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년 대통령배 축구대회(Park's Cup).
말레이지아 전 1:4로 뒤지던 상황. 종료 5분 남겨놓고 3골의 소나기 골.
79년 프랑크푸르트 입단
8월 당시 세계 최고 리그로 불리던 분데스리가 데뷔
79년 8월 11일
데뷔전 상대는 도르트문트. 스타팅으로 75분까지 뜀. 어시스트 기록.
최고권위 축구전문지 ''KICKER''紙 선정 주간 베스트11.
세번째 경기 슈투트가르트 전.
후반 7분 헬무트 뮐러의 어시스트 받아 헤딩으로 승리 결정 골.
KICKER지 선정 이주일의 골.
네번째 경기 바이에른 뮌헨 전.
그라보스키 어시스트로 선취골.
다섯번째 경기 최강호 보루시아MG 전.
한가운데 돌파에 이어 찬 공, 왼쪽 포스트 맞고 골. 선취골. 세경기 연속 골.
이날 KICKER지, 처음으로 <차붐>이라는 단어 씀.
9월 강호 함부르크 전.
페차이의 어시스트를 받아 강슛. 그라보스키 센터링-헤딩 슛. 30M 중거리 슛.
첫 해트트릭 기록.
11월 일본의 오데쿠라가 소속된 쾰른 전.
두 동양인의 대결로 관심 집중. 차 선취골, 결승골로 두골 기록.
오쿠데라 헛발질 7번. 차붐 대승. 프랑크푸르트 3:1로 승리.
일간스포츠 톱기사 <차범근 두골! 오쿠데라 누르다>
이때부터 MBC 차범근 경기 녹화방송 시작. 매주 월요일 밤. 시청률 최고.
사회는 이철원, 해설은 故 주영광
12월 UEFA 컵 출전.
첫번째 경기 레알 마드리드를 맞아 선취골을 넣었으나 1:1 무승부
두번째 경기 AC밀란 전.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강슛. 포스트 맞고 튀어나왔으나, 골대 5초 이상 흔들림.
특종 기사 실림. 3:2로 프랑크푸르트 승리.
80년 3월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1차전.
당시 20세의 나이로 ''게르만의 혼''이라 불리던 로타 마테우스(90년 월드컵 MVP),
갈색 폭격기 '차붐' 전담마크 특명. 신문 '마테우스! 차붐을 막아라' 톱기사.
경기 마테우스의 완승. 차붐 속수무책. 2:3 패.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2차전.
역시 마테우스 차붐 전담 마크. 이번엔 마테우스 속수무책. 차붐 대활약.
우측사이드에서 마테우스 여유롭게 제치고 어시스트. 1:0 프랑크푸르트 승리.
차붐, 이날의 선수. 원정팀 득점 우선권으로 프랑크푸르트 창단이후 첫 UEFA컵 우승.
경기 후 신문 마테우스 인터뷰
"나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차는 현재 세계 최고 공격수이다."
79~80 시즌 득점 랭킹 7위 랭크. 세계 상승세 베스트 4 선정됨.
세계축구 베스트 11 선정됨.
독일에서 세번째 고액연봉 협상 타결. 독일 대표팀 감독 차붐 귀화 추진. 실패.
81시즌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겔스도프’에게 육탄공격 받아 심한 부상.
프랑크푸르트 팬들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프 살해 위협 소동. 경찰 출동.
부상이후 슬럼프. 이때도 역시 한국 언론 차범근 씹기 발동.
KICKER지 이 일로 <한심한 한국인들> 이라는 기사. 곧 슬럼프 회복.
83년 레버쿠젠으로 트레이드. 프랑크푸르트 팬들 울음바다.
85~86시즌 분데스리가 MVP! 득점 4위.
86년 한국대표팀 선수로 멕시코 월드컵 출전.
88년 다시 UEFA컵 출동.
차붐 스페인 에스파뇰을 맞아 극적인 3:3 동점골 터뜨림. 5만 관중 차붐! 환호.
승부차기로 레버쿠젠 역시 팀 창단 이래 처음으로 UEFA컵 우승.
신문 톱기사 '지구 최고의 선수 차붐'
KICKER지 '차붐, 팀 창단 첫 UEFA 우승 두번이나 이끌다,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의 영웅이자 분데스리가의 최고스타'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출장 최다골 기록 (아쉽게도 이 기록은 최근 몇 년 전에 깨짐)
최종 기록 : 분데스리가 308경기 98골 (페널티킥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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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차붐의 조국입니까..? 너무 와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
- 미하엘 발락 (2002년 월드컵, 독일 대표팀 입국시)
"당신에게 사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 자리는 제게 너무 큰 영광입니다."
- 올리버 칸 (2004년 본프레레호의 독일과 친선경기차 방한시)
"나는 차붐을 존경한다. 나는 그의 경기를 보며 자랐다. 나도 그처럼 되고 싶었다."
- 마이클 오웬
"차붐은 내 축구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웅이다." -루이스 피구
"내가 저런 공격수와 맡붙게 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 파울로 말디니
"내 자신은 어느 정도 성공한 공격수로 평가받지만 차붐에 비해면 아니다."
- 클린스만
"우리가 풀지 못한 주요한 열쇠는 차붐이였다. 차붐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해결 불가능한 존재였다."
- 알렉스 퍼거슨 (79년 에버튼 감독, 당시 프랑크푸르트와의 UEFA컵 1라운드경기)
"방한의 목적은 양국의 발전과 우호증진이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차붐부터 만나보고 싶다."
- 슈레더 국무총리
FIFA의 선정기준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 적어도 저중 절반은 차붐만 못한것 같은데..
(2004년 세계 100대축구스타에 차범근의 이름이 없자.)
- 베켄바우어 독일월드컵조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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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 분데스리가 역대 용병 3위
골닷컴 인터내셔널에서 라울의 샬케 입단에 발 맞추어 분데스리가 역대 최고의 용병 TOP 10을 선정했다.
덴마크의 골게터 알란 시몬센과 프랑스 역대 최고의 왼쪽 풀백 빅상트 리자라쥐, 역대 분데스리가 용병 최다골 기록자 지오반니 에우베르(133골), 발롱 도르 2회 수상에 빛나는 케빈 키건과 함께 차범근이 당당히 TOP 10에 이름을 올렸다. 그것도 3위로!
골닷컴 인터내셔널은 차범근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20세기 아시아 최고의 선수였던 그는 독일로부터 시민권 제의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가진 공격수였다. 비록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 최초로 입성한 아시아 선수는 아니었지만(1호 아시아 분데스리거는 1977년부터 1986년까지 쾰른과 헤르타 베를린, 그리고 베르더 브레멘에서 활약했던 일본의 공격수 야수히코 오쿠데라였다), 그의 업적은 아시아 선수들 중 단연 최고였다고 할 수 있다."
"차범근은 10년간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며 2번의 UEFA컵 우승과 한 번의 DFB 포칼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그는 분데스리가에서만 98골을 성공시키며 오랜 기간 용병 최다 골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그의 기록은 10년 뒤인 1999년 슈테판 사퓌자에 의해 깨졌다). 유럽 무대에서의 그의 활약은 한국의 축구 붐 형성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아들인 차두리 역시 오랜 기간 독일에서 프로 경력을 이어갔고, 최근 스코틀랜드의 명문 셀틱으로 이적했다"
# 골닷컴 인터내셔널 선정 분데스리가 용병 TOP 10
10. 크라시미르 발라코프 - 불가리아 (슈투트가르트 1995-2003)
9. 브루노 페차이 - 오스트리아 (프랑크푸르트 1978-1983, 베르더 브레멘 1983-1987)
8. 윈턴 루퍼 - 뉴질랜드 (베르더 브레멘 1989-1995, 카이저슬라우턴 1997)
7. 토니 예보아 - 가나 (자브뤼켄 1988-1990, 프랑크푸르트 1990-95, 함부르크 1997-2001)
6. 케빈 키건 - 잉글랜드 (함부르크 1977-1980)
5. 장 마리 파프 - 벨기에 (바이에른 뮌헨 1982-1988)
4. 지오반니 에우베르 - 브라질 (슈투트가르트 1994-1997, 바이에른 뮌헨 1997-2003, 묀헨글라드바흐 2005)
3. 차범근 - 대한민국 (다름슈타트 1978-1979, 프랑크푸르트 1979-1983, 바이엘 레버쿠젠 1983-1989)
2. 빅상트 리자라쥐 - 프랑스 (바이에른 뮌헨 1997-2004, 2005-2006)
1. 알란 시몬센 - 덴마크 (묀헨글라드바흐 1972-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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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의 영원한 전설 차범근
차범근 감독은 1971년 18세의 나이로 U-19 대표팀에 선발된 것을 시작으로 1972년에는 19세에 국가대표팀에 뽑혀 태국에서 열린 AFC 아시안컵에 참가했습니다. 이후 1978년까지 대표팀의 중심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그 해에 다름슈타트와 계약을 맺고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였던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습니다.
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일시 귀국했던 차 감독은 1979년 명문 클럽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했고, 그 해(79/80시즌)에 12골을 터뜨려 분데스리가 득점 랭킹 7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를 UEFA컵과 DFB-포칼(독일 FA컵) 우승으로 이끄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매년 10골 이상씩 기록하며 프랑크푸르트의 중심 공격수로 자리 잡은 차 감독은 1983년에 당시만 해도 군소클럽이었던 바이어 레버쿠젠으로 이적했고, 팀을 분데스리가의 강자로 끌어올렸습니다. 특히 85/86시즌에는 17골을 기록하며 분데스리가 득점 4위에 올랐으며, 1988년에는 레버쿠젠을 이끌고 UEFA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차 감독 개인으로서는 프랑크푸르트에 이어 레버쿠젠에서도 UEFA컵 우승컵을 들어 올린 뜻 깊은 순간이었습니다.
1986년에는 오랜만에 대표팀에 복귀해 86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해 월드 스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88/89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한 차 감독은 독일에서의 각종 제의를 뿌리치고 귀국해 '차범근 축구교실'을 만들어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후 현대(현 울산 현대, 91~94년) 감독에 이어 1997년 대표팀 사령탑에 올라 98 프랑스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중국의 선천 핑안(98~99년)에 이어 2004년부터는 수원의 감독으로 재직 중입니다.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A매치 통산 121경기에 출장해 55골을 터뜨렸으며,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는 통산 308경기에 출장해 98골을 기록해 현역 당시 '외국인 선수 최다골'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습니다. UEFA컵과 UEFA 컵위너스컵에서도 총 37경기에 나서 10골을 터뜨렸으며, 독일의 FA컵인 DFB-포칼에서는 총 27경기에 나서 13골을 기록했습니다.
1999년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 선정 '20세기 최고의 아시아 축구 선수'에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영국의 축구전문지인 '월드사커'에서 선정한 '20세기 세계 축구를 움직인 100인'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월드컵 특집 인터뷰 17번째 주자로 인터뷰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풀어놓을 이야기가 워낙 많기 때문에 바로 옛날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웃음) 처음 대표팀 유니폼을 입으신 것이 1971년 일본에서 열린 AFC U-19 챔피언십이었습니다. 경신고 3학년이셨고, 사실 축구를 늦게 시작하신 입장에서 감회가 새로우셨을 것 같은데요.
사실 축구는 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했어요.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축구부가 없어져 공백 기간이 있었죠. 그 기간 동안 다른 운동을 하다가 중학교 3학년 때 경신중으로 전학을 가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게 됐어요. 중간에 2년 반 정도의 공백이 있었던 겁니다. 공백 기간이 있어 다른 선수들에 비해 늦게 시작은 했지만, 운도 좋았고, 여러 가지로 잘 풀렸던 것 같아요. 선생님들이나 주위 동료, 선배들도 잘 만났고요.
솔직히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되었을 때도 기술적으로는 많이 부족했지만, 신체조건이나 타고난 스피드가 있으니까 장래성을 보고 기용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기량도 발전했고, 본 대회 나가서는 골도 넣고 잘했죠. 그러나 훗날 생각해보면 제가 유럽 선수들처럼 좀 더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시작해 공에 대한 적응력을 키웠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계속 있었어요. 그래서 은퇴 후에 축구교실을 열게 된 것이기도 하고요.
그 대회에서 이스라엘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셨어요. 당시 코뼈 부상도 입으셨다고 들었는데요.
71년 대회는 저 외에 김진국 전무, 조동현 감독, 주장에 김호곤 감독 등이 참가했었죠. 홈팀 일본과 준결승전에서 붙었는데, 그 경기에서 코뼈가 부러졌어요. 저는 앞으로 헤딩을 하는데, 수비수가 뛰어올라 뒤로 부딪친 것이죠. 일본전에서는 승부차기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었는데, 결국 이스라엘과의 결승전은 뛰지 못했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좋은 추억이었어요.
공교롭게도 72년에도 AFC U-19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이스라엘과 붙어 또 졌었죠.(웃음)
이스라엘은 체구 자체가 유럽이었어요. 우리보다 몸도 좋고 발재간도 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나았습니다. 실력으로 봤을 때 그들이 우승하는 것이 맞았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대로 72년 태국에서 열린 AFC U-19 챔피언십이 끝나고, 곧바로 아시안컵에 참가하는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깜짝 발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어떠셨나요?
그 때는 획기적이었죠. 옛날의 시대 상황을 보면 우리 윗 세대의 경우에도 한번 대표팀에 뽑히면 10년 정도 했다고 하더군요. 젊은 선수들이 경기를 뛰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고도 하고요. 그 때가 제가 19세였는데, 고려대에 입학하고 대표 선수가 되었어요. 제가 가장 어렸고, 그 다음이 황재만 선배였죠.
당시 대표팀에는 김정남, 김호, 이회택, 이세연, 정규풍 등 제가 늘 라디오에서만 듣던 쟁쟁한 선수들이 모두 있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긴장되고, 제가 우러러봐야 하는 그런 대선배들이었어요.
그런 선배들과 같이 공을 찬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부담스러웠죠. 저나 황재만 선배나 어렸기 때문에 선배들이 어렵고 무서워서 정신이 없었어요.(웃음) 촌놈이 서울에 와서 산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대표 선수가 되어 엄청난 선배들과 같이 볼을 차니 주눅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선배들이 운동장에서 한 마디만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1974년 아시안게임에서 대표 선수로 활약하는 모습
팀의 막내이셨으니까 온갖 잡일을 다 하셨겠네요.(웃음)
아 그럼요.(웃음) 제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공 바람도 넣고, 빨래도 하고 그랬어요.
다들 훈련하고 나서 피곤하니까 자고, 저는 축구공 20~30개에 바람 넣는데 혼자 하니까 1시간 이상 걸려요. 더군다나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할 때는 빨래도 많이 했죠. 당시 세탁기가 별로 없어서 손으로 했는데, 선배들 옷까지 하니까 나중에는 손바닥이 한꺼풀 벗겨졌을 정도였어요.(웃음)
훈련을 해도 볼이 멀리 날아가면 누군가 주워와야 하잖아요. 당연히 말단인 제가 했죠. 74년 전까지, 2년 정도는 동기나 후배가 없었기 때문에 저 혼자 고생했었습니다.(웃음)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좋은 추억이에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 날도 제가 공 바람 넣는 것 담당이었죠. 그런데 그날 따라 공에 바람을 너무 많이 넣었던 겁니다. 훈련 때 이회택 부회장님이 슛을 시도했는데, 볼이 딱딱해서 발이 조금 아프셨나봐요. 그래서 저보고 공 바람도 잘 넣지 못한다고, 그것부터 다시 배우라고 하셨죠.(웃음) 공 바람을 적절하게 넣는 것도 선배들에게 배웠습니다.
이것과는 조금 다른 에피소드인데, 당시 이세연 선배님과 방을 같이 썼는데, 저를 많이 아껴주셨어요. 그런데 72년 아시안컵 크메르(현 캄보디아)전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U-19 챔피언십에 참가한 뒤에 합류했던 터라 태국 날씨에 이미 적응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선배들은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날 제가 몸이 너무 좋아서 자신 있게 플레이를 했었고, 치고 들어가서 마지막 1명만 제치고 슛을 시도하면 됐던 상황이었어요. 그 상황에서 슛을 시도했는데 제대로 맞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그 공이 살아서 깔짝깔짝 하더니만 흘러 들어가서 골이 되었어요. 경기 끝나고 이세연 선배가 저에게 오더니 "너, 볼 차는 것부터 다시 배워야겠다"라고 하시더군요.(웃음)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그러고 보니 저번 이회택 부회장님과의 인터뷰에서 대표팀에 갓 들어온 감독님께 마음 편하게 먹고 하라고 격려해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셨기에 큰 힘이 되셨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그랬어요. 그 때는 아까 이야기한대로 제가 너무 어렸고, 성격도 여려서 주눅이 들었었거든요. 그걸 보다 못한 이회택 부회장님이 "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러셨던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잘 없어요. 다들 자기 일 하는 것도 바쁘니까요. 그런데 이회택 선배는 배짱도 있고, 통 큰 축구를 하셨잖아요. 제가 너무 자신없어할 때에는 종종 붙잡고 하고 싶은 대로 플레이 하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어린 저로서는 굉장한 힘이 되었죠.
고려대 선배였던 이차만, 고재욱 선배들도 많은 이야기를 해줬고, 노흥섭 부회장님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분이 참 양반이었죠. 성격도 조용하시고, 후배들에게 부담을 안 주시는 분이었어요. 그 당시에 받았던 그런 좋은 인상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 때 선배들이 해줬던 이야기들은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워낙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 선배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죠.
74년에 후배들이 들어왔으니 그 이후부터는 공에 바람 넣고 빨래하는 일은 후배들에게 넘어갔겠군요.(웃음)
73년 말에 이영무, 김희태 등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후배들이 생겼어요. 그래도 몇 명 되지 않으니까 같이 했죠. 그 전에는 저 혼자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고, 혼자 하기는 힘든 일이니까 같이 했어요. 후배들이 들어오니까 한결 여유도 생기고 좋았습니다. 군대도 그렇고, 어디든 마찬가지잖아요. 선임이 되면 조금 편해지는 것이죠.(웃음)
72년 아시안컵 이라크와의 경기가 A매치 데뷔전이셨어요. 아무래도 청소년대표팀 경기와는 차원이 달랐을 것 같은데요. 긴장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청소년대표 시절과는 어마어마하게 달랐죠. 대표팀이란 것은 어렸을 때부터의 제 꿈이었고, 그 소망을 이루는 순간이었으니까요. 기분 좋기도 했지만, 두려움도 있었어요. 제가 저를 잘 아니까요. 내가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대도 있었고요. 여러 가지가 교차했었죠.
그 경기에서 저는 엄청나게 뛰어다녔어요. 선배들이 이름 부를 때마다 죽어라고 뛰어갔죠. 저 쪽에서 "범근아~" 부르면 거기로 뛰어가고...(웃음) 그렇게 90분을 뛰고 나니까 녹초가 되어서 유니폼도 땀으로 다 젖고, 축구화도 질퍽질퍽해졌더군요.
결국 그 경기에서 0-0으로 비겨서 승부차기를 하게 됐는데, 저도 차라는 거예요. 그래서 찼는데, 너무 긴장해서 땅을 찼어요. 볼이 또르르 굴러갔는데, 다행히 골키퍼가 먼저 찼다고 다시 차라고 하더군요.(웃음) 그런데 두 번째는 하늘을 향해 차고 말았어요.(웃음)
솔직히 그 때는 너무 많이 뛰어서 걸어가는 것도 힘들 정도였거든요. 자신이 없었는데, 선배들이 다 안찬다고 빠져서 저까지 배당이 된 거였어요. 제가 찬 볼이 하늘로 날아간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웃음)
사실 그 무렵에는 차범근 감독님의 오른쪽 측면 돌파에 이은 크로스를 김재한 부회장님이 헤딩슛으로 연결하는 패턴이 천하무적이었다고 들었는데요.(웃음)
그 당시 주로 김재한 선배가 중앙에, 저와 김진국 선배가 윙으로 있었어요. 반대쪽의 김진국 선배와는 스타일이 많이 달랐죠. 김진국 선배는 단신이지만, 기술이 굉장히 좋았어요. 수비수 1~2명 제치는 것은 예사였죠. 또 중앙으로 정확하게 킥을 해줬고, 김재한 선배가 수비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었기 때문에 제공권 싸움에서 상대가 안 됐죠.
김진국 선배가 현란한 드리블로 상대를 헤집고 들어가서 만들어주는 역할을 많이 했다면, 저는 그런 역할도 했지만 제가 직접 안으로 치고 들어가서 해결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래서 골도 많이 넣었던 것이죠.
어쨌든 그 때는 우리를 주인공으로 개사한 노래도 있을 정도로 굉장히 좋은 콤비였죠. (당시 아이들은 '떴다 떴다 비행기' 노래를 개사해 '공 잡았다 이회택, 달려라 차범근, 떴다 떴다 김재한 헤딩슛 골!'이라고 노래를 부르곤 했다. - 편집자 주)
제가 대표팀에 들어갈 무렵에 이회택 선배님이 물러나셨고, 이후에 박이천, 정규풍, 김재한 선배 등과 많이 활동했었습니다.
이회택 부회장님의 뒤를 이어 감독님께서 한국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바로 계승하셨는데요. 방금 말씀하신 대로 함께 뛰었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셨죠?
예. 짧았어요. 이회택 선배와는 많이 못 뛰었죠.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같이 뛰었던 것이 생각나네요. 당시 북한을 피하려다가 상당히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기억이 납니다. 좋은 기억으로는 브라질 산토스 클럽이 펠레와 함께 내한했을 때였어요. 우리가 2-3으로 졌는데, 이회택 선배와 제가 1골씩 넣었죠.
제가 윙에서 뛰었다면 이회택 선배는 중앙에서 스트라이커 역할을 하셨어요. 단신이지만 폭발적인 순발력과 스피드, 드리블을 갖추셨죠. 거기다가 결정력도 아주 좋으셨고요. 반면 저는 신장이 조금 있었고, 길게 길게 치고 들어가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저와 같이 대표팀에 계실 때는 부상도 있고, 나이도 조금 있어서 화려한 플레이는 하지 못하셨지만, 제가 어렸을 때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 등에서 경기할 때 많이 봤었죠.
1973년 서독 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 이스라엘과 경기가 있었습니다. 0-0인 상황에서 감독님이 연장전에서 극적인 결승골을 터뜨리셨죠. 이 골로 감독님은 그야말로 최고의 영웅 대접을 받으셨는데요. 어떤 기분이셨나요?
일단 그 전에 1972년 메르데카배에서 4명을 제치고 왼발 슛을 시도한 것이 골대 맞고 들어가면서 결승골이 되어 2-1로 승리해 우승을 차지했었는데요. 그러면서 72년 한국축구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73년에 이스라엘전이 있었죠. 제 기억으로는 연장전이었는데, 왼쪽에서 김호곤 선배가 슈팅한 것이 골대 맞고 튀어나오는 것을 제가 쇄도하면서 왼발 슛을 시도했어요. 골대 근처에 골키퍼와 수비수, 우리 선수들이 많이 섞여 있었는데, 왼쪽에 조그마한 틈이 있었고, 거기로 들어간 것이었죠.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골 감각이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당시 광화문 4거리 안에는 차가 안 다닐 정도로 온 국민이 그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을 때, 기가 막힌 타이밍에 결승골을 넣으니까 많은 분들이 저를 기억하게 되었죠. 그 경기 이후에는 시골에 가도 저를 금방 알아보더군요. 저도 뭔가 유명한 선수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를 돌이켜보면 이스라엘이나 호주 같은 팀들은 절대 이기지 못할 팀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체구도 크고, 유럽 팀과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우리보다 잘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고, 왠지 맞서면 위축이 되었죠. 그런 상대를 홈에서 잠재웠으니 정말 통쾌했어요. 국민들도 그런 통쾌함 때문에 저를 많이 기억하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골 감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큰 경기에서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는 분명 타고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만 해도 대표팀에 들어갈 때 기술도 부족하고, 볼에 대한 적응력도 많이 떨어졌었거든요. 그런데도 결정적 순간에 골을 많이 넣었어요. 꼭 이겨야하는 순간에서 제 발끝에서 골이 여러 번 나왔죠. 저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고, 신앙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만, 어쨌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결정적인 골을 넣었거든요. 대표팀에서나 독일에서나 많은 골을 기록했고, 따지고 보면 3경기에 1골 정도는 넣었어요. 그런 부분은 감각이었던 것 같아요.
서독 월드컵 아시아예선은 감독님이 처음 월드컵에 도전한 무대였죠. 이스라엘을 꺾었지만, 결국 마지막에 호주의 벽을 넘지 못해 본선 진출에 실패했었습니다.
그 경기는 정말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그 때는 어린 나이에 KFA도 원망스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꺾고 호주와의 경기만 남겨놨었는데, 원정에서의 1차전에서 0-0으로 비겼거든요. 당시 제게 결정적인 기회가 왔는데 놓쳤던 기억도 납니다.
어쨌든 한국에서의 2차전에서는 2-0으로 이기고 있다가 2골을 내주고 2-2로 비겼어요. 아쉬웠지만, 어쨌든 동률이라 홍콩에서 3차전을 하게 됐죠. 이렇게 되면 두 팀 모두 똑같은 입장이었는데, 사람들은 본선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물론 당시 KFA가 가난했고, 예산도 많이 발생했기에 그런 점도 있었고요. 그래서 홍콩에 가는 인원에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더니 선수단을 축소해서 갔어요. 그 분위기는 마치 '우리가 꼭 이길 것이다, 이겨야 한다'가 아니라 약간 포기하고 가는 느낌이었거든요.
결국 0-1로 패하면서 본선 진출에 실패했죠. 70년대의 한국적 상황이 정보나 재정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세련되지 못했고, 덜 개방적이었고, 소극적이었고, 이것이 그런 결과를 낳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죠. 어쨌든 충분히 이길 수 있었지만 실패했고, 한국축구가 조금 더 빨리 월드컵 무대 진출을 앞당길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던 겁니다. 그 때 서독 월드컵에 나갔다면 아마 분데스리가 진출이 더 빨라졌을 수도 있었겠죠.(웃음)
사실 이 무렵, 즉 70년대 초중반의 대표팀은 개개인의 능력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역대 최고의 대표팀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요. 감독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지금도 대표팀에 훌륭한 선수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70년대 참 좋은 선수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색깔이 분명하고 걸출한 선수들이 요소요소에 포진되어 있었죠. 우리가 좀 더 경험이 많았더라면 한국축구가 세계로 나가는 길을 훨씬 앞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모든 것은 지나간 과거이고, 아쉬움으로만 남는 것이죠. '돌아보면 훌륭하고 우수한 선수들이 많았다'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선수들을 잘 조련하고, 많은 국제경험을 쌓았을 때만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아쉬운 거예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저는 행운아였죠. 독일로의 길이 열렸으니까요. 그 이후에 허정무 감독, 김진국 선배, 박상인 감독 등이 계속해서 유럽무대에 진출했어요. 당시에는 길이 없어서 그렇지, 그 길만 잘 열렸다면 지금 이상으로 유럽에 갈 수 있는 선수들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올드 축구팬들은 감독님을 떠올릴 때 76년 박스컵 말레이시아전에서의 골 폭풍을 항상 언급합니다. 1-4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7분간 3골을 넣으셨죠. 이 경기를 회상해보신다면.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일어납니다. 제가 넣고 싶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 경기를 돌아보면 스스로에게도 운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당시에 0-4로 지고 있다가 제가 슈팅한 볼이 골대 맞고 나온 것을 박상인 감독이 넣어 1-4가 되었죠. 그리고 이후에 제가 나머지 3골을 넣었어요. 상대 문전에 가서 슈팅해서 골 넣고, 돌아서서 다시 들어가 슈팅하고 그랬는데, 보니까 4-4가 되었어요.(웃음)
처음에 4실점 했을 때는 관중들이 방석 던지고 야유하고, 경기장을 나간 분들도 있었는데, 불과 몇 분 사이에 3골이 들어가면서 4-4가 되어버리니까 경기장 나가다가 다시 들어오기도 하고 그랬죠.(웃음)
앞서 말했지만, 제가 넣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나 여러 상황, 이기고 싶은 마음과 욕심 등이 합쳐져 그렇게 골을 넣지 않았나 싶네요. 아무튼 그 경기 끝나고 버스를 타는데, 사람들이 제 다리를 붙잡고 "기적이다!"라고 외쳤던 기억도 납니다.(웃음)
1978년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북한과 대결하는 장면
서독 월드컵 예선에 이어 76 몬트리올 올림픽 예선과 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에서 모두 고배를 마셨습니다. 모두 마지막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며 아쉽게 탈락했죠. 직접 뛰셨던 입장에서는 그 아픔이 더욱 크셨을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경기에 실패했습니다. 문제는 골이 안 들어간다는 것이었어요. 찬스는 많았지만, 골을 넣지 못했죠. 그것이 우리 국민들을 화나게 만든 것이고, 축구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던 부분이에요.
저는 축구를 하면서 왜 우리가 결정적일 때마다 득점 기회를 놓쳐서 매번 골 결정력 부족, 문전 처리 미숙 등의 말을 귀가 따갑게 들어야 하는지 생각해봤습니다. 한국축구가 뭐가 문제인지 고민하다가 유럽축구를 한번 경험하고, 그 속에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독일에 가서 선수로 뛰었고, 지도자 공부도 하고, 유소년들이 어떻게 훈련하는지도 관찰했습니다.
직접 뛰고 경험하면서 느꼈던 첫 번째 부분은 역시 공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축구선수로서 공에 대한 적응력을 몸으로 습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연령대에서 축구를 하지 않고 있었죠. 우리는 보통 초등학교 4~5학년, 즉 10~12세 정도부터 축구를 시작합니다. 저 역시도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했고요. 반면 유럽은 5세 정도부터 시작하죠.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문전에서 그들과 똑같은 골을 넣을 수 있겠어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생활체육축구회에서 동호인들이 축구를 하는데, 선수들이 하는 것을 다 흉내 내고 똑같이 합니다. 그렇지만 선수들과 달리 뭔가 부자연스러워요. 왜 그러냐면 기본적으로 축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골프를 봐도 우리가 지금 해도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선수들과는 감각이나 폼이 조금 다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저는 유럽축구를 경험하면서 스스로에게 찾은 해답이 볼에 대한 적응력을 키울 수 있는 연령대에 아이들에게 볼을 주고 축구를 가르쳐야겠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우리도 초등학생 이전으로 축구 시작하는 연령대를 낮추고, 이들에게 기본기와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어릴 때 볼을 만진 아이들이 훨씬 자연스럽다는 거죠.
그래서 어린 연령대부터 축구를 하게 만들고, 기본기를 가르치고, 유럽처럼 리그제를 통해 계속 연마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한국에 돌아와서 축구교실을 열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행히 이제는 축구를 시작하는 연령대가 점점 내려가고 있고, 축구교실도 전국으로 확산되어 있어요. 또한 최근 들어 우리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모두 리그제로 바뀌었는데, 아주 환영할 만한 일이에요. 앞으로 지역리그제를 더 활성화해서 경기력을 끊임없이 키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1979년 분데스리가 진출 환송 경기에서 고려대 OB로 출전한 차범근 / 1980년 프랑크푸르트 팀의 일원으로 금의환향
이제는 본격적으로 독일 분데스리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미 많이 알려진 것이지만, 독일 진출 과정이 매우 복잡하셨죠. 다름슈르트와 계약해서 경기도 뛰었지만, 군 복무 문제로 인해 귀국하셔야 했어요. 이 때는 정말 난감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 과정이 상당히 복잡했죠. 제가 공군에 자원입대했는데, 당시 공군 복무는 삼군 중에 가장 길었거든요. 그래서 다들 공군으로는 안 갔죠. 그런데 그 무렵에 타군과 똑같은 조건으로 복무 기간을 해준다는 약속 때문에 입대하게 됐어요. 제가 1976년 10월에 입대했으니까 78년 12월이 제대였던 거죠. 정상적으로 복무를 하면 79년 5월이 제대였고요. 그래서 독일행을 추진했고, 다름슈르트와 가계약을 맺고 1경기를 뛰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처음 약속과는 달리 제 복무 기간이 79년 5월 30일까지로 결정되는 바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름슈르트와 6개월간 가계약을 했던 것이고, 당시 저는 군인 신분으로 소속팀이 없었기 때문에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저를 사서 대신 계약해주는 형태였거든요.
그런데 제가 군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와 버리니까 문제가 커졌습니다. 계약 위반인데다가 선수도 사라져버렸으니까요.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다행히 6개월 후에 제대를 하고 6월 22일에 출국해서 브레멘과 프랑크푸르트에서 테스트를 받고, 결국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원래 생각하고 있었던 프랑크푸르트로 가시게 된 거네요. 결과적으로는 일이 잘 풀린 셈이었군요.
그렇죠. 결국 원래 가려고 했던 팀으로 간 셈이죠. 사실 독일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78년 박스컵에서 프랑크푸르트 아마추어 팀이 내한했었거든요. 거기에 슐테라는 코치가 있었는데, 저를 보고 독일에 올 생각이 없냐고 물었어요. 마침 저도 독일행을 꿈꾸고 있었고요.
그런데 당시 분데스리가는 외국 선수를 한 팀에 2명만 보유할 수 있었는데, 이미 프랑크푸르트는 오스트리아 국가대표인 페차이와 스위스 국가대표인 엘스너가 있었죠. 그래서 저를 당장 데려갈 수 없었고, 대신 앞서 말했던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저를 사서 다른 팀과 6개월간 계약해서 뛰다가 프랑크푸르트로 데려간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군 문제로 한국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런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죠. 이후에 브레멘과 테스트를 받는 등 일이 복잡해진 상황에서 다행히 엘스너가 팔리면서 프랑크푸르트와 계약할 수 있었어요.
공군에서 연장 근무를 했던 5개월여 동안에도 한국에서는 '보내야 한다, 보내지 말아야 한다' 의견 대립이 있었고,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저에게 역적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고, 국가를 배신하고 간다는 반응이 많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어요.
동양에서 온 무명의 선수를 대하는 팀 동료들의 태도가 무척 차가웠을 것 같습니다. 입단 초기에 적응하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그건 저 뿐 아니라 다들 경쟁자였기 때문에 당연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프로를 접한 것이 처음이었는데, 그 전까지는 아마추어적인데다가 동양적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죠. 그러나 독일은 자기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무대였어요. 특히 제 경우에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경험하고, 내 영역을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죠. 실패를 거듭하면서 곁눈질로 보면서 배워나갔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동물의 세계와 같았어요. 먹고 먹히는 잔인한 세계였죠. 저는 그 표현이 조금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빼앗고, 내주고, 사라지는 그런 현장을 옆에서 목격하면서 이 무대가 얼마나 냉혹하고 처절한지를 깨달았습니다. 거기에 독일인들의 성향 자체도 상당히 냉정하고 차갑기 때문에 정을 붙이기 어려웠고요.
그래도 저는 참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좋은 친구들을 많이 얻었어요. 지금도 프랑크푸르트의 유소년 팀을 담당하고 있는 쾨르벨, 팀의 선수를 보강하고 스카우트하는 일을 맡고 있는 휠첸바인, 나흐트바이..이런 친구들이 아직도 거기서 일하고 있는데, 제가 어려울 때 많이 도와준 친구들이에요. 니켈 역시 마찬가지고요. 휠첸바인이나 니켈 같은 선수는 서독 국가대표이기도 했죠.
그런 친구들이 저를 도와주고, 힘도 실어주고, 제가 골 넣으면 함께 기뻐해주고, 실수하면 어깨를 쳐주면서 격려해주고, 자기 일처럼 챙겨줬어요. 정말 고마운 친구들이죠. 이런 친구들이 없었다면 저는 그런 냉혹한 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겁니다.
플레이 측면에서는 어떠셨나요? 이전에 상대하던 수준과는 월등히 다른 선수들과 대결을 펼치셔야 했는데요. 아시아 최고로 평가받았던 감독님의 폭발적인 돌파가 잘 통했는지요?
우선 공포감이 있었어요. 돌파해도 빨리 따라와서 바로 태클이 들어왔거든요. 태클 자체도 다른데, 우리가 걷어내는 태클이라면, 이들은 감으면서 볼을 빼앗는 태클이에요. 또한 수비수들의 다리가 길기 때문에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태클 영역이 넓었고요. 굉장히 정교하게 볼을 다루지 않으면 볼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어요. 또 슈팅이나 패스 타이밍도 더 빨리 가져가야 했고요.
그렇게 계속 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런 상황에 적응해가기 시작하더군요. 드리블도 더 정교하게 하게 됐고요. 많은 부분에서 새롭게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뛸 때에는 주로 서서 패스를 받았는데, 독일에서는 움직이면서 볼을 받지 않으면 패스가 오지를 않았어요. 패스하고 움직이는 상황에서 계속 플레이가 진행되기 때문에 경기 템포도 굉장히 빨랐고요. 문전에서도 볼을 잡아서 슈팅해서는 골을 넣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죠.
훈련 습관도 달라 고생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2시간 넘게 훈련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에너지를 나눠서 쓰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죠. 그런데 독일은 훈련이 90분 정도만 하기 때문에 그 안에 모든 것을 다 쏟아내야 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뭔가 부족해보여 더 훈련을 하다가 근육이 늘어나고 과부하가 걸리곤 했었어요.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시간이 지나니까 적응을 하게 되었죠. 독일 진출 후 4년째에는 전 경기를 모두 뛰기도 했고요.
프랑크푸르트 시절 DFB-포칼(독일 FA컵)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차범근
한국에서는 주로 오른쪽 윙을 보셨잖아요. 스트라이커로의 변신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대표팀에서는 주로 윙포워드의 개념으로 뛰었는데, 이후 독일에 가서는 중앙 스트라이커로 뛰게 됐죠. 독일에서는 3-5-2 포메이션을 많이 썼는데, 전방 투톱 중 한 명으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현역 마지막 2년 정도는 미드필더로 뛰었고요.
일단 제가 워낙 스피드가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 팀들을 상대로는 윙 역할로 충분했어요. 그것만으로도 통했으니까요. 그런데 독일 가서는 스트라이커로 뛰어야 했고, 빠른 것만으로는 통하지 않았죠. 그런 면에서 상당히 어려웠지만, 반대로 그런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부분도 있었어요.
당시 유럽에서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라고 하면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만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답답한 면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원래 윙포워드 출신이기 때문에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는 측면으로 나와 스피드를 살려 드리블을 시도했어요. 그런 부분이 잘 통했고, 팬들도 많이 호응을 해줬죠. 결국 대표팀에서 윙포워드로 플레이했던 경험이 유럽에서 스트라이커로 활동하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시야나 경기운영의 폭을 넓혀줬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개인적으로 공격수로서의 감각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대표팀에서든, 프랑크푸르트에서든, 레버쿠젠에서든 대략 3경기당 1골 정도는 넣었으니까요.
적응이 어려웠다고 말씀하셨지만, 입단 첫 해에 12골로 분데스리가 득점 7위에 오르셨습니다. 더군다나 UEFA컵과 DFB-포칼(독일 FA컵) 우승컵을 들어올리기도 하셨고요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처음부터 이렇게 좋은 성과를 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요.
사람이 새로운 상황에 접하게 되면 정신력이나 긴장감이 강해지기 때문에 그런 차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가 문제이죠. 제 경우에는 꿈에 그리던 무대로 간 것이었잖아요. 분데스리가에서 뛴다는 자체만으로 너무 감격스러웠고, 그렇기 때문에 높은 집중력으로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국에서 대표 생활을 오래했던 만큼 국민들의 응원과 격려도 많았고, 젊었기 때문에 기가 충만했어요. 젊은 선수가 기가 살면 막기 힘들잖아요. 그 기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첫 해에 버틸 수 있었어요. 사실 당시에는 UEFA컵에서 우승한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하고 힘든 일인 줄 몰랐어요.(웃음) 88년에 레버쿠젠에서 2번째로 UEFA컵 우승했을 때에야 이게 얼마나 힘들고 값진 일인지를 알게 됐죠.
그러나 다음 해에 요추를 다치는 중상을 입어 고생하면서 1년 정도 슬럼프를 겪었어요. 회복한 후에도 적응을 잘 하지는 못했죠. 사실 슬럼프를 겪을 때에는 정말 볼을 처음 차는 사람처럼 헤맸어요. 마음 고생도 컸고, 어려움도 많이 당했죠. 거의 좌초 위기까지 갔었습니다. 3년째 되면서부터 그런 부분에서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년차 들면서 15골을 뽑아내고, 85/86시즌에는 17골을 터뜨리면서 독일의 한 언론에서는 저를 '분데스리가 최우수선수'로 선정하기도 했죠.
1985년 레버쿠젠 시절의 활약 모습
- 독일에 진출하시면서 정말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교민사회나 한국 언론과의 오해도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프로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다가 독일에 가서 보니까 훈련하는 것부터 모두 새롭게 적응해야 했습니다. 거기는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진흙탕 같은 그라운드에서 축구할 때가 많았어요. 그런 곳에서 뛰다보니 체력적으로 힘들더라고요. 한국에서는 어렸을 때 가난해서 제대로 못먹었고, 나중에 대표팀에 가서야 고기를 마음껏 먹었거든요. 그래서 독일에서 식사할 때 창피하지만 체력 보강을 위해 스테이크 2개를 달라고 해서 먹곤 했어요. 원래 선수들은 1개만 배당되는데 말이죠. 당시 골이라도 넣었으니까 망정이지 골도 못 넣고 스테이크 2개 달라고 했으면 눈총을 받았을 겁니다.(웃음)
무엇보다 교민들이 저를 오해하신 거죠. 그 분들은 프로의 세계를 모르시잖아요. 교민들은 자신들이 원하면 만나주고, 함께 해주길 바라는데, 저는 그럴 수 없었거든요. 매일 훈련해야 하고, 매주 토요일에 시합이 기다리고 있었죠. 또 유럽은 땅이 커서 어디를 가려고 하면 1시간 이상 갔다 와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경기를 준비한다는 것이 도저히 무리였어요.
저로서는 힘든 훈련을 마친 뒤에는 쉬어야 했고, 저녁 10시 30분만 되면 누가 와도 들어가서 잤거든요. 시간 되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었습니다. 그 습관이 남아 아직도 1시간 정도는 꼭 운동을 합니다. 어쨌든 이런 부분 때문에 오해도 많았죠.
제가 생각해도 독일에 있을 때는 성적을 위해 기계적으로 살았어요. 그러나 그 것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었고, 제가 목표했던 것들을 다 이룰 수 있었으니까요. 몸 관리는 직업 선수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제 모습을 통해 후배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아무리 좋은 기량을 갖고 있는 선수라도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한 두 번은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가장 높은 경기력을 끌어낼 수는 없어요.
은퇴한 다음에 제 현역 생활을 돌아봤는데, 다시 내가 축구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했을 때 다시 못할 것 같더군요.(웃음) 다시 그렇게 긴장하고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철저하게 했죠. 고도의 집중력은 연령에 따라서도 다른데, 저는 에너지가 가장 왕성할 때 가장 높은 집중력으로 임했기 때문에 그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같습니다.
- 사실 누구나 프로로서의 몸 관리에 대해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이것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감독님도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현역 내내 혹독할 정도로 자기 관리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물론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저라고 없겠어요? 그러나 저는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지 않았습니다. 축구에 있어 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하지 않았어요. 밖으로 많이 돌아다니는 것도 하지 않았고, 디스코텍이나 술집도 제 발로 간 적이 없어요. 심지어 노래방조차도 말이죠. 축구와 관계된 것을 떠나서는 제 의지로 간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그러시겠지만, 축구 외에 다른 것도 해봤으면 하는 후회가 전혀 없어요. 저는 19세부터 팬들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고, 독일에서 10년 있을 때도 팬들이 응원해주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큰 힘을 얻었어요. 그리고 독일에 갈 때 좋은 축구를 배워 국내에서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것을 지켰죠. 그렇기 때문에 제 스스로에게 불만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신앙적인 것도 연관이 되어 있고요.
한 때 축구로 인해 마음 아픈 적도 있었지만, 제 안의 사명에 대해 의심해보거나 망각한 적은 없습니다. 98 프랑스 월드컵 때 도중 해임되고 힘들었던 시기에도 이틀 만에 축구교실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니까요. 다들 저보고 정신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때도 누구를 원망하고 제 상황을 비관하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물론 요즘은 시대가 달라졌죠. 아내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우리는 사명으로 축구를 했지만, 아들 세대는 또 달라서 축구를 즐기면서 한다고요. 맞는 말입니다. 어쨌든 축구를 위해서는 저 같은 사람도 있어야하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 방금 말씀하신 중에서도 알 수 있는데, 흔히 감독님에 대해 '축구가 인생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분'이라고 이야기들을 하세요.(웃음)
저는 축구가 전부입니다. 저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가정과 교회, 축구 뿐이에요.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수원에 와서도 6년간 있으면서 훈련장과 여기 감독실이 전부였어요. 공적인 일로 어디 가는 것 외에는 대부분 여기서 보냈죠. 그게 제 일이고, 거기에서 제 나름대로 재미와 보람을 느껴요. 물론 다른 관심사를 가져 놀이 삼아 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이렇게 한 분야에 뿌리내리고 동고동락하면서 생활하는 것도 또 다른 사는 맛이라고 생각합니다.
- 워낙 축구에 대한 열정이 크신 만큼, 언젠가는 지도자를 넘어 다른 분야에서도 많은 역할을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그것은 앞에 꼭 나서서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한국축구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FC 서울전을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비록 패하긴 했지만, 경기 전에 선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기 결과를 떠나 한국축구가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열심히 해야 한다. 경기 중단하지 말고, 고의적으로 파울하지 말고, 다쳐서 아프다고 오래 누워있지 말고, 좀 더 수준 높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축구를 해서 경기장을 찾은 팬들이 감동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으면 K-리그도 희망이 없다. 이렇게 모든 이의 관심이 쏠려있는 경기에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독일에 가기 전부터 한국축구의 근본적인 문제, 기술적인 문제를 보완해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고민했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대로 어린 선수들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차범근 축구상을 만들었고, 축구교실을 통해 저변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죠. 이제는 축구교실이 많이 확산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축구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없어졌잖아요.
만약 제가 감독을 그만둔 이후에 뭔가 다른 임무와 역할이 주어진다면 그게 무엇이 됐든, 어느 영역에서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말주변이 있는 것도 아닌데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TV 해설을 했던 것도 한국에서 열리는 잔치에 제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하게 된 것이었어요. 또한 축구팬들에게 좀 더 축구를 잘 설명한다면, 그들이 더 관심을 갖고 재미있게 축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던 것이고요.
- 다시 분데스리가 이야기로 돌아가서 독일 진출 2년 째였던 80/81시즌에는 레버쿠젠 소속이었던 겔스도르프의 악의적인 태클에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겔스도르프를 용서한다고 밝혀 독일 전역에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죠. 당시를 회상해보신다면.
굉장히 큰 사건이었습니다. 공이 없는 상황에서 겔스도르프가 무릎을 향해 가위질로 태클이 들어왔어요. 이 때 허리를 차이면서 요추뼈가 부러졌죠. 최소 6개월에서 영원히 축구를 못할 수도 있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오줌에서 계속 피가 나왔고요.
구단에서는 고소해야 한다고, 병원으로 고소장을 가져왔을 정도였어요. 저에게 사인만 하면 바로 제출하겠다고...
그런데 저는 신앙적 양심으로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고소를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이 독일인들의 마음을 건드렸던 것 같아요. 독일에서 돌아온 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독일인들을 만나면 그것을 기억하고 있고, 저를 사랑한다는 표현을 해주시곤 해요.
어쨌든 그 부상은 저에게 정말 혹독한 시련의 시작이었죠. 이후 1년간 슬럼프를 겪으면서 거의 퇴출 위기까지 갔었습니다. 마지막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회복했고, 그 덕분에 독일에서 10년을 있을 수 있었어요. 그 선수와는 화해를 했고, 나중에 제가 레버쿠젠으로 가면서 한 팀에서 뛰기도 했죠.
저에게는 시련과 동시에 전화위복의 계기도 되었던 사건입니다. 독일인들에게 화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사랑을 더 받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져 독일에 살던 한국인들도 생활에 있어서 상당한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80년대 후반 레버쿠젠 소속으로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중
- 독일에서 진가를 발휘하자 AC밀란이나 나폴리 등의 이탈리아 명문 클럽에서도 이적 제의가 들어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83년을 끝으로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당시로서는 군소클럽이었던 레버쿠젠으로 가시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 무렵에 분데스리가는 팀마다 팬들이 감소하고, 재정 위기가 와서 선수들 연봉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어요. 구조조정을 한 것이죠. 그 때 마침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AC밀란이 관심이 있다고 해서 갔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가 친구들의 권유로 세금혜택을 볼 수 있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다세대 주택 같은 것을 샀는데, 그게 문제가 되어서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발생했었어요.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팀으로 가야 했는데, 해결할 방법이 많지 않았죠. 독일을 떠나기 힘든 상황이라 이탈리아행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독일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당시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주고, 연봉도 지금 받는 수준으로 해주겠다고 했거든요.
잠시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TV에서 분데스리가 경기를 해주는 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 좋은 축구를 배우러 거기까지 갔는데 돌아올 수는 없다. 그 문제는 거기서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런 와중에 크라머 감독이 레버쿠젠 감독이었고, 팀 강화를 위해 대대적으로 선수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제가 꼭 필요하다고 제의가 들어왔어요. 골치 아팠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준다고 했고, 또 크라머 감독이 아시아를 잘 이해하고 있는 분이셨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해서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경기도 잘했고, UEFA컵도 우승했으니까요.
- 결국 레버쿠젠에서 팀의 레전드로 군림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감독님 입단 이후 레버쿠젠이 독일, 그리고 유럽의 강자로 자리매김했죠. 그런 점에서 뿌듯함이 있으실 것 같네요.
그렇죠. 레버쿠젠은 제가 입단하기 전에는 1부리그에 턱걸이하는 팀이었어요. 운동장도 열악한 편이었고요. 그런데 제가 입단한 이후에 팀을 계속 강화시키고, 투자를 하기 시작해 어느 순간 리그 우승을 노리는 팀으로 발전했죠. 투자 4년 만인 1988년에는 UEFA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유럽 최고가 되었습니다. 그 때 우승하면서 3만석 규모의 새 경기장도 만들었고요. 이후에는 계속 리그 우승권을 다투는 팀이 되었는데, 조만간 한번 우승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 말씀하신 대로 87/88 시즌에 UEFA컵 우승을 차지하셨죠. 더군다나 에스파뇰(스페인)과의 결승전에서 매우 중요한 골까지 넣으셨고요. 프랑크푸르트에서의 UEFA컵 우승과는 느낌에서 차이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프랑크푸르트에서 UEFA컵 우승을 차지했을 때는 독일에 처음 진출했던 해였어요. 경기도 잘하고 신나게 했지만, 쉽게 우승할 수 있는 걸로 생각했었죠. 그런데 독일에서 생활하다보니 UEFA컵 우승이란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더군요. 그렇게 목마르게 기다리다가 88년에 나이가 들어서 다시 우승을 하니 그 때의 감격은 말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원정 1차전에서 0-3으로 진 뒤 홈 2차전을 맞이했는데, 2-0으로 앞선 상황에서 제가 3번째 골을 넣으면서 동률을 만들었거든요. 결국 연장전과 승부차기 끝에 우승했고요.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해서 우승을 한 것이었어요. 생각만 해도 짜릿하죠. 지금도 가끔 그 영상을 보는데, 그 기분은 설명할 수가 없어요.(웃음)
- 1989년까지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하시면서 98골을 기록하셨어요. 한때 분데스리가 외국인 선수 최다골 기록도 갖고 계셨고요. 사퓌자(스위스)나 엘베르(브라질)에 의해 최다골 기록이 깨졌을 때는 어떤 심정이셨나요?(웃음)
기록이야 깨지기 마련이니까요.(웃음) 제가 마지막 2년은 미드필더로 활동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8년 정도 공격수로 활동한 셈이거든요. 그렇게 치면 많이 넣은 거죠. 또 UEFA컵 등에서 10골을 넣었고, DFB-포칼에서도 13골 정도 넣었으니까 다 합치면 독일에서 131골 정도 넣은 것 같아요. 어쨌든 제 기록이 깨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기록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동양인이 분데스리가에 가서 그렇게 골 넣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 만약 감독님이 페널티킥을 차셨더라면 더 많은 골을 기록하셨을 겁니다. 현역 내내 페널티킥을 기피한 이유는 역시 대표팀 초창기 시절의 기억 때문인가요?(웃음)
그렇죠. 대표팀에서 실축한 것이 쇼크였어요.(웃음) 그 이후로는 페널티킥을 거의 안 찼습니다. 조금 아쉽긴 해요. 제가 이회택 선배 말처럼 좀 더 배짱 있게 했다면 더 많은 골을 넣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 욕심이란 것이 끝이 없는 거잖아요.(웃음)
- 그러고 보면 예전 94 미국 월드컵에서 감독님이 신문에 쓰신 칼럼을 읽은 적이 있는데요. 당시 '내가 호마리우와 같은 성격이었다면 더 좋은 스트라이커가 되었을 것'이라는 요지의 글이었습니다.
그렇죠. 사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색깔이 있고, 저는 저일 뿐이기 때문에 누구와 비교하는게 맞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호마리우 같은 성격을 갖고 이었다면 훨씬 많은 골을 넣긴 했을 거예요.
저는 기본적으로 기회가 왔을 때 완벽하지 않으면 옆의 동료에게 연결했고, 그것을 즐겼어요. 성격적으로 무조건 내가 넣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만약 호마리우처럼 좀 더 골에 대한 욕심이 컸다면 더 많은 골을 넣었겠죠. 그러나 대신 저는 골만 욕심 내는 것이 아니라 도움도 많이 했고, 스피드를 활용한 공격과 제공권도 있었어요. 기술도 없는 것이 아니었고요. 저의 이런 측면을 팬들이 기억하고 좋아해주는 것이죠.
또 하나는 제가 좀 더 어린 나이에 볼을 만졌다면 더 잘할 수 있겠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한이 되어 축구교실을 만들게 된 것이고요. 저를 아는 축구팬들은 제가 왜 축구교실을 만들었고, 거기에 애착을 느끼는지 이해할 겁니다. 적어도 한 축구인이 한국축구를 바라보고, 그 나름대로 해결하려는 노력이에요.
어쨌든 이제 한국에서도 5~6세 아이들이 볼을 차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현재 초등학교부터 리그제가 실시되고 있는데, 아주 잘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더 활성화해서 선수들이 적응하고 성장한다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달라질 겁니다.
1986년 아들 차두리와 함께
- 첼시 연습장에 가셨을 때 발라크가 존경심을 표했던 일, 그리고 베르바토프가 토트넘 시절 이영표 선수에게 차붐에 대해 이야기했던 일, 독일 대표팀이 한국에 왔을 때 감독님에게 특별 대우를 해줬던 부분 등을 접하면 가슴 뿌듯합니다. 당사자인 감독님은 더 느낌이 남다르셨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지금도 독일 여행을 하는 한국 분들에게서 "아직도 독일에서는 차 선수가 굉장히 유명하네요"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독일인들이 분데스리가를 거쳐간 선수들을 다 좋아하고 기억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까 말했던 겔스도르프 사건이 그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독일 친구들이나 언론을 통해 성실하고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승리를 위해 90분간 열심히 뛰었고, 훈련했던 것을 피치에서 다 쏟아내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런 열정과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이름이 입에서 입으로, 아버지에서 아들에게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비록 누구 보라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를 위해 열심히 한 것이지만, 제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지도자 입장이지만 선수들에게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좋은 시대, 좋은 환경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국축구의 장래를 조금 더 염려하고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선배들을 통해 좋은 터전을 물려받았으니 이제 후배들에게 더 좋은 텃밭을 물려줘야 하지 않냐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못하고 최고의 리그, 최고의 선수들이 나만 편하고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한국축구의 미래는 없다고 이야기해요. 팬들이 경기장에 찾아올 수 있도록 좋은 축구를 해야 하는데, 좋은 축구란 훈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관리도 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스스로 변화해서 더 높은 기술을 끌어내기 위해 연마를 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것도 강조하죠. 이런 것들이 잘 이루어져 축구계가 모두 신났으면 좋겠습니다.
- 이제 86 멕시코 월드컵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감독님의 대표팀 합류를 반대하는 의견도 꽤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꽤나 섭섭하셨을 것 같아요.
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전에 참가했던 대표팀(윗줄 왼쪽 끝이 차범근)
찬반은 항상 있는 것이죠. 그러나 많은 국민들이 제가 뛰길 원한 걸로 알고 있어요. 사실 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우리가 못 나갔는데, 그 때도 아시아 예선에 저를 부른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참가하지 못했어요. 어느 시대든 서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어쨌든 후배들이 좋은 자리를 마련해줬고, 많은 사람들이 제가 뛰길 원했고, KFA가 결정해서 월드컵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월드컵 참가는 제 인생에 있어 더없이 즐겁고 좋았던 기억이에요. 더 잘해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한 것이 아쉬운데, 독일에 있느라 너무 후배들과 떨어져서 지내다보니 호흡 면에서 완벽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후배들이 너무 잘해줬고,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서 밥 잘 먹고 온 것이라 고마울 뿐입니다.
- 감독님께서는 월드컵을 앞둔 85/86 시즌에 분데스리가 17골로 한 시즌 개인 최다골을 기록하셨어요.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의 컨디션은 어떠셨나요?
사실 복숭아뼈 아래 인대가 파열해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수술해야 하는데, 월드컵 때문에 하지 못했죠. 근육이 계속 올라오는 것은 아닌데, 한 번씩 올라오면 아프고 두렵죠. 그래서 늘 테이핑을 했는데, 아주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월드컵을 앞두고 팬들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술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월드컵이 끝난 뒤, 수술을 하게 됐죠.
- 월드컵을 참가하는 감독님을 위해 레버쿠젠에서도 많은 협조를 해줬다고 들었습니다.
배려가 있었죠. 그 때만 해도 재활이나 의무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많이 부족했어요. 월드컵 자체도 32년 만에 나가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 레버쿠젠의 의무 담당자가 우리 선수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어 요청을 했고, 레버쿠젠 구단에서도 기꺼이 파견해줬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번 도움을 받았죠.
- 오랜만에 대표팀에 합류하셨고, 감독님은 이미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한 상황이었습니다. 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춰보지 않은 젊은 선수들도 많아 서먹서먹한 경우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런 면도 있었죠. 너무 오래 떨어져있었으니까요. 또 저와 같이 볼을 찼던 선수들도 많지 않았어요. 최순호, 박경훈, 정용환 같은 선수는 저와 같이 대표 생활을 하지 않았던 세대였습니다. 젊은 선수들이 많아 그 선수들로서는 한참 선배인 제가 어렵기도 했겠죠.
- 그토록 갈망하던 월드컵에 나가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를 위해 피치에 섰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요?
86년 멕시코 월드컵 첫 경기 아르헨티나전에서
벌써 우리는 아르헨티나의 네임밸류에 많이 위축되어 있었어요. 정신적으로는 무장이 잘됐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많은 부담을 안고 있었습니다. 상대는 마라도나라는 세계적인 선수가 있었고, 모든 카메라가 거기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니 몸도 경직되고, 움직임도 둔화되고, 오버하게 되었죠.
그러다보니 너무 쉽게 실점을 내줬고, 연속골을 내주면서 자신감이 떨어지고 조직도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어려운 경기를 펼쳤어요. 그래도 나름대로 1골을 만회하면서 1-3으로 패했는데, 당시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한 경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유럽에서 뛰고 있었고, 경험이 많았지만, 부담이 컸습니다. 상대 선수 개개인이 모두 대단한 선수들이었거든요. 어쩌면 제가 무명이었다면 부담이 덜했을 지도 모릅니다.
- 사실 상대팀들은 한국 선수 중에 감독님만 알고 있는 상황이었죠. 집중적인 견제 대상이었고, 그로 인해 상당히 힘드셨을 텐데요.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외부에 노출이 많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견제를 많이 받았죠. 제가 여러 가지를 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한 선수를 경계하다보면 다른 곳에서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죠.
아쉬움은 분명 있었습니다. 공격수가 골을 넣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요. 그러나 골운이 닿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죠. 어쨌든 상대는 제 움직임을 견제했고, 저는 수비수들을 끌어내는 역할을 했어요. 그러다보니 틈이 생기고 골도 들어갔기에 제 역할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당시는 동료들과 공을 같이 차본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볼을 주고받는 타이밍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었어요.
- 언급하셨지만, 어떻게 보면 분데스리가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다가 한국 선수들과 함께 하면서 플레이에 있어 미묘하게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움직임이나 패스 스피드, 타이밍 같은 것에서 말이에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제가 독일에 처음 갔을 때 동료들이 저에게 볼을 주지 않았어요. 분명히 달라고 했는데도 안 줬죠. 나중에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볼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제가 볼을 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겁니다. 그 선수들은 움직이는 선수에게는 볼을 주지만, 서 있는 선수에게는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초창기에 볼을 많이 받지 못했죠.
독일에서 그런 부분에 적응한 상태에서 대표팀에 왔는데, 아무래도 독일과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움직이면서 볼을 받으려고 했는데, 잘 맞지 않았죠. 아무래도 다른 스타일의 축구를 했었고, 서로 호흡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불가리아전을 보면 제가 오프사이드를 정말 많이 범했어요. 제가 들어가는 타이밍과 패스를 주는 타이밍이 조금씩 맞지 않았기 때문이죠. 볼이 들어오기만 하면 뭔가 될 것 같은데 약간씩 어긋나니 정말 아쉬웠죠.
프랑크푸르트의 예를 들어보면 제가 본능적으로 움직이면 거기에 맞춰 미드필드에서 정말 날카로운 패스가 들어왔어요. 당시 프랑크푸르트에는 휠첸바인과 그라보브스키가 미드필드에 있었는데, 둘 다 월드컵까지 나갔던 대단한 선수들이었습니다. 제가 움직이려고 하면 자로 잰 듯이 뛰는 앞으로 딱딱 맞춰 패스가 들어왔어요. 아무래도 제가 분데스리가에서의 패스 타이밍에 움직이다 보니 대표팀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패스 타이밍이 늦어 오프사이드가 걸려던 것 같아요. 굉장히 아쉬웠죠.
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전(왼쪽에서 세번째가 차범근)
- 당시 최순호 감독님과 전방에서 호흡을 맞추었는데요. 예전에 최순호 감독님과 인터뷰할 때 "차범근 선배는 확실히 움직임이 다른 선수들과 달랐다. 좋은 움직임이 있으니까 내 패스도 더 사는 느낌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아요. 최순호 감독은 그 때 보니까 기술과 스피드도 있고, 주위를 보는 눈도 빨랐어요. 특별하더군요. 저와 감이 아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제가 움직이는 타이밍에 맞출 수 있는 선수가 최순호 감독이었어요. 당시에도 아주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었죠. 호흡을 더 맞췄다면 더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 이후 1989년에 현역에서 은퇴를 하셨을 때, 독일에서도 여러 가지 제의가 있었던 터라 굳이 한국으로 오지 않아도 세계축구의 중심에서 계속 활동하실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한 망설임은 없으셨는지요?
없었습니다. 독일에서 지도자 코스를 '후스발레러'라고 하는데, A와 B자격을 이미 딴 상태였어요. 그리고 마지막 해였던 1989년에 리누스 미셸 감독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 과정을 이수했죠. 그 과정들을 공부한 것은 한국에 돌아와 지도자를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제가 독일로 갈 때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제 스스로 많은 사랑을 입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제 성격상 말을 바꾸는 것을 못하기 때문에 이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프랑크푸르트로부터 2년 제의를 받았는데, 가족들은 모두 남길 원했어요. 아마 남았다면 가족들에게는 좋을 수 있었겠죠. 사실 저도 한 때 동요하기도 했어요. 독일에서 7년 이상 거주한 사람들에게는 영구 체류할 수 있는 비자가 나왔는데, 그거 받는 것이 쉬운 게 아니었거든요. 그러나 결국은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한국으로 가겠다고 결심했죠. 계획하고 있었던 축구교실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 축구교실만이라도 주말리그를 해서 활성화시키겠다는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지도자하면서 몇년 지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돌아왔고, 90년에 축구교실을 열게 된 것이죠. 서울 용산구와 은평구, 구로구청장을 찾아가서 제 꿈과 비전을 설명하고 축구교실을 열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거기서 30만원씩 지원해줘서 코치 하나씩 두고, 제가 돌아다니면서 활성화를 시켰고요. 또 정몽규 회장님(현대산업개발 회장,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이 현대에 계실 때 지원해주시기도 했죠. 그런 도움 덕택에 축구교실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전혀 후회가 없고, 지금도 제가 잘한 일 중에 2가지를 꼽는다면 축구교실과 차범근 축구상을 만든 것,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 유럽에 대한 마음의 벽을 허문 것을 꼽고 싶어요. 제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럽지 않은 일들이었습니다.
- 현역 시절을 돌이켜보셨을 때 한국과 독일에서 각각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선수를 꼽아보신다면.
한국에서는 김진국, 박이천, 김재한, 이차만, 고재욱 선배 등과 호흡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시절 니켈과 그라보브스키가 제가 움직이면 아주 칼날처럼 패스를 연결해줬죠. 그리고 레버쿠젠에서는 전방에서 같이 투톱을 봤던 바스와의 호흡이 아주 좋았고 위력적이었죠.
- 다시 월드컵과 인연을 맺은 것은 98 프랑스 월드컵이었습니다. 월드컵 아시아예선의 경우, 그야말로 파죽지세였죠. 그러나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황선홍 선수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감독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요.(웃음)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완벽하게 통과를 했는데, 본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프로 선수들이다 보니 매번 불러서 합숙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6개월여 동안 어린 선수들을 더 찾아서 합류시켰는데, 이것은 미래를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어서 굉장히 어려웠어요. 처음에는 그 선수들을 데리고 킹스컵도 우승하면서 괜찮았는데, 이후에 호주 친선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고, 다이너스티컵에서 3월 1일 일본전에서 패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죠.
그래서 그 타이밍에 네덜란드 전력 분석을 위해 유럽에 가려고 했던 계획이 발목이 잡혀서 4월 1일 일본과의 리턴매치에 힘을 쏟아야 했어요. 결국 그 경기는 이겼죠. 그리고 오랜 기간 부상으로 고생하던 황선홍 선수가 회복한 상황이었는데,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다치면서 결정적으로 우리 무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월드컵 본선에서도 아주 치명적으로 작용했죠. 공격의 핵을 잃어버린 것이니까요. 결국 멕시코와 네덜란드에 패하면서 도중에 감독직에서 내려와야 하는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 네덜란드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객관적인 팀 전력의 차이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경기였어요. 선수들 역시 "차원이 달랐다, 패스하는 속도와 움직임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고 이야기들을 하더군요.
확실히 그랬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렇게 좋은 선수들이 경기를 끌어간다면 한국이 아니라 유럽 팀들도 네덜란드를 상대하기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경험도 부족했었죠.
일단 멕시코와의 1차전에서 우리가 골을 넣고 바로 퇴장을 당하는 악재가 발생했고, 그것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어려운 경기로 흘러갔어요. 만약 그 때 퇴장이 없었고, 그 경기를 계속 유리하게 끌고 갔다면 이후 경기들도 다른 상황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때 사기가 꺾이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고, 이런 것이 부정적으로 팀에 영향을 미쳤죠.
98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와의 경기전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
- 선수로서 월드컵에 나가셨지만, 감독으로 나가는 느낌은 어떠셨어요?
아무래도 다르죠. 선수 때는 자기만 잘하면 되는 것이지만, 감독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니까요. 감독은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98 프랑스 월드컵은 감독으로서는 처음 나가는 월드컵이었고, 긴장을 많이 했죠. 그것만이라면 괜찮은데, 언론 같은 곳에서 팀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까 그런 것들도 다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그 때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2002 월드컵과 2006 월드컵은 해설가로서 참가하셨어요. 전문적이고 깊이가 있으면서 시청자들이 편하게 들을 수 있는 해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팬처럼 즐기는 모습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앞서 이야기한대로 저는 어떻게 하면 팬들에게 축구를 가깝게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합니다. 저도 팬의 입장에서 축구를 보는데, 거기에 아무래도 축구를 한 사람이 축구 현장을 가장 잘 알잖아요. 팬들에게 거부감 없이 현장을 잘 설명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만 현장을 이론적으로만 설명하면 딱딱해요. 사람들이 축구를 어렵게 느낄 수 있죠. 해설이란 것은 쉽게 설명해야지, 그것을 어렵게 설명하면 듣는 사람들은 잘 모르죠. TV를 보는 사람들은 축구를 아는 분들도 계시지만, 잘 모르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저는 가급적 쉽게 우리 축구의 상황을 팬의 입장에서 설명해주기 위해, 그리고 이왕이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야기해주려고 애썼어요.
무엇보다 선수들이 제 해설로 상처입지 않도록 신경 썼습니다. 선수들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었죠. 그것을 꺾는다면 제가 잘못하는 것이에요. 그런 마음으로 했더니 다행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고마운 일이었죠.(웃음)
제가 특별히 잘했다기보다는 축구에 대한 애정을 갖고, 우리 선수들을, 우리 축구를 설명해줬을 때, 그리고 팬들이 현장에서 잘 모르는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잘 설명할 때, 그런 것들이 팬들의 가슴에 와 닿지 않았나 싶어요.
- 말씀하신대로 해설을 하실 때 보면 선수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 나오십니다. 지적보다는 잘한 점을 찾아 칭찬해주시려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예를 들어 저 상황에서 왜 이렇게 못했느냐가 아니라,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저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느낌의 해설이셨죠.
우리 축구를 팬들에게 좀 더 거부감 없이 전달하려고 노력했어요. 저 선수가 왜 저렇게 했는지를 팬들은 잘 모를 수 있어요. 축구라는 것이 저도 해봤지만, 보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기계처럼 움직일 수 없거든요. 축구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실수가 있는 스포츠입니다. 그래서 실수를 하더라도 뭔가 이해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시청자들에게 설명했을 때 거부감이 훨씬 더 줄어들게 되죠.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 최고의 선수들이거든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실수였는지, 반복되는 실수였는지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만약 반복되는 실수라면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뭔가 다른 쪽에서 지적이 필요한 것이죠.
그러나 저 상황에서 저 선수의 저런 플레이가 최선을 다한 상황이라면 그것은 이해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서 더 높은 것을 원한다면 세계적 선수도 맞출 수가 없어요. 그리고 팬들은 영원히 우리 선수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그런 현장을 팬들에게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제가 해설하면서 하고 싶었던 것이에요.
실수를 했을 때 자꾸 그 이야기를 하면 긴장해서 더 못하기 마련입니다. 계속 칭찬을 하면 잘하기 마련이고요. 우리 팬들도 선수들이 실수했을 때 좀 더 격려해줄 필요가 있어요. 선수들이 흥이 나고, 기가 꺾이지 않게 말이에요. 저 역시 그런 해설을 하고 싶은 것이고요.
- 2006 독일 월드컵 TV 해설을 하실때 차두리 선수와의 호흡은 엄청난 화제였습니다. 그런데 보고 있자면 차두리 선수가 같이 해설하는 것이 조금 불안한 듯한 모습도 보이셨는데.(웃음)
그렇죠. 우리 아들은 경기장에 나가서 뛰고 있어야 하는데 거기 앉아 있으니까 아버지로서 불만이었던 것이고요. 또 해설이란 것이 한두 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을 상대로 하는 것이잖아요. 따라서 말 하나, 행동 하나 하나가 파장이 커요. 그렇잖아도 부자가 앉아 있는데,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그것은 씻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아들은 선수이고, 젊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잘 느끼지 못하니 아슬아슬했죠.(웃음)
그런 상황에서 스위스전에서 "이건 사기입니다!" 이런 말을 두리가 하니까 저는 완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군요.(웃음) 다행히 반응은 좋았지만, 어쨌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계석 저쪽 끝에 앉아있으니까 어떻게 할 수도 없었고요.(웃음)
2005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한국축구의 영웅들' 출판기념회에서
- 이번 월드컵에는 TV 방송사간의 문제로 해설을 못하실 듯 싶은데, 아쉽지는 않으신가요?(웃음)
뭐 해설을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국민들이 원한다면 축구를 위해서 해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여러 상황 상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군요.
-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죄송합니다. 재미있는 인터뷰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축구팬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제가 19세에 처음 국가대표가 되어서 지금까지 여러분들의 많은 사랑 속에서 축구 인생을 걸어왔습니다. 어려울 때도, 고통스러웠을 때도, 좋았을 때도, 자랑스러웠을 때도 있었어요. 여러분의 사랑이 고마워서 더 잘해야겠다, 더 좋은 축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은퇴하면 후진을 양성해야겠다고도 생각했고요.
여러분들의 사랑이 고마워서 지금도 축구 현장에서 이렇게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저를 사랑해주셔서 큰 선수로 만들어주신 것처럼 더 많은 후배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격려해주셔서 훌륭한 선수들이 더 많이 배출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희망을 주고 삶의 에너지를 만들어줄 수 있는 그런 선수들이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한국축구가 세계무대에서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을, 그래서 기뻐하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꼭 보고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한국축구와 선수들을 사랑해주세요.
공식질문1. 축구는 (나의 삶)이다.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네요.
공식질문2. 월드컵은 (우리의 꿈) 이다.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의 가치를 갖고 있는 꿈이죠. 국민들에게도 굉장히 생산적인 에너지를 만들어줘요.
인터뷰=이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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