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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한국의 여배우 (경향 연재)

by Wood-Stock 2009. 4. 15.

은막의 중심에 선 여배우를 보라. 시대는 그의 몸에 흔적을 남기고, 관객은 그의 얼굴에 욕망을 투사한다. 일제 강점기 문예봉이 연기한 가난한 농촌 여성은 조선 여인의 원형이 됐다. 도금봉은 과도한 물욕, 성욕, 질투를 체화한 ‘한국형 팜므 파탈’이었으며, 임예진은 10대가 대중문화 소비층으로 떠올랐음을 증명했다. 본지는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한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열전을 연재한다. 문예봉부터 배두나까지, 대중의 두뇌에 뚜렷한 각인을 남긴 여배우들의 빛과 그림자를 만난다. 여배우의 얼굴 속에서 20세기의 100년과 21세기의 남은 나날들이 총천연색으로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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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우 그들을 말한다]최은희 上‘가장 한국적인 여인’의 도발적 변신

 

 

사랑채에 든 손님이 일보러 나간 방. 주인댁 과부인 ‘옥희 엄마’는 손님이 걸어 놓은 양절모에 눈이 간다. 살짝 냄새를 맡아보고는 찡그리는 미간 사이로 묘한 웃음이 흐른다. 비딱하게 모자를 써보다가 거울 앞으로 돌아서는 그녀. 포즈를 취하는 그 짧은 순간 교태가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 순간 교과서 속에서 읽고 떠올리던 어머니, 정숙하고 자기 욕망을 꾹꾹 눌러 참던 그 어머니는 오간 데 없다. 거기에는 일상을 뚫고 들어온 낯선 남자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여인, 인고하는 삶의 지리멸렬함을 깨고 싶어하는 어느 여인의 짧지만 도드라지는 욕망이 강렬하게 남긴 자국이 있을 뿐이다. 주요섭 원작소설을 신상옥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는 어쩌면 우리에게 ‘최은희’라는 배우의 스테레오 타입을 완성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장면에서 보듯 그렇게 꾹꾹 눌러 담을 수 없이 흘러넘치는 그녀의 끼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복을 입고 쪽머리를 했지만 양절모를 쓰고 거울 앞에 선 그 순간만은 ‘모던 걸’을 인용하고 있고, 클로즈업 된 손으로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연주하는 그 모습은 교육받은 어떤 여성들보다 세련된 위용을 자랑한다. ‘가장 한국적인 여인상’으로 혹은 오랜 세월을 인고하는 홀어머니 역할로 많은 작품에 출연해왔고, 또 그렇게 정형화되어 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최은희는 ‘모던’하고, 세련되고 또 카리스마 넘치는, 자신에 대한 전형적인 인식을 배반하는 에너지로 충만한 배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그녀와 신상옥 감독이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함께 만든 작품들이다. 아사달 아사녀 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무영탑>(1957)에서 그녀는 아사녀가 아닌 귀족의 딸 ‘구슬아기’ 역할을 맡는다. 석가탑을 쌓기 위해 집을 떠난 남편을 마냥 기다리는 아사녀와 달리 그 연적이라 할 구슬아기의 애정표현은 매우 적극적이다. 자신의 사랑을 숨기지 않고 쟁취하려 하는 그녀의 모습은 ‘옥희 엄마’에서 무척 멀리 떨어져 있지만 최은희이기에 가능한 카리스마로 넘쳐난다. <백사부인>(1960)은 한술 더 떠서 그녀를 천년 묵은 백사(白蛇)로 출연시킨다. 이때 신필름(신상옥 감독의 프로덕션)이 키운 신예 신성일이 상대역으로 출연하는데, 그녀는 그를 유혹하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로 화면을 압도한다. <지옥화>(1960)는 그중 가장 도드라진 작품이면서 전체적인 최은희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유난히 도발적인 작품이다. 여기서 최은희는 미군들을 상대하는 여인 ‘쏘냐’를 연기하는데, 그녀는 그야말로 후회도 거리낌도 없이 두 형제를 이간질하는 ‘팜므 파탈’이다. 서울로 갓 올라온 동식을 유혹하는 형의 애인 쏘냐는 미국화와 근대화의 길로 안내하는 뿌리칠 수 없는, 그렇지만 치명적인 매혹과도 같다.

 

1930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최은희가 배우의 길로 들어섰던 것은 무대를 통해서였다. 한국영화 배우 풀을 형성한 두 가지 큰 줄기였던 악극계와 연극계에서 그녀는 후자에 속했고, 극단 토월회, 극예술연구회, 신협 등에서 활동했다. 1947년 <새로운 맹세>로 영화계에 데뷔한 후에도 한동안 연극 활동을 병행했으나 1953년 영화 <코리아>를 계기로 신상옥 감독과 함께 한 후로 영화에 전념하게 된다.

 

1960년대 초 신필름이라는 화려한 '영화왕국'의 신화를 있게 한 이들 두 사람의 첫 만남도 무대였는데, 최은희의 회고에 따르면 신상옥 감독은 <코리아> 전부터 최은희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오곤 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연인으로, 부부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만큼이나 더 견고하게 그들을 묶어주는 것은 배우와 감독으로서의 동지적인 관계였다. 최은희는 한국전쟁 당시 이미 한 차례 납북을 겪은 터였지만 앞으로 그들의 앞날에는 한 편의 영화보다도 더 파란만장한 삶의 곡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한상 | 한국영상자료원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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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우 그들을 말한다](2)최은희 下남과 북을 동시에 사로잡은 ‘마스크’

 

봉염 어머니는 일제의 핍박과 지주의 착취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묵묵히 살아간다. 가난과 질병으로 그녀는 결국 아이들마저 모두 잃게 되지만 공산당이 되어 집을 나간 큰아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절망 속에서 소금 밀수에 나서던 그녀는 만주 항일무장대를 만나게 되고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는다. 밀수꾼들의 뒤를 따르지 않고 항일무장대를 향해 결연히 일어서는 그녀의 옆모습이 정지화면으로 잡히고 영화의 끝을 알리는 자막이 올라간다. 막심 고리키를 연상시키는 이 사회주의 리얼리즘풍의 장면은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강경애 원작 <소금>(1985)의 마지막 신이다. 그리고 여기서 신념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봉염 어머니’를 맡은 이가 바로 남과 북에 존재했던 두 개의 ‘신필름’을 대표하는 스타 최은희다.


<상록수>의 한 장면.

 

연극에서 배우 인생을 시작한 그녀는 일찌감치 스타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당대의 숱한 여배우들을 제치고 명실상부한 ‘최고 스타’의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던 것은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부터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어느 국회의원의 잃어버린 딸 행세를 하지만, 이후 유능한 변호사가 되어 힘없는 여성들을 도우며 과거를 참회하게 되는 여대생 ‘최소영’을 연기한다. 이 작품을 통한 간판스타로의 발돋움은 이후 그녀가 맡았던 역할들과 그녀가 겪어야 했던 삶의 격랑들을 설명하는 단초가 된다. 최은희는 <열녀문>(1962)이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비련의 과부 역할에도 어울리는 배우였지만, 그녀를 스타로 만든 이 역할은 진취적이고 합리적인 여성, 근대화와 발전의 이상향을 보여주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여배우’를 설명하는 숱한 키워드들, 가령 미모나 연기력, 혹은 성적 매력 등을 뛰어넘는 그 무엇, 좌중을 압도하고 스크린을 장악하는 이를테면 ‘프로파간다’적이라 할 마스크가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심훈의 대표작이자 식민지 시기의 대표적인 근대화 계몽소설인 <상록수>(1935)를 신필름이 영화화한 1961년작을 떠올려보자. 주인공 박동혁을 추동하는 의지의 여인 채영신(영화 속에서는 ‘최용신’으로 각색)을 맡은 것은 역시 최은희였다. 30년대의 계몽의지를 5·16 직후의 60년대 사회에서 영상화한 이 작품은 대종상, 부일영화상, 아시아영화제 등에서의 큰 성과와 흥행에서의 성공 외에 또 다른 결과를 낳았다. 권력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최은희는 이 작품으로 인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신상옥 감독과 신필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영화법을 제정하고 문화영화를 의무 상영케 하는 등 영화를 통한 공보·선전 정책에 힘을 쏟았던 박정희 정권에 있어 <상록수>의 계몽적 이미지들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음직하다. 이후 신필름의 63년작 <쌀>에서도 최은희는 적극적인 성격의 여성 ‘정희’역을 맡아 박정희 정권의 산업근대화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얼굴이 된다.

78년 새해 벽두 홍콩에서 그녀가 납북된 사건은 그러한 흡인력 있는 마스크를 북쪽의 권력 역시 흠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신상옥 감독과의 결별, 신필름의 등록 취소 등 남한에서 우여곡절을 겪던 끝에 안양영화예술학교의 운영난 문제로 홍콩을 찾았던 그녀는 그 길로 북한으로 납치되었고, 이후 북에서 다시 만난 신상옥 감독과 함께 탈출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탈출기>(1984), <소금>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 작품들 속에서도 그녀의 에너지가 그야말로 ‘분출’되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화려한 스타로서의 삶과 분단국가의 배우로서 겪어야 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배우 최은희를 알기 위해 좀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함을 말해준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각자의 기억 속에서 연상되는 최은희의 이미지는 그녀의 변화무쌍한 얼굴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김한상 | 한국영상자료원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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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우 그들을 말한다](3) 전도연우리시대를 비추는 ‘평범속의 비범’

 

“내가 왜 네 사정 얘길 들어야 되는데?” 서른이 넘어서면 때론 ‘안면몰수’ 뻔뻔해져야 산다. 직업도 없고 애인도 없으며 통장 잔고마저 바닥을 긁는, 서른이 훌쩍 넘은 희수 역시 살기 위해 ‘안면몰수’ 까칠한 본성을 드러낸다. 옛 남자친구가 황당해하건 말건 자존심 따위야 구겨지건 말건, 썩은 동아줄이라도 낚아채듯 꿔준 돈 350만원만 받으면 그만이다. <멋진 하루>에서 로맨틱하기는커녕 살벌한 ‘포스’를 풍기는 희수 역의 전도연은 그렇게 2008년의 팍팍한 풍경을 자신의 얼굴 속에 겹쳐낸다. 

 

전도연은 일상의 풍경과 욕망을 고스란히 자신의 얼굴 속에 담아낼 줄 아는 몇 안 되는 배우다. 영화 데뷔작 <접속> 에서 보여줬던 PC 통신 세대의 ‘헛헛한’ 풍경에서부터 최근작 <멋진 하루> 에서 희수의 경제적 궁핍이 빚어낸 촌극에 이르기까지 전도연이 연기하는 인물들의 몸짓과 얼굴 속에는 각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자화상이 묘하게 겹쳐진다. 이는 전도연의 강점인 무정형의 ‘평범함’이 대중들의 보편적인 감수성을 즉각적으로 투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전도연이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최고의 여배우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성실함뿐 아니라 ‘평범함’이 빚어내는 동시대성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바로 거대 담론의 시대가 몰락한 90년대 중후반, 평범한 개개인들의 욕망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점과 맞물린다. 전도연은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곧 그녀의 평범함이 보편성을 획득하며 호소력을 갖는 지점이기도 하다.


 

전도연은 91년 ‘존슨즈베이비’ CF로 데뷔한 이후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종합병원> 등에서 철없는 누이 같은 이미지로 얼굴을 알렸다. 반짝 스타로 그칠 것 같았던 그녀는 장윤현 감독의 <접속>(1997)에 출연하며 연기 인생에 전환점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듬해 <약속>(1998)과 <내 마음의 풍금>(1998)에서 상반된 캐릭터를 선보이며 배우로서 입지를 마련해갔다. 심지어 <해피엔드>(1999)에서는 당시 여배우들이 꺼리던 노출 연기를 과감하게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파격적인 연기 변신 이후 그녀는 로맨틱 코미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로 잠시 숨고르기를 한 후,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 에서 예측할 수 없는 당돌함을 뿜어내는 ‘선그라스’ 수진으로, 뒤이어 <스캔들> 에서는 정절을 지켜내는 조신한 여성으로 숨 돌릴 새 없이 변신했다. 그녀의 연기 변신은 강박에 가까울 정도지만, 억지스럽기보다 매년 자신이 구축한 이미지를 새롭게 반복, 변주하며 그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 이를테면 한 해는 내면을 극한까지 표출해낸 강한 캐릭터로 사람들의 뇌리를 흔들었다면, 또 한 해는 내면의 소소한 풍경을 끌어내며 편안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식이었다. <인어공주> 의 나영은 <내 마음의 풍금> 의 홍연을 확장 변주하고 있으며, <너는 내 운명> 의 은하는 90년대 후반 그녀가 보여줬던 최루성 멜로 영화의 감수성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밀양> 에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한국 최고의 여배우로 거듭난 전도연은 <밀양·사진> 의 성공이 가져다준 배우로서의 압박감에서 훨훨 벗어나 <멋진 하루> 로 또 한번 관객 앞에 섰다.

하나로 엮이기 힘들 만큼 다채로운 역할들을 넘나들었지만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영화 속 캐릭터를 끌어안는 순간, 그 모든 캐릭터들이 어딘가 본 듯한 익숙함을 획득해갔다. 전도연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었던 ‘평범함’은 깎은 듯한 외모의 여배우들과 차별화되는 그녀만의 장점이었다. 현실에서 그녀의 외모는 충분히 평균 이상임에도, 대중들은 손쉽게 그녀를 ‘평범함’이라는 이름으로 동일시하고 만다. 평온한 일상에 대한 기대와 지리멸렬한 일상에 대한 파열을 오가는 그녀의 모습은 일상을 살아가는 대중들의 이중적인 욕망에 다름 아니다. 평범한 일상의 표면을 들여다보거나, 일상 속에 잠재된 균열과 욕망의 모습들을 담아내온 전도연의 모습에서 대중들은 지금 현재 자신들의 열망을 발견하고 투영시켜온 셈이다.

<박혜영 | 한국영화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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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우 그들을 말한다](4) 강수연 ~ 장인정신으로 세계를 매혹시킨 ‘월드스타’

 

“돌멩이 하나에도 정주지 말라고 했자너.” 필녀(김형자)는 벗어날 수 없는 가난 때문에 딸 옥녀(강수연)에게 씨받이를 대물림했고, 옥녀는 상규(대갓집 종손)와 자신의 혈육에게 정을 주는 실수(?)까지 반복하고 만다. <씨받이>(1986)는 조선시대 여인 잔혹사의 원형이다.


 

토속적인 에로물이 범람하던 1980년대, 임권택 감독은 대갓집 제사 풍습과 씨받이를 들이는 절차는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옥녀와 상규가 서로 가까워지는 과정 등의 잔가지는 과감히 쳐내어 봉건적 억압구조에 대한 비판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철저히 주제에 몰두하고자 했던 임 감독은 옥녀 역으로 “18세 철없는 애부터 씨받이로 한 1년을 그렇게 갇혀서 모진 삶을 살아내야 되는데…나이와 관계없이 엄청난 체험의 세계를 살고…연기가 저 앞 하고 뒤가 전부 다 커버가 될 만한 충분한 기량을 가진” 배우 강수연을 캐스팅했다. 강수연은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마부>(1961) 이후 한국영화가 유럽 3대 영화제에서 공식적인 수상을 한 첫 기록이었다. <씨받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었던 언론과 평단도 떠들썩하게 ‘쾌거’를 다루었고, 소개된 적이 거의 없었던 한국영화와 배우 강수연을 해외 무대에서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87년의 장녹수는 신예 강수연이었다. <연산군>의 이혁수 감독은 강수연에 대해 “이미지를 시시각각 바꾸어가는 묘한 재주를 지닌 깜찍한 연기자예요. 동물들이 상황에 따라 변하는 보호색을 갖고 있듯이 수연이는 그때 그때 분위기에 맞추어 여러 개의 얼굴을 만들 줄 안다”고 평했다. 아역 시절부터 다져진 연기력과 자신의 역할에 대한 무서운 집중력으로 ‘가장 유망한 연기자’라는 찬사를 만들어 냈다. <고래사냥2>를 찍을 때는 수영을 못하면서도 원효대교에서 한강으로 다섯 번이나 뛰어들었다고 한다.

 

76년 <핏줄>로 10살에 데뷔한 강수연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전영선을 잇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70년대 대표적인 아역 스타였다. 아역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고래사냥2>(1985)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영희로,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에서 당돌한 여학생 미미 역을 통해 20대의 연인, 청춘스타가 된다.

 

<연산군>과 <감자>(1987)에서는 성인 연기자로 변신하며 장미희, 이미숙에 이은 여배우 세대교체를 이룬다. <씨받이> 수상에 이어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월드스타’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70년대부터 이어진 기나긴 침체의 늪에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90년대를 예감하는 중심에 강수연이 위치하고 있었다. <경마장 가는 길>(1991)은 파격적인 형식과 표현수위를 놓고 찬반논란이 일었던 작품이다. J(강수연)는 프랑스 유학시절 동거남 R(문성근)가 써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끈질기게 관계를 요구하는 유부남 R를 거부한다. 갇혀 있는 일상 속에서 출구는 오직 J와의 관계뿐이라는 R의 허상은 집착을 낳는다. J는 결국 ‘나는 창녀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R에게 미리 받았던 화대 아닌 화대를 접수하며 한국 사회의 속물성과 이중성을 드러냈다.

 

<그대 안의 블루>(1992)에서는 평범한 결혼이 싫어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식장을 뛰쳐나온 고학력 여성으로, <그 여자, 그 남자>(1993)에서는 90년대식 로맨틱코미디 속 독신녀로, <처녀들의 저녁 식사>(1998)에서는 거침없이 욕망을 드러내는 호정으로, 일과 사랑·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분한다. 2001년에는 <여인천하>로 안방극장을 매혹해 연말 연기상을 휩쓸기도 했다. 30년간 30여편의 영화를 장인정신으로 빚어온 배우 강수연의 영화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 그를 또 어디로 이끌지 기다려진다.

<최소원 | 한국영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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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우 그들을 말한다](5) 임예진70년대가 진짜 진짜 반한 ‘국민 여동생’

 

우리 영화사에서 10대 관객이 흥행의 주요변수로 떠오른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다. 75년 활극영화의 제작이 제한받는 등 유신정권의 검열이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해졌을 때, 하이틴 영화는 까다로운 검열을 비켜갈 수 있는 장르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특히 76년 문여송 감독의 <진짜 진짜 잊지마·사진>는 6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한국 대중문화에 있어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10대 관객층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하이틴 영화 붐의 중심에 배우 임예진이 있었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임예진의 등장은 70년대 유신체제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일거에 날려버릴 만큼 신선한 사건이었다. 임예진은 앳되고 순수한 외모로 10대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세대들에게 소구력을 가지며 소위 ‘국민 여동생’으로 떠올랐다. 아이돌스타의 첫 탄생이자 전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적인 스타의 탄생이었다.

 

임예진은 74년 김기영 감독의 <파계>로 데뷔했다. 이 작품에서 파르스름하게 머리를 깍은 비구승으로 등장해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하지만 임예진이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일련의 하이틴 영화를 통해서다. 75년 김응천 감독의 <여고 졸업반>에서 선생님을 사랑하는 여고생으로 출연한 데 이어 <진짜 진짜 잊지마>에서 이덕화와 짝을 이뤄 당대 최고의 하이틴스타로 입지를 굳혔다. 이후 <진짜 진짜 미안해> <진짜 진짜 좋아해> 등 ‘진짜 진짜’ 시리즈에 연이어 출연해 전형적인 ‘여고생스러움’으로 대중의 우상이 되어갔다.

 

대학가에서 통기타, 미니스커트, 생맥주, 장발로 대변되는 ‘청년 문화’가 폭발했다면, 임예진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대는 하이틴 영화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소소하게 담아갔다. 비록 청년문화가 보여주는 저항정신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10대 관객들이 소비의 주체로 부상해 자신들의 판타지를 투영할 수 있는 영화와 배우에 열광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이틴 영화 속의 임예진은 <진짜 진짜 잊지마>에서 반항기 가득한 남자 아이들을 선도하고, 홀로 있는 아버지를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등 국가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하이틴 영화가 검열을 피하기 위해 극중 수업에서 유신이념을 칠판 가득 써놓고 설명하거나, 교련수업을 필요 이상으로 장시간 스크린에 담아내는 등 당대 하이틴 영화가 지닌 정치적인 한계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런 탓에 임예진은 극중에서 항상 ‘반듯한’ 이미지를 고수한다. 임예진이 보여주는 ‘반듯함’은 기존 세대의 가치관을 수용하고 있지만, 이전 세대의 부정과 속됨을 환기시켰다. 일종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상기시켜 열광적인 호응을 얻어냈다. <진짜 진짜 미안해>에서 어린 시절의 상처로 비뚤어진 태일을 바로잡기 위해 노심초사하는가 하면, <진짜 진짜 잊지마>에서 시를 읊고 철길을 걸으며 낭만을 얘기한다. <진짜 진짜 좋아해>에서는 하얀 목련꽃이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 등 임예진은 당대가 원하던 순수한 첫사랑의 원형이자 여고생의 표상이었다. 기존 질서를 따르는 ‘반듯함’과 10대들의 판타지, 첫사랑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낭만성’이 임예진을 당대 최고의 스타에 오르게 한 가장 큰 이유였던 셈이다.


77년 이후 엇비슷한 하이틴 영화가 반복되고, 하이틴장르가 우수영화 선정에서 제외되면서 하이틴 영화의 제작과 인기가 시들해지자, 임예진도 성인 연기자로 변신을 모색한다. 이대근과 호흡을 맞춘 홍파 감독의 <불>에서 수줍은 새댁으로 출연했으며, 78년 이원세 감독의 <땅콩껍질 속의 연가>에서는 누드 사진 촬영으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이틴 영화 붐이 쇠퇴하고 성인 연기에의 도전 등을 거치면서 임예진은 활동무대를 스크린에서 TV로 옮겼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자칫 부담스러울 법한 ‘국민 여동생’의 기억을 뒤로 하고, 세월의 깊이만큼 한 뼘 더 속깊은 배우가 됐다. 한국영화사에서 임예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배우인 셈이다.


 

<박혜영 | 한국영화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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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우 그들을 말한다](6) 황정순산업국가로 통합 이끈 ‘어머니의 얼굴’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딸들을 보기 위해 전국 일주를 떠난 노부부는 청주, 부안, 부산, 울산을 거쳐 마침내 강원도 속초에 도착한다. 다섯째 딸 미애가 뱃사람인 남편 영균과 살아가는 곳이다. 미처 연락 받지 못하고 부모를 맞은 딸은 반가운 마음에도 대접할 변변한 음식이 없어 안색이 좋지 않다. 일터에서 막 돌아온 사위 영균이 술상을 들자 미애는 모자라는 술을 감출 요량으로 물을 탄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아버지는 모르는 척 술맛이 좋다며 칭찬을 하고, 설움이 복받친 딸은 밖으로 나가 흐느낀다.


 

“철없이 자란 네가 이제 어른이 된 걸 보니까 그저 기쁘기 한이 없다.” 위로하러 나온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딸을 감싸 안는다. 박정희 시대를 대표하는 성공적인 프로파간다 시리즈 <팔도강산> 첫 편(1967)의 한 장면이다. 아마도 많은 관객들의 옷고름을 적시고도 남았을 이 장면에서 인자하게 딸을 격려하는 어머니가 바로 황정순이다. 풍족하게 사는 다른 딸들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궁핍한 삶을 살아가는 미애 부부는 산업근대화 시대의 가장 큰 희생자에 속했을 농어민층을 대변하는 캐릭터일진대, 그들은 궁핍한 삶에 불만을 품지 않고 부모의 격려 속에 착실하게 돈을 모아 어선을 장만하는 성실함을 보인다. 그 뒤에서 항상 자상한 웃음을 멈추지 않고 서있는 ‘어머니’ 황정순은 직접 선동에 나서지는 않지만 그 못지 않게 강력한 메시지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1925년생인 그녀가 물론 처음부터 어머니 역할만을 해온 것은 아니다. 극단에서 연기생활을 시작하여 허영 감독의 <너와 나(君と僕)>(1941)로 영화에 데뷔한 그녀는 라디오 드라마 <청춘행로>에서 주인공 ‘촌색시’ 역할로 목소리 연기를 하고 이를 영화화한 작품(1949)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시골 여성이라는 이 배역은 이후 그녀가 주로 맡게 될 역할과 그녀가 표현하게 될 정서를 잘 보여준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의 유명한 법정 장면에서 그녀는 변호사 최은희가 감동적으로 변론하는 불쌍한 하층계급 아낙이 되어 눈시울을 적신다.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례적이라 할 작품 <육체의 고백>(1964)에서 황정순은 부산 환락가에서 미군들을 상대하는 클럽의 ‘프레지던트’ 마담을 연기한다. 어머니로서의 이미지가 교차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녀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밑바닥 여성들의 연대’다.

 

그러나 이렇게 황정순이 대변했던 서민적 혹은 비(非)도시적 이미지는 이후 그녀가 ‘어머니’의 얼굴로 산업근대화 시대 한국사회의 ‘남겨둔 고향’ 역할을 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최은희가 주로 맡았던 역할처럼 교양 있고 합리적인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인고하고 이해해주면서 자리를 지키는 어머니상을 통해 그녀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산업근대화의 우군이 되었다. <마부>(1961)에서 처량한 마부 춘삼을 보듬으면서 고등고시에 합격한 그의 아들로부터 어머니로 인정받게 되는 수원댁, <갯마을>(1965)에서 과부가 된 며느리의 재가를 돕고 다시 돌아온 그녀를 따뜻하게 반기는 시어머니, <화산댁>(1968)에서 엇나간 출세욕에 부당한 성공을 꿈꾸는 아들을 가슴 아프게 신고하는 어머니 화산댁 등 그녀가 맡은 역할은 ‘근대화’의 옆자리에서 이를 부단히 돕고 지켜주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러한 ‘스타로서의 어머니상’의 존재는 좁게는 근대화의 주체적 단위로서 ‘가족’에 대한 믿음과 향수를 자극하면서, 넓게는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하나의 가족과도 같은 결속으로 끌어내는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팔도강산> 시리즈의 약발이 떨어져갈 무렵 문화공보부는 이 작품을 TV연속극으로 만들어 다시 한번의 흥행을 모색하는데, 이를 몰랐던 영화제작진은 영화 완결편 <우리의 팔도강산>(1972)에서 어머니 황정순이 죽는 것으로 끝을 맺으려 했다. 하지만 이를 본 공보부의 불호령으로 제작진은 부랴부랴 결말을 수정해야 했고, KBS의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드라마화된 이 시리즈는 1974~75년 당시 시청률 40%가 넘는 큰 성공을 거두며 유신체제를 성공적으로 홍보했다. ‘어머니’의 힘은 그렇게나 컸던 것이다.

 

<김한상 | 한국영상자료원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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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우 그들을 말한다](7) 문예봉일제하 식민 여성 대변 ‘삼천만의 연인’

 

일제 강점기라는 고난과 핍박의 굴곡진 삶 속에서도 조선 민초들은 극장 구경을 다녔고, 영화라는 새롭고 진기한 매체에 매혹당했으며, 여배우들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었다. 1960년대의 문희, 남정임, 윤정희 그리고 70년대의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처럼 이른바 여배우 트로이카는 30년대에도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김소영, 김신재 그리고 문예봉(왼쪽)이다.

 

 

그들은 조선영화의 토키(발성영화) 시대에 각자의 고유한 매력을 인정받으며 ‘조선의 미’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잡았다. 김소영이 세련된 미모로 여성적 매력을 발산했다면, 김신재는 순수하고 가녀린 조선 소녀의 표상이었고, 문예봉은 동양적인 미모로 가련한 식민지 여성을 대변했다. 셋의 공통점을 들라면 본격적인 ‘영화’ 배우 즉 무대보다는 스크린을 통해 사랑받은 배우라는 점이다. 이 중 발성영화 시대 최고의 스타를 뽑으라면 단연 문예봉이다.

 

1917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난 문예봉의 본명은 문정원이다. 12살에 어머니를 여읜 후 배우였던 아버지 문수일을 따라 극단에 들어갔고, 이듬해부터 아역으로 무대에 섰다고 한다. 문예봉이 처음 스크린에 출연한 것은 1932년 이규환의 데뷔작 <임자없는 나룻배>를 통해서였다. 나운규가 맡은 뱃사공 춘삼의 딸로 분하며 일약 ‘조선영화의 샛별’이 되었는데, 관객의 뇌리에 가여운 식민지 여성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도 이 작품으로부터 시작됐다.

 

문예봉이 최고의 스타로 등극하게 된 계기는 조선의 첫 발성영화 <춘향전>(1935년)을 통해서다. 영화의 흥행 성공 덕분에 조선영화계 역시 토키 시대로 안착할 수 있었다. 이후 문예봉은 <아리랑>(1926년)을 잇는 걸작으로 평가받은 이규환의 <나그네>(1937년)에 출연하며 일제식 근대화에 유린당하는 조선 여성의 이미지를 이어나간다. ‘삼천만의 연인’으로 불렸던 문예봉은 서구의 마를린 디트리히, 일본의 이리에 다카코, 만주의 이향란에 비견되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우뚝 섰다.

 

2004년부터 일제 강점기 영화들이 속속 발굴된 덕분에 현재 문예봉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모두 5편에 이른다. <군용열차>(1938년)에서는 오빠 점용의 학비를 대신해 기생이 된 영심으로, <조선해협>(1943년)에서는 집안의 반대로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아이를 낳은 긴슈쿠로 분해 그녀의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그렇다 해서 그녀가 가녀린 조선여성의 표상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일탈을 서슴지 않는 유부녀 애순이라든지, 목사 남편의 자선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그녀의 연기 폭이 꽤 넓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이 같은 모습은 각각 <미몽>(1936년)과 <집없는 천사>(1941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조선영화령의 실시와 함께 조선영화계는 일제의 국책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영화 외에는 자의적인 영화 제작이 불가능해졌고, 1942년에는 아예 조선 내의 모든 영화사가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로 통·폐합되었다. 해방이 되자 문예봉은 조선영화동맹 위원으로 활동하다 1948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극작가인 남편 임선규를 따라 월북했고, 북한 최초의 극영화 <내고향>(1949년)을 시작으로 ‘인민 배우’로 살았다. 그녀는 일제하 조선 그리고 북한에서 프로파간다 아이콘이었지만, 동시에 스크린의 여신이기도 했다.

 

<정종화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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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우(女優) 그들을 말한다](8)안소영폭압시대, 우리의 일그러진 여신

 

얇은 가운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비치는 아름다운 나신, 그 하얀 나신을 빛내며 한 여인이 말 위에 올라 안개 자욱한 초원을 달린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하얗게 빛나는 나신에 휘감기는 옷자락, 달리는 말의 속도에 맞춰 흔들리는 풍만한 가슴.


 

암울했던 정치·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애(性愛)의 묘사만이 유일하게 허용된 표현의 자유였던 1980년대, 정인엽 감독의 82년작 <애마부인·사진>은 한국 영화에 이른바 ‘에로 영화’ 붐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었다.

 

남편의 무관심과 외도로 몸도 마음도 상처 입은 아름다운 유한부인의 성적 순례를 담은 영화는 개봉관에서만 무려 3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최고의 흥행작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데뷔 4~5년차의 신인에 불과했던 안소영 역시 이 영화 한 편으로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깊게 파인 속옷 사이로 보이는 터질 듯 풍만한 가슴과 반쯤 감은 눈 아래 불안하게 벌어진 붉은 입술, 속옷만 걸친 반라의 모습으로 안장도 없이 말 위에 올라 달리는 아찔한 그녀의 자태는 그 시절을 통과한 수많은 남성들의 에로틱한 상상을 부추기며 매일 밤 잠 못들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실 ‘바람난 주부의 일탈과 성적 여정’은 한국 영화에서 그리 낯선 소재가 아니었다. 양주남 감독의 36년작 <미몽>이나 개봉 당시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됐던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 등은 그 원조격인 작품들. <애마부인>은 여기에 70년대 ‘호스티스 영화’들로부터 이어온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설정과 노골적인 성애 묘사를 더하며 관객들의 성적 호기심을 충동질한 영화였다. 여기서 성공적으로 시도됐던 멜로드라마와 에로티시즘의 결합은 정치·사회적 주제에는 민감했으나 성적 표현에는 관대한 이중잣대를 들이댔던 80년대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와 비슷한 장르의 영화를 양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무려 13편의 ‘애마’ 시리즈와 <파리애마> <집시애마> 같은 유사 시리즈로 이어진 <애마부인>은 안소영은 물론 오수비, 염해리(김부선), 소비아, 강승미 같은 ‘애마’를 배출하며 에로배우들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많은 ‘애마’ 중 누구도 ‘1대 애마’ 안소영의 존재감을 넘어선 이는 없었다.

 

79년 임권택 감독의 <내일 또 내일>로 데뷔해 82년 <애마부인>으로 최고의 육체파 여배우로 떠오른 그녀는 82년 한 해에만 7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탄야> <산딸기> <암사슴> 등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화 속 그녀의 모습은 스크린 가득 적극적으로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던 <애마부인>의 ‘애마’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 중에는 김기영 감독의 괴작 <자유처녀>에서처럼 자유분방하지만 유부남을 사랑하여 파멸하고 마는 김기영 식의 여성을 연기한, 다소 예외적인 작품도 있었지만 여기서도 그녀는 자신의 싱싱하고 풍만한 육체를 전면에 드러내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후 안소영은 <티켓>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에 출연하며 애로배우, 육체파 배우라는 스스로의 이미지를 깨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나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자신은 끊임없이 ‘육체파 여배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했으나 그 이미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안소영, 그것은 80년대 굴절된 사회와 한국 영화가 토해낸 모순이자 그녀에게 덧씌운 굴레였다. 표현의 자유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성을 통해 우회해야 했던 시대, ‘애마부인’ 안소영은 그 폭압적인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여신의 초상이었다.

 

<모은영 | 한국영상자료원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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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우(女優) 그들을 말한다](9)김정림-‘자유부인’ 주연

 

전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을 뽑으라면 아마 정비석의 연재소설 <자유부인> 논쟁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시 한국 사회를 휘몰아치던 세 가지의 바람 즉 계바람, 댄스바람, 사치바람을 시의성 있게 소설에 담아, 식자들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며 중공군 50만명과 맞먹는 국가의 적이다”라는 격렬한 비난까지 받았다. 이 모든 것이 대중적 센세이션의 빌미가 되었다. 서울신문은 연재 종료와 함께 부수 5만2000부가 격감했고, 연재 직후에 나온 단행본이 7만부나 팔렸다 하니 당시의 국민적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소설을 바탕으로 스크린에 옮긴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 역시 한국영화 사상 가장 격렬한 논쟁에 휩싸인 영화였다.

    

<자유부인>은 세련된 멜로드라마로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높았지만, 이보다 개봉 전날까지 지속된 검열 시비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결국 대학 교수 부인과 대학생의 키스신 등 문제가 되는 장면을 100피트 정도 덜어낸 다음 가까스로 개봉했고, 수도극장 한 곳에서만 3주간 10만8000명의 관객을 모으며 1956년 흥행 1위를 차지했다. 이 같은 논란의 가장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무명의 술집 여성에서 영화의 주연으로 픽업, 일약 스타의 자리에 오른 김정림이다.

1922년 4월19일 평양 기림리에서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김복순이다. 술 도매상을 하는 중류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때부터 무용과 음악에 소질이 있어 학예회 출연을 도맡았다 한다. 해방되던 해에 월남, 언니가 경영하는 다방의 ‘레지’로 일하다 정식 결혼을 못한 채 딸을 낳았고, 6·25 전쟁 즈음 요정의 기생이 됐다. 다른 남자와 정식으로 결혼해 다시 딸을 낳은 그녀는 당시 신인 배우 발굴로 유명했던 한형모 감독에 의해 ‘자유부인’으로 전격 발탁된다.

김정림이 분한 대학교수 부인 오선영은 아들은 식모에게 맡겨둔 채 옆집 대학생과 댄스홀에 다니고 결국 다른 유부남과 호텔로 들어서기까지 하는 파격적인 여성이다. 당시 가정주부를 포함한 여성 관객들은 스크린을 통해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작은 일탈을 경험했을 것이다. 언뜻 수수해 보이지만 관능적인 매력을 품은 외모,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공허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은 남성 관객들의 눈길을 끌기에도 충분했다. 욕망을 좇다 처벌 받는 오선영 덕분에 관객들은 영화적 쾌락을 즐기다 편안하게 ‘건강한 가부장제’로 복귀할 수 있었다. 한복에서 양장으로 바뀌는 그녀의 극중 의상만 봐도 당시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의 적지 않은 충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여배우들 중에 가장 ‘카메라 페이스’가 좋은 것으로 평가받았던 김정림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자유부인> 개봉 직후 동대문 시장에 액세서리를 사러 갔다가 쇄도하는 인파에 걸음을 걷지 못했다든가, 명동 다방 거리에 그녀와 독대하려는 일류 감독과 평론가들이 줄을 섰다든가 하는 에피소드는 지금의 스타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느 스타들도 그랬듯이 운명은 그녀를 화려하게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80만환이라는 거액의 개런티를 받고 옮긴 다른 영화사의 <자유부인 속편>(1957)을 시작으로 그녀의 배우 인생은 쭉 내리막길을 걸었다. 실제 사생활에 빗대어 “연기가 아니고 그대로 생활의 반영”이라는 평가까지 얻을 정도였다.

김기영 감독의 <여성전선>(1957)에서도 다방 마담 역을 맡았던 그녀는 다시 영화계를 떠나 화류계로 돌아가게 된다. 유명 요정의 마담으로 일하던 그녀는 이후 영화계 복귀를 시도했지만 더 이상 배우로서 주목받지는 못했다. 출연했던 영화도 <자유부인>의 흥행을 이으려는 기획이 엿보이는 <사십대여인>(1958), <중년부인>(1963) 등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한국 영화에서 무한 반복되었던 ‘부인 시리즈’의 원조였다.

<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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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우(女優) 그들을 말한다](10) 도금봉 ~ 선망과 질시의 원시적 생명력

 

전쟁으로 남자들이 모두 자취를 감춘 어느 산골. 이웃 과부 점례가 인민군 탈영병을 산속 토굴에 숨겨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과부 사월은 점례를 협박하여 숨겨준 곳을 알아낸다. 밤에 토굴로 숨어든 사월을 본 사내는 쫓아내려 하지만 순사에게 알리겠다며 능청스럽게 협박하는 그녀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자신도 여자라며 옷을 벗는 그녀에게 사내는 기가 질린 목소리로 묻는다. “그럼 당신들 둘이서 날 짐승처럼 길러보겠단 말이오?” 하얀 등을 드러낸 여자가 콧소리를 내며 말한다. “아무려면 워뗘? 아, 살고 볼 것이제~!” 마치 1990년대에 유행했던 ‘…부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지만 출처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40여 년 전에 개봉된 <산불>(1967·사진)이다. 욕정에 사로잡힌 이 여성, 한편으로는 대담하고, 또 달리 보면 그 대담함이 어떤 코믹한 느낌까지 자아내는 이 여배우의 이름은 도금봉이다.


 

도금봉이 이렇게 성적 매력으로 어필하는 역할을 자주 맡게 된 것은 어쩌면 데뷔작 때부터의 숙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957년도에 데뷔한 그녀는 기생 황진이를 영화화한 첫 작품 <황진이>의 주연으로 발탁된 대형신인이었다. 악극단에서 활동을 하면서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은 터에 데뷔부터 주연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그녀는 이 작품에서 관능적이고 요염한 연기로 주목 받았다. 이후 그녀에겐 이런 성격의 역할이 자주 주어졌는데, 이를테면 <연산군>(1961), <폭군연산>(1962)의 장녹수 역이나 <천하일색 양귀비>(1962)의 양귀비, <백설공주>(1964)의 태수비 같은 역이다.

 

그녀의 관능성에 갈수록 음모적이거나 영악한 성격이 덧대어진 것이다. 이런 성격은 <월하의 공동묘지>(1967)나 <내시>(1968)로 가면서 더욱 짙어졌다. 주인공의 어머니 역할로 나온 <어제 내린 비>(1974)에서조차 돈 많은 노인에게 팔려가는 ‘음란한’ 어머니였던 것을 보면, 그녀는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역동적 여성성에 대한 도덕적 단죄를 스크린 위에서 대신한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한편 ‘생활력 강한 여성’은 도금봉 필모그래피의 또 다른 갈래인데, 그 경제적인 역동성도 곧잘 도덕적 위험지대로 빠져들곤 한다. <새댁>(1962)이나 <또순이>(1963)에서 도금봉이 맡은 역할은 서민적인 삶 속에서 알뜰하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젊은 주부다. 특히 그녀에게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또순이>에서 그녀는 쥐덫 팔기, 떡장수, 연탄배달 등 돈을 벌기 위해 온갖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억세게 생활력이 강한’ 여성상을 연기한다. 이는 쿠데타 이후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구호로 내걸었던 박정희 정권 하에서 장려 받은 여성상이었다. 그러나 ‘또순이’ 도금봉의 이와 같은 억척스러움은 후기작으로 갈수록 왜곡되고 뒤틀렸다.

 

<젯트부인>(1967)에서 그녀는 일수로 돈을 벌어들이는 극성스러운 ‘치맛바람’의 주인공을 맡았다. 광고에서부터 “또순이 도금봉이 열연하는 젯트부인”이라 하여 ‘또순이’ 이미지의 계승자임을 선언한 작품이지만, 여기서 도금봉은 성실하고 인정 많은 남편을 무시하고 악랄한 사채업에 뛰어들었다가 패가망신하는 여성이 되어 부정적 이미지를 한 몸에 짊어진다. <아름다운 팔도강산>(1971)에서도 그녀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손님을 더 받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시부모를 박대하는 며느리가 되고 있다. 초기에 각광 받았던 당찬 활동성과 경제적 능력은 오히려 단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그녀의 에너지에 대한 선망이 얼마나 컸던가에 대한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무지렁이 촌부에서부터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요부, 그리고 천하를 호령하는 왕비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의 폭은 그 어떤 여배우보다 넓었고, 또 강렬했다. 그녀가 체화했던 원시적인 생명력은 뭇 남성들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압도적이었고, 그래서 더욱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김한상 | 한국영상자료원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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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우(女優) 그들을 말한다](11) 배두나낯설면서도 친근한 ‘문화 아이콘’

 

한가로운 한낮의 아파트. 한 소녀가 정체불명의 남자를 쫓아 아파트 복도를 내달린다. 평화로운 아파트에 물의를 일으킨 개 도둑을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정의감에 소녀의 두 눈은 불타오르고 질끈 동여맨 모자와 불끈 쥔 주먹은 소녀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막 손을 뻗어 남자의 목덜미를 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아파트 문이 열리고, 달리던 소녀는 그대로 문에 부딪혀 넘어진다. 그 자리에서 한 컷 한 컷 뒤로 넘어가는 소녀의 모습.


 

마치 만화 속 한 장면 한 장면을 필름으로 옮겨 놓은 듯한 영화,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사진)에서 정의감 넘치는 아파트 관리소 직원 현남으로 연기한 배두나와 실제 배두나는 흥미로울 정도로 닮아 있다. 평소에는 한없이 게으름을 피우지만 개 도둑을 잡는 일에는 목숨걸고 덤비는 영화 속 현남이 그렇듯,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지만 일단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면 남들이 뭐라 해도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 약간 엉뚱해 보이기도 하고 혼자만 일상에서 뚝 떨어져 있지만 누구나 한 명쯤은 가지고 있을 조금 특별한 친구 같은 그 모습은 많은 이들이 배두나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일 것이다.

 

모델로 시작해 1999년 TV시리즈 <학교>로 스타덤에 올랐고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한 <링>으로 영화계로 진출한 배두나는 이렇듯 스크린 안과 밖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은 배우다. <플란다스의 개>의 엉뚱한 일에 목숨 거는 열혈 소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착한 납치’도 있다고 주장하는 반사회적이고 비주류적인 감성의 영미, 가족과 모든 규율로부터 자유롭기를 갈망해 결국 새로운 길을 떠나는 <고양이를 부탁해>의 태희, 일본말도 잘 모르면서 덜컥 밴드 보컬을 맡는 <린다 린다 린다>의 한국인 유학생 송, 조금은 둔하지만 사랑하는 조카 현서를 위해서라면 무시무시한 괴물에 맞서는 <괴물>의 남주 등 지금까지 그가 연기했던 스크린 속 인물들을 모두 합친다면 어쩌면 낯설면서도 친근한 배두나라는 한 개인이 완성되지 않을까.

 

물론 스크린이나 일상에서나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되는 것은 오직 배두나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공효진 등 최근 부각되고 있는 젊은 스타들의 이미지나 행보는 이미지 하나에서 행동 하나까지 만들어지고 통제되던 전통적인 스타와는 다르다. 그들은 신비감을 전면에 내세운 과거의 스타들과 달리 조금 더 현실에 발을 디디고 서서 각종 화보나 방송 등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가감 없이 내비치며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문화 코드를 제시한다. 최근 발간된 배두나의 사진집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행위이고,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미지로 남기기를 즐기는 요즘 세대들에게 좀체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스크린 안과 밖을 채워왔던 배두나는 배우인 동시에 문화적 아이콘이다.

 

또래의 다른 배우들에 비해 빼어난 미모나 월등한 연기력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어중간한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세대들에게 배두나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친근하고 현실감 있는 존재로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배우로서 혹은 일상에서 여전히 여행 중인 배두나의 다음 여행지는 과연 어디일까.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쓰와 찍고 있다는 차기작에서 우리는 또 어떤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의 모습을 만나게 될까.

<모은영 | 한국영상자료원 프로그래머>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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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부’를 그리다… 한국영화 속 ‘팜므 파탈’

ㆍ매혹적 눈빛, 뜨거운 입술, 도발적 몸짓
ㆍ妖婦 : 요사스러운 계집

황홀에 대한 감각적 제시, 관능의 현시. 팜므 파탈(Femme fatale)은 그러한 여자라고 알려져 있다. 예컨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동원해 치명적 매혹을 던지는 여성이다. 주술, 마술을 거는 것처럼 상대를 유혹해 감각을 극대화하고 관능에 몰입하게 한다. 이성을 상실케 한다. 저 수메리안의 이시타르부터 기독교의 이브와 데릴라, 그리스의 사이렌, 스핑크스 등이 신화적 요부다. 어느 틈엔가 그녀는 뱀파이어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흡혈귀의 붉은 입술이 그녀의 것이다.

영화로 오자면 1915년 루드야드 키플링의 <뱀파이어>라는 시의 후렴구에서 착안한 영화 <어느 바보가 살았으니……>가 만들어졌고 주연 배우 시다 바라는 스크린의 팜므 파탈로 알려지게 된다. ‘뱀프’(뱀파이어를 줄인 말) 시다 바라는 체크 무늬 옷의 순수한 소녀로부터 시작한 릴리안 기시와 정반대의 아이콘이었다.

도금봉

도금봉, 천의 얼굴을 가진 요부

이것이 신화적, 서구적 팜므 파탈의 이야기라면 한국 영화의 경우는 어떤가? 팜므 파탈 아니 요부라고 불린 여배우는 누구인가? 김수용 감독은 배우 도금봉을 가리켜 모든 남자를 다 유혹해서 파멸시킬 수 있는 배우라고 말한 적이 있다. 60년대 한국 영화계는 윤정희, 남정임, 문희의 트로이카 시대였지만 영화 <아름다운 악녀>의 최지희나 이국적 여성 역을 해낸 김혜정과 같은 감각적 배우들이 있었다.

2003년 제5회 서울여성 영화제에선 도금봉 회고전을 열었다. 변재란은 도금봉이 최은희나 최지희나 김혜정과 차별되는 독특한 연기 스타일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당시 프로그래머 주유신은 <백골령의 마검>이라는 영화를 재발견, 공포와 에로티시즘을 동시에 구현하는 흡혈귀 도금봉에 주목한다. 당시 우리들은 도금봉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에 경이감마저 느꼈다.

그런데 얼마 전 도금봉의 마지막 소식이 전해졌다. 79세. 이른 나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여생을 어디에서 보냈다는 것이 알려져 애달픈 마음을 갖게 한다. 노년을 구의동 성당의 노인 복지관에 의탁해왔던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지인들에게 알리지 말라고도 했다 한다.

도금봉의 여러 이미지가 떠오른다. 한국전쟁 이후 영화의 황금기가 시작되던 50년대 중반 이후 <황진이>로 데뷔했던 그녀는 관능파 여우, 모던 글래머라는 호칭과 더불어 생활력 강한 또순이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젯트 부인>에선 돈벌이에 악착 같은 공격형 주부, <또순이>에선 새나라 자동차로 운수업에 뛰어드는 억척 여성, <산불>에서는 남자(신영균)를 협박 겸 유혹하는 사월이 역을 맡는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역은 <살인마>의 여귀 역이었다. 원한 때문에 구천을 떠돌던 며느리(도금봉 역)는 자신을 모함해 살해한 시어머니와 가정부에 대한 복수극을 시도한다. 그들의 계략에 동원되었던 서양화가를 유혹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는 것으로 이 복수극은 시작한다. 며느리는 붉은 핏빛으로 그려진 이 초상화로 영구한 귀환, 불멸을 꿈꾸고 또 남편을 전시회로 유인해 복수극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직접 그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욕망대로 그려졌다는 면에서 며느리의 초상화는 생시와는 달리 그녀의 자기 재현에 대한 조정 능력을 의미한다. 남편이 붉은 초상화를 집으로 옮기면서 60년대 부의 상징인 이층집은 귀신 드나드는 집으로 변해가고 그녀는 복수에 성공한다. 며느리 역의 도금봉만이 아니라 이 영화는 시어머니(정애란)의 섹슈얼리티를 다룬다는 면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이후로도 <월하의 공동묘지>나 <목 없는 미녀>에서 도금봉의 여귀 역은 압권이었다.

데뷔한 지 바로 1년 뒤인 58년 작품인 유현목 감독의 <그대와 영원히>를 보면 그녀는 이후와는 전혀 다른 페르소나를 가지고 시작함을 알 수 있다. 빵집 점원인 애란(도금봉)은 마음 여리고 성실하나 남자 친구 광필(이룡)이 감옥에 가자 카바레를 경영하는 남자와 결혼한다. 그녀는 운명에 자신을 맡기는 수동적 여성에 불과하다. 영화는 운명의 잔혹함을 나타내는 미장센을 절묘하게 만들어 낸다. 광필이 감옥에서 나온 후 칼을 고르는 장면을 정면에서 촬영해 칼들이 걸린 그물 사이로 배우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 그 예다. 애란은 이렇게 운명의 덫에 걸려있는 여자로 등장해 이후 남자의 욕망을 조정하는 욕동적 여성 스타로 거듭난다. 마지막엔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 1997>라는 영화에 조역으로 출연한다. 두 사람밖에 없는데 왜 삼인조라고 주장하느냐고 용맹하게 따지는 전당포 노파 역이다.

도금봉이 또순이에서 여귀, 그리고 요부에 이르는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적 근대성의 자장 안에서 급변하던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에 이르는 사회 상황과 관계가 있다. 새로움을 추구하지만 잔존하는 낡은 것이 떠나지 못하고 거듭 돌아오던 시대, 그녀 역시 이 두 축을 요동하는 요부와 또순이, 여귀였던 것이다. 그녀로부터 일제 강점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여배우 신일선이 있다.

신일선

신일선, 조선의 여동생에서 타락한 모던 걸

일제 강점기 시대의 영화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름으로 소개된 <청춘의 십자로(1934)>에는 당시 신종 직업을 가졌던 모던 걸들이 등장한다. 주유소에서 일하는 가솔린 걸 김연실이 소개된 후, 카페 여급 즉 바걸 영옥(신일선)이 등장한다. 그녀가 영화에 출연하는 순간이 흥미롭다. 프레임이 담배 연기로 가득 찬 후에야 우리는 그것이 영옥이 관객을 향해 내뿜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바를 등지고 서 담배를 피우는 한복 차림의 그녀는 대담하고 퇴폐적이다. 남자를 유혹해 치명적 덫에 빠지게 하는 팜므 파탈이라기보다는 경제적 상황에 의해 자신이 타락하는 역이지만 담배 연기 뿜는 장면은 매혹적이고 도발적이다. 이미지가 서사를 압도하는 것이다.

1926년 나운규와 함께 <아리랑>에 출연해 민족의 여동생, 조선의 연인 ‘영희’ 역으로 등장했으나 불과 10년이 지나지 않아 ‘타락’한 모던 걸, 바 걸로 돌아온 이후 신산한 삶을 살았던 신일선은 술집을 운영하면서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70년대 그녀가 운영하던 술집을 찾아갔던 미당 서정주의 에세이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문예봉
이러한 신일선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집안의 현모양처형 이미지를 갖고 있던 문예봉도 집을 나가 호텔에서 남자와 동거하는 소비적 모던 걸 역을 <미몽(1936)>에서 수행하고 있다.

조선 영화에서 한국 영화로 이어지는 요부의 계보 그 근저의 한 부분에는 모던 걸의 이미지가 원형으로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한때는 신여성, 조선이라는 식민지의 계몽적 아이콘으로 추앙받았으나 3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전쟁의 후방을 지키는 ‘총후 부인’의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향락적 대상으로 폄하되는 모던 걸과 70·80년대 국가 주도 근대화의 밀실인 호스티스 영화의 여주인공들 또한 2006년 <타짜>의 정마담 역의 김혜수 캐릭터, 여곡성을 토하는 여귀와 같은 근대와 전근대의 이미지가 만나 이루어내는 것이 한국 요부의 형상화 작업이다. 이 와중, 도금봉은 ‘천의 얼굴의 요부’로서 남성적 주류 재현 가치의 포섭을 능란하게 피해나갔다. 잊혀진 채 외로운 죽음을 맞았지만 그녀의 도발적 이미지는 한국 영화사와 현대사에 현현할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선 도금봉 회고전을 6월13일부터 닷새간 열고 있다. 삼가 명복을 빈다.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입력 : 2009-06-17 16:38:23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