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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독일영화 다이어리 ~ 양기승(오마이뉴스 연재)

by Wood-Stock 2009. 6. 8.

[독일영화 다이어리 ①] 프리츠 랑 감독의 <메트로폴리스>

미래의 도시, 로봇 그리고 SF의 시작

 

 

현재 극장가를 휩쓸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과의 전쟁을 선포한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최신작 <터미네이터 : 미래 전쟁의 시작>이다.

 

<터미네이터> 시리즈 속의 기계는 인간과 거의 흡사하다. 사람처럼 자연스럽지는 못하지만 대부분의 말과 행동을 따라할 수 있으며, 스스로 무언가를 판단하고 구별할 수도 있다.

 

사람처럼 말과 행동을 하고 거기에 사람을 죽이는 임무를 띤 로봇 '터미네이터'가 등장했을 때 많은 이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포와 스릴을 느낌과 동시에, 무엇보다도 그 놀라운 상상력과 스크린에서 실현된 새로운 미래 세계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마치 현실처럼 느껴진 탓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터미네이터> 시리즈와 같은 맥락의 SF 영화들은 최근들어 수없이 많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점차 발전해가는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으로 마치 곧 다가올 미래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SF 영화는 최근에 만들어진 장르가 아니다.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 없이 미래 공간과 미래 기계를 그대로 재현해낸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현재의 SF 영화들과 미래의 SF 영화에까지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도 하다. 바로 프리츠 랑 감독의 1926년작 <메트로폴리스>다.

 

지상 세계와 지하 세계로 나뉜 미래의 도시, 메트로폴리스

 

미래 도시인 메트로폴리스 세계는 지상과 지하로 나뉘어져 있다. 지상 세계는 높은 빌딩이 세워져있고 다양한 형태의 도로가 수많은 곳을 미로처럼 이어주고 있다. 반면 지하 세계는 노동자들의 영역으로, 지상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기계처럼 반복된 노동을 하는 어둠의 지역이다.

 

이 메트로폴리스를 세운 프레더슨의 아들 프레더는 지하 세계를 알지 못한 채, 늘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하 세계에서 나온 마리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로 인해 지하 세계의 참혹한 현장을 알게 된다.

 

프레더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지하 세계를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역부족이다. 마리아는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을 도와줄 구원자가 등장할 것이라고 설파한다. 하지만 아들의 반항과 마리아의 집회 현장을 목격한 메트로폴리스 주인 프레더슨은 미치광이 과학자 로트방과 계략을 꾸민다. 마리아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교란시키기로 한 것이다.

 

마리아와 똑같이 생긴 로봇은 노동자들 사이를 교란시키고 결국에는 지상 세계와 지하 세계에 혼란을 가져온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은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반항하고 프레더는 이런 노동자들에게 구원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 <메트로폴리스>는 SF의 시초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SF 영화들에 뒤지지 않는 내용 전개와 볼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메트로폴리스>는 이후에 나온 모든 SF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어느 영화에서나 <메트로폴리스>가 가지고 있는 모티브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주인공 프레더가 자신이 구원자임을 모르는 상태에서 점차 지상 세계와 지하 세계를 이어주는 구원자가 되어간다는 전개는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매트릭스> 시리즈와 매우 흡사하다. 게다가 사람을 닮은 로봇의 등장은 앞서 언급한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비롯해 다양한 SF 영화에서 다뤄진 부분이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메트로폴리스 즉, 지상 세계의 모습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나 <아이, 로봇>에 등장하는 미래 도시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미래 도시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했기 때문에 <메트로폴리스>가 이후 SF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복잡한 이야기 구조와 놀라운 효과의 결합

 

<메트로폴리스>는 요즘 영화 못지 않은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무성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몰입시키는 힘이 대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적절한 SF적인 효과와 단순하지 않은, 생각할 점이 많은 이야기 줄기를 결합시킨 형태다. 물론 <메트로폴리스>는 그 당시의 이야기 구조로 보자면 놀라운 수준이지만, 일반적인 면에서 봤을 때는 이야기의 초점이 불분명한 것은 사실이다.

 

지상 세계와 지하 세계의 갈등을 통해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시각으로 볼 수도 있지만, 피지배층인 노동자들의 아둔함을 그린 측면도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구원자인 프레더를 통해 애매모호한 재결합을 의미하는 결말도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불분명한 점 중 하나다.

 

수많은 성경 모티브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성경의 내용을 아는 이라면, 특히 바벨탑 신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성경적인 내용과 시각적인 효과를 합쳐 완성된 <메트로폴리스>는 그만큼 영리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초점은 불분명하지만 분명히 이후의 SF 영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메트로폴리스>를 보고,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거나 어디서 많은 본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은 <메트로폴리스>가 후대 SF 영화에 끼친 영향 때문이다. 이 점만 보더라도 <메트로폴리스>는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 중에 하나다.

 

히틀러가 좋아한 영화, 하지만 흥행에 참패한 명작

 

히틀러가 좋아했었다고 알려진 영화, <메트로폴리스>. 그 영향력은 후대에서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공헌을 했지만 당시에는 그러하지 못했다. 엄청난 제작비와 출연자가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극장에서는 흥행에 실패했고 제작사는 문을 닫을 정도였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과 세월을 지나오면서 몇몇 장면들은 부분적으로 유실되었다. 지금의 <메트로폴리스>는 감독인 프리츠 랑이 원하던 형태 그대로를 재현한 것이며, 그 중에서 유실된 부분은 자막으로 처리되어 있다.

 

SF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과거의 영화 속에서 현대 영화의 모든 것을 찾아보고 싶다면 <메트로폴리스>는 놓치지 말아야 할 명작이다. 무성영화로써, 옛 영화라고 쉽게 생각하고 본다면 그 충격은 클 것이다. <메트로폴리스>는 그만큼 영리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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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영화 다이어리 ②] 히틀러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몰락 :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 

눈물 흘리는 히틀러, 그 인간적인 모습에 대한 문제

 

세계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있다. 세계대전, 나치, 유태인 학살하면 떠오르는 나라, 바로 독일이다. 그리고 독일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역사 속에서 영원한 독재자로 남아있을 히틀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현재 독일은 꾸준히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으며 세계사적으로도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 과연 히틀러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히틀러에 대한 많은 루머들은 아직까지도 존재한다. 당시에 발견된 시신은 조작된 것이며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설도 있고, 여장을 하고 살아남았다는 설도 있다.

 

히틀러가 저지른 수많은 만행들 속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는 과연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을까?

 

여기에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의 증언으로 제작된 영화가 있다. 히틀러는 마지막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지하 벙커 속에서 무엇을 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 트라우들 융에. 그녀의 증언으로 제작된 영화,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의 2004년작 <몰락 :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이다.

 

히틀러의 마지막 비서, 그녀의 증언으로 시작된 영화

 

베를린이 공격을 받고 있는 때에 '히틀러'는 새로운 비서를 뽑는다. 그 주인공이 된 사람은 젊은 나이의 여자, '트라우틀 융에'다. 그녀는 '히틀러'의 비서 역할을 하며 지하 벙커에서 나치의 마지막 시대를 지내게 된다.

 

어느 누가 보아도 독일의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 '히틀러'는 끝까지 독일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많은 부하들이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히틀러'를 떠나가고 그는 좌절하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지하 벙커 안에서 '히틀러'는 어두운 미래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깥 세상과는 달리, 지하 벙커 속의 나날들은 모든 것이 느리고 어둡다. 독일의 패배를 인정하게 된 '히틀러'는 마지막으로 오랜 연인이었던 '에바 브라운'과 혼인 신고를 하고 자살을 결심한다. 뿐만 아니라, 적들이 자신을 잡지 못하도록 시신을 불태워 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괴벨스' 부부는 물론 수많은 '히틀러'의 추종자들은 그의 죽음 앞에서 역시 자살을 선택하고 나치는 무너진다. 그렇게 어두운 독일의 역사 중 일부가 사라지고 트라우들 융에는 그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모든 것을 후대에 전하게 된다.

 

개봉 당시부터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던 '인간적인 히틀러'

 

영화 <몰락 :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은 개봉 당시에 매우 논란이 많았던 작품이다. 그 논란의 중심에 섰던 것은 '과연 히틀러가 영화처럼 인간적이었나?'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좌절하는 히틀러, 눈물 흘리는 히틀러, 사랑을 하는 히틀러의 모습이 과연 받아들일 수 있는 그의 모습인가?

 

유태인을 학살하고 희대의 독재자로 남아있는 히틀러가 보통 사람들과 같은 감정을 가졌다는 것,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 자체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누가 그를 그렇게 표현했는가? 영화는 친(親) 나치주의 감독이 만든 작품이라는 평가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에도 히틀러를 그린 영화들은 많았지만 영화 <몰락 :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이 논란이 된 것은 목격자의 증언으로 이뤄진 영화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 목격자는 바로 히틀러의 마지막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다.

 

영화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트라우들 융에의 증언 인터뷰로 시작된 영화는 그녀의 증언 인터뷰로 역시 끝을 맺는다. 영화 대부분은 그녀의 증언에서 비롯된 것이며, 영화가 그려낸 히틀러도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히틀러의 마지막 모습이다.

 

히틀러의 옆에서 그의 모습을 가장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을 그의 비서, 트라우들 융에. 그녀의 증언 때문에 영화는 매우 리얼한 당시의 지하 벙커를 그려내고 있다. 독일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점차 광기어린 모습을 보여주다가 결국에는 조금씩 인간적으로 무너지는 히틀러의 모습에서 관객은 쉽게 당시의 상황에 몰입할 수 있다.

 

 

 

 

 

 

영화 <몰락>은 히틀러를 어떻게 그리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왜 영화는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가? 히틀러는 영원한 독재자이고 유태인 학살의 주범이다. 그는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인가? 애초부터 스스로 히틀러의 비서로 들어간 트라우틀 융에가 본 히틀러의 모습은 그녀가 보고 싶어했던 가려진 히틀러의 모습은 아닌가?

 

이에 대한 논란, 이에 대한 대답은 관객의 몫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그녀의 증언으로 시작된 점을 밝히고 있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그의 마지막 생전 모습을 가까이서 본 사람은 그녀가 유일하다. 그녀가 왜곡한 것을 보았던 것인지, 올바른 것을 보았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즉, 히틀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화 <몰락 :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에서 중요한 것은 다시금 역사를 돌이켜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히틀러가 어떤 인물로 그려지든지, 영화가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어둡고 침울하다는 것이다. 역사 속의 한 상황을 통해 그 당시의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영화 전체가 트라우들 융에의 목격으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영화 <몰락 :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은 그녀가 없는 장소에서의 히틀러도 많이 그려내고 있다. 그의 비서였지만 융에는 모든 것을 지하 벙커에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는 허구로 구성된 부분도 물론 있을 것이다.

 

영화가 주는 의미는 히틀러의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닌, 역사적 상황 인지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이든지 영화를 통해 경악스러움을 느꼈다면 영화 속의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막연하게만 알았던 히틀러의 마지막 생전 모습에 대한 기록물이기도 한 이 영화는 관객을 몰입시키는 힘이 대단하다. 절대로 느슨하지도 않은 꽉찬 긴장 상태에서 적절한 전개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히틀러가 과연 인간적인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대답을 반드시 내릴 필요는 없다. 영화는 그의 숨겨진 다른 모습의 일부분을 비췄을 뿐이다. 영화를 보고 의아한 그의 모습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도 있지만 분명 어떤 부분은 누구나 느꼈던 그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 <몰락 :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은 히틀러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독일의 역사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를 볼 때, 히틀러의 삶만을 염두해두고 보지 말고 독일의 나치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히틀러의 비서, 트라우들 융에의 삶과 또다른 이의 삶의 비교

 

영화가 제작되고 트라우들 융에는 생을 달리했다. 죽기 전의 그녀의 증언은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영화의 결말에 해당하는 트라우들 융에의 생존은 실화와는 차이가 있는 부분으로, 염두하고 볼 것을 권한다. 실제로 그녀는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사람으로, 영화에서처럼 그 전쟁 속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그 당시의 트라우들 융에의 나이는 꽃다운 젊은 나이였다. 그녀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히틀러의 비서로서, 그의 곁을 지켰다는 사실을 후회하는 듯한 여운을 남긴다. 실제로 그녀는 나치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독일의 또다른 역사적 인물인 '소피 숄'과는 동갑이었다. 같은 나이에 누구는 히틀러에 대항하다가 죽음을 맞이했고 누구는 히틀러의 곁에 있다가 오랜 세월을 살아남은 것이다.

 

동시대의 같은 나이의 여성이 어떤 차이가 나는 삶을 살았는지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소피 숄'의 나치 저항 이야기는 다음 [독일영화 다이어리]에서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에서 다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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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그녀의 마지막 순간
[독일영화 다이어리 ③] 실화 바탕으로 한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

 

 

평범한 한 여학생이 있다. 친구와 함께 음악을 들으며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머리에 핀을 꽂고 한창 자기 자신을 꾸밀 나이다.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 1주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녀는 모른다. 자기에게 남은 시간이 1주일 밖에 남지 않았음을. 오로지 하늘만이 그 사실을 알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을, 역사에 길이 빛날 일을 해낸다. 이 일로 그녀는 죄인이 되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대처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역사에 기록되었고,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책으로나마 그녀를 알렸다. 그리고 2006년에 그녀의 마지막 6일 동안 벌어진 이야기가 영화로 탄생되었다. 히틀러 정권에 대항했던 유명한 학생 단체, '백장미단'. 그리고 거기에 속해있던 한 여학생 이야기, 바로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이다.

 

소피 숄의 마지막 6일 동안의 나날들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에 못지 않게 그에게 대항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백장미단은 학생 단체로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고 독일 국민들을 일깨우려는 노력을 했다.

 

백장미단의 중심에 서있던 '한스 숄'은 대학교에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는 선전문을 배포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오빠의 계획을 알게 된 소피 숄은 눈에 띄지 않으려면 여학생이 필요할 것이라며 스스로 그 위험한 계획에 동참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선전문을 배포하던 '숄 남매'는 붙잡히게 되고, '소피 숄'은 오빠와 떨어져 심문을 받게 된다. 그녀는 선전문을 배포한 것이 아니라며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지만 히틀러 정권은 끈질기게 수사를 벌이며 백장미단 전체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소피 숄'은 자신이 생각하는 히틀러 정권의 문제를 비판하며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는 당당한 자세를 보인다. 모든 사건은 재판으로 이어지고, '소피 숄'은 오빠인 '한스 숄'과 함께 참담한 판결을 받게 된다. 모든 사건은 6일 만에 진행되었다.

 

<몰락>의 '트라우들 융에', 같은 세대지만 다른 삶을 산 그녀들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소피 숄'이라는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마지막 6일 간의 일을 그리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그만큼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으로 그려져 잔잔함 속에 충격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다.

 

우선 앞서 다룬 영화 <몰락 :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과 비교를 피할 수 없다. <몰락 :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에 등장한 히틀러의 마지막 비서인 '트라우들 융에'와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의 '소피 숄'은 같은 세대지만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비서로, 히틀러의 죽음까지 목격했던 '트라우들 융에'는 히틀러 정권에 반감이 없었다. 끝까지 그와 함께 했고 모든 것을 목격함으로써, <몰락>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히틀러가 죽고 나치 정권이 무너짐과 동시에 그녀도 생을 달리 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 모든 상황을 이겨내고 오랜 세월을 후회 속에서 살았다. '트라우들 융에'는 그렇게 살다가 2002년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소피 숄'은 달랐다. '트라우들 융에'와 같은 세대를 살았고 같은 젊은 여성이었지만 그녀의 삶은 너무 짧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히틀러 편에 서지 않은, 그에 반대되는 편에 선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몰락>의 트라우들 융에, 그녀의 후회는 '소피 숄'을 생각하며

 

'소피 숄'은 망설임도 없이 히틀러 정권에 반대하는 선전문을 배포했고 붙잡혔다. 앞으로 더 많은 일들을 위해 거짓 진술을 통해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자 그녀는 당당하게 히틀러 정권을 비판했다. 그리고 재판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대단한 용기를 보여주었지만 그 용기가 그녀의 삶을 지켜준 것은 아니었다. 너무 젊은 나이에 그녀는 생을 달리했다.

 

'트라우들 융에'와 '소피 숄'의 삶은 완전하게 대비된다. 히틀러 정권에 서있던 여성은 오랜 세월 살아남아 독일의 통일까지 목격했다. 하지만 히틀러 정권에 반대하는 쪽에 서있던 여성은 그러하지 못했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했어야 할 그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아야 했던 것이다.

 

영화 <몰락 :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 마지막에 생전의 '트라우들 융에'의 인터뷰를 본 사람이라면 그녀가 '소피 숄'을 언급하며 과거를 후회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몰락>을 본 사람에게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정반대에 선 두 여성의 삶을 비교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정적인 장면의 연속, 긴장감은 2배로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은 다른 어떠한 영화들보다 특별하다. 영화의 대부분은 실내에서 벌어진다. 게다가 '소피 숄'이 심문을 받는 장면과 재판을 받는 장면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무척이나 정적이며 컷 자체도 단순하다. 대화 장면이 대다수인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자칫 하면 지루할 수 있는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실화 바탕의 영화라는 점도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지루하지 않다. 무척 흥미롭게 시작해 끊임없이 긴장감을 준다. 그녀가 심문을 받는 장면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며 각기 다른 색깔의 긴장감을 준다.

 

하나는 그녀가 살아남기 위하여 거짓 진술을 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소피 숄'을 영웅화하지 않는, 매우 특별한 부분이다. 실제로 그녀는 살아남아 백장미단을 살리고 더 많은 일들을 도모하기 위해 거짓 진술을 하여 상황을 빠져나가려 한다.

 

나머지는 그녀가 한 모든 행동이 드러나 더는 거짓 진술을 할 수 없을 때부터다. 그녀는 당당하게 히틀러를 비판하고 정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뚜렷하고 펼쳐나간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재판과 참담한 판결이 내려지면서 그녀의 마지막 6일은 그 끝을 향해 나아간다.

 

 

 

영화에 나온 대사, 실제 기록 토대로 해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이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나치 정권 시절의 모든 기록이 공개되면서부터다. 영화에 나온 '소피 숄'이 심문 과정에서 한 모든 대사는 90% 이상이 실제로 그녀가 한 말들이다.

 

이런 점을 봤을 때 '소피 숄' 그녀가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용기있는 여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녀의 마지막 날들, 그녀의 마지막 6일을 통해 '트라우들 융에'와 상반된 삶을 산 그녀를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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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치는 소년, 그 기괴한 성장기
[독일영화 다이어리 ④] 귄터 그라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양철북>

 

 

 

어둡고 으스스한 밤, 한 아이가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 자궁 속에서부터 이미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던 아이.
아이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한다. 어둡고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 그리고 어른들의 음탕하고도 외설적인 모습에 아이는 진저리를 친다.
 
결국에 3살이 된 소년은 스스로 계단에서 떨어져 성장을 멈추기로 한다. 3살에서 성장을 멈춘 아이는 양철북 두드리는 것을 즐긴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일종의 경고 메시지였다. 그리고 소년은 무서운 능력을 지녔다. 소년의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기 시작한 것이다.
 
소년은 그 모든 죽음이 자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소년은 그렇게 성장을 멈춘 채 살아간다.
 
 
북 치는 소년, 그 어려운 메시지
 
1979년에 제작된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의 영화 <양철북>은 귄터 그라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영화는 스스로 성장을 멈추기로 결심한 '오스카'라는 소년을 중심으로 독일 나치 시대 소시민들의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더 나아가 냉소적으로 꼬집고 있다.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양철북>은 다소 어려운 영화에 속한다. 수많은 모티브와 숨겨진 의미들이 영화 전체를 차지하고 있으며, 성장을 스스로 멈추기로 한 '오스카'가 보여주는 몇 가지의 설정은 판타지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는 시종일관 어둡다. 세상에 대한 부조리에 맞서 싸우면서도 경고의 의미에서 그치는 '오스카'의 메마른 북소리는 영화 전체에 삽입되어 있으며, 2번의 출생 장면을 제외하고는 영화가 주로 보여주는 장면은 폭력과 죽음의 장면이기 때문이다.
 
 
외설 등급 받았을 정도로 곳곳에 숨은 성
 
영화 <양철북>은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 번 보면 볼수록 그 매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수수께끼처럼 함축되어 나타난 여러 숨은 의미와 모티브를 찾는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양철북>이 내비치고 있는 메시지가 섬뜩하게 와닿을 정도다.
 
특히 영화에서 '오스카'의 북소리 다음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성(性)이다. 영화는 직설적으로 성을 비추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간접적인 성 표현으로 보는 관객들에게 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네 겹의 치마 밑에서의 인연으로 태어난 '오스카'의 어머니 이야기, '오스카'와 '마리아'의 비등산 놀이 등 모두가 정상적이지는 않지만 묘하게 관객들의 성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장면들이 영화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제작되고 18년이 지난 후에야 미국의 오클라호마 주에서는 <양철북>에 대하여 외설 등급 판정을 내린 바 있다. 미성년자의 성행위가 등장한다는 이유로, 영화가 제작되고 한참이 지난 후에, 그 비디오를 모두 회수한 것이다. 1980년에 영화 <양철북>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 부문을 수상한 것과 비교하면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섬뜩하고 기괴한 한 소년의 성장기

 

영화 <양철북>은 이렇게 여러 상징적인 의미와 성적 표현들로 인하여 평범한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영화 자체가 가지는 분위기도 그러하거니와, 주인공인 '오스카'를 비롯해 주변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습들 자체도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평범하지 않은 설정과 이야기는 영화 <양철북>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한다. 판타지로 가득한 영화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의 일부 판타지 요소는 관객들로 하여금 충분한 호기심을 자극하도록 한다.

 

하지만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관객에게 불편함을 선사할 수도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오스카'가 보여주는 모습들은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기 어려우며, 그 정도가 심하여 기괴하다고 생각될 정도다.

 

소설 속 글로 표현된 것보다 영상으로 나타난 <양철북>은 그렇게 섬뜩하다. 특별히 센세이션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영화는 공포 장르보다도 더 섬뜩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관객들이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다분히 녹아있는 영화가 <양철북>이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 중 하나

 

영화 <양철북>은 귄터 그라스의 소설을 읽어 본 사람도 볼 만한 영화다. 영화의 각본에도 귄터 그라스가 참여하여 그 내용에도 변화가 없다. 하지만 어느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보다 <양철북>은 더욱 더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그 만큼 자극적인 장면들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설은 총 3부작으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영화는 소설의 2부 분량에서 끝이 난다. 이런 차이에서 오는 재미도 소설을 먼저 접한 사람들에게는 신선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3부의 내용으로 후속편을 만들겠다는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의 희망 사항도 있었지만 지금은 무산된 상태다.

 

영화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 <양철북>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스티븐 제이 슈나이더, 마로니에 북스)'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명작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척이나 접근하기 어려운 영화에 속하기는 하지만 1번 정도는 봐야 할 명작 중에 명작이다. 제6회 LA 비평가 협회상과 제5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받고, 제32회 칸 영화에서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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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결혼식과 세 남자, 그 파란만장한 삶

[독일영화 다이어리 ⑤] 한나 쉬굴라 주연의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만일 당신이 여성이고, 인생에서 세 남자를 만나게 된다면 어떤 사람을 만나 평생을 함께 살 것을 다짐할 수 있겠는가?

 

한 명은 처음부터 사랑에 빠졌던 사람이다. 듬직한 모습도 보기 좋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이 좋다. 하지만 능력은 부족하다. 다른 한 명은 처음부터 좋아했던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자상하고 능력도 적당히 있다. 마지막 한 명은 나이가 많고 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한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당신에게 세 남자 중 한 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당신의 생계와 명예를 생각한다면 누구를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처절한 독일의 사회 내에서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의 부양을 책임져야 하는 마리아 브라운이라는 여성이 있다. 그녀에게는 한 남자와의 행복한 사랑을 꿈꾸는 평범한 여성이 될 수도 있고, 가족의 부양을 위해 남자를 이용할 줄 아는 요부가 될 수도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그녀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바로 파스빈더 감독의 1979년작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이다.

 

전쟁이 끝난 시대 속에서 한 여성의 홀로서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있을 무렵, 마리아 브라운(한나 쉬굴라)은 포탄이 떨어지는 도시 한가운데에서 우열곡절 끝에 사랑하는 헤르만과 결혼한다. 하지만 신혼의 행복도 잠시, 헤르만은 전쟁에 끌려나가고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헤르만이 사라지고 마리아는 가족의 부양을 위해 미군들이 많이 가는 바에서 일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흑인 미군인 빌을 만나게 되고, 헤르만의 전사 소식에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사랑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사랑도 잠시, 죽은 줄 알았던 헤르만이 돌아오면서 마리아 브라운은 파란만장한 삶을 걷기 시작한다. 자신의 부와 명예 그리고 돌아온 헤르만을 위해 그녀는 세 번째 남자를 만나게 된다. 한 회사의 사장이자, 재력가인 오스발트를 만나게 된 마리아 브라운은 전혀 새로운 여성으로 변화해 가기 시작한다.

 

난해하고 어려운 마리아 브라운의 삶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제목만 보고 판단한다면 단순한 멜로라고 생각하기 쉬운 영화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는 다소 난해하고 복잡한 느낌을 준다.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동시대적 영화인 <양철북>과는 달리, 판타지적인 요소가 없는 한 여성의 삶을 일상적으로 그려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어렵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열악한 전후의 상황에서 갓 결혼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이 생계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대해 마리아 브라운은 스스로의 가치를 이용할 줄 아는, 사회적으로 진화한 여성으로써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는 남성에게 이용당하는 여성이 아닌, 여성 스스로 남성을 선택하여 이용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의 중심적인 내용은 사회적인 중심에 선 여성 마리아 브라운과 세 남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하여 마리아 브라운의 대사와 행동 하나하나에 주시하며, 겉으로 보이는 세 남자와의 관계 그리고 사랑의 감정 유무를 딱 잘라 분석하고자 한다면 영화는 매우 어려워질 수 있다.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세 남자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감정 상태를 보이는 그녀의 감정 상태 표현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영화의 청각적인 요소 삽입이 주는 난해함의 효과  

 

영화가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의 자체적인 표현 방법에서도 비롯되는 문제다. 영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세 남자 사이에 서있는 마리아 브라운의 감정 상태를 속시원하게 밝히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는데 몰두하고 있는 것이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이다.  

 

영화 중간중간마다 모든 소리를 배제한 채, 들리는 아데나우어 수상의 라디오 연설 소리와 월드컵 경기 중계 소리 그리고 전쟁 중 실종된 사람들을 찾는 안내 방송 소리까지. 모두가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이다. 영화가 때로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유도 이러한 요소들 때문이다.  

 

이러한 효과들이 가지는 특징은 여러가지다. 우선은 이러한 청각적인 효과의 삽입은 관객들로 하여금 시대상을 그릴 수 있게 도움을 준다. 대략적인 제2차 세계대전 후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 브라운에게 몰입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얻는 효과도 있다. 세 남자에 대한 그녀의 감정 상태를 완전하게 개방하지 않아, 관객들로 하여금 모호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관객들은 마리아 브라운의 심중을 읽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되는 것이고,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열린 결말에 다다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충격적인 내용 전개와 결말의 연속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 남자를 이용하는 마리아 브라운의 이야기는 식상한 줄거리에 속하기 때문이며, 딱히 센세이션한 장면이 없을 수도 있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센세이션한 것을 뛰어넘어 관객에게 충분한 충격을 선사한다. 소소한 한 여성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이런 충격 요법은 영화에 전체적으로 깔려있는 요소다. 그 충격적인 내용 전개는 영화의 재미를 위해 언급하지는 않지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정도로 충격적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게다가 열린 결말 형태로 끝나는 마지막은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마지막 충격이다. 마리아 브라운의 삶이 종료된 것인지, 아니면 시련의 한 과정인지에 대한 언급도 없거니와 결말에 대한 원인 또한 영화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감독의 의도대로 찍었다면 영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마리아와 헤르만의 동반 자살로 끝을 맺었어야 하지만, 마리아 역할의 한나 쉬굴라가 반대하여 고쳐진 결말 장면이 바로 현재의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결말이라고 한다. 이러하니 더욱 더 결말에 대한 해석은 애매모호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고, 보는 관객의 몫으로 돌려지는 것이다.

 

파스빈더 감독의 빛나는 걸작

 

영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에 대한 메시지와 결말에 대한 확실한 의미는 이 작품의 감독인 파스빈더만이 알 것이다. 영화를 빨리 찍기로 유명했고, 양성애자이면서 마약 복용자이기도 했던 그의 세계가 모두 담겨있는 영화가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이 아닐까 생각된다.

 

영화는 파스빈더 감독의 빛나는 걸작이라는 칭호와 함께 제1회 런던 비평가 협회상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는 마리아 역할의 한나 쉬굴라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어려울 수도 있지만 보고 나면 다시금 생각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영화가 취하고 있는 약간의 몽롱한 느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반복적으로 보면 볼수록 세 남자를 향한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 작품이다.

 

인생의 단 한 번의 결혼과 세 남자 사이에 서있는 마리아 브라운의 파란만장한 삶 이야기는 현재 DVD로 만날 수 있다.

2009.07.02 14:40 ⓒ 2009 OhmyNews

 

 

지켜보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특별한 인연

[독일영화 다이어리 ⑥] 울리히 뮤흐, 세바스티안 코치 주연의 <타인의 삶>

 

  

 

나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감시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나도 모르게 누군가 나를 하루 종일 감시하고 있다면 어떨까?

 

내가 하고 있는 공개적인 행동은 물론이고, 사적인 공간에서의 지극히 개인적인 행동에서 전화하는 내용과 먹는 음식물의 종류까지 모두 감시당하고 있다면?

 

감시카메라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영국 런던에서 1인당 하루에 감시카메라에 노출되는 횟수는 약 300번이라고 한다. 그 어느 곳에서나 나의 모습이 누군가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감시의 문제는 범죄를 예방한다는 효과가 있지만 사적인 영역을 침해할 수 있다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의 감시가 우선일까? 아니면 개인적인 삶의 존중이 우선일까?

 

독일이 분단이 되고, 동독에서는 국가 체제에 반하는 행위를 하거나 그러한 위험성이 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남모르는 감시가 이뤄져왔다. 동독 국민이라면 이러한 감시의 대상은 누구나 될 수 있었고, 비밀 경찰이라고 부르는 슈타지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었다. 그리고 그 감시 내용은 철저하게 모든 것이 기록되었다.

 

동독에서 행해졌던 이러한 철저한 감시 체제를 소재로 하여 지켜보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특별한 인연을 그린 영화가 있다. 소재에서 받는 느낌과 다르게, 어딘지 모를 안타까움과 함께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타인의 삶>이다.

 

지켜보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묘한 이야기

 

동독의 최고 극작가인 드라이만과 배우인 그의 아내 크리스타를 감시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슈타지의 일원으로서 동독 체제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감시하는 것에 있어서는 최고의 능력을 보유한 비즐러는 드라이만을 체포하기 위한 단서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비즐러는 도청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가는 곳을 모두 따라다니며 그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드라이만이 동독 체제에 반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사랑에서는 물론, 그들의 대화를 통한 생각 등을 도청하면서 비즐러는 알게 모르게 그들의 삶에 동화된다. 그들의 삶 자체에서 묘한 동화감을 느낀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반국가적 행위를 숨겨주게 되고, 국가에서는 드라이만에 대한 보고를 하라고 재촉하기에 이른다.

 

긴장감 있는 스릴러와 감동이 있는 드라마의 만남

 

영화 <타인의 삶>의 장르는 복합적이다. 감시라는 자극적인 소재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에 충분하다. 지켜보는 자가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에서부터 감시당하는 자가 감시에 대한 눈치를 전혀 채지 못하고 모든 것을 누설하는 것까지, 영화는 꾸준히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보통의 영화가 여기에 그친다면, <타인의 삶>은 여기서 더 나아간 긴장감을 부여한다. 지켜보는 자가 감시당하는 자에게 동화되어 변화하기 시작하고, 이제는 국가와 지켜보는 자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면서 영화는 삼중의 긴장을 관객에게 부여한다.

 

영화 <타인의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삼중의 긴장을 통해 관객에게 억압적인 감정 상태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 흐름으로 적절한 시기에 관객의 긴장 상태를 풀어주는 것이다.

 

즉, 영화는 영리하게도 긴장감 있는 스릴러와 감동이 있는 드라마의 형식을 복합적으로 취하면서 관객에게 적절한 긴장과 감동을 동시에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관객은 안타까움과 공포와 긴장 그리고 슬픔 등의 다양한 감정을 영화 한 편에서 모두 느낄 수 있다.

 

 

과하지 않은 이야기와 연출

 

신기하게도 영화 <타인의 삶>은 이런 특징을 지니면서도 과하지 않은 느낌이다. 자칫하면 많은 욕심을 부린 탓에 영화 자체가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는 적절한 선에서 자제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긴장감을 부여할 수 있는 감시라는 자극적인 소재이지만 연출은 적절한 선에서 무난하게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화려한 앵글이나 빠른 속도의 컷을 자주 이용하는 편집 등의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무난한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 하면서도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힘을 지닌 영화가 <타인의 삶>이다.

 

덕분에 영화는 무척이나 간결하다. 간결한 영화 속에서 다양한 메시지와 감정이 들어가 있어서 풍성한 느낌마저 있다. 결말에 이르러 드라이만이 자신의 저서를 통해 비즐러에게 전하는 한 줄의 메시지는 영화의 이러한 점을 모두 함축시켜 주는 좋은 예다. 드라이만의 이 메시지를 통해 묘한 감동과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삶>을 제대로 본 것이다.

 

무엇보다도 빛나는 비즐러의 역할

 

그렇다면 영화에서 지켜보는 자는 왜 변하는가? 감시하는 것에 있어서는 비즐러를 따라올 자가 없고, 학생들에게조차 냉철한 모습을 유지하는 그가 드라이만 앞에서는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주의깊게 봐야할 하나의 중요한 점은 비즐러의 변화다. 울리히 뮤흐가 연기한 비즐러는 영화 초반에 매우 냉혹한 인간으로 표현된다. 얼굴에는 전혀 표정이 없으며, 혼자 집에서 TV를 보며 식사를 하고, 돈으로 여자를 불러 성관계를 가지는 등 매우 개인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영화 속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비즐러는 변화한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 순간부터 표정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혼자인 것에 대한 외로움과 불안이 교차하는 그의 표정은 불행하게 보이지만 훨씬 인간적이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를 감시하면서 그들에게 동화된 비즐러의 모습을 통해 관객들은 어딘지 모를 안타까움을 느끼며 그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되는 것이다.

 

주목받은 영화, 놓쳐서는 안 될 영화

 

영화 <타인의 삶> 이후에 2007년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울리히 뮤흐의 연기를 더이상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타인의 삶>을 통해 비즐러로 기억될 울리히 뮤흐에 초점을 두고 본다면 영화는 더욱 더 빛날 것이다.

 

런던 비평가 협회, 뉴욕 비평가 협회에서 수상한 바 있으며, 영국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바도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영화상에서 각본상, 남우주연상, 작품상을 수상하고 벤쿠버 영화제에서도 국제영화인기상을 수상할 만큼 영화 <타인의 삶>은 큰 주목을 받았다.

 

분단된 독일을 그리고 있지만 2006년작으로써, 비교적 최근 영화인 것도 놀라울 따름이다. 계속되는 장마로 인하여 하루 종일 비가 오는 요즘, 영화 <타인의 삶>은 비교적 잘 어울리는 영화가 될 것이다. 독일영화 중에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2009.07.14 14:33 ⓒ 2009 OhmyNews

 

 

인간이 되고 싶은 한 천사의 간절한 기도
[독일영화 다이어리 ⑦]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

 

 

 

심장 전문의사인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자신이 돌보던 환자가 사망하자,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다.

그런 그녀를 위로해주는 한 남자가 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그녀 곁을 지키며 따뜻하게 감싸주고 위로해준다.

그러나 그 남자를 볼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한 사람 뿐이다. 바로 심장 전문의사인 그녀. 천사인 그 남자와 인간인 그 여자가 특별한 인연을 맺은 것이다.

 

맺어질 수 없는 천사와 인간의 사랑 앞에서 천사는 괴로워한다. 결국에 천사는 그 여자와의 사랑을 위하여 인간이 되고자 하고, 천사의 길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인간이 된 천사 그리고 그 천사를 기다리는 여자. 이제 그들에게 벽은 사라지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니콜라스 케이지, 맥 라이언 주연의 1998년작 <시티 오브 엔젤>의 줄거리다. 이 영화는 줄거리 자체는 다르지만 천사와 인간의 사랑, 인간이 되고 싶은 천사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비슷한 원작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그 원작은 바로 빔 벤더스 감독의 1987년작 독일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다.

 

인간이 되고 싶은 한 천사의 이야기

 

어느 겨울의 베를린. 다미엘과 카시엘이라는 두 천사가 인간 세상에 내려온다. 그들은 다양한 인간들의 사연을 듣고 보며 그들을 위로한다. 그러던 중에 다미엘은 인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커피의 맛은 어떠한지, 시원하게 부는 바람의 느낌은 어떠한지 궁금해한다.

 

그리고 다미엘은 서커스에서 공중곡예사로 일하고 있는 마리온을 알게 된다. 마리온에게도 위로를 해주던 중에 다미엘은 그녀에 대한 남다른 자신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카시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미엘은 인간이 느끼는 여러 감정과 더불어 사랑을 느끼고 싶어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배우로 살고 있는 피터 포크의 도움을 받아 다미엘은 천사에서 인간이 되어간다.

 

빔 벤더스의 잔잔한 판타지 드라마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천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판타지 요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천사가 등장한다는 설정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어 거의 일반적인 드라마에 가깝다.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한 천사의 고뇌가 극 전체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천사가 등장한다고 하여 특별히 판타지 요소가 가득한 장면이 연출되지도 않는다. 극 초반에는 다미엘과 카시엘을 통해 천사의 생활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보여져 판타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다미엘의 고뇌가 시작되면 영화는 일반 드라마에 가까워진다.

 

<파리, 텍사스>의 빔 벤더스가 감독을 맡은 이 영화는 최근 그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는 최근작인 <부에나 비스타 쇼셜 클럽>, <텐 미니츠 트럼펫>, <더 블루스 : 소울 오브 맨> 등으로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흑백과 칼라의 조화로 이뤄지는 두 세계

 

빔 벤더스 감독이 이 영화에서 관객에게 특별함을 선사하는 부분은 색채에 있다. 영화는 시종일관 흑백으로 세상을 그려낸다. 1987년작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더라도 일부 관객들은 흑백 영화로 오해할 수 있을 정도다.

 

영화는 중간중간 칼라로 세상을 비췄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완전하게 칼라로 모든 세상을 표현한다. 흑백과 칼라의 경계는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뚜렷해진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이 흑백과 칼라가 의미하는 것은 천사가 보는 세상과 인간이 보는 세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미엘과 카시엘이 보는 인간 세상은 흑백으로 표현되고, 인간이 보는 세상 자체는 칼라로 표현된다.

 

즉, 천사들은 색깔조차 보지 못하는 감정이 없는 존재들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미엘이 천사로 살아가는 영화의 초중반에는 대부분이 흑백으로 그려지고, 그가 결국에 인간이 되는 영화 결말 부분에서는 전체가 칼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런 효과는 관객으로 하여금 천사의 처지가 되게 한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색깔조차도 보지 못하는 천사의 처지를 이해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다미엘이 인간이 되었을 때, 색깔을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는 장면이 더 특별해지는 것도 모두 이 효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천사에서 히틀러가 된 그 배우, 브루노 간츠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일부 어떤 이들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 개봉 당시에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 천사의 고뇌가 가득한 영화가 특별한 즐거움을 주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는 것이다.

 

천사라는 특별한 존재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이나 감정적 즐거움은 없지만 영화는 잔잔하게 잘도 흘러가는 편이다. 어딘지 모르게 우수에 가득찬 표정을 한 다미엘의 고뇌에 빠져들 수만 있다면 그 천사를 따라 영화는 쉽게 볼 수 있는 편이다.

 

더 재밌게 보려면 다미엘을 연기한 브루노 간츠에게 집중하면 될 것이다. 앞서 '독일영화 다이어리'에서 언급한 바 있는 <몰락 :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에서 히틀러를 연기한 사람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나온 시간 순서대로 보자면 그는 천사에서 히틀러가 된 셈이다. 연기의 폭이 넓은 브루느 간츠에게 집중하여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게 되면 또다른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1987년 제40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제10회 몬트리올 영화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이 외에도 바바리안 필름 어워드, 유러피안 필름 어워드, 뉴욕 영화 비평 협회에서 최우수 작품상, 남우 주연상, 최우수 촬영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2009.07.29 13:14 ⓒ 2009 OhmyNews

 

 

통일된 사실을 숨겨야 하는 독일판 '간큰가족'

[독일영화 다이어리 ⑧] 볼프강 베터 감독의 <굿바이 레닌>

 

 

 

2005년 6월, 한국 극장가에 기막힌 코미디 영화가 개봉했다. 감우성, 김수로, 신구, 김수미, 성지루, 신이 등 이름만 들어도 재미난 영화 <간큰가족>이었다.

 

영화는 간암 말기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버지에게 50억의 유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가족이 벌이는 기상천외한 사기극을 그리고 있다.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묘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통일이 되었을 때에만 유산 상속이 가능하다는 것. 이에 가족들은 통일이 되었다는 가짜 뉴스를 만드는 등 아버지를 상대로 웃지 못할 사기극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통일이라는 기쁜 소식에 아버지는 점차 기력이 회복되고, 가족들은 통일 소식을 유지하기 위해 더 큰 거짓말을 만들어낸다.

 

여기 <간큰가족>과는 반대 상황인 독일 가족이 있다. 통일된 사실을 숨겨야 하는 한 독일 가족의 웃지 못할 사기극, 바로 볼프강 베커 감독의 2003년작 <굿바이 레닌>이다.

 

통일이 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 독일판 '간큰가족'

 

동독의 열혈 공산당원인 크리스티아네는 늘 자식들에게 사회주의식 교육을 시킨다. 그러나 그녀는 다 큰 아들 알렉스(다니엘 브륄)가 베를린 장벽 붕괴를 주장하는 시위에 가담한 것을 보고는 충격에 8개월을 혼수 상태 속에 지낸다.

 

크리스티아네가 쓰러진 8개월 동안에 독일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서독과 동독이 통일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심장이 많이 약해져 충격을 받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알렉스는 고민에 빠진다. 열혈 공산당원인 어머니가 통일 소식에 충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알렉스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사기극을 벌이기로 한다. 마치 독일이 통일이 되지 않은 것처럼 꾸미기로 한 것. 알렉스는 어머니가 좋아한 동독제 오이피클 병도 찾고, 방도 동독식으로 꾸미고, 더 나아가 동독 뉴스까지 친구와 함께 제작하기에 이른다.

 

독일의 <굿바이 레닌>과 한국의 <간큰가족>

 

영화 <굿바이 레닌>은 사기극이 시작되는 동기 자체에 대한 설정은 다르지만 이야기의 흐름 전개상 <간큰가족>과 매우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간큰가족>이 개봉했을 당시에 표절 시비가 일기도 했었다.

 

굳이 앞뒤를 따지자면 <굿바이 레닌>이 2003년에 개봉했고, <간큰가족>이 2005년에 개봉했기 때문에 <간큰가족>이 표절했다는 쪽으로 주장이 많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간큰가족>의 시나리오는 이미 <굿바이 레닌>이 제작되기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표절은 아니라는 결론이 났었다.

 

이제 와서 어느 것이 가장 먼저 제작되었는지, 그 표절 시비를 가릴 필요는 없다. 실제로 두 영화를 모두 보고 나면 맥락상 비슷한 점이 무척이나 많지만 영화 전체에서 느껴지는 느낌과 감동 자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간큰가족>이 좀 더 코미디에 기울어져 있다면, <굿바이 레닌>은 드라마에 좀 더 기울어져 있는 영화다. 둘 모두 코미디와 드라마 사이에 서 있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어디에 더 비중을 두었는지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이유의 차이

 

<굿바이 레닌>은 <간큰가족>과는 다르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이유 자체가 진지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종일관 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 <굿바이 레닌>이다. 비슷한 거짓말을 펼치더라도 <간큰가족>은 다소 불순하며 유머스러운 동기가 부여된 것이고, <굿바이 레닌>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동기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극 중 알렉스는 어머니가 충격으로 사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거짓말로 통일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없는 것을 있다고 거짓말하는 것보다 있는 것을 없다고 거짓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굿바이 레닌>은 <간큰가족>과의 비교를 통해 보여준다.

 

이미 세상 전체가 통일된 기쁨으로 넘쳐나고, 온갖 자본주의의 산물들이 들어오면서 변화하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통일이 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것 자체에 무리수가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무리수를 코믹적인 요소들로 어렵지 않게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감동의 차이를 선사하는 <굿바이 레닌>

 

영화 <굿바이 레닌>은 독일영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한 번쯤을 들어보거나 봤음직한 영화다. 그만큼 유명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간큰가족>이 개봉하면서 그 비교로 인해 더 많이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다.

 

굳이 또 <간큰가족>과의 비교를 통해 언급하자면, 감동의 깊이에도 차이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더 강한 감동을 선사하면서 웃었다가 울도록 해주는 영화는 <간큰가족>이다. 반면에 <굿바이 레닌>은 솔직히 격한 감동이나 슬픔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굿바이 레닌>은 짠한 무언가를 선사한다. 눈으로 보이는 슬픔을 선사하지는 않지만 시종일관 알렉스의 중저음으로 깔리는 나래이션으로 인한 감동, 그리고 마지막에서도 여전히 알렉스의 입으로 전달되는 감동이 있다.

 

특히, 유심해서 봐야 할 것은 '알렉스의 거짓말이 어디까지 통했는가'다. 어머니 크리스티아네는 어디서부터 알렉스의 거짓말을 눈치채고, 세상이 변화했음을 알게 되었을까? 더한 감동은 아들의 거짓말을 알고도, 그 마음을 눈치채고도 모른 채 한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침대에 누워 있는 크리스티아네와 어머니 곁에서 자신이 제작한 가짜 뉴스를 보는 알렉스의 투 샷을 보면 크리스티아네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얼굴로 무언가를 꾸준히 바라봄을 볼 수 있다. 그녀가 본 것은 TV 화면이 아니라, 아들인 알렉스의 얼굴이다.

 

'독일영화 다이어리'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소재

 

영화 <굿바이 레닌>은 앞서 소개한 7편의 독일영화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소재를 보여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메트로폴리스>부터 <베를린 천사의 시>까지 소개한 영화들이 대부분 독일의 느낌이 강했다면 <굿바이 레닌>은 훨씬 친숙하다.

 

통일이라는 매우 독일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도 같은 상황이라는 점에서 오는 유사함과 <간큰가족>의 영향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굿바이 레닌>을 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은 아무래도 계속해서 언급한 것처럼 <간큰가족>과 비교해서 보는 것이다. 그리하면 매우 유사한 장면들에 묘한 호기심이 일어날 것이고, 이와는 달리 감동의 차이와 색깔의 차이를 느낄 수 있어 흥미로울 것이다.

 

영화는 제24회 런던 비평가 협회상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제53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는 블루 엔젤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 외에도 제16회 유럽영화상에서는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작품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2009.08.14 13:23

 

 

삶, 죽음, 사랑 그리고 새로운 만남이 교차되는 곳
[독일영화 다이어리 ⑨] 파티 아킨 감독의 영화 <천국의 가장자리>

 

 

 

홀아비로 살아온 한 남자가 있다. 성인이 된 아들을 둔 그지만,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매춘부인 한 여성을 집으로 데리고 온다. 매춘부로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그 여자는 딸 몰래 독일 땅에서 몸을 팔고 있다. 딸의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여자의 딸은 어머니를 찾고 싶어한다. 터키에서 정치 운동을 벌이는 왕성한 활동의 그녀는 독일 땅을 밟아 어머니를 찾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딸은 어머니를 찾던 도중에 독일의 한 여자를 알게 된다. 같은 여자지만 묘한 매력에 이끌린 그녀는 동성애적 사랑을 시작한다.

 

터키와 독일 사이에서 이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서로 인연을 맺으며 스쳐지나간다. 그러나 이들의 인연에는 만남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홀아비인 아버지, 그의 아들, 매춘부로 일하는 여자, 그녀의 딸, 어머니를 찾으려는 딸, 그 딸과 동성애를 하는 또다른 여대생 그리고 그 여대생을 걱정하는 어머니까지. 이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까지 모든 인연이 중첩되며 영화는 진행된다.

 

바로 <미치고 싶을 때>의 감독 파티 아킨이 내놓은 잔잔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여운이 남는 영화, 2007년작 <천국의 가장자리>다.

 

하나로 맞춰지는 퍼즐같은 매력적인 스토리

 

영화 <천국의 가장자리>는 총 3부로 이뤄져있다. '예터의 죽음', '로테의 죽음' 그리고 '다른 한 편의 이야기'까지 구성되어 있는 영화는 초반에는 자칫 별개의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등장인물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보다 보면 이 3개의 이야기가 각개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의 이야기임을 눈치챌 수 있다. 영화는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모이는 데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느끼도록 유도한다.

 

영화는 기존의 <러브 액츄얼리>나 최근작 <해운대>에서와 같이 많은 등장인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이다. 찾는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알아보지 못해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그 기이한 인연에 묘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영화는 독일과 터키라는 두 국가의 갈등을 기본 배경으로 삼고 있다. 독일에 사는 터키계 사람들과 터키에 사는 독일인들 사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그들의 애환과 고민을 담고 있는 것이다.

 

즉, <천국의 가장자리>는 우연과 운명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퍼즐을 맞추듯이 전개되는 형식에 터키와 독일, 두 나라의 묘한 갈등을 그려내고 있는 영화다.

 

잔잔함 속의 충격 요법과 자극적 소재까지 다양한 매력

 

영화 <천국의 가장자리>가 또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점은 바로 잔잔함 속의 충격적인 요소들의 배치다. 줄거리상 언뜻 보면 무척이나 잔잔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영화는 실제로 잔잔함 속의 충격을 선사한다.

 

우선은 죽음이다. 영화는 수많은 인물들의 인연을 다루고 있지만, 그 속에는 몇몇의 죽음까지 다뤄지고 있다. 문제는 영화가 죽음에 대한 어떠한 분위기 조성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는 삶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예고된 것이 아닌,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처럼 영화 속에서도 죽음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도록 그려진다. 즉, 보는 이들에게 어떠한 예고도 없이 등장 인물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요 인물들의 죽음이 이어지고, 이 죽음들로 인해 이야기의 흐름이 우려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영화는 죽음 뒤에는 다른 만남이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 뒤에 숨겨진 다른 인물들의 관계가 기막힌 인연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충격적인 요소는 동성애라는 소재의 사용이다. 이미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는 많지만 <천국의 가장자리>는 좀 더 특별하다. 이 역시도 동성애라는 사실을 전혀 언급해주지 않다가 갑작스레 동성애 코드를 내놓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천국의 가장자리>에서 나오는 터키인과 독일인 여자의 동성애는 그들 뿐만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국가 간의 화해와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어 특별하다.

 

충격과 안타까움 그리고 묘한 여운

 

영화 <천국의 가장자리>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바라봤을 때, 우리의 인생이다. 영화를 보면 우리의 삶 자체를 느낄 수 있다. 국가 간의 갈등을 통해 우리와 중첩되는 바는 없지만 인간 관계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나 공감이 될 만한 부분이 많다.

 

인연을 맺는 데에는 우연이라는 요소도 존재하지만, 그 어떠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관계를 맺기도 하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관개를 맺기도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관계를 맺기도 하고, 그 어느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는 할 수 없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관계는 맺어진다.

 

영화는 죽음과 섹스 그리고 동성애 등을 통해 충격을 선사하다가 인물들이 그저 스쳐가는 상황 속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정리가 되지 않은 듯한 상태에서의 결말로 묘한 여운을 이끌어낸다.

 

결말이 어딘지 모를 허전함이 느껴지지만 그것이 아쉽지는 않다. 오히려 거기서 끝을 맺는 것이 모두를 위해 더 행복하지 않을까에 대한 안도감이 드는 것이다. 이는 영화 내내 연달아 계속된 안타까움에서 생긴 것이다.

 

눈여겨 볼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의 한나 쉬굴라

 

<천국의 가장자리>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은 한나 쉬굴라를 염두에 두고 보는 것이다. '독일영화 다이어리'에서도 언급한 영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에서 '마리아 브라운'으로 열연했던 한나 쉬굴라가 바로 <천국의 가장자리>에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하는 여대생, 그녀를 걱정하는 어머니 역할로 등장하는 것이 한나 쉬굴라(위 사진 왼쪽)다.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에서 젊은 여성으로 나왔던 그녀가 2007년작 <천국의 가장자리>에서는 나이 든 어머니 역할로 나와 강한 모성애를 보여준다.

 

영화 <천국의 가장자리>는 제43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에서 여우 조연상을, 제20회 유럽영화상에서는 각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09.08.21 15:27

테크노로 무장한 게임영화,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
[독일영화 다이어리 ⑩] 프란카 포텐테 주연의 <롤라 런>

 

우리는 하루에 수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고 해도,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밥 한 끼를 먹어도 무엇을 먹을 것인지 고민하고 선택한다.

때로 안 좋은 일이 생겼다면, '차라리 그 곳을 가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이라며 과거를 후회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나는 다른 일을 겪게 되었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어떠한 상황에서 다시 기회가 주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그러한 기회를 세 번이나 잡은 한 여자의 이야기가 있다.

<인터내셔널>,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의 톰 튀크베어 감독, 프란카 포텐테 주연의 영화 <롤라 런>이다.

 

 

 

남자친구를 구하기 위한 3번의 기회

 

조직 내에서 돈 심부름을 하던 마니는 실수로 지하철에 돈가방을 두고 내리게 된다. 20분 내에 조직의 보스와의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으면 그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니는 여자친구인 롤라(프란카 포텐테)에게 전화로 사정을 말한다.

 

남자친구의 위험한 상황을 알게 된 롤라는 바로 뛰기 시작한다.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은행의 간부인 아버지에게 돈을 빌리는 것. 롤라는 은행까지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하고, 그 길에 롤라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롤라가 어떤 방법으로 돈을 구해올 것인지 답답했던 마니는 결국에 슈퍼마켓을 털기로 결심하고, 총을 들고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간다. 반면, 롤라는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아버지는 매몰차게 롤라의 부탁을 거절한다.

 

순식간에 경찰에게 포위된 마니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남자친구에게 달려간 롤라.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도망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경찰은 총을 쏘고 롤라는 쓰러진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 또 한 번의 기회를 잡고자 한다.

 

성공한 실험 영화, 독특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영화

 

영화 <롤라 런>은 독일에서 흥행한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유명한 독일영화다. 제목 그대로 롤라가 시종일관 영화 내내 뛰는 것으로 채워진 영화가 바로 <롤라 런>이다.

 

<롤라 런>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보다도 '아이디어'다. 다소 실험적인 요소들이 많은데, 어느 것 하나 너무 튀는 것이 없이 독특함을 지닌다. 그리고 그 독특함에 관객들은 쉽게 매료된다.

 

아이디어가 적당한 독특함을 영화에 부여하게 되었고, 그것이 관객들에게 신선함으로 다가간 것이다. <롤라 런>이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된 것은 강렬한 테크노 음악으로 무장한 게임 영화라는 데에 있다.

 

게임 영화,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

 

영화 <롤라 런>은 게임형 영화다. 마치 게임의 일부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 자주 했던 게임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가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목표가 뚜렷한 주인공이 있고, 그는 목표를 달성하게 위해 끊임없이 달리는 것이다.

 

우선 롤라에게는 마니를 살려야 한다는 목표가 있다. 그것은 돈을 구해서 그에게 달려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게임이 그러하듯이,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시간 제한이 있다. 영화에서 제시하는 제한 시간은 오직 20분이다.

 

그러나 모든 게임에서 그러하듯이, 주인공이 늘 목표를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행착오가 있고, 그 상황에서 주인공은 실패를 경험한다. 시간 제한에 걸리거나 실수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게임에서 그러할 때에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주인공에게는 기본적으로 3번 이상의 목숨이 주어지는 것이다. 영화 <롤라 런>도 마찬가지다. 게임형 영화로써, 롤라는 실패를 경험하지만 좌절하지는 않는다. 총 3번의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똑같은 목표, 똑같은 루트 그리고 다른 선택  

 

롤라는 3번의 기회를 부여받고, 각기 다른 선택을 통해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게임과 같이 롤라는 기회가 다시 주어져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그녀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동일한 루트로 달린다.

 

당연히 기회가 다시 주어진 만큼, 롤라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영화는 시작했던 부분에서 다시 재시작하고, 롤라가 어떠한 다른 선택을 하는지를 따라간다. 그리고 최종 목표에 도달하는지 따라가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게임을 하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된다. 주인공인 롤라가 부디 최종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마음 속으로 바라게 되고, 결국 목표에 도달하면 관객들은 게임처럼 묘한 승리감을 맛보게 된다.

 

다양한 놀이 요소가 포함된 다이내믹한 <롤라 런>

 

영화가 게임형 영화라는 사실은 영화 곳곳에 다양한 요소들로 담겨있다. 가령, 첫 장면에서 롤러코스터가 경사를 올라가는 듯한 오프닝은 테마파크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연이어 나오는 축구 장면은 영화가 게임식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영화가 또하나 특별한 요소를 갖는 것은 애니메이션이다. 영화는 중간에 애니메이션까지 섞어 완성되었다. 마치 <킬빌>에서 애니메이션이 쓰인 것과 비슷하다. 중간에 롤라가 뛰는 장면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 뛰는 것보다 더 스펙타클하고 다이내믹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강렬한 테크노 음악이다. 영화는 줄곧 굵직한 비트의 테크노 음악으로 무장되어 있다. 롤라가 뛰는 장면들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테크노 비트는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다시 봐도 강렬한 인상을 선사하는 롤라

 

영화는 다시 봐도 강렬함을 선사한다. 언제나 봐도 독특함과 신선함을 유지되기 때문이며, 강렬한 테크노 비트도 변함이 없다. 롤라가 목표 달성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기에 다른 이야기를 스스로 상상해볼 수 있는 재미도 있다.

 

무엇보다도 영화에서 강렬함을 선사하는 것은 롤라를 연기한 프란카 포텐테이다. 영화 내내 빨간 머리로 나오는 그녀는 <본 아이덴티티>에서는 맷 데이먼의 상대역으로 나와 인상깊은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영화 뒷이야기를 살펴보면 그녀는 <롤라 런>을 위해 머리를 몇 개월동안 감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만에 일어나는 사건이니 만큼, 영화의 설정을 위해 머리를 감지 않았던 것. 머리를 감으면 염색한 것이 조금씩 옅어질 수 있기에 그녀가 내린 결정이자, 열정이었다.

 

<엑스페리먼트>, <루나 파파> 등에서 강한 인상을 선보인 바 있는 마니 역의 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도 놓치지 말야할 배우다. 영화는 시애틀 국제 영화제와 선댄스 영화제에서 수상한 바 있다.

 
2009.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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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로 돌변한 보통사람들, 실화라 더 끔찍했다 
인간 본성에 대한 공포의 심리 실험, <엑스페리먼트> 
 
 
 

심리학의 권위자 닥터 톤은 자신의 심리 실험을 위해 신문 광고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한다. 참가자에게는 엄청난 상금이 주어진다. 그리하여 모인 사람은 총 20명. 실험을 위해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모의 감옥 실험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간수 8명, 죄수 12명으로 나뉘어 미리 준비된 모의 감옥에서 생활하게 된다. 죄수는 죄수 역할을 하면 되고, 간수는 죄수들의 질서를 바로잡는 간수 역할을 하면 된다. 죄수는 이름표 대신에 번호표를 달고, 간수는 한 번도 쥐어보지 못했던 곤봉을 차고 돌아다닌다. 그렇게 그들의 실험은 시작되었다.

 

닥터 톤은 모든 상황을 모니터로 지켜보고, 죄수와 간수는 정해진 기간 동안 알아서 감옥에서 생활한다. 외부의 영향은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모두들 신나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죄수와 간수 역할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데다, 정해진 기간만 지나면 모두들 상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행복함도 잠시,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바뀌어 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자기 자신. 간수는 간수답게, 죄수는 죄수답게 변해가기 시작한다. 재미있게 시작했던 장난들과 농담들도 이제는 죄수와 간수 사이에서는 금기시된다. 결국 모든 것은 살인으로 이어지고, 모의 감옥은 실제 감옥보다 더한 지옥으로 변해간다.

 

2002년에 충격적인 독일영화가 등장했다. 더한 충격은 영화 속 경악스러운 사건이 모두 실화라는 점이다. 바로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엑스페리먼트>다.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악한가?

 

영화 <엑스페리먼트>는 기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본래의 악함을 감추기 위해 선함을 표현하는 것인가, 아니면 선함에서 일부 악함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엑스페리먼트> 속의 실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 것인지를 파헤치려고 한다. 실험의 목적은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이 과연 선한 자유 의지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실험에서 주어진 극한 상황은 감옥이라는 환경 뿐이다. 다른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피실험자들의 자유다. 자유롭지 못한 환경 자체만 만들어주고, 인간의 본성을 관찰하고자 한 것이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실험은 정해진 기간을 버티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격해지는 폭력과 폭언 그리고 결국에는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결과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실험은 인간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인지, 그 사실만 밝혀낸 것이다.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을 바탕으로 한 실화

 

영화 <엑스페리먼트> 속 실험은 어느 정도는 결과를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쉽게 믿지 못할, 인위적인 면이 많이 느껴진다. 아무런 자극도 없이 인간이 완전하게 변해버리는 모습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엑스페리먼트>는 픽션이 아니다. 실제로 행해졌던 실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사실, 그것이 영화 속 충격적인 장면과 결말보다 더한 공포를 선사한다. 바로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을 바탕으로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은 1971년에 행해진 실험이다. 스탠포드 대학의 필립 짐바르도 박사의 지휘 하에 진행된 심리 변화 실험이었다. 영화 속 실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처음에 24명으로 시작했다는 점이다.

 

짐바르도 박사는 24명의 죄수와 간수로 나눠 생활하게 하였다. 이들 24명은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고, 심리적인 문제가 있지도 않았으며, 학력 또한 높은 사람들이었다. 즉,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박사는 인위적으로 죄수와 간수를 나누지 않았다. 즉, 더 악랄해 보이는 사람을 간수로 넣거나 약해보이는 사람을 죄수로 넣은 것이 아니다. 박사는 피실험자 24명을 아무런 조건 없이 무작위로 나눠 실험에 참가시켰다.

 

그렇다면 실제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역시 실험 시작 5일 만에 실험은 강제 종료되었다. 영화와 같이 간수는 폭력과 폭언을 일삼게 되었으며, 죄수들은 자기 비하적인 심리적 충격을 받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은 강제 종료되고,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정식 실험으로 채택되지도 못했다.

 

인간의 본성, 알 수 없는 그 본성의 문제

 

영화 <엑스페리먼트>와 실제 스탠포드에서 행해진 실험. 그 결과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라는 사실일까, 아니면 인간은 환경적인 요인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일까?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과 비슷한 목적과 조건으로 행해진 실험이 영국에서 실시된 바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실험에서는 스탠포드 실험 때와 같이, 어떠한 극적인 결과가 등장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의 영향을 받는 것일까? 스탠포드 실험은 무엇 때문에 죄수와 간수 사이의 심리적 차이가 벌어졌으며, 경악스러운 결과가 등장하게 된 것일까? 아직도 이 실험은 많은 윤리적인 문제와 더불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루시퍼 이펙트', 짐바르도 박사가 밝히는 진실

 

영화 <엑스페리먼트>와 더불어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이 화제가 된 것은 최근 '루시퍼 이펙트'라는 책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화제가 된 이유는 단 하나. 그 충격적인 실험을 실시했던 짐바르도 박사가 밝히는 진실이 담긴 책이었기 때문이다.

 

짐바르도 박사는 '루시퍼 이펙트'를 통하여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영화 <엑스페리먼트>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인 문제로 많은 지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설명도 없었던 그가 밝히는 진실이다.

 

그는 실험이 행해지고 35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금, 스탠포드 실험에 대한 진실을 '루시퍼 이펙트'를 통해 밝히며, 그와 더불어 2004년에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포로 수용소에서 발생한 포로 학대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책에 의하면, 그가 실험을 중지시킬 수 있었던 것은 개인 의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실험에 흥미를 보인 박사와 친분이 있던 연구진들이 실험을 본 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해, 그제야 실험을 중단시켰다는 것이다.

 

실험을 접한 다른 연구진들이 경악스럽게 느낀 실험 현장을 보고, 짐바르도 박사는 왜 실험을 중지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는 실험을 관찰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죄수 역할의 피실험자들에게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전한다.

 

즉, 죄수 역할의 피실험자들이 실제 죄수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간수가 죄수들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학대할 만한 존재로 느껴졌고, 그들이 죄수 역할에 너무 알맞은 사람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닌지 자기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도 의심했었다는 사실이다.

 

엄밀히 다시 말하면, 스탠포드 실험에 참가한 피실험자는 24명이 아닌 셈이다. 실험을 바라보고 방관했던 짐바르도 박사. 그도 피실험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결과물인 셈이다.

 

 

<엑스페리먼트>, 그 충격적인 독일영화

 

영화 <엑스페리먼트>는 실제 사건보다 더 충격적인 요소들을 많이 넣은 팩션으로 만들어졌으나,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의 문제점을 충분히 지적하며 그 속에서 묘한 영화적 재미를 완성해 내었다.

 

실제 공포영화보다 더한 공포를 선사하는 스릴러였던 셈이다. 국내에서 개봉 당시에는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으나, 독일영화라는 점 때문에 그러했을 것으로 본다. 실제 공포영화나 스릴러 영화의 마니아들은 익히 알고 있는 작품이 <엑스페리먼트>다.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을 알고 있는 사람이나 심리학 연구에서 이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접해봤던 사람 혹은 '루시퍼 이펙트'를 읽어봤던 사람 모두 <엑스페리먼트>는 필수로 봐야할 최고의 스릴러가 될 것이다. 물론 어느 정보도 접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도 영화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갈 것이다.

 

<롤라 런>을 통해 이미 얼굴을 알린 바 있는 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는 반가운 얼굴이다. 그는 영화 <엑스페리먼트>를 통해 <롤라 런>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를 전체적으로 주도해 나가면서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역할을 제대로 보여준다.

 

영화 <엑스페리먼트>는 지금까지 소개한 '독일영화 다이어리' 영화들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만큼 어느 할리우드 영화 못지 않은 제대로 된 스릴을 선보인다고 하겠으며, 친숙한 분위기로 영화를 이끄는 힘이 있다.

 

영화는 2001년 독일영화상에서 최고의 영화로 꼽힌 바 있으며, 제28회 시애틀국제영화제에서는 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제25회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는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이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엑스페리먼트>의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은 '독일영화 다이어리'에서도 다룬 바 있는 <몰락 :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을 연출했었다.

 

덧붙이는 글 | '독일영화 다이어리' 연재 기사는 <엑스페리먼트>를 끝으로 마칩니다. 지금까지 '독일영화 다이어리'를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며, 이번 연재 기사로 독일영화에 대한 많은 관심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2009.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