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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민중가요에서 시민음악으로 - 나도원(프레시안)

by Wood-Stock 2009. 5. 9.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여전히 불러내길 기다리는 소망들이 있다"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민중가요에서 시민음악으로 (上)

기사입력 2008-05-11 오후 12:09:35

 

노래는 삶에서 나오고, 삶은 세상과 따로 떼어지지 않는다. 중립이나 방관도 사회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음악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과의 대화일 수밖에 없다. 민중음악은 사회와 역사 그리고 공동체로서의 세상과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해왔다. 1970년대에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가졌고, 많은 이들이 노래운동에 투신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민중음악의 불꽃은 작아졌으며, 일각에서 소멸위기까지 거론될 정도로 창작활동은 위축되었다. 합법공간에서 성공적인 대중적 활동을 펼친 단체와 민중음악인들이 회상과 함께 호명되곤 하지만, 재생산 없이는 2000년대 대중음악계의 추억마케팅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없다.
  
  그 주된 이유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일치한다. 세상이 변했다는 것이다. 전선도 이동했다. 민주와 반민주 구도에서 이어진 개혁과 수구 구도, 그리고 진보와 보수 구도가 혼합되거나 혼동되는 양상이다. 지난 시기에 방관했던 자들은 그간의 성과를 성공적이었다고 뒤늦게 상찬하고, 실제로 몸을 실었던 이들은 실패라 말한다. 용서를 말하기도 하지만, 용서는 고통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담론과 의식이 은폐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고, 또 일부에선 허영과 유행에서 비롯된 진보적 태도가 계절풍처럼 일었다 잦아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음악의 역할축소는 역량약화로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마치 공연이 끝난 뒤의 쓸쓸함을 느끼듯 주로 후일담을 읊조리는 퇴행성까지 내보였다.
  
  그 수준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 민중음악 노래패 '꽃다지' ⓒ꽃다지

  그런데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음악뿐 아니라 문화예술운동의 위기와 전망에 대한 심도 있는 의견들이 제시될 때마다 의아할 정도로 논외가 되고 있는 작품으로서의 설득력에 대한 부분이다. 예술순수주의로 재단될 대상이 아니며 다른 각도에서 봐야한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일부 맞는 말이다. 민중음악은 비판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수용층과 독자적인 제작·유통·소비구조라는 존재방식을 공유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기 위한 지식인 논리가 결과적으로 스스로 영토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단지 언어사용법만이 다를 뿐이라는 악의 없는 농담을 듣기도 하는 지식인을 혹자는 간단하게 '남 걱정하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민중음악이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와 관련이 있다. 한 음악인의 표현대로 "민중의 음악이 아니라 민중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음악"의 창작은 자신이 아닌 대상의 눈높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또는 그렇게 합리화되었다. 어떤 기준을 '민중의 문화적 수준'으로 상정하고, 그들이 듣고 따라 부를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민중음악의 창작이 활발했던 시기, 민중이 즐긴 대중음악의 전반적인 수준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았다.
  
  가장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는 기독교 대중음악, 즉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 걸어온 길에서 흥미로운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공식적인 찬송가와 복음성가(gospel song)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기독교음악이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호응을 얻었다. 그 이전까지 교회는 전기기타나 드럼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신성한 교회에 소비적이며 향락적인 대중음악의 잔재를 들이는 행위는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최덕신이라는 걸출한 작곡가가 제시한 완성도 높은 CCM은 청소년과 청년층에게 자극을 주었고, 찬양집회의 활성화와 함께 전기를 마련했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기타연주자 함춘호 등 유능한 음악인들이 이 방면에 기꺼이 투신한다.
  
  투철한 의식과 태도가 중시된 민중음악진영의 흐름과 유사하고, 결과는 상이하다. 의식적인 관성이 일반의 눈높이를 따라가기 벅찬 상황을 만든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다수 현역 음악인들과 일부 비평가들에게는 민중음악을 폄하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기교주의에 함몰되어 완성도와 대중성을 혼동하게 되어버리는 것 역시 위험하다. 이러한 착각은 주류대중가요에서 흔히 발견되고, '잘 만든 것'과 '훌륭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러한 낮은 차원이 아니라 지금 말하는 것은 전달력과 설득력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비평적으로도 거론되는 민중음악 작품들은 당시 어떤 식으로든 비판받았던 것들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은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여전히 버릴 수 없는 가치들이 있기에…
  
▲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 ⓒ프레시안

  물론 민중음악은 수용자 개인에게 '체험'으로 의미지어진다. 시대의 기억과 공유의 경험을 불러오는 매개체이기에 예술적 기준만으로 말해지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도 그렇듯이, 한계의 인식이 의의의 계승일 수 있다. 더구나 1990년대 후반부터는 공교롭게도 일부 주류대중음악을 제외하고 록, 포크 등 대부분의 대중음악 장르들이 함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처럼 다른 이유들도 개입되었음을 암시하는 정황이 있음에도 태도와 존재방식만을 말한다면 새로운 움직임의 근거는 마련되지 않는다. 여전히 버릴 수 없는 가치들이 있기에, 과거형이 아닌 현재의 민중음악에 주목하고 창작활동을 조명해야 한다.
  
  최근 '탄핵송'이 인터넷을 타고 전파되었다. 이와 같은 전례로 'Fucking USA'가 있었다. 환경변화에의 적응이 관건이 되자, '송앤라이프(www.songnlife.com)'를 운영하는 윤민석처럼 인터넷에 기반을 두고 음반이 아닌 파일을 배포하는 방식이 대두되었다. 또한 상식이 기준이 되고 사안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분위기에 대한 반응이었다. 새로운 매체의 활용과 이슈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성의 확보였다. 그러나 새로운 매체 역시 기성질서로의 편입이 예정되어 있었고, 양심과 행동에 호소하는 개별적 사안대응의 한계 또한 명확하다. 68혁명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다고 극적으로 과장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도 그러했는가.
  
  사회를 직시하는 시민과 삶을 긍정하는 생활인의 모습이 함께 녹아든 음악
  
▲ 민중음악 가수 연영석 ⓒ연영석 홈페이지

  연구자로서 관찰하는 현상이 아닌 비평적 관점에서 주목하는 경향은 집단에서 개인으로, 역사에서 생활로의 이동이다. 그리고 다시 공동체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이는 일원에서 다원으로, 그리고 다시 다원에서 일원으로 이동하는 지적 흐름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일상성의 발견도 중시된다. 영화 <트루먼쇼>에서 평생을 갇혀 지낸 트루먼이 이상함을 발견한다는 설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 속에 은폐된 것을 어떻게 폭로하는가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점차 민주화 이후의 흐릿한 희망을 발견하고, 실패에서 배우고, 비극성과 엄숙주의를 낙천성과 일상성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손병휘의 노래처럼 사회를 직시하는 시민과 삶을 긍정하는 생활인의 모습이 함께 녹아든 음악이 태어났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음악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결과이다. 기본적인 음악적 요건이 충족될 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음을 인식했고, 유인혁에게서 보이듯 기성 음악과는 방법상 차이가 있으나 보다 음악에 집중하려는 노력들이 많아졌다. 동시에 의식의 저변으로 자연스레 흘러들어가 공감으로 적시면서도 독자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요구가 공존한다. 고독을 말함으로써 동료를 만들고, 부재를 노래함으로써 충만하게 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강렬한 에너지까지 겸한 연영석의 예가 있지만, 사실 문장으로는 쉬이 쓰여도 실제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어디에선 명예를 위해, 영생을 위해 죽지만, 이 땅에선 생존을 위해 죽는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시대에서 아버지를 잃은 가족의 시대로 변했을 뿐이다. 움직이지 않으나 팽팽한 긴장이 계속되는 세상에서 여전히 말해지지 못한 채 불러내주길 기다리는 소망들이 있다. 이 속에서 "어떻게 바꾸어야하는가"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함께 노래하고, "무엇을 말한 것인가"와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연구하며 나름의 답을 적어내고 있는 음악인들이 있다. 이제 그 이름들을 써내려가고, 돌아보고, 기억할 차례이다.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

 


 
"지금도 뜨거운 피가 필요하다"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민중가요에서 시민음악으로 (中)

기사입력 2008-05-18 오후 2:08:41

 

트럼펫이 아련히 울리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한번쯤은 뜨거웠던/ 혼자보다 여럿이 함께/ 우리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오월이면 피가 끓는." 이렇게 시작하는 '386'은 '오래된 정원'으로 연결되고, 문익환 목사의 육성으로 마무리되는 '강물은 똑바로 가지는 않지만 언제나 바다로 흐른다'로 내리 이어진다. 이 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단지 가사의 진정성 때문만은 아니다. 심화된 음악적 고민과 밴드 '프리다칼로'의 문건식(기타) 등 함께한 음악인들과의 호흡이 적정선에서 만나 발화하기 때문이다. 이 곡들은 6월항쟁 2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 발표된 손병휘의 네 번째 앨범 <삶86>(2007)에 담겨있다.

그의 목소리는 낙관적이고 따스하다
▲ 손병휘 ⓒ손병휘 홈페이지

순수하게 음악을 좋아하던 학생에서 '조국과 청춘'과 '노래마을'을 거치며 보편성과 동시대성을 추구하는 민중음악인으로 나이 들어온 손병휘 안에는 음악적 가치를 지향하는 포크 록 뮤지션과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시민이 공존해왔다. '나란히 가지 않아도 촛불의 바다를 만들 수 있다'고 노래하고, 각자의 삶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시선을 잃지 않았다. 어느 작은 모임에서 "무엇에 대한 반대가 아닌 긍정적 가치를 지향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 손병휘의 목소리는 낙관적이고 따스하다. 그가 민중·시민음악의 유연한 표정을 보여주는 <삶86>은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자기증명임과 동시에 개인과 세상을 함께 노래하며 변화해온 민중음악의 성취로 기록되어도 좋을 앨범이다.

노래운동의 전력을 가진 이들에게도 자족적인 수준이 아니라 소통이 가능한 균형감각과 결과물에 대한 책임이 요구된다. 민중음악을 다른 관점에서 보라고 할 수는 있을지라도 다른 관점에서 들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포크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을 수용한 '386', '오래된 정원', '강물은 똑바로 가지는 않지만 언제나 바다로 흐른다' 연작은 의미 있는 순간이다. 2007년 12월 7일에 불교역사문화관에서 열린 공연에서 20분 동안 한 몸처럼 계속된 세 곡의 라이브는 음반에서보다 훨씬 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것이 연주의 힘이다. 그리고 이 날 게스트로 무대를 채워준 두 음악인이 있었다. 안치환과 연영석이다.

그에게 대중과 민중은 다르지 않다

사회의식과 대중적 감성을 겸한 대중음악인으로 음악적 완성도를 중시해온 안치환도 <안치환9>(2007)를 내놓았다. '울림터'와 '새벽', 그리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일원으로 활동할 때의 안치환은 현장에 선 청년 민중가수였지만, 음악 자체를 꿈꾸는 젊은이기도 했다. 솔로 활동을 시작하고 조동익의 조력이 낳은 <Confession>(1993)과 록을 본격화한 <The Reason of Love You>(1995)부터 뮤지션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안치환은 <Desire>(1997)에 이르러 앨범의 주도권까지 장악한다. 그리고 대중가요로 많이 알려진 곡들 이외에 '자유'와 '수풀을 헤치며', 그리고 '귀뚜라미'와 '물 속 반딧불이 정원'처럼 치열하고 처연한 노래들을 불러왔다. 이 과정에서 민중가수를 넘어 포크/록 음악인으로, 운동권 가수에서 의식 있는 대중음악인으로 변모한다.
▲ 안치환 ⓒ참꽃

처음부터 안치환은 특정 범주 안에 머무르고 싶어하지 않은 포크싱어이자 로커였다. 오랜 세월 자신의 영역을 다져온 안치환을 대중과 거리가 있는 운동권 출신 가수로만 기억한다면 그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과중한 기대를 전제로 방송친화적인 '내가 만일'이나 유순해진 노래들 때문에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부당하다. 전작인 <외침!!>(2004)이 보여주듯 여전히 민중과 사회를 고민하는 싱어송라이터이고, 그에게 대중과 민중은 다르지 않으며, 삶과 노래는 따로 있지 않다. 그가 밝힌 지향은 "진보적이면서 대중적인 노래, 대중적이면서 건강한 노래"였으며, 비교적 안정적인 결과물로 그에 답하고 있음은 인정할 만하다.

'담쟁이'처럼 아름다운 곡들이 실린 <안치환9> 역시 안정적인 음반이다. 유투(U2) 스타일의 '처음처럼'과 시원한 록 트랙인 '세상이 달라졌다'를 담았고, 북한풍의 선율도 시도했다. '내 안의 나', '안개 속에서 길을 잃다'에선 세상과 함께 달라진 자신을 반추하고, 누군가의 남편이며 아버지임을 숨기지 않는다. '너의 환상'에선 안치환만은 변하지 말아야한다던 이들에게 어떤 고민을 되돌려준다. 그는 수년 전 인터뷰에서 "내 나이에 맞는 내용을 삶의 깊이를 가지고 노래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뭐 그리 대수로운 말이겠는가 싶을 수 있지만 자기 나이에 맞는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물론 프로를 지향한 매니지먼트 방식이 실망의 빌미를 제공한 사례들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래도 안치환은 여전히 노래를 부르다가 지친 듯하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목소리로 말하곤 한다.

그의 음악은 삶 자체에 근접하고 있다
▲ 연영석 3집 <숨> ⓒ프레시안

묘한 인연은 계속된다. 1997년, 윤도현이 펑크를 낸 공연에 대타로 무대에 서게 되면서 데뷔한 사람이 있다. 서른이 넘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연영석이다. 그의 입을 통하여 비속어를 포함한 일상어는 거침없이 노래가 된다. 순대국 타령이라 할 '미련' 등의 해학미는 요즘에 흔치 않다. 아니, 해학이라는 말 자체가 교과서에서나 볼법한 세상이다. 또한 '공장'에서는 '다'로 끝나는 한국어의 난점을 각운으로 탁월하게 역이용하는 재기를 보여준다. "그저 밥만 먹고 살기도 힘드네요"라는 넋두리 '밥'은 처연하고 아름다운 락 음악이 되고, 쑥스러울 정도로 진솔한 '엄마 미안해'와 '구르는 돌' 그리고 '간절히'의 절박함은 감동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연영석이 직설적으로 풀어내는 언어 풍경은 자유분방한 선율을 만나 삶 자체에 근접하고 있다.

세 번째 앨범인 <숨>(2005)에도 '나약해', '떼레비', '빵'처럼 시원하고 재미있고 무섭고 슬픈 곡들을 담아낸다.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을 대변한 '코리안 드림'은 노동현실에 대한 고발이면서 '한국 속 외국인'과 '외국 속 한국인' 사이에서 작동하는 이중적인 잣대까지 상기시킨다. 유난히 신분상승욕구가 강한 이 사회에서, 그리고 중산층이 상대적 개념이 아닌 절대적 개념임을 인정하게 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 나라에서 자신이 '2진'임을 인정하는 용기는 아무에게나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연영석은 그것을 고백하고, 듣는 이로 하여금 공명케 한다. 쑥스러움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솔직함이 꾸밈보다 진한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그의 노래들은 음악의 본질에 대한 리포트이다.

어떤 면에서 노동음악작곡가 김호철과 '포장마차'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연영석은 훨씬 자유분방하고 서정적이며 통쾌하다. 어쩌면 늦은 시기인 30대에 창작을 시작했기에 오히려 무수한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테고, 그래서 정형화되지 않은 어법을 지니게 된 것일지 모른다. 노동가수로서 늘 현장에 서고 있는 성실함을 겸한 연영석은 민중가수로는 이례적으로 2006한국대중음악상에서 '특별상'을 수상함으로써 시대에 걸맞고 유효한 민중음악의 가능성을 열어온 공로를 인정받았다. 또한 홍대 앞에 위치한 인디클럽 '빵'에 종종 기타를 들고 나타나기도 하며, 지난해에 잔잔한 반향을 불러온 인디음악인들의 앨범 <빵 컴필레이션 3>(2007)에 젊은 친구들과 협연한 '현실'을 싣기도 했다.

'잃어서'가 아니라 '잊어서'였다

연영석이 자유로운 에너지로 내용을 채우고 형식을 세워 생활인(노동자)이 공감할 수 있는 락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고명원의 역할이 컸다. 고명원은 민중가요와 헤비메틀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저항음악을 시도한 '메이데이'의 연주자였으며, 연영석은 메이데이의 '산 자를 위한 발라드', '전선은 있다', '동지에게'의 가사를 써준 인연이 있다. 고명원은 연영석의 앨범들에 프로듀서 겸 연주자로 참여하여 의미 있는 작품들의 탄생에 기여해왔고, 그래서 연영석의 공연 역시 고명원과 함께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음악적 풍경이 달라진다. 민중음악을 다소 폄하하던 어느 대중음악인마저 그들의 공연을 보고난 후에 고명원을 가리켜 "한국 최고의 기타리스트"라며 감탄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바 있다.

이들이 모두 한 무대에 섰던 적이 또 있었다. 2005년 10월에 광명시에서 열린 대규모 공연에서 안치환과 손병휘, 그리고 연영석과 고명원이 노래하고 연주했다. 그 무대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도 있었고, 비단 노동운동과 연관을 맺고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진솔한 노래의 울림을 아는 음악팬의 아낌을 받는 '꽃다지'도 있었다. 그 날 손병휘는 '촛불의 바다'를 부르며 수천 개의 휴대전화기가 공중에 들어올려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연영석은 수천의 입들이 분명 그 날 처음 들었을 법한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줄 아나'를 다함께 따라 부르는 장관을 그려냈다. 통쾌함이 관객들의 얼굴 곳곳을 누비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유를 잃어서가 아니라 잊어서였던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공장음악'을 제외한 다양한 음악이 대중과 만나지 못하게 된 것처럼, 이러한 노래들 역시 시민과 만나지 못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노래들이 귀한 이유는 그저 피가 뜨거웠던 시대를 회상케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도 뜨거운 피가 필요한 시대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만났을 때의 풍경은 마치 비갠 후의 달처럼 투명하고 맑았다. 이것은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

 


 
거리에서 함께 부를 노래가 없는 시대의 역설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민중가요에서 시민음악으로 (下)

기사입력 2008-06-06 오후 5:05:44

 

얼마 전 재불 여성작가의 자전적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페르세폴리스>가 조용히 개봉했다. 한국에선 '재불'이란 말이 어딘지 그럴 듯한 포장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란 출신으로 저항과 혁명, 그리고 억압을 경험한 그의 삶은 꽤나 팍팍했다. 하지만 미소를 짓게 하는 장면들이 많은데, 테헤란 뒷골목에서 마약밀매 하듯 아바(ABBA)와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의 음반을 사고파는 모습도 그러하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만큼 나라마다 역사와 배경은 다를지라도 문화의 폭이 넓어지는 과정에는 닮은 구석이 적지 않다.
  
  우리가 아시아에 무심한데다 경제규모, '한류'와 같은 잣대 때문인지 간과하고 있지만, 이웃에는 한국보다 더 큰 음반시장과 긴 음악역사를 가진 나라들이 있다. 한국보다 10년 정도 앞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발전하기 시작한 필리핀은 1960년대에 그룹사운드의 흥기를 맞고, 1980년대에 인디음악이 성장하여 1990년대 초에 폭발했다. 장발과 퇴폐문화 단속은 대만인들도 거친 성장통이다. 민중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현지 비평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의 민중음악과 유사한 지향과 존재방식을 지녔던 태국과 필리핀의 저항음악은 우리보다 10년 정도 앞서 행적을 남겼다. 그 이후에도 유사점은 발견된다.
  
  수용층의 축소는 우리 민중음악의 고민이다. 지역적 활동들이 있으나 권역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특히 음반사전심의제 폐지로 인하여 법에 의한 거부는 사라졌지만 오히려 대중에 의한 거부로 합리화되면서 무력감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더 이상 희생자로서의 지위를 원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입지를 강화하는 위협론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이용되지만, 정작 민중은 적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는 듯하다. 공포가 만든 편견과 달리 실제 악의 얼굴은 평범하고 애처롭기까지 하다. 더구나 평범한 이도 어떤 영역에선 추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세상은 낯설어졌다. 하지만 삶은 어차피 실수를 안고 가는 것이고, 노래는 다시 태어나며 삶은 죽음을 죽인다.
  
  민중음악의 주된 어법으로 자리잡아온 포크
  
▲ 문진오의 <오래 꾸는 꿈> ⓒ프레시안

  포크가 주된 어법이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창작과 수용이 원초적이기도 하거니와 언어가 강조된다는 점에서 유용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대부분의 남성들이 통기타를 연주할 줄 알던 시대도 있었다. 물론 다양한 스타일과 넓은 폭을 품은 포크가 한국에서는 일면적으로 인식된 경향이 없지 않다. 여전히 포크의 대표자로 호명되는 김광석은 심지어 생전에 함께 노래한 적도 없는 사람들과 목소리를 섞어 음반을 내야했다. 포크에서 중요한 전통의 기억은 우리에게 없었고, 정서적 접근이 그 자리를 대신해왔다. 그럼에도 포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음악적 포용과 일상성을 중시한 작품들을 낳기 시작했다.
  
  '노래마을' 출신으로 동요와 시에 집중한 백창우는 시선집이자 음반인 <시를 노래하다>(2005)와 같은 노작을 발표했다. 이지상의 <기억과 상상>(2006)에는 삶 속의 이야기가 담겼으며,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거친 문진오의 <길 위의 하루>(2005)와 <오래 꾸는 꿈>(2007) 역시 그윽한 파장을 그리는 포크음반이다. 안으로 삭이는 그들의 노래는 따스한 바람에 상처를 감쌌던 옷이 나부끼듯 처연하다. 침 넘기는 소리마저 크게 들려 수줍어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일까. 아니, 할말이 너무 많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어떤 사건과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들은 '덜어냄'으로 노래한다.
  
  보다 밝은 표정도 볼 수 있다. 세상이 우울하긴 해도 일상이 늘 우울하진 않다. '바위처럼'의 작곡자이자 '꽃다지'에서 활동한 유인혁은 김가영과 손현숙의 앨범에 손길을 보탰다. 호소력 짙다는 표현이 흔해져 이젠 그다지 호소력이 없어졌지만, 손현숙의 목소리를 말할 때엔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기 힘들다. 유인혁과 문건식의 조력이 있었던 손현숙의 <노래이야기1: 문답무용>(2007)에 비약적인 발전이나 새로운 감흥의 성취는 없을지라도 뭍에 사는 물고기와 같은 절박함이 깃든다. 낙천적이고 유연한 이수진의 <이수진1>(2008)에서 재즈의 기운이 스민 <화를 내>, <다시 오는 봄>는 최경숙의 곡이고, 잔잔한 감동을 남긴 <나는 영등포 공원을 걸었어>와 유머러스한 <대운하-피리와 꼬리> 등은 유인혁의 곡이다.
  
  우리는 어느덧 다름을 인정하는 단계로 훌쩍 넘어와 있다
  
  앞서 대뜸 CCM을 언급했던 이유가 있다. 과거 민중가요들 중에는 가사만 바꾸면 어색하지 않은 CCM이 될 정도로 악곡과 창법, 무드가 유사한 곡들이 많았다. 심지어 민족음악을 재창조하려 한 움직임보다 대중음악인들의 성취가 더 뛰어났다. 왜일까? 어떤 이의 음악을 들으며 그가 현재의 음악을 얼마나 듣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챌 수 있는 이들이 많다. 문인이 현재의 글을 읽지 않고 영화인이 현재의 영화를 보지 않는다면 치명적이다. 물론 그들 다수가 고생이란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음악에 몸을 담근 사람들이라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했다. 기능적 음악이 가질 수 없는 긍정성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래운동의 경험을 공유한 이들에게 발견되는 공통점, 즉 편안한 어법과 직설적인 주제의 결합, 그리고 정석적인 가창은 장점이자 한계이다. 여전히 공존과 혼재의 샛길에 서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 거리에서 함께 부를만한 노래가 없다는 아쉬움의 이면에는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희망이 있다. 5일 새벽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서 공연하고 있는 시민악대. ⓒ프레시안

  대중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자본과 시스템에 의한 거부라 해야 맞지만, 말하는 방법에도 괴리는 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명작임은 인정하면서 설교적인 뉘앙스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일상의 민주화는 외면하는 세대는 거부감의 대상이 되고, 학습된 트라우마가 강하게 작동될 때 설득력을 사라진다. 그 와중에 팝아트가 실제로는 비대중예술인 것처럼 민중음악의 이름과 내용 사이에 간격이 발생한다. 경직된 표현은 그래서 나온다. '비참하다'가 쓰인 문장을 읽다보면 정말 비참해지듯이 '강한' 말들이 있다. 마지막 술잔이 아쉬운 사람이 있는가하면 버거운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결국 노래의 주인공이 '너'인가와 '나'인가의 차이, 그리고 말하는 방식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인가와 "이렇게 산다"인가의 차이다.
  
  거리에서 함께 부를만한 노래가 없다는 아쉬움의 이면에는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희망이 있다. 어느새 같음을 강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단계로 훌쩍 넘어와 있다. 작곡과 연주의 개념은 빠르게 변했고, 음악을 즐기는 방식도 달라졌다. 연주력이나 음악인의 시시콜콜한 개인사에 관심을 갖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 촌스러운 유희가 되었다. 음악 자체만으로 호불호를 정하고, 뮤지션을 더 이상 우상이 아닌 소탈한 이웃으로 바라본다. 더구나 이제 음악은 누구든 할 수 있다. 행선지 정하지 못한 여행의 위태로움을 벗어나려는 장르화는 이러한 변화를 우회하는 시도들 중 하나였다.
  
  희망은 오히려 걸어온 길이 다른 음악인들에게서 발견된다
  
▲ 상품으로서의 음악이 아닌 삶으로서의 음악을 강조하는 '윈디시티'는 반전·평화·자유를 노래하며 세상을 직시하고 있음을 알렸다. 윈디시티의 김반장. ⓒ권준경

  노래운동과 가극 활동을 하다 재즈에 심취하여 유학을 다녀온 강은영은 외국인 연주자들과 함께 강은영쿼텟을 결성하고 재즈 앨범 <Someday>(2007)을 발표했다. '明天 대추리에서', '오월의 노래', 'Someday-임을 위한 행진곡을 위하여' 등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민중가요의 뉘앙스를 재즈에 얹고, '극'적인 창법을 더한 이채로운 시도이다. 1980년대까지 러시아와 남미의 영향을 받아들인 민중음악에게 서구의 대중음악 장르들은 기피 대상이었지만, 이제 "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다"와 같은 목적성마저 진부하게 들릴 정도로 문화제국주의의 평면성은 극복되었다. 음악인이라면 누구든 존재를 알리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나, 변화를 꾀했다고 해서 자신의 이미지에 손해를 끼칠 정도로 성공한 경우도 없다. 그런 점에서 오랫동안 음악의 경계를 넘나들어온 전경옥은 좋은 사례이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활동한 권진원도 <나무>(2006)와 같은 괜찮은 작품을 내놓았다.
  
  진보적·민중적 음악이라기보다는 사회의식을 지닌 음악인들의 독특한 시도에 가까우나 여전히 노래의 힘을 믿는 이들이 반갑고, 실제로 믿음이 효과를 높이기도 한다. 문제는 누구에게 수용될 수 있는가이다. 특정한 물리적·정서적 경험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세대성'에 의하여 한편에는 향수를, 다른 편에는 거부감을 주는 노래들이 섞여 나오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애정을 가진 일정 연령 이상의 바깥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쉽지 않다. 요강 앞에 무릎꿇어본 세대와 그게 뭔지 모르는 세대 사이에는 틈이 있다. 물론 많이 남아있지 않은 이들에게 모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정작 안타까운 것은 새로운 창작세대와의 단절이다. 그런데 희망은 오히려 걸어온 길이 다른 음악인들에게서 발견된다. 분명 무겁게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나 서류 견본 위에 쓰인 '홍길동' 찾기로는 다음 장을 채우기 힘들다.
  
  대중음악인에게는 침묵이 미덕처럼 강요되어왔다. 또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이해관계에 대하여 절실히 원하고 있음을 알려야함에도 좀처럼 발언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령 실망스러운 경우가 있더라도 모든 삶을 하나의 결점으로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영화와 미술, 국내와 해외, 현재와 과거로 확대해보면 얼마든지 너그러워질 수 있다. 물론 견해에는 일관성이 있어야하고, 일관성은 원칙에서 나오며, 원칙은 의식에서 나온다. 채식주의는 웰빙 따위가 아닌 생명에 대한 예의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의식과 창작의 음악적인 만남이며, 출신성분에 따르는 호의가 아니다. 정태춘·박은옥도 대중가수였고, 지금은 그와 같은 이들이 주류 시스템에 예속되어 있지 않은 인디음악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삶의 노래는, 이렇게 다시 태어난다
  
▲ '허클베리 핀'의 이기용은 "뇌가 있는 사회라면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다른 세계들의 만남과 접점"이 화두라는 '허클베리 핀'은 '사막'을 비롯한 여러 곡들에 진중한 의식을 숨겨왔다. 그리고 <환상... 나의 환멸>(2007)의 '낯선 두 형제'에서 이라크전쟁을, '휘파람'에선 북녘사람들을 노래한다. 시사저널 파업 시에 지지공연에 나서기도 한 '허클베리 핀'의 이기용은 "뇌가 있는 사회라면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말하고, "진보는 상식이다. 상식적인 세상이 되는 것이 진보이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사혼'과 '마하트마', 그리고 '썩스터프'처럼 음악으로 발언해온 헤비메틀/펑크 장르의 인디밴드는 그 수가 적지 않다. 수면 아래에 있지만 '폐허'는 빨치산과 혁명을 블랙메틀과 다크앰비언트라는 마니아 장르로 표현하고, 스무 살 청년의 감성을 지닌 '회기동단편선'은 진보적인 학생이자 음악애호가로서 바라보는 자신과 세상을 기록한다.
  
  상품으로서의 음악이 아닌 삶으로서의 음악을 강조하는 '윈디시티' 역시 <Countryman's Vibration>(2007)에 실은 'Freedom Blues'와 '우리시대'를 통하여 반전·평화·자유를 노래하며 세상을 직시하고 있음을 알렸다. 스스로를 "단순한 음악엔터테이너가 아닌 생각하고 활동하는 예술가집단"이라 규정하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레게를 "민중의 억압적인 역사를 담고 있으며, 세계의 다양한 문화에 대한 존중을 지니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들 역시 "이 사회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방관해선 안 된다"며 여러 집회 현장에 서왔다. 최근 촛불문화제에서도 만날 수 있는 '두 번째 달 프로젝트 바드'도 오래전부터 버스킹(거리공연)을 계속해왔다. 여리게 보이는 이 청년들은 2005 한국대중음악상의 대상격인 '올해의 앨범' 수상자이자 드라마 <궁> 등의 OST로도 알려진 뮤지션들이다. 이들은 '장소성과 의도'에 의해 의미 지어지는 공연예술을 벗어나 '현장과 사람'으로 구체화된 걸음을 성큼 내딛고 있다.
  
  지난해, '허클베리 핀'의 작업실에 여러 사람이 모여 밤이 늦도록 술잔을 기울인 날이 있었다. 그 자리를 찾게 된 손병휘는 기타를 들고 자신의 새 노래를 불렀고, 기타를 이어받은 연영석이 노래했으며, 마지막으로 고명원이 유쾌한 연주로 화답했다. 이후 악기를 독점한 연영석의 끊이지 않는 노래들을 흘려들으며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나누고 건배도 하면서 떠들었다. 저마다 자리가 다르고 서로 멀리 있는 듯하지만, 그 날처럼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만나고 있다. 우리가 요즘 배우고 있는 것처럼, 출발선과 목적지는 다를지라도 같은 길에서 만나 함께 걸을 수 있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무수한 것들을 육체의 언어로 불러내는 삶의 노래는, 이렇게 다시 태어난다.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