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정부관광청은 올해와 내년을 '스위스 걷기여행의 해(The Year of Walking)'로 정했다. 그림같은 풍경의 알프스만 감상하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자연과 호흡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여행을 적극 알리겠다는 취지다. 지난 4월 6일에는 (사)제주올레와 공동 발전을 위한 업무 제휴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걷기여행의 노하우를 배우고, 네트워킹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빠르면 올 하반기에는 스위스 하이킹 코스에 제주올레 홍보 표지판이 설치된다. 스위스를 방문하는 한국 여행자들을 위한 '스위스 올레' 같은 하이킹 코스도 선보일 예정이다. <오마이뉴스>는 스위스 정부 관광청의 지원을 받아 지난 6월 6일부터 12일까지 '7일5박' 일정으로 스위스의 라보지구, 체르마트, 알레치 빙하, 루체른 호수 일대의 하이킹 코스를 걸었다. 몇 차례에 걸쳐 '스위스 올레 여행기'를 연재한다. 오마이뉴스 / 이한기, 유성호 기자 |
[스위스 올레 여행기 ①] 레만 호수의 명소, 브베와 몽트뢰
머큐리와 채플린이 스위스 품에 안긴 까닭은
▲ 스위스 남서부에 위치한 레만(Leman) 호수 지역에는 브베와 몽트뢰 등 세계적인 휴양지가 위치해 있다.
브베와 몽트뢰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사람을 받았던 곳이며, 로잔과 함께 와인 생산지 라보지구 포도밭의 중심 축을 이루는 도시이기도 하다
▲ 카펠교(Kapellbrucke) 스위스 루체른 로이스강에 있는 다리. 1333년 로이스강에 놓인,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나무 다리로 길이가 200m에 이른다. 루체른의 상징이자 랜드마크다.
스위스 사람들은 근심 지수가 높다고?
▲ 스위스 루체른의 카펠교 인근에는 산책나온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제노포브스 가이드>에서 가장 흥미롭게 봤던 대목은 "재산으로는 텍사스 사람, 효율성으로는 독일인, 외교적으로는 프랑스인을 능가하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스위스 사람들의 근심지수였다.
"스위스 사람들이 지닌 '근심지수'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제각각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독일계 스위스인은 매사에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면서 근심 걱정을 하느라 언제나 최고의 근심지수를 기록한다. 프랑스어를 하는 라틴계 스위스인들은 고매한 상념과 원대한 꿈과 '글로벌 비전'을 가진 대사상가들이라서 근심지수 역시 그에 걸맞은 수준을 유지한다. 반면에 이탈리아계 스위스인들은 무슨 일에서든 너무 겁이 없는 경향이 농후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스위스인들의 근심지수는 '완벽한 대안'을 좇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납세자들이 재정 적자 해소를 위한 세금 인상안에 그토록 적극적인 지지표를 던지는 나라는 스위스밖에 없다"는 평가를 받는 게 그런 사례다. 수백년 동안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모든 남성에게 국방의 의무를 지게 하는 징병제를 고집하는 것도 '유리잔과 같은 평화'에 대한 근심지수가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스위스 국토는 남한 면적의 절반이고, 인구는 758만명(2008년)으로 이미 1000만명을 넘어선 서울시보다 적다. 전 국토의 70%가 산악지대로 돼 있는 건 한국과 비슷하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내륙 국가다. 한국을 유럽이라고 가정한다면 경기·강원·경상·전라도와 맞닿아 있는 충청북도에 해당한다.
여러 나라와 맞닿아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문화나 언어권도 독일·프랑스·이탈리아·로망슈 등으로 나뉘어 있다. 대다수의 스위스 사람들이 2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로 불리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가 스위스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이상할 뻔했다. 지방자치와 직접 민주주의의 발달은 국가 개념에 앞서 칸톤(Canton, 자치주) 등 지역의 자기 정체성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따로 또 같이'라는 말이 그 어느 나라보다도 어울린다.
▲ 레만(Leman)호수 스위스 남서부에 있는 호수로 중앙 유럽에서 벌러톤호에 이어 두 번째로 넓다.
레만 호수에 증기선이 지나가고 있다. 배 선수와 선미에 프랑스, 스위스 국기를 걸어놓아 두 나라를 왕래하는 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드디어 스위스로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지난 6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카타르 도하를 거쳐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했다. 비행 시간만 15시간, 스위스 서머타임을 감안하면 한국과 시차는 7시간. 피곤할만도 한데 견딜 만하다. 피곤과 함께 도착하는 여행의 끝과는 달리 설렘과 함께 출발하는 여행의 시작이 주는 힘이다. 제네바 공항에서 1시간여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브베(Vevey). 스위스에서 첫날을 보낼 도시다.
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사랑에 빠졌던 몽트뢰(Montreux)
스위스 남서부에 위치한 브베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레만(Leman) 호수를 사이에 두고 프랑스와 마주 보고 있다. 인구 2만명도 채 안 되는 작은 도시이지만, 인근에 있는 로잔·몽트뢰와 함께 국제적인 휴양지로 이름나 있다. 로잔(Lausanne)은 국제올림픽위원회인 IOC 본부가 있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올림픽 마크 로고와 깃발을 항상 사용할 수 있는 '올림픽 도시'로 유명하다. 로잔과 마주 보고 있는 프랑스 도시는 생수로 유명한 에비앙(Evian)이다. 로잔과 에비앙 사이가 레만호에서 가장 수심이 깊다. 300m가 넘는다고 하니 파리 에펠탑을 넣으면 물에 잠긴다.
또한 브베는 로잔·몽트뢰와 함께 스위스 와인의 대표적인 생산지인 라보(Lavaux) 지구 포도밭의 중심축을 이루는 곳이다. 2007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라보 지구 포도밭은 스위스 올레 취재팀이 이튿날 본격적인 하이킹을 하게 될 지역이다.
▲ 스위스 몽트뢰(Montreux) 호수 산책로에서 한 어린이가 망원경을 통해 건너편 프랑스 땅을 보고 있다.
▲ 브베(Vevey) 레만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인구 2만명도 채 안 되는 작은 도시이지만, 인근에 있는 로잔·몽트뢰와 함께 국제적인 휴양지로 이름나 있다.
브베 역에 도착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몽트뢰(Montreux)로 향했다. 기차를 타니 10분 거리였다. 인구 2만명의 작은 휴양 도시 몽트뢰는 해마다 7월이 되면 수십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유럽의 대표적인 음악 축제인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기 때문이다. 몽트뢰 역에서 내려 레만 호수의 호반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니 많은 관광객들이 배경 삼아 기념사진을 찍는 동상이 나타났다.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퀸(Queen)'의 리드 싱어였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가 그 동상의 주인공이다. 그는 지금이라도 당장 동상을 깨고 나와 노래를 부를 듯한 역동적인 자세로 마이크를 잡고 있다. 1991년 40대 중반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머큐리의 동상을 보고 있자니, 그가 열창했던 퀸의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 <위 아 더 챔피언스> 등이 떠올랐다.
몽트뢰는 머큐리가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는 지인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몽트뢰로 가라"고 말할 정도로 이곳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1978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큐리는 몽트뢰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대부분의 음반 작업을 했다. 머큐리가 죽고 난 뒤 만들어진 퀸의 마지막 앨범 <메이드 인 헤븐>(Made in Heaven)의 재킷 사진도 몽트뢰에 세워진 머큐리의 동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동상 주변에는 늘 팬들이 놓고 간 꽃과 편지가 끊이지 않는다.
▲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스위스 몽트뢰 호반 산책로에 있는 그룹 '퀸(Queen)'의 리드 싱어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 몽트뢰는 머큐리가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곳이다. 1978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큐리는 몽트뢰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대부분의 음반 작업을 했다.
상처받은 찰리 채플린을 24년 동안 품어준 브베(Vevey)
프레디 머큐리 이전부터 몽트뢰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장 자크 루소의 편지글 형식의 연애소설 <신 엘로이즈>(La Nouvelle Héloīse)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배경이 된 도시도 몽트뢰다. 러시아 출신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 <페트로슈카>를 작곡한 곳도 이 작은 도시에서다. 그들은 이곳에 머물며 예술적 영감을 얻고, 그 에너지로 후세에 빛나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몽트뢰에서 버스로 10분쯤 가니 시옹성이 나타났다. 호숫가 바위섬 위에 지어진 탓에 시옹성은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탈리아쪽에서 알프스로 넘어오는 상인들에게 통행세를 받기 위해 세워진 중세시대 성이다. 성의 기원은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지금의 모습은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16세기 제네바의 종교 지도자 보니바르가 이곳 지하 감옥 기둥에 쇠사슬로 묶인 채 4년 동안 갇혀 있었던 사건을 주제로 만든 서사시가 영국 시인 바이런의 <시옹의 죄수>다. 바이런의 서사시가 발표된 이후 시옹성은 더욱 유명해졌다.
▲ 시옹성(Chateau de Chillon)은 레만 호숫가 우뚝 솟은 암반 위에 세워져 호수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갑작스럽게 내린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관람 시간이 지나 시옹성 안에 들어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숙소인 브베로 발길을 옮겼다. 다음날 아침 라보 지구 포도밭 하이킹에 나서기 전 레만 호숫가를 찾았다. 브베를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찾아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이름 앞에 별도의 수식이 필요없는 전설적인 영화인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의 동상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스위스 브베(Vevey) 호숫가 산책로에 있는 찰리 채플린의 동상. 채플린은 1953년 브베에 와서
1977년 12월 25일 생을 마감할 때까지 24년 동안 살았다. 채플린은 아내 우나 오닐(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과 함께 브베 서쪽 외곽의 코르시 묘지에 잠들었다.
"세상은 내게 최상의 것과 최악의 것을 동시에 선사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좋지 않은 일을 많이 겪었지만 나는 행운과 불운이 떠다니는 구름처럼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런 믿음 때문에 나는 아무리 나쁜 일이 일어나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일이 일어나면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 중에서)
채플린의 동상은 작고 소박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콧수염과 중절모에 연미복 차림이다. 그런데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였던 지팡이는 웬일인지 잘려나가 손잡이만 남았다. 그의 동상 주변에는 5월을 말해주듯 장미꽃이 만개했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강제 추방되는 최악의 상황 때문에 '중립지대'인 스위스로 올 수밖에 없었던 채플린에게 브베는 어떤 도시였을까. 분명한 것은 브베가 상처받은 채플린을 오랫동안 품에 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레만 호숫가에서 관광객들이 꼬마 열차를 타고 시내 경치를 둘러보고 있다.
뒤에 보이는 큰 건물에서는 일주일에 한 차례 야채와 꽃 등을 파는 시장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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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올레 여행기 ②] '세계 자연유산' 라보(Lavaux)지구 포도밭
세 개의 태양으로 빚어낸 라보지구 명품 와인
▲ 스위스 올레 취재팀의 하이킹 코스는 뤼트리~에뻬쓰(Epesses)~셰브르(Chexbres). 하이킹과 관광 열차인
'라보 익스프레스' 체험을 동시에 하는 일정이다. 관광청에서 추천하는 코스는 생 사포랭~뤼트리. 거리는 11km, 소요 시간은 3시간15분.
취재팀은 이 코스 가운데 5~6km를 걷고, 3~4km를 관광 열차로 둘러보는 셈이다. 그림 왼쪽 방향은 로잔, 오른쪽 방향은 브베와 몽트뢰다.
"스위스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스위스 사람들이 다 마셔 버려 수출할 물량이 없어요."
간단했다. 스위스 와인은 국내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비량보다 더 많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면 수출할 물량이 남아 있었을 테니 생산량이 적은 탓도 있다. 일부 수출하긴 하지만 극소량이어서 전체 생산량으로 보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유럽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스위스에 가면 맥가이버 칼(빅토리녹스)은 못 챙겨도 스위스 와인은 꼭 챙겨야 한다'는 입소문까지 났다. 그만큼 희소가치가 있다. 특히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라보(Lavaux) 지구의 화이트 와인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 스위스의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인 라보지구 마을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이곳 와인을 소개하는 상점의 아기자기한 진열대를 볼 수 있다.
세계적인 스위스 와인, 외국에서는 맛볼 수 없다
지난해 스위스의 와인 생산량은 1억1000만 리터. 750㎖ 기준으로 하면 1억4666만 병이다. 이에 반해 와인 소비량은 2억7800만 리터(3억7066만 병). 국민 한 사람당 1년 평균 49병의 와인을 소비한 것이다. 성인 한 사람이 일주일에 와인 한 병 이상을 마셨다는 이야기다. 통계에서 보듯이 국내 생산량의 2.5배 가량을 소비하니 수출할 물량이 없는 건 당연지사. 더욱이 '스위스 퀄리티'에 대한 신뢰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라서, 국내산 와인에 대한 인기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스위스 전체로 볼 때 화이트 와인의 비중이 51%로 레드 와인보다 약간 많다. 점차 레드 와인 생산량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니 조만간 비슷해질 걸로 예상된다. 화이트 와인은 98%가 샤슬라(Chasselas), 레드 와인은 50%가 피노 누아르(Pinot Noir) 품종이다. 지역별 생산량을 살펴보면 발레(Valais)주가 45만 헥토리터(1hl=100리터)로 전체 생산량의 40%가 넘고, 라보 지구가 있는 보(Vaud)주가 29만 헥토리터로 26% 가량을 차지한다. 그러나 포도밭 밀집도로 보면 라보 지구가 스위스 와인 최대 생산지라고 할 수 있다.
▲ 라보지구 비탈진 언덕에 계단식으로 들어선 포도밭. 아래로는 드넓은 레만호수가 보인다.
▲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포도 농가 곳곳에는 탐스러운 장미덩쿨이 자리잡고 있다. 보기에도 좋지만 질병에 민감한 장미는 와이너리에 병충해가 번지기 전 미리 알려주는 지표식물 역할도 한다.
로잔~브베~몽트뢰에 걸쳐져 있는 라보 지구는 레만(Leman) 호수 북쪽에 위치한 햇볕이 잘 드는 구릉지대다. 26개 주(canton) 가운데 하나인 보(Vaud)주에 속해 있다. 끝없이 이어진 계단식 포도밭과 그 앞에 펼쳐진 드넓은 레만 호수, 건너편에 보이는 프렌치 알프스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2007년 6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와인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하이커들에게도 인기있는 하이킹 코스로 이름나 있다.
전체 면적은 830만m²(251만 평). 11세기 수도원에서 포도밭을 일구면서 이곳에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석회질 토양인데다 기온이 온화해 화이트 와인의 주재료가 되는 샤슬라 품종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다. 풍부한 과일향과 섬세한 맛이 특징인 이곳 와인은 스위스에서도 손꼽힌다. 라보 지구는 카라멩(Calamin), 샤도네(Chardonne), 데잘레이(Dézaley), 에뻬쓰(Epesses), 뤼트리(Lutry), 생 사포랭(St-Saphorin), 브베-몽트뢰(Vevey-Montreux), 빌레트(Villette) 등 모두 8개의 포도농장 공동체인 아펠라시옹(Appellations)으로 구성돼 있다.
라보 지구는 스위스정부관광청이 추천한 13개 걷기여행 코스 가운데 하나. '포도밭 속으로 떠나는 하이킹'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낭만이 물씬 풍긴다. 스위스 올레 취재팀의 하이킹 코스는 뤼트리~에뻬쓰(Epesses)~셰브르(Chexbres). 하이킹과 관광 열차인 '라보 익스프레스' 체험을 동시에 하는 일정이다. 관광청에서 추천하는 코스는 생 사포랭~뤼트리. 거리는 11km, 소요 시간은 3시간15분. 취재팀은 이 코스 가운데 5~6km를 걷고, 3~4km를 관광 열차로 둘러보는 셈이다.
라보지구에는 왜 세 개의 태양이 있을까
브베에서 기차를 타니 11분 만에 뤼트리에 도착했다. '스위스 타임'답게 출발도, 도착도 열차 시각표에 표시된 그대로다. 이제부터 '포도밭 하이킹' 고고싱~. 경사진 언덕배기를 조금 올라가니 코너에 차량 제한속도 30km라는 표지 아래 'Merci!'라는 환영 인사말이 외부인을 반긴다. 수확한 포도를 이층 창고에 저장하기 위해 지붕에 매달아 놓은 도르레도 눈에 띄고, 화단으로 변신한 포도 압축기도 살갑게 느껴진다. 주요 길목마다 설치돼 있는, 불어·독어·영어 등 3개 국어로 표기된 안내판에는 해당 지역에 대한 특징적인 소개 글이 친근한 일러스트와 함께 방문객들의 도우미 역할을 해준다.
걸은 지 20분 정도 지나자 계단식 포도밭과 레만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일기 예보와는 달리 날씨도 아주 덥지 않으면서도 맑다. 걷기 딱 좋은 조건이다. 발걸음을 서두르지 않으니 주변의 풍경이 몸으로 느껴진다. 계단식 포도밭이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경사진 땅의 기반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돌담은 낮에 열을 흡수했다가 밤에 방출하는 온도 조절 기능도 한다. 이 때문에 이 곳 주민들은 라보 지구에는 태양의 직사광선, 돌담의 열기, 레만 호수의 반사된 햇빛 등 3개의 태양이 있다고 말한다. 포도밭의 경계 벽을 모두 합하면 400km에 이르고, 호수를 따라 발달한 포도밭 길은 30km 정도다.
▲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언덕 경사면에 계단 모양으로 형성된 포도밭은 주변 마을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라보 지구 포도밭은 약 800년전 수도원의 수도승들이 포도밭을 일구면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가면 갈수록 시야가 더욱 트였다. 포도밭 초입에서 중간으로 진입하니 주변은 온통 녹색 잎의 포도나무와 파란 하늘과 맞닿은 호수다. 가끔씩 선글라스를 벗고 원래 자연의 풍광을 음미했다. 포도밭 사이에 간간이 심어놓은 장미가 눈에 띄었다. 가이드 다그마에게 물어봤다. 그녀는 "장미는 질병에 민감하기 때문에 포도나무에 병충해가 생기기 전에 알 수 있게끔 심어 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미를 포도나무 병충해를 막기 위한 지표식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포장도로와 비포장 밭길이 뒤섞인 길을 걷다보면 중간에 조그만 마을을 만나게 된다. 그 마을 한켠에서 꼭 만나는 게 음수대다. 레만 호숫가도 그렇고, 체르마트도 그렇고, 루체른도 그렇다. 스위스에서 길을 가다보면 몇년도에 만들었다는 연도 표시가 된 음수대를 자주 만나게 된다. 그 가운데는 먹을 수 없다는 경고문이 붙은 음수대도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옛날 우리나라 동네 우물 같다. 길 가다 목 마르면 물을 돈 주고 사야 하는 '야박한' 유럽 여행 길에서 만난 무료 음수대는 반가운 존재다.
외관을 분홍색 페인트로 칠해 눈에 띄는 3층 건물로 눈길을 돌렸더니 식당이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수수한 겉모습인데 가까이 다다가서 보니 2010년 미슐랭 가이드(Michelin Guide)에 소개된 집이었다. 또다른 마을에서는 옛날 마차처럼 생긴 소방차를 만났다. 위에 둘둘 감은 소방 호스가 이 차의 용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소방차를 설명하던 다그마가 "예전에는 저녁에 교회 종이 울리면 화재 위험이 있는 불을 더이상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고 덧붙인다.
▲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한 마을에 마차처럼 생긴 소방차가 진열되어 있다. 위에 둘둘 감은 소방 호수가 이 차의 용도를 말해주고 있다.
라보 지구의 계단식 포도밭을 보면 우리나라 남해의 다랭이 마을이 떠오른다. 다랭이 마을은 45도 경사, 108개 층층계단, 680여 개의 논이 바다를 바라본다. 훨씬 큰 규모인 라보 지구의 포도밭은 레만 호수를 바라보며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빌레트(Villette), 리에(Riex) 등 작은 마을을 구경하면서 쉬엄쉬엄 2시간 가량 걸었더니 어느새 에뻬쓰에 도착했다.
계단식 포도밭을 보며 남해 다랭이 마을을 떠올리다
취재팀이 찾은 곳은 에뻬쓰에 있는 파트릭 퐁잘라(Patrick Fonjallaz)의 와이너리. 와인 양조장을 견학하고 그곳에서 만든 와인을 시음하는 일정이다. 고소원 불감청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라보 지구의 와이너리 투어는 유명하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고 싶어하는 여행의 로망이다. 주로 4월부터 10월까지 운행하는 라보 익스프레스(Lavaux Express) 등의 관광 열차를 타고 주변을 둘러본 뒤 와이너리를 방문해 와인을 맛보는 코스로 돼 있다. 여기에 4~5km 하이킹 코스가 결합되기도 하는데, 반나절에 소화할 수 있는 일정이다.
에뻬쓰는 치즈나 포도주의 원산지 브랜드를 보증하기 위해 원산지 이름을 인증하고 관리하는 기관인 AOC(Appellation d'Origine Controlee)로부터 인정받은 곳 가운데 하나다. 파트릭은 1531년부터 이곳에서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는 퐁잘라 가문의 12번째 주인이다. 500년 가까운 가문의 와이너리 역사를 잇고 있어서인지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가 생산하는 와인병 라벨 뒤에는 11명의 선조 이름과 함께 맨 마지막에 그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퐁잘라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레드·화이트 와인은 연간 45만 병. "포도나무 한 그루가 와인 한 병"이라고 하니, 그의 포도밭에는 45만 그루가 넘는 포도나무가 자라고 있다.
▲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에뻬쓰 마을 와인 생산자인 파트릭 퐁잘라(Patrick Fonjallaz)씨가
화이트 와인의 주 품종인 샤슬라(chasselas)로 만든 와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와인 셀러가 있는 집안을 거쳐 밖으로 나가니 테이블과 의자가 갖춰진 작은 정자 같은 쉼터가 있다. 취재팀은 파트릭이 가져온 세 종류의 와인을 맛봤다. 샤슬라로 만든 화이트 와인과 살구향 맛이 강한 와인, 반건조 포도로 빚었다는 단맛이 강한 와인 순으로 시음했다. 와인 마니아가 아니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무겁지 않고 가벼운 느낌으로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수준이다. 파트릭은 맨 마지막 단맛이 강한 와인을 "연인들이 분위기 내며 즐기기 좋은 맛"이라고 소개하며 한 병씩 선물했다. "파트릭, 메르시!"
한국 방문객들의 관심과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파트릭은 시음이 끝난 뒤 집안에 있는 와인 셀러로 우리를 안내했다. 빼곡하게 들어찬 오크통에서 포도주가 숙성되고 있었다. 퐁잘라 와이너리를 소개하는 팸플릿이 놓여진 테이블 위에 꼬마와 승용차 안에 있는 할아버지가 대화하는 옛날 사진 액자가 놓여져 있었다. 그 사진 속의 주인공은 찰리 채플린과 파트릭이었다. 파트릭이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사진 속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 스위스 브베에 살던 찰리 채플린이 1953년 라보지구에 있는 퐁잘라 가문의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사진 속의 꼬마가 지금 퐁잘라 와이너리의 주인인 파트릭이고, 승용차 안의 할아버지가 찰리 채플린이다.
"1953년 스위스 브베에 살던 찰리 채플린과 당시 수상이 라보지구를 방문하면서 우리 와이너리를 들렀던 적이 있어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인데, 어느 할아버지가 자신이 찰리 채플린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찰리 채플린이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손가락을 인중에 대고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을 상기시키며) '이래도 못 믿겠냐, 내가 찰리 채플린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에요."
버스 같은 관광열차, 저속 '익스프레스'를 타고
퐁잘라 가문의 와이너리 탐방을 마치고, 호숫가에 위치한 퀴리(Cully)에서 점심식사를 마쳤다. 라보 지구 하이킹에 이어 관광열차 체험 일정이다. 우리가 탈 라보 익스프레스(Lavaux Express)가 식당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노란색과 녹색이 섞인 알록달록한 열차인데, 기차라기보다는 버스에 가깝고 고속이 아닌 저속으로 주변 풍광을 둘러보며 천천히 다니는 관광 차량이다. 미국에서 스위스로 이민 온 지 15년 됐다는, 사람 좋아보이는 조(Joe) 아저씨가 운전사다.
▲ 라보의 멋진 경치를 둘러보기에는 라보 익스프레스(Lavaux Express)가 제격이다. 알록달록한 열차는
'익스프레스'라는 명칭과 달리 느릿한 속도로 움직여 관광객들이 충분히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1시간쯤 유람 관광을 하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셰브르(Chexbres)역에 도착했다. <제노포브스 가이드>에 따르면 "스위스는 언제나 보수공사중"이라고 한다. 실제 보니 그렇다. 브베에서도, 셰브르에서도, 나중에 가본 루체른에서도 심심찮게 기중기와 건물을 둘러싼 비계를 볼 수 있었다. 시골이나 도시나 마찬가지다. 그 이유에 대해 <제노포브스 가이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스위스는 전국이 '보수공사중'이다. 스카이 라인 어디엔가에는 반드시 기중기가 삐쭉이 솟아 있고, 건물들은 차례차례 보수공사를 위해 폐쇄된다. 바깥 벽채만 빼고 안을 쏙 빼버린 집고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공사가 다 끝나고 나면, 놀랍게도 모든 것이 다 옛날 그대로인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서 한 집이 보수공사를 끝내면 다음 집으로 공사 장비가 옮겨진다. 그리고 20년이 지나면 동네 한 바퀴를 완전히 돌아 다시 처음 그 집부터 공사를 시작한다."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방식의 재건축보다는 리모델링이나 내부 보수를 통해 고쳐쓰는 건 스위스가 추구하는 친환경 정책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보수공사가 진행되는 곳조차 되도록 '깔끔한' 주변 환경을 유지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라보 지구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데다, 국가에서 법을 제정해 지역 개발을 관리하고 있어 자연훼손을 최소화하고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여느 곳처럼 보수공사는 진행되고 있었다.
▲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포도밭에서 바라본 레만 호수. 건너편에는 프렌치 알프스가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
이제 브베에서 짐을 찾아 비스프(Visp)를 거쳐 체르마트(Zermatt)로 간다. 거기엔 알프스 관광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4478m의 마터호른(Matterhorn)이 있다. 마터호른은 영화사 파라마운트의 로고 배경이어서 더욱 친숙한 느낌이다. 안녕, 라보! 반갑다, 마터호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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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올레 여행기③] 체르마트와 '알프스의 여왕' 마터호른
5만km 하이킹 코스, 지구 한 바퀴보다 길다
▲ 체르마트가 속한 발레주는 산악국가 스위스를 대표하는 곳이다. 해발고도 4000m가 넘는 산들이 47개나 된다.
마터호른(4478m)을 비롯해 몬테로사(Monte Rosa 4634m), 돔(Dom 4545m), 융프라우(Junfrau 4158m) 등이 발레주에 속해 있거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체르마트가 속한 발레주는 산악국가 스위스를 대표하는 곳이다. 해발고도 4000m가 넘는 산들이 47개나 된다. 마터호른(4478m)을 비롯해 몬테로사(Monte Rosa 4634m), 돔(Dom 4545m), 융프라우(Junfrau 4158m) 등이 발레주에 속해 있거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런 탓에 "발레주에 들르지 않고서 스위스를 가봤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브베(Vevey)에서 출발해 비스프(Visp)를 거쳐 체르마트로 가는 열차를 탔다. 비스프까지는 국철을 탔고, 이곳에서 마터호른 고타르드 철도(MGB, Matterhorn Gotthard Bahn)를 이용해 체르마트까지 갔다. 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는 탓에 기차 속도는 느렸다. 하긴, 체르마트를 발착점으로 하는 총길이 300km의 빙하특급도 '세계에서 제일 느린 특급열차'라는 꼬리표가 붙을 정도니.
비스프에서 체르마트까지는 기차로 약 1시간 정도. V자형 론 계곡(Vallés du Rhône)을 따라 옹기종기 마을이 들어서 있다. 샬레(chalet, 스위스 산간 지방의 지붕이 뾰족한 목조 주택)풍 건물들이 많다. 멀리 눈 쌓인 알프스도 모습을 드러낸다. 일부 관광객들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그런 풍광을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나무터널 틈새로 본 바깥 풍경은 마치 느린 그림을 보는 듯하다.
▲ 체르마트 도착 첫 날, 마터비스파 강 위의 다리에서 내려다 본 체르마트 시내 야경.
종착지인 체르마트역 플랫폼 벽면에 'Välkommen, Bienvenue, Taggwinscht, 歡迎, 환영합니다'라는 각 나라말로 쓰여진 환영 인사가 방문객들을 반긴다. 역 앞에는 호텔·리조트에서 운행하는 미니 봉고버스처럼 생긴 전기택시들이 관광객들을 태우느라 분주하다. 체르마트에는 반호프 거리와 마터비스파(Mattervispa) 강 주변에 샬레풍의 호텔과 리조트가 줄 지어 늘어서 있다. 건물 발코니에는 유럽에서 관상용 화분 재배로 흔히 쓰이는 붉은색의 제라늄 꽃으로 장식한 곳들도 눈에 많이 띈다.
등산열차 타고 해발 3000m 넘는 전망대에 오르다
체르마트의 해발고도는 1620m. 우리나라 덕유산 정상쯤에 해당된다. 공기가 맑고 건조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마친 뒤 마터비스파 강을 따라 산책에 나섰다. 체르마트 시내에서 마터호른을 한 눈에 보기 가장 좋은 곳은 반호프 거리 서쪽 끝에 위치한 마터비스파 강 위의 다리다. 특히 마터호른에 햇살이 비치는 오전 시간대가 좋다. 다리 위에 오르니 날씬한 피라미드처럼 우뚝 솟은 마터호른이 위용을 자랑한다. 산 중턱에 살짝 걸쳐진 구름을 빼고는 화창한 날씨다.
▲ 체르마트 시내에서 바라다본 마터호른. 피라미드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 해발고도 3000m가 넘는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 플란다스에 등장하는 세인트버나드가 목에 포도주통을 걸고 관광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스위스 알프스의 여왕'으로 불리는 마터호른(4477m)은 그랑드 조라스(Les Grandes Jorasses 4208m), 아이거(Eiger 3970m)와 함께 유럽 알프스의 3대 북벽으로 이름난 곳이다. '클라이머들의 공동묘지'라 불리는 아이거 북벽은 올해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영화 <노스페이스>(North Face)의 배경이 된 곳이다.
오늘 취재팀의 주요 일정은 산악 하이킹이다. 등산 열차를 타고 고르너그라트(Gornergrat) 전망대(3130m)에 오른 뒤 다시금 리펠알프(Riffelalp 2211m)로 내려와 체르마트까지 약 5.6km 정도를 걷는 일정이다. 고르너그라트 전망대행 등산 열차는 한두 량짜리 미니 기차다. 마터호른 고타르드 철도도 그랬지만, 이번 등산 열차도 창문을 열어 바깥 경치를 잘 볼 수 있게 해놓았다.
▲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 등산열차를 타고 내려오다 만난 양떼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전 국토의 70%가 산악지대이고, 산이 스위스 관광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산악 교통기관이 잘 발달돼 있다. 등산 철도는 융프라우요흐와 리기산을 비롯해 전국 10곳의 산에 개통돼 있다. 등산 철도는 선로 사이에 또 하나의 톱니바퀴식 궤도를 깔아 놓은 게 특징이다. 비탈길 급경사에도 미끄러지지 않도록 해놓은 렉 레일 방식이다. 등산 철도는 독일어로는 베르크반(Bergbahn), 프랑스어로는 슈맹 드 페르 드 몽타뉴(chemin de fer de montagne)라고 부른다.
등산 열차가 고도를 높이며 올라가면 갈수록 눈 쌓인 알프스의 산맥들이 더욱 가까워지고, 산 아래 마을의 집들은 성냥갑처럼 작아진다. 전망대에 가까워지자 주변은 온통 눈밭이다. 계절은 초여름인 6월이지만 바깥은 의심할 여지없는 겨울 풍경이다. 40분 가량 산악 열차를 타고 도착한 고르너그라트역. 해발 3000m가 넘는 곳에 발을 디딘 건 처음이다. 관광청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 스벤 하우저(Sven Hauser)가 전망대역에서 우리 취재팀을 반갑게 맞이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산과 산 사이에 거대하게 자리잡은 고르너 빙하(Gorner gletscher)가 보인다. 앞을 내다보면 마터호른 동쪽벽,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인 클라인 마터호른(3883m), 브라이트호른(4164m), 리스캄(4527m), 그리고 이탈리아와 맞닿아 있는 스위스 최고봉 몬테로사(4634m) 등 높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장관이다.
▲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 바라본 해발고도 4634m인 듀포스피체(Dufourspitze)와 고르너 빙하. 고르너 빙하는 스위스에서 알레치 빙하 다음으로 크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의 놀이터?
걸은 지 10분 정도 지나자 리펠알프 리조트가 나타났다. 그 옆 푸른 풀밭에는 리조트 손님들을 위한 아이들 놀이터도 있었다. 속으로 '여기가 해발 2200m가 넘는 곳이니 아마도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아이들 놀이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5분쯤 더 걷자 샬레풍으로 지어진 2층 목조건물이 나타났다. 점심식사를 할 알피타(Alphitta) 레스토랑이다. 입구에는 긴 깃대 위에 걸어놓은 스위스 국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스위스 여행 정보 책자를 보니 '멀리서 봐도 국기가 눈에 띄게 높게 매단 것은 레스토랑 영업중이니 와서 식사를 하라'는 사인이기도 하단다.
▲ 해발고도 2222m에 위치한 리펠알프 리조트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오성 호텔이다. 그렇다면 그 옆에 있는 놀이터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해발고도 2000m가 넘는 곳에 위치한 알피타 레스토랑. 긴 깃대봉에 매달린 붉은 바탕, 하얀 십자의 스위스 국기가 펄럭인다.
붉은 바탕에 하얀 십자로 돼 있는 스위스 국기는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고 한다. 13세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십자 표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슈비츠(Schwyz)주 병사가 독립을 목표로 피의 색깔인 붉은 깃발에 하얀 십자를 붙였던 것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 깃발은 16세기 들어와 스위스 연방의 국기로 채택돼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은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독립을 향한 투쟁의 역사가 담겨 있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국기가 정사각형인 것도 독특하고, 흰 바탕에 붉은 십자의 국제 적십자 마크의 기원이 된 점도 흥미롭다.
스위스 여행을 하다 보면 어딜가나 손쉽게 국기를 볼 수 있다. 관공서나 기업, 호텔이나 상가는 물론이고 개인 주택에도 심심찮게 국기를 걸어놓는다. 기념품점에 가면 태반이 국기로 디자인된 제품이다. 낙농업을 상징하는 젖소 캐릭터에까지 국기 디자인이 접목된다. 그러다 보니 스위스 국기가 마치 인기 있는 팬시 상품처럼 보인다. 스위스 사람들의 깃발 사랑은 유별나다. 국기보다는 덜 하지만 각 주(canton)의 깃발도 자주 눈에 띈다. 주로 국기와 함께 나란히 걸어놓는다.
▲ 기념품점에 가면 태반이 국기로 디자인된 제품이다. 낙농업을 상징하는 젖소 캐릭터
상품에까지 국기 디자인이 접목된다. 스위스 국기가 마치 인기있는 팬시 상품처럼 보인다.
한라산 정상에서 여유롭게 맥주를 곁들인 점심식사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알피타 레스토랑의 해발고도가 한라산 정상보다 높은 2000m 이상이니 마치 한라산 정상에서 식사한다는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다. 대부분 유럽 국가에서 그렇듯 스위스에서도 식사 때마다 생수를 시킨다. 많이 찾는 브랜드는 헤니츠(HENNIEZ). 스위스 최대 미네랄 생산기업인 헤니츠는 2007년 네슬레에 인수됐다. 스위스 사람들은 우리와는 달리 탄산가스가 들어산 생수도 즐겨 찾는다. 주문은 쉽다. 탄산가스를 원하면 '위드 개스(with gas)', 일반생수를 원하면 '위드아웃 개스(without gas)'.
리펠알프~체르마트 '쉬엄 쉬엄' 하이킹
스위스 알프스 중턱에서 여유로운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얼마 안 돼 큰 다람쥐 같은 동물을 만났다. 마못(marmot)이다. 네 다리가 짧은 다람쥐과 동물인데, 발톱이 크고 단단해 평지의 바위가 많은 곳이나 평원에 터널을 파고 산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알프스 고산지대에 사는 어두운 갈색 빛깔의 알프스 마못(Alpine marmot)이었다.
▲ 산악 하이킹 도중에 만난 알프스 마못(Alpine marmot). 네 다리가 짧은 다람쥐과 동물인데,
발톱이 크고 단단해 평지의 바위가 많은 곳이나 평원에 터널을 파고 산다.
걷다보니 초원 같은 대지, 작은 계곡, 울창한 산림이 이어진다. 그 중간 중간에 샬레풍 목조건물들이 눈에 띈다. 점심식사 후 50분 정도 걸어내려오자 확 트인 대지에 노란 민들레꽃이 만발했다. 다시 이어진 산림. 가벼운 등산 차림의 스위스 사람들이 한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약간 단조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눈 앞에 큰 안내판이 나타났다. 조금만 더 가면 고르너 협곡(Gorner Gorge)이 나온다는 것이다.
▲ 등산객들이 노르딕 워킹 폴에 의지하며 고르너그라트(Gornergrat)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
철제와 목조로 만든 계단으로 내려가자 협곡 사이로 거대한 물줄기가 보인다. 오랜 세월 자연이 빚어놓은 기기묘묘한 암벽 사이에 놓여진 나무 다리를 걸었다. 발 아래로는 빙하가 녹은 회색 물줄기가 협곡을 따라 흘러간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다. 10여 분만에 고르너 협곡을 빠져나오자 매표소가 나타났다. 성인 요금은 4프랑. 그렇다면 요금 정산은? 올라가는 사람이나 내려가는 사람이나 그냥 매표소에서 요금을 내면 된단다. 선불이냐, 후불이냐의 차이인데 입장료 후불은 처음 경험해 봤다.
▲ 고르너그라트(Gornergrat) 등산로에서 만난 가족 등산객. 스위스 어느 곳에서나 노르딕 워킹 폴을 쥐고 기을 걷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이킹에 나선 지 3시간쯤 지났다.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실제 걸었던 시간은 2시간 안팎. 체르마트 시내를 가로지르는 마터비스파 강이 나타났다. 체르마트 서쪽 끝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평지다. 강 건너편에 한 청년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줄을 매달고, 줄타기를 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길이 그 청년에게 쏠렸다. 족히 10m는 돼보이는 거리인데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건너는 걸 보니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다.
▲ 체르마트로 내려오는 산악 하이킹 도중에 만난 고르너(Gorner) 협곡. 발 아래로는 빙하 녹은 물이 흐른다.
스위스의 하이킹 코스를 모두 합치면 약 5만km에 이른다. 지구 한 바퀴를 돌고도 남는 거리다. 지난달 말 개장한 추자도 올레까지 포함해 현재 21개 코스까지 만들어진 제주올레의 전체 길이가 약 343km이니, 단순히 거리로만 비교하자면 제주올레가 146개쯤 있는 셈이다. 하이킹에 적합한 계절은 여름으로 주로 6월초부터 9월말까지인데, 표고가 높은 곳은 7월초부터 9월초까지로 짧아진다. 일반적인 하이킹 코스는 '반더벡(wanderweg)'으로 불리우며 노란색 표지로 돼 있고, 상급자를 위한 알프스 하이킹 코스인 '베르크벡(Bergweg)'은 빨간 줄이 들어간 노란색 표지로 구별돼 있다. 취재팀이 걸었던 하이킹 코스는 난이도가 높지 않은 '반더벡'이었다.
▲ 일반적인 하이킹 코스는 '반더벡(wanderweg)'으로 불리우며 노란색 표지로 돼 있고, 상급자를 위한
알프스 하이킹 코스인 '베르크벡(Bergweg)'은 빨간 줄이 들어간 노란색 표지로 구별돼 있다.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기 위해 기차를 타기까지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우선 마터호른 박물관에 들렀다. 이곳에는 1865년 마터호른 등정에 처음 성공한 영국 등반대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 일행이 조난 사고를 당했을 당시 부러진 자일 등이 전시돼 있다. 또한 마터호른 역사에 관한 자료도 볼 수 있다. 박물관 근처에는 마터호른에 오르다가 조난당해 사망한 등산가들이 묻힌 묘지(Friedhof)도 있다. 몇몇 사람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그 묘지 앞에서 오랫동안 발길을 떼지 못했다. 방송인 김제동씨는 등산이란 말 대신 '산에 업힌다'고 말한다. 등산가들의 묘지를 보고 있자니, 살아서는 마터호른에 업히고 죽어서는 체르마트에 안긴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 체르마트에 위치한 마터호른 박물관(Matterhorn Museum)에서 한 어린아이가 버튼을 눌러 마터호른을 오르는 등산로를 보고 있다.
▲ 체르마트 시내 교회 근처에 있는 공동묘지. 마터호른을 오르다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체르마트 중심가인 반호프 거리 주변의 골목길에 들어서면 잘 보존된 발레주의 전통 가옥을 볼 수 있다. 건물 하단부는 돌로 안정적인 지지대를 만들고, 그 위에 이층 규모로 세운 목조 건물이다. 특이한 것은 건물을 지탱하는 하단부 4개의 기둥 위쪽에 둥근 원반 형태의 나무나 돌을 끼워넣었다는 점이다. 체르마트 관광청 직원 스벤의 설명에 따르면, 곡물창고로 쓰인 건물에 쥐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해놓은 장치라는 것이다. 수백 년 동안 마터호른과 호흡하고 있는 전통 가옥과 골목길을 보고 있자니, 아이러니컬하게도 드라마 세트장을 꾸며놓은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 마터호른(Matterhorn)이 구름 속에서 모습을 가린 채 일부분만 모습을 드러냈다.
아침과는 달리 오후가 되자 마터호른은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구름 뒤에 산이 있는지도 모를 만큼 감쪽 같이 사라졌다. 마음 속으로 마터호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제 체르마트를 떠날 시간. 브리그(Brig)를 거쳐 리더알프 미테(Riederalp Mitte)에 있는 조그만 산간 마을로 간다. 스위스의 유명 인사인 아트 퓌러(ART Furrer)가 운영하는 호텔에 묵고, 이튿날 아트 퓌러와 함께 알프스 최대 규모라는 알레치 빙하(Aletsch Gletscher) 옆 산길을 하이킹 할 계획이다. 일정표에는 오전 5시30분까지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고, 오전 6시에 출발하는 걸로 나와 있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 범생이 같은 '스위스 타임'은 대중교통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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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올레 여행기 ④] 알레치(Aletsch) 빙하와 알레치 숲길
"뿌리째 뽑힌 나무도 그대로 놔두는 게 원칙"
▲ 알레치 빙하는 스위스에서 가장 길고 큰 빙하다. 길이만도 약 23km에 이른다. 그 옆의 알레치 숲도
1933년 국립공원의 지정된,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산림 보호 지역이다. 가운데 흰 부분이 알레치 빙하 지대.
▲ 스위스 발레(Valais)주에 위치한 리더알프의 해발고도는 1914m. 우리나라 한라산 정상쯤에 해당하는 높이다.
이 지역 산비탈에는 개량화된 목조 가옥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있다.
한국에서부터 함께 온 스위스정부관광청 박윤정 과장이 체르마트를 떠날 때부터 다음날 '강행군'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며 슬슬 엄포를 놓는다. "알레치 숲길 하이킹은 아침 일찍부터 시작해 다섯 시간쯤 걸어야 하고, 오후에는 루체른으로 가서 두 시간쯤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이고,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뜨는 것이니 '미리 걱정할 게 뭐 있냐'고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취재를 마치고 따져보니 그날 우리는 알레치 숲길에서 약 9km, 루체른에서 약 7km의 하이킹 코스를 걸었다. 걷고, 기차 타고, 또 걷는 일정이었다.
게쉬닛첼테스, 뢰스티, 피렛 드 페르슈에 이어 퐁듀까지
로프웨이를 타고 12분 가량 올라가자 산간마을 리더알프에 도착했다. 오늘 짐을 풀 곳은 아트 퓌러(Art Furrer) 호텔이고, 먹고 잘 곳은 30분 정도 더 걸어가면 나오는 산장 호텔 리더푸르카(Riederfurka). 두 곳 모두 아트 퓌러가 운영하는 숙박 시설이다. 로프웨이 승강장에 도착하니 호텔 마케팅 담당인 마리오 브라이데(Mario Braide)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가 몰고 온 차는 체르마트에서 타봤던 전기택시와 똑같았다. 낯 익으니 반가웠다. 이곳 역시 휘발유 차량 금지 구역이었다.
리더푸르카(2065m)는 리더알프 산간마을의 꼭대기에 위치한 샬레풍의 산장 호텔이다. 호텔 아래로 내려가면 곧장 알레치(Aletsch) 숲길이 나온다. 근처에는 빌라 카셀(Villa Cassel)이라는 환경보호센터 목조 건물이 있다. 이곳에는 알레치 지역의 자연과 역사에 관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호텔 입구에 4m짜리 '빅 스키'가 걸려 있다. 나중에 알고보니 호텔 주인 아트 퓌러가 묘기스키를 탈 때 직접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사람 키 두 배가 넘는 스키를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다.
▲ 산장 호텔 리더푸르카(Riederfurka) 입구에는 이 호텔의 주인인 아트 퓌러가
묘기스키를 탈 때 사용했던 4m짜리 '빅 스키'가 걸려 있다. 호텔 앞에서 매니저 아네트가 밝게 웃고 있다.
산장 호텔에서의 저녁식사. 메뉴는 퐁듀. 스위스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음식 로망 가운데 하나다. 송아지 고기 크림 스튜인 취리히 스타일의 '게쉬닛첼테스(Geschnetzeltes)'와 스위스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감자 요리인 '뢰스티(Rösti)', 레만 호수에서 잡은 담수어(농어의 한 종류) 요리인 '피렛 드 페르슈(Filet de Perche)'는 이전 여행지에서 먹어봤다. 그러나 퐁듀는 처음이다. 우리 일행만 묵고 있는 분위기 있는 산장 호텔에서 스위스 와인을 곁들인 퐁듀 요리를 먹는다니, 생각만으로도 즐거웠다.
퐁듀(fondue)는 스위스 산악지방에서 즐겨먹던 겨울철 요리다. 우리나라 뚝배기처럼 두께가 두꺼운 도자기 냄비에 그뤼에르 치즈나 에멘탈 치즈 등을 넣고 화이트 와인과 버찌로 만든 증류주 키르슈로 녹인다. 깍두기만한 크기로 자른 식빵을 가늘고 긴 포크에 꽂아 도자기 냄비 안의 녹은 치즈를 휘휘 저어 먹는 음식이다. 처음에는 남은 치즈를 재활용해 먹는 서민적인 음식으로 출발했는데 외국 사람들에게는 고급 음식으로 대접받는다. 먹어보진 않았지만 튀김 냄비에 기름을 끓인 뒤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익혀 먹는 미트(오일) 퐁듀도 있다고 한다.
리더푸르카 호텔 매니저인 아네트(Annette)가 우리 일행을 위해 일반 치즈와 토마토 소스를 가미한 치즈, 두 종류의 퐁듀 요리를 내놓았다. 약한 불로 도자기 냄비 안의 치즈가 굳지 않도록 했지만, 그래도 먹을 때마다 8자로 저어야 한단다. 스위스에서 먹어본 퐁듀 요리는 생각보다 짭조름했다. 퐁듀뿐만 아니라 게쉬닛첼테스도 조금 짠 편이었다. 일본 음식이 전반적으로 단맛이라면, 스위스 음식은 짠맛이었다. 내 입맛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여행의 즐거움이다.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긴 알레치 빙하를 만나다
▲ 알펜로제(Alpenrose)는 진달래과에 속한 나무로 피레네 산맥이 원산지다. 잎은 타원 모양이고 표면에 윤기가 흐른다.
꽃은 7∼8월에 연한 붉은색 또는 진분홍색으로 핀다.
▲ 알레치 숲길에는 뿌리째 뽑힌 나무들이 그대로 놓여져 있다. 통행에 방해가 되는 나무들만 옆으로 치우고
나머지는 그대로 놔두는 게 국립공원 관리 원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숲깊 초입에 들어서니 알펜로제(Alpenrose)가 눈에 띈다. 진달래과에 속한 나무로 피레네 산맥이 원산지다. 잎은 타원 모양이고 표면에 윤기가 흐른다. 짙은 녹색으로 가장자리가 뒤로 말린다. 꽃은 7∼8월에 연한 붉은색 또는 진분홍색으로 핀다. 알펜로제는 알프스의 봉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붉게 비친다는 뜻의 형용사로도 쓰인다. 숲길 하이킹 하는 곳곳에 알펜로제 나무가 자리잡고 있었다. 꽃이 활짝 필 때 오면 장관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간은 자연을 훼손할 자격이 없다"
아트 퓌러는 중간 중간 발걸음을 멈추고 알레치 숲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가는 길에 간간이 뿌리째 뽑힌 큰 나무가 보였다. 주로 겨울철 눈사태 때문에 쓰러진 것이라고 한다. 치워 놓을 만도 한데 그냥 그 자리에 놔뒀다. 왜 그랬을까?
아트 퓌러의 대답은 간단했다. "인간은 자연을 훼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통행에 방해가 되는 나무들만 옆으로 치우고 나머지는 자연 그대로 놔두는 게 국립공원 관리 원칙이라고 한다. 가능한 한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 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존하는 것이다.
둥근 홈이 크게 패인 바위 앞에서 아트 퓌러는 발걸음을 멈췄다.
"2000년 전 로마시대 때부터 본격적인 해빙기가 찾아왔다. 150년 간격으로 빙하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한다. 바위에 패인 둥근 홈은 빙하가 녹으면서 회오리처럼 물이 스며든 흔적이다. 그러한 모습이 이곳이 빙하시대를 거쳤다는 걸 증명해준다. 알레치 숲에는 이렇게 홈이 패인 바위가 곳곳에 널려 있다."
▲ 바위 가운데 만들어진 큰 홈에 아트 퓌러는 "빙하가 녹을 때 한 곳으로 흘러내리며 유속의
영향을 받아 바위가 움푹 패이게 됐다"며 "이곳이 빙하지대를 거쳤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물의 속성상 빙하가 합쳐지는 곳의 수심이 더 깊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융프라우와 이어진 알레치 빙하 트레킹은 걸어서 꼬박 이틀이 걸린단다.
가는 길에 숲 속에서 뛰노는 사슴 무리를 만났다. 가족일까 아닐까? 궁금했다. 좀더 가다보니 물 고인 웅덩이가 나왔다. 알레치 숲길에는 크고 작은 물 웅덩이 습지가 많았다. 아트 퓌러는 물 웅덩이를 보더니 취재팀 일행에게 "이 곳이 사슴웰빙센터"라며 웃는다. 사슴이 진흙 웅덩이에서 구르고 난 뒤 흙이 마르면 몸을 터는데, 그 과정에서 몸에 붙어있던 진드기 등이 함께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설명을 들으며 숲길을 걷다보니 우리는 손님이고, 자연이 주인이란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 알레치 숲길에는 크고 작은 물 웅덩이 습지가 많았다. 아트 퓌러는 "이 곳이 사슴웰빙센터"라며 웃는다.
사슴이 진흙 웅덩이에서 구르고 난 뒤 흙이 마르면 몸을 터는데, 그 과정에서 몸에 붙어있던 진드기 등이 함께 떨어진다는 것이다.
숲길 하이킹에 나선 지 1시간이 흘렀다. 겉에서 보기에도 오래된 나무 한 그루에 푯말이 붙어있다. 비쇼프씨츠(Bischofssitz). 주교가 앉았던 의자라는 뜻이다. 아롤라 파인(Arolla Pine)이라고도 불리는 스위스 소나무(Swiss Pine)다.
"1900년대 초 지금은 환경보호센터로 쓰이는 빌라 카셀(Villa Cassel)에 영국 켄터베리 주교가 방문했다. 짐꾼들과 함께 빙하 탐사에 나섰던 주교가 이 나무 아래서 스카치를 마시며 밤을 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빙하를 다 봤으니 이제 가자'고 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져오고 있다."
조금 과장된 것 같지만, '주교좌' 나무에 얽힌 이야기다.
"새들이 이 나무 열매를 입에 물고 다니며 퍼뜨린다. 새들이 한 방향으로 날기 때문에 이 나무들도 새들의 비행 방향으로 자랐다. 빙하 건너편에는 이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자연에서도 동물과 식물의 협력관계가 나타난다. 자연은 신기하고 놀라운 자생력을 갖고 있다. 자연은 세상이 뒤집어져도 스스로 헤쳐나간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환경이 많이 파괴됐는데, 자연은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거칠게 대응하면서 조화를 이뤄나갈 것이다."
▲ 비쇼프씨츠(Bischofssitz). 주교가 앉았던 의자라는 뜻이다. 아롤라 파인(Arolla Pine)이라고도 불리는 스위스 소나무(Swiss Pine)다.
▲ 하찮아 보이는 돌 이끼도 100원짜리 동전 크기 만한 게 50년쯤 된 것이라는 아트 퓌러의 말에 놀랐다.
아트 퓌러의 자상한 설명을 들으며 숲길을 걸은 지 2시간쯤 지나자 알레치 빙하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빙하라기보다는 거대한 회색 눈더미처럼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크레바스도 보이고 거대한 얼음 덩어리라는 게 느껴졌다. 150년 전에는 빙하가 고도 수십미터 위까지 올라와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길이도 3km나 짧아졌단다. 그런 탓에 빙하와 가까운 곳의 산비탈에는 오래된 나무가 없다. 특정한 경계에 따라 식물군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빙하가 만들어놓은 새로운 식물 지형인 셈이다.
▲ 알레치 빙하(Aletsch Glacier)는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긴 빙하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빙하는 얼고 녹고를 반복하면서 이동한다. 이동하는 속도는 무게에 따라 달라진다. 아트 퓌러의 설명에 따르면, 알레치 빙하는 하루에 34~36cm를 움직인다. 빙하끼리 만나는 지점에서는 가속이 붙어 하루 1.5m를 이동하기도 한다. 빙하는 움직이지 않으면 녹아 버린다. 빙하는 눈 결정체의 압축인데, 10m 정도의 눈이 내리면 10cm 두께의 빙하가 만들어진다. 그 무게와 크기 때문에 움직이는데, 그 과정에서 모래와 돌이 섞여서 함께 떠내려온다. 멀리서 보면 눈길에 트럭 바퀴가 지나간 자국처럼 빙하 가운데 흙길이 보이는데, 그게 빙퇴석이라고 불리는 모레인(moraine)이다. 빙하가 이동하다가 따뜻한 지역에서 녹게 되면 빙하 속에 있는 암석·자갈·토양물질 등이 섞여 이루어지는 퇴적층을 뜻한다.
3주 전에 히말라야를 다녀온 아트 퓌러는 "히말라야 빙하가 여기보다 더 빠른 속도로 녹고 있다"며 "빙하가 녹는 걸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하는 건 우리의 몫"이라고 강조한다. 아트 퓌러는 알레츠 빙하 때문에 생사의 기로에 선 적이 있다. 1996년 스키를 타고 빙하를 건너가다가 30m쯤 되는 크레바스에 빠졌다. 다행히 그는 40분만에 구조됐다. 크레바스에 빠진 뒤 생명을 건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데 운좋게 살아난 것이다. 그 이후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느냐는 질문에 아트 퓌러는 "또 떨어지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농담을 건넨 뒤 "정신과 영혼의 중요성, 영혼의 힘, 수호천사를 믿게 됐다"며 자신은 '마운틴 가톨릭'이란다.
▲ 아트 퓌러는 알레츠 빙하 때문에 생사의 기로에 선 적이 있다. 1996년 스키를 타고 빙하를 건너가다가 30m쯤 되는 크레바스에 빠졌다. 다행히 그는 40분만에 구조됐다.
▲ 일반적인 하이킹 코스는 '반더벡(wanderweg)'으로 불리우며 노란색 표지로 돼 있고, 상급자를 위한 알프스 하이킹 코스인 '베르크벡(Bergweg)'은 빨간 줄이 들어간 노란색 표지로 구별돼 있다. 알레치 숲길은 대부분 베르크벡 코스로 돼 있다. 이 코스에서는 특히 신발이나 복장에 신경을 써야 한다.
알레치 숲길에는 스위스 소나무뿐만 아니라 겨울철이면 잎파리가 다 떨어지는 연둣빛의 낙엽송 라취(Larch)도 많았다. 어떤 나무는 수령 1000년이 넘는 것도 있다. 나무 뿌리가 큰 바위 틈새를 파고 들어 바위를 두동강 낸 경우도 있다. 알레치 숲길의 역사와 자연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됐다. 하찮아 보이는 돌 이끼도 100원짜리 동전 크기만한 게 50년쯤 된 것이라는 말에 놀랐다. 나보다 한참 나이를 더 먹은 '형님'이 아닌가.
▲ 어떤 나무는 수령 1000년이 넘는 것도 있다. 나무 뿌리가 큰 바위 틈새를 파고 들어 바위를 두동강이 낸 경우도 있다.
알레치 숲길의 역사와 자연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됐다.
알레치 숲에는 수령 1000년 넘는 나무도
'스스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냐, 행복하냐'고 묻자 그는 "행복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며 "인생은 조화로워야 한다(Life is balance)"고 말한다. 그는 '한국의 젊은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인생은 너무 빨리 지나가니까 목표를 가지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 간에 그것을 꼭 하라"며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어떤 것도 쉽게 이뤄지지 않지만, 오랫동안 소망하고 소원을 붙들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것이다.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뻔한 얘기 같지만, 아트 퓌러의 인생을 돌아보면 무게있는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실천하는 게 문제다.
▲ 알레치 빙하(Aletsch Glacier) 지대에서 등산객들이 등산로를 따라 하이킹을 하고 있다. 스위스에는 등산코스 곳곳에 안내 표지판이 잘 설치돼 있다.
취재팀은 아트 퓌러와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따뜻한 미소로 이방인을 반갑게 맞아주었던 아네트가 만들어준 점심 샌드위치를 챙겼다. 또다시 길을 나섰다. 이곳에 온 것과는 반대로 리더알프에서 뫼렐까지는 로프웨이로, 뫼렐~브리그~루체른(Luzern)은 기차로 이동한다. 오후에는 에멘텐(Emmetten)~젤리스베르그(Seelisberg)의 루체른 호숫길 하이킹이 우리를 기다린다. 걷고, 기차 타고, 또 걷고... 언제 이렇게 스위스에서 맘껏 걸어볼 수 있을까? 어쨌든 걷는 복이 터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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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올레 여행기 ⑤] 루체른 호숫가와 리기산
눈쌓인 여름 알프스, 민들레 들판엔 워낭소리
SBB(Schweizerische Bundesbahnen)는 독일어, CFF(Chemins de fer fédéraux suisses)는 프랑스어, FFS(Ferrovie federali svizzere)는 이탈리아어로 국영 철도를 뜻한다. 또다른 공용어인 로망슈어로는 VFS(Viafiers federalas svizras)라고 표기하는데, 공식적으로 사용되진 않는다. 영어 표기인 SFR도 마찬가지다. 스위스의 표지나 안내판을 보면 3개 국어 이상의 언어로 표기돼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국어를 공용어로 선택한 나라라는 걸 항상 잊지 않게 해준다.
브리그(Brig)에서 기차를 갈아탈 때 봤던 노란 버스도 인상적이었다. 버스 몸통에는 호른 모양의 심볼 마크가 그려져 있고, 버스 뒤에는 자전거를 운반할 수 있는 거치대가 설치돼 있다. 스위스의 역사를 간직한 우편버스(Postbus)다. 철도가 다니지 않는 산속이나 계곡 안쪽 마을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철도역을 연결한다. 약 750 선로, 전체 길이 1만km에 이르는 주요 대중교통 수단이다. 승객은 물론 말 그대로 우편물을 함께 운반하기 때문에 '우편버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1906년부터 운행돼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그런 대중교통 수단들이 네트 다이어그램제로 운행 시각표를 짜기 때문에 환승이 무척 매끄럽다. 대개 10~20분 가량의 시간 여유를 주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아도, 그렇다고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대중교통 시각표만 제대로 확인하면 도시 간 이동은 정말 편리하다. 단 하나, 하나로 연결돼 출발하는 기차라고 해도 중간에 분리돼 행선지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만 조심한다면 걱정할 일이 별로 없다.
도시역이건, 산골짜기역이건 간에 눈에 띄는 공통점 하나는 똑같은 디자인의 시계가 걸려 있다는 것이다. 몬데인(mondaine)사의 시계다. 숫자판이 없고, 굵은 분침과 시침, 그리고 붉은색 원을 매단 것 같은 초침으로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디자인이다. 불필요한 요소를 과감하게 없애고, 시계 본연의 기능만을 살렸으면서도 매력적이다. 몬데인은 정확한 운행 시간을 상징하는 스위스 공식 철도 시계로 어느 역에서나 볼 수 있다. 스위스 기차는 언제 출발할까? '몬데인 시계의 초침이 정각에 올 때'가 정답이란다. 몬데인 시계는 초침이 정각에 올 때 분침이 한 눈금 이동하니, 1초의 틀림도 없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경험해보니 허풍만은 아닌 것 같다.
루체른 호숫가 울창한 산림 길을 걷다
취재 4일째인 6월 9일 오후, 기차를 타고 뫼렐(Mörel)~브리그~베른(Bern)~루체른(Luzern)으로 이동했다. 스위스 올레의 마지막 코스인 '호숫가 하이킹' 관문이 취재팀을 기다리고 있다. 아침이라고 하긴 이른 오전 6시부터 알레치(Aletsch) 빙하와 알레치 숲길을 걸었던 터라 2시간 30분 정도 이동 시간이 있었는데도 루체른에 도착하니 오후 4시였다. 해 지는 시간을 감안하면 대낮이다.
루체른은 스위스 중앙에 위치해 있다. 산과 호수로 둘러싸여 있어 '피어발트 슈테터 제(Vierwals-stätter-see)'라고 불리는데 흔히 루체른 호수라고 부른다. 피어발트 슈테터 호수를 둘러싼 4개 주 가운데 슈비츠 주, 우리 주, 운터발덴 주 등 3곳은 '발트 슈테터(Wald-stätter)'라고 불리는데, 스위스 건국의 모체가 된 주다. 이 3개 주에서 1291년 8월 1일 스위스 건국 서약이 이뤄졌다.
▲ 에멘텐(Emmetten) 지역의 '스위스 모빌리티' 트래킹 코스에서 취재기자들이 루체른 호수를 바라보며 걷고 있다.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활로 명중시킨' 전설의 인물인 빌헬름 텔(Wilhelm Tell, 영어로는 윌리엄 텔)은 스위스 건국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앙 스위스의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던 빌헬름 텔 이야기를 18세기 시인 괴테가 친구인 극작가 실러에게 이야기를 전했고, 그는 이 이야기를 희곡으로 만들었다. 이후 이탈리아 작곡가 오시니가 가극으로 만들었고, 빌헬름 텔은 세계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빌헬름 텔은 가공의 인물로 추정되지만, 스위스 사람들은 '실화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믿는다고 한다.
▲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활로 명중시킨' 전설적인 스위스 영웅 빌헬름 텔(Wilhelm Tell, 영어로는 윌리엄 텔)을 알리기 위해 전시되어 있는 사과와 활의 모형.
▲ 우르너 호수(Urner-see)를 둘러싸고 도는 뤼틀리~브룬넨(Brunnen) 코스는 1991년 스위스 건국 700년을 기념해 만든 '스위스의 길(Weg der Schweiz)'로 유명하다.
스위스 건국 서약이 이뤄진 곳이 뤼틀리(Rütli) 들판이다. 스위스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고, 매년 건국 기념일이 되면 이 곳에서 기념식이 열린다. 취재팀이 이날 오후 걸었던 루체른 호숫가 하이킹 코스는 에멘텐(Emmetten)~젤리스베르그(Seelisberg)로 7km 정도다. 호숫가를 병풍 삼아 오르는 코스로 종착점인 젤리스베르그는 뤼틀리와 아주 가깝다. 우르너 호수(Urner-see)를 둘러싸고 도는 뤼틀리~브룬넨(Brunnen) 코스는 1991년 스위스 건국 700년을 기념해 만든 '스위스의 길(Weg der Schweiz)'로 유명하다.
루체른 하이킹 코스의 가이드는 뤼디 야이슬리(Ruedi Jaisli). 스위스 모빌리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회사인 스위스 트레일스(Swiss trails)에서 일하고 있다. 모빌리티 프로그램은 차량 등 동력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의 힘으로 자연을 직접 체험하고 즐기는 것으로, 하이킹, 사이클링, 산악자전거, 카누, 스케이팅 등이 대표적이다. 장비 렌탈부터 숙박까지 원클릭 시스템으로 운영돼 이용이 편리하다. 하이킹이나 사이클링의 경우 홈페이지에서 해당 코스의 지도를 출력하면 혼자서도 이정표를 보고 길을 찾아갈 수 있다.
▲ 리기산에서 바라본 눈 덮인 알프스와 활짝 핀 민들레. 마치 한 눈에 사계를 보는 듯한 풍경이다.
스위스는 하이킹 코스 표지판이 잘 돼 있어 초보자들도 손쉽게 길을 걸을 수 있다. 다만 표지판에 쓰여진 예상 소요시간보다 실제 더 걸린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걷는 게 일상화된 스위스 사람의 보폭에 맞춰진 시간이라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의 발걸음으로는 예상 시간을 넘기기 일쑤다. 물론 아주 잰 걸음으로 걷는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걸음으로는 주변의 자연을 둘러보는 하이킹의 묘미를 반감 시키기 때문에 처음부터 여유있게 시간 계산을 하는 게 낫다.
6월이라 그런지 주변이 온통 초록 물결이다. 아스팔트 길에서 시작한 하이킹은 곧 호숫가의 울창한 산림으로 이어졌다. 루체른 호수와 건너편 산의 경치를 즐기며 걷다보니 다시 아스팔트 오르막 길이 나타났다. 오른편에는 소에게 먹일 건초를 준비하느라 풀 베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보인다. 탁 트인 공간 탓에 부른 바람이 시원하다. 쉬엄 쉬엄 2시간 넘게 걸어가니 오늘 하루를 묵을 호텔에 도착했다. 비닐 봉지를 손에 들고 여유만만, 유유자적 걷던 뤼디. 알고 보니 '느리기로 소문난' 베른 출신이란다. 갑자기 충청도 사람이 떠올라 웃음이 터졌다.
눈 쌓인 알프스와 민들레, 사계가...
▲ 리기 슈타펠에서 피츠나우(Vitznau)까지 내려가면서 빨간색 VRB 등산열차를 탔다.
속도가 느린 기차라서 그런지 젊은 승무원이 기차 밖에서 이동하며 표 검사를 하는 게 이색적이었다.
창문을 열면 루체른 호숫가가 보이는 호텔에서 아침을 맞았다. 6월 10일, 오늘의 일정은 리기(Rigi 1798m) 산 하이킹이다. 리기 산은 필라투스(Pilatus 2132m) 산과 티틀리스(Titlis 3238m) 산과 함께 중앙 스위스의 관광 거점이다. 깍아질 듯한 필라투스 산과는 달리 리기 산은 푸른 들판의 알프스를 상징한다. 루체른에 머물며 하이킹을 즐기려는 여행자에게는 리기 산이 제격이다.
젤리스베르그에서 열차와 보트를 타고 호수 건너편 브룬넨으로 갔다. 애초 계획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바람이 세게 불어 일정 변경이 불가피했다. 등산열차를 타고 리기 클뢰슈털리(Rigi Klösterli 1315m)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 산 정상인 리기 쿨름(Rigi Kulm 1752m)까지 걷는 일정이다. 나중에 따져보니, 오전 10시 40분부터 시작해 2시간 가량 걸은 셈이다.
여름과 겨울 리기산 하이킹 코스에 대한 안내와 함께 노르딕 워킹에 대해 소개하는 안내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약간의 구름과 파란색 하늘, 아주 덥지도 않아 하이킹 하기에 적격인 날씨다. 샛길로 들어서자마자 푸르른 들판이다. 30분쯤 걷다보니 작은 물줄기와 야외 바비큐 파티 장소가 나타났다. <스위스 가족>(Schweizer Familie)이라는 신문사에서 만든 공간인데, 전국에 200곳 정도 된단다.
중간쯤 산에 올라 건너편을 바라보니 저 멀리 눈쌓인 알프스가 어깨동무 하듯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 앞으로는 녹음이 우거진 푸른 들판과 노란색 민들레가 핀 너른 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풍경이 마치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가 바로 앞에 펼쳐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고 내려오는 하이커들이 사진기를 들이대는 우리 취재팀에게 반갑게 포즈를 취해준다. 평일이라 그런지 하이킹에 나선 사람들은 부부, 가족, 그리고 어르신들이 많았다. 등산 열차에서도 마치 효도관광 열차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연령대가 높았다.
▲ 리기산 정상을 오르는 아이들. 스위스 하이킹 코스에서는 연인과 가족, 어르신들을 많이 만난다.
리기산 정상 역인 리기 쿨름에 내리면 바로 위에 호텔 리기 쿨름 건물이 나타난다. 외관은 새것처럼 보이지만 1816년에 문을 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소다. 호텔 옆에는 리기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청년과 노인의 모습을 한 이색적인 이정표가 눈에 띄는데, 예상대로 청년 표지판은 경사가 상대적으로 심한 언덕길이고, 노인 표지판은 완만한 언덕길이다. 그러나 거리가 짧아 어느 길을 택하든 정상까지는 5~10분 정도면 충분하다. 정상의 해발고도는 호텔보다 약간 높은 1798m.
리기산 정상, 바람놀이에 푹 빠진 아이들
리기산 정상에 오르면 뾰족한 큰 안테나 탑이 세워져 있다. 그 주변에는 360˚ 파노라마 전망대가 있어 알프스 산과 호수를 조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치 비행기를 타고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 비슷하다. 전망대 한켠에 있는 기념 촬영용 인형 캐릭터 옆에는 '산의 여왕' 리기산이라는 자부심 가득찬 표지판이 산 정상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단체로 놀러온, 초등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들은 산 정상에 부른 바람을 친구 삼아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놀이에 푹 빠져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친구이자 장난감이다.
▲ 리기산 정상에는 360˚ 파노라마 전망대가 있어 알프스 산과 호수를 조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치 비행기를 타고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 비슷하다.
리기산 정상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 곳곳에 의자가 설치돼 있다. 한 눈에 봐도 전망이 좋은 곳에 설치된 '뷰 포인트'다. 등산열차를 타고 왔건, 하이킹으로 올라왔건 정상에서 내려가는 이들에게 좀더 머물다 가라며 유혹하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천천히 걸어 리기 슈타펠(Rigi Staffel 1604m)까지 내려왔다. 점심 식사를 했던 레스토랑의 천장에는 크기별로 다양한 워낭이 100개쯤 걸려 있었다. 200명이 채 안되는 주민들이 2000마리나 되는 소를 키우는 리기다운 인테리어다.
리기 슈타펠에서 빨간색 VRB 등산열차를 타고 피츠나우(Vitznau)까지 내려왔다. 햇살을 받은 호숫가는 은빛 물결이다. 호숫가 의자에는 망중한을 즐기는 사람들로 빼곡하다. 피츠나우에서 마지막 숙소가 있는 베기스(Weggis)까지 가는 호수 정기선을 기다리는 도중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VRB 열차 한 량이 큰 원반 모양의 철판 위에서 방향을 바꾸더니 철도 직원 한 명이 그 열차를 밀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농담 같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마지막까지 볼거리를 제공해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 VRB 열차 한 량이 큰 원반 모양의 철판 위에서 방향을 바꾸더니 철도 직원 한 명이 그 열차를 밀어 차량기지로 옮기고 있다.
라보지구의 포도밭 하이킹, 체르마트·마터호른의 산악 하이킹, 알레치 빙하 옆 숲길 하이킹에 이어 루체른 호숫가 하이킹 일정이 마무리됐다. 베기스에서 스위스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날 루체른을 거쳐 제네바에서 스위스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일만 남았다. 매일 다른 색깔의 하이킹 코스를 걷다보니 사진찍기에 몰두하며 스쳐지나가듯 봤던 10년 전 스위스 여행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걸은 만큼 보이는 게' 하이킹의 또다른 매력이다. 머리만 쓰는 여행보다 몸으로 느끼는 여행이 더 오랫동안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여행자들에게도 꼭 권하고 싶다. 하루만 더 머무르면서 자연과 사람 속으로 좀더 다가가보라고. 그러면 또다른 여행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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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스위스를 느끼고 싶다면
스위스는 이탈리아, 프랑스에 이어 한국인이 유럽 관광을 갈 때 세 번째로 많이 찾는 나라다. 그러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는 스위스는 '거쳐서 가는 나라'로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일본인들이 개척해놓은 관광 코스를 따라가는데 대략 취리히와 호수가 예쁜 루체른, 그리고 융프라우로 가는 인터라켄을 거친다. 이 코스는 이제 한국인에 이어 중국인들이 이어받았고 최근에는 인도인들이 답습하고 있다.
이렇게 스위스를 보는 것은 '효율적'일지는 모르지만 '효과적'이지는 않다. 짧고 저렴하게 가더라도 진짜 스위스를 느낄 수 있는 코스는 얼마든지 더 있다. 독일인의 정밀함과 프랑스인의 예술 사랑, 그리고 이탈리아인의 여유를 두루 지닌 진짜 스위스를 맛볼 수 있는 코스를 소개한다.
먼저 스위스인의 자연 극복 정신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얼마 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레만 호수 근처 라보 지역 포도밭을 추천한다. 중세 수도사들이 가파른 언덕에 계단식 포도밭을 만들었는데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높은 곳까지 약 40계단의 포도밭이 조성되어 있는데 밑에서 보면 마치 요새 같다.
벨린조나 인근의 몬테타마로 산 중턱에서 본 알프스 전경. 근처에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멋진 성당이 있다.
헤르만 헤세, 찰리 채플린, 오드리 헵번의 흔적
이곳 라보 지역 와인은 인기가 좋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외에도 낮에는 레만 호수에 반사된 태양열을 받고 밤에는 돌담이 품은 열기를 받아 포도의 당도가 높기 때문이다. 라보 지역 포도밭을 따라 트레일과 자전거 코스도 조성되어 있어 높은 곳까지 케이블트레인을 타고 올라간 뒤 내려오면서 인근을 둘러볼 수 있다.
다음은 유명인의 흔적을 찾아 여행하는 방법이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지켰던 스위스에는 수많은 유럽 지식인과 예술인이 피신해왔다. 스위스에 여행 온 괴테가 빌헬름 텔의 이야기를 들은 뒤 친구인 실러에게 전해줘 소설화되고, 다시 로시니가 '윌리엄 텔 서곡'을 만들어 스위스를 알렸듯 유명인들이 스위스 홍보대사 구실을 했다.
레만 호수 근처에서도 프레디 머큐리와 찰리 채플린, 오드리 헵번이 말년을 보낸 곳을 둘러볼 수 있다. 전쟁 중 망명 온 화가들이 모여 다다이즘을 만들어낸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는 현대미술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헤르만 헤세가 생의 절반을 보낸 루체른 근처의 테신 지역에는 헤세 기념관과 헤세의 묘지, 그리고 헤세가 걸었던 사색로가 남아 있다.
루체른 근처 테신 지역의 헤르만 헤세 기념관. 근처에 헤세의 사색로도 조성되어 있다.
광활한 빙하를 내려다보며 걷는 경험
다음은 '관광객'에서 '휴양객'으로 진화하는 방법이다. 스위스는 바라보기만 해서는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직접 체험해야 한다. '아름다운 베르네 맑은 시냇물이 넘쳐흐르네'라는 동요 속의 베른 시는 북한 김정은이 유학했던 곳으로, 영월 동강을 닮은 개울이 구시가지를 휘돌아 흐른다. 물이 깨끗하고 여울이 깊지 않아 여름에는 시냇물을 따라 수영과 래프팅을 할 수 있다. 물이 차면 베른 역에서 자전거를 빌려 돌아보면 된다.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스위스에서는 트레킹이나 자전거 하이킹을 꼭 해보는 게 좋다. 산악 지형이라고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지레 포기할 필요는 없다. 웬만한 곳은 케이블카나 케이블트레인이 올려다 준다. 길을 잃을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대부분 V자형 계곡이기 때문에 능선과 계곡을 따라 걸으면 절대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길 표지판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가장 추천하고 싶은 걷기 프로그램은 베트머알프와 리더알프 지역에서 알레츠 빙하를 따라 내려오는 빙하 트레킹이다. 눈이 아직 남아 있는 4~5월 넓은 스노슈즈를 신고 눈 위를 걸어 빙하를 따라 내려올 수 있고, 눈이 녹은 여름철에는 빙하를 종단할 수도 있다. 녹이면 전 세계 사람들을 몇 년간 먹일 수 있는 물이 나온다는 광활한 빙하를 내려다보며 걷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할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이다. 빙하 트레킹은 크레바스(빙하 표면에 생긴 균열)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전문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트레킹 코스로는 제주올레와 '우정의 길' 협약을 맺은 체르마트 트레일도 빼놓을 수 없다. 체르마트는 모든 운송수단을 전기로 움직이는 생태마을로, 마을 자체가 구경거리다. 파라마운트 영화사 로고에 나오는 마터호른 산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데, 여성스러운 융프라우를 보기 위해 인터라켄에서 관광객에게 치이는 것보다는 체르마트에서 강인한 남성 같은 마터호른을 보며 휴양하는 편이 훨씬 낫다(자세한 내용은 4월 말 나올 < 시사IN > 별책부록 < 걷기 좋은 길 > 을 참조하시라).
웨스트취리히의 쇼핑몰. 제련소를 개조 없이 쇼핑몰로 활용했다. 대규모 박람회와 패션쇼도 연다.
체르마트 외에 스위스에서 추천하고 싶은 곳은 유일한 이탈리아어 권역인 티치노 지역이다. 음식 맛이 좋고 인심이 후하면서 지역 차별을 당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전라도와 닮은 지역인데, 프리 알프스 지역(알프스 근교)이어서 산세가 험하지 않아 부담이 없다. 동양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산수화 속 자연을 닮은 산과 계곡이 있고 멀리 만년설에 덮인 알프스 고봉이 두루 보여 최고의 경관을 선사한다.
이곳 티치노 지역의 중심지가 벨린조나인데, 알프스의 산해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를 공격할 때 남하하던 길목에 있는 도시로 유럽에서 알프스를 지나 이탈리아로 갈 때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한다. 군사 요충지였던 만큼 성이 발달해 지금도 큰 성 세 개가 도심에 있다. 예전처럼 연결은 되지 않았지만 능선을 따라 성곽이 늘어선 모습이 만리장성을 연상하게 한다.
벨린조나 지역은 계곡물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색깔을 보여준다. 특히 눈이 녹아 흐르는 봄철의 물은 고려청자의 옥빛만큼 맑아서 물속 수미터 바닥이 선명하게 보인다. 007 시리즈 '골든 아이' 편에 나온 번지점프 시설도 있는데, 현재 운영 중인 번지점프 중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번지점프 시설이 댐 위에 만들어졌는데 댐 벽이 반사판 노릇을 해서 떨어질 때 비명 소리가 공포스럽게 울린다.
티치노 지역은 스위스에서는 가장 가난한 지역인 데다 지역 차별을 받기도 하는 곳인데 이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지역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세계적 마임이스트인 드미트리는 로카르노 옆 고향 마을에서 극장과 마임 학교를 설립하고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아직 무대에 오른다. 강남 교보타워와 삼성 리움미술관을 설계한 마리오 보타 역시 티치노 지역을 거의 떠나지 않고 활동한다. 곳곳에 그가 세운 랜드마크라 할 만한 건물들을 구경할 수 있다.
길 밖에서 만나는 진짜 스위스
마지막, 스위스 여행 팁이다. 스위스 도시를 둘러볼 때는 변두리 지역의 재개발 구역을 보면 좋다. 공장지대나 우범지역을 멋진 도시계획으로 예술 중심지로 탈바꿈시켜놓은 곳이 많기 때문이다. 로잔의 플론 지역이나 취리히의 웨스트취리히가 대표적이다. 두 지역 모두 기존 건물을 그대로 둔 채 내부를 공연장이나 극장 전시장으로 바꿔 문화 예술적인 공간으로 변모했다. 클럽도 많아 낮에는 예술의 중심이지만 밤에는 유흥의 중심지가 된다.
웨스트취리히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포장용 천과 폐타이어를 활용해 가방을 만드는 프라이탁 본사 건물이다. 폐컨테이너를 쌓아서 매장과 사무실로 사용한다. 제련소 건물을 기중기나 수증기 밸브까지 그대로 남겨둔 채 인테리어로 재활용한 쇼핑몰도 인상적이다. 각종 박람회와 패션쇼가 열린다. 명심하자. 스위스에서는 정해진 길보다 길 밖에서 진짜 스위스를 만날 수 있다.
※ 이 기사는 스위스관광청의 도움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고재열 기자 /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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