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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Tour - World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 김덕영 (한겨레)

by Wood-Stock 2013. 1. 10.

 

   막스 베버, 게오르크 지멜을 비롯해 서구 근대 사상을 탐구해온 사회학자 김덕영 교수(독일 카셀대)가 유럽 독일어권 도시들을 기행하며 사상의 발원과 흐름을 짚어보는 기획 시리즈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를 싣는다. 어떤 도시가 어떤 사상가를 보듬었으며 그 사상가가 어떻게 근대와 현대를 주조했는가 추적해보는 사상 기행이다. 마르틴 루터를 품은 비텐베르크부터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빈까지, 앞으로 20회에 걸쳐 그의 기행기를 싣는다

 

 

(1) 루터 종교개혁 산실 ′독일 비텐베르크′

세속적 종교에 맞서 중세 둑 허문 ‘근대의 발원지’

 

세계문화유산 ‘루터의 도시’

‘루터의 도시’ 가운데 하나인 독일 비텐베르크에 위치한 루터 하우스의 모습. 마르틴 루터는 1508년부터 35년 동안 이곳에서 살면서 ‘종교개혁’을 구상했고,

수많은 저작을 집필해 근대로 가는 길을 열었다. 3층으로 된 이 집은 많은 경우 5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기거했을 정도로 붐볐다고 한다.

 

 

추로지향(鄒魯之鄕)! 
이 한자성어는 중국에서 맹자의 고향 추나라와 공자의 고향 노나라를 합쳐 부르는 말로, 정신 또는 사상의 중심지를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경북 안동이 추로지향으로 일컬어진다. 지식인에게 추로지향을 찾는 것은 마치 신앙인이 성지를 순례하는 것만큼이나 설레고 흥분되는 일이다. 이번 기행에서는 서구 근대사상을 빚어낸 유럽 곳곳의 추로지향을 순례하면서 어떤 도시에서 누가 어떻게 근대와 현대를 주조했는가를 추적할 것이다. 그 첫 번째 순례지는 독일 비텐베르크다. 바로 이 도시에서 근대의 물꼬가 터졌기 때문이다.

비텐베르크는 마르틴 루터(1483~1546)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고, 루터는 비텐베르크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도시는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라고 불린다. 이 작은 도시(2011년 말 현재 인구가 4만9000명 정도)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만의 개혁이 아니라 근대의 문을 연 거대한 사회개혁 운동이었다.

루터는 1483년 튀링겐의 작은 도시 아이슬레벤에서 광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1546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비텐베르크 궁정교회의 설교단 아래에 안장되었다. 아이슬레벤 역시 ‘루터의 도시 아이슬레벤’이라고 불린다. 두 루터의 도시는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나란히 등록됐다.

아침 일찍 카셀에 있는 숙소를 나섰는데도 비텐베르크에 도착하니 오전 열시가 넘었다. 기차역에 내려서 마치 시골길 같은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루터 하우스’가 보였다. 비텐베르크는 루터의 도시답게 루터 하우스와 더불어 여정이 시작된다. 엄청나게 긴 길에 걸쳐 있는 이 건물은 루터가 35년 동안 살면서 종교개혁을 추진한 곳인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다행히 관람객이 몇 안 되었다. 단체 관람객, 특히 김나지움 학생들이 몰려오면 박물관을 둘러보는 일이 만만치 않다.

루터 하우스는 3층으로 된, 상당히 큰 건물이다. 거기에는 ‘면죄부 헌금함’, ‘95개조 반박문’, 루터가 번역한 성서 등 수많은 유물이 종교개혁의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각 유물들 옆에 독일어와 함께 영어로 설명문이 붙어 있어서 관람하기가 편하다. 그리고 입구에서는 여러 언어로 된 설명서를 파는데 한국어도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루터가 사용하던 방인데, 루터는 학자들이나 신학생들과 이 방에 있는 책상에 둘러앉아 토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 한구석에 난로가 있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큰 호사였다고 한다.

이 건물 지하에는 루터 가족의 일상생활을 미니어처로 재현해 놓았다. 부엌 풍경, 우유를 짜거나 물고기 잡는 모습이 눈에 띈다. 또한 루터 하우스와 그 주변에서 발견된 실제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루터 가족이 식사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미니어처인데, 딸린 식구 수가 엄청나게 많아 눈길을 끈다. 실제로 당시 많은 학생들이 그곳에 기거했는데, 식구가 50명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부인인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가 이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했다. 그녀는 이 위대한 개혁가의 더할 나위 없는 내조자였으며 동반자였다. 루터 하우스의 안마당에는 아담한 카타리나의 기념상이 있어 이곳을 찾는 손님들을 가장 먼저 맞이한다.

사실 루터 하우스를 제대로 보려면 며칠은 걸릴 듯싶었다. 아쉽지만 다른 역사적 자취를 둘러보기 위해 나왔다.

루터 하우스에서 건물 몇 채만 지나면 루터의 개혁동지였던 필리프 멜란히톤(1497~1560)이 살던 ‘멜란히톤 하우스’가 나온다. 현재 이 건물은 확장공사가 한창이라 관람할 수 없다. 바로 그 옆에 대학이 있다. 이 대학은 ‘마르틴 루터 대학 할레-비텐베르크’에 속하는데, 그 대부분은 할레에 있고 비텐베르크에는 아주 작은 부분만 있다. 이 대학은 집과 집 사이에 있는 작은 문을 지나야 나오기 때문에 헤매기 쉽다. 이 대학을 보니까 중세 대학의 규모가 이 정도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더 작았을 것이다.

계속해서 걷자 옛시청이 나왔다. 시청 바로 오른쪽으로 루터가 설교했던 교회가,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음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궁정교회가 보였다.

마침 내가 찾은 날은 시청 광장에서 한창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일단 루터가 설교했던 교회와 궁정교회를 둘러보고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언 몸을 녹이고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루터가 설교했던 교회는 찾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혹시 잘못 찾았나 해서 마침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맞다고 한다. 관광객들은 이곳보다 그 옆 궁정교회 앞에 몰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이곳이 종교개혁의 진원지였기 때문이다. 이 궁정교회는 비텐베르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그 정문에는 95개조 반박문이 새겨져 있다.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어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비텐베르크 궁정교회의 정문.

당시에는 나무문이었으나, 1760년 ‘7년 전쟁’ 당시 불에 타 무너지는 바람에 1858년 청동으로 문을 다시 만들었다.

 

면죄부까지 파는 타락한 교회 일침. 95개조 반박문으로 개혁물꼬 튼 곳
그가 35년 살며 공부한 ‘루터 하우스’ 마당엔 학생 뒷바라지한 부인 기념상
거리엔 역사적 궁정교회·대학건물… 루터의 삶과 고뇌, 투쟁의 숨결 넘쳐

 

‘변혁의 씨앗’ 뿌린 개방적 대학 분위기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가 된 것은 1512년 10월, 그러니까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꼭 5년 전의 일이었다. 다 아는 대로, 종교개혁은 루터가 1517년 10월 비텐베르크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일어났다. 그러나 면죄부 판매는 종교개혁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중세의 신학과 교회의 총체적인 위기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당시 종교와 성직자들은 세속화되었고, 교회제도는 낙후되었으며, 로마 교황청은 비대해지고 타락했다. 면죄부 판매는 바로 이러한 중세적 위기가 눈에 띄게 표출된 사례였던 것이었다.

사실 종교개혁의 원인은 좀더 시야를 넓혀서 중세 말기의 구조적 모순에서 찾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당시 인간 삶의 다른 영역은 근대로 내달리고 있었다. 예컨대 국민국가, 자본주의와 화폐경제, 인문주의 등이 등장해 발전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근대적 개인주의가 나타났다. 먼저 국민국가는 개인들의 공화국으로서 이 개인들이 정치와 종교의 주체가 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자본주의 및 화폐경제의 대두와 더불어 사회와 경제의 중심이 농촌의 기사계급에서 도시의 시민계층(부르주아지)으로 이행했다. 도시의 시민계층은 중세적 집단주의에 지배되던 농촌의 기사계급과 달리 근대적 개인주의의 세계관을 품고 있었다. 바로 이 사회집단이 근대 국민국가의 중추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인문주의는 성서의 복음정신을 따라 인간의 내적 자유 및 개인의 내면적 삶과 신앙을 추구할 것을 역설했다.

이 도도한 근대의 물줄기와 동떨어진 채 종교라는 삶의 영역은 여전히 중세적 틀에 갇혀 있었다. 이 틀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견고했다. 중세인들에게 구원의 문제는 현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도 절절한 관심사였다. 그런 만금 중세의 종교는 인간 삶의 구석구석을 지배하며 통제하고 있었다. 종교라는 거대한 중세의 둑이 근대라는 새로운 물길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이 둑을 허물고 근대의 물꼬를 터야만 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이자 요청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종교 밖의 힘이 아니라 종교 안의 힘이었다. 왜냐하면 중세에는 종교가 모든 종교 바깥 영역을 포괄하고 초월하는 보편적인 사회적·문화적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 종교 내부의 힘이 다름 아닌 루터의 종교개혁이었으며, 그 개혁이 일어난 곳이 파리나 런던과 같은 국제적인 대도시가 아니라 독일의 한 작은 대학도시 비텐베르크였던 것이다. 그 당시 이 도시 인구가 대략 2000명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작은 비텐베르크에서 그토록 거대한 역사적 변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지방분권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유럽에는 여러 도시에 대학이 있어서 자유로운 사유가 가능했다. 그리고 정치적 주권을 가진 제후들은 새로운 사상을 품은 지식인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주님의 포도원에 침입한 한 마리 멧돼지 새끼”(교황이 파문 결정을 내리면서 한 말)였던 루터가 화형에 처해지지 않고 새로운 신앙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1463~1525)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터 하우스에 들어서면 안마당에 세워진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의 기념상이 손님을 맞이한다.

루터의 든든한 내조자이자 개혁의 동반자였던 그는 루터 하우스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환대하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줬다.

 

사실 루터는 전형적인 중세적 가톨릭교도였다. 그는 가정과 학교에서 철저하게 중세적 가톨릭의 전통 아래 성장했으며, 수도원에서 완전히 중세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추구했다. 그런 루터가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자유롭게 성서를 연구하고 강의한 덕분이었다. 이 대학은 1502년에 창립되었으니까 당시로서는 신생 대학이었다. 그러나 이 대학은 라이프치히대학 같은 기존 대학과 달리 인문주의에 개방적이었다. 인문주의는 중세의 스콜라신학을 비판했으며, 사도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권위를 부여했다. 루터는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통해 교회와 교황의 전통과 권위를 중시하는 중세 가톨릭 신학으로부터 신과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새로운 신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었다. 비텐베르크는 크기도 작은데다 워낙 루터에 의해 각인된 도시라 그런지 누구에게 길을 물어보아도 행선지를 잘 가르쳐 준다. 그러나 조금만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면 모른다고 한다. 일반인들에게 루터는 과거의 역사에 속하는 인물이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인지도 모른다.

 

4년 뒤 ‘종교개혁 500돌’ 준비 한창

시청 광장에 차려진 크리스마스 시장에 들어가 보았다. 빼곡히 들어선 가게와 거대한 놀이기구 탓에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따뜻한 음료 한잔과 소시지로 요기를 하고 있는데, 시청 건물에 루터의 초상과 ‘루터 2017-종교개혁 500돌’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포스터가 여러 개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종교개혁 500돌인 2017년의 기념행사를 알리는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기념행사에 대해 아무리 물어도 구체적인 정보를 알 수 없어 비텐베르크대학을 다시 찾았다. 그 긴 길을 되돌아오면서 좀 유심히 보니, 길가 양쪽에 각기 시대와 양식을 달리하는 3층 정도의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데, 수많은 인물들의 기념편액이 붙어 있어 눈길을 끈다. 조금이라도 오래된 건물에는 으레 기념편액이 붙어 있고 심지어 몇 개씩 붙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작은 도시가 역사와 문화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대학에 가서 물어보니, 이미 2007년부터 독일의 여러 주가 협력하여 ‘루터 2017-종교개혁 500돌’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그 본부가 바로 비텐베르크대학이다. 루터의 삶과 활동, 그리고 종교개혁이 끼친 종교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 영향을 조명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한다. 이제 4년 뒤면 비텐베르크로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종교개혁은 단일 사건으로서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다시 한번 이곳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루터 하우스를 지나 기차역으로 향했다.

 

 

(2) ‘슐라이어마허 신학’ 싹튼 할레

독일 계몽주의 한복판서 “종교는 직관과 감정” 현대신학 태동

 

17세기 말~18세기 초 이성을 중시하는 독일 계몽주의의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감정을 중시하는 경건주의의 아성이기도 했던 할레대학의 신학부 건물.

슐라이어마허는 이곳에서 공부하며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1804년에는 이곳 신학 교수로 초빙되어 왔다.

그러나 1806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할레를 점령한 뒤 대학을 폐쇄하자, 베를린으로 옮겨가야 했다.

 

 

16세기 초 종교개혁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맞이한 신학은 18세기 말~19세기 초에 다시 한 번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앞의 경우가 근대 신학으로의 전환이라면 뒤의 경우는 현대 신학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의 주인공이 마르틴 루터라면 19세기의 주인공은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1768~1834)다. 루터가 비텐베르크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면, 슐라이어마허는 할레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할레는 비텐베르크에서 65㎞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그러나 비텐베르크를 방문한 지 이틀 만에 할레에 들르니 마치 작은 시골 읍에서 대도시에 온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텐베르크의 인구가 5만이 채 안 되는 데 비해 할레의 인구는 23만이 넘는다.

일단 걸어서 슐라이어마허가 살던 집을 찾기로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슐라이어마허의 이름은커녕 할레를 대표하는 길 가운데 하나라는 ‘그로세 메르커슈트라세’도 잘 몰랐다. 슐라이어마허는 1804년부터 1807년까지 이 거리의 22번지에 살았다. 1501~1506년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에는 그를 기념하는 편액이 하나 걸려 있었다. 현재 이 건물은 문화재와 관련된 주정부의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데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19세기까지 주로 지식인들이 살아서 ‘지식인의 거리’라고 불리던 그로세 메르커슈트라세는 이날따라 무척이나 휑했다.

 

  

 

 

“신앙은 머리가 아닌 가슴” 주창한 경건주의 영향받으며 유년기 성장
할레대학서 칸트공부 세계관 확장. 낭만주의 접한뒤 신학적 체계구축
“종교 본질은 절대의존감정” 규정, 나폴레옹의 대학 폐쇄에 베를린행

할레 중심광장엔 음악가 헨델 동상, 빈민구제기관 유명한 프랑케재단.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 드물어

허전한 마음으로 시내 중심부의 시장 광장으로 나왔더니, 광장 한복판에 우뚝 선 동상 하나가 보인다. 할레에서 태어난 바로크 시대의 대음악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이다. 할레를 대표하는 인물은 역시 슐라이어마허보다는 헨델이었다. 그 동상 아래에서 한창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시장 광장 바로 옆에는 ‘헨델 하우스’가 있다. 16세기 중반 이전에 지어진 이 르네상스 양식의 웅장한 건물은 헨델의 생가인데, 현재는 박물관과 콘서트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날도 콘서트가 있는 날인 듯했다. 한숨 좀 돌리고 이것저것 좀 물어보려고 안으로 들어서니 곱상한 할머니 한분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얼른 입장권을 사라고 하신다.

지난번 비텐베르크와 달리 이번에 찾은 할레에서는 소득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정표를 보면서 다시 계획을 다듬다보니, ‘프랑케재단’이 그곳에서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케라는 이름은 슐라이어마허와 할레대학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이름이 아니던가?!

할레대학은 비텐베르크대학보다 한참 뒤인 1694년에 개교했다. 독일 계몽주의의 선구자인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1655~1728)와 독일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크리스티안 볼프(1679~1754)가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독일 계몽주의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런데 할레대학은 경건주의 운동의 아성이기도 했다. 경건주의는 17세 후반기에 주지주의(이성이 의지나 감정보다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로 치우치며 형식화한 루터교 정통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신앙부흥운동이며 교회개혁운동이었다. 경건주의는 신앙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회개를 통한 거듭남의 체험을 중시했다. 이처럼 경건주의는 종교적 주관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종교개혁을 개혁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경건주의는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경건주의의 확고한 토대를 구축한 신학자가 바로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다. 프랑케는 할레대학의 그리스어·히브리어 교수로 초빙되었는데, 나중에는 신학 교수가 되었다. 바로 그로 인해, 그리고 그가 창립한 ‘프랑케재단’으로 인해 루터교 정통주의가 지배하던 할레대학이 경건주의 운동의 아성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와 감정을 중시하는 경건주의가 한 대학에 공존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학생이 고작해야 수백명에 불과한 그 당시 대학의 규모를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계몽주의를 대표했던 크리스티안 볼프가 마르부르크대학으로 떠났다가 갈등이 해소된 뒤에야 다시 할레대학으로 돌아왔다.

 

할레를 대표하는 길인 ‘그로세 메르커슈트라세’ 22번지에 위치한 슐라이어마허의 옛집. 그는 1804년부터 1807년까지 이곳에 살았다.

그로세 메르커슈트라세는 19세기까지 지식인들이 주로 살아서 ‘지식인의 거리’라고 불렸다.

 

슐라이어마허가 배우고 가르친 할레대학

슐라이어마허는 가정과 학교에서 엄격한 경건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1787~1790년 할레대학에서 개신교 신학을 공부했다.(그리고 1794년 베를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슐라이어마허가 공부할 당시 할레대학의 신학교수들은 경건주의가 아니라 주로 계몽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이성적 인식과 초자연적 계시를 매개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계시종교가 아니라 이성종교였다.

어려서부터 경건주의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적 성향의 할레 신학자들에게는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주로 철학자들의 강의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강의를 들었으며 그리스 고전을 탐독했다. 슐라이어마허는 1804년부터 1828년까지 20년 이상 플라톤의 저작을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이 웅대한 지적 작업에는 대학 시절의 공부가 결정적인 계기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또한 슐라이어마허는 할레대학에서 칸트의 철학을 접했는데, 이는 그의 정신세계를 결정적으로 각인했다. 그는 칸트로부터 세계를 합리적이고 계몽주의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배웠다. 슐라이어마허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순수이성’은 인간의 경험세계를 인식하는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로써 경건주의적 세계관에 머물러 있던 슐라이어마허의 세계관은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종교에 관한 한 슐라이어마허는 결코 칸트주의자가 아니었다. 칸트에게 종교는 궁극적으로 윤리이다. 칸트는 신의 존재에서 도덕법칙을 도출하지 않고 그 역으로 도덕법칙에 근거해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식의 논리를 전개한다. 이러한 종교이론이 추구하는 바는 도덕신학이다. 반면에 슐라이어마허가 보기에 종교는 실천적 윤리가 아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종교는 사변적 형이상학도 아니다. 종교는 윤리나 형이상학으로부터 도출할 수 없는 독립적이고 원천적이며 직접적인 그 어떤 것이다. 종교는 ‘무한자’(신)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다. 이런 인식은 슐라이어마허가 칸트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경건주의의 정신적 유산을 내적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할레대학을 졸업한 뒤 슐라이어마허는 가정교사와 부목사로 일하다가 1796년 베를린으로 가서 병원의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7년부터 낭만주의자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단순한 우정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지적 세계와 신학적 사고를 결정적으로 각인하는 제3의 요소를 만나게 된 대사건이었다. 낭만주의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와 달리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정과 직관을 중시했다. 이 점에서 낭만주의는 경건주의와 유사했다. 그리고 개인과 그의 개성, 개개인의 차이성 및 유일성과 그 위에 기초하는 개인의 삶과 행위를 강조했다. 이 점에서 낭만주의는 경건주의와 상이했다. 그것은 경건주의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개인주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이 새로운 개인주의에 적합한 신학적 논리를 구축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1799년 4월에 <종교론>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현대신학의 출생 신고서와도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종교의 본질이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라고 단언한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인간은 종교적 직관과 감정을 통해 신을 만나고 내적으로 받아들여 신과 합일을 이룬다. 종교는 유한자와 무한자가 서로 만나고 통합되는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관계이다. 그러므로 무한자인 신은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이다.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후기 신학사상의 결정판인 <기독교 신앙>(1830~1831)에서 종교의 본질을 “절대의존감정”이라고 규정한다.

슐라이어마허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간과하는 점이 한 가지 있으니, 바로 개인주의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주의는 양적 개인주의와 질적 개인주의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양적 개인주의는 칸트와 피히테에 의해 대변되던 입장으로서 자유와 평등을 결합시킨다. 인간은 평등한 한 자유로운데, 이를 근거짓는 것은 개인을 초월하는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원리, 곧 이성이다. 이에 반해 질적 개인주의는 낭만주의에 의해서 주창된 입장으로서 개인의 특성과 유일성을 강조한다. 이 질적 개인주의는 슐라이어마허의 철학과 만나면서 그 형이상학적 기초를 획득하게 된다. 슐라이어마허는 역설하기를, 모든 사람에게는 오직 그에게만 고유한 의미와 가치, 그리고 오직 그에 의해서만 해결되는 과제가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감정종교 또는 체험종교는 바로 이 질적 개인주의 시대의 종교였던 것이다.

할레 시내 중심부 광장에 서 있는 ‘음악의 어머니’ 헨델의 동상. 광장 옆에는 헨델의 생가인 ‘헨델 하우스’가 있다.

 

 

거리 전체가 프랑케재단

헨델 동상 아래의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따뜻한 음료로 몸을 녹인 뒤 프랑케재단을 찾아 나섰다.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에게 물으니 길을 건너면 된다고 말하면서 대충 손으로 가리킨다. 참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재단은 한두 개의 건물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길 건너 전체가 프랑케재단이라는 것이 그 젊은이의 손짓이 뜻하는 의미였던 셈이다.

프랑케재단의 본관건물에 들르니 안내하는 분이 자료도 듬뿍 주고 신명나게 설명을 해준다. 이 재단은 프랑케가 1695년 불과 4탈러의 기부금으로 빈민·고아를 구제하기 위한 기관으로 출발했다. 현재는 50개 넘는 건물에 다양한 사회·문화·학문·교육·종교 관련 시설과 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할레대학의 신학부도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이 작은 도시에 이토록 역사적이고 거대하고 복합적인 재단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고색창연한 과거의 유물로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동하며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기관과 시설로서 말이다.

슐라이어마허는 1804년 할레대학의 신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그의 할레 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1806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할레를 점령한 다음 대학을 폐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슐라이어마허는 1807년 베를린으로 가서 목사가 되었다. 그 뒤 빌헬름 폰 훔볼트(1767~1835) 등과 더불어 베를린대학의 설립을 주도하고 1810년부터는 그 대학의 교수 겸 신학부의 학장이 되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묻혔다. 할레대학은 1817년 다시 문을 열면서 비텐베르크대학과 통합했으며, 1933부터는 ‘마르틴 루터 대학 할레-비텐베르크’로 학교 이름을 바꿨다.

프랑케재단에서 나와 할레대학을 둘러본 뒤 천천히 시내 구경을 했다. 하루 종일 슐라이어마허는 할레에서 잊혀진 인물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알려주는 표지를 만났다. 중앙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마치 도시의 정문과도 같아 보이는 구조물이 있고 그 양편에 할레를 빛낸 인물들의 초상이 빙 둘러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슐라이어마허가 있었다. 이 위대한 인물이 할레의 집단기억에 생동하기를 바라며 할레를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3) 근대심리학 창시자 낳은 라이프치히

실험심리학 키운 분트의 방…130여년전 역사와 조우했다

 

라이프치히대학 심리학과 교사 안에 있는 빌헬름 분트의 방. 그가 썼던 탁자, 책상, 애장품과 강의 관련 자료들이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심리학사의 장면 1 : “그는 심리학을 철학으로부터 독립된 과학으로 제도화시켰다.”

심리학사의 장면 2 : “그는 심리학이 철학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누구든 이 두 장면을 보면 서로 적대적인 두 학자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한 학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독일 학자 빌헬름 분트(1832~1920)가 그 주인공이다.

이번에는 분트의 발자취를 찾아서 라이프치히로 길을 잡았다. 아침 일찍이 카셀에서 라이프치히로 가면서 차창 밖으로 내다본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대지는 며칠 전부터 내린 눈으로 덮여 있었고, 그 설국에 평지와 숲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흐르는 개울은 청량감이 넘쳤다. 간간이 보이는 마을과 인가의 굴뚝에서는 한가로이 연기가 피어올랐다. 당나라 시인 유종원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산이란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마다 사람 자취 끊겼네/ 외로운 배 위에 삿갓 쓴 늙은이/ 혼자서 낚시질, 추운 강에는 눈만 내리고.”

 

심리학은 실험의 방법 통해서만 과학적 객관성을 얻는다는 믿음
세계 첫 실험심리학 연구소 개설 학문적 업적이룬 제자 여럿 길러

연구소 있었던 건물은 사라졌지만 라이프치히 대학에 ‘분트 방’ 있어 지팡이와 책상·수강생 자료 보관

“철학없는 심리학자는 수공업자다” 그의 뼈있는 말이 귓전에 맴돌아


그러나 라이프치히 중앙역에 도착하면서 이런 상념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역 건물은 마치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처럼 거대했다. 그 역을 빠져나와 첫눈에 들어온 라이프치히는 장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구가 53만명 남짓이어서 독일에서 열한번째로 큰 도시이며, 오랫동안 중동부 독일 작센 지방의 경제·상업·교육·문화·행정·교통의 중심지 구실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이프치히를 “작센의 은밀한 수도”라고도 한다.

대학은 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었다. 라이프치히대학은 1409년 독일에서 다섯번째로 문을 연 대학이다. 오래된 대학들이 고유명사를 갖고 있는 데 반해 이 대학은 고유명사가 없다. 옛 동독 시절에 ‘카를 마르크스 대학’이라고 불리다가 통일 뒤에는 ‘라이프치히대학’으로 바뀌었다.

라이프치히대학은 19세기 중엽부터 급속하게 발전하여 1875년에는 독일에서 가장 큰 대학이 되었다. 당시 도시의 인구는 약 10만명이었고 학생 수는 약 3000명이었다. 세기의 전환기에는 저명한 학자들이 이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쳤는데, 그중에는 기념비적인 연구업적을 낸 학자들도 여럿 있었다. 분트는 그런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취리히 대학의 교수를 거쳐 1875년부터 이 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889~1890년에는 총장을 지냈다.

본디 심리학은 철학의 일부분으로서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 대한 사변적인 형이상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가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이르러 점차 현실적 경험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경험과학으로 발전했다. 이런 변화는 합리화되고 분화된 자본주의적 사회질서에서 어떻게 개인들의 주관적인 삶과 행위가 가능한가 하는 물음의 결과였다. 그것은 시민계층의 자아성찰이었다.

뒤이어 심리학은 생리학과 물리학 등 자연과학의 영향으로 엄밀한 연구방법을 쌓아 나간다. 특히 에른스트 하인리히 베버(1795~1878)는 1830년대부터 인간의 촉각을 실험적 방법에 따라 측정하기 시작했다. 구스타프 테오도어 페히너(1801~1887)는 1860년대 베버의 실험심리학적 사고에 입각해 정신물리학을 구축했다. 정신물리학은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 곧 외적 자극과 내적 감각의 관계를 실험적 방법을 통해 엄밀하게 측정하고 그 결과를 수학적 언어를 통해 객관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베버와 페히너는 라이프치히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그러니까 (이 두 학자가 교수로 재직하며 끼친 영향으로) 이 대학은 그 어느 대학보다도 실험심리학의 정신이 강했던 것이다. 실제로 분트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실험심리학의 아버지 베버와 정신물리학의 아버지 페히너를 알게 된 것을 더없는 행운으로 생각했다. 그밖에도 분트는 라이프치히에서 여러 분야의 내로라 하는 학자들과 교유하고 토론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1909년에 노벨상을 받은 화학자 빌헬름 오스트발트(1853~1932)였다.

분트는 라이프치히대학에 교수로 초빙된 지 4년 만인 1879년 세계 최초로 실험심리학 연구소를 개설했다. 이는 심리학이 실험의 방법을 통해서만 과학적 객관성과 엄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을 구현한 것이었다. 더불어 심리학이 하나의 독립적인 분과과학으로 제도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전 빌헬름 분트의 초상 사진과 분트의 방에 있는 강의 당시 학생의 명단, 그가 재직한 라이프치히대학의 교사 모습(사진 위부터).


 

처음에 분트의 연구소는 보잘것없었다. 그것은 겨우 실험실 한 개밖에 없는 일종의 사설 연구소였다. 그러다가 1882년부터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1883년에는 라이프치히대학의 실험심리학 연구소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때에는 실험실이 일곱 개로 늘었다. 이로써 분트와 그의 연구소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당시 세계 각국에서 새로운 심리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라이프치히로 몰려들었다.

분트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이들에 의해서 심리학은 다양한 방향과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분트가 이곳에서 남긴 또 한 가지 커다란 업적은 <철학 연구>라는 저널을 창간했다는 사실이다. 이 최초의 심리학 저널은 1883년에 창간되어 1902년까지 존속했다. 그리고 1906년부터 1917년까지 그 성격에 걸맞게 <심리학 연구>라는 이름으로 다시 발행되었다. 이 두 저널은 실험심리학의 연구 결과를 널리 보급했다.

분트는 거의 30년 동안 대학 근처에 있는 ‘괴테슈트라세’ 6번지에 살았는데, 아쉽게도 그 자리에는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또한 분트의 실험심리학 연구소가 있었던 건물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그 옛 터전이나 둘러보려고 대학 안으로 들어서니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의 기념상이 눈에 띄었다. 그는 이곳에서 공부했다. 그 밖에도 괴테·니체 등의 거장들, 현재의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도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수학했다.

분트의 발자취를 제대로 더듬어 보려면 아무래도 심리학자들에게 묻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심리학과를 찾았다. 그랬더니 심리학과에는 ‘분트 방’이라는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먼 길을 온 사유를 말하자 학과 사무실 직원은 따뜻한 커피를 대접했다. 박사후 과정의 한 여성 심리학자는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그는 심리학자가 아닌 사회학자가 분트에 관심을 품고 라이프치히를 찾았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채 한 시간이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심리학과 사회학의 학제간 대화를 나누었다. 이것만으로도 추운 겨울날에 라이프치히를 찾아와 발품을 판 보람이 있었다.

분트 방에서 만난 유물들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라이프치히대학에서 한 강의에 참석한 학생들의 명단이었다. 그 학생들은 후일 나름대로 심리학의 역사를 장식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일본인들까지 분트에게 찾아가 직접 배웠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자료도 있었다. 이처럼 분트의 실험심리학 연구소는 그 시작이 미미했으나 그 끝은 창대했다. 그곳 실험기구가 예상했던 것보다 다양하고 정교한 사실에도 놀랐다. 분트는 실험심리학의 연구 분야를 감각의 측정, 자극-반응 측정, 시간표상 측정, 재인식과 기억력 측정 등 일곱 분야로 세분화하고 그에 적합한 실험기구를 제작해 사용했다. 그것들은 1/1000초까지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분트가 사용하던 지팡이도 있었는데, 키 170㎝의 그리 크지 않은 그 ‘지적 거인’은 글을 쓰다 지치면 이 지팡이를 짚고 산책을 했다고 전해진다.

라이프치히는 장중하지만 아주 고풍스러운 도시다. 따라서 볼거리도 많다. 그중에서도 토마스 교회는 1212~1222년에 지어진 후기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1212년 이 교회에서 조직된 ‘토마너 성가대’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소년 합창단 중 하나이며, 특히 바흐가 1723년부터 175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휘자로 이 합창단을 이끌어 유명해졌다. 또 니콜라이 교회는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큰 교회인데, 1165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15~16세기에 후기 고딕 양식으로 증축되었다. 바로 대학 옆에 있다. 그리고 1813년 10월16~19일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기념하는 ‘제(諸) 국민 전투 기념비’는 91m에 이르는 거대한 조형물로서 이 도시의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 밖에 1848년 문을 연 조형예술 박물관은 중세부터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솔직히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도시 마천루’였다. 총 29층에, 높이 142m(안테나까지 합치면 155m)의 이 건물은 옛 동독 시절인 1968~1972년에 지어졌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본디 ‘카를 마르크스 대학’의 건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 본관 건물 바로 옆에 있다. 현재는 한 미국 투자은행의 소유이며 ‘중부독일방송’ 등이 세 들어 있다.

사실 이 건물은 유서 깊은 도시와 대학에 왠지 안 어울려 보인다. 아니, 마치 이물질처럼 어색해 보인다. 그러나 이 건물을 동독의 잔재라고 없애 버리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분단과 사회주의도 엄연히 독일 역사의 일부분이다. 저 현대식 건물은 독일과 라이프치히의 한 역사적 단면을 상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전통이 되어가고 있다. 앞으로 라이프치히의 명물이 될 것이다. 파리의 에펠탑이 그러지 않았는가! 우리처럼 모든 것을 때려부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라이프치히에서 분트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내내 오늘날의 심리학과 인문사회과학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심리학과 철학에 대한 분트의 태도 때문이었다. 분트는 심리학을 철학의 일부분으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심리학이 철학에서 분리되는 것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철학과를 세 분야로 나누어서 각각 철학이론·철학사·심리학에 할당할 것을 제안했다. 분트 자신도 심리학 교수가 아니라 철학 교수였다.

이러한 태도는 다양한 과학과 인식이 분화되고 제도화되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의 자아성찰에 대한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분트는 심리학의 ‘과잉 분트화’를 염려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심리학이 인간을 실험의 대상으로만 보게 되는 것을, 그리하여 인간의 자연과학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을 염려했던 것은 아닐까?

분트는 주장했다. 철학이 없는 심리학자는 수공업자에 불과하다고! 벌써 100년이나 된 이 주장이 새롭게 와 닿는 것은 오늘날 심리학을 비롯한 인문사회과학이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망각하고 갈수록 계량화되고 통계화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4) 문학사 두 거장의 도시 바이마르

세계관 달랐던 괴테와 실러, 문학의 벗으로 묘지에도 나란히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에 있는 괴테(왼쪽)와 실러의 기념상. 경험을 추구한 괴테와 이념을 추구한 실러는 ‘대척적인 정신들’이라 할 정도로 서로 많이 달랐지만, 1794년부터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가까워졌다. 두사람의 우정과 협력은 바이마르를 일약 독일문학과 세 계문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한 사람은 식물을 보고 ‘경험’이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이념’이라고 했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이런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 이 두 사람은 독일문학과 세계문학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그들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와 프리드리히 폰 실러(1759~1805)이며, 그들의 활동무대는 독일 바이마르였다.

바이마르는 인구가 6만5000명 정도로 작은 도시이다. 그러나 시내 중심은 기차역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일단 국립극장을 찾아가기로 하고 시내로 이어지는 도로를 죽 따라 내려갔다. 도중에 한두 번 물으면서 30분 정도 걸으니 국립극장이 보였다.

괴테와 실러의 기념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예상한 것만큼 그렇게 거대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고 상당히 정겨운 인간적인 크기의 상이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 부인이 지나간다. 현지인인 것이 틀림없다. 괴테와 실러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려고 이곳에 왔다고 말을 건넸더니, 먼저 ‘실러 하우스’와 ‘괴테 하우스’를 보고 난 다음 그들의 묘지를 방문하라고 친절히 일러준다. “그래도 삶이 죽음보다야 먼저지요”라며 내가 ‘썰렁한’ 유머와 더불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 활짝 웃는다. 사실을 말하면 그 중년 부인은 지리적 관점에 따라 나에게 길을 일러 준 것이었다. 국립극장을 기점으로 하여 차례로 실러 하우스, 괴테 하우스, 그리고 이들의 묘지가 나온다.

국립극장 바로 옆에 실러의 이름을 딴 길인 ‘실러슈트라세’가 있고 바로 그 길 옆에 실러 하우스가 서 있다. 길 이름과 집 이름이 참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러 하우스는 실러가 살던 집인데 그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보존해 놓았고, 그 뒤에 있는 건물 한 채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내가 방문한 날은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방문객이 꽤 많은 편이었다.

실러는 인간의 자유라는 이념을 추구한 이상주의자였다. 그의 문학 작품은 억압적인 현실세계 너머의 자유로운 이상세계를 그렸다. 이에 상응하여 실러는 문학적 이상세계가 상연되는 연극무대를 단순히 카타르시스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정의가 실현되는 도덕적 공간으로 보았다.

이는 실러의 미학 이론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는 미적 교육, 그러니까 예술에 의한 승화를 통하여 인간을 아름다운 영혼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운 영혼은 인간의 두 본성, 곧 이성과 감성(그리고 정신과 물질) 그 어느 하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양자를 조화롭게 결합시킨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실러에게 이 아름다운 영혼은 이상적인 인간상이며, 그의 예술적 창작을 이끄는 최상의 이념적 원리이자 그의 삶에 대한 최상의 실천적 요구다. 칸트가 말하는 이성국가도 바로 이 아름다운 영혼을 그 전제조건으로 한다고 실러는 확신했다. 이러한 미학 이론에 기초해 실러는 예술가에게 인간의 미적 교육이라는 중차대한 과제를 부여했다.

괴테 하우스는 실러 하우스와 지척에 있다. 아니, 저녁 식사 뒤 고무신을 끌고 가볍게 마실 다녀올 수 있는 거리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괴테 하우스는 실러 하우스와 마찬가지로 저택과 박물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실러와 괴테의 세계관만큼이나 확연히 다르다. 실러 하우스가 서민적이라면 괴테 하우스는 귀족적이다. 입장료도 괴테 하우스가 실러 하우스보다 두 배나 비싸다. 그런 만큼 볼 것도 엄청나게 많다. 그래서 그런지 방문객도 더 많아 보였다.

괴테 하우스는 실러 하우스와 달리 괴테의 이름이 들어간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평지(平地)’라는 뜻의 ‘프라우엔플란’에 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도다”라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이 연상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국립극장 앞 괴테와 실러 기념상, 두 문인의 생가들도 지척에 위치, 조금 걸으면 함께 묻힌 공동묘지

‘인간자유 추구’ 이상주의자 실러, ‘이념보다 생활’ 리얼리스트 괴테, 집 분위기도 귀족·서민적 정반대

칸트철학 통해 친해져 평생 협력, 괴테 “실러와 우정은 행운의 사건” 실러, 교수직 사임뒤 괴테 곁으로


괴테는 자연과 경험을 중시하는 리얼리스트, 아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완고한 리얼리스트”였다. 그는 이념에 매달리는 철학적 사변이 문학 작품에 독이 된다고 보았다. 이념은 문체를 자연스럽게 만들지 않고 추상적이고 장황하고 비비 꼬이게 만들며, 따라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그는 생각했다. 괴테의 주장으로는, 차라리 실무자나 생활인처럼 실제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글이 아주 뛰어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변적인 철학적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느 정도 무의식적으로, 말하자면 본능적으로 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괴테의 문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추구한 것은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이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세계에서 경험적으로 진행되는 인간의 행위였다. 그의 대표작 <파우스트>는 중세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기독교적 모티프를 담고 있어 어떤 숭고한 이념을 구현하고자 한 작품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대작에서 괴테가 그리고자 한 것은 천국으로부터 속세를 거쳐 지옥에 이르는 행위의 과정이었다. 이를 통해서 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괴테는 이 역시 작품 전체 또는 개별적인 장면을 지배하는 이념으로 보지는 않았다.

실러의 미학 이론을 빌리자면, 괴테는 ‘소박문학’의 대표자이며 실러 자신은 ‘감상문학’의 대표자이다. 소박문학이 자연과 인간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한다면, 감상문학은 현실세계에 없는 이상세계를 그리고자 한다. 또한 예술가에 대한 표상에서도 괴테는 실러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괴테의 주장을 따르면, 예술가는 가장 이기적으로 행위해야 하고 오로지 그에게 환희와 가치를 주는 것만을 실행해야 한다. 물론 이런 말을 예술가가 이기주의자나 쾌락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예술가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개인적 재능과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한다면 인류의 문화적 수준이 극대화되며, 그 결과로 인류가 추구하는 가치가 극대화된다는 것이 괴테의 메시지라고 해석하는 쪽이 타당할 것이다.

더 나아가 모더니티 이론에서도 괴테와 실러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 두 거장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인과적인 법칙에 의해, 그리고 기술적 수단과 계산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곧 인간은 고대 그리스 시대와 같은 총체성을 상실하고 단편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신과 자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각각 괴테와 실러가 살던 집인 괴테 하우스(맨 위)와 실러 하우스(가운데). 두 집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데, 실러 하우스가 서민적이라면 괴테 하우스는 귀족적이다. 바이마르 공동묘지에 있는 괴테와 실러의 묘지(아래). 실러가 세상을 떠난 1805년까지 우정과 협력을 계속했던 두 거장은 죽어서도 나란히 안장됐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에 따르는 처방에서 두 사람은 근본적인 상이점을 드러낸다. 먼저 실러는 고대 그리스의 신들을 소생시킴으로써 총체적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적 유일신 사상과 합리주의 및 유물주의에 의해 탈신화(脫神化)된 자연과 인간을 재신화(再神化)시키고자 했다. 그는 이 가능성을 시와 예술에 의한 미적 교육에서 찾았다.

이에 반해 괴테는 근대적 사회질서에서 총체적 인격을 갖춘 아름다운 영혼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아름다운 영혼’에 체념어린 작별을 고하고 일상의 요구, 곧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직업 생활에 헌신하는 것이 근대인에게 주어진 역사적-문화적 숙명이라고 괴테는 확신했다.

이처럼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사람, 아니 괴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두 “대척적인 정신들”이 처음에 서로 친해질 수 없었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1794년 7월부터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가까워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각각 칸트 철학과 자연과학이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실러는 인식을 경험과 오성(지성)의 공동작용으로 파악한 칸트의 철학을 깊이 연구했다. 칸트에게 인식의 가능성은 곧 경험과 그 대상의 가능성이다. 이에 비해 괴테는 탁월한 자연과학자이기도 했다. 자연과학에서는 개별적인 경험적 현상들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법칙을 찾아내고자 하는데, 괴테 또한 이런 본령에 충실하려 했다. 아무튼 실러와 괴테는 그들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똑같은 목표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괴테는 실러와의 우정을 “행운의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두 사람은 그 뒤 직접 대면하거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의논하고 같이 작품을 썼으며, 국립극장 일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 공동작업을 좀더 집약적으로 하기 위해 실러는 예나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1799년 바이마르로 이주했다. 둘의 우정과 협력은 실러가 180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한 작은 공국의 수도 바이마르는 일약 독일문학과 세계문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실러 하우스, 특히 괴테 하우스를 둘러보느라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사실 괴테 하우스는 그 안에 전시된 유물의 역사적·문화적·미학적 가치를 꼼꼼히 따지면서 살펴보려면 이삼일은 족히 걸릴 듯했다. 괴테 하우스를 나온 뒤 도로 하나를 건너 외곽으로 빠지는 또다른 도로를 따라갔다. 조금 걷다 보니 공동묘지가 보인다.

흰 눈이 수북이 쌓여 있는 공동묘지에는 찾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 두 거장은 일반묘지가 아니라 바이마르를 통치한 군주가문의 현실(玄室: 주검이 안치된 무덤 속 방) 안에 생전처럼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이 현실은 입장료를 받는데, 내부의 사진촬영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니 방문객 서너 사람이 조용히 현실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괴테와 실러의 주검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가냘픈 해가 노루 꼬리만큼 남아 있었다. 독일의 겨울은 오후 4시만 지나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남은 시간 동안 괴테와 실러의 흔적을 하나라도 더 확인하려 시내 이곳저곳을 살폈다.

바이마르는 작지만 아주 장중한 도시이다. 그도 그럴 것이 1552년부터 1918년까지 무려 400년 가까이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수도였다(1809년에는 작센-아이제나흐 공국과 합쳐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이 되었으며 1815년에는 대공국이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바이마르 시청이었다. 그 모습이 하도 독특해 보여서 자료를 찾아보니 1841년에 지은 네오고딕 양식(18~19세기에 부활한 고딕 양식으로서 ‘고딕 리바이벌’이라고도 부른다)이란다. 그 이전의 시청은 1583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1837년 도시에 화재가 일어나 타버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재의 바이마르 시청은 괴테와 실러가 아는 시청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괴테 광장’을 찾아갔다. 그 광장 안팎의 사람과 건물과 거리를 보면서, 괴테와 실러처럼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아니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인류의 정신적 문화를 풍요롭게 한 역사적 사례들을 떠올려 보았다. 공자와 노자, 퇴계와 율곡,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헤겔, 마르크스와 베버….

 


 

(5) 낭만주의 사조 형성된 예나

근대의 비이성적 병리 성찰…집단지성이 ‘낭만주의’ 꽃피워

 

 

독일 낭만주의의 발원지 예나에 있는 ‘낭만주의자들의 집’(왼쪽). 이 집에 살았던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였지만, 모든 현상을 형성 과정 속에서 살피는 역사적 정신과학으로 낭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낭만주의자들의 집’ 뒤에 있는 작은 정원에는 슐레겔 형제와 카롤리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오른쪽) 이들은 노발리스, 티크, 셸링 등과 더불어 18세기 독일 낭만주의를 이끌었다.



독일을 대표하는 사상가는 누구일까? 마르틴 루터, 이마누엘 칸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카를 마르크스, 막스 베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이름만 들어도 가히 그 중량감을 가늠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꼭 추가해야 할 사상이 있으니, 바로 낭만주의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낭만주의를 빼고 독일의 사상을 논한다는 것은 도교는 쏙 빼고 유교만 가지고 동아시아의 사상을 논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에 일어나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정신적 사조다. 문학을 비롯해 언어학, 문헌학, 조형예술, 음악, 철학, 법학 그리고 나아가 자연과학까지 포괄하는 종합적 문화운동이었다. 낭만주의는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인물들에 의해 추진되고 발전되고 전파된 전 독일적 현상이었다. 낭만주의는 독일에만 국한된 운동은 아니었지만, 가장 독일적인 정신 사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낭만주의가 형성된 곳이 예나이며, 그 중심에 슐레겔 형제, 곧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1767~1845)과 프리드리히 슐레겔(1772~1829)이 있었다.

예나는 바이마르에서 불과 20㎞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기차로도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바이마르를 방문한 날 하루 그곳에서 묵고 다음날 예나로 가고 싶었지만, 연말이라 이런저런 일이 생겨서 다시 카셀로 돌아왔다가 3일 후에 예나로 향했다. 바이마르를 지나서 조금 더 가자 기차는 흰 눈이 쌓여 있는 산으로 접어들었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무언가 새로운 것을 구상할 때 산속으로 기차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낭만주의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답다고나 할까, 무척 낭만적인 여행이다.

기차역에서 예나 옆 도시의 에르푸르트대학에 다니는 여학생을 만났다. 이곳 예나대학의 도서관에 지료를 찾으러 오는 길이라고 한다. 그 학생과 이야기하며 역을 빠져나왔다. ‘실러의 정원집’이 눈에 띄었다. 실러가 예나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있을 때 이 집에서 집필을 했다고 그 학생이 설명해준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스마트폰으로 ‘낭만주의자들의 집’을 검색해 가는 길을 일러주었다.

 

낭만주의 용어 만든 슐레겔 형제, 그들 추모하는 집엔 작은 흉상뿐 개인유품 찾아보기 힘들어 의외
흔히 반이성·반근대 비판받는 사상, 실은 개인소외와 인간 노예화 반기, 근대의 자기성찰 추구한 문화운동
노발리스·티크·셸링·파이트와 함께 공동철학·공동문학 집단지성 잉태

내가 예나 방문의 일차적인 목표로 삼은 낭만주의자들의 집은 예나 시내에서 좀 후미진 곳에 있었다. 성냥갑 같은 모양에 색깔도 칙칙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낭만주의자들의 집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았다. 방문객이라고는 나 혼자뿐이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슐레겔 형제의 개인적인 유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전문가가 아니라면 크게 호기심을 느끼고 볼 만한 것도 없었다.

이 집은 본디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가 살던 집이다. 피히테는 1794년부터 1799년까지 예나대학의 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집을 낭만주의자들의 집으로 만들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피히테는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이성을 중시하는 관념론과 감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고 피히테가 살던 집을 낭만주의자들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들의 지적 유산을 보존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피히테는 낭만주의가 형성되는 데에 철학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모든 현상을 그 형성 과정에서 보는 피히테의 발생론적 방법을 원용해 역사적 정신과학을 구축했다. 역사성은 낭만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또다른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셸링(1775~1854)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셸링의 자연철학은 낭만주의자들의 자연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예나에서 형성된 낭만주의는 집단지성의 산물이었다. 슐레겔 형제를 중심으로 하여 노발리스(1772~1801), 루트비히 티크(1773~1853), 셸링, 그리고 카롤리네 슐레겔(1763~1809)과 도로테아 파이트(1764~1839) 같은 여성들이 모여들었다. 또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던 슐라이어마허와도 연대를 맺고 있었다(피히테는 1799년 무신론자라는 혐의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베를린으로 갔다). 이렇게 해서 낭만주의 서클이 만들어졌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낭만주의적 집단지성을 ‘공동철학’과 ‘공동문학’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공동철학이라는 용어의 ‘철학’이라는 말은 좁은 의미의 철학이 아니라 지적·예술적 사유와 창작 및 토론을 가리킨다. 독일에서는 전통적으로 철학이 인식과 사유 그리고 지식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이들은 공동철학과 공동미학이라는 기치 하에 상호 협력하고 보완함으로써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문화운동을 확립해 나갔다.

이 낭만주의적 집단지성 안에서 동생 슐레겔은 이론가이자 철학자로서 낭만주의의 이념과 이론의 초석을 놓았다. ‘낭만주의’라는 용어도 그가 만들어낸 것이다. 형 슐레겔은 문헌학자이자 비평가로서 외국문학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낭만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는 특히 셰익스피어 번역으로 유명한데, 1797년부터 1810년까지 모두 9권으로 출간된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표준 번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슐레겔 형제는 ‘아테네움’이라는 저널을 창간하고 그 편집을 담당했다. ‘여신 아테나의 신전’이라는 의미로서 이 저널은 비록 1798년에 창간되어 1800년까지 총 6권밖에 출간되지 않았지만 공동철학과 공동문학의 실천적 장과 기관으로 기능함으로써 낭만주의 운동이 정착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예나에 있는 슐레겔 형제가 살던 집(위쪽). 동생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낭만주의의 이념과 이론을 정초했고, 형인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은 문헌학자이자 비평가로서 번역을 통해 낭만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예나대학을 설립한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기념상(아래쪽). 예나의 시장 광장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 예나는 규모는 작지만 수많은 지식인들을 품은 대학 도시다.


노발리스는 시문학을 대표했다. 낭만주의적 사랑과 동경을 상징하는 말인 ‘푸른 꽃’도 그의 작품에서 연유한 것이다. 티크는 대중적인 소설가와 동화작가로 활약했다. 셸링은 자연철학자로서의 역할을,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자와 모럴리스트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카롤리네 슐레겔은 작가 겸 번역가로서, 또 도로테아 파이트도 작가 겸 비평가로서 각각 낭만주의 형성사에서 확고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낭만주의자들의 집 뒤쪽에는 작은 정원이 있고 그 정원에는 두 개의 남자 흉상과 한 개의 여자 흉상이 나란히 서 있다. 남자 흉상은 슐레겔 형제이고 여자 흉상은 카롤리네다. 카롤리네는 1784년 형 슐레겔과 결혼했다가 헤어지고 1803년에는 셸링과 결혼했다. 도로테아는 1783년 파이트라는 남성과 결혼했다가 헤어지고 1804년 동생 슐레겔과 결혼했다.

오늘날 낭만주의는 흔히 ‘낭만적이다’ 또는 ‘로맨틱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물론 그런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낭만주의는 본디 고대나 고전주의와 구분되는 ‘근대적(현대적)’ 문화운동이라는 자아상을 갖고 있었다.

정말 낭만주의는 낭만주의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근대적이었을까? 사실 낭만주의는 반근대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낭만주의는 이성을 중시하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고 감정을 중시하고 비합리성을 추구했다. 심지어 낭만주의는 초자연적인 것, 동화적인 것, 공상적인 것, 신비적인 것 그리고 주술적인 것을 중요한 문학적 형상화의 모티프로 간주했다. 게다가 암흑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를 그 정신적 근원으로 보았다.

이처럼 반계몽적인, 곧 반이성적이고 반합리적인 낭만주의를 반근대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충분한 근거와 일리가 있다. 근대는 이성과 계몽 그리고 거기에 기반하는 과학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파악된 근대는 절반만의 근대이다. 분명 근대는 이성과 계몽의 시대다. 그리고 과학의 힘으로 엄청난 진보와 발전을 가져왔으며 인간과 개인을 전통과 종교 그리고 사회적 힘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근대는 인간과 개인을 소외시키고 노예화하고 파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니까 근대는 계몽적이지 못한 계몽, 이성적이지 못한 이성 그리고 합리적이지 못한 합리성의 시대이기도 하다.

낭만주의는 바로 이 근대의 모순과 병리적 현상, 곧 이성과 계몽의 변증법을 깊이 통찰하고 이 사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기제가 바로 감정·체험·신비 등과 같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었다. 낭만주의는 그 어떤 정신적 사조보다도 탁월하고 광범위한 근대의 자기성찰·자기비판·자기극복을 추구했던 문화운동이었다. 이렇게 보면 낭만주의는 오늘날 사회학에서 말하는 ‘성찰적 근대’를 이미 2세기 전에 선취해 실천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낭만주의는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문화운동이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의 모더니티 담론도 직간접적으로 낭만주의에 젖줄을 대고 있다.

물론 낭만주의는 단순히 계몽주의에 대한 저항운동이라는 식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감성과 비합리성은 근대의 구성요소이다. 다시 말해 감성과 비합리성은 근대인의 삶과 행위를 결정적으로 각인하는 요소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세계의 관찰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심미적이고 종교적인 세계의 관찰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 근대라는 시대의 특성이자 본질이다.

낭만주의처럼 중요한 정신적 사조의 발자취를 더듬는 사상사적 기행을 낭만주의자들의 집에서 끝낼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라도 더 찾아볼 마음으로 로비를 둘러보니 한쪽 벽에 낭만주의자들에 대해 간략하게 적어 놓은 팸플릿이 붙어 있다. 가까이서 보니 슐레겔 형제가 살던 곳이 표시되어 있다. “마르크트 23번지”(시장 23번지). 이 낭만주의자들의 집이 “운터름 마르크트 12a”(시장 아래 12a번지)가 아닌가? 반가운 나머지 직원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곳엔 슐레겔 형제와 카롤리네와 도로테아의 기념 편액이 걸려 있었다.

거기서 둘러보니 시장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기념상이 눈에 들어왔다. 예나대학을 설립한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1503~1554)의 상이었다. 예나가 대학도시라는 자기정체성을 안팎에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예나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시이다. 인구가 10만이 넘는 도시에 플랫폼도 두 곳밖에 없다. 기차역에 내렸을 때 꼭 산골짜기 탄광촌에 온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낭만주의가 탄생하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독일의 정신적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오늘날에도 교육과 연구라는 자기정체성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독일 통일 뒤에는 세 개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대학이나 연구소는 복잡하고 번다한 대도시나 신도시에 자리잡아야 국제성이 획득되고 세계화가 달성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예나를 보라!

 

 

(6) 칸트가 나고 잠든 땅, 칼리닌그라드

동토의 끝자락, 위대한 칸트의 묘지 앞에 선 감격이란…

 

칼리닌그라드(옛 쾨니히스베르크) 시내 대성당 한편에 있는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묘지. 한때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2차 세계대전 뒤로 소련(러시아)의 땅이 됐다. 칸트는 독일의 끝자락에 위치한 이 도시에서 한평생 살면서 근대 계몽주의를 완성했다.

 

 

처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독일 통일의 주역인 융커(옛 독일 동부 지역의 지주 귀족)의 경제적·사회적 기반이었던 옛 프로이센 지역을 여행하는 것이 이번 기행 중에서 백미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그곳은 베를린에서 동쪽으로 500㎞가 좀 넘는 거리이지만 열차로 가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남의 땅’이었다. 시간도 독일보다 두 시간이나 빠르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고향이자 동프로이센의 중심도시였던 옛 쾨니히스베르크를 찾아가는 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곳은 독일 땅 쾨니히스베르크가 아니라 러시아 땅 칼리닌그라드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소련(러시아)이 이 도시를 포함한 동프로이센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애초 계획했던 1박2일 기차 여행을 2박3일의 비행기 여행으로 바꿨다. 칼리닌그라드 기행은 이번 ‘추로지향(鄒魯之鄕) 순례’에서 가장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간 여행이 됐다. 날씨도 가장 추웠고, 눈도 가장 많이 쌓였다. ‘역시 칸트가 위대하기는 위대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은 베를린에서 1시간15분 정도 걸렸다. 추운 날씨에다 소련 시절을 연상시키는 현지 공항 직원들의 복장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까다로운 입국심사를 당하고 보니 몸도 마음도 더 얼어붙었다. 정말 동토의 나라에 온 기분이었다.

키 157㎝가 채 안 되는 저 작은 거인 칸트는 평생 이곳 독일의 끝자락을 떠나지 않은 채 겨자 바른 음식을 즐겨 먹고(칸트는 모든 음식에 겨자를 발라 먹었다고 한다), 시계처럼 정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하고자 한 것인가?

칸트는 그 이전의 철학적 조류를 종합해 근대정신을 체계화하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이 과제를 계몽주의의 이념을 가지고 해결하고자 했다. 칸트는 인식과 윤리는 물론이요 일견 이성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예술과 종교도 철저히 이성의 원리에 따라서 파악했다. 그의 철학적 사유와 성찰은 이성이라는 법정에서 이성이라는 재판관이 이성이라는 피고를 재판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바로 이런 연유로 칸트를 계몽주의의 완성자로 보는 것이다.

칼리닌그라드에 도착한 다음날 칸트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인구가 43만명이 넘을 정도로 큰 도시인데다 독일어는커녕 영어를 하는 사람도 만나기가 힘들어 일단 택시를 타기로 했다. 요금 미터기도 볼 수 없고 손가락 두 개 내밀면 200루블, 세 개 내밀면 300루블 주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칸트의 묘지에는 잘 데려다 주었다. 묘지는 고풍스럽고 위엄 있어 보이는, 14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벽돌로 된 성당의 오른쪽 후미에 있었다. 독일어로 선명하게 새겨진 ‘이마누엘 칸트 1724~1804’라는 글씨가 강렬하게 와 닿았다. 매일 사진으로만 보던 위대한 철학자의 묘지를 어렵게 와서 직접 보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200년 전 계몽주의의 원리와 이념에 입각해 근대정신을 주조한 철학자 칸트가 바로 이곳에 영면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의 철학은 분화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다. 인간의 정신능력은 인식이성·실천이성·판단이성·신앙이성으로 분화된다. 분화는 근대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면서 개인의 인격과 정신, 행위, 그리고 사회적 관계와 사회집단은 다양한 영역으로 분화된다. 칸트는 바로 이 근대의 역사적·문화적 과정을 담아낼 수 있는 형이상학을 제시하고자 했다. 기존의 형이상학이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근대적 분화성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칸트의 철학은 근대의 법정에서 근대라는 재판관이 근대라는 피고를 재판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쉽게 칸트의 묘지를 찾고 보니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칸트의 기념상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알았다고 하면서 기분 좋게 한참을 달리더니 한 기념상 앞에 내려주었다. 그런데 웬걸? 그 상은 칸트가 아니었다. 일단 그의 자취가 남아 있을지도 모를 현지 대학으로 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택시를 타고 호텔 카운터 여직원이 러시아어로 적어준 “대학”이라는 단어와 “칸트”라는 단어를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런데 맙소사, 아까 그 성당에다 데려다 주는 것이 아닌가?

아하, 칼리닌그라드에서는 칸트를 으레 그의 묘지와 연결시키고 그 이상은 모르는 것이구나! 아까 아침의 택시기사도 내가 칸트 사진을 보여주니 무작정 이리로 온 것이구나! 말은 안 통하고 날은 춥고 눈은 발목까지 빠졌다. 겨울 해는 짧고, 상황은 막막했다. 다시 택시기사에게 대학으로 가자고 했다. 그랬더니 (이 도시에는) 대학이 세 개라고 손가락으로 대답한다. 그러면 칸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학으로 가면 된다고 손짓 발짓으로 말했다. 그러자 기사는 한참 동안 이리저리 전화를 하면서 차를 몰더니 칸트의 기념상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칸트의 기념상 바로 옆에 대학 건물이 있는데, 그 현관 오른쪽에는 칸트의 얼굴과 러시아어로 된 칸트의 이름을 담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마누엘 칸트 국립대학’이다. 이 대학은 옛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이 대학은 1544년에 개교했다)의 후계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가르친 칸트를 기리기 위해 2005년부터 그 이름을 ‘국립 칼리닌대학’에서 ‘이마누엘 칸트 국립대학’으로 바꾸었다. 현재는 12개 학부에서 1만3000명 정도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의 관리인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칸트의 기념편액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자투리 영어로 박물관에 그게 있다고 말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다가 독일어를 좀 하는 학생을 만났다. 그가 일러준 대로 걸어가니까 칸트의 묘지가 있는 그 성당이 또다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입구 쪽에 마치 비밀통로처럼 생긴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박물관이 나왔다. 그 가운데 두 층이 칸트에게 할애된 공간이었다. 거기에 칸트의 기념편액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금속으로 된 모조품이었다.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젊은 여직원이 진품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조금 전에 오던 길을 되돌아가다 보니 큰 사거리가 나왔다. 바로 그 한쪽 귀퉁이의 벽면에 기념편액이 있었다.

이 기념편액은 1904년 칸트 서거 100년을 맞이하여 청동으로 제작하여 옛 쾨니히스베르크 성(이 성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심하게 파괴되었으며 그 폐허마저도 1968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명령으로 폭파되었다고 한다)의 서쪽 성벽에 부착했던 것인데, 1945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뒤 1994년 그 성벽의 잔해로 보이는 현재의 위치에 독일어와 러시아로 된 모조품을 만들어서 부착했다고 한다. 그곳은 칸트의 묘지가 있는 성당과 대학 사이에서 대학 쪽에 좀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칸트의 기념편액에는 <실천이성비판>의 마지막 구절이 양각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 숙고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칸트 철학에서 도덕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그는 인식을 책임지는 ‘순수이성’에 대해 윤리를 책임지는 ‘실천이성’이 우위를 지닌다고 말한다. 또한 칸트에게 종교는 궁극적으로 윤리다. 그러므로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곧 윤리적 공동체가 된다.

그런데 이 도덕법칙은 별이 빛나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인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한 법칙이다. 그래서 별이 빛나는 하늘처럼 아름다운 것이다. 바로 이 자율성과 주체성이 칸트 윤리학의 요체이다. 인식론도 마찬가지이다. 칸트에게 사물을 인식한다 함은 그 이전의 인식론이 가정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사물과 그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사물을 정리하고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내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정신적 행위를 뜻한다.

소련 체제 붕괴 이후 칼리닌그라드에서는 학문적 차원에서 칸트를 복원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현지 일반인들에게 칸트는 여전히 소외된 철학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나 사회주의 사상의 지배를 받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그의 위대한 철학적 사유와 성찰을 통해서 이미 생전에 세계가 고향인 세계시민이 되었다. 옛말에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이름 없는 사회학자도 이렇게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것이다.

걸어 다니면서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칸트의 흔적들을 찾아 이리저리 헤맨 탓에 시간은 훌쩍 오후 두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배낭에서 과자와 물을 꺼내 잠시 시장기를 속여 둔 채로 발 닿는 대로 걷기로 했다. 목표는 옛 쾨니히스베르크의 두 얼굴, 아니 쾨니히스베르크의 얼굴과 칼리닌그라드의 얼굴이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가를 더욱 많이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옛 프로이센 지역을 제대로 여행하지 못한 데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어차피 독일은 많이 보았으니까 독일의 역사와 러시아의 역사(엄밀히 말하자면 사회주의 소련의 역사)가 중첩되는 도시를 보는 것이 어쩌면 더 배울 것이 많을 듯싶었다.

이마누엘 칸트 국립대학 건물 옆에 서 있는 칸트의 기념상(위쪽). 이 대학은 1544년 개교한 옛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명맥을 잇는다고 내세우고 있다. 원래 ‘국립 칼리닌대학’이었다가 칸트를 기념하기 위해 2005년 이름을 바꿨다. 아래쪽 사진은 <실천이성비판>의 마지막 구절이 돋을새김된 칸트 기념편액. 1904년 칸트 서거 100년을 맞아 제작했으나, 2차 대전 때 파괴돼 1994년에 모조품으로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칼리닌그라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냥갑처럼 규격화된 건물이었다. 아주 높지는 않지만, 카메라로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긴 아파트도 보였다. 이러한 건물들과 전통양식들이 유기적으로 융합되지 못하고 마치 서로 다른 지층처럼 어색하게 ‘동거’를 하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난 다음에도 꽤 오랫동안 쏘다녔다. 더 걸을 수 없을 때 호텔에 돌아와서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었다. 식사 뒤엔 좋아하는 술은 아니지만 보드카를 한잔 하면서 어렵사리 칸트의 발자취를 더듬은 것과 처음 러시아 땅을 밟은 것을 자축했다.

나는 힘들게 옛날의 쾨니히스베르크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어떤 독일의 도시에서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웃으면서 나왔다.

 


 

(7) 헤겔철학과 삶의 종착지, 베를린

독일 관념론 완성한 헤겔, 훔볼트 대학서 변증법 연구 ‘불꽃’

 

 

독일 베를린에 있는 홈볼트대학.(왼쪽) 신인문주의 이념의 기치를 내걸고 1810년 빌헬름 폰 훔볼트에 의해 창립된 이 대학은 무엇보다 철학을 강조했고 

이런 교육이념은 다른 독일 대학들에 전범이 됐다. 베를린 중심부 도로텐슈타트 공동묘지에 안치된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부부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부부의 묘지.(오른쪽) 피히테의 뒤를 이어 훔볼트대학 교수직을 이어받았던 헤겔은 사후 피히테의 옆자리에 묻혔다.

 


칸트가 ‘주체의 철학’이라면 헤겔은 한마디로 ‘정신의 철학’ 마르크스 유물변증법에 영향

훔볼트 대학서 교수·총장 지낸 독일 철학계의 절대적인 존재

생전에 피히테 후임이었던 헤겔, 그의 묘지 옆엔 피히테의 묘지가…

 

어떤 독일 학자가 강연을 위해 일본에 들렀는데 학생들로부터 “이마누엘 칸트(1724~1804)와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 가운데 누가 더 위대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 질문의 진의를 알 수 없었던 그는 몹시 당황해서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는 일본 사람들에게 모든 것에 서열을 부여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세상만사를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치면 한국인들을 당할 사람들이 있을까?

 

얼마 전 오랜 친구와 전화통화를 했다. 토요일에 베를린에 간다고 하니까 미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주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에 다녀왔고, 금요일에는 세 시간짜리 세미나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답했다. “나도 안다, 내가 이팔청춘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칸트와 헤겔 중 누가 더 위대한가 하는 철학사의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친구, 또 실없는 헛소리한다고 낄낄거린다.

 

카셀에서 베를린은 도시 간 고속철도(ICE : InterCity Express)로 2시간45분 정도면 닿을 수 있어 여행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슈넬반(Schnellbahn : 도시 안을 운행하는 빠른 열차로 우리 지하철에 해당)으로 갈아타고 ‘알렉산더 광장’까지 세 정거장을 간 다음 걸어서 훔볼트대학에 가기로 했다.

 

훔볼트대학은 신인문주의 이념의 기치 아래 1810년에 창립되었다. 신인문주의란 인간의 이성과 자유, 그리고 전인적 인격의 형성을 강조하는 사상적 조류였다. 그리하여 훔볼트대학은 다양한 학제간 교육을 통해 인문주의적 교양을 갖춘 인간의 교육을 지향했다. 훔볼트대학은 무엇보다도 철학을 강조했다. 이 대학의 창립에 관여하며 초대 총장을 지낸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는 모든 고등교육은 철학에서 출발해야 하며 모든 학생은 철학 강의를 우선적으로 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교육이념은 그 이후에 설립되는 독일 대학들에 전범이 되었다. 헤겔은 1818년 피히테 후임으로 이 대학의 철학교수가 되었으며, 1829년에는 총장이 되었다. 그는 “교수 중의 교수”로 불리면서 독일 철학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 달리 훔볼트대학은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날씨도 춥고 해서 그런지 좀 짜증이 나려던 차에 눈이 번쩍 뜨였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기념상이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마르크스는 오른쪽에 앉아 있고 엥겔스는 왼쪽에 서 있는 근엄한 청동 기념상이다. 옛 서독 지역에서는 이 두 위대한 사상가의 기념상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기에, 이는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글의 첫머리에서 칸트를 언급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헤겔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칸트와의 관련 속에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철학이 한마디로 주체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면, 헤겔의 철학은 한마디로 정신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칸트에 대해서도 정신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인식이란 인간 정신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이자 작용이다. 그러나 그 정신은 주체, 곧 인식하고 실천하고 판단하는 주체에 한정된다. 칸트의 정신은 어디까지나 인간학적 차원에 머문다. 이에 반해 헤겔의 정신은 인간을 넘어서 자연과 신까지도 포함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학적 차원을 넘어서 자연철학적 차원과 신학적 차원까지 포괄한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은 절대적인 실체로서 자기 자신을 내포하는 존재이다.

 

헤겔이 보기에 칸트의 비판철학은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칸트의 인식론은 ‘주체에 의한 객체의 질서화와 구조화가 인식’이라는 기본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헤겔이 보기에 정신적 존재는 주체도 아니고 객체도 아니다. 그것은 양자의 통일이며 전체이다. 존재는 통일성과 전체성에 다름 아니며, 바로 이 통일성과 전체성이 진리이다. 주체와 객체는 이 통일성과 전체성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를 매개하며 외화하고 타자화한다.

 

훔볼트대학을 둘러보고 본관 건물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차 오늘은 토요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 대학은 토요일에 수업이 없어 대개 문을 잠근다. 그런데 다행히도 본관 건물의 문은 열려 있어서 나 말고도 방문객 몇 명이 그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명제, 이른바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한 번째 테제’가 새겨진 곳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명제는 본관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중간의 벽에 노란색 글자로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 이러한 명제에 입각해 인류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적 틀 가운데 하나를 주조한 마르크스의 철학은 변증법과 유물론에 그 핵심이 있다.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변증법은 역사운동의 법칙에 대한 이론이고 유물론은 역사운동의 토대에 대한 이론이다. 이 가운데 변증법은 헤겔한테서 온 것이다. 변증법은 한마디로 정신의 운동법칙이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은 운동을 통하여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지양하고 더 높은 통일성과 전체성의 단계로 고양되는데, 이 운동에는 대립·모순·부정 등이 중요한 기제로 작동한다. 헤겔에게 정신은 고착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운동을 통하여 자기를 실현하고 구현한다. 정신이 운동한다는 점에서 헤겔의 변증법은 유심론(관념론)적이다. 마르크스는 이 정신을 물질로 대체했다. 곧 유심론(관념론)을 유물론으로 대체했다. 마르크스의 철학은 유물변증법 위에 구축된 역사철학이자 사회철학이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는 헤겔의 후계자이자 비판자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은 1828년부터 세상을 떠나는 1831년까지 훔볼트대학 본관 건물의 뒤편에 있는 암 쿠퍼그라벤 4a번지에 살았는데, 그 건물은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 옆 건물의 벽에 그가 이 집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념편액이 부착돼 있다. 그리고 그가 살던 거리의 옆에 ‘헤겔 광장’이 있고 헤겔의 두상이 마치 자신이 구축한 거대한 철학적 사유의 세계를 지키기라도 하듯이 우두커니 자신의 이름이 붙은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칸트와 헤겔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칸트는 철저히 인간학적 차원에 머문다. 곧 철학이 물을 수 있고 물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이와 달리, 헤겔은 기존의 모든 지식을 통합하여 거대한 백과전서적 체계를 구축하려고 했다. 그 가운데 철학은 모든 학문의 정점에서 정신의 최고단계인 절대정신에 대한 자유로운 사유를 한다. 이 점에서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리고 칸트는 (물론 여러 가지 유보사항이 있지만) 이데아 세계와 현실세계를 엄격하게 구분한 플라톤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은 각각 플라톤과 칸트로부터 배웠지만 모두 스승한테 만족할 수 없었다.

 

헤겔은 사후 베를린 중심부에 있는 도로텐슈타트 공동묘지(도로텐슈타트는 베를린의 한 구역을 가리키는 지명)에 묻혔는데, 이 공동묘지는 생전에 그가 살고 가르치던 곳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우반(U-Bahn : 도시 안을 천천히 운행하는 열차로 우리의 옛 전차에 해당)으로 두 정거장을 간 다음 조금 걸어서 당도한 시내 공동묘지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작고 아담했다. 이 공동묘지는 유명인사가 많이 묻힌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 몇몇의 이름을 거론하면, 작가 아르놀트 츠바이크(1887~1968), 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1898~1979), 작가 하인리히 만(1871~1950, 거장 토마스 만의 형), 전 독일 대통령 요하네스 라우(1931~2006) 등이 그곳에 잠들어 있다. 마치 작은 정신의 공화국, 정신의 소우주를 보는 듯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헤겔의 묘지가 피히테의 묘지 바로 옆에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헤겔은 살아서는 피히테의 교수직을 물려받았고 죽어서는 피히테의 옆자리를 물려받았던 것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번 기행에서 피히테를 집중해서 다루진 못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가 중요하지 않거나 위대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피히테의 영전에 죄송스럽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바로 그 앞쪽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와 그의 부인 헬레네 바이겔-브레히트(1900~1971)의 무덤이 있다. 크지 않은 천연석에 생몰연도조차 없이 그냥 하얀 글씨로 이름만 새긴 이 부부의 묘비가 그렇게 인상적일 수가 없었다. 아주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헤겔의 철학은 여러 가지로 칸트의 철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평가도 극과 극으로 갈린다. 너무 사변적이고 거대한 지적 체계를 추구한 나머지 칸트 이전의 철학으로 후퇴했다든가, 칸트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주체철학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식의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독일 관념론은 칸트에게서 그 출발이 이루어졌다면, 헤겔에게서 그 완성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거장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고 앞으로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헤겔이 살던 거리 옆의 ‘헤겔 광장’에 있는 헤겔의 두상(위쪽)과 베를린 시내에 세워진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기념상(아래쪽). 헤겔의 후계자이면서 비판자였던 마르크스는 헤겔의 유심론(관념론)적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받아들여, 세계를 변혁하기 위한 철학을 구축했다.

 

독일 관념론, 특히 헤겔의 사변적 관념론은 난해하기로도 악명 높다. 오죽하면 브레히트는 헤겔의 <대논리학>을 “세계문학의 가장 위대한 희극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표현했을까? 이런 골치 아픈 철학을 논한다고 해서 누구 말대로 밥이 나오는 것도,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삶은 그런 물질적인 것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에는 인식하고, 사유하고, 성찰하고, 반성하는 삶, 곧 사변적인 철학적·형이상학적 삶도 있는 것이다. 독일 관념론, 특히 그 완성자인 헤겔의 사변적 관념론은 이런 삶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롭게 하는 정신적 유산이자 자양분이다.

 

도로텐슈타트 공동묘지에서 베를린 중앙역까지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다. 헤겔의 묘지와 다른 여러 저명인사들의 묘지를 둘러볼 때 조금씩 흩뿌리던 눈발이 중앙역에 가까이 이르자 점차로 굵어지면서 세상이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8) 마르크스가 살았던 본과 트리어

마르크스 하우스엔 유품 한점 없어…마치 교육장 온듯

 

 

독일 트리어의 ‘브뤼켄슈트라세’에 있는 ‘마르크스 하우스’의 안(왼쪽)과 바깥 모습(오른쪽). 마르크스가 태어난 이곳은 현재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으나, 변변한 유품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고향을 떠나 국적 없이, 오로지 자본주의의 비밀을 훔치는 ‘프로메테우스’로서 한평생을 살았던 마르크스의 신산한 삶이 드러난다.


한 도시에서는 우아하고 여성적인 건물이 정감있게 다가왔고, 다른 한 도시에서는 검정색의 거대한 성문이 사람을 압도했다. 앞의 경우는 본에서의 경험이고, 뒤의 경우는 트리어에서의 경험이다.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숨결을 그가 공부한 도시 본에서 찾는 것이 원래 목표였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계획에 없던 마르크스의 출생지 트리어를 기행지에 추가하기로 했다.


본에 간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이구동성으로 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82) 때문이냐고 묻는다. 과연 본은 베토벤의 도시였다.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광장인 ‘뮌스터 광장’의 한복판에 근엄한 베토벤 기념상이 서 있다. 뮌스터 광장은 우리말로는 대성당 광장으로 옮길 수 있다. 그 광장의 한켠에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대성당이 있는데, 그 첨탑이 어찌나 높던지 카메라로 다 담아낼 수도 없었다.

 

이 광장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베토벤 하우스’가 있다. 베토벤의 생가와 박물관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베토벤 하우스를 보니 얼마 전에 방문했던 할레가 생각났다. 할레의 시장 광장에는 18세기 음악가 헨델의 기념상이 서 있었고 그 가까운 곳에 헨델 하우스가 있었다. 베토벤 하우스가 서민적이고 소박하다면, 헨델 하우스는 귀족적이고 웅장하다. 마치 바이마르에서 실러 하우스와 괴테 하우스를 보는 것 같다.

 

카셀에서 동료 학자 한 사람이 본에 가도 마르크스의 흔적은 전혀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 본에서 ‘카를 마르크스 박사. 공부에서 박사학위까지-본, 베를린, 예나’라는 주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전시회가 나의 기행을 위해 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뭔가 대어를 낚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실망스러웠다. 직접 마르크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즐겨 읽었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하나뿐(사실 이것도 실제로 마르크스가 소장했던 것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나머지는 증명서, 서류, 책 표지, 사진 등이었다.

 


박물관으로 꾸민 마르크스 생가, 인쇄·영상자료만 전시돼 있을 뿐 체취 밴 어떤 흔적도 볼 수 없어

유물론 입각해 자본주의 모순 해부 ‘자본론’이란 지적 유산 남겼지만 사회주의 붕괴되며 부침도 겪어

막스 베버가 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계는 마르크스와 니체에 의해 각인됐다”

 

 

마르크스는 1818년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1835년에 본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그 이듬해인 1836년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1841년까지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이때 그는 이 대학 교수 브루노 바우어(1809~1882)가 이끌던 청년헤겔파(헤겔좌파)의 영향을 받아 급진적이고 무신론적인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1841년 예나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바우어의 지도로 하빌리타치온(독일 대학교수 자격)을 따기 위해 본으로 돌아왔으나 허용되지 않았다. 그 뒤 바우어가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교수의 꿈을 접은 그는 1842~1843년 쾰른에서 <라인신문>의 편집을 담당했다. 1843년 10월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뒤로는 평생 국적 없이 누구보다도 신산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 누구도 넘보기 힘든 위대한 지적 유산을 남겼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인류 역사, 특히 근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 달리 표현하자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원리를 밝혀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운동법칙과 작동원리를 역사적이고 이론적으로 추적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경제체제라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하여 자본주의에 대한 광범위하고 정치한 이론을 구축했다. 바로 이 역사적 차원이 마르크스를 기존의 사회주의 이론과 결정적으로 구분짓는 특징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근대자본주의의 사회질서 및 경제질서와 그 운동법칙을 노동·가치·화폐·자본·교환 등의 개념과 범주에 입각해 구명해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비밀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였다.

 


지난달 본에서 열린 마르크스 관련 전시회에 들렀다가 발견한 마르크스의 초상(위쪽). 마르크스는 1835년 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본보다는 그의 고향인 트리어에 가서야 그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더듬을 수 있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트리어의 대표적인 건축물으로 꼽히는 ‘포르타 니그라’(아래쪽). ‘검은 문’이라는 뜻으로 2000여년 전 로마인들이 세운 것이다.

 

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르크스의 고향 트리어에 가면 무언가 그의 체취를 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리어행을 결심하기까지 몇 번이나 망설였다. 꽉 짜인 일정에 하루를 뺀다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는 데만 5시간 반이 걸린다. 더구나 기차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데, 이런 경우 중간에 제대로 연결이 안 되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누구인가? 막스 베버와 더불어 오늘날 사회과학의 양대 산맥을 구축한 거인, 우리에게 끊임없이 지적 자양분을 공급해준 거장 중의 거장이 아니던가? 마르크스의 흔적을 추적하지 않고는 이번 기행을 마음 편히 끝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코블렌츠로 가는 완행열차를 타고 비스바덴을 지나니 라인강이 나타났다. 강은 비교적 험한 산과 산 사이를 흘렀다. 곳곳에 폐허가 된 옛 성터가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을 쏟아부을 듯 잔뜩 찌푸린 날씨였지만, 앙상한 본체를 드러낸 생명과 자연을 주변에 보듬은 채 유유히 흐르는 겨울 강을 감상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라인강이 그 지류 모젤강을 받아들이는 곳에 있는 코블렌츠는 마치 남양주의 양수리와도 같았다. 모젤강은 코블렌츠에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트리어로 향하는 길을 따라오면서 나의 눈길을 빼앗는다. 트리어를 찾아가는 길 자체가 즐거운 체험이다.

 

트리어 시내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거대한 검은 성문이 위용을 자랑하며 버티고 있었다. ‘포르타 니그라’였다. ‘검은 문’이라는 뜻의 이 성문은 기원전 180년께 로마인들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트리어에는 로마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얼마 전 나에게 포르타 니그라와 대비되는 인상을 주었던 본의 옛 시청은 1737~38년에 지어졌다. 사실 중부독일 이북에서 로코코 양식 건축물을 처음 보았다. 본과 트리어는 직선거리로 100㎞ 남짓한데도 이렇듯 사뭇 다른 인상을 받았다.

 

시내 중앙광장 바로 옆 ‘브뤼켄슈트라세’ 10번지에 ‘카를 마르크스 하우스’가 있다. 마르크스의 생가인 이 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평일인데도 방문객이 많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본의 전시회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마르크스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가 남긴 영향을 사진자료·인쇄자료·영상자료 등으로 여러 공간에 정리해놓은 것이 전부다. 그의 손때 묻은 유품은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마르크스가 1843년에 파리로 이주한 다음,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3월 혁명기인 1848~49년에 잠시 쾰른으로 돌아와 <신라인신문>을 발행한 시기를 빼고는), 여러 나라를 떠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트리어의 시민들은 마르크스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역에서부터 만나는 사람들에게 카를 마르크스 하우스의 위치를 물어보았는데, 누구나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트리어 사람들은 마르크스라는 위대한 사상가를 배출한 도시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 하우스 바로 근처에 마르크스의 이름을 딴 ‘마르크스슈트라세’라는 길이 있고, 카를 마르크스 하우스를 트리어의 명소 가운데 하나로 홍보하고 있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비록 고향에 단 한 점의 유품도 남기지 못했지만, 그의 생가를 중심으로 하여 고향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일찍이 고향에서 추방된 근대판 프로메테우스인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비밀을 훔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의 몰락과 그 이후의 역사 발전 단계인 사회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를 예언했다.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가 자연법칙처럼 필연적으로 작용하면서 관철되어 나가는 경향에 의해 지배를 받아왔으므로 그러한 예언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은 일종의 자연사적 과정이었다.

 

사실 이러한 표상은 지극히 비과학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인류 역사를 자연법칙으로 파악한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실천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지배와 억압과 착취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사회에 의해서 대체될 것인가, 그렇다면 그 사회는 어떠한 모습일까, 그리고 그러한 사회는 어떠한 방식으로 도래할 것인가를 설파하려면 보편타당한 법칙에 기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만약 엄밀한 경험과학적 분석과 설명에 머문다면, 실천적 측면에서 자본주의적 모순의 개선이나 수정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몰락과 그다음 단계의 역사 발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이처럼 과학과 비과학이 혼재된 그의 거대한 사고체계에 힘입어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인간의 역사와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80~90년대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마르크스는 다시 한번 추방되었다. 수많은 그의 추종자들이 개종하거나 변심하거나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의 비밀을 잘못 훔쳤다고 생각했다.

 

과연 마르크스는 죽었을까? 다시 묻자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역사유물론은 용도폐기되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역사철학적 형이상학과 예언의 요소만 걷어낸다면, 그리고 모든 것은 경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환원론적 사고만 벗어버린다면, 역사유물론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과학적 인식과 사유의 틀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점점 더 경제적으로 조건지어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막스 베버(1864~1920)의 말처럼 “우리 근대인의 삶의 운명을 가장 강력하게 결정하는 힘”이다.

 

베버는 마르크스와 가장 대척적인 입장에 있었고 심지어 평생을 마르크스의 유령과 싸웠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베버는 (물론 여러 측면에서 비판적이었지만) 마르크스를 사회과학적 인식과 사유의 발전을 위한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디딤돌이자, 그 어깨 위에서 세상을 좀더 멀리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거인은 향후의 지적 세계를 결정적으로 각인했다. 그는 마르크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지식인, 그리고 특히 오늘날의 철학자가 얼마나 진실한가는 그가 니체와 마르크스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를 보면 측정할 수 있다. 이 두 거장의 업적이 없었다면 자신의 작업의 아주 커다란 부분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정신적으로 존재하는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와 니체에 의해 각인된 세계다.”

 




 

(9) 사회학자 루만 키운 빌레펠트

‘사회 체계이론’ 연구 30년, 연구비 0원…루만은 독일의 선비였다

 


“연구프로젝트: 사회이론, 연구기간: 30년, 연구비: 제로.”

 

이는 니클라스 루만(1927~1998)이 1968년 독일 빌레펠트대학 사회학과의 교수로 초빙되었을 때 앞으로 추진할 연구 계획으로 제출한 것이다. 실제로 루만은 그때부터 199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동안 사회이론 연구에 몰두해 ‘체계이론’이라는 새로운 사회학적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그런데 루만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서는 빌레펠트 말고도 그에 인접한 외를링하우젠이라는 도시를 방문해야 한다. 루만은 빌레펠트에서 살다가 1977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외를링하우젠으로 이사를 하고 홀로 1녀2남의 자녀를 키웠다. 그리고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다.

 

 

빌레펠트 대학 교수 초빙될 때 제출한 연구계획서 그대로 실천
30년간 사회이론 연구 몰두 ‘체계이론’ 새 패러다임 구축해

 

 

아무래도 빌레펠트보다는 외를링하우젠에 루만의 흔적이 더 많을 것 같아서 외를링하우젠을 먼저 찾기로 했다. 루만에 대한 생생한 증언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를링하우젠은 빌레펠트에서 직선거리로 12㎞ 정도 떨어져 있으며 빌레펠트에서 완행열차로 10분 정도 걸렸다. 인구 1만6000명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돌아다닐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웬걸, 열차에서 내려 다시 3㎞나 버스를 타고 큰 고개를 넘어야 닿을 수 있는 산중도시였다.

 

루만이 20년 동안 산 집은 334m나 되는 산 정상 가까이의 ‘마리아네 베버 슈트라세’ 13번지에 있었다. 초인종을 눌러 보았으나 응답이 없었다. 평일인데도 동네가 마치 절간 같아,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만나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모두 루만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기 저 집에 살았지.” “아, 그 교수님! 지금 저 집은 그분이 살던 때와는 모습이 달라.” “그 자녀들은 아직도 이 도시에 산다고 하는데 정확한 주소는 몰라.” “그 교수님은 자주 개를 데리고 저 위 산에 나 있는 길로 산책을 했지.”

 

빌레펠트대학과 이 절간 같은 곳이 체계이론의 산실이었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이는 <루만 사전>이 나온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체계란 비교적 복잡한 구조(구조란 여러 요소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상호작용하는 것을 가리킨다)를 가리킨다. 체계는 환경과 구별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환경은 좁은 의미의 생태적 환경이 아니라 체계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하나의 체계에 대해서 다른 체계들은 모두 환경이 된다. 루만에 따르면, 전체 사회는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그러나 동시에 체계로서의 사회는 다양한 하부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체계와 환경의 경계는 일정한 통과성을 지닌 폐쇄성을 보여준다. 폐쇄성이란 체계가 외부세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는 체계 내부의 규칙성과 법칙성 그리고 자율성의 확보를 가능케 한다. 통과성이란 체계가 환경으로부터 필요한 것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특성을 지니는 체계는 사회의 복잡성을 감소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가 연구하다 지치면 올랐던 ‘철학자의 길’ 따라 걸으니 치열한 사유와 고뇌 느껴지는듯

 

 

이러한 체계 개념의 기저에는 현대사회에서 복잡성이 증대한다는 루만의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현대사회가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가 루만 사회학의 인식론적 관심이며, 이는 다시금 다양하게 분화된 하부체계가 얼마만큼 사회적 복잡성을 감소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주체성이니 의미성이니 이성이니 자율이니 행위니 또는 의사소통행위니 하는 것들은 모두 사회체계의 복잡성만 증가시키게 된다. 주체와 그의 의식 및 행위는 단지 체계의 환경일 따름이며, 그가 체계에 속하는 경우는 어디까지나 그가 수행하는 기능을 통해서이다.

 

마리아네 베버(1870~1954)는 저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부인이다. 그는 외를링하우젠에서 태어났으며 근대 여성운동사에 이론적·실천적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마리아네 베버 슈트라세’라는 길 이름은 외를링하우젠이 그를 기리기 위함이리라!

 


루만이 즐겨 찾은 산책길. 독일 외를링하우젠에 있는 ‘철학자의 길’.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 연구하다 지치면 산책했던 길이다. 그는 외를링하우젠의 절간 같은 집에 머물면서 ‘체계이론’이라 불리는 새롭고 방대한 사회학적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루만이 즐겨 산책을 했다는 산길을 찾아갔다. 이곳에 오기 전에 그 근처에 루만의 기념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기대감은 두 배로 컸다. 산책길 입구에는 정말 루만의 두상이 서 있었다. 그런데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베버의 두상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 바로 밑에 있는 시민대학의 책임자가 개인적으로 세운 기념상이란다. 그는 루만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회학자이다. 그날은 마치 바깥에 외출 중이라 그의 부인이 친절하고도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유럽연합의 고위인사와 같은 저명한 사람들도 이곳을 찾는다고 자랑이 한창이다. 그 부인에게 루만의 묘소를 꼭 한번 참배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루만은 아주 외진 곳에 묻혀 일반인들은 도저히 찾을 수 없다며 다음에 시간을 내서 오면 기꺼이 안내하겠다고 한다.

 


왜 루만의 두상과 함께 베버의 두상을 세웠을까? 그것은 베버와 이 도시의 인연 때문이란다. 베버는 1893년 가을 이곳에서 사촌누이(큰아버지의 큰딸)의 딸 마리아네와 결혼했다. 그 뒤 베버는 외를링하우젠을 마치 고향처럼 생각하고 자주 이곳에 들렀다. 지금도 그의 큰아버지 때부터 가문의 저택이었던 ‘베버 빌라’가 남아 있는데, 막스 베버는 외를링하우젠에 오면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내가 보기에 루만과 베버의 두상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단지 이 두 거장과 외를링하우젠의 인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더 나아가 향후 사회학이론의 중요한 축이 될 ‘베버냐 루만이냐’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축은 ‘마르크스냐 베버냐’라는 기존의 축과 상호보충하면서 사회학적 논의와 연구를 아주 풍요롭게 할 것이다.

 

베버는 개인과 그의 행위에서 출발해 구조적인 것을 감싸는 데 반해, 루만은 체계에서 출발해 개인과 그의 행위를 감싼다. 베버는 주체성과 주관적 의미를 강조한 데 반해, 루만은 탈주체성과 기능적 의미를 강조한다. 베버에 따르면 개인은 체계에 의해 그 인격과 자유를 박탈당할 위협에 처해 있다. 반면 루만에 따르며 체계는 개인의 인격과 자유에 의해 그 기능이 상실될 위협에 처해 있다. 또한 베버에게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면, 루만은 사회를 의사소통에 의해 구성되는 포괄적인 체계로 간주한다. 그리고 베버가 보편사적 관점에서 다양한 합리성의 유형을 추구한 반면, 루만은 체계이론적 관점에서 합리성을 체계와 환경의 차이를 인지하고 유지하는 능력으로 파악한다. 게다가 모더니티 이론가로서의 베버가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루만은 생활세계에 의한 체계의 식민지화를 극복하고자 한다.

 

루만이 연구를 하다가 지치면 산책했던 길은 산 중턱에 난 길이라 공식적인 이름은 없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비공식적으로 ‘철학자의 길’이라고 부른단다. 그 길을 직접 걸어보았다. 추운 겨울이지만 이 시대의 진정 큰 정신인 루만의 치열한 사유와 고뇌를 ‘추체험’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흥분되고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그의 숨결과 체취가 남아 있는 듯했다. 바로 이런 맛에 사상의 고향을 찾는 것이다.

 

외를링하우젠에는 루만의 이름을 딴 중등교육기관인 ‘니클라스 루만 김나지움’이 있다. 1857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김나지움인데, 루만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그가 생의 마지막 20년을 이 도시에서 산 것을 기리기 위해서 2000년부터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사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세상을 떠난 지 2년 만에 공공기관에 그의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루만과 외를링하우젠의 인연이 깊으며 외를링하우젠은 그러한 루만을 깊이 기억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 수많은 문제점
루만의 이론에서 빌려오자면 체계적 합리성의 결여 탓 아닐지…

 

 

이 김나지움을 둘러보고 나서 빌레펠트대학으로 향했다. 빌레펠트대학은 1969년에 창립되었다. 그 당시까지 독일 대학은 훔볼트대학이 제시한 교육이념, 곧 보편적이고 전인적인 교양교육의 이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빌레펠트대학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전문인력의 양성을 그 목표로 삼았으며, 다양한 인식영역의 학제적 연구와 융복합을 추구했다. 이런 점에서 빌레펠트대학은 개혁대학이라는 자아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자아상은 건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곧 모든 학부가 중앙 홀을 통해서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새로운 유형의 고등교육기관인 빌레펠트대학의 교육이념을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디자인한 것은 사회학자 헬무트 셸스키(1912~1984)였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철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훔볼트대학과 달리 이 대학은 사회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루만은 1966년 뮌스터대학에서 셸스키의 지도로 하빌리타치온(독일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빌레펠트대학이 창립되기도 전인 1968년에 그 대학의 첫번째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회학부(사회학과가 아니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독일어권에서 사회학이 학과가 아니라 학부인 경우는 빌레펠트대학이 유일하다.

 

도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도시 안에 대학이 있고 대학 안에 도시가 있는) 전통적인 대학과 달리 빌레펠트대학은 도시 외곽에 교정이 있다. 그곳에서 우반(U-Bahn: 도시 안을 천천히 운행하는 열차로 우리의 옛 전차에 해당함)을 타고 10분 정도 가니까 시내 중심이 나왔다. 인구 34만이 넘는 빌레펠트는 그렇게 고풍스러운 도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옛 시장 광장에 서 있는 기념상이 유달리 눈길을 끌었다. 위엄이 넘치는 왕후장상도 아니고 근엄한 예술가도 아니고 고매한 학자도 아니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요상하게 생긴 긴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왼쪽 손으로 받치고 있고, 오른손에 쥔 지팡이는 다리 뒤쪽으로 빼고 있으며 등에는 무언가 헐렁한 것을 지고 있다. 기존의 기념상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것은 특정한 인물의 기념상이 아니라 ‘아마포 직공’ 기념상이다. 곧 특정한 직업을 기념하는 상이다. 이는 빌레펠트가 전통적으로 방직업이 발달한 도시라는 자아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루만의 학문 이론은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커다란 함의를 지닌다. 그의 이론으로 보면, 한국 사회는 시급히 체계적 합리성을 확보해야 한다. 곧 다양한 사회체계와 그 다양한 하부체계가 다른 체계로부터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체적인 논리와 법칙에 따라서 기능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문제점들은 바로 이 체계적 합리성의 결여, 곧 체계와 환경이 뒤범벅된 복잡성과 혼란성에서 오는 것이다.

 

루만은 연구비도 없이 대학과 이 절간 같은 동네를 오가며 연구와 강의에 매진했다. 그리고 체계이론이라는 새로운 사회학적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그는 아주 소박하고도 소탈한 삶을 살았다. 이는 모든 것을 연구비 탓으로 돌리며, 기자나 스타보다 더 자주 언론 등에 얼굴을 내밀다가 선거철이 되면 권력의 주변을 맴도는 우리 지식인들과는 근본적으로 판이한 모습이다.

 

나는 그날 독일 땅에서 내가 어려서부터 배워 알고 있던 선비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했다.

 




 

(10) 라이프니츠가 40년 머문 하노버

이론을 실천한 라이프니츠…하노버는 이 천재를 그리워했다

 


“이성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이론과 실천 결합” 명제 붙들고 이론의 현실 응용 애쓴 철학자

미적분 발견하고 계산기 발명 남긴 글만 무려 6만편에 달해

 

하노버대학 안 상설전시관과 흉상 모신 라이프니츠 신전
그가 묻힌 성 요한 교회 등 도시 곳곳에 그의 흔적 남아

 


폭격당한 교회건물과 복원된 라이프니츠의 집. 독일 하노버 시내에 있는 에기디엔 교회(왼쪽). 14세기에 세워진 이 건물은 1943년 폭격으로 파괴된 이래 전쟁과 폭력에 대한 경고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복구하지 않은 모습으로 보존하고 있다. 하노버를 대표하는 사상가 라이프니츠를 기리기 위해 세운 라이프니츠 하우스(오른쪽). 이 건물 역시 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됐으나, 다른 장소에 전면만 원래의 모습을 복원했다.



독일 같은 유럽의 도시를 다니다 보면 오래되거나, 아름답거나, 우아하거나, 장엄하거나 위엄이 넘치는 건축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건축물들은 나름대로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고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보는 순간 사람을 얼어붙게 하지는 않는다. 이번에 그런 건축물을 만났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독일 북부의 내륙도시 하노버에서였다.

 

라이프니츠는 서구 정신사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보편천재’다. 미적분을 발견했는가 하면(참고로 라이프니츠와 뉴턴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미적분을 발견했다), 중국에 대한 저술도 남겼다. 그가 남긴 글은 무려 6만여편에 20만쪽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그의 서신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그 양이 1만5000통에 이르고 수신인만 해도 16개 나라에 1100여명이나 된다.

 

새해 첫 금요일에 하노버를 찾았다.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려, 홀로 큰 사상가의 발자취를 찾아 헤매는 사람의 마음을 꽤나 울적하게 만들었다. 9세기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나니, 세상에 나를 아는 사람이 적구나”라고 읊었던 신라 학자 최치원의 심경도 이러했을까?!

 

하노버에는 곳곳에 라이프니츠의 흔적이 남아 있다. 먼저 시내 중심에 있는 ‘라이프니츠 하우스’를 찾았다. 1499년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저택인데, 라이프니츠가 1698년부터 17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1981~83년 다른 장소에 전면만 원래 모습으로 복원했다. 현재는 하노버대학의 게스트하우스로 이용되고 있는데, 아쉽게도 그의 유품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이어서 하노버대학으로 길을 잡았다. 시내 중심에서 우반(U-Bahn: 도시 안을 천천히 운행하는 열차로 우리의 옛 전차에 해당함)으로 세 정거장을 가니 대학이 나왔다. 하노버대학은 라이프니츠의 탄생 360년을 맞은 2006년부터 학교명을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대학’으로 바꾸었다. 1831년 개교한 이 대학은 그동안 그냥 하노버대학으로 불렸다. 라이프니츠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 동안 하노버 궁정의 고문관 및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면서 숱한 업적을 남겼다. 이 역사성을 되살리고 그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을 계승해 대학의 연구와 강의에 통합시키려는 것이 개명의 취지였다. 이런 걸 두고 늦어도 너무 늦었다고 하던가?

 

하노버대학은 옛 성을 사용하고 있다. 현관에 들어서니 딱 무도장으로 쓰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웅장하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대학인데 무언가 있기는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직원에게 물어보니 아래층에 내려가 보라고 한다. 거기에는 작은 라이프니츠 상설 전시관이 있는데, 그날은 운 좋게도 그 전시관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은퇴한 교수가 나와 있었다. 아주 신이 나서 상세한 설명도 해주고 자료도 듬뿍 건네주었다.

 

그 전시장에 드리운 어두운 빛깔의 천에는 라틴어로 된 명제 ‘이성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nihil sine ratione)와 그 천 뒤쪽에 있는 한 유리 벽면에는 역시 라틴어로 된 명제 ‘이론과 실천의 결합’(Theoria cum praxi)이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전자의 명제는 라이프니츠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그의 광범위하고 방대한 지적 세계를 궤뚫는 핵심개념은 바로 이성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통용되는 이성 개념과 달리 라이프니츠의 이성 개념은 포괄적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식하고 실천하며 판단하는 인간 이성이 아니라 자연과 세계의 질서, 원리, 근거 및 이념이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아니라 신도 이성적 존재다. 또한 현실도 이성에 근거하고 이성에 의해 지배되므로 역시 이성적인 존재이다. 곧 이성은 현실의 질서가 된다. 그러므로 이성은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이다.

 

물론 라이프니츠가 통찰한 신적 이성과 인간적 이성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신적 이성은 무한하고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모든 사물과 인간의 근거가 된다. 이에 반해 인간적 이성은 유한하고 상대적이며 불완전하다. 인간적 이성은 본원적 이성인 신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신적 이성과 인간적 이성 사이에, 아니 모든 종류의 이성 사이에는 구조적 동일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적 이성과 인간적 이성 사이의 차이는 어디까지나 단계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요컨대 라이프니츠의 사상에서는 이성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하노버대학 앞에는 ‘게오르겐 정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그 어딘가에 ‘라이프니츠 신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비가 오는 둥 마는 둥 하는 가운데 그 넓은 정원에서 드문드문 조깅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한 30분을 걸어갔다. 저만치서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건축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 건물은 호수로 둘러싸인 곳에 있으며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 다리를 건너 가까이 가 보니 신전에 라이프니츠의 흉상이 모셔져 있었다. 이 신전을 보니 라이프니츠가 하노버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며 하노버가 라이프니츠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다. 게다가 물과 숲으로 이루어진 그 주변 경관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쉽게 눈길을 떼거나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기왕 마음을 빼앗겼으니,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한숨 돌릴 겸 잠시 상념에 잠겨 보았다.

 

하노버대학의 라이프니츠 전시관에서 본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라는 명제는 라이프니츠의 사상체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주춧돌 가운데 하나다. 요컨대, 이론은 사변적이고 공허한 탁상공론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인식과 사유를 통해서 얻어진 이론과 지식을 인간과 사회를 위하여 농업·상업·공업·광산업 등 다양한 삶의 영역에 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확고한 입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라이프니츠는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지 않았다. 이론을 위한 이론을 추구하는 상아탑은 그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계산기를 발명하고 광산에 필요한 양수기를 발명하며 자연과학적 연구와 발명을 목적으로 하는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등 이론과 실천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라이프니츠가 추구한 이론과 실천의 결합은 그의 핵심 사상인 이성의 원리에서 도출된다는 점이다. 인간의 이성은 신의 이성과 달리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상태인데, 이 실현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실천이다. 그러나 실천은 이론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이론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론과 결합한 실천, 곧 실천철학은 합리적인 인간 행위와 사회질서를 촉진시킨다. 물론 인간의 이성은 완벽하게 실현될 수 없다. 만약 그리된다면 인간이 신적 존재가 된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라이프니츠 신전을 ‘참배’한 다음 다시 우반을 타고 시내로 들어와서 라이프니츠가 묻힌 ‘성 요한 교회’를 찾았다. 그리로 가는 길에 ‘라이프니츠 냇가’라는 뜻의 ‘라이프니츠 우퍼’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 길은 말 그대로 어떤 냇가에 있었다. 성 요한 교회는 독일의 유명한 교회들과 달리 외부와 내부가 모두 단순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었다. 1666~70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가톨릭의 이상을 구현한 중세 교회들과 달리 프로테스탄티즘의 이상을 구현한 근대적인 교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미와 소박미를 자랑하는 듯 보였다. 교회의 설교단 왼쪽에는 석판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는 라틴어로 ‘라이프니츠의 무덤’이라는 글귀가 보였다. 그 교회에 있는 한 젊은 여성의 말로는 이 교회의 지하실에서 발견된 라이프니츠의 석관 뚜껑이라고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교회의 홀에 라이프니츠의 두개골이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까 만난 그 여성에게 물으니, 진짜는 아니고 진짜를 보고 만든 것이라 진짜와 거의 같단다. 내가 독일인들의 문화에서 아무리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이해한다고 하지만 감정적이고 정서적으로 끝내 융화될 수 없는 것이 수없이 많다. 인간 실존의 한계일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언어·음식·인간관계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죽음에 대한 표상이 그렇다. 공동묘지가 시내에, 그것도 때로는 주택가 바로 옆에 있지를 않나, 교회에 버젓이 사람의 두개골을 전시해 놓지를 않나! 어려서부터 죽음은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나로서는 왠지 낯선 풍경이다.

 

라이프니츠의 흔적을 돌아본 뒤 또 언제 하노버를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그중에서도 새 시청 건물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독일에서 새 시청(물론 모든 도시에 있는 것은 아니다)은 일반적으로 도시가 커지고 인구가 많아짐에 따라서 새로이 지은 건물이라 대개는 볼 것이 없다. 그런데 하노버의 새 시청은 경우가 좀 다르다. 이 시청은 독일 제국 시대인 1913년에 완성된 장려한 건물로서 시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궁전과도 같다.

 

하노버 새 시청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교회와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교회가 완전히 파괴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14세기에 세워진 에기디엔 교회인데, 1943년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복구하지 않은 채 놔둠으로써 전쟁과 폭력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도록 했다고 한다. 사실 독일의 도시에서는 전쟁과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문명의 야만성과 잔인성을 이토록 온몸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기념물을 만난 적이 없다. 아니 어느 예술품이 이보다 더 강력하고도 처절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까? 카메라로 전체 모습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 그렇게 통탄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날 내가 하노버에서 체험한 것은 전율 그 자체였다.

라이프니츠는 계몽주의의 문턱에 서 있었다. 그는 계몽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중시했지만, 계몽주의자들과는 달리 이성을 인간에 제한하지 하지 않고 이성에 의해 자연과 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그는 이성에 의해 합리적으로 신을 인식하고 증명하고자 했다. 이 점에서 라이프니츠는 칸트보다는 헤겔에 가까웠다.

 

 

(11) 현상학 운동 발원지 괴팅겐 - 

상학 창시자 후설 덕에…작은 도시 괴팅겐, 철학운동 중심지로

 

 

대학도시 상징 된 ‘거위 소녀’ 동상 독일 괴팅겐 구시청 광장에 놓인 ‘거위 소녀’ 청동상. 그림 형제의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이 청동상은 ‘대학도시’인 괴팅겐의 상징이다. 대학에 등록한 학생들이 소녀에게 키스를 하고 꽃을 바치는 전통이 전해오고 있다.

 

인구 12만명 규모는 작지만 교육·연구의 도시 자부심 커

후설이 괴팅겐대 교수로 온 뒤 ‘주체 지향성’ 강조 현상학 창시, 이성영역 머물던 철학사유 확장

그가 쓴 4만쪽의 방대한 자료 지금까지 ‘후설 총서’로 발간중

 

1990년대 초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던 때의 일이다.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의 현상학을 두 쪽가량으로 정리할 일이 생겼다. 막스 베버의 문화과학 및 사회학에 대해 갖는 지성사적 의미를 논하는 것이었다. 논문도 거의 완성되었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대학 도서관에 갔다가 까무러칠 뻔했다. <후설 총서>가 두 줄로 꽂혀 있는데 너무나 방대해서 그중에 내가 찾는 책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많이 쓸 수 있을까 하는 경외감이 들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후설 총서>는 완간된 것이 아니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내가 지식인의 신조로 삼고 있는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때의 체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처럼 내가 지적으로 어린 시절 큰 사표로 삼았던 후설은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지방(오늘날에는 체코 공화국에 속함) 출신의 유대인이다. 그러나 학자로서의 이력은 전적으로 독일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1887년부터 1901년까지 무려 14년 동안이나 할레대학에서 강사로 있다가, 1901년에 42살의 나이로 괴팅겐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16년 프라이부르크대학에 초빙되어서 1928년 정년퇴임했다.

2012년의 마지막날, 후설의 발자취를 찾아서 괴팅겐으로 길을 잡았다. 괴팅겐은 이번에 순례하는 추로지향 가운데 내가 머물고 있는 카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도시이다. 직선거리가 40㎞가 채 안 되며, ‘도시 간 고속철도’(ICE: Inter City Express)로는 20분, 완행열차로는 한 시간 걸린다. 시인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말마따나 단순히 “공간을 살해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도시 간 고속철도를 타야겠지만, 여행하는 맛을 즐기려면 역시 완행열차가 제격이다. 강이 따라오고 숲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한다. 넓게 펼쳐진 산야와 거기에 드문드문 자리한 마을들은 한가로움과 여유로움이 넘친다.

카셀에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맥주를 한아름씩 안고 탄다. 괴팅겐의 친구들과 송구영신 파티를 하러 가는 모양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젊어지는 것 같다. 좀 시끄러운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괴테이던가, 와인을 마시지 않고도 취하는 것이 젊음이라고 말한 이가?!

괴팅겐에 도착해 후설이 살던 집을 먼저 찾아나섰다. 그가 살던 곳은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아담하고 소박한 3층집이었다. ‘헤르만-푀게-베크 7번지’에 있는데, 집 오른쪽 벽 중간에 “에드문트 후설 1901~1916”이라는 글귀가 음각된 기념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왼쪽 벽 중간에도 또다른 두 개의 기념편액이 걸려 있는데, 그것은 당시 여성으로서 두번째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마리아 괴페르트메이어(1906~1972)와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괴페르트(1870~1927)가 이 집에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지금도 한적한 편이지만, 당시에는 더욱 조용할 듯하여 사색과 연구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박사학위 논문 막바지 단계에서 참고하려고 찾았던 후설의 책은 〈논리연구〉였다. 이 책은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권은 1900년에, 제2권은 1901년에 출간되었다. 이 〈논리연구〉는 현상학의 태동을 만천하에 고지한 저작으로서, 그 지성사적 의미는 역시 1900년에 출간되어 정신분석학의 태동을 만천하에 고지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작 〈꿈의 해석〉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업적으로 인해 후설은 1901년 괴팅겐대학의 교수로 초빙됐고,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부교수로 시작한 그가 정교수가 된 것은 1906년의 일이었다.

후설이 살았던 집에서 한 집 건너에 ‘막스 플랑크 다종교 및 다인종 사회 연구소’가 있다. 괴팅겐에는 총 4개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가 있으며, 약 20㎞ 떨어진 카틀렌부르크린다우에 있는 태양계 연구소까지 합치면 총 5개가 된다(실제로 이 연구소는 괴팅겐 소재로 친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대학과 독립적인 연구기관이다. 그러나 대학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이 소재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아무튼 인구 12만의 괴팅겐은 지방의 이름 없는 한 작은 도시가 아니라 교육과 연구의 중추적인 구실을 하는, 작지만 아주 큰 도시이다. 이러한 자부심은 중앙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곳의 플랫폼에는 괴팅겐이라는 현판 바로 밑에 “지식을 창출하는 도시”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그 이전에는 “대학도시”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는데, 막스 플랑크 연구소를 고려해 그렇게 바꾸지 않았나 싶다.

괴팅겐대학은 1734년에 설립되었다. 중세에 세워진 대학들과 달리 괴팅겐대학은 계몽주의 정신의 세례를 흠뻑 받았다. 그에 걸맞게 “모든 사람들의 복지를 위하여”를 대학의 슬로건으로 내세웠으며, 학생들을 대학 바깥의 세계에 적합하도록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하여 철학부, 법학부 및 의학부를 신학부와 동등한 위치에 놓고 가르쳤다. 이러한 계몽주의 정신에 힘입어 괴팅겐대학은 유럽 수학과 자연과학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근대 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1777~1855)가 바로 이곳에서 공부하고 가르쳤다. 가우스와 더불어 괴팅겐대학은 근대 수학의 메카가 되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더불어서 20세기 물리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는 양자역학은 바로 이곳 괴팅겐대학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다. 양자역학의 산파 구실을 한 세계적인 학자들이 바로 이곳에서 연구하거나 교류하곤 했다. 

괴팅겐대학은 1901년 후설이 교수로 초빙되면서 향후 독일 철학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가 창시한 현상학은 빌헬름 딜타이(1883~1911)의 정신과학 철학 및 신칸트학파의 철학과 더불어 당시 독일 철학의 중요한 사조를 형성했다. 딜타이는 베를린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고, 신칸트학파는 마르부르크대학을 거점으로 하는 마르부르크학파와 하이델베르크대학을 거점으로 하는 서남학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괴팅겐은 후설에 힘입어 베를린, 마르부르크, 하이델베르크와 더불어 당시의 독일 철학계를 주도했던 것이다.

이 세 철학적 조류는 1830년대부터 독일 관념론과 신인문주의가 쇠퇴하면서 경험적이고 실증적으로 지향된 사고체계,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실증주의가 급부상하면서 초래된 과학과 철학의 위기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그리고 칸트에 접목하면서도 칸트를 넘어서는 철학적 사고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는 또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흔히 현상학은 그 명칭 때문에 현상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와 달리 현상학은 인간의식에 주어지는 현상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현상학에서는 주체가 대상에 대해 철학적 우위를 점한다. 이런 점에서 현상학은 칸트의 비판철학과 마찬가지로 주체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가 주체를 초시간적이고 초월적인 지성계에 속하는 주체와, 시간적이고 경험적인 감성계에 속하는 주체로 양분한 반면에, 후설은 주체를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을 체험하는 정신적-육신적 통일체로 간주한다. 또한 주체의 의식에서 출발하는 칸트와 달리 후설은 주체와 대상의 상호관계에서 출발한다. 후설은 상호관계의 ‘아프리오리’(경험보다 앞서는 선험적인 것) 위에 그의 현상학적 사고체계를 구축하고자 하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지향성, 본질직관, 현상학적 환원, 시간성, 상호주관성, 생활세계 등의 개념과 이론으로 구현된다.

후설 현상학의 핵심개념은 지향성,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객체에 대한 주체의 지향성이다. 이 지향성은 단순히 인식론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식 전체를 아우른다. 그러므로 인식 이외에도 다음과 같이 아주 다양한 정신작용이 현상학적 논의의 대상이 된다. 시간의식, 감각, 인지, 기억, 환상, 예감, 표상의식, 감정이입, 추상, 이상화, 사고, 판단, 추론, 상징의식, 가치평가, 고통과 쾌락, 다양한 감정의식, 충동의식, 욕망, 의지, 동기, 관습, 성격, 입지 등. 이로써 이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철학적 사유가 인간의식의 영역과 지평 전반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이 다양한 정신작용을 통해서 상호주관성과 생활세계가 형성된다. 바로 여기에 갈릴레이 이후 계량화되고 객관화된 서구 문화와 철학 및 과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고 후설은 확신해 마지않는다.

1900년대 초반에는 후설과 괴팅겐을 중심으로 현상학 운동이 일어나면서 현상학은 철학의 영역을 넘어서 다양한 인식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13년에는 후설에 의해 <철학 및 현상학 연구 연보>가 창간되어 1930년까지 총 11권과 별책 1권이 발간되면서 이 현상학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괴팅겐이 전형적인 대학도시라는 자아상은 공간적-예술적으로도 구현된다. 구시청 앞의 시장 광장에는 분수대가 하나 있고 그 위에 ‘거위 소녀’라는 청동상이 있다. 그림 형제의 동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가녀린 소녀가 양손에 여러 마리의 거위를 들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원본은 괴팅겐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지금 서 있는 것은 모조품이라고 한다. 1901년에 이 ‘거위 소녀’가 세워지자 대학에 등록을 마친 학생들이 분수대 위에 올라가 그 소녀에게 키스함으로써 이 청동상은 대학도시 괴팅겐의 상징이 되었다. 현재는 학생 수가 너무 많아져서 갓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들만이 ‘거위 소녀’에게 키스를 하고 꽃을 바친다고 한다. 그날도 꽃이 꽂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위 소녀’를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후설은 4만쪽에 이르는 수고를 남겼다. 이 방대한 자료는 현재 벨기에 루뱅대학의 ‘후설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으며, 1950년부터 <후설 총서>로 발간되고 있다.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20여년 전 지적으로 어린 시절 우연한 기회에 후설의 저작을 보고 세운 지식인의 신조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를 얼마나 성실하게 실천해왔는가라고! 어느덧 ‘거위 소녀’ 위로 어둠이 내리면서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시간의 저편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시장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거위 소녀’에게 작별을 고하고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12) 신칸트학파 산실 마르부르크

코엔의 마르부르크학파, 철학사적 유물 되고 말았지만…

 

독일 마르부르크에 있는 구대학의 모습. 이곳에는 현재 마르부르크대학 신학부가 자리를 잡고 있다. 마르부르크에서는 ‘신칸트학파’의 창시자라 불리는 헤르만 코엔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비탈진 산꼭대기까지 도시가 펼쳐져 있다. 위쪽에 있는 시가지와 아래쪽에 있는 시가지를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건물이 아니라 도시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경우는 처음 본다. ‘도시간 고속철도’(ICE; Inter City Express)도 들어오지 않는다. 인구는 8만이 조금 넘을 뿐이다.

무슨 오지의 광산촌이 아니다. 독일의 유서 깊은 대학도시 마르부르크 이야기이다. 흔히 마르부르크는 괴팅겐, 튀빙겐 및 하이델베르크와 더불어 전형적인 대학도시로 꼽힌다. 인구 8만에 학생이 2만1000명 남짓하고 교직원이 3000명 정도 된다. 그러니까 도시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대학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교육도시라 불리는 도시가 여럿 있다. 그러나 모든 대학이 아무런 특성도 없이 일등부터 꼴찌까지 일사불란하게 서열화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대학, 그것도 세칭 명문대학은 모두 수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도시라는 말은 무색할 수밖에 없다.

 

 

마르부르크 구대학에 걸려 있는 헤르만 코엔의 편액. 신칸트학파는 철학사적 유물이 되고 말았지만, 마르부르크는 코엔을 자신의 역사 일부로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칸트에게 돌아가자” 기치 아래 사회학·심리학 등 분화된 시기
개별과학 논리적 정초 추구해 1900년 전후 지성계 풍미했지만 현상학과 실존철학 밀려 쇠퇴

마르부르크대학은 1527년에 문을 열었는데, 세계 최초의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파) 대학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1517년에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불과 10년 만에 이 대학이 세워졌다는 사실만 보아도 종교개혁이 얼마나 빨리 진행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500년 가까운 역사의 이 마르부르크대학에서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공부하거나 가르쳤다. 그 가운데 이번 기행의 대상은 ‘마르부르크학파’라 불리는 신칸트학파의 일파를 창시한 철학자 헤르만 코엔(1842~1918)이다.

사실 신칸트학파는 일반인들에게 그리 친숙한 이름은 아니다. 전문 철학자들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칸트학파는 187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독일 지성계를 풍미했다. 칸트 철학의 전통에 입각해 인간의 정신 및 삶, 행위와 문화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전개하는 일군의 철학자들(수백명의 강단철학자들)로 구성된 지적 공동체였다.

“칸트에게로 돌아가자”는 기치를 내건 신칸트학파 철학자들은 인간의 정신 및 삶, 행위와 문화에서 이성이 토대가 된다는 기본가정에서 출발했다. 신칸트학파는 원래 인간의 이념과 정신을 단순한 경제적·물질적 토대의 반영으로 보는 유물론에 대한 반대로 일어났는데, 점차 경험적·물질적 세계와 이념적·정신적 세계의 구분을 반대하는 여타의 철학적 또는 과학적 이론과 경향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이를테면 경험주의, 실증주의, 생리학, 민족심리학, 사회학, 실용주의, 심리학 등이 그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신칸트학파는 마르부르크학파와 서남학파로 구분된다. 전자는 마르부르크 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후자는 그 중심지인 하이델베르크대학이 독일 서남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두 학파의 커다란 차이점은, 전자가 일차적으로 인식론과 다양한 개별과학의 논리적 정초를 추구했다면, 후자는 특히 문화철학과 가치철학의 구축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서남학파의 창시자가 빌헬름 빈델반트(1848~1915)라면, 마르부르크학파의 창시자는 헤르만 코엔이다.

유대인인 코엔은 1873년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신칸트학파 철학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1828~1875) 지도를 받아쓴 칸트에 대한 논문으로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랑게가 코엔을 그의 “정신적 후계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코엔은 1875년 랑게가 세상을 떠나자 1876년 그의 후임으로 마르부르크대학의 철학교수가 되었다. 이로써 마르부르크대학은 신칸트학파 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코엔은 칸트의 3대 비판서 체계에 입각해 칸트의 철학을 해석했는데, 그 결실은 〈칸트의 경험이론〉 〈칸트의 윤리학 정초〉 〈칸트의 미학 정초〉 3부작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칸트 해석에 입각해 자신의 철학체계를 구축했는데, 그 결실은 〈순수인식의 논리〉 <순수의지의 윤리학〉 〈순수감정의 미학>의 3부작으로 나타났다.

 

 

(좌) 코엔이 살던 집. 마르부르크 ‘우니베어지테츠 슈트라세’ 62번가에 있다. 코엔은 여기에 살면서 마르부르크 구대학에서 가르쳤다.

  마르부르크 시내를 흐르는 란 강가에는 그를 기념한 ‘헤르만코엔베크’란 길도 있다.

(우) 마르부르크 시내 산 정상에 있는 마르부르크 성. 1529년 이곳에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 사이에 ‘성만찬’ 논쟁이 벌어졌다.

500년 역사 마르부르크대학엔 코엔 기념편액 등 곳곳에 흔적

 

이 가운데 1871년에 나온 <칸트의 경험이론>은 마르부르크학파의 금과옥조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 책에서 코엔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비판한 것이 순수이성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가정을 놓고 출발한다. 코엔에 따르면 이 경험은 인식 대상의 세계와 무관한 순수사유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므로 칸트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관과 물자체는 폐기되어야 하며 순수사유만이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순수사유란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이며 객관적인 과학적 사유, 즉 수학과 자연과학을 가리킨다. 그것은 순수인식이다. 이 점에서 코엔은 칸트와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칸트에 따르면 선험적 능력은 경험, 즉 경험적 인식의 전제조건이지 경험 그 자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선험적 능력은 인식에서 부분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그래서 직관이 필요하고 물자체가 설정되는 것이다.

코엔은 이러한 인식론, 즉 순수인식의 논리를 윤리학과 미학에도 적용한다. 이제 윤리학과 미학은 인식론적으로 정초되며, 따라서 순수의지의 윤리학이 되고 순수감정의 미학이 된다. 순수의지와 순수감정은 각각 주관적인 의지를 초월하는 객관적 이상과 주관적인 감정을 초월하는 객관적인 법칙을 가리킨다. 이렇게 해서 칸트 철학의 분화론적 사고, 즉 인간의 정신능력을 인식이성, 실천이성, 판단이성으로 구별하는 방식이 코엔에 의해서 총체론적 사고로 회귀했다.

마르부르크에는 구(舊)대학이라는 건물이 있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무슨 성당이나 수도원인 줄 알았다. 현재는 마르부르크대학의 신학부가 자리하고 있다. 그 한쪽 벽에 코엔의 기념편액이 붙어 있다. 코엔이 가르쳤던 바로 그곳이다. 마르부르크에서 코엔은 대학로라는 의미의 ‘우니베어지테츠 슈트라세’ 62번지에 살았는데, 그 집에서도 기념편액을 볼 수 있다. 또한 마르부르크는 란 강가에 있는 한 길을 ‘헤르만코엔베크’라고 부름으로써 이 철학자를 기억하고 있다. 이 길에서 바라보면 구대학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구대학은 마르부르크에서 산 정상에 있는 성 다음으로 큰 건축물인 듯싶다.

산 위에 자리한 마르부르크는 평지의 도시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서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게다가 란 강이 도시를 에워싸고 평화롭게 흐른다. 산과 물이 있으니, 배산임수의 명당은 아닐지 몰라도 도시와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이 있다. 도시 안에서 자연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구시가지에는 중세의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엘리자베트 교회와 성이 볼만했다. 엘리자베트 교회는 성녀 엘리자베트(1207~1231)를 기리기 위해 1235~83년 그의 묘석 위에 세워진 교회로 독일의 초기 고딕 양식을 대표한다. 그리고 산자락에 있는 엘리자베트 교회와 달리 산 정상에 위치한 마르부르크 성은 11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8단계에 걸쳐 건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의 일부는 마르부르크대학의 예술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엘리자베트 교회를 구경하고 나서 헉헉거리며 해발 300m에 달하는 성에 올랐다.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세상은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어떤 건물이 얼마나 오래되었고 어떤 양식으로 지어졌느니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리되면 저 은색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킬 것만 같았다.

마르부르크 성은 건축사나 예술사뿐만 아니라 지성사적으로도 중대한 의미가 있다. 1529년 10월 이 성에서 필리프 1세(1504~1567)의 주재로 마르틴 루터(1483~1546)와 취리히의 종교개혁가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 사이에 ‘성만찬’ 논쟁이 벌어졌다. 필리프 1세는 당시 변경백령 헤센의 군주로서 1527년에 마르부르크대학을 설립한 당사자다. 이 대학은 그의 이름을 따서 ‘필리프 대학’이라고도 불린다.

루터는 성만찬 때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에 실재로 임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실재적 임재설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츠빙글리는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를 상징설이라고 한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성만찬 논쟁 이후 결별했다. 이는 단순한 교회의 분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 좀더 근대화되는 계기였다. 루터가 여전히 중세의 실체론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던 반면, 츠빙글리는 근대적인 상징론적 사고를 전개했던 것이다. 제네바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1509~1564)은 성만찬 때 그리스도가 실재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한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창했는데, 이는 츠빙글리의 견해에 가까운 것이었다. 후일 츠빙글리의 종교개혁과 칼뱅의 종교개혁이 결합하여 개혁교회가 탄생했다. 이 개혁교회의 교리는 합리적인 근대문화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데에 상당히 중요한 정신적 역할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칼뱅주의의 예정론에 의해 결정적으로 각인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었다.

헤르만 코엔의 뒤를 이어서 파울 나토르프(1854~1924)는 자연과학과 심리학 및 교육학의 ‘비판적 정초’를 시도했다. 나토르프는 1881년 코엔한테서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했으며 어떤 점에서는 코엔과 더불어 마르부르크학파의 공동 창시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는 마르부르크학파 안에서 다양한 개별과학들을 비판적 으로 정초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예컨대 루돌프 슈탐러(1856~1938)는 법학과 사회과학, 카를 포어렌더(1860~1928)는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아르투어 리버트(1878~1946)는 비판철학을 비판적으로 정초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렇게 일세를 풍미하던 신칸트학파는 1930년대에 이르러 현상학과 실존철학에 밀려 급속히 쇠퇴했고, 이제는 철학사적 유물이 되고 말았다. 그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칸트를 지향했지만 결국은 헤겔화됨으로써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칸트학파가 아무런 역사적 의미도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르부르크학파는 다양한 개별과학이 분화되는 지적 상황에 대해 포괄적인 철학적 성찰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마르부르크에 오기 전까지 나는 이 도시가 과연 코엔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마르부르크는 코엔을, 그리고 더 나아가 나토르프도 자신의 역사의 일부분으로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나토르프가 살던 집에도 기념편액이 부착되어 있고 그의 이름을 딴 길 ‘파울나토르프 슈트라세’도 있다. 이와 같이 지성계에서도 신칸트학파를 철학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그에 대한 지성사적 및 사회사적 연구를 강화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르부르크를 떠났다. 멀리서 성과 엘리자베트 교회가 배웅을 하고 있었다.

 


(13) ‘비판이론’ 중심지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마르크스주의자들 모인 노아의 방주였다

 

광장에 마련된 ‘아도르노 기념물’ ‘테오도어 아도르노 광장’에 있는 아도르노 기념물. 

사각으로 된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책상과 의자가 있고, 책상 위에 램프, 메트로놈, 아도르노의 대표작 <부정의 변증법> 한권, 악보, 원고 등이 놓여 있다.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마르쿠제…
자본주의 심층구조와 모순의 본질 ‘비판이론’ 개념으로 명쾌하게 규명
프랑크푸르트학파 산실 겸 중심지
사회연구소는 현대식 건물이면서도 세월의 풍상 겪으며 아름다움 새겨 

지식인들에게 학파라는 단어는 묘한 매력을 풍긴다. 심오하고 치열한 또는 숭고하고 장엄한 뭔가가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학파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막연한 동경심을 품게 된다. 대학 초년생 시절이던가, 한 대학에서(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대학 출신들이) 학파를 만든다는 말을 듣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얼마 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학파는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학파라고 부르는 것은 학파가 아니라고!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괜히 타 대학 출신이 질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조금 공부하면서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라는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950년대 말이었다. 그러나 그 연원은 막스 호르크하이머(1895~1973)가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철학 교수와 사회연구소 제2대 소장직을 맡게 된 시점인 19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학제간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추구하며 이론적 논의와 경험적 연구를 결합시키려는 일군의 학자가 모여들었는데, 바로 이들을 가리켜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구성원으로는 호르크하이머를 위시해 테오도어 아도르노(1903~69), 헤르베르트 마르쿠제(1898~1979), 에리히 프롬(1900~80), 레오 뢰벤탈(1900~93), 프란츠 노이만(1900~54), 오토 키르히하이머(1905~65), 프리드리히 폴로크(1894~1970), 발터 베냐민(1892~1940)을 거론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이 승선한 ‘노아의 방주’였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또다른 정신적 지주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프랑크푸르트는 당시 베를린 및 하이델베르크와 더불어 정신분석학의 중심지였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억압된 인간의 해방에 그 궁극적인 관심이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진정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와 문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는 공통점을 갖는다. 1930년 사회연구소의 사회심리학 분과 책임자가 된 사회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결합시키려고 했다. 또한 정신분석학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경험연구를 하는 데에 아주 유용한 연구방법으로 기능했다. 그리하여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도시 중에서 가장 독일적이지 않게 보인다. 그 중앙역 주변에는 마천루가 꽤 많은데, 이는 인구 69만 남짓의 이 도시보다 큰 도시인 베를린(353만명), 함부르크(181만명), 뮌헨(138만명), 쾰른(102만명)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100m가 넘는 건물이 29개가 되며, 200m가 넘는 건물도 5개나 된다. 가장 높은 건물은 56층에 259m에 이른다. 저 거대한 빌딩 숲에서 한 사상가가 아니라 한 지식인 집단의 흔적을 추적한다는 것이 왠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 거기에 가려진 프랑크푸르트의 ‘속살’은 과연 어떨까 하는 호기심도 발동했다. 그동안 독일 교통의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를 수없이 지나치면서 외면만 보았을 뿐 한 번도 그 내면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명한 일이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발자취를 더듬는 기행은 그 산실이자 중심지인 사회연구소의 방문과 더불어 시작했다. 이 연구소는 1924년 프랑크푸르트의 사업가 헤르만 바일(1868~1927)과 그의 아들 펠릭스 바일(1898~1975)의 기부로 창립되었다. 이어서 1932년에는 <사회연구 저널>이 창간되어 이 연구소의 공식 기관지 구실을 하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베스트엔트슈트라세 79번지 호르크하이머가 살던 집에 부착돼 있는 기념편액. 호르크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산파이자 대부로 불린다.

프랑크푸르트 케텐호프베크 123번지 아도르노가 살던 집에 있는 기념편액.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양대 지주로 불린다.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희사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사회연구소 건물은 프랑크푸르트대학 맞은편에 있으며, 이 도시 중앙역에서 우반(U-Bahn, 도시 내를 천천히 운행하는 열차로 옛날 우리의 전차에 해당함)으로 두 정거장 가면 된다. 그런데 이 건물은 1924년 사회연구소 창립 때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되었고 현재 4층짜리 건물은 1950년 미국의 원조로 새로 지은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이 건물은 겉에서 보니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다. 현대식 건물이면서도 어느 정도 고풍스러움도 풍기고 있었다. 아마 60년이 넘는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아로새겨진 아름다움이 아닌가 한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입구 왼쪽에 이 연구소 창립자인 펠릭스 바일의 기념편액이 부착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4층 발코니에서 보니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1층 세미나실에 있는 일부 책을 제외하면 옛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쉽게도 지하에 있는 도서관은 공사 때문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사회연구소는 프랑크푸르트대학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으며 그 소장은 이 대학에서 교수직 하나를 맡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연구기관이었다. 프랑크푸르트대학은 사회연구소가 창립되고 발전하는 데에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산업화와 그에 따르는 수많은 사회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4년에 문을 연, 독일의 기준에서 보면 신생 대학이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실험정신과 개척정신이 강했으며 전통적인 과학 이외에도 사회학처럼 새로운 과학에 개방적이었다.

사회연구소는 ‘젱켄베르크안라게’라는 길 26번지에 있는데, 이 길과 90도로 만나는 길 ‘베스트엔트슈트라세’ 79번지에 호르크하이머가 살던 집이 있고 이 집에는 그의 기념편액이 부착되어 있다. 호르크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적, 인식론적 토대를 구축하고 1930년부터 1950년까지 탁월한 조직력과 관리력으로 사회연구소를 이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명실상부한 산파이자 대부였다. 이 학파는 달리 ‘호르크하이머 서클’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비판이론 학파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1937년 호르크하이머가 <사회연구 저널> 제6권에 발표한 논문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에서 연원한다. 호르크하이머를 따르면 전통이론, 즉 ‘부르주아 과학’은 사실과 가치가 엄격히 구분된 가치중립적인 그리고 주관성이 철저히 배제된 객관적인 인식을 추구하며 기존의 사회질서를 옹호하고 정당화한다. 이에 반해 비판이론은 사실과 가치 그리고 객관성과 주관성은 변증법적 관계를 이룬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며, 사회의 심층적 구조와 법칙성을 구명하고 사회적 모순을 비판함으로써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산실이자 중심지인 사회연구소 건물. 프랑크푸르트대학 맞은편에 있으며 1950년 미국의 원조로 지어졌다.

프랑크푸르트대학. 1차 세계대전 직전에 문을 열었으며, 실험정신과 개척정신이 강하고 새로운 학문에 개방적이었다. 사회연구소는 프랑크푸르트대학과 긴밀히 연계돼 있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그리고 역시 사회연구소가 자리잡은 길과 90도 각도로 만나며, 따라서 호르크하이머가 살던 집과 평행을 이루며 바로 옆에 있는 길 ‘케텐호프베크’ 123번지에 아도르노가 살던 집이 있고 그 집에도 기념편액이 있다. 프랑크푸르트의 기념편액에는 다른 도시와 달리 주인공의 얼굴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도르노의 기념편액 맨 밑부분에는 독일 유수의 출판사 ‘주어캄프’가 희사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아도르노와 이 출판사의 관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주어캄프의 설립자 페터 주어캄프(1891~1959)가 없었다면 선도적인 문화비판가 아도르노가 없었을 것이며, 아도르노가 없었다면 주어캄프는 문화비판 영역에서 선도적인 출판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도르노와 주어캄프의 관계는 지식인과 출판사가 상호 협력하여 인간의 정신과 문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증한다.

사회연구소를 기준으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살던 집과 반대방향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테오도어 아도르노 광장’이라는 그리 크지 않은 공터가 있다. 드문드문 나무로 둘러싸인 광장 가운데 아도르노 기념물이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흥미롭다. 굳이 양식을 따지자면, ‘포스트모던’하다고 하는 것이 적합할 듯싶다. 사각으로 된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책상과 걸상이 있고 책상 위에는 램프와 메트로놈과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나온 <부정의 변증법> 견본 한권, 그리고 악보와 원고가 있다. 마치 아도르노가 지금 내 눈앞에서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다가 반갑게 인사를 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양대 지주이다. 그러나 둘의 성격은 많이 다르다. 크게 보아 호르크하이머가 관리자라면 아도르노는 이론가이다. 아도르노는 철학, 사회학, 문학, 미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총 20권으로 된 <총서> 가운데 8권(12~19권)이 음악에 할애되어 있다. 아도르노에게 음악은 인식과 사유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데, 그 이유는 전위적인 음악이 문화산업에 의해 왜곡된 사회질서를 넘어설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1966년에 나온 <부정의 변증법>을 자신의 주저로 여겼으며 이 제목을 비판이론과 동일시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동일시하는 사고를 비판하고 비동일적인 것의 철학을 제시했다. 아도르노 기념물은 이러한 그의 지적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 기념물을 돌아본 다음 프랑크푸르트 시내 구경을 나섰다. 겉으로 보기에 초현대식인 프랑크푸르트의 내면에는 여느 도시 못지않게 많은 옛날 건물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특히 시청 광장은 아주 고풍스런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더구나 이 건물들은 박제화된 유물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살아 있는 삶의 공간이다. 그중 시청은 세 개의 건물로 되어 있는데, 그 전면은 고딕 양식으로서 독특하게 삼각형 형태를 띠고 있다. 14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들은 1405년부터 오늘날까지 600년 이상을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은 ‘뢰머’로, 시청 광장은 ‘뢰머 광장’으로 불리는데, ‘뢰머’는 로마인들이라는 뜻이다.) 거기에서 조금만 가면 마인 강이 나오는데, 그 다리 위에서 바라본 프랑크푸르트는 현대와 전통이 잘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는 도시였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는 ‘뢰머’. 뢰머는 로마인들이라는 뜻이다. 14세기에 지어졌으며 600년 이상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자본주의 사회의 심층적 구조와 그 모순의 본질, 즉 도구이성, 일차원적 사회, 물화, 상품화, 권위에의 예속, 총체적 관리사회, 억압사회, 문화적·미학적 야만성 등을 이론적·경험적으로 탁월하게 구명해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안, 즉 인간과 개인의 해방을 가능케 하는 진정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에 대한 논의는 추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 이유는 이들이 경제적 합리성 또는 도구적 합리성이라는 단 하나의 합리성에 입각하여 비판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2세대를 대표하는 위르겐 하버마스(1929~)는 사회적 합리성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비판이론의 외연을 넓혔다. 의사소통적 이성에 기반하는 사회적 합리성과 도구적 이성에 기반하는 경제적 합리성은 질적으로 상이하며 서로를 제한한다. 바로 여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놓인다. 이렇게 해서 경제로부터 상호작용으로 비판이론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비판이론의 제3세대를 대표하는 악셀 호네트(1949~)는 인정투쟁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비판이론의 상호작용적 패러다임을 이어가고 있다. 



(14) ‘비판이론’ 중심지 프랑크푸르트

“인간이 자신의 형상대로 신을 창조했다” 신학을 뒤엎은 철학자

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기념물(왼쪽)에는 “인간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신을 창조했다”는 유명한 명제가 새겨져 있다. 그 옆에 있는 기념비(오른쪽)는 원래 포이어바흐가 살던 집에 부착돼 있던 기념 편액이었는데, 이 집이 헐린 뒤 뉘른베르크 시가 기념비 형태로 설치했다.


두 인접한 도시가 동시에 한 사상가를 기리고 있다. 그 이유는 서로 다르다. 한 도시는 이 사상가가 그 도시의 대학과 관련 있기 때문이고 다른 도시는 이 사상가가 살았기 때문이다. 두 도시에는 모두 대학이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른 대학이 아니라 한 대학이 두 군데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이 두 도시는 독일의 에를랑겐과 뉘른베르크이며, 그 사상가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1804~72)이다. 에를랑겐대학은 1742~43년에 설립되었는데, 그 뒤 1918년 들어선 뉘른베르크 경제과학·사회과학 대학을 1961년 통합하면서 ‘프리드리히알렉산더대학 에를랑겐뉘른베르크’가 되었다.

에를랑겐과 뉘른베르크는 직선거리로 18㎞가 채 안 될 정도로 지척에 있다. 인구가 각각 10만과 51만을 조금 넘는다. 뉘른베르크는 바이에른 주에서 뮌헨(138만) 다음으로 큰 도시이며 독일에서 열네 번째로 큰 도시다.


포이어바흐가 인연을 맺은 순서에 따라서 에를랑겐부터 찾기로 했다. 내가 머무는 카셀에서 뉘른베르크까지는 교통편이 좋아서 ‘이체’(ICE·도시간 고속철도)로 두 시간 정도 걸린다. 그리고 뉘른베르크에서 에를랑겐까지는 완행열차로 20분 정도 걸린다.

에를랑겐 중앙역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면 주로 공학 관련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대학 캠퍼스가 나온다. 그곳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광장’이라는 꽤 넓은 공터가 있고, 그 한쪽에 포이어바흐 기념석이 있다. 그리 크지 않은 소박한 자연석인데, 그 위에 부착된 동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양각되어 있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1804~1872). 저명한 철학자이자 종교 비판가. 1827~1828년 에를랑겐에서 공부를 했고 1829년부터 사강사(요즘 대학의 시간 강사와 비슷하지만 대학에서 강사료를 받지 않고 수강생들에게 강의료를 받는 강사)로 가르쳤다. 그러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쳐 1836년 대학을 떠났다.”

포이어바흐는 1823년부터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곧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1824년부터 베를린대학으로 옮겨서 철학을 공부했고 2년 동안 헤겔이 개설하는 강의를 빠짐없이 들었다. 특히 논리학 강의는 두 번이나 들었다. 1826년부터 1년간 독학을 한 뒤 1827년부터는 에를랑겐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1828년에는 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와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사강사로 일했다. 그러나 1830년에 나온 저서 <죽음과 불멸에 대한 고찰>이 기독교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포이어바흐는 어느 대학에서도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32년에 강의를 접었다. 1835~36년 겨울학기 에를랑겐대학에서 다시 강의를 했지만, 1836년에는 영원히 대학을 떠나서 평생 재야학자로 활동했다.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포이어바흐는 일찍이 헤겔 철학에 빠져들었다. 1825년에는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아예 신학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미 1827~28년에는 헤겔 철학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다. 포이어바흐는 정신에서 출발하는 헤겔의 사변적 관념론은 주어와 술어를 전도시킨다고 생각했다. 즉 사유가 주어가 되고 존재가 술어가 된다. 포이어바흐가 보기에 이러한 사변적 관념론은 철학화되고 논리화된 신학에 지나지 않는다. 포이어바흐는 사유가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사유를 결정하기 때문에, 존재가 주어가 되고 사유가 술어가 된다는 견해를 내세운다.

에를랑겐은 내가 최근 방문한 도시들 중에 가장 현대적인 모습이었다. 길도 다른 도시들에 비해 직선의 형태를 띠고 있다. 마치 계획도시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옛 시가지, 특히 ‘궁전 정원’이라는 넓고 오래된 나무들이 우거진 정원과 그곳에 있는 옛 건물들에 자리한 대학 교정은 여느 도시 못지않게 중세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에를랑겐에서 다시 뉘른베르크로 가는 열차를 타니 점심때가 훌쩍 넘어 있었다. 새벽에 집을 나서며 싸 온 식은 커피와 딱딱한 빵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내 생전 그렇게 맛있는 커피와 빵을 맛본 적이 없었던 같다.


시간도 많이 지체되고 도시도 상당히 큰 편이라 뉘른베르크 중앙역 앞에 있는 여행안내소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아주 친절하고도 상세하게 길을 일러줄뿐더러 포이어바흐에 대한 정보도 출력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 여행안내소 직원은 내 여행에 대해 응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시가 크면 어쩔 수 없이 여행안내소를 찾아야 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포이어바흐는 1837년부터 1860년까지 뉘른베르크에서 30㎞가량 떨어진 중부 프랑켄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 브루크베르크에서 살았다. (현재 인구가 1300명이 채 안 된다.) 그러다가 부인이 공동 소유주로 있던 도자기 공장이 파산하자 가족과 함께 1860년 뉘른베르크 근처의 촌락 레헨베르크(오늘날에는 뉘른베르크에 속함)에 있는 한 농가로 이사를 해 187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이 시기에 실러 재단, 뉘른베르크의 친구들과 후원자들, 사회민주노동당 등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뉘른베르크 중앙역에서 트램(도시 안을 천천히 운행하는 지하열차)을 타고 일곱 정거장을 가서 좀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니 ‘철학자의 길’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그 간판이 가리키는 계단을 올라가니 꽤 넓은 공원이 나왔다. 원래 이곳은 그런대로 높은 산이었는데 그 윗부분을 깎아서 공원으로 만든 것 같았다. 포이어바흐가 살던 농가는 그 아래의 평지에 있었다고 한다. 포이어바흐는 자주 전망이 좋은 이곳 산에 올라서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면서 사색에 잠겼다고 한다. 현재 이 공원에는 비교적 큰 빈 석관의 형태로 된 포이어바흐 기념물이 있다. 그 옆에는 기념비가 하나 눈에 띈다. 이 기념비는 원래 포이어바흐가 살던 집에 1906년부터 부착되어 있던 기념 편액인데, 이 집이 여러 차례 팔리다가 1916년에는 헐려 버렸기 때문에 부착할 곳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뉘른베르크 시가 1999년에 이곳에 다시 기념비의 형태로 설치했다고 한다.


 

포이어바흐가 철학박사 학위와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강사로 일했던 에를랑겐대학. / 뉘른베르크의 ‘성 요한 공동묘지’에 있는 포이어바흐 석관.


포이어바흐 기념물의 전면에는 “인간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신을 창조했다”라는 저 유명한 명제가 새겨져 있다. 이 명제는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기독교 신학을 전복시킨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추상화해서 절대적인 존재로 신격화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신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일 뿐이다.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이렇게 되면 종교에 대한 논의는 신학이나 철학에서 심리학과 인간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는 사후 뉘른베르크의 ‘성 요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가 살던 곳은 시내 중심에서 동쪽 방향에 있고, 그가 묻힌 곳은 서쪽 방향에 있다. 다시 중앙역으로 와서 우반(U-Bahn)으로 두 정거장을 간 다음 트램으로 갈아타고 네 정거장을 더 가니 ‘성 요한 공동묘지’가 나왔다.

그런데 공동묘지가 너무 큰데다 흰 눈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은 토요일이라 관리사무소도 문을 닫았다. 아찔했다.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시기에 하소연 겸 푸념을 했다. 그러자 관리사무소 쪽으로 가시더니 나를 부르셨다. 달려가 보니 저명인사들의 묘지 위치가 새겨진 동판이 있었다. ‘K76’. 포이어바흐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잽싸게 달려갔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고, 그 번호가 가리키는 열에는 묘지가 많았으며, 더구나 모든 묘지가 묘비도 없이 석관으로 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흰 눈이 덮여 있어서 어느 것이 포이어바흐의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첫번째 묘지 위에 쌓인 눈을 치워보았으나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안 될 성싶어서 직감적으로 저거다 싶은 것을 골라서 눈을 치워보니 파란색으로 된 양각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1804년 생, 1872년 몰’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1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3시15분에 포이어바흐의 묘지 앞에서 서원했다. 당신에 대한 멋진 책을 써서 오늘 저지른 이 불경죄를 씻겠노라고.


그의 철학을 짚지 않고는 사상사를 제대로 논했다고 말할 수 없다. 포이어바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정신사적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한마디로 인간학적 유물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신에서 출발하는 기존의 신학은, 그리고 정신, 의식, 주체, 이성 등에서 출발하는 기존의 철학은 인간의 본질을 추상화하여 초월적 신이나 이념의 세계로 투사시킴으로써, 즉 인간의 본질을 인간의 밖에서 찾음으로써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사변적 사고체계는 인간의 실존과 경험적 현실에서 출발하는 사고체계, 즉 유물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물론 유물론은 포이어바흐 철학의 전유물은 아니다. 예컨대 기계론적 유물론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을 물리적 존재로 간주한다. 이에 반해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은 인간학적이다. 즉 총체적 인간을 철학적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바, 이 인간은 신체(육신)와 감각을 지니고 시간과 공간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존재이다. 인간의 신체(육신)는 정신의 부수현상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 그리고 자아와 세계가 주어지고 결합되는 통로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포이어바흐가 정신, 의식, 주체, 이성 등 인간 본질의 또다른 측면을 부정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총체적 인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다만 사변적 철학에서처럼 추상적 자아가 아니라 살이 있고 피가 흐르는 자아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 유물론은 그 이후의 다양한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것이 카를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헤겔의 역사적, 변증법적 사고를 결합시켜 사적,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축하여 인류 역사, 특히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원리를 규명해냈다.

뉘른베르크는 이 위대한 근대 철학자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또한 중세적 유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의 공중폭격으로 옛 시가지가 거의 다 파괴되었다. 그러나 전후 폐허를 복구하여 독일의 여느 도시 못지않게 중세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15) 세계 지적중심지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가 아름다운 건, 베버의 거대한 지적유산 때문이리라


하이델베르크 고성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 시내 풍경. 하이델베르크는 자연과 역사, 문화, 정신이 앙상블을 이루는 도시다.


하이델베르크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다. 그곳은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향연을 펼치는 공간이다. 산이 도시를 어머니처럼 포근하게 감싸고 있고, 그 사이를 네카어강이 정겹게 흐르고 있다. 이 강의 양쪽으로는 낭만적인 풍경이 연출되는데, 이 두 세계는 고풍스러운 다리에 의해 연결됨으로써 분리되면서 결합하고 있다. 또한 폐허가 된 고성이 하이델베르크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더해 준다. 폐허는 퇴락이 아니라 인간의 창작물이 온전히 자연의 산물처럼 느껴지도록 하는 미학적 매력이 있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이 ‘하이델베르크’라는 송가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을까? “오래전부터 난 너(하이델베르크)를 사랑하고 있노라/ 기꺼이 그대를 어머니라 부르며 끊임없이 노래를 바치고 싶노라/ 그대, 내가 아는 한/ 조국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여”

 

그러나 하이델베르크는 외면적으로만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다. 그에 더해 정신이라는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는 자연, 역사, 문화, 정신이 앙상블을 이루는 도시이다. 이 하이델베르크의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 막스 베버(1864~1920)다. 당시 ‘세계촌락’이라 불리며 독일, 아니 전세계의 지적 중심지로 군림하던 하이델베르크의 배후에는 베버라는 강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정신적 지도자가 버티고 있었다.


베버는 1897년에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경제학 및 재정학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은 1386년에 개교한 독일 최초의 대학인데 베버가 부임할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각 분야에 수많은 거장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버는 이미 1898년 초부터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인해 제대로 강의를 할 수 없게 됐으며, 결국 1903년 10월에 교수직에서 물러나 대학에서 아무런 발언권이나 결정권도 없고 학생을 지도할 수도 없는 명예교수가 되었다. 이처럼 갓 30세의 나이에 정교수가 되었지만 곧바로 날개가 꺾이고 만 것은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베버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하이델베르크에 살면서 연구에 몰두했으며, 그 결과 기존의 다양한 지적 유산을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종합함으로써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먼저 베버의 묘지를 찾기로 했다. 그는 도시 남쪽에 자리한 ‘산상 공동묘지’에 부인 마리아네 베버(1870~1954)와 합장돼 있다. 하이델베르크 중앙역에서 트램으로 다섯 정거장 가니까 나왔다. 이 공동묘지는 1848년에 개장한 유서 깊은 공간이며 총면적이 18헥타르에 달하고 그 안에 난 길을 모두 합치면 약 30㎞나 된다고 한다. 흔히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동묘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공동묘지라고 하기보다는 온갖 수목이 우거지고 다양한 양식과 형태의 묘지와 기념물이 어우러진 거대한 산상 공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동묘지는 그 아름다움은 물론 유명인사들이 많이 묻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1871~1925)가 그곳에 잠들어 있다.


하이델베르크 남쪽 ‘산상 공동묘지’에 있는 막스 베버의 묘지. 묘석에는 “그만큼 큰 그릇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베버의 묘석에는 “그만큼 큰 그릇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베버가 인류의 정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압축적이고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큰 그릇’ 막스 베버의 궁극적인 인식관심은 근대 서구의 역사적 형성조건과 발전과정 및 그 구조적 특징 그리고 병리적 현상에 있었다. 그리고 근대 서구의 독특성을 밝혀내기 위해 그 문화권을 다양한 문화권과 비교했다. 이러한 비교연구는 ‘합리화’라는 개념적·이론적 축에 입각해 추진되었으며, 또한 국가, 관료제, 봉건주의, 시민사회, 법, 자본주의, 시장, 도시, 종교, 예술, 과학, 에로스 등 실로 다양한 인간 삶의 영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연유로 베버는 서구중심주의자로 낙인찍히곤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의 소치이다. 왜냐하면 베버는 근대 서구 문화권이 여타 문화권보다 우월하다는 관점이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베버에 따르면 비단 서구 문화권에만 합리화 과정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권은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성취한다. 그는 인류역사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합리주의를 서구적 합리주의를 중심으로 비교함으로써 후자의 역사적·구조적 특수성을 좀더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베버의 거대한 지적 세계는 합리주의의 유형학으로 수렴했다.


베버의 묘지와 다른 여러 유명인사들의 묘지를 둘러보고 난 다음 버스를 타고 하이델베르크의 교통 중심지인 ‘비스마르크 광장’으로 나왔다. 그곳에서 도보로 시내 구경을 하면서 베버가 살던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이것저것 사진을 찍느라고 자꾸 시간이 지연되었다. 이렇듯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는 가까운 듯했지만 멀었다. 하이델베르크 같이 아름다운 도시에서는 카메라를 조심해야 한다. 날치기당할 염려 때문이 아니라 마구 셔터를 눌러대다가는 배터리가 다 닳아 없어져서 정작 중요한 것을 못 찍을 수가 있기 때문에! 


1897년 프라이부르크에서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한 베버는 시내에 살다가 1906년 네카어 강변의 저택으로 이사했다가 1910년에 바로 옆에 있는 웅장한 저택으로 이사했다. 베버 부부가 2층에 살았고 저명한 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에른스트 트뢸치(1865~1923) 부부가 3층에 살았다. 이 저택은 베버의 외할아버지가 1840년대에 지은 것으로서 그의 이름을 따서 ‘팔렌슈타인 빌라’로 불렸다. 네카어 강변의 풍만한 자연에 둘러싸인 그 빌라는 매우 아름다웠다. 현재는 ‘막스 베버 하우스’로 이름이 바뀌어서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국제 학생교류 센터와 어학코스로 사용되고 있다. 그곳에서는 네카어강과 그 건너편의 시가지와 고성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베버는 비록 대학에서 물러났지만 대학 저편에 위치하는 이 아름다운 저택에서 연구하고 저술하고 가르치면서 정신의 공화국 하이델베르크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막스 베버 하우스의 밖을 둘러보고 난 다음 그곳에 근무하는 여직원에게 안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오후 한시에 ‘하우스마이스터’(주택관리인)가 오니까 그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순간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합리적인’ 이유를 들이대며 거절하는 독일인들 특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까, 독일인들 말마따나 물어보는 데 돈 드는 것이 아니니까, 일단 하이델베르크 고성을 구경한 다음 점심을 먹고 다시 와서 하우스마이스터를 찾았다. 아, 그랬더니 너무너무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고 이것저것 설명도 해주고 자료도 챙겨주는 것이 아닌가? 그는 스페인계 독일인이었던 것이다. 그날 그 사람은 한국 친구 한 사람을 얻었고 나는 스페인 친구 한 사람을 얻었다. 막스 베버가 맺어준 이 우정은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내가 막스 베버 하우스의 내부를 꼭 보려고 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 저택은 베버가 살았을 뿐만 아니라 친교의 장소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베버 당시의 하이델베르크에는 지식인들의 친교가 매우 활발했는데, 그 중심에는 ‘베버 서클’과 ‘게오르게 서클’이 있었다. 베버 서클은 자연발생적인 지식인들의 친교였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베버의 명성을 듣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베버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매주 일요일 오후에만 방문객을 받게 되었다.


막스 베버 하우스의 내부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막스 베버와 마리아네 베버의 침실 및 서재가 있었으며 그 가운데 살롱이 하나 있었다. 막스 베버와 마리아네 베버가 쓰던 공간들에는 살롱으로 통하는 문이 하나씩 나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베버의 손때가 묻은 유품을 볼 수는 없었다. 바로 이 살롱에서 친교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친교의 장소라고 보기에는 좁아 보였다. 그래서 그 주택관리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옛 사진을 하나 보여주었다. 그것을 보니까 베버 당시에는 집 뒤로 정원이 나 있었는데,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 정원이라기보다 차라리 작은 동산이었다. 여기에서도 사람들이 친교를 나누었던 것이다.


베버 서클은 민주적이고 자유로웠다. 아주 다양한 국적과 연령의 사람들이 베버 서클을 찾았으며 방문객들의 활동분야도 학문(과학), 정치, 예술, 문학 등 아주 다채로웠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한데 어우러졌다. 그리고 여성들도 중요한 멤버였다. 베버 서클에서는 모임마다 주제가 바뀌었으며, 나중에는 그림도 감상하고, 음악도 연주하며 연극도 감상했다. 요컨대 베버 서클은 온갖 종류의 인간이 승선한 ‘작은 노아의 방주’였다. 이 방주에는 그 ‘사공’인 베버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승선하는 것도 환영했다. 그리하여 심미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아나키스트 등도 베버 서클에서 조우하고 소통했다. 이 가운데 특히 언급할 만한 인물은 슈테판 게오르게(1868~1933)다. 게오르게는 베버와 대척점에 있었다. 베버가 합리주의적 근대주의자였다면, 게오르게는 심미주의적 반근대주의자였다. 그럼에도 게오르게는 베버 서클에 참여했다.


이러한 게오르게를 중심으로 서클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게오르게 서클’이라고 한다. 게오르게 서클은 베버 서클과 아주 대조적이었다. 그것은 선별된 소수의 시인과 작가 및 지식인들로 구성된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엘리트 집단이었으며, 그 성격에 걸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을 배척했다. 이 서클의 구성원들은 일상적 삶을 벗어난 아름다운 삶, 즉 심미적인 삶을 추구했다. 이처럼 네카어 강변의 작은 도시 하이델베르크에서는 다채로운 세계관과 그에 입각한 다채로운 삶의 양식이 만개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신의 공화국이었으며 정신의 소우주였다.


 

막스 베버 하우스 바로 뒤에 있는 ‘철학자의 길’. 괴테, 헤겔, 야스퍼스, 블로흐 등의 철학자, 문인들이 이 길을 산책하며 사색에 잠기거나 지인들과 토론을 했다.

막스 베버가 살았던 ‘막스 베버 하우스’의 내부 모습. 베버를 따르는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던 ‘베버 서클’은 이 저택에 모여 학문, 정치, 예술, 문학 등을 논했다.


베버를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하이델베르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철학자의 길’이다. 이 길은 베버를 비롯해 괴테(1749~1832), 헤겔(1770~1831), 카를 야스퍼스(1883~1969),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 등 수많은 문인과 철학자 또는 사상가가 산책하며 사색에 잠기거나 지인들과 토론을 하며 정신적 교류를 나누었던 길이다. 철학자의 길은 막스 베버 하우스 바로 뒤에 있다. 해발 200m쯤에 위치하는 이 길에 오르니 하이델베르크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자연과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신이 앙상블을 이루는 이 아름다운 도시의 풍광을 감상하면서 길이가 약 2㎞에 달하는 철학자의 길을 천천히 걸으면 누구나 시인이 되거나, 철학자가 되거나, 화가가 되거나, 사진작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자의 길을 끝까지 걷고 난 다음 네카어강의 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길에 강과 그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찍는데 기어이 카메라가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16>‘횔덜린 문학산실’ 튀빙겐 

헤겔·셸링과 함께 튀빙겐 삼총사 불린 ‘방랑 시인’ 횔덜린

휠덜린 기념상 독일 튀빙겐 ‘구식물원’ 안에 있고 바로 옆에 튀빙겐대학이 있다. 휠덜린은 튀빙겐 대학 신학부를 다니며 헤겔, 셸링 등과 우정을 쌓았다.


특정 문학사조에 속하지 않고도 가장 위대한 독일 ‘비가 시인’ 칭송
그가 산 시대를 ‘정신의 궁핍’ 규정, 시인을 신과 인간 매개자로 바라봐 존재의 미적 형상화 다룬 작품 써
정신병 악화돼 방랑생활 접은 뒤 네카어강변 머물며 유명한 시 남겨

이번에 찾은 곳은 지난회 막스 베버를 만났던 하이델베르크와 마찬가지로 네카강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다. 주인공은 지난번에도 인용한 바 있는 ‘하이델베르크’라는 송가를 지은 바로 그 시인이다. 그는 막스 베버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네카 강변에서 살았다. 그리고 ‘네카강’이라는 송가도 지었다. 그 첫 두 연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대(네카 강)의 계곡들에서 내 가슴은 생명으로 일깨워지고/ 물결은 나를 에워싸고 찰랑거렸네./ 그대 방랑자여! 그대를 알아보는 마음씨 고운 언덕들/ 어느 하나도 나에게 낯설지 않네./그들의 정상에 서면 천국의 바람은 내 예속의 아픔을 풀어주기도 했고/ 환희의 술잔에서 생명이 빛나듯/ 계곡에선 파란 은빛 물결 반짝이었네.”

이 시인은 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이며, 그가 인연을 맺었던 도시는 튀빙겐이다. 횔덜린은 튀빙겐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생의 마지막 36년을 튀빙겐에서 보냈다. 튀빙겐은 하이델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대학도시이다. 튀빙겐대학은 1386년에 개교한 하이델베르크대학보다 약 백년 뒤인 1477년에 설립되었다. 14세기 말부터 15세기 말까지 독일은 이른바 대학의 ‘베이비붐’ 시대를 겪었다. 이 시기에 열두개의 대학이 문을 열었다. 그 첫번째 베이비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이라면, 튀빙겐 대학은 (마인츠 대학과 더불어) 열한번째 베이비였다. 현재 튀빙겐은 인구가 8만9000명 정도인데, 그 가운데 학생과 교직원(대학 병원 포함)이 각각 2만7000명, 1만명 정도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 이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를 기획할 때부터 횔덜린을 넣다 빼기를 수없이 했다. 그때마다 전체적인 목록을 다시 짜야 했다. 그 이유는 횔덜린에 대한 나의 지식이 너무나도 일천했기 때문이다. 독문학이라야 대학에서 부전공한 것과 ‘지성사적 모더니티 담론’이라는 연구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공부한 것이 전부인 나에게는 무척 버거운 주제였다. 그렇지만 횔덜린은 튀빙겐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마치 막스 베버와 괴테 및 실러가 각각 수많은 거장이 명멸한 하이델베르크와 바이마르를 상징하듯이!

일반인들에게 횔덜린은 낯선 이름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특정한 문학사조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독일 문학은 크게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의해 양분되어 있었다. 고전주의는 바이마르의 괴테(1799~1832)와 실러(1759~1805)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낭만주의는 슐레겔 형제(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1767~1845, 프리드리히 슐레겔 1772~1829)를 중심으로 예나에서 형성되어 독일 각지로 전파되었다. 횔덜린은 괴테와 실러 그리고 낭만주의자들과 교류했지만 고전주의에도 낭만주의에도 속하지 않았다. 아마 그런 까닭에 횔덜린은 당대에는 물론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잊혀진 시인이었다.

그러나 횔덜린은 비가, 송가, 비가, 찬가, 에피그램(경구), 각운시 등 다양한 양식의 작품을 남겼다. 횔덜린은 문학사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를 굳이 어떤 사조에 귀속시켜야 한다면, ‘횔덜린주의’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횔덜린을 가장 독일적인 시인이라고 격찬했으며, 낭만주의 작가 아힘 폰 아르님(1781-1831)은 횔덜린을 독일의 가장 위대한 비가(悲歌)시인이라고 칭송해마지 않았다. 횔덜린은 하이데거와 니체의 철학에 그리고 심미주의적 서정시인 슈테판 게오르게(1868~1933)를 비롯해 독일 시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니체가 고대 그리스 문화를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대별하는 방식은 횔덜린한테로 소급한다.

카셀에서 아이시이(ICE·도시 간 고속철도)로 세 시간 정도 걸려 슈투트가르트로 가서 완행열차로 갈아타고 한 시간 정도 더 가니 튀빙겐이 나왔다. 슈투트가르트에서 튀빙겐으로 가는 길은 공장 같은 건물이 자주 눈에 띄면서 아주 전원적이거나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아름다운 도시 튀빙겐을 더욱 드러나게 하기 위한 전주곡이었나 보다. 튀빙겐은 내가 이번 추로지향 순례에서 본 도시들 중에서 가장 중세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도시 튀빙겐은 한 마디로 횔덜린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튀빙겐 중앙역에서 한 10분 정도 걸어가면 네카강의 다리가 나오는데, 그 위에서 왼쪽으로 보면 강변에 동화에나 나올 법한 중세적인 건물들 옆에 노란색의 탑 같은 건물이 하나 눈에 띈다. ‘횔덜린탑’이다. 하이델베르크의 ‘막스 베버 하우스’가 연상되었다. 이 하우스도 구(舊)시가지에서 네카강의 다리를 건너면 (그 오른쪽)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횔덜린탑 바로 위에 횔덜린이 치료 받던 병원과 그가 살던 개신교 기숙사가 있다. 그곳에서 언덕배기를 넘어가면 바로 튀빙겐 구시가지가 나오고 그 끝자락에 ‘구식물원’이라는 꽤 넒은 정원이 하나 이어지는데, 거기에 횔덜린 기념상이 서 있다. 바로 그 옆에 튀빙겐대학이 있는데, 횔덜린은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시립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대학에서 그의 묘지로 가다 보면 횔덜린의 이름을 딴 길 ‘횔덜린슈트라쎄’를 지나게 된다.

휠덜린슈트라세(휠덜린길). 튀빙겐대학에서 
휠덜린 묘지로 가다보면 지나가는 길이다.

  
휠덜린탑. 휠덜린탑은 원래 휠덜린 숭배자 에른스트 침머의 집으로, 휠덜린은 이곳에서 인생의 마지막 30여년을 침머 가족의 보살핌속에서 시를 쓰면서 지냈다.
튀빙겐 대학에서 조금 떨어진 시립 공동묘지에 있는 휠덜린 묘지.


횔덜린은 1770년 네카 강변의 작은 도시 라우펜(현재 인구가 1만1천명 정도)에서 수도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두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재혼을 했다. 그러나 양아버지도 횔덜린이 아홉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횔덜린은 1788년 개신교 기숙사 장학생으로 튀빙겐 대학의 신학부에 입학했다.

이 기숙사는 1536년에 설립된 전통 있는 기관으로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요한네스 케플러(1571~1630) 같은 저명한 인사들도 이곳에 기거하면서 공부했다. 횔덜린은 헤겔(1770~1831) 및 셸링(1775~1854)과 같은 방을 썼으며 이들과 깊은 우정을 쌓았다. 이 세 사람을 가리켜 ‘튀빙겐 삼총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우정은 세 사람 모두에게 정신적으로 매우 풍부한 결실을 가져다주었는데, 횔덜린이 심한 정신질환을 앓게 되고 헤겔과 셸링의 관계가 점차 소원해지면서 1807년에 결렬되었다. 튀빙겐 대학의 개신교 기숙사는 오늘날에도 존속하고 있다.

횔덜린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는 것을 소원했지만 횔덜린은 대학 졸업 뒤 독일 각지를 떠돌면서 시인으로 살아갔다. 횔덜린은 한 마디로 방랑자였다. 이 기간 중 빵을 벌기 위해 주로 가정교사로 일했다. 서두에서 인용한 ‘네카강’이라는 송가에 나오는 “그대 방랑자여!”는 구절은, 어쩌면 쉼 없이 흐르는 네카강에 횔덜린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방랑하는 시인은 자신이 살고 노래한 시대를 궁핍한 시대로 보았다. 물질적으로는, 즉 빵은 풍요로울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궁핍한 시대라는 뜻이다. “빵은 지상의 결실이나, 빛에 의해 축복을 받아야 하고/ 천둥을 내리는 신으로부터 포도주의 기쁨이 비롯하리라.” 횔덜린이 보기에 이 궁핍한 시대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에, 즉 세계가 탈신화되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횔덜린에 따르면 이 시대에 시인은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소명을 갖는다.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왜 존재하는가를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말한다. 시인은 마치 성스러운 밤에 여러 나라를 배회하는, 포도주 신의 성스러운 사제들과 같다고.”

이런 점에서 횔덜린은 괴테보다는 실러에 가까웠다. 실러도 횔덜린처럼 탈신화된 세계를 한탄한다. 이 세계는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인과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고 실러는 횔덜린처럼 탈신화된 세계를 재신화시키고자 한다. 즉 그리스의 신들을 소생시키고자 한다. 실러는 시와 예술의 힘을 빌려 이를 달성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미학적 교육은 시인의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에 반해 괴테는 직업이 전문화되고 노동이 분업화된 오늘날의 합리적인 세계에서는 고전적 이상으로부터 체념 어린 작별을 고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의 요구에 헌신하는 것이 역사적·문화사적 숙명이라고 확신했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신은 은퇴했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행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괴테는 보았다.

횔덜린은 대학에서 신학 이외에도 스피노자(1632~1677), 라이프니츠(1646~1716), 칸트(1724~1894) 등과 같이 당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철학자들을 광범위하고 심도 있게 공부했다. 이때 튀빙겐 대학 교수들의 지도와 더불어 헤겔 및 셸링과의 지적 교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또한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해 스스로의 힘으로 칸트와 피히테의 철학을 학습했다. 그리고 1795년에는 직접 예나로 가서 피히테(1762~1814)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독일 관념론이 횔덜린의 문학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횔덜린은 주체와 객체의 구분(칸트) 또는 자아와 비자아의 구분(피히테)을 넘어서 이 둘의 변증법적 합일을 이루려고 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존재에서 찾았다. 존재는 주체나 객체 또는 자아나 비자아보다 근원적이며 이 두 차원을 통합하고 근거지우는 것이다. 이 존재에 도달할 수 있는 방식은 이성에 의한 인식이 아니라 지적 관조이다. 그것은 시인에 의한 미적 관조이다. 횔덜린은 존재의 미적 형상화를 추구한 근원의 시인이었다.

횔덜린의 오랜 방랑생활은 마침내 1806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정신병 증세가 악화되어 그해 9월 튀빙겐 대학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이 병원 건물에는 현재 튀빙겐 대학의 철학부가 자리하고 있다. 1807년 횔덜린은 그를 숭배하는 소목장이 에른스트 침머의 자청으로 네카 강변에 있는 침머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횔덜린탑이다. 횔덜린은 1843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수십년간 이 집에서 침머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시를 쓰면서 지냈다.

방문한 날이 토요일이라 오후 두시부터 횔덜린탑의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다. 조금 일찍 와서 기다리다가 제일 먼저 입장했다. 입장료가 싼 대신(내가 이번 시리즈를 추진하면서 낸 입장료 가운데 제일 쌌던 것 같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솔직히 볼 것이 없었다. 횔덜린이 기거하던 2층의 반원형 방에는 의자가 두 개 놓여 있고 벽에 그의 시‘봄’, ‘여름’, ‘가을’, ‘겨울’이 걸려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횔덜린탑은 박물관보다는 문화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도 일층에서 세 명이 기타를 치면서 무언가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횔덜린탑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횔덜린의 시‘겨울’을 떠올려 보았다. “휴식의 날, 한 해의 종말은 그러하다(사방에 폭풍우 불고 소나기도 내린다)./마치 완성을 묻는 소리와 같다./그리고 나면 봄의 새로운 형성이 모습을 나타내고/ 자연은 지상에서 그 당당함으로 반짝인다.”



<17>지멜이 말년 보낸 슈트라스부르크

지멜의 집 찾아낸 기쁨에…“여기 와본 사람, 있으면 나와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슈트라스부르크)에 있는 게오르크 지멜의 집. 이 집 4층에서 지멜이 살았다. 

지멜이 정교수로 있었던 슈트라스부르크대학이 가까운 곳에 있다.

‘돈의 철학’으로 유명한 지멜 도그마 버리고 경험세계 천착
유행·모험 등 사유 대상 삼아 철학의 인식세계 풍요롭게 해 신문에 강의일정 예고될 정도
그의 흔적 어렵게 추적한 끝에 마침내 집 앞에 이르렀는데…

지난 2월 2박3일의 일정으로 슈트라스부르크(스트라스부르), 프라이부르크, 바젤로 길을 잡았다. 이 세 도시는 너무 멀어서 왔다갔다하기가 영 마땅찮은데 서로 인접해 있어 ‘패키지’로 여행을 떠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첫날에는 슈트라스부르크에서 게오르크 지멜(1858~1918)의 발자취를 찾기로 했다. 이 도시는 현재 프랑스령이지만 지멜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독일령이었다.


슈트라스부르크는 이번 추로지향 순례에서 가장 찾고 싶은 도시였다. 지멜이 나의 작은 지적 세계를 떠받치는 주춧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막막한 도시이기도 했다. 이 시리즈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수많은 자료를 뒤지고 여러 사람한테 물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서 수업시간에 학생들한테 ‘썰렁한’ 유머를 던졌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지멜의 흔적을 찾는 것이 다음주까지 숙제다. 못 찾으면 단체기합에다 전원 F학점이다.” 학생들이 키득키득거린다. 그런데 한 여학생이 슈트라스부르크 여행 안내소에 문의를 해보라고 말한다. 그래 속는 셈 치고 전화를 했더니 시청을 연결해 주었다. 그리하여 지멜의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지멜은 전형적인 메트로폴리탄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와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그 대학에서 사강사로 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멜은 불운했다. 그가 부교수로 승진한 것은 사강사로 임명된 지 무려 15년이 지난 뒤였다. 그것도 전혀 보수도 없고 아무런 권리도 없는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1914년에야 슈트라스부르크대학의 정교수가 되었으나 얼마 뒤인 1918년 세상을 떠났다.


지멜의 불운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가 받은 시기와 질투도 결정적이었다. 지멜의 강의는 베를린의 엄청난 지적 사건이었다. 학생들뿐 아니라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 죄르지 루카치(1885~1971),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 같은 지식인들도 지멜의 강의를 들었다. 그의 강의는 가장 큰 강의실에서 진행됐으며 신문에 예고될 정도였다. 지멜은 그야말로 대학의 큰 매력이었다. 이 대학의 큰 매력이 대학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면, 별반 지적 매력도 없으면서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밥그릇이 깨지거나 작아지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러한 불운에도 불구하고 지멜이 학계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지멜의 아버지 사후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가 나중에 그를 입양한 사업가가 남긴 막대한 유산의 일부를 상속했기 때문이었다. 기왕 돈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니 꼭 그런 계기가 아니더라도 지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의 주저 <돈의 철학>을 언급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다. 흔히 이 책은 돈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지멜은 그와 동시에 돈에 기반하는 문화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지멜에 따르면 돈은 모든 인간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단순한 양적인 크기와 관계로 환원시켜버리며, 개인을 점점 더 단순한 경제적·사회적 기능의 담지자로 전락시킨다. 게다가 원래 수단이던, 그것도 절대적인 수단인 돈이 절대적인 가치로 고양되며 종래는 신격화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돈은 현대인의 사회적 삶과 문화적 삶의 물적·경제적 토대가 된다. 돈이 가지는 양적 논리는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면서 질적 논리로 비약한다. 돈의 전형적인 논리인 탈개성화와 탈인격화로부터 해방되어 개성과 인격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역설적이지만 돈의 소유에 의해 주어진다. 다시 말하자면, 돈을 소유한 개인은 생존을 위한 노동과 투쟁의 유물주의적 단계를 벗어나 사회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그리고 개인적·주관적 삶에 관심을 갖고 이를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슈트라스부르크 ‘서부 공동묘지’ 안에 있는 지멜의 묘지. 묘비 하나 없이 쓸쓸한 모습이다.


지난 2월 둘째 주 화요일 부푼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그런데 오펜부르크를 경유해 스위스로 가는 열차가 취소되었다. 오펜부르크에는 매시간 슈트라스부르크행 완행열차가 있으며 시간은 30분 걸린다. 연착이야 다반사이지만 운행 자체가 취소되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열차가 사람 마음을 잘 안다니까! 할 수 없이 만하임을 거쳐서 오펜부르크로 갔다. 그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오펜부르크에서 슈트라스부르크로 가는 내내 설레고 흥분되는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과 뒤섞이면서 제대로 자리에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


오펜부르크를 불어로 ‘오팡부르’라고 발음하는 것을 들었을 때, 인접한 두 국가의 언어가 아주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일화가 떠올랐다. 지멜은 1890년대 언젠가 미국의 한 대학으로부터 받은 초빙을 거절했다. 이는 그의 섬세한 인식과 사유를 독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화는 다시 오늘날 한국 대학의 한 풍경과 ‘오버랩’되었다. 최근 한국의 대학은 입만 열면 영어강의, 영어강의 하는 바람에 한국의 대학인지 미국의 대학인지 도통 분간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지멜처럼 외국어에 능통한, 그리고 거장의 반열에 오른 지식인도 외국어인 영어를 지적 인식과 사유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꺼렸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오늘날 한국의 대학이 한번쯤은 진지하고도 근본적인 자아성찰을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멜이 생애 마지막 4년(1914~1918년) 동안 정교수로 일했던 슈트라스부르크대학의 신캠퍼스. 상당히 큰 아테나상이 눈에 띈다.


슈트라스부르크 중앙역에 도착하니 이미 오후 1시가 훌쩍 넘었다. 일단 역에 있는 여행 안내소를 찾아가서 도시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얻었다. 그곳의 여직원은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웬만하면 독일어를 할 줄 알았다. 슈트라스부르크는 프랑스이면서 독일이고 독일이면서 프랑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직원이 일러준 대로 트램을 타고 한 정거장 가니까 지멜이 묻혀 있는 ‘서부 공동묘지’가 나왔다. 묘비 하나 없는 그의 작은 묘지는 일세를 풍미한 거장치고는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관리사무소에서 안내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찾지 못했을 것이다. 술 한 잔도 올리지 못한 채 큰절만 하고 애잔한 마음을 달래면서 다시 트램을 타고 슈트라스부르크대학으로 향했다. 이 대학은 1621년에 문을 열었으나 1681년 프랑스로 넘어갔다가 1871년 다시 독일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19년 다시 프랑스의 대학이 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학생 수는 4만2000명 정도이다. 지멜은 생애 마지막 4년을 이 대학의 철학 정교수로 봉직했다.


지멜은 철학에서 탁월한 연구업적을 남겼는데, 그 영역이 인식론, 형이상학, 문화철학, 예술철학, 생철학 등에 걸쳐 있을 만큼 광범위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도그마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경험적 현실의 세계로 임하는 철학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지멜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지성사적 위치를 차지한다. 철학이 경험적 현실세계로 임한다 함은, 철학이 경험과학화됨으로써 경험과학의 하부범주나 아류가 된다거나 또는 철학이 통속화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험과학이 다루는 대상을 철학이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철학의 인식세계가 넓어지고 풍요롭게 된다. 언뜻 단편적이며 무의미하게 보이는 다양한 현상들이 철학적 인식의 지평으로 들어오게 되기 때문이다. 돈, 유행, 모험, 장신구, 삶과 죽음, 남녀관계와 사랑, 교태, (도자기 등의) 손잡이, 액자, 폐허, 풍경, 알프스산맥, 예술가, 배우 등.


슈트라스부르크대학의 구캠퍼스. 앞에 보이는 것은 괴테의 두상이다.


슈트라스부르크대학의 신캠퍼스에서는 상당히 큰 아테나상이, 그리고 구캠퍼스에서는 괴테의 두상이 눈길을 끌었다. 구캠퍼스에 위치한 철학과를 찾았다. 여직원 혼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 온 용건을 말하고 이 도시에 무엇이든지 좋으니 지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잠시 인터넷을 검색하더니 “지멜은 사회학자이니까 사회과학대학에 알아보아야겠네”라고 말하면서 그쪽으로 전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말대로 지멜은 흔히 사회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사회학은 지멜의 부전공이었다. 그의 주전공은 철학이었다. 그러나 지멜은 부전공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사회학적 인식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왔다. 지멜은 오귀스트 콩트(1798~1857), 허버트 스펜서(1820~1903), 카를 마르크스(1818~1883) 등 그 이전의 사회학자들이 대변하던 사회에 대한 실체론적 관점을 단호히 거부하고 사회를 개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상호작용의 합으로 보았다. 지멜에 따르면 상호작용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서나 사회가 존재한다. 예컨대 연인이 다정하게 커피를 마시는 것도 사회이다. 이로써 사회는 개인들과 그들의 상호작용으로 해체되었다. 사회가 액화(液化)되었던 것이다.


아까 그 여직원이 전화를 끊더니 ‘슈트라스부르크시 아카이브’로 가보라고 말했다. 순간 이번에는 나 스스로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이 아름다운 도시는 다음에 구경하기로 하고 지멜이 어디에 살았는지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안 되면 하루나 이틀 더 투자할 각오를 했다. 트램을 타고 아카이브로 갔다. 완벽하게 독일어를 구사하며 아주 친절한 직원의 도움으로 여러가지 자료를 뒤졌으나 허사였다. 그러자 그 직원이 서류 상자를 하나 주면서 찾아보라고 했다. 그 안에는 개인의 간단한 신상과 전입날짜 및 사망날짜 등을 기록한 서류가 잔뜩 들어 있었다. 지멜의 것도 있었다. 그러나 나도 그 직원도 당시 시청 공무원이 손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주소를 정확히 읽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서체가 낯선 점도 있었지만, 거기에 적혀 있는 독일어 주소가 오늘날에는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도 있었다. 속이 바싹바싹 탔다. 그러자 그 직원이 비고란에 있는 사람 이름을 보더니 책자를 하나 가지고 와서 그 사람의 거주지를 찾아내었다. 그는 지멜과 같은 층에 살던 사람이었다. ‘슈테른바르테슈트라세 17번지’, ‘천문대 거리 17번지’라는 뜻이다. 지멜은 이 집의 4층에 살았던 것이다.


나는 그 직원에게 이름을 물어보고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한 다음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트램을 타고 두 정거장 가니 그 길이 나왔다. 땅거미가 내리기 직전이었다. 지멜이 살던 집은 그가 가르치던 대학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었다. 집과 대학 사이에 있는 천문대가 그 거리 이름의 연원이 되었던 것이다. 사진을 찍고 난 다음 나는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로 몇 번이나 소리쳤다. “전세계 지식인 가운데 지멜이 살던 집을 본 사람이 있으면 나와 봐.”




<18> 하이데거 철학 낳은 프라이부르크

나치 편든 하이데거 프라이부르크는 그를 지우려 했다

  

프라이부르크 북쪽에 위치한 하이데거가 살던 집. 비탈진 길에 자리한 이 집은 아담하고 단아했지만 기념편액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동조한 탓에 프라이부르크는 하이데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프라이부르크서 신학·철학 공부
후설의 현상학에 큰 영향 받지만 존재론적 물음을 출발점 삼아 기초존재론으로 독자 철학 형성

세계대전때 학생들 나치 참여 독려, 프라이부르크인들에겐 부정적 기억


나는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다. 그리고 청강과 도강을 반복하며 철학을 배웠다. 당시에는 부전공을 하나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 독일에서는 철학을 제2 부전공으로 택했다. 이처럼 지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철학에 매달린 이유는 사회학, 특히 이론사회학을 제대로 하려면 철학적 훈련이 필수적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이지만 중요한 철학자들에 대해서 조금은 풍월을 읊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철학자가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이다.

내가 하이데거를 어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언어유희, 아니 심지어 선문답처럼 들린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관련해 사용하는 용어만 해도 너무 많아서 혼란을 주기 십상이다. ‘존재’, ‘존재성’, ‘존재자’, ‘존재자의 존재’, ‘현존재’, ‘상(常)존재’, ‘안에 있음(존재함)’, ‘곁에 있음’, ‘더불어 있음’, ‘눈앞에 있음’, ‘손안에 있음’…. 세미나나 컬로퀴엄에서 이런 개념들이 난삽하게 얽혀 있는 발제문을 듣고 있노라면 눈꺼풀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아무튼 하이데거는 나에게 ‘뜨거운 수프’였다. 먹고는 싶지만 뜨거워서 먹을 수 없는 수프!

이번에는 프라이부르 크에서 이 뜨거운 수프 하이데거의 발자취를 찾기로 했다. 전날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자고 아침 일찍 오펜부르크로 나와 고속철도(ICE)를 탔다. 프라이부르크까지는 30분 걸렸다. 프라이부르크는 인구가 23만명 정도로 독일에서 34번째로 큰 도시이다.

프라이부르크 중앙역에서 보니 도시가 좀 커도 물어보면서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시청 안에 있는 여행안내소를 찾아갔다. 이 도시가 하이데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내하는 여직원에게 프라이부르크를 찾아온 연유를 말하니, 대뜸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대답한다.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 때문이냐고 되물었더니 아주 단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는 식으로 말한다.

하이데거는 1933년 나치에 참여했으며 그해 11월3일에는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의 자격으로 ‘독일 학생들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통해 학생들에게 나치 참여를 독려했다. 아마 이러한 전력이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인 하이데거에 대한 프라이부르크의 집단기억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솔직히 나 같은 아마추어가 이 문제를 판단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만약 하이데거의 과오가 “그의 사유의 결과였다면 그의 사유는 그러한 과오와 더불어 끝장났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유는 1934년 이후에야 본래적으로 전개되었다. 그가 오랜 기간에 걸쳐 대학에서 행하였던 모든 작업은 사유의 경험을 전한다는 유일한 과제를 위한 것이었다.” 물론 하이데거의 과오를 정당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와 그의 지적 세계를 한 특정한 시점이나 행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프라이부르크에서 하이데거의 흔적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이 집은 구 시가지를 벗어나 북쪽으로 한참 걸어야 나온다. 대중교통을 이용할까 하다가 마음도 썰렁하고 해서 그냥 걷기로 했다. 꽤 비탈진 길에 자리한 이 집은 아주 아담하고 단아했다. 산을 배경으로 하고 온통 흰 눈을 이고 있는 모습이, 뭐랄까 ‘설중매’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기념편액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그곳에서 다시 걸어 프라이부르크대학을 찾아갔다. 이 대학은 1457년 독일에서 일곱번째로 문을 열었으며 현재 학생 수는 2만4000명 정도이다. 철학과가 소재하는 건물 안에 있는 뮤즈(문예와 학술의 아홉 여신)의 상이 눈에 띄었다. 밝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어둡고 슬픔과 고뇌에 잠긴 모습이었다. 하이데거는 메스키르히라는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현재 인구가 8200명 정도)에서 태어나 콘스탄츠와 프라이부르크에서 김나지움을 다닌 뒤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신학, 철학 및 자연과학을 공부했으며 철학 박사학위와 ‘하빌리타치온’(독일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프라이부르그 대학 전경)

하이데거는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원외 정교수’로 재직한 후 1928년 에드문트 후설의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베를린대학의 초빙을 두번씩이나 거절했으며 뮌스터대학의 초빙도 거절했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그리고 그의 고향인 메스키르히에 잠들어 있다). 한마디로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인이었던 것이다.

하이데거의 하빌리타치온 지도교수는 신칸트학파의 한 지류인 서남학파의 거두 하인리히 리케르트(1863~1936)였으며, 하이데거가 마르부르크대학으로 초빙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신칸트학파의 또다른 지류인 마르부르크학파의 거두 파울 나토르프(1854~1924)였다. 하이데거가 그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의 집필에 착수한 것은 마르부르크 시절인 1923~24년 겨울학기였으며, 이 책이 출간된 것 역시 마르부르크 시절인 1927년이었다. 이렇게 보면 하이데거의 철학사상이 형성, 발전하는 데에 무엇보다도 신칸트학파 철학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신칸트학파가 몰락기에 접어들었으며 마르부르크학파도 해체된 상태였다. 하이데거 철학의 젖줄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은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의 현상학이었다. 현상학을 창시한 후설은 1901년부터 괴팅겐대학의 철학 정교수로 재직하다가 1916년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리하여 프라이부르크는 현상학 연구와 운동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의 조수로 일했으며 그의 현상학을 철저히 연구했다. 또한 강의에서도 심도있게 후설의 저작을 다루었다. 사실 후설 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관심은 대학 첫 학기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그때부터 그의 책상 머리맡에는 후설의 〈논리 연구〉가 꽂혀 있었다고 한다. 1900~1901년에 두 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현상학의 ‘출생 신고서’였다. 이렇게 보면 하이데거가 철학을 보편적인 현상학적 존재론이라고 규정한 이유가 드러난다.  (프라이부르크대학의 뮤즈(문예와 학술의 아홉 여신)상)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가 후설 현상학의 단순한 계승자가 아니라 거기에서 출발해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가 후설의 현상학에서 배운 것은 대상이 아니라 방법이다. 후설 철학의 대상은 의식의 작용 또는 체험을 현상학적으로 구명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하이데거 철학은 처음부터 존재론적 물음에 그 출발점이 있었다. 의식이 주체의 문제라면 존재는 주체를 넘어서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다. 존재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포괄한다.

물론 하이데거는 인간 삶에서 주체, 의식, 자아 등이 중요하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존재론적 토대를 찾고자 했다. 다시 말해 그 이전의 철학이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따라서 더 이상 소급할 수 없는 마지막 심급으로 간주했던 것을 하이데거는 다시 한번 소급하고자 했다. 바로 이 점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사적 위상을 엿볼 수 있다.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은 판단중지와 현상학적 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쉽게 말하자면 기존의 이론이나 견해 등에 의한 판단을 중지하고 근원과 토대로 파고드는 것이다. 이는 달리 본질직관 또는 본체직관이라고 한다. 그렇게 얻어진 근원과 토대가 선험적 주관성과 상호주관성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이 현상학적 본질직관을 한 단계 더 작동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과 그 작용은 (인간)존재의 한 양태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이데거는 스스로를 자기 자신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 즉 현상에 도달한다. 이것이 존재이다. 이는 후설이 설정하는바 인간의식에 주어지는 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존재의 본질구조 또는 실존범주를 구명하려고 하며, 바로 이런 점에서 기초존재론이라고 불린다. 내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이 갖는 일대 장점은 존재 자체에서 존재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있다. 이는 그가 제시한 세계성(세계-내의-존재), 내던져짐, 기투(企投), 시간과 공간, 언어, 기술과 도구, 배려함, 돌봄, 둘러봄, 불안, 죽음 등 일련의 존재론적 개념을 보면 쉽게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실존철학, 인간학, 심리학, 사회학, 신학 등 다양한 분야에 풍요로운 지적 자양분을 공급해준다.


내가 프라이부르크를 찾았을 때는 2월 중순인데도 한겨울이었다. 도시는 설국이었다. 그러나 추로지향 순례는 별반 수확이 없었다. 진정한 프라이부르크인, 하이데거를 기리지 않는 프라이부르크가 서운하고 야속했다. 시내 구경을 하면서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지만,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합된 고풍스럽고 웅장한 대성당을 보아도 앙금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걷다 보니 시청에 이르렀다. 그 앞쪽에 교회가 있고 그 광장에 기념상이 하나 서 있었다. 인부 한 사람이 조명장치를 손보고 있었고 그 앞에는 고상하게 생긴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프라이부르그 시청)

그 인부한테 누구의 기념상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카이네 아눙’(Keine Ahnung)이라고 답한다. 모른다(No idea)는 뜻이다. 다시 할머니께 물었더니 마찬가지였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분풀이한다고, 괜히 심술이 뻗쳐서 “나는 지금까지 카이네 아눙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랬더니 그 두 사람 파안대소를 하는 게 아닌가? 그게 인연이 되어 그들과 한동안 조금은 껄렁한, 조금은 진지한 수다를 떨었더니 한결 마음이 풀어졌다.

문득 하이데거의 언어철학 한 조각이 기억을 밀치고 올라왔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규정한다. 이 명제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으며 곧잘 인용되거나 회자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언어란 단지 타인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이거나 개인의 내면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가 머물고 존재가 세계 및 사물과 만나는 곳이다. 그러니까 언어는 존재의 근원이자 바탕이 된다. 여기에서 존재란 단순히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삼라만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한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거나 무분별하게 외국어를 남용하는 등 언어생활에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처럼 내 존재의 집을 버리고 다른 존재의 집에 존재하려는 이 존재자들의 존재론적 양태를 보았다면 하이데거는 무어라고 했을까? 내가 너무 심하게 하이데거 흉내를 냈나?



<19> 니체의 교수시절, 스위스 바젤

“망치로 철학한다”는 니체가 깬 건, 정치와 문화의 갑을관계였다

독일서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바젤대학서 교수 초빙된 니체
철학을 문헌학·심리학과 결합 아름다운 언어로 사유 담아내

그의 철학 핵심은 ‘반시대성’
문화를 정치에 예속시키며 왜소화된 근대적 주체 비판... 투쟁하는 모더니티 철학자

 
바젤대학 건물의 외변에 조각돼 있는 ‘스승과 제자’ 조각상. 스승과 제자의 키가 똑같은 것이 눈에 띈다. 
바젤대학은 스위스 최초의 대학으로, 프리드리히 니체가 고대 그리스 언어와 문학 담당 교수로 재직했다.

“나는 망치로 철학을 한다.”


철학은 마치 망치로 모든 것을 때려 부수듯이 기존의 모든 가치를 전복시킨다는 뜻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이다. 이번에는 이 망치를 든 철학자의 궤적을 찾아 바젤로 향했다. 프라이부르크에서 고속열차(ICE)를 타니 50분이 채 안 걸렸다.

니체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본대학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는데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인 1868~69년 겨울학기 바젤 대학의 교수직을 제안받았다. 그가 이미 탁월한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라이프치히대학은 그때까지 발표한 논문을 근거로 니체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하고 교수자격 취득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면제해주었다.

1869년 2월 니체는 바젤대학의 고대 그리스 언어와 문학 담당 부교수로 초빙되었고, 그 이듬해 3월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할까, 니체는 1876년부터 병 때문에 여러 차례 휴직을 해야 했고 1879년에는 결국 사직을 했다. 1876년부터 니체는 건강에 좋은 곳을 찾아 베네치아, 시칠리아, 투린, 니스, 제네바, 질스-마리아 등을 떠돌았다. 그러다가 1889년 1월 쓰러진 뒤 10년 이상을 정신적으로 혼미한 상태로 살다가 1900년 8월 바이마르에서 세상을 떠나 고향에 묻혔다.


문득 괴테가 말년에 한 말이 떠올랐다. “독일의 위대한 점은 놀랄 만한 국민문화가 나라의 모든 지역에 골고루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에는 나라 전체에 20여 개의 대학과 100개 이상의 공공도서관이 흩어져 있다. 미술 수집품을 모아놓은 미술관이나 자연 전체의 영역에 걸친 수집품을 모아놓은 박물관의 숫자도 상당한데, 그것은 각 군주가 그러한 아름다운 것과 유익한 것을 가까이 모아두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인문계 중고등학교나 기술 공업학교는 남아도는 형편이고, 학교가 없는 마을은 독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 시리즈는 사상가의 고향이 아니라 사상의 고향을 찾는 기획이니, 나중에 니체에 대한 책을 쓸 때 꼭 뢰켄을 찾겠다고 지도교수님께 말씀드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다짐했다.


비록 고전문헌학을 공부하고 고대 그리스 언어와 문학 교수를 역임했지만 니체는 철학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헌학에 바탕을 두는 철학이라는 표현이 그의 지적 세계에 어울릴 것이다. 게다가 니체가 구축한 계보학적 접근방법은 철학과 심리학을 결합시키고 있다. 니체는 이러한 결합을 자신의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내적-정신적 삶과는 무관한 형이상학적-초월철학적 도덕이론에 대한 반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니체의 계보학은 문화의 계보학이며 문화의 사회심리학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처럼 철학을 문헌학 및 심리학과 결합시킨 점에서, 니체가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아주 중요한 계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니체 철학이 갖는 또 다른 장점은 빼어난 문학성이다. 내가 ‘체계적으로’ 니체를 공부한 것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독일 대학교수 자격취득 논문을 쓸 때였다. 독일어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평가할 처지가 못 되는 내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언어가 장려한 철학적 사유를 담아내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철학을 배운 풋내기 사회학자의 마음을 단숨에 빼앗았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시를 짓고 그리스 언어와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횔덜린 시의 진가를 처음 발견한 사람도 바로 니체였다.


바젤은 인구가 17만명이 조금 넘으며 독일에서 43번째로 큰 도시인 자브뤼켄과 맞먹는다. 이 정도면 충분히 걸어다닐 만하다. 게다가 바젤은 말이 스위스지 독일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걸어다니는 데에 아무런 지장도 없다. 사실 여행은 지도를 들고 물어물어 찾아가야 제 맛이 난다. 그러다가 길동무라도 생기면 금상첨화이다. 그런데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독일이 아니라는, 그러니까 ‘남의 땅’이라는 점이 적지 않은 심적 부담으로 와 닿았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니체가 살던 곳을 찾았다. 두 군데였다. 니체는 ‘슈팔렌토어베크’ 48번지에 있는 집에서 1869년부터 1875년까지 살았고, ‘슈첸그라벤’ 47번지에 있는 집에서 1875년부터 1876년까지 살았다. 이 두 거리는 서로 만나며 니체가 살던 두 집은 한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 두 집 모두 기념편액을 부착해 바젤이 이 비운의 철학자와 맺은 짧지만 소중한 인연을 기리고 있다. 바젤대학도 니체가 건강상의 이유로 떠나는 것을 진심으로 애석해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도 니체에게 상당한 액수의 연금을 주었다고 한다.


  

니체가 1875~1876년에 살았던 바젤의 슈첸그라벤 47번지 집 / 니체가 1869~1875년 살았던 바젤의 슈팔렌토어베크 48번지 집.


이 두 집은 바젤대학 바로 옆에 있다. 바젤대학은 1460년에 개교한 스위스 최초의 대학이다. 인접한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이 문을 연지 3년 뒤의 일이다. 현재 학생 수는 1만3000명 정도로 그리 큰 편은 아니다. 문화사의 창시자 야콥 부르크하르트(1818~1897),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꼽히는 칼 바르트(1886~1968),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1883~1969)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바젤대학에서 가르쳤다. 이 가운데 부르크하르트는 니체와 교분이 있었으며 니체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다.


바젤대학 건물의 외벽에 양각되어 있는 “스승과 제자”라는 조각상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스승과 제자의 키가 똑같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일방적인 지배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라는 사실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하고 멋대로 상상해 보았다. 그렇다면 제자를 스승보다 더 크게 해서 “청출어람”을 형상화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서구인들의 예술세계에 너무 동양적인 사고를 투사시켰나? 아니 그렇게 하면 ‘포스트모던’한 예술이 되지 않을까?


흔히 니체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선구자요 포스트모더니티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 간주된다. 니체는 망치로 철학을 한다고 했으니, 즉 기존의 모든 가치를 때려 부순다고 했으니, 그의 지적 세계를 포스트모더니티, 즉 탈근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아예 ‘파(破)근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니체의 철학은 근대 서구사회 전반, 그러니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와 시민사회, 과학과 교육 그리고 기독교 등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비판과 대안을 모색한다. 이 철학적 사유를 관통하는 인식관심은 그 시대의 근본적인 삶과 실천의 문제에 있었다. 그것은 서구의 문화, 가치와 도덕이 몰락하고 타락하며, 또한 그로부터 데카당스하고 니힐리즘적인 인간유형과 행위유형이 나타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이런 한에 있어서 니체는 전적으로 시대적인 사상가이다. 그러나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화, 가치 및 도덕의 정립을 통해서 근대의 심각하고 근원적인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니체는 모든 가치를 재평가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이런 한에 있어서 그의 철학은 전적으로 반시대적인 성격의 것이다. 요컨대 니체의 철학은 반시대성의 시대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니체를 포스트모더니티의 선구자요 포스트모더니티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 간주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니체는 모더니티의 철학자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싶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모더니티의 또 다른 한 측면인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에 대한 성찰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는 정치적, 경제적 및 사회적 모더니티를 바탕으로 하면서, 동시에 이와는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 그리고 투쟁의 관계에 있다.


니체에 따르면 근대세계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삶의 영역이 예술과 문화의 영역을 예속시키고 지배하게 됨으로써, 거리와 고귀함의 파토스에 기반하는 귀족주의적 개인주의 대신에 데카당스하고 니힐리즘적인 인간유형과 행위유형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니체가 근대세계와 인간의 주체를 해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합리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근대세계와 왜소해지고 무화된 근대적 주체를 디오니소스적이고 미학적인 세계와 주체로 대체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니체의 철학은 근대세계의 디오니소스적-미학적 갱생을 지향하는 지적 모험인 것이다. 그것은 철저한 부정인 동시에 철저한 긍정이다. 그것은 철저한 가치의 비판이자 파괴인 동시에 철저한 가치의 정립이자 창조이다.


니체는 그때까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모더니티의 다른 측면인 미학적-문학적 모더니티를 시적인 수단을 이용해서, 그리고 때로는 매우 과장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논했다. 그것은 모더니티에 대한 가장 아방가르드한 자아성찰이자 자기반성이었다. 그것은 포스트모던한 모더니티 이론이었다.


바젤 대학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다음 시내 구경을 나섰다. 사실 외적으로 보면 바젤은 독일의 여느 도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시장 광장에 서 있는 시청이 눈길을 끌었다. 진한 피를 연상케 하며 이국적인 정취를 풍기는 붉은 색의 건물이 그 주변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 바젤 시청은 1504년부터 1514년까지 붉은 사암으로 지은 후기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유서 깊은 건축물이라고 한다.


바젤 시청


스위스가 외적으로 독일과 다른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유로가 아니라 스위스 프랑켄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처음 바젤에 도착했을 때 중앙역에 있는 여행 안내소에서 시내 대중교통 일일 사용권을 샀다. 9프랑켄이라고 해서 10유로를 냈더니 3프랑켄을 거슬러주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다시 중앙역에 돌아와 물을 한 병 샀다. 온통 도시를 휘젓고 다니느라 목이 탔다. 물 값은 프랑켄과 유로 두 통화로 치렀다. 일일 사용권을 사면서 거슬러 받았던 3프랑켄으로는 모자라 50센트(0.5유로)를 보탰다. 바젤 중앙역에 있는 상점들 중에는 직접 유로를 받는 곳도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마시는 물보다 달고 시원한 감로주가 있던가, 어디!



<20> ‘프로이트의 도시’ 빈 

베르크가세 19번지!…프로이트 심리학 혁명의 진원지였다

누군가 말하기를, 서구 사상사에는 세번의 대혁명이 있었다. 첫번째는 우주론적 혁명으로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의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관념이 전복되었다. 두번째는 생물학적 혁명으로서,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는 관념이 전복되었다. 세번째는 심리학적 혁명으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해 인간의 정신은 의식이라는 관념이 전복되었다.


 

오스트리아 빈 베르크가세 19번지에 있는 프로이트 박물관. 프로이트는 47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았다. 

프로이트는 낮에는 이 집의 진료실에서 상담과 치료를 했고, 저녁에는 서재에서 이를 정리하고 이론화하는 작업을 했다.


이번 추로지향 순례의 마지막은 이 세번째 대혁명의 주인공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로 장식하게 되었다. 나는 독일에서 정신분석학을 제1 부전공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프로이트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다. 참고로 위에서 한 말은 다름 아닌 프로이트가 한 것이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이 가운데 가장 중대한 혁명은 바로 자신에 의한 심리학적 혁명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셋째 주 월요일 빈을 향해 출발했다. 1박 2일의 일정이었다. 학기가 막 끝나서 그런지 마음이 홀가분했다. 도둑질도 자꾸 하면 는다고, 국경도 넘다 보니 이제는 아예 대놓고 넘게 되었다. 러시아, 프랑스, 스위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 다만 (에라스뮈스의 나라)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못하고 (카프카의 나라) 체코 국경을 넘지 못한 것이 끝내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프로이트는 1856년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지방(오늘날에는 체코 공화국에 속함)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860년 가족이 빈에 정착하면서부터 프로이트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1938년 영국 런던으로 망명할 때까지 빈에서 살았다. 그것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이었다. 빈은 프로이트의 전부였다. 카셀에서 빈까지는 고속열차(ICE)로 7시간 정도 걸렸다. 이번 추로지향 순례에서 가장 긴 열차여행이었으며, 칸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 다음으로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빈 서부역에 도착한 후 도시가 너무 커서 우반(도시 내를 천천히 운행하는 지하열차)과 슈트라센반(도시 내를 천천히 운행하는 지상열차)을 타고 돌아다녔다.


빈은 프로이트의 전부이면서 프로이트의 도시이다. 곳곳에 프로이트의 흔적이 남아 있고, 누구나 프로이트를 안다. 빈의 프로이트 또는 프로이트의 빈은 한 지점으로 수렴한다. ‘베르크가세’ 19번지! 이것은 인구 176만 정도로 오스트리아 최대 도시인 빈에서 가장 유명한 주소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1891년 늦여름 이 집의 이층으로 이사한 후 1938년 6월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살았다. 또한 이 집은 프로이트 가족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빈대학의 교수였으나 아무런 보수도 없는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그가 이 집에서 개업의로 벌어들이는 돈이 가족의 생계 유지 수단이었다.


저녁에 프로이트는 이 집에 있는 서재에서 독서하고 연구하고 집필했으며 수많은 편지를 읽고 썼다. 이처럼 베르크가세 19번지는 프로이트의 가정이자 일터이며 연구실이었다. 정신분석학은 바로 이 집의 진료실에서 이루어진 상담과 치료 그리고 서재에서 이루어진 정리와 분석 및 이론화 작업의 결과였다. 말하자면 베르크가세 19번지는 프로이트의 전부였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살던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박물관은 빈의 명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거기에 전시되어 있는 물건은 어떻게 보면 ‘찌꺼기’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1938년 9월 런던 북서쪽에 위치한 (주로 예술가들과 문인들이 거주하는) 햄프스티드 지역에 정착했다. 그리고 빈에 놔두고 온 가구와 책 그리고 수집품을 그리로 보내도록 했다. 프로이트는 그것들을 빈에서와 똑같이 배치함으로써 런던을 마치 그의 영원한 정신적 고향인 빈에서처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도 환자를 진료하고 저술을 하며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는 등 생의 마지막까지 매우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았다. 런던의 이 집도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빈의 프로이트 박물관에는 찌꺼기만 남아 있음에도 전시된 물건이 아주 많았으며 프로이트의 체취를 직접 느낄 수 있는 유품도 상당히 눈에 띄었다. 프로이트를 제1 부전공으로 공부하고 한국 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논의에서 자주 정신분석학에 준거하는 나에게 설명서를 읽어가며 그의 삶이 배어 있는 공간과 사물을 찬찬히 감상하는 것은 여간 큰 즐거움이 아니었다. 특히 1934년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은 현관이 눈길을 끌었다. 프로이트가 사용하던 모자와 지팡이가 걸려 있고 진료 갈 때 쓴 것으로 보이는 큰 가방도 있는데, 그 가방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니셜 S. F.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곳에 서니 마치 시간을 뛰어넘어 직접 프로이트를 방문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또한 방문객들을 위해 틀어 놓은 비디오에서 매일 사진으로만 보던 대사상가의 생생한 모습을 대하니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프로이트 박물관 현관 모습. 프로이트가 사용하던 모자와 지팡이, 진료 갈 때 썼던 큰 가방이 놓여 있다.

이 박물관의 한 공간은 안나 프로이트(1895~1982)에 할애되어 있다. 안나 프로이트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3남 3녀 중 막내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정신분석학의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는 아동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간주되며(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원칙적으로 성인을 그 대상으로 한다) 자아심리학의 개척자 중 한 명이다. 이렇듯 프로이트의 막내딸이 정신분석학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면, 과연 그의 부인은 어떠했을까? 그는 정신분석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언젠가 정신분석학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자 그는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은 외설문학의 한 형태가 아니던가요?”


베르크가세 19번지에서 ‘프로이트 삼매경’에 빠져 있다 보니 훌쩍 시간이 흘렀다. 꼭 먹던 과자를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마지못해 그곳을 나섰다. 아주 가까운 곳에 ‘포티프 교회’가 있다. ‘봉헌교회’라는 의미의 이 교회는 19세기 후반 네오고딕 양식(18~19세기에 부활된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로서 하늘로 쭉 뻗은 두 개의 첨탑이 인상적이었다. 바로 그 포티프 교회 앞에 공원이 하나 펼쳐져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공원’이다. 대략 2만9000㎡로 그렇게 크다 할 수 없는 이 도심 공원은 빈 시민들이 즐겨 찾는, 그리고 시위장소로 애용하는 곳이라고 한다. 내가 간 날은 약간의 눈만이 겨울의 끝자락임을 알리고 있었고 사람들이 여름에 남기고 간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와 웃음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프로이트 박물관의 내부 모습

그 공원에 프로이트 기념비가 있는데, 그 기념비의 상단에는 그리스어 ΨΑ(프시 알파)가 새겨져 있고 하단에는 독일어로 “지성의 목소리는 부드럽다”는 아주 짤막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ΨΑ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표시하는 약자였다. 그리고 그 아래의 문구는 프로이트의 한 저서에서 따온 것인데, 원래는 다음과 같이 좀 더 길다. “지성의 목소리는 부드럽다. 그러나 누군가 들어줄 때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처럼 지성을 강조한 것을 보면 프로이트는 계몽주의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누구보다도 계몽주의를 철저하게 파괴한 사상가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계몽주의는 이성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출발한다. 이에 반해 프로이트는 인간이 무의식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가 창시한 정신분석학은 반계몽주의의 전형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프로이트야말로 계몽주의의 진정하고도 위대한 후계자이다. 프로이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과 욕망을 합리적으로 충족시키는 문화, 쾌락과 노동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 인간과 사회가 조화를 이루는 문화이다. 그는 이러한 문화의 가능성을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에서 찾는다. 요컨대 프로이트는 반계몽주의적 계몽주의자였던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공원 옆에 난 큰 차도를 건너니 바로 빈대학이 나왔다. 이 대학은 1365년 독일어권에서 두번째로 창립되었으며(첫번째는 1348년에 문을 연 프라하대학) 현재 학생 수가 9만명이 넘어 독일어권에서 가장 큰 대학이다. 대학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프로이트의 기념상이 있었다. 게다가 이 대학을 빛낸 인물들의 기념상이 죽 늘어서 있는 게 아닌가? 마치 거대한 정신의 공화국에 온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작은 어깨가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저 큰 정신들은 나에게 한층 더 치열하게 인식과 사유를 하라고 격려하는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벨뷔 궁전으로 향했다. 프로이트는 1895년 6월을 이 궁전에서 보냈는데 그 어느 날 꿈이 소망충족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 사상사적 대사건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있다는 말을 오래전부터 들어서 꼭 한번 보고 싶었다. 세 시간을 헤맸지만 찾지 못했다(나중에 확인해보니까, 이 궁전은 오래전에 허물어지고 그 터 위에 기념비를 세운 것인데 나는 그와 이름이 비슷한 벨베데레 궁전의 주위를 맴돌았던 것이다). 완전 녹초가 되어 ‘지그문트 프로이트 사립대학’으로 가는 슈트라센반을 탔다. 이 대학은 2005년 개교했으며 정신치료학에 중점을 두고 있다. 현재 학생 수는 약 1200명이다. 솔직히 말해 독일어권에서 그렇게 정나미 떨어지는 대학 건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강의 내용을 보니 나 같은 아마추어 정신분석학자의 구미를 끌 만한 것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마지막으로 빈 시청 근처에 있는 프로이트의 단골 카페를 찾기로 했다. 그런데 도중에 문득 좀 미신적인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찾을 것을 무어라도 하나 남겨두어야 프로이트와의, 그리고 거대한 지적 유산을 보듬고 있는 문화와 정신의 도시 빈과의 인연이 지속될 것 같았다. 언젠가 벨뷔 궁전의 프로이트 기념비를 찾고 난 후 프로이트의 단골 카페에서 차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우반으로 한 정거장 남겨두고 발길을 돌려 빈 서부역으로 향했다.


지난 2월 셋째 주 화요일 오후 독일행 열차의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빈을 바라보자 그동안 방문했던 도시들이 무의식에 잠재해 있다가 다투어 의식의 문턱으로 밀치고 올라왔다. 하나같이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서 그런지 모두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이로써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3개월간에 걸쳤던 추로지향 순례를 모두 마친다. 그동안 생생한 사상의 현장을 찾는다는 새로운 시도에 큰 지면을 허락해준 <한겨레>와 백면서생의 거친 지식과 딱딱한 글 그리고 솜씨 없는 사진을 어여삐 보아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글·사진/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