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 즉위 500년, 영국이 열광하는 까닭은
“유럽서 신세계로 뱃머리 돌려라” 그의 리더십이 그립다
대영제국의 기초를 다진 헨리 8세. 대다수 영국인에게 그는 여섯 번 결혼하고 두 명의 부인을 죽인 광기의 군주다. 하지만 저명한 역사학자 데이비드 스타키(64) 박사는 “그때가 더 좋았다”고 주장한다. 물론 튜더 왕조 시대의 교육 제도를 다루다 나온 언급이지만 요즘 영국 쇠퇴의 위기감을 느끼는 영국인에겐 리더십 실종 현상에 대한 일갈로도 들린다. 런던정경대(LSE) 교수이던 스타기 박사는 최근 일간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헨리 8세가 고든 브라운(영국 총리)보다 더 유능하게 영국을 통치했다”고 말했다.
올해는 헨리 8세가 왕위에 오른 지 500주년 되는 해다(그는 1509년 6월 24일 즉위했다). 영국 전역에선 이를 기념한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고 있다. 13~15일 런던 남서부의 햄프턴코트 궁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그가 행한 종교개혁의 의미, 해군 창설, 건축·미술 분야의 문화적 유산을 따라가다 보면 궁정 암투극의 주인공이던 폭군은 어느새 국가 운명을 180도로 바꿔 번영을 가져온 지도자로 탈바꿈한다.
스타키 박사는 “그동안 페미니스트들의 저작에 가려 헨리 8세의 진면목을 잘 볼 수 없었다”며 “그는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을 통해 대다수 유럽 국가와는 다른 세계로 향한 첫 번째 유럽회의론자(eurosceptic)였다”고 강조했다. 유럽연합(EU) 가입에 소극적인 오늘날 영국의 시각을 반영하는 발언이다. 고립된 섬나라, 별 볼 일 없는 변방에서 도박에 가까운 홀로서기를 하면서 대서양이란 신세계로 뱃머리를 돌려 유럽 대륙은 물론 세계의 중심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5만 명 반란 일어날 때 병력 1000명 불과 여성 학자 중에서도 헨리 8세에 대한 도발적인 재조명이 나온다. 옥스퍼드대 출신으로 햄프턴코트 궁의 학예사인 수재너 립스콤(30)은 얼마 전 펴낸 저서 『헨리 8세를 바꾼 1536년』을 통해 그 내면을 이해할 만한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일간지 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1536년 한 해에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점은 예전에 주목받지 못했다. 그 일련의 사건들로 헨리 8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주장했다. 상냥하고 친근했던 신사가 잔혹하고 비정한 괴물로 변한 데는 1536년의 낙마 사고, 이에 충격 받은 앤 불린 왕비의 유산, 뒤이은 간통 루머, 혼외 아들의 죽음, 수차례 반란들…. 헨리 8세가 이 모든 상처가 축적된 중년의 위기를 영영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낙마 사고 후 살이 찌기 시작해 그가 마상 창시합(joust)의 뛰어난 선수였다는 사실은 젊은 시절의 갑옷(런던탑에서 내년 1월 17일까지 열리는 ‘헨리 8세: 드레스드투킬 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헨리 8세 포스터를 자기 욕실에 붙여 놓았다는 립스콤은 “아내뿐만 아니라 토머스 모어, 토머스 크롬웰 같은 총신까지 단두대로 보낸 역사를 정당화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헨리 8세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헨리 8세가 앤 불린에게 정말로 농락당했으며 그 때문에 자신의 성적 능력, 나아가 국가 통치력까지 의심했다는 것이다. 5만여 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자신이 거느린 군사가 고작 1000명에 불과했다면 그가 받았을 스트레스를 짐작할 수 있다. 왕의 치적을 미화하는 선을 넘어 잔혹하고 뒤틀린 성격마저 ‘설명’하려 한 립스콤의 분석은 논란을 야기한다.
드라마 ‘튜더스’의 팬 사이트에서도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7만2000명을 죽인 폭군을 축복해야 하는가.” 언제나처럼 나오는 냉소적 반응이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위대한 역사를 즐기지 못했을 것” “영웅은 아니지만 분명 영국에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란 평가도 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역대 국왕 인기 순위에서 엘리자베스 1세, 빅토리아 여왕 다음을 차지하는가 하면 심지어 1위에 올린 이도 꽤 됐다. 드라마에서 ‘영(young) 헨리’로 열연한 조너선 라이 메이어스 때문일까? ‘헨리 8세 신드롬’을 그냥 즐기려는 사람도 많다. 앤 불린의 이니셜 ‘B’가 장식된 목걸이나 햄프턴코트 궁의 ‘미로 정원’을 배경으로 한 게임이 나오는 등 관광 특수와 맞물린 갖가지 상품들이 선보인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회사원 폴 트루먼(40)은 “왕이 수도원을 해산시킨 다음 그 토지를 귀족에 나눠줘 충성심을 이끌어냈다. 예술에 조예가 깊고 잘 교육받은 군주로서 변화를 일으키는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환경 십자군’을 자처하는 찰스 왕세자까지 헨리 8세를 거들고 나섰다. 지난 8일 한 강연에서 “헨리 8세가 말년에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에 관심을 드러냈다. 왕국 최초의 환경주의자였다. 이런 점이 나와 닮았다”고 말했다. 헨리 8세는 당시 배를 만들 때 쓰는 떡갈나무가 고갈될까봐 어린 떡갈나무를 베지 못하게 규제했는데 이는 숲을 보호하려는 뜻도 있었다. 그는 한 그루의 떡갈나무를 베면 그 자리에 12그루의 떡갈나무 묘목을 심으라고 명령했다. 찰스 왕세자는 헨리 8세와 또 다른 닮은 꼴을 갖고 있다. 바로 이혼 경력이다. 왕세자는 지난 4월 이혼녀인 커밀라 여사와 함께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만났다. 당시 더 타임스는 “헨리 8세가 1530년 당시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선물받기로 했다”는 오보를 내보냈다. 그 편지에는 ‘형수와의 결혼이 성서에 어긋난다’며 이를 취소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청원이 기각되자 헨리 8세는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세워 스스로 수장이 됐다. 교황청은 지난달 이 편지의 사본 200부를 제작해 전 세계 박물관·도서관에 각 5만 유로(약 8900만원)에 배포한다고 밝혔다. 5파운드 백금 기념주화 880배에 팔려 헨리 8세에게 기쁜 소식은 또 있다. 그의 모습이 새겨진 5파운드짜리 기념주화가 발행됐는데 백금으로 된 것은 4400파운드(약 900만 원·100개 한정 발행)나 한다. 헨리 8세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 ‘메리 로즈’ 호를 위한 새 전시관도 짓는다. 1545년 프랑스와의 교전에서 침몰한 뒤 1982년 인양된 이 군함은 튜더 시대의 군인과 뱃사람들의 의복·장신구·주방기기 등을 고스란히 간직해 ‘튜더 타임캡슐’로 불린다. 2100만 파운드(약 43억원)를 들여 첨단 기술로 재탄생할 메리 로즈 호는 2012년 런던 올림픽에 맞춰 선보일 예정이다.
영국인에게 1666년은 런던 대화재와 흑사병이 유행했던 경이로운 해(annus mirabilis)였다. 경제위기를 겪는 올해는 끔찍한 해(annus horribilis)라고 말한다. 고통받는 국민은 지도자의 개인사보다 통치의 성과를 원하는 게 아닐까? 헨리 8세가 국가 정체성을 확립해 국익을 확보했다는 평가들은 강건한 군주의 리더십에 대한 향수를 일으킨다. 왁자지껄한 튜더식 낭만이 피어오르는 것 같은 햄프턴코트 궁 앞으로 적갈색의 템스강이 도도히 흐른다. -----------------------------------------------------------------------------------------------------------------------
‘이혼-참수-사망-이혼-참수-생존’ 비운의 여섯 왕비들
헨리 8세의 여인들
이혼-참수-사망-이혼-참수-생존. 헨리 8세와 결혼한 왕비 여섯 명의 운명이다. 헨리 8세는 셋째 부인 제인 시모어를 가장 사랑했지만 왕자(훗날 에드워드 6세)를 낳다가 산욕열로 숨져 사별해야 했다. 국왕 즉위 500주년을 맞이한 헨리 8세가 영국에서 재평가받고 있다. 그는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국교 성공회를 설립했다. 재위 36년간 7만2000명을 죽여 '폭군' 딱지가 붙어있었다. 하지만 요즘 상비해군과 성공회를 만들어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음은 중앙SUNDAY 보도내용.
‘divorced, beheaded, died, divorced, beheaded, survived’(이혼-참수-사망-이혼-참수-생존). 헨리 8세가 가장 좋아했다는 햄프턴코트 궁에서 7~12일 열린 플라워쇼 푯말에 새겨진 글귀다. 이 글귀는 영국 역사상 가장 요란스러운 국왕인 헨리 8세와 여섯 왕비의 운명을 압축한다.
이 푯말과 함께 여섯 왕비를 형상화한 테마 정원을 보러 온 관람객들로 13만㎡에 이르는 궁전 뒤뜰은 연일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행사 기간 무려 17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첫 부인 캐서린 아라곤의 정원은 그녀의 사산(死産)을 상징하는 관이 놓여 있었다. 에스파냐 왕녀로서 헨리 8세의 형에게 시집왔지만 형이 죽자 헨리 8세에게 떠넘겨진 비운의 여인. 결국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그녀의 시녀였던 앤 불린에게 자리를 내 준다. 그러나 그녀 역시 ‘천일’ 동안 아들을 못 낳고 간통·근친상간 혐의로 런던탑에서 목이 잘린다(‘nationalarchives.gov.uk’에서 선정적 내용으로 가득한 불린의 재판 기록을 볼 수 있다). 무수한 책이나 영화에서 그려진 이미지답게 정원의 컨셉트도 ‘witch(마녀)’다. 헨리 8세가 제일 사랑했고 왕자를 낳았지만 산욕열로 숨진 셋째 부인 제인 시모어는 차갑고 창백하게, 불륜을 저지르다 덫에 걸린 철부지 캐서린 하워드는 10대 취향으로 정원을 꾸몄다. 헨리 8세의 생애를 뒤덮는 여성의 그림자는 좀체 걷어내기 어렵다. 스타키 박사는 이 남자의 필체에서 또 다른 여성을 읽어 낸다. 바로 그의 어머니와 누이의 그림자다. “왕자들은 대부분 교사나 조언가와 비슷한 필체를 갖고 있는 데 헨리 8세는 어머니한테 글쓰기를 배운 것 같다”고 스타키 박사는 추측했다. 여성 의존적이고 감정적 제어가 어려운 성격도 여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앤 불린에게 보낸 육필 편지(영국 국립도서관에서 전시 중)나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만 보고 간택했다 실제와 너무 달라 탄식했다는 넷째 부인 앤 클레브즈의 일화 등은 그가 얼마나 사랑 없는 결혼을 혐오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헨리 8세의 개인사들은 국내외 정치 상황과 얽혀 있다. 당시 날로 커 가는 신교 세력과 손잡기 위해 정략결혼을 택했을 가능성이다. 헨리 8세가 늙어서까지 전쟁판에 뛰어들길 주저하지 않았다는 건 타고난 남성성의 발로일 수 있다. 대제독이란 관직을 신설하고 전투군함을 만들어 훗날 영국 해군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깨는 발판을 구축했다는 건 영국인에게 자긍심 그 자체다. 그에겐 두 여인이 더 있다.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 캐서린 아라곤의 딸인 메리 1세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해 가톨릭 부흥에 나선 맹렬 여성이었다. 수많은 신교도를 처형해 ‘Blood Mary’라는 악명을 날린다. 반면 아버지의 과업을 이어받아 성공회를 정착시키고 45년간 다스린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고 추앙받는다. 평생 싱글이던 그녀의 이름을 딴 향수가 플라워쇼 한쪽에서 저자의 코를 자극했다. 런던=박정경 자유기고가 olive-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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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헨리 8세 즉위 500주년 행사 다채
아내 6명 중 2명을 죽인 폭군으로 알려진 영국의 헨리 8세(1491∼1547)가 국왕에 즉위한 지 올해로 500주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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