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 Culture/노래 이야기

노래의 탄생 ~ 오광수 (경향 연재)

by Wood-Stock 2018. 7. 1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serial_list.html?s_code=ao308&page=1



[1] 신승훈 ‘미소 속에 비친 그대’

1990년, 어학테이프 납품회사인 덕윤산업(대표 이성균)에 근무하던 사맹석 부장에게 나이트클럽 DJ였던 김창환이 무명가수의 데모테이프를 내밀었다. 1970년대 송창식, 윤형주 등 ‘쎄시봉’ 멤버들과 어울리며 음악을 했던 사 부장은 음반을 제작했지만 큰 재미를 못 보고 숨 고르기 중이었다. 별 생각 없이 받아둔 데모를 자동차에서 듣던 사 부장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미 6~7곳의 기획사를 돌면서 퇴짜를 맞은 노래의 주인공은 대전 다운타운에서 노래하다가 상경한 신승훈. 발라드의 정석을 무시한 노래와 보기 드문 미성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영세업체였기에 제작비가 없었다. 도매상에서 어음을 할인하여 가까스로 서울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마쳤다. 타이틀곡은 신승훈이 만든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결정했다. 신승훈은 처음 만들어본 곡이 덜컥 타이틀곡으로 결정되자 놀랍고도 두려웠다.
[노래의 탄생]신승훈 ‘미소 속에 비친 그대’

사 부장은 ‘촌놈’ 신승훈의 얼굴 대신 안경과 악보만 강조한 앨범을 만들었다. 1990년 8월 말, 사 부장은 따끈따끈한 앨범을 들고 MBC FM에 갔다. 당시 가요프로그램을 담당하던 진현숙 PD가 “오랜만에 들을 만한 발라드가 나왔다”면서 너무 좋아했다. 라디오의 여성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신승훈은 대전 다운타운에서는 유명했다. 특히 여성 관객들이 신청하는 팝송을 너무 잘 불렀고, 레퍼토리가 1000곡에 달했다. 재야에서 갈고닦은 노래 솜씨가 여심을 흔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너는 장미보다 아름답지 않지만 / 그보다 더 진한 향기가.” 홍보를 시작한 지 한 달여 만에 신인은 절대로 설 수 없었던 <가요톱 10>과 <MBC 인기가요>에서 출연 요청이 왔다. 신승훈을 출연시켜 달라는 리퀘스트가 쇄도한 것이다. ‘얼굴 없는 가수’의 계획이 흔들렸다. 할 수 없이 서울 방배동 양복점에서 양복을 사고, 구두는 빌려 신고 방송에 출연했다. 데뷔앨범만 70만장이 팔렸고, 2집 ‘보이지 않는 사랑’은 100만장을 넘겼다. 소위 라인음향 ‘사맹석·김창환사단’의 신화가 그렇게 시작됐다. 그들은 신승훈에 이어 노이즈, 김건모, 박미경, 클론을 만들면서 가요계 기록들을 갈아치웠다.



[2] 존 레넌 ‘이매진(Imagine)’


‘국가가 없다고 생각해봐/ 해보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냐/ 죽일 이유도 죽일 필요도 없고/ 종교도 없는/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산다고 생각해봐.’
[노래의 탄생]존 레넌 ‘이매진(Imagine)’

동계올림픽 개막식 때 전인권과 이은미 등이 부른 존 레넌의 ‘이매진’은 얼핏 달콤한 사랑노래처럼 들리지만 도발적이고 발칙한 노래다.

존 레넌의 두 번째 앨범에 수록된 이 곡은 부인 오노 요코(小野洋子)와 공동 프로듀싱하여 1971년 발표해 빌보드 싱글차트 3위, 영국 싱글차트 1위에 올랐다.

일본 출신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와 존 레넌이 부부이자 예술적 동지로 살았던 시간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레넌보다 7살 연상이었던 오노 요코는 첫 만남부터 불꽃이 튀어 서로의 가정을 포기하고 1969년 결혼했다. 비틀스의 멤버들은 오노 요코가 비틀스를 해체시킨 마녀라고 공격했지만 뒤늦게 화해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누드를 앨범재킷에 쓰는 등 파격적인 행보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으며, 1970년대 미국을 휩쓴 평화운동의 구심점이 되어 활약하기도 했다.

여하튼 레넌은 ‘이매진’에서 신의 존재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무정부주의의 세계를 상상한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이 사라지는 유토피아였다.

그러나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존 레넌의 이 같은 행보에 고운 시선을 보낼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비틀스 시절 그는 “우리가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고 말했다가 큰 곤욕을 치렀다. 레넌 자신도 보수주의의 저항을 예상하여 ‘이매진’을 만들 때 설탕을 좀 쳤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결국 레넌은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계속하면서 오노 요코와 뉴욕에서 미국 영주권을 얻어 살기 위해 대중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천국도 지옥도 없고, 우리 위에 하늘만 있다고 생각해 보라’던 몽상가 레넌은 끝내 그런 세상을 보지 못하고 총탄에 스러져 갔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세상은 우리 앞에 없다.


[3] 조용필 ‘창밖의 여자’


[노래의 탄생]조용필 ‘창밖의 여자’

1980년 서울은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던 땅이었다. 박정희의 퇴장으로 서울의 봄이 오는가 했지만 신군부의 등장으로 다시 암울한 시간이 찾아왔다. 올해로 노래 인생 50주년을 맞은 조용필에게 1980년은 격동의 역사만큼이나 극적인 한 해였다. 미8군 시절 대기실에서 피웠던 대마초가 문제가 되어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히트로 긴 무명의 터널에서 벗어나온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 그러나 조용필은 좌절하지 않고 전국 명찰을 다니면서 판소리를 공부하며 목소리를 단련했다.

1979년 말 대마초 가수의 해금 조치와 동시에 동아방송 안평선 PD가 연락해 왔다. 곧 시작할 라디오극 <창밖의 여자>의 주제가를 만들고 불러달라는 요청이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드라마 작가인 배명숙씨가 건네준 노랫말은 조용필의 가슴을 뛰게 했다. 꼬박 닷새 동안 한 끼도 먹지 않은 채 작곡에 전념했다. 선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머릿속에 맴돌던 악상이 술술 풀려나왔다. 악보를 들고 동아방송 녹음실로 뛰어갔다. 녹음실 밖에 있던 안 PD와 배 작가가 노래를 듣다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피를 토하듯 이어지는 한 섞인 노래는 듣는 이를 전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구레코드는 ‘창밖의 여자’를 타이틀곡으로 하는 앨범을 세상에 내놨다. ‘단발머리’ ‘한오백년’ ‘고추잠자리’ ‘미워 미워 미워’ 등 버릴 곡 하나 없는 명반이 탄생했다. 단일 앨범으로 100만장 이상 팔려 나간 최초의 앨범이기도 했다. 그해 조용필은 TBC(언론 통폐합으로 KBS2가 됨)가 주는 최고 인기가수상을 받았고, 서울국제가요제에 나가 ‘창밖의 여자’로 금상을 받았다. ‘가왕’ 탄생의 서막이었다.

5·18 광주항쟁과 신군부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암울한 시기에 한 맺힌 외침을 담은 조용필의 노래가 대중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 것이다. 조용필 역시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이 유독 많았다고 회고한다. 조용필에게 와신상담의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태어날 수 없었던 노래가 바로 ‘창밖의 여자’다.




[4] 김민기 ‘늙은 군인의 노래’

김민기(사진)는 ‘투사’라고 불리기를 거부한다. 최루탄을 맞으며 시위를 한 적도, 데모를 하다가 투옥된 적도 없다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민기는 1970년대 이후 지난 촛불시위 때까지 늘 ‘우리가 사랑하는 투사’였다.
[노래의 탄생]김민기 ‘늙은 군인의 노래’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3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늙은 군인의 노래’는 1976년 김민기가 군복무 때 만든 노래다. 강제징집되어 카투사병으로 근무하던 김민기는 그가 만든 노래들이 운동권 노래로 불린다는 이유로 강원도 인제군 원통면의 보병부대로 전출됐다. 정년을 앞둔 선임하사가 막걸리 두 말을 돌리면서 김민기에게 자신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겨울밤 PX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선임하사의 30년 군생활을 마감하는 심경을 듣고 만든 노래다. 그 이후 하사관들과 장병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애창곡이 됐다.

1978년 이 노래는 양희은의 앨범에 수록된다. 김민기의 고교동창이자 DJ인 임문일이 소녀가장인 양희은의 앨범을 제작하면서 김민기가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음반은 곧 판매금지됐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 문공부 장관에게 전화해서 판금을 요청했고, 국방부도 전군에 전통을 보내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그 이유는 ‘군기해이’와 ‘사기저하’였다. 제대 후에 인천의 공장 직공으로, 전북 익산에서 머슴살이도 했던 김민기는 1980년 봄 문화체육관(현 경향신문 자리)에서 공연을 가졌지만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잠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탁월한 공연기획자로서 대학로의 한쪽을 지켰을 뿐 끝내 무대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수많은 변주를 거치면서 대학가 노래패의 단골 곡으로, 시위현장을 숙연하게 만드는 투사의 노래로 불렸다. 한때 시인 김남주가 이 노래를 가리켜 투쟁심을 저하시키는 패배주의적인 노래라고 공격하기도 했지만 김민기가 만든 ‘아침이슬’ ‘친구’ ‘공장의 불빛’ ‘금관의 예수’ 등과 함께 노래사에 길이 남을 노래임이 분명하다.


[5] 강산에 ‘라구요’

‘고향 생각 나실 때면 소주가 필요하다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아버지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 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노래의 탄생]강산에 ‘라구요’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 합동공연에서 강산에는 이 노래를 부르다가 결국 눈물을 쏟았다. 관객들도 같이 울었다. 강산에의 어머니는 충청도에서 함경도로 시집갔다가 한국전쟁 때 남편과 생이별, 아이만 둘러업고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로 왔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인 아버지도 전쟁통에 처자식과 헤어져 거제도까지 흘러왔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만나 결혼하여 강산에와 그의 누나를 낳았다. 그러나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강산에가 3살 때 작고했다. 강산에는 1984년 경희대 한의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도 못돼서 중퇴했다. 자유롭고 활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강산에는 꽉 짜인 대학생활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들이 한의사가 되기를 원했던 어머니도 희망을 포기했다.

강산에는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음악실 DJ도 하고, 음악카페에서 노래도 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로커를 꿈꾸던 그가 달달한 노래를 해야 하는 음악카페에서 환영받기는 어려웠다. 한때 노래를 포기하고 연극을 하기 위해 극단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가수의 꿈은 포기할 수 없었다. 198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인근의 소도시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음악공부를 했다. ‘라구요’는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외롭게 살았던 어머니에게 선물하기 위해 일본의 자취방에서 만든 노래였다.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자식들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의 삶은 그 자체가 절절한 한국 현대사였다. ‘라구요’를 타이틀곡으로 1991년 데뷔앨범을 냈지만 ‘18번이기 때문에’라는 노랫말이 방송사 등의 심의에서 문제가 됐다. 너무 속된 표현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강산에는 꾸준히 라이브무대를 통해 그의 노래를 알렸고, 팬들이 먼저 알아보고 그를 오랜 무명생활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해줬다. 부모님들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어 하던 북녘땅의 무대에 선 강산에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6] 에릭 클랩턴 ‘Tears in Heaven’

4월은 슬프고 잔인하다. 몇 년 전 ‘세월호 사건’이 유독 큰 슬픔과 분노로 다가온 건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이 헤아려졌기 때문이었다. ‘Tears in Heaven’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이유도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이 느껴져서다.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 어찌 그 슬픔의 깊이를 논할 수 있을까.
[노래의 탄생]에릭 클랩턴 ‘Tears in Heaven’

1991년 3월20일 뉴욕의 53층 고층아파트에서 에릭 클랩턴의 아들 코너가 추락사했다. 코너는 함께 동물원에 가자던 아빠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탈리아 출신 여배우 로리 델 산토와의 사이에서 코너가 태어났을 때 에릭 클랩턴은 자발적으로 알코올 치료소에 들어갔다. 수차례 약물과 알코올 중독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는 아들에게 떳떳한 아빠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아들 사망 7개월 전엔 공연을 담당하던 매니저 둘과 동료 기타리스트 스티비 레이 본을 한꺼번에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잃었다. 엎친 데 덮친 슬픔이었다.

클랩턴은 작곡가 윌 제닝스와 영화 <러쉬>(1991년작, 미국)의 사운드트랙 작업으로 슬픔을 달랬다. 제닝스는 <타이타닉>과 <사관과 신사> 등의 영화음악 작곡가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 유명한 ‘My Heart Will Go on’과 ‘Up Where We Belong’이 그의 작품이다. 클랩턴은 코너를 위한 노래를 만들어 영화에 넣고 싶다고 했다.

‘Would you know my name, If I saw you in heaven?(만약 천국에서 나를 본다면, 나를 기억해줄래?)’. 이렇게 탄생한 노래에는 아들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절절한 슬픔과 천국에서 아들을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살겠다는 다짐이 담겼다.

이 노래가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미국의 음악채널 MTV가 선보인 <언플러그드>에서 에릭 클랩턴이 통기타 하나만으로 부르고 나서였다. 아들 코너가 죽고 10개월 뒤였다. 이 공연실황을 담은 앨범은 1992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UK 차트 2위를 차지했다. 또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2000만장 이상이 팔렸다.

클랩턴은 2004년부터 자신의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로서 그 노래를 계속 부르면서 악몽을 떠올리는 건 잔인한 일이 아닐까?



[7] 태미 위넷 ‘스탠바이 유어 맨’

종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엔딩 장면은 매번 남녀 주인공인 정해인과 손예진이 등장하면서 우리 귀에 익숙한 노래가 흐른다.

‘Sometimes it’s hard to be a woman/ Giving all your love to just one man/ You’ll have bad times/ And he’ll have good times.’ 한 남자만 사랑하면서 산다는 건 쉽지 않지만 때로 그 남자가 이해하기 힘든 짓을 하더라도 용서하라는 내용의 ‘스탠바이 유어 맨’이다.

[노래의 탄생]태미 위넷 ‘스탠바이 유어 맨’

드라마에서는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인 가수 카를라 브루니가 리메이크한 노래가 쓰였다. 이탈리아 출신 카를라 브루니는 에릭 클랩턴을 노래 선생으로 둘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가수다. 그러나 원작은 미국의 컨트리가수 태미 위넷(1942~1998)이 불렀다. 위넷이 빌리 쉐릴과 공동으로 만든 이 노래는 1968년 말 3주 동안 빌보드 1위를 했다. 위넷은 “이 노래를 쓰는 데는 15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평생 동안 변명을 하면서 살았다”고 말했다. 여권운동가들이 남편의 부당한 대우나 잘못을 참고 살라고 부추기는 노래라고 공격한 것이다.

이 노래 때문에 구설에 오른 사람이 또 있다. 바로 힐러리 클린턴이다. 힐러리는 남편 빌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에 출마했을 때 CBS <60분>에 출연하여 “나는 태미 위넷처럼 남편 옆이나 지키는 여자가 되지 않겠다”고 했다가 결국 위넷에게 사과했다. 그 사건 이후 위넷은 클린턴의 지지자가 되어 모금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힐러리는 1997년 모니카 르윈스키 사건 때 노랫속 주인공처럼 굳건하게 남편 옆을 지키는 부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위넷은 평생 이 노래를 부르면서도 다섯 번이나 결혼했다.

어쨌거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제목에서부터 시청률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남자나 여자 모두 누가 싫어하겠는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되고 싶고, 그런 누나를 두고 싶다. 더군다나 손예진과 정해인이니. 다만 현실은 늘 멜로드라마같이 달달한 것은 아니다.


[8] 이동원 ‘향수’


이런 봄날, 노래를 흥얼거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 노래가 누구에게나 다 같은 노래일 수는 없다. 이동원의 ‘향수’는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노래의 탄생]이동원 ‘향수’

월북시인 정지용은 18세 때 이 시를 써서 휘문고보 교지 ‘요람’에 처음 발표한다. 이후 1927년 ‘조선지광’에 공식 발표했다. 고향인 충북 옥천을 그리워하면서 쓴 시로 그의 천재성이 엿보인다. 일제강점기 채동선이 시에 곡을 붙였고, 그 이후에도 강준일, 변훈 등이 발표했지만 크게 히트하지 못했다.

정호승의 시에 곡을 붙인 ‘이별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 이동원은 정지용의 시에 매료됐다. ‘향수’를 노래로 만들기 위해 작곡가 김희갑을 찾았다. 그러나 김희갑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곡을 붙이기에 너무 어렵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동원의 끈질긴 요청으로 김희갑은 1년 가까이 씨름하여 곡을 붙였다. 그는 도중에 수차례 포기하려고 했었다고 회상한다. 시의 묘미를 노래로 살리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완성된 곡을 받아든 이동원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동원은 당시 서울대 음대 박인수 교수를 찾아갔다. 그에게 듀엣곡으로 부르자는 제안을 하자 흔쾌하게 수락했다. 그러나 이 노래가 크게 히트하면서 엉뚱하게도 그 불똥이 박인수에게 떨어졌다. 당시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서 국립오페라단 단원으로 활약하던 그가 제명을 당한 것이다. 클래식을 하는 사람이 천박한(?) 대중음악에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시가 노래이고, 노래가 시였던 시대가 있었지만 시에 곡을 붙여서 성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송창식의 ‘푸르른 날’(서정주), 안치환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정호승) 등 손으로 꼽을 정도다. 시를 읽다 보면 절로 멜로디가 떠오르는 ‘향수’야말로 시를 살린 명곡이 아닐 수 없다. 해마다 5월이면 충북 옥천 일대에서 정지용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지용제’가 펼쳐진다.


[9] 그룹 U2 ‘원(One)’


‘단 한 번의 삶, 형제여 자매여, 서로를 이끌어 줘요(One life, with each other, sisters, brothers).’ 아일랜드 출신 그룹 U2는 불후의 명곡 ‘원(One)’에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서로를 이끌어 주자고 호소한다. 남북 정상의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 장면을 보면서 불현듯 이 노래가 배경으로 깔리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노래의 탄생]그룹 U2 ‘원(One)’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노래는 1990년 통일 전야에 베를린 한자 스튜디오에서 녹음됐다. 사랑과 관용의 언어를 부드러운 록발라드에 담은 노래지만 그 당시 U2의 멤버들은 해체 직전까지 갈 정도로 반목이 심했다. 정통 록을 고수하자는 래리 뮬렌과 애덤 클레이튼, 실험적인 전자음을 원했던 보노와 디 에지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했다. 멤버들에게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각성의 계기가 됐다. 분단됐던 나라도 하나가 되는데 음악적 견해 때문에 싸우는 자신들이 초라했다. 이를 계기로 30분 만에 아름다운 멜로디를 완성했으며 보노가 가사를 붙였다. 보노는 달라이 라마가 주도한 ‘원니스’ 행사에서 영감을 받아 노랫말을 썼다. 이 노래는 1991년 그들의 명반이 된 <악퉁 베이비(Achtung Baby)>에 수록되면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싱어 보노는 민간기구인 ‘원(ONE)’을 설립하여 빈곤 퇴치와 에이즈 치료 등에 힘써왔으며 2005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다. 지금도 여전히 빈곤 퇴치를 위한 무료공연을 펼치고, 전 세계의 지도자들에게 굶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돈을 더 내놓으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세계 최고의 무대로 꼽히는 U2의 콘서트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이웃 나라 일본에는 여러 차례 왔지만 서울 공연은 소문만 무성할 뿐 한 번도 성사되지 못했다. 보노는 한 인터뷰에서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겪은 아일랜드인으로서 한국의 분단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서 한국에서 가장 부르고 싶은 노래가 ‘원’이라고 말했다. 하루빨리 U2의 내한공연이 서울이나 판문점에서 열렸으면 좋겠다. 남과 북이 함께 손잡고 떼창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10] 마돈나 ‘라이크 어 버진’

“마치 처녀처럼 너무 기분이 좋아. 네가 날 안아줄 때, 내 가슴이 뛸 때, 네가 날 사랑할 때. 오, 베이비.” 1984년 9월, 미국 음악전문방송 MTV 무대에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도발적인 여가수가 등장했다. 3단 웨딩케이크 조형물에서 내려와 구두를 벗고, 속옷을 노출하며 무대를 휘젓는 마돈나를 보며 모두들 경악했다. 경쾌하면서도 흡인력이 느껴지는 멜로디에 실린 노랫말은 그의 외모만큼이나 선정적이었다. 그 파격적인 무대 이후 마돈나처럼 미디어의 주목을 받아온 엔터테이너는 지구상에 없다. 고향인 미시간을 떠나 무작정 뉴욕에 온 이후 마치 쇼핑을 하듯 많은 남자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동안 매스컴은 잠시도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노래의 탄생]마돈나 ‘라이크 어 버진’

그의 두 번째 앨범 타이틀곡인 이 노래는 빌리 스타인버그와 톰 켈리가 공동으로 작사, 작곡했다. 켈리는 자신의 연애경험을 토대로 노랫말을 썼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 이전에 받았던 상처들은 말끔히 지워지고, 사랑을 한 번도 안 해본 처녀처럼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마돈나와 프로듀서 나일 로저스는 처음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강렬한 멜로디에 이끌려 레코딩을 했다. 마돈나는 “난 당시 처녀도 아니었다. 처녀면 처녀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처녀처럼은 뭔가. 그 아이러니한 대목이 흥미를 끌었다”고 회고했다.

이 노래는 마돈나에게 빌보드 싱글차트 1위의 영광을 안겼다. 그와 동시에 매스컴의 호평도 이어졌다. 한편에서는 프리섹스를 부추기는 선정적인 노래라는 비난도 쏟아졌다. 그러나 마돈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유방암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오면서 정상에 오른 엔터테이너다웠다. 때로는 선정적인 춤과 노래로, 때로는 세상의 허위의식을 벗기는 직설적 화법으로 팝 역사의 새 지평을 여는 주인공이 됐다.

‘라이크 어 버진(Like a Virgin)’은 수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리메이크되면서 늙지 않는 노래로 남아 있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저수지의 개들>, <물랑루즈> 등의 삽입곡으로 쓰인 것도 이 노래의 생명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11] 안치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우리에게 5월은 늘 뜨거운 혁명의 계절이었다. 백기완이 쓰고, 김종률이 작곡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 광주에서 불리고 있지만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처럼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운동권 가요가 있을까?
[노래의 탄생]안치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속에 사무쳐오는 갈라진 이 세상에/ 민중의 넋이 주인 되는 참세상 자유 위하여….” 1987년 연세대 노래패인 울림터 멤버였던 안치환(당시 연세대 사회사업학과)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모 후보로부터 선거 유세에 쓸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평소 민중시인 김남주와 박노해의 시를 탐독하던 안치환은 지명수배를 받고 쫓겨 다니는 노래패 선배의 아픔을 떠올리면서 고스란히 이 노래에 담았다. 노동자 시인 박영근(1958~2006)의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청사)에 수록된 ‘백제 6-솔아 푸른 솔아’등의 시를 변형시켜서 곡을 붙였다. 그 진심이 통해서였는지 이 노래는 대학가에 구전되면서 이내 유명해졌다. 대학가 시위현장, 노동자의 파업현장에서 빠지지 않는 운동권 가요가 됐다. 어머니, 쑥물, 참세상, 샛바람, 창살 등의 단어가 주는 강렬함과 서정적인 선율이 어우러져서 자유를 외치던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든 것이다.

이 노래가 정식 출반된 것은 1989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에 ‘마른잎 다시 살아’ ‘지리산’ ‘잠들지 않는 남도’ 등의 노래와 함께였다.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했던 안치환은 시대적 요구에 의해 민중가수가 된 셈이다.

안치환은 이후에도 정호승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 나희덕의 ‘귀뚜라미’ 등을 만들면서 시인들과의 인연을 이어간다. 그중에서도 시인 김남주와의 인연은 각별했다. 1994년 2월 김 시인이 타계했을 때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서 문상객을 맞았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 ‘물따라 나도 가면서’를 만들어 영전에 바치기도 했다.

1980년대 시위현장을 누비던 젊은이들은 오늘 시대의 주인공이 되어 통일의 열기가 뜨거운 5월의 한가운데 서 있다. ‘솔아 솔아…’가 불리던 그 시절 못지않은 엄중한 시대의 요구에 직면하여 그 해답을 찾기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12] 퀸 ‘보헤미안 랩소디’


꽉 낀 청바지를 입고 상반신을 드러낸 채 무대를 질주하는 프레디 머큐리의 콘서트 영상을 보면 여전히 가슴이 뛴다. 피아노를 치면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부르던 머큐리는 지금 이 땅에 없지만 누가 뭐래도 금세기 최고의 로커였다.
[노래의 탄생]퀸 ‘보헤미안 랩소디’

퀸의 4집 앨범(1975년)에 수록된 ‘보헤미안 랩소디’는 팝 역사상 손꼽을 만한 논쟁적 곡이다. 5분55초라는 긴 곡에 한 편의 심포니와 같은 웅장함이 담겨 있다. 아카펠라로 시작하여 록과 발라드, 팝페라의 분위기가 어우러진 파격이 놀랍다. 이 노래에 맞춰 최초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엄마, 난 사람을 죽였어요(Mama, just killed a man)”라고 절규하다가 “쉽게 왔다, 쉽게 가네. 그냥 나를 놔줄 텐가?(Easy come, easy go, will you let me go?)”라고 되묻는다. 마치 이상의 난해한 시를 보는 듯한 가사가 암호문처럼 펼쳐진다. 평론가들은 난해한 노랫말을 두고 수많은 추측을 해왔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독백이거나 종교적 함의를 담은 기도문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그러나 머큐리는 그러한 추측들을 모조리 부정했다. 심지어 멤버들에게도 함구를 부탁한 뒤 1991년 에이즈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영원한 퀘스천마크로 남았다. 머큐리는 생전에 “그냥 판타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노래의 가사는 운율을 맞추기 위한 도구일 뿐 내용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대답을 회피했다. 퀸의 다른 멤버들 역시 머큐리는 매우 복잡한 사람이었고,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았다면서 그의 삶 속에 해답이 있다고 말한다. 머큐리는 1970년부터 약 5년간 메리 오스틴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양성애자였다. 이 노래를 발표한 직후 머큐리는 오스틴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 털어놨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이별을 통보했다. 그래서 노래 속 마마는 오스틴이었으며, 총으로 쏜 남자는 동성애자인 머큐리라는 해석도 있다.

이 노래를 듣다 보면 자꾸만 파란만장한 대한민국 5월의 현대사가 겹쳐진다. 또 그들과 동시대에 살았으면서도 라이브 무대를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으로 가슴이 저리다.


[13]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방탄소년단’이 빌보드를 점령한 뉴스를 접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떠올랐다. 훗날 ‘문화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은 서태지가 데뷔한 지도 벌써 26년이 지났다. 서태지가 데뷔했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방탄의 청년들이 세계를 정복한 것이다.
[노래의 탄생]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하여가’는 1993년 6월 발표된 2집 앨범의 타이틀곡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서태지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음악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이미 데뷔 앨범으로 태풍을 몰고 온 서태지는 2집 앨범이 200만장 이상 판매되면서 음악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너를 볼 때마다 내겐 가슴 떨리는 그 느낌이 있었지/ 난 그냥 네게 나를 던진 거야 예이예이에.’ 서태지의 원맨쇼로 만들어진 음악은 기성세대에겐 생소한 속사포 랩과 힙합 패션, 회오리춤을 무기로 10대들의 열광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기성세대들은 그들의 레게머리를 규제했으며, 저항적인 노랫말에 재갈을 물렸다. 그러나 김덕수의 사물놀이를 랩과 결합시킨 ‘하여가’는 10대들의 열광적인 지지에 힘입어 승승장구했다. 이후 서태지는 기성세대의 간섭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통일을 염원(발해를 꿈꾸며)하고, 학교교육을 비판(교실이데아)하는가 하면 자유를 억압하는 세상에 저항(시대유감)하는 노래들을 발표했다.

서태지는 많은 걸 바꿔놓았다. K팝으로 통칭되는 아이돌 음악시장은 그로부터 시작됐다. 노래와 퍼포먼스가 결합한 버라이어티한 쇼무대가 보편화된 것도 서태지의 영향이다. 10대들이 힘을 모아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갖게 된 것도 서태지가 만든 팬덤에서 시작됐다.

‘방탄소년단’은 10대들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을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담은 작명이라고 한다. ‘아이들’에서 ‘소년단’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다만 서태지의 노래에 이 땅의 10대들이 열광했다면, 방탄의 노래에는 전 세계 10대들이 열광한다. 그것도 한국어로 된 노래에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젊은이들이 환호한다. 실로 엄청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14] 이문세 ‘난 아직 모르잖아요’

“여리고 섬세하면서도 다분히 여성취향적인 감성의 소유자죠. 특히 시적인 언어감각은 당대 최고입니다. 이영훈이 없었다면 이문세도 없었을 겁니다”(이문세). “그의 노래엔 상업적 고급성이 아닌 문화적 고급성이 있어요. 어떤 가사와 멜로디를 써줘도 이해하기 쉽게 들려줍니다”(이영훈).
[노래의 탄생]이문세 ‘난 아직 모르잖아요’

2001년 3월 경향신문에서 대담을 위해 만난 두 사람이 나눈 덕담이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막강한 문화콘텐츠로 사랑받는 이영훈-이문세 콤비의 노래들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1984년 가을, 이장희가 운영하던 광화문 랩 스튜디오에 신촌블루스 엄인호, 가수 권인하, 이문세 등이 모여 있었다. 아직은 포니승용차에 기타를 싣고 떠돌던 무명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피아니스트 이영훈이 있었다.

원래 미대 지망생이었던 이영훈은 스탠드바에서 연주를 하면서 곡을 쓰고 있었다. 이영훈은 엄인호의 권유로 곡을 찾던 두 가수에게 습작을 들려줬다. 잘 알려진 ‘소녀’가 그 곡이었다. 이문세는 첫 곡을 듣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이문세와 이영훈은 의기투합하여 수유리 자취방에서 라면을 먹어가면서 작업을 했다. 작업을 마무리 지을 무렵 좀 더 대중적인 노래가 필요하다는 주문 끝에 나온 곡이 ‘난 아직 모르잖아요’였다. 85년 11월, 2집까지 무명가수였던 이문세가 낸 3집은 한 마디로 대박이었다. 세미트로트곡이나 포크송이 전부였던 가요계에 클래식한 느낌의 팝발라드곡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가요 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하면서 150만장이 팔렸고, 4집 <사랑이 지나가면>은 음반사상 최초로 200만장을 돌파했다. ‘휘파람’ ‘광화문 연가’ ‘시를 위한 시’ ‘그녀의 웃음소리뿐’ ‘사랑이 지나가면’ 등 명곡들이 그들 콤비에 의해 탄생했다.

그러나 완벽주의자인 이영훈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곡작업을 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커피 40잔, 담배를 4갑씩 피우며 밤을 새웠다. 결국 몸을 망친 이영훈은 지금 세상에 없다. 그러나 아직도 정동길을 걷는 이들의 곁에는 그가 늘 함께 걷고 있다. ‘세월이 흘러가면 어디로 가는지….’



[15] 밥 딜런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이 곧 내한공연을 갖는다. 8년 전 첫 내한공연 때 그는 정작 관객들이 기다리던 곡을 부르지 않았다. 바로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였다. ‘엄마, 내 총을 내려놓게 해주세요./ 난 더 이상 총을 쏠 수 없어요./ 길고 어두운 구름이 몰려오고 있어요./ 마치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것같이.’
[노래의 탄생]밥 딜런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수많은 국내외 가수들이 불렀던 이 노래는 1973년 그가 출연한 서부영화 <관계의 종말>을 위해 직접 만들었다. 악역 전문배우 제임스 코번과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주연한 문제적 영화로 보통의 서부영화와 달리 다소 비열하고, 사색적인 보안관과 악당이 등장한다. 노래에서 총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의 총, 혹은 추악한 권력의 상징으로도 해석된다. 1960년대 연인 존 바에즈 등과 반전운동을 함께한 저항가수였던 밥 딜런은 자신의 노래들을 목적성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을 거부했다.시인 딜런 토머스를 좋아해서 짐머맨이란 이름을 버리고 밥 딜런이 된 그는 음유시인이자 자유주의자로 불리길 원했다. 한때 그와 교유했던 존 레넌이 요절한 천재였다면 밥 딜런은 살아 있는 전설이다. 60여년 동안 40장 이상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1억장 이상이 팔렸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듣다보면 1997년 토마스 얀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가 떠오른다. 글로리아 게이너의 ‘아이 윌 서바이브’로 시작하여 ‘노킹 온…’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두 청년이 바다를 보러 떠나는 여정을 그렸다. 두 사람이 훔쳐 타고 떠나는 벤츠 자동차의 트렁크에 하필 암흑가 보스의 100만마르크가 실려 있었다. 

두 사람과 악당들의 쫓고 쫓기는 여정,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우러져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다. 그러나 정작 영화의 백미는 엔딩 신이다. 마침내 바다에 다다른 두 사람을 배경으로 ‘노킹 온 헤븐스 도어’가 흐른다. 데킬라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서서히 죽음을 맞는 주인공의 뒷모습과 파도치는 바다가 노래와 어우러질 때 좀체로 영화관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16] 김정호, 이름 모를 소녀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 놓고/ 쓸쓸히 바라보는 이름 모를 소녀/ 밤은 깊어 가고 산새들은 잠들어/ 아무도 찾지 않는 조그만 연못 속에/ 달빛 젖은 금빛 물결 바람에 이누나.’ 요절한 김정호(본명 조용호·1952~1985)는 천재였다. 1974년 발표된 ‘이름 모를 소녀’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그 전에 이미 음악동네에서 인정받던 싱어송라이터였다. 이 노래는 그가 중학교 때부터 짝사랑하던 선배의 사촌동생 이영희를 위해 만든 노래였다. 이 노래가 발표되자 짝사랑을 눈치챈 이영희가 명동 ‘쉘브르’에서 노래하던 김정호를 찾아가면서 연애를 시작, 3년 만에 결혼한다.
[노래의 탄생]김정호, 이름 모를 소녀

한국전쟁 때 납북된 박동신 명창이 외조부였고, 외삼촌은 아쟁 명인 박종선, 어머니는 명창 박숙자였으니 음악적 혈통을 타고 난 셈이다. 집을 나와 우이동 골방에서 음악을 하던 시절 만난 임창제와 김정호는 “우리가 음악으로 세상에서 1등을 한번 해보자”고 맹세했다. 결국 김정호가 만든 ‘작은새’와 ‘사랑의 진실’로 임창제와 이수영이 결성한 듀오그룹 어니언스는 순식간에 스타가 됐다.

그룹 4월과 5월의 멤버로도 활동한 김정호도 덩달아 레코드사의 표적이 됐다. 그는 지구레코드로부터 가수 겸 작곡가 전속계약 제안을 받았지만 유니버샬과 가수 계약만 하고 데뷔앨범을 냈다. 타이틀곡 ‘이름 모를 소녀’는 원래 양희은에게 주려고 만든 곡이었지만 김정호가 부르면서 당대 소녀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해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정애정은 예명을 정소녀로 바꾸기까지 했다. 오승근과 임용제가 만든 듀오 투에이스(금과은으로 개명)의 히트곡 ‘빗속을 둘이서’도 김정호의 곡이었다.

그러나 김정호도 대마초 파동을 피해 가지 못했다. 1976년 1월 가수 이종용, 송창식, 윤형주 등과 체포되어 1979년 말 해금될 때까지 가수활동을 금지당했다. 1983년 폐결핵으로 결핵요양원을 드나들면서 유작 앨범 <인생>을 만든 그는 1985년 11월 서른셋 나이로 눈을 감았다. 김정호는 치료가 가능했지만 음악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이유로 결핵요양원에서 뛰쳐나오곤 했다는 게 당시 매니저의 증언이다.



[17] 에스트루드 질베르토 ‘걸 프롬 이파네마’

휴가철이 다가오면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남쪽에 있다는 이파네마 해변에 가고 싶어진다. 별로 현실성이 없기에 대신 찾아 듣는 음악이 있다. ‘걸 프롬 이파네마’, 들을수록 사랑스러운 노래다.
[노래의 탄생]에스트루드 질베르토 ‘걸 프롬 이파네마’

“이파네마 해변의 태양에/ 구릿빛으로 그을린 소녀/ 아, 그대가 걷는 모습은 시보다도 아름답고/ 내가 이제껏 본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네.”

1962년 겨울 어느날 작곡가 비니시우스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은 이파네마 해변의 단골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때 카페 앞을 경쾌한 걸음걸이로 지나는 19세 소녀를 보고 비니시우스가 외쳤다. “저길 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녀가 지나가는군.”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가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노래가 될 줄은 그들도 몰랐으리라. 더군다나 두 사람은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이 곡은 미국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 스탄 게츠와 브라질의 기타리스트 후앙 질베르토가 1964년에 발표한 앨범의 타이틀곡이 됐다. 작곡가인 조빔이 피아노로 참여한 이 앨범은 그해 빌보드 앨범차트 2위를 기록하면서 미국에서만 50만장 이상 판매됐다. 또 1965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부문을 수상했다.

보사노바의 대명사가 된 이 노래는 비틀스의 ‘예스터데이’ 못지않게 꾸준히 리메이크되면서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다. 당시 19세 소녀는 노래 덕분에 이파네마 해변에 레스토랑을 차려서 크게 성공했다. 또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감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보사노바는 브라질을 대표하는 음악 장르가 됐다.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연주하거나 불렀지만 후앙 질베르토의 부인이자 보사노바의 여왕으로 추앙받는 에스트루드 질베르토가 부른 곡이 가장 인상적이다. 마치 안개꽃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의 노래를 듣다보면 긴 머리를 찰랑거리면서 경쾌하게 해변을 산책하는 소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나 이소라의 ‘청혼’ 등이 보사노바풍의 노래로 유명하다. 휴가를 떠난다면 반드시 챙겨야 할 플레이 리스트 중 한 곡이다.



[18] 양희은 ‘한계령’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설악산에 갔을 때 만났던 한계령은 신선이 노닐던 그 어디쯤이었다. 그래서인지 늘 한계령을 넘어설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그 설렘도 산을 가로지르는 긴 터널 때문에 빼앗겼지만 말이다.
[노래의 탄생]양희은 ‘한계령’

‘한계령’은 정덕수 시인의 원작 시를 바탕으로 하덕규가 작곡한 노래로 시적 비유가 넘치는 몇 안되는 가요 중 하나다. 이 노래를 부른 양희은은 탁월한 공명을 가진 청아한 목소리로 듣는 이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하덕규에게 한계령은 어린 시절 추억이 묻어나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한계령 아래 고성군 토성면 천진마을에서 자란 그에게 안개를 두르고 묵묵히 서 있는 산은 친구 같은 존재였다. 열 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올라온 이후에도 하덕규는 힘들 때마다 한계령을 찾았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한계령을 찾았다.

추계예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그림을 포기하고 ‘시인과 촌장’을 결성하여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지만 노래도 그에게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어느 여름날 절박한 심정으로 한계령을 찾았다. 그림도 노래도 안되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았던’ 그는 한없이 나약했다. 그러나 구름이 낮게 깔려 비를 뿌리는 한계령 어디쯤에서 ‘우지 마라’ 하고 ‘내려가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날 한계령은 하덕규에게 ‘나를 더 이상 도피처로 삼지 말라’고 얘기했다.

그날 이후 하덕규는 왕성하게 작품을 쓰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날의 느낌으로 쓴 ‘한계령’은 선배인 양희은에게 건넸다. 그러나 양희은의 노래는 발표된 지 5~6년이 지나서야 빛을 봤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뒤늦게 팬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가 된 것이다. 하덕규는 요즘 종교음악 활동을 하면서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19] 스팅 ‘셰이프 오브 마이 하트’

1960년대 초 영국 뉴캐슬의 조선소 마을 월센드에 영국 여왕이 롤스로이스를 타고 방문했다. 10세의 소년 스팅은 중얼거렸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되기 싫어. 여왕처럼 멋진 차를 타는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오늘날 초로의 스팅은 뮤지션들의 존경을 받는 뮤지션으로 우뚝 섰다.
[노래의 탄생]스팅 ‘셰이프 오브 마이 하트’

스팅의 ‘셰이프 오브 마이 하트(Shape Of My Heart)’는 영화 <레옹>의 주제곡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명상을 하듯 카드를 하지/ 그의 플레이는 전혀 의심받지 않아/ 돈을 따기 위해 이기는 게 아니야/ 존경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는 해답을 찾기 위해 카드를 하지.’

단순한 카드놀이로 삶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스팅의 노래는 감각적 리듬, 세련된 멜로디와 어우러져 감동을 준다. 월드스타 비를 비롯해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 곡을 샘플링했으며, 한국 팬들도 스팅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노래다.

어린 시절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덕분에 피아노를 시작하여 여러 콩쿠르를 휩쓸던 스팅은 정작 클래식보다는 비틀스와 롤링스톤스를 좋아했다. 그는 늘 고향 마을을 떠나 뮤지션이 되어 여행하기를 꿈꿨다. 그룹 ‘폴리스’의 베이시스트로 명성을 얻은 스팅은 1985년 “록에 더 이상 싱싱한 연료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솔로로 독립한다. 멤버들과의 불화도 한몫했다. 솔로로 독립한 이후 스팅은 재즈, 블루스, 보사노바, 가스펠은 물론 클래식까지 영역을 넓히면서 항상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여왔다. 우수에 가득 찬 목소리와 지적이면서도 낭만적인 노랫말, 무엇보다도 인간적이고 따뜻한 감성이 스팅을 빛나게 하는 요소들이다. 거기에 여심을 흔드는 외모 또한 인기 요인 중 하나다.

스팅은 또한 적극적인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레인 포레스트 재단을 설립한 이후 많은 자선콘서트를 통해 아프리카 등 빈민들을 돕고, 난개발로 파괴되는 열대우림 살리기에도 적극적이다. 세상일에 초연한 채 음악에만 빠져 사는 아티스트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는 늘 타임지 등 영향력 있는 매체들로부터 주목받아 왔다. 또 고향을 등지고 떠나왔지만 자신의 음악적 원천은 조선소의 굴뚝이었다고 말하는 스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20] 서울대트리오, 젊은 연인들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저기 멀리서 우리의 낙원이/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네.’
[노래의 탄생]서울대트리오, 젊은 연인들

1970~80년대에 청춘들이 여름 바다에 모닥불 피워놓고 둘러앉아 부르던 노래다. 그러나 이 노래를 만든 이들은 노래가 유명해지기도 전에 세상을 떴다. 1971년 12월25일 서울 충무로 대연각호텔 화재 때 사망한 민병무(작곡)와 방희준(작사). 당시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공대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두 사람은 ‘훅스’라는 그룹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훅스’는 그해 12월15일 한국일보 소강당에서 이용복, 양희은 등과 함께 한국약사협회가 주최한 자선음악회에 출연했다. 자작곡 ‘젊은 연인들’을 비롯해서 사이먼&가펑클의 노래 등을 선보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 행사에서 받은 숙박권으로 방희준의 생일파티를 겸해 대연각호텔에 투숙했다가 화를 당한 것이다. 당시 화재로 164명이 목숨을 잃었고, 가수 정훈희도 현장에 있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가 문화방송·경향신문 주최로 개최됐다. 민병무의 동생 병호는 형이 남긴 ‘젊은 연인들’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민경식, 정연택을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결성된 서울대트리오는 서울 예선에서는 1등을 했지만 본선에서는 동상을 수상했다. ‘나 어떡해’를 부른 샌드페블즈(서울대)가 대상이었고, ‘하늘’을 부른 박희선(상명대)이 금상을, ‘가시리’를 부른 이명우(충남대)가 은상을 수상했다. 대학생들의 노래경연대회라는 신선한 기획이 주효하여 대부분의 수상곡들이 히트곡이 됐다. 특히 ‘젊은 연인들’은 잔잔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노랫말로 큰 인기를 얻었지만 정작 멤버들은 가수활동을 이어가지 않았다. ‘젊은 연인들’의 노랫말을 둘러싼 확인되지 않은 사연들도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조난사고로 희생당한 선배들을 기리며 가사를 썼다는 설도 있지만 이를 확인해 줄 작사자는 세상에 없다.

1979년에는 이광조와 엄인호, 이정선이 만든 프로젝트 그룹 ‘풍선’이 리메이크하여 부르기도 했다. 서울대트리오의 맏형이었던 정연택은 명지전문대 세라믹·텍스타일과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민병호와 민경식은 전공을 살려 건축가로 일하고 있다.



[21] 콜드플레이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

2017년 서울 잠실운동장에서 펼쳐졌던 콜드플레이 내한공연 때 4만 관객들의 떼창은 리더인 크리스 마틴을 감동케 했다. 그는 인터뷰마다 한국 공연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콜드플레이는 한국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그룹이다. 대표곡 중 하나인 ‘비바 라 비다’는 노랫말부터 묵직하다.
[노래의 탄생]콜드플레이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

“나는 한때 세상을 지배했었지/ 내 말 한마디에 바다가 솟아 올랐지/ 이제 난 아침에 홀로 잠자고/ 내가 한때 지배했던 거리를 청소하지/ (중략) /한때 난 열쇠를 쥐고 있었지만/ 다음 순간 사방 벽이 나를 에워쌌지/ 그리고 난 발견했지, 나의 성은/ 소금기둥과 모래기둥 위에 서 있었다는 걸”

크리스 마틴은 멕시코의 비극적인 화가 프리다 칼로가 말년에 수박을 그린 정물화에 써 넣은 ‘인생이여 만세(Viva La Vida)’에서 제목을 차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랫말은 하루아침에 권좌에서 밀려난 권력자의 탄식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노래 속 왕은 누구인가? 이 앨범의 재킷에는 프랑스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명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자리 잡고 있다. 1830년 7월혁명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가 절대군주 체제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한 민중 봉기를 그렸다. 왕은 샤를 10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기다리지/ 내 머리가 은쟁반에 올려지기를” 등의 노랫말 때문에 성서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헤롯왕 앞에서 춤을 춘 살로메가 그 대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원했고, 헤롯왕은 요한의 목을 쳐 은쟁반 위에 담아오게 했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베이스 주자인 베리맨은 “왕국을 잃어버린 왕에 대한 이야기”라면서 “독재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목소리를 담았지만 결국 인간은 죽음 앞에서 미약한 존재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귀네스 팰트로와 이혼한 뒤 제니퍼 로렌스를 거쳐 다코타 존슨을 만나는 크리스 마틴 때문에 불편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이 노래마다 보여주는 철학적인 가사와 힘 있는 멜로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22] 최성원, 제주도의 푸른 밤


제주는 유배와 통곡의 땅으로 기억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힐링의 땅이기도 하다.
[노래의 탄생]최성원, 제주도의 푸른 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린 싫어요/ 신문에 TV에 월급봉투에/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달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신혼부부 밀려와 똑같은 사진 찍기 구경하며/ 정말로 그대가 재미없다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르매가 살고 있는 곳.’

얼마나 많은 이들이 노래를 들으며 가슴이 일렁였을까. 1988년 ‘들국화’의 최성원이 발표한 이 노래는 후배들의 리메이크가 잇따르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스테디송이 됐다.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 못지않게 어디론가 떠나라고 자극하는 노래다.

‘들국화’의 해체로 상처 받은 최성원은 마음을 정리하러 부산에 갔다가 불현듯 제주도행 밤배에 올라탔다. 제주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음악을 하는 선배뿐. 그는 선배집에 머물면서 서울에 사는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풍요를 누리는 선배의 딸 푸르매양을 만났다. ‘제주도의 푸른 밤’은 바다와 친구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푸르매양에게 선물한 노래였다.

록그룹의 베이시스트 최성원은 그가 만든 ‘그것만이 내 세상’과 ‘매일 그대와’ 등의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보기 드문 감성의 소유자다.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인 아버지 최영섭의 재능을 물려받은 그는 노래를 만드는 데 있어서 천재성을 보였다. 한때 록신에 베이시스트로 몸 담았지만 김민기와 조동진을 필두로 정태춘, 유재하, 조규찬, 유희열, 이적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포크음악 계보의 앞쪽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다. 최성원이 발굴한 이적의 음악에서 최성원의 그림자가 물씬 풍기는 것도 그런 이유다.

최성원도 존경하던 선배 조동진처럼 제주도로 이주하여 라디오 DJ를 하는 등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그와 음악적 맥을 같이하는 장필순, 이상순(이효리도 있다), 루시드 폴 등이 제주로 이주한 건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어느 해보다 더운 올여름에 모든 것 훌훌 버리고 떠나고 싶은 이들이 많았으리라. 노래는 어쩌면 상상 속의 일탈을 돕는 매개체가 아닐까.


[23] 휘트니 휴스턴 ‘아윌 얼웨이즈 러브 유’

“만약 내가 (당신 곁에) 있다면 당신 앞길에 방해만 될 거예요/ 그러니 가겠어요. 그러나 나는 알죠/ 가는 걸음걸음마다 당신을 생각할 거란 걸(If I should stay, I would only be in your way/ So I’ll go, but I know/ I’ll think of you ev’ry step of the way)”
[노래의 탄생]휘트니 휴스턴 ‘아윌 얼웨이즈 러브 유’

나지막하게 읊조리다가 참았던 슬픔이 터져 나오듯 ‘앤 아윌 얼웨이즈 러브 유’로 이어지는 휘트니 휴스턴의 이 노래는 영화 <보디 가드>의 주제곡이다. 1992년 제작된 <보디 가드>는 휘트니 휴스턴이 직접 출연하여 미국에서만 1억2000만달러의 흥행수익을 기록했으며 주제곡은 빌보드 싱글차트 14주 연속 1위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원래 싱어송라이터로 유명한 돌리 파튼이 1974년 중저음의 나직한 목소리로 발표한 노래였다. 휘트니 휴스턴이 작곡가의 추천을 받아 주제곡으로 부르면서 가창력의 정점을 보여준 것이다. 돌리 파튼의 노래에는 전주가 있었지만 캐빈 코스트너가 제안하여 도입부에 멜로디를 걷어냈다. 영화앨범은 1700만장이 판매되어 아직까지 역대 1위 기록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그러나 휘트니 휴스턴은 영화와 달리 ‘인생의 보디가드’를 잘못 만나면서 추락하기 시작한다. 연하의 가수 바비 브라운과 결혼한 이후 가정폭력에 시달린다는 뉴스와 마약과 약물복용 소식도 들려왔다. 리듬앤드블루스의 본령을 외면하고 지나치게 대중성을 강조하는 팝적인 노래에 빠져있다는 비평가들의 지적도 그녀를 괴롭혔다. 1999년 친구이자 매니저 로빈마저 떠나자 완벽한 고음은 술과 마약으로 손상돼서 쇳소리만 남았다.

2012년 2월 그래미 시상식 전야제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던 그녀는 베벌리힐튼호텔 4층 자신의 방 욕조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불과 48세의 젊은 나이였다. 몇 년 전에는 그녀의 딸마저 세상을 떠나서 팬들을 슬프게 했다.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영화가 국내에서도 개봉한다. 평소 ‘Can I Be Me?’라고 자주 말했던 그녀는 부와 명성을 다 가졌음에도 끝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 채 세상과 작별했다. 그러나 언제 들어도 속이 후련한 노래로 우리를 위로했던 ‘팝의 디바’였음은 분명하다.


[24] 송창식 ‘고래사냥’

송창식은 평가절하된 싱어송라이터다. 따져보면 그의 ‘은둔형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잠실종합운동장에 수만명을 모아놓고 노래를 해도 모자랄 대형가수가 몇몇 술손님을 놓고 미사리에서 노래하고 있다니. 그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아니다. 그냥 좀 그렇다는 거다.
[노래의 탄생]송창식 ‘고래사냥’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요즘 청춘들이 노래 때문에 여수 밤바다로 몰려간다면 1970년대와 80년대 청춘들은 이 노래 때문에 동해바다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고래를 잡으러 가기보다는 사방이 꽉 막힌 현실에 대한 울분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이 노래는 1975년 개봉했던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OST 중 한 곡이었다. 최인호 소설가가 극본을 쓰고, 하길종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군입대를 앞둔 비루한 청춘들의 방황과 좌절을 소재로 했지만, 실은 유신정권의 폭압을 반항적 문법으로 그린 영화였다.

최인호는 ‘고래사냥’의 가사를 송창식에게 주며 답답한 현실에 얽매어 있는 청춘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줄 노래로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청춘들의 이상과 꿈을 ‘고래’로, 꿈을 좇는 여정을 ‘사냥’으로 치환한 노래였다. 송창식은 앉은 자리에서 뚝딱 노래를 만들었다. 그의 노래는 영화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당시 공연윤리위원회는 최인호를 불러 ‘고래’가 의미하는 게 뭔지 추궁했다. 때마침 같은 영화의 OST인 송창식의 ‘왜 불러’가 장발 단속을 하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주인공들의 도주 장면에 삽입되어 문제가 됐던 참이었다. 결국 이 노래는 ‘왜 불러’와 함께 금지곡으로 묶였다. 염세적이고 퇴폐적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금지된 것에 매력을 느끼던 청춘들에게 ‘고래사냥’은 시도 때도 없이 불리는 애창곡이 됐다. 대학가의 선술집에서, 엠티(MT)를 가던 기차 안에서, 때로는 시위 현장에서까지 불렸다. 당시 청년문화의 기수였던 하길종도,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최인호도 이젠 없지만 그들이 그려낸 청춘의 벽화는 여전히 아름답다. 문득 송창식의 ‘철 지난 바닷가’를 들으며 바닷가를 걷고 싶다.



[25] 조동진 ‘나뭇잎 사이로’

미국에 밥 딜런이 있다면 우리에겐 조동진이 있다. 그가 떠난 지 벌써 1년.
[노래의 탄생]조동진 ‘나뭇잎 사이로’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고 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여린 별 하나/ 그 별빛 아래로 너의 작은 꿈이.’

‘행복한 사람’부터 ‘제비꽃’ ‘겨울비’ ‘흰눈이 하얗게’ 등 그의 노래들은 시인의 감성을 뛰어넘는다. 한 시절, 그의 새 노래가 나올 때마다 탁월한 서정에 감탄하면서 듣고 또 들었다. 그가 동아기획을 떠나 동생 조동익, 장필순, 더클래식의 박용진 등과 하나음악을 꾸려갈 때 기자와 취재원 사이로 처음 만났다. 그의 말은 노래보다도 느렸다. 덕분에 길고 긴 취재를 할 수 있었다.

조동진이 유명해진 건 1978년 ‘행복한 사람’이 담긴 첫 앨범을 내면서부터였다. 그의 절창 중 한 곡인 ‘나뭇잎 사이로’는 1980년 발매한 2집 앨범 수록곡이었다. 그가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하던 그룹 ‘동방의 빛’ 멤버였던 강근식, 배수연, 조원익, 이호준 등이 함께 참여했다. 이 앨범은 당시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도화선이 됐고, 조동진은 얼굴 없는 가수의 효시가 됐다. 조동진이 가요계에 데뷔한 건 첫 앨범 발표 훨씬 전인 1960년대 말이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2학년을 마친 뒤 휴학한 그는 명동 ‘오비스 캐빈’ 무대에 섰다. 1972년 조동진은 송창식, 이장희 등과 옴니버스 앨범에 참여하여 ‘작은 배’를 발표했다. 정릉 골짜기 술집에서 만난 시인 고은이 써준 가사에 곡을 붙인 노래였다. 조동진은 “시장 바닥에 죽어서도 히죽 웃고 있는 돼지머리를 보면 우리 고민이 무색해져”라면서 호탕하게 웃던 고은과의 만남이 자신의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고 술회했다.

오는 15일 하나음악의 후신인 푸른곰팡이 소속의 아티스트들과 조동진 음악을 계승하는 후배들이 모여 추모음악회를 갖는다. 모든 문화 콘텐츠가 상업적 성취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시대를 거스르며 살다간 조동진의 과묵했던 발걸음이 그립다. 레너드 코헨을 닮은 조동진은 우리에게 천천히 걸어야 별도 보이고 달도 보인다는 걸 가르쳐 준 아티스트였다.


[26] 마이클 잭슨 ‘빌리 진’


‘빌리 진은 내 사랑이 아냐/ 중략/ 그녀는 내가 아버지라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아들이 아냐(Billie Jean is not my lover/ 중략 /She says I am the one, But the kid is not my son)’
[노래의 탄생]마이클 잭슨 ‘빌리 진’

마이클 잭슨처럼 뉴스의 표적이 됐던 인물이 또 있을까? ‘빌리 진’은 마이클 잭슨의 아들을 낳았다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마이클 잭슨은 수많은 여성 스토커들에게 시달렸다. 특히 자신의 아들이나 딸이 마이클 잭슨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빌리 진’을 작사, 작곡한 계기에 대해 “‘잭슨 5’ 시절부터 형들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여성 팬들을 많이 봐왔다. 빌리 진은 수많은 오빠부대 중 한 명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 곡의 프로듀서였던 퀸시 존스는 “어느 날 잭슨의 수영장에서 놀던 한 여성이 자신의 쌍둥이 자녀 중 한 명이 잭슨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걸 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잭슨의 전기작가인 랜디 타라보렐리도 “어느 날 여성 스토커가 보내온 소포 속에 총과 함께 자신의 아이 중 한 명이 잭슨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편지가 있었다”면서 잭슨은 이 일로 악몽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빌리 진’은 7주 동안 빌보드 팝 싱글차트 정상 자리를 지켰고, 마이클 잭슨 최고의 앨범이자 1억400만장이 팔린 <Thriller>의 수록곡이 됐다. 그러나 당시 인종차별적 태도를 보였던 MTV는 ‘빌리 진’의 뮤직비디오를 방영하지 않았다. 잭슨의 소속사였던 CBS레코드가 소속 가수들의 뮤직비디오 방영을 불허하자 그때서야 방영했다. 잭슨은 작사, 작곡 실력에도 불구하고 늘 의심을 받아야 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를 보고 ‘이봐, 그 곡을 진짜로 누가 쓴 거지’라고 물어왔다. 나를 위해 곡을 쓰는 사람이 우리 집 차고에라도 숨어있다는 말인가”라며 분노했다.

‘빌리 진’의 ‘문워크 춤’은 팝음악계의 전설이다. 이 춤은 미국 슬럼가 흑인 어린이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전 세계에서 잭슨과 동시대에 살면서 그의 춤을 따라해보지 않은 청춘들이 과연 있을까? 아프리카 기아 난민의 어린이들을 위해 ‘위 아더 월드’를 만들고 기금 모금 콘서트를 통해 3000억원을 기부한 그가 떠난 지도 벌써 10년이 다 돼 간다.



[27] 정태춘, 북한강에서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리를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리를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노래의 탄생]정태춘, 북한강에서

그의 노래에는 상징과 은유, 아름다움과 냉철함이 공존한다. 일찍이 정태춘은 시인의 예감으로 그것들을 건져 올려 노래로 펼쳐 보였다.

그의 시작은 서정시인이었다. 1978년 ‘시인의 마을’이나 ‘촛불’이 그러했다. 그러나 1980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는 흰 고무신에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현장을 누비는 투사로 변신했다. ‘북한강에서’는 1986년 아내인 가수 박은옥과 발표한 앨범의 수록곡이다. 정태춘은 아이러니하게도 예비군 동원훈련장으로 가는 트럭 위에서 이 곡을 썼다. “당시 송파구 가락아파트에 살았죠. 새벽 댓바람부터 인근 여고 운동장에 모여서 트럭을 타고 북한강가에 있던 예비군훈련장으로 갔어요. 그 넓은 강을 보면서 가사와 악상이 떠올랐죠.”

민중들의 도도한 흐름이 저 강물과 같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먹구름이 머리를 짓눌러도 찬물로 얼굴을 씻고 새로운 강물에 발을 담그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떠나가는 배’나 ‘서해에서’ 등 그의 노래는 늘 뜨거운 감성과 차가운 이성이 공존하는 목소리로 치열했던 우리네 삶을 얘기해왔다. 그가 문화운동가로서 주한미군 문제, 노동자들의 권익, 가요 사전 심의 문제 등과 싸워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초지일관하는 예술적 의지 덕분이다. 지난 촛불집회 때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정태춘은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부르면서 이렇게 외쳤다.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시집도 내고, 사진전도 열고, 가죽공예도 하는 정태춘이지만 본령은 노래다. 내년이면 노래 인생 40년, 그의 새로운 목소리가 기다려진다.


[28] 레드 제플린, 스테어웨이 투 헤븐

‘반짝이는 건 모두 금이라고 믿는 여인이 있어요./ 그녀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사려고 하지요.’(There’s a lady who’s sure all that glitters is gold./ And she’s buying the stairway to heaven.)
[노래의 탄생]레드 제플린, 스테어웨이 투 헤븐

1971년이 저물 무렵 선보인 레드 제플린의 4집 앨범은 태생부터가 남달랐다. 재킷에는 나무 등짐을 진 노인의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앨범 타이틀, 밴드 이름, 멤버 사진도 없었다. 속칭 ‘타이틀 없는 4집 앨범’에 수록된 ‘스테어웨이 투 헤븐(Stairway To Heaven)’은 팬들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파격적인 곡 구성과 문제적 노랫말,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문법을 담고 있었다. 음악다방이 유행하던 1970년대 DJ들은 이 곡을 플레이해놓고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했다. 무려 8분짜리 대곡이었고, 그만큼 리퀘스트도 많았다.

지미 페이지는 발라드풍으로 시작하여 크레센도(점점 세게)로 마무리되는 교향악 같은 노래를 썼다. 중간 부분에 지미 페이지의 기타와 존 본햄의 드럼이 주고받으면서 폭발하고, 보컬인 로버트 플랜트가 절규할 때면 듣는 이를 전율케 한다.

플랜트가 쓴 노랫말은 천국과 지옥, 삶과 죽음을 얘기한다. 그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에서 종이와 펜을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손이 마구 글을 써내려갔다”면서 “첫 문장을 쓰고 난 뒤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고 회고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영혼을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노랫말은 구약 성경이나 고대 켈트족의 신화 속 문장들을 떠올리게 한다. 천국의 계단은 구약 창세기 28장 12절의 ‘야곱의 사다리’를 연상케 하고, 켈틱 문화에서 만날 수 있는 신비주의와 주술적 이미지도 노랫말 곳곳에서 드러난다. 돈으로 천국으로 가는 계단도 살 수 있다고 믿던 한 여인이 실패와 성찰을 통해 그런 삶이 무가치함을 깨닫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요즘처럼 하늘이 높은 가을, 사다리를 놓고 몇 걸음만 오르면 감히 천국을 훔쳐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물론 배경음악이 중요하지만 말이다.


[29] 산울림 ‘아니 벌써’


“대학 1학년 때 고물상에서 기타 교본과 1500원짜리 세고비아 통기타 2대를 사서 교본의 첫 장에 나오는 D코드를 잡으며 30분 동안 쳤어요. 그 소리가 참 아름다워 음악을 하게 됐죠.”(김창완)
[노래의 탄생]산울림 ‘아니 벌써’

김창완, 창훈, 창익으로 결성된 3형제 그룹 산울림의 시작은 차고에서 창업한 스티브 잡스와 다를 바 없었다. 왕십리 시장에서 구해온 계란판으로 방음을 하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만들었다. 그들이 대마초 파동으로 된서리를 맞은 가요계를 바꿀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환하게 밝았네/ 가벼운 아침 발걸음/ 모두 함께 콧노래 부르며/ 밝은 날을 기다리는/ 부푼 마음 가슴에 가득/ 이리 저리 지나치는/ 정다운 눈길 거리에 찼네.’

감수성과 실험성이 듬뿍 배인 사운드와 동요 같은 노랫말,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듯한 재킷까지 참신함이 넘쳤다. 시작은 1977년 MBC 대학가요제에 서울대 농대 그룹 샌드 페블스가 ‘나 어떡해’로 대상을 수상한 것이 계기였다. 둘째 창훈이 이 곡을 작곡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음반 제안이 들어왔다. 처음엔 기념앨범 한 장을 갖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큰형이자 리더 김창완의 은행 입사 시험 날짜와 레코딩 날짜가 겹쳤다. 은행 시험을 포기하고 녹음을 했다. 김창훈의 베이스는 국산 싸구려 기타, 김창완은 필리핀 밴드가 버린 중고 기타여서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음악평론가 이백천에게 악기를 빌려 재녹음을 했다. 총 9곡을 담은 데뷔 앨범이 발표되자 대중의 ‘괴상한 음악이 나왔다’는 반응 속에 단 20일 만에 신드롬에 가까운 돌풍으로 이어졌다. 1978년 문화체육관 첫 단독 콘서트. 공연장에서부터 덕수궁 앞까지 관객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관객들이 던진 꽃으로 무대는 꽃밭이 되었다.

사랑이나 이별 얘기도 없는 노래로 주류 음악 시장을 단숨에 평정한 것은 전무한 일이었다. 전통적인 화법에 머물던 가요계의 지형도를 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산울림 형제들은 생활고 때문에 그룹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0] 김동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람은 죄가 될 테니까.’
[노래의 탄생]김동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된 이 곡은 10월이면 자주 들리는 노래다. 10월의 신부들을 기쁘게 하는 결혼식 축가로도 사랑받고 있다.

이 노래는 노르웨이 출신 그룹 시크릿가든의 리더인 롤프 뢰블란이 만들었다. 1992년 노르웨이 가수 엘리자베스 안드레아센이 처음 부른 뒤에 안네 바다도 뒤따라 불렀다. 우리에게는 가을 노래로 익숙하지만 원래는 봄을 소재로 한 노래였다. 1996년 시크릿가든의 연주곡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될 때 제목은 ‘봄의 세레나데(Serenade to spring)’였다. 노랫말 역시 봄과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당신의 오감을 깨워서 활기찬 봄을 느껴보라’면서 ‘남은 생애에서 가장 젊은 봄날인 오늘, 당신과 함께 왈츠를 추고 싶다’고 노래한다.

이 노래가 10월과 인연을 맺게 된 데는 작사가 한경혜의 역할이 컸다. 2000년 봄 호주에 가면서 작사를 의뢰받았다. 누가 쓴 곡인지도 모른 채 연주곡만 넘겨 받았다. 한경혜는 김종서의 ‘아름다운 구속’을 비롯해 김태영의 ‘혼자만의 사랑’, 김건모의 ‘사랑이 떠나가네’ 등 굵직한 히트곡을 써서 주가가 높았다.

“연인들을 위한 사랑 노래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엄마가 된 기쁨을 담았어요. 제 아들이 10월에 태어났거든요. 5월경에 시드니에 체류하면서 완성했는데 그곳은 가을이었어요. 한 생명을 얻은 기쁨과 가을 느낌을 담아서 쓴 곡이죠.”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의 너는 아들이었다. 처음엔 ‘5월의 어느 멋진 날에’였지만 노래 분위기상 10월로 바꿨다. 아들이 중학교 시절에 ‘나를 생각하면서 엄마가 쓴 곡’이라고 했지만 친구들이 믿지 않아서 집에까지 확인하러 오기도 했다. 김동규를 시작으로 조수미, 임태경, 배다해 등이 불렀다. 시크릿가든의 첫 내한공연 때 이 노래가 한국에서 유명해진 것을 몰라서 플레이리스트에 없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31]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는 한국인들에게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만큼이나 유명한 노래다. 이글스는 잘 몰라도 이 노래는 알고 있을 정도다.
[노래의 탄생]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

‘캘리포니아 호텔에 잘 오셨어요/ 너무나 아름다운 곳/ 호텔 캘리포니아엔 방이 많아요/ 일년 내내 아무 때나/ 방이 있어요(Welcome to the Hotel California/ Such a lovely place/ Plenty of room at the Hotel California/ Any time of year/ You can find it here)’

2011년 내한공연 때 객석을 채운 1만여명 관객들은 마치 광신도들 같았다. 1976년 동명의 앨범으로 발표된 이 노래는 트윈기타가 내는 사운드와 관능적인 레게리듬이 귀를 사로잡는다. 노래를 듣다보면 온몸을 휘감는 열기에 빠져든다.

인기만큼이나 이 노래를 둘러싼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호텔의 ‘H’는 헤로인을, ‘C’는 코카인을 의미한다면서 중독되면 헤어나올 수 없는 약물에 대한 위험성을 얘기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노랫말에 언급되는 티파니 보석, 메르세데스 벤츠 등 자본주의의 상징물을 통해 황금과 권력의 유혹에 빠진 여인에게 보내는 경고라는 해석도 있다. 노랫말을 쓴 멤버 돈 헨리는 “아메리칸드림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성찰이자 양적 팽창에 빠져 있는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고 얘기한 바 있다.

노래가 유명해지자 ‘호텔 캘리포니아’ 위치를 두고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원래 앨범 재킷에는 LA 선셋대로에 위치한 핑크 팰러스 호텔의 사진이 들어가 있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자주 출입하는 유명 호텔이다. 멕시코의 해변 휴양지 토도스 산토스에 있는 동명의 호텔 주인은 이글스가 유명해지기 전 자신의 호텔에 묵으면서 쓴 노래라고 주장했지만 멤버들이 거짓이라면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정신병원을 의미한다는 주장부터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악명 높은 캘리포니아 감옥을 상징한다는 얘기까지 말도 탈도 많다.

여하튼 ‘여긴 천국이 아니면 지옥일 거야(This could be Heaven or this could be Hell)’라는 노랫말처럼 그곳이 천국이든 어디든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32] 메탈리카 ‘엔터 샌드맨’


[노래의 탄생]메탈리카 ‘엔터 샌드맨’미국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가 한창이다. 전설적인 마무리 투수로 이름을 떨쳤던 뉴욕 양키즈의 마리아노 리베라가 등장할 때마다 울려 퍼졌던 노래가 있다. 메탈리카의 ‘엔터 샌드맨(Enter Sandman)’이 그것이다.

양키즈 팬들에겐 승리의 전주곡이었지만 상대편에겐 기분 나쁜 노래였다. 그는 19시즌 동안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면서 82승 60패 652세이브를 기록한 전설의 투수였으니 상대편에게는 다 된 밥에 모래를 뿌려대는 괴물과 다름이 없었다.

‘이불을 덮어주마, 그 안은 따뜻해/ 죄악으로부터 널 지켜줄게/ 샌드맨이 올 때까지/ 한 눈을 뜨고 자렴/ 베개를 꼭 껴안고(Tuck you in, warm within/ Keep you free from sin/ Till the sandman he comes/ Sleep with one eye open/ Gripping your pillow tight)’.

메탈리카가 1991년 발표한 이 노래는 보컬리스트인 제임스 헤트필드가 가사를 썼다. 원래 샌드맨은 독일의 민간설화에 등장하는 잠의 요정이다. ‘잠잘 시간이야(The sandman is coming)’라는 표현처럼 샌드맨은 잠을 자지 않는 어린이들을 찾아다니면서 눈에 모래를 뿌려 잠들게 하는 설화 속 존재다. 동화에서는 물론이고 만화, 소설, 마블의 영화 등에 자주 등장한다.

헤트필드는 사운드가 대중적이었기에 가사에는 소름이 돋는 느낌을 담으려고 샌드맨을 등장시켰다. 그러나 드러머 라스 울리히와 프로듀서 밥 록은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면서 대중적인 인기도 거머쥐었다. 대중음악 평론가 로버트 파머는 ‘최초의 메탈 자장가’라면서 극찬했다. 이 곡의 인기 덕에 앨범 <Metallica>는 전 세계적으로 2200만장 이상을 판매했다.

2013년 열린 리베라의 영구결번 기념행사에 메탈리카가 야구장에 와서 이 곡을 직접 불렀다. 재미있는 사실은 리베라가 오랫동안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구였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또 메탈리카 멤버들은 대부분 뉴욕 양키즈의 라이벌 중 한 팀이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팬이라고 한다.


[33]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대중음악계에서 11월은 괴담의 계절이었다. 유독 이 시기에 많은 가수들이 요절을 했다. 그중에서도 유재하는 채 피어나기도 전에 져버린 음악 천재였다.
[노래의 탄생]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1987년 그가 선보인 첫 앨범은 클래식에 기반을 두고 다양한 대중가요의 방법론을 제시한 걸작이었다. 앨범을 발표한 지 3개월 뒤인 11월1일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는 단 한 장의 앨범으로 음악계의 판도를 바꿨다.

한양대 작곡과 3학년 때 그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로 음악계에 발을 내디뎠다. 훗날 김형석과 정재형 등 같은 과 후배들이 그의 뒤를 따랐지만 당시만 해도 클래식 학도가 대중음악을 하면 손가락질을 받는 시기였다. 유재하는 ‘위대한 탄생’의 베이시스트였던 송홍섭에게 자신의 곡을 조용필이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청했다. 송홍섭은 유재하의 집에서 받아온 노래들을 조용필에게 들려줬고, 1985년 발표한 7집 앨범에 ‘사랑하기 때문에’가 수록됐다. 졸업 후 유재하는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조동진, 김민기, 이문세, 김현식, 김광민, 한영애 등 음악계 선배들과도 폭넓게 교류했다. 그와 친분이 깊던 한 가수는 그가 만든 노래 분위기와는 달리 상당히 사교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미소년 같은 외모 때문에 여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고. 때로는 연습실 등에 여자친구를 데리고 나타나서 선배들로부터 눈총을 받기도 했다고.

유재하는 ‘위대한 탄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로 안주하기엔 음악적 열망이 너무 컸다. 결국 800만원의 자비를 들여 서울음반에서 첫 앨범을 냈다. 신인가수는 방송 출연으로 인지도를 높여야 하는 시절이었지만 PD들은 가창력 미달을 이유로 출연시켜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 1집 수록곡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부른 게 거의 유일한 공연 영상이다.

어쨌든 그가 남긴 단 한 장의 앨범은 각종 조사에서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등 음악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 유재하음악경연대회를 통해 진정성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후배들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의 죽음이 아쉽다.


[34] 빌리 조엘 ‘피아노맨’


지금부터 40여년 전 무명의 피아노맨이 LA 윌셔가와 웨스턴 애비뉴 교차로에 있는 술집에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의 예명은 빌 마틴. 토요일 9시 단골손님이 하나둘 모여들고 옆자리 중년은 진토닉을 음미한다. 그는 말한다. 추억은 조금 슬프지만 달콤하니 추억을 연주해 달라고. 피아노맨, 오늘 밤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바텐더는 피아노맨에게 공짜술을 가져다 주고, 분위기는 한껏 달아오르며 모두들 조금씩 취해간다. 피아노맨의 여자 친구인 웨이트리스는 손님들의 추파를 잘도 피한다. 그들은 그곳에 모여 외로움이라는 술을 나눠 마신다. 술 취한 그들이 바에 앉아 노래를 듣다가 팁을 주면서 말한다.
[노래의 탄생]빌리 조엘 ‘피아노맨’

“여보게, 자네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Man, what are you doing here?)”

그는 ‘피아노맨’으로 유명한 빌리 조엘이었다. 전 세계에서 1억장을 판매한 빌리 조엘은 살아 있는 팝의 전설로 ‘어니스티’ ‘업타운 걸’ 등 히트곡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뉴욕에서 태어나 자란 빌리 조엘은 피아니스트이자 권투선수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여러번 가수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1971년 데뷔 앨범 <콜드 스프링 하버>를 내놨지만 여전히 무명이었고, 생업을 위해 LA에서 노래하면서 재기를 도모했다. ‘여기서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 끝에 다시 도전해 2집 앨범 <피아노맨>(1973년 11월, 컬럼비아 레코드)을 발매했다. 빌보드 27위, 미국에서만 400만장이 팔렸다.

그는 3년여의 LA 생활을 접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잇따라 뉴욕에 관한 노래들을 발표하면서 그는 뉴욕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됐다. 2008년 백발의 빌리 조엘이 한국을 찾았을 때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피아노의 울림처럼 청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팬들은 떼창으로 응답했다. 그는 당시 “‘피아노맨’이라는 타이틀에 대해 싫어하거나 남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면 한 적은 없었다”면서 “수많은 피아노맨들 중에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건 내가 그만큼 아이콘이란 얘기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은 때로 삶을 뒤흔들 수도 있다.


[34] 최백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 지면 서러움이 더해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눈길을 걸으며 눈길을 걸으며/ 옛일을 잊으리다//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안갯속에 가로등 하나/ 비라도 우울히 내려 버리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노래의 탄생]최백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몇 해 전 내가 기획에 참여했던 공연에서 최백호가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늦가을이었고, 낙엽은 거리를 뒹굴었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그러더니 봇물처럼 터져서 멈출 수가 없었다.

나이 들어서 노래가 깊어지는 가수를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단연 최백호다. 젊은 최백호가 겉절이처럼 싱그럽게 노래를 했다면 지금의 최백호는 묵은지처럼 웅숭깊게 노래한다. 그는 이 노래를 가장 몰입해서 부르는 노래로 꼽는다.

1950년 부산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난 최백호는 29세 약관의 나이로 부산 영도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됐던 아버지 최원봉씨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생후 5개월 무렵이었다.

1970년 스무 살 가을에 어머니마저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그는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울었다. 세상의 전부였던 어머니였다. 그때 애절한 심정으로 써 놓았던 글이 가사가 됐다.

데뷔를 앞두고 당시 무명의 작곡가였던 최종혁에게 보여줬더니 곡을 붙였다. 선배 가수 하수영의 주선으로 서라벌레코드에서 당시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던 윤정하와 합동앨범을 냈다.

그러나 노래가 큰 반향을 일으키자 1977년 초 독집으로 찍어서 재발매했다. 어머니를 그리며 부른 사모곡이지만 팬들에게는 애절한 이별노래로 들렸던 것이다.

‘영일만 친구’부터 최근 ‘부산에 가면’에 이르기까지 최백호의 히트곡들이 많지만 늦가을에 부르고 듣기에 이만 한 명곡이 있을까. 그는 요즘도 아침에 일어나면 두 시간 동안 곡을 쓰고 노래 연습을 한다. 그가 박주원이나 아이유 등 당대의 젊은 가수들과 협업을 할 수 있는 것도 노력의 결과물이다. 첫눈이 오기 전에 덜컹거리는 부산행 열차를 타고 흔들리면서 그의 노래를 들어야겠다.


[35] 퀸, 위 윌 록 유

록그룹 퀸을 향한 당대의 열광을 단순한 복고적 문화현상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들의 전성기로부터 40년이 지나서 인기가 ‘역주행’하는 현상을 보고 프레디는 뭐라고 할까. 영화 제목의 영향으로 ‘보헤미안 랩소디’가 회자되고 있지만 ‘위 윌 록 유’ 역시 퀸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곡이다. 1977년 ‘위 아더 챔피언’과 함께 발표된 이 노래는 공연장과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있는 현장에서 줄곧 사랑받아 왔다. ‘위 윌 록 유’는 브라이언 메이가 만들었고, ‘위 아 더 챔피언’은 프레디 머큐리가 만들었다. 두 노래가 늘 쌍둥이처럼 붙어다녀서 일부 팬들은 한 곡으로 여기기도 했다. 영화에서 재현된 1985년 7월 라이브에이드 공연에서도 두 곡을 연속해서 선보였다.
[노래의 탄생]퀸, 위 윌 록 유

‘쿵쿵짝, 쿵쿵짝’의 단순 명료한 리듬으로 시작하여 기타 솔로가 시작되는 부분까지는 음악이라기보다는 응원 현장의 구호처럼 들린다. 실제로 브라이언은 이 노래를 영국 투어공연 때 팬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이 앙코르 요청 때 축구클럽 리버풀의 응원가인 ‘유 윌 네버 워크 얼론’을 불렀다. 여기에 감명받은 브라이언은 꿈속에서 악상이 떠올라 공연 때마다 팬들과 혼연일체가 될 수 있는 ‘발구르기 효과’로 시작되는 노래를 만든 것이다. 멤버들은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는 사운드를 오버 더빙한 뒤 딜레이 이펙트를 활용하여 마치 수천명이 참가한 듯한 효과를 냈다. 녹음 때 물리학 지식이 풍부했던 브라이언이 맹활약했다.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로저 워터스의 저택 뒷마당에서 촬영했다. 눈발이 휘날리는 날씨에 멤버들은 가죽 재킷을 입고 다이내믹한 장면을 연출했다. 뮤직비디오 속 프레디가 착용한 별모양의 선글라스는 엘튼 존이 선물한 것이었다.

이 노래는 2002년 런던에서 초연된 뒤 지금도 공연 중인 퀸 뮤지컬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이 시기에 프레디는 전설적인 무용수 니진스키를 존경한 나머지 타이츠 의상으로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하나. 쌍둥이 격인 노래 ‘위 아 더 챔피언’을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 후보가 캠페인 곡으로 사용하자 퀸은 사용금지를 요청했다.


[36] 사랑과 평화 ‘한동안 뜸했었지’


1975년 12월. 싱어송라이터이자 잘나가는 라디오 DJ였던 이장희는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대마초 파동 때문이었다. 구치소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발을 보면서 노래를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출소 이후 명동에서 신사복 매장을 운영했다.
[노래의 탄생]사랑과 평화 ‘한동안 뜸했었지’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망은 대마초보다 더 질겼다. 미8군 무대에서 인상 깊게 본 밴드 ‘서울나그네’에게 앨범을 내자고 제안했다. 최이철, 김명곤, 이남이 등 멤버들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실력만큼은 최고였다. 팀명을 한글로 짓기로 하고 서로 논의한 결과 이남이가 제안한 ‘사랑과 평화’로 했다. 1978년 이장희는 자신의 아내, 아들, 친구 등의 이름으로 ‘사랑과 평화’를 위한 노래를 내놨다. 활동금지 중이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뜸했었지/ 웬일일까 궁금했었지/ 혹시 병이 났을까 /너무 답답했었지 /안절부절했었지/ 한동안 못 만났지/ 서먹서먹 이상했었지/ 혹시 밤에 병이 났을까/ 너무 답답했었지’

‘속절없이 화풀이를 달님에게 해대겠지’에 이어 ‘대겠지’라고 합창하는 펑크록 풍의 ‘한동안 뜸했었지’는 발표와 동시에 ‘대박’이 났다. 그러나 이장희가 이 노래를 들고 퇴계로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멤버들을 찾아갔을 때 대부분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녹음하면서도 이 노래를 빼자고 했다. 그러나 이장희는 “딴 거는 다 하자는 대로 하겠는데 이 노래만큼은 꼭 넣자”고 했다. ‘사랑과 평화’의 멤버들은 당대 미8군 무대에서도 가장 수준급의 연주실력을 뽐내던 팀이었다. 그들의 실력과 수년 동안 음악에 대한 갈증을 참아왔던 이장희의 작곡 실력이 어우러져 수준급의 히트작이 탄생한 것이다.

‘사랑과 평화’의 1집은 요즘도 여전히 명반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멤버들이 하나둘 떠나거나 교체되면서 활동을 길게 이어가지 못했다. 또 이장희마저도 1980년대 초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가 LA에 터를 잡고 라디오방송사 사장으로 변신했다. 그들의 빈자리를 ‘산울림’이 치고 들어왔다면 다소 과장일까.


[37] 비틀스 ‘예스터데이’


해마다 연말이면 유독 자주 들리는 노래가 있다.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다. ‘모든 괴로움은 멀리 있는 듯 했죠(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로 시작하는 노래는 전 세계적으로 1600회 이상 리메이크됐으며 저작권 수익 또한 천문학적이다.
[노래의 탄생]비틀스 ‘예스터데이’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지만 일부 예술가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듯하다. 폴 매카트니는 어느 날 여자 친구 집에서 자고 일어난 뒤 피아노 앞에 앉아 10분 만에 이 곡을 완성했다. 꿈속에서 멜로디가 떠오른 것이다. 그는 너무도 쉽게 떠오른 멜로디가 온전한 내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스크램블 에그’라고 이름 붙여놓고 만나는 사람마다 들려줬다. 표절이 아닌 것이 확인되자 곧바로 가사작업에 돌입했다. 비틀스 멤버들은 당시 영화 <헬프>에 출연 중이었다. 폴 매카트니가 세트장에 있던 피아노를 쿵쾅거리면서 가사에 매달리자 멤버들이 화를 냈다. 그가 베토벤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비난했다. 보다 못한 존 레넌이 한 단어로 제목을 지으라고 조언했다. 결국 매카트니의 23번째 생일을 나흘 앞두고 노래가 완성됐다. 1965년 6월14일 드디어 현악4중주가 가미된 ‘예스터데이’가 탄생한 것이다.

발표와 함께 이 노래는 예상을 뒤엎고 큰 인기를 누렸다. 너무 조용해서 히트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지만 무려 4주간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에 올랐다. 표절 의혹도 없지 않았다. 레이 찰스의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Georgia on My Mind)’, 냇 킹 콜의 ‘앤서 미 마이 러브(Answer Me My Love)’ 등과 유사하다는 시비가 있었다. 밥 딜런도 “미국 국회도서관에 가보면 그보다 훌륭한 악보가 수백만곡이 있다. 그저 싸구려 대중작곡가가 만든 곡 같다”고 혹평했다.

어쨌거나 폴 매카트니는 그의 공연에서 이 노래를 빼놓지 않는다. 서울 공연 때도 모든 관객들이 떼창을 한 몇 안되는 곡 중 하나였다. 2002년 매카트니는 레넌의 부인 오노 요코에게 “이 노래만큼은 매카트니/레넌으로 표기 순서를 바꾸면 안될까”라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하기도 했다.


[38] 김현식 ‘골목길’



프레디 머큐리의 요절이 아쉽듯이 김현식의 죽음도 안타깝다. 우리에게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음악만을 생각했던 가수로 기억된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병원에서 탈출하여 녹음을 했던 열정적인 아티스트로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노래의 탄생]김현식 ‘골목길’1980년대 초 록과 블루스를 지향하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아지트는 서울 동부이촌동 김현식의 자취방이었다. 이정선, 엄인호, 이광조, 한영애, 이주호 등이 매일 모여 술과 음악에 빠져 살았다. 그렇게 어울리던 멤버 중 한 명이던 서 아무개가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진 뒤 그 아픔을 신촌블루스의 엄인호에게 털어놓았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만나면 아무말 못하고서/ 헤어지면 아쉬워 가슴 태우네.’ 엄인호는 그 사연을 듣고 단숨에 노래로 만들어 같은 패거리로 어울리던 가수 지망생 유 아무개에게 주었다. 엄인호는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스캔들로 일찌감치 가요계를 떠나는 바람에 노래의 주인이 없어졌다. 가수 방미 역시 리메이크해서 불렀지만 이 노래가 빛을 본 건 김현식을 만나면서였다. 1989년 신촌블루스 2집 앨범에서 김현식은 이 노래의 맛을 제대로 살렸다. 레게풍의 블루지한 느낌이 김현식의 삼베옷 같은 까칠까칠한 보컬과 어우러져 듣는 이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이 노래가 크게 빛을 본 것은 100만장 판매를 기록한 김현식의 유작 앨범 때문이지만 그 이전에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김현식은 유독 이 노래를 좋아해서 자주 불렀다. 강한 비트와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라이브 무대에서 더욱 빛나는 노래였다.

김현식이 떠난 뒤 유작 앨범의 히트로 영원히 기억할 만한 가수가 됐지만 그의 동료와 후배들은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가 술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고 그를 부추겨서 술을 더 마시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추운 날이면 그가 겨울바다 어디쯤에서 ‘깡소주’를 들이켜면서 씩 웃고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39] 해바라기 ‘사랑으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이 다시 떠 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노래의 탄생]해바라기 ‘사랑으로’

외양만 보면 연말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평범한 사랑 노래다. 그러나 ‘사랑으로’를 작사·작곡한 해바라기의 이주호는 사랑 노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주호가 이 노래를 쓴 시기는 1987년 11월이었다. 시대적 배경부터 살펴보자. 그때는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모두가 경제대국을 꿈꾸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정수라가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라고 노래했던 ‘아 대한민국’(1991)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부동산 투기가 만연하고 증권시장은 활황이었으며 강남 졸부라는 말이 유행했다. 압구정동은 유흥과 환락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주택 200만호 건설로 개발 경기가 타오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조명이 있으면 반드시 어둠이 더 깊은 법이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소외받는 이웃이 더 늘어났으며 빈부의 격차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분배에 대한 사회정의도 요구됐지만 정부는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늘은 되도록 천막으로 가렸다.

어느 날 이주호는 신문 사회면 귀퉁이에 난 기사 한 줄에 눈길이 갔다. 서울 김포공항 근처에 부모도 없이 살아가는 4자매의 이야기였다. 막내는 겨우 3살이었으며 영양실조 등으로 인해서 목숨이 위태롭다는 기사였다. 그러나 적은 보조금으로는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든 4자매에게 막내를 치료할 돈이 없다는 거였다.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한 그 저녁에 이주호는 4자매를 향한 연민과 사랑을 듬뿍 담아 이 노래를 만들었다. 바람 부는 벌판에 서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자는 사랑과 봉사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송구영신의 길목에서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내 이웃에 소외된 이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40] 봄여름가을겨울 ‘어떤 이의 꿈’

“어떤 이는 꿈을 간직하고 살고/ 어떤 이는 꿈을 나눠주고 살며/ 다른 이는 꿈을 이루려고 사네/ 어떤 이는 꿈을 잊은 채로 살고/ 어떤 이는 남의 꿈을 뺏고 살며/ 다른 이는 꿈은 없는 거라 하네.”
[노래의 탄생]봄여름가을겨울 ‘어떤 이의 꿈’

음악을 통해 꿈을 나눠주면서 살다가 안타깝게 세상과 작별한 전태관의 시작은 1986년 데뷔한 봄여름가을겨울의 드러머였다. 보컬인 김현식(작고)을 리더로 유재하(작고), 김종진, 장기호, 전태관(작고)이 멤버였다. 그러나 김현식의 마약사건 이후 봄여름가을겨울의 이름 밑에 김종진과 전태관만 남았다. 김종진은 고려대 사학과, 전태관은 서강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성향은 달랐지만 호흡만큼은 최고였다. 김종진은 전태관이 경영학과 출신이라는 이유로 밴드의 온갖 잡무를 맡겨서 너무 미안했다고 토로했다.

‘어떤 이의 꿈’을 발표한 건 1989년 2집 <나의 아름다운 노래가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을 통해서였다. 두 사람은 조용필처럼 자신의 음악을 하면서 유명해지길 원했다. 그들의 선배 송홍섭은 “너희들이 원하는 음악을 해라. 유명해지는 건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고 충고해줬다. 재킷은 전태관의 친구인 설치미술가 서도호가 맡았다. 이 앨범이 수십만장 팔리면서 스타 반열에 올랐다.

김종진은 ‘어떤 이의 꿈’을 두고 여러 생명을 구한 노래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라디오 DJ 시절에 ‘자살하러 가는 길에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를 듣고 버스에서 내렸습니다’라는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한 바 있다. 또 직간접적으로 이 노래로 삶의 희망을 갖게 됐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음악에 책임의식을 갖게 됐다. 당시 밴드의 주 수입원인 나이트클럽 출연을 지양하고 대신 공연에 집중했다. 1990년대 초에 내놓은 그들의 라이브앨범은 100만장 이상 나가면서 선풍을 일으켰다. 여전히 봄여름가을겨울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밴드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건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 덕분이다.

이제 곧 새해다. 이떤 이들은 새로운 꿈을 꿀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꿈이 어디 있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꿈꾸는 것도 자유다.


[41] 이매진 드래곤스 ‘잇츠 타임’

‘난 널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이 거리를 떠나고 싶지도 않아/ 어쨌든 이 도시는/ 절대로 밤에 잠드는 법이 없잖아(I don’t ever want to let you down/ I don’t ever want to leave this town/ Cause after all/ This city never sleeps at night).’

[노래의 탄생]이매진 드래곤스 ‘잇츠 타임’

가사를 들으면서 서울을 생각했다. 서울이야말로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절대 잠들지 않는 도시가 이닐까. 그런데 ‘잇츠 타임(It’s Time)’을 작사, 작곡한 댄 레이놀즈는 미국 서부의 도박 도시 라스베이거스 출신이다. 밤이 되면 더 휘황찬란해지는 카지노의 천국을 두고 ‘절대 잠드는 법이 없는 도시’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 노래는 젊은이들에게 과감하게 꿈을 향해 나아가라고 외친다. 그리고 꿈을 성취하더라도 초심을 잃지 말고 검소하게 살라고 충고한다. 어찌 보면 건전가요 같은 느낌이다. 레이놀즈는 10대 후반에 2년 동안 학업을 접고 선교활동을 할 정도로 독실한 모르몬교도였다. 이 때문에 그가 만든 노랫말에 종교적인 표현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관심보다 앞서는 것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는 명문 네바다 라스베이거스대학(UNLV)에 입학한 직후부터 음악에 몰입했다. 결국 그는 대학을 포기하고 모르몬교도들이 많이 사는 유타주에 정착, 기타리스트 웨인 서몬과 함께 밴드 이매진 드래곤스를 결성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명들이 그러하듯 늘 음악에 목말라 하는 가난한 밴드일 뿐이었다. 레이놀즈 자신도 우울증과 불안함에 시달렸다. 그때 영감처럼 이 노래가 떠올랐다. 다이내믹한 멜로디에 자신을 비롯해 모든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자는 노랫말을 붙였다. 이매진 드래곤스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에 참여키로 했던 록밴드 ‘트레인’의 불참으로 2만6000명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행운을 꿰찼다. 이 무대를 계기로 인터스코프 레코드사에 픽업, 2012년 첫 메이저 EP 앨범 <Continued Silence>를 내놨다.

다시 새해다. 우리에게 새해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희망을 향해 뛸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혹 연초부터 희망을 잃은 청춘이 있다면 이 노래를 권하고 싶다.


[42] 조용필 ‘그 겨울의 찻집’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의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긴 밤이여/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노래의 탄생]조용필 ‘그 겨울의 찻집’겨울에 한번쯤 이 노래를 흥얼거리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 성긴 눈발이 날리는 겨울 어느 날 찻집에 앉아 커피 한잔의 정취를 즐기다 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노래다. 조용필의 대표곡 중 하나이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애창곡으로, 지난해 조용필과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장이 함께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미 명반이 된 8집 앨범 수록곡으로 김희갑·양인자 콤비의 작품이다. 이 앨범 수록곡인 ‘킬리만자로의 표범’ ‘바람이 전하는 말’ ‘허공’에 밀려서 처음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뒤늦게 역주행하면서 유명해졌다. 양인자는 대학을 졸업한 뒤 작가 김수현과 월간 ‘여학생’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 신춘문예에 낙방한 뒤 함께 쥐약을 샀다는 일화로도 유명한 문학도였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미리 써둔 당선소감 메모였고, ‘그 겨울의 찻집’은 습작 메모였다. 지금은 없어진 경복궁 내 찻집에서 썼다. 양인자 극본의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으로 쓰이면서 주인공이었던 왕영은이 먼저 불렀다. 조용필은 이 노래를 처음 받았을 때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고. 시적인 가사와 세련된 멜로디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겐 별로 없는 겨울 노래라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오히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긴 가사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그 겨울의 찻집’은 대중적이면서도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 때문에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당시 김희갑은 이혼, 양인자는 사별로 ‘싱글’이었다. 작업 때문에 이들을 자주 만났던 조용필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작정하고 두 사람이 함께할 시간을 만들어 주면서 결혼을 부추겼다. 덕분에 두 사람은 1987년 결혼식을 올린 뒤 아직까지 백년해로하고 있다.


[42] 솔리드 ‘이 밤의 끝을 잡고’

[노래의 탄생]솔리드 ‘이 밤의 끝을 잡고’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시대였던 1990년대 댄스음악과 발라드음악을 양분한 히트곡 제조기들이 있었다. 김창환과 김형석. 김건모와 박미경, 클론 등 댄스음악계의 밀리언셀러 제조기가 김창환이었다면 솔리드와 신승훈, 임창정, 박정현, 성시경 등 발라드계에는 김형석이 있었다.


지금은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은 외모로 TV에 나와 ‘허당끼’를 내뿜는 김형석의 당시 별명은 ‘발라드의 시인’. 광주 태생.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와 음악교사였던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그는 자연스럽게 피아노와 친해졌다. 한양대 음대에 진학해서 만난 이가 고 유재하. 그가 그룹 퀸의 ‘Love of my life’를 연주하는 걸 보고 대중음악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래 어쩌면 난 오래전부터/ 우리의 사랑이 늦출 수 없는/ 이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울지마 이 밤의 끝을/ 잡고 있을테니.’ 헤어진 연인을 위한 애절한 송가인 ‘이 밤의 끝을 잡고’는 졸업 후 피아노 세션으로 활동하던 김형석이 처음 프로듀서로 나선 앨범의 타이틀곡. 미국에서 온 3인조(김조한, 정재윤, 이준) R&B그룹 솔리드는 이 노래가 담긴 2집 앨범(1995년 3월)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솔리드는 “김형석이 멜로디와 가사에 한국적인 취향을 가미해서 명품으로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이 앨범의 수록곡 ‘슬럼프’의 후렴구 코러스에 “밤새 밤새 밤새”라는 대목을 넣을 정도로 ‘밤샘 녹음’을 하면서 공을 들였다. ‘이 밤의 끝을 잡고’는 김형석과 정재윤의 공동 작곡으로 별들의 전쟁이 펼쳐지던 음악 순위 프로그램 정상에 오르면서 120만장이 판매됐다.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R&B 장르로 정상에 오른 건 이들이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 업타운, 이현우, 박정현, 브라운아이드소울, 바비킴, 박효신 등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앨범의 히트로 김형석은 1990년대 톱가수들의 단골 프로듀서로 등극했다. 박진영, 김원준, 엄정화, 김정민, 임창정, 유승준, 박정현, 베이비복스, 보아, 성시경 등을 밀리언셀러 가수 반열에 올렸으니 가히 ‘천만 작곡가’라 할 만하다.


[43] 이연실, 목로주점

꼭 가보고 싶은 콘서트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연실을 꼽겠다. 누구냐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모를 법도 하다. 1990년대 중반 대중 앞에서 홀연히 사라진 그녀는 여전히 잠행 중이니까.
[노래의 탄생]이연실, 목로주점

‘멋들어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언제라도 그곳에서 껄껄껄 웃던/ …/ 오늘도 목로주점 흙 바람 벽엔/ 삼십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 월말이면 월급 타서 로프를 사고/ 연말이면 적금 타서 낙타를 사자/ 그래 그렇게 산에 오르고/ 그래 그렇게 사막엘 가자.’

이연실이 작사·작곡한 ‘목로주점’은 지금 들어도 신선하다. 월급 타는 날 긴 나무 널빤지 탁자가 놓인 주점에서 막걸리 한잔하면서 호기롭게 사막으로 여행하는 꿈을 꾸는 풍경이 떠오른다. 파워 넘치는 목소리는 아니지만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주는 감흥도 상당하다.

전북 군산 출생. 포크 1세대인 그녀는 홍익대 미대 시절 라이브클럽에서 노래하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1971년 가수로 데뷔한다. 좋은 노래를 만들고 부르기 위해서 대구로 내려가 ‘다방 레지’를 체험하고, 노래하다가 시비 거는 취객과 맞붙어 싸우는 등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는 일화도 있다.

데뷔곡 ‘조용한 여자’와 ‘새색시 시집 가네’에 이어 다음해 발표한 ‘찔레꽃’은 이연실의 탁월한 음악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노래다. 특히 ‘찔레꽃’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른 가수들이 많지만 이연실이 그것은 군계일학이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과 어울리면서 포크계의 송라이터로 명성을 날렸던 이연실은 1975년 대마초 사건 때 연루되어 주춤한다.

‘목로주점’은 1981년 발표한 재기곡이다. 이제는 LED 조명으로 대체되어 30촉(30W) 백열등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막걸리를 마시다가 취해서 눈앞에서 백열등이 왔다갔다한 경험이 있는 술꾼이라면 이 노래를 들으면서 시간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풍문에 의하면 강원도 어디선가 감자농사를 짓고 있다는 이연실은 왜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물론 그 선택도 이연실의 몫이니 대중 앞으로 나와달라고 강요할 수 없지만 열성팬의 입장에서는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다.


[44] 쿨리오 ‘갱스터스 파라다이스’


우리에게 힙합은 더 이상 생소한 장르가 아니다. 힙합을 하는 래퍼들이 겨루는 TV 쇼프로그램은 이미 일상이 됐다. 쿨리오의 ‘갱스터스 파라다이스’는 힙합의 클래식 반열에 오른 노래다.
[노래의 탄생]쿨리오 ‘갱스터스 파라다이스’

이 노래가 발표된 건 1995년이다. 당시 신인 래퍼 쿨리오는 영화 <위험한 아이들>의 OST의 삽입곡을 의뢰 받았다. 미셸 파이퍼 주연의 이 영화는 흑인빈민가의 한 고등학교에 부임한 여선생이 엉망진창인 학교를 참 교육현장으로 만들어 간다는 내용이다. 원래 1960년대 흥행했던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원제:투서, 위드 러브)>(시드니 포이티어 주연)을 리메이크한 1990년대 버전 영화였다.

캘리포니아의 흑인빈민가 콤튼 출신인 쿨리오는 약물과 범죄로 얼룩진 이곳에서 갱스터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흑인 소년들의 절망을 노래에 담았다. 역시 흑인폭동 때 총격에서 살아남은 동료가수 LV와 함께였다. 쿨리오는 “빈민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꿈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위한 우울한 송가”라고 밝힌 바 있다.

쿨리오가 랩을, LV가 코러스를 맡아서 녹음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코러스 부분은 스티비 원더의 노래 ‘패스트타임 파라다이스’를 샘플링했는데 그가 욕설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사용을 불허했다. 결국 쿨리오는 욕설을 뺀 새로운 가사로 스티비 원더의 허락을 받아냈다.

결과적으로 이 노래는 영화보다도 크게 히트했다. 쿨리오와 LV는 1995년 빌보드뮤직어워드에서 대선배인 스티비 원더와 함께 무대에 섰다. 영화 OST에 앞서 발매된 싱글앨범은 미국과 영국에서만 5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면서 대성공을 거뒀다.

‘나는 미친 갱스터, 확실한 범죄자/ 날 화나게 하지 마, 내 부하들이 가만 안 둘 거야/ 죽음은 순간이야/ 죽을 각오로 산다는 거 말고 뭐가 더 있겠어/ 나는 지금 스물세 살, 스물네 살까지 살 수 있을까.’

노래 전체에서 묻어나는 슬픔이 묘한 힘을 갖는 노래가 아닐 수 없다. 파라다이스라는 단어가 주는 역설도 이 노래를 떠받치는 힘이다.


[45] 이럽션 ‘원웨이 티켓’


별스럽지도 않은데 중독성이 강한 노래가 있다. 한 번 들으면 좀처럼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이럽션의 ‘원웨이 티켓(Oneway ticket)’이 그런 노래다. 1970년대 말 이 노래가 히트하던 시절에는 소위 고고장으로 불렀던 디스코텍이 대세였다. 그곳을 지배하던 음악은 단연 디스코였다.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에서 존 트래볼타가 나팔바지를 입고 하늘을 찔러대던 그 춤과 노래 말이다. 디스코텍의 단골 레퍼토리였던 ‘원웨이 티켓’은 공부밖에 모르던 샌님을 빼고는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었다.
[노래의 탄생]이럽션 ‘원웨이 티켓’

원래 이 곡은 닐 세다카가 처음 불렀다. 잭 켈러와 행크 헌터가 쓴 원곡은 닐 세다카의 1959년 싱글 ‘오 캐럴’에 수록돼 있다. 이럽션의 그것에 비하면 훨씬 정서적이고 감미롭다.

‘Choo choo train Chuggin’ down the track/ Gotta travel on Never comin’ back/ Got a one way ticket to the blues.’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뒤 편도 티켓으로 기차를 타고 떠나는 슬픔을 노래했다. 이별노래에 맞춰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면서 하늘을 찔러대던 디스코텍의 청춘들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럽션은 1974년 ‘사일런트 이럽션’(Silent Eruption)이란 이름으로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남성 5인조였다. 한 명이 탈퇴한 뒤에 자메이카 출신의 여성보컬 프레셔스 윌슨을 영입하고 ‘이럽션(폭발)’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노래를 발표했다. 그룹 이름처럼 유럽과 미국을 강타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국내 인기를 등에 업고 1980년 코미디언 출신 가수 방미가 ‘날 보러와요’로 리메이크하여 부르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지금은 모두 철거됐지만 DMZ의 대북확성기에서 한때 가장 많이 나왔던 노래가 ‘날 보러와요’였다는 기록도 있다. 또 본인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송대관의 ‘차표 한 장’ 역시 이 노래의 영향 아래 있다.

그런데 마치 이 노래가 편도 티켓밖에 허용되지 않는 우리네 인생 얘기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46] 이장희, 그건 너

이장희의 지인들은 그를 천재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단 2주일 공부해 연세대에 합격했으며 기타 튜닝 몇 번으로 곡이 나오는 싱어송라이터였다. 예나 지금이나 쎄시봉 멤버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늘 유쾌하고 배려하는 성품 덕이다.
[노래의 탄생]이장희, 그건 너

‘그건 너’는 1973년 발표됐다. 기타의 강근식, 베이스의 조수연, 드럼의 배수연 등 이장희와 함께 결성한 밴드 동방의 빛이 참여한 앨범에 수록됐다.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 밤에/ 어이해 나홀로 잠 못 이루나/ 넘기는 책 속에 수많은 글들이/ 어이해 한 자도 뵈이질 않나.’ 이장희가 하루 만에 1절을 만들었고 고 최인호가 30분 만에 2절 가사를 썼다.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 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껄껄 웃더군.’

마치 지껄이듯이 툭툭 내뱉는 말투를 가사로 살린 노래는 이전의 그것과 분명 달랐다. 이 앨범을 두고 기존 소속사인 성음과 오아시스레코드가 경쟁을 펼친 일화도 유명하다. 성음이 이장희에게 시가 100만원짜리 오토바이를 선물하면서 오아시스의 공세를 막았다. 오토바이를 유난히 좋아하던 이장희는 결국 오토바이 사고로 이빨이 부러지고 입술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다.

타이틀곡 ‘그건 너’를 비롯해 ‘자정이 훨씬 넘었네’ ‘애인’ ‘비의 나그네’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히트하면서 이장희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러나 잘나가던 이장희에게 제동이 걸린다. 1975년 7월 공연윤리위원회가 ‘그건 너’ ‘한 잔의 추억’ 등을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리스트에 올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5년 말 이장희는 대마초 흡연 혐의로 긴급체포된다. 당시 진행하던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장희는 결국 가요계를 떠난다.

잠깐의 제작자 생활 끝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라디오코리아를 운영하던 이장희는 스스로 천국이라고 부르는 울릉도에 정착한 뒤 가수생활에 전념하고 있다. 50년 전 그 멤버들과 콘서트를 갖는 이장희에게서 더 이상 천재성은 보이지 않지만 인생을 달관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47] 한돌 ‘홀로아리랑’

‘저 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 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 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아리랑 아리랑 홀로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 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노래의 탄생]한돌 ‘홀로아리랑’

한돌이 작사·작곡한 ‘홀로아리랑’은 통일의 기운이 충만한 이 땅의 3월에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다. 지난해 북한예술단 공연에서 선보일 정도로 북한 주민들도 즐겨 부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김연자가 평양공연 때 처음 불렀고, 2005년 조용필이 북측의 요청을 받고 앙코르송으로 불렀다. 조용필은 노래를 들으면서 직접 악보를 필사해서 불렀다고 회고한다. KBS PD였던 박문영이 만들고, 정광태가 부른 ‘독도는 우리땅’과 더불어 독도를 노래한 대표적인 곡이다.

한돌은 이 노래를 독도에 갔다가 태풍을 만나 고립된 덕분에 만들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식량도 떨어져 고초를 겪다가 외로운 섬 독도와 아리랑을 접목해 명곡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노래를 서유석이 불러서 크게 히트했다.

한돌처럼 통일에 대한 염원이나 저항정신 등을 담은 의미 있는 노래를 만들어서 히트곡 반열에 오르게 한 가수는 드물다. 한돌이 만들고 신형원이 부른 ‘터’와 ‘개똥벌레’는 각각 수십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김광석이 불러 히트한 ‘외사랑’도 마찬가지다.

그가 줄곧 통일 의지를 담은 노래를 만들어온 배경에는 태생적인 이유도 있다. 부모님들은 한국전 당시 그를 임신한 채 함경도서 거제도행 배에 올랐던 피란민들이었다.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는데 공교롭게도 문재인 대통령과 출생코스가 똑같다. 한돌은 원산이 고향인 부모님과 문 대통령의 부모님이 같은 배를 타고 월남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금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누군가가 독도를 위해 노래를 불렀고, 우리가 그 노래를 사랑했기에 독도는 지금 외롭지 않다.


[48] 루이 암스트롱 ‘왓 어 원더풀 월드’

얼마 전 막을 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영화 <그린북>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1960년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천재적인 흑인 피아니스트와 백인 운전기사의 투어 여정을 통해 인종 간 화합을 그려낸 작품. 그 시절의 흑인 가수나 연주자들은 뛰어난 실력에도 늘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흑인 전용 숙소나 식당을 찾기 위해 ‘그린북’을 들고 다니는 건 그 시절 흑인 가수들이 공통적으로 겪어야 했던 수모다. 특히 남부에서는 더욱 극심했다.
[노래의 탄생]루이 암스트롱 ‘왓 어 원더풀 월드’

“나 혼자 스스로 생각한다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작곡가 조지 와이스와 프로듀서 밥 티엘은 흑백 갈등을 완화하기 위한 노래 ‘왓 어 원더풀 월드’(1967년)를 만들었다. 처음 두 사람은 토니 베넷에게 불러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그 대안으로 찾은 사람이 트럼펫 연주자이자 가수인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암스트롱의 호소력 있는 창법 덕분에 전화위복이라고 할 만큼 큰 반향을 얻었다. 1960년대 후반 암스트롱은 백인 사회에서 인정받는 몇 안되는 흑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로 인해 흑인사회로부터 백인의 비위나 맞추는 ‘엉클톰’이라는 비아냥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뉴올리언스 출신의 루이 암스트롱은 늘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었다. 1957년 아칸소 주지사 오벌 포버스가 흑인학생 9명의 등교를 저지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미온적으로 대처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암스트롱은 미 국무부가 주최한 구소련 공연을 취소하면서 미국 정부는 지옥에나 가라고 외쳤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연방군을 보내 흑인학생들이 안전하게 등교할 수 있도록 호위했다.

1988년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삽입곡으로 쓰이면서 다시 인기를 얻기도 했다. 팝가수 에바 캐시디와 펑크록그룹 라몬즈의 조이 라몬 등이 리메이크하여 히트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캐시디와 라몬은 이 노래를 부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떴다. 인생의 황혼기가 돼서야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는 것 아닐까?



[49] 부활 ‘희야’


‘희야 날 좀 바라봐 너는 나를 좋아했잖아/ 너는 비록 싫다고 말해도 나는 너의 마음 알아/ 사랑한다 말하고 떠나면 나의 마음 아파할까봐/ 뒤돌아 울며 싫다고 말하는 너의 모습 너무나 슬퍼.’
[노래의 탄생]부활 ‘희야’

올드팬들에게 ‘부활’의 싱어 이승철은 탁월한 보컬로 기억된다. 1986년 1집 앨범을 낸 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이승철은 소녀팬들을 몰고 다니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애당초 ‘부활’은 김태원이 이끌던 ‘디엔드’에서 시작됐다. 김태원은 팀이름을 ‘부활’로 바꾸고 김종서를 보컬로 영입했다. 1985년 김종서를 앞세워 강변가요제에 출전했지만 예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공교롭게도 이승철도 이 대회에 출전했다가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김종서를 내세워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가진 첫 공연은 대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첫 앨범 녹음을 앞두고 김종서가 시나위로 빠져나갔고, 베이시스트인 이태윤마저 탈퇴했다. 보컬의 부재는 치명적이었기에 급하게 물색에 나섰다. 그때 김태원의 동네 후배인 이승철이 서울음반에 놀러왔다가 오디션을 본다. 귀공자 스타일의 외모를 가진 그는 즉석에서 김현식의 ‘사랑했어요’와 딥 퍼플의 ‘솔저 오브 포춘’을 불렀다. 멤버들은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을 보는 기분이었다. 베이시스트 자리에 그룹 ‘보헤미안’의 리더 김병찬도 영입했다. 톱가수 민해경(본명 백해경)의 오빠이자 부활의 매니저 백강기는 여동생에게 사정하여 녹음시간을 빌렸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총 20시간. 시간이 없기에 모든 곡을 라이브로 불러서 끝냈다. 타이틀곡인 ‘희야’만 두 번 불렀다. 작사·작곡자인 양홍섭이 백혈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여자친구를 위해 만든 ‘희야’는 이승철의 애절한 목소리와 어우러져 순식간에 여성팬들을 불러모았다.

이 앨범으로 부활은 시나위, 백두산과 함께 3대 록밴드 반열에 올랐다. 줄잡아 30만장 이상이 판매됐으며 아직도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꼽힌다. 특히 이승철이 미성으로 부른 여성 취향의 록발라드는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에 록발라드 열풍을 불러오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50] 박인수 ‘봄비’


봄은 짧지만 봄노래는 넘쳐난다. 누구나 봄 앞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리라. 지난 몇 해 동안 장범준이 봄을 점령했지만 봄노래의 대명사는 따로 있었다. 비라도 흩뿌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박인수의 ‘봄비’가 그것이다.
[노래의 탄생]박인수 ‘봄비’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고/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사실 박인수가 불러 유명해졌지만 작사·작곡자인 신중현을 빼고는 얘기할 수 없는 노래다. 1969년 그가 이끄는 밴드 덩키스의 앨범에서 이정화가 먼저 불렀다. 그러나 박인수가 다시 불러 히트시켰다.

박인수는 가슴을 파고드는 창법으로 솔풀한 느낌을 극대화시켜 이 노래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정화가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불러오는 목소리라면 박인수는 바람에 흩뿌리는 봄비를 부르는 목소리쯤 될까. 이후 김추자, 장사익, 인순이, 체리보이, 홍서범, 하현우 등이 끊임없이 리메이크하면서 명곡이 됐다.

솔풀한 목소리를 가진 박인수는 파란만장한 삶으로도 눈길을 끈다.

함북 길주 태생의 박인수는 1·4후퇴 때 부모와 헤어져 껌팔이를 하다가 미군부대에서 일하게 된다. 14살 때 미국으로 입양을 간 그는 켄터키 중학교와 베어모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향수병 때문에 21세 때 한국으로 돌아와 미8군 무대서 노래하던 그는 신중현을 만나 일약 스타가 됐다.

결혼과 이혼, 대마초로 인해 인생의 굴곡을 겪었던 그는 훗날 극적으로 어머니도 찾았으나 잦은 투병으로 평탄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다. 1990년대 그를 인터뷰했을 때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봤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기에 안타깝다.

그러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창법으로 부른 그의 ‘봄비’는 우리 가슴속에 봄의 문신처럼 남아있다.



[51] 벤 이 킹 ‘스탠 바이 미’

‘밤이 와서 어둠이 내리고, 오직 달빛만이 우리를 비출 때도/ 아니, 난 두렵지 않아.’ ‘스탠 바이 미’(Stand By Me)처럼 오랜 세월 사랑받는 팝송이 몇 곡이나 될까. 1961년 발표된 이 노래는 최근까지도 세계인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존 레넌 등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했으며, 리버 피닉스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에 삽입곡으로도 사용되어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5년 별세한 벤 이 킹이 부른 이 노래는 미국 의회도서관에 국가기록물로 등재될 정도로 문화적,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또 그는 재단을 설립해 불우 청소년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민간단체를 돕기도 했다.
[노래의 탄생]벤 이 킹 ‘스탠 바이 미’

사실 이 노래에 더 큰 생명력을 불어넣는 건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활동 중인 ‘플레잉 포 체인지’ 프로젝트팀에 의해서였다. 이미 유튜브 영상으로 전 세계 수백억 뷰를 기록한 이들의 ‘스탠 바이 미’는 보는 것만으로도 흥겹고 감동적이다. 미국 샌타모니카의 한 거리 악사를 시작으로 뉴올리언스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이어 프랑스, 브라질, 뉴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거리의 음악가들이 이어 부르는 ‘스탠 바이 미’는 한마디로 판타스틱하다. 그래미 수상자 겸 음악 엔지니어 마크 존슨이 6명의 스태프를 이끌고 10년간 전 세계를 돌아다닌 끝에 완성된 앨범의 타이틀곡이다. 이 프로젝트에 출연한 거리의 악사들은 세계 각국을 돌면서 콘서트를 여는 등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무명 뮤지션들의 음악성에 감동하고, 그들이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뜻에 공감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설립된 ‘플레잉 포 더 체인지 재단’은 수익금으로 전 세계 소외지역에 음악학교를 세웠다. 이미 네팔, 말리, 가나, 인도네시아 등에 음악학교가 세워져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꿔보자는 이들의 꿈이 하나둘씩 실현되고 있다. 이들의 캠페인에 뜻을 같이하는 U2의 멤버 보노, 밥 말리 등도 목소리를 보태는 등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노래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52] 김정미 ‘봄’


‘빨갛게 꽃이 피는 곳 봄바람 불어서 오면/ 노랑나비 훨훨 날아서 그곳에 나래 접누나/ 새파란 나뭇가지가 호수에 비추어지면/ 노랑새도 노래 부르며 물가에 놀고 있구나/ 나도 같이 떠가는 내 몸이여/ 저 산 넘어 넘어서 간다네/ 꽃밭을 헤치며 양떼가 뛰노네.’

[노래의 탄생]김정미 ‘봄’신중현의 3대 명반으로 꼽히는 김정미의 앨범 <NOW>(1973)는 오리지널 음반이 수백만원을 호가한다. 도대체 어떤 여가수인지 궁금하다면 당장 유튜브를 검색해보자. 보는 순간 그녀의 매력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

김정미가 펄시스터즈와 김추자의 성공으로 주가가 높던 신중현을 찾아갔을 때 불과 여고 3학년이었다. 신중현은 그녀에게서 재능은 엿보이지만 조련이 안된 야생마를 봤다. 하드 트레이닝은 필수였다. 데뷔앨범 <간다고 하지 마오>에 이어 줄기차게 앨범을 내면서 신중현 사단의 스타로 급부상했다. 5집 앨범 <NOW>는 한국형 사이키델릭 록앨범으로 평가받았다. ‘봄’을 비롯해 ‘햇님’ ‘아름다운 강산’ ‘고독한 마음’ 등 명곡들이 즐비했다. 김정미는 섹시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흐느적거리는 춤으로 단숨에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소주병 난자사건으로 활동이 주춤한 김추자를 대신했기에 당시에는 늘 2인자로 폄훼됐다. 그러나 신중현은 김추자에 비해 파워는 떨어지지만 음역대나 보컬의 매력은 한 수 위라고 평가했다.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김정미는 “저만의 노래다운 특징을 찾아내려고 많이 연구했어요. 춤도 환각적이고 전위적인 율동으로 사이키델릭에 맞추어 연습하고 있어요”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김정미는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무대에서 사라진 신중현과 궤를 같이한다. 그녀의 노래들은 ‘창법저속’ 등을 이유로 잇달아 판매금지가 된다. ‘이건 너무 하잖아요’ ‘담배꽁초’ ‘가나다라마바’ 등도 비슷한 이유로 금지곡이 된다.

김정미는 2000년대 들어서 모든 앨범이 CD나 LP로 재발매되고, 팬카페까지 생겨나는 등 재평가 바람이 불었다. 팬들은 그녀를 불러내고 싶어 했지만 끝내 소환되지 않았다. 4년간의 짧은 가수생활 끝에 미국으로 떠난 뒤 여전히 침묵 중이다.


[53] 버글스 ‘비디오 킬 더 라디오 스타’

‘비디오(TV)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는 적어도 지난 수십년 동안 미디어의 변천사를 얘기하거나 콘텐츠 플랫폼의 변화를 얘기할 때 수도 없이 인용돼 온 노래다. 소위 ‘보는 음악’의 급격한 침공으로 ‘듣는 음악’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이 노래가 발표된 건 불과 40년 전이다.

[노래의 탄생]버글스 ‘비디오 킬 더 라디오 스타’영국의 팝듀오 버글스가 1979년 이 노래를 선보였을 때는 연주와 노래 실력을 바탕으로 한 무대형 가수들의 시대가 저물고, 섹시함과 춤으로 무장한 비주얼 가수들이 서서히 인기를 얻고 있었다. 버글스의 멤버인 트레버 혼은 뮤직비디오의 역사와 관련된 인터뷰에서 “비디오는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었다. 라디오는 이제 과거가 돼 버렸다”고 말했다. 미국의 음악전문채널 MTV는 1981년 8월1일 개국하면서 맨 먼저 이 노래를 앞세웠다. 또 수시로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방영하면서 라디오 시대의 종말을 부추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버글스의 앨범에 프로듀서 겸 신디사이저로 참여했던 한스 치머는 영화음악가로 변신하여 대성공을 거뒀다.

노래에서 거론되는 1950년대 초는 비디오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대였다. 개성 있는 노래실력과 탁월한 연주실력만으로도 아티스트의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노래 속 주인공들은 아무도 쓰지 않는 스튜디오에 앉아 옛날 음악을 재생해보면서 너무 낡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도 MTV의 성공과 함께 비디오형 가수인 마이클잭슨과 마돈나가 화려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노래가 전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적확하게 예견한 건 아니다. 그들의 노래처럼 라디오가 완전히 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비디오야말로 모바일에 밀려서 앞날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한때 날개 돋친 듯 팔렸던 비디오테이프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불과 2000년대 초반에도 흔히 볼 수 있었던 비디오 대여점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오래지 않아서 집집마다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TV도 굳이 필요치 않은 시대가 오지 않을까? 모바일이 비디오를 죽였으니.


[54] 크리스 디 버그, 4월의 눈동자를 가진 소녀

“옛날에 봄을 기다리는 왕이 있었다. 왕은 사악하고 비열하여 그 왕국은 늘 눈으로 덮여 있었다. 한 여행자가 음식과 하룻밤 잠자리를 청했다. 왕은 하인을 시켜 그녀를 내쫓았다. 4월의 눈동자를 가진 소녀였다. 그녀는 바람과 눈보라 속을 해매다가 어떤 남자가 사는 집의 불빛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녀는 탈진하여 죽고, 남자는 그녀를 묻어주었다. 그 무덤은 꽃들로 뒤덮였다.”

[노래의 탄생]크리스 디 버그, 4월의 눈동자를 가진 소녀크리스 디 버그의 ‘4월의 눈동자를 가진 소녀(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의 노랫말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1979년 국내에서 크게 히트한 이 노래는 애절한 크라잉 창법으로 사랑받았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들이 드나들던 음악다방이 성행하던 시절이어서 리퀘스트 음악으로 꽤나 인기를 모았다. 그 시대를 거쳐 온 독자들은 4월이면 한 번쯤 듣고 싶은 노래다.

시인이자 영문학도인 크리스 디 버그는 이 노래를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읽고 감동받아 썼다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이 노래와 분위기가 비슷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북유럽 신화를 차용했듯이 이 노래 역시 신화에서 영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영국 가수 크리스 디 버그가 정작 세계적인 가수로 부상한 것은 1987년 발표한 ‘레이디 인 레드(Lady in red)’ 덕분이었다. 결혼식 축가로도 자주 불리는 이 노래는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워킹 걸>의 삽입곡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1996년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에바 캐시디를 위해 발표한 ‘송 버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의 딸 로잔나 데이비슨은 미스 월드 출신으로 ‘비건’(고기는 물론 우유나 달걀도 먹지 않는 엄격한 채식)으로 불리는 채식주의자다. 채식을 권장하기 위해 새빨간 고추더미 위에 누워 찍은 누드사진을 공개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55] 김수철 ‘별리’


‘정주고 떠나시는 님 나를 두고 어디 가나/ 노을빛 그 세월도 님 싣고 흐르는 물이로다/ 마지못해 가라시면 아니 가지는 못하여도/ 말없이 바라보다 님 울리고 나도 운다/ 둘 곳 없는 마음에 가눌 수 없는 눈물이여/ 가시려는 내 님이야 짝 잃은 외기러기로세.’

[노래의 탄생]김수철 ‘별리’마치 판소리 한 자락을 연상케 하는 김수철의 ‘별리’는 ‘못다 핀 꽃 한 송이’와 더불어 1983년 발표된 1집의 명곡으로 꼽힌다. 그룹 작은 거인 시절에 불렀던 ‘일곱색깔 무지개’ 등과는 사뭇 다른 노래다. 그가 록음악에 한국적인 정서를 녹여넣는 시도 끝에 탄생한 국악가요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우리 민요의 한 자락을 듣는 듯한 유장함이 느껴지는 이 노래는 얼핏 사랑노래로 들린다. 나를 버리고 떠나는 ‘님’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뚝뚝 묻어난다. 그러나 김수철이 이 노래를 만들게 된 이유는 전혀 엉뚱한 데 있다. 1980년 12월1일 자정. 김수철은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문을 닫게 된 TBC(동양방송) 라디오의 고별방송을 듣고 이 노래를 썼다. 황인용 아나운서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문을 닫게 된 안타까움을 청취자한테 전했다. 김수철은 ‘말없이 가라시면 아니 가지는 못하여도 말없이 바라보다 님 울리고 나도 운다’고 정권의 힘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는 라디오의 운명을 얘기했다. 처음에는 님을 향한 그리움을 담은 노랫말이 아니라 좀 더 직설적이고 반항적인 노래였지만 당시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님을 넣어 개사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됐든 노래는 듣는 이들의 몫이기에 ‘별리’가 애절한 사랑노래임은 분명하다. 그 이후 김수철은 동서양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한국적인 록음악의 완성을 위해 노력해왔다. 1984년 영화 <고래사냥>을 시작으로 <칠수와 만수> <서편제> <태백산맥> 등 영화음악 발전에 큰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황천길> <불림소리> <팔만대장경> 등 주목할 만한 국악앨범을 선보이기도 했다. 술도 담배도 안 하면서 음악과 함께 살아온 김수철. 그는 여전히 소년의 미소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작은 거인이다.


[56] 첨바왐바 ‘텁섬핑’


우리의 5월은 라일락 향기처럼 그윽하지 않았다. 늘 최루탄과 깃발, 분노가 넘쳐나는 5월이었다. 그래서인지 5월이 되면 달콤한 봄노래 대신 투쟁가들이 생각난다. 길을 걷다가 ‘꽃잎처럼 금남로에 흩어진 너의…’를 부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란다. 노동자의날로 5월이 시작됐다. 문재인 대통령도 ‘노동이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당연한 얘기에 울컥한다. 영국의 그룹 첨바왐바(Chumbawamba)의 ‘텁섬핑(Tubthumping)’도 이맘때면 생각나는 노래다.

‘나는 쓰러지더라도 곧 일어날 거야/ 너희는 결코 나를 굴복시킬 수 없어/ 쓰러지더라도 곧 일어날 거야/ 너희는 결코 날 굴복시킬 수 없어.’

[노래의 탄생]첨바왐바 ‘텁섬핑’신나는 펑크음악에 실린 그들의 목소리는 비장하다. 이 노래는 1997년 영국 노동당 정부와 맞선 부두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었다. 토니 블레어 정권이 많은 부두 노동자들을 해고한 데 맞선 파업투쟁을 지지하고 나선 노래다.

1982년 결성된 첨바왐바는 해체되기까지 약 30년 동안 인간을 속박하는 모든 것들과 싸웠다. 이 노래를 발표한 뒤인 1998년 2월, 브리지 어워즈 시상식에 출연한 첨바왐바는 관람석에 앉아 있던 영국 노동당의 부수상 존 프레스콧에게 얼음물이 든 양동이를 부었다. 노동자 출신의 배신에 대한 응징이었다.

이들은 엄청난 자본 앞에서도 결코 굴하는 법이 없었다. 1998년 월드컵 때 나이키가 ‘텁섬핑’을 광고 음악으로 쓰겠다며 150만달러를 제안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제너럴 일렉트릭사가 음악사용료로 100만달러를 제안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GE사가 군용기 엔진을 생산한다는 이유였다.

2002년 제너럴 모터스사와 음악사용료 7만파운드에 계약한 첨바왐바는 이 돈을 독립 미디어와 시민단체에 전액 기부한다. 거대 기업이면서도 부도덕한 일을 서슴지 않는 제너럴 모터스에 대한 반대 운동에만 사용하는 조건이었다.

결성 당시 실력보다는 시간을 잘 지키고, 권위를 증오하며, 착한 마음씨를 기준으로 멤버를 영입했던 이들은 퇴장도 심플했다. 2012년 7월, 은퇴 공연도 없이 웹사이트에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57] 장사익 ‘찔레꽃’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노래의 탄생]장사익 ‘찔레꽃’처음 장사익의 노래를 들었을 때 숨이 멎는 느낌이었다.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너무도 처연하여 봄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전파상, 노점상, 가구점, 독서실 등 닥치는 대로 생계에 매달리던 가수지망생 장사익은 불혹이 넘은 나이에 음반을 낸다. 이광수 사물놀이패의 객원멤버로 따라다니다가 우연히 국악인 임동창의 공연 뒤풀이에서 노래를 부른 것이 계기였다.

‘찔레꽃’은 1993년 잠실 5단지에 살고 있을 때 만든 노래다. 5월 중순 어느 날 집을 나서는데 진한 꽃향기가 났다. 찔레꽃 향기였다. 쭈뼛거리고 늘 머뭇거리는 소시민 같은 찔레꽃이 뭐 하나 잘하는 것 없는 나와 닮았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절절하게 쓴 곡이었다.

사실 장사익은 준비된 가수였다. 1980년대부터 한소리회에서 피리, 대금, 태평소 등을 익히면서 전주대사습놀이 금산농악부문 장원도 거머쥐었다. 젊은 시절 나훈아와 신중현의 노래를 잘 부른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가수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1994년경 임동창이 뒤풀이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청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냥 노래 잘하는 중년이었으리라. 그날 ‘대전블루스’ 등 평소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불렀는데 모두들 이런 자리에서 끼리끼리 듣기 아까우니 음반을 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소리꾼 장사익이 세상에 나왔다.

‘찔레꽃’을 비롯하여 ‘귀가’ ‘국밥집에서’ ‘꽃’은 물론이고 ‘봄날은 간다’나 ‘님은 먼곳에’ 등 다른 이들의 노래도 그의 목소리와 만나면 절창이 된다. 장미꽃처럼 화사한 삶도 많지만 찔레꽃처럼 순박한 삶이 더 많은 것이 ‘오늘, 이곳’의 풍경이다. 유튜브로 그의 노래나 한 자락 들어봐야겠다.


[58] 어리사 프랭클린, 리스펙트


5월에는 ‘존경’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어버이날도 있고, 스승의날도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존경이나, 존중이라는 단어가 크게 대접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존경받는 어른도, 존경받는 스승도 별로 없다. 천지에 세대 간, 이성 간에 서로를 공격하는 포연만 자욱하다.

[노래의 탄생]어리사 프랭클린, 리스펙트어리사 프랭클린은 ‘리스펙트(Respect)’에서 배우자에게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으면 당신을 떠나겠노라고 엄포를 놓는다. 이 노래가 발표된 1967년은 미국 내에서 여권신장의 목소리가 높은 시기였다.

그러나 이 노래의 원주인은 따로 있었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오티스 레딩이 이 노래를 처음 만들어 불렀다. 래딩 버전은 자신이 아내, 혹은 연인에게 매달리고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오리지널 버전은 큰 인기를 얻지 못했고, 레딩마저 1967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26세 때 요절했다.

프랭클린에게 이 노래의 리메이크를 권유한 인물은 오리지널을 프로듀싱했던 제리 웩슬러였다. 이 노래는 여성과 흑인 인권운동의 대명사가 되면서 크게 히트했다. 빌보드 팝 싱글차트 1위에 올라 2주간이나 머물렀다. 또 리듬앤드블루스 차트에서는 8주간이나 1위를 지켰다. 오티스 레딩조차도 “웬 여자가 나타나 내 노래를 훔쳐갔다. 참 잘된 일이다”라면서 프랭클린의 성공을 축하해줬다.

이 노래를 발표할 당시 어린 나이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나이든 남편으로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어리사 프랭클린은 이혼소송 중이었다. 그의 처지가 노랫말과 어우러지면서 큰 호응을 얻었고, 그 역시 2년 뒤에 남편으로부터 해방됐다.

리스펙트는 단순히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고 노래한다. 시원시원한 프랭클린의 목소리는 이 노래의 또 다른 감상 포인트다.



[59] C.C.R ‘수지 큐’


1995년 말이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미국 록밴드 C.C.R의 첫 내한공연이 펼쳐졌다. 창단 멤버인 베이시스트 스튜 쿡을 중심으로 20여년 만에 재결성되어 한국을 찾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세종문화회관은 클래식 공연 외에는 문호를 잘 열지 않던 시절이었다. 첫 곡이 시작될 때부터 마지막 곡까지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다. 청바지 입은 노장 멤버(?)들은 열정적으로 1970년대를 재연했고, 통기타와 생맥주, 장발의 시대를 살았던 한국의 넥타이부대들도 모처럼 열광했다.

[노래의 탄생]C.C.R ‘수지 큐’C.C.R은 누구인가? 조영남이 ‘물레방아 인생’으로 번안해 불렀던 ‘프라우드 메리’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던 ‘코튼 필즈’ 등을 부른 밴드였다. 그들의 히트곡 중 하나인 ‘수지 큐(Susie Q)’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주일을 기억하는 올드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곡이다.

‘오 수지 큐, 오 수지 큐. 오 수지 큐, 베이비 아이 러브 유 마이 수지 큐’.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이 노래에 맞춰 특유의 오리춤을 추면서 무대에 등장했던 이주일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 그의 무대 덕분에 ‘수지 큐’가 1980년대에 다시 소환된 것이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유행어도 유명하지만 이주일을 생각하면 언제나 ‘수지 큐’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슈지 큐’는 C.C.R의 2집 앨범 <필모어 웨스트(Fillmore West)>(1969)에 수록된 곡이다. 미국에서도 이들의 노래는 1960년대와 70년대 청년기를 보낸 영화인들에 의해 자주 소환됐다. 1979년 제작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에서 월남전 위문공연을 온 본토 플레이걸들이 병사들과 함께 온몸을 흔들 때 나오는 곡이 ‘수지 큐’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님은 먼 곳에>에서 악단을 이끄는 정진영은 남편을 찾아 월남에 온 수애에게 ‘수지 큐’를 연습시키라고 말한다.

이처럼 ‘수지 큐’는 올드세대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노래지만 지금 들어도 여전히 신나는 노래임이 분명하다.



[60] 김현철 ‘달의 몰락’


“나를 매일 만날 때도 그녀는 나에게 말했어/ 탐스럽고 예쁜 달이 좋아/ 그녀가 좋아하던 저 달이 그녀가 사랑하던 저 달이 지네/ 달이 몰락하고 있네.”

[노래의 탄생]김현철 ‘달의 몰락’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마치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았다. ‘달의 몰락’이라니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버림받은 얘기를 한 편의 절절한 시로 빚어낸 젊은 뮤지션은 누구인가?

1993년 여름, 무명가수 김현철은 대구에서 공연을 마친 뒤 새벽 무렵 제3한강교를 지나고 있었다. 혜은이의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이 떠오르는 그 다리 위에서 하얗게 색이 바랜 달을 봤다. 그 순간 헤어진 여자친구가 떠올랐다. 마치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 같은 공간과 남녀가 이별하는 쓸쓸한 감성이 만나서 한 곡의 노래가 탄생한 것이다.

3집 앨범의 타이틀곡인 이 노래로 김현철은 단숨에 주목받는 싱어송라이터로 부상했다. 같은 앨범에 수록된 ‘춘천 가는 기차’나 ‘횡계에서 돌아온 저녁’ 등은 우리 음악계에서 좀체 볼 수 없었던 감성이었다.

그러나 자칫 잘못했으면 김현철이라는 가수는 피기도 전에 ‘몰락’할 뻔했다. 의사가 되기를 원했던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데뷔앨범을 낸 김현철은 1990년 5월 교통사고로 인해 전신마비가 와서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졌다. 뜻밖에도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용기를 준 건 아버지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보람도 얻고 성공도 할 수 있다”면서 그의 등을 떠밀어줬다.

그는 용기를 내서 새로운 앨범을 준비했고, 이문세(종원에게)나 장필순(어느새) 등에게도 곡을 써줬다. 새 앨범을 만들면서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음악과 내가 하고 싶은 노래에 집중했다. 3집 앨범은 5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면서 뮤지션 김현철의 이미지를 세상에 각인시켰다. 그가 제2의 음악 인생을 위해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고 있기에 사뭇 기대된다.



[61] 다섯손가락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장미가 지천이다. 붉디붉은 장미만 봐도 ‘낭만’이 돋는다. 다섯손가락이 부른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은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노래다. 비가 오는 수요일이면 더욱 그렇다.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리더 이두헌의 매력적인 중저음 보컬과 어우러져 듣는 이를 감상에 젖게 한다.

[노래의 탄생]다섯손가락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1985년 발표된 이 노래 때문에 당대의 청춘들은 비 오는 수요일이면 빨간 장미를 사서 연인에게 바쳐야 했다. 그러나 정작 이두헌에겐 실연의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였다. 동국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이두헌은 한 여학생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정처없이 걷다가 명동 근처에서 버스에 올랐는데 뒷좌석의 여고생들이 수다를 떨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수요일.” “수요일이어서 비가 오나?” 문득 명동성당 근처에서 빨간 장미를 팔던 할머니도 떠올랐다. 순간 거북선 담뱃갑의 은박지를 뜯어내서 곡을 메모했다.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그녀에게 안겨 주고파/ 흰옷을 입은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그녀에게 주고 싶네/ (중략)/ 한 송이는 어떨까 왠지 외로워 보이겠지/ 한 다발은 어떨까 왠지 무거워 보일 거야/ 시린 그대 눈물 씻어 주고픈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그 후로 오랫동안 명곡으로 남은 노래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학교방송국에서 DJ를 보던 후배는 이 곡을 소개하면서 이두헌이 ‘무슨 과 몇 학년 누구를 위해 만든 노래’라고 강조했다. 공개적으로 프러포즈를 대신해 준 셈이었다. 어느 날 그 여학생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기대에 차서 마주 앉은 이두헌에게 그녀는 말했다. “너무너무 부담스러우니 학교방송에서 그런 얘기를 하지 않게 해달라”고. 결과적으로 두 번씩이나 차인 셈이었다.

애당초 다섯손가락의 1집에는 이 노래가 없었다. 어느 날 음반기획자가 2곡이 더 필요하다고 해서 추가로 넣은 노래가 ‘새벽기차’와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었다. 노래에도 운명이 있는 게 아닐까?


[62] 엘튼 존 ‘유어 송’


상영 중인 영화 <로켓맨>은 엘튼 존의 음악 인생을 다룬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노래 ‘유어 송’은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국내에서는 이 노래보다 ‘소리 심스 투 하디스트 워드’나 ‘굿바이 옐로 브릭 로드’가 더 유명하다.

[노래의 탄생]엘튼 ì¡´ ‘유어 송’“모든 사람에게 얘기해도 돼/ 이 노래가 너를 위한 노래라고/ 너무 간단한 노래일지 모르지만/ 이제 거의 완성됐어/ 네가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당신을 위해 만든 이 노래를.”

달콤한 보이스와 피아노가 어우러진 이 노래는 1970년 발표한 두 번째 앨범 <엘튼 존>에 수록됐다. 그는 최근 영화와 관련된 인터뷰에서 작사자 버니 터핀이 쓴 가사에 곡을 붙이는 데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엘튼 존은 거의 모든 곡을 30분 안팎의 짧은 시간에 만들 정도로 천재적인 음악성의 소유자다.

그는 자신의 전기영화를 만드는 데 선뜻 동의한 이유에 대해 약물과 술에 빠져 살던 어두운 과거까지 다 보여주고, 그 과거와 결별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3년간 1200회 정도 중독자 모임에 나가는 등 새로 태어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서 재기 앨범 <더 원>을 발표한 그는 1994년 디즈니 만화영화 <라이온 킹>의 주제가를 작곡하여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특히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장례식에서 부른 ‘캔들 인 더 윈드’는 전 세계적으로 3300만장이나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다. 199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공연자 부문에 헌정되고, 1998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동성애자인 그는 남편이자 <로켓맨>의 제작자인 데이비드 퍼니시와 사이에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8세, 6세인 두 아이의 양육을 위해 더 이상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고별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어쩌면 더 이상 그를 무대에서 보기는 힘들지 모른다.



[63] 마이클 잭슨 ‘위 아 더 월드’

정확히 10년 전 6월25일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프로포폴 과다 투여로 자택에서 숨졌다. 51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의 10주기를 추모하는 행사가 국내에서도 곳곳에서 열렸다. 그는 팝음악의 역사를 장식한 가수였지만 죽은 뒤에도 평탄하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노래의 탄생]마이클 잭슨 ‘위 아 더 월드’1985년 발표한 싱글음반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는 마이클 잭슨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가 공동으로 작곡하고 퀸시 존스가 프로듀싱한 이 노래는 대기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를 돕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그야말로 당대의 톱스타들이 모두 참여했다. 스티비 원더, 티나 터너, 레이 찰스, 빌리 조엘, 브루스 스프링스틴, 다이애나 로스, 밥 딜런, 신디 로퍼 등이 동참했다. 요청을 받은 가수들 중에서 참여하지 않은 가수는 마돈나와 프린스 정도였다. 마돈나는 이럴 때 나서는 것보다 평소에 돕는 게 낫다면서 참여를 거부했다.

이 앨범에 참여한 45명의 스타들은 1985년 1월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A&M 레코딩 스튜디오에 모였다. 이들은 ‘USA 포 아프리카’라는 단체를 결성한 뒤 합창으로 녹음을 진행했다. 12시간이 넘는 작업 끝에 노래가 완성됐다. 이 싱글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1400만장이 팔렸고, 빌보드 차트는 물론이고 전 세계 음악차트를 휩쓸었다. 수익금 전액을 기부한 것은 물론이다.

“어떤 부름에 귀를 기울일 때가 됐습니다/ 세계가 하나가 되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하늘이 준 생명에 구원의 손길을 뻗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어디에선가 변화를 줘야 합니다.”

1984년에 영국과 아일랜드 뮤지션이 한데 뭉친 ‘밴드 에이드(Band Aid)’의 활약에 자극을 받아 만들었다는 추측이지만 결과적으로 마이클 잭슨 등 미국 팝스타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사건이었다. 그가 좀 더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오늘이다.



[64] 김연자 ‘아모르 파티’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 아모르 파티”

[노래의 탄생]김연자 ‘아모르 파티’가수 김연자에게 제3의 전성기를 가져다준 노래다. 이 노래의 산파역을 맡은 건 뜻밖에도 ‘철이와 미애’의 신철이었다. “몇 년 전에 SBS 라디오에서 <DJ 처리와 함께 아자아자>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어요. 그 프로그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너가 ‘부모님 전 상서’였죠. 매주 나훈아, 이미자, 주현미 등 중장년들이 좋아할 만한 가수의 노래를 리믹스로 편집하여 들려주는 코너였어요. 그때 김연자 메들리를 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죠.”

김연자는 일본에서 평생 번 돈을 남편이 다 날려서 이혼하고 돌아온 상태였다. 남편에게 모든 돈 관리를 맡기고 노래만 열심히 했는데 결국은 빈털터리였다. 신철이 메들리 앨범을 내자고 제안했다. 그 앨범에 따로 만들어서 넣은 노래가 ‘아모르 파티’였다. 이건우와 신철이 쓴 가사는 당시 김연자의 솔직한 심경을 담았다. 평생 번 돈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한번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댄스음악을 주로 만들었던 윤일상이 곡을 붙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 노래에 ‘EDM(일렉트로닉 댄스뮤직) 트로트’라고 이름 붙였다. 제목은 독일 철학자 니체가 주창한 ‘삶이 힘들더라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運命愛)를 빌려왔다.

노래에도 운명이 있는 걸까? 2017년 김연자는 아이돌그룹 ‘엑소’의 무대에 뒤이어 출연한 적이 있다. 그때 엑소 팬들이 동영상을 찍어 올리면서 음원차트에서 역주행을 시작했다. 외양은 트로트였지만 신세대들도 부담없이 리듬을 탈 수 있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MBC <무한도전> 등에도 잇달아 출연했다.

요즘 김연자는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정신없이 바쁘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살아온 덕을 본 것이다.



[65] AC/DC ‘하이웨이 투 헬’


지난달 30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판문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갑작스럽게 만난 뒤 오산 공군기지로 향했다. 예정에 없던 판문점 행사에서 우왕좌왕했다면 오산 공군기지에서 펼친 이벤트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노래의 탄생]AC/DC ‘하이웨이 투 헬’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헬기에서 내려 곧바로 연단에 올랐다. 그룹 AC/DC의 히트곡 ‘선더 스트럭(Thunderstruck)’에 맞춰 힘차게 걸었다. 출연진만 다를 뿐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의 한 장면처럼 대형 격납고 문이 열리면서 성조기가 등장하고, 강력한 록음악이 흘러나와서 흥분을 고조시켰다. 트럼프는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자신의 딸 이방카를 무대 위로 불러세웠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뭉칠 것이다”라면서 장병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했다.

시작이 다소 옆길로 샜지만 AC/DC처럼 가슴 뛰게 하는 밴드가 또 있을까. 본 스콧의 거친 보컬, 반바지 교복 차림의 리드기타 앵거스 영, 그의 형 말콤 영에 이르기까지 이 메탈밴드의 무대는 용광로를 연상케 한다. 특히 여섯 번째 앨범에 실린 ‘하이웨이 투 헬(Highway to Hell)’은 거칠고 대담하지만 절제미가 느껴지는 명곡이다. 짧지만 강렬한 느낌으로 듣는 이의 가슴을 뒤흔든다. 그래서 그들의 공연에서 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노래다.

“쉽고 자유롭게 살아/ 삶은 편도 승차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날 내버려 둬/ 모든 걸 내 발길에 실어 보내/ 이유는 필요없어/ 리듬에 맞출 필요도 없어/ 내가 하고 싶은 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내려가/ 파티 타임/ 내 친구들이 거기 있을거야.”

작사·작곡자인 본 스콧은 이 노래에서 삶을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에 비유한다. 1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갔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80년 2월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여름은 록음악의 계절이다. 여기저기서 록페스티벌도 열릴 것이다. AC/DC의 무대를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의 라이브 실황이라도 보면서 무더위를 날려 보내야겠다.



[66] 존 바에즈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

가수, 인권운동가, 반전평화 운동가. 존 바에즈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한 세상을 살아온 인물도 드물다. 이제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뉴스의 중심에 있다. 최근에는 노벨상을 수상한 밥 딜런에게 영향을 끼친 연인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노래의 탄생]ì¡´ 바에즈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그의 히트곡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The river in the pines)’는 감미로운 멜로디와 달리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는 곡이다. “서로 사랑하는 메리와 찰리는 솔밭 사이를 흐르는 강가에서 결혼을 했다. 그러나 찰리는 급류에 휩쓸려 세상을 떠났다. 위스콘신주의 날씨가 스산했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강물이 잔잔하게 물결치고, 삼나무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강 하류 바위 근처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여행자들은 강가의 무덤에 야생화를 심어주었다. 젊은 연인에게 바치는 꽃이었다.”

서정적인 포크송으로 기억되는 존 바에즈의 삶은 투사에 가깝다. 그는 1941년 미국 뉴욕에서 멕시코 출신 물리학자 아버지와 스코틀랜드 출신 희곡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핵 제조에 반대하는 물리학자였다. 존 바에즈가 반전 평화운동가가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보스턴대를 중퇴한 존 바에즈는 1961년 뉴욕에서 밥 딜런을 만나 함께 전국 순회공연을 하며 흑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헌신했다. 마틴 루서 킹 목사와 함께 인권운동에 앞장섰고, 베트남전쟁 반대운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생애 통산 8장의 골드앨범을 내고 그래미상 후보로 7차례나 노미네이트되는 등 음악적 성취도 남달랐다. 반전 노래의 백미로 꼽히는 ‘도나도나’나 인생을 깊이 있게 노래한 ‘500마일’ 등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래다.

“음악이 전쟁터에서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소리가 아름답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여전히 울림이 큰 가수다. 올여름 휴가 때는 솔밭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보며 존 바에즈를 들을 수 있는 한적한 공간을 찾아봐야겠다.



[67] 비치보이스 ‘서핑 유에스에이’


바다는 늘 매혹적이다. 특히 여름바다는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부른다. 그 바다에서 서핑을 즐기는 건 모든 이들의 로망이다. 거대한 파도가 만든 파이프라인 사이로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하게 파도를 타는 서퍼야말로 여름바다의 주인이 아닐 수 없다.

[노래의 탄생]비치보이스 ‘서핑 유에스에이’그 로망을 노래로 만들어 성공한 밴드가 바로 비치보이스다. 196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호손에서 브라이언, 데니스, 칼 등 윌슨 3형제와 그들의 사촌 마이클 러브, 친구 엘 자딘이 비치보이스를 결성했다. 그들의 데뷔 싱글이 ‘서핑’이다.

데뷔 앨범 <서핑 사파리>에 이어 내놓은 두 번째 앨범 <서핑 유에스에이>가 그 유명한 곡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치 캘리포니아 해변에 나가 서핑을 즐기는 서퍼가 된 기분을 만끽하게 하는 노래다. 비치보이스는 이후로도 ‘서퍼 걸’ ‘펀, 펀, 펀’ 등 끊임없이 서퍼 음악을 내놓으면서 대표적인 여름밴드가 됐다.

이 팀의 리더이자 작곡자인 브라이언 윌슨은 1964년부터 더 이상 무대에 서지 않고 작품에 집중한다. 마침내 이들의 명작 앨범인 <펫 사운즈>(1966년)를 내놓으면서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를 긴장시키는 록밴드로 거듭났다. 그러나 브라이언 윌슨이 신경쇠약을 이유로 앨범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88년 톰 크루즈 주연 영화 <칵테일>에 삽입된 노래 ‘코코모’가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면서 건재를 과시했으나 데니스 윌슨, 칼 윌슨 등이 사망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12년 밴드 결성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생존한 원년 멤버를 주축으로 재결성됐다. 원로 록밴드의 공연은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지만 한편으로 애잔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젊은 시절 보여줬던 율동도 없이 때로는 의자에 앉거나 마이크에 의존한 채 ‘서핑 유에스에이’를 부르는 그들이 안쓰럽다. 비치보이스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나이지만 미국에서는 로큰롤 명예의전당에 헌액되고, 그래미상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는 등 여전히 존경받는 밴드다.



[68] 송창식 ‘내 나라 내 겨레’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피어린 항쟁의 세월 속에/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 …/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노래의 탄생]송창식 ‘내 나라 내 겨레’몇 손가락에 꼽히는 ‘조국 찬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노래를 조영남, 송창식, 김민기, 윤지영 등이 불렀으니 뚜렷한 주인이 없다. 1970년대 초 음악평론가 이백천과 기자 정홍택이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났다. 이백천이 천재 뮤지션들이라며 정홍택에게 소개한 대학생들이 김민기와 양희은이었다. 두 사람은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청년들에게 매료됐다. 그래서 전국의 대학을 돌면서 공연하는 통기타 팀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 팀이 함께 부를 노래가 필요했다. 서울 충무로 라이온스호텔 3층에 방 2개를 빌려 합숙을 했다. 김민기와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양희은 등 소위 ‘세시봉’ 멤버들이었다. 김민기가 노랫말을 쓰고, 송창식이 곡을 붙여 완성했다. 기타를 치면서 떼창을 할 수 있는 엔딩송으로 만든 것이다.

처음 이 노래를 불러 앨범에 수록한 가수는 조영남이었다. 1971년에 나온 그의 앨범에 ‘동해의 태양’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됐다. 이어 1972년 송창식 2집에 ‘내 나라 내 조국’이란 제목으로 발표됐다. 1974년 포크싱어 윤지영의 2집 <고향 가는 길>에 김민기가 내레이션에 참여하여 수록됐지만 이 앨범은 검열 때문에 시장에서 사라졌다. 김민기가 공을 들였던 남자 포크싱어 윤지영도 자취를 감췄다.

1993년 김민기가 작품집을 내면서 내레이션 부분도 정리해서 넣었다. 처음 만들었을 때의 내레이션과는 사뭇 달라졌다. ‘나의 조국은, 나의 조국은 저 뜨거운 모래바람 속 메마른 땅은 아니다. 나의 조국은 찬바람 몰아치는 저 싸늘한 그곳도 아니다. 나의 조국은, 나의 조국은 지금은 말없이 흐르는 저 강물 위에 내일 찬란히 빛날 은빛 물결.’

아직도 동해바다에 서면 이 노래가 가장 먼저 떠오르면서 피가 끓는다. 우리에게 제2의 애국가쯤 되지 않을까.



[69] 심수봉 ‘무궁화’


노래를 들을 때마다 부채 의식이 느껴지는 가수가 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가수 심수봉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1979년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당시 현장에 있었다. 노래를 잘한 죄로 불려갔다가 역사의 격랑에 휩쓸렸다.

[노래의 탄생]심수봉 ‘무궁화’‘이 몸이 죽어 한 줌의 흙이 되어도/ 하늘이여 보살펴 주소서 내 아이를 지켜 주소서/ 세월은 흐르고 아이가 자라서 조국을 물어 오거든/ 강인한 꽃 밝고 맑은 무궁화를 보여 주렴.’

심수봉은 이 노래를 가장 아끼는 곡으로 꼽는다. ‘그때 그 사람’이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보다 먼저 꼽는 이유는 뭘까? 사건 직후 그는 한 달간 서울 한남동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 방송 출연금지와 출국금지를 당했다. 이 노래는 해금을 기다리던 시절에 우연히 국립묘지에 갔다가 무명용사의 비문을 보고 쓴 곡이다. 아들한테 우리꽃 무궁화를 위한 노래 한 곡 정도는 남겨주고 싶었다.

드디어 해금이 돼서 1985년 MBC TV <쇼 2000>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이날 이후로 어떤 방송에서도 출연 제의가 없었고 노래를 틀어주지도 않았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저런 노래가 어떻게 TV에 나오냐?”고 했다는 것이다. 노래보다는 심수봉의 등장이 불편했을 수도 있다.

심수봉은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여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엇을 보았나’라든가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고 썼지만 전체적으로는 뜨거운 조국애를 담은 노래였다. 말로만 해금됐을 뿐 여전히 그는 정치적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북녘땅을 고향으로 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심수봉은 “그냥 당하면 당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고 말한 바 있다.

1976년 남산 도쿄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하던 심수봉을 발굴한 건 손님으로 왔던 나훈아였다. 그날 저녁의 만남이 ‘파란만장 심수봉’을 만들었으니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덕분에 우리는 심수봉의 절창을 듣고 살았으니 고맙고, 고맙다.



[70] 밥 말리 ‘노 우먼, 노 크라이’

레게는 여름의 음악이다. 그리고 자메이카와 밥 말리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밥 말리의 대표곡 ‘안돼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No Woman, No Cry)’는 마음이 답답할 때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노래다.

[노래의 탄생]밥 말리 ‘노 우먼, 노 크라이’“나는 기억하고 있어요/ 우리가 살던 트렌치타운의 공동마당에서/ 위선에 찬 인간들을 관찰하던 때를/ 우리가 만난 좋은 친구들과 어우러지던 순간을/ 우리와 함께했던 좋은 친구들 그리고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좋은 친구들/ 밝은 미래 앞에서 결코 과거를 잊어서는 안된다오/ 자 이제 눈물을 닦아요.”

레게음악의 전도사로 불렸던 밥 말리는 이 노래 속에서 지금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절대로 울지 말고,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노래한다. 마치 사랑하는 여인에게 바치는 곡 같지만 사실은 그의 조국 자메이카를 위한 노래다. 1962년까지 영국 식민지였던 자메이카, 나아가서는 백인들에게 탄압받아온 흑인들을 절규하듯이 위로하고 있다.

밥 말리는 언젠가 모든 흑인이 그들의 고향인 아프리카에 모여서 이상향을 건설할 것이라는 라스파타리아니즘의 추종자였다. 1세기 전 흑인 인권운동가 마르쿠스 가비는 에티오피아가 흑인들을 구원할 약속의 땅이 될 것이라면서 라스파타리아니즘을 주도했다. 그러나 메시아로 추종했던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에티오피아 황제가 쿠데타로 물러나면서 시들해졌다. 그러나 카리브해의 레게 뮤지션들은 라스파타리아니즘을 종교로 신봉했으며 레게머리를 고수하면서 명상을 위해 마리화나를 피웠다.

밥 말리는 이 노래의 작사, 작곡자로 그의 친구 빈센트 포드의 이름을 올렸다. 포드는 밥 말리와 1950년대 트렌치타운의 빈민가에 살던 시절의 친구였다. 당뇨로 두 다리를 잃은 장애인이었지만 의협심이 강했고, 무료급식소를 운영하여 빈민구제에도 앞장섰다. 암울하고 힘들었던 시절에 함께 정을 나눴던 친구에게 재정적 보탬을 주기 위해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 노래는 1981년 5월 밥 말리가 뇌종양으로 사망한 뒤 발매된 베스트앨범에 수록된 라이브 버전이 더욱 큰 인기를 누렸다.



[71] 블랙 사바스 ‘시스 곤’


록의 계절에 펼쳐진 페스티벌에서 스틸하트가 ‘시스 곤(She’s Gone)’을 앙코르송으로 열창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런데 블랙 사바스가 부른 동명의 노래가 먼저 떠올랐다. 어쩔 수 없는 세대 차이다. 청춘의 한때 이 노래를 들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지 않았다면 실연의 아픔을 겪지 않은 중년이리라.

[노래의 탄생]블랙 사바스 ‘시스 곤’레드 제플린이나 딥 퍼플에 비해 저평가됐지만 4인조 메탈밴드 블랙 사바스는 2017년 해체될 때까지 꾸준한 인기를 누려왔다. 1976년 발표된 이 노래는 1973년 발표된 ‘체인지스(Changes)’와 함께 유독 한국에서 전폭적 지지를 얻었다. 1995년 이들의 내한공연 때 공연기획사 측이 두 곡을 꼭 불러야 한다고 요청했지만 기타리스트 토미 아이오미는 연주를 안 한 지 오래됐다면서 난색을 표했다. 결국 기획사의 설득으로 ‘체인지스’만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당시 한국 팬들은 ‘시스 곤’을 앙코르로 부를 것으로 굳게 믿었지만 그들은 끝내 부르지 않은 채 무대를 마쳤다. 블랙 사바스는 그때도 여전히 ‘파라노이드(Paranoid)’나 ‘아이언 맨(Iron man)’ 등 다소 묵직하면서도 악마적인 노래들을 내세우는 반종교적이고 음산한 분위기의 밴드였다.

이 노래는 1976년 발표한 앨범 <테크니컬 엑스터시>(Technical Ecstasy)에 수록된 곡이다. 애절한 멜로디와 다소 상투적인 노랫말의 ‘시스 곤’이 1970년대 말 한국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게 된 배경은 뭘까.

“너무 오래 당신을 기다려 왔어요/ 당신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나는 너무 마음이 아파요. 어쩌면 좋아요(I’ve been a long long time, waiting for you/ I didn’t want to see you go/ And now it’s hurting so much, what can I do)” 이 노래 속에서 오지 오즈번의 애절한 보컬은 마치 나훈아의 그것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고 절규하던 나훈아의 록 버전쯤 될까. 그래서인지 1970년대 말 대학가의 음악다방에서 DJ들이 자주 틀어댔다. “오늘은 왠지…” 하면서 말이다.



[72] 015B ‘신인류의 사랑’


“마음에 안 드는 그녀에겐 계속 전화가 오고/ 내가 전화하는 그녀는 나를 피하려 하고/ 거리엔 괜찮은 사람 많은데 소개 받으러 나간 자리엔/ 어디서 이런 여자들만 나오는 거야.”

[노래의 탄생]015B ‘신인류의 사랑’신세대나 신인류는 어느 시대나 있었다. 요즘도 1990년대생, 즉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탐구가 한창이다. 1994년에 015B(空一烏飛)가 발표한 이 노래도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문제가 있다. 압구정동에 ‘오렌지족’과 ‘야타족’이 등장했던 시절이니 노래는 당대의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지만 화자인 남성은 여성을 외모만 가지고 판단한다. 이 때문에 여고생 팬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면서 이 노래를 만든 정석원에게 협박편지를 보냈다. 1990년대 팬들은 그 이전 세대들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의사를 피력했다. 요즘엔 댓글로 의사를 표현하지만 그 시절엔 기획사나 언론사 등에 전화를 했다.

015B는 신해철이 주축이 됐던 무한궤도의 뒤를 잇는 그룹이다. 무한궤도가 1988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뒤 멤버였던 정석원, 조형곤, 조현찬이 정석원의 친형인 장호일과 함께 결성했다. 그룹명은 ‘무=0, 한=1, 궤도=5B(Orbit)’를 장난스럽게 바꿨는데 그 의미를 묻는 이들이 많아서 ‘공중을 나는 한 마리 까마귀’(空一烏飛)라는 한자를 끼워 맞췄다.

장호일(본명 정기원)은 서울대 신문학과 출신이고 동생인 정석원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출신이다. 팬들로부터 쏟아진 잘난 체한다는 질책은 명문대생이라는 배경도 한 요인이었다. 015B는 보기 드물게 앨범마다 객원가수를 기용했다. 그 객원가수가 훗날 대한민국 가요계의 풍성한 보컬을 양산하는 저수지 역할을 했다. 윤종신, 김태우, 김돈규 등을 비롯하여 이승환, 박정현, 다이나믹 듀오, 호란 등도 객원가수로 참여한 바 있다. 특히 윤종신은 015B의 노래와 궁합이 잘 맞아서 독특한 목소리의 솔로 가수로 우뚝 서는 데 큰 힘이 됐다. 여하튼 상큼한 노랫말과 실험적인 사운드로 1990년대를 주도하던 015B의 음악이 그리워진다.



[73] 패티 김 ‘이별’


가을 앞에서 패티 김의 노래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초우’ ‘이별’ ‘9월의 노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등 많은 노래가 스쳐 지나간다. 그중에서도 ‘이별’은 이 노래의 작품자이자 남편이었던 길옥윤과의 짧지만 아름다운 만남이 스며 있는 노래다.

[노래의 탄생]패티 김 ‘이별’‘다리를 꼬고 앉아 큰소리로 웃는 모습이 좀 건방져 보였다. 솔직하게 말해 당당함이 지나쳐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1958년 도쿄 국제극장에서 패티 김(당시엔 린다 김)을 처음 본 길옥윤의 회고다. 길옥윤은 색소폰에 심취하여 일본에서 일하는 재즈 뮤지션이었고, 패티 김은 미8군 공연단의 신인 가수였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1965년이었다. 길옥윤은 일하던 클럽이 망해서 귀국했고, 패티 김도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길옥윤은 패티 김이 묵는 호텔에 전화를 해서 노래를 불렀다

‘사월이 가면 떠나갈 사람/ 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 사랑이라면 너무 무정해/ 사랑한다면 가지를 마라’

결국 패티 김은 사랑스러운 로맨티시스트에게 청혼했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의 주례로 결혼을 했다. ‘4월이 가기 전에’와 ‘사랑의 세레나데’가 담긴 앨범을 하객들에게 나눠주고, 신혼여행은 베트남 파병 한국군 위문 공연으로 대신했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때로는 보고파지겠지/ 둥근달을 쳐다보면은/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날을 후회할 거야’

1973년 5월 ‘이별’이 발표됐을 때 팬들은 두 사람의 파경을 직감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두 사람은 이혼을 발표했다. 1994년 폐암 판정을 받은 길옥윤을 위해 SBS가 마련한 <길옥윤 이별 콘서트>에서 패티 김은 ‘사랑은 영원히’를 열창했다. 이듬해 3월 길옥윤은 파란만장했던 한 생애를 마감했다. 그리고 패티 김도 은퇴했다.



[74] 사이먼 & 가펑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네가 너무 힘들고 초라할 때/ 네 눈에 눈물이 고일 때 내가 닦아줄게/ 힘들고 어려울 때/ 친구가 없을 때도 나는 늘 너의 편/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를 눕힐게.”

[노래의 탄생]사이먼 & 가펑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이 아름다운 계절에 문득 이 노래가 그리웠다. 눈만 뜨면 치고받고 싸우고, 증오하고 경멸하는 작금의 상황을 노래로라도 위로받고 싶었다.

팝음악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1970년 발표한 이 노래는 빌보드 팝 싱글차트에서 6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이듬해 그래미상에서 총 5개 부문의 트로피를 받았다. 그러나 이 무렵 두 친구는 서로에게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지 못했다. 불화가 시작된 건 가펑클의 영화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가펑클과 사이먼이 영화 <캐치-22>에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촬영일정이 늦춰지면서 앨범 제작도 지연됐다. 더군다나 나중에 사이먼의 촬영 분량은 대본에서 사라졌다.

뒤늦게 가펑클이 스튜디오로 복귀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불편한 감정은 자꾸만 커졌다. 더군다나 NBC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서 이 노래가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스폰서 기업들이 후원을 포기했다. 제작 과정에서 두 사람 간 의견충돌이 잦아졌고, 결국 이 앨범이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이 됐다. 사이먼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가펑클에게 노래를 양보했던 사이먼은 뒷날 뼈저리게 후회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사이먼이 솔로로 독립하고, 가펑클은 영화배우 겸 가수로 활동했다.

1981년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두 사람은 듀오를 이뤄 무료 공연을 펼쳤다. 이를 기점으로 이들의 우정도 회복됐다.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무려 50만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의 노래는 한국팬들에게도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나 끝내 내한공연은 하지 못했다. 한동안 결혼식장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로도 인기를 얻었다.

지난해 9월 폴 사이먼은 뉴욕 퀸스의 코로나파크에서 공연을 열고 더 이상 순회공연은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75] 멜라니 사프카 ‘더 새디스트 싱’

요즘 유튜브를 통해 강제 소환되는 콘텐츠 중 작고한 DJ 이종환이 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의 디스크쇼> 등 음악 프로그램의 이름을 달고 그의 목소리가 추억의 팝송과 함께 전파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생각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노래의 탄생]멜라니 사프카 ‘더 새디스트 싱’“하늘 아래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는 일입니다/ 알고 지내던 모든 것들이/ 바로 내 자신의 삶이 되었지만/ 안녕이란 말을 하기도 전에/ 좋은 시절은 이별을 고하는군요.”

이종환 특유의 콧소리가 섞인 낭송과 멜라니 사프카의 슬픈 목소리가 어우러진 ‘더 새디스트 싱(The Saddest Thing)’은 이런 가을이면 사춘기의 기억 어디쯤 잠복해 있다가 튀어나온다. 1947년 뉴욕주의 퀸스에서 태어나 연기자를 꿈꿨던 그녀는 음반기획사를 영화사로 착각하여 오디션을 보러가는 바람에 가수가 됐다. 1967년 첫 앨범을 낸 뒤 매니저이자 프로듀서였던 피터 스체커릭과 이듬해 결혼한다. 그러나 사프카는 밥 딜런이나 존 바에즈 등 거물 포크싱어들의 명성에 가려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1973년 발표된 ‘더 새디스트 싱’은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곡이었지만 정작 미국에서는 큰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 한국에 불어닥친 포크 열풍과 유난히 슬픈 노래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취향과 맞물려 라디오 프로그램과 음악다방 리퀘스트곡으로 사랑받았다.

2006년에서야 첫 내한공연을 왔던 멜라니 사프카는 반전 및 인권 활동을 해왔던 포크싱어답게 공연에 앞서 임진각을 방문하여 눈길을 끌었다. 칼라 보노프, 리타 쿨리지 등 미국의 여성 포크싱어들과 함께한 무대였지만 ‘더 새디스트 싱’만으로도 올드팬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 노래가 유행했던 시절에 그런 속설이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이 노래를 신청해 들으면 반드시 헤어진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과 다를 바 없다.



[76] 김광석 ‘너무 아픈 사랑은…’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 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버리기/ 못다 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노래의 탄생]김광석 ‘너무 아픈 사랑은…’가객 김광석이 1994년 발표한 4집 수록곡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지금은 유명 시인이 된 류근이 작사한 노래다. 같은 앨범에 수록된 ‘서른 즈음에’ ‘일어나’와 더불어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시집 <상처적 체질>과 <어떻게든 이별>을 내고 방송에도 출연 중인 류근이 이 노랫말을 쓴 건 무명 시인 시절이던 1991년경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그는 집안이 망해서 다니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복학할 등록금이 없었다. 한 후배가 아르바이트 삼아 노랫말을 써보라고 했다. 당장 밥벌이가 급했던 그는 하루 만에 29곡의 가사를 썼다. 가수 윤선애의 앨범에 들어갈 곡이었지만 음반사가 망해서 빛을 보지 못했다.

몇 년 뒤 김광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의 새 앨범에 ‘너무 아픈 사랑은…’을 쓰겠다는 거였다. 녹음실에서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 류근은 살짝 실망했다. 군복무 시절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연인을 잊지 못해서 쓴 노랫말이었는데 슬픔이 묻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번 듣다보니 역설적 슬픔이 느껴졌고, 무엇보다도 거금 50만원을 받아서 한숨을 돌렸다, 김광석도 죽기 직전까지 무대에서 부를 정도로 이 노래를 아꼈다.

이 노래의 작사가와 작곡가로 인연을 맺은 류근과 김광석은 홍대 근처 김광석의 작업실 등에서 만나 5집 앨범 작업을 같이했다. 그러나 5집 앨범은 끝내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김광석이 자살로 세상을 마감하지 않았다면 류근과 김광석이 콤비를 이룬 노래가 더 나왔을 것이다. 김광석은 생전에 류근에게 저작권협회에 가입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당장 10만원의 협회비가 없었던 류근은 발표된 지 17년 뒤에야 저작권 등록을 했다. 그는 매달 술값 이상의 저작권료가 나와서 감사하고 있지만 먼저 보낸 김광석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77] 윤도현 ‘가을 우체국 앞에서’


가을은 오지 말래도 온다. 그러나 늘 기다려지는 게 가을이다. 그런데 그 가을은 허망하리만치 짧다. 그래서인가. 가을은 아름답지만 외롭고, 슬프고, 허망하다.

[노래의 탄생]윤도현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윤도현이 1994년 데뷔앨범에 발표한 이 노래는 싱어송라이터 김현성의 작품이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등 많은 작품으로 사랑받는 그는 파주를 기반으로 한 노래모임 ‘종이연’에서 윤도현을 만났다.

“그 당시 파주 광탄면에 작은 우체국이 있었어요. 그 우체국을 지나다가 ‘가을 우체국 앞에서’라는 제목을 먼저 떠올렸죠. 그 우체국 앞에 은행나무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사가 계속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결국 세 번째 만에 완성한 곡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노랫말이 목표였어요.”

그런데 노래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었다. 윤도현이 부르기로 한 뒤에 바로 김광석의 전화가 왔다. 자신의 새 앨범에 이 노래를 넣고 싶다는 거였다. 김현성은 잠시 고민했다. 신인가수가 부르는 것보다 유명가수가 부르는 게 작품자에겐 더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모임의 막내 윤도현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다. 김광석도 흔쾌하게 포기했다.

조용필의 노래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누군가에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 손’(서울 서울 서울)에서 보듯이 우체국은 우리에게 소통의 공간이다. 김현성은 그 공간에서 소멸을 보았다. 그의 말처럼 아름다운 건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소멸을 인정해야 홀로 설 수 있지 않을까.



[78] 최헌 ‘가을비 우산 속’


비라도 내리는 가을날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물론 세대 차이가 있겠지만 40대가 넘었다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노래다.

[노래의 탄생]최헌 ‘가을비 우산 속’“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나 혼자서 걸었네 미련 때문에/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질 그 얼굴이/ 왜 이다지 속눈썹에 또다시 떠오르나/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딜 갔나/ 아픈 가슴 달래며 찾아 헤매이는/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힌다.”

이두형 작사, 백태기 작곡의 ‘가을비 우산 속’은 가수 최헌이 1978년에 처음 불렀다. 이후 몇몇 가수들이 리메이크하여 희자매, 조영남과 김도향이 듀엣으로 부르기도 했다. 사람 좋고 의리를 생명으로 아는 가수였던 최헌은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였다.

1948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최헌은 명지대 경영학과 재학 중 미8군 무대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 1등을 차지한 뒤 록그룹 ‘히식스’(He6)의 보컬리스트로 영입됐다. 당시 기타리스트 김홍탁과 조용남이 이끌던 ‘히식스’는 ‘초원의 빛’ 등이 히트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우리 대중음악사에서 1970년대는 그룹사운드의 전성기였다. 이후 최헌은 1974년 ‘검은 나비’를 결성해 ‘당신은 몰라’를 발표했고, 1976년에는 ‘호랑나비’를 만들어 ‘오동잎’을 히트시켰다. 1977년 그가 솔로로 전향한 것은 시대의 흐름이었다. 록그룹의 보컬들이 잇따라 솔로로 변신하여 록감성을 바탕으로 한 발라드곡을 발표했다.

최헌은 ‘가을비 우산 속에’로 1978년 MBC 가수왕을 차지하는 등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1979년에 제작된 석래명 감독의 영화 <가을비 우산 속에>도 이 노래의 산물이다. 정윤희와 이미 고인이 된 신성일과 김자옥이 출연했다. 빨간 우비의 정윤희와 노란 우비의 김자옥이 마주 본 포스터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후 그룹사운드의 부활을 꿈꾸면서 그룹 ‘불나비’를 결성해 미국 버티 히긴스의 번안곡 ‘카사블랑카’(1983년)를 발표하여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2012년 9월 식도암으로 투병하다 가을비 속으로 떠났다.



[79] 에디트 피아프 ‘사랑의 찬가’


사랑은 가을과 닮았다. 붉은 단풍처럼 타오르다가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진다. 사랑은 모든 잎을 대지에 주고 봄을 기다리는 겨울나무와도 닮았다. 그런 사랑이 그리운 계절에 딱 어울리는 노래가 있다.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목소리와 애절한 노랫말이 어우러져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노래의 탄생]에디트 피아프 ‘사랑의 찬가’하늘이 무너지고 대지가 뒤흔들려도 당신이 나만 사랑해준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노래한다. 또 검은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라면 그리할 것이고, 도둑질을 하라면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말한다. 당신이 원한다면 조국도 버리고, 친구도 버릴 수 있다고 노래한다.

142㎝의 작은 키에 연약한 몸 때문에 예명조차 참새(피아프·piaf)라고 지은 그는 삶 자체가 비극이었다. 그가 노랫말을 쓴 ‘사랑의 찬가’는 그 비극의 정점에 있는 노래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맡겨졌다가 14살 때부터 서커스단원인 아버지를 따라 유랑생활을 했던 에디트 피아프는 가끔씩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탁월한 노래 솜씨를 인정받으면서 파리의 클럽에서 스타가 됐다.

그녀는 뉴욕 공연에 갔다가 만난 세계미들급 챔피언인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는 이미 세 아이를 둔 유부남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르당은 1949년 10월28일 포르투갈 인근의 아조레스 제도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피아프를 만나러 뉴욕으로 가던 길이었다. ‘사랑의 찬가’는 연인을 잃은 아픔을 담은 노래다.

1951년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에디트 피아프는 고통을 잊기 위해 모르핀과 술에 의지했다. 그 와중에도 노래를 향한 사랑과 열정은 멈출 줄 몰랐다. 그러나 남편 자크 필스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1963년 10월10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7년 그녀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라 비앙 로즈>(장밋빛 인생)가 개봉되어 큰 화제를 모았다. 에디트 피아프의 삶이야말로 어떤 영화보다도 더 파란만장했기에 보는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80] 이적 ‘다행이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 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노래의 탄생]이적 ‘다행이다’1995년 ‘패닉’의 이적과 김진표가 데뷔 앨범을 내놨을 때 대중은 단숨에 그들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달팽이)라는 도발적 노랫말은 일찍이 우리 가요계에서 찾기 힘든 감성이었다. ‘왼손잡이’와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등은 훗날 시와 소설, 노래 등 전방위적인 글쓰기로 주목받은 이적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노래였다.

2007년 이적이 3집 <나무로 만든 노래>의 타이틀곡으로 내놓은 ‘다행이다’ 역시 따뜻한 노랫말과 어쿠스틱한 멜로디로 이 풍진 세상을 사는 우리를 위로하는 노래다. 같은 해 정옥희씨와 5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한 이적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치기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다.

애시당초 1분30초 길이의 짧은 소품이었지만 주변에서 타이틀곡으로 적극 추천했다. 이적은 이 노래를 매만져서 3분이 넘는 지금의 곡으로 다시 썼다. 아내를 처음 소개받은 뒤 다른 친구에게 소개팅을 주선했던 이적은 두 번째 만남에서 운명과 같은 사랑을 예감했다. 그래서 “나랑 사귈래요?”라고 고백했고 “예”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술을 마시면 전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적은 “나랑 사귀자고 물었고, 그녀가 예라고 답했다”고 메모를 해놨다. 그 운명같은 사랑의 얘기를 이 노래에 담은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다’는 천천히 반응이 왔다. 다큐멘터리에 삽입되고, 파업 현장에서 불리는가 하면 연인들의 고백송으로도 인기를 얻었다. 발표된 지 5개월이 지나서야 인기를 얻게 된 건 단순한 사랑 노래를 뛰어넘어 사람 사이의 체온을 확인할 수 있는 따스함 때문이었다.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하는 건 결국 사랑이 아닐까.



[81] 레너드 코언 ‘아임 유어 맨’

트렌치코트를 입고 낙엽길을 걷는 고독한 남자의 뒷모습과 가장 잘 어울리는 가수를 꼽는다면 단연 레너드 코언이다. 중저음의 목소리로 마치 속삭이듯 노래하는 코언은 시인이자 소설가, 뮤지션, 영화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2016년 11월 82세를 일기로 타계한 그는 작고하기 직전에도 정규앨범을 발표하는 열정을 보였다.

[노래의 탄생]레너드 코언 ‘아임 유어 맨’“당신이 원한다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요”로 시작하는 ‘아임 유어 맨’은 달콤한 유혹의 말들로 가득하다. 자칫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코언이 노래하면 진정성이 느껴진다. 권투선수가 되기를 원하면 기꺼이 링에 오르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발밑에 엎드리고,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개처럼 울부짖을 수 있다고 노래한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1988년 발표된 그의 8번째 앨범의 타이틀곡. 코언은 이 앨범에 ‘이 모든 노래를 D I에게 바친다’고 썼다. 그렇다면 D I는 누구인가? 패션 사진작가 도미니크 이서만으로 알려졌다. 앨범 하나를 통째로 사랑하는 여인에게 헌정한 것이다.

수려한 외모와 글솜씨, 노래 실력을 두루 갖춘 코언은 유독 여성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담은 노래가 많다. 자신의 두 자녀를 낳아준 수잔 엘로드가 있었지만 무용수인 수잔 베르달을 위해 만든 노래가 ‘수잔’이었다. 또 한때 연인이었던 일렌 메리앤과 헤어지면서 만든 노래가 ‘소 롱 메리앤’이었다. 가을비 내리는 날이면 듣게 되는 ‘페이머스 블루 레인코트’까지 코언은 감성을 깨우는 관능적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그가 떠났을 때 배우 루비 로즈는 “우리는 올해 프린스, 보위, 레너드 코언을 잃고 트럼프를 당선시켰다”고 탄식했고, 캐나다 총리 트뤼도도 “코언은 1960년대뿐만이 아닌 지금도 공감을 부르는 아티스트였다”고 칭송했다. 코언의 공식 홈페이지는 오는 11월22일 스튜디오 정규앨범 발매를 예고하고 있다. ‘생스 포 더 댄스’라는 제목으로 9곡이 수록되는데 제니퍼 원스, 벡, 데이미언 라이스 등 여러 후배 뮤지션들이 헌정 참여했다.

가을이 깊어간다. 멋지게 늙어가던 음유시인 코언의 노래를 들으며 커피 한 잔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