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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조동진(1947~2017)

by Wood-Stock 2017. 8. 28.


조동진 혹은 처절한 체념 / 신현준


최근까지도 나는 조동진(1947년생)이 김민기나 조용필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건 마치 레너드 코언(1934년생)이 엘비스 프레슬리(1935년생)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만큼이나 의아한 점이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레너드 코언은 ‘1970년대의 로큰롤 스타’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1950년대의 로큰롤 스타’ 아닌가. 이와 비슷하게, 조동진은 ‘19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가수’이고 조용필과 김민기는 ‘1970년대’부터 유명해진 인물이다. 조동진은 386도, 475도 아니고 564세대에 속한다.

 

조동진에 대해 의아한 점은 한 가지 더 있다. 느리고 차분한 ‘포크’ 성향의 싱어송라이터라고만 알고 있었던 그는 의외로 ‘록 밴드’ 출신이다. 그것도 ‘미 8군 무대’ 출신이다. 레코딩된 음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미 8군 무대에서 전기 기타를 쳤다는 사실은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미 8군 무대’가 한국의 대중음악에 공헌한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곳은 어쨌든 ‘생업을 위한 비루한 공간’ 아니었던가. 그런 자리와 조동진의 지성적이고 시적인 이미지는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서른 줄이 넘은 나이로 데뷔 앨범을 발표했을 때 그는 미스터리하고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행복한 사람」이 수록된 이 음반의 표지부터 다른 음반들과는 달랐다. 그 당시의 음반 표지라는 것이 가로, 세로 31cm의 정사각형 모양의 종이 위에 실물 크기만한 가수 얼굴을 그려놓은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조동진의 음반의 표지는 적색 바탕 위에 연필로 스케치된 그의 자화상이 그려 있었다. 장작불 뒤에 사색하듯 앉아있는 사진이 실린 뒷면 표지도 특이하기는 마찬가지다. (말로 그림을 설명하기는 힘드니 사진을 참고하기 바란다.)

 

1979년에 발매된 조동진 1집 앨범

1979년에 발매된 조동진 1집 앨범

 

그렇지만 조동진은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대부로 불리지만 1970년대에도 언더그라운드에 있었다. 양희은의 노래를 들어본 사람은 양희은 2집에 실린「작은 배」라는 노래의 작사가와 작곡가로 조동진이라는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김세환과 이수만이 불렀던「다시 부르는 노래」라든가, 역시 김세환이 불렀던 「그림자 따라」라는 곡의 주인공이 조동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곡의 원래 제목이 「마지막 노래」였지만, ‘대중가요 가사답지 않게 염세적이다’라는 이유로 여러 번 검열을 거친 결과 제목이 바뀐 사연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그래서 조동진이 1970년대의 끝자락에 발표한 음반은 ‘1970년대적’이면서 동시에 ‘1970년대적’이지 않다. 음악 어법은 1970년대의 포크 운동과 끈이 닿고 있지만, ‘자유와 낭만’ 같은 1970년대 청년문화의 소박한 이상주의는 이 음반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김민기처럼 1970년대의 낭만과 거리를 두었던 인물과 비교해 보더라도 차이가 있다. 김민기가 내면세계를 표현하면서도 외적 세계에 대한 발언을 삼가지 않았다면, 조동진은 철저하게 내면 세계의 표현에 머물고 있다. 비유하자면 김민기가 ‘푸념’의 목소리라면, 조동진은 ‘체념’의 목소리다.

 

지난 번 이야기를 연장하면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는 엄중한 정치상황과는 대조적으로 ‘향락적’ 대중문화가 꽃피웠던 때다. 요즘 영화 「친구」나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사운드트랙으로 등장하는 음악들이 당시 젊은이들의 문화였다. 그에 반해 조동진의 음악은 매우 느리고 고요했다. 그런데 이런 느림과 고요는 그저 따분하지만은 않다. 이런 느림과 고요는 ‘선진조국 건설’과 ‘경제성장’을 위해 분주하던 제5공화국의 주역들은 물론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해 분투하던 반체제 운동세력과도 모두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조동진 혹은 처절한 체념 이는 젊은 시절 방황하면서 헤르만 헤세, 오쇼 라즈니쉬 같은 사상에 심취했다는 사실과 깊이 연관될 것이다. 추측일 뿐이지만 아버지인 영화감독 조긍하씨의 사업실패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절망적 상황에서 다른 포크 가수들처럼 ‘젊음을 구가할 수 없었던’ 그의 개인적 어려움과도 관련될 것이다. 이런 절박함은 어머니의 죽음을 노래한 「겨울비」나 어머니의 유품을 태울 때의 심정을 노래한 「불꽃」에서 ‘처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얼핏 듣기에 차분하고 고요하기만 한 그의 음악 속에서 복잡하게 이글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즉, 그의 체념과 허무는 처절한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노래들은 순전히 ‘개인적’임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정치적’으로 오해받기도 했다.「작은 배」의 가사가 ‘반체제 시인’ 고은(高銀)의 시라는 사실도 그렇지만, 2집에 수록된 「어둠 속에서」 같은 곡은 정말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시대에서 평이하게 들려올 수 없었다. 이는 조동진의 후예들의 곡에서도 마찬가지다. 조동진의 동생인 조동익이 이끌었던 어떤날의 「그날」이라는 곡이나 조동진이 키우다시피 했던 들국화의「아침이 밝아올 때까지」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본인들은 개인적 정서를 표현했다고는 하지만 듣는 사람이 꼭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조동진 본인은 10년 뒤 4집에 실린 1990년「항해」라는 곡에서 “오랜 항해 끝에 찾은 상처 입은 우리의 자유”라는 말로 잠깐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을 뿐이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나는 솔직히 말해서 세상이 나아지리라는 전망이 없습니다”라고 나직이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체념조차 많은 사색을 거친 것 같아서 그때도 굳이 반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세상은 정말 좋아질 수 있는 것일까.

 

*「다시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은 여러번 반려되면서 가사가 바뀌자 주위에서 ‘장난 삼아’ 붙여 준 제목이다. 한편 「그림자 따라」는 1979년에 발표한 1집 음반이 1986년에 재발매되면서 마지막 트랙으로 추가되어 있다. [창비 웹매거진/2002/3] 




창작자의 시대 연 '언더그라운드 음악 대부' 조동진


"자연친화적이고 회화적인 시어, 아날로그 감성으로 대안 제시" 

싱어송라이터 조동진
싱어송라이터 조동진[푸른곰팡이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28일 방광암으로 투병 중 쓰러져 세상을 떠난 조동진(70)은 자연 친화적인 시어와 서정적인 포크 선율로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계를 이끌었다.

1966년 미8군 밴드로 출발한 고인은 록그룹 '쉐그린'과 '동방의 빛'의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했으며, 서유석의 '다시 부르는 노래', 양희은의 '작은 배', 송창식의 '바람 부는 길', 김세환의 '그림자 따라' 등을 작곡하며 이름을 알렸다. '다시 부르는 노래'는 1970년대 포크계의 명곡으로 꼽혔다.

작곡가로 이름을 알린 그는 1979년 '행복한 사람'이 담긴 1집 '조동진'을 발표해 따뜻하고 서정적인 포크 선율에 낮고 포근한 목소리를 실어 울림을 줬다.

TV 등 대중 매체에 노출하지 않아 '얼굴 없는 가수'이던 그는 1980년 발표한 2집의 '나뭇잎 사이로'와 1985년 3집의 '제비꽃'이 큰 사랑을 받으면서 언더그라운드 음악계를 이끄는 싱어송라이터로 우뚝 섰다.

대중음악 평론가 최규성 씨는 "1966년부터 록밴드를 한 뒤 13년 만에 1집을 낸 조동진 씨는 이미 준비된 신인이었다"며 "1집은 대중음악사에서 1970년대에 안녕을 고하며 1980년대 창작자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란 분기점, 선언문 같은 앨범이었다. 지금까지도 언더그라운드에서 창작하는 후배들의 지침서, 교본 같은 앨범"이라고 평했다.

특히 그의 음악은 당시 한대수, 김민기 등이 시대 유감을 노래하며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던 포크의 흐름과 달리, 관조적인 시선의 노랫말과 아름다운 선율로 물길을 바꿔놓았다. 한 편의 시 같은 자연주의적인 노랫말 속에 깃든 내면의 성찰과 사색, 따뜻한 고독은 억압적인 시대에 마음을 다친 대중을 위로했다.

'행복한 사람'이 담긴 조동진 1집(1979) 재킷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 씨 제공]
'행복한 사람'이 담긴 조동진 1집(1979) 재킷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 씨 제공]

1980년대 동아기획에 몸담은 고인은 자신의 영향을 받은 후배들이 잇달아 등장하자 '조동진 사단'을 이루기도 했다.

최규성 평론가는 "조동진의 1집을 재발매하면서 출발한 동아기획은 해외 팝 수준의 뛰어난 창작곡을 담은 앨범을 잇달아 냈다"며 "조동진은 동아기획에서 좌장 역할을 하면서 주류가 아닌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창작곡으로 노래하는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동아기획 뮤지션들은 십시일반 도움을 주며 앨범을 만들었고 이때 협업 시스템이 정착됐다"고 설명했다.

조동진 1986년 공연 포스터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 씨 제공]
조동진 1986년 공연 포스터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 씨 제공]

이어 1990년대 동생인 조동익·조동희 남매와 장필순, 이규호 등의 뮤지션들이 모인 음악공동체 하나음악을 이끌었다. 그러나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된 1집 이후 1996년 5집 '조동진 5'까지 내고서는 칩거에 들어갔다.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 씨는 "조동진의 음악은 테크노 사운드가 몰려오는 1990년대에도 더욱 빛나는 아날로그적 감성이었다. 완벽하게 가공된 음악에 염증을 느낀 음악 팬들에게 다가가 포크 1세대로서 큰 울림을 줬다. 1세대로서 '언더그라운드'와 '언플러그드' 음악이란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최규성 평론가도 "지루하고 느릿하다는 상반된 반응도 있었지만 '작은 배' 등 그의 음악들은 그림이 그려지는 회화적인 노래의 시초가 아닐까 생각한다"며 "뛰어난 음악성에도 창작자로서 군사정권에서 탄압받은 뮤지션들과 달리 조명을 덜 받은 측면은 있다. 음악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는 분이었지만 주위에 동료들이 모여든 것만으로도 따뜻하고 인간적인 흡입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젊은날의 조동진
젊은날의 조동진[푸른곰팡이 제공]

5집 이후 그는 제주에 머물렀다. 2001년 '하나 옴니버스' 앨범에 한 곡을 수록했고, 하나음악 출신들이 다시 모인 기획사 푸른곰팡이가 2015년 발표한 옴니버스 앨범 '강의 노래'에서 다시 한 곡을 선보였을 뿐 뚜렷한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그는 20년 만의 새 앨범 '나무가 되어'를 발표하면서 "그렇게 빨리, 또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을 줄 몰랐어. 기타를 집어넣는데 10년, 다시 꺼내는 데 10년 걸린 셈이네"라는 소회를 전했다.

강산이 두 번 변했지만 그의 음악은 고요하면서도 역동적인 힘이 있었고, 몽환적이면서도 선명했다. 인생을 반추하는 듯한 진지한 독백 속에 허무와 희망이 포개어져 있었다.

이 앨범에서 그는 유신정권 시절의 청춘을 노래한 '1970', 44년을 함께 살다가 2014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그날은 별들이'와 '천사'를 들려줘 감동을 안겼다.

당시 문학평론가 함돈균 씨는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아 화제가 됐는데 조동진 씨야말로 음악으로 시를 쓰는 분"이라며 "역사와 사회의 개발 독재 드라이브에 휩쓸리지 않고 고요하게 자신을 유지하는 내공이 특별한 뮤지션"이라고 평했다.

'포크계 대부' 조동진, 별세…"자택에서 쓰러져"

이 앨범을 시작으로 세상과 다시 소통한 조동진은 최근 자신의 1~5집을 리마스터링한 박스 세트를 손수 작업했다.

그리고 다음 달 16일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꿈의 작업 2017-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공연을 계획했다. 13년 만에 서는 콘서트였으며, 동아기획-하나음악-푸른곰팡이로 이어진 뮤지션들이 조동진의 1998년 공연 '98 꿈의 작업-자연을 닮은 사람들의 노래' 이후 20년 만에 완전체로 모이는 무대였다.

그러나 그는 공연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은 28일 세상을 떠나면서 안타깝게도 이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됐다.

mimi@yna.co.kr



'나뭇잎 사이로' 한국의 밥 딜런...조동진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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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조동진, 포크음악 대부. 2017.08.28. (사진 = 푸른곰팡이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방광암으로 투병하다 70세를 일기로 28일 별세한 조동진은 한국 포크 음악의 격을 한 단계 높인 인물로 평가 받는다. 

 '행복한 사람' '나뭇잎 사이로' '제비꽃' 등으로 유명한 조동진은 1966년 미8군 록밴드로 음악을 시작해 록그룹 '쉐그린'과 '동방의 빛' 리드 기타리스트와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1979년 1집 '조동진: 행복한 사람/불꽃'을 내놓았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레이블 '동아기획 사단'의 수장으로 군림하며, 당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했다. 들국화, 시인과 촌장, 어떤날, 장필순 등의 앨범이 동아기획을 통해 나왔다. 

이 레이블이 힘을 점차 잃어간 90년대에는 자신의 동생인 조동익을 비롯해 장필순, 박용진(더클래식) 등과 함께 음악공동체 하나음악을 꾸렸다. 푸른곰팡이는 하나음악을 잇는 레이블이다. 

조동진은 또 1980~90년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대부로 통했다. 다른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저항적인 기운을 머금은데 반해 서정적인 노랫말을 선보였다. 이로 인해 특히 '한국의 밥 딜런'으로 통했다. 

1996년 5집 '조동진5: 새벽안개/눈부신 세상' 이후 제주 등에 살며 적극적인 음악 활동에 나서지 않다 20년 만인 지난해 11월8일 새 앨범 '나무가 되어'를 발표, 건재를 과시했는데 특히 서정성 짙은 노랫말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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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조동진, 포크음악 대부. 2017.08.28. (사진 = 푸른곰팡이 제공) photo@newsis.com

"나는 별빛 내린 나무가 되어 / 이전 처럼 움직일 수가 없어 / 나는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 / 그대 너무 외면하지 않기를"('나무가 되어') 등이 예다. 

문학평론가 함돈균 씨는 "좋은 시를 쓰는 순간 그 사람이 시인이다. 그런 관점에서 음악 가사를 시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그런 형태의 상이 있다면 수상자로 마음 속에는 조동진을 품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앨범의 사운드 특징은 몽환적이라는 것인데, 전자악기 등을 통해 분위기와 공간감을 강조한 일렉트로닉의 하위 장르인 앰비언트를 떠올리게 했다. 그럼에도 포크의 서정성은 뭉근하게 머금고 있다. 1996년 5집 이후 잠시 은둔했던 20세기 조동진의 포크가 '21세기적인 귀환'을 했다는 평을 받았다.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는 "개인이 느끼는 어떤 감정과 아름다움에 대한 옹호를 줄기차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표현을 했다"면서 "한국 대중음악계의 여러 흐름 속에서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한 음악도 분명 가치가 있었지만 대중적인 것보다 품격과 가치를 가진 음악의 흐름이 있었는데 그 핵심 존재가 조동진"이라고 말했다. 

"세상과 단절된 음풍농월이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쉽게 소멸해가는 아름답고 작고 슬픈 것을 꿋꿋하게 표현함으로써, 포크의 가치 중에 순수함에 대한 옹호를 음악으로 증명해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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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조동진, 포크 싱어송라이터. 2017.08.28. (사진 = 윤종신 인스타그램 캡처) photo@newsis.com

그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는 트렌디한 음악이 있는가 하면 쉽게 자신의 어법을 바꾸지 않은 음악가들이 있는데 조동진은 후자"라면서 "포크 음악의 순수함을 지키는 첨병 같은 역할로 대중음악계에 균형을 맞췄다"고 덧붙였다. 

조동진은 후대 가수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서정적인 감성으로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유희열, 윤종신이 대표적인다. 윤종신은 고인의 부고가 알려진 직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조동진 형님 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라고 적었다. 그의 젊었던 시절 사진도 함께 게재했다. 

조동진은 싱어송라이터 집안의 맏이었다. 형과 한국 포크을 이끌어온 조동익(57)·2011년 1집을 내고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한 조동희(44)와 함께 삼남매다. 

조동진은 최근 푸른곰팡이 대표를 맡은 조동희를 비롯해 이 레이블 소속 뮤지션들과 함께 내달 16일 한전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꿈의 작업 2017- 우리 함께 있을 동안에'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다.  

고인은 노래도 부를 예정이었는데 그의 추모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조동진은 2004년 LG아트센터 단독 공연 이후 무대에 선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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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조동진, 포크음악 대부. 2017.08.28. (사진 = 푸른곰팡이 제공) photo@newsis.com

동아기획, 하나음악, 푸른곰팡이로 이어지는 이 레이블 공연은 20년 만이다.  1998년 '98 꿈의 작업-자연을 닮은 사람들의 노래' 이후 다시 모인다.  

이날 장필순·한동준·이규호·오소영 등 조동진 음악의 계승자들이 출연하고, 듀오 '어떤날' 출신 기타리스트 이병우가 찬조 출연한다. 어떤날은 조동익과 이병우가 결성했던 듀오다.   
  
공연 당일에는 조동진의 6장의 리마스터링 앨범이 공개된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시인 나희덕, 음악 평론가 신현준·성기완·박준흠·최지선·김영, 시인 이원 등의 비평집도 포함된다. 

조동진은 공연을 앞두고 푸른곰팡이를 통해 "그만 두고 싶다고 해서 그만 둘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어둡고, 쓸쓸한… 희망이 없는 곳일지라도, 누군가는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한 바 있다. 

 realpaper7@newsis.com




[여적]시인 조동진, 가수 조동진


노래하는 시인 조동진씨는 1992년 시집을 펴낸 바 있다.

노래하는 시인 조동진씨는 1992년 시집을 펴낸 바 있다.

겨울비 내~리던 밤~ 그대~떠나갔네. 바람 끝 닿~지~않은~밤과~낮~저~편에…. 내가 불~빛 속을 서둘러 밤길~달렸을 때~내 가~슴 두드리던 아득~한 그 종소리.”

28일 아침 ‘노래하는 음유시인’ 조동진씨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맨먼저 떠오른 노래는 ‘겨울비’(1979년)였다. 그 한폭의 수채화 같은 서정적인,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겨울비~’하고 운을 뗄 때 일시에 숨이 멎고 온몸에 짜릿하게 흘렀던 전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새삼 휴대폰으로 재생해보니 38년 전처럼 또한번 소름이 돋았다. 그 뿐이 아니다. 다음 곡, 그 다음 곡이 절로 귓전을 떠돈다.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땐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제비꽃)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작은 배)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아~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행복한 사람)

시인의 서정성이 물씬 풍기는 노랫말의 백미가 또 있다.

조동진씨의 1993년 출연한 TV콘서트 공연모습.

조동진씨의 1993년 출연한 TV콘서트 공연모습.

“내가 좋아하는 너는 언제나, 소매 가득 바람 몰고 다니며, 내가 좋아하는 너는 언제나, 묵은 햇살 다시 새롭게 하며…”(내가 좋아하는 너는 언제나)

이 정도의 곡과 가사라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밥 딜런이 남부럽지 않다는 문학평론가의 찬사도 있다. 사실 고 조동진씨는 김민기·한대수·양병집씨 등과 함께 포크음악의 4대가로 꼽힌다. 그러나 앞선 김민기(아침이슬 등)·한대수(물좀주소)·양병집(역·逆) 등이 저항을 택했다면 조동진씨는 포크의 서정을 만개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인생을 노래하는 음유 시인에서 1996년 내놓은 음반에서는 철학자의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을 듣는다.

“밤새 뒤척이던 이 혼란의 새벽, 그대 거짓 웃음과 내 짧은 입맞춤…오 친구 난 길을 잃었네, 나는 어느새 안개 속에 갇혀버렸네.”(새벽안개)

조동진씨는 방광암 투병 중에도 다음달 콘서트(9월 16일)에 나설 계획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노래를 만들고 노래가 또 나를 만들고. 그렇게 노래와 내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로를 이끌어간다는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는데….

그러나 ‘조동진의 노래’를 듣고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고달픈 삶의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된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하루종일 ‘겨울비’ 가사가 입가에 맴돈다. “겨울비 내~리던 밤~ 그대~ 떠나갔네. 방안가득 하~얗게 촛불~밝혀두고, 내가 하~늘 보며 천천히~밤길~ 걸었을 때 내 마~른 이마~위엔 차~가운 빗방울이….”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8281533001&code=960100#csidx45ca63abfbad93bbccd54988608db0c 








“조동진은 한국 대중음악계 모더니즘의 창시자”

‘포크음악의 대부’ 조동진 방광암으로 28일 별세


‘포크음악의 대부’ ‘포크계의 음유시인’라 불리는 가수 조동진이 2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조동진의 소속사 푸른곰팡이는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조동진이 28일 오전 3시 43분 별세했다”고 밝혔다.

조동진은 최근 방광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해 왔다.

조동진의 동생인 가수 조동희는 “자택 욕실에서 쓰러진 것을 가족들이 발견해 급히 병원으로 모셨지만 결국 눈을 감았다”며 “병세가 악화돼 수술을 받기 위해 오늘(28일) 입원할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떠나니 너무나 황망하고 슬프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조동진은 푸른곰팡이의 동료 뮤지션과 함께 ‘꿈의 작업 2017-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라는 제목의 연합 공연을 다음달 16일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열 예정이었다. 좌석은 이미 매진됐다. 그러나 조동진은 끝내 이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됐다.

1966년 미8군 밴드에서 음악을 시작한 조동진은 록그룹 쉐그린과 동방의 빛에서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수만과 서유석이 부른 ‘다시 부르는 노래’와 양희은의 ‘작은 배’를 작곡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79년 솔로 1집 앨범을 발표했다. ‘행복한 사람’과 ‘겨울비’가 수록된 이 앨범은 훗날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기도 했다. 1980년 발표한 2집 앨범 수록곡 ‘나뭇잎 사이로’와 1985년 3집 앨범에 실린 ‘제비꽃’은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조동진은 시적 가사와 서정적 멜로디로 ‘한국의 밥 딜런’에 비유됐다. 후배 뮤지션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 ‘조동익 사단’을 이뤘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레이블인 동아기획을 이끌었고 1990년대엔 동생인 조동익ㆍ조동희 남매와 장필순, 이규호 등과 함께 음악공동체 하나음악을 꾸려서 활동했다. 현 소속사 푸른곰팡이는 하나음악의 후신이다.

조동진은 대중음악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주의’ 대중음악인으로 평가 받는다. 1994년 예술의 전당은 한국 대중가수 최초로 조동진에게 공연장 문을 열어 그를 예우했다.

음악평론가 김작가는 “조동진은 한국 대중음악계 모더니즘의 창시자”라며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대중음악의 세련미를 완성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김작가는 “선구적이면서도 특유의 감성을 녹여내 동시대와 호흡하는 그의 음악 세계는 유재하와 장필순으로 이어지며 한국 대중음악의 한 조류를 형성했다”며 “1980~1990년대 대중음악계는 조동진을 빼고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동진은 1996년 5집 앨범 발표 이후 제주에서 칩거해 왔다. 2001년 ‘하나 옴니버스’와 2015년 ‘푸른곰팡이 옴니버스’ 앨범에 참여했을 뿐 음악 활동을 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20년 만에 새 앨범 ‘나무가 되어’를 발표하며 가요계로 돌아왔다. 당시 그는 “어둡고 가려진 곳에서 고단한 하루를 이어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은, 내 오랜 노래 벗들에게 이 나직한 마음을 전해봅니다”라고 담담히 소회를 밝혔다. 이 앨범은 올해 2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최고 영예인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다. 이후 조동진은 1~5집 앨범 리마스터링 작업에 몰두했다.

다음달 열리는 공연은 13년 만의 무대이자 ‘조동진 사단’이 1998년 이후 19년 만에 모두 모이는 자리가 될 예정이었다. 공연기획사 모스트핏의 김웅 대표는 “우선 장례를 잘 치른 뒤 가족 및 동료 뮤지션들과 공연 방향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족으로는 2남(조범구, 조승구)이 있다. 발인은 30일 오전 7시. 빈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장례식장 9호실이고, 장지는 경기 벽제 승화원이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http://www.hankookilbo.com/v/7ad6653856fd4b46928067e250fa9705




[조동진 다시듣기] 시처럼, 가을처럼 젖어들다


음악인생 30년 즈음인 2000년 조동진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같은 음악을 추구하는 곳은 우리밖에 없다. 그만두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조동진 음악의 독보적 좌표를 짐작하게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음악인생 30년 즈음인 2000년 조동진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같은 음악을 추구하는 곳은 우리밖에 없다. 그만두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조동진 음악의 독보적 좌표를 짐작하게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일부)

조동진(1947. 9. 3~2017. 8. 28). 한국 포크음악의 거장이 꼭 이맘때 떠났다. 바람이 서늘해지다가 이제 9월이 오면, 암 투병 중이던 그는 후배 뮤지션들과 13년 만의 무대에 오를 참이었다. 특유의 낮고 단단한 음성으로 노랫말에 깊이를 더하는 이 음악가가 무대에 서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들은 이제 그를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 시간을 맞았다.

1집 <조동진>(1979)을 시작으로 2집 <조동진2>(1980), 3집 <조동진3>(1985), 4집 <조동진4>(1990), 5집 <조동진5>(1996), 6집 <나무가 되어>(2016)를 세상에 남긴 조동진은 “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한길로 죽 가서 자신의 흐름을 만들고 음악적인 성찰을 이뤘다”(가수 이장희)는 평이 지배적이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은 조동진 음악의 특별함을 “어떤 종류의 전형적 문학적 서정이 두르는 신비주의나 상투적 휴머니즘에 대한 대중의 기대를 배반하고 도취나 나르시즘 없음”으로 표현하며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그런 형태의 상이 있다면 수상자로 마음속에 조동진을 품고 있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시집을 내기도 했던 조동진 곡은 가사가 각별히 아름답다. ‘나뭇잎 사이’를 지칭하는 한국어 단어는 마땅치 않아도 70·80년대는 조동진을 통해 나뭇잎 사이라는 어떤 ‘작지만 확실한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감수성을 얻은 셈이다. 날카로운 감각을 둥글려 표현하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다시 들어본다.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어”

 한국방송 유튜브 계정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땐/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땐/ 너는 많이 야위었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 때/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 너머 먼 눈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어

(‘제비꽃’ 1985)


그의 대표곡으로 ‘제비꽃’을 기억하는 이가 많다. 가수 장필순, 이은미 등이 리메이크해 인기를 이어가기도 했다. 포크음악의 살아 있는 전설 중 하나인 장필순은 조동진의 음악적 직계로 불린다. 조동진이 80년대를 대표하는 레이블 ‘동아기획’을 이끌 때 장필순을 비롯해 들국화, 어떤날, 시인과 촌장, 김현식 등이 등장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반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외로운가요 당신은 외로운가요/ 아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바람결 느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그 마음 있으니/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눈이 있으니 (‘행복한 사람’ 1979)


‘행복한 사람’은 조동진 음악의 ‘서시’ 격이다. 1집 1번 트랙에 수록된 곡으로 많은 이에게 조동진을 각인시킨 노래. 당시 어두웠던 시대 상황에 비춰 ‘언더그라운드’에선 저항성 깃든 대중음악이 한 부류를 이루는 와중에 다른 한켠에선 시대 때문에 시든 마음을 다독이는 음악이 조동진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동진은 1966년 미8군 밴드로 음악을 시작해 록그룹 ‘더 쉐그린’ ‘동방의 빛’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했다. 포크로 건너간 조동진의 음악은 ‘서시’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음악적 일탈로 대중을 놀라게 하는 대신 익숙한 감동을 더 깊이 뿌리내리는 ‘나무’처럼 대중과 함께했다.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지붕들 사이로 좁다란 하늘/ 그 하늘 아래로 사람들 물결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여린 별 하나/ 그 별빛 아래로 너의 작은 꿈이/ 어둠은 벌써 밀려왔나/ 거리엔 어느새 정다운 불빛

그 빛은 언제나 눈앞에 있는데/ 우린 또 얼마나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나뭇잎 사이로’ 1980)


“네가 나의 밤을 모두 알고 있듯이, 나는 너의 푸른 새벽을 알고 있지”


네가 나의 밤을 모두 알고 있듯이/ 나는 너의 푸른 새벽을 알고 있지

소낙비 내리던 그 한낮의 어둠 속에서/ 우리 말하던 사랑과 자유 이제 아무 의미 없어도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에 잠깐씩 들렸던 바다/ 그 파도 소리 그 저녁 노을 우리 함께 기억하리

네가 나의 밤을 모두 알고 있듯이/ 나는 너의 푸른 새벽을 알고 있지 (‘친구들에게’ 1996)


동아기획의 시절을 지나 1992년께 조동진과 그의 동생인 조동익을 주축으로 ‘음악 친구들’이 모여 세운 ‘하나음악’은 전설의 음악공동체였다. 단순한 음반사를 넘어 구성원들이 가족처럼 어울리며 음악을 했다.

“이런 곳이 하나쯤은 있어야겠다 싶어 겁없이 만들었어요.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르고, 우리가 좋아하면 남들도 좋아하겠거니 했죠.” 골수팬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던 하나음악은 90년대 중후반 들어 가요계가 거대 기획사 위주로 급격히 쏠리면서 위기를 맞았다. 하나음악은 2003년 문을 닫았다. “막판에는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 다들 3년 동안 무보수로 일했어요. 내가 미안해서 더는 못하겠더라고요.” (▶관련기사 : [인터뷰] 신곡 ‘강의 노래’로 돌아온 조동진)


유리잔에 넘치는 불빛처럼/ 우리 빛나는 금빛 환상처럼/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내가 태어나 사랑한 곳

거리마다 춤추는 유혹처럼/ 우리 숨가쁜 오늘 하루처럼/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내가 태어나 사랑한 곳

그곳이 나의 천국/ 눈먼 행복과 벗겨진 꿈/ 눈물 없는 슬픔과 사랑 없는 열기만 가슴에 있네

거리마다 춤추는 유혹처럼/ 우리 숨가쁜 오늘 하루처럼/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눈부신 세상/ 내가 태어나 사랑한 곳 

(‘눈부신 세상’ 1996)


“발걸음 멈추게 하던 너의 순간들, 서둘러 사라져버린 너의 그림자”


밤새 불어난 강물/ 물에 잠겨버린 너의 날들

밤새 달려온 강물/ 물에 쓸려가는 너의 아픔

불어오는 바람의 위로/ 물에 비친 구름 빈 하늘

잃어버린 시간의 흔적/ 저 산 그림자

이름, 이름 모를 숲/ 저문 들판을 지나

우리 떠나왔던 곳/ 다시 돌아서 가는 시작도 끝도 없는 여행

밤새 들려온 강물/ 물에 흘려보낸 너의 노래

고여드는 마음의 강물/ 우리 이제 다시 흐르니

돌아오는 새들의 행렬/ 저 먼 종소리 (‘강의 노래’ 2015)


하나음악은 2011년 ‘푸른곰팡이’로 돌아왔다. 음악적 동지 윤영배·조동희·고찬용·장필순·이규호 등이 잇따라 푸른곰팡이에서 새 음반을 냈다. 조동익도 2013년 장필순 7집 프로듀서로 참여하면서 합류했다. 2015년 3월, 14년 만에 신곡 ‘강의 노래’를 들고 돌아온 조동진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강은 여러 의미로 해석하고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 소재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앨범 주제로 생각해왔다”고 했다. “하나음악 식구들이 예전부터 강가로 자주 야유회를 갔거든요. 족구도 하고 닭백숙도 먹고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기억도 일조한 것 같아요.”(조동진의 막내 동생인 싱어송라이터 조동희)

조동진은 싱어송라이터 집안의 맏이다. 형과 함께 한국 포크음악계를 이끌었고 제주에서 작업하고 있는 조동익, 2011년 1집을 낸 뒤 싱어송라이터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조동희(푸른곰팡이 대표)가 삼남매다.


뒤돌아보면 먼 저녁 바다/ 발걸음 멈추게 하던 너의 순간들

귀 기울이면 빈 바람소리/ 서둘러 사라져버린 너의 그림자

채우고 또 채우려 했었던 아쉬움을/ 비우고 또 비우려 했었던 그 기나긴 슬픔의 시간

눈 감아보면 흰 구름언덕/ 지금은 어느 또 누가 돌아보는지

채우고 또 채우려 했었던 아쉬움을/ 비우고 또 비우려 했었던 그 기나긴 슬픔의 시간

(‘저녁 바다’ 2017, 노래 장필순)


지난 5일 발매된 장필순 <소길9화> 앨범에 들어 있는 ‘저녁 바다’ 가사가 조동진의 것이다. 생의 ‘저녁’을 맞아 꺼져가는 빛을 붙든 음유시인은 길지 않은 분량에 바다, 발걸음, 순간, 바람소리, 그림자, 아쉬움, 구름, 시간 같은 단어를 골랐다.

조동진은 지난해 11월 20년 만에 6집 <나무가 되어>를 내놓았다. “시간을 넘어 강을 흘러 나무가 되어”(음악평론가 신현준) 돌아온 그는 “그렇게 빨리, 또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을 줄 몰랐다. 기타를 집어넣는 데 10년 다시 꺼내는 데 10년 걸린 셈”이라고 간단히 소회를 밝혔다. (▶ 관련기사 : 조동진, 시간을 넘어 강을 흘러 나무가 되다)

조동진은 성악가이자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조긍하(1919~1982)의 아들이다. 그가 딱 한번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에 참여한 영화 <산책>(감독 이정국, 2000) 삽입곡에도 ‘나무’라는 곡이 있다.

“아쉬워 말아요, 마지막 그 순간은 또다시 시작인데”


서러워 말아요 꽃잎이 지는 것을/ 그 향기 하늘 아래 끝없이 흐를 텐데/ 그 향기 하늘 아래 끝없이 흐를텐데

아쉬워 말아요 지나간 바람을/ 밀려오는 저 바람은 모두가 하나인데/ 밀려오는 저 바람은 모두가 하나인데

부르지 말아요 마지막 노래를/ 마지막 그 순간은 또다시 시작인데/ 마지막 그 순간은 또다시 시작인데 

(‘다시 부르는 노래’(‘마지막 노래’) 1986)


“아주 상식적인 말이기도 하고요. 또 늘 자신에게 다짐하는 그런 이야기지만 좋은 노래, 혹은 좋은 소리란 좋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좋지 못한 일들이 남들에게 아주 쉽게 전이되듯이, 좋은 마음이란 마치 꽃의 향기 같아서 넓게 넓게 퍼져가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노래에 귀 기울이는 분들께 그러한 분위기를 함께 나누고자 할 때 이보다 더한 축복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조동진이 1992년 <에스비에스>(SBS)에 출연해 밝힌 음악관이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08808.html





시인처럼 구도자처럼 낮고 유장한 노래들을 남기고…

포크음악 거목 조동진 별세
38년동안 6장 음반 남겨
적지만 긴 생명 주옥같은 노래들 ‘행복한 사람’‘제비꽃’

다음달 후배들과 예정된 무대
‘꿈의 작업’ 미완으로 끝나나


한국 포크음악의 거목 조동진이 28일 세상을 떠났다. 푸른 곰팡이 제공.
한국 포크음악의 거목 조동진이 28일 세상을 떠났다. 푸른 곰팡이 제공.


한국 포크음악을 상징하는 거목 조동진이 28일 새벽 3시43분 별세했다. 향년 70. 고인은 방광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고 있었다. 수술을 앞두고 자택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병원으로 옮겼지만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20년 만에 새 앨범 <나무가 되어>를 발표하고, 오는 9월16일 12년 만에 공식적으로 무대에 서며 지속적인 활동을 예고하던 상황이어서 아쉬움은 더 크다. 고인은 푸른곰팡이 후배들과 함께 ‘꿈의 작업 2017 ?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포크계의 대부’란 수식어처럼 그는 한국 포크음악을 대표하며 수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단순히 음악뿐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에서 귀감이 되었다. 1979년 1집을 발표하고 38년 동안 6장의 앨범만을 발표했다.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적시려면 우선 자신의 잔을 넘쳐흐르게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내면이 음악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다렸다.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마음속에 그릇이 있다면 선배님은 서두르지 않고 그 안에 물이 가득 차서 넘치려고 할 때 작업을 하시는 것 같다”(장필순)거나 “호숫가에 돌을 던져서 파장을 일으키려면 그 호수가 잔잔해야 하듯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박용준) 같은 후배 음악가들의 증언처럼 침묵조차도 그에겐 음악 행위의 일부였다.


수많은 후배들이 평소 고인을 따랐다. ‘거목’이란 수식어처럼 후배들이 조동진이라는 큰 나무 아래 모여들었다. 조동익, 장필순, 한동준, 이병우, 정원영, 윤영배, 고찬용, 유희열 등 한국 대중음악의 중요한 이름들이 그와 함께했고, ‘조동진 사단’이란 말이 생겨났다. 고인은 1992년 후배들과 함께 음악공동체 하나음악을 출범했다. 레이블이나 소속사의 개념이 아닌 말 그대로의 공동체였다. 함께 음악을 고민하고 이야기하며 대중음악의 한 영역을 구축했다. 80년대 동아기획의 뒤를 이으며 시작한 하나음악은 지금은 푸른곰팡이로 이름을 바꿔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대중에게도 많은 노래를 남겼다. 1979년 발표한 첫 앨범에서 ‘행복한 사람’이 큰 인기를 얻었다. 2집에서 ‘나뭇잎 사이로’, 3집에서 ‘제비꽃’ 같은 노래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티브이에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공연 위주로 활동하며 언더그라운드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로 자리했다. 과작이었지만 그의 호흡처럼 노래들은 긴 생명력을 지녔다. 라디오에선 여전히 그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많은 후배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새롭게 다시 부르고 있다.


그의 음악은 흔히 ‘서정적’이란 말로 표현됐지만 그 서정을 연출해내기 위해 구도자처럼 치열하게 음악에 집중했다. 조동진이란 이름에는 도식적으로 포크란 장르가 따르지만 그는 늘 다양한 사운드를 실험했다. 2집에 실린 ‘어둠 속에서’나 5집의 ‘새벽안개’는 대담하고 진보적인 사운드를 담고 있었고, 작년에 나온 <나무가 되어> 안에는 포크, 록, 팝, 일렉트로닉 같은 음악들이 한데 어우러져 엄청난 기운을 뿜어냈다. 그 치열하게 쌓아올린 사운드 위에서 조동진은 관조하듯 시를 쓰고 낮고 유장하게 노래했다.

음악평론가 신현준은 조동진의 음악에 대해 “그의 음악은 세상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 감각해야 하는지, 경험해야 하는지를 아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며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던 많은 사람들이 조동진을 ‘짝사랑’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후배 음악가 윤영배 역시 “이런 노랫말, 이런 언어가 이 세상 그 어떤 선언적인, 그 어떤 가파르게 내뱉는 구호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고 말했다.


<한겨레>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준비하고 있던 공연에 대해 “새로운 노래들이 중심이 되겠지만 오래된 노래들을 다르게 풀어보는 것도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노래들은 이제 불릴 수 없게 됐다. 푸른곰팡이 관계자는 장례가 끝나는 대로 예정된 공연을 추모공연 성격으로 바꿀지 취소할지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빈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30일 새벽 5시30분이다.


김학선 객원기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08626.html




한국 대중음악의 거목 故 조동진이 만든 유일한 영화음악 <산책>

http://blog.naver.com/cine_play/221085373607




그대 영원히 ‘행복한 사람’

한국 대중음악의 거목이자 은둔해 있던 시대의 사상가 조동진을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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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요계에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거목’ 조동진이 8월28일 숨졌다. 30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식이 거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8월30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장례식장.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른 노래가 잔잔한 호수에 동심원을 그리듯 울려퍼졌다. 흑백 영정사진 속 얼굴이 흐느끼는 사람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듯했다. 방광암으로 투병하다 8월28일 새벽 세상을 떠난 가수 조동진의 발인식이 엄수되는 순간,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우리를 위로하던 망자의 노래 <행복한 사람>은 이제 그를 위한 것이 되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들의 슬프지만 따스한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그야말로 ‘행복한 사람’이 된 듯했다.


화가의 꿈을 키웠던 어린 시절


올해로 꼬박 70년을 세상에 머물다 떠난 조동진. 단지 몇몇 히트곡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그의 삶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한국 포크의 대부’라는 수식어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 그의 음악 세계는 포크에만 한정되지 않을뿐더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적시려면 우선 자신의 잔을 넘쳐흐르게 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과 태도는 음악에만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 대중음악의 거목이자 은둔해 있던 시대의 사상가 한 사람을 떠나보냈다.


조동진은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승호·김지미·최무룡 주연의 <육체의 길>(1959) 등 30여 편의 영화를 만든 조긍하 감독이다. 어린 시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화가의 꿈을 키웠던 조동진은 일찌감치 음악도 자연스럽게 접했다. 진공관 앰프를 자작했을 정도로 오디오광인 형 조동완 덕이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친구들과 록밴드를 결성해 음악회 행사 같은 곳에서 연주했다. 1966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지만, 2년 만에 중퇴했다. 영화 제작까지 도맡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했다. 미 8군 클럽에서 전기기타를 연주하고, 서울 신촌의 다방과 카페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했다. 주로 유명한 팝을 연주하고 노래하던 그는 노래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1968년 만든 <마지막 노래>(나중에 심의에 걸려 <다시 부르는 노래>로 개명)는 후에 서유석, 김세환, 현경과 영애, 이수만 등이 불렀고, 1969년 만든 <작은 배>(고은 시인이 작사)는 양희은이 불렀다. 남들 앞에 나서길 꺼리는 성격 탓에 그는 음반을 내거나 방송에 출연하는 데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대신 스튜디오 세션 밴드 ‘동방의 빛’에서 기타를 치며 다른 가수들을 위한 노래를 작곡했다. 핑크플로이드 등 실험성 강한 프로그레시브 록에 심취한 것도 이 시절이었다.


1974년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조동진은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음악 동료들이 사라지자 그가 설 땅은 더욱 좁아졌다. 궁핍한 삶에 더는 견디기 힘들어졌을 즈음 자신의 첫 음반을 발매했다. 음악을 시작한 지 10년도 넘은 1979년의 일이었다. 1970년대 초반 김세환을 위해 만들어 녹음까지 했으나 그가 활동 금지를 당하는 탓에 발표하지 못한 노래 <행복한 사람>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웠다. 이 음반이 의외의 반응을 모았다. 1집이 30만 장이나 팔려나가는 히트를 기록한 데 이어, 이듬해 발표한 2집에서도 <나뭇잎 사이로>가 큰 사랑을 받았다.


인기 가수로 이름을 널리 알렸음에도 그는 방송 출연에는 무관심했다. 대신 간간이 공연 위주로 소극적 활동만 이어갔다. 음악과 공연에 집중하는 조동진의 집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가 모여들었다. 김수철, 들국화의 전인권·최성원·허성욱,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함춘호 등 음악인뿐 아니라 진중한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로 북적였다. 의도치 않게 그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대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조동진 사단’이 생겨났다. 조동진 사단의 일원은 1980년대 동아기획을 통해 음반을 발표했고,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붐을 일으켰다. 조동진은 1985년 발표한 3집에서 <제비꽃>을 히트시키며 중심을 잡았다.


1990년대 들어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산실이던 동아기획의 바람이 잦아들었다. 브라운관을 화려하게 수놓는 댄스음악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조동진은 동생 조동익과 함께 1992년 하나음악을 설립했다. 조동익 또한 1980년대 중·후반 이병우와 함께 포크 듀오 ‘어떤날’로 활동했던 음악인이다. 장필순, 한동준, 이소라, 박용준, 고찬용, 조규찬 등이 모여들었다. 하나음악은 단순한 음반제작사를 넘어서는 일종의 음악공동체였다. 제작자, 프로듀서, 작곡가, 가수, 엔지니어 등이 한 식구처럼 어울렸다. 1989년 시작돼 싱어송라이터의 등용문이 된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입상자들은 하나음악의 품에 자연스레 안겼다. 유희열도 그중 하나다.


‘천사’ 된 아내 지키는 ‘나무’가 되어

조동진은 9월16일 서울 서초동 한전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합동공연을 준비 중이었다. 한전아트센터 제공


“이런 곳이 하나쯤은 있어야겠다 싶어 겁 없이 만들었어요.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르고, 우리가 좋아하면 남들도 좋아하겠거니 했죠.” 2015년 초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조동진은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바람과 달리 1990년대 중반 이후 가요계가 거대 기획사 위주로 급격히 쏠리면서 하나음악은 위기를 맞았다. 한때 해산했다가 어렵사리 재건도 했지만, 2003년 하나 옴니버스 음반 <꿈>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문을 닫았다. “막판에는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 다들 3년 동안 무보수로 일했는데, 내가 미안해서 더는 못하겠더라”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조동익·장필순은 제주도로 내려갔고, 조동진은 일산에 칩거했다. 다른 구성원들도 각자의 길을 걸었다.


2011년, 잠들어 있던 하나음악이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했다. ‘푸른곰팡이’라는 레이블 이름으로 옛 하나음악 식구들이 다시 모여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장필순, 한동준, 고찬용, 윤영배, 더 버드, 이규호 등에다 조동진·조동익 형제의 막내동생 조동희까지 가세했다. 각자 음반을 발표하고 공연해오다, 2015년에는 하나음악의 전통과도 같던 옴니버스 음반 <강의 노래>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전까지 뒤에서 후원만 하던 조동진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이때였다. 그는 14년 만의 신곡 <강의 노래>를 옴니버스 음반에 수록했을 뿐 아니라, 프로듀서를 맡아 음반 전체를 진두지휘했다.


오랜 침묵을 깬 조동진은 지난해 6집 <나무가 되어>를 발표했다. 5집 이후 무려 20년 만의 새 음반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 음반은 포크에만 가둘 수 없는 음악적 자장을 지닌다. 포크, 록, 팝, 일렉트로닉 같은 다양한 요소를 쌓고 또 쌓아 어느 음악보다 깊고 치열하고 진보적인 사운드를 빚어냈다. <나무가 되어>는 지난 2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최고 영예인 올해의 음반 상과 최우수 팝음반 상을 받았다.


조동진은 푸른곰팡이 후배들과 함께 9월16일 서울 한전아트센터에서 ‘꿈의 작업 2017-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라는 이름의 합동공연을 할 예정이었다. 병원에서 방광암 진단을 받고서도 무대에 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술을 앞두고 자택에서 쓰러졌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푸른곰팡이는 합동공연을 추모공연 성격으로 바꿔 예정대로 진행할 계획이다. 조동진은 후배들과 무대에 올라 <행복한 사람> <나뭇잎 사이로> <천사>를 부르려 했다. <천사>는 2014년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만든 6집 수록곡이다.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가 된 조동진은 일산 자택으로 돌아갔다. 그의 곁에는 먼저 재가 된 아내가 있다. 그는 이제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되어 ‘천사’가 된 아내 곁을 영원히 지키게 됐다.


“마지막 그 순간은 또 다른 시작”


조동진은 지난 7월 생전에 마지막으로 <한겨레>와 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푸른곰팡이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실을 말한다면 과거에도 암담했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주어진 성향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어둡고 쓸쓸한 희망이 없는 곳일지라도 누군가는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그가 직접 부르는 노래는 들을 수 없게 됐지만, 대신 후배들이 부르는 그의 노래가 울려퍼질 것이다. 그 노래는 어둡고 쓸쓸하고 희망이 없는 곳을 환하게 밝혀줄 것이다. 그는 <다시 부르는 노래>에서 “마지막 그 순간은 또 다른 시작”이라고 노래했다. 그의 노래는 영원할 것이다.


서정민 씨네플레이 대표·전 <한겨레> 대중음악 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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