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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과학, 기술, 환경

김경민의 도시이야기 - 프레시안

by Wood-Stock 2013. 12. 8.

관점이 있는 뉴스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_list_writer.html?name=%EA%B9%80%EA%B2%BD%EB%AF%BC+%EC%84%9C%EC%9A%B8%EB%8C%80+%ED%99%98%EA%B2%BD%EB%8C%80%ED%95%99%EC%9B%90+%EA%B5%90%EC%88%98


[김경민의 도시이야기] 다큐 <말하는 건축 시티 홀>에 대하여

"오세훈의 야망, 동조한 건축가…역사 파괴한 新청사"


1963년 10월 28일 뉴욕, 역사를 부수다.

사실 서울만 유독 역사적 자원을 부수고 그 자리에 초고층 건물이나 랜드마크 건물을 세우는 데 혈안이 돼 있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전 외국의 많은 도시들도 현재 우리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건물을 지으면 도시 경쟁력이 향상될 것'이라는 믿음에 현혹됐었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의 뉴욕도 현재의 서울과 매한가지였다.

1963년 10월 28일. '뉴요커', 아니 많은 미국인들은 이날 '왜 역사적 건물을 부수지 않고 보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이날 뉴욕 맨하튼 심장부에 위치했던 웅장하고 아름다운 기차 역사, 펜 스테이션이 무자비하게 철거되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 후 이 자리에는,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초고층 오피스(사무용) 건물이 들어섰다.

▲ 철거 이전의 펜 스테이션 ⓒ미국 국회의사당 누리집
▲ 펜 스테이션 자리에 들어선 초고층 오피스 건물. ⓒ김경민


펜 스테이션 자리에 새 건물이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1961년 초였다. 이 엄청난 소식에 소수의 건축가들은 '더 나은 뉴욕 건축을 위한 액션 그룹(Action Group for Better Architecture in New York)'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펜 스테이션 철거를 반대하는 거리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 계급의 파업 시위가 아닌 멋진 정장을 입은 화이트칼라 전문가들의 집단 피켓 시위는 뉴욕 시민들의 눈에 매우 낯선 장면이었다. 이 시위에는 도시계획학계의 패러다임을 뒤바꿔놓았다고 평가받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저자, 제인 제이콥스도 참여하였다.

건축가들의 반대 시위에도, 뉴욕 시민들은 초기엔 펜 스테이션 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철거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건물이 철거에 들어가기 직전으로, 공사를 돌이키기에는 이미 매우 늦은 시점이었다. ②

그 아름답던 건물이 불과 3년 만에 처참하게 부서지는 것을 지켜보며, 뉴욕 시민들은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뉴욕시는 철거가 진행되던 중인 1965년, 역사적인 랜드마크 건물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이 법은 단순히 랜드마크 건물뿐 아니라 커뮤니티를 지정한 후 이를 보호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더 나아가 1년 뒤에는 중앙 정부 차원에서 '역사 자원 보호법'이 통과된다. 

▲ 펜 스테이션 철거 50년과 제인 제이콥스를 다룬 <가디언>의 기사. 피켓을 든 여서 옆에 안경을 쓰고 있는 여성이 제인 제이콥스다. (가디언 누리집 갈무리. ☞기사 원문 보기)


반세기 후 서울, 역사를 부수다.

그로부터 45년 후, 뉴욕의 반대편에 위치한 도시는 매우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2008년 8월, 비록 외세의 강압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건축적 의미가 깊은 서울시 청사를 중앙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시가 기습적으로 철거한 것이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문화재청의 철거 중지 요청에도, 시 청사는 사적이 아닌 단순 문화재이기에 문화재청이 간섭할 수 없다며 기습 철거를 감행하였다. 문화재청은 긴급 위원회를 열어 서울시 청사를 국가 사적으로 전격 지정하고 철거 중단을 명령하였으나, 서울시 청사 일부는 끝내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섰다.

50년 전 뉴욕의 건축계와 시민들은 역사적 건물, 펜 스테이션 철거에 대해 조직적 반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서울시가 나서 청사를 파괴하려는 시도에 전문가들의 조직적 반대 움직임은 없었다. 개인적인 반대 의사는 일부 있었을지언정. 이렇게 서울시 구청사는 전문가들과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무참히 철거되었다.

▲ 서울시의 청사 철거에 대해 문화 유산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었던 2008년 8월, 서울시는 태평홀을 중장비를 동원해 해체하고 말았다. 가운데 일부 헐린 부분이 태평홀이다. 사진은 2008년 8월 26일. ⓒ연합뉴스


제인 제이콥스 그리고 유걸

네이버 영화 페이지에서는 <말하는 건축 시티홀>의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서울시 신청사' 콘셉트 디자인의 최종 당선자인 건축가 유걸은 설계와 시공과정에서 제외된 채 신청사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는 유걸을 총괄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준공을 앞둔 신청사의 디자인 감리를 요청한다. 너무 늦은 합류였다. 이미 골조는 완성된 상태였고 유걸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유걸은 그래도 자신이 시청사의 마감을 돌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줄거리를 읽으면, '서울시 신청사' 건설 과정 특히 시공 과정에 건축가 유걸이 제외된 것이 주요한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시공 과정에 건축가의 의견이 반영되지 못한 것이 매우 큰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 시공에 건축가 의견이 반영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어이없는 현실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그리도 큰 문제일까? 건축가가 홀대받았다는 것이 정말 우리가 현시점에 곱씹어봐야 할 본질적인 문제인가?

건축가 100명이 뽑은 최악의 현대 건축물 1위로 서울시 신청사가 뽑힌 이유, 그리고 서울시민 60퍼센트 이상이 "디자인이 좋지 않다"고 지적하는 이유는 건축가가 시공 과정에 배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변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그 외관, 즉 '디자인'에 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문제의식은 보존해야 할 역사적 건물을 시 당국이 일방적으로 철저히 파괴했다는 것과, 그리고 그 자리에 들어선 건물의 외관이 주변의 역사적 건물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심각하게 반성해야 하는 것은, 시공 과정에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어쩌다 우리는 이 역사적 건물이 부서지는 데 침묵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맨해튼 펜 스테이션을 지키기 위해 피켓을 들었던 많은 전문가 그룹들은, 반세기가 지난 21세기엔 우리 곁에 없었다. 또 우리 모두가 흡사 50년 전 뉴욕 시민처럼 역사적 건물의 가치를 업신여겼다.

이렇게 한번 지키지 못한 가치는 이후에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2011년과 서울 공덕동 사거리 인근 한옥촌이 철거됐고, 2012년 비록 낡은 건물이었지만 유용한 가치가 있었을 서울 구로디지털단지 내 삼우창고(삼우보세장치장)이 철거됐다. 그리고 2013년 현재, 1940년대 조선영단주택(LH공사 전신)이 지었던 초기 원형이 잘 보존된 문래동 사거리 서남 블록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자기반성이 먼저다.

일개 정치인의 야망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건축가들 

한 가지 더. 시공 과정상의 문제가 있었건 없었건, 유걸 씨의 2008년 2월 서울시청 신청사 지명 당선 건축 조감도를 보면, 현재의 청사 모습과 얼마나 큰 차이점이 있는지를 비전문가인 필자는 알지 못한다. 현재의 모양새는 유걸의 설계 의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에 대해 건물을 설계한 유걸(72) 아이아크 공동대표는 "신청사가 구관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원래 의도했던 것"이라며 "처음이라 거부감을 가질 수 있지만 점차 좋아질 것으로 본다"고 반박했다. 그는 오히려 "애초부터 구관은 보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신청사를 짓고 보니 더 풍성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고 강조했다. 

시공 과정에서 건축가가 배제된 것은 필자가 보기에도 잘못이다. 하지만 만약 시공 과정 배제 따위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각이 주를 이루고 이것을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잘못을 가리기 위해 내세운 작은 변명에 불과하다. 비판받아야 할 점은 역사적 건축물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현실이지, 시공 과정이 아니다.

▲2008년 2월 서울시 신청사 당선안 (출처: www.iarcblog.net/entry/iarc-서울신청사-당선안)
▲ 서울 신청사 현재 모습. ⓒ김경민
▲ 서울 신청사 현재 측면 모습. ⓒ김경민


이제 자문해야 한다. 일개 정치인의 야망 그리고 그에 부화뇌동하는 건축가들에 의해 근현대 건축물들이 부서지기 시작하면, 역사의 도시 서울은 어떤 도시가 될 것인가? 서울은 전통과 현대 건축물만 남을 뿐, 중간 지대인 근현대 건축물은 없는 진공의 도시가 될 지 모른다.

우리에게 과거의 소중함과 미래를 말하는 인물은 제인 제이콥스와 정기용, 유걸 중 과연 누구인가?

최근 서구에선 역사적인 건물 축에도 들지 않는 과거 건물마저도 보존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또 중국 상하이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도시 이야기> 연재 초반, 상하이 티엔즈팡의 사례에서 설명하였다. 상하이엔 잊고 싶은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건물마저도 보존해야 한다며 내버려 둔 사례도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번 연재에서 한다.

□ 주석
① 'BATTLE OVER FUTURE OF PENN STATION CONTINUES', 1962년 9월 23일, <New York Times>

② LORRAINE B. DIEHL, 《The Late, Great Pennsylvania Station, 1985, American Heritage Press.
③ Jim O'Grady, 《Voices From the Wilderness Unite》, 2003.
④ http://www.nypap.org/content/pennsylvania-station,
http://82011443.nhd.weebly.com/the-demolition-as-a-turning-point.html
⑤ <한국일보> 2012년 6월 29일 여론조사 결과, 시민 10명 중 6명 "신청사 디자인 좋지 않다" (☞ 기사 보기 )
⑥ 위와 같음




[김경민의 도시이야기] 매국노가 지은 건물들도 없애면 그만?

오세훈의 천박한 논리 "청사 철거로 일제 잔재 청산"


서울시 구청사 철거를 위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노력은 심히 놀라운 수준이었다. 청사 철거를 두고 이명박 정부의 문화재청과 벌인 다툼은 2008년 당시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관련 기사 보기 : 오세훈 "시민 고객 위해 시청 본관 철거 시급"오세훈 시장, 당신이 네로 황제인가?"서울시청사가 불안전?…그럼 경복궁도 부숴라")

당시 서울시는 문화재청에 일방적으로 철거 계획을 통보한 뒤 곧바로 철거에 돌입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의 즉각적인 철거 중지 요청도 소용없었다. 문화재위원들은 서울시를 방문해 항의하려 했으나, 시는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힘겨루기 끝에 서울시는 결국 철거를 일시 중단한 적도 있으나,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법적 대응을 불사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서울시가 청사 철거를 위해 표면으로 내세운 논거는 "일제 시대 건물은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잔재 청산만큼 대중에게 호소할 만한 재료가 없었음은 충분히 수긍이 된다. 필자 역시, 경복궁 안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환영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건물은 조선 왕조 600년을 상징하는 궁궐 내부에 지어졌던, 왕조의 맥을 끊어버렸던 건물이다. 당시 민중에게는 폭압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었기도 했다. 그렇기에 경복궁의 원형을 보존하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는 것은, 총독부 건물이 가졌을 건축적 가치를 뒤엎을만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가치가 총독부 건물 철거에는 유의미했단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식민 시기에 만들어진 모든 건물의 철거를 주장하는 것이 옳을까. 이제는 이런 단편적 이유가 아닌,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야 할 시점인 듯하다. 아래와 같은 사례를 보며, 우리가 한 건물을 철거할 때 어떤 요소들을 고려해야 할지 생각했으면 한다.

▲ 서울시의 청사 철거에 대해 문화 유산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었던 2008년 8월, 서울시는 태평홀을 중장비를 동원해 해체하고 말았다. 가운데 일부 헐린 부분이 태평홀이다. 사진은 2008년 8월 26일. ⓒ연합뉴스


매국노가 지은 가치 있는 건물, 철거냐 보전이냐

우선 질문 하나. 망해가는 국가의 국모의 삼촌이며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였던 이가, 그의 딸을 위해 한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 과연 보전해야 할까.

'매국노'계에서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윤덕영 이야기다. 윤덕영은 순종 황제의 부인 윤황후의 큰아버지, 즉 외척이다. 그는 외척이라는 지위를 등에 엎고 '한일합방조약(경술국치)'을 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카인 윤황후는 한일합방을 막으려 국새를 치마 속에 감추었지만, 윤덕영은 이를 빼앗아 한일합방 도장을 찍었다.

순종의 일본 왕실 참배를 성사시킨 이 역시 윤덕영이다. 내선일체를 내세웠던 일제는 순종의 일본 왕실 참배를 원했고, 고종과 순종은 일본 왕실에 조선이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우려해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윤덕영의 힘으로 참배는 성사됐으며, 이후 윤덕영은 고종 독살설의 주동 인물로 의심을 받기도 한다.

그런 윤덕영이 지은 건물이 있다. 매우 거대하고 호화로워 '조선의 아방궁'이라고 불리었던 대지 1만 평(건물 600평)에 달하는 옥인동 저택이 그것이다. 윤덕영은 멸망한 국가의 궁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의 아방궁에 천수를 누리려 했다.

▲ 1920년대 서울 종로 옥인동에 있던 윤덕영 대저택 전경.


윤덕영은 1938년에는 자신의 저택 아래 동네에 딸을 위한 2층 벽돌집을 지었다. 1층은 온돌방과 마루,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되어 있고 집이다. 한옥과 양옥의 건축기법 외에도 중국식 건축기법이 섞인, 건축적으로 나름 의미 있는 건물이다.

서울시 구청사 철거를 위해 당시 서울시가 내세웠던 논거, 즉 '일제 잔재 청산'이 그리 중요하다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도 윤덕영이 지은 건물은 철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이 건물은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고(故) 박노수 화백이 평생에 걸쳐서 가꾼 곳이다. 고인이 시민들을 위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시에 기증한 곳이기도 하다.

요컨대, 윤덕영의 건물은 매국노의 건물이라는 '역사성'과 박노수 화백이 손수 가꾼 곳이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박물관이라는 '장소성'이란 전혀 다른 두 가치가 충돌하는 공간이다. 만약 역사성이라는 가치, 즉 일제 잔재 청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 철거가 마땅하다. 그러나 이 건물을 철거하는 데 선뜻 동의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윤덕영의 가옥이 오랜 시기를 거치면서 나름의 긍정적인 장소성을 구축하였단 것을 알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처럼 하나의 건물을 철거하려 할 때엔, 다층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건물에 얽힌 역사적 사실도 중요하겠으나, 그 건축물이 쌓아온 그리고 주변과 관계한, 사람과 연접한 관계성에 대한 냉철한 분석 역시 중요하다. 역사적 건물 그 차제로서의 가치를 혹여 가늠할 수 없다면, 우리보다 더욱 현명한 후손에게 결정을 맡겨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 윤덕영이 딸을 위해 만든 가옥. 박노수 화백은 이 건물을 수리해 전시관으로 시민들에게 개방했고, 현재는 서울시 문화재 1호로 등록돼 있다. ⓒ김경민


상하이, 일제가 쓴 건물도 후손 위해 보전하다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가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상하이는 많은 수난을 겪었고 많은 중국인과 상하이에 있던 외국인이 크나큰 피해를 당하였다. 당시 일제에 의해 점령되어 제국주의를 위해 사용된 건물들이 현재도 상하이에 남아있는데, 이중 일본 해군 본부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지금도 건재하다.

겉으로 보기엔 상하이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특색 없는 건물이지만, 이 건물은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를 중국 사회에 던졌다. 바로, '일제가 사용했던 건물, 즉 식민 잔재이자 미학적으로도 별반 뛰어나지 않은 건축물을 과연 보전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다.

이 건물 철거를 두고 뜨거운 찬반 논쟁이 일었다. 일제의 숨결이 남아있는 건축물들은 가차 없이 철거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치욕의 역사 또한 엄연한 역사임을 인정하고 건물을 보전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중국 학계는 많은 논의를 거쳐, 결국 잊고 싶은 역사를 지닌 건축물 또한 보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심지어 건축적 가치나 미학적 가치가 없더라도 후손을 위해 역사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중국은 지금도 이를 실천하고 있다. ①

▲ 과거 일제의 해군본부로 사용되었던 건물. ⓒ루안 팡 교수


이처럼 한 건물을 철거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윤덕영 가옥을 철거하지 않았다. 윤덕영 가옥이 일제 잔재이므로, 이를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에 쉽게 우리 사회가 동의하지 못한다면, 2008년 서울시의 청사 철거 논리에 대해서도 좀 더 시간을 두고 고민했어야 한다. 중앙 정부마저도 당시 강력히 철거에 반대하였는데도, 시 정부가 독단적으로 철거에 들어가는 일들이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P.S. 일제 잔재는 단순히 관련 건물을 부수면서 청산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이나 시키면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게 옳다. 필자는 과거에 서울대학교와 동경대학교간 프로그램으로 동경대 교수와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를 대상으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해당 국가가 전후 일본에 대해 배상을 강하게 요구하지 않았기에, 온정적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이 이뤄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위의 학생들은 그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일제 잔재 청산을 보여주기 차원에서 건축물을 부수는 방식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중국과 같이 외려 그런 건물들을 보존하면서 치욕스러운 역사마저도 재교육 현장으로 사용하고 역사 교육을 강화하는 게 보다 낳은 해법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 필자 주석

① Feng, Luan., Wang, Yiyun., 2009, Debates and Compromises: Conservation and Development of the Northern Old Hongkou in Shanghai, Planning Theory & Practice, 10(2): 271-281.




[김경민의 도시이야기] 북촌에 ' 3·1 독립의 길' 만들자

독립선언서 낭독 태화관이 보스턴에 있었다면…


보스턴은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미국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건물과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연설한 장소 등이 지금도 잘 보존돼 있다. 보스턴 시는 보스턴 '자유의 길(the Boston Freedom Trail)'이라는 미국의 건국 역사와 독립 기념과 관련된 명소들을 이어주는 길을 만들어 역사성을 기리고 있기도 하다. 보스턴 자유의 길은 인위적으로 새 거리를 만든 것이 아니다. 자유의 길은 기존 도로에 표식을 새우고 표식과 표식을 연결해 만들어졌다.

보스턴 자유의 길의 총 길이는 2.5마일(4킬로미터) 정도 되며, 보스턴 도심(다운타운·금융지구 인근)을 따라 걷는 길이어서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또 건물과 장소마다 역사적인 사건(스토리)이 새겨져 있어, 단순히 길을 걷는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보스턴과 그 역사를 길 전체가 '스토리 텔링'하고 있다는 매력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그 덕에 보스턴 자유의 길은 후세를 위한 교육 기능뿐 아니라 관광 상품의 역할도 하고 있다.

▲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보스턴 '자유의 길(the Boston Freedom Trail)
▲ 왼쪽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구 주의사당(Old State House). 오른쪽은 보스톤 '자유의 길(the Boston Freedom Trail)' 표식. ⓒ김경민


250년 역사 보존한 보스톤, 100년 전 건물 부순 한국

서울 종로 북촌 활성화는 기존 상권과 달리 골목길 자체가 매력적일 수 있단 사실을 알려주었고, 이 지역에서는 지금도 각 지점에 깃든 사연(스토리)을 발굴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그 스토리가 단편적으로 건물 또는 장소 단위에서 그치는 측면이 적지 않다. 이에 반해 보스턴 자유의 길은 도시의 여러 장소를 네트워크로 서로 이어지게 하여, 각 장소뿐 아니라 도시 전체에 대한 매력적이고 연결력 있는 스토리를 제공한다.

북촌 일대는 보스턴 못지않은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장소와 역사가 충분히 존재한다. 이들을 엮어서 '3.1 독립의 길(3.1. Freedom Trail)'이라는 새로운 '스토리 길'을 만들 수 있다. 3·1 운동은 처음에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그리고 학생 세력을 중심으로 개별 추진되다가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을 중심으로 운동의 일원화를 이루어내면서 급류를 타게 됐다.

이때 그 주요 거점이 바로 종로와 그 배후 주거지였던 북촌(北村)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역사적 건물들이 없어져서 1919년 3.1 운동의 역사를 느끼는 데에 큰 한계가 있다. 보스턴이 250년 전 역사적 사건과 건물들을 보존하고 있는 데 비해, 우리는 불과 100년 전 역사적 건물들을 부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1 독립의 길', 이렇게 만들 수 있다

3·1 운동이란 거사의 준비와 추진 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하의 내용은 장규식의 2003년 논문 <일제하 종로의 민족운동 공간 : 침략과 저항의 대치선>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계동 1번지 중앙고보: 1919년 1월 중순, 일본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학교를 방문하여 교사 현상윤과 교장 송진우에게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준비 상황을 보고하고 <2·8 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

▲ ⓒ김경민


재동 68번지 보성고보 교장 최린의 집 : 송계백(보성학교 출신) 방문을 계기로 최린, 현상윤, 송진우, 최남선 등이 수차례 회동하여 거사를 모의함.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 대표를 교섭하는 한편 이승훈을 통해 기독교 측과의 합작을 시도 - 3·1 운동의 초기 조직화 / 2월 21일 이승훈과 최남선 최린 회합, 기독교 측과 천도교 측의 합작 재시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지 않음)

계동 130번지 김성수의 집: 최남선의 편지를 받고 2월 11일 상경한 이승훈이 현상윤의 중개로 송진우와 회합, 이승훈이 송진우의 거사 참여 제의를 수락함으로써 기독교계와 천도교계의 일원적 거사를 위한 발판을 마련. (원형이 보존되어 있지 않음)

소격동 133번지 김승희의 집: 2월 17일 재차 상경한 이승훈과 송진우 회합. 송진우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천도교 측과 연락이 닿지 않자 이승훈은 기독교계 단독 거사를 고려함. 2월 21일 최린의 집에서 이승훈과 최린, 최남선이 전격 회동하여 기독교와 천도교 측 합작 재시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지 않음)

송현동 34번지 천도교 중앙총부: 2월 24일 이승훈 함태영이 최린과 함께 손병희를 방문, 기독교 측과 천도교 측의 합동 성립 - 3·1 운동의 일원화 (현 덕성여중)


계동 43번지 한용운의 거처: 최린과 한용운 회합. 불교계 참여

종로2가 9번지 YMCA회관: 박희도가 지도하는 학생YMCA를 중심으로 하는 학생단 독립운동의 진원지 (원형 보존돼 있지 않고, 1967년 재건축됨)

관수동 144번지 중국음식점 대관원: 1월 27일 중앙YMCA 학생부 간사 박희도의 주선으로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 회합, 학생단 거사에 대해 처음으로 의견 교환. (원형 보존되지 않음)

수송동 44번지 보성사(현 조계사 서편 경내): 2월 27일 밤 독립선언서 2만 1000매 인쇄. 여기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경운동 78번지 이종일(보성사 사장)의 집으로 운반되어 다음날 각지로 배포.


가회동 170번지 손병희의 집: 2월 28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3인이 지면을 익히고 독립선언식의 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회합. 인사동의 명월관지점 태화관으로 거사 장소 변경. (철거됨)


  

▲ 계동 43번지 한용운의 거처.               ▲종로2가 9번지 YMCA회관                   


▲ 손병희 선생 집터



인사동 137번지 승동예배당(연희전문 학생대표 김원벽이 다니던 교회): 2월 28일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 회합, 학생 조직 동원을 최종 점검하고 독립선언서의 배포를 분담.

인사동 154번지 태화관: 3월 1일 오후 2시, 33인 가운데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식 거행. (원형이 보존되지 않음)

종로2가 38번지 탑골공원: 3월 1일 오후 2시, 학생과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별도의 독립선언식 거행. 경신학교 출신의 정재용이 공원 팔각정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 낭독, 독립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에 돌입 - 거족적인 민족 운동의 시발점.


이처럼 3.1운동은 북촌 일대에서 활발히 논의되었고, 마침내 태화관과 종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된다.


여기서 아쉬운 점은 적어도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자리, 태화관 만큼은 원형을 보존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란 점이다. 태화관은 화재로 소실돼 지금은 태화빌딩이 들어섰으며, 그 외 3·1 운동을 탄생시킨 많은 역사적 건물들은 철거됐거나 사라졌다. 미래에 그 원형을 다시 재건한다는 가정하에 주요 현장의 동선을 '3.1 독립의 길'이는 이름을 붙여 그리면 다음과 같다.


ⓒ김경민


* 2주 전 연재에서 만해 한용운과 비교를 하기 위한 인물은 문인이면서 독립에 관여했으나 변절한 장지연이었다. 필자의 실수로 손병희를 언급하였다. 바로 잡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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