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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Tour - World

문명의 바닷길 - 주강현 (시사인 연재)

by Wood-Stock 2015. 6. 8.

시사IN


‘문명의 바닷길’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액체의 역사’다. 오늘의 한국을, 오늘의 유라시아를 있게 한 문명의 바닷길을 살핀다. 바닷길은 당연히 내륙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 어떤 길은 익히 알려졌으며 어떤 길은 생소하다. 익숙한 길은 그 길의 의미망을 되짚어나가는 계기가 될 것이며, 생소한 길은 잃어버린 바닷길을 찾아나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문명의 바닷길검은담비의 길, 세계를 바꾸다


검은담비(sable)의 털은 예나 지금이나 최상으로 꼽힌다. 그래서 가격도 최고다. 모피 거부 운동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지난겨울도 세계의 많은 귀부인이 모피를 걸치고 환상적 기분에 빠졌을 것이다. 동물의 죽은 껍데기에 산사람이 대신 들어서는 독특한 문화는 아직도 전성기다. 이런 모피광들에게 검은담비는 묘한 열망을 부여한다. 담비는 족제빗과 동물로 털이 조밀하고 부드럽기 그지없다. 특히 최상 품질인 시베리아산은 청색 기미를 띠는데 실크 색깔의 광택도 난다.

이런 검은담비가 세상을 바꾸었다? 사실이다. 모피가 상층 위신재(威信財)가 되고, 옷을 뛰어넘어 유력 자본재가 되었을 때, 모피는 더 이상 옷감이 아니었다. 모피에 대한 인류의 뜨거운 욕망은 문명의 시작과 함께한 것이다. 인류 문명사의 한 측면은 ‘동물의 가죽과 털을 벗겨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다. 인류가 실을 자아 옷감을 만들어 살아온 역사보다는 동물을 벗겨서 살아온 역사가 훨씬 긴 것이다. 그래서 ‘모피의 문명사’는 유라시아 문명사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부여·고구려·동예·발해, 더 나아가 북방의 흉노·말갈·여진 등 어느 민족이건 모피 동물의 수탈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모피 사냥과 무역은 고대 및 중세 사회에서 경제력의 근간 중 하나였다. 그런 모피 덕에 세계사에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 러시아가 모피를 찾아 동쪽으로 온 것이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어느 결에 두만강 하구에서 한반도와 접경했으며, 오호츠크 해를 넘고 베링 해를 건너 알래스카에까지 당도했다.

  
 

모피 무역은 러시아 재정의 10% 정도를 차지할 만큼 중요했다. 17세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모피 공급 국가였다. 차르는 가만히 앉아서 이 산업을 통제했다. 거대 모피업자 스트로가노프가(家)에 고용된 카자크족을 비롯한 모피 사냥꾼은 시베리아를 도륙했으며, 유럽 귀부인의 몸을 감쌀 모피를 위해 시베리아 눈밭이 피바다로 변하는 슬픈 환경 파괴의 역사가 전개되었다.

페루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이 황금에 이끌렸던 것처럼, 러시아인을 시베리아로 유혹한 동력은 모피, 그중에서도 검은담비였다. 담비 모피는 유사 이래 절대적 지위의 상징이었다. 모피 중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받는 것이 검은담비였고, 다음으로 검은 여우 그리고 일반 담비였다.

마르코 폴로는 암흑이라 불리는 지방, 즉 시베리아를 설명하면서 “이곳 주민들은 매우 진귀한 모피를 굉장히 많이 갖고 있다. 값비싼 담비 털을 갖고 있고, 흰 담비, 에르콜린, 다람쥐, 검은 여우 등도 많다. 그들은 모피 동물을 포획하는 사냥꾼들로서 놀라울 정도로 많이 수집한다”라고 기록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모피 수요가 급증했다. 신대륙으로부터 은이 유입되고 허세를 부리는 신흥 상인 계급이 발흥하면서다. 급성장하는 모피 시장의 주요 공급자는 러시아였지만, 러시아의 유럽 쪽 삼림에서는 모피의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검은담비의 시장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결국 모피를 구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몰려갔고 19세기 북미의 골드러시 현상에 비견될 모피 열풍 현상이 나타났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1945년 사할린의 한 모피 건조실. 러시아는 모피를 찾아 동진해 알래스카에까지 이르렀다. 
1945년 사할린의 한 모피 건조실. 러시아는 모피를 찾아 동진해 알래스카에까지 이르렀다.


러시아인은 검은담비 사냥지가 새로 생길 때마다 재빨리 몰려가서 씨를 말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음 사냥지로 옮아갔다. 시베리아를 헤집고 다닌 사람들은 사냥꾼과 군인, 탐험가가 뒤섞인 잡종 인간들이었다. 러시아가 그렇게 빨리 시베리아를 정복하게 된 배경은 이런 동물의 멸종 과정과 깊이 연관된다. 러시아 제국이 돈이 되는 모피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용한 방법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페루와 멕시코에서 사용한 것과 유사하다. 원주민을 강제 복속시키고 곧바로 돈이 되는 생산물들을 가져오도록 강제했다. 원주민에게 할당량을 강요하는 ‘야삭’은 검은담비나 기타 모피를 획득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이었다. 야삭을 거두는 방식은 간단했다. 무장 부대가 마을 원로를 모아놓고 조공을 바쳐야 한다고 통보한다. 원주민이 모피 상납을 거부하거나 적게 내놓으면 천막에 불을 지르고, 순록을 빼앗고, 반항하면 죽이고, 부인과 아이는 포로로 잡아갔다. 훗날 무역 거래로 바뀌게 되었으나 러시아인은 값싼 항아리, 옥, 장신구 따위를 검은담비와 맞바꾸면서 사기를 치기 일쑤였다.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저술가들은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행사한 식민주의에 대해 원주민들을 고립 상태로부터 러시아 시장으로 끌어내어 수준 높은 러시아 문화의 혜택을 제공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주민 공동체가 단 하나의 상품(모피)에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원주민 스스로 자기들의 환경을 파괴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상품이 고갈될 무렵 이들은 사회·경제적으로 파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 길을 따라 모피 동물들의 비극이 이어진다 

러시아 모피 회사는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 모피를 팔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으로 배들을 보낸다.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강제노동이 금지될 때(1818년)까지 원주민을 동원해 대량 사냥에 나선다. 차르는 북아메리카에서의 모피 독점권을 개인 회사에 부여했다. 1799년부터 1820년까지 식민 통치에 준하는 모든 권한을 RAC(Russian America Company)에 부여했다. 모피 장사꾼에 의해 원주민은 전통적 물개잡이의 고유한 삶을 포기당한 채 강제 노동으로 내몰렸다.

원주민만 고통받은 것은 아니었다. 근시안적인 무차별 남획으로 시베리아에서 검은담비와 여타 모피 동물이 고갈되었다. 모피의 길은 대륙에서 열렸지만 최종적으로는 북빙양(북극해)과 태평양에서 마무리되었다. 지금은 알래스카 지역에서 모피 시장이 동계 스포츠와 함께 ‘모피 랑데부’라는 이름으로 열려 그 옛날 모피 무역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베링의 탐사는 베링 해협 건너 알류샨 열도에도 비극을 몰고 왔다. 바다표범이나 푸른 여우 같은 모피용 동물이 많다는 게 알려지자 시베리아에서 사냥개를 몰고 러시아 모피 장사꾼이 밀어닥쳤다. 이때부터 알류샨 열도가 알래스카와 더불어 미국에 팔릴 때까지 포유동물 수난 시대가 이어졌다(1741~1867).

정리하자면 ‘모피의 길’은 이렇게 이어진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해 우랄 산맥을 넘어 바이칼 호 옆의 이르쿠츠크를 지나 레나 강가의 야쿠츠크 요새에 당도한다. 거기서 길이 갈려 남동쪽으로 하바롭스크에 당도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나 사할린 등으로 가는 노선이 있고, 유라시아 극동으로 향하는 노선은 오호츠크 해안의 오호츠크 요새를 거쳐 캄차카 반도에 당도했다가 유라시아 극동인 추크치 땅을 통과해 베링 해협을 건넌 뒤 알래스카로 가서 알류샨 열도로 내려간다. 그 길을 따라 동물들의 비극이 이어진다. 북아메리카의 북방 개척과 서부 개척 역시 모피 동물과의 전쟁이었다. 유럽 이주민의 손에 들린 총에 의해 모피 동물이 멸절에 가까운 위기로 내몰렸다. ‘모피의 길’이 만들어낸 인간과 동물의 비극을 생각한다면, 과연 모피를 걸칠 생각이 들까.

반도라서일까, 한반도에는 국지적으로 담비가 일부 버티고 있다. 예로부터 한자로는 산달(山獺)·초(貂)·학(貉·貈·狢) 등으로 불리는 우리 담비 속에는 산달과 검은담비 2종이 있다. 고대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고조선이 모피 무역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한반도의 담비들은 멸종하지 않고 호랑이와 표범 등이 사라진 숲과 들에서 최상위 서식자로 군림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문명의 바닷길 - 뱃사람의 간절함 “나무관세음보살…”


불교 전파는 대륙과 해양을 두루 관통했다. 예나 지금이나 장사야말로 문명의 씨앗을 뿌리는 원동력이었다. 

의상대사의 관음신앙 전파도 당대 상인의 힘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관음의 길은 장사의 길이기도 했다.


중국 푸젠(福建)성 샤먼(厦門)의 남보타사에 가면 바다를 조망하는 관음(관세음보살)상을 볼 수 있다. 항저우(杭州) 저우산(舟山) 보타락가사에서도 그렇다. 일본 나가사키 현 시마바라(島原) 반도에서는 관음상 모양을 한 성모마리아를 볼 수 있다. 관광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관음상이다. 그런데 뭔가 낙산사(강원도 양양)의 관음상과 비슷한 모양새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한때는 도쿄 유학파, 오늘날은 미국 유학파가 그렇듯이, 중국 유학파가 아니면 행세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신라 승려이면서 당나라 유학을 하지 않았으면 행세를 못한 것이다. 원효대사의 위대성도 당 유학을 중도 포기하고 대각을 이룬, 속된 말로 ‘자주파’의 승리랄까. 그들 유학파 무리에는 의상대사도 포함된다. 

강원도 양양 낙산사에 가면 의상의 족적이 그대로 전해온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인 2005년 4월4일 남김없이 불탔다가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바탕으로 복원된 20여 동 건물을 마주하니 감개무량하다. 동해가 절을 품은 듯, 절이 동해를 품은 듯하다. 홍련암은 1400년 전 의상대사가 중국 저우산 열도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한 이래 낙산사를 관음보살의 상주처이자 제1의 관음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한 모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해수관음상. 의상대사가 세운 낙산사를 통해 해수관음신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해수관음상. 의상대사가 세운 낙산사를 통해 해수관음신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의상대사 이야기.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양양 땅에 이른 의상은 홍련암 부근에서 파랑새를 만난다. 새가 석굴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 7일간 기도를 한다. 7일 뒤 바다 위에 홍련이 떠오르더니 관음보살이 나타난다. 홍련암이 그 위에 세워졌고, 낙산사 1400년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 뒤 강화 보문사, 상주 보리암 등 바닷가 해수관음신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생육신 남효온(1454~1492)은 <추강집(秋江集)>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의상이 관음보살 진신(眞身)을 해변 굴속에서 보았을 때 관음보살이 친히 보주를 주었고, 용왕도 여의주를 바쳐서 의상이 두 개의 구슬을 받았습니다. 이에 절을 창건하고 직접 관음상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해변의 작은 굴이 관음보살이 머문 곳이고, 뜰 가운데 석탑이 두 구슬을 갈무리한 탑이고, 관음소상이 바로 의상이 손수 만든 것입니다.”


관음은 ‘뱃사람’ 신앙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주는 생명의 손길이다. 그렇기에 관음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관음이 <법화경>을 소의경전(근본 경전)으로 삼는 까닭도 재난 구제 때문이다. “큰 바다로 들어갔을 때 흑풍이 불어 배가 표류하여 나찰귀의 나라에 떨어지게 되었을지라도 모든 상인이 함께 소리 내어 나무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음의 손길이 천 개 만 개로 뻗어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화답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큰일이 벌어지면 ‘나무관세음보살’을 탄식조로 뱉어냈다. ‘하나님 맙소사’는 근자의 한탄이다.

어느 누구는 해양 실크로드 말고 ‘해양 달마로드’도 중요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바닷길은 기존의 동서 교류라는 해양 실크로드 단선만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선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문명의 바닷길은 단선 못지않게 지선을 더 중시한다. 불교 전파는 당연히 대륙과 해양을 두루 관통했다. 해양불교는 남방 무역상인의 배를 타고 거침없이 섬과 항구를 공략하며 중국 연안은 물론이고 한반도까지 스며들었다. 우연히 배가 당도했는데 그 안에 불경이나 불상이 실려 있어서 그로부터 절이 시작되었다는 식의 연기설화(사찰 등의 건립 내력을 설명하는 설화)는 해안가 사찰에서 들을 수 있는 흔하디흔한 스토리텔링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보타사의 천수관음보살상 

보타사의 천수관음보살상


관음신앙의 시발은 일본? 아직도 논란 중

홍련암 관음 스토리텔링은 그대로 저우산 열도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낙산사와 항저우만(灣) 저우산이 불연속적인 강렬한 끈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관음신앙의 뜨거운 전파력이 바다를 넘어 한반도 동해안까지 소통했음을 증명한다.


‘보타락가’는 관음보살이 거주하는 포탈라카(potalaka)의 음역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구도를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던 중 보타락가산에 도착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다에 접한 아름다운 곳이라 했다. 현장법사도 인도에 다녀와서 스리랑카로 가는 바닷길 가까이에 이 산이 있다고 기록했다. 당대 영향력이 대단하여 관세음보살 거주지가 곳곳에 등장한다. 어느새 보타락가사는 인도에서 북상한 관음신앙의 ‘메카’가 된다.

낙가산 산록에 양나라 무제(502~549)가 세운 보타원이 있고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관음거 앞에는 신라초라 부르는 암초가 있다. 안내판에는 일본 화상 에가쿠(惠萼)가 오대산에서 관음보살상을 얻어 이곳을 거쳐 귀국하다가 신라초에 좌초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신라초는 남송 <불조통기(佛祖統記)>에 처음 출현하며, 명대 문헌에도 오르내린다. 지금까지 중국·일본 학자들은 남송 이후의 기록을 근거로 삼아 불긍거관음원 관음신앙의 시발이 일본이라고 알고 있다.

수년 전 중국에서 중·일 합작으로 <불긍거관음>이라는 영화가 대대적으로 만들어졌다. 소문이 퍼지면서 영화 티켓이 매진 사례를 이어갔다. 중국에서 처음 제작된 관세음보살 소재 영화이자 중국 최대 규모의 종교 영화로 관객들이 열렬하게 호응했다. 당연히 블긍거관음의 일본인 창건설이 강조된 영화였다.

우리 학계에서는 신라초를 일본과 연결 짓는 중국 사료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1124)에는 ‘옛날 신라 상인이 오대산에 갔다가 그 상을 조각하여 싣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바다로 나갔으나 좌초해 배가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관음상을 바위에 내려놓았다’고 했다. <고려도경>을 따른다면, 우리로서는 신라초와 더불어 한국인 창건설이 한결 진실에 가깝다. 논란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의상대사의 활동 연대는 불긍거관음의 시대에 한참 앞선다. 의상이 귀국하기 얼마 전인 646년에 현장법사가 <대당서역기>를 편찬했고, 이 신진 자료를 받아들인 의상이 귀국 후 낙산사에 관음도량을 창건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규슈 시마바라에서는 관음상 모양의 마리아상을 볼 수 있다.

규슈 시마바라에서는 관음상 모양의 마리아상을 볼 수 있다.


대당 유학승이었던 범일국사는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피살되고(841) 6년이 지난 847년에 신라로 귀환한다. 일본 승려로서 중국에 구법을 떠났던 엔닌(圓仁)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을 떠나 귀국한 해이기도 하다. 범일은 귀국하여 굴산사를 짓고 이어 낙산사에 정취보살을 봉안한다. 당시 저장(浙江) 연해에는 법화·관음의 해양불교 신앙이 유행하고 있었다.

항해술 발달 과정을 볼 때, 그리고 엔닌이 장보고 선단의 도움을 받아 항해한 기록을 보건대, 초기에는 신라인이 신라초도 만들고 관음신앙을 처음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일본인이 항저우만 일대에서 활발하게 내왕한 것도 사실이다. 국제항로의 거점에서 한·중·일 무역상인에 의해 국제 해양신앙으로서 관음신앙이 동아시아 전체로 전파되어 나갔다고 보는 것이 공정하지 않을까. 유독 신라초 명칭이 남아 있고 바로 거기에 관음원이 조성된 것만은 신라인의 초기 성과물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중국으로 항해하던 많은 일본 구법승이 장보고 선단을 이용하던 당대의 해양력을 판단해본다면, 당시 저우산에 밀집했던 신라 해양 집단에 의해 불긍거관음원이 대대적으로 키워졌을 법하다.

바닷가 절벽 위에 세운 불긍거관음원의 형세가 낙산사 홍련암과 100% 일치함도 설득력을 더해준다. 스토리뿐 아니라 공간 구성 자체도 일치한다. 해수가 들이치는 단애의 계곡도 양쪽 다 신비롭다. 두 곳 모두 관음의 현신처라는 명명백백한 증거가 있다.

현재 항저우만의 유서 깊은 항구 닝보(寧波)에는 송대에 세운 고려사관 유지(高麗使館遺址)가 남아 있다. 고려 충선왕이 대도(북경)에서 보타산에 향을 피우러 왔다. 이때 이제현 등 많은 신하들이 왕을 수행했다. 보타산은 고려시대에도 한·중 항로의 중요 좌표로서 구실을 다한 것이다. 

관음의 바닷길 원조는 저 멀리 남쪽으로 더 내려가야 한다. 명주(明州·닝보의 옛 이름)가 해상교통의 중심이 되기 이전에 이미 이슬람, 페르시안 등 서방 배가 몰려들던 곳이 오늘의 광저우(廣州), 푸저우(福州), 취안저우(泉州) 등이다. 푸젠성 샤먼의 샤먼 대학 앞에는 오로봉의 천년고찰 남보타사가 있다. 저우산 보타락가사가 ‘북보타사’라면 인도에서 올라오는 남방 바닷길에 또 하나의 보타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남보타사는 오대 시대에 창건되었다. 철불천수관음이 모셔진 대비전에는 참배객이 너무 많아서 밀려다닐 판이다. 수만 권의 불경과 불상, 서화가 보존된 장경각도 있다. 오로봉을 올라가 보니 불자 석각이 계곡마다 숨어 있다. 경주 남산처럼 오로봉 자체가 신성한 불국토이다. 국제항로의 바닷길에서 강남 최대의 관음 사찰이 천년 넘는 세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신도들을 끌어들이는 중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바닷가 절벽 위에 세운 불긍거관음원의 형세(위)는 낙산사 홍련암과 공간 구성이 일치한다. 

바닷가 절벽 위에 세운 불긍거관음원의 형세(위)는 낙산사 홍련암과 공간 구성이 일치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관음상에 담긴 ‘천년의 비밀’

해양신앙으로서의 관음신앙은 남보타사와 저우산의 보타락가사에서 양양 낙산사에 이르고, 상주 보리암 등 전국으로 퍼졌다. 관음은 곧바로 일본까지 영향을 미쳤다. 일본 상인들도 보타락가사를 일상적으로 드나들었다. 시마바라 반란(1637)이 벌어졌던 옛 성의 박물관에서 관음을 닮은 성모마리아 상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천주교인들은 마리아를 관음상으로 빚어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당시 마리아 상을 가지고 다니다 걸리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바다를 건너온 관음상과 천주상이 융합의 미를 창조한 셈이다. 

불교사가들은 아무래도 스님 단독의 불력에 의해 종교가 전파된 것으로만 서술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해양사에서 본다면 예나 지금이나 ‘장사’야말로 문명의 씨앗을 뿌리는 원동력이었다. 의상대사의 관음신앙 전파에도 당대 상인의 힘이 ‘스폰서’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오늘날도 무수한 상인이 항저우를 오가며, 한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 근역의 상하이다. 세계 최대 물류 허브인 양산(洋山)항이 닝보항과 마주보는 곳이다. ‘관음의 길’은 ‘장사의 길’이기도 했다. 그 고전적인 바닷길에 오늘날도 무역선과 관광객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오가고 있으니, ‘천년의 길’이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흔하게 찍을 수 있는 관음상이지만 찍고 나서 요모조모 비교해보면 천년의 비밀에 다가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문명의 바닷길 - ‘푸른 눈’이 건너온 믿음과 침략의 바다


스스로 한반도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인 신부 세스페데스가 조선에서 쓴 편지는 임진왜란에 관한 생생한 기록이었다. 

그는 단순히 ‘종군 신부’였을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남긴 장엄한 ‘선교의 길’을 톺아봤다.


마젤란이나 바스코 다가마 같은 대항해가가 만들어낸 바닷길은 초등학생도 알 정도로 익숙하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거쳤던 ‘선교의 길’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특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남긴 선교의 길은 대항해를 뛰어넘는 규모와 진정성이 있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해양강국의 제국 확장과 무역로 확충을 위한 공격적 선교와 맞물리기는 하지만, 하비에르의 바닷길에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하비에르의 족적을 한반도에서부터 밟아나가 보자. 오늘의 진해, 옛 웅천에는 ‘세스뻬데스 방한 400주년(1593~ 1993) 기념’ 조각품이 서 있다.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는 1593년 12월27일 웅천포에 도착해 1년 남짓 왜성에서 묵는다. 그는 표류가 아닌, 스스로 한반도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인이다. 그가 웅천 바닷가에 당도한 의미는 뭘까. 단순하게 임진왜란 ‘종군 신부’ 입성으로 해석해야 할까. 이 세스페데스가 바로 하비에르의 예수회 후예다.

역사는 1949년 6월로 올라간다. 유럽 이베리아 반도의 강력한 맹주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협약을 체결한다. 단적으로 말해, 싸우지들 말게끔 대서양에 해상 분할선을 긋고 세계를 양분해서 차지하자는 내용의 협약이다.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이, 동인도 및 아시아 해상권은 포르투갈이 독점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스페인 예수회 선교사들이 아시아에서 포교를 하려면 반드시 포르투갈의 승인과 보호를 받아야 했다. 스페인 출신들이 포르투갈 세계 경영 시스템을 이용해 예수회 선교사로 동방에 오게 된 사연은 이와 같은 세계 분할 정책에서 기인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 하비에르의 족적이 더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곳은 야마구치의 하비에르 성당이다(위). 
하비에르의 족적이 더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곳은 야마구치의 하비에르 성당이다(위).


예수회를 만든 독특한 두 인물 하비에르와 이냐시오 로욜라는 이베리아 반도의 특이하고도 굴절 많은 땅 바스크에서 태어났다. 둘은 파리의 대학에서 만나게 되며, 하비에르는 로욜라를 영적 스승으로 삼아 1534년 8월15일 몽마르트르 언덕 위 서원에서 예수회를 태동시킨다. 당시 반(反)종교개혁 흐름 속에 예수회는 선교 열망이 충만해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인 일본 쪽으로 예수회 선교사가 이동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하비에르는 로욜라의 권고와 교황의 명령을 받고 바스코 다가마가 떠났던 리스본의 벨렘 성을 떠나 인도의 고아로 간다. 당시 고아는 ‘아시아의 예루살렘’ 혹은 ‘아시아의 리스본’이라 불리는, 포르투갈 동방 선교의 주요 거점이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히라도의 하비에르 기념성당(왼쪽)은 불교 사원에 둘러싸여 있다. 

하비에르는 인도 남부 진주 해변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다 몰루카 제도로 간다. 정향, 육두구 같은 향신료의 본산지인 몰루카 제도는 지금은 인도네시아령이다. 하비에르는 몰루카 제도 암본에서 선교를 하다가 1545년 8월 말레이시아 믈라카(옛 말라카)로 되돌아오는데, 매우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일본인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 그 일본인은 어떻게 머나먼 믈라카까지 오게 되었을까.

일본인 안지로는 신흥무역상의 한 사람으로 살인죄를 짓고 국외로 도망해 생활하고 있었다. 도피처를 찾던 안지로는 포르투갈 상인을 만나 무역선을 타고 믈라카까지 오게 된다. 포르투갈 무역선이 가져오는 이국적 박래품은 일본인들을 ‘환장’하게 만들었고 상인들은 동서 교류의 첨병 구실을 하며 일본과 믈라카를 오갔다. 믈라카는 인도 고아로 연결되었고, 다시 리스본으로 확장되어 바닷길을 통한 문명 교류의 선이 되었다.

히라도의 하비에르 기념성당(왼쪽)은 불교 사원에 둘러싸여 있다.

안지로는 하비에르를 만나 감화를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바울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동생과 부하 역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안지로는 포르투갈어를 배웠으며 믈라카에서 고아로 갔다가 마침내 일본 선교의 선봉이 되어 1549년 4월25일 하비에르와 함께 일본으로 들어온다.  

‘하비에르의 길’이 열어놓은 역사적 결과물 

신학자 김상근은 하비에르의 도일을 “그리스도교 선교사의 중요한 이정표임에 틀림없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전래된 복음이 동아시아의 끝 일본에서 동서의 만남으로 완성되는 역사적 사건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당나라 때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가 중국 수도 장안에 전해졌지만 일본 열도에 유럽 선교사가 출현한 것은 하비에르가 최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말레이시아 믈라카에 세워진 하비에르 성당과 그의 동상. 
말레이시아 믈라카에 세워진 하비에르 성당과 그의 동상.

하비에르와 일본에 도착한 일행들은 규슈 지역 가고시마에서 다이묘(지방의 영주)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로부터 환대를 받는다. 가고시마에서 1년 동안 포교 활동을 벌여 신자 100~150명을 얻었고, 이후 2년3개월 사이 2000여 명에 가까운 기독교인을 더 만들었다. 전성기에는 30만명 이상의 신도를 확보하게 된다. 훗날 천주교 대탄압이 이루어져서 마침내 시마바라의 반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기독교 전파는 여러 곡절을 거친다.

일본은 이런 하비에르를 기억한다. 가고시마에 있는 하비에르 기념성당은 본디 1908년에 세워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었다가 1949년 당시 교황 비오 12세가 기부금을 내어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일본 현대식 건축물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하비에르 성당이다. 성당은 하비에르와 안지로의 일본 도착 사실을 부조로 새겼다.

가고시마에서 하비에르는 히라도(平戶)로 간다.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가 훗날 네덜란드에 의해 상관으로 허락되기 전에 히라도는 포르투갈 배가 들어오던 유일한 무역항이었다. 히라도에도 하비에르 기념성당이 있다. 불교 사원에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뒤섞여 조화를 이루며 히라도의 상징적 풍경이 되었다. 히라도나 고토(五島) 열도 그리고 나가사키에도 남아 있는 천주교의 여러 족적은 ‘하비에르의 길’이 열어놓은 역사적 결과물이다.

하비에르의 족적이 한층 더 진하게 남아 있는 곳은 야마구치(山口)의 하비에르 기념성당이다. 이곳은 전 세계 로마가톨릭 교도들이 낸 건축헌금을 받아 1952년 세워진 성당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행정구역상 야마구치의 하기(萩)는 조슈번 세력의 중심으로 훗날 가고시마의 사쓰마번과 삿초동맹을 맺어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이들의 본거지다. 메이지유신의 본향이 모두 하비에르의 집중 선교지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티메카코리아 김태진 제공</font></div> 
ⓒ티메카코리아 김태진 제공

하비에르로부터 불과 28년 뒤인 1577년에 세스페데스가 인도의 고아, 중국의 마카오를 거쳐 나가사키에 도착한다. 그는 교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세례명을 지닌 고니시 유키나가를 만나게 된다. 둘의 관계는 고니시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데, 조선 입성도 고니시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고니시로 대표되는 기리스단(吉利支丹:그리스도교 신자)이 임진왜란에 투입되고, 세스페데스가 한반도에 최초로 당도한 신부가 되는 것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다. 세스페데스는 1595년 일본으로 돌아간 후 일본에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 5만여 명 가운데 2000여 명을 천주교도로 개종시켰다.

세스페데스가 기록한 당시 조선에 대한 기록은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를 거쳐 예수회 본부로 전달되었다. 프로이스 역시 ‘하비에르의 길’을 따라 동방으로 온 신부다. 그는 1532년 리스본에서 태어나 16세에 예수회에 입회한다. 그리고 동인도회사가 있던 인도 고아로 파견되어 고아 관구장의 비서로 활약한다. 당시 아시아 각 지역의 선교사들이 로마의 예수회 총장에게 보내는 모든 보고서는 고아 관구장을 거쳐야 했으며, 프로이스 신부는 비서 자격으로 그 문서를 모두 열람하면서 아시아 각 지역의 정세, 특히 일본 사정에 정통하게 된다.

프로이스 신부는 31세인 1563년에 규슈에 상륙해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당대의 실력자 오다 노부나가와 무려 18회에 걸쳐 개인적인 교류도 한다. 그는 1597년부터 포르투갈의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던 ‘포르투갈령 동인도 역사 편찬사업’의 일환이었던 일본 천주교 포교사 집필자로 선정된다. 당시 아시아 문제에 최고로 정통한 이 유럽인은 1597년 7월 나가사키에서 향년 65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모든 힘을 일본 포교사 저술에 쏟아 부었다.

프로이스 신부는 한반도에 한 번도 발을 디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정보는 정확했다. 세스페데스가 조선에서 쓴 편지들 덕분이었다. 그는 이 편지를 바탕으로 침략전쟁의 무모함을 서술했으며, 임진왜란에 관한 생생한 정보를 전했다. 당시 보통의 일본인들은 이 정복사업이 마치 죽음으로 나아가는 걸 보장받는 일인 양 여겼다. 부녀자들은 살아서는 더 이상 지아비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 보고 울고불고했는데, 대부분 현실이 되고 말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목적에 대해서도 “중국을 침략해 천하를 얻겠다는 공명심 외에 자신에게 반발할 가능성이 있는 병사들을 해외로 내보내려는 의도도 지녔다”라고 정확히 기술했다. 도요토미는 주요 항구에 위수병을 배치해 조선에 출진한 병사들이 일본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조선 땅에 주둔한 일본 무장들의 노여움과 불만, 초조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수많은 기리스단 소속 일본 기독교 신자들이 전선에서 죽어갔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예수회의 본거지로 웅장했던 고아의 성당은 교권 다툼으로 파괴되어 오늘날은 폐허로 존재한다. 
예수회의 본거지로 웅장했던 고아의 성당은 교권 다툼으로 파괴되어 오늘날은 폐허로 존재한다.

종교와 함께 침략과 착취도 남기다 

다시 하비에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하비에르가 일본에 머문 기간은 고작 27개월이다. 하비에르는 중국을 향한 대항해에 나섰다가 중국 땅에서 사망하고 만다. 그의 시신은 그가 동방 선교의 출항지로 삼았던 믈라카로 운구된다. 하비에르가 믈라카에서 선교하던 곳에도 하비에르 성당이 언덕 위에 서 있고 그 앞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의 시신은 다시 고아로 옮겨진다. 뭄바이 남쪽의 고아에는 올드고아라 불리는 포르투갈의 옛 선교지가 다수 남아 있다. 그의 족적은 고아에 강렬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예수회의 본거지로 웅장했던 성당은 교권 다툼에 따라 잔혹하게 파괴되어 오늘날 폐허로 존재할 뿐이다.

‘하비에르의 길’이 의도했던 종교적 진정성과 무관하게 그의 길은 침략과 착취를 남겼다. 동방 민중에 대한 공격과 착취, 제국의 건설과 확충이라는 해양제국의 욕망을 반영한 바닷길의 야수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한 인간이 걸었던 미지의 길과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이상의 것을 해낸 의지와 헌신성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선교 역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프로이스 신부와 세스페데스 신부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문명의 바닷길 - ‘용왕의 자식’에게 건넨 막걸리 한 잔


바다에서는 인간만 이동하는 게 아니다. 해류를 따라 동물과 식물이 움직인다. 이러한 이동이 가져온 문명사적 궤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쿠로시오 해류가 한국에 전한 다섯 가지 보물을 살펴보는 이유다.


10년 전, 국립제주박물관에서 <한국-오키나와의 조개 제품을 통한 선사시대 문화의 재발견> 기획 전시를 한 적이 있다. 5세기에 이미 한국 남부에 오키나와산으로 보이는 고후우라제 팔찌가 전해졌음이 밝혀졌다. 한반도와 일본 본토, 제주와 일본 본토, 한반도와 오키나와, 제주와 오키나와 간의 다면적 네트워크가 확인된 것이다. 시각을 타이완과 필리핀으로 넓힌다면 바다를 통한 문명 교류의 영역은 한결 넓어질 것이다.

바다에서는 인간만 이동하는 게 아니다. 해류를 따라 이동하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그러한 이동이 가져온 문명사적 궤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주도 식생에 막중한 영향을 미친 쿠로시오 해류가 가져온 자연과 문명의 궤적, 이를 ‘쿠로시오 로드’라 명명하면 어떨까? 일본에서는 일찍이 ‘흑조문화권론(쿠로시오 해류를 한자로 ‘흑조’라 부른다)’이 오랜 학술 주제였다. 



 
 

쿠로시오 해류라 부르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일본이 일찌감치 국제학회에 보고해서 인정받은 명칭으로 전 세계가 ‘쓰나미’를 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쿠로시오의 원류는 북적도 해류다. 타이완 동쪽으로부터 오키나와 제도, 아마미(奄美) 제도로 북상해 가고시마(鹿兒島) 아래에서 동한난류와 갈라진다. 아랫가닥은 동쪽 시코쿠(四國)로 향하며, 윗가닥은 제주도와 남해안은 물론이고 한국의 서해·동해에도 영향을 미친다. 동아시아 앞바다의 대륙붕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올라간 쿠로시오 해류는 오호츠크 해와 베링 해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대한 오야시오 한류와 만나 대륙에서 멀어진다. 마치 북대서양에서 멕시코 만류와 래브라도 해류가 만나는 곳에 자욱한 안개가 끼듯이, 쿠로시오 난류와 오야시오 한류도 안개와 폭풍이 몰아치는 지역에서 만난다. 동아시아의 변방에 위치하고, 북서태평양 북서단에 자리 잡아 변변한 해류가 존재하지 않는 한반도에서, 쿠로시오 해류의 영향력은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다.

쿠로시오 해류 지역에서는 비슷한 식생을 관찰할 수 있다. 미크로네시아 폰페이 섬(Pohnpei)에 가보니 서귀포 천지연의 무태장어와 똑같이 생긴 놈들이 살고 있었다. 무태장어는 열대성 물고기다. 서귀포는 나가사키와 함께 무태장어 북방한계선이다. 난류를 따라 북상해온 무태장어가 서해나 동해로 올라오는 경우는 없다. 적도에서 만난 똑같은 무태장어를 제주도까지 밀어붙인 힘은 두말할 것 없이 쿠로시오의 힘이다.

쿠로시오의 더 근원적인 힘은 폰페이의 뱀장어가 살고 있는 적도 바다다. 적도 부근 태평양은 재빠르게 상승해 구름이 되는 수증기의 운동이 너무도 활발하여 웜풀(warm pool)이라 부르는, 강력한 구름 공장이 있다. 구름 공장에서 형성된 열대기후대는 쿠로시오 해류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種子島)에서 가만히 지켜보면 도도한 물줄기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름에는 고온다습하고 겨울은 건조한 아열대성 바람을 몰고 오면서 심한 태풍을 동반한다. 그 태풍에 밀려서 이른바 남만선이 다네가시마의 가도쿠라 곶에 당도했다, 거기서 철포가 전래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 철포로 전국을 제압했으며, 훗날 임진왜란에 조총이 등장한다. 바닷가 모래밭에서는 흔히 문주란을 만난다. 똑같은 문주란이 제주도에도 자생 중이다. 해류는 이처럼 조총 같은 문명이나 문주란 같은 생물체를 부지런히 실어 보낸다. 온난하며 습기를 머금은 이들 쿠로시오야말로 남방에서 시작한 문명 교류 루트다.

쿠로시오 해류는 멀리서 보면 남홍색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한없이 맑은 초록빛이다. 물이 맑기 때문에 태양빛을 덜 반사해 멀리서 검게 보일 뿐이다. 난류의 산호초 북방한계선도 쿠로시오 권역과 일치하며, 한반도 남단 서귀포의 문섬이나 섶섬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대마도 근해, 심지어 태안반도 근해에도 산호초가 일부 발견되는데 이 역시 쿠로시오의 영향이다. 제주도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있노라면 저 멀리 오키나와에서 보낸 편지들을 건져낼 것만 같다. 이 쿠로시오가 전한 보물은 크게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문주란과 선인장의 길


북제주 하도리의 토끼섬. 바위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여(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에 문주란이 그득 피었다. 겨울에는 누렇게 떠서 볼품이 없지만 여름에는 화사하기 이를 데 없다. 겨울에 말랐던 잎이 봄이면 파랗게 돋아나 7월 말쯤부터 백설 같은 꽃을 연달아 피워내고 9월까지 온 섬을 하얗게 물들인다. 은은한 향기 또한 뛰어나서 바람결에 묻어온 꽃내음에 취하곤 한다. 이 아열대식물이 언제 토끼섬에 정착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머나먼 남쪽 바다에서 해류에 밀려 이곳에 정착했으리라. 생명을 전파시키는 자연의 위대함에 경외감을 느낀다. 문주란은 한반도의 자생식물이 아니다. 해류를 따라 북상한 씨앗이 제주도에 정착해 집단으로 개체수를 늘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제주도 해안 곳곳에서는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선인장 백년초 군락을 만날 수 있다. 넓적한 선인장인데 육지에서는 ‘손바닥선인장’이라고 불렀다. 선인장이 해류에 밀려와 해변에 정착해서 이제는 어엿한 자생식물이 되었다. 대개의 선인장은 원산지가 멕시코다. 해류가 돌고 돌아 한반도에 당도한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규슈 남쪽 다네가시마의 문주란.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규슈 남쪽 다네가시마의 문주란과 똑같은 것이 제주에도 있다. 위는 서귀포 보목포구에서 발견된 선인장.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의 문주란 /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의 문주란과 똑같은 것이 제주에도 있다. 위는 서귀포 보목포구에서 발견된 선인장.

방어와 고래, 거북의 길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거북들이 한국으로 올라오기도 한다.모슬포는 방어로 유명하다. 해마다 12월이면 모슬포항에서는 방어 축제가 한창이다.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서 올라온 방어가 한 달여 동안 엄청나게 잡히기 때문이다. 방어는 봄부터 여름까지는 북쪽으로, 가을에서 겨울에는 남쪽으로 남북 회유를 거듭한다. 방어는 난류에 묻혀 들어왔다가 12월이 지나면 일본 쪽으로 빠져서 태평양으로 나가버린다. 이때쯤 모슬포에 방어가 얼굴을 들이미는데 기름기가 올라 맛이 절정에 이른다. 남해안은 물론이고 동해안으로도 쿠로시오 해류가 치고 올라오기 때문에 곳곳에서 방어가 출몰한다.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거북들이 한국으로 올라오기도 한다.


방어만 그러한가. 오키나와에서 제주도 근해, 한반도 서해안과 동해안이 모두 고래의 본거지였다. 귀신고래같이 오호츠크에서 내려오는 북방고래도 있지만 수많은 고래들이 한반도 본토와 제주도, 일본 사이의 물목에서 잡혔다. 규슈의 생월도(生月島)나 야마구치(山口)의 청해도(靑海島)에 본거지를 둔 서일본의 고래잡이 선단이 엄청난 양을 잡아들였다. 쿠로시오 해류는 태평양의 고래들이 올라오는 바닷길이기 때문이다.

보르네오의 남중국해에 인접한 해변이나 오키나와 북쪽의 야쿠시마 같은 섬은 거북 산란지로 지금도 유명하다. 이들 산란지에서 쿠로시오를 타면 아주 손쉽게 거북들이 제주도와 한국 본토로 올라올 수 있다. 어쩌다 거북이 그물에 걸리면 어부들은 ‘용왕의 자식’이라고 하여 막걸리까지 먹여서 되돌려 보낸다. 한국인에게 거북은 신이적(神異的) 존재다. 거북이 귀하다는 증거다. 거북의 본향이 남방이며, 쿠로시오를 타고 올라오던 중 어쩌다 길을 잃은 한두 마리가 한반도 연안에서 잡히곤 하는 것이다.

고등어와 삼치 같은 등 푸른 생선류의 상당수도 쿠로시오를 타고 올라온다. 일본인이 아지라는 명칭으로 선호하는 전갱이를 제주도 사람들은 각재기라 부르며 횟감으로 즐기는데, 이 역시 남방 어류다. 한반도 남동해안이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인지라 어종이 풍부한 것도 그 축이 바로 쿠로시오 해류여서다.

돼지고기의 길

돼지고기 식문화도 남방 문화다. 혹자는 순대가 몽골 지배기에 몽골 문화에서 왔다고 하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발리 섬의 고풍스러운 도시 우붓(Ubud)에서 돼지 창자에 돼지 피로 버무린 소를 넣은 순대를 먹어본 적이 있다. 돼지고기를 얹어주는 오키나와 국수와 제주도의 국수, 나아가 돼지국물에 모자반을 넣고 끓인 몸국, 똥돼지로 지칭되는 돗통시 문화 전체가 남방과 연결되어 있다.

대체로 태평양 일원에서는 돼지가 중요하다. 소·말·양은 본디 없던 동물이다.태평양은 기본적으로 돼지고기 문화권이다. 제주도도 돼지고기 문화권이다. 제주 사람이 즐겨 먹는 돔베국수와 오키나와 국수에 똑같이 돼지고기가 올라 있음을 주목할 일이다. 미크로네시아에서 북마리아나 제도,오키나와 제도,그리고 제주도에 이르는 광대한 태평양이 돼지고기 문화권이다.환태평양에 드넓게 퍼져 있던 돼지고기 문화의 강력한 보루가 제주도다. 돼지와 더불어 검정소(흑우)도 두말할 것 없이 남방의 소다. 이 역시 쿠로시오 루트의 한 가닥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위는 고토 열도의 돌살이다. 
위는 고토 열도의 돌살이다.

돌살의 길

밀물 썰물의 차이를 이용해 조간대에 돌로 그물을 설치했다가 물이 빠질 때 고기를 잡는 돌살이 있다. 육지에서는 독살·돌발이라고도 부르는 돌그물이다. 태안반도는 물론이고 서해안에 분포되며 남해안 일부에도 있다. 제주도에서는 원담 혹은 갯담이라 부른다. 이 돌살 역시 태평양 권역에 드넓게 퍼져 있으며, 특히 쿠로시오 해류권인 오키나와, 제주도, 타이완의 펑후 열도, 일본의 규슈 서해안에 밀집되어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바닷길이 전하는 것은 단순히 동식물만이 아니다. 바닷길을 통해 철포와 낚시법이 전수되기도 했다. 위는 규슈 다네가시마의 가도쿠라 곶에 세워진 철포전래기공비, 

류큐 왕국의 길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은 14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의 역사 무대에 등장하면서 15~16세기에는 명·조선·일본·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개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던 해상왕국이다. 이 시기 류큐는 명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능동적으로 참여했으며, 조선과도 활발한 교류를 지속했다. 류큐 사절단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온 것은 고려 말인 1389년이다. 조선 왕조에 들어서도 류큐는 50회나 사절단을 보내올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류큐의 영역에 자주 조선 사람이 표류해왔는데 그때마다 그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돌려보내 주었다. 이 역시 쿠로시오 해류를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다.

바닷길이 전하는 것은 단순히 동식물만이 아니다. 바닷길을 통해 철포와 낚시법이 전수되기도 했다. 위는 규슈 다네가시마의 가도쿠라 곶에 세워진 철포전래기공비,

해류는 문명을 옮겨주거나 수용했으며 때로는 문명을 파괴하기도 했다. 해류가 창조하는 인류 문명의 동력에는 전쟁·표류·무역 등 온갖 변수가 포함되며, 동식물 이동 루트로 이용되기도 했다. 쿠로시오 로드에 대한 우리의 일천한 시각에서 벗어나 아시아 문명사 전체로 파악하는 시각 전환이 필요한 까닭이다.





문명의 바닷길 - 콜럼버스보다 우리가 먼저거든?


콜럼버스가 발견했다는 신대륙을 그전에 이미 아시아인이 개척하고 교류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물이 있다. 

얼어붙은 베링해의 얼음길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까지 지평을 넓혔던 고아시아인들의 행적을 살펴봤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1988년 매우 묵직한 자료집을 출간했다. 빙하시대에 얼어붙은 베링해를 넘어서 아시아인이 아메리카로 넘어간 행적을 추적하는 문명사적 보고서였다(Cross the Continental). 유라시아에서 온 아시아인이 아메리카로 건너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태가 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인류가 바닷길을 통해 이동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첫 순위를 꼽는다면 바로 베링해 통과가 아닐까 한다. 초기 인류가 아시아 동쪽의 캄차카 반도와 추크치 반도(추코트카 반도)를 향해 나아간 것은 3만 년 전의 일이다. 이어서 수천㎞가 넘는 베링해를 건너는 빙하 통로가 만들어져 사람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끌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빙하시대 이전부터 캄차카에는 이미 사람이 살았다. 고대 사냥꾼 유물이 우시콥스키(Ushkovsky)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사냥꾼이 캄차카와 추크치를 건너가 북아메리카의 최초 정착민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포함해 유라시아 동쪽 북방의 제 종족을 고아시안(Paleo Asiatics:Koryak, Chukchi, Yukakir, Itelmen, Nivkhi)이라 호칭한다.

베링해는 오늘날에도 겨울에 강풍이 불면 바다가 평균 두께 1.2~1.5m의 빙판으로 뒤덮인다. 심지어 한여름에도 얼음이 떠다닌다. 화산재가 만들어낸 검은 모래 해변에 서면 북빙양의 검푸른 파도가 장엄하기까지 하다. 저 바다를 건너서 우리 아시아인의 선조들이 용맹무쌍하게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을 것을 생각하면, 훗날 이루어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운운은 작위적이다 못해 우습기만 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베링해는 겨울이면 빙판으로 뒤덮인다. 심지어 한여름에도 얼음이 떠다닌다. 얼어붙은 베링해를 건너간 아시아인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태가 됐다. 
베링해는 겨울이면 빙판으로 뒤덮인다. 심지어 한여름에도 얼음이 떠다닌다. 얼어붙은 베링해를 건너간 아시아인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태가 됐다.

해면 높이가 100m 이하로 낮아졌던 빙하기(약 2만~3만5000년 전)에 베링해는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잇는 육교 구실을 했다. 이 거대한 ‘문명의 육교’를 통해 상당수의 동식물과 사람이 이주했다. 빙하시대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간 고아시아족이 북미와 남미 원주민이 되었기 때문에 동부 시베리아 끝단 에벤(Even)·추크치(Chukchi)·코랴크(Koryak) 등의 제 민족이 베링해 건너편 알래스카 에스키모족과 유전인자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북미 대륙으로 넘어간 일부가 북서해안으로 흩어져 태평양 에스키모족을 형성했으며, 다른 일부는 알류산 열도로 들어가 알류트족을 이루었다.

환동해와 사할린을 가운데 놓고서 연결되는 오호츠크해 연안에는 주로 에벤 퉁구스족(Lamut)이 살았다. 아시아 에스키모족은 북극 해안을 따라 코리마(Koryma)강 하구의 동쪽 끝에서부터 태평양 해안을 따라 남동쪽으로 아나디르(Anadyr)강까지 확산·정착해 있었다. 곶처럼 툭 튀어나온 시베리아 동단은 이웃 알래스카처럼 에스키모의 고향이었다. 에스키모가 아메리카 북부에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스미스소니언 제공</font></div> 
ⓒ스미스소니언 제공

좁은 베링 해협은 너무도 가까워서 북방의 아시아와 아메리카인들의 문화는 통일되어 있었다. 아시아 에스키모족은 스스로를 ‘사람’이라는 뜻의 유기트(Yugit) 혹은 유피기트(Yupigit)라고 불렀다. 이들은 해안가에 사는 종족으로 물개·바다코끼리·고래 등의 바다 포유동물을 사냥하며 살아갔다. 반지하 오두막집에서 살았는데 벽은 돌과 고래 갈비뼈 혹은 턱뼈로 만들고 흙과 눈을 덮었다. 일상생활에서 물개·바다코끼리·고래는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주었다. 건너편의 아메리카 에스키모족도 바다 사냥을 하면서 살아갔다.

아시아 에스키모의 제의에는 자연에 관한 정령, 특히 엄한 바다 여신인 미감 아그나(Migam Agna), 그리고 그녀를 보조하는 범고래와 화해하는 의식이 포함돼 있다. 의식은 극적인 사냥 장면 재현이나 제의적 춤, 죽은 고래에게 음식을 먹이는 일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다음 해에도 같은 사냥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행했다. 아그나는 오늘날에도 원주민들의 조각품이나 장식품에 다수 전해오고 있다.

우리 상고사의 비밀을 간직한 고아시아족

유라시아 동단의 해변에는 추크치족이 살았는데, 이들은 캄차카 반도의 안쪽뿐 아니라 해안지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추크치족과 관련 있는 수많은 종족들이 태평양, 즉 베링해의 북서쪽 해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나디르만으로부터 남쪽으로 캄차카 반도의 목 부분까지, 그리고 오호츠크해 북쪽 해안 부근에는 코랴크족 조상이 살고 있었다. 캄차카 반도 대부분에는 이텔멘(Itelmen)족이 살고 있었다. 캄차카 반도의 남쪽 끝부분과 쿠릴 열도, 그리고 사할린 섬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본의 아이누족이 살고 있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베링 해협의 에스키모. 
베링 해협의 에스키모.


북방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 북서부 사람들의 유사성은 오랫동안 고고학·인종학·역사학·인류학·민속학 등 여러 학문의 남다른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이들이 간직한 샤머니즘은 청동기 시대 이래 오랜 북방의 전통으로 우리의 샤머니즘과 흡사한 측면이 많다.

양 대륙에 걸친 인종과 문화적 유사성은 선사 및 역사 문화에서 오랜 친연성의 결과다. 베링해 연안에서 불과 56마일 거리는 두 대륙이 거래를 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가령 아무르 하구의 고아시아인(니브히족을 포함해서)의 문화는 북아메리카 원주민과 흡사하다. 고아시아족은 북방에 널리 퍼진 공통의 도구 기술과 사용법을 공유한다. 베링 해협을 넘어가는 데 눈신발(Snow Sheos)이 지대한 일을 감당했다. 역사 시대에 접어들어 더 이상 눈신발을 신지 않고 스키를 쓰게 되지만 눈신발이 인류 문명사에서 남긴 족적은 중요하다. 눈신발을 신고 한 발 한 발 대륙을 넘어서 아메리카로 떠났던 고아시아족의 족적이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아시아족에 관한 관심은 우리 상고사의 풀리지 않는 부분을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부여나 고구려, 발해 등이 순수 한민족끼리 구성되었을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는데 그런 착각이 또 있을까. ‘인종의 용광로’라 할 수 있는 아무르 강 일대나 오늘날의 트랜스 바이칼 지역, 내몽골과 만주 곳곳에는 만주족뿐 아니라 다양한 소수민족이 산재했다. 이들 소수민족이 융합되고 혼혈되어 거대한 집단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독립변수가 되지 못하고 종족 소멸로 귀결되기도 했다. 이들은 홋카이도나 사할린의 아이누와도 연결되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알래스카의 원주민. 
알래스카의 원주민.


분단 시대를 너무나 오래도록 살아오면서 우리의 의식 속에 북방 종족에 관한 다양한 추억들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함경도에 여진족이 즐비하게 살았으며 훗날 재가승 집단이라 불렸다. 두만강 바로 건너편에서 건주여진이 발흥해 청나라가 된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가 북방 종족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에는 잘못된 지리 교육의 영향도 크다. 세계를 제패한 나라들이 포진한 북방을 크게 그린 메르카토르 도법 지도는 북방이 과장된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오호츠크 등은 실제보다 크고 멀게 느껴진다. 종족 이동의 궤적을 본다면 한반도와 생각보다 가까운 지역들인데 말이다. 북빙양 지역이 좁고 작게 되어 있음은 당연히 둥근 지구의를 돌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아메리카 북방과 아시아를 잇는 바닷길이 빙하 시대 소멸과 더불어 사라진 것은 아닐 터이다. 고아시아인들은 빙하를 건너 베링 해협을 통과하면서 떠나온 유라시아에 대한 기억을 유전인자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알래스카의 에스키모와 아시아의 에스키모가 교역에 종사하였음은 여러 인류학 보고서를 통해 입증된다. 알류트족도 캄차카와 연결되었고, 캄차카에서 쿠릴 열도를 통해 홋카이도와 연결되었다.

최근 미국 콜로라도 대학의 고고학자 오언 메이슨은 미국 고고학회지에 재미있는 발굴을 보고하고 있다. 알래스카 에스펜버그 곶(Cape Espenberg)의 라이징 웨일(Rising Whale)에서 청동 버클(허리띠 고정 장치)과 호루라기 비슷한 유물을 발견했다. 탄소연대 측정 결과 1000여 년 전 청동 제품인데 당시 선콜럼비아기(Pre-Columbian)의 알래스카에는 청동 제련기술이 없었다. 보고서는 중국이나 한국, 야쿠티아(레나 강가의 사하공화국)에서 수입된 무역품이라고 밝혔다.

오늘날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확고부동한 역사적 사실로 자리 잡고 있으나 여러 측면에서 사실과 다르다. 일찍이 바이킹의 진출이 오늘의 캐나다 뉴펀들랜드에서 확인되었으며, 바스크족이 캐나다 동부 해안에서 대구잡이를 오래도록 행한 것도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알래스카에서 발굴된 온돌 유적이 말해주는 것

청동 버클 발굴은 베링해를 건너서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무역로가 존재했음을 증명해준다. 반대로 알래스카의 해양 포유류 상아 등이 중국 등지로 수출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알래스카에서 발굴된 온돌 유적은 한민족과의 교류도 말해준다. 온돌이야말로 북방에서 형성되어 한반도 남방으로 전파된 한민족 고유의 난방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구가 희박하고 엄혹한 조건에서 살았던 북방과의 교섭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명의 장기 지속적 네트워크에 완벽한 단절이 있을 수 없다. 고고학적 발굴이 의미하는 것처럼 간헐적이나마 교류가 이어졌다.

일찍이 유라시아인이 건너갔던 바닷길은 훗날 베링이라는 탐험가에 의해 다시금 ‘재발견’되어 베링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지하고 습득한 지식체계의 상당 부분이 이들 서구인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임을 알 수 있다. 북방 원주민들의 흔적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곳은 역시 산이나 강, 바다 등 자연의 지명이다. 러시아식과 미국식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유라시아인이 남긴 오랜 문명의 흔적은 상당 부분 거세되었다. 베링해를 무대로 살던 이들이 믿던 샤머니즘이나 자연주의적 세계관도 미국식 기독교나 러시아 정교회, 혹은 사회주의 독트린에 의한 과학의 이름으로 미신 타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그마한 박물관이나 자료관, 또는 아카이브 센터에서 문명 교섭의 자취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네 밥상에 베링해와 오호츠크해에서 잡힌 명태가 오른다. 동해의 명태는 얼마 전 소멸했다. 베링해의 명태가 없다면 우리의 밥상은 쓸쓸해질 것이다. 이들 문명의 바닷길이 이어졌던 바다는 연어의 본향이기도 하다. 양식 연어가 아닌 자연의 품격을 그대로 간직한 연어 떼가 알래스카 해안과 캄차카로 거슬러 올라가며, 남쪽으로 내려가 한반도 동해안까지 온다. 남대천변에서 연어를 먹으면서 북방 바다에서 이루어졌던 아시아 선조들의 오랜 문명사적 궤적을 잠시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문명의 바닷길 - 돈 대신 말린 해삼 받습니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에서 말린 해삼은 통화정책과 물가정책의 주요 수단이었다. 중국은 아시아·태평양 전역에서 해삼을 수집했다. 

화교 집단의 주요 거래 품목 역시 해삼이었다. 그중에서도 동해 해삼이 으뜸이었다.


‘인삼과 산삼 위에 해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해삼은 건강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극피동물인 해삼은 그 종류가 많아서 무려 1100여 종이 확인되고 있다. 해삼은 세계 모든 바다에서 볼 수 있는데, 대부분 얕은 바다에 산다.

한국인들은 해삼을 날로 먹는 방식을 선호한다. 해삼이 싸고 흔했던 1970년대까지는 길거리에서 해삼과 멍게를 잔술과 함께 팔았다. 멍게·해삼은 이래저래 술안주의 대명사다. 중국인들은 말린 해삼을 선호한다. 유통의 문제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린 해삼을 오래 조리해온 역사에서 비롯된다.

중국 요리에서 해삼이 빠지면 요리가 성립될까 싶다. 중국인의 엄청난 식탐이 해삼에 걸려 있으니 중국 곳곳에 해삼 판매소가 즐비하고, 전 세계에서 해삼을 수집한다. 중국의 해삼 수입 역사는 그야말로 ‘태곳적’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해삼 하면 동해 해삼이 으뜸이었다. 북방에서 환동해는 중요한 해삼 서식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분석한 아키미치 도모야(秋道智彌)의 연구에 따르면 한반도 동해안은 모두 중요한 해삼 서식지이며, 일본 환동해권 역시 예외가 아니다. 블라디보스토크가 해삼위(海蔘威)가 된 것도 전적으로 해삼 수집소에서 유래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해삼을 말리고 있는 어민의 모습을 그린 일본의 그림.



이래저래 환동해는 해삼의 길이기도 했다. 청나라 조정은 벼슬아치를 변방에 보내어 해삼 구입을 독려했고 해삼 장사꾼은 동해 해삼으로 큰돈을 벌어들였다.

해삼 무역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진상·공무역뿐 아니라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잠상(潛商)이 혼재되었다. 해삼을 채취해 말려서 바쳐야 했던 어민들의 실질적 고통이 짐작된다. 실제로 기록에는 환동해 어민들의 무한 고통이 곳곳에 등장한다. <만기요람>(1808)에는 “별사방물(別使方物)을 보면 사은(謝恩)에 황제에게 대구 200마리·해삼 200근·홍합 200근·다시마 200근·광어 100마리를 바친다”라는 대목이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사진가</font></div>과 중국 옌볜에서 판매하고 있는 북한산 해삼.사신을 통한 공무역으로는 양이 부족하므로 중국과 거래하는 개시(開市)가 마련된다. 중강개시(中江開市)에서 거래된 공식 매매 총수에 다시마 1만5795근, 해삼 2200근, 소금 310석이 등장한다. 말린 해삼 2200근이면 상당한 양이다. 함경도 회령개시, 경원개시와 더불어 압록강변의 중강개시는 명나라로 들어가는 물자의 통로 구실을 했는데, 후금의 요구로 다시 개설되었다. 개시에 내보내는 물자는 국가에서 엄격히 통제했다. 개시에 내보낼 해삼 문제로 비변사에 보낸 함경감사 성수묵의 장계를 보자.


“실로 바닷가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막이 되고 있습니다. …개시(開市) 있는 고을의 해삼에 대한 행정이 포민(浦民)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되지만 개시에 관한 정례와 관계되고, 또 바닷가 가호의 신역(身役)이 되기 때문에 변통을 하지 않고 어물어물 지금까지 내려왔습니다.”

중국 옌볜에서 판매하고 있는 북한산 해삼.

중국인들은 개시에서 해삼 가격을 싸게 후려쳤다. 함경도 해삼은 두말할 것 없이 동해변에서 채집되었을 것이다. 해삼을 채취한 후 건조·가공해서 내보내는 어민의 고통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의 해삼 수요가 간절했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연행무역에서 의주부 수검소의 수출입품 목록을 보면, 수출은 담배·해삼·홍삼, 수입은 모자·수은 등이 주력품이었다.

사신을 통한 무역이나 개시 무역에서만 해삼이 거래된 것이 아니다. 중국의 모든 무역선은 해삼을 필수적인 거래 품목에 올려두었고, 상품성 있는 해삼을 채취하기 위해 조선 해안에 직접 출몰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돈 되는 해산물은 국제적인 무단 어업, 난폭 어업을 유발하는 대상이다.

중국은 일본에서도 해삼을 수입했다. 일본 쪽 환동해의 해삼은 전량 나가사키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후반기인 1695년께부터 말린 해삼은 막부의 통화정책, 물가정책의 중요 수단이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 초기에 일본은 금과 은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생사·견직물을 구입했다. 그런데 금과 은이 모자라게 되었다. 그래서 구리로 바꾸었지만 이 역시 부족했다. 금·은·동은 수출상품인 동시에 통화였다.

부족한 구리 대신 새롭게 개발된 교환 상품이 ‘다와라모노’라 부르는 표물(俵物)이었다. 해산물을 모두 가나미(俵)에 넣었기에 표물이라 부른 것이다. 표물은 건해삼·상어지느러미·말린 오징어·조각난 전복·말린 새우·우무·말린 가다랑어·쪄서 말린 정어리 등이고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이리코, 즉 해삼이다.

에도 막부가 새로운 수출상품으로 해삼 생산을 독려하기 시작했던 1744년, 나가사키에서 수출된 해삼 총량은 31만7000근(약 190t)이었다. 막부의 요청에 가장 잘 부응한 곳은 다섯 군데 해역이었다. 기타큐슈, 세노 내해, 노토를 중심으로 한 동해, 이세시마, 홋카이도. 생산량을 살펴보면 환동해 권역이 50% 이상을 차지한다. 이리코는 고대부터 조공, 진상물, 신의 음식이었다. 그것이 이리코를 귀인에게 주는 물건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고대 관습은 중세부터 막부 말기까지 이어졌다. 해삼 창자로 담근 젓갈을 필두로 이리코 진상이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해삼이 싱가포르 국부를 떠받쳤다고?

한편 중국인들은 환동해뿐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전역에서 해삼을 수집했다. 원주민에게 해삼 건조기술을 가르치면서 양질의 해삼을 구하고자 했으며,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역,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아보리진(Aborigine)에게서도 해삼을 구했다.

영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최초로 ‘발견’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지만 터무니없는 주장일 뿐이다. 그에 앞서 중국의 해삼 장사꾼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으로부터 다량의 해삼을 수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중국에서 오늘날의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 등으로 퍼져나간 화교 집단의 주요 거래 품목이 해삼이었다.

중국인의 요구에 따라 형성된 세계 해삼 루트에서 북방의 해삼 집결지는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간사이의 오사카, 개항장이자 대외 출구였던 나가사키에 포진되었다. 중국 본토는 베이징, 톈진, 푸저우, 광저우, 홍콩 등이 주요 거점이었으나 중소 도시에도 해삼 집결지가 산재했다. 중국인이 사는 곳마다 해삼은 필수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홍콩 재래시장은 과거에 남방 해삼이 흘러들어 오는 집결지였으며, 현재도 사정은 변하지 않아 남방의 말린 해삼이 흘러들어 오고 있다. 남방 해삼 집결지는 싱가포르, 마닐라 등이었다. 마닐라에는 일찍부터 화교 사회가 존재했고 이들은 묵묵히 해삼을 수집해 광둥으로 보냈다. 싱가포르가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임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 싱가포르 국부를 떠받치는 중요 요소에 해삼이 숨어 있음은 덜 알려져 있다.

중국 옌볜 훈춘 시장에 나가보니 북한에서 들어온 해삼들이 즐비했다. 말린 해삼 작은 봉지에 기십만원을 호가하니 너무 비싸서 그만 들었다 놓고 말았다. 북방으로부터 남방에 이르기까지 해삼을 먹고야 말겠다는 인간의 식욕이 불러일으킨 ‘해삼 루트’가 곳곳에 만들어지면서 1000년 넘게 이어져오고 있다.




문명의 바닷길 - 조기 생일은 1년에 세 번이었지


명태·조기·멸치가 바다의 ‘삼걸’이라는 것도 다 옛말이 되어버렸다. 곡우·소만·단오에 걸쳐 연평열도 주변에 여정을 풀었던 조기가 사라졌다. 

조기 떼가 만들던 장엄한 문명의 궤적이 인류에게 안녕을 묻는다.


동해에 명태라면, 남해와 제주는 멸치, 황해는 조기가 으뜸이다. 명태를 말리면 북어, 조기를 소금에 약간 절여 말리면 굴비가 된다. 이들 명태·조기·멸치는 동·서·남해의 ‘삼걸(三傑)’이다. 이들의 세력균형(?)은 황해 조기와 동해 명태가 급거 역사의 전면에서 퇴장하면서 깨져버렸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조기 떼는 황해와 동중국해의 경계 해역까지 발달한 양쯔강 하구 바닷속 모래밭에서 겨울을 난다. 동중국해의 따스한 물속에서 겨울잠을 자듯이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봄이 오면 북상하기 시작한다. 알을 낳기 위해 머나먼 항해를 거듭하는 조기의 회귀본능은 생명 탄생의 외경심을 일깨워주는 위대한 드라마다. 제주도 남서쪽에서 북상을 거듭해 평안도 앞바다 발해만에 이르기까지 장엄한 광경을 연출했다. 수천만 마리씩 떼를 지어 군단을 만들면서 바다를 점령했다. 봄빛 바다는 조기 울음으로 시끄러웠다.

조기의 이동은 단순한 생물체 회유에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조기를 따라 이동했기 때문이다. 서해안 어업생산력의 최대치가 조기잡이였고, 최대 유통량을 자랑하면서 부를 축적했으며, 조기 어장을 따라 파시가 열렸다. 조기 어장과 파시를 따라 황해를 북상하며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몰락해버린 포구의 술청에 앉아 흥청거렸던 파시를 떠올린다. 저쯤에서 술집 아낙이 걸어오고, 이쯤에서 취한 뱃동서(선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겠지…. 성어기마다 각처에서 모여든 무수한 선주와 선원을 상대로 하는 음식업, 접객업자들이 운집해 한산했던 어장이 일시에 번성을 이루던 파시(波市). 파시란 본디 어류를 교역하는 시장을 의미한다. ‘波’는 물결을 타고 해상을 이동한다는 뜻이고, ‘市’는 어업자, 즉 각종 영업자를 뜻한다. 근대의 파시는 임시 파출소 등 각종 기관까지 설치되어 일시적 번성을 누리는 임시 어촌이다. 파시란, 어류 등을 거래하기 위한 해상 시장으로도 해석된다. 혹자는 파시를 파시평(波市坪)이라고도 하는데, ‘坪’은 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일제강점기 연평도 파시의 풍경. 임시 파출소 따위 각종 기관까지 설치되는 등 성업을 이뤘다. 
일제강점기 연평도 파시의 풍경. 임시 파출소 따위 각종 기관까지 설치되는 등 성업을 이뤘다.


어부들은 흑산도에서 신의주 앞바다와 만주 다롄에 이르기까지 넓은 어장을 확보했다. 조기가 많이 잡히고 돈이 돌다 보니 섬마다 파시가 열려서 흥청망청 모처럼 시끄러운 바다가 되었다. 색줏집 아가씨들도 들병을 가지고 사내들의 돈을 한껏 뽑아 올렸다. 어느 시인이 그린 어촌 술집 풍경처럼, ‘커다란 생선 같은 여자를 껴안는’ 꿈을 꾸고 싶었을 것이다.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는 남자들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던 부초 같은 인생들이 바다에 널렸다.

조기를 따라 북상하면서 어부들은 한식 무렵에는 홍도 윗바닥인 안마도 밖으로 쫓아가서 잡았다. 정약전이 칠산 바다에서 ‘한식 후에’ 그물로 잡았다고 했으니, 대략 한식에 홍도 근역을 치고 올라가서 한식 이후에 칠산 바다에 당도했다. 200여 년 전 기록과 오늘의 구전이 일치한다. 칠산 어장은 연평도 어장이 시작되기 전에 조기가 집중적으로 잡히던 첫 어장이었다. 칠산 조기는 알이 차기 시작하고 살도 제법 올랐다. 모든 물고기가 그렇듯이 종족 번식의 중요한 대사를 앞두고는 살이 오르기 마련이다. 칠산도 어부들은 조기를 만난 반가운 마음을 이렇게 노래로 전했다.

황금 같은 내 조기야 어낭청 가래질이야
어디 갔다 인제 왔냐 어낭청 가래질이야
만경창파 너른 바다 어낭청 가래질이야
길을 잊어 인제 왔냐 어낭청 가래질이야

칠산 바다는 지도로 볼 때 영광 쪽으로 낙월면에 속한 일산도·이산도·삼산도·사산도·오산도·육산도·칠산도의 일곱 무인도가 점을 찍고 있어서 칠뫼라고도 불렸다. 넓은 의미의 칠산 어장은 밑으로는 안마도에서 비안도에 이르고, 위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어장을 뜻한다. 특히 위도 아래쪽인 형제도 일대는 황금어장으로 주가를 날렸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포포M</font></div>어부들은 흑산도에서 신의주 앞바다와 만주 다롄에 이르기까지 조기를 잡으러 다녔다. 흑산도 어민들이 조기잡이 배를 기다리며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어부들은 흑산도에서 신의주 앞바다와 만주 다롄에 이르기까지 조기를 잡으러 다녔다. 
흑산도 어민들이 조기잡이 배를 기다리며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조기 떼가 올라오는 시각을 예견하는 놀라운 삶의 지혜를 칠산도 어민들은 두루 체득하고 있었다. 칠산 바다 시도의 늙은 살구나무에 꽃이 피면 조기가 찾아왔음을 알아차렸다. 법성포 건너편 구수산 철쭉꽃이 뚝뚝 떨어져 바다를 물들이면, 조기들은 아름다운 빛깔에 취해 어쩔 줄을 몰랐다. 칠산도 어민들은 구수산 철쭉꽃을 칠산 바다에 조기 떼가 왔다는 신호로 알고 이내 배를 내어 고기잡이에 나섰다.

전국의 배를 구경할 수 있었던 연평 어장

칠산도 어민들은 자신들의 일정표대로 착착 움직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어부의 삶이란 늘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다는 어떤 경우에도 음력이다. 바다의 자연 질서는 음력을 벗어나는 순간 틀어진다. 물때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기가 돌아오는 어업력이 그러하다. 조기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곡우 때면 정확히 당도해 울음으로써 만물의 순환을 통지하고, 어둠이 깔리는 칠산 바다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알을 낳았다. 이로써 종족 보존의 대드라마가 완성되었다.

또 한 번의 최대 파시는 경기만에서 벌어졌다. 조기 선발대는 음력 3월 하순에 이미 연평도에 당도했으며, 후발대도 4월 초파일 무렵에는 모두 연평도에 도착했다. 연평도에서 4월 초파일을 ‘조기의 생일’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것이다.

조기들이 연평도를 그리워하면서 머나먼 여장을 푼 이유는 너무도 자명했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쌓여 강화도 앞바다를 질펀한 개펄로 만들었으니 부유물질이 많아 풍부한 먹이를 제공하고, 또한 얕은 모래밭은 알을 낳기에 적당했다. 조기들은 강물과 바닷물이 합수하는 곳을 좋아해 북상을 거듭하여 황해도 해주만에 집결했다. 연평 어장이라 할 때, 이는 해주만 일대의 잘 발달한 리아스식 해안과 자잘한 섬들을 포괄한다. 연평열도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및 부근의 크고 작은 섬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기철이 되면 인근의 배들도 모두 몰려와 파시를 형성했기 때문에 연평 어장은 가히 황해·경기·충청, 심지어 전라도 배들까지 망라하는 큰 어장이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충남 천수만에서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임 장군은 ‘조기의 신’으로 불린다. 
충남 천수만에서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임 장군은 ‘조기의 신’으로 불린다.


칠산 바다에서 곡우사리가 펼쳐졌다면, 인천과 연평바다에서는 소만사리가 나타났다. 소만사리가 오죽 컸으면 ‘조기 생일’이라고 불렀겠는가. 조기잡이가 끝나는 5~6월은 ‘파송사리’라 불렀다. 반면 새우잡이를 포함한 모든 고기잡이가 완전히 끝나는 10월은 ‘막사리’라 불렀다. 2015년을 기준으로 하면 곡우는 4월20일, 소만은 5월21일, 단오는 6월20일이니 이들 절기들이 조기의 생일이었던 셈이다. 절기로 치자면 본격 여름으로 접어들기 직전인 딱 요즘이다.

황해도 등산이와 구월이 앞바다는 자잘한 여와 모래밭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조기에게 최적의 산란장이다. 구월봉 아래 구월포에는 큰 ‘조기장’이 섰으며, 6월께 최대의 장이 섰다. 연평도 조기는 칠산도 조기보다 더 컸다. 밑에서 올라오면서 실하게 커져 칠산 어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포나루에서 얼음을 잔뜩 실은 시선배(일종의 운반선)들이 땔감, 식량 따위를 싣고 연평도까지 와서 조기와 맞바꾸었다. 일부는 해주항을 거쳐 개성 부잣집으로 실려 가기도 했다. 얼음에 차곡차곡 채워진 조기는 강화도 북쪽을 통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포나루까지 직진했다. 여기서 경강상인(京江商人)의 존재를 주목해야 한다. 마포는 새우젓의 동네답게 젓갈·소금·생선·건어물 등 해산물이 집중되었다. ‘바다를 잃어버린’ 지금의 서울과 달리 당시 서울은 바다와 소통하고 있었다는 좋은 증거다.

연평도 임경업당에 오른다. 망연하게 바다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젖는다. 해마다 파시철에 몰려들었던 배들 수천 척이 이쪽을 향해 뱃기를 세우고, 임경업을 칭송하며, 그의 음덕을 노래했다. 연평도에서는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길일을 택해 굿을 쳤다. 조기잡이를 떠나기 전, 대개의 서해 어촌에서도 임 장군을 모시고 마을굿이나 뱃고사를 올렸다. 연평도에 가면 반드시 임장군당을 찾아서 제사를 지냈다. 조기잡이를 파송치고 와서도 정성껏 당에 고사를 올렸다. 이렇듯 ‘조기의 신’ 임경업 장군은 서해안 각처에 흩어져 있었다.

조기 떼를 따라서 다시금 북상할 시간이다. 연평도 조기 군단은 힘껏 장산곶을 돌아서 북상했다. ‘조기의 신’ 임경업 신앙도 장산곶을 돌아서 이북의 철산 앞바다까지 힘차게 북상했다. 무더운 여름철이 시작되는 6월 말쯤, 조기들은 최종 목적지인 평안도 철산 앞바다인 대화도에 닿았다.

선천 신미도에서 철산 대화도에 이르는 근역은 조기의 산란장으로 3대 어장의 하나였다. 신미도 당후포는 조기 파시로 유명했다. 대화도 주변은 일부 모래톱을 형성하고 개펄이 함께 있어서 조기가 서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대화도에서는 5~6월 성어기에 파시가 형성되었다. 철산의 중심은 역시 가도다. 가도는 조기들의 마지막 회유지, 유턴 지점인 대화도 어장이었다.

모두 사라지고 핵발전소의 그늘만 드리웠네

조기들은 마지막으로 압록강변 용암포에 몰려들었다. 용암포는 군소재지로서만이 아니라 어시장으로도 유명해 용암포 어시장과 이도포 어시장이 봄부터 가을까지 매일 열렸다.

조기들은 방대한 양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밀물에 잠시 몸을 맡기면서 마지막 행군을 정리했다. 이제 더 이상 황해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제주도 남서쪽을 떠날 때는 초봄이었는데 어느덧 여름이 가고 있었다. 장장 1000㎞가 넘는 참으로 긴 여행이었다. 알을 낳고 몸이 홀쭉하게 빠져서 볼품은 없어졌지만 다시금 귀향을 서둘러야 한다.

조기들은 지름길을 택하기로 했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수심 60~80m의 물길로 방향을 잡았다.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의 얕은 바다인데도 갑자기 깊어지는 바다 골짜기가 있고 그 골에는 차가운 냉수괴가 흐르는데, 조기들은 그 물줄기를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 모든 게 역사가 되고 말았다. 조기도 사라지고, 파시도 사라지고, 서해안 어업 생산력은 절단 나고 말았다. 칠산 어장 주변에는 핵발전소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을 뿐이다. 작은 생명체들이 만들어낸 대하드라마보다 더 장엄한 문명의 궤적이 또 있을까. 하여 그 많던 조기들은 어디로 갔으며, 왜 사라졌을까를 묻는 것이다. 조기와 명태의 소멸에 인류 문명의 불길한 손길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바닷길 - 대구의 원래 이름은 ‘생선’이라네


개체수가 많고 맛이 담백한 대구는 얕은 물을 좋아해 잡기도 쉬웠다. 그런 대구가 사라졌다. 

인류도, 정치도, 문화도 식탁 위 음식이 만들어낸다. 생선이 사라지면 이를 매개로 살아오던 사람들의 오래된 문명도 막을 내린다.


서해안 조기의 소멸이 가져온 서해안 어촌 삶의 근본적인 변화 양상(<시사IN> 제404호 ‘조기 생일은 1년에 세 번이었지’ 기사 참조)을 썼더니 ‘그게 문명사와 뭔 관계인가’ 하는 지인의 연락을 받았다. 생선 이야기를 한 번 더 하면서 그 의문점을 풀어보자.

이번에는 ‘대구’다. 조기가 황해 권역의 미시사라면, 대구는 드넓은 대서양 권역의 미시사라고 할까. 두 어류의 미시사적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물고기들이 세상을 바꾸고 바닷길을 만들어내면서 문명사적 궤적을 그려나갔는가를 총합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황당한 지식 정보 중의 하나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이다. 지금까지 세계 학계에 알려진 콜럼버스 이전 유럽인의 신대륙 당도 증거들은 너무도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바이킹들이 일찍부터 아이슬란드를 거쳐서 북미 연안에 주거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상 대구는 유럽인의 주요 식량이자 부를 쌓는 수단이었다. 바이킹은 먼 거리를 항해하는 동안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말린 대구를 주식으로 삼음으로써 콜럼버스보다 훨씬 더 먼저 뉴잉글랜드(아메리카)에 도착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노르웨이 베르겐의 축제에 쓸 대구 목조각.

노르웨이 베르겐의 축제에 쓸 대구 목조각.


중세 한자동맹 시절인 1350년부터 200여 년간 번성을 누렸던 노르웨이 베르겐은 유럽 북방 어업의 본거지다. ‘베르겐의 영혼’이라 불리는 에드바르트 그리그가 태어난 항구도시답게 솔베이지의 노래가 일상적으로 낮게 깔리는 부두에서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목조건물군을 찾아나서 본다. 바이킹 흔적을 재현해내는 갖가지 바이킹 팬시 상품이 즐비한데, 곳곳에서 대구잡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바이킹은 유럽 북부 어장은 물론이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북아메리카 어장에서 대구를 잡아들였다. 대구잡이의 노선 확정은 그 자체로 거대 항로의 창조를 뜻했으며 ‘대구의 길’을 인류 역사에 아로새겼다. 신대륙 최초의 바이킹 주거지가 1960년 고고학자들에 의해 뉴펀들랜드 북부에서 발견되었다. 실상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드를 거쳐 그린란드와 뉴펀들랜드 어장까지 2400㎞ 대항해를 바이킹들이 일상적으로 해낸 것이다. 또 다른 ‘대구의 길’은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 사는 바스크족이 개척한 것으로, 오늘날의 캐나다 뉴펀들랜드 대구 어장으로 향하던 노선이다. 바스크족은 자신들만 아는 북아메리카 황금어장에서 엄청난 양의 대구를 낚아 올렸으며, 소금에 절인 대구를 유럽인에게 판매해 많은 돈을 벌었다. 바스크족은 수백 년 동안 어장을 비밀에 부쳤다. 유럽인들은 바스크족이 어디서 대구를 잡아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비밀은 독점경제를 창출했고 소수민족 바스크가 생존할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바스크족 문화를 말살시키려는 스페인의 엄청난 탄압을 받으면서 바스크는 ‘문화적 생존의 역사’를 살아왔는데 그 역사 안에는 당연히 대구잡이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다. 대서양을 가로질러 북아메리카로 향하던 대구의 길이 바스크족 역사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어부 출신의 뉴요커 마크 쿨란스키는 일찍이 미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고 한국어로도 출간된 <세상을 바꾼 물고기-대구>에서 다양한 ‘대구의 길’을 역사적으로 고구해냈다. 그가 책에서 다룬 ‘대서양 대구’는 몸집이 크고 개체수가 많으며 맛이 담백해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어종이다. 얕은 물을 좋아해 잡기가 쉽다는 점도 대구가 가장 상업적인 생선이 되는 데 한몫을 했다. 한때는 ‘대구’라는 본디 이름 대신에 그냥 ‘생선’으로 통용될 정도였다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1620년에 종교 박해를 피해 바다를 건넌 영국의 ‘나그네들’은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될 꿈에 부풀어 대구가 풍부한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 정착했다. 1602년 영국의 항해가 바솔로뮤 고스널드가 근처 해안에 있는 갈고리 모양의 곶에 케이프 코드(대구 곶)라는 이름을 붙이고 대구가 ‘들끓는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나그네들이 정착한 지 25년 만에 뉴잉글랜드인들은 삼각 무역으로 들르는 곳마다 돈을 벌어들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노르웨이 베르겐은 유럽 북방 어업의 본거지였다. 바이킹들의 대구잡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노르웨이 베르겐은 유럽 북방 어업의 본거지였다. 바이킹들의 대구잡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대구 귀족’도 다 옛말이라오

1700년대에 들어서 대구 무역의 중심지였던 뉴잉글랜드는 국제적 상업 세력으로 부상했다. 대구 어업으로 가문의 부를 쌓아올린 ‘대구 귀족’까지 등장했다. 소금에 절인 대구를 지중해 시장에 판매해 큰 이익을 챙겼으며, 저급 상품은 서인도 제도의 설탕 플랜테이션에 팔았다. 그곳 노예들은 이 물고기를 주식으로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을 버텼다. 결과적으로 소금에 절인 대구는 카리브해 노예들을 먹여 살려 노예무역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2014년 가을, 나는 부산에서 만난 쿨란스키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대구 한 가지를 둘러싸고 중층적인 역사가 펼쳐졌네요. 그야말로 대구 천년의 역사입니다. 대구를 둘러싼 탐험과 탐욕의 역사가 흥미롭습니다. 19세기 들어 어업의 현대화가 이루어지면서 대구 개체수가 가파르게 감소해왔지요”라는 내 말에 쿨란스키는 이렇게 답했다. “어업 현대화를 위한 최초의 시도는 프랑스에서 나왔는데, 바로 신세계로 가는 자국의 선단에 주낙을 설치한 것이라 했습니다. 낚싯줄에 낚싯바늘이 여러 개 달린 이 주낙은 물고기 남획의 위험이 있었지만 영국 어업위원회는 주낙으로 어획량이 감소할 가능성은 없다고 발표했지요. 주낙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기술은 더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는 목표에 초점을 두었고, 증기동력 트롤선, 전개판 트롤망(otter trawl) 등의 출현으로 대구 남획에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고성능 선박, 저인망, 냉동생선이 거대한 공모선이라는 형태로 합쳐졌는데, 이는 저인망으로 물고기를 쓸어담으면서 한편에서는 즉시 물고기를 냉동할 수 있는 강력한 고기잡이 배였지요. 1950년대가 되자 세계 어디에서나 대구 어획량이 매년 늘어났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92년에는 대구가 상업적으로 멸종했다는 사실이 자명해지면서 캐나다 정부가 뉴펀들랜드 근해, 그랜드뱅크스, 세인트로렌스 만 해저 어업을 무기한 금지했습니다. 이로써 3만명의 어민이 일자리를 잃고 접시닦이나 경비원, 트럭 운전사, 기계공 등으로 내몰렸습니다.”

조기떼 울음소리가 사라진 서해안 어촌이 적막강산으로 변해갔다면 대구가 사라진 대서양 연안 역시 ‘침묵의 바다’로 접어든 것이다. 스케일의 차이만 날 뿐, 종의 소멸이 야기한 장기 지속적인 인류 문명의 단절이라는 점에서는 하나도 다를 게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세상을 바꾼 물고기-대구>의 저자 마크 쿨란스키.

<세상을 바꾼 물고기-대구>의 저자 마크 쿨란스키


열심히 먹을 뿐 물고기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대중에게 인간과 대구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일깨워주기는 쉽지 않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어서 서해안 조기가 사라지면서 인간과 조기가 지녔던 관계망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서해안 조기와 대서양 대구가 비교적 일찍 사라졌다면 근년에 자취를 감춘 생선으로 명태가 있다. 휴전선 이남에서 명태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다. 1980년대까지 5만여t에 육박하던 연근해 명태 잡이가 2000년대 들어와서는 연간 1t도 안 되며, 근년에는 아예 없다.

그래도 우리들 밥상에는 여전히 명태가 오른다. 북양태 덕분이다. 북양태는 오호츠크해와 베링해에서 잡아온다. 이미 1960년대 보릿고개 시절부터 북양으로 진출하여 잡아들였다. 북양은 험한 바다다. 그러나 그 험한 바다 아니고는 우리가 원하는 명태를 얻을 수 없다. 이해 당사국의 쿼터를 받아 세금을 내가면서 잡아들이고 있다.

바다 위에서 인류 문명의 향방을 묻는 이유

오호츠크 북단인 셸리호바 만(Shelikhova Bay)은 세계에서 가장 생산적인 해역이다.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언제나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데, 강한 해류가 흐르는 이곳은 러시아 학자들의 표현을 빌린다면 ‘자궁’ 같은 곳이다. 캄차카 게와 넙치 같은 다른 종류들이 이곳에서 치어기를 보낸다. 오호츠크해의 물개와 고래도 이곳에서 양육된다. 오호츠크해의 자궁에서 배양된 고래가 동해로 들어오며, 오호츠크해와 동해가 교섭하면서 생물의 이동을 촉진한다. 동해의 환경은 독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또 하나의 바다 오호츠크해 해양 세계와 연계하여 병존한다.

오호츠크해에서 베링해, 알래스카에 이르는 드넓은 해역은 인류에게 남겨진 아직은 살아 있는 어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은’이란 단서가 남아 있다. 인류도, 정치도, 문화도, 오늘 아침 식탁 위의 음식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오호츠크해와 베링해는 우리들의 식탁을 채워주는 거대한 공장인 셈이다. 그러나 원주민의 적정량 어획과 공정한 소비라는 틀을 벗어나서 산업형 어로가 틀이 되었을 때, 자본의 압력은 북방 해양 생태계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결론을 내릴 순간이다. 인간이 선호하는 물고기를 잡아나가면서 그 물고기를 따라서 바다 위에 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종의 소멸은 길의 단절과 1000년 넘게 이어져온 문명사적 궤적 자체를 단절시켰다. 조기가 사라져서 파시가 철시된 서해안, 명태가 사라져서 명태축제에 명태가 한 마리도 없는 동해안, 대구가 사라져서 침묵의 바다로 바뀐 대서양 연안은 인간과 기술과 종의 소멸과 문명사의 파행이라는 근본적인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전 세계적으로 벌어졌던 고래잡이의 시대가 끝나자 고래들이 오가던 ‘고래의 길’이 일찍이 단절되었다. 거북이가 회유해온 ‘거북이의 길’이 단절되어 간다면, 이제 조만간 ‘참치의 길’도 그러할 것이다. 연어가 회귀하는 ‘연어의 길’이 단절된다면 연어를 매개로 살아오던 사람들의 오래된 문명도 막을 내려야 한다.

근자에 ‘생태 사관’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그 생태 사관의 법칙이 가장 잘 작동하는 공간이 바다일 것이다. 봄이 와도 새가 울지 않는다는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처럼 종이 소멸된 바다에서는 역동성도 생명력도 모두 사라진 침묵만이 흐를 뿐이다. 이것이 바다 위에서 인류 문명의 향방을 되물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문명의 바닷길 - 자그마한 카누로 대양을 누볐던 그들

폴리네시안이 태평양으로 나아갔던 대항해의 역사는 인류 역사상 중요한 진보 중 하나이다. 

이들은 동쪽으로 진출하며 새로운 땅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갔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향해 카누를 저어나가면서.


태평양은 가장 많이 언급되는 바다이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태평양에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면 내내 태평양을 통과하지만 그 밑 바다에는 무심한 채 한국과 미국의 관계만 생각한다. 우리가 속한 태평양에 누가 언제부터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그저 ‘남의 동네’ 이야기다.

태평양 사람들이 우리와 동일 아시아계이며, 아시아인이 태평양으로 나아갔던 대항해의 역사야말로 인류 역사상 중요한 진보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태평양을 말할 때, 기초 지식부터 재정리하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태평양은 일반적으로 서구의 ‘발명품’으로 간주된다. 유럽인이 광활한 대양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네들은 발견을 기록하고 분석하는 데 관념적인 틀이 필요했다. 태평양이라는 명칭도, 태평양 문화권이라는 구분도 다 서구의 발명품이다. ‘태평양 지역’(Pacific Region)과 ‘태평양 사람들’(Pacific Islanders)이라는 개념조차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산물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19세기에 프랑스인이 그린 미크로네시아의 풍경.

19세기에 프랑스인이 그린 미크로네시아의 풍경.


작은 섬들이 모였다 하여 미크로네시아, 검은 이들이 산다 하여 멜라네시아, 섬이 많다 하여 폴리네시아 이런 식으로 정해졌다. 이들 삼분법은 여전히 변덕스럽기도 하고 모호하다. 3개 문화 영역은 유럽인에게 편리한 관점일 뿐이지만 일단 이름이 붙여지자 리얼리티로 받아들여졌고, 지명의 정치(Politics of Naming)는 오늘의 태평양을 규정짓는 절대적인 기준치다.

호놀룰루 항 9번 부두의 ‘하와이 해양박물관’은 해양을 중심으로 한 하와이 역사 및 생활사에 집중하고 있다. 1층 전시실에는 2중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항해하는 원주민 선조들의 영웅적 활약이 장대한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그마가 분출하는 화산을 향해 폴리네시안들이 전진하는 그림은 상상이 아니라 선조가 겪었던 화산 폭발 목격담을 재현한 것이다. 긴 항해 끝에 이름 모를 섬에 닿고, 그 섬의 엄청난 화산 폭발을 목격한 선주민의 경험은 신화를 통해 구술 역사로 전해진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폴리네시안의 위대한 대항해는 기원전 1500년대 무렵, 동남아시아 라피타 문화를 향유하던 이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를 출발해 뉴기니 동쪽 해안을 따라 최초의 여행에 나선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한다. 태평양 카누와 동남아시아 카누는 매우 깊은 연관성이 있다. 카누 전통은 라피타 문명이 태평양으로 진출하였음을 시사한다. 타이 수도 방콕의 왕립선박박물관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카누들이 폴리네시아 곳곳에서 발견된다.

폴리네시안들은 멜라네시아의 섬들을 점령한 다음 동쪽으로 진출한다. 400~600㎞ 이상을 건너 통가와 사모아 제도에 정착한다. 라피타 도자 문화를 추적한 결과 동쪽으로 피지에 이른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피지에는 후기 폴리네시안과 멜라네시안 조상이 뒤섞인 채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폴리네시안들은 동쪽으로 더 나아가서 당시에는 무인도이던 사모아 제도와 통가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발굴된 도자기는 3000여 년 된 것들이다. 이곳이 ‘폴리네시안의 요람’ 같은 곳이며, 아마도 후기 폴리네시안들이 탄 카누가 몇 척 더 당도했을 것이다. 사모아·통가 등에서 다시 소시에테 제도까지 1800㎞를 가로질렀다. 이로부터 타이티·마르키즈를 거쳐 하와이에 이르는 고단한 행로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하와이 선조들이 전해온 타히티 신화는 이렇게 말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하와이 해양박물관에는 대항해를 가능하게 했던 2중 카누가 재현되어 있다.

하와이 해양박물관에는 대항해를 가능하게 했던 2중 카누가 재현되어 있다.


“테네는 다시 카누를 타고 출발했다. 그는 대를 이어 항해했고, 또 대를 이어 항해를 계속했다! 그들은 동쪽에 있는 심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서쪽에 있는 심연에 다다랐다. 그들은 험한 조류가 흐르는 지역과 경쾌한 산들바람이 이는 지역을 건넜다. 카누는 해류에 밀려 이리저리 떠다녔다.”

생존 가능한 모든 섬에 정착하다

침묵의 바다인 적도의 무풍대를 거치면서, 거친 바다와 폭풍우를 용감하게 헤치며 폴리네시안들은 새로운 땅에 대한 의문을 지속적으로 풀어나갔다. 폴리네시안은 언제나 동쪽으로 전진했다. 그것은 바람과 조류와 정반대 방향으로 항해했음을 의미한다. 1년에 1주일에서 2주일 정도 바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때가 있음을 선사인들은 일찍이 간파했다. 태양과 별, 구름과 바람, 조류와 새들의 움직임. 이 모든 것이 항해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폴리네시안들의 대항해는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위대한 분산과 전파의 과정이었다. 그 뒤로 이어진 역사는 그 자체가 장대한 서사시였다. 태평양 곳곳으로 뻗어나가 결과적으로 생존이 가능한 모든 섬에 사람들이 정착했다. 이런 일은 아무 곳에서나 벌어질 수 없으며, 오직 해양 세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중 카누는 선체 2개를 하나의 함교로 연결하고 돛과 든든한 피신처를 갖춘 요새였다. 카누는 ‘우주선’이었다. 돌도끼 같은 석기 도구나 뼈·조개 등을 이용해 건조된 카누는 어느 문명권에서 만든 배보다 견고하고 위대한 발명품이었다. 유럽인들이 처음 태평양 섬을 방문했을 때, 더 이상 이런 거대한 2중 카누는 없었다. 대항해 시대가 끝난 다음이라 400㎞ 내외의 연근 제도와 내왕하는 일상적 카누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카누는 대항해자들에게 생명의 근거지이며, 역사의 추동력이다. 크다고는 하지만 대양에서는 일엽편주만도 못한 이 자그마한 카누로 대양을 누볐다는 사실이 경외롭다. 목적지도 불분명한 조건에서 그네들은 대항해를 완수하였던 것이다.




신들은 폴리네시안들의 항해에서 신뢰할 만한 마지막 보루였다. 바다의 영혼인 탕가로아의 아이들, 그리고 자연의 영혼인 타네·투·롱고 등에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그네들은 신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관통하는 모험에 나섰다. 밤에는 소라나팔로 신호를 보내 배들을 모이게 하고 북쪽의 별을 보면서 강력한 북서무역풍을 업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네들이 크기를 알 수 없는 일련의 군도에 당도하였을 때, 태평양의 새로운 역사가 열렸다.

이들 폴리네시안은 누구인가. 그들의 언어와 그들이 기른 동물, 그리고 키운 작물은 그네들의 기원이 동남아시아임을 말해준다. 동남아시아에서 어떤 강력한 외부 집단에 의하여 밀려나게 된 이들이 지금 인도네시아라 부르는 섬들을 통하여 바다로 바다로 동진을 거듭한 후 1차로 멜라네시아에 당도한다.

멜라네시아에는 그네들이 당도하기 전부터 검은 피부의 선주민이 살고 있었다. 뉴기니의 주민 거주는 무려 3만 년 이상 되었다. 뒤늦게 찾아들어온 이들을 학술상 ‘후기 폴리네시안’(Proto Polynesians)이라 부른다. 태평양 너른 바다 고립무원의 섬에 격리된 채 오랫동안 개별적으로 살면서 후기 폴리네시안의 종족 분화가 이루어진다. 일부는 북쪽 항로를 택하여 미크로네시아로 알려진 자잘한 섬들로 이주한 후 오늘날 미크로네시아 원주민의 조상이 된다. 다른 일부는 뉴기니 북쪽에서 흩어져 살거나 멜라네시아의 많은 섬으로 항해하여 정착한다.

폴리네시안의 기착지, 하와이

쿡 선장과 타히티인의 일화는 왜 이들이 같은 폴리네시안인지를 잘 말해준다. 통역으로 데리고 간 타히티인이 멀리 떨어진 마르키즈 사람들과 그런대로 대화가 가능했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과 머나먼 이스터 섬, 타이티 섬과 하와이 섬 사이에도 어렵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이러한 언어적 계보, 나아가 외모가 풍겨주는 인종상의 일치점이 같은 폴리네시안임을 말해준다. 대항해 이래로 너무도 먼 섬에서 오랫동안 격리된 채 살아가고 있었지만 언어나 풍습에서 공통된 문화적 원형질을 간직했다.

항로를 다시 보자. 동남아시아에서 필리핀을 거쳐 오늘날의 미크로네시아로 가는 항로가 있었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뉴기니 북단을 거쳐서 피지와 통가에 이르는 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네들 일부는 북상하여 미크로네시아로 올라갔을 것이다. 사모아와 통가가 ‘폴리네시안의 요람’이라 불리는 것은 이 같은 인종 전파의 중간 길목이자 폴리네시안이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모아와 통가에서 타이티와 마르키즈 제도로 나아가는 길이 확인된다. 타이티와 마르키즈에서 하와이로 가는 길을 폴리네시안이 개척하였으며, 아래로 나아가 뉴질랜드에 이르는 남쪽 길도 개척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동쪽으로는 남아메리카에서 가까운 이스터 섬에 이르는 고단한 길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미크로네시아 폰페이 섬의 난마돌은 현존하는 태평양 최고의 해양문명 유적으로 손꼽힌다.

미크로네시아 폰페이 섬의 난마돌은 현존하는 태평양 최고의 해양문명 유적으로 손꼽힌다.


남태평양에서 하와이로 가자면 3개의 전혀 다른 해류를 거쳐야 하며 바람의 방향도 다르다. 따라서 그네들은 ‘돌아올 수 없는 길’임을 분명히 알고도 북상을 거듭해 마침내 하와이를 발견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스터 섬으로 가는 길은 동풍을 이용했을 것이다. 이스터 섬을 넘어서면 바람과 조류가 북동쪽으로 커다란 구비를 그리며 카누를 페루에 닿게 하였을 것이다.

폴리네시안들은 언제나 새로운 거주지를 발견하고 건설했다. 그네들은 서쪽에 있는 원초적인 고향의 고대적 추억을 실어 날랐다. 사모아에서 ‘하바키키’(Havaiki)란 서쪽으로라는 뜻이다. 그네들이 죽은 다음에 영혼이 서쪽 끝의 섬에서 뛰어오르며 조상들의 고향으로 되돌아간다고 믿었다.

거친 파도를 헤치며 하와이에 닿은 폴리네시안들은 대단히 실용적이었던 것 같다. 그네들은 바다와 땅을 두루 이용할 줄 알았다. 결코 수동적이지 않으며 주어진 에코시스템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었다. 마르키즈와 타이티에서 출발할 때, 생존에 필요한 돼지와 얌·타로·바나나·빵나무 등 곡식과 동물을 가지고 왔다. 해안에 정착하여 숲을 태워 화전을 일구었으며, 물줄기를 조절해 관개시설을 만들고 거대한 물고기잡이 못을 조성했다.

서구가 하와이를 발견한 지는 250년도 되지 않았다.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1778년에 하와이에 당도했다. 인류사로 치자면 지극히 짧은 세월이다. 불과 200여 년 조금 넘는 사이에 하와이는 폴리네시안의 기착지에서 아메리카 합중국의 일원이 되었다.

휴가차 하와이로 떠나는 이들은 미국 시민 이전의 하와이 선주민을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문명의 바닷길 -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동서 바닷길 교류를 언급할 때 동남아시아-아프리카를 잇는 바닷길은 대체로 무시된다. 

그러나 마다가스카르의 인구 구성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유럽 중심의 대항해 시대 역사 서술의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바닷길 문명 교류의 기본 동력은 바람이다. 바람은 돛을 밀어내어 문명과 문명을 접촉시키고, 마침내 여러 문명을 교직하였다. 바람이 없었더라면 문명의 바닷길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도양에서의 문명 교류도 그러했다. 말레이시아 이슬람예술박물관에서 펴낸 <몬순에 실려 온 소식>을 보면 이슬람 문명 역시 바람을 타고 온 다우선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몬순을 타고 아라비아 해에서 동남아시아로 중동 및 서방의 문명이, 반대로 동방의 문명이 오갔다. 오죽하면 몬순을 굳이 ‘무역풍’이라 명명했을까.

동서 바닷길 교류를 언급할 때 로마-당나라를 잇는 기본선, 즉 페르시아 만과 인도양을 거쳐 동남아시아, 남중국해로 연결되는 기본선만 부각한다. 동남아시아에서 아프리카로 직결되는 고대 바닷길은 대체로 논외다. 정화함대가 말라카 해협을 거쳐 인도양으로 나아가고 오늘의 소말리아에 해당하는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 당도한 항로는 국가적으로 선전된다. 반면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아프리카와 교류하던 무역로는 중국인 무역로에 가려져 무시되곤 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보로부두르 사원은 8~9세기께 사일렌드라 왕조 시대에 조성된 거대한 불교 사원이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보로부두르 사원은 8~9세기께 사일렌드라 왕조 시대에 조성된 거대한 불교 사원이다.


환태평양 문명의 회랑이 말레이 반도에서 시작해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를 거치는 순환구조로 뻗어나갔다면, 말레이 반도에서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로 뻗어나간 바닷길은 전혀 다른 것이다. 마다가스카르와 자바는 중국 중심의 바닷길과 다른 바닷길 교류의 숨겨진 비밀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를 기억하는가. 아니면 마다가스카르의 독특한 풍경 사진을 기억하는가. 인도양에 떠 있는 이 거대한 섬의 고립된 환경과 독특한 경관은 언제나 무궁한 판타지를 심어준다. 이 마다가스카르는 문명 교류의 비밀을 간직한 숨겨진 섬이라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이 마다가스카르가 아프리카 남동부에 있음은 누구나 아는 상식. 지리적으로 최단 거리인 모잠비크까지 400여㎞다. 먼 거리 같지만 드넓은 대양에서는 멀다고도 할 수 없다. 따라서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인이 지배적이고 아프리카 문화권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우리의 통념은 거기까지다.


18세기에 만들어진 마다가스카르 고지도.그런데 마다가스카르의 인구 구성을 보면 이런 고정관념이 깨진다. 말레이·인도네시아인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저 멀리 인도네시아에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초기 정착이 이루어졌다. 논쟁거리이기는 하지만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초기 정착민은 이르면 서기 250년, 늦어도 350~550년에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했으리라 본다. 이들은 대항해에 유리한 아우트리거(Outrigger) 배로 인도네시아 남부에서 왔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인도네시아인이 대서양을 횡단해 마다가스카르로 흘러들었다.

18세기에 만들어진 마다가스카르 고지도.

인도네시아 이주민은 초기 연안의 열대우림에서 화전 경작을 시작했다. 적어도 600년께에 이르면 이들 초기 정착자들은 중앙고원의 열대우림까지 개척한다. 7~9세기에 아랍 무역상인이 인도양을 남하해 이 섬에 당도했다. 아랍인은 코란을 들고 북서 해안에 당도해 이슬람을 전파했다. 반투(Bantu) 언어를 구사하는 아프리카 이주민은 1000년쯤에야 들어왔다. 15세기부터는 최초의 서양인인 포르투갈인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디에고 디아스가 섬에 최초로 정박했다. 1600년대까지 마다가스카르는 인도양에서 여러 중요 항구를 연결하는 무역 허브항 구실을 담당했다.

17세기 후반에는 프랑스가 동쪽 해안에 무역기지를 세웠다. 마다가스카르는 해적과 유럽 무역상인 사이에 명성을 얻었으며, 인도양 노예무역의 중개 거점으로 번성을 구가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쟁탈전을 벌이다가 1896년부터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고, 1957년 프랑스령 말라가시 공화국으로 있다가 1960년에 독립했음은 익히 알려진 이 섬의 흑역사다.

오늘날의 주민 구성은 말레이·인도네시아족, 말레이·인도네시아·아프리카 혼혈족, 프랑스인, 백인과의 혼혈인 크리올 등으로 되어 있다. 중앙 고원지대에는 말레이·인도네시아족이, 섬의 남서쪽에는 뒤늦게 당도한 아프리카인의 후손들이 거주한다. 문화적으로는 인도네시아와 아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6만㎥의 돌을 옮기고 깎아 지은 보로부두르 사원은 화산재에 가려져 있다가 20세기에 복원됐다.

6만㎥의 돌을 옮기고 깎아 지은 보로부두르 사원은 화산재에 가려져 있다가 20세기에 복원됐다.


보로부두르 사원에서 발굴된 결정적 증거

프랑스 고고학자들은 마다가스카르에서 일찍이 고대 인도네시아의 흔적을 다수 확인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와 마다가스카르 간 문명 교류의 증거가 인도네시아 안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있는 보로부두르 사원에서 결정적 증거가 발굴되었다.

보로부두르는 거대한 불교 사원 중 하나다. 8~9세기께 사일렌드라 왕조 시대에 조성되었다. 사원은 10세기까지 근 5세기 동안 자바를 지배한 사일렌드라 왕조의 다이내믹했던 순간을 잘 보여준다. 불교적 세계관인 만다라를 표상해 우주가 3개 국면으로 나뉘어 있다는 믿음에 따라 축조되었다. 정오각형 테라스를 가진 피라미드형 기단부와 3개의 원형 플랫폼이 있는 2층, 그리고 꼭대기에는 기념비적인 탑들이 서 있다.

보로부두르는 사일렌드라 왕조가 붓다와 자신들 왕조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보다 300년 빠르고, 유럽의 거대 성당보다 400여 년 앞서 지어졌다. 적도의 엄혹한 기후 속에서 6만㎥의 돌을 옮기고 깎은 초대형 토목공사, 그리고 이를 수행한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15세기쯤 이 거대한 사원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인도네시아는 어느 결에 이슬람의 땅으로 변해 더 이상 불교가 의미를 상실했다. 게다가 중앙 자바의 정치적 상황은 이 사원을 잊히게 만들었다. 유적은 화산재에 가려졌으며 정글에 숨겨져 원숭이 놀이터로 변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보로부두르의 벽면에 새겨진 부조 중 선박은 아프리카-인도네시아 간 교류의 의문을 풀어준다.

보로부두르의 벽면에 새겨진 부조 중 선박은 아프리카-인도네시아 간 교류의 의문을 풀어준다.


보로부두르는 19세기 식민통치자인 네덜란드인이 정글 속에서 재발견해 20세기에 복원된다. 양식상으로 볼 때 보로부두르 예술은 인도 굽타와 후기 굽타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인도양을 통한 인도 문명과의 접촉이 확인된다. 벽면은 무수한 부조가 채우고 있다. 그중에서 매우 독특한 부조가 하나 있다. 원거리 항해가 가능한 큼지막한 선박 한 척이 새겨진 부조인데, 많은 선원이 돛대에 올라가거나 선상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를 연결하던 고고학적 의문점이 풀리는 순간이다. 선박의 설계도에 준하는 명백한 조각이 확인된 것은 쉽지 않은 행운이다.

우리말로 마땅한 번역어가 없는 ‘아우트리거’는 선체와 평행을 이루는 나무 조각을 뜻한다. 뱃전 바깥으로 양쪽에 이중으로 긴 막대를 매달아 배가 웬만한 파고에도 전복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았다. 이 같은 선박은 7~13세기에 이 지역을 통치한 사일렌드라와 스리위자야 두 왕조의 국제 무역선과 전함으로 쓰였다. 오늘날에도 발리나 자바 해역에 가면 수천 년 넘게 이어왔을 동일 형식의 아우트리거를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태평양의 폴리네시아나 미크로네시아의 선박에서도 아우트리거 양식이 보편적이라는 점이다. 말레이 반도에서 동남향으로 진출해 폴리네시아에 이른 종족 이동의 결과가 동일한 선박 문명의 흔적을 저 태평양으로부터 인도양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보로부두르 유적의 부조에 각인된 선박도 바로 아우트리거다. 선박 양식을 통한 인도네시아와 마다가스카르의 문명 교류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간 불교 문명이나 이슬람 문명을 통한 문명 교류의 전파 루트를 확인하는 노력이 많았던 데 비해, 선박의 양식을 비교 고찰해 문명 교류를 확인하는 일은 드물었다. 선박 양식으로 본다면 태평양이나 동남아시아 남부인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남동부의 마다가스카르가 동일 문명권이다. 말레이 반도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선주민들이 각기 다른 해역권의 촉매 구실을 해냈음을 주목해야 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아우트리거는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다.

아우트리거는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다.


세계사 서술의 왜곡과 편중을 바꾸는 바닷길

20세기 후반에 선장 출신인 영국인 필립 빌이 보로부두르 사원을 찾는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 2003~2004년 대항해를 조직해 마다가스카르까지의 항해를 입증해보고자 함이었다. 그때 사용한 선박을 보관하기 위해 사무드라 라크사(Samudra Raksa) 박물관이 만들어졌으며 2005년에 문을 열었다. 고대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 간 문명 교류의 바닷길을 잘 설명해주는 박물관이 탄생한 것이다.

지금까지 바닷길을 통한 동서의 문명 교류는 중국과 서양의 교류, 또는 유럽인의 일방적인 동양 방문 및 침탈 정도로 정리되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마다가스카르의 인도네시아 선주민 존재는 유럽 중심의 대항해 시대 역사 서술이 한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15세기에 유럽의 역사적 공간이 확장되었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한 것이 1488년. 태풍 속에서 뒷바람을 맞으며 13일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그 곶을 ‘폭풍의 곶’이라 명명했으며, 귀향길에 이를 다시 ‘희망봉’으로 바꿔 불렀다. 인도로 가는 길이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바스코 다가마는 1497년에 리스본을 떠나 디아스가 발견한 희망봉을 돌아서 아프리카 동안인 모잠비크를 거슬러 오른다.

바스코 다가마는 케냐에서 이븐 마지드라는 이슬람교도를 소개받는데 그는 인도양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 수로 전문가였다. 그의 안내로 24일간 인도양을 횡단한 끝에 인도 서해안인 카푸아(Capua)에 닿는다. 그 당시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한 것은 국가 1급 기밀에 속했다.

일찍이 아시아인들이 남아프리카 언저리의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하고 있었음을 안다면 서세동점(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밀려옴)만을 강조할 형편이 못 된다.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양으로 접어드는 길목은 아랍계 이슬람인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인의 주무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자바와 마다가스카르의 직항 바닷길은 세계사 서술의 왜곡과 편중을 바꾸어줄 좋은 예증이다.




문명의 바닷길 - 홋카이도에 살았던 아이누인들…

홋카이도 드넓은 벌판의 꽃밭은 애초에 아이누들이 누비던 삶의 공간이었다. 홋카이도는 아이누의 독립된 땅이었고 

이들은 바다를 통해 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아이누와 함께 북방문명권을 형성했다.


실크로드의 동단은 과연 경주에서 끝나는 것일까. 중앙아시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 경주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북방 루트는 끝이 나는 것일까. 그러한 주장은 사실 한국인들의 소망일 뿐,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북방 루트의 동쪽 끝은 한반도가 아니라 연해주와 사할린, 홋카이도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동해를 관통해 일본 열도와 대륙을 연결해주던 일본로는 발해를 경유해 당과 거란 등 각지로 향하는 도로와 연결되었다. 발해와 일본 사신이 동해를 관통하는 사신로가 있는 반면, 일본 사신이 발해를 경유해 당의 장안(長安·지금의 시안)으로 들어가는 ‘견당사(遣唐使)로’도 있었다. 일본과 발해의 동해를 관통하는 연결 루트는 서아시아에서 일본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북회경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실크로드의 북회경로에서 연해주와 아무르 강변 하구를 통해 홋카이도로 연결되던 동쪽 노선이 하나 더 존재했다.

모든 문명이 한반도를 거쳐 북쪽에서 남으로 내려와 일본 규슈 등으로 들어간다는 사고는 해양교통을 무시하는 고정적·고착적 사고일 뿐이다. 또한 연해주에서 곧바로 홋카이도로 들어가는 북방 노선에 대해서도 종종 무시하는 사고가 팽배하다. 홋카이도의 원주민 문화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혼슈 중심의 일본사를 서술하기 위해 북방민족 간에 오래도록 존재했던 독자적인 문명 교섭에 관해 눈감고 있는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19세기 말에 촬영된 홋카이도 지역의 아이누인들. 
19세기 말에 촬영된 홋카이도 지역의 아이누인들.



10세기 이후, 홋카이도 남서부에서 여진계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연해주와 홋카이도의 교류가 확인된다. 그런 의미에서 북회경로는 동북아시아의 십자로로 볼 수 있다. 727년 발해 사신이 오기 전에 일본은 이미 사신을 말갈국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발해와의 공식 교류 이전에 일본 조정이 이미 대륙 정세에 관심을 갖고 말갈국을 관찰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평면지도에서 본다면 말갈은 머나먼 땅이지만 둥근 지구 위에서 본다면, 말갈의 땅에서 환동해 북부를 관통하여 곧바로 홋카이도나 도호쿠(東北) 지방에 당도할 수 있다. 말갈의 땅과 일본 사이에 사전 교감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727년 발해와 일본 양국은 교류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었다.

오늘의 일본 역사는 홋카이도를 침략해 아이누인들을 몰살시키다시피 하고 그들의 독자적 문화 또한 말살하는 왜곡을 일삼고 있다. 아이누인들은 역사의 저편으로 밀려나서 흔적이 아주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할린에도 아이누족이 다수 살았음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홋카이도 문화의 원형은 사할린과 연결되는 것이다. 사할린 문화가 좁디좁은 해협 건너편 연해주와 연결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북방 연해주나 아무르 강 하구로부터 사할린을 거쳐 홋카이도에 이르는 북회경로는 실크로드의 마지막 동쪽 궤적이 남아 있는 중요한 문명사적 증거이다.

역사적으로 일본 열도와 북방과의 무역은 산단 교역이라 불렸으며, 이는 비교적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만주 쪽에서 올라온 정보에 따라 중국 중원의 지배세력은 일찍부터 홋카이도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

송대의 <불조통기>에 수록된 ‘동진단지리도(東震旦地理圖)’를 보면 에조(아이누)가 등장한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1471)에도 홋카이도가 그려져 있다. 1602년의 <곤여만국전도>에 에조를 ‘야작(野作)’이라 명기했으며, 야작 서측으로 여진(女眞)을 명기했다. 오늘의 연해주 방면에 여진족, 동쪽 방면에 에조가 병존했던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이누 관련 자료집에 실린 그림. 일본 어민(왼쪽)과 아이누가 바다에서 만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이누 관련 자료집에 실린 그림. 일본 어민(왼쪽)과 아이누가 바다에서 만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본인 탐험가가 목격한 산단 교역의 현장

드넓게 영토를 확장하던 청나라는 아무르 강 하구에서 원주민들과 조공 교역을 실시했다. 선주민이 중국의 조공체계에 확실히 들어감으로써 산단 무역이라는 형식으로 새로운 교역이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 중원에서 내려지는 조공품들이 아이누족에게 전달되고, 아이누족은 반대로 모피 같은 자신들의 생산물을 중국에 바쳤다.

1809년 일본인 탐험가 마미에는 아무르 강 하구에서 청조와 선주민 간의 조공의식과 교역을 목격했다. 그의 <동달지방 기행>은 산단 교역의 귀중한 기록이다. 조공 교역에서 청조는 선주민들에게 중국제 견직물을 주었으며, 이 견직물이 홋카이도로 들어와서 에조 비단이라 불리게 된다. 중국 강남의 쑤저우(蘇州)에서 만들어진 견직물이 베이징을 거쳐 동북부 아무르 강 하구로 이동하며, 거기서 마미에 해협을 건너 사할린과 홋카이도로 건너가 혼슈로 넘어가는 방식의 교역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의 만주 동쪽 바다와 연해주에 대한 일본의 인식이다. 일본에서는 연해주 지방을 중국이라 부르지 않고 ‘동단’이라는 독립 지역으로 인식했다. ‘단’은 타타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에도 시대인 1644년, 청조가 수도를 베이징으로 천도한 바로 그해에 선주 다케우치 도우에몬과 일행 43명이 사도가시마를 출항한 후 조난당했고,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갈레와라 만 근처에 표류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생존자 15명은 성경(훗날 봉천, 지금의 선양)을 거쳐 베이징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반년가량 베이징에 체재한 후,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귀국했다. 귀환자들이 에도 막부에 불려가 취조를 당한 진술서가 <동단 표류기>다. 귀환자들은 청국이 아니라 ‘달단국’이라 불렀다. 달단이라는 말은 중국 당대부터 있었고, 명대에는 몽골을 달단이라 불렀다.
 

  
 

한편 유럽에서는 중국 북쪽, 북방 유라시아 지방을 타르타리아, 즉 타타르인 혹은 타타르족의 땅이라고 명명했다. 중국 본토와 만주, 연해주에 대한 분리 이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 본토와 다른 만주·연해주에 대한 이해방식은 먼 훗날 만주·연해주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성한 아이누의 땅에 일본인들이 들어선다. 침략의 선봉장은 마쓰마에 번이었다. 마쓰마에 번은 북방 대륙에서 타타르 해협을 거쳐 홋카이도로 들어오는 중국 제품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산단 무역의 중간 고리에 마쓰마에 번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에도 막부가 성립되고 난 후 마쓰마에 번은 아이누 민족과의 교역을 전담했고, 아이누는 일본인과 산단인 사이의 교역을 중개했다. 막부는 쇄국정책을 감행했음에도 북방교역만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지속했다. 그 결과 중국 강남으로부터 오늘의 연해주를 거쳐 일본 북방에 이르는 ‘북의 실크로드’가 이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일본 본토에서 홋카이도로 일본 열도의 문명이 넘어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홋카이도가 아이누의 독립된 땅이었고, 그네들은 바다를 통해 사할린의 아이누들, 심지어 쿠릴 열도의 아이누와 하나로 연결된 동일한 북방문명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홋카이도와 사할린, 연해주와 아무르 강 하구, 쿠릴 열도의 북방문명권은 본질적으로 하나인 것이다.

오히려 그것과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 일본 본토의 문화다. 그런데 오늘의 일본 역사는 오로지 일본 본토와 홋카이도의 연계점만을 강조하곤 한다. 왜냐하면 홋카이도의 아이누는 ‘부인된 문화’, 사할린은 ‘버려진 문화’이며, 쿠릴 열도는 오로지 ‘북방 4도’를 찾기 위한 일념으로 일본 문화와의 연장선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산단 무역의 바닷길은 일본 본토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오랫동안 존재하던 북방인들의 문명사적 교섭이었다. 마쓰마에 번을 앞장세운 일본 본토인의 개입이 시작되었을 때, 산단 무역은 이상하게 왜곡되었다. 중국 본토의 비단이 아이누를 거쳐 일본 본토인에게 전달되는 무역 루트 정도로 왜소화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북쪽의 실크로드 증거물이 다수 남아 있다. 현재 홋카이도 박물관이나 사찰, 오래된 가문에는 견직물이 전승된다. 현존하는 에조치 면의 과반수가 아오모리 현 내에 소장되어 있다. 오래된 것은 쑤저우의 관립직물공장에서 1770~1778년에 제작되었다는 직인이 찍혀 있다. 소장자들은 대체로 환동해를 정기적으로 운행하던 기타마에부네 선박을 운용하거나 어업을 했던 경영자 등 홋카이도와 연관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는 산단 교역에 마쓰마에 번 같은 일본 북방의 번들이 적극 개입했다고 하여 그 영향이 일본 본토까지 두루 퍼졌던 것은 아니며, 오늘의 일본 동북 지방에만 영향을 남겼음을 뜻한다.

아이누족이 증명하는 일본의 ‘작위성’

결론 삼아, 산단 무역의 바닷길은 일본 열도 내에 이른바 혼슈 중심의 역사 이외에 전혀 다른 북방문명권과의 교섭을 일관되게 추구하던 아이누 같은 이민족이 강력하게 존재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산단 무역길이 완전히 끊겼음은 아이누와 북방의 문명사적 젖줄이 단절되었음을 뜻하고, 이는 홋카이도가 일본령으로 완전히 복속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많은 이들이 홋카이도를 찾는다. 드넓은 벌판에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꽃밭을 바라보면서 청정한 홋카이도의 여름을 만끽한다. 그런데 그 꽃밭이 애초에 아이누인들이 누비던 삶의 공간이었고 신성한 공간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 것이다. 애써 서양식을 강조하는 하코다테와 오타루의 양풍 건물과 왜식 건물의 조화 속에 아이누의 건물은 오로지 민속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그 아이누들이 사할린 및 쿠릴 열도의 아이누들과 하나의 언어권으로 소통했고 타타르 해협을 통해 말갈족·여진족 등으로 불리던 북방민족과 소통했음을 생각해볼 일이다. 이는 일본인들이 강조하는 국민국가적 혼연일체가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만들어진 개념인가를 알려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남방 해양 루트로서의 오키나와 및 류쿠국, 북방 해양 루르로서의 홋카이도 및 아이누족은 그 존재만으로도 일본 열도의 ‘만들어진 작위성’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문명의 바닷길 - 동해에 있다는 미지의 섬… 그 섬을 찾고 싶다

섬은 어느 결에 유토피아의 대명사가 되었다. 섬으로 가는 길은 이상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우리에게는 울릉도 가는 길이 그렇다. 오랜 세월 울릉도는 금단의 섬, 환상의 섬, 반역의 섬, 유민의 섬이었다.


무더운 계절에는 많은 이들이 섬을 꿈꾼다. 그 섬에 가면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은 환상에 젖는다. 막상 섬에 가보면 환상은 깨진다. 그래도 좋다. 존 레넌의 ‘이매진’이 아니더라도 상상은 삶을 충만케 한다. 역사가 홉스봄이 말했던가. “민중은 어떤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지만 희망이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무수한 바닷길은 삶의 길이고 현실의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상의 길, 유토피아의 길도 존재한다.

섬은 어느 결에 유토피아의 대명사가 되어 토머스 무어로부터 무수한 상상가들의 이상향으로 부각된 지 오래다. 플라톤의 사라진 아틀란티스 이야기는 ‘섬-이상향’ 담론의 원조 격이다. 우리에게도 ‘섬-이상향’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울릉도 가는 길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울릉도는 어떻게 이상향이 되었을까.

1018년 동북여진 떼도둑이 우산국(于山國)을 침입한 기사가 <고려사절요>에 등장한다. “1018년 고려 현종 9년 11월 우산국이 동북여진의 침구를 받고 폐농하게 되었으므로, 이원구를 파견하여 농기를 보내는” 내용이다. 1019년 7월 기사에는 여진 침략으로 인해 본토로 도망 와 있던 우산국 사람을 돌려보내려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022년에는 여진족을 피해 본토로 도망 온 우산국 사람을 예주(지금의 영덕)에 정착시켰다고 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울릉도에 당도하면 삼선암(위)을 마주하게 된다. 울릉도 3대 절경 중 제1경인 삼선암은 3개의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바위섬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울릉도의 숲에는 망가지지 않은 신비가 숨겨져 있다.

울릉도에 당도하면 삼선암(위)을 마주하게 된다. 울릉도 3대 절경 중 제1경인 삼선암은 3개의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바위섬이다.

울릉도의 숲에는 망가지지 않은 신비가 숨겨져 있다.


이 짧은 기사들은 해양사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여진족사 역시 오로지 육지 중심으로만 서술하고 있으나 그네들은 두만강 하구에서 동해로 진출하고 있었다. 동북여진의 동해 공략으로 말미암아 울릉도가 초토화되고 그로부터 빈 섬이 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진족이 동해를 가로질러 울릉도를 들이치고 규슈까지 진출한 사실은 뒤늦게 확인되었다.

1019년 3월27일, 적선 50여 척이 돌연 쓰시마에 침입한다. 당시 일본 측은 적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 ‘도이(刀伊)의 적’이라 호칭했다. ‘도이’란 만이(蠻夷), 즉 오랑캐를 뜻한다. 일본에서 이들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이들이 물러나고 놀랍게도 넉 달이나 지난 뒤였다. 적은 쓰시마에 상륙해 섬 각지를 방화하고 살인을 한 뒤에 퇴각했다. 피해는 전 섬에 걸쳤으며 죽은 자 382인에, 쓰시마의 주요 산업이던 은광이 소각되었다. 태수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태재부(규슈를 관할하는 통치시설)로 도망한 후 사태를 보고했다.

 

  
 

쓰시마를 떠난 여진족 함대는 이키 섬 북서해안으로 재차 침입했다. 배 크기는 지금 치수로 평균 15m에 달하고, 30~40척이 각기 50~60인씩을 태우고 빠르게 움직였다. 약 3000명에 이르는 대집단이 상륙했다. 집은 소각되고 우마는 식량으로 도살되었다.

쓰시마와 이키 섬에서 잡은 포로들을 태운 채 4월7일에 축전국(후쿠오카 인근 지역)을 들이쳐서 민가를 방화하고 살상했는가 하면, 이튿날인 4월8일에는 하카타 만의 노코 섬을 공격해 다수의 섬사람을 포로로 삼았다. 4월9일에는 하카타에 상륙해 경고소를 불질렀다.

돌연 이키와 쓰시마, 규슈 각 지역을 약탈하고 홀연히 사라진 이 이상한 적에 관해 태재부는 최초 보고 때부터 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고려인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한 풍속, 즉 우마를 대량 살상해 폭식하거나 말을 타고 빠르게 돌진하는 것을 감안한 결과, 그리고 무엇보다 3인의 포로를 심문한 결과 그들은 고려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돌아가던 적이 쓰시마에 들렀을 때 탈출한 모녀에게서 적의 퇴각 향방이 북쪽이었음을 확인했다. 6월25일에는 작은 배를 고려로 도항시킨 후 통역을 들여보내 사건 경과를 말하고 질의했으며, 그 결과 도이가 고려국 연안을 황폐화시키고 후일 일본으로 향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고려국은 돌아가는 적을 습격하여 격파시키고 다수 일본 포로를 구출했다. 일본인 300여 명이 송환되었다. 증언 등을 통해 도이가 오늘날의 연해주에 살던 여진족임이 확인되었다.


오늘의 연해주 일대 동북여진이 울릉도를 들이치고 동해를 관통해 일본을 습격한 다음 유유히 되돌아갔다! 발해가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했음을 생각한다면, 그 후예들이 일본 항로를 알고 있다고 해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육지 중심의 역사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던 숨겨진 역사다. 연해주에서 규슈까지 가는 동해 바닷길이 울릉도를 가로질러 열린 중요한 사건이다.

여진족에게 침탈당한 이후, 오랫동안 울릉도는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세인의 접근을 막는 단절의 시간은 오히려 울릉도를 이상향으로 각인시키는 방식으로 나름의 기억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울릉도는 어느덧 이상한 무리가 숨어 사는 이상향으로 각인되었다. 오랜 세월 ‘금단의 섬’이자 ‘환상의 섬’, ‘반역의 섬’이자 ‘유민의 섬’이었다.


동해에 있다는 소문이 돈 요도와 삼봉도는…

반면에 함길도 연해민 사이에 신도설이 등장한다. 동해 가운데, 혹은 양양 동쪽에 요도라는 섬이 있다는 유언비어였으며 실제 요도를 다녀왔다는 사람도 나타난다. 요도는 조선 초기 정국을 불안에 몰아넣었다. 세종은 요도를 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미지의 섬이 그 어딘가에 있고 그 섬을 둘러싸고 유언비어를 만들어냈다. 위치도 알 수 없고 정체 자체를 모르는 섬이 동해에 존재한다는 것은 국가통치 전략상 지극히 불온한 일이었다.

국가는 당연히 그 미지의 섬을 찾아 나섰다. 그 섬에서 모반이 일어날 수도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모반을 꾀할 수 있는 미지의 섬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응은 집요하고도 철저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미지의 섬은 유언비어가 창조한 가상의 섬이었을 것이다. 요도는 그동안 잊혔던 울릉도일 수도 있다.

15세기 말 <성종연간>에는 다른 신도설이 영안도(永安道) 연해민 사이에 나돌기 시작한다. 강릉 경내인 동해에 삼봉도가 있으며, “도망친 무리가 1000명이 넘게 살고 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풍요로우며, 청명한 날이면 경흥에서 바라보이며, 회령으로부터 동쪽으로 7주야를 가면 도달한다고 했다. 성종은 동해 한가운데에 울릉도와 우산도가 있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삼봉도’가 있음을 처음 보고받았으므로 큰 관심을 표명한다. 1472년, 병조에서는 강원도에 있는 삼봉도를 찾기 위한 계획서를 올린다.

국왕은 삼봉도 수색을 실제로 허락한다. 삼봉도의 존재가 국가적 이슈가 된 것이다. ‘세종 때부터 사람들을 보내어 이를 찾았으나 얻지 못하였다’는 대목으로 미루어, 세종이 수색에 실패했던 요도가 다시금 삼봉도로 둔갑해 의문이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삼봉도 경차관 행차에 왜와 여진 통사 1인씩을 보낼 것을 지시한다. 혹시라도 삼봉도가 이미 알고 있던 울릉도가 아니라 새로이 발견된 섬이어서 일본인이나 여진인이 유랑해 들어가 거주하는 경우를 대비한 조치일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해금정책을 펴고 있었으나 정기적 수토(搜討)를 통해 울릉도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삼봉도는 울릉도와는 다른 섬이라고 생각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 <홍길동전>에도 섬(율도국)이 이상향으로 그려져 있다. 
<홍길동전>에도 섬(율도국)이 이상향으로 그려져 있다.

성종의 삼봉도 탐색은 실패로 끝나며, 삼봉도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무릉도(울릉도)에 가까스로 도착해 섬을 수색한다. 무릉도가 전설의 섬으로 회자되면서 삼봉도로 환치되고, 국가적으로는 그 삼봉도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던 정황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성종의 삼봉도에 관한 관심은 결코 식지 않았으며, 섬 탐사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인다. 삼봉도를 찾아 나섰지만 결국은 울릉도에 당도하곤 했다. 울릉도 이외의 다른 섬이 동해에 없는 조건에서 삼봉도가 있을 턱이 없지만, 성종은 필경 삼봉이라는 별도의 섬이 동해 어딘가에 있다고 믿었다. 동해의 너른 바다에 관한 전체적 정보와 탐험이 이루어지지 못한 조건에서 성종은 울릉도 이외에 어떤 미지의 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役)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한 제어책에서 민중 반란의 진원지로 삼봉도가 주목된다. 섬에서 민중의 해방을 위한 정진인이 출래할 것이라고 믿은 당시 일반 민중 사이에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하는 경향이 미만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해도출병설은 끊임없이 이어지거니와 울릉도는 동해의 이상향으로 민중에게 희구되고 있었다.

섬은 육지와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단절을 뜻하지만, 그로 인해 신비화·미궁화의 토양이 된다. 신화는 멋대로 창조되고 부풀려진다. 게다가 먼 섬으로 유배 보냈기 때문에 단절감과 고독감을 잉태시킨다. 중죄인일수록 먼 섬에 머물렀으므로 이들이 혹시나 반역의 무리로 변신하거나 무리들과 결합할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었다. 이런 마당에 어딘가 삼봉도라는 섬에서 반역의 무리들이 출병한다는 꺼림칙한 소문은 결코 소홀히 스쳐버릴 풍문이 아니었다.

구한말, 울릉도 개척령을 공식 반포

아주 먼 훗날, 울릉도로 조선인 유민은 물론이고 일본인도 스며들었다. 일본인들은 독도에서 강치잡이로 세월을 보내게 되고, 이를 빌미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다. 한때 일본이 울릉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탈바꿈시키고자 시도했던 것을 안용복이 저지한 사건은 너무도 유명하다.

구한말, 울릉도 개척령이 공식 반포되자 울릉도는 이상향으로서의 역할을 끝내고 공문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울릉도를 천하의 보고로 생각하고 이상향을 찾아 몰려들었다. 20세기 초반에도 울릉도 이상향을 찾는 뱃길은 끊이지 않았다. 울릉도 개척이 폭넓게 이루어지고 이상향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끝냈을 때, 섬의 숲과 바다는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절단 나고 망가졌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훼손되지 않은 섬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섬에 가면 그 무언가의 비밀이 있을 것 같다. 최근 찾아가본 울릉도 바다와 숲에는 아직도 망가지지 않은 신비로운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울릉도로 가는 바닷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리라. 지금도 울릉도 뱃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 옛날 이상향으로 가던 바닷길이라는 오랜 유전인자가 우리 안에 숨 쉬는 것이 아닐까.



문명의 바닷길전쟁의 바닷길은 이제 끝났을까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일본·조선·중국 3개국을 휘몰아간 국제 전쟁이었다. 

단순히 동북아만 뒤흔든 것이 아니라 동남아까지 끌어들였다. 지평선에서 바라보는 역사와 수평선의 역사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역길을 제외하면 바닷길 중에 으뜸은 역시 ‘전쟁의 길’이 아닐까 싶다.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니는 동북아의 전쟁 바닷길은 산둥 반도 등주(덩저우)쯤에서 발해만의 섬들을 건너 요동(랴오둥) 반도로 건너가는 길이다. 자잘한 섬들이 발해만에 포진해 그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랴오둥 반도를 공략할 수 있다. 수·양·당 제국의 전쟁 행보가 그러하였다.

지금부터는 임진왜란의 바닷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4만3000여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 건너 조선으로 들어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요동 철령위(鐵嶺衛) 출신이다. 수군을 이끌고 들어온 진린은 강남(양쯔강 이남 지역) 광동(광둥) 출신이다. 육군과 해군은 같은 중국인이지만 소통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강남·강북의 격차를 지니고 있었다. 강남 해군이 바다를 관통해 조선 남해안에 포진하고 이순신을 도와 승전을 이끌었다.

진린은 애초에는 이순신을 시기했으나 차츰 이순신을 흠모하게 되었고 해전 승리의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다.

진린의 손자 진영소는 명나라 멸망 이후 난징으로부터 남해 장승포에 표착했으며, 조부 진린이 공을 세웠던 남도로 옮겨가 광동 진씨의 뿌리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강남과 한반도가 바닷길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 주강현 제공</font></div>임진왜란 말기 도산성(현 울산왜성) 일대에서 벌어진 조·명 연합군과 왜군의 전투 장면을 그린 일본의 병풍 그림 ‘도산전투도’. 
임진왜란 말기 도산성(현 울산왜성) 일대에서 벌어진 조·명 연합군과 왜군의 전투 장면을 그린 일본의 병풍 그림 ‘도산전투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일본·조선·중국 3개국을 휘몰아간 국제 전쟁이었다. 그런데 근년에 발굴된 문서에 따르면, 이 전쟁이 주변국에 미친 영향이 훨씬 복잡했음을 알 수 있다. 아시아 지역만 봤을 때, 명나라 군대에 편입된 외국 병사 외에 중국 동북지역의 여진족, 류큐국, 마카오에 거주하던 포르투갈인, 심지어 남해의 섬라(‘시암’, 즉 타이의 전 이름)까지 영향을 미쳤다.

닝보 대학의 임진왜란 전문가 정제시(鄭潔西)는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전체 아시아 국가의 연동 과정을 만력 20년(1592년)에 기획되었던 타이와 중국 연합함대의 일본 정벌 계획에서 소상하게 밝힌 바 있다(최근 <해양문화> 2집 수록).

전쟁 발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을 돕기 위한 중요 전략의 하나로 섬라의 무력을 동원해 일본을 토벌하자는 안건(이하 차병섬라·借兵暹羅)이 상정되었다.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은 다급한 나머지 현상금을 걸어 조선을 회복하고자 하는 책략을 펼쳤다. 수많은 제안서 중에 정붕기가 제안한 차병섬라가 포함되어 있었다. 정붕기는 사신을 보내 섬라의 병사를 빌려 직접 일본 본토를 침으로써 조선의 어려움을 완화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섬라는 당시 동남아의 떠오르는 신흥 강국이었다.
  


 
 

라 사신은 먼저 명 조정에 건의하기를 “섬라가 일본과의 전쟁에 참가해 섬라 해군이 직접 일본 본토를 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명나라 <신종실록>(1593년 정월조)에 섬라 사신이 출병을 자청하는 광경이 언급된다. “섬라는 서쪽 끝에 있고 일본에 가려면 만 리 길을 가야 하지만, 가까이 병부가 있으니 왕을 위해 힘을 다하고자 합니다. 병부에 명령을 내리셔서 일본을 직접 토벌하게 하소서….”


당시 차병섬라 상황은 섬라의 조공사신이 병부에 종군을 자청했고, 자국이 직접 일본의 소굴을 치겠다고 요구했으며, 병부는 섬라 사신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의 <선조실록>에도(1592년 12월) 차병섬라에 관한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섬라 사신이 제안한 참전 요구가 조정에서 받아들여진 후, 황제는 차병섬라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상당히 구체적인 실행 절차를 직접 고안하게 된다. 사신을 섬라에 직접 보내 군사를 동원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한다.


타이 해군도 참전할 뻔했던 임진왜란

그러나 섬라와 인접했던 양광(광동과 광서)의 총독 소원은 ‘오랑캐의 마음을 알 수 없으니, 병사를 빌리는 일은 반드시 중단해야 한다’라는 양광 지역 민중의 불안한 마음을 분명히 전달한다. 섬라 병력을 동원해 참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섬라는 중원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명나라에 절대적으로 충성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또한 섬라 자체가 명나라에 위협적인 존재일 수도 있었다. 섬라는 군사 강국이기 때문에 일본과 교전한 뒤 다시 명나라를 침략하고자 하는 야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명나라의 적이 장차 일본이 아니라 섬라가 될 수도 있으며, 차병섬라는 향후 국가 재난을 불러일으키는 빌미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로써 저 멀리 남쪽 타이에서 일본에 이르는 광대한 전쟁의 길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러한 기획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국제 전쟁의 거대한 판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단순하게 동북아를 뒤흔든 것이 아니라 동남아까지 끌어들일 만한 국제 전쟁이었다는 좋은 증거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 주강현 제공</font></div>임진왜란은 독립 해상왕국인 류큐(현 오키나와)까지 영향을 미쳤다. 위는 류큐의 슈리성. 
임진왜란은 독립 해상왕국인 류큐(현 오키나와)까지 영향을 미쳤다. 위는 류큐의 슈리성.


임진왜란 광풍은 독립 해상왕국인 류큐(현재의 오키나와를 가리킴)를 뒤흔들었다. 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은 류큐에 전쟁조달금을 요구했다. 중국과 조공체제를 굳히고 있던 류큐는 일본보다는 중국에 기울어져 있었다. 류큐를 통해 수집된 일본 정보는 고스란히 중국에 보고되었고, 중국은 류큐의 정보에 기초해 일본의 군사·정치적 동향을 지켜보았다.

전쟁이 끝나자 사건은 엉뚱하게 전개되었다. 오늘날의 가고시마인 사쓰마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류큐 출병을 명령한다. 시마즈란 어떤 인물일까. 칠천량전투에서의 원균 전사, 남원성 전투에서의 도공 포로화,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 전사 등은 모두 그의 손에 의해서였다. 우리 역사서에서는 그를 심안돈오(沈安頓吾)라 부른다. 그 시마즈의 사쓰마 번이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어 다시금 조선 식민지배에 나섰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또 하나의 슬픈 증거이기도 하다.

왜란에서 돌아온 제대 군인들이 득실거리자 사쓰마 영내는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전장을 누비던 병사들이 하릴없이 서성거리니 불안감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쓰마는 무사의 비율이 유난히 높았다. 무사 인구 비율이 전국 평균의 5배였다. 영주 시마즈의 류큐 출병은 가고시마에서 조선의 남해안까지 이어지던 전쟁의 바닷길이 남쪽으로 연장되어 오늘의 오키나와까지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1592년 시작되어 1598년까지의 7년 전쟁 직후 1609년에 류큐 무력 침공이 실행된 것이다. 사쓰마의 류큐 침략은 번의 경제적 이득 때문이었다. 사쓰마는 류큐국과 중국과의 무역 이권을 독점해 번의 재정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 중국과 조공 무역체제를 갖추고 있던 류큐국에는 일명 강남 상인들이 다수 왕래하고 있었다.

이로써 중국 강남에서 조선의 남해안에 진출한 진린의 수군, 일본 가고시마에서 조선의 남해안에 진출했다가 남방 류큐국까지 진출한 전쟁의 바닷길이 원을 그리면서 형성되었다. 게다가 미완으로 끝났지만 타이로부터 일본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바닷길이 한때 탁상에서나마 그려졌으니 바닷길의 외연은 가히 확장 일로였다.

전쟁의 바닷길은 이제 끝이 났을까? 당연히 우문이다. 분단 상황에서 전쟁의 바닷길은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그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른바 해군 군사작전도(軍事作戰圖)란 그 자체가 전쟁의 바닷길이기도 하다. 굳이 ‘잠수함의 길’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바다는 변방이 아닌 ‘문명의 고속도로’

우리는 흔히 지중해 문명, 에게해 문명이라는 말을 쓴다. 굳이 바다문명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원이 부족하고 척박한 풍토의 그리스에서 약진과 번성이 가능했던 지점은 바로 선박 이동을 통한 문명의 바닷길이었다. 식민 제국을 거느리면서 문명과 문명의 접촉을 통한 소통의 세계를 도모한 것이다.

우리 역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육지중심주의에 사로잡히고 바닷사람을 천시하는 나라에서 아무리 대륙국가가 아니라 해륙국가를 강조한들 먹혀들 여지가 적었다.

그동안 <시사IN>에 문명의 바닷길을 연재하면서 일부러 체계적으로 순서를 배치하지는 않았다. 일견 난삽할 정도로 다양한 방식의 바닷길을 제시했을 뿐이다. 우리의 ‘잠자고 있던 바다 DNA’를 일깨우려는 충동적 방식이었음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지평선에서 바라보는 역사와 수평선의 역사는 다를 수밖에 없다. 바다에서는 우연과 필연적 사건에 의해 새로운 감염과 문화 충돌이 빚어지기도 한다. 가령 제주도에 하멜이 느닷없이 표착하여 조선에 충격을 주었고, 역으로 하멜 귀환 후에는 유럽에 충격을 주었다. 육지에서는 쉽게 벌어지기 어려운 문제들이 바다에서는 일상적으로 벌어지곤 한다. 바닷가 변방은 변방이 아니라 ‘문명의 고속도로’이기도 했다.

마지막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임진왜란을 둘러싼 전쟁의 바닷길을 썼다. 막연하게 중국 군대의 참전이 아니라 해군의 참전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수군은 강남 세력이었다. 중국 강남에서 조선 남해안까지 선이 이어졌다. 일본 수군의 선도 가고시마에서 조선 남해안으로 이어졌다. 전쟁 이후에는 그 선이 류큐국으로 이어졌다. 류큐국이 중국 강남과 밀접하게 움직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거대한 둥근 루트가 완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 역사관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이른바 ‘액체의 역사’를 서술했다. ‘액체의 역사’에는 반드시 바닷길이라는 노선이 존재했다. 그 노선은 중첩적·융합적으로 존재했으며, 때로는 동시다발적으로, 때로는 전파론적으로 상호 융합했다. 우리가 21세기에 그나마 먹고살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물류의 바닷길로 세계를 오가기 때문이다. 일명 ‘세상을 바꾼 박스’인 ‘컨테이너의 길’이야말로 오늘의 우리와 자본주의 세계를 연결하는 강력한 바닷길이다.

바닷길은 속속 새롭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오래도록 지속된 바닷길의 흔적은 오늘과 내일의 바닷길을 규정짓는 좌표일 수 있다. 문명의 바닷길, 그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