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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이소룡 - 그는 원래 센 인간이었다

by Wood-Stock 2009. 8. 8.

이소룡, 그는 원래 센 인간이었다

 

한겨레  

 

시간은 힘이 세다.

지금 유명한 영화배우 가운데 35년 뒤에도 팬카페를 거느릴 수 있는 인물이 몇 명이나 있을까? 원더걸스가 35년 뒤에도 팬들을 몰고 다닐까? 35년 뒤에 이명박 대통령을 떠올릴 20대가 많을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독자는 많지 않을 게다. 그러므로 35년 전의 다음과 같은 신문기사는 더욱 감동적일 것 같다.

 

‘홍콩스타 이소룡 사망’

【홍콩〓UPI 東洋】 당수 8단의 중국계 남우 이소룡(브루스 리)이 21일 밤 이곳의 한 병원에서 응급가료를 받은 후 사망했다고 발표됐다.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정통한 소식통은 이가 지병인 간질로 2달 전에도 TV스튜디오서 녹화중 발작, 쓰러진 적이 있었다고 전했다.(<조선일보> 73년 7월22일치 7면)

 

한 일간지가 35년 전 두 줄 기사로 부음을 전했던 이소룡은 21세기에도 살아남아 끈질기게 ‘이소룡 키드’를 길러낸다. 보도와는 달리 이소룡이 ‘당수 8단’이 아니라 절권도를 만들었음을 이소룡 키드는 잘 안다. 그 시절 이소룡 영화를 개봉관에서 봤던 세대와 지금의 10~30대에게도 여전히 이소룡은 영웅이다.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던 ‘싱하형’이나 한 보험회사의 광고에도 그가 등장한다. 이들에게 이소룡이 태어난 오늘, 11월27일은 더욱 뜻깊다.

 

이소룡의 본명은 이진번(李振蕃). 1940년 11월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73년 7월20일 홍콩에서 숨졌다. 어렸을 적 홍콩에서 살다 열아홉 살 때 미국에 건너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몇 편의 드라마에 단역으로 나왔으나 홍콩에서 찍은 4편의 영화로 ‘브루스 리’는 동양을 넘어 세계의 스타가 됐다. 그는 죽을 때까지 미국 시민권자였던 ‘경계인’이기도 하다.


시간은 힘이 세다. 그러나 이소룡은 시간보다 힘이 세다. 그의 생일날 〈esc〉가 이소룡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를 살펴봤다. 격투기 전문가와의 대담은 무술가로서의 이소룡을 보여줄 것이다. 문화적 상징으로 끊임없이 소비되는 이유에 대해 문화평론가가 살펴봤다. 다음과 같은 소리를 내면 섹션 첫 장을 더 빨리 넘길 수 있다. “아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일러스트레이션 이상호 기자


 

그는 원래 센 인간이었다

격투 전문가와 영화기자의 대담, “다문화 사회의 마이너리티 이소룡과 추성훈은 한 핏줄”

 

이소룡은 복합적인 면모를 지닌 인간이다. 이소룡의 다양한 모습을 조망하기 위해 격투 전문가와 영화 전문 기자가 대담했다. 김남훈(35) 케이블티브이 수퍼액션 유에프시(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십) 해설위원은 격투가 이소룡을 조망했다. 김 해설위원은 현역 프로레슬러이며 블로그 ‘인간어뢰의 鬪强導夢(투강도몽)’(blog.naver.com/heavy1.do)을 운영 중이다. <씨네21> 주성철(33) 기자는 액션영화에 조예가 깊다. 이소룡 영화에 출연했던 한국인 배우 인터뷰로 유명하다. 이 대담은 이소룡이 사라진 시대 이소룡 키드들이 나누는 이소룡 이야기다.

 

 

◎ 사회자 고나무 기자(이하 사회) : 이소룡이 숨진 지 35년이 됐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이소룡을 접한 계기부터 말씀해 주시죠.

◎ 김남훈(이하 김) : 저는 중학교 다닐 때까지 이소룡이 살아 있는 줄 알았어요.(웃음) 재개봉을 많이 해서 <정무문>과 <당산대형>을 100번쯤 본 듯합니다. 제가 살던 경기도 송탄에서 영화표 값이 500원이고 자장면이 500원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 볼까 밥 먹을까 고민했죠. 중학교 가서야 이소룡이 중국인이고 죽었다는 걸 알았죠.

◎ 주성철(이하 주) : 저는 고향이 부산인데 해설위원님처럼 이소룡이 살아 있는 줄 알았어요. 이소룡 영화를 많이 봤고 쌍절곤 들고 다니는 동네 형들이 많았어요. 또 당룡(본명 김태정)이라고 <사망유희>에서 이소룡 대역을 맡은 한국 배우가 있었는데 부산 출신이거든요. 그래서 부산에서는 부산 사람이 이소룡 영화에 나왔다는 게 화제였어요.

◎ 사회 : 김남훈 해설위원님께 먼저 질문 드리자면, 격투가로서 이소룡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 김 : 이소룡의 무술은 기존 쿵후의 복잡한 수기 싸움보다 실제로 상대를 타격하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실제의 격투술이라는 측면에서 이소룡을 (현대 격투기의) 얼리어답터로 볼 수 있습니다. 펜싱의 찌르기 스타일도 흡수하고 가라테 주먹 쥐는 방법을 흡수하고요, 어렸을 땐 영춘권을 수련하죠. 나중에는 주짓수(유술)도 접합니다. <용쟁호투> 보면 오픈 핑거 글러브(손가락이 노출된 격투 글러브) 끼고 암바(팔꿈치를 꺾는 기술) 거는 장면이 나오죠. 절권도는 여러 무술의 우성인자만 모은 잡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소룡은 어린 시절에 복싱도 배웠죠. 일대일 격투에서 복싱 스텝을 펼치는데, 이런 건 기존 중국 무술에서 볼 수 없던 것이죠. 사실 쿵후가 아니에요. 격투기 트레이너로서도 훌륭했습니다. 이소룡 서재에 책이 2500권 있었는데 상당수가 스포츠 생리학 책이었다고 합니다. 보디빌딩 트레이닝으로 신체가 작은 동양인이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근육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웨이더(현대 보디빌딩의 창시자)나 아널드 슈워제네거도 이소룡에게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는 거고요. 프로틴 음료나 과일주스를 본인이 직접 만들어서 어떻게 몸을 강하게 만들 것인가 연구해서 먹었다고 합니다.

 

» <용쟁호투> 촬영중 출연진 스태프와 대화하는 이소룡. 김영사 제공

 

» 1972년 <정무문> 개봉 당시 홍콩 극장 앞. 김영사 제공

 

이소룡이 살아있는 줄 알았어요

 

◎ 사회 : 현대 종합격투기에 영향을 줬고, 살아 있다면 더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지적이 흥미롭군요.

◎ 김 :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지금 “절권도를 수련했다”는 격투기 선수가 없는 이유는 이소룡이 없다는 데 기인하기도 합니다. “이소룡이 강한 거냐, 절권도가 강한 거냐”가 아니라, 이소룡이 원래 강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해요. 복싱이 세서 마이크 타이슨이 연승행진을 한 게 아닌 것처럼요.

◎ 사회 : 지금 종합격투기 경기를 보면 절권도를 베이스로 했다는 타격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 김 : (웃음) 절권도 베이스도 유에프시 초창기에는 있었습니다. “지쿤도(절권도)를 수련했다”며 한 손에는 오픈 핑거 글러브를 끼고 한 손은 맨손으로 나온 선수도 있었죠. 복싱·가라테처럼 큰 규모의 무술은 흥행이 발달하면서 끊임없이 기술과 훈련법이 발달합니다. 그런데 절권도는 미완의 상태로 끝났고 이소룡이 숨진 1973년과 지금 사이에는 35년의 간극이 있죠. 종합격투기가 엄청 발달해 버렸어요. 지금은 믹스트 마셜 아츠, 즉 무술을 다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전 절권도는 ‘올드 스타일’이 된 거지요. 현대 종합격투기 규칙으로 경기하면 당시 절권도 고수라도 지금의 국내 격투기 선수도 못 이길 겁니다. 허리 아래를 공략하는 하단 태클에 대한 방어기술이 없고 지나치게 타격 위주여서 클린치 싸움에 대한 대비책도 없습니다.

◎ 사회 : 이소룡의 60년대 영상을 보면 앞발로 복싱의 잽처럼 상대방의 무릎을 빠르게 차는 동작이 나옵니다. 이런 발차기가 지금 종합격투기 경기에서 안 나오는 이유는 뭐죠?

◎ 김 : 나오긴 하는데 선수 사이에 수준 차가 클 때 나오죠. 지금 선수들이 상향 평준화돼서 그런 기술에 안 속고 맞아도 큰 충격을 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소룡이 살아 있다면 당시 옆날차기가 신선했던 것처럼, 지금 와서도 새로운 걸 보여줬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이소룡은 추성훈 선수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추성훈 선수는 재일동포로 태어나 다민족, 다문화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죠. 이소룡도 혼혈입니다. 외할머니가 독일 사람이죠. 미국에서 태어나서 홍콩에 갔고 미국 시민권자였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홍콩 쿵후 도장에서 이소룡을 문하생으로 안 받아줬죠.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흑인에게는 햄버거도 안 팔던 60년대 미국에서 영화 활동을 한 거죠. 추성훈 선수처럼 이소룡도 그러면서 성장한 것 같습니다. 그런 내력이 무술에도 영향을 준 게 아닐까요? ‘뿌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 상대를 때리는 게 중요하다’라는….

 

절권도는 여러 무술의 우성인자만 모은 잡종

 

◎ 사회 : 액션 배우로서 이소룡을 어떻게 보시나요.

◎ 주 : 김 해설위원님 말씀 중에 “이소룡이 원래 센 인간이었다”는 게 인상적이네요. 제가 홍콩 무술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소림사 영화입니다. 소림사 영화의 이야기 구조에서는 수련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소룡 영화에서 이소룡은 원래 센 인간으로 나옵니다. 이소룡 이전에 무술 영화를 많이 찍은 호금전이나 장철 감독의 영화에서는 편집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소룡은 편집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몸 풀고, 때리고, 쓰러뜨리고, 소리 지르는 장면을 편집 없이 갔죠. 홍콩 무술 영화에 없던 사실주의 전통을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본 등 외세와의 대결을 끌어들여 중국인에게 자긍심도 줬죠. 호금전 감독 영화에 무술감독을 자주 맡은 한영걸이 <당산대형> 마지막에 이소룡에게 패배해 죽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상징적인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중국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했어요. <용쟁호투>에서 이소룡과 무술에 관한 선문답을 주고받는 선사가 호금전의 영화 <협녀>에 대사로 나옵니다.

◎ 김 : 위키피디아에서 ‘브루스 리’를 검색하니 57개어로 나와있더군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약 120개어로 프로필이 나와 있는데 말이죠. 단적으로 오바마 1/2 파워라는 거 아닙니까?(웃음)

◎ 주 : 요즘 영화랑 연결해 보면 <본…> 시리즈가 있습니다. 3편 <본 얼티메이텀>에서 격투 코디네이터가 제프 이마다인데, 댄 이노샌토(이소룡의 친구이자 제자)와 친분이 있습니다. <본…> 시리즈에서 맷 데이먼이 보인 격투 스타일은 이전 할리우드랑 다릅니다. <매트릭스>의 무술을 지도한 원화평과도 다르죠. 제프 이마다 인터뷰를 보면 “필리핀 무술 칼리에 이소룡의 무술을 섞었다”고 설명합니다. 지금 가장 각광받는 액션 영화에 이소룡의 스타일이 녹아 있다고 생각하니 ‘이소룡 참 오래간다’는 생각도 들고 이소룡의 격투 스타일이 현대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프 이마다 위에서 무술을 총괄한 게 스턴트 코디네이터 댄 브래들리인데 <본 얼티메이텀>의 무술을 담당한 뒤 <007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무술을 맡죠.

 

<본…> 시리즈 안에 이소룡 있다

 

◎ 사회 : 이소룡 영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는다면요?

◎ 주 : <맹룡과강>의 콜로세움 격투 장면과 <용쟁호투>에서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용쟁호투> 장면에서 이소룡이 가진 고독함과 자존심이 드러납니다. 이소룡의 개인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같아요.

◎ 김 : 이소룡 영화는 지금의 격투기와 어울리는 장면이 많습니다. <용쟁호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장면은 옥타곤(미국 종합격투기 대회 유에프시의 팔각형 링)에 선수가 걸어들어가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이소룡이 만든 싸움에 대한 콘셉트, 즉 남자와 남자가 싸운다는 모양새는 지금도 촌스럽지 않습니다.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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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절곤이 처음 등장한 영화는? ~ 이소룡의 이해를 돕는 영화와 책, 팬 카페들

한겨레  

» <맹룡과강>의 한 장면.
⊙ 이소룡의 영화 : 1971년 개봉한 <당산대형>은 이소룡의 첫 영화 출연작이자 출세작이다. 타이에서 저예산으로 촬영됐다. <정무문>에는 이소룡의 상징이 된 쌍절곤이 처음 등장한다. 72년 개봉한 세 번째 작품 <맹룡과강>은 홍콩 영화 가운데 처음으로 유럽 로케이션을 한 작품이다. 영화 디브이디를 인터넷 교보에서 아류작과 함께 묶어 1만9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용쟁호투>에는 무명 시절의 성룡과 홍금보가 나온다. 영화 디브이디를 지마켓(3900원)과 인터파크(2900원) 등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이소룡은 유작 <사망유희>의 불탑 격투 장면을 <용쟁호투>를 찍기 전에 촬영했다. 그러나 도중에 숨진 탓에 한국인 배우 김태정이 나머지 부분에 대역으로 출연했다.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네 편이 담긴 디브이디 박스세트는 품절됐다.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사망유희>를 묶은 비디오 박스세트는 지마켓에서 1만98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 이소룡의 책 : <절권도> 상·하(서림문화사·각 9000원)와 <이소룡 자신감으로 뚫어라>(인간희극·9800원)가 판매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책들은 그가 직접 쓰지 않았다. 메모·일기 등을 사후에 지인이 편집해 출판했다.

 

⊙ 이소룡 전기 영화·책 : 베이스기타 연주자 겸 저술가인 브루스 토머스가 쓴 전기 <이소룡, 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김영사·2만6000원)가 이달 출판됐다. 꼼꼼한 취재와 자료조사로 인간 이소룡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93년 개봉한 영화 <드래곤>은 전기 영화를 표방했지만 실제 이소룡의 삶을 많이 왜곡했다.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유하·문학동네)는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시인 유하의 문화에세이다. 지금은 절판됐다.

 

⊙ 이소룡의 아들·딸이 나온 영화 : 이소룡의 아들 브랜던 리는 액션 영화 <리틀 도쿄> <크로우> <래피드 화이어> 등에 출연했다. 93년 스물아홉의 나이에 <크로우>를 찍다 촬영 소품인 권총 오발 사고로 숨졌다. 딸 섀넌 리(39)도 저예산 홍콩 액션 영화 <엔터 더 이글> 등에 출연했다.

 

⊙ 이소룡 팬카페 : 네이버 카페 ‘이소룡 월드’(cafe.naver.com/lxl.cafe)에 이소룡이 단역으로 출연했던 미국 드라마 <그린호넷>과 <롱 스트리트> 영상 등 자료가 많다. 다음 카페 ‘장사의 쌍절곤 배움터’(cafe.daum.net/jangsas)는 회원이 4만여 명이며 정모(정기모임)·번개 등을 통해 서로 쌍절곤 실력을 보여준다.

 

고나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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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에 가려진 인간 이소룡의 흔적들

» 〈이소룡 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
〈이소룡 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
브루스 토머스 지음·류현 옮김/김영사·2만6000원
 

배우보다 ‘무술인’ 삶·철학 초점, “무술은 자기 자신의 확장이다”

섬광같이 강렬했던 서른두 해 아내·모친 등 인터뷰 녹여 담아

 

번뜩이는 섬광같이 짧고 강렬했던 삶의 흔적을 스크린에 남기고 떠난 영화배우 이소룡의 평전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돼 나왔다. 1960년대부터 여러 록 밴드의 베이스 주자로 활동한 독특한 이력이 있는 지은이는 이소룡의 서른두 해 삶과 무술과 철학을 성실한 주변인 인터뷰와 무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풀어낸다.

 

이소룡은 어릴 적부터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아 ‘무시정’(無時停)이라 불렸다고 한다. 병약하고 비쩍 마른 아이였던 그는 악몽과 몽유병에 시달렸다. 학교 공부에는 관심이 없어 결석을 밥 먹듯이 했고, 당시 중학교 시험에 떨어진 대부분의 홍콩 아이들이 그랬듯, 뒷골목을 누비며 ‘호랑이파’라는 작은 패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어느 날 패싸움에서 진 그는 어머니를 졸라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싸움에 이기려고 시작한 쿵후였지만, 이소룡은 열세 살 처음으로 쿵후를 만난 때부터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수련에 정진했다. 엽문 사부한테 영춘권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싸움에 환장한 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수련에 푹 빠졌다. 누군가와 말하는 중에도 팔이나 다리를 가만두지 않으며 수련을 계속할 정도로 쿵후에 몰두했던 그는 함께 도장에 다니던 다른 학생들을 낙담시킬 정도로 무술을 익히는 속도가 빨랐다.



» 스크린에 가려진 인간 이소룡의 흔적들

열아홉 살에 이소룡은 어머니가 준 100달러와 아버지가 준 15달러를 들고 샌프란시스코행 여객선에 올랐다. 아들이 벌인 싸움 때문에 번번이 경찰서에 불려가 각서를 썼던 어머니의 뜻이었다. 그는 시애틀 차이나타운의 아버지 친구 집에 묵으며 그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에서 웨이터로 일했다. 시애틀에서 열린 ‘아시아 문화의 날’에 쿵후 시범을 보인 걸 계기로 그의 수하에 제자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한다. 이들은 식당의 뒤뜰에서, 겨울에는 차고에서, 제자가 운영하는 슈퍼마켓 마당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련했다. 이소룡보다 나이가 배는 더 많았던 수련생 가운데 한 명은 “대부분 인종적으로 소수자였던 수련생들에게 이소룡은 신체와 정신적·감정적인 부분까지 키워주는 사부였다”고 회상한다.

 

이소룡이 홍콩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미국에서 보낸 청년 시절을 성실히 따라가는 지은이는 영화의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이소룡을 기억하고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이소룡이 5년 동안 영춘권을 수련했고, 미국에서 12년 동안 자신의 무술과 철학을 발전시키고 가르치는 데 온 힘을 쏟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소룡에게 가장 큰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그는 종종 공원을 걷거나 항구를 찾았고,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붓다·노자·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을 배우고 무술과 관련된 거의 모든 책을 섭렵했다. “무술은 자기 자신의 확장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쿵후를 “무한한 자기표현의 원동력”으로 삼았고, 쿵후를 통해 “모든 두려움, 의심 그리고 물밀듯이 밀려드는 인생의 불안감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소룡의 무술 양식은 ‘절권도’라 한다. 쿵후에 입문하며 익힌 영춘권에 뿌리를 두고 다른 무술 양식들을 받아들여 자신에게 가장 효율적인 양식으로 발전시켜 간 그는 자신의 무술 양식에 ‘주먹을 저지하는 방법’이라는 뜻을 지닌 ‘절권도’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후회했다고 한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 ‘절권도’가 하나의 제한적인 양식이자 구속으로 굳어지는 건 그가 가장 경계했던 일이었다. 이소룡의 도장 벽면에 써 있다는 글귀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그의 무술 철학을 잘 담고 있다.

 

“무술이 담고 있는 진리는 개개인마다 다르다. 이 진리가 무엇인지 자신의 경험을 되짚어봐라. 유용한 것은 받아들이되, 쓸모없는 것은 내버려라. 그리고 이 진리를 경험과 접목시켜라. 창조적인 인간은 어떤 무술 양식이나 체계보다도 더 소중하다.”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기사등록 : 2008-11-14 오후 07:3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