루스와 재즈가 개별적인 장르로 완전히 분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스미스의 존재가 그 경계를 나눴다. 그래서 프로듀서 존 해먼드는 그의 노래가 “오늘날 블루스의 바로 그것”이라고 평했다. 스미스의 노래는 구전으로만 남은 영가, 블루스, 재즈 사이의 근원적 동질성과 상호 영향관계에 대한 로제타스톤이다. 또한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는, ‘블루스의 어머니’ 마 레이니에게 발탁된 스미스가 ‘블루스의 아버지’ 핸디의 곡을 통해 ‘블루스의 여왕’에 등극했음을 보여주는, ‘고전 블루스’ 가계도의 꼭짓점이기도 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로도 유명한 소설 〈컬러 퍼플〉의 작가 앨리스 워커는 여성 블루스 가수, 특히 베시 스미스에게서 창조적 자극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작품에는 스미스를 모델로 한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은 소설과 다르다. 스미스의 말년은 초라하고 비참했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그는 거의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이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었다는 자가 장례식 기금을 챙겨 사라지는 바람에 그의 무덤이 묘석도 없이 30년 이상 버려져 있었다는 대목에는 말문조차 막힌다.

 

베시 스미스는 흑인이었고 여성이었다. 그것은 그가 끝내 벗어나지 못한 원죄의 굴레였다. 그가 동명의 단편영화 〈세인트루이스 블루스〉에서 노래와 연기로 새겨 넣은 장면은 바로 자신의 인생이었던 것이다.(영화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는 외국의 유명 유시시 사이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Bessie Smith                                                      Glenn Miller Band 

 

 

지미 로저스의 〈티 포 텍사스〉(1927년) ~ 컨트리 음악, ‘백인의 블루스’로 등극하다

 

교통수단의 발달이 초창기 미국 대중음악의 발전에 미친 영향은, 오늘날 인터넷이라는 소통 수단이 음악의 유통 방식을 변화시킨 것에 비할 만큼 지대했다. 레코드와 라디오의 발명 이전에는 교통수단이 곧 통신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악보에 채록된 적도 없는 국지적 민속음악이 지역 경계선을 넘어서는 길은 사람의 이동과 함께 전파하는 방법뿐이었다.

 

재즈의 발상지 뉴올리언스와 블루스의 본고장 미시시피 유역이 수로교통의 오랜 요지였다는 점은 그 명백한 증거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새로운 음악 형식들은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상호교류 속에서 발견되고 발전된 것이었다. 그래서, 컨트리 음악사상 최초의 스타인 지미 로저스가 기관차 제동수 출신이라는 사실에는 필연성마저 내포된 것처럼 보인다. 로저스에게 기관차는, 마크 트웨인에게 증기선이 그러했듯, 창작의 세계와 소통하는 전위였다.

 

지미 로저스(1897~1933)는 흔히 ‘컨트리 음악의 아버지’로 불린다. 각지를 떠돌며 만난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음악적 자양분을 흡수하여 독자적 스타일로 뿌리를 내린 그는 무엇보다, ‘백인의 블루스’로서 컨트리 음악의 전범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존재다. 낡은 구전가요나 스탠더드 넘버를 반복해 녹음하던 당시 가수들의 관행과 달리, 로저스는 자작곡을 통해 개인적 경험과 독자적 느낌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 그의 연주 패턴과 노랫말과 창법이 고스란히 컨트리 음악의 교본으로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근거다. 그래서 1961년 ‘컨트리 음악 명예의 전당’은 지미 로저스를 그 첫 번째 헌액자로 선정하며 “모든 것을 시작한 인물”이라는 찬사를 바쳤던 것이다.

 

1927년 11월, 로저스의 생애 두 번째 녹음 세션에서 탄생한 〈티 포 텍사스〉는 그 ‘모든 것을 시작한 노래’였다. 50만 장이 팔려나간 이 곡은 로저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요들 테크닉과 흑인의 팔세토 발성을 결합시킨 그 특유의 창법을 처음 선보였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 노래의 다른 제목인 〈블루 요들 넘버 원〉은 로저스의 독특한 창법을 가리키는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총 13편의 ‘블루 요들’ 연작을 발표하여 컨트리 음악의 고전적 스타일을 완성시켰고 전례가 없는 대중적 성공을 누렸다. 시리즈의 아홉 번째 노래 〈스탠딩 온 더 코너〉(1930년)에서는 당대 최고의 재즈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과 역사적인 협연을 펼치기도 했다. 비평가 피터 구랠닉이 “당대의 신화적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영향력에 필적할 만한 인물은 베이브 루스 그리고 뒷날의 엘비스 프레슬리밖에 없다”고 단언한 것도 과장이 아니다.

 

지미 로저스가 ‘가난의 질병’이라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점은 어떤 드라마보다 극적인 인생의 아이러니다. 기관차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전진시킨 원동인 동시에 비극적 최후를 촉진시킨 원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하고 주연한 〈홍키통크 맨〉(1982년)은, 느슨하게나마, 그의 죽음을 모티프로 각색한 영화다. 컨트리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던 ‘뮤지션 이스트우드’는 극중에서 직접 노래도 불렀지만, 현명하게도, 지미 로저스의 요들 창법을 흉내내는 따위의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았다.

 

 

 

 

 

루이 암스트롱의 〈웨스트 엔드 블루스〉(1928년) ~ ‘재즈’의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다

 

1999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20세기를 결산하며 “금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을 선정했다. 비슷한 시기 <라이프>도 새 천년을 앞두고 “밀레니엄을 만들어온 100인”의 리스트를 공개했다. 비틀스를 위시한 몇몇 대중음악가의 이름이 명단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서 언급된 인물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루이 암스트롱. 그에 대해 <타임>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파블로) 피카소, (제임스) 조이스와 나란히 언급될 수 있는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했고, <라이프>는 “그의 즉흥연주 능력과 기교적 탁월함이 재즈를 규정했다”고 평했다.

 

루이 암스트롱(1901~1971)은 재즈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솔로이스트였다. 그 말은 곧, 그가 재즈를 ‘재즈답게’ 만든 최초의 혁신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재즈는 악기와 악곡을 통제하는 냉철한 이성과 그것을 정서적으로 치환해내는 뜨거운 감성 사이의 균형감각을 전제로 하는 고도의 창조행위다. 그 표준을 제시한 인물이 암스트롱이었다. 그래서 <타임>은 “아폴로와 디오니소스가 뉴올리언스 출신 천재의 격렬한 내적 세계에서 만났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웨스트 엔드 블루스〉가 바로 그 전범이다.

 

스승이었던 킹 올리버의 곡을 연주한, 암스트롱의 1928년 버전 〈웨스트 엔드 블루스〉는 많은 비평가들이 “본격적인 재즈 역사의 시발점”으로 꼽는 작품이다. 카덴차 스타일의 짧은 독주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가 신기원이었다. 얼 하인스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에 이어지는 암스트롱의 마지막 리드 파트는 재즈 솔로의 형식과 구조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명연이었다. 잔잔하게 넘실대는 스윙 리듬, 치밀하게 축조된 솔로 연주, 노래하기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스캣 창법에 이르기까지, 3분을 겨우 넘는 단출한 연주 시간 동안 암스트롱은 재즈의 우주에 창세기적 질서를 부여하는 거대한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웨스트 엔드 블루스〉를 통해 루이 암스트롱이 제시한 음악적 비전의 영향력은 재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가 악기를 통해 인간을 드러낸 방식은 이후 20세기의 대중음악 전체에 영감을 주었다.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대중문화 책임자였던 빌리 마틴은 “루이 암스트롱이 20세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했을 정도다. 실제로 암스트롱은 베시 스미스의 〈세인트루이스 블루스〉와 지미 로저스의 〈블루 요들 넘버 나인〉에서, 그리고 빙 크로스비와의 협연작들을 통해 줄곧 블루스와 컨트리와 팝을 아우르는 ‘20세기 대중음악의 허브’로 기능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이 〈웨스트 엔드 블루스〉를 “로큰롤 역사를 만들어온 노래” 가운데 하나로 꼽은 것은 그에 대한 상징적인 헌사나 다름없다. 대중적인 스타일에 치우쳤던 루이 암스트롱의 후기 활동은 오늘날에도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암스트롱이 견뎌야 했던 혹독한 차별의 세월과 그 속에서 창조해낸 음악적 유산을 외면할 수는 없다. 〈왓 어 원더풀 월드〉의 낙관적 메시지는 지난한 여정을 마친 자의 여유를 통해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 앞에서 대중영합적이라는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세상을 바꾼 거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Louis Armstrong                                                 Ethel Waters  

 

 

레드벨리의 <미드나이트 스페셜>(1934년) ~ 감옥에서 건진 미국 민요 ‘불멸의 노래’ 되다

 

감옥은 시간이 정체된 곳이다. 사회로의 포섭을 위해 사회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 변화 없는 일상을 보낸다. 그래서 ‘쇼생크’ 교도소의 수감자들은 이미 수십 번이나 돌려본 리타 헤이워스 영화에 매번 시사회와 같은 열광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 포크음악의 보존과 전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민속학자 존 로맥스가 구전가요들을 녹음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최대한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머물러 있는 음악을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1933년 로맥스에게 ‘발견’되었을 때, 허디 레드베터는 폭력상해죄로 복역 중이었다. 본명보다 레드벨리(188?~1949)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타고난 음악재능과 방대한 레퍼토리로 로맥스를 사로잡았다. 블루스와 컨트리의 뿌리였다고 할 노동요, 영가, 춤곡, 동요의 원형질들이 그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권위 있는 음악지 <롤링 스톤>이 레드벨리를 일컬어 “현대 세계와 민속 전통 사이의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 가운데 하나”라고 평한 것은 그 때문이다.

 

<미드나이트 스페셜>은 1935년 형기를 마치고 나온 후 레드벨리가 남긴 수많은 노래들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곡의 하나다. 이미 1920년대부터 이 노래를 불러왔던 레드벨리는 몇 가지 다른 버전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당시 최고의 가스펠 그룹이었던 ‘골든 게이트 쿼텟’과 함께한 녹음이다. 그의 노래들 대부분이 그렇듯, 전승가요를 편곡한 이 곡은 소위 ‘프리즌 블루스’라는 고전적 하위 장르의 상징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영어의 몸이 된 처지와 ‘야간특급’ 열차의 불빛을 극적으로 대비시킨 노랫말에, 불완전한 형식의 블루스 악곡을 얹은 이 곡은 그 자체로 음악사의 ‘미싱 링크’를 메우는 살아있는 화석인 것이다.

 

너바나의 유작 <언플러그드 인 뉴욕>(1994)에서 커트 코베인은 “가장 좋아하는 퍼포머의 노래”라는 소개와 함께 레드벨리의 곡을 연주했다. 그 곡 <웨어 디드 유 슬립 라스트 나이트>를 통해 당대의 젊은이들이 그 이름을 알게 되기까지 레드벨리는 오랫동안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져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때로는 함께) 활동했던 우디 거스리가 미국 ‘모던포크의 아버지’로 명성을 남긴데 비하면 초라한 위상이다. 반면에, 아이러니하게도, 미지의 과거로 사라질 뻔했던 무수한 고전민요들은 레드벨리의 기억 속에 봉인된 덕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프랭크 시나트라에서 아바를 거쳐 유투에 이르기까지. 댄스 팝 가수에서 펑크 록 밴드까지. 장르와 시대를 불문한 수많은 이들이 레드벨리의 노래를 리메이크했다. <굿나이트 아이린>, <록 아일랜드 라인>,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 등은 그가 남긴 유산의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사랑에 관한 최고의 노래들이 실연에 상심한 이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인생에 관한 최고의 노래들은 그것의 쓴맛을 경험한 이들에게서 나왔다고 할 것이다. 감옥을 들락거리며 롤러코스터 같은 삶의 궤적을 질주했던 레드벨리의 노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존할 수 있는 힘 또한 그로부터 비롯한 것일 터다.

 

 

 

로버트 존슨의 ‘크로스 로드 블루스’(1936년) ~ 흑인노예의 읊조림, 위대한 유산으로

 

로버트 존슨(1911~1938)은 대중음악사상 가장 큰 미스터리라고 할 인물이다. ‘델타 블루스(혹은 컨트리 블루스)의 제왕’으로 불리는 명성과 달리 그 생애에 관해 알려진 내용은 극히 제한적이고, 그나마도 오싹한 전설과 끔찍한 구설 사이에 놓인 것이 대부분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대가로 불가사의한 음악적 재능을 얻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다. 따지고 보면 영혼매매 전설의 원조는 로버트 존슨이 아니다. 코엔 형제가 영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2000년)에서도 다루었다시피, 토미 존슨이라는 동시대 블루스 뮤지션의 자술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존슨이 그 주술적 신화의 음침한 거래당사자로 끊임없이 소환되는 이유는 베일에 싸인 짧은 생애와 시대를 앞서간 음악 때문이다.

 

악마를 소재로 한 곡들을 즐겨 불렀다는 점도 로버트 존슨의 전설을 부추긴 요인이다.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는 그것이, 블루스의 탄생 배경이기도 한, 미국현대사의 어두운 면과 맞닿아 있는 메타포라고 분석했다. 존슨의 노래들이 “여타 미국 예술가들은 표현한 전례가 거의 없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크로스 로드 블루스>는 바로 그 어두운 감정의 체화라는 측면에서 로버트 존슨을 상징하는 곡이다.

 

<크로스 로드 블루스>는 1936년 11월23일부터 사흘간 진행된 로버트 존슨 최초의 녹음 세션에서 탄생했다. 어스름 무렵의 교차로에서 악마와 조우한다는 이 곡의 내용은 부두교의 무속신앙과 기독교의 ‘파우스트’적 모티프가 혼재한 것이다. 블루스가 흑백인종 간의 문화적 교차로에서 탄생한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존슨이 들려준 격렬한 팔세토 보컬과 (문자 그대로) 신들린 기타연주는 대중음악사의 혁명적 전환점이기도 했다. 델타 블루스가 시카고 블루스로 이양하는 양상-어쿠스틱에서 일렉트릭으로, 남부 시골에서 북부 도시로 확장된 과정이 그 속에 생생한 흔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비참한 흑인노예의 읊조림에서 위대한 음악가의 유물로 승화한, 블루스의 음악사적 의미가 교차한 지점이었다.

 

로버트 존슨은 평생 단 두 번의 녹음세션을 통해 불과 29곡을 남겼을 뿐이다. 게다가 그 곡들 전부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사후 30년도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머디 워터스와 키스 리처즈(롤링 스톤즈), 에릭 클랩튼과 지미 페이지(레드 제플린)가 이구동성으로 그를 “가장 위대한 블루스 연주자”라 칭송했다. 실제로 머디 워터스는 로버트 존슨을 카피하는 것으로 경력을 시작했고, 에릭 클랩튼은 온전히 존슨의 곡들로만 채워진 헌정앨범 <미 앤 미스터 존슨>(2004)을 발표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히트했던 영화 <스트리츠 오브 파이어>의 감독 월터 힐은 젊은 기타 연주자가 로버트 존슨의 미발표곡을 찾아 나선다는 줄거리의 <크로스로즈>(1986)를 연출한 바 있다. 악마에게 영혼을 걸고 연주대결을 펼치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예술을 가장한 사기와 음악을 변명한 상품이 판치는 물질적 세상에 대한 우화처럼 보인다. 로버트 존슨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이다.

 

 

 

베니 굿맨 밴드의 〈싱 싱 싱〉(1938년) ~ 재즈, 미 주류음악계 화려한 신고식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코트 피츠제럴드는 소설의 배경이기도 했던 1920년대를 ‘재즈의 시대’라고 칭했다. 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찾아온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활기를 당대의 유행음악으로 급부상한 재즈의 사운드에 빗댄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 기준에서 재즈의 전성기는 ‘스윙의 시대’ 1930년대다.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하는 빅밴드들이 흥겨운 리듬을 연주했던 그때, 재즈는 마지막으로 넓은 대중적 성공을 누렸고 처음으로 깊은 음악적 가치를 공인받았다.

 

1930년대는 한편으로, 존 스타인벡의 소설과 도로시아 랭의 사진을 통해 각인된 대공황의 시기이기도 했다. 미국 현대사의 가장 비참하고 가혹했던 시련기에 가장 크고 화려한 형태의 재즈악단인 빅밴드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얼핏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학자 앨런 브링클리의 분석에서 그것은 외려 당연한 현상이었다. “미국의 사회적 가치관은 대공황을 맞아 그리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익숙한 사고와 목표에 더욱 더 집착하며 어려운 시기에 대응”했기 때문이다. 재즈학자 마셜 스턴스의 말마따나, 애초부터 빅밴드는 “미국인의 큰 것에 대한 애착의 결과”였던 것이다. 빅밴드의 쾌활한 스윙은 고단한 현실에 찌든 보통사람들에게 달콤한 휴식을 제공한 도피처였고, 베니 굿맨 밴드의 〈싱 싱 싱〉은 그 시대 민중에 투여된 가장 강력한 플라시보였다.

 

베니 굿맨(1909~1986)은 ‘스윙의 제왕’이라는 애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당대 가장 성공한 밴드 리더였다. 예술적 명성과 사회적 명망을 한 손에 거머쥔 그는 1938년 1월 16일에 그 경력의 정점에 올랐다. 역사적인 ‘카네기 홀’ 콘서트를 통해서였다.

 

굿맨과 그 악단이 대중음악가로서는 사상 최초로 ‘고전음악의 전당’에 입성하며 음악사를 새로 쓴 것이다. 재즈가 미국 주류음악계에 공식 데뷔한 그날, 베니 굿맨 밴드가 정규 프로그램의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이 바로 〈싱 싱 싱〉이었다. 기념비적인 클라이맥스였다.

 

본래 루이스 프리마의 1936년 작품인 이 곡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베니 굿맨 밴드의 음반들이었다. 12분에 달하는 확장 버전으로 연주된 ‘카네기 홀’ 콘서트 실황녹음은 그 중 단연 최고로 꼽힌다. 특히, 여기서 진 크루파의 드럼과 제스 스테이시의 피아노가 들려준 솔로는 재즈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으로 평가 받는다. 더불어 극적인 것은, 이 실황녹음의 원본 테이프(사진)가 무려 12년 동안이나 분실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재즈 역사의 획기적인 사건이 전설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것이다.

 

베니 굿맨의 ‘카네기 홀’ 공연은 고전음악의 본향인 유럽에서 먼저 평가를 받은 재즈가 고향인 미국에서도 마침내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획기적 전환점이었다. 또한, 다른 인종과의 협연을 금기시하던 분리의 장벽을 깨고, 보수적인 상류무대에 흑인 연주자들을 올림으로써 인종차별에 눈먼 동시대인들을 개안시킨 선구적 사건이기도 했다. 1938년 1월 16일의 몹시 추웠던 일요일 저녁, 베니 굿맨 밴드가 연주한 ‘싱 싱 싱’과 그것을 향한 관객들의 갈채는 두 시간의 공연 동안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나은 곳으로 바뀌었음을 알린 신호음이었던 것이다.

 

 

                                                                        "Aurex Jazz Festival", Sep.3,1980 at Budokan 

 

 

프랭크 시나트라의 〈올 오어 너싱 앳 올〉(1939년) ~ 소녀들의 열광 끌어낸 재발매 앨범

 

자본주의의 가장 첨예한 전선인 미국에서는 예술분야 종사자들도 노조활동을 통한 이윤추구에 적극적이다. 최근 미국작가노조의 파업이 그 단적인 예다. 음악계라고 다르지 않다. ‘미국음악가연맹’은 1896년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두 차례의 대대적인 파업을 감행한 바 있다. 1942년 8월부터 1943년 말(일부 레코드회사와는 1944년)까지 이어진 1차와 1948년의 2차 파업이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노조위원장 제임스 페트릴로가 매번 파업을 주도했고, 그때마다 노조 소속 음악가들의 연주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그 때문에 음악가 노조의 파업은 이른바 ‘페트릴로 금지령’이라 불린다.

 

1차 ‘페트릴로 금지령’은 음반판매량의 증가가 레코드회사와 라디오 방송국의 배만 불린다는 주장에서 시작하였다. 공연활동의 기회와 방송에서의 라이브 연주가 줄어들면서 연주인들의 기회가 제한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파업의 여파로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새로운 음반제작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기출시작의 재발매가 속출했고 악기 연주자가 필요없는 아카펠라 음악이 유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레코드회사들의 궁여지책에서 비롯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또다른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요컨대, 프랭크 시나트라의 경우가 그렇다. 1943년 당시 프랭크 시나트라(1915~1998)는 메이저회사인 컬럼비아와 계약을 맺으면서 스타덤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가노조의 파업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몸이 단 시나트라와 컬럼비아는 고심 끝에 기존 음반이라도 재발매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시나트라가 해리 제임스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1939년 발표했던 〈올 오어 너싱 앳 올〉이다. 처음 발표했을 당시 유명 라이브클럽(빅토르 위고 카페)의 매니저로부터 “파리 한 마리의 관심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혹평을 받기까지 했던 곡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 앞섰다.

 

인생이 흥미로운 것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939년 녹음을 손끝 하나 대지 않고 고스란히 재발매한 〈올 오어 너싱 앳 올〉은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대히트를 기록했다. 경쟁상대가 많지 않았다는 정황적 요인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시나트라의 개인적 매력이 새로운 세대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더욱 주효했다. 평이한 스탠더드 팝 스타일의 〈올 오어 너싱 앳 올〉은 시나트라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통해 좀더 로맨틱한 경지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힘입어 프랭크 시나트라는 소녀 팬들의 폭동에 가까운 열광을 끌어낸 최초의 스타로 등극했던 것이다.

 

〈올 오어 너싱 앳 올〉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전성시대 개막을 알린 ‘슬리퍼 히트’(예상치 않은 성공작)였다. 더불어 “사랑에 관한 한, 모든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는 노랫말은 악명 높은 바람둥이로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개인사를 예견한 것이기도 했다. ‘세기의 목소리’로 불린 ‘20세기 최고의 엔터테이너’의 화려한 경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주디 갈런드의 〈오버 더 레인보〉(1939) ~ 70년이 지나도 지지 않는 ‘무지개’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였다는 1939년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골라내라는 것은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을 내놓으라는 말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면 아마도 비평가들은 장 르누아르 감독의 <게임의 규칙>을, 관객들은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 주연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라면 얘기가 다르다. <오즈의 마법사>가 첫손에 꼽힐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버 더 레인보우>가 담겨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미국레코딩산업협회가 “20세기 최고의 노래”로, 미국영화연구소가 “20세기 최고의 영화음악”으로 선정한 바 있는 <오버 더 레인보우>는 <오즈의 마법사>와 주디 갈란드를 불멸의 아이콘으로 각인시킨 마법이었다.

 

<오즈의 마법사>에 출연했을 당시 주디 갈란드(1922~1969)는 17살에 불과했다. 이후 47살에 이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는 한 순간의 예외도 없이 <오버 더 레인보우>의 그늘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불평은 없었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대표곡 <마이 웨이>를 족쇄처럼 여겼던 것과는 달리, 갈란드는 그 노래를 평생의 동반자로 간주했다. <오버 더 레인보우>를 “수도 없이 불렀지만 여전히 내 마음 가장 가까운 곳에는 그 노래가 있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노래를 변주하는 것조차도 금기시했다. 영화 속의 도로시가 그랬던 것처럼, 무대 위의 갈란드는 언제나 원전악보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버 더 레인보우>가 ‘주디 갈란드의 노래’로 우선시되는 이유다.

 

아이러니한 것은 주디 갈란드의 강렬한 존재감 때문에 <오버 더 레인보우>가 원작자들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노래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이다. 공개적인 좌파였던 작곡가 해롤드 알렌과 작사가 에드가 하버그는 이 노래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 대한 기대감의 표현이라 간주했다. 특히, 대공황기의 최대 히트곡 가운데 하나인 <브라더, 캔 유 기브 미 어 다임?>에서 이미 좌파적 이상을 피력한 바 있었던, 하버그는 달콤한 노랫말 사이에 정치적 메타포를 심기 위해 고심했다. 그런데 주디 갈란드의 앳된 목소리와 이웃집 소녀 이미지가 달콤함을 돋보이게 만든 나머지 <오버 더 레인보우>를 동화 같은 꿈의 세계로 이월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오버 더 레인보우>의 가치를 방증한다. 노래의 생명력은 그 자체로 유효하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로만도 에바 캐시디의 리메이크 버전, 임펠리테리의 연주곡 버전, 이스라엘 카마카위워올레의 메들리 버전이 <오버 더 레인보우>에 새로운 관객을 끌어 모았다. 동화극의 배경음악인 동시에 동성애자 클럽의 찬가로 불리는 노래는 흔치 않다. <오버 더 레인보우>의 힘이다.

 

인기 있는 노래와 가치 있는 노래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해서 변함없는 인기를 누리는 노래라면 그 자체로 가치를 입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평생 <오버 더 레인보우>를 품고 살아야 했던 주디 갈란드의 숙명 또한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판명된 것이다.

 

 

 

 

 

우디 거스리의 〈디스 랜드 이즈 유어 랜드〉 (1944년) ~ 맹목적 애국보다 더 애국적인 비판

 

집단의 내부적 통합에 사용될 때 노래는 강력한 결속력을 발휘한다. 국가, 군가, 교가의 존재 이유다. ‘9·11 테러’ 여파 속의 미국에서 특정한 노래들이 반복해서 불렸고 들렸던 연유도 거기에 있다. 통합의 도구로서 노래의 사회적 기능을 작동시켰던 것이다. 우디 거스리의 <디스 랜드 이즈 유어 랜드>는, 어빙 벌린의 <갓 블레스 아메리카>(1938)와 함께, 당시 가장 빈번하게 선택된 노래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디스 랜드 이즈 유어 랜드>가 본래 <갓 블레스 아메리카>를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였다는 점이다. 우디 거스리는 어빙 벌린의 노래가 현실과 동떨어진 퇴행적 이상주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음악사학자 리처드 크로포드에 따르면 거스리는 그것이 “사회적 불평등을 마치 신의 뜻인양 호도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1940년, 기존 민속음악에 가사를 붙여 처음 이 노래를 만들었을 때에는 제목도 <갓 블레스 아메리카 포 미>라고 칭했을 정도였다. 이후 시간을 거치며 새로운 멜로디와 제목을 붙인 <디스 랜드 이즈 유어 랜드>를 탄생시켰지만 거스리의 초심은 변하지 않았다.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영화 <프라이머리 컬러스>의 원작소설가인 조 클라인이 집필한 전기에 따르면, 가장 신랄한 문장이 담긴 6절에서 거스리는 <갓 블레스 아메리카>를 대놓고 반박하기도 했다. “어느 햇살 밝은 아침의 첨탑 그늘 속/구호소 옆에서 나는 내 이웃들을 보았다/그들이 굶주린 채 서 있는 동안/나는 거기 서서 의문했다/이것이 신이 아메리카에 내린 축복인지를”

 

실상, 요즘은 그 노랫말을 직접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3절까지 뿐이다. 우디 거스리 본인이 끊임없이 가사를 바꿔 불렀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담긴 비판적 정서를 부담스러워 한 사람들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배제가 더 큰 이유였다. 그러나 역사는 거스리의 비판이 국가를 위한 보다 순수한 애정의 발로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오늘날 우디 거스리(1912~1967)는 “모던포크의 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은 그가 “민속음악을 사회적 저항과 관찰의 수단으로 전환시켰다”고 평했다. “밥 딜런과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나아갈 길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그런 업적은 그의 출신 배경과도 무관치 않다. 존 스타인벡이 소설 <분노의 포도>를 통해 고발한 1930년대의 대공황은 거스리가 체험한 현실이었다. 그는 모래폭풍을 피해 고향을 떠난 오키(오클라호마 사람)였으며 수많은 톰 조드(<분노의 포도>의 주인공)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민속학자 앨런 로맥스에게 발견되어 레코딩 제의를 받은 계기도 노동자들을 위한 ‘<분노의 포도> 저녁 콘서트’였다. 자신의 기타에 “이 기계가 파시스트를 제거한다”는 문구를 새겨 넣었던 무산계급자 거스리는 그렇게 세상과 만났다.

 

<디스 랜드 이즈 유어 랜드>는 맹목적인 애국의 노래가 아니라는 점에서 <갓 블레스 아메리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노찾사의 <광야에서>가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과 같을 수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다. 부자들만의 전유적 위법행위들을 자행했던 사람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꼽히는 마당에 그 차이가 무슨 대수냐고 반문한다면 다시 한 번 상기할 일이다. 어쨌든 ‘이 땅은 당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Woody Guthrie                                                   Pete Seeger & Bruce Springsteen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1942년) ~ 전쟁의 시름 잊게 해준 세계인의 ‘성탄절 18번’

 

2차 세계대전이 미국에 끼친 여파는 물리적이라기보다 문화적인 것이었다. 진주만이 피폭당하기는 했지만 본토는 안전했고, 전시동원체제가 발동했지만 국내경제는 (다른 참전국들에 비해 월등히)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가장 잘 반영한 문화영역은 음악이었다. 스포츠 이벤트 등의 주요행사에 앞서 국가를 연주하는 일이 관례가 되었고, 이른바 유사국가 혹은 유사군가 형식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노래들이 대거 발표되었다. 어빙 벌린의 <갓 블레스 아메리카>는 가장 대표적인 곡이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기간을 통틀어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곡은 로맨틱한 발라드였다. 어빙 벌린이 만든 또 다른 노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그것이다. 얼핏 의외의 반응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마저도 전쟁 여파라는 동전의 다른 쪽 면이었다. 한데서 온기를 찾는 것은 본능이기 때문이다. 노래의 탄생배경부터가 그랬다. 벌린은 이 노래를 아리조나의 따뜻한 겨울 휴양지에서 작곡했다. “눈 쌓인 성탄절을 꿈꾸는” 서남부지역 사람들의, 비현실적이지만 낭만적인 상상에서 영감을 떠올린 것이다. 전장 군인들의 향수와 그들을 떠나 보낸 가족들의 애수가 크리스마스라는 상징적 접점에서 현실도피의 위안을 찾은 것도 당연하다.

 

어빙 벌린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완성한 직후, “사상 최고의 노래를 썼다”고 자신했다. 그의 단언은, 적어도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거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 빙 크로스비다. 당대 최고의 엔터테이너였던 그는 이 곡을 크리스마스 캐롤의 신고전이자 (<버라이어티>의 표현에 따르면) 모든 음악분야를 통틀어 “가장 값비싼” 노래로 만들었다. 크로스비 버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엘튼 존의 <캔들 인 더 윈드 1997>을 따돌리고,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로 등재된 2008년판 ‘기네스북’의 기록은 그 증거인 셈이다.

 

실제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누구보다 빙 크로스비(1903~1977)의 노래였다. 그는 1941년 크리스마스에 이 곡을 초연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 <홀리데이 인>(1942) 사운드트랙에서 처음 음반을 녹음했던 장본인이다.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히트차트 1위에 올랐고 이후 1945년과 1946년에도 차트 정상을 거듭 정복하며 크로스비의 인기를 정점에서 떠받쳤다. 한 가수가 같은 노래로 세 번이나 차트 1위에 오른, 역사상 유일한 경우다. 마치 운명과도 같은 관계였다. 크로스비가 참전 군인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군인들의 사기진작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당시 <빌보드>가 집계한 인기투표 결과에 따르면, 그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페리 코모를 비롯한 다른 스타들의 득표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에는 사람들이 성탄절에 소원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가 당대의 인기 여가수(였으며 조지 클루니의 이모인) 로즈마리 클루니와 함께 주연한 동명영화(1954)는 그런 바람이 사람들을 변화시킨다고 얘기하는 동화다. 꿈을 꾸기에 너무 팍팍한 현실은 없다. 현실이 너무 팍팍하기에 꿈을 꾸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존재 이유는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른다.

 

 

행크 윌리엄스의 <무브 잇 온 오버>(1947년) ~ ‘컨트리 음악’ 촌티 벗기고 로큰롤 잉태

 

‘컨트리 앤 웨스턴(흔히 컨트리로 약칭)’은 백인 전통의 미국 대중음악을 통칭하는 관용어다. 문자 그대로 ‘시골’ 농부와 ‘서부’ 카우보이에 의해 불렸던 노래들이 그 원형이었다. 이전까지 ‘산골 촌뜨기’들의 음악이라는 의미에서 ‘힐빌리’라고 불리던 것이 1940년대 음악산업의 발전과 함께 확장된 개념으로 수용되었다. 당시를 즈음하여 컨트리는, 도시인들에게까지 널리 인기를 누리면서, 시골 사람들의 전유가 아닌 대중음악의 전위로 도약했다. ‘땡볕에 그을러 목덜미가 벌게진 무지렁이(레드넥)’들의 흥얼거림이 당대의 유행음악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행크 윌리엄스는 그 전환기의 이정표였다.

 

1961년 ‘컨트리 음악 명예의 전당’은 그 최초의 헌액자로 행크 윌리엄스(1923~1953)를 지미 로저스와 나란히 세웠다. ‘컨트리의 아버지(로저스)’에 필적하는 인물로 평가한 것이다. 로저스와 윌리엄스는, 26년 터울로 각기 다른 시기를 살았지만, 당대의 표준을 결정짓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도 유사한 위상을 점하고 있다. 요컨대, 지미 로저스가 컨트리의 음악적 규범을 확립한 초기의 개척자라면 행크 윌리엄스는 그것의 현대적 전범을 마련한 전성기의 개혁자라고 할 것이다. 뛰어난 창작능력이 그들 공통의 미덕이었다. 특히, 윌리엄스의 탁월함은 오늘날까지도 동시대적인 숨결을 내뿜는 것이다. “컨트리와 그로부터 발화한 모든 대중음악 스타일에 미친 윌리엄스의 심대한 영향력은 무엇보다 작곡가로서 우선한다”는 <롤링 스톤>의 평이 그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행크 윌리엄스의 노래들은 그 현대적인 감수성으로 더욱 높은 평가를 받는다. 단순하면서도 선명한 멜로디와 현실 밀착적인 노랫말은 초창기 로큰롤에도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밥 딜런과 비견되는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은 그에게 바친 추모곡 <타워 오브 송>에서 작곡가로서 윌리엄스가 “나보다 100층은 더 높은 노래탑 위에 있다”고 경의를 바쳤을 정도다. 보컬리스트로서도 혁신적이었다. 요들링과 크루닝(섬세한 저음창법)이 대세이던 시절에 윌리엄스는 생생하고 직선적인 목소리로 관객의 심중을 가로질렀다.

<무브 잇 온 오버>는 행크 윌리엄스의 이력에 불을 붙인 최초의 히트곡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곡은 또한, 윌리엄스가 활동초기에 이미 독자적 영역과 독보적 영향력의 완성치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곡에 담긴 기타 중심의 사운드, 곧게 뻗은 명료한 멜로디, 현실적 소재의 해학적인 노랫말은 로큰롤에 대한 선험적 비전을 제시한 것이었다. 로큰롤 음악으로서는 최초로 인기차트 1위에 오른 빌 헤일리의 <록 어라운드 더 클락>(1955)이 이 노래에 빚진 바가 바로 그것이다.

 

행크 윌리엄스는 1953년 1월 1일, 공연장을 향해 가던 자신의 캐딜락 뒷좌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불과 29살의 나이였다. 술과 약물의 상승작용이 불러온 비극이었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윌리엄스가 죽음에 있어서조차도 자기파괴적 로큰롤 스타 신화의 전범이었다고 얘기하곤 한다. 어느 모로 보건 행크 윌리엄스는 로큰롤 시대 이전에 등장한 로큰롤 스타였던 것이다.

 

 

 

 

루이스 조던의 <칼도니아>(1945년) ~ ‘점프 블루스’로 음악 인종장벽도 ‘점프’

 

아르앤비 즉, ‘리듬 앤 블루스’는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가장 오해되고 그만큼 남용되는 용어다. ‘끈적한 발라드’의 대명사라는 잘못된 인식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 그러나 본래 리듬 앤 블루스는, 비평가 로버트 파머의 말마따나 “흑인들이 만들어낸 음악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표현”이었다. 1947년, <빌보드>의 기자(였으며 뒷날 프로듀서로 명성을 남기게 되는) 제리 웩슬러가 처음 사용한 명칭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이)민족 음악’이라는 의미에서 ‘레이스 뮤직’이라고 불렸던 흑인음악에 인종적 요인뿐만 아니라 그 음악적 특성까지 고려한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리듬 앤 블루스는 뒷날의 소울, 펑크(Funk), 디스코, 심지어는 힙합조차도 대의적으로 포용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좁은 의미로 사용될 때 그것은 1940~50년대 커다란 인기를 누렸던 흑인음악의 스타일을 지칭한다.

 

리듬 앤 블루스는 단순히 말하자면, 리듬감이 강한 블루스 악곡이라는 의미다. 블루스의 음계와 구조에다 스윙재즈나 부기우기의 리듬을 접목하여 새롭고 강렬한 사운드를 창조한 것이다. 그 원형이 된 스타일을 ‘점프 블루스’라고 하는데, 여기서 점프가 리듬감을 의미하는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점프 블루스에는 재즈의 흔적이 더 강하게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본격적인 리듬 앤 블루스에서 기타와 피아노가 리드 악기를 담당하는 반면 점프 블루스에서는 색소폰 등의 관악기가 여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다. 실제로 점프 블루스의 대가들 상당수가 재즈악단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방증한다. 루이스 조던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루이스 조던(1908~1975)은 빅밴드 재즈에서 출발한 색소폰 연주자였다. 이후 독립하여 팀파니 파이브라는 콤보(소규모 악단)를 조직함으로써 조던은 시대의 요구에 답하는 동시에 시대의 변화를 개척했다. 즉, 음악가들의 징병과 재정적 난국을 야기한 2차대전의 여파로 1940년대 초반까지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빅밴드가 줄줄이 해체하던 상황에서 새로운 음악적 진로를 모색한 결과가 그의 밴드와 음악이었다는 것이다. 그 선택의 결과는 어마어마한 파급 효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리듬 앤 블루스와 그에 뒤이은 로큰롤의 등장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리듬 앤 블루스 음악의 보고인 어틀랜틱 레이블의 설립자 아멧 어트건은 조던이 “모든 초창기 로큰롤과 리듬 앤 블루스 스타들에게 영향과 영감”을 주었다고 평했다.

 

이미 1942년부터 히트곡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루이스 조던은 <칼도니아>를 통해 음악사적 지위도 확고히 했다. 이 곡은 레이스 뮤직(뒷날의 리듬 앤 블루스) 차트에서 정상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철저히 백인 중심인 팝 차트에서도 10위권에 진입한 당대 극소수 흑인음악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주크박스의 제왕”이라는 그의 애칭은 그처럼 인종을 불문한 거대한 인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거칠고 힘이 넘치는 리듬과 강력한 샤우팅 보컬로 넘실대는 이 곡의 새로움이 로큰롤의 거의 모든 음악적 특징들을 이미 잉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음악에 반영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그의 태도는 로큰롤이 가져오게 될, 대중음악에서의 인종장벽 붕괴를 끌어낸 균열의 시작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