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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농구 득점 기록들

by Wood-Stock 2009. 5. 12.

 

'100득점 신화' 윌트 채임벌린은 누구?

 

[마이데일리 = 박세운 기자] NBA 역사상 전무후무한 단일경기 100득점 신화의 주인공 윌트 채임벌린은 어떤 선수였을까?

 

코비 브라이언트는 23일(이하 한국시간) 토론토 랩터스와의 원정경기에서 81점을 퍼부으며 NBA 역사를 뒤바꿨다. 자신의 한경기 최다득점은 물론, 레이커스 선수 사상 한경기 최다득점 기록을 경신했고 NBA 역대 단일경기 최다득점 부문 2위 자리에 올랐다. 종전 2위기록은 윌트 채임벌린이 1961년 12월9일 3차연장전 끝에 기록한 78점이었다.

 

브라이언트는 이제 NBA 역사상 80점 이상을 기록한 2번째 선수가 됐다. 최초로 80점 고지를 점령했던 선수는 바로 윌트 채임벌린이다. 채임벌린은 지난 1962년 3월3일 뉴욕 닉스전에서 무려 100점을 기록하며 단일경기 최다득점 역대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다. 최초로 90점대를 득점을 기록한 선수이자 유일하게 한 경기에서 세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선수인 것이다.

 

브라이언트의 득점기록이 각광을 받으면서 채임벌린의 이름이 그 어느 때보다 자주 언급되고 있다. NBA 역사상 최고의 득점기계로 평가받았던 채임벌린은 대체 어떤 선수였을까.

 

채임벌린은 뛰어난 농구선수이자 운동선수였다. 그는 고교시절 필라델피아 지역 삼단뛰기 챔피언이었고 캔자스 대학에서는 전국 최고의 높이뛰기 유망주였다. 채임벌린은 타고난 운동능력에 힘까지 겸비했다. 채임벌린은 싸움을 특히 싫어했는데 경기도중 주먹다짐이 난무했던 1950~60년대 NBA에서 그는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당사자들을 양손으로 들어 싸움을 말리곤 했다.

 

216cm 125kg의 거구를 자랑하는 채임벌린은 1960년대 빌 러셀, 월트 벨라미, 네이트 서몬드, 카림 압둘자바 등 쟁쟁한 빅맨들과 경쟁해왔다. 러셀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채임벌린의 팀을 쉽게 꺾지 못했다. 러셀은 전성기 시절의 채임벌린을 '30점대'로 묶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수였다.

 

채임벌린은 높이를 이용한 득점에 그 누구보다 능했다. 덩크 뿐 아니라 스핀무브에 이은 핑거롤에도 능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채임벌린만의 장기였다. NBA는 채임벌린의 독주를 막기위해 수차례 농구규칙을 개정해야했을 정도로 그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NBA는 1964년 채임벌린의 골밑장악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페인트존의 길이를 지금과 같은 16피트로 늘렸다. 자유투 라인에서 한 스텝을 밟고 곧바로 덩크를 연결시킬 수 있었던 채임벌린의 골밑독주를 막기위해 3초룰 적용범위를 넓혀야했던 것. 또한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되는 일이지만 자유투를 레이업으로 넣을 수 있다는 조항 역시 폐기됐다. 만약 이 조항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통산 51.1%의 자유투성공율보다는 더욱 좋은 기록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과거 NBA는 동료가 던진 슛을 공중에서 잡아 후속 플레이를 전개할 수 있었다. 이 역시 백보드 상단부근에 위치한 볼을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채임벌린 때문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채임벌린은 61-62시즌 시즌평균득점 50.4점을 기록했고 같은시즌 전설로 남아있는 100득점 신화를 창조했다. 3점슛이 없던 시절, 2점짜리 야투와 자유투만으로 달성한 대기록이었다. 채임벌린은 1960년 11월 보스턴전에서 55리바운드를 잡아 단일경기 최다리바운드 신기록을 수립했고 1967년 2월 볼티모어전에서는 18개의 야투를 모두 성공시켜 슛 실패없이 가장 많은 야투성공을 기록한 선수로 역사에 남아있다.

 

채임벌린은 1967년 필라델피아 워리어스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보스턴의 리그 9연패 도전을 무너뜨리는 등 통산 2회 우승을 차지했다. 13차례 올스타로 선정됐고 4차례 정규시즌 MVP에 올랐다. 채임벌린은 지난 1978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지난 1999년 세상을 떠났다.

 

한편, 브라이언트는 로워매리언 고교시절 4년간 2883득점을 기록, 종전까지 지역고교 최다득점 기록이었던 2359점을 경신했던 바 있다. 종전기록 보유자는 다름아닌 채임벌린이었다.

 

 

 

체임벌린, 1962년 100득점 `전설`

 

[일간스포츠 이은경 기자] `전설의 스타` 윌트 체임벌린(216㎝.1999년 사망)과 `21세기 득점기계` 코비 브라이언트의 역사적인 기록 순간은 어떻게 달랐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1962년 3월 3일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 뉴욕 닉스의 경기가 열렸던 필라델피아 홈경기장으로 가보자. 당시 필라델피아의 센터였던 체임벌린은 필드골 36개, 자유투 28개를 성공시켜 한 경기 100득점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 센터였기 때문에 3점슛은 없었는데도 100점을 기록했으니 더욱 놀랍다.

 

당시 뉴욕 주전 센터 필 조던이 독감 때문에 결장해 체임벌린의 득점력에 날개를 달았다. 뉴욕은 체임벌린을 막기 위해 파울 작전을 시도했는데, 이 때문에 체임벌린이 28개나 되는 자유투를 성공시켰고, 전설적인 기록이 나올 수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체임벌린의 통산 자유투 성공률이 51.1%에 불과한데 이날 경기에서는 자유투 32개를 던져 28개를 넣었다는 사실이다.

 

체임벌린은 종료 46초 전 2점슛으로 100득점을 올렸고, 이 순간 홈팬들이 경기장 안으로 몰려들어와 경기가 중단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체임벌린이 100점으로 NBA 한경기 개인 최다득점 기록을 쓰기 전까지 최고 기록 역시 체임벌린 자신이 3개월 전 세웠던 78점이었다. 체임벌린은 61~62 시즌 한경기 평균 50.4득점을 올렸다.

NBA 역사상 최고의 스타로 꼽히는 마이클 조던도 한 경기 최다득점은 69점이었고, 한 경기에서 70점 이상을 넣은 선수는 체임벌린과 엘진 베일러, 데이비드 톰슨, 데이비드 로빈슨 4명이었다. 그리고 23일(한국시간) 코비 브라이언트가 81점으로 여기에 이름을 추가했다. 한국 프로농구에서는 2004년 3월 7일 우지원(모비스)이 창원 LG전에서 70점을 넣은 게 최고 기록이다.

 

한국농구 최다득점은 우지원 ‘밀어주기’로 70점

 

한국프로농구의 한경기 최다득점기록은 우지원(모비스)이 갖고 있는 70점이다. 2003~2004시즌 마지막 날인 2004년 3월7일 LG전에서 기록한 우지원의 70득점(3점슛 21개)은 문경은(당시 전자랜드)과의 과열된 3점슛 타이틀 경쟁 속에서 소속팀 선수들의 지원과 상대의 느슨한 수비가 어우러진 가운데 작성돼 ‘밀어주기’라는 빈축을 샀다.

 

문경은은 같은날 TG삼보전에서 22개의 3점슛을 뿜으며 66점을 넣어 역대 2위 기록을 갖고 있다. KBL은 당시 “이 기록은 참고기록으로만 삼겠다”고 했지만 연감에는 버젓이 역대 1, 2위 기록으로 공인돼 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작성된 KBL 최다득점은 2002년 3월10일 에릭 이버츠(코리아텐더)의 58점.

 

아마에서는 최철권(전 SK코치)이 87년 전국체전에서 기록한 97점이 최다득점. 최철권은 3점슛 18개로 54점을 뽑는 등 가공할 득점력으로 전북선발이 부산선발을 135-95로 꺾는 데 앞장섰다.

 

〈김경호기자〉

 

 

농구역사에 남아있는 '황당 득점기록'

 

[마이데일리 = 박세운 기자] 신시내티 대학의 포인트가드 스티브 로건은 지난 2002년 2월18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대학농구(NCAA)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을 터뜨렸다.

 

로건은 서던 미시시피 대학과의 경기에서 41점을 퍼부었다. 그 자체가 대단한 게 아니었다. 서던 미시시피 선수들이 만든 전체득점이 37점에 불과했던 것. 팀 전체득점이 로건 혼자의 득점기록에 미치치 못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언론은 '로건 41 vs 서던 미시시피 37'이라는 헤드라인을 써가며 흥분을 감추지못했다. 신시내티는 89-37 대승을 거뒀고 로건은 9어시스트 6리바운드를 보태며 승리의 주역이 됐다.

 

1965년 메이저리그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투수로 데뷔한 피트 시미노는 브리스톨 고교시절 잘나가는 농구선수였다. 시미노는 1960년 1월24일 팔리새드 고교와의 경기에서 무려 114점을 기록하며 펜실베니아 지역 단일경기 최다득점 기록을 수립했다. 펜실베니아는 윌트 채임벌린, 코비 브라이언트 등 전설적인 농구선수들을 많이 배출했지만 현재까지 그 누구도 '메이저리거' 시미노의 기록에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

 

레지 밀러의 누나로 유명한 세릴 밀러는 여자고교농구 단일경기 최다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밀러는 리버사이드 폴리 고교시절이던 81-82시즌 한 경기에서 105점을 퍼부었다. 하지만 밀러의 기록은 현 WNBA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인 리사 레슬리의 거센 위협을 받았다.

 

레슬리는 잉글우드 모닝사이드 고교재학 시절 사우스 토랜스 고교와의 경기에서 전반에만 무려 101점을 기록하며 신기록 달성을 눈 앞에 뒀다. 하지만 큰 망신을 당한 사우스 토랜스 고교측에서 후반전 출전을 거부했고 결국 레슬리는 개인최다득점 기록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1960년대말 맨스필드고교 선수였던 톰 맥밀란은 3학년 시절부터 4학년 때까지 17경기 연속 50점 이상을 기록하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1969년 12월17일 열린 엘클랜드 고교전에서는 단 19분동안 67점을 퍼붓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편, 농구역사상 단일경기 최다득점 기록은 지난 1988년 터키에서 수립됐다. 터키프로리그 페네르바체 이스탄불 소속의 에르만 쿤터는 팀이 175-99로 승리한 경기에서 무려 153점을 퍼부었다.

 

한국프로농구(KBL)에서 단일득점 최다득점 기록은 우지원(모비스)이 보유하고있다. 우지원은 지난 03-04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창원 LG전에서 21개의 3점슛을 포함, 총 70점을 퍼부었다. 이는 공식기록으로 남아있지만 문경은(당시 전자랜드)과의 3점슛 타이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밀어주기의 결과였기 때문에 크게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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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선수권대회 역사 속의 '한국농구'

 

(2006년 8월) 19일 일본에서 제15회 세계 남자농구선수권 대회가 막을 올린다. 한국은 지난해 9월 카타르에서 열린 제23회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 대회 4위에 그쳐 본선티켓을 놓쳤으나 한국농구를 빛낸 대선배들의 흔적은 세계대회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찬란히 빛나고 있다.

 

한국은 15회째를 맞는 세계대회에 총 6차례 출전해 통산 9승30패를 기록했다. 지난 1970년 처음으로 세계대회에 출전했고 1986년 스페인 대회부터 4회 연속 진출이라는 성과를 달성하기도 했다.

 

역대 최고성적은 1970년 대회에서 기록한 11위, 당시 한국은 처녀진출임에도 불구하고 3승2패의 수준급 성적을 남겼다. 이후 한국농구는 세계농구와의 격차를 실감하며 이렇다할 성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허재, 신동파, 이충희 등 한국농구를 빛낸 전설들의 활약상만큼은 크게 돋보였다.

 

허재는 지난 1990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 이집트전에서 62점을 퍼부으며 당시 한국이 거둔 유일한 승리를 이끌었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대회 역대 단일경기 최다득점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충희가 1986년 브라질전에서 기록한 45점은 역대 공동 6위에 올라있다.

 

신동파 역시 세계대회 역사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신동파는 한국이 처음으로 세계대회에 발을 내딛은 1970년 유고슬라비아 대회 8경기에서 평균 32.6점을 기록해 대회통산 역대 평균득점 2위에 랭크돼있다. 또한 당시 대회 최다득점 기록자로 이름을 남겼다.

 

FIBA가 3점슛을 도입한 건 지난 1985년. 3점슛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슈터가 세계강호들을 상대로 평균 30점 이상을 기록한 건 상상을 초월하는 업적이다. 게다가 한국은 처녀출전이었던 이 대회에서 역대 최고성적을 거뒀다. 신동파가 한국농구의 전설로 불리는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다.

 

마이데일리 2006.8.19

 

 

허재, 신동파

신동파, 이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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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로 간 NBA 스타들

 

스크린에서 만나보는 NBA 스타들의 모습은 어떨까?
미 프로농구(NBA)에는 랩, 힙합 앨범을 들고나와 무대에서 팬들을 만나는 선수들이 있는가 하면 영화나 TV 등을 통해 '연기'에 도전하는 선수들도 있다.

'끼'로 똘똘 뭉친 '연기파' 선수들은 작게는 조연, 혹은 카메오로 등장해 매력을 뽐내는가 하면 아예 주연으로 출연해 예사롭지 않은 연기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 주연으로 나선 스타들

 

농구 스타들이 주연으로 나선 영화는 대부분 '전공'인 농구와 관련된 영화들이다.
1979년에 개봉했던 '피츠버그를 구한 물고기자리 사나이들(The Fish that Saved Pittsburgh)'은 'Dr.J'로 유명한 줄리어스 어빙(60. 201cm)이 주연을 맡았다.

디스코 음악이 흥을 돋우는 이 영화는 NBA 최약체 팀인 피츠버그를 물고기자리의 농구 스타 어빙이 구해낸다는 내용으로 카림 압둘 자바(63. 213cm), 크리스 포드 전 감독 등 실제 NBA 스타들이 대거 출연했고, 마브 알버트와 LA 레이커스의 전설적인 아나운서였던 고(故) 칙 헌도 찬조 출연했다.

1994년에는 샤킬 오닐(38. 216cm)이 엔터테이너로서 재능을 뽐냈다.
국내에는 '샤킬 오닐의 NBA 챔프'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영화 '블루 칩스(Blue Chips)'는 대학 스타들의 스카우트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리를 다루고 있다.

배우 닉 놀테와 함께 주연을 받은 오닐은 이 영화를 시작으로, '카잠(Kazaam, 1996년)', '스틸(Steel, 1997년)' 등 세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또 '무서운 영화4(Scary Movie 4)'에서는 카메오로 출연해 특유의 익살스런 연기로 영화 도입부를 빛냈다.

오닐은 '블루 칩스'를 촬영하면서 페니 하더웨이(38. 201cm)와 가까워졌고, 두 선수는 1990년대 중반 올랜도 매직에서 '매직 존슨-카림 압둘 자바'를 이을 장신 가드-센터 콤비로 각광받기도 했다.

'블루 칩스'에 당시 상대팀 선수로 출연했던 앨런 휴스턴(39. 198cm)은 1999년 '블랙 앤 화이트(Black and White)'에서 제법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당시 휴스턴은 브룩 쉴즈와 호흡을 맞춘다는 사실에 매우 설렜다고 밝히기도 했다.

휴스턴과 동시대 최고 슈터로 활약한 레이 앨런(34. 196cm)은 전설적인 농구영화 '히 갓 게임(He Got Game)'의 주연으로 호평을 받았다.

1998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농구 마니아로 잘 알려진 스파이크 리가 감독을 맡았고, 농구 선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덴젤 워싱턴이 주연을 맡았다. 앨런은 그의 아들이자, 전국 최고의 농구 유망주 지저스 셔틀스워스 역할을 맡아 인기를 끌었다.
'히 갓 게임'은 '코치 카터(Coach Carter)', '글로리 로드(Glory Road)'와 함께 농구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꼭 봐야 하는 영화로 꼽힌다.

게다가 이 영화에는 마이클 조던(47. 198cm), 딘 스미스 감독, 조지 칼 감독, 오닐, 스카티 피펜(44. 201cm), 찰스 바클리(47. 198cm), 레지 밀러(44. 201cm), 트레비스 베스트(37. 180cm), 월터 맥카티(36. 208cm) 등 NBA 스타들도 대거 등장해 눈을 즐겁게 해준다.

데니스 로드맨(49. 203cm)은 장 끌로드 반담과 함께 '더블팀(Double Team)'이란 액션영화에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로드맨은 이후에도 인터폴과 같은 터프한 '사도' 역할을 많이 해왔다.

또, '농구 황제' 조던도 1995~1996시즌을 앞두고 애니메이션 '스페이스 잼(Space Jam)'에 출연해 인기몰이를 했다.

▲ 최고의 조연들

 

주연급은 아니지만, 조연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스타들도 있다.
'레전드' 압둘 자바는 조용한 성격과는 달리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사망유희'에서는 이소룡의 맞상대로 나와 격투를 벌였고, 1980년 개봉한 '에어플레인(Airplane)'에서는 항공기 부조종사로 등장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레슬리 닐슨 스타일의 영화였던 '에어플레인'에서 압둘 자바는 의외의 엉뚱함을 보여준다.

그는 그 외에도 많은 스포츠 관련 영화에서 실명으로 등장했다. 빌리 크리스탈이 주연한 '파리가 당신을 부를때(Forget Paris)'에서는 은퇴 경기에서 퇴장 당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은퇴한 존 샐리(46. 211cm)와 릭 팍스(40. 201cm)는 검증된 연기파 선수들이다.

현역 시절 '스파이더'란 별명으로 유명했으며,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시카고 불스에서 3차례 우승했던 존 샐리는 연기, 진행 등에서 끼를 뽐내왔다. 영화 '나쁜 녀석들(Bad Boys)', '에디(Eddie)' 등은 그의 대표작이다.

LA 레이커스에서 3번 우승한 릭 팍스는 가수 겸 연기자였던 바네사 윌리엄스의 남편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농구관련 영화에 빠짐 없이 출연하고 있으며, 그 외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출연해왔다. 최근에는 '원 트리 힐(One Tree Hil)'에서 농구 유망주에게 거액을 주고 승부조작을 유혹하는 악역을 맡기도 했다.

▲ NBA 스타들이 등장하는 농구영화들

1996년에 나온 '리바운드(Rebound: The Legend Of Earl'The Goat'Manigault)'는 길거리 농구스타 얼 매니고우의 전기를 다룬 영화다.

그는 NBA 스타들조차 혀를 내두르고 갔으며 실제 구단들로부터도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 당당히 거절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이 영화에서 길거리 코트에서 함께 자웅을 겨룬 윌트 채임벌린의 역할은 케빈 가넷(34, 208cm)이 맡았다. 가넷은 당시 NBA에 막 입성한 신인급 선수였다. 이 영화에도 압둘 자바와 조 스미스(35. 208cm), 푸 리차드슨(44. 185cm) 등 실제 선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1990년대 농구팬들에게는 우피 골드버그의 '에디(Eddie)'가 인기였다. 흥행을 위해 추첨을 통해 팬에게 감독직을 맡겼던 뉴욕 닉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물론 허구다).

이 영화에는 팍스와 그렉 오스터택(37. 218cm) 등 지금은 추억이 된 은퇴 선수들이 등장한다. 또 상대팀 선수로 30명이 넘는 NBA 현역선수들이 촬영에 동원됐다.

1990년대 중반을 수 놓았던 스타들의 지금 모습을 생각해보면 '에디'는 농구 마니아들의 마음에 더욱 와 닿는 영화가 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 속 레이커스의 감독이 커트 램비스(52)였는데 실제로 그는 영화 개봉 후 2년 뒤인 1998년 레이커스 사령탑을 맡았다. 그러나 코비 브라이언트(33. 198cm)에 대한 편애와 선수단 통제 실패로 반발을 산 뒤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2000년대에는 '라이크 마이크(Like Mike)'가 관심을 끌었다. 한 소년이 조던의 농구화를 신은 후 조던처럼 잘 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은 이 영화도 NBA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라이크 마이크'에는 빈스 카터(33. 198cm), 덕 노비츠키(32. 213cm), 스티브 내쉬(36. 191cm), 앨런 아이버슨(35. 185cm) 등 슈퍼 스타급 선수 18명이 출연했다.

한편, 2010년 5월 미국에서 개봉한 코메디로맨스물 '저스트 라이트(Just Wright)'도 농구를 소재로 한 영화다.

드와이트 하워드(24. 211cm), 드웨인 웨이드(28. 193cm), 라존 론도(24. 185cm) 등이 등장한다.

< 자료 = NBA 제공 > news@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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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대회를 휩쓴 NBA 스타들

 

2010년 국제농구연맹(FIBA) 세계선수권대회가 주말에 개막했다. 월드컵과 마찬가지로 4년에 한 번 개최되는 세계선수권대회는 농구 강국들이 총출동하는 '농구대전'과도 같다.

세계선수권대회는 늘 판도 예측이 쉽지 않았다. '농구종가'라 자부하는 미국조차도 16번의 대회 중 3번 밖에 우승하지 못했다. 1994년 이후에는 금을 보지 못했다.

구 유고슬라비아가 5번 우승으로 역대 우승 횟수 1위에 올라 있고, 구 소련연방은 미국과 같이 3번씩 우승했다.

이후 유고와 소련이 해체하면서 세계농구계의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이 가운데 올해 대회는 각각 1950년과 2006년에 우승을 차지했던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이 또 다른 우승후보로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선수 개개인으로 보면 어떨까?

미국프로농구(NBA)가 글로벌화 되면서 세계선수권대회를 빛냈던 스타들이 대거 NBA에 진출, 자신의 커리어를 드높여왔다. 이 가운데 마누 지노빌리(33. 아르헨티나)와 파우 가솔(30. 스페인)은 농구선수로서는 더 이룰 것이 없는 존재로 자리잡았다.

▲ 지노빌리와 가솔은 우승 보증수표?

 


2002년 세계선수권대회 스타로 떠오른 지노빌리는 프로와 국제무대에서 모든 걸 이룬 선수다.

샌안토니오에서 뛰어난 개인기와 클러치 플레이로 많은 인기를 얻은 그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에이스로서 10여년간 명성을 떨쳐왔다.

국제무대에서는 2002년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 2004년 올림픽 금메달, 2008년 올림픽 동메달 등을 이루었고, FIBA 아메리카 선수권대회에서도 2001년에 정상을 밟았다. NBA에서도 팀 던컨(34. 211cm), 토니 파커(28. 188cm)와 트리오를 이루어 3번(2003년, 2005년, 2007년)이나 우승했다.

NBA 데뷔 이전에도 지노빌리는 승리를 몰고다니는 남자였다. 18살의 나이에 프로가 됐던 그는 이탈리아 세리에-A 리그에서 소속팀 킨더 볼로냐를 2001년 이탈리아 리그 우승, 2001년과 2002년 이탈리아 컵 대회 우승, 2001년 유로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2001년 유로리그에서는 MVP도 수상했다.

이쯤 되면 '가는 곳마다 우승'이란 수식어는 그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가솔도 지노빌리 못지 않다. 지난 6월, LA 레이커스에서 2년 연속 NBA 우승의 기쁨을 맛 본 그는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금메달 수집'에 나섰다.

후안 카를로스 나바로(30. 192cm)와 짝을 이룬 그는 1998년 U-18 유럽선수권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성인대표팀에서는 유럽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1개(2009년), 은메달 2개(2003년, 2007년), 동메달 1개(2001년)을 모두 차지했고,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2006년에 정상에 등극하는 기쁨을 누렸다.

또, 2006년 대회 결승에서는 다리 골절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MVP를 수상했다. 결승에서는 동생 마크 가솔(25. 216cm)이 자신을 대신해 주전센터로 출전해 주가를 높여 기쁨을 더했다.

가솔 역시 이미 NBA 데뷔이전부터 스페인의 '국민 유망주'였다. 소속팀 바르셀로나는 2001년 스페인 컵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고, 가솔은 이 대회 MVP를 수상했다. 그 가능성을 인정받아 그는 2001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지명될 수 있었다.

▲ 마이클 조던, 국제대회에서도 황제급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47. 198cm)도 국제무대에서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현역시절 시카고 불스를 6번이나 NBA 정상에 올려놨던 조던은 1984년 올림픽과 1992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학생 신분으로 출전했던 1984년 올림픽에서는 까다로운 바비 나이트(69) 감독까지 매료시켰다. 당시 NBA 데뷔를 앞두었던 그는 8경기에서 17.1득점을 올렸고, 스페인과의 결승에서는 20득점을 올리며 결승전 승리(96-65)를 이끌었고, 덕분에 그 주가는 더 치솟았다.

스페인 대표팀 감독은 "그가 점프를 하면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로부터 8년 뒤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올림픽서 조던은 농구의 역사를 또 한번 바꾼다.

내로라하는 NBA스타들과 함께 '드림팀'을 결성해 대회를 휩쓴 것. 당시 '드림팀'은 경기 중 타임아웃은커녕 개인연습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유있게 상대를 제압했다.

대회 당시 가족들과 바르셀로나에 머물렀던 조던은 경기가 없을 때는 아이들과 함께 하거나, 골프와 카드에 빠져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던처럼 세계대회와 NBA 우승을 동시에 거머쥔 미국선수는 의외로 많지 않다.

얼마 전 명예의 전당에 올랐던 1960년 대표팀의 제리 웨스트(72. 188cm), 1988년 올림픽 패배의 아픔을 딛고 2번 연속 올림픽 우승(1992년, 1996년)을 차지했던 데이비드 로빈슨(45. 216cm), 1980년대 NBA를 주도한 래리 버드(53. 206cm)와 매직 존슨(51. 206cm), 얼마 전 명예의 전당에 등록된 스카티 피펜(44. 201cm), 나이지리아 태생이지만 미국시민권을 따내 1996년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하킴 올라주원(47. 213cm) 등이 대표적인 스타들이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올림픽 동료이자 보스턴 셀틱스에서도 한솥밥을 먹은 케빈 가넷(34. 211cm)과 레이 앨런(35. 196cm)도 빼놓을 수 없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우승한 리딩팀의 코비 브라이언트(32. 198cm)도 LA 레이커스에서 5번이나 우승한 실력자다.

▲ 세계를 떨게 한 '샤크'와 'ZO'

하지만 미국인 NBA 선수중에서는 NBA 우승과 MVP, 세계선수권대회, 올림픽 우승을 모두 달성한 선수는 2명뿐이다. 바로 1992년 드래프트 동기인 샤킬 오닐(38. 216cm)과 알론조 모닝(40. 208cm)이다. 포지션도 센터로 같고, 우승도 함께 경험했다.

얼마 전 보스턴 셀틱스로 이적한 오닐은 캐나다에서 열린 1994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드림팀 II'의 일원으로서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그는 대회기간 내내 최고 스타대접을 받았다. 평균 18.0득점 8.5리바운드로 골 밑을 휘저었고 미디어의 관심도 끊이지 않았다.

오닐은 1994년 대회 우승을 이끈 데 이어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드림팀 III'의 멤버로 출전해 선배들과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는 오닐의 마지막 FIBA 무대였다.

드래프트 동기인 모닝도 '드림팀 II' 유니폼을 입으면서 국가대표에 데뷔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모닝은 딸의 출산으로 인해, 올림픽 기간 중 호주와 미국을 오가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리하면서 신장병에 걸려 팬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당시 그는 6경기동안 팀이 기록한 블록슛(30개) 중 절반에 가까운 14개를 혼자 기록하면서 위력을 발휘했다.

모닝은 2006년 마이애미 히트에서 오닐을 도와 처음이자 마지막 NBA 우승을 거머쥐었다.

▲ 세계를 지배한 또 다른 강자들

국제무대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NBA 공습에 성공한 유럽인들도 살펴보자.

2010년 FIBA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블라디 디박(42. 세르비아)과 아비다스 사보니스(45. 리투아니아)는 유럽농구의 역사를 빛낸 센터들이다. '최고의 테크니션'이란 찬사를 받았던 만큼, 포스트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기량을 보여줬다.

두 선수 모두 비록, NBA에서는 우승을 거머쥐지 못했지만 국제무대에서는 남부럽지 않은 영예를 이루었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디박은 유고가 낳은 최고의 스타다.

1986년, 18살의 나이로 성인대표팀에 데뷔해 2002년까지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었다. 그 사이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은 유럽선수권 우승 3회, 세계선수권 우승 2회, 올림픽 은메달 2회를 따냈다. 그는 대표팀을 통해 성장했다.

디박은 사보니스보다 NBA 데뷔가 빨랐다. 이전까지 유고의 프로팀에서 뛰었던 그는 1989년 LA 레이커스에 데뷔했다. 처음 데뷔했을 때만 해도 할리우드의 화려함과 미국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고전했지만, 그 와중에도 올-루키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리는 등 남다른 기량을 보였다. 레이커스도 비록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NBA 파이널에 오르는 등 저력을 보였다.

디박은 레이커스와 샬럿 호네츠(현 뉴올리언스), 새크라멘토 킹스 등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2000년대부터는 유럽선수들의 '대부' 역할을 하면서 외국선수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았다. 킹스 구단은 그의 은퇴 후 등번호 21번을 영구결번 시켰다.

221cm의 사보니스는 NBA 입단 이전부터 유럽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1981년 리투아니아 최고클럽인 잘기리스에 입단해 셀 수 없이 많은 우승을 거머쥐었고, 스페인리그의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2차례 우승을 품에 안았다.

국제대회에서의 영향력도 대단했다.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1986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그는 3번의 올림픽 무대를 뛰면서 금메달 1개와 동메달 2개를 따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미국대표팀을 좌절시키기도 했다.

비록 1995년 NBA(포틀랜드)에 데뷔할 무렵에는 무릎부상 여파로 운동능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지만, 노익장은 여전히 코트를 호령했다. 그는 1995-96시즌에 신인상과 식스맨상 투표에서 모두 2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밖에도 시카고에서 3번의 우승과 식스맨상을 거머쥔 토니 쿠코치(41. 크로아티아)는 이미 데뷔 전부터 '유럽의 매직 존슨'이라는 찬사를 받아온 선수였다. 211cm의 장신이지만, 가드 못지 않은 패스 능력과 3점 슛 능력을 보유하고 있던 그는 유럽에서 이룰 건 다 이룬 선수였다.

그는 이탈리아 베네통 트레비소에서 3년 연속 최우수선수에 선정되고, 이탈리아 리그(1992년), 이탈리아 컵(1993년), 유럽 챔피언스 컵(1993년)을 차례로 제패했다.

비슷한 시기, 국제대회에서는 유고슬라비아 팀의 일원으로 유럽선수권 우승 2회(89년, 91년), 올림픽 은메달(1988년),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1990년)을 거머쥐었다. 1990년 대회에서는 MVP가 되기도 했다.

또 크로아티아 대표팀에서는 1992년 올림픽 은메달, 1994년 세계선수권대회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92년 당시에는 그의 시카고 불스 입단을 못마땅하게 여긴 조던과 피펜의 시기를 받아 집중적인 마크를 당하기도 했다.

한편, 지금은 고인이 된 드라젠 페트로비치(유고슬라비아) 역시 유럽 농구팬들이 잊지 못하는 이름이다.

1986년 세계선수권대회 MVP로서, 1989년 유럽선수권 우승, 1990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품에 안았고, 3번 출전한 올림픽에서는 두 개의 은메달(88년, 92년)과 동메달 1개(84년)를 목에 걸었다.

그는 NBA 진출 후 점차 적응해나가 1992~1993시즌에는 22.3득점을 기록하는 등 NBA에서 뛴 역대 최고의 유럽인 슈팅가드로 남을 수 있었으나, 1993년 여름, 불의의 교통사고로 28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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