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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2008 -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프레시안 연재)

by Wood-Stock 2009.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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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은 대중과 가장 가까운 문화임에도 피상적으로 다뤄져 왔다. 특히 위기에 처했던 한국의 대중음악은 최근 산업적으로, 내용적으로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 이 과정에서 비평은 대중음악의 활력을 더욱 높이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프레시안>은 음악비평웹진 <보다>와 함께 대중음악의 현실을 짚어보는 기획을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김민규, 김봉현, 서정민갑 등 젊은 음악평론가들이 참여하는 이번 기획에서는 아이돌, 리메이크, 인디음악, 음악페스티벌 등 대중음악계의 주요 키워드를 차례로 짚어본다.

 

현재 <프레시안>에 고정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보다>의 일원인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는 "대중음악의 음악적·환경적 지형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대중음악 전반을 밀도 높게 그려내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번 기획은 매주 2편씩 <프레시안>과 <보다>(http://www.bo-da.net )에 동시에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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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①] 아이돌의 화려한 부활, 독인가 약인가 

 

누구나 한번쯤, 혹은 지금도 TV 속 전화벨 소리에 집안을 두리번거리곤 한다. 이 사소한 해프닝처럼 미디어가 창조하는 비현실은 항상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음악산업과 미디어가 고안해낸 가장 오래된 아이템이자 상품인 아이돌은 "비디오가 음악을 죽인다"는 푸념을 뒤로하고 열린 영상시대에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상업주의와 대중음악을 적대적인 관계로만 규정하는 것도 곤란하다. 아이돌을 통하여 트렌드와 시장작동방식을 이해할 수 있고,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대중음악 이면의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기획사시스템이 연예산업을 장악한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아이돌이 가요계와 방송을 과점해왔다. 그런데 특정 소비자군 만을 대상으로 단기수익에 집중하다보니 2000년대에 들어 아이돌과 팬덤은 '그들만의 세상'에 갇히고 말았다. 그 중 여럿의 이름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아주 오래된 이야기의 주인공들처럼 희미해졌다. 빠르게 소비되고 빠르게 잊혀진 것이다.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너무나 명확해진 가요계는 서먹한 풍경으로 변했다. 이러한 가요계의 '국소마취'는 뒤따라 찾아온 음반산업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음악을 완벽히 도구화함으로써 전술만 남고 철학은 사라진 것이 199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진행된 시장논리의 강화와 관련이 없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런데 2007년, 고사 직전까지 갔던 아이돌 시스템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로 대변되는 돌파구를 찾아냈다. 이 어린 친구들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고, 'Tell Me'를 따라하는 아이들의 재롱은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의 고정 프로그램이 되었다. 2008년에는 쥬얼리의 'ET춤'이 그러했다. 나름대로의 음악적 색깔을 지닌 빅뱅과 가창력이 뛰어난 브라운아이드걸스 등도 성장했다. 분위기가 반전되고 수익시스템도 어느 정도 조정되자 왕년의 아이돌 스타들까지 속속 복귀를 예고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보기 힘들었던 모습이다.

 

한편에선 '드림콘서트'에서의 집단행동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이 행사는 전부터 배타적인 팬덤 문화를 극명하게 노출해왔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가수가 나올 때에만 풍선을 흔들며 환호하고, 나머지는 침묵하는 그로테스크한 진풍경을 수년전에도 목격한 바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이번 일이 도마에 오르는 것을 보며 그동안 많이 나아졌던 모양인가 했을 정도이다. 또 모 대학교가 축제의 흥행을 위해 원더걸스를 불렀다가 자칫 불상사를 낼 뻔한 일은 대학문화와 대학축제의 현재를 여실히 보여줬다. 그런데 이처럼 부정적인 사건들마저도 이른바 아이돌 전성시대의 재래를 보여주는 이슈가 되었다. 이쯤 되면 대중음악계가 되찾은 활기와 누적된 질적 향상이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 고 해야겠지만 그리 간단치가 않다.

 

한국음악산업협회에 따르면 2008년 상반기 음반판매 1위의 주인공은 아이돌 가수들 중 하나가 아니라 김동률이다.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원더걸스는 2007년에 5만장도 넘기지 못하면서 15위에 머물렀다. 오히려 유희열의 음반이 상당한 판매량을 기록했고, 자신의 앨범을 통제하는 이 프로듀서형 가수의 단독 콘서트는 성황을 이루었다. 노래의 히트가 히트수로 판가름 나고 음반이 힘을 잃은 상황과 새로운 매체에 민감한 청소년층의 향유방식 변화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흥행이 관객 수로 판가름 나듯이 음반판매량은 여전히 실증적인 지표이다. 음악수용자의 계층화 현상, 그리고 막강한 지원에도 불구하여 성과는 충분치 못한 아이돌의 몇 가지 한계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공정하다.

 

'바보 캐릭터' 대신 '비호감 캐릭터'가 뜨고, 스타들의 짝짓기 프로그램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정도로 소비방식이 변화한 데에는 경험이 쌓이면서 어떤 단계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최근 보여준 여학생들의 참여성과 팬덤문화 역시 그러하다. 아이돌 팬클럽은 이미 인터넷 동호회와 카페를 통하여 집단소통과 군중동원의 선례를 남겨왔다. 또한 아이돌이 어린 세대만의 향유물이라는 전제 역시 편견이 되었다. 마이클 잭슨, 마돈나, 카일리 미노그도 아이돌이었고, 서태지 역시 아이돌이다. 오래전, 만화는 아이들만 보는 것이라던 시절처럼 다소 촌스러운 인식이라고나 할까. 물론 여기에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 전제에 대한 공감이 없기 때문에 아이돌에 대한 비판 역시 오해를 받아왔다. 다양성과 창작의 최소 기반을 위해선 일방적인 과점이 아니라 공존이 중요하다는 것이 하나, 아이돌 시스템이 안이함에 갇혀 스스로 자기기반을 허무는 것에 대한 비판이 둘이다. 그런데 중요한 논점들을 선점 당하자 이러한 지적을 계몽적이며 교조적인 태도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향유물과 자신의 격을 동일시하는 성향은 어떤 대상이 비판받을 때 자신의 격까지 의심받는다고 생각하여 공격성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듣지 않고 폄하하는 것만큼이나 무턱대고 두둔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이 와중에 아이돌을 옹호하기 위해 등장한 논리가 뮤지션과 아이돌의 분리이다. 태생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기획사시스템에 의한 수동형 아이돌만이 부각되었다고 해서 '아이돌≒뮤지션'이지 '아이돌≠뮤지션'은 아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아이돌 가수들 중에는 자신의 곡을 스스로 작곡하는 일이 흔했다. 박남정, 현진영, 김원준 모두 아이돌 댄스가수였지만, 동시에 작곡하는 음악인들이었다. 물론 아이돌을 대상으로 음악성만 운운한다면 그야말로 코미디가 되지만, 앞서 언급한 결과론적인 규정으로 선배들이 그 시절로 돌아가 작곡을 하지 말아야 될 것 같은 상황까지 강요하는 것도 적절치는 않다. 자기는 편견이 아니라면서 남은 편견일 것이라는 생각은 결국 자신의 편견을 인정하는 격이다.

 

문제는 관행적인 제작과정에 있다. 무수한 후보 곡들을 '수집'하여 그 중 몇 곡을 골랐다는 자랑이 일반화되면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백화점이 아니라 잡화점식 음반들 속에서 노래들은 어쩌다 자기가 여기에 누워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투덜댄다. 일관성을 결여한 음반과 추억 속의 동시상영은 다르다. 상품임을 강조하면서 정작 품질을 외면하면 불량품이 되고, 다른 의도가 강할수록 음악적 성격은 불분명해지기 마련이다. 다른 하나는 곡비를 주고받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곡(노동)을 제공했으나 간택 받지 못한 작곡자들의 생계문제이다. 반면, 예전처럼 권력자의 은밀한 '행사'에 가야할 일은 없어졌거나 혹은 줄었지만, 아이돌과 기획사의 수입처는 여전하다.

 

기실 외적인 포장의 중시는 규격화와 완성도의 혼동에서 비롯되었다. 팝음악에 대한 콤플렉스는 굳이 밟지 않아도 되는 계단을 만들어 밟게 했다. 그러다보니 시도 자체와 기술보다 내용과 정서가 중요함에도 스타일 수입과 아이디어 수집을 통한 재현을 창작으로 오해하기에 이르렀다. 노래 자체의 힘보다 편곡과 안무가 우선시되는 것이다.

그 슬로건은 "대중성을 좇으라, 그러면 대중이 따를 것이다"이다. 보편성에 대한 오해와 자기위안을 위한 단정, 즉 자기정당화는 조금 다른 의미의 '수월성'을 거쳐 듣는 이마저 민망하게 만드는 노래들과 '재미있음'에 대한 심각한 오해로 이어진다. 덕분에 큰 가능성이 있었던 아이돌마저 "낮은 데로 임하게" 된다. 시대착오적인 음악과 시대초월적인 음악의 구분은 의외로 쉽다.

  

다행히 이효리, 민효린, 태양 등의 경우처럼 여러 면에서 나쁘지 않은 사례들이 있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일단 노래에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원더걸스의 'Tell Me'는 '스테이시 큐'의 'Two of Hearts'를 샘플링 했고, 쥬얼리의 'one More Time'은 '인 그리드'의 'one More Time'을 그대로 가져온 곡이다. 재창작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스크린에서 물감이 떨어질 듯한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의 삽입곡으로 새삼 화제가 되고 있는 'Don't Let Me Be Misunderstood' 역시 지난 40여 년간 '애니멀스'와 '에릭 버든' 그리고 '게리 무어' 등에 의하여 수없이 리메이크되어온 곡이다. '산타 에스메랄다' 버전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영화 자체부터 세르지오 레오네의 웨스턴무비에 핏줄을 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샘플링과 리메이크을 내세웠을 뿐 사실상 번안곡에 가깝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새로운 히트 곡을 얻었지만 새로운 수준의 곡을 얻은 것은 아니다. 노래뿐 아니라 뮤직비디오, 의상, 공연컨셉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모방과 차용이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리메이크, 샘플링, 오마주, 모티브 등 사연도 가지가지이다. 카우보이를 목동이라 번역하면 이미지가 달라지는 게 세상이치이다. 무수한 앨범들에 이러한 곡들이 관례적으로 삽입되는 요즘의 상황은 옛날 옛적 가요계의 '번안곡 시대'를 연상시킨다. 주류 가요계의 창작이 한계에 달한 시점에서 1980년대와 1990년 가요들을 리메이크했듯이 현재의 풍조 역시 그와 목적은 유사하고 방식은 안이하다. 심지어 소녀시대는 '모닝구 무스메', 이효리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식으로 컨셉 자체가 차용이 아니냐는 이들도 없지 않다.

 

물론 아이돌은 다소 다른 방식으로 소비된다. 쥬얼리의 서인영은 '소비이즘'의 상징이 되었고, 원더걸스는 선망 받는 스타로서의 욕구를 'So Hot'을 통해 판매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동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살해가 금기시되지만 코미디에선 금기를 노골적으로 깸으로써 쾌감을 선사하듯이 아이돌은 욕구의 자유지대가 되었다. 사육이라는 다소 심한 말이 나올 정도로 엄혹한 환경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생존한 그들은 대중이 가질 수 없거나 될 수 없는 인공적인 대리물로 받아들여진다. 음악애호가들이 영웅보다는 친근하게 이름 붙일 수 있는 음악을 즐기는 한편에서 아이돌은 자본주의사회의 또 다른 아이돌로 기능한다.

 

그럼에도 적정선을 넘어선 아이돌의 일방적인 과점양상은 그대로이고, 문화소비자의 선택권과 문화다양성 그리고 창작기반은 여전히 열악하다. 강점은 약점이기도 하기에 어느 선 이후부터는 한계가 된다. 이 부분에 대한 반성이 공감을 얻어가던 때에 등장한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에 대한 반응은 "대중음악계의 구원투수"였고, 어느 정도 '잘못된 신호'로 작용했다. '경쟁력'과 '성장'을 중시하는-또는 해야 한다는 강박이 강력히 개입했다. 여전히 제작자들에게 아이돌을 투기물이고, 어린 가수들 역시 연기자 또는 연예인으로 가기 위한 경로로 생각하며, 팬과 평단마저 지레 낮은 기대수준을 갖고 대하는 태도를 취한다. 자칫 본의 아니게 아이돌을 소모품으로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에 참여할 수도 있다.

 

긍정적인 모습의 아이돌들이 나타나면서 주류대중음악계에도 희망은 보인다. 다행이다. 그런데 여전히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지난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 그 동네에 일어난 일이다. 건조한 땜질로 시스템을 다시 가동시킬 수는 있지만, 언제고 같은 상황을 맞아 발목을 붙들릴 위험은 그대로이다.


시청률 제고를 위해 부활한 TV가요프로그램들의 순위제가 이렇다할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전제와 출발이 잘못되면 언짢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뱀에게 머리를 물렸을 때 응급처치를 하겠다고 목을 졸라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중음악계에 생기가 돌고 이슈가 연이어 발생한다. 어려운 시절에도 악기를 팔지 않은 음악인들의 층은 깊어졌으며 진지한 담론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 흐름을 성숙으로 이어가 아이돌이 다른 음악과 공존하는 시대를 기대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야,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충분히 호감을 가질만한 아이돌들이 어떤 품새로 자리 잡는가에 시계를 거꾸로 돌려 같은 길을 재차 밟게 되거나, 아니면 '지속가능한' 단계에 접어들거나 할 것이다. '어덜트 아이돌'이 아니라 '얼트 아이돌'을 기대해본다. 누군가는 중학교 시절 영어선생님이 교실에서 자주 사용하던 생활영어를 들려주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Be quiet, Shut up!" 

   

나도원/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②] 원더걸스, 소녀시대의 음악이 두려운 이유


샘플링, 오마주의 패러디

 

원더걸스는 작년 5월, '텔 미(Tell Me)'의 뒤를 잇는 '소 핫(So Hot)'을 발표했는데, 그 직후 재미있는 소식이 이어졌다. 우선 네티즌 사이에서 '소 핫'이 유리스믹스(Eurythmics)의 '스윗 드림즈(Sweet Dreams)'를 '샘플링'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는 "유사점이 거의 없으며, 그렇게 유명한 노래를 무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뉴스가 흥미로운 이유는 '소 핫'이 스테이시 큐(Stacey Q)의 '투 오브 하츠(Two of Hearts)'를 샘플링 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텔 미'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차이인가.

 

우선 이제는 낯설지 않은 '샘플링'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아보자. 샘플링은 이미 존재하는 녹음 결과물을 새로운 음악적 작업에 사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빅뱅의 '크레이지 독(Crazy Dog)'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에서 따온 신디사이저 소리가 그대로 깔려있다. 이 곡을 예로 드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곡의 유명한 사운드가 변형 없이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정의대로라면 이승철의 '소리쳐'가 후렴 부분에 대한 표절 논란을 겪을 때, '그것은 표절이 아니라 샘플링'이고 원작자에게 로열티를 주기로 '사후계약' 했다고 유야무야 넘어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후 계약'이라는 것이 양식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따질 필요도 없이, 어떤 멜로디가 비슷한 것은 샘플링이 아니라 단순하게 그냥 비슷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곡 어디에도 '리슨 투 마이 하츠(Listen to My Hearts)'에서 온 '샘플'은 없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경제 논리였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서 한국 가수들의 노래와 무대를 '카피'하는 것에 대해서 부러 소송이나 기타의 조치를 취했다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이것이 단순히 용어상의 혼란에 불과하다면 '텔 미'와 '소 핫'이 특별히 흥미로울 이유는 없다. 물론 샘플링이 하나의 작법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심지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도 간과할 부분은 아니다. 잘 쓰인 샘플링은 좋은 악기 연주나 노래 실력, 혹은 훌륭한 곡 쓰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곡을 구성하는 창의(創意)의 일부다. 하지만 '말하자면 편곡입니다' 식의 잘못된 설명을 넘어, '표절 아니면 샘플링' 같은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은 현대 대중음악의 주요한 작업 방식을 '훔쳐다 쓰는 것'이나 '미리 밝히면 그나마 양심은 있는 정도'의 행위로 끌어내리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최근 이런 경우들이 반복되면서, 샘플링이 표절 논란을 회피하거나 사전 차단하는 대응 논리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샘플링 여부를 공식적으로 밝힌 '텔 미'에 '투 오브 하츠' 샘플이 얼마나 사용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샘플이 아예 없어도 논의는 달라지지 않는다. 많은 네티즌들, 특히 스테이시 큐의 원곡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딱 들어보니 스테이시 큐 생각이 났다'거나 '이거 비슷하긴 비슷한데 이런 것이 샘플링인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텔 미'와 '샘플링'으로 검색한 결과를 아주 잠깐만 훑어봐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이런 느낌이 '투 오브 하츠'에서 가져온 샘플에서 비롯한다고 하긴 어렵다. 둘 사이에는 이유가 다른 유사점이 훨씬 많으며, '아아아아아 니쥬'를 '테테테테텔 텔미'로 바꿔서 그렇다는 이야기는 우스개로 남겨두는 것이 옳겠다. 미리 밝혔다는 것을 제하면 '소 핫'과 다를 바가 없다. '소 핫'이 '스윗 드림즈'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논란이 일고 다수의 사람들이 동일한 인식을 하는 과정이 같다는 말이다.

 

이승철과 원더걸스의 경우가 표절인지, 아이디어 수준의 활용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판단하는 것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그들을 비난하거나 그들만을 이야기할 생각도 없다. 예는 이미 무수하다. 이 글의 목적은 그들의 곡은 샘플링을 활용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 단어만 이상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뮤직비디오 표절은 '오마주' 혹은 '패러디'라고 주장하고, 무대 및 퍼포먼스 베끼기는 '아이디어 차용'이나 급기야 '재연' 같은 단어를 들먹이는 것과 동일하다.

 

곧 대중예술과 관계된 용어의 의미를 혼동하거나 의도적으로 악용하고 있으며, 그에 관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 법리(法理)와 객관이 아니라 양심과 창의의 문제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모든 오마주와 패러디와 재연과 샘플링은 그것의 바탕이 된 원전(原典)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알려주기 전에 본인이 먼저 아는 법이다. 쿨의 '이 여름 Summer'는 재미있고 아이비의 '유혹의 소나타'는 우스운 이유가 그렇다. 확실히 요즘의 샘플링은 아이비 측이 오마주라고 주장했던 광경을 패러디하고 있다.

 

리메이크가 '다시 만들어' 내는 것

 

그런데 지금까지의 귀찮은 과정을 한 번에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보통 리메이크라고 한다. 다른 가수의 노래를 다시 부르고 자신의 개성을 담거나 '재해석'하는 작업을 일컫는다. '커버(Cover)'라는 일반적인 단어를 제치고, 주로 영화나 텔레비전 등의 영상매체에서 쓰이는 용어가 한국에서는 유독 음악계에서 사랑 받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냥 다시 부르는 것이라고 하면 노래 못하는 사람 찾기 힘든 한국에서 그다지 매력적인 상품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일단 노래방에 가도 다른 사람들 노래는 안 듣고 자기 부를 곡을 찾아 검색 삼매경에 빠지는 우리가 아닌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던, 과거의 좋은 노래들을 다시 소개하고 새로운 감성을 불어넣는 작업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좋은 리메이크 작업은 아티스트의 취향과 영향을 드러내고 자신의 선택과 개성을 통해 청자들에게 새로운 음악적 경험을 제공하는 '큐레이팅'의 의미까지 가질 수 있다. 여기서 굳이 '큐레이팅' 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故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시리즈 같이 극히 모범적인 예시를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부르기'의 곡들이 원래 누구의 어떤 노래인지 모르더라도, 그것들을 소개받고 발견했으며 감동과 위안을 얻었다. 그 곡들이 이미 존재하던 곡들이라고 해서 김광석의 음악적 열정이나 창의적 활동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요컨대 샘플링과 마찬가지로 리메이크 자체에 대해서 좋고 나쁘다는 가치판단을 할 수 없다. 음악은 물론이고 모든 창작 활동에서 빼어남이란 단순히 새로운 어떤 것(newness)이 아니라 창조력(creativity)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부르기' 이후 10년이 넘도록 비슷한 경험을 찾기는 어렵다. 근래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는 '리메이크 앨범'들은 이미 구축한 인지도와 익숙한 곡들을 합쳐 손쉬운 상업적 결과를 얻고자 한다. 그래서 앞서 말한 노래방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다. 그저 스튜디오에서 잘 녹음된 것에 불과한, 노래방 CD나 다름없는 앨범들이 무수하다. 물론 그것이 어떤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분명 대중들의 선택을 받고 있는 옛 노래들이 있고, 누군가 그 필요를 채워주고 있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전후 관계를 따져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려운' 음악계에서 소소한 투입비용 대비 적절한 성과를 얻어내고 있으며, 시장이 불러낸 현상인 만큼 시장이 원치 않으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아쉬운 것은 일종의 동업자 의식, 혹은 최소한의 상도덕이다. 작년에 큰 화제가 되었던 김동률의 '하소연'을 중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남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면 법적으로 권한을 위임 받은 저작권협회에 연락을 취하고 정해진 대가를 치르면 된다. 그 노래를 만든 사람이나, 원래 불렀던 이에게 의사를 타진할 필요조차 없다. 이 시스템적 결함은 우리 사회가 창작을 얼마나 가벼이 여기는지에 대한 상징과도 같다. 그것은 아주 뿌리가 깊어서 스스로 아티스트를 자처하는 이들마저 때때로 타인의 작품을 값만 치르고 가져다 쓴다.

 

무엇을 위기라고 부를까

 

부족한 창조력이 약간의 부주의와 소홀한 양심, 교묘하게 구축된 변명의 논리와 만날 때 대중음악은 위기에 처한다. 누구도 그 가치를 배려하지 않는 창작물이 대중으로부터 버림받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샘플링과 리메이크가 그 자체로 어떤 원인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요즘 음반에는 대부분 피아노라는 악기를 쓴다고 '피아노의 전성기'이라고 하지 않듯이, 현재의 상황이'샘플링과 리메이크의 범람'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선택지이고, 오직 그 결과로만 판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오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왜곡한다. 다음으로는 노래가, 연주가, 작곡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작은 구멍을 크게 밝히는 돋보기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서성덕/음악비평웹진 <보다> 편집위원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③] 2008년에 만난 1990년대 뮤지션들 

 

1990년대 음악, 어떻게 볼 것인가?

 

1990년대에는 소위 '고급가요군'으로 분류되는 뮤지션들이 존재했다. 모습을 제한적으로 노출하면서도 적지 않은 대중적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둘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았다. 1990년대의 그들은 매체 발달을 통해 비교적 어렸을 때부터 팝의 높은 수준을 실감한 세대를 대변한다. 따라서 자기만족을 떠나 높아진 눈높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스레 사운드라던지 세련된 곡의 형식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다분히 감각적이었고 모방에 대한 혐의가 늘 따라다녔기 때문에 진정성과 작가주의적 태도를 중요시 여겼던 기존 평단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지만, 일부 대중은 그들을 뮤지션의 새로운 전형으로 받아들이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끝을 모르고 팽창하던 댄스 뮤직의 시대에 존재했던 또 다른 선택권이었고, 팝에 근접한 수준 높은 음악을 한다는 동의가 팬들을 중심으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그들 중 대다수가 싱어-송라이터면서 동시에 프로듀서를 지향했던 것도 그러한 인식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댄스 뮤직의 파급은 순식간에 많은 것을 바꿨지만 보편적으로 봤을 때 한없이 가벼웠고 만들어진 상품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여기에서 발생한 괴리는 1990년대 대중음악의 양면을 상징한다. 평단으로부터 가볍게 치부됐던 고급가요군이 댄스 뮤직과 비교해서는 상당히 진지한 집단으로 인식됐고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평단은 고급가요군을 절대 지지하지 않았지만, 내밀 명함조차 희귀했을 만큼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고, 고급가요군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연말 시상식에서 원하는 이름이 호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태를 조롱했다. 통신 매체의 발달로 보다 극명하게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되었던 불신 가득한 시대, 그것이 1990년대의 진실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시대가 아름다운 포장지에 싸여 재조명되고 있다. 여기에서 경계해야 할 부분은 단순히 예전이 좋았다는 식의 접근이 기본 골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점이다. 1990년대 음악에 가장 빠른 반응을 보였던 세대가 오늘날 획득한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너나 할 거 없이 호황을 누렸던 그때를 추억하는 데 그칠 뿐이라면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된다. 본인들은 기성세대의 '예전이 더 좋았어' 타령에 얼마나 공감했나?

 

물론 1990년대를 대표하는 뮤지션들에게 2000년대는 어떤 재앙과도 같을 것이다. TV 출연을 하지 않고도 안정적인 행보를 보였던 그들 중 일부는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고도 잊혀지는 게 두려워서 대중에게 웃음을 판다. 자연히 음악은 남지 않고 우스운 사람만 남는 악순환이 생겼다. 그러나 그들이 누군가? 그들은 팝에 근접한 순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곡을 쓰고 직접 프로듀서가 되어 결실을 이끌어냈던 실질적인 첫 번째 세대다. 단절의 시대에서 손 내밀 대상을 자국 선배가 아니라 해외에서 찾아야 했고, 지명도가 충분히 쌓인 상태에서 유학을 감행했던 그런 경우다. 이전 세대에서도 마찬가지 고민을 안고 있었던 유학파가 존재했지만 그들은 연주 중심의 뮤지션이었고 귀국 후 교수로 불리는 광경이 더 익숙했다.

 

그러나 지금부터 언급될 이름들은 학생이 아니라 우리 곁에 늘 친숙하게 머물고 있었던 뮤지션이 될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도 분명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따라서 그들의 존재 가치를 예전 결과물이 아니라 현재의 위치를 통해 조명하는 것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 단절의 시대에서 고군분투했던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 되어 이전과는 달리 후배 뮤지션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으로 전해질 것이다. 그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그에 해당되는 뮤지션들의 행보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유형은 단적인 분류가 아니라 상징적인 부분을 부각시킨 결과임을 알린다.

 

프로듀서로서의 김현철, 정석원, 박진영

  

여기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김현철이다. 김현철은 출발점에서부터 프로듀서를 지향했고 누구보다 그 명칭에 잘 어울리는 뮤지션이다. 그의 정확한 판단력과 재능은 이미 초창기에 후배가 아닌 선배들의 앨범에서 빛이 났지만, 유재하 추모 앨범 [1987 다시 돌아온 그대위해](1997)에서는 다소 과소평가된 경향이 있다. 단 한 장의 앨범으로 10년 사이에 너무나 거대해진 유재하의 그늘을 감안하더라도 그 앨범을 주도한 김현철의 역량은 당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2000년대의 김현철은 어떤 모습일까? 확실히 입지는 예전 같지 않다. 재즈가 대한민국에서 쿨한 음악으로 받아들여졌던 시기에 김현철이 어떤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는지 돌아보면 그건 너무나 명백하다. 그러나 영역 자체가 좁아진 건 아니다. 여전히 O.S.T를 비롯한 각종 외부 작업을 성실히 수행했고, 특히 아이들을 위한 팝 앨범은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였다. 또 8집 [...그리고 김현철](2002)과 같은 앨범을 들어보면 천생 프로듀서라는 느낌이다. 그다지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지만 다양한 성향의 뮤지션들을 통제하고 각자의 색깔에 맞춰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능력은 정말 탁월했다.

 

김현철에 이어 이 유형에서 조명 가능한 뮤지션으로는 정석원이 있다. 015B 해체 후 공백기를 가졌던 정석원은 2000년대 들어 이가희라는 신인 가수를 발굴해서 앨범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그는 굉장히 독특한 결과를 낳았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건 소녀 감성의 발라드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기계 중심으로 이루어진 그 어떤 음악들보다 치밀한 프로그래밍과 사운드로 채웠는데, 가사는 지나치게 가볍고 도발적이어서 도대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이가희의 앨범이 굉장히 실험적인 시도로 그쳤다면 다음으로 이어진 박정현과의 작업에서는 어느 정도 절충점을 찾아 사뭇 다른 반응을 이끌어냈다. 오늘날 그녀의 최고작으로 정석원과의 결과물이 꼽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것을 떠올리면 무척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현재 정석원은 015B를 부활시킨 상태다. 무려 10년 만에 공개한 7집 [Lucky 7](2006)은 1990년대의 감성과 트렌드를 이끌었던 예전 행보에 미치지 못했지만 여전히 감이 살아있는 정석원의 능력을 유감없이 담아낸 것에 의의를 둘 수 있었다.

 

프로듀서 유형의 마지막은 박진영이다. 가급적이면 고급가요군으로 분류됐던 뮤지션들 중심으로 진행하려 했지만, 1990년대 출신 뮤지션 가운데 박진영만큼 프로듀서로서 대중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거두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걸 감안하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댄스 뮤직은 1990년대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분야지만 언제나 가볍게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박진영도 마찬가지였는데 하나 차별되는 점이 있었다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프로듀서와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프로듀서로 구체적 흔적을 남기기 전에 박진영이 참여한 외부 작업들을 보면 거의 일관성이 없다. 함께한 뮤지션들의 성향도 그렇고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기록도 존재한다. 돌이켜보면 이미 그때부터 훈련을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춤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은 그루브를 만드는 데 장점으로 작용했을 테고, 거기에 프로듀서 역량이 더해지면서 천대받았던 댄스 뮤직을 하나의 고급 브랜드로 바꾼 게 2000년대 박진영이 거둔 성과다. 비평적으로 소외됐던 분야를 대표하는 뮤지션이니만큼 그의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좀 더 명확하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싱어-송라이터 유형의 김동률, 이승환

  

싱어-송라이터 유형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김동률이다. 2008년 상반기에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1990년대에 관한 기사를 집중적으로 양산시킨 주역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를 맞이할 무렵의 김동률에게 1990년대는 어떻게든 극복해야 할 벽과 같았다. 1990년대 활동 기간에 비해 전람회가 남기고 간 자취는 이상하리만치 깊었는데, 그것은 김동률에게 득이 되기도 했지만 음악적으로는 독이기도 했다.

 

솔로가 된 이후에도 전람회는 김동률을 항상 따라다녔고, 그게 어떤 부담이었는지 증명이라도 하듯이 2000년대에 발표한 첫 번째 앨범이자 본인의 2집인 [희망](2000)에는 이전과 달라야 한다는 어떤 강박이 전해진다.

결과도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불과 1년 만에 발표한 [귀향](2001)으로 모든 우려를 불식시켰다. 과거로부터 비로소 해방된 인상이었고 [희망]을 스스로 보완한 앨범이기도 했다. 현재 김동률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음악이 담긴 5집 [Monologue](2008)의 상대적 성공을 누리고 있으며, 2000년대에 가장 신뢰감 있는 싱어-송라이터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이승환. 이승환은 앨범과 공연 모두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사운드 구현을 이룩하며 고급가요군에서 누구보다 충성도 높은 팬을 보유했었지만 2000년대에 가장 극심한 타격을 받은 뮤지션이기도 하다. 세 장짜리 레이블 컴필레이션 앨범과 더블 앨범으로 구성된 7집으로 2000년대 역시 화려하게 출발했던 이승환이 앨범 제작에 부담을 느끼고 EP로 대처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6년이 채 되지 않는다. 해마다 몰라보게 규모가 축소되어 앨범 시장의 재앙으로 불리는 2000년대를 그보다 극명하게 대변하는 이름도 없을 것이다.

 

여전히 그다운 앨범을 세장이나 발표했고 신인 뮤지션을 발굴하는 데에도 열의를 보이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 것은 그 자체만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수치로 드러나는 부분에 있어선 전에 없이 입지가 좁아졌다. 고급가요군의 정수로 불렸던 이승환의 부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극단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 주는 분위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 유희열과 윤상

 

최근 회자되고 있는 1990년대로의 귀환 분위기에 도화선이 된 건 유희열이었다. 1990년대의 감성이라 불렸던 015B도 불가능했고 가장 충성도 높은 팬을 보유했다고 평가받았던 이승환조차 입지가 좁아진 요즘, 유희열은 대체 무엇이었기에 6년여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런 전환을 이끌어냈을까? 단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고 누군가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답은 존재한다. 바로 라디오다.

 

DJ 유희열과 라디오로 유대감을 형성한 적이 없다면 그게 어떤 건지 절대로 모를 것이다. 의외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언급됐던 뮤지션들 가운데 대중과 가장 늦게 교감을 이룬 것이 유희열이다. 물론 그전에도 유희열은 이승환, 윤종신 등과의 작업을 통해 음악적 신뢰도를 구축했었다. 그가 좋은 뮤지션이란 건 알만한 대중은 다 알았고 동료 뮤지션들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앨범에서는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늘 막혀 있었다.

 

그것을 단숨에 해결해 준 것이 라디오였고, 그것이 어떤 파급 효과가 있었는지 처음으로 증명한 결과가 4집 [A Night In Seoul](1999)이다. 이후 삽화집으로 유대감은 더욱 견고해졌고, 그와는 별개로 일렉트로니카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뮤지션으로서의 욕심도 알렸다. 그렇게 형성된 끈이 1990년대의 감성과 가장 높은 충성도보다 더 오래 지속됐던 건 우리 사이에서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좀 이해가 되나?

 

다음은 윤상이다. 최근 윤상이 일렉트니카 뮤지션들과 작업을 진행 중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2000년대에 따로 어떤 프로젝트 결과물을 발표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보여준 윤상의 행보는 그 자체가 의미 있는 프로젝트와도 같다. 대중적 이해도가 떨어지는 기계 중심의 음악과 월드 뮤직에 집중한 노력은 좀 더 심도 있게 조명되어야 한다. 윤상은 일찍부터 두 분야에 관심을 보였던 보기 드문 뮤지션이고, 대한민국 안에서는 선생으로 불릴 만한 위치임에도 뒤늦게 유학을 감행하는 등 늘 새로운 자극을 이끌어내며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 역시 뒤늦게 파생된 일렉트로니카 문화를 주도하는 후배 뮤지션들과의 작업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5집 [There Is A Man](2003)에서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춘 bk! 외에도 프랙탈(Fractal), 카입(KAYIP) 등을 참여시켜 이끌어낸 결과는 무척 흥미로운 것이었다. 소리의 질감을 다듬는 손길은 그 어떤 장인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1990년대 출신임에도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뮤지션이 바로 윤상이다.

 

1990년대 뮤지션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

 

지금까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일곱 명의 뮤지션에 대해 살펴봤다. 물론 여기에는 없지만 윤종신이라던지 정재형 등 충분히 존중할 만한 행보를 거듭하고 있는 다른 뮤지션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포함시키지 못해 무척 유감스럽지만 1990년대가 전성기였다고 평가받는 뮤지션들의 오늘을 비추면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히 "1980년대 음악이 좋았다. 아니다, 1990년대가 더 우월하다"는 식의 정의가 아니라 보다 생산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1990년대의 뮤지션들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그때 가장 훌륭한 결과물을 발표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절의 역사를 반복했던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끊기지 않는 긍정적 흐름을 조성시킬 수 있는 최초의 가능성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여기 언급된 뮤지션들은 2010년대에도 그리고 2020년대에도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2000년대 와서 음악의 패러다임이 급격히 변화함에 따라 절망에 가까운 어려움에 직면해 있지만 그것이 종말로 이어지리라 믿지 않는다. 이 뮤지션들은 커다란 벽이 생길 때마다 그걸 스스로 넘어야 했던 환경을 보냈고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을 것이다. 미리부터 포기하는 걸 택하는 대신 그 경험이 차후 후배들에게 어떻게 쓰일지를 떠올리면서 두근거리는 쪽을 택하겠다. 


문정호/음악비평웹진 <보다> 필자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④] 국내 록에 새로운 물결이 인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열린 송도에는 비가 내렸다. 하지만 매해 물폭탄에 맞서 왔던 관객들은 이미 경험치가 만랩이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장화와 우비를 준비해서 진흙탕 따위 아랑곳없이 열광적으로 공연을 즐겼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트래비스, 언더월드, 엘르가든 등의 헤드라이너에 관심을 보냈지만, 서브 무대인 펜타포트 스테이지를 주목하는 이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 국내 록 씬의 새로운 경향을 알리는 의미심장한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탈진'하는 에너지의 갤럭시 익스프레스, 펑크 씬의 히어로가 로큰롤의 백비트로 회귀한 문샤이너스, 일본 시장 진출에 성공한 최고의 멜로딕 펑크 밴드 검엑스, 노이즈에 담긴 감정을 극대화한 비둘기우유, 올해 인디씬의 히어로 로로스 등이 그 주인공이었다. 특히 올해 데뷔앨범을 발표한 로로스, 비둘기우유의 무대는 90년대 중후반 펑크/얼터너티브의 영향에서 출발한 국내 인디 씬이 10년의 시간 동안 얼마만큼 분화하고 다양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흥미로운 지표였다.

  

국내 포스트록/슈게이징의 흐름은 9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 옐로우 키친, 퓨어디지털사일런스, 아스트로노이즈, 쓰루 더 슬로 등의 밴드가 클럽 스팽글과 레이블 밸룬앤니들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옐로우 키친의 [Mushroom, Echoway, Kleidose](1998), 퓨어디지털사일런스와 피와 꽃의 스플릿 EP [barcode for lunch/ 즐거운 한때 우리는 외계 혹성을 방문했다](2000) 등의 인상적인 앨범을 발표했다. 그리고 초기 클럽 빵의 잠, 글라스 패사드, 페퍼민트 오나니즘 등이 그 흐름을 이었다. 하지만 한 장의 앨범, 개별 밴드의 약진으로 그치는 아쉬움이 반복되었다.

 

이 단절적인 흐름에서 보다 대중적인 지지를 받은 밴드가 2003년 EP [사랑의 유람선]을 발표한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이하 속옷밴드)였다. 보컬 멜로디 없이 연주만으로 청중의 감정을 움직인 속옷밴드 역시 2006년 셀프타이틀 1집을 마지막으로 '안녕'했다. 그리고 같은 해 종잡을 수 없는 유머의 소유자 불싸조의 2집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와 감상적인 음악에 포스트 록 방법론의 일부를 차용한 푸른새벽의 고별작 [보옴이 오면]이 발표되었다.

 

밴드를 결성해 화제가 되고 앨범을 발표해 주목을 받을 즈음 해체하는 수순이 반복되면서 국내 포스트록/슈게이징의 흐름은 여기까지인가 싶었다. 이 때 등장한 밴드가 로로스와 비둘기우유이다.


클럽 빵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로로스는 2006년 데뷔 싱글 [Scent Of Orchid]를 발표했다. 아직 성긴 미완성의 사운드였지만 그 스케일과 감정의 완급에 주목하는 팬들이 생겼다. 2007년 [라이브 클럽 빵 컴필레이션 3]에 '성장통'으로 참여한 후 올해 초 발표한 로로스의 데뷔앨범 [Pax]는 드라마틱한 구성과 팝 센스를 동시에 구현한 올해의 화제작이었다. [Pax]는 메인스트림 진출에 성공한 동세대 해외 포스트 록의 흐름과도 일맥상통하는 맥락을 가지고 있었고, 그 대중적 가능성은 클럽 공연과 페스티벌 무대를 통해 점점 확장되어 가고 있다.

 

반면 비둘기우유의 [Aero]는 90년대 해외 인디 씬의 흐름이었던 슈게이징에 보다 집중한 앨범이다. 노이즈로 구축한 이들의 싸이키델리아는 때로는 광폭하게('너의 눈으로 나를 본다'), 때로는 드라마틱하게('Murmur's Room') 표출되며 마니아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인스트루멘틀 중심의 포스트록/슈게이징의 흐름은 헤비네스 계열에서도 대두되었다. 2004년 데뷔 EP [Most Important Value]를 발표한 49 몰핀스, 2006년 데뷔앨범 [Rough Draft In Progress]를 발표한 할로우 잰이 바로 그들이다. 하드코어/스크리모 계열에서 발군의 앨범을 발표한 이들은 천천히 시작하여 폭발하는 서사를 지닌 곡들로 헤비네스 팬들과 포스트 록 팬들에게 동시에 어필하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음악의 새로운 흐름은 느닷없이 표면 위로 드러난다. 하지만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많은 시도, 시행착오, 의지들이 존재한다. 지금 '포스트록/슈게이징'의 흐름이 두드러지는 것은 몇몇 좋은 앨범/아티스트 때문만은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노이즈를 생산해온 릴레이, 불가사리 등의 공연과 홍철기, 최준용 등의 아티스트, 홍대 부근 서교 지하보도를 '불가사의한 장소'로 만들고 있는 머머스룸, 오랜 작업을 마치고 앨범 발표를 앞두고 있는 데이드림, 3년 만에 2집을 발표한 '왕십리 슈게이저' 스타리-아이드, [라이브 클럽 빵 컴필레이션 3]에 'Apollo 11'로 참여한 프렌지 등 아직 가시화되거나 화제의 중심에 있지 않음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소리로 표출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슈게이징/포스트록의 자의식과도 일맥상통한다. 


김민규/음악인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⑤] 2008년, 한국 포크의 영광은 계속된다 

 

▲ 1970년대 말 명동과 신촌의 포크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1980년 광주를 거치며 낭만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알게 되었던 김현성, 백창우, 홍순관 같은 이들은 포크의 아름다움과 민중가요의 진지함을 적절히 결합시키며 김민기와 양병집의 계보를 잇는 현실 참여적 포크 음악의 역사를 1990년대까지 끌고 왔다.

▲ 미술에서 음악으로 장르를 바꾼 늦깎이 뮤지션 연영석은 명 기타리스트 고명원과 함께 록의 어법으로 독창적인 민중가요를 들려주면서도 클럽 빵에서는 통기타 하나만을 가지고 자신의 음악을 벼리며 홍대 인디 씬과 민중가요의 접합을 꾀하고 있다.

 

 

포크, 라는 말은 어쩐지 세대적이다. 힙합이 30대 중반 이상의 사람들에게 다소 덜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포크는 30대 이하의 사람들에게 서먹한 삼촌의 존재 같은 느낌이 있다. 그러니까 통기타가 익숙한 놀이문화였던 세대, PC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는 대신 기타학원에 다니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나 '연가' 같은 노래의 코드를 외우는 것이 훨씬 쉬크(Schick)했던 세대에게 포크는 추억이며 또한 자신의 음악적 뿌리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통기타 하나만 있으면 밤을 새워 노래하는 일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광화문 근처의 카페에만 가 봐도 밤새 기타 치며 노래하는 40대들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서태지의 등장 이후, 그러니까 1990년대 중반 10대가 한국 대중음악의 주 소비층으로 등장한 이후 포크는 더 이상 젊은 세대의 언어가 되지 못했다. 대학에서 MT를 가도 기타를 가져가지 않았고, 노래방 기계가 없이는 더 이상 함께 노래하지도 않았다. 그 무렵부터 왕년의 포크 뮤지션들은 하나같이 미사리로 달려가 카페 간판에 자신의 히트곡과 사진을 박아 넣었으며, 중년의 언니오빠들은 사춘기 시절 자신의 우상이었던 이들의 노래를 들으며 없는 추억을 만들어내는데 열중했다. 그리하여 이제 포크는 1970-80년대의 상징으로 국한될 뿐, R&B와 일렉트로니카 같은 당대 트렌드의 구석에도 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포크 혹은 통기타 음악은 과거의 유산일 뿐일까? 어쩌면 우리가 2007년 최고의 음반 판매 뮤지션이 소녀시대이거나 원더걸스일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처럼 포크 역시 어떠한 오해의 대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무대는 여의도와 미사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음악은 TV와 라디오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008년 현재 한국 포크는 과거로부터 돌아왔고 해외로부터 자극되었으며 다시 20대에게 기타를 쥐어주고 있기도 하다. 이 다양한 흐름을 일별하며 우리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한국 포크가 다시 메이저가 될 수 있다는 낙관이 아니라, 있어야 할 음악이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명백하고 평범한 사실이다.

 

있어야 할 음악이 있어야 할 곳에 있다


먼저 한국 포크의 마지막 스타였던 김광석이 세상을 떠나고, 김창기가 떠난 동물원이 더 이상 히트곡을 내지 못하며, 잠시나마 영화를 누렸던 동년배의 뮤지션들이 대부분 미사리로 발길을 돌렸을 때 새롭게 활동을 시작한 일군의 포키들이 있다. 1970년대 말 명동과 신촌의 포크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1980년 광주를 거치며 낭만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알게 되었던 김현성, 백창우, 홍순관 같은 이들은 포크의 아름다움과 민중가요의 진지함을 적절히 결합시키며 김민기와 양병집의 계보를 잇는 현실 참여적 포크 음악의 역사를 1990년대까지 끌고 왔다. 그러나 노래가 감상되고 반추되기보다는 1회용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던 1990년대 중반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포크가 미사리로 밀려갈 때,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서정시와 결합시키며 한국 포크의 새로운 돌파구를 타진했다.

 

원래 가장 가사에 주력하는 음악답게 스스로 시와 같은 노랫말들을 써내곤 했던 포크와 시의 만남은 문학과 음악의 만남이라는 혼종이 주는 이채로움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정성을 생명으로 하는 두 장르의 만남은 시노래의 격조와 품격을 획득하며 힙합과 트로트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던 이들의 비빌 언덕이 되어 주었다. '시노래모임 나팔꽃'이라 자신들을 명명한 이들은 이미 음악과 문학에서 부인하기 힘든 지명도를 획득했던 이들이었지만 서로간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활력을 수혈 받았고, 이들은 꾸준하고 기획력이 돋보이는 소극장 공연과 음반 출시, 지역 순회공연을 펼치며 포크의 생존을 알리는 보루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동인체제로 운영되는 활동의 피로감으로 최근에는 다소 활동이 뜸하지만 시노래모임 나팔꽃은 2000년대 이후 가장 눈에 띄는 중년 포크 뮤지션들의 활동으로 기록될 만 하다.

 

미사리로 가지 않은 중년의 포크뮤지션들이 나팔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명동 포크의 중심이기도 했던 김의철을 비롯한 일군의 포크뮤지션들은 '청개구리'라는 이름을 걸고 명동과 일산의 공연장을 중심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창작곡 위주였던 나팔꽃에 비해 과거의 노래가 더 많았던 청개구리의 공연장에는 상대적으로 훨씬 연배가 많은 이들이 추억을 되새기며 꽉꽉 들어찼고, 작가주의적 엄숙함이 있는 이들의 공연에는 특히 왕년의 포크 매니아들이 튼실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오래도록 활동을 중단하고 있던 한돌 같은 옛 스타의 귀환으로 이어지던 청개구리 모임은 공연이 계속되며 손현숙, 윤선애, 전경옥 같은 민중가요 진영 출신의 여성 포크 뮤지션들이 결합해 활력을 더했다.

 

나팔꽃의 포크뮤지션들과 달리 다소 비현실참여적인 편이었던 청개구리의 포크뮤지션들 가운데 2000년대 들어 거의 유일하게 창작활동을 이어간 김두수는 발군의 저력을 선보이며 청개구리 모임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기도 했다. 그가 2002년 오랜 침묵을 깨고 내놓은 4집 [자유혼]은 한국에서 전무후무한 사이키델릭 포크 음반으로서 강한 음악적 아우라를 발산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김두수는 2007년 5집 [열흘나비]에서도 환상적인 사운드와 도저한 노랫말을 결합시키며 자신의 은자(隱者)적 이미지를 배가시켜 한국 포크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러한 중년 포크 음악인들과 팬들의 귀환은 물론 더 이상 동시대의 음악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음악적 세대분열이라는 현실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한편 각기 다른 세대가 각기 다른 음악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다양함이 성장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과거의 음악인들이 현재를 살아가며 벌어졌던 일은 단순히 공연과 새 음반 출시만은 아니었다.

 

한국 대중음악의 얄팍한 지층을 뒤늦게 복원하려는 움직임은 전설적인 포크 음반들의 복각으로 이어졌고, 덕분에 팬들은 중고음반시장에서 비싸게 거래되던 옛 명반들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김민기, 한대수, 서유석, 박인희, 현경과 영애, 해바라기 등의 복각음반은 비트볼, 뮤직리서치, 리버맨뮤직 등의 리이슈 전문 레이블들의 성장으로 이어지며 과거의 영화가 그리 만만하고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어떤 이에게는 추억이었을 이름들이 어떤 이에게는 놀라운 발견이 되었고, 이로써 과거는 현재로 이어질 통로 하나를 더 얻게 되었다.

 

포크의 전통을 유지해온 민중음악 뮤지션들

 

과거의 귀환이 현재 한국 포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면 다른 한축은 당연히 지금을 말하는 젊은 포크뮤지션들의 존재일 것이다. 먼저 민중음악 진영의 포크 뮤지션들 이야기를 해보자. 유의미한 가사 전달에 주력하고 즉각적인 공연이 가능하도록 음악을 전투용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민중음악은 1990년대 이후 다양한 음악적 분화를 거치면서도 포크의 전통을 꾸준히 유지해왔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노래마을' 등의 노래모임에서 독립한 안치환, 손병휘, 문진오, 이정열, 이지상 등은 자신의 음악적 영토를 포크에 국한하지 않으면서도 포크의 섬세하고 묵직한 질감을 음악적으로 다양하게 변주했다.

  

포크에서 록으로 전향한 것처럼 보이는 안치환은 밴드 활동을 하면서도 민중가요 다시 부르기 등의 작업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뿌리가 포크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고, 손병휘는 늘상 거리의 음악인으로 달려가면서도 섬세하고 깔끔한 포크의 서정을 음악에 담아 보여주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활동을 겸하고 있는 문진오는 무게감 있는 보컬의 매력을 기반으로 가장 질박한 정서를 담아내고 있으며, 이지상은 시노래모임 나팔꽃과 자신의 활동을 병행하며 '사랑-당신을 위한 기도'처럼 처연하고 쓸쓸할 때 더욱 빛나는 노래들을 만들어 냈다. 뿐만 아니라 팀 활동 경력이 그리 많지 않은 박창근, 정윤경, 연영석의 존재도 빠뜨릴 수 없다.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창근은 여리면서도 매우 힘 있는 보컬과 생태주의적 세계관을 결합시키며 가장 젊은 민중가요 뮤지션으로 민중가요의 진화를 증거하고 있으며, 정윤경은 곱고 매끄러운 노래들로 만만치 않은 창작력을 확인시켜 주었다. 미술에서 음악으로 장르를 바꾼 늦깎이 뮤지션 연영석은 명 기타리스트 고명원과 함께 록의 어법으로 독창적인 민중가요를 들려주면서도 클럽 빵에서는 통기타 하나만을 가지고 자신의 음악을 벼리며 홍대 인디 씬과 민중가요의 접합을 꾀하고 있다. 이밖에도 청개구리 모임에서 언급했던 여성 포크록 뮤지션 손현숙은 꾸준한 음반 발표와 콘서트를 통해 일취월장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으며, 전경옥과 윤선애 역시 포크적 정서를 통해 자신의 현재를 말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거의 유일하게 남은 지역 포크 공동체의 맥을 광주에서 이어가고 있는 김원중과 박문옥, 한보리 역시 유려하고 깊이 있는 음악들을 내놓으며 한결같은 가객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대추리에서 목 졸려 쓰러진 뒤 스스로 음악적 유폐를 단행한 정태춘의 입이 다시 열리는 순간 우리는 그의 비감한,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민중가요는 원래 음악적으로 포크적 정서에 기반 한 것이기도 했지만 팀 활동에서 솔로 활동으로 독립한 뮤지션들은 더더욱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음악활동을 찾아야했기 때문에 포크 음악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이 흐름은 한국 포크의 현실참여적 기풍을 지켜나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홍대에서 만날 수 있는 인디포크의 스타들

 

그리고 홍대 인디 씬 역시 현재 한국 포크의 주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이며 특히 한국 포크의 새롭고 다양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집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홍대 인디 씬에 록밴드 만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클럽 빵과 바다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일군의 뮤지션들은 여전히 통기타 하나만으로 자신의 음악을 전달하는데 거침이 없다. 김민기나 한대수, 노찾사보다는 조동진, 어떤날, 장필순을 듣고 비틀즈나 데미언 라이스(Damien Rice)를 더 아낄 것이 분명한 이들은 20대에서 30대 초반의 나이에 걸맞는 수줍음과 떨림 가득한 정서로 곱고 다감한 개인적 서정의 노래들을 부르며 클럽 활동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내공을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다.

 

1980년대 동아기획에서 발아한 포크뮤직의 요람이었던 하나음악의 오소영, 이다오, 장필순 이후로 맥이 끊어져버린 개인적 서정의 포크 계보를 잇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이들의 음악은 '88만 원 세대'로 통칭되는 사회적 불안감이 비록 음악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아직은 연주나 가창이 서투르기도 하며 모던 록과의 경계가 다소 희미하기도 하다. 하지만 솔직하고 투명한 포크 특유의 질감만은 영롱한 이들의 음악은 2007년 어쩌면 20년 전이라면 [우리노래전시회]가 되었을지도 모를 [라이브 클럽 빵 컴필레이션 3]을 통해 실체를 드러낸 바 있다. 수많은 아마추어 포크 뮤지션들이 클럽 빵의 오디션을 보고 한달에 한번뿐인 무대에 오르려 애쓰는 가운데 몇몇의 이름은 이미 홍대 씬에서는 어지간한 오버그라운드 뮤지션들보다 더 뜨거운 열광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귓속말을 하듯 또박또박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시와의 치유 같은 음악과 가슴을 베일 듯 예리한 단편의 아름다움을 직조해낸 이장혁의 음악은 분명 2008년 이후 오래도록 주목하게 될 것이다. 1980년대 한국 포크의 진득함이 배어있는 박기혁과 한국 포크의 자장에서 자유로운 아톰북의 선선한 음악에도 귀를 아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디 씬의 고참밴드로서 자리를 지키며 포크 록의 자장을 확장하고 있는 플라스틱 피플과 홍대 씬에서 출발했지만 이젠 홍대 씬을 넘어선 스타가 되어버린 루시드 폴 역시 아름다운 포크 음악 창작자들이다. 이젠 활동을 중단한 푸른 새벽은 몽롱하면서도 자폐적인 음악들을 선보이며 인디 씬에 한 획을 그었고, 밴드 편성으로 활동 중인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재치 있고 감각적인 작업들도 현재의 한국 포크음악을 대표할만하다.

  

이처럼 홍대 앞의 포크 씬은 당연히 포크 음악을 하고자 하는 뮤지션들 덕분에 채워지고 재생산되지만 그 과정에서 클럽 빵이나 바다비와 같은 클럽의 역할을 결코 폄하할 수 없다. 이 클럽들은 포크 뮤지션들의 음악을 상시적으로 들을 수 있는 공간이며, 또한 뮤지션들 간의 공동체로서 서로를 교감하고 자극받으며 더욱 확장되는 근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 클럽 빵의 무대에 더욱 많은 젊은 아마추어 포크 뮤지션들이 몰리고 있으며, 특히 20대 음악 팬들의 호응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낙관적이다.


서울대학교의 포크 모임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붕가붕가 레코드'의 작업들 역시 20대의 자주제작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포크 록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히트곡 '앵콜요청금지'처럼 풋풋하고 진솔한 사운드의 포크공동체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밖에도 발랄한 통기타 음악의 싱얼롱 매력을 복원시키고 있는 나무자전거나 언니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유리상자 역시 통기타의 매력을 알리는 포크 메신저이다.


지금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Kings Of Convenience)나 글렌 한사드 & 마르게타 이글로바(Glen Hansard & Marketa Irglova)처럼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이름들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해외의 인디 포크 뮤지션들은 영화와 인터넷을 통해 자국의 영토를 넘어 한국의 감수성 풍부한 소년소녀들의 예민한 감성을 건드리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 포크의 여러 경향들 가운데 재주소년이나 이장혁, 루시드 폴 같은 한국 인디포크의 스타가 조금 더 끓어오르는 순간 한국 포크는 1970-80년대의 과거와는 또 다른 지점의 영토를 수면위로 띄울 수 있을 것이다.

 

포크는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단 하나의 장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사회를 노래하건 자신에 대해 노래하건 뮤지션에게 통기타는 자신의 최소한의 근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기획사에서 육성되는 뮤지션들조차 기타를 배우고 곡을 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기타 하나와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음악의 길을 가는 사람은 가난하고 치열하게 정직해질 수밖에 없다. 자아가 사라진 채 남의 이야기를 붕어처럼 따라하거나 기계로 이어붙인 음악의 범람 속에서 포크는 음악에 대한 태도를 묻는 깐깐한 감독관이거나 아날로그의 매력을 지키는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잃지 않을 것이다.


시청 앞 촛불 집회의 '아침이슬'과 광화문 통기타 카페들의 '일어나', 그리고 홍대 앞 라이브 클럽의 '앵두'사이의 거리는 그리 가깝지 않을 수 있지만, 이들은 촛불을 통해 서로의 음악적 실체를 확인하기도 했다. 옛 흐름을 이으면서도 젊은 세대들의 감성을 대변하는데 성공해가고 있는 포크는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단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진심을 담은 노래는 언젠가는 만나게 되고, 그 노래는 누구의 가슴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서정민갑/대중음악의견가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⑥] 힙합 씬의 믹스테이프 바람, 구원 투수 될까? 


한국 힙합의 발자취 그리고 성과


혹자는 한국 힙합에 과연 '역사'라는 말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부터 제기할지 모르겠다. 엄밀히 볼 때 틀린 말은 아니다. 1999년부터 몇 년 간 지속된 컴필레이션 앨범의 열풍에 힘입어 2000년대 들어 비로소 힙합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뮤지션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으므로 이렇게 보면 한국 힙합의 역사는 채 10년도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정체성의 범주를 유연하게 늘어뜨린다면 한국 힙합의 시작은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진영, 서태지, 듀스로 대표되는 '랩댄스'를 한국힙합의 시초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랩댄스는 그 명칭에서 이미 알 수 있듯 음악적으로 온전한 힙합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 랩댄스 주역이 한국힙합의 문법을 일정부분 정립해놓은 점, 그리고 한국이란 나라가 힙합문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미리 토양을 닦아놓은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릴 적 듀스의 음악을 들으며 래퍼의 꿈을 키웠다는 여러 힙합 뮤지션의 고백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렇다면 한국 힙합은 지난 십 수 년의 역사 동안 무엇을 성취했을까? 먼저 산업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랩댄스 시대와 PC통신 시절을 지나 컴필레이션 앨범의 열풍이 일면서 한국힙합은 서서히 모양새를 갖춘다. 홍대 클럽가를 중심으로 힙합 전문 공연이 활발히 열리고 자신을 '힙합 뮤지션'으로 내세우는 이들이 점차 늘어갔다. 2000년대 초반 때마침 미국 빌보드를 장악하기 시작한 흑인음악의 파워 역시 국내에 호재로 작용했다. 이효리를 위시한 대중가수들이 앞 다투어 흑인음악을 들고 나왔고 힙합은 가장 인기 있는 음악으로 각광받았다. 에픽 하이(Epik High)의 출현은 가요계의 어린 팬들을 대거 힙합 씬으로 유입시켰으며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의 움직임도 활발함을 더했다.

 

그 결과, '힙합'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고, 일정한 규모와 울타리를 갖춘 '한국 힙합 씬'이 형성되었다. 발전 정도가 처음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도 일부 존재하나 힙합이 한국 대중음악의 무시 못 할 한 축으로 성장한 것만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에픽 하이와 다이나믹 듀오(Dynamic Duo), 리쌍 같은 힙합 팀들이 음반 판매량 순위의 높은 위치를 항상 점유한다는 사실은 이 같은 판단을 더욱 공고하게 해준다.

 

음악적 측면을 보아도 긍정의 말을 풀어놓을 수 있다. 한 때 '한국힙합은 다 똑같다'는 식의 자조어린 말이 나돈 적도 있지만 이제 그런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먹통힙합'으로 상징되는 1990년대 초중반 힙합 스타일을 주로 받아들였던 한국힙합은 현재 비교적 다양한 스타일의 세분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다. 빌보드 차트를 휩쓰는 말랑말랑한 알앤비-힙합 스타일, 실험성을 주 무기로 하는 하이브리드(hybrid)-힙합 스타일, 댄스 플로어를 뜨겁게 달구는 클러빙 힙합, 그리고 특유의 한국적 멜로디와 감성이 어우러진 감상용 힙합까지 비록 양적으로 본토인 미국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나 한국힙합 자체만 놓고 봤을 때 내부적으로 스타일의 세분화가 큰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현재의 한국힙합 씬에 부는 믹스테이프 바람

 

이러한 한국힙합의 현재 가장 중요한 화두가 바로 '믹스테이프'이다. 힙합 뮤지션들이 약속이나 한 듯 최근 잇달아 믹스테이프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믹스테이프란 말 그대로 수록곡을 끊이지 않게 서로 연결해놓은 형태의 음반 기록물을 뜻하는데, 사실 오늘날 힙합과 믹스테이프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미국 현지에서는 이미 믹스테이프 시장이 거대하게 성장해 힙합 씬 안에서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유명 시리즈물 믹스테이프를 제작하는 디제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고, 몇몇 스타 래퍼들은 정규앨범 한 장 없이 믹스테이프 만으로 부와 명예를 축적하는 일이 가능하다. 즉 믹스테입은 '정규 앨범'이 아니다. 때문에 믹스테이프는 주로 공식 발표를 앞둔 신곡이나 미공개곡, 그리고 다른 뮤지션이 이미 발표한 비트 위에 자신이 새롭게 랩을 얹은 곡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힙합 씬에 믹스테이프가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라마(Rama)가 지난 2006년 두 차례 믹스테이프를 발표한 적이 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또한 디제이들이 기존의 히트곡을 엮어 만든 형태의 믹스테이프는 간간히 발매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2008년 들어 한국힙합 씬에 '래퍼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는 형태'의 믹스테이프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 닥친 것이다. 이-센스(E-Sens), 사이먼 도미닉(Simon Dominic), 더 콰이엇(The Quiett), 오버클래스(Overclass: 크루), 도끼(Dok2), 베이식(Basick), 딥플로우(Deepflow), 스윙즈(Swings) 등 시디로 발매한 이들을 비롯해 온라인 공개를 택한 이들까지 합치면 열 손가락이 넘는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걸까?

 

우선 믹스테이프는 '비공식 앨범'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더 높은 음악적 자유를 보장 받는다. 정규앨범의 콘셉트에 맞지 않아서, 혹은 '정규'라는 두 글자의 중압감에 눌려 시도하지 못했던 것들을 믹스테이프에서는 마음껏 할 수 있다. 즉 다루는 소재에 제한이 없어지므로 미발표 가사를 활용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믹스테이프 수록곡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다른 뮤지션이 이미 발표한 곡의 반주 위에 자신의 랩을 새로 얹고 원곡의 장치들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행위 역시 이 같은 자유로움에 기반을 둔다. 래퍼라면 누구나 이러한 믹스테이프의 매력에 한번쯤 끌리는 것이 당연하다.

 

신인이라면 믹스테이프를 자기 시험의 장으로 삼아볼만하다. 부담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정규 앨범을 곧바로 내기보다는 그 전에 믹스테이프로 자신에 대한 시장의 반응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잘 된다면 적지 않은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고, 설령 잘 되지 않더라도 그다지 손해 볼 것은 없다. 실제로 위에 거론한 래퍼 중 절반 이상이 아직 정규 앨범을 내지 않은 이들이다.

 

그러나 요즘의 한국 힙합 씬에 믹스테이프 바람이 부는 가장 큰 원인은 '투자 대비 경제적 효율'이 크기 때문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마디로 믹스테이프는 적은 자본으로 효율적인 수익을 올리기에 적합한 상품이다. 일단 수록곡의 대부분을 이미 기존에 발표된 곡들을 가져다 쓰는 형태로 채우기 때문에 곡비가 들지 않고(물론 이는 명백한 저작권법 위반이지만 미국 현지에서도 믹스테이프 시장의 영향력을 실감하면서 눈감아 주는 것이 관행처럼 되고 있다), 일련의 제작 과정과 비용이 정규 앨범에 비해 간소하기 때문에 그만큼 투자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투자비용이 적으니 판매가 부진했을 경우의 위험부담 역시 감소함은 당연한 이치다. 또한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정규앨범보다 여러 모로 음악적 제약이 덜한 믹스테이프인 만큼 창작에서 오는 스트레스, 다시 말해 '정신적 투자' 역시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잘 팔려서 오히려 문제인 믹스테이프

 

이러한 믹스테이프의 특성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에 열거한 점들은 '빠른 순환', '비교우위', '매력', '메리트'같은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한국힙합 믹스테이프의 가격에 '거품'이 끼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상대적으로 적은 투자와 상대적으로 가벼운 내용물을 담고 있다면 그만큼 가격 역시 조정되어야 맞다. 미국의 경우를 보자. 미국에서는 보통 정규 앨범이 약 14달러에 판매되고, 믹스테이프는 5~7달러 수준에서 소비자에게 공급되고 있다. 딱 절반이거나 그 이하 수준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보통 정규 앨범이 1만500~1만2000원에 판매되는 한편 믹스테이프의 가격은 8000원 정도다. 적게는 65% 수준에서 많게는 80%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물론 단순비교는 위험하다. 정황과 환경이 참작되어야 한다. 씬의 규모, 제작 시스템, 뮤지션의 여건 등이 고려되어야 비로소 온당한 비교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한다고 해도 지금의 믹스테입 가격이 누구나 수긍할만한 합리적인 가격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온라인을 통한 무료 배포가 일반화되어 있는 미국의 경우처럼 '모든 믹스테이프의 온라인 무료 배포'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할 생각은 없지만, 가격의 일정한 하향 조정에 관한 공론화의 필요성은 분명 있어 보인다.

 

사실 이러한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믹스테이프가 (대체로) '잘 팔리기' 때문이다. 만약 믹스테이프가 '안 팔리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시장 원리에 따라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공급자가 가격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공연히 비싼 가격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작금의 상황, 즉 '비싼' 믹스테이프가 '잘 팔리는' 상황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믹스테이프의 개념과 가격에 대한 리스너들의 평소 인지 부족, 일단 사놓고 보자는 리스너들의 충성도 높은 소장 욕구, 믹스테이프에 붙어 나오는 '한정'이라는 꼬리표가 소비자에게 암묵적으로 전달하는 신호 등등. 그러나 잘 팔리는 것이 무조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길게 보면 뮤지션과 리스너 모두에게 좋지 않게 작용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 우려가 있다.

 

사이먼 도미닉이 지난 6월에 3000장 한정으로 발매한 믹스테이프 [I Just Wanna Rhyme Vol.1]이 출시 일주일도 채 안되어 품절되었던 사실은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를 시사한다. 먼저 이것은 웬만한 한국힙합 뮤지션의 정규 앨범 판매고와 비슷하거나 그를 뛰어넘는 수치다.

 

게다가 적은 투자와 높은 가격을 수반한 '믹스테입'으로 이뤄낸 성과이니 '정규 앨범'으로 얻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경제적 실리를 얻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설령 사이먼 도미닉의 경우를 이례적인 성공 사례로 분류하더라도, '현재의 한국힙합 씬에서 믹스테이프의 위력은 정규 앨범 못지않다'는 일반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처럼 믹스테이프으로 정규 앨범과 대등한(혹은 그를 능가하는) 판매고와 수익을 기록할 수 있는 한국 음악 씬(혹은 한국 힙합 씬)의 특수한 상황은 뮤지션들에게 강한 유혹과 동기 부여로 작용한다.

 

한마디로, 좀 극단적으로 말해 정규 앨범을 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뮤지션들이 일반적으로 정규 앨범에 들인 투자와 노력만큼 온전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모험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길로 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좀 더 간편하고 위험 부담도 별로 없는 믹스테이프으로도 만족할만한 경제적 실리를 얻을 수 있는데 구태여 공들여 성공 여부도 불투명한 정규 앨범을 만들 이유가 없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극단적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을 것이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기계적으로 음악을 양산해낼 것이 아니라면,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려는 뮤지션들의 창작욕이 적절한 균형을 잡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의 가정을 배제하더라도 '결과가 괜찮아 보이는데 나도 한번 해볼까' 식의 믹스테이프 발매가 혹시라도 만연하게 된다면, 그것이 씬에 끼치는 부정적인 해악은 긍정적인 영향 이상일 수도 있다.

 

이런 것이다. 일단 뮤지션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일회성 아이디어 위주의 결과물을 만들게 된다. 믹스테이프는 신선한 시도와 다양한 내용을 담아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정규 앨범이 지니는 몇 가지 미덕, 다시 말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내러티브와 콘셉트 그리고 개별 곡의 정제된 완성도 등에서 태생적으로 미흡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믹스테입'도' 존재하는 씬이 아닌, 믹스테이프가 '주'가 되는 씬은 한번 의문을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 리스너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정규 앨범과 믹스테이프 간의 특성 차이를 인지하지 않은, 또 믹스테입 간의 완성도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묻지 마' 식 지지와 구매는 필요 이상으로 높은 현재의 믹스테입 가격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셈이 되며, 결국 씬의 다양성을 해치고 더 정제된 음악을 들을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현재의 믹스테이프 바람을 한국 힙합 발전의 도화선으로

 

한편으로는 작금의 믹스테이프 바람이 씬의 구조적 열악함에서 탈피해보려는 뮤지션들의 절박한 타개책으로도 보여 가슴 한편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쳐서 좋을 것은 없다. 한국 힙합 씬에서 믹스테이프는 정규 앨범에 담지 못했던 것들을 간헐적으로 소비하는 보완재적인 역할, 그리고 씬의 동력이 떨어졌을 때 신선한 아이디어와 재미로 활력을 불어넣는 일종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로 기능해야 한다.

 

연이어 발매되는 믹스테이프를 둘러싸고 뮤지션과 리스너 각자 서로의 입장과 생각이 있을 줄 안다. 낯선 상황일수록 상호 간의 차분한 소통이 중요하다. 작금의 상황을 향후 한국 힙합 발전의 도화선으로 삼을 혜안이 필요한 때다. 더불어 저작권 문제와 적정 가격에 대한 밀도 높은 논의 역시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김봉현/<한국힙합,열정의 발자취> 저자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⑦] "아직도 복고는 현재진행형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레트로(retro 복고)라는 꽤 세련된 어감의 단어가 지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해마지않는)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레트로는 바야흐로 뜨거운 감자였으니 <품행제로>에서 류승범은 질척한 추리닝을 입었으며, 이수영은 이문세/이영훈 콤비의 흘러간 히트곡을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인사동 거리 한켠에 자리 잡아 개인적으로도 눈요기할 겸 몇 번쯤 놀러 다녔던 '토토의 오래된 물건' 같은, 소위 '옛 추억이 담긴 물품들'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성업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기 시작한 것은, 각 산업 분야별로 차이야 다소간 있었겠지만, 대략적으로 2000년대 초반의 월드컵을 전후해서였다. 대공황, 이른바 IMF 체제라 불리던 극한의 경제적 허무주의를 통과해서였을까. 의지할 것은 과거의 영광뿐, 그렇기에 노스탤지어란 헤픈 수식이 될 수밖에. 레트로 붐에 힘입어 등장했던 상품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추억이란 돈을 주고서라도 살만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것뿐이었다면 레트로란 한때의 웰빙 붐처럼 금세 사그라졌겠지.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2008년 현재, 지금-여기의 한국을 강타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여전한 레트로 붐이다. 진부해졌냐고? 아니다, 도리어 더욱 강력해졌다는 것이 중평. 수많은 뉴 트렌드가 헤게모니를 잡음과 동시에 진부한 올드패션으로 퇴락해가던 와중, 레트로 만큼은 뛰어난 자기-갱신 능력을 바탕으로 흔들리지 않고 곧게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다.

 

특히 한국 대중음악 씬에서의 레트로는 눈여겨볼 만한데, 노스탤지어라는 키워드 하나만으로도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던 레트로는 이미 구식이 된지 오래. 2007년과 2008년 전반기를 통틀어 제2의 아이돌 전성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빅뱅과 원더걸스, 또한 그와 별도로 훌륭한 작품을 들고 찾아온 대규모의 신진 밴드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는 레트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혹자는 딴죽을 걸 수도 있으리라. 원더걸스 같은 아이돌 그룹과 '브로콜리 너마저', '갤럭시 익스프레스' 등의 인디밴드들이 보여주는 성과물들이 같은 경향 아래에 있다고? 물론, 그렇다. 경향으로서의 레트로는 포괄적인 큰 줄기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과거의 유물을 활용하는 것이라면 모두 경향으로서의 레트로라는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세부적인 전략에 있어서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무엇을'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할 것인지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차이는 사실 '본질적인 차이'로서 이를 고려하지 않고서 2008년 현재진행형의 레트로를 읽는 것은 수박겉핥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개개의 차이도 있을 것이나, 그럼에도 눈에 띌 정도로 군(群)이 형성되고 있다 판단되는 개별들의 활동을 묶어 크게 세 가지의 양상으로 분류해보았다.

 

■ 패셔너블한 레트로

  

가장 대중적이며, 가장 최신의 유행을 주도하고 있는 레트로의 양상이다. 다들 체감하고 있듯이 2007년부터 현재까지 (케이블을 포함한) 매스미디어 음악 씬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들은 레트로를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2세대 아이돌 그룹들, '거짓말'의 빅뱅, 'L.O.V.E'의 브라운 아이드 걸스, '소녀시대'의 소녀시대, 'Tell me'의 원더걸스이다(이외에도 적지 않음. 최근 엄정화의 'D.I.S.C.O' 역시 대표적이겠다). 이들은 주로 80-90년대 댄스 팝의 공식을 현재적인 세련된 사운드로 재전유하는 전략으로 승부수를 걸고 있는데, 현재까지의 스코어만 따지자면 대성공. 지지부진했던 한국의 메이저 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들의 포지셔닝은 2000년대 초반의 '후줄근한' 복고와는 사뭇 다른 모습인데, 80-90년대의 장르적 공식을 적극 이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장 패셔너블하다. 심지어 엄정화는 스타일로만 따지자면 가장 미래지향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이 인용하는 공식들 역시 한국 대중가요의 것들이 아닌데, 영·미·유럽권의 레트로한 팝 사운드가 그들의 주재료이다. 그렇기에 70-80년대의 '후줄근했던' 시대상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던 바로 앞 세대의 레트로 전략과 (당시에도 동경의 대상이었던) 팝 사운드를 활용하는 이들의 전략은 꽤나 다른 감성적 기반을 토대로 하여 세워졌다 볼 수 있다.

 

샘플링/표절에 관련된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임에도 불구, 원래적인 그들의 지향 자체는 '동어반복'이나 '답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80-90년대 댄스팝의 장르적 공식들이 일렉트로니카의 세례를 받은 디지털 팝 사운드, 그리고 최신의 아이돌 시스템을 만났을 때 어떠한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는가를 우리는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 노스탤지어/로파이로서의 레트로

 

메이저 씬에서 가장 메이저다운 방식으로 80-90년대의 영·미·유럽권 팝 사운드를 현재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면, 2000년대 초반 바람을 일으켰던 '아날로그적 향수'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들은 바로 인디씬의 모던록/모던포크 주자들이다. (지면관계상 모던록에만 초점을 맞춘다.)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삼아 속속들이 등장한 델리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을 필두로 한 1세대 모던록 밴드들의 주관심사는 당대 영미권을 강타하던 각종 록/팝 사운드를 자양분삼아 기존 가요계의 흐름과는 불연속적인 선분을 창조해내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한국적인 것'은 종종 배제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스웨터의 첫 정규음반 [Staccato Green]이 발매된 2002년을 전후해 한국의 모던록 씬에는 앞서의 기조와 분명한 입장의 차이를 지니는 2세대라 불릴만한 밴드들이 속출했으며, 이들은 1세대들이 수용했던 영미권의 록 사운드에 라디오친화적인 한국의 80/90년대 대중가요적 감성을 적극적으로 결합시킨 음반을 등장시킨다. 이들은 유연한 공동체쉽을 바탕으로 이후로도 죽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지닌 바이오그래피를 차곡차곡 쌓아 가는데, 슬로우 쥰의 [Reverse](2007)와 스웨터의 [Highlights](2008)가 이들 집단의 최신작들이다.

 

한편, 인디록 씬에서 유난히 훌륭한 작품이 쏟아졌던 2007년의 후반기가 시작될 무렵 발매된 브로콜리 너마저의 데뷔 EP [앵콜요청 금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생동감이 다소간 가라앉고 있던 2세대 이후의 한국 모던록 씬에 모처럼 풋풋한 신예들이 등장할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008년에 데뷔 EP [Appetizer]를 발매한 달콤한 비누를 포함하여, 이들은 비록 양적으로는 아직 적은 수에 불과하지만 그 영향력 면에서라면 가벼이 볼 수 없을 것. 실제로 한국 인디록 씬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는 리스너들 중 다수가 브로콜리 너마저를 2007년 최고의 루키이자 기대주로 뽑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이들의 기반이 기존의 2세대 모던록 밴드들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 이들은 레트로한 취향을 조금 더 급진적으로 몰고 나가는 경향에서 차이를 보인다. (기존의 2세대들이 단정한 웰-메이드를 추구했음을 기억하라.) 거친 질감을 세련되게 만드는 프로세스를 건너 뛰어버리고, 날것의 청춘 그 자체를 노래하는 이들의 모던록이 2세대의 반반한 웰-메이드 기타팝보다 더욱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파이하며 촌스러운, 심지어 퉁명스럽기까지 한 기타톤이 가난한 청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이끌림이 될는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 콜라주로서의 레트로

  

앞서의 두 양상이 기본적으로 원재료들에 기입되어 있는 현실과의 시차를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면, 이번에 소개할 마지막 양상, 즉 콜라주(collage)를 주요한 작법으로 활용하는 축은 큰 범주에서의 레트로에는 속해있되 그 기초적인 전략부터 앞서의 것들과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여기서의 콜라주는 미술에서의 콜라주 기법을 빗댄 것으로서 이러한 작법을 본령으로 삼는 그룹은 과거의 유산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체/재조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법 자체가 '낯설게 하기'를 주요한 과업 중 하나로 삼고 있는 바, 한국의 메이저 가요 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는 힘들며 인디록 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정한 양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익숙지 않은 만큼 창작자가 이러한 기법을 소화하는 데에는 일정 정도의 음악적 숙련도가 요구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2000년대 초반의 몇몇 밴드들에 의하여 행해진 시도들, 예를 들어 국악과 메틀의 크로스-오버 등은 대부분 사실상 불발이었다. 조금 더 발효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실질적으로 온전한 작품으로서의 선구적인 작업이라면 3호선 버터플라이의 [Time Table](2004)이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발동은 역시 2007년. 웹진 <보다>의 첫 번째 공동작업물이기도 했던 '2007년 올해의 앨범' 차트에 몽구스, 그림자 궁전, 굴소년단, 갤럭시 익스프레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등 이러한 기법에 적극적인 밴드들이 다수 이름을 올린 것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들이 참조하는 올드한 레파토리들은 개별 밴드마다 큰 차이를 보이는 연유로 짧은 지면에서 다루기는 부적절하지만, 그럼에도 교집합을 일부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적인 것'의 변용. 갤럭시 익스프레스와 그림자 궁전은 과도하게 노이지하다는 점만을 제외하면 전혀 다른 록을 선보이고 있지만 딱 한 곳, 산울림에서 접점을 찾게 된다. 몽구스의 음악은 매우 유쾌하면서도 한국적 한의 정서를 은연중에 표출하며,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는 '도시생활'에서 쫀득쫀득한 와우 이펙터를 필두로 훌륭하게 80년대 초반의 후줄근함을 패러디해낸다.

 

그러나 단순히 '한국적인 것'을 활용함으로서 이들이 특별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한국적인 것을 굳이 강조하지는 '않는' 지점에서 영민해진다. 2000년대 초반의 미숙아적 시도들 대부분이 한국적인 것의 무게감에 짓눌려 훌륭한 배합에 실패했음을 상기한다면, 한결 가벼운 방식으로 한국적 로컬리즘(localism)을 제시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가볍다. 익숙했던(familiar) '한국적인 것'은 그들의 콜라주 안에서 '색다른(exotic) 것'으로 다시 태어나며, 이는 미술에서의 콜라주가 그렇듯 무엇보다 흥미로우며, 재미있기도 한 경험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대중음악 씬 전반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레트로 붐의 양상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이 세 가지 양상은 언뜻 전혀 상관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상호적인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패셔너블한 레트로'는 '콜라주로서의 레트로'와 음악적으로 가장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트렌드의 전위를 마크하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노스탤지어/로파이로서의 레트로'는 '콜라주로서의 레트로'와 지역적인 활동 반경이 겹치며(이는 생각보다 중요한 지적일 수 있다), 노스탤지어를 적극 가용하는 점에서 '패셔너블한 레트로'의 전략과 또한 겹친다. 이는 이러한 양상들이 서로 배제하기 보다는 오히려 상호 참조·보완하며 진화해나갔음을 비춘다.

 

노스탤지어라는 키워드 하나만으로 설명될 수 있던 레트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간 지 오래, 최소한 한국의 대중음악씬에서 레트로는 '생존을 위하여' 다양한 가지로 뻗어나갔으며, 앞서 분류한 세 가지 양상은 그 중 몇몇 특징적인 흐름에 대한 기록이다. 당연하게도 이에 포함되지 않을 개별들이 충분히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키치로서의 레트로'는 큰 덩어리지만 역시 지면관계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한 개별들까지 고려했을 때의 레트로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서 현재의 대중음악 씬을 논하는 데 있어 제외되어서는 안 될 굉장히 비중 잇는 요소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지금-여기에서 답습이 아닌 '한 걸음 더'로서의 레트로만큼 흥미진진한 아이템도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레트로 트렌드에 대한 현재적인 평가는 일단 'Thumb-Up(엄지손가락 들어올림)'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섣부르게 미래를 예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다보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역동적인 현재진행형의 흐름에 충분한 관심을 쏟아야 할 것. 창조적인 아티스트들에게 합당한 관심이라면, 그들은 지금까지 진화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진취적이며 훌륭한 음악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단편선/음악비평웹진 <보다> 필자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⑧] '가요', 인디 음악이 재발견하다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의 리더 이기용은 한 웹진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음악에 대해 '가요적'이라 평한 리뷰를 두고 상당한 거부감을 표한 적이 있었다. 이는 단순히 자신들의 음악 스타일이 가요가 아니라는 항변이 아니라, 가요라는 말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는 '가요적'이라는 말에는 이미 부정적인 가치평가가 들어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음악을 두고 그런 평가를 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현재 인디 씬에서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슬로우 쥰(Slow 6) 역시 한 인터뷰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메탈리카(Metallica) 등의 헤비메탈 음악 얘기를 하며 놀았지만, 집에 들어와서는 혼자서 몰래 가요를 들었다고 고백하였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자.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드럼 세션 연주자이자 한국 모던 록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H20에서 드럼을 담당했던 김민기는 '가요 성향'의 솔로 앨범 두 장을 발표했다. 그는 헤비메탈을 하던 시절부터 가요를 좋아했었고, H20에서 활동할 때에도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팀의 다른 멤버였던 강기영과 박현준은 록 밴드의 멤버가 가요를 좋아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장난으로 팀에서 나가라고까지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굳이 더 찾지 않아도 이런 사례들은 무궁무진하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라면 이 사실에 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당시 가요는 고상한 (록) 음악 애호가들이 듣기엔 너무나 촌스럽고 저열한 음악이었다. 특히 1980년대 '방송용' 가요는 트로트와 함께 음악 애호가들에겐 '불가촉천민'과 같은 존재였다.

 

록 음악을 들으면서 가요를 함께 듣는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고, 가요를 듣는 것은 음악 애호가로서 영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가요는 음악적으로도 너무 앙상해 해외의 록이나 팝 음악을 듣는 이들의 기호를 충족시켜줄 수 없었다. 그게 조용필이건 전영록이건 소방차건 이지연이건 간에, 당시의 음악 마니아들은 대부분의 가요를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1980년대의 가요는 한 마디로 '방화'와 같은 이미지였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서서히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함께 음악 시장이 급격하게 팝에서 가요로 수요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015B와 이승환, 전람회 등 일군의 소위 '고급가요' 뮤지션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모두 1980년대에 '가요'가 아닌 '팝'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들이었다.

 

이들의 지향점은 대부분 비슷했다. 정말 세련된 '팝' 음악을 만들겠다는 것, 세련된 감성에 기술적인 성취를 더하겠다는 것. 이들은 가요라는 말이 주는 촌스러움과 부정적인 이미지를 떨쳐내고 외국의 팝 음악과도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음악들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직접 외국에 나가서 작업을 하기도 하였고, 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트렌드를 발 빠르게 수입해오기도 하였다. 흔히들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단절의 역사'라 표현하곤 하는데, 1990년대의 뮤지션들은 1980년대의 촌스러운 가요들과 자신들을 그렇게 스스로 구분 지었다.

 

그리고 1990년대가 저물어갈 때쯤 홍대 주변을 중심으로 한 인디 씬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들 역시 1980년대의 가요와는 상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1990년대의 뮤지션들보다 더 가요와 자신들을 구분 지었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의 너바나(Nirvana)'나 '한국의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가 되고자 했을 뿐이다. 여전히 가요는 촌스러운 것이었고, 그런 음악을 하려고 하면 '키치'라 오해받았다.

 

이런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중반부터였다. 2003년 말, 재주소년이란 팀이 어떤날의 영향을 언급하며 자신들이 어떤날의 감수성을 이어받았다고 얘기했다. 어떤날이나 조동익 등의 영향을 받은 인디 뮤지션들은 꽤 많은 수가 있었지만 이를 직접 언급한 경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더 재미있는 경우는 2004년 식스틴(Sixteen)이란 밴드가 자신들의 첫 EP를 발표할 때였다.

 

식스틴은 아예 "재주소년이 어떤날의 감성을 이어받았다면 자신들은 윤상의 감성을 이어받았다"고 얘기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사운드 건축가' 혹은 '일렉트로닉 마스터' 윤상이 아닌,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강수지의 노래들을 만들어주고 전자음악과 가요가 섞여있는 애매한 성격의 1집을 발표했던 '가수' 윤상을 그 목표로 삼은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80년대를 코드로 한 음악들이 우리 음악계에 등장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예고'를 하였다.

 

그 예고는 딱 들어맞았다. 식스틴 이후 많은 인디 뮤지션들이 직간접적으로 가요의 세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뮤지션은 맨 앞에서 짧게 언급했던 슬로우 쥰이다. 그는 메탈 키드이기도 했지만 집에 와선 동아기획의 가요를 듣는, 전형적인 19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뮤지션이었다. 그는 자신이 습득한 음악적 자양분들 가운데 동아기획의 가요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 나갔다. 그가 데뷔 앨범 [Grand A.M](2004)을 발표했을 때 평단에선 '어떤날과 김현철의 재림'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와 1980년대 가요와의 연관성을 얘기하였다. 그 자신도 이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고, 2집 [Reverse](2007)에서도 가요와 모던 록의 접점을 찾기 위한 시도를 계속 해나갔다.

 

하지만 슬로우 쥰의 사례만으로 가요와 인디의 연관성을 얘기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다. 슬로우 쥰이 영향을 받은 동아기획이나 어떤날의 음악은 1980년대의 음악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았고, 그 영향력도 꾸준히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경우는 최근 등장한 '달콤한 비누'나 '브로콜리 너마저', '술탄 오브 더 디스코(Sultan Of The Disco)' 같은 밴드들이다. 이들은 인디 씬에서 불쑥 튀어나와 진짜(?) 가요 같은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 초반 TV와 라디오를 통해 계속해서 재생되던 그 가요들 말이다.

 

작년 인디 씬 최고의 히트상품인 브로콜리 너마저의 '앵콜요청 금지'를 들을 때 사람들은 '80년대의 멜로디'를 생각했다.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의 주제곡이었던 김지연의 '찬바람이 불면'과 같은 순진무구한 멜로디에 꾸밈없는 목소리를 더해 "안 돼요~"라고 노래하였고, 이 노래는 각종 블로그를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서 가수와 관객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감동적인 순간을 연출했다.

 

지금의 이 흐름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런 밴드들이 최근 몇 년간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갑자기' '불쑥' 튀어나왔다는 점이다. 앞서 짧게 얘기했듯이 1980년 후반의 가요들과 2000년대 인디 밴드들과는 접점이 없다. 1980년대 후반부터 그 흐름이 이어져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1990년대를 거치며 더욱 단절됐다. 1990년대 뮤지션들은 1980년대의 가요를 촌스럽다 여기며 영·미의 세련된 팝 음악을 추구했고, 또 2000년대 음악 씬을 이끌고 있는 인디 뮤지션들은 1990년대 뮤지션들의 기술적인 매끈함에 거부감을 표한다. 이런 단절의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2000년대 뮤지션들이 '느닷없이'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의 가요들을 다시 부르기 시작한 건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이다.

 

이를 단순히 복고 열풍이나 한때의 유행으로 치부해버리기엔 무리가 있다. 재주소년을 시작으로 가요의 세례를 이야기하는 뮤지션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고, 무엇보다 촌스러운 줄로만 알았던 가요 멜로디들이 꽤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기 시작한 것이다. 슬로우 쥰은 계속해서 훌륭한 앨범을 발표하면서 1980년대의 감성을 재현해낼 것이고, 보다 큰 레이블과 계약한 브로콜리 너마저의 멜로디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 흐름이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아주 자그마한 퍼즐이라 하더라도 지금 이들은 그 퍼즐을 기대 이상으로 잘 맞춰가고 있다. 소소한 것일지언정 이마저도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이 단절의 역사에서는. 


김학선/음악비평웹진 <보다> 편집장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⑨] 인디 레이블의 현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대중음악은 창작과 제작, 유통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방송이나 언론 매체, 팬덤 역시 큰 영향을 미치지만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요소가 내부적으로 대중음악계를 작동시키는 주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기술적 발전과 사회상의 변화로 인해 시대에 따라 대중음악의 얼굴이 변하고 또한 그러한 변화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게 현실이지만 창작과 제작, 유통을 중심으로 구성, 작동되는 이러한 구조는 불변의 성질일 것이다.

 

신인 뮤지션의 발굴과 음반의 기획, 제작을 담당하는 레이블은 이러한 구조의 중심에 있는 존재다. 음악창작자의 실력 못지않게 레이블의 역량과 안목 역시 대중음악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며, 일군의 레이블들의 취향과 지향점이 모여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이런 흐름에 따라 대중음악의 진로가 결정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레이블은 대중음악의 중심을 떠받치는 척추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대중음악이 발달한 영미권이나 일본에서는 이런 속성을 일찍부터 파악했기에 가수와 밴드의 활동뿐만 아니라 주요 레이블의 동향 또한 음악팬들의 관심사가 되곤 한다.

 

90년대 후반 홍대 앞 라이브 클럽을 배경으로 첫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여, 지금은 총체적 난국에 직면한 한국 대중음악의 유력한 구원투수로 거론되고 있는 인디 씬에도 다양한 레이블이 활동하고 있다. 모던록/포크 씬에는 비트볼 뮤직과 카바레 사운드, 파스텔 뮤직이 대표적이고 헤비니스 씬은 도프 엔터테인먼트와 GMC 레코드가 독보적이다. 힙합 씬에서는 소울 컴퍼니가 선전 중이며, 그밖에 신생 레이블인 일렉트릭 뮤즈와 튠테이블 무브먼트가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인디 씬이 현재 질적인 측면에서 한국 대중음악을 떠받치고 있고 해외 음악 씬과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기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들의 현재 모습은 당대의 대중음악의 방향을 가늠 짓는 중요한 열쇠임에 틀림없다.

 

개성적인 복고와 유머, 비트볼 뮤직

 

비트볼 뮤직은 과거의 음악적 유산을 갈무리하여 현재의 음악에 접목시키는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비트볼의 음악은 복고적이면서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특유의 유머와 위트를 선사한다. 지금까지 라이너스의 담요, 몽구스, 스마일스 등 색깔 있는 인디 뮤지션을 발굴해 왔고, 올해는 달콤한 비누의 EP앨범 [Appetizer]와 제4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록 앨범, 올해의 신인 부문 수상자인 머스탱스의 2집 [Acid Trip], 그리고 눈뜨고 코베인의 2집 [Tales]를 발매했다. 또한 해외 인디레이블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 시애틀의 명문 인디레이블 서브팝(Sub Pop)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어 아이언 앤 와인(Iron&Wine)과 CSS의 음반을 국내에 소개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인디 씬 전통의 명가, 카바레 사운드

  

카바레 사운드는 인디 씬의 형성과 함께 출발한 레이블이다. 이런 배경과 맞물려 인디 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은희의 노을, 코코어, 푸른새벽, 플라스틱 피플 등의 뮤지션들이 지난 날 카바레 사운드를 거쳐 갔다. 로우파이 사운드와 미니멀한 사운드에 노하우를 갖고 있고 다양한 음악을 선보이며 자신들의 음악적 지평을 넓히는 게 카바레의 특징이다. 현재 오!브라더스, 캐비넷 싱얼롱즈, 구남과여라이딩스탤라, 페일슈 등이 소속되어 있으며 올해는 제4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싱글 부문 수상자인 페퍼톤스의 2집 [Newstandard]와 여성 싱어송라이터 뎁의 데뷔 앨범 [Parallel Moons]를 발매했다.

 

인디 씬의 히트 메이커를 꿈꾼다, 파스텔 뮤직

 

파스텔 뮤직은 현재 인디 레이블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와 높은 인지도를 지니고 있다. 특히 CF음악과 드라마 OST 분야에 대한 진출이 눈에 띈다. 인디음악의 인지도와 음악적 지평을 확장시켰다는 지지와 근래 비슷한 스타일의 동어반복이 지나치며 초기의 음악적 취향을 버리고 대중영합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비판이 동시에 향하고 있다. 물론 취향과 관점에 따라 각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주요 인디 레이블들 중 특정 레이블이 최근 제작한 음반들이 음악적 완성도의 평균치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저조한 결과를 보이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올해 더 멜로디의 보컬 타루의 솔로앨범 [R.A.I.N.B.O.W]와 요조&에릭의 [Yozoh With 소규모아카시아밴드 / Nostalgia]를 발매하였다.

 

헤비니스 씬의 신흥 강자, 도프 엔터테인먼트

 

도프 엔터테인먼트는 길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헤비니스 씬에서 큰 성과를 거두어 왔다. 제4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록 싱글> 부문 수상작인 스트라이커스의 'Turn Back Time'이 수록된 [Untouchable Territories], 작년 최고의 앨범이자 우리 시대 새로운 명반으로 자리매김한 할로우 잰의 1집 [Rough Draft In Progress]가 바로 도프 엔터테인먼트의 손을 거쳐 등장한 앨범들이다. 내한공연 기획과 해외 음반 라이선스에도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며, 특히 일본 진출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도프 엔터테인먼트는 올해 문샤인의 3집 [Eternal]을 발매했고 '펑크 씬의 아이콘' 럭스와 2장의 앨범 계약을 맺은 상태다.

 

하드코어 씬의 산 증인, GMC 레코드

 

  GMC는 한국 하드코어 씬의 성장과 역사를 함께해왔다. 현재 한국 헤비니스 씬의 1인자로 평가 받는 바세린의 데뷔 앨범 [Bloodthirsty]와 하드코어 씬을 개척한 삼청교육대의 2집 앨범 [Vengeance Is Mine]이 GMC의 대표작이다. 하드코어 전문 레이블을 표방하고 있으며 사업적 성격보다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다. 현재 바세린과 삼청교육대 같은 중견 밴드 외에도 앞으로 록 음악 씬을 뜨겁게 달굴 49몰핀스, 나인씬, 넉다운 등의 젊은 밴드들이 포진해 있다.

 

힙합 씬의 젊은 피, 소울 컴퍼니

  

소울 컴퍼니는 더 콰이엇과 키비, 두 젊은 힙합 뮤지션을 중심으로 2004년에 결성되었다. 가요에 힙합적인 요소가 가미되는 유행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고정적 힙합 수요층이 많지 않은 현실 속에서 소울 컴퍼니는 우리말로 된 랩과 라임에 대한 애착을 내세움과 동시에 젊은 감성을 소울, 재즈적 성향의 비트에 담아 자신들의 음악적 영역을 구축했다. 그 결과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을 대표하는 레이블로 자리매김하였고, 특히 제4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힙합 앨범> 부문 수상작인 더 콰이엇의 [Q Train]을 내놓는 성과를 올리기에 이른다. 올해 더 콰이엇의 믹스테이프 [Black on The Beat]와 랍티미스트의 2집 [MInd Expander]를 발매했다.

 

인디 씬의 새로운 움직임, 일렉트릭 뮤즈와 튠테이블 무브먼트

 

근래에 새롭게 등장해 인디 씬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레이블로 일렉트릭 뮤즈와 튠테이블 무브먼트가 있다. 플라스틱 피플의 멤버이기도한 김민규의 일렉트릭 뮤즈와 그림자 궁전의 멤버로 예명 '9'로 알려진 송재경의 튠테이블 무브먼트는 라이브 클럽 빵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점과 현재 가장 주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일렉트릭 뮤즈는 올해 아톰북의 데뷔 앨범 [Warm Hello From The Sun]과 비둘기 우유의 데뷔 앨범 [Aero], 스타리-아이드의 2집 [Sweet Night]를 발매했고, 작년 그림자 궁전의 데뷔 앨범 [그림자 궁전]으로 주목을 받은 튠테이블 무브먼트는 올해 로로스의 [Pax]를 발매했다.

 

인디레이블의 발전과 명암

 

대개 해외 음반 라이선스나 국내 음반 재발매, 공연 기획 등을 주요 사업으로 시작했던 인디 레이블들은 2003년을 기점으로 레이블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독자적인 음반 제작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기에 힘을 더한 것이 바로 홈레코딩의 확산이다. 대형 스튜디오를 이용하지 않고도 컴퓨터와 소규모 작업실만으로 음반의 제작이 가능해짐에 따라 소자본 인디 레이블의 음반 제작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제작 환경에 어울리는 음악 장르들이 확산되고 이에 대한 작업 노하우도 축적되기에 이른다.

 

또한 과거에는 제작과정에서 셀프 프로듀싱만을 고집하거나, 아니면 아예 프로듀싱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데 반해 점차 창작물을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하고 조율하는 프로듀서의 역할을 인식함에 따라 인디음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프로듀서의 양성도 모색되고 있다.

 

인디 레이블의 경영에 있어서는 독자적인 수익구조가 정착됐다. 레이블의 장르와 성향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보통 모던록/포크 레이블의 경우 음원수입이 음반수입보다 많거나 비슷하지만, 헤비니스 계열 레이블은 음반수입과 공연수입이 더 많다. 또한 초기의 주먹구구식 회계와 계약 관행에서 벗어나 점차 경영상의 정밀함과 투명성도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국내 음반 시장의 불황에 대한 대응으로 해외 진출에 대한 모색이 늘어나는 추세다. 해외 레이블과의 제휴를 통한 해외 진출과 음반 수입 및 라이선스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도프 엔터테인먼트와 비트볼 뮤직을 중심으로 일본 진출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고, 지금까지 스트라이커스와 껌엑스가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물론 인디 레이블들의 현재 모습에 밝은 면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기획력의 부재가 아쉬운 대목이다. 지금까지 인디 씬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앨범의 경우 거의 우연에 따른 결과이거나 뮤지션의 개인 역량에만 의존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직 인디 레이블들이 자신들의 기획력을 바탕으로 히트작을 내놓을 만한 역량에는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또한 여전히 인디 씬의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동력을 모두 갈무리하기에는 인디 레이블의 숫자가 부족하다. 근래에 신생 레이블인 일렉트릭 뮤즈와 튠테이블 무브먼트가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는 것도 이들 레이블의 안목이 뛰어난 점도 있지만, 그만큼 기존 레이블들이 담아내지 못한 자원이 많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인디 씬의 음악적 지층의 확장과 양적, 질적 발전을 위해 더 많은 레이블이 필요한 실정이다.

 

'음악을 통한 가슴의 떨림'이라는 성과

 

90년대 후반부터 창작자의 영혼이 스민 '작품'으로서의 성격보다 자본주의적 '기획 상품'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띤 음반들이 대형 연예기획사에 의해 천편일률적인 모양새의 공산품 찍어 내듯 제작되어 한국 대중음악을 점령했다. 결과는 대중음악의 자멸이었다. 현재 대중음악 산업의 불황은 MP3로 대표되는 기술적, 사회적 변화보다 주류 음악 씬의 이러한 행태에 기인한 사태다.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성장해온 인디 씬은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유력한 대안이다. 창작이라는 본연의 책무를 환기시키고 음악적 다양성을 넓혔으며, 무엇보다 '음악을 통한 가슴의 떨림'이라는 대중음악의 진정한 미덕을 일깨운 것이 지금까지 인디 씬이 거둔 성과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회적으로 인디 씬과 그 중심을 이루는 인디 레이블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실정이다. 게다가 올해 들어 인디 레이블에 대한 정부의 유일한 지원정책이었던 인디레이블육성지원사업이 중단되었다. 레이블 당 1천만 원의 자금지원이 사라진다 해서 당장 인디 레이블들의 존립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지원을 바탕으로 좋은 음반들이 많이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해외 문화선진국들이 인디 음악을 비롯한 비주류 문화, 예술의 발전을 위해 장기적, 구조적 지원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인디 레이블에 대한 대중의 애정과 관심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 대중음악의 부흥을 열 첨병으로서 자리매김할 인디 레이블의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다. 


최준하/음악비평웹진 <보다> 필자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⑩] 음악페스티벌의 시대, 샴페인은 아직! 

  

왠지 "그 때를 아십니까?"식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니까 동네 새 애들(New Kids on The Block)의 내한공연 때 일어난 압사사건이나 1970년대 해외 팝스타의 내한공연 때 여대생들의 속옷이 날아다녔다는 이야기. 물론 이제는 세상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웃으며 말할 수도 있겠지만 왠지 도시락을 못 싸온 아이들이 남몰래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는 고백처럼 열적은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얼마나 문화적 변방에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단지 대한민국이 GNP가 낮은 개발도상국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국근대화의 기치 아래 단순한 즐거움마저 유예해야 했던 군부독재의 철권통치 속에서 대형 음악 축제라든가, 해외 음악 스타의 내한 공연 같은 것은 사치와 낭비의 퇴폐풍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비로소 축제의 시대가 되었다고, 너무 축제가 많은 것이 아니냐고 했던 김대중 정권 시기에도 사실 대형 대중음악 축제라곤 쌈지사운드페스티벌 정도가 전부였다. 록 담론의 과잉부흥을 끼고 한국 대중음악 페스티벌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자유콘서트의 영광은 너무 짧았고, 트라이포트의 야심 찬 시도는 쏟아지는 장대비속에서 잔인하게 씻겨져야 했던 것이 불과 10년 전이었다.

  

그런데 2008년, 이게 어찌된 일일까? 관록의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이 10년을 맞이하게 되고, 트라이포트를 계승한 펜타포트가 상종가를 치고 있으며, 극소수 매니아들의 장르였던 재즈 음악의 페스티벌이 지자체의 공식 사업으로 수년째 열리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동두천과 부산의 '형님스러운' 록 페스티벌이 건재하고 '언니스러운'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이 여성 음악팬들의 필수 가을소풍 코스로 공인받게 되었다. 저주받은 땅이었던 난지도가 거대한 그루브의 난장이 되었으며, 경기도 어디에 붙어있는 줄도 몰랐던 광명시가 음악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전무후무한 음악영화축제가 수년째 호황 속에서 진행되기까지 하고 있다. 실로 궁핍했던 지난날은 이제 추억 속에 묻어두고 그저 영광된 미래를 즐기기만 하면 될 만큼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시대가 되었다고 확신해도 좋은 것일까?

 

최근 한국 대중음악 음반시장의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과 맞물려 생각해보면 이러한 음악 페스티벌의 호황은 실로 기이하기까지 하다. 음반이 아니라 음원으로 음악을 듣게 되었다고 한들 이러한 음악 페스티벌의 번창을 설명해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다만 몇 개의 가설이다.

 

예를 들어 음악을 소비하는 매체가 LP에서 CD로 바뀌고, CD에서 MP3로 바뀌면서 음악에 대한 태도 역시 바뀐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음악을 듣는 일이 더 이상 골방에서 진지하게 음악적 계보를 외우고 연주의 아름다움에 취해 눈물 흘리며 듣는 지적 순례가 아니라 가볍게 다운 받아 소비하는 놀이가 되어버린 지금, 단순히 듣는다는 수동적 행위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이들의 음악 체험이 더 큰 판의 광장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저 귀로만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직접 자신의 스타를 눈앞에서 보고 사진을 찍고 영상을 블로그에 올리며 일련의 행위 자체를 인터넷을 통해 보다 많은 이들과 공유하는 집단적 놀이로 확장할 뿐만 아니라, 대단위로 사람들이 모이는 행위 자체를 즐기며 취향의 연대감으로 함께 놀 줄 알게 된 음악 소비 방식의 변화는 문화비 지출에 거침이 없는 2-30대의 소비 행태와 맞물려 대형 음악 페스티벌을 확장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버 그라운드 음악씬의 급속한 10대 중심 재편은 2-30대 음악팬들을 더욱 한국 인디씬이나 해외 음악씬으로 경도시키는 촉매제가 되었을 것이고, 이들은 일본에서 열리는 후지록이나 썸머소닉 같은 축제를 직접 찾아가거나 최근 2-3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내한공연의 거침없는 주소비층이 됨으로써 대형 음악페스티벌의 흥행을 보장하는 안전판과도 같은 역할을 담지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보다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근원적 열망의 확장은 한국에서 이뤄질 것 같지 않았던 여러 내한공연을 거뜬히 성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음악 소비층의 타깃을 분명히 하며 여러 장르의 다른 축제가 분화될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냈다. 재즈 페스티벌의 안착과 월드 뮤직 축제의 등장은 이러한 열성적인 팬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단지 음악페스티벌의 순항만은 아니다. 대형 음악페스티벌의 확장 가능성을 엿보이며 기대를 모았던 썸머브리즈페스티벌의 돌연한 취소와 몇몇 페스티벌의 안일한 기획, 그리고 다른 축제와 확연히 비교되는 낮은 국가 주도성은 음악 페스티벌의 미래를 결코 낙관하지 못하게 만드는 냉정한 적신호이다.

  

사실 음악페스티벌에 와서 열광하는 관객들 가운데 몇 명이나 그 뮤지션의 음반을 샀겠냐는 냉소적인 질문처럼 음악을 다운받아 소비할 뿐, 음반을 사는 일이 뮤지션에 대한 지원과 투자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한국 음악 팬들의 근시안적 시각은 세계 최고급 뮤지션들의 내한공연과 더 다양한 음악페스티벌이 이뤄지지 못하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당대의 트렌드가 되는 일부 장르에만 냄비 끓듯 몰려드는 얄팍한 한국 대중음악 팬덤 문화로는 롤링 스톤즈 같은 노장 록 밴드들의 내한공연이나 비주류 장르 중심의 페스티벌 같은 것은 결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장 자체의 규모가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현실에서 어쩌면 우리는 이미 수용규모의 포화점을 넘어서고 있음에도 환상을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썸머브리즈 페스티벌의 취소는 어쩌면 그 냉정한 현실의 증거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약속한 공연을 일단 뚜껑부터 열었다가 흥행이 안 되면 취소해버리는 일부 기획사들의 얍삽한 '간보기' 행태 역시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악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 대중음악씬의 발전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는 몇몇 페스티벌의 안일한 기획 역시 외화내빈의 허약체력을 만드는 주범이다. 음악 페스티벌이 단지 내한공연을 중심으로 한 한국 뮤지션들의 들러리서기 무대라면 그것은 기획사의 돈벌이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국 대중음악씬의 발전을 고려한 사려 깊은 기획과 책임감 있는 진행, 음악팬들의 적극적인 팬덤문화가 함께 어우러지지 못한다면 2008년 음악페스티벌의 호황은 반짝 경기의 추억으로 끝나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더더욱 영화 축제나 특산물 축제에 비해 턱없이 적은 국가적 지원은 대중음악의 산업적 효능과 문화적 가치에 둔감한 관료적 마인드를 증명하는 것으로서 영세한 민간 자본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부정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밑도 끝도 없는 낙관과 기대가 아니라 자라섬, 쌈지, 제천 같은 의미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몇몇 페스티벌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호응이며, 작지만 개성 있는 페스티벌의 장르적, 지역적 산개(散開)와 한국 대중음악 씬에서 국가와 자본, 기획자, 매개자, 평론가, 팬층이 담당해야 할 역할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과 소통이다. 파이가 커지지도 않았는데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10년 중도우파 정치가 무너지는 데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면 3년여의 핑크 무드가 무너지는 시간은 훨씬 더 짧을지도 모른다. 

   

서정민갑/대중음악의견가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⑪ 대중문화에 저항하는 '진짜 대중문화' 

  

장면 1. 햇빛 좋은 오후, 홍대앞 거리를 산책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귀가 끌린다. 통기타,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이 뮤지션은 스스로 제작한 싱글음반을 소개하며 햇살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공연을 이어간다.

 

장면 2. 촛불집회가 열린 시청 부근. 여러 어쿠스틱 악기를 둘러맨 밴드가 보도 한 편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삼삼오오 모여든 집회 참가자들은 그들의 노래를 듣고, 어느덧 집회는 구호만이 아닌 함께 즐기는 문화로 변해간다.

 

장면 3. 인사동 거리에서 소규모 악단의 공연이 한창이다. 오랜만에 나들이한 가족, 관광 온 외국인들 모두 흥겹게 그들의 연주를 즐기고, 그들이 펼쳐놓은 악기 가방에 선뜻 팁을 지불한다.

 

위의 이야기들은 가상이 아닌 지금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장면들이다. 아직 일상의 문화로 온전하게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공연장이 아닌 거리, 공원 등지에서 연주하고 노래하는 뮤지션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들을 버스커스(Buskers)라고 부른다. 아마 작년 소규모로 개봉되어 10만이 넘는 관객을 모았던 영화 <원스>를 보신 분들은 주인공이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던 첫 장면이 기억날 것이다.

  

버스커스는 공적인 장소에서 공연을 하며 팁 또는 선물을 받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음악뿐만 아니라 서커스, 아크로바틱, 코미디, 댄스, 저글링 등 다양한 공연으로 거리의 문화를 꽃피우는 이들이다. 버스킹 문화가 일찍이 시작한 해외에서는 버스커스를 전업으로 하고 있는 아티스트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 아티스트 중 조운 바에즈, 밥 딜런, 사이먼 앤 가펑클, 자니 미첼 등 버스커스 출신으로 프로페셔널 아티스트가 된 경우가 꽤 있다.

 

국내에서도 그 수가 많지 않지만 거리에서 공연이 열리는 경우가 있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홍대앞 놀이터가 그렇다. 홍대 지하철 역 부근 서교지하보도에서는 뜻을 같이한 인디 밴드들의 공연이 열리곤 한다. 그리고 서울 지하철의 몇 개 노선에서도 지정된 장소에서 공연이 열린다. 아쉽게도 아직은 이 정도이다. 거리공연이 그 거리의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법적인 문제, 주변 주민의 인식 등 여러 장애물을 넘어서야 한다.

 

거리공연의 시도는 90년대 중반부터 있었다. 98년경 파티밴드를 꿈꾸었던 '오! 부라더스'는 홍대앞 거리에 악기를 싸 들고 나가 서프 뮤직과 로큰롤을 연주하곤 했다. 주변 상인들의 민원으로 경찰이 출동하기 전까지 말이다. 99년에는 서울 지하철 일부 노선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지정된 장소에서 지정된 시간에 해야 하는 제한된 형식의 공연이었다.

 

 

▲ 소규모로 개봉되어 10만이 넘는 관객을 모았던 영화 <원스>의 첫 장면은 주인공이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풍경이었다.


 

2002년 홍대앞 놀이터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프리마켓에서 일군의 뮤지션이 공연을 시작했다. 작가들이 창작품을 만들어서 팔듯이 우리는 공연을 하고 팁을 받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한 프리마켓 공연은 이제 주말 홍대앞 놀이터의 명물이 되었다.


거리공연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아티스트도 등장했다. 'Think About' Chu'로 유명한 아소토 유니온은 앨범 발매 이전 홍대와 이태원 부근에서 기습적으로 거리공연을 하곤 했다. 버스커스를 꿈꾸는 캐비닛 싱얼롱즈는 거리를 다니다 맘에 드는 곳에서 공연을 했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로 알려진 하림이 다양한 해외의 민속악기를 들고 거리에서 공연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던 것도 이 시기이다.

  

2007년 펜타포트 페스티벌의 숨겨진 승자였던 어 베러 투모로우는 거리, 강의실, 클럽 등 장소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끼를 맘껏 발휘한다. 월드뮤직을 연주하는 악단 오르겔탄츠는 인사동, 대학로, 삼청동 등지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하곤 한다. 두 번째 달 프로젝트 그룹 바드의 경우 버스커스로 자유롭게 연주하고 활동하는 멋쟁이 뮤지션이다. '진식의 1020 서교지하보도'는 공연장이 아닌 자신의 공간을 모색하는 뮤지션들이 의기투합한 경우이다. 포크 뮤지션 시와는 망원동의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인 마리아 프로젝트에 참여해 지난 8월 25일 해질녘 마리아수도회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노래를 들려줬다.


MP3로 음악을 듣고, 블로그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올리는 디지털의 시대에 거리공연은 무슨 의미일까? 그건 아마도 일상 속에 존재하는 즐기는 문화의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대량으로 소비되는 대중문화는 일방향의 성향이 강하다. 그럼으로써 문화는 즐기는 무엇이 아닌 소비하는 무엇에 가까워진다. 버스커스는 이에 반하는 문화 생산자이다. 이들은 매체를 통해서 전달하기 보다는 관객이 존재하는 거리로 나가 얼굴을 맞대고 자신의 창작물을 전달한다.

 

더 중요한 것은 아티스트와 관객과 거리가 모두 모여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가 되는 순간을 창출한다는 점이다. 내 안에서 추상적으로 상상하던 악상이 노래가 되고, 그 노래가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순간에서 문화는 발생하고 우리 일상에 존재하게 된다. 두 번째 달 바드가 아일랜드에 갔을 때 거리의 모든 사람이 음악인이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건 과장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포크(folk)가 단어가 가진 원래 의미처럼 존재하는 나라의 문화는 몇몇의 유명 아티스트가 아닌 모든 대중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김민규/음악인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⑫·끝] "대중음악도 '비즈니스 프렌들리'하면 된다?" 

 

계절을 바꾸는 바람이 분다. 음악계에도 예전과 다른 습기를 품은 바람이 일고 있다. 어느 예술인단체의 모임에서 한 연극평론가로부터 음악평론가로 살기엔 불운한 시절 같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불과 1년 몇 개월 전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꽤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은 매 10년 후반부마다 전기를 맞아왔고, 그간 상승곡선과 하강곡선을 주고 받아온 영화의 침체와도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반전에는 그럴만한 배경이 있으며, 명백한 한계 또한 존재한다.

 

립씽크 등 '습관'에 대한 반성과 비판적 견해의 존속, 그리고 문화운동에 가깝게 이어진 어떤 노력들이 있었다. 음악인들은 창작을 지켜냈고 인디음악은 성장했다. 음악을 즐기는 장이 확장되고, 일부 미디어가 대중음악을 주요 콘텐츠로 다루어 화제를 생산하는 데에 늦게나마 동참하기 시작했으며, 가요계 역시 산업구조의 급변 이후 차차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해가고 있다. 그러나 시야를 확장하지 못한 호객성 기사들이 복제되는 현상이 노출하듯 질과 내용에 대한 동의는 미진하다. 산업의 '의미 있는 지속'은 아직 저 멀리에 있다.

 

음원산업 성장의 그늘, 파이가 커져도 접시는 비어있다

 

한국음악산업협회의 2008년 음반판매집계에 의하면 10만 장 이상 판매된 음반은 현재까지 네 장에 이른다. 지난 2007년 내내 10만 장을 넘긴 음반이 불과 세 장이었음에 비하면 선전하는 셈이고, 바닥을 쳤다고 볼 수도 있다. 음반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록물(record)이자 작품으로서 단순한 물건 이상의 함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음반을 포기하고 음원 단위의 활동을 요구하는 것은 시인에게 시집을 내지 말고 시 한편씩만 팔라는 얘기와 비슷하다. 소설처럼 앨범 전체를 유기적인 작품으로 만드는 앨범아티스트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이다. 해외에서는 수백만 장씩 팔리는 히트앨범들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유독 큰 낙차를 기록한 한국의 음반시장은 단순히 매개체의 변화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은 음반산업과 음악산업의 구분이다. 불법다운로드 때문에 음반이 팔리지 않아 음악계가 어렵다는 아우성은 틀리지는 않으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기계적 팩트와 실제 간에는 차이가 있으며, 자기위주로 통계와 자료를 해석할 때 사실은 왜곡된다. '음악산업백서2007'에 의하면 2006년 기준으로 음악산업의 규모는 4400여억 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이중 음반산업이 848억 원대이고, 2000년에 450억원 규모였던 디지털음악산업은 3562억 원으로 크게 성장했다. 이처럼 음악을 구매하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소비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파이의 크기와 무관하게 생산자(창작자)는 여전히 빈 접시를 들고 서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음악산업의 팽창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질적인 발전과 수용자 층의 확대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를 동력으로 산업규모가 커진 1990년대 중후반은 외형적으로는 호황기였지만 다양성과 창작기반은 심각하게 악화된 시기였고, 이것이 2000년대 대중음악 전반의 위기를 초래한다. '뮤직비지니스'에서 '뮤직'은 빠지고 '비지니스'만 남은 성장은 내실과 무관했다. 쉽게, 다수의 청자가 원하는 수준으로, 가시적인 실적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는' 수준으로 만들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하면 결과는 비슷해진다. 음악애호가들은 그러한 결과물을 좋아할 수 없었고, 음악이 생명력을 갖기 위한 전제조건들이 무너졌다. 확대로 축소를 초래한 황폐한 번식이다. (주류가요음반시장과 달리 인디음반시장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입장권을 사재기한 암표상들이 텅 빈 경기장 밖에서 서성대는 모습은 비단 다른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인터넷시대가 열리자 일부는 순진한 기대를 품기도 했으나, 새로운 시스템 역시 강자가 장악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편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속성이다. 사람과 사회는 늘 시간과 시대 순으로 성숙하지는 않는다. 작은 순기능, 즉 직접홍보와 판매 등은 발견이라기보다는 기존에 있던 것의 변형에 가까웠다. 2001년 이후 음원산업이 꾸준히 성장하면서 전체 음악산업의 규모는 더욱 커진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성장한 음원시장의 수익이 이동통신사 중심으로 분배되고 음악의 재생산에 재투자되지 않아 치명적이다. 이른바 음원시대에 음원수익에 강조점을 찍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유이다.

 

현실은 이렇다. 온라인음원의 수익은 이동통신사가 50%를 가져가고, 나머지를 제작사가 22%, 음원제공업체가 19%씩 나눈다. 저작권자 및 실연자, 그러니까 음악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고작 9%이다. 해외의 경우는 대체로 이와 반대의 분배율이라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한국적 상황'을 알게 된 해외 음악인들과 음악 관계자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구조이다. 이처럼 덩치가 커지고 있지만 수익의 극히 일부만이 제작자와 음악인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재생산의 기반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법다운로드보다 합법적이지만 비상식적인 음원수익분배에 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타당성을 얻는다. 이러한 수익분배율이 정해지게 된 과정은 어떻게 하면 기업은 살고 생산자는 도태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익추구가 문화산업의 근간마저 흔드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참고사례라 할만하다.

 

신문의 판매부수와 마찬가지로 이용자수 경쟁을 하는 이동통신사는 덤핑에 가까운 음원 서비스 가격을 유지한다. 누가 음반을 사겠는가라는 말이 나오고 실제로 그렇게 길들여진다. 더구나 음원시장이 포화상태에 가까워지고 성장세가 정체되기 시작한 상황이라 이익 조정은 업체에게도 부담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용료를 현실화하여 수익을 유지해야겠지만, 심리적 저항과 회원유치 문제가 만만할리 없다. 그런데 2007년, 대형제작자들은 대통령선거 후보들을 불러놓고 불법음원의 근절이 음악인들의 숙원인양 사뭇 비장한 '쇼'를 했다.

 

외형만 중시하는 관점은 이 문제를 포착하지 못한다. 아니, 외면한다. 1조2000억 원대에 달하는 노래연습장산업이 존재하지만 음악저작권협회는 얼마 전에 있었던 스캔들이 새로이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아예 저작권협회 등록을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음악인들까지 있다. 음반수요가 음원수요로 이동하면서 발생한 이익마저 1차생산자에게 돌아가지 않는 구조는 음악의 존립기반을 위협한다. 주류 가요계에서도 음원판매는 '가교역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성장이 후퇴를 견인해온 것이다.

 

공연시장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이제는 공연시장으로 눈을 돌려야한다는 얘기가 있다. 음악활동의 출발이자 마지막은 테이블 주위에서 한담을 나누거나 방석을 깔고 앉아 문제풀이를 하거나 까나리액젓을 들이키는 것이 아니다. 공연은 클리프 리처드와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예에서처럼 새로운 세대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계기도 되어준다. '음악산업백서2007'은 공연산업이 2005년의 1451억원에서 2006년에는 1887억으로 30% 성장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음원산업과 마찬가지로 밑바닥에는 와 닿지 않는 현황이다. 해외 유명뮤지션의 내한공연마저 동원 가능한 관객수가 한정되어 있어서 여러 회의 공연을 할 수 없으므로 대관료를 포함한 투자비를 1~2회 공연을 통해 회수한다. 공연 티켓가격이 생활수준에 비하여 높게 책정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국내 중소규모 공연의 사정 역시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거의 매일 계속되는 클럽공연들이 있지만 한국의 클럽들은 음악인에게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기획공연 또는 페스티벌의 출연 그리고 단독공연에서만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입장수익이 한정되어 있기에 적자를 감수하며 활발한 공연활동을 지속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1~2회 공연으로 대관료 등을 충당하는 소극적 활동에 만족해야 한다.


이러한 중소 공연시장의 열악함은 단지 전문적인 기획마인드의 부재와 음악애호가들의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라이브에는 뛰어나지만 앨범은 부실하고, 반대로 앨범은 뛰어나지만 라이브에는 약한 음악인들이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 환경은 음악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연의 주요한 소비층 역시 제한적이다. 음반소비와 음원소비 계층의 상이함처럼 공연실적의 대조 역시 수용자의 계층화와 관련이 있다.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가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폭발이 일어날 듯한 기운이 조성된 1990년대부터 영화·공연문화의 주요 소비층이 된 일군(관계자들은 이들에게 '언니들'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이 있다. 이전까지 음악매니아의 중심축으로 수집과 몰두형이었던 '형님들'과 달리 참여와 기호형이었던 그들이 2000년대 대중예술의 주 소비층으로 영화와 뮤지컬, 그리고 공연시장의 고객이 되었다. 이러한 성향의 차이에 대한 사회·경제적 분석도 가능하다.

 

근 몇 년 사이 페스티벌의 성황을 개별 뮤지션의 활동은 쉽지 않은 사정 하에서 모듬 메뉴 격인 페스티벌로의 집중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페스티벌은 다양한 음악의 향유와 소개의 장이며 특별한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명반을 남기고 해산한 '유앤미 블루'의 재결합 공연이 성사된 무대 역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펜타포트락페스티벌,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이다. 특화라는 이름으로 장르를 가르고 지자체가 지원하는 축제가 정치적 의도 때문에 단발성 이벤트로 전락하는 일도 있지만,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취향들이 어우러지는 장면이 언젠가는 만들어질 테고, 그래야 한다. 그러나 역시 출발은 중소규모 공연임에도 빈약한 인프라와 공연 관련 세금이 22%에 달하는 등의 제도적 문제가 길을 가로질러 누워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성장의 조건?

 

그리고 저변의 문제로 연결된다. 한국에서는 음악수용이 20대 중반 이후 급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극의 폭을 넓힘으로써 문화적 감수성을 유지시키는 데에는 영향력 있는 미디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매체환경은 그렇지 못하다. 방송의 책임도 없지 않다. 상황이 변하여 음악방송이 밀려났다는 주장을 펴지만 연예기획사시스템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자초한 측면이 더 크다. '잊혀질 만 하면' 부패 스캔들이 터지는 방송연예계에서는 돈과 커넥션이 대중스타를 만들어냈다. 관료들이 관련업체로 진출하는 것처럼 PD가 기획사로 가거나 직접 차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만약 수사가 '적정선'에서 그친다면 정직한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시청자들 역시 그들에게 사과 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보비 규모가 커지는 현상은 일반적인 추세가 되어 생산보다 홍보로의 집중이 가중된다.


지상파 방송은 물론 '음악전문'으로 등록된 케이블 음악방송채널에서도 극히 제한적인 음악 외에는 전달되지 않고 있다. 일정 금액을 지불해야 편성에 포함시키는 '띠' 관행 때문이다. 음악인의 뮤직비디오가 방송되려면 프로그램 제작협찬금 명목으로 500만 원에서 2000만 원까지의 금액을 지불해야한다. 케이블 음악채널은 대부분의 편성시간대를 이러한 계약물로 채웠다. 비용을 지불하고 편성시간의 일부를 확보하는 '띠 두르기'에 의하여 대형 기획사 소속이 아닌 신인 음악인이나 인디 음악인들은 아무리 뛰어난 작품을 발표한다고 해도 대중과 만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했다. '음악전문' 유선사업자는 프로그램의 전문편성비율을 80%로 유지해야하지만, 그 비율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러한 관행을 인지해온 방송통신위원회는 2007년까지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사업자 '편향'이 창작자와 수용자를 소외시키고 산업의 근간을 흔들었다. 덕분에 게토화된 방송채널에 중소 레이블들이 홍보비를 지출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방송의 권력이 분산되었다고는 해도 대안적 미디어의 역할은 미약하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할 때 소문과 유언비어가 퍼지듯이 현장의 음악 성과와 무관한 선입견이 대중음악에 씌워졌다. 문화적 가치 대신 경쟁력과 생산성만 강조하는 논리는 자기파괴적이 되고, 창작물의 원활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산업성장 역시 모래성놀이에 불과하다.

 

'한류'에 대한 환상이 그랬다. 한때 한류는 기업 이미지 광고와 일부 영화들처럼 애국심 마케팅과 맥을 같이함으로써 심정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2006년에 '삼성경제연구소'는 "(현지에서) 미국·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경쟁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개발도상국이 자국 문화산업을 육성하도록 자극을 준다"는 요지의 분석을 낸 바 있다. 해외 진출과 '국가 브랜드'를 연결시키며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할리우드와 뉴욕을 누빈다는 어떤 건장한 청년의 성공담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껌엑스, 할로우잰, 스트라이커스, 윈디시티 등의 경우처럼 음악은 작은 규모이더라도 장르와 씬에 연계할 때에만 유효하다. 그런데 올림픽 개막식에서 립싱크를 할 정도로 국익에 함몰된 촌극은 지금도 연속방송 중이다.

 

"성장보다 성숙을"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기성 대중음악의 산업적 위기는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의 본격적인 상륙과 떼어놓을 수 없다. 자본의 욕구를 개인의 욕망으로 내면화한 거대한 착시현상 속에서 사람이 상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소비자를 선택하는 시대가 왔다. 극단적 상업주의와 성과주의 속에서 음반의 제작과 유통, 음원서비스와 방송을 과점하는 기업이 나타났고, 시장논리는 강화되었다. '콘텐츠'라는 말은 시장에서 가치부터 따지는 용도의 유행어가 되었다. 문화예술에 개발주의를 강요하면 예술의 본질적인 출발점을 시장이 거세하는 방식, 즉 '표준화'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대중음악에 대한 성찰이 간과된 논의들은, 심지어 한가하게 음악을 논하는가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모두 농담이 되어버린다. 게을러서 가난하다는 천박한 자본주의적 사고와 실력이 부족해 인지도가 낮지 않느냐는 빈정거림은 과연 질적으로 다를까. 그 와중에 예술인 역시 생활인이라는 사실은 종종 잊혀진다. 상업주의에 가까이 갈수록 이윤으로부터 멀어지는 창작자와 문화노동자의 처우에 대한 인식은 낮은 수준이다. 음악(음악인과 창작)이 있기에 산업이 의미를 갖고 존재할 수 있음을 설득해야 하는 단계인 것이다. 그럼에도 창작이 없으면 산업도 존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대중음악의 산업적 효능과 문화적 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문제는 강조는 되고 있으나 중요한 부분들이 현실성을 근거로 간과된다는 데에 있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시행한 '인디레이블육성지원사업'을 폐지했다. 실적이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지원사업이 중단·변경된다는 것은 문화예술정책의 기조 자체가 현장의 바람과 다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역시 기초예술지원규모와 대상을 대폭 축소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대중음악인이 공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창구는 거의 막힌 셈이다. 이런 것이 소위 '정상화'는 아니다. 선진국들처럼 예술인 출신 인사가 문화부장관이 된다고 해서 좋은 정책이 보장되진 않는다.

 

결국 음악산업의 안정화는 주류 가요의 체질개선과 방송 등 매체환경에 대한 점검, 전문성과 사명감 그리고 현장주의에 기초한 정책, 비평·연구 활동의 심화와 부가판권시장에 대한 연구가 병행될 때 가능해진다. 이미 전문화된 축제와 공연기획이 시도되고, 영상과 음악을 접목하는 등 대중예술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자업자실'의 결과였던 위기를 겪고도 강자경제에 의하여 조직은 살고 사람은 죽는 현상이 지속된다면 음악산업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산업에는 양질의 생산자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창작자의 풀이 필수적이다. 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리기만 해도 보이는 일이다.

대중이 음악의 숨결을 잊어가고 음악이 단순 소비재로 전락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우려할만한 징후이다. 수동적 소비를 벗어난 수용이 능동적 창작과 만날 때에 새로운 상상력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진다. 또한 자율과 공존이라는 문화다양성이 세대별로 음악을 선택할 수 있는 문화선택권과 창작자의 재생산 환경을 가능케 한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함께 중시되어야 안정적인 산업과 선순환구조가 가능함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병은 치료법을 알려준다. 아직 상상과 현실의 간극은 멀지만 증산보다 분배, "성장보다 성숙"이라는 가치는 대중문화예술에도 적용된다. 지금 음악은 희미한 가능성을 안은 채 언젠가 건너야할 다리 앞에 서 있다. 


나도원/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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