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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Tour - World

러시아 역사기행 - 정수일(경향연재)

by Wood-Stock 2009. 10. 9.

(1) 극동의 관문 블라디보스토크

ㆍ유럽과 태평양 잇는 항구 도시
ㆍ시베리아 출발점에 서다
‘독수리 바위’에서 바라본 블라디보스토크 전경.

초양(草洋, 풀 바다)에서 진주를 건져내는 우리 행각은 계속된다. 그 터를 대흥안령에서 몽골로 옮겼다가 이제 다시 시베리아로 옮기려고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건져내겠는지 기대 반, 걱정 반 속에 2009년 7월1일 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대한항공(KE) 981기편에 몸을 실었다. 11시30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시속 966㎞의 속도에 고도 약 1만m를 유지하면서 곧바로 군사분계선과 평행선을 긋는다. 30여분 동안 직행하다가 북동쪽으로 꺾지 못하고 강릉 쪽으로 동선을 잡는다. 여기서부터는 고도를 1000m 더 높이면서 저만치 동해의 공해 상공을 날다가 그제야 기수를 북향으로 튼다. 제 땅 상공을 피해야 하는 이 서글픔을 저 동해의 창파도 씻어내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꼭 두 시간이 걸려서 구름이 자욱하고 물기가 번뜩이는 아르촘 공항에 착륙했다. 기내에서 검역관이 오기를 20여분이나 기다렸는데도 입국장의 혼잡을 피한답시고 승객들을 40명씩 나눠 내리게 하는 바람에 비행기에서 내리는 데만도 한 시간 이상 걸렸다. 20평 남짓한 입국장은 또 입국장대로 북새통이다. 입국 수속에 또 한 시간 걸렸다. 승객의 대부분은 현지 러시아인이다. 그들은 별 군소리 없이 ‘관성의 법칙’에 순응한다. 적어도 겉으론. 기온은 15도, 비가 촉촉이 내린다. 현지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왕년에 없던 일로 지난 6월 내내 장맛비가 내렸으며, 겨우내 무르팍까지 쌓이던 눈도 5~6년 전부터는 가뭇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상기후의 징조로서 재난일 수도 있다고 동토인들은 불안해한다고 한다.
 
 
우리의 시베리아 초원로 답사는 이렇게 이변 속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시베리아는 그리 낯선 땅은 아니다. 그렇다고 제대로 알아본 땅 같지도 않다. 정작 이 땅의 동쪽 끝에서 저 멀리 1만여㎞나 뻗어간, 실로 까마득한 서쪽 끝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첫발을 떼자니 그 실체부터가 궁금해 온다. 라틴어 계통에서 부르는 ‘시베리아’는 러시아어 ‘시비르’에서 유래된 것인데, 타타르어로 ‘잠자는 땅’이란 뜻이다. ‘시비르’란 이름은 16세기 타타르인들이 서시베리아에 세운 칸국의 수도 이름에서 따온 것이나, 후일 러시아인들의 동진과 더불어 우랄산맥 동쪽 전 지역에 대한 범칭으로 확대되었다. 그 지역적 범위는 우랄산맥 동쪽 비탈에서 태평양 연안의 분수계까지를 포함하는데, 동서 너비는 7000㎞, 남북 길이는 3500㎞, 면적은 약 1300만㎢로서 러시아 연방의 75%, 아시아의 25%나 차지한다.

지형적으로는 우랄산맥과 예니세이 강 사이의 해발 200m 이하의 시베리아 저지대, 예니세이 강과 바이칼 산지대 사이의 해발 500~700m의 중앙시베리아 고원지대, 고생대의 습곡(褶曲)운동에 의해 조성된 알타이산맥에서 자바이칼산맥에 이르는 남시베리아 산간지대, 중생대에 조성된 동시베리아 산간지대 등으로 구분한다. 기후는 심한 대륙성 기후로서 영구동토지대(툰드라)가 많으며 영하 70도까지 내려가는 극한지대도 있다. 그래서 총체적으로 연평균 기온은 영도 이하다. 남부에 동서로 초원지대(스텝)가 형성되고, 그 북쪽에 자작나무를 비롯한 침엽수가 우거진 타이가 지대가 펼쳐져 있다. 우리가 타고 갈 시베리아 황단철도는 스텝과 타이가가 지그재그로 얽혀있는 지역을 숨바꼭질하듯 헤집고 지나간다.

풍부한 천연자원과 광대한 처녀지를 갈무리하고 있는 시베리아는 세계 굴지의 보물단지이다. 그 속에서 수만년 전 현생인류인 몽골로이드와 그 후예인 고아시아인들이 이곳을 요람으로 삼고 삶을 개척해 왔다. 이곳에 나타난 첫 국가는 기원 전후 바이칼 호까지 영역을 넓혔던 흉노이며, 그 뒤를 이은 유연(柔然)이나 선비(鮮卑) 같은 북방계 민족들도 시베리아 남부나 동남부 일원에서 나름의 역사를 엮어왔다. 그러다가 13세기에 이르러 몽골 제국의 킵차크 칸국(1243~1480년)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잠자던 땅’ 시베리아는 마침내 그 면모를 세계에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면모를 드러내자마자 야심찬 러시아의 ‘동진정책’이란 격랑에 휩쓸린다. 몽골의 압제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모스크바 대공국은 러시아 통일제국의 틀을 갖춰가면서 대외 팽창에 눈을 돌린다. 그 주안점이 바로 시베리아에 대한 ‘동진’이다. 러시아는 킵차크 칸국의 고토에서 일어난 카잔과 아스트라 칸국을 차례로 공멸한 다음 1582년 카자흐의 모험가 예르막을 내세워 시비르 칸국을 평정한다. 예르막은 시비르 지방을 통째로 러시아 황제 이반4세에게 공물로 바친다. 그러자 러시아는 서시베리아의 이르티시 강과 토볼 강의 합류 지점에 동방 진출의 전초기지로 토볼스크 시를 건설한다. 여기를 거점으로 해 러시아의 동방 진출은 본격화된다. 강력한 카자흐 기마군단은 동진을 계속해 반세기도 채 안 된 동안에 극동의 오호츠크 해안까지 도착한다. 로마노프 왕조의 표트르대제는 시베리아 경략에 대한 강한 야욕을 품고 오호츠크 해로부터 남하를 시도했으나 흑룡강 방면에서 청나라의 제지에 부딪힌다. 그러자 양국 간에는 동시베리아와 극동을 놓고 물고 물리는 쟁탈전이 벌어지는데, 대체로 노후한 청나라가 고배를 마신다.
 
블라디보스토크 거리 풍경.

이러한 혼탁스러운 역정에서 이제 인종의 순수성이란 옛말로 되고 말았다. 러시아의 동진 물결을 타고 밀려든 슬라브계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벨로시아인이 4000만 인구 가운데서 약 90%를 차지한다. 원주민인 알타이계의 터키인이나 몽골인, 퉁구스인, 고아시아계 인종은 오히려 소수민족으로 전락해 터전을 잃고 변방에 쫓겨가 주로 수렵이나 어업에 종사한다. 주민의 대부분은 남부 철도 연변에 몰려 살고 있으며, 북부는 갈수록 인구밀도가 희박하다. 하루 종일 가도 인적 하나 없는 곳이 수두룩하다.

이렇게 개척되고 변모된 시베리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황단철도로 대표되는 초원 실크로드란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동진에 의해 우랄산맥 동쪽 기슭으로부터 남러시아 초원지대를 지나 부분적으로 북방 침엽수림 지대를 가로질러 흑룡강 일대까지 이어지는 길이 바로 시베리아 초원로이다. 이 길의 서단은 몽골 초원에서 알타이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로 이어지는 전통적 초원로 구간이나 동단은 새로 개척된 초원 ‘모피로’이다. 동시베리아에서 생산되는 모피를 수입해 가는 길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시베리아는 천혜의 보고이지만, 한때 종신 유형지가 되었을 정도로 황막하고 고달프며 동떨어진 이상야릇한 신기루의 땅으로 비쳐졌다. 게다가 굴절된 프리즘을 통해 흘겨보다보니 왜곡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껍데기를 벗겨버리면 시베리아는 진정 인간의 성찰과 깨달음을 촉발한 마그마로, 지혜와 문명을 함양한 도량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러시아 문호 체홉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장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내고, 어려운 환경에 적응해 ‘책임 있는 과업을 수행’하는 민중의 공적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무저항과 현실 안주에 만족하는 정신적 스승 톨스토이와 결별하고 1890년 마차를 타고 장장 다섯 달 동안 시베리아를 거쳐 사할린 섬까지 다녀온다. 다녀와서 초지(初志)를 담아 써낸 것이 <사할린 섬>과 <6호실>이다. 그에 앞서 다른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도 10년간의 시베리아 유배생활에서 자신이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다면서 그 성찰을 <죄와 벌> 같은 대작에 낱낱이 풀어놓는다. 모두는 시베리아 예찬론자들이다.

우리에겐 시베리아가 이런 예찬 말고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먼 옛날 우리네 한 조상의 태가 그곳에 묻혔을 법하며, 그곳에서 일렁이던 문명의 여파가 우리 땅에 밀려왔다. 우리 역사의 자랑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가 자리했던 고지(故址)이기도 하다. 가깝게는 우리의 50만 혈육이 그곳에서 삶을 일궈가면서 애국의 정열을 불태웠다. 오늘은 새로운 유대로 우리와 유럽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시베리아의 무한한 초양 속에는 주옥 같은 보물이 무궁무진하게 깔려있다. 이제 우리는 시베리아 초원로를 따라 그 채집에 나선다. 그 출발점이 바로 시베리아 극동의 관문 블라디보스토크이다.
 
극동의 관문 블라디보스토크의 항구.

아르촘 공항에서 56㎞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는 흔히 연해주라고 부르는 프리모르스키 크라이 주 주도로서 길이 30㎞, 폭 12㎞의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러시아어로 블라디보스토크는 16세기 러시아의 동방 진출을 의미하는 ‘동방 정복’(블라디=정복, 보스토크=동쪽)이란 조금은 살벌한 느낌이 드는 복합어다. 우리말로는 자리한 주의 이름을 따서 ‘연해주’라고 하나, 중국어로는 ‘하이선웨이(海參외)’라고 한다. 그 뜻에 관해서는 몽골어의 ‘해변가의 작은 어촌’이나, ‘해삼이 많이 나는 저지(외=低地)’란 두 가지 설이 있다. 원·명대까지만 해도 ‘영명성(永明城)’이라고 불려 온 이곳은 17세기 중엽 러시아의 동방 진출 전까지만 해도 청나라 길림부도통(吉林副都統)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러시아와 만청 간에 영토분쟁이 일어나 얼토당토 싸우지만 무능한 만청은 러시아와 불평등한 ‘북경조약’(1860년)을 맺고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우수리강 이동 약 40만㎢에 달하는 넓은 땅을 러시아에 내주고 만다. 이즈음 러시아는 비밀리에 군대를 파견해 초소를 지으면서 항구란 이름을 붙이고 이주를 시작한다. 얼마 안 가선 일약 시로 승격시킨다.

일행은 아무르강 하구에 황소 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금각만(金角灣, 조로토이로 만)가에 자리한 아무르 바이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바다처럼 펼쳐진 수면에 반사된 황금빛 노을은 문자 그대로 황홀경이다. 백야(白夜) 속에 황홀경은 두세 시간 지속된다. 30여년 전만해도 블라디보스토크는 군항이란 철의 장벽에 가려져 외래인은 허가증을 소지했어도 항구는 물론, 해변가도 얼씬할 수가 없었다. 그저 차를 타고 우중충한 거리 몇 군데만 주마간화(走馬看花)식으로 스쳐 지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은 문이 활짝 열렸다. 고층건물이 즐비하고 곳곳에 ‘Sale’이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있다. 큰 탈바꿈이다.

다음날은 발해 유적지 답사로 하루를 보냈다. 그 다음날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태평양함대사령부가 자리한 군항 광장이다. 광장 언저리에는 꺼지지 않는 화염이 활활 타오르는 제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탑이 자리하고 있다. 탑 왼편엔 대전에서 공훈을 세운 대형 잠수함 한 대가 실물로 전시되어 있다. 적에게 포위되자 승무원 전원이 자폭으로 불굴의 절개를 과시한 잠수함이다. 그런가 하면 바로 그 앞바다 군항에는 대형 군함들과 나란히 ‘C-56 잠수함박물관’이 바다에 떠있다. 역시 이 대전 때 10척의 적함을 침몰시켰다는 전설적 잠수함을 개조해 전시한 박물관이다. 전쟁의 상처와 더불어 그 전쟁을 이겨낸 사람들의 전공은 영원히 역사를 되살려가는 불멸의 불씨로 남아있게 된다.

이어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인 해발 214m의 ‘독수리 바위’ 전망대를 찾았다. 68만 인구를 한품에 안고 있는 시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동방의 진주’란 명성에 걸맞은 빼어난 경관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곳곳마다 육중한 컨테이너와 촘촘한 기중기로 숲을 이룬 무역항이나 어항, 군항, 그리고 9288㎞를 달려온 철마가 멎는 마지막 역사는 이곳이 러시아가 아시아나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극동의 관문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눈 아래에서는 2012년 아시아·태평양정상회의(APEC) 장소로 쓰일 루스키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한창 건설 중에 있다. “우리에게는 무엇인가?”라고 물음을 던질 정도로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와 가깝다. 그러기에 어느 곳 하나 무심코 지나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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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0만 고려인의 애환

ㆍ낯선 땅, 차별과 박해 견딘동포들의 아픈 흔적들…

우리에게 블라디보스토크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곳에 동포의 애환이 서려있고, 그 애환을 풀기 위한 그들의 피땀이 흥건히 스며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장을 풀기도 전에 아르촘 공항에서 곧바로 찾아간 곳이 바로 신한촌(新韓村)의 옛터이다. 2009년 7월1일 오후 4시30분, 하바로프스크 거리에 자리한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애잔한 보슬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일행은 ‘연해주신한촌기념탑’ 앞에서 촉촉한 옷깃을 여미고 삼가 묵념을 올렸다. 이 기념탑은 1999년 8월15일 해외한민족연구소가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웠는데, 높이가 서로 다른 세 대의 흰 돌기둥으로 구성되었다. 5m쯤 되어 보이는 가운데의 제일 높은 기둥은 인구가 가장 많은 남한을, 그보다 30㎝쯤 낮은 오른쪽 기둥은 북한을, 제일 낮은 왼쪽 기둥은 해외동포를 각각 상징한다고 안내원은 설명한다. 보는 순간 구태여 높이에서 차별을 둘 필요야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상이야 기안자나 조각가의 소관이니 어찌 하겠는가. 밖에는 2.5m 높이의 보호 철책이 둘러쳐져 있다.
 

미하로브카 군에 있는 고려인 ‘우정마을’ 전경.

 
원래 마을은 이곳을 시작으로 산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찍이 이곳을 찾은 춘원 이광수는 마을의 정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마을은 아무르 만에 면해 있는 절경지로서 집들은 바윗등에 굴 붙듯이 산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러시아풍의 나무로 지은 집은 보통 2~3개의 한국식 온돌방이 있는데, 20여명씩이나 함께 사는 대가족도 있다. 이역에서도 전통을 이어가며 오순도순 정답게 모여 사는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현대적 건물로 꽉 차고 무성한 나무숲으로 뒤덮여 있어 옛 흔적이라곤 남아 있지 않다. 차를 타고 5분 걸려 산등성이에 이르렀다. 밋밋한 언덕배기에 ‘알레나’라고 쓴 큼직한 간판이 달린 상점 앞에 멈췄다. 이 상점이 바로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선생의 고택 자리이다. 선생은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1907년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될 때 참령으로 강화진위대를 이끌고 대일항쟁을 전개하면서 같은 해에 신민회를 조직한다. 4년 후에는 윤치호 등과 함께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유되어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자 1915년 러시아로 망명한다. 191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이듬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부총리에 취임한다. 성재는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걸출한 애국투사이다.

선생의 고택 옆에는 1912년에 지은 한민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학교 정문과 교실문마다 태극 문양을 새겨 넣은 이 학교에서는 200여명의 어린 학생들을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교육하고 있었다. ‘보국가’나 ‘대한혼’, ‘애국가’ 같은 학생들이 부른 노래 가사에서 그러한 기상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보국가’ 1절에는 “조국강산 사랑하라 동포형제 사랑하라 우리들의 일편단심 보국을 맹약한다/ 화려할 사 우리 강산 사랑할 사 우리 동포 자나깨나 잊을소냐 길이 보존 우리 국토”라고 절절한 애국애족의 얼과 넋이 넘쳐나고 있다. 학교 건너편의 스탈린구락부 안에는 고려도서관이 따로 있어 성재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고려인들이 이곳에 모여 3·1운동 같은 행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여기서 70여m쯤 내려오니 길 양 옆에 기둥을 세우고 가름대는 솔가지로 장식한 ‘독립문’이 세워졌던 자리가 나타난다. 이 독립문은 신한촌의 대문 역할을 했다. 대문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독립의 의지를 새록새록 가다듬곤 했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주립 의과대학 교정에 2002년 9월 건립된 ‘안중근 의사 기념비’.
이어 블라디보스토크 주립 의과대학 정원에 자리한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를 찾았다. 비는 이 대학과 서울 보건신학연구원 사이에 국제적 협력에 관한 협정서 체결을 기념해 2002년 9월5일 세운 것이다. 비에는 ‘인류의 행복과 미래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란 글발이 새겨져 있다. 비 앞에 서니 저절로 숙연해지며 머리가 숙여진다. 순간 대학 시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쏴 넘어뜨린 하얼빈 역을 찾았던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의사가 그 장거를 준비해 온 현장이 있다. 그곳이 바로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한 크라스키노 연추 하리 마을이다. 의사는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이곳에서 1909년 2월7일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동맹을 결성한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약손가락을 잘라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국만세”를 삼창한다. 애국에 불타고 애족에 결연한 열혈청년들만이 펼칠 수 있는 장엄한 장면이다. 의사는 직접 작성한 맹약에서 “손가락 하나씩 끊음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나 첫째는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빙거(憑據)요, 둘째는 일심단체한 표라. 오늘날 우리가 더운 피로써 청천백일지하에 맹세하오니 … 마음을 변치 말고 목적을 도달한 후에 태평동락을 만세로 누리옵시다”라고 호소한다. 의사는 비록 태평동락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한 방울 이슬로 사라졌지만,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그 영롱한 빙거와 표는 정녕 청사에 길이길이 아로새겨져 있다. 핏방울 형상을 한 ‘단지동맹기념비’(2001년 10월19일 세움)의 아롱진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다음날 오후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기울어질 무렵 고려인(러시아어로는 카레이스키, 즉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처음으로 발을 붙인 개척리를 찾았다. 한인들의 긴 이주사와 더불어 뼈저린 애환이 서린 고장이다. 원래 19세기 중엽부터 벌이를 찾아 계절적으로 극동 시베리아 방면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가족 단위로 본격 이주를 시작한 것은 1863년부터이다.

최초로 인접한 함경북도의 13호 농가가 노브고로드 만 연안의 포시에트로 이주한 이래 이곳을 중심으로 서우펀강(綏芬河) 유역과 우수리스크, 그리고 하바로프스크 등 지역으로 이민이 속속 이어졌다. 급기야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극동지역에만도 이민자가 2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이 모태가 되어 고려인들의 거주와 활동 영역은 전 러시아로 확대되었으며, 그 수는 약 50만명으로 추산된다. 

신한촌 옛터에 1999년 8월15일 세운 ‘연해주신한촌기념탑’.

 
개척리 마을은 한인들의 고달픈 이주사를 고발하는 현장이다. 1873년 군항의 개항과 더불어 개척된 마을이다. 해안가에서 300m 떨어진 마을은 당시로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부였다. 지금은 프그라니치나야 거리라고 하며 상점과 운동장, 스포츠센터 등 현대적 시설물이 빼곡히 들어서 그 옛날의 모습은 완전히 지워졌다. 당시 이곳에는 민족 언론을 주도하던 ‘해조신문사’와 ‘대동공보사’가 자리하고, ‘성명회’란 반일운동 조직과 한인학교도 함께 있었다. 이상설, 유인석 등 훌륭한 지도자들의 눈부신 활동무대였다. 고려인들의 활동 기세를 우려한 러시아 당국은 1911년 봄 난데없는 장티푸스의 박멸을 구실로 이곳에서 고려인들을 강제로 철거시키고 이곳을 기병단의 병영지로 만들었다. 보금자리를 빼앗긴 고려인들은 당국이 지정한 시 서북 변두리의 생소한 마을, 신한촌으로 옮기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낯선 땅에 삶의 뿌리를 내리는 데는 고통과 슬픔이 앞서게 마련이다. 그러한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 고려인들이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제정 러시아 당국이 이른바 ‘황화(黃禍)’란 사시(斜視) 속에 가하는 차별과 박해이다. ‘황색인종으로부터의 화’라는 ‘황화’는 황인종, 즉 아시아인에 대한 유럽인의 해묵은 인종차별이다. 1906년 극동지방 총독으로 부임한 운테르베르게르는 고려인의 인구 증가를 ‘엄청난 위험’으로 간주하고 이민 금지, 관유지 임대 금지, 어장의 고려인 노동자 채용 금지 등 각종 제재조치를 취한다. 고려인들은 러시아인들이 도저히 개간할 수 없는 돌밭을 개간하고 나서는 인근 지역을 야금야금 잠식하면서 친지들을 데려다가 새로운 부락을 만들곤 한다. 그래서 10년 안에 러시아인은 그곳에서 쫓겨나게 마련이라는 것이 총독의 판단이다. 또한 ‘황화의 주범’인 고려인의 존재는 극동 안보에도 위협이 되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37년 18만 극동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바로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비극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삶을 꿋꿋이 개척해 나갔다. 그들의 근면성과 성실성, 강인성은 지어 총독을 자문하는 지방 경찰서장들까지도 공히 인정하는 바였다고 한다. 술을 마셔도 난폭하지 않고, 중국인들처럼 강도나 살인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러시아인보다 청결하다. 아무리 험악한 땅이라도 그들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농경지가 되며 생산성은 중국인의 2배나 된다. 이것이 고려인들에 대한 러시아 현지인들의 일치한 평판이다. 일찍이 조선을 네 차례나 방문하고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1897년)이란 책을 쓴 영국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비숍은 당초 게으름을 조선인의 기질로 여겨 왔었는데, 러시아와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근면하고 잘 사는 현장을 목격하고 나서는 자신의 오판을 후회하면서 조선 사람은 ‘밖에 나가면 더 잘사는 민족’이란 체험적 결론을 내린다.

지금은 ‘엘레나’란 상점이 들어선 이동휘 선생의 고택 자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인들의 애환이 서린 몇 군데를 돌아보고 나서 북방 280㎞의 지점에 있는 노브고르드예프카 발해 고성을 답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미하로브카 군에 있는 ‘우정(友情)마을’에 들렀다. 본래 이 마을은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했다가, 그래도 나서 자란 땅 극동에 되돌아오고 싶어 하는 동포들을 위해 한국주택건설협회가 지어주기로 한 것이다. 계획은 1000가구 분을 지어주기로 했는데 1990년대 말 금융위기가 닥쳐오면서 지원을 포기해 지금은 동북아평화재단과 일부 자원봉사단체에서 돌보고 있다고 한다. 공사가 지지부진해서 이제 겨우 34가구만 입주한 형편이다. 다른 5개 마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건축기자재는 창고에서 불그죽죽하게 녹이 쓸어가고 야외시설들은 폐물로 나뒹굴고 있다. 바람막이도 제대로 안 된 집에 입주한 ‘난민들’은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1년에 고작 3000달러밖에 안 되는 지원금으로 연명한다고 한다. 입주민들의 얼굴에는 수심기만이 가득하다. 인사를 건네도 무덤덤하다. 측은함을 넘어 미안하기만 하다. 고사성어에 귀곡천계(貴鵠賤鷄)라는 말이 있다. ‘고니를 귀하게 여기고 닭을 천하게 여긴다’라는 뜻이나. 삶 속에 녹아난 성어로는 ‘먼 데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데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라는 말로서 ‘집 떠난 사람을 더 생각하라’는 훈계이다. 우리는 과연 ‘고니’처럼 멀리 집 떠난 그들에게 이 성어가 가르치는 인지상정을 베풀고 있는지. 4000만은 고사하고 40만이 십시일반하면 저 혈육들은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도 남음이 있으련만.

가슴을 짓누르는 반문과 번민 속에 마을을 뒤로 하고 그런 ‘귀곡’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또 하나의 현장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어둠이 살포시 내리깔리는 무렵 발로다르스키야 거리 38번지에 자리한 최재형(崔在亨, 1860~1920년) 선생의 고택을 찾았다. 지금은 러시아인이 살고 있는데, 한국인의 접근을 못마땅해 한다고 하기에 먼 발치에서 카메라에나 담을 수밖에 없다. 구한말 의병조직인 ‘동의회’의 총재, ‘대동공보’와 ‘대양보’의 사장, ‘권업회’ 총재, ‘대한국민의회’ 명예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부임은 못함) 등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격인 선생은 일본군과의 격전에서 체포되어 총살 당한다.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다 바친 이 시대 희유의 민족지도자 중 한 분이시다. 대로 가에 휑뎅그렁하게 나앉은 선생의 고택은 어쩐지 소연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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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원으로 뻗은 발해의 초피로(貂皮路)

ㆍ서역제국과 문물 소통했던 해동성국의 위대한 교역로

스체클라누하 발해 성터

발해와 연해주, 연해주와 발해, 장엄한 역사의 만남이고 냉엄한 현실의 경합(競合)이다. 연해주가 발해의 치하에 들어옴으로써 그 땅에 첫 국가가 태어났으며, 우리 역사에서 영역이 가장 넓은 해동성국(海東盛國)이 우뚝 섰으니 그 만남은 장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연해주 땅에 일떠선 발해의 불 보듯 빤한 정체성을 놓고 오늘날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우리가 대립각을 세우고 있으니 냉엄하지 않을 수 없다. 

‘담비의 길’(초피로)이 표시된 발해의 교통로 약도(‘발해를 찾아서’, 전쟁기념관, 1998, 53쪽 참고).

이 ‘만남’과 ‘경합’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한 현장 답사는 그래서 애초부터 녹록지 않다. 첫 난관은 발해에 대한 우리의 무지이다.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가장 컸던 나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적게 알고 있는 나라가 바로 발해다. 발해가 동시대의 통일신라에 비해 수명은 30년쯤 짧지만, 그 크기는 4~5배에 달하는데도 발해에 관한 한 우리의 지식은 통일신라의 그것에 비해 40~50분의 1도 채 안되니 말이다. 일찍이 실학자 박제가(朴齊家)는 “우리나라 선비들이 신라 9주 안에서 태어나 그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틀어막아버리니…, 어찌 발해의 역사를 알 수 있겠는가” 하고 개탄한 바 있다. 발해에 대한 이러한 무지와 더불어 편단과 무시는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발해사의 수난을 자초하고야 말았다.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주의 편견에 젖어 발해를 아예 무시해버렸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우리의 또 하나의 민족국가인 북방의 발해까지 아우르는 완전 통일로 이어지지 못함으로써 남북국가 분립시대를 연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일통삼한(一統三韓)’의 내재적 한계성이며, 우리 겨레가 두고두고 반추해야 할 뼈저린 역사적 교훈이다. 그것이 아니었던들, 발해는 우리 역사의 주류에서 밀려나지 않았을 것이며, 발해의 기나긴 수난에 허무한 빌미도 제공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동안 일부 올곧은 사학자들에 의해 비뚤어진 역사의 흐름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역풍이 일곤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관변사학자들이 주장한 ‘만선사관(滿鮮史觀)’의 올가미에 걸려 발해사는 고구려사와 더불어 만주사의 일부로 변조되었다. 이 시점에서도 발해사를 ‘요동사’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는 등의 수난 여파는 종시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고려인들이 살았던 고르바트카 발해 성터 안의 마을

게다가 작금 주변국들의 움직임도 심상하지 않다. 중국은 이른바 ‘동북공정’을 내세워 발해 유적지에 철의 장막을 쳐놓고 발해가 당나라 변방의 소수민족인 말갈(靺鞨)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강변한다. 러시아는 당나라와는 무관하게 말갈족이 세운 극동의 첫 독립국가라고 하면서 은근히 영유욕(領有慾)을 내비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 학계는 독립국가이기는 하나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족이라는 이중구조설을 퍼뜨린다. 강역을 놓고도 우리는 연해주는 물론 아무르 강 중류까지로 주장하나, 러시아 측은 연해주의 한카 호(興凱湖) 북쪽을 조금 넘는 선으로 본다.

 

이렇게 우리의 정통국 발해는 오늘날까지도 그 수난의 역사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니 이 치욕의 역사를 더 이상 연장시킬 수는 없다. 이젠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귀감을 얻어 발해사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오롯하게 밝혀냄으로서 왜곡과 변조를 막아야 한다.

 

고르바트카 발해 성터.


매우 벅찬 과제이고 사명이다. 비전공자로서 도전장을 내민다는 것은 언필칭 무리이겠지만, 문제의식쯤은 가져야 한다는 판단에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수난사의 현장인 발해유적지 몇 군데와 출토품을 전시한 박물관을 찾았다. 유적지 현장을 찾기에 앞서 우선 예비 지식을 얻기 위해 극동대학 박물관과 러시아 아카데미 극동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 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에는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증언하는 생생한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한 유물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현장 답사로 택한 첫 곳은 팔치산스크에 있는 니콜라예브카 성터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지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잔뜩 찌푸린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린다. 오전 8시에 출발해 한참 달리니 왼편으로 울창한 수림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숲속에는 여러 가지 독충이 서식한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 가장 독한 것은 ‘클레시’란 진드기다. 노란색, 흰색 같은 보호색으로 칠한 이 독충은 크기가 이()만큼 밖에 안되지만 돌로 쳐야 깨질 정도로 단단하며, 일단 살에 붙으면 힘으로는 뗄 수가 없어 전문병원에 가야 한다. 독성이 강해 정신이상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 독충은 1920년대 일본군이 이곳을 강점했을 때 살포한 것이라고 한다. 악명높은 일제의 살인 만행은 여기서도 저질러졌다. 

 

발해의 토기 항아리와 숫막새기와(극동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 박물관 소장).


9시가 조금 넘어 니콜라예브카로 가는 길목에 있는 스체클라누하 성터에 도착했다. 표고 200m쯤 되는 둥근 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성터는 조그마하지만 아담하다. 높이 3m, 너비 2m가량의 흙벽으로 둘러싸인 유지는 둘레가 약 500m로 보인다. 성벽은 잡초로 묻혀 있고, 바닥은 감자밭이다. 여기서 차로 한 시간 달려 드디어 목적지 니콜라예브카 성터에 도착했다. 성은 남· 북·동쪽 세 방향이 나지막한 산으로 에워싸인 평지성이다. 개활 지대에 자리한 서문으로 들어가니 무릎까지 자란 잡초가 아침 내내 내린 비로 물방울을 머금은 채 일렁이고 있다. 흠뻑 젖은 바짓가랑이를 끌며 성벽을 타고 옛 성터의 전모를 두루 살펴봤다. 남아 있는 토성의 높이는 5m, 너비는 2~3m나 되며 둘레는 3㎞가 족히 된다. 약 300m 간격으로 고구려성이나 발해성만이 가지고 있는 치가 튀어나오고 바깥에는 지금도 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해자(垓字)가 파져 있다. 해자 너머에는 수백 호의 농가가 널려 있다. 성터는 네모꼴 형태인데 동북 편에 기찻길이 나 있어 성터가 두 조각으로 나눠진 것처럼 보인다. 몇 군데에 밭뙈기가 띄엄띄엄 널려있을 뿐, 양떼와 소떼가 거니는 황무지다. 여기서는 움집터와 각종 점토 유물, 동물과 물고기뼈, 조개껍데기, 쇠붙이 등 철기시대 유물과 함께 질그릇과 절구통 등 발해시대 유물도 출토되었다. 이것은 이 두 시대 문화층의 공존을 입증한다. 성터는 77년에 처음 발견되었으며, 8~10세기에 축성한 것으로 예측한다. 이 성의 기능에 관해서는 유물로 미루어 이 지역의 행정중심지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노보고르데예브카 발해성 남성 전경.


성터 북쪽에는 일리스타야 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을 따라 차로 20여분 거리에 니콜라예브카 성과 쌍벽을 이루는 고르바트카 발해 성터가 있다. 불규칙한 5각형 모양새의 이 성터의 성벽 길이는 1200여m에 달하는데, 지금도 성 안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9~10세기에 축성된 이 성터에서도 토기를 비롯한 발해 유물이 적잖게 나왔다. 원래 이 마을에는 한말에 이주해 온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아마 1937년 중앙아시아로 실려 가던 날이었을 것이다. 땅바닥을 살짝 파기만 해도 고려인들의 유물이 나온다고 한다. 이를 테면 발해인을 이은 고려인 문화층인 셈이다. 이렇게 우리네 조상들은 이 땅에서 켜켜이 문화층을 이루면서 대를 이어 살아왔던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동문 밖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24개의 돌 유물이다. 대체로 세 줄로 놓여 있는 이 돌 유물은 발해 고유의 것이어서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것은 모두 13곳인데, 그 가운데 10곳은 옛 발해 땅이던 오늘의 옌볜 지방과 나머지 3개는 북한의 함경북도에 있다. 이곳 연해주 땅에서 발견된 이러한 돌 유물은 발해의 정체성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 유물의 용도에 관해서는 묘당이나 관아, 노제를 지낸 임시제단, 왕실의 기념 건물, 관변창고, 높은 기단의 창고, 종교 숭배물, 역참(驛站), 주택 등 일반 건물에 쓰인 자재라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 아직 정설은 없다. 아무튼 고르바트카 성터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발해의 정체성을 증언하고 있어 주목된다. 일리스타야 강줄기를 따라 한카 호를 거쳐 우수리 강에 이르기까지의 옌볜에는 여러 기의 발해 성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 성터는 우수리 강에서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발해의 국제 5도(道)의 하나인 ‘일본도(日本道)’를 지켜준 보루였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체류의 마지막 날에는 이곳에서 북방 280㎞나 떨어져 있는 노브고르데예프카 성터를 찾았다. 목적은 발해의 북방 한계를 현장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발해의 초원로에 관한 유물적 단서를 포착하기 위함이다. 그 단서가 바로 이 고성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소그드 은화이다. 떠나기에 앞서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극동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의 니키틴 박사의 소개를 받아 극동대학 박물관장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박사를 방문했다. 원래 이 연구소에 근무하던 샤프쿠노프 박사가 보관하고 있던 이 은화를 그가 서거하면서 극동대학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40대초의 관장은 그런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실물을 확인하자면 며칠이 걸리기 때문에 당장은 보여줄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한다. 실망이 컸지만 다음 기회를 약속하고 박물관을 떠나 곧바로 은화의 발견 현장인 노브고르데예프카로 향했다.

시내를 벗어나자 무연한 초원과 밀밭이 눈 모자라게 펼쳐진다. 잘 포장된 2차 도로를 차는 쏜살같이 달린다. 놀라운 것은 가지각색의 깔끔한 디자인을 한 길 표시물이다. ‘도로표시물전시회’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성싶어 수십 가지의 표시물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았다. 3시간반쯤 달려 성터 어귀에 도착해서 잠깐 쉬는 참에 유모차를 끌고 가는 한 아주머니에게 성터에 관해 물었다. 그는 손으로 앞산을 가리키며 이런 전설을 신나게 전한다. 먼 옛날 발해인들이 저 산 밑 어딘가에 금덩어리를 파묻어 놓았다고 해서 지금껏 사람들이 찾아봤으나 찾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어귀에서 한참 달려 평지에 묘처럼 우뚝 솟은 산 하나를 끼고 왼쪽으로 도니, 드디어 아르센예브카 강을 사이에 둔 두 성터, 즉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이 나타난다. 깊고 물살이 센 강은 두 성의 자연 해자 역할을 했다. 남성은 뾰족 산이고 북성은 내성과 외성을 갖춘 꽤 큰 규모의 성터다. 내성에 올라가 보니 허물어진 성벽 잔해가 이곳저곳에 널려 있다. 요로에 자리한 이 성터는 60년대부터 20여년간 발굴작업을 진행했는데, 온돌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발해 유물이 나왔다. 우리가 주목한 소그드 은화는 이 성터 바깥의 한 취락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샤프쿠노프 박사의 생전 증언에 의하면 이 은화는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드(소그드)에서 8세기쯤에 주조된 것으로서 교역 수단으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 초피(貂皮·담비의 가죽)가 당시 발해의 특산물로서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은화를 주고 구입해 갔을 것이다. 이러한 추단과 더불어 중간지점 격인 치타에서 등자( 子) 같은 고구려 유물과 동·서 문물이 동시에 발견된 점 등을 감안해 샤프쿠노프 박사는 사마르칸드~치타~발해 상경~연해주로 이어지는 이른바 제2 동아시아교역로, 즉 ‘초피로(貂皮路·담비의 길)’의 가설을 제시했다. 니키틴 박사도 발해 멸망 후 800호 4000명의 발해인이 몽골제국의 초기 수도 카라코룸 지역으로 이주한 사실을 예로 들면서 발해와 몽골 간의 교류와 그 통로인 초원로를 지적했다. 그렇다면 그 길은 발해 상경에서 서쪽으로 부여를 지나 대흥안령을 넘어 동몽골 초원로로 이어지는 발해 국제 5도의 하나인 거란도(契丹道)였을 것이다. 그 길은 바로 샤프쿠노프 박사가 명명한 ‘초피로’다. 이 길을 따라 발해는 초원로 상의 서역 제국과 활발한 교역을 진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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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무르 강이 굽이쳐 흐르는 하바로프스크

ㆍ‘시베리아의 심장부’ 감싸안은 애환과 분쟁의 강

아무르 강 전경.

흔히들 ‘아무르 강을 보기 위해 하바(하바로프스크의 약칭)로 간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만큼 아무르 강은 유명하니까. 필자는 일찍이 중국 땅에서 구소련을 넘나들면서 두 번이나 이 강을 건너 본 적이 있다. 그때는 그 나름의 감성(感性)에서 ‘검은 용’처럼 흘러가는 강물 위에 무덤덤하게 몸을 띄웠지만, 수십 년이 지난 뒤 찾아가는 아무르는 오성(悟性)에서 발산되는 다른 모습으로 눈앞에 다가 온다. 숱한 겨레의 애환을 싣고 하바에서 굽이쳐 흘러간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르를 보기 위해 하바에 왔다고 해도 좋고, 하바를 보기 위해 아무르를 찾는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수리스크에서 7분 연착된 밤 11시20분 열차를 타고 하바로 향했다. 듣던 바와는 달리 열차는 현대적으로 아주 편리하게 꾸며졌으며, 승무원들도 굉장히 친절하다. 야행이라서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간혹 희미한 불빛 속에 자작나무며 잣나무 숲이 어른거릴 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까지 구간은 시베리아 횡단철도 노선 중 가장 먼저 운영에 들어간 구간이다. 옛소련 시절에는 국방상 이유로 하바 이동의 선로는 모두 폐쇄되어 하바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역 구실을 한 적이 있다. 다음날(2009년 7월4일) 아침 8시 정각에 하바에 도착했다. 출구를 나서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예로페이 하바로프의 우람한 동상이다. 그는 1650년쯤 이곳을 포함한 시베리아를 개척한 사람으로서 하바로프스크란 이름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두 개의 빨간 색 바늘을 달고 있는 대형 시계탑도 광장의 명물이다. 바늘 하나는 러시아 전역에서 표준시간으로 삼고 있는 모스크바 시간을, 다른 하나는 현지 시간을 가리킨다.

이 하바로프스크가 오늘은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우며 어딘가 모르게 정적이 감도는 듯하지만, 사실은 살벌한 군사거점으로 출범했다. 1858년 당시 동시베리아 총독이던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백작이 불과 25㎞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청나라로부터 아무르 강에 대한 영유권을 빼앗기 위한 전초기지로 세운 도시가 바로 이 하바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과의 국경분쟁이 쉼 없이 일어남으로써 줄곧 군사도시로 발전해 왔다. 지금도 극동 군관구 사령부가 이 도시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의 하바로프스크 주는 러시아의 89개 행정단위 가운데서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면적은 78만9000㎢로서 남한의 9배다. 이 넓은 땅에 사는 사람은 고작 160만명에 불과하며 그중 주도인 하바에만 60만명이 몰려 있다. 하바 주는 수많은 호수와 무성한 숲, 귀한 에너지 자원과 광물, 진기한 동식물을 품고 있는 천혜의 자연보고이며 극동 시베리아의 심장부다. 연해주나 사할린 지방도 원래는 하바로프스크 주의 관할 아래 있었으나 1938년과 1947년에 각각 분리되었다.

기차역에서 곧바로 인투리스트 호텔에 들어가 여장을 풀고는 답사에 나섰다. 먼저 찾은 곳은 호텔 근처에 있는 민족박물관이다. 3층으로 된 붉은 벽돌 건물이다. 박물관 1~2층에는 각종 동식물 박제품과 우리나라 한복을 비롯한 여러 가지 민족 유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득의양양한 무라비요프와 의기소침한 만청 대표가 아이훈(愛琿)조약(1858)에 서명하는 모습을 그린 유화는 퍽 인상적이다. 또한 눈길을 끈 것은 3층에 전시된 한 전투 장면이다. 1920년대 초 대치 상태에 있던 적군(赤軍)과 백군(白軍)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 장면을 아주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련의 전투에서 패한 백군은 만주 지방으로 도피한다. 후일 그네들 중 일부가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유입한다.

하바로프스크 기차역 광장에 세워진 개척자 하바로프의 동상.
일찌감치 점심을 마치고 시 중심에 자리한 레닌광장에 들렀다. 햇볕이 쨍쨍 쬐는 정오 무렵인데도 사람들로 붐빈다. 광장은 주 청사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은행과 공무원대학, 의과대학, 병원 등 공공건물들로 빙 둘러싸여 있다. 한 바퀴 돌아본 후 여기서 200m쯤 떨어진 푸슈킨 거리의 한 붉은 벽돌집을 찾았다. 우거진 가로수 속에 파묻혀 있는 이 호젓한 단층집은 1920년대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쓰던 신문발간소이다. 지금은 결혼상담소로 변해 옛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어 김유천(김유경의 오기) 거리로 발길을 옮겼다. 거리에 이름이 붙여질 만큼 이곳 하바가 기리고 있는 고려인 2세 김유경은 1900년 연해주 수이푼 구역 차피고우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적군에 가담한 그녀는 적군 76연대에서 소대급 지휘관으로 성장한다. 그러다가 1929년 백군과의 전투에서 장열하게 전몰한다. 이듬해에 그녀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이 거리가 그녀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녹음이 짙게 드리운 거리는 아득히 곧게 뻗어 있다.

여기서 안내 받은 곳은 ‘영웅광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산화한 3만7000명의 이름이 돌판에 빼곡히 새겨져 있다. 그 숱한 이름 속에서 ‘김’ ‘리’ ‘박’ 같은 고려인들의 성을 찾아냈다. 해외 동포들이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 그 땅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지켜야 할 의리일진대, 우리는 그네들이 그렇게 해서 그 땅에 뿌리 내리는 것을 대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동포들의 삶을 놓고 이 한 가지 소박한 도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말만큼 쉽지는 않아 보인다. 오늘도 하바에는 2000여명의 고려인들이 뿌리 내려 살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국의 번영에서 힘을 얻고 있다. 고국은 그들의 믿음직한 지킴이다. 그래서 고국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우리 일행을 안내한 고려인 3세 정 선생의 간절한 말이다. 광장 뒤편 언덕 위에는 시 방송국과 높다란 영웅탑이 세워져 있다. 거기서 100m쯤 떨어진 곳에는 3년 전에 문을 연 정교회 교회와 지난해 지은 신학교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바야흐로 정교회가 부흥하고 있는 조짐인 듯하다.

아무르 강은 하바의 명물이며, 강 위에 가로놓인 다리는 명물 중의 명물이다. 두 명물을 한꺼번에 감상하기 위해 다리로 향했다. 2006년에 완공한 다리의 동서 길이는 자그마치 5㎞나 된다. 밑으로는 기차가, 위로는 자동차가 지나가는 2중 구조의 다리다. 서쪽 교두보 언저리에 차를 세워놓고 강과 다리를 유심히 살펴봤다. 물속에 부식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물빛은 검푸르죽죽하다. 이런 색 물줄기가 마치 용처럼 구불구불 흘러간다고 하여 중국 사람들은 이 강을 ‘흑룡강’(黑龍江)이라고 부른다. ‘흑룡강’이란 이름은 13세기에 씌어진 <요사(遼史)>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이전의 문헌에는 ‘흑수’(黑水)니 ‘약수’(弱水)니 ‘오환하’(烏桓河)니 하는 이름으로 나온다. 이 강은 몽골 북부의 성산 헨티산에서 발원해 러시아와 중국 간의 국경선을 이루면서 하바의 바로 남쪽에서 우수리강과 합류한다. 그 후 이 도시를 오른쪽으로 끼고 북동 방향으로 흐름을 틀어서는 사할린 섬 앞을 거쳐 오호츠크 해에 유입한다. 장장 5498㎞를 흐르는 이 강은 세계 10대 강의 하나로서 유역 면적이 넓고 풍부한 수자원을 갈무리하고 있다. 어종만 해도 상·하류 합쳐 160여종에 달한다. 하바에 이르러서는 그 너비가 2㎞를 넘으며 깊이는 평균 7m이다.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어 썰매를 타고 내왕하는 데 두세 시간이나 걸린다고 한다.
 
아무르 강 다리 전경.

그러나 이 강은 결코 평화롭게 유유히 흐르는 강만은 아니다. 숱한 애환과 분쟁을 싣고 소용돌이치는 강이기도 하다. 강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중국 간에는 시비가 그칠 날이 없다. 최근까지도 강 가운데 있는 두 개 섬을 놓고 일어난 분쟁이 무장충돌 직전까지 치달았다. 원래 러시아 영인 이 두 섬이 퇴적 현상으로 인해 중국 땅에 붙어버렸기 때문에 영유권 시비가 인 것이다. 2004년 양국 간의 국경협정에 의해 일시 분쟁이 봉합되기는 했으나, 언제 또 다시 터질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무르 강 다리 답사에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이 다리로부터 서쪽으로 기차를 타고 세 시간이나 걸리는 유대인 도시 비로비잔까지의 광활한 땅이 아직껏 유대인들의 소유지라고 한다. 그들은 이 소유지에서 여전히 공동체를 이루고 상부상조의 협동기업을 운영하면서 부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그 모진 수난 속에서도 꺾임 없는 유대인들의 끈질긴 생명력, 그 증언의 현장이다.

하바에서의 이틀째 날엔 아무르 강이 굽이쳐 흐르는 이 길목에서 겨레의 얼과 혼을 불사른 다른 두 한인 선열의 발자취를 더듬어 봤다. 선참으로 찾아간 곳은 마르크스 거리 22번지에 있는 김 알렉산드라 스탄게비치(1885~1918)의 유적이다. 유적 표시로 건물 외벽에는 그녀의 생애를 함축한 내용이 새겨진 동판이 걸려 있다. 그녀는 연해주 우수리스크 근처에서 함경북도 출신의 이주민 딸로 태어났다. 20대에는 교사를 하다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우랄 지역으로 거처를 옮겨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1918년에 이동휘 등과 함께 하바에서 한인 사회당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이듬해 9월 러시아를 침입한 일본군의 후원을 받는 백군과의 일전에서 체포되어 아무르 강변에서 총살당한다. 한반도의 13개 도를 상징하는 13개 발자국을 뗀 뒤 총탄을 맞고 쓰러진다. 향년 33세의 꽃다운 나이다. 상하이에서 간행된 ‘독립신문’ 1920년 4월17일자는 “혁명사상으로는 대한 여자의 향도관(嚮導官) … 자유정신으로는 대한 여자의 고문관(顧問官), 해방투쟁으로는 대한 여자의 사표자(師表者)”라고 그녀의 한 생을 높이 평가한다. 그녀의 시신은 강물에 내던져졌다. 그 후 비통에 잠긴 시민들은 오랫동안 강에서 낚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많은 아무르 강을 굽어보며 영롱한 이슬로 사라진 그 현장에서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머리 숙여 열사의 영원한 안식을 빌어 삼가 묵념을 올렸다.

그 길로 콤소몰 거리 89번지에 있는 열렬한 민족문학 작가 조명희(1894~1938)의 고택을 찾았다. 일제의 농민 수탈에 저항하는 한 지식인 운동가의 처절한 삶을 그린 그의 수작 <낙동강>(1927)은 학창 시절 필자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다. 고택은 낡은 2층 목조건물이다.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한국문학 최초의 창작 희곡집 <김영일의 사(死)>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결국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8년 연해주로 망명해 바로 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중학교 교편을 잡고 동포신문 ‘선봉’, 잡지 ‘노력자의 조국’ 편집을 담당하는 등 망명 작가로서의 눈부신 활동을 펼친다. 그러다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다. 이듬해 4월 일본 첩자를 도왔다는 무고한 죄명을 쓰고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처형된다. 딸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당당하게 선언하며 한 사날 있으면 돌아온다던 그 말이 선생의 마지막 유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필귀정이라, 그의 명예는 회복된다. 여기 하바의 시립 공동묘지의 ‘기억 사원’ 안에는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필자는 3년 전 타슈켄트의 나보이 문학박물관 4층에 마련된 ‘조명희 기념실’을 찾은 바 있다. 기념실 중앙에 모셔진 선생의 흉상 위에는 소설 <낙동강>에 나오는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멀지 않아서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라는 문구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핍박 속에서 정든 고향산천을 등지고 이역만리에서 서러운 타향살이를 하는 겨레붙이들이 지니고 있는 수구초심(首丘初心,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낙엽귀근(落葉歸根)의 끈끈한 근성이요 고고한 정체성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과연 본능적인 이 근성과 이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동포애를 베풀고 있는지 한번 되새겨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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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낯설지 않은 부랴트를 찾아서
ㆍ씨름·강강술래 즐기고, 체구·생김새까지…한국인과 너무 닮았네

지금의 시베리아 초원로는 ‘신 실크로드’ 개념에서 보면 ‘철의 실크로드’이다. 이를테면 기계동력에 의해 움직이는 기차를 타고 편히 다니는 초원길이다. 길은 그 길이되, 그 옛날 말 잔등에 업혀 다니던 험난한 길은 아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기차에서 몇 밤 몇 날을 지내는 것쯤은 거뜬히 넘겨야 할 것이다. 7월5일 오전 10시45분에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횡단열차(5호차 10번 좌석)를 타고 7일 오후 6시5분 목적지 이르쿠츠크에 도착했으니 꼬박 2박3일, 55시간이 걸린 셈이다. 주파한 거리는 무려 3336㎞나 된다. 4인 1실의 열차 칸은 여행에 불편함이 없이 잘 꾸려져 있다. 소형 TV가 침대마다 한 대씩 있고, 조명과 선반 같은 시설도 이용에 편리하게 설계돼 있으며 침구도 깔끔하다. 현대화로 걸음을 옮기는 러시아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사실 기차 여행은 나름대로의 멋이 있다. 긴 시간을 빨리 달리면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쳐지나가는 사상(事象)에 관한 사색의 여유를 가질 수 있으니 그러하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변의 농촌 풍경

열차는 타이가(침엽수림대)의 우거진 숲과 스텝의 푸르싱싱한 풀밭 속을 이리저리 숨바꼭질 하듯 꼬리를 휘저으며 미끄러져간다. 한여름의 시베리아는 온통 푸른 바다이다. 자작나무와 잣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가 하면, 짙푸른 평원과 늪지대가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진다. 곁가지 하나 없이 하늘을 향해 올곧게 자란 자작나무와 잣나무의 행렬은 참말로 장관이다. 동틀 무렵 호숫가나 강가의 나무 숲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뽀얀 물안개, 백야의 어둠을 사뿐히 몰고 오는 낙조, 여기 시베리아만이 간직한 환상이고 운치다. 졸지에 창가를 적시는 빗방울은 나그네의 추념(追念)을 다독거린다. 어쩌면 세계의 마지막 청정 호수가 될 저 바이칼을 옆에 끼고 몇 시간 달린다는 것은 드문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몇 시간씩 달리고는 역에서 길게는 30분까지 정차한다. 정차하면 영락없이 아낙네들이 바구니에 삶은 감자와 계란, 찐빵, 건어물 같은 갖가지 먹을거리와 들꽃 다발을 들고 다가와 앞다퉈 호객한다. 옛날과 달라진 풍경이다. 그전엔 이동수레 같은 데 차려놓고 앉아서 팔았었는데, 지금은 발품을 팔아 뛰어다니며 벌이를 한다. 이러저러한 이상야릇한 풍경 속에 별로 지루함을 모른 채 시간은 흘러간다. 그러나 이 길에서 꼭 들러봐야 할 곳 두 군데가 있는데, 일정상 들르지는 못하고 스쳐지나갈 수밖에 없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그 첫번째가 이르쿠츠크에서 동쪽으로 약 600㎞ 떨어진 치타다. 치타는 우리와 인연이 있는 고장이다. 일찍이 이곳에서 고구려 말등자와 함께 극동과 서역 간의 교류를 실증하는 악기 등 몇 가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치타가 교류 통로인 초원 실크로드상에서 길목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고구려 기병이 이곳까지 왔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등자를 비롯한 고구려의 마구가 전래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진대, 이것은 두 지역 간에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이번 시베리아 초원로 답사에서 연해주에 자리했던 발해가 이른바 ‘초피(貂皮)의 길’을 통해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와 교류를 진행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그 길이 바로 이곳을 지나갔을 것으로 추단되니 어찌 치타역에서 발걸음이 떨어지겠는가.

울란우데 기차역 외관.
새벽 2시39분까지 잠을 쫓아가면서 치타역을 기다린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곳은 1910년대 재러시아 한인들이 벌인 독립운동의 한 중심지였다. 당시 치타는 자바이칼 주의 수부로서 주로 감자 농사를 짓는 한인 120~130명이 살고 있었다. 물을 따라 물고기가 생기는 것처럼 한인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것이 당시의 시대상황이고 보면 이해가 간다. 미국 국민회로부터 파견된 이강(李剛)이 주도한 이곳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화(1911~15년)가 블라디보스토크의 권업회와 쌍벽을 이루며 재러 한인들의 반일독립운동을 이끌어갔다. 어딘가에 그러한 흔적이 남아 있으련만 찾지 못하고 지나가는 마음이 무쇠덩어리처럼 무겁다. 23분의 정차 시간은 마음의 상처만 남겨놓았다.

다음으로 꼭 들려봐야 할 곳은 부랴트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다. 부랴트, 우리에겐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미국 에모리대학 연구소의 세계 종족별 DNA 분석 자료에 의하면 바이칼 주변의 부랴트인과 야쿠트인,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한국인의 DNA가 진배없다고 한다. 평평한 얼굴, 튀어나온 광대뼈, 얇은 입술, 낮은 코, 두꺼운 눈꺼풀, 가는 실눈, 작달막한 체구, 두꺼운 피하지방층 등 생김새도 한국인과 이들, 특히 부랴트인은 엇비슷해서 가려내기가 힘들 지경이다. 이러한 체질인류학적 유사성 말고도 생태적 및 문화적 유사성도 쉬이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서로가 낯설지 않고 만나면 친근감마저 든다. 이제 그 현장을 찾아가 보기로 하자.

사실 울란우데는 2년 전 울란바토르를 거쳐 서시베리아 답사를 할 때 들렀다. 그 전에도 두세 번 지나간 적이 있다. 원래 부랴트인들은 바이칼 호수 분지와 앙가라 강 유역, 동사얀산맥에서 유목생활을 해 온 고아시아인의 몽골계에 속한 한 인종이다. 신화에 따르면 ‘부르데 치노’, 즉 ‘푸른 늑대’라는 이름의 남자가 그들의 조상인데, 그는 ‘고아마랄’, 즉 ‘고운 붉은 사슴’과 결혼해 후손들을 거느리게 되었다고 한다. ‘부랴트’란 말은 ‘늑대’란 ‘부르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들의 거주 지역에서는 30만년 전 인류의 생활 흔적과 신석기 및 청동기 유물도 다수 출토되어 그들 역사의 유구함을 증명해주고 있다.

우스찌 오르딘스크 시의 표식물인 기마동상.
부랴트는 칭기즈칸 시대에 몽골 제국에 편입된 이래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 때까지 줄곧 몽골과 운명을 같이해 왔다. 그러다가 1727년 러시아와 만청 사이에 맺은 카흐타 조약에 의해 러시아령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직후 이곳은 혁명적 적군(赤軍)과 반혁명적 백군(白軍) 간의 격전장이었다. 적군의 승리로 끝나자 소비에트 정부는 이곳을 완충지로 만들기 위해 울란우데를 수도로 하는 극동공화국을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반적 시베리아 정세가 안정되자 소비에트 정부는 이 공화국을 소비에트 러시아로 흡수(1922년)해 부랴트몽골자치사회주의공화국으로 개명했다. 그 이후 부랴트와 다른 지역 몽골인들과의 통합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1958년에 모든 공식 명칭에서 ‘몽골’자를 삭제해버렸다. 그러다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인 80년대 후반부터 이곳에도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불어왔다. 라마교가 부활되고 학교에서 부랴트 몽골어 교육이 정식 채택되었다. 90년에 자체 법령이 소련 법령에 우선하며 부존자원에 대한 독자적 통제권을 주장하는 ‘주권 선언’을 발표했으나, 이듬해에 그냥 러시아 연방 내의 자치공화국으로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선상에서 94년엔 새로운 ‘부랴트 헌법’이 채택되고 자유선거로 대통령을 뽑았으며, 부랴트인이 수도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를 이른바 부랴트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대다수 주민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공화국 인구는 100여만명이며, 그중 부랴트인은 40만명쯤 되는데 30만명이 울란우데에 몰려 있다.

서쪽으로 바이칼 호수를 끼고 있는 수도 울란우데는 ‘붉다’라는 뜻의 ‘울란’과 ‘우다’라는 강 이름이 합친 합성어이다. 이곳은 북쪽으로 타이가 산림지대가 에워싸고 남쪽으로도 낮은 산들이 둘러싼 분지이다. 울란우데는 여느 러시아 중소 도시와 별반 차이 없는 수수한 도시로서 큰 건물은 얼마 없으나 공장 굴뚝은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몽골을 거쳐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만나는 접지로서 역사는 꽤 크고 붐빈다. 인상적인 것은 라마교의 부활이다. 티베트 라마교가 몽골을 거쳐 이곳에 들어온 것은 18세기 초다. 유입 후 세력을 키워 한때 제정 러시아의 공인을 얻었으나, 말살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세워질 무렵까지만 해도 부랴트와 치타, 이르쿠츠크 일원에 46개의 수도원과 150여개의 사원이 있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탄압을 받아 승려 수천명이 수용소로 보내지고 수도원 2개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부랴트에만도 사원 20여개가 다시 문을 열었다. 조금은 과장된 수치지만 신도가 20만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오늘날 부흥을 선도하는 총본산은 울란우데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자리한 이로브긴스크 마을에 있는 다찬 사원이다. 승려 30여명과 학승 100여명이 있다고 한다. 대웅전에는 망명 중인 달라이 라마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부랴트의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들에는 예외 없이 불상이 모셔져 있다. 격변기를 맞아 흔들리는 마음을 종교적 신앙으로 다잡으려는 부랴트인들의 속내를 읽을 만도 하다.

우리의 ‘강강술래’를 닮은 부랴트인들의 집단놀이

(부랴트 민속박물관 소장).

현대문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부랴트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삶을 개척해 나가기 위한 방편에는 이런 종교뿐만 아니라, 고유의 샤머니즘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한국 무속의 원류가 바로 이 북방 민족들 고유의 샤머니즘에 닿아 있으니, 그 현장을 찾아가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다음날, 시내에 있는 작지만 알찬 향토박물관을 둘러본 다음 300㎞나 떨어진 알혼 섬으로 향했다. 한 시간쯤(80㎞) 달리니 갖가지 들꽃이 만발한 드넓은 초원이 나타난다. 안내 표식으로 길 오른쪽에 우뚝 서 있는 기마동상에서 우회전해 자그마한 도시 우스찌 오르딘스크에 이르렀다. 시 한가운데 부랴트 민속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 관장은 일행을 친절하게 맞아준다. 이 두 박물관과 이어지는 답사 길, 그리고 알혼 섬에 있는 후즈르 박물관에서 우리는 부랴트의 어제와 오늘을 생생하게 알아낼 수가 있었다. 특히 관심거리인 샤머니즘에 관해서 말이다.

박물관에는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한 각종 토기와 마구, 불상, 다양한 생활과 놀이 도구, 순록 뿔 왕관 등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이 두 박물관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다채로운 샤먼 의식과 도구, 장옷과 마고자, 세형동검과 비파형 동검, 씨름과 강강술래 같은 우리의 것과 너무나 흡사한 문화유물들이다. 연락이 제대로 닿지 않아 보지는 못했지만, 민속박물관에는 민속공연장이 따로 마련되어 주로 샤먼의 연출과 더불어 민속 노래와 춤도 선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공연장 입구에서는 불을 피워 관람객을 정화시키고 샤먼이 주술을 읊어 액운을 막아준 다음 입장시킨다. 불과 샤먼에 대한 믿음과 기대의 표현이다. 민속박물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미젤리자(‘눈보라’라는 뜻) 식당에서 이곳 토속음식인 닭고기 볶음밥과 훈제한 돼지고기를 흑맥주에 곁들어 정말 맛있게 먹었다.

이곳을 떠나 알혼 섬에 이르는 길가 곳곳과 알혼 섬 안에서도 알록달록한 색 천으로 단장한 세르게(몽골의 오보)와 구르칸(적석묘)을 발견했다. 다른 점은 세르게의 경우 대개 1~2m 길이로 잘라 채색 천을 휘감은 통나무를 수직으로 몇 대씩 나란히 세워놓는 형식이다. 아마 그 기능은 몽골에서처럼 샤머니즘적 기능과 함께 도로나 경계의 표식인 듯하다. 샤머니즘은 부랴트인들을 포함해 시베리아인들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인간과 주변의 자연환경이나 현상에 대한 관계를 중시하는 친환경주의 사상이다. 그들은 처해진 주변의 환경이나 현상에 대해 예를 표하고 대화를 시도하면서 인간이 자연을 버리고 인간만을 생각하는 이기(利己)에 대해 경고한다. 이러한 친환경주의 사상의 결정체가 바로 샤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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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ㆍ이광수 ‘유정’ 무대… 아름답구나, 여인들 순애보

이르쿠츠크역사

이르쿠츠크를 상징하는 휘장은 검은 호랑이가 붉은 담비를 물어 구제하는 도상이다. 검은 호랑이는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서식한 길상 동물이며, 담비는 부근 숲 속에 사는 야생동물이다. 초피(貂皮), 즉 담비 가죽은 예나 지금이나 고급 모피로 애용됨으로써 담비 역시 진중되는 동물이다. ‘산신령’이나 ‘산군’(山君)으로 여겨지는 호랑이의 영험과 위력을 빌려 설한풍 거칠지만 보물로 가득한 이 땅을 번성케 하려는 뜻이 담긴 상징물이라고 해석해 본다. 그래서 그런지 올 때마다 신기(神氣)를 느낄 정도로 훈훈하고 정감이 들며,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하는 그 이색적인 풍광에 매료되기도 한다.

지난 50여년 동안 다섯 번이나 들렀으니,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10년에 한 번 꼴로 찾아 온 셈이다. 얼마나 변했으며, 또 변해가고 있는가가 늘 궁금하다. 그러면서도 한 구석엔 변하지 말고 그대로였으면 하는 ‘수구’(守舊)의 취향도 가끔 내뱉어 본다. 이번엔 지난해(2008년) 2월에 있은 초원로 답사에 이어 꼭 1년 반 만에 다시 찾아왔다. 사흘 전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시베리아 횡단철도 열차는 예정 시간보다 40분 늦은 오후 6시5분에 도착했다. 시간은 여기가 서울과는 같고, 블라디보스토크와는 3시간, 모스크바와는 5시간 시차가 있으니 드넓은 러시아 땅의 동쪽 편에 약간 치우쳐 자리한 곳이다.
 

기차 역사 정문에서 현지 여행사 직원과 함께 통역 안내를 맡을 이르쿠츠크대학 유학생 서군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철도대학 유학생 임군이 같은 역을 맡았다. 학구열에 불타 낯선 이역 땅에 와서 열심히 공부하고 세계를 익혀가면서 여행객들에게 안내의 도움까지 주는 젊은이들이 정말로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숙소는 시내가 아니라 30분 거리에 있는 라스트비앙트의 삼림 속 통나무집(올라체카)으로 잡았다. 이색적인 체험이다. ‘북경코야점’(오리구이 식당)에서 저녁을 때우고 8시가 다 되어서 거리에 나섰는데도 백야 탓으로 대낮처럼 환하다.

이르쿠츠크를 상징하는 휘장(검은 호랑이가 담비를 구제하는 도상).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 도시들 중에서 유일하게 350여년의 긴 역사를 가진 유구한 도시이다. 곳곳에 그러한 나이테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1615년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에 앞장섰던 카자크 기병들이 앙가라 강변에 만들어 놓은 자그마한 기지촌으로부터 발걸음을 뗀다. 점차 동부 시베리아 정복의 거점으로 확장되다가 1686년에 도시로 승격하고, 18세기 초엽에 이르러서는 시베리아의 정치·경제 중심지로 부상한다. 1761년에 이르쿠츠크 원정대가 베링 해협을 정복한 데 이어 알래스카에 앙가라 출신의 상인과 주민들이 정착하면서 극동과 알래스카 전체가 이르쿠츠크 주의 관할 하에 들어온다. 이때부터 이르쿠츠크는 명실상부한 시베리아의 맹주로 군림한다. 그러나 아직은 시베리아 고풍이 켜켜이 쌓인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로 남아 있다. 그러다가 제정 러시아의 압제가 극에 달한 19세기에 들어서는 유형지로 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배되어 온 데카브리스트들에 의해 ‘하느님은 높고 차르(황제)는 멀리 있으니’ 죄와 벌이 무섭지 않다고 으쓱거리는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던 살벌한 도시가 ‘시베리아의 파리’로 파격적인 변신을 한다. 20세기 초에는 반혁명 백군(白軍)의 본거지로서 불꽃 튀는 격전장이 되기도 했다. 너무나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은 비록 그 현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원래 건물은 모두가 목조 건물이었으나 1879년 큰 화재로 대부분 건물이 전소되거나 화상을 입었다. 참사 이후 목조건물을 대신해 석조건물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파리’였던 그 명성만은 이어가려는 이곳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그 ‘파리풍’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주택을 비롯한 전통 건물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크기나 외양이 같은 것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아기자기한 색깔과 문양은 기괴할 정도로 다종다양하다. 무언가 서로 달라야 신이 쉬이 식별하고 제대로 찾아온다는 속설은 이곳 사람들의 믿음이라고 한다. 도식을 피하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이곳만의 개성이다. 현대적 건물도 전통을 따라 탈러시아적인 서구식으로 짓고 꾸미고 있다. 샤머니즘과 러시아 정교회가 추구하는 전통 양식과 유럽의 바로크 형식이 혼합된 이른바 ‘시베리아 바로크’ 형식의 독특한 건물이 눈에 많이 띈다. 최근에는 200년 이상 되는 건물은 문화재로 지정해 정부가 보호 관리하고 있으며, 오랜 건물은 함부로 허물거나 증축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인구 80만명을 품고 있는 이 도시는 세계적 관광명소 바이칼 호로 가는 필수 경유지라는 점에서 관광 전망은 밝다. 아울러 경제·문화적 잠재력도 상당하다. 교통의 요로에서 중국이나 몽골과의 교역이 활발하며, 1956년에 완공된 앙가라 수력발전소와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동부 시베리아의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교육·문화면에서도 동시베리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기세가 1㎾당 한화로 4원밖에 안 되니 아마 세상에서 가장 싼 전기료가 아니겠는가. 국립 이르쿠츠크대학을 비롯해 30여개의 대학과 직업학교가 있다. 대학 등록금은 1년에 한화로 250만원(6만 루블)이라고 하니 우리네보다 퍽 싼 셈이다.

 
콜차크 해국제독 동상
첫날밤을 보낸 올라체카는 숲 속 깊숙이 파묻혀있다. 2층으로 된 20여동의 통나무집들이 이곳저곳에 꼭꼭 숨어 있다. 층 마다 방이 대여섯 개씩 딸려 있다. 방바닥이며 벽은 몽땅 널빤지로 짰는데, 널빤지 사이사이의 틈은 자작나무 껍질로 메우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지은 지 몇 해 된 집인데도 구수한 나무 진 냄새가 은근히 코를 찌른다. 한여름이지만 창문을 열어젖히니 시원한 숲 바람이 솔솔 스며든다. 괴괴한 숲속의 밤은 나그네의 온갖 잡념을 털어버리고 곯아떨어지게 한다. 삼림욕을 만끽한 하룻밤이다. 이르쿠츠크 주 전체 면적 76만7900㎢ 가운데서 타이가 삼림 지대가 75%나 차지하며, 7월 이맘 때의 평균기온이 17~19도이니 정말로 쾌적한 자연환경이다.

올라체카에서 시내로 돌아와 관광에 나섰다. 처음 찾은 곳은 앙가라 강의 지류인 우샤코브카 강 건너편에 자리한 즈나멘스키 수도원이다. 수도원 정문 밖 광장에는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해군제독 알렉산드르 콜차크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1689년에 문을 연 이 수도원은 이곳과 울란우데, 치타 지역까지를 관장하는 동시베리아 정교회의 본부이다. 지금까지 줄곧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현행 수도원으로서 내부는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눈 익은 성화도 여러 점 눈에 띈다. 30여명의 신도들이 선 채로 엄숙히 예배를 근행한다. 수도원에는 300여년 전(1698년)에 만들어진 귀중한 성경이 보관되어 있으며, 유명 인사들이 묻힌 공동묘지도 함께 있다. 이 묘역에는 알래스카와 쿠릴 반도를 발견한 ‘러시아의 콜럼버스’ 쉘리호프와 데카브리스트의 뜨레베츠키야 부인과 가족들이 묻혀있다. 쉘리호프의 묘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지도와 컴퍼스, 닻, 원고 등이 청동으로 부조되어 있다.

이어 찾아간 곳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체취가 스며있는 레닌 거리 23번지 옛 극장이다. 이곳은 1920년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한 외국 혁명가들이 자주 모임을 갖던 자리이다. 벽면에는 그러한 역사의 현장임을 전하는 동판이 여러 장 붙어있다. 이에 앞서 1910년대에 이범석, 이범윤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유배되기도 했으나, 그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이르쿠츠크는 자유세계를 찾아 방황하던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무대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이곳에서 고려인으로선 유일한 러시아 연방의원 유리 텐(한국명 정홍식)이 배출되었으며, 100여명의 한국인 교민과 유학생들이 살고 있다.

이어 발길을 옮긴 곳은 데카브리스트의 박물관이다. 데카브리스트란 1825년 12월 러시아 최초로 근대적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들을 지칭하는데, 러시아어에서 12월을 ‘데카브리’라고 하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그래서 일명 ‘12월 당원’이나 ‘데카브리스트 사건’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사건이 여태껏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사건 자체의 의미와 더불어 그 부인들의 기막힌 순애보와 그들에 의해 시베리아 동토에 자유와 근대적 문명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1812년 모스크바까지 쳐들어온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파리까지 진격한 러시아 젊은 장교들은 유럽의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사상, 근대 문명에 감응되어 귀국해서는 농노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를 수립하기 위해 1816년 구제동맹을 결성한다. 이를 시발로 복지동맹과 북방결사, 남방결사, 통일슬라브결사 같은 혁명조직을 잇따라 뭇고 세를 키워간다. 그 바탕에서 1825년 12월14일 원로원 광장에서 거행되는 새 황제 니콜라이 1세에 대한 선서식을 계기로 거사를 도모하기로 한다.

데카브리스트 박물관(발콘스키 고택).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 5명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나머지 120여명의 장교들은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섣달, 송구영신(送舊迎新)의 꿈은 이렇게 꺾이고 만다. 그러나 다음 세기에 타오를 불씨를 이 암흑의 땅에 뿌려놓았다. 그것이 데카브리스트의 자부와 긍지였다. 그들 모두는 장교인 동시에 열렬한 혁명가, 정치가들이었으며, 그 가운데는 이름난 시인도 있다. 시인 라에프스키는 <명상>(1830년 작)에서 자유를 찾은 감격을 이렇게 자문자답식으로 읊조린다. “방랑자여, 그대는 왜 당신의 매력적인 골짜기를 야생의 숲, 바위 덩어리, 어두운 협곡으로 대체하였는가”, 이에 대한 답은 “이 산들 속에서, 이 화강암의 절벽 속에서, 나는 힘과 자유를 숨쉰다”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푸슈킨도 남부로 유배를 가는 바람에 데카브리스트의 대열에 직접 끼지는 못했지만, 그들 못지않은 열정으로 혁명을 동경하고 그들과 호흡을 같이 한다. “무거운 족쇄가 떨어져 나가고, 감옥은 허물어지리니 자유는, 기쁘게 문 앞에서 당신들을 맞이하고, 형제들은 그대들에게 검을 건네리라.” 그가 쓴 시 <시베리아의 깊은 광맥 속에서>(1827년 작)의 마지막 구절이다.

데카브리스트의 한 사람인 발콘스키 백작 주택을 개조한 박물관 1, 2층에는 그들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유물과 사진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 너나없이 감동을 받는 것은 그들 부인의 극진한 순애보이다. 데카리스트들에게 유배형이 내려진 뒤 황실은 부인들에게 반역자인 남편들을 버리고 귀족 신분으로 재가를 하든지, 아니면 귀족으로서의 모든 특전을 버리고 남편들을 따라 유배지로 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명을 내린다. 부인들은 주저없이 유형 길을 택한다. 고대광실에서 영화만을 누려오던 귀족 출신의 부인들은 설한풍 휘몰아치는 시베리아 대지를 1년 이상 걸어서 순정의 드라마를 펼친다. 유배형을 마친 데카리스트들과 부인들은 유배지 이르쿠츠크를 그들이 그토록 꿈꾸던 자유와 이상의 온상으로 변모시킨다. 그들에 의해 이 도시가 지녀오던 역사의 무게와 문화의 결은 확 달라진다. 그것이 오늘로 이어진 ‘시베리아 파리’의 모태이다. 벽에 걸려있는 발콘스키 부인 마리아의 초상화, 38세의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겉늙음에서 그 고난 찬 일생이 읽혀진다. 소박한 살림살이와 숱하게 오간 편지, 읽은 책, 하나하나가 혁명가들의 불꽃 튀는 삶과 참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비롯해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전시실을 발 디딜 틈 없이 꽉 채운 관람객들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기까지 하다. 필자는 ‘참 순애보의 현장을 찾아서’란 감격 어린 말 한 마디를 방명록에 남기고 박물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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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민족의 본향 바이칼

 
‘시베리아 진주’ 속에 ‘고스란히 잉태된‘한국인의 DNA
이르쿠츠크 도착 서너 시간을 앞두고 벌써 끝없이 펼쳐진 창창한 바이칼 호수가 시야에 들어온다. 햇빛에 반사된 수면은 거울처럼 번뜩거린다. 열차는 내내 호숫가를 오른쪽에 끼고 자작나무 숲속을 숨바꼭질하듯 꼬리를 휘저으며 달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실개천이 호수로 졸졸 흘러들어간다. 저 수많은 실개천이 모여 지구 전체를 2㎝ 두께로 덮고도 남음이 있을 세계 최대의 담수호 바이칼을 이루고 있다. ‘티끌 모아 태산’, 그 격언의 현장이다.
 
바이칼 전경

바이칼, 민족의 뿌리 찾기 일념에서 몇 번 찾아온 낯익은 고장이다. 최근에는 지난해 2월13일에 이어 1년 반 만에 다시 찾아왔다. 이번의 중점 답사지는 호수의 심장부에 자리한 알혼 섬이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다음날(2009년 7월8일), 시내 몇 군데를 대충 둘러보고 나서 정오 무렵 300㎞ 떨어진 알혼 섬으로 향했다. 200여㎞를 달리니 짙푸르던 초원은 반사막 고원지대로 바뀐다. 아롱다롱한 색 천을 동여맨 세르게(몽골의 오보, 우리네 서낭당)와 돌무덤인 구르칸이 자주 눈에 띈다. 행인들도 우윳빛 러시아인과는 다른 모습의 구릿빛 부리야트인들이다. 제대로 찾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오후 6시35분, 알혼 섬으로 도항하기 위해 말로에 모어라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배의 주유구가 고장이 나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한다. 보기엔 간단한 고장인 것 같은데, 예닐곱 수리공이 부산을 피우며 수리하는 데 무려 세 시간이나 걸린다. 일행을 포함해 외국 관광객들은 초조해 물가에서 서성대지만, 현지인들은 관성(慣性) 탓인지 표정 한 점 없이 느긋하기만 하다. 백야에 저녁노을은 느릿느릿 호수 면을 물들인다. 흰 갈매기들이 먹이를 찾아 까옥거리며 호숫가를 맴돈다. 다행히 세 시간이란 사색의 여유를 안겨주었다.

‘시베리아의 진주’ ‘시베리아의 파란 눈’이라고 일컬어지는 ‘바이칼’은 부리야트어로 ‘큰(바이) 물(칼)’이란 뜻이다. 따로 ‘큰(풍요로운) 불’이란 뜻으로 화산과 관련시키며, 부리야트나 부여란 말이 이 ‘바이’에서 파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정말로 ‘큰 물’답게 길이는 636㎞, 폭은 20~80㎞, 둘레는 무려 2000㎞나 되며 면적은 한반도의 3분의 1과 맞먹는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로서 제일 깊은 곳은 1630m나 되며, 세계 담수의 20%를 담고 있는 제일의 담수호로서 물의 양은 미국 5대호의 물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 신기한 것은 336개의 하천이 흘러들어와 호수를 이루지만 빠져나가는 강은 오로지 앙가라 강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수량이 조절되는지는 아직껏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바이칼에는 2500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데, 그 가운데 4분의 1가량은 이곳만의 특이종이다. 북극해에서 비밀수로를 통해 왔다는 민물 물개, 체질의 절반 이상이 지방이기 때문에 햇볕에 나오기만 하면 금방 버터처럼 녹아버린다는 골로미양카, 듣기만해도 이상야릇한 물고기들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어류를 꼽으라면 단연 훈제가 별미인 청어류의 오물이다. 매해 25만~30만t씩이나 잡는다고 한다. 바이칼은 40m 깊이에 있는 지름 40㎝의 쟁반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으리만큼 세계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호수이다. 알고 보니 보코플라프라라는 새우 모양의 작은 갑각류(甲殼類)의 싹쓸이 청소 때문이다. 이놈은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데, 2주일이면 사람의 뼈까지도 말끔히 없애버린다고 한다. 이러한 청정에다가 신비까지 곁들인 바이칼의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면 5년이, 발을 담그면 10년이 젊어진다고 해서 사람들은 다시 찾아오게 된다고 한다.

태고부터 숱한 신비를 간직해 온 바이칼은 단순한 자연의 큰 물구덩이 아니라, 천혜의 인종을 잉태한 태반이고, 다양한 문화를 융합시킨 허브이며, 숱한 민족의 수구지심(首丘之心)을 불러일으키는 본향이기도 하다. 태반과 허브, 본향, 이 3통(通)이 있기에 바이칼과 한민족은 여러 면에서 끈끈한 유대로 상관되어 왔다. 우선 지질학적 변천에서다. 빙하기 때 바이칼은 고립된 오아시스와 같은 열수(熱水) 광산이었다. 당시 구석기인들은 혹독한 추위 때문에 열수가 치솟는 온화한 바이칼 주변에 머물고 있다가 해빙기에 큰 홍수가 일어나자 남하해 한반도 일원에까지 정착하게 된 것이다. 바이칼은 지금도 지진활동을 하고 있는 내륙단층지대로 남아 있다. 빈번한 기후 변동과 그에 따른 해수면의 변화나 지형적 변천을 면밀히 추적해 보면 두 지역을 이어준 민족이동 통로를 밝혀낼 수가 있을 것이다.
 
샤머니즘의 메카 알혼 섬의 부르칸 산

다음으로 생태학적 관련성도 점차 밝혀지고 있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조선’이나 ‘고려’는 순록을 뜻하는 ‘코리’나 ‘고올리’에서 유래된 말로서, 바이칼 동쪽에서 순록을 기르면서 살아온 코리족(야쿠트)을 비롯한 순록유목민 일파가 순록의 먹이인 이끼의 길을 따라 대·소흥안령을 넘어 만주지역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목축이 농업과 결합해 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 제국의 경제와 생태적 토대를 이루고, 더 남하해 한반도에 이르러서는 농업구조로 전환하면서 한반도 내 고대국가들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작금의 체질인류학적 연구도 상관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지역이나 민족 간의 상관성을 밝혀내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전학적 지표는 Y염색체 DNA와 미토콘드리아 DNA 두 가지다. 이러한 유전학적 지표에 근거해 동아시아인들의 초기 이주경로를 추적해보면 약 6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가 동남아시아나 시베리아 쪽으로 이동해 오늘날의 동아시아인 집단을 형성한다. 한편 혈액 속의 감마항체를 만드는 유전자를 조사하는 방법으로 혈통을 연구해 온 일본의 한 학자는 몽골로이드는 다른 인종과는 달리 ab3st라는 감마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유전자는 바이칼을 중심으로 사방에 확산되었는데, 그 비율이 몽골·만주·한국·부리야트를 비롯한 동시베리아인에게는 높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아주 가깝다. 또한 미국 에모리대 연구소의 세계 종족별 DNA 분석 자료에 의하면 바이칼 주변의 야쿠트인과 부리야트인, 아메리카의 인디언, 그리고 한국인의 DNA가 거의 같다고 한다.

바이칼의 명물인 ‘오물’을 파는 여인
끝으로, 지금까지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상관성은 문화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보게 된다. 바이칼 주변 사람들의 정신적 근간은 인간과 주변의 자연환경에 대한 관계를 중시하는 친환경주의 사상의 결정체인 샤머니즘이다. 샤먼의 주문이나 무구(巫具)에서 보다시피 한국 무속의 원류는 이 시베리아 소산의 샤머니즘이다. 두 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전통복식을 살펴보면 모두 앞섶이 열린 이른바 전개형(前開型, 카프탄)이란 공통성이 있다. 그리고 구비전승에서도 상당한 상관성을 엿볼 수 있다. 바이칼 주변의 코리인이나 부리야트인은 순록을, 몽골인은 늑대를, 한국인은 곰 같은 짐승을 시조로 삼는 이른바 수조(獸祖)전설이 신통히도 일맥상통한다.
 
시베리아는 구비문학의 보고이다. 자고로 세시풍속이나 각종 의례 등 삶의 주요 계기마다 특유의 음감(音感)을 가진 전문적인 이야기꾼을 초청해 경청하며 감상하곤 한다. 주제는 전설이나 신화, 동화, 수수께끼 등 다양한데, 그런 이야기 속에서 한국문화에 녹아있는 여러 구비전승 요소를 고스란히 발견하게 된다. 일례로 부리야트의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를 들 수 있는데, 그 내용이 우리네 것과 진배없다. 그 밖에 솟대와 서낭당 같은 공유성 유물들도 처처에서 만나게 된다.

이 모든 사실들은 알혼 섬에 공간적으로 응축되어 있다. 그러니 그곳으로의 도항을 앞두고 가슴이 설레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9시35분, 대기 세 시간 만에 차량 20여대와 승객 100여명을 태운 여객선은 나루터를 떠난다. 노을 비낀 수면을 15분간 미끄러지더니 얇게 드리운 야음 속에 조심스레 닻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바이칼 호 중앙 서쪽에 좀 치우쳐 있는 알혼 섬에 다다랐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메카 알혼의 원래 발음은 ‘아이홍’인데, 17세기 러시아인들이 이곳을 정복하면서 ‘올콘’으로 잘못 발음한 데서 유래된 와전어이다. 이말의 뜻에 관해서는 ‘(하늘로부터) 가까운’ ‘작은 숲’이라고도 하지만, 현지 안내원은 ‘나무 없는’(메마른) 뜻이라고 소개한다. 이것이 원주민어인지 몽골어인지가 분명치 않다.

여기서부터는 전용관광차를 갈아타고 다녀야 한다. 약 50분 걸려 중심 마을인 후즈르에 자리한 니콜스 관광숙박소에 도착했다. 1~2층으로 된 나무 귀틀집 20여채가 옹기종기 붙어있다. 12동 b호(1층)에 여장을 풀고 호밀 밥에 돼지비계로 저녁을 때우고는 전통목욕인 반야를 하고 자리에 들었다. 향긋한 나무 진 냄새 속에 노독이 말끔히 가셔진다. 이튿날 아침식사도 호밀 죽이다. 알혼 섬은 제주도의 절반쯤 되는 크기의 섬으로서 바이칼 호 한가운데 남북으로 길게 놓인 절해고도다. 숙소로부터의 관광코스는 북행이다. 30분쯤 가니 섬 언저리에 자리한 그 유명한 부르칸 산이 나타난다. 치안 때문에 ‘특수장비’를 갖추고 가야 한다는 뜬소문과는 달리 평온하다. 일렬로 도열한 세르게(오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침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부르칸은 문자 그대로 선경이다. 동북아시아 곳곳에 숱한 기원적 전설을 갈무리하고 있는 부르칸니즘(不咸文化)의 모태인 이 부르칸의 자태는 자못 신비롭기도 하고 숭엄하기도 하다. 섬 인구 1500명 가운데 에벵키족이 다수를 점하고 있지만, 제주(祭主)만은 아직까지도 전설의 주인공인 코리족 남자어른이 담당한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30분 정도 가면 불타버린 선착장과 생선공장 자리가 남아있는 유배지 이샨카 마을이 나타난다. 지금은 휴게소로 커피숍 한 채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 옛날의 쓸쓸한 풍광을 과객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다시 한 시간 가니 트리브라테라는 삼형제바위가 또 하나의 샤먼 전설을 토해내고 있다. 옛날 아들 삼형제가 아버지처럼 샤먼이 되고 싶어 했는데 아버지는 극구 말린다. 그러자 세 아들은 몰래 이곳에 와 샤먼이 되려고 정진 기도하던 끝에 이렇게 세 바위로 굳어졌다고 한다. 샤먼에 대한 숭앙을 그려낸 전설이다. 석화인(石化人) 전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신기한 것은 이끼가 화석화되어 돌이 붉은 색을 띠고 있다. 다시 15분쯤 가니 ‘송곳’이란 뜻의 ‘하보이’, 즉 섬의 끝(북단)에 이른다. ‘밝음’이 아닌 ‘붉음’이란 부르칸(不咸) 뜻이 실감나게 붉은 방울송이가 알알이 맺힌 잣나무와 적송이 빼곡하다. 그리고 샤머니즘의 메카답게 섬의 끝머리를 대형 세르게로 장식하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후즈르박물관에 들러 맷돌 같은 우리와의 유사품들을 여러 점 확인하고, 다시 선착장에 돌아와 알혼 섬에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멀어져 가는 섬을 바라보니 저도 모르게 상념에 젖기 시작한다. 물이나 돌밖에 없는 알혼 섬이나 바이칼 호를 굳이 찾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자문부터이다. 한마디로 그 답은 시쳇말로 ‘뿌리 찾기’이다. 이 길은 참 나를 찾는, 내 속으로 순례하는 길이다. 뿌리 없는 나무는 자라서 가지를 치고 꽃피우며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자칫 너 나를 넘나드는 국제화 시대에 무슨 고루한 소리인가고 핀잔을 던지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나라는 존재는 본래부터가 남과 남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나와 남은 어울림 속에서 공생함으로써 나를 찾는 길은 곧 남을 찾는 길과도 잇닿아 있다. 차제에 한 가지 덧붙이면, 유전적으로 한민족의 20~30%는 남방계에 속하며, 우리 속엔 남방 문화유전자도 분명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북방만이 아니라 남방에서의 ‘뿌리 찾기’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균형 감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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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채로운 딸찌 민속촌
ㆍ자작나무 귀틀집과 페치카 ‘도도한 고풍’

무려 11개의 시간대를 거쳐야 하는 길고 먼 시베리아 초원로만큼 계절에 따라 삶의 리듬, 문화의 리듬, 여행의 리듬이 다르고 바뀌는 길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이 길의 매력이다. 그래서 필자는 올해 여름철(7월)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지난해 겨울철(2월)엔 이르쿠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두 구간으로 나눠 이 길을 답파했다. 지금까지는 여름철 이야기를 썼고, 이제부터는 겨울철 이야기를 전할 것이다.

딸찌 민속촌의 통나무 귀틀집 망루.

2008년 2월12일 오후 1시50분,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모스크바행 몽골횡단철도 열차를 타고 일망무제한 설원을 지나 이튿날 오후 3시20분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장장 25시간30분을 달렸다. 휘몰아치는 삭풍(朔風)에 대낮인데도 기온이 영하 20도를 넘어서 얼굴이 아릿했던 매서운 몽골 추위와는 달리 뜻밖에도 그 북쪽에 자리한 이곳 온도는 영하 8도, 눈이 녹고 있다. 왕년에 보기 드문 이상기후라고 한다.

숙소는 바이칼 호반에 있는 리스크비얀카의 바이칼 호텔에 잡았다. 리스크비얀카는 이르쿠츠크 동남쪽으로 앙가라 강을 따라 65㎞ 지점에 있는 자그마한 항구 도시이다. 호숫가 언덕배기에 자리한 호텔 전망대에 서니 눈 덮인 바이칼이 한눈에 안겨온다. 아침 햇살이 저만치 피어날 무렵 바이칼 관광에 나섰다. 얼음 축제가 방금 끝났지만 기기묘묘한 얼음 조각물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하나하나가 정교한 예술작품이다. 설경도 설경이거니와 꽁꽁 얼어붙은 얼음판을 지치면서 환히 트인 물밑을 들여다보는 것은 문자 그대로 황홀경이다. 8m 이상의 두께로 얼어붙은 물밑에서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노닐며 수초가 나풀거린다. 한겨울 얼음 두께가 10m 이상이면 5t 트럭이 다닌다고 한다. 그때면 환바이칼철도 노선이 얼음 위에 가설되기도 한다. 리스크비얀카는 비릿한 내음이 풍기는 어항이다. 선창가에 붙어있는 어물시장에는 이곳 명물인 오물을 비롯해 각종 어류들이 매장에 즐비하다.

이어 이곳에서 약 4㎞ 지점, 리스크비얀카 어귀에 자리한 바이칼 생태박물관을 찾았다. 1928년에 설립한 이 박물관은 1961년에 소련 과학아카데미 소속 호수학 연구소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층으로 된 작지만 알찬 박물관에는 유구한 바이칼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호수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서식하는 각종 어류와 동식물에 관한 기록과 유물, 도표와 모형 등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하고 있다. 1층은 수족관이고 2층은 전시장이다. 바이칼에는 7개 과(科) 50여종의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투명한 물고기 갈라만카나 민물 새우 에피슈라, 철갑상어(길이 1.8m에 무게 120㎏), 바이칼 바다표범인 네르파 같은 특이한 물고기가 살고 있어 어류학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네르파는 지구상 민물에 사는 유일한 바다표범이다. 바다에 사는 표범이 어떻게 민물에 살게 되었는지는 생태학자들 사이에도 여전히 불가사의로 남아 있다. 더러는 북해와 바이칼을 잇는 비밀동굴을 통해 왔다고 주장하지만, 누구도 그런 동굴을 본 사람은 없다. 바이칼 주변에 서식하는 2600여종 동식물 가운데서 4분의 3 정도가 이곳만의 희귀종이라고 하니, 바이칼은 명실공히 생태학의 보고이다. 그래서 매해 3만여명의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한다. 각종 동식물의 박제품은 그토록 생생할 수가 없다. 박제기술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방명록에 ‘바이칼이여, 영원하라!’라는 짧은 글 한 마디를 남기고 박물관을 나섰다.

다음으로 발길을 옮긴 곳은 여기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유명한 딸찌 민속촌이다. 이름부터가 딸찌 ‘민속촌’이니 ‘마을’이니 ‘건축박물관’이니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그러나 정식 명칭은 ‘건축-인류학박물관 딸찌’이다. 명칭에서 읽을 수 있다시피, 이곳은 건축물을 통해 전통적 삶의 양식을 보여주려는 일종의 야외 전시장이다. 폐쇄된 실내에서가 아니라 우리네 용인 민속촌처럼 탁 트인 바깥 공간에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전시교육장이다. 1969년 바이칼 수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수몰지역의 건물들을 그대로 옮겨다가 관광명소로 꾸린 지혜의 산물이다. 무려 67만㎡나 되는 호숫가 넓은 대지에 40여종의 건축기념물과 8000여점의 전통문화재를 한데 모아놓고 있다. 전시물들을 통해 17세기부터 이곳에 이주해 온 러시아인들과 부리야트인이나 카자크인 같은 원주민들이 누렸던 생활모습을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는 역사의 생동한 현장이기도 하다.

딸찌 민속촌의 전통적 통나무 귀 틀집 아즈바.
그래서 하나하나 깐깐히 살펴봤다. 입구의 우거진 자작나무부터가 눈길을 끈다. 물론 시베리아 땅 어디에서나 지천에 깔려있는 것이 자작나무이지만 여기 것은 관광지라서 그런지 한결 달라 보인다. 하얀 껍질을 두르고 미끈하게 자란 가지마다엔 흰 눈꽃이 송송이 피었으니 숲은 온통 백화원(白花園)이다. 보통 20m 이상으로 쭉쭉 뻗어있는 자작나무의 껍질은 종이처럼 얇게 벗겨지는데, 겉면은 흰빛이고 안쪽은 밝은 갈색이니 천혜의 미술소재가 아닐 수 없다. 불에 잘 타면서도 습기에 강해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고 한다. 노르웨이나 핀란드 같은 북유럽과 시베리아에 주로 분포되어 있지만, 한국과 일본 홋카이도에도 자생한다. 특히 그 신비성으로 인해 우리의 전통문화와 끈끈한 연을 맺고 있다.

제주도 민가의 나무 대문처럼 몇 대의 통나무를 가로댄 빗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이즈바’라고 부르는 전통적 목조 가옥이다. 뾰족한 지붕과 다양한 모양새와 아기자기한 문양을 갖춘 문과 창문, 그 외경부터가 이채롭다. 몇 채는 세월의 풍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져가고 있지만 그 고풍만은 여전히 도도하다. 러시아 목조문화의 상징물이다. 소나무와 전나무, 물푸레나무, 자작나무와 같은 침엽수로 지은 통나무 귀틀집이다. 나무집은 나무의 보온력과 통기성으로 말미암아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다. 이런 집은 나무에 못을 박지 않고 홈을 파 잇는 방법으로 짓는다. 빗물에 젖어 못을 박은 언저리가 쉽게 썩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내리는 눈의 하중을 견디기 위해 지붕의 경사를 급하게 한다. 창문은 한기 때문에 되도록 작게 내고, 유리가 아직 없던 시절이라서 송진을 먹인 아마포로 막는다. 하나하나에 옛사람들의 슬기가 깃들어 있다.

이즈바의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오늘날의 원룸 형태가 연상된다. 크게는 ‘페치카’라고 하는 벽난로가 있는 주방, 식탁과 그 위에 이콘(종교 같은 관념적 대상을 형상화한 미술품)을 걸어두는 ‘아름다운 구석’, 그리고 침상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페치카이다. 페치카는 음식을 만들고 방안을 덥히는 실용적인 쓰임새만이 아니다. 집안이 화평하면 “페치카가 잘 놓여 있다”고 말하며, ‘페치카가 없는 집은 집이 아니다’라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로 집안의 상징물이자 필수불가결의 시설물이다. 페치카 뒤에는 집 귀신이 살고 있어 잠자리에 들 때는 귀신이 깨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새집에 이사할 때면 으레 이 귀신에게 선참으로 신고를 해야 한다. 이즈바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문턱은 특별히 높게 한다. 이유는 악마나 역병 같은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벽사진경(피邪進慶)은 인간의 공통심리인가보다.

딸찌 민속촌에서 만든 각종 수공예품.
몇 집 방안에 걸려 있는 빛바랜 사진을 쳐다보니 이곳은 원래가 가부장적 대가족제였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어로 ‘가족’을 뜻하는 ‘세미야’는 ‘씨앗’이란 ‘세먀’와 어원을 같이 하고 있다. 이를테면 농경과 유착된 가족이란 말은 씨앗과 같이 많이 퍼지고 자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3대가 함께 사는 것은 19세기까지만 해도 러시아 농민 가정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러시아의 가부장적 대가족제도하에 지탱되고 있는 가정생활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64개 장의 <도모스트로이>가 16세기 이반 4세에 의해 반포된 바 있는데, 그 내용이 유교적 가정생활 지침과 많이 닮아서 흥미롭다. “가장의 교훈이 없으면 집안사람들이 여러 죄를 범하게 된다. …자식을 사랑하면 할수록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일례가 그것이다. 이네들에게도 고부갈등은 골칫거리어서 자주 작품의 주제로 등장하는가 하면, 축제 때는 화목을 위해 며느리가 시어머니나 시누이를 초청하는 풍습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고 한다.

집집마다 특색 있는 가재도구나 장식품, 수공예품, 그리고 등자를 비롯한 마구와 마구간, 각종 농기구와 사냥기구가 유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나무 두 그루 사이에 인골을 올려놓는 풍장(風葬) 풍습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어느 요새에 쓰인 대문짝도 옮겨놓았으며, 1679년에 지은 카잔스키야라고 하는 작은 예배당은 지금도 예배당으로 쓰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당시의 목공예나 수예, 도자기공예를 재현하거나 실제 제작해 수익을 올리는 경우도 눈에 띈다. 이러한 수공예품들이 골목골목에 차려놓는 매대에 가득 쌓여있다. 그 가운데 남다른 인기를 끄는 것은 러시아의 상징적 기념물인 마트로시카이다. 어머니를 의미하는 라틴어의 ‘마테르’(mater)에서 기원한 이 여성 인형은 원래 시베리아에서 여신을 금상으로 만들어 그 속에 똑같은 여신들을 차곡차곡 집어넣던 민간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작은 인형은 보통 대여섯개, 큰 것은 15개까지도 들어간다. 가장 큰 바깥 인형은 어머니를 상징하며 그 속의 인형들은 계승될 다음 세대들로서 모계적 다산성을 의미한다. 러시아에서 어머니는 대지이고, 대지는 곧 어머니이다. 매대에서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큰 ‘네트파’라고 하는 피리를 기념품으로 샀다. 흙으로 빚은 것인데, 등과 배에 하나씩 난 구멍이 공명을 일으켜 소리를 내는 깜찍한 전통 악기이다.

러시아의 전통적 목욕인 바냐에서 사용하는 물통과 바가지.
두 시간 남짓 이채로운 딸찌 민속촌을 둘러보고 이르쿠츠크로 돌아았다. 한두 군데 더 돌아보고 나서 해질 무렵에 여기서 36㎞ 떨어진 자임간으로 향했다. 울창한 수림 속에 통나무집이 띄엄띄엄 널려있다. 러시아의 전통목욕인 바냐로 이름난 삼림휴양지이다. 시간당 160루불(한화로 약 4800원)을 물고 3~4명을 수용하는 바냐 욕장에 들어갔다. 먼저 가볍게 샤워를 한 뒤 증기실로 들어간다. 증기실에는 바싹 마른 자작나무 장작으로 두세 시간 시뻘겋게 달군 돌들이 채워져 있는 난로통이 있다. 난로통에 나무바가지로 물을 끼얹으면 순식간에 뜨거운 증기가 살갗을 파고들어 온몸을 뜨겁게 달군다. 그러면 몸에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적당한 온도와 습기를 유지하기 위해선 물을 조금씩 계속 난로통에 끼얹는다. 온몸에 땀이 흥건할 때 자작나무 가지로 몸을 때리곤 바깥에 뛰어나가 눈이나 얼음 속에서 한참 뒹굴다가 다시 돌아와서 증기 쐬기를 반복한다. 러시아인들이 겨울에 즐기는 일종의 놀이이자 체력단련 방법이라고도 한다. 바냐는 단순한 증기목욕이나 습식사우나를 넘어서 사교의 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왕왕 주술(呪術)이나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성스러운 교회 공간과 대립되는 ‘부정한 공간’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아무튼 한탕 바냐를 하고 나니 쌓여오던 노독이 일시에 말끔히 가셔진 기분이 든다.

남을 아는 데는 오늘보다 어제가,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남의 유적을 찾아다니고 남의 습속에 젖어본다. 이것이 오늘 일과의 맺음말이다. 바냐가 달린 식당에서 푸짐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자정을 넘긴 새벽 2시12분, 역시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노보시비르스크를 향한 30여시간의 장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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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초원로의 대동맥 시베리아 횡단철도
ㆍ구한말 민영환을 흔든 ‘근대화 기적소리’

세상에는 문명을 소통시키는 길이 수없이 많다. 크게는 육로와 바닷길, 하늘길이 있으며, 이러한 큰 길에서 뻗어나간 갓길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개척으로부터 이용하기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연을 안고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문명의 소통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길을 고르라면 단연 시베리아 횡단철도(TSR)가 첫 물망에 오를 것이다. ‘철마’(열차)를 타고 이 길에 오를 때마다 그 경이로운 연혁과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일행은 그 길의 한복판 이르쿠츠크에서 서쪽으로 노보시비르스크를 향해 달리는 열차에 몸을 싣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속에 점점이 박혀있는 고즈넉한 마을과 도시, 갖가지 파스텔 색깔로 아름답게 단장한 기차역, 수많은 심산계곡을 뚫고 지나가는 터널과 철교…. 이 모든 것이 이 길이 간직한 어제와 오늘을 고스란히 속삭여주고 있는 성싶다. 옴스크에서 노보시비리스크까지의 600여㎞ 구간은 전 구간에서 가장 평탄한 직선 구간으로서 사색과 상념에 너비와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안개 낀 아마자르 역에 정차. 2009년 7월6일.

이 횡단철도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이다. 그만큼 사연도 많다. 블라디보스토크 역 구내에 들어서면 ‘9288’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념탑이 눈에 띈다. 그 숫자가 바로 시발역인 모스크바 역(모스크바에는 목적지 이름을 딴 7개 역이 있음)에서 종착역인 태평양 연안의 블라디보스토크 역까지의 거리가 무려 9288㎞나 됨을 나타내는 이정탑이다. 이 거리는 지구 둘레의 약 3분에 1에 해당하며, 서울에서 부산까지 22번 이상 오가는 거리이다. 시속 80~90㎞의 열차로 이 거리를 답파하는 데만도 꼬박 6박7일, 156시간이 걸린다. 달리는 동안 시간대는 일곱 번이나 바뀌며,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에는 11시간의 시차가 생긴다. 그래서 모든 역에는 현지 시간과 표준시간인 모스크바 시간을 알리기 위해 특수 제작한 ‘철도 시계’가 걸려 있다. 이 철도는 인구가 100만명을 넘는 5개 도시(모스크바, 페름, 예카테린부르크, 노보시비르스크, 옴스크)를 비롯해 90여 개의 크고 작은 도시를 지나가며, 약 50개 역에 정차한다. 두 대륙을 잇는 이 철도는 우랄산맥 기슭에 자리한 페르보우랄스크를 경계로 아시아와 유럽의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아시아쪽 길이(7512㎞, 81%)는 유럽쪽 길이(1777㎞, 19%)에 비해 근 4.3배나 더 길다. 그래서 아시아쪽에 있는 시베리아 이름을 따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철도는 강폭이 2㎞에 달하는 아무르 강을 비롯해 볼가, 오브, 예니세이, 레나 등 16개의 강을 건너간다.
 
이러한 몇 가지 수치만으로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어마어마한 모습과 대역사(大役事)를 헤아리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인간 창조의 기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이 철도의 부설 아이디어로부터 시공과 완공에 이르기까지의 25년간(1891~1916)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극복과 고투의 과정이다. 처음부터 예산 부족을 이유로 하는 재정부의 반대에 부딪힌다. 10년 넘게 공전하던 철도 부설 구상은 마침내 1891년 3월 알렉산드르 3세가 건설에 관한 칙령을 공포함으로써 현실로 옮겨지기 시작한다. 이 시작을 고했다는 공로가 인정되어 1908년 이르쿠츠크의 앙가라 강변에 그의 동상이 세워진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후 철거되었다가 2003년 복원되었다. 앞면에는 러시아 문장인 쌍두 독수리가, 뒷면에는 당시 철도 건설을 적극 지지했던 시베리아 총독 무라비요프의 얼굴상이 새겨져 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철도 건설 사업을 향년 23세의 젊은 황태자 니콜라이에게 일임한다. 후일 니콜라이 2세로 즉위한 황태자는 칙령이 공포된 두 달 후에 철도 착공식을 주관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오스트리아와 그리스, 홍콩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에 상륙해 시가현(滋賀縣) 소재지인 오쓰(大津)를 관광하다가 한 경찰관의 저격을 받는다. 이른바 ‘오쓰 사건’이다. 메이지 천황의 환대 속에 한 달 남짓 보내다가 목적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러 1891년 5월31일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철도 기공식 테이프를 끊는다. 세 달이나 걸려 환국한 황태자는 시베리아철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철도 건설 전반을 진두지휘한다. 그러나 철도 완공 4개월 후에 일어난 2월 혁명으로 폐위되어 예카테린부르크에 유폐되었다가 끝내는 일가족과 함께 암살을 당하고마는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비운의 황제가 된다.

비록 착공은 했지만 갈 길은 첩첩태산이다. 당초 이 긴 철도를 1년 반 만에 완공한다는 모험적인 계획을 세우고 공기 단축을 위해 전체 노선을 6개의 공구로 나눠 동시에 착수한다. 그러나 노선의 반 이상이 측량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가 시작되다보니 홍수 다발 지역에 선로가 건설되고 산사태로 노반이 파묻히며 동토가 녹아 선로가 물에 잠기는 일이 다반사다. 공기 단축을 위해 레일의 중량을 기준의 절반으로 낮춘 결과 선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침목이 부식되기 일쑤다. 터널 건설을 피하다 보니 급경사나 곡선 반경이 작은 구간이 많아져 열차가 속도를 낼 수 없다. 그러다보니 개통 첫해엔 하루에 세 건꼴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인구가 희박한 시베리아에서 작업 인부를 구하는 일은 큰 난제의 하나였다. 인부 가운데 29%만이 현지인이고, 나머지는 유배 죄수들이나 중국인들이고 가끔 한인들도 끼었다. 인부들의 작업환경이나 생활환경은 극도로 열악하다. 여기에 인종차별마저 겹쳐 외국인 한 달 보수는 러시아인의 절반밖에 안 되는 45루블에 불과하다.
 
게다가 주먹구구식 계획 때문에 실제 건설비용은 계획치를 크게 웃돌았다. 5월까지도 꽁꽁 얼어붙어 있는 동토에서의 건설비는 치솟을 수밖에 없다. 당초 3억2500만루블(약 1억7000만달러)로 잡은 건설비가 약 10억루블로 3배 이상 늘어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99년부터 3년간 무서운 페스트와 콜레라가 번져 인부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건설 기간 사고와 질병에 죽어간 사람은 무려 1만명에 달한다. 하바로프스크의 영웅광장 한 귀퉁이에는 연도별로 희생자들의 명단이 새겨져있다. 여기에 더해 1900년 중국 전역을 휩쓴 의화단 봉기에 영합한 중국 인부들은 이미 건설한 선로 700㎞를 마구 파괴한다. 비용은 엄청나게 치솟는 반면에 수요는 예측치에 턱없이 못 미친다. 그래서 기공한 지 10년이 되었는데도 공사는 겨우 절반밖에 진척되지 않아 결국 완공까지는 25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숱한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끝에 개통된 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지난 90여년 동안 러시아의 개발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소통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열차의 기적 소리는 ‘잠자는 미인’ 시베리아를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러시아는 16세기의 동방 진출을 계기로 시베리아에 대한 지배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교통의 불편과 주변국들의 간섭 등으로 인해 실제적 통치권은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철도가 개통됨으로써 머나먼 낯선 땅 시베리아를 러시아 제국에 실제적으로 통합시킬 수가 있게 되었다. 러시아는 재빠르게 시베리아의 행정기구를 정비하고 총독 등 현지 행정관들을 파견한다. 풍부한 자원 개발이 가속화되고 농업과 상업이 붐을 이루며 이주민도 크게 늘어난다. 건설공사가 시작된 1891년 무렵 500만명이던 시베리아 인구가 20년이 좀 지난 1914년에는 2배 이상으로 급증한다. 그뿐만 아니라 영사관이나 무역대표부 등 외국 주재기관이 신설되고 외국 금융과 투자 활동이 활성화됨으로써 세계를 향한 시베리아의 문은 열리기 시작한다.

오늘날 며칠씩 이 철도를 질주하는 열차를 타도 별로 피곤하지 않고 쾌적함을 느끼는 것은 철도의 현대화, 특히 장대(長大) 레일화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전 구간에 걸쳐 철도의 복선화가 1937년에 끝난 데 이어 2002년까지는 전철화가 이루어졌으며 광섬유 케이블 설치작업도 마무리되었다. 길이가 25m인 레일 여덟 개까지 이어서 하나의 레일로 만드는 이른바 ‘장대 레일화’가 전 노선의 45%를 점하고 있다. 그래서 증기 동력으로 숨을 헐떡이며 달리던 그런 옛날의 열차가 아니라, 장대 레일 위로 전기 동력에 의해 리드미컬하게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현대판 열차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 수송량도 끊임없이 늘어난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의 총 길이가 9288㎞임을 알리는 이정탑. 블라디보스토크 역내.


문명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의 개념에서 보면, 일행이 몸담고 있는 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아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는 초원로 상의 ‘철의 실크로드’이다. 이 길은 일찍부터 우리와 러시아나 유럽을 연결해주는, 소통시켜주는 가교이다. 한반도의 종단철도(TKR)는 크게 경원선과 경의선(만주횡단철도를 통해)의 두 갈래로 나뉘어 각각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이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그러나 오늘은 저주로운 분단의 철책에 가로막혀 그 이어짐과 오감은 뚝 멎고 말았다. 다시 그 열림을 애타게 바라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길을 오간 사람들의 족적을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작업인부로서 철도 건설에 참여한 동포 한인들의 피맺힌 자국이 어디엔가 찍혀있을 것이며, 20세기 초반 연해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이 이 길을 오갔을 터이고, 더러는 시발역에서 종착역까지의 전 구간을 답파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록은 별로 없다. 다행히 민영환(閔泳煥, 1861~1905년)이 남긴 <해천추범(海天秋帆)>(한말)이란 책이 있어 그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민영환은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다. 윤치호 등 일행 네 명과 함께 떠난 사절단은 중국과 일본, 캐나다와 미국을 경유해 영국과 아일랜드,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등 10개 나라를 지나는 먼 길을 에돌아 출발 6개월 21일, 총 204일 만에 목적지 러시아에 도착한다. 귀국할 때는 착공한 지 5년밖에 안 되는 초기의 철도 부설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때로는 갓 시동한 기차를 타고 이 길의 연로(沿路)를 따른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세계 일주자이자 최초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이용자이다. 이 대장정의 기록을 담은 기행문이 바로 그의 <해천추범>이다. ‘해천추범’이란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라는 뜻으로서, 이런 뜻을 책 제목으로 택한 데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부심했던 그의 사색과 고민이 배어있다.

 
하바로프스크 역 외경.

민영환은 8월20일 마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떠나 10월10일 기차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장장 50일 간의 긴 여행이다. 일기체로 쓴 그의 기행문에는 총 83구간 사이의 거리와 지명을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 노정은 마차를 타고 강은 배로 건너며 단 세 구간만 기차로 지난다. 그들의 여행은 한마디로 고행이다. ‘길은 험하고 질척거려 차가 매우 흔들리니 사람은 피곤하고 말은 기운이 빠졌다.’ 수십 일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니 그 괴로움과 번민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기차라고 잡아탔는데 바퀴가 훼손되어 ‘나아감이 매우 느려서’ 주야에 겨우 314리(약 126㎞)를 달렸다. 이러한 고행을 그나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황령(皇靈, 황제의 영험)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은전을 오매불망한다. 대행황후(大行皇后, 명성황후)의 기신(忌辰, 망자의 생전 생일) 새벽에는 선방(船房)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향을 피우며 공복(公服)을 입고 동녘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나서는 서로 마주보며 감회의 눈물을 흘린다. 극동지역에서 만난 교포 유민들에게는 고국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현지 러시아 관찰사를 찾아가서는 그들을 보호해달라는 청을 드린다. 애국애족의 충정이다. 이것이 초원로의 대동맥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누비는 우리들에게 주는 <해천추범>의 값진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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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과학도시 노보시비르스크

ㆍ팔만대장경의 재료… 자작나무를 울타리 삼은 ‘100년 신도시’
ㆍ군수 요충지서 첨단과학 메카로 우뚝

자작나무와 다차(주말농장).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 이르쿠츠크와 노보시비르스크 사이 구간은 가장 쾌적한 구간이다. 일망무제한 평지 초원과 수림지대를 가로지르는 노선은 오르막이 별로 없어 마냥 직선로를 달리는 기분이다. 그러니 속도는 전 노선에서 가장 빠르며, 운행의 안전도도 가장 높다.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 시간으로 2008년 2월14일 밤 10시12분(현지시간은 15일 2시12분)에 떠난 열차가 16일 아침 4시40분(1시간 시차)에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으니 꼭 30시간28분을 달린 셈이다. 4인용 침대칸이 딸린 열차로 좌석은 7열차 17번이다. 세 사람은 일행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극동 콤스몰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50대 초반의 무역업자이다. 러시아어밖에 몰라서 의사소통이 안 되니 본인도 퍽 안타까워하는 표정이다. 그래도 외마디 소리에 손짓과 눈짓을 섞으니 정은 통한다. 간단한 인스턴트 식품으로 여행 8일간의 식량을 대체한다. 차림새도 소박하다. 작금 러시아 중산층의 초상이다.

새벽녘에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어느새 수림 속에 점점이 박혀 있는 ‘다차’의 머리 위엔 흰 눈이 수북이 쌓인다. 극동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오는 내내 철도 연변에서 숱한 다차를 목격했는데, 그 밀도는 서쪽으로 올수록 더 짙고, 모양새도 더 다양해진다. 그만큼 서쪽은 동쪽에 비해 부유하다는 뜻이다. 50여년 전 처음 봤던 그 다차와는 이제 차원이 달라져 가는 성싶다. 원래 다차는 시내에 사는 사람들의 주말농장으로 자연과의 만남이라는 데서는 쉼터의 기능도 있었다. 그러나 호사하는 별장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크기나 모양새가 고만고만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판판 달라 보인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주말농장이나 쉼터로서의 본래 기능이 남아 있겠지만, 신흥부자들에게는 부의 상징으로 둔갑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어마어마한 다차가 경관구(景觀區)마다에 들어앉을 수가 있겠는가. 변화하는 러시아의 축도(縮圖)라고 해도 지나친 말일까.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본부 복도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토론하는 연구원들.
몇 시간 내린 눈으로 미끈하게 뻗어 올라간 자작나무의 밑동치는 몽땅 흰 옷으로 갈아입고, 가지마다엔 눈꽃이 송송이 피어나 유난히도 청순하게 보인다. 문득 그 시절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백조들이 머리 위로 발레단 상징인 은빛 자작나무 가지를 치켜들고 총총걸음으로 무대의 개막을 알리던 그 황홀하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른다. 지금 그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니 감회가 새롭다.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는 자작나무는 기백과 청순함으로 우리 겨레를 포함해 북방 민족들에게는 성스러운 나무로 여겨지고 있다. 러시아에 하느님이 자작나무를 타고 내려와 인간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신라의 금관은 이 자작나무 껍질로 내관을 둘렀고 천마총의 천마도나 팔만대장경도 같은 소재로 만들었다. 다들 자작나무를 땅과 하늘,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통로, 즉 우주수(宇宙樹)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는 우주수 가득한 웅숭깊은 신비의 땅이다.

지금 일행은 이 땅의 신비를 파헤치려고 또 하나의 명소 노보시비르스크를 찾아가고 있다. ‘새로운 시베리아’라는 뜻이 말해주듯, 노보시비르스크는 100년 남짓한 건설 역사를 가진 ‘새 도시’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의 첫 삽을 뜨던 1893년, 오브 강에 놓을 철교의 부지를 찾다가 마침 강폭이 좁고 바닥이 자갈인 이곳이 선택되었다. 철도 건설자들이 인가를 이루면서 형성된 이 도시는 러시아의 중앙부에 위치한다는 지정학적 특성과 유리한 자연환경에 힘입어 20세기 초부터 극동 지역과 우랄산맥 너머의 수도권을 연결하는 물류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급속히 성장한다. 원래는 니콜라이 2세의 이름을 따 ‘노보니콜라옙스크’라고 불리다가 1925년 오늘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비행기와 탱크 등 무기와 군수물자 생산의 요충지로 두각을 나타냈다. 전후에는 소련 최고의 공단 지역으로 변모하면서 1959년에 이르러서는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의 조성을 계기로 첨단 실용과학의 메카로 자리를 굳힌다. 그래서 오늘은 인구 150만명을 거느리는 러시아 제3의 도시로서 인근 위성도시들을 통합해 대도시군을 형성하고 있다. 급기야 러시아의 정중앙, 시베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 가장 큰 도서관, 가장 큰 기차역, 가장 큰 비행장, 가장 큰 댐이라는 신나는 기록을 가진 도시가 되었다.

이제 숨차게 달려온 열차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역, 노보시비르스크의 중앙역에 서서히 들어선다. 1939년에 지어진 이 역사는 연한 하늘색의 기차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몇 년 전에 개축해서 내부 시설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화려하다. 역사 안에는 철도공사가 직영하는 고급 호텔도 있다. 이 역이 하루에 취급하는 물동량은 1990년대에 비하면 30~40% 줄어들었는데도 여객열차 150대와 화물열차 100대가 드나들며 화물 수송량은 약 55만t에 달한다. 현재 러시아 철도공사 산하에는 17개 지사가 있는데, 그 중 이곳에 본부를 두고 12만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서시베리아 철도지사가 화물 수송량에서 단연 1위를 차지한다. 그것은 이 역이 러시아 철도 운송의 심장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에 도착하니 현지 여행사에서 파견된 안내원 아나스타샤가 기다리고 있다. 예쁘고 상냥한 아가씨는 일행에게 환영의 뜻으로 빨간 카네이션 한 송이씩 건네준다. 러시아 사람들은 유난히 꽃을 좋아한다. 그 추운 겨울 거리 어디에서도 손에 꽃을 들고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을 쉬이 발견하게 된다. 크고 작은 모든 행사에는 꽃 증정이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추운 곳이라서 꽃 가꾸기가 어려우니 꽃이 귀해서 그렇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역사를 빠져나와 시 중심 레닌 광장 곁에 있는 첸트랄나야(중앙)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6층 618호실이 배정되었으나 수도에서 찬물이 나오지 않아 그만 638호실로 옮겼다. 여행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호텔인데도 화려한 역사에서 받은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시설이 부실하다.

처음 찾아간 곳은 이 도시 역사의 산 증인인 오브강 철교이다. 러시아의 큰 도시는 대개 한복판에 강을 끼고 있다. 노보시비르스크도 예외는 아니다. 도시의 중심을 관통하는 길이 3680㎞의 오브강은 서부 시베리아의 중요한 강 중 하나로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부설될 때 그 위에 철교가 놓이게 되었다. 다들 이 다리가 1893년에 개통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민영환(閔泳煥)은 <해천추범(海天秋帆)>에서 1896년 9월1일 맑은 날 이곳에 도착했는데, 철교가 놓이는 중이라서 기차에서 내려 배를 타고 오브강을 건넜다고 기록하고 있다. 생생한 현장 기록이라서 믿음성이 있다. 지금은 신·구 철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자잘한 보수를 해오다가 1995년에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마쳐 지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높은 교각이 인상적이다. 강변의 부드러운 모래사장과 넓은 풀숲, 20도 안팎의 수온, 여름철에는 수영과 피서를 즐길 수 있는 훌륭한 휴양지라고 한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본부 입구.

돌아오는 길에 그 유명한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에 들렀다. 시 남쪽 30여㎞ 지점에 자리한 인구 10만명의 아담한 공원도시이다. ‘아카뎀’은 ‘아카데미’, 즉 ‘과학(기술)’이고, ‘고로도크’는 ‘작은 도시’란 뜻이니, 아카뎀고로도크는 ‘작은 과학도시’란 말이다. 우리네 대전 대덕연구단지를 연상케 하는 고장이다. 냉전시대를 가파르게 치닫고 있던 1950년대, 미국의 첨단 과학 육성정책에 자극을 받은 흐루시초프는 이 과학도시의 조성을 결심한다. 드디어 1950년대 말에 고속으로 소련 과학의 교두보로 완공된다. 핵물리학·우주과학·천체물리학·특수금속학·미생물학·위성통신·지질탐사 등 다양한 첨단과학 분야에 특화된 50여개의 연구소와 400여개의 보조연구소가 들어섰다. 노보시비르스크 국립대학과 23개의 단과대학은 우수한 과학도들을 양성하고 있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본부도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러시아어로 ‘동반자’란 뜻, 1957년 10월 발사)와 전투기 대표주자인 수호이 기종도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첨단과학 분야의 가장 우수한 연구자들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몰려왔다. 그러나 졸속한 페레스트로이카는 그들의 해외 유출로 나타났다. 한동안 웅성거리던 과학도시는 일시에 암울한 유령의 도시로 변했다. 다행히 지금은 고부가가치의 과학연구에 시동이 걸리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부상해 매해 90여회의 과학 박람회가 열리고 1000개의 외국 회사를 유치하게 되자 쓸쓸히 빠져나갔던 사람들이 슬슬 돌아온다고 한다. 과학과 학문의 숭고성이 무망한 정치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통절한 교훈이다.

울타리가 쳐진 과학도시는 아름드리 나무가 빼곡한 울창한 수림 속이다. 휴양림을 방불케 하는 쾌적한 환경이다. 주택과 모든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모든 과학연구 활동을 총지휘하는 통합기관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본부를 방문했다. 본관 1층만을 여행객들에게 공개하는데, 과학도시가 걸어온 길을 알리는 홍보물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어 곁에 있는 ‘돔우쵸니크’, 즉 ‘과학의 집’을 방문했다. 1층에는 휴식공간을 겸한 갤러리가 있다. 호방한 러시아의 대자연을 그린 몇 장의 유화는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2층에 있는 도서관과 콘서트홀을 둘러봤다. 일반 홍보용 시설에 불과해 과학의 도시 심연에 깔려있는 최첨단의 비경(秘境)은 접할 수가 없다. 단, 과학도들의 영롱한 눈빛과 얼굴에서 불타는 탐구열을 읽을 수 있다. 다양한 인종의 학도가 삼삼오오 컴퓨터 앞에 모여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토론하는 모습은 자못 대견스러웠다. 이 과학도시에는 물리수학 영재학교란 특수학교가 있다. 시베리아 전역에서 11~12세의 우수한 아동들을 선발해 물리수학 등 기초과학을 교육한다고 한다. 이들이 있기에 이 나라 과학의 전망은 창창하다.
 
오브 강 위의 신·구 철교.

떠나기에 앞서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이 과학도시의 창시자인 미하일 라프렌티예프(1900~80)의 동상을 숙연한 자세로 둘러봤다. 카잔에서 태어난 그는 모스크바대학 물리학 및 수학부의 학부와 대학원을 수료하고 잠깐 프랑스에 유학하고 돌아온 후 평생을 폭발에 관한 연구에 바쳤다. 1957년 소비에트연방 과학학술원이 성립되면서 시베리아 지부의 첫 지부장으로 아카뎀고로도크의 창설을 주도했다. 오늘도 과학의 아버지로서 후학들의 앞길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학자와 학문의 무게를 제대로 헤아려볼 줄 아는 사회만이 비전이 있는 문명사회다.

비록 주마간산(走馬看山)식 견학이었지만, 아카뎀고로도크는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이 시대의 참 학문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사색의 불을 지폈다. 일정한 소명이 부여된 시대를 사는 인간의 사색은 결코 시대와 동떨어질 수 없다. 시대의 소명에 따르는 것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사명이고, 소명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명감이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사명인(使命人)이다. 사명인만이 진정한 시대인이다. 소명에 따른 사명을 자각하는 것은 인간의 최고 지각이며, 그 사명을 수행하는 것은 인간의 최고 가치이다. 따라서 시대의 소명에 충실한 학문만이 참 학문이다. 흔히들 학문은 ‘초시대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참된 학문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빛을 발하며 미래지향적으로 학문을 추구하라는 뜻이지, 초연하게 시대의 소명을 떠나 학문이 존재할 수 있다거나, 소명을 무시한 채 유아독존 격으로 상아탑 속에서 학문을 하라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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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망중한, ‘실바’ 관람과 생일파티

ㆍ이역만리서 만난 동포 “고맙재이오, 잘 가오”
ㆍ러시아 예술의 샘터, 시베리아
ㆍ열광적인 뮤지컬 보고나니 겹쌓인 여독도 말끔히 풀리고…
 
건설된 지 120년도 채 안 되는 노보시비르스크는 ‘신흥’ 도시답지 않게 볼거리가 많다. 아마도 러시아의 정중앙에 위치하면서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 가장 큰 기차역과 가장 큰 도서관, 가장 큰 댐 등 기록과 더불어 과학의 메카 아카뎀고르도크와 소문난 박물관과 극장 몇몇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혹한에 부대끼는 일행의 시베리아 답사 노정에서 절반(7일간)을 넘기고 있는 터라 이런 곳에서 잠깐 다리쉼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를 테면 망중한의 여유다. 노독이 겹쌓이는 여행에서 이것은 여정을 더 활기차게 이어가기 위한 일종의 ‘재충전’이다. 그래서 여기서 이틀 여정을 소화하기로 했다.
 
노보시비르스크의 재래시장 입구.

첫 날 오브 강 철교와 아카뎀고르도크를 둘러보고 나서 찾아간 곳은 야외 철도박물관이다. 우중충한 하늘에서는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지난 2000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러시아의 3대 철도박물관 가운데 가장 큰 박물관이라고 한다. 나머지 두 개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 가장 클 수밖에 없는 것은 TSR(시베리아 횡단철도)·TMR(만주 횡단철도)·TMGR(몽골 횡단철도)·투르크-시베리아 철도(중앙아시아의 알마티와 비쉬켁, 타슈켄트 행) 등 주요한 철도가 다 이곳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3000여 평의 공간에 67대의 열차가 진열되어 있다. 앞으로 천장을 만들어 전천후 관람이 가능하도록 할 것이라고 현장 안내원은 소개한다. 전시품의 위용도 위용이거니와 종류가 그렇게 다양할 수가 없다. 100여 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차종별과 시기별, 용도별로 잘 정리해 놓았다. 2002년에 전 구간의 전철화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달리던 각종 증기기관차며 디젤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객차의 변천 모습이다.

150여 년 전인 184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으로 객차가 만들어진 이래 내부 시설은 부단히 변해왔다. 처음엔 4개 등석으로 세분화했으나 혁명 이후에는 2인 1실의 1등석과 4인 1실의 2등석 두 가지로 간소화했다. 1950년대 중반 필자가 처음 타봤던 이런 간소화식 객차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내부시설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그 이름도 지금은 2인 침대칸은 ‘룩스’로, 4인 침대칸은 ‘쿠페’로 달리 부르고 있다. 객차의 길이도 24m나 길어진데다가 24량의 장대 열차로 달리니 열차의 총 길이는 근 500m나 된다. 개통 이래 역사의 고비마다에서 철도운송에 공을 세운 기관차엔 일일이 표창마크가 붙어 있다. 섭씨 1000도를 유지하면서 각종 철을 녹여내는 용광로 열차, 레일을 놓는 열차, 눈 치우는 열차, 병원 열차 등 생전 처음 보는 특수 열차들이 줄줄이 선을 보인다.
 
애환과 변환(變換)으로 가득 찬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연혁을 현장에서 두루 알고 나니 지금 그 위로 달리고 있는 의미가 새롭게 되새겨진다. ‘지즉위진간’(知卽爲眞看), 즉 ‘앎으로써 참이 보인다’라는 우리네 선현들의 말이 새삼 실감난다. 누군가가 현장 답사를 독려하는 데 ‘아는 것만큼 보인다’라는 서양 사람의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되뇌고 있는데, 사실은 우리네 선현들은 그와 맞먹는 지혜로운 말을 이미 벌써 이렇게 써왔다. 제 것은 모른 채 무턱대고 남의 것만을 좇는 허무함을 일깨워주는 일례라 하겠다.

시베리아의 통나무 귀틀집 아즈바를 연상케 하는 한 전통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때우고는 서너 시간 각자 자유 휴식을 취했다. 한결 거뜬한 기분으로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뮤지컬 코미디 극장을 찾았다. 마침 <실바>라는 뮤지컬을 공연하고 있다. 입장료는 한 장에 450루블(미화 19달러)이다. 약 500명 수용의 극장은 빈 좌석 하나 없이 꽉 차있다. 주말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현지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평시도 이와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대답한다. 배우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관람객들의 진지한 모습도 퍽 인상적이다. 원래 러시아인들은 어떤 유의 공연이든 즐기는 민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모스크바가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전화에 휩쓸리고 있는 그 아찔한 순간에도 극장은 여전히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만큼 러시아인들은 예술에 열광적이다.

<실바>는 1915년 독일 작가와 헝가리 작곡가의 합작품으로 창작된 유명한 뮤지컬인데, 이곳에서 공연하는 <실바>는 러시아어로 번안한 것이다. 줄거리는 신분이 낮은 카바레의 기녀(妓女) 실바를 둘러싼 사랑의 이야기이다. 에드먼드라는 지체 높은 젊은이가 예쁘고 착한 실바를 사랑하지만 부모의 반대에 부딪친다. 혹여 변호사 앞에서 혼인증서를 쓰면 부모의 반대가 누그러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부모는 막무가내다. 부모는 다른 여자와의 정혼을 강요한다. 그 즈음 에드먼드의 어머니도 실바와 같은 기녀 출신임이 밝혀지자 부모의 고집은 한풀 꺾인다. 드디어 에드먼드와 실바는 결혼에 골인하면서 무대는 환희의 축제 속에 막을 내린다. 장장 두 시간 반의 화려한 무대가 펼쳐진다. 노래와 춤, 음악의 대하모니이다. 연극의 짜임새나 배우들의 연기력이 워낙 뛰어나 내용을 파악하기엔 어려움이 없다.
야외철도박물관에 전시된 증기기관차와 객차.

러시아는 어느 자그마한 도시에 가도 극장이 다 있다. 지난 80년대 말 통계에 의하면 구소련 전역에 640여개의 극장이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 극장은 시대마다의 산 증인으로서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찍이 8세기경부터 나타난 일종의 유랑연극단인 ‘스코모로히’(어원은 그리스어의 ‘익살꾼’)가 바로 그 모태다. 소규모의 연극이나 노래·춤·만담·연주·요술·인형극·동물 재주 등 다채로운 연기 종목을 갖고 도시나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문자 그대로 익살을 부린다. 많은 경우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지배계층들의 낯을 찌푸리게 하곤 한다. 그래서 1648년 황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칙령을 내려 이런 유의 공연을 금지시키고 익살꾼들을 벽지로 추방한다. 그러나 누를수록 튀어 올라오는 것이 사회의 대응법칙일진대, 익살꾼들의 활동은 오히려 더 활발해지고 극장은 늘어난다. 1856년 처음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상설 극장이 선을 보였으며, 심지어 농노 출신들로 구성된 농노극장까지 나타난다. 이러한 전통이 계승되어 소련 시절에는 곳곳에 대형 극장들이 세워져 러시아 예술의 선도 구실을 해왔다. 러시아 극장은 모두 국립이나 공립으로 운영되며, 극장과 극단은 일체로서 상설 극장에는 전속 극단이 있다. 이 뮤지컬 코미디 극장의 복도 벽에 붙어있는 공연 프로그램을 보고 깜작 놀란 것은 상연 종목이 매일 바뀐다는 사실이다. 일요일에는 마티네(오후에 행하는 흥행)로 대체한다.

신비의 땅, 시베리아는 러시아 예술의 샘터이자 보고이다. 돌이켜보면, 필자가 그 시절 러시아를 알기 시작한 것은 이 광활한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무대로 한 영화를 통해서이다. 그래서 이틀 전 이곳에 오는 열차 속에서 일행과 함께 DVD로 감상한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와 <닥터 지바고>는 그 시절과의 수십 년 간극을 뛰어넘어 감회를 새롭게 한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시네마스코프의 웅장한 화폭에 담아낸 대서사시가 펼쳐진 그 황홀한 현장들을 지금 막 지나가고 있다. 시베리아의 대초원을 달리는 증기기관차의 처연한 울음으로 표현된 연인들의 그 애절한 사랑은 마냥 ‘잠자는 미녀’ 시베리아의 우울한 어제를 속삭여주는 듯하다. 다행히 <실바>는 시베리아의 이러한 고질적 비극에서 탈피해 낙관적 종막을 고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후련하게 해준다.
 
뮤지컬 <실바>의 두 주인공 실바와 에드먼드.

내친김에 ‘망중한’을 더 즐기라는 하늘의 뜻으로 보아 오늘은 일행 중 차은숙 선생의 생일파티를 마련했다. 늦은 시간이지만 호텔 4층 로비에 다들 빙 둘러 앉았다. 누구는 축하 케이크를, 누구는 음료수를, 또 누구는 당과류를 장만해 왔다. 나지막한 소리로 ‘생일 축하합니다’라는 축가를 부르고 나서 곧바로 덕담으로 이어진다. 필자에게 청이 들어왔다. 금방 떠오르는 것이 ‘나이론(論)’이다. 인간의 나이에는 생물학적 나이와 사회학적 나이의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무 테나 상어의 지느러미, 그리고 달력처럼 한해 한해를 넘기는 숫자를 따지는 ‘생물학적’ 나이다. 작금 이런 계산법의 ‘불합리성’이랍시고 지적하는 역설적인 반어(反語)로 “나이는 숫자가 아니다”라는 유행어가 있다. 이에 비해 사회학적 나이는 경륜에 빗대는 ‘사색’과 ‘인내심’을 잣대로 헤아리는 나이이다. 사색과 인내심은 동전의 양면으로서 나이를 먹어가는 것만큼 깊어지며 또 깊어져야 한다. 바꿔 말하면, 사색과 인내심은 속된 말로 ‘나이 값’을 매기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고 인내심에 인내심을 보태면서 나이를 먹어가야 한다. 물론 사회적 나이라도 인간의 생물학적 노화는 막을 수가 없다. 문제는 어떻게 노화하는가 하는 것이다. 노화는 육체적 늙음을 말하는데, 그 늙음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늙어서 죽는’ 것보다 ‘늙어서 낡아지는’ 것이다. 인간에게 늙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낡음은 결코 그렇지 않다. 늙음과 낡음은 정비(正比)관계도 아니고 동격어는 더더욱 아니다. 늙음이란 성숙이나 기여를 뜻하지만, 낡음은 썩음이나 쓸모없음의 대명사이다. 그래서 늙었다고 해서 낡아서는 안 되며, 늘 새롭고 젊게 살아야 한다. 한 마디로 ‘늙은 젊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흔히 말하는 노익장(老益壯)의 본새이다.

이튿날 정오께 재래시장 참관에 나섰다. 시장은 문어귀부터 장꾼들로 붐빈다. 옛날엔 시장도 국영이었으나 지금은 태반이 사영(私營)이라서 물건 값도 천차만별이다. 시장의 한쪽 구석엔 고려인 아주머니들의 판매대가 눈에 띈다. 주로 김치나 두부, 콩나물, 부침개, 자반 같은 한국식 반찬감을 팔고 있다. 인사하자 너나없이 답례는 하는데, 더러는 러시아 말로 한다. 한국말인 경우도 “어디서 왔슴두”라고 억양 짙은 함경도 사투리다. 아무튼 이역만리에서 혈육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이것저것 구입했더니, “고맙재이오, 잘 가오”라고 인사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경찰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촬영을 일절 못하게 한다. 인파 속에 사라질 때까지 손을 저으며 바래주던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이어 발길을 옮긴 곳은 시립역사박물관이다. 49루블을 물고 촬영권을 얻었다. 작지만 알찬 박물관이다. 15만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소비에트 해체시기까지의 시베리아 역사발전 과정을 시기별로 일목요연하게 구분해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횡단철도 건설을 비롯해 시베리아 개척사에 눈길이 모아진다. 쟁기와 낫, 맷돌을 비롯한 여러 가지 농기구가 우리의 것과 흡사한 점이 너무나 신기로웠다. 박물관을 나서자마자 지하철을 둘러봤다. 이 도시에는 3개 노선의 지하철이 있다. 러시아 지하철은 어디 가나 지하의 깊은 곳을 운행하므로 플랫폼까지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상당히 길고 속도가 빠르다. 역 벽면 장식은 화랑을 방불케 할 정도로 화려하다. 우리네 지하철역과 다른 점은 1회용 표는 입구의 개표기에 집어넣기만 하면 그만이고, 출구에는 개표기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출구에서 개표기를 통과하느라 기다리는 번거로운 일은 없게 된다.

정감이 드는 도시 노보시비리스크에서의 마지막 망중한은 오브 강변의 얼음조각공원에서 보냈다. 채색 얼음으로 조각한 각종 모형들, 특히 우람한 뉴욕의 여신상과 이곳 성 니콜라이 예배당은 오브 강의 눈부신 저녁노을을 머금고 신비의 빛을 발하고 있다. 얼음 조각도 조각의 유의미한 한 장르임을 비로소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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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시베리아의 개척과 러시아의 동진

ㆍ‘미지의 동토’ 몽골 멍에 벗고 마침내 장악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이틀간 머문 다음 시베리아의 서쪽 끝자락 예카테린부르크를 향한 장도에 올랐다. 아득히 펼쳐진 설원과 타이가(침엽수림대), 그리고 스텝(초원지대) 속에 점점이 박혀있는 도시와 마을들, 그 모든 것을 동서로 이어준 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분명 신비의 땅 시베리아가 400여년 전 잠에서 깨어나 문명의 세계를 향해 기지개를 켠 인고의 산물이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개척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는 숱한 오해와 왜곡이 난무했고, 피와 눈물, 한이 맺혀 있다. 전설 같은 데카브리스트의 이르쿠츠크 개척사에도 얼마나 많은 애환이 서려있는가. 이 모든 것이 달리는 열차와 함께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시베리아의 농촌 풍경.

16세기 말엽 카자흐 기마병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만 해도 시베리아는 고요한 잠속에 묻혀 있었다. 모든 것이 신비에 싸여있던 세상이다. 평균 높이가 500m에도 못 미치는 나지막한 우랄산맥을 사이에 둔 러시아조차도 그 동쪽 세계에 관해선 무지 그 자체였다. 일찍이 11세기부터 노브고로드인들을 비롯한 러시아 사람들이 간혹 모피 같은 토산품을 구하기 위해 우랄산맥을 넘나들었지만, 그 동쪽에 있는 세상에 관해서는 괴담과 수수께끼로만 입방아를 찧었다. ‘머리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어깨 사이에 입이 있고, ‘여름 내내 물속에서 살며’ ‘땅속을 걸어 다닌다’는 등 실로 허무맹랑한 괴담으로만 알고 있었다.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속을 달리는 말 썰매.
이에 비해 서구에서는 일찍부터 이 지역에 관해 관심을 갖고 탐험도 하면서 이러저러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16세기 초 영국은 아시아를 향한 항로 개척을 위해 북빙양을 에돌아 시베리아의 오브 강을 거쳐 중국으로 진입하려는 탐험을 몇 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시베리아에 관한 서방의 최초 기록은 폴란드의 역사학자 마트베이가 1517년에 쓴 <두 싸르마찌예에 대하여>란 논문이다. 그는 당시 폴란드에 온 러시아인들로부터 얻은 자료에 근거해 러시아 동쪽 지역, 즉 시베리아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몇몇 곳을 지명하면서 각각 고유 언어와 풍습이 있음을 밝힌다. 그러나 이곳 토착민은 경작을 하지 않고 빵과 금전에 대한 개념이 없으며 동물 가죽을 뒤집어쓰고 사는 ‘짐승 같은’ 원시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대사 시기즈문드가 남긴 단행본 <모스크바에서의 일들에 관한 기록>(1549년)에도 유사한 내용이 실려 있다. 저자는 1516년과 1526년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에 다녀온 후 이 책을 저술했다. 이 책 역시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사이에 시베리아를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오브 강 일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사실적인 것도 있지만 강 유역에 살고 있는 ‘검은 인간’들은 11월 말에 죽었다가 이듬해 4월에 되살아난다든가, 오브 강 상류로 추측되는 ‘꼬싸마’ 강 건너편엔 털북숭이 인간, 때로는 개의 머리를 하고 다니는 원시인이 살고 있다는 등 엽기적인 우화를 전하고 있다. 이렇게 북빙양의 해상탐험에 주안점을 둔 시베리아에 관한 서구인들의 지식은 비록 러시아인들에 비해 약간 앞서고 기록도 남겼지만 내용은 그것이 그것이다.

러시아이건 서구이건 간에 이렇게 시베리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개척할 수도 없었던 것은 몽골에 의한 차단이 그 주요인이다. 바꿔 말하면, 러시아와 서구에 대한 몽골의 유린과 지배가 제거됨으로써 비로소 러시아와 서구는 시베리아를 제대로 이해하고 개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제2차 몽골 서정군이 유럽 전역을 석권하고(1235~1244년) 그 결과로 출현한 킵차크 칸국이 230여년 동안이나 러시아를 지배함으로써 서구나 러시아는 동방 시베리아에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특히 러시아는 인접하고 있음에도 감히 시베리아에 손을 뻗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칭기즈칸의 맏아들 주치의 차남 바투가 이끈 15만명의 제2차 서정군은 일격에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을 초토화시키고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수도로 한 킵차크 칸국(1243~1480년)을 세워 러시아를 지배한다.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러시아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그 굴욕을 표현한다. ‘타타르’라는 말은 원래 몽골의 한 부족명인 달단(달달)의 음사였으나, 러시아에 그 이름이 전해지면서 ‘지옥’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타르타로스’와 연관시켜 몽골인들에 대한 비칭으로 사용했다. 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까지를 포함한 유목기마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통칭으로 되어버렸다. 당시 서구에도 이 이름이 전해졌으며, 오늘날까지도 러시아 경내에는 ‘타타르’라는 이름을 가진 몽골족 후예들이 살고 있다.

‘후회는 동정의 열매’라는 칭기즈칸의 냉혹한 가르침을 받든 몽골 지배자들은 러시아 사회를 무참하게 짓밟고 파괴했다. 몽골의 수탈에 관해 “한 거대한 기생충이 러시아 민중의 생체에 달라붙어 그 즙을 빨아먹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생명력을 고갈시켰고 때때로 그 생체 안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고 한 역사가는 묘사한다. 이러한 굴욕적인 ‘몽골의 멍에’가 러시아의 서부 지방에서는 약 1세기, 북부와 중부 지방에서는 약 2세기, 시베리아와 인접한 남동부 지방에서는 근 3세기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일세를 풍미하던 킵차크 칸국의 위세도 내홍과 더불어 러시아 여러 공국들과의 대결에서 전패를 거듭함으로써 ‘몽골 불패의 신화’는 깨진다. 드디어 신흥 티무르 제국의 파죽지세(破竹之勢) 앞에서 칸국은 무너지고 만다. 말 위에서 싸워 제국을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안장에 앉아 제국을 통치할 수는 없다는 유목사의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 킵차크 칸국은 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

이제 러시아의 통치권은 러시아 평원의 중심부에 자리한 모스크바 강변의 자그마한 마을에서 일어난 모스크바 공국(1271년)의 손으로 넘어간다. 모스크바 공국은 주변의 여러 공국들을 병합하고 정교회를 영입해 급속하게 세를 키운다. 급기야 킵차크 칸국의 예속에서 벗어나 러시아의 희망으로 떠오른다. 특히 1480년에 등극해 44년 동안이나 지배자로 군림한 이반 3세는 대통일의 모스크바 시대를 선포하면서 강력한 전제주의적 민족국가 건설을 지향한다. 그는 자기 호칭에 로마의 황제 이름인 ‘카이사르’에서 따온 ‘차르’란 이름을 덧붙여 자신이 전제군주임을 과시한다. 그를 이어 모스크바 시대를 선도한 사람은 그의 손자 이반 4세이다. 3살에 왕위에 올라(1533년) 17살 때 친정(親政)에 나선 그는 러시아 역사에서 뇌제(雷帝, 그로즈니)란 이름을 남긴 유명한 차르이다. 뇌제란 벼락처럼 두려운 군주이자 번개처럼 위광이 빛나는 군주라는 이중적 뜻을 함유하고 있다. 이 뜻이 말해주듯 이반 4세는 자신의 전제주의적 통치를 위해서는 나라를 피로 물들인 폭군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나라를 튼튼한 기반 위에 올려놓은 유능한 군주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그의 54년간의 통치시대는 모스크바 시대의 장려한 서막을 장식한 전환기적 시대로서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 확장을 수반한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일어난 것이 바로 ‘미지의 세계’ ‘잠자는 미녀’ 시베리아에 대한 동진과 개척이다. 넓이로 보면 유럽 러시아의 두 배가 넘는데 사람은 거의 살지 않고, 간간이 들려오는 풍문에 의하더라도 풍부한 부존자원을 품고 있는 땅, 그것도 나지막한 우랄산맥만 넘으면 가 닿을 수 있는 땅, 시베리아는 하늘이 내려준 ‘복덩어리’이다. 그 매력에 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선봉장의 투입이다.

그 선봉장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4년간(1579~1582년) 카자흐 부대를 이끌고 시베리아 원정을 단행한 에르마크이다. 카자흐란 한 민족 이름이기도 하지만, 당시는 러시아의 변방에 살던 기마전사 집단을 도거리로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더해 온갖 압제와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방 지방으로 도망간 농민들도 카자흐라고 불렀다. 아무튼 카자흐는 수렵이나 어업, 약탈을 생업으로 하는 집단들이다. 에르마크는 볼가 강을 항행하는 배를 기습해 약탈하는 카자흐 부대의 우두머리이다. 그의 시베리아 원정은 표면상 당시 러시아 문화예술의 후원자로 널리 알려진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사촉하에 진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문은 이반 4세의 특허를 받아 우랄지방에서 모피업과 제염업, 광산업, 농림어업 등을 경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스트로가노프는 에르마크에게 후한 대가를 주면서 당시 우랄산맥 너머 오브 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던 시비르 칸국의 쿠춤 칸으로부터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는 일을 맡겼다. 2년 후에는 다시 에르마크를 불러 시비르 칸국을 정복하면 차르가 후한 보상을 해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정부가 원정에 필요한 무기와 식량 일체를 대줄 것이라고 유혹했다. 에르마크로서는 일확천금의 호기라서 대뜸 승낙한다.

1579년 에르마크는 1000여명의 카자흐 부대를 이끌고 시베리아 원정에 나선다. 오브 강의 지류인 이르티슈 강변에서 벌어진 쿠춤 칸과의 전투에서 초전 대승을 거둔다. 수적으로는 열세이나 화승총으로 무장한 카자흐는 활과 창으로 대응하는 적군을 쉽게 제압한다. 3년 후에 양 군은 시비르 칸국의 수도 시비리에서 다시 대결한다. 에르마크는 후퇴전술로 칸 군을 성 밖으로 유인한 다음 기습작전으로 시비리를 단숨에 함락한다. 그는 시비리 칸국을 통째로 이반 4세에게 헌상하고 후한 상을 받는다. 그러다가 3년 후 에르마크는 칸국의 잔존세력들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해 부상을 입고 도망치다가 이르티슈 강에 빠져 익사한다. 남은 부대는 시비리를 버리고 러시아로 돌아간다. 그러나 유럽 러시아에 대공국의 발판을 마련한 이반 4세에게 시베리아는 ‘낚을 수 있는 사냥감’으로 비쳤다. 그는 정규군을 보내 본격적인 시베리아 진출에 나선다. 1588년과 89년에 튜멘과 토볼스크에 건설한 요새에 의지해 불과 10년 사이에 시비르 칸국을 완전히 정복하여 러시아에 편입시킨다. 일단 전진 기지인 시비르를 장악한 러시아인들의 동진 속도에는 날개가 붙는다. 에르마크의 출전으로부터 70년도 채 안 돼 러시아인들은 5000여㎞를 달려 동쪽 끝 태평양에 다다른다. 그들은 이에 머물지 않고 다시 남하해 중국 청나라 국경 지대인 흑룡강(黑龍江) 일대까지 세를 확장한다. 그러면서 청나라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1689년) 국경분쟁을 해결한다. 저항도 거의 없는 무주공허(無主空虛)의 주인으로 둔갑한 셈이다. 정복사치고는 드문 일이다. 그런가 하면 시베리아 개척사에는 숱한 유형수들의 피와 땀, 한이 서려있다.
 
시베리아에서 출토된 각종 고대 유물.(블라디보스토크 극동대학 박물관 소장)

이 모든 시베리아 개척활동은 우랄산맥 동쪽으로부터 남러시아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지나 부분적으로 북방 침엽수림대(타이가)를 관통해 흑룡강 일원까지 이어지는 시베리아 초원로를 따라 이루어졌다. 이 길의 서단은 전통적인 초원로의 일부이나 동단은 새로 개척된 초원로이다. 러시아는 이 동단 초원로를 통해 시베리아, 특히 동시베리아에서 생산되는 담비와 족제비, 비버 같은 동물의 질 좋은 모피를 대거 수입해갔다. 그리하여 이 동단 초원로를 ‘모피의 길’이라고 부르는데, 이 길은 발해시대의 ‘모피의 길’과 연결된다.

19세기부터 본격화된 시베리아 개발은 오늘날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 각종 광물질, 목재 등 부존자원의 끝모를 보고이다. 더욱이 이 보고 중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20%밖에 안 된다고 하니 시베리아의 미래가 중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찍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시베리아의 자원은 소련의 미래와 우주를 정복할 비밀병기이다”라고 시베리아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한마디로 압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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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아시아와 유럽의 경계 예카테린부르크
ㆍ두 대륙 잇는 혼성도시 경계탑엔 저녁놀만 쓸쓸 …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사는 숱한 애환이 서려 있는 한 편의 긴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가 펼쳐진 현장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보름 동안 횡단열차를 타고 하나하나 누비던 끝에 마침내 그 종장을 향하고 있다. 장마다 실로 드라마틱한 역사의 한 단면들을 실토하고 있다. 울란바토르에서 출발해 이르쿠츠크를 지나 모스크바로 가는 몽골횡단철도(TMGR)를 타고 노보시비르스크를 떠난 지 꼭 19시간43분 만에 시베리아의 서쪽 끝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했다.

아시아 - 유럽 경계탑. 뒤로 난 도로가 경계탑 동쪽의 아시아길.

오는 도중 중간에 좀 못 미쳐 옴스크를 지났다. 어두움이 짙게 깔린 한밤중이라서 희미한 전기불빛만이 얼어붙은 이르티시강을 싸늘하게 비추고 있을 뿐, 시가는 통 분간할 수가 없다. 18세기 초 군사 요새로 건설된 이 도시는 시베리아에서 노보시비르스크 다음으로 큰 도시이며, 인구는 약 120만명을 헤아린다. 옴스크하면 필자에겐 잊혀지지 않는 한 가지 추억이 있어 그저 스쳐 지나갈 수가 없다. 30년 전 바로 이맘때 구소련 ‘뚜104’ 항공기편으로 모스크바를 향하다가 악천후로 이곳에 불시착했다. 덕분에 하루 묵으면서 시내를 둘러봤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이 지금껏 뇌리에 깊게 각인돼 있다. 19세기 중엽, 그는 이곳에 5년 동안이나 유배되어 당시 시베리아의 고달픈 현실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다. 그 모든 것을 담아낸 작품이 바로 <죽음의 집 기록>이다. 시대의 기수로 우뚝 선 대문호는 시대가 영겁(永劫)으로 흘러가도 죽지 않는 법이다.

경계탑으로부터 유럽 각지까지의 거리 표지판.

예카테린부르크는 러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89개 행정구역 중 하나인 스베르들로프스크 주의 주도로서 우랄산맥 동쪽 기슭, 토볼강 지류인 이티지강 연안에 자리하고 있다. 약 130만명이 사는 이 도시는 우랄산맥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로 1721년에 건설되었다. 2년 후에 표트르 대제가 황후인 예카테리나(후에 예카테리나 1세 여제)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이곳에 러시아의 첫 제철공장이 세워지면서 야금공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한다. 특히 1783년에 건설된 시베리아 횡단도로와 19세기 말에 부설된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도시를 가로지름으로써 도시의 면모는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1924년 이곳에서 혁명을 이끌었던 스베르들로프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이 스베르들로프스크로 바뀌었지만, 소련 연방이 해체된 후엔 예카테린부르크란 옛 이름으로 복원된다. 그러나 철도역만은 아직 그대로 스베르들로프스크역으로 불리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이 도시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유럽에서의 전란을 피해 군수산업을 비롯한 중공업 공장들이 대거 우랄산맥 동쪽 기슭의 안전지대인 이곳으로 옮겨진다. 이것을 발판으로 전후에도 공업이 계속 성장해 경제규모로는 러시아에서 세 번째를 자랑하는 ‘부자 도시’로 자리매김된다. 오늘날 우랄지방의 최대 중공업 도시로서 80% 이상이 군수산업에 기반을 둔 철강·화학·야금·합성수지·건설자재·직물 등 각종 공장이 가동되고 있다. 약 3만개의 기업 가운데 대기업이 1000여개에 달한다. 철강산업으로 유명한 ‘우랄마쉬’의 경우 종업원 수가 1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예카테린부르크는 과학도시이기도 하다. 200개 이상의 연구기관과 우랄대학을 비롯한 16개의 대학이 있으며, 기계공학과 지리학 및 건축학 분야에서는 단연 압권이다. 시내에 산재한 600여개의 기념물 중 43개가 러시아의 국보로 지정되었을 만큼 유서 깊은 도시이기도 하다.

예카테린부르크는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 의해 형성된 이른바 ‘우랄파’란 막강한 정치세력의 본향으로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한다. 시 근처 한 시골에서 태어난 옐친은 우랄 공업대학 건축과를 나와 시 공산당 서기장을 걸쳐 일약 모스크바 시당 서기장으로 발탁된 무렵인 1991년 8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항거하는 쿠데타를 묘하게 역이용한다. 그가 쿠데타군의 탱크 위에서 한 연설이 뭇사람들의 환심을 얻어 급기야 크렘린궁의 주인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러나 막강하던 경제가 절반 이하로 곤두박질하는 최악의 곤경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그 거구의 옐친도 알코올 중독과 심장병으로 하야하고 만다. 올해 6월 이곳에서 러시아·중국·인도·브라질의 정상들이 모여 이른바 ‘브릭스 정상회담’을 개최할 정도로 이 도시의 정치적 위세와 명망은 여전히 높다.

도심에 연못을 낀 예카테린부르크는 ‘수채화 같은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촐할 뿐만 아니라, 높낮음과 색조가 잘 어울리는 고풍스러운 유럽식 도시이다. ‘탈아입구(脫亞入毆)’, 즉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에 들어가는 정서가 물씬 풍긴다. 조금은 들뜬 기분 속에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이 처형된 자리에 세워진 이른바 ‘피해성당(일명 로마노프 성당)’이다. 성당은 곤욕이나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채 하얀 눈 속에서 야릇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다. 5년 전에 지은 성당의 1층은 처형지와 박물관이고 2층은 기도소이다. 몇몇 신자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성가를 부르며 기도를 올리고 있다. 벽에는 낯익은 성화나 이콘화들과 함께 처형된 황제 일가족 7명(황후, 4명의 딸, 11살의 황태자 알렉세이)의 초상화, 그리고 그들의 감금생활상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니콜라이 2세 처형지에 세워진 ‘피해성당’ 외경.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차르의 전제통치에 항거하는 2월혁명이 일어나자 퇴위한다. 그리곤 켈렌스키 임시정부의 감시 하에 우랄지방의 한 평범한 민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7월16일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체프란 사람의 집에 감금된다. 그런데 그를 구심점으로 삼는 백군(白軍)이 구출작전을 펼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적군(赤軍)은 서둘러 당일 황제 일가족과 의사 및 하인 등 11명을 지하실에서 총살한다. 황제는 비명에 갔다. 대관식에서 목걸이가 땅에 떨어져 불길한 징조라고 하던 수군거림이 성자의 예언처럼 맞아떨어졌다. 시신들은 소각되었다느니, 광산에 버려졌다느니, 야산에 파묻혔다는 등 추측이 난무한다. 한때 타다 남은 황제의 두개골이랍시고 DNA 검사를 한 결과 가짜로 판명된 소동까지 일어났다. 막내딸 아나스타샤 공주의 생사에 관한 미스터리는 오랫동안 세간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공주가 학살되기 직전 경비병의 도움으로 피신한 후 신분을 바꿔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920~30년대에는 공주임을 자처하는 미모의 여인들이 나타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러나 1991년 소련 연방이 해체된 후 예카테린부르크 근처 숲속에서 발견된 시신들이 황제 일가족 7명의 시신들이라는 것이 확인되면서 공주의 죽음에 관한 소문은 낭설로 그치고 말았다. 러시아 정부는 비운의 제정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을 순교자로 인정, 정교회의 성인으로 시성(諡聖)하고 1998년 황제의 시신을 성 페테르부르크의 성 베드로 성당에 안치했다. 이로써 희대의 비극은 막을 내린다.

다음으로 발길을 옮긴 곳은 유명한 광물박물관이다. 겉보기에는 허름한 집 2층에 차려놓은 박물관이지만, 속은 실로 알차다. 안내원 마리나는 사설 박물관이라고 소개하는데, 규모나 가치로 미루어 잘 믿어지질 않는다. 2층 전체가 진열장인데, 왼쪽 벽에는 이곳 특유의 광물을, 오른쪽 벽과 중앙에는 러시아 전역에서 나는 광물을 두루 전시하고 있다. 한결같이 기기묘묘하고 현란하다. 예카테린부르크에는 멘델레예프 원소주기율표에 나오는 모든 광물이 매장되어 있으며, 세상에 알려진 광석과 광물의 절반 이상이 우랄산맥 속에 묻혀 있다고 하니 이 지역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광물천국’이다. 그리하여 보석가공업이 발달해 여러 가지 자연산 보석을 이곳 나름의 방식으로 세공해 값진 보석을 만들어내고, 시내 곳곳에 화려한 자연석으로 만든 브로치나 반지 같은 장신구 공예점들이 즐비하다. 어떤 보석은 이곳에서만 가공되고 생산된다. 그래서 전문 보석 매매상이나 보석 애호가들이 이곳에 폭주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좋은 보석은 경매처럼 불티나게 팔린다. “눈에 띌 때 사두라”는 러시아 속담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예카테린부르크하면 떠오르는 것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 상에 위치한 도시라는 인상이다. 그만큼 이 도시는 아시아와 유럽의 두 얼굴을 함께한 혼성도시로 유명하다. 그 만남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바로 시 중심에서 17㎞ 지점에 자리한 아시아-유럽 경계탑이다. 남북으로 2000여㎞나 길게 뻗은 우랄산맥이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루다보니 넘나드는 길이 여러 갈래이다. 그래서 경계탑(혹은 경계비)만도 44개나 있고, 그 모양도 오벨리스크형이나 첨탑형 등 각이하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원래 ‘우랄’이란 ‘돌로 이루어진 경계’라는 뜻이다. 보통 ‘우랄’이라고 하면 유라시아 대륙의 북부에서 아시아와 유럽을 갈라놓는 분계선으로서의 산맥을 말하나, 넓은 의미에서는 이 산맥을 중심으로 동서에 펼쳐진 넓은 평원을 지칭하기도 한다. 우랄산맥은 북유럽의 카라해로부터 카자흐스탄 북부까지 뻗어 있다. 지질대로 놓고 말하면 북쪽의 툰드라에서 시작해 타이가와 삼림 스텝을 지나 남쪽의 사막지대로 이어진다. 평균 높이가 300~500m로 산세는 낮은 편이다. 특히 중간 지대는 상대적으로 낮다. 북쪽에 가장 높은 나로드나야봉(1894m)이 솟아있고, 남쪽에 다음으로 높은 야만타우봉(1638m)이 있다. 약 3억년 전에 조성된 이래 침식이 심해 오밀조밀한 호수와 아기자기한 바위를 많이 거느리고 있다. 카스피해로 흘러들어가는 우랄강(길이 2534㎞)은 남쪽 기슭에서 발원한다.

교통안전을 기윈해 채색 천을 둘러놓은 ‘세르게’.

경계탑 입구에 들어서자 교통안전을 기원해 여러 가지 색깔 천을 두른 ‘세르게’(한국의 서낭당이나 몽골의 오보와 비슷함)와 경계탑으로부터 유럽 각지까지의 거리 표지판, 그리고 아시아-유럽 경계이론의 창시자인 타티쉐프의 석판상이 눈에 띈다. 350루블의 입장료를 물고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가 경계탑에 이른다. ‘아시아’와 ‘유럽’이란 러시아어 단어가 새겨진 받침돌 위에 20여m쯤 되어 보이는 삼각 뾰족 철탑이 세워져 있다. 받침돌 한가운데를 지나는 선이 바로 두 대륙을 나누는 분계선이다. 사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것은 일찍부터 지리학계의 논제였다. 특히 두 대륙을 공유한 러시아가 16세기부터 이 문제를 상정하자 그 논의에 일부 서구 학계도 가담한다. 그러나 오리무중으로 있다가 18세기에 이르러 러시아의 타티쉐프가 수자원의 원천과 식물의 분포가 확연히 다르다는 자연 지리적 근거에 준해 우랄산맥-우랄강-카스피해-흑해-터키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기준으로 하는 경계 설정을 주장한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우거진 적송 숲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 냉철한 경계 철탑에 저녁노을이 비끼기 시작한다. 경계탑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아시아길이, 서쪽으로 유럽길이 휑하니 뻗어 있다. 무엇이 이 두 대륙을 갈라놓고 있는가? 꼭 갈라놓아야만 하는가? 분명 다름이 있기에 갈림이 있는 법, 그렇다면 둘 사이의 다름은 과연 무엇일까? 왜 그런 다름이 생겼을까? 새삼스러운 상념은 아니지만, 그 경계 지점에 서고 보니 그 해답이 더더욱 간절해진다. 역사란 부침(浮沈)의 과정일진대, 유럽과 아시아는 서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오늘로 이어져 왔다. 그 과정은 선의라기보다 악의 경쟁에 더 치우쳤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러한 어제를 뒤로 하고 상부상조하면서 나란히 공생공영하는 길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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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러시아의 정체, 그 두 얼굴

ㆍ쌍두 독수리 아시아 - 유럽 ‘왜 나뉠까’
ㆍ지역·이념따라 정체성 뒤섞여…두 대륙 결합의 상징으로 국장(國章) 채택

러시아의 유럽화를 이끈 표트르 대제의 기마동상(상트페테르부르크).

우랄산맥의 동쪽 기슭에 자리한 아시아 러시아의 서단(西端)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유럽 러시아로 이어지는 길은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아닌 항공로를 택했다. 현지시간 새벽 4시(모스크바 시간 새벽 2시)에 일어나 어슴새벽이 채 가시기 전에 공항에 도착했다. 우랄의 삭풍을 헤가르며 러시아 항공 WR 019편은 정각 8시에 공항을 이륙해 기수를 서쪽으로 튼다. 흐릿한 날씨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간 우랄이 어스레하게 자태를 드러낸다. 그제야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 들어간다는 실감이 난다. 순간, ‘나지막한 산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지역이 갈라져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얼까? 구경은 그 어떤 정체성, 이를테면 자연 지리적 정체성이나 인문 사회적 정체성이 달라서 오는 갈림일 텐데, 그렇다면 그 갈림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인다.

사실 지구상에서 맞붙어 있는 육지가 두 대륙으로 나눠진 경우는 러시아 말고는 거의 없다. 러시아는 한 몸체에 아시아와 유럽이란 두 얼굴을 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 독특한 현상을 역사는 외면해 오지 않았다. 그 정체성을 놓고 예나 지금이나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무성하다. 그 중심에는 러시아사람들이 서 있는데, 그들의 말을 빌리면 두 얼굴의 정체성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쌍두 독수리 국장(國章)에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원래 독수리는 용맹한 새로서 로마제국의 상징으로 쓰여왔는데, 로마제국 계승의식이 강했던 비잔틴에서도 국가 상징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머리가 하나인 원형 독수리 그대로이다. 그러다가 13세기 이후 쌍두에다가 오른발엔 십자가를, 왼발엔 황금구(黃金球)를 덧씌운 형상의 국장으로 변형된다. 이때 쌍두는 제국의 서방과 동방 영토(혹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를, 십자가는 교권을, 황금구는 세속권력을 각각 상징한다. 원래 쌍두는 그 옛날 히타이트나 페르시아 시대에도 있었으나, 당시는 신화 속의 영물로나 나타나지 문장으론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15세기 러시아가 이 형상을 이어받는다.
 
1472년 비잔틴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 조에(소피아)와 결혼한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가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로, 그리스정교의 수장으로 자처하면서 쌍두 독수리가 새겨진 깃발과 옥새를 사용한다. 여기로부터 이른바 ‘모스크바 제3 로마설’이 나오고, 쌍두 독수리가 러시아의 전통 국장으로 자리매김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모양새가 약간씩 달라진다. 처음엔 단순 소박했으나, 16세기에 이르면 모스크바 상징인 성 게오르기 상 도안이 가슴에 삽입된다. 17세기 로마노프 왕가가 들어선 후에는 오른발에 왕관을, 왼발에 교권을 뜻하는 황금구를 추가하고, 두 머리 한가운데 왕관 3개를 올려놓는다. 이로써 국장으로서의 러시아 쌍두 독수리 전형이 완성된다. 그러나 소비에트연방 시기에는 이런 식의 국장은 폐지된다. 그러다가 러시아연방 시기가 도래하자 2000년 의회가 국장 부활을 공식 가결한다. 그러면서 하나의 줄로 세 왕관을 연결하고, 좌우 발에 홀(笏)과 구(球)를 쥐게 한다. 세 왕관은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을 의미하고 홀과 구는 주권수호 의지와 나라의 통일을 상징한다고 풀이한다.

아무튼 쌍두 독수리 문장의 두 머리가 상징하듯 15세기 말엽 이래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 서양과 동양이란 두 얼굴을 가진 양면(兩面) 국가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이 특이한 두 얼굴(양면성)은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해답은 자연환경과 인문지리 및 역사발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초원과 평원이 아득히 펼쳐진 유럽 러시아 땅과 툰드라와 타이가로 뒤덮인 아시아 러시아 땅이 저력이나 기능에서 같을 수가 없다. 그 속에는 원초적으로 뿌리가 다른 인간집단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의 생업과 삶의 형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도 이러한 다름과 갈라짐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바로 역사이다. 역사가 있었기에 그토록 이질적인 두 땅이 맞붙고, 한 마리 독수리에 달린 두 머리(얼굴)가 상징성으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일컬어 자연과 인문학의 조화라고 한다.

오늘로 이어진 러시아의 역사는 크게 키예프 루시시대, 몽골 지배시대, 모스크바 공국시대, 제정 러시아시대, 소비에트 연방시대, 러시아 연방시대의 여섯 개 시대로 나뉜다. <초기 연대기>라는 러시아어 사적(史籍)에 의하면 러시아의 역사는 키예프 루시시대부터 막이 오르는데, 그 막을 올린 주인공이 누군가는 러시아사학계의 해묵은 논쟁거리다. 노르만 학파는 원주민인 슬라브족이 노르만 계열의 바랑고이(바랴그)인들을 초청해 지배자로 옹립함으로써 나라가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슬라브 학파는 키예프 지역에 살던 슬라브족 스스로가 세웠다고 반박한다. 이른바 외래설과 자생설 간의 각축이다. 누구에 의해 세워졌던 간에 약 400년 동안(9~13세기) 키예프를 수도로 하고 북으로는 발트해, 남으로는 흑해, 서로는 카르파티아산맥, 동으로는 모스크바에서 약 200마일 떨어진 오카강까지의 꽤 넓은 지역에 키예프 루시란 이름의 한 공국이 번성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아직은 유럽 땅이어서 머리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
유럽-아시아를 상징하는 러시아 연방의 쌍두 독수리 국장(모스크바 연방의회 의사당 정문).
그러다가 1240년 몽골의 서정에 의해 공국은 사라진다. 이때부터 250여 년간 외래의 몽골 지배가 시작된다. 볼가강 하류의 사라이에 도읍을 정한 킵차크 칸국(1243~1480년)은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일원에 세워진 두 번째의 아시아 제국이다. 첫 번째는 일찍이 근 100년 동안(4~5세기)이나 유럽을 석권한 훈 제국이다. 몽골 지배는 유럽 러시아에 아시아적 정치 문화요소들을 이식시킴으로써 문예부흥이나 종교개혁, 시민운동 등 근대를 지향하는 서구적 시대 흐름으로부터 러시아를 격리시킴은 물론, 러시아로 하여금 장차 두 얼굴의 정체성을 갖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한편, 모스크바 유역에서 일어난 모스크바 공국(1271~1613년)은 출범과 더불어 킵차크 칸국과의 불안한 공존 속에서 화전(和戰) 양면 전술로 대응해 오다가 마침내 칸국을 제압하고 유럽 러시아를 통일한다. 그래서 일부 사학자들은 정체성 확립이란 측면에서 키예프 루시시대와 몽골 지배시대를 전사(前史) 시대라고 하며, 모스크바 공국시대부터를 진정한 러시아 역사시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럽 러시아를 발판으로 하여 일어난 이 모스크바 공국은 15세기 후반 이반 3세 때부터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로 자임하면서 쌍두 독수리를 정식 국장으로 채택한다. 그 쌍두가 유럽과 아시아를 상징한 것인지는 천명된 바가 없지만, 그의 뒤를 이은 이반 4세가 카자흐 기병 원정대를 보내 시베리아를 거머쥐기 시작한 점으로 미루어 공개적이건 암묵적이건 간에 쌍두 독수리의 한쪽 머리는 아시아 시베리아를 지향한 것임이 분명하다. 17세기 초엽에 모스크바 공국을 계승한 로마노프 왕조의 제정 러시아시대(1613~1917년)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정체는 국장에 새겨진 독수리의 쌍두처럼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른 두 얼굴, 즉 양면성인 것이다. 오늘에 와서 이 양면성은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른다는 의미의 합성어인 ‘유라시아’란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다.

러시아가 유라시아 국가로 변모되어 온 과정은 모스크바 공국시대부터 끊임없이 추구해 온 팽창주의의 소산이다.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1462~1505년) 때부터 1917년 제정 러시아시대(차르시대)가 끝날 때까지 약 450년 동안 영토는 하루 평균 약 50평방마일씩 늘어난다. 결과 이반 3세가 즉위할 때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는 약 1만5000평방마일이었던 것이 1917년 10월 혁명 당시 러시아의 영토는 그것의 약 567배가 되는 850만평방마일로 급증한다. 영토는 소비에트 연방시기에도 여러 지역을 병합하는 바람에 전 세계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 땅에 각이한 혈통의 128개 민족이 살고 있으며, 동서로 11시간대에 걸쳐 있는 세계 최대국이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어 연방을 구성했던 14개 공화국이 떨어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러시아 연방은 여전히 지구 육지면적의 8분의 1 이상을 점하고 있는 대국으로 남아 있다.

독수리의 쌍두로 상징되는 유럽과 아시아의 두 얼굴을 가진 러시아의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19세기 러시아 시인 표트르 주트체프는 이렇게 읊조린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나라 러시아, 일반의 잣대로 잴 수 없는 나라 러시아, 자신만이 독특한 모습을 지닌 나라 러시아, 있는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나라 러시아.” 그 정체성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으면 이렇게까지 읊조리겠는가. 작금 많은 유럽인들이 러시아를 유럽 나라로 보지 않는가 하면, 아시아인들은 또 나름대로 러시아를 아시아 나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러시아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가 자못 궁금하다.

대체로 자기의 처지와 입장에서 출발해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 유라시아주의의 세 가지 이념에 따라 서로 다른 대답이 나온다. 서구주의자들은 러시아를 유럽의 일부로 보나 유럽만큼 발전하지 못한 유럽으로 보며, 슬라브주의자들은 서구와는 차별되는 우수한 슬라브적 전통을 지닌 독자적 나라라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근간에 대두한 유라시아주의자들은 유럽과 아시아의 긍정적 요소들을 두루 공유하고 있는 유라시아 나라라고 절충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라 상이한 발전모델을 찾고 있는데, 서구주의자들은 ‘추격형 발전모델’을, 슬라브주의자들은 ‘독자적 발전모델’을, 유라시아주의자들은 ‘복합적 발전모델’을 각각 추구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오늘날 러시아 연방이 안고 있는 고민이다.
 
유럽 러시아의 여학생들(슬라브족).

근래에 주목되는 것은 러시아가 옛 냉전시대에 미국의 단독 파트너로서 누렸던 강국의 위상을 되찾으려는 야심찬 시도이다. 그러한 시도는 아시아에 낯을 돌리고, 미래와 우주 정복의 ‘비밀병기’인 시베리아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 올해 6월 우랄산맥 너머의 첫 아시아 땅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러시아·중국·인도·브라질의 정상들이 모여 이른바 ‘브릭스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그리고 지난 7월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독수리산 전망대에서 2012년 바로 이곳 앞바다의 루스키 섬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담을 위해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 건설 등 준비가 한창인 것을 확인했다. 러시아의 미래가 극동지역 개발과 직결되는 현실이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곳곳에서 감지하다시피 18세기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가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유럽에 가까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면서까지 유럽화를 추진해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나,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지금 러시아의 활로는 바야흐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시베리아 극동지역에선 지금 엄청난 인력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 젊은이들은 유럽 러시아 쪽으로 빠져나가고, 대신 인근 동북 3성의 1억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와 인력 공백을 메우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얼마 안 가서 극동지역은 중국인들의 천지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이것은 러시아 두 얼굴의 무게 추에 기울음 현상이 일어날 징조가 아닐 수 없다.

구름 위를 날고 있어 다른 일에 한눈팔 여지가 없다. 이제 곧 맞닥뜨리게 될 유럽 러시아의 현실을 눈앞에 그려보면서 늘 아리송하던 러시아의 정체성을 이렇게 한 번 짚어본다. 소형 비행기의 말단 좌석 19B는 앞좌석과의 사이가 10㎝도 채 안 된다. 골똘한 생각에 불편을 느낄 겨를도 없이 1시간 40분 만에 목적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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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러시아인들의 성소 정교회

ㆍ기도로 1000년을 견딘 ‘러시아의 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우중층한 상공에서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자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황금빛 ‘양파머리형’ 교회 지붕과 그 위에 총림(叢林)을 이룬 수많은 십자가들이다. 러시아어에는 많은 교회를 지칭하는 집합적 표현으로 ‘마흔의 마흔 배’(1600)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교회 수가 많다는 뜻이다. 유럽 러시아나 아시아 러시아를 막론하고 그 어디에 가도 정교회 교회를 만난다. 정교회는 러시아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 내린 성소이고 기둥이며 고향이다. 그래서 정교회를 ‘러시아의 혼’이라고 한다.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사원 외관.

흔히 러시아에 전파된 그리스도교의 일파를 ‘정교회’(正敎會)라고 하는데, 그 온전한 명칭은 ‘동방정교회’이다. 여기서 ‘정교회’의 ‘정교(orthodox)’는 ‘바른 믿음’을 말하며, ‘동방’은 구원과 생명의 빛, 즉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빛나는 태양이 동방에서 떠올랐음을 뜻한다. 이렇게 보면 어딘가 정교만이 참 그리스도 신앙이고, 정교회만이 참 그리스도 교회인 양 비쳐지는데, 이것은 러시아인들이 갈등과 분열로 점철되던 그리스도교를 구원의 자세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역사적 배경과 자긍심을 반영한 것이다.

원래 그리스도교는 동방의 문화적 배경을 자양분으로 하여 자리를 잡아가다가 4세기 초 로마제국의 정치적 질서와 타협하면서부터 라틴 서방에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후 그리스도교는 상이한 역사 지리적 및 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동방 그리스도교와 서방 그리스도교라는 두 개의 큰 흐름으로 갈라지게 되며, 교리적 논쟁을 비롯해 동·서방 그리스도교 간의 갈등이 노정된다. 마침내 1054년 성 소피아 성당에서의 상호 파문 조치를 계기로 결별하게 된다. 결별 후 서방 그리스도교는 크게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양분되고, 동방 그리스도교는 동방정교회와 동방독립교회, 동방귀일(歸一)교회로 3분된다.

이르쿠츠크의 즈나멘스키 수도원 내부의 이콘과 기도 장면.
러시아는 988년 키예프 루시시대에 정교를 정식 국교로 받아들인다.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000여년 동안 정교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부침을 거듭해 온다. 정교회는 로마 교회와는 달리 모든 종교 활동을 민족 고유어로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음으로써 애당초 독자적 성격을 띠게 된다. 루시시대를 이은 킵차크 칸국 몽골 지배시대에는 정교회 성직자들에게 면세 혜택을 주는 등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베풂으로써 정교는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번성한다. 칸국의 왕자를 비롯한 몽골인들이 정교에 귀의해 러시아화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모스크바 근교의 세르게이 삼위일체 수도원과 최북단 백해의 한 섬에 남아있는 솔로베츠키 수도원 같은 화려한 수도원들은 이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몽골 지배시대와 그 직후는 러시아 종교미술의 전성기이다. 15세기 초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그린 성화 ‘삼위일체’를 비롯해 수난을 미로 승화시킨 슬기가 배어있는 명작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한편 러시아 정교회는 1448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재가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모스크바 수좌 대주교를 선출함으로써 독립수장 교회로 자리매김된다. 5년 뒤 비잔틴 제국이 망하자 러시아는 유일하게 독자적 정교 국가로서의 위상을 굳힌다.

16세기 모스크바 공국시대에 들어서면 모스크바는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계승자란 의미의 이른바 ‘제3의 로마’로 자임하면서 선민의식마저 고취한다. 그 결과 교회와 수도원은 급증하고, 황제 우위의 황제교황주의와 내세의 구원을 추구하는 구원주의, 그리고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평등주의 등을 근간으로 하는 ‘러시아 혼’이 풍미하게 된다. 방만한 성세에는 폐단이 따르는 법이다. 그래서 무절제한 교권에 제동을 걸고 교회의 질을 높이기 위해 표트르 대제는 1721년 교회헌장을 반포해 종교개혁을 시도한다. 헌장에 따라 신부들을 육성하는 학교를 설립하고, 신부들은 현대 학문을 수학해야 한다. 특히 전래의 총주교제를 폐지하고 대신 정부 산하에 종무원을 두어 재무를 비롯한 모든 교회업무를 공권력의 감시하에 일원화한다.

근대화를 향한 이러한 종교개혁이 단행되었음에도 역대 차르는 국가 우위의 황제교황주의에 입각해 정권에 대한 교회의 충성이나 순종, 침묵을 일관되게 강요해왔다. 소비에트 연방시대에는 종교 활동의 자유와 제재가 엇갈려왔다. 그러다가 지금의 러시아 연방시대에 이르러서는 교회가 국가에 예속되는 세속권 우위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크렘린의 중요한 확대 국무회의에서 최고 권력자인 옐친이나 푸틴의 좌측 옆자리에 총리가, 우측 옆자리에 엄숙한 제복 차림의 정교회 수장이 앉아 있는 이색적인 모습을 목격한 바 있다. 2008년 5월 신임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곧바로 총대주교 관저로 알렉세이 2세를 예방하고, 같은 해 11월 대통령의 연방의회에 대한 첫 연차교서 연설 때도 맨 앞줄 중앙에 총대주교가 푸틴 총리 및 상하 양원 의장들과 나란히 자리를 함께 한다. 러시아 연방 내에서의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를 집약적으로 과시하는 한 장면이다. 제아무리 정교(政敎)가 밀착된 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현상이다. 정교회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 포용은 역대 당국의 실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종교로 호도하고 마약이나 매춘, 이혼 같은 사회적 타락을 종교의 힘으로 막아보려는 데 그 이유가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회제도와 역사적 환경 속에서 숱한 기복을 거듭하면서도 러시아 정교회가 1000여년 동안 시들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주요인은 그 민족성과 독자성에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이르쿠츠크의 즈나멘스키 여(女)수도원과 노보시비리스크의 버니아잔스키 교회, 예카테린부르크의 ‘피해성당’,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몰리 수도원과 ‘피의 구원성당’,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성당과 구세주 성당 등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둘러보면서 이 점을 절감했다. 정교회 건물의 외형과 내부, 촛불과 종소리, 십자가와 성호, 전례와 성가, 사제 등 하나하나의 세부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세계를 그대로 읽을 수가 있다.

교회의 건물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노아의 방주처럼 ‘바실리카’라고 부르는 선박 모양과 ‘로톤다’라고 부르는 원형, 그리고 십자가형 등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몇 년 전 터키의 아라랏 산 건너편 ‘방주박물관’에서 화석으로 굳어진 ‘노아의 방주’ 모양(길이 167m)을 본 적이 있다. 실체 여부는 차치하고 인간을 죽음에서 구출해낸 방주의 모양을 따른다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노보시비리스크의 보즈니아잔스키 성당 외관.

‘바실리카’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로마 공회당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근행한 까닭에 교회 건축양식의 하나가 되었다. 원형도 가끔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정사각형의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이다. 아무래도 러시아 정교는 그리스 정교를 모태로 한 만큼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 내부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제단인데, 제단 가운데서도 감실 역할을 하는 지성소(至誠所)이다. 항상 동쪽을 향하게 되어 있는 이 지성소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인 성물이 보관되어 있다. 성소가 동쪽을 향하는 것은 동쪽으로부터 구원과 생명의 빛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교회 건축의 외양을 살펴보면, 서구 라틴 세계의 로마네스크나 고딕 양식은 별로 찾아볼 수 없고, 주로 비잔틴 건축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양파머리형’ 쿠폴(돔)과 목조 건물이란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인들의 창의성 발현이다. 겨울철 많이 내리는 눈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지붕을 양파형(돔형)으로 만들며, 풍부한 삼림자원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목재인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몰리 수도원 외관.
교회 내부는 출입부와 예배를 드리는 장소인 회중석(會衆席), 그리고 회중석과 지성소 사이의 ‘이콘의 벽’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중석은 가톨릭이나 개신교와는 달리 의자가 없어 신자들은 선 채로 의식을 치른다. 회중석의 양 벽에는 프레스코화와 이콘이 걸려있다. 신자들은 이콘 앞에서 초를 봉헌하고 기도를 드린다. 일명 ‘이코노스타스’라고 하는 ‘이콘의 벽’, 혹은 ‘성격’(聖隔) 앞에는 설교대가 놓여 있다. 이코노스타스는 그리스도와 성모, 사도, 성인들의 일대기를 담은 다양한 이콘들로 장식되어 있어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한다. 실로 교회 내부는 성스러운 이콘들의 갤러리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교회의 황금빛 양파머리 지붕(쿠폴)은 타오르는 대지의 촛불을 상징하며, 촛불은 자신을 정화하고 자신을 불태우는 지고의 희생과 죽은 자를 기억하는 표시이다. 쿠폴은 수에 따라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달라진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둘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셋은 삼위일체를, 넷은 사도들과 복음서를, 일곱은 정교회의 일곱 가지 중요한 의례와 일곱 차례의 공의회를 각각 상징한다. 쿠폴의 황금빛은 천상 세계의 초월적 아름다움을, 푸른색은 천상의 영원성을 의미한다. 쿠폴과 더불어 종소리는 또 하나의 정교회 상징물이다. 일요일이나 축일에 다양한 종소리를 조화롭게 울린다. 타종은 밖에서 치는 우리네 외타식 종과는 달리 종 안의 쇠방울을 울려서 소리 내는 내타식이다. 일찍이 서양 문명사가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러시아 대지의 지평선 위에 울려퍼지는 종소리와 쿠폴의 광휘야말로 ‘러시아적 혼’의 근원적 상징이라고 평한 바 있다.

러시아 정교회 앞을 지나다보면 누구나가 그 특이한 십자가 구조에 의문을 던진다. 횡목과 경사진 나무가 덧붙어 있으니 말이다. 그리스도의 매달린 육신을 표현하는 정교회의 십자가는 끝이 6면이거나 8면이다. 십자가의 맨 윗부분은 그리스도의 머리를, 중간의 긴 횡목은 못 박힌 그리스도의 두 팔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사진 나무는 그리스도와 함께 처형될 때 좌우에 매달린 두 강도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인정해 천국에 승천한 강도는 위로 올라간 오른쪽이고 반대로 부정해 나락에 떨어진 강도는 아래로 처진 왼쪽을 상징한다고 한다. 고대의 신화 구조에서 왕왕 오른쪽은 긍정을, 왼쪽은 부정을 나타내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는가 보다. 정교회는 성호에서도 그 특징이 엿보인다. 이콘 앞에서 인간을 악으로부터 구제해달라는 의미로 성호를 긋는데, 세 손가락을 먼저 이마(성부)에서 배(성자)로 그은 다음 가톨릭과는 반대로 오른편 어깨(성자들)에서 왼편 어깨(성령)의 순으로 긋는다. 원래는 성호에 두 손가락을 사용하다가 12세기부터 삼위일체를 뜻하는 세 손가락 성호로 바뀐다.
정교는 ‘리투르기아’, 즉 전례(예배의식)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이해함으로써 정교회의 통일성과 정체성을 보장하려고 한다. 정교는 다른 종교에서와 같은 성직자의 설교가 없이 단순히 전통적이고 의례적인 전례를 통해 교리의 이해에 접근한다. 그리하여 전승에 바탕한 초기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회중석에서 신자들이 부르는 성가로 시작되는 전례는 대교회에서는 매일, 일반 성당에서는 일요일과 축일에만 거행된다. 성가는 반주 없는 8음조의 비잔틴식 단선율 노래이다. 정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의 사제는 결혼을 하고 흰 옷을 입는 백승과 독신 수도승으로서 검은색 옷을 입는 흑승으로 대별한다. 일반 교회의 사제는 대부분 백승이다.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 즉 ‘알아야 참이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구구히 정교회의 세부를 살펴본다. 이것은 남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타자관(他者觀)의 요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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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성스러운 돌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ㆍ소설 ‘죄와 벌’ 무대, 나그네 맘 잡는 애잔함 …

이른 아침 7시40분 상트페테르부르크 폴코보국제공항에 착륙했다. 겨울철이라서 음침하리라고만 예상했던 이곳 아침 날씨는 의외로 활짝 개어있다. 좀처럼 보기 드문 날씨라고 한다. 전날 많이 내린 눈이 길가에 수북이 쌓여 있다. 아침 기온은 영하 10도로 내려가지만 한나절이 되면 기온이 0도 안팎으로 올라가면서 눈과 얼음이 녹아 길가는 질퍽거린다. 네바강도 얼지 않고 푸른 물살을 드러낸다.

핀란드 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네바강과 다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상트’는 영어 ‘세인트’, 즉 ‘성스러운’이란 뜻이고, ‘페테르’는 영어의 ‘피터 대제’이고 러시아어의 ‘표트르 대제’이다. ‘피터’나 ‘표트르’는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의 음사인데, ‘베드로’는 ‘돌’이나 ‘반석’이란 의미이다. ‘부르크’는 독일어나 네덜란드어에서 ‘도시’란 뜻이다. 이런 말들을 합성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성스러운 돌의 도시’란 뜻이 된다. 이곳엔 돌과 관련된 전설 한 가지가 전해오고 있다. 도시의 틀이 잡힌 후 300여회나 범람이 연발해 석축을 쌓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러자면 많은 돌이 필요하다. 그래서 도시로 들어오는 사람에겐 통과세란 명목으로 자신의 머리보다 큰 돌덩이 두 개씩을 내도록 했다고 한다. 그 시절의 발상치고는 꽤 슬기롭다.

인구 480만명(2006년 기준)을 헤아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850㎞ 떨어진 북위 60도에 위치한 러시아 제2의 도시이다. 이 도시는 라도가 호수에서 발원하는 길이 740㎞의 네바강이 시내 중심을 관통해 핀란드 만으로 유입하면서 형성된 자연의 섬 델타와 운하에 의해 생긴 인공 섬들 위에 건설되었다. 건설 초기에 41개이던 것이 101개로 늘어난 섬들과 3대 운하를 비롯해 모세혈관 구실을 하는 숱한 운하와 그 위를 가로지르는 365개의 다리(교외까지 625개)로 도시의 얼개가 짜여 있다. 이 지역은 원래 늪지대였기 때문에 건조한 여름 말고는 안개가 잦고 습도가 높다. 그래서 화창한 여름날 시인 푸슈킨은 ‘유럽을 향한 창’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습하고 냉혹한 겨울날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고전과 퇴폐, 찬란한 아름다움과 우울함이 동시에 피고 지는 세속적인 도시’라고 서로 다른 평을 한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문화와 예술, 역사와 유적의 도시이다. 시내에는 약 250개의 박물관과 50개의 극장, 80개의 미술관이 있으며 해마다 900여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성당 앞의 해학적인 표트르 대제 동상.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화려한 유럽식 근대 도시로 일약 변모하게 된 것은 표트르 대제의 담찬 정치적 야욕의 소산이다. 18세기 초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을 치르면서 대제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를 건설하고 나서 유럽을 향한 전초기지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 기지로서 네바강 하류와 발트해가 만나는 늪지 위에 인공도시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모델로 삼은 도시 건설에 착수한다. 급기야 1712년 제국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긴다. 이를 계기로 유럽식 근대화 도시로 급성장하지만, 이와 동시에 절대왕정의 본산으로 근대화의 악폐를 잉태한다.
 
그 과정에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이름도 몇 차례 바뀌고 여러 가지 별칭도 뒤따른다. 1918년 소비에트 정부의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기면서 이곳 이름은 ‘페트로그라드’로 바뀌고, 1924년 레닌 사망 후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레닌그라드’라고 부른다. 근 70년 동안 써오다가 러시아 연방시대가 도래하자 원명이 복원된다. 그 과정에서 얻은 별칭만도 ‘유럽을 향한 창’ ‘북쪽의 베니스’ ‘운하의 도시’ ‘물의 도시’ ‘백야의 도시’ ‘혁명의 도시’ 등 다양하다.

도시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에 등재된 도시답게 유적·유물이 줄줄이 시야에 들어온다. 모스크바 대로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벌어진, 유명한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현장을 증언하는 모스크바 문(당시 바리케이드로 사용)이 장중히 서 있다. 독·소 전쟁이 한창일 때 독일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1941년 9월부터 모든 수송로를 차단한 채 무려 872일 동안이나 봉쇄한다. 그러나 군·민 합심으로 끝내 도시를 지켜낸다. 당시 치열했던 전화의 상흔을 성 이삭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 성당의 외벽과 기둥에는 아직까지도 총격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성당은 1818년부터 40년간 지어진, 단일 예배당으로는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성당이다. 규모도 규모거니와 완벽한 건축미를 보여준다. 64개의 원통 대리석 기둥 위에 세워진 돔의 높이는 111.3m에 달하며, 3개의 육중한 청동 문은 각각 무게만도 9t이나 된다. 당시에는 이 건물보다 더 높은 건물은 불허했다고 하니 그 위세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설계와 감독을 맡은 프랑스 건축가 몽펠랑은 이 성당을 짓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한다.
 
이윽고 도심부인 넵스키 거리에 들어섰다. ‘넵스키’는 ‘네바강’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며, 넵스키 거리는 네바강 왼쪽 기슭을 따라 펼쳐진 거리이다. 19세기 중엽에 개통된 거리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에서부터 옛날 해군성까지 뻗어 있다. 작가 고골은 ‘넵스키 대로보다 훌륭한 곳은 없다’고 절찬하면서 <넵스키 대로>라는 작품을 썼고, 푸슈킨이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문호들의 작품에도 이 거리가 자주 등장한다. 이 거리에는 카잔 성당, 도스토예프스키 묘가 있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수도원, 미하일로프 광장, 알렉산드리아 광장, 10월 혁명의 본부 자리인 스몰니 수도원 등 굵직한 유적들과 더불어 상점들도 즐비하다. 카잔 성당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본떠 지은 네오클래식풍의 건물로서 코린트식 열주가 늘어선 회랑으로 둘러싸여 외모부터가 웅숭깊은 느낌을 준다.

멀어져가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수도원의 황금빛 쿠폴(양파머리형 돔)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 그 속에 묻힌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불후의 명작 <죄와 벌>이 떠오른다. 그 시절 밤을 지새우면서 탐독하던 소설이다. 이 거리의 가난한 대학생인 주인공은 현실적으로는 가진 것이 없어 가난하고 무력하지만 현실을 각성한 의지적이고 사색적인 청년이다. 그는 인간을 범인(凡人·평범한 사람)과 비범인(천재적인 사람)으로 나누면서 범인은 기성의 도덕과 법률에 대한 복종형 인간이고, 비범인은 그러한 것에 대한 초월형 인간이라고 해석한다. 이 대목에서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분명 ‘복종형 인간’에서 ‘초월형 인간’에로의 도약을 지향한다. 그의 문학이 오늘날까지도 살아 숨쉬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참 달리다가 차는 노란색 3층 건물 앞에서 속도를 줄인다. 모이카 강가의 푸슈킨 문학박물관이다. 푸슈킨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있는 학습원에 입학해 문학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다. 이곳을 무대로 <예브게니 오네긴> <대위의 딸> 등 주옥 같은 시편들을 창작한다. 열혈 청년 푸슈킨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메스를 들이댄다. 근대 러시아의 첫 혁명운동이라고 하는 데카리스트들의 반전제주의 투쟁(1825년)과도 호흡을 같이 한다. 박물관에는 푸슈킨뿐만 아니라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마야코프스키 등 작가들의 원고와 유작, 사진들이 전시되어 러시아 최고의 문학박물관으로 꼽힌다. 벽에는 1837년 1월27일 오후 4시 반에 멈춰버린 시계가 걸려 있다. 결투의 총성이 한 방 울린 시각이다. 시 외곽의 얼어붙은 대지에서 푸슈킨은 아내 나탈리아의 연인인 프랑스 사관생도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상대방이 먼저 쏜 총알에 하복부를 맞고 쓰러진다. 이틀 후 비운에 간다. 영화에서 봤던 그 처절한 장면이 눈앞에서 재생한다. 결투, 인간의 삶에 대한 역설적인 유린이다. 결투는 입회인의 참석 아래 제비뽑기로 먼저 권총을 쏠 사람을 선정하고, 그가 상대방을 쓰러뜨리면 결투는 그것으로 끝나지만, 그렇지 못하면 상대방에게 자신을 쏠 수 있는 기회를 넘겨준다. 결투는 명예라는 ‘허구적 기호’를 실재보다 더 귀중히 여겨 온 서구적 근대성의 산물이다. 망자 푸슈킨은 이런 허구성을 갈파했기에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고 절규한다.

2차 세계대전 때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바리게이트로 쓰인 모스크바 문.
첫날 오후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보내고 저녁은 ‘아리랑 식당’에서 며칠 만에 한식으로 때운다. 네바강변에 자리한 모스크바 호텔 5층 5016호에 여장을 풀었다. 승강기 고장으로 오르내리는 데 얼마간의 발품을 팔았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부터 자야치 섬(토끼섬) 일대의 관광에 나섰다. 제일 아름답다는 트로이츠키(삼위일체) 다리를 건너자 반원형의 비르줴바야 광장에 두 기의 등대(라스트랄)가 나타난다. 높이 32m의 등대에는 바다의 신 ‘넵튠’과 뱃머리 장식, 그리고 볼가강·드네프르강·네바강·발호프강을 상징하는 4개의 조각상이 부착되어 있으며, 꼭대기에는 불을 피워 바다를 밝히는 기름접시가 놓여있다.

토끼섬에 이르러서는 제정 러시아의 쌍두 독수리 국장이 걸려있는 표트르 문을 지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들어섰다. 원래 이 요새는 표트르 대제가 북방전쟁에서 스웨덴으로부터 되찾은 네바 강 유역의 땅을 지키기 위해 처음에는 흙과 나무로 지었으나(1733년), 후에 다시 돌로 보강했다. 르네상스 시대가 추구하던 6각형 모양을 따른 성채의 높이는 12m, 폭은 4m로서 성벽에는 5개의 문과 6개의 망루가 설치돼 있다. 1917년 10월혁명 전까지는 정치범 수용소로 이용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첫 수감자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반대한 아들 알렉시스 왕자였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고리키도 여기에 감금된 적이 있다.

같은 이름의 성당은 우람하고도 화려하다. 나무로 지은 집이 불타버리자 지금의 철제 구조물로 지어졌다(185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122.5m의 첨탑 꼭대기엔 높이 3.8m, 날개 길이 역시 3.8m의 천사상이 십자가를 안고 서 있다. 넓은 홀에 역동적으로 비틀어 만든 곡선형 도금 기둥 장식이 퍽 인상적이다. 여기에는 역대 로마노프 왕가의 황족들이 묻혀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로서 총살된 비운의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의 유해도 발견된 후 이곳에 이장되었다.

성당 앞에는 미국에서 활동한 한 조각가가 1991년에 기증한 이색적인 표트르의 앉아있는 동상이 눈길을 끈다. 머리는 작고 손발은 크며 키는 2m가 넘어 신체적 균형이 맞지 않는 다소 해학적인 조형물이다. 사실 러시아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표트르는 파격적인 기인이다. 매우 정력적인 사람으로서 건축을 진지하게 탐구하던 끝에 신분을 속이고 핀란드의 조선소에서 조선술을 2년 동안이나 공부하고, 요새 동쪽 30m의 강변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초로 지은(1703년) 건물인 오두막에 8년 동안 살면서 수도 건설에 잠심몰두(潛心沒頭)한다. 이 오두막에 전시된 소박한 거실과 침실, 서재와 식당, 그가 직접 만든 보트 등 유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한다.

돌아오는 길에 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피의 구원 성당’에 들렀다. 19세기 말 공포정치로 악명 높았던 알렉산드르 2세가 7번의 폭탄 테러 끝에 피 흘리며 쓰러진 곳에 세워진 성당이다. 캄차카 반도를 미국에 팔아넘길 정도로 매국도 서슴지 않은 그에 대한 민중의 저주는 하늘에 사무쳤다. 손자인 니콜라이 2세는 24년간이나 걸려 지은 이 화려한 성당과 같은 건물을 다른 곳에서는 지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건축가의 눈을 뽑아버렸다고 한다. 역사는 화려함에 가려진 어두움을 결코 잊지 않고 만대에 고소한다.

알렉산드르 2세가 피살된 ‘피의 구원 성당’의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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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미술의 보고 에르미타주 박물관 

ㆍ피카소·세잔… 300여만점 불후의 명작들 탄성

근대 유물의 분포 밀도로 보면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마 세계에서 으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면적이 45.6㎢(서울 면적의 약 13분의 1)밖에 안 되는 곳에 250개의 각종 박물관이 있고, 거리마다에는 유적 유물과 볼거리가 올망졸망 붙어 있다. 그러나 그 백미는 단연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보고 싶어하는 곳이 바로 이 박물관이다. 해마다 260만명이나 찾는다고 한다. 문제는 어떻게 제한된 시간 내에 그 방대한 내용의 얼개라도 대충 알고 가는가 하는 것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외경.

이틀간의 일정에서 첫날 반나절을 박물관 참관에 할애했다. 차창 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네바 강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면서 근 50년 전의 어슴푸레한 기억을 애써 되살려 봤으나 흐리멍덩히 아름아름할 뿐이다. 새벽 한 시에 상판이 들렸다가 다섯 시에 다시 무겁게 내려앉은 네바 강의 여닫이 다리 위로 차량과 사람 물결이 일렁인다. 네바는 ‘여자의 마음’이란 뜻이다. 외람된 말이지만 여자의 잦은 변심처럼 강물 빛이 하루에 세 번 바뀌는 데서 유래된 비유이다. 아침에는 회색이지만 한나절에는 푸른빛으로 변했다가 저녁이면 황금빛을 띤다고 한다. 이것은 햇빛의 조화나 백야의 착시에서 오는 현상일 터이다. 길이 740㎞의 네바 강은 동쪽에 있는 면적 1만8000㎢의 라도가 호에서 발원해 하류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큰 도시가 들어앉을 수 있는 삼각주를 만든 다음 핀란드 만으로 유입한다. 백야는 예나 지금이나 이곳의 인기 브랜드이다. 백야는 고위도 지방에서 한여름에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지 않아 밤인데도 대낮처럼 환한 현상을 말한다. 보통 6월21일부터 29일까지 새벽 2~3시쯤 잠시 어둑해졌다가 이내 해가 뜨는 심한 백야 현상이 나타난다. 몽환의 은빛 세계 속에서 ‘백야의 별 축제’니 ‘백야의 댄스 페스티벌’이니 하는 ‘환희의 장’이 펼쳐지곤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백야>에서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훨씬 아름다웠다”고 예찬도 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환상과 우울, 미망을 더 신랄하게 꼬집는다.

세잔의 ‘화병’(1877년, 에르미타주 박물관).
어느새 차가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잇닿은 궁전광장에 이르렀다. 체크 무늬의 광장 중앙에 장대한 알렉산드로프 전승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기둥 높이가 47.5m에 달하는 이 기념비는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2년 후에 차르 황제 알렉산드르가 세운 것인데, 무게가 600t에 달하는 자주색 대리석이다. 기둥 꼭대기에는 십자가를 안고 있는 천사상이 얹혀 있다. 이 광장은 차르의 전제주의 폭정에 항거한 ‘피의 일요일’과 10월혁명 사건으로 러시아 현대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수놓고 있다.
 
장기간 차르의 혹독한 전제 통치에 시달려 오던 피압박 대중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드디어 1905년 1월9일(일요일) 지금의 모스크바 역 광장에서 넵스키 거리를 지나 황궁이 있는 이 광장으로 몰려든다. 군중들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생존권과 언론 및 집회의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등 요청사항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평화 행진에 나선다. 막혔던 보가 터지듯 많은 시민들이 합류해 대오는 어마어마하게 늘어난다. 차르가 손을 흔들며 궁전 발코니에 나타나자 시위 군중들은 이제야 차르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 생각되어 그를 향해 환호한다. 순간, 차르가 흔들던 손을 내리자 군중을 에워싸고 있던 군인들이 군중을 향해 일제히 기관총 사격을 퍼붓는다. 삽시간에 새하얀 광장이 4000명이나 되는 무고한 사상자들의 피로 붉게 물든다. 이 날을 역사에서는 ‘피의 일요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날 차르의 전제통치를 불살라버릴 혁명의 불씨가 지펴진다.

이때부터 12년이 지난 1917년, 2월 혁명을 거쳐 드디어 10월25일 밤, 네바 강 건너편에서 정박 중이던 오로라호가 동궁을 향해 발사한 공포탄이 10월 혁명의 서막을 알린다. 다음날 새벽 2시, 궁전에서 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모의를 하고 있던 니콜라이 2세와 임시정부 각료들이 현장에서 체포된다. 영욕으로 점철된 로마노프 왕조가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그때의 그 모의장 벽에는 새벽 2시에 멈춰선 시계가 걸려 있다. 이 역사적 사변의 일등 공신인 오로라호는 원래 1897년에 건조되어 3년 후 진수한 7000t 급의 순양함이다. 발트 함대 소속으로 1905년 일본과의 쓰시마(대마도) 해전에서 참전 68척 중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2척 중의 한 척이다. 2월 혁명 때는 선원들이 선상 반란을 일으켜 선장을 살해하고 민중 봉기에 가담한 전력이 있다. 표트르 대제의 오두막을 보고 나서 인근에 유물로 정박해 있는 이 배를 찾았다. 세월의 풍상 속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노 순양함은 이제 몇 개의 무공훈장만을 달고 부동의 자세로 관광객들을 맞으려 물 위에 적적하게 떠 있다. 몇몇 물오리만이 주위를 맴돌며 무자맥질하고 있다. 마침 해군행사가 열려 내부 구경은 할 수 없다고 해서 외경만 카메라에 담았다.
 
고갱의 ‘열매를 들고 있는 여인’(1893년, 에르미타주 박물관).
궁전광장을 에워싸고 벌어졌던 이러저러한 일들을 뒤로 하고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들어섰다. 성인 입장료는 450루블이고 내부 사진촬영 시는 100루블을, 캠코더 소지시는 250루블을 추가한다. 예전엔 실내 촬영이 금지되었는데, 지금은 돈 앞에서 그 금기가 무너지고 말았다. 보존과 돈의 역학관계에서 변화가 인 셈이다. 그 시절의 러시아가 아닌 다른 러시아의 한 단면을 읽게 된다. 에르미타주는 프랑스어로 ‘은둔하는 곳’이란 뜻이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가 확연치는 않으나, 지하에 많은 은밀한 방이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그럴싸한 설이 있다. 1924년 이래 ‘국립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불리고 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영국 대영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라고 하는 이 대형 박물관은 건물부터 구도와 전시품에 이르기까지 그 깊이와 폭이 실로 엄청나다.

오늘날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네바 강가에 위치하면서 서로 연결된 다섯 개의 건물, 즉 지붕에 176개의 조각상을 이고 있는 겨울궁전(동궁), 소(말라야)에르미타주, 구(스타르이)에르미타주, 신(노브이)에르미타주, 에르미타주 극장으로 구성된 하나의 복합구조물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건물로서 본관 구실을 하는 것은 초록과 흰색의 환상적인 로코코풍(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귀족계급의 우아하고 유희적인 예술형식)으로 지어진 동궁이다.
 
이 박물관의 개관일은 논쟁 끝에 최초의 건물인 동궁의 완공일이 아닌, 미술품의 전시 시작일로 낙착되었다. 동궁은 표트르 대제의 며느리인 엘리제베타 여제가 8년간(1754~1762년) 지은 것으로서 궁전으로만 쓰여 왔다. 이어 표트르 대제의 딸인 예카테리나 여제가 1764~1787년 사이 동궁 옆에 소 에르미타주와 구 에르미타주를, 1783~1787년 사이에 구 에르미타주와 아치 화랑으로 연결되는 에르미타주 극장을 지었다. 신 에르미타주는 한참 후인 1839년 니콜라이 1세 때 건조되었다. 1764년 소·구 에르미타주를 짓기 시작할 무렵 베를린의 한 갑부가 부채 대신 미술 소장품 225점을 러시아에 건넨다. 이를 계기로 당시 서양 계몽주의에 심취해 러시아의 후진성을 개탄해오던 예카테리나 여제는 대뜸 화랑을 열고 서양 귀족들로부터 2000여점의 예술품을 사들인다. 비록 화재를 입고(1837년), 무식한 니콜라이 1세가 1000여점의 작품을 경매에 부쳐 날려 보내기도 했지만, 러시아의 근대화 추진과 더불어 소장품이 꾸준히 늘어나면서 19세기 말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한다.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지면서 적잖은 소장품이 모스크바 국립 표현박물관에 이장된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차 두 대 분량의 소장품이 임시로 우랄산맥 너머로 피란했다가 되돌아오기도 했다.
 
피카소의 ‘부채를 들고 있는 여자’(1908년, 에르미타주 박물관).
그렇다면 이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라는 위상을 그대로 유지해온 이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은 과연 얼마나 될까? 2006년 출판사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출판한 도록 <에르미타주>의 어디에도 구체적인 양이나 규모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체로 연구자들이나 관심 있는 관람자들의 추산만이 난무한다. 총 면적 4만6000㎡나 되는 350여개 방에 조각 1만2000점, 회화 1만6000점, 판화와 데생 60만점 등 총 300만점이 소장되어 있다. 10㎞나 되는 동선을 따라 한 작품을 10초씩, 하루 8시간 본다고 해도 장장 4년이 걸린다느니, 1050개의 전시실에 전시된 작품 하나를 1분씩만 감상해도 5년이나 걸린다느니, 창문과 오르내리는 계단 수는 각각 2000개와 120개나 된다는 등 갖가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통계가 나돌고 있다.

작품들은 3층으로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1층에는 선사시대의 문화와 예술,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오리엔트 문화, 아시아 문화와 예술,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화와 예술에 관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과 3층에는 주로 서구의 명작들이 선을 보이고 있는데, 명작들의 ‘총집합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탈리아 다 빈치의 ‘꽃을 가진 성모’와 라파엘로의 ‘성모상’, 네덜란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프랑스 세잔의 ‘화병’과 마티스의 ‘음악’, 고갱의 ‘열매를 들고 있는 여인’, 레넨의 ‘우유를 파는 여자의 가족’, 독일 홀바인의 ‘젊은 남자의 초상’, 스페인 피카소의 ‘부채를 들고 있는 여자’ 등 듣기만 해도 미감에 흠뻑 젖는 세기의 초상들이다. 물론 명성대로 미술품 위주이지만, 2층에는 서유럽 지역의 무기류와 의전용 홀(笏) 전시실이, 3층에는 화폐 전시실 같은 유물 전시실도 마련되어 있다. 아무튼 에르미타주는 명실상부한 미술사 공부의 전당임을 새삼 느낀다.

레넨의 ‘우유를 파는 여자의 가족’(1640년대, 에르미타주 박물관).
미술에 관한한 에르미타주가 타자의 초월을 불허할 만하다는 데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주로 1층에 덤으로 전시된 선사시대나 고대의 유물은 무척 빈약하다. 사실 이번에 이곳을 찾아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그래도 러시아가 많이 소장하고 있는 중앙아시아와 알타이 지역 문화유산이다. 특히 아직껏 가보지 못한 북방 유목문화의 보고 파지리크 고분군 유물에 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운이 없게도 26호 파지리크 유물 전시실을 비롯한 중앙아시아관은 수리 중이라서 11월 말까지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사정 끝에 겨우 추가 입장권을 구입해 중앙아시아관의 전시실 한 곳만 ‘말 타고 꽃구경하는’ 식으로 휙 둘러봤다. 주로 실크와 의상에 관한 유물이라서 기대엔 못 미쳤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적잖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스키타이관을 세세히 둘러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의외의 소득은 선사관에서, 남러시아에서 출토된 인류 문명교류의 최초 유물이라고 하는 전형적인 비너스 상 두 점을 발견한 것이다. 피카소의 인물화 한 점을 구입하고 박물관을 떠났다.

 
미술에 관한한 러시아인들은 천부적인 재능과 소양을 갖춘 사람들인 것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만도 이 에르미타주 말고도 일행이 방문한 러시아 박물관을 비롯해 30여개의 전문 미술 박물관이 있다. ‘페트로코프’, 즉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 같은 가볼 만한 유적 유물들을 뒤로 남긴 채 이번의 짧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답사를 마쳤다. 여행이란 늘 다음을 위해 아쉬움을 남겨두는 법. 어쩌면 이것이 여행의 유혹이요 매력일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을 전하면, 한·러 수교 20주년이 되는 올해에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에르미타주 한국유물전’이 예견되며, 이를 계기로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유물 조사 및 한국실 개관도 논의될 것이라고 한다. 실로 경하해 맞이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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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스키타이 미술공예의 신비

ㆍ제국의 빼어난 조형문화… 어찌 야만·변방인가

기원전 수세기 동안 북방 유라시아 대륙을 풍미하던 스키타이의 문화, 특히 휘황찬란한 미술공예의 신비에 관해서는 아직껏 많은 수수께끼가 입방아를 찧고 있다. 필자는 일찍이 서구문명 중심주의에 의해 문명권에서 소외된 북방 유목기마민족 문화를 하나의 새로운 문명권으로 설정하면서 그 중심에 서 있는 스키타이 문화에 관해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다. 그 현장 몇 곳을 돌아보기는 했지만, 유물을 종합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기회는 종시 차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스키타이관을 찾게 된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박물관 내의 미술전시관들은 관람객들로 붐비지만, 웬일인지 이 스키타이관만은 한산한 편이다. 덕분에 유물을 꼼꼼히 살펴볼 수가 있었다.
 

이러한 유물과 더불어 몇 가지 기록에 의해 스키타이 정체가 점차 밝혀지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선지자 예레미아가 그들을 활과 창을 잡고 말을 탄 채로 줄지어 엄습하는 잔인한 북방 민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같은 시기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 새겨진 에사르하돈 왕(기원전 681~669년 재위)의 연대기에는 그들을 ‘이슈구(쿠)자이’라고, 그리고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스키타이와의 교역을 시작한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스키타이’ 혹은 ‘스키테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스키타이인들은 스스로를 ‘스콜로텐’ 혹은 ‘슈크’라고 칭한다. ‘이슈구(쿠)자이’나 ‘스키타이’는 이러한 ‘스콜로텐’이나 ‘슈크’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금제 여자 얼굴상(옷 장식용, 기원전 4세기, 사진 왼쪽). 금제 남자 얼굴상(옷 장식용,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의 시조와 인종 및 본향에 관해서는 이견이 구구하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명저 <역사>에서 스키타이의 시조에 관해 두 가지 전설을 전하고 있다. 하나는 타르기타오스란 시조인데, 그의 아버지는 태양신 제우스이고 어머니는 보리스테네스 강(현 드네프르 강)을 낀 땅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헤라클레스가 드네프르 강 연안에 있는 울창한 삼림지대인 힐라에아에 살던 사녀(蛇女,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뱀)와 동거해 낳은 셋째 아들 ‘스키테스’가 바로 스키타이 시조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징적인 전설에서 공통되는 점은 시조의 출현이 드네프르 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인종과 관련해서 전해오는 신명(神名)이나 인명, 지명 등을 감안하면 스키타이어는 인도-유럽 어족의 인도-이란 어군 중 동이란 아어군(亞語群)에 속한다. 따라서 그들은 비록 인종적 혼합을 많이 겪어왔지만, 원초적 인종은 이란인의 한 계통이라는 데 견해가 모아지고 있다.

 

스키타이의 본향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동쪽으로부터의 서진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그들은 아락세스 강(현 볼가 강) 동쪽에 살다가 중앙아시아의 일족인 마사게타의 공격을 받자 강을 건너 흑해 북안에 진출한다. 그러자 원주민 킴메르인들은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친다. 도망치는 그들을 추격하던 끝에 근동 지방에 이른다. 당시 여러 세력들 간에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혼란한 상태를 틈타 스키타이는 근동지방을 손쉽게 장악하고 28년간이나 통치한다.

이러한 시조나 인종 및 본향을 가진 스키타이의 형질적 용모는 대체로 우람한 체구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턱수염이 더부룩하다. 키는 계층에 따라 다른데, 상층부는 비교적 큰 편(176~180㎝)이나 평민은 중위(약 164㎝)에 머문다. 귀를 덮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헐렁한 통바지에 버선 모양의 가죽 단화를 신고 전개형(카프탄·앞이 트인 형)의 짧은 상의에 허리띠를 졸라맨 모습은 흡사 고구려인의 옷맵시를 연상케 한다.

 
스키타이 왕국은 왕족 스키타이가 다른 스키타이(유목이나 농경 스키타이)를 통솔하는 부족 연맹적 성격이 짙은 왕국이다. 말 위의 궁술가들인 스키타이는 가재도구를 실은 차를 집으로 삼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목기마민족이다. 그들의 기동력이나 전투력은 당대의 어느 누구도 따라잡을 수가 없으며, 사회 전체가 군사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라면 그들을 공격한 어떤 적도 그들로부터 도망갈 수 없고, 그들이 피하고자 하면 어느 누구도 그들을 붙잡을 수 없다는 점이라고 자탄 어린 지적을 한 바 있다. 징병제를 근간으로 한 각 부족에게는 기마 전사단이 조직되어 있으며, 부족장은 언제나 진두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를 지휘하며 퇴각은 애당초 불허된다.

스키타이의 무사정신과 승전욕, 그리고 형제애는 남다르다. 무사가 첫 번째 적을 죽이면 적의 피를 마시는 특별 의식을 거행하며, 살해된 적의 머리 가죽을 벗겨서는 무두질해 손수건이나 옷감으로 쓰기도 하고 말고삐에 매달아 과시하기도 한다. 그들은 손가락을 자르는 엄숙한 서약을 통해 의형제 관계를 맺고 상호 충절을 확인한다. 스키타이의 무사 정신이나 사회의 군사적 성격은 마구와 기마 전술용 무기가 발달한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스키타이관에 전시된 유물 중에는 이를 증명하듯 안장, 가죽 등자, 청동제 갑옷, 짧은 활, 방패, 쌍날이 달린 아키나케스형 단검 등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청동제 투구(기원전 7세기).      지혜의 여신 얼굴이 새겨진 금제 장식품(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의 종교의식은 토테미즘적이고 샤머니즘적이다. 그들은 자연현상을 의인화한 신과 동물을 숭배한다. 그러나 신을 위한 신전이나 조상(彫像)을 세우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전쟁신 아레스는 각별한 의미가 부여된다. 마른 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꼭대기에 아레스의 상징인 오래된 철검을 꽂는 의식을 매해 치른다. 종교적 의례로서의 희생이나 순장 흔적도 곳곳에서 보인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스키타이는 인류에게 실로 풍부하고 값진 문화유산을 남겨놓았다. 그 가운데서 으뜸가는 것은 단연 신비의 경지에 이른 미술공예다. 조형 기법이나 소재, 문양, 용도, 그리고 외래문화의 영향 관계에 따라 미술공예사를 세분해 5기로 나누기도 하고, 또는 전·후 2기로 대별하기도 한다. 5분법은 기원전 8~7세기를 1기, 6세기를 2기, 5세기를 3기, 4세기를 4기, 3세기 이후를 5기로 나누는 분법이다. 2분법에서 전기는 기원전 8~5세기로 5분법의 제1·2·3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주요 유물들이 쿠반 강 유역에 널려 있다. 후기는 기원전 4세기 이후로 5분법의 제4·5기에 해당하며, 주로 그리스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드네프르 강 유역에 유물이 집중되어 있다.
 
스키타이 미술공예의 특징은 동물의장의 신통한 발달과 황금을 비롯한 귀금속의 세공이다. 무구(武具)와 마구(馬具)와 함께 이른바 ‘스키타이 3요소’를 이루고 있는 동물의장(양식)은 원래 스키타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고, 그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스키타이인들이 나름대로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독특한 예술 기법을 도입해 스키타이 특유의 동물의장을 창출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물의장의 기원에 관해서는 북시베리아 삼림지대 기원설과 오리엔트 기원설 두 가지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산양이라든가 사나운 들새와 날짐승 같은 사실적 야생동물이 주제로 많이 다루어진다. 이에 비해 후자의 경우에는 환상적이고 기괴한 동물들이 등장해 서로 싸우는 이른바 ‘동물투쟁’이 주 모티브를 이루고 있다. 스키타이는 이러한 북시베리아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리엔트의 동물투쟁 기법을 창의적으로 받아들여 독특한 동물의장을 안출하고 발전시켰다.
  

스키타이 무사들의 전투 장면을 새긴 금제 빗(기원 전 4세기).

철검과 금제 칼집(기원전 7~6세기, 사진 왼쪽). 길이 41.4㎝의 금제 말머리 꾸미개(기원전 4세기).

사슴 모양의 금제 방패장식판(기원전 7~6세기).  


사슴 모양의 방패 장식판 유물에서 보다시피 미술공예가들은 짐승들의 몸을 일정한 형태의 틀 안에 넣기 위해 기발한 형태로 동물의 몸통을 변형시키거나 압축함으로써 짐승이 가지는 힘과 탄력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들은 동물의 투쟁 장면을 모티브로 하여 동물의 몸을 좁은 공간에 압축시키고 그 표현을 도식화하고 편화(便化)해 동물의 힘을 강조하거나 과장하며, 그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상을 추구한다. 그것은 유목민이 본능적으로 간직하는 동물에 대한 관심과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들 자신의 추상적 예술감각과 미감을 발산하고, 거기에 그리스 미술의 사실성과 오리엔트 미술의 환상성을 가미함으로써 신선하고 독특한 스키타이식 동물의장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스키타이 동물의장이 지닌 또 하나의 특색은 짐승 몸의 주요 마디나 근육 부분에 콤마형 또는 반달형 틀을 만들고 거기에 보석을 끼워 넣는 감입(嵌入) 기법을 쓰는 것이다. 본래 이 기법은 아시리아에서 시작해 스키타이가 받아들인 후 시베리아를 거쳐 중국 수원(綏遠·오르도스)으로, 더 나아가 한반도까지 파급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는 스키타이 동물의장을 분석하면서 거기에 그들의 고원(高遠)한 우주관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그들은 우주가 수직으로 3개의 세계, 즉 상계(하늘)와 중계(땅), 하계(지하)로 구성되었다고 이해한다. 그들은 이러한 공간적 우주 구조에 대응시켜 상계는 조류를, 중계는 굽동물(사슴·양·염소 등)을, 하계는 맹수나 어류, 파충류를 상징화해 동물의장을 꾸미는 슬기를 발휘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스키타이 신화에도 나오지만 굽동물이자 육식성 맹수이기도 한 멧돼지가 하계와 중계를 연결하는 중개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 밖에 상징성 동물인 그리핀은 맹수이지만 동시에 날개를 달고 있어 상계와 관련이 있는 동물로 둔갑한다.

스키타이 미술공예는 이러한 동물의장과 함께 금을 비롯한 귀금속을 다량 사용한 것이 또 하나의 특색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황금은 재질로서 영원불멸할 뿐만 아니라, 그 광채는 암흑과 불안을 몰아내는 광명과 상통한다고 하여 권력과 재력의 상징으로 삼아왔다. 가재를 수레에 싣고 이동하는 유목민들에게 금은 가장 편리하고 안전한 재화다. 그리하여 스키타이, 특히 상층들은 장신구는 물론 의기(儀器)와 제기를 비롯해 방패나 칼자루, 칼집, 활집 같은 무기나 용기 및 도구도 금으로 장식하기에 급급해한다. 그리하여 3~4㎏의 순금제 공예품이 부장된 고분이 수두룩하게 발견되고 있다. 그들의 금속 세공품은 한결같이 모티브가 기발할 뿐만 아니라, 가공 기술 또한 일품이다. 현대의 기술로도 따라잡기 힘든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들이 사용한 이 많은 금은 도대체 어디서 구해왔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남부 카프카스의 콜키스 지방에서 사금이 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엄청난 양의 금 수요를 충당할 수는 도저히 불가능했을 터. 아마도 동방 무역을 통해 금의 원산지인 알타이 일원에서 수입했을 것으로 추단된다.

이와 같이 스키타이 미술공예의 이모저모를 스키타이관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유물은 되돌아가서 다시 보곤 하니 시간은 촉박할 수밖에 없다. 관리원의 종관을 알리는 독촉을 몇 번 듣고서야 문을 나섰다. 차창을 스치는 노을 비낀 네바 강 수면이 마냥 역사의 거울처럼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구석구석을 비춰준다. 어쩐지 뇌리에 진하게 투영되는 것은 벽면을 가득 채운 그 화사한 그림들보다는 세진(世塵)이 켜켜이 쌓여있는 스키타이의 녹슨 유물들이다. 근 5000년 전에 신석기시대를 갓 벗어난 에게 해 지역의 문화를 이른바 ‘에게 문명’으로 정의하면서도 이보다 3000년 후에 눈부신 금속문화를 꽃피운 이 유목기마민족들의 문화는 문명 밖의 ‘미개’와 ‘야만’, ‘중심문화’를 멀리 떠난 ‘주변문화’로 얕잡아봤으니, 어리석음치고 더한 어리석음이 또 어데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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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범진 열사의 넋을 기리며 

ㆍ“조국 대한은 죽었습니다”
ㆍ참을 수 없는 비통과 절망…외교관 생 마감 
ㆍ재러 항일운동 주도…일부 유적 기념관조성 차질 ‘착잡’

실크로드의 시베리아 초원로를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쪽 끝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1만여㎞(1만188㎞)를 두 번에 꺾어 주파했다. 이 기나긴 여정에서 필자는 이 길 위에서 풍기는 인간들의 삶과 만남의 향훈을 만끽했을 뿐만 아니라, 이 길과 더불어 남긴 우리 겨레의 애환이 가득 찬 족적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어쩌면 이것이 노독을 무릅쓰고 긴 여정을 단숨에 달려가게 한 동력이었으며, 그 여정의 기록을 거의 마무리하는 이 순간까지도 뇌리의 심연에 각인되어 있는 지울 수 없는 기명(記銘)일 것이다. 그 가운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범진 열사와의 새삼스러운 만남이 있다.

이범진과 아들 위종

그 시절 우리의 외교사를 편력하던 중 우연히 이범진 열사의 최후를 단편적인 기사로 읽은 바 있다. 화려한 외교관의 삶을 순국 자진(自盡)으로 마무리하는 일은 외교사에 드문 일이다. 그래서 일찍이 이곳에 들렀을 때도 궁금증을 풀려고 기웃거려 봤지만 허사였다. 사실 열사의 행적은 90여년이란 긴 세월 동안 소외와 무지 속에 파묻혀 있었다. 다행히 새로운 세기와 더불어 비장되었던 문서기록과 친지들의 생생한 증언, 그리고 학자들의 고증에 의해 그의 행적은 빛을 보게 되었다. 드디어 오늘 우리는 그 현장을 찾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르그로보 3번지 북방묘지(옛 우즈펜스키 공동묘지) 제8구역에는 2002년 7월에 세워진 이범진 공사의 추모비가 의연하게 서 있다. 추모비에는 “이범진 공사는 1852년 9월3일 서울에서 탄생하여 1911년 1월13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순국한 대한의 충신이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위훈에 비해 너무나 소략한 비문이라서 조금은 아쉬운 감이 없지는 않지만, ‘순국한 대한의 충신’이란 한 마디 글귀에서 ‘순국지사’이자 ‘독립운동가’란 명예를 읽을 수 있지 않나 싶어 그나마 위안을 느낀다.


국운이 경각에 달려있던 한말에 활동한 이범진(李範晉)은 전주 이씨 가문 출신으로서 자는 성삼(聖三)이다. 부친 이경하(李景夏)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애국 무장이다. 이런 무가에서 태어난 이범진은 27세에 병과로 급제해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과 총애 속에 관운이 뒤따라 승승장구한다. 명성황후가 피살된 을미사변 후에는 일제의 위해가 걱정되어 고종과 황세자를 러시아공간에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년)을 주도하고 김홍집을 괴수로 한 친일내각을 몰아낸다. 대신 박정양을 수반으로 한 친러내각을 조직하는 데서도 주도적 역할을 한다. 그러다가 주미공사(3년간), 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겸임공사에 이어 1901년 러시아 상주공사로 임명된다. 대 러시아 외교를 한창 펴고 있을 무렵인 1905년에 망국적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의 주 러시아 공사관은 폐쇄된다.

주 러시아 한국공사관 건물(1901~1905년)
일제의 강요에 의한 공사관의 폐쇄에 불만을 가진 이범진 공사는 송환령에 불응한다. 그 후 순국할 때까지 6년간 여권 발급 등 정상적인 공사관 업무를 계속하면서 구국의 일념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국제적 활동을 전격적으로 전개한다. 그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를 러시아 황제에게 전하는 등 현지에서 고종의 밀사 역을 수행하면서 러시아의 도움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과 이상설, 그리고 둘째 아들 이위종을 특사로 밀파하여 일제의 조선 강점을 만천하에 고발하고 빼앗긴 국권 회복을 호소한다.

능수능란한 외교관으로서 이러한 국제적 활동을 펴봤지만, 국권 회복이라는 대의를 실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이제 얼굴을 안으로 돌린다. 최근 러시아와 일본 외교문서에서 이러한 그의 전환을 입증하는 새로운 사료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는 공사권이 피탈된, 생의 마지막 6년 동안 ‘대한의 충신’으로서의 삶을 불태우고 있다. 극동 연해주 지역의 민족운동가들과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투쟁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해외 항일 언론의 모태이기도 한 ‘해조신문(海潮新聞)’이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범진은 곧바로 축하편지와 함께 지원금을 보낸다. 3년 전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의 논설로 세상을 일갈했던 장지연 선생이 주필을 맡은 ‘해조신문’은 재러 한국인들이 만든 최초의 한글신문으로서 비록 3개월 동안(1908·2·26~5·26) 총 75호를 낸, 단명의 신문이었지만, 국내외 동포들의 항일 민족의식을 북돋는 데 크게 이바지한 애국의 목탁이었다. 이범진은 같은 해 연해주 크라스키노에서 결성된 대표적 의병투쟁 조직체인 ‘동의회(同義會)’에도 금 1만루블을 휴대한 아들 이위종과 그의 장인인 사돈 놀켄 남작을 보내 지원한다. 그뿐만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거주지 신한촌의 민족교육기관인 한민학교 설립에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더욱 악랄하게 기승을 부리자 이범진은 국내 진공까지 시도한다. 당시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연해주 방면에서 두만강을 건너서 일거에 함경도를 점령하고, 길게 몰아쳐서 서울에 들어가 승리의 노래를 연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럴 때 자신이 총사령관, 이범윤이 부총사령관이 될 것이라고 거듭 천명한다. 그 후 안중근의 의형제인 엄인섭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협심해 의병봉기를 일으킬 것을 촉구한다. 그러던 그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전 재산을 정리해 서슴없이 각지에 후원금으로 보낸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그는 자산으로 7만루블을 갖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미주 국민회에 5000루블, 미주 무관학교에 3000루블, 미주 신문사에 1500루블, 하외이에 1000루블, 블라디보스토크 청년회에 2000루블, 블라디보스토크 신문사에 1000루블을 각각 기증한다. 그리고 자신의 장례비로 5000루블, 아들 이위종 부부에게 약간의 금액을 유언으로 남긴다. 실로 이익이 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를 생각해보는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정신과 공을 앞세우고 사를 뒤로 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의지를 대변하는 전범(典範)치고 이보다 더한 전범이 또 어디 있으랴.

이범진 열사 추모비(오른쪽)와 묘역.

이것도 모자라 망국에 참을 수 없는 비통과 절망을 통감해 오던 이범진은 마침내 고종황제에게 “우리의 조국 대한은 이미 죽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소인은 자살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오늘 생을 마감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겨놓고 자진 절명한다. 결국 죽음으로 원수 일제에 저항하고자 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그 유명한 ‘절명시(絶命詩)’ 4수가 떠오른다. 시골에 칩거해 있던 반골선비 매천은 “나라가 선비 기르기 5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라고 절규하면서 “망국 선비로는 못 산다”라는 유언과 함께 이 ‘절명시’를 남기곤 더덕술에 아편을 타마시고 자결한다. 두 순국지사의 최후에서 우리는 나라에 대한 사명을 깨닫고 시대적 한계 속에서 자결로 그 사명을 다하는 비장함과 떳떳함이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열사를 두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근대사에서 아관파천을 주도해 나라의 이권을 러시아에 넘겨준 친러파로 지목되어 왔다. 물론 그러한 점은 부정할 수 없기에 그를 역사에서 공과를 겸행한 인물로 판정할진대, 과를 넘어선 공으로 생을 마감한 점을 감안한다면, 이제 그러한 평가는 편견이나 폄훼로 낙착 짓고 새롭게 조명해야 할 것이다. ‘웃음은 마지막 웃음이 진짜 웃음인 것’처럼 인간의 참 삶은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인간사회엔 이성에 바탕한 상쇄율(相殺律)이 있어 공이 과를 상쇄하기도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된 홍보물 ‘애국혼’에 실린 ‘이범진공’이란 글에서 ‘생명을 충성으로 버리고, 재산을 의(義)로 씀’이란 부제로 내린 그에 대한 평가야말로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당시 현장에서 내린 실의(實意)의 평가는 오늘의 백면서생들이 책상머리에서 들먹이는 낙점보다는 진정성과 신빙성이 더 높지 않겠는가. 그리고 헤이그 밀사 파견을 진두지휘한 그에게 파견된 이준 열사나 아들 이위종보다도 낮은 급의 훈장이 서훈되었다면, 그 기사(奇事)는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는지.

다행히 이러저러한 착잡한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열사의 유적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몇 곳에 남아 있어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그러한 유적은 2001년 이곳에서 피살된 한 한국 유학생의 장례를 맡은 블라디미르라는 장의사가 바로 90년 전 열사의 장례를 맡았던 장의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발굴이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이범진 공사가 부임 후 임시숙소와 사무실로 썼던 집은 철도역 가까이 넵스키 대로 118번지에 자리한 한 호텔이었으며, 1901년 3월 그가 러시아 상주공사로 임명된 후 거처한 곳은 시묘노프스카야 거리 11번지의 꽤 웅장한 건물이다. 1901년 11월부터 1905년 6월까지 공사관으로 사용한 집은 시내 중심가에 있는 ‘여름정원’ 바로 옆에 위치한 페스첼라 거리 5번지의 고색창연한 5층 건물이다. 문호 푸슈킨과 레닌도 한때 거주한 바 있는 유서 깊은 이 건물이 지금은 보통 아파트로 쓰이고 있으나, 당시 모습 그대로이다. 1층 벽면엔 “이 건물에서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이범진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초대 상주공사가 집무하셨습니다”라고 한글과 러시아어로 쓰인 현판이 붙어있다. 공사관은 3층 6호와 7호실을 임대하고 있었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이 건물의 일부를 매입해 열사기념관으로 조성하려는 사업이 예산 문제로 보류되었다고 하니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이범진 열사의 시신 안치소(페트로파블롭스키 병원)
열사가 생을 마감한 순국 장소는 체르노레친스카야 거리 5번지에 있는 방이 6개가 달린 한 목조건물이다. 그는 1905년 6월부터 1911년 1월 자결할 때까지 이곳에서 홀로 비서와 함께 살았다. 장례비만 남겨놓고 독립운동에 사재를 다 털어놓은 처지라서 옷이나 시계 등 가재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려 쓰는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곳의 한 일간지는 1911년 1월14일과 22일자 지면에 열사의 자결과 장례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1월13일 낮 12시 한국 공사인 ‘왕자 이범진’(59세)은 거실에서 천장 전등에 밧줄을 설치하고 목 매달아 사망했다. 밧줄로 목을 맨 상태에서 권총으로 자신을 향해 총 3발을 쐈으나 탄환이 벽과 천장을 향해 빗나갔다. 고인이 관할 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유서에는 “그 누구에게도 잘못이 없고 지극히 평정한 마음 상태에서 자결한 것이며, 이는 조국이 주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명분이 없고 적에게 복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자결 원인을 담담히 적고 있다. 1월21일 ‘애국왕자’의 시신이 안치된 페트로파블롭스키 병원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친지들과 함께 각지에서 온 한국 교민대표단과 조문객 등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고인을 바랬다. 태극기가 덮인 관과 조문객을 태운 세 대의 운구열차가 핀란드역을 떠나 장지인 우즈펜스키 묘지에 이르러 그곳에 시신을 안장했다. 비명에 간 고인의 유언이런가, 영안실이나 장지에서는 아무런 장례의식이나 추도사도 행해지지 않았다. 이렇게 독립운동가이자 순국지사인 이범진 공사는 이역만리에서 고국의 산천을 등진 채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열사의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애족의 숭고한 얼과 넋을 기리고 이어받는 일,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여전한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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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러시아의 심장 모스크바, 그 변모

ㆍ역사는 진행형… 크렘린의 변신 뒤로한채 귀국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밀도 높은 탐방을 마치고 시베리아 초원 실크로드의 종착지 모스크바를 향했다. 백야의 여운이 희불그레하게 드리운 저녁 7시25분 풀코바 제1공항을 이륙한 러시아 국내선 SU 848편 비행기는 2시간25분을 날아 목적지 모스크바 공항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공항에서 직행한 한 식당 곁에서는 카지노가 현란한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지금 모스크바에서 카지노는 성업 중이라고 한다. 카지노, 그 옛날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다. 언필칭 모스크바는 이 시대 변화의 상징이기도 하고, 세상을 보는 창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난 반 세기 동안 이곳을 10여차례 드나들면서 그 변모상을 쭉 지켜봐 왔으며, 그 변모를 이번 답사의 화두로 잡았다.
 
크렘린 궁과 레닌 묘.

시 중심에서 저만치 비켜간 ‘뚜리’란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옛날 소비에트 시대에는 그럴싸한 초대소였으나 지금은 현대에 밀려 빛이 어지간히 바랬다. 윗바람도 제대로 막지 못해 방안은 써늘하고 온수도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이튿날 시내의 다른 호텔로 옮겼다. 옮기는 길에 모스크바의 ‘어제’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여러 곳을 스쳐 지나간다. 거리는 훤칠하게 뚫리던 옛날의 모습과는 생판 다르게 붐비고 막힌다. 차는 오다가다를 반복한다. 덕분에 일행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길어졌다.

모스크바의 어원에 관해서는 ‘습지’와 ‘석장들의 성채’ ‘소 건너는 목’ ‘밀림’이라는 등 어종에 따라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축축한 강’ ‘젖소의 강’이란 뜻의 모스크바 강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모스크바란 이름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147년에 나온 <이라피예프 연대기>란 책에서다. 이 연대기는 수즈달 공후인 유리 돌고루키가 한촌(寒村)이던 이곳에 주춧돌을 놓고 나무로 된 방벽을 쌓기 시작해 1156년에 완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모스크바의 창건자는 유리 돌고루키이고 창건 연대는 1147년으로 알고 있다. 그 ‘나무 방벽’이 바로 크렘린의 전신이다. 유리를 이어 이곳 공후가 된 다밀이 이곳에 상주하면서 저택을 지어 도시 면모를 갖춰보려고 했으나 1237년 몽골 서정군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만다.

그러다가 간신히 공후의 명맥을 이은 ‘돈주머니’란 별명의 이반 칼리타는 당시 러시아 땅의 거의 반을 석권하고 있던 몽골제국 예하 킵차크 칸 국의 환심을 사서 인근 러시아 공국들의 토지를 수중에 넣는 한편, 당시 키예프를 떠나 블라디미르에 옮겨 앉은 정교회의 수도 대주교를 모스크바로 영입한다. 이제 모스크바는 러시아 정교회의 본산이 된다. 이것은 신정체제를 표방한 모스크바 공국의 세 확장에 결정적 계기가 된다. 국운이 트기 시작할 때 이반 칼리타를 이은 드미트리는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킵차크 칸 군을 무찔러 ‘몽골 불패의 신화’를 깨뜨리고 일약 러시아의 희망으로 떠오른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킵차크 칸 국이 쇠잔해가는 틈을 타서 이반 3세는 1480년 드디어 그 예속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포한다. 이때부터 모스크바 공국 시대가 열리면서 인구 30만~40만명을 가진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심장으로 부상한다. 이반 3세는 내성인 크렘린과 성당들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을 서구식 하얀 석조 건물로 개축한다. 모스크바의 첫 변모이다.

비잔틴의 마지막 황제 조카와 결혼한 이반 3세는 대공 대신 비잔틴 황제 호칭인 ‘군주’나 ‘차르’로 자칭한다. 그러면서 모스크바 대공의 문장이던 말을 탄 성 게오르기 상에 비잔틴 황실 문장인 쌍두독수리를 결합해 새로운 문장을 만든다. 이렇게 모스크바 대공은 비잔틴 황제의 계승자로, 모스크바는 ‘제3 로마’로 변신한다. 17세기 초 모스크바 공국은 로마노프 왕조의 제정러시아(1613~1917)로 탈바꿈한다. 이때 수도가 오늘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가지만(1711), 모스크바의 러시아 중심축 위상은 여전하다. 그리하여 소비에트 시대에 접어들자 러시아의 수도로 다시 되돌아가 면적 1000㎢에 인구 1000만명을 헤아리는 세계 굴지의 도시로 성장한다. 이렇게 모스크바는 시대 영합적인 변모에 능수능란하다.

러시아의 상징적 건축물인 성 바실리 성당 외경.
이제 그 현장 몇 곳을 찾아가 보기로 하자. 처음 찾아간 곳은 국립 모스크바 로모노소프대학이다. 차는 숲속 길을 따라 야트막한 산, 그러나 평지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곳인 ‘참새 산’에 오른다. 옛날부터 이곳에 참새가 많이 모여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0월 혁명 직후 산 이름을 ‘레닌 산’으로 고쳤다가 소비에트가 해체되자 다시 제 이름으로 부른다. 산 전망대에 서니 푸슈킨이 말한 ‘흰 돌의 모스크바’ ‘둥근 지붕의 모스크바’ ‘금빛 십자가의 모스크바’가, 그리고 톨스토이가 말한 ‘어머니인 도시’ ‘수없이 많은 교회가 늘어선 아시아풍의 성스러운 도시’ 모스크바가 한눈에 안겨온다. 1947년 모스크바 창건 800주년을 맞아 지은 26층에서 32층에 이르는 이른바 ‘스탈린 7대 건물’을 비롯해 크렘린 궁과 숱한 크고 작은 성당들, 올림픽을 치러낸 중앙 종합운동장, 지어 스키장 도약대까지 시 전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모스크바 전경을 감상하고 나서 모스크바 대학 후문을 통해 대학 구내에 들어선다. 꼭 50년 전 향학에 불타던 그 시절, 카이로 대학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러 걸었던 바로 그 길을 밟으니 실로 감회가 새롭다. 반세기의 풍상 속에서도 저 32층 240m의 첨탑별은 여전히 의젓하게 하늘 높이 솟아 있다. 그 별빛을 등대 삼아 ‘학문의 배’는 망망대해를 항진하고 있을 성싶다. 모스크바 대학은 예전의 명성 그대로 규모나 내용을 갖춰나가고 있다. 1755년 과학자이자 ‘러시아 문학의 표트르 대제’라고도 일컫는 로모노소프가 이 대학을 창건할 때는 시 중심에 자리했으나, 1953년 이곳에 새 청사를 짓고 옮겨왔다. 320㎢의 부지에 17개 단과대학을 가진 종합대학으로서 100여개의 외국 유학생을 포함해 3만1000명 학생과 8000명 교수, 700만 장서의 도서관, 4개의 천문대, 3개의 박물관, 1개의 식물원 등을 아우르고 있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복합적 대학 캠퍼스이다. 창건자 로모노소프가 지향한 교육이념의 하나는 러시아 학자들을 길러 냄으로써 당시 러시아 학계를 지배하던 외국인 학자들의 횡포를 막고 자체의 힘으로 러시아 학문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 이념이 실천되었기에 오늘의 모스크바 대학이 있다. 현지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학생이 세 번 지각하거나 한 번 무단결석만 해도 제적하며. 대학 주변에 유흥가는 불허한다. 교육이 살아있다는 증좌이다.

크렘린 궁 내 황제의 대포(1585년 안드레이 쵸호프 제작).
저녁에는 여행의 말미에 ‘망중한’을 즐기게 하는 오페라 관람이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스타니슬랍스키 극장에 가 차이콥스키의 유명한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근 3시간 동안 감상했다. 원래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궁전을 연상케 하는 역 단장과 편리함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추억을 무색하게 한다. 북적대는 인파에 발 디딜 틈이 없다. 떼밀려서 가까스로 전동차 문을 통과했다. 푸슈킨의 동명 원작에 기초해 창작되어 1897년 초연된 이 3막의 오페라는 주인공 오네긴과 타치나 사이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는데, 그 애절한 아리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가슴을 옥죈다. 그 시절 아마 같은 장소라고 기억되는 이곳에서 본 <예브게니 오네긴>과는 내용이나 형식은 크게 달라진 바가 없는 것 같은데, 무대 규모나 화려함은 분명 덜하다. 그래서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예상한 바대로 경비를 줄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대답이다.

국립 모스크바 로모노소프대학 본관과 창건자 로모노소프의 동상.
다음날엔 아침 일찍이 붉은 광장과 크렘린 궁, 그리고 그 경내와 인근에 있는 여러 성당과 명물들을 두루 돌아봤다. 17세기부터 ‘모든 아름다운 것’이란 뜻의 슬라브어 ‘끄라시나야’란 이름으로 불려오던 광장이 현대 러시아어에서는 ‘붉은’이라는 의미로 바뀌면서 지금은 ‘붉은 광장’이라고 부른다. 광장 언저리에 80여년 동안 묻혀있으면서 참배의 대상이 되어오던 레닌의 시신은 조만간 딴 곳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묘문은 굳게 잠겨있다. 평일(목요일)인데도 크렘린 참관자들은 장사진을 이룬다. ‘성벽’이란 뜻의 크렘린은 부등변 삼각형 모양으로 총 길이는 2235m에 달하며, 평균 무게 8㎏의 벽돌로 지면의 기복에 따라 높이가 5m에서 19m에 이르게 벽을 쌓았다. 성벽에는 구세주 탑과 삼위일체 탑을 비롯한 탑 18개(높이 28~71m)가 배치되어 있다.
 
참관 코스를 따라 처음으로 들른 곳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인 국립 무기궁전이다. 1485년 ‘국고’란 이름의 특수 창고로 발족한 이 궁전에는 전래의 각종 무기류뿐만 아니라 역대 황제들이 대관식 때만 쓰는 ‘모노마흐 대관모’를 비롯해 화려함이 극치에 이른 각종 궁전 의상과 장식품, 가재와 마구류가 전시되어 있다. 이어 오밀조밀한 양파모양의 돔에 십자가를 이고 있으면서 일찍이 “아, 여기가 바로 천국이로다!”라고 보는 이들의 경탄을 자아낸 15세기의 성모승천 성당(일명 우스펜스키 성당)과 성모수태 성당, 모스크바 시대 대공들과 황제들의 장례가 진행된 16세기 초의 천사 성당, 그리고 대 크렘린 궁전과 망루 궁전 등 기념비적 유물들을 차례로 둘러봤다.
모스크바의 대표적 수공예품인 마트로시카(목제 인형).
이어 크렘린 궁과 마주하고 있는 굼 백화점에 들렀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오래된 큰 백화점으로서 늘 고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그 백화점이 웬일인지 썰렁하다. 알고 보니 외제를 비롯한 고가품만 팔다보니 서민들의 발길이 뚝 끊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변모가 실감나는 현장이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붉은 광장’ 언저리에 자리한 성 바실리 성당이다. 예언자 바실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 성당은 러시아의 전통적 목조건축술과 비잔틴과 서유럽의 석조건축술을 융합시켜 만들어낸 러시아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이 성당은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뇌제 황제가 1552년 카잔 칸 국을 멸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560년에 완공한 성당이다. 가운데 높이 47.5m의 뾰족 지붕을 한 성모출현 교회를 중심으로 8개의 교회가 주위에 배치되어 있다.
 
 
얼마나 화려했으면 폭군 뇌제가 설계한 두 러시아 건축가를 불러놓고 칭찬한 다음 즉석에서 다시는 그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두 건축가의 눈을 도려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시간에 쫓겨 점심을 거른 채 1000여년의 러시아 미술을 집약한 러시아 4대 미술관의 하나인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을 찾았다. 상인인 파벨 트레티야코프의 개인 미술품 수장고에서 국립 미술관으로 발돋움한 이 미술관에는 러시아의 대표적 사실주의 작품 10만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문학 예술에서 사실주의를 이상으로 추구하는 필자에게는 미의식을 점검하고 충전하는 절호의 장이었다.

이번의 모스크바 체류는 그간 줄곧 지켜봐오던 그 변모를 재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역사는 변모의 과정이다. 모스크바는 2000년 동안, 특히 지난 한 세기 동안 변모의 시도를 많이 해왔다. 오늘도 그 시도는 진행형이다. 무엇이 참 변모인지는 역사가 해답을 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그것을 착실히 지켜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반추하면서 귀국 길에 올랐다.

2007년 6월27일부터 2009년 7월10일까지 약 2년 동안 초원 실크로드를 대흥안령 초원로, 몽골 초원로, 동·서 시베리아 초원로의 네 구간으로 나눠 답사했다. 그 답사 견문을 지난 1년 동안(2009·2·5~2010·2·10) 모두 52회에 걸쳐 실어 온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의 문명기행문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 풀밭에서 문명의 옥석을 가려 주옥을 주워보려던 애초의 바람이 얼마나 이뤄졌는지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 각필하게 됨을 독자 여러분께 고백하는 바이다.

< 시리즈 끝 >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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