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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Tour/My Tour - London

런던 여행기 - 정혜윤(프레시안 연재)

by Wood-Stock 2009. 5. 8.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나의 심장을 어디에 묻을까"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 웨스트 민스터 사원 1

기사입력 2009-02-21 오후 2:58:34

 

워즈워드는 웨스트 민스터 사원을 처음보고 대지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본 웨스트 민스터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중간계 같은 곳이다. 선과 악이 만나고 절대 권력과 절대 반지를 두고 사투를 벌이지만 결국은 선이 승리하는.인간 세상은 희생을 통해 다시 한번 고결해지는.

반지의 제왕을 지은 톨킨은 방에다 언제고 중간계 지도를 걸어 놓았었다.런던도 지상에 웨스트 민스터를 걸어놓았다.

내가 본 웨스트 민스터의 첫인상은 황금색으로 짠 꿈이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기 직전에 굳어버린 것 같고 사랑하는 여인의 금빛 머리카락이 하늘에 올라가 별자리로 되기 전 지상의 끄트머리에 마지막 관능을 떨구느라 하체는 세속적이고 상체는 성스러운 것으로 화하는 찰나같고, 지상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말하지 못한 약속이 가득 수놓아진 섬세한 레이스가 하늘에 걸린 것 같고, 말을 타고 먼 길 달려온 온 중세 기사가 자신의 더러움과 먼지를 한 점이라도 그 안에 떨어 뜨릴까봐 두려움에 정결하길 바라는 호흡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결정체 같고, 누구라도 지상의 것은 잠시 놔둬라 라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 앞에 내리까는 속눈썹에 떨어지는 환영 같고,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것은 건물의 첨탑이 아니라 내 영혼이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내 몸이 황금색으로 도포되는 찬란함 같고, 그런 느낌이었다. 지상의 음울함은 이 건물 안에서 위로받기 보다는 망각되어야 하는 존재 같고 더 나은 미래는 의심할 여지없는 오래전 약속 같이 느껴진다. 이 안엔 황금성배, 원탁의 기사, 성스러운 돌, 첨탑 주위를 도는 혜성, 그날치의 물고기를 무릎 꿇고 바치는 가난한 어부, 낯선 여행자가 들어선 뒤에 환하게 불타오르는 라임 스톤. 돌로 된 손으로 기도하는 왕, 수백년 동안 자지도 않고 감지도 않고 지켜보는 눈동자같은 이야기가 가득할 것 같다. 일개 왕에게는 머리를 조아릴 수 없어도 이 건물이 주는 약속 앞에선 고개를 숙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건물이다. 이 건물 앞에서 보면 템즈강 건너편 사우스 뱅크의 현대적 건물들이 오히려 공정 라인을 타고 나온 기술 복제 상품, 두둑한 연봉과 보너스의 향연처럼만 느껴진다.

이 건물의 파트너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대로 범람하는 템즈강, 강에서 바다로가 아니라 바다에서 강으로 물이 흐른다는 그 템즈강과 그리고 하늘뿐이다. 이 건물에선 단정하게 정리된 유람선 떠다니는 템즈강을 보는게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이 건물에선 배와 인간들의 이야기와 악취와 역병과 화재, 왕들의 출정, 전쟁, 공습, 뱃놀이, 헨델의 수상음악에 얽힌 얼굴이 천겹 겹쳐 떠오르는 수세기 전부터의 회화적인 템즈강을 보는게 현실적이다

이 건물 앞에서 나는 북위 51.5도의 의미를 알아챘다. 이곳에서 어둠은 서서히 오는 것, 어둠은 황금색으로 오는 것. 어둠은 기다려야 하는 것. 그래서 그 어둠은 가슴 깊히 받아들일 수 있다.

▲ 웨스터 민스터 사원. ⓒ정혜윤


이 건물은 외양이야 어떻든 속사정은 전설과 현실,이야기와 역사 사이에 놓여 있다. 정복왕 윌리엄이 그랬던 것처럼, 십자군에 전사로 뛰어나가고 결국엔 남편인 헨리 2세를 밀어내고 자기만의 왕국을 갖고 싶어했던 엘리노어 왕비가 그랬던 것처럼, 엘리자베스와 메리스튜어트가 그랬던 것처럼. 다이애나와 찰스 황태자가 그랬던 것처럼.

1066년 색슨족에게서 노르만족으로 왕권이 넘어간 그 해부터 웨스트 민스터는 특별해졌다.

나는 참회왕 에드워드가 숨진 뒤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진 1066년의 일은 바이외 태피스트리 속으로 먼지로 쾍쾍 거리며 날아 들어간다.

내 눈 앞에는 영국왕의 자격이 거의 없던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교황을 설득해 베드로의 모발이 들어있는 반지를 받고, 전 유럽의 모험을 즐기는 귀족들이 윌리엄이 약속한 영국의 토지와 금전에 홀려 앙주, 브루따뉴, 플랜더즈, 아라곤에서 모여들고, 그들이 바다를 건널 750척의 선박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벌채하고, 마침내 기병으로 무장한 노르만군대와 보병인 영국군이 맞서 싸우고, 윌리엄은 위장 전술을 써서 후퇴하는 척하다가 적을 포위하고 그 전투에서 결국 영국군 섹슨계 해럴드 왕이 전사하는 풍경이 펼쳐져있는데 그 때 웨스트 민스터 사원 위에는 혜성이 하나의 징조처럼 걸려 있다.

▲ 바이외태피스트리의 일부.


1066년 크리스마스로 날아가 본다면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능수능란한 정복왕 윌리엄이 그 날 웨스트 민스터에서 웃음을 참으며 왕관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그 날 이후로 웨스트 민스터는 왕들의 대관식 장소가 되었다.윌리엄이 대관식 며칠 전에 런던탑의 기초가 될 돌을 막 놓았다는 것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다. 웨스트 민스터와 런던탑의 차이는 왕이냐 죽음이냐의 차이이고 이후 모든 대관식장을 걷는 왕과 여왕들의 발걸음엔 그런 사연들이 또각또각 따라붙는다.

나는 웨스트 민스터에서 대관식을 올리지 못한 두 에드워드 중 하나인 어린 에드워드 왕자의 이야기를 런던탑 블러디 타워에서 들었다.어느 날 삼촌을 따라 런던탑에 들어간 에드워드 왕자와 그의 동생은 그 뒤로 두 번 다시 탑에서 나오지 못했는데 누군가는 어린 소년의 얼굴을 창문으로 흘깃 보았다는 둥, 누군가는 두 소년이 런던탑 마당에서 노는 것을 보았다는 둥,누군가는 그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는 둥, 누군가는 형이 어린 동생을 달래는 밤의 나지막한 소릴 들었다는 둥,누군가는 그들의 어미가 런던탑 문 앞에서 섦게 울다 실신하디시피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는 둥,하지만 어느날인지부터 아무도 두 번 다시 왕자들을 보지 못했다는 둥. 몇백년 뒤 런던탑에서 어린 소년의 유골이 발견되었을 때 모두들 바로 어린 에드워드 왕자일 걸로 믿었다는 둥,그래서 그 유골도 웨스트 민스터로 옮겨졌는데 현대 과학의 힘을 빌어 유골에 대한 조사를 해보니 유골은 뜻밖에도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아이 것으로 밝혀졌다는 둥, 아직도 논란중인 그런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들이 결혼식장인 동시에 대관식장, 대관식장인 동시에 장례식장, 장례식장인 동시에 무덤, 무덤인 동시에 교회인 이곳을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고 누군가는 그 이야기중 일부를 바람처럼 내 귀에 속삭여 주었다.

언제나 중세 기사들의 로망을 생각나게 하는 첨탑으로 가득한 고딕 양식 웨스트 민스터는 지상 사람들에게 충성과 굳은 언약, 폭력 뒤의 연회, 전쟁 뒤의 보상, 다시 못 볼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왕녀와의 결혼, 화려한 수행단, 바스 기사단, 길거리에 뿌려지는 금화, 공짜로 나눠주는 포도주. 잉글랜드 왕관, 대관식의 봉, 네번째 손가락에 끼는 반지. 대관식 의자, 자주빛 휘장, 구경하느라 모여든 런던 시민들, 일제히 울려 퍼지는 종소리 같은 것을 끝없이 상상하게 하는데 결혼식, 대관식, 장례식, 무덤 중 관광객인 우리의 눈길을 영구히 끄는 것은 역시 무덤들이다. 그곳에서 무덤들의 역할은 고난도 검법을 수련중인 닌자들에게 주는 수행 교본 같은 것들이다. 이들의 삶을 보고 배워라. 바보와 악당들의 이야기도 들어라.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둔감한 너의 머리를 내리쳐라.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이빨 빠진 노파처럼 회춘을 위해 무덤의 비문을 읽는다.그 때 무덤의 비문을 에워싸고 있는 은은한 불빛은
나에게 묻는다.피곤한가? 끝내고 싶은가? 춤을 멈추고 싶은가? 아니면 햇살 속으로?

나는 이곳에서 가장 아이러니컬한 무덤인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의 무덤 사이로 날아갔다. 그 둘의 무덤은 이곳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선 자매처럼 가까운 곳에 있지만 그 둘은 살아있는 동안엔 만나지 못했고 (만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고) 불굴의 진 빠지는 기 싸움만 벌였다.

나는 메리스튜어트 하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새벽 4시의 결혼식장과 세상에서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처형식장이 생각난다.

▲ 메리 스튜어트의 초상화.

태어나던 날 아버지가 죽어버림으로써 응애 할 때부터 여왕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운명은, 감히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는 모조리 죽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 남편 프랑스 왕은 병약해서 죽고, (그 사이에 애인들이 죽어 나가고,)두 번째 남편 헨리 7세의 증손자 단리는 살해당하고(필시 그녀도 가담한,왜냐하면 그때 그녀는 남자중의 남자 몸을 갖고 있는 보스웰을 사랑했으니까)세 번째 남편인 보스웰은 여왕과 함께 공모해 단리를 살해하고 왕권까지 탐했다는 죄목으로 쫓겨 다니다가 현상 수배에 걸려 감옥에 갇혀 죽는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새벽 4시의 결혼식은 바로 세 번째 결혼식이다. 남편의 살인자이자 자신의 정부였던 보스웰과의 범죄로 맺어진 결혼식에서 그녀는 남편이 죽은지 석달도 지나지 않아 상복을 입고 뱃속엔 보스웰의 아이를 품은 게 거의 확실한 상태로, 축하의 인사는 커녕 그나마 썰렁한 하객 모두들 겁에 질린 상태로, 미사도, 오르간 소리도 없이, 반지도 없이, 어두운 관속 같이 오싹한 예배당에서 있어야 했다. 사랑에 눈이 먼 그녀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여왕 자리도 가족도 친구도 버리겠노라고 맘 먹었었지만,결혼식 직후에 사랑은 사실상 끝나버렸고, 군중들은 성이 나서 이 간통한 갈보를 쫓아버리라고 하였고 귀족들은 등을 돌렸다. 그녀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해 결국 엘리자베스의 잉글랜드로 도망쳐 버리는 이야기는 북구의 전설 그 자체다. 호수 속 외로운 섬에 갇혀있는 왕비. 왕비를 사랑하는 용감한 기사. 몸숨 건 한밤의 탈출, 그리고 그 전설에 떨어지는 떨칠 수 없는 어두움은 뱃속에 있던 그녀의 아이.아이를 찾기 위해선 그녀가 포로로 갇혀 있던 저 쓸쓸한 스코틀랜드의 호수의 밑바닥을 파보아야 한다거나 프랑스의 어느 수녀원에 가봐야 한다거나 등등등. 메리 스튜어트에게 영국에서의 꿈은 엘리자베스의 숙적인 스페인을 움직여 웨스트 민스터에서 대관식을 올리는 것,그녀는 자신이 웨스트 민스터에 가고 엘리자베스가 런던탑에 가는 상상으로 전유럽에 비밀 편지를 보내며 끝없는 허망한 외교놀이에 일생을 바친다. 빨래 더미 속에, 책속에, 거울 뒷면에 넣어져 전 세계로 보내질 공허한 편지를 쓰는 동안 그녀는 얼마나 자주 이 웨스트 민스터를 열렬한 눈초리로 바라보았을까? 얼마나 저 앞에 서고 싶어했을까? 그리고 마침내 교묘하게 엉킨 음모 속에서 그녀는 엘리자베스의 시해를 기도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는데 사형장으로 가는 그녀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는 위엄 있는 여왕 그 자체였다. 그녀는 마치 축제의 의상을 고르듯 ,대관식을 준비하듯 정교한 의식에나 어울릴 가장 좋은 옷, 눈을 가릴 가리개, 마지막 피비린내 나는 순간을 위한 핏빛 속옷과 팔을 가리는 길다란 핏빛 장갑을 며칠에 걸쳐 정성껏 손수 골랐다.

낭만적이지만 위험한 북유럽풍의 음울한 발라드 같은 삶을 산 그녀의 무덤 옆에 있는게 바로 열정적이지만 수상쩍은 의도가 있는 소네트같은 삶을 산 엘리자베스 1세의 무덤이다.

엘리자베스는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대관식이 거행된 1월 15일은 매섭게 추웠는데......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나의 심장은 어디에?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 웨스트 민스터 사원 2

기사입력 2009-02-27 오후 3:06:38

 

그녀가 담비 털가죽으로 안을 댄 치렁치렁한 자수 실크 망토 아래 대관식 의상을 차려입고 금사를 섞어 짠 실크 스타킹, 베네치아제 황금과 진주가 달린 진홍색 벨벳 모자로 잔뜩 치장하고,오른손 넷째 손가락에 백성들과의 결합을 상징하는 반지를 끼고 ,머리엔 무게가 3킬로그램에 이른다는 잉글랜드 왕실 왕관을 썼을 때 런던 시내 교회들은 한꺼번에 종소리를 울렸고 오르간 트럼펫 소리는 라파엘로 그림을 수만개 촛불로 비춘 것만큼이나 성스럽고 화려하게 넘쳐흘렀었다.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에 여왕으로서 의회 앞에서 한 연설은 황금의 연설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이 대관식과 장례식 사이에 왕으로 산 모든 왕들을 대표하는 연설이었다면 역사는 행복했을 것이다.

"왕관은 남이 쓴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영광스러운 법이며 직접 써보면 그다지 즐겁지 않다. 신께서 내게 주신 책무를 이행하고 신의 영광을 드높이며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양심의 명령이 없었다면 나도 이 왕관을 누구에게든 주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날까지만 살아서 통치할 생각이다. 나보다 더 강하고 현명한 군주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는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이곳에 묻힌 다음 그녀의 무덤 앞을 지나쳤을 신하들은 후임인 제임스 1세와의 갈등을 겪느라 지쳐서 이런 말들을 남겼을 것이다. '다시 그녀와 알현실에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혹은 '그녀의 이름이 내뿜은 광명은 절대 망각에 묻히지 않는다. 그녀가 남기고 간 행복의 기억이 모두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에'

'그녀가 남기고 간 행복의 기억이 모두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다'는 말만큼 죽은 왕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한 부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어느 날 걸리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누구든 맘에 드는 자를 불러서 하룻동안 시중을 들게 하거나 질문에 대답하게 할 수 있는 섬에 도착했는데 처음에 알렉산더 대왕을 부르자 그는 자신은 독살되지 않았고 다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열병으로 죽었다고 대답했다. 그 다음엔 걸리버는 시저와 부루투스를 불렀는데 그 둘은 놀랍게도 너무나 서로 잘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임을 당한 자와 죽인 자가 서로 연민으로 가득차 바라보는 장면은 애국심 ,굳건한 정신, 완전한 덕, 용맹의 표상으로 보였다. 시저는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모든 위대함도 결코 자신을 죽인 부루투스의 행위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걸리버는 이번엔 열 대여섯명의 영국 국왕들을 여덞이나 아홉 세대 이전의 조상들과 함께 불렀는데 결과는 비통했다. 왜냐하면 왕관을 쓴 행렬 대신에 깡패 두명, 아첨꾼 세명, 성직자 한명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걸리버는 너무 놀라서 차라리 영국의 중류층 농민이나 몇 명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단순한 예절과 음식, 공정한 거래, 진정한 자유정신, 나라를 위한 용기와 사랑은 그들에게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걸리버는 말했다.

그래도 지금 나란히 붙어있는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의 무덤을 보노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공간의 운명이란 걸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왕들의 운명, 경쟁자의 운명, 동시대인의 운명,체스판 말의 운명, 바둑의 운명. 그리고 결국 우리의 운명은 거인들(가짜 거인 포함)의 어깨위에 서야 한다는 것.거인의 어깨 너머로 그 위에 올라타서 세계를 보는 것, 그것이 이 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어두운 황금빛 메시지일수도 있다

▲ 엘리자베스 1세. '그녀가 남기고 간 행복의 기억이 모두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다'는 말만큼 죽은 왕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웨스트 민스터 사원은 많은 무덤들 때문에 상상의 보물 지도란 제목을 단 팝업북 같기도 하고 꺼내도 꺼내도 계속 나오는 러시아 인형 마뜨로쉬카 같기도 한데 특히 시인의 묘역은 그 하나하나가 왕조별, 역사별, 새로운, 별난, 진지한, 앞서간, 욕먹는 등 온갖 각도의 당대의 영웅 전설, 재야의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보물 지도들이다.

시인의 묘역에 처음 묻힌 사람은 캔터베리 이야기의 <제프리 초서>이다. 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두루 여행한 여행가이자 시인.급사이자 국왕의 친구,그런데도 귀족은 아닌 사람, 포도주 상인의 아들, 건설현장 감독이자 세관 감사관으로 살았다. 사는 동안 그는 에드워드 3세, 리처드 2세, 헨리 4세 등 세 명의 왕을 모셨고 시티와 왕궁 사이의 갈등을 목격했고 혁명적인 유랑 성직자 존 볼이 블랙히스에 모인 군중에게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물레를 돌릴 적에 그때 누가 젠틀맨이었는가?'라고 급진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보았고 그때 농민 봉기군들이 당시 열네살이었던 소년왕을 믿었다가 결국은 두목격인 와트 타일러와 잭 스트로우가 잡히면서 진압되는 것도 보았다.그렇지만 그 질문. 누가 과연 태어날 때부터 젠틀맨이었는가는 영원토록 초서와 동시대 영국인들의 머리 속에 남아 빙빙 맴돌았을 것이다. 초서는 무너져 가는 자기 세계를 슬퍼할 줄도 알았고 그 세계를 자기 방식으로 즐길 줄도 알았다. 그의 저서 <켄터베리 이야기>에서 무덤가에서 읽기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잠깐 속삭여 주고 싶다.

그런데 주님,! 이런 일을 떠올릴 때면
재미있게 놀던 젊은 시절이 생각나요
그 당시에도 내 마음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내가 마음대로 놀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하지만 세상에 나이 때문에 모든게 엉망이 돼버렸어요
나이를 먹자 아름다움과 생기를 잃어버리게 되었답니다
안녕! 아름다움과 생기는 악마와 함께 사라져버려라…
(초서의 배스 여인의 이야기)


아름다움과 생기는 악마와 함께 사라져 버려라라고 말하는 입술은 얼마나 빨갛게 마르지 않고 싱싱한가?

그 밖에 놓치지 말아야 할 무덤은 세익스피어(그의 비문은 템페스트의 위풍당당 왕이자 마법사인 프로스페로의 이야기이다),리빙스턴, 뉴턴 (그의 무덤 주위엔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처럼 행성이 돌고 있다.1680년 혜성의 경로가 표시된 천구,프리즘을 가지고 노는 천사 같은 소년, 태양과 행성의 무게를 다는 소년,인류를 빛낸 위대한 이가 여기에 존재했었다는 라틴어 비문), 다윈, 윌리스, 무명용사의 묘 등인데 영화 다빈치 코드 마지막 장면 때문인지 뉴턴의 무덤이 인기 1위의 무덤이다. 1727년에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던, 살아생전 행동반경 150마일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던, 책상에 앉아서 연필을 굴려서 조수간만의 시간을 맞췄던 천재 뉴턴에 관한한 내가 아는 제일 멋진 해석은 이렇다. 볼테르의 말이다

'우리에게 바다의 조석을 일으키는 것이 달의 압력이지만 영국인들에게는 중력 때문에 바다가 달을 향해 끌린다는 것이다 ..데카르트 학파에게 빛은 공기 중에 존재하지만 뉴턴 학파에게 빛은 태양으로부터 6분 30초 만에 오는 것이다'

나는 만유인력이란 말을 처음 들은 뒤로 언제나 '끌어당긴다'는 단어의 신비로움에서 헤어나지 못해온 듯 같다. 워즈워드의 말대로 그는 사상의 낯선 바다를 홀로 항해했다. 뉴턴은 자기 자신을 바닷가에서 생경하고 유달리 예쁜 조개껍질을 주워들고 유심히 바라보는 어느 날의 소년으로 표현했다. 뉴턴이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있는 자기 방에 덧문을 닫아걸고 덧문에 지름 4분의 일인치의 둥근 구멍을 낸 다음에 구멍을 통해 가느다란 햇빛이 어두운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다가 반대편 벽에 비치는 햇빛이 둥글지 않고 기다란 직사각형인 것에 놀라는 장면은 나에게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그는 태양빛은 각기 다른 굴절 각도와 다른 성향을 지닌 혼란스러운 광선들의 집합체라고 표현했는데 무한한 색채들이 무색의 빛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그의 설명은 묘하게도 나에게는 어떤 매너리즘도 거부하게 만드는 힘을 준다. 나는 가끔 속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치는 상상을 한다. 저 안에 무한한 색채가 있다. 우리는 색채와 빛으로 둘러 싸여 있다. 나의 눈 역시 빛과 색채로 가득하기만을.

'신성함에 가까운 정신력과 독특한 수학 원리로 행성들의 항로와 혜성의 진로, 바다의 조수, 광선의 차이를 탐구해 과거 어느 학자도 상상하지 못했던 다채로운 자산을 이룩한 아이작 뉴턴 경 여기 누워 있도다'가 그의 비문인데 뉴턴과 찰스 다윈으로 이어지는 웨스트 민스터사원의 그 공간을 나는 인류 머리통의 장엄한 코너라 부르고 싶다. 팬스를 훌쩍 넘어가는 무거운 야구공의 spin을 보는 기분 같다고나 할까? (다윈이 국교회 사원 안에 안치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는 좀 더 따져 볼 일이겠지만)

▲ 아이작 뉴턴의 무덤. 무덤 주위엔 행성이 돌고 있다

좀처럼 런던과 케임브리지를 떠나지 않았던 뉴턴과는 달리 칼라하리 사막을 넘은 최초의 백인, 은가미 호수를 본 최초의 백인,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최초의 백인으로 추앙받는 이가 바로 뉴턴 앞바닥에 누워있다. 그는 미이라가 되어서 아프리카에서 실려 왔다. 선교사이자 최초의 국경없는 의사, 개인적인 NGO, 여행가, 탐험가 ,어느 정도 평화주의자, 더 많이 박애주의자, 황금으로 넘치는 엘도라도 말고 사랑으로 넘치는 문화적 엘도라도를 꿈꾼 철인,바로 리빙스턴이다.

나는 중앙아프리카, 배가 다닐 수 없는 좁은 강어귀에서 심각한 표정을 한 허름한 옷차림의 리빙스턴을 찾아내고 몇날 며칠 관찰했다. 그는 노예 무역에 관한 소문을 조사해보란 말을 하기도 하고, 빅토리아 시대 탐험의 성배라고 할 수 있는 나일강의 진짜 수원을 조사하러 나가기도 하고, 그저 할 일 없다는 듯이 정글 속을 터벅터벅 걷기도 하고, 어느 추장의 열병 걸린 갓난아이를 돌봐주기도 하고, 상심에 사로잡힌 열두살 미소년의 마음 속의 고통을 들여다보기도 하고,말라리아를 걱정하며 식이 요법을 개발하기도 하고, 진정한 복음은 백만번의 설교에 있는게 아니라 그들에게 단 한번만이라도 자유 무역의 길을 열어주는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고,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 목화를 길러 보면 좋지 않을까 평원의 흙냄새를 코로 맡아보기도 하고 어느 날은 그저 깊은 정글의 바람 앞에서 셔츠를 열고 손부채질을 하기도 하고 그리고 어느 날은 빅토리아 폭포라 명명하게 될 폭포를 발견하기도 한다. 강으로 곧바로 흘러가지 않고 계곡에 부딪힌 뒤 다시 하늘로 솟구쳐 물기둥이 되는 물줄기를 가진 폭포. 그 모습이 마치 연기 기둥 같아 보이는 폭포. 햇빛과 부딪힌 물방울들이 영원한 무지개를 만드는 폭포.

폭포를 발견한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부서지면서 같은 방향으로 떨어지는 물줄기의 눈같이 새하얀 얇은 면은 각각 그 거품의 핵에서..방출되는 마치 한 방향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작은 혜성들 같다.... 나는 그의 등 뒤에서 경외감에 사로잡힌 고귀하고 고독한 영혼인 리빙스턴에게 짐바브웨 말인 쇼나어로 부드럽게 속삭인다. '빅토리아 폭포의 현지어 이름은 '모시오아투나'예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영원히 솟아오르는 연기' 라는 뜻이에요. 낮엔 쌍무지개가 걸리고 보름달이 뜨는 밤엔 달무지개가 걸리는 폭포에요. 난 그이야기를 듣고 난 뒤 언제나 달무지개가 폭포에 걸려 오묘한 빛을 내는 태곳적 짐바브웨의 밤에 대한 꿈을 꾸기를 멈추질 않았어요.' 그리고 더 속삭인다. 당신은 어느 날 한 밤중에 뭐에 홀린 듯, 무슨 부름을 받은 듯 호수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거예요. 먼 훗날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 어스름 빛 아래 당신의 유언이 적힐 거예요. 당신은 이렇게 말할 거예요. '내가 쓸쓸이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세계의 이 오랜 폐단을 고치는 일에 이바지 할 ....모든 이에게 하늘의 귀한 은총이 내리길 비는 일이 전부다' 맞아요.당신은 쓸쓸히 죽어갈 거예요. 아프리카 사람들의 운명은 앞으로 오랫동안 더 한층 가혹해질거니까요. 하지만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이 죽은 뒤에 몇가지 좋은 일이 일어난답니다. 옛 노예시장은 사라질 거예요 .노예들이 째찍질 당하던 바로 그곳에 어쩌면 대학 같은게 생길수도 있지요. 지금 이 호수 근처에는 당신의 이름을 딴 리빙스턴이란 도시가 생길거예요. 그 도시는 선교사들의 낙원이 될거예요. 그 도시엔 150개나 되는 교회가 생길 거예요. 말라리아는 퇴치될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심장은 바오밥나무와 방울뱀의 보호 아래 이곳 아프리카에 남게 될거예요. 당신의 몸은 아프리카의 햇볕에 말려진 뒤에야 런던으로 가게 될거예요. 하지만 어느날 당신을 찾아온 떠벌이 속물 헨리 모턴 스탠리를 탕가니아 호수 근처 우지지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를 후계자로 삼는 일만은 이 아프리카를 위해서 하지 말기를…

▲ 데이비드 리빙스턴.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서 그리스도 같은 자기희생으로 치자면 리빙스턴 같은 복음주의자 노인을 아무도 따를 순 없을 것이다.
이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서 그리스도 같은 자기희생으로 치자면 리빙스턴 같은 복음주의자 노인을 아무도 따를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엇을 위한 순교자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빅토리아 시대? 신앙? 아프리카인? 인류의 양심? 말년에 그가 후회한 것은 딱 하나였다고 들었다. '나는 나의 아이들과 많이 놀아주지 못한 걸 가슴 깊이 후회한다.'그의 거창한 중단없는 삶에 비하면 너무나 인간적인 후회라서 가슴에 더 남는다. 나는 그의 유언장 앞에서 나의 심장은 과연 어느 땅, 누구의 가슴에 묻어둬야 할까 꽤 진지하게 물어보고 마음이 바빠졌다.

웨스트 민스터 사원은 박물관도, 아이콘 수집관도 아니고, 마담 투소 밀랍 인형관도 아니고 다름 아닌 교회이다. 내가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 갔을 때 그 공간 어디쯤에서 열릴 작은 예배를 알리는 안내 벽보를 읽었던 걸 기억한다. 그것은 영국에서 붙잡힌 어느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것이었던 걸로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 어쩌면 이런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영국의 어느 감옥에 갇혀있는 탈북자 출신 불법 체류자를 위한 기도.

오래전 런던의 어느 들판에 모여서 국왕의 알현을 요청하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분노하고 지친, 굶주린, 안식처가 필요한 현대판 순례자들이 다시 이 건물 앞에 이르러 오래된 무덤이나 스테인드 글래스의 빛 같은 것에 기대지 않고도 당대 사람들의 현명함 때문에 생긴 희망의 빛을 퍼 올릴 수 있다면 영국 국교회의 본산인 웨스트 민스터 사원은 영원할 것이다.

뜰에 나오니 근처의 회사원이나 학생인듯한 도시락족들의 점심 식사가 한창이었다. 카레, 노랗게 샤프란에 물들인 쌀, 마카로니같은 다국적 음식들이 다국적 연인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이 도시가 이젠 이민자들의 도시가 되었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인도계 아가씨와 영국계 청년이 도시락을 나눠 먹고 아프리카계 총각이 아시아계 아가씨와 청경채를 나눠먹는 오후의 대기 속으로 아찔한 꽃냄새,나무 냄새, 겨드랑이 냄새,다양한 억양의 영어와 알 수 없는 나라의 언어들이 뒤섞여 들어가는 가운데 나는 그만 어질어질, 한군데에 통 집중을 못하는 눈동자를 가진 현대판 배신의 마돈나로 바뀌어 웨스트 민스터 사원의 경건함을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그래도 빅벤을 바라보다 웨스트 민스터 사원을 다시 보니 뾰족한 첨탑 위로 헨리 7세의 기도하는 검은 손이 자꾸 떠오른다. 그는 무슨 기도를 올렸을가? 저 안의 무덤의 주인공들은 무슨 기도를 올렸을까? 그 대답을 찾아가는 것은 낭만적인 전설속의 위태롭고 어두운 비밀을 헤쳐 가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조금은 알고 나왔다고 생각한 저 안에 누워있는 사람들의 모든 삶도, 사실은 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삶만큼이나 여전히 비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햇살 아래서는 지금 막 새로 만들어진 웃음과 소곤거림, 횡단보도의 껌벅거림, 뛰려고 내미는 다리의 근육만이 진실이다.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당신 삶의 신화는?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 대영박물관1

기사입력 2009-03-06 오후 5:29:10

 

언젠가 누군가 자신의 꿈은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보내는 보물 상자 속에 들어가 보는 것이라고 말했던게 기억난다. 또 언젠가 어린 날의 운동장 느티나무 아래서 너 트로이에 대해 들어봤니? 조심스럽게 물었던 것이랑 어느날 맥주를 마시면서 람세스 2세와 그의 히타이트 족 아내, 아부심벨 신전과 그들이 광적으로 꿈꿨던 불멸, 그리고 영화 미이라에 나오는 파라오의 정부 아낙수나문이 실제 인물이었을까? 같은 이야기를 나눴던게 기억난다. 그런 기억 중 언제나 내 마음에 서늘한 한 줄기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내 나이 열세살 때 우연히 읽었던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나오는 리디아왕에 관한 것이다. 아내의 아름다움에 취한 왕은 자신의 신하에게 몰래 아내의 나신을 볼 것을 명하고 밤에 드디어 신하는 왕비의 조각 같은 몸을 보게 되는데… 이 장면은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가장 운명적인 장면으로 재탄생한다. 모닥불이 타오르는 사막의 밤에 모두들 둥글게 모여앉아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아름답고 지적이고 강한 여인이 리디아의 왕비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던 남자 중 하나가 그녀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 아우구스투스의 흉상. 스스로 신이라 부르는 것에 결국 성공한 작고 나이든 남자의 슬픈 듯 겸손한 얼굴!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주는 땅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를 신비감에 푹 빠져들게 한다.

나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가 죽은 후 안토니우스를 사로잡기 위해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진주를 식초에 녹여 포도주에 넣어 마셔버리는 장면, 결국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치마폭에 빠졌다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는 것, 살아남은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로 끌려가 개선 행진에서 웃음거리가 되기 전 뱀에게 칭칭 감겨 자살(자살이냐 타살이냐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나는 자살 쪽에 은근히 기대를 건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피를 이어받은 파라오 아닌가?) 하는 것,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원로원에서 받고 달력의 8월 달 속에 영원히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까지의 이야기에 깊숙이 매료되는데 그 아우구스투스의 흉상 중 하나를 이곳 대영 박물관에서 봤을 때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가 꿈꿨으나 이루지 못한 것, 즉 스스로 신이라 부르는 것에 결국 성공한 한 작고 나이든 남자의 슬픈 듯 겸손한 얼굴을 봤을 때, 나는 그만 흉상의 딱딱한 피부를 벗겨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싶은 유혹을 느낀 것이다. 일찌기 로마인이 두려워 한 사람은 딱 둘뿐이었는데 하나는 한니발이었고 하나는 가냘픈 여인,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였던,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집트의 잉여 농산물이 로마를 풍성하게 해주었던 그 시절이야기요!

대영 박물관은 길을 잃고 헤매기 좋은 곳이다. 이곳엔 '원조'들이 모여서 스스로의 가치를 두고 고결한 경쟁을 벌이는 곳이고 오래된 신들이 중단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곳이다.

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을 대영박물관의 44개 이오니아식 계단을 앞에 두고 생각해냈다. 레오나르도는 모델을 구하지 못해 쩔쩔 매는 제자들에게 젖은 담벼락을 가리키면서 저것을 모델로 취하게,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니,전투 장면이든 여인의 몸이든, 동물의 몸이든. 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대영박물관이 내겐 초현실주의 공간으로 느껴지는 것은 천이백만 점 유물 들을 그저 박물관에 보관중인 예술 작품으로만 본다면 대영 박물관은 우리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진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이 유물들 중 어느 하나가 나에게 젖은 담벼락이 되어주길 간절히 원하는데 우리가 매끈한 여인의 다리를 털장갑을 끼고 만지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듯 이 유물들을 감히 질문 없이 대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우리는 유물을 통해 유물 너머 어머어마한 문명과 도시들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데 이 유물들은 CG의 테크닉도 아니고 상상으로 가득찬 문장만도 아니고 어떤 구체적인 존재가 꿈을 안고 믿음으로 땅에 다리 붙이고 밥 먹으면서 고민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떨리게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한 가지 주문을 외면서 대영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당신의 소원을 조심하라 -이루어질지도 모르니까'
'당신의 소원을 조심하라 -흔적을 남길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인디애나 존스 4>에 나오는 크리스탈 해골과 길가메쉬 서사시, 아프리카 베닌의 흑인 예술가. 미이라, 수메르의 점토판들 사이에서 곧 길을 잃고 말았다.

나는 제일 먼저 그 옛날 이혼의 슬픔에 잠겨 여행을 떠났던 아가사 크리스티가 고고학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던 수메르 문명의 우르 (성서의 아브라함의 고향인 것으로 짐작되기도 하는 곳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곳의 폐허에서 아가사 크리스티는 귀를 기울여 수로를 따라 흐르던 강물이 햇빛아래 출렁대는 소리, 그 옆에서 밀이 황금색으로 일렁대는 소리, 지구라트의 그림자를 등 뒤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를 다 들었을지도 모른다. 우르 발굴의 최대 화제작은 푸아비란 이름을 가진 왕비 무덤이었던 것 같다.

"푸아비 여왕은 죽음이 다가오자 먼저 간 남편 곁에 묻어달라고 요청했다. 사람들은 구덩이를 파고 선왕의 무덤 위에 여왕의 묘실을 마련했다. 여왕의 손 옆에는 황금 술잔이 놓여있었다… 금과 은 청금석, 홍옥수, 마노 따위를 엮은 목걸이가 아직도 여왕의 목에 걸려 있었다. 입성은 다 썩어 없어졌지만 한 때 그 옷차림을 장식했던 황금 부적들은 이제 여왕의 초록빛 아이쉐도우가 가득 들어 있는 그릇과 나란히 놓여있었다… 여왕은 황금 빨대로 음료를 마실 수 있고 곁에서 악사들이 연주하는 하프 소리도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스티븐 버트먼, <낭만과 모험의 고고학 여행> -우르 편)

그것은 은으로 만든 리본이었다. 하지만 그 리본은 여인의 머리에 달려있지 않고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여인은 리본을 똘똘 말아서 주머니에 넣은 채 집에서 나왔는데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리본의 주인은 왜 리본을 머리에 달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녀는 장례식에 늦는 바람에 제대로 몸치장을 할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장례식에 늦을까봐 걱정한 나머지 걸음을 서두르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고 하프가 흙먼지 속으로 천천히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스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낭만과 모험의 고고학여행 -우르 ,어느 순장당한 여인의 몸차림)

일식과 월식에 관심을 갖고 있고 점성술을 믿는가? 당신의 별자리를 오늘의 운세난에서 읽어보는가? 맥주를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수메르 문명의 리듬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 모두를 우리에게 알려줬다. 수메르 문명에서 원의 중심각은 360도이고 하루는 24시간이고 한 시간은 60분이고 바퀴는 굴러갔고 학생들은 분수와 제곱을 배웠다.

우르는 수메르 문명에서도 가장 번창했던 초기 도시 국가였지만 메소포타미아의 강들이 물줄기를 바꾸는 바람에 버려져 한때는 늑대들의 차지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1927년과 1932년 사이에 대영박물관 발굴팀이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사이 도시의 쓰레기와 무덤들 사이에서 우르를 발굴해 냈을 때 그 화려함에서 최고였던 것은 푸아비 왕비의 무덤이었다. 나는 그녀의 시신 곁에 있었다던 초록색 아이쉐도우 한 통의 존재에 계속 마음이 쓰인다. 죽어서도 아름답고 싶은 마음이 수천 년 전의 여인과 나를 연결시켜준다.(나는 그날 그녀와 나의 인간적인 욕망을 위해 초록색 아이쉐도우를 두 통 샀다. 한 통은 쓰고 한통은 묻으려고) 무덤에서 가장 놀라왔던 것은 순장당한 사람들이었다는데 도대체 누가 왜 순장 되었을까? 그것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나는 스키타이족들의 정신없는 닥치는 대로의 순장 습관에 대해선 들어봤지만 우르의 순장 습관에 대해선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순장당할 여인이 주머니에 말아 넣고 나온 리본 한줄기는 그래서 주인과 함께 영원히 수수께끼다. 그녀는 자신이 순장당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알았더라면 리본이나 몸치장 따위는 상관없지 않았을까? 아니면 알았기 때문에 리본이나 몸치장이 더 중요했을까? 나는 대영 박물관에서 보드게임, 전승 기념판 ,황금 하프 같은 우르 무덤 출토물 들을 보았는데 그 모자이크 상감 조각 속에서 왕은 신뢰하는 신하들과 수메르 군인에 둘러싸여 한낮의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죄수들은 왕 앞에 끌려가 고개를 조아리고 자비로운 사면을 기다리고 있고 악사들은 대기 중이었다. 그들 모두가 우르에서 보낸 한 나절 찬란한 오후다. 이 수메르를 물리친 것으로 알려진 왕이 바로 바빌론의 위엄 있는 왕, 함무라비 법전으로 잘 알려진 함무라비다.(함무라비 법전의 효력은 지금도 살아 있어서 이란에서 스토커에게 화상을 입어 실명한 여인이 함부라비 법의 눈에는 눈의 정신을 들어 스토커도 실명시킬 것을 요구했고 재판이 그녀의 손을 들어준 것 때문에 국제 사회가 논란중이다. 법의 집행을 빌미로 한 또 하나의 범죄라는 의견이 인권 단체 쪽에서 강력하게 제기되었는데 스토킹한 남자는 곧 눈에 산이 부어질 예정이다. 그러나 당시 함무라비 법전의 의미는 지금과 달랐을 것 같다.야만의 상태에서 어떤 식으로든 질서가 부여되는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는게 옳지 않을까 싶은데..)

▲ 푸아비 왕비의 무덤에서 발견된 원통 인장.

우리는 대영 박물관에서 이라크전을 겪은 바그다드가 완전히 잃어버린 것까지 포함해 메소포타미아 번영의 천일야화를 한도 끝도 없이 보거나 들을 수 있다.수메르,바빌로니아,히타이트,아시리아,페르시아.정복자가 바뀌면 신화도 바뀌었지만 그래도 신들은 언제나 두 개의 강물줄기 사이에 있고 전사들은 갈대밭이나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습지에서 싸우고 사람들은 바벨탑 같은 지구라트를 세우고 왕들은 험악한 산 같은 천연 요새가 없는 평야의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끝없이 벽을 쌓고 사자를 조각하고 문을 달았다. 메소포타미아 주변엔 돌이나 나무가 거의 없어서 점토로 된 유물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어떤 해의 보리 수확량을 기록한 문자판이나 맥주의 성분을 적은 것, 기원전 2600년경의 무덤에서 나온 도장 같은 것들이다. 그들이 그 도장으로 무슨 계약을 맺었을까 상상해 보는 건 즐겁다. 누가 어떤 이유로 얼마나 빚을 졌을까? 언제 몇 배로 갚을 것인가? 그들은 손바닥 만한 점토에 갈대나 상아로 만든 철필로 쐐기 문자를 정성껏 기록했을 것이다. 점토판 2만 5천개를 수집해서 편지, 의학적 자료, 하늘을 관찰한 것까지 모조리 왕궁의 도서관(바로 길가메쉬가 발견된 곳)에 보관하게 했다는 아시리아 제국의 아슈르바니팔 왕,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네베(이라크 전쟁으로 유명해진 모술이란 도시근처)의 왕국 성벽을 장식하던 사자 두 마리. 사자 사냥, 그리고 이국적인 동식물로 가득 차 있었던 왕궁 옆의 공원. 아시리아 멸망 후 들어선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 바빌론(신들의 문 이라는 뜻이었다).신들의 문에 인간의 박물관을 만들어서 제국 영토의 끝과 먼 지역에서 구한 물품이나 조각상을 보관하도록 했다는 위대한 마지막 왕 네부카드 네자르. 그는 왕궁이 모든 사람의 놀라움, 제국의 중심, 빛나는 거주지, 장엄한 주택이길 꿈꾸며 몽환적인 푸른색으로 궁전을 꾸미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바빌론의 많은 이야기 중 공중 정원 이야기는 언제나 경이롭다. 먼 이국 동방 메디아 출신의 아내 아미타스 여왕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왕비가 언제고 고개를 들면 고향의 푸른 언덕을 상상할 수 있도록 왕의 명령으로 만들어졌다는 공중 정원.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였던 그 정원은 이제 이라크 전쟁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신바빌로니아 왕국은 곧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고, 그 페르시아 제국은 다시 알렉산더에게 무릎을 꿇어, 다리우스 황제의 인간의 상상 이상이었다는 지상 최대의 화려한 궁전과 애통함은 유물이 되고 알렉산더 대왕 역시 바빌론에서 죽음을 맞았다. 알렉산더의 시신은 당시 바빌론의 관습대로 황금 꿀에 담겨져 마케도니아로 호송되었는데 그때 그의 황금관을 실은 수레를 끌던 64마리의 노새들은 각각 금관을 쓰고 움직일 때마다 딸랑딸랑 황금 종소리를 냈다고 알려졌다. 그의 시신 행렬은 고향에 이르지 못하고 이집트에서 멈췄는데 그의 친애하는 장군 프톨레마이오스와 후손들이 이집트 땅 어딘가에 몰래 몰래 숨겨두어서 왕조의 멸망과 함께 알렉산더왕의 시신은 영원히 비밀 속에 묻혀 버렸다. 징기스칸의 무덤이나 알렉산더의 무덤 둘 중 하나가 발견된다면 세계는 다시 한번 경이로움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페르시아의 번영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알 수 있는 역설적인 사례로는 이웃 나라 이오니아의 식민지에 살던 천재 학자 데모크리토스의 말을 떠올리면 좋을 듯하다. 그는, 나는 페르시아의 왕이 되느니 차라리 하나의 인과율을 터득하는 쪽을 택하겠소이다 라고 했다. 페르시아의 부귀 영화엔 눈길 한번 안주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에 몰두해 있는 가난한 데모크리토스를 상상해 보는 것도 좋긴 좋지만 솔직히 다리우스 황제의 궁을 한번 보고 싶기도 하다.

지금 메소토파미아 지역은 대부분 이라크의 땅인데 만약 우리가 어느 날 바그다드 사진을 보게 된다면, 폭탄과 공습으로 얼룩진 폐허 너머 그 앞에 여전히 흐르고 있는 강이 바로 티그리스 강이라 생각하면 된다. 나는 언제고 한번 하늘에서 티그리스 강을 내려다보고 싶다. 그 강이 물줄기를 바꾸지 않고 지금도 지지하는 도시의 상처받은 모습을. 그 강은 혹시 인간의 눈물이 넘쳐흘러 물줄기를 바꾸지 못하고 있는건 아닐까?

어느 날 런던 사람들이 대경실색할 뉴스를 들은 것도 바로 이 메소포타미아 문명 때문이었다.1872년 12월 3일 쐐기 문자를 연구하던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 연구원이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성서의 대홍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성서의 노아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일 수 있다니? 그렇다면 성서가 무언가를 베꼈단 말인가? 성서는 오로지 성령의 힘만으로 일필휘지로 기록된 것 아닌가? 데일리 델레그래프 신문사는 재빨리 그 젊은 연구원에게 재정 지원을 해주고 그는 득달같이 티그리스 강변으로 가서 이듬해엔 대홍수의 잃어버린 점토판 문서를 잔뜩 찾아내 대서특필된다. 그 때 그가 찾아낸 길가메쉬 서사시의 점토판 역시 대영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오랫동안 종교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노아의 홍수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를테면 지구라트는 바벨탑에 영감을 주었는가? 창세기의 6일간의 천지 창조 역시 메소포타미아 창조 서사시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니네베 유적 왕실 도서관에서 나온 왕들의 명단은? 논란거리는 많았다.

나는 언젠가부터 인류 최초의 영웅이라는,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인 길가메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종교적인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아마 출발은 전적으로 이 묘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성난 이마
들소의 눈
청금석 수염
보리 같은 머리털
멋진 손가락의 소유자였다
어른이 되었을 때 그의 남성미는 완벽했으며
세상 최고의 남자였다
그는 세상 모든 곳을 둘러 보았으나
우르크 성으로 돌아왔다
긴 여정이었고 피로에 쌓여 몹시 지쳐있었다
그가 돌아오자 곧장 이 이야기를 돌에 새겨놓았다'
(길가메쉬 서사시 중에서)

'옛날에 옛날 옛적에 먼 옛날 옛밤에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신들의 모임에서 인간의 씨를 홍수로 쓸어버리기로 결정한 후에' 그러니까 대홍수 이후에 영웅이자 변강쇠, 반신반인 왕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길가메쉬였단 것이고 그 길가메쉬의 내용은 앞뒤 거두절미한다면 서사시 안에 거의 완벽하게 이렇게 정리되어있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
그렇지만 지금도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
한 친구를 사랑하다가 그 친구를
잃은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친구를 다시 살려낼 힘이
자기에게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는 이야기'

(<길가메쉬 서사시> 중에서)

▲ 길가메쉬 서사시 점토판.
길가메쉬 서사시의 서글픈 인간적인 결말은 어느 날 하루 몸이 아픈 친구와 자기 자신을 위해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현자에게서 영생의 식물을 구한 길가메쉬가 깜빡 잠이 든 사이에 뱀이 그 식물을 먹어버린다는 것이다.(그래서 뱀은 젊어지느라고 매번 허물을 벗는다는 설이 등장한다) 잠에서 깬 길가메쉬는 친구를 구하는 것도, 영생을 누리는 것도 자신의 운명이 아니고 오직 이 도시의 성벽만이 자기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성벽을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이것이 야단스럽게 인생을 즐긴 영웅의 마지막이다. 그가 헤라클레스처럼 하늘에 올라가 하늘의 별이 되었단 이야기는 못 들어봤어도 나는 밤길에 하늘의 별을 볼 때 가끔 수메르인들 생각을 해보곤 한다. 수메르인들은 별들을 그의 병사로 보았고 은하수를 왕도라 보았고 훌륭한 여자는 별들의 움직임을 담는 그릇으로 보았다. 그들은 뛰어난 과학자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어린 시절 할머니 댁으로 가는 밤길을 혼자 걷다가 밤하늘의 신비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허둥지둥 대던 내 혼란스러우면서도 경외감을 품고 있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따뜻하다. 그 때 나는 밤하늘이 내 머리위로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것과 별이 무슨 상관이 있지 않을까 몰두해 내가 모르는 보이지 않는 끈이란 게 하늘에 있지 않을까 상상했었던 것 같다. 강을 숭배하던 바빌로니아인들은 민물과 짠물의 신을 만들었고 마른땅은 신이 물 위에 멍석을 깔아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곳이 얼마나 비옥한 삼각주인가를 아는 우리는 물리적 힘을 아직 모르던 시대 오래전 사람들도 우리랑 같은 관심사를 갖고 있었단 것을 알게 된다.

어쨌든 노아의 홍수와 수메르 길가메쉬 중 누가 승자일까? 많은 현명한 학자들은 자! 자! 차분하게 들으세요. 원래 빙하기의 끝에는 세계 도처에서 홍수가 아주 많았답니다. 쾅! 쾅! 쾅! 이렇게 결론 내렸다.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당신도 '영원'을 꿈꾸는가?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 대영박물관2

기사입력 2009-03-13 오후 2:10:01

 

하지만 대영 박물관에서 변함없이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은 이집트의 미이라다.

나는 미이라를 보기 전에 이집트의 건축왕, 가장 큰 동상과 아부심벨 신전 건축으로 영원히 역사 속에 남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가장 자기선전에 능했던 인상적인 군주 람세스 2세의 흉상 앞에 서 보았다. 이 쾌락적인 왕은 참으로 많은 것을 누렸다. 그는 여러 부인들과의 사이에 79명의 아들과 59명의 딸을 낳았고 자식들을 신전 벽에 새겨 넣었다.그가 그 많은 신전을 지을 때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어느날 모세와 아론은 람세스 2세를 찾아가 이제 그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로 떠날 것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이 바로 출애굽기 5장의 내용이다. 기원전 1300년경의 일이니까 330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떠났지만 곧 후회한 왕은 이집트 병거 600대를 동원해서 추적하게 하였다. 이 명령은 신하들 사이의 편지로 전달되었는데 그때 그 편지가 바로 'papyrus anastasi I'란 이름으로 대영 박물관에 남아 있다. 언젠가 나는 이 3300년 전 서신의 내용을 읽은 적이 있는데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황급한 시기의 편지 사이에 이런 글들이 섞여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자네는 담장 없는 포도원에 들어가 포도를 지키고 있는 어여쁜 소녀를 발견하고 소녀는 자네를 편안하게 생각하고 자네에게 자신을 허락할걸세. 그러면 곧 자네는 사람들에게 잡히고 망신당하겠지. 자네는 도와달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못 들은척하겠지'

친구에게 다가올 불행을 조롱하는 건지, 친구에게 행여라도 좋은 일이 있을까봐 내심 질투하는 건지, 아니면 염려를 담아 진지한 경고를 하는건지 애매한 3300년 전의 편지를 읽다가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들의 우정은 아리따운 여자 앞에선 예나 지금이나 여우처럼 교활하며 복잡하니 믿을게 못된다.

▲ 이집트의 아부심벨 신전.

팔목에 팔찌를 주렁주렁 찬 이집트 미인들, 세금을 세는 관리들, 지팡이를 든 사제들, 구불구불한 나일강과 사막, 춘분과 추분 때 석양의 햇빛이 그 머리를 통해 신전 안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스핑크스, 대추나무와 낙타. 람세스란 이름을 가진 파라오들, 이집트 최고의 미인 왕비이자 여제사장이었다던 네페르티티에게 입을 맞추는 이크나톤 왕, 햇빛 속에서 등장하는 태양신 아톤신, 어스름한 신전의 불빛과 어둠 속에서 선택받은 자에게만 나타나는 아몬신, 지하 세계와 죽음 곁에서 죽은 자들의 여행을 돕는 가장 위대한 부활의 신인 오시리스신. 오시리스신의 아내인 이시스, 시기심 때문에 오시리스와 싸움을 벌이고 결국 그를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그의 동생인 세트신, 재칼의 머리를 가진, 최초의 미이라를 만든 아누비스신, 잠시 살아난 오시리스와 이스시가 사랑을 나눠서 생겨난 매의 머리를 가진 하늘의 신이자 파라오의 보호자인 호루스 신, 아몬신의 살아있는 상징이란 뜻의 투탕카멘, 석회암 파편에 적힌 수천년 전의 연애시 시누혜, 죽은 이의 시중을 드는 소녀 인형 샤부티들의 이야기는 하나로 흘러간다. 바로 왕들의 죽음과 미이라이다.

이집트 왕들의 모든 피라미드와 미이라를 합해서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영원한 BOY KING 투탕카멘일 것이다. 그의 짧은 인생은 형인 이크나톤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크나톤은 막강해진 사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다신교를 몰아내고 유일신을 숭배하는 이집트식 종교개혁을 일으켰는데 그때 그가 선택한 신은 아톤 (태양의 회전 이란 뜻) 이었다. 밝고 강력하게 빛나는 태양신 아래서 예술 작품도 부드러워져서 왕은 왕비에게 몸을 기울여 키스하고 왕가의 가족들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에겐 해결하기 어려운 마음속의 혼란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건 죽음과 부활, 영생은 누구에게 맡겨야 하는가? 였다. 그들이 미이라를 계속 만드는 한 죽음의 신인 오시리스는 포기할 수 없었다.(오시리스가 죽음을 극복했다면 이집트인들은 자신도 죽음을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오시리스야말로 수천년 동안 이집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이었다) 이크나톤이 죽자 불만에 가득 찼던 사제들이 이크나톤의 유일신 종교개혁을 싹 무시하고 꼭두각시처럼 내세운게 바로 어린 투탕카멘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 투탕카멘은 아톤이 아니라 아몬신의 살아있는 상징이란 뜻이다. 투탕카멘이란 이름으로 잠깐 통치하던 소년왕은 별 업적 없이 열여덟 나이쯤 죽어 버렸는데 당시 이집트의 번영으로 보아서 틀림없이 화려했을 그의 무덤 흔적은 아주아주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22년. 다른 발굴 작업을 하던 인부들의 막사, 지하 16계단 중 첫 번째 계단에서 봉인된 입구 하나가 발견 되었다.봉인된 문을 열자 또 봉인된 문이 나왔다. 고고학 역사상 가장 센세이셔널한 순간이라고 이야기되는 장면이다. 그 봉인된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가자 5000점의 물건으로 꽉 찬 무덤 한가운데 투탕카멘이 잠자듯 손길 한번 타지 않고 온전히 수천년 전의 고요 속에 나타난 것이었다. 향수, 구운 오리고기, 송아지 고기, 금세공한 슬리퍼, 그가 더울 때 부칠 타조 깃털 부채, 몸을 움직이고 싶을 때 탈 전차의 부품, 어렸을때 가지고 놀던 배, 금으로 만든 호신용 단검.3밀리미터 두께의 황금관. 그리고 저기 저 무덤 제일 안쪽 깊숙한 곳에 있던 것이 바로 아마포 붕대로 감싸진 몸에 황금 마스크를 쓴 그의 미이라였다. 그의 무덤 안에 있던 수많은 물건들의 목록을 읽어보았지만 다른 무엇도 황금 가면의 이마께에 놓여있었다던 한 묶음의 화환만큼 내 마음을 움직이진 못했다. 누군가 몸을 숙여 그의 이마에 마지막 키스를 하고 꽃다발을 두었을 때 그 꽃이 3천년 후에나 빛을 볼 것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 꽃다발에 금실이 좋았다던 왕비의 눈물 한 방울 떨어졌을까? 격식을 차린 요란한 예술 작품 속에서 한 다발의 수수한 꽃다발은 이집트 왕족을 어쩐지 인간적으로 가깝게 느끼게 만든다.당신보다 이쁜 것은 못봤어.이런 고백을 하던 가공되지 않은 마음.

▲ 대영박물관에 있는 투탕케멘은 검은 돌로 만들어져있다. 투탕카멘 피라미드에서 나온 유물들은 이집트 밖으로 반출되는게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인데 바로 그 점 때문에 하워드 카터의 투탕카멘 발굴팀은 도덕적 칭송을 받는다.
나는 투탕카멘을 생각하면서 이집트인의 눈으로 파라오의 방에 어둠이 오는 것을 상상해 본다. 밤이 되어 지하 세계인 명계에서 태양빛이 은은히 올라와 파라오의 황금 마스크에 반사될 것이다. 호출 받은 파라오는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 조각배에 올라타 그 밤 스스로 태양신이 된다. 그는 자신이 너무 일찍 떠나온 테베와 나일강과 사막을 홀로 빛나며 내려다 본다. 무엇이든 빛나는 것은 뭔가를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빛나는 그는 무슨 염원을 반사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대영 박물관에 있는 투탕카멘은 황금빛이 아니라 검은 돌로 만들어져 있다. 투탕카멘 피라미드에서 나온 유물들은 이집트 밖으로 반출되는게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인데 바로 그 점 때문에 하워드 카터의 투탕카멘 발굴팀은 도덕적 칭송을 받는다.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를 보지 못해 아쉬운 사람들은 남자 수염을 단 하트셉수트란 세계 최초의 여왕 조각을 찾아봐도 좋을 듯하다. 그녀와 이크나톤, 투탕카멘이 속해 있던 왕조 는 이집트 역사상 권력과 부, 영향력이 최정점에 달했던 멋진 시기였으니까.

사실 왕들에게만 미이라만 있는게 아니었다. 왕, 신하, 부유한 사람, 서민, 심지어 황소. 모두에게 있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죽음을 눈앞에 보는 순간에도 그들 자신을 쾌락에 내맡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평소에도 잔칫상 위에 관을 올려놓는 관습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듣자마자 그 이야기에 대단히 열광했다. 찰나를 즐기자는 생각을 밥상머리에서도 그만큼 철저하게 실천한 민족이 또 있었을까? 찰나를 즐기면서 동시에 영원한 삶에 그렇게 집착한 민족이 또 있었을까? 다시 지상에 돌아오길 그렇게 열렬히 꿈꾼 민족이 또 있었을까? 나일강과 사막이 삶과 죽음의 상징처럼 나란히 펼쳐져 있던 나라에서 삶과 죽음은 더 복잡하게 가시적으로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미이라를 보면 묻고 싶어진다. 넌 살아있는 동안 누구였느냐?

미이라가 된 영혼은 훗날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상형 문자로 적힌 친절한 안내서의 도움을 받는데 그 안내서는 우리가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자의 서이다.사자의 서의 핵심 내용은 42가지 죄에 대해서 42명의 신 앞에서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는 친구의 재산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저는 고아의 재산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도 울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습니다..같은 것들이다. 영혼이 신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도덕적 결백을 맹세하면 그의 심장은 접시저울 위에 놓인다. 그리고 접시저울의 또 한쪽 접시에는 진실을 나타내는 타조 깃털 하나가 놓여있다. 심장이 타조 깃털만큼 가벼우면 영혼은 오시리스와 함께 내세의 쾌락을 영원히 누릴 수 있지만 심장이 죄로 무겁다면 죽은 자의 심장을 먹어치우는 괴물이 그 심장을 낼름 먹어 버린다. 그래서 사자의 서에는 심장에 대한 주문도 들어있다. 오! 함께 많은 세월을 겪은 심장아! 내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증인으로 나서지 말아라. 내 말에 귀를 좀 기울어 주렴.

▲ 이집트의 사자의 서 중 일부.

이런 이집트인들의 심장에 대고 외치는 안타까움을 현대 과학이 도와줄 수 있을까?

1985년 스웨덴 웁살라 대학의 과학자들은 기원전 400년경의 한 살짜리 사내아이 미이라에서 유전 물질을 추출해 복제했다. 그들은 사내아이의 유전자를 키우는데 성공했다. 죽은 이집트인의 체세포 염색체를 살아 있는 난자에 집어넣은 다음 대리모의 자궁 속에 이식한다면 그 염색체는 아기로 태어날 것이다. 기원전 400년 전 나일강변에서 태어난 그때와 똑같은 아이로. 그렇게 된다면 한 살짜리 사내아이를 미이라로 만들었던 엄마의 정성은 보답 받게 되는 것일까? 언젠가 미이라의 얼굴을 현대 과학으로 복원해 낸 사진을 본 일이 있었다. 두개골과 치아가 얼굴 윤곽을 제공해주니 거기에다 얼굴 조직이 갖는 평균 깊이를 바탕으로 밀랍으로 살을 올리고 가짜 속눈썹을 붙이고 유리눈을 끼우고 검은 뱅 스타일 이집트 가발을 씌워보면 대략 비슷한 얼굴을 만들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미이라 뒤에서 나타난 얼굴은 사춘기도 채 안 된 나 어린 소녀의 것이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그대로 뛰어나가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나일강변을 뛰어다닐 것만 같았다. 그런데 등 뒤에서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를 수 없다.

대영박물관의 모든 미이라 중 사람을 가장 헷갈리게 하는 것은 아르테미도루스일 것같다. 그는 이집트에 사는 그리스인이었는데 그의 용모는 어느 이집트인과도 닮지 않았다. 그의 고향인 파이움 가까운 곳에는 파로스의 등대가 깜박깜박 빛나는 위대한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있었다.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조상은 그 어느날 알렉산더 대왕을 위해 싸웠을 것이고 그 도시에 그대로 남아 이집트 여인들과 결혼해 이집트의 종교와 이집트의 죽음 방식을 받아들였을 것이란 것 정도다. 어느날 파이움을 정복한 로마 사람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집트인인가? 그리스인인가? 어느 날인가는 화가가 와서 아르테미도루스의 얼굴을 그렸을텐데 그는 죽은 뒤에 자신의 관을 그 그림으로 덮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초상화가 앞에 서있던 날로부터 몇 년 뒤에 몇 살의 나이로 그가 죽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미이라를 본 사람은 누구나 명료하고 큰 눈으로, 볼륨감 가득한 얼굴로 무슨 일 있나요? 하고 묻는 영원히 젊은 절정기의 눈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그의 미이라 관의 그림에서 오시리스신은 그의 영혼을 다시 깨워 지상으로 돌려보내려 하고 있는데 그 밑엔 엉뚱하게도 그리스어로 이런 말이 써있다. FAREWELL 아르테미도루스! 우리는 그를 보내줘야 하나? 붙잡아야 하나? 어쨌든 그 시기의 파피루스들이 대영 박물관에 많이 남아있으니 이젠 우리 파피루스를 만날 때다. 파피루스들은 탈 때 연기 냄새가 좋아서 이집트 농부들이 연료로 많이 썼다고 들었다.

▲대영박물관 최고의 자랑거리인 로제타석.

대영박물관 최고의 자랑거리인 로제타석에서 칭송한 왕은 포틀레마이오스 5세이다. 그는 투탕카멘 왕보다 더 어린 나이인 여섯 살에 왕이 되었다. 그는 사원에 관대했기 때문에 이집트의 신관들은 그를 칭공하는 송덕문을 잔뜩 작성했다. 송덕문은 로제타석에 똑같은 내용으로 세 번 기록됐다. 두 번은 이집트 문자로,나머지 한번은 그리스어로 .이것을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이 로제타 마을에서 발견한 뒤에야 제대로 된 이집트학이란게 생겨나고 암호는 해석되고 학자들은 파피루스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적어놓은 파피루스의 사연들을 읽어보면 가슴이 어쩐지 뭉클하다.

"저는 노예로 팔려가게 될까요?"
"제가 부자가 될까요?"
"제가 이혼할 운명입니까?"
"누군가 저를 죽이게 될까요?"
"제 자식들이 저와 화해할까요?"

그들은 이 파피루스를 들고 신탁으로 뛰는 가슴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귀를 쫑긋거리며 듣고 있는 그들의 귀에 신탁은 알듯 모를 듯 은유로 가득 찬 말들을 들려줬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새벽길을 걸어 금성을 보면서 자신의 도시 속으로 돌아갔을 건데 그 풍경이 내겐 다시 파피루스속의 한 장의 이집트 그림으로 남는다. 질문을 품고 자신이 출발했던 곳으로 걸어 돌아가는 것. 나 역시 비슷한 생각에 빠져 그 옆에 맨발로 동행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걷는 내 눈앞엔 세상에서 가장 긴 강인 나일강이 흐르고 그 강엔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화강암 오벨리스크를 실어 나르는 배가 떠있고, 그 강엔 곧 올 새벽의 요란스러운 흥정을 위해 선잠깬 상인들과 어부들이 모여들고 그리고 강 옆의 집에선 지상에서 착하게 살면 꼭 다시 살아온다고 믿는 선량한 사람들이 새벽잠을 자고 있는, 그런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글자로 이뤄진 시 라고 표현한다. 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어려서 엄마에게 처음 붓글씨를 배울 때 큼직한 붓으로 제일 먼저 그려본게 한자의 부수들이었다. 마음 심이나 손 수 ,눈 목 같은 글자들에 대해 엄마는 이것은 손으로 더듬어 만져야 알 수 있음을 뜻하는 글자이고 이것은 마음으로 헤아려야 알 수 있음을 뜻하는 글자이고 이것은 열심히 지켜봐야만 알 수 있음을 뜻하는 글자라고 오래 오래 설명해 줬었다. 다른 사람의 세계로 이동하는 길잡이가 '시'라고 막 학교에서 배웠던 나는 글자가 그렇다면 시 로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 대영박물관의 미이라. 유럽, 미국에서는 미이라가 동양적 신비와 에로의 대상으로 폭력적으로 다뤄진 시기가 있었다.

한가지 이집트 미이라에 관해서 꼭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유럽, 미국 사람들에게 미이라는 동양적 신비와 에로의 대상으로 폭력적으로 다뤄진 시기가 존재했었단 것이다. 미이라 사기꾼, 미이라 흥행사, 미이라 밀매꾼까지 존재했었다. 외교관들도 한 덩어리는 대영박물관에 또 한 덩어리는 루브르 박물관에 또 한덩어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미이라를 챙긴다는 말이 돌았었고 그건 사실이었다. 심지어 미이라를 갈아서 그 분말을 약처럼 마시던 때도 있었다. 나폴레옹은 나일강 전투에서 패해 빠져 나올 때 미이라 두 개를 챙겨서 하나는 자신이 갖고 하나는 아내 조세핀에게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로 모든 이집트 여행자들은 자신의 모험과 용기의 상징으로 미이라를 기념품으로 갖고 싶어 했다. 이집트를 여행했던 플로베르도 자기 책상위에 미이라 발 조각 하나를 놔두고 있었다고 한다.(루앙에 살던 플로베르의 꿈은 아랍에 가서 동정을 잃는 것이었다) 이런 이상스런 이집트 열풍에 관한 이야기 중 으뜸은 미라의 붕대를 벗기고 내장을 보이며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된 순회 흥행사 글리든에 관한 것이다. 그는 어느날 대충 미이라 몇 구를 구한 다음에 자신이 상형 문자를 해독해 보니 그 미이라는 지체 높은 사제의 딸이었다고 뻔뻔스럽게 선언했고 언론은 아예 그녀를 왕족의 공주로 둔갑시켰다. 공주 미이라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밝히겠다고 선언한 강연회의 마지막 날,드디어 스트립쇼를 연상시키는 조명 아래 공주 미이라의 붕대는 한꺼풀 한꺼풀 풀려나가고 송진 덩어리는 제거되고 마침내 그녀의 허리를 두르고 있던 마지막 아마포 한 조각마저 파르르 벗겨졌을 때, 관객들은 두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성인지 신음인지를 내뱉고 말았다. 공주의 허리에 붙어 있던 것은 바로 바로 바로 남근이었던 것이다. 그 미이라는 남자였던 것이다. 거짓말과 허세 때문에 조롱거리가 된 그는 두고두고 삼손의 여우 꼬리를 갖고 있는 사람, 요나의 고래에서 막 꺼낸 싱싱한 달팽이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놀림 당하다가 아편 중독으로 죽어 버렸다. 미이라가 대영 박물관의 귀빈이 되기 전 이렇게 야만적으로 구경꺼리가 되면서 이집트란 나라 자체에 대한 우리의 정확한 판단 능력도 마비되어 버렸을 수도 있다.

그래도 미이라에 대한 우리의 원초적 호기심. 그것은 오래 전에 죽은 이의 몸을 구경해 본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이라의 호소력은 어쩌면 흔적 없이 영원히 사라지기도,영원히 잊혀지기도,영원히 잊어버리기도 결코 원치 않는 우리의 끈질긴 꿈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헤르도토스는 이집트를 여행하고 피라미드에 대해서도 이런 글을 썼다

"케옵스의 사악함은 자금이 부족하자 얼마간의 목돈을 구해오라는 명령과 함께 자신의 딸을 매음굴에 팔아버리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그녀는 그 돈을 마련하였다.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영속시키는 유적을 남길 결심을 하였고 각 남자에게 돌 하나씩을 선물해 줄 것을 요청했다.이 돌을 모아 그녀는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는데 그것은 각면이 150피트에 달하는 거대한 피라미드의 정면에 있는 또 다른 세 개의 피라미드의 중간쯤에 서있다"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이 드레스는 얼마나 고집이 센지!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 대영박물관 3

기사입력 2009-03-20 오후 5:36:01

 

1799년부터 1803년간 터키 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 특별 대사였던 엘진 후작이 파르테논 신전의 소벽을 사느라고 가산을 탕진한 몇 년 뒤, 그리고 아직 국가의 개념도 모르던 런던 사람들이 눈앞에 펼쳐진 그리스의 아름다움에 놀란 몇 년 뒤, 대영 박물관은 건축되기 시작했다. 런던 사람들은 그리스 양식에 열광해서 브리티시 헬레니즘이란 것을 염두에 뒀다. 대영 박물관이 그리스 양식 건물이 된 거나 근처에 마블 아치가 세워진 것이나 런던 사람들의 그리스 동경을 반영한 것인데 처음에 엘진 수집품을 본 사람 중 하나인 헤이든의 묘사를 보면 런던 사람들이 그리스 조각에 얼마나 놀랐는지를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그는 테세우스 상을 보고는 내장이 골반 쪽으로 밀려들어가 있는 것까지 표현했다고 썼고 여성 조각품의 손목과 팔꿈치에는 요골, 척골, 같은 것들이 표현되어 있으니 그리스 조각이야말로 최고로 영웅적인 예술 양식이 일상 생활의 모든 필수적 세부 상황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고 그걸 본 자기 자신이 받은 충격은 영원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썼다.

이곳에 수천점이 있다는 그리스 항아리에 가장 매료된 것은 런던에 살던 병약하고 섬세한 시인 (그때쯤이면 사랑에 가슴 아파하고 있을) 존 키츠였다. 그는 그리스 항아리와 엘진 경이 수집한 그리스 유물에 바치는 시를 썼다. 당시 런던 사람들의 기분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소개한다.

듣는 가락은 달다, 허나 들리지 않는 가락은
더욱 달다. 하여 고요의 피리를 마냥 불거라
감각의 귀가 아니라 보다 고귀한 것
영혼을 위하여 곡조 없는 노래를 부르라
나무 아래 젊은이여! 너는 노래를 그칠 수 없다
그 나무 또한 잎 질 날이 없겠구나
대담한 연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입 맞출 수 없겠구나
너의 소원이 곧 이루어질 듯하건만 -그러나 슬퍼마라
행복에 못 미치는 대신 그녀 또한 이울지 않으리
영원토록 너는 사랑하고 그녀 또한 아름다우리
(존 키츠 <그리스의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


나는 사실 살아남은 미노스의 꽃병 하나를 자세히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대신 하나의 꽃병이 산산히 깨져나가는 상상을 해본다. 그때 깨지는 것은 옛 사람들의 그림자, 침묵 속의 노동, 은밀히 교환되던 시선, 대담한 연인들의 사랑과 쾌락, 흥겨운 춤과 피리 소리의 한때, 파도와 감정. 프라이드와 갈망, 영원한 증표. 맘속으로 꿈꾸던 이상적인 세계….

▲엘진 마블, 즉 엘진이 통째로 뜯어왔다는 파르테논 신전의 동쪽 벽 부분은 그리스 문화재 반환 운동의 핵심 부분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끈다.

이 놀라운 예술품 또한 어지러운 아픔을 주고
그 속에 그리스의 영광과 거친
시간의 퇴화를 범벅하고 -물결 높은 바다를
태양을, 장려한 그림자를 섞는다

(존 키츠-<엘진 경의 대리석 조각품을 보고>)

그러나 엘진 마블, 즉 엘진이 통째로 뜯어왔다는 파르테논 신전의 동쪽 벽 부분은 그리스 문화재 반환 운동의 핵심 부분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끈다. 사랑하는 아내인 여배우 멜리나 메리쿠리의 국적을 따라 그리스인이 된 세계적인 명성의 줄스 다신 감독은 1994년 세상을 떠난 아내를 위해 '멜리나 메리쿠리 재단'을 설립하고 전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 문화재의 반환 운동을 주도해 왔다. 그가 특히 관심과 열정을 기울였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엘진 마블로 불리는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품들이었다. 영국 정부와 대영박물관 측은 '엘진 마블'이 그리스만이 아닌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이며, 대기오염으로 악명 높은 아테네에 돌려줄 경우 훼손이 우려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서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언덕 위에 서서 바다를 향해 넘실대지 못하는 파르테논 신전을 보는 것은! 확실히 답답하긴 하다. 파르테논의 뜻은 처녀에게 바쳐진 신전, 즉 아테네에게 바쳐진 신전이란 뜻인데 신전은 아테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페리클레스의 황금기에 세워졌다. 그래서 당시 파르테논의 존재는 다름 아닌 아테네의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아테네 여신 이야기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제우스의 머리에서 창과 방패로 완전 무장한 채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오며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탄생 신화는 들을 때마다 갑자기 각성한 누군가의 머릿속을 놀라움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솔직히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런 각성은 행동으로 이어지니까.

전 세계에 걸친 제국주의적 약탈의 결과로 박물관을 차렸다는 대영 박물관과 영국 사람들이 모처럼 콧대를 세우며 기뻐 날뛸만한 발굴이 영국에서도 한 차례 있었다. 서포크 지방의 서턴 후에서 1939년에 이뤄진 발굴인데 보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돌던 오래된 둔덕을 파 내려갔더니 거기서 길이 27미터의 배가 발견된 것이었다. 그 배안에는 갑옷, 방패, 투구, 칼, 술잔 (끝이 뿔 모양이라서 한번 든 술잔은 원샷으로 마시기 전에는 결코 내려놓을 수 없게 되어있다) 들이 들어 있었다. 더 자세히 보니 그 배는 배 자체로 왕릉이었다. 살아서 위대한 전사였던 왕이 힘겨운 이생에서의 싸움을 끝내고 난 다음 보물을 가득 실은 배를 타고 보이지 않는 사공들의 힘을 빌어 저승으로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죽음의 보물선의 주인공은 7세기의 레드월드 왕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배안에서 그의 뼈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도 서턴후의 배는 앵글로 색슨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과거로 영국 사람들에게 프라이드를 제공한다.

런던의 초기 역사는 안개를 뚫고 나타난 로마군의 등장에서부터 시작된다. 템즈강에 로마 군단이 왔을 때 여전사 부디카로 불리는 브리튼 족의 여왕이 앞장서 맹렬히 싸웠지만 패배하고 그 뒤로 런던은 로마의 보급기지인 항구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그래서 런던을 산책하다보면 로마시대의 유물들을 종종 마주치는데 나는 로마 시대 때 만들어졌다는 시장인 보로 마켓을 런던에서 가장 흥미 있는 곳 중 하나로 꼽고 싶다. 그 근처만 걸어도 로마의 와인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 같고 실제로 보로마켓 근처에선 와인투어가 이뤄지고 있다. 보로마켓에서 레몬즙을 뿌려가며 서서 먹던 굴이 런던 체류 전체 기간 중 먹어본 음식 중 단연 최고의 음식이었다. 거기서 한물간 줄 알았던 리바이스 청바지를 진짜 멋지게 소화해 낸 남자가 양손 가득 장을 보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따라갈 뻔했지만 간신히 억제했다.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매일 생각이 바뀐다) 대영 박물관에서 우리는 부디카를 진압한 후 네로가 임명한 총독의 관이나 로마 군인들이 가장 좋아했던 신인 미트라 신의 흉상, 혹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흉상을 볼 수 있다.

▲ 나는 로마 시대 때 만들어졌다는 시장인 보로 마켓을 런던에서 가장 흥미 있는 곳 중 하나로 꼽고 싶다.

이 대영박물관을 우리보다 앞서 마르고 닳도록 찾던 런더너 중에는 마르크스와 버나드 쇼, 헨리 무어가 있었다. 찰스 다윈과 같은 시대의 인물인 마르크스는 망명 지식인, 세계주의적 혁명가, 헌신적인 사회주의자, 급진적 저널리스트로 살았다. 그는 영국의 자본주의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한 자료를 바로 대영 박물관의 학구적인 분위기 안에서 찾아냈다. 초기 자본주의로 생긴 인간 희생에 대한 통계 자료를 주로 정부 측 공장 감독관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찾아냈다는건데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꼭 그를 만나보고 싶다. 아마 이런 보고서였을 것이다

나이가 몇 살입니까?
-스물 셋입니다
몇 살 때 공장 일을 시작했습니까?
-여섯 살 때입니다
어떤 공장입니까?
-아마 천을 짜는 공장이었습니다
작업시간이 몇 시부터 몇 시까지였습니까?
-일이 밀릴 때는 새벽 다섯 시에서 저녁 9시까지였습니다
식사 시간은 얼마나 주었습니까?
-정오에 40분입니다
일을 하는 동안 늘 서있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틀이 많이 있고 돌아가는 속도가 빠르니까요
일을 잘못하거나 늦을 때는 어떤 일을 당합니까?
-혁대로 때립니다
맞는 사람을 지나치게 아플 정도로 때립니까?
-그렇습니다… 감독은 혁대를 들고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있으며 쇠사슬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는데 아이들을 쇠사슬로 묶어 방을 가로 질러가며 혁대질을 했습니다
집에 시계가 있습니까?
-아니요. 없었습니다
대개 늦지 않게 출근했습니까?
-네. 어머니가 새벽 4시에 일어났고 어떤 때는 두시에 일어났습니다. 갱부들이 보통 서너 시에 일하러 갔는데 그들이 움직이는 소릴 들으면 어머니가 나가 그들에게 시간을 물었습니다.
당신 몸에 기형이 생긴 것은 노동 때문인가요?
-네
복사뼈가 약해지고 다리가 휘는 것은 흔한 일입니까?
-네, 아주 흔한 일입니다
... (<역사의 원전> -의회조사단에 제출된 한 여공의 증언)


▲ '노동자가 혁명 속에서 잃을 것이라곤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대영박물관에 앉아서 칼 마르크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나는 이래서 마르크스가 놀랍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이런 문서들을 지금도 숱하게 읽을 수 있으니까. '노동자가 혁명 속에서 잃을 것이라곤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란 문장을 대학 초년생 때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고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뜯어 먹히는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와 함께 읽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데, 세상은 마르크스 시대와 다른 어떤 해법을 요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는 어떻게 정의가 승리할 것이란 걸 믿었을까? 비인격적인 힘이 지배하면서 생겨난 우리의 공허함을 그는 어떻게 분석해 낼까?

대영 박물관에 앉아서 그의 이런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이들로 들끓는 소호 집의 소란을 피해 대영 박물관 도서관의 책 속으로 도망치는 것, 치질로 고생하며 "자본론을 끝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앉을 수는 있어야겠네. 부르즈와 계급이 나의 뾰로지를 기억해주길 바란다네"라고 엥겔스에게 농을 거는 것. 쉴 때나 아내가 아플 때,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면서 위로받는 것, 어느 날 아이들을 데리고 햄스테드 히스로 놀러가는 것. 아이들과 피크닉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것

아빠의 행복은 ? 싸우는 것
아빠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굴종
아빠가 좋아하는 영웅은? 스파르타쿠스와 케플러


그러다가 결국 두 아이가 죽고 아내는 신경 쇠약에 걸리고 전 세계의 정부는 일치단결하여 그를 비난한다. 그의 이론 덕에 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지지만 그 중에서 '가난한 자들은 서로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만큼 좋았던 것은 없었다. 그에게 이런 조언을 듣는 상상은 어떨까?

"인간의 뇌는 어떤 명령 센터의 명령을 통해 움직이는게 아니죠. 인간의 결정은 신체 전체와 소통하고 주위 환경과 소통하는 전체 신경 네트워크의 배열이란거죠. 우리가 뭘 결정하든 우리는 네트워크 안에 있어요. 바꾸고 싶다면 이야기하고 행동해 보세요. 참여하세요. 당신에게 올바른 힘이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인류가 되세요."

세계사의 모든 시대와 모든 문제에서 인간은 오로지 투쟁을 통해서만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알려준 인간의 운명이다.

▲버나드 쇼가 런던에 와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지성을 획득하고 가공할 논객이 되는데 큰 역할을 한 곳 역시 대영박물관 도서관일 수 있다.
더블린 태생의 빽도 줄도 없던 버나드 쇼가 런던에 와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지성을 획득하고 가공할 논객이 되는데 큰 역할을 한 곳 역시 대영박물관 도서관일 수 있다.당시 번득이는 총기에 관해서는 아무도 따를 수 없었다던 그가 한 말 중 딱 한마디만 골라서 소개할 수 있다면 나는 이것을 고르겠다

"남한데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지 마라
나와 남은 취향이 다를 수 있으니까"


그에 관해선 아주 부러운 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그에게 논리적으로 공격을 당한 어떤 사람도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끼거나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워있는 여인'이란 조각은 아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도 한두번 봤을 것 같다. 누워있는 조각 시리즈를 만든 이가 바로 헨리 무어인데 그는 1920년대 런던에 사는 동안 대영 박물관에 다니면서 아프리카나 멕시코 아즈텍 조각에 빠져 들었다.그가 가장 좋아했던 조각품 하나를 나는 대영 박물관에서 찾아냈는데 당시 프랑스 점령 오스트랄 제도 섬 중 하나인 루루투에서 만든 18세기 나무신상이었다. 헨리 무어는 연못에서 튀어 오르는 개구리처럼 생긴 둥근 머리통, 둥근 몸통, 빈약한 팔다릴 가진 이 신의 모습에서 놀라운 생명력을 느꼈다고 훗날 썼다. 헨리 무어하면 내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1940년 9월 어느 날 런던 대공습 시기에 지하 대피소에서 공습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그린 작품들과 누워있는 사람들의 연약하고 웅크린 둥근 몸통 조각들이다. 손가락을 빨 것 같은 둥그런 몸통들은 이상하게도 슬픔만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꺼지지 않는 생명의 힘과 숨결까지도 느끼게 한다. 혹시 헨리 무어는 이 대영 박물관의 아프리카관, 남미관에서 길을 잃고 넋을 잃으면서 인간의 존재의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 단서를 찾지 않았을까? 목이 메일수록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든 사람은 마치 갓 태어난 것처럼 삶에서 벗어난다'고 에피큐러스는 말하지 않았던가?

▲ 헨리 무어의 '누워있는 여인'. 혹시 헨리 무어는 이 대영 박물관의 아프리카관, 남미관에서 길을 잃고 넋을 잃으면서 인간의 존재의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 단서를 찾지 않았을까?

옛날에 나는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성의 도서관을 찾던 사람들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도서관에는 도서관 사서 말고도 쾌락을 줄 여인들,장수들,점성가들,까마귀들,티티새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왕은 날마다 그곳에서 금지된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는데 그 제물은 순교자를 말하는게 아니라 침묵 속에서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펼쳐가며 아이네이아스의 무훈담을 읽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도서관에 대해 들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중 하나다. 나의 금지된 신에게 바치는 나만의 온갖 정성을 다한 정갈한 제물.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어느날 런던 대영 박물관을 찾았다가 이런 표현을 남겼다.

"런던은 지저분한 도시지만 그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박물관에다 대리석으로 표현된 신들의 시간을 보관하고 있다. 마치 근엄한 청교도가 과거의 색정적인 순간과 즐겁고 황홀한 죄악의 순간을 그의 기억 깊숙이 묻어두고 있는 것처럼"

나는 이 말이 좋다. 무덤 속에서 나온 물건일지라도 이곳의 많은 유품들은 인간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먹고 마시고 어울리고 하인들이 서빙하고 연인들은 보드게임을 하고 과일은 쌓여있고 술잔은 충분하고 여섯 줄 하프는 울리고 아시리아 정원에 새들이 지저귀고 왕들은 사자 사냥을 떠나고 파라솔은 햇빛을 가리고 푸아비 여왕은 수금을 타고 항아리속의 관능적인 여인들은 수줍어하면서 도발하기도 하고 돌고래는 뛰놀고 배는 떠나고 사내들은 잔치 상 옆에 비스듬히 누워있고 벌거벗은 긴팔을 가진 무희들은 춤을 추고 사내들의 근육은 울퉁불퉁하고 턱수염은 풍성하고 치아는 튼튼하고 누군가는 문을 노크하고 엄격한 신관들은 어쩐지 뾰로통한 표정으로 위엄을 세우려 애쓰고, 전쟁 뒤에는 잔치가 있고 왕과 전사들은 말을 타고 신들은 즐기길 허락하고....! 모든 것들 위에 시간은 흘러간다.

대영 박물관을 나오면서 든 생각은 신들의 모습은 각자의 천국을 닮았다는 것이다. 나의 천국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대답은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식으로 하면 이럴 것 같다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화와 역사 사이를 거닐다 온 우리에게 대영박물관의 유물들이 주는 힌트라면? 나에겐 상상력을 가지라는 말로 들린다.

금은보화와 주지육림에 파묻혀 죽음을 택했던 아시리아 왕 사드라나팔루스의 관능적 방탕이 우리에게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 만큼이나 낯익은 현실 역시 그 우스꽝스러움, 엽기스러움, 비애, 혼란스러움, 번쩍거림, 불안, 기대, 평범함 등에서 상상력을 요구한다. 상상력이야말로 현실을 다시 새롭게 보게 하는데 그런 일을 하다가 결국은 우리도 부활하듯 새로워질 것이다. 사람들은 시칠리아 시라쿠스 히에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다. "왕이 되기 위해 그에게 부족한 것은 오직 왕국뿐이다" 나는 그말을 헤아려보며 계단을 내려왔다.

끝으로 노벨상 수상작가 쉼보르스카의 박물관에 관한 시를 한편만 소개하고 싶다. 이 시는 내 친구와 내가 어느 날 함께 읽으면서 너무나 감탄하고 열심히 살아보자고 손을 맞잡았기 때문에 그 날 이후로 내 자연사 박물관의 유물이 되었다

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
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
최소한 삼백년 전부터 쭉

부채는 있는데-홍조 띈 뺨은 어디있나요?
칼은 있는데 -분노는 어디있나요?
어두운 해질녘 류트를 퉁기던 새하얀 손은 온데 간데 없어요


영원이 결핍된 수만가지 낡은 물건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어요
....

쇠붙이와 점토, 새의 깃털이
모진 시간을 견디고 소리 없이 승리를 거두었어요
고대 이집트의 말괄량이 소녀가 쓰던 머리핀이
킬킬대며 웃고 있을 뿐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오른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

나는 어떨까요. 믿어주세요, 아직도 살아있답니다
나와 내 드레스의 경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어요
아 ,이 드레스는 얼마나 고집이 센지!
마치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기를 열망하듯 말이죠.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중에서 -박물관)
 

 
사형 집행인의 노래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 런던탑 1

기사입력 2009-03-27 오후 3:32:15

 

오늘 밤 제 신경이 이상해요. 정말 그래요, 가지 말아요
애기를 들려주세요. 왜 안하죠. 하세요
뭘 생각하세요? 무슨 생각? 무슨?
당신이 뭘 생각하는지 통 알 수 없어요. 생각해봐요

-나는 우리가 죽은 자들이 자기 뼈를 잃은
쥐들의 골목에 있다고 생각해


(엘리엇 -<황무지> 중에서)

▲앤 불린의 초상화.
1536년 5월 19일 금요일 9시. 5월의 아침 햇살은 포근했다. 앤 불린은 타워 그린으로 걸어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하기 전에는 처형 신호를 내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침착하고 당당한 목소리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선하신 하느님의 백성들이여, 전 오늘 법에 따라 죽으로 나왔습니다. 그에 반대하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죽으러 나왔으니 겸허하게 나의 신이신 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살면서 왕에게 거스른 적이 있다면 죽음으로써 확실히 속죄하게 되길 바랍니다. 선량한 그대들에게 바라노니 부디 내 왕이시며 그대들의 왕이신 왕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오늘 기꺼이 죽음을 맞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겸허히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세상을 떠나려는 절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연설을 마친 그녀는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을 따라온 충실한 네 명의 시녀들에게 자신이 죽는 모습을 보고 놀라거나 슬퍼하지 말라. 못되게 굴었다면 부디 용서해 달라. 왕비로 살아온 자신을 결코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기도할 때면 늘 절 기억하세요. 매일같이 희망의 빛이 비추길. 앤 '이라고 서명한 기도서를 시녀에게 유품으로 건네주었다. 그녀는 마침내 후드를 벗었다. 프랑스에서 날아온 솜씨 좋은 사형 집행인은 무릎을 꿇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죽음 앞의 예의였다 .앤은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목걸이를 풀고는 단두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녀중 하나가 눈가리개를 해줬다. 앤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을 큰 소리로 외쳤다."주여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 주여 제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여 제 영혼을 바치나이다"

훗날 런던탑의 사형 집행인들은 도끼날을 갈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앤 왕비는 자신의 하얀 목을 참수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일격이 가해지기를 기다렸다
칼날은 그녀의 목을 정확히 두 동강으로 잘라놓았고
너무나 삽시간이라 그녀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윙 윙 윙 윙

솔즈베리 백작부인은 귀부인들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품위 있는 모습으로 죽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도끼를 들어 올려 그녀의 두개골을 두 조각냈다
바로 그때 도끼날의 이가 빠져 무너져 버렸다
윙 윙 윙 윙

캐서린 왕비는 조금이라도 쉽게 죽게 해달라고
나에게 금으로 된 사슬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준 값비싼 뇌물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는 내가 내리치자마자 멀리 날아갔기 때문에
윙 윙 윙 윙"


(나스메 소세끼가 옮긴 엔즈워드의 <지옥문> 중에서)

▲영국의 사형집행인들이 사형수의 목을 칠 때 썼던 도끼.
666이란 숫자를 이마에 달고 나온 악마의 아기 오멘이나 피를 뿌리는 캐리 말고 내가 어려서 무서워하면서도 진지하게 자꾸 생각해본 이야기로는 목에 이어 붙은 접합선이 있는 몸으로 런던의 밤거리를 눈물 흘리며 다니는 괴물 프랑켄슈타인과 온몸과 얼굴을 철갑옷으로 가리고 있어 아무도 그의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어떤 왕의 사생아란 소문이 돌았다는 바스티유 감옥의 철가면, 그리고 '너는 내 칼 때문에 죽는게 아니라 네 과거 때문에 죽는다'라고 외치며 복수하는 몽테크리스토 백작, 런던탑 블러디 타워의 창문에 얼굴을 한번 비친 뒤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소년 왕 이야기, 천일의 앤 블린 이야기 등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그런 이야기에 깊이 빠져 들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입술이 하얗게 말라가자 엄마는 처방전으로 직접 공포스러우나 알고 보면 썰렁한 이야기를 창조하는 가내 동화 작가로 나서기에 이르렀는데 이를테면 철가면은 알고 보니 중국집 배달 소년이었다는 수준의 이야기였고 그걸 계기로 나는 내가 읽은 것을 엄마에게 다 늘어놓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어느날 파스칼은 "그림은 얼마나 공허한가! 실물을 보고는 전혀 감탄하지 않는데 실물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란 얼마나 공허한가!"라고 외쳤다는데 나는 그 문장을 보자 어린 시절에 내가 무서운 이야기에 왜 그렇게 빠져 들었었나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고요하고 평화로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만 보이는 시골 마을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탐정물과 공포물, 야만스런 역사에 빠져들던 소녀에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파스칼의 그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세상을 보러 길을 나서 보지 못한, 세상을 보고 어리둥절한 채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 지 모르는 나는 그런 상상들을 통해 세상은 수많은 이야기라는 것, 세계 전체는 누구에게나 어느 순간 고유하고 개인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 그런데도 역사에는 '전형적인 것, 되풀이 되는 것. 항상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어떤 사실 자체 보다 어떤 사실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갖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으리란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 것 같다. 그런 많은 밤에 개구리 울고 귀뚜라미 울고 밤길은 어둡고 현관불은 흐릿하고 하루살이는 불빛에 날아들고 나방은 그 불빛에 빠지직 타죽고 개는 달을 보고 짖고 배추에 서리 내리고,동치미는 땅 속에서 살얼음을 띄우고…그런 밤엔 무서운 이야기가 제격이었다.

21세기가 아니고 20세기에 런던을 찾은 일본 근대소설의 거장 나스메 소세끼는 어느날 런던탑을 보고는 이런 글을 썼다.

"런던탑의 역사는 영국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고갱이다. 과거라는 괴이한 물체를 뒤덮는 장막이 저절로 찢겨 희미한 광채를 20세기에 반사시키고 있는 것이 런던탑이다. 모든 것을 없애버린 시간의 흐름이 거슬러 올라간 마지막 지점에서 고대의 한 조각이 현대로 떠내려 온 게 런던탑이다. 사람의 피, 사람의 살, 사람의 죄가 모여 말, 차, 기차 속에 결정으로 남아있는 것이 런던탑이다. 런던 브리지 위에서 템스강을 사이에 두고 탑을 바라볼 때 나는 내가 현대인인지 아니면 고대인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잊고 그 위용에 빠져 있었다. 런던탑은 20세기를 경멸하듯 서 있다. 나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 전 세기의 음울한 일들을 영원히 전하겠다고 맹세한 듯.. "

(<런던탑> 중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런던탑은 전세기의 음울한 일을 영원히 전하는 곳이 되었을까? 왜 사람들은 런던탑에서 괴이한 이야기를 수집하게 되었을까?

▲ 런던탑의 전경.

사실 런던탑은 역사적 의미가 많은 곳이다. 원래 런던탑은 런던이란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려주는 곳이었다. 프랑스산 흰색 캉 석재로 지은 전망 좋은 화이트 타워는 당시 가장 높은 건물로 런던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성벽의 두께는 4,5미터로 런던탑은 항구를 수비하는 튼튼한 요새이자 왕궁이었단 걸 알 수 있다.

런던탑은 영국 초기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사건중 하나인 노르만 정복의 영원한 상징이었다. 21년 동안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소유하고 있던 정복왕 윌리엄은 아들을 셋 두었다. 윌리엄은 유산으로 맏아들에겐 노르망디를 줬다.(그는 맏아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이런 왕을 모시는 노르망디 사람들은 불행할 것이라 했다) 가장 좋아했던 둘째 아들에게는 잉글랜드를 물려주었다. 세째 아들 헨리에겐 물려줄 땅이 없어 현금을 주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십자군 전쟁에 나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둘째에게 노르망디를 저당 잡혔다. 그리고 둘째는 사냥터에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의 심장을 꿰뚫은 화살이 고의적이었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그러자 셋째는 재빨리 웨스트 민스터 사원으로 달려가 왕관을 썼다. 얼마 뒤 십자군에서 돌아온 큰 아들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침략했지만 후퇴하고 그냥 노르망디에 머물게 되었다. 노르망디에서 그는 무능한 정치인이어서 그에게 질린 봉신들은 헨리에게 제발 노르망디를 침략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헨리 1세가 다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통치하게 되었다. 헨리 1세의 통치는 훌륭해서 후세 사람들은 왕은 정직했고 위엄이 대단한 사람으로 그의 처세엔 아무도 부정을 행하지 않았다, 인간과 가축이 다 함께 평화로웠고 금은보화를 가지고 다녀도 아무런 피해가 생기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헨리 1세에게 불행한 사건이 생긴다. 그의 후계자인 왕태자가 노르망디에서 돌아오는 길에 술 취한 키잡이의 실수로 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헨리 1세 사후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19년간이나 벌어져 이때처럼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에 귀의한 시절은 없었을 거라고 한다. 런던에도 많은 교회가 생겼다. (이때 등장한 유명한 추리소설의 주인공이 캐드펠 수사다)

1154년 마침내 왕이 된 이는 헨리 1세 누나의 아들이었다. 그가 헨리 2세다. 헨리 2세의 가문은 좀 이상한 내력으로 유명했다. 그의 할머니 중 한사람은 마녀라고 불렸는데 어느 날 성당 창문을 열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가문 사람들은 재능은 있어도 악마에서 태어나 악마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었다. 헨리 2세는 프랑스의 루이 7세를 방문했다가 왕비 엘리노어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왕이 아니라 신부와 결혼한 것 같다고 평소에 푸념하던 여장부였던 엘리노어는 즉각 이혼하고 황소처럼 힘 좋고 혈기왕성한 헨리 2세와 결혼을 하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는 29세. 왕의 나이는 19세였다. 그녀는 혼수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프랑스 땅을 가져와 그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궁정은 당시 세계에서 제일 활기찬 곳이었고 그는 평생 통치를 위해 여행을 가장 많이 한 왕으로 기록되었는데 그의 순회 왕실 법정은 공정함과 현명함으로 유명했고 결과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동일한 법률, 관습법을 탄생시켰다.

▲ 페어 로자문디와 엘리노어 왕비의 이야기를 다룬 그림. 에블린 모간의 작품.
내가 그의 통치 시절에 관심을 갖게 것은 <죽음의 미로>란 소설 때문이었는데 헨리 2세는 사랑하는 여인, 세상의 장미란 뜻의 로자문디를 사냥터 근처의 외딴 성-기독교 세계의 가장 견고한 정조대였다는 성-에 숨겨놓고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 어느날 로자문디가 독살을 당한다. 누가? 왜 그녀를 죽였을까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면 영국은 끔찍한 내전에 휘말리게 될 상황이었는데 소설 속에선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여자 검시관이 등장해 그녀의 사인을 밝혀낸다. 그 때 로자문디의 독살자로 의심받았던 이가 바로 엘리노어 왕비이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도 그녀는 남편을 배신했다. 수도사들은 암살당한 왕의 여자, 소문만큼 아름답지 않고 뚱보였던 페어 로자문디를 위해 그녀의 묘비에 이런 문구를 새겨놓았다. 여기 영면하고 있는 사람은/ 세계의 장미이지/ 아름다운 장미는 아니다

헨리 2세의 네 아들들 중 위로 둘은 일찍 죽었고 어머니 엘리노어와 더 가까웠던 셋째 아들은 프랑스의 왕 필립 오귀스트 (루브르에 가면 지하에서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와 결탁해 자기 아버지를 배신할 궁리를 했기 때문에 헨리 2세는 막내아들 존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반역자 명단의 첫 자리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기탁했던 아들 존의 이름을 발견한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34년간의 통치를 끝내게 되었다. 그가 죽었을 때 누군가는 '역시 그의 가문은 악마에게 태어나 악마에게로 돌아가는군!'하고 수군댔을지도 모르겠다.

그를 배신한 셋째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사자왕 리처드이다. 그의 인생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프랑스 왕 필립 오귀스트도 함께한 십자군 참가다. 기사도 이야기에 푹 빠져 낭만적 열광이 도에 넘치게 흘러 넘쳤던 리처드는 왕이 되자마자 국고를 탕진하고 심지어 지방 관직까지 팔아 돈을 마련해 성지를 향한 배에 올라탄다. 그는 십자군 전쟁동안 사라센 포로 학살을 저질렀는데 그것 때문에 사라센 아이들은 저기 사자왕 리처드가 온다 하면 울음을 뚝 그쳤다고 한다. 결국 그는 위대한 술탄 살라딘과 조약을 맺고 귀국하는데 그 길에 신성 로마 제국의 포로가 되었다가 간수들과 술을 마시며 우울을 달래고 엄청난 몸값을 내고 풀려난다. 그는 화살에 맞아 군대 막사에서 사망하는데 그에 대한 평가는 이랬다. '나쁜 자식, 나쁜 형제, 나쁜 남편, 나쁜 국왕.'

그러나 그에게는 위대한 사자왕 리처드라는 전설이 변함없이 따라 다닌다. 리처드왕이 중세 흑기사의 상징처럼 여겨진 것은 스코틀랜드의 역사가 월터 스콧의 역할이 클 것 같다. 월터 스콧은 <아이반호>란 소설에서 사자왕 리처드와 로빈 후드를 멋지게 그려내는데 나는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의 '숲 속의 아름답고 푸른 빈터들 중 하나에 석양의 마지막 햇살이 비쳐 들었다. 둥치가 굵고 우듬지가 널따랗게 퍼져 무성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떡갈나무들, 아마도 로마 병정들의 보무당당한 행진을 지켜보았을 나무들 수백 그루가 가지를 뻗치고 있는 아래 부드러운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같은 문장의 애호가였다. 왕비의 이름을 걸고 벌어지던 화살 시합이나 마창 시합이 벌어지는 막사와 장막, 평민과 귀족과 수도사와 사제가 엉켜서 한바탕 즐기고 싸우는 풍경은 나에게는 월터 스콧이 문학이란 이름으로 보여준 역사였다. 로빈 후드는 너무도 다양한 버전이 있다는데 내가 읽은 소설 로빈 후드에서는, 로빈후드는 셔우드 숲에서 색슨족 농민을 괴롭히는 남작과 수도원장을 물리치고 위기에 빠진 미인 메리언을 구출해 결혼을 한다.

▲ 사자왕 리처드의 초상화
그 때 바람을 가르고 홀연히 등장해 천하 장사같은 힘과 용기와 신중함으로 로빈 후드를 도와주고 살인죄를 사면까지 해주는 아름다운 푸른 눈의 흑기사가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사자왕 리처드였던 것이다. 사자왕 리처드가 '나에게는 나만의 할 일이 있다!'라고 말한 뒤 프랑스의 골치 덩어리를 처치하러 다시 말을 달려 홀로 평원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내 어린 마음에도 다시 못 볼 장관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그의 말 타는 솜씨는 너무 훌륭하고 너무 빨라서 아무도 그를 따라갈 엄두조차 내지 못해서 결국 그는 그의 길을 혼자가야만 했으니까. 로빈 후드는 당시 현실의 모순을 모두 형인 리처드가 십자군으로 나간 틈을 타서 못되고 못난 동생 존이 마음대로 국정을 처리해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빈 후드가 마지막에 죽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좋다. 그는 평생 몸에 지니고 있던 화살 한방을 마지막으로 날린 다음에 이제 내 인생의 마지막 화살도 날렸으니 저기 화살이 떨어진 곳에 나를 묻어달라고 친구에게 부탁하고 숨을 거둔다. 도적이자 무법자인 동시에 여자와 자유와 정의를 사랑했던 그는 자유란 것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얻는 구체적인 것이란 걸 알려주었던 셈이고 영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로빈후드를 민중의 영웅으로, 우리가 홍길동이나 임꺽정, 장길산을 사랑하듯 사랑했던 것 같다.이런 영웅들은 분명히 자의적인 법집행 같은 통치의 불합리한 모순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시대에 민중들이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초인이었을 것이다.(헨리 8세는 가면극을 할 때 로빈후드 역할을 하길 좋아했다. 캐서린 왕비 앞에서 로빈 후드 가면을 벗고 깜짝 놀래주기를 하도 여러 차례 해서 왕비는 다 아는데도 번번이 놀라는 척해줬다고 한다)

그런데 반대로 술탄 살라딘 쪽의 기록에 따르면 사자왕 리처드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따라 다닌다. '사자왕 리처드는 실제로 전쟁터에서 사자처럼 거칠게 싸우는데 사자가 알라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교양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 않는가? 우리는 이 왕을 사자 똥구멍 왕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건 진지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실제로 죽은 사자 항문을 여러 번 보았는데 볼 때마다 그 크기에 엄청 놀라니까.' 술탄 살라딘은 리처드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사랑하는 조카를 잃고 애닮은 시 한 수를 썼는데 간략하게 기억나는 대로만 옮겨 적어보면 이렇다. '얼마나 많은 수가 더 죽을 것인가? 피리 소리나 우리가 만드는 노래로 그들을 다시 불러올 수는 없지만 / 매일 아침 동이 틀 때 / 나는 내 기도로 그들을 기억하리라/…어둠이 지배한다 / 외로움이 지배한다 / 우리가 다시 길을 밝힐 수 있을까?

▲술탄 살라딘을 그린 그림.
술탄 살라딘은 아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너한테 티그리스 강에서 나일강에 이르는 제국을 넘겨주게 되었다. 우리의 승리는 백성이 우리를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라. 백성으로부터 고립되면 절대 오래갈 수 없다. 술탄은 건강이 쇠약해져 순례를 떠나지 못하게 되자 아쉬워하면서 대신 성벽 밖에서 메카로부터 돌아오는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싶어 했고 그 날 맞은 비로 고열에 시달리다 죽는다. 그 마지막 순례자를 만나던 비 오는 날에 옆에 있던 신하가 망토를 벗어 어깨에 둘러주자 술탄은 웃으면서 그 옷을 다시 신하에게 던져주는데 그 이유는 신하가 평소에 늘 약골이었던 것을 기억해서였다. 나는 살라딘 이야기를 읽은 뒤에 다마스커스의 비 내리는 전경을 찍은 흑백 사진을 본 일이 있는데 그 사진은 살라딘이 죽자 온 다마스커스 사람들이 눈물을 주룩주룩 쏟으며 '알라여, 천국의 문을 열고 이 영혼을 받아들여 그가 늘 바라던 최후의 승리를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이후 역사에서 다마스커스가 겪은 불행을 생각하자 뭉클했다. 아랍인들은 아직도 또 다른 살라딘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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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의 도시로 가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8>런던, 런던탑Ⅱ

기사입력 2009-04-03 오후 7:37:03

 

사자왕 리처드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이는 배신를 잘해서 아무도 그를 신뢰할 수 없다는 소문이 돌았던, 너무나 애타게 왕위를 탐했던 존이었다. 존이 왕이 되기 위해 조카 아서를 살해했다는 소문을 빌미로 프랑스왕 필립 오귀스트는 그를 중죄인으로 선포하고 노르망디를 비롯한 프랑스 안의 모든 영토를 몰수해버렸다. 물론 이에 응하지 않았던 존과 프랑스사이에 전쟁이 있었지만 그는 패해서 결국 땅을 빼앗기게 된다.

▲실지왕 존이 서명한 마그나카르타.
과도한 세금 때문에 귀족, 교회, 전 국민이 그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 존이 귀족들과 회동을 하고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이를 갈면서, 튀어나올 듯 눈을 부라리며, 나무조각을 이빨로 깨물며 윈저 성 근처 평원에서 서명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마그나 카르타이다. 병역면제세나 상납금 징수는 반드시 왕국 평의회를 거쳐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길고 긴 마그나카르타는 전제적인 절대 군주의 종말을 선언한 셈이었다. 마그나카르타를 실지왕 존이 맹세한 것까지 포함해, 오천명의 모험가들이 건설한 노르만 식민지 잉글랜드는 꽤 많은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왕족이나 기사, 십자군 전사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감각과 의지를 가지게 되었단 걸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본인들이 동의하지 않는 세금은 낼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런던탑이 악명 높아진 것은 영국의 귀족 간 권력 쟁탈 전쟁인 장미 전쟁 때 시체를 쌓아뒀기 때문일 것 같다. (그 높은 화이트 타워가 시체로 차곡차곡 쌓였단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세익스피어가 더할 나위 없이 멋지게 그린 헨리 5세는(그는 젊어서 방탕했던 걸로 유명한데 왕이 되자 그런 우려를 일거에 불식시킨 모양이다.놀다 놀다 지친 그는 이런 독백을 한다.일년내내 노는 날이라면/노는 것도 일하는 것 못지 않게 지루할거야/그러나 휴일을 어쩌다 오기에 학수고대하는 것이고/드문 일이 아니면 사람들은 재미있어 하지 않는 법이지 -세익스피어 헨리 4세중에서)용감한 군인 중에서도 최고였고 백년 전쟁 중 가장 놀라운 전투라는 아쟁쿠르 전투 후 루앙까지 차지한 잉글랜드의 영웅이었다.

세익스피어의 헨리 5세를 읽어보면 그는 대단한 선전 선동가요 연설가인데 전투가 벌어질 성 크리스핀 축일 하루 전에 그는 병사들의 막사를 돌아다니며 성 크리스핀 데이는 영원히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잉글랜드의 명예를 위해 부모 형제와 처자가 있는 잉글랜드로 명예롭고 당당하게 돌아가기 위해 싸워달라고 포효한다.(그의 웅변 모습은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첫 장면을 떠올리게한다. 우리는 내일이면 고향으로 갈 것이고 나는 내일이면 이 전쟁을 끝내고 내 가족에게 돌아가 밀밭 사이를 걷고 있을 것이다라고 글래디에이터가 말하며 말달리는 첫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그의 웅변의 효과 때문인지 영국군은 전투에서 대승한다. 내가 기억하는 또 다른 헨리 5세의 모습은 아쟁쿠르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오랫동안 벌거벗은 시체들을 연민에 가득 찬 눈으로 지켜보는 거다. 시체들이 벌거벗게 된 이유는 밤 사이에 가난한 프랑스 농민들이 시체들의 옷을 모두 벗겨가 버렸기 때문이다.

헨리 5세는 화평을 요청하는 프랑스왕의 요구에 따라 프랑스 공주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어린 아들을 낳았는데 그 뒤로 곧 그만 파리에서 요절하고 만다. 그러니까 헨리 5세의 후계자는 생후 9개월 된 아가였던 것이다. 그 갓난장이가 바로 장미 전쟁 후 런던탑에 갇혀 죽은 헨리 6세다. 헨리 6세는 온화했지만 정치에 무관심했고 오히려 학문과 신앙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1440년에 이튼 칼리지를 만들고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에 웅장한 예배당을 만들고 파산 했다. 그에게 운명의 해는 1453년이었다. 잔다르크가 애국적으로 등장한 얼마 뒤인 그 해에 백년전쟁은 끝났고 사병들은 프랑스에서 귀국했고 왕은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 왕의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요크가의 리처드 공작이 왕의 보호자인척 하다가 왕위를 탐내는 바람에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요크가는 백장미, 헨리의 랭카스터 가는 붉은 장미를 상징으로 써서 전쟁의 이름이 장미 전쟁이 된다. 헨리 6세가 패하자 왕위를 이은 게 요크가의 에드워드 4세였다. 헨리 6세는 런던탑의 간수들에게 하도 매를 많이 맞자 신의 축성을 받은 국왕을 이렇게 때려서는 안된다고 점잖게 한 마디 했는데 그 온순한 왕이 런던탑 안에서 시해 되었을 때 이튼 칼리지와 킹스 칼리지의 학생들은 백합으로 죽음을 애도했다.

▲ 에드워드 4세의 두 아들이 살해된 피의 탑(Bloody Tover)의 내부.

에드워드 4세 입장에서 보면 런던탑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곳일 것 같다. 런던탑은 그에게 왕위를 뺏긴 헨리 6세가 살해당한 곳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두 아들 역시 이곳에서 같은 운명을 맞는다. 단지 두 달간 왕관을 썼던 에드워드 5세 이야기 역시 내가 어려서 애호하던 이야기다. 나는 나중에 나쓰메 소세끼의 런던탑과 세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읽고 런던탑에 얽힌 이야기 하나를 이런 식으로 머릿속으로 재구성해 기억하게 되었다.

'한밤 중의 침대 끝에 잠옷을 입은 귀티 나는 두 명의 꼬마가 앉아 있었는데 형은 12살, 동생은 9살이었다. 형은 무릎에 금박을 입힌 커다란 책을 올려놓고 자기 자신과 동생을 위해 어떤 구절을 찾아내 읽어주고 있다. 이런 구절이었다. 자신의 눈앞에 자신의 죽는 순간을 떠올리는 자는 행복하다. 마침내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때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형이 읽자 동생은 슬픈 목소리로 아멘이라고 대답한다. 책을 내려놓은 형은 동생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도 목숨만 살려준다면 삼촌께 왕위를 넘길텐데라고 말하고 동생은 어마마마가 보고 싶다고 힘없이 대꾸한다. 그 둘은 무릎을 꿇고 고통도 쾌락처럼 차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어린 아이답지 않은 기도를 하고는 몸을 웅크리고는 천사처럼 잠이 든다. 그 때 안개 끼고 바람 부는 성 밖엔 그들의 어머니가 검은 상복을 입고 서서 문지기에게 애원을 하고 있다. 한번만 나의 어린 아이들을 보게 해달라고. 문지기가 거절하자 그 기품 있는 여인은 재빨리 금목걸이를 풀어 손에 쥐어주며 여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남자의 도리가 아니잖는가? 라고 다시 한 번 애원한다. 그러나 간수는 그녀의 눈물어린 부탁을 송구스럽다는 말과 함께 끝내 거절한다. 절망한 여인은 바람 소리 불길하게 윙윙 거리는 속에서 세익스피어 풍으로 읊조린다. '탑을 둘러싼 검은 그림자, 탑을 둘러싼 두터운 벽, 탑을 둘러싼 차가운 사람들...'

어린 왕자의 사연이 다시 화제가 된 건 1674년에 런던탑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돌계단 밑에서 어린 아이의 유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유골은 웨스트 민스터 사원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리처드 3세에는 어린 아이 둘이 죽는 장면이 살인자의 입을 통해 이렇게 묘사된다.

'두 아기는 얌전하게 자고 있더라고, 대리석 같이 흰 팔로 서로 껴안고 있고, 입술은 줄기에 달린 네 송이 빨간 장미꽃이 여름철의 미를 자랑하는 양 입을 맞추고 있었소, 그리고 머리맡에는 기도책이 한 권 있지 않겠소, 그래서 하마터면 맘이 변할 뻔했지. 허나 제기, 이때 악마란 놈이,..그거야말로 천지조화의 최고 걸작, 세상에 둘도 없는 훌륭한 작품인 것을, 후회와 양심과 짓눌려 말문도 막히는 형편이지만 이 전말을 잔인한 왕께 전하러 온 거야'

삼촌 리처드가 어린 두 조카를 런던탑에 가두고 살해한 후 리처드 3세로 등극했다는 소문이 런던에 쫙 퍼졌을 때 쯤 왕위 찬탈에 대한 런던 사람들의 염증은 대단했지만, 그래도 그 때도 그것은 국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여전히 두 봉건 귀족간의 집안싸움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결국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가 머리에 왕관을 쓴 채 전사하고 별 대단한 가문도 아니었던 (하지만 랭카스터가에 가장 가까운 혈통을 가졌던) 튜더가의 헨리가 즉위하게 되는데 헨리 튜더에겐 이 런던탑이 피 묻은 축복의 장소일 수 있다. 왜냐하면 장미전쟁 때 고급 귀족들이 차례차례 죽어버려서 튜더 왕조의 왕권은 다른 어떤 왕조보다도 강했기 때문에. 그가 헨리 7세, 훗날의 정력적인 군주 헨리 8세의 아버지다.

그런데 리처드 3세에 대해선 요즘은 다른 해석이 인정되는 분위기다. 이를테면 그가 소문처럼 나쁜 인물이 아니고 세익스피어가 묘사한 것처럼 저주받은 추남에 꼽추도 아니고 결코 조카를 살해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준수하고 유능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즉 리처드 3세에 대해선 승자인 튜더 왕조 쪽의 역사날조가 있었다는 주장이 문헌 조사를 통해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 그렇다면 괴담의 공포란 어쩌면 역으로 누군가가 '안정'을 위해 만들어낸 것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노르만 정복의 굳건한 상징이었던 이곳이 왜 음울한 역사의 현장이 되어 가는지를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왕들은 그 전날 반드시 하룻밤은 런던탑에 묵어야했다. 그런데 1300년 이후 2세기 동안 4명의 왕이 살해되거나 왕위를 찬탈당한 뒤에 살해되었단 것(에드워드 2세, 리처드 2세, 헨리 6세, 에드워드 5세)이다. 그리고 감히 왕과 생각이 다르다고 말하며 죽어간 자들은 왕보다 훨씬 많은 피를 이곳에 뿌렸다.

▲ 반역자의 문. 런던탑의 죄수들은 이곳으로 드나들었다.

이후로 런던탑의 처형장 타워그린, 반역자의 문은 튜더 왕조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일세 시절을 보내며 더할 나위 없이 유명한 죄수들 때문에 공개적인 비탄의 장소로 확고부동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들 중 대다수는 어쩌면 한밤에 배를 타고 끌려왔을 것이다. 그 물살의 소름끼치는 어두운 빛깔과 차가운 소리는 죄수들을 희망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비통의 도시로 가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영원한 고통을 당하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저주받은 무리들 속으로 가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정의는 지존하신 창조주를 움직여
그 성스러운 힘과 최고의 지혜와 시원의 사랑으로 나를 만들었나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나쓰메 소세키 -런던탑)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 천일의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아내 캐서린 하워드(그 둘은 사촌간이었다) 9일의 여왕 제인 그레이, 어쩌면 그녀들 모두가 묵었을 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방이 런던탑 퀸즈 하우스 일층에 있다. 그 소박한 방에서 그녀들은 무시무시한 처형장인 타워 그린에서 누군가 처형되는 것을 볼 수도 있었고 다름 아닌 바로 자신들의 처형대를 세우는 인부들의 밤샘 작업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앤 볼린은 왜 죽어야 했을까? 그녀는 자신을 미워했던 추기경 토마스 울시가 죽자 '추기경의 지옥행' 이란 제목의 궁정 가면극을 보란듯이 공연 했고 존경받는 법률가이자 대법관인 토머스 모어에게 사형을 내리라고 악을 써댔고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 스페인의 캐롤라인 왕비와 그녀의 딸 메리에게 매정하게 굴었고 캐롤라인 왕비가 살아있을 때도 그녀의 보석을 내놓으라고 난리쳤지만 그런 이유로 처형당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다섯 명의 남자들과 간통을 하고 근친상간을 범했다는 죄로 처형당했지만 그것은 조작과 음모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나는 그녀를 만나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런던탑의 퀸즈 하우스.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 천일의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아내 캐서린 하워드, 9일의 여왕 제인 그레이, 어쩌면 그녀들 모두가 묵었을 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방이 런던탑 퀸즈 하우스 일층에 있다.

"당신이 알지 못하는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침을 뱉을 때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요. 역사는 항상 최고의 희생을 원하고 당신은 그 시절의 조심성 없는 희생 제의였어요. 영국 국교회가 성립되는 와중에 말이지요. 마이 레이디"

그녀는 어쩌면 숨구멍 전체를 들썩거리며 천 가지 감정을 흘러 보내듯 나에게 이런 이야길 한 자락 들려줄지도 모르겠다 .

"내가 대관식을 위해 급작스럽게, 호사스럽고 깔끔하게 단장된 이 런던탑에 와서 하룻밤 머물고 흰색 마의를 입힌 말 두필이 끄는 흰색 가마를 타고 웨스트 민스터 사원으로 가서 대관식을 치르던 6월의 어느 날과, 참수대로 가기 위해 런던탑으로 반역자의 문을 통해 돌아왔던 그 사이엔 이런 날이 하루 끼어 있어요. 성녀이자 동정녀인 우르슬라 성인과 만천명의 처녀들이 그려진 대형 테피스트리 밑에서 아이를 낳던 어느 날이었죠. 난 아들이 아니라 딸을 낳았고 그 아이에게 엘리자베스란 이름을 붙이게 되고 왕자를 낳을 줄 알고 미리 준비했던 마창 시합과 불꽃놀이가 취소되던 날. 난 그날 변해버렸어요. 왕도 변해 버렸지요. 나는 내 사랑과 목숨과 아이가 한꺼번에 위태로와진 것을 보았죠. 나는 어떻게든 아들을 낳아야했어요. 나는 숱한 임신을 했지만 결국 엘리자베스를 빼곤 어느 아이도 살아남지 못했어요. 내가 엘리자베스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직접 젖을 먹이겠다고 하니 모두들 질겁하더군요."

"현대 의학은 당신이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 혈액이 특이형일 수 있단 애기죠" 라고 그녀에게 말한다면 그녀는 그 무슨 비비디바비두 같은 말이냐며 나를 바라볼까?

▲ ,헨리 8세를 다룬 영국드라마 '더 튜더스' 의 한장면. ⓒBBC

그녀는 참수될 걸 알자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겠네요. 난 목이 작고 가늘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생의 마지막 날, 흰색 망토를 걸치고 처형장으로 걸어 갈 때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고 한다. 앤 불린의 인생 모토는 최고로 행복한 여자가 되자였다. 그런데 그녀는 참수 후 관도 없이 궤에 담겨서 런던탑 근처 사원 뜰에 묻혔다. 그녀가 죽자 런던탑에 설치된 총포는 불을 내뿜으며 일제히 왕비의 죽음을 알렸다. 앤이 죽던 날, 헨리 8세는 '원래 영웅들은 사악한 마녀의 간교함에 놀아나기도 한다'.라고 말하며 최고로 근사한 식사를 맘껏 즐겼고 당분간 누구도 앤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얼마 뒤 곧이어 런던탑에선 또 다른 축포가 연달아 울렸다. 헨리 8세는 상복을 벗을 시간도 기다리지 않고 세 번째 아내인 제인 시모어와 결혼을 했고 30년 가까운 세월 기다린 에드워드 왕자를 낳은 것이다.

런던탑 퀸즈 하우스에 또 하나의 비운의 여주인공은 어여쁜 캐서린 하워드이다. 그녀는 제인 시모어가 아이를 낳고 죽은 후 다섯 번째 아내가 되었는데 옷과 춤을 좋아했던 경박한 평범한 어린 아가씨에 불과했던 그녀의 죄목은 앤 불린처럼 간통죄였다. 앤 불린처럼 야망은 컸지만 앤 불린보다 배포는 턱없이 약했던 캐서린은 런던탑에 끌려올 때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울음을 그치고 나자 죽을 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참수대를 자기 방으로 가져와 목을 올려놓는 연습을 했다는 게 그녀에 관한 전설이라면 전설이다. 그녀는 앤 블린 옆에 묻혔다.

그리고 런던탑 퀸즈 하우스 마지막 비운의 여주인공은 제인 그레이이다. 그녀는 헨리 8세의 두 자녀인 신교도인 에드워드의 사망, 극단적 가톨릭인 메리 여왕의 즉위 사이에 헨리 7세의 혈통이란 이유 하나로, 9일 동안의 여왕으로 역사에 쑤셔 넣어져 있다. 병약한 에드워드 6세가 죽게 되자 가톨릭에게 나라를 넘기고 싶어 하지 않았던 신교도 귀족들은 야망에 눈이 멀어서 왕실의 피(헨리7세 누나의 손녀)를 이어받은 그녀를 기회주의적인 벼락부자 신교도 노섬벌랜드 귀족의 응석받이 아들과 억지로 결혼 시키고 병상의 에드워드 6세에게 그녀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한다. 누나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을 경우 영국이 가톨릭 국가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던 에드워드 6세는 신교도 귀족들의 요구를 따른다. 어른들이 결혼의 정치적 중요성을 노골적으로 떠벌이는 동안에 제인 그레이는 자신이 이익을 위해 팔린 노예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 하는데,마침내 에드워드 6세가 죽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왕위는 제 것이 아닙니다. 에드워드 6세가 내게 왕위를 넘겼다면 그건 자기 이익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강요해서겠지요."

결국 그녀는 왕위를 잇고 여왕으로 행렬을 하지만 딱 9일이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6세 사망 직전 런던을 탈출했던 메리가 가톨릭, 스페인,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신교도 노섬벌랜드 공작파를 물리치고 왕위를 차지하면서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런던탑에 갇히게 된다. 처음에 대관식을 위해 런던탑에 왔던 그녀는 여왕의 옷에서 사복으로 옷만 갈아입고 런던탑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그건 그녀의 열여섯 생일이 지난 며칠 뒤의 일이었다. 책을 좋아하고 무척 영민했던 그녀는 정략적으로 이용만 당하다 원한 적이 없던 9일간의 여왕 역할 때문에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게 된 것이다. 제인 그레이는 죽을 때 용감했지만 결국은 어린 소녀답게 부들부들 떨었다 한다.

에드워드 일세는 사랑하는 엘리너 왕비를 추모해서 열아홉개의 돌십자가를 세웠다. 누군가 제인 그레이에게 '왕비님이 북부에서 돌아가시자 임금님은 유해를 운구해 오면서 쉬는 곳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이런 십자가를 세웠어요' 라는 이야길 해줬을지 모른다. 사랑스럽고 똑똑한 제인 그레이는 chere reine (사랑하는 왕비), 그래서 이곳 이름이 채링 크로스 인거죠!하고 뽐내듯 들떠서 어느날 런던 산책길에 말했을지 모른다. 서점이 가득한 책들의 거리 채링 크로스를 부드러운 바람결에 산택하며 종이와 잉크 냄새를 맡는 것, 그것이 조숙함과 학구열과 지식으로, 저명한 학자들까지 깜짝 놀라게 했던 제인 그레이에게 딱 어울리는 행복한 삶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녀의 꿈은 책에 헌신하는 삶이었으니까.

▲ 런던 채링 크로스의 서점가.

죽음 앞의 절규, 죽음 앞에 마지막 단 한 번의 용기, 누구나 신의 가여운 어린 것이 되는 죽음 앞의 급박한 기도, 자식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어미의 애통함, 영광과 추락, 죽을 때까지 빼놓지 않고 있던 반지,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목에 닿는 섬뜩한 차가운 도끼날의 느낌, 멀리 프랑스에서 특별히 초청받아 날아온 솜씨 좋은 사형 집행인의 단 한 번에 내려치는 배려, 허망한 야망, 애원과 회개, 음모와 권력 앞의 쓰라린 웃음들을 블러디 타워에서 서서 생각하다보면 으스스하기도 하지만 좀 궁금한 마음도 든다. 런던탑의 타워 그린과 블러디 타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런던 사람들은 시민의 삶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고 프랑스의 바스티유 감옥 함락 같은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런던탑의 괴담은 나쓰메 소세끼가 본대로 피와 살이 찢기는 음울한 역사인 것은 분명한데, 동시에 인간이 많은 걸 참아내는 것(혹은 참으며 얻어내는)을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하다. 정열을 불살라본 적이 없어서 어떤 결과도 초라하지 않은 인생이 영국식 현명함일까? 그러고 보니 이런 속담이 생각난다. 프랑스 사람은 애인을 사랑하듯 자유를 사랑하고 독일 사람들은 노부인을 사랑하듯 자유를 사랑하고 영국 사람들은 법적인 부인을 사랑하듯 자유를 사랑한다고.

1066년의 노르만 기사들, 장미 전쟁 때의 시체, 템즈강과 런던시티를 향해 쏴 올려졌을 수천포의 대포, 런던탑을 파괴하고 왕관을 약탈하는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군대들(그들은 대관식때 쓰는 왕관, 왕홀, 반지등을 없앴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왕실의 상징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크롬웰이 처형한 찰스 일세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왕관이 부서지는 것은 가슴 아파했다.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보석 컬렉션들도 이때 사라졌다) 왕관을 다시 복구하는 찰스 2세, 대관식 하루 전에 이곳에 들렀던 왕들의 시절을 그러나 런던탑은 이젠 잊은 듯하다. 사실 런던탑에 들어서기 전부터 나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래전 공포에 무뚝뚝하게 반응하지 않을 준비, 벽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이니셜과 가문의 문장과 피 묻은 사연을 숨죽여 읽어볼 준비, 블러디 타워에서 제인이라는 이름을 찾아내 한마디 거들 준비, 불길한 다섯 마리 까마귀를 만날 준비. 도시를 한 번 비장하게 돌아보고 만감에 젖을 준비, 죽음과 화해한 진짜 영웅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 어떤 피조물 하나를 골라 애틋해야 할 준비.

그러나 실제로 본 런던탑의 이미지는 잘 관리되는 도시 괴담의 테마 파크관 같다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 눈앞의 거대한 런던탑은 비탄의 흔적 없이 빅토리아 양식의 타워 브릿지를 배경으로 최적의 산책 코스 같다. 정복왕 윌리엄이 이 도시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깃발 꽂고 템즈강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건설한 성벽에서 21세기 오피스 걸들과 노인들이 오후의 햇볕을 쬐며 책을 읽는 것을 보는 건 가을날 낙엽을 발로 차며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만큼이나 애틋하게 낭만적이기도 하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어느 날 햇볕에 따뜻하게 몸을 쪼이는 것에 불과하다 라고들 하지 않는가? 어차피 인생은 잠시 지나가는 거라고들 하지 않는가? 그래도 지금 우리가 그 옛날의 사람들보다 문명화 되었다거나 훌륭한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옛날에도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신념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고독과 유폐을 택했다. 그리고 후손과 미래에 기대를 걸었다. 우리는 아직도 그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고 숭고함에 있어서 그걸 넘어서지 못한다.

런던탑에 초창기에는 조페국이 있었단 것은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이야기이지만 (뉴턴도 조폐국장이었다) 그래도 성벽 위를 걷다가 템즈강을 보면서 런던이 런던탑을 통해 수호되는 활발하고 거대한 무역항이었던 시절의 상상을 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런던은 명예혁명 이후 통치한 오렌지공 윌리엠 3세 시절에 이르러 다른 모든 국가의 해군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한 힘을 보유하게 되었다. 원래 영국의 거대한 해군력 건설은 국내외의 왕당파에 맞서기 위해, 네델란드와 맞서 상선단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라 한다.

 
 
"신념이 아니라 사람을 기억하게 되었다"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에서 점퍼가, 런던탑Ⅲ

기사입력 2009-04-12 오후 3:27:05

 

바로 그 시절의 어느날 런던탑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 왔다. 키가 2미터에 이르는 젊은 꺽다리 러시아인이었는데 그의 이름은 표트르였다. 그는 여러모로 비범한 인물이었다. 차르의 아들인 그는 1672년에 태어났고 모스크바 교외 왕실 영지 독일인 정착촌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그 구역에 살던 가난한 외국인 기술공들 덕에 신기한 기술을 많이 보고 듣게 되었다. 그는 지방 유지의 아들, 마부 소년, 거리의 부랑아등 온갖 부류의 친구들을 불러 모아 군대 놀이를 하다가 나중에 자라서는 군사 훈련을 시켰고 정말로 이런 군대들을 모아 1689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 그의 이야기는 너무 신기해서 설레기까지 한다.
그의 이야기는 다 신기하지만 다음의 이야기는 너무 신기해서 설레기까지 한다. 그는 어느날 왕실 별장에서 낡은 영국 범선을 찾아냈는데 그 배를 수리해 연못에 띄워보고는 성에 차지 않자 더 물이 많은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고 호수라는 대답을 듣자 호수에 가서 배를 띄워보고 그 다음에 호수에 성에 차지 않게 되자 어마마마에게 조선소를 세워 배를 만들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 다음엔 바다가 보고 싶어져서 항해를 떠나게 해달라고 조른 다음에 허락을 받아 대사절단을 꾸려 길을 떠난다. 그렇게 해서 그가 찾아간 곳이 바로 네덜란드와 영국이었다. 그게 1697년과 1698년 사이의 일인데 18개월 안 대사절단 실습생 틈에 끼여 여행하는 동안 그는 무려 열 네가지나 되는 기술을 직접 익혔다. 그는 기술자이자 포병, 발명가이자, 목수, 선원이자 병기공, 대장장이이자 치과의사 같은 역할을 몽땅 다 해내게 되었다. 암스테르담에선 동인도 회사의 조선소에서 머물면서 선박 건조 기술을 배웠고 항해술을 익혔다.(바람둥이 포함)

런던에서 바다에 가거나 바다에 가지 않는 날이면 바로 이 곳 런던탑에 소장된 각종 무기들을 돌아보고 조폐국과 그리니치 천문대를 방문했다. 그는 항해 기술을 익힌 사상 첫 러시아인 ,범선을 건조하는 법을 처음 배운 러시아인 집단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여행 목적은 해군 건설, 강력한 포병 조직, 선장, 선원, 기관사의 러시아 초빙 등이었는데 러시아로 돌아간 그는 표트르의 해군 혁명이라 불리는 해군의 건설, 그리고 유럽을 향한 창문이란 별명을 가진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만들어 냈다. 도시를 만들 때 그가 직접 작업 현장을 돌아다니며 관리 감독했다는 그 도시의 10년 후 모습을 본 외국인들은 그 도시를 세계의 경이라고 불렀다. 결국 그는 그토록 탐내던 발트해를 얻었다. 그도 1698년 어느날 나처럼 런던탑 성벽에 서서 템즈강을 내려다 보면서, 자기의 꿈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에게 그 꿈은 바다를 향한 통로를 얻고 싶다는 것이었고 이곳은 그에게 길을 보여 줬을 것이다. 그는 처음 자극을 주었던 영국의 낡은 배에 대해서 어린 시절의 장난감이었을 뿐 아니라,지금도 경이롭게 생각하는 해군을 건설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자작나무 우거진 땅 끝의 황폐한 나라의 사람들로만 여겨졌던 러시아 사람들은 그를 통해 동양 사람에서 유럽 사람이 되었다.

▲ 런던탑 성벽과 템즈강. 내가 따라야 할 힘, 내가 써야 할 힘이란 어떤 것일까?

나도 표트르를 생각하며, 템즈강을 보며 오랫동안 성벽을 걸어보았다. 심리학자인 융은 '어른이 되고 나면 여러분은 자기 삶을 움직이는 힘을 반드시 재발견해야 한다. 비현실적 감각이나 감정의 결여, 긴장은 삶의 잘못된 힘을 따름으로써 나타난다.'고 말했다. 내가 따라야 할 힘, 내가 써야 할 힘이란 어떤 것일까? 아마 아주 아주 오래전에 안개 속에서 런던과 템즈 강을 발견한 사람 중엔 그저 멀리 있는 땅을 보고 싶고 알고 싶어서 땅바닥에 막대기로 바다와 섬의 상상의 지도를 그려 넣은 사람도 있었을 것인데 그들은 그들이 앞으로 건너야 할 바다가 얼마나 넒고도 먼지 일일이 계산에 넣지 않고 출발했을 것이다. 나는 그 힘을 숭배하고 따르고 싶다.한 귀여운 아메리카 인디언 소년은 이런 조언을 얻었다고 한다. '삶의 길을 가다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 뛰어넘어라 / 네가 생각하는 만큼 넓진 않으리라.'

영국이 한때 어떤 식으로 힘을 썼는지 사례로 보여줄 만한 사나이도 이곳에 갇혀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나가는 길에 진흙이 있는 것을 보고는 벗고 있던 망토를 펼쳐 여왕이 그 망토를 즈려 밟고 지나가게 했다는 낭만적 전설로 유명한 월터롤리 경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배를 덮쳐 금을 빼앗는 해적이자 엘리자베스 여왕의 근위 대장, 신대륙에 버지니아란 이름을 붙이고 감자와 담배를 영국으로 들여온 탐험가이자 역전의 용사이면서, 그 인품에 있어서는 후안무치, 오만방자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곳의 어느 방에서 엘리자베스 풍의 반바지를 입고 세계사 책을 쓰기도 했는데 그 책의 애호가중 하나는 올리버 크롬웰이었다.(청교도였던 그는 신성국가를 꿈꾸며 신세계로의 이민을 꿈 꿨었을지 모르겠다)

▲월터 롤리의 초상화. 그는 역전의 용사이자 후안무치, 오만방자한 사람이었다. .
늘 불가능한 항해를 꿈꿨던 월터 롤리와 그 시절 사람들은 배가 움직이는 원인을 뭐라고 생각했을까? 강력하게 부풀어 오른 돛은 스스로가 배를 움직이는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어느 순간에라도 방향을 바꾸거나 멈출지 모르는 바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라고 말해준다면,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훗날 그가 이름을 단 버지니아 같은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고가의 상품인 담배의 공급지가 되었고 버지니아에서 생산된 것들은 영국 이외의 상인들과 교역할 수 없었고 영국 이외의 항구로 수출되는 것도 금지되었었다.

지금 런던탑 앞에는 호화스러운 요트들이 정착해 있는 쇼핑몰과 식당으로 가득한 세인트 캐서린 부두가 있다. 이 부두를 통해 차와 구슬, 노예, 진기한 음식재료, 최고의 식재료인 살아 있는 거북이 같은 것들이 배를 타고 왔다 갔다 했으리라. 하지만 이 세인트 캐서린 부두는 1968년에 폐쇄되었다. 세인트 캐서린 부두가 폐쇄되던 무렵, 4월 23성 성 조지의 날, 항구의 교역이 끝난 이유는 이민자들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백인 항구 노동자들의 웨스트 민스터 행진이 있었다. 그들은 신인종주의 민족주의 정치가의 말이 옳다고 깃발을 흔들며 웨스트 민스터로 행진했는데, 그 세인트 캐서린 부두 노동자들의 행진을 대부분 카리브해 이민자들이 자리 잡은 브릭스턴 지역에서 일어난 민족주의적 테러나 최근 런던의 경제 불황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그 옛날의 블러디 타워나 타워 그린의 이야기보다 더 구조적으로 착잡한 기분이 든다. 과거 대영 제국의 정치가들은 병원의 잡역부와 청소부들을 자치령과 식민지에서 데려오면서 기뻐했었다. 오늘날에도 런던의 병원과 버스, 지하철은 그들이 없으면 작동을 멈출 것이고 워킹 맘들은 출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장작가인 도리스 레싱의 런던 스케치란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도리스 레싱은 어느날 병원의 노인병동에 가게 되었는데 젊은 흑인 남자 간호사가 늙은 백인 여자에게 요강을 주는 것을 보게 된다.늙은 백인 여자는 아주 고령이었고 노동 계층이었고 노처녀였다.그런 여자에게는 그녀 주위로 커텐이 드리워지기도 전에 공공 장소에서 요강을 사용해야 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더 끔찍한 것은 간호사가 남자,그것도 제복을 입은 젊고 차분한 흑인이란 점이었다. 도리스 레싱은 이 둘 사이엔 상상하기 힘든 내면의 드라마가 진행되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가 돌아와 좀 닦아드릴까요?라고 묻자 그녀는 위엄있게 빛나는 눈으로 "아니.괜찮아요.아직은 내가 할 수 있어요"라고 대답한다.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불안과 젊은이들의 울분 답답함을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는 어떻게 풀어나갈까? 그것을 해묵은 인종주의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왕위를 지키기 위해 도끼를 날리는 것만큼이나 위험해 보인다.

▲ 지금 런던탑 앞에는 호화스러운 요트들이 정착해 있는 쇼핑몰과 식당으로 가득한 세인트 캐서린 부두가 있다.

어쨌든 지금 현재 런던탑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곳은 주로 찰스 2세의 왕정 복귀 뒤에 마련된 보석들을 전시하고 있는 주얼 하우스이다. 동인도 회사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물한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인 코히누르와 스타 오브 아프리카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530캐럿짜리, 여왕의 봉에 박혀있다-를 볼 수 있다. 세계 제 1의 다이아몬드, 제2의 다이아몬드는 모두 현 엘리자베스 여왕 소유인데 주얼 하우스에서 다이아몬드의 247면체를 보면서 빛의 반사 이론을 생각하기엔 그 곳은 관광객으로 넘쳐났다.

우리 시대는 위대한 사람들을 만들어내기 힘든 시대라고 한다. 위대한 개인들이 꽃피기 힘든 시대라고 한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돈을 벌어라라는 토양의 속성이 바로 그렇다는데 나는 그 말을 뒤집고 싶다.이 곳에 있었던 또 하나의 유명한 죄수 가이폭스가 재등장하는 영화가 하나 있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이다. 엘리자베스 일세의 후계자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일세 시절 가톨릭 신앙을 위해 11월 5일에 국회의사당을 폭파하려 했던 가이폭스는 런던탑에 갇혀 있다가 죽는데 영화에서는 그가 죽는 장면에 '사람이 아니라 신념을 기억하라. 신념은 지금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기억하라 11월 5일을'이라는 나레이션이 흐른다. 영화의 끝 장면에선 가이폭스 마스크를 쓴 수많은 사람들이 극단적인 민족주의자 ceo형 독재자를 타도하고 자유를 찾기 위해 모여들고 국회의사당은 폭파되는데 그 때는 "신념이 아니라 사람을 기억하게 되었다"란 나레이션이 흐른다. 그때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 거리에 넘쳐 흐른다.

런던탑에 앉아 가이폭스의 부활을 잠시 생각해본다.원인과 결과들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매일 매일 똑같이 사는 것 같지만 ,반복되고 되풀이 되는 역사의 한 주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신념 가득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이 곳의 오래된 삶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해주는 말일지 모른다. 오래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순간이 우리 모두의 삶 속에 한번은 들어있기를. (그래도 내가 브이 포 벤데타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주크 박스에서 줄리런던의 "cry me a river"가 흘러나올때 브이가 나 사실 춤 한번도 춰본 적 없어.부탁이 있어.나랑 춤한번 춰볼래?라고 마스크를 쓴 얼굴 밑으로도 수줍어하며 나탈리 포트만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이다.나 한번도 춤춰본 적 없어.)

▲ <브이보벤데타>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나는 이상하게 런던탑을 도는 내내 엘리엇의 황무지 이 싯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나는 언젠가 문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단 한번 돌아가는 소리
각자 자기 감방에서 우리는 그 열쇠를 생각한다.
열쇠를 생각하며 각자 감옥을 확인한다.
(엘리엇 황무지)

 


 
관능적이고 용감한 여인들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10>런던, 핼프튼 코트(1)

기사입력 2009-04-17 오후 9:49:55

 

어느 날 우리는 홍익대 앞의 스페인 식당에서 꿀을 탄 세리주를 나눠 마시며 무어인의 마지막 한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스페인의 그라나다에 알함브라 궁전을 지은 무어인의 왕이 알함브라 궁전을 빼앗기고 언덕을 넘어갈 때 뒤돌아보며 마지막으로 쉬었다는 한숨. 그 성에는 무어인 왕들의 딸들이 살던 왕녀들의 탑이 있다.

▲ 워싱턴 어빙의 여행기 <알함브라> 표지 사진.
<알함브라>란 최고의 여행기를 쓴 미국의 소설가 워싱턴 어빙은 어느날 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젊은 아가씨가 그 탑의 창문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것을 보고 그 탑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 탑은 대리석 분수가 있는 아름다운 중앙 홀과 높은 아치들, 격자 세공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라베스크와 치장 벽토 장식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그가 그라나다에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탑에 갇혀 살던 세 공주는 밤에만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공주들은 이따금 아직도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보석으로 장식한 승마용 말을 타고 외로운 산속을 달리다가 누군가 말을 걸면 바로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세 공주의 전설을 더 소개했는데 무어인 모하메드왕은 어느 날 포로로 잡힌 기독교 국가 아가씨의 용모에 반해서 그녀와 억지로 결혼을 하고 세 딸을 한꺼번에 낳게 되었다. 점성술사들은 공주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면 특별히 폐하의 날개 아래 모아놓고 다른 누구에게도 보호를 맡겨서는 안됩니다라고 간언했다. 세 공주는 무척 아름답게 자랐는데 첫째는 호기심이 많고 질문하기를 좋아하고 만사의 근원을 캐기를 좋아했다. 둘째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고 꽃과 보석과 장신구를 좋아했고 거울과 분수 속에서 자기 모습을 찾아내 보는 걸 좋아했다. 셋째는 꽃과 새와 동물을 좋아하는 마음이 따뜻한 소녀로, 공상을 좋아해 몇 시간씩이나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나 달빛이 비치는 바다를 지켜보곤 했다.

어느날 세 소녀는 무어인 군인들에게 끌려오는 기독교인 포로를 보게 되었는데 그들은 기품 있고 당당한 세 명의 젊은이 들이었다.공주들이 그들을 흠모하게 되었다.공주들이 마침내 사랑에 빠질 몸과 나이가 된 걸 알자 무어인 왕은 점성술사의 말에 따라 그녀들을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대신 화려한 보석과 옷으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치장해줬다. 하지만 공주들은 나날이 웃음을 잃고 수심이 깊어갔다. 공주들은 결국 각각 짝을 맞춰 기독교인 포로들과 왕의 눈을 피해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나서야 웃음과 활기를 찾았다. 시일이 좀 흐르자 에스파나 기사들은 몸값을 치르고 그들의 고향인 코르도바로 돌아가게 되었다. 돌아갈 날이 되자 기사들은 세 공주들에게 함께 달아나자고 했다. 알함브라 궁전에는 남몰래 드나들 수 있는 지하 통로가 있었는데 통로는 강둑까지 연결 되어 있었다. 공주들이 그 지하통로를 통해 출구까지 가면 기사들이 그 곳에서 국경을 넘을 준마를 대기시키고 함께 달아나기로 약속했다. 드디어 탈출의 날, 공주들은 갇힌 탑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 그런데 막내 공주는 주저하며 덜덜 떨었다. 그녀의 다정다감하고 연약한 마음은 혼자 남을 아버지를 생각하자 움츠러들었던 것이다. 발코니 아래서 언니들이 애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때 순찰병이 돌기 시작했다. 막내는 이렇게 소리쳤다. "나 결정했어요. 사랑하는 나의 언니들, 알라께서 언니들을 인도하고 축복하실 거예요." 나머지 두 공주는 기사의 등에 매달려 말을 타고 달려갔지만 곧 발각되었다. 그들은 강으로 뛰어 들어 파도에 몸을 던졌고 다행히 알라의 보호인지 성모 마리아의 보호인지 코르도바의 해안으로 밀려갔다. 왕이 두 딸을 찾아오는 일에 마음을 썼는지, 얼마나 애통해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신 그는 남은 딸 하나를 지키는 일에 무척 마음을 썼다고 한다. 나중에 알함브라 궁전엔 일찍 죽은 왕녀의 눈물 젖은 무덤이 하나 생겼다고 한다.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이 스페인에게 함락된 건 카스티야 아라곤 공동왕인 이사벨라 여왕과 남편 페르디난도 때의 일이었고 바로 그 때 무어인 왕은 알함브라 궁전을 언덕에서 내려다보며 마지막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왕녀의 탑에 꽁꽁 갇혀 눈물 흘릴 필요 없는 어여쁜 공주들이 그 무어인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뛰어 놀게 되었다. 이사벨라 페르디난도 부부는 자신들의 네 왕자와 공주를 무어인에게 빼앗은 알함브라 궁전에서 길렀던 것이다. 이사벨라 -페르디난도 시절 때의 스페인을 존슨 박사의 개라고 표현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전혀 예상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뒷다리로만 걸어 다니는 묘기를 보여 사람들을 깜짝 놀래켜 준다는 그 개처럼 스페인도 변변치 않게 여겨졌다가 갑자기 유럽에서 벌떡 일어나 사람들을 놀래켜줬다. 유럽 사람들은 스페인의 도약에 어찌나 깜짝 놀랬던지 그 시절을 두고두고 스페인의 황금시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때 일어난 일들은 1492년 그라나다의 무슬림 완전 정복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그리고 종교재판소 설립이었다.

▲ 알함브라 궁전에서 놀며 뛰며 공부하며 지낸 공주가 바로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가 된 캐서린이었다.
그 어린 시절 알함브라 궁전에서 놀며 뛰며 공부하며 지낸 공주가 바로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가 된 캐서린이었다. 장미 전쟁을 치르고 왕이 된 헨리 7세는 아직도 취약한 정권을 그 당시 유럽의 핵심 세력으로 급부상한 에스파냐 왕실 공주와 아들과의 결혼을 통해 굳건히 하고 싶어했다. 두살 때 헨리 7세의 아들 아서와 정혼한 캐서린은 열두살 때인 1498년에 잉글랜드로 왔지만 결혼 여섯 달 만에 첫 번째 남편 아서가 죽고 만다. 그래서 캐서린은 아서의 동생인 훗날의 헨리 8세와 다시 결혼하게 되는데 문제가 되었던 건 과연 아서와 캐서린이 초야를 치뤘냐 하는 것이었다. 캐서린은 아서와의 신혼 첫날밤에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운차게 침대로 뛰어들긴 했지만 그냥 잠만 푹 잤다고 주장을 해서 헨리 8세와 캐서린은 꽤 많은 시간을 보낸 뒤에 결혼하게 되었다.

헨리 7세의 뒤를 이은 헨리 8세에겐 너무나 많은 칭송이 있어서 그대로 믿기 힘들 정도다. 그는 수학, 천문학을 좋아했고 라틴어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했고 누구보다도 높이 점프를 하는 멋진 춤을 추었고 악기를 능수능란하게 연주했고 요즘도 불리는 찬송가를 지었고 시를 지어 사랑을 고백할 줄 알았고 여자처럼 예쁜 얼굴을 가졌고 특히 사냥이 끝난 뒤에 분홍빛 뺨은 너무나 예뻤고 탄탄한 허벅지는 일품이었고 키는 백 90 센티미터였고 하루에 여덟 내지 열 마리 말을 지치게 할 정도로 정력적인 사냥꾼이었고 바다를 유별나게 사랑해 현대 해군을 창시하기도 했다.

특히 내 마음을 끈 것은 그 시절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가 바야흐로 잉글랜드 땅에 착륙한 시기였단 점인데 헨리 8세야말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란 새 시대의 선구자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르네상스풍 새 시대의 선구자란 어떤 사람이었을까? (르네상스적 인간이 되는 것이 학창시절 내 인생의 목표였다. 무참히 실패했지만.)

그는 우선 궁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인문주의자들을 식탁에 초대했다. 헨리 7세에게 많은 유산을 넘겨받은 그가 화려하게 꾸민 궁으로는 그리니치와 리치몬드, 윈저, 햄프턴 코트(햄프튼 코트는 원래 헨리 8세 통치 초창기의 실세인 친프랑스계 추기경 토마스 울시가 템즈강변 옛 수도원 자리에 왕궁에 버금가게 화려하게 지은 궁인데 나중에 자신의 세력이 위협받자 자발적으로 헨리 8세에게 바쳤다.) 등이 있다. 그는 왕궁과 대저택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그 궁에는 자연스럽게 귀족, 성직자, 관료, 시종등이 따라붙어 궁에 머무르는 사람의 숫자가 많을 때는 수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헨리 8세는 남들에게 부를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온 학자들을 우대했다. 왕이 식사할 때는 인문주의자, 시인, 예술가들이 배석해 열띈 대화를 나눴고 베르길리우스같은 사람이 화제에 올랐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트로이 전쟁 영웅이자 로마 건설자인 아이네이아스의 유랑을 읊은 서사시 아이네이아스를 썼는데 자신의 위엄과 미래의 비전에 관심 있는 통치자라면 베르길리우스의 민족적 예언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을 것 같다 .베르길리우스는 죽을 때 자신의 그 글을 없애달라고 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취소 시켜버렸다.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일세도 베르길리우스의 번역에 관심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좀 더 부드럽게 청동으로 주조하겠지
그들이 숨 쉬는 조상들을, 나는 정말 믿을 수 있어
그리고 더욱 살아있는 형상을 대리석으로 빚어내지
아주 유창하게 논쟁하고 지침을 이용하여
천체의 진로를 정확하게 찾아내고
떠오르는 별들을 정확히 예언하겠지
로마여,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통치하는
당신의 힘을 기억하라-당신의 기예는 이런 것들이야
평정하고 법의 지배를 부과하며
정확한 자들을 용서하고, 오만한 자들을 전쟁에서 꺾는 것
(아이네이아스-피츠제럴드 번역본)


르네상스 시절의 통치자들은, 베르길리우스가 목동들과 그랬던 것처럼, 떡갈나무 그늘에 앉아 차가운 포도주를 마시며 고대시를 암송하며, 여름날 저녁에 뜨거운 목욕탕에서 나온 로마인들의 왕과 그 목욕탕 안에서 나그네에게 들어와 함께 놀기를 청했던 관능적이고 용감한 여인들의 쾌락을 맛보려 했을지도 모른다.

▲ 햄프턴 코트의 광경. 햄프튼 코트는 원래 헨리 8세 통치 초창기의 실세인 친프랑스계 추기경 토마스 울시가 템즈강변 옛 수도원 자리에 왕궁에 버금가게 화려하게 지은 궁인데 나중에 자신의 세력이 위협받자 자발적으로 헨리 8세에게 바쳤다.

그런 식탁에 앉았던 사람 중에서도 에라스무스와 토마스 모어의 우정은 유별났던 것 같다. 네델란드 출신 세계적 지식인이자 유목민이었던 에라스무스가 당대의 불온서적이자 초특급 베스트셀러, 풍자와 조롱 문학의 극치인 <우신예찬>을 쓴 곳은 바로 토머스 모어의 집이었고 그리고 우신 예찬도 토머스 모어 경에게 바치는 것으로 되어있다.

"나 (우매함) 없이는 이 삶 속에서 어느 집단도 어느 사회도 편안하게 유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결국 모든 것에 나 우매함이 첨가물로 양념되어 있지 않다면 ,정말이지 민중이 군주를, 주인이 하인을, 시녀가 주인마님을, 선생이 학생을, 친구가 친구를, 아내가 남편을, 식당 주인이 손님을, 동료가 동료를, 즉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우신예찬>)

이것을 펼치고 읽다 보면 어느 날은 멍청한 듯,눈꺼풀 한 번 깜박거리며 어리석은 듯 사는 것도 꽤 좋겠는걸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당시 궁정 전속 화가인 한스 홀바인이 그린 그림 속에서 에라스무스는 작은 체구의 수도사 같은 몸으로 두 손을 책에 얹고 있는데 그 책에 쓰여 있는 문구는 '헤라클레스의 과업'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헤라클레스의 과업의 의미는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 같다.도저히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정신의 힘을 나누는 것이고, 조용하지만 막을 수 없는 이성의 흐름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고, 미래가 평화롭고 현명하게 피 흘리지 않고도 다가올 수 있다는 한 줄기 가능성 쪽에 승부를 던지는 것이고, 교육 받은 위대한 지도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고 사람들은 밤이 되면 편히 잠들고 학자들은 그들의 양초가 닳도록 책을 읽고 이야기하고 또 기쁜 아침을 맞는 것이고. 도시들은 도서관으로 이뤄지고 세상은 책 속 세상처럼 고통이 없고 배신이 없는 것. 바로 르네상스의 아침.

▲ 궁정화가 였던 한스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무스. 책에 쓰여 있는 문구는 '헤라클레스의 과업'을 뜻하는 것이었다.
성서를 번역하고 어린이들의 예법책 같은 것을 지어 당대 유럽 최고의 지성,'세상의 빛'이란 별명을 가졌던 에라스무스는 여덟 살 난 헨리 8세를 처음 봤을 때 조숙한 천재라 불렀고 사람들은 그에게 헨리 8세를 영국의 옥타비아누스라 소개했으며 그렇다면 그런 왕이 다스리는 왕궁은 그냥 왕궁이 아니라 뮤즈의 왕궁일거라 에라스무스는 말했다. 그러나 반은 중세인이었고 반은 르네상스인이었던 헨리 8세의 세상은 피와 고통과 배신이 난무했고 왕궁도 뮤즈의 왕궁은 아니었다.

잉글랜드 에스파냐 왕국을 꿈꿨던 에스파냐 출신 왕비 캐서린은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의 세력 관계 축이 흔들흔들 하는 동안 유산과 사산을 반복하다 결국 여섯 번의 임신 중에 딸 메리 하나만 건졌다. 갓난장이였던 딸 메리가 세상에 나와 처음 뱉은 단어가 '사제님 사제님'이었단 건 여러모로 광신적인 그녀의 앞날과 관련해 의미심장하다. 프랑스와 동맹(그때 동맹을 맺은 프랑스의 왕 프랑시스 일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후원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헨리 8세를 질투하고 골탕 먹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의 말들-내 선한 젊은 잉글랜드 왕은 제 구실 못하는 나이 많은 아내를 만나 아들이 없다. 헨리 8세도 프랑시스 일세를 질투해 그는 체격이 좋은가? 허벅지는 튼튼한가? 라고 물은 뒤 여길 보게나 내 정강이는 정말 멋지지 않은가? 라고 말했단 일화는 유명하다)을 맺어 왕자도 낳지 못하는 나이든 에스파냐 아내를 애지중지 할 이유가 없었진 와중에 헨리 8세는 치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그녀는 놀랍게도, 무관심한 척 왕의 애를 태우며 자신은 함부로 정부로 불려지길 거부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되었다가 버려지느니, 결혼해서 왕비가 되거나 아무것도 안 될 운명 앞에 서 있었던 그녀의 이름은 앤 블린이었다.

그녀는 캐서린 왕비의 시녀였는데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남편에게 선사해야 할 가장 값비싸고 고귀한 지참금인 제 정절을 잃느니 차라리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그 뒤로 앤에 대한 헨리 8세의 사랑은 악마같이 강렬했다고 한다. 사랑에 빠진 헨리 8세는 자기 옷에다가 '차마 공개 선언하지 못한다'라는 구절을 공개적으로 쓰고 그리니치의 파티에 참석했고 앤은 폭풍우에 흔들리는 배에 올라탄 외로운 처녀 모양의 보석을 왕에게 선물했다. 누군가는 앤 불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그녀는 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눈빛이 어찌나 매혹적이던지 남정네들은 당장이라고 무릎 꿇고 충절을 맹세할 지경이었다.' 역사가들은 앤이 아름다운 푸른 눈으로 헨리 8세를 바라보기만 한 게 아니라 헨리 8세에게 왕권을 이어나갈 아들을 약속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헨리 8세는 1527년에 이혼에 착수했고 이혼에 걸린 시간은 자그만치 6년이었다. 적과 흑의 작가 스탕달은 1812년 에스파냐에 있는 프랑스 장교의 행복을 이런 식으로 묘사했는데 그 표현은 당시의 헨리 8세에게도 딱 들어맞는다. '여러분을 매우 고통스럽게 하고 장래에도 여러분에게 맞서고자 하는 여자, 그런 여자를 끌어안는다면 일종의 달콤한 쾌락을 맛볼 수 있다.'
 

 
햄프튼 코트의 은밀한 승자는 누구일까?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 햄프튼 코트(2)

기사입력 2009-05-01 오후 5:44:25

 

헨리 8세의 유언은 '왕국의 왕위를 에드워드 왕자에게 물려주며, 그가 죽으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캐서린 왕비(여섯번째 아내)가 낳을지도 모를 자녀들이 후계자가 된다. 만약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 메리 공주와 그녀의 자손들, 이어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자손들이 왕위를 잇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의 여동생인 메리의 자손들에게…' 그 때 그의 나이 쉰다섯이었다.

▲ 메리의 영혼에 대해 앙드레 모로아는 애정과 고집과 절대 권력의 혼합으로 생기는 혼란의 한 예라고 말했다.
어려서도 자주 앓았던 에드워드 왕자는 왕위에 올라 얼마 안 가 열다섯 살 나이에 병으로 죽고 그 뒤를 이은 수줍고 고집센 노처녀 메리는 카톨릭 스페인의 펠리페 2세를 사랑하고 여론을 져버리고 그와 결혼해 아기를 낳고 싶어 했지만 임신은 두 번의 상상 임신소동으로 끝나버리고 미남 펠리페는 곧 돌아오겠다 말하고는 스페인으로 떠나 다시 아내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나중엔 볼록 나온 배 속에 있는 것이 아기가 아니라 혹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결국 그녀는 5년간의 통치 끝에 블러디 메리(신교도들을 화형시키는 잔인한 박해로 얻은 별명이다)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만을 안고 죽게 된다.

그녀의 영혼에 대해 앙드레 모로아는 애정과 고집과 절대 권력의 혼합으로 생기는 혼란의 한 예라고 말했는데 어머니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함께 어린 시절에 겪은 불행과 고독을 오로지 신앙의 힘만으로 견뎌낸 걸 생각하면 사람의 영혼이 어떤 과정을 통해 위험해지는지 좀 보이는 것도 같다. 아마 그녀는 이 햄프튼 코트에서 펠리페 2세와의 혼사를 성립시키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뛰는 가슴으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지탱해준 신앙적 동지와의 이상적 결합을 꿈꾸며 뒤늦은 행복의 예감에 몸을 떨며 얼굴을 붉혔을 수도 있다.

처녀왕의 전설을 낳은 엘리자베스 역시 어머니 앤 블린의 최후를 보면서 결혼 자체에 대한 공포를 갖게 되었단 이야기와 함께 실은 자궁이 기형이어서 애를 낳지 못할뿐 아니라 성관계 자체가 불가능하단 소문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늘 젋고 잘생기고 출중한 몸놀림을 보이는 남자들을 곁에 많이 두었고 그들의 질투심을 이용했고 그녀 스스로도 불같이 질투를 했고 성적인 농담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렸다. 스탕달은 연애에 관한한 엘리자베스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그는 연애론에서 그녀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두 사람의 엘리자베스, 난폭한 아버지를 둔 두 여성을 비교해보자
어느 쪽이 문명국 혹은 야만국의 군주였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두 사람 모두 엘리자베스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표트르의 딸은 전제적이었지만 경쟁자와 적을 용서했다.
그런데 영국의 엘리자베스는 메리 스튜어트의 왕위에 대한 욕구와 매력을 용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녀가 보호를 바라고 있을 때 도량 좁게도 그녀를 투옥했다.
엘리자베스는 크든 작든 자기의 질투심 때문에 전제권 혹은 법률의 승인 없이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 그런데 이 엘리자베스는 자기의 굳은 정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찬미를 받기 위해 온갖 우스꽝스러운 교태를 부렸고 자기 쪽에서 눈짓을 던져 놓고도 연인들이 접근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리하여 결국 자기의 욕망도 그들의 야심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스탕달의 의견에 반대한다. 나는 솔직히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많이 끌린다. 그녀는 나보다 책을 많이 독파한 학자는 거의 없다고 자랑했으며 죽는 날까지 키케로나 플루타르크 번역을 소일거리로 삼았고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스물여섯 시간 동안 내리 <철학의 위안>이란 책의 번역에 매달릴 정도로 학문을 사랑했으며 영어로 프랑스어로 이탈리아어로 그리스어와 라틴어, 에스파냐와 스코틀랜드와 네델란드어로 말을 할 줄 알았다. 노골적으로 불경한 욕설을 날릴 배포가 있었고 사냥한 동물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부류의 여자가 아니었고 짖궂은 장난을 좋아했다.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기 위해 극단적인 몸부림을 치며 나이 들어갔고 그녀가 궁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란 말을 끝없이 듣고 싶어서 시녀들이 자신보다 예쁜 옷을 입는 걸 참지 못했다. 노년에도 목이 깊게 팬 드레스를 입었고 아침에 몸치장을 하는데 두 시간씩을 바쳤고 걸어다니는게 신기할 정도의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한꺼번에 몸에 걸쳤고 보석에 집착했다. 그녀의 보석 컬렉션은 당대 유럽 최고 수준이란 말을 들었는데 보석들에는 그녀의 좌우명인 셈페르 에어뎀 (semper eadem, 항상 같다)을 새겼고 최상급 진주 장신구를 처녀성의 상징으로 자주 활용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남자 없이 살 수는 없는 여자답게 남자 궁정인들의 관심을 독차지해야 직성이 풀렸다. (이들 남자 궁정인들의 역할은 감히 손에 넣을 수 없는 고귀한 여인을 그저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쓰라린 한숨과 불면의 밤을 보내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녀가 누구의 딸인지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헨리 8세 초상화 밑에서 사람들을 맞이하곤 했는데 그녀는 충성심을 불러일으킬 줄도 알았고 받은 사랑을 유지할 줄도 아는 여자였다. 특히 그녀는 언니와 달리 종교적인 광신도가 아니었고 원래 개인의 내면 깊은 곳은 함부로 들여다봐선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어머니 앤 블린의 죽음과 자기 스스로 런던탑에 갇혀 본 경험 때문에 그녀는 속마음을 말하지 않기, 사기 치기, 위선, 기만, 모략에 있어서 대가의 경지에 올라 있었는데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 통치자라면 반드시 가져야할 덕목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왕위에 어렵게 오르자 신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이유는 어머니가 자식을 살피듯 나라 구석구석을 보살피란 뜻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여자라면 다른 식의 연애는 못한다. 사랑 하나 보고 불같이 뛰어들 정열 따위는 생길 수 없다. 나는 그녀 최후의 영혼이 외로움 속에 후들거리며 손가락에 갖가지 반지를 끼고 드레스를 끌고 런던의 진창길을 걸어가는 것을 결코 싸늘하게 바라볼 수 없다.

▲ 진주로 치장한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 그녀는 충성심을 불러일으킬 줄도 알았고 받은 사랑을 유지할 줄도 아는 여자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어린 시절 햄프튼 코트에서 천연두를 앓아서 이곳을 좋아하진 않았다고 한다. 대신 부활절, 성령강림절, 크리스마스 무렵에 대대적인 연회를 열었고 외국사절들과 왕족을 위한 호사스런 잔치를 자주 열어서 그녀 시절의 햄프튼 코트는 벽마다 금과 은이 눈부시게 빛나는, 명화와 악기와 황금빛 샹들리에로 화려하게 장식된 잉글랜드 전역을 통틀어 가장 정교한 궁전이란 평을 들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곳 정원에서 월터 롤리경이 신대륙에서 들여온 담배와 감자를 길러 보기도 했으리라. 그 시절엔 런던에 나가면 세익스피어의 글로브 극장이 있었을 것이고 그리니치에선 먼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선단들의 출정식이 있었을 것이다. 또 그 시절엔 배 한척으로 단 한차례 원정만으로도 엘리자베스 여왕의 일 년치 수입보다 더 많은 값나가는 화물을 싣고 돌아왔다는 모험 소설 속 주인공 같은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 있었다. 그는 그 유명한 골든 하인드호를 타고 스페인의 황금 상자를 빼앗는 해적질을 거침없이 자행했고, 여왕은 골이 난 스페인의 왕에게 사과하는 척하면서 드레이크에게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스페인은 너를 해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일어나시오, 프랜시스경이라고 한다" 그녀는 해적에게 기사작위를 줘 버린건데 (한 발 더 나아가 그에게 투자를 해서 막대한 개인적 이득도 올렸다)여러모로 스페인과 영국 사이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전쟁은 그녀에게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줬다. 그녀는 스페인과의 전쟁 현장에 은빛 갑옷을 입고 나타났는데 영국은 화공선을 이용해 전쟁을 치렀지만 그보다는 개신교 바람이라는 남풍과 거센 풍랑이 포탄보다 더 치명적인 피해를 스페인의 배에 입혀 무적함대는 대부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신께서 바람을 보내시어 그들이 뿔뿔이 흩어졌더라'라는 그 전쟁 이후에 엘리자베스의 별명은 위풍당당 일라이자였다. 어쨌든 영불해협에서 15세기부터 유명했다던 영국의 해적 행위는 그녀의 시기에 오면 애국 활동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런던은 메르쿠리우스(로마 신화속의 상업의 신)에게 바쳐진 도시가 된다. 엘리자베스 시절 대륙에서 들여온 또 하나 중요한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 바퀴벌레. (나는 묵던 호텔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책으로 내려쳐 없애려다가 관뒀다. 네 조상들의 항해가 너를 구했도다!)

▲ 헨리 8세의 네번째 아내 안느 클래브스. 나는 그녀를 햄프튼 코트의 은밀한 승자로 손 들어주고 싶다.
헨리 8세의 여섯 아내와 자손 중 햄프튼 코트의 은밀한 승자는 누구일까? 아들을 낳은 제인 시모어? 훌륭한 자녀 교육의 귀감 캐서린 파? 나는 네 번째 아내 안느 클래브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녀는 어지럽게 변화하는 권력의 한가운데서 홀로 조용히 있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남편이 이제부터 여동생으로 불러주마 라고 말하며 다섯 번째 여섯 번째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 자신의 남편이 죽는 것, 에드워드 6세의 건강이 악화되어 열다섯 살 나이로 죽는 것, 노섬버랜드 경이 제인 그레이와 함께 잉글랜드 땅에 신교를 뿌리 내리겠다는 명분으로 왕권을 탐한 것, 9일 여왕이었던 열여섯 명민한 제인 그레이가 사라지는 것, 메리가 카톨릭의 국가를 세우려 했던 것, 메리가 가톨릭 신봉자인 펠리페와 결혼하기로 하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들뜨던 것, 메리가 스미스필드에서 신교도를 화형시키는 것, 메리 여왕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아이의 징후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자궁 종양이었던 것을 알고 절규하던 것…. 그런 것들을 그녀는 고향 네델란드로 돌아가지 않고 잉글랜드 땅에 남아 다 지켜봤다. 그녀의 장례식은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서 열렸는데 그녀의 뒤를 이어 곧바로 죽은 메리 1세는 안느의 무덤에서 멀지 않은 헨리 7세 옆의 자그마한 예배당에 묻혔다. 그녀가 햄프튼 코트의 은밀한 승자일 수 있는 이유? 다름 아닌 그녀의 궁이야말로 다툼이나 중상모략, 사악한 음모가 없는 당시 런던의 유일한 궁이었기 때문일 것 같아서이다. 헨리 8세와 아내들이 이곳 햄프튼 코트에서 꽃을 따며, 템즈강까지 이어졌단 수로의 물소릴 들으며, 류트 음악을 들으며, 갤리반드나 파반춤을 추며, 사냥터로 떠나며 동경해봤을 그런 삶.

'어느 알량한 인생이 그녀를 깨트릴까 겁이나서,사용하지 않고
조심스런 진열장 안으로 치워버렸다.

거기 그녀는 꾸어온 물건처럼 낯설게 서서
그저 늙어갔고 눈멀어 갔다
그리고 귀중하지도 진귀하지도 않았다.' (릴케의 어느 여인의 운명)


그러나 내 눈에 그녀는 적어도 헨리 8세 시절엔 혼자였기 때문에 존경받고 행복했던 사람으로 기억될-영원한 주변인이었다.

이 성 저 성을,이 저택,저 저택을 옮겨 다니며 살았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의 튜더 왕조를 생각하면 칼비노의 도시 이야기중 하나가 떠오른다. 에르실리아라는 도시의 주민들은 도시의 삶을 지탱해주는 관계들을 설정하기 위해 집 모퉁이에 흰색, 회색, 검은색 같은 실들을 걸어두어 혈연관계, 거래, 권력관계를 표시했다. 그런데 나중에 실들이 너무 많이 걸려 그 사이로 걸어다니는 게 힘들게 되자 결국 그곳을 떠난다. 그리고 다른 곳에 에르실리아를 또 건설하고 또 실을 걸어두기 시작한다. 그러면 도시는 또 똑같이 유사한 형태를 띄게 된다.그러면 또 도시를 버린다. 그래서 먼 훗날 에르실리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폐허 속에서 복잡하게 뒤엉켜있는 실을 보고 도시는 다름아닌 관계들의 망이란 걸 알게 되었다. 햄프튼 코트나 윈저 성에 실을 걸어놓고 실만 놔두고 건물을 태워버리고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는 상상을 한번 해본다. 어떤 반복적인 패턴이 읽히지 않을까?


튜더 왕조 이후로도 햄프튼 코트의 역사 역시 언제고 영국 역사랑 실처럼 복잡하게 뒤엉켜있다. 엘리자베스의 승계자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 1세는 햄프튼 코트에서 당시 소수였지만 아주 엄격했던 청교도들과 협상을 망쳐 종교분쟁을 정치 분쟁으로 만들어 버렸고 청교도 목사 300명을 교회에서 추방해버렸다. 청교도들을 태운 메이 플라워호가 신대륙을 향해 떠나게 된 건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참수당한 최초의 왕인 찰스 1세의 비극적 최후는 이 햄프튼 코트를 둘러보면 더 착잡하게 다가오는데 찰스 1세는 이곳에 줄리어스 시저가 승리하는 그림을 열성적으로 사 모았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명화에 파묻혀 살았던 그는 햄프튼 코트에서 열린 올리버 크롬웰 군대와의 협상에 진심으로 응하지 않았다가 결국은 이곳에 감금 되었고 의회와 의회가 대표하는 국민에 대한 전쟁 도발 책임으로 처형되었다. 나중에 올리버 크롬웰은 의회에게 햄프튼 코트를 선물받기도 한다.


▲햄프턴코트의 화려한 내부 전경. 나는 이 화려한 궁궐 뒤 존재의 화려함만큼이나 고통들이 느껴진다.

퀸스 아파트나 킹스 아파트, 정원, 접견실, 침대, 그림, 천장,등을 둘러보면서 당시의 왕궁을 상상해보면 헨리 8세가 제인 시모어가 아이를 낳을 방을 장식할 테피스트리(이곳의 테피스트리는 거의 헨리 8세의 수집품이다)를 고르는 것이며 하노버 출신의 무심하고 수줍은 왕 조지 1세가 아주 짧게나마 사람들의 호감을 끌어보려고 ball룸에서 연회를 열지만 그런 와중에도 언제까지나 사람들 속에 섞이지 못하고 라틴어로 외마디 내뱉는 것, 열일곱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잃은 앤 여왕이 비탄에 잠기는 것, 위대한 왕의 생애 속에 끼어들고 싶어 시저나 알렉산더의 그림을 사 모으는 허영 많은 왕들의 이야기가 떠오르는데 나는 이 화려한 궁궐 뒤 존재의 화려함만큼이나 고통들이 좀 느껴진다. 버나드 쇼는 일찍이 존재의 고통은 생의 권태로만 대체될 수 있다고 했다. 삶은 권태롭거나 고통스럽거나 둘 중 하나일까? 아직도 화려한 햄프튼 코트를 보면서 그 질문을 나에게도 던져보게 된다. 권태와 고통 둘 중에 무얼 먼저 피해가야 할까? 앙드레 말로는 인생의 모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모험은 삶에 직면하여 스스로 느끼는 놀라움이다' 나는 권태든 고통이든 앙드레 말로식의 모험으로 해석해내고 싶다. 떨고 있는 사람은 무료함을 느끼지 않는다.

모험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돌아와 아내의 형편없는 구혼자들을 물리치고 아내 페넬로페를 되찾은 다음에 그녀에게 자신의 모험담을 들려주고 나서, 또 이런 이야기를 한다. 자신은 바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기에 그의 손에 들린 노를 삽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만날 때까지 앞으로도 도시들과 나라들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 하는 예언을 받았으며 그런 사람들을 만난 다음에야 그의 삶의 순례가 끝난다고. 그래서 그는 구혼자들이 죽인 가축을 벌충하기 위해 가축을 약탈하는 일로 자신의 모험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무시무시한 모험을 끝내도 여전히 죽을 때까지 모험을 그렇게 계속해야하는 것이 삶이 라면 나는 차라리 토마스 모어의 시 한 구절을 외우며 봇짐 싸고 길을 떠나겠다. "나는 새로운 것이 갖고 싶다. 이 세상에 그런 것이 없어졌다 해도"

베르사이유를 연상시키는 햄프튼 코트 정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은 이제 마지막으로 세 가지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하나는 황도 12궁이 그려있는 정교한 시계. 또 하나는 아주 오래되었다는 포도나무, 또 하나는 미로. 햄프튼 코트의 시계 속에서 해는 아직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 그 시계를 배경으로 한 풍경 속에서 헨리 8세는 한밤중에 토마스 모어를 깨워 지붕에 올라가 정원의 시계를 보면서 별과 혜성의 운행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리고 배를 타고 찾아올 손님들을 위해 템즈강의 만조 시간을 알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로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붙잡히길 바라는 엉큼한 발자욱 소리, 웃음소리. 후다닥 사라지는 옷자락의 한 부분..저 아이들은 상륙 지점을 모르는 아직 순풍에 돛달고 있는 배이다.한창때는 2000송이가 열리기도 했다는 오래된 포도나무를 보니 갑자기 이 말이 생각난다.'감기지 않으면 시들어 버린다.'

▲ 햄프튼 코트의 오래된 포도나무. "감기지 않으면 시들어 버린다"

사포가 에리나에게 바친 릴케의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내 너에게 불안과 근심이 넘치게 하리라
너 포도넝쿨 휘감긴 장대여,내 너를 요동시키리라
죽는 것처럼 내 너를 꿰뚫어버리리라
그리고 무덤처럼 너를 넘겨주리라
온 우주에다,이 모든 것에다.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위대한 시인들은 혁명의 잿더미에서 솟아나온다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1)

기사입력 2009-05-08

 

일본의 중세 연구 학자 아베 긴야는 어느 시월의 일요일, 유럽 베스트팔렌의 작은 도시 이자론의 낙엽 깔린 길을 걷고 있었다. 그 때 그의 머리 위로 갑자기 교회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는데 다음 순간 도시의 종이란 종이 모두 뎅그렁 뎅그렁 소리를 내기 시작해 거리 전체가 서서히 종소리로 가득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때 그는 종소리가 왜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도시의 공간 속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녹음 기술로는 절대로 재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그 이후 유럽 중세의 종소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말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중세 사람들은 종소릴 듣고 그것이 무슨 종소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취침의 종, 세금 독촉의 종, 화재 발생의 종, 시장의 종, 폐문의 종. 빌헬름 텔의 작가 실러는 '종의 노래'란 시에서 종은 살아 있는 자를 부르고 죽은 자를 애도하고 폭풍을 물리치는 것이라 했다. 다시 아베 긴야의 말을 빌리자면 중세 사람들은 종소리야말로 신의 소리가 인간의 소리가 된 것이고 다시 공동체의 소리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나 역시 종소리에 관한 이런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세의 어느 날 길을 떠나는 이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나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돌아올께' 라고 말을 하고 집을 나서는 것. 사랑을 잃은 섬세한 여성이 새가 상처받은 급소를 날개를 붙여 감추듯 그 마음을 세상에 감추고자 종소리가 울릴 때만 살짝 들썩거리며 급히 마음을 고백하는 것. 날아가는 새소릴 들으며 구름위의 종소리 같다고 생각하는 것.

나에겐 이런 하루가 있었던 게 갑자기 떠오른다. 그 때 가난한 여행자였던 나는 낡은 호텔의 꼭대기 다락방에 묵고 있었고 그 방의 창문은 내 침대 머리 위 천장에 붙어 있어 침대에 앉아서 손을 뻗으면 열 수 있었고 나는 그 창문으로 보이는 밤과 새벽 하늘을 보려고 밤새 노래를 부르며 똑바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에 비둘기가 날아와 앉는 것까지를 보고 잠들었었다. 시간은 한없이 흘러서 제 일종이란 저녁 6시의 만과의 종, 제 2종이란 밤의 시작을 알리는 종. 영어로 트와일라잇이라 부르는 제 1종과 제 2종 사이의 두 개의 빛의 시간, 태양과 달 사이의 빛의 시간에 꿈결인양 종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그때 눈앞엔 해질녘의 가벼운 먼지가 어질어질 방안에서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난 어쩐지 빛이 깃든 저녁을 본 듯한 기분에 사로 잡혔었다. 그건 신비 체험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 같다.구체적인 저녁 속에 빛이 깃들어 있는 것이고, 어쩌면 빛이 깃들지 않은 시간은 없다는.

▲ 세인트 폴 대성당 전경. 나는 세인트 폴 대성당 앞에 서서 잠시 종소리를 생각해 봤다.

나는 세인트 폴 대성당 앞에 서서 잠시 종소리를 생각해 봤다. 이를테면 헨리 8세의 제인 왕비가 아기를 가져 몸이 불어난 것을 감사하는 특별 미사를 올렸을 때, 크리스마스에 주교들이 축하 미사를 올렸을 때, 경축할 만한 기쁜 날 미사에 앞서 서민들에게 길거리 잔치를 베풀었을 때, 여섯 시간 동안이나 종이 구슬프게 울리는 동안 장례 미사가 열렸을 때. 흑사병과 콜레라가 도시를 휩쓸었을 때,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평범한 일요일마다 종소리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을 것이다. '(…)은 종처럼 울려서 / 나를 불러 외로운 나에게 돌아오게 한다.' 나는 존 키츠의 시의 한 구절의 주어를 비워 놓아 보았다. 뭐가 나를 사람들 속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가게 할까? 무엇이 나를 일요일 아침마다 눈을 뜨게 하는걸까?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유서 깊은 도시 레나다 근방에 휘황찬란하게 아름다운 훌리아란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레나다의 공식적인 미녀이자 기념물이었다. 그냥 기념물이 아니라 도시의 모든 건축적 보고 중에서도 특별히 생기 넘치고 신선한 기념물이었다. 사람들은 뭐라고 말을 했냐면 "나는 성당에 간다. 훌리아를 보기 위해서" 난 그 이유가 맘에 쏙 든다. 나도 오늘은 누군가를 보기 위해 세인트 폴 대성당에 들어간다.(가끔은 신을 보러도 간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거대한 돔이 눈길을 끄는 곳이다. (이탈리아의 어느 건축가는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미학적 경험이 어느날 피렌체 성 두오모 성당의 돔을 본 것이라 했다. 그 돔이 세계 최초의 돔인데 그는 아무리 냉정하고 시기심 많은 사람이라도 그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천제적인 건축가를 인정하지 못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 그림자는 토스카나의 모든 사람들을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데…라고 말했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뒤엎을 정도로 큰 그림자를 가진 돔…마음에 새겨둘만한 일이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도배된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돔을 갖고 있다는 세인트 폴 대성당의 오늘날의 모습을 알려면 런던의 재난 시대로 날아가야 한다.


▲ 찰스 1세의 처형 장면을 묘사한 그림.

때는 바야흐로 찰스 일세를 처형시킨 호국경 크롬웰의 공화정도 끝났고 방탕한 왕 찰스 2세가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파리에서 흥청망청 돌아온 바로 그 때였다. 찰스 1세와 크롬웰은 각자의 신념을 평생 끌고 갔다는 점에서 비극적 공통점이 있었다. (찰스 1세의 얼굴을 알고 싶은 사람은 당시의 궁정화가였던 반다이크의 그림을 보면 된다.) 찰스 1세는 경건하고 순결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음란한 이야기만 들어도 얼굴을 붉혔는데 겁이 많은 사람이 흔히 그러하듯 조금만 어긋나면 폭력적으로 변했다. 당시 의원들은 권리 청원을 만들어 국왕도 법률을 존중할 것을 찰스 1세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궁정을 흠모하는 왕권신수설 신봉자였다. 찰스 1세는 국왕이 법률을 따라야 한다면, 일일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면 도대체 조세는 어떻게 징수해야하는가 난감했다. 결국 국왕과 의회 사이에 내란이 일어났다.

이때 청교도파에 있던 사람이 크롬웰이었다. 그는 원래 유산으로 받은 밭을 성실하게 일구며 아내를 소중히 여기며 조용히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수학과 역사를 좋아했고 병법을 읽은 적이 있었고 신앙인으로서 죄의식이 강했다.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는 관대했고 출신 계급보단 그 사람의 마음을 중시해 사람을 기용했다. 그가 중대한 결정의 순간마다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성서를 들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주위 사람들은 자주 보았다고 한다. 그에게 시편은 전쟁의 시였다. 크롬웰은 찰스 1세 처형 후 국왕과 의회가 사라진 상태에서 성자의 나라를 꿈꾸었던 것 같다.당시 영국의 청교도들의 이미지를 알려면 한 평범한 청교도 신도의 이런 표현을 염두에 두면 될 것 같다. 우리의 하느님은 어둠과 비와 추위의 신입니다. 저 길고 긴 겨울밤이면 내 청교도 선조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책을 사슬로 조여 놓은 두툼한 성서를 낭독하곤 했지요. 그 옛날 청교도의 수도사들은 '신은 하루 빨리 지상을 떠나 천국으로 들어가고 싶습니까?'란 질문을 받자 '아니오 ,나는 가장 먼 길을 둘러 천국으로 가게 해주십사 하느님께 청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청교도 신앙이 올리버 크롬웰이 믿었던 신앙이다.

▲올리버 크롬웰의 초상화. 만약 어느 날 역사에서 네 명의 위대한 정치가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기회를 갖게 된다면 나는 알렉산더, 카이사르, 나폴레옹, 올리버 크롬웰을 선택할 것 같다.
그의 이야기 중 슬픈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폭풍우가 몹시 치던 밤, 그는 우울증과 열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죽음의 순간에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영국 왕을 위해 이런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견실한 판단력, 한 개의 심장, 그리고 애정을 주시옵소서…그들을 구원하시고 개혁 사업을 도우시어 그리스도의 이름이 온 세계의 영광이 되도록 하옵소서'

그리고 또 하나의 슬픈 이야기는 그의 장례식 때 우는 사람은 하나도 없이 개 짖는 소리만 들렸다는 것인데 그가 죽고 2년이 안되어 아무런 내란도 없이 왕정복고가 싱겁게 이루어졌고 그의 군사들은 조용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어려서 크롬웰에 대해 읽고 좀 혼란스러워 했던 것 같다. 그는 자기의 개인적 이해관계로 움직인 적이 없고 군인의 처우 개선을 원했고 평범한 사람의 권리와 평등을 원했고 왕의 절대 권력에 반발했고 신 앞에서 죄의식을 느꼈고 종교 안에서 사람과 국가들이 화해하길 원했는데 왜 그렇게 미움을 받게 된 것일까? 왜 사람들은 왜 다시 왕정복고로 마음이 기울었을까? 사람들은 어디서 피로감을 느낀 걸까?

만약 어느 날 역사에서 네 명의 위대한 정치가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기회를 갖게 된다면 나는 알렉산더, 카이사르, 나폴레옹, 올리버 크롬웰을 선택할 것 같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단 점에서 관심이 가고 그를 빼면 나머지는 모두 군인이었고 공화정을 거쳐 그 다음엔 전제 군주를 꿈꿨다는 공통점에서 마음을 끈다. 나는 군사 정신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국가를 꿈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폴레옹은 옥좌에 앉은 이후로 인간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모두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고 말했다. 독재자들은 자유로운 헌법을 내놓는다면 자신부터 제거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다음엔 더 못한 독재자로 대체될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자기의 자리는 절대로 자유가 대신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독재를 했다.

크롬웰 사후 수순은 왕정 복고였다. 크롬웰이 죽으면서 영국왕을 위해 올린 기도가 그래서 가엾은 선지자의 기도처럼 슬프다. 파리에서 궁핍하게 살았던 찰스 2세는 꽃과 카페트를 밟으며 귀국했다. 그는 파리에서 가난했기 때문에 다시는 런던을 떠나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했다. 그 때 런던은 인구가 넘쳐흘러 좁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집들은 이쪽 집의 창에서 손을 뻗으면 건너편 집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배수로와 하수구들은 낡았고 구정물과 쓰레기로 길바닥은 늘 질척거렸다. 얼마 뒤에 무서운 병, 흑사병이 돌게 되었다.(흑사병은 그 전부터 전 유럽을 휩쓸어 이탈리아에선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쓰는 배경이 된다. 흑사병이 돌던 해 사람들은 시골 별장에 모여서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것이 데카메론의 내용이다.)

이 시절의 흑사병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 중에는 뉴턴이 있었다. 뉴턴은 시골집에 콕 박혀서 미적분학과 만유인력 이론을 창안했다 .런던 사람들은 대문마다 붉은 십자가를 그려 넣거나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처럼 시골로 피난을 갔다. 런던 사람 다섯 명 중 두 명이 죽어나가서 런던에는 시체를 묻을 땅이 부족 했다고 한다. 흑사병 수레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밤마다 다니면서 '시체 있으면 내놓으세요!' 라고 외쳤다는데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다니엘 디포는 '흑사병은 백약이 무효야. 거리에는 행인이라곤 없어, 드문드문 시체들만이 흩어져 있어. 낮에도 밤에도 그저 고요하기만 한 거리에 이따금 성당의 낮은 종소리만이 구슬프게 울려.' 라는 글을 남겼다. 흑사병은 크리스마스가 지나서야 겨우 진정세를 보였는데 그로부터 아홉 달 뒤에 다시 큰 비극이 발생했다.


▲ 1666년 런던 대화재를 묘사한 그림. 무너지는 세인트 폴 대성당과 흑사병의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1666년 9월 2일 그날 창문을 닫던 하녀들, 마차 운전사들은 자욱한 안개 대신에 또 다른 자연의 사나운 힘, 바로 불을 보게 된다. 불이 난 것은 일요일 이른 새벽이었는데 건조한 날씨와 때마침 분 세찬 바람 때문에 계속 번져갔다. 왕실 제빵업자의 부엌에서 시작돼 닷새 동안 계속된 1666년 런던의 대화재는 1만 3200집과 89개의 교회를 삼켜 버렸고 런던의 3분의 2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당황해 돌로 만들어진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세인트 폴 대성당의 육중한 포틀랜드 석재로 만들어진 기념비와 기둥, 기둥머리 역시 생석회처럼 녹아버리고 납 지붕들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때 세인트 폴 대성당이 녹아내리는 물이 마치 용암의 눈물이 흐르듯 흘렀다고 한다. 가장 고색창연했던 예배당이자 기독교 초기 신앙의 유서 깊은 걸작중 하나가 잿더미 속에 누워 있는 것과 흑사병의 공포를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사람들은 금화를 조심스레 땅에 묻고 일부는 허리띠로 묶고 가재도구들을 거룻배에 싣고 불길을 피해 달아났다. 그때 아비 규환속의 템즈강을 떠돌던 어떤 거룻배 한 척에 한 쌍의 버지널(옛날 피아노)이 실려 있었던게 애틋하게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찰스 1세의 처형, 크롬웰 시대, 찰스 2세의 왕정 복구, 세인트 폴 대성당 화재를 온 몸으로 완벽하게 겪어낸 위대한 시인이 하나 있었다. 그는 사는 동안 호머처럼, 갈릴레오처럼, 먼 훗날의 보르헤스처럼 시력을 점점 잃게 된 밀턴이었다. 라틴어를 할 줄 알았던 밀턴은 올리버 크롬웰을 위해 외국어 비서관직을 맡아 수행했던 당대의 논객이었다. 그는 1649년의 찰스 일세의 처형을 지켜봤다. 그리고 찰스 1세 처형 11년 만에 그의 아들 찰스 2세가 돌아오기 한달 전에 <왕정복고의 불편과 위험>이란 글을 내 찰스 2세 환영 인파 소리를 누구보다 불안한 마음으로 들어야했다. 공화정이 무너지자 그의 소책자들은 교수형 사형 집행인 피 묻은 손에 의해 불살라졌다. 그는 자신이 섬겼던 크롬웰의 시체가 무덤에서 파헤쳐져 런던 거리에 매달리는 것을 보았고 그 자신도 옥고를 치렀고 찰스 2세의 골치 덩어리가 되었다. 그가 왕당파 의회의 처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명 때문인데 그의 정적들은 그의 실명을 하느님이 그의 눈을 멀게 하심으로써 그에 대한 처벌을 증거 하신 것이라고 해석했다.(그는 마흔 두 살 때 완전히 시력을 잃어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헤라클레스가 눈을 멀게 한 괴물 사이클로프스라고 놀려댔다. 그래도 그는 용감하게 '내가 겪은 어둠은 무덤속의 어둠보다 덜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테네가 목욕한 모습을 봤다는 이유로 헤라가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자 제우스가 긴 생명력과 예언을 주었던 티레시아스 같은 신화 속 인물에 자신을 비유하곤 했다)

은둔 생활을 하던 그는 1665년의 흑사병을 피해 정든 집을 떠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큰 시련 중 하나는 세인트 폴 대성당이 무너져 내린 것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런던의 서적상들은 수많은 책들을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된 세인트 폴 대성당 돔 안으로 옮겼는데 그곳까지 무너지는 바람에 15만 파운드의 책이 전소돼 런던의 서적상들은 몰락해 버렸다. 운 나쁘게도 그 때 그는 역작 <실낙원>을 출판하려던 참이었다. 그 대화재로 그는 유일한 재산이었던 집도 잃어버렸다.그가 <실낙원>을 출판한 것은 1667년이었다. 그가 <실낙원>을 출판한 걸 곰곰이 앉아 생각하면 불굴의 투혼을 불살랐다는 말 밖에 딴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신이 인간에게 이성을 선물했기 때문에 인간은 신의 선물과 그 대가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된다는 밀턴의 <실낙원>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존재는 사탄인데 그는 뇌쇄적인 미인인 이브를 사랑하여 이브가 아담과 입을 맞추자 '혐오스러운 광경이다. 저들은 에덴동산에서 한껏 즐기는데 나만 채워지지 않는 갈망의 고통을 겪는구나. 그대 행복에 겨운 쌍이여. 즐겨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쾌락은 짧고 이제 곧 오랜 고통이 따르리니' 하고 미친 듯 에덴동산을 뒤져 선악의 나무를 찾아낸다. 이 때 나에게 사탄은 우리 인간의 어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설명해주는 존재 같기만 하다. 그의 <실낙원> 일편에는 '지옥도 천국으로, 천국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밀턴에 따르면 인간의 타락 역시 자기 의지에 의한 것이고 신도 맹목적인 복종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낙원을 잃은 우리 인간들은 그 세계의 시험을 받아야한다. 자유 의지와 선택으로.

존 밀턴의 초상화. 그는 찰스 1세의 처형, 크롬웰 시대, 찰스 2세의 왕정 복구, 세인트 폴 대성당 화재를 온 몸으로 완벽하게 겪어낸 위대한 시인이었다.
훗날 그에 대해 한 비평가는 최고로 적절한 말을 남긴다. '위대한 시인들은 사회적 혁명의 잿더미 속에서 불사조처럼 솟아나온다.' 위대한 인간은 위대한 시련을 만나야 나온다는 말, 밀턴을 보면서 실감할 수 있다.(왕정복고 때문에 그가 정치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실낙원을 쓸 수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위대한 인간은 한 사회의 모범적인 사람이어서 위대한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예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말을 나는 언제나 가슴으로 신봉한다. 나는 <실낙원< 속의 이브를 잊을 수 없다. 밀턴의 이브에 대해선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아담은 신만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이브는 아담 속에 나타난 신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아담 속에 나타난 신. 한 연약한 떨고 있는 인간 속에 나타난 신. 나 역시 누군가에게서 그런 순간을 본다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그의 글 삼손에서 삼손은 이렇게 선언한다. '내 발목은 묶였으나 내 주먹은 자유롭다.' 밀턴의 삼손은 벌떡 일어나 포효하며 우지끈 무엇을 무너뜨렸을까?

밀턴의 이야기를 생각하다보면 모든 인간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의 속성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차례차례 포기해야했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는 두 번의 결혼에 실패했고 먼 눈으로 홀로 기르다시피 한 딸들은 그를 싫어했고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고..

강인한 사람들은 온갖 고통을 통해서도 인생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갖는다. 끊임없이 바라든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든가. 그는 어떤 쪽이었을까? 그는 지식이 뛰어나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자신에게 주어진 굴레를 가장 잘 지고 가는 자가 신의 가장 훌륭한 종이다라고 썼다. '눈이 멀어서 불행한 게 아니라 눈먼 상태를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이 불행의 원천이다'라고도 말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내 어깨위에 올려놓고 그의 손을 쥐고 세인트 폴 대성당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눌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진실로 즐기기 위해서는,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고독이 필요하다. 그의 실명한 눈에 손바닥를 가만히 대고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나에게 그에 대한 유일한 안타까움은 아무래도 그가 유머감각은 없었던 것 같단 점이다.
 

/정혜윤 CBS PD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비싼 실크 <공작부인>과 입이 찢긴 <웃는남자>의 시대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2)

기사입력 2009-05-15 오후 3:50:03

 

그 대화재 이후 세인스 폴 대성당의 재건축을 맡게 된 사람은 옥스퍼드 출신의 하늘을 볼 줄 알았던 건축가, 영국왕립 학회 회원 크리스토퍼 랜 경이었다.(그는 런던 대 화재 이후 51개의 교회를 지어서 그 이름은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수차례 마주치게 된다. 그의 교회들은 장식적이라기보다는 단정한 느낌을 준다. 세속을 떠난 천상의 세계로의 탈출도 의미 있지만 이 생에서 제대로 맘 단단히 먹고 감사드리며 잘 사는 것도 중요하다는 느낌을 주는…. 이런 느낌은 영국 중부 도시들의 교회를 봐도 받을 수 있다. 교회들은 지상보다 살짝 조금만 높이 솟아 있어서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이 지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구나, 우리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땅을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우선 기도드리게 된다. 천상으로의 일탈은 큰 관심사가 아니다.)

자연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키라는 칙령으로 1662년에 만들어진 왕립 학회는 국왕부터 시민 계급 ,과학 연구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참여 하였는데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모토는 'Nullius in verba(어느 누구의 말도 취하지 말라)'였다. 로버트 보일, 로버트 훅도 멤버였는데 당시 왕립 협회의 실험 책임자는 로버트 훅이었고 그의 별명은 새로운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건강 염려증 환자에다가 싸움꾼이기도 했던 그가 고안해 낸 걸 보면 진공 펌프, 공기 압축기, 카메라에 사용될 조리개, 시계에 사용될 나선형 용수철, 기압계, 습도계, 풍속계, 시계로 작동되는 망원경…. 그러나 지식과 연구와 개발을 위해 헌신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고귀한 협회에 대한 갈망은 왕립 협회 사람들보다 조금 앞선 세대인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의 인물인 프랜시스 베이컨에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왕립 학회에 영감을 주었다)그는 신아틀란티스라는 유토피아를 다루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 살로몬의 집이란 협회가 나온다. 그 집의 방들은 천문학적 도구를 갖춘 수학의 집, 식물원, 동물원, 수족관, 해저를 항해하는 배를 만드는 실험실등 상상 가능한 모든 실험실이었다. 연구자들은 항해를 떠나기도 하는데 금, 은, 보석, 향신료, 비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 창조물인 빛을 얻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의 신아틀란티스에선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들은 빛의 상인, 실험을 하는 사람은 신비인으로 불렸다. 왕립 협회 창립 당시 과학은 유행이 되어있었다 .당시 시대상을 쓴 일기를 남겨 유명해진 피프스는 망원경을 처음 사자 교회로 달려가 아름다운 여인들을 관찰하는 즐거움을 맛봤다고 기록을 남겼다.

▲ 자연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키라는 칙령으로 1662년에 만들어진 왕립 학회는 국왕부터 시민 계급 ,과학 연구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참여 하였는데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모토는 'Nullius in verba(어느 누구의 말도 취하지 말라)'였다.

명예혁명 뒤인 1689년에 왕위에 오른 사람은 오렌지공 윌리엄 3세인데 그는 권리장전을 받아들이면서 일을 시작했다 .국왕은 어떤 이유로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가 권리장전의 기본 정신인데 그때부터 영국에서는 국왕과 의회가 충돌할 근본적인 이유가 사라졌다고 한다. 윌리엄 3세는 루이 14세와 전쟁을 했는데 조세만으로는 전쟁 비용을 댈 수 없으니까 국채 제도와 잉글랜드 은행, 증권 투기를 고안해 냈다. 잉글랜드 은행은 윌리엄공이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돈을 대줄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었던 셈인데 윌리엄 3세가 루이 14세에게 지면 돈을 돌려받을 수 없으므로 윌리엄 3세와 런던 시티의 관계는 아주 돈독했고 그 와중에 런던은 금융과 상업의 세계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훗날 자신이 가진 힘을 아주 적절하게 국가를 위해 다 쓴 지도자의 모습으로 기억되었다.

오늘날의 세인트 폴 대성당은 그런 사람들의 관점과 기술과 돈, 이런 모든 이야기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곳이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이 완성된 1710년 이후의 어느 날 런던을 걷는다고 생각해 보면 풍경은 이렇다. 완공된 세인트 폴 대 성당의 돔이 우뚝 솟아 있고 시티의 상인들과 중산층의 부와 자신감을 반영한 듯 금박을 입힌 기둥을 가진 교회들이 불쑥 불쑥 거리의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었다. 런던 대화재 때 금화를 조심스레 땅에 묻고 장롱에 재산을 넣고 열쇠를 잠갔던 런더너들, 아니면 아예 금을 허리에 두르거나 가족들에게 들려 시골로 보냈던 런더너들은 그 무렵엔 그런 촌스러운 방법을 그만뒀다. 그들은 대부분 금세공업자 출신인 은행원들에게 금을 맡기기 시작했다. 특히 왕정복고 이후 극장과 예배당을 만들고 식민지 약탈에 파견할 신식 군대를 양성하느라 바빴던 찰스 2세는 시티 오브 런던의 은행가들에게 친절했다. 결국 왕국의 모든 자금이 런던에 예치되었고 나중에 잉글랜드 은행이 시티에 생겨났다. 누군가는 세인트 폴 대성당의 진정으로 위대한 점은 돔이 아니라 바로 그 위치라고 말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위치는 바로 시티 오브 런던이었으니 세인트 폴 대성당의 자존심은 시티 오브 런던의 자존심이 되어버렸다.

세인트 폴 대성당이 완공될 무렵의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향후 30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시티의 자존심도 오래오래 변하지 않았다.(카나리 워프가 생기기 전, 혹은 다국적 기업들이 시티로 몰려들어오기 전, 혹은 미국에 이은 런던발 금융위기 이야기가 전 세계를 휩쓸기 전) 런던 시장 취임일은 흥청망청 거리 축제가 따르는 기념일이었고 런던 시장이 타는 여섯 마리 말이 끄는 황금빛 마차는 위대함의 절정이었고 시티 오브 런던은 런던의 심장이었다. 국왕도 템플바를 우선 두드려 런던 시장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시티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단 사실을 당시 시티 오브 런던 사람들은 대단한 자랑거리로 알고 있었다. 그때 시티 안에 생긴 예배당에서 계산 빠른 그들은 아마 돈이라는 적절한 희생을 바치고 자유와 권리, 영원을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확실히 이익이 남는 일인가를 헤아려 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 세인트 폴 대성당이 완공될 무렵의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향후 30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시티의 자존심도 오래오래 변하지 않았다.

세인트 폴 대성당이 완공된 후 대략 한 세기 이내, 그러니까 기계화가 되기 전 시대를 영국의 새로운 아우구스투스 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바로 그 시절에 명언을 쏟아내기로 유명한 사무엘 존슨 박사는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곳에서 10마일 이내에 있는 학문과 과학이 왕국의 나머지 지역 전부에 있는 것보다 더 많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 지식인 중에서 런던을 기꺼이 떠나려는 사람을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을거야 라고 단언했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는 명언 "런던이 지겨워진 사람은 사는게 지겨워진 거야. 런던에는 삶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게 있으니까 말이야"란 말도 바로 그 시절에 남겼다. 서머싯 하우스에선 밤새도록 파티가 열려 신사 숙녀들은 헨델의 음악 어떻게 생각해? 우리 카드놀이 하지 않을래? 같은 말들을 나눴을 것이며 그 중 딴 마음이 있는 두 사람은 발코니로 나와 아름다운 정원을 보고 밀어를 나눴을 것이다. 남미에서 수입한 마호가니로 만든 치펜데일 가구, 웨지우드 도자기도 그때 인기였고 박물관에 있는 은제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은제품들이 만들어진 것, 역시 바로 그 시기였다. 하녀들의 식기, 커피 하우스나 선술집의 식기들도 좋은 것들이어서 런던의 과밀 인구들은 자기의 삶에 대체로 흥분과 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그 시절의 이야기 중 읽고 오래 오래 기억하는 것은 평범한 서민 가정의 아낙네가 드디어 창에 처음으로 유리를 끼워 넣고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나의 어린 날의 기억 중에는 새집을 마련한 엄마가 꽃무늬 커텐을 달고 좋아라 몇 번이고 그 커텐을 나에게 펼쳐보였고 그 때마다 커텐과 똑같은 천으로 원피스를 해입은 나는 멋지다면서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댔던 오후가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넓히다 보면 알루미늄 샷시나 보일러, 진공청소기, 자동차가 각각 도시 속의 삶 속에서 하나의 스토리를 갖는 것 같다.나는 창에 유리를 처음 끼운 그 시절의 아낙네 맘을 짐작할 수 있고 장에 가서 서민용으로 튼튼하게 나온 웨지우드 식기를 사오는 주부의 맘도 짐작할 수 있다. 그건 아마도 가난해도 품위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일 것이다.

▲ 조수아 레이놀즈가 그린 조지아나 데본셔 공작부인 초상화.
그렇다고 그 시대가 밝기만 한 건 아니었다. 부정한 사업가들은 엉터리 회사를 설립해 개미 투자자들의 돈을 등쳐먹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는 남해 버블 사건이 있었다.(남태평양의 정체불명 인물에게 투자하는 회사가 등장했는데 1000%이상 주가가 올랐다가 폭락하는 바람에 수천명의 주주들이 패가망신했다. 금융 사기꾼과 일확천금 불로소득에 대한 동경은 그때도 뚜렷이 존재했다) 유명한 도적으로는 잭 세퍼드가 있었는데 그는 부자만 덮쳤고 도둑질한 돈을 인심 좋게 거리에 뿌리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가 하도 유명해지니까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가 등장했는데 바로 거지 오페라다.1724년 11월 타이번 처형장에서 그가 교수형을 당하던 날, 20만명의 숭배자가 운집했고 무장 보병 연대가 동원되었다. 그가 죽을 때 한 말은 정직한 방법으로 빵을 얻을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 지하에 묻혀있는 화가 중 한 명인 조수아 레이놀즈가 바로 그 시대 사람이었다. 그는 영국 왕립 미술원의 초대원장이었고 애덤 스미스, 에드워드 기번 등이 속한 사무엘 존슨 박사 그룹의 친구이자 지식인이었다. 상류층 사람들의 초상화를 우아하고 생생하게 그려낼 줄 아는 조수아 레이놀즈 그림 속 모델인 조지아나 데본셔 공작부인(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온 영화 <공작부인>의 주인공)은 값비싼 실크로 몸을 휘감고 사랑 없는 결혼에 절망하여 진정한 사랑을 찾아 비극적으로 몸을 던졌다. 조수아 레이놀즈와 달리 윌리엄 호가스는 당시의 세인트 돔 대성당이 있던 시티 오브 런던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의 삶, 혹은 그 시대 뒷골목 사람들의 인간적인 절망을 그리고 있다. 그는 매춘부의 편력, 탕아의 편력, 당대 결혼 풍속도 등을 그렸다. 호가스의 그림 속에는 밤새 매춘부의 품안에서 놀다 돌아온 새 신랑,그 새신랑에게 관심 없는 새 신부, 청구서를 잔뜩 들고 있는 집사가 나온다. 매춘부의 편력 그림에는 노래를 부르는 임신한 매춘부, 소문난 구두쇠의 아들인 손님의 시계를 훔칠 속셈으로 열심히 시중드는 매춘부, 감정 없이 스타킹을 훌훌 벗는 스트립 걸들이 나온다.

결혼은 사랑이 없는 계약이고 인생의 괴로움은 로즈 테번 같은 선술집에서나 매독에 걸린 매춘부의 품안에서나 겨우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일단 생각해 버린다면 삶은 다른 길 없이 쭉 내리막길로 비극적이다. 그의 그림 중에는 베들럼의 탕아란 그림이 있는데 빈털털이가 된 탕아가 정신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 그림속의 등장인물들은 다양하게 미친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왕관을 쓰고 있고 누군가는 종이로 된 망원경을 들고 있고 누군가는 퀭한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고, 그를 찾아온 예전의 그를 알았던 귀부인 둘은 쑥덕거리고. 난 그림 속 사람들이 미쳐간 다양한 뒷 사연들이 그 시절의 런던의 한 모습이었을거라고 생각한다. 눈치코치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외국인들 중 누구라도 그 시절의 뒷골목 런던을 봤더라면 헌장의 가면을 쓴 귀족제, 부자의 이익을 위한 국민의 지배란 밉살스럽지만 예지적인 발언을 했을 수 있다.

▲ 윌리엄 호가스는 당시의 세인트 돔 대성당이 있던 시티 오브 런던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의 삶, 혹은 그 시대 뒷골목 사람들의 인간적인 절망을 그리고 있다.

이런 세태의 어두운 면으로의 가속화는 윌리엄 호가스를 높이 평가했던 불운한 런던의 수필가의 글 속에 아주 잘 나와 있다. 그 수필가는 윌리엄 호가스보다 약간 뒷 세대의 인물인 찰스 램인데 그는 수필집에서 런던의 거지와 굴뚝 청소부를 찬양했다. 찰스 램은 글 속에서 요새 들으면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영국 은행에 근무하는 한 행원이 이름도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500파운드나 되는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다. 그는 매일 아침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은행까지 걸어 다녔는데 20년 동안 길가에 앉아 적선을 비는 눈먼 바디메오 모자 속에다 어김없이 반 페니를 던져 넣는 것을 실천해 왔다. 그 착한 늙은 거지는 죽음에 임하여 매일 같이 은혜를 베푸는 이 은인에게 동냥으로 모아놓은 것 전부를 물려주었다. 찰스 램은 신문에까지 실린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거지에겐 이것저것 묻지 말고 그저 주라고만 했다. 그 글은 제 11차 런던 빈민굴 거지 박멸 작전에 즈음해서 쓰여진 것이었다. 기름기 번질한 시민들이 '보라 저기 저 절단난 파산자들을'이라고 거지들을 손가락질 하며 바삐 가버리는 것을 개탄하며 쓴 글 같다. 찰스 램은 살을 에는 12월의 런던 새벽 추위 속에서 지옥 입구 같은 굴뚝 구멍에서 일하는 시커먼 얼굴의 꼬마들을 런던 태생 아프리카 성직자들이라고 불렀다.

▲ 찰스 램은 수필집에서 런던의 거지와 굴뚝 청소부를 찬양했다
찰스 램의 친구 중에 한 명은 해마다 성 바숄로무 장날에 엄청난 만찬회를 열었다. 초대장은 일주일 전에 런던 시내와 그 변두리에 있는 굴뚝 두목들한테 보내졌는데 초대 범위는 굴뚝 청소 꼬마 녀석들이었다. 그 잔치날 밤에 굴뚝 청소부 꼬마들은 지글거리는 소시지를 남비 채 들고 입에 들이 부을 수 있었다.성 바숄로무 장날 만찬 때 시커먼 굴뚝 청소부 아이들이 웃고 환호성을 지르느라 드러내 보이는 수백 개의 이빨은 그 번쩍이는 빛으로 밤의 어둠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런 굴뚝 청소 아동의 문제는 조금만 더 지나면 큰 사회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의회에 굴뚝 소년 위원회란게 생겨났는데 그들에게 보고된 문서에 따르면 굴뚝 청소하던 아이 하나가 죽었는데 시체를 검사해보니 여러 가지 화상이 나타났다. 다리 중에서 살이 많은 부위와 발이 제일 많이 탔는데 굴뚝 소년들이 움직이는데 가장 효과적으로 쓰이는 부위, 무릎과 팔꿈치는 뼈까지 타들어간 것으로 보아 불쌍한 희생자는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깨닫자 마자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런던의 사교계를 이끌었던 사무엘 존슨 박사는 1746년에서 1756년까지 십년간 사전 편집자로 일했고, '행복이 무엇일까?'란 질문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읽어야 할 고전 <라셀라스>를 썼다. 그 당시 행복관을 알 수 있는 <라셀라스>의 첫 장은 골짜기에 있는 왕궁이란 제목인데 이렇게 시작한다.

'공상이 속삭이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으며 희망의 환영을 열심히 좇아가는 사람들이여, 나이를 먹으면 젊은 날의 기대가 이루어질 것이며, 오늘 부족한 것이 내일이 되면 채워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이여 아비시니아의 왕자 라셀라스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라.'

▲ 사무엘 존슨의 <라셀라스> 표지.
라셀라스 왕자는 행복한 골짜기의 폐쇄된 궁궐에서 불만에 가득 찬 생활을 하다가 젊은 날 주유천하해서 학식을 쌓은 시인인 이믈락과 여동생 네카야 공주를 데리고 골짜기를 탈출해 세상 경험을 위해 길을 떠난다. 소설 속에서는 시인인 이믈락이 사무엘 존슨의 대리인 정도 될 것 같은데 그가 펼치는 행복론은 '세상 어느 곳에 살든지 인간의 삶은 참고 견뎌야 할 것은 많고 즐겁게 누릴 일은 별로 없다'혹은 '인간은 늙어 죽을 때까지 행복이란 이 세상에서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임을 쉽게 깨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이 행복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으며 자기도 언젠간 그런 행복을 얻으리라고 계속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지요.'이다. 그는 어떻게 하면 최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겠느냐는 라셀라스 왕자의 질문에 '선과 악, 행과 블행을 결정하는 원인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불확실하며 또 서로 뒤엉켜 있을 때가 참 많습니다. ..따라서 삶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어떤 확고하고 절대적인 선택 기준을 찾으려는 사람은 아무리 평생 동안 궁리하고 모색해도 결코 그것을 찾지 못한 채 죽어버릴 것입니다...인생을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예측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순응하고 싶지 않았던 원인들에 이끌려 현재의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랍니다'라고 대답한다. 때는 바야흐로 흐르고 흘러 그들의 세상 경험을 끝내야 할 날 라셀라스 왕자 일행은 행복을 찾았을까? 그들은 저마다의 소망을 맘속으로 품었지만 그 소망들 중 어느 것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나일강의 범람이 그치면 고향으로 돌아가 보기로 결정했다.

나는 가끔 라셀라스의 10장을 펼쳐서 읽곤 하는데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시인에게는) 쓸모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행복이란게 달리 뾰족하게 없다손 치더라도 이런 문장 하나 믿고 살면 온 가슴으로 받아들일 일은 많을 것 같다.

▲ 세인트 폴 대성당 화재 발생 이후 앤여왕까지 시기 일을 가장 예리하게 쓴 작가는 빅토르 위고 라고 생각한다.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의 주인공은 어려서 잡혀가 입이 찢겨 늘 웃는 얼굴로 보인다.
그러나 세인트 폴 대성당 화재 발생 이후 앤여왕까지 시기 일을 가장 예리하게 쓴 작가는 빅토르 위고 라고 생각한다.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의 주인공은 어려서 잡혀가 입이 찢겨 늘 웃는 얼굴로 보인다.(배트맨의 조커처럼) 그의 직업은 사람들을 웃기는 떠돌이 광대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영국 대귀족의 유일한 직계자손이자 어마어마한 재산의 상속자임이 밝혀진다.그가 그때 런던의 상원 의원들 앞에서 이런 연설을 한다.

"저는 세력가들의 수중에 들어가 어느 왕의 명령으로 얼굴이 깍이고 그것이 그 왕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저는 심연 속에 던져졌습니다…가난,저는 그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겨울,저는 그 속에서 오돌오돌 떨었습니다.기근,저는 그 맛을 봤습니다.흑사병,저는 그병에 걸려봤습니다.수치,저는 그것을 묵묵히 삼켰습니다…어느 날 밤 폭풍 몰아치던 밤,버려진 어린 고아의 몸으로 막막한 세계 속에서 혈혈 단신으로 여러분들이 사회라고 일컫는 이 어둠속으로 저는 처음 발을 들여놓았습니다…그것은 사회라는 바벨탑의 잘못입니다. 모든 것이 위에서 짓누르게 되어 있으니 실패한 건축물입니다…나이 겨우 여덟에 매춘부가 되어서 스무살이 되면 늙어서 그 짓조차 그만두는 소녀들도 있습니다.형벌의 가혹함 또한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습니다. 바로 어제 알몸으로 쇠사슬에 묶인 채 복부를 돌무더기로 누르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목격했습니다.…뉴캐슬어폰타인에 가보신 분 계십니까?그곳 탄광에는 석탄을 씹어 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허기를 잊기 위해서죠.버턴 레이저스에서는 아직도 문둥병자들을 몰아 놓았고 혹시 그 소굴을 벗어나는 사람이 있으면 총질을 해댄단 사실을 아십니까?주민들의 오두막집에는 침대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땅바닥에 작은 구멍을 파고 아기들을 그 속에 눕힙니다. 결국 그곳 사람들은 요람이 아닌 무덤 속에서 삶을 시작합니다…"

그가 이런 연설을 하자 의원들은 광대의 말이라 생각하고 웃겨서 포복절도 한다. 그때 그들의 눈에 눈물이 보였다면 그건 너무 많이 웃어서 고인 눈물이었다.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일상적 모순에 맞서 싸운 '개혁가' 나이팅게일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3)

기사입력 2009-05-22 오후 5:03:31

 

조수아 레이놀즈도 있지만 세인트 폴 대성당 묘역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은 넬슨이다. 그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 한쪽 눈과 한쪽 팔 없이 서 있다. 넬슨은 1794년 지중해 작전에서 오른쪽 시력을 잃었고 1797년에 오른쪽 팔을 잃었다. 눈을 잃고 팔을 잃으면서도 자신이 참여한 모든 주요 해전을 승리로 이끈 그는, 살아있을 때 이미 신화적 영웅이 되어 있었고 1798년 나일강 전투의 승리로 확고부동한 국민 영웅이 되었다.

▲ 넬슨 제독의 초상화. 그는, 살아있을 때 이미 신화적 영웅이 되어 있었다.
나일강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와의 일전을 앞두고 제국의 흥망을 책임질 유명한 배는, 영국인의 성스러운 유골이라고도 불린 빅토리 호였다. 빅토리 호는 승무원 850명 승선 가능. 4개월간 해상 체류 가능한 물과 식량 탑재 가능, 3년간 사용할 수 있는 화약과 포탄 적재 가능한 3층짜리 배였다. 당시 빅토리 호에 승선한 영국 해군은 잘 훈련된 정예 부대가 전혀 아니었고 부랑자 처리법에 의해 선술집에서 여인숙에서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강제 징집된 병사들이었다. 위풍당당한 빅토리 호를 움직인 선원들의 생활은 끔찍했는데 넬슨은 영국 선원들의 처우를 개선하려고 노력한 당시 둘 밖에 없던 선장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 휘하의 선장들을 형제단이라고 불렀다. 교전 중 부상당한 선원들은 마취제가 없어서 기절한 상태에서 아니면 마구 들이부운 럼주에 취한 상태에서 수술을 당했다. 부상자들이 있는 방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있었는데 그건 부상병들이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넬슨 역시 부상 당했을 때 같은 방식으로 치료 받았다.

새로운 알렉산더 대왕이 되는게 꿈이었던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들어가 맘루크 정부랑 싸웠는데 그때 그가 한 유명한 말이 '병사들이여,4000년의 세월이 여러분을 이 피라미드에서 내려다보고 있다'였다. 나폴레옹과의 결전을 앞둔 넬슨이 한 유명한 말은 '돌아올 때는 머리에 월계수를 쓰거나 삼나무 가지(애도의 상징)를 덮고 오겠습니다'였다.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이 싸운 나일강 전투의 승리자는 넬슨이었다. 나일강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졌다는 소문은 전 유럽에 순식간에 퍼져 나갔는데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나폴레옹도 패배할 수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처음 알아서였다.

그런데 나일강 전투 후의 넬슨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내 말고 다른 여자랑, 그것도 남편이 있는 여자랑 사랑에 빠진 것이다. 나폴레옹에게 조세핀이 있는 것처럼, 넬슨에게 엠마가 생긴 것이다. 내가 세인트 폴 대성당과 트라팔가 광장에 서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던 넬슨은 제독 넬슨이라기보다는 평범한 한 남자로서의 넬슨이었다. 그 남자는 그녀를 사랑함으로써 살아있는 동안에도 많은 것을 잃었고 후대의 평판도 그르치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그녀를 끝까지 사랑했다. 그는 트라팔가 전투에서 죽었는데 빅토리 호로 날아가 보면 이럴 것 같다.

▲ 엠마 해밀턴의 초상화. 넬슨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엠마 해밀턴은 나폴리에서 매력적인 구경거리였다. 특히 그녀의 앉는 자세는 자세 그 자체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그녀는 한쪽 손을 턱에 바치고 한쪽 발은 어딘가에 올려놓고 몸을 앞으로 숙인 폼페이 벽화 속 여인 같은 고전적 자세를 취해 나폴리 궁정에서 찬사를 끌어냈다. 그녀의 긴 곱슬거리는 머리,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드레스의 곡선. 방종한 웃음, 격의 없는 말투, 친밀한 위로와 속삭임. 넬슨과 그녀는 막 발굴된 폼페이의 유적과 베수비오 화산 구릉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넬슨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라팔가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가면 그리운 엠마를 만날 수 있으련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넬슨은 14미터 앞에서 날아온 머스킷 총에 척추를 맞고 말았다. 넬슨은 마지막 유언을 생각할 때가 되자 엠마가 걱정이 되었다. 사람들이 엠마와 그 사이에 낳은 딸 호레이샤를 돌봐줄 것인가? 배의 돛으로 만든 관은 늘 배에 실려 있었다. 죽음에 임박하자 그는 따스한 인간적인 접촉이 그리웠고 옆에 있던 장교에게 키스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뺨에 키스를 받자 이렇게 말했다.'나는 여한이 없다. 신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노라''

넬슨은 죽었지만 트라팔가 전투에서 영국은 크게 이겼다. 프랑스 -스페인 연합 함대의 스물 세척 중 스무 척이 격침되었고 영국 함대는 한 대의 손실도 없었다. 트라팔가 전투 후 영국은 한 세기 동안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넬슨의 장례식은 이랬다.

'거대한 관중이 완벽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시신을 실은 마차가 나타난 순간에는 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가 모자를 벗었다. 계획적으로 진행된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고인에게 존경을 표하려는 충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장송곡이 조용히 연주되는 틈틈이 북소리나 대포 소리가 들려왔다.'

나폴레옹은 훗날 나의 모든 계획은 영국 함대에 의해 좌절되었소.라고 말했는데 나폴레옹이 유배 떠나던 길에 읽어달라고 부탁한 책이 바로 넬슨 전기였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누구에게 왜 졌는지 명확히 알고 싶어했던 것 같다.

▲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데르>

넬슨 가까이 있는 또 하나의 무덤의 주인공은 화가 터너이다. 터너는 1851년에 죽었는데 넬슨처럼 화려한 장례식 후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살아있을 때 대단한 사랑을 받았던 화가였다. 터너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 구역에서 자랐는데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푸주한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정신병자 수용소에서 죽었다.(나는 그 이야기를 뮤지컬 <스위니 토드>를 보던 날 들었기 때문에 그가 스위니 토드의 아들로 나오는 꿈을 꿨었다.) 그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왕립 아카데미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최고 목표로 생각한 현실주의자로 자랐는데 20대에 이미 그 꿈을 이뤘다. 그는 여행을 좋아했고 특히 알프스에 매료되었다. 68세의 나이에 해상의 눈보라가 어떤 것인지 보기 위해서 영국 해협을 건너는 정기선의 돛대에 몸을 묶고서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다를 건너 '눈보라'란 그림을 그린 일화는 그의 성격과 함께 그의 관심사도 말해준다.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컸던 그는 산업 혁명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거룻배가 아니라 증기선, 기차(비, 증기, 그리고 속도-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기차역, 산업화된 도시를 그렸다. 터너는 넬슨에 관련된 그림도 많이 그렸는데 <트라팔가 전투,빅토리의 뒤 돛대 우현 활대끝에서 본 광경>은 죽음의 총탄이 발사 된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고 <트라팔가에서 돌아오는 빅토리>은 넬슨의 시신을 실은 배가 와이트 섬을 지나오는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가 그린 <전함 테메데르>의 사연은 이렇다. 테메데르는 트라팔가르 전투에서 넬슨의 빅토리 호를 구해낸 3층짜리 거대한 떡갈나무 전함이었는데 이 위대한 전함은 증기와 철의 시대가 되자 쓸모없게 되어서 폐선처리 되게 되었다. 그래서 두 척의 증기 예인선이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이 배를 55마일에 걸쳐 끌고 가게 되었는데 터너는 바로 끌려가는 날의 테메데르를 그렸다. 그림 속에서 오른편에는 해가 지고 있는데 그 그림을 본 사람들은 인간의 고통은 아니라하더라도 배의 고통, 배의 쓸쓸함, 배의 애처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터너는 다른 의미로 영국민을 뭉치게 한 것 같다. 그것은 자연과 세상을 보는 하나의 시각을 준 건데 그의 그림 속의 자연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낭만과 애수에 사로잡혀 있을 틈이 없이 급격하게 변하는 자연과 극적인 세상의 소용돌이와 모호함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 같다. 자연은 그에게나 그의 동시대인들에게나 낭만적 숭배의 대상은 아니었고 오히려 같이 변화를 겪어내야 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그의 유언은 자신의 작품 중 두 점을 국립미술관에 로랭의 작품가 같이 나란히 전시해달라는 것이었다.(국립미술관에 가봤더니 진짜였다) 1978년에는 터너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동상. 그는 아직도 임무 수행 중이다.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의 운명도 늘 변함없는 존경과 숭배의 대상은 아니었고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숭배되었다,잊혀졌다,살아났다,욕먹다를 반복했다. 국가의 위기 상황, 뭔가 구심점이 필요한 순간, 용기를 통한 성공이 필요한 순간에 그는 주목을 받았다. 이를테면 처칠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이런 식의 말을 했다

"넬슨 기념비가 우리를 내려다보듯, 과거의 영웅 전사들도 우리를 지켜보면서 우리 섬나라 국민들이 그 기상을 잃었다고 혹은 당신들이 지난 세기에 확립해놓은 본보기가 사라져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제국의 시대에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저질러진 악행과 관련되면 넬슨은 브리타니아의 전쟁신으로 해석됐다. 넬슨은 그냥 넬슨이 아니라 국가 정체성의 화신으로 줄곧 해석되어 왔지만 나에게는 사랑 때문에 한쪽 눈으로 눈물을 흘린 넬슨의 모습이 더 강하게 떠오른다. 그의 마지막 말은 그 유명한 '나는 의무를 다하였다'였다. 하지만 인간의 의무에 과연 끝이 있는 것일까? 죽은 뒤라도…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은 아직도 의무 수행 중이다. 하지만 사랑의 의무라면, 거기서라면 그에게 쉼이 있길….

▲ 나이팅게일. 그녀는 야전 병원의 조직 개혁에 앞장섰고 끝없이 편지를 보내며 상사들을 괴롭혀, 고위 관리들은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또 한사람의 좀 색다른 전쟁영웅의 묘가 세인트 폴 대성당에 있다. 나이팅게일이다. 나이팅게일은 어려서부터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지체 높은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서른세살이란 나이에 비교적 늦게 간호사 수련 과정을 밟았은데 처음에는 런던의 작은 개인 병원에서 일했고 그 때 새로운 근무 수칙을 만들어서 의료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래서 크림 전쟁 야전 병원 책임자로까지 발탁 되었는데 그녀가 특히 명성을 끌었던 것은 관료들의 나태와 무기력을 단호하게 비판하는 개혁가로서의 자세였다.

하루에 꼬박 스무 시간씩 서있어야 할 정도로 바쁜 날도 있었다는 그녀의 일화는 등불을 든 숙녀, 병사들이 그림자에 키스하는 여성이란 전설을 낳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전쟁터에서 무엇에 가장 절망했었던가 하는 점인 것 같다. 그녀는 주사를 잘 놓아서나 부상자들에게 친절하게 굴어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부상자들의 고통만큼이나 야전 병원을 관리하는 육군의 무능과 무관심에 절망했다. 그녀는 야전 병원의 조직 개혁에 앞장섰고 끝없이 편지를 보내며 상사들을 괴롭혀, 고위 관리들은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크림 전쟁에서 총알에 쓰러진 군인보다 전염병과 불결한 위생 환경 때문에 죽은 군인의 수가 많았고 나이팅게일도 열병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었던 걸 생각하면 그녀가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개혁에 매달렸단 걸 알 수 있다.

다행히 그녀는 장수했다. 그녀가 죽은 나이는 90살,1910년의 일인데 크림 전쟁 이후에도 그녀의 평생 목표는 의료 개혁이었다. 과학 기술의 눈부신 진보와 오용, 음모적으로 진행되는 정치와 전쟁 이데올로기에서 배제되어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행할 수 있는 영웅적인 행동은 넬슨이 아니라 나이팅게일이 힌트를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과 시간의 저울이란 묘지 앞에서 사소한 열정과 근심사 일랑 잊어버리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모순에 가슴으로 항의하는 것,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 밤마다 평균 160대의 독일 폭격기가 고성능 폭탄, 소이탄을 쏟아 부으며 런던 상공을 공격하던 세계대전 중에 허버트 메이슨의 카메라는 공습 다음날의 세인트 폴 돔을 찍었다.

런던 대화재처럼 잔인한 또 다른 시대에, 세인프 폴 대성당은 다시 한번 영국 역사에 등장한다. 1940년 12월 29일~30일 사이에 찍힌 사진 속에서다.(공교롭게도 그날을 런던의 제 2차 대화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밤마다 평균 160대의 독일 폭격기가 고성능 폭탄, 소이탄을 쏟아 부으며 런던 상공을 공격하던 세계대전 중에 허버트 메이슨의 카메라는 공습 다음날의 세인트 폴 돔을 찍었다. 그 사진 속에서 돔은 연기와 불꽃 속에서도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사진은 전 세계에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읽혔다. 런던은 침착하고 꿋꿋하게 계속되는 폭격을 견뎌내고 있다. 런던은 결코 나치즘에 굴복하거나 나치와 동맹을 맺지 않을 것임을 당당하게 알리는 바이다. 그날 런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세인트 폴 대성당도 다른 의미로 읽혔을 거란 느낌이 든다. 밤마다 거리에서 마주친 행인들이 서로 굿 나잇, 행운을 빌어요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적어도 오늘 밤엔 죽지 않기를 바래요 하고 인사를 나누던 그 시절에, 연기 속의 세인트 폴은 결코 죽지 않는 희망의 이미지를 줬을 것이다. (그때 포츠머스에 있던 넬슨의 배 빅토리 역시 독일군에게 폭격을 당했지만 심각한 손상은 없었다는 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다)

이런 런던 대공습 기간에 우연히 런던에 있다가 급작스런 공습을 만나 대피소까지 같이 들어가게 된 세계적인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이다. 대피소 안에서는 "누군가 귀를 막으세요!"하고 솜을 나눠주었고 목사는 축음기와 음반을 가져와 탁자에 놓고는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며 음악을 틀어줬는데 사람들은 솜으로 막은 귀로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여러분 각자 종이에 이름을 써서 호주머니에 간직해주세요. 이름과 주소를 쓰세요!"라고 외쳤는데 그때 니코스 카잔차키스 앞에는 젊은 여성이 카키색 군복을 입은 청년의 손을 말없이 꼭 쥐고 있었다. 누군가 옆에서 '저들은 신혼부부야'라고 속삭여줬다. '저들은 신혼여행을 이런 식으로 보내고 있는거야…' 그 때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단테를 호주머니에 넣어오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그는 '단테의 연옥의 마지막 노랠 들을 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봄날의 부드러움과 꽃으로 둘러싸인 루치아, 녹색 풀밭에서 춤추는 여자들의 희디흰 다리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만약 내 삶의 순회가 여기 이 자리에서 끝난다 해도 그런대로 괜찮은 훌륭한 결말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누군가 '적기들이 지나갔다'라는 는 말을 외치는 것을 듣고 벌떡 일어나 사람들 속에 섞여 급히 달려 나가는데 그때 그의 머리 속에 다시 한번 단테의 마지막 시구가 떠올랐다. 그 마지막 싯구는,'다시 별들을 보라!'였다.

그 때 적기가 지나간 뒤의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사람들은 런던의 별이 그렇게나 빛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빛나는 밤 총총한 하늘이 저기 냉정하게 있구나.

▲ 세인트 폴 대성당을 들어가는 사람은 259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 whispering gallery(속삭임의 회랑)에 가서 잠시 앉아보길 권한다.

세인트 폴 대성당을 들어가는 사람은 단체 입장시간을 기다려 스톤갤러리와 골든 갤러리에 꼭 올라가보길 권한다. 259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 whispering gallery (속삭임의 회랑)에 가서 잠시 앉아보길 권한다. 그 곳에선 소리의 공명 현상 때문에 아래쪽의 아주 조그만 소리도 위쪽까지 들린다.1981년 다이애나와 찰스 왕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어떤 사람은 그 공명 현상 때문에 뉴질랜드 출신 성악가 키리테 카나와가 불렀던 헨델의 '빛나는 세람핌(천사)'을 황홀하게 들었다고 한다. 그 속에선 소리의 공명 현상 때문에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도 나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막혀 있던 공간을 돌던 나의 목소리의 파동이 저 높은 곳의 타원형 돔의 천장 벽에 부딪혀 건너편으로 날아간다는 것. 그 순간의 나에겐 그것은 화해의 이미지였다. 소리의 파동을 따라 반사되어 날아간 내 마음이 무사히 전달되는 것을 보았으니까.

돔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보이는 것, 그건 바로 한도 끝도 없는 과밀 런던이었다. 빙글빙글 빙글 돌며 돔을 구경할 때 돔과 나는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눴다.

-삶의 애착은 왜 생기는 걸까?
그건 삶이 그만큼 고되기 때문이지
-저 밑의 많은 건물들이 보여주는 걸까?
끝없이 너를 단련시키고 발견하게 하는 너만의 성소를 찾아내라는 거지. 그래서 어디서나 광휘를 발휘하라는 거지.

높은 곳에 오르니 나폴레옹의 말이 잠시 생각났다. 그는 "나는 그냥 이 시대 안으로 던져진 바윗덩어리 일뿐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결코 삶의 어떤 고단함도 마다하지 않았다.

▲ 여성 가이드는 손을 높이 들어 높이 110미터, 베드로 성당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그 돔을 가리켰는데 우리의 열여섯 사내들의 고개는 아무도 그녀의 손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세인트 폴 대성당 마당에 서있는 것은 앤여왕의 동상이다. 내가 성당 밖으로 나오니 그 앤 여왕 동상 옆에는 중유럽의 얼굴이 붉고 어깨가 떡 벌어진, 맥주와 세월의 합성 작용으로 불룩 튀어나온 배를 가진 노동자 계층의 중년 사내 열 여섯 명이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아래 계단에는 블라우스 단추를 과감하게 네 개나 풀어놓은 여성 가이드가 돔의 가장 높은 지점인 골든 갤러리에 대해 침을 튀기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여성 가이드는 손을 높이 들어 높이 110미터, 베드로 성당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그 돔을 가리켰는데 우리의 열여섯 사내들의 고개는 아무도 그녀의 손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지상의 거대한 돔, 그녀의 가슴에만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천국이 바로 여기 있다는 듯. 지상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뭐 다른 거대한 돔이 저 높은 곳에 필요하냐는 듯. 십분 이해한 나는 기도헸다. 지상의 형제들을 위해 상쾌한 바람 한자락 불어 옷섶이 살짝 흔들리기를.

우리 지상의 형제들은 감히 삶을 바꿀 수는 없어도 삶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어느 바람 불던 날에.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빅토리아 시대, 피지에 인도인이 건너간 까닭은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기사입력 2009-06-05 오후 3:10:02

 

내 가슴속에는 하나의 완성되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다.

수년 전 겨울에 나는 피지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 여행의 첫 며칠은 내 여행 중 가장 즐거웠던 한때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바다는 정말 아름다웠고 푸르렀다. 열대의 난은 조지아 오키프의 꽃처럼 노골적으로 여성적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의 낡은 철도 길을 걸어보는 것도 꼭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걷는 것처럼 이국적으로 좋았다. 나는 백만 마리 모기에 물리는 와중에, 원주민 마을의 밤 파티에 참석해 코코넛 잎사귀에 싸서 땅에 파묻고 구운 바나나를 열기가 식기도 전에 호호 불면서 먹어 보았고 그 연기가 하늘에 올라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추장이 권해주는 피지 전통주 카바도 마셔 보았고 그 술엔 마약 성분이 조금 섞여 있다는 말을 듣고는 "난 이미 마약의 효력이 나타났어요. 난 경제적인 여자거든요. 보세요" 라고 외치고는 발딱 일어나 큰 나무로 막 달려가 마을의 까만 사내 녀석들과 과격한 춤을 추면서 놀아 보기도 했다. 통가나 사모아 같은 섬 이름도 들었다. 저기 어디로 배를 타고 나가면 공항이 하나 있는 어떤 섬에 가게 되는데 그 섬의 입국장 안으로는 오로지 내국인만 들어갈 수 있어서 아직까지 그 섬을 본 외국인은 없단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도 들었다. 그 섬의 이름은 '얌'이라고 했다. 나는 '얌'의 입국장 문 너머로는 어떤 세계가 있을지 피지 밤바다를 보면서 궁금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식사로 카레를 먹게 되었는데 그 카레는 내가 먹어본 카레 중에서 제일 기름기 많은 이상야릇한 맛을 갖고 있었다. 불만에 가득 차 고개를 들어보니 그제야 인도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많이 지천으로 깔려 있단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지치고 가난해 보였다. 피지의 인도인은 하와이의 한국인, 덴마크의 에스키모처럼 내 마음 속에 애수를 불러 일으켰다. 나는 카레 접시를 가리키며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고는 '이런 잊을 수 없는 근사한 음식을 하는 당신들은 언제 여기에 왜 왔나요?'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빅토리아 시대라고 대답했다. 빅토리아 시대. 피지에서 인도인의 입으로 듣는 빅토리아. 그 대답은 그대로 질문이 되었다. 왜?

▲ 1820년부터 1920년 사이에 160만에 이르는 인도인들이 피지의 제당 공장에서 카리브해, 아프리카, 인도양, 태평양 등지까지 영국의 값싼 제국 노동력으로 파견되었다. ⓒPacificFocus.org

1820년부터 1920년 사이에 160만에 이르는 인도인들이 피지의 제당 공장에서 카리브해, 아프리카, 인도양, 태평양 등지까지 영국의 값싼 제국 노동력으로 파견되었다. 인도인은 빅토리아 시대 영 제국의 노동력의 반석, 군대의 근간이었다.1877년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여황제가 되었다. 피지에 첫 인도인이 노동자로 도착한 해는 1912년이었다. 그들은 하와이로 떠난 인천의 교회 신도들처럼 큰 배를 타고 배 멀미와 불안감에 시달리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면서 피지로 갔다. 그리고 하와이의 한국인처럼 사탕수수 농장의 처절한 노동자가 되었다. 피지의 인도인들은 6년 정도의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피지에 그냥 남아 살았다. 그 결과로 빅토리아 여왕의 거대한 대리석 동상이 철거되어 동물원 뒤뜰에 방치된 지 수십 년이 흘렀건만 나는 정체 불명 맛의 인도 카레를 쓴 눈물을 흘리며 남태평양의 햇살 아래 먹게 된 것이다. 그래도 질문은 남았다. 빅토리아 시대는 어떤 시대였기에 인도인들을 미지의 나라로 떠나 보냈나? 만약 내가 피지의 인도인과 사탕수수 나무 그늘아래 만나 이야길 나누게 된다면 그는 자신이 떠나온 고향 마을에 대해 뭐라고 말을 했을까?

▲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은 바로 그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 때 세워졌다.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은 바로 그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 때 세워졌다. 런던을 여행하면 수도 없이 듣게 되는 이야기 중 하나는 1851년의 런던 만국 박람회에 대한 것이다. 당시 하이드 파크에 세워진 크리스털 팰리스(수정궁)는 건축학의 개가로 불렸다. 그 건물은 투명한 유리를 철근이 에워싸는 구조물이었다는데 길이가 1851피트였다. 1300여개의 기업이 참가해 연발 권총, 의치같은 당대의 혁신적인 출품작들을 선보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독일 출신의 앨버트 공이 국민의 환심을 얻기 위해 특별히 심혈을 기울였다는 그 박람회 오프닝 날인 5월1일에 여왕은 오늘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날이라고 선언했다. 그 박람회는 부와 기술의 진보의 상징이었다.

그 박람회의 구경꾼 중에는 샬롯 브론테도 있었고 도스토예프스키도 있었다. 샬롯 브론테는 박람회에 후한 점수를 주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샬롯 브론테는 "그곳은 놀라운 곳이다. 한 가지 한 가지 물건들이 대단한 것보다 모든 물건들이 모여져 있는 특이한 방식이 대단하다. 기관차와 보일러가 가득한 방, 마차와 마구가 모여 있는 방, 금은 세공품, 다이아몬드와 진주가 모여 있는 방…. 수정궁은 일종의 바자 또는 시장인데 동방의 마법사가 만들어 냈음직한 그런 바자요. 시장이다. 지구의 구석구석에서 이 많은 값진 물건들을 모아오는 것만도 마술이 아니고는 안 될 일인데 그것을 진열하는데도 초자연적 능력이 필요했을 것 같다. 복도를 매운 인파도 어떤 힘에 눌린 듯 큰 소리 한번 못 냈다. 거기서 들리는 사람들의 나지막한 웅성거림은 멀리서 듣는 바다소리 같았다"라고 썼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언짢음도 역으로 생각하면 수정궁 박람회의 위풍당당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당당하고 환희에 찬 듯이 위세가 있기 때문에 숨이 막힌다. "지구 전역에서 단 한 가지 생각을 가지고 온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거대한 궁전에서 조용히 끈기 있게 입 다물고 모여 있는 모습은 어딘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풍경이나 바빌론의 풍경과 같으며 눈앞에 실현된 묵시록의 예언을 보는 것 같다. 내가 무대 장치에 현 되었다 치자. 그러나 그 거대한 장치를 만들어낸 강력한 정신은 얼마나 오만하며 얼마나 자기 승리와 개선을 확신하고 있는가. 그 정신의 오만함, 완고함, 그리고 맹목에 몸을 떨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 1851년 런던의 만국 박람회 당시 하이드 파크에 세워진 크리스털 팰리스(수정궁)은 건축학의 개가로 불렸다.

런던 박람회는 전 세계적인 박람회 붐을 일으켰다.(그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에서의 유명한 이야기꺼리는 브라질의 황제 부처가 공업제품을 앞에 두고 왕관을 쓴 머리를 연신 조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왕과 런던 사람들은 사실 런던 물건들의 디자인이 다른 나라 것들에 비해 좀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866년,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을 과학박물관 옆에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만국 박람회의 전시품들과 영국 왕실 소장품들을 합쳐 국민들에게 널리 보여 국민의 미적 안목을 향상시킨다가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의 설립 취지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대영 박물관 못지않은 방대한 소장품이 있다는 이 박물관은 알라딘의 동굴이라고도 불렸다.

피지의 인도인의 관점에서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을 보면 흥미로운 아이템이 하나있다. 바로 티푸의 호랑이 오르간인데 그 오르간은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이 자랑하는 인기 20대 아이템중 하나이다. 티푸의 호랑이 오르간이 탄생한 이야기는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1792년 12월 22일 남인도. 영국과 마이소르 간의 전투현장. 깊은 정글이다. 영국군 장군의 아들 휴 먼로는 술탄 티푸와의 전쟁에서 패했고 그 자신도 호랑이가 덮치는 바람에 목숨을 잃는다. 술탄은 이 호랑이를 생포했다. 1797년 남인도. 영국과 마이소르 간의 전투현장. 마이소르 궁전. 이번에는 마이소르족이 영국군에게 패하고 술탄 티푸마저 살해당한다. 바로 그때 술탄의 궁을 뒤지던 인도령 동인도 회사 총독의 눈에 진기한 것이 들어오는데 그것을 본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오싹 떤다. 그 오르간 건반을 누를 때마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와 영국군의 비명이 호랑이의 내장으로부터 한 소리가 되어 울려 나오게 고안되어 있었다. 그리고 소리가 나올 때 호랑이 밑에 깔려 있는 영국군의 손은 음률에 맞춰 마치 무기력한 운명을 상징하듯 힘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 티푸의 호랑이 오르간. 오르간 건반을 누를 때마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와 영국군의 비명이 호랑이의 내장으로부터 한 소리가 되어 울려 나오게 고안되어 있었다.

이 기괴한 상상력의 오르간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이 소리야말로 제국이 울부짖는 소리 같다고 느꼈다. 그 때 호랑이 오르간이 동인도 회사로 실려 갈 때 술탄 티푸의 후계자들은 어찌 되었을까? 오르간과 함께 끌려갔을까? 훗날 나는 <제국>이란 책에서 약간의 단서를 찾았다. 거기엔 요약하자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마이소르 왕은 적어도 한때 동인도 회사의 적 가운데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던 티투 술탄의 왕위 계승자였다. 그러나 그런 시절은 오래전이 지나가 버렸다. 왕은 고참 인도 행정 사무직원에게 교육 받았다.그 사무직원은 이렇게 전했다. 전하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아이처럼 전력을 다해 남성 스포츠를 즐기는 데에는 아무런 장애도 안됩니다. 그는 또한 고유의 음악뿐 아니라 서양 음악 감상을 즐기며 지식 또한 갖추고 있습니다 . (그가 그러고 있는 동안) 우리는 도로를 정비하고 배수 체계를 만들고 난민을 위한 거처를 만듭니다'

이 문장을 해독해 보면 '왕의 머리는 좋은 것 같은데 다행히 그 머리를 쓸 일은 없어 보이니 우리는 안심하고 할 일이나 하면 된다'일 것 같다. 실제로 티푸의 왕위 계승자 마이소르왕은 영국 지배 하 인도에서 부유하고 서구화되고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는,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 나약한 바람둥이가 되어버렸다. 영국은 그에게 딱 한 가지만 바랬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보팔, 카푸르탈라 같은 토후국의 이름을 단, 화려하게 장식된 코끼리를 타고 다니고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다른 봉건적 왕들의 역할 역시 마이소르 왕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영국 지배 체제를 떠받치는 기둥 노릇을 하는 그 동안에 보통 인도인들은 영국의 제국 경제가 철저하게 필요로 했던 아편을 추출하기 위해 양귀비를 기르거나 아니면 값싼 노동력으로 전 세계에 파견되었을 것이다. 당시 인도의 인구는 전 세계의 14%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노동 조건은 전세대의 아프리카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옛 현자들은 '신은 깊은 슬픔과 불운한 나날을 만들고 그것이 인간들을 위한 이야기와 노래가 되고 그래서 모든 이야기가 없어지고 모든 슬픔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시대엔 '제국'이 깊은 슬픔과 불운한 나날을 만들고 그래서 우리에겐 많은 이야기와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다로 바꿔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유럽의 낯선 화가 앞에서 어깨에 힘주고 의젓하게 서 있는 풍채 좋고 치렁치렁 화려한 옷을 입은 루카우 지방의 술탄과 그의 올망졸망한 열 명의 아들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이유로 나는 빅토리아 앤 알버트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그림, 1815년에 인도에서 그려진 왕과 그의 열 명의 아들들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림은 이런 제목을 달고 있다

Tilly Kettle painting a portrait of Shuja ud-Daula and his ten sons
Date 1815
Artist/designer Unknown
Place Lucknow, India Dimensions

유럽의 낯선 화가 앞에서 어깨에 힘주고 의젓하게 서 있는 풍채 좋고 치렁치렁 화려한 옷을 입은 루카우 지방의 술탄과 그의 올망졸망한 열 명의 아들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아들들 운명이 결판나는 동안 루카우 지방의 하층민 수드라 계급 인도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고무 플랜테이션 농장에, 어쩌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 가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피지의 인도인이 어느 날 돈을 모아 런던에 여행을 와서 티푸의 호랑이 오르간을 보게 된다면 햇볕과 노동에 찌든 눈 밑으로 짜디짠 눈물을 흘릴지 모르겠다. 자존심, 정의, 살아보지 못한 삶, 죽지 않는 호랑이, 아편 ,카레가 연신 그의 머리를 스칠지 모르겠다.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시인, 공예가, 사회주의자 여기에서 살았노라"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기사입력 2009-06-14 오후 2:52:31

 

1838년에 열여덟 살의 빅토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그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대관식 때 반지가 작아서 좀 쩔쩔 맸었다.그녀에게 큰 기대를 거는 사람은 없었는데 빅토리아 시대가 되니 분위기가 달라져 버렸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영국이 세계의 표준이 되는 시기였다. 제인 오스틴이 런던에 들러 웨지우드 도자기 가게에서 분에 넘치는 쇼핑이 아닐까 (그녀는 차 세트를 사느라 심지어 오빠의 돈까지 써버렸다) 갈등을 겪으면서도 과감하게 차 세트 전체를 사서는 집에 돌아가 차와 설탕을 찬장에 넣고 보물 단지 모시듯 열쇠를 잠가 관리한 얼마 뒤에 거의 모든 런더너들은 차를 일상적으로 꺼내 놓고 마시게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런던 사람들은 차를 한 모금 마실 때 그 입술로 방대한 지구의 노동력과 에너지를 함께 마셨다. 서인도 제도 차 농장과 갓 자리 잡기 시작한 인도 차 농장 사람들의 노동력, 열대작물을 키우는 태양의 에너지, 상선을 움직이는 바다의 에너지. 기관차 엔진의 증기 에너지.

제국의 정점에 있던 빅토리아 여왕은 부지런하고 고집 세고 지치지 않는 출산 능력이 있었고 오래 살았다. 그녀는 버킹엄 궁을 싫어했고 윈저궁을 더 좋아했고 특히 와이트 섬의 오즈번 하우스를 좋아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앨버트 공의 팔짱을 끼고 남들의 시선 없이 고요히 산책할 수도 있어서 좋아 했었다는 그 섬의 맞은편에 뭐가 있었던가? 바로 여왕이 산책 중에 고개 들고 바라보았던 것은 하늘과 바다. 그리고 포츠머스 해군 기지였다. 영국은 세계 선박 보유량의 4분의 1정도를 차지했었다. 다른 어떤 시기도, 어떤 나라도 영국이 19세기에 중반에 그랬던 것처럼 대양을 지배한 적은 없었다는데 여왕 부부는 영국의 경제력과 해군을 통한 세계 지배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여왕이 좋아한 오즈번 하우스에 여왕은 어느 날 무굴 제국 궁전의 화려한 내부를 본뜬 건물을 증축했고 전신국을 만들었다. 1880년경에는 영국,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캐나다가 15만 7021킬로미터 해저 케이블로 연결 되었고 철도는 달렸고 로이터 통신사는 이미 생겨나 있었고 전보는 몇 시간 만에 도착했다. 그동안에 영국은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했는데 영국 사람들에게 국제적인 자유 무역이란 것은 영연방 국가들을 부추켜 그들 나라의 생산물들을 값싸게 영국으로 대량으로 팔게 하고 그 수입으로 영국 제품을 사들이도록 한다는 의미였다.


▲ 와이트 섬의 오즈번 하우스를 방문한 빅토리아 여왕.

그 시대의 가장 실용적인 사람 중 하나는 쥘 베른의 필리어스 포그일 것이다. 그는 어느 날 클럽에서 신사들끼리의 대화를 나누다가 온갖 교통수단을 동원한 80일간의 세계 일주 여행을 호언장담하고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인도를 철도로 횡단해 사티 당할뻔한 인도 미녀를 구해낸다. 그 당시 뱅골, 델리등 철도 회사의 소유자는 실크 헤트를 쓴 영국인이었는데 그의 등 뒤에는 돈줄로 은행가, 금융업자, 증권업자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철도는 혁명과 전쟁에 대해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고 에릭 홉스봄은 말했는데 철도를 진짜로 소유한 사람은 누구든 모든 민족들을 꼼짝 못하게 해왔다. 기업과 금융, 로맨티시즘, 폭력, 모험은 결국 상공업과 기술로 연결된 하나의 세계를 극적으로 만들어냈다. 전 세계의 경찰, 전세계의 은행가, 전세계의 지도자인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바람직한 영웅의 모습을 알고 싶다면 코넌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에 나오는 존 록스턴경을 만나보면 될 것 같다.

▲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 표지.
"호화로운 모피와 동양의 어떤 노천 시장에서 입수한 듯한 진기한 무지갯빛 융단이 마루바닥 여기저기에 깔려있었다… 권투 선수들과 발레리나, 경주마의 스케치가 있는가 하면 관능적인 프라고나르나, 용맹스런 지라르데, 꿈꾸는 듯한 터너의 작품들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식품들 중에 간간이 섞여 있는 트로피들을 본 나는 존 록스턴 경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만능 스포츠맨이자 운동선수 중 한 사람이란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맨틀피스 위에 엇갈린 형태로 걸려있는 암청색의 노와 버찌빛 노는 그가 옥소니언과 리앤더 조정클럽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위아래에 걸려있는 펜싱용 칼과 복싱 글러브는 양쪽 모두의 경기에서 우승한 인물의 것이었다. 사방의 벽은 온통 대형 동물의 머리 박제로 장식되어 있다시피 했다. 거만하게 입술을 아래로 늘어뜨린 엔클레이브산의 희귀한 흰 코뿔소를 포함한 이것들은 전세계에서 직접 사냥해온 최고의 표본들이었다… 지금 시거를 물어뜯으며 나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는 사내야말로 바로 그 유명한 록스턴 경이었다….

'이건 쓸모 있는 총이지.470구경에 망원 조준경과 쌍발식 약협 이젝터가 달리고 유효 사정 거리는 영거리에서 320미터까지야. 3년 전에 페루의 노예상인들을 상대했을 때 내가 쐈던 총이라네. 우리 모두에게는 인권과 정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가 있는 법이야…'"


(코난 도일 <잃어버린 세계>)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야말로 내가 어려서 가장 좋아하던 책이었다. 소파에 엎드려 그 책을 읽으며 공룡에 쫓기는 상상에 겁에 질려 소파를 잡아 뜯다 엄마에게 엉덩이를 얻어맞고는 '차라리 나를 소파 구멍 속으로 묻어줘'라고 했다가 한 대 더 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소설 속에서 공룡을 찾아 떠나는 빅토리아 시대판 공룡 원정대의 일원인 존 록스턴 경은 빅토리아 시대의 총아였다. 사냥꾼, 만능 스포츠맨, 사격왕, 노예 해방의 선구자, 정의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기 위해 존재하는 긴 다리, 모험가, 부유한 귀족, 냉철한 판단력, 큰 키, 근육질 몸, 위기 앞에서 오히려 활기를 찾는 눈동자. 나는 원정대가 늦은 봄의 축축한 안개 낀 아침에 보슬비 속에서 죽어버린 화가의 스케치북 속에 있던 거대한 공룡의 단서를 찾아 아마존을 향해 떠날 때 '옛부터 전해 오는 뱃길을 따라, 먼 곳으로'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장면을 기껏해야 오 분이면 다 걷는 뚝방길의 돌멩이를 걷어차며 친구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다녔었다. 그리고 그땐 몰랐었다. 그 시대의 탐험이란게 단지 뭔가 몰랐던 것을 알고 찾아내 기뻐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애로운 신의 뜻에 따라 영국산 면바지와 셔츠를 벌거숭이 야만인들에게 입혀준단 의미, 영국산 비누를 쓰게 만든다는 의미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을. 빅토리아 시대에는 꿈의 지평선이 사업의 지평선이었다.

이런 빅토리아 시대 대영 제국의 모순에 대해서 고민한 사람, 윌리엄 모리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안에 마련되어 있는 윌리엄 모리스의 방은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못할 꿈으로 가득한 소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애틋함을 준다. 그 방은 우리의 어떤 기억들을 호출한다. 가시나무 잡목과 탱자나무의 생울타리로 덮여 있던 옛집, 과실수에 열매가 잔뜩 매달린 마당이 있던 마을의 다른 집들, 그 사이를 한가롭게 산책하다가 포대기로 아기를 들쳐업은 젊은 부인이 '애야 하나 먹으련?'하고 그날 아침 갓 딴 과일을 건네주기도 했던 담장, 친구 없이 외로운 날엔 푹신한 소파에 묻혀서 읽던 그림이 화려했던 책 들. 그 그림을 따라 딴 세상으로 한없이 빠져들던 한가로운 오후.


▲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의 윌리엄 모리스 방.

윌리엄 모리스 방에 서서 그를 상상해 본다. 어느 날 윌리엄 모리스는 꿈을 꾸는데 라벤더의 잔가지를 바닥에 뿌리고 있던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그의 등 뒤로 다가와 이렇게 말을 건다. 저는 손님의 얼굴에서 주름살이 없어지면 어떤 얼굴일지 궁금해요.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햇볕이 가득한 휴일에 저는 소년이었고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인생에서 꾼 꿈은 이런 거랍니다. 내 생애 최고의 기쁜 날로는 프랑스 루앙 같은 곳의 중세 고딕 성당 순례를 했던 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때 나는 노르망디의 바닷가에서 내 인생을 결정한 거나 다름없지요. 나는 고딕 성당과 중세 장인들의 길드 공동체야말로 이상향이라 찬탄했지요. 사람은 그렇게 서로 서로 힘을 합해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듯 노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자기의 손을 써서 말이지요. 나는 원래 마음을 두었던 신학을 포기하고 건축과 그림에 빠져들었지요. 나는 옥스퍼드 대학 보들리 도서관에서 중세의 필사본 책을 발견하고 수공예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점점 더 매료되었고 문자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지요. 매일 필사본을 품고 다니는 나의 모습은 신과 사람들의 좋은 구경꺼리가 되었지요. 내가 평생의 연인이자 아내인 제인을 만난 곳도 옥스퍼드였지요. 길게 파도치는 머리카락을 가진, 꿈꾸는 듯한 크고 검은 눈동자와 가느다랗고 긴 목덜미를 가진, 우수와 유혹을 동시에 지닌 말없는 여자 제인 버든를 만나 나는 그만 강렬한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어요. 그녀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는데 나의 스승이자 동료인 로세티의 모델이었고 그땐 몰랐지만 실은 둘은 연인 사이이기도 했지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열여섯이었는데 나는 그녀와 결혼을 바란다는 것은 미치광이 짓이야 라고 말하곤 했어요. 왜냐하면 그 발에 키스하는 것만이 사나이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여러 편의 시를 읊어주며 구애했고 아버지의 유산으로 신혼집, 그러니까 그 유명한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레드 하우스를 지었어요. 나는 그 집의 실내 장식에만 2년을 바쳤어요. 벽지, 스테인드글라스, 가구, 쿠션. 커텐 모든 걸 내가 디자인하고 나와 내 친구들이 그림을 그려 넣었지요.데이지꽃, 튤립, 연꽃, 아서왕의 이야기가 온 집에 가득 했어요.사람들은 내 집은 한편의 시라고 칭송했어요. 그 집에서 나는 라파엘 전파 친 링을 만났어요. 나는 그들과 손으로 하는 공동 작업을 꿈꿨지요. 우리 라파엘 전파는 신화와 전설, 육체와 정신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길 좋아했지요. 우리가 살던 산업 사회와 현실 정치는 모든 걸 인간 대신 기계가 하기 시작했는데 우린 그걸 거부했던 것이지요. 나는 부지런히 일을 했어요. 가구, 벽지, 의자, 피아노 모든 것에 우리의 문양들을 그려 넣었지요. 나는 인기가 있었고 당시엔 가구 주문이 많아서 일감도 많았지요. 왕족들을 위한 궁정품 양식이 상층 부르즈와지로 내려오던 시기, 그러니까 예술이 실용화 되는 시대 분위기 속에 나는 살았던 셈인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미술 공예 운동을 벌이던 시기와 이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 오픈한 시기는 겹칩니다. 나는 이곳에도 많은 물건을 납품했지요. 나는 점점 더 예술은 미적 소산물일 뿐 아니라 노동의 기쁨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 로세티가 그린 <Day Dream>
하지만 나는 사적으론 행복하지 않았어요.100권이 넘는 중세 필사본으로 벽을 가득 메운 내 집 서재에 있는 제인의 풍모는 필사본의 왕비만큼 아름다웠으니 제인의 미모가 사라져 슬픈 건 아니었죠. 나의 아내는 다시 로세티를 만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경위야 어찌되었던 로제티는 30년 동안이나 제인을 모델로 썼고 그녀를 라파엘 전파 그림 모두의 거대한 종합, 경이로운 대상이라 칭송했으니까요. 나의 아내의 얼굴이 궁금하시다고요? 그렇다면 로세티가 그린 DAY DREAM을 추천합니다.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에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그 아름다움을 보면 로세티가 아내를 얼마나 아름답게 잡아내는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쩔 수없이 탄복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와 아내와의 정사는 잡지에 만화로 실릴 만큼 공공연해졌고 나는 세 딸을 위해서 우리 세 사람의 기묘! 한 동거를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나와 로세티, 제인이 한 집에 같이 사는 거예요. 너무 괴로운 날에는 나는 아이슬란드 같은 데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지요. 우리의 기묘한 동거는 입방아에 올랐지요.

그러는 와중에도 내 인생은 공적으론 왕성해보였습니다. 나는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 최고의 제본업자, 가장 아름다운 책의 장정가, 손의 장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나는 일을 위해 수천 장의 드로잉을 그리곤 했어요. 나에게 예술은 그림이나 건축 조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으로부터 생겨나는 아름다운 모든 것.즉 삶의 기쁨이 모두 예술이었어요. 나에겐 예술은 한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민중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바로 그것이었죠. 나는 언젠가 유토피아란 시를 발표했는데 그 시 속에선 모든 사람들이 기뻐 노동을 하고 있죠. 그 시는 사실 별로 인기가 없었어요. 나는 성당이나 궁전과 마찬가지로 성당 앞길, 고속도로, 길거리 공장 까지도 예술 공간으로 생각했으니 환경 운동도 해야 했고 고건물 보호 운동도 해야 했어요. 정치적으로는 사! 회주의자가 되었지요. 물건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야지 매매를 위해 만들어져선 안된다고 생각했으니 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 나는 아무도 타인의 욕망에 의해 희생당하지 않는 사회를 바랬어요. 하지만 나는 실패했을 수도 있지요. 왜냐하면 내 작품은 결국은 아주 비싸게 팔렸으니까요"

▲윌리엄 모르스가 디자인한 무늬의 벽지.
오스카 와일드는 모리스야말로 초서 이후 영국에서 유일하고 진정한 이야기의 시인이다. 그는 신들과 인간의 불가사의한 전설, 기사도와 로망스의 놀라운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쉼 없이 들려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낭만적인 중세주의자에서부터 사회 혁명가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훗날 윌리엄 모리스의 묘비명은 '시인, 공예가, 사회주의자 여기에서 살았노라'였다. 그는 예술과 노동자들의 연결고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가구에서 길거리, 도시풍경까지 일상적인 것을 풍부하게 바꿔 보려 했기 때문에 그의 미술 공예 운동은 아르누보란 이름으로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최초로 상업적으로도 승리한 근대 스타일이란 평가를 훗날 받게 되었다. (이를테면 그때 부르즈와들은 이런식으로 살았다고 묘사한 걸 본적이 있다. 윌리엄 모리스식 벽지를 바른 집에 하인 셋을 두고 가정 교사가 한 명 있고 주인은 우표수집과 나비 채집이 취미이고 골프를 즐기기도 하고 스위스로 여름휴가를 가고…) 그리고 그의 인생의 유일한 여자, 아내 제인은 그보다 18년 더 살았다. 그가 죽은 1896년으로부터 3년 뒤에는 소비에 대한 오늘날까지도 끝없이 거론되는 주목할 만한 책이 한 권 출판되었다. 바로 1899년에 나온 베블런의 유한 계급론이다. 베블런은 그 책에서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서 자기 계급을 과시한다고 말해 쇼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줬다. 사람들은 이제 하나의 계급으로 쇼핑을 하는 시작했고 그 말은 우리 시대에 이르러서 지당한 이론으로 거론된다. 필요에 의한 소비만을 인정하려던 모리스의 노력도 시대의 흐름을 되돌리진 못했다. 대신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의 화려한 현대적 산업 제품들-여자의 백, 구두, 코르셋, 드레스, 장신구, 패션 사진, 인물 사진 등은 반대로 시대의 흐름이란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래도 그의 평생의 좌우명 '내가 할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다면'은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신기할 정도로 그의 전 인생을 감쌌던 활기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다면'


▲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포스터. 나는 개인적으로 윌리엄 모리스를 생각하면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가 생각이 난다.

나는 개인적으로 윌리엄 모리스를 생각하면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가 생각이 난다. 마부의 딸이었던 제인도 윌리엄 모리스와 결혼하기 전 약 일 년에 걸쳐 상류층 진입을 위한 교육을 따로 받았다.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인 피그말리온을 쓴 버나드 쇼가 윌리엄 모리스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단 걸 생각해 보면 버나드 쇼는 제인과 모리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버나드 쇼는 모리스의 딸 중 하나와 결혼할 뻔했다) 피그말리온이란 이름을 가진 한 조각가가 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조각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조각이 인간이 되기를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간절히 바라다가 마침내 그 소원을 이뤘다는 피그말리온 이야기는 어려서 처음 알고 난 뒤 지금까지도 들을 때마다, 처음 들었을 때처럼 마음이 설렌다. 내가 생각하는 피그말리온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마침내 그 조각이 여인이 되어서 뒤를 돌아보며 뱉은 첫 마디 '나에요, 그래요 나에요.'이다. 나예요. 그래요. 나에요.란 말을 모리스는 인생의 어느 순간 들어보았을까?

말년의 모리스는 이런 글을 남긴다

그것은 꿈이었을까?
그래 정말 그렇다
내가 본대로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꿈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윌리엄 모리스 이야기를 생각하다보니까 자꾸만 말라르메의 바다의 미풍 첫 구절이 생각난다. "육체는 슬프고 나는 모든 책을 읽었다" 꽃과 줄기의 휘어지는 곡선으로 가득한 그의 텍스타일들은 언제나 부드러움, 만개, 상냥함, 열정, 이야기의 함축,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총합인 청신한 청춘의 느낌으로 나에게 남는다.
 

 


 

 
"욕망은 나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기사입력 2009-06-21 오후 5:05:31

 

1870년대가 넘어서자 사람들은 교외의 집과 정원 주택지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고 런던에 사는 부유한 사람들은 켄싱턴 공원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사느냐 아니냐에 따라 가문의 체면이 좌우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전원에서 진정한 잉글랜드를 찾고 싶어했는데 그런 맥락에서 사랑받게 된 화가가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에서 그림을 자주 볼 수 있는 컨스터블이다.

컨스터블은 유명인의 초상화나 종교,역사화,유적지를 그린 화가가 아니고 시골길이나 농지,강물이 흐르는 잉글랜드 농촌와 그의 고향 잉글랜드 남부 스타우어 강둑의 이미지를 그렸다. 그는 실제 자연보다 더 그럴듯하게 그리는 것을 거부했는데 아마도 그는 찬찬히 물레방아와 시골길을 관찰했을 것이고 하늘의 구름과 날씨와 바람을 꼼꼼히 일지에 적었을 것이고 그보다 더 오래 정성껏 그림들을 다듬었을 것이다.(이 박물관에는 그의 지갑이나 메모첩같은 소집품들도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그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 묻힌 터너와 동시대인으로 여러모로 그와 비교되곤 했던 것 같다. 살아있는 동안에 더 성공적으로 보였던 것은 터너였는데 두 차례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컨스터블의 입지가 더 확실해졌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영웅들에게 어울릴만한 집을 제공해 준다는 국가 정책이 추진 되었을 때 그의 그림 건초 수레에 그려진 오두막집 윌리 롯의 집이 모델로 선정되었고 토마스 쿡 여행사와 그레이트 이스턴 철도 회사는 컨스터블 지방으로 가는 여행 상품을 내놓기도 했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밀레를 바라보듯 영국 사람들은 컨스터블을 바라봤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를 소개하는 글 들 중 읽고 가장 좋았던 것은 박지향 교수가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이란 책에서 소개한건데,

'물레방아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 버드나무, 오래된 모습의 강둑, 나는 그런 것들을 사랑한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나는 그것들을 그릴 것이다. 그림은 감정의 다른 말이다.나는 부주의했던 소년 시절을 스타우어 강 강둑에 놓여있는 모든 것과 연결시킨다. 그것들이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였다.

부주의했던 어떤 시절, 내 옆에도 은행나무와 포도나무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도 하지만 미소를 짓게도 된다. 컨스터불 그림이 환기시키는 기억 속에서 시간은 항상 천천히 흘러가고 사위는 조용하고 마음을 다독거릴 일만 남았다. 제국의 몰락과 전쟁을 치른 영국 사람들은 삶이란 우리 모두에게 슬픔이 가득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제부터 진짜 뭘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면 그건 바로 자신의 삶의 목표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런 풍경 속에 버드나무가 수줍게 흔들리고, 구름이 떠다니고, 작은 집에 아이들 뛰고, 건초더미 쌓여 있고, 수수한 음식이 차려지고, 진실만을 말하고 가끔은 한숨을 쉬기도 하지만 어쩐지 안심하게 되는…

▲컨스터불 그림이 환기시키는 기억 속에서 시간은 항상 천천히 흘러가고 사위는 조용하고 마음을 다독거릴 일만 남았다.

남진의 '저 푸른 초하늘에 구름같은 집을 짓고 살자'는 노래를 절규하듯 부르는 취객,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같은 노래를 부르며 살짝 눈물을 비치기도 하는 내 푼수같은 선배들. 그 옛날 내 고향 푸른 하늘밑에 진짜 이쁜 여자친구를 두고 왔다고 주장하는 선배들, 그들 모두 이 앞에 세워주고 싶다. 나는 풍경화가 현대적 감수성이 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월트 휘트먼의 내 자신의 노래를 잠시 같이 불러보자….

'...
풀밭에서 나와 함께 빈둥거리다… 네 목에 있는 마개를 열어다오
내가 바라는 것은 말도.음악도,시도 아니야…관습도 강의도,최고의 것도 아니지
단지 그 고요함, 네가 부르는 콧노래가 좋을뿐
그토록 영롱한 여름,유월의 아침에 우리가 함께 누웠던 일을 추억하네

너는 내 엉덩이에 머리를 올리고 내 위로 살며시 돌아누웠지
나의 갈비뼈를 감싼 웃옷을 벗겨 훤히 드러난 내 가슴에 혀를 대고
자꾸만 파고 들어 내 턱수염을 느끼고 내 두발을 감싸 안았지…

지상의 모든 논쟁보다 더 높은 평화와 지혜가 순식간에 피어올라 사방으로 퍼졌고
나는 신의 손길이 나의 노련한 손임을
신의 영혼이 나의 맏형임을
태어난 모든 남자들이 나의 형제임을..
모든 여자들이 나의 여동생임을 연인임을,
그리고 창조의 근본이 사랑임을 알았네.'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가 소개한 이 노래도

한달에 천리라를 벌 수 있다면
난 정말이지 자신할 수 있어
온전한 행복을 찾을 거라고
난 그러 평범한 회사원이라서 많은 걸 바라지 않아

그저 열심히 일해서 마침내
온전한 평화를 찾고 싶어
교외에 있는 자그마한 집에서
바로 너처럼 젊고 예쁜 아내랑 살고 싶어
한달에 천리라를 벌 수 있다면
난 쇼핑을 많이 할 거야

내가 원하는게 있으면 가장 좋은 것들을
많이많이 사줄거야

(이탈리아 노래 -한달에 천리라를 벌 수 있다면)


1892년 한 영민한 소년이 배포 크게도 기숙사에게 친구에게 이런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현재의 평화로운 세상을 엄습하는 거대한 변화를 볼 수 있어
대격변, 소름끼치는 싸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전쟁
그리고 나는 너에게 런던이 위험에 처할 것과 런던이 공격당할 것과
내가 런던을 방어할 것임을 예언한다
내가 런던의 방어를 지휘할 것이며 런던과 제국을 재앙으로 부터 구할 것이라고
너에게 예언한다'

그 소년의 이름은 왓치맨도 베트맨도 아니고,바로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의 예언은 반은 맞고 (그는 런던을 방어한다) 반은 틀린다.(제국은 구하지 못한다). 빅토리아 여왕이 죽고 2년 후부터 제국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역사는 팍스 브리타니카의 빅토리아 시대를 피루스 왕의 승리(승리했지만 결국은 얻은게 없는 승리) 라고 말한다.빅토리아 시대는 폭포와 도시에 이름을 남겨놓고 사라졌다.

빅토리아 시절의 위기감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은 아무래도 우주전쟁으로 잘 알려진 웰스일 것 같다. 그의 소설 <타임머신>의 출발지는 영국 가정의 안락한 거실이다. 그날 그곳에 모여 차를 마시던 쟁쟁한 사람들은 집주인으로부터 시간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듣는다. 대략 8일쯤 시간이 흐른 후 주인은 자기의 실험실에서 나와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는 80만 년후의 세계를 다녀왔다면서 인간은 인형같이 가냘프고 깨질 것 같이 작고 연약하고 하얀, 꽃같이 예쁜 엘로이 족으로 진화했었는데 엘로이들이 그를 보자 화환을 걸어주며 어찌나 뜨겁게 환영했던지 꽃으로 질식할 지경이 되었다고 했다. 그들은 과일만 먹고 사는데 주위에 노동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들의 몸도 가냘프기만 했다.그런데 시간 여행자는 곧 그들에겐 행복한 날의 한 떨기 불안함 같은 한가지 수수께끼가 있단 걸 알게 되었다.그들은 어둠을 무서워하고 밤만 되면 무서워 벌벌 떨며 모두들 모여 잔다. 시간 여행자는 얼마후 끔찍한 진실을 알게되었다. 도시 곳곳에 있는 우물 속에는 또 다른 종족,즉 흉측하게 생긴 야행성 괴물들이 사는데 그들 역시 엘로이처럼 인간들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노동을 하는 밤의 종족인 몰록들은 밤이면 몰려 나와 엘로이들을 공격하고 먹어치운다. 지상에 사는 아름다운 종족 엘로이, 지하에 사는 흉측한 종족 몰록. 타임머신의 주인인 시간 여행자는 두 종족을 지켜보면서 이것은 인류의 이기심에 대한 엄벌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인간들이 수고롭게 일하는 또 다른 인간들의 등위에 올라 앉아 안락과 쾌락을 누리며 살아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런 결과를 맞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해 준 후 시간 여행자는 다시 길을 떠난다. 그가 떠난 뒤 그 거실에는 그가 남기고 간 꽃 한 송이만이 시간 여행의 증거로 남아 있었는데 그 꽃은 시간 여행자가 사랑했던 엘로이 여인 위나가 고마움을 표현하며 그의 가슴에 꽂아준 것이었다.

▲ 웰스의 <타임머신> 표지. 빅토리아 시절의 위기감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은 아무래도 우주전쟁으로 잘 알려진 웰스일 것 같다. 웰스는 당시에 타임머신을 써서 '만약 세상이 앞으로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오?'란 질문을 던졌을 테고 그 글을 읽은 당시 사람들을 몹시 심란했을 것이다.

'인류의 지적 능력과 힘이 사라진 뒤에도 감사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인류의 가슴에 여전히 남아있을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처럼 그 꽃은 놓여있었다. 웰스는 당시에 타임머신을 써서 '만약 세상이 앞으로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오?'란 질문을 던졌을 테고 그 글을 읽은 당시 사람들을 몹시 심란했을 것이다. 어여쁜 엘로이들이 꽃을 던지며 햇살 아래 웃음을 터트리고 뛰어다니는 행복이란 몰록들이 잠잠한 동안에만 가능한 것이니,바로 행복한 날의 한 떨기 치명적인 불안함이었다..

그러나 '발칙한 1890년대'를 포함해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는 성공과 탐욕에 눈 먼 위선자와 부채를 살랑살랑 부쳐대며 치맛단 사그락거리는 허영심 가득한 요조숙녀만 살았던 건 아닌 것 같다. 그 시기엔 (결정적으로 다윈의 등장 이후) 종교와 과학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으로 고정 관념이 허물어지는 아픔을 감수하면서도 자기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학자들도 함께 살았고 자본주의의 본산이자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인 런던발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도 함께 살았다. 윌리엄 모리스 같이 인간 노동의 소중함을 믿는 사람들도 살았고 찰스 디킨스처럼 구두쇠를 싫어하고 고아와 뒷골목에 애수를 느끼는 사람도 살았고 웰스처럼 쓴 소리를 해대는 사람도 살았다.

그래서,어쩌면 발칙하고 변화무쌍했던, 자본과 제국의 빅토리아 시대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은 '우리보다 더 취한 나라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인간소외, 실업등 휘몰아치는 사회의 변화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에 대해 가장 명예로운 답을 찾아내려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놓칠 수 없는 한 가지가 분명히 더 있다.

▲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은 빅토리아 시대 왕실 수집품의 박물관으로서도 의미 있는 곳이지만 산업과 예술의 결합이라는 근대 이후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에도 너무나 의미있는 곳이다.
이곳은 빅토리아 시대 왕실 수집품의 박물관으로서도 의미 있는 곳이지만 산업과 예술의 결합이라는 근대 이후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에도 너무나 의미있는 곳이다. 영국 출신 세계적인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코르셋 진열장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자기 의상 컨셉을 얻은 곳 바로 이곳이다. 오페라의 대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우리들은 현대의 역사도 한 때 그리스의 예술 작품을 창조했던 사람들과 동일한 인류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 자신들에게 단단히 납득시켜야 한다. 무엇이 인류를 근본적으로 변하게 했는가? 그리스인들은 예술품을 창조했는데 우리는 지금 왜 사치 산업의 제품들밖에 생산하지 못하는가?' 라고 개탄했는데 리하르트 바그너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을 수 있는 곳도 이곳이다.

만국 박람회를 구경한 도스트예프스키가 '광고에 매달리지 않고 불안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언론과 전세계적인 소통,세계 박람회등을 생각하면 창조적인 독립성을 유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지역적인 것이 온갖 이점과 함께 죽어버렸다.이제 어디서 예술가 창조자 시인들이 나올까? 아니면 이제는 단순한 비즈니스맨만 나올 뿐일까?'라고 개탄했는데 그 질문에 대한 해답 역시 이곳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을 방문했을 때 대대적으로 홍보 중이었던 것은 뮤지엄에서의 패션쇼였는데 그것은 스텔라 맥카트니가 디자인한 아디다스 스포츠웨어 전이었다. 과학과 돈이라는 삭막한 몸통이 어떤 과정을 통해 시와 노래의 대상이 될 만한 매력을 갖게 될 것인가? 나 역시 궁금하다.상업적 감각과 현실의 요청인 동시에 자기의 역량과 개인적인 고백이 되는 물건들이 어떻게 우리 시대를 대표하게 될 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비안 리가 커텐을 뜯어 만들었음직한 드레스, 오드리 햅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서 입었음직한 의상이나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 시대에 너무 많은 헤어스프레이를 뿌려대며 우리의 언니들이 입었던 과도한 어깨패드 의상이나 다이아나 비도 좋아했다는 베르사체 드레스같은 걸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돈나라면 겉옷으로 입었을게 분명한 속옷들, 스파이스 걸스도 소화 못할 아찔한 하이힐들. 핼무트 뉴튼이 찍었음직한 공격적인 모델들의 사진들… 그러나 이것들 모두의 본질은 그 상품들 뒤에 도시의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들이 사랑하기 시작한 것은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이다.여학생이 빨간 신호등에도 결코 멈추지 않고 모퉁이를 돌아설 때, 태연하게 거리의 좌우를 둘러보기만 하는 태도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커다란 빌딩과 작은 입구에 자신을 맞추어가는 방식, 사람들 속에서 여자가 걸어가는 자태, 램프의 기름이나 필수품이 단지 코너를 돌기만 하면 살 수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주부들. 사실상 이런 생활 양식들이 사랑을 이루어 내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욕망을 자극할 뿐이다. 시골길의 담벼락에 홀로 기대어 서서 한 남자의 피를 휘저었던 순진한 아가씨도 이 도시에서는 그의 눈길이라도 한번 끌게 되기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만약 그 여자가 높은 구두를 신고 가방을 흔들면서 대도시의 거리를 재빨리 걸어다닌다면 또는 차가운 맥주를 손에 들고 발끝으로 신발을 돌리면서 계단에 앉아있다면, 남자는 그 자세에, 차가운 돌 위의 매끄러운 피부에, 그 섬세하고 흔들 흔들하는 구두를 압박하는 빌딩의 무게에 반응해서 그만 매혹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돌의 조각과 가방의 흔들림과 햇빝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하이힐이 이루어내는 어떤 결합이 아니라 바로 그 여자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토니 모리슨 재즈 중에서)

그러나 나는 욕망 예찬론자이다.소유에 집착만 하지 않는다면 매번 욕망 그 자체가 나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다고 믿는다. 이를테면 욕망은 이런 사랑같은 거다. 그러니까 소유랑은 절대로 다르다.

'이따금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보답없는 사랑에 열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울화가 치밀곤 한다.그러나 이제 보답없는 사랑이란 없는 법이고 무슨 수든 보답이 있기 마련이라고 난 생각한다' 휘트먼이 열렬했던 짝사랑이 쓸쓸하게 끝난 후 '이따금 사랑하는 이'와 란 제목으로 쓴 시다.

▲ 나는 사실 이곳의 인기 아이템중 하나인 엘리자베스 시절의 '웨어의 거대한 침대'를 보자 엉뚱한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나는 사실 이곳의 인기 아이템중 하나인 엘리자베스 시절의 '웨어의 거대한 침대'를 보자 엉뚱한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그것은 니코스 카잔치키스가 소개해준 것인데 어느 날 욕망에 몸이 달뜬 못생기고 불운한 서른 살 노처녀가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베를린 근교에 머물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의 방으로 들어선 그녀는 손에 두툼한 책을 한권을 들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설명을 좀 들으러 왔어요"라고 말했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두 사람의 무릎이 맞닿았다. 친구가 칸트책의 복잡하고 추상적인 의미들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노처녀는 상체를 약간 수그리고서 열심히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가 책을 홱 덮어버리고는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난 칸트보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존 어빙의 일년 동안의 과부에 나오는 장면인데 어느날 그 해의 살아있는 유부녀중 가장 아름다운 유부녀를 보고 사랑의 열병에 빠져버린 순수한 청년이 그 유부녀에게 짝사랑을 고백한 다음, 둘이 처음 만났던 날 입었던 옷을 그대로 달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은 이 문장이다 "이틀 뒤, 에디는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커피가 끓는 동안 그는 침실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메리언이 누워있는 줄 알았지만 그것은 다만 그녀의 핑크빛 캐시미어 가디건이었다. 다만 그녀는 단추를 열어두었고 스웨터의 긴 소매 뒤로 돌려놓았다. 마치 가디건 안의 보이지 않는 여자가, 보이지 않는 머리 뒤로, 보이지 않는 두 손을 맞잡은 것처럼, 단추를 열어둔 곳에 브래지어가 빠끔 보였다. 에디 자신이 그녀의 옷을 펼쳐놓은 어떤 모습보다도 더 마음을 홀리는 모양새였다. 브래지어는 흰색이었고 팬티도 그러했는데 매리언은 에디가 좋아하는 위치에 정확히 팬티를 놓아두었다."

그런 순간에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침대는 예술입니다.

예이츠는 희망과 기억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의 이름이 바로 예술이라고 했다.예술은 인간들이 두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에 그들의 믿음의 옷을 내걸어 놓는 곳,그 황량한 벌판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놓았다고 한다. 우리도 예이츠처럼 외치자,v오 희망과 기억의 사랑스러운 딸이여, 잠시 동안 나와 함께 있기를. 나의 삶을 예술로 만들어 주기를. 나의 가슴을 초자연적으로 부풀어 오르게 해주길.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당신을 궁금하게 만드는 여행기"
[화제의 책] 정혜윤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 줄게>

기사입력 2009-09-19 오전 10:17:16

 

기자의 한 지인은 영국 런던으로 여행을 가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들어가보지 않았다고 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까지 갔지만 바깥에서 건물 모습만 봤다는 것. 딱히 들어갈 이유를 못 찾았다는 설명이었다. 그에게 이 책을 설명하자 이 친구는 간단히 답했다. "그 책을 읽어봤다면 나도 사원 안에 들어갔을 텐데."

<침대와 책>,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등의 책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지독한 독서가' 정혜윤 CBS PD가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 줄게>라는 제목의 런던 여행기를 냈다. <프레시안>에 연재된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가 기초가 된 이 책은 연재를 열심히 읽었던 독자라면 새롭게 변주된 글을 읽는 재미를 누릴 수 있다. 그리니치 천문대, 자연사 박물관 등을 주제로 한 글이 새로 추가됐고 웨스트민스턴 사원 등 거의 모든 이야기가 새롭게 구성됐다.

▲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 줄게>(정혜윤 지음, 푸른숲 펴냄)
이 책은 몇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여행기임에도 사진이 별로 없다는 것. 맛집, 멋집, 교통, 숙박 정보에 '빠삭'한 수많은 여행객들이 여행지에서 잃어버리고 오는 것, 바로 '이야기'가 중심이다. 정 PD의 독서가로서의 삶이 반영된 그녀 만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또 하나는 누구나 아는 장소를 소재로 삼았다는 것. 대부분의 책이 숨겨진 맛집, 멋집, 교통, 숙박 정보를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그는 런던탑, 대영박물관, 세인트 폴 대성당, 트라팔가르 광장, 그리니치 천문대 등 영국에 한번 가보지 않은 사람도 들어본 익숙한 공간들에 관한 여행기를 썼다.

그는 "한계와 갈망"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여행을 떠날 수 없다. 어렵사리 시간을 내고 돈을 마련해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가서 구경하고 사진만 찍고 돌아와 '생각보다 볼 거 없더라'고 한다. 나는 그들의 손을 끌고 '아니야 이렇게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어,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책 속에도 이런 말이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 'view'란 그런 것이다. 이를테면 책임감 같은 것이다. 한 번 보고 두번 보고 다시 잊지 못하게 되는 것 같은 것이다. 내가 본 아름다움에 책임지고 싶다는 내밀한 욕망은 나의 내부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주었다. 다나카와 슌타로 식으로 말하자면 세계가 나를 사랑하기에 나는 나일 수 있다"(웨스트민스터 사원 편)

그는 어쩔 수 없는 일상의 '한계' 속에서 떠난 여행에서 가져야할 '갈망'에 대해 말한다.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과 어떻게든 나를 연결시키고 싶다는 갈망.

"어쩌면 런던은 핑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쿄와 뉴욕이라고 해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나는 도시의 이름을 빌어 갈망과 호기심과 또 다른 세계와 또 다른 삶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에서 중요한 지점은 '런던'이 아니라 '속삭인다'는데 있다. "런던을 속삭여 줄게"라는 제목처럼 책의 표지를 비롯해 곳곳에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표지에 구식 전화기를 들고 있는 오렌지 원피스 차림의 모델이 바로 저자 자신. 이외에도 각 이야기 편마다 검은 실루엣으로 표현된 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영국의 세인트폴 대성당 앞에서, 트리팔가르 광장을 메운 인파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이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의 열정과 과거의 신비에 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는 세인트 폴 대성당의 역사와 그에 시련을 겪었던 시인에 대해,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미이라에 담긴 사연들에 대해, 트라팔가르 광장에 서 있는 넬슨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국의 역사와 문화가 담뿍 담긴 이러한 이야기들만으로도 흥미진진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더욱 생동감있게 하는 것은 이것이 '독서가' 정혜윤 PD의 이야기라는 것. 그가 만약 화가였다면, 선생님이었다면, 고고학자였다면 이 모든 이야기는 달랐을 것이다.

'영국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백과사전식 여행기가 난무하는 속에서 그의 여행기는 오히려 궁금증을 부른다. 모두가 자신의 삶에 대해 목소리를 내어 말한다면 수천 수백가지의 재미있는 여행기가 우리의 이야기 속에 쏟아질 것이다. 그 친구의 여행은 어떤 것이었을까. 당신에게 '런던'은 어떤 곳일까?

/채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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