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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영화와 인문(人紋) ~ 김영민(한겨레 연재)

by Wood-Stock 2009. 8. 8.

① 이창동 <밀양>(2007) : 용서의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신애의 절망…그 상처 빼닮은 살인자의 딸

 

 

1. 밀양(密陽)을 굳이 ‘빽빽한 빛’으로 풀었습니다. 용서라는 주제의식 속에 영화를 새길 때, 신애가 살인자의 딸의 손에 머리카락을 맡기는 그 짧은 순간 속에 용서의 빛이 ‘빽빽하게’ 응결했다고 여깁니다. 신을 매개(媒介)로 한(했기에) 신애-살인자 사이의 용서는 어긋나지만, 오히려 상처 받은 약자로서 그 딸을 매개로 그 용서의 빛은 다시 소생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요체는 ‘신⇒딸’로 옮아가는 매개의 변화에 있지요. 2. 다소 의도적으로 종찬의 시각을 생략했습니다. 종찬은 그 자체로 장편의 비평이 필요할 만큼 흥미로운 존재이고, 또 ‘밀양’이라는 빛의 내용을 용서로 제한시켰기 때문입니다. 3. 이창동은 기복이 없는 일급이고, <밀양>은 <인디아나 존스> 따위의 영화 30개와도 바꿀 수 없는 수작입니다. 그가 또 영화를 내면 무조건 보시기 바랍니다. 4. 다음 주에 다룰 영화는 이윤기의 <아주 특별한 손님>(2006)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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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애가 종교를 매개로 살인자를 용서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딸 손에 머리카락을 맡긴 순간 꺼져가던 용서의 빛은 되살아나 ‘밀양’을 이뤘다

 

약자는 강자를 용서할 수가 없다. 의지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다. 가령 김대중씨가 전두환 일당을 사면하는 것과 망월동의 고혼들이 용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일본을 용서하는 판국에 친일파를 용서하지 못하랴?’라고들 하지만, 친일파가 여태껏 사회적 강자의 자리를 점유할 수 있다는 한국 근현대사의 공공연한 비밀이 번연한 터에는 어림없는 소리다. 천 년이 지나도 용서할 수 없다. 아니, 도덕의 탈을 쓴 정치적 구호로는 오히려 상처의 실재를 밀어낼 뿐이니 용서란 오직 불가능하다. 그래서 리쾨르는 ‘망각일 뿐인 용서’를 경계하고, 카뮈는 용서를 위한 철저한 기억을 주문한다.

 

하지만 종종 그 불가능을 넘어서고픈 욕동이 솟구치기도 한다. 언젠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은 사람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신문은 한결같이 미담으로 각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낱 세속의 피해자이지 십자가상에 달려 용서를 말하는 예수[神]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은, 그리고 세속은 억압된 기억의 실재를 기어코 되불러내는 법이며, 되불려나온 상처는 이미 치료가 불가능해진다.

 

이 불가능한 용서를 욕심내는 일은 겉으로 보아 영웅적이다. 용서를 향한 그 도덕적 강박은 차마 초인적이기조차 한데, 관념 속에서 스스로를 영웅시·초인화하려는 이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은 곧 나르시시즘이다. 영화 <밀양>에서 아이를 잃은 신애(信愛!)가 상실과 자책의 고통과 대면하는 가운데 나르시시즘에 빠져가는 장면들은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의 나르시시즘은 외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모습을 취하며 깊어간다. 여기서 종교는 결정적인, 그리고 거의 유일한 계기를 제공한다. 물론 종교란 사랑과 더불어 대표적인 나르시시즘의 형식이다. 실존의 고독과 고통 속에서 종교에 의탁한 신애는 제 마음대로 신의 의지를 읽어내면서 그 의지를 자신의 원망(願望)과 동일시한다. 그러고는 그 용서의 무대,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야 하는 비극적이며 영웅적인 무대에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어느 화창한 날, 신애는 외려 참척(慘慽)의 절망을 씨앗 삼아 떳떳하게 가꾼 나르시시즘을 뽐내고자 꽃을 꺾어들었다. 예배를 마친 뒤에 용서의 ‘의도’를 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찾아 굳이 교도소로 간다. (아아, 신애씨, 대단해요!) 그러나 문제는, 신애를 용서의 강박으로 내몬 바로 그 신이 유독 신애만의 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구나 신을 믿고 있었고, 누구나 자신의 ‘의도’ 속에 신을 담아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애만의 영웅적 용서의 대상이어야만 할 감옥 속의 그 남자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저 홀로 ‘생각’하고 있다. 신애의 ‘의도’나 그 남자의 ‘생각’은 모두 신으로부터 발원했지만, 신애의 의도는 그 남자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 세속의 어긋남, 내 의도와 타인의 현실 사이의 어긋남과 부닥친 신애는 그만 실신하고 만다. 그러나 교도소 앞에서의 실신 장면은 실은 꿈에서 깨는 장면과 다를 바 없다. 그간 자신을 관념적으로 보호하고 변명하던 나르시시즘의 거울방[鏡箱]에서 이로써 떨쳐나오는 셈이다. 그리고 그 나르시시즘의 균열과 더불어 신애의 몸부림은 다시 시작된다. 애초에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건졌던 바로 그 나르시시즘의 환상은 이제 적대적 짝패로 둔갑한다. 아직은 현실 속으로 내려앉지 못한 신애, 아직은 용서를 세속과 시간과 타자의 문제로 이해하지 못한 신애는 여전히 신을 붙잡고 늘어진다. 영화는 신과 대결하는 신애의 모습을 매우 인간적으로 묘사한다. 나르시시즘 속의 신과 함께 웃었던 그가 다시 나르시시즘 속의 신과 더불어 울고 있는 것이다. 무릇 억압된 것은 증폭되는 법, 그사이 다시 돌아온 죄책감은 더 커져버렸고, 급기야 신애는 죄책감의 정점에서 자해에 이른다.

 

살인자의 중3 딸은 그 아버지에 의해 승합차 속에 끌려온 채로, 남편과의 사별 후 말없이 아버지를 떠나 밀양으로 온 신애와 처음으로 대면한다. 그리고 아득한 미래의 기억 속에서 상처는 상처를 본다.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종교에 귀의한 신애의 시야에, 그 딸은 도시의 한구석에서 또래의 남자애들에게 얻어맞고 있는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구타당하는 중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신애를 하염없이 쳐다본다. 그 하염없는 시선은 도시의 기원과 성격을 묻는 희생양의 것이다. 그러나 희생양의 슬픔은 의문이 아니라 동종의 상처 속에서만 깊게 다가선다. 신애의 궁극적인 만남이 교도소의 살인자가 아니라 미장원의 딸과 이루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자해한 후 병원에서 퇴원한 신애가 들른 미장원에는 소년원을 갓 출옥한 그 딸이 “학교를 때리(려)치운 채” 미용사로 일하고 있었다. 딸은 신애의 머리카락을 반쯤, 그것도 왼손으로, 깎아줄 수 있었다. 머리를 깎다 만 신애가 미장원을 뛰쳐나왔다는 사실은 내겐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더 중요한 사실은, 피해자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가해자의 딸손에 맡긴 그 짧은 순간 속의 ‘빽빽한 빛’[密陽]이기 때문이다.

 

신애는 자신에게 용서의 힘을 준 바로 그 신에 의해 ‘명시적으로’ 용서를 도난당했다. 그러나 신, 혹은 나르시시즘을 매개로 한 살인자와 신애의 용서 게임은 결국 현실에 이르지 못한다. 그 현실은 살인자의 딸이 겪는 세속의 상처와 더불어 되살아난다. 신애는 왼손의 그녀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반만 맡김으로써 ‘묵시적으로’ 용서를 되찾는다.

 

내 집에서 나오면 곧 ‘송강호 거리’라고 쓰인 간판이 전봇대 높이 걸려 있고, 잠시 걸어 오르면 종찬이 일하던 그 카센터가 여전히 영업 중이다. 종찬은 극히 흥미로운 캐릭터이고, 신애 역에 지지 않는 주인공이다. 종찬은 <오아시스>(2002)의 종두(설경구)와 더불어 한국 현대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남성 연기의 풍경을 이룬다. 종찬이 다만 자신의 세속적 욕망에 응해서 신애를 선택적으로 주목했고, 일반자(一般者) 중의 한 매력적인 개체를 제 나름대로 소유하려는 것인지, 혹은 신애와의 만남 자체로 그 자신의 존재와 삶의 양식이 뒤바뀐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용서의 빛’에서 바라본 종찬의 역할은 의외로 미미하고, 그가 신애에게 바치는 충실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② 이윤기 〈아주 특별한 손님〉(2006): 타인의 삶 ~ 너 되어살아본 나 그 삶의 무늬들

 

 

1.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2000) 속에서 꼬마 양양이 사람들의 뒤통수 사진을 찍어대는 모습을 기억하시지요? 나는 지하도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앞사람의 뒷모습을 볼라치면 ‘걸어 올라가는 내 뒷모습’을 단 한 차례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문득 생각이 머뭅니다. 내 동선과 그 변화를 통째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온전히 타인의 몫인 셈이지요. 일부의 정신분석학자들이 자아는 자신의 진실을 오인하거나 무시하게끔 구조화되어 있다는 지적을 할 정도니까요. 아무튼 이 타인의 몫을 내 것으로 전유하는 방식과 노력 속에 인문학적 성숙의 일단이 있습니다. 2. 십우도(十牛圖)는 12세기 중국 선종에서 전래하는 수행도(修行圖)로서 견성(見性)의 과정을 소를 찾아 나서는 열 단계에 빗대 해설한 것입니다. 물론 내가 타인 속에서 발견되듯이, 수행자는 소와 다르지 않지요. 3. 물론 이윤기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지상의 그 누구가 대체 ‘충분’할까요?) 그러나 <아주 특별한 손님>을 만들 수 있는 그는 아주 ‘필요’한 감독입니다. 4. 다음주에는 봉준호의 <괴물>(2006)을 만나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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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흔(痕)’은 흔히 흉터라고 새기지만 그것은 ‘발뒤꿈치’라는 뜻을 아우르고 있다. 흉터라는 게 제자리가 있을 리 없건만 각별히 발뒤꿈치의 흉터는 흉터의 원형을 가리키는 것일까? 신화 속에는 종종 발을 저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는 ‘멀리 돌아다녀 본 사람’으로서 일종의 현자를 상징한다. 물론 흔(痕)이 곧 현(賢)일 수 없지만 현은 늘 흔을 숨기고 있다. 그 현자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서정주) 누님이 아니라 이제는 돌아와 스스로 거울이 된 누님인 셈이다. ‘흔’적 없이 내달리는 정보혁명의 소비사회적 시류에는 어울리지 않는 객담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지혜를 ‘세상(타인) 속을 돌아/다녀오기’와 결부시키는 오랜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근년 타계한 미국의 철학자 로티(R. Rorty)도 인간의 실천적·도덕적 지혜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멀리 돌아다님”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한 바 있다. 물론 사상사적으로 보아 이런 식의 메타포는 헤겔에게 그 특허권이 돌아간다. 독일의 사회학자 지멜(G. Simmel)도 인류의 문화적 성숙 과정을 두고 ‘영혼이 여러 객체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세상 속을 돌아/다녀오기’로 표상한 바 있다. 이른바 ‘십우/심우도’(十牛/尋牛圖)의 풍경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듯이, 동양의 정신문화적 전통 속에서도 지혜와 ‘돌아/다녀오기’는 한통속으로 어우러져 있다.

 

이윤기의 <아주 특별한 손님>(2006)은 굳이 ‘손님’에 대한 이야기일 필요가 없다. 여기에 손님이 있다면 그 손님은 타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에둘러 돌아다녀 온’ 또다른 자기를 가리킨다. 일부 평자들이 정리해 놓은 것처럼, <여자, 정혜>(2004)에서 <러브토크>(2005)를 통해 이어지는 주제는 “정박되어 있던 주인공이 지리적 이동 내지는 이탈의 경험을 통해서 다시 자아를 찾는 과정이 형성된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극히 인문학적인 테마로서 ‘사람의 무늬’(人紋)를 탐색하고 궁리하는 자라면 언제든지 다시 부닥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 권경인은 ‘먼 길’(<변명은 슬프다>, 1998)에서 “온갖 길 다 섞으며 스스로 길에서 놓여나는 바람”을 말하는데, 이윤기의 영화도 손님이 된 자기, 혹은 그런 바람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보경은, ‘명은’이라는 이름만을 빌려 생전 가본 적이 없는 타지에 다녀온다. 그 타지에서 보경은 ‘명은’의 역할을 하면서 타인의 삶을 엿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지점은 ‘명은’이라는 이름 때문에 일시적이나마 새롭게 알게 된 ‘가족이 된 타인’(혹은 타인인 가족)이 아니다. 그가 ‘명은’의 노릇을 하면서 엿보게 된 타인은 오히려 자기 자신, 그 노릇이 바뀌면서 낯설게 된(소외된) 채 드러난 자기 자신이다. 그런 뜻에서, ‘아주 특별한 손님’이란 이름 바꾸기를 통해 다른 역할(노릇)에 노출된 채 성찰적 경험을 겪으며 자기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낯선 자아인 것이다.

 

‘명은’이라는 이름과 역할을 통해 타지에서 타인을 엿본 뒤에 ‘되돌아온’ 보경은 첫새벽에 서울에 닿는다. 그리고는 그간 불화했던 엄마에게 전화를 넣어 엄마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명은’이라는 타인을 거쳐 되돌아온 보경이 낯설다는 것을 이미 엄마도 눈치챈 것일까?

 

 

‘아주 특별한 손님’은 타인이라기보다 보경이 명은을 ‘연기’하며 재발견한 낯선 자아다.

이 발견을 되돌아온 자신의 생활 속에서 주체화해낼 수 있을까는 또다른 숙제로 남겨졌다.

 

보경은 잠시 ‘명은’이라는 새 이름을 얻어 노릇을 바꾼다. 실은 세속 속에서의 성숙이란 노릇(입장) 바꾸기와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많은 인문학자들이 번다한 이름 아래 제시한 이론들도 이 ‘노릇(입장) 바꾸기’의 가능성과 조건 따위를 묻는 것으로 귀결한다. 영화 속의 보경도 노릇을 바꿔 살아보는 짧은 체험을 통해 낯설게 된 자아를 엿보고, (영화 속에서는 그리 선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그 낯선 자아를 지렛대 삼아 새로운 자아의 소식을 전하려고 한다. 엄마를 당황하게 만든 새벽의 전화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글의 첫머리에 해설한 인문학적 성숙과 지혜의 문제로 다시 돌아와 보면, 논의는 이미 새로운 문제에 봉착해 있다. 약술하자면 그것은, 과연 ‘노릇을 바꾸면 버릇도 바뀌는가’라는 것이다. 이 감독은 어느 인터뷰 중에 “모든 배우들이 기회가 없어서 발견을 못하는 자기의 부분들이 있다”고 했듯이 보경도 노릇 바꾸기의 기회를 통해 자기의 다른 부분을 발견했지만, 이 발견을 자신의 생활 속에 주체화해낼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노릇(제도)과 버릇(생활) 사이의 틈이 생생하게 부각되어야 한다. 이 영화를 기억하는 자라면 무엇보다도 노릇과 버릇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낯선 자아를 ‘아주 특별한 손님’으로 공대해야 할 것이다.

 

<아주 특별한 손님>이 ‘돌아다녀봄’의 상태를 완료하지 못한 채 자기발견과 주체화의 조짐을 내비치면서 막을 내린다면, 가령 같은 해에 개봉한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은 바로 그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조를 보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옛 동독의 비밀경찰 비즐러는 체제의 하수인으로 충실하게 살아왔고, 그의 자아는 그 충실성을 중심으로 온전하게 통합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반체제 인사이자 최고의 극작가인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을 도청하는 임무를 떠맡으면서 ‘타인의 삶’을 속깊이 엿보게 되는데,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는 바로 그 복된(!) 죄 때문에 그의 자아는 서서히 균열한다.

 

드라이만을 체포할 빌미를 건지려던 그는 오히려 그들의 삶을 통해 인간적인 감명을 받은 나머지 직무유기를 하면서까지 그들을 도와줄 정도로 돌이킬 수 없이 바뀌어 가는 것이다. 두 영화는 타인의 삶을 속깊이 거치면서 변화해가는 자아의 행로를 다룬다는 점에서 일치하며, 자아의 문제 못지않게 타인의 문제를 묵직하게 다룬다는 점에서도 비교할 만하다.

<아주 특별한 손님>은 자아는 종종 타인을 통해 바뀐다는 소식, 거꾸로 나는 영영 스스로 바뀔 수 없다는 상식을 다시 일깨운다. 타인은 템포다. 너무 빨리 다가서는 타자는 귀신이거나 괴수이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타자는 메시아가 된다. 그것이 이윤기가 주인공의 내적 시간이 흐르는 템포에 그처럼 정세(精細)하게 뜸을 들이는 이유다.

 

 

 

③ 봉준호 <괴물>(2006): 진리는 어떻게 돌아오는가

우리의 진리는 왜 우리를아프게 하는가

 

 

1. 다가오는 타인은 그의 템포와 리듬에 의해 체감됩니다. ‘그 사람, 참 성격이 좋아!’라거나, ‘그 새끼, 정말 지랄 같네!’랄 때, 그 체감의 형식은 우선 그 사람의 템포와 그 사람의 리듬인 것이지요. 자본주의나 근대화를 ‘속도’의 문제로 환원시켜 탐색하는 사회학자들이 더러 있다는 점을 기억하시면 좋을 겝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관객을 압도하는 방식이 대체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괴물>의 괴물도 그 나름의 괴이한 템포와 리듬에 의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너무 빠르게 다가오는 타인이 귀신이거나 괴수이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타자는 메시아가 된다고 할 때, 우리가 이 영화를 대하는 가장 훌륭한 방식은 그 괴물을 메시아적 상상 속에서 다시 읽는 것입니다. 2. 계면쩍은 부탁이지만, 제 글도 그렇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제 글의 템포와 리듬이 다소 이상하더라도 그것을 괴물로 만들지 혹은 메시아로 영접할지는 오로지 독자 여러분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3. 다음에는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2006)을 논의해 보겠습니다.

 

봉준호의 ‘괴물’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타자가 되어 돌아온 진리다. 인간의 작용이 부작용을 낳고 은폐된 부작용의 역사가 아프고 낯선 진리로 돌아올 때까지 ‘무지일 뿐인 평화’와 ‘망각일 뿐인 안심’은 더 달콤하다

 

인문(人文)은 인문(人紋)인데, 말 그대로 ‘사람의 무늬’를 뜻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를 살피고 헤아리는 공부인 셈이고, 마찬가지로 인문학의 진리란 인간의 무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설렁설렁 말하자면, 인간의 무늬 속에 진리의 조건을 두게 되면서 철학적 근대가 열린다. 그런데 인문학적 진리의 조건을 이루는 인간의 무늬는 조개껍질처럼 단순한 게 아니라 겹/층을 이루고 있다. 겉무늬가 있는가 하면 속무늬도 있는 것이다. ‘무늬만…’이라는 시쳇말은 무늬의 뜻과 가치를 깔보지만, 실은 ‘무늬(현상의 패턴) 속에 진리가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편 사상가들은 늦봄의 때죽나무처럼 많다.

 

그 인문이 겹과 층을 이루고 안팎이 서로를 알아볼 수 없도록 나뉘면서 인간은 인간의 진리를 오히려 낯설어한다. 인간의 진리와 인간은 돌이킬 수 없이 불화하거나 아예 서로를 알아볼 수 없게끔 다르게 변해가는 것이다. 마치 서로의 얼굴조차 식별할 수 없게 된 이산가족처럼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어디에선가 낳아놓은 자신의 진리를 영영 알아볼 수 없도록 소외되기도 하는 법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옛말이 있지만, (조금 서둘러 요지를 말하자면) 실은 모든 고귀한 진리들은 필연코 우리들의 발등을 찍는 법이다. 우리가 꽃과 나비의 관계처럼 진리와 곱게 어우러져 살 수 있다면 왜 이곳이 세속이겠는가? ‘진리가 왜 아프거나 괴상한가?’라고들 불평하고 싶겠지만, 그 외상(外傷)은, 이윽고 타자가 되어 돌아오는 진리라는 특이점이 인간의 세계 속으로 재진입하는 비용으로서 실은 극히 당연하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식습관이 위암 발병의 원인이라는 보고는 무수히 많다. 식습관은 개인의 생활습관, 나아가 그의 삶의 양식과도 관련되며, 결국은 (‘장수촌’이라는 곳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 습관과 양식을 이모저모로 규정하는 당대의 사회체계나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Der Mann ist was er ißt), (포이어바흐)이라고도 하지만, 식습관, 생활습관, 그리고 삶의 양식 등속은 모두 인간의 무늬[人紋]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무수히 많은 생활의 구성요소들이 한 인간의 무늬를 조형하는 가운데에도 그 구성요소들의 함의가 늘 분명한 것이 아니며, 그 반작용/부작용의 내용이 단숨에 알려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내 습관들과 그 은폐된 결과들은 나로부터, 내 의도나 기대로부터 점점,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멀어져 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화창한 봄날, 식생활을 통해 형성된 내 습관의 진리는, 혹은 내 습관이 은폐했던 진리는 어느 무심한 의사의 입을 통해 ‘위암’이라는 진단 속에서 아프고 괴상하게 찾아오는 것이다.

 

일찍이 철학자 니체는 ‘진리는 이제 아름다운 처녀가 아니라 이빨이 다 빠져버린 노파가 되었다’는 흥미로운 메타포를 사용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포이어바흐는 “우리 시대의 진리는 부도덕 그 자체”라고 일갈한다. 샐리스(John Sallis)도 “만약 진리가 괴이한 모든 것, 불구가 된 모든 것, 혹은 괴이함 그 자체였다면 어떨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진리에 대한 이런 메타포나 질문의 형식은 얼핏 보아 상식에 어긋나는 듯이 여겨지고 심지어 가장 진리에서 먼 것이라는 직감을 키우기조차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얼버무리듯 통속의 상식과 야합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삶과 세상에 아프도록 솔직하고 정세(精細)하게 접근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진리의 성격과 그 행로를 우리의 욕심대로 규정하거나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아집을 통으로 버릴 수 있다면?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우리의 진리들이 타인처럼 낯설어지고 급기야 괴물처럼 기괴해지는 것도 차츰차츰 용납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봉준호의 <괴물>을 이런 식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 이 영화가 끌어모은 1천만의 관객이 대체 이 영화 속에서 본 것이 무엇인지는 영영 알 수가 없을 테다. 그들이 소년소녀처럼 손을 잡고 극장에 들어가 <괴물>을 통해 본 것이 무엇이라고 해도 최소한 그것은 ‘아프고 낯설고 기괴한 진리’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고 낯설고 괴이한 진리’가 아닌 것의 좋은 사례로는 <킹콩> 시리즈물이나 제이 러셀의 <워터호스>(2007) 따위일 것이다. “네스호의 괴물 또는 킹콩 영화에 대한 혐오스럽고도 익살스러운 열광은 괴물처럼 총체화된 국가에 대한 집단적 투영”(아도르노)이라는 좌파적 평가는 국가 시스템 그 자체 속에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의 총체를 읽어내려는 ‘명랑한 사회학도’인 진보신당 당원 봉준호의 시각과 이어질 듯 보인다. 영화 속의 킹콩이나 워터호스(waterhorse)는 낭만적으로 채색되어 인간화의 길을 걷게 되고, 심지어 과도하게 사회화된 어른 남자들이 아닌 매개(<킹콩>의 ‘여인’이나 <워터호스>의 ‘아이’)와 진정한 소통의 길을 튼다. 이로써 이 괴수들은 인간의 체계 속에 내재화되면서 그 숭고한 공포의 예각이 꺾이고 만다. 킹콩은 여인을 사랑하고, 워터호스는 아이와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 (파시즘이 그 주된 시대적 배경이긴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런 식으로 야만성을 자신 안에 끌어들여 통합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현재의 통일적이고 적대적인 상태를 특징짓는 일은 없다”고 성토하는데, 아도르노와 봉준호의 괴물이 킹콩이나 워터호스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다소 무리하게나마 간략히 정리해 보자. 킹콩이나 워터호스의 존재는 ‘여인’이나 ‘아이’의 매개를 거쳐 비정치적 ‘동일자’로 정화된다. 그러나 봉준호의 괴물은 그 누구와도 교감을 나눌 수 없는 ‘타자’로 남는다. 혹은 여러 평자들의 지적처럼 그 태생이 과도한 정치적 알레고리에 묶여 있는 탓에 워낙 킹콩이나 워터호스 같은 낭만적 변신을 기하기가 어렵다.

 

그 경이로운 사이즈에도 불구하고 킹콩이나 워터호스는 여전히 자연적인 존재로서 ‘작용-반작용’의 형식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지만, 봉준호의 괴물은 ‘포름알데히드’가 시사하듯 부자연스러운 존재이며 ‘작용-부작용’의 형식으로 인간세계에 돌입한다.

 

인간은 ‘작용-반작용’이라는 정상적인 결과 속에서만 자신의 진리를 확인하려는 선입견의 볼모다. 나의 작용이 ‘부작용’을 낳고, 은폐된 부작용의 역사가 내 작용의 비밀을 증거하는 ‘아프고 낯설고 괴이한 진리’를 내 눈앞에 꺼내놓을 때까지 ‘무지일 뿐인 평화’와 ‘망각일 뿐인 안심’은 더욱 달콤하다. “범죄 행위의 폐제(廢除)된 외상적 이야기가 그 행위 이후에 나타남을 잊지 말아야 한다”(지젝)기에, 나는 오늘도 내가 살고 있는 밀양강에서 괴물이 솟아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④ 김태용<가족의 탄생>(2006) : 가족, 혹은 어긋남의 자리 ~ ‘가족이라는 운명’은 없다

 

 

1. “시나리오를 쓰는데 자꾸만 어떤 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와 관계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지더라구요. 예를 들면 그 딸의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일까. 그 남자친구의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 이런 식으로 말이죠.”(김태용) 바로 이런 게 세속(世俗)의 형식이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의 그물처럼, 그 누구도 감히 벼리가 될 수 없는 거대한 그물망의 얽힘이 세속입니다. 자신만을 주인공으로 삼아 무대 위에 올리는 짓이 환상이라면, 세속은 그 환상들이 타인의 환상들과 접붙어 이루어가는 환멸들의 관계와 구조입니다. 마침내 ‘주인공’ 따위가 없어지는 구조, 그것이 세속인데, 그런 점에서 <가족의 탄생>은 제법 세속적입니다.

2. 다음 주에는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2005)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물은 0도나 100도에 이르면 숨어 있던 임계점을 보인다. 얼거나 비등하면서 ‘물’이라는 임시적이며 유동적인 체계가 허물어지고 고체나 기체로 변하는 것이다. 세상살이를 체계의 관점에서 살필 때에는 이처럼 임계점을 규정해보는 일이 중요하고 흥미롭다. 일부의 체계이론가들은 임계점을 잣대로 삼아 ‘열린 체계’와 ‘닫힌 체계’를 구별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닫힌 체계란 임계점에 이르지 않고는 바깥과 상시적인 접촉과 융통이 불가능한 체계를 가리킨다.

 

건강한 체계는 외부 환경과의 일상적 소통과 교환을 나누는 여러 채널을 확보하거나 재생산하는 법이다. 내부의 체증이나 외부의 침탈이 있어야만 비로소 열리는 체계는 결국 그 개방 자체와 함께 불행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가이아나 인민사원사건이나 오대양 사건 등 집단자살 소동을 일으킨 여러 성격의 폐쇄적인 조직들이 좋은 예증이다. 남녀가 만나 이루는 가족이라는 제도도 하나의 체계이긴 마찬가지인데, 이 경우 사랑과 개방이 반비례한다는 통속적인 역설이 가족의 불행한 비밀이다. 가령 질투는 연애(사랑)에 근거한 관계의 체계적 배타성의 징후인 셈이고 이 배타성은 가족제도 속으로 고스란히 이전된다. 사랑이 달콤할수록 그 배타성(질투)은 깊어지곤 하지만, 마치 ‘호의가 지옥으로 가는 길’(마르크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어렵듯이 바로 그 달콤한 배타성의 부메랑은 코앞에 닥쳐도 알 수가 없는 법이다.

 

사랑과 혈연으로 무장한 가족의 배타적 동일성이 주는 이익은 단기적이며 우연적이고 경험적(일회적)이다. 그 모든 달콤한 것은 속히 썩는 법! 그러나 사랑은 그 완악한 통속주의 속에서 배타성이 주는 달콤한 이익을 오인한다. (정신분석의 대중적 파급 이후, 사랑은 오직 오인 속에서만 성립한다는 주장들은 결코 낯설지 않다.) 그래서 가족과 사랑은 자연스러운 게 되고, 마냥 영속되리라고 전제하며, 운명적인 힘에 의해 조형된 것이라고 확신하고 만다.

 

그러나 가족은 자연적인 것도, 더구나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이라는 타이틀처럼, 가족이라는 제도는 역사 속에서 그 기원을 어낼 수 있을 정도로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탄생은 늘 속되고 잡되다. 그것은 자의적인 제도에 의지하면서 지속되고, 아무 운명도 아닌 우연들에 의해 묶이고 풀릴 뿐이다. 물이 0도에서 얼면서 그 본질의 한 대목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처럼, 가족은 그 가족이라는 제도의 0도를 보이는 순간에야 그 가족의 본질을 슬핏 드러낸다.

 

 

제도의 0도 속에서 발설되는 가족의 본질은 “너 나한테 왜 그래?/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와 같은 문장으로 거듭 발설된다. 이 문장은 세속의 어긋남, 혹은 세속이라는 어긋남을 가장 통속적으로 드러내는 신호와도 같다. ‘결코 두 사람은 똑같이 사랑할 수 없다’(플로베르)는 사정은 쉽게 잊혀지고 ‘사랑을 준 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롤랑 바르트)는 투정만 늘어가는 것, 그것이 세속의 애정이자 세속의 가족이다. 낯설게 들리겠지만, 오인하므로 관계는 유지되고, 되레 어긋나므로 새로운 관계는 생성되는 것이다.

 

가족은 역사 속에서 ‘탄생’한 제도일 뿐 자연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누이와 동생, 남자와 여자, 엄마와 딸은 서로 묻는다. “너 나한테 왜 그래?”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 …영화는 그 지목하는 손가락들이 어긋나는 자리로서의 가족을 이야기한다

 

누이(미라)와 동생(형철)은 오랜 격조 끝에 재회하지만 그 재회의 반가움은 짧고 위태롭다. 생활양식을 나누어 갖지 못한 반가움은 ‘소망의 자의적 충족’(프로이트)이라는 뜻에서 대체로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기억에 기대는 반가움은 그 기억 속의 관계를 냉철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다. 특히 관계는 노릇이라기보다 오히려 버릇인데, 노릇에 의지하는 반가움은 결국 한갓 풍경으로 끝나버리고 그 풍경의 이면을 이드거니 견뎌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그 어긋남에서 어김없이 다시 묻는다. “너 나한테 왜 그래?/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 말하자면 누이 노릇, 동생 노릇, 부모 노릇, 애인 노릇 등은 관계의 실상이 아니라 껍질에 가깝다.

 

반가움의 풍경이 끝나기가 무섭게 갖은 버릇들은 제 영토와 봉록을 고집한다. 마치 시체 속을 누비는 하아얀 구더기처럼, 그 버릇들은 스스로를 ‘하아얀 것’으로 표상한 채 언죽번죽 설쳐대면서 관계와 노릇의 환상에 송송 구멍을 낸다. 김태용은 “창작자의 딜레마 중 하나가 의도에 매몰되는 것인데,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효과가 중요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한 바 있지만, 그것은 비단 창작자만의 딜레마가 아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어긋나는데, 그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의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경은 엄마(매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엄만 도대체 왜 그러는데?/ 넌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데?”라는 치명적인 대치는 사사건건 계속된다. 그러나 이해는 공짜로 찾아오지 않는다. ‘이해는 은총’(마르틴 부버)이라는 주장에 이르면 다소 수상쩍어 보이겠지만, 여러 학자들의 지적처럼 이해를 단지 인식론적 수확으로 여기는 태도는 시대착오적이다. 이해는 제 나름의 비용을 치른 후에야 의도와 어긋나면서 뒤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엄마가 죽은 후에 그 유품을 뒤적거리는 선경에게 이해의 빛은 느닷없이 스며든다.

 

급기야 세월의 비용을 치른 선경은 ‘엄마는 구질구질한 게 아니라 정이 많으셨던 거야’라고 엄마를 변명하는 데 이른다. 경석은 애인인 채현의 생활양식이나 버릇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해주지 않고 주변에 선의를 분산시키는 채현이 ‘헤픈 여자’로만 보인다. 자신이 채현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의심은 깊어간다. 가족은 가령 자본주의나 아동기처럼 역사의 곡절 속에서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며 영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발가벗은 일상 속의 그것은 한갓 허약한 제도인 탓에, 국가나 기업은 권력과 화폐로 지원하고, 종교나 도덕은 이데올로기와 환상으로 보위한다.

 

할리우드 영화들이 강박적으로 증명하려 하듯이 남김없이 가족주의로 귀결하는 가족서사들은 거꾸로 가족이라는 제도의 허약함을 웅변한다.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은 전편을 흐르는 그 따뜻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제도적 불모성을 예리하게 묘파한다. 그것은 권력과 화폐와 도덕과 이데올로기의 울타리 속에 지탱되는 가족도 아니며, 가족애로 일심동체가 되는 가족도 아니다. 그것은, ‘넌 나한테 왜 그러냐?’고, ‘너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네가 변했다’고 지목하는 그 손가락들이 어긋나는 자리로서의 가족을 말한다.

 

 

⑤ 김지운<달콤한 인생>(2006): ‘진짜 이유가 뭐죠?’ ~ 마음이 하는 일에 이유가 있을까

 

 

 

1. 내가 가까운 학생들을 훈련시킬 때에 지키며 되새기도록 권하는 지침 중의 하나는 ‘네 마음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지침은 ‘고백과 소문은 반칙’이라거나 ‘생각은 공부가 아니’라는 등의 지침들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 지침에 견결하기만 해도 참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지요. 요체는 ‘탈심리주의적 태도’인데, 신뢰는 결코 심리의 바다 속에서 건져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의 보스와 선우의 경우처럼, 호감이 관계를 구원할 수 없는 곳, 바로 그곳이 우리의 세속입니다. 2. 다음은 윤종빈의 <용서받지 못한 자>(200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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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는 왜 보스를 배신했을까? 보스는 왜 선우를 죽이려 했을까? ‘진짜 이유’는 아무도 그 진짜 이유를 모른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이유란 영영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대상이며 인문의 촉수인 것. 보스와 선우의 죽음은 인과를 따져야 할 건달들이 이유를 따지고 헤아린 죄, 그것이 죄라면 죄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은 나뭇가지나 바람이 움직이는 것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그랬다면 그것은 ‘원인’을 캐고 제거하는 스릴러물로 낙착되고 말았을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 대사 중에서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라는 스승의 말 속에서, 문제는 원인이 아니라 이유이며 영화의 취지는 사실의 확정이 아니라 인문(人紋)의 탐색이라는 점을 짐작게 한다.

 

“그런 거 말고 … 진짜 이유가 뭐야?” 보스는 선우에게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캐묻는다. 단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조직에 충성했기에 아내에게 못하는 말조차 털어놓을 만큼 믿었고, 사랑에 무심한 듯했기에 자신의 애인마저 맡겼던 그가 흔들린 것이다. 보스는 과거의 선우를 일깨우며 다그친다. “너, 그런 놈이 아니잖아!” 물론 보스의 믿음은 원인-결과로 확인되는 부하의 객관적 충실도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 객관성을 비집고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부하의 주관성은 단지 배신의 시늉이 아니다. 말하자면, 보스는 그가 조직의 세계에서 ‘돌이킬 수 없이’(이것은 이 영화의 채택되지 못한 제목이기도 했다) 어긋난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직감했던 것이다.

 

 

사과의 맛을 본 아담이 돌이킬 수 없이 낙원에서 멀어진 것처럼, 소크라테스를 만난 플라톤이, 혹은 예수를 만난 바울이 돌이킬 수 없이 변해간 것처럼, 그 여자의 어떤 이미지를 접한 그는 이미 객관성(인과의 충실성) 속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조직의 단말기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보스의 과도한 반응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선우는 늘 자신의 소임을 오차 없이 수행하는 해결사로서 ‘체계의 노동’에 완벽했지만, 스쳐 지나가야만 했던 그 여자의 인상에 밟힌 그는 실없는 ‘정서의 노동’을 자임하며 보스의 체계와 치명적으로 대치한다.

 

“진짜 이유가 뭐죠?” 죽음의 문턱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선우는 총을 들고 보스와 마주 선다. 그리고 건달답지 않게 무엇보다도 이유를 궁금해한다. 자신을 죽여야 하는 원인이 아니라 이유, 그것도 ‘진짜 이유’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그는 7년 동안이나 보스를 위해 개처럼 일해 온 자신을 그처럼 쉽게 죽이려 했던 ‘이유’에 절박하게 매달린다. 그러나 조직이라는 체계 속에서 쓸모 있는 질문의 방식은 ‘이유’가 아니라 오직 ‘원인’일 뿐이다. 인과가 아니라 이유를 묻는 사이는 이미 명령-복종의 체계를 벗어난다. 이유는 인문(人紋)의 촉수이며, 그것은 조직적 체계가 부리는 인과의 그물망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 거 말고 … 진짜 이유가 뭐야?”라고 물었던 보스에게 그가 그 ‘진짜 이유’를 대지 못한 것처럼 “진짜 이유가 뭐죠?”라고 묻던 그에게 보스도 그 ‘진짜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선우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대답하지만 그것은 그가 추정한 원인-결과였지 보스가 요구한 ‘이유’가 아니었다.

 

보스와 선우는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치명적인 궁금증 속에서 불구적으로 대치한다. 그러나 어느 쪽도 결국 그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상대를 죽이려 들고 또 상대를 죽이고야 만다. 애매함은 더러 매혹적이고, 그 매혹은 더러 치명적이다. ‘이유 없는 반항’이자 ‘이유 없는 처벌’이라는 점에서 이 조폭영화는 실존적인 울림을 얻고, 원인과 결과라는 선형적(線形的) 조직이 수용할 수 없는 잉여의 부분 속에서 인문의 결마저 생긴다. 실은 이유라는 것은 영영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대상이며, 그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한 쉼없는 재서술의 과정이 곧 인문학의 내적 동력이기도 하다.

 

<달콤한 인생>의 한 측면은 ‘체계의 노동’과 ‘정서의 노동’이 상충하는 지점을 매우 섬세하게 드러낸다. 보스의 오른팔이었던 선우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처벌받는 것은, 체계의 노동만으로 자신을 증명해 왔던 그의 인생 속으로 달콤한 정서를 인입한 탓이다. “표정 속에 욕망이 드러나는 조직의 3인자 문석(김뢰하)은 시험받지 않지만 욕망에 초연해 보이는 선우만이 체계의 알리바이가 되어 줄 희생양으로 지목”(김현수)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서는 못 박듯이 서술될 수 있는 게 아니며, 더구나 조직은 정서의 노동을 체계적으로 배제함으로써만 자신의 체계를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자신의 애인을 감시하고 필요한 경우 처리하라는 보스의 명령은 엄밀히 ‘체계의 노동’이었다. 그렇기에 보스는 일견 연정에 초연한 듯한 그를 택했을 것이다. 그 역시 그것을 체계의 노동으로 이해하고 수행하지만, 무심결에 간취한 그 여인의 이미지는 예기치 않게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인생은, 참, 그런 식으로만 달콤한 것!)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고, 선우는 그의 보스와 분명한 이유 없이 대치한다. 그 와중에 그는 돌이킬 수 없이 보스의 체계와 멀어지면서 그 여인으로 인한 ‘정서의 노동’을 자임한다. 지멜이나 기든스(A. Giddens) 등의 사회학자들은 산업사회의 체계 지향적 남자들이 여자들의 공동체 지향적 정서 노동 속에서 휴식과 구원의 기운을 찾는다고들 지적하지만, 하필 그 여자가 보스의 애인이었으니 그 대가는 응당 치명적이었던 것.

 

사안을 더 근본적으로 살피자면, 보스와 그의 치명적인 대결은 인과를 따져야 할 건달들이 ‘이유’의 와류 속에 휘말린 죄로 소급된다. 한갓 건달들이 이유를 따지고 헤아린 죄? 이것이 죄라면 참으로 이상한 죄다. ‘이유’는 워낙 문사들의 화제(話題)이면서, 펜으로써 쉼 없이 재서술해야 할 대상이지, 칼과 총을 사용하는 이들이 다룰 수 있는 타깃이 못 된다. 펜으로써 원인을 헤아리는 짓이 대개 졸루하다면, 총칼로써 이유를 따지는 짓은 이처럼 치명적이다.

 

그러면 보스와 선우가 동시에 알고자 한 ‘진짜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진짜 이유가 뭐야?”라며 그를 죽이려 했고, “진짜 이유가 뭐죠?”라며 보스를 죽이려 했던 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속의 내레이션이 시사하듯, 보스의 여인을 두고 한순간 품은 ‘이루어질 수 없는 달콤한 꿈’이었을까? 그러나 화해할 수 없이 충돌하는 그 치명성은 그처럼 하나의 은폐된 이유로 수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너무나 사소한 것이기에 충돌은 금세 그 동력을 잃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외려 진짜 이유는 ‘아무도 그 진짜 이유를 모른다는 바로 그 사실’, 혹은 ‘아무도 진짜 이유를 진짜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둘 사이의 치명성은 바로 그 무지(에의 의지)에서 발원한다. 보스와 그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진짜 이유’로 상대방을 죽이는 게 아니다. 상대를 죽일 수 있는 힘은 오히려 ‘진짜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며, 그것을 강박적으로 찾으려는 애착 속에서 오히려 그 진짜 이유를 밀어낸다는 것이다.

 

 

 

⑥ 윤종빈 ‘용서받지 못한 자’(2005): 침묵 속에서 ‘나라’를 지키다

아파도 비명 참는 ‘우리들의 군대’

 

 

1. 옛날 얘기지만, 32개월의 내 군 생활에는 그 길이만큼 모욕적인 체험들이 많았지요. 주로 직업군인들과의 불화였습니다. 나 역시 10년 이상 ‘군대꿈’을 꾸면서 태정과 승영과 지훈의 증상을 강박적으로 반복하였지요. 하지만, 오익재·신백호·이호룡 등등,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인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곳도 군대였는데, 놀랍게도 이 선임병들은 태정도 승영도 지훈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침묵의 힘 속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2. 윤종빈의 사과문으로 국방부는 ‘용서’한다며 고소를 취하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만든 감독이 ‘용서받은 자’가 된 셈이지만, 엉뚱하게도 가해자들이 베푸는 값싼 용서는 가장 오래된 도착(倒錯)이지요. 3. 우리 옛 시조 중에 “입실(入室)을 못한 전에 승당(昇堂)을 어이 하리!”라는 구절이 있지요. 쉽게 말하면 조급하지 말고 차근차근 공부의 단계를 밟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초기증상’이라는 말은 입실이 성공적일 경우에 마치 승당이라도 한 듯 조급한 허영에 부푸는 짓을 가리킵니다. 소란스레 입실한 윤종빈 감독의 근기 있는 승당을 기대합니다. 4. 다음주의 영화는 홍상수의 <극장전>(200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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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일을 겪어내는 것’[經難]이 반드시 성숙을 보장하진 못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시쳇말이 한결같이 먹힌다면 지옥은 이윽고 도인이나 성자들로 득시글득시글할 테다. 다만 위기상황은 반응을 약빠르게 단순화해서 사람들의 유형이 쉽게 드러나게 만들기는 한다. ‘극적 인물’들이란 그런 식으로 과장된 위기에 유형적으로 적응해 간 생활태도(Lebensführung)를 분류한 것이다.

 

‘짬을 먹을 만큼 먹은’ 태정(하정우)은 이미 충분히 현실적이다. 그는 제대를 앞둔 병장이자 내무반장으로서 내무실의 살림과 정치에 실질적인 책임을 진다. 그는 군대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점을 현실적으로 수용하며 그 조직을 있는 그대로 건사하기 위한 ‘체계의 노동’을 적절하게 수행한다. 사욕을 부리는 고참이라도 후임들 사이에서는 굳이 그 체면을 세워주려고 하고, 간간이 상병을 불러내어 “밑의 새끼들 좆같이 굴면 너부터 죽는다고, 새꺄!”라면서 멋지게 주먹을 날린다. 형식적으로만 보자면 그는 조직을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필요한 유형의 인물이다. 모르긴 해도 태정은 전투 현장에 처하더라도 용감하고 책임감 있는 병사로 그려질 듯하다.

 

» 윤종빈 ‘용서받지 못한 자’(2005): 침묵 속에서 ‘나라’를 지키다

 

 

‘군대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승인하는 태정과 부정하는 승영, 승인도 부정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한 지훈. 군대라는 체제의 폭력 앞에서 누구도 떳떳할 수 없는 이들은 오늘도 ‘죽어도 말할 수 없는’ 침묵의 힘으로 나라를 지킨다승영(서장원)은 태정이 살아내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군대에서는 어쩔 수 없어”라는 태정에게, 승영은 “난 군대가 진짜 이해가 안돼”라고 짓치고 든다. 태정이 병장일 때 이등병으로 전입한 승영은 영리한 신참내기가 으레 그러듯이 내무실에 횡행하는 ‘전통적 지배’(막스 베버)의 비합리성을 까발리고 싶어한다. “내무실에서도 슬리퍼가 필요하면 직접 가져다 신으면 되지, 밑의 애들이 그걸 왜 갖다줘야 돼?” 그러나 승영은 자신의 비판이 태정이라는 친구-고참의 존재에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친다. 말년 병장인 태정은 승영에게도 고스란히 돌아갈 체계 속의 그 ‘어리석은 반복’을 에언한다. “너는 짬 먹으면 안 그럴 것 같애?” 하지만, 승영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초심자의 초기증상 속에서 오직 모르기 때문에 더 순수한 음성과 기백으로 항의한다. “나는 밑의 애들 들어오면 진짜 잘해줄 거야.”

 

승영의 밑으로 들어온 지훈(윤종빈)은 군대를 통과한 우리 모두가 여태 생생히 기억하는 그 유명한 ‘고문관’이다. 태정이 묵인한 현실이자 승영이 저항한 군대라는 현실 앞에서 지훈은 내내 정신을 못 차리며 고참들의 비웃음을 산다. 그에게 군대라는 공간은 묵인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다. 차라리 그곳은 완벽한 비현실이며, 그는 맹하게 정신이 빠져 있다. 사회에서는 “잘나갔다”고 스스로 변명하지만 지훈은 전화를 받는 단순한 노릇에도 영영 익숙해지지 않고, 네자리숫자의 전화번호 몇 개도 변변히 외지 못한다. 그의 사수인 태정은 그를 가르치다 못해 그의 귀를 비틀며 “이 외계인 새끼”라고 고함을 지르고 만다. 그러나 그 외계인이 발을 들여놓은 바로 그곳이 그에게는 오히려 영영 적응할 수 없는 외계였던 것이다.

 

고문관, 혹은 외계인인 지훈은 군화끈으로 목매달아 자살함으로써 군대라는 외계에서 영영 벗어난다. 피할 수 없이 다가온 현실을 승인도 부인도 할 수 없을 만치 무력했던 그는 영내에 발을 딛고 있지만 그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는 유령 같은 존재였고, 마치 떠나온 차안을 잊지 못하는 유령처럼 세상 밖으로 줄창 전화질을 해서 돌아오지 않는 그의 애인(수현)만을 찾는다.

 

그리고 그 짐은 지훈이라는 존재를 알리바이 삼아 자신의 저항을 합리화하려 했던 승영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지훈이 남긴 비극적 상처의 짐을 떠맡은 승영이 이미 제대한 태정을 찾아가는 길은 너무 당연한 수순이다. 바로 이 대목은, 군대의 부조리에 대한 승영의 저항이 워낙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내적 구조를 잘 보여준다. “나는 밑에 애들 들어오면 진짜 잘해줄 거야”라던 자신의 다짐이 지훈의 자살로 허물어지자 승영은 저항의 허약한 토대를 스스로 드러내며 태정을 찾아가 울면서 그의 위안을 구한다. “태정아, 괜찮다고 얘기해줘, 다 이해한다고 …” 그러니까, 얼핏 역설처럼 들리겠지만, 승영의 진실은 외려 태정에게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승영의 비판이 종종 태정과 같은 ‘군대 체질’을 향하지만, 그 비판은 곧 태정이라는 친구-고참의 존재에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훈의 자살을 통해 사후적으로 확인된다. 그 저항의 비밀은 태정이 승영의 우상이자 대타자(大他者)였다는 자가당착 속에 있는 것이다. (종교나 연애 등과 같은 사랑의 구조가 꼭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태정의 눈에 비친 승영은 그닥 남자답지 못한, 그리고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싯적의 친구일 뿐이다. “넌 내가 봤을 때, 어른이 먼저 돼야 돼, 새끼야!” 물론 휴가 나온 승영을 기피하려는 태정의 태도는 ‘남자-어른답지 못한 승영의 존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기억을 앓는’(프로이트) 증상은 비단 승영들만의 것이 아니라 태정들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제대군인 전체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멋지고 남자답게 군대 세계를 통과해 나온 태정에게도 군대는 “기억이 나지 않(아야 하)는” 사건들이다. 승영과 태정의 불화는 실은 모든 군인과 제대한 민간인 사이의 불화를 유형화한 것일 뿐이다. 군인이었던 민간인은 과거를 잊고 싶어하고, 민간인이었던 군인은 현재를 강박적으로 발설하고 싶어하는 것!

 

한편 승영의 집요한 접근을 제어하는 장치로서 태정의 애인이 등장하는 장면도 우연이 아니다. 군인과 창녀의 결합에 대한 갖은 역사적 사실들이 잘 보여주듯이, 군대나 공장이라는 남성적 체계의 각박한 노동과 그 상처를 잊거나 치유하는 가장 통속적인 방식은 여자의 ‘살’이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남자는 여자의 살을 먹거나 그 속에 파묻히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말미에 이르면 태정은 승영의 자살을 뒤로한 채 애인과의 중단된 섹스를 계속하고 대게를 먹는다. 결국, 승영은 지훈의 자살을 태정에게 말하지 못하(않)고, 태정은 승영의 자살을 자신의 애인(지혜)에게 말하지 못한(않는)다. 그리고, 그런 채로 우리들의 군대는 오늘도 그 침묵의 힘 속에서 ‘나라’를 지킨다.

 

 

홍상수의 <극장전>(2005) ~ 허영은 ‘그와 나’의 이기적 흔적이다

 

 

1. 동수는 영리하며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며 산망스럽습니다. 삿된 허영 속에서 그 누구에게서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그의 마지막 결심은 기껏 자신의 ‘생각’이지요. “이제 생각을 해야겠다!” 영화는 그렇게 끝을 맺고, (홍)상수도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수의 생각은 기껏 모방과 모방의 근친상간적 욕망에 닿아 있을 뿐이고, 그 욕망의 바닥에는 아무런 운명도 필연성도 없는 것이지요. “동수씨는 영화를 잘못 보셨네요”라는 영실의 실다운 지적은 바로 그 모방 욕망의 체계를 깨는 (홍)상수의 개입입니다. 그러나 (홍)상수의 개입이 이 허영의 주체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한 모습을 띠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겝니다. 2. 허영의 주체는 영화 속의 동수이기도 하지만, (홍)상수의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보는 바로 우리이기도 합니다. 3. 다음주에는 민병국의 <가능한 변화들>(2004)을 함께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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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의 명작 <라쇼몽>(羅生門, 1951)에는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진술들이 경합한다. 그것은 단지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문제만이 아니기에 눈을 뜬다고 코끼리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이 아니라 해석만 존재할 뿐”(니체)이라는 주장은 의미 있는 과장이지만, 워낙 사적 이해관심에 바탕한 진술들은 이런저런 해석의 욕심에 얽혀들기 마련이다. <라쇼몽>이 제시하는 문제의식 중의 한가지도 사건/사태에 접근하는 관찰자의 시각조차 이기적으로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눈을 감을 때 우리는 이기적이지만, 지나치게 눈을 부릅뜰 때 더욱 이기적이다.

 

<라쇼몽>과 무관하게 살펴보더라도, 해석과 이기심이 한데 엮이는 방식은 여럿인데 그중의 뚜렷한 한 가지가 ‘허영’이다. 허영이라는 말은 평이한 일상어이기도 하지만 몇몇 학자들이 이론적 주제어로 전용해서 분석한 바 있다. 특히 르네 지라르는 허영을 ‘모방(물듦)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숨긴 채 자신의 사이비 독창성을 고집하는 태도’라고 정리한다. 예를 들어 남한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놀라운 재주를 보이는 표절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며, 단 한 차례도 생산적 귄위에 충실해 본 적이 없는 영리한 학생들의 성공지향적 태도 속에서도 허영의 흔적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우선 허영이라는 말을 지라르 식으로 사용해 보면, 해석이 허영으로 치닫는 그 심리의 메커니즘이 환하게 드러난다. 마치 떡에 콩고물이 묻듯 해석에 붙는 게 이기적 욕심인 것처럼 허영도 결국 이기적 욕심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허영의 욕심이 드러나는 형식은 대체로 두 가지다. 있는 것(가령 내 내면을 구성하고 있는 타인의 영향)을 없다고 하는 경우, 그리고 없는 것(가령, 모방의 사실을 잊거나 덮어버렸기에 가능해진 독창성의 환각)을 있다고 믿거나 우기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허영의 사건은 종종 극적인 결과로 치닫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마데우스>(1984)의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의 놀라운 재능에 떠밀려 허영조차 부릴 수 없는 절망에 빠지는가 하면,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재능을 끝까지 무시한 채 제 허영과 야심 속에서 나름의 사상적 성취를 맺는다. 물론 우리가 일상의 현실에서 체험하는 갖은 허영들의 경우에는 이들이 서로 얽히고 섞여 드러나는 게 보통이고, 심지어 그로 인해 허영의 주체는 매우 변덕스럽기도 하다.

 

동수는 선배감독인 형수의 영향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독창성을 내보이고 싶다. 그러나 그는 벗어날 수가 없다.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 영실은 동수가 지닌 욕망의 실체를 안다. “자기는 이제 재미 봤죠? 그럼 이제 그만! 뚝!”

 

 

<극장전>의 동수는 매우 영리해 보이지만, 한편 변덕스럽고 이기적으로 표상된다는 점에서 허영의 주체로 등장하기에는 매우 적절한 인물이다. 그는 ‘영화(제작)’를 매개로 선배 감독인 형수의 영향권에 놓여 있고, 또 그때그때의 정황에 필요한 대로 그 사실을 인정하기도 한다. 가령 형수의 도움으로 영화배우로 입문한 영실이 “동수씨는 이형수 감독이 정말 미워요?”라고 다그치자, “저, 그 형한테 정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라고 미봉해서 사태를 무마해 버린다. 그러다가도 때론 즉흥적으로 그 영향의 물매를 극적으로 반전시키려 한다. “영실씨가 출연하신 영화가 다 내 이야기예요 … 그렇게까지 하면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건지 ….” 형수의 재능과 출세에 대한 동수의 반응은 극히 양가적이고, 그것은 병상에서 임박한 죽음과 싸우고 있는 형수의 처지 탓에 더욱 복잡해진다. 영화 속에서 형수와 동수는 한동안 서로 만나지 못한 사이로 그려지는데, 그것은 “지한테 영향받은 것을 인정하라고 자꾸 눈치를 주는 거예요”라는 동수의 불만 섞인 말대꾸 속에서 그 실마리를 짐작할 수 있다.

 

둘 사이의 격조(隔阻)는 동문들 간에 형수의 투병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지면서 형식적으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허영의 어긋남에 떠밀려 동수는 형수와 진정으로 재회하진 못한다. 비록 동수의 진실이 형수 속에 잠복해 있긴 하지만, 영실에 대한 욕망이 곳곳에서 형수-동수 관계의 실질적인 매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동수가 형수를 위한 모금 동문회에 참가한다거나 심지어 그의 병상을 찾는다거나 하는 행위들은 실은 형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욕망은 형수를 통과해서 영실로 향하거나, 영실을 매개로 삼아 잠시 형수에게 기착할 뿐이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동수의 욕망에 관한 한 형수는 형식이자 빌미일 뿐이지만 영실은 정작 그 내용이자 실질인 것이다. 가령 그 욕망의 진실은 영실을 향한 다음과 같은 질문 속에서 돌연히 뾰족해진다: “둘(형수와 영실)이 애인이었어요?”

 

동문회에 참석한 동수는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변명을 들이대며 형수를 위한 모금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모금 행사에 돈 없이 참석한 데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모금이라는 대의가 아니라 영실이라는 이해관심을 좇아 간 셈이다. 그리고 그 행보는 명백히 영실이 출연한 영화를 보면서 재구성된 욕망의 길에 얹힌다. 영실을 향한 동수의 욕망은 홍상수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기도 하지만, 모방적인 것이다. ‘욕망은 모방적’이라는 주장은 이미 적지 않은 인류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정신분석가들이 입 모아 뱉어놓은 말인데, 특별히 ‘소비사회’ 속에서 번성하는 욕망의 메커니즘에 그 현상들은 매우 현저하게 드러난다.

 

형수가 만든 영화를 굳이 (숨어서라도) 볼 수밖에 없고 또 그 영화를 통해 욕망이 전염된 채 잔칫집에서 발정한 똥개처럼 운신하는 동수가, 형수의 영화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두려는 고집(“다 내 이야기예요”)을 부리는 것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전술했듯이, 변덕은 허영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허영은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이는 분열의 일종이므로 그 분열 속에서 변덕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간단히 정리해 보자. 동수는 ‘영향의 불안’(anxiety of influence)(해럴드 블룸)과 같은 상태에 놓이면서 얼마간 형수와 격조하게 된다. 그는 선배의 영향을 부정하거나 숨기면서 자신의 독창성을 내보이고 싶은 전형적인 허영의 주체다. 하지만 형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동수는 그의 회고전을 보게 되고, 그 영화 속에서 모방생성된 욕망에 몸이 달아 영실을 쫓아다닌다. 형수는 동수의 대타자(大他者)로서 줄곧 그의 욕망을 규정하는 매개다. 그러나 동수는 결코 형수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형수의 영향에 스스로 불안해진 동수는 형수로부터 얼마간 멀어졌지만 다시 형수의 영화를 통해 영향을 받으면서 우연찮게 모방한 욕망으로 인해 영실의 삶에 개입한다. 물론 그 개입은 무책임하고 우발적일 뿐 아니라 이기적이다. “영실씨, 사랑해요!”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에서 종종 그렇듯이 여자는 조금 더 현명하고 현실적인데, <극장전>의 영실도 마찬가지다. 그는 동수가 지닌 욕망의 실체를 번연히 들여다본다. “자기는 이제 재미 봤죠? 그럼 이제 그만! 뚝!”

 

 

 

⑧ 민병국의 <가능한 변화들>(2004): (불)가능한 변화 ~ 다른 나는 없다, 지금의 나만 있을 뿐

 

 

1. 민병국이 내놓은 제작의 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내면적 변화에 회의적이긴 하지만 그 가능성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가능한 변화’를 ‘(불)가능한 변화’로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인간의 내면적 변화! 슬픈 얘기이긴 하지만, 인간은 ‘내면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한결 낫습니다. 진정 인간을 변화시키려 한다면 오히려 ‘내면적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하며, (내 식으로 말하자면) 그 ‘내면’이라는 게 마치 없는 듯이 행위해야 합니다. 저도 20년 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노릇을 하면서 이 ‘노릇’만으로는 이들의 ‘버릇’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절감하곤 했습니다. 노릇이 바뀐다고 버릇이 바뀌는 것도 아니지만, ‘내면’을 바꾸려 하는 한 영영 바꿀 수 없을 겝니다. 2. 문호(정찬)의 대사 중에, “이 고기 말이에요, 사실은 죽은 살이 타는 건데 냄새가 너무 달콤해요”라는 게 평자들의 주목을 끌었지요. 그런데 달콤한 것은 차라리 반복이지 변화가 아닙니다. 자아(에고)가 진리를 억압하듯이, 우리의 몸은 변화에 저항합니다. 3. 다음주에는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2003)을 함께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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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으로 연락하던 남녀가 ‘처음’으로 만난 자리에서 역시 ‘처음’으로 묻는다. “전에도 채팅하다 만난 적 있으세요?” “아니오 ‘처음’이에요.” “저도 ‘처음’인데 ….” 뒤의 ‘처음’이라는 거짓말은 앞의 ‘처음’이라는 사실에 기생한다. 쾌락이 무지에 기생하는 일반법칙처럼, 처음으로 만났기에 이들은 ‘처음’이라는 쾌락의 낱말을 뻔뻔스레 사용한다. 이처럼, 나날이 새로워지는 바로 그 힘으로 나날이 늙어가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네의 세속이다.

 

어느 철학자가 세인(世人, das Mann)이라고도 이른 이 범인(凡人)들은 처음이라는 매번의 우연과 그 기회를 역시 처음이라는 거짓말로 오염시킨다. 자신에 대한, 자신을 위한, 그리고 자신을 향한 거짓말이 어느덧 진지해지면서 내면화되면, 그것은 ‘허영’이 되고 그는 속물이 된다. 그리고 이 허영의 주체는 도시자본제적 삶의 체계 속에서 바람처럼 흘러다니는 우연의 가능성을 놓친다. 이 대목에서는 진리(진실)를 ‘마주침’이라는 사건적 우연성 속에서 찾는 사상가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럴진대 만남 속의 우연을 ‘처음인데요!’라고 얼버무리면서 외면하는 짓은 참으로 슬픈 노릇이다. 흙 속에 숨은 보석을 놓치는 일이야 조금 아까울 뿐이지만, (도스토옙스키가 보여주듯이) 내 마을로 찾아온 신을 쫓아버리는 짓은 정녕 치명적!

 

<가능한 변화들>에서는 허영을 체질화한 지식인 속물들이 주인공이다. 종규(김유석)는 젊은 나이에 사고를 당해 다리를 절게 되고, 첫사랑인 수현이 자신을 거부한 것도 어쩌면 자신의 불구 탓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교수직을 향한 꿈은 좌절당한 채 별로 연구할 것도 없는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마치 물 밖에 나온 문어처럼 징그러울 정도로 그의 일상은 권태롭다. 일견 그가 진정으로 ‘연구’하는 것은 그의 주변에 걸려드는 여자들인 것처럼 보인다. 여자들에 대한 그의 졸렬한 태도는 상처의 이기심을 먹고 살아가는 남자의 허영(내 상처는 보다 깊고 ‘독창적’이라는 허영!)에 특징적인 것이다. 아니, 그의 태도는 실은 자본제적 삶의 마당 속을 효율적으로 경쟁하기 위해서 내내 숨기거나 모른 척해야 하는 정서의 고향을 설핏 드러낸다.

 

 

첫사랑의 상처를 안고 사는 종규, 그 상처를 빌미삼아 속물스러운 현재의 삶을 정당화하고 순정의 진실을 찾아 첫사랑 수현의 주변을 끊임없이 기웃거린다. 그러나 수현과의 재회에서 드러난 진실은 오늘의 그 낡은 버릇 외에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기든스(A. Giddens) 등의 근대 비판가들은 남자가 자신의 객관적 성취를 위해 숨기고 있던 그 ‘정서의 지지대’(emotional prop)를 지적한 바 있다. 또 그것이 허물어지는 계기가 점점 잦아지는 도시적 경험 속에서 현대의 남녀관계가 겪는 구조변동을 말하기도 한다. 어머니나 아내의 충실과 그 정서적 지지를 당연시해오던 가부장제 속에 남자들은 그 지지가 철회되거나 혹은 그 지지의 빈 속을 경험하는 황당하고 뼈아픈 체험을 겪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은폐된 부분을 인식·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이른바 ‘성찰성’이란,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른 채 의지하고 있던 것을 깨닫는 일이다. 혹은, ‘작은 것을 보는 것 속에 밝음이 있다!’[見小曰明]. 위니콧(D.W. Winnicott)을 위시한 여러 심리학자들은, 가족이나 연인과 같은 근본적·1차적인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제공하던 정서적 지지가 없어지거나 훼손될 경우 그 당사자(특히, 남자)는 이후 단발적이며 피상적인 애정관계를 전전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깊고 지속적인 정서의 관계를 믿지 않거나 혹은 아예 회피하는 쪽을 택한다. 세속에서 성숙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곧 1차적 애정관계에 대한 근본적이며 진득한 신뢰에 의지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분석에 일리가 있다면, 종규와 같은 지식인 속물의 태도는 우선적으로 자기보호적이다.

 

상처받은 종규, 아니, (정확히는) 상처받았다는 ‘생각’에 골몰하는 종규는 바로 그 상처라는 이기적 울타리 속에서 한 사람을 진득하게 사랑하는 신뢰의 관계를 맺지 못한다. 애인을 두고 임신까지 시키면서도 그는 마치 발정난 개처럼 아무 여자에게나 침을 흘리며 수작을 건다. 바람둥이인 그의 여자관계는 삽화나 징검다리와 같은 꼴을 취할 뿐이다. 프로이트의 낡은 설명처럼 스스로 그 상처의 경험을 안전하고 약하게 반복함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하는 내적 강박이거나, 혹은 원초적 상처의 그늘 아래 근기 있는 친밀성의 관계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종규가 수현에게 드러내는 태도는 그가 지닌 상처의 성격, 그리고 과거의 그 상처가 그의 현재에 어떤 빌미로 쓰이는지를 잘 보여준다.

 

종규는 첫사랑(수현)의 상처를 품은 채 그녀의 주변을 강박적으로 맴돈다. 영화 속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이 첫사랑의 실패는 그를 불구로 만든 사고와 상상적으로 결부되면서 이후 그의 인간(여자)관계를 결정짓는 초석적 사건처럼 작동한다. 이 바람둥이의 삽화적 관계는 전술했듯이 상처를 회피하기 위한 자기보호장치이기도 하지만, 한편 그것은 자신이 자신에게 허용하는 보상적 쾌락의 형식이기도 하다. 종규는 첫사랑의 실패를 상처의 진원지로 ‘생각’하면서 그 첫사랑을 되찾으려는 강박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그는 영혼이 메말라가는 해바라기처럼 수현의 곁을 실없이 맴돈다. 이를테면 종규는 수현 속에 자신이 잃어버린 사랑의 진실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빌미 삼아 손에 닿는 대로 아무 여자나 집적이지만, 늘 첫사랑을 향해 되돌아가는 그의 상처는(정확히는, 상처에 대한 그의 ‘생각’은) 자신의 비루한 방탕기를 정당화한다. 순정의 진실을 수현에 의해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한, 그가 그의 현실을 어떤 타락한 식으로 살아내든 그것은 이미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상처는 곧 어리석음”(아도르노)이라는 오래된 격언은 종규의 경우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 경우 ‘수현’이라는 이름의 첫사랑-상처는 그의 진실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종규의 현재를 미봉하거나 분식하는 알리바이로서 기능한다. 결국 수현은 그의 진실이 유예/유배된 곳이 아니라 다만 잃어버린 쾌락의 지점에 불과한 것이다. 이 사실은 그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수현과 동침하게 되는 진리(!)의 순간에 명백해진다. 종규는 바로 그 진리의 순간에 그간 유예하거나 상상해왔던 자신의 진리를 증명하지 못한다. 수현의 나신 앞에 종규는 여전히 치졸하고 고집스러울 뿐이다. 수현과의 합일을 통해 그가 또다시 증명한 진실은, 그의 현재를 구성하는 그 낡은 버릇 이외에 아무런 진실이 없다는 진실이다.

 

 

 

⑨ 임상수 <바람난 가족>: 당신, 아웃이야! ~ 바람난 아내가족이라는 ‘제도’를 벗다

 

 

1. 이건창(1852~1898)의 문집을 보면 젊어 과수로 살던 충청도의 어느 이씨 부인이 스스로 자신의 유방을 잘라내어 마을의 무뢰배들을 경계하고 일부종사의 절개를 지킨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애너벨 청(Annabel Chong)은 <애너벨 청 스토리>(1999)에서 251명의 남자들과 연속적으로 섹스를 벌이는 퍼포먼스-다큐를 찍으면서 “여성이 성욕을 표현하고 그 결정권을 갖는다면 어떤 형식이든 문제될 게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합니다. 두 여인은 공히 자신의 육체를 도구적으로 사용합니다. 전자의 경우 그 행위는 남자를 향해서 남자를 위해서 남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후자는 여자를 향해서 여자를 위해서 (그러나 실은) 남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자들의 행위는 급격히 바뀌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 행위를 작동하게 하는 틀은 여전히 남성들의 세속이라는 말이지요. 반항과 탈주의 (여)성적 욕망이 기획되고 표출되는 기회와 방식이 얹혀 있는 지점과 지형을 살피지 못하는 한, 남성주의 체계 속에서 지속가능한 불화의 생산성은 없습니다. 한편 쾌락과 진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서 이씨 부인과 에너벨 청은 진자(振子) 운동의 양 끝 점을 가리킵니다. 호정도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지만 그러나 아직 그 행위는 그저 자기 자신만을 가리킬 뿐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쾌락은 진리와 전혀 무관합니다. 체계 안팎의 구심이나 원심을 가리키는 신호가 될 수 없는 호정은 여전히 바람일 뿐입니다. 2. 다음주에는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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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주의 가족 안에서 여성의 반란이 성해방의 형식을 띤다는 사실은 더 이상 새롭지 않지만 그 반란조차 체계 속에서 되먹임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호정은 기존의 제도를 온존시키는 데로 귀결하는 무능한 불화에는 관심이 없다. 그녀는 몸을 던져 다른 생산성을 꿈꾸는 것일까.

 

가족은 자연적인 것도 더구나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은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처럼 현실적이다. 가족제도를 철저하게 세속화한 <가족의 탄생>은 그 세속적 어긋남의 신호를 “너 나한테 왜 그래?/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와 같은 문장 속에 집결시킨다. 그들은 불화하면서 조율하고 갈등하면서도 화해의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싸움은 때늦은 깨우침에 대한 안타까움과 겹친다.

 

그러나 <바람난 가족>은 가능한 변화와 조절을 염원하거나 기대하는 <가족의 탄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들이 불화하는 풍경은 시쳇말로 ‘쿨’해 보인다. 그 불화는 단지 가족이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불화, 그러므로 결코 기존의 그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한 불화가 아니다. (이 무능한 불화란, 가령 윤종빈의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고참이자 친구인 태정의 존재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승영의 항의가 결국은 불모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연상하면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바람난 가족이 부린 불화의 생산성이 영화 속에 충분히 묘사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제도적 틀에 응석을 부리는 불화의 종류를 벗어났다는 점에서만큼은 분명 새롭다. 그렇기에 <가족의 탄생>이 “너 나한테 왜 그래?”라는 화두 속에서 움직였다면 <바람난 가족>의 화두는 앞으로 잘하겠다는 남편을 향해서 던지는 호정의 ‘쿨’한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다: “당신, 아웃이야!”

 

 

 

가족 등으로 대변되는 현실의 제도를 보호하는 가장 값싼 장치는 물론 도덕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워낙 당대의 것일 수밖에 없다. 실상 도덕은 그 실체가 없는 것으로 제도와 더불어 합체를 이루지 못하면 곧 소멸하고 만다. 이를테면, 제도는 도덕의 신체인 셈이기에 현실의 제도 속에서 보호받고 재생산되지 못하는 도덕은 현실의 권력장(場)에서 퇴출된 채 기억 속에서 출몰하는 유령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 도덕이 그 역사사회적 인위성(人爲性/人僞性)을 가린 채 자연스러운 규제력으로 사회구성원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그것이 왼손으로는 제도를 쥐고 있는 채로 오른손으로는 ‘양심’이라는 최종심급의 가상(假象)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애인의 성기를 왼손으로 쥔 채 오른손으로 그의 순정(純情)을 잡았다고 ‘생각’했던 이들처럼 말이다. 아무튼 도덕에 대한 잡다한 논의와는 별도로 그것은 확실한 사회적 힘이기에, 예를 들어 마광수나 장선우의 경우처럼 (소위 ‘도덕적’인 사람들보다) ‘양심’의 함량이 조금 부족해 보이는 이들도 결국 자신의 처신을 조금 ‘조심’하게 되긴 한다. 물론 양심적인 사람과 조심스러운 사람 중의 어느 쪽이 더 나은가 하는 꽤나 짚어봄직한 문제는 아직 이 글의 관심이 아니다.

 

그런데 도덕이 당대의 제도와 결합한 현실적 힘이라는 사실 속에 이데올로기는 서식한다. 당대에 ‘눈치보기’를 거부했던 니체와 같은 미래인들이 도덕의 저편과 선악을 넘어선 지경을 ‘눈치 없이’ 떠벌리는 것은 그러므로 넉넉히 이해할 만도 하다. 일상적으로 현실의 제도를 인준하고 좇게 만드는 최종심급의 장치는 대체로 도덕이므로, 적절한 제도로써 이 도덕을 선점하고 전유할 수 있는 기술과 인력은 당대를 지배하려는 세력에게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숱한 이데올로기 비판가들이 국가와 가족 사이의 제도적 공모를 경계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종교나 국가도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가족을 잡아놓아야 하며, 마찬가지로 시장의 일차 타깃도 늘 가족인 것이다. 밀레트(K. Millett)에서 알튀세르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지적하듯이 적절하게 순치된 가족은 국가체제의 이데올로기적 단말기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제도가 된다. 그 제도를 감시 감독하는 원격의 장치가 곧 당대의 도덕이며, 많은 인류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이 입을 모으듯 그 도덕의 바닥에는 성도덕(성을 분배하고 배치하는 서열)이 자리한다.

 

<바람난 가족>은 바로 그 제목처럼 성을 분배하고 배치하는 서열이 바뀌어가는 풍경과 그 사정을 잘 드러낸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까지는 우리같이 극히 도덕적인(?) 사회에서는 거의 정상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그 남편에 대처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처리하는 아내의 태도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 아내는 조루(早漏)한 남편 곁에서 자위를 하고, 이웃집의 고딩에게 섹스를 가르치고, 바람기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아웃’(out)을 선언한다. 앞서 말한 대로, 아내는 기존의 제도적 틀을 온존시키는 데로 귀결하는 무능한 불화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기존의 제도를 전제해서만 가능해지는 불화, “그러므로 결코 기존의 그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한 불화”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기존 제도와의 소모적 불화를 넘어 다른 생산성을 꿈꾸는 것일까? 그래서인가, 영화 말미에서 남편이 “잘할게!”라고 다가들자 아내는 “이 애기, 당신 애기 아니야!”라고 내뱉고 만다.

 

숱한 할리우드 영화의 맥빠지고 매너리즘화한 귀결이 보여주듯 가족주의는 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마지막 종교이자 마지막 형이상학이 되고 말았다. 그 위태로운 사정은 한갓 제도에 불과한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심지어 도덕적인 것으로 표상하게 한다. 남성주의의 갖은 이데올로기가 집결하는 가족의 안팎에서 여성의 반란이 성해방의 형식을 띤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된 지적이다. 그러나 불화와 일탈조차 체계 속으로 되먹임되는 강고한 현실 속에서 그 힘겨운 반란이 새로운 현실을 불러낼 수 있는 생산성을 얻기는 결코 쉽지 않다. 20세기의 여러 좌파 비평가들은 성해방과 성평등을 구체화시킬 성정치 이론들을 다각도로 실험했지만 그 결과는 그리 신통치 못했다. 말리노프스키나 프롬 등이 말하는 모권제 사회의 이상도 요원한 일인 터에, 바람이 난다고 해방이 되는 것도 아니며 해방된다고 평등해지는 것도 아니다. 지속가능한 불화는 오직 창의적이어야 하므로, 문제는 남편을 ‘아웃’시킨 뒤에 가능해질 새로운 욕망, 새로운 관계, 새로운 생산성이다.

 

 

 

⑩ 임순례 <와이키키 브라더스>: 세속이란 무엇인가? ~ 돌아갈 수 없는 그때, 그 꿈이여

 

 

 

1. 악의로써 세속을 정의하는 방식은 일상을 놓치는 약점에 빠집니다. <배트맨>처럼 악을 과장해서 얻는 이분법은 손쉬운 설명이지만 흔히 영웅주의적으로 흘러 되레 세속을 놓칩니다. 그러므로 척마(尺魔)의 위용(威容)이 아니라 오히려 촌선(寸善)의 졸루(拙陋) 속에서 세속의 본질을 찾는 게 현명하지요. 그런 점에서 친구(브라더스)라는 그 흔한 관계는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지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척마가 아니라 촌선이듯이, 문제는 적이 아니라 친구입니다. 오직 호의만으로 가능해지는 상처와 타락의 지경을 친구처럼 보편적으로 증명하는 관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보와 성숙의 문제에 관한 한, 친구라는 것은 아직 영영 관념론일 뿐입니다. 2. 나는 호의의 관념론에 묶이지 않고 세속을 현명하게 뚫어내는 관계론적 처방으로 ‘동무’라는 개념을 10여년 실험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친구’라는 세속의 알리바이가 아니랍니다.(sophy.pe.kr) 3. 다음주는 정재은의 <고양이를 부탁해>(2001)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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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꿈과 희망은 오늘의 체계 앞에서 어떻게 사라지는가. 영화는 추억과 선의로 뭉친 친구들을 중심으로 세속(이곳)과 와이키키(저곳) 사이의 거리를 우울하지만 섬세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 조명한다. 그러나 친구라는 관계가 세속의 구원이 될 수 없듯 브라더스의 세상 속 어디에도 와이키키는 없다

 

건강보신주의는 사종교(私宗敎)처럼 강고하다. ‘웰빙’은 마치 이 시대의 복음인 듯 전파된다. 비만아들은 전방위적으로 솟아오른다. 불과 몇십 년 전만 떠올려 보아도 지금의 물질적 풍족은 과연 상상을 초월하는 종류와 규모의 것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방’ 속에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맘껏 구가하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런데도 이들은 한결같이 피로하다. 만성적인 ‘피로’ 속에서 자본제적 삶의 증상을 읽어내는 사회학자들이 여럿 있듯이, 우리 모두는 강박적인 풍요에 몰두하면서도 돌이킬 수 없이 피로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현대 사회 속의 위험이 ‘체계적’(system-oriented)이라면, 그 피로 역시 체계적인 것이다.

 

 

생활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뒤엉켜 들어가는 당대의 세속도 체계와 무관할 리 없다. 손쉽게 대별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데는 공동체적 세속이 아니라 체계적 세속이다. 그러므로 세속적 피로의 성격이 체계적이라는 지적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세속의 체계적 속성은 중층다면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내가 특별히 관심을 두는 속성은, ‘(체계적) 피로’라는 테마에서 잘 드러나듯이 세속은 속인들이 체계와 스치거나 부딪치면서 돌이킬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실존적 마모의 현장이자 그 표상이라는 점이다. 세속의 때[世塵]는 시간처럼 공평한 것일까? 마치 마루에 먼지가 쌓이고 얼굴에 주름이 생기듯 세속적 체계 속의 삶은 도덕적 부식과 실존적 감가(減價)를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임순례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하고 싶었던 진짜 얘기는 우리가 10대에 가지고 있었던 삶의 원형과 희망이 우리가 30대 중반의 어른이 되었을 때 소시민적 가치관에 묻혀 살면서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한탄”이라고 말했다. 어느 평론가는 이를 두고 “아무런 두려움과 걱정이 없던 시절의 꿈과 희망이 허약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마모’되어 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번역한다. 어쩌면 전혀 새로운 지적이 아니기에 오히려 절절한 지적이 되는 것일까.

 

꿈은 문턱에서부터 식고, 애인들은 기대보다 빠르게 늙고, 우리들의 존재는 채 성숙하기도 전에 마모된다. 바로 그 세속의 내실에서는, 선하든 강하든, 그 숱한 의도들이 현실 속으로 외출하지 못한 채 실그러지거나 이운다. 그저 ‘일상의 평균치’(Durchschnittlichkeit, 하이데거)만을 관성적으로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속인들은, 평균치라는 바로 그 소박한 겨냥 탓에 오히려 나날이 평균 이하로 떨어지는 것, 바로 그것이 세속이다.

 

 

세속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의도가 체계 속에 얽히고 마모되면서 돌이킬 수 없이 어리석게 퇴락해가는 관계들의 총체를 가리킨다. 의도는 처음부터 체계와 연루했고, 마지막까지 관계와 내통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역설적인 미덕은 바로 그 세속(이곳)과 ‘와이키키’(저곳) 사이의 거리를 우울하지만 섬세하게, 그리고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조명한 데 있다. 연인도 그렇지 못한 터에 친구라는 그 고래의 관계는 세속의 구원이 될 수 있는가? 그 친구들(브라더스)은 와이키키로 갈 수 있었는가? 아니, 그들은 제 나름의 어리석은 열정 속에서 고스란히 세속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워낙 임순례는 친구들이 와이키키로 갔는지를 물으려는 게 아니다.

 

이창동의 <오아시스>(2002)나 브라이언 드 팔머의 <칼리토>(1993)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와이키키로 가지 못한다. 돌아갈 수 없는 그때와 그 꿈은 성우(이얼)의 회상 속에서 안타깝게 반복되고, 해변을 달리던 그 젊은 날의 나신(裸身)들처럼 외려 세속에 대한 무지 탓으로 더욱 해맑아 보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브라더스는 와이키키라는 이름과 추억, 상처와 꿈을 인각한 채로 내남없이 세속 속으로 몰각해간다. 소금 뿌린 배추처럼, 식초 먹은 버섯처럼 그들 모두의 퇴락은 돌이킬 수 없다. 개성화된 실내의 환상이 시장 자본제의 저편이 아닌 것처럼, 추억과 선의로 결연한 ‘친구’(브라더스)도 세속의 저편이 아닌 것이다. 아니, 오히려 친구라는 그 호의의 관계만큼 세속의 구조적 체질을 정확히 증거하는 것도 없다. 그것은 거래하는 타인이 세속이고, 증여하는 애인이 세속이고, 헌신하는 부모가 세속이듯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세속일 뿐인 것!

 

 

브라더스의 세상 속에서는 그 어디에도 와이키키가 없지만, 고향 수안보 역시 그 누구의 와이키키도 되지 못한다. 성우의 사춘기 우상으로서 ‘아버지의 법’(Loi du pere)을 넘어가도록 도왔던 음악학원 원장은 출장밴드로 근근이 연명하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있고, 남편과 사별한 첫사랑 인희(오지혜)는 채소 트럭을 모는 억척 아줌마로 변신해 성우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애잔함으로 몰아넣고, 현구(오광록)와 강수(황정민)는 본의 아니게 밴드생활을 접고 낙향하고, 고향의 친구들은 각자의 처지와 노릇 속에서 서로 힘들게 버성기며 세속에 복무하고, 끝까지 기타를 놓지 않는 성우도 결국 단란주점에 불려가 발가벗은 채 기타를 연주하는 꼴을 보이고 만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와이키키라는 환상의 진지(陣地)를 중심으로 결속했던 브라더스의 ‘공동체’가 세속의 ‘체계’에 의해 변질되고 와해되어 마침내 물화(物化)에 이르는 모습을 쓸쓸하게 보여준다. 추억은 언제나 공동체의 모습을 띤 채 동일화의 환상을 부추기지만 현실은 에누리 없는 상품의 체계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다크 나이트>(2008)의 유명한 대사처럼, 우리 모두는 “일찍 죽어 영웅이 되거나 오래 살아서 악한이 되는 것”이라는 과장된 이분법 속에 속절없이 빠진다.

 

 

임순례의 시선은 따스하게 전해지지만, 영화의 결말에서도 희망의 조짐은 도드라지지 않는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서비스는 인희였고 더 이상의 서비스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임순례의 시선과 취지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는, ‘생각’ 따위를 하지 않는다는 게 옳다. 그 어떤 희망도 진보도 생각 속에는 없는 것! 다시 아도르노의 시각을 빌려 물어보자면, 임순례의 시선은 세속에 대항해서 내세운 알리바이일까, 아니면 바로 그것 자체가 세속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세속의 일부일 뿐인 것을 세속의 알리바이인 양 제시하는 인문학적 분석과 예술적 묘사는 왜 아직 아무것도 아닐까?

 

 

⑪ 정재은 <고양이를 부탁해>: 스무살의 이유, ‘그 이상의 이유’

오이디푸스 세상 밖 어디로 나갈까

 

 

1. 영화의 제목에 의탁해서 헐겁게 총평하자면, 이 영화는 고양이를 부탁하고 세속 속으로 길을 떠나는 스무살짜리 여자애들의 방황과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양이’는 무엇일까요? 물론 이런 식의 자의적 해석은 조충소기(雕蟲小技: 서툰 솜씨로 남의 글에서 토막 글귀를 따다가 뜯어 맞추는 짓)에 그칠 위험이 크지요. 그러나 지영의 할머니가 내뱉은 말(“고양이는 영물(靈物)이야”)에 기대면 그들이 집을 나와 길을 떠나기 전에, 세파에 몸을 던져 그 통과의례를 완성하기 전에 맡겨둔 그것이 무엇일지 짐작되지 않을까요?

 

2. 1993년경에 정재은이 내 스터디 모임에 참석해서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습니다. 그 흑백 사진 속의 정 감독은 눈만 반짝이면서 한쪽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영판 고양이군요! 3. 다음주에는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2002)을 같이 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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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희는 아버지의 법에 등을 돌리고 부모의 집에서 나오려는 행위에 대한 ‘그 이상의 이유’를 구하려고 하지만, 그 이유를 구체화시킬 삶의 방향은 “가면서 생각”하려 할 뿐이다. 그는 분명하고 당당하게 반항하면서도, 그 반항에서조차 바로 그 스무살의 고비처럼 여전한 불안을 감출 수는 없다

 

인상적인 첫 장면에서는 부부 싸움의 새된 고성과 더불어 집기가 창문을 깨뜨리는 배경을 뒤로 한 채 자주색 코트를 걸친 혜주가 우울하고 성마른 표정을 드러내며 집 밖으로 걸어나온다. 쌍둥이인 비류와 온조 자매는 조부모의 집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그 부모가 맡긴 선물조차 전달하지 못한 채 돌아선다. 조실부모한 후 늙고 병든 조부모와 함께 어렵사리 생계를 꾸려가는 지영은 가난 속에서 자신의 꿈을 저당잡힌 채 세대가 아니라 차라리 ‘시대’ 차이를 느끼면서 사사건건 조부모들과 부딪친다. 다정하고 섬세한 스무살 태희는 가족이라는 (예를 들어 괴테나 실러 등이 조형해 놓은 고전 바이마르적 교양과 완전히 무관한) 속물적 소시민(Kleinberger)의 제국으로부터 야반도주한다. 그가 수년간 아버지의 사업에 바친 무상노동을 돈으로 환산해서 훔치고, 대형 가족사진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하얗게 도려낸 채로.

 

 

청소년의 성장이란 ‘아버지의 법’(Loi du pre)으로 대변되는 전통적 지배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전통은 죄다 이데올로기와 도덕의 빗장을 걸어 그 내부의 허상(=빈 중심)을 볼 수 없도록 제도화되어 있지만, 우상파괴적 재치와 탈주적 호기심으로 희번덕거리게 마련인 청소년들은 세월을 기다리지 않고 전통을 무시하려고 한다. 어느 시대건 통으로 생략할 수는 없는 나름의 무게를 지니는 법이니 필경 ‘법고창신’(法古創新)하는 게 성장과 성숙의 이치이긴 하지만, 핵가족화한 개인들로서 시장 속에 떠밀려 다니는 시대에 여전한 아버지의 법으로 아이들을 잡아둘 수는 없다.

 

집을 하나의 세계, 심지어 우주로 표상하는 종교학자와 인류학자들이 적지 않듯이, 스무살의 성장기는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집을 나가는 일로,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집을 지으려는 고민과 방황으로 집약된다. 쌍둥이라는 콤비네이션으로 집을 지키는 비류와 온조나 자본주의적 도시의 코드에 온전히 올인하면서 세속적 성공을 노리는 혜주와 달리, 태희와 지영이가 집을 떠나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실은 갓 스무살에 이른 이 여자들은 모두 제 나름대로 삶의 과도기를 ‘통과’하는 중이며, 또 어디론가를 향해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여상(女商)을 졸업한 뒤 세속적 체계의 문턱에서 배회하며 학창 시절의 추억을 매개로 우정의 공동체를 살려나가는 이들은 이른바 통과의례(rites of passage) 중의 한 가지인 성인식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20세기의 인천에서 치르는 그들의 성인식은 “전통을 배반하고 시장에 복종하는”(울리히 벡) 역설만큼이나 혼란스럽고 출구가 없어 보인다. 다만, 과거 전통사회의 성인식은 종족/부족집단의 고정된 의식(儀式)을 통해 그 과도(過渡)의 형식을 한 가지로 고정시키고 그 이행기의 의미와 가치를 삶의 전체 지평 속에 상징적으로 통합시켜 개개인의 갈등이나 방황을 최소화시켰던 것이 중요한 차이다. 그러나 막 스무살에 이른 이 다섯 여자애들의 경우, 삶의 이행기를 ‘통과’하긴 하지만 자기정체성과 사회적 노릇을 마련할 수 있는 편리한 의례는 어디에도 없다. 조금 달리 표현하자면, 영웅(모델)을 얻지 못한 채로 오이디푸스의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혼란인 셈이다.

 

 

이와 관련해서 태희의 대사는 각별히 새겨들을 만하다. “엄마 아빠 싫다고 울면서 집 나가는 것은 10대 때나 하는 짓이지. 건 너무 시시하잖아. 난, 그 이상의 이유를 찾겠다는 거지.” 다시 지영이가 “어디 갈 건데?”라고 묻자, 태희는 답한다. “가면서 생각하지 뭐.” 태희는 아버지의 법에 등을 돌리고 부모의 집에서 나오려는 행위에 대한 ‘그 이상의 이유’를 구하려고 하지만, 그 이유를 구체화시킬 삶의 방향은 “가면서 생각”하려 할 뿐이다. 그는 분명하고 당당하게 반항하면서도, 그 반항에서조차 바로 그 스무살의 고비처럼 여전한 불안을 감출 수는 없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포착된 이들의 일상은 인과가 분명한 서사보다 오히려 그 불안과 호기심의 착종이 빚은 젊은 순간들 속에서 더 아름답다. 그래서일까, 정재은은 이렇게 변명해준다. “그 어떤 순간이 되더라도 그 아이들한테는 그 순간이 숭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 어느 평론가도 스치듯이 지적했지만, 다섯명이나 되는 스무살 여자들의 성장통을 비교적 골고루 묘사하면서도 영화의 어느 구석에서도 성애(性愛)가 주제화되지 않는다는 점은 오히려 이 영화의 비평적 주제가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한창 나이의 처녀들의 대화와 상호작용 속에서 성적 관심과 실천이 소재에도 오르지 않는 것은 대체 무슨 연유일까? 그 흔하던 얼치기 하이틴 영화들을 단번에 무색하게 만드는 완성도 높은 리얼리즘 속에서 성애적 갈등이 통째로 빠져버린 일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요원

 

굳이 프로이트나 라이히 등의 지론에 동조할 필요조차 없이 청소년의 성장이 우선적으로 성적 형태를 띤다는 것은 상식이다. 통속적인 인성위상학에 의지해서 분별하더라도, 그 성장은 아버지의 법(초아자)에 대한 반항과 갈등, 그리고 현실(자아) 속의 순응과 자리매김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가장 두드러진 성장통은 자신의 성적 욕망(이드)을 둘러싼 신경증적 불안의 항상성에서 유래한다.

 

청소년기의 특징은 그 영혼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치 빠른 속도로 몸이 자란다는 것이고, 영혼과 몸 사이의 이 근본적 괴리가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다름 아닌 ‘몸’이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나이가 들어도 꼭 아이 같은 말투나 거동, 심지어 복색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드물게 있는데, 그들이 수행력이 높은 진인이나 도사가 아닐진대 필시 성욕을 억압하거나 회피(거부)하는 생활양식에 물든 탓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다시, 좀 기이하게 들릴 수도 있을 테지만, 사람들은 대개 음탕(!)해지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물론 수행의 목적이나 특정한 필요에 의해 금욕의 생활에 매진할 수도 있고, 그 나름의 성취를 이룰 수도 있다. 에둘러 말하면, 아이들이나 노인들이 다만 기력이 적어서 ‘청장년’의 무리와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혹은 노인들이 차츰 아이들을 닮아가는 게 다만 근력이 떨어지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고양이를 부탁해>에 대한 숱한 호평을 배경으로 단 한마디를 거들자면, 영화 속의 다섯 여자들이 왠지 아이들처럼 보이는 것이 다만 내가 나이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⑫ 박찬욱 <복수는 나의 것>: ‘복수는 너의 것’ ~ 우리는 모두폭력의 피해자일 뿐

 

 

 

1. 나는 박찬욱의 영화 중에서 여기에 소개한 <복수는 나의 것>을 단연 으뜸으로 칩니다. 아니, 이 영화는 한국 영화사의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결절점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할 듯합니다. 그의 <올드 보이>(2003)를 보는 도중 적잖이 흥분하여 빗발치듯 한 갖은 사념을 주체할 길조차 없었던 행복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지만, 그것은 <복수는 나의 것>만큼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내 취향으로 보자면 그의 복수 삼부작은 전형적인 내리받이입니다. 물론 완벽한 것이 환영받는 세상은 아니지요. 쓰임받지 못한 재주를 쟁여두는 일은 덕스럽고, 표현에 공을 들이는 중에 오해를 사는 일은 복권 사는 짓보다 백배나 나은 법이니, 세속의 완벽한 것들은 오히려 묻혀도 썩지 않는 식으로만 자신을 증명합니다. 2. 송강호는 물론이거니와 배두나나 신하균의 경이로운 연기를 보노라면, 하위징아나 카유아(R. Caillois)의 주장처럼 연기(흉내내기) 속에서 유희와 성스러움이 겹친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게 됩니다. 학생의 빛나는 눈동자에 ‘공포와 매혹의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를 느끼는 선생의 행복처럼, 저런 헌신적인 재능들과 어울려 작업을 하는 감독이라는 직업의 행복을 넉넉히 짐작할 만도 합니다. 3. 다음주에는 장선우의 <거짓말> (2000)을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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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와 현실의 어긋남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너나없이 복수를 가하는 대상이자 복수를 당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복수는 나의 것’에서 ‘나’는 복수의 의도를 갖고 폭력을 휘두르는 개인들이 아니다. 그 폭력의 주체는 차라리 전염되고 가속되는 맹목성을 그 생명력으로 삼는 폭력 그 자체다

 

‘의도는 외출하지 못한다’는 게 세속(世俗)이 그 맨얼굴을 보이는 첫 번째 명제다. 염량(炎凉)의 슬기, 혹은 세속의 실천적 지혜(phronesis)는 바로 이것을 깨단하는 것이지만, 아, 그것은 영영 쉽지 않다. 고등어를 사러 갔다가 갈치를 사게 되고, 맞선 보는 자리에서 중매쟁이에게 더 눈길을 주게 되고, (프로이트의 말처럼) 은혜를 입은 자는 돌이킬 수 없이 은인을 원망하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초심을 지키자’ 운운은 한결같이 맨망스러운 짓이니, 차라리 초심 따위는 없다고 여긴 채 생활방식의 견결한 충실성에 목을 매는 게 백배나 낫다. <복수는 나의 것>을 찍을 무렵에 박찬욱은 스스로 “어찌어찌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술회한 바 있는데,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는 의도에 따라 현실 속으로 외출하지 못한 채 어찌어찌 되어버린 자아의 모습에 대한 (폭력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공부가 아니라고 그간 번번이 지적했지만, 마찬가지로 의도는 자아가 아닌 것이다. 실은 의도를 자아의 알짬인 양 여겼던 철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근대 서양철학’이라고 하는 것들의 상당수는 의도와 자아의 등치를 매개로 엮어내었던 사유의 건축술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여러 사상가들이 의도(생각)와 자아(나) 사이의 근본적 어긋남을 넉넉하게 밝혀 놓기도 했지만, 의도가 세속 속으로 외출하지 못한 탓에 생길 수밖에 없는 그 어긋남은 영영 완벽할 수 없는 우리네 생활의 도처에 널려 있다. 그리고 그 어긋남을 치명적으로 만드는 게 폭력의 맹목성이자 그 전염성이다.

 

 

 

1000만원을 가로채 간 장기밀매단 탓에 누이(임지은)의 신장을 이식할 기회를 놓치게 된 류(신하균)를 동정한 애인 영미(배두나)는 ‘착한 유괴’를 제안한다. (아아, 지상의 그 모든 ‘착한 것’은 곧 의도의 어리석음 속에서 허우적댄다.) 돈 많은 부르주아의 아이를 볼모로 잡아 꼭 1000만원만 받고 돌려주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 의도는 현실 속의 얽히고 꼬인 복잡성 속에서 으레 어긋난다. 류의 호의에 등을 돌린 채 누나는 자살을 하고, 설상가상으로 유괴한 아이(한보배)는 사고로 익사하고 만다. 아이의 아버지 동진(송강호)은 딸의 복수에 나서고, 류는 누나의 복수에 나서고, 또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은 영미의 복수에 나선다.

 

이 영화는 박찬욱의 ‘폭력론’을 구성하는 세 가지의 이치들로 대별해서 설명할 수 있는데, 이 셋은 점점이 겹치면서 그간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영상을 제공한다. 그 첫째는 물론 앞서 언급한 ‘의도의 불모성(어긋남)’에 대한 관심에서 도출되는 폭력론이다. 요컨대 이 영화 속의 폭력은 주로 의도의 어긋남에 수반되는 돌이킬 수 없는 물매효과 탓에 증폭되곤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쏘우>(Saw) 연작과 같이 치밀하게 의도된 게임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비록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구절이 구약성서에서 인용된 신의 말씀이긴 하지만, 다수의 환자들을 용의주도하게 독살한 의사들의 경우처럼 ‘하나님 콤플렉스’(god-complex)를 흉내내지도 않는다. 어느 프랑스 철학자가 ‘마주침의 유물론’을 말하듯이, 그것은 의도와 작심이 어긋나면서 우연찮게 생기는 사건들의 물리적 효과에 가까운 것이다.

 

둘째는 그의 책 <박찬욱의 오마주>(2005)에서 밝힌 한 문장에서 출발할 수 있다. “어느 경우에나 폭력은 영화적 볼거리이기를 거부하고 인간끼리 관계하는 여러 양식 가운데 하나로서 성찰의 대상이 된다.”(339쪽) 그러나 무엇보다도 구경(소싯적에 ‘구경간다’는 말은 주로 영화 보러 극장에 간다는 뜻이었다)은 성찰이 아니라는 점에서, ‘성찰의 대상’으로 영화를 관람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박찬욱과 같은 명민한 감독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노릇이다. 가령 <디워>(2007)의 심형래식 스펙터클을 ‘구경’하는 게 성찰이 아니라면, <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를 보면서 혼이 빠지도록 울게 만든 그 감정이입적 ‘공명’도 성찰이 아닌데, 성찰은 구경과 공명 사이에서 어렵사리 유지되는 이론적 긴장감을 잃지 않고 영화의 전모를 그 세속적 연관성 속에서 읽어내는 일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독특한 스타일의 폭력이 “인간끼리 관계하는 여러 양식 가운데 하나로서 성찰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긴 사설 없이도 설득력을 얻는다.

 

 

그 마지막은 폭력에 대한 일종의 구조주의적 이해랄 만한 태도다. 가령 시장은 필경 시장구조의 메커니즘이 주도하며, 전통사회의 물물교환처럼 생산자와 소비자가 각각 주체적인 이해관심으로 만나 각자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곳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복수는 나의 것> 속에 재현되는 폭력은 등장인물들의 주체적 의도에 따라 행사된다기보다는 차라리 폭력 그 자체의 구조적 맹목성에 의해 점멸하거나 가속된다. 따라서 개개 장면의 스펙터클을 죽인 채 영화의 전체를 조감하면 등장인물들이 폭력을 휘두른다기보다 오히려 폭력에 휘둘린다는 편이 더 적실해 보인다. 박찬욱은 이 영화를 놓고 “잔인하고 무심한 자연이나 신, 혹은 운명이 지배하는 내용”이라는 자평을 내린 바 있는데, 이는 ‘복수씨에 대한 동정’(Sympathy for Mr. Vengeance)이라는 영어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도 잘 어울린다.

 

지라르(R. Girard)가 ‘모방적 폭력’에 대한 유명한 논의 속에서 악마를 폭력을 행사하(게 만드)는 개별 주체가 아니라 “모방적 폭력의 구조 그 자체”로 규정한 것은 이 논의에서 매우 유용한 참조점이 될 만하다. 그러니까, <복수는 나의 것>에서 ‘나’는 복수의 의도를 지닌 채 좌충우돌하는 류나 동진과 같은 개인이 아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 문헌학적 유래로 따지면 그것은 신이고, 이는 운명이나 자연 따위로 번안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현상적 흐름을 그 템포에 맞게 쫓아가노라면 그 폭력의 주체는 차라리 전염되고 가속되는 맹목성을 그 생명력으로 삼는 폭력 그 자체로 보인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내가 모르는 수많은 너로 이루어진 폭력의 구조, 바로 그것만이 폭력을 온전히 소유한다. 그런 식으로 “<복수는 나의 것>은 괴물과 싸우다 괴물로 변하는 인간을 그린 영화”라는 그 흔한 평문의 이면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⑬ 장선우 <거짓말>: 똥은 무섭다 ~ 상스러운, 혹은 성스러운 인간의 진실

 

 

 

1. 이창동은 장선우의 <거짓말> (2000)을 본 뒤 “장선우는 용기 있는 감독”이라고 평했는데, 아무튼 그가 예사내기가 아니란 사실은 여러모로 분명해 보입니다. <거짓말>은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 관객을 한편 끌어당기고 한편 내몰면서 더불어 만들어낸 한판의 굿 같으며, 이어진 장기튀김의 여파는 유례가 없는 것으로서 영화나 현실의 자연성에 대한 발본적 질문의 형식을 띤 사건이었습니다. 사드는 “호의도 변덕도 아닌, 나를 결심시킨 건 취향뿐”이라고 했지만, 재능도 취향을 통해 걸러지는 법인데, 거꾸로 취향을 걸러내고 그의 재능을 직시하는 것은 또 우리의 몫이겠지요. 2. 다음 주에는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 (1998)를 같이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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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와 Y가 서로의 육체에 탐닉하면서 내뱉는 어휘들은 문명이라는 살균처리를 거친 이들을 어지럽게 만든다. 이 어지러움은 단순히 관객모독에 그치지 않고, 거칠고 즉물적인 욕망을 다독이거나 제도화하면서 숨겨온 의식의 저편을 마구 헤집는다. 그래서 진실은 때로 무섭고 치명적이다

 

‘내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라는 말을 참말로 여기면 그것은 어느새 거짓말이 된다. 거꾸로 말의 내용을 좇아 거짓말이라고 치면 거짓말이라는 그 말은 그대로 참말이 되고 만다. ‘거짓말’을 이름으로 붙이는 데에는 이런 역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장선우의 <거짓말>도 예외가 아니다. 가령 어느 아이의 이름을 ‘김거짓’이라고 하고, 누군가 그 아이를 일러 “너, 거짓이지?”라고 물어볼 경우에 생길 자그만 혼란을 상상해 보면 그 어취를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어리눅은 듯, 혹은 도통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화엄경>(1993), <꽃잎>(1996)과 더불어 <거짓말>을 만든 장선우의 영화 세계가 바로 그런 뜻의 거짓말인 것.

 

 

여고생은 “너랑 ×하고 싶어!”라고 30대 후반의 남자에게 외친다. 혹은 “어제 니 똥을 먹을 때 내 가슴은 쿵탕쿵탕 뛰었어”라거나 “이젠 내 ×지를 빨아줘!”라거나 “난 너의 세 구멍과 전부 하고 싶어”라는 등의 말은 차마 거짓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닐스 보어(Niels Bohr)의 표현법을 흉내내자면 ‘깊은 거짓말’이다. 이 거짓말을 ‘깊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그저 상소리라고 내팽개치기에는 지나치게 절실한 구석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이어바흐의 말이 아니더라도, 지나치게 절실한 말은 늘 스캔들감이 된다.) 혹은 고쳐 말하면 그것은 거칠고 즉물적인 욕망을 다독이거나 제도화하면서 숨겨온 인간적 진실의 깊이(없는 깊이)를 막무가내로 건드리기 때문이다.

 

응당 점잖은 독자들의 목자를 찡그리게 만들 이 언사들에는 실은 상스러운 데만이 아니라 성스러운(숭엄한) 데가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들은 의식의 저편을 톺아보는 짓에는 늘 치명적인 구석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늘 진실은 인식의 문제이기 이전에 인정의 문제, 혹은 용기의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콘래드(J. Conrad)의 <암흑의 핵심>(1902)이 적실하게 형상화한 것처럼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은 때로 무섭고 치명적인 것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고들 하지만, 그 똥의 중요한 한 측면은 무섭다는 데 있다.

 

×이니, 좆이니, 똥이니 하는 어휘들은 문명이라는 살균처리를 거친 도시인들을 단숨에 어지럽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견디지 못하고 퇴장하는 관객들이나 심지어 구토를 하는 관객들의 이야기는 또 그것대로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움에 궁극적인 기준은 없기 때문이며, 그 체감은 때와 장소에 따라 바뀌는 갖은 규제력에 의해서 쉼없이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너랑 ×하고 싶어!”와 “실례지만 시간 좀 있으세요?” 중에서 어느 편이 더 자연스러운지는 넓은 의미의 당대적 권력이 결정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한 측면은 ‘자연스러움’에 대한 당대적 결정을 향해 던지는 근원적 질문의 형식을 취한다. <거짓말>이 주는 어지러움은 일차적으로 이 당대적 권력과 그 분별심에 퍼붓는 모욕적 퍼포먼스의 효과다.

 

숱한 이론들이 주워섬기듯이 문화가 일종의 신경증적 미봉(彌縫)의 상태를 가리킨다면, <거짓말>의 어지러움은 상징적으로 통합된 그 문화적 신경증이 일거에 부서지면서 정신병적 실재(네 속의 억압된 진실)가 어른어른 드러난다는 데 있다. 이로써, (세평처럼) ‘장선우는 관객을 물먹인다’. 아니, 단순히 관객모독의 상황을 연출하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거짓말>은 문명·문화라는 상징적 통합상태를 수호하고 유지하려는 세력에 직신직신 딴죽을 건다. 그러므로 이 퍼포먼스 탓에 두 장씨(장선우와 장정일)가 ‘아버지의 법’에 의해 회술레를 돈 것은 또 그것대로 ‘자연’스럽다. (이처럼, ‘자연’은 아무것도 아닌 것!) 다른 자연스러움, 혹은 더 깊은 자연스러움을 구하려는 예술가들이라면 치명적으로 따라붙는 그 비용조차 자신의 행위 속에 수렴할 수밖에 없을 터!

 

 

여담이지만, 하위징아나 카유아(Roger Caillois)와 같은 놀이 이론가들에 따르면, 어지러움은 놀이(유희)의 쾌락에 구성적으로 관여하는 특징이므로, 생산자든 소비자든 간에 쾌락을 구하려면서 어지러움을 빼버리려는 자는 필경 자가당착에 처한다. 그러므로 (각종의 축제에서처럼) 어지럼증은 신경증이라는 문화적 안정상태가 일시적으로 붕괴하는 체험인데, 형식적으로는 <거짓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문화적 공해에 찌든 사람들이 허적한 산야의 맑은 공기 속에서 눈결에 어지러움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문화(文化), 심지어 문화(文禍) 속에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자연이 선사하는 즉물적 실재감은 어지럼증뿐 아니라 종종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성애가 워낙 반복적이긴 하지만, J와 Y가 지겹게 반복하는 성적 사도마조히즘은 그것 자체로 어지러움의 굴레를 이룬다.

 

일찍이 푸코는 사드(Marquis de Sade, 1740~1814)의 에로티슴(에로티시즘)을 일러 “새로운 담론의 형태로 등장한 비이성의 형태”라고 정리한 바 있다. 사드 자신의 용어로 고치면 이 비이성은 곧 ‘자연’을 가리킨다. 그는 인간은 자연의 맹목적 도구에 불과하고 “당대의 도덕이나 자애심 탓에 자연의 충동을 억제하지 말 것”이며 자신이 묘사하고 행한 성적 기벽은 모두 자연 속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정신분석을 포함한 현대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한결같이 자연성에 대한 새로운 해체나 비판에 집중하듯이 그의 포르노그래피 역시 기존의 자연성에 대한 도발적 침탈의 형식을 띤다. 그렇게 놓고 보자면 J의 대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좆’과 ‘자연스러움’에 대한 것이라는 점은 또한 나름대로 자연스럽다. “니기미 좆도 막 나가니까 오히려 자연스럽다.”

 

<거짓말>의 J와 Y는 서로의 육체에 탐닉하면서 상대에게 가하는 폭력의 수위를 점점 높여간다. 아버지/오빠의 법에 등을 돌린 채 욕망만을 길라잡이삼아 막나가는 가운데 특히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어휘들, 그리고 한편 코믹해 보이기조차 하는 폭력의 형태와 그 정도다. 포르노그래피와 언어와의 관계를 옴니암니 따질 것도 없이, 육체에 대한 자연스러움이 변하면서 상징적 세계의 기초적 직물인 어휘가 바뀐다는 것은 그저 상식 중의 상식일 것이다. 더불어 ‘잔인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을 다시 사드의 입에 의탁할 필요는 없다. 모든 잔인함이 다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자연은 바로 무심한 그만큼 잔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잔인하지 말 것!’을 사회의 이법으로 내세우는 일부의 부르주아 이론가들이야말로 자연의 이법에 대한 역설적인 증거다.

 

<거짓말>의 메시지는 그 도발적인 매체들이 오련하게 관객의 시야를 떠나갈 즈음에 떠오른다. 그것은 J와 Y 사이에 오가던 사도마조히즘적인 폭력이 모종의 실존적 슬픔과 맞물리면서 체감된다. 그리고 그 폭력적 성애와 실존적 슬픔을 이어주는 그 도착적·연극적 진지함은 어느 순간 이 영화 전체를 하나의 별미쩍은 코미디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면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장선우를 돌아보면서 공소(空笑) 어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당신,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⑭ 허진호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 ‘끝없는 사랑’이 과연 아름다울까

 

 

 

1. 추억이 특별히 이미지로 제시되는 ‘차이’에 기댄다는 것은 누구든 범범하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매우 중요한 이치의 실마리가 되기도 합니다. 가령 옛 사진 속의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과 완벽히 일치한다면 ‘쫓아 올라가 생각할’(추억할) 거리가 아예 없는 셈입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바로 그 순간의 즉자적 체험에는 추억이 기생할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마나한 소리이지만 사진이 추억을 불러오는 매체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차이를 박아놓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영정(影幀) 사진은 이 논의에서 묘한 위치를 점하는데, 특히 사진 속의 망자가 활짝 웃고 있다면 추억의 기반이 되는 이 차이가 극(대)화됩니다. 그 웃음은 망자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고, 이로써 죽음과 삶이라는 차이에 망자의 무지라는 덤의 차이까지 덧붙어 추억의 강도와 그 절실함은 한결 강화되는 것입니다. 2. 한석규의 재기(?)를 응원하면서도, 이 영화를 다시 살피는 중에 나는 어쩌면 그의 연기는 ‘추억’으로 남게 될 수도 있으리라는 느낌을 얻습니다. 그사이 어떤 ‘차이’들이 생겨난 것일까요. 3. 다음주에는 박철수의 <학생부군신위>(1996)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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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정원과 다림의 사랑이 통속적일 수 없는 이유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간의 무상함 탓이다. 또 시간의 무상함을 추억 속으로 건져올리는 수단 중 사진만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정원은 “사랑은 사진처럼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임박한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는 정원(한석규)의 상념은 자주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기대의 끝에 이를수록 기억의 처음은 더욱 생생해지는 법이다. 그는 수업이 파한 뒤의 텅빈 운동장에 혼자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고 회상한다. 선성(先聲) 높은 철학자들의 이론을 들까부르지 않더라도 ‘빈 곳’을 찾는 인간의 심성은 넉넉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정원의 경우라면 살짝 다르게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가장 긴절하게 느낄 나이의 정원이 텅 빈 운동장을 즐겨 찾았다는 사실은 (프로이트의 말처럼) 상처의 기억을 약하게/ 다르게 반복함으로써 그 상흔을 소산(消散, Abreagieren)시키거나 극복하려는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을 법도 하다. 빈 운동장에 홀로 앉아 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정원은 다시 말한다. “어릴 적 텅 빈 운동장에서…우리 모두는 언젠가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얼기설기 기억나는 대로만 옮긴다.)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희로애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고자 신하들에게 그 방법을 알아오라고 하명했다. 얼마간을 기다린 왕에게 신하들은 반지 하나를 바치고는, 거기에 그 방법이 새겨져 있다면서 감쪼시도록 했다. 왕은 반지에 부각된 구절을 읽은 뒤에 웃으며 만족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이와 같은 문장이었다. “(무엇이든)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인생의 재상(災祥)과 화복을 시간 속에서 넓게 살피고 그 속에서 취사선택을 분별하는 이는 진정 현명한 사람일 것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이라는 말처럼 정녕 인생의 어리석음은 시간과 그 무상한 흐름을 잊은 채 자기의 생각 속에서 그 생각에 빠진 자기를 고집하는 인간일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 속에 이미 두 개의 시간이 등장하는 것이 새삼스럽게 눈에 걸린다. 실은 이 영화는,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돋보이는 미덕은, 곧 시간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이다. 주니가 나도록 지겹게 반복되는 사랑 이야기의 홍수와 그 홍수 속을 횡행하는 모방적 무지 속에서, 정원과 다림(심은하)의 사랑 이야기가 유다르게 새김질되는 이유도 필경은 시간에 대한 묘사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사라지게, 그래서 속절없이 아쉽게 만드는 이 무상한 시간성에 대한 나름의 묘사 덕에 통속할 수밖에 없을 이 영화가 그저 통속으로만 떨어지지 않게 된다. 어쩌면 허진호가 <봄날은 간다>(2001)라는 제목에 상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실은 <8월의 크리스마스>야말로 ‘봄날은 간다’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풀어보면 그가 <행복>(2007)에서도 결코 관한(寬限)하지 않는 시간과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서사의 알짬이 되는 매개로 사용한 것이 예삿일로 보이지 않는다.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시간성의 무상함 속에 교직한 것만 보더라도 이 이야기에 에로티슴(에로티시즘)이 돋을새김될 이유가 적다. 쾌락은 언제나 시간성을 거부하는 공시성(共時性)의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키스 한 번 없고 포옹 한 번 없이 근사한 사랑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남자 주인공인 정원이 치명적인 병에 걸린 시한부 인생을 살아간다는 설정에 의해 더 강화된다. 병과 이어지는 죽음은 두 남녀의 사랑을 시간이라는 불가피한 한계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도록 만든다. 정원의 병과 죽음은 극중 서사에 구성적으로 개입하는 시간성을 돋보이게 만들어 사랑의 동선과 움직임이 매우 절제 있게 순화되도록 돕는다. 그 효과는 그 일상마저 정화되는 듯한 기운을 번지게 한다.

 

허진호의 육성이다. “살아가는 일상이 죽음으로 시간이 제약된다면 일상이 달라 보일 것 같았다. 그걸 고통이나 두려움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일상적인 이별로 볼 수도 있다.”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chronos)가 흔히 죽음을 표상하는 것도, 거꾸로 인간들의 ‘으뜸가르침’[宗敎]이 한결같이 불사의 삶을 희구하는 것도 돌이켜보면 같은 이치를 담고 있다.

 

 

 

그 열정을 무상함 속으로 정화시킴으로써 사랑을 더욱 애달프게 만든 시간은 응당 ‘사진’ 이미지에 의해 결절된다. 사랑이 죽음이라는 시간성에 의해 무화될 때 그 무상함을 추억 속으로 건져올리는 수단 중에 과연 사진만 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사진의 현상을 죽음과 결부시킨 논의는 19세기의 인류학에서부터 현대의 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넉넉하다. 아쉽게 이 지면은 그리 넉넉지 못하니 모짝 생략하고, 다만, 어떤 인물사진이 더는 만날 수 없거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의 흔적으로 남을 경우에 그 사진이 띠게 되는 애달픈 무상성의 아우라를 떠올려 보아도 좋다. 정원은 “사랑은 사진처럼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안다”고 서둘러 말한다. 상식적이긴 하지만 그저 상식에 머무르지 않는 이 통찰은 죽음을 목전에 둔 자의 정화된 감성에서 나온 말일까, 아니면 사진사라는 그의 직업적 체험이 얻어낸 선물일까?

 

허진호의 말에 의하면, 정원의 직업을 사진사로 설정한 배경에는 그다지 속깊은 생각이 배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시간을 묘사하는 담백한 스타일의 여운 속에 오래 남을 이 영화는 사진사와 사진이라는 매개의 효과에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 지나가 버린 시간의 한 토막을 잡아 놓은 사진은 집/산(集/散)하는 양가성 속에서 인생의 근원적 형식을 일깨운다. 사진 속에 오롯한 과거의 인물은 그 인물의 미래에 대한 무지 속에서 오직 무지가 주는 그 ‘천연’스러움을 한껏 드러낸다. 한편 그 인물의 부재라는 현실은 그 모든 자연조차 ‘시간’ 속에 지나가 버릴 것이라는 담담한 확인이 된다.

 

  

여담 한 마디로 이 글을 줄이자. 정원은 부치지 못한 편지를 남기고 죽는데, 그 편지 속에는,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에게 고맙단 말을 드립니다”는 고백이 담겨 있다. 물론 고마움의 대상은 정원의 병을 알지 못한 채 소식 없이 사라져버린 그를 야속해하면서 떠나간 다림이지만, 정작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된 것은 정원의 짧은 삶, 즉 시간이라는 매개 때문이다. 다소 열퉁적게 말하자면, 정원과 다림의 사랑이 아름답게 마무리된 것은 시간이 그들의 사랑을 단절시켰기 때문이며, 그 단절 속에서 비로소 누릴 수 있었던 무지의 쾌락 때문인 것이다. 무지하기에 쾌락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쾌락은 무지에 기댄다. 그러나, 열쩍더라도 다시 어기차게 말하자. 정원이여, 무지 속에 죽어 행복했던 연인이여!

 

 

 

⑮ 박철수 <학생부군신위>: ‘삶의 너머엔 아무것도 없다’ ~ 죽음은 삶의 또다른 이름

 

 

1. 흔히 비교되곤 하는 임권택의 <축제>(1996)도 빼어난 수작이지만 <학생부군신위>는 그 열악한 제작 환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오래 기억해야 할 보석 같은 작품이다. 물론 관객은 “한국의 상장례 문화를 기록해 놓은 빼어난 영상인류학적 민족지”(정일신)인 이 영화를 기억하지 않겠고, 또 응당 기억하지 말아야 하는데, 보석은 오직 무지와 망각의 암둔한 토양에서만 채굴되기 때문이다. 2. 이 영화 속의 독특한 캐릭터는 단연 꼬마 바우(김봉규)다. 죽은 박 노인의 외도로 생긴 이 아이는 시쳇말 그대로 ‘상갓집의 개’(喪家之狗)처럼 저 홀로 떠돌며 갖은 행악을 부리는데, 극중에서는 상갓집이라는 ‘체계’의 안팎을 넘나드는 존재로 그려지면서 그 체계의 한계와 조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여담이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1945)나 <란>(1985)에 등장한 시동이나 광대의 존재 역시 주인공이 중심이 되어 엮어낸 체계의 안팎을 동시에 드러내는 효과를 발한다. 4. 개인적으로는, 어머니 역의 문정숙(1927~2000)이라는 명배우를 잠시 언급하고 애도하지 않을 수 없다. 청상과부가 되어 눈치볼 남자 없이 뻔질나게 영화관을 드나들었던 젊은 어머니를 따라 나 역시 무수한 영화들을 보면서 컸는데, <학생부군신위>는 그간 망망히 잊고 있었던 그 ‘얼굴’을 졸연히 되찾아주었다. 그를 통해 또다른 ‘어머니’를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의 회고가 아니리라. 5. 다음 주에는 송능한의 <넘버3>(1994)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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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부군신위>가 묘사한 ‘사람 사는 일’은 일상성과 그 복잡성으로 모아지는데, 이는 상갓집에서 이어지는 상장례의 절차를 좇아 생동감있게 전해진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의 어느 시골 노인 박씨(최성)의 죽음 탓/덕에 한산하던 그 시골집과 인근은 한 순간에 분잡스럽고 활기찬 잔칫집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상가(喪家)의 왁자지껄하고 어질더분한 현장을 슬금하게 지켜나가던 둘째 며느리 금단(방은진)이 말한다. “그기(그것이) 다 사람 사는 거 아니겠십니꺼?” 우리의 기억에서 우련하게 잊혀졌지만 이 땅의 영화학도라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박철수의 급조된(10여 일 만에 제작되었다) 수작 <학생부군신위>(1996)는 ‘사람 사는 이야기’로서의 상가의 내면을 면밀하고 풍성하게 되살려낸다.

 

외계인에게 지구인의 특징을 물어본다면 ‘상장례(喪葬禮)를 치르는 존재’라고 답할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나, 동료의 죽음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제 나름의 절차를 밟아 애도하려는 행위 속에서 현생 인류의 출현을 살피는 고인류학자(paleoanthropologist)의 보고는 사람의 죽음을 겪어내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사람 사는 일’이라는 상념에 이르게 한다. 물론 그것은 역설이다. 죽는 일, 혹은 가족이나 지기의 죽음을 겪어내는 일이 그중에서도 가장 사람 사는 일이라는 사실은 우리 인생사의 대표적인 역설이다. 그러나 사세(事勢)의 역설 속에서 인생의 묘득(妙得)을 깨단하는 일은 오히려 범상한 노릇이기도 하다. 흔히 위기 속에서 본심을 엿본다든지, 한계에 이르고서야 그 조건을 알게 된다든지, 마찬가지로 죽음에 이르러서야 삶이 확연해진다든지 하는 얘기들은 그리 멀리 동떨어진 고담(高談)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부군신위>가 묘사한 ‘사람 사는 일’은 일상성과 그 복잡성으로 모아지는데, 이는 상갓집에서 이어지는 상장례의 절차를 좇아 생동감 있게 전해진다. 이 ‘생동감’이라는 말은 부러 흘리지 않은 것이, (역시 역설적으로) 경남 합천군 가회면의 어느 시골 노인 박씨(최성)의 죽음 탓/덕에 한산하던 그 시골집과 인근은 한순간에 분잡스럽고 활기찬 잔칫집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포스터에 내세운 카피 문구-“내 죽으니 그리 좋나!”-는 이런 사정과 이어지는 풍경을 망자의 입을 통해 일거에 낚아챈다. 그러므로 문제는, 상장례는 대체 누구를 위한 일인지를 묻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죽어 제 몸의 모든 구멍이 틀어막힌 채로 누워 있는 시신의 지위는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큰아들 찬우(박철수)는 영화감독인데 제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도 직업의식과 그 버릇은 여전하다. (손탁의 말처럼) ‘우리’라는 말을 쓰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영영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니체의 말처럼) 타인의 슬픔은 공들여 배워야 하는 것이지만 내남없이 관습에 얹혀 슬픔을 사회화할 뿐이다. 그래서 찬우는 아버지의 시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 죽음의 잔치를 한 편의 영화처럼 인식하고 배치한다.

 

애살많아 보이는 작은고모(홍윤정)는 보험 세일즈우먼인데 오빠의 죽음을 정나미가 듣게 애도하는 틈틈이 친척들과 지기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보험 행상에 여념이 없다. 박 노인의 배다른 동생인 팔봉(김일우)은 졸부(猝富)가 된 채 딸 같은 아내와 손녀 같은 딸을 데리고 찾아와선 때늦은 체신을 세우느라 실없는 유세를 떤다. 격조한 동안 크리스천이 되어 미국에서 귀국한 막내 찬세(박재황)는 제 맘대로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등 전통 상례에 딴죽을 걸다가 호상차지(권성덕)의 꾸중을 듣는다. 아니나 다를까, 급기야 ‘미국’에서 온 ‘기독교인’인 찬세는 선산을 팔아치우자는 제안까지 내뱉다가 형에게서 면박을 당한다. 40년 전에 머슴 노릇을 하다가 ‘도라꾸’(트럭)를 훔쳐 달아난 태식(박동현)은 현금으로 빽빽한 가방 2개를 들고 와서는 영전에 통곡하며 사죄를 빈다. 읍내 다방의 마담과 아가씨들은 망자인 박씨와의 인연을 기념하며 한바탕의 주연(酒宴)과 노래로 배설하고, 당대의 신호로서 졸연히 다가든 민방위훈련조차 ‘치외법권’인 상갓집을 비껴가지만, 저녁 8시 텔레비전의 안방 드라마는 마당을 가득 채웠던 아주머니들을 모짝 안방으로 불러들인다.

 

 

그렇게 자잘하고 지질한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삶의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Beyond life nothing goes!)는 취지의 격언으로 ‘삶의 철학’(Lebensphilosophie)을 싸잡았던 어느 서양 철학자의 주장이 이 동아시아의 어느 상갓집 풍경에서만큼 더 온전하게 들어맞기도 어려울 듯하다. 서양의 장례가 검은색 정장의 한결같은 조문객들이 만들어내는 그 침묵의 공간으로 특징을 삼는다면, 우리의 것은 마치 죽어 누워 있는 망자를 일으켜 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쉼없이 훤화(喧譁)하는 풍경 속에 그 알짬이 있다. 호상의 말처럼 “상갓집에서는 떠들고 노는 기 괜찮은 기라!” 상가를 찾은 조문객들은 제 입장과 관계를 좇아 문상의 표현을 나누고 애도의 흉내를 짓지만, 그들은 그 중에도 자신들의 삶을 알뜰하고 이기적으로 챙길 뿐이고 제상 뒤에 누워 있는 망자의 시신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법이다.

 

실로, 죽음의 장소 속에서 삶은 가장 약동하는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우리네 상장례가 과연 그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새삼 물을 필요조차 없다. 종교의 그 질긴 생명력이 망자들에 대한 ‘애도’(엘리아스 카네티)에 있는지, 아니면 산자들의 삶을 분배정의적 차원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합리화’(독일의 종교사회학자들)하는 데 있는지 하는 문제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공자의 말씀대로 일단 귀신이 되었으면 가까이해선 안 되는 일[敬而遠之]이며, 살아 있는 자들이 주관하는 상장례란 그저 보내는 일이 아니라 보내 ‘버리는’ 일인 것이다. 그사이, 살아 있는 이들은 제 욕심과 고민 속에서 물덤벙술덤벙하며 죽은 자의 과거를 다시 반복할 뿐이다.

 

 

 

(16) 송능한 <넘버3>(1997): 건달은 누구인가 ~ 도시 뒷골목을 서성대는 무노동의 환상

 

 

 

1. 본문 속에서 논급한 베블런의 주장을 다시 옮기면 종교, 정치, 스포츠, 그리고 전쟁은 근본적으로 유한계급의 특권적 생활방식으로 배치됩니다. 가령 (스쳐 넘기기 아까운 주제이지만) 중세의 서구 귀족들이 신분적 특권처럼 즐겼던 매사냥의 전통은 이런 뿌리의 한 단락을 흥미롭게 예시하지요. 꼬집어 ‘조폭’이 아니라도 위계에 의한 상명하복(上命下服), 의리와 충성, 징벌적 폭력, 그리고 남성주의와 같은 ‘조폭적 행태’의 관점에서 보자면, 종교·정치·스포츠·전쟁의 집단적 주체들은 과연 조폭적입니다. 이 젠체하고 밑질긴 존재들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 곁에 있을 겝니다.

 

2. 다음주에는 임권택의 <서편제>(1993)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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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은 노동의 시간표에 갇힌 도시 속에서 축제와 폭력을 동경하는 고중세적 감수성에 기대며 노동이라는 산업사회적 비용을 치르지 않으려는 판타지이다

 

엄연한 조직의 2(3)인자인 태주(한석규)는 “잠 한번 늘어지게 자보는 게 소원”일 만큼 일과가 녹록잖은 건달이다. “이거 원래 건달이라는 직업이 놀고 먹는다는데, 내가 계산해보니까 평균 12시간 반을 일하더라”고 너스레를 떤다. 변변한 조직을 갖지 못한 가욋건달인 조필(송강호)이 조폭(조직폭력배) 합숙훈련 강의(!) 중에 설명하듯이 “건달은 땀을 흘려 노동을 하지 않는 불한당(不汗黨)”이지만, 태주에게는 그저 “나와바리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그러므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一日不食]는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들이대더라도 태주같이 근실(!)하게 일하는 건달들을 훑어내긴 어렵다. 세태와 그 운용을 보노라면 일하지 않고도 포실하게 살아가는 족속들을 수탐하느라 굳이 ‘영산강머구리파’나 ‘낙동강오리알파’를 쫓아다닐 필요는 없다. 제 몸 놀리고 제 땀 흘리지 않는 데 이력이 붙고 미립이 난 이들로 치자면 물경 수백만명이 불한당일 테니 말이다. 말을 뱉은 터에 조금 더 운을 붙이자면, 대체 이 시대의 그 누구가 정직한 땀으로 물초가 되도록 번 돈을 희망하는가? 까놓고 말하자면 ‘불한당’이야말로 21세기의 자본주의가 마침내 도달한 꿈의 직업이 아니던가?

 

 

 

불한당, 자본주의가 도달한 꿈의 직업

 

과거에 노동하지 않고 먹던 계급, 즉 불한당은 워낙 특권층이었고, 그들의 지위와 행세(行勢)는 현대의 조폭과 달리 당대의 권력체계에 의해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박제가의 <북학의>(1778) 등에서 잘 보이듯이 계급구조 변동의 시기에는 노동의 새로운 질서가 사회의 화두가 되는 법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다수의 양반/귀족들에게는 실속 없이 기승을 떠는 자유주의자들이 언감생심 넘볼 수 없는 범절과 위의(威儀)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지금은 멋모르고 주워섬기곤 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태도도 그런 엄절한 전통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자본제적 도시화 이후의 현상으로 쳐야 하는 조폭 현상은 당연히 중세적 계급이나 신분질서에 근거한 불한당의 전통과는 갈라진다. 이들을 계승하는 직업은 조폭이 아니라 차라리 성직자들이나 정치인들, 혹은 직업군인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부의 사회학자들은 성직자, 정치인, 스포츠맨 그리고 직업군인들은 그 직업의 체질구성상 조폭적 속성을 피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특별히 베블런(T. Veblen)에 따르면 ‘유한계급’은 야만문화의 초기 분업 형태인 남녀 구별에서 기원했으며 “유한계급제도는 초기의 소유권자들이 생산에 따라붙는 불명예를 피할 목적으로 조장한 결과들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 글의 논의에서 고동이 될 만한 베블런의 명제는 “유한계급은 평화에서 호전적 생활습관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점차 출현”했다는 것이다. ‘호전적 생활습관’의 함의를 넉넉하게 풀고 근현대의 사회적 변동들을 적실하게 적용해보면, 조폭과 더불어 성직자, 정치인, 스포츠맨, 그리고 직업군인들을 한 꿰미에 엮을 수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치면, 전방위적으로 솟구치는 짜증과 냉소 속에서 남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지닌 채 쓰고 만들었다는 송능한의 이 작품은 조폭에 대한 이야기가라기보다 차라리 그 자체가 곧 조폭적이다.

 

태주 같은 건달들은 자본주의적 도시화 속에서 이루어진 근대적 직업분화의 네트워크에 끌밋하게 포획되지 못한 무리들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들이 문자 그대로 중세적 존재일 수는 없지만, 무노동의 환상을 도착적(倒錯的)으로 현실화하려는 욕망을 이어간다는 점에서만큼은 중세적이다. 이 환상은 사치와 낭비의 삶에 대한 귀족적 욕망의 한 특별한 변용인데, 이들의 존재가 영화 같은 대중매체에서 각별하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자본제적 삶의 피로와 권태에 찌든 대중들에게 호전적 생활습관에 대한 관념론적 향수와 노동이 부재하는 도시의 삶이라는 판타지를 심어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건달은 노동의 시간표 속에 갇힌 도시 속에서 축제와 폭력의 세계를 동경하는 고중세적 감수성에 기대면서 노동이라는 산업사회적 비용을 치르지 않으려는 판타지인 것이다.

 

공동체의 왈짜, 체계 속의 건달

 

그러므로 조폭은 철저하게 근현대적 현상이며 도시적 삶의 이면(裏面)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왈짜들이 아니라 체계 속의 건달들인 것이다. 가령 임꺽정이나 홍길동이나 장길산의 패거리들은 비록 조직적인 폭력으로 당대의 법체계와 대치하지만 역사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조폭’일 수는 없다. 전통사회의 왈짜들이나 화적(火賊) 패거리를 조폭과 가르는 가장 중요한 대목은, 앞엣것이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개별적 행위들의 묶음이라면 뒤엣것은 체계의 질서에 기생하면서 그 체계의 그늘진 곳을 역시 ‘체계적으로’ 역이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비근한 사례로 1930년대 후반 이후 김두한 패거리가 정치적으로 진화해간 모습을 일람하면 한편 전통사회의 왈짜들과 체계 속에서 암약하는 조폭을 잇는 과도기적 형태와 그 과정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 조폭이 당대의 체계적 권력과 유착하거나 그 부스러기 이윤을 챙기면서 부침하고 명멸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건달도 조직적 존재이지만 그 조직 역시 철저히 체계적 현상인 것이다. 역사를 이야기로 각색한 작품 속에서는 ‘협객’이니 뭐니 하는 일견 흥미로운 인물상(charater)들이 기껏 소비자로 졸아든 잔약한 현대인의 눈길을 끌지만, 그것은 건달을 특정한 스타일을 지닌 개인으로만 묘사한 채 전통사회의 왈짜/의적 이미지와 체계 속의 조폭 이미지를 편리하게 섞바꾸며 임의로 윤색한 것에 불과하다. 누구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이야기이지 역사가 아니며, 풍경의 환상이지 상처의 기원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넘버3> 속의 마동팔 검사(최민식)는 직업적 전문성 때문인지 혹은 제 자신의 ‘좆 같은’ 성정과 체질 때문인지 조폭에 대한 환상을 가로질러 그 실제에 단도직입한다. 태주가 “제발 건달로 불러 달라”고 해도 마동팔의 입에서 쏟아지는 것은 그저 ‘깡패새끼’뿐이다.

 

인류의 대표적인 환상이라면 종교와 사랑과 자기애(나르시시즘)지만, 각양각색의 환상들은 인생의 욕망과 상처에 얹혀 명멸하며 때론 악지를 부려 앎이 주는 실재를 밀어내면서 밑질기게 자신의 존재를 고집하는 법이다. 조폭과 그 건달들은 근본적으로 근현대의 도시사회적 체계에 기생하는 현상이며,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조폭과 건달 역시 도시사회적 체계의 피로와 권태에 찌든 잔약하고 이기적인 소비자들이 낭만적으로 재현하는 환상이다. 예를 들어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2005)이 묘사한 선우(이병헌)의 비극적인 최후조차 자본주의적 체계 속에서 관료인간-기업인간-가족인간으로 아등바등, 진동한동 살아가는 우리네의 지질한 일상을 단숨에 폭력적·낭만적으로 초월케 하는 판타지가 아니던가? 그러나 <넘버3>를 만든 동기가 “깡패투성이의 어처구니없는 남한 사회에 대한 분노”라고 밝힌 송능한의 작업에서는 그런 환상의 잉여가 개입할 틈이 없다. 그는 바로 그 분노의 힘으로써 그 환상의 불을 끄고, ‘삼류 인생’들이 들끓는 이 사회의 벽화를 과장스럽고 우스꽝스레 점묘한다. .

 

 

 

(17) 임권택 <서편제>(1993) : ‘전통문화, 앓음다움을 넘어서’

쌀도, 밥도 안나오는‘그까짓’ 것들을 위하여…

 

 

1, 임권택 감독의 남다른 성취를 본받거나 버텨 읽어 얻을 게 적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나는 그를 대가로 여기지도 못하겠고 동뜨게 주목할 만한 감독으로 꼽지도 않지만, 우리 시대의 ‘세속’이 품어낼 수 있는 대중예술적 역량의 골과 마루를 통으로 증거한 이력에 관심을 두는 편입니다. 말이 났으니 좀 덧대면, 좋은 감독을 가늠하려면, 한 사람의 배우가 각각의 감독을 통해 바뀌는 매체효과적 차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좋은 ‘선생’의 경우도 매일반인데, 이들은 으뜸 항목이 아니라 일종의 장(場, champ)이며, 인격이 아니라 풍력이며, 거목이 아니라 숲이며, 대상이 아니라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2. 다음주에는 박광수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을 같이 읽습니다.

 

전통문화는 앓아서 아름다운 것이 된 채 풍경 속을 떠돌거나 상업주의에 포박돼선 곤란…

“공식적 세계관들에 대항하는 다른 세계관으로 연구돼야” 한다

 

소리꾼 유봉(김명곤)은 제 스스로 스승으로부터 파문을 자초한 가욋사람이다. 주류의 동정과 비아냥, 그리고 “소리꾼 목구녕이 갈보년 밑구녕만도 못한 세상” 속을 나름의 뱃심과 오기로 견디며 서편제 소리의 혼을 지켜나가려고 용을 쓴다. 영화는 유봉이 자기 자신을 그 혼길의 길라잡이로 자처하고 후대의 지킴이를 지키고 키우고자 진력하는 과정을 줄기로 삼는다. 그 지킴이들이란 자신의 아이들인 송화(오정해)와 동호(김규철)인데, 실은 이들도 자신의 친자식들이 아니다. 송화는 조실부모한 고아를 수양딸로 들인 인연이고, 동호는 우연찮게 동거하게 된 어느 과부의 아들을 떠맡게 된 경우다.

 

변화한 세태, 사라져가는 전통

 

동호가 판소리를 내팽개치고 변화한 세태 속으로 도타( )하자 불안해진 유봉은 약재를 조작해서 송화의 눈을 멀게 해서 곁에 잡아둔다. 그야말로 극약처방이다. “좋은 소리를 할려면 소리를 하는 사람의 가슴에다 말 못할 한을 심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변화한 세태 속에서 돌이킬 수 없이 사라져가는 전통을 유지하고 전수하기 위해 자식까지도 희생시키려는 비극적 결단이었던 셈이다. 유봉은 송화한테 “이제 니 한(恨)을 소리에 실을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탄식하는데, 그 탄식은 자식의 눈을 멀게 함으로써 가능해진 묘득(妙得)의 염원이자 아비로서 느끼는 죄의식의 회한이기도 하다. 산중의 폐가에 은거하면서 송화를 가르치는 유봉은 그 묘득을 이렇게 풀어낸다. “이 서편 소리는 말이다 …사람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한이 사무쳐야 되는디 …니 소리는 이뿌기만 하제 한이 없어 ….” 소리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어긋나고 갈라지고 자빠지고 소스라치는 인간사의 갖은 정한(情恨)과 그 밑질긴 슬픔이 가락과 장단의 형태로 승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공전의 대중적 반향을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임권택이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기도 했던 <서편제>는 우리 땅 사계의 토속적 아름다움을 서정적으로 잡아낸 ‘보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우선 이 판소리 자체에 배어든 속슬픔에 속절없이 공명하게 되는 ‘듣는 영화’다.

 

 

 

하지만 영화의 대체적인 서사는 판소리 자체의 내적 슬픔이 “소릿꾼 목구녕이 갈보년 밑구녕만도 못한 세상”에 의해 내몰리거나 함몰되는 여러 삽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소리 자체의 속슬픔이 세태에 의해 떠밀리는 겉슬픔에 얹혀 한층 깊어지는데, 그 깊은 슬픔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송화와 동호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대미를 이루며 풀어진다. 누이의 소문과 흔적을 듣보며 찾아온 동호는 어느 홀아비 객줏집에 얹혀 살아가는 눈먼 송화를 대면하게 되는데, 짐짓 그녀의 소리를 청해 들으며 스스로 북장단으로 마중하는 중에 한맺힌 누이의 삶과 소리가 더불어 어우러지고 풀리는 해원(解寃)의 체험을 나눈다. 나아가 소리꾼 아버지 유봉의 고집과 애착으로 빚어진 어긋난 가족사를 감명적으로 통합하는 지경에 이른다.

 

소리를 위해 딸의 인생에 ‘치명적으로’ 개입한 아버지 유봉이 그 딸을 위해 열어놓은 길은 역설적이다. 한으로써 이룬 소리이건만 다시 소리로써 그 한을 넘어서도록 요구한다. 소리를 위해서 딸의 한을 조작·조장한 그 소리꾼 아버지는 마침내 소리 그 자체의 ‘한계’를 새로운 예술의 ‘조건’으로 승화시킬 것을 주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실부모한 채 입양된 수양딸의 눈까지 멀게 한 비정한 소리꾼-아버지 유봉은 어느덧 그 딸-소리꾼에게 불가능한 과제를 내놓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하거라!” “그래도 나는 소리가 좋아, 소리를 하면 만사를 다 잊고 행복해지거든”이라는 일차적 감상을 넘어 “하지만 한을 넘어서게 되면 동편제도 서편제도 없고 …득음(得音)의 경지만 있을 뿐”이라는 대화해(大和諧)를 말한다. 그것은 북으로 치자면, “천개를 수천번이고 수만번이고 쳐가지고 이 장판지 들기름이 쩔듯이 그냥 니 몸뚱이 속에 북가락 푹 쩔어야” 하는 경지이기도 하다.

 

 

서편으로 기우는 인문학의 운명

 

유봉이 송화의 소리를 타박할 적에 뱉은 말처럼, 그러고 보면 이제는 “이뿌기만 하제 한이 없”는 것들의 세상이 되었다. 내남없이 이쁜 것만을 좇아 복대기를 치는 세상이고, 상품이 되어 진열되지 못한 재능은 모짝 냉대받고 방치되는 세상이니, 소리 따위에 시색이 좋을 리 없다. “지 소리에 지가 미쳐가지고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좋은 것”이라는 유봉의 발명을 시큰둥히 시먹는 동호는 포달스레 북채를 던지며 구두덜거린다. “그까짓 소리 하면 쌀이 나와 밥이 나와!” 그의 태도는 과거청산주의로 일관한 우리식 농축·급속 근대화의 현실이자 그 논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 그런지 소리판의 가욋사람인 유봉이 임자 없는 떨거지 신세인 송화와 동호를 거두어 근대화의 세태에 등을 진 채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재능의 계승자로 단련시킨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작금의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것은 ‘지는 싸움’으로서의 전통이 자본주의적 체계와 마찰하면 은결이 진 채 배돌아다니는 꼴을 보여준다.

 

<서편제>는 희한하게도 내겐 서편으로 뉘엇뉘엇 기우는 인문학의 운명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힌다. 급격하게 이식된 근대화와 산업화의 와류 속에서 전통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맥을 잃어버린 채 낡고 부조리한 것으로 청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영화에서는 서편제라는 판소리의 한 갈래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판소리만이 아니라 이 땅의 민초들이 오랜 세월 각자의 생활 속에서 삶의 이치를 담아 가꾸어 온 갖은 인문(人紋)과 그 표현들이 졸연히 그 생존의 지반과 전망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미 밀리고 실그러지고 있는 인문학은 무능과 부재(不在)의 급진성으로써 그 지는 싸움을 생활 속에서 새롭게 갱신하지 못하면 끝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메를로퐁티에서부터 버틀러(J. Butler)에 이르기까지 그 색목의 이방인들조차 힘지게 떠들어댄 ‘몸이라는 사회성’에서 자생한 이치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셈이다. 흔히 이 땅의 지식인들이 한국어의 학술적 전용이 어렵다고 두덜거리면서 외국어를 차용하는 일에 일말의 기탄도 없곤 하지만, 우리의 생활한국어 역시 일본식과 미국식의 근대화가 겨끔내기로 몰아치고 잡도리한 결과로 이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경신되어야 하며 또 경신될 수 있다.

 

영화의 결말이 제시하는 화해의 감동은 개인적인 공명의 테두리에 머문다. 전망의 부재로 말미암은 우울함은 그 화해의 풍경을 한층 더 감동적인 장면으로 고양시킨다. 그것은 아름다운 대로 ‘앓음-다움’(박상륭)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전통문화는 다만 앓아서 아름다운 것이 된 채 개인의 풍경 속을 떠돌거나 상업주의에 포박되는 것으로 그쳐선 곤란하다.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면) 민속 등의 전통문화는 단지 도시문명의 목가적 채색으로 그칠 게 아니다. 그것은 “공식적 세계관들에 암묵적·객관적으로 대항하는 다른 세계관이자 인생관으로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혹시 이 강성의 발언에 찜부럭이 나실 독자라면 (어느 독일 철학자의 주장처럼) “합리화된 도시 문화가 일상의 의사소통망을 통해 전래의 전승과 생생하게 접합”할 가능성을 구체화시켜 보시기를.

 

 

 

(18) 박광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 전태일, 혹은 무능의 급진성

전태일의 삶과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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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에서 영수로 재연된 변호사 조영래가 일종의 ‘연기’를 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자신 수배자 신분으로서, 분신자살한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수탐하고 글로 재현하려는 노력이 대체 무슨 연기냐고요? 그러나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어느 철학자의 표현처럼) ‘진리사건’으로 추체험하고 이를 응연히 마주 대하는 행위 그 자체는 곧 스스로를 묶어 돌이킬 수 없이 어떤 삶의 형식으로 밀어붙인다는 뜻에서 이미 더할 수 없는 ‘연기’가 아닐까요? 전태일 사건을 진리의 순간으로 응시하고 그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전태일은 그에게 최고의 감독이자 연출자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시장소비주의나 개성적 변덕으로 전락한 다양성의 신화를 알면서 모른 체하고 다기지게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짧은 한 세상 속에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선의 것이 과연 꾀바른 다양성의 결과일까요? 내가 오래전부터 조형하고 또 얼마간 실천하고 있는 ‘연극 인문학’의 이념은 그렇지 않다는 항의이자 새로운 교육법입니다. 가면이 자신의 살이 되도록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가면과 살을 넘어서는 유일한 법입니다.

 

2. 다음주에는 박종원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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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삶은 산업자본주의 체계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그의 죽음은 그 체계의 한계를 일거에 고발한다. 그는 체계의 진실이자 공포가 된다. 이것은 여전한 공식이 된다. ‘너는 우리들의 욕망을 죽인(위협한) 죄로 희생되어야만 한다!’

 

브루노(G. Bruno, 1548~1600)는 이단의 죄책이 잡혀 오랜 구금 끝에 분살(焚殺)되었다. 그는 당대의 도그마에 어긋나는 신념을 품은 채 타협하라는 가톨릭 교회의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한줌의 재로 돌아갔다. 화형을 당하기 전날 밤, 브루노는 감옥 한구석을 밝히고 있는 촛불에 자신의 손가락을 살며시 갖다 댔다 뗐다를 반복하면서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초조하게 예기한다. 어느 철학자는 ‘선구적 결단’(verlufende Entschlossenheit)이라는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지만, 브루노의 결단은 분초의 단위로 시매기는 불안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충실성 속에 묶어두는 행위일 것이다.

 

 

 

메시아, 체계의 환상적 알리바이

 

브루노가 화형당하기 직전에 남겼다는 말이 지금도 전해진다. “말뚝에 묶여 있는 나보다, 나를 묶고 불을 붙이려고 하는 당신들이 더 공포에 떨고 있을 것이다.” 공포의 원형 가운데 한 가지는 ‘진실에 대한 공포’인데, 이것은 ‘자신의 진실을 알고(보고) 싶지 않은 근본적 욕망’과 맞물려 있다. 브루노의 존재와 그 충실하고 질긴 항의는 당대 체계의 보편성(catholicism)이 감당할 수 없는 ‘외부성’이 되어 그 체계의 관료 인간들에게는 곧 공포의 조짐이었던 것이다. 자기준거적이며 자기복제적인 체계(‘체계는 체계만을 돌본다!’)는 자신을 체계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거치적대는 존재들을 짓누르거나 내모는 법이며, 이 가욋존재들은 거꾸로 체계 그 자체의 한계와 조건을 넌지시 드러낸다는 점에서 곧 그 체계의 진실이자 공포가 된다. 전태일의 삶은 산업자본주의 체계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그의 죽음은 그 체계의 한계를 일거에 고발한다. 그렇게 그는 그 체계의 진실이자 공포가 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적 상상력이 극적으로 현시했듯이, 사원(교회)이 대형화·체계화하면 자신들이 믿던 신조차도 밀어낸다고 하지 않던가. 가령 부처나 예수가 서울을 찾아온다면 자칭 그 신도들의 체계 속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는지는 너무나 뻔한 일이다. 마치 희생양으로서의 브루노의 의미가 당대 체계의 욕망에 대한 위협이었던 것처럼, 체계의 바깥을 의욕하는 가욋사람들은 당대의 도덕(눈치보기)이 허용하거나 조장하는 욕망에 대한 위협이며 이로써 스스로를 희생양의 신세로 내몰게 된다. 무릇 체계가 주워섬기는 그 모든 메시아들이란 신도들이 지닌 욕망의 한계에 대한 환상적 알리바이에 불과한 것으로, 그들이 실제로 찾아와선 곤란한 것! 특별히 자본주의적 체계 속으로 찾아드는 부처나 예수, 혹은 그 어떤 형식의 메시아든 그것은 그 체계의 욕망에 대한 위협이자 공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여전한 공식이 된다. ‘너는 우리들의 욕망을 죽인(위협한) 죄로 희생되어야만 한다!’

 

기존 체제는 그 체제를 유지해 주던 욕망들이 위협당하거나 새로운 욕망(의욕)으로 균열할 때 희생양이라는 일종의 보나파르티즘으로 그 위기를 돌파한다. 그래서 가욋사람을 잡아 족치는 희생양 현상은 근본적으로 욕망의 현상유지(안정화)를 지향하는 체계의 폭력인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희생양으로 지목되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가 중심이 된 공동체가 당대 체계의 약자들과 타자들을 달리 대접했고, 이로써 체계의 이데올로기적 단말기 노릇을 해 온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흔들면서 다른 삶의 의욕을 생성시켰기 때문이다. 제도와 교리로서의 기독교는 예수의 것이 아니며, 그의 것은 다른 어휘, 다른 관계, 그리고 다른 의욕의 가능성을 온몸으로 현시했던 삶과 죽음과 더불어 영영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면 전태일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무엇으로 살아남아 있을까?

 

 

 

존재의 공백과 재구성 ‘상실의 지혜’

 

예수의 삶과 죽음이 바울의 비전(전망)이나 언설과 얽혀 있었듯이, 마르크스의 노작이 엥겔스의 해석과 한 뭉치를 이루듯이, 전태일의 삶과 죽음 역시 조영래의 시선, 심지어 그의 어머니 이소선의 기억과 뗄 수 없이 엉켜 있다. 나 역시 조영래라는 부처를 통해 전태일이라는 예수를 알고 느끼게 된 행운아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정작 이 글의 알짬을 이루는 곳은, 그렇다면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보고 읽는 우리들은 대체 어떤 식으로 그와 관련을 맺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영영 ‘전태일의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거나 ‘그의 사적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식의 해석학적 이기심으로 만족하는 인숭무레기 이론가들의 반지빠른 태도에 슬금슬금 얹혀갈 텐가? 아니면 전태일의 고민과 전망을 영영 ‘타자의 것’(das Andere)으로 밀쳐둔 채 그를 기념비적 존재로 승화하고 체제 속에 내재화하는 것으로 미봉할 텐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를 어떻게 알게 되었든지, 그와 당신과의 짧은 만남과 영원한 헤어짐으로 말미암아 생성된 그 ‘상실의 지혜’를 어떻게 자기화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친하고 긴하게 알아오거나 의탁한 그 누군가와 헤어지기 전에는 그의 중요성이나 그 존재의 의미를 제대로 깨단하지 못한다는 말을 흔하게 듣는다. 의도가 비껴가는 게 세속이고 의미는 늘 사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몇몇 이론가들 생각으론, 이별과 상실 이후에 찾아드는 체험의 효과에서 정작 우리가 놓치는 부분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변화며 자기정체성의 균열과 새로운 재구성이다. 내 삶으로부터 영영 사라져 버린 대상의 의미를 새삼스레, 애닯게 깨치는 일도 그것대로 중요하지만, 그 상실의 사건을 통해 나 자신이 변화한 것을 체득하는 일은 몹시 어려운 만큼 더 소중한 체험이 된다. 영화 속에서 전태일(홍경인)의 삶과 죽음을 듣보고 수탐하는 영수(문성근)의 행적과 사유도 꼭 이와 같은 이치를 체현하고 있다. 물듦과 그 영향에 솔직하려는 태도는 공부와 성숙의 사북이자 그 밑절미이기도 하지만, 내 선생이나 동무와의 관계가 진작 내 존재에 구성적으로 간여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의 상실이 주는 효과를 통해서만 거꾸로 내 존재의 생김과 이력을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가 내 곁을 떠났기에 생긴 내 존재의 공백에 대한 온전한 인정을 통해서만 나는 나를 이해하고, 그 공백을 메우고 넘어가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나는 나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삼각산에 올라와 막노동을 하며 지내던 전태일이 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청계천 평화시장으로 돌아가려던 때(1970년 8월 9일)의 일기 한토막은 이 영화 속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며 그의 삶이 죽음을 통해 지향한 가치의 성격을 여실히 증명한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전태일은, 바로 우리 곁에 왔다는 그 죄(?) 탓으로 오인되거나 폄훼받는 메시아의 전형인데, 조영래가 그를 추적한 방식조차 차마 그러하다.

 

 

 

(19) 박종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 파리대왕을 죽이는 법

부조리에 투항하는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

 

 

 

1. “너희들이 앞으로 만들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라고 절규하면서 엄석대 체제를 혁명하는 데에 주도적이었던 김 선생은 영화의 말미에서 지역 국회의원으로 잠시 등장하는데, 노회한 정치인의 말과 짓 속에서 자유와 진리를 외치던 그 젊은 선생은 온데간데없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억압적 체제를 깨뜨리는 데 주역이 되었던 김 선생이 다시 기성 체제에 빌붙어 셋줄을 부리는 내부자로 변신하는 것으로 슬픈 세속의 단면은 자신을 증거한다. 체제가 그 체제를 바꾼 메시아를 다시 재체제화하는 그 경겁스러운 순발력! 세속이 꼭 그런 것이다.

 

2. 다음주에는 정지영의 <하얀전쟁>(1992)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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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궁극적 건강성은 그 체계를 발본적으로 의문시하는 가욋사람들의 비판적 연대에 기댄다. 파리대왕이 생겨나는 것은 세속의 운명이지만, 그 파리대왕이 독수리대왕으로 자라게 두는 것은 우리의 타락이다.

 

우화(寓話)에는 흔히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우선 그 이야기의 취지를 간명하게 강조하고 배치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에 비하면, 비단 밀란 쿤데라 등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인간들의 소설은 응당 삶의 ‘복잡성’을 그 밑절미로 삼는 법이니, 우화처럼 노골적인 계몽이나 훈계를 겨냥한 이치를 담기에 알맞은 그릇이 아니다. 하지만 본능 속으로 몰밀어서 그 말과 짓을 분명하게 유형화할 수 있어 보이는 동물들의 세계는 알레고리 기법을 통해 또렷한 메시지를 알기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닌다.

 

‘약하지만 대체로 선한 자’의 딜레마

 

동물이 아니라면, 물론 아이가 등장하게 된다. 흔히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라거나 축도(縮圖)라고 표현하지만, 이런 점에서는 축도라기보다 차라리 ‘극도’(極圖)라는 편이 낫다. 다종다양한 성인식의 절차를 통해 만들어지는 ‘어른’은 무엇보다도 사회화라는 중도(中道)에 편입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를 ‘착하다’고 여기는 통념은 일종의 혼동인데, 이 경우의 착함은 그가 아직 사회적 규범의 잣대에 온전히/냉정히 얹힐 수 없이 약한, 그래서 아직은 예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생긴 착각이다. 가령 윌리엄 골딩(W. Golding)의 <파리대왕>(1963)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이 예외적인 존재들이 주류의 규제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위치를 벗어나서 제 나름의 세계를 깜냥껏 주관하게 되면 그들은 그 극(極)단성을 온전히 과시하면서 본능적 파괴성에 탐닉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악이든 선이든, 그 순전한 모습을 그리는 데에는 동물 같은 짓이나 아이 같은 말이 제격인 셈이다. 인격의 다종다양한 분열상들을 본격적으로 보이면서 세속의 복잡성에 일조하기 전까지, 아이들은 온전히 하나의 가능성을 재현하거나 연기하고 있는 가면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아이들의 세상을 그린 것이나, 어른들의 해후 속에서 과거를 회고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영화 속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어느 시골 국민(초등)학교 5학년의 학급반장으로 재학 중인 엄석대(홍경인)의 인물과 행태 속에서 구체적으로 예시된다. 학급의 담임인 최 선생(신구)의 인정과 질둔한 두호 아래 석대는 갖은 행악과 추태를 저지르며 어둠 속의 지도자로 군림한다. 훗날 ‘엄석대의 반’에 의심의 시선을 던지는 김 선생(최민식)에게 최 선생은 이렇게 단언한다. “지내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그 반이 얼마나 좋은 반인지!” 흔히 시골의 토호를 징치하는 자가 한양에서 내려온 어사또이듯이, 시골학교의 ‘강하고 대체로 악한 자’에 맞서게 되는 이는 서울의 명문학교에서 전학을 온 한병태(고정일)라는 ‘약하지만 대체로 선한 자’다.

 

 

병태는 낯선 곳에 도착한 가욋사람의 시선으로 엄석대라는 ‘파리대왕’의 왕국을 간파하고 그 부조리함에 저항하지만 대가 없는 고군분투 속에서 번번이 좌절한다. 엄석대는 단지 한 사람의 급장이 아니라 담임선생의 눈먼 위임을 받은 위에 완력과 모략을 부려 전권을 행사하는 독재자인 것이다. 병태가 지녔던 날선 외부자의 시선은 속절없이 꺾이고, 어느덧 그마저도 매사 첨속으로 엄석대를 대하는 처지가 된다. 영화는 새 담임선생의 부임과 이어지는 반전에 이르기까지, 각성했지만 잔약한 개인이 강고하고 완악한 체계 속에서 분투하는 과정을 통해 그가 어떤 식으로 삐치고 실그러지고 마침내 순치되는가 하는 ‘선(량)한 자의 딜레마’를 간결하고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병태는 외부자의 시선을 잃어버리고 단독자의 입장을 포기한 채로 엄석대의 체계에 급속히 물들어간다. 반체제에서 친체제로 돌아선 병태는 그 자신의 변절과 그 죄책을 잊어버리려는 듯 잉여의 노동을 개의치 않으며 자신의 보스에게 각근히 충성한다. 그러는 사이 그는 엄석대의 일그러진 왕국에서 2인자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부자는 단지 부(富)의 ‘현실’을 향유하는 데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그 부의 ‘권리’를 발명하고 싶어한다는 베버의 설명처럼, 엄석대의 체계 속에 투항한 한병태 역시 그 투항과 복종의 달콤한 열매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법이니, 그는 응당 자신의 두동진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사태를 이런 식으로 재해석하자면, 변심과 복종의 열매가 달콤한 이유는 흔히 사실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권리의 문제로 번져간다. 만일 그 열매가 달콤해야 하는 이유가 그 자신의 변절을 합리화·정당화해야 하는 이유만큼이나 절실하다면, 그 열매는 그야말로 별수 없이 달콤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칸트의 어법을 빌리자면) 그 열매는 어찌할 수 없이 달콤해야 하므로 돌이킬 수 없이 달콤할 수 있는 것이다.

 

다 아는 대로 세속의 쾌락과 진실이 어긋나는 일은 통속적일 만큼 잦다. 또 진실이 치명적이라거나 가장 근원적인 쾌락은 진실을 외면하는 짓에 수반된다거나 하는 따위의 주장은, 세속의 욕망이 언젠가/어느 곳에선가 지불해야만 하는 비용의 실체를 일러주기도 한다. 단지 그간 감추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얻는 개방과 발화의 효과가 적지 않듯이, 쾌락의 열매는 개인의 진실을 희생하거나 억압했으므로 가능해진 것이기에 더욱 달콤해야만 하는 것이다.

 

 

 

‘절차적 합법성’, 독재자의 보호막

 

엄석대가 영웅이자 독재자로 군림하고 그의 체계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것에는 그의 지위와 행세가 이른바 ‘절차적 합법성’을 갖추었다는 사실도 중요한 한몫을 한다. 투표라는 제도와 최 선생의 인정은 그의 광범위하고 집요한 행악과 수탈을 가리거나 정당화하는 데 악용된다. 그리고 그렇게 오용되는 형식적 적법성은 반원들의 의사소통을 실질적으로 차단하고 체계가 체계만을 돌보는 그 기계적 메커니즘을 강화시키게 된다. 히틀러주의나 일본 천황제, 혹은 박정희 체제 등이 뼈저리게 시사하듯이, 좌도(左道)나 반체제 세력이 거세된 채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에 내몰린 제도적 선택은 파시즘적으로 흐를 위험에 노출되게 마련이다. 엄석대 체제의 제도적·절차적 적법성이 외려 그의 조직적인 행악을 가려주었듯이, 보나파르티즘이나 파시즘은 그 제도적 합법성에 의해 그 체제를 더욱 공고히 굳힌다.

 

합법적인 틀에 의해 보호받는 체계는 내부자에 의해 내파(內破)되기 어렵고, 체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개인들의 각성과 투쟁은 머지않아 진화되거나 내재화되기 쉽다. 역사가 숱하게 증명해주었듯이 제 나름대로 합법적인 형식을 이룬 왕국은 그 행악이 수미산을 이루어도 결코 스스로 변신하거나 몰락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엄석대의 체계도 개인 한병태의 결심과 투쟁이 아니라 그 체계 자체를 괴악하게 여겼던 외부자(김 선생)의 막강한 폭력에 의해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모든 제도의 궁극적 건강성은 그 제도를 근원적으로 낯설게 대하거나 그 체계를 발본적으로 의문시하는 가욋사람들의 비판적 연대에 기댄다. 파리대왕이 생겨나는 것은 세속의 운명이지만, 그 파리대왕이 독수리대왕으로 자라게 두는 것은 우리의 타락이다.

 

 

 

(20) 정지영 <하얀 전쟁>(1992) : 이야기냐 자살이냐?

‘억압된 과거’를 대면하는 공포 미봉하거나 미쳐버리거나…

 

 

 

1. 인간을 ‘이야기하는 존재’로 정의하는 학자들이 더러 있답니다. 그러나 단지 ‘언어적 존재’(homo linguisticus)와 같은 모호한 규정이나 인간은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따위의 경험적 사실을 떠올려서는 안 됩니다. 혹자는 이야기를 인문학적 인식의 범주나 단위로 치기도 하지만, <하얀 전쟁>을 놓고 보면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피해자들의 상처 속에 응고된 진실이 후대의 역사 속에 전달되도록 돕는 상징적 통합의 매체이지요. ‘이야기는 역사를 감춘다’는 말은 중요하지만 일면적인 지적일 뿐입니다.

 

2. 다음주에는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을 같이 읽어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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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증적 주체로서의 한기주가 얼기설기 봉합한 상징적·소설적 세계에 정신병적 자아로서의 변진수는 중대한 위협으로 다가든다

 

“가시는 곳 월 나-아-암 따-앙 하늘은 멀더라도~!” 그 어느 먼 옛날, 불과 열 살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부산항 제3부두에 이끌려 나와 승선하는 파월장병을 향해 학우들과 더불어 목청껏 외쳤던 이 노랫말은 아직도 혀끝을 생생하게 감돈다. 비록 국가 이데올로기의 최하위 단말기 노릇일 뿐이었지만, 개선의 무운을 염원하는 어린 우리들의 심정은 자못 진지하고 차마 비장하였다. 지난여름, 낡은 에어컨을 손봐주러 찾아온 마을 전파사의 주인 최씨는 수리하는 틈틈이 묻지도 않은 월남전 파병 때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빗맞은 것들과는 달리 자신을 향해 다가드는 포탄이나 총탄은 아예 그 소리부터 다르다는 얘기를 끝으로, 최씨는 월남에서 한몫 단단히 챙겨 귀국했다는 얘기를 마치 옛날 영화의 속편처럼 언죽번죽 꺼내놓는데, 회상이라는 특권적 기억에 기댄 노인의 음성과 표정은 사뭇 낭만적이었다.

 

이야기, 치유와 구원의 몸짓

 

그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일상의 원리는 ‘전쟁’조차 낭만적으로 채색할 수 있게 한다. ‘삶의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면, 그 삶의 일상 속에는 신들이나 괴물들조차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일상으로 박진할수록 낭만주의의 환상은 쉽게 부서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비교적 합리적인데다 지식인의 본치까지 띤 한기주 병장(안성기)은 단번에 그 체험의 요체를 꿴다. “전쟁, 허영이었어 … 한번 체험해 보고 싶다는 ….” 이론가들이 만구일담으로 주워섬기듯이 사적 낭만주의의 알속은 헛된 독창성과 독특성을 향한 자기애적 허영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끔찍한 실제와 그 지질한 일상을 거친 한기주에게 더는 전쟁 낭만주의나 전쟁 이데올로기 따위가 발붙일 구석은 없다. 귀국한 후 이혼한 채로 낡은 아파트에서 홀로 쓸쓸히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는 “10년이 지나도록 머릿속에서 혼돈과 절망으로만 뒤엉켜 있는 월남전”의 잔상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다름아닌 소설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특별히 외상성 기억으로 내장된 참전기를 회고담 형식으로 재서술하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자명해 보인다. 요컨대 한기주는 이야기(소설 쓰기)를 통해 자신을 치유하거나 부지불식간에 구원의 몸짓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대개 외상성 기억은 파편화된 채 그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폭력적으로 기동한다. 그것은 주체화를 위한 자아의 서사(삶의 일관성) 속에 의미있게 통합되지 못하고 강박적 잔상으로 소외된 채 밖으로만 배돌게 된다. 외상기억의 피해자는 과거를 숨기거나 스스로 그 기억으로부터 도피하는 법이지만, ‘침투’(intrusion) 라는 징후적 현상에서 보이듯이 과거의 파편은 예기치 못한 정황 속에서 피해자의 삶 속으로 솟아올라 그 현재적 권리를 치명적으로 요구하곤 한다. 물론 이와 같은 현상은 한기주보다 심약한 성정의 변진수(이경영)에서 한층 극적으로 도드라진다. (남편과 사별한 뒤 자신을 ‘과부’라는 명칭과 동일시하는 데에만도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듯) 가령 자신을 ‘강간 피해자’라고 인정하고 그 명칭을 수용하는 일이 이미 그 자체로 문제의 해결과 치유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억압된 문제를 낱낱이 대면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의미있고 일관된 전체성’(meaningful coherent whole)으로 재생시키는 출발점이 된다. 한기주에게 소설 쓰기는 자신의 억압된 외상적 기억을 상징적으로 배치·통합시키는, 일견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행위다. 자네(Pierre Janet)의 지적처럼, “외상적 상황이 만족스럽게 청산되려면 행동의 외적 반응뿐 아니라 내적 반응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결정한 어휘로써 그 사건을 상세히 설명할 수 있고 이 설명을 개인사의 한 장으로 자리매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의 실제를 소설 쓰기라는 상징형식으로 미봉하고 통합하여 자아를 건지려는 한기주에게 변진수의 등장은 악몽의 재연이나 다름없다. 그는 이른바 ‘실재의 귀환’이나 ‘억압된 그림자(Schatten der verdr<00E4>ngte/unbewusste Teil der Pers<00F6>nlichkeit)의 돌출’(융)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기주의 전쟁신경증은 바로 그 전쟁의 실재를 밀어내고 막아내는 보호기제가 이루어낸 타협인 셈인데, 변진수라는 살아 있는 상처의 흔적은 그 실재의 근원으로, 신경증의 진실이자 그 원천적 광기의 장소로 단박에 되몰아가는 것이다. 한기주는 ‘전우’라는 낭만적 환상은 고사하고 변진수가 자신의 생활공간 속에 틈입하는 것조차 꺼린다. 그는 변진수라는 전쟁의 상흔을 통해 ‘기억을 앓는 신경증’을 견디며 애면글면 건사하고 있는 자신의 현재가 일거에 붕괴할 수도 있을 위험한 신호를 직감적으로 읽고 있기 때문이다.

 

 

자살, 외상의 과거 속으로 돌아가기

 

정신병적 자아로서의 변진수는 신경증적 주체로서의 한기주가 얼기설기 봉합한 상징적·소설적 세계에 중대한 위협으로 다가든다. 그렇기에 그가 변진수의 등장과 더불어 당시 연재 중이던 신문소설을 그만두겠다고 찜부럭을 내며 동창인 신문사 편집국장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한기주의 소설 쓰기라는 상징적 봉합물은 변진수라는 치명적 벼리의 침탈과 그로 말미암은 요동으로 그만 찢어 헤쳐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변진수라는 전쟁의 실재와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다소 두동진 태도를 보이는 한기주의 선택은 둘로 갈린다. 변진수라는 과거와 더불어 미쳐 버리고 소설 쓰기를 그만두든지, 아니면 변진수를 제거하고 다시 미래의 소설 쓰기를 계속할 수 있는지 하는 기로에 내몰린다. 물론 그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 다시 소설 쓰기를 재개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것은, 변진수를 총으로 쏘아 죽인 뒤 그 총을 쥔 채 그의 주검 곁에 나란히 누운 자의 결심으로만 재현될 뿐이다. 전쟁외상성 증후군을 유달리 앓으면서 아직도 정글 속인 듯 도시 속을 개신개신 헤매고 있는 변진수가 존재하는 한, 한기주의 상징적·소설적 미봉은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변진수는 월남에서 가져온 권총을 한기주에게 부치지만 한기주는 당연히 그 용처를 짐작하지 못하고 역정만을 부린다. 그러나 변진수가 보낸 권총이란 자신의 외상이 현재 속에 결절된 표지판과 같은 곳이고, 오직 그 현장에 동참한 자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진실의 매체인 것이다. 한기주 역시 점점 외상의 흔적인 그 권총의 현실을 인정하게 되고, 이윽고 그 권총(해결)을 수용하게 된다. 변진수가 그 총으로 자살하고 싶어한다는 사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의 체험을 공유한 한기주의 손을 빌려 죽음의 평화에 이른다는 사실은, 글쓰기를 통한 상징적 봉합을 선택한 한기주와 극명하게 갈라지는 지점이다. 한기주는 변진수가 월남에서 가져온 권총으로 그를 쏘아 죽인 후에 그의 시신 곁에 누워 중얼거린다. “이젠 소설을 써야겠다, 정말 좋은 소설을 ….” 그는 소설 쓰기라는 주체화의 매체를 통해 과거를 미봉한 채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현실 속으로 복귀하지 못한 변진수는 과거를 택한다. 그는 과거를 지시하는 권총-매체를 통해 그 외상의 과거 속으로 영원히 되돌아간 것이다.

 

 

 

(21) 배용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 : 새와 소 ~ 애착에 허우적대는 마음의 길찾기

 

 

 

1. 저는 ‘독립’과 ‘고립’을 분별하고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식인의 좌우명처럼 길게 애용해 왔습니다. 무릇 체계의 구조적 간지(奸智)는 개인의 결심이나 성찰을 넘어서는 힘이므로, 독립은 성찰이나 결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체제의 제도적 단말기와 불모의 고립 사이에서 제 길을 걸어가며 실력을 쌓으려면 ‘다르게 살기’가 선사하는 불화의 생산성을 가꾸어가야 합니다. 대체로 불화의 삶은 비생산적이고 소모로 흐르기 쉽지만, 가욋사람으로 입신하려는 이들이라면 불화 속에서 생산해야 하고, ‘무능/부재’ 속에서 급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용균이 누군진 모르지만, 대단하군요.

 

2. 다음 주에는 배창호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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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곡과 기봉이 화두를 놓고 성불과 득도의 길을 토론하지만, 어린 해진은 새와 소와 더불어 커가며 그들과는 판이한 모습의 공부길을 그려놓는다

 

나는 문사의 본치를 띠고 있지만 그 근본이 무골(武骨)이라, 소싯적에는 갖은 운동과 무술 흉내로 소일하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믿지 않으시겠지만) 초등학교 시절에는 돌팔매질로 백발백중 쥐를 잘 잡았고 심지어 그 일로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하였다. 그 당시의 어느 날, 우연찮게 제법 근사한 나무 새총 하나를 얻게 된 나는 마을 뒷산으로 직행해 강하게 물을 먹인 뒤 첫눈에 들어오는 참새를 향해 어림잡고 눈결에 시위를 날렸다. 아직은 손에 채 익지도 않은 새총이라 겨우 먼장질이나 할 듯했건만, 작은 구슬만한 돌멩이는 빨랫줄처럼 날아가 정통으로 그 참새의 몸을 때렸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그 사냥감을 향하여 뛰어갈 참이었지만, 돌멩이를 맞은 참새는 수십개의 갈색 깃털을 분분히 흩뿌리며 땅으로 떨어지다 말고 한순간 흐느적거리던 날개를 간신히 휘감아 채면서 빽빽한 관목들 너머로 개신개신 넘어가고 말았다. 나는 나름대로 느낀 게 깊어, 그날로 새총을 발로 밟아 꺾어버리고 다시는 새를 탐하지 않았다.

 

 

 

새, 애착이 초래한 치명적 상처

 

동자승 해진(황해진)은 큰스님 혜곡(이판용)이 저잣거리에 나섰다가 우연찮게 떠맡아 절로 데리고 온 고아다. 기봉은 애착과 갈등의 응어리를 세속에 묻어놓고 입산한 젊은 중으로 어느 대찰의 주지가 소개해준 대로 혜곡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상좌 노릇을 하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위해 용맹정진한다. 혜곡과 기봉은 사제의 인연을 맺은 채로 공부길의 영욕과 허실을 나누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름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저 머리 깎은 꼬마일 뿐인 해진의 세계는 아직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다. 혜곡과 기봉은 말(화두)을 매개로 삼아 성불과 득도의 길을 토론하지만, 해진의 장소는 말이 없는, 말을 못하는 것들의 세상이라 일견 제 나이의 호기심과 모험에 걸맞은 놀이터일 뿐이지만, 배용균은 해진의 그 놀이터 속에서 혜곡과 기봉의 공부길과는 판이한 모습의 공부길을 그려놓는다. 그런데 그것은 흥미롭게도 새와 더불어 시작된다.

 

해진은 물장난을 치다 말고 물속의 자갈 하나를 집어 허공으로 던진다. 쌍을 이루어 살던 새 한 마리가 그 돌멩이에 맞고 물에 떨어져 퍼덕거린다. 경겁한 나머지 한 짝은 날아가지도 못하고 주변의 나뭇가지에 앉아 그야말로 새된(!) 울음을 뿜어댄다. 해진은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그 만고의 ‘애착’ 속에서 새를 잡아 절로 가져온다. 그러나 그가 가져온 것은 잡은 새만이 아니다. 짝을 잃고 남은 새 한 마리도 그를 쫓아와 이후로 줄곧 그의 거처를 맴돈다. 새를 잡아온 해진은 바로 그 애착의 힘으로 잡아온 새를 돌본다. 그러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벽장 속에 구금된 새는 해진의 애착대로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축 늘어진 새의 부리를 집어 물을 먹이려고 하지만, 가령, 횟집의 수족관에 잡힌 횟감이 자발적으로 싱싱해질 리가 없다. 그사이 짝을 빼앗긴 남은 새는 끊임없이 해진의 주변을 배돌며 이 이중적 애착의 후유증을 살아낸다.

 

해진은 자신의 애착만으로는 새를 살려내지 못한다. ‘사랑하므로 죽인다’는 것은 세속의 가장 흔한 이치이지만, 산사에서 살아가며 세상 모르는 동자승 해진도 애착으로써 붙들어온 새를 역시 애착으로써 죽이고 만다. 그는 죽은 새의 시체 위에 기왓장을 엎어둔다. 얼마 후 찾아본 그 시체와 기왓장에는 온통 구더기가 슬어 있다. 해진이 시체를 땅에 다시 묻고 그 기왓장을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는 순간, 그 주변을 서성이던 짝 잃은 새는 기왓장이 깨지는 그 ‘소리’(아, 산사에서의 ‘소리’란!)에 놀라 벽력같이 허공 속으로 솟구쳐 오르고, 이어서 이 모든 소리에 놀란 해진은 발을 헛딛고 절벽 아래 깊은 소(沼)에 빠지고 만다.

 

배용균의 등장이나 <달마가…>라는 작품은 그 자체로 한국 영화사에서 하나의 사건이었지만, 특별히 이 장면의 미학적 완성도와 그것이 자아내는 기이한 감동은 사뭇 기념비적인 것이다. 소에 빠진 해진은 한동안 두 팔을 물 밖으로 내밀고 허우적거리면서 구명을 위해 본능적인 몸부림을 친다.

 

카메라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이 장면을 원경으로 잡는데, 보는 시선에 따라서는 이 잔인한 풍경이 차마 아름답기조차 하다. 해진의 몸부림이 잦아들면서 관객들은 그가 죽었거니 여기는 순간, 어느새 그의 얼굴이 물 밖을 향해 고요히 떠올라 있고, 그의 몸은 마치 삶을 향한 애착의 끈을 놓아버리기라도 한 듯 가벼워지면서 조금씩 수면으로 솟아오른다. (영화상으로는 분명치 않지만, 그가 한순간 정신을 잃고 자아의 애착을 놓아버렸기에 가능해진 현상처럼 묘사된다.) 그러자 해진의 몸은 물흐름을 좇아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얼마 후 그의 몸은 안전하게 물가에 닿는다.

 

소, 길의 상징이자 수행의 방편

 

요컨대, 그는 새를 향한 애착 탓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지만, 물에 빠져 막 익사할 지경에야 목숨과 몸의 애착에서 놓여남으로써 오히려 몸과 목숨을 살리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도 현실적으로 별 신통치 못한 짓이긴 하지만, 특히 애착은 사랑도 돌봄도 아무것도 아니다. 타자의 지평 속 깊이 자신의 몸을 끄-을-고 나가보는 체험이 거듭되지 않고선 애착이라는 치명적 착각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법이다. 그리고 사람살이와 그 인문(人紋)의 공부라면, 타자성을 얻는 게 늘 그 밑절미로 깔린다.

 

그렇게 목숨을 건진 해진은 산그늘 속의 추위에 떨며 길을 잃고 헤맨다. 그리고 ‘길 위의 방황’이라는 테마와 더불어 소가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노릇이다. 내가 그 새의 상처를 가슴에 묻은 채 새총을 내팽개친 후 꼭 10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대학 1학년생이던 나는 같은 교회의 동료들과 어울려 봉사 및 전도 활동의 일환으로 남해의 어느 섬을 찾았다. 그러곤 여러 패로 나뉘어 가호방문을 하면서 내가 이해한 기독교의 진리를 주워섬기고 있었다. 한 농가에서 만난 70대의 노인이, 교회에 나오시라고 설득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말을 건넸다. “학생! 학생은 세상 맨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아는가?” 노인은 내가 그것을 알아맞히면 교회에 나가겠다는 다짐을 주며 내게 재차 답을 요구했다.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노인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오금을 박았다. “소야, 소[牛]! 그것도 모르면서 전도는 무슨 전도야!”

 

해진이 어두워져 가는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에 등장한 것이 다름아닌 소다. 선가의 ‘심우도’(尋牛圖)에서 잘 드러나지만, 소는 길의 상징인 동시에 길[道]로 가는 수행의 방편이자 시금석으로 곧잘 등장한다. 소는 어린 해진이 숲 속을 방황할 때에 그 반려가 되어 줄곧 길라잡이 노릇을 한다. 형식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새로 인해 잃은 길을 소로 인해 찾아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배회의 과정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인의 등장인데, 검정 치마저고리를 입은 이 여인은 숲 속에서 잠에 빠지는 해진을 깨워 죽음에서 구한다. 이 장면에서 여인은 소와 일치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아무튼, 해진이 겪는 외상적 체험의 후유증 속에서야 들깨워진 그의 무의식을 통해 본 적 없는 그의 상처(엄마)가 드러나는 것이다. 혜곡과 기봉이 화두를 놓고 일생일대사의 깨침을 겨루는데, 어린 해진은 새와 소와 더불어 커간다.

 

 

 

 

(22) 배창호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기다리는 자와 떠나가는 자

지질히도 통속적인사랑, 기다림의 환상

 

 

 

1. 이 글에서도 사랑의 통속성을 줄창 지적했지만, 그처럼 통속적인 대상을 인문학, 특히 철학의 논제로 삼아 진지하고 실답게 토의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한번쯤은 ‘한다는 생각’이나 시중에 상품으로 나도는 사랑에 대한 갖은 논의나 수상(隨想)들이 워낙 통속적이고 변변치 못했던 사정도 사랑을 진지한 철학적 주제로 제고하기 어렵게 만드는 데 한몫을 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잘라 말하면, 현대 인문학의 가장 탁월한 성취 중의 일부는 사랑에 대한 그 통속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문화와 욕망의 시대를 선도하는 급진적 주제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진부한 것을 가장 급진적으로 분석해낼 수 있는 재주는 흔히 오해받는 만큼 드물게 귀한 것으로서, 미래의 인문학도 이 지점에서 그 성패를 가늠하게 될 겝니다. 2. 직관적으로 보자면, 배창호는 나이(세월)와 미학적 거리를 두지 못해 그 속에 얹히고 묻히고 잡혀간 것입니다. 3. 다음주에는 정진우의 <자녀목>(1984)을 함께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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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종교나 자기애(나르시시즘)와 더불어 인류의 대표적인 환상인데…영민이 기다리는 행위를 통해서 사랑의 통속성을 증거하듯이 혜린은 떠나가는 행위를 통해 바로 그 통속성을 완결시킨다

 

이 영화는 다시 보아도 지루하고 통속적이다. 젊은 황신혜의 코를 페티시로 염탐(艶貪)할 노릇이 아니라 작품으로만 가량하자면 주목할 이유가 명개 먼지 한 톨만큼도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전 지난 3년간 단 하루도 혜린씨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라는 영민(안성기)의 대사는 거짓말이 아니라 오직 완벽한 ‘무지’ 속에서만 발설될 수 있는 연사(戀辭)다. 한국의 지역 철학자들이 별로 철학적이라고 여기지도 않을 어느 세계적인 프랑스 철학자의 말을 빌리면, 그같은 고백은 “기가 막혀서 웃지 않고는 분석할 수 없는 말”이겠기 때문이다.

 

만고의 사랑은 늘 통속하다

 

그런데 실은 바로 이 지질한 영화가 러브스토리라는 게 그나마 천만다행한 일인데, 세속의 사랑이야기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지질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을 다룬 문학이나 영화가 굳이 통속적일 필요는 없지만) 사랑은, 그 만고의 사랑은 늘 통속하다. 그것은 박인환의 시처럼 통속적으로 들리며, 그의 시를 모짝 신문기사보다 못한 것으로 폄하한 김수영의 큰 눈이나 큰 코처럼 통속적으로 보인다. 김치나 라면이나 혹은 어느 지역의 걸쭉한 국밥처럼 사랑은 오직 그 통속성으로 인해 불멸하지만, 그 통속성이 이내 자연화하면서 사랑은 다시 자신의 알짬을 숨기고, 거꾸로 이 은폐된 무지 속에서 사랑은 변함없는 그 통속성을 강화한다.

 

 

사랑의 약자란 으레 그러하지만 이 영화에서도 영민은 ‘기다리는 자’로 표상된다. 흔한 지적처럼 사랑이 낭비이자 사치의 일종이라면, 그것은 우선 기다림이라는 형식의 낭비이자 사치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예외없는 통속인 짝사랑으로 시작된다. (실은 모든 사랑은 그 본질에서 ‘짝사랑’일 수밖에 없는데, 사랑의 동력은 매력의 물매, 권력의 물매, 그리고 정서의 물매 등, 한쪽을 향한 기울기의 힘으로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평등한 사랑’은 불가능한 개념이다. 사랑이 볼꼴사나운 채로 평등한 꼴이라도 갖추려면 ‘섹스 사회주의’이상의 제도적 규제와 개입이 필요할 텐데, 그때는 이미 사랑이라고 할 수조차 없다. 사랑은 외부에서 임의로 건드리거나 간섭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더욱 더 불평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 아는 대로 사랑은 종교나 자기애(나르시시즘)와 더불어 인류의 대표적인 환상인데, 그중에서도 짝사랑은 환상의 기본을 가장 알뜰하게 보여주는 ‘무관계의 관계’ 형식이다. 이 사실은 영민이 연극 무대 속의 배우로 등장하는 혜린(황신혜)을 짝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으로 더욱 강화된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가족을 이루고 자식까지 낳게 되지만, 혜린을 대하는 영민의 태도는 배우를 대하는 관객의 태도처럼 내내 환상적이다. 이쯤에서, 무대나 스크린 속 여주인공의 호명(呼名)은 환상의 메커니즘을 통해 그녀를 욕망하는 그 누구나에게 정확히 배달된다는 이데올로기론을 들먹여도 좋을 것이다. 영민은 그녀의 공연 때마다 꽃·과일 등을 보내고, 심지어 공연 사진을 앨범으로 만들어 부치면서 관객의 익명 속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영화상으로 이 기다림은 혜린의 불행(사기혼인과 이혼)으로 인해 잠정적이나마 끝나긴 하지만, 영화의 절반은 혜린을 향한 영민의 기다림으로 채워진다. 어쩌면 사랑의 약자로서 그가 기다리는 반복은 기다림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통속의 사랑이란 기다림이라는 반복 속에 깃드는 환상이 거의 전부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은 반복되는 나날과 삶으로부터 우리를 일탈시켜주거나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온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한다.”(장정일, <보트하우스>)

 

영민이 ‘기다리는 자’라면 혜린은 ‘떠나가는 자’로 표상된다. 영민의 기다림이 한갓 아마추어짓이기라도 하듯 혜린은 산부인과 ‘전문’의(라고 사칭한 자)(전무송)와 혼인한 뒤에 뉴욕으로 떠난다. 미인이 ‘전문가’를 찾는다는 것은 가정과 직장, 사랑과 권력, 친밀성과 객관성, 살과 돈, 연인과 동료(친구)로 나뉜 근대 자본제적 세속의 코드와 일치한다. 영민이 기다리는 행위를 통해서 사랑의 통속성을 증거하듯이 혜린은 떠나가는 행위를 통해 바로 그 통속성을 완결시킨다. 실은 기다리는 짓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떠나가는 짓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부아르(<제2의 성>)의 표현법으로, 기다리는 남자를 영영 기다리게 만드는 그 신비의 밑절미는 그녀의 텅빔(vacance)이며, 이 텅빔을 접하는 순간 그는 그녀를 더는 기다리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기다리는 자를 떠나는 일은 여자의 특권이었다. 심지어 만나고 있는 순간에도 여자는 떠나가는 조짐과 시늉을 부림으로써 사회적 약자라는 객관적 핸디캡을 극복하고 개인적 매력의 특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혼인, 기다림에 응답하기

 

통속의 사랑에서는, 떠나가기를 포기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응답하는 행위를 일러 ‘혼인’이라고 불렀다. 혼인이라는 제도 속에서는 짝사랑의 물매를 그 본질로 하는 통속적 사랑의 행위는 상징적으로 끝이 난다. 기다리는 자와 떠나가는 자 사이의 어긋남의 변증법을 통해서만 점점이 성립하던 사랑의 다이내미즘(아니, 다이내미즘으로서의 사랑)은 공식적으로 끝난다. 이후의 기다림은 종종 우스꽝스레 역전되는데, 직장에 출근했다가 돌아오지 않거나 늦게 귀가하는 남자의 이미지는 시계를 쳐다보는 ‘집사람’의 이미지와 겹친다.

 

그러나 배창호는 다시 혜린을 떠나게 만드는데, 그 방식은 이미 안쓰러울 정도로 배창호적이다. (간단히 사족을 달자면, 이런 식으로 배창호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극복’되는 것이니, 공부길에 든 자라면 누구든 마땅히 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지만, 제아무리 한때를 풍미하던 자도 그 자신이 역사 속에서 극복되는 방식을 미리 알 수는 없다는 것 속에 또한 공부의 명암이 서린다.) 제도 속에서 화해한 두 연인이 다시 기다리는 자와 떠나가는 자로서 갈라지는 지점은 역설적이게도 ‘자식’이다. 하지만 다 아는 대로 자식은 혼인이라는 제도의 아교(이는 어느 요절한 시인이 말한바, 그 ‘안전한(!)’ 아교)가 아닌가? 혜린을 떠나게 하는 또 한 번의 통속적 설정은 출산 후유증에서 비롯된 죽음이다.

 

임신중독 증세를 보이는 혜린은 의사와 영민의 권면을 뿌리치고 “진정으로 사랑했던 영민의 아이를 낳기를 소망”한다는 이야기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영민의 아이를 낳기 위해서 그 영민을 버려야 한다는, 내가 듣기에는, 달밤에 거북이 등짝 긁는 소리 같은 이 발명은 이 영화가 파산하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세속의 사랑이 그 고유한 통속성을 얻어 불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둘이 만나서 아이를 낳건 그 무엇을 하건, 이 영화 속의 혜린은 떠나가는 자이면서 배우이고, 영민은 기다리는 자이면서 관객인 것이다.

 

 

 

(23) 정진우 <자녀목>(恣女木, 1984): 여인의 길, 혹은 겹의 이중구속

죽어야 사는, 가부장제 속 여자의 길

 

 

1. ‘이중 구속’의 현상은 흔히 사랑의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하므로 죽인다’는 좀더 일반적인 원칙의 변종으로 볼 수 있지요. 사랑이 애착으로 흐르고 구속과 동일화의 욕심을 부린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래서 애인을 죽여 그 인육을 먹은 어느 희대의 살인마의 발명 역시 한결같지요. “그녀를 죽도록 사랑했어요!” 죽도록 사랑하면 종종 죽이도록 사랑하게 되는 법이지요. 인류에게 끼친 가장 큰 해악이 사랑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뻔한 일입니다. 사랑? 이해하고 신뢰를 얻고 서로 존경하는 관계를 맺되, 부디 그저 현명하게 좋아하는 버릇으로 만족하시길 권합니다.

 

2. 다음주의 텍스트는 이원세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1981)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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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의 이중구속이라는 가혹한 신세에 놓인 연지는 그 체계 밖을 사는 것은 물론 넘볼 수조차 없으며, 그 당대 제도적 체계 속에서나마 나름의 살길을 도모하는 것마저 필경 자녀목을 향한 살신의 길이 될 뿐이다

 

열녀 가문으로 쟁쟁한 당골의 춘당댁에 시집 온 연지(김용선)는 수년간 태기가 없어 백방으로 애를 써보지만 아무래도 삼신할미의 기별이 없다. 일찍이 사드(Sade)는 생산에 있어 남성의 씨에 비해 여성의 태(胎)가 하는 일이 없다는 투로 폄하라도(!) 했는데, 신분·성차별적 전제 위에서 아예 씨 자체가 주제화될 수 없었던 조선의 부권제 사회에서는 오직 여자의 태만을 문제시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지만, 눈앞이 어두운 것은 늘 사회적 강자이기 일쑤다. 그러므로 철학적·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에게는 그 자신의 자아야말로 질둔한 채로 완벽한 강자가 된다. 그래서 남자의 씨를 의심할 수 없는 해석학적 오류, 혹은 무해석의 오류 속에서 늘 여자의 태만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노마님(박정자)은 독단적으로 씨받이(원미경)를 들인다.

 

등잔 밑이 어두운 사회적 강자

 

씨받이인 사월이를 발가벗긴 채 그녀의 몸을 샅샅이 보고 만지면서 ‘아들을 잘 낳는 여자’의 기준을 중얼거리는 노마님의 태도는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의 물질화 그 자체다. “눈초리가 갸름해야 하며, 엉덩이가 암소마냥 크게 퍼지고 크며, 배가 크고 살갗에 광택이 나고 살내가 향긋하며 목소리가 고르고 젖꼭지가 검고 단단하며 배꼽이 깊고 뱃가죽이 두춤해야….” 그래서 여자는 정신이 아니라 몸으로 판별되며, 그 몸은 남자아기를 생산해낼 수 있는 용기(容器)로 판별되며, 그리고 그 용기로서의 존재는 군자의 도리[君子不器]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사월이 이전에도 씨받이를 들인 적이 있는 터라, 가문의 권력자이자 가장의 친모인 노마님의 상상력이 가부장 체제의 관습과 타성에 묶여 있는 반면, 남편을 다른 여자들의 품속에 넘겨주면서도 관인대도(寬仁大度)의 국량을 강요당해 왔던 연지에게는 이미 사태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미립이 생겼다. 박잡한 경험이 주는 미립 속에서 체제의 울타리를 넘어 깨단하는 지혜는 사회적 약자들이 몸을 끄-을-고 살아가면서 자신들을 옥죄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벗겨가는 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어느덧 ‘그릇이 아니라 씨앗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단한 연지는 이 기막한 궁지를 뚫어내기 위해서 대담한 기지-가령, 줄리언 자롤드의 <비커밍 제인>(2007)에 나오는 그 목사들이 여자에게는 반드시 금해야만 하는 항목의 제1위로 꼽았던 바로 그 기지(!)-를 발휘해서 난국을 돌파하려고 한다. 연지는 심지어 씨받이인 사월이조차 짐작하지 못할 방식으로 집안의 하인인 성삼이(김희라)를 사월이의 방에 들여 합방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써 마침내 사월이에게 태기가 생기는데, 이런 내막에 감감한 노마님과 남편은 그녀의 임신을 집안의 경사로 여기고 이 눈먼 기쁨 속에 온 집안이 떠들썩하다.

 

그러나 그 사이, 사월이와 성삼이는 실제로 눈이 맞아 주인 모르게 바람(?)을 피우게 되고, 또 사당패의 모가비인 아버지가 임종시에 딸의 자식을 잠시나마 안아 보려는 청을 노마님이 말살스럽게 거절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불화가 깊어진 나머지 사월이는 춘당댁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 대목에서 다시 연지는 호랑이의 어금니에 걸린 반지를 빼려는 짓을 벌이는데, 가문의 홍복으로 여겨 애지중지하는 사월이의 아들을 쫓겨가는 그녀에게 빼돌려준 다음, 이제는 그녀 자신이 수태하려는 새로운 욕심에서 무춤거리는 성삼이를 다그쳐 그와 동침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그녀를 연모하고 있던 윗마루 의원(전무송)에 의해 발각되고 또 구애를 빌미로 그의 협박까지 당하게 되자, 연지는 엉겹결에 쥔 돌로 그를 상해해서 그 자리를 모면하지만, 결국 의원의 발고로 그녀의 행적은 낱낱이 밝혀져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끼 낀 담장 하나 누구 뜻대로 할 수 없는 양반·열녀의 집안”의 며느리였던 연지는 남다른 기지와 용기로써도 자신을 조여 오는 운명을 넘어서지 못한 채 자녀목(恣女木)에 목을 맨다. 그녀가 궁여지책으로 ‘제 몸을 제 뜻대로 굴리는 여자’(恣女)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봉건적 가부장제가 규정했던 ‘여자의 길’ 탓에 피치 못할 사정이었지만, 그 여자의 길은 곧 죽지 않고서는 자신의 주체를 세울 수 없는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연지를 연모한 나머지 그녀의 약점을 잡아챈 의원은, “대관절, 양반이란 무엇이며 신분이란 무엇이며 체면이란 무엇이오?”라고 다그치면서 모야무지로 함께 도주하자고 꾄다. 그러나 연지의 대답은 한결같다. “전 출가외인입니다. 죽어도 시집에서 죽어야 할 여자의 길을 왜 몰라주신단 말씀입니까?”

 

희생양이냐 또다른 죽음이냐

 

내가 특별한 지적 애정을 지니고 있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정신분열증을 설명하는 가운데 폭넓게 활용한 개념인 이중구속은 쉽게 말하자면 서로 결별할 수 없거나 헤어지기가 어려운 비대칭적 권력관계 속에서 구조화된 진퇴양난의 곡경을 가리킨다. 밖에서 씨받이 들이기를 거부하는 것, 혹은 나아가, 제 자신도 가문의 씨-받이[용기]라는 수동적·운명적인 존재이기를 거부하는 주체화의 길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규율적 권력의 희생양으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씨받이의 운명을 안팎으로 수용하고 겸종의 길을 걷는 게 능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인정 욕구, 그리고 사랑의 돌봄을 졸연히 잃게 되는 또다른 죽음의 길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이중구속이 후자의 경우 속에서도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여인의 의무는 남편을 다른 여자의 방에 넣어주는 데 동의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를 빼앗기도록 강제하는 제도의 억압 앞에서 의연하게 처신해야 하며 심지어 그 용신과 표정조차 범범(泛泛)한 척해야 한다. 그는 질투라는, 억압적 관계 속의 약자에게 주어진 최소주의적 항변조차 금제당하는 중층의 구속 속에 있는 것이다.

 

겹의 이중구속이라는 가혹한 신세에 놓인 연지는 그 체계 밖을 사는 것은 물론 넘볼 수조차 없으며, 그 당대제도적 체계 속에서나마 나름의 살길을 도모하는 것마저 필경 자녀목을 향한 살신의 길이 될 뿐이다. 씨받이 사월이가 자신의 남편과 합방했을 때마다 연지는 홀로 수(繡)를 놓는데, 이 수놓기는 그녀가 놓인 처지와 신세에 얹힌 은유로서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여인들의 수놓기는 여성적 친밀성의 매체이자 상징처럼 표상되곤 하고, 흔히 이야기의 구조를 일러 선형(線形)이라고도 하듯이 실을 뽑거나 잣거나 수를 놓는 것, 혹은 실타래는 그 자체로 이야기에 비유되곤 하는 것이다.

 

생물학자인 수 카터의 실험에 의하면, 위기 상황에 부닥친 초원들쥐 중 수컷은 제 짝을 찾아나서는 데 반해 암컷은 오히려 동료 암컷을 찾는다는데, 이는 여자들이 사회적 약자로서 이야기식 유대관계를 자기보호의 기제로서 활용해 온 이력이나 성격을 살피는 데 꽤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여자의 수다가 흔히 화제에 오르곤 하지만, 여자의 이야기는 연대와 보호, 치유와 구원의 매체로서 오랜 경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굳이 이런 식으로 생각을 이어 보자면, 연지의 수놓기는 자신의 말할 수 없는 사연(이야기)을 다르게 말하는 방식이며, 언어의 바깥으로 억압했던 응어리진 한(恨)을 미봉으로나마 풀어내려는 ‘증상으로서의 예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4) 이원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난쟁이의 꿈

업신여길 사람 없는 그곳으로 그는 갔을까

 

 

 

1. 내가 긴히 신뢰하는 학생들을 훈련시킬 때에 공부의 방편 삼아 몸을 얹어보도록 권유하는 금제가 더러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네 마음을 말하지 말고 남의 외모를 말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이론들을 밑에 깔고 생긴 탓에 그 의미를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지만, 그 취지를 제대로 파악해서 수년간 버릇처럼 차분히 지켜나가다 보면 예상 밖의 놀라운 성과를 얻을 수가 있답니다. 이 금제는 한편 선가(禪家)나 노장(老莊)류의 격언을 연상케 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은 자본제적 삶의 체계를 그 바탕에서부터 흔들어 새로운 욕망과 관계, 그리고 새로운 삶의 양식과 희망을 일구어내는 밑절미로 삼을 계기를 선사한다는 데에 그 요점이 있습니다. 가령, ‘양성평등!’이라거나 ‘텔레비전을 보지 말라’거나 ‘난쟁이를 차별하지 말라’는 슬로건은 오직 그런 식으로만 돌이킬 수 없는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2. 다음 주에는 김기영의 <이어도>(1977)를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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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는 사랑으로 바람을 불며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일하며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게 하련다”는 난쟁이의 꿈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세속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아버지(김불이)가 난쟁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그 존재의 표지가 된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는 은폐됨으로써 증상이라는 미봉 속에 근근이 살아가게도 하건만, 이 난쟁이라는 표지는 어디서든 생급스레 드러나고 언제라도 민주스럽다. 그 존재가 스캔들로 취급되고 그 생애가 유배인 탓에, 난쟁이는 그 무엇도 아닌 난쟁이다.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난쟁이였고, 남편보다 먼저 난쟁이가 될 수밖에 없고, 친구보다 직원보다 이미/벌써 난쟁이인 것이며, 죽은 시체가 되어서도 (검시관으로 찾아온 의사의 말처럼) 여전히 “난쟁이(잖아!)”로 대접받는다. 의식은 근본에서 요동(搖動)이긴 하지만, 난쟁이와 난쟁이 가족의 의식은 오직 그 사실을 중심으로 요동친다.

 

아버지보다, 친구보다 먼저 난쟁이인 존재

 

그래서 아버지가 난쟁이라는 사실은 집안 전체를 감싸는, 눌러도 눌러도 솟아오르는 자의식의 벼리가 된다. 막내딸인 영희(금보라)는 바야흐로 자신의 키가 아버지의 키를 넘어설 무렵의 나이에 이르자 아이다운 맹랑함으로 이 자의식을 선명히 드러낸다. “난 몰라, 아무도 아빠보다 작지 않으면 어떡하지? 아빤 더 부끄러워하실 텐데….” 하지만 동정(同情)은 주체화의 길이 아니며, 소녀는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사이즈의 아비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극히 흥미로운 대목은 영희가 큰오빠인 영수(안성기)를 대하는 태도인데, 그에게 불쑥불쑥 안기거나 팔짱을 끼거나 심지어 한 방에 곁붙어 자면서 마치 소녀가 아빠를 대하듯 부닌다. 큰오빠 영수는 영희에게 아빠의 대체물인 게 명백하다. 하지만 비록 영희는 내내 아빠의 처지를 ‘심정적’으로 동정하고, 심지어 영화의 말미에 이르면 “오빠, 아빠를 난쟁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꼭 죽여버려야 해!”라고 부르짖지만, 아빠보다 빠르게 커버린 그녀에게 아빠가 안기거나 부닐 수 없을 만치 작은 난쟁이라는 ‘물리적’인 사실로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올해는, 저 큰물 건너 어느 나라에서 1776년에 건국한 이후 200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한때 노예의 신분이었던 흑인(혼혈)이 대통령에 뽑히는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짐작건대 이후의 인류사에서 난쟁이가 사회의 실권자가 되거나 주류세력 속에 편입되는 사건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식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지막으로 가족을 위해 봉사하려는 일념에서 아버지는 술집의 호객꾼으로 취업하는데, 술취한 뒤에 본심에 더 충실해지는 게 인간이라던가, 자신을 대하는 동료와 취객들의 태도에 ‘미니보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의 슬픔과 환멸은 깊어만 간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에서 아버지는 큰아들 영수와 함께 손바닥만한 거룻배에 올라앉아 가족의 장래를 부탁하는 중에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나는 매일 밤 꿈을 꾸고 있다…. 아주 황홀한 달나라 꿈인데, 그곳은 난쟁이들만 사는 곳이라 오히려 큰 사람들이 구경거리더라.” “아버진 달나라로 가실 수 없어요.” “넌 이 땅에서 이 아비가 할 일이 남았다고 생각하냐?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희들의 짐을 덜어주는 것뿐이야. 그래서 말인데 내겐 꿈이 있단다. 난 네 어미를 위해 달나라에 먼저 가서 릴리프트 마을(<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을 건설할 참이야. 달에다 난쟁이 마을을 만드는 거야. 그곳에선 난쟁이 남편을 두었다고 네 어미를 업신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그런 난쟁이 마을로 니 어머니를 모셔다가 여왕으로 삼을 작정이다.”

 

 

아버지가 달 속에 상정한 난쟁이 마을이라는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없는 곳’이다. 이 영화의 관객이라면 영영 잊지 못할 장면인 굴뚝 신에서 아버지는 그 굴뚝의 꼭대기에 걸터앉아 그 없는 나라를 향해서 종이비행기 편지를 날려 보낸다. 유토피아(달나라의 소인국)와 세속 사이에 자리를 잡은 채로 없는 그곳을 그리워하는 이 우화 같은 장면은 이 난쟁이-아버지가 내몰리게 될 자리의 비극성을 처연하도록 ‘앓음’답게(아름답게) 예시한다. 굴뚝 위에 앉아 없는 곳을 향해 종이편지를 날려보내야 하는 이 난쟁이의 자리는 대체 어디일까? 그것은 ‘공적 지위를 얻지 못한 상태로 내내 유랑하는 일종의 난민’(한나 아렌트)과 같은 것일까? 혹은 ‘공민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로 정치화되는 벌거벗은 생명(blosse Leben)’(아감벤)의 일종일까? 아니면, 청송감옥의 수감자들, 숱한 정신병원과 요양소에 갇혀 있는 익명의 환자들, 불법 이주민노동자들, 서울역전 광장의 구석구석에 스며든 노숙자들처럼 내부의 식민지가 되어 ‘국가의 정치공간이 구성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내부 속의 국가 없는 외부’(주디스 버틀러)일까?

 

도시 근대화의 변죽으로 내몰린 하층민

 

소싯적에 큰아들 영수는 염부(鹽夫)가 되지 않고 공부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이웃집 명희의 사랑을 얻지만, 그는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명희가 술집의 접대부로 취업해서 나가기 전날 밤에 영수를 만나서 늘어놓은 하소연이다. “나 내일부터 술집에 나가. 어쩔 수 없잖아. 영수가 약속을 어기고 공장에 나가는 것처럼. 난 내일이면 끝장이야. 난 모든 것을 영수에게 먼저 주고 싶어. 부탁이야 나를 가져.” 얼마 후 임신한 채로 버려진 명희는 남은 돈 전부를 영수네에게 빌려주고 음독자살을 하는데, 응급처치를 하는 의사의 타성적인 거들먹거림이 유달리 눈에 띈다. 도시 근대화의 변죽으로 내몰린 하층민을 대하는 엘리트 전문가의 태도는 난쟁이-아버지의 주검 앞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난~쟁이 아냐?”

 

가족은 철거민의 신세에 내몰리면서 주택분양권까지 헐값으로 팔게 된다. 주물공장에서 일하던 영수는 아무런 보상 없는 산재(화상)를 입고, 둘째 영호는 첫 권투시합에 출전해 케이오패를 당하고, 자신의 존재를 가족의 짐으로 여겼던 아버지는 예의 그 굴뚝에서 몸을 날려 달나라로 가버린다.

 

그 사이에 부동산 투기업자인 박우철(김추련)의 눈에 든 영희는 그의 부하직원이자 애인 노릇까지 하면서 간신히 주택분양권을 되찾아 본곳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난쟁이-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사랑으로 바람을 불며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일하며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게 하련다”는 난쟁이의 꿈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세속 속에서는 자취를 감춘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급진적(!)인 꿈이 세속의 체계 속에서 흔적 없이 방전되었다면, 분노와 야심 속에서 세속을 겪어가고 있는 영호의 노래는 좀더 현실적으로 들린다. “선뜻~선뜻 잊읍시다 간밤 꾸었던 슬픈 꿈일랑 아침 햇살에 어둠 가시듯 잊어~버립시다 가끔~가끔 찾읍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조심~조심 아주 조~심 다시 찾읍시다.”

 

 

 

(25) 김기영 <이어도>(1977): 천남석의 자손들 ~ 문명에 떠밀려가는 환상의 섬

 

 

 

1. 제주도 출신으로 내 오랜 지기인 이아무개 교수를 통해 ‘이어도’에 대한 그곳 주민들의 감회를 엿듣는 중에 묘한 갈등에 휩쓸려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제주도에서 살던 고등학교 시절까지 단 한 차례도 이어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고, 오히려 대학에 진학하면서 육지로 나온 뒤에야 난데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어도에 대한 담론을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자리잡았던 계층계급상의 처지와 여건이 중요한 변수였으리라고 짐작할 수도 있겠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지닌 ‘이어도’ 식견 역시 다분히 문학적·신화적 상상력에 의해 부풀려진 것으로서 주로 이청준의 소설적 각색을 나름대로 곱씹어오면서 얻어낸 것들에 불과했겠지요. 그렇지만, 바로 이런 난감한 일이야말로 이른바 지식사회의 ‘담론’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이나 그 결절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이야기를 숨긴다’는 명제 다음에 곧바로 와야만 하는 명제는 ‘담론은 이야기를 숨긴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다음 주에는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를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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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이미 구성적으로 연루하고 있기 때문에 그 환상의 부재(혹은 ‘비어 있는 중심’)를 증명하는 것은 대체로 위험하며 실은 더러 치명적이기도 하다.

 

“이어도란 제주도민의 전설에서 나온 환상의 섬을 말합니다. 어부들이 고기잡이 갔다가 죽으면 그 넋은 이어도가 회수해서 영생토록 삶을 누려줄 뿐더러 어부들의 생사관을 확립시켜 죽음과 대결하는 이들의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관광회사의 기획부장으로 ‘이어도’라는 호텔 사업에 개입한 선우현(김정철)이 그 기획의 취지를 설명하는 중에 나온 말이다.

 

환상과 나르시시즘, 인간존재의 밑절미

 

환상(판타지)은 말 그대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부재를 증명해서도 안 되며, 아니 그 부재를 증명할 수도 없다. 내가 인류의 대표적인 3대 환상으로서 종교와 사랑과 자기애(나르시시즘)를 흔히 거론하곤 했지만, 이처럼 환상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이미 구성적으로 연루하고 있기 때문에 그 환상의 부재(혹은 ‘비어 있는 중심’)를 증명하는 것은 대체로 위험하며 실은 더러 치명적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모태가 된 이청준의 원작 <이어도>(1974)를 보면, 해군은 첨단 장비를 동원해서 이어도라는 섬이 환상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환상이란 단지 거짓말도 아니며 병리현상일 뿐인 망상(delusion)도 아니다. 환상은 그 가부나 진위만으로 가치가 판별되는 단순한 논리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신의 존재/부재를 증명할 수 없듯이, 사랑의 본질을 눈앞에 버르집어낼 수 없다. (옛 시인은 이를 두고 “사랑이 엇더터냐 둥글더냐 모지더냐 기더냐 자르더냐 …”라고 읊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인간이 벌이는 활동이라면 그 무엇이든 그 ‘수행성’의 효과 속에 똬리를 튼 나르시시즘을 완전히 제거할 수가 없는 법이다. 문학이나 예술, 종교와 사랑, 그리고 효심이나 애국심에서 나르시시즘이 차지하는 위상이 단단하고도 오히려 풍성하다는 사실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환상과 나르시시즘은 전근대의 유산이 아니라 차라리 인간존재의 밑절미인 것이다. 이청준의 <이어도>가 과학적 증명의 논리와 대결하면서 토속적 신화의 세계를 지켜내려는 천남석을 그렸다면, 김기영의 <이어도>는 “제주도의 상징인 이어도를 외국인 상대의 핑크호텔의 대명사로 쓰이는 것에 격분해서 항의하는” 천남석(최윤석)을 그린다. 이청준의 천남석은 현대 과학문명이 그 부재를 증명하려고 했던 이어도의 환상을 죽음(자살)으로써 (환상적으로) 되살려내려는 데 반해, 김기영의 천남석은 도시화와 산업화의 후유증에 휘말려들어 불모와 불임의 증상을 앓게 되는 섬의 현실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천남석의 기원은 제주 섬으로, 어부와 해녀의 삶을 살아온 조상들의 영욕과 애환이 그의 몸에 기입되어 있다시피 한 존재다. <이어도>는 이어도라는 상징으로 표상되는 특이한 삶의 공간을 천남석이라는 인물로 대변시키는데, 그의 사랑과 사업, 항의와 죽음, 심지어 익사한 그의 주검을 무당이 불러내어 그의 여인과 시간(屍姦)케 하는 말미의 그로테스크한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과 죽음(주검)은, 도시문명의 미명 아래 찾아든 죽임과 불임에 대한 항의와 대결로 일관한다. 임신에 실패하는 선우현의 아내, 늘어가는 환경오염의 폐해, 천남석이 공들여 기획하지만 실패하는 전복양식, 관광유람선 선상에서의 항의와 죽음은 불모의 체제와 불화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섬의 주민들과 자연이 오랫동안 생산적으로 공존해 왔던 그 순리의 왜곡을 극명하게 내보인다. 그런가 하면, 번식과 생산의 원색적 이미지로 넘나드는 토속적인 섬의 풍속은 시류에 침탈당하면서 이울거나 실그러질 수밖에 없는 전통의 운명을 처연하게 증거한다.

 

 

앞선 평자들의 지적처럼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압권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시간 장면이다. 호텔의 유람선 선상에서 이어도의 상업화에 항의하던 끝에 난바다에서 실종된 천남석의 주검을 마을의 무당이 주술(굿)의 힘으로 끌어올린다는 설정이다. 그러고는 천남석의 어릴 적 배필로 짝지어졌던 술집 작부 민자로 하여금 뭍으로 끌려온 천남석의 주검과 몸을 섞게 해서 불모(不毛)를 방지하고 그 자손을 잇게 한다. “천남석의 자손은 길이 이어질 거예요”라는 민자의 말은, 이 영화가 천남석의 존재로써 상징하는 가치를 처리하는 지향을 선명히 드러내면서, 영화 전체의 주제의식을 엿보게 한다.

 

마침내 신으로 승격하는 희생양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천남석이라는 존재의 삶과 죽음은 ‘신화적인 기억 속에서 제의적으로 재연되는 가운데 마침내 신으로 승격하는 희생양’(르네 지라르)과 놀랍도록 닮았다는 점이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 희생양의 죽음을 자청한 뒤에 부활해서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독교의 도그마에서 명시적으로 표상되듯이, 당대의 시속과 시류가 용인하고 추구하는 욕망 일반을 거부하고 다른 삶의 양식과 희망을 일군 아방가르드는 에피고넨(아류)들의 집단적 폭력에 의해 제의적 희생의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에피고넨들이 결코 앞질러 알 수 없는 것은 자신들이 죽인 그 희생양이 후대의 기억과 제의적 반복을 통해서 신적 지위를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그들이 미리 알았더라면 통탄해 마지않았을 것은 그들의 자손들인 또 다른 에피고넨들이 그들이 죽인 바로 그 희생양을 모방의 모델로 따르고 섬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의식적인 활동이든 무의식이든 혹은 역사상의 것이든, 반복의 중요한 한 갈래는 개인의 의도를 넘어서는 ‘복수’다. 천남석의 극적인 희생은 그가 겹으로(두 차례) 제물이 된다는 사실, 곧 살아서도 제물이었고 죽어서도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로 배가된다. 그는 근대적 도시화와 상업화에 의해 오염되는 이어도의 신화적 결백을 지키다가 선상에서 희생양의 죽음을 맞고, 그렇게 익사한 그의 주검은 섬의 무당에 의해 되불려와서 마을 여인네들의 생산(수태)을 위해 씨를 제공하는 기괴한 의식의 희생제물이자 주인공이 된다.

 

 

 

(26)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1973): 창녀의 사랑, 때밀이의 사랑

상처받은 자들의 어리석은 사랑

 

 

1. 이른바 ‘세계체제론’의 이론가인 월러스틴(I. Wallerstein)은 자본주의의 생성과정을 귀족계급의 몰락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귀족들의 성공적인 변신과 이전(移轉)이라고 분석합니다. 부잣집 아이들이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한다는 보도가 연일 신문시장을 치지 않던가요? 여러분들도 목사 집안에서 목사가 나고, 판사나 의사 집안에서 판사나 의사가 나고, 또 교수 집안에서 교수가 나는 것을 보시고는, 아직도 사회적 계급이나 신분이 통하는 시절일지 모른다는 의문을 지닌 적이 있겠지요? 나같이 평지돌출한 자가 뒤늦게 깨단한 것도, 이른바 유명한 교수 지식인들이 대체로 예사의 행내기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답니다. 그렇다면, 영자와 창수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영자가 창수를 만난 것은 왜 사람을 구원하는 ‘사건’이 되지 못할까요? 일부의 이론가들이 주워섬기곤 하는 그 ‘사건’마저도 계급계층적으로 인간들을 차별하는 것일까요? 창녀인 영자의 신세를 결정지은 것은 창수의 호의일까요, 영자의 버릇과 인간성일까요, 그 인맥일까요, 그녀의 집안 배경과 세속적 셋줄일까요, 아니면 신의 섭리일까요?

 

2. 다음주에는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을 이 연재물의 마지막 텍스트로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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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자들의 사랑은 그 상처를 덧나게 하고 강박적으로 반복하고 그에 대한 턱없는 비용과 대가를 요구하는 어리석음의 고독인 것이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상호작용의 형식조차 어느 시대에 정착한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자본주의의 실질적인 기원을 16세기 구라파의 어느 지역으로 소급시키는가 하면 그 종말을 가까운 장래에 배치하는 학자들이 있듯이, ‘사랑’이라는 그 환상의 중심을 강박적으로 배돌면서 만들어진 치열한 관심이 근대의 개인주의적인 틀거리 속으로 제도화한 일도 투미하게나마 그 기원의 시공간을 잡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영원한 게 아니라 역사적 계기와 이력을 좇아 그 나름의 곡절을 지닌 채 형성된 것이고, 이것은 ‘사랑의 역사’라는 미시사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갑돌이와 갑순이, 그리고 영자와 창수의 사랑에도 두루 적용된다. 그러나 비록 개인들의 사랑이 갖은 시공간의 제약으로 규제당했고, 결코 평등할 수 없는 비대칭적 권력관계에 따라 이미 오염되어 있으며, 사랑의 욕망 그 자체가 연인들의 자율성을 밑바탕에서부터 희롱하는 모방의 덩어리일지라도, 아아, 우리네 인생이 단 한푼어치의 감동과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을진대 그것은 속히 사랑의 몫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신산스럽고 굴곡진 사랑의 이력

 

그렇게, 그런 식으로 우리의 ‘영자’(염복순)와 창수(송재호)도 신산스럽고 굴곡진 사랑의 이력을 가꾼다. 약관의 나이인 시골내기 창수는 철공소의 직원으로 활달하고 성실한 청년이다. 어느 날 사장집으로 심부름을 가는 걸음에 그곳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또다른 시골내기 영자를 만나 첫눈에 반하고 만다. 그러나 창수의 구애가 열매를 맺기도 전에 그는 입대하게 되고, 그가 없는 3년은 젊은 영자에게는 길고 긴 나날이다. 그사이 주인집의 망나니 아들에게 강간을 당한 뒤에 가정부직에서 쫓겨난 영자는, 배움도 기술도 없이 상경한 젊은 여자에게 배당된 1970년대의 이력들(봉제공장 여직공, ‘빠걸’, 버스 차장 등)을 고스란히 겪으면서 도시빈민의 상처입은 자아를 학습한다. 그러다가 차장 노릇을 하는 중에 사고를 당해 왼팔을 잃게 되고, 실의에 빠진 영자는 보상금 전액을 시골집으로 송금한 뒤에 자살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미수에 그치고 만다. 월남에서 돌아온 창수가 영자와 재회하게 된 것은, 끝내 창녀로 살아가게 된 영자가 경찰의 집중단속에 걸려들어 잠시 유치장에 수감되었을 때였다. 창수는 영자의 의수(義手)를 손수 만들어주는 등, 그녀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며 재기를 돕고 더불어 입대로 이울었던 사랑의 불꽃을 다시 지피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멋진 때문이 아니다. 그 모든 사랑은 물매의 효과이며 그 모든 이별은 이 물매의 수행성 탓에 생기는 피치 못할 인과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영화 속에서는 그리 명백하게 주제화되어 있지 않지만, 정작 문제는 둘 사이에 실질적으로 개입하는 상처의 기억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이 상처의 문제를 유일하게 넘겨짚는 사람은 창수와 함께 보일러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씨 아저씨(최불암)뿐이다. 그가 ‘상처’를 들먹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둘의 관계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려는 것은 상처의 조짐에 대한 불길한 예감 탓이다. 김씨는 창수의 실질적인 부친 노릇을 하면서 창수의 삶에 이모저모로 개입하는데, 영자로부터는 “창수하고 나하고의 문제에 왜 아저씨가 감 놔라 배 놔라 하세요?”라고 퇴박을 당하면서도 “창수는 내가 잘 알아!”라면서 겁박을 주거나 엉너리를 친다. 김씨가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 것은, 인간만사의 골과 마루를 섭렵해 본 이들에게서 미립처럼 생겨난, 이를테면 두 존재의 물적 성분상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직감 때문이다. 김씨는 그것을 소박하게나마 (영자를 향해) 이렇게 표현한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요. 보태서 둘을 만들어주는 사람과, 빼서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 두 가지가 있단 말이야.”

 

‘상처는 어리석음이다’

 

그러고는 성병에 걸린 창수가 되레 영자를 나우 걱정하자 “남 생각 말고 니 장래나 생각해”라고 일침을 준다. 상처 일반이나 특히 외상(트라우마)에 대한 갖은 이론들이 번성하고 또 텔레비전 교양처럼 유포되고 있지만, 나는 ‘상처는 어리석음이다’(아도르노)라는 짧은 단상에 맺힌 이치만큼 강렬하고 실용적인 지침(!)을 알지 못한다. 김씨의 개입과 간섭은 일견 아들과 같은 젊은이의 장래를 염려하는 아버지 같은 이들의 지릅이자 직관이겠지만, 그것은 개인들의 상처로 건너갈 수 없는 그 죽음과도 같은 어리석음의 심연에 대한 자각이기도 한 것이다. 가령 창수는 영자를 사랑했고 또 혼인생활을 하면서도 그럭저럭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추정은 그리 과한 짐작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낭만주의가 흔히 범하는 최악의 실수는 (이미 니체나 그의 동시대인 J. S. 밀이 예리하게 정식화하고 있듯이) 이 사랑이라는 신성(神聖)이야말로 갖은 간난과 신고와 상처를 초극해서 마침내 그 열정의 진실을 완성하게 된다는 준역사철학적 신념이다.

 

이 달밤에 거북이 등짝 긁는 소리 같은 신념을 일거에 쳐부술 수 있는 자는 물론 김씨 같은 (신념이 아니라) 몸으로 삶을 때운 중늙은이들이다. 강간당하고, 배신당하고, 한쪽 팔이 잘리고, 창녀가 되어 갖은 수모와 모욕을 당하고, 그리운 가족을 등져야만 하는 처지를 반복해야 하는 어느 여자. 그리고 철공소 직공이나 때밀이와 같은 자본주의적 계서제의 최하층 노동을 담당해 살아가면서도 그 임금의 거의 전부와 젊은 열정의 거의 전부를 한 여자에게 투여하는 과도한 비용의 주인공인 어느 남자. 이 여자와 남자의 사랑은 반드시 이루어져서 세속의 지질하고 졸루한 잡탕속을 단숨에 넘어서는 빛나는 풍경을 선사해야 한다는 당위는 사랑의 환상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인간종의 상상을 빼곡히 채운다. 그러나 현실은 김씨의 편이다. ‘희망이 없이 사랑하는 자만이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어느 (보기보다 꽤 뚱뚱한) 독일 문필가의 말처럼, ‘내 뜻 속에서 늘 복원 가능하다’는 환상의 논리에 취한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관념론자인데, 이들이 가장 어두운 부분은 상처의 긴 그림자에 대한 오래된 지혜다.

 

슬픈 노릇이고 어쩌면 사뭇 비인간적인 지적이기조차 하지만, 상처는 그 근본에서 어리석음이며, 부처나 공자가 아니라면 그 어리석음의 진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처받은 자들의 사랑은 그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져 가면서 더불어 이루는 호혜의 합작이 아니라 그 상처를 덧나게 하고 강박적으로 반복하고 그에 대한 턱없는 비용과 대가를 요구하는 어리석음의 고독인 것이다. 그렇다면 세속이라는 갖은 상처의 착종(錯綜)이 연인들의 여건일진대, 그 모든 영자들과 창수들의 이별은 영영 고지된 것이나 다름없어, 이제 우리들의 시대 이후로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좋아할 수 있는 시절은 끝났고, 한 여자가 한 남자를 기다리는 시대는 종쳤다.

 

 

 

27.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 하아얀 고래, 하아얀 의욕

자~ 떠나자…연대의 바다로, 현실을 넘어

 

 

1. 오늘, 27회로 이 연재를 끝냅니다. 인맥도 학맥도 아무런 셋줄도 없는 제게 파격적인 지면을 제공해준 <한겨레>에 감사합니다. 특히 후덕하고 합리적으로 필자를 대했던 최재봉 기자의 한결같은 태도는 몹시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글이 어렵다고 불평하신 몇몇 독자들에게도 감사드리며, 이후에도 될수록 어려운 글들을 골라서 보시기 바랍니다. 죽을 즐기는 것은 병자이지만, 밥을 잘 씹어 죽으로 만들어 먹는 것은 건강법이기도 하답니다.

 

2.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다루지 못한 것, 그리고 배창호 감독의 작품을 혹평한 것에 일말의 회한이 있습니다. 혹시 그들을 좋아하는 분들은 제가 아무런 영화비평가가 아니며 그저 실직한 철학자이자 인문학자일 뿐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3. 끝으로, 자료와 비평으로 이 연재를 응원해준 김현수 감독 등 많은 후학들에게 감사의 정의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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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으로 튀면서도 허무할 수밖에 없는 젊음의 분위기를 잡아낸 단면들은 역사를 잃어버린 ‘풍경’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영화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고래’는 바로 이 풍경의 사이비성을 고발하는 실재의 은유다

 

1970년대를 살아가는 대도시의 어느 대학생이 별안간 ‘난 고래를 잡으러 갈 거야!’ 하고 외친다면 그는 대체 누구를 향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난 고래 잡으러 갈 거야. 난 용기를 보여줄 거야. 그러지 않고선 오늘의 나를 지탱할 수가 없어”라는 영철(하재영)의 절망이 가로지르고 있는 당대 현실의 속내는 대체 무엇일까? 대도시의 명문대에 속한 젊은 대학생의 용기가 졸연히 고래로 투영되어야 할 때 생략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고민은 무엇일까?

 

 

그가 장생포의 어느 포경회사를 찾아간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선언이 미쳐(狂) 미칠(達) 수 있는 조숙한 도인의 화두도 아니라고 한다면, 그의 ‘고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시대의 허무를 낭만과 삿된 열정으로 뚫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던 70년대의 ‘대학생’으로서 그는 세속적 체계의 욕망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억압된 마음속의 ‘희망’을 부지불식간에 지피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영철은 “고래는 동해바다에 있지만 내 마음에 있기도 해”라고 굳이 덧붙이는 것일까?

 

우스꽝스럽게도 고래는 흔히 새우에게 물먹(히)는 존재로 희화화되곤 한다. 고래가 얕은 물에서 놀면 새우들에게 집단으로 따돌림이나 골림을 당한다는 것이다. 새장 속의 독수리가 날갯짓을 과시할 수 없고 노자(老子)에게 경주용 말을 타게 할 수 없듯이, 웅덩이에서 고래가 제 힘을 발휘할 수는 없는 법이다. 새우들에게 축출당한 고래는 현실 속으로 외출하지 못한 채 ‘마음’ 속으로 되먹히고 억압된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서 화석화의 위기에 처한 고래는 미치거나(狂) 혹은 미친(達) 영혼의 물길을 타고 바다로 나아간다. 바다에 이르러, 그 영혼의 주인공은 제의(祭儀)와 같은 죽음을 맞고 고래는 그의 육신을 뚫고 대양 속으로 유영을 시작한다. 이것이, “이 세상 모든 것은 가짜 아닌 것은 없다”라는 병태(윤문섭)의 말에 “그래도 난 믿는다 … 사람을 믿는다”라고 대답한 영철(들)의 행진기(行進記)다.

 

 

역사를 잃어버린 ‘풍경’

 

<바보들의 행진>이 드러낼 수 없었던 시대의 장막을 한 꺼풀만 벗겨본다면, ‘철학’과 출신의 대학생들이 ‘바보’들이 되어 ‘고래’를 잡으러 ‘동해’로 가거나 체계의 여줄가리로 동화될 수밖에 없었던 당대적 현실과 그 배경이 눈에 선하게 잡힌다. 그렇기에 낭만적으로 튀면서도 근본에서 허무할 수밖에 없는 젊음의 분위기를 잡아낸 단면들은 그저 역사를 잃어버린 ‘풍경’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시, 풍경은 그 기원을 은폐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고래’는 바로 이 풍경의 사이비성을 고발하는 실재의 은유에 다름 아니다. 철학과 출신에 대한 대중적 표상(“철학과 다녔다니까 책을 많이 보셨을 거 아니에요?”/ “철학과 다니시잖아요 … 철학과를 나와서 어떻게 돈을 버시죠?”)도 이들이 바보가 되어 행진을 해야 하는 원인으로는 충분치 않다. 실내가 자본주의적 현실로부터 퇴각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며 자연이 체제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저편’이 아닌 것처럼, 이 표상마저도 시대의 비애를 번롱하는 풍경의 일종인 것!

 

당대 최고의 엘리트 수업을 마치고 1968년 세계혁명의 여진을 현장에서 겪은 하길종에게 1970년대의 엄혹한 군사독재의 현실은 한마디로 사이비의 그것이었으며, 이 퇴로 없는 현실을 뚫어내기 위한 영화적 노력과 절충 속에서 ‘바보’와 ‘고래’가 탄생한다. 어느 평자의 지적처럼, 그는 “일종의 무뇌아적인 대사들로 현실의 암담함을 간접적으로 공격”한다. 그러므로, 앞서 시사한 것처럼, 철학과 대학생들의 낭만과 사랑, 그리고 허무라는 표면의 이야기는, 풍경이 기원을 숨기고 이야기가 역사를 감추는 시대에 그가 선택한 우회로에 불과한 것이다.

 

알다시피, 1848년의 세계혁명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구좌파들의 제도화에 일정한 성과를 얻는 계기가 되어 이후 좌파 세력들이 도처에서 정권을 잡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1945년 해방 이후에야 한반도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의 다양한 갈래들이 계급적으로 분화하면서 정권을 향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극심해지고 분단된 남북에서는 화해할 수 없는 정권들이 오랫동안 완악하게 대립하게 된다.

 

1968년의 세계혁명은 미국의 우파적 헤게모니는 물론이거니와 구좌파들이 몇가지 형식으로 벌여온 전통적인 반체제 운동들에 대한 불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이후 신좌파의 제도화와 그 시민사회적 분화로 열매를 맺은 이 운동은 당시 구라파와 북아메리카 전역을 들썩인 세계적 규모의 요개(搖改)였지만, 그 여파는 일본에서 그쳤고, 김일성과 박정희가 적대적 공생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한반도에는 강 건너의 소문이나 일부 운동권의 비합법적 학습의 대상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병태와 영철과 영자를 엮는 사랑과 낭만과 허무의 ‘이야기’는 이와 같은 ‘역사’를 숨겨야만 드러낼 수 있었던 탈역사정치적 풍경인 셈이었고, 하길종의 불안한 카메라워크는 이 세계사적 현실의 허실과 영욕에 동시에 노출되었던 작가의 두동진 자의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한반도의 정치적 지체는 1968년의 세계혁명의 여파를 20년쯤 지난 1987년 이후의 지평 속에서 압축·재현하는 형식으로 계속된다.

 

 

철학적 바보들의 길, 현명한 동무들의 길

 

병태가 찾아서 떠난 동해바다 속의 ‘하아얀 고래’는 현실을 바꾸는 힘으로서의 상상력이 집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영화 속의 일차적 맥락을 떠나서 보더라도, 생활세계의 가시적 지평을 통히 지배하고 있는 체계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그 모든 가욋사람들을 견인하는 눈부신 푯대와도 같은 것이다. ‘하아얀’이란 형용어는 가령 사르트르가 카뮈의 탈정치적 글쓰기를 지목해서 말한 그 ‘백색(글쓰기)’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뉴턴의 흰색과 안정효식의 ‘하얀(전쟁)’과도 다른, 인간의 근원적 열정/수난(passion)의 층위에서 이념의 저편으로 묵묵히 걸어나가는 그 보행의 빛과 같은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당대적 체계와 생산적으로 불화하는 인문적 삶의 양식, 그리고 이념의 색깔들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산책과 연대의 태도를 일러 ‘하아얀 의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하아얀 의욕의 행로가 하아얀 고래를 찾아 나서는 철학적 바보들의 길, 현명한 동무들의 길이라는 점도 공들여 서술한 바 있다. 물론, 이 ‘동무들의 산책’은 ‘바보들의 행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기획이었다. <끝>

 

 

김영민 철학자·sophy.pe.kr/jk.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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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에서 ‘바보들의 행진’까지… 철학자가 본 한국영화

김영민 교수 ‘영화인문학’ 펴내

철학자이자 숙명여대 교수인 김영민이 영화를 매개로 삼아 인문학적 가능성을 드러내려 시도했다. ‘영화인문학’(글항아리 펴냄)이 그 산물이다. 부제는 ‘어울림의 무늬, 혹은 어긋남의 흔적’. 가까이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년)에서부터 멀리는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년)까지 한국영화 27편에서 길어낸 통찰을 에세이 형태로 담았다.
 

저자에게 영화 ‘밀양’은 “‘인디아나 존스’ 따위의 영화 30개와도 바꿀 수 없는 수작”이다. 이유는 ‘밀양’이 종교라는 나르시시즘의 형식에서 벗어나 동종의 상처가 만났을 때에야 진정한 용서가 가능하다는 진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 ‘복수는 나의 것’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 으뜸으로 치켜올리면서 “내가 아닌, 내가 모르는 수많은 너로 이루어진 폭력의 구조, 바로 그것만이 폭력을 온전히 소유한다.”는 점을 살펴내고 있다. 이밖에도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등이 두루 도마에 오른다.

 

사실 영화비평의 권위는 약해진지 오래다. 개인블로그와 영화전문잡지는 영향력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다. 이런 영화비평에 대해 저자는 “시속의 유행이나 대중의 취향을 버르집고 따져 그 이치들의 맥을 잡고 거기에 틈타는 구조와 체계를 유형화시키며 이로써 (체계의 욕망이 아닌) 외부성의 희망을 조형해내는 노력”이라고 뜻을 새로이 새긴다. 제목이 ‘영화비평’이 아니라 ‘영화인문학’인 것은 특정한 매체에 특권적으로 머물지 않기 위함이다.

 

1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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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김영민이 ‘이야기하는’ 영화 ~ 〈영화인문학〉

 

» 〈영화인문학〉

<트랜스포머-패자의 역습>이 극장가를 장악했다가 물러난 뒤, 한국 최초 재난영화인 <해운대>가 짧은 시일 안에 500만 이상의 관객을 모았다. 이 두 영화의 선전은 첨단을 자랑하는 컴퓨터그래픽(CG) 덕일까. <밀양>부터 <고래사냥>까지 영화 27편의 영화비평을 담은 <영화인문학>의 지은이 김영민 숙명여대 철학과 교수는 “아니다”라고 답할 게 분명하다. 그는 ‘영화가 영화인 이유’를 ‘컴퓨터그래픽’이 아니라 ‘이야기’에서 찾기 때문이다.

 

<영화인문학>은 그가 강조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영화를 이야기한’ 책이다. 책 제목에 굳이 ‘비평’ 대신 ‘인문학’을 넣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를 소개하면서, 외국의 유명 영화비평가나 감독의 말을 인용하는 대신, 카뮈와 프로이트의 통찰을 원용한다. 당연히, 이 책에선 장면 전환의 기법 따위를 논하지 않는다. 대신에 진리, 종교, 가족, 조직, 타인, 욕망 등 인문학적 주제들이 그 자리를 메운다.

 

그가 영화 이야기를, ‘종교의 나르시시즘적 성격’을 다룬 <밀양>에서 시작해 ‘암울한 군사독재 체제’를 그린 <고래사냥>으로 매듭짓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형이상학에서 현실세계까지 인문학의 전 영역을 다루고자 하는 욕심이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괴물>에서 “진리의 낯섦”을, <달콤한 인생>에서 “조직의 관리 본능”을, <극장전>에서 “모방하는 욕망의 드라마”를, <복수는 나의 것>에서 “수많은 너로 이루어진 폭력의 구조”를 파악해낸다. 복잡한 영화 전문용어 없이 영화의 속내를 전달하는 힘, 그게 바로 인문학의 힘인 듯하다.

 

/글항아리·1만5000원. 김보근 기자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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