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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2018, 한겨레)

by Wood-Stock 2018. 11. 5.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863876.html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멜론에서 듣기 
https://bit.ly/2Mx0XkB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 기울일수록, 가슴 뛰는 나의 노래여


한겨레·멜론·태림스코어 공동기획 100대 명반 선정

최고 명반으로 뽑힌 유재하 데뷔앨범
시간 흐를수록 진가 드러내며 생명력
모든 앨범 이름 올린 서태지와 아이들
‘21세기 명반’ 선정된 26장에도 눈길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명반 100장이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한겨레>는 음원사이트 멜론, 출판사 태림스코어와 공동기획으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선정 작업을 진행했다. 음악평론가, 음악 전문 기자, 음악방송 피디 등 47명이 투표한 결과를 바탕으로 1위부터 100위까지 순위를 매겼다. 그 결과를 8월28일부터 9월28일까지 한 달 동안 디지털 기사를 통해 역순으로 공개해왔다. 이를 종합해 소개한다.


■ 1위는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한국 대중음악 최고 명반으로 꼽힌 단 한 장의 앨범은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다. 유재하는 한양대 작곡과에서 클래식을 전공했다. 하지만 10대 시절부터 대중음악과 재즈에 큰 관심을 보였던 그는 결국 대중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먼저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다. 조용필의 백밴드 ‘위대한 탄생’과 김현식의 백밴드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키보드를 연주했다. 두 가수에게 자신이 만든 곡을 주기도 했는데, 조용필 7집(1985) 수록곡 ‘사랑하기 때문에’와 김현식 3집(1986) 수록곡 ‘가리워진 길’이 그것이다. 두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서 각각 28위와 16위에 선정됐다.


유재하는 봄여름가을겨울에서 나와 1987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했다. 앞서 조용필과 김현식 앨범에 실린 두 곡을 비롯해 ‘그대 내 품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지난날’, ‘우울한 편지’ 등 모두 9곡을 담았다. 모든 수록곡을 작사·작곡한 건 물론 편곡까지 혼자 해냈다. 한국 대중음악 사상 밴드 아닌 가수 혼자 작사·작곡·편곡 모두 해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유재하는 데뷔 앨범을 낸 지 석 달도 채 안 된 87년 11월1일 서울 강변북로에서 친구가 몰던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로 숨지고 만다. 유작이 된 데뷔 앨범은 사후 더 큰 주목을 받았다. 클래식과 재즈의 어법을 기반 삼아 만든 노래들은 한국 발라드의 품격을 높이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 앨범의 진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났다. 1998년 음악전문지 <서브>가 실시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조사에서 7위를 차지한 데 이어, 2007년 음악웹진 <가슴네트워크>와 <경향신문> 조사에서 2위에 선정됐다. 그리고 이번 조사에선 1위로 올라섰다. 박은석 음악평론가는 “유재하의 음악이 끊임없이 새로운 관객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아니, 어쩌면 관객들이 유재하의 음악에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발견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관객으로부터 새로운 평가를 획득하며 훌륭하게 연륜을 쌓아가고 있다”고 평했다.


■ 다관왕은 서태지와 아이들
 

명반 100 목록 안에 가장 많은 앨범을 올린 이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1집(22위), 2집(52위), 3집(69위), 4집(82위) 순으로 자신들이 발표한 모든 앨범을 순위에 올리는 진기록을 세웠다. 힙합, 록, 전자음악, 국악 등 다양한 장르를 뒤섞으며 앨범마다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꾼 분기점으로 기록된다. 다음으로 많은 앨범을 올린 이는 한국 모던록의 선구자 언니네 이발관이다. <가장 보통의 존재>(50위), <비둘기는 하늘의 쥐>(84위), <후일담>(90위) 석 장의 앨범을 올렸다.


조동익·이병우가 결성한 포크 듀오 어떤날은 단 두 장의 앨범만 남기고 해체했는데, 1집(6위)과 2집(20위) 모두 20위권 안에 들었다. 지금도 음악애호가들 사이에서 이상향과도 같은 존재로 남아있다. 김창완·김창훈·김창익 3형제가 결성한 밴드 산울림은 10위권 안에 무려 두 장의 앨범을 올리는 저력을 발휘했다. ‘아니 벌써’가 실린 1집(5위)과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실린 2집(7위)이 그것이다. 이밖에 장필순(11위·53위), 이문세(13위·42위), 시인과 촌장(14위·54위), 김광석(24위·87위), 신촌블루스(27위·72위), 조용필(28위·55위), 봄여름가을겨울(35위·86위), 동물원(38위·49위), 부활(59위·78위), 패닉(61위·91위), 양희은(80위·85위)이 각각 앨범 두 장씩 목록에 올렸다.


■ 새롭게 떠오른 21세기 명반들
 

100장의 명반 중 2000년 이후 발매된 앨범은 모두 26장이다. 그 중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한 앨범은 노브레인 1집 <청년폭도맹진가>(2000)다. 저항의 메시지와 음악이 일체를 이룬 한국 펑크록의 걸작이 2000년대 최고 명반으로 꼽힌 것이다. 다음으로 ‘바람이 분다’가 실린 이소라 6집 <눈썹달>(30위), 한국힙합 1세대 가리온의 1집 <가리온>(36위), 한국힙합 1세대 디제이 겸 프로듀서 디제이 소울스케이프의 <180그램 비츠>(39위) 등이 꼽혔다.


이번 ‘명반 100’ 조사는 2007년 조사 이후 11년 만에 이뤄졌다. 2007년 이후엔 음악시장이 정규앨범보다 디지털 싱글과 미니앨범(EP) 위주로 바뀌면서 명반 목록에 들기가 쉽지 않은 여건인데도 모두 9장의 앨범이 새로 이름을 올렸다. 언니네 이발관(50위), 이센스(56위), 검정치마(73위), 서울전자음악단(75위), 3호선 버터플라이(77위), 장기하와 얼굴들(94위), 에프엑스(96위), 버벌 진트(97위), 윤영배(99위)가 그 주인공이다. 요즘 대세인 힙합 앨범으론 이센스의 <디 에넥도트>, 버벌 진트의 <누명>이 눈에 띈다. 유일한 아이돌 그룹 앨범인 에프엑스의 <핑크 테이프>도 단연 돋보인다. 정민재 음악평론가는 “<핑크 테이프>는 대형 기획사의 웰메이드 프로듀싱의 결과이자 순수하게 음악만으로도 앨범 단위의 즐거움을 안긴 야심작이다. 20년 남짓한 한국 아이돌 음악 역사에서 이 정도로 선명한 시금석이 된 앨범은 그리 많지 않다”고 평가했다.


<한겨레TV>는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을 바탕으로 한 동영상 콘텐츠도 만들었다. 유튜브에서 ‘서정민의 킬링트랙’을 검색하면, 명반 10장씩 소개하고 그 중 노래 두 곡을 추천하는 5분 안팎의 동영상 10편을 볼 수 있다.

(나머지 동영상은 기사 아래 첨부)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유재하, 세월이 흐를수록 순위를 거슬러 오른 최고 명반


한국 대중음악 명반 1~10위


1위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1987) -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가 더 올라가는 마스터피스

2위 들국화 <들국화(1집)>(1985) - 세월과 세대를 뛰어넘는 한국 대중음악의 절대적 걸작

3위 신중현과 엽전들 <신중현과 엽전들>(1974) -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의 역작 ‘미인’이 수록된 앨범

4위 김민기 <김민기(1집)>(1971) - 시대의 변곡점, 대중음악사의 갈림길이 된 앨범

5위 산울림 <아니벌써(1집)>(1977) - 세상에 파격을 선사한 한국의 첫번째 펑크 앨범

6위 어떤날 <어떤날 I>(1986) - 조동익, 이병우 듀오가 남긴, 잔잔하게 오래가는 전설

7위 산울림 <제2집>(1978) - 실험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한국 록의 도약

8위 한대수 <멀고 먼 길(1집)>(1974) - 한국 포크 역사의 특이점

9위 넥스트 〈The Return Of N.Ex.T Part 1: The Being〉(1994) - 신해철이 꿈꿔온 밴드 음악으로 세상에 던진 충격파

10위 이상은 <공무도하가>(1995) -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걸작이 된 앨범


1위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1987)


전문가 리뷰 | 유재하에 관해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하는 게 이제는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의 상대적으로 짧은 인생과 절대적으로 짧은 이력은 단 한 장의 앨범으로 남았을 뿐이고, 우린 그걸 지난 30년 동안 거듭해서 청취하고 반복해서 논의해 왔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유재하의 음악이 끊임없이 새로운 관객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아니, 어쩌면, 관객들이 유재하의 음악에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발견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비평가 척 클로스터먼은 로큰롤 즉, 현대 대중음악이 작가의 의도보다 관객의 반응으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그렇게, 다른 뛰어난 작품들이 그렇듯,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관객으로부터 새로운 평가를 획득하며 훌륭하게 연륜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하기 때문에>에 대한 평가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의 유산들을 선정한다는 취지로 지난 20년 사이 평균 10년 간격을 두고 진행된 세 차례 조사에서 이 앨범은 1998년 7위(음악지 〈서브〉 조사)를 거쳐 2007년 2위(〈경향신문〉 조사)에 선정됐고, 여기 2018년에는 집계결과 목록의 맨 윗자리를 헌정받았다. 물론, 여론조사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다시피, 저기서 순위란 불변의 가치가 아니라 가변적 위치로 보는 게 맞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고, 변화한 세상은 변화한 기준으로 대두하기 마련이니까. 그게 별볼일 없는 숫자놀음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건 특정한 시점의 지표로 기능한다는 의미다. 요컨대, 이 또한 여론조사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다시피, 순위를 지정하는 숫자들의 작은 차이는 당대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유효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 여기서라면 <사랑하기 때문에>가 한국 대중음악사의 가장 중요한 단일 작품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기본적으로 훌륭한 노래들의 집합이다. 앨범 전체가, ‘Minuet’의 우아한 일탈을 제외하고, 팝 송라이팅의 새로운 전범이라기에 모자람이 없다. 클래식으로 훈련된 이성과 팝으로 경사된 감성을 아우른 작곡가로서 유재하는 뛰어난 만큼이나 달랐는데, 조용필이 부른 ‘사랑하기 때문에’와 김현식 버전의 ‘가리워진 길’이 무미한 범작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에 대한 반증인 셈이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를 당대의 수작쯤에서 멈춰 세우지 않고 시대의 걸작으로까지 견인한 가장 강력한 동인은 편곡자로서 유재하의 능력이다. 작곡가로서 유재하의 재능과 짝을 이룸으로써 궁극의 시너지를 발휘한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에>가 요즘의 젊은 관객들에게도 신선하게 들리도록 만든 보이지 않는 손이다. 예컨대, 기타 솔로가 마치 의무처럼 삽입되던 시대에 기타 연주를 완전히 배제해버린 ‘가리워진 길’이나 재즈의 연주 구조와 클래식의 악기 구성을 통해 통속가요로 오인될 만한 선율에 차별성을 부여한 ‘우울한 편지’는 그에 대한 증거와 다름 아니다. 모던한 발라드의 어법을 완성형으로 제시한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과 ‘그대 내 품에’, 그리고 타이틀 트랙 ‘사랑하기 때문에’는 말할 것도 없다.


혹자는 이 앨범을 가리켜 한국 대중음악사상 최초로 한 사람의 가수가 작사와 작곡과 편곡을 ‘혼자서’ 완수해낸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유재하가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성취해냈다는 측면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싶다. 음악적 감동은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들리는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가 앞으로 십 년쯤 뒤에도 변함없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관객들이 여기 담긴 노래들에서 여전히 감동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와 다름 아닐 테니까.


추천곡 ‘텅 빈 오늘밤’ | 냉정히 말해서 이 노래는, ‘우리들의 사랑’과 더불어, <사랑하기 때문에>의 수록곡 가운데 세월의 그늘이 가장 짙은 작품이다. 그리고 그건 전적으로 뉴 웨이브 풍의 사운드 프로덕션 때문이다. 당대의 트렌드를 가장 잘 반영한 노래의 숙명적 아이러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곡에서 유재하의 세련되고 정교한 편곡작업이 만들어냈을지도 모르는 가상의 매그넘 오퍼스를 상상하게 됨을 거부할 수 없다. 그가 계속해서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다면 아마 재즈의 농도를 희석한 스틸리 댄 혹은 클래식의 터치를 가미한 토토 정도의 음악을 만들지 않았을까 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를 통해 브루스 혼스비 앤 더 레인지까지 육박했던, 유재하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그렇게 나의 질문은 응답의 가능성을 잃었다.


박은석/음악평론가



7위 산울림 <제2집>(1978)


전문가 리뷰 | 첫 곡이 흐른다.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기타 노이즈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린다. 절로 고개를 흔들게 만드는 절묘하고도 끈끈한 3분30초가 지나면 독창적인 가사가 독보적인 목소리를 통해 발산된다. 여러 가지 의미로 충격이다. 들을 때마다 그렇다. 그 만큼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언제 들어도 놀라운 곡이다. 이 곡 하나만으로도 산울림의 2집을 대한민국 명반에 올리는 것에 어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이 앨범의 발표일을 확인하면 더욱 그렇다. 1978년. 어떻게 그 시대에 이런 실험적인 음악을 만들 수 있었던 걸까? 작곡, 작사, 편곡, 연주 등 앨범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지금과 비교해도 여전히 압도적이다. 이렇듯 산울림 2집은 외국 영향도 거의 받지 않은 순수한 대한민국 록 음악이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치가 더욱 올라가는 진정한 명반이다.



산울림. 우리 대중음악 역사에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지금 활동하는 우리나라 음악인 대부분이 많든 적든 간에 산울림의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돌연변이의 등장에 가까웠던 파격적인 음악 스타일은 한국 대중음악의 패러다임 자체를 뒤흔들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우리 음악계가 폭넓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산울림이 더욱 대단한 것은 실험성이 강한 음악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를 함께 살던 대중들이 이를 쉽게 받아들이고 함께 호흡했다는 점이다. 이유는 뭘까? 그 당시 사람들의 음악적 소양이 지금보다 특별히 높았다기보다는, 산울림 2집이 담고 있는 정서 자체가 한국 고유의 것이었다는 점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산울림을 실험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한국 록’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산울림의 2집은 1977년 1집 <아니벌써>와 비교해서 사운드와 연주 부분에서 큰 발전을 이룬 앨범이다. 그것도 5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이뤄낸 성과라는 점에서 산울림 멤버의 비범함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파격적인 등장이라는 상징성에서는 1집이 뛰어나지만, 음악 전반을 아우르는 완성도 자체는 2집이 높다. ‘나 어떡해’, ‘노래 불러요’, ‘둘이서’ 등의 재기발랄함과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안개 속에 핀 꽃’, ‘어느 날 피었네’에서 느껴지는 무게감 사이의 균형도 잘 잡혀있다. (‘나 어떡해’는 샌드페블스의 곡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김창훈이 만든 곡으로 산울림 2집에도 실렸다.) 특히 산울림 특유의 오르간과 기타가 함께 주도해나가는 사운드도 2집 들어서 확고하게 틀이 잡혔으며, 이는 향후 발표되는 산울림의 초기 음악은 물론 더 나아가 한국형 밴드 사운드의 뿌리가 되었다.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감을 갖고 있는 앨범이다.


추천곡 ‘어느 날 피었네’ | ‘어느 날 피었네’는 산울림 2집 수록곡 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와 함께 연주의 비중과 밀도가 가장 높은 곡이다. 주어가 없는 제목이지만 곡의 분위기를 단번에 장악하는 인트로 부분의 사운드는 프로그레시브 록을 연상시킬 정도로 무게감이 있고, 이후 본 멜로디로 진입하는 전환도 매우 매끄럽다. 곡의 중심부에서 펼쳐지는 악기들의 인터플레이도 완성도가 높으며, 멜로디를 한층 부각시키는 연주 주법도 훌륭하다. 또한 이 곡에 입혀진 김창완의 가사는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사운드와 하나로 수렴되어 사람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산울림은 이렇게 꽃을 기다리는 마음이 이렇게 복잡미묘한 것임을 알려주기도 한다.


김홍범/KBS 라디오 피디



‘벼락 천재’의 데뷔앨범…차갑고 세련된 한국적 재즈의 향취

한국 대중음악 명반 11~20위


11위 장필순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5집)>(1997) - 음악 장인들과의 만남으로 다다른 최고의 경지

12위 김현철 〈김현철 Vol.1〉(1989) - 벼락같은 천재의 벼락같은 데뷔작

13위 이문세 <이문세 4>(1987) - 이문세와 이영훈 콤비의 정점

14위 시인과 촌장 <푸른 돛(2집)>(1986) -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담은 소박한 혁명가

15위 사랑과 평화 <한동안 뜸 했었지(1집)>(1977) - 그루브 넘치는 펑키 사운드의 향연

16위 김현식 〈김현식 III〉(1986) - 요절한 가객 김현식의 정점과도 같은 앨범

17위 한영애 <바라본다(2집)>(1988) - 한영애의 매력과 개성이 폭발한 작품

18위 델리 스파이스 〈Deli Spice〉(1997) - 한국형 모던록의 화두를 제시한 앨범

19위 듀스 〈Force Deux〉(1995) - 한국힙합의 정신적 고향과도 같은 듀스의 최고작

20위 어떤날 <어떤날 II>(1989) - 조동익, 이병우 듀오가 남긴, 시간을 견디는 고전



12위 김현철 〈김현철 Vol.1〉(1989)


전문가 리뷰 | 세상엔 가끔 벼락처럼 천재가 내려온다. 벼락같은 천재는 가끔 벼락같은 데뷔앨범을 낸다. 김현철이 낸 데뷔작은 20세의 천재가 자기 안의 천재성을 총동원해 벽력처럼 쏟아낸 음반이다.


악곡의 섬세하고 세련된 질감 하나만으로도 이 앨범은 당대의 일류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멀리 미국의 재즈퓨전, 스무드 재즈를 자양분으로 삼았다는 음악에 실어낸 바로 여기, 한국의 감성이다. 당김음과 긴장음이 지뢰밭처럼 곳곳에 매설돼 출렁이는 차갑고 정교하며 세련된 재즈적 향취. 그 위로 도시나 고향, 또는 그 사이를 잇는 기차 같은 정경이 얹힌다(‘오랜만에’, ‘춘천 가는 기차’, ‘동네’). 덜컹대는 대신 부드럽게 올라탄다. 화성과 악기에 대한 박식을 뽐내 동료들을 때려눕히기보다 김현철은 그것들을 이용해 하고 싶은 이야기, 자아내고픈 분위기를 전하는 데 골몰한다.



‘춘천 가는 기차’는 그 백미다. 퍼커션, 플루트, 비브라폰, 신시사이저가 은밀히 조성해가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보사노바 리듬, 섬세하게 변해가는 화성…. 이런 음악적 설계도의 촘촘한 모눈은 춘천행 기차가 북한강을 끼고 눈 내린 철길 위를 달리는 정경을 그린 노랫말과 선율의 곡선을 방해하기는커녕 자기 모습을 숨긴 철골 구조처럼 든든히 뒷받침한다.


김희현, 손진태, 조동익, 함춘호 같은 당대의 연주자들 역시 이 새로운 모델의 열차에 목이 마르다는 듯, 기다렸다는 듯이 올라탔다. 유려한 연주를 한껏 뿌려댄다. 이 음반은 그렇게 대중가요의 발전도상에서 하나의 변곡점이자 명장면이 된다. 수록곡의 절반이 5분대, 대부분이 4분40초 이상이지만 곡마다 긴장감이 이어지는 것은 김현철의 짜임새에 명인들의 연주가 더해진 덕분이다.


작사, 작곡, 편곡을 모두 스스로 해낸 약관의 김현철은 국내 최고의 스튜디오(서울스튜디오)에서 최상급 세션 연주자들을 지휘하며 음반을 만들었다. 프로듀서까지 자임한 것이다. 연장자들로 이뤄진 콧대 높은 거대 음반 산업의 현장에서 약관의 젊은이가 지휘봉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이 음반이 표현해야 하는 모든 것을 오직 김현철만이 알고 있음을 모두가 인정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김현철 1집은 하나의 앨범을 하나의 화폭으로 여기게 할 만한 최적의 흐름을 보여준다. 첫 곡 ‘오랜만에’가 밤의 도시를 그려내며 만들어낸 설레는 분위기는 눈(‘눈이 오는 날이면’, ‘춘천 가는 기차’), 아침(‘아침 향기’), 비(‘동네’, ‘비가 와’) 같은 시공간적 소재를 차례로 통과한다. 그리고 ‘형’에 닿는다. 삶을 마주한 혼란, 위로에 대한 기대에 대한 고백의 발라드를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기나긴 길의 끝을 아련하게 칠해버린다.


최근 일본과 세계에서 옛 시티팝(city pop)을 발굴하는 물결 속에 이 음반도 먼지를 털고 조명 앞에 서는 분위기다.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는 김현철과 빛과소금의 음반을 일본 시티팝 애호가도 선망하는 앨범들로 꼽는다.


봄여름가을겨울, 빛과소금의 음악이 꿈틀대던 시기에 김현철은 솔로 싱어송라이터이자 음악감독으로서 우뚝 섰다. 장필순, 이소라의 작곡가, <그대 안의 블루>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 <시월애>의 영화음악 감독으로 세련되며 감성적인 우리 음악의 외연을 넓혔다. <사랑하기 때문에>(1987)만을 남기고 요절한 유재하의 빈 자리에 김현철은 이렇게 들어왔다.


추천곡 ‘동네’ | 보컬부터 건반, 기타, 베이스기타, 드럼까지 당김음의 파도가 넘실대는 곡. 특히 브리지 부분(‘내가 걷는 거리 거리 거리마다/ 오 나를 믿어왔고 내가 믿어가야만/ 하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의 보컬 리듬이 드럼과 엇나가고 겹치면서 ‘ㄱ’ ‘ㄹ’, ‘ㄴ’ ‘ㅁ’, ‘ㅅ’ ‘ㄹ’이 반복하는 모양새가 예쁘다. 해사하게 넘실대는 건반 솔로는 물론 후반부 김현철의 위악적인 스캣마저도 이 곡의 선을 돋보이게 할 뿐이다.


임희윤/동아일보 기자



19위 듀스 〈Force Deux〉(1995)


전문가 리뷰 | 듀스와 서태지와 아이들은 호사가들에 의해 곧잘 비교대상이 된다. 활동시기도 비슷했고 추구하는 음악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구하는 음악이 비슷했다’는 말은 큰 틀에서만 맞는 말이다. 타이틀곡이나 유명한 노래만을 살펴보았을 때만 그렇다. 조금만 더 세세하게 파고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마디로, 흑인음악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듀스는 ‘장르에 속한 그룹’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니었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은 ‘난 알아요’, ‘하여가’, ‘Come Back Home’ 같은 노래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서태지의 뿌리는 모두가 알 듯 ‘록’이었다. 듀스와 달리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들은 여러 장르로 들쭉날쭉했다.



또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이후 솔로로서 쌓은 서태지의 커리어는 듀스의 해체 이후 솔로로서 쌓은 이현도의 커리어와 장르적으로 명확히 대비된다. 서태지는 랩과 힙합을 시기적절하게 잘 ‘활용’했지만 흑인음악을 향한 장르 뮤지션으로서의 자의식과 애정은 그다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당연히 음악적 ‘우열’을 의미하진 않지만 한국힙합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는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대중적으로 더 성공하고, 음반을 더 많이 판 쪽은 서태지와 아이들이지만 한국힙합의 음악적 ‘적자’는 듀스가 되는 것이다.


이현도는 흑인음악을 향한 장르 뮤지션으로서의 자의식과 애정이 서태지보다 훨씬 강한 인물이었다. 이것은 진정성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성취의 영역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Go! Go! Go!’에서는 한국말 라임의 진보를 이루어냈고, ‘무제’에서는 랩 특유의 ‘언어유희’를 한국말로 시도했다. 한편 ‘나를 돌아봐’와 ‘우리는’은 뉴잭스윙을 온전히 차용하면서도 위화감 없이 완성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듀스의 세 번째 앨범 〈Force Deux〉는 정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듀스는 앨범을 낼 때마다 발전한 그룹이었다. 두 번째 앨범 〈Deuxism〉은 데뷔 앨범 <나를 돌아봐>의 확장·강화판이었다. 한편 리믹스 앨범 〈Rhythm Light Beat Black〉은 앞선 두 앨범의 노래들을 (당시를 지배하던 흑인음악 사운드를 활용해) 모두 엎어버리고 다시 만든 작품이었다. 그리고 〈Force Deux〉는 앞선 모든 결과물을 ‘과정’으로 만들어버린다.


‘굴레를 벗어나’를 가리켜 ‘나를 돌아봐’와 ‘우리는’의 최종진화형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Tuff Ruff Ver.’의 흘러넘치는 ‘멋’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상처’, ‘의식혼란’, ‘Nothing But A Party’도 마찬가지다. 이 노래들은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듀스가 이미 보여준 여러 스타일 위에서 최대한의 밀도를 성취한다. 이현도 특유의 R&B 발라드는 또 어떤가. 어서 ‘다투고 난 뒤’와 ‘사랑하는 이에게’를 들어보자.


듀스의 활동기간이 짧았던 건 지금 돌아봐도 아쉽다. 하지만 듀스는 성장과 발전만을 보여준 그룹이었다. 그들은 패기와 재능으로 남들보다 앞서서 많은 것을 이뤄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듀스는 한국힙합의 정신적 고향이 되었다.


추천곡 ‘상처’ | ‘굴레를 벗어나’는 듀스가 그동안 내세워온 타이틀곡과 궤를 같이 하는 노래였다. 뉴잭스윙을 온전히 차용하면서도 위화감 없이 완성한 ‘나를 돌아봐’와 ‘우리는’의 최종진화형쯤 되는 노래랄까. 하지만 〈Force Deux〉의 하이라이트는 ‘상처’였다. 물론 관점에 따라 두 노래의 사운드를 엇비슷하게 묶어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성재가 반주 없이 솔로로 노래 부르는 ‘상처’의 도입부는 ‘굴레를 벗어나’와의 결정적인 차별점인 동시에 김성재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 노래를, 아니 홀로 공명하는 김성재의 육성을 뮤직비디오와 함께 기억한다.


김봉현/음악평론가





첫방에서 보는 이들을 ‘혼돈 속의 그대’로 만든 명곡

한국 대중음악 명반 21~30위


21위 노이즈가든 〈Noizegarden〉(1996) - 소리의 충격으로 기억될 한국 록의 이정표

22위 서태지와 아이들 〈Seotaiji And Boys(1집)〉(1992) - 한국 대중음악사의 흐름을 바꾼 바로 그 앨범

23위 송골매 〈송골매 II〉(1982) - 대중을 사로잡은 하드록 명반

24위 김광석 〈다시부르기 II〉(1995) - 원곡의 인기마저 넘어선, 한국 포크 명곡들의 재해석

25위 조동진 <1집>(1979) - 한국 포크를 묵묵히 지킨 거목의 빛나는 데뷔 앨범

26위 노브레인 <청년폭도맹진가>(2000) - 조선 펑크 최고작이자 한국 인디신의 걸작

27위 신촌블루스 〈신촌 Blues II〉(1989) - 작품성과 인기를 동시에 거머쥔 한국 블루스 대표 명반

28위 조용필 <조용필 7집>(1985) -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응축한 ‘가왕’의 대표작

29위 정태춘 박은옥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 - 음반 사전검열제 철폐를 이끌어낸 앨범

30위 이소라 <눈썹달>(2004) - 프로듀서, 보컬리스트, 작사가 이소라의 최고의 성취



22위 서태지와 아이들 <Seotaiji And Boys(1집)>(1992)


전문가 리뷰 | 록 그룹 시나위의 베이시스트 출신 서태지가 댄서로 활동 중이던 양현석과 이주노를 규합하여 결성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국 대중음악계에 던진 충격은 대단했다. 이전까지 국내에서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음악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뉴 잭 스윙(New Jack Swing), 힙합, 유로 댄스, 테크노, 팝 발라드 등 여러 장르가 뒤섞였고, 그 위엔 랩이 얹혀 있었다. 국외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창구가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당시 이들의 음악은 대중과 평단을 비롯한 기성 가수들에게도 신선함과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안겼다.



이 모든 충격과 환희의 시작이었던 <1집>은 그해 최고의 화제작이자 문제작이었다. 일단 전면에 부각한 랩부터 엄청난 논란과 환호를 불러왔다. 리더 서태지는 미국 뉴욕의 게토에서 십수 년 전 탄생한 이 혁신적인 보컬 형식을 그들의 음악에 이식하고 대중 앞에 펼쳐보였다. 물론, 스타일적으로나 가사적인 부분에서의 온도차는 컸다. 또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국내에서 최초로 랩을 시도한 것도 아니었다. 홍서범, 김완선, 신해철 등이 그보다 앞서 랩을 선보인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에서 랩은 낯선 장르였다. 심지어 랩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도 수두룩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서태지가 택한 노선이다. 그는 미국에서 한창 메이저 장르로 발돋움하던 힙합에서 랩을 가져오되 프로덕션적으론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다. 리듬 파트와 4마디 루프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던 당대 힙합 사운드와 달리 유로 댄스, 테크노, 뉴 잭 스윙 등의 장르를 랩과 결합시키는 데 주력했다. 더불어 “환상 속의 그대” 한 곡을 제외하고는 반드시 노래 파트를 삽입하고 멜로디를 부각하면서 대중과의 접점을 꾀한 점이 눈에 띈다.


결과적으로 <1>집엔 그룹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다양한 스타일과 무드의 곡이 담겼다. 돌이켜보면, 넉 장의 정규 앨범 중 제일 대중친화적이기도 하다. 미 올드 스쿨 힙합에서 간간이 들을 수 있었던 일명 ‘랩 러브송’ 특유의 나긋나긋한 랩과 팝 발라드 감성을 버무린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80년대 후반의 뉴 잭 스윙 사운드를 추구한 ‘이 밤이 깊어가지만’, 강렬한 테크노 비트 위로 후렴구까지 랩으로 꽉 채운 ‘환상 속의 그대’ 등은 앨범의 하이라이트이자 서태지의 음악적인 감각이 빛난 곡이다.


다만, 가장 크게 사랑받은 타이틀곡 ‘난 알아요’는 꼭 재평가하고 넘어가야 한다. 방송에서 첫 선을 보였을 당시 현장에 있던 모든 이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을 만큼 파격적인 감흥을 전한 이 곡은 그룹이 해체한 이후, 뒤늦게 특정곡을 베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지목된 곡은 독일 출신의 듀오, 밀리 바닐리가 1988년에 발표한 ‘Girl You Know It's True’다. 실제로 두 곡은 (서태지의) 노골적인 레퍼런스 수준으로 유사하다. 원저작권자의 소송을 비롯한 법적인 절차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표절이라고 할 순 없지만,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손 꼽는 ‘천재 아티스트’로 대우받는 현실을 고려하면, 매우 씁쓸해지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본작이 한국 가요계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추천곡 ‘이 밤이 깊어가지만’ |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에 이은 후속곡으로 80년대 후반의 뉴 잭 스윙 사운드와 가요 발라드 특유의 감성이 잘 조화를 이루었다. 앨범에서 블랙뮤직 장르의 문법을 가장 충실히 따른 곡이기도 하다. 특히, 보컬 샘플과 스크래칭 샘플을 적재적소에 삽입한 것은 당시 매우 신선하고 세련된 시도였다.


강일권/음악평론가



30위 이소라 <눈썹달>(2004)


전문가 리뷰 | <눈썹달>이 나오기 8년 전, 두 번째 앨범 <영화에서처럼>(1996)에는 ‘Produced by 이소라’라는 표기가 있었다. 이소라의 시작엔 좋은 프로듀서들이 있었다. 그가 대중에게 처음 목소리를 들려준 ‘낯선 사람들’에는 고찬용이라는 훌륭한 리더 겸 프로듀서가 있었고, ‘낯선 사람들’에서의 활약을 지켜본 김현철은 프로듀서로 나서 그를 솔로가수로서 성공시켰다. 이런 시작 때문인지 많은 이들이 간과하지만 이소라는 일찍부터 자신의 앨범을 스스로 책임져왔다. 4집 <꽃>(2000)에서 다시 김현철이 프로듀서를 맡은 적이 있지만 2집에서 처음 앨범을 구상하고 기획한 뒤부터 단순히 가수를 넘어 프로듀서 이소라로서도 경력을 쌓아왔다.



프로듀서의 역할은 무척이나 많겠지만 ‘프로듀서 이소라’는 먼저 자신에게 맞는 곡을 줄 작곡가를 찾는 데 집중했다. 3집 <슬픔과 분노에 관한>(1998)이나 5집 Sora's Diary(2002)는 일종의 징후였다. 신대철과 김태원 같은 ‘헤비메탈’ 밴드 출신과 작업하는 이소라를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른바 ‘고급가요’의 범주에서 벗어나 이한철, 김민규(스위트피), 조윤석(루시드폴) 등 새로운 얼굴들에게 곡을 받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소라는 자신이 구상하는 앨범에 필요한 인물을 찾고 거기에 맞는 곡을 받았다. 신대철과 이한철, 김민규는 이후에도 이소라의 앨범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렸다. 무엇보다 이 작업은 계속해서 당대의 음악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인디신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의 음악과 경력을 갱신해나갔다. 그 음악과 경력의 가장 빛나는 지점에 <눈썹달>이 있다.


<눈썹달>에서 이소라는 앞서 언급한 신대철, 이한철, 김민규 말고도 이승환(스토리), 강현민, 정재형, 정지찬 등이 만든 노래를 불렀다. 이승환과 강현민이 만든 훌륭한 팝 발라드 사이에서 김민규와 이한철은 신선한 정서를 앨범에 불어넣었고, 신대철과 정재형은 마치 트립합이나 영화음악 스코어 같은 트랙으로 분위기를 환기한다. 익숙한 형식의 발라드로 시작해 더 넓은 세계를 그려나간다. 각기 다른 스타일과 정서를 갖고 있지만 ‘앨범’의 범주에서 튀는 곡은 없다. 이소라는 단 한 곡의 노래도 만들지 않았지만 완벽하게 노래를 배치하고 앨범을 통제했다.


여기까지가 프로듀서 이소라의 역할이었다면 ‘보컬리스트 이소라’는 실질적으로 이 다양함을 하나의 흐름으로 만든다. 이소라의 목소리는 ‘호소력’이라는 쉽고 뻔한 수식을 뛰어넘는다. <Fortuneteller>에서 이소라는 마치 샹송처럼 노래하기도 하고, <Siren(세이렌)>에선 허밍만으로 긴장감을 유지한다. <바람이 분다>에서 들려주는 극적인 절창과 쓸쓸히 운 듯 노래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는 이별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듯하다.


이별이라는 주제 아래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한 이야기들을 기품 있게 적어 내려간 ‘작사가 이소라’의 역할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덕분에 우리는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같은 아름다운 이별의 문장을 얻을 수 있었다. 프로듀서 이소라, 보컬리스트 이소라, 작사가 이소라는 각자의 자리에서, 또 하나가 되어 <눈썹달>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루었다. “가늘게 솟아오른 눈썹달”과 “이렇게 여윈 나”는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추천곡 ‘바람이 분다’ | 나직이 “바람이 분다”로 시작하던 노래는 “사랑은 비극이어라”란 회한으로 마무리된다. 극적인 곡의 구성과 악곡도 뛰어나지만 이를 더 빛나게 하는 건 이소라가 ‘서러운 마음’으로 써내려간 노랫말이다. 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노랫말로도 꼽히는 이 노랫말은 보편적인 언어로 이별마저도 기품 있게 그려냈다. 최고의 노래이며 동시에 최고의 노랫말이다.


김학선/음악평론가





한국 대중음악 명반 31~40위


31위 H2O <오늘 나는>(1993) - 한국 록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파격적 작품

32위 김수철 <작은거인 김수철(1집)>(1983) - 못다 핀 꽃 한 송이, 활짝 피다

33위 삐삐밴드 <문화혁명>(1995) - 사람들의 뒤통수를 후려친 도발적 혁명

34위 시나위 <Heavy Metal Sinawe(1집)>(1986) - 한국 정통 헤비메탈의 시작점

35위 봄여름가을겨울 <1집>(1988) - 퓨전재즈를 가요에 본격 도입한 앨범

36위 가리온 (2004) -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전설의 시작

37위 마그마 <Magma>(1981) - 한국 헤비메탈의 효시

38위 동물원 <동물원 1집>(1988) - 평범해서 특별한, 청춘과 일상의 사운드

39위 디제이 소울스케이프 <180g Beats>(2000) - 한국 힙합 디제이 선구자의 데뷔작

40위 유앤미블루 <Cry.... Our Wanna Be Nation!>(1996) - 한국 모던록의 가능성을 증명한 앨범






33위 삐삐밴드 <문화혁명>(1995)


전문가 리뷰 | 진정 문화혁명이었다. 시나위와 H2O 출신의 달파란(강기영), H2O 출신의 박현준, 그리고 신인 보컬리스트였던 이윤정으로 이루어진 삐삐밴드는 당시 가요계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음악으로 많은 사람들의 뒤통수를 때렸다. 1992년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한국의 가요계는 과거에 비해 좀더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직된 분위기가 유지되었으며, 당시 가요계는 싱어송라이터들이 이끌던 팝발라드, 중장년층을 넘어 ‘가요톱텐 1위곡’을 곧잘 배출하곤 했던 트로트, 서태지와 아이들로 인해 촉발한 10대 위주의 댄스뮤직으로 천하삼분지계가 일어난 시점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95년 ‘갑툭튀’한 삐삐밴드는 하나도 진지해 보이지 않고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낯섦으로 ‘순진한’ 가요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90년대 중반은 메인스트림 가요뿐만 아니라 홍대를 중심으로 발화한 인디음악 신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시기이며, 특히 펑크(Punk)는 당시 인디를 상징하고 정의하는 최전선 장르였다. 그런 펑크를 메인스트림 음악 신에 툭 내던진 앨범이 바로 삐삐밴드의 데뷔작 <문화혁명>이며, 실제로 삐삐밴드는 경직된 대한민국의 문화 시스템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기 위한 문화기획 성격도 포함하고 있었다.


<문화혁명>은 음악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앨범이지만, 이 음반의 가치는 작품 전반에 흐르는 이들의 방향성, 자세, 도전에 더 많은 의미를 둘 수 있다. 즉, ‘안녕하세요’, ‘딸기’, ‘슈퍼마켓’, ‘요즘 애들 10계명’ 등 개성이 듬뿍 묻어나는 제목과 가사들은 단순하고 꾸밈없는 내용으로도 음악을 만들고 발표할 수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해주었고, ‘가수’라고 하기엔 노래를 정말 너무 막(?) 부르고 못(?) 부르는 이윤정의 보컬은 대중들에겐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목소리였던 셈이다. 1990년대 중반 홍대에서 인디 신이 나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생태계를 형성할 수 있던 계기에는 삐삐밴드의 충격요법도 일정 부분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문화혁명>으로 소기의 목적인 ‘문화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삐삐밴드는 이듬해 좀더 전자음악의 비중을 높인 <불가능한 작전>을 공개했고, 이 앨범 역시 데뷔작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대중음악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게 된다. <문화혁명>에서는 비교적 무난한 ‘안녕하세요’로 대중의 간을 봤다면, <불가능한 작전>에서는 ‘유쾌한씨의 껌 씹는 방법’으로 당차게 정면승부를 벌였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삐삐밴드는 이후 이윤정이 탈퇴하고 고구마(권병준)가 가입하며 삐삐롱스타킹으로 이름을 바꿔 2기 활동을 맞이했지만, 당시 출연했던 음악방송에서 카메라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고 렌즈에 침을 뱉는 퍼포먼스로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해당 방송사로부터 영구적으로 출연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삐삐롱스타킹은 해체하였다.)


추천곡 ‘딸기’ | <문화혁명>에서 싱글로 내세워 당시 TV에서 삐삐밴드가 들려주었던 곡은 ‘안녕하세요’였지만, 이들의 ‘돌아이’ 감성을 제대로 표출한 곡은 ‘딸기’다. 시종일관 “딸기가 좋아”라며 난데없이 딸기 예찬을 펼치다 끝나는 이 곡은 펑크(Punk) 그 자체에 가장 충실한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어른들 눈치보지 말고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하자”는 의중이 딱 느껴진달까? 이런 정서는 <불가능한 작전>의 ‘슈풍크’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김봉환 / 벅스 콘텐츠 기획자




34위 시나위 <Heavy Metal Sinawe(1집)>(1986)


전문가 리뷰 | “그대는 몰라 진실한 음악을/ 그대는 몰라 즐거운 음악을” 시나위의 노래 ‘젊음의 록큰롤’의 가사 중 일부다. 저때는 저랬다. 헤비메탈이라는 장르는 1986년 당시 한국에서 가장 ‘힙’한 음악이었다. 나만 알고 있기 너무 아쉬워서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었다. 당시 젊은이들의 마음을 충동질하는 진실하고 즐거운 사운드의 절정이 바로 헤비메탈이었던 것이다. 이 땅에 그 헤비메탈의 꽃을 피운 시작점이 바로 시나위의 역사적인 1집 <Heavy Metal Sinawe>다.


무엇이 그렇게 젊은이들의 마음을 충동질했을까? 시대를 막론하고 ‘증폭된 사운드’는 젊은이들의 몸과 마음을 움직여왔다. 척 베리의 로큰롤이 그랬고, 레드 제플린의 하드록이 그랬으며 메탈리카의 스래시메탈이 그랬다. 지금은 EDM이 그것을 대체하고 있다. 다프트 펑크와 스크릴렉스의 전자음악이 록페스티벌의 관객을 뛰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약 30년 전, 헤비메탈은 컴퓨터의 힘을 빌리지 않은 인간의 육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증폭된 사운드였다. 그것을 한국에서 거의 처음으로 현실화시킨 것이 바로 시나위다.



1980년대는 억압된 시대였다. 민주주의의 물꼬가 트이기 전이었고 대중음악의 종류도 다소 한정적이었다. 정치적인 억압 때문에 대중의 취향이 다변화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때문에 영미권처럼 장르 음악이 발전할 리 만무했다. 이미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모던포크, 록, R&B 계열의 실력파 아티스트들이 대거 구속·수배되면서 대중음악의 맥이 끊겼다. 방송에서는 트로트 등의 나긋나긋한 음악만 남았다. 젊은이들의 음악이 거세된 것이다. 이때 한국은 다양한 장르 음악이 꽃피울 수 있는 시기를 놓쳐버렸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 80년대 중반,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에 헤비메탈 밴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나위, 부활, 백두산, 작은하늘 등의 밴드들이 자웅을 겨루며 밴드 붐의 분위기를 형성해나갔다. 거기에 첫 깃발을 꽂은 것이 바로 시나위 데뷔앨범 <Heavy Metal Sinawe>였다. 새로운 음악에 목말라 있던 젊은 층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는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이 앨범의 성공으로 시나위는 아이돌그룹을 방불케 할 만큼 팬덤을 지닌 인기 록밴드로 자리하게 된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 ‘그대 앞에 난 촛불이여라’는 당시 각종 음악차트에서도 상위권에 올랐다. 이처럼 <Heavy Metal Sinawe>가 대중적으로 성공하면서 가요 제작자들은 메탈 밴드에게 눈을 돌리게 된다. 이로써 80년대 후반 헤비메탈은 가요계에서 일정한 지분을 차지하게 됐고, 더 나아가 가요 트렌드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Heavy Metal Sinawe>는 한국 록의 영원한 송가 ‘크게 라디오를 켜고’로 그야말로 호쾌하게 시작한다. 음질은 다소 조악하지만 신대철의 호방한 기타와 임재범의 남성적인 보컬은 그러한 음질을 충분히 뚫고 나올 정도로 위력적이다. ‘그대 앞에 난 촛불이여라’는 가요의 감성에 기대지 않고 동시대 영미권 메탈 발라드의 품격을 재현한 결과물이었다. 거칠게 달려가는 ‘남사당패’, ‘젊음의 록큰롤’은 그야말로 당시 열악한 가요계를 정면 돌파하는 전형적인 헤비메탈 넘버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이 음반은 헤비메탈이 지닌 여러 미학을 골고루 보여주고 있다.


시나위 1집은 열악한 레코딩 환경에서 녹음됐다. 신대철에 의하면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비롯한 수록곡 대부분이 보름 만에 작곡됐다. 또한 메탈 앨범 녹음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사흘 만에 원테이크로 녹음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제한적인 환경에서 마스터피스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신대철과 임재범이라는 두 거대한 봉우리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은 헤비메탈이라는 산을 오르기 위한 두 개의 높은 벽(성량, 연주력)을 한 방에 부숴버렸다. 신중현의 아들로서 천재 기타리스트로 불렸던 신대철, 그리고 당시 가요계에서 독보적인 성량을 구사한 불세출의 보컬리스트 임재범의 만남이 없었다면 이런 위력적인 앨범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둘의 만남은 길진 않았지만,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날카로운 순간을 만들어냈다.


추천곡 ‘크게 라디오를 켜고’ |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시나위를 상징하는 곡이자 한국 헤비메탈의 영원한 송가로 꼽힌다. 헤비메탈의 어법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시나위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준 이 곡은 영미권 메탈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한 흔치 않은 사례로 평가해볼 수 있다. 기존 가요의 감성에 기대지 않고 순수하게 헤비메탈 사운드가 주는 쾌감으로 대중을 사로잡은 거의 유일한 노래이기도 하다.


권석정 / 카카오엠 피디





한국 대중음악 명반 41~50위


41위 낯선 사람들 <낯선 사람들>(1993) - 고찬용, 이소라의 존재를 알린 재즈 보컬 그룹의 데뷔작

42위 이문세 <5집>(1988) - 이문세와 이영훈의 시간을 견디는 ‘고전’들의 향연

43위 빛과소금 <빛과소금>(1990) - 가요에 퓨전재즈를 접목해 대중적으로 성공한 앨범

44위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를 찾는 사람들 2>(1989) - 민중가요의 대중화라는 성취를 이뤄낸 히트작

45위 아소토 유니온 <Sound Renovates A Structure>(2003) - 한국에서 꽃핀 블랙뮤직의 선구자

46위 롤러코스터 <일상다반사>(2000) - 애시드 재즈를 흡수한 세련된 음악들

47위 작은거인 <작은거인 2집>(1981) - 김수철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밴드 앨범

48위 조동익 <동경>(1994) - 조동익이 팻 메시니에게 보내는 작별인사

49위 동물원 <두 번째 노래모음>(1988) - 가요 역사상 가장 강한 생명력을 지닌 앨범

50위 언니네 이발관 <가장 보통의 존재>(2008) - 인디의 시작을 알린 밴드가 가장 끝까지 간 결과물




42위 이문세 <5집>(1988)


전문가 리뷰 | 작곡가 이영훈은 하루에 커피 40잔을 마시고 담배를 4갑 피우면서 흰 벽 앞에 피아노만 놓고 작곡을 했다고 한다. 하나의 모티브를 정교하게 확장하고 변주하기 위해 몸과 정신을 혹사하며 몰두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한 음 한 음에 고뇌를 담은 끝에 이문세의 아름다운 명곡들이 탄생했다. 이문세 전성기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5집은 이영훈이 전곡을 작사·작곡했다.



5집이 명작인 이유는 그 자체 완성도로도 충분히 뒷받침되지만 시간이 증명해주기도 했다. 광풍에 가까울 정도로 거셌던 이문세 리메이크 열풍 와중에 이 앨범에 수록된 ‘광화문 연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붉은 노을’은 특히 사랑받았다. ‘광화문 연가’는 이수영의 리메이크 앨범 〈Classic〉에 수록되며 이문세 다시 부르기 붐을 촉발했고,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은 〈슈퍼스타K〉에서 장재인이 불러 지금 세대에게도 애창곡이 됐으며, ‘붉은 노을’은 빅뱅이 다시 불러 엄마와 딸이 동시에 좋아하는 세대 관통 히트곡이 됐다. 다른 취향의 세대에게 통했다는 것은 원석의 완성도가 뛰어났다는 뜻이다. 빛 바래지 않고 꾸준히 찬사받는 이런 음악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명작’의 다른 말이다.


재평가 끝에 전설로 거듭난 측면도 있지만 당대에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무려 258만 장을 판매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8년 <한겨레> 보도를 보면 가격을 통상 3300원보다 25% 비싼 4000원을 받아 소매상들이 불매 운동까지 벌였으나 그에 아랑곳 않고 불티나게 팔렸다. 정규 앨범이라도 한 두 곡만 히트하고 마는 당시 분위기를 역행해 대부분의 수록곡이 사랑받기도 했다. 1986년부터 골든 디스크 상을 수상했고 당시 최고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 디제이까지 맡고 있던 이문세는 5집으로 커리어 정점을 찍으며 아성 조용필에 필적할 인기를 누렸다.


당시를 살았던 세대들은 “왜 그렇게 그 음반이 좋았냐”는 질문에 “마치 팝을 듣는 것 같았다”고 답한다.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우직한 정통 팝 선율, 우수에 젖은 분위기 있는 보컬, 여기에 시적인 가사까지 더해지며 팝에 버금가는 세련됨의 비교우위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조금씩 감지되는 재즈와 클래식의 영향도 한층 깊은 발라드가 나타났다는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대가 느끼는 이 음반의 특별함은 조금 다른 느낌의 세련됨일 것이다. 가곡처럼 쉬운 멜로디와 손편지 같은 시적 가사는 잠시 두고온 순수 혹은 정통성의 회복 같은 느낌을 줄 것이다. 유독 리메이크로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도 이처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정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색창연하나 완성도를 반박할 수 없는 옛 음악을 들으며 그 시대의 소박함과 위대함을 추억하는 것이다.


이문세와 이영훈 말고도 이 앨범에서 꼭 기억해야 할 이름이 있다. 김명곤이다. 이영훈은 생전 인터뷰에서 “사실 이문세 성공은 저와의 콤비가 아니라 김명곤 선배까지 트리오의 결실이라고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전곡의 편곡을 맡았다. 앨범에 자주 등장하는 신시사이저 스트링 연주는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한다.


추천곡 ‘광화문 연가’ | 원석이 아름답기 때문인지 시간이 지나도 꾸준히 리메이크되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발라드 중 하나가 됐다. 외피를 감싼 고색창연한 사운드가 오히려 낭만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악보가 가진 선율의 매력이 드높은 곡이다. 광화문이란 친숙한 소재로 공감대를 건드리면서도 시적 여운이 남는 가사는 작곡가 이영훈의 작사 능력도 증명한다. 5집을 대표하는 곡이자 1980년대 가요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다.


이대화/음악평론가




43위 빛과소금 <빛과소금>(1990)


전문가 리뷰 | 보통 빛과소금, 그리고 이들의 데뷔작을 얘기할 때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부터 얘기하게 된다. 김현식은 대중에게 ‘비처럼 음악처럼’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가수이지만 사실 그는 1986년 엄청난 밴드를 결성해 음악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김현식은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5인조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는데, 김현식(보컬), 김종진(기타), 전태관(드럼), 장기호(베이스), 유재하(키보드)가 그 주인공이다. 김종진과 전태관은 우리가 흔히 봄여름가을겨울 하면 떠올리는 바로 그 낯익은 두 얼굴이며, 장기호는 지금 소개하는 빛과소금의 창단 멤버이자 MBC <나는 가수다>의 음악감독으로 나와 방송에서 탈락자를 호명하던 바로 그 인물이고, 마지막 유재하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담긴 희대의 가요명반 한 장을 남기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천재 싱어송라이터이다. 다섯 멤버 중 누구 하나 빠짐 없이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봐도 우리나라에 이런 슈퍼밴드가 또 존재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팀이 빛과소금의 모체가 되었던 셈이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 2년이라는 짧은 기간만 활동하고 해체한 이후, 김종진과 전태관은 2인조 편성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의 이름을 이어나가 수많은 히트곡들을 만들었고, 유재하는 솔로로 데뷔했다. 장기호는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 해체하기 이전 유재하가 제일 먼저 팀을 탈퇴했을 때 그의 후임으로 들어왔던 키보디스트 박성식과 함께 봄여름가을겨울을 나와 당시 빅그룹으로 통했던 사랑과 평화에 가입한다. 하지만 장기호와 박성식은 당시 퓨전재즈를 좋아했고 사랑과 평화는 펑크(Funk) 사운드를 추구한 팀으로, 본인들의 감성과 사랑과 평화는 다소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팀을 나와서 기타리스트인 한경훈과 함께 빛과소금을 결성한다.


빛과소금은 퓨전재즈를 보컬과 엮어 대중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신선하고 세련된 음악을 선보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장르음악이 활성화되던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온전히 연주만으로 앨범 전체를 채울 수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과소금은 데뷔 앨범에 장기호, 박성식, 한경훈 세 멤버가 각자 작곡을 주도하여 본인의 특성이 잘 나타난 연주곡을 무려 3곡이나 담기도 했다. 보컬 중심의 가요 앨범에 연주곡을 3곡이나 수록했다는 건 당시로선 꽤나 놀라운 일.


역시 대중적인 반응은 연주곡보다는 보컬곡에서 왔다. 앨범의 3번 트랙으로 자리한 ‘샴푸의 요정’이 홍학표, 채시라 주연의 MBC 베스트극장 단막극 <샴푸의 요정> 주제곡으로 쓰이며 방송에 소개되는 행운을 얻게 된 것. 단막극이긴 했지만 워낙 많은 인기를 얻은 프로그램이라서 ‘샴푸의 요정’은 방송이 끝난 후에도 라디오를 통해 꾸준히 흘러나왔고, 이외에도 ‘그대 떠난뒤’, ‘슬픈 인형’처럼 뛰어난 멜로디가 돋보이는 보컬트랙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빛과소금은 1990년 데뷔 앨범을 발매한 이후 1996년까지 총 5장의 정규 앨범과 1장의 언플러그드 앨범을 발매했으며, 음악사적으로는 바로 이 데뷔 앨범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전한다. 한때 한 솥밥을 먹었던 봄여름가을겨울과 함께 한국에 퓨전재즈를 가요화하여 소개했던 최전선 팀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특히 싱어송라이터 음악이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도록 1990년대의 시작을 본격적으로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빛과소금이라는 이름은 기독교 신앙이 깊은 장기호와 박성식이 성경에 나오는 비유에서 따온 말이며, 앨범에 ‘Beautiful’ 같은 성가곡을 수록한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다.


추천곡 ‘샴푸의 요정’ | 사랑과 평화 4집에서 먼저 선보였던 곡.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해체 이후 장기호와 박성식이 잠시 사랑과 평화에 가입했을 때 ‘샴푸의 요정’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랑과 평화의 음악 스타일이 본인들의 감성과 다름을 인지한 두 사람은 곧 팀을 나와 빛과소금을 결성하고 ‘샴푸의 요정’을 다시 발표한다. 마침 빛과소금 버전 ‘샴푸의 요정’이 TV 드라마에 흘러나오는 기회를 잡으면서 그때부터 대중은 사랑과 평화 버전보다 빛과소금 버전을 훨씬 좋아하게 되었다.


김봉환/벅스 콘텐츠 기획자






한국 대중음악 명반 51~60위


51위 크래쉬 〈Endless Supply Of Pain〉 (1994) - 한국 헤비메탈 역사를 다시 쓴 기념비적 작품

52위 서태지와 아이들 〈Seotaiji And Boys II〉 (1993) - 아이돌 이미지를 벗고 아티스트로 도약한 발판

53위 장필순 〈Soony 6〉 (2002) - 지금도 신선하게 들리는 서늘한 기운

54위 시인과 촌장 <숲> (1988) - 70년대 한국 포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성취

55위 조용필 <대표곡 모음(1집)> (1980) - ‘가왕’이라는 신화의 출발선

56위 이센스 〈The Anecdote〉 (2015) - 대중과 평단 모두 사로잡은 한국 힙합 대표 명반

57위 신해철 〈Myself〉 (1991) - 신해철 음악세계의 진정한 시작

58위 김정미 〈Now〉 (1973) - ‘신중현’표 사이키델릭의 독보적 결과물

59위 부활 〈Rock Will Never Die / 부활 Vol.1〉 (1986) - 소녀 팬들을 열광시킨 ‘희야’의 탄생

60위 디제이 디오시 〈The Life… DOC Blues 5%〉 (2000) - 가요 역사상 가장 대담한 도발


52위 서태지와 아이들 <Seotaiji And Boys II>(1993)


전문가 리뷰 | 서태지와 아이들은 데뷔 앨범 한 장으로 한국 대중음악계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트로트, 포크, 발라드 등 성인 취향 가요가 득세하던 대중음악계는 이 앨범을 기점으로 댄스 뮤직 중심으로 재편되며 10~20대에게 주도권을 넘겨준다. 대중음악계를 넘어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부상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다음 앨범에서 어떤 음악과 안무를 선보일지는 전 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앨범 발표 전까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 전략은 새로운 앨범에 대한 기대감과 궁금증을 더욱 부풀렸다. 록을 전면에 내세우며 다양한 장르를 과감하게 결합한 두 번째 앨범은 데뷔 앨범보다 더욱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이 한 때의 바람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이 앨범을 통해 서태지와 아이들은 한국 대중음악계에 신드롬을 넘어 길이 남을 신화로 자리매김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 서태지는 데뷔 앨범의 성공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음악적 야심을 펼칠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또한 서태지는 직접 기획사까지 설립해 모든 활동의 주도권을 쥐며 혹시라도 불지 모를 외풍을 차단했다. 데뷔 앨범에서 ‘난 알아요’, ‘Rock’N Roll Dance’ 등의 곡을 통해 록과 댄스 뮤직의 결합을 시도했던 서태지는 자신의 음악적 뿌리인 록의 농도를 더욱 높이는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로선 방송용으로 부적합한 5분 이상의 러닝타임에 헤비메탈을 방불케 하는 일렉트릭 기타 솔로와 국악기 연주를 삽입한 ‘하여가’를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시도 자체부터 기존 질서를 향한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이 앨범의 무게중심은 ‘하여가’에 놓여 있지만, 나머지 수록곡들의 무게감도 만만치 않다. 유려한 멜로디와 가사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우리들만의 추억’과 ‘너에게’는 한국 대중음악사상 최초의 팬송으로 꼽힌다. 마약 중독자를 다룬 ‘죽음의 늪’은 이후 사회적 메시지 전달을 강화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행보를 미리 엿볼 수 있는 곡이다. 국내에 선구적으로 테크노와 레이브를 선보인 ‘수시아’는 몇 년 후 벌어지게 될 테크노 열풍을 예고한 곡이었다. 재즈, 신스팝, 힙합 등 다채로운 장르의 요소를 버무린 ‘마지막 축제’는 음악적 실험이 결코 대중성과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줬다.


이 앨범은 데뷔 앨범과 마찬가지로 수록곡 전곡을 가요 차트에 올리며 다시 한 번 10~20대를 열광하게 했다. 한국 대중음악사 최초의 더블 밀리언셀러라는 기록은 이 앨범의 위상을 증명하는 가늠자다. 더불어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 앨범을 통해 아이돌 이미지를 벗고 자신만의 음악적 고집을 가진 아티스트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이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다양한 장르와 음악적 실험을 선보이면서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앨범의 성공이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제시한 아이돌이 아티스트로 성장하는 문법은 20년 이상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어떤 아이돌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영광이자 언젠가는 넘어야 할 숙제다.


추천곡 ‘하여가(何如歌)’ | 헤비메탈 사운드와 휘몰아치는 랩의 조화, 여기에 절묘하게 파고드는 스크래치와 비트박스, 그리고 태평소 연주의 하이브리드. 이보다 ‘실험적인 사운드’라는 흔한 표현이 어울리는 곡은 드물다. 서태지가 지금까지 선보인 수많은 명곡 중에서 최고의 곡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이 곡을 제외하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 곡으로 한국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정진영/문화일보 기자



57위 신해철 <Myself>(1991)


전문가 리뷰 | 이것은 신해철 음악세계의 진정한 시작이었다. 무한궤도와 솔로 1집은 이 앨범을 위한 디딤돌이었으며, 신해철은 그 디딤돌을 딛고 순진한 소년에서 진지한 청년으로 거듭났다. 낙원상가 전자악기매장에 있던 미디와 시퀀서, 신시사이저를 손에 넣은 청년은 가슴으론 사랑을, 머리론 사유를 하며 세상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Myself〉는 아직 로커 신해철을 유예하고 있다. 이 앨범에서 그는 딥퍼플보단 디스코와 전자음악에 더 빠져 있었다. 넥스트 1집과 노땐스, 크롬과 모노크롬으로 이어질 장르적 교두보는 이미 이때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 뭉클한 건반 테마 아래 끊임없는 비트의 중첩을 새겨 넣는 ‘나에게 쓰는 편지’와 ‘날아라 병아리’ 이전에 넥스트식으로 죽음을 바라본 ‘50년 후의 내 모습’은 그 장르적 특성을 가장 구체적으로 들려준다.



힙합의 ‘스웩’을 응용한 자기소개 ‘The Greatest Beginning’과 더불어 라틴 리듬을 기계와 대치시킨 ‘다시 비가 내리네’처럼, 신해철은 이 앨범에서 비트 쪼개기에 제법 공을 들인 느낌이다. 섹시한 저음 랩에 필사적으로 맞서는 하이햇 비트, 브라스와 건반의 황홀한 난투극, 소울 코러스 위에 올라탄 신해철의 격정을 앞세운 ‘재즈카페’도 그랬다. 무한궤도가 데뷔하던 해 쓴 ‘내 마음 깊은 곳의 너’와 함께 이 앨범의 얼굴이 된 ‘재즈카페’에선 인간 드러머가 연주할 수 없는 리듬을 향한 신해철의 강박마저 느껴졌다. 그가 이 작품에 임하기 전 잡았다는 구체적인 방향성이 무엇인지 이 곡은 들려준다. ‘재즈카페’는 뮤지션 신해철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생전에 자신의 곡들 중 스스로 뽑은 ‘무덤까지 가져갈 노래 베스트 11’에서 3위에 오른 ‘그대에게’는 더 화려하고 세련된 편곡과 사운드에 힘까지 보태 이 앨범에 다시 실렸다. 그 유명한 전자 건반 인트로엔 밀도감을 더했고, 드럼 톤엔 박진감을 심었다. 이 곡에서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는 반상균과 민재현이 연주했다. 둘은 ‘내 마음 깊은 곳의 너’에서도 같은 악기로 참여했다. 이처럼 〈Myself〉는 신해철이 모든 걸 통제했고 모든 곡을 신해철이 쓴 건 맞지만 모든 연주를 신해철이 한 건 아니었다. 반상균, 민재현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그를 도왔다. 모든 색소폰을 분 이정식, ‘내 마음 깊은 곳의 너’에서 각각 피아노와 드럼을 친 정석원과 민병직, ‘아주 오랜 후에야’에서 기타를 연주한 박청귀, 러닝타임 6분에 이르는 ‘길 위에서’에 얇은 어쿠스틱 기타를 입힌 김의석, 공일오비라는 같은 둥지를 공유하는 윤종신과 김태우 등이 이 앨범의 조력자로 기록됐다. 〈Myself〉는 그래서 김수철의 〈One Man Band〉나 존 서먼의 〈Private City〉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원맨밴드’ 앨범이었다.


그럼에도 〈Myself〉는 90년대를 대표한 한 뮤지션의 고독한 자기성찰과 지독한 작가주의가 함박 녹아있던 작품이다. 그것은 앞으로도 단편의 싱글이 아닌 장편의 앨범을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당시 해설지를 썼던 팝 칼럼니스트 이영주도 그런 이 음반을 듣고 신해철이 “한 마리의 거대한 공룡으로 성장했음을 인정”했다.


신해철은 〈Myself〉의 성공으로 있던 빚을 다 갚았다. 하고자 했던 음악으로 큰돈을 벌었으니 그는 아마 뛸 듯이 기뻤을 것이다. 물론 넥스트라는 종착지에서 팬층은 양분되지만 그래도 신해철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에게 돈은 좋은 음악의 조건, 그 음악을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Myself〉가 없었다면 넥스트도 없었다.


추천곡 ‘길 위에서’ |커다란 신시사이저의 홍수, 절망의 모퉁이를 돌아 만나는 희망의 멜로디. 곡이 시작되고 43초에 이를 때까지 음악은 철학을 지탱한다. 이어 철학은 고독의 시로, 그 시는 다시 음악으로 스며들며 ‘길 위에서’는 조용히 몸부림친다.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와 ‘The Dreamer’ 사이에서 세상을 어루만지는 이 곡은 음악을 대할 때 신해철의 자세이자 신념이었다. 고요한 자기반성과 아련한 감수성이 뒤엉겨 송곳 같은 성찰을 피워낸다. 들짐승 같은 매서움으로 ‘이중인격자’를 부르짖기 전, 청년 신해철은 이 곡으로 자신의 청춘을 마감했다.


김성대/음악평론가





한국 대중음악 명반 61~70위


61위 패닉 <밑>(1996) - 이적의 음악적 광기와 실험정신이 마침내 폭발한 앨범

62위 김두수 <자유혼(自由魂)>(2002) - 한국 포크계 은둔자의 저주받은 걸작

63위 이정선 <30대>(1985) - ‘이정선’표 블루스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앨범

64위 공일오비(015B) <The Third Wave>(1992) - 한국 팝의 찬란한 진일보

65위 루시드폴 <루시드폴>(2001) - 21세기 한국 모던 포크의 본보기

66위 정태춘 <시인의 마을>(1978) - 한국적인 포크의 미학을 한 단계 끌어올린 앨범

67위 브라운 아이즈 <Brown Eyes>(2001) - 동양인의 ‘브라운 아이드 소울’, 한국형 R&B의 시작

68위 전인권 허성욱 <1979-1987 추억 들국화>(1987) - 들국화 시절 다하지 못한 말을 풀어낸 후일담 같은 앨범

69위 서태지와 아이들 <Seotaiji And Boys III>(1994) - 거친 사운드 위로 작정하고 토해낸 날선 메시지

70위 못 <비선형>(2004) - 예측이 불가능해서 더 아름답고 우울한 앨범



64위 공일오비(015B) <The Third Wave>(1992)


전문가 리뷰 | 1988년 MBC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그룹사운드’ 무한궤도는 모두의 기대와 달리 단명했다. 음악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돋보인 1989년 첫 앨범은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무한궤도의 역사는 순식간에 과거에 묻혔다. 하지만 멤버 중 신해철(보컬, 기타), 정석원(건반), 조형곤(베이스)은 계속 음악계에 남아 눈부신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포스트 무한궤도’의 역사는 1990년부터 본격화한다.


그해 신해철이 솔로 가수로 데뷔해 아이돌 스타로 거듭난 사이, 정석원과 조형곤은 그룹 공일오비를 진수해 확실한 신고식을 치렀다. 정석원의 친형 장호일(기타)이 고정 멤버로 힘을 보탰다. 공일오비는 처음부터 독특한 활동방식으로 화제를 모았다. 보컬의 대부분을 외부 인사로 채우는 ‘객원 가수 시스템’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노래마다 고유의 색을 입혔을 뿐 아니라 신인 가수 등용에도 쏠쏠한 역할을 했다. 윤종신, 이장우, 김태우, 김돈규, 조성민 등 여러 해 동안 공일오비가 배출한 보컬리스트들은 하나같이 걸출했다.



이러한 보컬에 눈부신 후광을 입힌 주역은 그룹의 핵심인 정석원이다. 정석원은 무한궤도에서 채 뽐내지 못한 창작력을 새 팀에서 마음껏 발휘했다. 대중성 있는 멜로디, 다채로운 스타일, 공감과 흥미를 자극하는 노랫말은 그의 특장이자 팀의 정체성으로 자리했다. 그 덕에 공일오비는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이상의 모든 요소를 거의 완벽한 형태로 드러낸 작품이 팀의 세 번째 앨범인 1992년 작품 <The Third Wave>다. 저마다 개성을 뽐낸 수록곡들은 당시 한국 팝의 진일보한 현태(現態)를 대변한다. 대표적인 예가 타이틀곡이자 히트곡인 ‘아주 오래된 연인들’. 타성에 젖은 연인들의 ‘웃픈’ 이야기와 긴 인트로를 내세운 감각적인 하우스 양식이 동시대 가요의 클리셰를 거부한다.


이러한 재기는 다른 트랙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내레이션, 보컬, 스캣이 관능적인 조화를 이루는 ‘다음 세상을 기약하며’, 공일오비 보컬의 모든 양태를 아우른 ‘수필과 자동차’, 무공해 아카펠라에 친환경 가사를 얹은 ‘敵 녹색인생’ 등 신선함이 줄을 잇는다. 절창의 듀엣(‘우리 이렇게 스쳐 보내면’), 가슴 저미는 팝 발라드(‘5월 12일’), 톡톡 튀는 록 넘버(‘현대 여성’) 등 빤한 공식마저도 공일오비라서 빤하지 않다. 여기에 유일한 연주곡 ‘Santa Fe’는 앨범의 스펙트럼을 한층 더 넓힌다.


한마디로 이 앨범은 1990년대 초반 한국 팝의 보고다. 당시 한국 대중음악을 구성하던 다양한 스타일을 담은 ‘모범 전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앨범으로 공일오비는 1990년대 가요계의 대세로 떠올랐고, 작사 작곡의 대부분을 맡은 정석원은 후배 창작자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이후 공일오비의 고공행진은 1996년에 나온 여섯 번째 앨범으로 아쉽게 마무리되었지만, 그 달콤한 후유증은 지금도 유효하다.


추천곡 ‘수필과 자동차’ |


이 곡에서 ‘음악 감독’ 정석원은 1) 한국에 레게 열풍이 채 불기도 전에 레게를 직수입해 왔고, 2) 영화, 수필, 자동차 등 흔한 소재를 끌어다가 세속화한 어른들의 모습을 재치 있게 묘사했으며, 3) 김태우, 윤종신, 이장우 등 각양각색의 목소리를 한데 모아 자연스럽게 엮어 냈다. 이로써 ‘수필과 자동차’는 공일오비의 모든 특장을 아우른 대표 예시가 되었다.


김두완/음악평론가



70위 못 <비선형>(2004)


전문가 리뷰 | 중독적 우울함의 지도. 처음 못의 앨범을 접했을 때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던 이미지다. 이리도 우울하고 어두운 색채를 지닌, 포근함이나 따사로움, 역동적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음악에 왜 이렇게 빠져들게 되는 걸까? 강한 도취를 전하며 오래도록 반복해 듣게 하는 이토록 매혹적인 중독성의 정체는 뭘까?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만들어 낸 기계적이고 차가운 전자음악, 터져 나오는 감정을 애써 감추는 듯 살짝 떨리는 나른하고 무표정한 읊조림, 신시사이저와 피아노, 강렬한 혼돈을 표출하는 듯한 노이즈와 때로 몽롱하게 아련한 감성을 자아내고 때로 세차게 내달리는 기타, 담담한 어쿠스틱 베이스와 가끔씩 맹렬하게 폭발하는 드럼 등이 얽히고설킨 현란한 소리의 조합. 켜켜이 쌓여가는 그 치밀한 잿빛 사운드의 층 사이에서 정처 없이 표류하던 내 감정은 어느 순간 소리에 동화되어 불규칙하게 넘실대는 음의 파도를 타기 시작한다.


내러티브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사랑의 상실로 인한 깊은 상처와 고통을 안은 채 깨질 듯 불안한 정서를 지니고 있지만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몸부림친다. 그의 내면은 음울함으로 가득 차 있고 치유하기 힘든 공허함에서 오는 참담한 외로움만이 그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다. 그의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스스로를 외부 세계와 고립시키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툴툴 털고 희망을 가져 보려고도 하지만, 마침내 자학하듯 그 끝 간 데 없는 절망 속에서 자조하고 체념하며 모든 걸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가 노래하는 뒤틀린 ‘What A Wonderful World’의 노이즈를 비집고 나오는 ‘멋진 세상’이란 말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싱어송라이터 이이언(eAeon)과 기타리스트 지이(Z.EE)로 구성된 듀오 못이 완성한 데뷔작의 사운드는 그 전까지 우리 대중음악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물론 이들의 음악에는 우울한 서정과 실험적 일렉트로니카를 절묘하게 뒤섞어 독창적 세계를 펼친 라디오헤드나 몽환적 트립합의 선구자 포티셰드의 짙은 영향과 흔적이 배어 있지만, 못은 단순한 모방을 넘어선 자신들의 섬세한 그림을 그려 냈다. 앨범 타이틀로 쓰인 ‘비선형’이라는 용어는 수학에서 사용되든 전기나 건축에서 쓰이든 1차 결합의 형태가 아니고 직선적 관계가 아니며 비례하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제목처럼 못의 음악은 일반적인 예상 가능 범주에 있지 않다. 불협화음과도 같은 일렉트로닉과 쓸쓸함 가득한 브릿팝의 향기는 교묘하게 어우러져 커버에 등장하는 으스스한 숲속 연못의 이미지처럼 일관된 어두운 분위기를 이루고 있고 결과적으로 보편적 감성에서 한 걸음 비껴 있는 사운드가 되었다.


즉 이 앨범의 정서는 코스모스보다는 카오스에 가까이 있다. 그러나 언뜻 무질서하게 퍼져 있는 듯 보이는 낯설지 않은 다채로운 양식은 각각의 곡마다 빈틈없이 치밀하게 배치되고 특히 탁월한 작곡 역량이 돋보이는 수려한 멜로디와 더불어 이들 특유의 사운드로 거듭났다. 밴드의 명쾌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Cold Blood’와 ‘카페인’, ‘현기증’과 같은 탄탄한 만듦새를 지닌 뛰어난 곡들을 비롯하여 ‘가장 높은 탑의 노래’나 ‘상실’, ‘날개’에 등장하는 재즈의 요소도 무척 인상적이다. 친숙한 서정시에서 벗어난 세련된 은유와 상징 또는 직설적인 감정 표현에 사용된 정제된 시적 언어가 담긴 가사 또한 이들만의 매력이다.


추천곡 ‘Cold Blood’ |이별이라는 잔혹한 현실 앞에서 마치 체념하듯 냉혈한의 가면을 쓰는 화자의 이야기 ‘Cold Blood’는 밴드의 비범한 역량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곡이다. 이들은 “추억은 투명한 유리처럼 깨지겠지/ 유리는 날카롭게 너와 나를 베겠지/ 나의 차가운 피를 용서해”라는 잊을 수 없는 노랫말과 함께 일렉트로니카와 모던록, 재즈라는 흔한 재료를 매끈하고 능란하게 버무려 밴드의 색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경진/음악평론가





한국 대중음악 명반 71~80위


71위 마이 앤트 메리 〈Just Pop〉(2004) - 아름다운 팝 음악으로 가득 찬 모던록 밴드 앨범

72위 신촌블루스 〈신촌 Blues〉(1988) - 한국형 블루스의 대중화를 이뤄낸 앨범

73위 검정치마 〈201〉(2008) - 갑자기 튀어 나온 코스모폴리탄의 신선한 도발

74위 이장희 〈그건 너〉(1973) - 세시봉의 반항아 이장희의 유쾌한 일탈

75위 서울전자음악단 〈Life Is Strange〉(2집)(2009) - 하나의 소우주를 펼쳐낸 21세기 한국 록의 걸작

76위 V.A. 〈우리노래전시회〉(1984) - 80년대 언더그라운드신의 올스타 컴필레이션 앨범

77위 3호선 버터플라이 〈Dreamtalk〉(2012) - 완숙의 경지에 오른 모던록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대표작

78위 부활 〈Remember〉(2집)(1987) -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의 원전 ‘회상 Ⅲ’가 담긴 앨범

79위 이장혁 〈이장혁 Vol.1〉(2004) - 고독한 내면을 무심한 듯 아름답게 풀어낸 고백

80위 양희은 〈1991〉(1991) - 양희은과 이병우의 이상적인 어울림



71위 마이 앤트 메리 〈Just Pop〉(2004)


전문가 리뷰 | 마이 앤트 메리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Just Pop’. 인디 밴드로는 드물게 팝으로 통칭하는 대중적인 음악, 쉽게 잘 들리는 음악에 대한 팀의 열망이 반영된 것이었다. 1995년에 결성된 ‘홍대 1세대’로서 1999년에 데뷔 앨범 〈My Aunt Mary〉를 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밴드의 뜻을 달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럼에도 팀의 초기 활약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앞선 1집과 2001년의 소포모어 앨범 〈Rock N Roll Star〉는 나름대로 준수한 결과물이었으나, 델리 스파이스와 언니네 이발관의 활약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주목이 불가피했다.



이들에게 비로소 합당한 조명을 가져온 건 3집 〈Just Pop〉이었다. 멤버들의 군 복무 후 처음으로 나온 앨범은 그들의 슬로건을 자신 있게 타이틀로 내세울 만큼 명료했다. 총 12곡이 수록된 〈Just Pop〉은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밴드가 그토록 갈망한 ‘그저 팝’ 그 자체였다. 꾸밈을 위한 현란한 장식도, 복잡한 구성도 없었다. 앨범은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고 군더더기 없이 매끈했다. 음반 곳곳에 포진한 캐치한 코러스와 멜로디는 그들이 거듭 강조한 팝의 본질에 닿아 있었다.


〈Just Pop〉의 위력은 보편적 감수성에 기인했다. 앨범에 앞서 싱글로 먼저 공개된 첫 곡 ‘공항 가는 길’이 대표적이다. 마이 앤트 메리의 결성부터 2집까지 함께한 드러머 이제윤이 유학길에 오르며 팀을 나가게 되자 밴드는 이 노래로 그를 배웅했다. 누구든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선율과 박자는 앨범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석별의 감정을 담담하게 그린 가사는 너른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두 장의 앨범을 거치며 숙련된 솜씨가 빛을 발한 것이다.


앨범의 매력적 팝송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드링크 음료 CF에 삽입되어 인기를 얻었던 ‘골든 글러브’와 연주 트랙인 ‘데드 볼’, 후반부의 ‘럭키 데이’가 브라스 세션을 동원해 경쾌하고 펑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면, ‘기억의 기억’, ‘파도타기’, ‘4시 20분’은 밴드 특유의 서정성에 초점을 맞췄다. 사운드와 템포의 변주를 통해 감상의 완급을 조절한 ‘소꿉친구’, 스팅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한 ‘비가 내려’는 듣는 재미를 높인 감초?트랙이다. 특히 곡 말미에 색소폰 솔로로 호소력을 더한 ‘비가 내려’는 음반의 백미다.

잘 들리는 팝을 향한 팀의 고집은 곧 만족할 만한 성과로 이어졌다. 마침내 뜻을 관철한 이들에게 평단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발매 이듬해 열린 제2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는 〈Just Pop〉에 ‘올해의 음반’과 ‘최우수 모던록’ 상을 수여하며 음반의 완성도를 공인했다. ‘공항 가는 길’, ‘골든 글러브’, ‘럭키 데이’ 등은 그 가치를 알아본 각종 채널에 의해 하나둘 알려지며 차츰 대중의 플레이리스트에 올랐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리퀘스트 되고 있다. 마이 앤트 메리가 평소 추구한 ‘듣기 편한 음악’을 근사하게 구현하고 열띤 호응까지 끌어낸 〈Just Pop〉은 인디신의 지평을 끌어올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추천곡 ‘공항 가는 길’ 여유로운 박자에 “또 다른 길을 가야겠지만 슬퍼하지는 않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을 담았다. 수준급 연주와 정순용의 깨끗한 음색, 유려한 멜로디는 드라마틱한 장치 없이도 묵직한 울림을 선사했다.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산뜻한 매력. 이런 게 바로 잘 만든 팝송이다.


정민재/음악평론가



80위 양희은 <1991>(1991)


전문가 리뷰 | 이 앨범에는 무서울 정도의 고독이 배어있다. 차가우면서 뜨겁다. 이 역설적인 균형은 당시 마흔 중년에 접어든 양희은의 심경과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지나간 모든 것들을 그리워하다 이내 체념하게 되는 나이. 어제 일처럼 뚜렷한 추억 앞에서 끝내 눈물만 떨구고 마는 고약한 기억의 습작. 마흔은 서글픈 나이다.


<1991>에는 데뷔 20주년을 맞은 포크가수 한 명과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유학 중이던 클래식 기타리스트 한 명만 있다. 그 외 모든 건 배제되었다. 베이스도 드럼도, 피아노도 브라스도 없다. 당황스러운 건 그 철저한 부재들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더 큰 풍요다. 이는 가사 때문이다. 수록한 8곡 중 6곡에 숨결을 불어넣은 그 시절 양희은의 사유는 맑고 예리했다. 그것은 사랑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고찰이요 깨달음이었다.



당시 26살이었던 이병우가 깨끗한 우리말로 쓴 ‘가을아침’은 그 넉넉한 한가로움에도 불구하고 중년의 육중한 고독을 담은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깊이엔 이르지 못했다. 영화 <겨울나그네>의 민우와 다혜가 떠오르는 ‘그해 겨울’, 떠나간 젊음 곁에 삶을 내려놓는 ‘그리운 친구에게’의 노랫말들 역시 이 앨범의 ‘부재 속 풍요’에 일조했다.


보컬과 기타의 음반인 <1991>은 사실 따로 떼어 놓아도 별개의 작품이 될 만큼 저마다 완성도를 지녔다. 양희은의 보컬만 들어도 좋고 이병우의 기타만 듣고 있어도 좋다. 양희은의 목소리에 담긴 엄숙한 운치, 침묵을 닮은 이병우의 연주는 살아가는 자의 고민, 사랑했던 사람을 향한 그리움, 홀로 있어 깨닫는 외로움, 꾹꾹 눌러담은 슬픔을 담담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장르는 다르지만 이 음반은 조 패스와 엘라 피츠제럴드의 <Easy Living>, <Sophisticated Lady>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다른 연주나 목소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오히려 그것들이 방해만 될 것 같은 두 사람의 완벽한 호흡에선 차라리 법률적 단호함마저 배어나온다. 이는 역시 공간을 주무르는 사운드 디자이너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일이라, 조와 엘라의 작품들에 노만 그란츠라는 이름이 있었다면 이병우, 양희은의 <1991>엔 제랄 벤자민(프로듀서)과 마이클 맥도날드(레코딩 엔지니어)가 있었다.


이들은 ‘저 바람은 어디서?’라는 양희은의 물음에서 간절함이 묻어나게 했다. 또 스페인 클래식 기타리스트 페르난도 소르의 연습곡에 양희은이 가사를 붙인 ‘나무와 아이’엔 세련된 외로움을 더했고, ‘11월 그 저녁에’를 통해선 인생이라는 아득한 숙제를 좀 더 명료하게 다듬어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벤자민과 맥도날드는 <1991>에 냄새를 입혔다. 냄새의 정서는 그리움과 쓸쓸함이고 냄새의 계절은 가을과 겨울이다. 구름 위 신선처럼 클래식 기타를 뜯어나가는 이병우는 최소의 소리를 위해 차려진 그 공간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이병우의 이해는 양희은이라는 쉽지 않은 보컬과의 호흡으로 치달았고 이내 음악을 완전한 고독과 슬픔에 바칠 수 있었다.


이병우는 이 앨범이 듣는 이들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그의 의도는 적중했다. 흐르는 연주와 담담한 노래, 읊조리는 가사는 듣는 이들의 마음 속 상처를 천천히 치유했다. 거기에는 ‘그 상처, 우리가 다 가져가겠다’는 구원의 뉘앙스마저 있다. 다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음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자 가치일지 모른다. 27년 전 양희은과 이병우의 만남은 그래서 결국 ‘음악의 이유’였다. 기타와 보컬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어울림을 둘은 들려주었다. 뻥 뚫린 가슴을 뻥 뚫린 음악이 메웠다. 무심함이 복잡함을 무너뜨리면서 앨범 <1991>은 태어났다.


추천곡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단순히 이 곡이 이 앨범의 대표곡이어서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곡은 이 앨범이 아닌 양희은의 대표곡이다. ‘아침이슬’과 ‘한계령’ 그리고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나는 양희은의 심장과 폐, 간이라고 생각한다. 이별을 관조하며 이별을 슬퍼하는 목소리, 헤어짐에 바치는 차분한 오열(“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은 언제 들어도 사람을 잠기도록 만든다. 많은 리메이크가 있었지만 어떤 리메이크도 양희은의 오리지널은 넘어서지 못했다. 아이유가 ‘가을아침’에서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이 곡을 다시 부른 이들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김성대/음악평론가





한국 대중음악 명반 81~90위


81위 윤상 <Cliché>(2000) - ‘윤상’표 전자음악의 위대한 시작점이 된 앨범.

82위 서태지와 아이들 <Seotaiji And Boys Ⅳ>(1995) - 힙합부터 메탈까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한 서태지와 아이들 4집.

83위 이승환 <Human>(1995) - 대중성과 음악성을 모두 획득한 이승환 4집.

84위 언니네 이발관 <비둘기는 하늘의 쥐>(1996) - 한국 인디신을 열어젖힌 모던록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데뷔 앨범.

85위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1971) - 한국 현대사와 함께한 불후의 명곡 ‘아침이슬’만으로도 가치를 증명한 앨범.

86위 봄여름가을겨울 <나의 아름다운 노래가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1989)
- 김현식의 백밴드로 시작해 퓨전재즈를 한국에 본격 소개한 봄여름가을겨울 2집.

87위 김광석 <네번째>(1994) - ‘일어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서른 즈음에’가 실린 김광석 4집.

88위 김건모 <Kim Gun Mo 3>(1995) - 전국 길거리를 도배한 ‘잘못된 만남’이 수록된 메가히트작.

89위 미선이 <Drifting>(1998) - 조윤석이 루시드폴로 활동하기 이전 몸담았던 밴드 미선이의 데뷔 앨범.

90위 언니네 이발관 <후일담>(1998) - 한국 인디 1세대 모던록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두 번째 앨범.



87위 김광석 <네번째>(1994)

리뷰| 1990년대 초중반,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를 든 ‘음유시인’의 이미지와 ‘포크의 계승자’라는 좌표가 김광석에게 부여된 것은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와 ‘다시 부르기’ 프로젝트를 통해서였다. 그는 (1980년대 들국화로 대표되었던) 소극장 공연을 통해 대중적 돌파를 이루어낸 거의 마지막 주자였으며, 1970년대산 모던 포크를 소환하고 정립하여 단순한 리메이크가 아니라 1990년대의 음악으로 재탄생시킨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김광석의 <네번째>는 이러한 행적에 뒤이은 아름다운 결실이다.


이 앨범은 김광석의 절정을 증명해주는 작품임과 동시에 (리메이크 음반인 <다시 부르기>를 제외하면) 그의 유작이 된 음반이다. 노래모임 새벽에서 활동했던 황난주의 작곡,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코러스, (동물원의) 김창기의 작곡, (이전에 김광석의 솔로 앨범에 참여한 바 있는) 김형석의 참여 등의 면면을 보면 김광석에게 이 앨범은 일종의 결산 같은 인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여러 갈래들은 하나의 줄기로 흐른다. 류근, 김지하의 시정(詩情)도, 김창기, 강승원, 노영심, 박용준, 이무하, 황난주 등 다양한 색감의 작곡들도 김광석의 목소리를 통해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는 것이다. 풍부한 성량과 유려한 음색의 김광석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각인에 다름 아니다. 조동익 밴드(조동익, 함춘호, 박영준, 김영석 등)가 빛나던 시절의, 깔끔하고 세련된 편곡과 연주는 이 앨범에 세련미를 더해준 중요한 공신임에 틀림없다.



이 앨범을 통해 김광석 본인이 작곡한 4곡을 안배하고 있어 (1992년 3집 앨범에 이어)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입지를 확장했다는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일어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자유롭게’가 건강하고 소박한 포크·포크록의 미덕을 계승했다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통해 보편적인 사랑 노래를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획득했다.


무엇보다 (‘서른 즈음에’ 같은) 세월의 흐름과 나이의 무게, (‘회귀’ 같은) 생성하고 소멸하는 목련을 통한 은유적 성찰, (‘일어나’ 같은) 삶에 대한 소망과 결의가 중첩하는 가사들은 이 음반의 색깔을 결정짓고도 남음이 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처럼) 사랑의 아픔이나, (‘혼자 남은 밤’처럼) 삶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아름다운 곡들에 대해 더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가면 사랑은 지나가고 꿈도 흐릿해진다. 그런 점에서 <네번째>는 사람들에게 못 다 이룬 꿈과 사랑을 환기시킨다. 이는 과거의 한 시절 어떤 집단들이 소망했던 “아름다운 세상 참주인된 삶”(‘끊어진 길’)의 거창한 화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개인이 사랑하고 이별하고 좌절하고 아파했던 흔적들을 그의 목소리는 길어올리고 또 어루만진다. 그리고 그의 노래는 하나의 시대를 닫는다. 그렇게 김광석이라는 이름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으로 남았다.


추천곡 ‘회귀’ 김광석의 <네번째> 앨범에는 오래도록 사랑받는 곡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회귀’를 추천한다. 김지하의 시와 황난주의 곡이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시절 특정 공동체의 꿈을 상기하게 만든다. 그가 돌아가고자 했던 때는 언제이고 그곳은 또 어디일까. 한 때의 꿈과 이상을 보듬고 되새기는 듯한 이 노래는 피아노 한 대만으로 간결하게 연주되었지만 김광석만의 풍성하고 유려한 절창이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 노래는 “빛을 뿜던” 젊은 날들을, 그리고 사라져간 벗들을 보내는 송가이다. 나아가 “짧은 눈부심”을 뒤로 한 채 스러져가버린 봄날의 목련은 김광석 자신의 초상 같기도 하다. 이렇게 그는 “긴 기다림”과 “애틋한 그리움”을 남겼다. 


최지선/음악평론가



88위 김건모 〈Kim Gun Mo 3〉(1995)


리뷰전국이 도배되다시피 했다. 커피숍, 의류 매장, 술집, 놀이공원 등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리했다. 불법으로 음반을 판매하는 노점상들도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노래를 연신 틀어댔다. 나이트클럽에도 디제이들의 으뜸 레퍼토리로 굳게 뿌리를 내렸다.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은 인적 드문 산간 마을이나 외딴 섬을 제외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힘차게 흘렀다. 그야말로 광풍이었다.


노래의 어마어마한 인기는 1995년을 또 한 번 김건모의 해로 만들었다. KBS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한 것을 포함해 그는 지상파 3사 음악방송 정상을 모두 가뿐히 석권했다. 연말에 열린 다수의 시상식에서도 김건모는 연거푸 대상, 최우수상에 호명됐다. 1994년 ‘핑계’에 이은 대박 행진으로 김건모는 ‘국민가수’라는 영예로운 호칭까지 얻었다.


일련의 성대한 성과를 이룬 데에는 단연 ‘잘못된 만남’의 공이 크다. 유로댄스를 골격으로 삼은 강렬한 반주는 역동적인 사운드를 선호하는 젊은 음악팬들의 보편적 취향을 만족함으로써 열띤 지지를 이끌어냈다. 친한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긴다는 내용의 가사는 듣는 이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한 번 더 흡인력을 행사했다. 외양은 경쾌하지만 실상은 애절한 이채로운 모습으로 노래는 청취자들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앨범이 발산하는 매력은 ‘잘못된 만남’에 그치지 않는다. 감미로운 멜로디의 후렴이 인상적인 컨템포러리 R&B ‘이 밤이 가면’, 지-펑크(g-funk)의 성분을 들인 힙합 ‘너를 만난 후로’, 스티비 원더를 떠올리게 하는 하모니카 연주가 흥을 곱절로 키우는 뉴 잭 스윙 ‘넌 친구? 난 연인!’ 등 당대 팝 트렌드를 포착한 스타일로 노래들은 내내 세련미를 뽐낸다. 더불어 2집에서 크게 히트한 ‘핑계’를 의식한 듯 ‘드라마’, ‘너에게 (마음으로 하는 말)’ 같은 레게 노래를 재차 수록해 친밀감을 도모했다.



앨범은 서정성도 충만했다. 아카펠라 형식을 따른 ‘겨울이 오면’은 지난 연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차분하게 진행되는 신시사이저와 앞뒤에 배치된 보컬 애드리브가 멋스러운 ‘그대와 함께’는 현재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고백으로 애틋한 기운을 퍼뜨린다. ‘아름다운 이별’은 피아노와 보컬에 집중한 구성을 통해 한없이 쓸쓸한 분위기를 내보인다. 카랑카랑함 안에 구슬픈 숨결이 깃든 김건모의 목소리는 발라드의 풍미를 극대화했다.


전국을 무른 메주 밟듯 누빈 ‘잘못된 만남’ 외에도 준수한 노래들을 가득 갖춘 앨범은 발매 석 달 만에 250만 장 넘게 팔려 나갔다.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 전무한 대기록이었다. 김건모는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최다 앨범 판매 기록 인증서를 받았다.


이와 같은 크나큰 성공은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든 가사를 쓰고 절반 가까운 수록곡을 작곡한 프로듀서 김창환은 빼어난 감각으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노래들을 완성했다. 또한 나머지 절반을 작곡한 노이즈의 천성일, ‘잘못된 만남’을 비롯해 다수의 노래를 편곡한 김우진의 섬세한 손길로 앨범은 더욱 근사해지고 견고해졌다. 김건모 3집은 이른바 ‘김창환 사단’이라고 불린 명인들의 협력이 가장 찬란하게 빛난 순간이었다.


추천곡 ‘잘못된 만남’신시사이저 루프는 노래의 필살기나 다름없다. 한 번만 들어도 머릿속에 깊이 각인될 만큼 짜릿하고도 명쾌하다. 빠른 속도를 내면서도 음 높낮이가 선명한 래핑으로 흥겨움은 곱절이 된다. 더할 나위 없이 리드미컬한 반주 안에 머문 ‘사랑도 잃고 친구도 잃는’ 비참한 가사는 노래에 극적 예술성을 부여했다. ‘잘못된 만남’은 1990년대가 낳은 가장 쾌활한 비가일 것이다. 


한동윤/음악평론가





한국 대중음악 명반 91~100위


91위 패닉 〈Panic〉 (1995) - 이적, 김진표 듀오의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데뷔 앨범 

92위 전람회 〈Exhibition〉 (1994) - 김동률의 시작점으로, 한국 발라드의 품격을 높인 앨범 

93위 할로우 잰 〈Rough Draft In Progress〉 (2006) - 한국 포스트록의 신기원을 연 앨범 

94위 장기하와 얼굴들 <별일 없이 산다> (2009) - 인디 뮤지션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의 가능성을 증명한 앨범 

95위 안치환 〈안치환4〉 (1995) - 민중가요와 대중가요를 접합시켜 민중가요의 대중화를 이뤄낸 앨범 

96위 f(x) 〈Pink Tape〉 (2013) - 대형 기획사의 시스템의 장점을 극대화한 한국 아이돌 음악의 야심작 

97위 버벌 진트 〈누명〉 (2008) - 자신, 그리고 나아가 한국힙합에 씌워진 누명을 벗어 던진 앨범 

98위 더블유 〈Where The Story Ends〉 (2005) - 코나 출신 배영준이 결성한 일렉트로 팝 그룹 더블유의 2집 

99위 윤영배 〈위험한 세계〉 (2013) - 하나음악 출신 윤영배가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낸 앨범 

100위 송창식 〈사랑이야/토함산〉 (1978) - 포크 장르를 우리 정서에 맞게 토착화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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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위 패닉 〈Panic〉 (1995)

리뷰 | 첫 앨범은 아티스트가 가장 긴 시간을 준비해 완성하는 작품이다. 음악인이 되리라 마음먹은 후 오랜 수련기간을 거치고 여러 습작을 토해낸 뒤 나오는 것이 첫 앨범이다. 첫 앨범을 발표한 뒤 얼마간의 기간을 두고 두 번째, 세 번째 앨범을 발표하고 여러 앨범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비로소 아티스트로서 커리어가 형성된다. 아티스트의 가장 긴 노력이 결집된 것이 바로 첫 앨범인 것이다. 그 때문일까? 데뷔작이 최고작으로 남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실제로 여러 명반 리스트를 보면 첫 앨범이 선정된 사례가 많다. 이 리스트에도 여러 ‘1집’들이 대거 포함돼 있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첫 앨범으로 역사는 시작된다. 그런 면에서 패닉의 1집 〈Panic〉은 매우 드라마틱한 시작점이었다. 주류세대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 음악적 실험과 완성도,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 확고한 정체성, 신인의 패기 등 온갖 용감한 도전들로 가득한 앨범이었다. 90년대는 이러한 도전이 종종 상업적 성공으로도 이어지는 호시절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랬고, 넥스트가 그랬으며, 패닉이 그 뒤를 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방식은 패턴화되어 이후 등장하는 H.O.T. 등 아이돌그룹 생산 전략으로 이어졌다. 넥스트나 패닉의 방식은 패턴화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빛이 날 수 있었다.


90년대에는 메이저 기획사가 다소 실험적인 음반들을 제작하기도 했다. 덕분에 인디신이란 것이 생겨나기 전에 이미 삐삐밴드, 유앤미블루와 같은 충격적인 음악들이 가요계에 등장했다. 패닉의 1집을 제작한 곳도 당시 최고의 메이저 기획사 신촌뮤직이었다. 이적은 “우리의 모델은 삐삐밴드 같은 것이어서 이것저것 해보자는 식”으로 1집을 만들었다고 말했는데, 그만큼 이들의 음악은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게 보였다. 하지만 ‘달팽이’와 ‘왼손잡이’가 크게 히트하면서 패닉의 음악은 당시 10대들에게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계산되지 않은 음악’이 드라마틱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후 이적은 ‘포스트 서태지’라는 수식어에 가장 근접한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다.


〈Panic〉은 그야말로 패기로 가득 찬 앨범이었다. 다소 음산하게 시작하는 첫 트랙 ‘Intro: Panic Is Coming’의 가사만 읽어봐도 가요계에 던지는 그 출사표의 무게를 짐작해볼 수 있다. 앨범 전체에 걸쳐 어느 곡 하나 기존 가요의 관성을 마냥 따라가는 곡이 없었다. 패닉을 세상에 알린 발라드 ‘달팽이’ 역시 기존 히트 발라드의 감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랑을 다루지 않은 발라드가 이렇게 공전의 히트를 친 경우는 매우 찾아보기 힘들다. 이외에도 ‘왼손잡이’, ‘아무도’ 등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가사는 정말로 신선했다. 새로운 음악에 목마른 10대들의 감성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패닉의 1집이 나오고 1년 뒤 SM엔터테인먼트가 H.O.T.를 성공시키면서 10대들의 감성은 아이돌그룹의 음악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계산된 음악’이 시장을 잠식해나간 것이다. 때문에 아쉽게도 패닉은 다양한 음악이 대중에게 각광받은 90년대 호시절의 마지막 영웅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적은 긱스, 카니발을 거쳐 솔로로 출중한 앨범들을 연달아 발표하며 결국 살아남았다. 〈Panic〉이 나왔던 1995년 당시 20대 초반이던 이적은 자신이 마흔 넘어서까지 좋은 음악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이나 했을까? 그리고 〈Panic〉이 자신의 최고작으로 남으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추천곡 ‘기다리다’| 이적의 발라드를 만들어내는 재능은 정말 탁월하다. 이 재능은 한국 가요시장에서 히트곡을 만드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는 이 재능을 결코 남용하지 않고 좋은 앨범을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기다리다’는 ‘달팽이’와 함께 1집을 듣는 청자에게 안도의 순간을 제공한다. 덕분에 다른 곡들의 통통 튀는 발칙함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권석정/카카오엠 피디



96위 f(x) 〈Pink Tape〉(2013)


리뷰| 수많은 아이돌 그룹 중에서도 2009년에 데뷔한 에프엑스(f(x))의 입지는 특별했다. 데뷔곡부터 주재료로 삼은 일렉트로니카, 랩과 노래의 경계에서 넘실대는 창법, 난해한 노랫말 등 이전의 어떤 팀에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함이 이들의 무기였다. 2010년 발표한 ‘NU ABO’에서 정체성을 선명히 드러낸 그룹은 ‘피노키오(Danger)’와 ‘Hot Summer’, ‘Electric Shock’를 거치며 자신만의 브랜드를 공고히 했다. 음악과 콘셉트의 측면에서 에프엑스 같은 팀은 당시에도, 그 이전에도 없었다.


이와 같은 포지셔닝은 정규 2집 〈Pink Tape〉에서 정점을 보였다. 앨범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밝혀지기 전에 공개한 ‘아트 필름’부터 파격이었다. 오직 프로모션을 위해 제작된 2분 남짓의 영상물은 신곡을 배경으로 다양한 오브제를 감각적으로 배치, 구성해 에프엑스만의 캐릭터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화면 속 환상적, 동화적이면서 천진난만하고 패셔너블한 모습은 역시 지금까지의 걸그룹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성격이었다. 에프엑스의 이러한 캐릭터 구축과 활용은 2010년대 아이돌 음악 시장에서 걸그룹 콘셉트의 다변화로 이어졌다.


영리한 비주얼 연출만큼이나 음악적 기획 또한 뛰어났다. 이 무렵 SM엔터테인먼트는 해외 작곡가들을 대거 섭외하고 국내외 작곡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곡을 제작하는 대규모 ‘송라이팅 캠프’를 본격적으로 진행했는데, 〈Pink Tape〉는 해당 프로젝트가 앨범 단위로 거둔 중대한 결실이었다. 외국 작곡가의 곡을 한국 작곡가가 국내 시장에 맞춰 다듬고 발표하는 것은 에스이에스(S.E.S.)의 ‘Dreams Come True’(1998)부터 존재한 작업 방식이나, 〈Pink Tape〉는 한 장의 앨범 자체가 ‘송라이팅 캠프’를 통했다는 점에서 달랐다. 글로벌 대중을 공략함과 동시에 작품성 획득을 꾀한 것이다.


그렇게 국제 합작으로 탄생한 12곡의 수록곡은 ‘웰메이드 케이팝’의 본보기였다. 앨범은 복잡하게 쪼갠 리듬 패턴과 예상치 못한 전개가 돋보인 타이틀곡 ‘첫 사랑니(Rum Pum Pum Pum)’부터 덥스텝과 트랩, 하우스 등 EDM 소스를 적소에 활용한 ‘Toy’, ‘Kick’, ‘Airplane’, ‘Step’과 같은 고감도 일렉트로닉 댄스팝이 주를 이뤘다. 엑소(EXO)의 디오(D.O.)가 참여한 어쿠스틱 팝 ‘Goodbye Summer’, 멜로디 진행에 역점을 둔 ‘여우 같은 내 친구(No More)’, 곡 전반에 사용된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를 통해 신선도를 높인 미디엄 템포 ‘Ending Page’는 음반의 짜임새를 높이는 데 일조한 노래였다.


〈Pink Tape〉는 대형 기획사의 정교한 제작 시스템이 가진 순기능을 보여줬다. 이는 때로 아이돌 산업 전반에 대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나, 유니크한 캐릭터를 꾸미고 국내외의 실력자를 모아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이들이기에 가능한 ‘케이팝 블록버스터’와 다름없다. 〈Pink Tape〉는 이러한 웰메이드 프로듀싱의 결과이자 순수하게 음악만으로도 앨범 단위의 즐거움을 안긴 야심작이다. 20년 남짓한 한국의 아이돌 음악 역사에서 이 정도로 선명한 시금석이 된 앨범은 그리 많지 않다.


추천곡 ‘첫 사랑니’| 첫사랑의 경험을 사랑니에 빗댄 발상부터 신선했다. 중의적인 가사는 첫사랑의 설렘으로도, 사랑니의 고통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여기에 노래와 랩, 그리고 그 중간을 유연하게 오가는 멤버들의 가창은 익히 경험한 에프엑스 고유의 스타일이었다. 퍼커션의 변칙적인 사용으로 리드미컬한 재미를 만들면서, 귀에 꽂히는 후렴을 통해 흡수력을 높인 것이 성공 포인트. 실험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과연 에프엑스이기에 가능했던 고품격 댄스팝이다. 


정민재/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