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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필름의 거리 (한겨레 연재)

by Wood-Stock 2009. 8. 10.

필름의 거리 ① 도쿄 아사쿠사 ~ 기타노 다케시의 순수를 찾아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꼬마가 열심히 달렸던 바로 그 골목

한겨레
» 아사쿠사는 도쿄의 첫 번째 여행자가 꼭 들르는 인기 방문지다. 이화정
“또 아사쿠사야?” 벌써 다섯 번째. 도쿄에 갈 때면 빼먹지 않고 이곳에 들르니 주위에선 지겹다는 반응 일색이다. 하긴, 신주쿠나 하라주쿠 같은 중심가와는 사뭇 동떨어진 전통의 거리 아사쿠사에서 매번 색다름을 찾는 것도 무리일 터다. 이곳의 명물인 천초사(센소사)나 제법 볼거리로 꼽히는 전통 상점 거리 ‘나카미세도리’도 처음엔 마냥 신기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곱씹어 간직할 만한 풍광은 아니다. 나 또한 ‘도쿄타워’나 ‘레인보 브리지’처럼 도쿄에 가면 반드시 들러야 할 관광 필수코스 이상으로 이곳을 염두에 두진 않았다.

 

사정이 바뀐 건 그러니까 기타노 다케시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을 보고 난 후다. 영화는 집 나간 엄마를 찾아 떠나는 초등학생 마사오, 그리고 이 모험에 우연히 동참하게 된 건달 기쿠지로의 여행담을 그리고 있다. 평소 폭력적인 영화를 찍던 다케시답지 않게 착한 영화를 찍어 주위를 놀라게 한 작품이자, 나에겐 잊을 수 없는 시작과 마무리로 기억되는 영화다. 사실 마사오가 집 떠나기 전, 그리고 험한 여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게 전부니 그닥 별스럽지도 않은 장면이다. 그런데 히사이시 조의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꼬마가 열심히 달리는 장면을 보노라면 미처 어딨는지 알지도 못했던 삶의 ‘희망’이 샘솟는 기분이 들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중요하건 몇 번이고 다시 본 이 장면이 촬영된 곳이 바로 아사쿠사라는 점이다.

 

마사오가 달리는 짧은 시간, 에도시대의 정취를 그대로 보존한 아사쿠사 거리가 화면에 고스란히 담긴다. 천초사, 전통 상점거리를 지나 메이지유신 이후 번성한 극장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유원지 ‘하나야시키’, 도쿄의 한강이라 불리는 ‘스미다가와’ …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알려진’ 아사쿠사일 뿐이다. 바쁜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마사오에게 아사쿠사는 ‘관광지’가 아닌 외로움을 달래 줄 유일한 놀이터일 뿐이다. 사실 다케시가 다시 없을 것 같은 ‘착한 영화’를 만들면서 출발과 매듭점으로 아사쿠사를 택한 것은 눈여겨 볼 만하다. 마사오에게 이곳이 생활이었던 것처럼 다케시에게 아사쿠사는 청년시절, 가난에 허덕이며 일용직을 전전하던 그를 코미디언으로 키워 준 정신적 고향이었기 때문이다.(아사쿠사는 일본 코미디언의 산실로 정평이 나 있다) 다케시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를 바꾸면 나라는 사람도 바뀔 것 같다”고 전했다. 결국 자신이 꿈을 키운 곳,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보낸 그곳을 영화에 등장시킴으로써 오래 전 잃어버린 자신과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을 찾을 때면 나는 마사오처럼 한달음에 아사쿠사를 섭렵하는 대신 이 거리를 꼭꼭 되새김질하는 느린 걸음을 택한다. 간식거리로 문어빵을 사들고, 관광객을 위해 마련된 포토패널에 고개도 쏙 밀어넣어 본다. 천초사를 조금만 돌아 나서면 거리는 관광지의 외피를 벗고 서민들의 거리로 탈바꿈한다. 오래된 2층집 창틀에 하얀 이불을 내거는 아주머니, 거리에 늘어선 선술집에서 청주(사케) 한잔에 인생을 풀어놓는 동네 할아버지들, 과연 작동이 될까 싶은 시계를 열심히 손질하는 시계방 아저씨, 뒤죽박죽 쌓여 있는 장난감을 정리하는 완구점 할머니 … 여기에 코가 빨개지도록 낮술을 걸친 취객과 경찰의 실랑이까지 더해지면 이 거리의 풍경이 완성된다. 늘어선 구경꾼들 속, 어린 마사오와 청년 다케시가 자연스레 오버랩 된다. 에도시절부터 전해진 사람 내음, 아사쿠사를 둘러보는 동안 나 역시 잠깐이나마 순수함을 되찾길 기대해 본다.

 

 

기사등록 : 2008-03-26 오후 11:39:01 기사수정 : 2008-03-28 오후 03: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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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의 거리 ② 주펀 ~ 허우 샤오셴의 따뜻한 위로

아름답고 잔인했던 <비정성시>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가파른 계단

한겨레
» 〈비정성시〉의 주무대인 주펀. 좁은 골목과 가파른 계단이 이어졌다. 이화정
몇 해 전 허우 샤오셴 감독과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춘 촬영감독 마크 리 핑빙을 인터뷰했다. 그는 허우 샤오셴이 항상 촬영 장소에 먼저 도착해 그곳에서 느낀 감흥들로 만든 ‘즉석콘티’를 건네 긴장했던 기억을 털어놓았다. 허우 샤오셴에게 촬영지는 단순히 장소가 아닌, 작품을 구상하고 담아낼 가장 중요한 감정의 그릇이었다. 대만에서 나고 자라 그 풍광 속에 대만인의 삶을 기록한 감독 허우 샤오셴. 그의 대표작 <비정성시>는 이런 대만을 가장 잘 포착한 작품이다. 영화의 주 무대가 된 ‘주펀’에서 그는 어떤 감흥을 전달받았을까. 문득 그의 카메라를 따라가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영화 <비정성시>는 1945년 일제 치하 해방 이후 국민당 정부의 정착까지, 대만의 한 평범한 가족이 겪는 아픔을 통해 대만 질곡의 현대사를 그린 작품이다. 식당을 하는 임아록. 정치·사회적인 격변 속에 그의 네 아들은 실종되고, 죽고, 미쳐 간다. 아픈 역사는 양조위가 연기하는 청각장애인 막내아들 문청의 눈으로, 그의 아내 관미의 내레이션으로 차분히 기록된다. 주펀은 바로 사진사 문청이 일하던 사진관이 있던 곳이다. 암울한 시대를 대변하듯 내내 흐렸던 주펀의 하늘, 가파르게 이어지는 좁은 계단, 그리고 그 끝에 이 모든 아픔에 무관한 듯 펼쳐져 있던 바다. 영화 속 주펀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그래서 잔인했다.

 

주펀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쉽다. 타이베이에서 교외선을 타고 한 시간 남짓에 있는 루이팡역. 그 짧은 이동으로 거리는 도심의 혼잡을 말끔히 벗고 자연의 충만함을 내어준다. 산 중턱에 위치한 주펀으로 가려면 역 앞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바다를 낀 구불구불한 산길. 눈앞에 펼쳐진 진풍경에 탄성이 앞선다. 영화 속 관미가 처음 이곳에 와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자주 보게 돼서 좋았다”던 말이 새삼 떠오른다. 길의 처음은 고풍스런 상점 거리 ‘지산제’다. 대만 대표 먹거리인 ‘썩은 두부’(취두부) 냄새를 뒤로한 채 좁은 골목을 따라가면 곧 <비정성시>의 가파른 계단 길 ‘수치루’를 만난다. 영화 속 젊은 지식인들이 매일 저녁 모여 시대를 탄식했던 곳, 홍등 아래 선술집이 늘어서 있던 ‘슬픔을 간직한 도시’는 지금 대부분 관광객들을 위한 전통 찻집과 기념품점으로 바뀌었다.

 

관광객들의 바쁜 재잘거림 속, 나도 따라 계단을 밟아 본다. 계단 중턱, <비정성시>의 촬영지로 소개된 찻집 ‘아미차관’에 들러 자리를 잡았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 이쯤이었으리라. 잔뜩 구부린 채 필름의 흠집을 수정하던 문청이 떠오른다. 느리고 꼼꼼하던 그의 손동작. 문청은 그렇게라도 아픈 현실을 수정하고 싶었으리라. 허우 샤오셴은 북경어를 모르는 양조위를 위해 문청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설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 동포를 죽이는 총소리도 듣지 못한 문청에게, 장애는 현실을 이겨낼 절실한 방패였는지 모른다. 주펀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깨끗한 렌즈, 문청의 맑은 눈을 통해 본 주펀은 이처럼 상처 받은 이들을 위한 허우 샤오셴의 따뜻한 위로다.

기사등록 : 2008-04-16 오후 10:2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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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의 거리③- 베를린 ~ ‘라라’의 자유를 챙겨보라

〈비욘드 사일런스〉가 모노톤으로 스케치한 젊은 도시

한겨레
» 베를린의 하케셔마르크트. 베를린을 여행하려면 자유를 챙겨가라. 사진 이화정.

베를린 여행에 앞선 당부 하나! <베를린 천사의 시>의 쓸쓸한 감성을 기대하지 말 것. 빔 벤더스 감독이 컬러로 담기에 너무 황폐해 흑백 촬영을 결정했다던 ‘잿빛’ 베를린은 어디에도 없다. 전승기념탑의 천사상 ‘황금의 엘제’는 번쩍번쩍 금빛을 자랑하고, 잠깐이나마 영화 속 ‘천사 다미엘’이 되고 싶은 관광객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계단을 오르기 바쁘니 말이다. <베를린 천사의 시>로부터 14년 뒤. 한 달간 직접 ‘베를리너’가 되어 컬러로 풀어본 이 도시는 그야말로 북적댔다.

 

청각장애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라라’의 성장 스토리, <비욘드 사일런스>는 빔 벤더스가 스케치한 모노톤의 베를린을 총천연색의 현재로 되돌려주는 최신 관광안내 책자다. 영화는 클라리넷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라라와 어릴 적 받은 상처로 딸의 진로를 반대하는 아버지, 둘 사이의 대립과 화해를 그린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라라가 고향 마을을 떠나 택한 곳이 바로 지금 세계에서 가장 젊은 도시, 힙합 도시로 통하는 베를린이다.

 

영화 속엔 참 많은 ‘베를린’이 등장한다. 베를린의 관문인 초역(동물원역)을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 폭격의 흔적을 간직한 카이저 빌헬름 교회, 독일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슈프레강을 지나는 유람선의 운치를 만끽할 만한 산책로 운터 덴 린덴, 그리고 알렉산더 광장의 텔레비전 탑까지. 컨버터블을 타고 환호하는 라라를 쫓기만 해도 따로 관광버스 탈 필요가 없다. 여기까지는 맛보기. 본격적인 베를린 체험은 처음 초역에 도착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라라의 어리둥절함이 가신 뒤, 카메라의 빠른 움직임이 멈추고 나서부터다. 클라리넷 연주자가 되고 싶은 꿈 하나로 빈손으로 베를린행을 택한 라라. 그의 대담한 선택에 베를린의 현재가 그대로 포착된다. 영화의 주 무대는 아티스트들의 온상인 쿠담 지역. 클럽에서의 서툰 즉석연주를 시작으로 라라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한다. 고향 마을이 지금껏 자신을 구속했던 족쇄였다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 베를린은 가능성의 또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지금 베를린에는 무수한 ‘라라’가 존재한다. 젊은 아티스트들은 크리에이티브한 열정 하나만으로 앞다퉈 ‘베를린 대이동’을 감행한다. ‘해변의 모래보다도 많은 숙소’, ‘수도의 집값이 다른 지역보다 싼 유일한 예’로 알려질 만큼 싼 집값이 가장 큰 메리트. 통일 뒤 버려진 집들은 아티스트들의 주거지이자 전시 공간, 클럽, 혹은 트렌디한 숍으로 탈바꿈했다. 여기에 베를린을 매혹적이게 하는 궁극의 요소, 바로 상업화된 소호나 마레가 줄 수 없는 특유의 정취가 양념처럼 첨가된다. 베를린에서 <본 슈프리머시>를 찍은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은 “동시대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번잡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신선한 도시”다. 누구나 ‘속성’으로 시민이 된다는 까다롭지 않은 도시. 이곳을 여행하면 빼먹지 말고 잊었던 자유를 챙겨 와라. 혹시 빈티지 숍에서 맷 데이먼을 만나도 부산 떨 일 없다. 그 역시 당신처럼 베를린의 매력에 흠뻑 빠진 이들 중 하나일 뿐이니까.

기사등록 : 2008-05-07 오후 10: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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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의 거리 ④ 사라예보 ~ ‘악마의 씨’ 사라의 비밀
〈그라비바차〉의 끔찍한 공간에서 젊음의 열기가…
한겨레
» 빨간 지붕과 돌바닥 그리고 이슬람 사원이 사라예보를 완성한다. 이만큼 자유분방한 도시는 없어 보였다. 사진 이화정.

“여자 혼자 거길 간다고?” 동유럽 여행 중, 폴란드의 다음 코스로 보스니아의 서울 사라예보를 간다고 하자, 폴란드 여행자 인포메이션센터의 도우미는 펄쩍 뛰었다. 그의 말로 사라예보는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도시, 그런 곳을 여자 혼자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왜 하필 사라예보냐?”는 그의 질책에 뚜렷한 대답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서둘러 그곳을 나서야 했다. 그럼에도 난 사라예보로 향했다. 보스니아내전이 끝난 지가 언젠데. ‘에이 설마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물론 그의 ‘과잉반응’도 일리가 있다. 불과 십수 년 전, 이곳은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세르비아계가 민족과 종교를 사이에 두고 내전을 일으켰던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이들 중 여럿은 ‘산동네엔 여전히 지뢰가 널렸으니 함부로 가지 말라’고 귀띔해 주었고, 번화가를 조금 벗어나자 건물 곳곳에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총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도 참 잘 왔다 싶었다. 동유럽을 실감케 하는 빨간지붕과 울퉁불퉁한 돌바닥, 이국적 풍경을 완성하는 이슬람 사원이 들어선 구시가지의 모습만으로도 사라예보는 매력적이었다. 차도르를 벗어던진 도심의 거리도 평온했다. 세련된 건물은 없었지만 낡은 아파트 곳곳에 바쁘고 활기찬 일상이 들어차 있었다. 젊은 남녀들은 스트리트 패션 화보에 실릴 정도로 센스 있는 옷차림을 했으며, 밤이 되자 모두들 클럽과 펍으로 몰려 가 젊음의 열기를 발산하기 바빴다. 단언컨대, 내가 여행한 동유럽 어느 나라도 사라예보만큼 자유분방한 곳은 없어 보였다.

 

정작 사라예보의 ‘지금’을 알게 된 건 그곳을 떠나고 나서부터다. 여행 뒤, 나는 사라예보 출신 여성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가 그린 사라예보, <그라비바차>를 통해 또 한차례 사라예보와 만날 수 있었다. 딸 사라의 수학여행 경비를 마련하려 웨이트리스로 취직해 돈을 버는 엄마 에스마. 에스마는 사라가 세르비아군에게 강간당해 태어난 ‘악마의 씨’라는 사실을 숨긴 채 딸을 키워 왔다. 내전 중, ‘인종청소’라는 명분 아래 세르비아군은 어린 소녀부터 부녀자 가릴 것 없이 이슬람 여성들을 강간했고, 또 낙태를 못하게 군 수용소에 가둬두었다 풀어주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열두 살 사라가 사춘기를 보내는 평범한 동네 ‘그라비바차’는 사라예보에서도 가장 피해가 극심했던 지역, 곧 에스마에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딸을 아프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끔찍한 기억의 장소였다.

 

정권 탓에, 종교 때문에, 혹은 인종 때문에 지금도 많은 곳에서 전쟁과 탄압이 자행된다. 그러나 분명한 건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무모하기 그지없는 이 싸움에서 언제나 가장 큰 희생양은 약한 여자라는 사실이다. 피해자이면서도 오히려 사회의 수치로 치부되어 죄인처럼 살아가는 여성들. 애써 태연하려는 명랑한 웃음 속, 혹은 그래도 희망을 찾으려는 결연한 의지 속 ‘그녀들의’ 사라예보는 여전히 신음하고 있었다.

 

기사등록 : 2008-06-04 오후 10: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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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의 거리 ⑤ 이탈리아 코모 ~ 벨라지오! 벨라지오! 벨라지오!
조지 루니의 별장과 함께 <오션스 트웰브>에서 보여준 기막힌 풍경
한겨레
» 이탈리아 북부의 호수 도시 코모. 〈오션스 트웰브〉의 쟁쟁한 톱스타들이 등장했다. 이화정
장기여행 중, 밀라노의 한 숙소에서 손빨래를 하느라 진땀을 빼던 나는 결심했다. ‘그래 나한테도 휴식이 필요해!’ ‘여행이 곧 휴식 아니야?’라는 질문은 짧은 휴가 때나 통용되는 말이다. 말도 안 통하는 낯선 곳에서 숙소 구하랴, 먹을 만한 식당 찾으랴, 지리 익히랴 하루가 멀다고 실랑이를 하고 나면 ‘이 놈의 여행!’하는 욕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오는 것이다. 여행이 곧 생활이 되는 적색경보령을 해제시키려면 긴급처방이 필요하다. 바로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의 도시 코모로 무작정 출발하기 같은.
 

코모는 밀라노 중앙역에서 기차로 40분 거리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이다. 역사를 나서자마자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가 펼쳐진다. 코모의 진면목은 호수를 중심으로 자리잡은 고산도시 ‘벨라지오’에 도착하는 순간 확연히 드러난다. 번쩍거리는 밀라노 쇼핑센터들과 달리 소박한 정취를 간직한 중세풍 상점들.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대하노라면, 이곳이 과연 무뚝뚝하고 성질 급한 사람들로 유명한 이탈리아가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렇게 호의적인 시선을 받으며 골목 끝에 다다르면 코모 호수가 한눈에 펼쳐진다. 아! 그때의 감격이란. 돈 많은 이들이나 탄다는 요트가 즐비하지만, 이곳은 부호들이 즐겨 찾는 프랑스 남부 휴양지 칸에서의 위화감을 주지 않는다. 그냥 호수가 있고, 하늘이 있고, 요트가 있으며, 데이트하는 연인이 있고,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있을 뿐이다. 이탈리아가 전쟁에 패하자 무솔리니가 곧장 이곳을 찾았다고 하는데, 이 정도 평화라면 그럴 만도 했겠다.

 

조지 클루니를 비롯해 브래드 피트, 맷 데이먼, 앤디 가르시아 등 쟁쟁한 톱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인 영화 <오션스 트웰브>에 보면 이 기막힌 코모의 광경이 꽤 여러 차례 등장한다. 전편 ‘오션스 일레븐’의 멤버가 또다른 한탕을 꿈꾸며 활동무대를 유럽으로 옮긴 것. 이곳은 귀족 출신의 도둑 ‘폭스 나이트’(뱅상 카셀)의 별장이 있는 곳이다. 고 루치니 비스콘티 감독의 별장이었다는 빌라의 테라스, 클루니와 뱅상의 뒤로 코모 호수와 산이 한눈에 담긴다. 사실 코모는 클루니의 별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는 영화촬영 기간에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을 비롯해 프로듀서, 출연진들에게 별장을 내주었으며, 또 함께 출연한 케이시 애플렉의 갓 태어난 아기는 한 달이나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역시 풍광이 좋으니 인심도 후해지는 모양이다.

 

비록 내게 클루니가 별장을 내어주는 기적이 일어난다거나, 영화 속 뱅상처럼 멋진 오픈카를 타고 마을을 돌아볼 일은 없었지만 코모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데 부족하진 않았다. 호화빌라를 빼면 이탈리아의 뜨거운 태양도, 맑고 푸른 호수도, 세월을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낡은 돌담도 모두 공짜 아니던가. 돌아오는 길, 난 이탈리아어로 ‘아름답고 멋진 곳’이라는 뜻의 벨라지오라는 이 마을 이름을 ‘벨라지오! 벨라지오! 벨라지오! 벨라지오! 벨라지오!’로 바꿔버렸다. 여행이 다시 일상이 아닌 감동이 되는 순간이었다.

 

기사등록 : 2008-06-25 오후 08:23:06

 

이화정/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