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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Tour - World

Coffee Road - 박종만

by Wood-Stock 2012. 3. 29.

 

베두인 텐트 안 내 생애 최고의 커피

정성스레 커피콩을 볶고 갈아 최고의 환대를 보여준 커피 한잔

 

 

나는 가끔 난처한 질문을 받는다. “지금까지 마신 커피 중 가장 맛있던 것은?” 그럴 때면 나는 슬그머니 “기억에 남는 커피는 있다”고 돌려 말하곤 한다. 커피 역사를 찾아 아랍지역을 여행하던 2008년 2월에 잊지 못할 커피를 만났다. 시리아의 팔미라 유적지 인근 사막에 있는 베두인의 텐트에서였다. 사막을 오가는 상인들을 약탈하는 베두인이 떠올라 두려움도 있었지만 막상 만나 보니 그들은 매우 친절했다. 한밤중에 불쑥 찾아간 낯선 이방인을 오히려 환대해주었다.

 

바디야(badiyah)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베두인. 그날 나는 하루종일 모래바람에 지친 나머지 한 유목민의 텐트에서 염치 불고하고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더구나 그 텐트는 대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아침이 되자 자명종 같은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로 가족들이 차례로 일어났다. 낙타 젖으로 만든 요구르트와 전통 빵으로 아침을 대접받고 곧바로 베두인 커피를 청했다. 난로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빙 둘러앉았다. 할아버지는 한참을 웅크려 뒤척이더니 푸른빛 천주머니에서 소담스러운 커피 생두를 꺼냈다. 장터에서 양 한 마리를 주고 샀다며 매우 귀하게 다루었다. 할아버지는 자부심에 가득 찬 근엄한 표정이 되었다.

낙타 배설물로 불을 지핀 난로는 저녁에는 난방용으로, 낮에는 조리용으로 변한다. 난로 위에 아랍 전통 문양이 선명한 무쇠 프라이팬을 철커덕 올리고는 긴 무쇠 숟가락으로 생두를 볶는다.(사진) 커피를 만드는 일은 남자들만의 고유 영역이었다. 그것도 가장만이 할 수 있는 절대 영역이었다. 숟가락 휘젓는 솜씨로 보아 아주 잘 볶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할아버지는 진지했다. 커피 볶는 일에 온통 집중했다. 몰두하는 모습에는 어떤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자신들의 집을 찾아준 손님의 안녕을 기원하는,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는 간절한 모습이었다.

다 볶아진 커피는 큰아들의 전통 절구통으로 옮겨졌다. 절굿공이를 두드리는 소리는 일정한 리듬이 있어 마치 악기 연주 같았다. 난로에서 끓고 있던 물을 작은 전통 주전자에 옮겨 붓고 곱게 간 커피를 쏟아붓는다. 그러고는 다시 난로 위에서 끓인다. 끓인다기보다는 차라리 졸인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할아버지는 자랑스럽다는 듯 주전자를 치켜들더니 곧장 내게로 다가온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 모금을 마셨다. 커피 한 잔을 위해 하룻밤을 온전히 사막 한가운데에서 보내고, 다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 마시는 커피니만큼 그 한 모금은 간절했다. 검은 액체 그대로였다. ‘악마의 음료’라 불릴 만큼 진하고 강했다. 나는 이미 기대감, 기쁨, 감격스러움으로 넋이 나가 있었고 그 순간 내게 베두인 커피는 이미 단순한 음료로서의 커피가 아니었다. 한 잔의 성스러운 생명수였다. 입안에 머물 때의 끈적거림은 목구멍을 통과하자 곧 아늑함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깊은 여운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들에게 커피는 손님을 환대하는 최고의 대접이다. 한 순배를 돌고 난 뒤 다시 내게 커피를 따라주려고 다가오던 그의 투박하고 거친 맨발이 아련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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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잔이 그리도 절실했던 사람

‘산토스 커피’의 고향 브라질 산투스항 커피하우스에서 만난 할아버지

 

세계 제1의 커피생산국 브라질의 커피 역사를 조사하기 위해 2010년 1월 브라질 상파울루주에 있는 무역항 산투스를 찾았다. 커피회사 이름쯤으로 알고 있는 ‘산토스 커피’는 하역 시설이 잘 갖추어진 이곳 산투스항을 통해 수출되는 브라질 커피를 모두 일컬어 하는 말이다. 모카 항구를 통해 실려 나가는 예멘 커피와 에티오피아 하라르 커피 등을 ‘모카커피’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산투스의 유서 깊은 구시가지를 찾았다. 이미 신항으로 거점을 옮긴 항구는 쓸쓸함이 가득했다.

역사를 자랑하듯 산투스역에는 1867년 2월에 문을 열었다는 내용과 140년을 기념하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상파울루주 각지에서 생산된 커피를 세계 각국으로 보내기 위해 놓인 철로는 당시 브라질의 국가 경제를 부흥시킨 주역이었다. 커피농장 협회와 세계적인 커피 무역회사들이 포르투갈 식민지풍 건물에 줄지어 들어서 있다.

리네우 카를루스 브라질 커피박물관장을 만나 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커피농장(파젠다·Fazenda)을 대대로 물려받아 운영한 집안 내력부터, 북쪽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건너와 벨렝을 거쳐 미나스제라이스까지 남으로 내려온 커피나무 이야기며, 흑인 노예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와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는 아마존 밀림의 환경 파괴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내 번화가로 발길을 옮겨 산투스식 커피하우스를 찾았다. 커피 바 위에는 번쩍이는 이탈리아제 에스프레소 기계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길게 늘어선 카운터 테이블에는 10여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다른 한쪽에는 껌과 사탕 따위를 파는 유리 칸막이가 설치돼 있어 생소했는데 이를테면 커피하우스와 편의점이 결합된 멀티숍쯤 된다. 브라질식 에스프레소인 카페지뉴(Cafezinho) 한 잔을 시켜놓고 미소 가득한 바리스타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나는 세차게 문을 열고 들어선 한 할아버지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백발의 할아버지는 숨을 헐떡거리며 커피 바로 달려갔다. 검버섯이 가득한 얼굴에 보라색 속옷차림을 한 할아버지는 왼쪽 어깨 아래부터 손가락까지 깁스를 했다. 할아버지는 바에 앉기도 전에 걸어가며 커피부터 주문했다. 커피를 뽑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고작 30초 정도인데 할아버지는 ‘언제쯤 커피가 나올까?’ 하듯 바리스타의 손놀림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손꼽아 기다린다는 표현이 딱 걸맞았다.

걸쭉한 커피에 브라질식 액체 설탕을 듬뿍 두른다. 그 커피를 바라보며 할아버지는 무어라 중얼거리며 장탄식한다. 고개를 숙여 아주 천천히 조금씩 커피를 마시고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무언가 자신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음이 분명했다. 작은 커피 잔에 담겨 나온 커피 한 잔을 할아버지는 여러 차례 나누어 마셨다. 마치 이 세상에서 마시는 마지막 한 잔의 커피처럼 그는 천천히 음미했다. 평소 같으면 여러 질문을 해봤을 테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간절함에 압도되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깊은 사연을 알 도리가 없었지만 커피 한 잔이 그리도 절실하게 느껴졌던 사람을 나는 다시 만나 보지 못했다.

지난 주말 모처럼 명동을 찾았다. 사람들은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에 테이크아웃용 커피 컵을 들고 거리를 활보한다. 무심히 마시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산투스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마신 간절한 커피 한 잔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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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빠진 잔 속 뭉클한 삶의 내음

20여년 전 가난한 독일 유학생 부부에게 대접받은 커피 한잔

 

3월이 되면 20여년 전 들렀던 독일 마르부르크가 생각난다. 한국에서 100년 전통의 커피하우스를 만들겠다는 꿈을 그곳에서 다졌으니 나에게는 각별한 곳이기도 하다. 거대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 기차로 달려 인구 10만이 채 안 되는 아름다운 대학도시 마르부르크를 찾았다.

일교차가 심하고 찌푸린 날이 많은 독일의 날씨와 달리 그날 마르부르크는 화창한 봄의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학생회관 멘자(학생식당)에서 동양인 몇 명에게 말을 걸어 한국 유학생을 수소문했다. 30여분 헤맨 끝에 내게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커피 맛을 안겨준 유학생 ㅂ을 만났다. 크지 않은 체구에 안경 너머 선량한 눈을 가진 ㅂ은 나를 친형을 만난 듯 반갑게 대해주었다. ㅂ은 법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으로 2년 전 그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새신랑이었다. 유학생 부부가 그러하듯 이 부부도 빠듯한 생활에, 참아내기 힘든 이방인의 서러움까지 짊어진,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ㅂ은 고목들이 빼곡한 넓은 캠퍼스 구석구석을 안내해주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완벽한 유리온실 식물원이었다. 우리나라 노지에서 커피 재배를 꿈꾸던 당시 나에게 그 식물원은 경배의 대상이었다. 훗날 내가 커피 재배 연구를 하는 데 많은 영감을 준 값진 경험이었다.

늦은 오후 그의 신혼집에 도착했다. 음악을 공부하는 새댁은 저녁상을 준비했다. 오랜만에 보는 된장찌개에다 좀 허옇긴 해도 김치라는 이름 외엔 달리 붙일 단어가 없는 배추무침까지, 평소에 보았다면 참으로 소박한 저녁상이었겠으나 긴 여행 중에 만난 한국 음식이니 어찌 호사라 하지 않겠는가?

잠시 후 부엌에서 커피 그라인더의 기계음이 들렸다. 이내 커피가 나왔다. 단출한 살림을 증명이라도 하듯 잔 하나는 이가 빠진,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잔은 모양이 서로 다른 커피잔이었다. 나는 가슴이 저며 왔다. 볼품없는 잔에 담긴 커피가 코끝으로 옮겨지고 다시 내 입안을 가득 채운 순간 그 커피는 오랫동안 내가 즐겼던 여느 값비싼 커피들을 그저 상념 속에 모두 묻게 만들었다. 쓴 듯 신 듯 한 커피 맛은 마치 춤추듯 입속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가 나의 무딘 감각을 일깨웠다. 많은 이들이 커피 향과 맛을 도저히 알아먹기 힘든 묘한 단어들로 잘도 구분을 하지만 나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낼 적당한 단어들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그 커피 한잔이 왜 그리 감동적이었는지, 나는 왜 그 자리에서 왈칵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는지,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 그 커피의 둔탁하고 투박한 여운은 기차로 돌아가려 했던 나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다음날 아침, 고마움을 표하고자 내민 작은 봉투를 한사코 마다한 ㅂ은 오히려 내게 작은 커피 깡통(사진)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밖에는 줄 것이 없었다. 귀국하면 진심 어린 편지와 성의 있는 선물을 꼭 보내리라. 오랫동안 좋은 친구로 관계를 맺어나가리라는 나의 비장한 다짐은 단 한 차례 짧은 안부편지를 보낸 것으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맘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다.

부부가 선물해준 낡은 커피 깡통을 우리 박물관 전시실 한쪽에 두고 그날의 커피 한잔을 추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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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만나지 못한 커피잔의 인연

피천득 선생에게 대접하고 싶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귀한 커피잔

 

여러 해 전, 봄이면 가장 먼저 핀다는 산수유가 따뜻한 햇살 아래 노란 꽃을 활짝 피운 어느 오후였다. 외출하려고 나서려는데 저만치 강기슭 미루나무 아래에서 한 노인과 그를 부축하고 걸어오는 중년 여성을 보았다. 공손함과 배려가 느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여 그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피천득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우연히 시작되었다. 외출에서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날 선생님께서는 내게 인연의 시작을 알리는 귀한 선물을 박물관에 남기고 가셨다. 우리나라 수필의 백미 ‘인연’이 담긴 수필집 한 권이었다. 표지를 펼치니 꾸불꾸불한, 아주 천천히 쓴 것이 틀림없는, 아흔이 가깝다고 믿기지 않는 고운 글씨체의 친필 서명이 담겨 있었다.

그해 가을, 선생님께서는 다시 커피를 드시러 오셨다. 해맑은 어린아이의 웃음과 소년의 수줍음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위엄, 권위, 비장함 같은 단어는 선생님의 사전에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고운 손으로 커피잔을 움직이신다. 햇볕을 받아 더욱 선명한 커피 한 모금에 환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 모습에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꼭꼭 숨겨둔 충동이 밀려왔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봄과 가을 청명한 날이면 그 단아한 모습을 바로 곁에서 뵐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충동은 점점 커져만 갔다.

사실 나에게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커피잔이 하나 있다.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왕실이 썼던 커피잔인데, 손님 대접은 물론 나 자신도 아직 그 잔에 커피를 마셔본 일 없이 진열장에다 고이 모셔만 두고 있다. 20여년 전 여행 중 파리에서 시몬 보부아르가 글을 썼던 카페 되 마고의 구석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감격에 도취되어 여러 날 골동품상을 뒤진 끝에 어렵사리 구한 내겐 보물 같은 커피잔이다. 언젠가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 커피 한잔 대접하고 싶은 분을 만나게 되면 드리려 귀히 아껴 둔 커피잔이다.

한번은 이 잔의 소문을 듣고 한 재력가가 찾아와 “그 잔에 커피를 마셔야겠다!”고 생떼를 쓴 적이 있었다. 명망 높은 한 정치가가 찾아와 “그 잔에다 마실 사람의 자격이 무엇이냐?”며 따져 묻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땅한 답변을 찾지 못해 곤란에 처하곤 했다.

여러 해가 지난 가을, 봄에 다시 만나자던 선생님과 헤어지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곧 봄이 오면 선생님께 그 잔에 커피를 담아 대접해야지!’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 봄에 온 마음을 다해 커피 한 잔을 만들고 선생님이 사랑한 여성시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시와 모차르트 피아노곡을 들으며 봄 향기에 흠뻑 취해 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봄에 다시 만나자시던 선생님을 그해 가을 이후에 더는 만날 수가 없었다. 유난히도 따뜻한 2007년 봄날 선생님은 소천하셨다. 스스로의 아둔함을 탓해야만 했다. 시간은 나를 위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조금만 더 일찍 인연의 소중함을 깨달았더라면 낡은 커피잔은 주인을 찾았을 것을….

북한강을 마주한 뜨락에도 봄기운이 가득하다. 박물관 앞마당을 거닐며 “천국이 여기보다 아름다울까?”라시며 미소 짓던 선생님이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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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단골 카페에서 그를 추억함

이탈리아 제노바의 오래된 카페 ‘클라인구티’에서 마신 ‘카페 코레토’

 

이탈리아 속담 중에 ‘그러니까 제노바 상인이지’(Genuensis ergo mercator)라는 말이 있다. 뛰어난 상술의 제노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제노바는 10세기 이후부터 이미 시리아와 이집트 교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내어 베네치아, 피사와 더불어 지중해의 중심도시로 부상했다. 제노바는 베네치아와 비슷한 시기인 17세기 초 오스만왕국의 중심도시 이스탄불로부터 커피를 받아들였다. 당시 주 교역물인 향신료를 대체할 물품으로 커피는 각광받았다.

항구 가까이 있는 숙소로 걸어가면서 본 제노바는 해안을 따라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포근한 도시였다. 숙소에 배낭만 내려둔 채 곧장 시내로 나왔다. 언덕 위 작은 골목길들은 정겨움이 넘쳐났다. 일찍부터 교역에 나섰던 탓일까,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다.

제노바 구시가지 골목길 헌책방에 들러 커피 책을 고르다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고마운 친구 마리오를 만났다. 헌책방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배우처럼 잘생긴 외모를 가진 장발 청년 마리오는 내가 커피 역사를 찾아 제노바에 왔다 말하자 책방 주인에게 한참을 설명하더니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오래된 커피하우스를 소개해주겠다며 그가 앞장섰다. 쌀쌀한 기운이 돌았지만 발길 닿는 곳마다 유적인 골목길을 느릿느릿 걷다 보니 마음이 저절로 따스해졌다. 오랜 친구와 걷듯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었다.

 

1828년 문을 연 카페 클라인구티(Klainguti)에 들어섰다. 카페는 유려한 곡선과 섬세한 조각장식을 통해 제노바풍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로코코 스타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제노바풍이라는 표현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벽 등은 영롱한 진주 빛으로 빛나고 있고, 정교한 목공예의 진수를 보이는 바 카운터와 뒷면 장식장은 마치 춤추듯 파도치듯 넓은 매장을 가로지르고 있다. 옅은 커피색의 바닥 대리석에서는 견고함이 돋보였고, 액자 틀에 모자이크 된 벽면 거울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궁전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벽면 액자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 아리아 ‘돌아가자 고향 프로방스로’(Di Provenza il mar il suol)가 2막에 나오는 <라 트라비아타>는 작곡가가 베르디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아버지 제르몽이 멀리 떨어진 파리에 사는 아들 알프레도에게 찾아가 이제 그만 비올레타와 헤어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아버지의 간절함을 그린 아름다운 곡이다. 나는 멀리 떨어져 지내는 아들딸이 그리울 때면 이 곡을 들으며 몰래 눈시울을 적시곤 해왔다. 나에게 있어 베르디는 그리움을 더욱 간절하게 해준, 다시 못 볼 친구 같은 존재다. 그 베르디가 1860년부터 세상을 떠난 1901년까지 40여년간 겨울을 제노바에서 지내며 커피를 즐겨 마시던 곳이 바로 그곳 클라인구티다.

베르디의 흔적을 찾아 카페 안 이곳저곳을 들춰 보았다. 그런 나를 보며 주인장은 마음씨 좋은 미소를 짓는다. 베르디와 교감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구석자리에 앉아 ‘카페 코레토(Corretto)’를 시켰다. ‘카페 코레토’는 이탈리아의 달짝지근한 술이 들어가는 에스프레소 커피다. 추울 때 즐겨 마신다. 조각미남 바리스타(사진)는 싱글벙글하며 커피를 만들어 내왔다. 짙은 이탈리안 에스프레소에 달콤한 알코올 기운이 전해져왔다. 베르디 음악이 없어 아쉬웠지만 마리오와 클라인구티 사람들의 미소에 둘러싸여 밤늦도록 클라인구티를 떠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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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앞에서 부질없다 종교싸움

시리아 다마스쿠스 우마이야 모스크에서 대접받은 커피 한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도착하자마자 박 피디와 나는 성지 우마이야 모스크에 촬영허가 신청서를 접수했다. 이맘(Imam)과의 이슬람 커피 인터뷰와 모스크 안에서 기도드리는 장면 촬영을 위해서다. 모스크가 워낙 자유스럽게 아이들이 뛰어놀고 가족들이 즐거운 소풍을 하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코란을 허리 아래에 두지 않는다’, ‘여성들은 짧은 치마를 입고 들어설 수 없다’ 등 엄격한 규율이 존재하는 신성한 곳이기에 이맘을 대면하고 기도드리는 장면을 가까이서 촬영할 수 있다는 것은, 방송용 카메라를 들고 입장조차 할 수 없었던 이집트의 카이로 모스크를 생각해보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금요일 낮 예배가 끝난 후 이슬람 종교지도자 이맘을 만나기 위해 모스크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관리 책임자는 근엄한 표정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로마시대 교회답게 대리석으로 둘러싸여 방 안은 번쩍 빛이 났다. 인자한 모습의 이맘은 멀리서 찾아와준 우리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서방세계에 잘못 인식되고 있는 이슬람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소명의식으로 우리를 환대하는 듯했다.

이맘은 커피를 권했고 우리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방 한구석에서 만들어내는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젊은 사제는 전기난로 위 은제 이브리크(커피 추출도구)를 매우 소중히 다루었다. 커피가 끓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흘러넘치지 않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정성스레 내어 온 커피 잔은 아랍에서 그동안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화려하면서도 담백한 무늬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방 안은 커피 향으로 넘쳐났다.

 

이맘에게 있어 커피는 어떤 존재인지 궁금했다.

“커피는 삶의 활력소입니다. 지금처럼 귀한 손님을 맞을 때나 매일 보는 친구를 만날 때에도 커피는 활기를 돌게 해주지요. 평안한 일상생활을 할 때에도, 심신이 지쳐 피곤할 때에도 커피는 늘 우리 곁에 있지 않나요? 커피가 이슬람의 음료니 기독교의 음료니 하는 종교적 논란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긴 시간 이어진 이맘과의 대화를 통해서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은 특히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에게 우리를 만나는 일은 일상적인 일 중 하나였겠지만 나는 그의 따뜻한 눈길에서 진심을 다해 우리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어떻게 하면 이곳의 커피 관련 자료를 한 점이라도 가져갈 수 있을까만 궁리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나는 조심스럽게 이맘에게 청했다. “이맘께 대접받은 이 커피 잔을 우리 박물관에 전시할 수 있도록 가져갈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박물관의 귀한 전시 자료로 쓰일 것입니다.”

그는 관리책임자와 귓속말로 잠시 얘기를 나누고는 이내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하라 답한다. 천만금을 얻은 기분이었다. 초기 이슬람 건축의 정화요, 이슬람 4대 모스크 중 하나인 우마이야 모스크의 수장으로부터 그가 마시는, 그가 친히 손님에게 대접하는 커피 잔을 선물받다니 꿈만 같았다. 석양이 지면 잿빛으로 물드는 도시 다마스쿠스. 그 속에서 유일하게 영롱한 빛을 발하는 우마이야 모스크에서 잊지 못할 시간들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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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는 품위를 마신다

허름한 예멘 커피집에서 떠올린 한국 ‘다방’의 추억

 

 

예멘의 수도 사나 구시가지에 있는 작은 커피 집을 찾았다. 천장을 가린 푸른 천막(오른쪽 사진)을 보며 나는 사막 한가운데서 푸른 바다를 떠올렸다. 바리스타 한 명, 서버 한 명의 단출한 가게다.

 

덕지덕지, 기둥 뒷면에 붙어 있는 메뉴판인 줄 알았던 천조각들은 자세히 살펴보니 이슬람 기도문이다. 2006년 12월에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이 집행된 이라크 지도자 사담 후세인의 사진과 바그다드 시내 사진들이 조각조각 붙어 있다. 작년 우리가 처음 예멘을 찾았을 때 느꼈던 두려움에 순간 소름이 돋는다.

 

테러세력이 판치는 위험한 나라로 알려진 예멘, 여기저기서 들려왔던 자살폭탄 테러 소식이나 젊은 미국인이 참수되는 동영상을 접했던 탓에 도저히 밖으로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옷이며 가방에 붙어 있던 나이키 상표를 모두 떼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기억이 난다.

 

커피 주전자와 물 주전자가 따로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주문이 들어오자 미리 끓고 있는 큰 주전자의 커피를 계량해 작은 아랍 주전자로 옮겨 붓는다. 굵은 철근을 잘라 가스 불판을 만들어 그들만의 커피 머신으로 쓰고 있다. 청년 바리스타는 한마디 말이 없다.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는 진지함의 정수다. 누구에게서 배워서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몸에 밴 것일까? 주문이 여러 개 한꺼번에 들어오자 재빨리 유리컵에다 분필로 주문 내용을 미리 써둔다. 1분이 채 안 되어 꿀맛 예멘 커피가 나왔다. 절로 감탄이 나온다. 차, 커피, 시나몬, 카더몬 외에도 분명 그 어떤 비밀스런 향신료가 들어갔을 것이다.

 

전쟁 후 새롭게 생겨난 우리나라 다방에는 지금의 바리스타 격인 ‘주방장’이 있었다. 그 시절 커피의 품질이라 해야 다들 그만그만한 수준인데다, 인근 다방들과 경쟁이 치열해지던 때인지라 ‘원두는 같은데 특별히 맛있는 커피를 만든다’고 소문난 유명 ‘주방장’을 서로 모셔 가려고 스카우트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다방의 주방은 주방장의 허락 없이는 감히 누구도 들어갈 엄두를 못 내던 그런 엄격한 공간이었다. 커피는 대개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아침 일찍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준비했다. 어떤 이는 커피 원두에 담배꽁초 한 개비를 풀어 섞기도, 어떤 이는 달걀 껍데기나 귤껍질을 섞기도, 또다른 어떤 이는 소금 한 움큼을 넣어 끓이기도 해 이른바 자신만의 비법으로 커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아주 센 불로 넘치는 커피를 내렸다 다시 올렸다 하는 일을 수차례 반복한다. 청년의 어깨너머로 모카 항에서 봤던 연유 캔들이 보인다. 한국에 돌아와 아무리 그 맛을 내려 해도 안 되던 것이 바로 이 단맛을 내는 공공연한 비밀 레시피인 연유 때문일 것이리라. 커피는 적당히 묵직했다. 잘 차려입은 예멘 신사(왼쪽)가 나무 테이블에 걸터앉아 주문한다. 그윽하게 눈을 감으며 커피 한 잔을 들이켠다. 그의 자세에서 멋스러움이 절로 풍긴다. 친구들이 오고 있다며 차 한 잔과 커피 여러 잔을 더 시킨다. 도대체 이 멋스러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기다리던 친구가 반갑게 인사하며 그의 곁에 앉는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떠나지 않는 기억이다. 그가 커피 마시는 모습에 반해 한동안 나는 푸른 천막카페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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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가 커피 무역업자였다고?

에티오피아 랭보하우스에서 마신 하라르 커피의 잊을 수 없는 향기

 

 

한낮에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떠나 다음날 새벽 3시가 되어서야 해발 1800m 고원에 위치한 하라르에 도착했다. 투명하게 맑은 밤하늘에 불꽃놀이를 하듯 별이 쏟아졌다. 시간이 갈수록 몸 상태는 좋지 않아 온몸이 무거웠다. 지마에서부터 아팠던 두 눈은 탐험 내내 나를 괴롭혔고, 믿기지 않게도 열대의 아프리카에서 나는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다. 참으로 멀고도 긴 여정이다. 어찌 여기까지 왔는지, 고물 마이크로버스 한대를 얻어 타고 사막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무작정 달려왔다는 것 외에는 다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랭보하우스를 찾아 곧게 뻗은 구시가지 중심지를 걸었다. 이른 아침부터 해가 따갑게 내리쬐었다. 드센 흙먼지에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오랜 가뭄 탓에 물이 귀해 식수 차 앞에는 아이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세상 근심 없는 듯 아이들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동네 꼬마들이 낯선 이방인의 뒤를 따른다. 아이들 무리 중에 키 크고 눈치 빠르게 생긴 꼬마 녀석이 불쑥 가이드를 자청하고 나선다. 어디서 배웠는지 능숙하게 영어, 불어를 해댄다. 어린 나이에도 자신만의 하라르 커피 예찬론을 술술 풀어놓는다.

“하라르 커피는 축복받았죠. 신이 축복을 내린 것인데 커피를 볶을 때 다른 커피와는 달리 풍부한 윤기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신이 축복 내린 땅, 풍부한 미네랄이 넘치는 하라르 커피 향은 몸속의 구석구석을 파고들죠.”

양팔을 펼치면 쉽게 손에 닿을, 좁은 흙벽 골목길을 지나자 인도식 나무 장식이 눈길을 사로잡는 랭보하우스가 한눈에 들어왔다. 고즈넉한 느낌이다. 시간이 그때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꼭대기로 올라가자 골목길에서는 상상도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사방이 창으로 뚫려 시야가 탁 트인다. 멀리 무수히 솟아 있는 이탈리안 무슬림의 코발트빛 첨탑이 인상적이다. 커피나무를 뒤로하고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랭보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불과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주옥같은 시를 남긴 랭보는 아덴에서 무역으로 커피와 첫 인연을 맺은 후 이곳 하라르에서 본격적인 커피 무역을 하게 된다.

당시의 유럽, 특히 프랑스는 서부 아프리카 식민지의 로버스타(커피 원두의 한 종류)를 대신해 질 좋은 아라비카 커피를 아라비아로부터 전량 수입하던 때였다. 1869년 개통된 수에즈 운하 덕에 모카 커피 수출량의 절반가량을 프랑스로 수출했으니 아덴에서부터 하라르까지 랭보는 커피 속에 파묻혀 살던 때였다.

37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랭보를 떠올리며 하라르 커피 한잔을 마셨다. 낙타 등에 실려 사막을 지나 홍해를 건넜을 랭보의 하라르 커피 사랑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정황들을 살펴보면 그에게 커피는 그저 삶의 수단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절절히 사랑했던 것일까? 그 속내를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랭보가 자신의 커피 농장을 갖기도 했을 만큼 하라르 커피는 그에게 충분한 매력을 선사했음을 알 수 있다. 아랍인들은 하라르 커피를 같은 에티오피아에서 나는 시다모나 이르가체페보다 더 좋아한다. 아랍 특유의 향신료 향이 가득한 때문이다. 하라르는 아프리카 속의 아랍이요 아라비아의 한쪽 끝이다. 랭보하우스를 뒤로한 채 하라르 커피나무를 찾아 지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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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 헬프 미!

세비야 황금의 탑에서 ‘탈옥’해 마신 흙내 진한 에스프레소 한잔

 

 

과달키비르 강의 잔물결이 눈부시다. 산텔모 다리와 잘 어울려 세비야를 더욱 매력적인 곳으로 만든다. 쾌적한 환경과 좋은 기후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낭만적이거나 낙천적이기 때문일까, 오페라의 희극적 인상이 깊어서일까, 세비야에는 무언지 모를 흥겨움이 묻어 있다. 황금의 탑(Torre del Oro)이 강 옆에 버티고 있다. 13세기부터 군사전망대로 쓰이던 것이 대항해 시대에는 감옥으로 쓰였고 오늘날에는 해군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미 늦은 오후가 되어 혹시 입장 시간이 끝나 못 들어가면 어쩌나 하고 재빨리 들어갔다. 3층 망루에 올라 세비야 시내를 내려봤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분명할 텐데 나는 마치 남들은 얻지 못할 특권을 운 좋게 거머쥔 양 몹시 흥분했다. 망루에서 본 강은 콜럼버스의 대항해 시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너무 긴 시간을 몽환에 잠겨 있었던 것일까?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불이 모두 꺼져 있다. ‘올라?’(안녕?) 하며 소리를 내어 봤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 슬그머니 망루에 올라간 나를 보지 못한 직원 둘이 나를 남겨둔 채 문을 잠그고 퇴근을 해버린 것이다. 사방은 어두컴컴해 두려움이 몰려든다. 굳게 닫힌 성문을 마구 두드리며 소리쳤다. 중세에 감옥으로 썼던 건물인 만큼 두꺼운 나무문이라 두드려도 별 소리가 나질 않았다. 문틈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이 보일 때면 ‘헬프 미!’를 큰 소리로 외쳤지만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

숨을 깊이 들이켜며 생각을 가다듬는다. 커피를 가득 실은 배는 세비야의 젖줄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들어와 이곳 황금의 탑에 닿는다. 시대가 다를 뿐 똑같은 공간에 선원들과 죄수들 그리고 나는 함께 이곳에 있다. 어쩌면 황금의 탑은 내게 그들을 잊지 말기를 당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 앞에 있는 책상을 더듬거려 전화기를 찾았다. 어슴푸레한 빛 아래 명함이 보였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통화를 시도한 끝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올라? 안에 사람 있어요, 도와주세요!” 무덤덤하게 전화받던 이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다. “아, 그냥 그대로 기다려주세요. 곧 가겠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참으로 간사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그제야 깜깜하기만 하던 곳에서 유물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8세기 세비야 항구 모습이 그려진 대형 액자, 항해 도구들, 범선의 모형들, 원형 벽면을 빼곡히 두른 작은 액자들 등, 30분이 지날 즈음 마침내 성문이 열리고 뚱뚱한 체구의 관리인이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났다. 내게 백배사죄한다. 내가 좀 큰소리쳐도 될 분위기였다.

돌아다보니 아름답기 그지없는 감옥이다. 멀리 떨어진 다리 위에서 한참 놀라 뛰던 가슴을 진정시켰다. 다리 건너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 한잔을 시켰다. 붉은색의 짙은 흙 내음 가득한 에스프레소는 세비야의 황금의 탑 탈출기를 오래오래 기억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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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된 커피 맛에 안식 있으라

동독 시민혁명의 성지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 교회에서 허기를 달래준 커피 한잔



바흐의 ‘커피 칸타타’로 불린 ‘칸타타 BWV 211’이 초연되었던 치머만 커피하우스를 찾아 나섰으나 치머만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치머만이 있던 카타리넨슈트라세 14번지는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쑥밭이 된 라이프치히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건물에 속하지 않았다.


답답함을 누르고 근처에 있는 성니콜라이 교회(왼쪽 사진)를 찾았다. 라이프치히에 가까워질 무렵, 밤기차에서 맞은편에 앉았던 짧은 빨강머리 아가씨는 여러번 성니콜라이 교회를 꼭 가보라 권했다. 1989년 9월4일, 월요 평화기도회를 마친 교인 700여명이 교회 밖 광장으로 나선 것이 기화가 되어 장벽을 무너뜨린 동독 시민혁명의 성지가 바로 이 성니콜라이 교회다.

고딕 양식이면서도 독특한 구조를 지닌 교회 안을 살피다 뜻밖에도 어디선가 은은한 커피향이 흘러나왔다. 그 향을 따라 교회 안 깊숙한 구석에 있는 친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낯선 이방인의 갑작스런 방문에도 놀라는 기색 없이 오히려 너그러운 미소를 보낸다. 12세기에 처음 건축되어 오늘에 이른 작은 아치형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와 방 안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커피는 누군가 미리 끓여둔 것을 교인들이 직접 따라 마신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사람들의 소곤거림이 기분 좋게 만든다. 아침부터 돌아다닌 탓에 허기진데다 커피가 간절했다. 누군가 내게 다가와 커피 한잔을 내민다.

간절히 원할 때 이루어진 일들은 기쁨이 배가 된다. 미리 끓여두어 약간 식었는데도 커피 맛은 일품이었다. 적당함이라고 할까 절제라고나 할까, 화려한 에스프레소 기계를 통해 뽑아진 에스프레소에 비길 맛이 아니었다. 카페는 더이상 자유사상가들, 권력을 맹신하는 정치가들, 사회적 명망가들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다.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요 특권을 누리기 위함도 아닌 그저 각자의 사사로운 일상을 카페에서 보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지는 않아도 꾸준히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나는 송아지 저금통에 1유로라도 아끼던 평소 습관과는 달리 넉넉히 넣었다.

내게 커피를 내민 카페의 책임자이자 목회수업을 받고 있는 제이(J·오른쪽)에게 염치없는 부탁을 함께 했다.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이곳의 커피 잔을 꼭 우리 박물관에 전시하고 싶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이 커피 잔이 우리 교회 카페에서보다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도록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의 이 짧은 말 한마디에 금세 가슴이 뭉클해지고 코끝이 찡해졌다. 교회에서 쓰는 커피 잔이 사치스러울 리 없어 값비싼 것도 아닐 테지만 해마다 나서는 커피 탐험에서 참으로 의미 있는 순간을 맞았다. 지금 우리 박물관 전시실 한쪽 면에는 성니콜라이 교회에서 받은 이 커피 잔과 지난해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에서 받은 커피 잔이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마치 이슬람을 통해 기독교 세계에 전해진 커피 역사를 증명이나 하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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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북돋워주는 탄자니아 생강커피

킬리만자로에 올라 마셨던 맵고 뜨거웠던 전통 커피의 맛, 잊을 수 없는 여주인의 얼굴

무더위에 빠듯한 일정, 불편한 숙소, 입에 맞지 않는 아프리카 음식들로 대원들은 힘든 기색이다. 탄자니아 모시(Moshi)로 향한 늦은 출발로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 내 표정은 아침 내내 내린 비로 인해 대원들 모두를 더 힘들게 만들고 있다. 빗속의 킬리만자로를 고물 지프로 오르는 일은 그리 수월치 않다. 길은 어느새 비로 인해 샛강으로 변해 있다.

킬리만자로를 지척에 두고 있지만 비로 인해 위용만을 느낄 수 있을 뿐 그 모습은 볼 수가 없다. 킬리만자로는 많은 이들에게 생이 다하기 전 언젠가는 반드시 가 보아야 할 아름답지만 고독한 자신만의 이상향으로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상상 속의 아름다움에 편승해 일본의 커피업계에서는 언제부턴가 탄자니아 커피를 킬리만자로 커피로 칭하고 있고 탄자니아 사람들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지 않은 모양이다.

잠시 쉴 요량으로 길거리 커피점 앞에 차를 세운다. 말이 커피점이지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가정집 한 귀퉁이 약 33㎡(10평) 남짓 공터에 장작불과 냄비, 설거지용 물통 네 개가 전부인, 의자도 없는 그야말로 노천 커피점이다.

냄비에는 얇게 채 썬 생강이 끓고 있다. 그 위로 곱게 갈린 커피 원두 가루를 듬쑥 집어넣는다. 정제되지 않은 굵은 설탕도 한 움큼 손에 담아 집어넣는다. 한참을 기다린 후 중국산이라는 표기가 선명한 오렌지빛 플라스틱 거름망에 거른다. 커피찌꺼기 조금과 생강이 걸러진다. 생강커피(Ginger Coffee)이다. 이곳 탄자니아 북부지역에 오래전부터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오는 전통 커피로, 기호품으로서의 음료가 아니라 추위를 잊고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약리효과를 내는 건강음료로서의 커피인 것이다.

쌉쌀함과 쓴맛 그리고 단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연거푸 두 잔을 청해 마신다. 입맛에 따라 커피에 우유나 꿀 혹은 술 같은 것을 첨가하는 것은 익히 보아왔지만 처음 물을 끓일 때부터 커피가 아닌 다른 재료를 넣는 것은 처음 보았다. 큰 기대 없이 얼떨결에 접한 생강커피이지만 노천 커피점의 분위기와 맛 그리고 연신 수줍어 어쩔 줄 몰라 하던 커피점 여주인의 순박한 모습과 함께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 있을 특별한 커피다.

비는 그칠 줄 모른다. 고작 먼발치에서 잠시 본 킬리만자로를 보고 뭐라고 말하는 건 온당치 않은 일이겠지만 적어도 지금 본 킬리만자로는 그 어떤 너그러움이 스며 있는 것이 분명하다. 모시로 가는 길가의 경사면 커피나무들 중에서도 잘 가꾸어진 나무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대신 힘겨워하는 농민들의 지친 표정에서도 반짝이는 미소는 어디에서나 보석처럼 빛난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맑은 미소를 생각할 때면 함께 킬리만자로의 생강커피가 떠오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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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나무 한 그루의 간절한 사랑

예멘 사나니 커피 산지에서 만난 가난한 커피 농부의 부탁과 미안한 거절

 

 

예멘 사나니 커피 산지를 찾아 마투브(Mathoob)로 향했다. 돌산 산중턱으로 건조한 바람이 분다. 커피나무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차에서 내려 흙을 만져보았다. 푸석거린다. 작물을 심으려고 돌밭을 갈아 두었고, 커피나무는 줄지어 뙤약볕을 쪼이고 있다. 나무 사이로 농부의 모습이 보인다. 불쑥 찾아간 일행을 보고 오라 손짓한다. 언제부터 커피 농사를 지었느냐는 질문에 쉼 없이 답한다.

“어릴 때부터 해오던 일이에요. 지금은 새로 땅을 일궈 좀더 많은 나무를 심으려고 해요. 여기는 잘 익은 커피나무들이 있어요. 이쪽은 옛날부터 있던 나무들이고 저쪽은 새로 심을 땅이에요.” 활기찬 표정이다.

나뭇가지를 들추며 그중 잘 익은 가지 한 줄을 꺾어 보여준다. 입에 물고 크게 한 바퀴 돌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의 우스꽝스런 춤사위에 웃음꽃이 피었다. 농부는 집을 향해 큰소리로 두 아들을 불러 커피를 준비시킨 뒤 언덕 위 새로 일군 돌밭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막 심어둔 어린나무들이 힘겹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잘 갈아엎어놓은 흙에 구덩이를 파고는 어린나무 한 그루를 소중히 두 손으로 감싸 구덩이에 묻는다. 무릎을 꿇고 신께 기도드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고운 흙을 뿌리 옆에 뿌려준다. 거친 흙을 덮고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에 나뭇가지를 끼워 꾹꾹 밟아준다. 특이한 방식이다. 주변에 있는 나무 막대기 몇 개와 돌로 벽을 만들고 그 위로 종이상자를 비스듬히 덮어 그늘을 만들어준다. 작은 플라스틱 양동이에 담은 물을 부어주어 이 집안의 소중한 살림밑천인 커피나무 한 그루를 심은 것이다. 그의 허리춤에 찬 전통 칼 잔비야(예멘에서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는 남자들의 지위와 가문을 상징하는 단검)와 미소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집 앞마당 나무그늘 아래에 자리가 깔려 있다. 기댈 수 있도록 큼지막한 베개도 놓여 있다. 어디를 가나 비스듬히 기대앉는 모습을 본 것으로 미루어 예멘 고유의 풍습인 듯했다. 작은아들이 커피를 들고 나왔다. 커피잔으로 건배와 러브샷을 연이어 하며 잠시 즐거움에 빠졌다. 커피잔이 다 비어 갈 무렵 농부는 진지한 표정으로 아들녀석을 한국으로 데려가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한다. 아프리카 짐마에서 만난 아홉 아이를 둔 농부가 내게 했던 똑같은 내용의 간절한 부탁이 떠올랐다.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르지 않다. 부탁을 받을 때면 마음이 앞서지만 앞뒤 생각해보면 늘 쉽지 않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딱한 심정이다. 커피 묘목 한 주에 200예멘리알. 1달러 정도 하는 커피나무는 두 아들에게 앞으로 30년 동안 사나커피라는 이름표를 달고 큰 기쁨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안했다. 커피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자식들을 위한 아버지의 수고요 기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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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모카커피의 멀건 첫인상이라니

부푼 마음으로 도착한 예멘의 모카항…커피의 역사와 숨결 대신 황량함의 추억만 새기다

 

12시쯤 도착할 수 있으리란 상상은 애당초 무리였다. 육지가 가깝다는 소식을 알리기라도 하듯 작은 고깃배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어렴풋이 항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프리카의 지부티에서 출발해 16시간의 긴 항해 끝에 드디어 예멘의 모카에 도착하고 있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은빛 물결 너머로 전설의 모카항이 가까이 다가온다. 가슴속에 그려왔던 모카항의 모습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비로소 모카항에 발을 딛는다. 차창 밖으로 폐허가 된 건물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간혹 보이기는 하지만 도저히 사람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바닷가에는 먼 곳에서부터 쓸려왔을 지푸라기며 비닐봉지 같은 온갖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다. 들개 떼들이 어슬렁거린다. 늑대를 연상시킨다. 한가로이 떠 있는 작은 배들. 뒹구는 주춧돌,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아름다운 옛 건물들의 잔해, 약국, 나귀. 골목이 제법 큰 것으로 보아 옛 영화를 짐작할 수 있을 뿐, 그야말로 전설에 파묻혀 버렸다. 황량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크지 않은 동네를 한참 동안 몇 바퀴를 돈 다음에 커피집에 들렀다. 나무간판에 ‘카페 주테, 모카’(Cafe Zoute. Mocha)라 쓰여 있다. 커피 한잔을 청하자 22살의 동네 청년이자 사장인 이가 별사람 다 보겠다는 듯 이리저리 나를 살피고는 고갤 갸우뚱거리며 커피를 만들어 낸다. 언제부터 이 커피점이 생겼느냐는 질문에 모른다고 잘라 말한다. 아쉬운 마음이다. 이 젊은 사장은 낡고 시시콜콜한 역사 따윈 안중에도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생업에 열중인 그를 두고 역사의식이 없다는 둥, 어찌 책망할 수 있겠는가!

잘 헹궈지지 않은 유리잔에 인스턴트커피를 두 스푼 넣은 뒤 끓고 있는 두 개의 양은 주전자 중 하나를 골라 뜨거운 차를 붓는다. 이미 딴 깡통 연유를 가득 붓는다. 계핏가루를 듬뿍 뿌리더니 젓지도 않고 건네준다. 멀건 모카커피를 한모금 마신다. 허탈한 마음이다. 근사한 바닷가 커피집 테라스에서 모카항을 바라보며 진하디진한 모카커피를 한잔 마셔보고 싶었던 꿈은 황망히 날아가 버린다. 하지만 커피의 역사와 숨결이 배어 있는 모카항에 유일한 커피집에서 마시는 오리지널 모카커피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어둑해질 무렵 폐허가 된 동네를 다시 둘러본다. 뼈대만 앙상한 2층 건물에는 최신식 아르데코의 기하학적 감각이 묻어 있어 과거의 영화가 비치는 듯하지만, 거친 모래와 굵은 돌멩이만 나뒹구는 골목길, 그 위를 지나는 나귀, 오토바이, 덕지덕지 붙은 선거용 포스터, 왜소한 이슬람 첨탑, 그 어디에서도 지난날의 화려함은 없다. 마을 안 종교적 분위기는 이슬람의 정신문화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자랑스럽게 이어지고 있음을 잘 알려주고 있지만, 모카항이 보여주는 오늘의 모습은 황량함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역사는 지금도 그렇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모카항을 떠난다. 그리도 긴 시간을, 그리도 먼 길을 산 넘고 바다 건너 찾아온 모카항을 겨우 반나절 둘러보고 떠난다. 모카에서 하룻밤을 지내려던 계획이었으나, 마땅히 잘 만한 숙소를 찾지도 못했거니와 으스스한 분위기가 두렵기도 해 아쉬움을 접어둔 채 발걸음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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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아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 된 베네치아 카페 기행 단상



베네치아(베니스)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로마역에서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셨다. 수도의 역답게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오간다. 커피점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바리스타 넷이 커피를 뽑으며 족히 삼십명은 상대하고 있다. 바에 기대어 에스프레소며 카페라테 한잔씩을 비우고 찬물 한잔으로 입가심을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커피점 앞으로 여행가방을 든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든다. 20세기 초 에스프레소 머신이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유럽, 아니 세계의 커피문화가 오늘처럼 발달할 수가 없었을 것이리라.

산마르코광장 카페 플로리안과 콰드리를 찾아 나섰다. 지도책을 들여다보고 걸었는데도 구경하느라 여러번 길을 잃었다. 한참 걸어 이젠 잘 찾아가고 있겠지 하다 보면 어느새 그 자리에 다시 와 있다.

산마르코 대성당과 가장 가까운 카페 라베나(Lavena)의 테라스를 시작으로 광장 안 카페 네 곳을 커피를 마시며 돌아다녔다. 이십 수년 전 커피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미친 듯이 일본의 이름난 커피하우스를 돌아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미련스런 일인 줄 잘 알면서도 광장 안 한군데도 빼놓고 싶지 않았다.

카페를 돌며 골몰히 생각에 빠졌다. 과연 카페의 가치를 커피 맛으로 평가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적어도 의미는 있는 일인가? 의욕은 앞섰으나 카페 한곳 한곳을 지날 때마다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 카페에서 커피 맛은 절대적 가치가 될 수 없다. 그 공간이 지니고 있는 내면적 요소, 함축된 분위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 그런 커피 외적인 요소가 그 카페를 말하고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카페는 커피를 마시는 공간만이 아니었다. 카페는 이미 그 공간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의미 혹은 존재적 가치로 평가되어 하나의 문화 산물이 되어 있었다.

대운하를 가로지르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래된 리알토(Rialto) 다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옛날 예멘의 모카항을 떠나 거친 바닷길을 건너온 커피는 이곳 베네치아에서 머물다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예나 지금이나 커피는 기근을 해소할 주식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비단이나 금은 같은 사치품도 아니었건만 사람들은 열광했다. 커피는 차라리 전염병과도 같았다. 커피를 한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이내 커피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정점에 베네치아가 있었다.

어둑어둑 해가 지더니 어느새 보름달이 떠올라 운하에 희미하게 비친다. 큰 배낭 때문에 아프던 어깨는 이제 카메라 끈만 닿아도 통증이 느껴진다. 운하 옆 카페테라스에 털썩 주저앉았다. 약국에서 산 통증완화 연고는 처음에는 약효가 꽤 오래갔는데 이젠 바를 때만 잠시 나은 듯하다가 이내 다시 아픔이 전해져 온다. 문득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