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 동경하던 강릉 소년, 45년째 LP 수집 ‘덕후’의 길
71년 첫 상경해 대연각 화재 목격
초등 졸업 무렵 음반 수집의 길로
다음 회에 서울 노래 보따리 풀어
아날로그 LP 시절, 한국인을 위로하며 한국인의 기쁨과 슬픔을 노래한 대중가요 이야기를 앞으로 격주로 풀어가려 한다. 첫 번째 주제는 <서울&>의 매체 정체성에 걸맞게 ‘서울을 노래한 대중가요’로 정했다. 본격적인 서울 노래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전에 지방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 왔던 필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지방 사람들의 로망 서울
필자는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성장한 지방 사람이다. 운 좋게도 취학 전에 강릉 한국방송공사(KBS) 어린이 합창단원이 되어, 보릿고개가 엄혹했던 1960년대 중반부터 금성 진공관 라디오를 끼고 살며 드라마의 매력에 푹 빠져 살았다. 일찍부터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특권’을 누렸던 당시를 생각하면 꽤나 행운아란 생각이 든다. 1968년 강릉에 처음으로 KBS가 개국했을 때, 우리 집은 몇백 대에 불과했던 강릉의 텔레비전 수상기 보유가정이었다. 그때 밤색 가구로 꾸며진 멋들어진 일제 소니 티브이는 친구들이 부러워했던 우리 집 자랑 1호였다.
티브이 수상기는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체험시키는 마술 상자 같았다. 티브이를 통해 처음 바라본 서울은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에겐 환상이었다. 고층 건물이라곤 3층짜리 건물이 전부였던 강릉과 달리, 목이 뒤로 넘어가도록 올려다봐야 할 만큼 하늘로 치솟은 고층 빌딩들이 즐비했던 서울의 모습은 어린 가슴을 벌렁거리게 했다. 강릉에서는 본 적 없는 ‘허공에 달린 도로’(육교)와 ‘대낮처럼 밝은 지하세계’(지하도)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텔레비전을 통해 자연스럽게 생겨난 서울에 대한 로망 때문에 서울에서 누가 내려왔다고 하면 만사 제쳐놓고 구경을 갔던 촌스러운 기억이 웃음을 머금게 한다.
불발로 끝난 첫 상경 기회
오매불망 그리던 서울 방문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에서 버스 사업을 준비했던 아버지가 함께 서울에 가자고 했다. 버스나 기차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간다는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았다. 하지만 서울로 가는 당일, 동네 친구들과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사고를 쳤다. 철부지 아들 때문에 서울행 비행기를 타지 못한 아버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셨다. 그때 죽도록 혼이 났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969년 12월11일 낮 12시25분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등 총 51명을 태우고 강릉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YS-11기가 이륙 11분 만에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가는 초유의 항공기 납치사건이 터졌다. 아버지와 내가 서울로 가려고 타려 했던 항공기다. 철부지 아들의 어처구니없는 사고 덕에 더 큰 사고를 피한 아버지는 안도하셨지만, 첫 상경의 꿈이 깨진 나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별천지 같았던 서울
2년 뒤인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을 맞은 1971년 12월25일에 드디어 서울에 입성했다. 서울에 다녀온 친구들과 어른들께 귀동냥으로 듣고 상상만 했던 서울의 모습은 역시나 별천지였다. 먼저 그 시절 지방에서는 공영방송 KBS만 시청할 수 있어 <뽀빠이>가 전부였던 강릉과는 달리, 서울은 민영방송인 MBC와 TBC에서 <황금박쥐> <요괴인간> <서부소년 차돌이> 등 비교 불가 수준의 재미난 만화영화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황홀했다. 아버지와 함께 스카라극장 옆 진고개 식당을 가려고 탄 버스에서 촌스럽게 멀미로 고생하던 중에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 현장을 직접 보았다.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에 연루된 가수들
당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으로 사망하거나 피해를 본 대중가수들이 있다. 1970년 제1회 동경국제가요제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상을 받은 정훈희는 당시 대연각호텔 스카이라운지에 고정출연하고 있었다. 국제적인 가수로 위상이 높아진 그녀는 자신의 백밴드가 사용할 고가의 악기와 앰프를 새로 장만했지만, 화제로 모든 장비를 잃었다. 그때의 충격으로 정훈희는 활동을 중단했다.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 온 1972년 초여름, 겨우내 칩거했던 정훈희가 야심하게 발표한 컴백곡 ‘빗속의 연인들’이 매일같이 라디오와 티브이에서 흘러나올 만큼 히트를 기록했다. 그런데 그해 서울은 기록적인 폭우로 도시 저지대가 거의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났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날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고통받던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쉼 없이 흘러나오는 ‘비가 오는데에에에, 비가 오는데’ 하고 반복되는 노랫말에 그만 폭발해 방송사로 항의 전화를 해대었고, 각 방송사는 항의 전화벨 소리가 한동안 요란히 울렸다 한다. 그 바람에 대중가요 사상 최초로 ‘빗속의 연인들’은 ‘눈속의 연인들’로 제목과 가사를 수정하는 해프닝까지 생겼다.
대연각호텔 화재로 사망한 ‘젊은 연인들’의 작곡가, 민병무
대연각 화재 사건으로 희생된 가수들도 있다.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 동상 수상곡인 ‘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도 사연 많은 노래다. 이 노래의 작사가는 방희준이고 작곡가는 민병무다. 서울대 공대 출신인 작곡가 민병무는 같은 팀 멤버 민병호의 친형이다. 원래 ‘젊은 연인들’은 노래를 만든 포크 듀오 ‘훅스’가 가장 먼저 대학가에서 불렀다. 대연각호텔에 불이 났을 때, 방희준의 생일잔치를 하느라 함께 숙박했던 민병무가 사망했다. 몇 년이 지난 1976년 남성 듀엣 ‘아도니스’(호와 섭)가 ‘다정한 연인들’로 제목을 수정해 음반을 처음 냈지만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민병호는 고교 동창인 서울대 농대생 민경식과 미대생 정연태와 함께 ‘서울대 트리오’를 결성해 형의 유작을 들고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던 것. ‘젊은 연인들’은 대학가요제 수상 이후 노래에 얽힌 애틋한 사연이 알려지며 큰 화제를 모았다.
음반 수집 ‘덕후’의 길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1973년 12월 어느 날, 동네 친구 형이 틀어놓은 전축 위에서 빙빙 돌아가는 동그란 검은 물체에서 흘러나오는 영국의 하드록 밴드 ‘딥 퍼플’(DEEP PURPLE)의 ‘하이웨이 스타’(HIGHWAY STAR)를 들었다. 그때까지 즐겨 들었던 대중가요와는 사뭇 다른, 강렬하게 질주하는 그 노래를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충격을 맛봤다.
이후 음반수집의 길로 접어들어 45년 동안, 음악 없이는 못 사는 제법 유명한 ‘덕후’ 음반수집가가 되었다. 그때 서울은 사대문 안에 사는지, 밖에 사는지로 빈부차를 구분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나는 비록 사대문 밖인 영등포구 상도동(이후 관악구를 거쳐 동작구로 지명 변경)에 살았지만 동네마다 레코드 가게가 넘쳐났다. 가게에 진열된 다양한 음반을 보려고 매일같이 상도동에서 노량진까지, 줄지어 있던 레코드 가게를 순례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는 서울의 구체적 지명을 노래한 대중가요 노래비들을 찾아 떠나보겠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174.html
고무줄놀이하면서도 불렀던 노래 ‘서울의 찬가’
노래비 속 서울 노래들 (상)
1호 ‘서울의 찬가’는 대표곡
서민 애환 그린 ‘마포종점’
애절한 사연 담긴 ‘단장의…’
2000년대 들어 전국 각지에는 지역축제와 더불어 지명이 들어간 대중가요 노래비 건립이 이어지고 있다. 1968년 국내 최초로 탄생한 윤석중의 동요 ‘반달’ 노래비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 창경궁에 세웠다가 1984년 광진구 구의동 어린이대공원으로 이전했다. 같은 해에 대중가요로는 전남 목포시 유달산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최초로 건립되었다. 이후 이난영을 추모하는 난영가요제가 열렸으니 노래비 건립과 지역축제의 역사는 꽤나 오래된 셈이다. 서울에는 총 9개의 대중가요 노래비가 있다. 건립 순서에 따라 소개하겠다.
서울 노래비 1호-패티김 ‘서울의 찬가’
서울 대중가요 노래비 1호는 1994년 ‘자랑스러운 서울시민 600인'에 선정된 작곡가 길옥윤(노래 패티김)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서울의 찬가’ 노래비다. 1995년 10월25일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공원에 세운 이 노래비는 조각가 황현수가 대리석으로 만든 피아노 모양의 받침대 위에 가사와 악보를 새겨놓고 그 위에 청동으로 만든 서울시 시조 까치가 시목인 은행나무 열매를 물고 앉은 모습이었다. 현재는 원형이 훼손되어 악보가 새겨진 돌과 청동으로 제작된 까치가 망실되어 가사가 새겨진 앞판만 남은 상태다.
길옥윤은 생전에 ‘서울의 찬가’에 대해 ‘세계 유명 도시는 그 도시를 찬미하는 노래가 모두 있는데 왜 서울은 없는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만든 노래’라고 밝혔다. 아마도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서울을 찬미한 노래가 무수하게 발표되었던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1969년 패티김이 동아방송의 ‘이달의 노래’ 코너에서 처음 발표한 ‘서울의 찬가’는 서울 각 지역의 동네 골목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많았을 정도로 사랑받았다. 또한 당시에 각 학교에서는 수업종이 울리면 ‘종이 울리네 수업이 시작되었네…’로 가사를 바꾼 노래가 등장했을 정도로 서울을 대표하는 노래로 크게 유행했다.
서울 노래비 2호-이해연 ‘단장의 미아리 고개’
서울 노래비 2호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 노래비다. 이 노래비는 1996년 8월1일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고개 정상에 자리한 아리랑 아트홀(현 미아리고개 예술극장)에 건립되었다. 상당한 크기의 철제에 노래 제목과 가사를 새겨넣은 독특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이 고개를 넘어 미아리 일대에 조성되었던 조선인 공동묘지에 묻히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기에 미아리고개라 칭하게 됐다고 한다. 6·25전쟁 때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도로였던 이 고개는 가사에 묘사된 것처럼 인민군이 후퇴할 때 수많은 사람이 철삿줄에 두 손을 묶여 납치되어 넘어갔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휴전 후인 1956년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로 발표되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작사가 반야월의 실제 경험이 녹아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반야월은 가족을 남겨두고 처가가 있는 김천으로 내려가 아내와 아이들은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던 그는 서울이 수복되면서 아내를 다시 만났다. 하지만 네 살배기 어린 딸 수라는 김천으로 피난을 가려고 미아리고개를 넘던 중에 배고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어 오열했다. 숨진 아이를 미아리고개에 손으로 흙을 파고 묻었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찾아갔지만 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당시의 비통한 심정을 애절한 가사로 옮긴 노래가 바로 ‘단장의 미아리고개’이다.
서울 노래비 3호-은방울 자매 ‘마포종점’
서울 노래비 3호는 1997년 12월 마포대교 옆 마포구 도화동에 있는 어린이공원에 세운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노래비다. 박춘석이 작곡하고 정두수가 작사한 ‘마포종점’ 노래비는 바위에 가사가 쓰인 상판을 붙여놓은 평범한 모습이다. 마포 전차 정류장과 노래에 얽힌 유래와 제작일자를 바위 3개로 구성한 점이 특색이다. ‘마포종점’은 1960년대에 서울 시가지를 누볐던 전차의 종점인 변두리 마포의 쓸쓸한 밤 풍경과 강 건너 영등포로 일하러 떠난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노래가 발표된 1968년은 서울의 전차 운행이 중단된 해이기도 하다.
전차만이 아니다. 2절 가사에 등장하는 여의도는 비행장으로 묘사되어 있다. 여의도 비행장은 1916년부터 서울 여의도에 있던 국내 최초의 공항이다. 이후 1958년 김포공항으로 민간항공이 이전하면서 이곳은 미군전용 비행장으로만 사용되다 1971년 경기도 성남의 서울공항으로 비행장을 이전하면서 사라졌다. 또한 함께 등장하는 강변북로에 있는 당인리 발전소는 1930년 문을 열어 열병합발전소로 80년이 넘도록 서울을 밝히고 데웠다. ‘마포종점’은 1960년대 성장일로의 밝은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던 서울 도심에서 소외된 변두리 서민들의 슬프고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준 위로의 노래였다는 점에서 빛을 발한다.
서울 노래비 4호-남인수 ‘애수의 소야곡’
서울 노래비 4호는 옛 드림랜드였고 지금은 북서울꿈의숲이 된 공원에 세운, 일제강점기에 ‘서정가요의 제왕’으로 불렸던 남인수의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사랑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을 절절하게 표현해 많은 이의 가슴을 움직였다. 가사에 등장하는 ‘휘파람 소리’와 ‘바람 소리’는 대중가요 가사의 문학성을 살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큰 규모의 이 노래비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했던 당대 가요계의 유명인사 이름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는 남인수의 고향인 경남 진주시에도 있다. 사실 이 노래비는 서울 노래비 1호인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보다 7년 앞선 1988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세워졌다. 시기로는 가장 앞서지만 4호 서울 노래비가 된 것은, 1998년 드림랜드에서 열렸던 남인수가요제 때 노래비를 지방에서 서울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227.html
‘돌아가는 삼각지’ 쓸쓸함, 병상의 배호를 끌어당겼다
노래비 속 서울 노래들 (하)
김광석 노래비, 생전 주 무대 대학로에
신해철 노래비, 어린 시절 성장지에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는 ‘우리 것’은 모두 촌스럽게 생각하는 콤플렉스가 분명 있었다. 그래서 국내 지명은 노래 제목이나 가사에서 피하고 싶은 소재였다. 전통적으로 트로트는 이 부문에선 예외다. 오랜 세월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며 적극적으로 전국의 지명을 주요 소재로 다뤄왔기 때문이다.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국내 지명에 대한 인식의 대반전을 일으킨, 서울의 대중가요 노래비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서울 노래비 5호- 배호 ‘돌아가는 삼각지’
2001년 11월 용산구 삼각지에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가 서울에서 다섯 번째로 세워졌고, 가수의 이름으로 명명된 ‘배호길’까지 함께 탄생했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비 내리는 명동’ 등 유독 서울의 지명을 소재로 한 배호의 노래들은 장르는 트로트지만 세련된 재즈 스타일 창법으로 불러, 촌스럽게 여겨졌던 국내 지명을 마치 세계적인 근사한 지명으로 착각시키는 마술을 발휘했다. ‘돌아가는 삼각지’는 삼각지에 입체교차로가 생겨나기 전인 1963년에 만든 노래지만, 1967년에 닦은 입체교차로를 빗대어 만든 노래로 오해하는 분이 많다. 작곡가 배상태는 이 노래를 노량진에서 전차를 타고 충무로로 가던 중 삼각지에서 한 사내가 비를 맞고 걸어가는 쓸쓸한 모습을 보고 만들었다고 한다.
‘돌아가는 삼각지’는 노래를 부를 가수를 찾지 못해 애를 먹은 사연이 있다. 당대의 인기 가수 남일해는 연습만 했고, 금호동도 구닥다리 노래라며 퇴짜를 놓았다. 유망 신인 가수 남진도 여의치 않아 무명 가수 김호성이 처음 녹음했지만 음반이 나오질 못했다. 작곡가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청량리 인근에 있던 배호의 허름한 전셋집을 찾아갔다. 당시 건강 악화로 거동조차 힘들었던 배호도 처음엔 이 노래 녹음을 사양했다. 하지만 쓸쓸한 분위기의 노래가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아 가래를 뱉어가며 병상에서 녹음을 강행했다. 명곡 ‘돌아가는 삼각지’는 그런 과정을 거쳐 1967년 세상에서 빛을 보았고 배호의 출세작이 되었다.
서울 노래비 6호- 김광석 ‘다시부르기 1, 2’
화려한 외모나 최고의 인기 가수도 아니었던 김광석의 노래들이 지금껏 사랑받는 원동력은, 인생의 험난한 과정마다 느꼈던 고민과 희망을 대변해준 삶의 진정성이 담긴 가사에 있다. ‘서른 즈음에’가 그랬고 ‘이등병의 편지’와 ‘거리에서’도 그랬다. 1993년 노래 생활 10년을 결산하는 장기공연을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시작한 그는 1995년 1천 회 공연이라는 금자탑을 쌓으며 대학로에 소극장 공연 문화를 정착시켰다.
2008년 1월6일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 앞 입구 벽면에 여섯 번째 서울 노래비 김광석 ‘다시부르기’가 탄생했다. 김광석 노래비는 노래 한 곡이 아닌 앨범(<김광석 다시부르기 1, 2>)을 대상으로 제작된 최초의 서울 노래비이다. 앨범 수록곡들은 김광석이 소극장 1천회 공연을 달성하면서 즐겨 불렀던 노래들이다. 브론즈 부조가 대리석 단상에 얹힌, 통기타 치는 김광석 모습을 담은 이 노래비는 대학로 소극장 문화 확립에 공헌한 그의 음악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비록 큰 규모는 아니지만 서울의 노래비는 공간 확보에 어려움이 있기에, 경제적인 측면과 조형 면에서도 예술적 표현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모범적인 작품이다.
서울 노래비 7호- 이문세 ‘광화문 연가’
서울의 일곱 번째 노래비는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이다. 이 노래비는 2008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 고 이영훈의 팝 발라드 음악을 기리기 위해 그의 1주기인 2009년 건립되었다. 정동길과 정동교회가 바라보이는 덕수궁 돌담길에 있는 이 노래비는 잘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울 정도로 작은 것이 흠이지만, 활짝 웃는 이영훈의 모습과 빈티지 마이크 형태를 띤 조성현 작가가 제작한 노래비는 조형미가 뛰어나다. 정동길은 작곡가 이영훈이 생전에 사랑했던 거리이자 음악적 영감을 제공한 공간이다.
‘광화문 연가’는 정동교회와 덕수궁 돌담길을 배경으로 한 아름답고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영훈이 시적인 가사와 탁월한 멜로디를 직조해 격조 있는 사랑 노래를 제시하면, 탁월한 소리꾼 이문세가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창법으로 불러 청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서울 노래비 8호- 오기택 ‘영등포의 밤’
라희 작사, 김부해 작곡의 ‘영등포의 밤’은 1965년 음반 발표 당시에 공장 지대였던 칙칙한 영등포를 사랑 가득한 낭만의 거리로 묘사했다. 부도로 망하기 직전이었던 신세기레코드를 되살린 ‘영등포의 밤’이 담긴 음반은 밤새 찍어도 모자랄 정도로 팔려나갔다. 하지만 왜색 창법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였다가 해금되기도 했다.
산업 현장에서 고단하게 살았던 서민의 꿈과 애환을 담은 노래 ‘영등포의 밤’은 1966년 강민호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면서 더 큰 인기를 얻었다. 2010년 12월23일 기타 모습을 형상화한 높이 2.5m의 ‘영등포의 밤’ 노래비가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문화광장에 세워졌다. 서울 노래비 8호의 등장이었다. 제막식에 참석한 오기택은 “긴 세월이 흘러 영등포 중심부에 노래비가 세워져 감격스럽다”며 소감을 전했다.
서울 노래비 9호- 신해철 ‘세계의 문’(유년의 끝)
2015년 뜻하지 않은 의료사고로 사망한 고 신해철을 기리기 위한 노래비가 서울 북서울꿈의숲 공원에 2015년 12월24일 건립되었다. 서울 노래비 9호로 탄생된 신해철의 노래비는 높이 163㎝, 가로폭 65㎝ 규모의 벤치 형태로 디자인되었고 동판에는 넥스트 3집 수록곡 ‘세계의 문’(유년의 끝) 가사가 새겨져 있다. 과거 드림랜드가 있었던 북서울꿈의숲 공원 인근 지역은 신해철이 성장기를 보낸 지역이다. 실제로 노래비로 탄생한 ‘세계의 문’을 비롯해 ‘날아라 병아리’ 등 주옥같은 명곡들의 가사 속에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그가 바라보고 느꼈던 세상의 풍경과 삶의 고민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279.html
첫 정상회담 방북 취재…‘휘파람’ 등 북한 LP도 수집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을 기념하며
‘휘파람’ 싱글 LP는 유일하게 보유
김정일 애창곡, 이수미의 ‘두고 온 고향’
72년 첫 적십자회담서 ‘사랑해’ 합창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뜻깊은 날에 실릴 칼럼을 쓰다 보니 제1차 김대중 김정일 남북 정상회담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나는 2000년 제1차 남북 정상회담 당시 사진 풀기자단(공동취재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갔다. 북한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89년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찾았던 북측 통일각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기록을 중시해 무언가를 수집하는 천성은 평양에서도 여전했다. 2박3일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 정상회담 소식을 알린 <로동신문>을 비롯해 모든 일정의 기록물을 포함해 회담 후에 제작된 사진집, 한정판 시계, 우표, 전화카드 등등까지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숙소인 평양 고려호텔 쇼핑센터에서 산 보천보전자악단 시디(CD), 전혜영·이분희·이경숙 등 북한 유명 여가수들의 시디와 비디오 같은 음악 자료도 빼놓을 수 없다.
북한 음악 자료들은 체제 찬양 일색인지라 기관에 정식 등록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친 뒤에야 돌려받았다. 최근 북한 가수들의 음반은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비싼 값에 팔리고 있고 외화벌이용으로 해외 판매에도 적극적이다. 심지어 해외 유명 경매사이트에는 북한의 유성기 음반까지 심심찮게 등장한다.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거친 북한 가수들과 악단의 연주 수준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또한 찬양가요 일변도였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미국과 서양의 유명 팝송까지 선곡에 포함할 정도로 레퍼토리가 변화하고 있다.
2000년 당시 남측 수행원들이 묵었던 숙소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왔던 노래는 익숙한 ‘반갑습니다’나 ‘휘파람’이 아닌, 찬양가 ‘그 품 떠나 못살아’였다. 온종일 같은 노래만 반복해서 들려주어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지만 멜로디가 꽤 수려해 중독성이 강했다.
대중음악과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는 문화 공간이나 축하공연 일정은 무조건 자청해 취재를 맡았다. 당시 만찬장에서 함께 식사했던 김책공대 총장에게 북한에서도 LP를 듣는지 물었더니 “예전에는 많이 들었지만 이제 북한은 LP가 아닌 시디로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그 뒤 이런저런 경로로 북한 노래가 담긴 LP를 여러 장 구했다.
그중 북한 가요 ‘휘파람’의 오리지널 싱글 LP를 남한에서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전혜영이 노래한 ‘휘파람’은 1991년 북한 유일의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조기천이 작사하고, 리종오가 작곡했다. 북한의 젊은 층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휘파람’은 찬양가요들과 달리 한 젊은이의 짝사랑을 빠르고 경쾌한 리듬으로 부른 드문 노래이다. 북한 인기 여가수 전혜영의 낭랑한 음색은 남한의 휴대폰 컬러링으로도 서비스된 지라 ‘반갑습니다’와 더불어 ‘휘파람’은 가장 많이 알려진 북한 가요일 것이다.
‘휘파람’은 1992년 6월8일자 <조선일보> ‘색연필’ 꼭지에서 <내외통신>의 6월4일자 798호 기사에 근거하여 “혁명성이 없어 민심을 동요시키고 사상해이를 초래하여 인민들을 바보로 만들 뿐만 아니라 조직의 기강과 규율을 깨고 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금지되었다고 보도된 적이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북에서 명곡으로 평가받는 ‘휘파람’은 금지 보도가 나간 뒤인 <평양신문> 6월19일자 TV 노래 프로그램 소개에 버젓이 등장했다. 또한 1993년 북한 노인들의 재혼 문제를 다뤘던 영화 <대동강에서 만난 사람들>에서 주인공인 홀아비 강 선달이 대동강 유람선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많은 승객 앞에서 ‘휘파람’을 유쾌하게 부르는 장면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지난 4월1일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북 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공연-봄이 온다’ 무대에서 최진희는 남매 듀오 현이와 덕이의 ‘뒤늦은 후회’를 불렀다. 공연 직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진희와 악수하며 “그 노래 불러줘서 고맙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졌다. 또한 ‘뒤늦은 후회’가 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애창곡이었다는 해석에 음원 사용량이 123배나 폭등하는 화제를 모았다. 사실 ‘뒤늦은 후회’는 현이와 덕이의 히트곡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나 ‘꼬마 인형’에 비해 널리 알려진 곡은 아니다. 최진희도 몰랐던 노래를 북측에서 콕 짚어 부탁한 것은 북한에서 우리 가요를 꽤 깊숙이 듣고 있다는 증명이다.
남한의 대중가요를 북한 주민들도 즐겨 부른다는 사실이 1990년대에 언론이 보도하면서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최진희는 북한에서 인기 많은 남한 가수 중 한 명이다. 실제로 1996년 6월 국내 대중가요 중에서 북한에서 애창되는 남한 가요 1위가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랑의 미로’는 평양에서 발간한 <외국 민요집>에도 실렸고, 북한의 음대생들이 졸업 실기시험 때 주로 부르는 곡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처럼 북한에서 인기가 많은 남한 가수 최진희에게 김정일 위원장의 애창곡 ‘뒤늦은 후회’를 불러달라고 요청한 것은 이런 사정을 알고 나면 특별하기보단 당연한 일로 보인다.
고 김정일 위원장은 대중문화 애호가로 유명했다. 남한의 영화와 가요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고 알려졌다.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현이와 덕이의 ‘뒤늦은 후회’보다 훨씬 이전인 1972년 이수미의 ‘두고 온 고향’은 고 김정일 위원장의 애창곡으로 가장 먼저 알려졌다. 이 노래의 가사는 실제로 실향민인 유명 디제이(DJ) 고 이종환이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사모곡이다.
다시금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지금처럼, 화해 무드를 만드는 데 일조한 대중가요는 과거에도 많았다. 1971년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이산가족 찾기를 추진하느라 북측에 회담을 제의했다. 이에 북측이 응하면서 1972년 8월30일 제1회 남북적십자회담이 처음으로 평양 대동강 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당시 남측 이범석 수석대표와 북측 김태희 대표단장은 회담 후 함께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불렀다. 당시 내외신 기자들은 이들이 ‘우리의 소원’이나 ‘아리랑’을 부를 것으로 예상했지만 의외로 남한의 젊은 층에 인기가 많았던 혼성 듀엣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를 불러 화제가 되었다. 핵미사일로 남과 북이 대치하던 상황에서 벗어나 모처럼 찾아온 남북 화해 분위기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전쟁 종식이라는 알찬 열매를 맺길 소망한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329.html
이미자·나훈아가 가장 많이 부른 노래? 서울 노래 14곡
1908년 ‘경부철도가’ 이후 서울 지명 노래 1500곡 불려
한강 소재는 격동의 한국사 증언
70~80년대는 명동, 종로, 광화문
박춘석 22곡으로 가장 많이 작곡
서울 노래들은 시대별 풍경과 시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1908년 최남선의 창가 ‘경부철도가’로 시작된 서울 노래는 1926년 윤심덕의 ‘자라메라’, 1934년 채규엽의 ‘서울 노래’와 박부용의 ‘노들강변’, 강흥식의 ‘유쾌한 시골영감’으로 본격화되며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수한 명곡이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지금의 서울은 한강을 중심으로 강남과 강북으로 분리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청계천을 경계로 북촌과 남촌으로 구분되었다. 북촌은 종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 거주 지역이고, 남촌은 충무로(당시 본정)와 명동(당시 명치정)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다. 이에 일제강점기의 서울 노래는 조선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북촌이 중심을 이뤘다.
1930년 발표된 김옥엽, 이진풍의 ‘한강물’ 이후 지금까지 서울 노래의 핵심 지역인 한강은 격변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증언한다. 1950년대의 한강은 현인의 ‘전우여 잘자라’처럼 전쟁의 격전지로, 국가 재건의 기운이 드셌던 60년대에는 ‘한강수에 배 띄어라’라는 황금심의 노래처럼 서울 시민들의 유원지로서 거듭났다. 1979년 혜은이의 ‘제3한강교’는 눈부시게 발전이 진행된 한강의 모습을 증언한다. 서울을 구분했던 강이 도심의 청계천에서 한강으로 이전되었음은 서울 인구의 양적 팽창을 말해준다.
해방의 감격을 표현한 서울 노래로는 현인의 ‘럭키서울’, 장세정의 ‘울어라 은방울’이 대표적이다. 1942년 발표된 진방남의 ‘꽃마차’는 발표 당시엔 가사에 등장한 지명이 중국의 ‘하르빈’이었지만 해방 후에 서울로 바뀐 특별한 노래이다. 해방되면서 서울 노래는 현인의 ‘서울야곡’처럼 일본인들이 사라진 남촌의 명동, 충무로로 옮겨가는 전이 현상이 포착된다. 또한 소공동, 남대문, 광화문, 세종로, 삼각산, 을지로, 마포 그리고 미아리고개와 우이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역을 거점으로 서울 시내 곳곳에는 각종 극장과 라이브클럽 그리고 음악다방이 생겨나면서 대중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60년대의 대표적인 서울 노래들인 이시스터즈의 ‘서울의 아가씨’, 은방울자매의 ‘요지경 서울’, 남진의 ‘서울 플레이보이’, 차은희의 ‘서울의 전차 차장’, 김상희의 ‘서울의 버스 여차장’, 유주용의 ‘서울 여대생’ 등 서울의 인물들을 밝고 해학적으로 묘사한 특징을 보인다. 당시 지방민들은 가난한 시골을 탈출해 성공을 꿈꾸며 무조건 서울로 향하는 이촌향도의 경향이 강력했다. 서울 사대문 안에 터전을 잡기 힘들었던 지방민들의 거주지였던 청계천이나 삼선교, 삼각지, 아현동, 용산, 노량진, 영등포, 마포 그리고 멀리 서울 외곽의 불광동이나 우이동, 도봉산까지 서울 노래에 등장하는 지명은 확대되었다.
1970년대 들어 청년 세대의 통기타 소리가 요란했던 명동은 서울 노래의 중심이었다. 군사정권의 통제와 억압에 저항하며 서울 시민의 빈부 차이를 노래했던 양병집의 ‘서울 하늘’, 서유석의 ‘파란 많은 세상’ 등 포크송은 금지의 멍에를 짊어지기도 했다. 분식집과 입시학원들이 넘쳐났던 70~80년대 종로와 광화문은 청소년들의 아지트였다. 당시의 분식집에는 ‘디제이(DJ) 박스’가 있었는데, 전인권도 그 시절 광화문의 한 분식집에서 디제이로 활동했다. 1972년 청년 세대의 감성을 대변했던 이장희의 ‘그건 너’, 1987년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같은 새로운 감성의 서울 노래가 젊은 세대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80년대에 시위가 빈번했던 대학로를 주제로 한 ‘동숭로에서’도 새롭게 등장한 서울 노래였다.
90년대는 강남 지역이 주목받으면서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신세대 문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서울 노래도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 ‘영동 부르스’, 유영석의 ‘압구정동’, 신성우의 ‘rock'n roll+압구정동 공주병’ 김지애의 ‘밤 깊은 서초동’ ‘방배동의 밤’ 등 강남의 유흥가를 소재로 한 노래가 대거 등장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김흥국의 ‘59년 왕십리’, 한동준의 ‘내 고향 삼선교’, 동물원의 ‘혜화동’, 오월의 ‘종로에서’ 등 훈훈한 인간미를 그리워하는 강북 노래들도 부활했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한 인디음악 신(무대)이 형성된 홍대 인근이 서울 노래로 사랑받기 시작했다.
2010년 조사에서 서울 노래는 1940년대까지 70곡, 1950년대 58곡, 1960년대 151곡, 1970년대 101곡, 1980년대 202곡, 1990년대 209곡, 2000년대 206곡 등 총 1142곡이 확인되었다. 또한 1930년대 44명, 1940년대 6명, 1950년대 30명, 1960년대 109명, 1980년대 152명, 1990년대 172명, 2000년대 186명 등 800명에 가까운 가수들이 서울을 노래했다. 제목에서는 가장 많은 544곡이 ‘서울’을 넣었고, 명동 85곡, 한강 70곡, 서울역 55곡, 남산 40곡, 종로 39곡, 청계천과 여의도 24곡, 이태원 21곡, 영등포 17곡의 순이었다.
서울 노래를 가장 많이 부른 가수는 14곡의 나훈아와 이미자가 공동 1위, 오기택 13곡, 설운도 12곡, 도미와 윤일로 11곡, 은방울자매와 주현미가 10곡으로 뒤를 이었다. 서울 노래를 가장 많이 작사한 작사가는 반야월이 31곡으로 가장 많으며, 이철수 23곡, 김병걸 18곡, 손로원과 장경수 17곡 등 순이다. 서울 노래를 가장 많이 작곡한 작곡가는 22곡을 지은 박춘석이다. 서울 지명이 가장 많은 곡은 1984년 설운도의 ‘나침반’으로 종로, 명동, 청량리, 을지로, 미아리, 영등포 등 모두 6곳이 등장한다.
2010년 청계천문화관의 ‘대중가요 서울을 노래하다’ 전시회 이후 서울 지명송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이에 유재석의 ‘압구정 날라리’, 유브이의 ‘이태원 프리덤’, 자이언티의 ‘양화대교’, 신현희와 김루트의 ‘홍대 블루스’ 등 서울 노래들이 급증해 현재 1500곡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2012년 지구촌을 강타했던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인해 서울 강남은 세계적인 명소로 떠올랐다. 이처럼 서울 노래들은 밝고 희망찬 찬가 형식을 띠거나 서울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과 시대별로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는 지역의 특성을 녹여내며 다채롭게 발표되고 있다. 지명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서울뿐 아니라 전국의 지명이 재킷에 표기된 가요 엘피(LP)의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381.html
트로트의 여왕은 포크송도 잘 불렀다
트로트 울타리 넘어 포크·가곡·팝·민요도 수록한 이미자의 LP들
‘나그네’ 등 포크풍 노래 녹음
트로트 가수 특유 마이너 감성 없어
“곡 들어보고 한번 부르면 끝”
국내 대중가요 역사에서 혼성 듀엣의 노래는 유성기 시절부터 등장한다. 1960년 말 공식 팀명을 갖고 활동한 ‘서수남과 현혜정’ 이전의 모든 혼성 듀엣은 프로젝트로 팀을 결성하고 단발성으로 노래를 발표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1956년 안다성과 권혜경이 함께 부른 국내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 ‘청실홍실’은 전국의 안방을 강타했다. 이후 스타 가수 부부인 황금심과 고복수는 1958년 발매된 고복수의 은퇴기념 음반에서 ‘노래하는 부부’로 굳건한 금슬을 과시해 화제를 모았다. 1971년 하춘화와 작곡가 고봉산이 코믹하게 대화 형식으로 함께 부른 ‘잘했군 잘했어’는 지금도 불리는 프로젝트 혼성 듀엣 역사상 최대 히트곡이다. 이후 1987년 이문세, 고은희의 ‘이별 이야기’, 1990년 홍서범 조갑경의 ‘내 사랑 투유’ 등 아날로그 엘피(LP) 시절에 발표된 프로젝트 혼성 듀엣들의 달콤한 노래들은 어김없이 대중의 흥미를 일으키며 히트했다.
그런 점에서 1963년 킹스타레코드에서 발매한 남일해와 이미자의 10인치 LP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앨범이다. 21살 젊디젊은 이미자가 풋풋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선배 가수 남일해와 함께 부른 진귀한 혼성 듀엣곡을 들을 수 있는 음반이기 때문이다. 트로트 여성 솔로 가수의 대명사인 이미자가 프로젝트 혼성 듀엣으로 음반을 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앨범에서 유일한 혼성 듀엣곡은 반야월이 작사하고 나화랑이 작곡한 타이틀곡 ‘우리 둘은 젊은이’이다. 이미자와 남일해는 이때의 인연으로 1965년 개봉했던 영화 <계약결혼>의 주제가를 듀엣으로 다시 불러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미자와 남일해의 듀엣곡이 수록된 이 음반은 실체를 직접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희귀하다.
미국인들은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성대를 영구보존해 해부해보고 싶어 했고,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뇌를 해부해 특이한 구조를 발견하고 싶어 했다. 한때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로 극찬받았던 이미자도 오래전 일본에서 ‘사후에 성대를 영구보존해 해부학적으로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평가해 화제가 되었다. 1993년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한 ‘이미자 성대의 비밀’을 풀어보고자, 한 텔레비전 방송사가 이대부속병원 음성관리소에 이미자의 성대 분석을 의뢰했다. 당시 성대, 음폭, 발성, 공기 역학 부문으로 정밀 검사를 했다. “이미자의 성대는 점액질이 풍부하고 훈련이 아닌 천부적인 창법, 발성법을 체득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처럼 이미자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일반인과는 차별되는 성대에서 시작된다는 판명이 나왔다.
이미자는 트로트 장르를 상징하는 존재지만, 트로트만 잘 부를 것으로 단정하면 곤란하다. 그는 포크송, 가곡, 팝, 민요 등 그 어떤 장르의 노래도 타고난 음감으로 소화하는 만능 가수였다. 내친김에 트로트를 대표하는 이미자가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흥미로운 실험을 시도했던 음반들을 소개한다.
60~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미자는 팝송 번안곡 ‘태양의 저편’, 탱고풍의 ‘사랑의 등불’, 뭔가 트로트 가수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캐럴까지 담백하게 노래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1967년에 트로트 가수 이미자는 세계 각국의 민요를 노래한 이색 독집을 발표하며 자신이 탁월한 보컬리스트임을 증명했다. 양면이 펼쳐지는 ‘게이트폴드’로 제작한 이 앨범의 재킷 사진부터 보수적인 트로트 여가수의 이미지를 파괴했다. 양팔이 시원하게 드러나는 민소매 상의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이미자가 들판에서 꽃을 들고 비스듬히 누운 파격적인 모습 뒤에서 밝은 표정을 짓는 4명의 남성들은 ‘바다로 가자’ ‘고향의 옛집’ 등에서 코러스를 맡았던 당대의 인기 남성사중창단 쟈니브라더스다.
이 앨범에 수록된 이미자의 노래에는 트로트 가수 특유의 마이너 정서는 온데간데없다. 창법에서도 가식이나 기교를 전혀 찾을 수 없는 순박한 시골 처녀의 상큼함이 가득하다. 첫 트랙 ‘오 대니 보이’는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아일랜드 민요이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등도 과거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을 정도로 익숙한 이탈리아 민요다. 이 음반은 1970년과 1971년에 추가 제작했을 정도로 히트했다.
또한 이 앨범의 인기 덕에 이미자는 1979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제가 등을 수록한 세계 민요 앨범을 1장 더 발매했다. 줄리 앤드루스의 노래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도레미송’과 ‘에벨바이스’의 이미자 버전 또한 원곡 가수와 견줄 만하다.
1970년대는 맑고 고운 포크송과 팝송 번안곡의 시대였다. 청년들이 대중문화를 주도했던 시대로, 당대의 통기타, 생맥주, 청바지의 거센 열풍은 이미자조차 포크송을 부르게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1973년에 발표한 이미자의 포크송 ‘나그네’는 우리가 아는 ‘등대지기’의 멜로디에 가사만 다르게 붙인 포크송이었고, ‘여수’는 팝송 번안곡이었다. 1976년에 녹음한, 팝송 ‘로망스’ 번안곡 ‘그대는 내 추억’과 페리 코모의 ‘아이 빌리브 인 뮤직'을 번안한, 윤항기의 노래로 유명한 ‘노래하는 곳에’를 들어보면 그가 트로트 가수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세련되게 부른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음역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고음 처리에 부담을 느껴 객석에다 마이크를 들이대는 ‘나쁜 습관’을 자꾸 보이는 가수들을 우리는 수도 없이 봤다. 그래서 팔순이 코앞이지만 한결같은 미성에 꾸밈없이 소박하고 진지한 이미자의 무대는 더 큰 감동을 안겨준다.
“음악을 정식으로 배우지도 않았건만 신곡 녹음 때 작곡가가 피아노로 쳐주는 곡을 한번 듣고는 스스로 불러보면 끝이었다. 거기다 감정까지 적절하게 표현하며 바로 녹음할 수 있는 유일한 가수다”라는 작곡가 고봉산의 극찬은,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음악 실험은 물론이고 지금도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상당 부분 유지하며 활동하는 이미자에게 어울리는 헌사일 것 같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목소리는 신의 선물이다. 또한 단 한 번 곡을 들으면 곧바로 소화해냈던 이미자의 절대 음감은 신의 축복일 것이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433.html
통기타 반주 조용필의 첫 앨범, 300만원대 초고가
가왕 조용필의 초기 희귀 음반들
1971년 ‘선데이서울컵’ 가수왕 등극
그해 4곡 담긴 컴필레이션 앨범 데뷔
1980년 전까진 다양한 음악적 시도
데뷔 50주년을 맞은 가왕 조용필의 전국투어가 한창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중가수라는 존재가치에 걸맞게 그의 음악과 영상을 만날 수 있는 음반 미디어는 엘피(LP)를 시작으로 카세트테이프, 시디(CD), 레이저디스크, 비디오테이프, 디브이디(DVD) 등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국내외에서 발매된 LP만 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조용필의 수많은 LP 중에는 음반 수집가들이 탐내는 희귀 앨범이 무수하다. 그의 전성기였던 1980년 이후 히트 음반보다는 데뷔 시절 음반들은 실물을 보기 힘든 희귀 음반이 대부분이다. 가왕으로 성장하기 전, 조용필이 데뷔하던 무렵에 발매된 희귀 LP 음반 몇 장을 소개한다.
조용필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68년에 음악 활동을 하려고 가출했다. 음악하는 친구 3명과 서울 동대문 근처 허름한 창고를 손보아 내놓은 월세방에서 살며 록밴드 ‘애트킨즈’를 결성했지만,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아 경기도 문산의 용주골에 있는 기지촌 클럽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1년 동안 흑인 병사와 양공주들이 던져주는 팁으로 생활했다. 그 시절은 가왕 조용필의 음악 여정에서 가장 가혹한 시절이라 할 수 있다. 1969년 팀이 해체되면서 화양 소속 록밴드 ‘화이브 핑거스'에 잠시 몸담았고, 미8군 등지에서 활동한 록 밴드 ‘비스’의 오디션에서 탈락했을 정도로 데뷔 시절 조용필은 연주력이나 자신의 곡을 창작할 음악 내공이 부족했다.
당시 조용필은 하숙방과 업소에서 틈만 나면 라디오나 음반으로 들은 외국곡의 선율을 그려가며 음악 내공을 기르려는 열성을 보였다. 업소로 찾아온 가족들에게 붙들려 고향 화성으로 돌아가 원치 않았던 대학입시 준비로 잠시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또다시 가출을 시도한 조용필은 경기도 광주의 무명 하우스 밴드에 합류했다. 연주만 했던 그는 밴드 보컬리스트가 입대하는 바람에 갑자기 대타로 노래를 부르는 터닝 포인트를 맞이했다. 마침 생일을 맞은 한 미군 병사가 바비 블랜드의 <리드 미 온>(Lead Me on) 음반을 건네며 노래를 신청했다. 밤새 음반을 듣고 연습해 다음날 멋지게 연주하고 노래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후 조용필은 백인, 흑인, 라틴계 미군 병사들의 전혀 다른 음악 취향에 맞춰 솔, 리듬&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섭렵하는 소중한 경험을 한다.
1970년 서울로 온 그는 국제호텔 ‘레인보우’, 조선호텔 ‘투모로우’ 등에서 밤무대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최이철과 함께 ‘김대환과 김트리오 악단’의 멤버가 되어 1971년 5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제3회 선데이서울컵 전국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 참가해 이변을 일으켰다. ‘길 잃은 철새’와, ‘언체인드 멜로디’(Unchained Melody)를 부른 조용필이 히식스, 키보이스 등 인기 밴드의 리드 싱어들을 제치고 가수왕이란 대어를 낚아버린 것. 가수로서 가창력과 가능성을 인정받은 조용필은 자연스럽게 정식으로 음반 발매의 기회를 잡았다.
1971년 최초로 조용필의 노래 4곡이 담긴 데뷔 음반 <여학생을 위한 뮤직칼 “사랑의 일기”>가 오스카레코드-사에서 나왔다. 이 음반은 조용필, 영트리오, 유미려 등이 함께한 컴필레이션(편집) 음반이다. 재킷 뒷면에 표기된 ‘푸레이보이 컵쟁탈가수왕 조영필의 사랑의 자장가’란 부제는 신인 가수 조용필에 대한 기대감을 말해준다. 조용필이 노래한 팝송 번안곡 4곡은 히트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재킷 뒷면에는 21살 청년 조용필의 풋풋한 흑백 사진이 실려 있는데, 이름이 ‘조영필’로 잘못 표기돼 있다.
1980년대 들어 조용필의 1인 독주 시대가 시작되면서 무수한 편집 음반이 여러 음반사에서 쏟아졌다. 데뷔 음반에 수록한 노래들도 원곡에 여러 악기를 더빙한 세련된 버전으로 두세 차례 재발매했다. 간단한 통기타 반주에 맞춰 담백하게 노래하는 오리지널 버전의 감흥은, 오직 데뷔 음반에서만 느낄 수 있다. 조용필의 데뷔 앨범은 상태가 좋은 경우 300만원이 넘는 고가에 거래되는 희귀 앨범이다. 조용필이라는 브랜드 파워와 더불어, 무엇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음반 숫자가 극소량이기 때문이다.
이어 1972년 아세아레코드사에서 기타리스트로만 참여한 ‘김대환과 김트리오 악단’의 LP도 발매되었다. 음반에는 창단 멤버 최이철이 빠지고 이남이(밴드 ‘사랑과 평화’)가 참여했다. 김대환은 회고록에서 “김트리오의 인기는 높았다. 그만큼 연습도 많이 했다. 게으름을 피우면 가차 없이 주먹이 날아갔다. 용필이도 고백하지만 나를 떠올리면 매 맞은 기억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최근 재발매된 이 희귀 음반은 조용필, 이남이가 국민적인 인기를 얻기 이전에 함께한 유일한 연주 앨범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조용필은 1972년 전반적으로 팝 스타일의 노래들로 구성된 첫 독집을 발표했다. 조용필의 첫 창작곡들인 ‘내 마음속의 그림자’ ‘옛일’ 그리고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첫 버전이 수록된 음반이란 점에서 가치가 있다. 진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조용필 노래에다 효과음까지 더빙한 2면 첫 트랙 ‘일하지 않으면 사랑도 않을래’는 조용필의 첫 금지곡이다. 금지 사유는 “가사 저속”과 “퇴폐”로 알려졌는데 금지되는 바람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국방홍보원 자료실이 소장한 이 앨범을 보면, 1975년 10월26일에 ‘표절’로 방송 금지되었음이 확인된다. 이 노래의 원곡은 1970년 개최된 이탈리아 산레모 가요제에서 1위를 차지한 아드리아노 첼렌타노의 ‘일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도 못하네’(Chi Non Lavora Non Fa L'Amore)이다.
조용필의 첫 독집은 팝 번안곡들과 조용필의 창작곡을 다채롭게 구성한 음반이다. 훗날 그의 대표곡이자 국민가요가 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첫 버전도 여기에 실렸다. 하지만 이 곡은 앨범의 다른 수록곡들과는 음악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데뷔 시절의 조용필 앨범들은 자신의 앨범을 통제하지 못했던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조용필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80년 이전의 음반들에 대해 “솔직히 그 시기의 음반들을 생각하면 부끄럽다. 내가 이런 음반들을 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제작자가 주문했기에 떠밀려서 했다. 직접 신경을 쓴 1980년 이후 음반부터가 진짜 내 음악이다”라고 말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486.html
1970년 나온 ‘축구의 노래’를 아시나요?
축구·야구 등 스포츠 관련 LP들
‘아리랑 목동’ ‘잘 있어요’ 등은 경기장에서 많이 불린 대표곡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부진으로 국내에서는 2002년 한일 월드컵만큼의 관심은 사라졌지만, 지구촌은 이변과 명승부가 펼쳐지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열기로 뜨겁다. 사회적 분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해온 대중가요는 일제강점기부터 스포츠를 노래의 소재로 적극 썼다.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을 응원하고 승전을 축하했던 가요는 지역을 대표하는 프로 스포츠 팀의 응원가로도 무수히 애용된다. 스포츠와 연관된 가요가 수록된 LP들을 소개한다.
축구
1950년대에 박단마 등 수많은 가수가 부른 박춘석 작곡의 ‘아리랑 목동’은 지금도 각종 경기장에서 가장 사랑받는 응원가다.
축구를 소재로 한 최초의 가요는 1970년 대한축구협회가 제작하고 KBS합창단이 부른 ‘축구의 노래’다.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에서 벌어진 한일전 경기 사진을 앨범 커버 이미지로 쓴 이 싱글 LP는 조금만 제작해 실체를 보기 힘든 희귀 음반이다.
1983년 ‘슈퍼리그’가 출범하면서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프로축구 리그를 시작했다. 이에 다양한 응원가가 불렸다. 강원FC의 ‘고래사냥’, 부산 아이파크의 ‘아침이슬’, FC서울의 ‘서울의 찬가’, 울산 현대의 ‘잘 있어요’ 등은 히트한 가요를 응원가로 썼다. 하나같이 시대를 넘어 사랑받는 명품 가요들이다. 1973년 발표된 이현의 히트곡 ‘잘 있어요’는 축구는 물론이고 야구 경기에서 이긴 팀이 진 팀 응원단에게 일종의 ‘약 올림’의 정서를 담아 즐겨 불러준다. 이후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축구 국가대표팀 응원단 ‘붉은악마’를 중심으로 응원 열기가 전 국민에게 퍼지면서 대표 팀을 응원하는 가요가 대거 탄생했다.
올림픽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이 조선인 최초로 금메달과 동메달을 땄다. 이를 기념해 손기정의 우승 소감을 담은 가요 ‘마라손 제패가’와 ‘우승의 감격’이 발표되어 조선인의 자긍심을 높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한 양정모 선수가 레슬링에서 건국 이래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아일보·동아방송이 비매품으로 제작한 7인치 싱글 음반은 현재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희귀 음반으로 대접받고 있다. 앞면은 양정모 선수가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건 장면이고, 뒷면은 손기정이 결승 테이프를 끊는 역사적 장면으로 장식되어 음반의 가치를 더한다. 김상희의 ‘몬트리오올의 금메달’은 금메달 획득 중계 실황을 함께 실었다. 최희준·봉봉이 노래한 ‘마라톤 제패의 노래’와 별넷 버전의 ‘몬트리오올의 금메달’이 함께 실렸다.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1988년 여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그때부터 민해경의 ‘우리들의 올림픽!’(1981), 조용필의 ‘올림픽 향연’(1982), 이정명의 ‘올림픽의 태극기’(1982) 등이 발표되며 분위기를 띄웠다.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는 1986년 12인치 싱글과 독집에 이어 1988년에도 다시 발표되었을 정도로 히트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그룹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는 영어, 한국어 버전으로 발표되어 유럽과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독일 음악 차트에서는 6주 연속 1위에 올랐다.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종목에서 두 번째 금메달을 따내면서 문화부 후원으로 기념앨범 ‘세계의 정상에서’가 제작되었다
야구
1896년 4월23일 경성(서울)에 사는 미국인들이 국내에 ‘야구’를 전파했다. 1960년대부터 실업 야구가 활성화되고 1970년대부터는 고교 야구가 국민적 인기를 얻으면서 야구를 소재로 한 가요가 꾸준히 발표되었다. 1964년 백야성의 ‘미남의 4번타자’를 녹음한 음반은 야구장을 배경으로 실업 야구 유니폼을 입은 가수 사진으로 앨범 커버를 장식해 관심을 끌었다. 1984년 심수봉이 창작한 박지영의 ‘나는 야구광’도 야구에 콘셉트를 맞추어 상당한 히트를 기록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지역 연고제 때문에 각 지역의 이름이나 특색이 담긴 기존 가요들이 응원가로 적극 활용되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부터 SK와이번스까지 인천 연고지 팀을 대표해온 응원가는 김트리오의 ‘연안부두’다. 경쾌한 리듬으로 경기장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문성재의 ‘부산갈매기’와 김수희의 ‘남행열차’는 롯데 자이언츠와 기아 타이거즈를 대표하는 응원가로 불렸다. 한화 이글스는 지역을 부각한 조영남의 ‘내 고향 충청도’를 응원가로 사용했다. 1994년 옴니버스 앨범 <꿈의 구장-프로야구 주제가>는 김광석, 김태욱, 태진아, 잉크 등이 참여해 신곡들을 발표했던 이색 음반이다. 이 음반은 고 김광석의 참여로 인기가 매우 높다. 같은 해에 해태 타이거즈 선수 선동열과 이종범은 인기 가수 양수경과 프로젝트 혼성그룹 투앤원(TWO&ONE)을 결성하고 독집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태권도·씨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태권도는 세계인이 사랑하는 스포츠로 성장했다. 하지만 태권도와 씨름을 소재로 한 가요도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내 최장수 밴드로 알려졌던 6인조 밴드 로링식스는 1979년, 야외에서 벌이는 호쾌한 태권도 대련 장면을 커버 이미지로 사용한 앨범을 발표해 관심을 끌었다.
1986년 서울올림픽 노래를 타이틀로 발매된 김연자 독집에는 야구를 소재로 한 ‘잠실야구장’과 지금도 민속씨름 경기를 대표하는 곡으로 쓰이는 최초의 씨름 가요 ‘씨름의 노래’를 B면 타이틀곡으로 실었다. 뒷면을 장식한 당시 천하장사 강호동의 경기 사진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560.html
1968년 나훈아 데뷔 앨범, 배호와 창법 비슷
트로트 황제의 진짜 데뷔곡과 나이 논란
음반으로 확인된 데뷔 연도는 68년
47년생 출생 정설이나 51년 기록도
가수의 역사는 음반으로 공식화된다. 아무리 오래 가수 생활을 했어도 음반을 발표해야 공식 데뷔를 한 것으로 인정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필자는 대중가요 음반 수집가들로부터 나훈아의 진짜 데뷔곡과 나이에 대해 무수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도 출생연도와 데뷔 연도 그리고 데뷔곡에 대해 논쟁이 있는 미스터리한 가수이다. 현재 인터넷 포털에 소개된 그의 프로필에는 1947년 출생, 데뷔곡은 1966년 ‘천리길’로 공식화돼 있다. 사실일까? 언론 자료에 등장하는 나훈아의 데뷔 과정을 살펴보자.
나훈아는 부산 초량초등학교 시절에 부산시 교육위원회에서 개최한 콩쿠르에서 2년 연속으로 1등을 차지하며 노래에 재능을 보였다. 대동중학교를 거쳐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해 형과 함께 장위동에서 하숙하면서 서라벌예고를 졸업했다. 그는 ‘오아시스 레코오드사’ 전속작곡가 심형섭, ‘맘모스 레코드사’ 작곡가 오영원 등 여러 작곡가 사무실을 다니며 가수 데뷔 기회를 엿봤다. 당시 오아시스 레코오드사의 마루를 닦고 작곡가들에게 세숫물까지 떠 바치는 고단한 생활을 했던 그는 배고프고 서러운 무명 시절을 감내했다.
어느 날, 장충동 녹음실에 심부름을 갔다. 마침 음반 녹음 예정인 가수가 나타나질 않자 녹음실 사람들은 반농담으로 가수 지망생인 그에게 노래를 시켰다. 투박한 경상도 청년의 순박한 이미지와 섹시한 남성적 매력이 담긴 음색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자리에서 타이틀곡으로 음반 녹음이 결정되면서 나훈아는 데뷔 기회를 잡았다. 최홍기가 본명이지만 ‘최훈’과 ‘나훈’(羅勳)을 거쳐 ‘나훈아’(羅勳兒)란 예명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팬 카페 ‘나사모’에 소개된 인터뷰 기사 ‘오효진의 인간 탐험’에는 나훈아가 1947년 2월11일, 부산시 동구 초량 2동 415번지 7통3반에서 태어난 것으로 소개돼 있다. 인터넷 포털의 인물 정보란과 생년월일은 같다. 인터뷰에서 나훈아는 “그때만 해도 한 곡 녹음해 판을 내는 데 6만원을 내야 했습니다. 나한테는 돈이고 뭐고 밥 사줘가면서 공짜로 내주겠다는 거였습니다. 김영광씨가 작곡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 네 곡을 받았는데, 마장동 녹음실에서 녹음했어요”라고 말했다. 녹음실을 장충동으로 소개한 언론 기사와는 장소가 다르다.
이어 나훈아는 “그때만 해도 기계에 두 채널밖에 없어서 노래 한 곡에 한 군데만 틀려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어요. 연습 한 번 하고 녹음하면서 한 번도 안 틀리고 6분씩 네 곡을… 딱 30분 만에 끝내고 나와버렸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이 잘했다고 짜장면하고 탕수육을 사줘서, 그걸 실컷 먹었어요”라고 말했다. 데뷔곡과 첫 히트곡으로 나훈아와 그때 언론은 다 같이 ‘천리길’을 언급했다. 나훈아는 “여러 사람이 내는 엘피(LP)에 내 노래 ‘천리길’ 한 곡을 끼워넣어 먼저 낸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 그리워’ ‘약속’을 차례로 낸 겁니다. ‘천리길’이 전국의 라디오에서 1위곡으로 올라갔을 때, 배호의 ‘황금의 눈’과 멜로디가 똑같다고 금지곡이 됐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데뷔곡으로 알려진 ‘천리길’이 수록된 1966년 발표된 나훈아의 음반은 실체가 확인된 적이 없다. ‘천리길’의 첫 버전은 1969년 5월29일 오아시스 레코오드사에서 제작한 컴필레이션(편집) 앨범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천리길’에 이어 발표했다는 4곡(‘약속’은 ‘약속했던 길’의 오류)은 모두 1968년과 1969년 발매된 음반들에 수록되어 있다. ‘천리길’이 막 히트하면서 1969년 7월5일 세광출판사에서 발행한 <대중가요 제40집>에 소개된 나훈아의 프로필은 흥미롭다. 노래책에는 나훈아의 본명은 최홍기이고 인터뷰에 소개된 동일한 본적과 그때 살았던 서울 충무로의 상세한 주소까지 나와 있다. 또한 가장 미스터리한 그의 생년월일은 인터뷰와 인터넷 포털에 등장하는 ‘1947년 2월11일’이 아닌 ‘1951년 2월11일’로 4살이나 어리게 소개돼 있다.
과거 ‘연예인의 나이는 고무줄 나이’라는 말이 있었듯 음반사 측에서 신인 가수 나훈아의 나이를 4살이나 줄여 홍보했을 수도 있다. 또한 항간에 나돌았던 1946년생인 라이벌 남진을 의식해 본래 나이로 수정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사실 여부를 확인하긴 어렵다. 프로필에는 데뷔일이 1968년 7월27일, 데뷔곡은 ‘내 사랑’, 히트곡은 ‘천리길’로 소개되어 있다. 나훈아가 1966년이 아닌 1968년에 음반 데뷔한 것이 분명하기에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1951년생(데뷔 나이 18살)보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47년생(데뷔 나이 21살)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실제로 한국전쟁 시기에 태어난 부산의 신생아들은 1957년부터 뒤늦게 출생신고가 가능해지면서 실제 나이에 많은 오류가 있긴 했다.
‘천리길’ 이전에 발표된 나훈아의 노래는 그가 처음 녹음했다고 밝힌 4곡보다 훨씬 많다. 1년 앞선 1968년에 발표된 음반도 2장이나 발견되었다. 음반으로 확인된 나훈아의 데뷔 연도는 1968년 8월16일이고 데뷔곡은 신인 가수로는 이례적으로 앨범의 타이틀곡을 장식한 ‘내 사랑’과 ‘약속했던 길’ 2곡으로 봐야 한다. 모두 작곡가 심형섭의 작품이다. 데뷔곡에서 나훈아는 배호와 유사한 창법을 구사해 다른 가수가 아닌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이는 데뷔 음반에서는 아직 자신만의 보컬 스타일이 확립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나훈아가 처음 녹음했다는 4곡에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 ‘내 사랑’은 없다. 아마도 당시의 많은 가수처럼 첫 히트를 기록한 ‘천리길’을 데뷔곡으로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온갖 풍상을 겪으며 오랜 은둔의 삶을 걸었던 나훈아는 트로트 가수로는 드물게 작사 작곡 능력이 있는 뮤지션이다. 시대를 초월해 사랑해주는 팬덤에다 토속적인 애절한 음색, 남성미 넘치는 다이내믹한 창법과 진지하게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그에게 독보적인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요인들이다. 지금까지 발표한 나훈아의 엘피 음반은 국내외를 포함해 100장이 넘게 확인된다. 그중 나훈아의 데뷔 초기 음반들은 음반수집가들에겐 군침 도는 고가의 ‘컬렉터스 아이템’으로 대접받고 있다. 최근 오랜 공백을 딛고 컴백한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는 개최하는 공연마다 완판 신화를 이어가며 거장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611.html
한국 첫 창작 록음반은 가정집에서 녹음됐다
신중현의 모태 에드포의 첫 앨범 ‘빗속의 여인’ 녹음 비화·극장쇼 포스터 발굴
마이크 1대의 척박한 환경서 녹음
1968년 펄시스터즈 대박 이후 재반 거듭
1990년대 후반 “일본인에 400만원 팔려”
신중현의 활동 초기와 전성기에 발매된 음반들은 대중가요 엘피(LP) 컬렉션의 화두로 평가받는다. 하나같이 그의 음악적 색채와 향기가 선명한 창작곡에다 금지돼 폐기된 희귀 음반들이기 때문이다. 그중 대중가요 LP의 최고가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데뷔 앨범 <히키-신 키타-멜로듸>와 그에게 ‘한국 록의 대부’란 찬사를 안겨준 에드포(발표 당시엔 ‘에드·훠’로 표기) 첫 앨범은 재발매를 거듭한 희귀 LP이다. 이제껏 한 번도 소개된 적 없는 신중현의 첫 밴드 에드포의 진귀한 극장쇼 포스터와 밴드 에드포 시절에 발매했던 앨범들을 소개한다.
신중현은 미8군 무대에서 ‘히키신’ 혹은 ‘짹키’란 애칭으로 활동했다. 비틀스가 첫 싱글앨범을 낸 1962년에 그는 테너 색소폰 신지철, 드러머 김대환과 이름을 모르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2명과 미8군 4인조 패키지 쇼 악단 ‘클럽 데이트’를 결성했다. 신중현은 인터뷰에서 “그 시절 키 작은 내가 장대같이 큰 신지철의 가랑이 사이를 넘나들며 기타를 연주해 기립박수까지 받을 만큼 쇼맨십이 대단했었다”고 당시를 증언했다. 신중현은 인기가 많았던 클럽 데이트를 해체하고 당시 선풍적이었던 비틀스 음악에서 모티브를 얻어 한국적인 록음악을 시도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신중현은 비틀스의 애칭 ‘fab4'와 비슷하게 밴드 이름을 ‘애드포’(Add4)로 정하고 유니폼 콘셉트까지 벤치마킹했다. 멤버 영입에 나선 그는 4인조를 이뤄, 밤에는 동두천 미 7사단 클럽에 출연해 생활비를 벌었고 낮에는 작곡과 연주 연습에 몰두했다. 이번에 처음 공개한 포스터에서 보듯 미8군 밴드 에드포는 극장 쇼와 음악감상실 같은 일반 무대에서는 ‘짹키와 그 일행’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김시스터즈의 오빠 김영조의 주선으로 이난영, 이봉룡 남매가 운영한 LKL레코드에서 에드포의 첫 앨범 제작이 결정되었다.
앨범을 제작할 음반사가 정해졌지만 녹음은 지연되었다. 수도 없이 교체된 멤버 구성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녹음할 곡이 부족했다. 당시는 싱글 개념이 없어 무조건 10곡이 넘는 앨범만 제작했다. 한국 최초의 창작 록 앨범에 수록할 곡 창작과 연습을 위해 2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1964년 최종적으로 리드기타 신중현, 보컬 서정길, 드럼 권순근, 베이스기타 한영현이 녹음에 참여했다. 그동안 에드포 첫 앨범 녹음은 ‘일반 가정집을 녹음실로 이용했던 장충녹음실의 카펫이 깔린 응접실에서 진행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최근 캐나다에서 귀국한 에드포의 드러머 권순근은 필자와 인터뷰에서 “장충동이 아닌 동대문에서 녹음했다”고 증언했다. ‘크래이지 드러머’로 명성을 떨쳤던 권순근은 1961년 공군 군악대 출신들로 결성된 밴드 ‘블루 스카이’와 ‘아카데미’를 거쳐 에드포의 첫 앨범 녹음에 참여했다. 녹음은 카펫이 깔린 가정집 응접실에서 휴대용 미군용 릴 테이프 녹음기에 길게 연결된 한 개의 마이크 주변에 멤버들이 모여 동시녹음을 시도했다. 연주나 노래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녹음하는 악조건이었지만, 아침부터 시작된 14곡의 녹음은 실수 없이 단 한 번에 끝냈다. 한국 최초의 창작 록 앨범은 이처럼 최악의 척박한 환경에서 탄생했다.
청년 신중현이 신선한 목소리로 신나게 부르는 ‘커피 한잔’의 오리지널 곡 ‘내속을 태우는구려’와 후에 ‘퀘션스’의 객원 보컬로 참여한 임성훈의 노래로 유명해진 ‘명동거리’의 원곡 ‘나도같이 걷고싶네’는 흥미로운 트랙이다. 그리고 신중현 사단의 첫 여가수가 펄시스터즈나 김추자가 아닌 1964년 KBS 아마추어 톱싱어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KBS합창단원으로 활동했던 장미화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안녕하세요’로 70년대를 풍미한 장미화는 ‘天使(천사)도 사랑을 할까요’ ‘굳나 燈(등)불을 끕시다’ 2곡을 녹음했다.
최초의 창작 록 음반에 대한 반응은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먼저 감지되었다. 이에 부산 제일극장 쇼 무대에서 활동하던 에드포는 서울로 올라와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서울 세종로의 ‘아카데미 음악감상실’, 젊은이의 명소였던 명동 ‘오비스 캐빈'의 꼭대기 층에서 공연을 했다. 티켓은 어느 정도 팔렸지만 ‘쇼 단장’들의 횡포에 생계가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 에드포는 일반 무대와 더불어 장미화, 전미라, 제비시스터즈 등 여성 객원가수들과 무용수들과 함께 미8군 클럽에서도 활동했다. 또한 리더 신중현은 송만수에게 곡을 주며 첫 작편곡집을 발표해 작곡가로서 활동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더불어 에드포는 재즈가수 김영국의 음반에 세션으로 참여하며 1965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신중현이 창설한 에드포의 첫 음반은 중고 대중가요 LP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던 1990년대 말에 서울 청계천에서 “일본인이 400만원에 사갔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외국곡 카피가 아닌 자신의 창작곡으로 승부를 걸어 흥행 참패를 이어갔던 신중현이 1968년 펄시스터즈의 데뷔 앨범을 통해 뒤늦게 사랑받기 시작하면서 이 음반도 주목받았다. 60년대 후반에 변형 재킷으로 재발매된 무수한 음반이 그 증거다.
초반은 KBS 텔레비전에 출연한 멤버들의 연주 사진을 재킷으로 사용한 LKL레코드다. 재반은 라벨 색이 회색도 있다. 간혹 재킷은 초반이지만 음반은 신진레코드사 라벨의 재반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 꼼꼼하게 봐야 된다. 초반과 재반의 가격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재반은 LKL에 이어 신진에서 여러 버전이 무차별적으로 제작되었다. 그중 하얀 바탕에 에드포 멤버들의 흑백사진으로 커버가 장식된 버전은 서정길, 장미화, 투닥스, 전미라 등 4명이 노래한 7곡이 2면을 장식하고 있어 재발매 음반 중 가장 희귀하다.
몇 장의 ‘연주 음반’으로 명맥을 이어갔지만 당시 대중적 인기는 외국 번안곡으로 활동했던 라이벌 밴드 ‘키보이스’의 몫이었다. 먹고살기 힘들어진 신중현은 1966년 결국 밴드를 해산하고 미8군 클럽 무대로 돌아갔다. 이후 신중현은 연주음악 위주로 활동하면서 ‘블루즈 테트’(‘한국의 벤쵸스’로 명기한 에드포 음반), ‘액션스’ 등을 거쳐 1968년 ‘덩키스’ 결성 후 펄시스터즈의 빅히트까지 10년의 무명 시기를 감내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688.html
대역으로 스타덤, 신중현 사단 여가수들
김추자·김정미 (상)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유행어 낳아
패티김 ‘펑크’ 놓치지 않고 기회 잡아
육감적인 춤사위와 창법은
‘솔 사이키 가요’라는 신조어 탄생시켜
김정미
한국 사이키델릭의 여제로 불려
71년 김추자 소주병 난자 사건으로
무대 못 오르자 대타 출연해 스타 돼
신중현의 실험적 음악의 구현자
1970년대부터 신중현의 이름 석 자가 적힌 음반은 대중가요 엘피(LP)의 꽃이자 화두로서 굳건한 브랜드 파워를 지닌다. 수많은 명곡을 발표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신중현, 박춘석, 길옥윤 같은 작곡가들은 ‘사단’급으로 스타 가수들을 ‘거느렸다’. 그중 ‘신중현 사단’은 하나의 관용어가 될 정도로 대표적이다.
오늘은 ‘신중현이 사랑했던 여가수들’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준비했다. 신중현에게 발탁돼 스타덤에 올랐던 가수는 수없이 많다. 신중현 사단의 전설적인 여가수인 김추자와 김정미의 다른 점과 공통점을 찾는 평행이론으로 첫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때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가 돌았던 김추자는 신중현 사단 최고의 스타 가수라 해도 좋다. ‘제2의 김추자’라 불렸던 김정미는 뒤늦게 ‘한국 사이키델릭의 여제’로 재평가받았다. 대중가요사상 최고의 섹시 여가수로 평가된 김추자와 대중가요사상 가장 섹시한 음색의 여가수로 인정받은 김정미의 음반들은 가요 음반 수집가들에겐 하나같이 매력적인 아이템이다.
타고난 예체능 재능과 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활달한 성격의 김추자는 어릴 적부터 운동과 노래에 재능을 보였다. 춘천여고를 다니던 시절에는 강원도 기계체조 대표선수와 응원단장을 맡을 정도로 끼가 넘쳤다. 수학여행 때는 단독 리사이틀 무대가 마련될 만큼 노래 잘하기로 학교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춘천 향토제에 출전해 ‘수심가’를 불러 3위에 입상했던 그는 팝송은 물론이고 우리 가락에도 범상치 않은 재능을 보여주었다.
김추자보다 2년 늦게 서울에서 태어난 김정미도 춤과 노래에 타고난 재능을 보이며 주변의 귀염을 독차지했다. 활발한 성격의 장난꾸러기였던 김정미는 서울 정신여고에 입학하면서 한국 고전무용과 모던발레를 공부하며 예술대학 진학을 꿈꿨다. 그의 음악 취향은 독특했다. 또래 여고생의 인기를 끌었던 달콤한 포크송보다 외국의 진보적인 록밴드 음악을 즐겨 들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넋을 잃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신중현 사단 입단 과정
김추자, 김정미가 신중현 사단의 일원이 된 과정은 완전히 다르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신입생 김추자는 학교의 노래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뒤, 가수의 꿈을 품고 직접 신중현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당시 펄시스터즈의 빅 히트로 인기 작곡가로 떠오른 신중현의 사무실에는 가수 데뷔를 꿈꾸는 지망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거기 끼어 있던 김추자는 신중현에게 눈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창을 소화할 만큼 탁월한 가창력을 지닌 김추자는 데뷔 음반에서, 신중현이 꿈꿨던 사이키델릭에 우리 가락을 접목한 실험적 사운드를 시도했고 대성공을 거뒀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스스로 찾아간 김추자와 달리, 김정미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재능을 높이 샀던 친구들이 신중현 사무실로 이끌고 가 그 문턱을 넘었다. 여고 졸업반이었던 1971년 어느 날, 친구들은 ‘김정미 가수 만들기 작전’을 세운다. 본인에게는 비밀로 하고 신중현에게 연락해 오디션 약속을 대신 잡아냈다. 엉겁결에 친구들을 따라나선 김정미는 단 한 번에 신중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패티김 대역으로 스타덤에 오른 김추자
1969년 민요 창법을 가미한 신중현의 창작곡들로 데뷔한 김추자는 육감적인 춤사위와 창법으로 ‘솔(soul) 사이키 가요’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화제를 모았다. 한 음반에서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나뭇잎이 떨어져서’ 이 3곡을 동시에 히트시키며 신인가수 김추자는 단숨에 가요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김추자가 스타덤에 확실히 오른 것은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9년 11월 동양방송(TBC) 새 주말드라마의 주제가 ‘님은 먼 곳에'(유호 작사·신중현 작곡)를 부르기로 예정되어 있던 패티김이 별안간 나타나지 않았다. 갑작스런 사태에 신중현은 유망주 김추자에게 대타로 노래할 기회를 준다. 이 노래는 빅 히트를 기록하며 김추자에게 이듬해 ‘MBC 10대 가수 청백전’ 신인가수상까지 안겨주었다.
김추자 대역으로 데뷔한 김정미
육감적인 몸매와 섹시한 창법, 독특한 춤사위로 주목받은 김정미도 대타로 무대에 올라 한순간에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김추자와 닮은꼴이다. 1971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컴백 리사이틀을 앞둔 김추자는 저 유명했던 ‘소주병 난자 사건’으로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긴박한 순간에 신중현은 다시 한번 임기응변의 능력을 발휘했다. 데뷔를 준비 중이었던 신인 가수 김정미를 과감하게 김추자 대역으로 무대에 올렸던 것.
창법과 춤사위가 김추자와 닮았던 김정미는 단숨에 ‘제2의 김추자’로 각종 주간지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탄력을 받은 김정미는 데뷔 음반 발표를 앞당기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신중현 사운드 2집으로 발매된 김정미의 데뷔 음반은 상태가 민트급이면 수백만원에 거래되는 희귀 음반이다.
여러모로 공통점 많은 김추자, 김정미
이처럼 김추자, 김정미는 우연하게 찾아온 대타 또는 대역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타덤에 오른 공통점이 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선후배 사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1971년 발매된 김정미의 데뷔 음반은 2007년 박스 LP로 재발매됐다. 엄청난 반응을 얻었던 김추자의 데뷔 음반은 여러 곡을 히트시키는 상업적 성공으로 재발매를 거듭해, 다양한 버전의 LP가 있다. 그 음반은 2002년 CD에 이어 발매 50년 만에 오리지널 게이트 폴드 재킷으로 제작돼 관심을 끈다.
김추자와 김정미 데뷔 음반의 재발매는 시대를 선도했던 신중현의 실험적 음악성과 더불어 지금도 상업성까지 여전함을 증명하고 있다. (2부로 계속)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741.html
신중현의 3대 명반 꼽히는 ‘김정미 NOW’
김추자·김정미 (하)
김추자보다 음폭이 좁았지만 신중현 사이키델릭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하고 소화한 가수
박정권 탄압 음반 폐기돼 희귀 음반
1978년 사라진 이후 신비한 존재로
김추자
다이나믹하고 화려한 춤사위
숱한 스캔들로 대중에 확실한 인상
국악, 록, 솔, 트로트 등 폭넓은 가창력
1975년 가수들의 대규모 활동 금지를 몰고 왔던 대마초 사건 이전에 발매된 김추자와 김정미의 엘피(LP)들은 대부분 희귀 앨범으로 분류된다. 두 가수의 음반들은 신중현 음악의 브랜드 파워와 대중가요 LP의 가격 폭등을 주도하는 핫 이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인지도와 활동 기간이 차이가 나듯이 김추자와 김정미가 발매한 앨범 수는 큰 간격이 있다. 일반 대중이 아닌 대중가요 LP수집가들로만 국한해 본다면, 두 가수의 음반들에 대한 선호도는 역전되거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한 세기가 저물어가던 1990년대 말, 중고 LP가게가 몰려 있는 서울 청계천과 회현동 지하상가에는 일본 사람들이 신중현 음반을 위시하여 한국의 60~70년대 록, 포크 음반을 가격 불문하며 싹쓸이했던 적이 있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음반은 섹시하게 노래하는 신중현 사단의 대표 여가수 김추자와 김정미 음반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김추자를 모르는 국내 음반 수집가는 없었지만 낯선 이름의 김정미는 ‘섹시한 비음을 구사한다’는 입소문과 함께 호기심을 자극하며 가격이 엄청나게 폭등했다.
두 가수의 빛과 그림자
김추자는 터질 것 같은 몸매를 여과 없이 드러낸 꽉 조이는 의상과 엉덩이를 현란하게 돌려대는 다이내믹한 춤으로 대중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켰다. 섹시한 외모에 폭발적인 가창력까지 겸비한 그의 등장에 정적이 흐르던 당대 사회는 후끈 달아올랐다. 70년대의 패션 리더로 젊은 층에 어필했던 김추자는 수많은 스캔들과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사로 떠오르는 뉴스메이커였다. 7080세대들에게 김추자는 ‘잠자던 돌부처도 돌려세웠다’는 말까지 나돌았던 섹시 가수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의 화려한 이면에는 숱한 스캔들과 활동 중단과 컴백을 반복하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반면 김정미의 활동 반경은 판이했다. 김추자의 대타로 등장했던 그는 섹시한 미모와 열정적인 춤과 가창력으로 각종 언론에 의해 기대주로 평가받았지만, ‘제2의 김추자’란 꼬리표를 활동 기간 내내 달아야 했다. 신중현은 원래 여러 가수에게 같은 곡을 녹음시키는 방식을 유지했다. 김추자, 김정미도 ‘잊어야 한다면’ ‘고독한 마음’ ‘아니야’ ‘추억’ 등 같은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그중 드라마 주제가 ‘셋방살이’는 원래 김추자가 먼저 방송에서 불렀지만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 금지를 당하면서 김정미가 대신 불러 히트한 노래다. 김정미는 대중이 기억할 스캔들 하나 없었던 착한(?) 이미지였기에 온갖 소문과 사연을 만발시켰던 김추자의 화려했던 대중적 인기와는 거리가 있었다.
외모와 음폭과 음악 장르
두 가수는 외모도 판이했다. 김추자는 복스럽고 통통한 고전적 이미지가 강했다면, 김정미는 시원한 이목구비와 당시로서는 훤칠했던 164㎝의 키에 볼륨감 넘치는 몸매로 대중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선탠한 것 같은 야성적인 피부색으로 ‘인디언 추장의 딸’이란 별명을 얻었던 이국적 외모의 소유자였다.
국악에 음악의 뿌리를 둔 김추자는 음폭이 넓은 가창력으로 비트 강한 록과 솔, 팝은 물론이고 민요, 트로트까지 그 모든 장르를 깊은 감성으로 소화해냈다. 김추자가 타고난 천부적 재질을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맛깔나게 소화해낸 만능 가수였다면, 김정미는 피나는 노력으로 사이키델릭에 특화된 보컬을 선보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신중현이 아닌 다른 작곡가들의 트로트 곡을 노래한 김정미의 음반은 사이키델릭에서 안겨준 감동이 깔끔하게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김정미의 존재가치는 신중현의 사이키델릭을 가장 잘 표현하고 소화해낸 가수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신중현 사이키델릭의 대표 주자 김정미
김정미 4집의 ‘바람’과 5집에 수록된 ‘봄’은 국내 사이키델릭 명곡으로 평가받는다. 외국에서도 명성이 높은 <김정미 NOW> 음반은 신중현의 디스코그래피에서도 ‘에드훠’(Add4) 첫 앨범과 ‘신중현과 엽전들’ 1집과 더불어 3대 명반으로 손꼽힌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빨간 코스모스와 김정미가 함께 어우러진 재킷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신중현이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알려진 이 사진 속 코스모스는 ‘사이키델릭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김정미는 김추자보다 음폭이나 가창력은 다소 부족했지만, 신중현의 사이키델릭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표현해낸 가수로 평가받는다. 그의 전위적인 춤사위와 비음이 섞인 섹시한 보컬은 명불허전이다. 김정미는 사이키델릭에서만은 김추자를 능가했다. 콧소리가 배인 그의 음색은 에로틱한 느낌까지 안겨준다. 정돈되지 않은 듯 보였던 현란한 춤은 행위예술가의 그것처럼 진지했다.
불운과 전설의 시작인 대마초 사건
‘가요정화 운동’이라 했던 1975년의 대마초 사건은 김정미, 김추자에게 불운의 시작인 동시에 새로운 전설의 서막이었다. 사건에 연루된 김추자는 활동 금지되었고 그때까지 신중현의 곡만 불렀던 김정미도 모든 노래에 금지 족쇄가 채워졌다. 또한 신중현 사단의 가수라는 이유로 대마초 가수로 오인당했던 김정미는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당시 언론에서 김정미는 “하루아침에 오리지널 노래가 없는 가수로 전락해버렸다”고 한탄했다. 신중현의 운명처럼 그의 모든 음반도 폐기되어 희귀 음반이 되었다.
막 꽃봉오리를 터뜨린 순간에 찾아든 음악적 좌절은 김정미의 이름을 대중의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2000년대 들어 불기 시작한 복고 문화의 영향으로 김정미는 젊은 록 애호층에 ‘사이키델릭의 여왕’이란 재평가를 받아냈다. 김추자의 귀한 음반들조차 김정미의 음반들에 비해 왜소해 보이는 것은 오리지널 음반을 실물로 보기가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김추자가 철모를 쓰고 총을 들고 있다는 음반은 필자도 귀동냥만 했을 뿐, 실물은 못 보았다. 단 한 번의 컴백으로 온갖 화제와 소문을 만발시키고 한순간에 사라진 김추자와 더불어 1978년 가요계를 떠난 김정미는 7080 음악 부활 이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여전히 신비로운 가수로 남아 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789.html
1960년대를 풍미한 중저음과 철학적 노랫말
최근 작고한 대중음악계의 신사 최희준
데뷔곡은 60년 ‘우리 애인…’ 아니라 61년 발표한 ‘목동의 노래’
재즈풍의 스탠더드 팝, 한 시대 풍미
유성기 음반 63~64년께 발매
한국 대중가요계의 큰 별이 졌다. ‘대중음악계의 신사’로 알려졌던 최희준(본명 최성준) 선생이 지난 8월24일 지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향년 82살로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60년대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서울대 법학과 출신 가수였던 그는 수많은 히트곡을 연달아 내며 1964년부터 1966년까지 동양방송(TBC)의 프로그램 <가요대상>에서 3연패와 1966년 신설된 문화방송(MBC)의 <10대가수상>에서 초대 ‘가수왕’에 등극하며 한 시대를 화려하게 풍미했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57년 서울대 장기자랑 대회에서 법대 대표로 김광수 악단의 반주로 샹송을 불러 입상했다. 이후 ‘노래 잘하는 서울법대생’이란 입소문을 타면서 미8군 쇼 무대의 밴드 마스터 파피에게 소개되어 ‘쇼 보트’라는 단체에서 아르바이트 가수활동으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58년 사법고시에 낙방한 그는 대학 졸업 후에 진로를 고민하다, 1960년 서울 명동의 어느 다방에서 비너스레코드를 창립해 음반 제작을 준비하던 작곡가 손석우를 만났다. 직업 가수가 되려는 마음이 없었던 최희준은 음반 녹음 제안을 받고 처음엔 망설였지만 결국 정식 데뷔를 결심했다. 이에 손석우는 본명 성준 대신 ‘항상 웃음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희준’(喜準)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한명숙의 대표곡 ‘노란 샤스의 사나이’, 현미의 ‘밤안개’, 패티김의 팝송들과 더불어 최희준은 미8군 무대 출신 가수들과 함께 미국 재즈의 영향을 받은 ‘스탠더드 팝’ 바람을 선도하며, 트로트가 주류였던 가요계에 새로운 트렌드를 몰고 왔다. 당시는 목소리가 예쁘고 고운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꾀꼬리 가수들이 각광받던 시기였다. 최희준, 한명숙, 현미 등 미8군 무대 가수들은 삼베처럼 꺼칠꺼칠한 허스키 보컬을 구사해 음반 반품 사태가 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저음 허스키 음색의 최희준은 개성 있는 보컬리스트 전성시대를 주도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다양성에 일조했다.
최희준의 앨범은 대부분 전성기였던 60년대에 집중돼 있다. 1992년 <제1회 대한민국재즈페스티발 실황 앨범 2집>에 ‘맨발의 청춘’과 애창 샹송인 ‘고엽’(AUTUMN LEAVES)을 부른 것이 마지막 LP 앨범이다. CD로는 1995년에 데뷔 35년 기념 베스트 앨범이 발매되었다. 선생의 각종 부고 기사들을 보면 약속한 듯이 데뷔곡을 1960년 ‘우리 애인은 올드 미쓰’로 표기했다. 오류다. ‘우리 애인은 올드 미쓰’는 데뷔곡이 아니라 첫 히트곡이다. 노래가 발표된 년도는 1960년이 아닌 1961년이다. 최희준은 1961년 작곡가 손석우가 창립한 비너스레코드 10인치 LP로 제작된 1집을 통해 발표한 ‘목동의 노래’로 음반 데뷔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의 데뷔곡에 대한 논란의 불씨를 지필 음반이 하나 있다. 최희준이 음반 데뷔했던 1961년 당시는 SP 유성기 음반(78회전 음반)과 본격 제작이 시작된 LP 음반이 혼용되어 발표된 과도기였다. CD 제작이 본격화된 1990년 중반에 LP가 함께 제작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최희준의 ‘당신의 이름은 깍쟁이’와 한명숙의 ‘추억의 밤안개’가 함께 수록된 SP 유성기 음반은 도미도레코드의 서브 레이블인 한나라레코드에서 제작되었다. 이 유성기 음반은 수록된 노래들이 모두
다시 실린 도미도레코드 스플리트 LP로 미뤄 유성기 시대 끝자락인 1963~64년쯤 발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61년 서울 남산 한국방송(KBS) 스튜디오(지금 영화진흥위원회 시사회실)에서 열린 개국 쇼에서 화제의 신인가수 최희준은 첫 히트곡 ‘우리 애인은 올드미쓰’를 불렀다. 이후 1963년 ‘진고개 신사’, 1964년 ‘맨발의 청춘’ ‘빛과 그림자’, 1965년 ‘하숙생' ‘종점’ ‘길 잃은 철새’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가수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당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바쁜 일정에 쫓겼던 그는 64년 자가용을 마련하면서 ‘마이카 1호 가수’가 되었다.
60년대는 극장 쇼 무대의 전성기였다. 65년 최희준은 전남 여수 중앙극장에서 낮 공연을 마치려는데 객석에서 갑자기 ‘하숙생’을 불러달라며 연호했다. ‘하숙생’은 새롭게 시작된 KBS의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이었다. 여수 공연은 이 드라마 주제가가 나간 지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최희준은 급히 녹음만 마치고 전국 순회공연길에 올라 가사를 외우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드라마 인기가 삽시간에 치솟아 열화와 같이 노래를 청하는 관객들로 인해 당황했다. 최희준은 여러 극장 공연에서 ‘하숙생’을 세 번 넘게 앙코르로 불렀을 정도로 노래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당시 아무 방송이나 틀면 흘러나왔던 ‘하숙생’은 철학 전공 대학생들 사이에서 존재의 근원을 표현한 노래로도 통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좋아하는 남한 노래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최희준은 민요와 트로트 일색이던 60년대에 위키 리, 유주용, 박형준, 작곡가 손석우, 김기웅과 함께 ‘포 클로버스’라는 국내 최초의 노래 동아리를 결성해 밝고 건강한 가요 보급에 앞장섰다. 명문고·명문대 출신이라는 학벌 프리미엄으로 이름을 얻었던 이들은 비탄조의 트로트와 다른, 밝고 건강한 팝 스타일의 노래로 대중가요의 체질을 변화시킨 선구자들이다. 또한 멤버들 중 최희준과 유주용은 패티 페이지, 냇 킹 콜 등 세계적인 외국 가수들의 내한공연에 어김없이 찬조 출연했던 국가 대표급 가수로 존재감을 더했다.
필자가 음반으로만 만나던 고인을 직접 만난 것은 96년 국회 출입기자 시절이다. 당시 그는 가수가 아닌 제15대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과묵한 이미지였지만 다정다감했던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정계를 떠난 2002년 서울 정동극장 소극장 무대였다. 당시 밴드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이 연주를 맡았는데, 환상적인 케미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결국, 그 공연이 고인의 노래를 들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고 최희준은 1960년대에 국가 재건의 분위기를 북돋는 건강한 노래로 ‘딴다라’로 폄하되었던 대중가수의 품격을 높였다. 그는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했던 대스타였지만 ‘찐빵’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친숙한 이미지로 대중과 소통했다. 이제 고 최희준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그는 어떤 장르의 음악을 시도해도 중심을 잃지 않았던 뛰어난 보컬리스트로 기억될 것이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842.html
한국 가요에 격조를 더하다
인기 절정에 갑자기 은퇴해 화가의 길, 37년 만에 컴백한 정미조
풍부한 성량과 우아한 창법으로 ‘개여울’ 등 대중가요 품격 높여
2016년 컴백해 내놓은 CD 앨범은 격조 높은 보컬과 뛰어난 완성도로 왜 정미조인지 증명해
최근 500장 한정 LP로 발매돼
이화여대 미대 서양화과 출신으로 화제를 모으며 등장했던 정미조는 인기 절정의 순간에 미련 없이 은퇴를 선언하며 본업인 화가의 길로 돌아갔던 독특한 이력의 가수이다. 정미조의 사진으로 커버가 장식되거나 그의 노래만으로 구성된 LP는 1972년 데뷔부터 1979년 은퇴까지 총 13장에 이른다. 팝 스타일의 노래가 주를 이루고 캐럴과 세계 가곡 음반까지 포함된 그의 LP들은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 음반이 되었다. 그중 신중현 곡 ‘고향’을 노래한 음반과 <세계 가곡집> LP가 가장 희귀하다.
신인 가수 선발경연대회 트렌드 발화
정미조는 초등학교 시절 화려한 발레리나를 꿈꿨다. 중학교 때는 교내외 무용 대회와 그림 대회에서 입상을 독차지하며 화가의 꿈이 생겨났다. 배화여고 교내 음악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는 막연하게 가수의 꿈도 품었다. 1968년 이화여대 서양화과 신입생 장기자랑 무대에서 시원한 창법으로 팝송을 노래한 정미조는 단숨에 교내의 실력자로 소문이 났다. 이에 20명으로 조직된 파월 장병 위문 공연단에 선발되면서 졸업 전부터 음반 제작 제의가 밀려들어왔다. 이에 잠시 본업인 화가의 길을 접고 가수 데뷔를 결심했다.
1972년 3월, 졸업과 동시에 동양텔레비전방송(TBC TV)의 <쇼쇼쇼>에 출연해 시원한 성량과 울림이 큰 노래 솜씨를 뽐냈다. 이후 피아트 승용차를 상품으로 건 서바이벌 노래 경연이었던 한국방송(KBS) TV의 <신인 가요제>에서 우승했다. 동아방송(DBS)의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서는 10주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각 방송사에 다양한 신인 가수 선발대회 프로그램의 활성화를 불러왔다. 1972년 7월 아세아레코드사 전속 기념으로 가요와 번안곡으로 구성된 데뷔 음반을 발매했다.
패티김을 이을 대형 가수로 주목
정미조는 음반 발매 전부터 이화여대 미대 출신이라는 학벌 프리미엄에다 170㎝의 큰 키와 시원한 이목구비로 ‘오디오와 비디오를 겸비했다’는 평을 받으며 패티김을 이을 대형 가수로 기대감을 높였다. 무엇보다 이희목이 작곡하고 1922년 월간 <개벽>에 김소월이 발표한 시를 가사로 사용한 그의 대표곡 ‘개여울’은 “소월의 시가 50년 만에 대중가요로 탄생했다”고 언론에 소개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사실 ‘개여울’은 1967년 KBS 전속가수 김정희가 이미 발표한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이다. 김정희의 원곡이 꾸밈없이 순수한 분위기라면, 5년 뒤 발표된 정미조 버전은 저음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가창력과 호소력으로 대중에게 어필했다. ‘개여울’의 큰 히트로 문화방송(MBC) 신인 여가수상을 받았던 정미조의 데뷔 음반은 일찌감치 다 팔려 재발매됐을 정도로 히트작이었다.
대중적 관심의 표적이 된 정미조
인기가 높아지자 집안에서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주간지 <주간여성>에 “가수 정미조와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깊은 관계”라는 스캔들 기사가 실린 것. 집안 어른들에게 ‘스캔들을 내지 않겠다’ 약속하고 가수 활동을 시작했기에 난리가 났다. 하지만 스캔들 기사 이후 정미조에게는 대중의 관심이 더욱 집중되었다. TV 출연만 한 달에 28회를 기록했고, ‘파도’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등 후속곡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1976년 MBC 10대 가수에 선정되며 최정상 가수가 되었다.
많은 대중문화인이 활동금지에 신음했던 1975년에 정미조도 자유롭지 못했다. MBC의 <금주의 인기가요>에서 정상을 차지했던 이장희 곡 ‘휘파람을 부세요’와 젊은 층의 인기를 얻기 시작한 송창식의 곡 ‘불꽃’까지 금지곡으로 묶였다. ‘불꽃’은 정당한 금지 사유가 없었다. 당시에는 빨간색 이미지가 강한 노래는 무조건 금지되던 반공의 시절이었다.
제9회 야마하 동경국제가요제에서 수상
정미조는 금지의 아픔을 딛고 1978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9회 야마하 동경국제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김기웅의 곡 ‘아! 사랑아’를 열창해 우수가창상을 받은 정미조는 대중가수로서 꿈꾸었던 모든 영광을 이루면서 미뤄둔 화가의 꿈이 되살아났다. 1979년 10월, 갑자기 은퇴와 유학 선언을 했다. 인기 절정의 순간 프랑스 파리로 미술 공부를 하러 떠나기 위해 정미조는 미련 없이 가수 활동을 접었다. 갑작스런 은퇴 선언은 많은 팬에게 충격을 주며 화제가 되었다. 동경국제가요제가 막을 내리고 한 달 뒤 12월 힛트레코드에서 정미조의 수상 기념 음반이자 고별 음반이 나왔다.
37년 만에 격조 높은 음악으로 컴백
수원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대중음악계와는 거리를 두었던 정미조는 이따금 그림 전시회 때 노래를 선보였고, 2006년에는 베스트 시디(CD)까지 발매해 컴백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결국 정미조는 은퇴 선언 37년 만인 2016년 컴백했다. CD로 먼저 공개된 신작 앨범 2장은 최근 500장 한정 LP로 발매돼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2016년 컴백 앨범 ‘37년’은 정미조의 격조 있는 보컬과 뛰어난 완성도로 팬들과 평단의 극찬을 끌어냈다. 이 앨범은 왕년의 유명 가수들이 컴백하며 보여준 음악적 구태의 재현이 아닌, 월드뮤직과 재즈 어법을 적극 수용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음악적 도전과 실험을 보여준 2017년 작 ‘내 젊은 날의 영혼’에서도 정미조는 라틴, 팝 재즈, 모던 포크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우아한 창법으로 들려준다. 두 앨범은 최근 발매되는 대중가요 LP 중 최상급의 매력적인 음질을 구현해 화제를 모았다. 게이트 폴드 팁온 슬리브(펼침 양장)로 제작된 재킷도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최근 유행을 주도하는 컬러반의 유혹을 떨쳐내고 블랙반으로 제작한 것은 좋은 음질을 위한 제작자의 고집스러운 선택이다.
자칫 무모해 보이는 이 모든 시도는 수익보다는 작품의 완성도를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삼는 제작자 이주엽의 고집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뛰어난 작사가이기도 한 그가 운영하는 음반사 JHN은 왕년의 인기 가수로만 머물 수 있었던 최백호를 뛰어난 월드뮤직 보컬리스트로 업그레이드시키는 마력을 발휘했다. 정미조도 신작 2장 앨범으로 격조 있는 여성 보컬리스트로 부활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894.html
공기관에 전시된 ‘빽판’, 시민권 얻다
‘빽판’의 시대, ‘빽판’의 추억 上
명백히 불법이지만 대중음악의 자양분 역할도
50~60년대는 정식 레이블도 해적판 제작
음반사가 적혀 있지 않았던 ‘백반’
오래전 음악감상회를 하던 중에 “지금은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빽판’도 귀한 자료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다들 코웃음을 쳤다. 이번에 청계천박물관에서 ‘빽판의 시대’ 전시(포스터)를 의뢰받아 준비하면서 농담처럼 했던 말이 현실로 다가왔음이 느껴져 묘한 감흥에 사로잡혔다. 실제로 전시 개막 행사에서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공공기관에서 빽판을 전시하는 오늘은 혁명과도 같은 날”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빽판, 즉 해적판은 하얀 음반 라벨에 제작사가 표기되지 않은 ‘백반’(白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음반 판권 소유자와 라이선스(사용권) 계약 없이 만들어 유통한 불법 음반을 말한다. 은밀히 뒤에서 제작되어 ‘Back’이란 말을 썼다는 설도 있다.
한국전쟁 후 미군의 본격 주둔과 더불어 물밀듯이 유입되었던 다양한 서양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을 질적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되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한미군방송(AFKN)으로 팝송을 들었던 젊은 세대는 아무 때나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국내 음반업계는 정식 사용권 계약 없이 클래식, 팝송, 재즈 등 다양한 서양 음악을 무차별 제작해 유통하기 시작했다.
시대별 빽판의 유통 과정
빽판은 외국에서 제작한 원판의 음원을 불법 복사했기에 기본적으로 정식 녹음 음반과는 음질부터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전쟁 후 원판들은 유학생들이 들여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전국 각지에 주둔했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왔다. 미군기지에 근무했던 한국인 군속과 기지촌 성매매 여성 ‘양공주’를 통해 원판 싱글과 음반 LP들 그리고 각종 미군 피엑스(PX) 물건을 수집해 유통한 음성 조직들이 성업했다.
어느 시대나 해적판으로 제작된 노래들은 당대 가장 인기 있던 가수나 밴드 노래들의 음악 그리고 유행했던 음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950~60년대에는 지구, 오아시스, 도미도 등 정식 레코드사에서도 해적판을 만들었다. 저작권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시기였고 붕괴 직전의 음반 시장을 재건하는 일이 급선무였기에 해적판은 큰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다. 당시 발매된 해적판 라벨에 당당하게 납세필증까지 붙이는 해프닝까지 연출했다. 검열 기관도 노래와 커버 이미지가 미풍양속 등 검열 기준에 위배되는지만 살폈다.
50년대부터 70년대 초반 제작된 해적판은 재킷 디자인에 상당한 공을 들였기에, 70년대 중반 이후 조악한 단색 재킷으로 인쇄한 빽판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1968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성음제작소가 정식 사용권 계약을 맺고 음반을 제작하며, 70년대 들어 정식 음반사들은 해적판 제작을 중단하고 라이선스 음반 제작으로 전환했다. 그 긍정적인 순간은 제작사가 표기되지 않은 빽판 제작이 활개 치는 계기가 되었다.
나를 음반 수집으로 이끈 빽판의 추억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1973년 12월 어느 날, 동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동글납작한 검은 물체에서 흘러나오는, 내겐 인생의 음반인 영국 밴드 딥 퍼플(Deep Purple)의 ‘하이웨이 스타’(Highway Star)를 듣게 된다. 그때까지 들었던 대중가요와는 사뭇 다른 강렬한 노래는 나에게 소름 돋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검은색 동그란 물체는 불법으로 제작된 빽판이었다. 팝송에 전율을 느낀 이후 LP 수집을 시작한 소년은 음반수집가로 성장했다. 당시 내가 살던 상도3동에서 노량진역까지에는 10개가 넘는 음반가게가 성업했다.
빽판을 듣고 충격을 받은 뒤, 수업이 끝나면 동네 음반가게들을 매일같이 순례했다. 동네 음반가게마다 파는 음반이 조금씩 달랐다. 클래식 음반도 인기가 있었지만 가요 음반과 팝송 ‘빽판’을 파는 곳이 가장 많았다. 금발의 외국 여성 사진으로 장식된 팝송 빽판들은 음반가게 진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젊은 영혼들을 사로잡았다. 70년대 대유행했던 ‘다이아몬드 스텝의 고고 춤’을 출 수 있는 신나는 팝송들이 대거 수록된 빽판은 가장 잘 팔렸던 인기 상품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롯해 비틀스,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CR), 벤처스 등 밴드의 음반도 인기가 대단했다.
동네 음반가게는 물론이고 서울 도심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 음반가게에서도 빽판은 버젓하게 진열대 한 자리를 차지했다. 동네 음반가게들은 대부분 신보로 나온 최신 팝송들이 수록된 빽판만 팔았다. 더 많은 음악에 목말랐던 까까머리 소년은 단골 음반가게 사장님에게 “세운상가에 가면 싼값에 다양한 빽판을 살 수 있다”는 솔깃한 정보를 들었다. 주말이 되면 청계천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나는 근사한 외국 음악이 담긴 빽판을 찾아내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
세상의 모든 음악 집결소 청계천 세운상가
살뜰하게 모아둔 용돈을 가지고 청계천에 가는 날은 사냥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청계천에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 다 있었다. 청계천 4가에는 ‘빽판’을 파는 도매상과 소매상들이 밀집해 있었다. 청계천 8가에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비싼 ‘원판’들을 음성적으로 팔았다. 단속이 들이닥칠 것 같은 불안한 분위기에서 빽판을 뒤적이던 추억이 떠오른다. 빽판은 라이선스 음반의 10~20% 이내의 싼값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청계천을 찾은 청소년들은 빽판 재킷을 화려하게 장식한 금발의 서양 미인 사진에 홀려 아낌없이 용돈을 꺼냈다. 빽판의 재킷 사진들은 미군들이 즐겨 보던 각종 해외 오락 잡지 등에서 발췌했다고 한다.
값이 싼 만큼이나 빽판은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음반 몇 장을 구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진심으로 행복했다. 70년대 빽판의 재킷은 조악한 종이로 제작해 쉽게 훼손되었다. 그래서 물자가 넉넉지 못했던 당시에 귀했던 두툼한 청색, 녹색 테이프로 테두리를 테이핑한 빽판은 자랑거리였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980.html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빽판의 역사
‘빽판’의 시대, ‘빽판’의 추억 中
58년 유니버설사, 유성기 해적판 발매
최동욱·이종환 등 팝송 디제이 프로그램 이름 딴 ‘빽판’도 제작돼
각종 해외 음악을 담은 불법 음반의 역사
국내에서 ‘빽판’은 언제부터 제작되었을까? 드러내고 싶지 않은 흑역사인만큼 빽판에 대한 오해는 상당하다. 연구 대상으로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심도 있는 연구조차 없었다. 일반적으로 빽판의 전성시대는 1970~80년대로 알려졌다. 음반 미디어도 LP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국내 빽판의 역사는 유성기 시대였던 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음악 장르도 팝송에 국한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이 또한 오해다. 해적판은 세상의 모든 장르를 담아냈다.
빽판은 크게 원판의 커버와 수록곡을 그대로 복사한 음반과 재킷 디자인부터 완전히 다르게 제작한 편집 음반으로 나눌 수 있다. 국내 팝송 문화는 빽판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법으로 제작하고 유통했던 해적판은 부정적 이미지에도 원판과 라이선스 음반보다 아주 쌌기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또한 들을 수 없었던 금지곡이 고스란히 담긴 것도 매력 있었다.
1950년대의 유성기 해적판
한국전쟁 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원판 LP들이 ‘양키 시장’과 기지촌 주변에서 비싼 값으로 국내 시장으로 들어왔다. 그로 인해 1950년대 중반 이후 국내에서도 LP 보급이 이루어졌다. 불법으로 제작된 팝송 해적판의 등장은 원판을 복사해 제작한 유성기 음반과 10인치 LP들로 본격화되었다.
KBS 전속 1기 가수 출신인 옥두옥은 한국 가수 최초로 미국에서 음반을 발표했다. 해방된 뒤부터 활동했던 그녀는 재미교포와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 가 1956년과 1957년 2장의 싱글 음반을 미국에서 녹음했다. 그의 본명은 김문찬인데, 음반에는 ‘Moon Kim’으로 표기했다. 이 음반에 실린 ‘Kanda Kanda’는 장세정의 ‘역마차’를, ‘East of Make Believe’는 현인의 ‘고향만리’를 번안한 곡이다. 1958년 유니버샬레코드사는 미국에서 발표된 그녀의 노래들을 불법 유성기 음반으로 발매했다.
1950년대는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증언하듯 춤바람이 대단했다. 이에 댄스용 경음악과 외국영화 주제가, 인기 외국 가수들의 유성기 음반이 불법 제작되어 팔려나갔다. 국내에서 LP 제작이 시작된 1958년부터 해적판 LP도 양산되기 시작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냇 킹 콜, 폴 앵카, 닐 세다카 등의 노래와 살롱용 연주 음악을 수록한 팝 LP들이 유성기 음반보다 싸게 유통되면서 국내에도 팝송 음반시장이 조금씩 형성돼갔다. 또한 이 시기 빽판들은 방송 음악 프로그램과 전국의 음악감상실, 살롱에서도 각광받으며 국내 팝송 문화 조성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납세필증까지 붙인 1960년대의 빽판
저작권 개념조차 없었던 1960년대 해적판 라벨에는 국가에서 발행하는 납세필증 인지까지 붙여 유통했다. 전국에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이 미미했던 시절에 영상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극장이었다. 당대의 엄청난 외국영화의 인기를 반영하듯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과 열풍을 몰고온 각종 트위스트 음반들이 빽판 시장을 주도했다. 비틀스, 브렌다 리, 카니 프랜시스, 패티 페이지, 클리프 리처드 등 유명 외국 가수들, 벤처스, 빌리 본 등 악단들의 해적판 제작도 줄을 이었다. 또한 클래식, 재즈, 사이키델릭, 포크, 록, 솔, 오페라, 샹송, 칸초네, 라틴, 요들송 등 다양한 장르 음악이 인기리에 팔려나가며 장르의 다양성 확보에 기여했다.
빽판의 어원이 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1964년에 발표된 이미자의 대표곡 ‘동백아가씨’ 열풍은 현해탄의 높은 파도를 넘었다.
1966년 일본 빅터레코드사는 2장의 <동백아가씨> 싱글 음반을 현지에서 발매했다. 일본 정서에 맞게 제목을 ‘사랑의 빨강 등불’로 바꾸고, 가수 이름도 일본식 발음인 ‘리요시코’로 소개했다.
당시는 한-일 국교 수립 이후 반일 감정이 극도로 악화한 시기다. ‘이미자가 일본말로 노래를 녹음했다’는 소문은 반일 감정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 이때 노래에 대한 비난과 호기심이 뒤섞여 일본말 ‘동백아가씨’가 수록된 황당한 가요 해적판이 등장했다.
전형적인 1960년대 편집 팝송 해적판의 뒷면에 <이미자 히바리고마도리 유행가집>이라고 쓰인 조악한 등사지가 붙은 빽판이다. 청계천의 음반 도·소매상들은 하얀 라벨의 이 음반을 ‘백반’(白盤)이라 표기했고, 처음으로 ‘빽판’으로 칭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팝의 국내 보급에 일조했던 디제이 최동욱, 이종환
국내 최초의 전문 방송디제이로 평가받는 동아방송의 최동욱과 문화방송(MBC)의 이종환은 자신들이 진행했던 방송 프로그램의 이름을 딴 시리즈 빽판 제작을 주도했다. 음성적으로 입수한 원판들에서 빌보드 차트에 오른 히트곡과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노래를 선곡해 제작한 이들의 편집 팝송 빽판들은 60년대 해적판 시장의 히트 상품으로 떠올랐다. 또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제작에 참여한 빽판에 수록한 팝송들을 자기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들려주며 자연스럽게 팝송을 보급하고, 저변을 확대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당시 최동욱이 진행한 팝송 해적판 시리즈는 ‘탑튠 쇼’이고, 이종환이 진행한 시리즈는 ‘뮤직 다이알’ ‘탑튠 왕’ ‘오늘의 팝송’ 등이 대표적이다. 시리즈 음반들에 두 사람이 커버 모델로 여러 번 등장했던 것은 당시 그들의 인기와 이름값을 증언한다.
이후 국내 해적판 시장에는 비슷한 제목의 시리즈 해적판들이 범람했다. 미미레코드사는 방송 테이프를 입수해 ‘탑튠 쇼 36집’에 최동욱이 번안한 조영남의 ‘그린베레의 노래’ ‘월남에서 온 편지’ 등 2곡을 수록했다. 이어 신진레코드사에서 발표했던 37집에는 조영남의 ‘딜라일라’를 처음 수록해 대박을 터트렸다. 또한 36집은 레드, 37집은 그린 음반으로 제작해 국내 해적판 시장의 새로운 유행을 주도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038.html
유재하·김현식·김정호·최병걸…요절의 계절
11월 낙엽 따라 가버린 가수들 上
유재하 떠난 딱 3년 뒤 김현식도
포크에 국악 접목한 김정호도 33살에
‘찬비’의 최병걸도 38살 이른 나이에
만추의 11월이다. 요즘은 사라졌지만 한동안 11월은 연예인들이 몸조심해야 된다는 ‘괴담’이 널리 퍼졌다. 11월에 사망하거나 사고를 당한 연예인이 많아서 생긴 말이다. 실제로 11월에 세상을 떠난 중요 대중가수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11월에 우리 곁을 떠나 별이 된 가객들의 유작 LP 이야기를 두 번에 걸쳐 소개한다.
11월을 여는 첫날인 1일부터 걸출한 뮤지션이 2명이나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1987년 유재하에 이어 3년 후인 1990년 김현식이 공교롭게도 같은 날에 뒤를 이으면서 ‘11월 괴담’이 일파만파 번져나갔다. 1987년 11월1일, 유재하는 서울 강변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스물다섯 살 짧은 생을 마감했다. 비록 생전에는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지금도 그의 이름이 회자되는 것은 아름다운 음반 한 장을 남겼기 때문이다. 한양대 음대 작곡과 출신의 순수음악도가 대중가수로 변신한 것도 평범치 않았다.
유재하는 데뷔 음반이 곧 유작 음반이 된 비운의 가수다. 유재하의 노래들은 여자친구와의 만남부터 몇 번의 헤어짐과 재회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담은 솔직한 연애 일기였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그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가왕 조용필은 유재하가 만든 노래 ‘사랑하기 때문에’를 가장 먼저 녹음하며 그의 음악성을 알아봤다. 스산한 늦가을에 제격인 유재하의 유작 음반은 최근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들국화 1집을 제치고 당당히 1위에 선정되며 존재감을 더했다.
유재하 독집의 초반은 1987년에 1천 장 정도를 발매했는데, 타이틀곡 ‘사랑하기 때문에’의 글자를 담배 연기로 디자인한 독특한 그림 재킷이었다. 이 음반에는 발매일을 정확하게 표기하지 않았다. 수록 곡들의 녹음 번호로 미뤄, 총 9곡 중 8곡을 1987년 3월에 녹음했고, ‘가려진 길’은 4월에 녹음했음을 알 수 있다. 초반 커버 디자인이 유재하의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발매된 LP는 회색 콘크리트에 기댄 유재하의 사진과 “87. 夏”라는 글자를 넣어 디자인을 수정했다. 그런데 이 음반의 초반이 1987년 여름이 아닌, 녹음이 끝난 5월 즈음에 발매된 증거가 있다. 필자가 소장한 초반 재킷의 뒷면에 유재하가 친필로 쓴 사인에는 ‘87. 5. 19’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별이 된 유재하가 너무도 쓸쓸해 3년 뒤 같은 달 같은 날에 선배 김현식을 데려갔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마의 11월 괴담설’은 증폭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생전에 절친한 음악 선후배 사이였고 밤을 새워 음악과 인생을 논했던 술친구이기도 했다. ‘사랑의 가객’이라 하는 김현식은 뜨겁게 사랑을 노래하고 훌쩍 떠났다. 삶의 굴곡이 많았던 그는 성공과 좌절을 반복했다.
대마초 사건은 그를 정점에서 끌어내렸지만 숱한 명곡을 발표했다. 하지만 술과 담배로 자신을 혹사한 대가는 가혹했다. 병상에서도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던 김현식은 간 경화로 1990년 11월1일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사후인 1991년에 발매돼 김현식의 유작 앨범이 된 6집과 타이틀곡 ‘내 사랑 내 곁에’는 그가 생전에 경험하지 못한 아낌없는 찬사와 호응을 끌어내며 자신을 영원히 추모하게 했다.
유재하와 김현식처럼 11월에 3년 간극으로 별이 된 가수가 2명 더 있다. 김정호와 최병걸이다. 1985년 11월29일 포크 가수 김정호는 33세의 아까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드라마틱하게 짧은 삶을 살다 간 그의 등장은 70년대 대중음악계에 일대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그가 만들고 노래한 수많은 노래는 젊은 학생층에 국한됐던 기존의 포크송 수요층을 온 국민으로 대상 영역을 넓히면서 시대정신이 되었다. 당시 유니버샬레코드사는 젊은 층을 겨냥해 기획한 ‘영 훼밀리’ 옴니버스 시리즈 음반 1집부터 5집까지(3집을 제외한) 모든 재킷 표지를 김정호의 사진으로 장식했다. 당시 그의 대중적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준다.
유난히 슬펐던 김정호의 노래들은 한의 정서를 담은 국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마초 흡연으로 활동이 금지된 좌절의 시간 동안 그는 인생을 성찰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진짜 소리를 찾는 창작 활동에 몰두했다. 5년 만에 맛본 해금의 달콤함도 잠깐이었다. 늘 심신을 힘들게 했던 결핵균보다 강하게 꿈틀거렸던 음악에 대한 그의 피 끓는 열정은 명곡 탄생과 더불어 자신을 사지로 모는 건강 악화를 불러왔다.
1983년 11월에 발표된 그의 유작 음반 LIFE는 피를 쏟아내며 발표한 마지막 정규 음반이다. 그의 마지막 히트곡인 타이틀곡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도 인천 결핵 요양원에서 안개가 자욱한 송도 해변을 걷는 한 여인의 모습에서 느낀 슬픔의 이미지를 담아냈다. 또한 음반에 수록된 ‘님’ 등은 많은 후배 가수들의 창법에 영향을 끼친 김정호 특유의 애절한 샤우팅 창법의 전형을 제시했다. 사후에 선후배 가수들로부터 헌정 음반을 받으며, 국내 가수로는 최초로 헌정 음반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김정호가 별이 되어 떠난 3년 뒤인 1988년 11월7일. 70년대의 인기 가수 최병걸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70년에 데뷔해 ‘난 정말 몰랐었네’, 정소녀와 함께 불렀던 ‘그 사람’ 등 무수한 히트곡을 남긴 최병걸은 호남형의 외모로 여성 팬층이 두꺼웠다. 그의 대표곡 ‘난 정말 몰랐었네’는 1978년 MBC TV <금주의 인기가요>에서 5주 연속 1위에 오르며 그에게 그해 MBC, TBC 10대 가수상을 안겨준 공전의 히트곡이다.
1970년대 한국 영화음악 작업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최병걸은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와 아류작인 이유섭 감독의 <춘자의 사랑 이야기>의 주제가를 불렀다. 비록 개봉 일주일 만에 간판을 내렸지만 <춘자의 사랑 이야기>의 주제가 ‘찬비’는 생전에 고인이 자신의 노래 중 최고작이라 자평했을 만큼 애절한 분위기가 압권이다. 광고모델 한계순과 결혼했던 최병걸은 80년대 이후 노래보다는 창작에 더 몰두했지만 간암 말기로 수술도 받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사후에 더욱 조명받았던 유재하, 김현식, 김정호와는 달리 최병걸은 대중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아쉬움을 더한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187.html
60년대 절창 차중락·배호의 너무 이른 죽음
11월 낙엽 따라 가버린 가수들 下
68년 27살, 71년 29살 때 요절
차중락 ‘낙엽 따라…’ 운명 밟아
배호도 데뷔곡 ‘굿바이’처럼
11월에 별이 되어 떠난 중요 가수들이 의외로 많음이 뒤늦게 확인되면서 ‘11월 괴담’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3년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가수는 유재하와 김현식, 김정호와 최병걸 이전에도 60년대를 풍미했던 차중락과 배호가 있다. 차중락과 배호는 생전에 서로를 아꼈던 친구라는 점에서는 유재하와 김현식과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다. 올해에 50주기를 맞은 차중락은 1968년 11월10일에 27살의 나이로, 배호는 1971월 11월7일에 29살의 꽃다운 20대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충격파를 날렸다.
밴드 ‘키보이스’의 리드보컬 출신인 차중락은 잘생긴 얼굴, 미스터 코리아 2위로 선정된 건장한 체격과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감미로운 바이브레이션 창법으로 젊은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철없는 아내’로 솔로로 독립한 그는 동양방송(TBC)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사랑의 종말’의 빅히트로 1967년 TBC 남자 최고신인가수상의 영예를 안고 음악 인생의 정점을 내달렸다. 인기 가수가 된 뒤 바쁜 활동과 잦은 스캔들로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차중락은 건강이 악화하기 시작했다. 1968년 11월10일. 서울 동일극장 무대에서 그는 고열로 쓰러지며 극심한 두통을 호소했다.
차중락은 사망 직전에 가을 시즌을 겨냥한 ‘낙엽의 눈물’ 등 5곡이 수록된 신보를 1968년 8월25일 발표했다. 이 노래들이 유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갑작스러운 요절로 제작사인 유니버살레코드사는 급하게 유작 음반으로 포장해 재발매했다. 초반 타이틀 <차중락의 새노래>는 재반에서 <마지막 남기고 간 차중락의 새노래!>로 수정되었고, 타이틀곡도 ‘낙엽의 눈물’과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짧은 솔로 가수 생활 동안 차중락이 남긴 곡은 20여 곡에 불과하다. 당대 대중의 선택은 ‘사랑의 종말’과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었지만, 그는 ‘마음은 울면서’와 ‘그대는 가고’ ‘철없는 아내’를 각별히 사랑했다고 한다. ‘철없는 아내’는 70년대 후반 산이슬 출신의 박경애가 리메이크해 또다시 히트했다. 하지만 2004년 박경애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 노래를 녹음한 가수는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는 징크스를 남겼다.
1969년 인기 절정의 순간에 갑자기 별이 된 차중락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더욱더 퍼져갔다. 1주기를 즈음해서는 대중음악사상 처음으로 요절 가수 차중락을 기리는 ‘낙엽상’까지 제정되었다. 그해에 가장 뛰어난 남녀 신인 가수에게 주는 ‘낙엽상’의 1회 수상자는 나훈아와 이영숙이었다. 심지어 1970년에는 그의 히트곡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과 같은 제목으로 그의 짧은 일생을 그린 김기덕 감독의 영화와 더불어 차중락과 관련된 영화가 2편이나 동시 기획되는 충돌까지 일어났다.
차중락의 최대 라이벌은 신장염으로 사지를 넘나들면서도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로 급부상했던 배호였다. 1967년 ‘돌아가는 삼각지’로 스타덤에 오른 배호는 1970년까지 4년 연속 문화방송(MBC) 10대 가수에 선정되며 히트곡마다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는 전성기를 누렸다.
1971년 10월20일 방송된 MBC 음악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이다. 방송 후, 가을비를 맞아 감기 몸살에 걸렸던 배호는 11월7일 병세가 악화돼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회생할 수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는 구급차 안에서 세상과 이별했다.
배호가 세상을 떠난 다음날인 11월8일. 라디오의 정규 뉴스 방송 시간에 배호의 노래가 흘러나와 청취자들은 방송 사고로 여기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수협회장으로 치른 장례식 후 경기도 장흥의 장지로 향한 운구 행렬에는 많은 여성 팬이 소복을 입고 따라가 화제가 되었다. 현재 노래비가 없는 차중락과 달리 배호는 경기도 장흥의 묘소에 ‘두메산골’을 시작으로 서울 삼각지에 ‘돌아가는 삼각지’, 강원도 주문진에는 ‘파도’, 경주시 현곡에는 ‘마지막 잎새’ 등 4개의 노래비가 있을 정도로 여전히 팬이 많다. 가수 장사익은 “아무리 불러도 배호의 ‘필’을 못 좇아가겠다”며 그의 가창력을 극찬했다.
배호와 차중락에게는 노래 제목과 연관된 공통점이 더 있다. ‘가수는 자신의 노래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는 가요계의 속설에서 배호는 벗어나지 못했다. 드러머 출신의 무명 가수로 출발했던 배호의 데뷔곡 제목은 묘하게도 ‘굿바이’였다. 사망 직후에 발매된 유작의 제목도 이별을 암시하는 ‘마지막 잎새’와 ‘0시의 이별’이었다. ‘0시의 이별'은 ‘통금인데 0시에 헤어지면 어떡하냐’는 이유로 방송 금지가 되기도 했다. 늘 병마와 싸웠던 배호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오히려 먼저 별이 되어버렸던 차중락도 마찬가지다. 그의 첫 히트곡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고 유작 또한 노래 제목에 낙엽이 들어간 ‘낙엽의 눈물’이다.
1988년 11월22일 새벽에 남성 그룹 ‘강병철과 삼태기’의 리더 강병철은 행사를 마치고 봉고차를 타고 귀가하던 경인고속도로에서 음주운전 중이던 30대 경찰관의 승용차와 부딪히면서 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발표한 삼태기의 음반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1992년 등장한 남성 힙합 댄스 듀오 ‘듀스’의 멤버 김성재는 타고난 춤꾼으로 그룹의 패션과 콘셉트를 담당했다. 그룹 해체 이후 1995년 컴백했던 23살 청년은 방송 출연 다음날인 11월20일 새벽에 호텔 방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처음 경찰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인을 발표했으나 타살 의혹이 제기되며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남겼다. 1995년 발매한 듀스의 마지막 정규 음반인 3집은 게이트 폴드 LP로 소량 제작되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연예계 전체로 증폭되었던 ‘11월 괴담’과 관련해서는 11월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행사가 집중되면서 바쁜 일정과 심리적 이완 현상이 커진 탓에 긴장감이 풀려 사건 사고가 많다는 분석이 있었다. 또한 프로야구 등 중요 스포츠 시즌이 끝나면서 각종 언론이 연예 관련 뉴스로 관심을 옮기면서 사건들이 부풀려진 것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올 11월은 아무 사고 없이 지나가 모두가 한 해를 멋지게 정리하는 12월을 맞이하길 바란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265.html
윤수일·김현철·빛과 소금…젊은층에 재발견된 ‘시티팝’
윤수일·김현철·빛과 소금…젊은층에 재발견된 ‘시티팝’
상당수가 세련된 시티팝 LP 찾아
하나의 장르라기보다는 80~90년대 일본에서 성행한 용어
최근 옛 서울역사(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린 제8회 서울레코드페어에서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색다른 경험을 했다. 먼저 음원으로 음악을 듣는 디지털 시대에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아날로그 LP를 고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또한 방문객의 대다수가 20~30대 젊은 층인 점이 놀라웠다. 사실 LP 수집가들에게는 신중현 관련 음반들과 60~70년대의 희귀 LP가 인기가 많다. 그런데 이번 페어는 공기부터가 완전 달랐다. 80년대 이전의 LP들은 저렴한 음반 위주로만 거래가 소소하게 이뤄질 뿐이었다. 대신 한국식 ‘시티팝’으로 분류되는 80~90년대 가수들의 LP를 찾는 발길이 뜨거웠다.
몇 해 전부터 원조라 할 수 있는 일본의 시티팝 LP 인기가 올라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왜 이렇게 젊은 세대에게 시티팝의 인기가 높을까? 시티팝은 하나의 장르라고는 보기 어렵고, 80년대 초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일본에서 성행한 세련된 대중음악을 가리키는 용어다. ‘시티’(city)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도시인들의 낭만을 그려낸 노래가 주종을 이룬다. 음악적으로는 신시사이저, 키보드를 바탕으로 세련된 편곡과 연주에다 청량감 넘치는 사운드가 특징이다. 풍요로웠던 80~90년대 일본의 음반사들이 아낌없이 투자해 구축한 최고급 음악 인프라는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껏 끌어올렸다. 시티팝은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고도 성장기였던 80~90년대에 도시를 소재로 한 세련된 시티팝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80년대에 시티 뮤직을 표방해 국내에서 인기를 끈 대표 주자들의 음악이 독자적인 한국식 시티팝이라 생각하지만, 당시 대세를 이뤘던 일본 시티팝의 영향을 받았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80년대에 한국에서는 시티팝 대신 ‘시티 뮤직’을 쓴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과거 한국 대중음악은 일본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거나 심지어 표절했던 작품도 있었다. 또한 과거는 물론이고 지금도 국내 방송에서는 일본말 노래는 공개적으로 방송할 수 없어 일본 대중음악은 금기 사항이다.
국내에서 시티팝으로 소개되는 노래를 들어보면 도시의 이미지와 도시인의 삶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노래가 의외로 많다. 그저 세련된 편곡과 세션을 동반한 고급스러운 음악을 시티팝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또한 시티팝이 음악 장르라기보다는 ‘도시를 떠나 노을이 환상적인 해변을 드라이브’하는 느낌을 대변하는 분위기도 강력하다. 윤수일의 ‘아름다워’는 전형이다. 이처럼 일본과는 다른 음악 환경인 한국에서 시티팝은 개개인의 느낌이 중시돼 정체성 규정이 모호한지라 생각처럼 명확하게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식 시티팝의 기원이 어떤 가수의 노래인지를 단정하는 일도 난제다. 하지만 윤수일 밴드, 도시 아이들을 비롯해 퓨젼 재즈 계열의 김현철, 빛과 소금, 봄여름가을겨울 등을 한국의 대표 시티팝 뮤지션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80~90년대 발표된 국내 뮤지션들의 대표 시티팝 LP를 소개한다. 한국식 시티팝의 주자로 널리 알려진 뮤지션들의 것과 더불어, 도시를 음악의 화두로 삼고 세련된 편곡과 수준급 세션들로 고급스러운 음악을 담은 것들이다.
1981년 윤수일 밴드의 1집은 ‘고독한 도시 남자의 음악’으로 화제를 모았다. 1집의 ‘제2의 고향’, 솔로 히트곡을 다시 녹음한 ‘유랑자’와 1982년 2집의 ‘아파트’는 그의 도시 3부작으로 손꼽힌다. 청량감 넘치는 사운드로 인기 만점이었던 ‘아파트’는 아파트가 주거 형태로 주목받던 시대 상황을 그려내며 한국식 ‘시티 뮤직’으로 주목받았다. 1986년 이재민의 뻣뻣한 로봇 춤으로 화제를 모았던 ‘골목길’과 ‘제 연인의 이름은’도 많이 회자된다. 80년대 댄스 가수 김완선은 데뷔 음반부터 참여 작곡자와 프로듀서의 면면이 화려했고 세련된 사운드를 선보인 점에서 일본식 시티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도시 아이들(고 김창남, 박일서)은 그룹 이름처럼 도시를 콘셉트로 시티팝을 지향했다. 1988년 발매한 2집은 ‘음악 도시’ ‘도시 안녕’ 등 도시와 관련된 노래로 채웠다. 기획사 뮤직시티는 재킷 앞면을 도시의 조명과 네온사인의 잔상에 비친 사람의 얼굴로 디자인했고, 뒷면에는 “이 음반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사용을 허락함. 뮤직시티 시장”이라는 문구를 넣을 정도로 도시 이미지에 충실했다. 세련된 사운드를 구사했던 이들은 이후 ‘김창남과 도시로’를 결성해 시티팝을 이어갔다. 90년대엔 시티록 밴드 ‘세라’도 등장했다.
김현철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1989년 발매한 그의 1집 음반에 수록된 ‘춘천 가는 기차’ ‘오랜만에’와 1992년 2집의 ‘그런대로’는 도회적이고 실험적인 한국식 시티팝의 본질을 들려준다. 발라드와 댄스가 대세였던 80년대 후반의 가요계에서 낯선 멜로디보다 화성 중심의 퓨전 재즈였기에 김현철의 음악은 방송이나 가요 차트보다는 음반 판매에서 강세를 보였다. ‘춘천 가는 기차’는 발매 이후 경춘선 열차를 타고 당일치기 춘천 여행을 떠나는 연인이 늘어난 히트곡이다.
봄여름가을겨울도 1989년 3집을 미국에서 현지 스태프와 세션들을 기용해 고급스러운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샴푸의 요정’으로 유명한 빛과 소금의 정규 음반은 국내 시티팝 LP 수집가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여성 로커 도원경의 LP 재킷은 그 자체로 도시적이다. 빌딩 앞에서 가죽점퍼에 선글라스를 끼고 오토바이를 탄 도발적인 캐리커처로 장식된 1집 음반의 수록곡 ‘성냥갑 속 내 젊음아’는 노래방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그 밖에 조용필, 홍수철, 엄인호, 명혜원, 회색도시, 고상록, 신윤철, 강은숙, 택시 등도 한국식 시티팝을 부른 가수다.
평소 소박하고 거친 사운드를 좋아하기에 시티팝으로 분류되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사운드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들어보니 왠지 풍요로운 기분이 든다. 요즘 젊은 세대가 원하는 이런 분위기가 한국식 시티팝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324.html
“송창식의 ‘밤눈’이 내겐 최고의 겨울 노래”
송년 분위기 나는 노래들
불안한 영혼 담은 아름다운 멜로디
윤심덕·키보이스·나훈아의 캐럴
송년이 되면 어디서나 들렸던 노래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인 12월, 엄동설한의 긴 겨울이 시작되었다. 각종 송년회 모임과 크리스마스를 지나 송년의 시간이 다가오니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된다. 계절이 바뀌면 유난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 봄비가 내리거나, 햇살이 강렬하고, 낙엽이 지고, 요즘처럼 날이 춥고 눈이 내리면 어김없이 다시 듣고 싶은 계절 노래 말이다. 계절 노래는 그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부활하며 영원히 추억으로 기억된다. 마치 서랍 속에 고이 넣어뒀다가 문득 그리워질 때 꺼내보고 싶은 오래된 사진처럼.
겨울을 대표하는 대중가요와 겨울 풍경을 음반 재킷으로 장식한 시대별 가요 LP를 소개하려 한다. 과거 겨울을 대표하는 캐럴 LP에는 한 해를 보내는 송년가들이 대부분 포함되었다. 겨울 노래의 화두는 단연 하얀 ‘눈’과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은 기네스북에도 오른 빙 크로즈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다. 그는 이 노래로 세 번이나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음반으로 발표된 국내 겨울 노래는 1926년 윤심덕의 ‘파우스트 노엘’, 즉 익숙한 캐럴인 ‘첫 번째 노엘’로 시작되었다. 1945년 해방 후 미군 주둔과 더불어 유입된 외국 팝가수들의 캐럴 음반을 통해 국내에도 캐럴의 대중화가 급격하게 이뤄졌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1950년대 말부터는 한복남, 전오승, 하기송 등이 창작 캐럴을 만들며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때 당대의 인기 가수 송민도, 현인, 김용만, 김정애 등이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캐럴 LP를 잇따라 발표했다. 50년대 창작 캐럴은 고전 캐럴 멜로디를 차용했지만 완전 트로트 버전인지라 듣는 이를 웃음 짓게 한다.
60~70년대는 록과 포크의 전성시대였다. 자연스럽게 많은 록밴드와 포크 가수가 독특하고 색다른 캐럴 음반으로 젊은 층의 호응을 끌어냈다. 고전 캐럴을 롱 버전의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로 편곡한 히파이브와 라스트 찬스, 키보이스 등 록밴드들의 캐럴 음반은 개체수의 희귀함과 탁월한 음악성 때문에 지금도 고가에 거래된다. ‘해변으로 가요’로 여름을 평정했던 키보이스는 ‘징글벨 락’으로 겨울까지 접수했다.
또한 이미자, 배호, 남진, 나훈아, 하춘화, 문주란, 박일남 등 많은 트로트 가수도 동참하며 캐럴 음반량은 급팽창했다. 그중 1972년 발매했던 나훈아의 캐럴 음반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연출한 조악한 재킷 디자인 때문에 외국에서 ‘월드 워스트 캐럴 음반 재킷 10’에 선정되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창작곡까지 수록된 나훈아의 캐럴 음반은 꽤나 진귀하다. 쌍둥이 자매 듀엣 바니걸스의 엄마와 뽀뽀하는 가사가 등장하는 ‘지난해 본 산타 할아버지’는 이색 트로트 캐럴이니 한번 들어보시길 바란다.
요즘은 캐럴 음반 신보가 많지 않아 발매 자체가 뉴스가 되는 디지털 시대다. 한때 저작권이 없는 캐럴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비유되었다. 80~90년대만 해도 크리스마스와 연말에만 유통되는 캐럴 음반은 특별한 홍보 전략 없이도 수만 장은 거뜬히 팔려나갔다.
캐럴은 가수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개그맨, 배우들도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경쟁적으로 캐럴을 발표해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코믹 캐럴의 최대 히트작은 1982년에 나온 심형래의 코믹 캐럴이다. 국내 최초의 코믹 캐럴은 1966년에 발표된 코미디언 서영춘과 여성 듀엣 갑순을순의 ‘징글벨’로 봐야 한다. 이 곡은 서영춘의 형인 작곡가 서영은의 창작 캐럴을 기존의 ‘징글벨’에 리믹스한 버전으로 서영춘 특유의 익살이 돋보인다.
계절 노래도 세대 간 간극이 있다. 겨울 노래만 해도 중장년층에게는 이미자의 ‘첫눈 내린 거리’, 4월과5월의 동요처럼 맑고 순수한 ‘겨울바람’, 조영남의 ‘함박눈 아가씨’, 현경과 영애의 ‘눈송이’, 이종용의 ‘겨울아이’, 송창식의 ‘밤눈’, 조하문의 ‘눈 오는 밤’, 이선희의 ‘겨울 애상’, 남성 듀엣 미스터 투의 데뷔곡 ‘하얀 겨울’, 푸른 하늘의 ‘겨울 바다’, 김종서의 ‘겨울비’ 등이 사랑받았다.
1977년 최대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던 영화 <겨울 여자>의 주제가 ‘겨울 이야기’도 김세화와 이영식이 부른, 진한 추억을 간직한 명곡이다. 또한 가요 순위 1위까지 오르며 10대부터 30대까지 폭넓게 팬을 확보했던 ‘하얀 겨울’은 당시 커피숍이나 패스트푸드점에 가면 겨울 노래로는 빠지지 않고 흘러나왔다.
개인적으로 최고로 생각하는 겨울 노래는 70년대 포크 가수 송창식의 ‘밤눈’이다. 창작곡들로 포진된 1974년 송창식 3집에 수록된 이 노래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남성 듀오 트윈폴리오 결성 후 인기를 누리던 송창식은 입대 영장을 받고 가수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지 불안에 시달리며 심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소설가 최인호(음반에는 ‘최영호’로 표기)가 통기타 가수들에게 노랫말을 줘서 곡을 붙이는 작업을 했다. 송창식에게 배당된 노랫말이 바로 ‘밤눈’이었다. 최인호의 서정적인 노랫말도 근사했지만, 미래가 불투명했던 당시의 허탈하고 답답한 젊은 날의 솔직한 심정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담아낸 송창식의 진심은 많은 젊은 영혼들에게 오랫동안 공감대를 형성하며 사랑받았다.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는 KBS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 등장했던 박효신의 ‘눈의 꽃’과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주제곡인 거미의 ‘날 그만 잊어요’를 선호한다. 유엔(UN)의 ‘평생’, 핑클의 ‘화이트’는 경쾌한 멜로디와 리듬으로 젊은 연인들의 발랄한 사랑을 묘사해 사랑받았던 겨울 노래다. 디제 디오시(DJ DOC)의 ‘겨울 이야기’나 젝스키스의 ‘커플’도 첫눈을 신나게 즐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계절 노래다. 반대로 첫눈 오는 날이면 오히려 지난 추억 때문에 우울한 사람들은 드라마 <겨울연가> 주제곡인 류의 ‘처음부터 지금까지’나 김건모의 ‘겨울이 오면’, 원타임의 ‘위드아웃 유’를 들으며 마음을 달랬을 것 같다.
이처럼 세대별로 좋아하는 겨울 노래는 제각각이지만 겨울에 들어야 제격이란 점이 공통점이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401.html
전설의 고복수도 데뷔 시절은 찬밥 신세였다
최규성의 LP 이야기 22-돼지띠 가수들의 데뷔 음반들 (상)
뒤늦게 오케레코드에 스카우트 뒤 ‘히트’
1935년생 돼지띠 대표 가수 최희준
1947년 김세레나·박인수·트윈폴리오
2019년 기해년 황금 돼지띠의 해를 맞아 중요 돼지띠 가수들의 데뷔 앨범에 얽힌 이야기를 준비했다. 중요 가수들의 풋풋했던 데뷔 시절 사진이 앨범 커버를 장식한 LP는 보는 재미까지 안겨준다. 데뷔곡부터 히트하며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가수도 많지만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해 데뷔 음반의 실체가 불분명한 유명 가수들도 상당하다.
돼지띠 가수의 역사는 1911년생 고복수로부터 시작된다. 1911년생 돼지띠는 109세의 고령이기에 생존 가수는 없다. 고복수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주최한 국내 최초의 전국 신인 가수 선발대회에 참가해 2위에 올랐다. 관심은 여자 입상 가수에게만 쏠렸고 남자 가수 고복수는 찬밥 신세였다. 뒤늦게 1934년 동아일보 학예부가 주최한 ‘당선가 발표 음악대회’에서 경쟁사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이 그의 노래를 듣고 스카우트했다. 데뷔곡 ‘타향’(타향살이)을 수록한 고복수의 데뷔 유성기 음반은 크게 히트해, 소녀 가수 황금심과 결혼까지 성사시켰다. 난관은 있었지만 고복수는 돼지띠 가수의 시작을 멋지게 장식했다.
1923년생 돼지띠는 중요 가수를 찾지 못했다. 85세가 된 1935년생 돼지띠 가수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찐빵’ 최희준이 대표다. 그는 1957년 서울대 장기자랑 대회에서 법대 대표로 입상하면서 ‘노래 잘하는 서울법대생’으로 입소문을 탔다. 1958년 사법고시에 낙방한 그는 진로를 고민했다.
1961년 창립한 뷔너스 레코드의 첫 작품인 최희준의 데뷔 음반은 한명숙, 블루벨즈 등 여러 명의 돼지띠 가수들을 동시다발로 배출한 특별한 음반이다. 블루벨즈의 멤버 서양훈, 현양, 김천악, 박일호는 모두 동갑내기 돼지띠다.
이 음반은 뷔너스 레코드에 성장 동력을 안겨준 빅 히트작으로 세 번에 걸쳐 발매되었지만, 처음 발매 때는 전국의 레코드 가게에서 무더기 반품 사태가 빚어졌다. “한명숙이란 여가수, 진짜 가수 맞느냐. 목소리가 쉰 것처럼 이상하다”는 이유였다. 당시는 꾀꼬리처럼 맑고 고운 목소리가 대세였다.
60년대 남성사중창단 전성시대를 주도했던 블루벨즈의 ‘이별의 종착역’은 오리지널 가수 손시향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다시 녹음한 것이다. 한명숙은 생존해 있지만 건강이 좋지 않고 나머지 가수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다.
고희를 넘긴 1947년생 돼지띠 가수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거나 음악 활동을 사실상 중단한 이들도 있지만, 여전히 한국 대중음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건재한 이도 있다. 김세레나의 데뷔 앨범은 라이벌 최숙자, 조미미, 김부자가 같이 등장한 음반이다. 한복을 입은 풋풋한 시골 처녀 같은 커버 사진이 웃음 짓게 만드는 이 앨범에서 김세레나는 ‘풍년이 왔네’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데뷔 1년 만에 가수왕에 오른 펄시스터즈를 지구레코드에 빼앗긴 킹레코드의 박성배 사장은 녹음해둔 곡과 발매했던 곡을 묶어 1970년 몰래 음반을 발매했다. 입길에 오르는 걸 피하려고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만 비공식적으로 배급했지만, 대전 공연을 갔던 펄시스터즈가 우연히 현지 레코드 가게에서 발견해 갈등을 일으켰다. 타이틀곡인 신중현이 작곡하고 펄시스터즈가 노래한 TBC 동양방송 TV 드라마 주제가 ‘나팔바지’는 1947년생 돼지띠 가수 박인수가 코러스로 처음 녹음에 참여했던 데뷔곡이다.
한국 포크송의 대중화에 공헌했던 남성 듀오 트윈폴리오는 돼지띠 선배 가수 최희준과 함께 공연을 했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1968년 12월 데뷔 앨범을 발표한 1947년생 돼지띠 동갑내기 송창식과 윤형주는 “번안 곡 ‘렛 이트 비 미’(Let It Be Me)를 녹음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음반으로 출시되었는지는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트윈폴리오 데뷔 앨범 발매 직후인 1969년 1월에 발표된 송창식의 솔로 데뷔곡 ‘멀어진 사람’이 실린 앨범도 가수 본인과 함께 활동했던 윤형주도 실체를 몰랐던 희귀 앨범이다. 윤형주는 송창식보다 2년 늦은 1971년에 후배 김세환과 함께 솔로 데뷔 음반을 발표했다. 디제이 이종환이 기획한 이 음반에서 윤형주의 솔로 데뷔곡 ‘라라라’와 ‘비와 나’가 크게 히트하며 통기타 문화를 주도했다.
콧수염 포크 가수 이장희도 1947년생 돼지띠다. 어린 시절 울보였던 그는 친구들에게 음치라고 놀림을 당했다. ‘자정이 훨씬 넘었네’는 고등학생 때 음치를 극복하고 싶은 마음에 만든 그의 첫 습작이었다. 연세대 생물학과에 입학한 이장희는 밴드와 포크 그룹을 결성해 아마추어 가수 활동을 했지만 정식 데뷔를 하지는 못했다. 홍익대생 화가 이두식의 주선으로 화실에서 생활하면서 창작곡 작업에 몰두한 그는 선배 이종환의 주선으로 1972년 11월에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희귀한 이 음반의 재킷은 콧수염을 기르고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청년 이장희의 파격적인 모습이 젊은층의 관심을 끌었다.
1947년생 돼지띠 가수 황규현은 차중락의 동생인 친구 차중용의 집에서 키보이스의 연주를 들으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1969년 여름, 트로트 작곡가 박진하는 밴드 쉐그린의 리드 보컬 황규현의 애절한 허스키 목소리에 반해 신곡 ‘애원’의 악보를 건넸다. 황규현은 “촌스러운 가요를 왜 부르냐?”며 거부했지만 계속된 간청에 미도파 살롱에서 시험삼아 불렀다. 예상치 못한 뜨거운 반응이 일어났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킹레코드의 사장 ‘킹박’이 녹음을 제안했다.
1970년 발매된 황규현의 솔로 데뷔곡 ‘애원’이 담긴 음반은 8만 장이 팔려나가는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이 노래는 1980년대까지 중·고생들이 가사 중 “목이 메여 불러보는 내 마음을 아시나요”를 “목이 메여 불러본다 지금은 연습이야”로 장난스럽게 개사해 불렀을 정도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1966년 록밴드 쉐그린의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던 조동진은 가수보다 작곡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양희은은 그가 창작한 ‘작은배’를 가장 빠른 1972년에 녹음했다. 음악 활동 13년 만에 가수 데뷔 음반을 발표한 조동진의 ‘행복한 사람’은 1970년대 초반 김세환이 먼저 녹음했지만 활동 금지로 봉인된 사연이 있다. 30만 장이 넘는 판매 기록을 세우며 명반으로 평가받는 조동진의 데뷔 앨범은 다양한 버전이 있는데, 1979년 대도레코드에서 발매한 초반이 가장 희귀하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483.html
김흥국·현숙·이문세…59년 돼지띠 동갑
돼지띠 가수들의 데뷔음반들 下
조덕배·임지훈·권인하·김두수 등도 59년생
현진영·유희열·말로는 71년생
1959년생 돼지띠 가수로는 김흥국, 현숙, 이문세, 조하문, 조덕배, 임지훈, 권인하, 김두수, 이원재, 김목경 등이 있다. 목사로 변신한 조하문을 제외하면 대부분 각 장르에서 여전히 활동하는 중견 가수들이다. ‘효녀 가수’로 유명한 현숙은 어려서부터 동네 노래자랑 대회에서 우승을 독차지했던 꼬마 가수였다. 여고 재학 중이던 1976년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했다. 작곡가 임종수에게 스카우트된 현숙은 자신의 매니저인 선배 가수 김상범의 앨범에 독특한 비음의 ‘끓고 있네’ ‘냉면타령’으로 데뷔해 주목을 받았다.
가수협회장까지 지낸 김흥국은 가장 널리 알려진 1959년생 돼지띠 가수다. 히트곡 ‘59년 왕십리’ 때문이다. 그는 군 제대 후에 밴드 오대장성 드러머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지만 앨범 발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긴 무명의 시간을 감내한 그는 1986년 데뷔곡 ‘창백한 꽃잎’ 등이 수록된 솔로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조명을 받지 못해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코믹한 이미지에 가려진 김흥국의 감성적인 가창력을 확인할 수 있다.
조하문은 연세대 지질학과 2학년 때 밴드 아스펜스를 결성해 각종 대학가요제에 출전했지만 매번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김수철이 깜짝 스타로 배출된 1979년 제1회 전국 대학가요 경연대회 때는 창작곡 규정을 모르고 외국 곡을 준비해 실격됐다. 그해 TBC 젊은이의 가요제에서도 2차 예선에서 탈락했다. 결국 3인조 밴드 마그마를 재결성한 조하문은 1980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하드록 ‘해야’를 고음의 샤우팅 창법으로 구사해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대상이 기대되었지만 프로를 능가하는 실력이 오히려 흠이 되어 은상에 머물렀다. 조하문의 데뷔곡 ‘해야’는 <80대학가요제> 2집에 처음 실렸다.
이문세는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다운타운에서 노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후 1979년에 고 김정호가 운영한 무교동의 라이브 카페 ‘꽃잎’에서 친해진 개그맨 전유성의 주선으로 기독교방송 라디오 <세븐틴>에 이야기 손님으로 출연했다. 입담과 노래 실력을 겸비했던 그는 곧 고정 출연자가 되었고, 양희은의 뒤를 이어 진행자로 기용되었다. 노래에 대한 열망이 컸던 그는 1980년 자작곡 ‘가는 사람 갈지라도’ 등으로 음반을 내고 데뷔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이제는 희귀 앨범으로 수집가들이 표적인 1982년 발매한 첫 독집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데뷔 초기의 이문세는 가수보다는 노래하는 방송 진행자로 더 알려졌다.
조덕배는 소아마비 장애를 딛고 서정성이 돋보이는 다양한 장르 음악으로 사랑받는 뮤지션이다. 그는 고등학생 때 온종일 화실에서, 방학 때는 서해안 대천과 작약도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거나 곡을 만들었다. 1978년 데뷔 음반을 발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LP가 발견된 적은 없다. 정식 발매는 8년 후인 1985년에 이뤄졌다. 지난 사랑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전한 데뷔곡 ‘나의 옛날 이야기’는 지금도 사랑받는 명곡이다.
권인하는 1979년 청주대 캠퍼스 밴드 샐러맨더스(‘도롱뇽’이란 뜻)의 키보디스트로 MBC 대학가요제 본선에 데뷔곡 ‘헤어진 후에’로 진출했다. 그 후 경희대 환경학과에 다시 진학해 동아리 밴드 탈무드에서 활동했다. 그의 이름이 가요계에 알려진 것은 1985년 자작곡인 이광조의 ‘사랑을 잃어버린 나’가 히트하면서부터다. 1986년 밴드 ‘우리’를 결성해 정규 앨범을 발표해 대학가에서 나름 주목받았다. 자신의 대학 등록금을 앨범 제작비에 썼을 정도로 음악 열정이 강했던 권인하는 밴드 해체 후 솔로로 독립했다.
아트 포크 뮤지션 김두수는 1981년 고려대에 입학 후 서울 명동의 PJ살롱, 쉘부르 등에서 통기타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밤업소에서 예명을 요구해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천하의 악당 김두수를 예명으로 삼았다.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아 킹박에게 오디션을 봤다. 당시는 가수의 얼굴 사진을 크게 배치한 촌스러운 재킷이 유행했다. 제작사는 재킷 이미지로 내정한 윤해남 화백의 추상화를 뒷면으로 옮기고, 김두수의 얼굴 사진을 전면에 배치해 그를 절망시켰다. 음악 외적인 벽에 가로막혀 빛을 보지 못한 1986년 발매된 데뷔 앨범은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서정주의 시를 가사로 사용한 데뷔곡 ‘귀촉도’는 2000년 미당의 장례식 때 조곡으로 사용되었다.
데뷔 전부터 학원가에서 소문난 노래꾼이었던 임지훈은 1982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곡인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의 가사를 작사하며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게 먼저 알렸다. 이후 산울림 김창환이 주도했던 꾸러기들 멤버로 활약했던 그는 솔로 데뷔 이후 개성 있는 가창력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한양대 음대 출신 싱어송라이터 이원재는 1987년 대학 후배 유재하보다 먼저 데뷔 앨범을 발표해 데뷔곡 ‘좋아’가 좋은 반응을 얻으며 ‘제2의 김민기’로 언더그라운드 판에서 주목받았지만 건강 문제로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 때 기타 연주를 시작한 김목경은 군 복무를 마친 1984년에 녹음 엔지니어 공부를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났다. 음악 내공을 기르며 7년간의 영국 유학 생활을 마친 김목경은 1989년 12월 현지에서 녹음한 서구 블루스 음악에 기반을 둔 음원들을 한국에 가져왔다. 이듬해 발표한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은 가요풍의 ‘내가 본 마지막 그녀’였지만, 대중에게 김목경의 이름을 널린 알린 히트곡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다. 이 곡은 김광석이 1995년 리메이크하면서 뒤늦게 빛을 보았다.
1971년생 돼지띠 가수로는 현진영, 유희열, 말로, 정단, 윤병주, 현진영, 김경호, 김연우, 언니네이발관 이석원 등이 있다. 한국 비보이 1세대 춤꾼 현진영은 1990년 ‘현진영과 와와’로 데뷔했고, 김경호는 고교생 시절인 1992년 제2회 청소년 창작가요 경연대회에서 자작곡 ‘꿈 그리고 사랑’으로 동상을 받으며 일찌감치 데뷔했다. 나머지 가수들은 대부분 시디(CD)로 데뷔했지만 언니네이발관의 정규 앨범들과 윤병주가 주도한 노이즈가든의 앨범들은 최근 LP로 재발매되었다.
1983년 돼지띠 가수로는 슈퍼주니어 김희철, 테이, 손담비, 임주연 등이 있고 1995년생 돼지띠 가수로는 전 세계에 엄청난 팬덤을 만들며 케이팝의 인기를 주도하고 있는 방탄소년단의 지민, 뷔 등 많은 아이돌 가수들이 맹활약하고 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544.html
26년 만에 LP 신보 내는 현존 최고 음악 커플
가수 데뷔 40주년 맞은 정태춘-박은옥 커플
8집 LP 발표 이후 처음 발매 예정
데뷔 40주년 기념해 신곡 등 수록
음악계로 돌아온 한국 포크의 거장
한국 대중가요계에는 시대마다 황금 콤비를 이뤄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가수 커플과 가수-작곡가 커플이 많다. 현존하는 최고의 음악 커플인 정태춘-박은옥 부부는 1978년 같은 해에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정태춘은 치열한 현실 의식과 뜨거운 작가 정신, 토속적 정서에 뿌리를 둔 서정의 미학을 구현한 아름다운 작품과 음반사전심의 철폐 운동 등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선 굵은 업적을 남긴 한국 포크의 거장이다.
가수 데뷔 40주년을 맞은 정태춘-박은옥이 남긴 발자취에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앨범, 전시, 출판, 전국 투어 등 다채로운 작업이 잇달아 열린다. 사실 정태춘은 가수보다 작사·작곡자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21살이었던 1975년 <골든 포크 앨범> 13집에 수록된 양병집의 ‘양단 몇 마름’이 그의 데뷔곡이다. 이후 박은옥, 윤설희, 윤정하, 손미나, 남궁옥분, 조인숙, 이미배, 이수만, 양병집, 위일청 등 많은 가수들이 그가 만든 노래를 불렀다.
정태춘-박은옥 부부는 현재까지 13장의 정규 앨범과 여러 장의 베스트 앨범을 발표했다. 정규 앨범은 2012년에 발표한 11집이 마지막인데, 정태춘은 3집, 박은옥은 2집 이후인 1984년부터 공동 작업으로 앨범을 발표하고 있다. 다만 서사의 기운이 넘쳐났던 7집 <아 대한민국>(1990년)은 정태춘의 솔로 앨범으로 발표되었다. 7집은 카세트테이프와 시디(CD)로만 발매되었고, 8집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년)는 LP로 발매된 마지막 앨범이다.
포크 가수 정태춘의 데뷔 음반
정태춘과 박은옥은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포크송의 열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한 한국 대중음악의 암흑기였던 1978년에 등장했다. 정태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실린 데뷔 음반은 서라벌레코드에서 1978년 8월20일 발매한 7인치 싱글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시인의 마을’과 ‘아하! 날개여’는 가수 정태춘의 데뷔곡이다. 소량 제작되었기에 지금은 무척 희귀한 고가의 음반이다. 정규 1집에 보름 앞선 10월20일에 발매된 음반이 하나 더 있다. 신인 여가수 장영희와 함께한 스플릿 앨범에서 정태춘은 ‘섬마을’ 등 5곡의 창작곡을 발표했다.
주류 가요계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정태춘
정태춘 1집의 ‘시인의 마을’과 ‘촛불’ 등은 전원적 삶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인 명품 포크송이었다. 1979년 MBC 신인가수상,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 부문 수상은 당대 대중이 그의 구수하고 서정적인 가락에 얼마나 많은 공감대를 형성했는지 증명한다. 정태춘의 페르소나인 박은옥은 공식 데뷔 이전에 부산 등 다운타운에서 통기타 가수로 활동했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정태춘이 만든 곡만 노래해온 그녀는 1집을 통해 ‘회상’ ‘윙윙윙’ 등을 히트시키며 존재감을 얻었다. 정태춘은 일부 수록곡에서 코러스를 맡아 훗날의 환상적인 듀엣 작업을 예고했다. 1980년 발매된 박은옥의 2집 초반은 희귀 앨범이다.
음악 작업으로 교감한 두 사람은 1980년 5월 결혼했다. 달콤한 결혼 생활과는 달리 데뷔 음반부터 가해진 노랫말에 대한 ‘공륜의 심의보류 조치’는 정태춘의 창작욕을 옥죄었다. 또한 지상파 텔레비전의 <명랑운동회> 같은 오락 프로그램 출연을 강요당했던 방송 환경은 정태춘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에 인기에 연연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음악에 천착하며 주류 가요계와 차츰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음악을 구축하기 위한 탐구와 시도에 더욱 몰입했다.
시인이 되고자 했던 자아를 담은 초기 앨범들
첫 독집의 상업적 성공에 고무된 제작사는 차기작의 곡 선정과 제작 일체를 신인 가수에게 맡겨버렸다. 1980년 발매된, 암흑 속에서 기타줄 튕기는 정태춘의 모습이 담긴 2집 재킷은 음악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전작의 상업적 성과에 미치지 못했지만 2집은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자 했던 정태춘의 자아를 중심으로 자신만의 음악적 색채 찾기를 탐구한 결과물이다. 불교적 분위기가 강력한 이 앨범은 젊은 날의 정태춘이 추구했던 음악 세계를 선명하게 드려낸, 숨겨진 한국 포크의 명반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음반의 상업적 실패로 치른 혹독한 대가
2집의 실망적인 상업적 결과에 굴하지 않았던 정태춘은 더욱 자신의 음악 세계 구축에 천착했다. 3집에서는 국악과 양악의 음악적 상관관계에 대한 실험을 시도했다. 작품은 의미심장했지만 상업적 대가는 처참했다. 그로 인해 3집은 데뷔 싱글과 더불어 음반수집가들이 가장 탐내는 희귀 앨범이 되었다. 연이은 상업적 실패로 제작사까지 경영난에 허덕이게 되면서 정태춘은 이후 몇 년간 앨범을 발표하지 못했다. 노래를 부를 무대도 급감했다. 경제적 궁핍이라는 불청객을 맞이한 정태춘은 이후 부당한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지닌 노래로 변화한다. 그의 음악에 서정과 서사를 넘나드는 양극의 질감이 공존하는 이유이다.
부부의 공동 작업으로 부활
생활고에 시달렸던 정태춘과 박은옥 부부는 지구레코드와 4년 전속에 800만원이라는 굴욕적인 계약을 맺게 된다. 공동 앨범으로 발표한 4집은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키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경제적 빈곤에서도 신뢰를 잃지 않았던 두 사람의 듀엣곡 ‘사랑하는 이에게’는 힘겨운 시간을 겪는 모든 연인들을 위한 헌사가 되었다. 이 노래는 1980년 박은옥 2집에 먼저 실렸지만, 듀엣곡으로 생명력을 얻었다. 이후 정태춘 박은옥은 1985년 5집과 1988년 6집에서 더욱 역동적인 민요적 선율과 창법을 선보였다.
1990년 7집 <아 대한민국>은 비합법 카세트테이프로 발매되었다가 1996년 합법적 CD로 재발매된 역작이다. 1993년 사전 심의를 거부하고 발매한 8집은 서사와 서정을 합체한 민중가요의 새로운 음악 어법을 제시한 이들 부부의 최대 명반이다. ‘창작·표현의 자유 만세’라는 붉은 스티커를 찍은 이 LP 재킷의 구호는 음반 사전심의 철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2017년 LP로 재발매된 정태춘 1, 2집에 이어 40주년 기념으로 발매될 신보 <사람들 2019>에는 모처럼 신곡과 더불어 LP로도 제작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618.html
시대를 앞서 가 외면당한 데뷔 LP, 지금은 금값
24년 만에 3집 <시공초월> 앨범 내고 컴백한 정혜선
장르 파괴적 음악, 카리스마 넘치는 보컬
“로버트 플랜트 영향을 많이 받아”
3집 다양한 음악 장르 척척 소화
중고 음반 시장에서는 1970~80년대의 낯선 가수 음반이 인기 가수의 히트 음반보다 몇 곱절 비싼 값에 거래되곤 한다. 대부분 금지의 아픔이 선명하거나 시대를 앞서가는 독창적이고 뛰어난 음악성을 지녔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발매할 때 대중에게 알려질 기회를 빼앗겨 개체수가 희귀한 음반들이 이에 해당된다.
음반미디어가 LP에서 CD로 급격하게 전환되었던 1990년대에 발매된 이상은 6집 <공무도하가>, 유앤미블루의 정규 앨범, 넬의 인디 1집은 2000년대 들어 중고 음반 시장에서 비싼 몸값을 자랑했다. 최근 24년 만에 정규 3집을 발표하며 컴백한 정혜선의 앨범도 빼놓을 수 없다. 일반 대중에게는 낯선 그의 과거 앨범은 뒤늦게 재평가받으며 중고 음반 시장에서 각광받는다. 현재 정혜선의 1집 LP는 최대 90만원, 더 귀하다는 CD는 최대 30만원을 호가한다.
음악과 상관없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정혜선은 중학생 때 김광한, 김기덕, 전영혁, 배한성 등이 진행했던 라디오 음악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록을 즐겨 들으며 성장했다. 성신여대 지리학과 86학번인 정씨는 1989년 우연히 학교 벽보판에서 ‘제1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포스터를 보았다. 떨어져도 그만이란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참가를 결심했다. 음악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어 통기타와 통기타 교본을 구해 한 달 동안 독학했다. 자작곡 ‘나의 하늘’을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주최 측에 제출해 예심을 통과했고 덜컥 은상까지 받았다.
대회 직후 발매된 기념음반에는 라이브가 아닌 조동익, 함춘호 등 전문 세션들과 서울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버전이 수록되었다. 하나뮤직의 태동을 앞둔 1991년, 정혜선의 음악성을 알아본 심사위원 조동진이 ‘곡을 써오라’고 연락했다. 한 달 만에 만든 아홉 곡은 1992년 하나뮤직의 실질적 1호 앨범이 되어 LP, CD, 카세트테이프 3종 세트로 발매되었다. 앨범 발매 뒤 정혜선은 순수하면서도 원초적인 카리스마가 넘치는 ‘원조 음색 깡패'라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또한 수상곡 ‘나의 하늘’과 타이틀곡 ‘오, 왠지', 이국적인 느낌의 ‘해변에서’ 등 장르 파괴적 노래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문제작’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여자 전인권’ ‘제2의 한영애’란 별명도 얻었던 정혜선은 “제 노래에 영향을 준 시조새는 레드 제플린의 보컬 로버트 플랜트”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1집은 “제작자 조원익씨가 제 음악은 최소 10년은 앞서간 것 같다고 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고 말했다. 요즘은 실물 구경이 어려운 정혜선 1집은 3만 장 정도가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90년대는 무명 가수의 음반도 5만 장이 팔리지 못하면 주변에서 걱정했던 음반 최대 활황기였음을 고려하면, 그리 놀랄 판매량은 아니다. 첫 독집 발매 후 김광석, 신애라, 김연주 등이 진행했던 라디오 방송에 10여 회 정도 출연도 했다. 배우 이덕화가 진행했던 MBC 텔레비전 인기 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도 나가 ‘해변에서’를 불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후 1993년까지 하나뮤직에서 진행한 학전소극장 공연 등 각종 라이브 무대에 올랐다. 어느 날 조동진을 보러 정동극장 공연을 찾았던 사진작가 김중만이 정혜선의 노래를 듣고 반해 2집 제작을 제안했다. 비록 상업적 기대를 충족시키진 못했지만 자기 음악에 자신감이 넘쳤던 그는 이번에도 한 달 만에 속전속결로 아홉 곡을 만들었다. 1995년 제작된 2집은 스스로 ‘플라잉 창법’이라 하는 독특한 창법이 매력을 더하는 ‘꿈속의 꿈’과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담은 가사로 랩을 시도한 ‘아침신문’ 등이 담겼다.
1995년 제작된 2집은 제작자의 개인 사정으로 정식 유통이 되질 못하고 소량의 홍보용 CD만 배포되다 사장된 비운의 앨범이다. 실물을 직접 본 사람이 드물 정도로 희귀해 ‘저주받은 걸작’으로 입소문을 탔는데, 타이틀곡 ‘꿈속의 꿈’은 놀라운 생명력을 발휘했다. 정식 발매가 되지 못했음에도 MBC 라디오에서 제작한 <오미희의 타임> 박스 앨범에 선곡되었고, 피시(PC)통신 천리안 음악동호회 두레마을에서 진행한 ‘우리가 죽기 전에 들어야 할 가요100곡’에도 선정되면서 그의 앨범은 특별해졌다.
2집 발매 무산으로 활동 동력을 잃은 정혜선은 1998년 결혼 후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육아에 전념했던 그는 자녀의 성장과 더불어 음악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났다. 마침 자신의 음반을 비싼 값에도 찾는 팬이 많다는 소식에 고맙고 미안해 보답하고 싶었다. 2017년 1인 회사를 만들어 2집 수록곡 4곡을 다시 녹음해 미니앨범을 발매한 것은 그 때문이다. 1집까지 재발매하면서 내친김에 신보 작업에 들어갔다. 20년 넘게 한 곡도 쓰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 쌓아둔 음악적 영감이 샘솟듯 콸콸 터져버렸다.
자작곡 여덟 곡을 담은 3집 앨범 <시공초월>은 오랜만에 컴백한 다른 많은 가수가 반복했던 구태와는 멀찍한 간극을 둔다. 요즘 트렌드에도 잘 부합하는 전자음악, 감성적인 록발라드, 얼터너티브 록, 발라드, 모던 록 등은 더욱 깊고 넓어진 그의 내공을 느끼게 한다. 자칫 다양한 장르의 노래는 앨범의 통일성을 해치는 산만함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독특한 창법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하는 카리스마가 여전하다. 정혜선은 “20년 넘게 음악 작업을 하지 않았지만 계속 듣고 그리워했어요. 진부한 건 싫고 제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롭고 유니크함”이라고 말한다.
정혜선은 다양한 장르의 노래에 변화무쌍한 보컬 톤을 펼쳐내는 뮤지션이다. 그가 쓴 가사는 공통점이 있다. 사회 부조리와 비인간적인 것에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결국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따뜻함으로 귀결된다. 정혜선은 “긴 공백이 무색하게 새 음악이 계속 쏟아져 벌써 4집에 들어갈 곡들을 거의 만들었어요. 이젠 멈춤 없이 음악을 할 겁니다”라며 의욕을 보인다. 그의 정규 3집은 CD와 LP로 2월 말에 동시 발매되었는데, LP는 온라인 예약판매 단계에서 조기 품절되는 브랜드 파워를 보여주었다. 3월16일 홍대 앞 롤링홀에서는 3집 발매 기념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682.html
쉐그린·권태수·김세화·허참의 스타산실
1970~80년대 포크 음악의 또 다른 산실 쉘부르 上
쉘부르서 인기 얻어 라디오 출연
쉐그린, 쉘부르 창업 일등 공신
허참 우연히 들렸다 입담 발휘해 취직
1953년 서울시 종로구 무교동(현재 종로구 서린동)에서 개업한 음악감상실 ‘세시봉’은 각종 대중문화 프로그램으로 당대 젊은 세대의 사랑방 구실을 했던 명소였다. 뒤를 이어 고 이종환이 창업한 라이브클럽 ‘쉘부르’는 1970~80년대 무명 통기타 가수들의 등용문으로 각광받았다. 종로 시대와 명동 시대로 나뉘는 쉘부르 출신 가수들을 두 번에 걸쳐 소개한다. 1부는 종로 시대를 장식했던 쉘부르 원년 가수들의 음반 이야기다.
자유롭고 불같은 성격 탓에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이종환은 대학을 중퇴한 뒤 음악다방 디제이(DJ)로 활동하며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1964년 MBC 라디오 <임국희의 한밤의 음악편지>의 피디(PD)가 된 그는 <탑튠 퍼레이드>의 연출과 진행을 맡으면서 팝송 해적판의 선곡과 기획에 관여했다. 그는 자신이 진행했던 라디오에서 해적판으로 제작한 팝송들을 선곡하고 공개방송과 초대 가수들의 라이브 음원을 음반으로 제작하면서 활동 반경을 넓히기 시작했다.
이종환은 1973년 서울 종로2가에 음악실 쉘부르를 창업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당시 쉘부르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가수는 이종환이 진행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인지도를 얻었다.
자연스럽게 쉘부르 출신 가수들에게 ‘대장’으로 불린 그는 가요계의 권력자로 급부상했다. 포크 듀오 쉐그린은 쉘부르 창업의 일등 공신이다. 멤버 이태원과 전언수는 밴드가 해체하자 1970년 듀엣으로 전환했다. 이태원이 ‘수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으로 알려지면서 ‘한국의 사이먼과 가펑클’로 불렸던 이들은 당시 11개 중·고등학교에 팬클럽을 보유했을 정도로 학생층에 인기가 많았다. 권태기가 찾아온 두 사람은 1973년 각각 솔로 가수로 독립했지만 쉘부르 창업과 더불어 재결합했다.
종로 쉘부르의 원년 멤버인 포크 듀오 어니언스와 개그맨 고영수는 이종환의 주선으로 함께 데뷔 앨범을 발표하는 기회를 잡았다. 특히 ‘사랑의 진실’ 가사 중 “빠빠빠빠” 부분이 학생층에 유행하면서 음반은 발매하자마자 품절되며 어니언스 열풍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 앨범은 원작자에 대한 의혹이 나돌았다. 사실 임창제 이름으로 발표한 히트곡들은 김정호의 작품이었다. 덩달아 관심이 집중된 김정호도 종로 쉘부르 무대에 올랐고, 이종환의 주선으로 1974년 데뷔 앨범을 발표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1975년 지구레코드에서 발매한 음악실 쉘부르(당시 업소 간판과 음반에는 ‘셸부르’로 표기) 기획 작품집의 1집은 쉐그린의 최대 히트 음반이자 마지막 음반이기도 하다. 당시 외래어 팀명 사용금지 분위기로 ‘막내들’이란 한국어 팀명을 동시에 표기했다. ‘삼돌이 짝사랑’ ‘동물농장’ ‘어떤 말씀’ ‘기다림’ ‘밤은 가고’ ‘연가’ 등 여러 곡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얼간이 짝사랑’은 전언수의 코믹 대사가 유쾌한 노래이고, ‘어떤 말씀’은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이 위세를 떨쳤던 1970년대의 사회상을 코믹하게 터치해 히트했다. 하지만 멤버 모두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활동 금지의 아픔을 겪었다.
쉐그린 독집으로 제작된 시리즈 첫 작품의 성공에 고무된 지구레코드는 곧바로 종로 쉘부르의 무명 통기타 가수들을 소집해 2집을 제작했다. 이 앨범에서 발굴된 최대 유망주는 권태수다. 1974년부터 쉘부르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폴 앵카의 히트 팝송 ‘파파’(PAPA)를 번안해 불렀다. 이종환의 추천으로 같은 해에 같은 곡을 번안했던 신인 가수 권태수와 인기 가수 이수미의 노래는 모두 동반 히트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1970년대 중후반은 최백호, 김민식, 이영식 등 뛰어난 신인 남자 가수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였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권태수는 1977년 동양방송(TBC) 방송가요대상에서 남자 신인상을 받으며 쉘부르 출신 가수들의 위상을 높였다.
쉘부르 시리즈 2집을 통해 데뷔한 김홍경, 김민식, 남성듀엣 버들피리 등 많은 무명 통기타 가수들도 인기 가수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3집에서는 ‘나비소녀’ ‘겨울여자’로 유명세를 타게 되는 김세화를 발굴했다. 당시 여고 3학년 김세화는 서울 청계천의 밤업소 아마존에서 작곡과 대학생 오빠의 졸업 작품 발표회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곳에서 우연하게 그녀의 노래를 들은 개그맨 손철이 쉘부르에 초대했다. 이종환의 즉석 오디션에 통과한 그녀는 데뷔의 기회를 잡았다. 김세화의 독집으로 제작된 시리즈 3탄은 포크 명곡 ‘밀밭’ 등 데뷔 시절 김세화의 풋풋한 포크송이 담긴 희귀 앨범이다.
1975년 동양방송 라디오가 주최한 대학생 보컬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은 채은옥도 쉘부르 무대에 올랐다. 이후 1976년 발표한 ‘빗물'은 이종환의 지원 속에 히트했다. 방송진행자 허참은 군대 친구와 함께 종로에 나갔다가 입구에 붙어 있는 탄산음료 ‘오란씨’ 시음 행사 안내문을 보고 쉘부르에 들어갔다. 행운권 추첨 행사에 당첨된 그는 무대에서 탁월한 개그 능력을 선보였다. 이에 이태원이 이름을 묻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이태원이 “허 참, 자기 이름도 몰라요?”라고 다시 묻자 “제 이름을 어떻게 아셨나요? 저는 허참입니다”라고 말하는 재치를 보였다. 허참의 본명은 이상용이다.
이종환에게 인정받은 허참은 취직을 했다. 신청곡을 틀어주다 잠깐씩 무대에 올라 사회자(MC)까지 했던 그는 쉘부르의 명물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공연진행자로 승격된 그는 스탠딩 코미디와 노래를 섞은 ‘허참쇼’ 코너로 유명세를 타면서 결국 방송 진출에 성공한다. 간간이 노래 실력도 뽐내던 허참은 1978년 솔로 앨범까지 발표했다. 수록곡 중 ‘왜 몰라주나’는 당시 제법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을 정도로 반응을 얻었다.
인기 가수 전영록, 김만수, 윤정하, 나희명도 종로 쉘부르 출신이다. 쉘부르 출신 가수 김세화와 권태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애창곡으로 알려진 MBC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작은 연인들’을 함께 불러 1979년에 빅히트를 터트렸다. 처음 이 노래는 김세화와 이영식이 함께 부를 예정이었지만 이영식의 결혼으로 파트너가 권태수로 교체된 사연이 있다. 음악실 쉘부르 기획 시리즈 음반은 1975년 한 해에만 4장이 발매되었다. 이수경의 독집으로 발표된 4집은 반응을 얻지 못해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이후 쉘부르는 종로 시대를 마감하고 명동으로 옮겨 전성 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746.html
매주 토요일 오디션 문전성시…이문세도 떨어져
1970~80년대 포크 음악의 또 다른 산실 쉘부르 下
100원 내고 이종환 앞에서 오디션
이문세 여러 번 낙방, 남궁옥분 3수
아트 포크 김두수도 ‘쉘부르’ 출신
종로 시대를 마감한 음악감상실 쉘부르는 명동으로 이전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1970년대 중반 서울 명동은 ‘쉘부르’ ‘오라오라’ ‘가젤’ ‘PJ’ 등 통기타 라이브 클럽들이 성업했다. 명동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로는 종로 시대의 쉐그린, 권태수, 채은옥, 김세화를 비롯해 전영, 남궁옥분, 하덕규, 강영숙, 박영일, 강은철, 박강성, 김두수, 최성수, 강승모, 신형원, 변진섭, 양하영, 강영철, 신계행, 김승덕, 박진광, 윤태규, 한승기 등이 있다. 포크 가수뿐 아니라 조갑출이 리드했던 밴드 ‘25시’도 명동 쉘부르에 고정 출연했다.
음악감상실 성격이 강했던 쉘부르는 명동으로 옮긴 후 라이브 클럽으로 체질을 개선해 정기적으로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다. 토요일 오후마다 명동 쉘부르는 통기타 한 대 달랑 메고 찾아온 무명 가수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이종환 앞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오디션 통과가 필수였다. 당시 오디션에 참가하려면 참가비 100원을 카운터에 있는 ‘미스현’에게 내고 신청서를 받아 제출했다.
지하의 명동 쉘부르에 들어서면 입구 왼쪽에 기타 10대를 보관하는 수납장이 입장객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오디션은 총 13개의 전구 중 10개에 불이 들어와야 1차 관문을 통과했다. 13개 모든 전구가 켜지면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최종 합격자는 거금 3만원(당시 대졸 초봉이 7만원)을 상금으로 받았다. 이문세도 명동 쉘부르에 여러 번 찾아와 오디션을 봤지만 끝내 무대 시간표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처럼 이종환의 주관적 평가로 실력이 있어도 오디션 문턱을 넘지 못한 가수들도 많았다.
쉐그린에 이어 권태수가 진행을 이어받은 명동 쉘부르에서는 날마다 월 숫자가 쓰인 탁구공 12개, 일 숫자가 쓰인 탁구공 31개가 담긴 바구니에서 무작위로 공을 뽑아, 그 날짜가 생일인 손님에게 맥주와 안주를 서비스로 제공하는 행사가 인기를 끌었다.
주병진은 종로 시대 허참의 뒤를 이어 명동 쉘부르가 배출한 개그맨이다. 그는 오디션 인터뷰 무대에서 탁월한 유머 감각을 발휘해 사회자로 뽑혔다. 당시 TBC의 김웅래 프로듀서(피디)가 방송의 개그 코너 출연자를 섭외하다 소문을 듣고 찾아와, 1977년 주병진은 방송에 진출했다. 가수로는 1978년 TBC 해변가요제에 누나 주선숙과 듀엣으로 나와 본선까지 진출했다.
1977년 10월 단순히 상금을 타보려는 가벼운 마음으로 오디션에 지원했던 창작노래 동아리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남궁옥분은 세 번째 도전 끝에 합격했다. 당시 명동 쉘부르에는 선머슴 같은 외모의 포크 가수 전영이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본명이 전미희인 전영은 여고 졸업 후 이곳에서 활동을 시작해, 데뷔곡 ‘어디쯤 가고 있을까’를 발표해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남궁옥분도 이후 1981년 KBS 신인가수상, 1982년 MBC 10대가수상, KBS 여자가수상 등을 받으며 명동 쉘부르를 대표하는 가수로 성장했다.
1980년 추계예대를 중퇴한 하덕규는 화실을 경영하며 틈틈이 작곡도 했다. 그는 명동 쉘부르에서 진행한 노래자랑대회에서 3전 4기 도전 끝에 한가한 낮 시간을 배정받았다. 이후 동창생 오종수와 ‘시인과 촌장’을 결성해 1집을 냈지만 가요계의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하덕규 솔로 1집의 ‘슬픈 재회’는 반드시 언급해야 할 명곡이다. 반응을 얻지 못했던 이 노래는 남궁옥분이 제목을 ‘재회’로 변경해 다시 불러 차트 정상에 올랐다. 앵무새처럼 히트곡만 강요했던 방송 현실에 갈등했던 남궁옥분에게 재기의 원동력이 되었고, 하덕규도 음악 활동을 재개할 계기를 마련해준 노래다.
배문고를 다녔던 고등학생 강승모는 통학길에 쉘부르에 전시된 출연 가수들 사진을 보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졸업 후 참가한 오디션에서 송창식의 ‘가위, 바위, 보’와 이은하의 ‘겨울 장미’를 불러 통과했다. 이종환을 대부로 대했던 강승모는 ‘창밖의 여자’를 부를 때면 ‘조용필보다 더 조용필스럽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1984년 데뷔 음반에서 조용필과 흡사한 창법에 여성스러운 창법을 더한 ‘무정 블루스’를 빅히트시켰는데, 일부 사람들은 조용필의 신곡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최성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78년, 명동 쉘부르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무명 시절 그는 쉘부르에서 노래는 기본이고 업소 입구에서 손님들을 90도 각도로 인사하며 맞이했고 음악실 디제이까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1986년 KBS 가요대상 신인왕 후보, 1988년 MBC와 1989년 KBS에서는 10대가수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노래는 주류와 언더그라운드, 성인과 청년 취향의 경계에 있는 음악으로 평가할 만하다.
연극배우를 꿈꾸며 중앙대 연극영화과로 진학한 박강성은 목표를 수정해 1982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뛰어난 가창력을 갖고 있었지만 쉘부르 등 다운타운의 라이브 카페에서 오랜 기간 무명 가수의 설움을 겪었다. 종로 시대에 관객으로 가수의 꿈을 키웠던 강영철은 오디션에서 두 번 낙방한 끝에 통과했다. 그때 쉘부르에서 양하영을 만나 혼성 듀엣 ‘한마음’을 결성해 한 시대를 풍미했다.
아트 포크 뮤지션 김두수도 1982년 서울 명동의 PJ살롱, 쉘부르 등에서 무명 통기타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명곡 ‘가을 사랑’의 신계행도 명동 쉘부르 출신이다. 1985년 대성음반에서 발매한 옴니버스 앨범 <별들의 속삭임>을 통해 ‘가을 사랑’ ‘사랑 그리고 이별’을 발표하며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가수왕에 등극한 변진섭까지 배출한 쉘부르 출신 가수들은 다른 업소에서는 오디션 없이 무대에 오르는 특혜를 누렸다.
남궁옥분은 “쉘부르의 가수 대기실은 1평 반 정도로 좁았다. 가수들은 무릎이 맞닿은 채로 서로 기타 코드를 봐주고 줄이 끊어지면 기타를 빌려주는 끈끈한 동료애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실제로 명동 쉘부르 가수들은 정신없이 바쁜 크리스마스이브나 연말 특수에는 자발적으로 주방에서 안주까지 만들었고, 유일한 업소 휴일인 6월6일 현충일에는 단체로 강원도 강릉 경포대 등으로 야유회를 떠났을 정도로 끈끈했다. 고 이종환의 음악에 대한 애착이 담긴 라이브 카페 쉘부르는 70~80년대 무명 통기타 가수들의 등용문으로 평가받는다.
김민기와 이주원이 인정한 70년대 무명 포크 가수
비운의 가수 윤지영
김민기 곡이 다수 수록된 2집
기지촌의 원곡 수록돼
고가에 거래되는 희귀 앨범
가수 ‘윤지영’을 기억하는지? 이름만으로는 여자 가수로 오인할 소지가 있는데, 실제로 동명의 여자 가수가 몇 명 있다. 오늘 소개하려는 윤지영은 70년대에 활동했던 남자 가수다. 활동을 중단한 지 오래인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가 남긴 음반은 대중가요 LP 수집가들에겐 고가에 거래되는 희귀 앨범으로 대접받는다.
윤지영은 독집 석 장을 남겼다. 1973년 발매한 1집, 1974년 발표한 2집은 한국 포크의 전설 김민기가 관여했고, 1978년 발매한 3집은 ‘따로또같이’의 리더 고 이주원의 작품집이다. 이렇듯 중요 창작자들과 협업하며 의미심장한 앨범을 발표했고, 그의 노래 중엔 리메이크되어 빅히트한 곡도 있기에 그의 존재가 대중의 기억에서 거의 지워진 현실은 재앙에 가깝다. 인터뷰 기사조차 찾기 어려운 윤지영의 희귀 앨범을 소개하려면 조각 정보들을 맞춰나가는 어려운 퍼즐 게임을 벌여야 한다.
윤지영의 대표곡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윤지영의 첫 독집은 1973년 성음제작소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음반은 윤지영을 포함해 김민기·김인배·김성진 등이 창작과 편곡에 참여했다. 번안곡과 ‘봉봉사중창단’의 노래까지 수록된 것은, 무조건 앨범 개념으로 음반을 발매했던 당시 국내 가요계의 관행으로, 짐작하건대 상업적 고려와 더불어 실을 곡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크다.
앨범은 첫 곡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의 휘파람과 통기타 선율로 문을 연다. 윤지영의 존재를 당대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알린 첫 히트곡이자 그의 대표곡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모티브로 삼아 윤지영이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수록곡 중 유일한 그의 창작곡이다. 70~80년대 대중가요에 익숙한 동시대 청자나 70년대 한국 포크송에 관심이 많다면 각종 포크 컴필레이션(편집) 음반을 통해 이 노래를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사실 이 노래는 윤지영의 오리지널 버전보다 ‘나비소녀’로 유명한 김세화 버전이 더 친숙하다. 김세화는 윤지영 1집이 발매된 지 5년 뒤인 1978년에 이 노래를 리메이크해 원작보다 더 큰 히트를 기록했다. 김세화 이전에도 이영식과 한정식이 먼저 리메이크했고 황은미-문재치, 이경화에 이어 고 이주원의 아내인 샹송 가수 전마리도 1991년 자신의 2집에서 이 노래를 프랑스어로 커버해 화제를 모았다. 또한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은 1992년 선천적 음치의 열등감을 그렸던 MBC 베스트극장 <뭐뭐>의 드라마 주제가로도 쓰였다.
희귀한 비틀스의 커버곡이 수록된 앨범
1집에 수록된 비틀스 번안곡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틀스 관련 노래는 저작권 관리가 철저해 국내에서 번안곡의 수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회상’의 원곡은 비틀즈의 초기 곡 'ALL MY LOVING'이다. 비틀즈의 활동 초기인 1963년 'With The Beatles' 앨범에 수록된 이 팝송은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내 마음 나도 몰라’도 비틀스 커버곡이다. 원곡은 비틀스의 명곡 ‘섬싱’(something)이다. 이들 번안곡에서 윤지영은 포크송을 노래할 때의 담백한 창법과는 다른, 감정 처리가 화려한 창법을 구사한 점이 흥미롭다.
사실상 김민기의 작품집인 2집
1집에서 김민기의 창작곡 ‘친구’와 ‘잘가요’를 노래한 윤지영은 2집을 사실상 김민기 작품집으로 구성했다. 1974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제작한 2집 <고향 가는 길>이 전설적인 포크 명반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금지의 대명사’였던 김민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유통되지 못하고 사장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2집은 70년대 포크의 전형을 보여주는 앨범은 아니다. 윤지영은 심플한 통기타 연주보다 오케스트라를 이용한 풀 세션의 스케일 큰 음악을 선호한 가수였다. 그런 점에서 숨겨진 70년대 스타일의 담백한 포크 명반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가요풍의 노래가 살짝 아쉬울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2집은 매력 있다. 이 음반에는 넉 장으로 구성된 김민기 앨범(1993년)에 수록된 노래들의 첫 버전이 대거 담겨 있기 때문이다. 총 12곡 중 윤지영이 작곡한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 ‘초겨울’, 가곡 ‘선구자’를 뺀 나머지는 모두 김민기 곡이다. 김민기는 ‘내나라 내겨레’에서 직접 육성 녹음에도 참여했다. ‘산’은 김민기 곡 ‘가뭄’의 첫 버전이다. 김민기의 목소리로 친숙한 ‘바다’ ‘강변에서’도 이 앨범에 먼저 실렸다. 명곡 ‘가을 편지’는 최양숙이 1971년에 처음으로 불렀고, 남자 가수로는 윤지영이 이 앨범을 만들며 가장 먼저 녹음했다.
1집에 실렸던 ‘황혼’은 심의에 걸려 2집에 다시 실렸다. 이 노래는 김민기의 블루스 포크 걸작 ‘기지촌’의 첫 버전이다. 윤지영은 인터뷰에서 “당시 음반사에서 음반을 기획하면서 김민기에게 곡을 맡기고 돈도 미리 줬지만 신곡을 만들어오지 않아 서울 이태원에 여관방을 잡아 김민기를 감금하다시피 해 만든 노래”라고 밝혔다. 노래를 만들기로 약속한 마지막 날. 화장실에서 한참의 시간을 보내고 나온 김민기는 이태원 여관 주변의 풍경을 담아 가사와 악보를 적어내려갔다. 김민기의 ‘기지촌’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 노래는 1979년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가 불법 테이프로 녹음해 대학가에 알려졌고, 1993년 3집 앨범 <김민기3>에서 한영애가 원형을 복원해 널리 알려졌다.
윤지영 2집이 사장된 이유는 검열로 추측된다. 모든 수록곡에 크레디트를 표기하지 않았고 가사도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순화되어 있는 점은 검열을 통과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8년 발매한 윤지영의 3집에 참여한 고 이주원이 “정말 노래를 잘하는 친구”라고 추켜세웠듯, 그는 가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시원한 음색의 창법을 구사한다. 이주원은 1979년 따로또같이 1집에서 윤지영 곡 ‘초겨울’을 녹음하며 친분을 이어갔다. 최근 대중적 조명을 받지 못한 채 활동을 마감한 비운의 70년대 가수 윤지영의 1집은 LP, 2집은 CD로 재발매되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927.html
1984년 인순이 음반, “퇴폐적” 삭제 수난
희귀한 변형 재킷 앨범들
초베스트셀러 이문세 4집도 초·재반과 싱글 버전까지 존재
‘빽판’을 통해 팝송의 매력에 빠져든 필자가 가요 LP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대마초 파동의 기운이 드셌던 1975년 즈음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음반을 발매한 국가마다 재킷 이미지가 다른 변형 버전이 풍성한 팝송 LP처럼 대중가요에서도 같은 음반의 변형 버전이 넘쳐난다. 신중현 음반들이 가요 LP의 화두로 주목받는 이유는 선구적인 음악성도 있겠지만 재킷 디자인과 수록곡이 다른 변형 버전들이 지닌 매력도 무시할 수 없다. 에드포(ADD4)의 첫 앨범과 덩키스의 이정화 독집, 김민기 1집, 김정호 1집, ‘늙은 군인의 노래’가 수록된 양희은 독집, 유재하 1집, 강산에 0집 등은 이 분야의 대표적인 명반들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최대 활황기로 평가받는 80~90년대 대중가요 LP에도 많은 변형 버전들이 발견된다. 1984년 한국음반에서 발매된 인순이의 독집은 타이틀곡이 건전가요에 가까운 ‘아름다운 우리나라’다. 평범한 이 음반의 재킷 뒷면을 장식한 사진은, 인순이가 주연배우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1982년 개봉 영화 <흑녀>의 캐릭터와 같이 속살이 비치는 에로틱한 옷을 입은 독사진이라 단숨에 눈길을 잡아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음반은 야한 사진을 삭제하고 ‘착한 음반’으로 변신한 재발매 버전이다. ‘퇴폐적이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 처분을 받고 전량 폐기된 초반은 현재 개체 수가 극소수인 희귀 버전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이 팝송 전성시대였다면 이문세·이영훈 콤비가 수준 높은 팝 발라드를 제시한 이후는 대중가요가 팝의 인기를 위협하기 시작한 터닝포인트였다. 1987년 발매된 이문세 정규 4집은 대중가요의 부흥에 기여한 ‘사랑이 지나가면’ ‘그녀의 웃음소리뿐’ ‘이별 이야기’ 등 지금까지도 애청되는 히트곡들이 담긴 명반이다. 이 앨범의 메가톤급 히트로 제작사 킹레코드도 자체 음반 공장을 가진 메이저 음반사로 거듭나는 발판을 마련했다. 80년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답게 이 음반은 재킷 디자인이 다른 초반과 재발매 음반 그리고 45회전 싱글 변형 버전까지 혼재한다.
싱글 음반은 정규 앨범의 밀리언셀러 등극을 기념하기 위해 소량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재킷은 모자이크 분위기의 재반 커버 사진과 비슷하지만 이문세의 검정 머리카락이 파란색으로 변형돼 있다. 재킷 앞면에 ‘45 RPM'과 타이틀 2곡을 명기한 정규 앨범과는 달리 싱글에는 ‘그女의 웃음소리뿐’ ‘그대 나를 보면’ ‘이별 이야기’ 등 수록된 3곡이 모두 씌어 있다. 싱글의 재킷 뒷면도 정규반과는 약간 다른 사진을 솔라리제이션(사진을 인화하다 순간 빛에 노출해 명암의 반전 효과를 얻는 것)으로 변색 처리해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한 LP의 일반적인 회전수인 33과 1/3이 아닌 45회전 방식을 택해 확연하게 뛰어난 음질 구현도 매력적이다.
1994년 대영에이브이에서 발매한 공일오비(015B)의 정규 5집도 이문세 4집처럼 싱글 음반으로 제작된 변형 버전이 있다. 음반 미디어가 LP에서 CD로 대전환이 시작된 시기였기에 소량 제작한 정규반 LP도 귀하지만 싱글 버전은 실물 보기가 쉽지 않은 희귀 음반이다. 싱글은 인쇄된 재킷 없이 제작된 대부분의 디제이(DJ)용 LP와 달리 정식 인쇄된 재킷이다. 싱글 재킷 앞면 하단에는 빨간색으로 ‘비매품' ‘PROMOTION LP'가 씌어 있다. 총 10곡이 들어 있는 정규반과 달리 조용필 원곡 ‘단발머리’와 나미 원곡 ‘슬픈 인연’의 리메이크 버전 등 4곡이 수록되었다. 이문세 4집 싱글이 45회전이라면 공일오비 5집 싱글은 33과 1/3회전으로 제작되었다. 한 면에 5곡씩 수록된 정규반과는 달리 싱글에는 2곡씩 수록되었지만 한 면을 꽉 채우고 있어 45회전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1986년에 동아기획에서 제작한 들국화 정규 2집도 특이한 변형 버전이 있다. 한국 대중음악 명반 1위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1집 이후 들국화는 멤버 교체의 내홍을 겪었다. 기타리스트 조덕환이 멤버들과 음악적 견해 차이로 탈퇴하면서, 2집은 트윈 기타 체제를 갖춘 6인조가 되어 발표했다. 밴드 믿음소망사랑이 공중분해하면서 들국화의 정식 멤버가 된 최구희와 주찬권, 들국화의 사운드를 주도했던 허성욱의 깔끔한 키보드 연주, 허성욱의 친구인 밴드 노란잠수함 출신 기타리스트 손진태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전인권의 개성적인 음색의 화합이 빚어낸 세련된 사운드는 들국화 2집이 많은 대중에게 사랑받은 원동력이 되었다.
들국화 2집은 수많은 공연을 함께 소화했던 멤버들이 정식으로 밴드에 합류해 발표한 히트 음반이다. 이 앨범 이후 들국화 멤버들은 재결성 이전까지 또다시 흩어졌다. 원래 최성원이 먼저 불렀지만 전인권이 다시 불러 히트한 ‘제발’ 등 명곡이 즐비한 이 앨범 변형 재킷도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수록곡과 재킷 디자인은 정규반과 같다. 변형 버전은 재킷 앞면에 전인권, 허성욱, 최성원, 주찬권, 손진태 등 멤버들의 초록색 친필 사인이 큼지막하게 장식되어 있다. 흔하게 보이는 정규 2집에 비해 변형 버전의 사인은 얼핏 보면 인쇄가 아닌 친필로 오해할 법해 흥미를 더한다.
넥스트의 정규 3집은 LP 제작이 거의 사라진 1996년에 CD와 카세트테이프로 발매되었다. 이 음반도 정규반과는 다른 DJ 프로모션용으로 제작된 변형 재킷 LP가 있다. 커버는 정규반에는 없는 파격적인 이미지가 눈길을 잡아끈다. 총 14곡이 수록된 정규 CD와는 달리 싱글 LP에는 4곡이 담겨 있다. 사회 비판적인 시선을 지닌 밴드답게 ‘Money’는 배금주의와 황금만능주의로 내달리는 세상을 질타한 곡이다. 이 앨범의 최대 히트곡인 록발라드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는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나기 전에 동성동본 금혼법을 비판한 노래다. ‘Komerican Blues(Ver. 3.1)’는 1993년 개봉한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으로, 수록했던 곡에 창을 삽입해 한국적인 느낌을 안겨준다.
이처럼 대중가요 LP 음반의 다양한 변형 버전들은 당대의 금지 문화와 상업적 이유 그리고 급변하는 기술 환경이 빚어낸 우울한 결과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파격적인 재킷 이미지와 다양한 버전의 변형 음반들은 지금보다 풍요로웠던 80~9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제작 환경과 다채로운 당대의 기록 문화를 반증하는 유산들이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988.html
IMF 이후 아버지 노래 크게 늘어
66년 영화 주제곡 ‘아빠의 청춘’
30여 년 뒤 IMF 때 아버지 응원가로
‘사랑하는 어머니께’는 불효 노래
5월은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기념일이 넘쳐나는 가정의 달이다. 시기에 맞게 부모님을 중심으로 가족과 연관된 대중가요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어린이, 부부와 연관된 노래들은 지면 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룬다.
가족과 연관된 대중가요는 유성기 시절부터 어머니가 핵심 소재로 각광받으며 한국인의 심금을 울려왔다. 또한 가족들로 그룹을 결성한 김시스터즈, 김브라더스, 작은별가족, 김트리오 등도 동시대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이끌어냈다.
사람이 입에 올리는 단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엄마’라고 한다. 문득 지방에서 레코드 가게를 운영했던 친구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가 뇌리를 스친다. 은퇴를 앞둔 한 노교수는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어머니가 집안일을 하면서 늘 흥얼거렸던 노래를 다시 듣고 싶어 친구의 가게를 찾아 일본어로 몇 소절 흥얼거렸다고 한다. 노래는 귀에 익었지만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찾아주지 못했다.
한참 세월이 흐른 후, 그 노래는 1935년 김연월의 ‘산곡의 등불’ 이후 정시스터즈, 최희준, 패티김, 송창식 등 많은 가수가 번안했던 ‘산골짝의 등불’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노교수는 이미 정년퇴임을 해버려 늘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그 외 어머니의 별세 소식에 통곡하며 녹음을 마친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와 신세영의 ‘전선야곡’도 큰 공감대를 형성했던 유성기 시절의 명곡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이뤄진 북한 육상 선수 신금단 부녀의 극적인 만남은 남북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녀의 애틋한 사연은 온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이에 황금심의 ‘눈물의 신금단’, 최숙자의 ‘눈물의 십분간', 임화춘·신화자의 ‘신금단 부녀의 이별’ 등이 담긴 LP들이 동시다발로 발표되어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오기택의 ‘아빠의 청춘’은 1966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 주제가다. 이 영화는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재혼도 하지 않고 헌신하며 살아온 아버지의 애환을 그린 당대의 흥행작이다.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외환위기(IMF) 때, 이 곡은 한껏 쪼그라든 아버지들의 기를 살려주는 응원가로 되살아났다.
아버지 노래는 꾸준하게 등장하지만 어머니 노래보다 수가 적다. 히트곡도 바블껌의 ‘아빠는 엄마만 좋아해’, 이수미, 권태수 등의 ‘아버지’(파파), 윤승희의 ‘아빠랑 엄마같이’, 현숙의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 최불암·정여진의 ‘아빠의 말씀’, 아버지가 생전에 쓰던 의자를 소재로 한 정수라의 ‘아버지의 의자’, 배따라기의 ‘아빠와 크레파스’ 그리고 최백호의 ‘애비’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언제나 다정한 친구나 연인 같은 어머니와는 달리 무서웠던 아버지의 가부장적 이미지가 빚어낸 결과일 것이다.
1969년 김소월의 시를 가사로 사용한 유주용의 ‘부모’는 가정의 달이 되면 라디오에서 부활하는 노래다. 스스로 부모가 되어봐 부모님의 애틋한 마음을 알게 됨을 노래한 이 곡은 많은 가수가 다시 부르면서 시대를 초월한 명곡이 되었다.
70년대까지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은 자식의 성공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1971년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번안한 ‘1943년 3월 4일생’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라는 전혀 다른 질감으로 애절함을 더했다. 당시 노래 제목의 날짜를 이용복의 생년월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1972년 이용복이 특별출연한 영화 <어머니 왜 나를 나셨나요>가 개봉했을 정도로 이 노래는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1972년 동양방송(TBC) TV 드라마 <어머니>의 주제가 ‘모정의 세월’은 나훈아의 구수한 음색이 드라마의 인기에 일조했다. 하지만 이 노래는 1년 뒤에 다시 부른 한세일의 대표곡으로 우리는 기억한다. 자식들에 대한 근심으로 살아가는 어머니의 애절한 인생을 노래한 ‘모정의 세월’은 한세일에게 MBC 신인 남자 가수상까지 안겨주었다. 1972년 발표된 김상희의 ‘팔벼개’는 어머니의 정겨운 체취와 추억을 되살려주는 마력의 노래다. 1973년 발표된 이연실의 ‘찔레꽃’도 가슴 먹먹해지는 눈물겨운 사모곡이다.
1983년 김창완의 첫 독집 <기타가 있는 수필>에 수록된 ‘어머니와 고등어’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노래는 어머니가 자식에게 주려고 냉장고에 넣어둔 고등어를 한밤중에 발견한 아들이라는 평범한 일상을 통해 모자의 진한 애정을 전달해 큰 공감대를 형성했다. 강인엽의 ‘그리운 어머니’는 MBC TV의 군 위문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 테마송으로 사용되면서 군인들이 가창 애창하는 어머니 노래로 각인되어 있다. 이 노래는 1991년 영화 <어허 어이 어이가리>의 주제가로 강인엽이 처음 발표했다.
어느 시기나 어머니 노래는 효심이 기본이지만 예외는 있다. 어머니의 뜻에 반대해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 멀리 떠나겠다는 최성빈의 ‘사랑하는 어머님께’가 그런 노래다. 1995년 발표된 이 노래는 착한 제목 때문에 어버이날이면 각 라디오의 단골 신청곡으로 각광받지만 ‘불효막심한’ 가사 내용 때문에 절대로 방송해서는 안 되는 노래로 유명하다.
세기가 저물어가던 1999년 발표된 지오디(god)의 ‘어머님께’는 어머니가 일하는 공장에서 나눠주는 도시락을 먹지 않고 몰래 싸가지고 와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곡이다. 가사에서는 도시락을 짜장면으로 대체했다. 이 노래는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랩 스타일이지만 모든 세대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선사했다. 또한 2007년 테이의 ‘어머니’와 박효신의 ‘1991년 찬바람이 불던 그 밤’, 2008년 라디의 ‘엄마’ 등 최근에 발표된 어머니 노래들도 친근하고 다정한 어머니의 존재감이 여전함을 증명한다.
김진표, 자화상, 싸이, 데프콘의 ‘아버지’, SG워너비의 ‘아버지 구두’ 등에서 보듯 아버지 노래는 IMF 이후에 급증했다. 이전과는 달리 아이들과 놀아주고 육아와 가사를 아내와 분담하면서 친구처럼 친근한 이미지로 변신한 아버지들이 늘어난 결과가 아닐지. 이처럼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주는 어머니와 친근하게 변신한 아버지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는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가장 쉬운 공감 소재이기에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5060.html
찜통더위 속 ‘만삭 녹음’이 대박 났다
데뷔 60년 맞아 전국 투어 시작한 이미자
만삭의 이미자, ‘동백아가씨’ 녹음
임신 중 현미도 같이 녹음, 대박 나
데뷔 60주년을 맞은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가 전국 투어를 시작했다. 한국 대중가요사의 산증인인 그는 1990년에 통산 560장의 음반과 총 2069곡을 발표한 다작 가수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1973년 방한한 베트남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5년 동안 파월 장병 위문 공연의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최고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국내 가수 최초로 외국의 문화훈장을 받은 그는 국내외에서 세 번이나 훈장을 받은 유일한 가수다.
상복도 많았다. 1964년부터 1970년까지 MBC 10대 가수상의 단골 수상자였고, 그중 세 번이나 가수왕에 등극했다. 당시 여자 가수 지망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미자의 창법을 모델로 삼았다. 2002년 국내 가수 처음으로 남북에 동시 생중계된 그의 ‘평양 특별공연’은 한민족의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치는 화려한 경력보다는 서민의 애환과 정서를 어루만지며 대중과 소통한 가수라는 점에서 더욱 빛난다.
필자가 이미자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30주년 공연 이후 신보를 준비 중이던 환상의 음악 콤비 이미자-박춘석 두 사람을 함께 취재하는 자리였다. 당시는 트로트에 관심 없는 20대 청춘이었기에 46살의 중년 가수와 첫 만남에 큰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사진 촬영을 하면서 소름 돋는 경험을 했다. 박춘석의 정갈한 피아노 연주에 맞춰 맑고 청아한 음색으로 부르는 그의 노래에는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진정성이 강력했다. 왜 부모님 세대가 그의 노래에 열광하는지, 왜 그의 성대는 사후에 보존해야 하는 국보급으로 평가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세월이 훌쩍 지난 2004년. 데뷔 45주년 기념공연 팸플릿에 들어갈 이미자의 음악 인생을 정리하는 글을 써주면서 선생과 재회했다. 최연소 관객이 돼 그의 공연을 처음 보았다. 그의 노래는 마치 ‘순박한 시골 누이’ 같았다. 가식이나 기교를 찾을 수 없었다.
2014년 55주년 기념공연 때는 한 언론사의 요청으로 이미자의 데뷔 초기 음반들을 빌려준 적이 있다. 음반 대여 조건으로 경제적 대가는 필요 없고 그가 좋아하는 음반에 직접 사인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어떤 음반에 사인을 할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총 4장의 음반에 사인을 해주었는데 대표곡 ‘동백아가씨’ 음반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자는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여고 졸업을 앞둔 1958년. 그는 민영 TV 대한방송(HLKZ)의 <예능 로터리>에서 최고상을 받아 유니버샬레코드에서 ‘행여나 오시려나’ 등의 유성기 음반을 녹음하며 정식 가수로 데뷔했다.
초창기 그의 가수 활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싸구려 출연료에 지방 무대를 돌아다니며 선배들 양말을 빨고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여관방이 너무 추워 몰래 도망친 적도 있었다. 이미자는 1964년 초까지 스카라극장 인근의 다방들을 드나들며 일거리를 찾았다.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아가씨> 주제가를 녹음하는 행운이 찾아왔다. 사실 ‘동백아가씨’를 녹음하기로 내정된 가수는 최숙자였다. 하지만 신생 음반사인 지구레코드는 인기 가수의 높은 출연료가 부담스러워 작곡가 백영호의 추천을 받아 저렴한 비용으로 이미자를 대타로 선택했다.
1964년 여름, 스카라극장 앞 목욕탕 건물 2층 녹음실. 낡은 선풍기 한 대로 찜통더위를 이겨내며 만삭의 이미자와 현미가 함께 녹음을 끝냈다. 이미자는 ‘동백 아가씨’, 현미는 ‘떠날 때는 말없이’를 녹음했다. 동반 히트가 터졌다. 이에 ‘만삭에 녹음을 하면 대박이 난다’는 소문이 가요계에 퍼지면서 한동안 임신 녹음이 유행되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1964년 최대 히트곡 ‘동백 아가씨’는 갖가지 사연을 연출했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지구레코드의 임정수 사장은 인지도가 빈약한 신생 음반사인 지구보다는 한 지붕 회사였던 미도파레코드 이름으로 음반을 슬쩍 발매했다고 한다. 처음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음반이 대박을 터뜨리자 미도파 측에서 회사 이름 도용을 문제 삼으며 소송을 걸었다. ‘동백아가씨’ 음반이 미도파와 지구 두 버전이 있는 이유다. 미도파가 초반이고 지구는 재발매 음반이다.
그런데 발매 당시 ‘동백아가씨’는 음반의 타이틀곡은 고사하고, 뒷면에 수록되는 푸대접을 받았다. 음반이 발매되자 그가 노래한 주제가의 인기가 영화를 능가하는 반전이 일어났다. 전국의 음반업자들이 판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쳤다. 생전에 작곡가 백영호는 “술집에서 술값 대신 ‘동백아가씨’ 음반을 제발 한 장만 구해달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35주 동안 인기 차트 1위를 차지했던 열풍은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트로트를 천시했던 젊은 대학생들이 ‘동백아가씨’를 합창하는 진풍경까지 연출했다.
1965년 거침없는 질주에 제동이 걸렸다. 경쟁사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동백아가씨’는 가요심의전문위원회에 의해 ‘왜색’을 띤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가 되었다. 금지곡 ‘동백아가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애창곡이란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던 ‘동백아가씨’는 1987년 금지의 족쇄에서 풀려났다. 국내를 평정했던 ‘동백아가씨’ 열풍은 1966년 현해탄의 높은 파고를 넘었다. 이에 ‘이미자가 일본말로 노래를 녹음했다’는 소문은 한-일 수교로 생긴 반일 감정이 퍼지는 데 기름을 부었다. 노래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되면서 조악하게 인쇄된 등사지가 붙어 있는 ‘일본어 동백아가씨’의 ‘빽판’까지 등장했다. 최근 빽판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을 집필하면서 발견한 7인치 도넛 빽판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미자의 노래가 반세기 넘도록 남북을 초월해 사랑받은 이유는 타고난 실력에다 꾸준한 연습, 진지한 음악적 태도와 건실한 생활까지 합체되었기 때문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인 그는 “공연하는 데 한계가 온 것 같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잘 안 되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보여드리고 들려드리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념공연마다 음반을 선보였던 이미자는 이번에도 신곡이 포함된 기념 앨범 ‘노래 인생 60년 나의 노래 60곡’을 발표했다. 부디 이번이 그의 마지막 공연, 마지막 음반이 아니길 바란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5143.html
‘떠날 때는 말없이’ ‘안개’…60년대 히트곡 OST 많아
대중음악과 영화의 공생 100년, 50~60년대 편
연속극 주제가가 영화 주제가로
60년대 옛 노래 영화로 리바이벌
정훈희 데뷔곡 ‘안개’ 40만 장 대히트
1919년 10월27일, 김도산 감독이 연출한 한국 최초 영화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가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그날이 한국 영화의 날로 지정된 이유다. 100년이 지난 2019년 5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한국 영화의 존재 가치를 전 세계에 증명했다. 한국 영화는 2012년에 관객 1억 명 시대를 돌파하고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1960년대의 슬픈 풍경이 떠오른다. 필자가 살았던 동네에 엿장수가 오면 아이들이 빈병, 폐지를 들고 나가 달콤한 엿과 바꿔 먹었다. 5살 때부터 어른들의 손을 잡고 공짜로 극장을 드나들었던 필자는 엿보다 회색 깡통이 좋았다. 그 안에 가득 찬 필름을 밀짚모자에 두르면 햇빛에 반사되어 근사했기 때문이다. 그땐 그저 폼 나는 놀이기구로만 생각했던 깡통은 극장 상영 후 버려진 소중한 한국 영화 필름들이었다. 동네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가 소중한 우리 영화 유산을 훼손하는 처참한 현장이었음에 자괴감이 든다.
한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 흥행 몰이에 일조한 중요 주제가 LP들을 50~60년대, 70~90년대로 나눠 2회에 걸쳐 소개한다.
과거에는 영화 주제가 녹음은 곧 출세의 지름길이란 등식이 형성되었다. 최초의 창작 가요인 이정숙의 ‘낙화유수’는 1927년 이구영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무성영화 주제가였다. 영화계는 개봉 전에 주제가를 미리 발표하는 흥행 전략을 세웠다. 가요계도 영화의 흥행이 주제가의 히트로 이어지는 음반 판매 효과를 기대했다. 이처럼 한국 영화와 대중가요는 오랜 기간 공생 관계를 맺어왔다.
당시 인기를 끈 라디오 연속극이 영화로 제작되는 흐름이 생겼다. 1956년 중앙방송국의 라디오 연속극 <청실홍실>은 최초로 드라마 주제가를 만들었다. 전국을 강타한 인기 덕에 이 드라마는 이듬해에 영화로 제작되어 새로운 지평을 예고했다. 1957년 유성기 음반으로 발표된 송민도의 노래 ‘나 하나의 사랑’도 연속극의 빅히트로 1958년 한형모 감독이 연출한 영화 <나 혼자만이>의 주제가로 쓰여 흥행에 일조하며 60년대 초에 LP로도 발매되었다. 1958년 오향영화사를 창립한 작곡가 박시춘이 감독까지 맡았던 영화 <딸 칠형제>는 당대의 인기 가수들이 대거 출연해 주제가의 위력을 과시했다.
한국 영화는 1959년에 무려 111편을 제작하며 다수의 주제가를 히트시켰다. 권영순 감독의 영화 <가는 봄 오는 봄>은 백설희가, 가수 고복수는 직접 제작한 영화 <타향살이>를 통해 자신의 히트곡을 리바이벌했다. 안다성이 주제가를 부른 홍성기 감독의 영화 <비극은 없다>는 제3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등을 휩쓸며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도 출품된 당대의 흥행작이다.
같은 해 개봉한 노필 감독의 영화 <꿈은 사라지고>는 남녀 주인공 최무룡과 문정숙이 주제가를 직접 불러 성공 신화를 일궈냈다. 유성기 음반으로 처음 발매된 영화 주제가들은 10인치 LP로도 재발매되었다. 특히 문정숙이 부른 명곡 ‘나는 가야지’는 양옥집을 부상으로 받을 정도로 히트해 영화 주제가 편집 LP 제작 붐으로 이어졌다.
1960년 개봉한 유두현 감독이 연출한 영화 <카츄샤>의 주제가인 송민도의 ‘카츄사의 노래’와 주연배우 최무룡이 부른 ‘원일의 노래’도 긴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1962년 개봉한 영화 <연산군>은 1회 대종상에서 음악상 등 8개 부문을 휩쓴 흥행작이다. 이 시기에는 30~50년대 유성기 시절에 사랑받았던 이애리수의 ‘황성옛터’(1961),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1961),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1962),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1963)’,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1969) 등이 영화로 제작되며 리바이벌 붐을 일으켰다.
1964년은 무려 147편의 한국 영화가 제작되는 양적 팽창을 이루며 흥행 규모도 해방 이후 처음으로 외화를 넘어섰다. 당시에는 제2회 청룡영화상 음악상을 받은 <맨발의 청춘>(1964) 같은 청춘물과 <갯마을>(1965) 등 문예영화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1964년 쟈니브라더스가 부른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가는 대만의 공군가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미는 1964년 개봉한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의 주제가를 최고의 명곡으로 언급한다. 같은 해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를 빅히트시킨 이미자는 영화와 드라마 주제가를 무려 600여 곡 넘게 노래한 국내 최다 음반 녹음 가수로 평가된다.
1965년 개봉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남과 북>은 제1회 동양방송(TBC) 방송가요대상에서 주제가상을 비롯해 국내외 영화제를 휩쓴 명작이다. 곽순옥이 부른 주제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는 20년 후 KBS의 ‘이산가족 찾기’ 특별방송 때 부활해 온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이산의 슬픔을 각인시켰다. 1966년 정승문 감독의 영화 <아빠의 청춘>은 오기택이 부른 주제가가 IMF 외환위기 때 어깨가 처진 아빠들의 응원가로 부활해 시대를 초월한 명곡으로 사랑받는다. 같은 해 개봉한 영화 <하숙생>은 최희준이 부른 주제가가 제2회 동양방송(TBC) 방송가요대상 주제가상을 받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1967년 개봉한 영화 <안개>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 원작이다. 이 영화는 한국 영화의 표현 영역을 한 차원 높인 수준 높은 작품성으로 국내외 영화제를 휩쓸어 노래, 영화, 소설 모두 ‘트리플 걸작’의 신화를 남겼다. 이 영화의 OST는 재발매를 거듭하며 40만 장이 팔려나갔다. 주제가 ‘안개’는 1970년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에서 정훈희를 국내 최초의 국제가요제 수상자로 등극시켰다.
세기의 라이벌 남진과 나훈아를 스타로 견인한 공전의 히트곡 ‘가슴 아프게’(1967)와 ‘사랑은 눈물의 씨앗’(1969)도 모두 영화주제가였다. 1968년 정소영 감독의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은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37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 흥행사를 새로 썼다. 신파조 최루성 멜로드라마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 영화는 대만과 일본에도 수출됐다.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도 1969년 청춘스타 남진과 트윈폴리오, 조영남, 최영희 등이 출연한 영화 <푸른 사과>를 통해 영화음악으로 데뷔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5212.html
‘고래사냥’ ‘왜 불러’ ‘날이 갈수록’ 3곡 동시 히트
대중음악과 영화의 공생 100년, 70~90년대 편
<별들의 고향> <어제 내린 비> 등 70년대 히트작들 주제가도 인기
지금의 한국 영화계는 영화음악의 중요성을 알기에 제작비를 아끼지 않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기존에 발표된 히트곡이 주제가나 배경음악으로 이 영화 저 영화에 쓰였던 이유다. 대사와 음향이 빠진 러시 화면조차 보여주지 않고 시나리오만 가지고 음악을 만들었다니 최악의 제작 환경이었다. 하지만 1970~80년대 중요 한국 영화를 통해 시대의 아이콘으로 평가받는 주옥같은 주제가들이 탄생했다. 기적 같은 일이다.
1970년대는 60년대의 라디오드라마처럼 TV드라마와 주제가가 히트되면 영화로 제작되는 트렌드가 이어졌다. 이미자가 주제가를 불러 TBC 방송가요대상과 청룡영화상 주제가상을 받았던 최인현 감독의 <아씨>(1970)와 바보 영구 연기로 화제를 모은 장욱제의 TV드라마를 스크린으로 옮긴 김기 감독의 <여로>(1973)가 대표적이다.
1970년 개봉한 정인엽 감독의 영화 <먼 데서 온 여자>의 주제가는 한상일의 ‘웨딩드레스’다. 이 노래는 제목과 가사, 가수는 같은데 정풍송과 길옥윤 2명의 작곡가에 의해 전혀 다른 멜로디로 발표된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영화의 원래 제목은 <웨딩드레스>였지만 흥행을 이유로 <먼 데서 온 여자>로 제목이 야릇하게 변경되었지만 주제가만 살아남아 결혼 시즌의 명곡이 되었다.
1971년 개봉한 국내 최초의 하드보일드 영화인 박종호 감독의 <들개>는 인기 가수 정훈희가 신성일과 파격적인 정사 신을 벌여 흥행에 성공했다. 배우 신성일이 연출한 영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은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국판 같다. 관람객 수가 14만 명에 근접하는 흥행 성공의 이 영화에서 포크 가수 김세환은 주제가 ‘목장길 따라’의 히트로 인기 가수의 발판을 마련했고, 작곡가 이봉조는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주제가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 필름은 분실되었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 <이별>은 관객 15만 명을 동원하며 1973년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주제가 가사처럼 작곡가 길옥윤과 패티김의 이혼이 화제가 되어 흥행에 한몫했지만 ‘아시아의 연가’로 평가받는 주제가의 몫도 무시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통제와 검열이 극에 달했던 1974년과 1975년에 중요한 한국 영화와 영화음악들이 대거 탄생했다. <별들의 고향>이 1974년에, 1975년엔 <바보들의 행진> <영자의 전성시대> <어제 내린 비>가 연속 개봉하며 청년 세대의 억눌린 심정을 대변했다.
관객 46만 명을 동원한 <별들의 고향>은 이장호 감독의 출세작이다. 강근식 음악감독은 주제가 일변도였던 한국 영화음악에 전자기타와 무그 사운드를 선보여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이장희가 부른 주제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젊은 세대에게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 윤시내가 목을 조르며 소녀 목소리를 연출한 주제가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도 가수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며 흥행에 일조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OST 초반은 영화 속 정사 장면으로 장식된 재킷이 ‘퇴폐적이다’라는 이유로 판매 금지가 되었다.
송창식의 명곡 ‘고래사냥’ ‘왜 불러’ ‘날이 갈수록’이 전편에 흐르는, 1975년 개봉한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암울한 시대 현실을 자조적이면서도 경쾌한 방식으로 풀어낸 1970년대 최고의 한국 영화다. 주인공 병태의 친구 영철이 ‘고래사냥’이 흐르는 가운데 자전거를 타고 동해 바다 절벽 위에서 파란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과 영자가 입영열차 창문에 매달려 키스하는 장면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주제가를 부른 송창식은 대마초 파동으로 요동치는 정국에서 살아남아 MBC 가수왕에 등극했다.
15만 관객을 동원한 이장호 감독의 <어제 내린 비>는 흥행과 작품성, 음악까지 좋았다. 정성조 음악감독은 감각적인 사운드로 이 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36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김호선 감독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는 1975년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던 시대의 아이콘이다.
‘창녀의 치마 속을 통해 본 1970년대의 암울한 한국 사회’를 영상으로 전했던 이 영화의 주제가는 임희숙이 내면을 울리는 솔(소울) 창법으로 노래했다. 주제가들은 금지당해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했지만 정성조 음악감독이 들려준 탁월한 사운드는 주제가 일변도의 한국 영화음악에 일대 파장을 몰고왔다.
이영표 감독의 영화 <미인>에서 명곡 ‘미인’은 삭제되고 여배우 김미영과 신중현의 키스신은 살아남았다. 이 영화의 작품성은 떨어지지만 신중현의 최전성기 연주를 컬러 영상으로 볼 수 있어 매력적이다. 70년대 중후반에는 하이틴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김인순이 가장 많은 주제가를 불렀다.
1976년 개봉한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브이>도 최호섭이 부른 주제가가 흥행에 한몫했다. 1977년 김호선 감독의 <겨울 여자>는 58만6천 명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 흥행 신기록을 새로 썼다. 김세화의 주제가 ‘눈물로 쓴 편지’와 이영식과 함께 부른 ‘겨울 이야기’는 겨울 시즌 송의 명곡이 되었다.
1970~80년대 한국 영화는 군사정부의 통제가 심해 체제나 사회현상을 비판하고 고민하는 작품보다는 <애마 부인> 등 쾌락적인 섹스 영화의 범람으로 영화 본연의 힘을 상실한 암흑기였다. ‘한국 영화는 3류’라는 등식이 형성되는 순간이다.
소재가 제한되자 대안으로 인기 가수들을 대거 영화에 출연시켰다. 남진의 <가수왕>, 패티김의 <속 이별>, 하춘화의 <숙녀 초년생>, 백영규의 <슬픈 계절에 만나요>, 조용필의 <그 사랑 한이 되어>, 나훈아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주제가 ‘하얀새’) 등은 그런 류의 영화들이다. 작품성이나 흥행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1989년 개봉한 이남이 주연의 <울고 싶어라>의 364명, 김흥국 주연의 <앗싸! 호랑나비>가 기록한 181명의 관객 수는 쉽게 깨지지 않을 최소 관객 기록이다. 전영록, 김수철, 임창정, 엄정화, 이상은 등 예외도 있었지만, 가수들이 주연으로 등장한 영화의 흥행 실패는 한국 영화의 징크스로 남았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년)는 남도소리와 아름다운 사계로 103만 관객을 매혹시켰다.
18편의 1천만 관객 영화를 배출한 한국 영화는 일상생활처럼 한국인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시작은 미미했고 여전히 힘든 현실이지만 한국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에 점령되지 않은 극소수 나라의 영화로 성장과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529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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