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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

by Wood-Stock 2011. 6. 10.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1]

한반도의 미래가 달린 실크로드, 당신은 모른다!

기사입력 2011-06-10 오전 8:44:58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소장 엄구호)는 지난 4월 6일부터 5월 25일까지 총 8회에 걸쳐서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 시민 강좌를 진행했다. 이 강좌는 러시아·유라시아 전문 연구 기관을 표방한 아태지역연구센터가 고선지, 혜초 등 역사 속 인물을 통해서 실크로드의 현재적 의미를 재발견하고자 마련되었다.

<프레시안>과 아태지역연구센터는 10일부터 매주 한 차례씩 이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의 글을 시작으로 매 강좌의 핵심 내용을 추려서 독자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일원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할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교과서, 저작물, 언론 매체 심지어 백과사전에도 실크로드는 한낱 구대륙(유라시아)에서 로마와 중국 장안을 이어준 외통 장사길(오아시스 육로)로만 기술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한반도 같은 이른바 '주변국'은 이 길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오아시스 육로 하나만을 실크로드로 오해하는 경향도 여전하다. 사실 외국 학계도 진배없다. 이것은 이 시각까지 고집되어 오는 실크로드에 관한 통설이다. 이제 이 구태의연한 통설을 지양하고 역사적 사실과 시대의 요청에 걸맞게 실크로드를 새롭고 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문명은 '모방성'이란 고유 속성에 의해 끊임없이 이동하는데, 그 공간적인 이동 과정이 곧 교류이고, 그 교류의 길이 바로 실크로드다. 따라서 실크로드란 한마디로 문명 교류의 통로에 대한 범칭이다. 그런데 인류가 이러한 문명 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것은 불과 120여 년 전 부터다. 그동안 여러 가지 연구 끝에 이 길이 후기 구석기 시대에 들어와서 인류가 장거리 이동을 하면서 트이기 시작한 이래 여러 확대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아냈다.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연구 과정을 살펴보면,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개념마저도 이해의 범위를 확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길이 포괄하는 공간적 범위와 그 기능에 대한 인식이 점진적으로 심화됨에 따라 실크로드는 단선적(單線的)인 연장만이 아니라, 여러 가닥이 겹쳐져 있는 복선적(複線的)인, 내지는 씨줄과 날줄로 엉켜있는 그물처럼 망상적(網狀的)인 길로 확대되어 왔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그간 실크로드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몇 단계를 거쳐 확대되고 심화되어 왔다.

첫 단계는 '중국-인도로' 단계다.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19세기 후반 3년간 중국을 답사한 후 5권으로 된 방문기 <중국>(1877년)을 출간했다. 그는 1권 후반부에 고대 중국 중원 지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북 인도로 수출되는 주요 교역품이 비단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이 중국으로부터 인도까지로 이어진 교역로를 독일어로 '자이덴슈트라센'(실크로드)이라고 명명했다. 이리하여 '실크로드'란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 길이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둘째 단계는 '중국-시리아로' 단계다. 20세기 초 스웨덴의 스벤 헤딘과 영국의 오렐 스타인 같은 탐험가들은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뿐만 아니라, 멀리 지중해 동안의 시리아 팔미라에서까지 한금(漢錦, 한나라 비단) 유물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독일의 알베르트 헤르만은 1910년 이 비단 교역로를 시리아까지 연장하고, 선학을 따라 그 이름을 '실크로드'라고 재천명한다. 그런데 유물들은 주로 여러 사막에 산재한 오아시스에서 발견됨으로 일명 '오아시스로'라고도 불렀다. 실크로드사에서 보면, 이 길은 첫 단계의 길, 즉 중국-인도로의 단선적 연장이다. 오늘까지도 이 길이 마냥 실크로드의 대명사나 전부인양 오해되고 있다.

셋째 단계는 '3대 간선로(幹線路)' 단계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문명 교류와 그 통로에 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실크로드는 오아시스로 육로만이 아니라, 그 남·북방에 해로와 초원로가 동서로 병행되어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른바 3대 간선이다. 뿐만 아니라, 적어도 5개의 통로(5대 지선)가 남북을 세로지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제 실크로드는 문자 그대로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 얽히고설킨 그물망의 교통로임이 분명해졌다. 실크로드 개념의 확대 차원에서 보면, 앞 두 단계의 단선적인 연장 개념에서 벗어나 복선적이며 망상적인 개념으로 증폭된 셈이다. 그러나 실크로드 개념이 이렇게 몇 단계를 거쳐서 확대되어 왔어도 아직은 주로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이른바 구대륙에만 한정된 길이며, 이것이 지금까지의 통념이다.

마지막 넷째 단계는 환지구로(環地球路) 단계다. 앞의 통념대로라면 문명 교류 통로인 실크로드가 지구의 다른 한 부분인 '신대륙'까지는 이어지지 않음으로써 '신대륙'은 인류 문명의 교류권에서 소외당하고 말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적 사실이 증언하다시피, 15세기 말부터는 '신대륙'으로 해로가 개통되었으며, 이 '태평양의 비단길'을 따라 구대륙의 비단과 도자기가 '신대륙'의 감자, 고구마, 옥수수, 고추, 낙화생, 담배, 해바라기 등과 맞바꾸는 '대범선 무역'이 일어났다. 이것은 문명 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해로)가 5대주 6대양 전 지구를 아우르는 '범지구로'로 자리매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실크로드를 오아시스로 하나로만 보거나, 구대륙에만 한정시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진부한 주장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아무튼 여태 이러한 주장이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언필칭 아이러니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실크로드 이해에서 또 하나의 혼동되는 개념은 이른바 '신실크로드'다. 대체로 18세기 중엽까지는 전통적인 교통수단인 말에 의해 초원로가, 낙타에 의해 오아시스로가, 범선에 의해 해로가 운영되어 왔다.

그러다가 산업혁명의 덕분으로 1769년 니콜라 조제프 퀴노가 사상 처음으로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하는 목제 3륜차를 발명한 것이 계기가 되어 기차와 기선, 비행기라는 새로운 근대적 교통수단이 도입된다. 이제 지구는 육·해·공의 입체적 교통망으로 뒤덮이게 되고, 그에 따라 교류의 내용과 방도도 엄청나게 달라진다.

그래서 18세가부터 오늘 21세기에 이르는 약 300년간의 실크로드는 그 이전의 전통적 실크로드와는 구별 지어 '신실크로드'라고 일컫는다. 요즘 흔히 말하는 '철의 실크로드'니, '경제 실크로드'니, '오일 실크로드'니 하는 것이 바로 이에 속한다.

실크로드에 관한 이해가 바로 설수록, 이 범지구적 길이 인류 역사의 전개에서 감당해온 역학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된다. 그 역할은 우선, 문명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명의 발달은 교류에 크게 의존하게 되는데, 그러한 교류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가교 구실을 하는 공간적 매체가 필요하다. 그 매체가 바로 실크로드다.

다음으로, 실크로드는 세계사 전개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해 왔다. 이 길을 따라 일련의 세계사적 사변들이 일어나고 수많은 민족과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으며, 기라성 같은 영웅호걸들이 역사의 지휘봉을 휘둘렀다. 이 길이 없었던들 세계사는 분명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을 것이다.

끝으로, 문명의 산파역은 이 길이 이루어낸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이다. 원래 문명의 탄생과 발달은 교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교통의 불편은 문명의 후진을 초래하며, 교통의 발달 없이 문명의 창달이나 전파는 도시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명론의 원리가 실크로드사에서 그대로 실증되고 있다.

실크로드의 바른 이해에서 우리의 민족사 전개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이 길의 한반도 연장 문제다. 지금까지의 통설로는 구대륙 내에서 전개된 실크로드의 동단(東端)은 일괄해서 중국이다. 이를테면 초원로는 화북 지방이고, 오아시스로는 장안(시안)이며, 해로는 중국 동남해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서역 및 북방계 유물과 관련 기록은 일찍부터 한반도와 이들 지역 간에는 문물이 교류되고 인적 내왕이 있었음을 실증해준다. 그렇다면 분명한 것은 이러한 교류를 실현 가능케 한 공간적 매체로서의 길이 있었을 진대, 그것은 다름 아닌 중국을 관통한 실크로드의 동쪽 구간, 즉 한반도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이 제대로 밝혀질 때,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우리의 역사적 위상이 제대로 복원될 것이다.

우리는 고조선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연(燕)나라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 등 유물의 출토지와 <위서>, <구당서>, <삼국사기> 등 기록에 근거해 3대 간선의 한반도 연장을 고증할 수가 있다. 오아시스로는 경주에서 한성(서울)과 평양을 거쳐 압록강을 넘은 다음 종래 한·중 간의 접경지였던 영주(營州, 초양)를 지나 유주(베이징)와 러양(洛陽)에 이어 장안에 이르는 길(약 6800리)이다. 금성에서 로마까지는 약 3만6800리로서 하루에 100리씩 걸으면 꼭 1년이 걸린다.

해로는 크게 남·북방 2대 바닷길로 대별된다. 북방해로는 서해안에서 중국 산둥반도까지의 바닷길로서, 여기에는 연해로(우회로)와 횡단로(직항로)의 두 갈래가 있었다. 대체로 통일 신라 시대부터 개통된 남방해로는 서해안에서 중국 동남해안으로 직접 이어지는 사단로(직항로)다. 해로는 신빙성 있는 기록과 유물이 남아있어 비교적 명료하다.

그러나 초원로의 경우, 오아시스 육로나 해로에 비해 아직은 연구가 일천하지만, 몽골 초원이나 동북 초원 지대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유물과 광개토왕이나 장수왕의 북정 루트 등을 고려하면 역시 영주를 기점으로 내·외몽골 초원과 연결되는 초원길을 설정할 수 있다.

실크로드는 우리와 세계를 이어주는 길이다. 우리가 이 길 위에 발자국을 촘촘히 찍어놓을 때, 그만큼 우리는 세계와 가까워지고, 그만큼 우리의 위상은 높아진다.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2]

목숨 걸고 동서 이은 세계의 영웅, 그를 기억하라!

기사입력 2011-06-22 오전 10:23:44


중서 교역의 새 역사를 연 장건(張騫)

한 무제는 즉위 3년차인 기원전 139년 장건을 월지(月氏)에 사신으로 보냈다. 한나라 개국 때부터 북방을 위협해 온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 월지와 동맹을 맺으려는 것이었다. 월지는 서북방 초원 지대의 큰 유목민 세력으로서 오랫동안 흉노와 맞서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장건은 월지를 찾지 못했다. 월지가 30여 년 전에 흉노의 공격을 받고 멀리 서쪽으로 옮겨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건 일행은 흉노에게 붙잡혀 11년간 포로로 지냈다. 그 동안 유목 세계의 사정을 잘 알게 된 장건은 기원전 128년 흉노를 탈출하고 다시 월지를 찾아 나섰다. 파미르고원을 넘어 헬레니즘 세계에 들어가 있던 월지를 방문하고 2년 후 장안으로 돌아와 13년에 걸친 사행을 마쳤다.

서방에 정착해 있던 월지에게 중국 변경으로 돌아와 흉노와 다시 겨룰 뜻이 있을 수 없었으니, 장건의 원래 목표였던 동맹은 이뤄질 수 없었다. 그러나 장건이 가져온 서방의 물화와 견문은 한나라 조야에 서방과의 교역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장건은 기원전 119년 오손(烏孫)에 사신으로 가서 4년 동안 그곳에 체류했다. 그 사행의 목적도 공식적으로는 흉노에 대항하는 동맹이었지만, 실제로는 서역 교역로의 확충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장건의 활동이 가진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떠올려본다.

(1) 장건 이전 중서 간 교역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었는가?

중국과 서방 사이의 교통로는 천산산맥 북쪽의 '초원의 길'과 천산산맥 남쪽 타림분지를 지나는 '사막의 길'이 있었다. 인도차이나반도를 우회하는 '바다의 길'은 한나라가 지금의 광둥성 지역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서는 거론할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사막의 길에 비하면 초원의 길이 자연조건에서는 편안한 길이었다. 그러나 초원 지대에는 유목민이 거주하고 있어서 약탈의 위험이나 통과세 등 상품 통행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 강대한 국가 권력이 뒷받침하지 않는 민간 상인들의 자생적 교역 활동은 규모와 범위에 제약이 있었다. 전국 시대 이래 중국의 경제 발전은 원거리 교역에 대한 잠재적 수요를 크게 키워놓고 있었지만, 그 수요를 충족시킬 만한 교역 체제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진한제국의 통일이 이뤄지고 있을 때 북방 유목 세계에서도 흉노가 거대한 정치 조직을 이룬 데는 초원의 길을 통한 교역의 이득이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정치 조직의 형성과 유지에는 큰 비용이 든다. 흉노는 유목 세계의 패권을 장악함으로써 중서 간 교역의 이득을 독점할 수 있었다.

(2) 한나라의 중서 간 교역 수요는 어떻게 자라나고 있었는가?

'실크'로드라는 이름대로 비단은 고대에서 중세까지 중국의 최대 수출품이었다. 근세 이전의 원거리 교역에서 가공 제품이 이처럼 오랫동안 대량 수출 품목의 자리를 지킨 것은 특이한 일이다. 산업혁명 후 유럽의 가공 제품이(그것도 직물을 중심으로) 세계 시장을 정복한 것과 비견할 만한 일이다.

중국은 전국 시대에 하나의 산업혁명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 기반은 철기 혁명이었다. 철기 문명은 기원전 15세기경부터 히타이트제국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지만, 중국에서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새로운 차원의 철기 문명을 이루었다. 고열을 이용한 주조(鑄造) 기술의 발전으로 철기의 사용량이 급속하게 늘어난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주조 기술을 도입해 철기 사용을 늘린 것은 기원후 10세기경 이후의 일이었다. 중국은 1500년간 최고의 재료 기술을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국 시대 중국의 급격한 변화는 철기 혁명 덕분에 생산력이 급격히 향상한 결과였다. 양잠-견직 산업은 집약 농업의 사회 경제적 조건이 뒷받침해 준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제조 기술이 더러 전파되더라도 중국과 경쟁할 만한 생산력을 키울 수 없었다. 생산력 향상으로 인한 소비 수준의 상승이 중국인의 원거리 교역 수요를 계속해서 늘려주었다.

(3)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는 중서 간 교역에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가?

전국 시대까지 흉노는 그리 큰 세력이 아니었다. 진시황의 통일과 비슷한 무렵 묵특선우(冒頓單于)가 유목 세계의 패권을 세운 이래 진한 제국과 맞장 뜨는 적수가 되었다. 한 고조가 흉노에게 포위당해 큰 곤경을 치른 이래 '돈으로 평화를 사는' 화친 관계를 맺어 무제 때까지 10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이 화친기 동안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를 '2중 제국'의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거대한 생산력을 발판으로 거대 제국이 세워졌는데, 직접 생산을 담당한 한 제국 위에 그것을 착취하는 흉노 제국이 올라타 있는 모습이다. 한나라가 평화의 보상으로 해마다 보내는 막대한 선물과 함께 중서 간 교역의 이득이 흉노 제국의 유지 비용을 충당해준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나라 백성들이 흉노의 농노 노릇을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나라의 생산력이 워낙 거대해서 흉노에게 바칠 것 바치고 뜯길 것 뜯기면서도 무제 때까지 엄청난 재정 비축이 이뤄졌다. 흉노의 통제에서 벗어날 실력이 갖춰진 것이다. 무제는 즉위 후 10여 년간 전마(戰馬) 10여만 필 수입을 비롯해 군비를 확충한 끝에 기원전 129년 정면 공격을 시작해서 10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에 흉노의 통제력을 와해시켰다.

장건을 오손에 파견한 것은 흉노의 통제력이 와해된 뒤의 일이었으므로 파견의 목적이 군사 동맹보다 교역로 확보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무제는 그 직후 남방의 남월과 동방의 조선을 정벌해서 '천하 체제'를 구축했다. 중국 문명의 경제력이 하나의 제국으로 세워진 것이다.

▲ 둔황 막고굴 제323굴 북벽에서 발견된 장건출사서역도. ⓒwikipedia.org

(4) 장건이 개척한 실크로드는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후한 때의 중국 역사 지도를 보면 서쪽으로 커다란 혹이 하나 붙어 있는 모양이다. 지금의 칭하이성과 타림분지에 해당되는 이 혹 모양의 지역은 한나라의 정상적 지방 행정이 펼쳐진 곳이 아니라 교역로 운영을 위해 주둔군이 배치된 지역이었다. 인구가 희박한 이 지역에는 안정된 조공 관계를 맺을 만한 큰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주둔군을 통해 한나라 조정이 직접 관할한 것이었다.

흉노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북방 초원 지대에는 유목민이 계속 살고 있었다. 천산산맥 북쪽의 '초원의 길'은 이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흉노의 통제력이 사라진 후 한나라 입장에서 이 교역로를 이용하려면 분산되어 있는 유목민 세력들을 하나하나 상대해야 했다. '사막의 길'은 1~2만 명의 주둔군만 배치해 놓아도 현지 세력의 도발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편리한 길이었다.

중화 제국이 운영한 사막의 길과 유목민이 장악한 초원의 길은 교역로로서 경쟁 관계에 있었다. 중화 제국의 힘이 강할 때는 사막의 길이 활발하게 이용되어 교역량이 커지고, 약할 때는 동서 간 교역량이 줄어들었다. 예외적인 상황은 몽골제국 시절이었다. 유목민이 주도권을 쥔 이 시절에는 초원의 길이 거침없이 활용되어 동서 간 교역이 다른 시기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활성화되었다.

중국은 비단을 위시한 가공 제품을 실크로드를 통해 수출했다. 수입품은 무엇이었는가? 장건과 무제 당시에는 막대한 수량의 전마가 도입되었다. 그 수요가 줄어든 뒤에는 옥과 귀금속 등 사치품이 수입품의 주종이었다. 실크로드 교역은 중국의 산업 발전에 작용하기보다는 중국 기술의 전파로 서방의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장건은 두 번째 사행에서 다녀온 이듬해인 기원전 114년에 죽었다. 사마천은 그의 행적을 <사기> "대원(大宛) 열전"에 적었다. 장건의 신분은 열후(列侯)로서 우리 사회로 보면 국회의원 정도? 직위는 관리로서 우리의 장관급인 대행령, 군인으로서 우리의 군단장 급인 중랑장에 겨우 이르렀다. 신분만으로는 사마천이 열전을 세워 줄 위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사마천은 장건이 죽은 23년 후 완성된 <사기>의 "대원 열전"을 실질적인 "장건 열전"으로 꾸몄다. 그 20여 년 동안 장건의 유업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대원 열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장건이 죽은 후) 1년 남짓 지나자 장건이 대하(大夏) 등지에 보냈던 사신들이 모두 파견된 곳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에 서북의 나라들이 비로소 한나라와 교통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건이 이 길을 연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이 모두 박망후(博望侯, 장건의 열후 호칭)의 이름을 들어 바깥나라의 믿음을 얻으려 했고, 바깥나라 사람들은 그 이름을 통해 믿음을 주었다."

외국을 대상으로 한 6편의 <사기> 열전 중 서역 방면은 "대원 열전" 하나뿐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실질적인 "장건 열전"이었으니, <사기>를 극도로 존숭한 후세 사람들에게 장건의 이름은 곧 '서역 개척'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처음 통일했다고 하지만 진정한 '천하 제국'은 한 무제의 흉노 격퇴로 완성되었다. 중국 문명이 정치적 통일체와 경제적 통합체를 이룩한 것이다. 한 무제와 장건 이후 1000여 년간 중화 제국이 중서 교역의 주도권을 지킨 것은 이 통일성과 통합성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 실크로드를 통해 상품을 옮긴 사람들 중에는 중국인보다 외국인이 많았다. 그러나 교역 내용과 규모가 중국 시장의 조건에 따라 1차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중국의 주도권을 말하는 것이다.

 

/김기협 역사학자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3]

1300년 전 실크로드 제패한 고선지, 그의 최후는?


고구려 멸망

고 구려 유민 고선지가 중앙아시아 무대에 등장했던 이유는 고구려 멸망 때문이다. 고구려 멸망은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그의 두 아우 남건·남산의 권력 투쟁에서 비롯됐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남생과 그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두 아우와의 권력 다툼이었다.

남 생이 당을 끌어들여 권력을 되찾으려다 평양성에서 대치하는 상황에서 승려 신성이 성문을 열어 줌으로써 고구려가 멸망했다. 평양성 안의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당으로 잡혀갔다. 이때 당으로 잡혀간 고구려인 모두 노예 신세였다. 반면 남생과 승려 신성은 당으로부터 높은 벼슬을 받았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

고사계는 고구려 멸망으로 하서(河西, 오늘날 武威)로 끌려왔다. 고사계는 고선지의 아버지이나, 이에 관한 기록은 우리 역사에 없다. 거의 동시대 신라 혜초에 관한 기록도 우리 역사 기록에 없다.

고 선지에 대한 기록은 <신·구당서>를 위시해 당 시대 역사 기록에 모두 기재되어 있다. 한 예로 <구당서>의 '고선지전'에 의하면 "고선지는 본시 고구려인이다. 아버지는 사계이며, 처음에 하서에서 여러 번 공을 세워 사진(四鎭) 십장, 제위장군이 되었다." 고사계가 고구려에서 머나먼 하서로 끌려와 군인이 되었다.

고구려인들이 당에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인이다. 고사계는 토번과 돌궐을 제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고선지 그는 누구인가?

고선지는 외모가 사나이답고 건장한데다 기마와 궁술이 능하였다. 게다가 용감하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아버지를 따라 안서(安西)로 이주했다.

고 선지에 관한 첫 기록은 고사계와 하서부터였다. 그때 고선지 일가는 고구려인이 하서로 끌려올 때 함께 잡혀왔다. 고구려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선지는 외모가 출중하면서 군인의 자질을 모두 겸비하였다. 하서에서 안서로 이주 한 후, 고선지가 아버지 공로로 유격장군이 된 것이 아니라 군인의 몫을 제대로 감당한 결과였다.

나이 20여 세의 고선지

안 서에서 나이 20여 세에 고선지는 장군이 되었다. 이로써 고선지는 아버지와 관품(官品)이 같았다. 그러나 안서절도사 전인완(田仁琬)·개가운(蓋嘉運) 휘하에서는 높은 벼슬을 얻지 못했다. 그 후 안서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察) 때부터는 천산(天山)산맥 이남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지역 사령관으로 부임할 때마다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매번 발탁되었다.

고선지 의 최초 독자 전투는 달해부(達奚部) 전투였다. 개원(開元, 713〜741년) 말 달해부 반란으로, 현종은 안서사진절도사 부몽영찰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이때 고선지는 기병 2000을 거느리고 부성(副城)에서 북방으로 나아가 능령(綾嶺) 아래서 적을 궤멸하는 개가를 거두었다. 이 전투가 고선지의 첫 독자적인 전투였다.

고선지의 지역 사령관

부 몽영찰의 상주로 달해부 격파로 공로에 대한 상주로 고선지는 안서사진 가운데 토번 침공이 빈번한 우전진(于闐鎭)을 맡았다. 우전진수사(鎭守使) 고선지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에서 토번을 막았을 뿐 아니라 우전 치안에 큰 공을 세웠다.

한편, 우전국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우전국과 같은 나라다. 혜초가 우전국을 순례했을 때는 우전진수사 고선지보다 10여 년 앞선다. 고선지는 첫 지역 사령관으로서 토번을 제압했다. 그 결과 우전진수사 고선지는 타클라마칸 사막 동북의 언기(焉耆)진수사로 승진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안서사진절도사 부몽영찰이 토번 연운보(連雲堡)를 함락하고 개선한 고선지에게 욕을 퍼부으며 "개의 창자를 먹을 고구려 놈, 개똥을 먹을 고구려 놈! 누가 너에게 우전사 자리를 얻게 상주해 주었냐?", "누가 네게 언기진수사를 얻게 해주었냐?", "누가 네게 안서부도호사를 얻게 해주었냐?", "누가 너에게 안서도지병마사를 얻게 해주었냐?"고 계속해서 물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정리하면 고선지는 우전진수사에서 언기진수사가 되었고, 다시 안서부도호 후에 도지병마사가 되어서 안서도호부의 제2인자가 되었다. 부몽영찰의 말투에서 보듯 고선지는 패망한 고구려 유민이라는 이유로 부몽영찰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였다. 그런 고선지가 계속해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사령관으로서 임무수행이 출중한 결과였다.

고선지의 토번 연운보 원정

현종은 747년 토번 정벌을 고선지에게 비밀히 명령했다. 현종의 군사 작전은 토번과 아랍 제국의 연합을 깨뜨려야만, 당이 서방에서의 잃은 패권을 되찾을 수 있는 군사 조치였다.

고 선지가 토번으로 출정하기 전의 토번과 당의 상황은 ‛토번 옆의 소발률국(小勃律國) 왕은 토번으로 불려가서, 토번 공주를 왕비로 맞게 되자, 토번 서북의 20여 나라가 토번에 굴복하니, 이들 나라가 당에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그 후 전인완·개가운·부몽영찰이 여러 차례 토번을 토벌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현종은 특별히 칙서를 내려 고선지를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삼아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번을 토벌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현종의 특명에 의한 고선지 출정이었다. 고선지는 연운보 점령하고 탄구령(坦駒嶺)을 지나 소발률국(小勃律國)을 정복하였다. 고선지는 소발률국 정벌을 위해 탄구령(해발 4600미터)을 횡단하였다. 서양의 나폴레옹이 넘은 알프스 산맥이 2500미터였던 사실과 비교한다면, 고선지가 나폴레옹보다 약 2배 높은 힌두쿠시 산맥의 坦駒嶺을 넘은 셈이다.

고선지에 의한 토번 연운보 함락과 소발률국 점령으로 불름(拂菻, 오늘날 다마스쿠스)을 비롯한 72국이 당에 복속했다. 고선지의 작전 성공으로 서역 지배권이 토번에서 당으로 이양되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었다.

안서사진절도사 고선지

토번 연운보를 함락하고 개선한 고선지에게 현종은 그 해 12월 안서사진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안서절도사 휘하 군사는 2만4000명이나 되는데다가 742년부터는 군복으로 매년 62만 필단을 공급받은 그런 절도다.

안 서도호 관할 영역은 동쪽으로 언기, 서쪽으로는 소륵(疏勒), 남쪽으로는 우전 등 사진을 관할하면서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토번, 천산산맥 북쪽의 돌궐(突厥)을 감독·감시할 책무가 있다. 고선지가 임명된 안서절도는 동서 교류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책무를 가진 직책이다.

고선지의 서역 경영

▲ 실크로드를 점령한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 ⓒ프레시안
749년부터 고선지의 중앙아시아 평정 기사가 보인다. 이때 사라센 제국이 동방 진출을 시도할 때였다.

고선지는 토번 연운보 함락과 소발률국 정벌 때처럼 서역을 평정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고선지는 서역 평정을 위해 휘하 군사만 의지하지 않았다. 한 예는 고선지는 우전국왕 위지승(尉遲勝)과 더불어 서역을 평정하였다.

< 구당서>의 '위지승전'에 고선지의 서역 정벌 기사를 보면 "(비사부도독 위지승이 우전 국으로) 귀국해 안서절도사 고선지와 함께 살비(薩毗)의 파선(播仙)을 격파하였다." 이는 고선지와 우전국왕 겸 비사부도독 위지승이 함께 살비·파선을 평정한 기사다. 비사도독부는 본시 우전국이며, 정관(貞觀) 22년부터 당에 투항했다.

그 후 우전국이 안서 사진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고선지가 우전진수사로 임명받은 후 우전에서 토번 세력을 몰아냈던 그 지역이다. 우전은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 현재 화전(和田)부근이다.

748 년 토화라(吐火羅, 소발률국 서쪽 지역) 엽호(葉護, 왕의 뜻) 실리망가라(失里忙伽羅)는 걸사(朅師)가 토번 재물을 받고 걸사 안에다 토번의 3000 병사를 주둔시키고 있어 걱정이 되어 고선지의 안서병마를 동원해 소발률국에 5월까지 도착을 청원한 헌표(獻表)를 올렸다.

<신당서>의 '토화라전' 내용을 보면 "토화라 부근 걸사가 토번을 끌어들여 토화라 공격을 도모하자, 이때 토화라 섭호 실리망가라가 안서절도사 고선지에게 토벌해 줄 것을 간청하자, 황제가 군대를 보내서 이를 격파했다." 걸사 영역은 오늘날 타지키스탄 남부과 아프가니스탄 서북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이때 고선지는 걸사를 격퇴했다. 고선지가 당 황제의 명령을 받고 파미르 고원의 토화라로 진군할 때 주변 지역도 평정했다. 소발률국 남쪽의 개실밀(箇失密)도 고선지가 제패했다. 당 고종 용삭(龍朔) 원년(661) 파사(波斯)도독부를 위시해 16개 서역부(西域府)와 72주(州)가 설치되었으나 그 나라 왕을 도독으로 임명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실효적 지배는 아니었다. 그러나 안서도호 고선지는 서역을 장악했다.

고선지의 석국(石國) 정벌

750년 고선지의 석국 정벌하게 된 까닭은 당에 대한 조공 태만이었다. 석국 왕이 당의 강거(康居)도독부로서 충실하지 않았다. 석국이 서방 신흥 세력 대식(大食)과 연합했기 때문이다.

안 서절도사 고선지의 중요 책무가 서역 제국의 조공에 대한 감독이었다. 그해 12월 고선지는 당나라 군사를 몰고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대평원을 가로질러 타슈켄트로 달렸다. 이때 이슬람은 부하라를 중심으로 동방 진출을 꾀하였으나 고선지의 토번 연운보 함락으로 아랍의 동방 진출이 일시 좌절된 상태다.

고선지는 석국뿐 아니라 아홉 나라와 더불어 당을 배반한 돌기시(突騎施) 등을 격파한 이유는 당에 대해 조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에 대한 조공은 예물을 바치는 행사만 의미하지 않는다. 당에 대한 충성 서약이다.

고선지의 대식(大食) 정벌과 안녹산 반군 토벌

750 년 고선지 장군이 걸사국 왕 발특몰(勃特沒)과 석국 왕을 사로잡아 개선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대식(大食)에 대한 고선지의 공격 가능성은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태평광기>에 "고선지가 대식(大食)을 정벌하여 가려륵(訶黎勒)을 얻었는데, (그 나뭇잎) 크기는 5∼6촌 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선지의 대식 공격을 뜻한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 755년 안녹산이 반란하자, 하서절도 고선지를 부원수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반군을 격퇴하게 하였다. 고선지는 태원창(太原倉)이 반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군수 물자를 군사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불살랐다.

한편, 안녹산 반군을 감당할 수 없어 섬군(陝郡)에서 동관(潼關)으로 고선지는 퇴각했다. 그런데 고선지와 늘 함께 했던 환관 변령성(邊令誠)은 현종에게 군량 탈취, 동관으로 퇴각했다는 이유로 고선지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고선지의 최후

고선지가 다른 곳에서 도착하자, 변령성은 칼잡이 100명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지시하면서, "대부(大夫)에게도 역시 명이 있다"고 하자 고선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죽음을 받아 들였다.

한 편, 칼리프 알-만수르는 노예 출신 아부 무슬림을 궁전으로 불러들여 살해했다. 아브 무슬림은 죽기 전까지 안서도호 고선지와 대적한 아랍 총독이었다. 공교롭게 고선지가 모함으로 죽은 같은 해 아부 무슬림도 살해되었다. 고선지의 출세 과정과 이븐 무슬림의 모든 것이 너무 흡사했다.


/지배선 연세대학교 교수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4]

한국 최초의 배낭 여행, 걸어서 인도·이란을 가다!

 

 

들어가며

8세기 초 신라의 혜초(慧超 : 704~787년) 화상이 지은 불후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그것은 '1283년 만의 귀향'이란 화려한 수식어를 앞세운 <실크로드와 둔황> 특별 기획전이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는데, 그곳에서 그 동안 사진으로만 알려졌던 실물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혜초를 유라시아와 실크로드를 주름잡았던 영웅의 한 사람으로 추켜세워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담보로, 그것도 무려 1300여 년 전에, 미지의 세계를 돌아다닌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나 역시 역마살(驛馬煞)을 타고 났는지 '혜초'란 인물을 가슴으로 만나서 지난 30년 동안, 혜초의 그 길을 화두로 삼아, 모두 10여 차례에 걸쳐 2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그의 행적을 답사했다. 그 길은 워낙 방대하여 한두 번의 답사로는 무려 오만 리나 되는 전 코스를 주파할 수가 없었고 또한 옛날에 임이 자유롭게 갔던 곳이라도 지금은 국경이라는 인위적인 '선' 때문에 갈 수 없는 곳이 많았다.

'죽의 장막'에 가려 있던 붉은 중국의 광대한 영토가 그랬고, 구 소련이 해체되기 전의 중앙아시아가 그랬고, 탈레반 정권 시절의 아프가니스탄이 그랬다. 이글은 혜초의 '세계정신'과 '최초'의 의미 그리고 문명 교류의 현장에서 겪었던 경험담을 독자들과 함께 '다시' 음미해보고자 하는데 있다.

혜초의 '세계정신'

▲ 서울여자대학교 김미자 교수 등의 복식 고증을 거쳐 추정 복원한 스물세 살 무렵의 혜초.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의 제자인 디지털 복원 전문가 박진호 씨가 작업했다. ⓒ박진호

혜초에게는 '첫째'란 수식어를 여러 개 부칠 수 있다. 우선 우리나라 '최초'로 중국과 인도를 지나 서역과 아랍권까지 갔던 테마 배낭 여행객(Backpackers)으로서의 위상이, 그 무엇보다 우뚝하다.

다 음은 가장 오래된 문헌을 남긴 저술가로서의 초상 또한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제목도 없고, 앞뒤도 없이, 온전치 못한 두루마리 상태라도 '세계 4대 여행기'에 꼽힐 정도로 귀중한 것은 평가절하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다음으로는 선구자적인 구법승으로서의 위치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기록을 남기지 않은 이름 없는 입축구법승(入竺求法僧)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중화권에서는 3∼11세기까지 약180여 명에 달하는 이름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중 무려 17명이나 되는 해동 출신의 입축구법승이 있다는 사실은, 이웃 일본과 비교해보아도,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진취적이었나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정점에 혜초가 단연 우뚝하다.

사전류에는 혜초의 생몰 연대가 확실히 적혀있지만,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혜초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언제 인도로 떠났고. 그리고 언제 열반하였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727년에 천축에서 돌아왔고 780년에 오대산에서 경전의 서문을 썼다는 것 이외의 나머지 앞, 뒤는 모두 추정에 불과하다.

<왕오 천축국전>이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물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 정신'이겠지만 그러나 혹자는 그 행간 속에서 또 다른 의미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이라는, 민족이라는, 종교라는, 선을 넘어서 보편타당한 세상으로 돌아가자는-이른바 드넓은 세계를 두루 섭렵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세계정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세 권짜리 <왕오천축국전>

마 지막 난관인 파미르고원을 넘어 순례에서 돌아온 혜초는 짬짬이 메모해 두었던 기록들과 기억의 편린들을 되살려가며 정리를 해나가며 두루마리 종이에다 몇 번이나 옮겨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작업은 둔황의 어느 석굴 안에서 했을 것이다.

이 런 가설 하에서, 혜초는 둔황에서 겨울을 보내고 장안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 그 중 제일 깨끗한 한 부를 말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물론 이 <수고본(手稿本)>은 그 뒤 다시 보완되어 3권으로 묶여져 장안의 종이 값을 올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이런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당 혜림(慧琳)이 편찬한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안에 기록되어 있는, 상중하 3권으로 된 <왕오천축국전>이 지금도 해인사 판 팔만대장경에 있기 때문이다.

< 왕오천축국전>의 출현은 드라마틱하기 그지없다. 사실 1000여 년 동안 이 여행기는 제목만 존재하던 전설상의 여행기였다. 그러다가 1908년 프랑스의 페리오(Pelliot)라는 동양학자 눈에 띠어 마치 1000만 년의 블랙홀에서 튀어나오듯 모습을 드러냈다. 제목도, 저자도, 앞뒤도 없는 필사본 두루마리 형태로 말이다.

당시 능히 한문초서도 읽을 수 있는 실력이었던 페리오는 필사본의 어휘 중에서 총18자가 <일체경음의>에 적힌 85자와 일치하는 점에 유의하여 그가 찾아낸 낡은 두루마리가 바로 이름만 전해지고 있던 혜초의 인도 여행기로 단정하였다.

문명 교류의 현장들

(1) 장안성의 50년 세월

천 축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728년 봄 마침내 제2의 고향 장안으로 돌아왔을 때의 혜초의 나이는 25살(?)이었다. 물론 704년 출생설이 유효하다면 말이다. 이후 혜초는 무려 반백년이란 긴 세월을 장안성에 머물며 밀교승으로서 활동을 하였다.

혜초는 장안에 돌아와 처음에는 천복사(薦福寺)라는 사찰에 여장을 풀었고 그 다음으로는 대흥선사(大興善寺)로 거처를 옮겼다. 바로 중국 밀교의 태두인 금강지(金剛智)와 불공삼장(不空三藏)이 주석하고 있던 곳이다. 당시는 '안사의 난'(755년)과 같은 전란으로 장안이 자주 유린되었던 시기였기에 호국 불교란 이름하에 역대 황제들은 주술적인 신통력에 의지하기 위해 밀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는데, 그 중심 도량이 바로 대흥선사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바로 혜초의 스승 불공삼장이 입적하기 전에 발표한 유서(774년 5월 7일)로, "내가 지금까지 밀교의 비법을 전수한 지 30여 년 동안에 문하에 제자가 자못 많지만, 그 중 6명이 우뚝했다"라고 하면서 2000명에 달했다는 제자들 중에서 '6대 제자' 중 3번째로 '신라 혜초'를 지명했다.

(2) 오천축국의 순례

고생 끝에 혜초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워하던,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Bodhgaya) 보리수 아래에 도착하여,

이렇게 하여 대탑에 이르렀다. 내가 본래부터 원하는 곳에 왔음으로 무척 기뻐서 내 어리석은 뜻이나마 대략 엮어서 오언시를 지었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 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멀다 하리오"라고 읊었다.

이 른바 혜초가 남긴 '총5수' 중 첫 번째로 나타나는 오언절구로 혜초 자신의 고백처럼 부처님의 나라를 그리워했던 한 젊은 구도승의 꿈과 환희심이 잘 표현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명구이다. 그리고 남천축국에서 읊은 시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그곳으로 돌아가네. (…) 따뜻한 남쪽에는 기러기 오지 않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에 날아가 소식 전하리."

카이버고개 넘어 아프간으로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 페리오도 다음과 같이 혜초의 서역 순례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혜 초는 우리에게 8세기 전반기 인도에서의 불교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서북인도, 아프간, 러시아령 투르케스탄, 중국령 투르케스탄에 관해서는 다른 기록에서는 볼 수 없는 지식을 많이 제공해준다. 그는 중앙아시아 제국의 명칭을 통상적인 중국식 명칭과 함께 현지 명을 기록해 놓고 있다. 예를 들면 소륵(疎勒)을 실제의 호칭인 카슈카르로 적은 것 등이다.

나는 1995년, 2001년 두 번이나 파키스탄과 아프간의 국경에서 금단의 땅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것은 1983년 KBS 취재팀의 경우도 그랬는데, 그때의 작가는 그 심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혜 초 스님은 가운데 길로 내려가다가 석장을 흔들며 그만들 돌아가라고 손짓을 한다. 우리는 왜 혜초를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것일까? (…) 아, 우리는 언제 다시 혜초의 뒤를 따라 敦煌 깊숙이 묻혀버린 <왕오천축국전>의 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인가?

아프간은 근대에 들어와서 역사란 이름의 운명에 의해 희롱만 당했던 슬픈 과거를 가진 나라로 오랜 내전과 구 소련의 침공 그리고 이어진 극우파적인 탈레반 정권으로 인해 오랫동안 포연이 걷히는 날이 없었다. 내가 카이버고개에서 뒤돌아서야만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4) 폐르시아의 땅, 이란으로

사실 현존본 대로 혜초가 실제로 페르시아나 아라비아까지 갔을까? 하는 문제는 학계에서도 한 동안 이론이 많았지만, 근래에 이란의 마샤드(Mashad)까지 갔다는 정수일의 주장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5) 파미르고원을 넘다

혜 초는 모두 4차례에 걸쳐 파미르를 넘는 귀향길을 모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카슈미르에서 파미르의 동쪽 루트를 넘어 호탄으로, 두 번째는 파키스탄의 오장국 밍고라에서 스와트 계곡을 타고 파미르를 넘어 총령으로, 세 번째는 아프간의 와칸계곡으로 넘는 시도였다.

그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혜초는 다시 발길을 서쪽으로 돌려 페르시아까지 갔다가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와서 동쪽 페르가나 계곡까지 와서는, 이상하게도 천산을 넘어 카슈가르로 가는 전통적인 '천산남로'를 이용하지 않고, 결국은 남쪽으로 우회하여 아프간 북부의 와칸계곡을 거슬러 올라와서 총령진으로 돌아왔다.

 

/김규현 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장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5]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몽골 제국의 창건자 칭기즈칸!

 

여러분들 모두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인상을 갖고 있을 것이다. 칭기즈칸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 파괴와 살육의 주인공, 무자비한 정복자, 이런 게 아닌가? 그만큼 칭기즈칸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압도적이었다.

구 (舊) 소련 시대엔 특히 더 했다. 소련 학자들은 칭기즈칸이 전 세계를 정복해 야만에 빠지지 않도록 막았던 건 러시아 인민의 위대한 투쟁 덕분이었다고 선전했다. 몽고에 있어서 칭기즈칸은 가장 자랑스러운 존재였지만, '상전'인 러시아의 입장이 그랬기 때문에 몽고 학자들은 조상을 비판하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련이 붕괴되고 몽고도 독립하면서, 칭기즈칸에 대한 평가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은 몽고에 가면 공항에서부터 그에 대한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소련이 무너진 것도 원인이지만 학자들의 연구도 한 몫 했다. 1995년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지난 1000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물었는데, 1위로 꼽힌 것이 바로 칭기즈칸이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최고경영자(CEO)'의 바람직한 모델로, 리더십을 갖춘 인물로서 그를 부각시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렇듯 부정적인 평가와 긍정적인 평가를 오가는 인물이지만, 그를 어떻게 봐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늘은 그에게서 뭘 배울 것이냐 보다, 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찬찬히 살펴보려고 한다.

▲ 몽골 언덕에 그려진 칭기즈칸의 초상화 ⓒnavercast.naver.com

몽골 출현 전야

칭 기즈칸 태어나던 당시는 혼돈의 시대였다. 중국 당나라 북쪽엔 위구르라는 유목민족 제국이 있었다. 그런데 이 당나라와 위구르가 모두 840~907년에 걸쳐 망한다. 큰 나라가 버틸 때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이때부터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 금 위구르는 중국의 서쪽에 있는데, 원래 위구르 민족은 몽고 초원 지역에 있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그보다 북쪽에서 내려온 키르기스의 침공을 당해 쫓겨 내려간다. 그런가하면 남쪽의 당나라도 무너진다. 그 후 '5대 10국' 시대라는 혼란이 찾아온다. 이런 상황에 북방에 거란족이 유목국가를 세운다.

거란의 원래 이름은 키탄(Qitan)이다. '야율아보기'라는 사람이 거란을 세웠다. 이 국가는 순수한 유목/농경 국가가 아니라 유목과 농경이 걸쳐져 있는 체제였다. 그래서 지배 방식도 '이중 지배체제'가 된다. 농경민을 지배하는 방식과 유목민 지배하는 방식이 공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몽골족이 이쪽으로 이주하게 된다.

원 래 초원엔 위구르 제국이 있었다고 말씀드렸다. 위구르가 멸망하며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면서 힘의 공백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만주 북방 아무르 강 인근에 살던, 몽골어 계통의 집단이 이동을 하게 되는데 그 대열에 몽골이란 이름의 집단도 있었다. 거기서 후에 칭기즈칸이 출현하게 된다. 그런 그가 다른 민족을 통합하고 국가를 세우니, 그가 속해 있던 집단 이름이 국가 이름, 하나의 민족 이름이 된 것이다. '몽골'은 이렇듯 원래 아주 작은 집단 이름이었다.

몽골족의 이주

몽 골 사람들이 남긴 유명한 책으로 <몽골 비사>가 있다. 여기에 몽골의 조상 설화가 나온다. 설화는 보르테 치노(청색 늑대)와 그의 아내인 코아이 마랄(흰 사슴)이 만나 자식을 낳는 얘기로 시작된다. 거기서 나온 자손이 '알랑 고아'란 처녀와 혼인을 하고, 그 자손이 몽골의 후손이 된다.

알랑 고아는 원주민 도본 메르겐과 결혼해 아이를 낳는데, 남편이 일찍 죽는다. 그런데 그 뒤에 여인이 다시 아이를 가진다. 그러자 죽은 남편 사이에 난 아들들이 항의를 한다. 여인은 이렇게 해명한다. 밤에 달빛이 겔(천막집)의 에루게(천막 위로 난 창문)의 창문을 통해 들어와, 배를 쓰다듬었더니 그 빛이 뱃속으로 들어왔다고. 하늘의 아이를 배었단 뜻인데, 거기서 낳은 자식들 중 막내아들 계통에서 칭기즈칸이 나온다. 원주민과 이주 민족의 결합이라는 테마가 설화 속에 드러난다.

한편 페르시아에서 만든 <집사>라는 책이 있다. 세 권이 있는데 두 번째 책이 <칭기즈칸 기>다. 여기에도 칭기즈칸의 조상들이 어떻게 이주해왔는가가 나온다.

그 의 조상들에 해당하는 이들이 전쟁으로 모두 절멸해 도망가다가 협곡을 만난다. 그 협곡 사이에 펼쳐진 초원에서 자리를 잡고 몇 세대를 산다. 점점 인구가 많아져 초원이 부족하게 되자, 나갈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 이들은 고민하다 70마리의 소를 잡아 껍질을 벗겨 풀무를 만든다. 협곡을 둘러싸고 있는 철산 주위에 불을 지피고 풀무를 불어대서 철산을 녹이기 시작한다. 그랬더니 시냇물이 흐르고 통로가 보이기 시작해, 나와서 초원 세계를 개척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몽골 민족은 원래부터 그 지역에 살던 이들이 아니라 현재의 중·소 국경지역 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고, 위구르 제국이 붕괴돼 힘의 공백이 생기면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시기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여러 자료들로 보면 900년경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칭기즈칸이 속했던 집단의 이주는 그 이후, 한 1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되니 굉장히 복잡해지는 거다. 10~12세기 걸쳐 계속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혼란스러워지고, 전쟁이 계속 벌어진다. <몽골 비사> 254절에 쿠쿠초스라는 사람의 시가 나온다. 칭기즈칸의 통일 이후 국가를 누구한테 물려줄까 하다가 두 아들이 싸우는데, 이 쿠쿠초스가 우리가 어떻게 힘든 세월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가를 시로 읊으면서 그 둘을 말린다. 그 내용을 보면 몽고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전쟁을 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투 르크계니 몽골계니 집단끼리 서로 싸우게 되고, 그러다보니 기존의 사회조직이 흔들린다. 기존 사회는 부계 친족 조직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계속되면서 계층이 분화되기 시작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기고 칸(왕)이라는 칭호가 생긴다. 그리고 노얀(군사 귀족), 카라추(평민), 보골(노예)으로 이어진다. 누케르(맹우)와 안다(의형제)라는 새로운 사회관계도 형성된다.

칭기즈칸, 등장에서 사망까지

이 제 칭기즈칸의 일생을 보도록 하자. 칭기즈칸의 아명(兒名)은 테무친이었다. 테무는 쇠, 그러므로 쇠처럼 단단한 사람이란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는 왕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아니요, 가난한 집 아들도 아니었다. 군사 귀족 이수게이 바타르의 아들이었다. 출생연도 불분명하다. 학자 간에 1155년이다, 1162년이다, 1167년이다 의견이 분분하다.

소년기는 어두웠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 중에, 과거에 자신이 약탈했던 집단으로부터 보복 공격을 받아 독살 당한다. 그러면서 테무친의 고난의 길이 시작된다. 아버지를 추종하던 무리들이 다 떠나간 것이다. 그는 장남이었고 여러 명의 동생이 있었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어려워 가족들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깊은 산속에서 풀뿌리를 캐먹고 종달새를 잡아먹고, 강의 물고기를 낚시해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먹을 것을 두고 싸우다 이복형제를 죽이기도 한다.

그러다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면서, 부인을 맞게 된다. 상대는 원래부터 '데릴사위'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집의 여자다. 이름은 부르테. 이때 혼수로 받은 최고의 모피 코트를 당시 최고 실력자이자 아버지와 의형제였던 케레이트의 옹 칸에게 갖다 주는데, 그 사람 눈에 들게 되어 테무친은 자리를 잡아 간다.

그러다가 '메르키트'라는 집단과 전쟁이 벌어지는데, 부인을 빼앗긴다. 그는 부인을 찾기 위해 다른 집단과 연합해 메르키트 공격하는데, 이게 그의 명성을 몽고 초원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이 후 테무친은 전쟁을 통해 몽고 제국을 통일해 간다. 그 가운데 그가 부딪쳤던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어릴 때 그의 의형제였던 자무카다. 죽마고우였던 둘은 성장해 상당한 집단의 리더가 되어 있었는데, 누가 더 상급자인가 겨루는 싸움이 나게 된다. 여기서 '13익(翼) 전투'가 벌어진다. '익'이란 1000개의 텐트를 묶는 단위를 이르고, 테무친은 '13익'의 리더였다. 그러니까 1만 명 이상의 전사를 휘하에 둔 리더였던 것이다. 아무튼 이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테무친이 승리하게 된다.

다음으로 자신의 보호자나 다름없었던 옹 칸과 대결하게 된다. 테무친이 자신이 공을 세운 것을 근거로 옹 칸의 딸을 요구했는데, 건방지다며 거절당해 대결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알타이 산맥에 있던 '나이만'이라는 집단이 패하게 되면서, 그는 최종적으로 몽고 초원을 통합하게 된다.

테무친은 1206년 쿠릴타이라는 행사에서 즉위해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즉위 후 그는 새로운 나라의 기본적인 구조를 만들어 나간다. 가장 중요한 게 셋 있다. 천호제와 친위병, 그리고 법령 제도다. 천호제는 1000개의 호구로 구성된 95개의 '밍간'을 다스리는 방식이다. 즉 9만 5000명의 병력이 있었단 얘기다. 이 1000호를 다시 100호로 나누고 10호로 나눠 조직적인 군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장'(만호장, 천호장, 백호장)들을 통해 자신의 명령을 일률적으로 전달시켰다.

다음으로 친위제다. 취약한 권력 기반을 보완하려고 자기한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친위병을 구성했다. 아까 말했던 '장'들의 자제들을 불러다 친위병으로 세우고, 그들에게 굉장한 특권을 줬다. '장'들에게 권력을 넘보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는, 인질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법령을 만들었다. 몽고말로 '자삭'이라고 한다. 특히 도망가는 군인의 사형법 등 군율에 관해 많이 썼다. 후에 자삭이란 말이 사형이란 뜻으로 바뀌는 데에서 보듯 엄격한 법령이었다. 이를 통해 제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이 렇게 내부를 다지면서 그는, 점령 준비를 마친다. 최초의 원정 공격 대상은 중국이었다. 당시 중국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있었다. 여진족 역시 북방에서 내려왔고 기마민족이었다. 싸우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은 야호령이라는 북경의 서북쪽 관문을 돌파하면서 그곳에 주둔해 있던 금나라 군대 30만 명을 몰살시킨다. 이때 북경이 포위되면서 결국 항복을 받아내게 된다.

칭 기즈칸은 당시에 중국을 '정복'하겠단 생각은 없었다. 그냥 조공을 바치고 공녀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군대를 철수해 돌아갔다. 그런데 금나라 황제가 약속을 어기고 북경에서 황하 남쪽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황하가 엄청 큰 강이기에 기마부대가 못 건너올 거라고 생각한 거다. 그러자 칭기즈칸은 대노해 응징을 시작한다. 산동, 하북 각지를 약탈하며 초토화시킨다.

한 편 1218년에 '오트라 사건'이 터진다. 칭기즈칸이 호레즘이라는 나라에 상인과 사신 450명을 보냈는데 전체가 몰살당한 사건이다. 호레즘은 서아시아에서 바그다드까지 통치하던 강력한 나라였는데, 군주가 이 450명을 스파이라고 생각해서 다 죽인 것이다. 금나라보다 강력한 세력에게서 도전을 받은 칭기즈칸은 중국 정벌 작전을 중단하고 호레즘 원정을 결의해서 출발한다.

그 래서 그 유명한 서방 원정, 7년 전쟁이 시작된다. 유목민족이라 가족과 가축을 다 데리고 오가느라 가는데 2년, 오는데 2년 정도 걸렸다. 이 전쟁으로 중앙아시아 지배하던 호레즘이 완전히 무너지고, 국왕은 카스피 해까지 도망가서 토인들에게 붙잡혀 죽는다. 그리고 칭기즈칸 군대는 그대로 산맥을 따라 러시아로 넘어가, 거기서 전투를 벌여 러시아도 괴멸시키지만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1225년 몽골리아로 회군한다. 러시아를 지배하게 된 건 그로부터 20~30년 뒤,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의 원정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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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전쟁의 기록을 보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그리고 약탈의 잔인성도 대단했다. 한번은 바미얀이란 곳에서 칭기즈칸의 둘째아들의 아들, 그러니까 손자가 적에 의해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래서 바미얀 주민들뿐 아니라 개와 고양이까지 샅샅이 죽였다고 한다. 결국 중앙아시아 전체가 파괴되고 만다.

칭기즈칸의 마지막 원정 장소는 지금의 티베트 북쪽 서하(西夏, 탕구트)라는 곳이었다. 전쟁을 한 이유는 서방 원정할 때 물자를 지원해 달라고 했는데 거절을 당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은 거기서 목숨을 잃는다. 이유에 대해선 낙마를 했다, 화살을 맞았다 등 여러 설이 있다.

그의 시신을 모시고 가는 동안, 매장지를 알리지 않으려고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매장지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다. 탐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 매장지를 찾아 헤맨다고 한다. 분명한 건 '부르칸 칼둔'이라는 산에 있다는 것 하난데, 바로 그가 어릴 때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종달새 잡고 고기 낚았다는 그 산이다.

'피의 정복자' 그리고 '동서 문화 교류의 아버지'

지 금까지 칭기즈칸의 삶을 살펴 보았다. 그를 어떻게 봐야 할까? 칭기즈칸에게 리더십은 분명히 있었다. 강력한 정치적 의지와 결단력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민족들을 받아들이는 포용력도 있었다. 천호제나 자삭 법령 등에서 알 수 있듯 상당한 조직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몽고 제국의 창건자이지만, 그걸 완성한 사람은 아니다. 자식과 손자 대에 걸쳐 확장된 거다. 그러니 몽고 제국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로 인해 유례없는 동서 간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비록 처음엔 피를 통해 파괴하고 이룬 작업이었지만, 몽고 제국은 후대에 이어 문화적 교류와 인류 역사에 기여하는 제국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안은별 기자(정리)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6] 

걸어서 세상 끝까지…중세에도 한비야가 있었네!

 

이븐 바투타와 이슬람 여행가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서양인들의 여행기에만 익숙해 있었다. <히스토리아>를 저술한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에서 출발하여, 중세 원나라 때의 마르코 폴로, 근대에는 남극을 발견한 아문센(1972~1928년)이나 아프리카를 탐험한 리빙스턴(1813~1873년)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찾아다닌 사람들은 줄곧 서양인들이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의 여행가로 인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이가 적지 않고 그들의 문명 교류와 인류 문명에 대한 공헌도 결코 작지 않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중세 이슬람 세계가 낳은 대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1368년)였다.

그럼, 이슬람 세계에서 위대한 탐험가가 탄생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610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계시 받고 나서 이슬람 종교는 다섯 가지의 기본 가르침 위에 발전해 왔다. 신앙 고백, 하루 다섯 번 메카로 향한 예배, 한 달간의 단식, 수입의 40분의 1을 종교세로 내는 희사, 그리고 평생 한 번 성지 메카를 순례하는 의무가 그것이다.

어디서 어느 장소에서건 일상의 예배를 보기 위해 항상 메카 방향을 알아야 했다. 해의 방향을 보고, 밤에는 별과 달의 움직임을 보고 정확하게 메카의 방향을 찾아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목표였다. 메카에는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으로 믿는 "바이툴라(Bait-ul Allah)"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누구나 천부적인 천문학자가 되고 방향과 거리를 계산하는 지리적 개념이 발달하였다. 이런 기본적인 훈련이 항상 이동해서 살아가는 유목 생활과 맞물려 다른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리 발달하였다.

둘째는 메카 순례 때문이다. 평생에 한 번 모든 성인 무슬림들은 육로로 걸어서, 또는 배를 타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로 순례를 떠난다. 수많은 여행가를 배출하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배경이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동쪽의 무슬림들은 거의 6개월, 심지어 1년이 걸려 메카로 향하는 일을 반복해 왔다. 여행길에 대한 정보나 준비, 길을 찾고 뚫고 나가는 종교적열정이 여행을 촉진시켰다. 이븐 바투타의 대여행기도 이러한 메카를 찾아가는 순례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 중세 이슬람의 대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1368년). ⓒ창비


이븐 바투타는 누구인가?

1304년 현재 모로코의 스페인을 마주보는 북아프리카 끝 도시 탕헤르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인 이슬람 명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무슬림 지도자로 오랫동안 법관으로 봉직했다. 1325년 21세에 홀로 성지 순례를 위해 집을 나서 이집트, 시리아를 거쳐 메카에 도착하였고, 이어 이라크,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인도 등 동방 이슬람 세계 탐험을 결심하고 대여행에 나서 30년간 아시아·유럽·아프리카의 3대륙을 두루 여행하면서 정확하고도 섬세한 현지의 방문 기록을 남겼다.

처음에는 성지 순례와 다양한 이슬람 세계의 문명과 문화를 알아 볼 목적으로 시작한 여행은 점차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호기심으로 불멸의 여행서를 남겨주었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30년에 걸쳐 장장 12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여정을 답사하였다. 1345년 원나라 말기에 바닷길로 중국 남부 항구 도시 취안저우(천주)에 도착한 후 육로로 베이징까지 여행하였고, 1349년 다시 바닷길로 모로코로 돌아갔다.

그 후 다시 아프리카 여행에 나서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여 나이저 강까지 이르렀다. 드디어 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을 만나기 위해 대사하라를 여행하면서 수단, 나이지리아, 말리, 팀북투 등지를 여행하고 1353년 말에 여행을 끝내면서 모로코로 돌아왔다. 이미 그이 나이는 21세의 열혈청년에서 49세의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인생과 청춘을 세계 여행에 바친 위대한 한 인간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인류 사상 유례없는 이 탐험기의 원본은 소실되었으나, 술탄 아부 아난(Abu Anan)의 제의로 당대 아랍의 대문장가인 이븐 주자이(Ibn Juzai)가 필사 요약한 저본이 남아 인류의 귀중한 유산으로 전한다. 대여행을 마치고 귀향한 그는 1368년 모로코에서 타계했다.

여행기의 특징과 의미는?

 

이븐 바투타 기행은 그보다 앞선 13세기 후반 <동방견문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의 23년간의 여행과 비교된다.

청년 이븐 바투타가 거쳐간 방문지의 범위와 여정, 탐험 정신은 단연 독보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바투타는 그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여행기에 옮겼다. 다양한 의식과 의례, 각 지방별로 독특한 통과 의례와 삶의 가치관의 차이, 동물과 농작물, 주요 산물 등에 이르기까지 의식주 일반이 절 묘사되어 있다. 일종의 지역별, 종족별 민족지적 성격을 갖춘 매우 훌륭한 인류학 기초 자료이다.

무엇보다 14세기 인류 역사를 가진 자의 기록이 아닌, 일반 대중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의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역사 기록이다. 나아가 이 여행기는 당시 각 지역의 다양한 이슬람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슬람이 아랍에서 발생하게 되었지만, 이슬람이 갖고 있는 특유의 포용력과 관용성으로 어떻게 전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문화적 절충과 변동을 경험하는지에 대한 흥미 있는 자료를 이 여행기가 제공해 주고 있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수피즘(Sufism)이라 불리는 이슬람 신비주의가 중앙아시아 여러 지방의 신앙과 기치 체계와 접목하면서 민중들의 강력한 영적 기둥으로 작용하는 과정을 이 여행기는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토착 문화와의 갈등과 수용의 문제가 초기 이슬람 전파 과정을 연구하는 본질적인 핵심이기 때문에 이러한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례의 제공은 이슬람 전파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두 권으로 된 이분 바투타 여행기는 정수일 교수의 탁월한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국내 학계는 물론 일반 대중들도 그동안 낯설게 여겨져 왔던 이슬람 세계를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얻은 셈이다. 이 책을 통해 진정한 중세 이슬람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적 환희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고전을 읽는 묘미이고, 특히 흥미진진한 이슬람 고전의 특징이다.

여정을 기록하는 바투타의 문체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다. 그는 여행 내내 이슬람 세계 각지의 종교계 명사들과 접촉하고 예우를 받았다. 가는 곳마다 그를 대접한 귀족의 딸을 아내로 삼았고, 그 아내들을 남겨 두고 여행을 떠났다. 그는 결혼 과정을 별다른 감정을 섞지 않은 채 짧고 간결하게 서술한다. 그가 경험하는 죽음의 위기도 마찬가지다. 바투타는 심한 열병을 앓거나 격렬한 전투에 참가하는 등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그는 그러나 숨 가쁜 위기를 흥분에 휩싸이지 않고 차분하게 전달한다.

그의 여정은 북쪽으로 러시아 남부, 남쪽으로 아프리카 중부, 동쪽으로 중국까지 달했으며, 지금과 같은 빠르고 편리한 교통 및 통신 수단이 없었던 시절의 여행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또 그의 여행기는 중세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에 관해 자세히 기록한 귀중한 사료이기도 하다. 나일 강 유역에서는 피라미드를, 인도에서는 코뿔소와 마법사 그리고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도 산 채로 함께 화장하는 기묘한 풍습을, 아프리카에서는 하마와 식인종을 목격했다.

나아가 그는 각지의 술탄과 총독, 성직자를 비롯한 여러 유력 인사를 만나 교제했으며, 덕분에 여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자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중세 지구촌 사람들의 삶에 대한 가장 흥미롭고 가장 상세한 현지 보고서인 셈이다.

실크로드는 원래 부가가치를 쫓아가는 물류 이동로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함께 이동하면서 문명과 신화, 과학과 기술의 루트가 되었다. 수많은 영웅들이 이 길을 따라 정복 야욕을 불태우고 무한한 인간의 탐험 정신을 실험한 무대였다. 이븐 바투타도 실트로드를 개척한 문명 전파자였고, 서로 다른 삶을 가진 세상을 이해하고 하나로 묶어준 위대한 선각자였다.

 

/이희수 한양대학교 교수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7]

韓·日이 하나로? '뉴 판게아' 시대에 불러내야 할 영웅!

 

 

유라시아 대륙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지평선, 높이를 상상할 수 없는 산맥들, 그리고 깊이를 측정하기 어려운 강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약한 바람을 순식간에 태풍으로 변화시키기도 하고 반대로 태풍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게도 한다.

이러한 법칙은 대륙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그 존재조차 찾을 수 없었던 집단이 어느 순간 대륙의 지배자가 되기도 하고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제국이 한 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대륙에서 영원한 권력을 가지고 신화를 창조한다는 것은 사실상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대륙이라는 바둑판과 체스판에는 셀 수 없는 무한의 변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은 역사 속에서 미약한 인간이 역사의 흔적을 새길 수 있도록 허락해왔다. 유감스럽게도 인류의 역사에서 단지 세 사람만이 대륙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겨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스스로 대륙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륙을 설계하고 경영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어야 대륙은 한 인간의 지배를 허락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즈칸이 이러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 인물이자 대륙이 허락한 인류 최후의 정복자는 누구일까? 바로 14세기 중앙아시아가 배출한 아미르 티무르(Amir Temur)이다.

▲ 아미르 티무르의 초상 ⓒhttp://orexca.com

고향인 몽골을 떠나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후 몰락해버린 역적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종교에 심취한 아버지 슬하에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낸 아미르 티무르였지만, 그는 800년마다 한 번씩 유라시아의 밤하늘을 밝힌다는 별 중의 별 "샤히브키란"의 기운을 타고 태어났다. 아미르 티무르는 기존의 유목민들과 달리 문무를 겸비하면서 성장하였으며, 그의 성장을 두려워한 삼촌의 살해 위협을 극복하고 마침내 중앙아시아 몽골 동포들 사이에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아미르 티무르는 중앙아시아 통일 전쟁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으며 급기야 세이스탄 전투에서 화살을 맞아 오른쪽 팔다리에 부상을 입고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야만 했다. 그의 서양식 이름인 테멀레인(Tamerlane)은 '절름발이 티무르'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침내 중앙아시아를 통일하였다.

아미르 티무르는 120여 민족이 공존하는 중앙아시아의 다민족·다문화 사회를 소통과 화합으로 이끌면서 수니와 시아에 염증을 느껴 발생한 이슬람 수피즘을 장려하여 자신의 국가를 새로운 세력을 키웠으며, 천재적인 군사 전략과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바탕으로 1000일이 넘는 원정을 떠나 국제전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토대로 그는 실크로드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륙을 설계하였다. 그는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를 14세기 당대 최고의 도시로 만들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유라시아의 경제, 무역, 문화를 발전시켰다. 특히 1402년 중세 최대의 전투인 '앙카라 전투'에서 유럽을 넘보던 오스만제국을 초토화시켜 유럽의 구세주가 되었으며, 이후 유럽 사회는 그의 대륙을 향한 전략과 설계를 배워서 근세의 토대를 만들 수 있었다.

닫힌 중세의 중앙아시아를 열고 세계를 소통시켜 근세의 발판을 만든 아미르 티무르는 1404년 중국의 명(明)을 정벌하러 떠났다가 오트라르에서 병으로 위대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그러나 그는 역사 속에서 정말 완벽하게 사라졌다.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즈칸만큼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그를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역사 속에 사라지게 만들었을까? 아니 방치하도록 만들었을까?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를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이면서 잔인한 학살자라고 평가한다.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라면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처럼 평가가 있었을 것이고, 한 번도 국제전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칭기즈칸처럼 분석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 과정에서 파괴와 학살을 자행했다면 칭기즈칸과 히틀러처럼 연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다.

14세기의 유라시아 대륙을 설계하고 경영하였던 아미르 티무르는 중세에 번영한 아시아의 마지막 선과 근세를 만든 유럽의 출발선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한 세기에 걸쳐 동시대를 지배했던 그를 배제하고 근세의 출발과 발전을 논하기는 힘들다고 판단된다. 예를 들면, 아미르 티무르 사후에 진행되었던 정화(鄭和)의 대항해, 근세 유럽의 출발선인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 유럽 국가들의 해양로 개척, 인도의 무굴 제국 등은 그와 연관성을 가진다.

실제로 위의 사건들과 연관된 역사 문헌들은 아미르 티무르를 배제하고 시작한다. 서구 학계는 근세 유럽의 르네상스와 이후 근대로의 발전은 자체적인 역량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라고 대부분 주장한다. 그러나 문헌을 살펴보면 유럽의 중세는 오늘로써 끝나고 내일부터 바로 유럽의 근세가 시작되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세상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신(神)만이 할 수 있다. 장기간에 걸쳐 중세 기독교의 암흑기를 경험한 유럽 사회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근세라는 거대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가! 이러한 논의가 지금 진행되고는 있지만 아미르 티무르는 여전히 배제되고 있다.

20세기 말 거대한 구소련이 무너지고 대륙이 긴 잠에서 깨어나 다시 움직이고 있다. 중국, 러시아, 인도 등 과거 대륙국가들이 부활하고 대륙 전체가 요동치고 있다. 그런데 14세기 아미르 티무르가 중앙아시아를 발판으로 국가를 세우고 제국을 만든 시점이 이와 유사하다. 다시 말하면 거대한 몽골제국이 무너지고 대륙이 복잡하게 진행되던 상황이 지금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에는 중세를 넘어 근세가 들어서는 초입이었으며, 현재는 현대를 넘어 또 다른 세기로 들어가는 문턱에 있다는 공통점도 가진다.

이 시점에서 이제 역사 속에서 사라진 그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도대체 어떠한 인물이었기에 역사가 그를 숨겨야만 했는지를 밝혀야만 한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역사 속에서 철저하게 누군가에 의해서 사라졌지만 그의 대륙을 향한 위대한 전략과 설계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지금도 살아남아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21세기는 세계를 움직였던 위대한 인물을 복제할 수 있지만 21세기를 움직이려는 자는 위대한 인물의 전략을 진화시키고자 한다는 것을.

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아미르 티무르를 말해야만 하는가? 현재 지구촌은 대륙이라는 섬을 없애려고 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 중에 있다. 예를 들면, 한국과 일본의 대한해협을 연결하려는 해저 터널 구상, 미국과 러시아의 베링해를 연결하려는 해저 터널 구상, 스페인과 모로코의 지중해를 연결하려는 해저 터널 구상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물론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지만 이러한 구상의 종점은 대륙이 연결되는데 있다.

 

▲ <아미르 티무르>(성동기 지음, 써네스트 펴냄)


만약에 위의 구상이 실현된다면 세계는 5대양 6대주가 아니라 5대양 2대주로 바뀔 것이다. 섬이 대륙에 붙어 대륙이 확장되고 그 대륙들이 다시 붙어 거대한 대륙으로 인식되는 시대는 과거 지구가 하나의 땅덩어리로 존재했던 판게아 시대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므로 우리는 이를 '뉴 판게아(New Pangaea)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과거 지구가 하나의 땅덩어리였을 때 살았더라면 모든 인류는 어쩌면 같은 언어와 문화를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누어진 대륙에서 살게 된 인류는 지금과 같이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뉴 판게아 시대의 도래는 바로 균열되고 이질화된 세계가 다시 뭉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뉴 판게아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첫째, 다인종·다민족·다문화가 보편화된다. 둘째, 자원을 통한 새로운 질서가 구축된다. 미래에 부족한 식량 자원, 지하자원, 에너지 자원을 두고 통제할 수 없는 충돌이 발생할 것이다. 셋째,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충돌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면서 아미르 티무르를 찾아야 하는가? 우리가 뉴 판게아 시대에 대륙 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잃어버리고 있는 대륙 경영 마인드를 찾아야한다. 이러한 마인드를 우리에게 제시해 줄 위대한 인물들, 다시 말하면 실질적인 국경이 없는 다인종·다민족·다문화가 존재하는 대륙을 정복하여 판게아와 같은 하나의 거대한 대륙을 설계하고 경영하였던 인물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말하면, 우리와 같은 상황에 처했으나 이를 극복하고 대륙을 경영하였던 자가 적합할 것이다. 분명 세계사에는 우리와 같이 대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는 바람에 대륙 마인드를 잃어버린 인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여 대륙을 다시 설계하고 경영하여 역사에 길이 남은 위대한 인물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21세기는 유라시아 시대이다. 남북이 통일되거나 북한이 철길을 개방한다면 우리는 조상의 뿌리인 바이칼 호수까지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산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머지 않았다. 나아가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하기 이전의 역사에서 유라시아 유목민들이 유럽, 아프리카까지 거침없이 달려갔던 것처럼 우리 앞에 대륙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대륙이 열리기 전에 우리는 대륙을 이해하고 설계하고 경영할 수 있는 대륙 경영 마인드를 회복시켜야 한다. 필자는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즈칸이 아니라 아미르 티무르에게서 대륙 경영 마인드를 찾자고 제안하고 싶다.

 

/성동기 인하대학교 교수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8]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를 다녀온 동양의 영웅?


정화(鄭和). 10여 년 전만 해도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다가 두 가지 '폭탄 선언'으로 일약 희세의 위인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97년 미국의 학술지 <라이프>가 새로운 세기를 맞으면서 학자들의 설문조사를 통해 지난 1000년 동안 '역사를 만든' 위인, 이를테면 '사건 창조적 인간' 100명을 순위를 매겨 뽑았다. 동양인은 11명밖에 오르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제대로 된 인물을 찾았다는 데서 일말의 위안을 느꼈다. 이 11명 가운데 간디나 쿠빌라이, 마오쩌둥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멀리 제치고 단연 선두(14위)에 오른 사람은 다름 아닌 정화다. 바꿔 말하면, 지난 1000년 동안 동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바로 정화라는 것이다.

또 하나 지난 2003년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의 왕립 지리학회에서 영국 해군 잠수함 퇴역 장교인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가 '신대륙' 발견자는 콜럼버스가 아니라 정화 함대라고 장엄한 선언을 한다. 불과 5년의 시차를 두고 터진 이 두 가지 사건은 중세 대항해 시대에 대한 지금까지의 통념을 일시에 날려 보내는 명실상부한 '폭탄 선언'이다. 충격을 받은 동서양 학계는 저마다 그 해명에 골몰하고 있다. 과연 실(實)인가 허(虛)인가?


▲말레이시아의 사당에 있는 정화의 석상. ⓒnavercast.naver.com

정화는 원 제국의 멸망(1368) 뒤인 1371년 중국 운남성 곤양(昆陽)에서 서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회회인(回回人, 이슬람교도) 마 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이곳 고향으로 진격해 온 명군에게 생포되어 남경을 거처 대도(북경)에 이송된다. 그는 당시 대도를 지키던 주체(후일의 성조 영락제)가 선대를 전복하는 '정난의 변'에 적극 가담해 무공을 세운다. 논공행상에서 정화는 내시들의 총수인 내관감(內官監)에 발탁되고, '하서양'을 앞두고는 총사령관격인 흠차총병태감(欽差總兵太監), 세칭 삼보태감(三寶太監)에 전격 기용된다. 그리곤 성조로부터 '정'가성을 하사받는다.

정화의 이러한 승승장구는 성조와의 운명적인 만남과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천부적 재질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열한 살 위인 주체가 정변을 일으켜 황제가 되기 전 연왕으로 있을 때부터 그를 밀착 경호하는 환관으로서 함께 생활하고 공부하면서 한문도 익히고 여러 나라 말도 배워두었다. 키가 9척(180센티미터)이고 허리 둘레는 10위(150센티미터)의 거부인데다가 미목이 수려하고 호랑이처럼 걸으며 목소리는 낭랑하니, 실로 재질과 용모가 구전한 거장의 귀상(貴相) 모습 그대로다.

개인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언필칭 '시대'다. 명대 초기에는 건국 지반을 다지고 성가신 왜구의 소요를 막기 위해 해금(海禁)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결과 국제 무역이 줄어들어 재원이 쇠잔해지고 중화의 국제적 위상이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좌시하지 못한 성조는 등극하자마자 동남아 각국에 사절을 보내고 동남해안 지역 여러 곳에 무역을 관정하는 시박제거사(市舶提擧司)를 설치하면서 해금을 풀고 해외진출을 권장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성조의 신임이 두터운 정화는 그의 명을 받들어 일곱 차례나 '하서양', 즉 해로를 통해 서양에 파견된다. 당시의 서양은 오늘날의 서양 개념과는 달리, 보르네오 서쪽에서 아프리카 동해안까지의 인도양 해역을 말한다. 정화가 이끄는 대규모 선단은 28년 동안(1405~1433년) 일곱 차례에 걸쳐 남경에서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무려 30개국, 500여 개 지방, 총 18만5000킬로미터나 되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항해를 단행했다.

바다의 풍운아 정화도 구경은 죽음으로 그 운세를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제7차 '하서양' 중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어디서 어떻게 사망해 어디에 묻혀있는지는 지금껏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회항 중 인도 캘리컷에서 사망했으며, 남경 중화문 밖 우수산(牛首山) 자락에 매장되었다는 것이 회자되는 설이다. 일세를 풍미했지만, 환관과 천민이란 굴레에 묶인 채 그의 종말은 이렇게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에게 600년이나 지난 오늘에 이르러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지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한 일이다.

정화는 '하서양'할 때마다 당시로는 명망 있는 학자나 문장가들을 대동해 기록을 남기게 하고, 자신이 직접 기념비 같은 것을 세워 장거를 알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가 지나간 동남아 곳곳에 그를 기리는 묘당이나 비석들이 세워졌다. 그래서 비록 훗날 조정의 무모한 분서로 기록들이 숱하게 소실되었지만, 적잖은 기록과 유물들이 남아있어 역사적 '하서양'의 전말을 그나마도 세세히 전해주고 있다.

마지막 제7차 '하서양'의 항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1430년 12월에 남경을 출항해 중국 동남해안과 베트남의 참파, 자바,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해협, 스리랑카,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을 거쳐 이란의 호르무즈까지 갔다가 거의 같은 항로로 회항해 1433년 7월 남경에 도착한다. 가는 길에 2년, 돌아오는 길에 5개월이 걸렸다. 매번 정화 휘하의 선단은 대종(大䑸)과 소종의 두 편대로 나눠 활동한다. 대종은 전체 선단이고, 소종은 대종에서 각지에 파견된 분견대다. 분견대는 활동을 마친 후 분견지에 돌아와 여러 소종들과 합류해 대종을 이루어 회항한다.

마지막 '하서양'을 떠나기 직전, 정화는 친히 복건성 장락현에 <천비지신령응기(天妃之神靈應記)>라는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즉 "나 정화는 영락 4년(1405년)에 황제의 명을 받들어 동료들과 함께 이민족 나라들을 방문했다. 그 후 지금까지 모두 일곱 번 항해했는데, 그때마다 수백 척의 대선단과 수만 명의 병사를 거느렸다 (…) 수평선 넘어 세상의 끝에 있는 나라들이, 서쪽에서는 서쪽 맨 끝이, 동쪽에서도 동쪽 맨 끝이, 우리가 도달하려는 항해의 목표였다 (…) 우리가 찾아간 서방이라는 국가는 3000여 개국에 이르렀고, 거대한 대양을 10만 리나 넘게 항해했다 (…) ". 7차 '하서양'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이다.

각설하고, 여기서 <라이프>의 '폭탄 선언'으로 화제를 돌려보기로 하자. 왜 지난 1000년 동안의 동양 최고의 인물로 정화를 꼽았을까? 지금까지 신대륙의 발견이나 인도해로의 개척으로 중세의 서막을 열어놓았다고 우겨대던 서구가 자존심과 '중심주의'를 내려놓고 정화를 앞세울 수밖에 없게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정화의 '하서양'은 15세기 말 소위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콜럼버스나 '인도항로'를 개척했다는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보다 시간적으로 근 한 세기 앞섰을 뿐만 아니라, 선단의 규모나 선박의 구조면에서도 그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월등하다. 제1, 3, 4, 7차 출해 때 매번 선단의 승선 인원이 2만7000명이나 되었고, 매번 출동 선박은 대소 200여 척이나 되었다. 선박 중에서 기함격인 보선(寶船)은 매번 20~30척씩 참가하는데, 보통 보선의 길이는 약 138미터이고 너비는 56미터쯤 된다니 어림잡아 축구장 크기다. 적재량은 1500톤으로 1000명이 승선할 수 있으며, 9주의 돛대에 12장의 대형 돛을 단 대범선이다.

이에 비해 87년이나 뒤늦은 1492년에 대서양을 횡단한 콜럼버스의 선단은 고작 3척의 경범선에 90명의 선원으로 구성되었으며, 기함의 적재량은 250톤에 불과했다. 이어 1498년 인도양 항해에 성공한 다 가마의 선단도 4척의 소범선에 승선인원은 160명이었으며, 길이가 25미터도 채 안 되는 기함의 적재량은 겨우 120톤이었다. 정화보다 약 100년 후에 환지구 항행을 단행한 마젤란 선단의 겨우도 5척의 소범선에 265명이 승선했으며 적재량도 최대가 130톤이었다.

실상을 밝히기 위해 조금은 지루하리만치 수치들을 나열했다. 사실 이러한 어마어마한 대범선의 건조 문제를 놓고 그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이 시점까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필자는 그 가능성을 다음과 같은 논리에서 찾고 있다. 즉 1957년 명대에 건설된 남경 용강(龍江) 조선소에서 길이 11.1미터의 조타대(키)가 발견되었는데, 이 크기의 키라면 보선 같은 대형 범선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매번 수행한 사람들이 여러 저서에서 이러한 실록을 남겨놓고 있다.

게다가 명대는 대형 선박을 건조한 전대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당대에 길이 20장(약 62미터, 600~700명 탑승)의, 송대에 40장의 배를 건조했으며, 북송 때 고려에 파견한 신주(神舟)의 길이도 30여 장이나 되었다. 이상의 몇 가지 점으로 미루어 명대에 정화의 보선 같은 대형 선박은 건조 가능하였다고 추론한들 별 무리가 없을 성싶다.

▲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개빈 멘지스 지음, 조행복 옮김, 사계절 펴냄). ⓒ사계절

이어 개빈 멘지스의 '폭탄 선언'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이 '선언'은 <라이프>에 대한 경악을 몇 배로 증폭시킨 터라서 논쟁은 '격돌 지경'이다. 그 내용의 '실'에 관한 연구가 아직껏 미흡한 탓에 '허'라는 의견의 목소리가 더 높은 듯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실'인가 '허'인가의 논쟁을 떠나서 멘지스의 주장을 소략하게 소개하는데 그치려고 한다. 중국 태생으로 17년간 영국 해군 잠수함 장교로 세계 방방곡곡을 누빈 그는 역저 <1421 중국, 아메리카를 발견하다>(한역본은 '아메리카' 대신 '세계'로 번역)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그 요체는 정화의 제6차 '하서양' 때 3개의 소종이 남북아메리카와 호주, 남북극 등을 탐험하고 구체적인 항정 지도까지 그렸다는 것이다. 그는 40여개 국과 900여 소의 유적지, 1000여 권의 책에서 관련 기록과 증거를 찾아냈다고 한다. 과테말라의 중국계 오골닭, 페루어와 중국어의 유사성, 중국인 DNA를 가진 베네수엘라인, 에콰도르의 중국제 닻과 낚시 바늘, 난파선 조각 등 나름대로 갖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앞에서 지적한 것 말고도 정화 선단은 쿡 선장보다 300년 앞서 호주를 탐사했고, 유럽인들보다 무려 400년 전에 남북극에 도달한 셈이다. 멘지스는 다른 저서 <1434, 증국의 정화 대함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불을 지피다>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동력은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명이 아니라 정화의 함대에 의해 전수된 중국 문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화는 왜 이러한 전무후무한 대규모의 항행을 단행했을까? 그 원인에 대해 이론이 구구하지만, 종합하면 몇 가지다. 다들 첫째 원인으로 후환이 걱정되어 '정란지변' 때 해외로 도주했을 건문제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을 꼽고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회적이거나 부차적인 동인은 될 수 있어도 항시적인 주원인은 아닐 것이다. 실제적 주요인은 해금으로 인해 추락된 국위를 선양하고, 경제적으로 대외 무역을 진작시키기 위함이었다. 때마침 북방에서 중앙아시아 일원을 장악하고 있는 타타르와 티무르에 의해 오아시스 육로를 통한 대서방 교역이 저애를 받자 해로를 통한 교역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7차 '하서양'은 대규모 해상 교역이라고도 말한다. 이밖에 황족과 귀족 등 특권층의 부귀영화에 필요한 이방의 보물을 얻어오기 위한이란 분석도 가능하다.

<라이프>와 멘지스의 두 갈래 '폭탄 선언'을 유도케 한 기폭제는 아무래도 정화의 7차 '하서양'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일 것이다. 이 '하서양'을 계기로 중국과 해상 실크로드 연안 여러 나라들과의 통교와 교류가 전례 없이 활성화되었다. 해마다 내화 사절이 끊이지 않고, 180여종의 각종 외국 물품이 수입되었으며, 중국인들의 남양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정화의 '하서양'은 중세 대항해의 서막을 열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해상 실크로드사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항정 거리나 항행 기간, 선박의 규모와 수량 및 적재량, 승선 인원수, 선단 조직, 항해술 등 모든 면에서 당시 세계 최대의 원양 항해로서 서구를 멀리감치 앞질렀으며 목선과 범선 항해의 기적을 이루었다. <정화항해도>에 500여개의 지명(외국 300여개)과 방위, 항구, 암초 등 표식물이 오롯이 명기됨으로써 세계 원양 항해사의 진귀한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화의 이러한 혁혁한 업적은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더욱이 값지게 이어진 것도 아니어서 우리에게 통절한 역사적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다. 제6차 '하서양'이 한창이던 1421년 4월 북경의 황국이 불에 타는 사건이 일어나자 한림원의 한 유지는 중화제국의 전통을 무시하고 함부로 서양에 함대를 파견한데 원인이 있다고 강변하면서 선단의 항해 중단을 건의한다. 분별력을 잃은 성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정화를 중도에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의 사후 44년 만인 1477년 병부는 문신 세력을 등에 업고 '하서양'은 막대한 전량을 낭비하고 1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도 국익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된 무모한 행동이라는 비난을 했고, 더불어 환관 세력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정화의 '하서양'과 관련된 기록, 특히 조선 관련 기록을 몽땅 불살라버렸다. 이 분서 사건은 지난 1000년 동안의 중국의 최대 비극이라는 데 중국학계는 입을 모으고 있다. 필요한 설계 문헌의 소진으로 인해 더 이상 대형 선박을 건조할 수 없게 되었고 급기야 30년 후에 왜구가 침입해 왔고, 그로부터 장장 600년 동안 강대국 지위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번번이 바다로부터 외세의 내침을 받아오다가 끝내는 망국의 비운을 면치 못했던 해양국인 우리로서는, 조선 산업을 비롯한 강력한 해양력 배양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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