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 Culture/Sports Record

메이저리그의 전쟁 영웅들

by Wood-Stock 2009. 5. 11.

메이저리그의 전쟁 영웅들

 

1941년 12월8일(이하 한국시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에이스 밥 펠러는 재계약을 위해 단장을 만나러 가던 도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태평양함대가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는 것. 이에 펠러는 재계약 협상을 접고 곧바로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22살의 펠러는 홀어머니와 가족들을 부양하고 있어 징집 대상이 아니었다.

 

전함 USS알라바마호의 대공포 사수가 된 펠러는 첫 11개월간 대서양에서 독일 U-보트를 쫓아 다녔으며, 이후 3년은 태평양에서 8번의 대규모 작전에 투입돼 강속구로 삼진을 잡는 대신 대공포로 적기를 떨어뜨렸다. 군대에서 거의 4년을 보낸 펠러는 가슴에 5개의 종군 휘장(Campaign ribbon)과 8개의 은성장(Battle star)을 달고 제대했다.

 

펠러는 군에 입대하기 전 3년간 76승과 767삼진을 기록하며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다시 26승과 348삼진을 기록했다. 이를 그대로 대입하면 그는 4년간 97승 1057삼진을 손해본 셈이다. 만약 참전하지 않았다면 펠러는 266승 2581삼진이 아닌 363승 3640삼진으로 은퇴할 수 있었다.

 

밥 펠러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간판타자 행크 그린버그는 1941년 4월 군에 징집됐다. 구단은 그를 군에 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린버그가 이를 마다했다. 12월6일 그린버그는 8개월만에 군복을 벗었다. '만 28세 이상자 제대 조치'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틀 후 일어난 진주만 공습은 그로 하여금 다시 군대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했다. 자원입대한 후 사관후보학교를 졸업한 그린버그는 버마-인도 전선을 담당한 B-29 폭격기 부대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5시즌 동안 그린버그는 단 97경기에 나서 15홈런 72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1940년 41홈런 150타점, 1946년에 44홈런 120타점을 기록했음을 감안하면, 그는 대략 200홈런 600타점 정도의 손해를 본 셈이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린버그는 역사상 10명뿐인 500홈런-1800타점 클럽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363승의 1900년대생 최다승 투수이자 좌완 최다승 투수인 워렌 스판도 군대에서 3년을 보냈다. 전차병이었던 스판은 유명한 벌지전투 참가로 청동 성장(Bronze Star)을 받았으며, 레마겐 다리 전투에서 유산탄 맞아 명예 전상장(Purple Heart)을 달고 제대했다.

 

1947년부터 1963년까지 17년간 스판이 올린 연평균 승수는 20승. 전쟁이 없었더라면 그는 사이 영과 월터 존슨에 이은 역대 3번째이자, 1900년대생 최초의 400승 투수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판은 훗날 전쟁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이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다며 참전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워렌 스판                                                          Ted Williams

 

 

전쟁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선수는 테드 윌리엄스다. 2차대전 당시 윌리엄스도 징집대상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이 정도면 이혼한 어머니를 부양할 수 있는 돈을 모았다'면서 참전을 선택, 꼬박 3년을 비행교관으로 복무했다.

 

돌아오자마자 다시 맹타를 휘두르기 시작한 윌리엄스는 1952년 2월 이번에는 한국전에 참전, 귀에 이상이 생기기 전까지 전투기 조종사로서 38차례 출격했다. 윌리엄스는 제트기를 조종하는 소감에 대해 "이제는 내가 미키 맨틀보다 빠르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두 번의 선택이 그의 통산성적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윌리엄스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의 3년, 그리고 1952-1953년 2년, 도합 5년간 43경기 출장에 그쳤다. 그의 통산 연평균 성적이 188안타 37홈런 130타점 143볼넷임을 감안하면 산술적으로 900안타 180홈런 600타점 700볼넷의 손해를 본 셈이다.

 

이를 그의 통산 성적에 더하면 윌리엄스는 3500안타 700홈런 2400타점 2700볼넷을 기록할 수 있었다. 어쩌면 행크 애런보다 먼저 베이브 루스를 넘어섰을지도 모르며, 불멸의 타점 1위, 볼넷 1위였을지도 모른다.

 

  

조 디마지오 역시 자원입대로 1943년 2월에 군복을 입었다. 디마지오는 전선에 나서는 대신 방망이를 들고 위문을 다녔지만 당시 미국 최고의 스타였던 그가 군복을 입은 것만으로도 병사들에게는 엄청난 힘이 됐다. 디마지오 역시 3년 동안 500안타 70홈런 350타점 정도의 손해를 봤다.

 

아예 '대령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제리 콜맨은 야구선수보다 전투기 조종사로서 더 성공한 인물.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 전 2차대전에서 57차례 출격했으며, 다시 메이저리거가 된 후 한국전에서 63차례 출격해 총 120차례 전투 비행의 기록을 세웠다. 2개의 공군 십자 훈장(Distinguished Flying Cross) 13개의 공군 수훈장(Air Medal) 3개의 해군 표창(Navy Citation)을 받은 콜맨은 뉴욕 양키스의 내야수로서 723경기 타율 .263 16홈런 217타점을 기록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그들에게 사람들은 진심어린 경의를 표했다. 워싱턴 세너터스의 외야수 버디 루이스는 2차대전 동안 수송기 조종사로 히말라야 산맥 위를 350차례 비행하며 수송품과 부상병을 실어날랐다. 1945년 루이스는 복귀 첫 타석에서 스트라이크 2개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하지만 주심은 이를 모른 체 했다. 투수가 발끈하자 주심은 "이봐. 저 친구는 진주만 이후 처음으로 방망이를 잡는 거라고"라고 말했다. 투수 역시 더 이상 항의하지 않았다.

 

194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유격수 루크 애플링이 만 37세의 나이로 참전을 선언하자 그의 아내는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애플링이 야구선수를 제외한 다른 직업은 2주 이상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애플링은 군대에서 2년을 보내야만 했다.

 

국가의 비상사태에서 발벗고 나선 것은 선수만이 아니었다. 시카고 컵스의 구단주 윌리엄 리글리는 완성 직전에 있었던 리글리필드의 조명탑을 떼어다 조선소에 기증했다. 이를 대단한 긍지로 여긴 컵스 구단은 1988년이 되어서야 커미셔너의 협박에 못이겨 할 수 없이 조명시설을 달았다.

 

2차대전이 일어날 무렵 야구는 미국에서 '국민적 여가(national pastime)'라는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독일에게 '하일 히틀러'라는 구호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플레이 볼'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에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참전이라는 방법으로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을 했고, 팬들은 다시 아낌없는 사랑을 줬다.

 

약 340명의 메이저리거와 3000명의 마이너리거가 징집 또는 자원입대를 통해 2차대전에 참가했으며, 그 중 35명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리고 2명의 메이저리그 선수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메이저리거들

 

오늘(2009.6.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9주년이 되는 해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가고 그 사회와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인류 최대의 재난이다.

 

하지만 그 전쟁이 스포츠인 야구, 그것도 한국도 아닌 메이저리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UN군의 일원으로 우리나라에서 방망이 대신 총을 들고 싸웠던 벽안의 야구 선수들이 있었다.

 

▷ 파일럿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한 테드 윌리엄스

 

한국전의 영웅 중 야구선수로 가장 유명한 선수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다. 윌리엄스는 한국전 참전 이전에 2차 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미 2차 대전에서 조국을 위하여 기꺼이 방망이를 내려놨던 윌리엄스는 꼬박 3년을 비행교관으로 복무하며 종전 시까지 영웅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다시 방망이를 잡으면서 맹타를 휘두르던 윌리엄스는 1952년 4월 30일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친 뒤 군(軍)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해 겨울 윌리엄스는 "난 죽을지도 모른다."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한국으로 급파된다.

 

1953년 2월 16일, 대위계급장을 가슴에 단 윌리엄스는 평양 남쪽의 북한군 막사와 보급대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확히 목표지점을 폭파 시킨 뒤 기수를 돌리는 중에 북한군의 대공포를 맞고 추락위기에 처하고 만다. 윌리엄스는 강한 의지로 수원공군기지까지 날아간 뒤 동체 착륙을 시도했고, 기체가 활주로에 심하게 부딪혔지만 아무런 부상을 입지 않았고 태연하게 밥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고 한다.

 

1953년 6월, 39번의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윌리엄스는 쉴 겨를도 없이 소속팀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고 세인트루이스 전에 대타로 나왔다. 윌리엄스는 시즌 막판 팀에 합류했지만 37경기에서 13개의 홈런을 포함, 0.407의 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2차 대전과 달리 한국전쟁은 그의 전성기의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그 5년 때문에 윌리엄스는 베이브 루스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타격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윌리엄스이기에 57년과 58년에는 타격왕을 차지하고, 40번째 생일을 맞이했던 1960년에는 29홈런을 터뜨려 통산 500홈런을 넘어서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1946~51년 사이에 평균 33홈런 124타점을 기록했던 윌리엄스는 54년 이후로는 평균 26홈런 77타점에 그치고 만다. 타율을 비롯한 비율 스탯은 여전히 훌륭했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에 결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만약 5년의 공백만 없었더라면 그는 700홈런과 2400타점, 2400득점을 모두 넘어설 수 있었을 것이며, 타점과 득점은 여전히 역대 1위의 기록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두 번의 MVP와 두 번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으며, 타격에 관한한 '역대 메이저리그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윌리엄스는 1960년을 끝으로 통산 521홈런 1839타점 1798득점 2021볼넷 709탈삼진 .344/.482/.634의 화려하고도 놀라운 기록을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 '다저스의 에이스' 돈 뉴컴의 참전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신인왕, 사이영상, MVP를 모두 받았던 '흑인 투수' 돈 뉴컴도 한국전 참전용사다. 1949년 팀 동료 재키 로빈슨, 로이 캄파넬라 및 인디언스의 래리 도비 등과 같이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출전한 '최초의 흑인 선수' 이기도 한 뉴컴은 1952년부터 2년간 잠시 그라운드를 떠나며 낮선 한국 땅을 밟았다.

 

참전하기 전까지, 뉴컴은 정말로 잘 나가는 투수였다. 1949년 17승으로 신인왕을 차지한 이후 50년 19승, 51년에는 처음으로 20승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했던 것이다. 그는 브루클린 다저스(LA 다저스의 전신)에 새로이 등장한 또 한 명의 흑인 영웅이었다.

 

휴전 후 귀국하여 다시 마운드에 올랐을 때도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특히 1956년에는 27승 7패 평균자책 3.06의 빼어난 성적으로 리그 MVP와 사이영상을 동시에 거머쥐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월드시리즈에서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뉴컴은 3번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5경기에 선발로 등판했으나 0승 4패 방어율 8.59의 참담한 성적을 남기고 말았다. 이후 1958년 다저스가 연고를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LA로 옮긴 후로는 늘 부상에 시달리며 예전과 같은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신시네티와 클리블랜드 등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다 테드 윌리엄스와 마찬가지로 1960년에 메이저리그를 떠났다.

 

총 10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뉴컴은 149승 90패 평균자책 3.56의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것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것이었으며, 그는 '신인왕-MVP-사이영상'을 모두 거머쥔 유일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영광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피칭 외에 타격에도 큰 소질이 있었던 뉴컴은 메이저리그 통산 .271의 수준급 타격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뉴컴은 은퇴 이후 일본 프로야구에서 타자로 다시금 활약하며, '메이저리거의 일본진출 1호 선수'라는 특이한 경력까지 남겼다.

 

 

▷ '참전'이라는 이름으로 나선 뭇 선수들

 

양키스에서 내야수로 활약하며 통산 723경기에서 타율 0.263, 16홈런, 217타점을 기록한 제리 콜맨 역시 한국전 참전용사다. 그는 야구선수보다는 전투기 조종사로서 더 성공한 인물이기도 한데,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 전 2차 대전에서 57차례 출격했으며, 한국전에서 63차례 출격해 총 120차례 전투 비행의 기록을 세웠다. 2개의 공군 십자 훈장(Distinguished Flying Cross), 13개의 공군 수훈장(Air Medal), 3개의 해군 표창(Navy Citation)을 받은 그의 별명은 '캡틴(Captain)'이었다.

 

한국전 참전 외에 2차 대전에도 많은 야구영웅들이 아무 대가 없이 전쟁에 참가하여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은 바 있다. 양키스의 빌 디키, 조 디마지오, 필 리주토, 요기 베라 등도 참전용사이며, 밥 펠러, 행크 그린버그 등도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투복을 입은 사나이들이다.

 

2차 대전 당시, 전미 대륙에는 "독일에 '하일 히틀러'라는 구호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플레이 볼'이 있다"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였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참전이라는 방법으로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을 했고, 팬들은 참전하고 돌아 온 그들에게 진심 어린 경의를 표했다.

 

약 340명의 메이저리거와 3000명의 마이너리거가 징집 또는 자원입대를 통해 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 참가했으며, 그 중 35명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리고 2명의 메이저리그 선수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 김현희 객원기자 / 야구타임스 김홍석 편집기자(블로그 : MLBspecial.net)


 

'Art & Culture > Sports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데스리가 차붐 이야기  (0) 2009.05.12
농구 득점 기록들  (0) 2009.05.12
그렉 매덕스 - 350승  (0) 2009.05.11
MLB Legend, 불멸의 기록들  (0) 2009.05.11
World Best Boxer 50 - ESPN(2007)  (0) 2009.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