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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스크린의 연인들 (한겨레 연재)

by Wood-Stock 2009. 8. 10.

‘사랑의 스잔나’ 의 진추하

내 사춘기 시절 ‘둘도 없는 내 여인아’

 

 

 

사춘기 시절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영화배우는 진추하(천추샤)다. 중학교 2학년 봄에 서울로 전학을 와서 연합고사를 보기까지 근 2년간 변두리라고는 해도 서울 한구석에서 나름대로 땟물을 벗었다고 턱을 한껏 쳐들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1976년 12월, 나는 운명적으로 그와 마주쳤다. 관객이라고는 두개 있는 구공탄 난로 옆에 앉아 있는 네댓 명이 전부인 명성극장에서였고 영화의 제목은 <사랑의 스잔나>, 당시 이따금 선보이던 한-중 합작, 엄밀하게는 한국과 홍콩의 합작영화였다.

 

영화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대략 여주인공인 진추하가, 예쁘고 모범생이고 온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추하양이 저 몹쓸 백혈병에 걸려 죽는다는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어디선가 좀 본 듯한 내용에 어디선가 읽은 듯한 대사며 장면의 연속이었다. 이것저것 짜깁기해서 대충 만든 영화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주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태어나서 본 영화라고는 순수 국산영화고 외화고 합작이고 간에 통틀어 스무편이 될까 말까 했는데도 그랬다. 텔레비전의 ‘주말의 명화’며 ‘명화극장’은 빼더라도.

 

극장 밖에는 주인공의 사돈의 팔촌도 닮지 않은 배우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울의 극장과 너무도 수준차가 나는 간판이 달려 있어서 어설프다는 점에서 안팎이 일치됨을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진추하는 내가 일찍이 초등학교 때 어떤 여성지의 별책부록으로 나온 영화배우들의 화보에서 본것 같은 특별한 점이 없었다. 이를테면 소피아 로렌의 야성미, 잉그리드 버그만의 청순함, 캐서린 헵번의 우미함,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천변만화, 오드리 헵번의 고고함 그 무엇에 비견할 만한 특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숨이 넘어갔을 때는 아예 울었다. 스스로가 촌스럽고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울었다. 극장 화장실에 가서 살인적인 암모니아 냄새 속에서 오줌을 누면서도 울었다.

 

왜 울었는가. 그가 뭔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에 속해 있으면 안도하고 획일화된 틀 속에 안주하고 앞으로 남들과 똑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정해져 있는 존재에게도 내밀한 나름의 무언가가, 조개 속살처럼 약하고 건드리면 아프고 눈물이 나오는 부분이 있음을 진추하는 알려주었다. 그 방법이 통속적이든 수준이 높든 아무 상관없었다.

 

숨 넘어가면 숨 넘어갈 듯 울고 노래하면 노래에 푹 빠져

 

당시 고등학생들의 자취방에 압도적으로 많이 걸렸던 배우는 올리비아 핫세(아르헨티나 출신으로 60년대 후반 17살의 나이에 〈로미오와 줄리엣〉에 출연함으로써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영어로는 Olivia Hussey인데 그 당시 남학생들은 백이면 백 올리비아 핫세라고 불렀지 미국식으로 ‘올리비아 허시’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 인간이 있었다면 백이면 백 맞아죽었을 것이다)였다. 핫세의 인기가 지속된 데는 그 당시 중고생들이 제 또래라고 생각할 만큼 앳되고 동양적인 외모 덕이 컸겠지만〈로미오와 줄리엣〉주제곡‘어 타임 포 어스’의 사운드 트랙에도 힘입은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진추하는 청신하고 동양적인 미모는 기본이고 저 심금을 울리는‘원 서머 나잇’과 ‘그래주에이션 티어스’를 직접 작사, 작곡하고 노래까지 불러젖혔으니 핫세 양이 한국에서, 아니 동양권 어디에서 〈사랑의 스잔나〉를 보았더라면 청출어람의 후배가 나왔음을 뼈아프게 실감하지 않았을까. 그로부터 진추하와 올리비아 핫세는 고등학생 자취방 벽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나갔다. 멀리는 80년대 중반까지.

 

영화 〈사랑의 스잔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노래‘원 서머 나잇’이나 ‘그래주에이션 티어스’는 여전히 남아 있다. 내 또래인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에 진추하의 노래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무척 반가웠다. 그 영화를 보면서 찔찔 울고 또 울었다는(화장실 가서도 울었다는) 사나이들을 나는 알고 있다. 진추하는 소풍날 교련복 입고 탄띠, 수통, 각반을 차고 줄지어 행군(行軍)을 해야 했던 어이없는 시절 내 사춘기의 들창이며 코드였다.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성석제 소설가

 

 

‘브레드리스’ 건달 리처드 기어

고단했던 젊은 날, 그가 잠시 내곁에 머물렀다

 

브레드레스 포토 보기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내가 최초로 좋아한 배우는 냉혹한 투우사이자 방황하는 영혼, 타이론 파워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의 피가 모래밭에 스며드는〈혈과 사〉의 마지막 장면에서 너무나 큰 상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때 이후 나는 얼마나 많은 배우를 좋아했던가. 〈태양은 가득히〉의 알랭 들롱, 〈더 웨이 위 워〉의 로버트 레드퍼드, 〈아비정전〉의 장궈룽(장국영)…. 그리고 한때는 게리 올드먼의 광기와 순수가 뒤섞인 눈빛을 좋아했고 미국의 막막한 시골을 여행할 때마다 〈길버트 그레이프〉에서의 삶에 포위되어 지친 청년 조니 뎁의 불안한 표정을 떠올렸다.

 

또한 내가 정우성을 좋아한다는 것은 나 스스로 소문을 내고 다니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내 노트북의 사진파일에는 정우성으로 가득 차 있고, 얼마 전 탈고한 내 장편소설 속 한 인물이‘난 남자배우 얼굴이 불안을 담고 있어야 화면에 몰두할 수 있거든’ 하고 말하는 것은 물론 정우성을 두고 한 말이다. 한편 내가 세월을 두고 좋아한 배우는 역시〈대부 2〉의 알 파치노다. 그러나 이 모든 매혹에도 불구하고 내게 가장 강력하고 또 짧은 사랑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연인은〈브레드리스〉의 정말로 대책 없는 건달, 리처드 기어다.

 

수많은 총구앞으로 뛰쳐 나간다. 경쾌한 음악 네멋대로 춤을 춘다

 

그때 나는 결혼 이후 닥쳐온 가난과 일상에 찌들어 있었다.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파트타임 직장에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가정사도 고단했거니와 적성에 맞지 않는 회사 일도 힘들었다. 몹시 위축돼 있었으며 무엇보다 고독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고민하거나 심지어 연민을 느낄 여유조차 없는 그 시절 어느 햇살 좋은 날, 지금은 영화평론가의 아내가 된 친구와 함께 참으로 오랜만에 시내의 극장에 갔다. 과자 봉지와 음료수를 들고 재잘거리며 극장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잠시나마 자유의 실감 때문에 눈물이 핑 돌았다.

 

〈브레드리스〉의 리처드 기어는 경찰에게 쫓기는 싸구려 시골 건달 제시다. 그의 꿈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멕시코로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여대생 모니카는 방학 때 시골에서 잠시 어울렸던 제시가 찾아오자 어처구니없을 뿐이다. 어디에서 구했을까 싶은 굵은 체크무늬 바지에 요란한 재킷을 입은 천박한 취향, 리모컨이 신기해서 가랑이 사이로 권총을 뽑듯 리드미컬하게 이리저리 눌러보는 장난스럽고 낙천적인 모습. 지구를 구원하는 만화 속의 영웅만이 우상인 제시는 삶에 아무 준비도 대책도 없다.

 

그러나 지도교수의 애인이 되어서라도 출세하고자 했던 모니카의 마음 한편에는 도시의 속물성에 환멸이 있었다. 제시는 섹스가 끝나고 욕실로 가려는 모니카를 붙잡으며 뜨겁게 말한다. “내 체취를 갖고 다녀.” 제시의 맹목적인 순정을 거부하기에는 삶이란 게 너무 숨통을 죄는 위선적인 존재가 아닌가.

 

경찰에 포위된 제시는 수많은 총구 앞으로 뛰쳐나간다. 다음 순간 경쾌한 음악과 함께 시작되는 그의 춤만큼 절망을 숨막히게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그 절망은 이 영화의 원본인 장 뤼크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보다 훨씬 원색적이면서 강렬했다. 그때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 발레리 카프리키스처럼 그가 골라준 핑크색 끈 원피스를 입고 경찰에 쫓기며 세상에 나밖에 모르는 남자와 함께 차 안에서 밤을 새우고 싶었던가. 누군가 나를 지친 일상에서 빼내 다른 곳으로 데려가주었으면, 어떤 것이든 좋으니 다른 인생을 시작하게 해주었으면, 며칠만이라도 내 멋대로 함부로 살아보았으면….

 

하지만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돈 많고 친절하고 잘생긴 남자는 평생 한번도 기대해본 적이 없다. 세상에 기적이 하필 나한테 일어날 리가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키치와 순수의 건달 제시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마지막의 비극은 예정된 수순이다.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와 〈아메리칸 지골로〉를 끝으로 리차드 기어에 대한 내 사랑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제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살기는 글렀다는, 막바지에 이른 젊음의 한 시절. 일탈에 대한 불온하고 충동적인 꿈. 그것들과 함께 〈브레드리스〉의 순정 건달 제시가 내 곁에 머물렀던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다.

 

은희경 소설가 

 

 

‘양들의 침묵’ 조디 포스터

고독하면서 아름다운, 그는 내게 쿨했다

 

 

 

조디 포스터라는 미국 여배우에 관해 내가 주워들은 몇가지 것들. 그는 프랑스어만 쓰는 기숙 고등학교를 다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한다. 그래서 〈택시 드라이버〉에 출연하고 그 영화가 칸영화제에 갔을 때 그는 감독 마틴 스코시즈의 통역을 해줬다고 한다. 대학도 어딘가 근사한 데를 나온 그는 레즈비언이다. 인공수정으로 애 둘을 낳고 파트너와 함께 보통 가정생활을 꾸리고 있단다. 그리고 그런 사생활은 일체 공개하지 않고 있고.

 

뭐 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거에 불과하니까 사실 여부는 그리 중요치 않다.〈택시 드라이버〉에서는 어린 창녀 역을 하는데,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십대적 몸을 볼 수 있다. 뭐랄까 성인이 된 모습보다 훨씬 요염한 맛이 느껴진다.〈피고인〉이라는 영화에선 쓰레기처럼 사는 백인 하류 처녀로 나온다. 트레일러 집에서 아무 남자들과 동거하며 술집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그 처녀는, 어느 날 술이 떡이 되어 춤을 추다 술집 뒷방에서 여러 남자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하게 된다.

 

싸구려 시골 하층민 테

강해지려는 눈빛이 외로웠다

 

조디 포스터의 영화 중 나의 베스트는〈양들의 침묵〉이다. 시골 하층민 출신이지만 공부를 죽어라고 해서 연방수사국(FBI) 요원이 되어 자신의 출신으로부터 탈출한다. 한니발 렉터에게 비싼 핸드백에 싸구려 구두를 신은 촌년이라는 비웃음을 당하면서도 그는 연쇄 살인범 피해자들 주변을 끈질기게 탐문하고 다닌다. 그들은 바로 자신이 이제 막 가까스로 탈출해 나온 아무 꿈없는 쓸쓸한 인생들이다. 그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 여자의 연약한 몸, 불안한 듯 낮게 담담히 흐르는 목소리, 강하지 않지만 강해지고 싶어하는 눈빛이 외롭다.

 

〈콘택트〉에서의 지적인 우주천문학자 역도 좋지만 내게는〈패닉 룸〉에서의 한 장면이 더 기억에 남아 있다. 여인은 막 이혼을 하고는 병약한 십대 딸과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온다. 두 모녀는 서로 강한 연대감을 느끼고 있고 아주 의연하다. 번잡한 이사를 끝내고 딸도 잠든 늦은 밤 여인은 홀로 와인 한잔을 들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다. 평화롭게. 갑자기 여인은 여태껏 보여줬던 의연함을 잃고 울컥 울음을 터뜨린다. 한번은 미국 방송의 퀴즈 프로그램 〈지오파디〉에 나온 조디 포스터를 본 적이 있다. 원래 일반인을 위한 프로그램이지만 그날은 배우들을 불러다 놓고 하는 특별기획이었던 것 같다. 결국엔 내 예상대로 조디 포스터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는데, 난 그의 해박한 지식에 조금은 감탄했다.

 

이런 얘기를 늘어놓고 있다고 해서 내가 조디 포스터를 마음속으로 연모하고 있다든가 하는 건 아닌 거 같다. 또 영화감독으로서 언젠가 이 배우랑 일할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꿈을 꾸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나도 조디 포스터에 관한 얘기와 스크린 속 그의 모습을 혼동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가십이나 영화 속 장면들이 그의 진실이건 아니건 간에 내게는 좋게, 쿨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누구든 남 눈치 안보고 자기 식대로 산다는 건 고독하면서도 아름다운 일이니까.

 

난 사춘기 때도 여배우를 동경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보다는 옆집 아줌마에게 흥미를 갖는 부류였다. 손에 닿을 수 있는 이득에만 몰두하는 비낭만파랄까? 아니면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조작에 속지 않으려고 애쓰는 좁은 속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영화감독인 내게 여배우란 같이 작업하는 동료이고, 비즈니스 파트너다. 내가 여배우에게 사랑을 느끼는건 스크린 속의 모습에서가 아니다. 내가 그 여인들에게 사랑을, 강한 동료의식을 느끼고 존경심을 품게 되는 건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통해서다.

 

조디 포스터는 한 편인가 두 편 직접 감독을 한 적도 있고, 한 이년 전에는 아주 작지만 귀여운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었다. 제목을 잊은 그 작품에서 그는 조연으로 나온다. 그는 요즘 뜸한 편이다. 뭐, 여배우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일 테니까. 하지만 난 조만간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스크린을 통해서든 뭐든. 그 여자와 나는 동갑이다.

 

임상수 영화감독

 

 

 

‘남과 여’ 아누크 에메

그 여인 냄새·움직임 어느것 하나 잊지못한다

 

 

 

몽정을 했다. 사실 나는 그 때,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꿈이길 더 바랬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날 이후 나는 떨어지는 꿈을 꿔서 키가 훌쩍 자라길 바랬지만 그 여자(또는 그 여자를 대신하는 잔상들)가 내 꿈을 지배했고 나 또한 그 여자를 만나 속옷을 흥건히 적시곤 잠에서 깨기를 반복했을 뿐이다. 영화 제목도 생각이 나질 않는, 주말의 명화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영화였던 것은 얼핏 기억이 난다. 당연히 영화 스토리는 잊은 지 오래지만 그 여자만은 너무나 또렷하게 내 마음 속에 아직도 있다.

 

라쿠웰 월치? 그 여자의 이름도 바른 표기법으로 쓸 줄 모르지만 그 여자가 내 열다섯 가슴에 들어올 때, 몸의 들고 나는 환상적 형태와 착 달라붙고 짧았던 그 도발적 의상들은 눈을 감고도 아직 그려낼 수 있다. 그 여자 때문에 나는 한 동안 스크린에서 여자 연기자들을 볼 때, 연기는 물론 얼굴도 채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몸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잔상만으로 남아있을 뿐 너무나 빨리 이별하고 말았다. 사실 그 여자 같은 역할모델들은 이후 너무나 쉽게 봐올 수 있던 터라 사랑의 미묘한 감정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꿈에서 등장하지 않았다

“박하사탕” 들꽃같은 여인이여…

 

아주 오랫동안 내 마음에 담아두었던 여인은 미처 그 이름도 모른 채였다. 아누크 에메. 나는 그 여인이 나온 영화를, 이 영화만을, 딱 한 편만 본 줄 알았다. 남과 여의 문제를 <남과 여>라는 단편적인 창을 통해 이해하는데도 충분하다고 착각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여인 때문이었다. 요즈음 말처럼, 필이 꽂힌 채 그 여인의 모든 것을 좋아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했었다. 도빌의 바닷가, 파도가 일렁이고 아이들이 분주하게 뛰는 그 회색빛 해안가의 바람처럼 그 여인의 서늘한 눈빛은 한없는 깊이를 가진 여인의 모습으로 나로 하여금 성적대상으로서 여배우와 관계를 정리하게 만들었다. 얇은 입술이 가진 관능 그리고 검은 브래지어로 이등분된 여윈 등판이 아름다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만든 그 여인은 상당한 기간 동안 현실에서 여자친구조차 비교하게 만든 나의 절대 지배자이기도 했다.

 

사실 그 여인의 외모를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 다만 그 여인의 냄새(영화인데도 말이다), 같이 있었던 카페의 소음들, 그 여인이 머리를 손가락 사이에 넣어 쓸어 올릴 때 우아한 그 움직임들을 어느 것 하나 잊지 못한다. 그 여인은 특이하게도, 아니 애타게도 내 꿈에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연예인 브로마이드를 사게 했던 장본인이다. 그 여인이 나온 영화를 볼 때, 나는 미처 그 여인이 등장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오직 <남과 여>에서 그 여인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여인이 돌아왔다고 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내처 달려가 봤던 <남과 여 20년 후>. 그 여인 또한 20년 후였다. 세월은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그 여인은 아직도 서늘하고 깊은 고혹적인 눈빛과 아름다운 지혜를 가득 문 입술, 그리고 세월을 내려놓지 않는 시원한 이마로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 여인이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최소한, 나이 들어(?) 영화 속에서 인연으로 만나는 그 따위 일들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더구나 그 여자는 처음, 너무 촌스러워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그런 인상이었다. 그런데 다급하게 빠져나가는 병사들의 소란스러움과 그 여자의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의 여유로움 사이에서 그 여자는 너무나 어리숙하고 순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문소리. 그 여자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연애감정이 생기는 대상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 달뜬 감정이 몸을 데우고 복받쳐 오르는 끓는 감정을 촉발시키지도 않는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여자가 왠지 내 연인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만든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를 면회 온 그 여자의 청초한 들꽃 같은 모습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까?

 

이섭/전시기획자

 

 

‘플레이어’ 팀 로빈스

내 친구랑 닮았다, 단순한 외모치곤 하는 짓이란

 

 

 

10대를 마칠 때까지 내가 본 영화들 속에 연인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여학생이되 여성은 아니었다. 내 10대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가 <엑소시스트>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를 본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전 교사의 지도주임화’가 이루어진 학교인데다 시내에 극장이라곤 두 군데뿐이니, 사복으로 위장했다 해도 영화관람이란 남의 집 담을 타넘는 것만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린다 블레어가 괴성을 지르고 얼굴이 칼자국으로 너덜너덜해지고 입에서 퍼런 똥 같은 물질이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걸 눈을 반쯤 가린 채 겁에 질려 지켜보았는데, 주인공 소녀의 정신분열과 인체학대에 감정이입할 때 분출하던 아드레날린이야말로 우리의 제도교육 스트레스에 출구가 될 자격이 있었다.

 

한때 크리스 미첨과 올리비아 허시가 나오는 <썸머타임 킬러>가 유행했고 두 청춘스타에 대해 떠들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나도 대세를 좇아 이 영화를 보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폭력이나 섹스 장면은 전혀 기억나지 않고 오직 하나, 두 남녀가 손을 잡고 조그만 배를 타는 장면 하나가 달랑 기억에 남아있다. 베드신은 아니더라도 키스신 정도는 있었을 텐데 당시 우리 처지에서 <엑소시스트>에 비하면 그건 너무나 설득력 없는 판타지였다. 대학 1학년 때 농촌활동을 다녀온 뒤 심신의 피로가 생리현상의 부조화를 가져왔던 모양인데 남학생들과 큰 교실에서 함께 ‘잔’ 탓에 임신이 됐을지 모른다고 걱정했으니, 그런 정서적 성적 지진아가 영화에서 베드신을 보았다 해도 그게 에로틱하거나 로맨틱했을 리 없는 것이다.

에로틱하거나 로맨틱 하진않다, 고집세고 쿨하고 똑똑하다

내가 스크린에서 어떤 남성의 매혹에 잠시 넋을 놓은 건 로버트 알트만의 92년작 <플레이어>였다. 영화 찍고 싶다고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오는 감독들에게 늘 “스무단어로 설명해봐.”라고 말하는 ‘싸가지 없는’ 할리우드 영화제작자가 나오는데 내가 ‘이 배우의 다른 작품도 보고 싶다’는 마음에 설레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가 팀 로빈스다. 이 배우가 초면은 아니었다. 에드리언 라인 감독의 90년작 <야곱의 사다리>에서 그를 처음 봤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음산하고 끔찍한 장면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뒤숭숭한 표정으로 나오는 이 배우와 개인적으로 어떤 소통을 하기엔 감독의 장력이 너무 셌다. 게다가 관객의 뒷통수를 후려치는 결말의 충격은 주연 배우의 조금은 독특했던 첫인상까지도 쓰나미처럼 다 쓸고 가버렸다.

그는 유난히 큰 키에 미남이긴 하나 역대 할리우드 남자스타들처럼 ‘에로틱’하거나 ‘로맨틱’하진 않다. 그보단 오히려 고집 센 지식인 같은 분위기, 똑똑하고 냉소적이면서 쿨한 이미지가 있다. 혹시 웃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고종석이라는 친구하고 이목구비가 닮았다. 하는 짓을 보면 그의 이미지가 단순한 외모만은 아닌 것 같다. 보수 우파의 정치행태를 조롱한 <밥 로버츠>나 사형제도를 비판한 <데드맨 워킹>을 감독한 것도 그렇지만, 9살 연상의 선배 여배우와 결혼하고, 어느 핸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이티난민에 대한 정책을 비판해 소란을 일으키고, 지지난 대통령선거에선 랄프 네이더를 적극 지지해서 고어를 떨어뜨린 주범이라고 민주당지지자들한테 손가락질 당한 것도 그렇다.

1994년 칸영화제에 갔는데 그해의 개막작이 <허드서커 대리인>이었다. 순진하고 낙천적인 주인공이 냉혹한 자본주의의 시험에 들어 고난을 치르는데, 나는 이 영화에서의 팀 로빈스를 특히 좋아했다. 칸 개막식 때 대극장 앞에서 자동카메라를 들고 서있다가 붉은 카펫의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스타들 가운데서 까만 싱글 정장의 팀 로빈스를 발견하고 셔터를 눌렀다. 가까이서 보니 이 남자는 두 다리가 참으로 긴 것이 마치 영덕대게 같았다. 나는 영화제 자료와 함께 필름 두 롤을 신문사로 우송했는데 나중에 돌아와서 보니 신문에 실린 사진 몇 컷만 남고 나머지 필름은 찾을 수 없었다. 나의 영덕대게 역시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조선희/ 소설가

 

 

‘프라하 봄’ 테레사

운명을 믿는 여인에겐 쿨한 사랑은 없는 법

 

 

 

한때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을 즐겨 읽었던 적이 있다. 그의 단편들은 언제 들추어보아도 보석 같다. 그의 몇몇 작품들은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져 막막한 절망감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어떤 뜻에서 그는 나로 하여금 소설쓰기에 흥미를 잃도록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다. 마치 B. B. 킹의 연주를 직접 듣고 나서 감당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들어 연신 담배만 뻑뻑 빨아대던 한국의 숱한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처럼.

 

하지만 그가 쓴 장편소설들의 수준은 들쭉날쭉하다. 나는 <농담>을 여전히 그의 베스트로 꼽는다. <생은 다른 곳에>는 찬탄을 자아낼 만한 형식미를 갖췄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대중과의 접점이 가장 넓은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의 ‘부질없는 따스함’을 사랑한다. 그 이후의 작품들은 별로다. 괴팍하게 늙어가는 노인의 꼬장꼬장한 푸념 같다. <농담>은 물론 명품이지만 두 번 읽기엔 버거울 만큼 냉혹하다. 결국 내가 이따금씩 들추어보는 그의 장편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뿐이다. 이 작품을 더할 수 없이 세련된 영상에 담아낸 <프라하의 봄> 역시 내가 즐겨보는 영화다.

 

나의 바람둥이 기질에 상처

그녀의 어깨 감싸주고 싶다

 

언젠가 나는 사비나(레나 올린)야말로 “모든 남성들이 꿈에 그리는 연인”이라고 쓴 적이 있다. 이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걸까? 이즈음 들어 <프라하의 봄>을 볼 때마다 눈에 밟히는 것은 오히려 테레사(줄리엣 비노쉬)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여인,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없는 여인, 나의 바람둥이 기질에 상처 받고 악몽에 시달리는 여인, 나와 함께라면 몰락까지도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여인. 테레사에게 쿨한 사랑은 없다. 그녀는 사랑으로 나를 옭죄고, 질투로 병들며, 그렇게 한 세월을 함께 견딘다.

 

사비나에게 사랑은 우정의 한 형태다. 그것은 에로틱한 우정이며 삶의 비공식 부문에 속한다. 테레사에게 사랑은 우정과 공유될 수 없다. 그녀는 차라리 사비나와 우정을 나눌지언정 토마스와는 그럴 수 없다. 그녀에게 사랑은 일대일 대응이며 우정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랑은 그녀에게도 괴로움이다. 그래서 그녀는 당장에라도 깔아뭉갤듯 부릉부릉 대는 소련군 탱크의 캐터필러에 맞서 겁도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것이다. 오오 테레사, 제발 그런 식으로 네 삶을 함부로 내동댕이치지 말아줘.

 

<프라하의 봄>을 보며 내가 만났던 테레사들을 생각한다. 내가 받았던 따스한 온기와 내가 줬던 차가운 상처를 생각한다. 저기 도심을 가로지르는 더러운 흙탕물 속에 둥둥 떠내려가는 공원 벤치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테레사가 있다. “이곳은 너무 더러워요, 우리 시골로 떠나요.” 나는 영화 속으로 걸어들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고 싶다. 죽기 직전의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요?” 토마스(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대답한다. “나는 행복하구나, 하는 생각.” 테레사, 그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믿어줘. 네가 질투와 속박으로 나를 나락까지 끌어내렸다는 자책감 같은 건 떨쳐버려. 이 비루한 삶을 나와 함께 견디어줘서 고마워.

 

심산/시나리오작가  

 

 

‘조지아’ 제니퍼 제이슨 리

은주와 제니퍼, 내 인생극장 동종의 모습들…

 

 

 

그날 그 황당한 죽음의 소식 이후 자주 듣게 된 말이 있다. “은주 때문이야!”

원인 모를 우울모드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변명처럼 내뱉는 말이 ‘은주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말 은주가 우울을 가져왔는지, 은주를 빙자한 각자의 속앓이인지는 모르겠다. 차라리 우울하고 싶어라! 쯤은 아닐까. 은주가 떠난 세상에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일요일 오후 홀로 두 편의 비디오를 때렸다. <돌로레스 클레이븐>과 <조지아>. 나이 든, 1962년생의 미국산 이은주가 출연하는 작품으로 정말 은주가 생각나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소설사에 영화사에 혹은 진짜 인생극장에 그리 흔치 않은 은주들, 은주류의 전통이 있다. 돌로레스의 딸 셀리나, 조지아의 여동생 새디, 또는 그녀의 다른 영화들, 그러니까 <위험한 독신녀>, <부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등등에 키 작은 이은주, 제니퍼 제이슨 리가 등장한다.

 

그녀들로 충분했던 세상의 스크린, 김빠진 팝콘들이 굴러다닌다

 

은주와 제니퍼 제이슨 리를 동일시하는 것은 억지일는지 모른다. 도대체 닮은 구석이 뭐가 있는가. 죽는 연기? 세컨드 베스트의 위상? 그냥 왠지 비슷한 느낌?

그런 것이 아니다. 두 여배우의 모습은 내가 출연한 실제의 인생극장에서 맞닥뜨린 여성과 동종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세상에서는 ‘자의식’이라고 부른다. 쉽게 잘 부서지는 딱딱한 견과류 껍데기. 그게 바로 자의식 과잉의 성분이다.

 

화면에서 마주치는 제니퍼 제이슨 리는 언제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대개가 인생막장의 배역을 맡고 있지만 그 팔자, 그 신세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을 안겨주곤 한다. 그녀는 세상의 가해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지만 그 철저히 무너지고 망가지는 모습으로 세상을 조롱한다. ‘FUCK YOU!' 앙다문 입술로 그녀가 자주 외치는 대사가 이것이다. 도대체 너 왜 그러니 은주야….

 

더 이상 여자를 사귈 수 없게 되었다. 몇 해 후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 때문일까, 마주치는 여자들이 일단 안심을 하고 대해 온다. 그렇듯 안심하는 표정에는 날 선 자의식이 담겨있지 않다. 차라리 무성(無性)에 가깝다. 할아버지가 되면 세상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감히 남자가 되어 여자를 사귈 수 있겠는가.

 

지난날의 여자들 혹은 제니퍼 제이슨 리 또는 이은주들과 언제나 싸웠다. 싸움의 소재, 싸움의 배경은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을만큼 유치한 것들이다. 정말 짜장면을 먹을지 라면을 먹을지를 놓고 다퉜던 기억도 있다. 김대중이 좋다 싫다를 놓고 죽도록 다투다 원수처럼 헤어진 여자도 있다. 만남으로 시들어가는 꽃, 나는 물주는 법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애로운 할아버지가 불쑥 되고 말았다.

 

은주는 가고 제니퍼는 늙었다. 웬일일까, 차라리 후련해지는 느낌. 아마도 이제 다른 자의식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으리라. 그녀들로 충분하기로 결정한 세상의 스크린에 비가 죽죽 내리고 의자는 삐꺽거리고 김빠진 팝콘들이 굴러다닌다. 변두리, 삼류, 동시상영, 그래 다 좋다, 자애롭게.

 

삐쭉빼죽한 자의식의 표출은 내게 환상과 환멸의 두 얼굴을 동시에 펼쳐 보여주었다. 그런 성향을 사랑하기는커녕 지긋지긋해 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지긋지긋함만을 찾아다녔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명으로 회복하기에 이생은 너무 짧다. 부러질 때 부러지지 않은 가지, 떨어질 때 떨어지지 않은 이파리는 추악하도다.

 

김갑수/시인·방송인

 

 

‘몽빠르나스의 등불’ 제라르 필립

사춘기 소녀 꿈 바꿔버린 ‘주말의 영화 그 남자’

 

 

 

내 인생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 중에 중요한 한 남자가 있다.

〈적과 흑〉의 주인공, 프랑스 배우 ‘제라르 필립’이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손가락이 가늘고 섬세했던 여자 미술 선생이 소질이 보인다며 내게 미대에 갈 것을 부추겼다. 덕분에 흥분해서, 거의 매일 미술실에 홀로 남아 늦도록 그림을 그리고, 풍광이 아름다워서 외롭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고 느끼게 했던 중학교 교정을 터벅터벅 걸어나오던 그 시절. 순수 미술을 하는 ‘화가’는 나의 꿈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어느 봄날 토요일 밤, ‘주말의 명화’에서 제라르 필립을 만났다. 모두 잠든 안방에 숨어들어가, 17인치짜리 금성사 로고가 선명한 텔레비전을 어둠속에서 마주하고 영화 〈몽빠르나스의 등불〉을 보았다. 후기인상파의 한 사람이었던 모딜리아니의 삶을 다룬 전기영화였다. 고흐 이상으로 절대적 빈곤과 드라마틱한 삶을 요절로 마친, 그리고 사춘기 소녀를 단박에 사로잡을 미모의 화가 모딜리아니가 제라르 필립에 의해 내 앞에 나타났다.

 

내방 돌아와 꺽꺽대며 울었다, 물 한잔으로 와인흉내 내보며…

 

얇은 입술에 작은 얼굴, 검은 고수머리의 그는 내가 어렵게 구한 화집 따위에 엄지손톱만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모딜리아니의 생, 그 너머를 보여주고 있었다. 혼자 무릎을 싸안고, 그 영화를 집어삼켜버린 나는 동생의 코 고는 소리가 낮게 깔리고 있는 내 방으로 돌아와 괜히 꺽꺽대며 울다가, 목젖을 움직이지도 않고 와인 한 잔을 아주아주 조용히 삼켰던 그를 떠올리며, 물 한잔으로 그를 흉내내어 보다가 잠이 들었다.

 

그 주말의 밤 이후, 내 꿈은 그림 그리는 사람에서 ‘영화 만드는 이’로 바뀌었다. 사춘기 소녀가 본, 빼어나게 잘 만든 한 편의 전기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가 그 어떤 것보다 매력적이라고 속삭여 주었던 것이다. 미술실을 드나드는 대신, 영화에 목매여 헤매던 내게 제라르 필립은 고맙게도 이후, 영화 속 애인들을 소개해 주는 구실까지 했다. 소녀의 ‘꿈’도 바꿔버린 그가 난생처음으로 ‘이성적 매력’의 세계까지 일깨워준 셈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현실의 ‘이성 애인’은 사귀어 보지도 못한 내게 ‘몬티’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했던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의 몽고메리 클리프트처럼, 유사 제라르 필립 같은 배우, 이를테면 선병질적인 느낌의 얼굴에 우울한 표정, 다소 마른 몸으로 소녀적 취향에 어필하는 사람이 현실의 대체제였다.

 

사춘기가 지나고 열심히 주워섬긴 남자들은 취향이 바뀌어 ‘근육질(!)’이었다.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아메리칸 지골로〉의 리처드 기어가 그 대표격. 〈브레드레스〉에서 쫙 달라붙는 체크 무늬 바지에 튀어나온 엉덩이, 댄스하듯 흐느적거리는 불량한 걸음걸이의 리처드 기어는 가장 섹시한 이성이었다.

 

〈이유없는 반항〉으로 호주에서 할리우드로 넘어가 〈LA 컨피덴셜〉로 스타가 된 러셀 크로가 그 뒤를 이었다. 대체로 좀 작은 눈에 촘촘한 속눈썹, 각진 턱의 얼굴에 두춤하고 넓은 어깨, 부피가 있어 보이는 몸집의 리처드 기어류의 배우들이 날 흥분시켰다. 최근엔 〈오만과 편견〉의 미스터 다시,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콜린 퍼스가 좋아졌다. 무뚝뚝하게 꽉 다문 입술에 다소 유연하지 못한 매너의 콜린 퍼스 덕분에 〈셰익스피어 인 러브〉도 다시 챙겨 보았다. 대체로 빼어난 연기력과 지적인 영혼의 소유자이거나 영화사에 오롯이 기록될 걸작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보다는, 내 취향으로 ‘섹시한 매력’이 풍기는 남자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영화 일을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새로이 스크린 속의 남자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 어리석지만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서 그나마 위로가 되는 듯싶다. 한 소녀의 인생을 바꾸는데 톡톡히 한몫을 한 남자 ‘제라르 필립’으로부터 스크린 속 남성 편력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심재명/ MK픽처스 이사

 

 

‘나쁜 피’ 의 쥘리에트 비노쉬

골방의 시절, 그 습한 눈빛에 살아있음을

 

 

 

바람이 늘 가슴속에서만 불던 시절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현재에 대한 자괴감으로 늘 불면증에 시달리던 따스한 봄날이었다. 그 당시 많은 이들이 그랬듯 무책임하게 ‘운동’을 정리하고 군에 다녀온 후,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시작한 사법시험 준비는 나를 골방으로만 몰아갔다. 불면증에 시달려 벌건 눈으로 전전하던 나에게 칙칙한 냄새로 기억되던 좁은 공간, 비디오방은 나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날도 그랬을 것이다. 일상처럼 비디오 몇 개를 고르고 가수면 상태에서 몽상을 즐기려하는 순간 무언가가 가슴에 창끝을 들이대었다.

 

레오 카락스 감독의 〈나쁜 피〉. 영화에 대한 처음 느낌은 당혹이었다.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고통을, 절망을, 비루함을 표현하는 언어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구나. 이제 영화의 줄거리는 기억에서 퇴색되었지만 몇 장면들은 생생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막막하던 나의 현실에 닿아 있었다. 알 수 없는 침울함과 막막함은 늘 나를 짓눌러 쾨쾨한 습기로 기억되는 도피의 지하공간으로 불러들였으니, 영화가 주는 모든 상황을 나의 처지에 맞추어 해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쥘리에트 비노슈. 그녀의 이미지는 무슨 색이었을까? 사실 그녀의 연기보다는 그녀의 표정이 주는 느낌이 더 선명했던 것 같다. 해탈한 노승이 던지는 선문답 같은 눈빛이었다면 표현이 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백지의 철없는 표정이 모든 것을 다 깨달은 듯한 현인의 웅변보다 커다란 느낌으로 각인되었다. 누추한 일상에 숨어 있는 현란한 삶의 색들을 스스로 건져내는 눈빛이었다.

 

그런 봄날이 몇 번지나가고 일상의 부역에서 회상한다

 

처음으로 같은 영화를 서너번 반복해서 보는 동안 그녀의 이미지는 어쩌면 내가 꿈꾸던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살아있음. 날숨과 들숨을 반복하는 동안 내가 숨쉬는 것들에서 자극을 발견하고 날것 그대로 내 욕망에 충실하고 바람의 방향으로 얼굴을 돌릴 수 있는 철없는 용기. 지금도 선명한 그 눈빛은 그녀의 답답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날것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겁 많은 아이의 습한 눈빛이 왜 내 가슴을 그토록 헐떡이게 했을까?

 

그 후, 봄이 몇 번 더 날 괴롭히는 동안, 난 직업을 얻기도 했고 아이들의 아빠가 되기도 하여 고루한 일상에 부역을 하며 지내고 있다. 허나 지금도 가끔 권태에 숨 막혀 불면증이 도질 때면 그 시절의 쥘리에트가 날 부른다.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날것 그대로 나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타자에 대한 해석은 주체의 상황에 기대어 있다고 믿는다. 지금 영화를 다시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다시 봄이다. 처절하게 생을 믿은 것들이 다시 비루하게 얼굴을 들이미는 공간이다. 그 시절의 암담함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표정을 달리하고 있다. 매일 부딪치는 현실은 미래를 알 수 없게 치장하고 나는 또 나만의 지하로 나를 가둘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순간인들 평온한 광장만 허락되겠는가? 다시 그녀의 알 수 없는 눈빛이 그리울 듯하다. 허나 지금은 뒷산에 올라가 휘파람 한번 불어볼 생각이다.

 

이동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 

 

 

 

‘이세상 어딘가에’ 허장강

변해버린 아저씨, 나는 울고 말았다

 

  

 

정말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스크린속의 연인이 내겐 너무 많았던 건지, 아니면 거의 없었던 건지…. 어렸을 때 극장에서 살다시피 한 적이 많았다. 친구들이 많을 땐 연극을 하고 놀았고, 한두 명 정도면 극장엘 갔다. 혼자서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영화의 한 장면을 흉내 내어 보거나 하였다. 혼자서 길거리를 걷다가도 앞에 가던 아저씨가 바바리 코트에 선글라스를 꼈으면 영락없이 한 장면이 됐다.

 

나는 혼자서 “파랑새 나와라 파랑새, 여기는 지리산, 지금 내 앞에 수상한 사람이 가고 있다. 간첩인 것 같다. 예의 주시하겠다. 오버” 이렇게 중얼거리며 앞사람에게 들키지 않게 담벼락에 착 붙기도 하면서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 갔다. 혼자 거울을 보며 엄앵란이 신성일에게 뺨을 맞고 울면서 S자로 뛰어가는 모습을 흉내내기도 하고 전옥 할머니의 지엄하고 무시무시한 대비마마의 역할을 흉내 내어 보기도 하고 <연산군>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를 재구성하여 허구헌날 연극을 하며 놀기도 했다.

 

영화는 정말이지 내 인생의 친구이자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대개 주연급이 아닌 조연급, 혹은 강렬한 인상을 주는 성격 배우인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남자 배우로는 김승호, 이예춘, 허장강 등이 강렬하게 남아있고, 여자배우로는 엄앵란, 최지희 등 60년대의 말괄량이 혹은 반항적 청춘 스타이거나 악역을 너무나도 멋있게 해내는 전옥, 혹은 윤인자 등이 그들이다.

 

내게 연인이 있었나 없었나 그게 현실인지 지금이 현실인지

 

외국배우로는 단연 찰리 채플린이다.

<박서방> <마부> <로맨스 빠빠> <쌀> <월급봉투> <육체의 길> 등 모두 김승호씨의 연기가 인상 깊게 남아있는 작품들이다. 이예춘씨의 역할은 대부분 악역이였는데 그의 잔인하고 무서운 연기와 표정은 현실세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그런데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였는지, 그가 뱃사공으로 나오는 영화에서 그토록 선하고 한 많고 정 많은 역할로 변신했을 때 또 한번 그의 다른 모습에 깜짝 놀랐다. 허장강씨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게 느물느물하면서 뻔뻔스럽고 잔인한 역할들을 많이 했는데 이경희씨와 함께 한 <이 세상 어딘가에>에서 벙어리 부부로 나왔을 때, 그 가난한 집의 유일한 생계수단인 재봉틀마저도 빼앗겼을 때 나는 너무 슬프고 비통해서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흐느껴 울었다. 세상에 그렇게 선한 연기를 잘하다니, 역시 허장강은 최고였다.

 

청춘스타 엄앵란의 <맨발의 청춘> <맨발로 뛰어라> <말띠 여대생>에서의 톡톡 튀는 연기는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엄앵란씨가 어느 날 <배신>이라는 영화를 찍으면서 배신을 때렸다. 웃통을 벗고 있는 신성일과 함께 커다랗게 찍힌 포스터의 제목은 <배신>이었는데 그 영화를 찍으면서 둘이 결혼하기로 했단다. 결혼 이후 시어머니의 구박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너무 걱정이 되서 이태원에 있는 엄앵란의 집으로 찾아 갔다가 문전박대 당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가 극장이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처음 <모던 타임스>에서 찰리 채플린을 만나고 나도 저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래서 그에 관한 기사, 영화, 책은 그 이후로 빠지지 않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너무나 많은 배우가 내 삶의 이곳저곳에 각인되어 있다. <25시> <희랍인 조르바>의 안소니 퀸, <스파르타쿠스>의 커크 더글라스, 제랄드 빠르디유, 로버트 드 니로, 대니얼 데이 루이스, 더스틴 호프만 , 버트 랭커스터…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현실세계를 확장시키고, 현실에선 만날 수 없는 캐릭터들에 주로 나는 매료되었던 것 같다.

내 삶의 반 정도는 영화 속 스타들과의 만남이었고, 그것이 현실인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 현실인지 정말 헷갈릴 때가 있다.

 

이혜경/서울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

음악다방 ‘복숭아주스’ 추억속 여인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편의점에서 복숭아 주스 한 병을 사 마신 적이 있다. 뚜껑을 열어 한 모금을 채 마시기도 전에 갑자기, 정말 느닷없이, 완전히 잊고 있었던 지난날의 어떤 기억들이 화들짝 떠올랐다. 모든 감각이 이십 수년 전의 한때로 순간 이동했다. 눈물나게 그립고 빛나던 한때. 도대체 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때의 기억이 그토록 생생하게 떠올랐을까?

 

고등학교 초년 시절의 여름에서 가을 무렵, 부산 서면의 뒷골목에 있던 ‘모모’라는 음악다방을 자주 드나들었다. 바로 근처에 있던 ‘물방울’과 더불어 ‘모모’는 좀 ‘노는’ 애들의 사교장이자 해방구였다. ‘노는’ 친구 하나를 따라 우연히 가본 그곳에서 나는 ‘미향이’를 만났고, 그 애를 보기 위해 매일같이 그 집을 찾았다. 미향이는 늘 우산 꽂은 크리스털잔에 가득 채워진 복숭아 주스를 마셨고 나도 그랬다. 이따금 ‘정애’도 만났고, 두어번 ‘희진이’와 마주 앉기도 했지만, 그 애들도 그 복숭아 주스를 마셨고 나도 그랬다.

 

그 얼굴을 볼 수 있는것만으로 살아 있음이 허무하지 않았다

 

바로 그 복숭아 주스의 냄새였다. 세상엔 복숭아 주스도 많지만 딱 그때 그 복숭아 주스의 냄새를 기억하게 만든 복숭아 주스는 그 편의점에서 마신 그 복숭아 주스가 처음이었다. (나는 확신한다. 냄새는 기억의 가장 강력한 촉매제다. 겪어보면 실감하게 된다.)

 

일단 복숭아 주스의 추억이 부활하는 순간, 그때 그 주변의 온갖 기억들이, 마른 짚단에 불길이 번지듯 화악, 순식간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기억나지 않았던 많은 이름들, 얼굴들, 노래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웃을 때마다 살짝 찌그러지던 미향이의 작은 보조개, 정애와 함께 걸으며 받쳐 들었던 우산의 색깔, 두 갈래로 땋은 희진이의 머리칼 냄새…. 그 냄새의 기억 한쪽 언저리에 부산 대한극장이 있다.

 

‘모모’에서 딱 서른두 번쯤 엎어지면 코가 닿는 거리. 거기서 〈해바라기〉를 보았다. 이탈리아 배우들은 왜 그렇게 멋있는 걸까?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는 닮고 싶었고 소피아 로렌은 갖고 싶었다. 정말이지 소피아 로렌은 말도 못하게 근사했다. 그 여자는 아무리 슬플 때도 청승맞아 보이지 않고, 아무리 기쁨에 들떠 있어도 경박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물끄러미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극단의 슬픔을 표현할 줄 알았고,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리는 것만으로 지상의 행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엘 시드〉라는 영화를 본 뒤로 나는 이미 소피아 로렌의 광팬이었다. 그러나 〈엘 시드〉에서의 소피아 로렌은 2% 부족하다. 그 풋풋하고 ‘뽀사시’하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어딘가 단순하고 약해 보이며 조금은 꾸며진 느낌을 준다.

 

〈해바라기〉에서의 소피아 로렌은 〈엘 시드〉에서보다 훨씬 더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럽고 풍부한 표정을 갖고 있었다. 더없이 행복할 땐 표정 한구석에 슬쩍 불안의 그림자를 깔아둘 줄 알았고, 절망에 빠져 망연해진 얼굴엔 보일 듯 말 듯 설렘이 엿보인다. 천진하고 수줍은 표정 한켠엔 도도한 위엄이 깃들어 있고, 단호하고 굳은 얼굴 한쪽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나약함이 숨어 있다. 세상의 어떤 못난이라도 다 받아 줄 것 같은 너그러움이 보이는가 하면, 세상의 어떤 잘난 남자도 가까이 못할 서릿발이 비친다.

 

영화 속 소피아 로렌은 예뻤다. 그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살아 있음이 허무해지지 않을 만큼. 그 얼굴을 다시는 기억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죽는 게 두려울 정도로. 그러나 그 예뻤던 소피아 로렌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미향이의 예쁜 보조개도, 정애가 씌워주었던 노란 우산도, 희진이의 윤기 흐르던 두 갈래 머리도, 점점 아스라해져 간다. ‘모모’가, 그때 그 뒷골목이 그립다. 그러나 이젠 복숭아 주스 안 마실란다. 몸에 좋은 인삼 주스나 마실란다.

 

이수인 영화감독

 

 

 

<테스> 의 나스타샤 킨스키

달동네 좁은 방 여신의 신전, 나는 사제

 

 

오래된 영화를 기억하는 건 길게 객차를 매달고 한밤중을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오래된 기억들이 모두 그러하듯, 오래된 영화의 기억도 작게 분절되어 있다. 시퀀스들은 사라지고 스틸사진들만 느슨하게 연결되어 흘러간다. 캄캄한 밤을 달리는 긴 객차마다 차창에 한 여배우의 얼굴이 떠 있다. 나스타샤 킨스키. 내가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배우라고 조금도 주저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배우. 그녀가 내게 손짓한다. 멀리서 바라보지만 말고 이 기차에 올라타세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기차에 올라탄다.

 

대학 1학년 시절. 1979년. 동숭동 낙산자락 달동네의 작고 허술한 방. 앉은뱅이 책상, 철제 책꽂이, 아버지가 대학 입학 선물로 사주신 전축. 둘이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이었다. 앉은뱅이 책상 위에 언제나 펼쳐진 채로 놓여진 책이 있다. <테스>. 300원짜리 삼중당 문고 한 권을 사면서도 새가슴이 되어야 했던 시절, 그 크라운 판형에 올 컬러 책을 사기 위해 내가 써야 했던 돈은 얼마였을까. 영화사들이 무슨 유행처럼 출판사를 차리던 시절이었다. 영화 <테스>를 수입한 회사에선 영화의 중요한 장면들을 거의 고스란히 담아 소설 테스를 펴냈다. 그리고 그 덕에 내게 테스는 토머스 하디의 테스가 아니라 나스타샤 킨스키의 테스가 되었다. 심지어 로만 폴란스키의 테스도 아니고, 나스타샤 킨스키의 테스다.

 

문학 청년·군인·넥타이맨에게 기억속 차창안 그는 말을 했다

 

겁에 질린 커다란 눈, 하얀 이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열린 입술, 그 입술 앞에 내밀어진 붉은 딸기. 바람둥이 알렉스가 순진한 시골처녀 테스를 유혹하는 장면이다. 사진은 달동네의 좁아터진 내 방을 여신의 신전으로 바꿔놓았다. 나는 여신을 모시는 젊은 사제였다. 날마다 여신에게 싱싱한 딸기를 바치는, 아니, 스스로 그 딸기가 되어 여신의 입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에 몸을 떠는, 미친 사제였다. 오! 그 책을 빌려간 뒤 돌려주지 않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그 누군가에게 저주 있으라. 그는 내 젊은 날의 가장 은밀한, 그러나 순결했던, 첫사랑의 욕망을 도둑질해 갔으니.

 

기억은 대구 중심가에 있던 어느 극장에 멈춘다. 푸른 제복에 갇혀 있던 스포츠 머리 군인 ‘아저씨’가 혼자 극장에 앉아 있다. 생리적 이유 때문에 공포영화를 거부하던 그 군인 아저씨가 외출을 나와 혼자서 유혈 낭자한 그 영화를 상영하던 극장으로 들어간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의 여신 나스타샤 킨스키가 나왔기 때문에. <캣 피플>. 1982년, 전두환 장군의 전성시절, 시대는 공포영화보다 더 참혹했고, 시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던 문학청년에게 그 단순명쾌한 명령어의 세계 군대는 지옥이었다. 흑표범이 된 여신이 군인 아저씨에게 명령한다. 공포를 이겨내거라. 눈을 뜨고 나를 보라. 아름다움은 공포 속에서 가장 빛나는 법이다!

 

기억은 다시 기차에 올라타 몇 년쯤의 시간을 달려간다. 지금은 사라진 인사동 입구의 어느 작은 소극장. 객석은 텅 비어 있다. 넥타이를 맨 젊은 샐러리맨이 의자에 파묻혀 있다. 그는 울고 있다. 영화가 서러워서, 시인이 되지 못하고 월급쟁이가 되어 버린 자신의 길지 않은 인생이 서러워서. <파리 텍사스>. 여신은 유리벽에 갇혀 있다. 하나씩 옷을 벗으며 여신이 말한다. 울지 말아요, 내 사랑. 당신이 찾아온 파리는 프랑스가 아니라 텍사스 황무지의 파리였어요. 외롭고 쓸쓸하고 서러운 황무지, 그게 인생이랍니다. 당신이 걸어가야 할 길은 아직 멀어요. 눈물을 닦고 또 걸어가세요.

 

기억이 올라탄 기차는 작은 간이역들마다 멈춰선다. <달빛 그림자>, <마리아스 러버>, <사랑의 아픔>, <막달레나>, <라 비온다>… 그리고 종착역이다. <원나잇 스탠드>. 기억의 기차는 나를 내려놓고 떠나간다. 떠나가는 기차의 창에서 이제 나이든 여신이 손을 흔든다. 여신처럼 나이든 나는 그녀에게 고개 숙여 절한다. 감사합니다, 나의 여신이여. 당신이 있어 내 삶은 기억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조병준/여행가·시인

 

 

 

‘동사서독’ 장만위

부담없는 만옥이 누님 자장면 한번 먹자구요

 

 

 

요즘에야 홍콩영화가 많이 꺾어졌지만,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정말 홍콩영화 붐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때 친구들 중에 <영웅본색> 안 본 놈들 없는 거야 기본이고, 어디서 싸구려 선글래스 쓰고 성냥개비 씹던 놈도 있었고, 문방구에서 파는 어린이은행 지폐에 불붙여서 담배 피우던 녀석까지 있었다. 아무튼 온갖 ‘개폼’의 원조가 된 <영웅본색>을 필두로 홍콩영화들이 우루루 몰려들었고, ‘윤발이’ 형님은 “싸랑해요 밀키쓰~”를, ‘(왕)조현이’ 누님은 “니하오마, 안녕하세요, 왕조현이예요~”를 외치면서 우유 들은 탄산음료 광고에서 한판 붙던 때가…,

벌써 이렇게 오래됐나?

 

하여튼 정말 그때는 홍콩 여배우 누님들 인기 짱이었다. 왕쭈시엔(왕조현), 메이옌팡(매염방), 치우수전(구숙정), 종추홍(종초홍)…. 생각 잘 안나네 이거. 아무튼, 나타났다 사라졌다, 피었다 졌다 한 수많은 누님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잘나가는 누님 하면 역시 장만위(장만옥)다. 사실 장만위라는 캐릭터는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미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왕쭈시엔의 순수 콘셉트, 메이옌팡의 농염한 섹시함, 얼굴은 최진실 스타일이지만 몸매는 시원한 글래머를 자랑했던, 언밸런스 콘셉트 치우수전, 이런 쟁쟁한 누님들과 비교한다면야….

 

사실 그래서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는 뭐 항상 ‘틀면 나오는’ 여배우 정도로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마음에 들어간다. 사실 정말로 너무나 예쁜 여자를 보면 가슴이 콩당콩당 뛰고, 열정이 활화산처럼 뻥 터지지만, 한 템포 죽이고 생각해 보면, 저렇게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너무나 예쁜 ‘그녀’는 연애나 결혼을 하기엔 너무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만옥이’ 누님이 딱 그런 과 같다. <대장부일기> 같은 코미디에 나오든, <첨밀밀> 같은 찡찡한 사랑 이야기에 나오든, <영웅>에서 시원하게 칼부림을 하든, “나 매력 있지 않아요?” 하고 들이대는 거 없이, 부담없이 그 영화에 스르륵 녹아들어간다. 자기한테 남이 맞춰주길 바라는 연인은 정말 피곤하다. 상황 속에 자기를 맞춰주는, 그것도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맞춰주는 센스를 갖춘 연인이 있으면, 하지 말래도 내가 알아서 신발 밑창까지 닦아주면서 그에게 맞춰줄 용의가 있다.

 

무지하게 많은 작품 리스트를 자랑하는 ‘만옥이’ 누님이지만, 꼭 하나 기억 확실하게 나는 장면은 바로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 사실 여기서 장만위는 <지옥의 묵시록>의 말론 브랜도 마냥 후반부에 잠깐 나온다. 그때 장만위의 모습.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단 몇 분 나오지만, 온갖 체념과 한숨이 꼬깃꼬깃 압축돼 있는 듯한 그 모습…. 그 서글픈 자태만큼은 아직도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그런데 슬프게도 머리 속에는 그 자태만 남아 있고 정확히 무슨 역할을 했고 무슨 대사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젠장. (그런데 이 글의 주제가 ‘스크린 속 연인’인데 내가 영화 분석할 일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 넘어가자.)

 

1964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따지면 벌써 마흔 둘인가? 요즘 ‘만옥이’ 누님 사진을 보면 조금씩, 그의 얼굴에도 세월이 쌓여간다. 하지만 무너지는 게 아니라 더 숙성되는 얼굴이다. 예쁜 여인보다는, 마치 내 주위에서 부담없이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나왔던 기억이 내게는 더 많으니까, 정말 나이 먹는 것도 부담없이 먹어간다.

 

아무튼, 나이를 먹어가면서 열정적인 사람보다는 부담없이 편안한 사람에게 더 끌리는 나로서는 편안함에다 우아함까지 묻어 있는 ‘만옥이’ 누님. 딱이다. ‘만옥이’ 누님하고 안면 틀 기회가 생긴다면 “우리 점심 때 자장면이나 먹어요”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 누님은 자장면을 먹어도 우아할 것 같다. 입술 주위에 검붉은 자장이 조금 묻어도, 그것조차도 매력일 것 같다.

 

김구라/개그맨

 

 

‘카사블랑카’ 험프리 보가트

젊은날, 나의 초상이여

 

 

기억이 담긴 머릿속 다락방을 여는 열쇠는 참으로 다양하다. 소리, 냄새, 하찮은 물건, 거리, 사람…….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뒤엉켜 있을 기억 뭉치들은 다락방 문이 한번 열릴 때마다 용케도 한 줄기씩 잘도 뽑혀 나온다. 어디선가 오스트리아 작곡가 주페의 ‘경기병’ 서곡이 흘러나오면 난 금세 학창시절로 돌아가 체육복을 입고 친구들과 음악에 맞춰 운동장을 행진하고 있다. 교복을 입고 까르륵대는 여학생들을 거리에서 만났을 때, 여학교 시절 내 친구 이름을 부를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지하철에서 어떤 청년을 보고서는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놀라 가슴이 쿵쾅, 뛴 적도 있다. 모습이 누구랑 닮았구나, 라고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세월을 건너뛰어 반응을 보인 것이다. 기억이 튀어나올 때는 그처럼 순식간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의식 자체는 일종의 ‘마술적 리얼리즘’인지 모르겠다.

 

영화. 영화 역시 기억의 다락방을 여는 열쇠로서는 독보적이다. 첫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하던 대학시절, 난 <카사블랑카>를 주말의 명화 극장에서 만났다. 무뚝뚝하고 냉소적이지만 가슴에 뜨거움을 간직한 주인공 릭(험프리 보가트)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과 닮아 있었다. 릭의 표정, 릭의 몸짓, 두 눈을 지그시 찡그리며 담배를 빨아대던 모습까지 딱 그 사람이었다. 아니, 그런 착각 속에서 넋을 잃고 영화에 빠져 들었다. 기숙사에서 함께 영화를 보았던 몇몇 친구들은 그 후 한동안 영화 속 노랫말과 대화를 흉내 내며 깔깔 웃곤 했다.

 

릭의 술집에서 일하는 피아노 연주자 샘이 부르는 감미로운 노래 가사, “키스는 키스이고 한숨은 한숨일 뿐. 세월이 지나도 그 두 가지는 남습니다”는 “방학은 방학이고 F학점은 F학점일 뿐. 세월이 지나도 그 두 가지는 남는다” 등으로 바뀌었다. 일리자(잉그리드 버그만)와 릭이 나누던 달콤한 대화, “어젯밤에 어디 있었죠?” “그렇게 먼 과거는 기억 못해.” “오늘 밤 당신을 만날 수 있나요?” “그렇게 먼 미래는 알 수 없어.”는 “너 어젯밤 누구랑 술 마셨어?” “그렇게 먼 과거는 기억 못해.” “수업 끝나면 뭐 할 거야?” “그렇게 먼 미래는 알 수 없어.” 등의 말을 수도 없이 만들어 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이 영화에 깊이 빠진 건 그 후,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던 막막한 상황에서였다. 이 시대, 우리의 해맑은 사랑이 세속적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하겠다는 용감한 맘까지 먹고 있던 때였다. 주말의 극장에서 다시 만난 험프리 보가트는 처음 내가 보았던 낭만적 인물에서 벗어나 사랑의 고통에 번뇌하는 실존의 인물로 다가왔다.

 

우연히 만난 옛 연인 일리자는 이미 반나치의 리더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고, 더군다나 일리자는 두 사람의 탈출을 도와 달라며 릭에게 매달리는데, 그때 릭이 받았을 고통은 바로 나의 고통이기도 했다. 결국 일리자의 사랑을 붙잡아두는 걸 포기한 채 두 사람의 탈출을 성공시키고, 카사블랑카의 비행장에 홀로 서 있던 릭의 쓸쓸하지만 담담한 모습은 늘 내 맘 속에 남아 있는 한 장면이다.

 

<카사블랑카>라는 영화는 이처럼 젊은 날 심하게 앓았던 사랑의 고통 속으로 금방 나를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험프리 보가트의 고뇌에 찬 표정이 곧 나의 표정과 오버랩된다. 그는 곧 나였던 것이다. 이제는 사랑의 촉수가 나무껍질처럼 딱딱해져가는 중년의 나이, 가끔 어떤 영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젊은 날의 한 장면으로 내가 뛰어 들어갈 수 있다면 즐거운 일 아니겠는가. 하물며 그것이 숨도 못 쉴 정도로 아팠던 사랑의 고통이라면, 더욱더.

 

강맑실/사계절출판사 대표  

 

 

 

‘집으로’ 여주인공 김을분

할머니 오늘도 안녕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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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교수연찬회 여흥시간에 노교수들 젊었을 적의 사진을 스크린에 보여주면서 알아맞히는 게임을 했다. 비밀리에 부탁해 미리 입수한 사진들이다. 누가 봐도 ‘청춘은 아름다워’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정작 사진의 주인공은 시침을 떼고 있다. 틀린 답이 몇 개 이어진 뒤 이윽고 정답이 나왔다. 탄성은 신음에 가깝다. 수줍은 듯 주인공 ‘마리안느’가 무대 위로 올라간다. “여학교 다닐 때 저도 괜찮았거든요.”

 

나는 기억한다 백숙을 발로 걷어찬 손주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아이를 기쁘게해주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던 그 눈빛을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지는 않지만 살아있는 한 누구나 할머니가 된다. 조용필의 노래 ‘단발머리’의 마지막 가사는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다. 그의 콘서트에 몰려든 중년여인들의 ‘절규’를 나는 ‘청춘의 초혼제’라 부른 적이 있다. 그 많던 소녀들은 누가 데려갔을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두 종류다. 하나는 ‘짱한’ 영화고 다른 하나는 ‘찡한’ 영화다. 앞의 것은 사람을 흥분시키고 뒤의 것은 사람을 안정시킨다. 스크린 속 연인도 마찬가지다. 침실의 연인은 몸을 감미롭게 하고 마루 위의 연인은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영화 속 할머니에선 두 가지 냄새가 난다. 프라이드치킨과 프라이드 그린토마토. 배우의 이름은 김을분과 제시카 텐디다. ‘꼬장꼬장’한 제시카 텐디는 80살에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지만, ‘꼬질꼬질’한 김을분은 77살에 <집으로>로 39회 대종상 여우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수업 시간에 이정향 감독의 <미술관 옆 동물원> 이야기를 길게 했는데 마침 그 감독의 후속작품이 개봉 대기 중이었다.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개구쟁이 일곱살 엄청 연상녀와 귀(?)막힌 동거를 시작한다.’ 적어도 인내심을 요하는 극기훈련용은 아닌 듯했다. 수업 듣는 제자들을 몰고 2002년 식목일 개봉 첫날에 극장으로 갔다. 처음에 잔잔하게 웃어대던 학생들이 차츰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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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내 여자 주인공은 말이 없다. 말은 없고 글도 모르지만 대신 사랑이 있고 무엇보다 희생의 가치를 안다. 개구쟁이는 프라이드치킨을 그렸는데 연상녀는 백숙을 준비한다. 그 둘 사이 소통의 부재는 역으로 관객을 깊숙이 찌른다. 나는 기억한다. 백숙을 발로 걷어찬 손주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아이를 기쁘게 해주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던 그 선한 눈빛을.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숴버리는. 내일이면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헤르만 헤세의 시에 곡을 붙였다는 서유석의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노래다. 사람들은 좋아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따금 누군가 내게 묻는다. 개를 좋아하느냐? 그는 내게 개를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중이다. 개를 좋아하면 개를 먹고 개를 사랑하면 개를 키운다. 꽃을 좋아하면 꽃을 꺾고 꽃을 사랑하면 꽃을 기르는 것과 같다. 어찌 개와 꽃뿐이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먹고 꺾는 장면들이 영화 안팎에서는 늘 진행 중이다.

 

일곱 살 상우를 연기했던 유승호는 마침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에서 자폐아를 연기 중이다. 우리 모두 사랑 앞에선 장애인이다. 그를 보니 할머니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할머니는 오늘 아침에도 안녕하신지.

 

주철환/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귀여워’ 예지원

그 끼에 장미 드리리다

 

 

 

난 <귀여워>를 보면서, 시쳇말로 ‘그녀’(예지원)에게 ‘뿅뿅가’고 말았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내 가슴을 적시고 후비고 흔들었다. 특히 그녀가 옥상에서 난리치는 낮과 밤 두 장면에서는, 영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녀의 품에 안기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오래 전부터 만나와 익숙한 사이였지만, 한번도 사랑에 가까운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는 한 여인을, 한 순간 온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귀여워>의 여운에 감겨 결심했다. 내 언젠가 그녀에게 장미를 바치리라. 그녀에 의해서만 피어날 수 있는 장미를. 하여 그녀가 자신이 피운 장미의 향기를 뭇사람들에게 퍼트리게 하자.

 

내가 그녀를 첨 만난 것은 한 오년 전 어느 드라마에서였다. 계용묵 선생의 단편소설 <백치 아다다>의 주인공 같은 여자가 등장해서는 툭하면 얻어맞았다. 그 드라마에 대해서 떠오르는 것은 오직, 그녀가 얻어맞는 모습뿐이다. 그 인상적이었던 여인은, 이후에 <생활의 발견>에서는 섹스 머신의 이미지로, <여고시절>에서는 왈가닥 여걸의 이미지로, <아나키스트>에서도 홍일점으로 나왔다는데 별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그 영화에서는 무형의 이미지로, 내게 닿았던 모양이다.

 

종합해보자면 나와 각별했던 여인이 아니었다. 심지어 나는 그녀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96년도 <뽕>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는 것도 몰랐다.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섹스심벌이니 백치미이니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들을 들은 적도 있었지만, 섹스심벌 소리를 듣는 여인이, 백치미라는 욕인지 칭찬인지 헷갈리는 평에 시달리는 여인이 어디 한둘인가, 그저 그런가보다 했다.

 

내가 그녀를 강렬하게 인식한 것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서부터였다. 그녀가 촬영과정에서 시도했다는 국회 담 넘기는 고전소설 속 여성영웅호걸 ‘박씨부인’의 활약에 비견하는 듯했다. 집창촌 여인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의원이 된다는 그 영화는 마침내 뚜껑을 열었고, ‘혁명적인 정치 풍자다’로부터, ‘집창촌 여성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해먹은 황당무계다’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의 평가를 받은 모양인데, 아무튼 그 영화를 통해 나는 그녀의 수없이 혼재하는 에너지를 목격한 듯했다. 그 영화가 현재까지도 그녀의 유일한 단독 톱 주연 작품이라니, 아무래도 그녀의 모든 것이 마음껏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테고, 나 역시 그녀의 모든 끼의 폭죽 같은 발현에 여러 가닥의 촉수가 꿈틀거렸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 수없이 혼재하던 그녀의 에너지가, 끼가, <귀여워>에서 아주 조화롭게 결합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어느 평자의 말처럼 ‘가벼움, 경박함, 자유로움, 헤픔, 성스러움까지’ 한 몸에 품고 있는 듯했다. <귀여워>의 흥행성적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예술성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 일색이었고, 특히 그녀의 연기에 대해서도 상찬의 도가니였다. 대개 동의하는 입장에서, 그 평자들에 비해 매우 문외한인 내가 굳이 무슨 폼 나는 언어로 그녀를 더 치켜세울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귀여워>는 그녀의 재능과 타고난 바를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 그 방향과 지점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광맥과도 같다. 나는 이후에 그녀라는 광맥에서 뿜어져 나올 아름다움을 생각하니 기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바라는 것이다. 나도 그녀라는 광맥에 기대어 한 줄기 빛을 깨냈으면 하고. 나는 그녀를 위한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것이다. 그녀에 의한 그녀를 위한 장미를.

 

김종광/ 소설가

 

 

 

‘스쿨 오브 락’ 조앤 쿠잭

나 혼자만이 그를 알고 싶소

 

 

 

어릴 적 꿈은 중고교 교사였다. 그래서 영화를 보더라도 다른 어떤 소재보다도 선생님이나 교육에 관한 작품에 우선 마음이 갔던 것 같다. 영화의 궁극적 지향이 무엇이든 간에 교사와 학생 간의 인간적 소통을 다룬 것이라면 내 경우는 무조건 감동의 일순위에 올랐다.

 

멀리 따지면 ‘명화극장’의 단골이었던 시드니 포이티어 주연의 1967년작 <언제나 마음은 태양>이 있고, 가깝게는 키팅 선생을 시대의 영웅으로 만든 1989년 <죽은 시인의 사회>, 1995년의 <위험한 아이들>과 <홀랜드 오퍼스> 그리고 1999년의 <뮤직 오브 하트>를 잊을 수 없다. 이런 선생님 영화들은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출렁인다.

 

올해도 음악선생 클레망 마티유의 교육열정을 그린 프랑스영화 <코러스>가 더해졌다. 마티유가 대머리에 뚱뚱하고 지극히 평범한 얼굴의 소유자라는 점, 그 외모에 있어서 나와의 유사성은 한층 영화에 나를 깊숙이 잠기도록 해주었다. 선생님 영화에 전폭적 애정을 투사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이상하게도 그런 영화에서 유난히 음악의 여운이 짙다는 것이다.

 

<언제나 마음은 태양>에서 가수 루루가 부른 ‘투 서 위드 러브’는 골든 팝송이며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앤드류가 책상 위로 올라서 ‘캡틴 오 마이 캡틴!’하는 절정의 순간을 적신 모리스 자르의 음악은 가히 스코어 최고봉이다. 심지어 시시하고 밋밋했던 <위험한 아이들>에서도 래퍼 쿨리오의 ‘갱스터스 파라다이스’는 빛을 발했다.

 

<위험한 아이들>은 거의 유일하게 여선생 주연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셸 파이퍼의 이미지가 교사와 어울림을 빚어내지 못해 두고두고 아쉬웠다. 극중 여선생님과 애정으로 접속할 절호의 찬스가 그만 물거품이 된 것이다. 그 뒤 ‘왜 여자 선생님을 다룬 영화가 적은 것일까’ 하는 괜한 불만이 쌓여갔다.

 

 

 

우악스러운 잭 블랙이 주연인 <스쿨 오브 락>(2003년)은 드디어 영화가 내게 연인을 하사하는 반전의 장이었다. 물론 그 대상이 잭 블랙은 아니다. 아직 그럴 용기는 없다. 주인공은 그가 보결교사로 들어간 초등학교의 교장 멀린스 역의 조앤 쿠삭이다. 영화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잭 블랙 모노드라마나 다름없어 사실 그는 조연에 불과하지만, 조연을 좋아하는 것은 주연보다 남들에게 때론 괴팍할 수도 있는 취향을 들킬 염려가 적어 안심이다.

 

여기서 조앤 쿠삭은 전에 출연했던 영화들 <런어웨이 브라이드>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보여주지 못한 지극히 아늑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 표정만으로 나한테 영화는 이미 끝났다. 그는 잭 블랙의 엉뚱한 실험을 막아야 하는 위치지만 속내는 이해하고 끝내는 허락하며 교장으로서 ‘강’과 인간으로서 ‘약’을 동시에 그려낸다. 그런 퓨전 캐릭터가 흔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잭 블랙을 마음만 먹으면 순간에 날려 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그에게 물들어가는 것을 보며 난 쾌재를 불렀다.

 

특히 호프집에서 둘이 맥주를 마시는 대목에서 이런데 처음이라면서도 잭 블랙이 틀어준 노래 스티비 닉스의 ‘에지 오브 세븐틴’에 맞춰 흥겨워하는 표정은 실로 압권. 아마도 락 팬들은 락의 승리를 맛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겐 그 이전에 고매한 여성을 흔드는 평범한 남자의 승리였고 또한 나의 승리였다.

 

주변 사람들한테 조앤 쿠삭의 인상에 대해 물었더니 백이면 백 ‘존 쿠삭의 누나 말하는 거죠?’라는 단순사실을 들이대며 시큰둥한 반응들이다. 고평은 커녕 동의를 못 얻은 것이 가슴 아프냐면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다행이다. 나만이 그녀를 독점적으로 바라보고 상상의 영토로 초대할 수 있으니까.

 

임진모/대중음악평론가

 

 

 

‘아라비아의 로렌스’ 피터 오툴

귀족적인, 그러나 불안한 갈망하지만 좌절하는 성장기의 내 모습

 

  

 

세상의 어떤 규칙들을 이제 겨우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어린 나이의 소년, 소녀들에게 어른들이 저지르는 꽤 폭력적인 질문, 그러나 어른 입장에선 꽤 즐기게 되는 두 가지의 질문이 있다. 하나가 넌 누굴 가장 존경하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이다.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할 말이 없을 때면 곧잘 해대곤 하는 이런 질문이, 어렸을 적 내겐 꽤 골치 아프고 귀찮았다. 교과서에 나오는 위인들마다 나름 존경할 거리들이 만만치 않게 있었고, 무엇인가 되고 싶기엔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하며 사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런 질문에 재빠르게 확신에 차서 대답하지 못하게 되면, 나보다 더 의기소침해지고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기도 썩 즐겁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질문에 확신에 차서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난 뒤였다. 거대한 화면안에 불타는 사막이 광할하게 펼쳐지고 콤플렉스로 가득차 보이는, 뭔가 비어있고 나약해 보이는, 하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도 꽤 귀족적인 느낌의 피터 오툴과 이글거리는 사막 저편에서 점처럼 희미하다 조금씩 거대하게 다가오며 카리스마를 자랑하던 오마 샤리프는 나를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그 뒤로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로렌스와 그의 사막 친구들이었고, 장래 희망은 사막으로 가서 베두인족의 일원으로 함께 생활하는 거였다. 뭐, 나의 확신에 찬 이 대답이 어머니를 결코 평온하게 해주진 못한 것 같았지만 나의 사막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스무살이 넘어, 당시의 실제 역사가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였고, 로렌스 역시 그 안에서 장기알처럼 도구화된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한 단면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매혹적인 것들에 저당잡힐 때가 있다. 더군다나 피터 오툴이 더위를 극도로 싫어하는 체질인지라 사막에서 살기는커녕, 며칠동안의 여행조차 거부할 정도라는 것을 인지한 이후에도….

 

 

 

난 <아라비아의 로렌스> 화면 안의 모든 것들에 여전히 매혹당했다. 기차를 보기만 하면 그 위에서 세상을 움직이듯 성큼성큼 걸어가는 로렌스를 떠올렸고, 그 영화로 인해 피터 오툴이 나오는 모든 영화를 보려고 애썼고, 특히나 당시 텔레비전를 통해 방영된 피터 오툴 주연의 <마사다>는 나를 아침형 인간에서 늦은 밤 잠 못드는 인간형으로 변신시켰다. 어쩌면 나는 피터 오툴의 이미지에서 언제나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하지만 스스로 자신 안에 끊임없이 갖혀버리고 말았던 나의 성장과정을 예지몽처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로렌스와 사막에 매료당하던 어느날 나를 또 한번 매혹의 뭉텅이안으로 빠트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장호 감독의 1975년 작 <어제 내린 비>의 김희라 선생이었다. 영화의 모든 것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하얀색 와이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은혜를 갚기 위해 그리고 배다른 동생의 행복을 위해 갖은 추한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며 울부짓던 김희라 선생의 연기와 이미지는 당시의 나에게 젊음의 어떤 이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김희라 선생의 최고 걸작들은 모두 이장호 감독님과 함께였던 것 같다.

 

<어둠의 자식들> <과부춤>에서 김희라 선생은 캐릭터가 인정하는 범위의 경계선에서 어떤 빛을 느끼게 해준다. 때때로 나 역시 연속적인 빛을 뿜어줄 그런 영화 안에서의 파트너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커플이 나에겐 이장호-김희라 커플인 것 같다.

 

변영주/영화감독

 

 

 

 

‘네버랜드를 찾아서’ 조니 뎁

변하는 것들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을 보여주는 그에게 매혹되다

 

 

 

초록의 잔디밭, 커다란 개를 데리고 빙글빙글 춤을 추는 남자. 남자의 이야기를 듣던 부인과 소년들의 눈에 어느새 개는 커다란 곰이 되고 공원은 쇠라의 그림 같은 서커스의 사육제로 변한다. 지난 겨울에 본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한 장면입니다. 피터 팬을 쓴 극작가 존 베리의 인생을 통해 사람에게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상상력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다르게 만드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이 영화를 본 날은 파리에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가을부터 다음해 봄이 오기 직전까지 늘 파리엔 비가 내립니다. 그맘 때의 파리는 거리도 마음도 모두 우울한 회색입니다. 건축을 공부하는 남편과 결혼해서 프랑스에 온 지 4년, 벌써 네 번째 겨울인데도 저는 도무지 이 도시의 우울에 익숙해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오후 파리 구석의 한 영화관에서 저는 그를 만났습니다. 조니 뎁. 불온하고 반항적이고 거친 청춘을 거쳐 왔으며 아이돌 스타로 출발했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괴팍한 영화에만 출연해온 괴짜. 그러나,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가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가진 배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도 그날 그가 가진 변하지 않은 그 무엇인가에 결국, 매혹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사랑하는 모든 것에 상처를 입히던 <가위손>의 에드워드로부터 어머니에 대한 악몽을 간직한 채 목 없는 기사를 쫓는 <슬리피 할로우>의 심약한 수사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캐리비안의 바다를 떠도는 잭 스페로우 선장까지, 지금까지 그가 연기한 배역은 모두 현실과는 100만년 이상은 떨어진 환상 속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배우 조니 뎁이 가지고 있는 변하지 않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환상입니다. 드라마를 쓰면서 왜 그렇게 자꾸 주인공을 죽이냐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아마 그건 사라짐이 두려워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옛 사랑, 옛 기억, 잃어버린 것들, 소멸 된 것들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프랑스의 소설가 모디아노는 자신의 소설 <서커스가 지나간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서커스가 지나간 다음, 천막이 걷힌 다음 현란한 서커스의 불빛이 사라진 텅 빈 공터에서 나는 남아 있는 공포를 느낀다’. 실은 저도 사랑이든 젊음이든 아름다움이든 세상에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결국은 소멸로 갈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렵습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 아름다운 것들이 그저 한순간 서커스처럼 존재했다가는 어느새 무섭게 사라져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것들이 지나간 다음 남은 삶의 공허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저는 그렇게 드라마마다 주인공들을 죽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가장 아름다웠던 한때를 박제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 이유일 겁니다. 제가 조니 뎁 이란 배우에게 매혹된 것은. 그는 영화를 통해서 변하는 것들 속에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들을 보여줍니다. 존 베리로 분한 그가 병상에 누운 케이트 윈슬렛에게 보여줬던 네버랜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단지 믿기만 한다면 세상의 무엇이든 가능하다며 속삭이는 그. 현실에선 우리가 결코 볼 수 없었던 꿈들을 재현해 주는 그. 단지 개와 춤추는 것만으로 이미 지나버린 서커스의 빈자리를 다시 채워줄 수 있는 그.

 

그와 함께 상상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이제는 더 이상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비 오는 오후에 저는 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를 만나고 영화관을 나서자 하늘은 오랜만에 활짝 개어 분홍색 황혼이 하늘 가득 펼쳐져 있었습니다. 마치… 환상처럼 말입니다.

 

오수연/ 드라마 작가, <겨울연가>  

 

 

 

마릴린 몬로

그녀가 다가와 안아주는 꿈을 자주 꿨던 소년은 어느날, 그녀와 키스했습니다

 

 

 

여러분도 비슷한 꿈을 꾼 적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년은 한동안 그녀가 다가와 안아주는 꿈을 자주 꿨습니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품에 안겨 제발 이 꿈이 끝나지 않았으면 했더랬습니다. 언제 처음 그녀를 만났는지는 가물가물하군요. 아무튼 그녀를 만나기 전에 신문에서 이상한 표현들을 먼저 접했습니다.

 

육체파, 섹스심볼, 백치미, 뭐 그런 말들이었죠. 소년은 아직 육체파가 인상파나 전자파 혹은 양은이파랑 어떻게 다른지 몰랐습니다. 그저 육체파가 있으면 영혼파도 있겠구나, 싶었죠. 아무튼 실물을 처음 봤던 날, 소년의 어머니는 꽤나 걱정을 했더랬습니다. 아이 눈에 초점이 없는 걸 보고 앞으론 그녀를 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보지 말란다고 안 볼 소년이라면 오늘 이 자리에 불려나오지도 않았겠지요. 어머니의 눈을 피해 그녀를 만나는 건, 솔직히 더 좋았습니다. 눈에 초점이 풀려도 뭐랄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그녀가 바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소년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죠. 그녀의 얼굴은 늘 인생의 고뇌 같은 건 난 몰라, 하는 표정이었으니까요. 정말 아이처럼 순진했던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죠.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고, “다이아몬드는 여자들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그녀는 돈만 많으면 노인이든, 아이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떠돌이 쇼걸인 그녀에게 필요한 건 안락한 집이었지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 황홀한 꽃미남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녀는 이런 인생의 목표를 숨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아마 사랑을 몰랐기 때문이겠죠. 그녀는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이유가 사랑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자신의 인생 목표도 떳떳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소년은 그녀에게 충고하고 싶었습니다. “돈과 보석에만 매달리지 말고 진짜 사랑을 해보라”고.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죠. 초등학생 꼬마가 사랑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랬는지. 아무튼 그녀의 행복을 기원하는 건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매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달콤한 키스를 나누곤 했으니까요. 소년의 바람대로 말이죠.

 

물론 이제 어른이 된 소년은 더 이상 그녀를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말한대로 “키스는 황홀하지만 집세를 내주지 못하며 다이아몬드만이 영영 변치 않는 모양으로 여자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그녀는 적어도 신데렐라보다 훨씬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왕궁에 들어가리라 꿈도 꾸지 못했던 신데렐라와 달리 그녀는 백만장자와 결혼하려고 참 무던히 애를 썼죠.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가슴을 강조하고 아이 같은 말투로 바보처럼 말하는 그녀에게 어떤 남자가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본주의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 ‘정숙’을 지고의 덕목으로 꼽던 시절에 그녀만은 여자의 매력이 ‘정숙’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죠. “이렇게 더울 때 전 어떻게 하는 줄 알아요. 속옷을 아이스박스에 넣어둔답니다”(<7년만의 외출>)라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을 만큼 그녀는 자기 매력을 잘 이용했지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가 낭만적 사랑에 눈이 멀어 다이아몬드를 내팽겨친 적은 없다는 사실이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녀가 수십년간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남아있던 이유도, 조금씩 변형되면서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는 이유도 그냥 섹시한 육체만 앞세우는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튼 끝으로 비밀 하나를 털어놓겠습니다. 소년은 그녀와 키스한 적이 있습니다.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요. 어땠냐고요? 음.... 딱딱했습니다. TV 브라운관이 좀 딱딱하잖아요.

 

남동철/<씨네21> 편집장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의 왕쭈셴

피가 끓어오르던 고등학교 시절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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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영화보다는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배우보다는 좋아하는 가수가 더 많았다. 인기 정상에 서있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도 많았지만 그들에게 연인이나 이성적인 매력을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왕쭈셴(왕조현)은 달랐다. 그는 피가 끓어오르던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여인으로 다가온 첫 여배우였다.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은 80년대 중후반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대다수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홍콩 영화일 것이다. 강호의 의리가 사라졌음을 개탄하며 한 줌의 쓴 웃음을 지어보이던 저우룬파(주윤발)의 고독한 모습과,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을 흘릴 듯한 왕쭈셴의 커다란 눈망울은 내 마음 속에 깊은 자국을 남겨 놓았다. <영웅본색>을 먼저 보고 <천녀유혼>을 보기 전까지 나는 약간 망설였다. 누아르가 아닌 시대극이라서 머뭇거렸는데 영화를 보면서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까울 만큼 그 속에 빠져들었다.

 

어리숙하면서도 맑은 심성의 선비 ‘영채신’(장궈롱:장국영)과 청순가련한 귀신 ‘섭소천’(왕쭈셴)의 애절한 사랑은 슬프도록 아름답게 어우러졌다. 서둘러 비디오 테이프를 빌린 나는 되감기와 빨리 감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왕쭈셴이란 여배우에게 빠져들었다. 옷을 벗어 장궈롱을 감추던 장면, 나무 욕조에 밀어 넣고 입 맞추는 장면은 수십 번을 반복해서 봐도 좋기만 했다. 끝내 둘이 함께 하지 못하는 끝 장면에선 늘 한숨을 내쉬곤 했다. <천녀유혼>에서 왕쭈셴은 애처롭고 가녀린,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눈물을 머금은 그의 커다란 눈을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무슨 일이든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한 모습은 당시 포르노와 도색잡지를 통해서만 성에 대한 허기를 채울 수 있었던 나에게 여인의 의미로 다가왔다. 그것도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너무나도 마음을 아프게 했던 영화 속의 슬픈 사랑은 곧바로 ‘왕쭈셴 열병’으로 전염됐다.

 

저우룬파, 예쳰원(엽천문)과 함께 한 코미디 영화 <대장부일기>도 무척 재미있게 봤다. 물론 그 중심에는 치렁치렁한 고전의상을 벗어던진 늘씬한 몸매의 그가 있었다. 발 빠른 친구가 구해온 왕쭈셴의 농구선수시절 비디오를 보며 즐거워했고, 그가 광고하던 음료수를 열심히 사마시기도 했다. 한번은 친구들 사이에서 ‘장궈롱은 왕쭈셴의 맨몸을 봤다, 못 봤다’로 논란이 분분했는데 야한 영화에 도가 터있던 한 녀석이 ‘중요한 부분은 가린다’는 결론을 내놓아 모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천녀유혼> 이후의 작품들에선 그 특유의 애틋한 매력이 잘 살아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무 가공된 애처로움만 강조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얼마 전 왕쭈셴의 뚱뚱해진 모습이 전해져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여러 소문 끝에 다음 영화를 위해 일부러 살을 찌우고 있다는 얘기가 전해졌는데, 그가 살이 찌건 마르건 내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왕쭈셴은 언제나 <천녀유혼>의 ‘섭소천’ 바로 그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전에 <천녀유혼>을 다시 한번 보려다가 오히려 예전의 설레던 마음이 퇴색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인간이 귀신보다 잔인해”라는 ‘섭소천’의 슬픈 대사를 가끔씩 느끼는 나이가 됐지만 나에게 왕쭈셴은 여전히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기억되고 있다.

 

~ 송기철/대중음악 평론가

 

 

 

‘태양은 가득히’ 의 알랭 들롱

우수에 젖은 듯한 눈빛 며칠밤 가슴앓이 ‘열병’ 나이가 먹었지만 그는 여전히 잘생겼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고 상쾌지수가 증가한다.

외모를 우선시하는 세상이 문제라지만 아름다운 것에 열광하게 되는 이 자연스러움을 그 누가 욕하랴!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고 아름다운 배우가 등장하는 영화가 더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렇게 아름다운 배우들에게 이끌려 극장으로 향하던 학창 시절, 나의 발길을 딱 붙잡아버린 배우가 있다.

 

알랭 들롱. 가장 아름다운 배우를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그 이름. 알랭 들롱은 나에게 있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세상에 아름다운 배우들은 많지만 알랭 들롱의 아름다움은 남다르다. 남자라고 하기엔 너무 아름다웠다. 특히 그 눈빛. 식상하다 하더라도 우수에 젖은 듯한 그의 눈빛, 사람을 잡아 끄는 그 눈빛은 극장 문을 나선 후에도 며칠씩이나 가슴앓이를 하게 만들었다.

 

스크린 속 알랭 들롱은 언제나 태생부터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존재처럼 냉소적이고 찌푸린 인상의 멜랑꼴리한 인물로 등장했다. 잘 생겼지만 도덕적으로는 모호한 이 아름다운 청년은 그 아름다움이 무색할 정도로 살인범, 사기꾼, 난봉꾼, 범죄자로 나왔다. 그는 형사를 맡았을 때 조차도 범죄자와 구분하기 힘들었다.

 

알랑 들롱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한 그의 모습은 온전히 사랑할 수도 온전히 증오할 수도 없는 혼란감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그는 우울하고 폭력적이었다. 그래도 그는 용서를 받았고 게다가 연민까지 느끼게 했다.

 

 

 

알랭 들롱의 아름다움에 대한 극찬이 지나친 걸까? 하지만,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 같은 청년 리플리로 출연한 <태양은 가득히>, 냉철하고 고독한 살인 청부업자로 나온 <사무라이>, 푹 눌러 쓴 중절모와 깃 세운 레인코트에 우울함이 번지던 <형사>, 그리고 <암흑가의 두사람>, <지하실의 멜로디>… 빚어낸 듯 아름다운 외모와 퇴폐적인 분위기는 딱 ‘차가운 천사’가 무색한 것을 어찌 부정하랴.

 

지금 아름다운 배우로 손꼽히는 주드 로가 <알피>로 알랭 들롱에게 도전했지만, 그래도 그가 아니면 역시 뭔가 부족하다. 영화 속 여자들에게 부러운 감정이 생기는 것도 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곁에 두고 싶고, 함께 있고 싶다는 감정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가질 수 없어서, 만질 수 없어서 안타까운 그 감정이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당시에 알랭 들롱 한 번 좋아하지 않은 여자들이 있었을까? 없을 거다. 지금도 그가 출연했던 옛날 영화들을 보면 스크린 속 알랭 들롱은 여전히 아름답고 그 눈빛은 가슴을 설레이게 만든다.

 

어느 한 배우에 대해 무한한 애정공세를 펼친다는 거, 지금은 생각하기 힘들다. 그래서 알랭 들롱에게 느꼈던 순수에의 열병 같은 감정이 지금 생각하면 풋풋하다. 하지만 시간이 무정한 걸까, 세월에 휩쓸려 나의 감성이 변한 걸까. 그의 얼굴에서 찰나의 순간이 지나감을 느낀다. 나이가 먹었지만 알랭 들롱은 여전히 잘생겼다. 하지만 아름답진 않다. 아쉽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나의 머리와 온몸의 세포들이 기억하는 알랭 들롱은 여전히 아름답기 때문에.

 

~ 채윤희/여성영화인모임 회장, 올댓시네마 대표

 

 

 

예술적 열정과 사랑 불태운 ‘잉그리드 버그만’

'살아있는 그녀’ 미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잉그리드 버그만을 기억하는가. <무기여 잘있거라>에서 폭행당해 잘린 머리와 야성의 눈빛으로 처음 만난 게리 쿠퍼를 바라보며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그녀. 흰 이빨이 드러나는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많은 사연을 품고 있던 그녀. 키스할 때 코는 어디다 두어야 하냐고 묻던 그녀.

 

내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보았던 그녀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 영화를 언제 처음 보았는지 몇 번이나 보았는지 기억할 순 없지만 난 똑똑히 기억한다. 그녀의 미소를. 그녀의 눈빛을. 그녀가 꿈꾸던 세상을.

 

평범한 소년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었고, 그 감독이 동경하는 여성의 캐릭터엔 언제나 마리아 역의 잉그리드 버그만이 내재돼 있다는 생각을 오늘 했다. 그녀는 전쟁 중에 희생의 위기에서 구출된 스페인 여자였고, 짧은 머리였으며 학살 중에 생존했다. 그녀의 야생적인 순수함은 마땅히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지금 글을 쓰며 생각하는 것이지만 나는 한참 동안, 어떤 식으로든지 희생당하는 여성을 구하려고 내 영화 속에서 무진 애를 썼던 것 같다. 그 중심에는 아마도 잉그리드 버그만의 ‘마리아’가 잠재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폴란드에서 영화 공부를 하던 수년 전 한참 밤샘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였는데도, 나는 텔레비전을 끄지 못한 적이 있다. 잉그리드 버그만에 관한 다큐멘터리인데 뭐 시나리오가 대수인가! 잉그리드 버그만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웨덴 출신의 배우다. 당대 최고의 감독과 남자배우들과 연기했고 그녀에 관한 아름다움은 세상의 모든 남성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그녀는 화산같은 심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총명했으며 배우로서 열정은 그녀의 안정적일 수 있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유부녀였으며 열한 살의 딸까지 있었지만 촉망받는 이탈리아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를 보고 그 감독과 그의 영화 <무방비 도시>에 매료된다. (나는 별 감동없이 그 영화를 극장에서 봤다.)

 

 

극사실주의 시점에서 전쟁과 전쟁 속의 사람들의 모습을 강렬하고 과장없이 보여 주었던, 당시 할리우드 영화와는 정반대편에 서 있던, 어쩌면 미국사람들의 생각에선 좌파 성향이 강했던 작품이었다. 그녀가 그런 작은 유럽의 영화를 보고 매료당하다니! 그리고 가족을 버리고 바람둥이 유부남 영화감독과 사랑에 빠져 모든 부와 영광을 버리고 이탈리아의 작가 감독에게 가다니!

 

가슴에 불이 붙었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타락한 우상’이라며 손가락질했고 그녀가 재기하기까지 수없이 많은 시련과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녀의 유작인 <가을 소나타>라는 잉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다시 자신의 고향인 스웨덴으로 돌아와서 모국어로 연기했다. 그녀는 67살이었고 촬영할 때 암 투병 중이었지만 아무에게도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았고 자신의 생과 똑같은 상황의 배역을 맡았다.

 

<가을 소나타>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명성 때문에 버리다시피 한 딸과의 화해와 용서의 과정에 관한 영화였다. 그 영화를 찍고 곧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딸을 버리면서까지 그녀의 열정을 위해, 전세계 사람들과 정반대편에서 그녀의 꿈을 위해 살았다.

 

그녀처럼 용감하게 자신의 예술적 열정과 사랑을 위해 살기는 쉽지 않다. 완벽한 여신으로서의 조건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직까지 살아 있으며 그녀의 미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 송일곤/영화감독, <꽃섬> <거미숲>

 

 

 

올리비아 핫세

내 나이 17살때 만난 ‘줄리엣’ 그 철없는 ‘소녀’ 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인이라니 대뜸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화양연화>의 장만위(장만옥). 그렇다. 어떤 남자도 이소룡을 능가할 수 없듯이, 어떤 여자도 <화양연화>의 장만위를 능가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냇킹콜의 촉촉한 목소리를 타고 흐르던 몸과 목과 얼굴의 선, 몽롱하고 습습한 상해의 골목길을 오가던 장만위의 방심한 표정들, <화양연화>의 장만위는 단연 박주영 급이다.

 

하지만 장만위는 내게 스크린 속의 연인일 수가 없다. 불행하게도 나는 스크린 밖의 그를 만나버렸다.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 시사회가 열렸던 중앙극장에서였다. 여신은 량차오웨이(양조위)와 함께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 뒤 내가 앉은 자리 옆의 통로로 지나쳐 퇴장했고, 그때 여신의 옷깃이 내 팔을 스쳤다.

 

들어라 사람들아, 장만위와 나는 그런 사이다. 이런 가문의 영광이 어딨냐며 길길이 날뛰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배우는 역시 왕자웨이(왕가위) 같이 눈 밝은 감독의 카메라 속에 있어야 한다는 느낌이었다.

 

 

자, 이젠 본론을 이야기하자. 1978년 겨울, 나는 ‘허리우드’ 극장과 1.2.3카바레 사이의 콘크리트 마당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기 위해 줄 서 있었다. 지금 내 나이쯤의 아저씨가 혼자 줄 가운데 끼여 있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만 17세였고, 줄리엣 역을 맡았던 올리비아 핫세의 나이는 만 15세였다.

 

<썸머타임 킬러>에 등장한 20대 초반의 아름다운 올리비아도, <나일 살인사건>의 조연 올리비아도 나는 모른다. <마더 테레사>로 나온 50대 올리비아의 원숙함은 더더욱 모른다. 내게 올리비아 핫세는 1978년 겨울의 줄리엣으로만 살아 있다. 그러고 보니, 스크린 속의 연인은 올리비아가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철부지 줄리엣이라 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캐퓰릿가의 무도회에서 두 철부지, 로미오와 줄리엣이 눈이 맞았다. 유머레스크가 끝나고 니노 로타의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총각이 뭐냐. 앞뒤 모르는 불같은 것들이다. 처녀는 뭐냐. 얼음 같은 욕망덩어리들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들이 사위고 시들어 버린다. 그런데도 사랑에 빠지는 철부지들이 있다.

 

그래, 다 안다. 그래도 도리 없는 게 사랑 아니냐. 대충 그런 내용의 노래다. 그 아름다운 선율을, 또 그 선율이 이끄는 대로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저 철없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해 겨울 나는 그 영화를 네 번 넘게 보았던 듯싶다. 물론 비디오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내친 김에 하나 더 고백해두자. 줄리엣보다 2년 전에 만난 사랑이 있었다. <진짜 진짜 잊지 마>에서 이덕화와 함께 나온 임예진이 그 주인공이다. 중년의 푼수 역할을 넙죽넙죽 해대는 옛사랑의 모습을 가끔씩 텔레비전 화면에서 마주치곤 한다. 보려고 해서 본 것은 아니지만, 보다 보니 또 그냥 볼만하다. <마더 테레사>에 나온 늙은 올리비아는 어떤 모습일까.

 

꽃도 사랑도 젊음도 덧없이 사위어가는 것임을 이젠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아름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서히 내 안에서 역사가 되어가는 사랑이 있다. 조용히 그냥 두어야 할지, 아니면 찾아가서라도 한번쯤 확인해볼지, 어떤 게 나은지 잘 모르겠다. 누구, 알면 좀 가르쳐 주시라.

 

 ~ 서영채/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

 

 

 

‘기쁜 우리 젊은 날’의 황신혜

우아하고 도도한 ‘혜린’ 욕망과 허영 좇다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와 그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낀다

 

 

 

‘그대가 생명과 같은 사랑을 원한다면 난 그대를 사랑하지 않겠소. 생명은 한숨과 같은 것이니까. 그러나 그대가 영혼과 같은 사랑을 원한다면 난 그대를 사랑하겠소. 왜냐하면 영혼은 영원한 것이니까.’ 핀 라이트가 비추는 무대에서 슬립 차림의 여자가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다. ‘일찍 깨시더라도 절 깨우지는 마세요. 저는 아침잠을 즐기거든요. 그럼 불을 끌까요?’ 넋을 놓고 혜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영민이 보인다. 그 순간 영민이 되어 침을 꼴깍 삼킨 것은 나뿐이 아니었을 거다.

 

혜린(황신혜)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찾아왔다. 브로드웨이와 뉴욕을 향한 그의 눈에 한국의 무대는 천박하고 상투적이다. 그런 그에게 뉴욕의 산부인과 의사라는 오성우가 찾아오고, 그에 비하면 가난하고 수줍은 영민의 사랑은 우습고 촌스럽다. 그리고 그는 화려한 꿈을 좇아 뉴욕으로 떠나버린다. 무대 위에서 보였던 아름답지만 허영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내가 <기쁜 우리 젊은 날>의 혜린을 만난 것은 1987년이다. 거리엔 매일 최루탄과 돌이 날았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뭔가 바꿔낼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겨가고 있었다. 외치지 않는 영화는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어 결국 저들의 편을 드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전투적으로 영화를 보던 그때다.

 

<킬링필드>에 분노하고 <바보선언>에 열광하고 <전함포템킨>을 몰래 보던 영화과 2학년 시절 ‘누구 편인지 한번 보자’ 뜯어먹을 기세로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봤다. 작은 일 하나에도 선진국을 들먹이며 미국은 어떻고 유럽은 어떻다고 비교하던 시대. 미국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절대 선이었던 그 시대와 혜린은 많이도 닮아 있었다. 황신혜는 도도하고 허영이 가득한 혜린의 모습 그 자체였고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에 기가 질려 영화 속 영민도 영화를 보는 나도 한없이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나고 종합상사의 직원이 돼있는 영민은 우연히 지하철에서 혜린을 다시 본다. 많이 지치고 초라하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너무 완벽하여 영민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던 그에게 틈이 생긴 것이다. 꿈만 같던 욕망의 끝을 본 그는 허영이 만든 상처에 자기 보호를 위한 자존심의 벽을 세워 여전히 사랑으로 기다리는 영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결같은 영민의 헌신과 사랑에 그 벽은 무너지고 꿈같은 시절이 짧게도 지난다. 그리고 행복한 결혼과 임신. 임신 중독으로 자신의 목숨과 아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긴 시간 한결같은 영민의 사랑에 대한 답으로 아이를 남겨놓고 죽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혜린이 뉴욕에서의 좌절을 슬프게 고백하던 그 벤치에 영민과 혜린을 닮은 아이가 남아 이야기를 나눈다.

 

혜린은 자신의 욕망과 허영을 다 드러냈지만 그것이 가져온 비극의 결과도 자신의 고통도 다 고백한다. 그리고 진실한 사랑이 어디 있었는지 뒤늦게 찾아 내 부끄러운 얼굴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어쩔 수 없이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외치지 않는 영화는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시절, 영화를 한쪽 눈으로만 보던 색맹의 시절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영민의 오랜 기다림과 배창호 감독의 긴 호흡은 정말 근사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으니까. 그 유려한 롱테이크와 미장센은 색맹인 나에게도 아름다운 색으로 보여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나는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사랑을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이제 어렵지 않을까? 이제 나는 영민만큼 순수하지 못하니까.

 

색맹은 치료됐는지 모르겠지만 눈에 탐욕이라는 장막이 하나 생겨버린 것 같다. 어떤 쪽이 더 큰 장애인지 생각하게 된다. 부끄러운 얼굴로 다시 돌아온 혜린은 내게 자꾸만 그 시절을 돌아보라고 한다. 거기엔 심한 색맹이지만 순수한 열정으로 사랑하는 내가 있다. 나는 여전히 우리에게 바꿔야 할 것들이 남아있고 내 영화가 거기에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김대승/ 영화감독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심은하

‘다림’ 을 만나는 순간 가슴에 멍으로 남은 첫사랑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이었다

 

 

 

세상에는 첫사랑에 관해 영원히 변하지 않을 두 가지 명제가 존재한다.

하나는 첫사랑은 실패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죽을 때까지 첫사랑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는 것.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슬픈데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더 슬픈지.

 

아무리 차가운 이성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뜨거운 심장이 뛰고 있는 한, 사람은 어느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첫사랑에 관한 한 이것은 세 번째 명제가 되지 않을까?

한 소녀를 너무나 끔찍하게 사랑한 적이 있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좋아하던 소년 시절의 나는 <소나기>의 그 소년처럼 소녀와 잠시 동안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긴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단 한 번의 실수에 돌아서야 했던 소녀의 그 때 그 뒷모습만을 기억하며 살아야 했다. 소녀의 기억은 그대로 내 가슴에 멍이 되어 남았고 나는 시간으로 멍자국을 조금씩 지워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시간은 어떻게든 흘렀고 난 어느 새 전역을 앞둔 군인이 되어 있었다. 군대에서 난 그렇게도 내게 괴로운 기억을 안겨줬던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휴가를 나오던 날 나는 우연히 <8월의 크리스마스>를 봤고, 잊고 있던 첫사랑의 기억과 다시 만났다.

 

 

군대라는 낯선 시간을 살고 있던 나는 죽음이라는 낯선 시간을 준비하는 정원(한석규)과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고 그 곳에서 다림(심은하)를 만나는 순간 난 이미 시간의 터널을 지나 그 때 그 소녀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지내왔건만 난 나도 모르게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힘들게 지내온 딱 그 시간만큼의 시간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이미 정원과 하나가 돼버린 난 다림이가 팔짱을 끼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고 다림이가 곱게 눈을 흘기면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 그렇게 타임머신을 타듯 다림이를 타고 시간여행을 떠나 이윽고 호흡이 곤란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내 마음을 훔쳐본 것처럼 정원이 읊조리는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만은 추억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그 순간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보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가 그대로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가슴은 답답한데 눈물까지 비오듯 흘러내려 더없이 어지럽기만 해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나서도 그대로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으로도 씻지 못한 첫사랑의 기억을 눈물에 섞어 조금씩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날 그 둔기에 맞은 듯한 몽롱함은 이후 그 어떤 영화나 상황 속에서도 더이상 느낄 수 없었다. 20대의 꽤 오랜 시간 동안 첫사랑의 끈을 놓지 못하고 힘들어 하던 내게 그 끈을 놓게 해준 ‘다림’, 심은하. 내년쯤엔 새로운 모습의 다림이를 볼 수 있을까?

 

~ 강릉 엠비시 보도부 김인성 기자  

 

 

 

내 심장을 멎게 한 노팅 힐’ 의 안나스콧, 줄리아 로버츠

그녀를 다시 만나려 오늘도 극장앞 기웃거린다

 

 

 

단언컨대, 나는 줄리아 로버츠를 좋아하지 않았다. 거실에 앉아 케이블 텔레비전의 채널을 이리저리 떠돌다가 문득 걸리기라도 하면 결국 끝까지 보고야 마는 그 재밌는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도 나는 줄리아 로버츠만은 미스 캐스팅이라고 생각했다. 멀대처럼 큰 키에 인천공항만큼 큰 입을 소유한 여자는 나의 이상형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나는 1970년대의 다이안 키튼이나 80년대의 피비 케이츠, 혹은 90년대의 맥 라이언처럼 작고 귀여운 느낌의, 고양이 같은 여자가 좋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단 한 편의 영화, 그것도 단 하나의 장면 때문에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영화는 <노팅 힐>이고, 그 장면은 후반부에 그녀가 휴 그랜트의 서점에서 마지막으로 사랑을 확인할 때다. 스크린을 보면서 이야기해야겠으나 불가능하므로 지면으로나마 한번 재현해보자.

 

서점에 찾아온 그녀. 하늘색 카디건에 파란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자신의 실수 때문에 상처를 받은 휴 그랜트에게 사과하며 조분조분 상황을 설명한다. “이제 나는 당신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이라며 농담하는 그녀, 하지만 소심한 휴 그랜트는 결국 그 사랑을 포기한다. 그 거절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그를 멍하니 쳐다보는 그녀. 잠시 입술을 꽉 다물고 있더니 이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어색하게 웃는다.

 

그녀의 눈은 툭 건드리면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지만, 그녀의 굵은 선은 그녀를 단지 ‘연약한 여자’로 놔두지 않는다. 금세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 “훌륭한 결정이에요. 하지만 잊지 말아요. 지금의 나는 단지 한 남자 앞에 서서 사랑을 구하는 여자일 뿐이라는 걸.” 그러곤 그녀는 뒤돌아선다.

 

나는 스크린 속에서 이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더니 이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러곤 나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휴 그랜트에게 ‘이 얼간아, 그녀를 잡아!’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처럼 내가 영화 속 여배우를 보고 가슴이 뛴 건 <천녀유혼>의 왕쭈셴(왕조현)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한마디로 나는 단숨에 그녀에게 반하게 되었다.

 

 

이런 걸 사랑이라 말하면 우습지만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한 순간 반하게 되는 것. 누군가에게 반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품이나 능력 등을 하나하나 따진 후에 결정하는 게 아니듯,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녀의 전작이나 <할리우드 뉴스 101> 같은 가십 프로그램에 나오는 그녀의 사생활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저 단 한 장면, <노팅 힐>의 마지막 장면 속에서의 모습으로 인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이후 다른 작품에서의 그녀도 꾸준히 사랑해왔다고 말하긴 힘들다. 예를 들어 <오션스 일레븐>의 줄리아 로버츠, 혹은 <에린 브로코비치>의 그녀를 좋아하느냐면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내가 좋아하는 그녀는 오로지 <노팅 힐>에서의 극중 배역인 ‘안나 스콧’뿐인 것 같다.

 

더 이상 그녀에 대해 구구절절 할 말이 없다. 나는 <노팅 힐> 이전의 그녀의 모습, 혹은 그 이후의 그녀에 대해 온통 부정하고 있으니까. 마치 17살 여름방학 때 동네 도서관에서 첫눈에 반했으나 두 번 다시 보지 못한 어여쁜 여학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엔 서론도, 본론도 없다. 그저 <노팅 힐>에서와 같은 그녀의 모습을 다른 작품에서 만날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했던 옛 연인을 다시 만날 것 같은 기대감으로 오늘도 줄리아 로버츠의 새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 앞을 기웃거린다.

 

김양수/월간 <페이퍼> 기자, 만화가

 

 

 

줄리엣 비노쉬, 맑고 단단한 그 이름 줄리엣

안나, 테레사, 비안느…상처를 안으로 삭히는 맑고 단단한 그 이름. 줄리엣

 

 

 

줄리엣, 하고 말할 때마다 영롱하게, 그러면서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희미한 눈동자. 푸른 빛? 그 깊은 속으로 빠져들면 끝없이 이어지는 미로. 그리고 한 줌의 기억들.

줄리엣? 보이저 2호가 발견한 천왕성의 위성이며 앙드레 지드의 정결한 참회록인 소설 <좁은 문>의 주인공이며 셰익스피어에 의하여 애틋한 사랑의 영원한 표상이 된 이름이지만 내게는 오직 영화 <나쁜 피>의 주인공 안나,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맑고 푸른 그 배우의 이름 줄리엣.

 

어디서 보았던가. 당신의 <세가지 색-블루>는 종로였고 <퐁뇌프의 연인들>은 명동이었는데, 처음 만난 것은 어느 대학교 영화과 학생들의 감상회, 그 한 순간. 90년대 초, 그 무렵의 제목은 <더러운 피>. 저 50년대의 누벨 바그에 대응하여 90년대의 프랑스 영화를 견인한 누벨 이마주. 그 새 물결의 선발 타자 레오스 카락스의 두 번째 작품에서 줄리엣! 당신은 오십여 석의 객석에 고작 대여섯. 맨 앞 줄에 앉아 고개를 쳐들고 있는 나를 내려다 보며, 영화 속 침실 장면인데, 그 투명한 얼굴을 화면 가득 채운 채 끝없이 속삭였는데, 오직 그것만이 생생하게 남은 기억.

 

줄리엣, 당신의 영화 속 이름들은 안나(<나쁜 피>)였으며 테레사(<프라하의 봄>)였고 다시 안나(<데미지>)였다가 줄리(<세가지 색-블루>)였다가 다시 한나(<잉글리쉬 페이션트>)를 지나 베아트리체(<카우치 인 뉴욕>)를 거쳐 비안느(<초콜렛>)가 되었는데 그 영화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수많은 이름들, 그러니까 안나, 테레사, 베아트리체, 비안느가 하나같이 줄리엣이었고,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니까 나는 레오스 카락스나 필립 카우프만, 혹은 라세 할스트롬이나 안소니 밍겔라의 영화를 본 게 아니라 오로지 줄리엣, 그 맑은 이름만을 본 것이 아닐까.

 

아무래도 <나쁜 피>. 내 마음 속에 낙인처럼 찍힌, 영화 속의 안나, 곧 줄리엣. 이상기후의 폭염과 사랑없는 섹스에 따른 괴질이 짖누르는 파리. 학생들이 정성껏 마련한, 그러나 비좁은 감상실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꽤 여러차례 복사한 듯한 낡은 필름 때문에 이 뜨거운 영화는 뜻밖의 리얼리티를 갖게 되었는데, 나는 맨 앞에 앉아, 세상의 모든 것이 녹아내릴 듯한 분위기의 영화 속에서 그야말로 이슬처럼 투명한, 완력깨나 쓰는 중년의 젊은 애인으로 출연하여 푸른 옷 푸른 눈으로 침대 위에서 속삭이는, 그리고 너무 더운 나머지 아랫입술을 내밀어 바람을 만들어 그것을 당신의 얼굴 위로 불면서, 그 때문에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리는, 그리고 다시 끝없는 속삭임. 그 순간 내 마음 속에 낙인으로 찍혀버린 <나쁜 피>의 안나, 곧 줄리엣. 이 영화에 함께 출연하였고 키에슬로프스키의 <세가지 색-레드>의 주인공인, 줄리 델피의 그 매혹적인 얼굴은 기억조차 희미할 정도로 강력한 펀치로 내 심장을 강타한 그 안나, 곧 줄리엣 비노쉬.

 

명동에서 보았던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그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당신의 가방 속에 쪽지를 남기며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하늘이 하얗다고 말해줘. 만일 그게 나라면 구름은 검다고 말할게”라고 썼는데, 다음 날. 당신은 마치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 듯이, “오늘도 꽤 덥네”하고 무심코 내뱉듯이, “하늘은 하얗다”고 말하는데, 남자 주인공 대신 내가 오히려 긴장하여 “그래, 구름은 검어”라고 말할 뻔 했으니, 왜 그랬을까.

 

당신의 영화 <데미지>. 사랑하는 연인, 그리고 그 아버지와도 인연을 맺게 된 안나, 곧 줄리엣은 어느 호텔 침대에서 “상처받은 사람은 위험해요. 그들은 살아남은 법을 아니까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는데, 그때 나는 깨달았으니, 줄리엣, 그 이름은 상처를 안으로 삭히는 이름이며 그 상흔을 남루하게 드러내지 않고 또한 그 고통을 악용하여 다른 이의 눈물을 강요하지 않으며, 오로지 속으로 삭히며 다스릴 뿐, 조금의 공격성도 없이, 눈물 한 방울조차 용납하지 않으며, 자신이 상처입었다는 사실을 단 한순간도 내색하지 않은 채, 그리하여 끝내 상처입은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으니, 아주 단단한 이름 줄리엣 비노쉬! 나의 연인.

 

정윤수 - 문화평론가, 축구평론가

 

 

 

매혹적이고 순수한 안나 카리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춤추는 모습이 너무도 슬픈 여인이 있다. 나는 이 여인을 60년대 초반의 프랑스 영화에서 볼 수 있었다.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한 20대 초반 씨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에서는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곤 했다. 전설적인 감독들의 영화를 즐기기보다는 공부하면서 저 영화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감? 하는 심정으로 눈이 벌개서 화질도 좋지 않고 자막도 열악한 비디오를 보던 시절이었다. 나는 배우를 중심으로 영화를 보지 않았다. 아무리 이쁜 배우들도 기억하지 못하며 감독 이름 외우기에 바쁜 때였다.

 

장 뤼크 고다르의 여자 그 옆에서 빛을 발할때 질투마저 느꼈다

 

그때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를 친구들과 함께 봤다. 그런데 그의 영화에는 항상 같은 여인이 등장했고,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매혹적이었다. 곧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안나 카리나! <비브르 사 비>에서 그녀는 창녀이다. 하지만 순박한 눈빛으로 할아버지와 세계에 대한 심오한 철학을 논하기도 하고, 슬픈 얼굴로 담배를 피워 물기도 한다. 그리고 주크박스를 틀어놓고 혼자 춤을 추기도 한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최근 장만위에게 많은 남성들이 느끼는 매혹과 열광을 넘어선다고 단언할 수 있다. 불운한 한 여자의 일생이 고스란히 드러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발하는 그녀의 얼굴은 순수함 그 자체를 보여준다. <국외자들>에서는 루브르 박물관을 단숨에 내달아 숨넘치는 자유의 열정을 보여준다. <알파빌>에서 그녀는 사랑이란 말을 알지 못하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어두운 도시의 창녀지만 결국 그녀는 사랑을 깨닫게 된다.

 

<미치광이 삐에로>에서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도피행각을 펼친다. 그녀는 베트남 처녀가 되기도 하고, 미국인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영화들은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들이다. 그리고 장 뤽 고다르와 안나 카리나는 사랑하는 사이였고, 부부였다. 훌륭한 영화감독에게는 훌륭한 여배우가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여배우가 존재한다. 나에게 이것은 콤플렉스와 함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난 감독이 될 수 없어, 어쩌면 아름다운 여인과도 함께 할 수 없어!

 

 

 

하지만 아무도 장 뤽 고다르처럼 안나 카리나를 아름답게 잡아내지 못했다. 안나 카리나 표정에서 묻어나는 본질적인 순수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슬픔을 동시에 잡아내진 못할 것이다. 너무 순수하고 아름답기에 역설적으로 퇴폐적이기까지 한 그녀의 눈빛과 표정은 고다르 영화의 심오한 주제를 반영하고, 영화의 주제는 그녀의 이미지를 통해 매혹적으로 스크린에 잔영을 남긴다. 그리고 그녀의 이미지는 영화와 함께 깊이 각인된다.

 

하지만 장 뤽 고다르도 안나 카리나와 평생을 함께하진 못했다. <미치광이 삐에로>를 찍을 무렵 사랑하는 여인이자 영화적 동지였던 고다르와 카리나는 불화를 겪었고, 고다르는 카리나를 남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음모를 가진 팜므파탈로, 명품과 춤에 집착이 있는 여자로 그리기도 했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를 마지막으로 고다르와 카리나는 결별을 하는데, 이 영화에서 보여준 클로즈업 화면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느끼게 해준다. 이후 그녀는 감독이 되어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고다르와 함께 했을 때만큼 빛을 발하진 못했다.

 

예순 다섯이 넘은 그녀의 모습을 최근 박중훈이 출연한 <찰리의 진실>에서 잠깐 볼 수 있었다. 너무 짧아 아쉽기도 했지만, 시간이 아름다움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과 배우에게 어울리는 영화와 역할이 얼마큼 중요한지 새삼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게 인간의 표정이 얼마나 심오하고 아름다운지를 알게 해준 배우였고, 마음 속의 연인이었다.

 

조영각/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보디 히트’ 의 캐서린 터너

20년이 흘쩍 지났지만 내 머리속에 콱 박힌 그녀의 팜므 파탈 이미지를 사랑한다

 

 

 

난 농담으로 내 영화감상 연대기에 1기와 2기가 있다고 말하곤 한다. 1기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20대 초반의 2년 동안이다. 몸 하나 편해보겠다고 시험까지 봐가며 선택한 군대 안에서 영어실력은 모자라지만 영화보기를 즐기는 동료들과 비공식으로 결성한 ‘자막없는 외국영화를 본 뒤 각자 알아들은 내용을 설명하고 전체 스토리를 끼워 맞춰가는 모임(자각스끼모)’은 내가 영화산업계의 변방에서나마 말석을 차지하고 이럭저럭 버틸 수 있게 해준 최고의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그 때 본 최신영화만 해도 200편이 넘으니 말이다. 뭐 ‘자각스끼모’가 항상 정확한 영화 스토리를 완성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게 자막있는 비디오로 자주 확인이 되고 있어 쓴 웃음이 나긴 하지만….

 

2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1998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8년째 하고 있는 ‘업무상 영화보기’는 1기에서의 ‘놀자고 영화보기’와 두가지 점에서 크게 다르다. 하나는 보고 싶은 영화를 내가 고를 수 없다는 것이고 두번 째는 열심히 영화를 보면 월급을 준다는 것이다. 열심히 본다는 의미를 설명드리자면 소비자들에게 선보일 신작 영화들을, 그 영화의 장르와 배우와 스토리의 짜임새가 비슷한 지나간 영화의 수익자료와 비교 분석해서 최적 비용으로 최대의 수익을 내는 계획을 만들기 위해 볼 뿐 더 이상 즐겁기 위해 영화를 보지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슬프게도 업무상 보게된 1998년 이후의 모든 영화는 내게 더이상 영화가 아니었다. 10년 내의 영화속 여배우들도 배우가 아니었고. 그리하여 첫사랑의 여배우가 영원한 연인이 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영화와 관련된 직업 때문임을 고백한다.

 

1981년 제작된 <보디 히트>라는 영화와 그 해 제작된 <프리지가의 명예>라는 영화로 1985년 늦은 여름에 잇달아 혈기 방장한 20대 초반의 군인을 찾아온 캐서린 터너는 얼굴형과 체형, 그리고 목소리까지 이상형의 대척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본 여배우들 중 가장 매력적이고 자극적인 캐릭터로 기억되고 있다. 더구나 남자 배우보다 여배우의 캐릭터가 한 영화의 전부를 지배한다는 것이 얼마나 흔하지 않은 일인지 최근의 <친절한 금자씨>가 친절히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현상을 신기한 관점으로 분석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1980년대 초반은 에이즈 공포가 할리우드를 위협하기 전이기 때문에 알(R)등급 영화들이 지금보다 훨씬 적나라하게 배우의 나신을 보여 줬고 그래서 <보디 히트>에서도 완벽한 허벅지로 대표되는 캐서린의 나신을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쨌든 허벅지, 흰 원피스와 빨간 스커트가 내게 준 성적인 충격은 대단했다. 하지만 단순히 유명 외국 여배우의 누드가 내게 끼친 순간적인 성적 충격만을 따질 경우 피비 케이츠의 <파라다이스>나 브룩 쉴즈의 <푸른 산호초>를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영화들보다 <보디 히트>의 성적 코드들은 그녀만의 독특한 목소리와 관음증을 최대한 자극하는, 마치 도청된 듯한 사실적인 대사들이 어우러져 더욱 강력하게 다가왔었다. 비교하자는 뜻은 아니고, 금자씨의 대사에 버금가는 <보디 히트>의 멋진 대화 한토막. “종이 타월이나 비슷한 것 없나요? 얼음 물에 적셔서.”(캐서린) “바로 대령하리다. 내가 직접 닦아드릴 수도 있는데.”(윌리엄 하트) “핥다 줄 생각은 없나요?”(캐서린) 이 대사만 읽어봐도 이 영화의 남녀간의 희롱은 선남선녀의 것이 아니라 잡배들의 그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와 나눠보고 싶은, 너무 매력적이라 거절할 수 없는 독과 같은.

 

<프렌즈>에서 챈들러 빙의 트랜스젠더 아버지로 등장해 날 경악시켰지만 <장미의 전쟁> 이후 배우로서 저지른 모든 과오를 못 본 척 할 만큼 난 캐서린 터너가 내 머리속에 심어준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사랑한다. 기껏 <엘에이 컨피덴셜>의 킴 베이싱어를 최근에 본 최고의 팜므 파탈이라고 하던데 웃기는 소리…. 내 관점에서 아직도 <보디 히트>를 넘어선 누아르 영화가 나오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더욱 그녀가 자랑스럽다.

 

구창모/소니픽처스릴리징오브코리아 홈엔터테인먼트사업부 상무

 

 

 

‘연애의 목적’의 강혜정

 

 

 

살다보니 어찌 소망하던 영화일을 하고 있지만, 기실 난 영화보다는 음악에 빠져 청춘을 보냈다. 그래서 최초의 나의 연상의 연인(배우라기 보다는 가수인) 올리비아 뉴튼 존이 출연한 영화 <그리스>를 보기 위해 중 3 겨울, 스카라 극장 앞에서 하염없이 추위에 떨던 기억이 아직 새록새록하다. 목소리로만 듣던 올리비안 뉴튼 존을 스크린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경이적이라 할 만큼 즐거운 체험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에 등장한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는 내 영혼마저 앗아갈 정도의 충격을 던지며 올리비아 뉴튼 존을 깨끗이 잊게 만들었다.

 

소피 마르소·브룩 실즈등 플라토닉한 연인들 보내고

20년간 사모한 친절한 연인 장미희를 배반하고 이번엔 도발적 성숙함 강혜정이 다가왔다

 

데뷔 당시의 그 청순한 얼굴과 다소 통통한 몸짓은 각종 영화잡지를 사 모으게 만들었고 내 책상이며 노트, 연습장 표지를 온통 소피의 사진으로 장식케 했다. 단언컨대 소피 마르소, 피비 캣츠, 브룩 실즈 등 당시 청춘스타 3인방은 온통 내 꿈속을 넘나들며 내 외로운 가슴을 위로하던 플라토닉한 연인이었다. 반면 동네극장에서 감상하던 에로영화의 주인공들은 절제되었던 내 리비도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던 에로스의 연인들 이었다.

 

동네극장을 전전하며 에로스의 연인을 찾던 나는 어느 날 이른바 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한 사람인 장미희씨의 지적관능미에 꽂히게 되었다. 그 영화는 바로 <깊고 푸른밤>이었다.

대낮에 수업을 땡땡이치고 본 영화라 밖으로 나왔을 때 당연히 어두워야 어울릴 바깥은 환했고 그 밝음은 내 머리속을 정말 하얗게 만들었다. 내 나이 21살에 당시 29살의 장미희씨의 재발견으로 플라토닉과 에로스로 구별되던 연인들은 뒷전으로 물러났고, 그 둘이 합쳐진 이상향의 연인으로 그녀가 자리잡았다.

 

잠시 세속의 유혹에 홀려 킴 베이싱어, 다이안 레인에 한눈 팔기도 했지만 장미희씨는 세월의 풍화가 더께처럼 굳어진 친근함과 더불어 여지껏 결혼하지 않은 친절한 연인이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 내 청춘도 흐르면서 나는 이즈음 20년간 사모한 친절한 연인 장미희씨를 배반하고 새로운 젊은 연인을 스크린에서 만나고 있다.

 

<올드 보이>에서 처음 본 강혜정씨는 극단적인 순결함과 도발적인 성숙함으로 내 눈길을 끌었다. <남극일기>에서 잠깐 카메오로 등장한 그녀는 <연애의 목적>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연애의 목적>에서 그녀를 보고 난 느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회환의 감정이었다.

 

“난 이제 정말로 저런 사랑할 나이가 지났구나….” 그녀는 내 젊은 날 있었던, 혹은 있음직한 현실적 애인의 실제적 아이콘이 된 것이다. 젊은 영혼들 사이의 그 복잡하고도 아기자기한 사랑, 아픔 혹은 미묘한 연애의 감정이 그녀로 인해 북돋아 진 것이다.

 

요즘 <웰컴 투 동막골>에서 그녀는 순수 그 자체로 다시 회귀했다. 도무지 실제 나이도 짐작이 안 되고 온갖 다채로운 색색의 이미지가 담겨진 그녀는 정말 신비롭기까지 하다.

 

사실 업무관계로 강혜정씨와 몇 차례 만나 안면이 있다. 똘똘하고 당찬 스크린 밖의 그녀는 여느 20대 처녀와 다를 바 없다. 내심 얼마나 다행이던지…. 떡볶이라도 한 접시 사주고픈 여동생 같았달까? 화면 속 주인공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면야, 어디 가슴 설레어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넬 수 있었을까?

 

하지만 스크린 속에서 만나는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 청춘의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소중한 연인이다. 언제 내가 또 그녀를 배반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김태성/쇼박스 ㈜미디어플렉스 부장 (홍보팀장)

 

 

 

‘킬빌’ 의 우마 서먼

 

 

 

테니스 요정 마리아 샤라포바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지난해 가을에 일본에 출장 갔다가 아주 우연히 어느 호텔 로비에서 마주 친 것이다. 그는 그랬다. 9척 장신에 떡 벌어진 어깨, 길게 쭉 뻗은 다리. 그러나 기골장대한 몸과 어울리지 않는 앳된 얼굴.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높은 곳에서 내려 보는 오밀조밀한 눈코입, 어색하게 마주쳐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를 도도하게 무시하던 눈빛. 내가 일반적으로 알던 사람들과는 너무도 다른 신체비례를 가진 그는 모든 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오락실의 비디오 게임에 나오는 ‘사라’나 ‘니나’같은 여전사를 눈앞에서 조우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비현실감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매력을 느낀 건 단지 샤라포바가 예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예쁘장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여성들은 무섭다. 그러나 무섭기에 매력적이다. 그래서 중학생 시절부터 오락실과 무협지를 헤매고 다니면서 예쁘면서 강한 여성들을 탐닉해왔다. 그리고 그런 여전사의 리스트에는 <킬빌>의 브라이드, 우마 서먼이 수위를 차지한다.

 

내면의 따뜻함 감춘 냉혹한 킬러

현실의 ‘브라이드’ 등과 소주 한 잔 먹고 싶다

 

브라이드의 매력. 쭉뻗은 다리로 어색하게 일본도를 들고 80명이건 100명이건 상관하지 않고 난도질을 해대는 그는 무섭다. 중국의 최고수에게 직접 사사받고, 일본 최고 명장의 칼을 든 그에게 어설프게 추근거리기라도 했다가는 목이 댕강 날아갈 판이다. 다소곳이 앉아서 눈물을 흘리는 다른 스크린 속 연인들과는 다르게 브라이드는 결의로 가득찬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보호본능이 아니라 보호받고 싶은 본능을 자극한다. 그와 함께 어두운 밤거리에서 불량배를 만난다면 너무 든든할 것 같다.

 

 

이소룡 추리닝을 입고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칼을 휘둘러대는 그, 벌벌 떠는 일본 날라리들에게 엄마처럼 잔소리까지 하는 그는 무척 여유로워 보인다. 그런데 그에게도 틈이 있다. 동정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척하지만, 사실 그의 얼굴에는 어쩔 줄 몰라하는 혼란스러움이 짙게 배어난다. 별명이 예전에 검은 코브라였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복수를 하러 다니는 그는 금자씨보다 훨씬 헐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긴 몸에 어울리지 않는 소녀같은 표정. 주위에서 다들 냉혹한 킬러라고 하지만, 너무 혼란스러운 감정을 그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킬빌>에 나오는 여러 잔인한 여고수 중에서 우마 서먼은 가장 나약하다. 루씨 리우의 넘치는 카리스마나 대릴 한나의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잔인함에 비하면 우마 서먼은 ‘나도 잘 모르겠어’ 하는 표정을 짓고, 그렇게 혼란스러워 하면서 맨날 설득당하고, 방심하다가 선방을 빼앗기고는 한다.

 

브라이드에게 끌리는 점, 그리고 우마 서먼이 나의 연인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사실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 함께 일하는 동료들 중에 브라이드처럼 강하지만, 여린 여성들을 많이 봐 왔다. 브라이드의 외모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지만, 브라이드 같은 혼란함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주위에서 많이 만나왔다. 그들은 강하지만, 혼란스럽다. 냉혹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따뜻하다.

 

그들에게 적대적이기만 한 사회와 조직과 회사와 남자들 속에서 그들은 강해졌지만, 그리고 그놈들이 그들을 그렇게 위악스럽게 만들었지만, 가슴 속의 따뜻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브라이드가 죽은 줄 알았던 딸을 만나고 눈물을 흘리듯, 비정한 그들은 사실 다정한 그들이 아닐런지. 어쨌든 육식동물같은 몸에 초식동물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현실의 브라이드들과 오늘 소주 한 잔을 먹고 싶다.

 

제영재/문화방송 피디

 

 

 

‘잉글리쉬 페이션트’ 의 랄프 파인즈

 

 

 

내겐 ‘콕’ 집어 어느 한 배우(캐릭터)를 첫사랑의 설레임이나 두근거림으로 좋아해본 기억이 드물다. 물론 좋아하는 배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잭 니콜슨, 존 말코비치, 게리 올드만, 조니 뎁…. 하지만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끌렸고, 그들의 놀라운 변신과 천재적인 연기력을 숭배하는 것이지 연인으로 상상해본 경험은 글쎄, 없는 듯하다.

 

이지적이면서도 열정과 잔인함 동시에 갖고 있는 눈빛에 끌렸나 보다

 

이리 궁리, 저리 고민하다 보니 문득 떠오른 얼굴. 슬픈 눈빛과 수줍은 미소가 매력적인 랄프 파인즈이다. 눈부신 금발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희고 투명한 피부, 깊이를 알 수 없는 잿빛 눈동자, 그리고 기다란 팔다리가 귀족적인 품위를 느끼게 하는 배우 랄프 파인즈.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서 였다. <쉰들러 리스트>에서 그는 차갑고, 비정하고, 악마적인 마음을 가진 남자 아몬 거트를 연기했었다. 여기서 그는 쉰들러와의 대치점에 선 잔혹한 나치 장교라기보다는 불행한 역사가 낳은 연민의 대상으로, 아름다운 악의 꽃으로 나를 매료했다.

 

이후, 그가 다시 한번 나를 사로잡은 것은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사막 한가운데서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고 오열하던 모습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경비행기 탐험가로 분해 영국인 귀족 유부녀(크리스틴 토마스 스콧)와 불륜의 사랑에 빠진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격정적으로 교감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챈 남편의 질투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동굴 탐사 길에 사고를 당하면서 심한 부상을 입은 연인을 사막 한가운데 있는 동굴로 옮겨놓고,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겨둔 채 구조 요청을 하러 떠난다.

 

숨돌릴 틈도 두지 않고, 며칠을 꼬박 새며 사막을 걸어 구원군을 만나지만, 독일인으로 오인한 연합군에 체포되고, 두고 온 연인을 구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도무지 전달되지 않는 간절하고도 외로운 외침. 가까스로 동굴로 돌아오지만, 이미 그의 연인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버린 뒤였다. 그 참담한 상황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애초 그와 사랑에 빠진 자신을 원망할 뿐.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조용히 내 가슴까지 적셨던 것 같다.

 

 

사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그 영화를 뚜렷하게 기억하는지, 진짜 재미있게 보았는지 그런 기억은 희미하다. 다만, 그 때의 랄프 파인즈의 슬픈 눈빛과 연인의 죽음 앞에 오열하던 모습만은 지금도 선명하다.

 

어딘지 이지적이면서 어두워보이는가 하면, 알 수 없는 열정과 잔인함을 동시에 갖고 있는 배우 랠프 파인즈. 흔히 말하는 영웅적인 카리스마보다는, 유창한 언변으로 유혹하기보다는, 차분하고, 조용한 눈빛으로 몇마디 이상의 말을 하는 이 배우에게 나는 끌렸나 보다. 이후로 그가 나온 영화들을 애써 찾아서 보진 않았다.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와 에스에프 대작 영화의 그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 나의 환상이 깨어질 듯한 우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해리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 역에 그가 캐스팅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곤 차가움과 열정을 동시에 가진 랄프 파인즈의 이미지가 잘 어울리는 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게 랄프 파인즈는 <쉰들러 리스트>와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가장 눈부시게 빛나던, 나를 설레이게 하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윤숙희/<젊은기획>대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메그 라이언’

 

 

 

스물다섯 황금기 내 눈부신 연인과 그녀는 완전히 겹쳤다…

해리와 샐리와 달리 우린 각자의 길로 갔지만

 

나는 종종 ‘이영애가 누구야?’와 같이 뜬금없는 질문을 해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곤 한다. 방금 <웰컴 투 동막골>을 보고 나오는 길이면서도 동행들과 대화하며 영화에 출연한 배우 이름을 말하려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여일’이라는 여주인공 이름은 떠오르는데 ‘강혜정’이라는 배우의 이름은 좀처럼 기억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한 동일한 배우의 얼굴마저 매번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흔히들 길눈이 지독히 어두운 사람을 ‘길치’라고 일컫는 것처럼 나는 ‘배우치’임에 틀림없다. 주변 사람들이 쏟아내는 핀잔에 대한 나의 방어는 ‘그래도 황신혜는 알아’라는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변명이다. 그러면서 나는 ‘암, 배우라면 황신혜 정도는 돼야지. 왜 다들 그렇게 밋밋한 거야’라는 혼잣말로 자위를 하는 것이다.

 

영화에 텔레비전 드라마에 각종 광고까지 다중 출연하는 국내 배우들에 대한 사정이 그러하니 외국 배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거의 유일하게 이름이며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는 여배우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메그 라이언이다. 1989년에 개봉된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 당시는 나는 스물다섯이었고 한창 열애 중이었으니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영화관에 나와 나란히 앉은 이는 바라볼수록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새록새록 다가오던 나의 연인이었다. 해리와 샐리의 로맨스에 나오는 사소한 에피소드들과 미묘한 심리들이 우리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어서 영화를 보는 동안 무척 즐거웠다. 그러면서 나의 연인과 샐리와 그 역을 맡은 메그 라이언은 내 마음 속에 완전히 겹치는 존재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해리와 샐리의 해피 엔드와 달리 우리는 각자의 길로 갔고 어느덧 블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한때 연인이었다가 친구로 남은 그녀를 어쩌다 해후하는 일은 세월의 무게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메그 라이언이 우리보다 너댓 살 위라는 사실은 때때로 나에게 큰 위안이 되곤 한다. 만일 메그 라이언이 세월을 거슬러 여전히 샐리 역의 귀엽고 발랄한 젊음인 채로 남아 있다면 그 또한 견디기 끔직한 출렁임으로 내 마음의 연안을 침식할 것이다. 나는 오랜만에 메그 라이언을 <유브 갓 메일>에서 다시 만났다. 이 영화는 1998년에 개봉된 영화지만 최근 몇 년 간 나는 새 영화를 개봉관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분주한 생활을 한 탓에 7년이나 뒤인 지난봄에야 디브이디를 구해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유브 갓 메일>은 나의 직업적인 관심사와 맞물려 꼭 보고 싶어했던 영화다. 수도권 외곽 도시에 자리잡은 조그만 의원을 꾸려가던 치과의사에서 어린이책을 만드는 출판사 대표로 전직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나는 언젠가 틈을 내어 이 영화를 꼭 보리라 벼르고 있었다. 대형서점 ‘폭스’가 들어서면서 42년 간 뉴욕의 한 동네를 지켜온 조그만 어린이 전문서점 ‘길모퉁이’가 밀려나는 사건을 중심으로 이메일을 통해 펼쳐지는 두 서점 주인의 로맨스가 나의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의 무게가 더해졌을 메그 라이언의 모습이 무척 보고 싶었다.

 

역시 메그 라이언은 나의 기대를 조금도 배반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없이 젊고 발랄한 ‘샐리’가 아니라 수수하고 소박하고 친근한 여인 ‘캐슬린’으로 나에게 다시 다가왔다. 세월의 침식을 적절히 견뎌낸 모습으로 그녀는 잠시 종종걸음 치는가 싶더니 또 그 걸음을 제어하려 열 손가락을 활짝 펴서 허공을 가볍고 단단하게 짚는 것이었다. 상대역인 톰 행크스가 하얀 데이지 한 다발을 바친 것처럼 이 가을에, 나도 그녀에게 보랏빛 국화 한 다발을 바치고 싶다.

 

신형건/<푸른책들> 대표, <동화읽는가족> 발행인

 

 

 

슬픈 눈빛…감미로운 몸짓…장귀룽

 

 

 

4월 1일엔 거짓말을 한다. 악의 없는 거짓말에 속은 사람도 껄껄껄 속인 사람도 헤헤 웃으면 그만이다. 분명 우리의 전래 풍습은 아닌데 4월 1일은 만우절이라 불리며 우리에게 잠깐의 활력과 웃음을 주는 그런 날이 돼온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2년 전부터 내게 4월 1일은 더 이상 만우절로 기억되지 못하고 활력과 웃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날은 이제 장궈룽(장국영)을 추모하는 날이 된 것이다. 만우절 장난 같은 소식처럼 장궈룽의 죽음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어제도 보았던 <아비정전>에서 장궈룽은 여전히 런닝, 팬티 바람으로 춤추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가 아닌 원영정을, 아비를, 데이를 난 상상할 수 없다

그는 존재감이 드러나는 최고의 배우였다

 

내가 장궈룽을 처음 만났을 때(물론 스크린 속에서) 그의 이름은 ‘아걸’(<영웅본색2>, 1987)이었다.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죽어가던 그의 슬픈 눈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신파조의 음악과 그의 슬픈 눈이 만나 이룬 장면은 내겐 ‘최고의 장면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우리 말과 달리 높낮이의 차이가 심한 중국어를 좋아하게 된 것이 그쯤이었다.

 

그 후 그는 ‘영채신’(<천녀유혼>, 1987)으로 감미롭게 다가왔다가 곧 ‘원영정’(<인지구>, 1987)으로 나를 눈물짓게 하더니 ‘아비’(<아비정전>, 1990)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의 눈빛, 그의 몸짓, 그의 음성, 그의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런닝 하나만 달랑 걸쳐도 그건 패션이 되었으니까. 깡통을 발로 차며 주리를 틀던 관객들이 급기야 환불 소동을 벌였지만 그건 ‘아비’를 모르는 자들이 벌이는 바보짓이라 코웃음 치며 난 ‘아비’에게 빠져 들었다.

 

 

나를 사로잡은 그는 ‘탁일항’<백발마녀전>, 1993), ‘데이’(<패왕별희>, 1993), ‘구양봉’(<동사서독>, 1994)이 되어 나를 흔들어 댔고 급기야 ‘보영’(<해피투게더>, 1997)으로 나타나 나를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허걱. 이런 것이 사랑이로군. 심장이 멎느니, 눈앞이 하얘지느니,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느니 하는 말들이 다 진실이었다. 그건 그에게 빠진 나를 두고 하는 말들이었다. 바보 같지만 뒤늦은 나의 고백이다.

 

사실 장궈룽은 스크린 속에서 언제나 멋지지만은 않았다. 그의 초기작들에서 그는 별 매력없는 홍콩 배우 이상이 아니었고(그래도 잘생기긴 했었다) <해피투게더> 이후의 작품에서는 빛을 잃어 가며 쇠락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깊이도 얕아지고 레이저를 쏘아댈 것 같던 광채도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로 그는 자기 자리를 조금씩 내주기 시작했고 그런 그를 보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닌 원영정을, 그가 아닌 아비를, 그가 아닌 데이를, 그가 아닌 보영을 난 상상 할 수 없다. 그는 그저 한 시대를 스치는 연예인이 아니라 존재감이 드러나는 배우였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 불꽃같은 사랑을 하는 상태가 아닌 지금도 난 그가 최고의 배우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2주기에 <씨네21> 기자 몇과 함께 그를 만났었다. 오랜만에 보는 아걸은 무척 반가웠고 자주 만나는 아비는 언제나처럼 눈부셨다. 그는 더 이상 현존하는 최고의 배우는 아니었지만 우린 행복했다. 그를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그는 여전히 스크린 안에서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를 꼭 캐스팅하겠다던 꿈을 이룰 수는 없지만 그는 오늘도 내 작은 옥탑방의 텔레비전 속에서 살아 있고 컴퓨터 엠피쓰리 파일 속에서 노래하고 있다. 그걸로 됐다. 그걸로 난 행복하다. 별이 된 그도 행복하길 바란다.

 

김조광수(청년필름 대표)

 

 

 

 

열정적 여성의 모습 내 심장에 강한 각인 ‘비비언 리’

 

 

어릴 적 일본에서 살던 집 건너편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내외분이 운영하던 꽤 큰 영화관이 있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방과 후면 늘 그 곳에 가서 영화도 보고, 두 분과 저녁도 먹곤 했다. 유년 시절 영화관은 하교 후 가방만 던져놓고 달려 나가는 놀이터였던 셈이다.

 

그렇게 보기 시작한 영화 중 선명하게 기억 되는 첫번째 영화가 저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몇 번을 보고 또 봤다. 아름다운 스칼렛, 비비안 리. 그는 단번에 내 시선을 빼앗아 가버린 ‘너무나도 예쁜’ 기억 최초의 ‘서양 여성’으로, 이후 내 인생의 모델이자 미적 감성의 원천이 되어 버렸다.

 

철없고, 가냘프게만 보이는 그가 석양 무렵 당근을 뽑으며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라거나, “신께 맹세코 앞으로 나는 더 이상 배고프지 않겠어, 내 가족을 굶주리지 않게 하겠어”라며 되뇌던 모습은, 그때까지 내가 갖고 있던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180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당시 내 머리 속 여성의 이미지는 자기 의사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고, 항상 ‘네, 네’ 머리 조아리던 수동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내게 영화 속 스칼렛, 서양 여성 비비안 리는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속에는 뜨거운 열정이 있고, 귀엽고 발랄하지만 때로는 강인하고 격정적이기까지 한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 내게 또 다른 ‘삶’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후 나는 자유롭고 능동적인 서양 여성의 매력에 흠뻑 빠져 <애수>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비롯해 비비안 리, 오드리 헵번 등이 나오는 영화를 빼놓지 않고 보게 되었는데, 그 때 본 영화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이해와 예술적 감성을 넓혀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이 글을 쓰면서, ‘영화’와 그녀들은 내게 삶을 보여준 모델이자 발레를 만나게 해준 숨은 주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주인공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실제로 다양한 배역에 도전하며 적극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바지를 입고 아무렇지도 않게 계단에 앉아 있던 오드리 헵번(<사브리나>)은 어린 내게 ‘자유’의 상징이었다. 그가 <어두워질 때까지>란 스릴러 영화에서 눈이 먼 역할로 출연했을 때는 그 변신, 도전에 존경심마저 들 정도였다.

 

그들을 통해 나는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에, 그리고 음악에 심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뮤지컬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감동은 나에게 음악적 감성을 깨워준 것 같다. 이 후 뮤지컬 영화를 특히 좋아하게 되어 <사운드 오브 뮤직> <메리 포핀스> 등을 빼놓지 않고 봤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애수>에서 발레단의 가장 예쁜(!) 발레리나로 나왔던 비비안 리의 모습은 이 후 나를 발레로 이끈 장본인은 아니었을까?

 

발레 무용수로 있을 때 나는 <백조의 호수>를 특히 좋아했다.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백조 오데트가 강하고 유혹적인 흑조 오딜로 변신하는 그 순간이 정말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삶에서도 그러한 변신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항상 다양한 모습에 도전하는 모습 말이다. 물론, 내 삶의 모델이었던 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르게 된 것이리라.

 

오드리 헵번은 말년의 삶을 유니세프 대사로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돌보는 데 썼다. 죽기 전까지 또 다른 도전을 하며 적극적인 삶을 산 것이다. 진정 아름다운 그녀들처럼 나도 끊임없이 여러 가지 도전을 하면서 변신해 나갈 것이다.

 

최태지/정동극장장

 

 

 

‘겨울의 심장’ 의 에마뉘엘 베아르

 

 

 

“혈액형이 뭐죠”라는 질문과 그에 이어지는 장황한 해석은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해 알려주고, 심지어 성격에 대해 준엄한 충고를 하는 순간에 이르면 “진심으로 그렇게 믿으세요?”라고 물어볼까 망설이게 된다. 한 번은 정색을 하고 물어보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썰렁한 상황을 겪고 나서 다시는 그런 반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혈액형 놀이’는 서로 소통하기 위한 사회적 게임이고, 나름의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충분히 안다. 그와 비슷한 게임 중의 하나가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배우’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혈액형 놀이’와 같이 전형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류 정신분석학과 ‘취향의 사회학’을 동원하면 상대의 내밀한 본성을 알게 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사랑에 거절당해서일까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움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몇 년을 우물쭈물했는데, 이러다가는 아무 취향도 없는 인간으로 매도되겠다 싶어 모범답안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배우’ 특히 ‘여배우’에 대해서는 아직도 뭐라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속마음은 솔직히 이렇다. 가능성이 없는 일은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다고. 하지만 한 여배우만은 잊혀지지 않는다. <금지된 사랑>이라는 생뚱맞은 한국 제목으로 배급된 프랑스 영화 <겨울의 심장>(Un Coeur en hiver)에서 까미유 역을 맡은 엠마누엘 베아르다.

 

두 명의 남주인공, 막심과 스테판은 오랜 친구 사이다. 어느 날 막심은 자신과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 젊은 애인인 바이올리니스트 까미유를 스테판에게 무심히 소개해준다. 주인공들이 대화조차 아끼며 눈빛과 미소만을 주고 받으니 특별한 사건이랄 것이 거의 없지만, 영혼을 조율하는 듯한 라벨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영화는 차츰 긴장을 더해간다. 그 긴장은 서로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는 스테판과 까미유가 과연 새로운 연인이 될 것인가 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어지간한 예술가를 능가하는 장인정신으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스테판은 도무지 범속한 세상 속으로는 자신을 던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천직인 악기를 제작하는 일 외에는 매사에 참여하기보다 관조하는데, 사랑도 마찬가지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까미유가 차츰 그에게 빠져들고 마침내 무너지듯 사랑을 고백해도 그는 슬며시 비껴가고 만다.

 

자신도 역시 까미유를 좋아하고 있음에도. 남성 판타지의 정점이라 할 여인이 ‘겨울의 심장’을 가진 남자에게 거절당하고 괴로워 할 때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스테판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행동이 퇴화된 자신의 삶, 운명 같은 자신의 고독에 대해 쓸쓸한 상념에 잠길 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 영화에서 까미유는 사랑에 실패한다. 실패는커녕 제대로 시작도 못해본다. 스테판이라는 불모의 남자 앞에서는 까미유조차 꽃피지 못하고 시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빼어난 아름다움과 기품에 불구하고 사랑을 얻지 못한 까미유이기에 내게는 역설적으로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 영화를 보고 구입한 라벨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나는 까미유의 열매맺지 못한 서늘한 매력에 대하여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이 영화 속에서 내가 정말로 공감했던 것 또는 진실로 소유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은 까미유의 아름다움인가 아니면 스테판의 ‘겨울의 심장’인가? 이제는 세월이 너무나 흘러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조광희(변호사)

 

 

 

 

소피 마르소 ‘코팅 책받침’ 에 설레던 학창시절 풋사랑

 

 

 

2004년 11월, 영화를 사고 파는 국제적인 시장인 에이에프엠(American Film Market)의 한 부스에서 그녀의 신작을 만났다. <안소니 짐머>였다. 트레일러 정도밖에 없었지만 꼭 잡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한국의 누군가에게 선점 된 상태, 못내 아쉬웠다.

 

2005년 5월, 칸에서 일어난 ‘소피 마르소’의 해프닝은 잠시나마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극장으로 되돌려 놓았다. 불혹의 나이에도 아름다운 그녀의 미소는 그리움과 아쉬움 그리고 풋사랑의 추억에 잠기게 했다.

 

학창시절, 봄·가을 소풍 때나 시험이 끝나면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뭉쳐서 영화관을 자주 찾아가곤 했다. 친구들과는 2류 극장인 재개봉관을 가는 것이 대부분 이었는데 저렴한 요금에다 가끔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영화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청룽(성룡)의 수많은 영화, <사학비권>, <취권>, <소림 36방> 등 홍콩 무술영화와 <매드맥스>시리즈 등 비(B)급 액션영화에 왜 그렇게 열광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때는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가까운 이들과 함께 시내를 가는 것이 더 즐거웠던 것 같다.

 

커튼이 올라가면서 안경점, 예식장 광고가 몇 번 반복된다. 이윽고 맛배기 영화와 함께 불이 꺼지고 소음이 잦아들면,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는데 그다지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 순진한 꼬마들의 사랑 이야기였다. 파리로 전학온 앳된 소녀 소피 마르소. 그녀는 파티에 초대받고,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다.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취해 함께 춤추는 소년과 소녀. 그리고 설레는 내 마음. 그렇게 시작된 나의 풋사랑은 결국 코팅한 소피 마르소 책받침을 사게 만들었다. 책받침과 함께 집으로 가는 내내 그녀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영원히 간직할 것 같았던 나의 열정은 어느 순간 닳고 닳은 책받침처럼 기억의 한 귀퉁이로 퇴색했다가 그녀의 당혹스런 미소와 함께 나타났다.

 

소피 마르소는 브룩 쉴즈와 <파라다이스>의 피비 케이츠 뒤를 이어 전 세계의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으며, 지금까지도 <라붐>의 ‘빅’은 청순미의 대명사로 손꼽히고 있다.

 

그녀는 이후 속편 <라붐 2>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배우의 길에 들어서는데 <유콜잇러브>, <고요한 펠리세이드>, <팡팡>, <구름 저편에>, <브레이브하트>, <007 언리미티드>, <벨파고>, <안나 카레리나>, <혁명가의 연인>, <피델리티>, <샤샤를 위하여>, <달타냥의 딸>, <로스트 앤 파운드>, <넬리>, <안소니 짐머> 등 제법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하지만 한국에 소개된 영화는 몇 편 되지 않았다.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다행히 반가운 것은 <라붐 3>가 프리 프로덕션 중이라는 소식이다. 내년쯤에는 <라붐 1, 2, 3>을 한꺼번에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10대에서 40대까지 같이 늙어가는 소피 마르소와 다시 한번 파티를 꿈꾼다.

 

이관형/한국방송 피디,

 

 

 

위노라 라이더, 비디오 비평 ‘알바’ 가 맺어준 인연

 

  

 

1991년 어림은 정말 영화에 파묻혀 산 시간이었다. 그 시절은 막 극단에 들어가서 연극을 한다 어쩐다 열심히 쫒아 다니던 때였는데, 그야말로 한 달에 세종대왕 한 두 장조차 손에 쥐기 힘들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늘 달고 사는 처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은 영화감독이 된 이수인 선배가 환한 얼굴로 와서는 영화도 보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기가 막힌 알바가 생겼다면서 신청자를 받겠다는 것이다. 비디오 한 편에 원고지 5매 정도 평만 쓰면 된다는 선배의 말은 사뭇 복음이었다. 극단에서 너도나도 신청자가 쇄도했고 신청자 중에서 필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필자로 선정(?)되었다. (그 중엔 지금은 스타가 된 정진영 선배도 있었다!)

 

하지만 일은 정말 어려웠다. 욕심껏 분량을 할당 받아오긴 했는데 비디오를 하루에 10편 넘게 봐야하는 것은 육체노동이었다. 게다가 본 영화에 대한 상큼발랄한 평가를 원고지 5매 안에 구겨 넣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평론쓰기 숙제였다. 그래도 돈 쌓이는 재미에 눈이 시뻘개지도록 비디오를 보며 며칠은 착실했는데 난 한 편의 영화 때문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 배우 때문에 나머지 비디오를 보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영화는 <열정의 록큰롤>이란 촌스러운 제목을 달고 있어서 처음엔 무시하고 뒤로 미뤄뒀었는데, 어머나! 그 섹시한 피아노 사운드에 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온 몸과 엉덩이까지 동원해서 피아노를 쳐 대던 그, 데니스 퀘이드의 연기도 압권이었지만 난 그의 어린 신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천사같기만 한 명징하고도 새콤한 그녀는 첫날밤 장면에서도 순진무구하기만 했다. 미성년자의 성행위 묘사라고 해서 극장 검열에서 잘려나간 부분을 저주하며 그 소녀의 귀엽기만한 눈웃음에 헤죽대던 나는, 그 순간 그녀의 골수팬이 되고 말았다. 그 가슴설레는 새침함이라니! 그녀의 이름은 위노라 라이더였다.

 

데뷔작인 <비틀쥬스>에선 검은색이 황홀하리만큼 잘 어울렸고, <가위손>에선 그야말로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소녀였다. <헤더스>나 <청춘 스케치>에서는 반항기 가득한 고등학생으로 나와 그야말로 폭발하는 젊은 열기를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내 눈에는 그녀가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는 듯 보였다.

 

눈에 번진 마스카라에서도 세파나 풍상을 읽을 수 없었으며, 그저 그녀의 무구한 영혼이 놀라운 치유력으로 사춘기의 아픈 정서적 상처들을 치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순수의 시대>와 <아메리칸 퀼트>에선 그녀의 열기를 느낄 수는 없었지만, 성숙해가는 여인의 향기가 가슴을 더욱 설레게만 했다.

 

그녀가 도벽이 있다는 소식은 가슴 아팠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천형과도 같은 배우라는 직업에서 기인하는 스트레스라고 믿고 싶다. 스크린에서 만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믿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여전히 나는 무구한 그녀의 영혼을 스크린에서 만나길 기원한다.

 

김성수(극작가, 연출가, 예술극장 나무와물 대표)

 

 

 

이소룡, 아침마다 그에게 절을 하고 등교했다

 

 

 

1974년 추석, ‘촌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 들길 십리를 걸었다. 십 원짜리 네 개를 얼마나 꽉 쥐었던지 극장 앞에 당도하니 손바닥에 다보탑이 박혀있었다. 이소룡의 <당산대형>, 추석 특선프로였다. ‘직직’ 비 오는 화면에서 사내는 웃통을 벗었다. 배에는 부젓가락으로 누른 듯한 왕(王)자가 박혀있었고, 포효하며 분노한 발차기를 쏟아놓았다.

 

그 날부터 모든 것들이 시들해졌다. 오로지 낙이란 점방의 흙벽에 붙어 촌 것들을 유인하던 <당산대형> 포스터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학교 파하면 점방 앞에 뺑 둘러서서 닳고닳은 내용을 혀에 근육이 박힐 정도로 종알거렸다. 어느 날, 무정한 가을비가 왔다. 화들짝 포스터로 달려가 온몸으로 막았다. 빗줄기가 달려들고 황톳물이 튀어 올랐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뜬금없는 비도 걱정이었고, 선거벽보처럼 긁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엄습했다. 마침내, 뉘 볼세라, 한밤중에, 동생이 플래시로 비추고 나는 습자지로 베꼈다. 집에 와 달력 뒷장에 옮겨 그릴 때까지 속 모르는 개들이 컹컹 짖었다. 다음날부터 아침마다 달력을 들춰 이소룡에게 절하고 등교했다.

 

초등학교 4학년, 그렇게 ‘무(武)’자가 도래했다. 공책이나 교과서의 빈틈에 언제나 ‘무’를 썼고 이소룡의 몸을 복근의 ‘왕’자부터 그려나갔다. 서울로 전학 와 제일 먼저 찾은 게 ‘무도장’이었다. 이소룡을 꿈꾸며 문을 밀었더니, 포개져 빙글빙글 돌던 남녀들이 촌놈 하나를 내려다봤다. 무도장(武道場)이 아니라 무도장(舞蹈場)이었다.

 

이소룡은 스크린 속의 ‘연인’을 넘어 스크린 밖으로 나온 ‘인연’이 되었다. 이소룡의 발차기에서 ‘무’자를 만난 후, 십 년 터울로 약속이나 한 듯 ‘무’자가 한 자씩 다가와 사 무(武·舞·巫·無)가 되었고 그간 한 글자 한 글자에 사무쳐 내 몸의 나이테로 새겨졌으니 말이다.

 

 

83년 무렵, 당시 초야에 묻힌 춤꾼들이 나온 <명무전>을 보았다. 일체 잡담 없이 오로지 침묵으로 거니는 것이었다. 침묵을 권유하는 문자 무(舞)가 그렇게 다가왔고 또 미치기 시작했다. 93년에는 가무악이 꽉 차 있는 무(巫)에 빠져 전국을 돌았다. 굿(Gut)은 굿(Good)이었다.

 

최근 몇 년, 초야에 묻힌 명인들을 무대에 올리다 문장원(88)과 장금도(77)의 춤에 빠졌다. 고령이라 풍화된 듯 아무 동작도 없었지만, 다시는 꾸며질 수 없는 유일무이한 분량이었다. 말로만 듣던 무(無)였다. 원래 무(無)라는 글자는 ‘춤춘다’는 뜻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없다’는 뜻으로 이용되자 구별을 위해 천(舛)을 붙여 오늘날 쓰는 무(舞)를 다시 만든 것이다. 그런즉 춤의 궁극은 비워버리는 무(無)였던 것이다.

 

내 사무침이 시작된 전남 담양의 ‘명화의 전당 명성극장’은 허물어져 모 식당의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 <전무후무(全舞珝舞)>라는 춤공연을 마치고 추석 때 못 뵌 할머니 산소를 찾았다가 텅 빈 그 주차장에 한참을 서 있었다. 31년 전 고무신짝 가득 흥건히 땀을 채워 넣던 이소룡의 야수 같은 괴성이 이명처럼 울려났다. 소년은 의지가 박약하여 무예(武藝)를 닦진 못했지만, 무(舞)를 읽는 평론가가 되어 무(巫)와 무(無)를 찾고 있었다.

 

진옥섭/무용평론, 전통예술연출가

 

 

 

‘가을날의 동화’ 중추홍(종초홍)

암울했던 대학시절 그의 얼굴에서도 ‘상실감’ 을 보았다

 

 

 

이른 아침 창문을 열고 숨을 들이쉬면, 차갑고 쓸쓸한 냉기가 가슴 깊은 곳까지 퍼진다. 늦가을. 나는 이 때가 가장 좋다. 계절의 변화란 ‘매직’과도 같아서, 가슴에 담아두었던 기억들을 불러낸다. 기억은 쓰디쓸수록 짜릿하다. 그 쓴맛이 선명하게 남긴 흉터가 우리들의 현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대학교 4학년 때였다. 차가운 공기가 거리에 내려앉은 늦가을 이 즈음.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취업준비를 하던 시절, 학교 앞 동시상영 극장으로 숨어들었다. 내 도피행각엔 나름 이유가 있었다. 3년간 놓고 지내던 ‘보캐뷸러리(Vocabulary)’ 책을 다시 끄집어 낸 것도 갑갑했지만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함께 통과했던 한 여자를 먼 곳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극장의 간판엔 저우룬파(주윤발)과 중추훙(종초홍)이 있었다. 어줍은 솜씨로 그린 것이었지만 이들의 표정엔 쓸쓸한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답답했던 시절. <가을날의 동화>는 내 가슴을 절절히 파고들었다.

 

 

 

결혼을 약속한 애인을 찾아 뉴욕으로 날아온 제니퍼(중추훙). 그에게 뉴욕의 가을은 잔인했다. 애인에겐 다른 여자가 생겼고 낯선 뉴욕은 그의 생채기를 자꾸만 건드린다. 어딘지 촌스러웠지만 인공적인 매력에 때 묻지 않은 중추훙의 얼굴은 참 예뻤다. 그 얼굴에서 내가 본 것은 바로 상실감이었다. 낯선 도시, 뉴욕의 빈민가. 별다른 희망 없이 ‘이민의 땅’을 부유하던 삼판(저우룬파)은 제니퍼의 상실감, 그 상실감의 ‘표정’과 ‘깊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니퍼를 향해 서서히 피어오른 그의 애정은, 그러니까 동질감의 다른 표현이었다.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두고 무작정 미국 이민 길에 오른 홍콩의 청춘들과 내가 공유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1990년대 초반. 80년대 중후반 민주화의 홍역을 치르고 난 대학 캠퍼스는 거대한 무기력에 빠져있었다. 소련의 해체, 독일의 통일, 동구의 몰락…. 그 격변이 가져온 정신적 공황. 이제 곧 내가 편입돼야 할 사회에 대한 불안감. 그 희뿌연 시계(視界)가 자아내는 정체불명의 공포와 상실감을, 나는 제니퍼의 얼굴에서 봤다. 지나친 비약이었을까? 아니면 스치듯 내 마음을 긁어대는 낙엽 소리에 센티멘털했던 것일까?

 

그 날, 마치 ‘삼판’이 된 듯 제니퍼와의 엇갈린 사랑에 가슴을 치던 나는 <가을날의 동화>를 세 번이나 보고서야 극장을 나섰다. 그리고 친구를 불러냈다. 쓸쓸한데 소주 한 잔 하자고. 결국 소주잔에 쓸어 담은 건, 황량한 서울 거리와 숙취로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뿐이었지만….

 

가을바람이 가슴팍으로 훅 스며들면 생각나는, 제니퍼의 얼굴과 겹치는 또 한 명의 ‘내 연인’은 <첨밀밀>의 이요(장만위)다. 제니퍼와 이요는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린 시대의 한복판에서 살았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1986년 중국의 개방화 바람에 몸을 실고 홍콩으로 밀려든 소군(리밍)과 이요(장만위)는 10년 뒤, 뉴욕의 거리에서 이민자 신세로 재회한다.

 

그 날은 대만의 국민가수 등려군이 사망한 날. 이들의 쓸쓸한 모습 뒤로 등려군의 노래가 흐른다. 등려군의 죽음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10년 세월을 버텨온 이요의 청춘이 죽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소군과 이요는 잘 살았을까? 각자 따로? 서로 함께? 어느 쪽이든 그랬을 거다. 그들은 ‘상실의 시대’를 함께 살았고 그 상실을 대가로 인생을 얻었으니까.

 

정기영 (영화월간지 ‘프리미어’ 편집장)

 

 

 

‘에비타’ 의 마돈나

 

 

 

미국의 팝계에서도 도발적 섹시함과 성의 자유분방한 표현으로 천박하다고까지 했던 마돈나. 그런 그가 1995년 영화에 출연한다는 발표 직후, 미국 연예계가 떠들썩했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 출연 영화가 <에비타>이고, 맡은 배역이 다름 아닌 아르헨티나의 국모 ‘에비타’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헨티나 정부의 엄청난 항의가 이어졌다. 부다페스트의 대주교는 마돈나의 교회 입장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울지마오 아르헨티나여’  도발적 이미지 뛰어넘어 가슴을 울리는 힘이라니

 

‘에비타’는 이미 1976년 세계적인 뮤지컬 작곡가 엔드류 로이드 웨버에 의해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뮤지컬 <에비타> 역시 큰 이슈가 되었는데 정치적 배경을 소재로 한 뮤지컬이 그간 브로드웨이의 불문율과 달리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울지 마오 아르헨티나여(Don’t Cry for Me Argentina)’라는 곡으로 유명세를 탔고, 1981년부터 수 년 간 브로드웨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20년 가까이 영화로 기획되면서 켄 러셀에서 올리버 스톤, 메릴 스트립에서 미셀 파이퍼에 이르기까지 내로라라는 감독과 영화배우의 이름이 거론됐지만 정작 영화로는 만들어지지 못해 더욱 그러했다.

 

‘에비타’라는 이름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에바 페론’을 존경의 뜻으로 불렀던 이름이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가 삼류 나이트클럽의 댄서를 거쳐 영화배우로 데뷔했던 1944년, 극적으로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된다. 민중 혁명으로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추대되면서, 아르헨티나의 퍼스트 레이디가 된 에바. 그는 소외당한 민중들 편에 서서 기금을 모으고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면서,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한 나라의 영부인이자 부통령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그러다 1952년 암 말기 진단을 선고 받고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고작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에비타를 마돈나는 어떻게 연기할까? 대사 없이 노래로 이루어진 오페라타 형식의 영화라는 점에 막연한 기대감을 가진 나는 개봉 첫 날 스크린 속의 에비타를 만나기 위해 일찌감치 극장에 자리했다. 어린 시절에서 앳된 처녀의 모습으로 나타난 마돈나는 실제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러웠고, 시골뜨기 처녀가 클럽 가수 아구스틴 마갈디를 꼬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진출하면서 사진작가, 군인, 권력의 실력자 등 많은 남자들을 상대하는 모습에선 연민의 정을 느끼게 했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지지자들 앞에서 ‘울지 마오 아르헨티나여’를 부를 때는 우아하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마돈나의 노력과 끼가 백분 발휘되며 에비타의 이미지를 재현해 낸 장면 장면이 나의 가슴을 움직였다.

 

 

사실, 너무나 도발적이고 유니섹슈얼한 이미지 때문에 ‘스크린 속 나의 연인’으로 마돈나를 소개하기에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에비타>에서 만난 그는 아직도 나의 마음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들이 에비타로 이름 붙인 갖가지 상품들을 개발하고, 칼 라거펠트, 존 갈리아노 등 세계 유명디자이너들에 의해 ‘에비타 룩’이 새로운 유행으로 생겨나고, 그에 관한 책들이 출판되는 등 에비타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이 역시 마돈나가 <에비타>에서 보여준 강력한 이미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분방하고 자신 있는 모습으로 이제 40대 후반으로 치닫고 있는 마돈나. 그녀를 <에비타>처럼 영화에서 다시 만날 수는 없을까?

 

설도윤/뮤지컬 제작자(설&컴퍼니 대표)

 

 

 

로버트 드 니로

기타선을 따라 고이던 고뇌에 찬 그 눈빛 소개팅때 써먹으려 했지

 

 

나는 타고난 영화광이다. 초등학교 3, 4학년 때부터 혼자 극장가는 걸 좋아했으니 ‘씨네마 키드’라고 할만 했다. 취미를 공유할 만한 친구가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먼저 영화를 보고 친구들에게 줄거리를 이야기해주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영화 이야기를 들으려고 조회 시간 전이나 체육 시간에 내 주위를 산처럼 둘러쌌는데, 영화 그 자체보다는 적당히 과장을 뒤섞은 내 이야기에 더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그 시절에 가장 인기 있던 배우는 성룡이었다. 6학년 겨울방학 즈음 성룡의 <취권>이란 영화는 관객 70만명을 동원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OO극장 앞에는 얼음이 얼지 않습니다”라는 상영관의 광고 카피를 신문에서 봤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그 즈음 나를 사로잡았던 배우는 성룡도, 이소룡도 아닌 로버트 드니로였다. 무협영화만 줄기차게 보러 다니던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왠지 ‘있어 보이는’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됐고 우선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를 골라 봐야겠다는 겉멋(?)이 들기 시작했다. 나에게 아카데미상은 좀 어렵지만 고상한 것, 뭔가 특별한 영화의 인증서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보게 된 영화가 <디어 헌터>였고 주인공으로 나온 로버트 드니로를 그렇게 처음 만났다.

 

드니로는 성룡처럼 신기한 액션을 보여주지도 않고 알랭 들롱처럼 매끈한 조각형의 미남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에게 얘기해줄 만한 것도 없었다. 손짓 발짓 섞어가며 이야기를 풀던 취미가 <디어 헌터>를 본 뒤 사라져버렸다. “친구의 애인을 흠모하면서도 속내를 감추는 주연 배우의 연기가 죽여주더라”라고 이야기를 꺼냈다면 친구들은 하품이나 해댔을 것이다.

 

드니로는 눈빛의 변화만으로도 충분한 연기를 보여줬다. 베트남전 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사람들이 준비한 환영파티에 가지 않고 택시에 탄 채 마을을 곧장 지나쳐버린다. 함께 참전했던 친구들의 행방을 모른 채 혼자만 금의환향한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모텔방에 들어간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방안을 이리저리 맴돌다 두통 때문인지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소파에 걸터앉는다. 드니로가 이마에 손을 갖다 대는 바로 그 순간 ‘카바티나(Cavatina)’라는 곡의 기타 선율이 시작된다.

 

그 아름다운 음악과 혼란에 빠진 드니로의 말없는 연기는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표창을 날리고 깨부수고 날아다니는 것만 멋 있는 줄 알았는데 고뇌에 빠진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근사했다. 그게 어찌나 멋스러웠던지 대학생이 되서 소개팅을 나가기 전날엔 친구가 ‘카바티나’를 연주하고 나는 여학생 앞에서 고뇌에 찬 표정을 지어보자는 어처구니 없는 작전을 짜기도 했다.

 

 

드니로는 <대부 2>와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에서도 멋진 연기를 보여줬다. 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은 지금 다시 봐도 눈물을 훔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고는 <성난 황소>에서의 연기다. 영화 초반의 몇분, 흑백의 느린 영상 속에서 홀로 복싱연습을 하는 장면은 아마도 영화사상 몇 안되는 명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다양한 표정을 담아내는 그 눈빛이나 배역에 몰입하는 드니로의 모습은 배우들 뿐만 아니라 나처럼 인생을 영화처럼 살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표상이라 생각한다.

 

남무성/재즈평론가, 만화책 <재즈 잇 업> 저자

 

 

 

‘너는 내 운명’ 황정민

‘얼마나 울리나 보자’ 별렸던 마음 와르르 꺽꺽 울게 만든 남자

 

 

 

그러고 보니 난 참으로 현실적인 사람이었나 보다. 학창 시절 그 흔한 외국 배우 하나 가슴에 품지 않고 살아온 걸 보면.

 

만인의 연인 <칵테일> 속 톰 크루즈도, <가을의 전설>의 브래드 피트도, <타이타닉>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단지 스크린 속 배우일 뿐 단 한번도 나의 가슴에 연정을 품게 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내가 앓고 있는 불치병, 후천성 기억력 감퇴증(AMDS:Acquired Memory Deficiency Syndrome) 때문에 외국 배우들의 이름은커녕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그 출중한 외국 미남 배우들에게조차 눈길을 주지 않았던 내가 서른을 훌쩍 넘긴 요즘 범상한(?) 외모의 스크린 속 남자 배우에게 연정을 품게 되고 말았다. 나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그 남자는 <너는 내 운명>의 석중, 배우 황정민.

 

애초 초절정 최루성 영화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극장을 찾을 당시, ‘그래 얼마나 울리나 두고 보자, 내가 우나봐라’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지켜보던 내가 무너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현실에서는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아니 지긋지긋하고 통속적인 순애보. 나는 질그릇보다 몇 배는 더 투박하고, 농축 우라늄 같이 밀도 높은 황정민의 연기에 취해, 나도 모르게 극장 안 훌쩍이는 여자들 틈에서 그 소리의 강도를 몇 배나 더 높이고 말았다.

 

창작물이 화려할수록 진정성은 훼손되는 법, 화려하지 않지만 극중 인물의 깊이를 묻어나게 하는 배우 황정민. 나는 <너는 내 운명>의 석중을 만난 뒤로 황정민을 다시 생각하게 됐고,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한번 살다 죽을 인생, 나랑 살다 죽고 싶다는 석중과 같은 남자를 나도 현실 속에서 만나길 바란다면 철없는 노처녀의 판타지일까?

 

평소 사랑과 믿음과 소망 가운데 그 중의 제일이 사랑이라 믿으며, 조건없이 아무나 마구 사랑하다가는 결국 상처받기 십상이라는 나의 사랑관에 변화를 가져다 준 남자, 그냥 별 매력 없이 연기나 잘 하는 줄로만 알았던 배우 황정민을 남자로 다시 보게 해준 영화 <너는 내 운명> 속 석중을 알게 된 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마초 나 형사를 보면서 또 한번 나는 사랑에 빠지게 됐다.

 

화학조미료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무공해의 맛있는 연기를 선보인 배우 황정민, <너는 내 운명> 속 황정민은 달빛 같은 남자다. 햇빛 아래서 보았다가는 고스란히 드러날 눈가에 생긴 작은 주름과 거칠어진 피부, 그리고 가슴 속의 시린 상처를 가린 채, 아름다운 미소만을 부드럽게 비춰주는 달빛 같은 남자. 나도 이 겨울이 가기 전에 현실에서도 달빛 같은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싶다. 왜? 사람은 이불만 덮는 게 아니라, 과거의 상처도 덮어야 하기에….

 

신여진/<해피투게더 프렌즈> <좋은 사람 소개시켜줘> 방송작가

 

 

 

‘아메리칸 뷰티’ 미나 수바리

주인공이 그랬듯 ‘상상속 일탈’ 로 빨려들어

 

 

 

내 인생의 여배우를 공개적으로 얘기할 수 있게 된 데는 영화와 관련된 두 번의 전환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린 시절부터 차분히 앉아 스크린을 응시하는 ‘할리우드 키드’와는 거리가 먼, 활달한 성격에 운동장을 종횡무진 누비던 나였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책과 음악, 영화에 탐닉하기보다는 학교 대표로 응원단에 참여하던 나였다.

 

이렇듯 내 인생의 영화, 아니 내 인생의 여배우를 전혀 꿈꿀 수 없었던 나의 인생에서 영화와의 첫번째 조우는 1996년이었다. 이른바 ‘잘 나가던 약장사’(제일제당 제약사업부)에서 하루 아침에 엔터테인먼트 사업부(현 씨제이엔터테인먼트)로 발령을 받은 나는 매주 토요일 오전 집사람과 어린 딸들을 이끌고 극장주를 찾아다녔다. 씨제이가 영화사업을 하던 초창기라 “저희 영화 하루만 더 걸어주세요”라며 사정하고 다니던 나에게 ‘영화’란 업무 스트레스를 강요하던 불편한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러니 여배우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데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있던 1999년 겨울, 영화를 새롭게 보게 했고 나아가 내 인생의 활력소가 된 한 배우를 만나게 되었다. 미나 수바리. 1979년 미국 로드아일랜드생. 10대 소녀의 모습에 팜므 파탈의 도발적인 눈빛을 가진 그녀. 그녀의 간단한 프로필만을 얘기했을 때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아메리칸 뷰티>에서 장미꽃이 흩날리는 판타지 목욕 장면의 주인공이라고 말하면 백이면 백 모두 떠올리는 그녀가 바로 나의 연인 미나 수바리이다.

 

모든 사람이 알만큼 강렬했던 그녀의 캐릭터는 내 심장의 휴화산을 다시 폭발시켰고, 내 머리 속에는 철필로 새긴 듯한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영화를 보기 한해 전 <피스 메이커> 미국 정킷(해외 언론을 대상으로 한 주연배우 인터뷰 행사)에서 니콜 키드만을 보았을 때 가졌던 흥분과 환상은 <아메리칸 뷰티> 한편 보는 것으로 하드 디스크 포맷 시킨 것처럼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 정도다.

 

 

영화 속 케빈 스페이시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뭔가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했고, 그녀를 통해 영화가 업무뿐만 아니라 나의 삶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영화 속 장면에서 케빈이 딸의 친구에 잘 보이려는 수컷의 본능을 발견하는 순간, ‘언젠가도 나는’ 하며 정신적 일탈(?)을 꿈꿨던 두 딸의 아버지인 나였지만 현실 속에서 일탈의 결과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없이-물론 그런 용기도 없었지만- 내 상상 속에서 내 마음대로 스토리를 이리저리 구성해 보면서 잃어버렸던 나만의 본성을 찾을 수 있게 했던 그녀. 그리고 주변에 전혀 피해를 주지 않고 오로지(!) 나만의 내적 세계에 머물렀던 그녀가 있었기에 이후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4년여의 시간 동안에도 신문 사회면이나 방송 뉴스에 나올 일 없이 착실한 ‘기러기 아빠’로 남을 수 있었다.

 

그녀가 일깨워준 나의 판타지에 대해 주변에서는 ‘원조교제’와의 유사성 운운하며 의혹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정평이 나있었기 때문에 영화 속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떳떳하게 하고 다닐 수 있었다는 점이다. 드림웍스 영화를 배급하던 회사 업무 때문에 알게 되었던 ‘팜므 파탈’ 그녀는 내가 가족과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에 우리 가족을 지켜주었던 ‘수호천사’ 역할을 한 것이다. 정신적이든 현실적이든 누가 우리 사이를 일탈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찾아본 그녀의 인물검색에서 그녀의 이혼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를 통해 나는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지만, 그녀는 세계의 많은 유부남들의 사랑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5년 후 다시 그녀의 인물정보를 찾아볼 때는 행복한 그녀의 모습을 기대한다.

 

신승근 (디어유엔터테인먼트 부사장)

 

 

 

저우싱츠(주성치)

뉴욕에서 만난 ‘소림축구’ 그만의 코미디 늪에 풍덩

 

 

 

성장기 내내 홍콩 영화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생각한다.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이나 장궈룽(장국영)의 영화를 거의 다 골라 보았다. 단순히 동양적인 매력을 넘어 서양적 세련미를 덧대는 그들이 나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멜로나 무협 영화에 온통 마음이 가있던 내게 코미디 배우가 들어올 여백은 사실 없었다.

 

그러다가 만났다. 저우싱츠(주성치). 뉴욕에서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단원이란 수식어로 벅찰 정도의 기대와 절정을 맛보다가 십자인대 파열이란 부상을 입어 발레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사투를 벌여야 했던 시절이었다. 혹독하고 끔찍했던 순간이었다.

 

그 시절 빼놓을 수 없는 취미 생활이 일주일에 한 번씩 32가의 한인 타운에서 우리 비디오를 빌려 보는 것이었다. 거의 3년 동안 단골로 드나든 탓에, 내 취향들을 잘 알고 있던 비디오 가게 주인이 난데없이 <소림축구>를 권했다. 속는 셈치고 보라며 서비스로 밀어 넣어준 덕에 만난 <소림축구>의 저우싱츠. 그때까지만도 저우싱츠 역시 연휴 때 텔레비전에 흘러 지나가는 흔한 코미디 배우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중국의 무술 문화와 그의 절대 고독한 표정이 어우러진 블랙 코미디. 웃지도 않으면서 인간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불현듯 비웃는 그만의 내공이 오락성, 폭력성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영화는 대중 예술의 극치를 그려냈던 것이다.

 

무엇보다 허무맹랑 코미디의 유쾌함을 넘어서, 인생철학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해주어서 기뻤다. 여느 무술 고수 배우들과 달리, 자기는 도저히 흉내낼 수도 없는 전통 무술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변형시켜 소화해내는 그에게서 또 하나의 인간 승리를 찾아볼 수 있었다.

 

마치 배우 자신이 일반 관객과 하나가 되어, 그 자신 역시 오를 수 없는 고수들을 동경하고, 그 마음을 담아 고수 흉내내기를 감수하며 일반인의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듯한 그에게서 느끼는 매력은 참으로 묘했다. 나는 그것이 다른 무술 고수 배우들에 대한 주성치의 콤플렉스라고도 보았는데, 그는 그것을 좀처럼 감추려 들지 않았던 셈이다.

 

이후 난 그의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발견한 <희극지왕> <식신> 등은 나를 여지없이 ‘저우싱츠’의 늪으로 밀어넣었다.

 

브루스 리, 청룽, 그리고 리롄제로 이어지는 걸출한 무인들의 축에 절대 낄 수 없어도, 그는 적어도 무술과 연기가 무엇임을 정확히 간파하는 인물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만의 코미디적 해설로 대중에게 친근하게 와 닿는 이유이고, 결국 <007 북경특급> <홍콩 레옹> <도성> 등을 통해 패러디의 지존으로 거듭났던 배경이 아닐까. <쿵푸허슬>의 하이라이트에서 거세게 피어오르는 그만의 카리스마를 난 소름 끼치게 느꼈다.

 

나는 내가 ‘순수 예술을 하는 이’라고 선 긋고 싶지 않다. 콤플렉스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매력으로 바꾸면서 자신있게 패러디를 추구한 주성치를 통해 다시금 확인한 교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장르를 뛰어넘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에 대한 갈망도 키워줬다. 그래서 주저없이 내 연인으로 꼽는다. 저우싱츠. 참 힘든 시절, 너무도 소중하게 만난 배우다.

 

강예나/유니버설 발레단 수석 무용수

 

 

 

제니퍼 코널리

‘원스 어폰 어 타임…’ 그 소녀, 내 사춘기 끝내다

 

 

나는 1970년생이다. 내 십대 시절의 시작과 끝을 온전히 80년대와 함께 하게 된 것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그것은 곧, 팝 음악과 키치 문화의 프리즘을 통해 중첩투사된 경박한 화려함의 무지개 속에서 사춘기를 보냈음을 의미한다. 스크린 속의 연인이라면 무조건 반사적으로 코팅 책받침의 물신(物神)부터 떠올리는 게 자연스러운 세대라는 것이다. 피비 케이츠, 브룩 쉴즈, 소피 마르소, 다이안 레인, 나스타샤 킨스키 따위의 이름들이 30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마치 문신처럼 뇌리에 각인되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들은 ‘스크린 속 나의 연인’으로 간주된 적이 없었다. 피비 케이츠의 <파라다이스>도 브룩 쉴즈의 <푸른 산호초>도 소피 마르소의 <라 붐>도 보지 못했다는 표면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어차피 결코 닿을 수 없는 여인에 대한 비현실적인 짝사랑이 유치해 보였던 것이다. 또래의 여학생들과 분식집엘 가거나 왕성한 테스토스테론 분비의 요구에 굴복하여 이보희의 <무릎과 무릎 사이>와 오수비의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를 보는 식의 실용적인 노선이 차라리 남는 장사라는 게 나의 논리였다.

 

게다가, 대중음악 평론가로 호구지책하고 있는 이력이 말해주듯, 그 시절의 나를 더욱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음악이었다. 내 벽을 장식한 핀업 스타들의 이미지는 <스크린>과 <로드쇼>가 아니라 <월간팝송>과 <음악세계>가 제공한 것들이었고, 그 가장 빛나는 전시물은 올리비아 뉴튼 존이란 이름에 속한 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출연했던 <재너두>나 <그리스> 같은 영화들을 통해서도 연인상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녀에 대한 느낌은 마치 사이렌에 대한 굴복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침내, 저 ‘스크린 속 나의 연인’이라는 표제어를 만족시키는 주인공을 만난 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제니퍼 코널리를 통해서였다. 그녀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동양적 아름다움의 미덕마저 모조리 흡수한 듯한 신비로운 외모와 감정의 이입을 견고하게 만드는 또래집단의 실존적 동질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가슴 속을 사정없이 파고든 그 강력한 드릴의 정체는, 자신을 훔쳐보는 사내아이의 눈길을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청순한 동시에 잔인하기도 한 사춘기 소녀의 조숙함을 대변하는 화신으로서 그녀의 극적 존재감이 만들어낸 인상이었다.

 

그건 내게 일종의 전환점을 의미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제니퍼 코널리는 내가 처음으로 ‘비현실적인 짝사랑’이나 ‘여신에 대한 굴복’ 따위의 감정이 아닌 현실의 반영으로서 영화와 여배우를 만나게 된 시발점이었다. 어쩌면 가장 사춘기적인 방식으로 맞이한 내 사춘기의 종말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오히려 더 괴롭히는 따위의 위악적 조숙함으로 유치함의 실상을 가리는 것이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후 제니퍼 코널리의 영화를 볼 때면, 그것이 번역 제목 수준만큼이나 한심한 <백마 타고 휘파람 불고>이건 아카데미 조연상을 거머쥔 호연의 <뷰티풀 마인드>이건 간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그녀를 떠올리며 픽 하고 웃고 만다. 왠지 그녀가 내 사춘기의 부끄러운 기억들을 죄다 떠벌이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얼굴 빨개지는 쑥스러움은 어쩔 수 없으니까 말이다.

 

박은석/대중음악 평론가

 

 

 

줄리 델피

연애의 의미 돌아보게한 ‘비포 선라이즈’ 의 셀린느

 

 

 

그녀는 내가 결혼을 생각하게 만든 첫번째 여자였다.

가장 가슴 벅찬 열망과 가장 고통스런 비애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 그녀.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 그녀는 실패한 연애의 상처로 인해 심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난 달콤한 탈출구였다. 영화 하겠다고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진지하게 삶을 꾸려가는 것이 진정 의미있는 인생일 거라고, 순진하고 치기어린 얘기들을 들려주었고, 그녀는 나와 함께 대학로와 인사동을 오가며 영화와 공연장을 순례하고 둘만의 여행으로 고단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연애의 모양새는 갖췄지만, 늘 아슬아슬하고 불안했던 그녀와의 관계는 매순간 희열과 좌절의 극단을 넘나들게 했다. 내가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던 것은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희와 열정을 붙잡고 싶은 욕망에서였다. 그녀의 일상이 편안해지고 문화탐험을 위주로 한 교양연애도 시들해지자, 결국 그녀는 좀 더 안정되고 부가가치 높은 삶을 향해 나를 떠나고 말았다. 결혼이라는 선택을 통해 보다 확실하게 자신의 삶을 위치지우고 싶어한 그녀는, 결혼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내비친 나를 정말 순진하고 치기 어리게 바라보았다.

 

내가 가진 현실적인 불확실함까지 감내할 자신이 없었던 그녀의 선택에 난 크게 반발하지 않았지만, 희열과 열정이 사라진 공백과 허탈의 상처는 생각보다 컸다. 그때, 코아아트홀 일요일 조조상영에서 만난 그녀 ‘셀린느’(<비포 선라이즈>의 줄리 델피)는, 그때까지 내가 알던 연애와 사랑에 대한 생각을 한순간에 뒤집어놓은, 말 그대로 ‘발견’이었다. 그동안 내가 붙들려 있었던 연애가 얼마나 과도한 욕망과 집착으로 버무려진 열병덩어리였는지, 정말 내가 사랑을 느끼는 대상은 누구이며 사랑을 이뤄가는 내용과 방식은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 뒤통수를 치는 듯한 깨우침을 ‘셀린느’는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단 하룻밤의 시간뿐. 비엔나 거리를 거닐면서 제시와 셀린느는 참 많은 얘기를 나눈다. 고즈녁히 책을 보며 대화를 하는 그녀. 서글서글한 눈매에 담백한 인상의 그녀는 지적이고 사려 깊기까지 하다. 매력적인 눈웃음에 천진한 미소, 나긋한 목소리에 맑고 풍부한 감수성까지…. 내가 제시가 되어 비엔나의 밤거리를 함께 거니는 듯 나른한 흥분에 빠져들었다. 제시가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건네게 만든, 기차 안에서 그녀가 읽고 있었던 바타이유의 <죽은 자>도 서점을 뒤져가며 열심히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불행히도 번역본을 구할 수 없었다.

 

 

그때 이후, 별 내세울 것도 없는 내 사랑과 연애는 이른바 ‘셀린느 찾기’의 흥미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신념어린 의지(!) 끝에 마침내, 나는 나의 셀린느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제시와 셀린느가 <비포 선셋>에서 다시 만난 바로 그때, 나는 나의 셀린느와 함께 옛날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크린 속 10년 만에 만난 그들은, 지난 시간의 엇갈림과 회한 속에 아쉬운 두 번째 이별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객석의 나는 흐뭇한 행복감을 만끽하며 나의 셀린느의 손을 꼭 쥔 채, 그들을 애틋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난 후 다시 보는 셀린느. 늘어난 잔주름과 시간이 남기고 간 흔적들은 오랜만의 그녀에게서 발견한 안타까움이었지만, 나에게 그녀는, 사려깊고 당당하며 진지하고 순수한 10년 전 비엔나 밤거리의 셀린느, 그대로였다.

 

신창길/ <분홍신> 프로듀서

 

 

 

 

제라르 드파르디외

그 대책없는 약자의 선량함이라니

 

 

물론 내 이상형은 키 크고 잘생긴 남자다. 카리스마가 있거나 우울한 불량기가 느껴지는 얼굴보다는 선한 인상의 남자가 좋다. 그리고 똑똑하고 예의바르고 매너도 좋고, 사리에도 밝아서 언제 어떤 순간에도 당황하는 법이 없는 남자보다는 저런 대책 없는 순수함으로 어떻게 나랑 같은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을까 싶을 만큼 약간은 몽상적인 남자가 좋다. 그렇다고 바보처럼 헤헤거리며 누구나 이용해먹고 싶어지는 그런 남자는 아니었으면 싶고, 살짝 만화 주인공 같은 순수함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좋다. 예를 들자면 금성무 같은 타입. <중경삼림>에 나오는 금성무든 <첫사랑>에 나오는 금성무든, 그를 보고 있자면 배시시 웃음이 절로 나온다.

 

막상 현실에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 문제로 방황하거나 또는 행복해하는 그를 보자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인다. 제 아무리 세게 실연을 당한다 한들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 몇 개 먹고 나면 다 잊을 것 같은 안도감을(중경삼림), 그는 준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렇게 그를 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설렘이 없다. 보면 흐뭇하고, 상상만 해도 행복한데 마음이 떨리지는 않는다.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잘 키운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예뻐 죽겠기는 한데, 그 존재가 안타까워서 마음 저린 느낌 같은 건 없다.

 

내게 마음 저린 느낌을 주었던 배우는 금성무와도 정반대고 내 취향도 아니다. 나는 키 크고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데, 그는 코만 크고 안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건 만화처럼 순수해서 누구도 훼손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 남자인데, 이 사람은 너무 바보 같아서 누구든 이용해먹고 싶어지는 타입이다. 통조림 따위 먹지 않고 해결될 실연도 이 남자 앞에서는 전 생을 걸어야 하는 비장함이 되고 만다. 너무 안 생겨서 그런가.

 

그렇게 비장한 사랑 고백도 겨우 생의 마지막 순간(시라노)이나 이별의 순간에서야(그린카드) 할 수 있을 뿐이다. 고백을 해봐야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따위의 해피엔딩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매사 불쌍함으로 일관하니, 혹 그에 대한 내 감정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닐까. 그렇다면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그를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뭉근하게 저려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혹시 낡고, 가난하고, 힘없고, 약한 것들에게 반사적으로 느끼는 태생적인 연대감 비슷한 것은 아닐까.

 

그는 실제로도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단다. 탈선이란 탈선은 다 저지르는 문제아를 위한 대비책으로 권유받은 연극을 통해 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했다는 프로필은 나중에 알았지만, 태생이 그래서 그런지 그의 눈빛에는 어떤 우수가 있다. 그를 보면 평생을 걸고 싶은 꿈이 있고, 그 꿈은 이루지 못하기가 더 쉽다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고,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고, 그래서 애달프고, 그래서 간절한 어떤 열망이 느껴진다. 그것은 조금만 더 비약하면 내 모습이 되고, 조금 더 정신 차리고 보면 내가 반드시 외면하고 싶은 내 모습이 된다.

 

동시에 참 많이 좋아했지만 가난해서 혹은 그 삶이 너무 불안해보여서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래서 오래오래 미안함으로 남기고 만 누군가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픈 마음으로 손을 내밀면 그는 오히려 가만히 나를 안고 내 고단한 삶을 위로해줄 것 같다. 내 욕심 찾아 살겠다는데, 비난하는 대신 어깨 두드리며 격려해주고 그림처럼 묵묵히 바라봐주기까지 하는, 그에 대해 내가 책임질 일은 하나도 없지만, 내가 힘들거나 심심할 때는 아무 때고 뒤돌아보면 늘 그 자리에서 넉넉하게 웃고 있는 선하고 따뜻하고 마음 약한 남자... 그만하면 이기적이고 못된 여자의 판타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한지혜/소설가

 

 

 

임창정

귀엽고 착한 이 남자, 딱 내 스타일

 

 

내가 임창정을 기억하는 건 <비트>(1997)부터이다. “13대 1로 쪼개서…”라며 큰소리 떵떵 치다 ‘뒤지게’ 두들겨 맞던 놈 말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라면가게 차리고 환하게 짓던 미소, 가게 지켜야 된다며 조폭에게 돈을 주고 흘리던 눈물이 도무지 잊혀지지 않았다. <비트>엔 정우성, 고소영 같이 ‘존나~ 멋있는’ 인간들이 많이 나왔지만, 전부 만화 주인공들 같았고, 오직 임창정만이 ‘실사’ 같았다. 살려고 허풍도 치고 때로 비굴해지지만, 자기 욕망에 솔직한 ‘진짜 인간’ 말이다.

 

<행복한 장의사>(1999)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다. 특히 임창정이 조등(弔燈)을 들고 새벽 논길을 자전거로 달리는 장면은 가장 행복하게 꼽는 장면이다. 마치 그의 자전거를 같이 타고 새벽 논두렁길을 달리는 듯 상쾌한 바람이 코끝에 스치는 듯하다. 그는 망나니처럼 굴 때도 극악함이 도를 넘지 않는다. 근본은 착한 사람 같다는 믿음이 이상하게도 그의 눈빛에 전해온다. 그래서인지 <행복한 장의사> 중 껄렁한 놈팡이에서 죽음의 의미를 터득해가는 장의사로 거듭날 때도 그의 눈빛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설득이 되고, <시실리 2km>에선 조폭이면서도 처녀귀신 말을 들어주는 다정한 그가 과히 이상치 않다.

 

사랑영화 속 그는 무척 겸손해 보인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에서 언강생심 톱스타를 사랑하는 청년인 그는, 조심조심 그녀에 대한 마음을 내보이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 맘 때였나, 과자 시에프에서 임창정이 벤치에 앉아 “나, 그거 아주 잘 먹는데…”하며 약간 웃으며 몸을 꼬는 광고가 있었다. 임창정이 부르는 애절한 사랑 노래와 더불어, 난 귀엽고 착해 보이는 그를 정말 꼭 안아 주고 싶었다.

 

사랑 영화 속 ‘귀엽고 착해 보이는 임창정’의 결정적 이미지는 역시 <색즉시공>(2002)이다. 정액 토스트를 들고 천진하게 뛰어가는 그는 흡사 <톰과 제리>의 표정을 닮았다. 다리를 쩍 벌리는 하지원을 보고 밥알을 튀기고, “좋아?” 라는 말에, 엉겁결에 웃으며 끄덕이다 봉변당하는 그이지만, 진정한 압권은 따로 있다. 하지원을 여관방에 눕혀 놓고 사정사정해서 반지 팔고, 기숙사에서 ‘브루스타’ 랑 ‘즉석 미역국’ 이랑 가져와서 여관방에서 차력쇼로 마늘 까며 미역국 끓여 먹이던 그! 나는 살다 살다 이렇게 눈물나는 코미디는 처음 보았다. 하지원은 임창정을 사랑하지 않지만, 그는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과시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필요로 할 때 최선의 사랑과 배려를 그녀에게 준다. 그 후로도 그는 그녀와 수줍게 만날 뿐 그녀에게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귀엽고 착해 보이는데다, 웃기기까지 하다니, 그는 완전 내 스타일이야~.

 

그에겐 생활의 냄새가 풀풀 난다. <위대한 유산>(2003)에서 쭈그려 앉아 손빨래를 하는 그의 엉덩이 흔들림이 아줌마의 그것처럼 리얼하기에 “너…똥쌌어” 같은 대사의 울림이 남다르고, <파송송 계란탁>(2005)에서 “어 얘 순진한 척하는 것 좀 봐” 같은 대사가 자연스럽기에 “낭만 고양이~”가 더욱 구슬프다. 그의 팍팍한 삶의 냄새 때문인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에 무수한 커플들이 나왔지만, 내 마음을 울린 건 오직 임창정 뿐이었다.

 

밤낮 없는 빚 독촉에 시달리고 풀죽은 듯 집에 돌아와서도 아내에겐 “넌 소시지, 난 단무지, 우리 한 떨기의 김밥이 되자”며 포근히 안고, 지하철에서 “제 아내를 위해 단 1초만이라도 기도해 달라”고 울 땐, 좀 오버스러웠지만 내 남편이 그렇게 우는 양 애틋했다. 신기루 같은 비장미를 날리며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남자가 아니라, 가장 현실감 있는 삶의 의지로 나를 꼭 안으며 수줍은 듯 웃을 것 같은 남자 임창정, 스크린 속 ‘나의 연인’이여. “오 너를 느낄 때~ 난 살아있어~ 너는 내 행복의~ 전부니까♬”

 

황진미/영화평론가

 

 

 

장만옥

목까지 가리고도 섹시할 수 있다니!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난 스무 살 전엔 공부만 했고, 스무 살 이후엔 너만 바라보며 산 게 분명해! 아무도 생각이 안 나!” 선언 같은 나의 외침에 마누라는 만족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글생글 웃는다. 원고청탁을 받고 맨 먼저 한 것이 바로 이런 안전장치 심어놓기이다. 마침내 “써도 돼. 용서해줄게”란 농담 같은 허락이 떨어지고서야 나는 ‘연인’이라는 아주 위험한 단어에 대해 비로소 조금 자유로워졌다.

 

<화양연화>. 인생의 골목을 스치고 지나간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왕자웨이(왕가위)의 충혈된 집중은 나에게 아주 긴 진동을 남겼다. 차우와 수리첸의 거짓같은 진짜 사랑이 비처럼 붉은 커튼처럼 또는 가로등 불빛처럼 내 중년의 초입에 내린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나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이 영화의 여주인공 수리첸이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스크린 속 인물 중 유일하게 섹시하다고 느낀 여자라는 점이다. 초점이 흐려진 가구와 벽 사이로 그녀의 얼굴과 그녀의 곡선(!)이 선명하게 떠오르면, 나는 영락없이 일상의 설렘을 간신히 참아내며 버티고 있는 차우(량차오웨이·양조위)가 되어버린다. 목까지 가린 치파오를 입고도 저렇게 섹시할 수 있다니! 그것은 일종의 기적과도 같았다.

 

하지만 사실 그녀를 나의 연인으로 만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영화 <2046>이었다. (이 영화에선 장만위(장만옥) 즉 진짜 수리첸은 단 몇 초밖에 나오지 않는다.) 차우는 <화양연화>의 수리첸을 떠나보냈지만 결국 평생 그녀의 환영을 쫓으며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가슴 내려앉는 애잔한 고독이다.

 

 

 

사실 남자들은, 아니 적어도 나는 이놈의 애잔하고 쓸쓸한 사랑을 너무나 좋아한다. 그것은 추억에 대한 사랑이고 사랑에 대한 추억이다. 추억은 이별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어쩌다 펼쳐본 중학교 시절의 명상록엔 웬 놈의 이별시가 그리도 많이 적혀있는지. 제대로 사랑 한 번 못해 본 녀석이 이별의 감정에 가슴이 저미고 눈물이 고였었던 것이다.

 

사랑의 ‘추억’은, 진짜 사랑이 있었건 없었건 간에 그 자체로, 떠나온 고향 같고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 같은 것이다. 장쯔이가 아무리 수리첸처럼 입어도 짝퉁일 수밖에 없고, 만나는 상황이 비슷하거나 이름이 같다고 하여 그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윤도현은 노래한다. “언젠가 다른 사람 만나게 되겠지, 널 닮은 미소 짓는. 하지만 그 사람은 네가 아니라서 왠지 슬플 것 같아. 잊을 수 없는 사람….”

 

차우는 가수가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평생 소설을 쓰며 진정한 연인을 기억할 것이다. 그 소설은 우주에서 가장 슬플 것이고, 주인공은 우주에서 가장 외로울 것이며, 우주에서 가장 긴 이별과 기다림을 다룰 것이다. 아! 아름답지 않은가?

 

 

차우 속 수리첸이? <2046>속 <화양연화>가? 현실의 사랑은 추억이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 담겨서야 비로소 그 완전한 미를 획득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내 가슴 속엔, 음악에 맞춰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의 발걸음과 국수통을 든 그녀의 손과 애써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의 연인’이 장만옥이란 말이지?” “‘내 인생의 연인’이 아니라 ‘스크린 속 나의 연인’이라니까!” 마누라가 약속을 어기고 원고를 봐버렸다. 아무래도 더 쎈 안전장치가 필요할 것 같다.

 

안슬기/<다섯은 너무 많아> 감독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개봉 첫회에 목숨걸던 시절…극장으로 달려가던 새벽 인신매매범에 끌려갈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분명 미하일 바리시니코프(59)의 팬이 아니었다. 소련 최고의 발레리나에서 미국 망명 예술가로 목숨 걸고 ‘조국’을 바꿨다는 것에 조금 흥미를 갖긴 했지만, 정확히 거기까지. 관심 있는 배우 목록을 대라면 그 외에도 나는 189명 정도는 숨도 안 쉬고 너끈히 외울 수 있을 만큼 세상의 많은 스타들을 사랑했다. 남자 구경하기 어려웠던 당시 여학생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넘치는 에너지를 항상 이상한 방향으로 폭발시키는 불완전한 시기였다는 뜻도 된다. 나의 열정은 공부가 아니라 영화로 슬슬 옮겨가고 있었고, 남들보다 먼저 영화를 보는 것만이 영화에 대한 내 애정을 드러낼 기회라는, 조금 유치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개봉 첫날 1회를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던 시절. 나는 제일 먼저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가는 1등 관객이 되고 싶다는 열망에 늘 시달렸다.

 

<지젤>(1987)은 바로 그 시기, 1등의 왕관을 쓰고 만난 기념비적인 영화였다. <백야>(1985)가 엄청나게 히트를 기록한 덕분에 당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는 아니더라도 천정을 찌를 정도는 되었다. 사촌언니는 그의 팬이었다. 나에게 늘 팝송과 영화의 신세계를 알려줬던 언니는 어느 날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지젤> 첫 회를 봐야 해. 그리고 입장 순위 100위 안에 들어야 해. 그렇게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었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사진을 10장이나 준다고 하거든.” 우와, 나는 그의 팬은 아니었지만 사진엽서 10장이라는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1등 관객이 되기 위해 우리는 전날 합숙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혹 못 일어날 것을 대비해 밤을 꼴딱 새우기로 작정했다. 극장에 출동한 시간은 새벽 5시, 목표지점은 호암아트홀. 날은 어두웠고, 우린 아직 어렸으며, 덩치 큰 공포가 골목마다 잠복해 있었다.

 

새벽녘 시청 앞은 무서우리 만치 조용하고 축축했다. 먼지를 뒤집어 쓴 낡은 인형의 집처럼 음산한 빌딩의 숲에서 두리번거리던 두 소녀. 그때 택시에서 내리는 우리를 가리키며 한 남자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우린 그가 당시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었던 인신매매범임을 직감했다. 왜냐하면 그는, 도망치다 아무 택시에나 올라탄 우리를 뒤쫓아 와서는 택시 운전사에게 “얘들 우리 애들이니 어서 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사태를 파악한 아저씨는 남자를 멋지게 물리쳐주었고, 우리를 호암아트홀 경비실에 무사히 인도해준 후에야 발길을 돌렸다. 한숨을 내리쉰 후 시계를 올려다보니 시간은 겨우 새벽 5시45분이었다. 그날 우리는 당연히 1등 관객이었고, 두 번째 관객은 9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극장관계자들은 우리의 열정에 감복했는지 사진세트를 덤으로 하나씩 더 쥐어주었다. 하지만 밤새 수다를 떨고 험한 일까지 겪어서인지, 나는 영화 상영 내내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몰려오는 졸음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게 <지젤>은 영화 속 로맨스와 발레 <지젤>의 로맨스가 기가 막히게 겹쳐진 영화라는 기억 이외에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가 되었다.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꽉 낀 타이즈가 부담스러워 자꾸 눈을 돌리게 된 민망한 기억으로만 남은 영화. <지젤> 이후 나는 사실 발레 영화라면 치가 떨린다.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라는 이름도 기억에서 가물가물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번도 깊이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믿었던 그 이름이, 스크린 속 나의 연인 칼럼을 청탁받고 나자 계속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친김에 찾아보니 그는 그 유명한 <섹스 앤 더 시티> 6시즌에 등장했다고 한다. 또 최근까지 화이트 오크 댄스 프로젝트라는 현대무용 단체를 활발히 운영했다고 한다. 아, 내 청춘의 한때를 불멸의 밤으로 만들어준 이 남자는 여전히 잘 살고 있었구나. 내심 기쁘고 뿌듯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사진엽서 세트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한 여자가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고. 그의 청록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자꾸 눈에 어른거린다.

 

황희연/월간 <스크린> 편집장

 

 

 

오드리 햅번

젖은 눈의 애처로운 웃음 신비로운 슬픔이어라... 오늘도 그를 보며 잠 청한다

 

 

 

술자리에서 조금만 유치해지면 나는 영화 배우 얘기를 늘어놓는다. <킹콩>에서 나오미 와츠 죽이지 않든? 그래. 머홀랜드 드라이브 때부터 예사롭지 않더라. 아네트 베닝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아. 에이, 아니다. <러브 어패어>에서의 그녀를 따라갈 수는 없지. <이터널 선샤인>의 케이트 윈슬렛은? 그렇게 팔뚝 굵고 매력적으로 보인 여배우는 처음이야. 맞아, 맞아. 주절 주절….

 

마치 헤어진 여자 친구를 회상하듯이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계속되다보면, 궁극적으로 나는 세 명의 여배우를 거론하는 것으로 그 주제의 신선함을 떨어뜨리는 치기를 재탕한다. <카사블랑카>의 잉그리드 버그만.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의 셜리 맥클레인. 그리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햅번. 이미 여러 번 들어온터라 지인들은 별 관심도 없는데 나 혼자 잔뜩 감상에 빠져 이 세 여배우 예찬론을 다시금 늘어놓고 집으로 돌아온다.

 

술기운이 잔뜩 오른 나는 늘 그랬듯이 손닿기 쉬운 곳에 놓아둔 디브이디를 플레이어에 넣고 텔레비전 앞에 늘어진다. 헨리 맨시니의 꿈결 같은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지방시의 검은 드레스를 입은 고혹스런 미스 고라이틀리가 티파니 쇼윈도우 앞을 서성인다. 안녕, 미스 고라이틀리. 이젠 거의 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행복한 기분으로 잠을 청하는 방법.

 

오드리 햅번. 그녀가 헐리우드 역사의 아이콘인 것도, 패션 리더였으며 말년에 아름다운 일을 많이 했다는 것도 내겐 관심사가 아니다. 사실 오랜 세월 그녀의 영화들을 봐오면서도 전혀 여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다른 배우들에 비해 더 특별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그녀보다 예쁘고 섹시한 여배우들은 수없이 많았다. 단지 그녀가 나오는 영화들은 대부분 재미있었다, 는 정도였을 뿐.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그 많은 영화 중에서 <티파니에서…>는 무의식중에 늘 내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영화의 어떤 게 나를 끌어당기는 것일까. 헨리 맨시니의 음악? 블레이크 에드워즈의 경쾌한 연출? 그 해답은 나중에 의외의 영화를 통해 찾을 수 있었다. <사랑과 영혼> 이란 덜떨어진 흥행작 땜에 묻혀버렸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또다른 걸작 <영혼은 그대 곁에>(1989)에서 나는 노년의 햅번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영화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은 드레이프스를 인도하는 천사 ‘햅’으로 깜짝 출연하며 자신의 필르모그래피의 마침표를 찍는다.

 

환갑의 나이로, 여전히 맵씨가 좋은 하얀색 옷으로도 미처 가릴 수 없는 주름살 가득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햇살을 받고 있는 그녀에게서 나는, 노년 여배우의 처량함이 아니라 신비로운 슬픔같은 걸 느꼈고, 곧 그 얼굴은 오래 전 젖은 눈으로 애처롭게 웃어보이던 미스 고라이틀리로 오버 랩되며 내 마음을 마구 뒤흔들었다.

 

한 여배우를 바라보며 신비롭다, 라는 느낌으로 마음마저 뭉클해진 경험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40여년 전 그녀가 만든 홀리 고라이틀리는 생각보다 훨씬 내 마음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햅번은 <영혼은 그대 곁에>를 끝으로 착한 일 많이 하다가 4년 뒤인 1993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녀에 대한 무수한 좋은 평판으로 보건대 아마도 지금은 마지막 영화에서처럼 천사가 되어 활동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천사로 햅번을 기용했던 스티븐 스필버그. 새삼 뛰어난 예지력을 가진 감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윤기/ 영화감독, <여자, 정혜> <러브토크>

 

 

 

이강생

내가 반한 게 그이였을까 차이밍량이었을까

 

 

 

난 영화 속 나의 연인을 찾기가 힘들다. 이유는 영화 속에서 마음을 흔드는 남자를 보게 되더라도 영화가 끝나면 ‘그 배우가 멋지게 연기 했구나’ 또는 ‘작가나 감독이 매력적인 인물을 만들었구나’ 라는 생각으로 그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님을 빠르게 자각하는 허무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남자가 누군가의 상상력이란 생각이 들 땐 그에 대한 나의 설렘도 이내 막을 내린다. 직접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그림의 떡) 사람은 좋아 할 수 없는 현실파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나는 영화 속 인물보다는 못하더라도 나의 눈높이를 가능한 남자에게 맞추고 그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한마디로 현실 가능한 남자인 것이다.

 

그런 내게도 머릿 속에 지워지지 않는 영화 속 얼굴이 있다. 작은 욕조 안에서 옷을 벗고 어깨를 움츠리고 미간을 슬며시 찡그리며 건조한 표정을 짓던 사람. 작년 가을 부산영화제에 갔다가 남편의 권유로 보게 된 영화였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만의 외롭고 고독한 가진 것 없는 젊은이들이었다. 사실 내가 열광한 인물은 내 눈 앞에 펼쳐진 영화 너머 이 영화를 만든 감독 차이밍량일 수도 있겠다. 나를 두 손 들게 한 그의 영화 <흔들리는 구름>을 강렬한 느낌으로 보았고 작년엔 그 한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난 가끔 그 엽기적이며 기괴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배우 이강생과 차이밍량을 생각했다.

 

시작은 주인공인 남자포르노 배우가 일본인 여자 포르노 배우와 수박으로 포르노를 찍는 장면이었다. 수박을 손가락으로 찔러 철퍽거리는 소리를 내는 장면에 나와 남편은 킥킥거리며 웃고 말았다. 연일 방송되는 가뭄으로 인한 물 부족의 경고… 남자는 건물 물탱크에서 샤워를 하고 여자는 자신이 다니는 박물관 화장실에서 물을 훔쳐낸다. 물에 대한 갈증은 사람들의 내적 결핍을 형상화한다.

 

 

낡은 타일 바닥을 타닥거리며 걷는 그녀의 무기력해진 슬리퍼 소리는 마음을 조인다. 아파트 건물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숫자들은 우리가 도시 속 커다란 수용소 속에 살고 있음을 연상하게도 한다. 형광등 아래 비추는 창백한 푸른빛… 좁은 목욕탕에서 샤워기 대신 플라스틱 병에 구멍을 뚫고 세상에 오염된 듯한 더러운 물을 뿌리며 권태롭고 힘겹게 섹스하는 배우의 몸짓은 처참하리만큼 스산하다.

 

후반부로 가며 영화 속 섹스는 지겨운 ‘일’이 되어 버렸고 그 모든 것을 벗어나고픈 갈망으로 두 남녀의 사랑은 희미한 숨구멍이 되어 버렸다. 진지해지고 우울해질 즈음 화려한 춤과 노래로 보이는 뮤지컬은 나를 잠시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해학과 해소가 있다. 남자가 포르노 배우임을 몰랐던 여자는 기절한 일본 여배우와 포르노를 찍는 남자를 보게 되고, 충격을 받아 바라보고 서있던 여자는 고통스러울 만큼 힘겹게 섹스하는 그를 보며 차츰… 그리곤 결국 두 남녀의 교감만이 남게 되는데… 참으로 기괴한 섹스 장면에 난 그만 머릿속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모든 의도 뒤에는 차이밍량의 의지와 정서가 담겨져 있다. 그는 희망을 선뜻 내어 놓지 않는다. 물을 아끼고 분리수거하며 환경오염을 걱정하는 장면도, 아이도 없고 기쁨도 없다. 그는 대안 없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고독한 인간인지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은 계속해서 사회주의자가 되어 가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 것 같다.

 

이강생의 외로운 눈빛이 지워지지 않는 것은 우리도 같은 정서의 테두리 속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장차현실/만화가

 

 

 

리버 피닉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시린 투명함이여

 

 

 

한 때라도 사진을 모았거나 연애 편지를 썼거나 영화보고 울거나 멋있지를 연발한 남자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거의 모두 젊어서 세상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제임스 딘. 장궈룽(장국영). 몽고메리 크리프트. 루돌프 발렌티노. 그리고 배우는 아니지만 이젠 세상에 없는 나의 전 남편. 요절. 젊어서의 죽음은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지름길이며, 남긴 자들에게는 감상주의란 싸구려 향수를 한 움큼씩 듬뿍듬뿍 남긴다. 나의 전 남편이라니…. 죽는 순간. 소유격이 붙는군.

 

그러나 내게 있어 리버 피닉스는 살아 있을 때도 좋은 배우였다. 제임스 딘이 첫 사랑이긴 하지만, 분명 <스탠 바이 미>의 꼬마 리버 피닉스는 보자마자 좋았다. 솔직히 살아만 있어 줬다면, 그 얼굴에 풀풀한 아웃 사이더의 기질과 고독하고 깊은 눈빛만 남아 있었다면, 살아서 그가 신용카드 선전을 하고 제니퍼 로페즈와 로맨틱 코미디에 출연했더라도 그를 좋아했을 것이다. 어떤 충성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성형 수술로 괴물이 된 배우 미키 루크를 아직도 좋아하는 것처럼.

 

어떤 영화에서도 리버 피닉스는 ‘집’이란 곳에 머물러 본 적이 없는 ‘골수 떠돌이’라서 미치게 좋다. 데뷔작 <익스플로러>에서부터 우주로 여행을 가고, <스탠 바이 미>에서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이끌고 낯선 시체를 찾아 길을 떠난다. <허공에의 질주>에서는 반전 운동을 하다 아예 가족이 통째로 미 연방 경찰에게 쫓기고, 결국 구스반 산트의 <아이다 호>에 이르러러는 마침내 길의 감식가란 왕관을 쓴다.

 

 

 

그래. 당연하지…. 가수 톰 웨이츠처럼 그의 짧은 인생 자체가 거리의 운행자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히피인 부모 밑에서 구걸을 하면서 세상을 떠돌았고, 할리우드에 지독히도 적응하기 힘든 채식주의자이기도 했다. 리버 피닉스의 얼굴에는 아주 어리고 앳된 시절부터 이미 반항아라는 수식어로는 부족한, 무엇에도 초연할 수 있는 텅 빈 도화지 같은 매혹과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려 어깨조차 빌려 줄 수 없는 시린 투명함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에서 친구들과 내기를 걸어 가장 못 생긴 여자를 데리고 오기로 했을 때 그의 표정을 당신이 보았더라면 싶다. 사람들이 정해 놓은 미와 추의 경계를 그저 넘어 버리는 무심함. 그래서 그를 영화에서 본다는 것은 특히 통째로 모두가 전부 리버 피닉스의 영화인 <아이다호>에서 그를 본다는 것은 영혼의 북쪽이란 표지판을 보고 멀리 멀리 길을 떠나는 ‘은밀한 도망’의 행위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살아있었다면 디카프리오 대신 틀림없이 해냈을 <토탈 이클립스>의 랭보 역할을 맡은 그를 정말 보고 싶다.)

 

그리하여 죽기 전에 그가 음성 메시지에 남긴 말. ‘고통과 오해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라는 말은 나의 말이기도 하다. 사라짐의 충동을 불러 일으키는 남자 리버 피닉스. 잊기에는 너무 숨막히는 남자 리버 피닉스. 미치도록 떠돌아 다니고 싶던 시절. 새벽길의 청소부가 살아있는 가로수처럼 보이던 시절. 내게 있어 리버는 아직도 내가 가지 못한 세상 모든 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있어 세상의 모든 로드 무비들은 아직도 나의 영화였다.

 

내 마음속 깊은 바다에는 아직도 한 마리 아름다운 불사조가 산다. 리버 피닉스란 멈추지 않는 강물이 흐른다.

 

심영섭/영화평론가

 

 

 

마리아 팔코네티

그 숭고한 이미지, 영화에 대한 탐구열을 자극하다

 

 

작은 키에 스크린 앞에 앉아 영화를 보면서 성장해 왔던 나의 옛 모습을 뒤돌아보면, 배우에 대한 동경과 판타지에 사로잡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영웅본색>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돈을 불태우던 저우룬파(주윤발), 전화박스에서 숨을 거두던 장궈룽(장국영), <탑건>에서 F-14 톰 캣의 시끄러운 굉음에 쾌감을 느끼게 했던 톰 크루즈. 내 나이 또래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고히 간직했을 법한 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의 브로마이드. 할리우드와 홍콩 배우에 대한 동경으로 방안 가득 브로마이드를 채워넣었던 내 세대의 평범한 영화 체험은 2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획기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1994년부터 시네마테크 활동을 하며 남들보다 더 많은 영화를 보게 되면서부터 그 평범함과는 점차 거리를 두게 되었다. 배우보다는 감독을 먼저 보게 되었고, 할리우드 영화보다는 유럽이나 제3세계 영화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영화보기의 경험은 익숙하지 못한 새로운 길을 여행하는 것처럼 피곤하고 힘든 일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이 길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좀 더 다양한 영화적 재미를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고다르나 트뤼포의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와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구로사와 아키라의 <칠인의 사무라이>와 <이키루>, 레오 까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 등의 영화를 경험하면서 감독 뿐 아니라 이전에는 만날 수 없었던 스크린의 배우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만남은 이전에 내가 동경해 마지않았던 배우들의 이미지보다 더욱 깊이 각인되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장 폴 벨몽도와 진 세버그, <400번의 구타>의 장 피에르 레오, <동경 이야기>의 류 치슈와 하라 세츠코, <칠인의 사무라이>와 <이키루>의 시무라 다케시와 도시로 미후네, <소년 소녀를 만나다>의 드니 라방과 미레이유 페리에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배우들이 무차별적으로 나를 매료시켰다.

 

그 중 나를 가장 매료시켰던 배우는 단연 마리아 팔코네티였다.(광주국제영화제에서 일하고 있을 당시 홍보대사로 너무나 열심히 활동하는 문근영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크라이테리온에서 출시된 <잔다르크의 열정>을 고심 끝에 선물한 적이 있다. 문근영의 진실됨과 마리아 팔코네티에 대한 배우로서의 각별함이 배우로서의 가능성과 발전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칼 테어도르 드레이어의 무성영화 <잔다르크의 열정>에서 숭고하면서도 희생적인 잔다르크 역을 맡은 마리아 팔코네티는 원래 지방의 연극배우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잔다르크가 지닌 시골처녀의 순박함과 순교자의 열정을 혼신의 힘을 다해 표현하고 있다. 영화는 수개월에 걸쳐서 진행되었던 잔다르크의 종교 재판을 마치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인듯 시간을 압축시켜 다루고 있으며 시종일관 잔다르크를 핍박하는 이들과 고통스러워 하는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교차시키는 수법으로 수난의 시간을 ‘잔혹‘하다고 할 정도로 부각시킨다.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까지 담아낸 클로즈업을 통해 영화 형식이 적절하게 활용될 경우 이 정도로 충격적인 힘을 가질 수있구나 하는 실감을 안겨준 영화였다. 그래서 지금도 마리아 팔코네티의 순교자적인 희생과 구원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다. 팔코네티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숭고한 이미지는 내가 새로운 영화에 대해서 탐구하고 싶은 열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새로운 영화에 좀 더 쉽게 조우할 수 있도록 도와준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상백/이모션 픽처스 기획팀장

 

 

스티브 부세미

소심남, 뻔뻔남들의 세상서 지켜주고파

 

  

 

나의 연인은 언제나 스크린 밖에 있었지, 스크린 안에 존재한 적은 없다. 만질 수 없고 체취를 맡을 수도 없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 상상 속의 연인에게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나는 다만, 스크린 속 배우들의 어떤 이미지에 간혹 감동할 뿐이다. 이를테면, 삶의 상처를 담고 냇물처럼 흐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주름, 눈빛 하나만으로도 시끄러움을 표현해내는 잭 블랙의 기괴한 표정 아니면,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악기가 되는 버스터 키튼의 정직한 몸? 그래서 내겐 죽도록 싫어하는 배우는 있어도, 죽도록 사랑하는 배우는 없다. 그러므로 이 글은 ‘스크린 속, 나의 연인’이 아니라 그나마 일관되게, 그것도 매우 가늘고 긴 시간동안 나의 관심을 끌어왔던 어느 배우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스티브 부세미다.

 

어느 날인가, 나의 건장한 룸메이트는 자신의 소심함에 어이없어 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시대, 남자의 소심함이 얼마나 큰 미덕인지 모르는군.” 자기성찰을 할 줄 모르는 뻔뻔한 남자들 틈에서 소심한 남자들은, 적어도 자신을 괴롭힐지언정, 폭력적이지 않다는 그의 논리는 일면 설득력이 있었다. 예민한 신경이 스스로를 말라 죽일지라도,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의 소심함이 당신을 잠시 피곤하게 만들지라도, 세상을 평정하는 무소불위의 독불장군이 되지는 않겠어. 그래서 소심한 남자의 삶은 비극적이다. 홍콩 누아르 속 주인공들처럼 폼 나게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단 한순간도 피로를 떨쳐버릴 수 없어서 비극적이다. 나는 스티브 부세미를 볼 때마다 그런 상념에 빠져든다. 그의 몸은 언제나 날카로운 바늘처럼 위태롭고 영양실조에 걸린 듯이 창백한 얼굴은 죽음을 눈앞에 둔 듯하고,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불만 가득한 말들은 분열증적이다.

 

 

이건 그가 맡은 역할이 강도나 킬러나 그저 평범한 남자일 때나 상관없이 이미 그에게 주어져 있는 어떤 불운한 분위기다. 그래서인지, 그가 어떤 연기를 하든 그는 단 한번도 안정되거나 행복해 보인 적이 없다. <판타스틱 소녀 백서>에서처럼 소녀에게 사랑을 받아도, <커피와 담배>에서처럼 여전히 수다스러워도, 코헨형제의 영화에서처럼 어딘지 모자란 살인마가 되어도, 내 눈에 그는 날이 갈수록 자신도 방어하지 못하는, 퀭한 눈빛의 나약한 짐승이 되어 간다. 세상의 모순을 자기 것이 아닌 양 너털웃음으로 날려버리는 호탕한 남자들과 달리, 이 우유부단한 남자는 그 모순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신경에 새기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에게 소심함은 운명이다.

 

그가 <파고>에서 토막 난 시체가 되어 분쇄기 속의 뼛가루로 남았을 때, 나는 이것이 바로 이 시대, 소심한 남자들의 말로가 아닐까, 잠시 슬퍼했다. 마초가 득세하는 시대, 꽃미남이 각광받는 시대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다 사라지는 소심한 남자들. 그들에게 내려진 가혹한 형벌. 물론, 나는 스티브 부세미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연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소심함에 고통 받다가 죽어가지 않도록, 마초들이 여전히 건재한 세상에서 그 혼자만 괴로움에 지쳐가지 않도록, 소심한 그가 행복해지는 순간까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 우습지만, 이건 나에게 일종의 책임감과 같은 것이다.

 

남다은/영화평론가

 

 

 

안성기

80년대 장동건이자 원빈이자 설경구였다

 

 

 

첫키스, 첫사랑, 첫경험…. ‘처음’이라는 말의 의미에 포함된 ‘설레임’이라는 느낌을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1985년 과외 아르바이트를 땡땡이치고 내 인생에 처음으로 본 성인영화,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이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꿈꾸며 오로지 영주권을 얻기 위해 계약결혼을 했던 백호빈과 제인. 결국 미국시민권을 얻은 남자의 욕망과 그에게 사랑을 느끼고 만 여자가 충돌하고 맺게 되는 비극적 결말의 영화이다. 마지막 이혼여행 길에 올라 사막에서 허망하게 죽어가는 안성기와 장미희의 모습과 함께 아직도 잊지 못할 몇 개의 장면들이 머리 속에 박혀있다.

 

로맨틱한 키스씬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던 내게 누구보다 젊고 매력적인 모습의 안성기와 온통 뼈밖에 안 남아있던 장미희의 베드씬이 준 충격은 꽤나 컸다. 요즘의 성인영화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낮은 수위 였지만 내겐 안성기라는 배우가 영화 속에서 보여준 처음이자 마지막인 섹시한 남자의 이미지였기에 그리고 내가 본 첫 성인영화라는 의미로 마음이 울렁거렸는지도 모르겠다. 셀 수 없이 많은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연민이 가는 악역이었다는 것이 또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후로도 그는 <적도의 꽃>에선 훔쳐보는 남자로, <고래사냥>에선 기인 같은 거지로, <겨울나그네>에선 기다리는 남자로, <공포의 외인구단>에선 패배자들의 혹독한 감독으로,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는 한 여자를 서툴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남자로 다가왔다.

 

지금도 완벽한 미남 장동건에게는 가슴 떨림을, 원빈의 미소에서는 모성본능을, 설경구에게서는 인간을 느끼지만 80년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영화의 주인공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당대 최고의 배우 안성기는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다 만족시켜주는 남자였다. 당시에는 안성기 주연이라고만 하면 두말없이 그저 ‘좋은 영화’라는 신뢰를 느꼈고 최고의 티켓파워를 발휘하는 배우란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영화배우는 극장에서만 볼 수 있었던 시대를 함께 소비한 세대에겐 그야말로 하늘에 떠 있고 마음 안에 떠 있는 ‘스타’ 그 자체였지만 컴퓨터만 열면 쏟아지는 스타의 소식에 익숙한 요즘 세대에게 ‘안성기’라는 이름의 배우는 그 의미가 많이 다를 것이다.

 

<실미도>가 대한민국 흥행사에 가장 먼저 관객 1천만명을 넘어서면서 온 국민이 그 화제에 댓글로 무분별한 애정공세를 펼치던 무렵의 일이었다. 어느 영화평 아래에 “안성기도 연기 좀 하네?”라는 누군가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아마도 오랜시간 부드럽게 커피를 권해주는 아저씨로만 알고 있는 초등학생 정도의 한줄 평이었겠지만 그 나름대로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했다는 듯 자랑스럽게 올린 것을 보며 많이 웃었다. 완전히 바뀐 세상에서 완전히 달라진 ‘스타’의 존재를 돌아보게 했던 상징적인 말이었다.

 

그저 막연하고 열렬한 팬으로만 가슴속에 담고 있었던 당대의 배우를 난 어느 순간 영화광고 디자인을 직업으로 가지면서 만났다. <그대안의 블루> <남자는 괴로워>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등을 통해 그의 사진을 오리고 자르고 카피를 얹어 포스터를 만들면서 행복했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환상의 인물과 내 손끝으로 만나게 될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니 남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혼자만의 벅찬 기쁨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소심한 남자, 정의로운 남자, 부실한 가장, 웃기는 경찰, 로맨틱한 대통령, 냉정한 군인, 귀여운 장풍선생까지 그는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내뿜는다. 모두에게 존경 받는 이 국민배우와 함께 나도 어느덧 같은 ‘영화인’이라는 이름으로 산다. 최근엔 직접 만나 오랜 팬이었음을 고백도 할 수 있었고 <라디오스타> 라는 영화의 자막에 이름을 같이 올릴 수 있는 기회도 맞이했다. 내가 처음 그에게 반했던 영화 <깊고 푸른 밤>의 백호빈을 21년만에 만날 수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영화 같은 내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승혜/영화사 아침 대표

 

 

 

량차오웨이(양조위)

깊은 눈빛, 세상에 슬픔을 전염시키다

 

 

 

영화를 업으로 삼은 이래로 영화 속의 누군가를 설렐 만큼이나 좋아했던 기억이 까마득해졌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스크린 속에서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했던 사람이 있었다. 한 때 영화보기를 온전히 일로 받아들이기 전에 영화만으로도 충만감을 만끽했던 그 시절에 만났던 사람. 바로 량차오웨이(양조위)다.

 

돌이켜보면 한국에 왕자웨이(왕가위) 영화붐을 가져왔던 영화 <중경삼림>과 <동사서독>을 통해서 이미 그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도 나에게는 어쩐 일인지 1996년 영화 <씨클로>에서 본 그의 이미지만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 영화는 베트남계 프랑스 감독 트란 안 훙이 감독하고 라디오 헤드의 ‘크리프’라는 음악으로 더 유명해진 영화다.

 

<씨클로>는 베트남에서 씨클로를 운전하며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18살 소년과 그의 누나, 그리고 소년이 발을 들여놓는 갱조직에서 그를 범죄의 길로 이끄는 ‘시인’의 얘기를 그리고 있다. 량차오웨이는 소년의 누나를 사랑하면서도 그녀에게 매춘을 알선하고 돈을 받아 챙기는 갱조직원 ‘시인’으로 분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연신 불안하고 슬픔이 가득한 시선으로 담배를 피워 대며 감상적인 시구를 읊조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보이는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낯선 남자의 방에 들여 보내곤 슬픔과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으로 지켜보기만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의 순결을 빼앗은 남자를 살인하는 순간에도, 분노와 질투로 어쩔 줄 몰라하는 남자의 모습이 아니라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 사라지기 전에 안간힘을 쓰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투영된다.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가장 슬프고 강렬한 살인장면이었던 것 같다.

 

아열대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원색의 색조로 가득한 화면에서 그는 유독 무채색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는 마치 이 세상에 발을 잘못 들여놓은 다른 세상에서 온 유랑자처럼 고단하고 절망적인 세상을 부유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불 속에서 사라져갈 때도 불 속에 서있는 그의 모습과 흩날리며 타들어가는 지폐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가장 비극적인 그 순간이 그토록 위태롭게 보이던 그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신성한 제례의식처럼 느껴지면서 비로소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장궈룽(장국영)의 연인으로 등장했던 왕자웨이 감독의 <해피 투게더>는 물론 <영웅> <화양연화> <무간도> <2046>에 이르기까지 보는 이에게 슬픔을 전염시키는 그의 깊고 애잔한 눈빛과 조용한 말투, 쓸쓸한 표정은 그가 출연하는 모든 영화들 속에서 하나의 일관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씨클로>에서 그를 좋아하게 된 이후로 난 그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그리고 칸 영화제에서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의 시사회로 처음 먼 발치에서나마 그를 봤고, 마침내 그 해 부산영화제에서 왕자웨이 감독과 함께 부산을 찾은 그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때의 심정이란….

 

그 이후로 나는 아는 기자들이 그를 인터뷰하고 나면 그와 관련된 얘기들을 건네 듣곤 했다. 그들이 전하는 얘기들은 ‘그가 얼마나 사려깊은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다정하고 인간성이 좋은 사람인지’ 등 그를 칭찬하는 얘기 일색이었다. 그와 5분만 얘기를 나누어도 그의 조용한 말투와 깊은 눈빛에 반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여기자들을 만나면서 배우로서 뿐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서 량차오웨이의 매력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조옥경/영화사 숲 대표

 

 

마릴린 먼로

‘섹시함’ 뒤에 숨은, 내밀한 슬픔의 매력

 

 

이상하게도 내겐 나만의 여신이 없었다. 한참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하던 시절에 같은 또래의 아이들처럼 <주말의 영화>를 목을 빼고 기다리거나 용돈이 생기면 얼른 영화관으로 달려가곤 했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꼭 특별히 내가 숭배하거나 사랑하는 어떤 스타를 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예컨대 공책, 책받침, 책갈피 등등 온갖 학용품에 왕쭈셴(왕조현)이나 저우룬파(주윤발)의 얼굴이 넘쳐나던 시절에도 난 그저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영화관을 찾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난 스타 따위에 연연하는 철부지가 아냐’라는 식의 건방진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고, 그저 그 매력적인 홍콩스타들도 <공자다정>같은 영화에선 어처구니없을 만큼 꼴사나운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데 불과하다.

 

전설적인 섹스심벌이자 세기의 스타로 알려져 있는 마릴린 먼로에 대해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본 먼로 주연의 영화는 빌리 와일더 감독의 <뜨거운 것이 좋아>로 기억하는데,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작품이긴 했지만 먼로가 특별히 매력적인 여배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먼로의 하얀 치맛자락이 지하철 통풍구 바람에 날리는 그 유명한 장면이 등장하는 <칠년만의 외출>은 내겐 빌리 와일더의 영화였을 뿐이고, 제인 러셀까지 가세한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도 하워드 혹스의 이색적인 뮤지컬로 비쳤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본 한 편의 마릴린 먼로 영화가 처음으로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건 오토 프레밍거의 <돌아오지 않는 강>이었다. 블루진에 하얀 셔츠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먼로에게 어울리는 의상은 온갖 장식들로 한껏 멋을 낸 여성스러운 복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묘하게 성적인 암시를 풍기는 그녀의 얼굴과 제스처는 그걸 강조하고자 하는 의상과 만날 땐 오히려 천박한 인상을 줄 뿐이지만, 그와 대조적인 단순한 의상에 싸여 있으면 놀랄 만큼 청초한 빛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여타의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먼로의 매력이 온전히 발휘된 유일한 영화는, 존 휴스턴의 <기인들>일 것이다. 잠시나마 그녀의 반려자이기도 했던 아서 밀러가 각본을 쓴 이 작품은 밀러의 먼로 예찬인 동시에 그녀를 향한 작별인사이기도 하다. 세파에 시달린 순수, 성스러운 창녀, 성숙한 소녀 내지는 경험 많은 처녀 등등, 먼로와 결부될 법한 ‘음란한’ 상상과 정의들은 이 영화를 통해 완성되었다. 한편으로 섹스심벌이 아닌 연기자로서의 먼로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전혀 기대하지 못했을 곰삭은 슬픔과 탄식, 절망을 내비치기도 한다.

 

영화의 안과 밖이 기묘하게 겹치는 순간이랄까. 먼로는 이 영화가 개봉되기 직전에 아서 밀러와 이혼했으며 일년 뒤엔 알콜중독과 수면제 과다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 속에서 먼로는 클라크 게이블에게 묻는다. “어떻게 그냥 살죠?”(How do you just live?) 게이블의 답변. “먼저 잠을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가려운 데를 긁고, 계란 프라이를 하고, 날씨가 어떤지 보죠. 깡통에 돌도 던지고 휘파람도 불고요.” 그건 먼로가 결코 누려보지 못했던 삶일 것이다.

 

문득 작년에 열렸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이 떠오른다. 그것은 브레송이 바로 <기인들>의 세트장에서 촬영한 먼로의 사진이었다. 보는 이에게 기묘하게 슬픈 느낌을 전하던 그 사진은 앤디 워홀의 의도적인 과장과 풍자를 가볍게 넘어서며 거장다운 솜씨로 먼로의 내밀한 슬픔과 피로감에 공명하고 있었다.

 

유운성/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배종옥

구름 너머 ‘첫사랑’ 닮은 구름 아래 ‘여신’

 

 

 

대학 1년, 생애 첫 미팅에서 만난 K와 끝내 연인이 되지 못하고 멀어졌다. 미완성이 부른 집착이었을까. 무심히 텔레비전을 보던 찢어진 내 작은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아니, 쟤가 왜 광고에 다 나오지? 언제 연예인이 된 거야.’ 착시의 대상이 배종옥이었다는 걸 드라마 <왕룽일가>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하여튼 그 때 내 눈에는 ‘두 사람이 무척 닮았다’. 헛것을 좇을 정도로 간절했던 K에 대한 허기를 <왕룽일가>의 배종옥을 보며 달랬고, 인기 급상승의 ‘쿠웨이트 박’에 비해 배종옥의 얼굴을 짧게 내보내는 연출자를 매회 저주했다.

 

급기야, 역시 배종옥이 출연했던 드라마 <도시인>을 볼 때는 드라마 프로듀서를 해야할까 보다,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그래서였는지 알 수 없으나 졸업 무렵, 한 방송사의 방송아카데미에다 아르바이트 수개월치를 갖다 바치고 연출 과정을 마쳤다). 이쯤 되니 배우 배종옥 자체의 매력에 점점 빠질밖에.

 

그녀의 온전한 첫 영화 주연작 <걸어서 하늘까지>가 극장에 걸리던 날, 달려갔다. 그것도 첫 미팅의 K를 데리고. 현실 속의 K와 재회한 터에 스크린 속의 연인까지 어둠 속에서 함께 하니 영화에 대한 아쉬움은 크지 않았다. 그 후 K와 첫 연애에 빠져들었으니 ‘오우~ 스크린 속 나의 여신이여, 땡큐’였다. 1년 뒤에 나온 드라마 <걸어서 하늘까지>의 주제가는 음치를 증명해주는 나의 오랜 애창곡이 됐다.

 

 

신문기자가 됐다. 배종옥과의 첫 대면은 케이비에스 분장실에서 이뤄졌다. 긴장과 설렘에 살떨리던 인터뷰 순간은 허무하게 끝났다. 여신의 응답 방식은 대단히 경제적이었고, 교감의 수위는 기사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 헤어진 K는 누군가의 아내가 됐고, 여신은 구름 궁전에 머물 뿐인 시절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질투는 나의 힘> 개봉 파티에서 여신을 다시 만났고, 여전히 경제적인 대화를 나눴다.

 

다시 시간이 흘러 <러브 토크> 마지막 촬영날, 여신이 내 앞에 툭 앉으며 아는 체를 했다. “<안녕, 형아> 때 인터뷰를 3주 동안 계속 하니까 너무 힘들더라. 근데 기자들도 공부 좀 하고 와야하는 거 아니니? 어이 없는 질문 할 때면 없는 기운이 더 빠져. 그렇지 않니? <씨네21>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보자마자 특유의 말투와 억양으로 툭 반말을 던져주시는 그녀, 감동의 물결이었다. <러브 토크> 개봉 파티날, 누군가 눈 흘기며 면박을 줬다. “어째, 자리에 없다 싶으면 종옥 언니가 노래 부르고 있고, 그 뒤에서 열심히 백댄서하대. 번번이. 그렇게 좋아?”

 

K는 바다 건너 머나먼 땅에서 새 삶을 시작했고, 그녀와의 기억은 구름 저 너머로 사라져간다. 반면, 노희경 작가의 <굿바이 솔로>에 출연중인 배종옥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있음을 증명하며 여신 독재의 시대를 마무리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구름 너머에서 이따금 내 코앞으로 하강해 그 또한 나처럼 생사고락의 인격이라는 걸 알려주니 참으로 정겨운 여신이요, 인간미있는 여신이다. 스크린과 텔레비전에서 똑부러지는 그의 눈빛과 어투는 여전하지만 외부를 포옹하는 기운은 나의 눈을 따뜻하게 해준다. 현실과 스크린 사이에 벌어지는 교차의 묘미는 삶을 진정시켜주곤 한다. 영원한 건 없다는 새삼스러움으로.

 

이성욱/ <씨네21> 기자

 

 

 

남자가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음을 알게 해준 장궈룽

 

 

무도회장에서 춤추는 젊은 군인들을 보며 검은 상복을 입은 엉덩이를 흔드는 스칼렛을 보고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렸을 때 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아직도 내게 그의 엉덩이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신밧드와 함께 사막을 가로지르는 파라 공주를 보는 순간 난 새로운 연인을 만났다. 사막의 뜨거운 햇살과 모래 바람을 가득 담은 화사한 노란 톤의 풍경, 그 속에서 아라비아 풍의 의상 위로 살짝 드러나는 도톰한 젖무덤을 가진 그는 현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환상의 여인이었다.

 

러시아에서 온 파란 눈의 매력적인 스파이를 본 순간 이번에는 그가 나의 연인이 되었다.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트리플 엑스는 그 나이의 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판타지의 총합이었다. 이집트의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오리엔트 특급 열차의 한 객실에서, 그림 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는 바다 속에서 나는 줄곧 그를 따라다녔고, 그와 함께 하는 모험은 짜릿했고 행복했다.

 

그랬었다. 스크린을 보며 반해 나의 연인으로 삼은 이는 하나가 아니었다. 한 여인에게 순정을 바치지 않았고 지조도 없이 더욱 매력적인 여인을 만나기 위해 스크린을 찾아 나섰다. 불이 꺼지고 극장 안이 어두컴컴해지면 가슴을 두근거리며 이번엔 누구를 만나게 될까 하고 기다렸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아무도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라고 손가락질하거나 돌을 던지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스크린이 주는 크나큰 매력 중의 하나였다.

 

물론 극장에 드나들 돈을 마련하느라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단속반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학교에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극장으로 향했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내 불타는 연정은 <나인 하프 위크>의 엘리자베스에게서 <천녀유혼>의 섭소천에게로 옮겨가며 즐거운 청춘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내 길지 않은 생애에 충격적으로 등장한 연인을 만났다. 내가 사랑했던 수많은 여인들을 모두 물리치고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던 새로운 연인, 그는 남자였다. 남자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그는 바로 아비였다. <아비정전>의 매력적인 두 여인 수리진이나 루루보다도 나는 남자인 장궈룽(장국영)의 아비에게 꽂혔다. 아니, 아비를 연기하는 장궈룽에게 꽂혔다. 둘은 하나였다.

 

 

망치를 휘둘러 세면대를 부수고도 귀걸이로 루루를 유혹하는 그, 권태와 반항의 공기 속에서 흐느적거리고,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려 몸부림치는 그, 나른하고 권태로운 그의 표정과 속옷 차림으로 맘보를 추는 그의 몸짓…. 그의 사소한 동작 하나 표정 하나도 삽시간에 나의 마음을 빨아들였고, 나는 그의 생각, 감정,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알고 싶어졌다. 그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떠도는 나의 모습이기도 했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매혹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그는 나의 연인이었다.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아비의 장궈룽을 떠올리던 시절, 그런 연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한없이 행복해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내 젊음의 한 시기가 지나갔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문득 4월1일 장궈룽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막 넘었음을 깨달았다. 마음이 아프다.

 

남선호/영화감독

 

 

 

루퍼트 에버릿

유약하고 불안한, 내 젊은날의 페르소나

 

 

 

지금은 사라진 서울 영동의 씨네하우스가 복합관이 되기도 전, 그 안쪽 골목 안에는 씨네하우스 예술관이라는 별도의 상영관이 있었다. 숨어 있기 좋은 곳이었다. 관객은 우리 일행뿐이기 일쑤였다. <낯선 사람과 춤을>을 보러 간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곳, 씨네하우스 예술관과 서강대 커뮤니케이션 센터, 프랑스문화원, 집앞 비디오 가게가 학교를 제외하고 내가 다니던 전부였던 때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 인물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루퍼트 에버릿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젊은 남자 배우였다. 집 앞 비디오 가게에서 <하츠 오브 파이어>를 빌린 것도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이었다. 밥 딜런이 주인공인 록 영화라니 굳이 건너뛸 까닭은 없었다. 그런데 화면을 장악하는 저 음울한 청년은 누구지? 이런, 또 루퍼트 에버릿이었다.

 

어느 영화 혹은 일련의 영화에서 보인 연기가 좋아서 어느 배우를 좋아한 적은 있지만 극의 페르소나가 아닌 배우 자체의 모습만으로 이처럼 큰 매력을 느꼈던 적은 그리 많지 않다. 이십 년 가까이 지난 때 한 일이며 밝히기 부끄럽지만, <로드쇼>라는 일본 잡지에서 <어나더 컨트리>에 출연한 루퍼트 에버릿의 사진을 오려 스크랩북에 넣어두었고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당시 나는 왜 그가 그렇게 좋았는지 애써 생각해 보려 하지 않았다. ‘그냥 좋으니까’라는 다분히 ‘오빠부대’ 같은 감정이었다. 지금 곰곰히 생각해 보니 앞서 이야기한 그 두 영화의 페르소나와 무관하지 않다.

 

두 아이를 키우며 술집 종업원으로 일하는 연상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 상류 사회 젊은이. <낯선 사람과 춤을>의 루퍼트 에버릿은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자신을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것이 욕정이건 소유욕이건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한 여인에게 사로잡혀 있고 그것을 온전히 제어하거나 통제할 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와 자신이 욕망하는 여성의 세계 사이에서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하며 결국 스스로를 또 그 여인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하츠 오브 파이어>에서 그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록 음악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으나 그 열정으로 인해 잠시도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젊은 작곡가. 이제 보니 그의 페르소나는 스무 살 적 내가 갖고 싶던 페르소나였는지 모른다. 그 시절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울었으며 그렇게 혼자 힘들어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무엇보다 싫었다. 나는 그의 페르소나, 그리고 루퍼트 에버릿이라는 개인의 외모에서 유대감을 찾으려 했나 보다. 하얗고 여리다 못해 창백해 보이는 갸름한 얼굴은 뾰족한 코와 가는 턱선,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입술로 인해 더욱 약하고 우유부단해 보인다. 다 자란 남자와 소년의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갖춘 듯한 큰 키와 마른 몸은 어딘지 불안하고 쉬 깨질 것만 같다.

 

한동안 그를 잊고 지냈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으로 루퍼트 에버릿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다시 오르내리게 됐을 때 가슴이 먹먹했다. 그 영화 속의 루퍼트 에버릿도 매력적이지만 그는 내 가슴속의 루퍼트 에버릿이 아니었다. 부드럽고 섬세한 멋을 지니고 있지만 금이 갈 듯 유약한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서른 살이 되던 89년에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청춘 스타의 별을 스스로 떼어낸 후 묵묵히 배우의 길을 걸어온 그의 족적에는 물론 박수를 보낸다. 그래도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이 그리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도 어느새 하릴없이 추억을 되새기는 나이가 돼 버린 것일까.

 

조동섭/문화평론가

 

 

 

진 시먼스

그대 70대 할머니여도 난 여전히 설레어라

 

 

 

무엇보다 먼저 손은 행위를 나타낸다. 손은 계약서에 사인해 결정을 완료하고 도시를 건설하며 손가락 한 번의 클릭 실수로 한 국가의 경제나 국방 시스템이 마비될 수도 있다. 사랑이 시작될 때, 처음 나누는 육체적 접촉도 상대의 손을 잡는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몽정을 경험했다. 못먹고 못살던 시대의 1965년산 제품으로선 너무 빠른 신체적 조숙이었다. 그러다보니 피도 안마른 어린 초딩 녀석이 벌써부터 밝힘증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오호통재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이면 4학년 바로 그 즈음에 담임선생으로 온 분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 초등학교 선생 일을 시작하는 23살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외람되지만 수업시간 내내 담임선생이 칠판의 좌우를 오갈 때마다 따라 파동치는 가슴에 온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밤마다 담임선생에 대한 환상으로 몽정을 하는 횟수가 더욱 잦아진 반면, 성적은 육중한 물체가 낙하하듯 빠르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만 갔다. 이렇게 나의 초딩 4년 시절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야릇하고 은밀한 쾌감, 그러면서도 왠지 불결하고 순수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감정의 혼돈 상태에서 유쾌하지 못하게 끝났다.

 

5학년 무렵, 주말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던 외화프로그램을 보다가 우연히 진 시몬즈라는 배우를 알게 되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60년 작 <스팔타커스>였다. 당시 흑백 화면에서 그녀를 처음 보고 나도 모르게 화면을 향해 뻗는 내 손을 발견하게 되었다. 경이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온몸으로 진동하는 일종의 무의식적 행위였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도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분명 여선생에 대한 성적인 호기심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오히려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듯한 그런 순수함이 가슴 쏙에 “쏴~”하고 퍼지는 듯했다. 진 시몬즈는 어린 나에게 성적 매력을 초월한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스크린 속의 내 첫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한 동네에 전화가 있는 집을 찾기가 쉽지 않은 시절인 만큼 이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강렬해져만 갔다. 고교시절까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빅 컨트리>(1958), 리차드 버튼 주연의 <성의>(1953), 버트 랭카스터와 함께 전도사 샤론 역으로 나왔던 <엘마 갠트리>(1960), 그리고 전혀 의외의 캐릭터로 등장했던 <검은 수선화>(1947) 등등 여러 작품들을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봤다. 진 시몬즈가 나오는 영화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고1때였다. 등교길이면 언제나 같은 버스에서 마주치던 여고생이 있었는데, 옆모습이 진 시몬즈와 흡사했다. 무언가 멋진 프로포즈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 고민하고 또 했다. 당시 문화방송 장학퀴즈에 출연해 장원을 하고 소감을 밝히는 과정에서 공개적인 사랑 고백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결국 장학퀴즈 445회에 출연(당시 차인태, 조일수 진행)했지만 공개홀의 수많은 조명과 방청객들을 보자 너무 떨고 긴장한 나머지 작전은 100%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사회생활을 하며 이성에 대한 취향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진 시몬즈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신부와 소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가시나무 새>에서도 열연했고, 근래에는 저 유명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늙은 소피의 영어 목소리를 맡기도 했다. 비록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목소리만 들려주는 것이었음에도 그리고 그것이 70대의 할머니가 된 진 시몬즈였음에도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는 존재로 다가왔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게 만드는 절대적 아름다움을 보여준 진 시몬즈는 내겐 영원한 스크린 속의 첫사랑인 것이다.

 

조성진 (음악평론가, 월간 <핫뮤직> 편집장)

 

 

이케와키 지즈루

조제야, 잘 지내고 있니?

 

 

 

2005년 10월 그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일년 전 스크린에서 보았던 그녀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때론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마치 쓰네오에게 투정부리듯 또 어떤 때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일년 후〉를 읽는 것처럼 나지막한 말투로 얘기를 한다.

 

2004년 10월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나에겐 특별한 영화다. 매번 남들이 말하는 좋은 영화, 꼭 봐야 된다는 영화를 수입해서 개봉했지만 그 결과는 대부분 실망할 수준이었다. 미리 영화를 본 사람들이 인터넷에 찬사의 글을 올렸지만 그건 영화의 흥행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남자주인공 역을 맡은 쓰마부키 사토시가 방한했을 때야 겨우 “음, 이 영화가 손해는 보지 않겠구나” 안심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영화를 보면 항상 내가 한 일이 아닌데, 계속 조제와 헤어진 쓰네오처럼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조제가 잘 지내고 있을까? 요즘도 혼자 그렇게 생선을 구워서 먹고 있을까? 혹시 또 옆집 변태아저씨의 이상한 요구를 들어주면서 지내지는 않을까? 정말 쓰네오와는 그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영화를 개봉한 지 정확히 일년 만인 2005년 10월 극장에 다시 영화를 걸었다. 그리고 감독님과 조제 역을 했던 이케와키 지즈루를 한국에 초청했다. 처음 만나자마자 그런 얘기들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스스로에게 “이 사람아, 저 사람은 이케와키 지즈루라는 배우야, 조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런데 한시간, 두시간이 지나면서부터 그런 다짐이 소용이 없어졌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그녀는 이케와키 지즈루가 아닌 조제였다. 웃는 모습이며, 장난치는 동작 하나하나까지 영화에서 본 조제와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는 똑같은 사람이었다.

 

 

지난 1월, 디브이디 제작을 위해 영화의 촬영지를 찾아갔다. 조제와 쓰네오가 같이 마지막으로 여행갔던 그 바다와 또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모텔, 조제가 남자친구가 생기면 제일 먼저 가고 싶어했던 동물원과 그리고 처음 쓰네오가 조제를 데리고 달렸던 그 둑길. 촬영을 모두 마치고 저녁에 감독님을 만났다. 우리가 찍어 온 사진을 보시면서 너무나 즐거워하시던 감독님은 갑자기 “음, 조제는 지금 뭐 하고 있지?”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하셨다. 늦은 일요일 저녁시간, 그녀는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방송되는 만화를 보고 있었다. 그녀와 몇 달 만에 다시 통화를 했다. 여전히 밝고 씩씩한 목소리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가을이 되면 이누도 잇신 감독님의 예전 작품 〈금발의 초원〉을 개봉할 생각이다. 물론 주인공은 이케와키 지즈루다. 조제가 아닌 이케와키 지즈루가 주연을 맡은 영화인 것이다. 감독님과 주연배우를 초청하는 행사를 계획중이다. 그런데 이케와키 지즈루가 아닌 조제를 다시 보고 싶고, 또 그녀의 안부가 궁금하다. 아무래도 그녀의 방한 중에 다시 한번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극장에서 봐야 할 거 같다.

 

요즘도 맑은 하늘에 걸려 있는 구름을 보면 문뜩 생각이 난다. 뚝방길을 과속으로 달리던 조제의 유모차가 길 아래로 구르고, 그리고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저 구름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하던 그녀가.

 

조성규/영화 수입·배급사 스폰지 대표

 

 

 

마쓰 다카코

봄날이 되면 주체못할 짝사랑이 ‘콩콩’

 

 

 

얼마 전 어느 케이블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 진행자가 깊은 인상을 주었던 영화 한편을 꼽아달라는 주문을 했는데 함께 출연했던 분은 펠리니 감독의 〈길〉을 이야기했다. 속으로 ‘탁월한 답변이군’ 하며 감탄했다. 영화사적 걸작이자 누구라도 감탄할 만한, 나무랄 데 없는 답변 아닌가. 한편, 난 얼결에 이명세 감독이 만든 〈첫사랑〉을 이야기했다. 한국 영화에서 이런 위트 있는 상상력이 등장했다는 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견해를 밝히면서 말이다. 실은 그저 개인적 취향이 묻어 있는 답변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스크린 속 나의 연인’에 관한 청탁을 받고서 엇비슷한 고민을 했다. 영화사적으로 위대한 배우, 혹은 영화제에서 상 하나쯤 거머쥔 배우를 거론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을 터였다. 쥘리에트 비노슈와 장만위, 그리고 심은하 등 배우의 이름을 대략 떠올린 뒤, 난 (또다시 취향이 거침없이 명령하는 대로) 전화를 건 기자에게 어느 여배우 이름을 말했다. “마쓰 다카코로 쓸게요” “네? 마쓰다 카코요?” (그만큼 마쓰 다카코는 국내에서 지명도 있는 배우가 아닙니다. 그저 양해를…) “흠, 〈4월 이야기〉의 마쓰 다카코로 하죠.”

 

〈4월 이야기〉는 봄이 되면 다시 찾는 영화 중 한편이다. 도쿄 시내에 눈 내리듯 벚꽃이 화사하게 날리는 장면은 언제봐도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이미 본 사람은 알겠지만 영화는 작은 소품이다. 상영시간도 한시간 남짓이며 감독은 〈러브레터〉로 잘 알려진 이와이 슌지 감독. ‘순정만화적’ 상상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자주 소개되는 감독인데 나름의 까닭도 없지 않겠지만 감독 자신으로선 억울한 순간도 있겠다. 그러면 청춘의 비극적 자화상 〈릴리 슈슈의 모든 것〉도 순정만화인가?! 라는 식으로.

 

여하튼, 〈4월 이야기〉에서 마쓰 다카코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우쓰키’라는 대학 초년생. 그녀는 지방에서 도쿄로 대학을 진학해 혼자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닌다. 강의실과 서점, 집을 오가며 조용히 생활하는 우쓰키에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으니…. 그녀의 첫사랑이 영화 속 키워드. 미스터리 영화처럼 〈4월 이야기〉는 우쓰키라는 여학생이 왜 도쿄로 진학을 하게 되었는지, 특정 대학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등의 행동을 살며시 설명해준다. 요컨대, 누군가를 향한 주체못할 짝사랑이 원인이었던 것.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4월 이야기〉를 틈틈이 다시 챙겨보는 것, 그리고 도쿄 시내를 자전거를 탄 채 배회하는 우쓰키 역의 마쓰 다카코를 어느새 ‘나의 연인’으로 삼게 되었는지 말이다.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것을 “사랑의 기적”이라 당차게 말하는 우쓰키의 모습과 흩날리는 벚꽃을 보면서, 그리고 봄비 맞으며 거리를 콩콩 뛰어다니는 그녀를 보면서 삶의 설레는 봄날을 느껴보고픈 심정인 것은 아닐지.

 

우연한 기회에 국내 〈4월 이야기〉 개봉을 즈음해 도쿄에서 마쓰 다카코를 인터뷰하는 기회가 있었다. 마쓰 다카코는 영화에서 여주인공 우쓰키가 짝사랑하는 남자 선배가, 그녀를 위해 쓸 우산을 자상하게 골라주는 장면을 영화 속 베스트 장면으로 꼽았다. 답변도 베스트였다고 기억한다.

 

 

단아한 자태의 마쓰 다카코, 그녀는 나에게 봄이 되면 남몰래 떠올리게 되는 배우가 된 것일까. 혹시 그녀를 인터뷰하거나 사적으로 만날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정중한 안부를 전해주시길. 제 이름을 기억할 리 없겠지만 〈4월 이야기〉를 아끼는, 영화 속 우쓰키를 흠모하는 사람이 세상 어딘가 한사람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녀는 잠시 환하게 미소짓지 않을까요.

 

김의찬/영화평론가

 

 

 

궁리

‘귀주’마저도 관능적이었다

 

 

 

그녀를 다시 떠올린 건 지난 3월 중국 출장 때였다. 나는 저장성 항저우 공항에서 내려 헝뎬이라는 시골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특징 없이 펼쳐지는 차장 밖 풍경에 심드렁해질 즈음 뭔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염색(染色)’이란 글자가 박힌 간판들이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버스는 막 염색공장 지대를 지나는 중이었다. 허리를 곧추세워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내 마음은 이미 장이머우 감독의 〈국두〉를 좇고 있었다.

 

그렇다고 옆사람을 붙잡고 〈국두〉를 보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궁리(공리)가 당대 최고의 배우 아니냐고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나는 침묵이 최선이란 걸 알고 있었다. 궁리가 만인의 연인이 될 수 없는 이상 내가 원하는 만큼의 공감과 탄복을 얻어내지 못할 게 뻔했다. 나는 궁리를 가슴에 숨김으로써 일체의 훼손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 싶었다.

 

붉은 염색천이 난무하던 이 영화를 만난 건 1990년대 초반 군 복무 시절이었다. 전작 〈붉은 수수밭〉의 명성에 이끌렸던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시간을 때울 요량이었다. 청승맞게 혼자 찾아간 극장에서 그녀와 처음 대면한 느낌은 먹먹함과 울적함이었다.

 

〈국두〉에서 궁리는 늙은 남편이 운영하는 염색공장에서 남편의 조카와 파멸적인 사랑을 나누던 모습을 열연했다. 스크린 속의 그녀는 20대의 내 혈기를 자극할 만한 농염을 갖추지도 못했고, 애써 요망을 떨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상미학이 곁들여진 화면이 곳곳에서 붉은색으로 타오를 때 내 가슴도 그렇게 물들어 갔다. 비극적 사랑은 그녀의 절규와 함께,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때 나는 기꺼이 마음을 줘버렸다. 규율과 절도의 생활 탓에 연정의 이유까지 단순해지기 쉬운 군대 시절임을 고려하더라도 당시의 무장해제는 참으로 뜻밖이었다. 그전까지 내가 가슴에 둔 여배우는 사춘기 시절의 소피 마르소가 전부였다. 그런 면에서 나는 심심한 사람이었다.

 

〈국두〉를 접한 이후 나는 두 살 연상인 궁리의 영화 행적을 따라갔다. 전작 〈붉은 수수밭〉(1988)을 뒤져서 봤고 〈홍등〉(1991), 〈귀주 이야기〉(1992), 〈인생〉(1994)은 개봉 직후 기어이 표를 끊었다. 그녀의 출연작들은 중국 영화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까지 뒤바꾸어 놓았다.

 

 

 

그녀의 매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나는 오래도록 답을 구하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궁리에게는 천박하지 않은 관능이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국두〉에서 사내의 야위고 풀기 없는 모습에 비해 그녀는 얼마나 생기 있고 육감적이던지.

 

되바라지고 다소 이악스런 모습을 드러낼 때(〈홍등〉)나, 이례적으로 단발머리를 선보였을 때(〈인생〉), 그리고 관료주의에 끈질기게 대항하는 투박한 촌부로 변신했을 때(〈귀주 이야기〉)조차 나는 그의 숨어 있는 관능을 보았다. 누군가 그의 볼이 팬 광대뼈를 단점으로 지적할 때에도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올해 나는 그녀가 잠시 낯설었다. 〈게이샤의 추억〉에서 질투심 많은 게이샤 하쓰모모로 나왔을 때 선뜻 마음을 주지 못했다. 하쓰모모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듯 맹렬한 분노에 몸을 떨 때에도 쉽사리 감정을 나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연기 인생은 약진했지만, 나는 자꾸 과거의 궁리를 찾고 있었다. 영화 속의 내 여인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다는 헛된 믿음을 그렇게라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조장래/ CJ엔터테인먼트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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