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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과학, 기술, 환경

첨성대의 과학

by Wood-Stock 2012. 11. 26.

PRESSian

 

(1) 첨성대에서 보는 별자리와 경주 고분 및 유적들

 

경주 여기저기 있는 수백 개 고분, 첨성대와 불국사, 안압지 등 주요 유적들은 왕도 경주의 혼이나 다름없다. 대릉원 등 잘 알려진 30여 고분은 황금관과 철검 같은 보물을 품고 신분을 감싼 채 경주시내 반월성 옆에, 어떤 것들은 경주 외곽, 산꼭대기, 바닷속까지 퍼져 있다. 그리고 왕궁터 바로 옆에 첨성대가 있다. 첨성대는 왕궁 직속기관이었다.

경주 여행을 하다 보면 오랜 기간 이렇게 모양을 잡고 있는 그들의 존재 저 끝에 어떤 암호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첨성대를 바라보는 반월성 앞 계림의 숲에서 불현듯 경주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열정이 생겨났었다. 눈 닿는 곳마다 솟아있는 고분이 총총히 눈에 들어오는 밤, 신비로운 곡선의 첨성대 옆길로 지나갈 때 천마총의 천마가 밤하늘에서 눈앞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것은 첨성대 매점에서 파는 손수건에 그려진 천마를 보고 떠올린 단순한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나중에 '첨성대를 중심으로 경주의 왕릉과 중요 유적들은 하늘의 별자리가 그대로 지상에 내려와 앉은 것처럼 모양새가 일치한다'고 이용환 울산 MBC PD가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 느낌은 되살아나고 첨성대에 관한 새로운 연구를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 첨성대를 기점으로 한 경주의 왕릉 및 건축물이 별자리와 일치하는 도읍이야기 <첨성대 별기>의 연출자 이용환 울산 MBC PD ⓒ 이순희


울산 MBC의 다큐멘터리<첨성대 별기>(이용환 연출)는 2009년 12월 방송되었다. 여기에는 그간의 학자들의 연구를 통한 여러 사실을 재조명하면서 경주시내 유적이 별자리를 본뜬 것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하고 있어 흥미진진했다. 첨성대를 보는 시각이 전보다 넓어지고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세계가 펼쳐졌다.

생각 없이 볼 때는 기하학적 모양과 오래된 돌 건축이 주는 느낌뿐이던 첨성대가, 그야말로 별빛 찬란한 속에 미동도 않고 버티는 학문적 진리, 천문학 그 자체로 보이고 비밀이 조금씩 언급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 첨성대를 볼때 시각적으로 가장 특이한 형태는 1단부터 24단까지는 회전곡면을 이루며 그 위 27단까지는 직선으로 이루어졌다. S자형 회전곡면은 태양 그림자 길이의변화로 알 수 있는 황도의 곡선을 수직으로 세워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송민구


기본 사실 중의 하나는 첨성대 모양과 첨성대 건축이 가리키는 동지일출선에 관한 것이다. 이 사실은 건축가이자 전 서울공대,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 송민구의 1980년 첨성대 논문에서 처음 밝혀졌다.

"회전곡면을 이루는 첨성대의 곡선은 태양이 원을 그리며 도는 궤도, 즉 황도의 곡선을 따온 것이다. 동지, 춘추분과 하지를 정점으로 하는 그림자 관측으로 신라인들은 황도가 그리는 곡선을 쉽게 알아냈을 것이다. 또한 첨성대 꼭대기 정자석(井字石)과 바닥의 초석 및 지대석의 두 모서리는 동남동 30도 가까운 동지일출선과 정확히 일치한다"라고 제시했다.

"그 선상에 김유신묘, 선덕여왕릉과 불국사 석굴암, 문무왕릉이 위치하는 웅장한 장사(葬事)구도가 드러난다. 우연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그는 단언했다.

▲ 송민구 교수의 연구 : 첨성대 정자석과 초석 및 지대석의 두 모서리를 정확하게 지나는 동지 일출선 및 여타 방위들('한국의 옛 조형의미'에서 인용) ⓒ송민구


"동지일출은 그날 이후 해의 고도가 상승하기 때문에 신라인에게 새로운 시작으로서 매우 중요했다. 신라 조영물의 상당수가 동남동 30도 각도의 일출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라는 송민구의 주장은 계속 이어지며 첨성대 전체를 분석하는 것이 되었다.

그의 첨성대 논문이 실린 <한국의 옛 조형의미, 1987>은 천문관련 어려운 수학공식이 많이 나오지만 인문적인 얼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송민구 : 1920-2010. 서울 공대·성균관대 건축과 교수, 경복고 수학교사, 건축가협회장 등을 역임. 주요 건축으로 동국대 본관, 서강대 도서관 등이 있다. 저서로 "첨성대가 지닌 의미"라는 제목의 논문이 포함된 <한국의 옛 조형의미, 1987>가 있다).

'첨성대가 왕릉을 정하는 기준점으로 별자리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왕릉이나 주요 건축물이 어떤 천재지변으로 자리가 유실됐다 해도 언제든 원위치를 되 확인하기 위해 천문관측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또 일출의 정확한 때로부터 1년의 길이를 측정하고 달력의 제작과 시간의 예보, 별자리에 보이는 특별한 현상이 왕과 국가에 관련된 길흉 여부를 점치기, 중요한 위치측정 등 다양한 업무는 정치, 왕권, 종교, 이념 등에 직결되는 것이기도 했다. 담당자들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일에 첨성대가 기준역할을 했다.

그 목적은 천문관측 외에도 상징이나 기념비적인 것도 있지만 본질은 후손들이 길이 보존하며 그 정신을 계승시키기 위한 국가이념에 있었다. 도읍 건설은 그런 것이다. <첨성대 별기>의 제작은 이 논문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했다.

▲ 정기호 교수의 연구 : 첨성대를 기점으로 동지일출선이 지나는 축에 석굴암이 동향해 있고 선도산 기점 동서 위도가 교차하는 지점에 첨성대가 있음을 제시했다. ⓒ정기호


그런데 첨성대 기점 동지일출선에 관해서는 송민구의 천문관측의 관점과는 달리 조경학자의 입장에서도 연구되었다.

조경학자 정기호 성균관대 교수는 1991년 "경관에 개재된 내용과 형식의 해석" 논문에서 "일출 방향을 향해 나 있는 석굴암과 선덕여왕능이 첨성대의 동지일출선 축과 일치하며 선도산에서 비롯된 동서 위도선과 동지일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첨성대가 있음"을 살폈다. 그는 "주어진 자연현상의 한 특징을 포착하여 그 위에 석굴암 등 조형물을 극히 계획적으로 앉혀 놓았다. 첨성대는 국가체제 수립과정에서 왕도 건설의 의도적인 축 설정과 관계되어 있다"고 했다.

<첨성대 별기> 프로그램이 찾아낸 첨성대 관련 자료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별자리와 방위를 찾아 점을 치는데 쓰던 식점반의 출현과 1963년 홍사준 유문룡의 첫 실측, 이동우·김장훈 교수의 노력으로 뒤늦게 보존된 실측도면, 일본인 나카무라의 첨성대로부터 왕릉 간 거리의 규칙성연구, 풍수지리, 유태용 교수의 고려 척 확인, 정태민의 고천문 연구 등이 연이어 거론됐다.

결정적으로 고구려 시대의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가 등장했다. 첨성대와 이 천문도가 결합되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첨성대 별기>는 경주의 왕릉, 유적 상당수가 하늘의 별자리 모양과 일치하는 현상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런 주장은 최초의 것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지상에서의 천문관측 기점인 첨성대는 하늘에서 방위 기준이 되는 견우별(알테어, 알타이어)이고, 대릉원과 쪽샘지구는 천시원(하늘의 시장이라는 뜻)별자리 영역에 든다. 대릉원 내 97호 고분과 미추왕릉은 천시원 가운데 있는 후(侯), 제좌(帝座)란 별과 크기와 방향, 위치가 같다.

▲ 대릉원 일대의 고분들을 연결하면(윗부분)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나와 있는 천시원 별자리(아랫부분)와 모양이 일치한다. 97호분과 미추왕릉은 천시원 중간에 있는 별 후(侯), 제좌(帝座)와 방향, 위치, 크기가 같다. ⓒ이용환


반월성 앞 넓은 뜰은 직사각형 비슷한 별자리 천전(하늘의 밭)과 실제 모양이 같다. 천전은 임금이 있는 도성 안의 밭을 뜻한다. 반월성은 구감(물이 흘러가는 도랑처럼 모든 것의 근본이란 뜻), 안압지는 천연(하늘의 연못), 포석정 또한 천원(하늘의 동산)이라는 별자리와 모양이 일치했다. 첨성대 별기는 별자리와 유적사진의 대비를 통해 그 주장을 펴나간다.

▲ <천문유초>(이순지 원저, 김수길·윤상철 공역)에 제시된 우수(牛宿 , 28수 가운데 하나) 별자리에 들어 있는 견우, 천전, 구감은 각각 첨성대, 반월성 앞 벌, 반월성 자리와 일치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평양성에 있다가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에게 전해진 통치 자료이다. '하늘에 있는 별자리를 분야별로 죽 펼쳐 보인다'는 뜻의 천문도인데 이만한 별자리를 기록하는 데는 적어도 500년 이상의 관측이 축적된 결과라고 한다. 별자리의 변형된 모양으로 보아 그 제작연대는 고구려보다 훨씬 더 거슬러 고조선 시대로 올라간다고 보기도 한다(정태민, 박명순의 연구). 1984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학계에 일반적으로 공개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 '천상분야열차지도'의 탁본. 평양성에 있다가 조선 시대로 전해진 제왕의 통치 자료이다.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고천문도'로서 국보이다. ⓒ성신여대박물관 소장


첨성대는 647년경 선덕여왕 때 세워졌다. 경주 황룡사가 지어진 것과 거의 동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첨성대 건축에 고구려 자가 큰 오차 없이 기준이 된다는 것은 유태용 한양대 교수가 실험해서 밝혀냈다.

고(故) 홍사준 경주박물관장은 '황룡사 구층탑을 세운 아비지 일족이 첨성대를 지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인 적이 있다. 근거가 없는 것이라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어도 '아비지'는 백제의 천재 건축가였다. 현재 첨성대는 계속되는 부동침하 등으로 약간 일그러진 상태이지만, 그 형태는 굉장히 안정적인 건축구조이며 1400년 가까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천문에 있어 백제가 고구려 신라보다 뛰어났다'고 송민구는 논문에서 지적했다. 그 예로 도읍을 정하는 데는 북극성의 고도 측정 등 특별한 천문관측 결과가 적용되는데, 부여에서는 정확한 일남중(태양이 정남에 오는 때) 고도를 1년에 두 번 춘·추분에 측정할 수 있었다고 했다. 평양이나 경주보다 더 정밀한 관측을 할 수 있었기에 천문지식에 있어서 고구려 신라가 백제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초까지도 그런 천문 이념이 존재했으리라고 한다. 세종대왕 때에는 천문학자 이순지의 <천문유초>가 저술되었다.

이용환 PD는 <삼국유사>에 '첨성대관련 기록이 별기에 전한다'고 한 것은 그 책이 불교공인 이전의 신라 토속 종교와 학문에 관한 책일 것이라고 보았다.

첨성대에서 명활산성, 선도산성, 남산성이 일정한 거리에 있다는 것은 일본인 나카무라가 처음 주목했다. <첨성대 별기>를 제작하면서 실측한 결과 명활산성(동), 선도산성(서), 남산성(남)이 첨성대로부터 각각 3.2km, 3.5km, 3.9km가량 떨어져 둘러싸고 있다. 이 PD는 4방위 중 북쪽에 있는 방위로서 봉황대를 덧붙였다. 봉황대는 신라고분중 형태가 가장 큰 무덤이다. '첨성대는 그 안의 평지에 이등변 삼각형 공식과 같은 개념으로 자리한다'는 것이다.

'신라인 박제상이 쓴 책 <부도지>에 묘사된 것처럼 4부에 단을 세우고 그 마름모꼴 한가운데 평지에 천대를 쌓았다는 것이 후일 첨성대를 세운 이 자리를 말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따라붙었다.

▲ '다음 뷰'에서 본 첨성대 기점 동쪽의 명활산성, 서쪽의 선도산성, 남쪽의 남산성과 북쪽의 봉황대는 각각의 거리가 대체로 일정하다. 첨성대는 이들이 둘러싸고 있는 자리의 평지 안에 이등변삼각형 함수를 나타내는 자리라고 한다.ⓒ이용환


서양에서는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 세 개가 오리온 별자리의 삼태성별과 방위각이 같다고 하는 그레이엄 핸콕의 저서 <신의 지문>이 있다. 앙코르와트 사원 또한 용의 별자리를 닮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고대에 사람들은 뭐든지 별과 함께 생각했다고, 이집트 피라미드 같은 천문개념이 있었으리라 보았습니다. 첨성대와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그 열쇠가 되었습니다. 천문을 통치에 이용하기 위해선 기구가 있어야 했을 테니까. '송민구 선생 등 학자들이 저랑 비슷한 생각을 이미 30년 전에 논문으로 발표하셨구나' 하여 구체적 내용을 알게 되고 첨성대의 비밀을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첨성대 별기> 제작은 3년이 넘게 걸렸다. 이용환 PD는 <첨성대 별기> 제작 과정을 기록한 책에서 "반월성을 남천과 형산강이 둘러싸고 흐르고 있는데 천시원을 지나가는 은하수의 위치와 그 모양이 비슷한 것 아닌가. 이것들을 확인하면서 전율이 왔다. 경주는 신라왕릉 등 별자리를 지칭한 유적을 가진 세계 유일의 도시가 될 것이며, 앞으로 경주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2) 첨성대와 천문의 수학 : 송민구 등의 연구

 

그동안 첨성대 연구에 헌신한 이들에게 알게 된 흥미로운 현상이 한둘이 아니다. 그것은 동지 일출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기도 했다. 신라인의 이 방위개념은 천수 백년 지난 오늘 무언으로도 그 뜻을 전달하는 것이 되었다.

왕들이 죽으면 그 시각에 맞춰 해 뜨는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매장했다. 해는 왕을 상징하는 것이며 별은 해진 뒤에 나와 퍼져서 해처럼 비춘다. 왕이 죽은 시각에 내세로 떠나는 영혼이 실리는 북두칠성의 9성이 낮이든 밤이든 그 시각에 어디 있는지 알려면 정확한 관측을 해야 했다. 왕릉은 그로부터 풍수지리상 길지의 터를 잡아 조성됐다.

▲ 경주 시내 첨성대 부근의 고분. 첨성대는 이들 고분의 위치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 이순희


1969년 발굴한 경주 인왕동 고분에 묻힌 8인의 머리가 모두 동남쪽을 향해있으면서도 조금씩 방위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계절에 따른 해돋이 방향의 변화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전 경희대박물관장 황용훈 교수는 말했었다.

천마총 주인으로는 지증왕 이름이 나오기도 하고 알 수 없다고도 하는데, 고고학자 조유전에 따르면 '천마총 또한 죽은 날의 해돋이 각도를 분석한 결과 자비왕의 무덤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했다.

석굴암에서 보는 문무왕릉이 일출 방향에 맞춰져 있고 망해사나 신방사,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주 부석사 대석단이 동남동 방향인 것 등도 일출이 중요한 기점이었음을 알려주는 예이다.

 

▲ 첨성대 주변 민가에서 1930년대에 발견된 식점천지반(式占天地盤)의 한 부분. ⓒ 이용환

▲ 식점천지반에 새겨진 24축의 일부, 방사선과 원, 팔괘 중 하나. 원형 한가운데 자침을 설치해 방위를 찾는데 쓰던 것이라고 한다. ⓒ 이용환


1930년대에 첨성대 주변 민가에서 둥근 돌판에 24축의 일부인 子 · 癸 · 丑 · 戊 · 寅 · 甲의 글자와 방사선, 팔괘의 한 부분이 새겨진 식점천지반(式占天地盤) 조각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단순히 해시계로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

"현대의 풍수지리학에서 명당을 구할 때 방위각을 측정하는 기구 패철과 같은 것으로, 한가운데 자침을 설치해 측정한다"고 풍수지리연구가 황영웅 박사가 이를 복원한 그림을 제시했다. 식점천지반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963년 12월 홍사준 당시 경주박물관장이 주도하여 유문룡 씨에 의한 첨성대 첫 실측이 이루어졌다. "첨성대 안에 10cm 단위로 실을 매달아서 돌의 크기를 실측했죠"라고 유문룡 씨가 회상했다. 그때 만든 3벌의 도면은 이후 첨성대 연구의 기본자료가 되었다.

▲ 첫 실측이 있은 직후 1964년 봄의 첨성대 서남향. 학생들의 경주수학여행은 역사 현장에 접하는 걸음이기도 했다. ⓒ 김정순


이를 토대로 송민구, 이동우, 김장훈 등의 연구가 나왔다. 도면은 수십 년간 떠돌다가 이동우 박사에게 가 있던 것의 복사본 한 벌이 김장훈 교수를 통해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기증되어 첫 실측도면으로 보존되기에 이르렀다. 첫 실측에는 첨성대 주변의 자연석 10여 개도 나와 있는데 지금은 치워졌다. 그 이후 몇 번의 실측이 더 있었다.

▲ 건축가이자 서울공대 교수 송민구(1920-2010). 첨성대 구조와 관측에 대한 수학적 ·건축적 분석을 남겼다. ⓒ 송민구

건축가이자 서울대,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를 지낸 송민구의 1980~1987년에 걸친 첨성대분석은 첨성대 형태상의 특이점이 천문현상과 일치할 것이라는 견해에 입각하여 전개됐다. 고려 성종(982~997)때의 개축과 그 후 있었을 개수, 현재 북동쪽으로 2도가량 기울어지기까지 원형과의 사이에 오차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내재된 규칙성을 찾아내어 원형이 지녔을 의미를 추정하였다.

1963년도의 실측도면과 5만 분지 1지도, 바빌로니아 천문도(그의 연구 당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접할 수 없었다. 이점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등을 바탕으로, 수평 수직을 구하는 피타고라스 정리의 정수해에서 출발해 수에 대한 동양 개념까지 아우른 해석을 가했다.

건축자재와 구조, 현장에 대한 경험과 직감, 고대미술사와 수학에 박식했던 그의 분석은 첨성대에서 행해졌을 천제며 점성술, 관측의 구체적 환경, 당시 도읍 설정까지의 상황이 짐작된다. 첨성대에 관한 건축적·수학적 분석의 논문은 이 연구가 처음이다.

1981년 과학사학회지에 발표된 '경주 첨성대실측 및 복원도에 의한 비례분석' 논문과 1987년 발행된 저서 '한국의 옛 조형의미'에 실린 내용 중 동지일출선, 황도곡선을 따른 회전곡면, 관측방법과 정자석·지대석·판석에 집중된 연구 몇 가지를 더 들어본다.

'첨성대 지대석과 초석 두 모서리를 지나는 동지일출선상에는 미추왕릉과 내물왕릉이 선상에서 약간 벗어나 위치해 있는데, 이는 첨성대이전 비(막대기를 수직으로 세워 그림자로 관측하는 것)를 이용해 관측할 때의 부정확함 때문에 약간 어긋난 듯하다'고 보았다.

내물왕릉 및 미추왕릉은 첨성대가 축조되기 이전의 능이므로, 첨성대가 지어지기 이전부터 관측에 적합했던 그 자리에서 천제의식이나 천문관측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신라의 천문관측은 첨성대가 축조되면서부터 틀이 잡힌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조선 말기의 국가 부여의 경우 '비와 햇빛이 고르지 않아 농사가 잘 안되면 왕에게 그 책임을 물어 죽이기도 한다'고 했으니 관측의 정확성이 얼마나 절실한 것이었을지 짐작된다.

당시의 관측 수준은 한군데만으로는 불충분해서 또 다른 지역에서의 관측을 종합해 판단했다는데, 첨성대와 같은 위도이면서 서쪽으로 16km 지점의 주사산성이 제2의 천문관측 장소였으리라 한다. 이곳은 동지·하지·춘추분의 일출과 일몰, 북극성 등을 용이하게 관측할 수 있는 곳이다. 즉 하지 때 이곳의 정남에 오는 해 그림자 길이가 첨성대에서 측정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주사산성은 험한 군사적 요지로서 적군의 진행 방향 등 동향을 상세히 관측할 수 있는 거점이며 선덕여왕 때 백제-신라군 간의 옥문곡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 첨성대 회전곡면의 모선(母線) ⓒ 송민구


첨성대의 특이한 형태를 이루는 회전곡면은 황도곡선(파장 240, 진폭 9의 비례로 이루어진 삼각 함수 곡선의 2분지 1)과 같은 것으로 원하는 날의 일남중고도(해가 정남에 다다라 남기는 그림자)를 미리 알 수 있게 하는 구조이다.

그 목적은 낮에 일남중고도를 측정하여 첨성대 중심에 옮겨놓고 밤에 황도를 지나는 별자리를 보고 길흉을 점치는 것이다. 옛 바빌로니아에서도 남중한 태양의 위치로 밤에 별자리가 지나가는 것을 관측하여 점을 쳤다. 점의 패턴은 동양과 다르나 방법과 목적은 동일하다.

회전곡면에 쌓인 돌의 개수는 364개이다. 개구부를 돌 하나로 막으면 365개가 되고, 개구부 테두리를 이루는 돌4개를 제하면 윤년 1년의 날수인 360개가 된다.

전체 27단 중 1~24단까지가 황도곡선으로 1단이 동지, 12단이 춘추분, 24단이 하지를 나타내는 정확한 삼각 함수 곡선을 이룬다. 25, 26, 27단은 수직으로 직선을 이룬다. 이 중 19단과 25~26단, 28~29단에 정자석(井字石)이 돌출되어 놓여 있다.

송민구는 이 정자석의 의미에 고대중국의 낙서(洛書 : 거북 등에 쓰였다는 그림을 옮긴 것, 수학에서 가로·세로·대각선상의 세 수의 합이 15가 되는 방진(方陣)과 같은 개념)를 연관시켰으며 스키타이 묘제가 우물 井자 모양인 사실도 언급했다.

▲ 일남중고도 측정방법 ⓒ 송민구

27단에는 원형공간의 동쪽 절반을 덮는 직사각형 모양의 판석이 편각(偏角)을 이루며 덮여 있다. 최상질 석재를 공들여 다듬어 한 변을 정확한 직선으로 만든 이 판석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이 판석은 첨성대 내부나 위에서 보기 전에는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다.

28, 29단 정자석 모서리의 해 그림자는 하지 때 정오에는 19단 정자석의 돌출한 부분에, 춘·추분 때는 25단 정자석의 돌출부에, 동지 때는 26단 정자석의 돌출부에 해 그림자가 떨어진다. 따라서 돌의 표면이 희고 연마되어 있으면 음영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연마한 돌로 쌓았다"라는 역사기록은 이 의미이다. 눈금을 그려넣거나 각 정자석의 정확한 직각, 대각선 교점의 일치, 추의 사용상 또는 미적 효과 등을 위해서도 연마한 돌이 사용됐다. 내부는 다듬지 않은 돌의 뒷면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어떠면 공사기간에 맞추느라 거칠게 두어뒀음 직도 하다.

외부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출입하게 되는 개구부가 지대석에서부터 4.56m 높이의 12단에 위치한 것은 관측에 불필요한 인물들 출입을 제한할 뿐 아니라 중심을 알기 위해 추를 사용할 때 개구부를 막아 미풍도 차단할 수 있게 했다. 내부는 아늑하다고 한다.

▲ 첨성대 24단에서 관측하는 것을 예시한 그림 ⓒ 송민구


24단에 마루를 깔면 약 1m 폭의 공간에 관측자 한 명이 의자에 앉아서 26단의 두께가 얇고 폭이 넓은 정자석을 작업대 삼아 춘추분·일남중 고도와 천구·적도 등 천문현상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27단 판석 위에 장치했을 관측기구도 이 자리에서 쉽사리 손에 들어오는 범위에 있다.

관측은 주로 가을 겨울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관측자가 추위에 노출된 채 작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관측기구를 다루어야하고 등불을 올려놓거나 온기를 줄 기구의 배치도 필요했으리라 한다.

 

 

(3) 정자석과 판석, 첨성대의 천문상수들

 

송민구의 연구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첨성대의 초석과 지대석, 28,29단 정자석은 정4각형이며 몸통인 회전곡면은 원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의미를 지니지만 그 기능도 둥근 몸통은 천체에 나타난 것을, 네모난 초석 지대석 정자석은 지상에서의 관측을 하는 것으로 구분되어 있다. 신라의 수학수준 및 장기간에 걸쳐 측정한 경험에서 그런 형태의 관측대를 생각해 낸 것이다.

▲ 위에서 본 첨성대. 맨 꼭대기 29단 정자석의 네모서리 이음매와 돌 한쪽이 떨어져 나간 모서리, 27단 원형평면 둘레의 돌, 공간 절반을 덮은 판석, 그 아래 26단과 25단의 정자석까지 들여다보인다. ⓒ 이용환, 첨성대별기

초석(혹은 지대석의 밑단 : 현재 초석부분은 땅에 묻힌 상태여서 보이지 않는다)과 지대석은 1971년 박흥수 교수의 실측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16도 편각된 것으로 발표되었는데, 이는 그 대각선 방향이 동지 일출 방향임을 입증해준다(첨성대의 위도가 35도49분49초라 계산할 때 동지 일출 방위는 29도23분24초이다. 다시 말해 좌북(磁北)이 15도36분36초면 완전히 일치한다. 16도 편각이라 할 때 23분24초의 차이가 생길 뿐인데 당시의 정밀도로서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값이라고 한다).

또한 첨성대 방위의 정확성은 박흥수 교수의 견해대로 자침(磁針)을 썼으리라 한다. 초석을 구성하는 8개 돌의 의미는 민력(民曆)에 나오는 연신(年神) 방위도를 나타낸 것으로 보았다.

▲ 첨성대 축조방법의 도해 ⓒ 송민구
9.1m 높이에 있는 맨 꼭대기 28-29단의 정자석과 그 아래 27단의 판석은 '첨성대 별기' 제작 때 대형 크레인에서 내려다보고 찍은 사진에 유일하게 전체모습이 드러난다.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성스러운 비밀의 장소를 처음 본 것 같았다.

꼭대기 정자석은 네 모서리가 견고하게 고정되도록 28단은 S자형 꺾쇠로 고정시켰다. 웃단인 29단은 돌에 홈을 파서 가로세로 맞물려 정사각형이 일그러지지 않고 절대각을 유지하도록 했다. 28단 꺾쇠를 쓴 홈에는 유황을 끓여 부어 철물을 고정시켰다. 또한 정남에서 동쪽으로 치우쳐(편각되어) 28, 29단의 정자석이 놓인 것이 특이하다.

정자석의 편각은 1963년도 유문룡 실측에서는 12도30분으로 되어있고 1971년 박흥수의 실측에서는 12도59분56초로이다.

"tan‐¹ 41분지9=12도38분이 당초의 각이라고 한다면(1987년의 송민구의 저작에서 이 수치는 12도22분48초로 기록되었다), 이 각도가 지닌 음력 한 달과 시간의 계산 등 신비스러운 천문과의 관계는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송민구는 썼다.

이 정자석 두 모서리와 지대석과 초석 두 모서리를 잇는 대각선으로 동지일출선이 지나는데, 지대석과 정자석은 평행하지 않으며(실측복원도에 정자석과 지대석이 평행으로 그려진 것은 오류라고 지적됐다) 방향은 정남북이 아니다. 첨성대의 어느 것도 동서남북을 일관되게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 정자석 아래 27단의 원형공간에는 평평한 직사각형 판석이 절반을 덮게 걸쳐 놓여 있다.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의 이 판석은 어떤 석재와도 비교가 안 되는 최상 품질의 돌을 엄청나게 공들여 깎아 한 변이 직선을 이루도록 했음을 송민구는 강조했다.

▲ 27단에 놓인 판석의 직선 변에 일치하는 북두칠성 ⓒ 송민구

"27단 판석은 편각된 방위각에 맞춰 별이 남중하는 고도를 관측하기 편하도록 되어 있다. 북두칠성이 27단 판석의 직선 변에 방향이 일치할 때, 즉 12도22분48초의 편각된 선에 일치할 때 다른 별들의 방위각은 어떻게 되는가를 알아보려고 작도한 그림이 3-66이다. 역시 별들의 방위각과 돌들의 크기가 잘 일치한다.

그러므로 27단 돌들의 크기는 북극성을 위시한 별들의 방위각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별과 별 사이의 방위각에 의한 상대적 위치를 알면 한 별을 관측하고 다음 별이 다가오는 시간을 예측할 수 있다."

동시에 편각은 순간을 정남에서 구하기 위하여 시간의 여유를 갖게 하고, 정자석에서 성도를 작성하든가 성도를 깔아놓고 별자리를 잡아올리든가 하는 작업을 용이하게 하는 의미일 것이라고 했다.

"또한 장치를 고정시키기에 알맞은 여유 등 복합된 기능을 지니고 있으며, 지대석이 정남에서 동으로 16도 편각된데 따른 자침의 이용과 함께 경이의 눈으로 바라다볼 수밖에 없다"고 그는 썼다(1981년 유복모, 강인준, 양인태의 실측에서는 지대석이 18.92도 동으로 편각된 것으로 나온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논문마다 정자석과 지대석 등의 실측 각도가 조금씩 다르게 제시된다. 부등침하 혹은 장비의 문제 등이 그 원인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내가 건축가이니 판석으로 쓴 돌이 보통돌이 아니란 걸 알아볼 수 있죠. 맨 꼭대기에서 비바람을 맞아도 더 맞았을 텐데 다듬은 면만 봐도 이 판석은 차원이 다른 돌입니다. 이 돌의 한 변이 나타내는 직선과 12도22분48초의 각은 뭔가를 얘기하는 것으로 1350년 지난 지금도 자로 그은 듯한 직선입니다. 석가탑 다보탑보다 더한 정확성을 구사해 거기 위치시킨 정자석과 판석은 아무 의미 없이 놓인 것이 아닙니다"라고 송민구는 2009년 작고 직전의 '첨성대별기' 인터뷰에서 말했었다(지금 복원된 첨성대는 이 판석이 좌우가 바뀐 채 건축되었다고 한다).

25, 26단의 정자석 또한 형태나 구조나 돌의 두께를 보아 구조재가 아니라 방위각을 측정할 때 척도로써 이용하려고 한 것이다.

▲ 2012년의 첨성대 동남향. 맨 위의 정자석 모서리로 동지일출선이 지나가고 회전곡면을 이룬 몸통부 아래쪽 6단의 돌은 각 단마다 동지 이후 춘분에 이르는 6개 절기 기간의 날수와 같다. ⓒ 이순희

첨성대 몸통의 회전곡면을 이루는 364개 돌들은 크기가 지극히 불규칙하여 어떤 상징성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천문과의 관계에서만 그 규칙성이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돌의 크기 하나하나가 별의 방위각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첨성대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또 더할 나위 없는 구조물이 된다. 이미 알려진 별들의 상대적 위치가 회전곡면에 360개의 돌의 크기로서 그 방위각이 나타나 있어 그것을 관측하는 중에 다른 천체현상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가능성은 충분하다. 석조로 구축된 일종의 성도(星圖)가 우리나라 신라에서 647년에 만들어진 것이 된다"고 송민구는 말했다.

첨성대는 천문관측의 기준이 되는 점의 집합체이며, 이것으로 평년, 윤년, 시보, 24절기, 28수 별자리 관측, 12직, 일월년백, 神방위 등 모든 것을 정할 수 있다. 위치로 보아 종교의식의 장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본다. 별자리의 변화를 보고 길흉을 점치는 것도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다.

첨성대는 현대인이 쓰고 있는 민력의 모든 것을 유도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첨성대는 소규모의 관측으로 한정되어 있고 어떤 관측기구를 썼는지도 알 수 없다. 첨성대 관련기록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여러 정황을 추측케 한다.

첨성대 축조는 1년이면 완공되는 소규모 크기지만, 645년이 년백오황입중(年白五黃入中)의 해이며 평년이므로 이 해를 기준으로 회전곡면 모선에 24절기의 시점을 정하여 둔다. 다음 해인 646년은 윤년이므로 24절기의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 일자의 변동이 생긴다. 현대와 같이 정확한 시간측정이 어려웠으므로 24절기의 시간까지 정확하게 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647년에 첨성대가 축조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변화가 파악된 연후에 완공이 되고 정식으로 쓰게 되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첨성대 건축은 어느 때라도 실증할 수 있는 명쾌한 논리와 구조를 담고 천문관측을 위한 구조물로 지극히 정교하게 짜여진 형태"라는 것이다.

숭실대 건축과 이상진 교수는 "7세기의 천재 건축가가 첨성대를 지었다면, 오늘의 천재인 송민구는 그것을 분석해냈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첨성대를 건축기호학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 연구가 나오게 된 것이죠"라고 했다.

그는 수학과 미술에 정통했고 외국어자료를 읽기 위해 영어와 불어를 독학했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어려운 고등수학 문제를 푸는 게 휴식을 취하는 것이기도 했다.

2009년에는 천문학자 박창범(고등과학원)의 발표가 있었다. 첨성대가 가리키는 방위, 건축에 보이는 천문의 숫자들, 그 역할 등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첨성대 방위가 정남북에 정렬되지 않아 천문대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가 됐지만 이는 그 방위가 가지고 있는 천문학적 의미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갖게 된 오해이다. 정자석 모서리를 동지 일출 방향에 의도적으로 맞추었다면, 첨성대는 천변관측과 함께 일 년의 시작을 알아내는 목적으로도 사용되었음을 뜻한다. 정자부에 올라가 있는 관측자에게 정자석은 가장 유용한 방위 지표가 될 것이다. 그동안의 연구에서 이 정자석이 동남동 30도 가까운 동지일출 방향임을 유일하게 주목한 것은 송민구이다."

"관측대의 구조가 동지를 알아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은 첨성대 몸통부 하부 6단이 동지에서 춘분까지 각 절기의 날 수와 맞는다는 사실과도 연결이 된다. 몸통부의 아래쪽 여섯 층을 이루고 있는 돌 수는 각각 16, 15, 15, 16, 16, 15개이다. 이는 동지-소한, 소한-대한, 대한-입춘, 입춘-우수, 우수-경칩, 경칩-춘분 사이의 날수와 맞다.

몸통부는 27층으로 구성돼 달의 주기(27.3일)에 맞추었다. 몸통을 쌓은 돌은 1년의 날수를, 또 몸통부 중간에 있는 창은 위아래를 각각 12층으로 하여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하였고, 기단석에도 12개 석재를 사용하였다"

첨성대 역할에 대한 박창범의 의견 또한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에 전해오는 신라의,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천문기록은 모두 육안으로 관측한 기록으로 보인다. 다만 팔방위나 일 년의 시작 정도를 알 수 있을 정도의 측정이 수행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은 발견된다. 또 천제를 지내거나 불교적 상징물, 왕권을 위한 점복의 기능이 있었다 해도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은 첨성대가 천문대일 때에 이러한 모든 복합적 용도와 자연스럽게 관련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 "나카무라 하루히사의 연구", 첨성대 기점 동심원상에 놓인 신라왕릉 표시와 그의 저서 <일한 고대도시 계획> ⓒ 나카무라

한편 앞서 일본에서도 첨성대를 연구한 사람이 있었다.

나카무라 하루히사(中村春壽)는 대학생 때인 1938년 경주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첨성대엔 뭐가 있다'고 믿게 됐다. 전쟁에 징집되자 그는 '첨성대를 놔두고 죽으러 가누나' 했다가 돌아온 뒤 1978년 <일한 고대도시 계획>이란 책에서 '첨성대를 중심으로 경주의 30여 개 왕릉은 일정한 거리를 둔 동심원상에 있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그가 기본자료로 채택한 25만 분지 1 경주지도에 나타난 점 크기의 왕릉 위치를 두고 단언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왕릉에 대한 일정한 거리의 법칙성을 제시했다'는 평이 따른다.

명활산성, 선도산성, 남산성과 첨성대는 일정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 식점천지반의 존재를 첨성대와 연관시킨 것도 그였다. 나카무라는 첨성대 연구에서 '박일범 초대 경주박물관장의 큰 도움을 얻었다'고 밝히고 이 책을 헌정했다. 2009년 첨성대 별기 인터뷰에서 그의 아들은 "아버지는 살아생전 밤새도록 경주 지도 위에 컴퍼스를 돌리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Pressian / 김유경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