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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포르노 스타, 경계를 허물다

by Wood-Stock 2009. 8. 10.

포르노 스타, 경계를 허물다
한겨레
» 감독·작가·제작자 역할 넘어 할리우드 진출한 성인영화계의 여걸 스토미 대니얼스
감독·작가·제작자 역할 넘어 할리우드 진출한 성인영화계의 여걸 스토미 대니얼스

 

장면 #1. <펜트하우스>

1980년대 초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군 부대에서 흘러 나온 포르노 잡지 한 권이 친구들 사이에 나돌았다. 그 시절 아이들은 그 책 한번 보는 게 소원이었고, 그것은 무슨 권력의 트로피처럼 교실 뒤편의 한주먹들조차 비굴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꿀단지’였으며 권력이었다.

 

장면 #2. 2008년 1월 라스베이거스 샌즈 호텔

‘성인 엔터테인먼트 엑스포’(Adult Entertainment Expo)를 찾았다. 국내외를 꽤나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전시회, 박람회를 다 가 봤지만 이런 엑스포는 처음. ‘므흣’한 풍경이 펼쳐지리라 예상하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은 넥타이 매고 007 가방 든 비즈니스맨들의 피 튀기는 전장이었다.

 

고문 장면과 포르노가 뭐가 다르죠?


미국 내 합법적 시장 규모 연간 40억달러(약 36조원). 할리우드가 한 해 800여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반면 이들이 생산하는 콘텐츠는 평균 잡아 1만3000여편. 2000년대 중반 이후 ‘들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국 포르노 시장의 한가운데서 포르노 영화계의 아카데미라 할 ‘에이브이엔’(Adult Video News) 스타상을 2년 연속 수상한 포르노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혹은 스토미 워터스)를 만났다.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 늦은 아침을 겸한 약속이었다. 적당히 어깨가 드러난, 예사롭지 않은 미모였다. ‘짜잔’하고 적절한 효과음이라도 있어 줬으면.

 

1979년 미국 루이지애나주의 바톤 루지 출생. 염색한 금발. 170㎝의 늘씬한 키와 36인치의 가슴. 몸에는 아일랜드 이민과 체로키 인디언의 피가 흐른다.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을 하고 어머니와 자랐어요. 그렇다고 아주 가난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고 평범한 가정 분위기에서 자랐어요. 어렸을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는데, 공부도 아주 잘했어요. 고등학교도 루이지애나주가 인증한 우수 고등학교를 들어갔고 그곳에서 교내신문 편집장까지 했으니까요.” 그의 성장담은 오히려 특별할 것이 없어서 이상했다. 괜히 불우했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마지못해 ‘이 일’을 시작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바로 클럽에서 스트립 댄서로 일을 시작했어요. 어려서부터 춤을 췄고 남에게 나를 보여주기를 좋아했던 저는 그 일을 굉장히 사랑했어요. 클럽에서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를 겨우 넘어선 정도였지만 단숨에 스타가 될 수 있었죠. 클럽에서 꽤나 유명세를 탄 이후 ‘위키드’(Wicked)라는 포르노 영화사의 스카우터 눈에 띄어 포르노 영화에 데뷔했어요.” 이후 그는 쉬지 않고 포르노를 찍어 나갔고, 2003년에는 같은 포르노 배우 팻 마인과 결혼까지 하며 온 삶을 그곳에 파묻기 시작했다. ‘비비드’(Vivid)와 함께 미국 포르노 영화계의 양대 산맥이라 할 위키드의 스타로 성장하며 <펜트하우스>, <플레이보이> 등의 잡지 모델로도 활동했다. 2005년 이혼했지만 결혼생활 중에도 ‘일’은 계속했다. “제 일을 사랑해요. 영화를 촬영하는 중에는 최대한 그 ‘느낌’을 전달하려 하지 실제 그만큼 느낀다고는 할 수 없을 거예요. 우린 배우고, 그건 영화니까요.”

 

고문받는 영화 장면을 보면서, 저 배우가 실제로 저런 고문을 당할 것이라 믿는 이는 거의 없지만 포르노를 보면서는 배우의 교성과 흥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당돌한 배우는 그것이 ‘일’로, ‘예술’로 자신에게 다가온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랑의 표현을 보여주는 게 어디까지 되고, 어디까지 안 된다는 것인가요? 키스는 되고, 섹스는 안 된다는 건가요? 섹스를 하지 않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요? 그건 사랑을 만드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판타지로 승화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이죠.”

10년이 안 되는 동안 100편에 가까운 포르노 영화를 찍고, 10여편의 포르노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포르노 영화의 대본을 쓰며, 제작에까지 손을 댄 스토미 대니얼스의 생각은 의외로 확고했다. “포르노 영화의 경계는 곧 허물어질 거예요. 실제로 유럽 영화들 중에는 실제 정사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가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이에요. 영화의 목적에 따라 시장은 다르게 존재하겠지만, 애니메이션·액션·스릴러가 따로 있듯이 그저 보통의 영화적 장르가 될 거라 생각해요.”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의 생각은 포르노가 ‘약간 별난’ 내용의 영화라는 뜻이다. 그런 생각 때문이었는지, 그는 할리우드의 ‘보통’ 영화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나라에도 개봉한 영화 <40살까지 못 해본 남자>에도 잠깐 출연했고, 지금도 할리우드 영화 두 편을 촬영 중이라고 했다.

 

지나 제임슨의 후계자로 크로스오버 스타상

 

그는 스트립 댄서로 시작해 포르노 배우가 됐고, 감독·작가·제작자가 됐으며, ‘할리우드’ 여배우로 빠르게 변신하면서 경계를 허물고 있다. 2008년 ‘그래미상’ 시상식에 나타난 그가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보인 이유는 그러한 탓이다. 지난 1월 “더는 카메라 앞에서 다리를 벌리지 않겠다”는 소감과 함께 은퇴를 선언한 전설의 포르노 배우 지나 제임슨이 에이브이엔 시상식장에서 스토미 대니얼스를 공개적인 후계자로 지명하고 크로스오버 스타상까지 안겨줬었다. 그때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으며, 연수입은 생각보다 많으며,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시장은 더욱 커지고 있고, 가장 큰 고민은 건강 문제라고 술술 대답을 잘 이어 가던 그가 포르노의 부정적 측면을 묻자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어떤 의미일까? 가치관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그 큰 가슴 앞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김혁/장난감수집가·테마파크기획자 blog.naver.com/khegel

 

기사등록 : 2008-03-12 오후 09:34:43 기사수정 : 2008-03-15 오후 12:5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