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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Tour - World

유럽 소도시 여행 - 한겨레 백상현

by Wood-Stock 2012. 2. 9.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주의 알베로벨로 - 슬픈 역사가 쌓은 꿈의 도시

 

이탈리아 지도 전체를 봤을 때 구두 뒷굽에 해당하는 지역이 풀리아주다. 풀리아주의 다양한 도시들 중 알베로벨로는 풀리아주의 자랑이자 이탈리아에서 가장 이질적인 느낌의 소도시다. 알베로벨로로 향하는 황톳빛 들판에는 올리브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그 올리브나무 사이로 독특한 원추형 모양의 돌집들이 듬성듬성 눈에 띈다. 트룰로라고 불리는 이 지역 특유의 주거지다. 남부에서 흔히 채취되는 돌을 이용해 지은 집이다.

알베로벨로는 포폴로 광장을 중심으로 동쪽 언덕의 신시가지와 서쪽 언덕의 트룰리(트룰로의 복수형) 지구로 나뉜다. 포폴로 광장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몬티 지구와 아이아 피콜라 지구의 1400여채나 되는 트룰로가 벌집 모양의 군집을 이루며 장관을 연출한다. 특히 몬티 지구에는 1000여채의 트룰로가 비탈진 언덕을 따라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 마치 동화 속 풍경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을 안겨준다.

트룰로의 유래는 현실적이고 팍팍하다. 옛날에는 주택에 부과되는 세금이 과했기 때문에, 가난했던 이곳 주민들은 단속 관리가 나올 때면 얼른 집을 부수기 위해 이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을 이용해 트룰로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화 같지만 사실은 서글픈 서민의 삶이 녹아 있다. 조상들의 눈물과 한숨이 이제는 남부 제일의 관광거리가 되고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니, 언제나 그렇듯 역사나 인간의 삶이나 참 아이러니하다.

알베로벨로를 거닐다보면 시선이 닿는 곳마다 동화 같은 풍경이다. 원추형 지붕마다 제각기 그려져 있는 태양·달·별 등의 도형과 종교적인 문양들이 더욱 신비로운 느낌을 더한다. 트룰로는 원래 원추형 지붕이 건물마다 하나씩 있는 독립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몬티 지구의 트룰로 중에서 유일하게 한 건물에 두 지붕을 가진 트룰로 시아메세가 시선을 끈다. 옛날에 아버지로부터 하나의 트룰로를 상속받은 두 형제 중 형과 정혼한 여인이 동생과 사랑에 빠지게 되자, 형제가 크게 다투고 서로 등을 돌렸다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트룰로는 가운데 벽을 세워 둘로 쪼개졌고, 지붕도 둘로 나뉘게 되었다. 트룰로 시아메세는 지금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동화 같은 풍경 이면의 현실적인 이야기다.

몬티 지구를 한눈에 내려다보기 가장 좋은 위치는 포폴로 광장 서쪽에 있는 성 루치아 교회 옆 작은 공터다. 여기에 서면 펼쳐진 풍경 그대로 동화 같은 세상을 믿고 싶어진다. 파란 하늘과 원추형의 트룰로 그리고 또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곳, 알베로벨로. 이곳에서는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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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의 보석 - 체코를 대표하는 블타바강가의 소도시, 체스키크룸로프

 

체스키크룸로프역을 나와서 조금만 걸으면 푸른 녹음 사이로 붉은 지붕들과 독특한 모양의 첨탑과 성이 어우러진 체스키크룸로프의 아름다운 풍광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체코공화국 남동쪽 보헤미아 지역에 자리잡은 이곳은 영화 <일루셔니스트>(2006)와 <아마데우스>(1984)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300여개의 건물이 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고, 18세기 이후 건물은 아예 없다고 할 정도다. ‘보헤미아의 보석’, 체스키크룸로프. 400여년 전에 세워진 부데요비체 문을 통과하면 정말 신기한 마술처럼 고풍스럽고 운치 가득한 건물들과 골목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체스키는 체코어로 ‘보헤미아의 것’을 의미하며, 크룸로프는 ‘강의 만곡부의 습지’를 의미한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고도를, 강이 에스(S)자를 그리며 감싸듯이 흘러간다. 가지각색의 앙증맞은 기념품들과 마리오네트 인형을 파는 기념품점들, 한가로운 시간이 머물고 있는 노천 바, 마법사의 주술이 담겨 있을 것만 같은 색색의 약병이 진열된 약국, 창문에 책과 그림을 걸어놓은 낡은 서점, 알록달록 그림 간판이 예쁜 인형박물관이 골목길을 돌 때마다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크룸로프성의 플라슈티 다리(망토 다리)에 올라 바라보는 체스키크룸로프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답다. 곡선의 블타바강과 붉은 지붕들이 모여 있는 중세의 도시는, 한여름의 초록을 배경으로 펼쳐진 한 폭의 장대한 풍경화였다. 체스키크룸로프의 랜드마크 격인 원통형 탑은 1257년에 처음 건설돼 16세기에 재건축된 것이다. 높이에 따라 지름이 점점 좁아지고 외벽도 다양한 색채와 무늬로 장식돼 있어서 상당히 독특한 느낌을 준다. 160개의 계단을 따라 탑을 오르면 발아래로 블타바강과 붉은 지붕의 집들, 저 멀리 비투스 성당, 굽이쳐 흐르는 블타바강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된다.

성탑을 내려와 신시가지의 라트란 거리와 구시가지를 잇는 라제브니츠키 다리(이발사의 다리)를 건넌다. 이 목재 다리의 이름은 블타바강의 왼쪽 둑에 있던 오래된 이발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다리에는 신분을 초월해 이발사의 딸을 사랑한, 레오폴트 2세 황제의 서자가 살해당한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세상에는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욱 애틋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나 많다. 모든 사랑과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면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것이 뻔하다. 이발사의 다리 난간에 기대어 잠시 상념에 빠졌다. 저녁 어스름이 강물을 따라 슬금슬금 마을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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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가득한 코페르니쿠스와 진저브레드의 도시, 폴란드 토룬

쇼팽과 나폴레옹을 감동시킨 그 맛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고향이자 1231년 독일 튜턴 기사단에 의해 건설된 유서 깊은 중세 도시 토룬. 폴란드 중부에 있는 이 도시는 중세시대 한자동맹의 일원으로 상업의 중심지로 발달하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고향답게 15세기 고딕식의 코페르니쿠스 하우스가 여행자를 맞아준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꾸며진 그의 집은 다양한 서적과 실험 도구들이 방마다 가득 들어차 있어서 한 학자의 진지한 탐구 자세를 살짝 엿보게 해준다. 천동설을 종교처럼 믿고 따르던 중세 암흑기에 그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뒤엎고 지동설을 주장하며 파문을 일으켰다.

1999년 6월 조국 폴란드를 방문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 토룬을 찾았다. 교황은 “과거 가톨릭교회가 코페르니쿠스의 위대한 업적인 지동설 이론을 배척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고백하며 공식적으로 사죄했다. 코페르니쿠스의 동상이 있는 토룬의 골목에 멈춰 서서 동상에 새겨진 글을 읽으며 그를 바라본다. ‘태양을 멈추고 지구를 움직인 토룬의 코페르니쿠스.’

토룬이라는 도시에 또다른 명성을 안겨준 것은 진저브레드라는 향이 강한 비스킷이다. 14세기 이래로 이어져온 전통과자인데, 아로마 향이 깊숙이 배어 있고, 초콜릿이나 설탕 아이싱이 덮여 있는 맛있는 과자이다. 1825년 8월에 토룬을 방문한 적이 있는 쇼팽은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그 무엇보다 토룬의 진저브레드가 나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었다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진저브레드는 이들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표트르(피터) 대제, 나폴레옹 황제 등 수많은 인사들의 미각을 매혹시켰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토룬에서 가져온 진저브레드를 먹었다고 한다.

토룬의 옛 시가지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동화 같은 이야기와 역사가 담긴 동상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옛 시청사 옆 광장에는 바이올린 악사 동상이 있다. 어느 노점상이, 판매중이던 개구리 모형을 가리키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어느 날 비스와 강에 개구리 떼가 몰려와서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었죠. 그때 발트해 연안의 그단스크까지 물품을 운송하던 뗏목 사공 이와가 바이올린을 연주해서 개구리 떼를 멀리 떠나게 했다고 해요.” 광장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행운의 강아지 필루스 동상이 있다. 여행자가 필루스의 꼬리를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모자를 만지면 시험을 잘 보게 된다고 한다.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여행자나, 중요한 시험을 앞둔 여행자라면 필루스의 행운을 꼭 체험하기를…. 밤이 되자 위대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를 기억하고 있는 듯 밤하늘에는 별들이 청아하게 빛난다. 그 옛날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인 언어가 소란스러운 광장의 카페 위 밤하늘 너머로 지금도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드는 곳이 바로 토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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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운하의 도시 프랑스 콜마르 -  색채의 마법사가 사는 동네

 

 

독일과 스위스 국경에 접한 프랑스 알자스 지방은 프랑스·독일 두 나라 사이에서 무려 17번이나 통치권이 바뀌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었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바로 이곳 알자스다. 이 지방에는 아름다운 두 도시가 있는데 주도인 스트라스부르와, 꽃과 운하의 도시 콜마르이다. 보주 산맥 동쪽 기슭 알자스 평원 끝에 위치한 콜마르는 카롤링거 왕조의 작은 촌락에서 시작됐다. 13세기에는 신성로마제국 직속의 자유도시였다가 30년 전쟁 뒤 루이 13세에게 양도되어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독일령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콜마르 전투를 치르고 난 뒤 알자스는 독일로부터 해방되었다. 알자스 와인 생산지답게 들녘은 짙은 초록색 포도밭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낮은 언덕 위 포도밭과 마을로 이어진 작은 길들, 마을마다 하나씩 고풍스럽게 솟아 있는 성당의 종탑들이 빠르게 달리는 열차 창밖으로 춤을 추듯 나타났다 사라져간다.

콜마르 기차역에서 옛 시가지까지 산책 삼아 걷기에 좋다. 온통 붉은색 제라늄과 노란색 꽃들로 드리워진 창문들과 알자스 특유의, 목조가 건물 외벽에 드러난 주택들, 중세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골목길들, 하나의 예술작품 같은 상점 간판들.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맑은 운하와 운하를 따라 늘어선 카페·레스토랑들이 마치 동화 속 풍경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과거 와인 교환소였던 일명 ‘머리의 집’ 건물이 시선을 끈다. 건물의 벽면과 창틀에 온통 다양한 표정의 머리 형상의 조각을 장식해 놓았다. 거기서 조금 더 걸으면 알자스 지방의 예술과 역사의 보고라고 일컬어지는 운터린덴 박물관이 나타난다.

이 박물관에서 놓치지 말고 봐야 할, 혹자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그림으로 손꼽는 걸작이 바로 독일 뷔르츠부르크 출생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작품 ‘이젠하임의 제단화’다. 박물관을 지나자 어디선가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옛 시가지를 가로질러 작은 운하가 흐르고 있다. 운하 양옆으로는 울긋불긋 수놓아진 꽃들이 새파란 하늘과 흰 구름을 이고서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그 아름다운 운하길을 프랑스인들은 ‘프티 베니스’라고 부른다. 작고 예쁜 베니스라는 이름 그대로 흐르는 강물에 비친 반영과 파스텔톤의 색채 화려한 주택들, 화사한 카페들이 어울린 풍경이 그저 눈부시다. 콜마르 옛 시가지를 걷노라면 색채의 마술사가 한껏 재주를 부린 듯하다. 파스텔톤의 주택 문 앞에서 노크를 하면 동화 속 주인공들이 창문을 활짝 열고서 나를 맞이할 것만 같다. 그렇게 동화 같은 색채 속을 거닐다가 강물을 들여다보니 내 그림자가 비치고, 콜마르의 하늘이 담겨 있다. 향기로운 꽃과 화사한 색채의 도시 콜마르의 프티 베니스를 따라 걷다 보면 인생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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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탕물에서도 아름다워라, 인생이여 -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변 와인 마을 슈피츠

 


 

독일 남부에서 발원한 도나우강은 오스트리아의 평원을 관통해서,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 등 동유럽의 여러 나라를 지나 동쪽의 흑해로 흘러드는 유서 깊은 강이다. 도나우강을 따라 오스트리아의 멜크와 크렘스 사이 36㎞ 구간을 바하우 계곡이라고 한다.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강과 계단식 포도밭, 고풍스러운 수도원, 웅장한 고성들, 강변의 소박한 마을들이 어우러진 중세의 풍경은 맑은 수채화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멜크수도원, 뒤른슈타인성, 빌렌도르프 비너스 등 수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이곳 ‘바하우 문화경관’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주로 멜크·뒤른슈타인·빌렌도르프·크렘스 등의 마을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멜크수도원에는 10만여권의 장서와 2000여권의 필사본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곳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오늘 소개할 곳은 멜크와 크렘스 중간 지점에 있는 그 이름도 낭만 가득한 도나우 강가의 슈피츠다.

마을을 감싼 산비탈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싼 계단식 포도밭이 아늑하다. 마을 곳곳의 호이리거(해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파는 집) 앞에 쌓여 있는 빈 와인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강을 따라 걷다가 지도에 표시된 대로 산길을 올라 힌터하우스 유적에 서 본다. 그 낡은 성벽에 기대앉으면 슈피츠와 도나우강, 그리고 바하우 계곡의 절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땀을 식히는 바람의 흥얼거림, 서걱대는 나뭇잎의 화음, 도나우 강물의 합창, 햇살에 영글어가는 포도들의 재잘거림, 활짝 핀 무궁화와 때이른 코스모스의 웃음소리, 온갖 자연의 생동하는 노래가 들리는 언덕에 서 있자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마을을 감싼 포도밭의 제일 높은 곳에 그 옛날 중세의 상인들과 여행자들이 드나들었던 로테스 토어(붉은 문)가 우뚝 서 있다. 벤치에 앉아 슈피츠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대여섯명이 로테스 토어에 올라왔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배낭에서 와인잔을 꺼내들더니 각자의 잔 가득 포도주를 따랐다. 그들은 높이 잔을 들고 건배를 하고서는 슈피츠를 내려다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었다. 인생의 참맛이 바로 이게 아닐까. 한 잔의 와인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새 도나우강 위로 반달이 솟아났고 석양에 붉게 물든 하늘과 초록색 포도밭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마을에 하나둘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고 포도밭 사잇길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슈피츠의 대기 속에는 와인 성분이 있는 듯 유난히 향기롭다. 사위에 어둠이 내리고 간혹 불 켜진 가로등들, 건너편 마을에 별빛처럼 드문드문 불 밝힌 집들, 그리고 유화처럼 길게 강물을 가로질러 빛나던 달빛. 며칠 전에 쏟아져 내린 비 때문인지 푸른 도나우 강물이 아니라 흙탕물이었지만,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분명 진흙탕 속 같은 혼탁한 세상이지만 달빛처럼 맑은 마음 은은히 빛을 낸다면 우리는 아름답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저 멀리 호이리거에서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노래와 웃음소리가 인생의 찬가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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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파리, 아르누보의 도시 라트비아 리가 - 밀다에게 꽃을

 

 

 

한때 ‘동유럽의 파리’ ‘동유럽의 라스베이거스’라고 불렸던 리가는 8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도시다. 발트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의 수도이기도 하다. 그 시작은 1201년 독일 브레멘의 대주교 알베르트가 이 지역을 무역 본거지로 건설하고 ‘검의 형제 기사단’을 발족하여 발전시키던 때라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주교의 기사단은 리보니아(오늘날의 라트비아와 남부 에스토니아 지역)를 완전히 점령해서 독일의 봉토로 삼았다. 리가는 리보니아의 주요 도시로서, 중세 한자동맹의 중심도시로서 명성을 떨친다. 이 역사적 사실을 기념해서 브레멘 시는 그림 형제의 동화 <브레멘의 음악대>에 나오는 동물 군악대 동상을 리가 시에 기증했다. 그 동상은 바로 성피터교회 뒤편에 있다.

옛시가지를 걷다 보면 지붕 위에 두 마리의 검은 고양이가 서 있는 ‘고양이 집’이 눈길을 끈다. 여기에도 재미난 사연이 담겨 있다. 20세기 초 길드에서 쫓겨난 한 상인이 앙심을 품고 일부러 지붕 위 고양이 동상의 엉덩이를 길드 쪽으로 향하게 했다는 소심한 복수에 관한 것이다. 시청사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성롤란드 동상 뒤쪽에 리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히는 ‘검은 머리 전당’(사진)이 우뚝 서 있다. 독일 르네상스의 진수를 보여주는 고딕풍의 이 건축물은 당시 상인조합인 ‘검은 머리 길드’가 세 들었던 건물이었고, 1713년에 이 건물을 구입하여 현재와 같은 화려한 건물로 변화시켰다. 이 길드 회원들이 상상 속의 아프리카 흑인 무어인인 ‘성 모리셔스’를 그들의 수호신으로 삼은 데서 검은 머리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일어난 예술사조인 아르누보는 ‘새로운 예술’이라는 그 명칭처럼 회화, 건축, 실내 인테리어 등에서 기존의 천편일률적이고 모방적인 양식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조를 말한다. 라트비아의 정신을 화려한 장식과 결합시킨 리가의 건축물은 유럽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르누보로 자타가 인정한다. 리가에 있는 건물 중 3분의 1 이상이 아르누보 건축물일 정도로 이 도시는 아르누보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아르누보 건물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알베르타 거리는 다양한 조각품과 건물들을 하나로 융합시킨 예술공간처럼 느껴진다.

아르누보 거리에서 다시 옛시가지 중심지로 돌아오는 길, 브리비바스 대로에 자유의 기념탑이 있다. 라트비아 국민에게 자유의 상징인 이 탑은 밀다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기념비 꼭대기에 머리 위로 손을 뻗쳐서 세 개의 별을 들고 있는 소녀 동상이 바로 밀다이다. 소련이 지배하던 시절 이 탑 아래에 꽃을 바치거나 집회를 하면 정치범으로 몰려 즉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밀다는 시베리아행 편도 티켓을 받게 하는 ‘여행 대리인’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나돌았다. 기념탑 아랫부분에는 ‘테브제메이 운 브리비바이’(Tevzemei un Brivibai)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조국과 자유’를 의미한다. 억압의 시대에 조국 땅에서 자유로운 삶을 꿈꾼 라트비아인들의 슬픔과 염원이 담긴 이 문구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내게도 가슴 저린 느낌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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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잘츠카머구트의 푸른 심장, 장크트길겐

12개의 산봉우리가 만든 지평선

 

 

오스트리아를 여행할 때, 도시의 번잡함을 벗어나서 한가롭게 산길을 걷고 호숫가를 산책하며 분주한 마음에 잠시나마 쉼표를 찍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잘츠카머구트 지역이다. 잘츠카머구트에는 수많은 가파른 고봉들과 크고 작은 호수, 그림 같은 계곡들, 부드러운 언덕들, 그리고 그 천혜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마을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중에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할슈타트이지만 오늘 우리의 여정이 향할 곳은 잘츠부르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볼프강 호수 마을 ‘장크트길겐’(사진)이다.

 

깔끔하게 정돈된 마을 앞으로 새하얀 돛대를 단 요트들이 작은 새처럼 내려앉은 볼프강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옥빛 볼프강 호수를 감싸안고 가파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섰다. 땅과 하늘의 경계를 나누듯 노랑, 빨강 케이블카가 산 정상을 분주히 오르내리고 있다. 3500여명의 주민들보다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이 언제나 더 많다는 장크트길겐에는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가 태어난 집이 있다. 모차르트의 누나인 나넬도 결혼 후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여행길에 갑작스레 찾아드는 허기를 채울 요량으로 자일반(케이블카) 승강장에 붙어 있는 소박한 셀프 레스토랑에 들러서 몇 개의 기다란 노천 테이블 중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메뉴판을 보니 저렴한 가격의 슈니첼 제멜이 눈에 띈다. 슈니첼 제멜은 제멜이라는 작은 빵 사이에, 단지 슈니첼(달걀·빵가루 등을 입혀 튀긴 고기)만을 끼운 오스트리아식 햄버거이다. 채소가 없어서 먹기에 조금 팍팍하지만 간편하면서도 든든하게 속을 채우기에 딱 좋은 음식이다.

 

장크트길겐 마을 뒤쪽에 위치한 해발 고도 1522m의 츠뵐퍼호른은 사계절 내내 하이킹족과 스키어들, 그리고 패러글라이더들에게 인기가 최고인 곳이다. 이미 길겐의 푸른 하늘에는 새들보다 더 높이 날고 있는 패러글라이더들의 비행이 이어지고 있었다. 얼른 그곳에 올라보고픈 마음에 자일반을 타보기로 했다. 나를 태운 자일반은 15분 정도 계속 산 정상을 향해 부드럽게 상승했다. 점점 인간 세상이 멀어지고 호수는 작아졌지만 그 색채는 더욱 짙어졌다. 세상을 멀리할수록 아름다운 자연이 가까워진다는 걸 알면서도 왜 나는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려고만 하는 걸까.

 

츠뵐퍼호른 정상에 서자 잘츠카머구트는 오로지 파랑과 초록색을 사용해서 세상에서 가장 큰 캔버스에 그린 대자연의 그림이 되어 발아래 펼쳐진다. ‘12개의 산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그 츠뵐퍼호른이란 이름이 말해주듯 뿔처럼 우뚝 솟은 수많은 고봉들이 지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비상하는 패러글라이더처럼 내 마음도 그 바람에 실려 잘츠카머구트의 하늘을 마음껏 떠돌았다.

 

들꽃들이 피어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시간에 쫓김 없이 즐기는 산책은 말 그대로 마음 가득 평온을 안겨준다. 눈부신 초록의 자연과 맑은 호수, 그리고 평온한 삶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잘츠카머구트의 푸른 심장, 장크트길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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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햇살과 해산물 요리의 천국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세잔의 밤거리 아래에서

 

 

기차역에서 ‘빅토르 위고 대로’를 따라 걸으면 우람한 분수대가 있는 드골 광장이 나온다. 드골 광장에서 이어진 미라보 거리는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대로를 따라 늘어선 수많은 카페 중에서도 1792년에 창업한 카페 레 되 가르송(Les Deux Garcons)은 엑상프로방스의 화가 폴 세잔이 단골로 다니던 카페다.


저녁시간 엑상프로방스의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걸으며 무얼 먹을까 고민하는 건 소도시 여행의 또다른 즐거움이다. 가까이 있는 지중해의 영향 때문인지 프로방스는 매운 양념과 해산물 요리가 많다. 또한 농지와 목장이 없는 산악지대여서 우유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마늘·올리브오일·올리브가 프로방스 요리의 중심 재료이다. 풍부한 프로방스의 허브는 바로 프로방스 음식의 영혼과도 같다. 1900년에 앙드레 미슐랭이 운전자를 위해 주유소, 차량 정비소를 알려주기 위한 실용 가이드북으로 출간한 <미슐랭 가이드>를 빼놓고 프랑스 음식을 논할 수 없다. 미슐랭 가이드의 별 3개를 얻는 레스토랑과 요리사는 일생일대의 영광이다. 2006년 기준 프랑스에서 별 3개를 받은 레스토랑 26곳 중엔 엑상프로방스의 식당이 2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프로방스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셰 고구(Chez Gogou) 레스토랑의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와인을 곁들여 먹은 쇠고기 야채찜 요리는 토마토소스가 뿌려져서 아주 개운한데다 양도 많아 깊어가는 프로방스의 밤을 즐기기에 딱이었다.

이른 아침에는 법원 앞 넓은 광장에 큰 시장이 들어선다. 식료품시장과 생활용품, 잡화시장, 골동품 벼룩시장, 꽃시장이 한데 어울려 엑상프로방스의 활기찬 아침을 만든다. 프로방스의 향기와 색채, 다양한 노점상과 거리의 악사가 어우러진 프로방스의 풍경은 마음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방인 여행자에게 시식용으로 치즈를 권하고, 프로방스의 다양한 소스를 올린 빵조각을 권하는 노점상의 넉넉한 미소가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 근대 회화의 아버지 세잔은 이곳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나 여기서 자랐고, 여기서 공부했고, 여기서 살았으며(잠시 파리에서 살기도 했지만), 결국 여기서 죽었다. 세잔은 엑상프로방스 근교의 하얀 바위산인 생트빅투아르산을 일평생 자신의 작품 소재로 삼았다. 세잔의 아틀리에는 도로 한켠 우거진 숲속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세잔이 사용하던 여러가지 미술도구, 입던 양복, 그의 정물화의 모델이 되었던 낡은 주전자와 소품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소소한 일상의 사물들을 비범한 예술적 그림으로 승화시켰던 세잔. 무작정 프로방스의 밤거리를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본다. 작은 분수대 옆에서 노래하던 거리의 악사는 어느새 떠나고 정적만이 흐른다. 그 밤공기 속에서 나는 라벤더 향기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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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이 노래한 영화로운 에덴동산, 포르투갈 신트라

아담과 이브도 이 안갯속을 걸었을까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 “영화로운 에덴동산”(the glorious Eden)이라고 극찬했던 조용하고 평화로운 고도(古都), 신트라(Sintra).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서북쪽으로 20㎞ 지점에 둥지를 틀고 있는 신트라의 울창하고 깊은 산속에는 13~15세기의 왕궁인 신트라 성, 화창한 날이면 멀리 테주 강까지 내려다보이는 동화 같은 페나 궁전(사진), 아름다운 몬세라테 정원 등이 자리잡고 있다. 매년 여름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교회와 궁전, 공원에서는 수준 높은 대규모의 ‘신트라 음악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바이런이 왜 이곳을 ‘에덴동산’이라고 불렀는지 이해가 충분히 갈 정도로 청정한 자연 속에 둘러싸인 우아한 마을이다.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흐린 하늘과 짙은 안개로 인해 페나 궁전으로 향하는 언덕길은 마치 신비로운 정령의 숲으로 향하는 묘한 느낌이 든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페나 궁전은 원래는 수도원이었으나, 1839년 페르난도 2세가 개축한 뒤에는 왕들의 여름철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아멜리아 여왕의 방을 비롯해서 화려하고 독특한 장식의 수많은 방들과, 아직도 초기 수도원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성 내부의 회랑은 묘한 대비를 이룬다. 분명 수많은 동화 속 주인공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이 궁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만 같다.

마을로 내려와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관광안내소 근처에 위치한 툴랴스(Tulhas)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입맛을 살려주는 따스한 야채 스프와 비린내 없이 깔끔한 맛을 선사하는 대구 크림소스 요리에 마음이 흡족하다. 인상 좋은 주인장이 포르투갈 전통 와인 포르투 한병을 들고 오더니 한잔 가득 따라준다. 포르투갈 작은 마을 한 작은 식당 주인장의 후한 인심이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후식으로 신트라의 전통과자로 유명한 피리키타 도이스 과자점을 찾아갔다. 신트라의 전통과자로 유명한 트라베세이루는 ‘베개’라는 뜻인데, 생긴 모양이 베개 같다. 케이자다는 타르트처럼 동그란 형태의 과자다.

시인 바이런이 머물다 간 카페의 은은한 조명, 더욱 짙어진 저녁 안개, 그리고 골목마다 빛나는 가게 불빛과 빗물에 촉촉해진 좁은 골목길들이 신트라를 별천지 세상으로 변화시킨다. 안개 낀 골목길을 걸으니 인생이란 이렇게 안갯속을 걷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절망의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면 그냥 한번 툭 털어내고 일어설 수 있으면 좋겠다. 미래는 어차피 알 수 없으니까 현재는 희망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신트라의 안개 낀 그 미망 같은 길을 걸으며 적어도 현재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인생을 긍정해야겠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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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중세로의 타임머신, 로맨틱 가도의 첫 도시 뷔르츠부르크

권력은 시들어도 꽃들은 지지 않네


전후 독일은 전쟁의 폐허를 복구하는 동시에 관광산업의 부흥을 위해 독일 전역에서 특색 있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다양한 소도시를 연결짓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결과 독일 구석구석 종횡을 잇는 고성 가도, 메르헨 가도, 괴테 가도, 판타지 가도 등을 비롯한 7대 가도가 탄생했다. 그중에서도 전세계 여행자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가도가 바로 뷔르츠부르크에서 알프스 산자락의 퓌센을 잇는 전체 길이 350㎞의 로맨틱 가도다. 로맨틱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이유는 먼저 로마인들이 그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지만, 그 가도를 따라 여행을 하다 보면 시간이 멈춘 듯한 중세의 고요함과 완만한 구릉지대의 자연이 선사하는 낭만이 가득 넘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쌉쌀한 맛이 나는 백포도주로 유명한 프랑켄바인의 산지답게 뷔르츠부르크의 언덕에는 초록색으로 빛나는 포도밭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곳 와인은 보크스보이텔이라는 둥글고 평평한 형태의 와인병에 담겨져 더욱 그 명성이 높다. 중앙역에서 구시가를 향해 곧장 뻗어 있는 카이저 거리를 따라 10분 남짓 걸으니 구시가의 중심 마르크트 광장이 나온다. 그 광장에는 절제된 고딕 형식의 마리엔카펠레 성당, 화려한 바로크 시대의 팔켄하우스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마르크트 광장에서 조금 더 걸으면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노이뮌스터 성당과 위풍당당한 시청사 탑이 등장한다. 시청사 바로 옆에 가장 아름다운 관광포인트인 알테마인브뤼케(옛 마인 다리)가 있다. 마인 강과 푸른 포도밭, 구시가가 어울려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알테마인브뤼케에서 올려다보이는 마리엔베르크 요새는 주교의 옛 거주지이자 뷔르츠부르크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주교는 1719년 이후부터 마리엔베르크 요새에서 내려와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레지덴츠(관저·주교관)로 이주를 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이곳은 건축가 발타자르 노이만의 작품인데, 300개 이상의 바로크와 로코코풍의 화려한 방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계단의 방 천장에 그려진 이탈리아 화가 티에폴로의 프레스코 천장화는 방문객들의 숨을 일순간 턱 막히게 한다. 뷔르츠부르크 주교관 정원은 각종 색채와 종류의 꽃들이 만발하고 잘 다듬어진 나무들과 기하학적으로 잘 짜인 구성의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 옛날 권력자들은 그 꽃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꽃송이들 위로 수많은 세월이 지나고, 그렇게 무심한 세월의 흐름 속에 헤아릴 수 없는 영웅들과 권력자들은 과거의 망각 속으로 사라져갔다. 서슬 퍼렇던 권력도, 바닥을 알 수 없는 욕심도 어쩌면 저 가엾이 떨어진 꽃잎들보다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행자들이 떠나간 뷔르츠부르크의 그 정원에서는 조용히 낙화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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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 속에 숨겨진 비범함의 아름다움, 체코 텔치

균형감과 통일성의 정답안

 

체코 ‘남부 모라비아’ 지방의 매력적인 13세기 도시 텔치는 로마네스크 교회의 은신처로 만들어졌다. 1530년 큰불로 폐허가 되었던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르네상스 스타일로 온전히 재건되었고, 인구 6000여명에 불과한 이 작은 마을은 놀랍게도 1992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쾌거를 이뤘다. 도대체 이 작은 마을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세계문화유산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가 있었을까?

 

일반적인 유럽의 도시들이 원형으로 광장을 이루고 있는 것과는 달리 텔치의 광장은 마치 긴 대로처럼 길쭉하게 옛시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광장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5분이면 충분히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그 광장의 한복판에 서서 눈을 들어 광장을 한 바퀴 휘둘러보면 저절로 감탄사가 입에서 흘러나온다. 광장을 따라 길게 통일감 있게 늘어선 건축물들이 선사하는 균형미와 조화로움, 눈부시게 새파란 하늘과 솜사탕처럼 점점이 뿌려진 흰구름을 배경으로 빨강·분홍·노랑·검정 등 온갖 색채로 채색된 파사드들, 삼각형·타원형·반원형 다양한 패턴이 조화를 이룬 지붕들, 건물 2층마다 세 개씩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나 있는 창문들, 그리고 광장을 향해 균일하게 나 있는 아치형 회랑들. 균형감과 통일성 속에 다양한 색채와 형태의 변화가 어우러진 텔치의 건축미는 마법 같은 매력으로 시선을 잡아챈다.

 

텔치 광장의 끝에 있는 성야고보 교회의 첨탑에 오르면 또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크 양식의 ‘예수의 성스런 이름 교회’의 쌍둥이 첨탑이 사이좋게 솟아오르고, 텔치를 둘러싸고 있는 작은 연못에는 잔잔한 평화가 넘친다. 교회 바로 옆의 텔치 성은 이 도시가 지닌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현대인들, 좀더 크고 웅장한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텔치는 그런 시대를 거스르는 작은 것의 아름다움과 소소한 풍경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음을 역설한다. 사람의 살아감도 그러하지 않은가.

 

텔치가 전해주는 작지만 오랜 여운이 남는 감동을 마음에 조용히 새기며 첨탑을 둘러보는데, 첨탑 한 벽면 공간에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이 남겨놓은 쪽지에 시선이 머문다. 그 게시판은 이제 무수한 메모와 그 메모를 고정한 핀으로 너무나 빽빽해서 빈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텔치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작은 마음 한 점을 이곳에 두고 떠난 걸 게다. 나도 그 텔치의 첨탑 속에 내 마음의 쪽지를 남겨두었다. “작고 아름다운 내 마음의 텔치, 잊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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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둥지 마을 에즈의 절벽에서 바라본 코트다쥐르 바다

가장 낭만적인 이름의 기차역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그림 같은 쪽빛 해안을 유럽인들은 코트다쥐르라고 부른다. 그 해안을 따라 오렌지축제로 유명한 망통, 고급 휴양지 모나코, 멋진 해변의 니스, 영화제로 명성이 높은 칸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도시들이 이어진다. 휴가철마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해안가로 몰려드는 이곳은 여행과 휴식을 갈망하는 이들에게는 꿈의 해변이다. 그 해안가 높은 언덕 정상에 자리잡은 난공불락의 ‘독수리 둥지 마을’이 바로 에즈다. 그림 같은 코트다쥐르 해안가를 달리던 열차가 에즈쉬르메르에 선다. ‘바다 위의 에즈’, 세상에 이토록 낭만적인 기차역 이름이 있을까. 기차역을 건너서 바닷가로 내려갔다. 사람들은 저마다 파라솔 아래에서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으면서 한가로운 코트다쥐르의 바다를 즐긴다. 잠시 그 해안가에 드러누워서 지중해의 파도 소리를 듣다가, 더우면 지중해의 쪽빛 바다로 몸을 던졌다.

버스가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산길을 한참을 오른 뒤에야 나선형의 산꼭대기에 둥지를 튼 에즈가 눈앞에 등장한다. 낡은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은 골목길과 역시 풍화작용의 흔적이 역력한 주택들이 푸근하고 정겹다. 각종 기념품과 금은 세공품 가게들, 허브를 파는 가판대, 암벽 바위를 뚫고 파낸 동굴 같은 무수한 작은 예술 공방들, 다채로운 창문틀과 따스한 색감의 주택들, 지중해 햇살을 닮은 노란색으로 채색된 교회의 종탑, 교회 옆의 꽃밭처럼 평화로운 묘지는 에즈만의 아름다움과 고즈넉함으로 다가온다.

정상에 자리잡은 야생의 정원(Jardin d’Eze)은 일년 내내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 때문인지 온통 초록색 식물들로 생명의 활기가 넘쳐난다. 인상적인 다양한 선인장과 희귀한 식물들이 곳곳에 넘쳐나고 군데군데 세워진 하얀색 조각상들이 어울려 묘한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뒤를 돌아보니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저 멀리 코트다쥐르의 쪽빛 바다와 그 해안을 따라 늘어선 마을들이 숨막히는 풍경화다.

에즈의 올리브나무와 소나무 아래에서 니체는 그의 작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마지막 부분을 완성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에즈의 풍경 속에서 어쩌면 그렇게 도발적이고 신성 모독적인 생각들을 풀어낼 수 있었을까. 인간의 이성에 의해 신화의 세계가 사라지고 더욱더 고독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 진정 아름다운 삶일까. 어느새 두둥실 떠오른 보름달을 머리에 이고 가파른 에즈의 절벽에 서서 빛나는 별을 바라본다. 아, 나도 언젠가는 하늘의 별처럼 빛날 수 있을까? 니체가 서성거렸을 에즈의 골목 한 모퉁이에 발걸음이 오래도록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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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노니는 이탈리아 남부 해안마을 트로페아

예쁜 마을 선발대회 단골 1등이라오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난하지만, 드라마틱한 산들과 눈부신 해안 절경, 그리고 세룰리안블루 색채의 바다가 어우러진 가장 매혹적인 주가 바로 칼라브리아다. 이탈리아 지도를 보면 장화 모양의 앞굽에 해당하는 위치다. 칼라브리아 현지인들에게 트로페아를 물어보면 누구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티레노 해안의 ‘가장 예쁜 마을 대회’에서 트로페아는 늘 손쉽게 우승을 차지한단다. 전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가 아름다운 트로페아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래서 항구도 헤라클레스 항구라고 불린다.

트로페아에 거창한 관광 명소들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작은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남부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길이 있고,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와 낡은 집들이 있고, 그들이 땅에서 땀 흘려 가꾼 농작물이 있는 식료품 가게들이 있다. 에르콜레 광장의 끝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커다란 창문 같다.

깃털 같은 흰 구름들이 수놓아진 눈부신 하늘과 푸른 티레노 바다를 바라보고, 새하얀 해변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곳이 바로 벨베데레다. 벨베데레에 서서 눈앞을 바라보면 먼 티레노 바다에서 불어온 해풍이 온몸을 감싸고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간다. 막혀 있던 가슴이 그곳에서 시원스럽게 뻥 뚫린다.

트로페아를 떠받치고 있는 깎아지른 절벽 아래, 해안가로 내려갈수록 더욱 드라마틱한 트로페아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오전인데도 벌써 부드러운 모래 해변을 따라 수많은 파라솔이 활짝 펼쳐지고 수영복을 입은 휴양객들이 바다에 뛰어들거나 선탠을 즐기고 있다. 남부의 하늘은 투명하리만치 맑고, 뭉게구름과 모래사장은 햇살에 빛의 파편을 더욱 풍성히 뿌린다. 트로페아를 포함해 피초에서 리카디까지 이어진 티레노 해안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사람들은 이 해안을 ‘신들의 해안’이라고 부른다. 트로페아는 또 매년 128개의 지침을 가지고 도시를 평가하는 레감비엔테(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환경단체)가 발행하는 ‘귀다 블루’에서 최고 등급(5-sails)을 받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절벽 위의 트로페아는 놀라운 풍경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수많은 파라솔과 그 파라솔처럼 하늘에 둥둥 떠 있는 흰 구름떼, 드문드문 서 있는 우람한 야자수들,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비키니를 입고 한껏 젊음을 발산하는 여인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오감이 활짝 열린다. 트로페아를 떠나는 기차 시간도 잊고 마치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신들의 해안을 이리저리 오래도록 배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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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밀밭에서 자유를 꿈꾸다 

종교개혁의 열정을 품은 도시 체코 타보르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남쪽으로 80㎞ 떨어진 소도시 타보르는 위대한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추종하는 후스파의 본거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는 당시 부패한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고, 어려운 라틴어가 아닌 일반 대중들이 알아듣기 쉬운 체코어로 설교를 하다가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뒤,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불꽃같은 신앙과 정열을 추종하는 보헤미아의 후스 추종자들은 박해를 피해 이곳 타보르로 몰려들었다. 과격하고 열정적인 후스의 추종자들은 타보르파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자연히 타보르는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요새이자 성지가 되었다.

타보르의 중심인 지슈카 광장에는 체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자 타보르를 세운 얀 지슈카(1370?~1424)의 동상이 우뚝 서서 낯선 여행자를 감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후스 전쟁 중에 로마제국의 황제 지그문트가 파견한 십자군을 수차례나 물리쳐서 체코의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사실 그때 그의 나이가 이미 60살이었고, 한 눈이 먼 상태였다. 2005년에 그는 역사상 체코의 가장 위대한 5대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옛 시가지를 걷다 보면 타보르에는 똑바로 이어진 길이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모든 길이 좁게 형성되었고,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길이 대부분이다. 이는 이 도시를 적으로부터 지키고 방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그렇게 건설되었단다.

타보르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코트노프 성(Kotnov Hrad)으로 향했다. 성 내부는 후스파박물관으로 개방되고, 또한 실험적인 현대 설치미술 작품들도 전시를 하고 있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느낌이다. 전시실을 돌아본 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밟고 성탑의 꼭대기에 오르자 성벽 바깥으로 천혜의 요새답게 깊은 절벽이 있고 그 아래로 강이 흐른다. 붉은 지붕들이 서로 이마를 맞댄 타보르의 하늘 위로 한 무리의 새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자유롭게 비상한다.

강을 건너 약간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자 소박한 주택들과 드넓은 황금 밀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언덕 위로 눈부시게 새파란 하늘이 빛났고, 갈대를 누이는 바람이 강 건너편 마을에서 불어왔다. 길도 아닌 길을 걸으며 마치 그 옛날 탐험가처럼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니 저 멀리 강 건너 언덕 위에 붉은 지붕의 타보르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길이 아닌 길을 걸을 수 있는 자유와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는 삶의 여유로움. 세상은 언제나 그런 자유마저 빼앗으려 하지만 여행이든, 일상이든, 우리는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꿈꾸는 자의 행복과 꿈이 없는 자의 고단함을 나는 안다. 저 머나먼 풍경 너머에 행복이 있을 거라 믿으며 그렇게 길을 걸어간다. 내 앞에 주어진 길은 무엇일까? 오늘 타보르의 황금 밀밭에서 한 여행자는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길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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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기를 연습해보세요

잔잔한 물결의 드넓은 호수를 품은 프랑스의 작은 마을, 안시




스위스 제네바 근처 국경에 인접한 프랑스의 작은 휴양도시 안시의 첫인상은 평화로움이다. 소도시를 여행할 때면 늘 그러하듯이 가볍게 카메라만 달랑 메고 옛 시가지를 향해 걷는다. 알프스 산맥 가까이에 위치한 안시 옛 도심의 중심으로 작은 운하가 흐른다. 안시 호수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들어낸 티우 운하(Canal du Thiou) 길만 잘 따라가도 옛 시가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레퓌블리크 대로에서 바라보는 운하와 마을 풍경은 빼놓지 말아야 할 전망 포인트다. 운하를 따라 물막이 시설이 간간이 있고, 세월의 정취가 느껴지는 오래된 주택들과 레스토랑, 카페들이 줄지어 있다. 운하 물결에 반영되어 흔들리는 오래된 주택들과 파란 하늘빛,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운하를 따라 유유자적 걷다 보면 예전에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역사박물관으로 쓰는 작은 건물이 단아한 모습으로 운하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안시 호수는 작은 마을에 비해 바다처럼 광대하다. 화려한 페리 유람선이 선착장에 정박해 있다. 그 선착장에 바로 이어지는 ‘유럽 공원’엔 큰 나무들이 시원한 그림자들을 드리웠다. 부드럽게 펼쳐진 잔디밭은 여행자들이 쉬어가기 좋은 공간이다. 유럽 공원을 천천히 거닐다 보면 ‘사랑의 다리’(Pont des Amours)가 나오고, 이 주변 선착장에 유람선 호객행위를 하는 선원들이나 물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여행자들이 보인다. 한 시간쯤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작은 유람선을 탔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선장 아저씨는 열네댓명 정도의 승객을 태우고 뜨거운 여름 햇살 속에 물살을 가르며 달렸다. 호수를 둘러싼 알프스의 산들과 깎아지른 바위 절벽의 장관,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물결, 녹음 가득한 초록과 푸른 호수에 가슴이 뚫린다.

언제나 빠른 걸음으로 바쁘게만 일상을 보내던 사람은 안시에서의 느린 걸음에 처음엔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느리게 걷는다는 것, 느리게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진다는 불안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빠르게 산다는 것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는 걸까. 너무 빨리 걸으면 오히려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게 되지 않는가. 안시에서 나는 천천히 걸었다. 마치 느리게 걷기 연습을 하듯이 말이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저녁이 되자 낮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운하 주변 레스토랑과 골목을 가득가득 메운다. 작은 도시지만 여행자들로 가득하다. 안시는 매년 세계 최대의 애니메이션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깊은 어둠이 드리우는 밤, 운하 거리는 레스토랑의 조명과 운하에 설치된 불꽃 조명으로 아름답게 빛난다. 운하 거리를 따라 여기저기서 거리공연도 펼쳐진다. 늘씬한 아가씨 둘이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채 스스로 망가지는 막춤 공연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고요한 호수 마을 안시의 밤, 한낮의 평화로움과는 다른, 여행자들이 뿜어내는 흥겨움과 기쁨이 운하 물결 위로 별빛처럼 반짝반짝 쏟아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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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안이뤄지고 배겨?

북쪽의 베니스라 불리는 벨기에 브루게 운하길 유람

 

 

북쪽의 베니스, 혹은 서유럽의 베니스라고 불리는 브루게는 한때 그 별명답게 남유럽의 베네치아와 비길 만큼 상업도시로 황금시대를 누리기도 했다. 지금은 아름다운 중세 건물들과 도심을 타원형으로 감싸 흐르는 운하와 50여개의 다리가 그림처럼 펼쳐지는 관광지로서 더욱 유명하다.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북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북해에 이르기 전, 숨바꼭질하는 예쁜 소녀 같은 소도시 브루게에 닿는다. 작고 아담한 주택들과 중세의 운치가 살아 있는 거리가 여행자를 맞아준다. 한 장난감 가게에서, 동그란 얼굴에 이마 위로 치켜세워진 고수머리의 탱탱(Tintin·만화 주인공) 인형을 발견했다. 흰 강아지 스노이와 함께 불의가 있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지 달려가 파헤치는 탱탱은, 1929년 벨기에 만화가 에르제에 의해 탄생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문화와 현실을 널리 알린 공로로 ‘탱탱의 모험 티베트’ 편에 ‘진실의 빛’ 상을 수여한 바 있다. 전 프랑스 대통령 드골은 “세계적으로 내 일생의 유일한 라이벌은 오직 탱탱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브루게의 중심인 마르크트 광장 남쪽에는 브루게의 상징과도 같은 종루 벨프리가 우뚝 서 있다. 종루 꼭대기에 매달린 크기가 다른 종 47개가 매시 정각을 알리는 아름다운 종소리를 낸다. 중세 상인 조합인 ‘길드 하우스’는 가장 포토제닉한 건축물이다. 마치 아기자기한 초콜릿처럼 다채로운 색깔과 모양으로 구성된 창문과 지붕들이, 보는 사람을 동심으로 돌아가게 한다. 서로 다르면서도 함께 모여서 한층 더 아름다운 길드 하우스 앞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다투는 데 급급한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 도시 곳곳을 흐르는 운하가 모습을 드러낸다.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들이 좁은 운하를 따라 오가고 있다. 과거에는 무역선이 오가는 생존을 위한 물길이었지만, 지금은 수많은 여행자들을 끌어모으는 관광을 위한 운하가 되었다. 브루게를 대표하는 상징들 중 하나인 백조들이 운하에서 유유히 노닌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밌는 전설이 있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부하가 브루게를 다스릴 때, 시민들이 그를 처형했다. 처형된 관리자 집안의 상징이 백조였는데, 황제는 브루게 시민들에게 자신의 부하를 죽인 벌로 호수와 운하에 영원히 백조를 키우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마을을 벗어나 초록의 가로수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그렇게 걷다가 운하가 만들어낸 목가적인 ‘사랑의 호수’(Minnewater)에 이르렀다.

이 호수에 와서 소원을 빌면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낭만적인 전설이 전해진다. 아름다운 브루게 풍경 속에 서 있으면 누구라도 이렇게 낭만적인 곳에 사랑하는 이와 함께 오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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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도시의 음울한 우아함

엘베강가의 피렌체, 드레스덴의 매력에 취하다

 

엘베강의 피렌체라고 일컬어지는 우아하고 매력적인 옛 동독 작센주의 드레스덴. 제2차 세계대전 때 기차로 두 시간 떨어진 체코 프라하는 운 좋게도 전쟁의 참화를 피했지만, 드레스덴은 심한 공습을 받아 옛 시가의 90% 이상이 파괴되었다. 드레스덴은 처참하게 폐허가 된 옛 시가를 복원하느라 ‘전쟁보다 더 고된 시간’의 터널을 지나와야만 했다. 그저 예쁘기만 한 다른 유럽의 소도시에 비해 음울함이 묻어나는 건, 이 부인할 수 없는 드레스덴의 어두운 역사 때문이다. 이곳을 처음 찾는 이들은 이 도시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란다. 현재의 드레스덴은 전쟁의 상흔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온전하게 복구되었기 때문이다. 바로크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드레스덴의 옛 시가지를 한가롭게 걷노라면 우아한 중세의 시간 속을 거니는 기분이 든다. 가톨릭 궁전교회와 바그너의 ‘탄호이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등 많은 명작들이 초연된 젬퍼오퍼 국립 오페라하우스, 츠빙거 궁전과 드레스덴 성을 비롯한 주요 관광지들은 옛 시가지 중심에 모여 있다. 특히 유럽의 발코니라고 불리는 ‘브륄의 테라스’에 서면 엘베강과 강 너머 새 시가지의 멋진 전망이 펼쳐진다. 슈탈호프 외벽에 그려진 ‘군주의 행렬’은 그 길이가 101m나 된다. 무려 2만5000여장의 타일을 이용해서 작센의 군주들을 묘사한 벽화이다. 군주의 행렬을 따라 걸으면 마치 역사 속의 한 순간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든다.

드레스덴의 정신적 지주인 웅장한 바로크식 건물 프라우엔 교회(사진)로 향한다. 전쟁이 끝난 뒤 드레스덴 시민들은 언젠가 재건될 희망을 안고 산산이 부서진 프라우엔 교회의 돌들을 모아 번호를 매겨 보관했다. 독일 태생의 미국인 생물학자 귄터 블로벨이 1994년에 프라우엔 교회 재건 사업을 시작했고, 1999년 노벨 의학상 수상으로 받은 상금을 모두 기부했다. 이후 이 교회는 정부의 지원보다는 온 국민의 마음을 모은 성금으로 복구되었다. 그 마음이 담겨서일까. 드레스덴의 이 교회는 독일 여행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로 늘 추천을 받는다. 프라우엔 교회 내부는 그 자체로 예술 작품과도 같고, 오페라 극장처럼 우아하다. 때마침 주일이어서 성가대는 예배 순서에 따라 1층, 2층, 3층으로 자리를 옮겨 가면서 멘델스존과 바흐의 작품들을 천상의 화음으로 노래한다. 전쟁의 참화 속에 폐허가 되었던 프라우엔 교회는 새로운 희망으로 재건되었다. 절망의 현장에서 희망을 꿈꾸는 건 바로 사람들의 몫이다.

밤의 장막이 드리운 드레스덴의 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옛 시가 골목을 지나 아우구스투스 다리를 향한다. 빛의 궤적을 남기며 전차가 스쳐 지나가고, 성당과 궁전과 광장에 불을 밝힌 조명들이 엘베강의 피렌체, 드레스덴의 밤을 눈부시게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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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역사 품은 강과 절벽

 

중세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스페인 톨레도

 


화가 엘 그레코가 너무나 사랑한 도시이자, 라만차의 지평선 위에 타호강이 부드럽게 감싸고 흐르는 아름다운 도시, 톨레도.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 떨어진 이 도시는 기원전 2세기에 로마의 식민도시였고, 이후 고트의 중심도시로 발전했다. 이어 이슬람 세력이 침입한 이후에는 톨레도 왕국의 수도이자 상공업 중심지가 되었다. 그 뒤 카스티야 왕국의 문화·정치 중심지로서 더욱 찬란한 꽃을 피웠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부침 속에 기존의 기독교, 유대 문화와 함께 이슬람 문화가 더해져서 톨레도는 세 가지 문화가 공존하는 종교와 예술의 도시로 거듭났다. 고스란히 보존된 중세 도시의 매력으로 스페인을 찾는 여행자들의 필수 여행지로 꼽힌다.

웅장한 비사그라문과 무데하르 양식의 ‘태양의 문’을 통과해 비탈길을 걸으면 아담한 소코도베르 광장이 맞아준다. 이슬람 지배 시기에는 주로 가축시장이었고, 투우나 축제 등 공공 행사가 주로 열렸던 시민들의 열린 마당이었다. 광장을 둘러싼 바르와 카페, 기념품점, 그리고 아기자기한 마사판(Mazapan) 전통과자 가게들로 정감이 넘친다. 오늘날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인 톨레도 대성당의 세 개의 문은 각각 지옥, 용서, 심판을 상징한다.

프랑스 고딕 양식의 이 대성당은 페르디난드 3세가 1227년 건설을 시작하여 266년이 지난 1493년에 완성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길이 113m, 너비 57m, 중앙의 높이 45m에 이르는 압도적인 공간이다. 성당 중앙에 있는 화려하고 정교한 성가대석을 비롯해 보물실, 성물실 등 휘황찬란한 유물들이 가득하다. 무엇보다도 성당 안 박물관에 있는 엘 그레코의 그림들이 인상적이다. <참회의 베드로> 등 엘 그레코의 작품뿐만 아니라 반다이크, 고야의 작품들도 시선을 끈다.

소코도베르 광장에서 출발하는 꼬마기차를 타고 톨레도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길을 올라간다. 그 언덕길 가장 높은 전망대에 오르자 톨레도의 그림 같은 전경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그냥 다시 내리막길로 향하는 꼬마기차가 못내 야속했다. 톨레도를 온전히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어서 언덕길을 다시 걸어 올라가기로 맘먹었다. 타호강을 따라 걷는 느린 산책은 색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빠른 속도로 지나칠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내 마음의 프레임에 오롯이 새겨진다. 왕 같은 알카사르와 왕비 같은 대성당, 그리고 오밀조밀 모여 있는 중세의 집들이 어울린 톨레도, 그 천년의 고도를 감싸고 흐르는 타호강과 오랜 세월만큼 깊은 절벽이 어울린 풍경 앞에서 감탄사가 절로 터져나온다. 톨레도를 일평생 사랑한 화가 그레코의 심정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구원의 노래가 울려퍼졌던 분수

체코의 숨은 보석, 올로모우츠

 

체코 브르노에서 북동쪽으로 약 60㎞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올로모우츠는 여행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다. 하지만 이 작은 도시가 보유한 문화재와 중세 건축물의 수는 수도 프라하의 뒤를 이어 체코 제2위를 차지할 정도로 풍부한 매력적인 도시이다. 12세기 이후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의 대성당, 고대 신화가 영감이 되어 형상화된 수많은 분수들, 프라하의 천문시계와는 색다른 느낌의 우아한 천문시계, 모차르트가 교향곡 제6번(Symphony No.6 F-major)을 작곡한 도시, 올로모우츠. 시청사 앞 드넓은 광장에 들어서자 웅장한 바로크 양식의 성삼위일체 석주(Holy Trinity Column)가 높이 솟아 있다. 이 석주는 높이가 무려 35m에 이르는데, 시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부 유럽의 바로크 걸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기념비이다. 시선을 땅으로 향할 틈을 주지 않는 올로모우츠의 성삼위일체 석주와 아름다운 천문시계, 수많은 고대 신화가 담긴 분수들을 바라보며 광장을 배회했다. 1593년 빌렌베르크가 그린 그림을 보면 부드러운 곡선의 논밭들 뒤로 수많은 첨탑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우아한 스카이라인의 올로모우츠가 담겨 있다. 느리게 걸을수록 소도시에 숨겨진 비밀들은 더욱 환하게 드러난다.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시저)의 분수를 비롯해,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넵투누스(넵튠), 헤라클레스, 트리톤, 메르쿠리우스(머큐리), 유피테르(주피터), 아레이온(아리온)의 분수들이 제각각 개성을 뽐내며 광장과 골목 곳곳에 솟아 있다. 높이가 100m에 이르는 성 바츨라프(벤체슬라스) 성당은 황제의 권력을 넘어섰던 영화로운 종교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땅거미가 지고 저녁 어스름이 서서히 몰려온다. 아레이온의 분수 앞에 앉아 어둠에 덮여가는 도시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 아레이온의 분수에는 영감 넘치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리스 코린토스(고린도) 출신의 유명한 가수가 이탈리아에서 하프처럼 생긴 전통악기 키타라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많은 재산과 명성을 얻었다. 금의환향하는 길에 선원들이 그를 바다 한가운데 던져 죽이고 재산을 가로채기로 공모했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로 뛰어들기 전에 그는 생의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끝내고 절망 속에 바다로 몸을 던졌을 때 놀랍게도 돌고래가 그를 구해주었다. 그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서 깊은 바다에서 헤엄쳐 온 돌고래였다. 신은 그 돌고래를 갸륵히 여겨 하늘의 별로 영원토록 빛나게 해주었다. 돌고래의 선행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노래로 자신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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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작은 천국 소도시로의 초대

여행작가 백상현이 소개하는 이탈리아 소도시의 아찔한 매력

 

이탈리아 북서부 해안 친퀘테레의 다섯 마을 중 한 곳인 마나롤라

소도시 여행은 최근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지구촌 여행의 한 유형이다. 작지만 아름답고 속 깊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소규모 도시를 구석구석 들여다보는 여행이다. 이런 소도시 여행은 유명 대도시 여행이 채워주지 못하는, 현지인의 삶과 문화에 더욱 밀착한 여행을 가능하게 해준다. 낯선 여행자를 대하는 시선도, 무미건조하고 때론 차갑기까지 한 대도시보다 소도시가 더 정겹고 따스하다.

로마·피렌체·베네치아….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여행지가 수두룩한 나라가 이탈리아다. 항상 인기있는 이 도시들 말고도 이탈리아엔 남부 시칠리아섬에서부터 북부 산악지대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소도시들이 빼곡 들어차 있다.

고대문명 교차로 시칠리아, 유적·자연 어우러진 이색 소도시들 촘촘

이탈리아의 소도시 중에서도 시칠리아섬 지역 도시들은 단연 독특한 아름다움과 풍요로운 유산, 다양한 먹을거리들로 여행자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수많은 고대문명의 교차로 시칠리아답게 고대 페니키아부터 카르타고, 그리스, 로마, 비잔틴, 아랍, 노르만, 아라곤왕국, 19세기 부르봉 왕조까지 역사상 화려했던 제국들이 이 섬을 거쳐 갔다. 수많은 문명이 이곳을 지배하려 했지만, 시칠리아인의 정신은 결코 굴복당한 적이 없다고 시칠리아인들은 딱 잘라 말한다. 그런 역사적 바탕 때문인지 시칠리아 사람에게 ‘이탈리안’이라고 부르면 욱하는 성향이 있다. 마피아의 본거지라는 오명으로 일부 여행자들이 꺼리기도 하는 곳이지만, 이곳을 여행한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시칠리아를 주저 없이 추천한다.

 

작은 천국의 땅’ 타오르미나

괴테는 그의 ‘이탈리아 기행’에서 타오르미나를 ‘작은 천국의 땅’이라고 말했다. 타오르미나는 마법과 신화의 공기 가득한 타우로산 높은 언덕에 둥지를 틀고 있다. 가슴이 탁 트이는 이오니아 바다를 앞에 펼쳐놓은 타오르미나는 일년 중에 여덟달을 수영, 윈드서핑, 스쿠버다이빙, 요트 세일링 등 수상스포츠와 일광욕을 즐길 수 있는 지중해성 기후를 자랑한다.

먹거리는 어떤가. 진짜 과일처럼 생긴 전통과자 마르차파네, 달콤한 칸놀로, 그리고 토론치니(Torroncini, 누가), 만도를라(Mandorla, 아몬드), 과일과 벌꿀 등으로 만든 시칠리아 전통과자를 파는 가게 케르니는 꼭 들러야 할 곳이다. 신문에도 자주 실리고, 이탈리아의 유명 인사들도 많이 찾아와서 기념사진을 남기는 곳이다. 타오르미나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최고의 명소는 바로 기원전 395년에 세워진 완벽한 말편자 모양의 그리스 원형극장이다. 푸른 시칠리아의 하늘 아래 반원형 객석인 카베아에 앉아 무너진 무대 너머로 연기를 내뿜는 에트나 화산과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인간 문명과 자연 세계의 하모니가 연출하는 최고의 화음을 감상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타오르미나다.

 

화산재 위에 재건된 도시 카타니아

카타니아는 지금도 무시무시한 용암과 연기를 분출하는 에트나 화산으로 인해 불운과 축복을 동시에 받은 곳이다. 에트나 화산의 분출로 도시가 용암과 화산재에 뒤덮인 횟수가 무려 7번. 가장 심각한 피해를 본 1669년 화산 폭발은 거의 1만2000명이나 되는 목숨을 앗아갔다. 하지만 불굴의 영웅 카타니아인들은 오뚝이처럼 다시 도시를 일으켜 세웠다. 용암과 화산재 위에 재건된 도시라 그런지 카타니아의 건축물들은 어딘지 모르게 그 색채가 거무스름하다. 하지만 검고 칙칙한 색채를 한꺼풀만 벗겨내고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진주처럼 우아하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가득하다.

카타니아의 중심인 두오모 광장에는 현무암으로 만든 코끼리분수가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코끼리의 표정이 분명 미소를 짓고 있다. 사람들은 이 코끼리분수가 무시무시한 에트나 화산을 진정시키는 마법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카타니아를 찾는 여행자에게 가장 매력적인 볼거리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활기찬 아침 시장 풍경이다. 파르도 거리의 생선시장과 나우마키아 거리의 식료품 시장이 만드는 활기는 수많은 역경을 극복해온 카타니아인들의 저력이 만든 당연한 결과이리라.

시칠리아섬 들판(위) 시칠리아 에리체산 정상의 중세도시 에리체의 골목(아래)

 

꽃향기 과일향 가득한 에리체 - 중세 숨결 가득

중세 골목마다 달콤한 과자 향기, 에리체

해발 751m의 에리체산 정상에 있는 에리체는 중세시대의 축소판이다. 대리석으로 포장된 중세의 골목길과 회색빛 돌들로 건설된 성벽과 성당, 고대 비너스 신전, 그리고 주택들은 소박하고 고요하다. 마치 수도승들이 사는 산중의 수도원 같은 느낌이다. 에리체의 골목길을 걸으면 꽃향기와 과일향기가 난다. 시트론 잼으로 채워지고 설탕가루가 하얗게 뿌려진 달콤한 비스킷들과 그 과자들을 장식하는 꽃가지들과 작은 과일들로부터 또다른 향기가 퍼져 나온다. 그 옛날 ‘산 카를로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수녀들에 의해, 시나몬 향기가 나는 무스타촐리, 통아몬드로 꽉 채운 소브리, 크림으로 속을 채우고 설탕가루로 덮은 부드러운 제노베시 비스킷 등 전통과자들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져온다.

윤기 나는 대리석 골목길을 따라 공기 중에 부유하는 비스킷 굽는 향기와 이 지역 전통요리의 향기가 뒤섞여 여행자들은 더욱 깊은 허기를 느끼게 된다. 파스타와 함께 바삭하게 구운 빵조각이 올려진 에리체 페스토, 지중해의 신선한 생선과 잘게 썬 아몬드를 곁들인 트라파니 쿠스쿠스 등 전통 지중해 요리에 에리체를 둘러싼 산허리 포도밭에서 나는 와인을 곁들이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후식으로 ‘수도원의 오래된 제과점’에서 전통 비스킷을 골라 먹으면 에리체 여행이 완성된다.

 

북부 청정자연, 중부 슬로푸드 골라골라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티 산맥의 알페디시우시 대자연 속의 여행자들(왼쪽) 부라노 운하의 거리(오른쪽)

 

 

 

테마별로 즐기는 이탈리아 소도시 여행지 베스트

저마다 독특한 색채를 내뿜는 이탈리아의 소도시들. 이 깜찍하고도 유서 깊은 마을들을 짜임새 있게 둘러보는 방법 중 하나는 지역별, 테마별로 묶어서 여행하는 것이다. 작은 도시라고 해서 볼거리나 맛볼거리가 부족할 거라는 편견은 일찌감치 분리수거해 두는 게 좋다.

 

청정 자연 속에 숨은 소도시 여행

몬테비앙코와 돌로미티로 대표되는 북부의 자연은 말 그대로 청정함 그 자체다. 가슴까지 시원하게 뚫리는 이탈리아 내륙 깊이 숨어 있는 자연여행을 떠나본다.

돌로미티의 초록 심장, 알페디시우시

북부 돌로미티 산맥에 속한 해발 2000m의 알페디시우시는 무려 축구장 8000개 크기인 56㎢에 이르는 평평한 초원이다. 여름철이면 알프스의 수많은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고, 바람결에 다채로운 색깔로 군무를 펼치며 향기를 발한다. 시우시에서 콤파초에 이르는 4300m 케이블카 구간은 세계에서 가장 긴 공중 케이블카 구간이다. 평탄한 초원을 걷다가 고개를 들면 종종 자연이 빚어낸 대성당으로 비유되기도 하는 돌로미티의 장엄한 형상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북부 이탈리아의 알프스, 아오스타

아오스타의 야생화정원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4807m의 몬테비앙코(몽블랑)와 4685m의 몬테로사 등 고봉들이 즐비한 이곳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3차원적인 입체감이 느껴지는 지역이다. 아오스타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이동하면 몬테비앙코를 체험하기 위한 전초기지 쿠르마유르에 닿는다. 바로 인근의 라팔뤼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가서 케이블카만 타면 바로 3000m가 넘는 전망대 푼타엘브론네르(푸앵트엘브로네르)에 도착한다. 그 전망대에 서기만 하면 장엄한 대자연이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이탈리아인이 가장 사랑하는 호수마을, 코모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국경에 인접한 코모는 로마시대 이래로 수많은 귀족들과 부유한 사람들의 인기 있는 휴양지로 각광받아 왔다. 오늘날도 마돈나, 조지 클루니, 베르사체, 실베스터 스탤론 같은 유명 인사들의 별장들이 여기저기에 자리잡고 있다. 호수 주변 어디에서든 마음 내키는 곳에 내려 한가롭게 산책할 수 있는 여유로움, 도시의 탁한 공기에서 벗어나 알프스의 대자연을 넘어온 신선한 공기의 청량감. 이게 바로 코모 호수의 매력이 아닐까.

 

중부지역 슬로푸드 소도시 여행

이탈리아 중부에는 분주하던 마음을 평온케 하는 근사한 자연과 사람의 호흡에 가장 적합한 기후가 숨을 탁 트이게 해주는 움브리아주가 있다. 이 비옥한 땅에는 슬로푸드 미식 기행지로 삼을 만한 소도시들이 즐비하다.

 

움브리아의 부엌, 페루자

페루자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맛보려면 일명 ‘페루자의 부엌’으로 불리는 보르고에 가면 된다. ‘주방의 위대한 마에스트로’ 칭호를 부여받은 주인장 루이기가 주방을 책임진다. 동그란 수제 면발의 중부지방 전통 파스타인 탈리아텔레는 갈아 만든 고기 소스와 치즈가 살짝 버무려져 아주 탱탱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정말 일품이다. 안주인이 추천한 전통요리 ‘회향풀을 곁들인 페루자의 돼지고기’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든다. 후식으로는 순한 크림치즈 마스카르포네와 달걀노른자를 휘저어 섞은 크림을, 커피에 담근 비스킷으로 싼 뒤 술과 코코아로 맛을 낸 수제 티라미수를 추천한다. 한 스푼 입에 넣자마자 그 부드러움과 달콤함에 온몸이 짜릿해진다.

페루자 보르고 식당의 회향풀 돼지고기

 

와인 향기 가득한 마을, 스펠로

 

‘이탈리아의 초록 심장’이라고 불리는 움브리아의 와인은 명성이 높다. 마테오티 광장의 ‘에노테카 프로페르치오’는 꼭 들러야 할 곳이다. 윤기 나는 대리석 바닥, 커피 머신, 풍성한 치즈와 햄, 그리고 2200여병의 와인들, 올리브유, 꿀, 마멀레이드, 각종 소스, 블랙 트뤼플 등 움브리아의 전통 음식들이 가득 채워진 프로페르치오는 와인 애호가에게는 천국이다.

 

 

스펠로의 꽃 골목길

 

이탈리아 미식의 수도, 볼로냐

 

사람들은 볼로냐의 풍성하고 기름진 음식을 빗대어 ‘뚱보들의 도시 볼로냐’라고 부른다. 볼로냐 시민들에게 식당을 추천하라면 탐부리니를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탐부리니는 1932년에 처음 문을 연 셀프 레스토랑이자 와인바 겸 델리카트슨이다. 온갖 파스타, 리소토, 고기류, 생선 그리고 샐러드와 야채 요리들이 펼쳐진다. 매장 한쪽에 진열된 살라미, 살시차, 모르타델라(볼로냐 오리지널 소시지), 파르마의 프로슈토 등 수제 햄들과 파르마산 치즈들은 보기만 해도 풍성하다.

 

볼로냐 식당에서 만난 음식. 볼로냐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미식도시다

 

 

 

해안 따라 소도시 여행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이탈리아의 해안을 따라 생겨난 다양한 해안 소도시들은 이탈리아 해안 여행의 백미다. 몸도 마음도 가볍게 이탈리아 해안으로 떠나보자.

 

리구리아 해안가의 다섯 마을, 친퀘테레

‘다섯 개의 땅’을 뜻하는 친퀘테레는 그림 같은 해안 길과 깎아지른 산비탈에 늘어선 포도밭들과 올리브나무, 그리고 그 절벽 위에 아찔하게 둥지를 튼 파스텔톤의 집들, 넉넉한 마음의 어부들이 어우러진 곳이다. 다섯 마을 중 리오마조레에서 시작되는 ‘사랑의 작은 길’은 가장 인기 있는 하이킹 코스다. 가다가 지치면 바닷가 마을답게 안초비(젓갈) 피자를 한번 먹어보는 것은 어떨까.

 

남부 아말피 해안의 꿈의 장소, 포시타노 라벨로

최고의 전망 포인트인 동쪽 스피아자 그란데의 언덕길에서 바라보는 포시타노는 한 폭의 그림이다.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층층이 집들이 늘어서 있고, 눈부신 티레니아 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눈길이 가는 곳마다 어느 수채화보다 아름답고 눈부셔서 잠시 백일몽을 꾸는 듯 황홀함을 준다.

라벨로는 ‘시인들이 죽음을 맞을 때 찾아오는 곳이 바로 라벨로다’라는 말이 전해져 온다. 특히 빌라 침브로네의 ‘무한의 테라스’에서 비명 같은 감탄사를 터뜨리지 않는 여행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곳에 서서 가만히 눈을 감으면, 아말피 바다의 힘찬 테너와 바람의 고운 소프라노, 경쾌한 꽃들의 화음이 여행자들의 영혼을 감싸 안는다.

 

색채의 마술사가 사는 도시, 부라노

유럽의 대부분 낡은 건물들과는 대조적으로 부라노의 색채는 너무나 밝고 선명하고 깨끗하다. 부라노 사람들이 밝은 색채로 외벽을 칠하게 된 건 이 지역 어선들이 알록달록하게 배를 칠하던 풍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집주인이 정부에 신청을 하면 담당 기관에서 몇 가지 색을 알려주고 그중에 마음에 드는 색을 골라 칠한다. 부라노의 색채를 보고 있으면 마음엔 작은 기쁨의 물결이 일고, 행복의 기운이 불어온다.

 

6월엔 꽃의 도시로

소도시 여행 일정 이렇게 짜보세요

시칠리아 소도시 여행은 타오르미나→카타니아→아그리젠토→에리체→팔레르모 순서로 섬을 한바퀴 돌아보는 일정으로 구성한다. 도시별로 1박2일이면 충분하다. 전체 7박8일 일정. 시칠리아섬 안에서의 이동은 기차보다는 버스나 자동차를 대여해서 다니는 게 편리하다.

남부 소도시들은 알베로벨로→레체→갈리폴리→마테라→아말피 해안 도시들(소렌토·아말피·포시타노·라벨로) 일정으로 구성하면 좋다. 7박8일. 도시당 1박2일 일정으로 하고, 아말피 해안의 경우는 중간 지점인 포시타노에 숙소를 구한 뒤 넉넉히 3박4일 정도 머물면서, 주변 해안 도시들인 아말피·소렌토·라벨로를 버스를 이용해서 다녀오는 것도 좋다. 해안도로가 구불구불해서 자가용 운전은 위험할 수 있다.

중부 슬로푸드 소도시 여행은 페루자→스펠로→피렌체→시에나→피사→산지미냐노→볼로냐 일정으로 짠다. 페루자에서 2박 하면서 스펠로를 다녀오고, 피렌체에 3~4박 하면서 시에나·피사·산지미냐노를 버스나 기차로 다녀오는 것도 좋다. 그리고 이탈리아 미식의 수도 볼로냐에서 2~3박 하면서 에밀리아로마냐주의 파르마산 치즈의 산지 파르마와 발사믹 식초의 생산지 모데나, 라사냐(라자냐)와 만두형 파스타인 카펠레티로 유명한 페라라 등 근교 소도시를 다녀오면서 슬로푸드 여행을 마무리하면 괜찮을 듯하다. 7박8일 정도.

도시별 축제나 특이한 행사 시기를 택해 여행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타오르미나→타오르미나 예술제(매년 여름), 카타니아→아가타 성녀 축제(2월), 아그리젠토→국제민속 축제(2월), 페루자→초콜릿 축제(10월 셋째 주), 스펠로→성체 축일, 인피오라타(꽃축제·이상 6월), 볼로냐→세계 최대 규모의 어린이책 박람회, 볼로냐 아동도서전(3월), 친퀘테레→인근 레반토 마을의 깃발 축제, 십자가 행진 축제(7월), 라벨로→라벨로 축제(3~10월, 피크 시즌 6월과 9월).

가는 길 → 시칠리아 로마에서 시칠리아행 야간열차를 타거나, 본토의 제일 아래쪽 빌라 산 조반니로 이동한 뒤 메시나 해협을 건너는 여객선을 타면 된다. 본토의 주요 도시에서 저가항공으로 시칠리아의 팔레르모로 들어간 뒤 여행을 시작해도 좋다. → 북부 소도시 알페디시우시는 북부의 볼차노로 이동해서 사드(SAD) 버스를 이용해 시우시까지 1시간 내외 소요. 아오스타는 토리노에서 기차나 사브다(SAVDA) 버스로 2시간 이동하면 된다.


유럽의 젖줄 라인강 따라 오르며 만난 스위스의 고색창연한 소도시들

천년 옛성 밑 물길에 유럽 최대 라인폭포의 위용

 라우펜 성에서 바라본 라인폭포

라인강은 스위스 알프스에서 발원해 유럽 중부를 가로질러 흐르다가 북해를 만나 그 여정을 마무리한다. 총길이가 무려 1320㎞에 이르는 장대한 물길이다. 라인강 상류 스위스 지역 물줄기를 따라 오르며, 강이 이뤄낸 아름다운 풍경과 강변에 깃들인 매혹적인 소도시들을 둘러봤다.

라인강 유일의 폭포, 라인폭포와의 만남

라인강, 그 기나긴 여정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폭포는 단 한곳이다. 그 폭포가 바로 스위스 샤프하우젠의 라인폭포다. 폭포의 낙차는 23m밖에 안 되지만, 그 폭은 150m나 되며 1만7000년의 세월 동안 쏟아져 왔다고 한다. 수량은 매초 700㎥나 되는 엄청난 양이다. 유럽에 있는 폭포들 중에서 가장 큰 폭포인데, 멀리서 볼 때는 평범해 보여서 살짝 시큰둥하다가도 가까이 다가가면 그 엄청난 위력에 압도당한다.

라우펜 성을 통과해서 폭포 전망대로 내려가는 벨베데레 산책길이 폭포를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전망 포인트다. 특히 마치 폭포 한가운데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켄첼리 전망대에 서면 라인폭포의 웅장한 힘을 실감할 수 있다. 유람선을 타고 폭포 가운데에 솟아오른 섬에 올라가거나 폭포에 근접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된다. 라인강 유일의 폭포이자 유럽 최대의 폭포라는 희귀성과 그 웅장함으로 인해 외국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스위스 현지인들도 즐겨 찾는 관광 명소가 라인폭포다.

라인폭포 바로 위쪽에서 라인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라우펜 성은 일반적으로 라인폭포에 접근하는 통로로만 인식이 되어 여행자들의 외면을 받기도 하지만 실상은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멋진 성이기도 하다. 성에서 라인폭포로 이어지는 벨베데레 파노라마 산책로의 모토인 ‘보고, 듣고, 감탄하라’처럼 라인폭포를 찾는 이는 누구나 보고 듣고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슈타인암라인 라인강 생선요리

‘배의 집’ ‘돌출창의 도시’ 샤프하우젠

라인강을 따라 교역을 위해 물자를 실어 나르던 배들은 라인강 유일의 이 폭포로 인해 인근 도시인 샤프하우젠에서 짐을 내리고 육로로 폭포를 지나가야 했다. ‘배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샤프하우젠의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전부터 라인강의 수운 교역으로 번영을 누렸던 도시가 바로 샤프하우젠이다. 구시가 골목길을 따라 고딕,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에 화려한 장식이 더해진 돌출 창문은 샤프하우젠의 가장 흥미로운 볼거리 중 하나이다.

샤프하우젠은 바이에른(바바리아)과 티롤 지역으로부터 소금과 곡물을 교역하고 1501년에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면서 급성장했다. 18세기에 많은 부를 쌓으며 성장한 상인들이 자신들의 부와 고상한 취향을 자랑하기 위해 그리고 실내에 있는 사람들이 거리 풍경을 잘 내다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창문이 바로 돌출창이었다. 그래서 샤프하우젠은 ‘돌출창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각양각색의 돌출창과 벽화들을 구경하며 구시가를 걷노라면 목이 뻐근할 지경이다. 특히 샤프하우젠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손꼽히는 ‘기사의 집’(Haus zum Ritter)의 프레스코화는 16세기 샤프하우젠의 유명 화가인 토비아스 슈티머의 작품인데, 알프스 북쪽에 남아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프레스코화 중 가장 뛰어나고 아름답다고 인정받고 있다. 포르더가세 65번지 건물에 있는 그림은 1930년대에 복제된 것이며 원본은 대성당 근처 알러하일리겐 박물관에 있다.

또한 포어슈타트 거리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황금 황소의 집’은 옛 샤프하우젠의 가장 화려한 집들 중 하나이다. 특히나 우아한 다섯 개의 돌출창은 인간의 오감을 표현하고 있는 여성을 드러내고 있다. 거울(시각), 장갑(촉각), 꽃(후각), 현악기(청각), 케이크(미각) 등 다섯 가지 사물로 오감을 표현하고 있다.

수운교역으로 번영 누린 중세도시 샤프하우젠 
건물마다 화려한 돌출창 장식 눈길 
슈타인암라인 프레스코화도 볼만

샤프하우젠 옛시가 동쪽 비탈진 언덕 위에는 1527년 건축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발표한 ‘이상적인 요새’라는 아이디어를 실용화한 무노트 요새가 우뚝 솟아 있다. 360도로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원형의 지붕에 오르면 요새 바로 아래 포도밭과 중세의 느낌 가득한 옛시가와 유유히 흐르는 라인강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요새답게 육중한 대포들도 놓여 있다. 지금은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되는 휴식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다양한 음악 공연이나 영화를 상영하는 노천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주말에는 뮌스터 대성당 근처 넓은 잔디밭에서 벼룩시장도 열리고, 와인 셀러 방문과 시음을 할 수 있는 ‘포도 개화 축제’(6월), ‘포도 밟기 축제’(9월) 등 다양한 축제들도 열린다.

라인강의 보석, 슈타인암라인

‘라인강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소도시 ‘슈타인암라인’은 샤프하우젠에서 동쪽으로 20㎞ 떨어진 곳에 있다. 라인강변 도시들 중에서도 가장 완벽하게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옛시가의 건물들마다 화려하고 섬세하게 장식된 16세기의 프레스코화는 슈타인암라인이 왜 라인강의 보석으로 불리는지 의구심을 가진 이들의 마음속 의문부호를 저절로 사라지게 한다.

매년 거의 100만명에 가까운 여행자들이 이곳에 들른다. 관광객이 몰려들기 전인 오전 10시 전이나 단체관광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오후 5시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조금 한가로운 산책을 할 수 있다. 옛시가는 시청사를 중심으로 운터슈타트 거리와 오버슈타트 거리로 길게 계란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슈타인암라인의 시청사 광장에 들어서서 360도 한바퀴 돌아보면 마치 입체동화책 속의 한 페이지를 펼쳐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시청사는 16세기에 거상의 집이자 곡물과 옷가게, 그리고 시청으로 건설되었다. 절반이 목재로 구성된 꼭대기 층은 16세기 원형 그대로이며 가운데층은 1745년 개축 때에, 제일 아래층의 파사드와 입구는 1865년에 추가되었다.

시청사를 등지고 광장의 오른편 바로 옆에는 가장 화려하면서도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프레스코화이자 홀바인(Holbein) 양식인 ‘바이센 아들러’ 건물이 있다. 라인강 방향으로 늘어선 다양한 프레스코화는 숨막힐 정도로 아름답고 우아함이 넘친다. 이 프레스코화들로 인해 시청사 광장의 전체적인 그림이 비로소 완성된다. 시청사 광장의 주요 건물들의 이름은 각각의 벽화의 특징을 따서 붙여졌다. 바이센 아들러(Weissen Adler)는 흰 독수리, 히르셴(Hirschen)은 수사슴, 크로네(Krone)는 왕관, 로터 옥센(Roter Ochsen)은 붉은 황소를 의미한다. 특히 고딕식의 붉은 황소 건물엔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선술집이 있다.

옛시가 중심 거리인 운터슈타트 거리를 따라 걷다가 중간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린트부름 박물관은 슈타인암라인의 옛 생활 모습을 잘 재현해 놓았다. 예수 탄생 이야기를 전세계의 전통의상과 건축양식으로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크리스마스 박물관도 숨은 볼거리다. 풍요로운 라인강에서 잡은 생선을 주재료로 하는 메뉴가 인기가 있고 가격대도 적당해서 별미로 추천한다. 시청사 광장의 ‘헤스 그라프’에서는 치즈 장인과 함께 치즈 제조 체험 및 치즈 시식을 할 수 있다.


스위스 라인강 여행 정보

라인폭포 스위스 샤프하우젠 남쪽으로 약 4㎞ 거리에 있는데, 샤프하우젠 역에서 ‘에스반(S-Bahn) 33번’을 타고 라우펜 성에서 하차. 5분 소요. 라우펜성 역까지는 4~10월 사이에만 운행한다. 이 시기 외에 방문할 경우 샤프하우젠에서 1번이나 6번 버스를 타고 노이하우젠 마을에서 내린 뒤 이정표를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라인폭포가 보이는 강변 선착장에 닿는다. 2012년 6월부터 라인폭포와 샤프하우젠을 왕복하며 48명까지 탑승 가능한 라이팔 익스프레스 관광열차가 운행중이다. 10~15분 소요.

샤프하우젠 취리히에서 IC, IR, RE 열차를 타고 40분 정도 소요. 1시간에 2~3대꼴로 운행한다. 4~10월 사이에는 크로이츨링겐, 슈타인암라인, 샤프하우젠 사이를 오가는 유람선(www.urh.ch)이 운행한다. 샤프하우젠 누리집(www.schaffhauserland.ch) 참조.

슈타인암라인 취리히에서 기차로 샤프하우젠에 도착한 뒤 한번 갈아타면 된다. 샤프하우젠에서 25분 소요. 누리집(www.schaffhauserland.ch) 참조.

여행 문의 주한 스위스관광청(www.myswitzerland.co.kr) (02)3789-3200.

글·사진 백상현/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