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 Culture/과학, 기술, 환경

낮은 한의학(이상곤) - 프레시안 연재(2)

by Wood-Stock 2013. 7. 17.

관점이 있는 뉴스 - 프레시안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전 대구한의대학교 교수)의 '낮은 한의학' 연재가 매주 수요일 다시 <프레시안> 독자를 찾습니다. 이 원장은 지난 2009년 3월부터 2011년 5월까지 만 2년간 연재 칼럼을 통해서 일상생활에서 건강을 지키는 방법과 함께 우리 삶 곳곳에 녹아 있는 한의학의 사유를 소개했습니다.

독자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은 이 연재는 <낮은 한의학>(사이언스북스 펴냄) 책으로도 묶여, 시민과 소통하려는 한의사 사이에서는 필독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관련 기사 : 
정조 독살은 헛소리! 홍삼의 불편한 진실!) 이상곤 원장은 '낮은 한의학' 시즌 2에서는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출 예정입니다.

이상곤 원장이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당시 왕들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산해진미를 섭취하였지만 격무와 스트레스, 만성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왜 왕처럼 살면 죽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바람직한 건강 관리법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편집자>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숙종의 건강학 ①

한약은 간에 나쁘다? '장옥정'의 그 남자는?


숙종도 피해가지 못한 간 질환

요즘 "한약은 간(肝)에 나쁘다"는 양방 쪽 의견만 듣고 한약 복용에 거부감을 가진 이가 적지 않다. 하지만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간 질환에 한약이 널리 쓰였고 약효도 좋았다. 한약 말고는 달리 약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약이 간에 나빠 환자에게 해를 끼친 사례는 보기 힘들다.

조선의 왕들도 간염이 왔을 때 한약으로 치료했고 그 효과를 톡톡히 봤다. 대표적 인물이 숙종(李諄·1661~1720년)이다. 드라마 <장옥정>처럼 장희빈과의 로맨스가 부각되면서 숙종은 조선의 왕 중에서 유달리 문무에 능한 매력적인 남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숙종은 15세 때인 재위(1674~1720년) 2년 9월부터 간염 증상으로 고생을 했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9월 13일 머리가 아프고 인후통이 생기자 의관들과 공조좌랑 이국헌이 감기로 진단하고 대표적 감기 처방인 형방패독산을 복용케 한다. 이튿날에도 두통과 인후통이 지속되자 숙종의 외당숙 김석주가 나서 의관들과 함께 처방을 변경한다. 소시호탕에 맥문동 갈근 지모 황백을 더하여 처방한다.

이후 증세는 호전되는 듯했지만 9월 17일 갑자기 수라를 들기 싫어하면서 오한과 오심 증상이 시작된다. 가슴이 답답한 증상에 초점을 두고 양격산을 처방하기도 하고, 밥맛을 당기게 하는 이공산, 소요산이라는 처방으로 바꿔보기도 하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9월 25일 숙종의 얼굴과 눈이 누렇게 변해가자 의관들은 황달 증세로 진단하고 처방을 급선회한다. 황달을 치료하는 시령탕을 처방한 지 3일 만에 얼굴과 눈의 노란빛이 가시기 시작한다. 피부색에 윤기가 돌고 오심 증세가 줄어들면서 밥맛이 돌아왔다.

시령탕을 쓴 지 5일이 지난 9월 30일 황달 빛은 완전히 사라졌고 수라와 침수도 일상적 상태가 되면서 시령탕을 보다 온화한 처방인 백출제습탕으로 바꿨다. 10월 2일 황달을 치료한 지 7일 만에 의관들에게 '평상시와 같으니 더 이상 묻지 마라'고 하교한다."

현대 의학은 황달을 유발하는 간염을 일반적으로 전황달기, 황달기, 회복기 3기로 나눈다. 전황달기는 황달이 생기기 1~2주 전의 기간으로 약간의 열감과 관절통, 피로감, 무기력증 등 감기 증상과 같은 증세가 나타나고 식욕 부진, 오심, 구토 등 소화기계 증상과 상복부 불쾌감을 호소한다. 황달기는 황달 빛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1~2주간으로 증상이 가장 심한 기간이다. 회복기는 황달이 점차 사라져 1~6주 뒤 회복되는 기간이다.

숙종의 치료 기록들은 이런 해석과 딱 맞아떨어진다. 한약 복용 일주일 만에 황달이 사라지고 간염 증세가 회복됐다는 것은 현대 의학의 시각으로 봐도 진기록이다. 그만큼 한약의 간염 치료 효과가 뛰어나다는 증거다. 안타까운 사실은 숙종이 어린 시절 황달을 앓았으면서도 간 건강을 관리하지 못하고 간과 관련된 질병을 앓다 간경화 증세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다. 그는 황달 발병 이후에도 45년을 더 살았지만 평생 간 질환 관련 증상을 나타냈다.

한의학은 간에 질병이 생기면 간과 관계된 계통의 기관에 전신적 증상을 일으킨다고 본다. 흥분을 잘하고, 눈이 나빠지며, 아랫배가 긴장되고 굳어진다. <동의보감>과 중국 의학서 <난경(難經)> 또한 아랫배와 눈에 나타나는 증상, 화를 잘 내는 성격 등을 간 질환 진단의 요점으로 봤다.

"간이 병들면 양쪽 옆구리 아래가 아프면서 아랫배까지 땅기고 성을 잘 낸다." (<동의보감>).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얼굴빛이 퍼렇고 성을 잘 낸다. 속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배꼽 왼쪽에 동기(動氣)가 있으며 눌러보면 단단하고 약간 아프다. 병으로는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대변이 잘 나오지 않는다. 눈은 간이 허할 때 잘 보이지 않는다." (<난경>)

간 역시 음과 양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즉, 너무 허해도(음기가 모자라도) 또 너무 실해도(양기가 넘쳐도) 좋지 않다. 이들 의학서는 간이 허할 경우, 즉 음기가 모자랄 때는 신맛이 나는 음식인 참깨 개고기 자두 부추를 먹어 간을 보하도록 했다. 피로할 때 마시는 한방 드링크제에 신맛이 나는 작약이 많이 든 것도 그 때문이다.

간이 실하다는 개념은 간이 투쟁을 주도하는 장군이라는 정의에서 유래한다. 투쟁은 긴장이 필수이며 근육의 지나친 긴장은 쥐가 날 듯 땅기는 증상을 유발한다. 이런 증상을 완화하려면 단맛이 든 멥쌀, 대추, 쇠고기, 아욱 등을 권한다. 이런 논리가 한의학에서 말하는 식보(食補)의 핵심이다.

ⓒSBS


'버럭' 숙종, 그 원인도 간 질환

숙종은 한의학서에 나오는 이런 모든 증상을 평생 달고 살았다. 15세 때 황달성 간염을 앓은 이후 작은 일에도 흥분을 했으며 쓸데없이 애간장을 태웠다. '애간장'이라는 말 속에도 간 질환에 대한 한의학적 진단의 핵심이 숨어 있다. 오죽하면 간장(肝腸)을 녹이고, 태우고, 졸이고, 말린다는 표현을 썼을까. '애'는 초조한 마음속을 뜻하는 순우리말로 초조함을 강조해서 붙인 것이다. 실록은 숙종이 분노한 모습을 여러 차례 기록했다.

"임금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점차로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어지지 않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였다. 내의원의 문안에 비답하기를 '마음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곤란하고 밤새도록 번뇌가 심하여 자못 수습할 수가 없다'고 했다." (재위 14년 7월 16일)

재위 21년 9월 13일 숙종은 계속된 흉년에 대한 해결책을 쓴 비망기(備忘記)를 신하들에게 내리면서 "큰 병을 앓은 나머지 조금만 사색함이 있어도 문득 혈압이 올라온다"고 했다. 실록에는 달아오르는 열을 주체하지 못해 화를 내는 숙종 때문에 신하들이 덜덜 떠는 모습을 묘사한 대목도 있다.

"최계옹이 상소하기를, 신하들이 벼슬을 질곡(桎梏)처럼 여기고 궁에 들어가는 것조차 무서워하며 벌벌 떤다. (임금 앞에 서면) 발을 포개고 서서 숨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당시 홍문관이었던 최계옹은 1710년(재위 36년) 숙종의 지나친 편당성과 화를 잘 내는 성격적 결함에 직격탄을 날리는 상소를 쓴 후 제주목사로 좌천된다. 숙종은 분노 조절 장애 증후군쯤 되는 질환을 앓은 셈이다. 모두가 간이 튼실하지 못했기 때문이 벌어진 일이다.

한의학에선 아랫배가 땅기고 아픈 증상을 산증(疝症)이라고 하는데, 간에 문제가 생기면 이런 증상이 찾아온다. 꼭 간 질환이 아니어도 산증이 생길 수 있다. 차가운 물속에서 성관계를 가진 후 여성의 아랫배가 차갑고 땅기고 아프면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이에 속한다. 성관계 후 아랫배가 물에 의해 식으면서 근육이 굳어져 아래를 데워야 할 기운들이 근육 사이로 스며들지 못하고 위로 치밀어 올라 생긴 증상이다. 이런 증상에는 반총산이라는 처방이 특효다.

중국 최고(最古)의 의학서 <황제내경>은 산증을 "아랫배에 병이 생겨서 배가 아프고 대소변이 나오지 않는 것인데 찬 기운 때문에 생긴다"고 설명했으며, <의학입문>은 "산증이 간의 질병으로 발생한다"고 규정했다. 숙종의 첫 산증 발병 기록은 재위 22년 12월 3일에 나온다. "상(上)에게 처음 산증이 발병하여 아랫배가 찌르는 듯한 자통이 심했다. 상황이 매우 급하여 곡골이라는 경혈에 뜸을 뜨고 나았다"고 적혀 있다. 재위 29년에는 숙종이 자신의 산증과 함께 화증에 대해서도 답답함을 호소한다.

"상이 말하기를, 몇 년 전부터 이 병(산증)의 뿌리가 이미 생겼는데, 처음에는 약간의 통증을 느낄 뿐이더니 어느 새 이 지경이 되었다. 상이 또 탄식하기를, 사람이 자고 먹는 것을 제때에 하여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였다. 성질이 너그럽고 느슨하지 못하여 일이 있으면 내던져두지를 못하고 출납(出納)하는 문서를 꼭 두세 번씩 훑어보고, 듣고 결단하는 것도 지체함이 없었다. 그러자니 오후에야 비로소 밥을 먹게 되고 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하였다. 그래서 화증(火症)이 날로 성하여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내가 병의 원인이 있는 곳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눈병 치료하는 굼벵이

숙종은 눈병 때문에도 고생했다. 물론 그 뿌리는 간 질환이었다. 재위 30년 12월 11일 실록은 이렇게 적었다.

"화증이 뿌리내린 지 이미 오래고 나이도 쇠해 날로 깊은 고질이 되어간다. 무릇 사람의 일시적 질환은 고치기 쉽지만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화증이다. (…) 오랜 시간 수응하면 화염이 위로 올라 비록 한겨울이라도 손에서 부채를 놓을 수가 없다. 나의 눈병은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숙종 43년에는 눈이 어두워져 신하들의 보고조차 장지(壯紙)에 큰 글씨로 간략하게 쓰도록 했다. 심지어 혼례식을 올린 후 인사 온 왕세자 부부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내가 눈병이 이와 같으니 왕세자빈의 얼굴을 보고 싶어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한의학은 눈을 불의 통로라고 본다. 어두운 밤길에서 고양이를 보면 눈이 파랗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간 질환으로 발생한 분노와 초조함의 화병은 불의 통로에 불을 더해 안 신경을 위축시킨다. 숙종의 눈병에 내의원은 공청(空靑)이라는 약물을 썼다. 기록엔 "중국에서 어렵게 구한 귀한 약물"이라고 돼 있다. 한의학에서 밝히는 공청의 약리 작용은 이렇다.

"간에 화가 있으면 피가 뜨겁고 기가 위로 치솟아 혈맥이 통하지 않게 된다. 간에 열을 내리면 오장이 안정되어 눈의 여러 가지 증상이 회복되는데 공청의 찬 맛은 쌓인 열을 없애준다."

하지만 실록은 공청이 그다지 효험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시력 감퇴 증상을 치료한 약은 무엇이었을까. 기록에는 없지만 추론하자면 굼벵이를 쓰지 않았을까 싶다. 중국 청나라 때 나온 약물학서인 <본경소증>은 굼벵이의 효능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체에서 피(血)는 음식물이 위장에서 삭고 삶아지고 쪄지는 더러운 상태에선 벗어났지만 맑은 에너지인 기(氣)로 변환되기 전 상태의 물질이다. 음식물을 받아들여 깨끗한 혈액으로 전환하는 역할은 간이 맡는다. 굼벵이는 더러운 두엄에서 태어났지만 가장 맑은 매미로 탈바꿈한다. 그래서 더러운 것을 맑게 하는 작용을 한다. 혈액이 말라들어 가거나 나쁜 피를 정화해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치료한다."

요즘 시중에서 간염이나 간경화에 굼벵이를 쓰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처방이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숙종의 건강학 ②

질병의 권력학, 장희빈 뒤에는 '천연두'가 있었다!?


마지막까지 고통 준 肝

많은 사람이 과연 한의학이 눈 질환을 치료할 수 있었을지 의문을 나타내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실명을 일으키는 녹내장도 치료했다. 더 대단한 것은 그 치료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냉이(정확하게는 냉이의 씨앗)를 썼다는 점이다.

냉이 씨의 약명(藥名)인 석명자의 한자 뜻은 냉이의 효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석은 나무를 깨서 나눈다는 뜻이고, 명은 어둡다는 뜻이다. 눈이 캄캄하고 어두운 것을 깨서 없앤다는 의미다. <동의보감>에 기록된 냉이 씨의 효능은 좀 더 구체적이다. '청맹목통(靑盲目痛)하여 사물을 볼 수 없는 질환을 치료한다'고 쓰여 있다. 청맹목통은 녹내장의 전형적 증상으로, 겉으로 보기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고 통증이 심한 상태를 가리킨다.

한의학은 녹내장이 방수의 흐름이 나빠지면서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방수는 수정체와 각막 사이에 흐르는 눈 속의 눈물로, 혈액에서 걸러져 나온 것인데 흐름이 나빠지거나 안구 속에 고이면 눈의 압력이 높아지고 시신경을 눌러 시력을 저하시키고 통증을 일으킨다.

냉이는 물을 몸 밖으로 뽑아내는 이수나 이뇨 작용을 통해 녹내장을 치료한다. 특히 동네 어귀 냇가에 많이 자라는 큰황새냉이가 효험이 좋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석명자는 큰황새냉이를 말한다. 물가에 자란 것이 눈 속의 물을 빼내는 효능을 발휘한다고 여겼다. 어린 순과 잎은 뿌리와 더불어 이른 봄을 장식하는 나물이다. 냉이국은 뿌리도 함께 넣어야 참다운 맛이 난다. 데워서 우려낸 것을 잘게 썰어 나물죽을 끓여 먹기도 한다.

하지만 눈 질환이 문제가 아니었다. 숙종 재위 40년에 들어서면서 간 질환은 악화일로였다. <난경>에 '간이 병들면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대변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숙종은 이런 증상을 그대로 보였다. 재위 40년 4월 27일 실록은 "상의 환후가 7개월 동안 계속돼 증세가 백 가지로 변해 부기(浮氣)가 날로 더해졌다"고 했다. 부종이 계속되자 선조의 증손으로 종친이었던 유천군 이정은 "성질이 강력한 약을 쓰면 안 된다"는 어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수환(導水丸)'이라는 처방을 고집했다. 이 약이 크게 효험을 보이자 감탄한 숙종은 스스로 시를 지어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여덟 달을 온갖 방술로 다스렸지만 한 가지 환약으로 빠른 효험을 얻었네. 지극한 그 공로 내 마음에 새겨두니 종친에게 은총을 표하노라."

유천군이 처방한 도수환은 대황, 목통, 견우자 등의 약재를 포함한 약으로 강력한 이뇨 효과와 대변의 관장 효과를 겸한 처방이었다. 이 약으로 큰 효험을 봤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숙종에겐 대소변을 제대로 못 본 게 가장 큰 문제였던 셈이다. 이런 일련의 치료 사실을 살펴보면 숙종의 주요 질병은 간 질환이었으며, 그 범주 안에서 지속적으로 상태가 악화됐음을 알 수 있다. 숙종은 재위 45년 10월 아들 연령군이 사망하자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46년 5월에는 간경화 말기 증세인 복수가 차올랐다.

"시약청에서 입진하였다. 성상의 환후는 복부가 갈수록 더욱 팽창하여 배꼽이 불룩하게 튀어 나오고, 하루에 드는 미음이나 죽의 등속이 몇 홉도 안 되었으며,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정신이 때때로 혼수상태에 빠지니, 온 조정과 백성(中外)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후 한 달 만에 숙종은 세상을 떠났다.


두창과 인두법

숙종의 목숨을 빼앗은 병이 간 질환이라면 그의 인생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질환은 조선 시대 민중을 무척이나 괴롭힌 두창(痘瘡·천연두)이다. 예부터 마마, 손님, 포창(疱瘡)으로 불렸으며 일본에서는 천연두(天然痘), 중국에서는 천화(天禍)라 불린 무서운 질병이었다. 우리나라에선 백세창(百世瘡)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백세창은 평생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전염병이라는 뜻으로, 한번 전염병에 걸려서 살아남으면 재발하지 않는다는 면역의 기본원리를 우리 조상들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연두는 공기로 전파되는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질환이다. 일단 감염되면 고열과 발진이 일어나고 두통, 구토, 몸살 증상이 수반되며 2~4일이 지나면 얼굴, 손, 이마에, 이후에는 몸통에 각각 발진이 생긴다. 증상이 일어난 지 8~14일이 지나면 딱지가 앉고 흉터가 남는다. 천연두에 대한 기록은 4세기경 진(晉)나라 의사인 갈홍이 의서에 상세히 기록한 것이 처음이다. 우리에겐 조선 태종 때부터 본격적인 기록이 나타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무서운 질병으로 인식됐다.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는 4세 이전의 영아 40~50퍼센트가 두창으로 사망한다고 했다.

조선 후기엔 두창 치료법으로 인두법을 주로 썼다. 인두법을 처음 소개한 인물은 공식적으로는 정약용이다. 어린 시절 두창을 앓다가 죽을 뻔한 데다 여러 아이를 두진으로 잃은 아픔 때문에 인두법에 관심을 갖게 됐다. 청나라 <강희자전>에서 "모든 두즙(痘汁·천연두즙)을 코로 받아들여 숨 쉬면 (천연두가 빠져) 나가게 된다. 이를 신통한 종두법이라고 한다"라는 구절을 보고 질병을 내부에서 외부로 밀어내는 보편적 한의학적 논리에서 외부에서 내부로 심는 종두법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핵심은 두창의 딱지인 시료를 채취하는 방법이었다. 천연두의 고름인 두장(痘漿)을 직접 채취해 쓰는 법과 두창을 앓은 이의 옷을 입히는 법, 마마 자국을 말려 가루로 만든 뒤 코로 빨아들이는 법 등이 있었는데,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으로는 습기 있는 두흔(痘痕·마마 자국)을 코로 빨아들이는 수묘법(水苗法)이 권장됐다.

이런 방법은 잘못하면 감염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묘를 만드는데, 좋은 묘를 구해서 도자기 병에 넣고 밀봉해 숙묘 단계로 변화시켜 사용한다. 이때 모든 책임은 의사가 짊어져야 한다. 그러자 시중에선 갖가지 황당한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종두에 적합한 계절과 날짜, 시료 채취용 아이의 선택 방법이 따로 있으며, 이를 잘 정해야 만일의 위험에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방식의 인두법이 분명히 효과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우리 역사의 전면에 허준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도 두창이 있다. 일개 의관에 불과한 허준이 어의 양예수를 제치고 선조의 총애를 받은 것은 광해군의 두창 때문이었다. 광해군의 두창을 과감한 처방으로 치료하자 선조는 그를 일약 당상관에 제수했다. 허준은 그 이전까지 두창 증세와 기존 전염성 질환의 증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두창이라는 이름을 정확한 병명으로 분리해 공식적인 의학 용어로 확립한다.

천연두 전문 의사 유상

숙종에게 두창은 잊을 수 없는 질환, 원수 같은 질환이었다. 첫 부인인 인경왕후, 그다음으로는 숙종 자신이 두창을 앓았고, 왕세자인 연령군도 두창에 걸려 고생했다. 특히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숙종의 두창을 치료하기 위한 기도에 나섰다 무리해 세상을 떠난다.

실록에 기록된 두창의 첫 번째 희생자는 숙종의 전 부인이자 <사씨남정기>로 유명한 김만중의 조카딸 인경왕후였다. 숙종 재위 6년의 일이었다. 10월 19일 인경왕후가 두창이라는 확진이 떨어지자 숙종과 명성왕후는 창경궁으로 옮기고 인경왕후는 경덕궁에 남아 있다 10월 26일 승하한다.

재위 9년 10월 18일에는 숙종이 두창에 걸린다. 치료는 처음엔 내의원에서 주도했다. 하지만 승마갈근탕이라는 처방이 오히려 발열 증세를 심하게 일으키자 두창 전문의 유상(柳)이 입시해 치료의 주도권을 행사한다. 화독탕으로 열을 가라앉힌 후 <동의보감>의 보원탕 처방을 썼다. 10월 27일 얼굴에 생긴 곪은 종기 때문에 증상이 다시 심해지자 사성회천탕이라는 처방으로 바꾸어 투여한다.

사성회천탕은 보원탕이라는 처방에 웅황(雄黃·천연 비소 화합물)을 더한 것으로 선조, 광해군 때의 인물인 학송 전유형이 만든 독자적인 처방이다. 전유형은 해부학적 지식을 중요하게 여긴 독특한 의사이자 문신으로, 두창에 대한 그의 처방은 박진희, 이경화 등 조선 후기 의사에게 널리 퍼졌다. 이런 노력 덕택일까. 10월 29일 숙종은 열이 내리고 얼굴에서 딱지가 떨어지면서 호전됐다. 치료를 주도한 유상은 <증보산림경제>를 지은 유중림의 아버지로 서얼 출신이었다. 이후 유상은 공로를 인정받아 동지중추부사로 두 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리면서 연령군의 두창 치료에도 참여한다.

ⓒSBS


엄동설한의 찬물 세례

숙종의 두창은 권력 지도까지 바꿔놓았다. 명성왕후가 숙종의 치료를 위해 기양법(祈禳法)을 행하다가 승하했기 때문이다. 14세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어머니의 강력한 보호를 받았지만 결국 두창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실록에 기록된 명성왕후의 모습은 한마디로 '극성스러운 어머니' 그 자체였다. 재위 1년 6월 21일의 기록이다.

"당초에 자전(명성왕후)은 여러 공자들이 은밀히 화를 일으킬 뜻을 품었음을 알고, 행여 독살 시도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임금의 음식을 모두 친히 장만하여 손수 갖다 드렸다."

대비의 과도한 간섭으로 직접 음식을 장만하다보니 신하들 사이에 뒷말이 나왔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엄마표 집밥' 덕분일까. 숙종은 조선 왕 중에서 영조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길었다.

명성왕후의 과도한 자식 사랑은 결국 자신의 명을 재촉한다. 급한 마음에 무당을 불러 점을 봤는데 숙종의 두창이 명성왕후에게 든 삼재(三災) 때문에 생겼다는 점괘를 받는다. 명성왕후는 비장한 각오로 무당의 처방에 따라 삿갓을 쓰고 소복차림으로 물벼락을 맞았다. 엄동설한에 물벼락을 맞은 그녀는 결국 병을 얻고 그해 12월 5일 승하했다. 실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상이 두창을 앓았을 때 무녀 막례가 술법을 가지고 금중(禁中·대궐)에 들어와 기양법을 행하였는데 대비가 매일 차가운 샘물로 목욕할 것을 청하였다." "박세채가 상소하여 맨 먼저 이 말을 내었는데 임금이 처음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였으나 조정의 신하들이 여러 번 쟁론하여 마침내 유배하게 되었다."

엄동설한에 차가운 물로 목욕하다 대비가 죽자 신하들은 무녀 막례를 처형하라고 여러 차례 건의하지만 숙종은 끝내 유배형으로 사건을 종결한다. 명성왕후의 아버지는 서인 김우명(1619~1675년)으로 남인(윤휴)과의 대립에서 패하고 화병으로 죽은 인물이다. 명성왕후는 말과 글로 '음식을 끊고 자결하겠다'는 말을 내릴 정도로 남인을 증오한 인물이었다. 남인 출신 장옥정(장희빈)이 명성왕후에 의해 쫓겨난 것도 그 때문이다. 숙종은 어머니가 죽자 장옥정을 다시 입궐시켜 숙원에 봉했다. 천연두가 조정의 권력 지도까지 바꾼 셈이다. 조선시대도 그렇지만, 지금도 지도자의 질병과 건강은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광해군의 건강학 ①

전쟁 후유증을 여색으로 치료? 로맨티스트는 없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배우 이병헌이 연기한 광해군. 영화의 내용과 달리 의학적 사료를 통해 만난 그는 의외로 소심하고 항상 불안해하는 '보통 사람'이었다.

건강은 어떤 비결에 의해 획득되는 게 아니라 상식적 수준의 지혜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만들어나가는 행위의 산물이다. 의학에 정통한 의사보다 '의학'이라는 단어조차 들어보지 못한 시골 할머니나 벽지 할아버지가 더 건강하게 장수하는 게 그 증거다. 잘 씹되 모자란 듯 먹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늘 걸어 다니고 농사를 통해 끊임없이 몸을 놀리며, 작은 것에 만족하고 걱정거리는 쉬 잊어버리는 그들, 건강할 수밖에 없다. 오랜 세월 대를 물려 몸으로 습득한 지혜를 일상으로 만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이 그들보다 장수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습득된 지혜를 누구나 아는 '귀찮은 지식'으로 치부하고 훨씬 적은 노력으로 훨씬 쉽게 건강해지려 하는 까닭이다. 게으름은 동서양 의학을 막론하고 건강과 장수의 최대 적이다.


속이 불처럼 타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재미와 더불어 독특한 상상력이 관객을 사로잡았지만, 역사학도는 사료와는 거리가 먼 내용 때문에 불편해했던 게 사실이다. 건강 측면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광해군 이혼(李琿·1575~1641년)을 아주 건강한 남성으로 표현했지만 의사의 눈에 그의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자신의 건강을 무속에 맡기고 여색을 탐하면서 섭생에는 게을렀다.

<광해군 일기>는 광해군의 건강에 뭔가 큰 문제점이 있음을 즉위년(1608년)부터 기록했다. 인목대비의 광해군 챙기기가 그 실마리다. 그녀가 약방에 내린 교서에는 광해군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주상이 지난번부터 침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들었지만 미처 상세히 알아보지 못했는데 어제 문안할 때 친히 본 즉, 정신이 예전과 달라 혼미한 듯하고 너무 심하게 야위었다. 수라도 하루 동안에 한 번이나 두 번쯤 드시는데 겨우 한두 수저만 드신다. 주무시는 것도 2~4시간에 불과하니 어찌 이처럼 안타깝고 절박한 일이 있겠는가."

광해군 자신도 여러 번 자신의 건강에 대해 진단을 내렸다. 즉위 2년 후 영의정 한음 이덕형(1561~1613년)과 만난 자리였다.

"어려서부터 열이 많았고, 이것이 쌓여 화증이 나타났으니 이는 조석 간에 생긴 병이 아니다. 항시 울열증(鬱熱症)을 앓아 자주 경연을 열지 못했다."

화증(火症)과 심질(心疾)은 <광해군 일기> 기록상 광해군이 가장 자주 토로한 질병이다. 즉위 3년 영의정에 오른 이원익(1547~1634년)이 "왕의 건강이 좋지 않아 서류 결재가 늦어지고 있다"고 걱정한 대목을 봐도 광해군의 건강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이 말한 심질과 화증은 신체 내부에 열이 올라 속이 답답하고 괴로운 증상을 말한다. 한의학 관점에서 보면 울열증은 눈에도 이상을 유발한다. 광해군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앓고 있는 병이 안질이고 보면 더더욱 보는 것을 멈추고 조용히 조섭해야 마땅하다. 안질 증세가 아침에는 덜했다가 낮에는 심해지니 나 역시 안타깝기 그지없다."

예부터 눈이 나쁘면 쇠간을 먹는 것도 간과 눈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말해준다. 간염이 심해지면 눈에 황달이 먼저 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의학에서 눈은 원래 불이 지나는 통로 기능을 한다. 어두운 밤 고양이의 눈이 파랗게 불타오르듯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물을 포착하는 시력은 모두 불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화병은 불의 통로에 불을 더해 안(眼) 신경을 위축시킨다. <동의보감>은 눈의 병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간에 화가 있으면 피가 뜨겁고 기가 위로 치솟아 오르므로 혈맥이 통하지 않게 된다. 간의 열을 내리면 오장이 안정되어 눈의 여러 가지 증상이 회복된다."

평생 따라다닌 전쟁 후유증

광해군의 건강에 빨간 불이 켜진 결정타는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는 4월 29일 열여덟 살 둘째 아들 이혼을 세자로 책봉한다. 5월 20일 평양에 머물면서 "세자 혼은 숙성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사방에 널리 알려졌다. 왕위를 물려줄 계획은 오래전에 결정하였거니와 군국의 대권을 총괄토록 하며 임시로 국사를 다스리게 하노니 무릇 관직을 내리고 상벌을 시행하는 일을 편의에 따라 결단해서 하게 하노라"고 천명한다. 조정을 나눠(分朝) 광해군은 전쟁을 수행하게 하고 본인은 일본군에 쫓겨 요동으로 건너가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광해군은 1592년 6월 14일부터 분조를 이끌고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 지역을 옮겨 다니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했다. 의병을 모집하고 전투를 독려하며 군량과 말먹이를 수집하고 운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가 분조를 끌고 다닌 지역은 험준한 산악과 고개를 넘는 일이어서 거동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왜군과 멀지 않은 지역이어서 심리적 압박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선조 시대 주부 벼슬을 지냈다고 알려진 유대조(兪大造)가 올린 상소는 산악 지역에서 광해군과 함께 보낸 노숙생활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때 산길이 험준하여 일백리 길에 사람 하나 없었는데, 나무를 베어 땅에 박고 풀을 얹어 지붕을 하여 노숙하였으니 광무제가 부엌에서 옷을 말린 때에도 이런 곤란은 없었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비를 맞으면서 끝내 모두 온전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고생스러웠습니다. 험난한 산천을 지나느라 하루도 편히 지내지 못하였습니다."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광해군은 그 후유증으로 1593년 봄과 여름 동안 해주에 머물며 계속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 구중궁궐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왕손에겐 산길을 걷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동의보감>은 이런 질병을 '노권(勞倦)'으로 규정한다. 노력하고 힘써서 피로한 병이라는 뜻으로, 그 원인과 병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로하면 몸의 원기가 줄어들게 된다. 음식물의 기(氣)가 부족해 상초(上焦·심장의 아래, 위장의 윗부분)가 막히고 하초(下焦·위의 아래, 방광 윗부분)가 통하지 못해 속이 더워지면서 가슴속에서 열이 난다. 화가 왕성하면 비토(脾土·지라)를 억누른다.

비(脾)는 팔다리를 주관하기 때문에 노곤하고 열이 나며 힘없이 동작하고 말을 겨우 한다. 움직이면 숨이 차고 저절로 땀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며 불안하다. 이런 데는 마땅히 마음을 안정하고 조용히 앉아 기운을 돋운 다음 달고 성질이 찬 약으로 화열을 내리고 신맛으로 흩어진 기를 거둬들이며 성질이 따뜻한 약으로 중초(中焦·위장 부근)의 기를 조절해야 한다."

임진왜란 후 벌어진 왕위 계승 문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광해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더했다. 1608년 선조의 병세가 심해지면서 북인 정권의 영수이자 대북(大北)파였던 정인홍은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라고 건의하는 한편,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파 영의정 유영경을 공격한다.

선조는 유영경에게 힘을 실어준 후 문안을 드리러 온 광해군을 문전박대한다. 심지어 더 이상 왕세자 문안을 운운하지 말고 다시 오지도 말라고 경고한다. 16년 공들여온 왕세자 자리가 무너질 듯한 상실감에, 광해군은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만다. 엄청난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 광해군은 즉위에 이르기까지 정신, 육체 양면에 걸쳐 극도의 피로감과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 최근 시작한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 광해군은 운명적인 사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MBC


여색에 푹 빠진 왕

즉위 후에도 광해군의 건강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경연조차 제대로 열지 못했다.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위한 왕의 공부 도량이자 현실 정치의 토론장이었던 경연을 거르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그는 신하들과 점점 멀어져갔다.

즉위 2년 승정원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연 재개를 요청했지만 광해군은 "나의 건강이 회복되면 말을 하겠다. 우선 기다리라", "근간에 감기가 걸려서 마땅히 조리하고 즉시 할 것", "내가 비록 병을 참고 견디며 경연을 열고자 하나 만약 이른 아침에 거동하면 더 아플까 염려되니 조금 미뤄서 하자"는 말로 경연을 피해갔다.

오랜 전란과 왕위 계승 암투 속에서 광해군의 몸과 정신은 날로 쇠약해갔지만 그는 스스로 체력 회복을 위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광해군 일기>는 이런 광해군을 냉소적으로 기록했다. 군주로서 건강을 되찾기 위해 모범을 보이는 대신, 여색에 집착하고 유교 사회에선 음사(淫事)인 무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출발은 상궁 김개시였다. 실록은 비방(秘方)이란 말로 여색을 탐닉한 광해군을 비난한다.

"김 상궁은 이름이 개시로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計巧)가 많았다. 춘궁(春宮·동궁)의 옛 시녀로서 왕비에게 간택이 되어야 (왕의) 잠자리에 들 수 있었는데 비방으로 갑자기 사랑을 얻었다."

<광해군 일기>는 환시 이봉정의 입을 빌려 왕의 여성 편력을 까발린다.

"왕이 즉위한 이래로 경연을 오랫동안 폐하고 일반 공사의 재결도 태만해서 매양 결재의 날을 넘겼다. 더러 밤에 들이려 하면 왕이 항상 침내(寢內)에 있었기 때문에 환시들도 뵈올 수가 없었다."

"왕이 여색과 놀기를 좋아해 매양 총희(寵姬) 서너 명을 데리고 후원을 노닐었다. 그러다가 꽃나무와 물 바위 등에 이르면 밤낮이 다하도록 지칠 줄 몰랐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광해군의 건강학 ②

불편한 진실…"광해군은 미쳤었다!"


지난 연재에서 살폈듯이, 광해군은 각종 약재와 섭생으로 몸을 돌보는 대신 무속에 집착함으로써 건강을 회복할 기회를 잃었다. 당시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은 푸닥거리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유교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무당이 유학의 성지인 한양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싫어했다.

근대 이전의 질병 치료는 병의 원인과 본질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결정됐다. 질병을 신의 처벌로 여기면 죄를 회개해야 했고, 귀신이 들어 병이 생겼다고 보면 귀신을 쫓아야 했다. 비문명 세계에선 무속인이 곧 의사였다. 광해군이 오랜 질병으로 힘들어하던 즉위 3년의 기록을 보면 그가 무속에 얼마나 심취했는지 알 수 있다.

"이때 상(임금)이 유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좌도(左道)에 심히 미혹했다. 명과학(命科學)과 점술에 능한 정사륜, 환속한 중 이응두 등이 궁중에 진출해 상을 모셨는데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신임이 두터웠다. 상은 한결 같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일이 있으면 길흉이나 금기만 따지는 그들의 말만 들었다.

조회를 하러 정전으로 옮기는 일조차 이들의 말을 따랐다. 심지어 귀신을 섬기고 복을 비는 일이라면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거처를 새 대궐로 옮길 때에는 매일 음사를 하느라 북소리 장구소리가 대궐 밖으로 흘러넘쳤다. 도성 백성들이 말하기를 죽어서 귀신이 되면 수라간의 음식을 실컷 먹겠다고 했다."


무속과 저주가 부른 병

왕비에 대한 기록은 무속과 더욱 밀접하다.

"상궁 김 씨(개시)가 왕비(폐비 유 씨)를 심하게 투기해 원수처럼 대했다. 그러다 궁중에 저주가 크게 일어나 흉악한 물건이 (왕비의) 침실에 가득했다. 왕비가 병이 들자 의원들은 사악한 귀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총애를 받은 무당 복동의 기록은 광해군의 질병관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다.

"복동이 저주를 한 것 때문에 국문을 당하였는데, 궁에 들어가 저주한 물건을 파내고 기도를 하기에 이르러 오히려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 (…) 왕이 그에게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상을 내리니 한 달 남짓 만에 권세가 조야를 흔들었다."

광해군 5년 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계축옥사와 이 사건을 배경으로 벌어진 '폐모살제'에도 무속과 저주가 난무했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박 씨가 소생 없이 죽고 계비인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자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 사이에 왕위 계승 암투가 벌어졌다.

1607년(선조 40년) 겨울 선조가 앓아누웠을 때 궁중에선 선조의 와병이 죽은 의인왕후 박 씨의 탓이라는 소문들이 흘러나왔다. 기록에는 인목대비의 수하 나인들이 의인왕후가 묻힌 목릉으로 사람을 보내 주술을 거는 행동을 했다고 적고 있다. 의인왕후의 사촌 박동량은 저주와 관련해 실록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의 사람들은 선조가 질병에 시달리게 된 이유를 의인왕후에게서 찾고 있다. 수십여 명이 요망한 무당들과 잇따라 목릉에 가 저주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 이 일이 말할 수 없는 곳(인목대비)과 관련이 되어 있어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계축옥사 이후 즉위 7년, 광해군은 왜란으로 불탄 창경궁을 중건해 놓고도 "궁내의 대조전이 어둡고 유령이 나올 것 같다(幽暗不便)"며 가기를 꺼렸다. 도망가듯 다른 궁궐로 자주 옮겨 다니곤 했다. 이 때문인지 광해군은 새 궁궐을 짓는 데 국력을 낭비하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급기야 광해군 9년 성균관 유생들은 전국 각도 유생들에게 돌린 통문에서 "인목대비가 의인왕후의 영혼을 저주했으며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여우 뼈와 목인을 궁중에 묻고 무당을 끌어들여 빌었다. 저주를 수년 동안 계속했고 닭, 개, 염소, 돼지 등의 온몸을 궁중에 던져 임금을 해치려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인목대비를 옹호한 서인의 인조 반정이 성공한 이후 기록은 반대로 광해군을 공격하고 있다. "부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저주로 인목대비를 해치려 했으며 귀매(鬼魅)를 궁중으로 몰아넣어 질병을 퍼뜨리려 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온갖 주술이 총동원된 전대미문의 드라마가 펼쳐진 것만큼은 사실로 보인다.


질병관(觀)은 어떤 의학 체계에서든 치료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조선의 의료 체계에서 유학과 무속은 나름의 치유 체계를 갖고 있었다. 유학은 구체적인 몸의 치유 문제를 마음과 결합시키고 경건하게 마음을 닦는 수양론에 집중했다. 무속은 인간의 감정을 의례를 통해 안심시키면서 감정을 달래주는 측면이 강했다. 전자가 요즘 말로 '힐링'이라면 후자는 위약(僞藥) 효과, 즉 플라시보 효과에 비유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광해군의 질병관이 무속에 경도된 데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형제 간의 왕위 쟁탈전과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난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겪은 심신의 피로와 고통은 의약이 쉽게 치유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가해진 엄청난 심적 부담을 힐링과 마인드컨트롤로 극복하려고 발버둥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서인들과 인목대비가 보내는 노골적인 질시와 저주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를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었을 터. 그의 병은 갈수록 깊어만 갔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광해군의 건강학 ③

허준도 무릎 꿇은 조선 최고의 명의는?


조선 최고의 침의 허임

즉위 10년 광해군은 "내가 평소부터 화증이 많은데 요즈음 상소와 차자(箚子·간단한 서식의 상소문)가 번잡하게 올라와 광증(狂症)이 생겨 살펴볼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질병을 화증을 넘어 광증에 이르고 있다고 자가 진단한 것. 인조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이후 67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는 불안증과 그릇된 질병관은 그의 심신을 괴롭혔다.

그래도 광해군이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까지 장수한 것은 침의 위력 때문이다. 그는 무속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한편 침구 치료에 매달렸다. 그의 곁엔 조선 최고의 침의(鍼醫) 허임이 있었다. 허임은 임진왜란 때 광해군과 더불어 분조 활동을 하면서 생명을 같이한 전우였다.


각 기록에 조선의 명의로 이름을 올린 허임은 선조를 침으로 치료한 공으로 상인 출신임에도 어의(御醫)와 부사까지 지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 오늘날까지 그 진가를 인정받는 <침구경험방>의 저자이기도 하다. 광해군 즉위 2년의 기록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침의였는지를 드러낸다.

"침의 허임이 전라도 나주에 가 있는데 위에서 전교를 내려 올라오도록 재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오만하게 집에 있으면서 명을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군부를 무시한 죄를 징계하여야 하니 국문하도록 명하소서."

이뿐만 아니다. 광해군 6년에는 사간원이 아뢴다.

"어제 임금께서 '내일 침의들은 일찍 들어오라'는 분부를 하였습니다. 허임은 마땅히 대궐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급히 들어와야 하는데도 제조들이 모두 모여 여러 번 재촉한 연후에야 느릿느릿 들어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경악스러워하니 그가 임금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자기 편리한 대로 한 죄는 엄하게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 차례 사간원의 요청이 있었지만 그의 행동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한술 더 떠 허임은 치료를 잘한 공로로 가자(嫁資), 즉 포상금까지 받는다.

조선 시대 불세출의 명의이자 의성(醫聖)으로 불리는 허준조차 침에 관해서는 허임 앞에서 꼬리를 내린다. 선조 37년 허준이 임금의 물음에 답한다.

"신은 침을 잘 모릅니다만 허임이 평소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다음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허준의 나이 58세, 허임의 나이 34세 불과한 점에 비추어 보면 대단한 칭송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초기에 궁중에 들어와 광해군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왕의 총애를 받은 허임 침구법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기록에 따르면 허임은 침을 놓는 기법에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선조 37년 실록은 "선조가 편두통을 앓자 허준은 병을 진단하고 남영은 혈 자리를 잡았으며 허임은 침을 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 기록으로 미뤄 허임은 침 자리나 침에 대한 이론보다 침을 놓는 실제 방법을 중시했다.

ⓒMBC


광해군 살린 補瀉法

그의 침법인 보사법(補瀉法)은 수법파 기술의 결정판이자 비법으로 '허임 보사법'으로 따로 분류된다. 그가 쓴 <침구경험방>의 서문에도 침에 대한 그의 생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불민한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의 병을 고치려 의학에 몸담은 뒤로 (…) 환자를 치료하는 데 진료의 요점과 질병의 변화과정, 보사법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허임 보사법의 보법은 만약 침을 5푼 깊이로 찌른다면 2푼을 찌르고 멈추었다 2푼을 찌르고 나머지 1푼을 찌르면서 환자로 하여금 숨을 들이마시게 한다. 마치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과 같이 내 몸에 기를 팽팽하게 채워 넣는 것이라 해서 보법이라 한다. 사법은 이와 반대의 방법을 쓰며 풍선에서 공기를 빼는 것처럼 자침한다. 특히 그는 "오른손으로 침을 놓는다면 왼손을 놀려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이는 우리가 혈(穴)이라고 하는 침 자리의 특성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혈은 구멍이지만 피부로 덮여 막혀 있으므로 왼손으로 문질러 내면의 기를 활발하게 만든 후에 자침을 해야 한다는 것. 기가 활동하면 구멍이 열리고 기의 흐름이 더욱 활발해지면 그때 침을 놓아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이치다. 그의 침법은 천지인(天地人) 침법으로도 불리는데 세 번으로 나눠 2푼, 2푼, 1푼씩 상중하 차례로 찌르는 것에 기인한다. 그의 침법은 단순하지만 이처럼 본질을 읽어내고 임상이라는 실전에 적용한 비법이다.

나는 이 침법을 복원해 임상에 적용해보았더니 다른 질환에도 효과가 좋았지만 자기 몸이 일으킨 면역의 반란인 알레르기 질환에 특효를 보였다. 알레르기 비염은 꽃가루나 온도 변화 등 외부에 우리 몸이 필요 이상의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나타나는 질환이다. 콧물이나 재채기도 이런 외부적 요인을 없애기 위한 자의적 반응일 뿐이다. 허임의 보사법 중 사법은 외부 자극에 대해 지나친 긴장감을 풍선에서 바람 빼듯 치료한다. 난치병으로 알려진 이명도 귀 안의 신경세포인 유모세포의 흥분을 진정시킴으로써 좋은 효과를 보았다.

조선 최고의 침의인 허임에 대한 기록은 광해군 즉위 15년에 사라진다.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난 바로 그해다. 광해군은 자신의 질환을 신하들에게 누설한 것에 분노해 그를 파직한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의지에 따라 수없이 궁을 들락거린 그였지만 광해군이 유배를 당해 권좌에서 쫓겨난 후 다시는 어의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선조의 건강학 ①

퇴계의 독설 "왕이 色을 밝히니 목소리가 탁하지!"


庶子 콤플렉스

조선의 임금 중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이는 하성군(河城君) 이균(1552~1608년), 즉 선조이다.

여러 인재를 발탁한 영명한 군주가 어떤 이유로 돌팔매질을 당하는 무능한 군주가 됐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은 역사학자의 몫이다. 나는 선조를 공감하는 의사의 입장에서 그의 시대가 그의 질병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또한 그의 내면과 질병이 어떤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유추해볼 따름이다.

명종 22년 6월 27일, 왕의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지자 중전과 몇몇 사대부가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모였다. 명종은 아직 숨은 붙어 있었지만 말은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명종의 분명한 하교가 없는 가운데 영의정 이준경(1499~1572년)이 후계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를 중전에게 청하자 중전은 하성군 이균을 지명했다. 이 사람이 바로 비운의 임금, 선조였다.

선조의 아버지는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과 창빈 안 씨 사이에 난 덕흥군 이초(1530~1559년)다. 후궁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균이 왕이 된 사실은 많은 풍수가의 입에 올랐다. 창빈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장흥 땅에 있었는데 서울 동작으로 옮기고 난 후 손자가 임금 자리에 올랐다 해서 그가 묻힌 동작릉이 풍수학자 사이에서 연구 대상이 될 정도였다.

후계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뤄진 방계 왕족의 왕위 계승은 곧 벼락출세를 의미했고, 바로 이 때문에 선조는 평생 동안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치열했던 선조의 '서자 콤플렉스'는 질병으로 이어졌다. 마음의 병이 몸으로 옮겨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언급된 선조의 질병이 크게 소화 불량과 귀울음(이명), 편두통으로 나뉘는 부분도 같은 맥락이다. 감기로 인한 기침과 콧물 등 흔한 증상과 근골격계 질환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질환이 마음의 병에서 생겨난 질병인 셈. 현대 의학으로 말하자면 스트레스가 주원인인 질환이다.

선조 시대는 사림(士林)이 장악했다. 이들은 송나라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을 추종했다. 적통(嫡統)이 아닌 선조를 전격적으로 왕위에 올린 세력이 바로 이들이다. 그 때문일까. 이들 사대부의 역할이 커질수록 왕은 주눅 들고 신하는 큰소리를 쳤다. 왕권의 시대는 저물고 신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사림들은 자신이 만든 임금인 선조의 내면 세계를 뜯어고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선조를 성리학적 이상 군주로 키우려는 교육을 시작한 것. 이황, 이이, 기대승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성리학의 거두들이 모두 선조의 경연 강사로 나섰다. 이황은 <성학십도>를, 이이는 <성학집요>를 통해 선조를 위대한 군주로 키우려 노력했다. 그들은 신하가 아닌 스승에 가까웠고, 정치적 후원자로서 충고를 쏟아냈다.

선조를 왕위에 옹립하고 원상(院相·왕의 사망 시 임시로 정무를 이끄는 정승)에 올라 국사를 총괄한 이준경은 선조에게 신하의 의견을 존중하라고 끊임없이 압박한다. 실록은 이준경에 대해 "대간의 말을 관대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선조에게) 반복해 아뢰었다"고 쓰고 있다.

선조 즉위 초 이황을 종주로 한 신진 사림의 속마음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경연에서 기대승이 선조에게 자꾸만 "이황을 대하는 자세를 옛 성현처럼 존대하라"고 강권하자 선조는 압박감을 못 이기기고 이렇게 반박한다.

"그(이황)를 옛사람으로 가칭하여 말했는데, (그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며 옛사람의 누구에게 비교할 만한가? 이런 말로 묻는 것이 미안하지만 평소에 궁금하였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士林과의 끝없는 신경전

임진왜란이 끝난 후 벌어진 사림과의 대결은 선조를 더욱 힘들게 한다. 선조는 왜란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년) 10월 26일 분에 못 이겨 이황과 그 제자인 유성룡을 힐난하는 발언을 한다.

"듣건대 경상도의 풍속은 누구라도 아들 형제를 두었을 경우 한 아들이 글을 잘하면 마루에 앉히고 무예를 익히면 마당에 앉혀 노예처럼 여긴다. 국가에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게 된 것은 경상도가 오도한 소치다."

선조는 쟁쟁한 성리학자 사이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질식할 것 같은 나날을 보냈다. 성리학의 연구는 도덕성명(道德性命)에 편중돼 국가와 국민의 실제 문제에 대한 연구는 적고, 교조적이며 도덕적인 문제에 치중한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관점은 당연히 의학계에도 영향을 미쳐 도덕적 관점에서 사람의 성욕을 절제하거나 억제하는 것을 논의의 중심으로 이끌어냈다. 중국 금·원대의 명의인 주진형은 그의 저서 <격치여론(格致餘論)>에서 "절욕 양생 사상은 유학의 이욕(理欲) 논변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잘라 말할 정도였다.

중국과 한국을 포함해 고금의 모든 유학자는 성(性)과 건강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지적해왔다. 중국 공자의 <춘추(春秋)>를 전국 시대 노나라 사람 좌구명(左丘明)이 재해석한 책 <좌전(左傳)>에는 전국 시대 명의 의화(醫和)가 진(晉)나라 왕 진후(晉侯)의 병을 논의하면서 "그 병은 여자를 가까이하면서 절도에 맞지 않고 때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진단하는 대목이 나온다.

선조의 질병에 대한 기록도 여색 절제에 대한 말로 시작된다. 선조 6년 1월 3일 신하들 사이에선 선조의 목소리가 끊어져 책 읽는 소리가 이상하다는 말이 조심스럽게 돌기 시작한다.

"옥음이 정상이 아닌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어도 오래 끌고 낫지 않으니 입시한 신하로서는 누구나 물러가서 조심합니다."

이후 여러 차례 선조의 이상한 목소리에 대한 근심스러운 논의가 계속되지만 직접적인 언급은 모두 자제한다. 이런 가운데 율곡 이이가 처음 입시하자마자 포문을 열었다. 이이의 성격을 두고 실록은 "쾌직(快直)하다"고 표현한다. 거침없이 직설적이라는 뜻이다.

"소신이 병으로 오래 물러가 있다가 오늘 옥음을 듣건대 매우 통리(通利)하지 않으시니 무슨 까닭으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여색을 경계하는 말을 즐겨 듣지 않으신다 하니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맑지 못한 것이 여색을 삼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책망이 직설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선조는 "그대가 전에 올린 상소에도 그렇게 말하였으나, 사람의 말소리는 원래 같지 않은 것인즉, 내 말소리가 본디 그러한데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답변한다. 실록은 "옥색이 자못 언짢아하며"라며 이때 선조의 불편한 심기를 자세히 적고 있다.

목소리는 성 호르몬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게 사실이다. 남성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남자의 목소리가 굵어지며 저음이 되고 여성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여자의 목소리는 고음이 된다. 지금이야 성 호르몬이 신장 곁에 붙은 부신에서 분비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됐지만 옛날엔 그렇지 못했다. 한의학은 부신을 신장의 일부인 명문(命門)이라 규정짓고 목소리와 성 호르몬의 관계를 당연시하며 생리적으로 설명해왔다.

▲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의 선조. 선조는 끊임없이 사림과 불화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MBC


心火가 만든 위장병, 쉰 목소리

과연 선조의 갈라진 목소리는 여색을 밝혀 남성 호르몬이 고갈 또는 소진된 데서 기인한 것일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선조는 즉위에 즈음해 공부와 정치적 결정에 따른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스트레스를 오랫동안 받으면 외향적인 사람은 교감 신경이, 내향적인 사람은 부교감 신경이 흥분한다. 선조는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부교감 신경이 항진되면 감각과 운동 신경을 관장하는 미주 신경에 과긴장증이 오는데 발성 장해로 목소리가 쉬거나 위장 운동 장애가 생긴다.

실제 목소리의 이상을 호소한 이후 선조는 위장 장애로 위장약을 복용하거나 소화 불량 증상을 지속적으로 호소해왔다. 율곡 이이를 비롯한 신하들은 한의학을 유교적 이론으로만 바라보다 실제 스트레스를 유발한 자신들의 책임은 망각했다.

<동의보감>은 성음문(聲音文) 첫 구절에 '목소리는 신장에서 나온다'고 규정한다. 현대는 자기표현의 시대다. 말을 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도 부지기수다. 말로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며 살다보니 성대가 피로해지는 건 당연지사. 성대를 지나치게 사용하면 목이 마르고 건조해져 결국엔 쉰 목소리가 나온다. <동의보감>은 목소리를 윤택하고 탄력 있게 내는 양생법도 소개한다. "말하고 외우거나 읽을 때 언제나 기해(배꼽 아래 있는 혈 이름) 속에서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고운 목소리를 내는 약물도 거론했다. 껍질을 벗긴 살구 씨, 졸인 우유, 꿀을 반죽해 알약을 만들거나 곶감을 물에 담갔다가 늘 먹는 것이 좋다고 했다. 달걀의 효능에 대해서도 "흰자는 성질이 서늘해 인후두의 열을 식히고 염증을 없애 목소리를 좋게 한다"고 설명한다. 노래 부르기 전에 날달걀을 먹으면 좋다는 속설도 근거가 없는 게 아닌 셈이다.

하지만 정작 선조를 괴롭힌 병증은 목소리가 아니라 소화 불량이다. 즉위 7년 1월 7일 선조는 "자주 체한다" "음식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괴로워한다. 사실 스트레스와 소화 불량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혈관이 수축한다. 위의 소화 운동을 담당하는 위장관 근육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들도 위축된다. 위장 운동 능력이 떨어지면 잘 체하고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

'비위를 맞춘다'거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 '속 좁다'라는 옛말이 생긴 것도 마음과 위장의 관계에서 비롯됐다. 내면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 선조의 위장 장애는 그 이듬해에도 계속된다. 실록은 좌의정 박순은이 "왕의 비위에 이상이 생겨 민망하다고 한숨을 쉬었다"고 썼다.

호남유림의 거두이자 허준을 발탁하고 후원한 미암(眉巖) 유희춘(1513~1577년)은 보다 못해 이런 증세를 음식을 통해 치료하기 위한 <식료단자>를 지어 올린다. 중국 양생서 <연수서>, <수친양로서>, <명의잡서>, <사림광기> 등을 발췌해 만든 식사 지침서인 것이다. 가미응신산, 양위진식탕 등 위장 기능 개선 처방을 올렸지만 고질이 된 선조의 위장병은 쉽게 낳지 않고 평생을 괴롭힌다.

선조 34년 선조는 신하들의 그늘에 가려 속마음을 숨기고 화병을 안고 살던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내 병이 다시 도져 고질이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심화(心火)가 가장 치성해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한다." 선조의 위장병은 노년에 극에 달하는데 선조 41년에는 "도통 입맛이 없어 무를 곁들여야 겨우 수저를 든다. 만일 약 중에 무와 맞지 않는 약재가 들어가면 그것조차 못 먹게 될 것 같다"고 말할 정도가 된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선조의 건강학 ②

허준에게 짜증내는 왕 "약 쓰는 게 왜 이리 경솔해!"


이명과 편두통에 침을 선택

선조를 괴롭힌 가장 무서운 질환은 귀울음 곧 이명이었다. 증상은 즉위 28년 8월부터 시작돼 평생 동안 이어졌다.

<동의보감>에서 파악한 귀의 본질은 '공한(空閒)'이다. '고요함을 소중하게 여기고 마음이 텅 비어 한가함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음이 번뇌로 가득 차거나 화가 뻗치면 귀에 병이 생긴다. 귀는 고요하면서 차가운 기관이다. 우리가 뜨거운 불에 손을 데면 반사적으로 귓바퀴를 잡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공포영화에 소리가 없으면 무덤덤해지듯 귀는 어둡고 차가운 공포를 주관하는 곳이다. 생긴 모양도 외부는 넓고 내부로 갈수록 좁아진다. 소리를 모으기 좋게 생겼다. 그래서 한의학은 귀를 구심성(求心性)의 음적(陰的) 기관이라 규정한다.

한의학에서 뜨겁고 팽창하는 힘은 화(火)이며 차갑고 수축하는 힘은 수(水)다. 귀는 확실히 음적이며 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차가운 귀에 뜨거운 화가 올라오면 귀는 달아오르면서 자기 소리를 시끄럽게 증폭한다. 이런 기전으로 스트레스는 귀울음을 유발한다. 이명이 오면 자신의 심장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선조는 이명 치료를 위해 약물을 먹으라는 신하들의 청을 거절하는 대신, 조선 최고의 침의(鍼醫) 허임(許任)의 침을 맞길 원했다. 이렇게 엄포까지 놓았다.

"귓속이 크게 울리니 침을 맞을 때 한꺼번에 맞고 싶다. 혈(穴)을 의논하는 일은 침의가 전담해서 하라. 침의가 간섭을 받으면 그 기술을 모두 발휘하지 못해 효과를 보기 어려우니 약방은 알아서 하라."

여러 차례에 걸쳐 침을 맞은 점, 침의에게 의존한 점을 보면 침이 선조의 귀울림을 많이 개선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선조의 질환을 치료한 공으로 양반이 되고 부사 자리에 오른 허임은 동아시아 최고의 침구 서적인 <침구경험방>을 쓰기도 했다.

선조는 편두통을 앓기도 했다. 침으로 편두통을 치료한 의관에게 선물을 하사한 기록도 있다. 사실 선조의 편두통은 난치의 질병에 가까운 것이었다. 명저 <편두통>(강창래 옮김, 알마 펴냄)의 저자 올리버 색스는 편두통을 "뚜렷한 절망과 은밀한 위로"라고 표현한다. 편두통은 크게 소화 불량, 월경, 호르몬과 관련지어 일어나는데 선조의 편두통은 소화 불량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색스는 "편두통이 올 때는 위가 평소처럼 편안하지 않고 먹는 것을 조심하면 증세가 줄어든다. 반대로 위장을 부담스럽게 하면 더 잦고 심각해진다"고 설파했는데 선조의 소화 불량증과 딱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선조의 편두통은 색스의 분류로 따지면 '하얀 편두통' 유형에 속한다. 정서적 자극을 받으면 얼굴이 창백해지고 의기소침해지는 유약한 억제형이면서 미주신경 긴장증에 가깝다는 것.


선조와 허준

선조 당시의 어의(御醫)는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이다. 선조는 허준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실록이나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통해 드러난 그의 모습은 드라마와 많은 차이가 있다. 실록의 허준은 여러 차례에 걸쳐 탄핵을 당한다. 야사(野史)로 전해오는 허준의 '난리탕' 처방 일화는 청탁을 배격하는 허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허준이 당대의 명의로 뜨는 어의가 되자 사대부들의 왕진 청탁이 쇄도했다. 비록 어의였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사대부와 의관의 신분 격차는 엄청났다. 왕진 청탁을 거절할 명분이 필요했던 그는 각기병이 생겨 움직일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그런 와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허준은 선조와 신하들이 몽진을 떠나는 상황에서 제일 앞장서 종종걸음으로 내달렸다. 오성 이항복은 그 모습을 보고 "어의 허준의 각기병에는 '난리탕'이 최고"라고 비꼰다.

허준은 드라마와 달리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고, 평생 후원자였던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갔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는 많은 진료 청탁과 이 부탁을 정성껏 수행하는 허준의 모습이 곳곳에 드러난다. 1569년 당시 유희춘은 나주에 사는 나사침과 그의 아들 나덕명의 병을 진찰해달라고 부탁했다. 또 남원에 사는 신흔의 질환 치료를 부탁하는데 허준은 "병이 비록 중하지만 치료될 수 있다"고 보고한다.

유희춘은 자신의 병은 물론 부인의 고질병 치료를 부탁하기도 했다. 종기 치료를 위해 얼굴에 지렁이 즙을 바르고 토사자환을 처방한다. 호불호가 분명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성을 다해 진료하는 인간 허준의 또 다른 면이다. 실록은 왕의 말을 기록한 글이지만 사대부의 시각으로 쓰였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사간원은 허준을 강력히 비난한다.

"허준이 본시 음흉하고 범람한 사람으로 자신이 수의가 되어 약을 씀에 있어 많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잘못을 저질러 망녕되이 극히 찬 약을 써서 마침내 선왕께서 돌아가셨다."

어의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는 비난이 쇄도하면서 결국 허준은 의주로 귀양을 가게 된다. 특히 인간적인 평가에서 모진 곤욕을 치른다. "음흉하고 범람한" 사람으로 규정 당하며 사대부들의 왕진 청탁을 거절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하지만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사간원이 허준의 석방 명령 환수를 주장하자 오히려 의관으로서의 고집을 칭찬한다.

"약을 처방함에 있어 허준의 치료 능력을 잘 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신대로 옳다고 생각하면 시행하며 정성껏 처신하는 그 뜻을 감안하여 석방한다."

"망녕되이 극히 찬 약을 썼다"는 대목은 선조도 말한 바 있다. 선조 40년 10월 9일 새벽 선조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다 넘어져 의식을 잃는다. 그러자 의관들은 한꺼번에 청심환, 소합원, 생강즙, 죽력, 계자황, 구미청심환, 조협가루, 묵은 쌀죽 등의 약을 한꺼번에 올렸다. 청심환, 구미청심환, 죽력 등은 모두 성질이 찬 약제들. 선조는 이튿날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한다.

"의관들은 풍증이라고 말하나 내 생각에는 필시 명치 사이에 담열이 있는 것 같다. 망령되이 너무 찬 약제를 쓰다가 한 번 쓰러지면 다시 떨치고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미음도 마실 수 없으니 몹시 우려된다. 다시는 이처럼 하지 말라."

이런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2주 후인 10월 26일 지속적으로 먹어오던 영신환이라는 약물을 선조가 거부하는 일이 벌어진다.

"새로 지어들인 영신환을 복용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그 약 속에는 용뇌 1돈이 들어 있다. 용뇌는 기운을 분산시키는 것이니 어찌 장복할 수 있는 약이겠는가. 그것도 지금처럼 추운 시기에 말이다. 요즈음 먹어보니 서늘한 느낌이 들어 좋지 않다. 의관들이 필시 오용하였을 것이다."

12월 3일에는 허준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진료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린다.

"사당원(砂糖元)을 들이자마자 또 사미다(四味茶)를 청하니 내일은 또 무슨 약과 무슨 차를 계청하려는가. 허준은 실로 의술에 밝은 양의(良醫)인데 약을 쓰는 것이 경솔해 신중하지 못하다."


선조를 위한 변명

반면 의관으로서의 허준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조선 최고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고금의 의료 서적에 널리 통달해 약을 쓰는 데 노련하다." (선조)

"허준은 내가 어렸을 때 많은 공로를 세웠다. 근래 내 질병이 계속돼 그를 곁에 두고 약을 물어 쓰고 싶다." (광해군)


의관으로서의 이런 평가와 달리 실록이 그의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 혹평을 일삼은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실록은 심지어 허준에 대해 "성은을 믿고 교만을 부리므로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기록할 정도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아 확신할 순 없지만 역시 치료 청탁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점과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 외골수 같은 진료 행태 때문에 생긴 부정적 결과가 아니었던가 싶다. 만약 그가 진료 청탁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면 <동의보감>을 비롯한 수많은 저작이 나올 수 있었을까.

비록 많은 사대부와 권신들이 임진왜란에 허둥대면서 도망간 선조와 허준의 모습에 대해 비난하지만 그들의 나약함은 어쩌면 시대가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숭배한 사대부와 권신들은 내성외왕의 경지를 임금에게 강요하고 허준을 자신들의 주치의로 만들려 했다. 선조에 대해서는 밖으로는 왕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한편, 안으로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며 끊임없이 압박을 가했다. 성리학의 대가인 주돈이는 성인의 경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성인은 중정(中正)과 인의(人義)를 본성으로 삼고 주정(主靜·무욕한 까닭에 고요하다)하여 인극(人極)에 이른다."

사대부와 학문의 극적인 경지를 다투던 욕심 없는 사람이 과연 전쟁에 능률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까. 뿔이 강한 짐승은 강한 이빨을 타고날 수 없고 이빨이 강한 짐승은 강한 뿔을 타고날 수 없다. 오직 성리학만을 숭상하고 성인의 경지를 숭상한 사대부에 의해 만들어진 선조, 전쟁에서의 비겁함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치욕의 군주' 선조는 왜란 중 의주에서 신하들에 대한 불만을 시 한수로 읊어낸다.

"관산에 뜬 달 보며 통곡하노라 / 압록강 바람에 마음 쓰리다 / 조정 신하들은 이날 이후에도 / 동인이니 서인이니 나누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痛哭關山月 / 傷心鴨水風 / 朝臣今日後 / 寧腹各西東)"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효종의 건강학 ①

중국 치겠다던 효종, 감기에 굴복하다


조선 왕은 대부분 즉위하면서부터 상사(喪事)로 인해 건강에 타격을 입는다. 반정(反正)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이들을 제외하면 조선의 모든 왕은 선대왕의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왕정을 시작했다. 충효(忠孝)가 국가 운영의 근본 가치였던 만큼 임금은 상사에 있어 백성의 모범이 돼야 했다.

문제는 선대왕의 장례 절차가 몸을 해칠 만큼 복잡하고 힘들었다는 점. 국왕 복식(服飾)을 하고 겨우 몇 시간 사극에 출연하는 연기자도 몸살이 날 지경인데, 3년상을 치른 조선의 허약한 왕은 오죽했겠는가. 체력 소모가 엄청났음은 불문가지. 오랜 상을 치르면서 임금의 몸은 계체량을 통과하기 위해 무리하게 살을 뺀 복서처럼 흐느적거렸다.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북벌론(北伐論)으로 잘 알려진 효종(李淏·1619~1659년)도 상사로 인한 과로를 피해갈 수 없었다. 최초의 질병 기록은 아버지 인조의 장례식 후에 나타난다.

효종 즉위년인 1649년 10월 16일 실록은 "상(上)이 집제(執制·장례)를 너무 지나치게 해 날로 매우 수척해지고 오랫동안 평안치 못하여 여러 아랫사람들이 근심하였다"고 적고 있다. 11월 19일에도 "약방에서 주상이 몸이 불편하니 친히 삭제(朔祭·왕실에서 음력 초하룻날마다 조상에게 지내던 제사)를 행하지 말기를 청하였다"고 기록했다.

효종의 즉위엔 개운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친형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데다 대신들이 그의 아들인 원손(元孫)의 왕위 계승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 인조의 상사에 열심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일까. 북벌론으로 강골 이미지가 뚜렷한 효종은 의외로 즉위 10년 만에 명을 달리했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이었다.

감기에 당뇨까지

실제로 효종은 청나라를 치겠다는 일념에 스스로 철퇴나 청룡도를 익히는 등 무예 연마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무예를 연마한다고 오랜 산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효종은 즉위 초부터 매년 감기를 앓았으며 그로 인한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효종의 건강을 인생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재위 초반에는 감기로 고생을 했으며 중후반에는 소갈 증상과 그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종기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결국 그는 종기 치료 중 출혈 사고로 숨을 거뒀다.

효종의 감기 치료와 관련한 <승정원일기> 기록은 한의학사에서 귀중한 자료 가운데 하나다. 일종의 면역 질환인 감기는 오늘날 서양 의학도 적확한 치료제를 찾지 못해 대증(對症) 치료만 하는 형편이다. <승정원일기>는 효종의 감기 증상에 따른 처방의 변화와 효과 유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음은 물론, 감기에 관한 한 조선 최고의 치료술을 보여준다. 효종의 내밀한 체질적 특징까지 알 수 있는 것은 덤이다.

감기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콧구멍이나 기도를 타고 들어오면서 생기는 질환이다. 적이 침입하면 인체의 군대 격인 면역 세포가 이들을 물리치고자 전쟁에 돌입한다.

감기에 걸리면 콧물이 나오고 재채기를 하는 것도 면역 세포가 벌이는 전쟁의 산물이다.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몰아내는 물 폭탄이 콧물이라면 재채기는 바람 폭탄이다. 재채기 때 나오는 바람의 세기는 시속 180킬로미터에 달한다. 오한으로 몸이 덜덜 떨리고 열이 오르는 것도 세균과 바이러스를 열로 몰아내려는 면역 반응이다.

현대 의학은 아직 감기를 잡아내지 못했다. 우리가 감기 치료제라고 먹는 약은 열을 내리고 콧물과 기침, 염증을 멈추게 하는 각각의 증상 개선제일 뿐이다. '감기 치료제를 만들면 노벨상 감'이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몸에서 세균과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몸의 면역계다. 한의학은 우리 몸의 발열 작용을 면역 반응을 활발하게 하는 고마운 존재로 인식한다. 해열제를 써 무리하게 열을 내리면 면역계는 세균과 바이러스를 몰아내기 위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므로 그만큼 더 힘들어진다.

'감기에 걸리다'를 영어로는 '캐치 어 콜드(catch a cold)', 한자로는 '상한(傷寒)'이라고 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감기를 체온이 떨어지면서 발생하는 질환으로 인식한 것이다. 체온이 떨어지면 면역력이 약해지고 그로 인해 질환이 발생하는데 그 대표적인 질환이 감기다.

일부 면역학자는 체온이 0.5도 떨어지면 면역력이 35% 저하하고 1도 오르면 6배 정도 활성화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아베 히로유키와 같은 학자들이 그들로, 체온이 오르면 혈액의 흐름이 빨라지고 그에 따라 면역 세포인 백혈구가 세포와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속도도 그만큼 빨라진다는 게 주장의 핵심이다.

허장성세 약골 임금님

한의학적 감기 치료는 현대 의학과 달리 인체의 면역 반응을 돕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감기에 걸렸을 때 고기를 멀리하고 콩나물이나 뭇국, 생강이나 파뿌리 달인 물을 먹으면서 이불을 덮고 땀을 내도록 하는 게 그것이다. 생강이나 파뿌리는 몸을 따뜻하게 하고 콩나물이나 무는 배설을 촉진해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체외로 빨리 쫓아내게 한다. 한의학은 감기에 걸렸을 때 고기를 먹으면 소화기에 필요 이상의 부담을 줘 면역 능력을 오히려 떨어뜨린다고 본다.

소갈증(消渴症)이라 불리는 당뇨병도 체온이 떨어져 발생하는 질환이다. 체온이 36.5도 이하로 떨어지면 체내 대사 활동이 느려지고 중간 대사 물질이 분해(연소)되지 않은 채 남게 되는데, 이것이 혈액 안에서 여러 가지 질병을 유발한다. 체내의 당분이 대사 작용을 통해 연소되지 않고 혈액 속에 노폐물로 남으면 당뇨병이 생긴다. 단것을 별로 많이 먹지 않았는데도 당수치가 높아지거나 당뇨병에 걸린 사람들이 이런 경우다. 모두 체온이 떨어져 발생한다는 점에서 효종이 감기와 당뇨병을 동시에 앓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한의학은 감기를 외감과 내상 2가지로 분류한다. 외감은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외부로부터 직접 공격해 일어나는 경우이고, 내상은 주로 음식이나 스트레스, 과로로 야기되는 체온과 신진대사의 저하가 원인이다. 증상에도 차이가 있다. 외감은 발열이 지속적이고 근육 뼈마디가 심하게 아프며 음식을 잘 먹지 못하지만 맛은 느껴지는 반면, 내상은 발열이 그쳤다 다시 시작되고 뼈마디에 힘이 없고 늘어지며 음식 맛도 잘 모른다. 또한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특징도 있다.

효종은 강한 군주의 이미지와는 달리 재위 10년 동안 내상이 원인인 감기를 늘 앓았다. 즉위 초기의 무리한 상사에 따른 과로와 반청(反淸)주의에 따른 스트레스로 체력이 약화된 탓이다.

이 때문에 효종의 감기 치료도 내상성 감기에 자주 쓰는 '곽향정기산'이 처방됐다. 이 처방은 조선 후기 유재건이 쓴 <이향견문록>에 '만병통치약'으로 소개될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처방의 구성은 별다를 게 없다. 곽향 소엽 백지 대복피 백복령 후박 백출 진피 반하 길경 등 모두가 습기를 말리고 온기를 불어넣는 평범한 약재다.

효종의 오한 두통 증상에 주로 쓰인 '청서익기탕' 처방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기력이 떨어질 때 쓰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효종은 위장이 약하고 체력적으로 약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기침 증상에 삼소음, 행소탕, 청폐탕 등 약한 위장 기능을 감안한 처방을 쓴 것도 그 증거다.

소화 불량과 설사, 불면 증상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곽향정기산' '보중익기탕' '죽여온담탕' 등을 처방하는데, 이들은 모두 병에 저항할 힘이 없어질 정도로 체력과 기력이 떨어질 때 쓰는 처방이다.

당뇨 유발한 '욱'하는 성질과 식탐

효종은 즉위년부터 소갈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 원년 2월 24일 '황금탕', 즉위 2년 3월 12일 '청심연자음', 즉위 3년 6월 4일 '양혈청화탕'을 각각 투여했는데 이들은 모두 <동의보감> 소갈문에 쓰인 치료 처방이다.

'消'는 몸 안의 진액이 말라 들어가 윤기가 없어진다는 뜻이며 '渴'은 목마름 증상을 의미한다. 몸 안의 진액인 인슐린이 부족해서 생긴다는 점과 일단 병에 걸리면 물을 자주 마신다는 점에서 현대의 당뇨병 해석과 똑같다.

특히 효종은 성격과 식습관에서 당뇨를 유발할 여러 요인을 지니고 있었다. '욱'하는 성격에 참을성이 없었던 점은 대신들로부터 여러 차례 지적을 당한 바 있다. 효종 3년 참찬관 이척연은 "지난번 경연 자리에서 '죽인다'는 말씀까지 하셨다고 하니 신은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라며 왕의 과격한 언사를 나무랐다. 효종 5년에도 기록이 보인다.

"조금이라도 전하의 마음에 거슬리면 반드시 꾸짖고 심지어는 발끈 진노하시니 말소리와 얼굴빛이 너무 엄해 보는 사람이 어리둥절해합니다."

효종 9년에는 왕 스스로 자신의 성격을 반성한 기록도 있다.

"나에게 기질상의 병통이 있다. 한창 성이 날 때에는 일의 시비를 따지지 않은 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 행하여 꼭 끝을 보고서야 그만 두었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이 많았다."

당뇨병의 적인 식탐도 도마에 올랐다. 효종 8년 8월 16일 우암 송시열이 작심하고 나무란다.

"신이 듣건대, 금년 봄에 영남의 한 장수가 울산의 백성들을 상대로 전복을 따 진상할 것을 매우 급하게 독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장수가 말하기를 상께서 훈척대신을 시켜 그렇게 요구하셨다고 했습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음식 탐하는 사람을 천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식탐에 대한 지적은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반복되는데, 신하들은 중국 남송대의 대학자이자 주자(朱子)의 친구였던 여조겸(呂祖謙·1137~1181년)의 일화를 두 번이나 거론하며 효종에게 식탐을 경계하라고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여조겸은 젊은 시절 음식이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상을 때려 부숴버릴 정도로 성질이 거칠었는데 후일 오랫동안 병을 앓으며 논어의 한 구절을 읽은 후 포악한 성정을 고치고 대학자로 거듭났다. 여조겸에게 깨달음을 준 논어의 구절은 '스스로에겐 엄격하고 남의 허물은 크게 탓하지 말라'는 대목이었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효종의 건강학 ②

사라진 북벌의 꿈? 효종 독살의 진실은…


갈증과 열 식히는 蓮

효종 7년 4월 20일의 <승정원일기>에는 효종의 증상을 확실하게 소갈로 보고 '맥문동음(麥門冬飮)'이라는 처방을 낸 기록도 있다.

<동의보감>은 소갈에 대해 "심장이 약해(心虛) 열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지 못하며, 가슴 속이 달아오르면서 답답하고 편치 않아 손발을 버둥거리는 증세(煩躁)가 나타나고, 목이 말라 물을 자주 마시고 소변이 자주 마렵다"고 규정하는데, 이는 효종이 기질상 보여주는 화병과 번열(煩熱), 구갈(口渴) 등의 증상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동의보감>에서 이런 소갈 증상에 주로 권유하는 약물은 연뿌리 즙 오미자 맥문동 천화분 인삼 등인데, 실제 효종에겐 연자죽과 연자육(蓮子肉)이 든 청심연자음, 양혈청화탕이 자주 처방됐다.

진흙탕에서 찬란한 꽃을 피우는 연꽃은 불교에선 청정한 불심(佛心)의 상징이다. 한의학의 눈으로 보면 그 의미는 더 깊다. 연(蓮)은 욕망의 불을 물로서 진정하는 작용을 한다. 붉은 연꽃과 푸른 연잎은 모두 뿌리가 끌어당긴 수분과 영양에 의존해 자란다. 물에 잠기면 뿌리, 줄기(연대), 잎이 모두 죽는다. 반대로 물이 마르면 가지와 잎은 시들지만 뿌리는 죽지 않는다. 연뿌리는 물을 끌어올려 무더운 여름의 열을 식히고 푸름을 유지한다. 상부의 열을 식히면서 촉촉하게 하는 작용이 당뇨의 갈증과 번열 증상을 식혀주는 효능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약으로 주로 쓰이는 부분은 연꽃의 열매인 연자육이다. 흔히 연밥으로 불리며 꽃이 지고 씨방 속에서 생겨난다. 연이 세상의 온갖 번뇌를 꽃으로 피워내듯, 연자육은 마음에 맺힌 열을 풀어내 콩팥으로 배설한다. 청심연자음이란 처방의 군약(君藥·처방에서 가장 주가 되는 약)으로 쓰이는데 흔들렸던 평상심을 안정시킨다. 특히 얼굴이 붉어지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목마름, 다리가 약해지는 상열하한(上熱下寒) 증상을 치료한다. 화병이나 만성 질환, 특히 당뇨병 고혈압 성기능 쇠약(조루 증상)에 효능이 크다.


교수형당한 어의

효종의 잦은 감기와 소갈증은 결국 화를 불렀다. 소갈증이 부른 종기가 화근이었다. <동의보감> 소갈 편에는 "소갈병의 끝에 종기가 생긴다"고 경고한다.

"소갈병이 마지막으로 변할 때 잘 먹으면 뇌저(腦疽)나 등창이 생기고, 잘 먹지 못하면 반드시 중만(中滿·배가 그득하게 느껴지는 증상)이나 고창(배가 땡땡하게 붓는 병)이 생기는데 이것은 다 치료하기 어려운 증상이다."

효종은 결국 즉위 10년 만인 1659년 5월 4일 종기 때문에 숨을 거뒀다. 직접적인 사인은 머리 위(뇌저)에서 시작해 얼굴로 번진 종기였다. 일부에선 효종이 사망 두 달 전 송시열과의 기해독대에서 자신의 건강을 자신했다는 점을 들어 '효종 독살설'을 주장하지만, 한의학적 관점에서 추론해보면 이는 임금의 건강을 책임진 어의 등 의관들의 책임이라고 봐야 한다. 당시 진료 상황을 꼼꼼히 묘사한 실록과 <동의보감>의 기록을 대조해보자.

"상이 침을 맞는 것의 여부를 어의 신가귀에게 하문하니 '종기의 독이 흘러내리며 농증이 생기려고 하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반면 어의 유후성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상이 신가귀에게 침을 잡으라고 명해 침을 맞았는데 침구멍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상이 이르기를 '가귀가 아니었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라고 했다. 그런데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솟아 나왔다. 침이 혈과 경락을 범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출혈이 멈추지 않으면서 상이 승하하였다."

그런데 <동의보감>은 소갈의 금기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병이 생긴 지 100일이 지났으면 침이나 뜸을 놓지 못한다. 침이나 뜸을 놓으면 침이나 뜸을 놓은 자리에서 헌 데가 생기고 그곳에서 고름이 나오는데 그것이 멎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

소갈병의 금기는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있는데, 현대의 당뇨병 환자에게도 한의학적 지침이 될 만하다. 첫째는 금주, 둘째는 금욕(성생활을 금하는 것), 셋째는 짠 음식과 국수다. 기름진 음식과 향기로운 풀, 광물성 약재를 쓰는 것도 금기 대상이다.

어쨌든 어의 신가귀는 "소갈병 환자에게 침을 놓으면 죽을 수 있다"라는 말이 한의학의 교과서인 <동의보감>에 분명하게 나와 있는데도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효종의 종기에 침을 놓고 말았다. 신가귀는 시침을 말린 동료 유후성과 함께 효종을 돌보던 6명의 어의 중 한 명으로, 무인 출신이지만 침을 잘 놓아 인조가 특별히 의관으로 임명한 인물이었다.

진료 기록을 자세히 보면 신가귀가 <동의보감>의 금기를 어긴 것이 이때가 처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효종 9년 7월 3일 신가귀는 효종의 종기에 침을 놓는다. 실록에는 "족부에 생긴 종기에 침을 놓은 자리에서 진액이 흘러나오면서 멎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 신가귀는 이때도 효종의 종기를 소갈병의 연장선에서 보지 못했다. 무인 출신으로 침에는 밝았을지 몰라도 병증의 연관관계는 잘 몰라 실수를 범한 듯하다.

하지만 신가귀의 족부 사혈요법은 효종의 피가 멈추면서 일부 효과를 봤다. 신가귀는 이를 바탕 삼아 이듬해 5월에도 똑같은 시술을 하다 효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족부 종기를 치료받은 효종은 어의 유후성의 만류에도 불구, 지병으로 집에서 요양하던 신가귀를 억지로 불러내 얼굴의 종기를 찔러 피를 내게 함으로써 죽음을 자초한 셈이 됐다.

이 일로 신가귀는 효종 사후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동료 어의들도 유배를 가거나 곤장을 맞았다. 당초 신가귀는 허리를 베어 죽이는 참형에 처해질 예정이었지만 효종의 맏아들인 현종의 배려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종기는 찌르는 게 맞지만…

효종은 세 차례에 걸쳐 종기 증상을 앓았는데, 효종 9년 1월 21일에 시작된 팔 부위의 종기와 같은 해 6월 8일 낙상으로 시작된 족부 어혈증상으로 인한 부기, 효종 10년 4월 27일에 시작된 머리 부위의 종기다. 효종 10년 윤 3월 9일 예조판서 홍명하의 말을 담은 실록의 기록은 효종의 종기 증상이 소갈병, 즉 당뇨병에 의해 생긴 합병증임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지난해 성상께서 마루에 떨어졌던 우환은 전고(前古)의 제왕들에게는 없던 환액(宦厄)이었습니다."

다리를 다쳤으면 삐거나 부러지거나 멍이 들었어야 하는데 효종의 증상은 달랐다. 발이 붓고 힘이 없으면서 말라 들어가 통증이 너무 심했다. 이는 바로 당뇨의 후유증으로 생긴 증상이다. 현대 의학에서도 당뇨병 환자의 3분의 1 정도에서 말초신경병증과 혈관 질환으로 족부 증상이 일어난다고 밝히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효종의 족부 증상은 소갈증에 의한 합병증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효종의 죽음을 두고 침을 놓은 어의 신가귀가 손을 떠는 수전증을 앓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신가귀가 침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침 자리는 효종의 종기 치료나 죽음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지엽적 문제일 뿐이다. 비록 신가귀는 이때의 실수로 교수형을 당했지만 그것은 소갈에 대한 무지의 결과였지 수전증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신가귀가 종기를 사혈 침으로 치료한 것은 소갈병의 합병증만 아니었다면 잘못된 게 하나도 없었다. 신가귀를 말린 동료 어의 유후성도 산침(散鍼)으로 효종의 눈 주위 종기를 치료한 바 있다. 산침은 중국 명나라 때 의서인 <의학입문>에도 나오는 것으로 경락상의 혈 자리에 침을 놓지 않고 병소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아픈 곳을 따라 찌르면서 침을 놓아 피를 빼는 방식이다.

이처럼 종기를 찔러서 피고름을 빼내는 방식은 역사가 깊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서(고려가 만든 것이란 주장도 있다)이자 <동의보감>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제내경> 소문에는 "중국의 동쪽 지역은 물고기를 먹고 짠 음식을 좋아해서 옹양(癰瘍), 즉 종기의 질병이 많은 곳으로 폄석(돌로 만든 침)으로 치료한다"는 조문이 있다. 우리나라가 예부터 식습관으로 인한 종기가 많은 나라로 지목된 것. 침구법을 집대성한 <황제내경> 영추의 옥판(玉板) 편은 "고름 피가 잡힌 경우에는 오직 폄석이나 피침(곪은 곳을 찢는 침) 봉침(벌의 침)으로 종기를 찔러서 피고름을 빼내는 방식"을 정석으로 권하고 있다.

<동의보감>도 마찬가지로 "종기가 곪을 때는 열십자로 찢고 고름을 배출하는 것이 좋다"며 "절개해서 고름을 빼내라"고 충고한다. 두텁게 살 깊숙이 생긴 종기를 침으로 깊이 뚫어 여는 낙침법(烙鍼法)도 소개했는데,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침을 달궈서 쓰도록 하고 있다. 침을 찔렀는데도 고름이 바로 나오지 않으면 털 심지나 종이 심지를 꽂아 넣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해야 한다는 뒤처리 방법까지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드라마 <마의>는 史實?

거머리를 이용한 종기 치료법도 나온다. 종기에 물로 적신 종이를 얹으면 빨리 마르는 지점이 꼭대기인데 그곳에 거머리를 올려두면 피와 고름을 빨아먹는다는 얘기다. 피고름을 빨아먹은 거머리는 반드시 죽는데 물에 넣으면 살아난다고 치료 경험담까지 기록해 놨다.

얼마 전 한방 외과술을 주제로 한 <마의>라는 TV 드라마가 인기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유교적 관념에 얽매여 한의학에는 외과학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일반인의 선입관을 여지없이 깨부수는 파격적 내용이 많아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실제 많은 이가 한의학에는 신체에 칼을 대는 외과학이 아예 없었을 거라고 여기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위에서 밝힌 모든 종기 치료법들은 외과학 그 자체다. 다만 서양 외과학이 메스, 즉 칼을 주로 쓰는 반면 한의학에선 여러 종류의 침을 쓸 따름이다.

과연 우리 한의학은 드라마 <마의>의 주인공 백광현(1625~1697·숙종 때 어의)처럼 머리에 구멍을 뚫어 뇌종양을 치료하고 썩어가는 다리를 절단할 만큼의 대담무쌍한 외과학의 전통을 가졌을까. 과연 한의학적 외과술이 말의 질병을 치료하는 마의의 치료술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종기 때문에 한평생 고생하다 죽은 현종 편에서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하자.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현종의 건강학 ①

효종 이어 현종도 독살? 진실은 이렇다!


완연한 봄, 전남 완도군 보길도엔 핏빛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또 졌다. 보길도는 효종이 죽은 후 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피터지게 싸운 두 인물의 악연이 얽힌 곳이다. 이른바 예송 논쟁의 주역인 우암 송시열(1607~1689년)과 고산 윤선도(1587~1671년)가 그들이다.

남인의 선봉장 윤선도는 송시열이 이끌던 서인 세력에게 패해 유배됐다가 보길도에서 죽었고, 그를 유배 보낸 송시열은 꼭 18년 후 자신도 보길도로 유배된다. 보길도 바위 곳곳에는 송시열의 시가 남아 있다. 떨어져 잎으로 흩어지지 않고 붉은 꽃송이 뚝뚝 떨어지는 보길도 동백꽃의 자태는 당시 조선 민초들이 겪은 아픔을 증언하는 듯하다.

예송 논쟁은 효종과 효종 비 인선왕후 사후 효종의 계모이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을 것인가, 즉 복상(服喪)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당시 사대부의 예법은 어머니는 장자가 죽으면 3년, 차자가 죽으면 1년을 상복을 입도록 했다. 물론 왕의 상의 경우에는 대비가 3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은 효종이 소현세자의 동생, 즉 차자이므로 1년상(기년설)을 주장했다. 반면에 윤선도를 비롯한 남인은 기년설이 현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며 3년상을 주장했다.

효종의 아들 현종(1641~1674년)은 임금 자리(재위 기간 1659~1674년)에 오르자마자 일어난 1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의 뜻을 받아들이고 남인에게 철퇴를 내렸다. 하지만 15년 후인 1674년 자신의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서인의 9개월(대공설)을 물리치고 남인의 기년설을 채택함으로써 서인을 실각시켰다(2차 예송 논쟁).

서인은 인조의 장자를 소현세자로 인정한 반면, 남인은 소현세자가 일찍 죽었으므로 효종이 실질적인 인조의 장자라고 봤다. 현종은 예송 논쟁이 결국 자신과 아버지 효종의 왕위 계승 정통성을 두고 벌어진 논쟁임을 뒤늦게 깨닫고 서인을 배격한 것이다. 이 예송 논쟁이 왕과 사대부의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것임을 명확히 안 것이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현종 치세에 벌어진 남인과 서인 간의 예송 논쟁은 사실 민생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현종 재위 15년에 걸쳐 권신들이 권력 투쟁을 벌이는 동안 조선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고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현종은 당쟁이 이어진 재위 기간 내내 신경병적 증상을 보였다.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농사일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차라리 (내가) 죽어버려 이런 말을 듣지 않았으면 한다"(재위 3년 3월 23일 조회)는 극단적인 말도 했다.

이런 신경증적 태도는 건강도 악화시킨다. "직접 기도드리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만, 다리의 병 때문에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형편이다"라면서 기우제를 직접 올리지 못할 만큼 아픈 자기 신세를 한탄한다. 재위 14년 5월 1일, 가뭄이 더욱 심해지자 이번에는 지나친 자책으로 신하들을 놀라게 한다. 몸도 정치도 뜻대로 되지 않는 현종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

"오장이 불에 타는 듯해 차라리 죽고 싶다. 아! 무릇 백성은 먹을 것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해 존재하는 것인데, 백성에게 먹을 것이 없으면 나라가 무엇에 의지해 그 꼴을 유지하겠는가. 생각해보니 그 허물은 진실로 내게 있음에도 불쌍한 우리 백성이 대신 재앙을 받고 있도다."

기근의 기록들은 딱한 수준을 넘어 비참하기까지 하다. 현종 12년 5월 19일의 기록이다.

"올해 굶주리거나 병을 앓아 죽은 참상은 실로 만고에 없던 것입니다. 경상도에는 굶어죽은 자가 590명이며 전라도는 2080명입니다. 시체를 땅에 묻도록 했지만 백성들이 굶어 지쳐 길에서 시체가 썩어나가고 있습니다. 흙을 덮어놓아도 소나기가 지나가면 곧 드러나니 참혹함을 이루 다 아뢸 수 없습니다."

현종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평생 동안 약을 달고 살았다. 기록상 가장 많이 처방된 탕제는 화병으로 가슴이 답답한 증상을 해소하는 가감양격산이다. 현종은 즉위 후 7년 동안 이 탕제를 63회나 먹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현종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석견(1644~1665년)이 죽자(현종 7년) 이 약의 복용을 바로 중지한다. 예송 논쟁과 정통성 시비가 그에게 심적으로 얼마나 큰 부담을 줬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감양격산 처방은 <동의보감> '화(火)' 편에 나오는 양격산 처방을 변형한 것으로, 양격산은 스트레스가 쌓여 심장에 열이 나고 변이 잘 나오지 않는 데 쓰는 탕제다. 양격산에는 대황과 망초라는 약물이 들어 있는데, 대황은 마치 장군처럼 대장을 뻥 뚫어 변비를 해소하고 관장한다고 해 장군풀로도 불린다.

가감양격산은 양격산에서 대황과 망초를 빼고 연교(連翹)를 군약(君藥)으로 배치해 마음의 열을 없앤다. 연교 감초 길경 황금 치자 박하 죽엽 등의 약물이 포함돼 있다. 주로 상초(심장 아래 위장 윗부분) 열을 전문으로 없애는 데 쓰이는 처방이다. <동의보감>은 "상초에 열이 있으면 눈에 핏발이 서며 몸이 붓고 머리와 목이 아프며, 입 안과 혀가 헌다"고 적고 있다.

<동의보감>의 지적처럼 현종은 눈병, 목에 멍울이 생기는 나력 질환, 심장의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생기는 종기를 평생 동안 달고 다녔다. 눈병은 즉위년 초부터 시작돼 현종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눈에 대한 침 처방이 이어진 것은 물론, 눈을 씻어주는 세안탕과 사물용담탕 속효산 자신명목탕 처방이 반복됐다. 얼마나 답답했던지 눈병에 좋은 광물성 약재인 공청(空靑)을 구하러 중국 서촉 지역(지금의 쓰촨성)에 사신을 보내는 문제를 의논할 정도였다.


온천욕의 놀라운 효과

즉위 2년에는 다래끼가 생기면서 옛 인경궁에 있는 초정(椒井)에서 눈을 씻었다. 인경궁은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지어진 궁궐로 그곳 초정의 물은 맛이 떫고 톡톡 쏘며 매우 찬 성질을 가진 냉천이었다. 물이 찬 것은 아래에 백반석(白礬石)이 깔려 있었기 때문인데, 백반은 화가 속으로 몰리면서 오한이 나거나 편두통이 있을 때 사용하는 약재이기도 하다.

초정의 물은 탄산수와 비슷한데, 너무 차가워 음력 7~8월에만 멱을 감을 수 있고 그때도 밤에 목욕하면 얼어 죽는다고 목욕을 막을 정도였다. 백반의 주성분은 알루미나이트라는 물질로, 위산 과다 환자들이 먹는 겔 형태 약품의 원료이며 단백질을 침전시키는 능력이 강하다. 중국 청나라 말기에 편찬된 <본경소증>은 백반의 효능을 이렇게 분석한다.

"돼지 창자를 백반으로 문지르면 끈적끈적한 액체가 없어지며 상추를 절일 때도 백반을 넣으면 점액이 없어진다. 조직 속의 물을 없애 단단하게 강화한다. 눈에 열이 나고 진물이 나 아픈 증상을 잘 고친다."

눈병과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현종은 즉위 6년째 되던 해에 치료차 온천에 다녀올 것을 조심스럽게 타진한다. 신하들의 목소리가 크고 기근이 계속되는 상황이라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내가 들으니 온천이 습열을 배설시키고 눈병에도 효험이 있다고 하니 지금 이 기회에 가서 목욕을 했으면 한다. 눈동자에 핏발이 서서 침침한데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거기다 습창이 도져 온몸에 퍼졌다."

현종이 이렇게까지 호소했지만 대신들은 "평상심을 가지고 궁내에서의 치료에 임하라"며 온천행을 반대한다. 현종은 이에 대해 "(내가) 평상심을 갖지 않을 무슨 일이 있겠는가"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결국 현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온천을 다녀오는데, 그 결과는 놀랍다. 실록은 이렇게 썼다.

"상(上)이 서책의 획을 거의 구분하지 못했는데 문서의 작은 글자도 요연하게 읽을 수 있게 됐으며 수백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 사람도 구별했다. 습창은 거의 사라졌다."

온천에는 유황이 들어 있다. 유황은 성질이 뜨거우며 독성이 있다. 약으로 사용할 때는 독성을 없애기 위해 특별한 방법으로 조제한다. 유황과 두부를 함께 달여 두부가 짙은 녹색으로 변하면 두부를 제거하고 남은 액을 그늘에 말려 사용한다. 유황 600그램당 두부 1200그램을 사용한다. 두부를 넣는 것은 유황의 약성이 워낙 뜨겁기 때문에 이를 중화하기 위한 것이다. 스트레스로 화가 많은 사람에게 유황을 그대로 쓰면 오히려 열을 올리고 땀을 흘리게 해 원기를 손상할 수 있다.

신하들이 현종의 온천행에 반대한 것도 이런 우려 때문이었다. 그만큼 온천욕은 사람의 기를 데워주는 효과가 크다. 효과를 보는 질환은 피부나 근육, 관절이 차가워져 생긴 신경통이나 중풍 등이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서종태는 "온천욕을 하고 나면 원기가 손상되니 오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온천욕은 손발이 오그라들고 손발을 못 쓰는 질환을 고치는 데 좋다"고 말했다.

온천욕이 가장 효과적인 질환은 역시 피부병이다. 유황은 크게 더운 성질이 있어 한의학에선 화(火)로 규정한다. 피부는 내부를 보호하는 단단한 돌과 같은 성벽이므로 금(金)이라고 본다. 불과 쇠가 만나면 용광로와 같이 끓어오른다. 쇠는 불순물과 분리돼 순수해지며 내부는 더욱 치밀하고 단단해진다. 유황천은 피부의 각질층을 녹이고 피부에 불기운을 더해 탱탱하게 탄력성을 높이며 물질 대사를 항진시켜 상피 형성을 빠르게 한다. 의서들은 유황천이 습창, 즉 진물이 나는 습진류의 질병을 잘 고친다고 설명한다.

피부병 중에서도 나력은 현종을 끈질기게 괴롭힌 질환이었다. 요즘의 경부 임파선 결핵쯤으로 추정된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이 앓은 대중적 질병이었다. 조선 시대 의사들의 전문과로 나력의와 치종의(治腫醫)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나력을 치료하는 의생에게는 의서를 외우고 해석하는 고강(考講) 시험을 면제하고 특채해 양성했다는 기록도 있다. <동의보감>도 나력의 원인과 치료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나력은 멍울이라 한다. 목의 앞과 옆에 콩알이나 은행 씨만한 멍울이 생기는 것을 나력이라 하고, 가슴 옆구리 겨드랑이에 돌같이 단단하고 말조개만한 것이 생긴 것을 마도(馬刀)라고 한다. 성격이 급하고 우울해 심장에 열이 생긴 부인들에게 많이 생긴다. 목에 처음 생겼다가 터진 다음에는 팔다리로, 온몸으로 병독이 퍼진다. 생김새는 매화 열매 같은데 치료하지 않으면 저절로 터지면서 구멍이 생긴다. 오한과 신열이 나며 쑤시고 아프다."

현종의 나력 치료는 <동의보감>에 기재된 처방 위주로 진행됐다. 왕이 된 후 4년간은 치자청간탕과 연교산견탕을, 이후 4년간은 하고초환, 평혈음, 보중승독병, 산종궤견탕을 투여했다. 목의 종기를 치료하는 대표적인 약물에는 곤포, 하고초, 연교, 현삼 등이 있는데 현종에겐 '현삼주(玄蔘酒)'가 특히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 드라마 <마의>에서 백광현(조승우)이 생명을 구하는 현종(한상진).
현종을 죽음으로 몬 스트레스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MBC


정통성 스트레스

종기인 나력과 핵환은 조선 시대 의관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동의보감>은 이들 질환을 '결핵'이라고 표현했으나 현재의 그것과는 다르다. <동의보감>의 결핵은 화기와 열이 한곳으로 몰려 맺힌 작은 멍울을 가리키는데 과일의 씨와 비슷하다. 따라서 쨀 필요는 없고 열기만 흩트리면 저절로 삭는다. 현종 10년 11월 16일 임금의 턱 밑에 핵환이 생기자 의관들은 혼란스러워한다. 효종이 종기를 치료하다 출혈로 죽은 트라우마가 짙게 깔려 있었다.

"상의 오른쪽 턱 밑에 종기가 자리 잡고 있는데, 고름이 잡힌 지 오래됐다. 곧 터질 듯한 기세였는데 의관들은 영류인가 의심하고 있었다. 도제조가 큰 소리로 '의관이 의원이라는 이름만 지녔지 무슨 소견이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이튿날 다시 약의(藥醫)와 침의 제조들이 난상 토론을 하자 현종은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는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현종은 갈팡질팡하는 의관들을 보고 불안해했다. 실록은 "막상 침의들이 침으로 종기를 따려 하자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고 기록했다.

현종은 딸 명혜공주와 명선공주가 재위 14년 4월과 8월 잇따라 죽자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는 빈번하게 복통을 호소했다. 소변 보기가 곤란해지고 설사가 이어졌다. 스트레스로 인한 과민성대장증후군과 비슷한 증상이다. 생명력의 근원인 곡기를 보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람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흙은 생명의 근원이다. 인체의 흙인 '土' 기운은 소화기인 비위(脾胃)의 기능이다. 생명력은 따스한 온기인데, 온기가 떨어지면 배가 차가워지면서 복통과 설사가 이어진다. 그해 5월부터 설사 처방인 청서육화탕, 창늠산, 삼련탕, 반총산, 수자목향고 등을 복용했지만 멎지 않았다.

최후의 일격은 정치적 스트레스였다. 현종 15년 초 인선대비(효종의 부인)가 죽고 2차 예송 논쟁이 시작되자 1차 예송 논쟁 후 겨우 사라졌던 가슴 답답증이나 불면의 증후가 다시 도졌다. 정통성 시비로 인한 스트레스 증후군이 재발한 것이다. 스트레스는 여러 단계로 나뉜다. 경고 반응기, 저항기, 피로기로 나뉘어 생태 반응이 나타난다. 경고 반응기는 스트레스를 받아도 자신의 저항력으로 극복해 원상태로 복귀하려고 애쓰는 상태고, 저항기는 스트레스를 받지만 아직 저항력이 있어 겨우 지탱하는 시기다. 하지만 만성적인 상태가 되면 저항력이 사라지면서 인체는 해삼 퍼진 것처럼 흐물흐물한 상태가 된다.

일각에서는 독살설을 제기하지만 현종은 정통성 시비에서 비롯된 질병의 늪에서 끝내 헤어 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현종은 그해 8월 18일까지 설사와 호흡 곤란, 가슴의 답답증을 호소하다 세상을 떠났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현종의 건강학 ②

조선 시대에 외과 수술? <마의> 백광현의 진실은…


현종과 마의 백광현

현종이 가장 많이 앓은 질환은 종기다. 드라마 <마의>의 백광현(1625~1697년 추정)은 현종 때 활약한 종기 치료 전문가다.

백광현은 실제로 말을 치료하는 마의(馬醫) 출신이며 현종 4년 각종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천한 신분인 마의로 출발해 현종의 종기를 치료함으로써 숙종 5년에 어의가 된 인물로, 종기 치료에 한 획을 그은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종기 때문에 크게 고생한 현종이 '백태의(白太醫)'의 신화를 만든 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백광현이란 인물은 드라마처럼 현대 양방의 수술법을 쓰는 전설적 명의였을까. 숙종, 영조 때의 문장가였던 정내교(1681~1757년)가 지은 <완암집(浣巖集)> 4권 중 '백태의전(白太醫傳)'은 백광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본디 말을 잘 치료했다. 오직 침을 써서 치료했는데 서책(의서)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익히다보니 솜씨가 숙련된 것이다. 말 치료하던 침술을 종창(腫瘡)을 앓는 사람에게 써봤더니 종종 탁월한 효험이 있기에 마침내 사람을 치료하는 데 전적으로 힘쓰게 됐다."

또 <귀록집(歸鹿集)> 14권의 '백지사묘표(白知事墓表)'는 이렇게 전한다.

"젊은 시절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우림군(羽林軍)에 배치되는데, 말에서 떨어져 다친 뒤 한동안 앓은 것을 계기로 의술에 뜻을 두게 됐다. 무릇 독소가 강하고 뿌리가 배긴 정저(헌 부위의 꼭대기가 검고 못같이 된 종기)는 예부터 내려오는 처방엔 치료법이 없었다. 그런데 백광현은 앓는 자를 만나면 반드시 대침(大鍼)을 써서 터뜨리고 찢어 독소를 빼내고 뿌리를 뽑음으로써 거의 죽어가던 자를 능히 살려냈다."

<승정원일기> 숙종 16년 1월 14일 기사는 "오늘날 침의 중에 하침(下鍼·침 놓기)과 파종(破腫·종기 제거)에서 백광현이 으뜸"이라고 썼다. '백지사묘표'는 "백헌 이경석(1595~1671년·영의정)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게 됐으니, 이때가 현종 4년"이라고 적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백광현은 30여 년 동안 현종과 숙종 두 조정을 대대로 섬기면서 여러 차례 신효(神效)의 공을 인정받았다. 그때마다 품계가 더해져 의성(醫聖) 허준과 같은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다. <승정원일기>엔 백광현이 현종의 종기를 치료하는 상황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상이 전날 치료한 종기에서 농이 잘 빠지지 않은 것 같다고 하자 백광현은 그의 장기인 침봉(鍼鋒)을 사용하면서 임금께 '종기의 구멍을 칼날처럼 뾰족한 침봉으로 뚫어 배농시키겠다'고 대답했다. 상은 혹시 구멍이 넓어지면 잘 아물지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구멍이 얕게 잘 뚫리면서 많은 농이 배출됐다. 의관 중 김유현이 농이 배출될 종기 구멍이 다시 닫히지 않도록 종이를 말아 구멍 사이에 끼워놓았는데, 상은 종이를 끼워둔 통증이 한 식경까지 갈 정도로 심하다고 털어놓았다."

백광현의 종기 치료법은 100여 년 전에 나온 <동의보감> '옹저문'의 치료 방법과 유사했다.

"옹저로 곪을 때는 말에 물리는 재갈로 부추 잎처럼 양쪽이 다 날이 서게 침을 만들어 열십자로 째고 고름을 짜낸다. 옹저가 생긴 곳의 피부가 두껍고 고름이 나오는 구멍이 작아서 잘 나오지 않을 때는 화침으로 째는 것이 좋다. 고름이 나오지 않으면 심지를 꽂아 넣어야 한다."

기록상의 백광현은 허준이나 조선 최고 침의 허임 등에 비교하면 별 볼일이 없었지만 그 후손들은 종기 치료로 일가를 이룬다. 숙종 10년에는 그의 아들 백흥령이 아버지의 후광을 입어 금위영 침의가 됐고, 박순이 백광현의 제자로 이름을 날렸다. 백흥성 백문창 백성오 등 그의 자손들은 영조에서부터 헌종 대에 이르기까지 <승정원일기>에 이름을 올린다.

한방 외과학 선구자 임언국

드라마 <마의>는 한방 외과술이 백광현과 그의 스승으로부터 시작되고 정착된 것처럼 그렸지만, 전통 의학에서 외과술의 유래는 1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설적 명의로 <삼국지>에도 나오는 화타(145~208년)가 원조 격이다. <삼국지>에서 화타는 조조에게 거리낌 없이 외과적 치료법을 제안하다 죽임을 당한다.

"대왕의 머리가 아픈 것은 머릿속에 바람이 일기 때문입니다. 병의 뿌리가 골을 싸고 있는 주머니 안에 있으니 약으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마비산(痲沸散)으로 만든 탕을 드시고 잠든 후에 머리를 쪼개 그 안의 바람기를 걷어내야 합니다."

화타가 말한 마비산은 대마와 만다라화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농본초경>은 대마를 "많이 먹으면 사람이 귀신으로 보여 달아난다"고 했고, <명의별록>은 "인삼에 섞어 먹으면 앞일을 미리 안다"라고 했다. 마취에 대한 설명은 없고 향정신성 약물이라고 규정한다. <중약대사전>에서 기록한 만다라는 좀 더 구체적이다.

"독이 있는데 종자의 독성이 특히 강하다. 가지과의 식물로 흰독말풀 종류다. 세 알만 씹어도 중독될 수 있으며 맥박이 빨라지고 동공이 확대된다. 다량으로 먹으면 혈압이 내려가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평생 암살의 공포에 떨었던 조조는 '머리를 쪼갠다'는 말을 듣고는 화타를 옥에 가둔 후 죽였다. 화타의 외과적 치료는 인도 의학의 전래로 추정되지만 후세로 전수되지 못했고 이후 한의학에서 외과학은 사라졌다.

종기가 흔했던 우리나라의 외과학은 피고름을 빼내는 종기 치료를 가리킨다.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은 이상로(李尙老)다. 아버지가 묘청과 잘 알고 지낸다는 이유로 권력에서 소외돼 방랑했지만 승려에게서 의학을 전수받고 의사가 됐다고 한다. 종기를 잘 치료해 권세가를 여럿 치료했는데 의종(毅宗)의 발에 난 종기도 치료했다고 전해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과 전문서는 <치종비방>으로, 조선 명종 때 활약한 임언국(任彦國)이 쓴 책이다. <치종지남>이라는 책도 있는데 임언국과 그의 유파가 저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드라마에선 백광현의 외과술이 임언국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묘사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치종지남>은 9장밖에 되지 않지만 나름대로 독창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3종으로 분류돼 있던 종기를 5가지로 새로 분류한 점, 직접 개발한 고약 '토란고'로 종기를 치료한 점, '천금루노탕'이라는 처방을 재구성해 사용한 점 등이다. 특히 X자형 절개술은 침을 찔러 피고름을 터뜨리는 기존의 종기 치료 침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농침'은 침이라는 명칭은 붙었지만 피부를 절개하기 위한 칼 모양으로 생겼으며 '곡침'은 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무엇을 긁어내는 도구 형태를 띠고 있다.

임언국은 양반가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하다 어머니가 종기를 앓아 낫지 않자 영은사의 노스님에게 침술을 전수받아 치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은사는 임언국의 고향 정읍에 있는 내장산 내장사의 옛 이름이다. 당대의 학자이며 관리인 어숙권은 임언국의 치료 모습을 보고 그 외과술의 뿌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임언국은 종기를 치료하고 난 뒤 반드시 앵무새 고기를 불에 태워 그 재를 종기 구멍에 발랐다. 그 이유를 묻자 한 동네에 살던 마의가 말의 종기를 치료한 뒤 늘 앵무새 고기를 태워 재를 발랐는데 효과가 좋아 자신이 사람에게 발라보니 역시 효과가 좋았다고 했다. 그 후에는 족제비를 불에 태워 그 재를 종기 구멍에 발라주며 치료했다고 한다."



백광현은 임언국의 후예?

드라마 <마의>에선 백광현의 스승 고주만이 치종청을 만들고 이후 사암도인과 함께 이를 발전시킨다고 나오지만, 고주만은 실제 인물이 아니고 사암도인은 사암 침법만 전해올 뿐 생몰연대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치종청은 조정이 종기를 전문적으로 치료해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설치한 종기 전문 의료 센터로 성종 때 만들어진 뒤 폐지와 복원을 반복했다. 조선 후기 학자 김려가 쓴 야담(野談) 총서 <한고관외사(翰皐觀外史)>는 "임언국이 종기를 잘 치료하는 것으로 유명해 영남에 있는 이이(李耳)라는 선비와 더불어 종기 치료 학교를 처음 설립했다"고 밝히고 있다. 임언국의 의료사적 위치를 짐작게 한다.

선조 때 활약한 조선 최고의 침의 허임도 임언국의 영향으로 '치종 교수'라는 공식 직함을 갖게 된다. 종기의 원인을 심경락에 두고 기죽마혈(騎竹馬穴)에 뜸을 뜬 점, 두꺼비 독과 태운 재를 종기 치료에 이용한 점 등은 임언국의 경험을 수용했거나 전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드라마는 백광현이 이런 치료법을 쓴 것으로 묘사했지만 사실 그 시초는 임언국이라 볼 수 있다. 임언국의 이런 외과적 치료 방식의 뿌리가 마의로부터 비롯됐고, 백광현이 마의 출신인 점에서 차용된 드라마적 상상력일 뿐이다.

임언국의 외과적 종기 치료술은 관념적, 유교적 치료 방식의 벽에 가로막힌 한의학에 새로운 길을 여는 전기를 마련했지만, 그 벽은 너무 높았고 한의학은 거대한 유학의 벽 앞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따라서 <마의>나 '백광현'은 드라마처럼 현대 양방에서 이뤄지는 본격적 외과술을 몇 백 년 앞서 개발한, 전설적 능력을 지닌 과장된 존재가 아니라 한방 외과술의 막을 올린 임언국의 후예쯤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경종의 건강학 ①

게와 감으로 왕을 죽여? 경종 독살설의 진실


조선의 제20대 왕 경종(景宗·1688~1724, 재위 1720∼1724). 숙종과 희빈 장옥정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세자 때부터 신변, 정치와 관련해 갖은 수난을 겪은 비운의 왕이었다. 32세에 왕위에 올라 재위 4년간 병치레만 하다 생을 마감했다.

경종의 재임기는 소론과 노론이 세제(世弟·연잉군, 후일 영조) 책봉을 두고 피의 숙청(1, 2차 신임사화)을 벌인 당쟁의 절정기였다. 자식이 없고 병약해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지만 노론의 압박으로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물러날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소론의 지지로 다시 친정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실록에 따르면 경종은 "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을 앓고 있었다. 실록 곳곳에 경종의 "이상한 병"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10여 년 이래로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 (재위 1년 10월 10일)

"도승지 김시환이 나랏일을 의논하기 위해 들어왔는데 의관들의 입진 후 화열이 오른 상의 심기가 대발(大發)했다. 여러 신하가 놀라 두려워하며 물러갔다." (재위 2년 3월)

"상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쌓인 걱정과 두려움으로 마침내 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을 앓았다. 해가 지날수록 고질이 됐으며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혼미한 증상도 있었다. (…) 곤담환과 우황육일산 등의 처방을 썼지만 효험이 없었다." (재위 4년 8월 2일)


간질과 발작

경종이 말한 "이상한 병" "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의 정체는 무엇일까. 경종이 복용한 약물은 그의 질병을 알려주는 핵심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집중적으로 복용한 약물은 가미조중탕이었다. 경종 즉위 원년부터 재위 2년, 3년에 걸쳐 150첩 이상 복용했다. 어떤 일에도 잘 나서지 않고 적극성을 보이지 않던 경종은 이 약만큼은 작심한 듯 계속 지어 올릴 것을 의관들에게 주문한다. 그만큼 약효가 좋았다는 뜻이다.

가미조중탕은 일반적으로 대조중탕과 소조중탕으로 나누는데, 고종의 어의이자 국내 최초의 근대적 한의학 교육 기관 동제의학교 교수를 역임한 청강(晴崗) 김영훈(1882~1974년)의 기록에 따르면 경종이 먹은 가미조중탕은 소조중탕으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 전체에 나타난 가미조중탕의 처방 기록은 총 50회 정도로 정조와 순조에게도 투여한 기록이 나온다. 경종에게는 무려 42회가 처방됐다. <동의보감> '열담(熱痰)' 조문에 나온 소조중탕의 기록은 이렇다.

"열담이란 곧 화담(火痰)이다. 번열이 몹시 나서 담이 말라 뭉치고 머리와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눈시울이 짓무르면서 목이 메어 전광증이 생기는 증상에는 대·소조중탕이 좋다."

<동의보감>은 또한 경종에게 쓰인 또 다른 처방인 곤담환의 치료 목표를 놓고서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전광증은 현대 의학으로 말하면 뇌 구조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정신 착란이나 정신 분열증의 여러 증상을 가리키는 질병으로 때 아닌 발작을 일으키는 게 특징이다.

"습열과 담음이 몰려서 생긴 여러 가지 병을 치료한다. 속을 끓이고 소원이 풀리지 않아서 전광증(癲狂症)이 생기는데 하루 100알씩 먹는다."

<동의보감>에 나타나는 소조중탕과 곤담환의 공통적 치료 목표는 전간(癲癎)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간질이다. 인현왕후(숙종의 계비)의 둘째 오빠 민진원은 영조 4년 궁중에서 일어난 사건을 초록한 책 <단암만록>에서 경종의 정신과적 증세를 이렇게 묘사한다.

"숙종 승하 시 곡읍(곡하며 우는 행위)을 하는 대신 까닭 없이 웃으며 툭하면 오줌을 싸고 머리를 빗지 않아 머리카락에 때가 가득 끼어 있었다."

경종의 간질 증상을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은 숙종 15년 11월 8일 실록에 쓰인 '경휵(警)'이란 단어다.

"원자(경종)에게 경휵의 증세가 있어 약방의 여러 신하가 청대하여 조양하는 방법을 갖추어 진달하였다."

여기에서 '경'은 '놀란다'는 뜻이고 '휵'은 '경련' '쥐가 나다'란 의미의 발작성 경련과 간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 SBS 드라마 <장옥정>에서 장희빈(김태희)과 경종. 실제로 경종은 평생 비만 체형이었다. ⓒSBS


돌팔이 이공윤

많은 드라마에서 경종의 모습은 마른 체형에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비만 체형이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26세 때인 1714년 기사에는 경종의 모습을 "비만태조(肥滿太早·아주 일찍부터 살이 찌다)"라고 했고 재위 2년 기사에는 "성체비만(成體肥滿·다 커서도 살이 쪘다)"으로 묘사돼 있다. 비만한 만큼 더위를 많이 느끼고 땀이 많이 나는 질환을 앓았다.

이런 경종의 비만병 치료에 이공윤이라는 사람이 나섰는데, 조선 후기의 유의(儒醫)로 알려져 있지만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공윤에 대한 평가를 담은 실록 기록은 이렇다.

"경종 2년 천거된 후 약방에 들어가 임금의 병환을 모셨는데, 이공윤이 스스로 말하기를 도인승기탕을 자주 복용해 설사를 하고 나면 몸 내부가 깨끗이 청소되고 임금의 병환이 금방 나을 수 있다고 해 실제 시험해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공윤은 오히려 방자하게 노기 띤 눈으로 스스로 의술을 자랑하며 시평탕에 대황, 지실 등 설사하는 약을 재료로 처방해 일백하고도 수십 첩을 임금에게 지어 올렸다. 그러자 임금의 살은 빠지지 않고 비위 등 내장만 허해졌고, 오히려 음식을 싫어해 물리는 날 수가 많아지면서 한열(寒熱·오한과 발열)의 증세까지 생겼다."

이공윤이 의학과 관련해 기록에 등장한 것은 경종 이전 숙종 35년, 유천군 이정과 더불어 의약동참(議藥同參)에 뽑히면서부터였다. 의약동참이란 조선 시대 내의원 소속의 의관으로 주로 임금이나 왕비, 세자 등의 병을 치료한 의관으로 정원은 12명이었고 모두 어의로 불렸다. 이후 춘천의 제방 쌓는 일에 개입해 부당하게 뇌물을 받은 일로 중죄인이 되어 양산에 유배됐지만 경종의 질병이 악화되면서 복귀한다.

숙종 때 같은 유의인 유천군 이정이 '도수환'이라는 공격적인 약재로 왕의 질병을 치료했듯 이공윤도 감수나 대황 등 공격적인 약물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이공윤의 처방은 늘 주변의 우려를 자아냈다. 경종 4년 사헌부는 이공윤을 "사판(仕版·벼슬아치 명부)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히 주청한다.

"이공윤은 괴벽하고 미련한 데다 행동과 모습마저 대체로 해괴한 데가 많습니다. 유의라 하여 의약동참에 뽑혔으나 매양 차례가 되는 날마다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다가 누차 부른 뒤에야 느릿느릿 나와서 여러 의관의 입만 쳐다보다가 묻는 말에만 마지못해 대답하고 정성들여 깊이 연구해보려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경종이 세상을 등질 때까지 마지막 진료를 담당한 것은 불행하게도 이공윤이었다. 그의 공격적 처방과 복약 지시는 끝까지 계속됐다. 경종 4년 8월 19일 식욕이 줄어들고 원기가 떨어지자 비위를 좋게 하는 육군자탕을 처방한 후 20일에는 게장과 생감을 먹게 했다.

문제는 여기서 터졌다. 게장과 생감을 먹은 경종은 밤에 갑자기 가슴과 배가 조이는 통증을 호소했다. 복통과 설사를 진정시키기 위해 곽향정기산을 처방했는데도 차도가 없자 "설사를 그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계속하며 이번에는 계지마황탕을 처방한다.

계지마황탕 속의 마황은 허약한 사람에게는 결코 투여할 수 없는 약물이다. 마황의 별명은 청룡이다. 용처럼 에너지를 뿜어내면서 땀을 내는 무서운 약이다. 필로폰 성분을 함유한 강력한 진통제에 견주는 약물이다. 위장이 허약한 사람이 먹으면 침을 증발시켜 입맛이 없어지기 때문에 다이어트 약물로도 쓰이는데, 그 부작용이 엄청나다.

계지마황탕을 먹은 후 경종의 환후는 더욱 위태로웠고 맥박이 약해졌다. 이복동생이자 세제인 영조는 인삼과 부자로 위장의 온기를 올리는 처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공윤은 이때에도 다시 한 번 영조의 처방을 조목조목 따지며 반대 의견을 피력한다. "신(臣)의 처방 약을 쓰면서 인삼도 쓰면 기를 능히 돌리지 못한다"고 못 박는다.

하지만 결국 인삼을 마시고 난 경종의 눈빛은 좋아졌고 콧등도 따뜻해지면서 반전의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흥분한 영조가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자기 의견만 내세우고 인삼 약재를 쓰지 못하게 하느냐고 강하게 이공윤을 힐책한다.

게와 감이 부른 참극

경종은 이후 얼마 안 돼 숨을 거뒀다. 즉위 4년 8월 25일이었다. 경종이 숨을 거두자 시중에 독살설이 확산됐다.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함께 먹으라고 권유한 사람이 영조였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은 영조가 임금이 되고 30여 년이 지난 후 큰 사건으로 불거졌다. 일명 '신치운(1700~1755년) 사건'이다.

신치운은 경종과 영조 때의 문신으로 영조 때 소론이 노론에 밀려 숙청당하는 데 앙심을 품고 모반을 꾀하다 처형된 인물이다. 사건의 시작은 신치운이 모반으로 친국(親鞫)을 받으면서 한 말로부터 시작된다. 영조 31년 5월 20일 신치운은 이렇게 말한다.

"신은 상(영조)이 왕위에 오른 갑진년(1725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

실록에 따르면 이 말을 들은 영조는 분통해하며 눈물을 흘리고 살을 짓이기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해명했다.

"대왕대비(인원왕후·숙종의 둘째 계비)께 이 사실을 아뢰었는데 자성(慈聖·임금의 어머니)의 하교를 듣고서야 그때 경종에게 게장을 진어(進御·임금이 먹는 것)한 것이 내가 보낸 것이 아니라 어주(御廚·수라간)에서 공진(貢進)한 것을 알았다. 경종의 죽음은 그 후 5일 만에 있었는데 무식한 하인들이 지나치게 진어한 것이다. 그들이 고의로 사실을 숨기고 바꾸어 조작하였다."

영조는 게장과 생감을 경종에게 먹도록 한 것이 자신이 아님을 누누이 강조한다. 사실 경종에게 바친 게장과 감의 궁합이 상극이며 함께 먹으면 절대 안 되는 음식이라는 것은 의관이 아니라면 알기 힘들다. 게장과 감이 상극의 음식이라는 점은 주로 한의서에 나오기 때문이다. 한약물의 고전 <본초강목> 감나무 편은 "감과 게를 함께 먹으면 복통이 일어나고 설사를 하게 한다. 감과 게는 모두 찬 음식이다"라면서 실제 경험까지 기록해뒀다.

"혹자가 게를 먹고 홍시를 먹었는데 밤이 되자 크게 토하고 토혈(吐血)까지 했으며 인사불성이 됐는데 목향으로 치료할 수 있었다."

게장과 감은 멀쩡한 사람을 죽게 만들 만큼 독약은 아니지만 지병이 있거나 소화기 계통이 약한 사람에게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경종은 14세 무렵, 생모인 희빈 장 씨가 사약을 받는 모습을 목격하고 끊임없는 당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더욱이 간질에다 비만 체질로 인한 복통을 달고 살았던 그에게 게장과 감의 음식 조합은 치명타였음이 분명하다.

'신치운 사건'은 결국 이공윤의 자식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이공윤은 영조 즉위 후 경종의 치료에 대한 대신들의 이의가 제기되자 그 책임을 지고 유배를 간 후 그곳에서 죽었지만, 신치운 사건으로 화가 날 대로 난 영조는 경종이 죽은 지 31년이 지났음에도 그때의 과오를 물어 이공윤의 아들 이명현을 처형했으며 이명현의 아내와 아들들은 노비로 만들었다. 이공윤의 형제들은 북도로 유배를 갔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경종의 건강학 ②

정력제도 해결 못한 장희빈의 손자 욕망


후사 잇기 위한 정력제

경종은 죽을 때까지 후사가 없었다. 이복동생 연잉군 영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야사(野史)에는 폐비된 장옥정이 사약을 받기 전 아들(경종)의 고환을 잡아당겨 고자로 만들었다는 설이 그럴듯하게 포장돼 있다. 경종은 9세 때 단의왕후와 혼인했고, 그녀가 죽고 나서 선의왕후와 재혼했을 뿐 단 한 명의 후궁도 두지 않은 유일한 왕이었다. <승정원일기>는 경종의 후사 문제를 한의학적 처방과 연결시켜 거론한다.

경종이 21세 되던 1708년, 즉 숙종 34년 2월 10일 <승정원일기>는 임금이 소변이 자주 마렵다고 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후사를 위해 육미지황원과 팔미지황원을 처방했다고 썼다. 한의학에서는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이 양기, 즉 정력과 관계가 깊다고 본다. 소변이 자주 마렵다는 것과 정력의 관계를 한의학은 이렇게 설명한다.

항온 동물인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인체의 온도를 36.5도로 유지해야 한다. 방광에 고이는 소변의 주성분은 혈액이 아닌 물이다. 물의 온도는 4도에 불과하다. 소변을 배출하는 것은 몸의 노폐물을 처리하는 것 외에 방광의 온도를 체온과 같이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다. 한의학은 소변을 36.5도로 데워서 저장하는 방광을 태양의 온기와 같다고 정의해 '족태양방광경(足太陽膀胱經·인체에 분포되어 있는 주요 경맥 중 하나)'이라고 규정한다.

소변은 그냥 흘러나가는 것이 아니라 물총처럼 짜내는 것이다. 짜내는 힘이 강하면 한 번에 시원하게 소변을 볼 수 있지만 힘이 떨어지면 오히려 역류해 잔뇨감이 생긴다. 자꾸 소변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이런 증상을 양기가 약해진 때문이라고 본다. 즉, 방광이 제 기능을 못하면 정력이 약해지고 빈뇨증이 생긴다는 것. 그러고 보면 남성들이 정력제에 목숨을 걸고, 오줌발에 신경을 쓰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는 셈이다.

난경은 방광을 포함한 신장 계통에 '생명의 정(精)을 간직하는 부위로 정신과 원기가 생겨나는 곳이며 남자는 정액을 간직하고 여자는 포(胞), 즉 자궁이 매달린 곳'이라고 정의한다. 즉, 신장 계통을 생명 활동의 근간이자, 생식 활동을 주관하는 곳으로 여긴 것이다. 보신(補身)이라는 개념과 보신(補腎)이라는 말이 혼용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장에 문제가 생긴 이들을 위한 특효 처방은 무엇일까. 알려진 것 중 신장을 보하는, 즉 보신하는 가장 중요한 약물은 '육미지황환'이다. 고희(古稀)의 나이에 사흘 꼬박 노름을 해도 허리가 아프지 않게 한다는 전설의 한약이다. 옛날 어른들이 주머니에 넣고 먹던 토끼 똥같이 생긴 환약이 바로 그것이다.

육미지황환은 흔히 만성 요통, 뼈마디 통증, 성기능 쇠약, 당뇨병, 전립선 질환, 식은땀, 귀에 소리가 나는 증상 등에 좋다. 이 처방에 기재된 중심 약물은 지황인데 그 다른 이름이 '지정(地精)'이다. 이 식물이 땅의 정기를 모조리 뽑아 올린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나머지 약재인 마, 산수유도 신장을 보해 정기를 채우는 작용을 돕고, 목단피 택사 백복령은 신장의 정기가 허해서 생긴 허화(虛火)를 없앤다.


황제의 약 '공진단' 처방

즉위년에 이르러서도 후사가 없자 특단의 대책으로 그 유명한 공진단(拱辰丹)을 처방한다. <승정원일기> 즉위년 9월 7일 어의 권성규와 이진성이 "상의 하초(下焦·배꼽 아래 부위) 맥인 척맥(尺脈)이 약하다"고 진단하자 김창집이 무시로 공진단을 복용할 것을 건의한다. 잇따라 9월 14일에도 하초의 부실함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처방으로 공진단을 추천한다. <승정원일기>는 이 모두를 '종사의 경사를 위한 것'이라고 전제하며 '선조들도 큰 효험을 봤다'는 경험담을 곁들였다.

공진단의 구성 약물은 크게 사향, 녹용, 인삼, 산수유로 대별되며, 공(拱)은 공손하게 두 손을 마주잡는다는 뜻이고 진(辰)은 북두칠성을 가리킨다. 천자문에도 둘째 구절에 진(辰)자가 나온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이 그것이다. 이때 일월이 음양의 대비를 나타내듯 성신도 대비적 의미가 있다. 성이 뭇별을 나타낸다면 신은 거대한 별들의 원점인 북두칠성을 말한다. 이때는 진이 아니라 신으로 읽는 것이 원칙적으로 맞다.

따라서 공진단은 공신단으로 읽어야 옳으며, 여기서 공신은 하나의 숙어 기능을 한다. 공신의 사전적 의미는 '뭇별이 북극성을 향한다는 뜻으로 사방의 백성이 천자의 덕에 귀의하여 복종함'이다. 공신의 이런 의미는 이 처방을 만든 중국 원나라 때 명의 위역림의 뜻과도 맞아떨어진다. 공신단은 애초 일반인이 아닌 황제의 건강 증진용으로 만들어진 처방이기 때문이다.

공신단의 치료 목표는 수승화강(水升火降)이다. 말 그대로는 찬 기운은 위로 올리고 열은 아래로 내리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한의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내리면 손에 쥔 무엇인가로 머리를 가리고 뛴다. 아무것도 없으면 손으로라도 가린다. 거의 반사적으로 머리 꼭대기로 손이 가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 몸의 모든 양기(陽氣)가 모이는 백회(百會)라는 혈이 있기 때문이다. 비로 인해 백회혈에 음기가 자리 잡으면 체온이 내려가면서 감기에 걸린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고 방어를 하는 것이다.

얼굴은 신체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다. 겨울에도 얼굴은 좀처럼 추위를 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의학에선 얼굴과 머리에 인체에서 가장 뜨거운 화가 있다고 전제한다. 반면에 하체는 차갑다. 인체에서 가장 많은 것은 혈액이고 중력이 작용해 하부에는 혈액이 충만하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혈액을 데우는 데 양기를 소모하다보니 하체는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뜨거운 열기는 위쪽을 향하고 차가운 한기는 다리 쪽으로 쏟아내려 불균형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를 주역에선 천지비괘(天地否卦)라고 하는데 상하가 단절돼 꽉 막힌 상태의 병리적 모습을 가리킨다. 흔히 우리가 '머리는 차갑게, 발은 따뜻하게 하라'는 건강 격언은 이런 원리에서 유래했다.

머리에 불타오르는 양기를 흩어버리고 아래로 내려주는 데는 사향이 가장 좋은 약재다. 사향노루의 사향선을 건조시켜 얻은 분비물이 바로 사향인데, 그 향기를 서양에선 무스크의 향기이라고 한다.

18세기 스웨덴의 식물학자인 카를 폰 린네의 분류에 의하면 무스크의 향기는 신의 향기다. 서양의 고대 신전은 대개 무스크 향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장엄하고 고혹적인 신전의 분위기는 무스크 향으로 인해 비밀스러움을 더한다. 사향의 생태학적 특징은 실제로 신전 수도자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사향노루는 늘 혼자 다닌다. 교미를 위해 1년에 한 번 정도 암수가 만나는 것 외에는 고독한 혼자만의 생활을 즐긴다. 그가 걷는 길은 늘 험한 길이다. 히말라야의 척박한 땅과 바윗길로만 다닌다. 더욱이 수척하고 깡마른 모습이다. 봄이 되면 사향은 가장 소중한 사향주머니를 스스로 버린다. 자신의 발톱으로 주머니를 떼어 낸 후 대소변으로 덮어버리고 떠난다.

사향의 효능도 마치 맑고 강인한 수도자의 정신과 비슷하다. 흉한 사기(邪氣)와 귀신 기운, 악기(惡氣)로 인해 생긴 각종 증상을 사라지게 하고 간질을 치료한다고 전해진다. 사향의 품질엔 여러 등급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향노루가 스스로 적출한 사향이 1등급이며 극히 구하기 힘든 것이다. 2등급은 포획해 도살, 채취한 것이고 3등급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사향노루의 피가 심장에서 비장으로 흘러들어간 하품이다.

초강력 정력제 사향과 녹용

사향의 남성 호르몬 생성을 돕는 작용 때문에 그런지 사향 이야기에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일화가 늘 회자된다.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홀린 이유가 그녀가 허리에 찬 사향주머니 때문이었다는 설이다. 양귀비 사후 그녀의 무덤 주변엔 황제의 후궁들이 보낸 도적들이 득실득실했다고 한다. 행여나 양귀비가 차고 다닌 사향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보낸 것이다.

<본초강목>은 이렇게 기록했다.

"수사향노루는 기이하다. 사향주머니가 모두 물로 돼 있는데 그 향이 좀처럼 소실되지 않는다. 당나라 때 궁중에 헌상된 후 길러져 사향을 채취한 적이 있었으며 그 이후로는 기록에 없다."

<승정원일기>에서 김창집은 경종에게 공진단을 추천하면서 그 원료가 되는 조선 녹용의 채취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녹용의 핵심은 그 피에 있다. 중국 녹용은 피를 품은 채로 말려 붉은 가지 색깔이 나는데, 조선은 피를 빼고 말리는 탓에 녹용의 색깔이 백색이고 효험도 없다."

동서고금을 통해 녹용의 보양과 정력강화 효과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왜 그런 효과가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한의사는 별로 없다. 이는 사슴의 생태와 관련이 깊다. 중국 진나라 때의 학자인 갈홍(283~343년)이 불로장수의 비법을 서술한 도교 서적 <포박자(抱朴子)>에는 "종남산에 사슴이 많은데 늘 한 마리의 수컷이 백수십의 암컷과 교미한다"라고 쓰여 있다.

<본초강목>도 "사슴은 성질이 매우 음탕하다"고 지적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사슴의 생태를 아래처럼 보고하고 약효에 힘을 싣는다. 여기서 '독맥'이란 해부학적으로 머리뼈와 척추, 남자의 성기를 연결하는 맥을 가리킨다.

"사향노루는 먹을 때는 서로 부르며, 행보할 때는 동행하고, 모여 있을 때는 뿔을 외부로 향해 둥근 진을 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며, 누울 때는 입을 꼬리 쪽으로 향하여 독맥(督脈)을 통한다."

사슴의 뿔을 관찰하면 녹용의 강장 효과가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세상의 수많은 동물 중에서 뿔 속에 피가 흐르는 것은 녹용밖에 없다. 뿔의 외피는 머리뼈의 연장으로 차갑고, 그 안에 든 피는 따뜻하다. 차가운 뼈를 뜨거운 피가 밀고 올라가 튀어나온 형국으로 내부에 있는 양적인 힘이 아주 강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녹용은 뼈의 생명력과 조혈 기능, 양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그 어떤 약재보다 탁월하다. 해면체인 남성의 성기에 혈액을 용솟음시키게 함으로써 양도를 흥하게 하며 골다공증, 소아의 성장 부진, 허리 통증에 유효하다. 모두 녹용이 가진 양적인 기, 즉 에너지의 힘 때문이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영조의 건강학 ①

원조 '국민 약골' 영조, "○○ 없인 못 살아!"


조선의 최장수 왕이자 52년 세월 동안 왕좌에 머문 영조(李衿·1694~1776년, 재위 1725∼1776년). 숙종의 둘째 아들이자 경종의 이복동생이었던 그는 탕평책을 통해 조선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한 왕이자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는 '두 얼굴'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한평생 비천한 무수리(숙빈 최씨)의 자식이라는 콤플렉스를 안고 산 불행한 임금이기도 했다.

비록 여든이 넘도록 장수했지만, 영조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약을 달고 산 '국민 약골'이었다. 조금만 찬 음식을 먹어도 배탈이 났고 소화 불량에 시달렸으며 복통 때문에 소변을 보기 어려워하던 소년이었다. 전염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그렇던 그가 83세라는 천수를 누렸다는 건 미스터리에 가깝다. 대체 그의 건강 비결은 무엇일까. 건강 체질을 타고난 걸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가꾸고 양육한 걸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밝혀가는 과정이 바로 이번 연재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실천으로 옮긴 건강 지혜

영조의 장수와 건강 비결을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자기의 몸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몸의 어떤 부분에 어떤 약점이 있는지 파악해 이를 염두에 두고 과부하가 걸리진 않는지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24시간 변화를 관찰하면서 신체의 약점을 알고 과부하의 경계치를 관찰하는 데는 자기 자신이 최고 전문가일 수밖에 없다. 영조는 평생 복통과 소화 불량 등 냉기에 민감해했다. 자신이 냉증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한평생 차가운 자리에 앉지 않고 찬 음식을 멀리하는 등 온기 보존에 신경 쓴 것은 철저한 자기 관찰의 결과다.

둘째, 자신을 냉정하게 주시하면 병이 자기 몸에서 가까이 있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잘 알고 무엇을 할 것인지 방법론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영조는 '인삼 마니아'였다. 여러 번 처방을 실험한 후 인삼을 대량으로 넣은 건공탕을 상복해 건강을 유지했다.

현대는 건강 지식 홍수 시대다. 많은 사람이 신체 관리를 위한 전문 지식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팔랑귀가 된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의 심오함이다. 건강 지식이 자신의 신체 상황과 맞아야 하는데도 모든 사람에게 맞는 것처럼 맹신하는 데서 문제가 불거진다.

예를 들면 우유나 인삼의 경우가 그렇다. 우유가 보급되자 과학적 분석을 통해 모유보다 더 풍부한 영양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한때 모유보다 우유를 선호했지만, 나중에 모유 성분 가운데 면역 효소나 기분을 좋게 하는 성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우유 우위설이 자취를 감췄다. 인체의 심오함을 단편적 지식의 틀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증한 예다. 인삼도 마찬가지다. 체질에 맞지 않으면 열이 나거나 혈압을 높이는 등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자신의 체질 특성과 견줘보고 관찰해서 무엇이 몸에 맞고 맞지 않는지 진실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셋째, 건강의 지혜를 실천하는 것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모자란 듯 음식을 먹으면서 새롭지는 않으나 지혜로운 지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작은 노력으로 크게 건강을 얻고자 게으름을 부린다. 하지만 영조는 술을 거의 먹지 않고 아무리 바빠도 밥을 제때 챙겨 먹으면서 자신만의 노력으로 건강의 지혜를 체득했다.

대다수 왕이 선대왕을 여읜 슬픔에, 혹은 힘겨운 장례절차 와중에 건강을 잃어버린 반면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 사건 앞에서도 곡기를 끊거나 반찬 수를 줄이는 감선(減膳)을 하지 않았다. 삶을 이어가기 위한 에너지 보급과 권력 투쟁을 철저하게 구분 짓고 살았음을 보여준다. 국가적 위기 상황이나 신하들과의 갈등 때 반찬 수를 줄이거나 단식 투쟁을 했지만 시간을 정해놓고 투쟁의 근본 목표에 부합한 것에만 충실했을 뿐 투쟁 그 자체에 매몰되진 않았던 영리한 왕이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 씨의 아들로 태어난 까닭에 왕이 되기까지의 행보가 여간 험난하지 않았다. 그의 출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설이 나돌았다.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었다. 많은 야사(野史)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숙종의 아들이 아닐 것으로 추정하면서 영조를 바라본다.

▲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이산>의 영조(이순재). 드라마 와는 달리 영조는 평생 약을 끼고 산 허약 체질이었다. ⓒMBC


못 말리는 '인삼 마니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각종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영조의 체질은 특이한 데가 있다. 그는 83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인삼이 든 처방을 애용했다. 심지어는 말년 10년 동안 복용한 인삼이 100근이나 될 정도였다. 그의 풍성한 수염은 아버지 숙종의 풍모와 전혀 달랐고 오히려 숙빈 최 씨에 가까웠다. 이것도 그가 김춘택의 아들로 의심받는 한 이유가 됐다.

성격도 아버지 숙종이나 이복형 경종, 아들 사도세자, 손자 정조와 전혀 달랐고 질병의 양상도 이들과 달랐다. 조선 시대 왕들은 무장인 이성계의 혈통을 이어받아 대개 불꽃같은 성질을 보이거나 화병을 앓았다. 심지어 화가 내부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종기를 앓다 죽는 경우가 많았다.

숙종도 예외가 아니었다. 숙종 14년 7월 16일 기록엔 "이때에 임금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점차로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어지지 않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였다. 마음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곤란하고 밤새도록 번뇌가 심하다"고 쓰여 있다. 극도의 화병을 호소한 대목이다.

현종도 마찬가지다. 1721년 10월 기록엔 "심화가 불어나 화열이 오르내리면서 정신이 아득하고 권태가 있어 치료하기 힘든 지경이니 조섭을 위해서 세제로 하여금 대리 청정을 시킨다"라고 적혀 있다. 경종도 즉위 후 2년에 도승지가 올린 상소를 읽다 화열이 오르고 심기가 폭발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성계와 아버지 숙종의 체질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하다.

하지만 영조는 달랐다. 일생 동안 화열을 돋우는 인삼을 달고 살았다. 그가 가장 많이 복용한 것도 한의학 처방 중 인삼이 가장 많이 포함된 건공탕이었다. 영조 41년의 처방 기록에 의하면 매일 8.8돈(30그램)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인삼을 복용했다. 영조 스스로도 "제조에게 인삼의 정기를 얻어 건강하다"고 말할 정도로 대단한 인삼 애호가였다. 그런데 그의 아들 사도세자와 손자 정조는 숙종과 경종 등 전대 왕들처럼 화열이 많은, 따라서 인삼이 맞지 않는 체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사도세자의 경우를 보자.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러 왜 사람을 죽이게 됐는지 물었다. 이에 사도세자는 "마음에 화증이 나면 견디지 못해 사람을 죽이거나 닭 같은 짐승이라도 죽여야 마음이 풀어지기에 그랬습니다"라고 답했다. 결국 이 병이 커져 비극적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불렀다는 데는 역사적으로 이의가 없다.

정조는 더욱 치열하게 내면의 화병과 싸웠다. 화를 내리는 가미소요산과 우황, 금은화를 밥 먹듯 먹었다는 건 잘 알려져 있고 소량의 인삼도 극도로 경계해 복용하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 인삼을 기피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영조는 숙빈 최 씨의 체질을 이어받아 소음인에 가까운 체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가 일생 동안 보인 정치적 행태는 매우 자학적이었다. 대신들과 문제가 생기면 이를 쟁점으로 탕약 복용을 거부해 약자로서 탄압받는 임금의 모습을 부각했다. 왕권과 신권의 충돌에서 능동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수동적으로 여론을 환기시키는 소음인의 특징을 보인 것이다. 영조 50년엔 유생과 백성들을 모아놓고 현상금을 내걸어 탕제 정지 여부를 묻는 행사도 벌였다. 또한 소식(小食)을 즐기고 기름진 음식과 술을 피하는 등 절제된 식생활을 이어나갔다. 소화 기능이 약한 소음인 체질이 아니고선 실천하기 힘든 식습관이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영조의 건강학 ②

원조 '국민 약골' 영조, "오줌발이 약해서…"


영조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도 순탄치 못했다. 그는 이복형 경종 밑에서 왕세제로 있으면서 조금만 한눈팔면 목숨이 끊어질 수 있는 살얼음판을 걸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 씨는 궁녀들의 여종인 무수리였다. 왕의 어머니라곤 상상하기 힘든 천한 신분을 딛고 영조는 출발점에 섰다.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상대로 저주의 굿판을 벌인 후 죽임을 당한 것은 숙빈 최 씨가 진실을 알린 덕분이었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고 난 후 경종과 영조는 갈등 관계에 돌입한다. 자기 어머니를 죽인 원수의 자식인데 예뻐 보일 리가 만무할 터.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문고리 권력'인 실세 환관 박상검과 영조 간에 불거진 갈등은 1인자와 2인자의 간극을 보여주면서 불안한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인시켰다. 뒤이은 목호룡의 고변은 왕과 왕세제 간 일촉즉발의 순간순간으로 이어졌다.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 의혹은 남인과 소론 강경파에 의해 더욱 증폭됐다. 경종은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단감을 먹고 죽었는데, 영조 31년 5월 20일 소론의 선두 주자로 반란을 꾀했던 신치운은 스스로 "신은 영조 즉위년인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라고 말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경종 독살설의 의혹이 영조 재위 31년까지 뻗친 것이다. 게다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죄책감은 결코 다른 왕들보다 작은 스트레스가 아니었을 것이다.

영조가 앓은 질병은 대부분 소화력 부진이나 복통 등 한랭성 질환이었다. '골골백세'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체질이었다. 다만 궁궐 밖에서 생활하던 18세에 두창을 크게 앓은 것을 제외하면 본인의 판단과 선제적 대처로 질병을 예방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를 괴롭힌 질환은 산증(疝症)이었다. 경종 재위 시절 왕세제였던 그는 산증으로 경연(經筵)을 자주 쉬어야 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산증은 한의학적 병명으로, 현대 의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하복 냉통 증후군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소화 불량과 전립선 질환이 복합된 것이며, 여성으로 말하면 생리통과 자궁 하복통 질환을 의미한다.

<동의보감>은 "산증은 부위별 분류에 따라 전음(前陰)에 배속하였다. 전음은 종근이 모이는 곳이며 종근이란 음부의 털이 나는 곳에 가로놓인 뼈의 위아래에 있는 힘줄이다"라고 설명했다. 아랫배에 병이 생겨 배가 아프고 대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을 산증이라고 하는데 이는 찬 기운으로 인해 생긴다.

송나라 양사영의 <직지방(直指方)>은 더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산증이란 음낭과 아랫배가 아픈 것이다. (…) 오한과 발열이 생기다가 대소변을 보지 못하거나 설사가 나기도 하는데 적취(積聚·몸 안에 쌓인 기로 인해 덩어리가 생겨 아픈 병)가 생겨 술잔 같거나 팔뚝 같거나 쟁반 같기도 하다."

"만 가지 보약이 헛것"

<승정원일기> 영조 원년 10월 12일 기록에선 영조 스스로 산증이 생긴 원인을 자세히 설명한다. 요지는 이러하다.

"홍진(홍역) 이후에 처음에는 산기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체기가 있어서 청열소도지제를 다복하여 하부가 궐랭하고 해역이 병발해 독음에 뜸을 뜨고 방풍산을 써서 효과를 보았으나 그 찬 약이 문제였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승정원일기> 영조 50년 5월 8일 기록에서 영조는 "홍진 때 쓴 우황과 찬 약이 산증을 유발했다"고 회고한다. 영조는 생활습관 문제도 고백한다.

"예전 같으면 여름에는 생냉물을 먹지 않았으나 요즘은 과인이 스스로 과식한 측면이 있고, 겨울이 되어서도 오히려 수족을 차게 하는 등 온몸을 두루 차갑게 했다. 평상시 과인의 처신이 몸을 차갑게 한 것이다."

산증의 형태에 대해서도 "지금 복부는 손으로 만져보면 옆으로 횡단지기가 있는데, 의복이 단박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여름에 덥다고 생랭(生冷)한 것을 과식한 소치"라고 밝혔다.

산증은 소변을 보기 어렵거나 참기 힘들게 해 영조를 계속 곤란케 했다. 영조 2년 10월 14일 <승정원일기>엔 "어릴 때부터 소변을 자주 보았는데 최근에는 더욱 심해져 하룻밤에 수차에 걸쳐 들락날락했다. 특히 요번 제사 때 초헌을 보는데 소변이 심히 마려워 실례를 할 뻔했다"라고 곤혹스러운 경험을 밝혔다. 심지어 "소변이 방울방울 떨어져 고통스럽다"라고 고민을 털어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소변에 관한 한 아버지 숙종은 아들 영조와 꼭 닮았다. 숙종 10년엔 사심도적산과 삼호작약탕 등에 대한 처방을 주문했는데 이들 처방은 모두 소변을 순조롭게 보기 위한 것이었다. 영조는 찬 약물이나 생활습관에서 산증의 원인을 찾지만 <동의보감>은 이 병의 원인을 화병으로 설명한다.

"대체로 성을 몹시 내면 간에서 화(火)가 생긴다. 화가 몰린 지 오래되면 내부가 습기로 차가워지며 통증이 심해진다."

숙종의 경우 변덕스럽게 화를 내는 경우가 잦았던 점을 고려하면 무장의 후예다운 질병이었다. 사실 영조도 자가 진단과 달리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화병에 시달렸다. 앞에서 본 대로 즉위할 때까지의 스트레스와 격화된 당쟁의 와중에서 신하들 사이에 끼여 자학적인 발언을 자주 했다.

실록 영조 7년의 기록엔 "만 가지 보약이 헛것이다. 내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다"고 말하거나 영조 9년엔 "온갖 보약이 다 헛것이고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요방이다"라며 괴로운 심경을 표현했다. 영조 44년의 기록에도 "아, 나의 병은 첫째도 심기이고 둘째도 심기에서 비롯된다"라고 토로했다. 영조 13년엔 현기증을 호소하면서 고암심신환이라는 처방을 내리는데 그때 현기증의 원인을 화라고 규정한다.

화가 원인이 된 산증을 치료하는 방법은 다른 원인으로 발생한 것과 차이가 있다. 숙종과 영조의 소변에 관한 처방은 비교의 기본점이 된다. 한의학의 기본적인 치료 원칙은 허와 실을 가리는 데 있다. 두 임금의 질병 양상은 허와 실 사이에서 차이가 크다. 숙종은 소변이 붉고 갈증을 자주 호소했는데 도적산 계열의 찬 약물을 위주로 공격적인 처방을 한 반면, 소변을 보기 힘들거나 참기 힘들어하며 설사가 잦은 허증 증상을 보인 영조의 경우는 내부를 따뜻하게 데우는 반총산을 위주로 처방했다. 영조는 "반총산을 나의 주인으로 삼는다"고 할 정도로 애용했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영조의 건강학 ③

영조, 뱃속 회충을 이렇게 길들였다!


소화기 냉증 치료하려 배꼽 뜸질

회충에 의한 상충(上衝·위로 치밀어 오름)감과 구역감을 '회기'라고 하는데 이 증상은 영조 20년에서 41년까지 이어진다. 회충을 치료하는 약물은 모두 매운 약이다. 위장의 온기를 올려 회충이 살 조건을 사라지게 하겠다는 처방이었다. 또 어의들은 위장의 온기를 보태기 위해 한편으로는 뜸 치료를 적극적으로 권했다.

영조도 자신의 건강상 약점이 소화기 냉증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연제법(煉臍法)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애썼다. 연제법은 배꼽을 뜸질하는 것인데, 방식은 직접구가 아닌 간접구에 가깝다. 쑥뜸과 피부 표면 사이에 소금이나 약재를 넣어 열기가 피부에 직접 닿아 상처를 내거나 고통을 주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인체를 보는 지혜가 동서양에서 일치하는 것은 배꼽이다. 왜 배꼽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도는 의학과 예술의 융합점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인체도는 다빈치의 역작이지만, 그 속에 있는 사각형과 원을 통한 비례는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인체 비례에 대한 생각을 구현한 것이다.

"자연이 낸 인체의 중심은 배꼽이다. 등을 대고 누워서 팔 다리를 뻗은 다음 중심을 배꼽에 맞추고 원을 돌리면 두 팔의 손가락 끝과 두 발의 발가락 끝이 몸에 닿는다."

손발을 뻗은 인체의 중심이 배꼽이라는 생각은 <동의보감>에도 유사하게 기록돼 있다. <동의보감> '배꼽' 편은 "팔을 위로 올리고 땅을 디디고 서서 줄로 재보면 중심이 바로 배꼽에 해당된다"라고 했다. 손을 들어 올린 모습에서 배꼽이 인체의 중심이라는 데는 동서양이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배꼽이라는 순수한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월인석보>에선 배꼽을 '빗복'으로 적고 있는데 배의 한복판이라는 뜻으로, 이곳이 인체의 중심이라는 표현이다. <구약성경> '욥기' 40장 16절은 "이제 보라. 그의 기력은 그의 허리에 있고 그의 힘은 그의 배꼽에 있느니라"고 했다. <동의보감>은 더욱 구체적으로 배꼽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치료 효능까지 덤으로 적었다.

"배꼽 줄은 마치 과일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을 때 양분이 과실꼭지를 통하는 것과 같다. 배꼽에 더운 김을 쏘여주어 꼭지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풀과 나무에 물을 주고 흙을 북돋워주면 잘 자라는 것과 같다."

뜸을 뜨고 더운 김을 쏘이는 것은 배꼽이 차갑다는 뜻이다. 이런 인식엔 한의학 고유의 음양론이 뿌리내리고 있다. 배꼽은 자궁 속 태아 상태에서 영양분을 받는 유일한 통로다. 어머니는 배꼽을 통해 태아의 음형을 기르는 물질적 기초를 공급한다. 출생 후 닫혀 있어도 배꼽은 인체의 정혈이라는 음기가 모이는 축이다.

<동의보감>은 배꼽을 데우는 방법으로 몇 가지를 제시했다. 소금이나 회화나무 껍질로 배꼽을 덮고 난 뒤 배꼽에 쑥뜸을 뜨는 방법, 부자를 비롯한 따뜻한 약으로 고약을 만들어 붙이는 방법, 배꼽을 약쑥으로 덮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배꼽을 데우면 "냉대하와 월경이 고르지 못해 임신하지 못하는 것을 치료한다"라고 적기도 했다.

체질에 맞는 식습관 실천

이렇듯 영조는 연제법으로 위장의 냉증을 없애는 한편으로 탕약을 적극적으로 복용해 체내의 온기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는 위장의 온기를 북돋우기 위해 인삼과 계지, 건강 등이 들어간 이중탕을 복용했는데 한번 먹어본 후 효과가 확실하자 자신에게 가장 맞는 처방으로 확신했다. 이후엔 이중탕에 녹용과 우슬, 부자를 넣어 건공탕이라고 불렀다. 건공탕은 나라를 건국한 공로와 같은 처방이라는 뜻이다.

영조는 그만큼 이중탕을 사랑했다. 그는 이중탕을 자신이 가장 아끼던 만능 기술자 최천약의 신기에 가까운 기술과 같다며 상복하면서 건강 지킴이로 삼았다. 영조 41년 12월 29일 제조들이 "건공탕의 효과로 얼굴이 화창해졌다"고 하자 영조 스스로 "인삼의 정기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한 해 인삼 20근을 소비할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 모두가 영조가 매일 한약을 복용할 정도로 건강을 챙긴 덕분이었다.

영조가 기름진 음식이나 음주를 멀리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금주령을 철저히 지킨 탓인지 처방에 술이 들어가지 않아 효과가 떨어진다고 신하들이 건의할 정도였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은 영조가 감선이나 철선(撤膳·국상이 났거나 나라에 재앙이 들 때 임금이 근신하기 위해 육선(肉膳)을 들지 않던 일)을 하면서 철저히 검약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 4가지를 꼽는 모습은 전혀 달랐다. 송이버섯, 생전복 새끼, 꿩고기, 고초장(苦草醬·고추장)이 그것이다.

영조가 사족을 못 쓸 만큼 좋아한 것은 사슴꼬리였다. 79세에 이르러서도 "반찬 중에서 사슴꼬리만 손을 댈 수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가 특히 즐긴 것 중 하나는 죽은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이 준비해준 밤이었다. 반면 그가 싫어한 것은 생선회나 기름진 음식 등 자신의 소화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자신의 체질에 맞게 잘 먹은 것이 건강 관리의 포인트였던 셈이다.

조선 시대까지 약차는 기호 음료처럼 먹는 요즘과 달리 치료의 보조 수단으로 쓰였다. 하나의 처방이었다. 영조가 다리 힘이 모자라면서 즐겨 먹은 것이 송절차다. <승정원일기>는 송절에 대해 "송절은 솔뿌리를 가리키는데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하고 어혈을 없애는 약재다. 황토에서 자란 어린 소나무의 동쪽으로 난 뿌리를 주재료로 오가피 우슬을 넣어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연구자 중엔 "송절차를 마시고 술에 취했다"는 실록 문구를 근거로 송절차가 금주령을 피하기 위한 영조의 눈속임 술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영조가 술을 즐긴 적이 없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이는 억측에 가깝다. 영조는 송절차의 효험을 많이 본 탓인지 5년 동안 음용한 후 복용을 중지했다.

'앎'으로 극복한 허약 체질

어깨 통증도 영조를 오랫동안 괴롭힌 질병이었다. 침 요법은 물론 고약 종류를 직접 붙이거나 다른 보조 요법도 사용했다. 솔잎을 쪄서 따뜻하게 감싸는 방법, 누에고치를 볶아서 붙이는 것, 천초를 술과 달여서 팔에 수건으로 감싸는 방법 등이 동원됐다. 영조의 체질에 맞게 탕약도 복용했는데, 특기할 점은 아침에 일어나 팔을 전후로 흔들고 난 뒤 갑자기 좋아졌다며 운동 치료의 효험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영조는 허약한 '저질 체력'임이 분명했다. 평생 산증으로 인한 복통과 설사, 소변 장애 증상으로 고통 받았다. 특히 즉위 초기엔 산증과 소화 불량으로 힘들어했으며 중년기엔 어깨 통증과 회충으로 인한 소화 불량을 호소했다. 말년엔 극심한 피로와 하지무력감, 건망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가 조선 왕들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장수에 성공한 왕이 된 비법은 평범했다. 그는 자신의 체질을 알고 질병에 대비하며 스스로 건강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정치적, 태생적으로 가해지는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도 건강 비결이 자기를 바로 알고 약점과 단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실천하는 평범한 것임을 증명한 유일한 왕이었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정조의 건강학 ①

영조는 사도세자를, 사도세자는 정조를 죽였다


"세손(정조)은 문에 들어오자마자 곧 관을 벗고 손을 모아 애걸하였다. 영조가 멀리서 세손을 보고는 진노하여 말하기를 '어째서 세손을 모시고 나가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 세손은 문으로 들어와 땅에 엎드린 후 세자(사도세자)에게로 점점 가까이 기어왔다. (…) 별군직이 세손을 안고 나가려 하자 세손이 저항했다."

승정원 사서 이광현의 일기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가 죽는 장면을 여과 없이 기록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이후, 조선 제22대 왕 정조(1752~1800년, 재위 1776~1800년)의 삶은 화증(火症)으로 점철됐다.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봤다고 알려진 경종이 간질, 화증을 앓다 일찍 죽은 것과 비교하면 초인적인 자기절제를 발휘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도세자의 광증은 영국의 정신과 의사 존 볼비의 애착 이론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볼비는 1950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부모를 잃고 모성 결핍을 겪은 아이들을 연구해보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는 초기 아동기에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평생 지적, 사회적, 정신적 지체를 겪었다고 보고했다. 2차 연구에선 결핵을 앓아 요양소에 격리된 어린이들을 분석했는데, 이 아이들이 감동 결여성 인격 장애로 반사회적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밝혀냈다.

유아에게 부모는 자신을 적으로부터 지켜주고 음식물을 제공하는, 신과 같은 전능한 존재다. 따라서 이렇게 절대로 실패해선 안 될 인간관계에 실패했다는 것은 회한과 공포, 불안 등과 뒤섞여 아기의 마음에 새겨진다.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벗어나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혼자 꿈의 세계를 만들어 현실과 뒤섞이게 된다. 신경증 또는 정신병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양육 과정에 대한 묘사는 초기 애착 과정에 실패한 이유를 잘 설명한다. 세자의 위엄을 세우려고 태어난 지 100일 만에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진 저승전(儲承殿·왕세자 동궁의 처소)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것도 그의 모친이 아니라 경종을 모시던 나인들을 보모로 썼다. 세자를 보려고 들른 영조는 나인들의 불손한 태도에 화가 나 저승전을 찾지 않게 되면서 사이는 더 멀어진다.

이 점을 혜경궁은 정확히 집어냈다.

"부모 측에서 양육하며 성취하지 않으시게 하고 처소가 멀리 떨어져서 인사를 아실 때부터 떠나심이 많고 모이심이 적으니 조석에 대하는 사람은 환신, 궁첨이요, 들으시는 것이 항간의 잡담뿐이니 이것이 벌써 잘되지 못한 장본이며 어찌 슬프고 원통하지 않으리오."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영조와 사도세자는 심한 갈등을 겪는다. 엄격한 아버지 영조의 교육 방식은 한중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영조 38년, 사도세자는 화증이 더해 당번 내인 김한채를 죽여 그 머리를 들고 다니다 영조의 질책을 받는다. 사도세자는 이렇게 답변한다.

"사랑치 않기에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럽니다."

무수리 엄마와 경종 독살 사건으로 콤플렉스 덩어리였던 영조는 아들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키웠던 것이다. 심리학자 기 코르노는 저서 <부재하는 아버지, 잃어버린 아들(Absent Fathers, Lost Sons)>에서 자식이 갈망하는 칭찬, 애정 표현, 인정을 아버지가 보류하는 것은 심리학적 연구 대상이며 보편적 현상으로 정의했다.

▲ 정조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이산>. ⓒMBC


"젊었을 적 열이 많아…"

영조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자주 질책했다. 그 정점에 사도세자의 광증이 발병하고 뒤주 사건이 생기면서 정조는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게 됐다. 정조의 질병은 여기서 시작됐다. 아버지 죽음의 트라우마가 화증이 되어 평생 그를 괴롭혔다. 정조의 죽음은 종기로 인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동의보감>은 종기를 '옹저(癰疽)'로 표현하는데 그 원인을 화로 인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했다.

"옹(癰)은 막힌다, 저(疽)는 걸린다는 뜻이다. 혈기가 막히고 찬 기운과 열이 흩어지지 못할 때 생긴다."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상하거나 소갈병이 오래되면 반드시 옹저나 정창이 생기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아픈 것, 가려운 것, 창양, 옹종이 생길 때 속이 답답한 것은 다 화열에 속한다. 불에 가까이 하면 처음에 가렵고, 몹시 뜨겁게 하면 아프다. 불에 닿으면 헌 데와 딱지가 생긴다. 이것은 다 화(火)의 작용이다."

정조를 평생 진료한 주치의는 강명길(1737~1801년)이다. 32세 때 의과에 급제해 이듬해 내의원으로 들어갔다. 정조가 임금이 되기 전부터 친분이 있어 임금이 되자 바로 수의(首醫·내의원에 속한 내의(內醫)의 우두머리 의원)가 됐다. 정조는 '홍제전서(弘濟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자신의 체질과 치료 처방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젊었을 적에 몸에 열이 많아서 음식을 겨우 먹었으므로 날마다 우황과 금은화 따위를 먹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수의 강명길이 자신의 체질을 잘 알고 고암심신환을 처방해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10여 년 동안 환약으로 복용했다는 것이다. 가미소요산이라는 처방과 청심연자음이라는 처방을 꾸준히 복용해 건강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한의학에선 치료를 '균형'으로 정의한다. 열이 나면 보통 열을 내리는 데 치중하는데, 강명길은 열을 내리는 목적에만 중심을 둔 게 아니라 열을 내리면서도 식욕을 돋우거나 신체의 허약을 회복하는, 보(補)와 사(瀉)를 겸한 치료법으로 정조의 신뢰를 얻었다.

고암심신환은 화증을 치료하는 보약이다. 진짜 열이 아니라 허화(虛火)로 가슴이 답답하거나 잘 놀라면서 뼈와 살이 말라 들어가는 증상 치료에 적합하다. 허증을 기반으로 처방했다는 건 정조가 튼튼한 체질은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여름이 되면 소화 기능이 떨어지듯 정조는 열이 나서 음식을 챙기지 않았다. 대다수 임금이 하루 5번 음식을 먹었지만 그의 행장에 따르면 하루 두 끼만 먹을 정도로 식욕이 없었다고 한다.

청심연자음도 마찬가지다. 연꽃의 씨앗인 연밥이 주재료인 처방이다. 연꽃이 마음의 평정을 이루듯 번뇌를 씻어 마음을 맑게 하고 정신을 보양하면서 허한 증상을 보충하는 것으로 알려진 처방이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정조의 건강학 ②

종기·치질…정조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약은?


강명길의 인생유전

가미소요산은 정조가 죽어가는 순간까지 애용한 처방이다. 이는 <장자(莊子)>의 '소요유편(逍遙遊篇)' 내용과 관련이 있다.

큰 물고기가 대붕(大鵬)이 되어 우주에서 날개 치는 이야기인데, 소요산을 복용하면 마음이 상쾌해져 넓은 천지에 대붕이 자유롭게 날개 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가미소요산은 본래 부인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생리 전에 화를 내거나 어깨 결림, 두통, 불면, 변비 증상이 있을 때 효험이 있다. 주로 갱년기 여성의 열이 오르는 증상에 쓰는 약을 강명길이 추천해 복용함으로써 정조는 신기한 효과를 봤다.

정조의 해묵은 화병에 갱년기 증세가 포함된 것을 파악한 강명길은 가미소요산으로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다. <동의보감>에도 없는 약을 처방해 신기한 효험을 보자 정조는 강명길과 공동 저작을 기획한다. 정조 23년 완성한 <제중신편(濟衆新編)>이 그 결과물이다. <동의보감>의 최종 업그레이드판인 이 책은 흔히 강명길의 저작인 줄 알지만 정조가 만든 <수민묘전(壽民妙詮)>이란 책의 증보판이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정조가) 세자로 있을 때 영조의 수발을 위해 10년 동안 끊임없이 연구한 것은 진맥에 대한 비결과 탕약에 대한 이론이다. (…) 몇 차례에 걸친 수정을 거듭한 끝에 <제중신편>을 완성했다."

정조는 편애에 가까울 만큼 강명길을 감쌌다. 당시 경기북부 어사였던 정약용과 채홍원이 발의해 부평부사를 지낸 강명길의 죄상을 밝힌 일이 있다. 정조는 가장 사랑하던 정약용이 "재결(災結·자연재해를 입은 전답)은 훔쳐 먹고 군보(軍保·군역에 복무하지 않는 대신 정군의 복무 비용을 부담하는 장정)에게는 침징해 허다한 불법을 저질렀으니 용서하기 어렵습니다"라고 그를 탄핵했음에도 강명길을 귀양 보내는 척하다 한 달 후 어의로 복직시켰다.

정조의 최후는 강명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학에 관한 한 탁월한 이론가였던 정조는 누구보다 자신의 체질을 잘 알았다. 초기의 종기가 번지게 된 원인이 인삼이 든 육화탕에 있음을 알고 인삼을 기피했다. 마지막 순간엔 자신의 평생 건강 처방인 가미소요산을 합한 사물탕과 경옥고 사이에서 갈등한다. 정조는 강명길의 추천이라는 말에 인삼이 든 경옥고를 복용한다.

정조 사후 강명길은 노륙 형에 처해졌다. 본인은 극형에 처하고 아들은 외딴섬으로 보내는 것인데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바로 죽게 된다. 효종의 종기를 치료하다 죽음에 이르게 한 현행범 신가기가 극형에 처해진 이후 최악의 형벌이었다. 정조의 신임 아래 최고의 권세를 누린 강명길은 마지막 순간 최악의 구렁으로 떨어졌다.

ⓒMBC


종기 치료하는 우황

정조가 늘 먹었다는 우황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효험을 지녔을까. 우황은 소의 담낭, 담관에 생긴 결석이다. <본경소증>은 이렇게 설명한다.

"봄철에 전염병(바이러스성)이 돌면 소도 독을 마신다. 독은 육체와 정신의 빈 곳을 공격한다. 소는 튼튼한 육체와 고삐를 맨 순종하는 마음에 틈이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정기를 모아 독을 진압한다. 독은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내부에서 응결한다. 이런 힘의 정수가 우황이다. 이 튼튼한 힘의 정수는 정서 장애나 열성 경련을 치료한다. 소의 몸에 우황이 있으면 밤에 몸에서 빛이 나고 눈에 핏발이 있으며 수시로 반복해서 운다. 사람을 두려워하며 물에 자기 모습을 잘 비춘다. 동이에 물을 받아 소한테 대주면 웩웩거리다 물에 우황을 떨어뜨린다."

쓸개즙은 본디 검은색이지만, 약간 희석하면 푸른색이 되고 많이 희석하면 노란색이 된다. 황달은 소장으로 빠져나와야 할 담즙이 나오지 못하고 역류해 전신의 혈액으로 퍼지면서 희석된 담즙의 색깔을 보여주는 증상이다. 한의학에선 아이들이 놀랐을 때 푸른똥을 싸는 것을 담이 놀라 차가워지면서 반쯤 희석된 상태로 파악한다. 음식을 입에서 씹고 위에서 반죽하고 나면 자연 그대로의 색을 띤다. 밥은 흰색, 홍당무는 붉은색, 김은 검은색이다. 그러나 대변은 황금색이다. 반죽된 음식이 소장을 통과할 때 쓸개즙이 골고루 침투해 완전히 삭혀지면서 누렇게 변하는 것이다.

쓸개즙의 삭히는 힘은 타박상이나 상처를 입었을 때 생기는 어혈 제거에도 사용된다. 교통사고로 다쳤을 때 웅담을 쓰는 것도 이런 기전이다. 옛날에 대변으로 어혈을 치료하던 것도 담즙 색소가 스테르코빌린으로 변한 힘을 빌린 것이고, 요료법(尿療法)도 소변에 포함된 담즙 색소가 유로빌린 성분으로 변한 힘을 빌려 혈전을 녹이기 위한 것이다. 우황을 고를 때도 삭히는 힘을 시험한다. 우황은 소의 쓸개가 농축돼 담석에 이른 것이므로 삭히는 힘이 아주 강하다. 수박에 그어서 수박 무늬 위에 줄이 생겨야 진짜 우황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담(膽)은 마음의 상태와 연결되기도 한다. '담이 크다'는 말은 겁이 없고 용감하다는 뜻이다. 달리기를 잘하는 말에겐 쓸개가 없다. 그래서일까. 말은 바람소리에도 놀라고 자신이 뀐 방귀에도 놀란다. 말먹이를 주러 갔다 뒷발에 차이는 경우도 흔하다. 말은 겁이 많아 작은 소리에도 갑작스레 날뛰며 그러다 기수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반면 곰은 침착함과 용감함의 대명사인 것을 보면 쓸개의 효능을 짐작할 만하다. 우황은 삭히는 힘으로 종기가 잘 나는 사람을 치료하고 와신상담해 화를 없애는 힘을 발휘하기에 우황청심환에 사용한다.

피재길과 이동의 활약

금은화 역시 종기의 성약이다. 인동초의 꽃인데 금빛과 은빛이 나는 꽃이 소박하게 핀다. 꽃이 필 때 은은하게 나는 향기가 일품이다. 꽃은 시들지만 줄기와 일부 잎사귀는 겨울을 견디며 생기를 유지해 살아남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겨울을 넘기는 생기가 약효의 핵심이다.

<본경소증>은 약효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동은 보라색 줄기에서 하얀 꽃이 피고 하얀 꽃이 다시 노랗게 변한다. 이러한 특징은 혈맥에서 종기가 발생하고 썩은 종기가 허물어져 노란 고름이 되는 현상과 비슷하다. 이렇게 인체 기혈이 병소에서 죽어갈 때 금은화는 병든 곳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린다."

<동의보감>은 귀한 금은화보다는 흔한 인동초 줄기를 모아 끓여 먹는 것이 가난한 자가 종기를 예방하는 가장 중요한 약이라고 소개했다.

정조가 종기에 자주 걸린 만큼 종기 치료를 둘러싸고 여러 명의 의사가 등장한다. 길거리 약장수 수준의 의사가 벼락출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시대 의료는 '열린 의료'였다. 왕을 치료할 때도 숙련된 궁중 의사뿐 아니라 뛰어난 의술을 지닌 세간의 명의를 초빙하는 유연한 시스템이었다. 특기할 점은 치료의 기술적인 부분은 의사들이 담당했지만, 치료의 논리적 타당성은 유학자 출신의 대신들이 검증했다는 것이다.

정조 17년, 머리에 난 부스럼이 자라 종기가 됐는데 내의원들이 약을 써도 낫지 않자 피재길이란 의원을 불러 치료를 맡겼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박'이었다. 일순간 종기가 사라진 것이다. 피재길은 아버지가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이었지만 일찍 세상을 뜬 바람에 기술을 따로 배우진 못했다. 다만 남편을 거들었던 어머니가 종기를 치료하는 고약 제조법을 알았기에 피재길은 웅담고라는 고약을 만들어 일약 스타가 됐고 마침내 내의원 침의에 올랐다.

이동은 정조의 치질을 치료한 것으로 유명한 의사다. <이향견문록>과 <호산외사>에 따르면 이동은 정식 의사가 아니라 임국서라는 의원의 마부로 들어가 어깨 너머로 의술을 배웠다고 전한다. 손톱, 머리카락, 소변, 대변, 침 등을 약재로 사용해 특이한 방식으로 치료했다고 한다. 실록엔 이동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정조의 건강학 ③

정조 독살설의 진실, 수은이 아니라 인삼이 죽였다!


담배와 깍두기를 좋아한 정조

정조는 깍두기와 담배 애호가였다. 홍선표는 <조선요리학(朝鮮料理學)>에서 이렇게 전한다.

"200년 전 정조의 사위인 영명위(永明慰) 홍현주(洪顯周)의 부인(숙선공주)이 임금에게 처음으로 깍두기를 담가 올려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각독기(刻毒氣)라 불렀으며, 그 후 여염집에도 퍼졌다. 고춧가루 대신 붉은 날고추를 갈아서 쓰면 빛깔이 곱고 맛도 더욱 좋다."

무가 독을 없앤다는 각독기설은 <본초강목>에도 언급돼 있다. 두부를 즐겨 먹어 중독에 이른 한 두부 상인이 무즙을 먹고 두부 독을 없앴다는 얘기다. 아내가 두부 만드는 냄비에 실수로 무를 넣었는데 끝내 두부가 되지 않았다는 말을 기억하곤 실제로 무를 먹었더니 두부 독이 사라졌다는 것. 난을 피해 석굴에 들어간 사람이 적이 피워 넣은 연기에 질식해서 죽게 됐는데 무를 씹어 즙을 삼키자 소생했다는 얘기도 덤으로 들어 있다.

정조가 지독한 골초였음을 감안하면 숙선공주가 담배 독을 제거하려고 깍두기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정조의 문집 <홍제전서(弘齋全書)>엔 담배의 별칭 '남령초'에 대한 예찬이 나온다.

"화기(火氣)로 한담(寒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장을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안온하게 잘 수 있었다. 정치의 득과 실을 깊이 생각할 때 뒤엉켜서 요란한 마음을 맑은 거울로 비추어 요령을 잡게 하는 것도 그 힘이며, 갑이냐 을이냐를 교정하여 퇴고할 때 생각을 짜내느라 고심하는 번뇌를 공평하게 저울질하게 하는 것도 그 힘이다."

격무 속에서도 담배 한 대를 물고서 느긋하게 휴식하는 왕이었지만, 담배의 화기가 결국 그의 건강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을 게 분명하다.

정조에게 종기가 발생한 시점부터 사망 시점까지는 1800년 6월 14일부터 14일간에 불과했다. 종기 치료를 위해 많은 처방과 고약이 투여됐지만, 대체적인 흐름은 두 가지였다. 열을 내리는 청열약과 몸을 보하기 위한 인삼을 넣은 경옥고와 팔물탕이다. 청열약으로는 가미소요산과 백호탕이 대부분 처방됐고, 보약으로는 경옥고와 팔물탕이 주로 처방됐다. 가미소요산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열을 내리는 서늘한 약재이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능을 겸해 정조가 애용했다. 최후의 14일 동안에도 가장 주도적인 처방으로 기록돼 있다.

백호탕은 석고를 주재료로 만든 처방이다. 석고가 흰색이어서 호랑이처럼 내부의 열을 물어뜯어 없앤다고 처방된 청열약이다. 종기의 열을 내리려고 유분 탁리산을 처방하는데, 이는 피부의 열을 내리는 녹두가 대부분인 처방이다. 메밀밥을 개어 종기에 붙이는데, 메밀 또한 찬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6월 23일부터 증상이 개선되자 강명길이 경옥고를 복용할 것을 은근히 권유한다. 이런 권유엔 종기가 생긴 이후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는 배경이 있다. 소의 양이라 불리는 위즙이나 녹두죽 등을 권유했지만 정조는 쌀미음을 조금 먹었을 뿐이었다.

조선 후기 의학의 흐름도 한몫했다는 추측이 많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장수를 누린 것은 꾸준한 건공탕 복용 덕이 컸는데, 이 처방엔 엄청난 양의 인삼이 들어가 원기 보강이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종기 치료엔 소(消)법과 탁(托)법이 있다. 열을 소멸시키는 법과 밀어내는 법이다. 청열약이 소멸시키는 방법을 주도한다면 밀어내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 하므로 황기라든지 인삼을 사용하는 게 필수다.

그러나 인삼에 관한 한 정조는 '결사반대'였다. 6월 23일 정조는 처음 열 증세가 일어난 것이 더위를 없애는 육화탕 탓이라 여기고 경옥고 처방을 단호히 거부한다. 6월 24일엔 갈증을 없애고 맥을 살리는 생맥산이란 처방을 권해도 먹지 않았다. 6월 25일 번열증이 있는데 온보하는 약을 먹을 수 없다며 다시 거부한다. 그러다 생맥산이 더 나을 것 같다고 말했으나 다시 거부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경옥고를 귤강차에 타서 복용한다. 이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정조 24년 6월 23일 정조 독살설의 뿌리가 된, 수은이 함유된 연훈(煙燻)방이 처음 등장한다. 6월 14일 제조(提調) 서용보에게 종기의 고통을 호소한 이래 병의 진척이 없자 최후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이전에도 종기를 앓았던 정조는 저잣거리의 천민 의사 피재길의 도움으로 병을 고친 적이 있었기에 새로운 도움을 받고자 변 씨 의원과 장영장관(將營將官) 심인을 부른다. 심인은 독살설의 장본인이자 정조 어찰의 상대방인 심환지(1730∼1802년)의 친척뻘이다. 심인이 정식 내의원이 아닌 장영장관인 것은 궁궐에 들어오기 위해 임시 직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연훈방과 팔물탕

왕에게 약을 사용하려면 안전성을 확보해야 한다. 임상 시험 결과 변 씨 의원의 토끼 가죽은 신봉조가 효과를 보았고 연훈방은 서정수가 효험을 보아 안전성과 효능을 담보했다. 6월 26일 연훈방을 사용한 뒤 진료의 전 과정을 관장하는 도제조 이시수가 말했다.

"조금 전 연훈방을 사용한 뒤 심인과 여러 의관이 하는 말은 모두 종기 부위가 어제보다 눈에 띄게 좋아져 며칠 가지 않아 나머지 독도 없어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의관뿐만 아니라 아침 연석에서 신들이 본 것으로도 어제보다 매우 좋아졌습니다."

이때 종기에 고여 있던 피고름이 한 바가지 빠져나와 이불과 옷을 모두 적셨다. 이 점이 호전이냐 악화냐 하는 점은 다른 경우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정조 24년 혜경궁 홍씨가 종기로 고생했다. 며칠을 끌다 피고름이 많이 나와 종기가 나았다는 기록을 보면 분명한 호전 증상이다. 연훈방은 수은을 태운 유해한 약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태우고 흡입했을까.

내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경면주사(유화수은의 일종)를 잘게 부수고 옛 한지에 말아 모래 위에 꽂아서 태운다. 그런 뒤 연기를 모으기 위해 고깔을 써서 코로 흡입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기록에서 3번 사용했다고 전하지만 기록을 자세히 보면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임금의 원기를 보충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약물이 논의된다. 정조는 "이제는 열을 다스리는 약을 크게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가미소요산에 사물탕을 합방해 사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왕과 신하의 나라인 조선에서 왕의 뜻만 관철될 수는 없다. 도제조 이시수는 경옥고를 비롯한 육군자탕, 생맥산, 팔물탕 등을 추천했다. 경옥고는 특히 어의 강명길의 추천이 곁들여졌다.

그런데 이시수가 보기에도 병세는 눈에 띄게 악화됐다. "어제 저녁에도 주무시는 듯 몽롱해 보이셨는데 간밤에 계속 그러하셨습니까." 정조는 "어젯밤의 일은 누누이 다 말하기 어렵다"라며 고통을 호소한다. 이후 증세는 급격히 악화되고 정조는 숨을 거뒀다. 정조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질환은 종기가 분명하다. 그러나 진료 기록을 보면 더 중요한 터닝 포인트는 인삼 아니었을까. 이건 나의 억측일까.

미완의 개혁가였던 정조는 그의 정치 행로처럼 죽음을 맞이했다. 규장각, 장용영, 화성행궁을 설치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왕으로 추숭하려 했지만 그의 개혁은 좌절됐다. 강명길과 이시수 등의 건의를 묵살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인삼을 끝까지 복용하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 혼수상태에서 인삼이 듬뿍 든 팔물탕을 받아 마시는 기분은 어땠을까.

자신의 길과 보편적 지식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던 정조의 고뇌는 건강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답하게 해준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을 낳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순조의 건강학 ① 수두·홍역·마마보다 ○○이 더 무서웠다!


조선 제23대 왕 순조(1790~1834년, 재위 1800~1834년)는 왕비들의 권력으로 인해 부침이 잦았던 나약한 군주다.

정조의 둘째 아들로 수빈 박 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겨우 11세 때 왕위에 올랐다. 당연히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벽파(僻派)의 영수(領袖) 김귀주의 누이동생이다. 정조가 처단한 김귀주 대신 그가 육촌인 김관주를 이조(吏曹)에 앉혀 벽파를 등용한 건 당연지사다.

앞날을 가늠한 당대의 천재 정조는 자기가 죽기 전 당쟁으로 권력의 축이 한쪽으로 기울 것을 걱정해 안동 김 씨 김조순의 딸을 간택해뒀다. 하지만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권력이 바로 김조순에게 쏠리면서 세도 정치가 시작됐고 인사권과 과거 제도, 삼정(三政,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으로 이어진다.

조선의 최고 과제는 왕권 강화였다.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태종조차 처가의 발호를 경계해 왕비의 극력 반대를 무릅쓰고 처남인 민 씨 형제를 모두 제거했다. 뒤에 발호할지도 모를 세종의 장인마저 죽여 버릴 정도로 외척과 처가의 권력화를 경계했다.

순조는 재위 19년 자신의 원자가 10세가 되자 다시 한 번 권력의 축을 옮기기 위해 풍양 조 씨 조만영의 딸을 간택한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이던 효명세자가 22세 나이로 요절하면서 왕권은 약해지고 안동 김 씨의 세도 정치는 전성기를 맞는다.

▲ 문화방송(MBC) 드라마 <이산>의 순조. ⓒMBC


수두, 홍역, 마마…

순조는 '국민 약골'이었다. 어릴 때부터 전염병이란 전염병은 모두 앓았다. 12세 때인 즉위 1년 11월 19일엔 수두를 앓았다. 의관들은 홍역과 같으나 홍역은 아니라고 진단하면서 언제부터 발진했는지 묻는다. 순조는 "발과 다리 부분에서 발진했는데, 몸에도 많이 나 있다"고 말한다. 의관들은 해기음과 승마갈근탕을 처방했는데, 열흘 뒤인 11월 29일 수두로 진단하면서 완치됐음을 선언한다.

수두를 앓은 지 1년 후 순조는 홍역을 앓는다. 임금의 회복을 축하하는 교문(敎文)에서 "오랫동안 설치던 홍역이 갑자기 궁중에까지 침범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상당히 유행하던 홍역이 궁궐 내로 퍼진 것을 알 수 있다. 순조는 당시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왕비 책봉 15일 후 부부가 함께 홍역을 앓은 셈이다. 순조에겐 가미승갈탕, 왕비에겐 가미강활산이 처방돼 17일 만에 완쾌해 고유제를 지냈다.

순조는 재위 5년에 다시 두진(痘疹·천연두의 증상으로, 춥고 열이 나며 얼굴부터 전신에 붉은 점이 생김) 마마의 증세를 앓는다. 2월 18일 시작된 마마 증세는 27일 완치된다. 예조에선 "왕의 두창 증후가 빨리 회복됐으며…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여 진하(進賀)의 의절을 거행하소서"라고 건의하면서 의관들과 도제조들에게 포상한다.

두창은 전염병이지만, 당시 처방에 사용했던 약물의 구성을 보면 순조의 건강 상태를 알 수 있다. 질병이 시작된 초기엔 가미활혈음이라는 마마 치료약을 처방했지만 나중엔 가미귀룡탕이란 처방이 잇따른다. 귀룡탕은 허약한 소아가 복용하는 대표적인 처방으로 당귀와 녹용을 같은 양으로 하여 술에 달여 먹게 하는 것이다.

마마에 보약을 처방했다는 건 순조가 어릴 때부터 허약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귀룡탕의 또 다른 적응증은 원기 부족을 보충하는 것이다. 양기가 허약해 후사를 잇고 싶을 때 복용하는 처방이다. 그래선지 순조의 여인은 정비 순원왕후 김 씨와 숙의 박 씨 둘이 전부다. 계비는 없었으며 두 명의 부인에게서 1남 5녀의 자식을 얻었다.

한의학으로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순조는 한의학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 전염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했다. 그런데 한의학으로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한의학의 탄생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이론이 아니라 전염병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일반인은 한의학의 원조라면 화타(華陀·중국 후한 말기~위나라 초기의 명의)나 편작(扁鵲·중국 전국 시대의 명의)을 떠올리지만, '한의학의 히포크라테스'는 동양 의학의 원전 중 하나인 <상한론(傷寒論)>을 지은 장중경이다.

'처방'이란 말 자체가 장중경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한론> 서문은 전염병으로 죽어간 자신의 피붙이에 대한 애끊는 애정과 자괴감으로 시작한다.

"나는 종족이 많아서 전에는 200이 넘었다. 그러나 상한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3분의 2가 넘었다. (…) 이 처방으로 모두 낫게 할 수는 없지만 절반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시대적 배경은 공교롭게도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이다. 역사서에도 당시의 참상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삼국지> 무제기(武帝記)는 이렇게 전한다.

"조조가 적벽에 이르러 유비와 싸워 유리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욱 큰 병이 있었다. 관리와 병사들 가운데 죽은 사람이 많아서 이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조조의 아들 조식의 언급은 좀 더 구체적이다.

"집집마다 엎어진 시체들의 아픔이 있었으며 어떤 경우는 전 가족이 죽었다. (…) 부유한 사람이 죽은 경우는 적었고 가난한 이들이 대체로 죽었다."

<상한론>의 치료 방법은 전염병의 변화 과정에서 나타난 증후들을 귀납적으로 파악해 6가지 증후군으로 나눈다. 첫 번째인 호흡기에서 소화기를 거쳐 마지막인 생식기로 전이되는 과정에 따라 각기 땀을 내거나 구토 혹은 설사를 시키면서 이물질을 죽이지 않고 밀어내는 관용의 치료법을 정한다.

질병의 전이 과정은 그리스 아테네의 멸망을 기록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아래 기록과 세밀하게 일치한다.

"처음에는 오한, 발열과 눈의 충혈, 재채기와 기침이 뒤따른다. (…) 마침내 위장 장애를 일으켜 설사와 구토가 시작되고 피부에 작은 농포와 궤양이 생긴다. 심하면 8일째를 넘기지 못하고, 살아남아도 생식기가 파괴되고 실명(失明)과 기억 상실에 걸린다."

동서양으로 나뉘어 있지만 질병의 패턴은 정확히 호흡기에서 소화기로, 다시 생식기로 감염되면서 끝을 맺는다. 많은 연구자는 발진티푸스를 이 전염병의 원흉으로 지목한다.

현대 의학이 직접 바이러스나 세균을 죽이는 치료를 한다면, 동양 의학의 기본 정신은 자연과의 조화다.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그것을 죽이기보다는 빨리 쫓아낼 생각을 한다. 죽여 놓으면 간과 콩팥 등에 부담을 주고 뒤처리가 힘들기 때문이다. 호흡기엔 땀으로 발산하는 약을 처방하고 소화기엔 설사로써 밀어내고 생식기에선 내면의 온도를 높여 저항력을 기르는 방식이다. 현대에 우리가 알고 있는 한의학은 저항력을 기르고 보(補)하는 방식뿐이지만 한의학의 처방들은 훨씬 실증적이며 현실적인 치료 의학이다.

순조는 그 자신이 전염병에 혼이 났을 뿐만 아니라, 백성이 전염병으로 고통 받는 모습도 지켜봤다. 당시로선 새로운 전염병이던 콜레라도 그 중 하나다. 순조 21년, 평양부 감사가 처음 보고한 전염병의 양상은 공포 그 자체였다.

"갑자기 괴질이 발생하여 토사와 관격, 즉 구토, 설사와 가슴이 막혀 타는 듯한 고통을 호소하다 잠깐 사이에 사망한 사람이 1000여 명이나 된다."

콜레라는 한자로 호열자(虎列刺)다. 호랑이가 물어뜯는 듯한 고통을 호소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당시엔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백련교도들에게 혐의를 돌리기도 했다. 당시 사망자는 거의 10만 명에 육박했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순조의 건강학 ② 

태반 먹으며 건강 관리, 하지만 나라는 말아먹었다


세도 정치로 인한 스트레스

순조를 가장 괴롭혔던 건 왕 노릇으로 인한 스트레스다. 정순왕후의 섭정으로 주눅이 든 데다, 여우를 피하다 만난 호랑이처럼 처가 쪽 김조순의 세도 정치로 기를 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조 증상은 신경성 질환으로 불리는 편두통처럼 다가온다. 순조는 재위 10년을 맞으면서 귀 주변이 땅기고 아프다는 고통을 호소해 육화탕을 처방받는다. 귀 주변이 아프고 당기는 건 편두통 증상에서 흔한 전형적인 증상이다.

그런데 의관들이 신경성 증상을 중이염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염증성 증상에 투여하는 형개연교탕과 만형자산을 처방했다. 신경성 증상을 염증성으로 착각한 것도 무리일뿐더러 본래 속이 약한 사람에게 생지황이나 찬 성질의 약을 처방하니 소화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의관들은 설사와 식욕 부진에 쓰는 건비탕을 급히 다시 지어 올린다.

순조가 본격적으로 신경성 증상을 호소한 때는 다음 해인 재위 11년이다. 순조는 전좌(殿座)하는 일이 자주 있다고 걱정한다. 실록은 전좌 증상을 앉아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불안 증세로 파악했다.

"근래에 전당에 임어하심이 거의 빠지는 날이 없으시니, 성궁의 노고는 이미 말할 수 없지만, 전좌하셨을 적에는 그 일을 끝낸 적이 없으며, 출궁이나 환궁하는 경우에는 매번 허둥대며 급히 서두르는 탄식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화기(火氣)가 쌓인 증세로 인연하여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답답함을 소통시키는 자료로 삼기는 하지만…."

순조는 자신의 마음 상태를 솔직히 털어놓는다.

"내 마음을 내가 도리어 알지 못하는 때가 있다." "평상시에도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걸어 다니는 소리 같은 것도 역시 모두 듣기가 싫다."

병적으로 나타나는 증상도 그대로 이야기한다. 조동(躁動)증이 생겼다고 말한 것이다. 조동은 말 그대로 심장이 급박하게 뛰면서 마음이 급해진다는 뜻이다.

이런 불안 증세에도 영부사(조선 시대 중추부의 으뜸 벼슬) 이시수는 유학적 치료법인, 마음을 기르는 양심(養心)을 제시했다.

"간혹 번조하고 답답하더라도 참을 인(忍)자 공부에 착수하여 오늘과 내일에 참고 또 참는다면 저절로 평상시처럼 회복될 것입니다."

순조는 마음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기력이 쇠진했다.

"어머니께 문안할 때면 번번이 걸어서 나아갔지만 땀이 나는 경우가 없었는데 지금의 경우는 걸어서 절반도 못 가고 이미 몸에 땀이 나고 숨이 차며 수라는 입맛이 달지 않아 잘 먹지 못하며 정신이 황홀하다." "잠이 드는 것을 하룻밤으로 견준다면 거의 3, 4경쯤이며 수라는 평상시의 10분의 1 정도다."

내 마음 나도 몰라?

순조는 재위 11년, 22세가 되던 시점부터 불면증과 식욕 부진, 사지 무력, 피로, 정신 황홀, 현기증이라는 다양한 신경 쇠약증과 소화 불량증을 호소한다. 처방한 약물들을 살펴보면, 순조의 여성적 성품이 분명히 드러난다. 귀비탕, 감맥대조탕, 가미소요산을 각각 처방받았는데, 이 처방들은 여성의 우울증이나 히스테리에 사용하는 대표적인 치료 약물이다.

귀비탕은 송나라의 엄용화가 개발한 건망증 치료 약물로 '일에 대한 근심이 지나쳐 심장과 비장이 과로하고 건망증이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이 병이 된 것'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증상의 허실과 음양 중 몸이 활발하고 남성적인 양증에는 사용하지 말 것을 경고한 음증의 여성적인 처방이다.

감맥대조탕도 마찬가지다. 감초와 밀, 대추 3가지로 구성된 처방으로, 역시 장중경이 지은 <금궤요략> 22편에 기재돼 있다. 치료 목표는 "부인이 히스테리로 울거나 웃거나 하고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되어 빈번히 하품을 하는 경우에 사용한다"라고 돼 있다. 즉, 정신 안정 작용을 하는 처방이다.

가미소요산은 정조가 화증(火症)에 자주 사용했던 처방이다. 어깨가 자주 결리고 쉽게 피로하며 정신 불안 등의 신경 증상이 있는 허약 체질에 사용하는 처방이다.


여성적 기질

순조에 대한 질병 치료는 약물 위주였다. 처방의 종류도 아주 다양해서 100여 가지나 됐다. 순조에게 허약하고 피로한 허로(虛勞) 증상이 지속되자 의관들은 극단의 처방을 구사한다.

대조지황탕과 혼원단이라는 처방이 그것이다. 대조지황탕은 대조환이나 보천대조환에서 만들어진 처방으로 맥이 약하고 기혈이 쇠약한 것을 치료하는데, 허로한 사람이 성 생활을 지나치게 하여 가슴과 손바닥에 번열이 나는 데 먹으면 효험이 좋은 약이다. 혼원단은 몸이 몹시 여위고 기침과 가래가 있으면서 귀주(鬼?)병을 앓는 사람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이 두 처방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건 태반이다. 태반은 임신부의 자궁 안에서 태아와 모체 사이의 영양 공급, 호흡, 배설을 주도하는 조직이다. 고대에는 태반을 인간이 최초로 몸에 걸치는 가장 좋은 옷이라고 여겨 신선의(神仙衣)라고도 했다. 한약재로서의 정식 명칭은 자하거(紫河車)다.

자하거의 자색은 보라색이다. 보라색은 검은색과 붉은색의 혼합이다. 검은 어둠에서 해가 뜨는 붉은 여명의 아침이며,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색깔이다. 본래 자궁은 생명이 시작됐지만, 세상에 나오지 않은 미명의 장소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었다.

자하거의 약용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한의학에선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본초강목(本草綱目)>의 기록은 현실과 신체발부(身體髮膚)에 대한 유학이념 사이의 치열한 괴리를 보여준다. "유구국(오키나와)에서는 부인이 출산하면 반드시 태반을 먹는다" "팔계(광서성의 만(蠻)족)의 요인은 남자를 생산하면 친족이 모여서 태반을 먹는다"라고 적으면서도 "사람으로서 사람을 먹는다면 유구족이나 요인들 같은 오랑캐와 얼마나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탄식의 말을 남겼다.

명대에 <본초강목>의 저자 이시진이 자하거의 사용을 망설였다면 명의 뒤를 이은 청나라는 자하거를 천하의 명약으로 사용했다. 청대의 비방집에 보천하거대조환이라는 처방으로 실질을 살렸다.

자하거의 약효는 대부분 자음(滋陰), 즉, 음을 기르는 효능을 첫 번째로 꼽는다. 태반은 생명력을 기르는 텃밭으로 온갖 중요한 물질의 창고가 된다. 인체에서 물과 같은 혈액 모양의 물질이 부족해 잘 달아오르는 것을 음의 부족으로 파악해 음허(陰虛)로 인식하고 그 물질을 보충하는 데 자하거 약효의 특징이 있다고 본 것이다.

<동의보감>에서 기록한 자하거의 치료 효능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주목하는 치료 효과는 남성 성기능 장애와 여성 불임에 대한 효능이다. 입문대조환 처방의 주치(主治)는 더욱 구체적이다. "기혈이 허약하고 음경이 줄어들어 겨우 형태만 있으며 안색이 누렇게 뜨고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한다"라고 성기능 개선을 효능으로 내세웠다.

자하거는 폐결핵과 같은 만성 소모성 질환에도 치료 효능을 발휘한다. 만성기관지 천식과 피로, 해소 등 호흡기도가 약해서 점액이라는 음적인 물질의 분비량이 줄어들면 쉽게 이물질이나 바이러스, 세균에 노출되는 상태를 치료한다.

자하거의 또 다른 치료 효능은 항스트레스 작용이다. <동의보감> 내경편 신문(神門)에는 태반이 간질이나 가슴이 뛰는 것, 정신이 없는 것, 말이 많으나 일관성이 없는 것에 혈을 길러 정신을 안정시키는 효능이 탁월한 것으로 기재했다.

순조는 재위 13년에 웅주산과 인삼석창포차를 복용한다. 웅주산은 가위 눌린 것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한의학에선 가위 눌림을 귀염이라고 한다. 이름처럼 귀신이 압박한다고 본 것이다. <동의보감>은 이 증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잠들었을 때는 혼백이 밖으로 나가는데 그 틈을 타서 귀사가 침입하여 정신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꿈을 꾸고 불안해지는 가장 큰 원인은 혈기가 부족해서라고 보았다. 혈기는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손상 받는다. 가위 눌림은 현대 의학에서 수면 마비라고 하는데, 일종의 수면 장애로 본다. 잠자고 있는 동안 긴장이 풀린 근육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식만 깨어나 몸을 못 움직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웅주산의 구성 약물은 우황, 웅황, 주사 등 신경을 안정시키는 약물이다. 순조가 받은 심리적 압박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약재들이다. 이 시기에 처방된 약물들엔 대부분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심(心), 지(志), 신(神) 등의 글자가 들어가 있다. 가미영신환, 천왕보심단, 청심온담탕, 주사안신환 등의 처방을 달여 올렸다.

소화 불량에 신경 쇠약 겹쳐

22세부터 25세까지 순조는 소화 능력이 떨어지면서 신경 쇠약 증세를 호소한다. 불면증, 식욕 부진, 피로, 정신 황홀, 피로, 숨참, 사지 무력증으로 고생한다.

한의학은 이런 신경성 위장 질환을 외향성과 내향성으로 나누어 치료한다. 외향성인 사람은 간기울결(肝氣鬱結)로 보고, 내향성인 사람은 심담허겁(心膽虛怯)으로 본다. 내향성인 사람의 증상은 식욕이 없으며 신경이 쓰이는 일, 긴장되는 일이 생기면 밥맛도 없고 소화가 안 되며 정서가 불안하고 깜짝깜짝 잘 놀란다. 꿈을 많이 꾸고 무서움을 잘 타면서 쉽게 어지럽고 자주 구역감이 발생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순조는 내향성의 스타일이었다.

순조가 지속적으로 허약해지면서 위장의 소화력이 떨어지자 가미군자탕 계열의 처방이 이뤄진다. 가미군자탕은 순조 자신이 운명하는 마지막 날까지 복용했던 처방이다. 가미군자탕, 육군자탕, 생위군자탕, 삼령백출산, 승양순기탕 등은 모두 사군자탕이라는 처방을 모토로 그때그때 증상에 맞게 변형한 처방이었다. 순조 14년, 왕의 신뢰를 받던 유의(儒醫) 홍욱호는 왕의 온몸이 불편한 증세는 오로지 위기(한의학에서 원기를 이르는 말)가 부족해서 나타나는 것이라 진단하면서 위기를 보충하고 건강하게 만들 것을 재삼 강조한다.

사군자탕은 인삼, 백출, 백복령, 감초 4가지로 구성된 약물로 전신이 무력하면서 소화 기능이 약하고 자주 설사를 하면서 많이 먹지 못하고 힘이 없는 증상에 사용하는 처방이다. 사군자탕을 푹 달여 대접에 담아놓으면 담백한 마음을 지닌 군자 같다. 달인 듯 달이지 않은 듯 담담한 빛깔이어서 차 한 잔 마시는 것 같다. 처음엔 그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기 힘들지만 한참을 먹고 나면 건강이 개선된 느낌이 오는 것이다. 이런 처방을 꾸준히 한 탓인지 순조는 38세까지 13년 동안은 질병 기록이 없다.

죽는 날까지 가미군자탕 복용

순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직접적인 사인은 다리 부위의 종기다. 다리 부위에 생긴 염창(?瘡)으로 짐작된다. <동의보감>은 염창을 이렇게 설명한다.

"양쪽 다리가 짓물러서 나쁜 냄새가 나고 걸어 다니기도 힘든데 이것은 정강이뼈 위에 생긴 것으로 위험한 질병으로 보면서 많이 걷지 말아야 한다."

순조 14년 11월 2일, 다리에 문제가 생긴 것을 먼저 지적하기보다는 다리에 약을 붙인 결과로 수포와 붉은 열이 올라오는 것을 호소한다. 11월 20일 다리 부위의 종기가 손가락 머리처럼 부풀어 올라 고약을 바를 것을 의논한다. 이후 석 달 넘는 기간에 22종이나 되는 많은 고약을 붙이면서 종기를 치료한다.

문제는 똑같은 증상이 순조 34년, 45세 되는 해에 재발한 것이다. 그해 10월 28일 가벼운 두통 증세와 함께 대소변이 불순한 증상이 있다고 하여 순조에게 가미정기산이 처방된다. 11월 1일 기록을 보면, 종기가 재발해 메밀병으로 만든 고약을 종기에 붙인다. 메밀병은 순조 14년 9월에 사용한 바 있던 고약 종류다. 13일까지 종기 치료 목적으로 소담병자, 촉농고, 투농산 등 고약을 계속 붙이면서 치료했지만 순조의 종기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특기할 점은 종기가 진행됐음에도 탕약은 계속적으로 가미군자탕, 인삼이나 계피가 들어간 가감양위탕, 이공산 등 위장의 기력을 돕는 처방이 계속됐다는 점이다. 순조 사망의 직접적 원인은 종기였지만, 그가 한평생 밥 맛 떨어지는 인생을 살다갔음을 처방은 보여준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중종의 건강학 ① 복통 호소하는 왕, 대장금의 화끈한 처방은…


조선의 왕들에겐 각자 믿고 의지하는 의사들이 있었다. 선조 때는 허준이 있었고, 광해군은 허임을 총애했는가 하면, 인조는 이형익을 믿고 자신의 몸을 맡겼다.

임금의 신체와 관련한 여러 가지 정보는 나라의 극비 사항에 속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왕의 건강을 챙기고 심기를 안정시키는 의약에 관한 일의 총책임은 당연히 유학자인 사대부의 몫이었다. 내의원 제조라는 직책은, 치료 기술은 의사에게 맡기지만 그 논리적 타당성과 검증은 유학자가 맡아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출발했다.

유학자 이이교(李利敎)는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의 중심은 유학'이라고 외친 것이다.

"내가 일찍이 술수에 관한 책을 본 적이 있다. 점을 치거나 의술을 펴거나 관상을 보는 것, 풍수를 논하는 것은 각각 하나의 기능에 치우친 것일 뿐이어서 심신을 다 보충할 수 없다. 유학은 성현이 준행한 바이며 오직 의리로써 설하였기에 사람이 입문하기에 어렵다."

'약방기생' 전락한 女醫

대장금(大長今)은 중종(1488~1544년, 재위 1506∼1544년)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내밀한 문제까지 치료를 맡긴 여의(女醫)였다. 유학자의 세상, 그것도 남성 위주의 조선 사회에서 여의 대장금은 어떻게 중종의 신뢰를 얻었을까. 실록은 치료에 관한 세세한 부분은 밝히지 않았으나 대장금이 중종과 얼마나 밀착해 그의 총애를 받았는지에 대해선 기록을 남겼다.

여의가 처음 생겨난 때는 태종 6년. 허도(許)가 건의했다.

"그윽이 생각건대,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으로 하여금 진맥하여 치료하게 하면, 혹 부끄러움을 머금고 나와서 그 병을 보이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여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원하건대, 창고(倉庫)나 궁사(宮司)의 동녀(童女) 수십 명을 골라 '맥경(脈經)'과 침구(鍼灸)의 법을 가르쳐서 이들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면, 거의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태종이 제생원(濟生院)에 명해 동녀에게 의약을 가르치게 한 게 여의의 시작이다. 교육을 마쳐도 여의가 되는 건 극소수에 불과해 태종 18년 기록에 따르면 7명에 그쳤다. 의녀는 그 능력에 따라 내의녀, 간병의녀, 초학의녀 등 세 등급으로 나뉘었고, 수업 연한은 3년이었다. 내의녀는 진료와 치료를 전문으로 한 사람이다. 간병녀는 간병을 주로 담당했는데, 여기엔 조산의 역할이 포함됐다. 초학의녀는 간병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했다.

여의의 지위는 역대 왕의 관심도에 따라 부침이 심했다. 전문성을 위주로 진료하는 여의들을 창기(娼妓)와 같은 자리로 끌어내린 건 연산군이다. 연회에 내의원 의녀를 부르면서 '약방기생'으로 만든 것이다. 이후 사대부의 잔치나 관원들의 유희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여의의 제자리 찾기는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의녀에 대한 중종의 대우는 파격적이다. 중종 5년엔 연산군 때 생긴 폐습을 없애려고 관원의 연회에 의녀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는 아마 중종과 밀접했던 장금의 건의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강이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힘든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중종 30년엔 의녀를 희롱한 사건으로 대사헌 허항이 체직(遞職·벼슬이 갈리는 것)할 것을 왕에게 요청한다. 혜민서 훈도들이 돈을 받고 자신의 형인 제조 허흡이 통솔하는 여의들을 휴가를 보내는가 하면 술을 먹이고 희롱해 대사헌의 체면을 구겼다는 내용이고 보면 법을 시행한 이후에도 약방기생이란 오명은 계속된 듯하다.

"내 증세는 장금이 안다"

▲ 드라마 <대장금>의 장금(이영애). 세간의 지적과는 달리 대장금은 실제로 중종의 총애를 받던 여의였다. ⓒMBC

중종과 장금에 대한 기록은 1515년 중종 10년 3월 8일에 처음 나타난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그해 2월 25일 원자인 인종을 생산하고 위독해졌다가 숨을 거둔다. 이때 장금은 인종마저 위독해지는 상황에서 그를 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하지만 관례대로 대간은 장경왕후의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를 "의녀 장금의 죄가 의원 하종해보다 더 심하다"라고 밝히며 벌을 건의한다. 하지만 중종은 그 건의를 물리친다.

1533년 1월 9일 중종은 종기를 앓아 고생한다. 이때 내의원은 장금에게 치열한 '견제구'를 던진다. 내의원 장순손은 말한다. "대체로 종기를 앓을 때는 젊은 여자로 하여금 가까이 모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종기가 터진 후에도 더욱 부인들을 기피해야 미더운 일입니다"라면서 장금의 접근 자체를 막고 나선다. 그런 견제 때문이었는지 장금의 진료 기록은 중종의 죽음 문턱에서야 나타난다.

실록에 장금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나타나지만 의료와 관련해 분명한 사실은 중종 39년 10월 26일의 기록이다. 중종이 미리 문안하지 말라고 한 탓인지 정원이 미안해하면서 증세를 묻는다. 중종은 건조한 말투로 대변이 어려워서 처방을 의논하고 있다고만 말한다. 이어서 나온 기록은 놀랍다. 다름 아니라 내의원 제조가 묻는 것이다. 내의원 제조는 알다시피 임금의 진료를 담당하는 자리다. 의료 총괄 책임자가 임금의 증세를 진료하는 게 아니라 되레 문안하는 자리로 역전되면서 장금에게 증세를 물어본 것이다. 중종은 답한다.

"내 증세는 여의가 안다."

여기서 여의는 장금이다. 더욱 놀라운 기록이 이어진다. 당시 중종이 앓은 질병은 산증(疝症)이다. 산증은 하복의 통증이 위로 치받쳐 오르는 것이다. 중종은 자신의 병에 대해 설명한다.

"요즈음 날씨가 갑자기 한랭해져서 많은 한기가 배로 들어가서 냉기가 쌓여 대소변이 편안하지 못하다." "그날 밤 장금이 나와서 말하기를 지난밤 왕이 삼경에 잠이 들고 오경에 다시 잠이 들고 소변을 보았으나 대변은 삼 일째 불통이다."

밤을 새우며 진료한 사람은 바로 의녀 장금이었던 것이다.

의관들은 증세에 맞춰 여러 날에 걸쳐 반총산이란 처방을 투여한다. 하지만 차도가 없자 극적인 처방을 구사한다. 밀정(蜜釘)을 사용한 것이다. 밀정은 밀전도법을 이야기한다. 관장법을 통해 대변을 배출하는 것이다. 피마자기름이나 통유탕 등 대변을 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다 직접 관장을 하게 된 것은 임금과 장금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10월 29일 실록은 임금이 대변을 통했다고 기록했다. 장금은 이렇게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치료하면서 왕을 모신 유일한 의녀였지만, 이후 역사 어디에도 그에 관한 기록은 없다.

찬 음식 즐긴 중종

제주도 의녀들의 기록은 특별히 기록돼 있다. 세종 13년 제주 의녀 효덕은 안질과 치통을 잘 치료해 세종이 쌀과 장 등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록엔 성종 23년에 임금이 치통을 앓자 이비인후과의 유명한 의사를 초빙하라는 명을 내린다. 치통 치료에 일가견을 지닌 제주 의녀 장덕이 죽은 뒤라 그 제자인 귀금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본다. 제주도 의녀가 몇 대에 걸쳐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조선 왕의 평균 수명을 보면 왕 노릇이 생명을 단축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대체로 왕실에서 자란 사람들은 질병에 자주 걸리고 단명하며, 반정을 통해 왕이 되거나 외부에서 갑작스럽게 왕이 된 이들은 질병도 없고 장수하는 경향이 강하다. 중종은 반정으로 왕이 된 대표적인 경우다. 중종은 40세에 이르러서야 종기를 앓아 치료받은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어깨 부위가 아프고 붓는 종기가 생긴 것이다.

합병증으로 기침과 치통까지 생기면서 치료 순서를 고민하다 종기를 먼저 치료하기로 결정하고 '천금루노탕'이란 처방을 복용하고 종기를 침으로 터뜨린다. 종기는 의외로 곪지 않아 태일고, 호박고, 구고고 등 고약을 붙인다. 거머리로 하여금 빨아먹게 하고서야 종기가 호전된다. 거의 6개월이 지나서야 종기가 나아지면서 의관들에게 상을 준다.

이후 중종은 건강을 회복하고 임종을 맞는 재위 39년, 57세 되던 해에 다시 질병을 호소한다. 39년 1월 17일 기록을 보면, 치통은 나았지만 잇몸이 아직 아프고 기침병도 생겨 경연(經筵)을 열지 못했다. 기침병을 치료하는 처방은 '삼소음'이다. 삼소음은 기운을 북돋우는 사군자탕을 기본으로 감기약을 첨가해 위장의 온기를 북돋우면서 가슴을 시원하게 하고 기침을 진정시키는 처방이다. 몇 차례 복용 후 기침 증세가 호전되자 찬 음식을 피해야 재발이 없을 것이라는 건강 지침을 준다. 거꾸로 해석하면 중종은 찬 음식을 즐겼다는 얘기다.

4월이 되면서 중종이 다시 호소한 증세는 어깨 통증이었다. 구고고 등 고약을 붙여보고 찜질도 하면서 치료하지만 신통찮은 효험으로 고민한다. 중종은 오목수(五木水)로 치료하고자 반문한다. 오목수는 5종류의 나무에서 나오는 물을 말한다. 곧 홰나무(槐), 뽕나무(桑), 복숭아나무(桃), 버드나무(柳), 느릅나무(楡) 혹은 닥나무(楮) 등에서 나오는 수액에 물을 타서 목욕하거나 오목을 끓여 목욕물로 사용하는 처방인데 효험이 좋았던 것 같다. 중종은 덧붙여 오목수로 목욕하면서 쉬고 싶다는 뜻을 은근히 피력한다.

또 다른 기록은 오목수의 효능이 상당히 보편적이었음을 나타낸다. 숙용 김 씨가 온천수로 목욕하러 가고자 청하자 이렇게 이른다.

"이제 과연 농사철인데 왕자군이 선왕의 후궁을 모시고 왕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목수와 벽해수(바닷물)로 목욕을 하면 병을 고칠 수 있으니, 내려가지 말라."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중종의 건강학 ② 중종은 어떻게 조광조를 죽였나?


똥, 오줌을 약재로?

10월 24일부터 중종은 대변이 막혀 곤욕을 치른다. 10월 29일 대변이 통하자 한숨을 돌렸지만 임종의 그림자가 다가온다. 11월이 되자 심열과 갈증을 호소한다. 혀가 갈라지고 입이 마르고 손바닥에도 번열이 있자 청심환, 생지황고, 소시호탕 등 다양한 처방을 통해 치료한다.

재위 39년 11월 4일 의관들은 아주 특별한 약물을 처방한다. 야인건수(野人乾水)다. <동의보감>은 이 처방을 이렇게 설명한다.

"성질이 차서 심한 열로 미쳐 날뛰는 것을 치료한다. 잘 마른 것을 가루로 만들어 끓는 물에 거품을 내어 먹는다. 남자 똥이 좋다."

11월 8일 박세거가 들어가서 임금을 진찰하고 이렇게 적었다.

"갈증이 줄어들고 열은 이미 줄었다."

중종도 이런 효험을 인정했다.

"전일 열이 올랐을 때 야인건수를 써서 열을 물리쳤다. 혹시 밤중에 열이 심하면 쓰려고 하니 미리 준비해서 들여오라 했다."


야인건수는 전염병에 열이 심할 때 먹으면 관 속에 든 사람도 살아 나온다고 해서 파관탕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판소리 명창들이 득음을 하기 위해 목에서 피가 나오고 열이 나면 절간의 똥물을 길어다 끓인 다음 마시고 치료했다는 이야기도 같은 논리선상에 있다.

이 처방의 뿌리엔 쓸개즙이 있다. 음식을 먹으면 위장에선 갖가지 음식 색깔이 버무려지지만 대변을 보면 노란색이다. 노란색은 쓸개즙이 희석됐을 때 나타나는 색이다. 황달이 생겨 쓸개즙이 간으로 역류해 혈액 속에 퍼지면 노란색이 되는 것과 같다. 똥 속엔 분해된 쓸개즙의 일부가 포함돼 열을 식혀준다. 오월(吳越) 전쟁 때 월나라 왕 구천이 와신상담했다는 고사는 스트레스로 인한 열을 쓸개즙을 맛보면서 식혔다는 방증이다.

오줌도 약으로 쓰였다. 환원탕이란 이름으로 처방됐다. 송시열이 어린아이의 오줌을 받아 마셔 건강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오줌을 달여 만든 약을 추석(秋石)이라고 하는데 정력 보강에 좋은 약재다.

추석도 음련추석과 양련추석으로 나뉘어 음기와 양기가 허약한 사람을 각각 보충한다. 특히 약효가 좋은 것은 7세 이전 어린아이의 오줌이다. 궁중 내의원에선 관상감, 봉상시, 사역원에서 교육받는 어린아이를 동변군으로 차출해 소변을 받아 한약재 가공 재료로 사용했다.

중종은 8회에 걸쳐 야인건수를 복용한다. 그때마다 열이 잡히면서 치료 성과를 올린다. 죽기 전날까지도 야인건수와 청심원을 처방한다. 하지만 마지막 날은 열이 잡히지 않으면서 불알이 오그라졌다. 죽음을 앞두고 생명력이 다했음을 기록한다.

치통엔 엽기적 처방

치과가 없었던 옛날엔 치통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치료했을까. 실록은 중종이 치통으로 고통받았음을 여러 차례 기록했다. 재위 34년 중종이 치통 때문에 영정을 맞는 일을 세자에게 하도록 맡긴다. 39년 다시 치통이 말썽을 부리자 의관과 치통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한다.

"나에게 본디 이앓이 증세가 있는데 아픈 것은 빠졌으나, 지금 있는 이가 또 아프고 흔들린다. 이 이가 빠지면 음식을 먹기 어렵겠고 잇몸도 붓고 진물이 나오는데, 약으로 고칠 수 있는가?"

중종은 원인도 스스로 분석했다.

"감기엔 반드시 열기가 생기므로, 이가 움직일 때 잇몸도 헐고 열이 나니 감기 때문에 일어난 듯하다. 잇몸이 조금 붓고 진물이 나는데 어떻게 하면 이를 튼튼하게 할 수 있겠는가."

강현이 대답한다.

"먼저 옥지산으로 양치질한 다음에 청위산을 복용하고 뇌아산을 아픈 이 겉에 바르고, 또 피마자 줄기를 아픈 이에 눌러 무는데 뽕나무 가지를 써도 됩니다. 다만 뇌아산에는 양의 정강이뼈를 넣으므로 쉽게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잇몸엔 치조골 인대가 붙어 있다. 인대는 뜨거우면 늘어나 결합이 단단하지 못하게 되면서 구강의 노폐물이 이와 잇몸 사이를 채우면서 느슨해진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염증이 잘 생기는데, 이것이 풍치의 원인이다. 중종은 이런 원리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동의보감>은 잇몸이 패어 이뿌리가 드러나고 치아가 흔들리는 현상을 다시 튼튼하게 되돌리는 처방을 제시한다. 양의 정강이뼈와 몇 가지 약재를 조합한 '엽기적' 처방이다. 그러나 <중약대사전>에 보면 양 정강이뼈의 화학적 성분은 인산칼슘이 절반이고 불소가 중요한 성분으로 포함돼 있다고 분석한다.

치아를 구성하는 주요 성분이 인산칼슘이고 충치를 막고 보호하는 불소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현대 과학으로 분석해도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치아문'에는 버드나무 껍질로 치통을 치료하는 조문이 나온다. 버드나무 껍질이나 잎을 끓여서 머금었다 뱉으면 어금니의 아픈 통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적었다.

아스피린의 원료는 살리실산인데, 이는 버드나무 껍질에서 추출해 얻을 수 있다. 진통제의 원조가 아스피린인 것을 보면, 조상의 지혜가 현대 과학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임플란트로 빠진 치아를 보강하겠지만 옛날엔 어떤 방식으로 치료했을까. 낙치중생방(落齒重生方)이란 조문에는 빠진 치아를 재생하는 엽기적인 처방이 등장한다. "치아를 다시 나오게 하는 데는 숫쥐뼈를 가루로 만들어 쓴다"고 하며 뼈를 발라내는 방법까지 기재하고 있다("쥐를 잡아 껍질을 벗긴 다음 노사라는 약물을 문지르면 3일이 지나서 살은 다 헤어지고 뼈만 남는다"). 또 한 가지 처방이 기재돼 있다.

"눈을 뜨지 못한 쥐새끼 서너 마리를 5가지 약재를 넣고 빚어서 사용한다."

쥐가 이빨에 특징을 지닌 설치류임을 감안한다면 한의학이 약물을 쓰는 원리, 즉 살아가는 생기를 빌려 약물로 쓴다는 원리가 반영된 처방인 셈이다.

조광조를 죽이다

▲ 조광조(1482~1520년)

중종의 총서는 중종 시대를 이렇게 평가했다.

"중년에는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겨 하여 옛날 정치에 뜻을 집중하였으나, 신진(新進)만을 전임(專任)하였으므로 일이 과격한 것이 많아 뜻을 능히 성취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비록 여러 차례 간사한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하였으나, 능히 다시 개오(改悟)하였으니 학문의 힘에 힘입은 것이었다."

조광조는 중종 시대의 아이콘이다. 앞에서 언급한 신진의 대표 주자는 조광조였다. 실록 14년 12월 16일 중종은 조광조를 사사(賜死)한다. 그 배경은 이러했다.

"지난날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 등이 모두 시종으로 있으면서 성리의 학문을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진강하여, 내 그들의 사람됨이 나의 정치를 도와서 이루어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좋은 관직을 가려서 임명하고 직급을 뛰어넘어 승진시켜서 몇 년 안 되는 사이에 모두 높은 자리에 발탁했으니, 내가 그들을 대우함에 부끄러움이 없다 할 만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조광조 등이 서로 어울려 결탁해서 자기에게 붙는 자는 퇴출시키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하며, 명성과 위세를 서로 의지하여 힘 있고 중요한 자리를 틀어잡았다. 조종의 법도는 지킬 것이 못 된다 하고 원로의 말씀은 쓸 가치가 없다고 하며, 후배들을 유인해서 과격한 언행이 버릇이 되도록 하고, 심지어 일을 의논할 때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가 있으면 반드시 극구 배격하고 막아서 상대를 꺾고 자기를 따르게 하니, 국론이 뒤집히고 나라 정치가 날로 잘못되었다. 조정 신하가 가만히 분개하고 개탄하는 자가 많았다."

사관의 평가는 약간은 씁쓸한 어조다.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사약을 내리는 장면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했다. 압권은 역시 당시 38세였던 조광조의 사사 장면이다. 사약을 받자 자신의 사사가 진실인지를 알기 위해 의금부 도사 유엄에게 심정(沈貞)의 지위를 묻는다. 그러고는 거느린 사람에게 말한다.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어라. 먼 길 가기 어렵다."

실록엔 '거듭 독주를 가져다가 많이 마시고 죽었다'라고 적혀 있다. 거듭 마셨다는 것은 사약을 먹었는데 죽지 않은 것이다.

다른 기록에 이 부분을 보충하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사약을 마셔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나졸들이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고 했다. 그러자 "성상께서 이 머리를 보전하려 사약을 내렸는데 어찌 너희들이 감히 이러느냐"라고 소리 지르며 독한 술을 더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다.

두 얼굴의 약재, 부자

당나라 고종대인 653년에 제정된 당률에선 대표적인 독약으로 짐독, 오두, 부자, 치갈(治葛)을 손꼽았다. 오두와 부자는 같은 종류의 독성 식물이다. 오두는 같은 식물의 모근이고 부자는 그 곁가지인 자근에 속한다.

짐독은 무엇일까. 짐새의 독인데 중국 남해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새의 털을 술에 담가두면 독주가 되어 치명적인 독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본초강목>에는 꿩과에 속하고 형태는 공작과 비슷하며 목은 검고 부리는 붉으며 뱀을 통째로 삼키며 이 새가 물을 마신 곳에선 모든 벌레가 전멸한다고 적혀 있다. 오직 코뿔소의 뿔만이 이 짐독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하나 그 실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아 다만 독살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전해질 뿐이다.

오두와 부자는 잘 알려져 있다. 부자의 맹독성은 예전부터 사냥에 이용돼왔다. 북반구의 원시민족은 부자 뿌리에서 독성을 추출해 화살 독을 만들어 새나 짐승을 잡았다. 중국에선 그 즙을 달인 것을 사망(射罔)이라고 불렀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독이 사냥한 새와 짐승에서 분해돼 저독성으로 바뀌며 조리하면 무독성이 된다는 것이다. 북반구에서 자라며 남방에선 자라지 않고 독성도 거의 없어진다. 남미 인디언은 화살 독으로 큐라레를 사용했다. 방기과의 수지상 흑색 덩어리인데 약물로 개발돼 골격근 이완제와 전신 마취제의 보조제로 사용된다.

부자는 그 독성으로 인해 '독의 꽃' '악마의 뿌리' '살인자'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골짜기를 못 건넘'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얻기도 했다. 서양에선 아코니틴으로 불리는데 그리스의 아코네라고 하는 마을에서 따온 이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아코니틴에 의해 사망했으며, 영웅 테세우스를 독살하기 위해 메디아가 사용한 약물도 이것이다.

부자는 한방에서 쓰는 가장 힘 있는 처방인 팔미지황환에 들어가는 중요한 약재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양기가 부족해 야간에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에 좋은 처방이다.

조광조가 사약으로 먹은 부자나, 부자가 들어가는 팔미지황환이라는 보약 사이의 간극도 큰 것이 아니다. 똑같이 부자가 들어간다. 사약의 부자는 날것이고 팔미지황환에 들어가는 부자는 '포제'라고 해서 통째로 구워 오래 숙성한 것이다. 조광조에 대한 퇴계의 평가도 부자와 닮은 측면이 있다.

"조광조의 타고난 성질은 신실하고 아름다우나 학문이 충실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치에서 시행한 것이 사리에 지나쳐 합당하지 못한 것이 있어 마침내 일이 실패했다. 만약에 학문이 충실하고 덕성과 재능이 성취된 이후에 정사를 담당하였으면 어디까지 갔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세종의 건강학 ① 세종은 왜 무당의 푸닥거리에 집착했나?


조선 제4대 왕 세종(1397∼1450년, 재위 1418∼1450년)은 인간적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인권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죄수라도 인간적 처우를 해야 한다는 인권주의자였다. 죄수들이 겨울 추위에 얼어 죽을 것을 염려해 온옥(溫獄)을 만들라고 형조에 명을 내릴 정도였다.

간통의 경우에도 처벌 위주가 아니라 인간적 차원에서 적절한 형벌만 내렸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 15년 12월 기록을 보자.

"우리나라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윤수(尹須)·이귀산(李貴山)의 아내가 다 음탕하고 더러운 행위로 일이 발각되어 사형을 받았으니 악행을 징계하는 법이 엄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감동·금동·연생 등(의 유사한 사건)이 잇따라 나왔으니, 남녀 사이의 정욕을 어찌 한갓 법령만으로 방지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에 대한 연민

조선의 이념인 유학은 질병이나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철저히 내면을 성찰하고 욕망을 억제해 마음을 닦도록 요구했다. 양심(養心)이나 수심(修心)의 방식으로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라는 도덕적 메시지였다. 하지만 종교나 무속은 다르다. 불가항력적인 재앙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는 정서적 위안, 안심(安心)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질병이라는 현실 앞에선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보통 사람이었다. 특히 질병 치료에선 사대부와 유학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사찰에 가서 약사불(藥師佛)에 비는 건 물론, 도가의 기문둔갑술을 쓰고 무당의 푸닥거리로 질병을 치료하려 했다.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의 불화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종의 외삼촌 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 사형제를 죽였고, 한술 더 떠 후궁들과 여성 편력을 일삼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대립은 어린 세종에게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더 깊게 했다.

세종 2년 5월 27일 원경왕후는 학질을 앓았다. 태종은 질병의 원인을 담담히 설명한다.

"성녕대군(태종의 4남)이 죽은 뒤부터 상심하고 슬퍼하며 먹지를 않더니 오늘에 이르러 학질에 걸렸다."

실록은 이후 세종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사랑으로 세종은 궁궐을 비우고 국정을 내팽개친 채 어머니 간호에만 집중한다. 실록은 다만 행선지에 대해선 언급했다. 개경사라는 절에 머물다 오부, 최전의 집에 머물고 이궁(離宮) 남교(南郊) 풀밭에서 지내는가 하면 갈마골 박고의 집, 송계원 냇가, 선암 동소문, 곽승우 이맹유의 집 등으로 옮긴다.

'학을 뗀다'는 옛말이 이런 이상한 행동에 대한 해답이다. 세종은 학질을 떼기 위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머문 것이다. 태종은 이에 대해 분명히 언급한다.

"내가 대비와 주상의 간 곳을 몰랐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주상이 대비의 학질을 근심하여 몸소 필부의 행동을 친히 하여 단마(單馬)로써 환자 두 사람만을 데리고 대비를 모시고 나가 피하여 병 떼기를 꾀하니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문제는 치료 방법이었다. 실록은 덧붙인다.

"6월 6일 임금과 양녕, 효령이 대비를 모시고 개경사에서 피병할 때 술사둔갑법(術士遁甲法)을 써서 시위를 다 물리치고 밤에 환관 2인, 시녀 5인, 내노 14인만 데리고 대비를 견여(두 사람이 앞뒤에서 메는 가마)로써 모시어 곧 개경사로 향하니 밤이 삼경이라 절에 가까이 이르러 임금이 다만 한 사람만 데리고 먼저 본사에 가서 있을 방을 깨끗이 쓸고 돌아와 대비를 맞아 절에 머문 지 사흘이 되도록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6월 11일엔 도류승 14인을 모아 도지정근(桃枝精勤)을 베풀었는데, 이는 복숭아 가지를 잡고 기도하는 도교 의식이었다. 6월 14일엔 아예 무당을 시켜 성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학질이 낫기를 기원했다.

세종이 안타깝게 병구완을 했지만 대비는 학질을 세 번 반복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실록은 임금이 음식을 먹지 않은 지 수일이었으며, 머리 풀고 발 벗고 부르짖어 통곡했다고 그 슬픔을 기록했다. 의약과 무속, 불교 사이에서 당연히 이성적 선택을 할 것으로 보인 세종도 어머니의 학질이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선 무속에 더 집착한 보통의 남자였다.

ⓒSBS


치료 위해 불교, 무속 집착

세종의 무속에 대한 집착은 재위 후에도 계속되었다. 결국, 세종 20년 사간원에서 푸닥거리를 중지할 것을 간언한다.

"전번에 거동하시다가 환궁하시던 날에 신들린 무당으로 하여금 길옆에서 음사를 베풀어 대소신료들이 보고 듣는 것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세종의 반응은 되레 한술 더 뜬다.

"그렇다. 본궁에서 베푸는 음사가 매우 많았으므로 이후로는 마땅히 은밀한 곳에서 행하게 할 것이다."

세종 24년의 기록은 우리를 더욱 난감하게 만든다. 세종은 승정원에 이렇게 지시한다.

"무릇 사람의 수종다리는 양기가 막힌 데서 말미암으니, 만약에 주술(呪術)을 행하여 음기가 속으로 들어오게 하여 음양이 서로 화하게 하면 혹 병이 낫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내가 수종다리의 병이 발생하자, 한 주술 하는 소경을 불러 다스리게 하였더니 조금 나았다. 비록 이것으로 쾌히 낫지는 못하였으나 주술에 힘입어 삶을 얻은 것이니, 그 소경에게 옷 한 벌과 쌀 2석을 하사하라."

조선의 왕은 유학의 수호자였지만, 세종은 한평생 불법(佛法)을 통해 마음의 안식을 찾고자 했다. 자신이 가장 절절히 사랑했던 어머니의 대비 능에 절을 지으려고 일대 논쟁을 벌인다. 상대는 존경하지만 두려워하는 아버지 태종이었다.

"주상이 산릉에 절을 설치코자 하나 불법은 내가 싫어하는 바이다. 만일 이 능에 내가 들어갈 터라면 설치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

이렇게 태종이 따로 능을 쓸 거면 절을 만들고 부부 합장을 하려면 쓰지 마라는 엄명을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태종도 세종의 불심을 막지 못했다. 세종 30년 8월 5일엔 아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궁 옆에 불당을 설치해 부왕의 쾌유를 빌었으며, 32년엔 형 효령대군의 집으로 옮겨 불교 의식인 공작제를 지냈다. 32년 2월엔 스님 50명을 모아 임금 앞에서 질병의 쾌유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린다. 병의 고비마다 유교적 가르침보다는 불교적인 기도나 무속을 선호했던 것이다.

말년엔 실지(實地)의 일에 쓸모없는 선비를 뜻하는 우유(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라는 말로 유학자들을 폄하하자 사관이 세종의 인생역정을 평가한다.

"유학을 숭상하여 학문을 좋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사를 모아 강관에 충당하고 밤마다 3, 4고가 되어서야 비로소 취침하였다. (…) 중년 이후에 연속하여 두 아들을 잃고 소헌왕후가 별세하니 임금이 그만 불교를 숭상하여 불당을 세우게 하였다."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세종의 건강학 ② 세종은 '고기 마니아'? 진실은 이렇다!


세종은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한 탓에 비만했다. 즉위년 10월 9일 태종은 유시(諭示)한다.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肥重)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 또 문과 무에 어느 하나를 편벽되이 폐할 수는 없은즉, 나는 장차 주상과 더불어 무사를 강습하려 한다."

살찌고 무겁다는 건 사실이었다. 일부 역사 연구가들은 세종이 대단한 대식가이고 살이 쪄서 소갈(消渴)증이라는 당뇨 증상을 앓았다고 주장하지만, 글의 의미를 짚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흔히 드는 예는 태종이 "세종이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에도 권도를 좇아 상중이라도 고기를 먹도록 하라"는 유언을 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실제로 허손(虛損)의 병에 걸려 대신들이 고기 들기를 권했다. 허손은 피로가 극심해 생기는 질병이다. <황제내경>에선 허손을 이렇게 규정한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로하면 몸의 원기가 줄어들고 음식물의 기가 부족해져서 상초(上焦)가 잘 작용하지 못하며, 하완(下脘)이 통하지 못하므로 속의 위기가 더워지면서 그 열기가 가슴을 훈증시키기 때문에 속에서 열이 난다."

세종 4년 임금이 허손 병을 앓은 지 여러 달이 지났다. 병세는 점점 깊어 약의 효험이 없었다. 태종의 상중에 고기 없는 소찬만 여러 달 먹다 보니 음식물의 기가 부족해져 생긴 증상이었다. 대식가여서 고기를 많이 먹다 며칠 굶어 고기를 찾은 게 아니라 상중이어서 고기를 절제한 게 여러 달 되다 보니 원기를 보충할 목적으로 권한 게 진실인 것이다. 덧붙이는 세종의 말은 대식가라는 가설과 거리가 멀다.

"내가 본디 병이 없고 늙지도 어리지도 않으니 어찌 감히 뒷날에 병이 날까봐 고기를 먹겠느냐."

세종은 재위 초반까지만 해도 건강에 자신이 있었지만 29세였던 재위 7년에 이르자 관을 짜서 준비할 정도로 심한 병에 걸린다. 세종 31년 11월 15일 기록은 당시 상황을 재론한다.

"임금이 을사년에 병이 심하여 외간에서 관곽을 짜기까지 했는데 아직까지 무슨 병인지 모른다."

이는 세종 7년 7월 29일 임금이 몸이 불편해 여러 종친관이 정부 육조에서 문안했다는 말로 시작한다. 윤(閏) 7월 10일엔 두통과 이질을 앓았는데 7월 19일 중국 사신들이 들어와 임금의 얼굴을 보고는 얼굴빛이 파리하고 검게 변해 있어 병환이 심했다고 한다.

이때 진찰한 사람은 요동의원 하양이다. 진찰 결과는 이렇다.

"전하의 병환이 상부는 성하고, 하부가 허한 것은 정신적으로 과로한 때문이다. 그래서 맥이 (한 번 호흡하는 동안에) 4번씩 뛰어 평화한 맥과 같은 듯하나, 오른쪽 맥은 침(沈)하면서 활하고, 왼쪽 맥은 침하면서 허하다. 담(痰)이 가슴 사이에 쌓여 기운이 유통하지 못하고 수화(水火)가 오르내리지 못하니, 먼저 소담할 약을 복용하고 다음에 비위를 온화하게 할 약을 복용하고 조리할 약을 진어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진찰한 하양은 향사칠기탕(香砂七氣湯)과 양격도담탕(?膈導痰湯)을 합제(合劑)한 방문을 냈다.


심리적 火가 원인


재위 초반 인간으로서의 세종은 불행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는 물론이고, 외삼촌들의 떼죽음, 장인 심온의 죽음과 장모의 노비 전락은 엄청난 인간적 고뇌를 떠안아야 하는 고통이었다. 국상(國喪)의 장례식은 과로의 연속이었다. 3일장도 힘들다고 하는 판에 3년상을 치르는 건 엄청난 고역이다.

세종은 정종과 원경왕후, 태종에 이르기까지 국상을 거의 연속으로 치렀다. 상례의 고단함을 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평민들이 만사를 제쳐놓고 상제를 행하여도 3년 안에 병에 걸림을 오히려 면하지 못한다. 전하께서 소찬만 잡수시고 국정을 돌보면서 3년의 상제를 마치고자 한다면 병이 깊어 치료하기 어렵다."

대신들의 건의가 있은 게 재위 4년, 병이 난 시점이 재위 7년인 점을 감안하면 발병이 상례 끝에 맞춰진 셈이다.

세종은 유별나게 성실했다. 실록은 이렇게 적었다.

"즉위함에 미쳐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를 행하고 다음 경연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게으르지 않았다."

향사칠기탕이나 양격도담탕은 심리적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처방이다. 게다가 맥상이 침(沈)한 것은 원기가 쇠약해졌다는 증거다. 관을 짤 정도의 질병 이후 세종은 계속적으로 다양한 증상을 호소한다.

세종의 '소갈'은 당뇨인가?

소갈증과 안질은 세종이 가장 자주 호소한 질병이다. 소갈은 현대 의학의 당뇨와 연관해 생각하기 쉽지만 한의학에선 소갈을 소갈(消渴), 소중(消中), 소신(消腎)의 3가지로 나눈다. 소갈은 세종 재위 13년 3월 중국에 갈증을 없앨 약을 문의할 정도로 심했다.

재위 21년 세종은 하루에 마시는 물이 어찌 한 동이만 되겠느냐고 탄식한다. 소갈을 없앨 목적으로 처방한 음식은 흰 장닭, 누런 암꿩, 양고기다. 닭은 본래 삼계탕에 들어갈 정도로 속을 데우는 음식이고 꿩은 신맛이 있는 음식으로 갈증을 없애는 효능이 있다.

한의학의 논리로 보면, 양고기는 인체의 모든 곳에서 양적인 힘을 북돋워준다. 특히 시력과 청력, 폐의 호흡 능력을 키우는 데 효과가 있다. 사실 염소의 눈은 초점이 없는 원시다. 멀리 보는 능력이 강하다. 멀리 밝히는 양적인 힘이 크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시력을 좋게 하는 데는 양의 간으로 만든 '양간환'이 좋다고 <동의보감>에 나와 있을 정도다.

한의학은 질환에 좋은 음식을 추천하기보다 환자 자신에게 맞는 음식을 추천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세종은 몸이 차고 냉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앞에서 본 추천 음식이 모두 온기를 돋우는 음식이라는 공통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풍질(風疾), 풍습(風濕) 등 관절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번 온천을 갔고, 그때마다 효험이 컸다고 한다. 술은 특히 체온을 끌어올려 냉기를 없애는 중요한 약으로 쓰였는데 이직 등이 세종의 풍랭통을 치료하려고 강권한 점은 중요한 방증이다.

<동의보감>은 소갈을 이렇게 정의한다.

"심장의 기운이 약해져 열기가 올라오는 것을 적절히 발산하지 못하면 가슴속이 답답해지고 입술이 붉어진다. 이렇게 된 사람은 목이 말라 물을 많이 마시고 소변을 자주 보는데 양은 적다. 이런 증상을 격소라고 하는데 백호가인삼탕이 좋다."

소변을 자주 보고 시원하지 않은 증상은 임질이다. <동의보감>은 이 병에 대해 "심신의 기운이 하초에 몰려 오줌길이 꽉 막혀 까무러치거나 찔끔찔끔 그치지 않고 나온다"고 풀이했다. 일부 호사가들이 말하는 염증성으로 생기는 성병 후유증이 아니라 신경을 쓰거나 체력이 떨어지면서 물총처럼 소변을 짜내는 힘이 떨어져 아랫배 근육이 켕기는 증상을 말한다. 실제로 세종이 말을 타고 능을 다녀온 후, 자신이 말고삐를 잡고 움직일 때와 다른 사람이 고삐를 잡았을 때를 비교해 말고삐를 놓고 움직일 땐 임질 증상이 없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피로감이 원인인 임질이었다.

요동의원 하양의 진찰을 받고 세종 자신이 원민생이라는 사람을 통해 물어본 처방은 죽엽석고탕이다. 백호탕이나 죽엽석고탕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약물은 석고다. 석고는 하얀색 때문에 백호로 불리는데 열을 꺾는 강렬한 약성이 호랑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간적 고뇌를 비롯한 번민은 모두 화(火)라는 개념에 포함된다. 심리적 화가 바로 소갈을 유발한 가장 큰 원인이다. 정신이 고뇌를 승화해 인격적 완성은 이뤘을지 몰라도 신체가 받아야 할 부담은 소갈증이 된 것이다. 




[낮은 한의학] 세종의 건강학 ③ 세종의 죽음, 진실은 이렇다!


세종을 평생을 두고 괴롭힌 건 안질이었다. 세종 23년 4월 실록은 그가 안질을 얻은 원인을 이렇게 기록했다.

"당시에 임금이 모든 일에 부지런하였고, 또한 글과 전적을 밤낮으로 놓지 않고 보기를 즐겨 하였으므로 드디어 안질을 얻었다. 증상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픈 통증이 있었다. 재위 21년에도 지난봄 강무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眼膜)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이내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다."

세종의 안질에서 공통점은 안구에 통증과 건조한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안과 질환 중 통증이 있는 질환은 많지 않다. 건조감이 있는 건 눈물이 마르거나 결막염을 앓았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며 소갈의 후유증으로 생기는 신생혈관증과는 구별된다. 23년의 기록에 안질을 얻은 지 10여 년이 됐다고 한 점으로 추산하면 안질을 얻은 시기는 35세 전후이고 42세에 더욱 심해져 시력이 매우 나빠졌음을 알 수 있다. 세종 24년엔 안질로 인해 세자에게 정사를 위임하고자 결심한 것을 보면 고통이 아주 심했던 듯하다.

세종은 역시 과학자적 실험 정신이 강했다. 눈병을 고치려고 여러 온천의 물을 길어와 무게를 측정했다. 실록은 경기도 이천의 갈산 온천물이 가장 무거운 것을 알아내고 세종이 행차했는데 효험이 컸다고 기록했다. 세종은 평산, 온양, 이천 등지의 온천을 열심히 다니면서 지병인 허리와 어깨의 강직을 치료했다. 온천행을 너무 자주 하다 보니 지나친 비용과 민폐 때문에 가까운 경기도 주변 온천을 찾는 데 공을 들였다.

못 말리는 '온천 마니아'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몇 번이나 확인했다.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부평 주민들이 자신의 행차에 따른 번거로움으로 이른바 님비(NIMBY) 현상이 생겨서 숨겼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분노한 세종은 부평부를 현으로 강등했다. 반면 온양은 왕비가 중풍 요양차 들렀다가 완쾌하자 온양현에서 온양군으로 승격시켰다.

온천 마니아 세종은 재위 20년 경기도의 온천을 찾기 위해 특단의 유인책을 내놓는다. 경기 지역의 온천을 신고한 자에겐 후한 상을 내리고, 직위가 있는 자는 3등급을 올려주며, 백신(탕건을 쓰지 못했다는 뜻으로, 지체는 높으나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일 경우 7품직을 주고, 신고자가 주변인의 핍박을 받을 경우 타향으로 이주시키며 비옥한 토지를 주고 부역을 면제해 완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지봉유설>은 우리나라 온천 중 온양, 이천, 평산, 연안, 고성, 동래의 온천이 가장 유명하다고 기록했다.

여러 차례의 온천행 이후 안질이 악화하자 다시 찾은 곳은 초수(椒水)였다. 초수는 맛이 떫고 찬 물을 말한다. 물 밑에 백반이 있어서 차다고 하는데 화가 속으로 몰리면서 오한이 나거나 편두통이 있을 때 사용한다. 호초(후추)처럼 매운맛이 있다고 하며, 지금으로 말하면 탄산수 느낌이다. 물 밑의 백반 주성분은 알루미나이트다. 위궤양 치료제의 원료와 같으며 단백질을 강력하게 침전시킨다. <본경소증>은 이를 이렇게 분석한다.

"돼지 창자를 백반으로 문지르면 끈적한 액체가 없어지며, 상추를 절일 때도 백반을 넣으면 점액이 없어진다. 조직 속의 물을 없애 단단하게 강화한다."

재위 26년 세종은 충북 청주의 초수리를 지목해 행궁을 세우고 두 달에 걸쳐 치료한다. 과연 세종은 나았을까. 31년 기록은 안질이 이미 나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초수 덕분인지, 후일의 치료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풍질, 풍습으로도 고통

풍질, 풍습도 세종이 고통을 호소한 질환이다. 풍질은 중풍과 관련 있어 보이지만 세종 24년 기록에 따르면 건습(蹇濕)으로 표현했다. '건'은 절름발이, '습'은 관절염 증후를 가리킨다. 일종의 고관절염에 가깝다. <동의보감>에서 풍습은 "뼈마디가 안타깝게 아프거나 오그라들면서 어루만지면 몹시 아프다"고 정의했는데, 류머티스 관절염과 유사하다.

세종은 재위 13년 8월 18일 김종서를 불러들여 자신의 풍질에 대해 설명한다.

"내가 풍질을 앓은 까닭을 경은 알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경복궁에 있을 적에 이층 창문 앞에서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 아팠다. 이튿날 다시 회복되었다가 4, 5일을 지나서 또 찌르는 듯이 아프고 지금까지 끊이지 아니하여 드디어 묵은 병이 되었다. 그 아픔으로 30세 전에 매던 띠가 모두 헐거워졌다."

세종 17년엔 중국에서 온 사신의 전별연에 불참하며 다시 한 번 증상을 호소한다.

"내가 궁중에 있을 때는 조금 불편하기는 하나 예(禮)는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은 등이 굳고 꼿꼿하여 굽혔다 폈다 하기가 어렵다."

세종 21년엔 "내가 비록 앓는 병은 없으나 젊을 때부터 근력이 미약하고 또 풍질로 인한 질환으로 서무를 보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재위 24년엔 "나의 병은 만약 몸을 움직이고 말을 하면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심하므로 2, 3일 동안 말을 않고 조리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런 증상은 근막통증증후군처럼 다른 조직의 움직임에 통증을 유발하는 특이한 질환이다.

세종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처럼 많은 병에 시달렸다. 이런 증상을 종합해 분석하면 지금의 강직성 척추염 증상과 유사하다. 강직성 척추염은 척추 관절 뼈의 인대와 건(힘줄)이 유연성을 잃고 딱딱해지면서 운동성이 제한된다고 해서 붙여진 병명이다. 류머티스 관절염과 유사하며 보통 청년기 남성에게 발병하는 자가 면역성 질환이다. 인체의 조직과 기관, 조직과 조직 사이를 이어주는 결합조직에 잘 생기는 전신성 염증 질환이다.

주로 척추 관절을 중심으로 질환이 나타나지만 다른 결합 조직에도 침범한다. 눈에 공막염, 포도막염, 홍채염을 유발하고, 이밖에도 근막통증증후군, 천장관절염(고관절염과 유사)도 생긴다. 드물지만 강직성 척추염 말기엔 마미증후군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 저림과 무력증, 요실금 등을 호소하기도 한다.

직접적 사인은 중풍

세종이 불행한 가족에게서 얻은 슬픔과 괴로움을 위대한 영혼으로 승화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신체는 정확히 질병으로 보여준 것이다.

세종은 숨을 거두던 32년 "말이 잘 나오지 않는 증세도 조금 가벼워졌다. 그러나 기거할 때면 부축하여야 하고,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있어도 말이 떠오르지 않고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두근거린다"고 했다. 이는 언어 건삽증(혀가 굳어 말을 못하는 증상)과 심허(心虛) 증상으로 볼 수 있는데 심혈관계 질환에 의한 중풍 전조증에 가깝다. 이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점으로 미뤄보면 세종의 직접적 사인은 중풍일 가능성이 크다.



[낮은 한의학] 성종의 건강학 ① 

한명회의 압구정 기생놀음에 까칠한 성종은…


대군 칭호도 받지 못한 채 자산군에서 자을산군으로 봉해진 성종의 즉위는 장인 한명회와 관련이 깊다. 형 월산군과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당시 4세)이 있었는데도 성종이 왕위에 무난히 오른 배경엔 당시 최고 권력자 한명회의 존재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성종의 질병도 한명회와 깊은 관련이 있다. 성종을 평생 동안 괴롭힌 질환은 더위 먹는 병인 서증(暑症)이었다. 서증은 11세 무렵부터 시작돼 승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호소한 질병이다. 최초의 관련 기록은 성종 14년 6월 11일에 나타난다.

"정해년에 심한 더위를 먹어 여름만 되면 이 증세가 발병한다."

같은 해 6월 25일 기록엔 정희왕후의 제사를 임금이 지내지 못해 미안하다는 뜻을 밝힌다. 19년 6월 7일엔 의정부에서 더위 때문에 경연과 국정 활동을 중지했고, 25년엔 머리가 아프고 더위 먹은 증상이 있어서 경연을 취소했다.

서증은 한명회의 집에서 얻은 것이다. 성종 14년 6월 14일, 왕의 질병이 점차 나아지자 육즙을 먹어야 한다고 대신들이 강권한다. 성종은 자신의 병을 오래전에 얻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며 육즙을 거부한다.

"내가 어렸을 때 서질(暑疾)을 얻어 언제나 심한 더위를 만나면 그 증세가 다시 일어나니, 이것은 상당군(한명회)이 알고 있는 바이다. 내가 이 병을 얻은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됐다."

19년 6월 7일엔 이런 말도 한다.

"내가 어려서 한 정승의 집에 있을 때 더위를 먹어 인사불성이 되니, 대부인이 손수 목욕시켜 구료하여 다시 깨어났는데, 지금까지 더운 철을 만나면 항상 더위를 먹어 병이 날 것 같아 6월부터 7월까지는 경연에 나아가 정사 보는 것을 중단한 것이 오늘날 비롯된 게 아니다."

<동의보감>은 서증을 이렇게 정의한다.

"하지 이후에 열병을 앓는 것은 서병이다. 서란 상화(相火)가 작용하는 것이다. 여름에 더위를 먹으면 답답증이 생기고 말이 많아지며 몸에서 열이 나고 갈증이 나서 물을 들이켜고 머리가 아프며 땀이 나고 기운이 없어진다."

▲ 드라마 <인수대비>의 성종. ⓒJTBC

▲ 드라마 <인수대비>의 성종. ⓒJTBC


여기서 의미 있게 되새겨볼 것은 상화가 작용한다는 점이다.

상화란 신장(腎臟)에 소속된 명문(생명의 문 또는 생명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오른쪽 콩팥을 이르는 한의학 용어)의 화를 가리킨다. 한의학에서 심장과 신장에 대한 해석은 현대 의학의 그것과 다르다. 인체를 소우주라는 관점으로 확대할 때 뜨거운 심장은 여름이고 신장은 겨울이다. 겨울은 계절의 시작과 끝이다. 1월이 두 얼굴의 사나이인 야누스를 뜻하는 'january'인 점과 같다. 가장 차가운 계절인 겨울과 가장 뜨거운 계절의 시작인 봄의 기운을 아우른다는 의미다.

신장은 차가운 쪽과 뜨거운 쪽 양면이 있다. 차가운 쪽이 물을 상징하는 신수(진액을 이르는 한의학 용어)라면 신장의 뜨거운 부분인 명문은 보일러이며, 흔히 단전(丹田)이라는 붉은 밭과 맥락을 같이한다. 현대 의학의 부신(副腎)은 보일러와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명문은 생명의 문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체의 보일러다. 상화가 있어 더위를 잘 탄다는 점은 보일러가 지나치게 항진돼 잘 달아오르는 걸 의미한다.

인간은 체온 36.5도의 항온동물이다. 보일러도 있지만 반대편엔 에어컨도 있다. 에어컨으로 진정하는 힘은 약하고 보일러로 달아오르는 힘은 큰 게 곧 상화다. 성종은 에어컨인 신수는 약하고 보일러인 상화, 명문화는 강한 열성 체질이었다.

까칠하고 직설적인 성격

왜 하필 장인 한명회의 집에서 서증이 시작됐을까. 중국 원나라 때의 유명한 의사 주진형은 상화를 식욕, 성욕 등 인간적 욕망이 발동하는 것을 말한다고 규정했다. 인욕(人慾)이라고 하지만 사실 분노의 감정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성종은 한명회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한명회의 집에 있는 동안 성종은 사실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상화가 발동할 만큼 분노할 상황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한명회는 결국 성종 12년 6월 중국 사신과 압구정에서 잔치를 벌이려고 국왕의 차양을 빌리려다 실각한다. 성종은 이 일을 계기로 한강변의 정자 중 선대왕이 지은 두 곳을 제외한 모든 정자를 헐어버리라는 명을 내렸다. 차양막을 요청한 죄에 대한 벌치곤 과도해 보인다.

성종은 잘 흥분하고 예민했다. 재위 15년 1월 29일 권찬이 '주사안신환'을 처방해 올린다. 주사안신환은 열이 심하게 올라오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상과 떠도는 화를 진정시켜 정신을 편안케 하는 약이다. 경계(驚悸)증에 쓰는 약이기도 하다. 경계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을 말하는데, 중국 한나라 말의 의사 장중경은 경계의 원인을 "밥은 적게 먹고 물을 많이 마셔서 물이 명치에 있는 것이 심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으로 정의했다.

성종은 재위 19년 12월 21일 형인 월산대군 이정이 죽자 자신의 증세를 다시 토로한다.

"나의 증세는 본래부터 있었던 것으로 마음이 상하면 가슴이 아프다."

성종은 가뭄이 들면 자주 수반(水飯)을 들었다. 물에 밥을 말아먹는 수반은 자연재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신의 도덕성을 과시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속이 타는 체질의 특성이 드러난 것이다.

까칠하고 직설적으로 반응하는 특징은 실록에도 잘 나타난다. 원상(조선 시대에 왕이 죽은 뒤 어린 임금을 보좌해 정무를 맡아보던 임시 벼슬)인 김질이 "비위는 찬 것을 싫어하므로 수반이 비위를 상할까 염려합니다"라며 걱정하자 "경의 말과 같다면 매양 건식을 올려야 하겠는가"라고 성질 급하게 반박했다.



[낮은 한의학] 성종의 건강학 ② 

자타공인 '밤의 황제', 성종은 왜 色에 집착했나?


물에 밥을 말아 먹는 성종의 습관은 설사로 이어졌다. <단계심법>이란 책은 이렇게 지적한다.

"여름철에 찬 음식을 많이 먹거나 찬물이나 얼음물을 너무 자주 마셔서 토하거나 설사한다. 더위 먹은 데는 비위를 따뜻하게 하며 음식물을 잘 소화시키고 습(濕)을 없애며 오줌이 잘 나가게 해야 한다."

<위생가(衛生歌)>라는 양생법 책도 "사철 중에 여름철이 조섭하기 힘들다. 잠복한 음기 속에 설사하기 아주 쉽다"라고 적었다.

이런 지적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대가는 심한 설사로 나타났다. 성종 15년, 20년, 25년 여러 번 설사와 이질을 호소하는데 특히 25년 8월 22일엔 사형수의 처형과 관련한 조계(중신과 시종신이 편전에서 벼슬아치의 죄를 논하고 단죄하기를 임금에게 아뢰던 일)를 중단할 정도였다.

"지난밤과 오늘 아침에 뒷간에 여러 번 다녔기에 조계를 정지한다."

11월 20일엔 경연을 정지하면서 세자가 "주상께서 측간을 너무 자주 가셔서 피로해 계십니다"라며 우려한다. 성종이 재위 25년 심한 설사와 이질 직후 세상을 떠났다는 건 건강의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훈이다.

서증을 앓는 사람에게 주는 양생 지침을 동의보감은 이렇게 적고 있다.

"여름은 사람의 정신을 소모하는 시기다. 심장의 기운 심화는 왕성하고 신장의 기운 신수는 약해져 있다. 그러므로 성생활을 적게 하고 정기를 굳건하게 해야 한다."

또 다른 문장도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

"여름은 더위가 기를 상하게 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술을 마시거나 성생활을 하면 신이 상하여 죽을 수 있다."


왕후 3명, 후궁 9명

있으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쏘냐.
무단히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하 애닯구나 가는 뜻을 일러라.

사랑하는 연인의 애처로운 이별가인 듯하지만 성종이 아끼던 신하 유호인(兪好仁)을 떠나보내며 지은 시다. 얼마나 다정다감한 심성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멋쟁이가 왕이란 지존의 신분이 됐으니 여성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을까.

성종은 자타가 공인하는 '밤의 황제'였다. 오죽하면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란 별명이 붙었을까. 낮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였던 요순 임금처럼 정사를 돌봤고, 밤엔 중국 하나라의 걸 임금과 은나라의 주 임금처럼 주색잡기에 능한 임금이라는 뜻이다. 이런 별칭에 걸맞게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편찬 등 큰 업적을 남긴 반면, 거의 매일 밤 곡연(임금이 궁중 금원(禁苑)에서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 베풀던 소연)을 베풀고 기생들과 어울렸고 많은 후궁을 거느렸다. 25년의 재위 기간에 3명의 왕후와 9명의 후궁을 맞아들였고 16남 12녀를 거느렸다. 자식이 너무 많아 궁궐에서 다 기를 수 없게 되자 궐 밖 여염집에 살게 할 정도였다.

야사(野史)의 기록을 다 신뢰할 순 없지만 차천로가 지은 <오산설림초고>엔 성종과 관련한 기생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함경도 영흥의 명기로 '봄바람에 웃는다'라는 이름의 소춘풍(笑春風)이 성종의 부름을 받았다. 연회도 없이 조용하기만 한 궁중의 별전에서 성종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춘풍에게 술잔을 건네며 "오늘 밤은 너와 함께하고 싶은데 너의 뜻은 어떠하냐"고 물었다. 성은을 받으면 평생 다른 사람과 정을 나눌 수 없기에 독수공방이 싫었던 그녀가 거절의 뜻을 비치자 성종은 웃으면서 술과 시로 밤을 새웠다. 그의 풍류를 짐작케 하는 이야기다.

과도한 음주와 성생활

성종의 첫 번째 왕후는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한 씨였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두 번째로 숙의 윤 씨를 왕후로 맞았다. 윤 씨는 연산군의 어머니다. 성종은 궐 밖에서 형 월산대군과 어울리고 호색 기질을 계속 발휘하면서도 한편으론 정소용과 엄숙의 등 후궁을 가까이했다. 질투심에 불탄 윤 씨는 비상(砒霜)이 든 주머니와 책으로 방양이라는 저주 의식을 치르다 발각된다. 이후 잠잠해졌지만 중궁위(中宮位) 생일인 재위 10년 6월 1일 저녁, 문제의 사건이 벌어진다.

"지금 중궁(왕비를 높여 이르던 말)의 행실은 길게 말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내간에는 시첩(侍妾)의 방이 있는데, 일전에 내가 마침 이 방에 갔는데 중궁이 아무 연고도 없이 들어왔으니, 어찌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예전에 중궁의 실덕이 심히 커서 일찍이 이를 폐하고자 하였으나, 경들이 모두 다 불가하다고 말하였고 나도 뉘우쳐 깨닫기를 바랐는데 지금까지도 고치지 아니하고 나를 능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왕비로선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자신의 생일날 하례도 없이 옷 한 벌로 때우면서 다른 시첩의 방을 찾았으니 분통이 터지지 않았겠는가. 결국 폐비가 되어 쫓겨난 후 사약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연산군을 역사상 가장 타락한 왕으로 만든 폐비 윤 씨 사건이다.

체질적으로 신장이 약한 성종이 자신의 건강을 해치려고 성생활로 마음껏 역주행한 셈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술도 왕의 건강을 해쳤다. 공식적으로도 명나라와 일본의 사신들과 연회를 자주 벌였는데 회례연이 18회, 양로연이 21차례, 진연이 50차례로 술 마실 기회가 너무 많았다. 서병에 가장 해롭다고 경고한 음주와 성생활이 과도했다는 점은 반드시 짚어야 할 해악이었다.

동의보감은 정기(精氣)를 이렇게 정의한다.

"대체로 정(精)은 쌀 미(米) 자와 푸를 청(靑) 자를 합해서 만든 것으로 아주 좋다는 말이다. 사람한테 정은 아주 귀중하면서도 매우 적다. 사람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은 목숨이며 아껴야 할 것은 몸이고 귀중히 여겨야 할 것은 정(精)이다."

중국 고대 한의서 <난경(難經)>은 "심장엔 정이 3홉 있고 비장엔 흩어진 정기가 반 근 있으며 담에는 정이 3홉 들어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양생서는 "사람 몸에 정이 통틀어 1되 6홉 있다. 16세 남자가 정액을 내보내기 전엔 1되다. 정이 쌓여 그득 차면 3되가 되며 자꾸 내보내서 적으면 1되도 못된다"고 했다.

재미있는 구절도 있다.

"사람이 성생활을 하지 않을 때는 정이 혈액 속에서 풀려 있어 형체가 없다. 그러나 성생활을 하게 되면 성욕이 몹시 동하여 정액으로 되어 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쏟아낸 정액을 그릇에 담아 소금과 술을 조금 넣고 저어서 하룻밤을 밖에 두면 다시 피가 된다."

사실 보신(補身)과 보신(補腎)의 개념은 비슷하게 쓰였다. 보신은 몸을 보한다는 일반적인 뜻이지만 보신은 간, 심, 비, 폐, 신 중 하나인 콩팥을 보한다는 뜻으로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신장은 '생명의 정을 간직하는 부위로 정신과 원기가 생겨나는 곳'이며 '남자는 정액을 간직하고 여자는 포(胞), 즉 자궁이 매달린 곳'이라고 <난경>에선 풀이했다. 신장이 생명 활동을 영위케 하고 성행위와 생식 활동을 주관한다는 것은 보신(補身)의 핵심이 보신(補腎)이라는 말과 잘 통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게 맞다.

성종을 고통스럽게 한 또 하나의 질병은 치통이었다. 재위 11년 7월 8일 치통으로 고통받던 성종은 승정원에 하교해 중국 사신에게 치통을 그치게 하는 약을 물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운을 띄운다. 그러자 김계창은 단박에 "전하의 병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알게 할 수는 없다"고 거절한다.

7월 21일 우여곡절 끝에 사신들을 경회루에 불러 잔치를 벌이는데, 사신들이 술잔을 권하자 성종은 "사신들이 가르쳐준 곡소산을 먹고 치통이 좋아졌는데 술을 먹으면 심해질까 두렵다"고 사양한다. 사신들은 다른 처방이 있다며 안심시키고 술잔을 비우게 한다. 곡소산은 <동의보감>에 기재된 곡래소거산의 준말이다. 웅황, 유향, 후추, 사향, 필발, 양강, 세신 등이 들어간 약물로 약을 가루 낸 뒤 콧구멍에 불어넣어 치료한다.

성종이 앓은 치통은 그의 약점인 신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의보감>에서 치아는 뼈의 끝인데 이는 신장이 주관한다. <황제내경>은 신장이 쇠약하면 치아 사이가 벌어지고, 정기가 왕성하면 이가 든든하며, 허열(虛熱)이 있으면 이가 흔들린다며 신장의 허열이 병의 뿌리임을 강조했다.



[낮은 한의학] 성종의 건강학 ③ 선릉 환락가 불야성의 비밀


성종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세상을 떠나기 나흘 전 배꼽 밑에 작은 덩어리가 생겨 지난밤부터 조금씩 아프고 빛깔도 조금 붉다고 얘기하면서 전에 유사한 증세를 앓았던 이세좌를 불러 질병 치료 경험을 듣는다. "신은 이 병을 앓은 지 15년이 지났는데 별다른 치료 방법은 없고 다만 무쇠와 천년 된 기와를 달궈 그 부위에 찜질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답변을 듣는다.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의관 송흠이 진후하고 나와서 말했다.

"성상의 몸이 몹시 여위셨고, 맥도가 부삭하여 어제는 육지였는데, 오늘은 칠지였습니다. 그리고 얼굴빛이 위황하고 허리 밑에 적취(積聚)가 있고, 내쉬는 숨은 많고 들이쉬는 숨은 적으며, 입술이 또 건조하십니다. 성상께서 큰 소리로 약을 물으시므로 아뢰기를, '청심연자음, 오미자탕, 청심원 등의 약은 청량한 재료가 들어 있어서 갈증을 그치게 할 수 있으니, 청컨대 이를 진어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또 성상의 몸을 보건대 억지로 참으시면서 앉으신 듯하기 때문에 마침내 물러나왔습니다."

<난경> 56편엔 배꼽 밑 덩어리인 적취에 대한 상세한 병리적 설명이 있다. 아랫배에 있는 적취는 신장 부위에 있다고 해서 신적(腎積)이라고 한다. 신적은 신수가 부족해서 생기는데, 신수는 신장에 저장된 에어컨과 같은 음(陰)적이고 차가운 물질이다. 상화가 망동하면 음이 모자라게 되며 반대편인 양(陽)적인 양기가 병적으로 왕성해지고 상승한다. 이런 상태를 분돈(奔豚)이라 한다. 돼지새끼가 기세 좋게 내디디는 상태와 같아서 숨쉬기가 어려워지고 씩씩대게 된다. 사실 죽기 한 달 전 성종은 숨 가쁘고 기침이 나는 천증(喘症)을 호소한다.

어쩌면 그런 증상들은 성종의 마지막을 위한 예고편이었는지 모른다. 또 신수가 부족해지면 혈액 속의 물이 줄면서 끈적해지고 응고돼 쌓이면서 적취가 된다고 설명한다. 이런 병리관은 성종이 앞에서 호소한 증세와 딱 맞아떨어진다. 그에 따른 처방은 이런 추론을 더욱 명확히 한다. 청심연자음은 주색을 과도하게 즐기거나 과식으로 인해 입 마름증이 왔을 때 처방하는 대표적 약물이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위장이 약하고 식욕이 부진하며 소변을 자주 보고 입이나 혀가 건조한 하반신 쇠약에 적용한다.

매실의 두 얼굴

청심연자음의 주성분인 연밥씨는 그런 특징을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연은 무성한 여름 햇볕에 대응해 더욱 무성히 푸르러진다. 뿌리가 끌어올린 수분에 의존해 상부의 무성한 열을 식히는 것이다. 인체에서도 하부에 빠져나가는 수분을 수렴해 상부를 적셔주므로 소변이 자주 빠져나가는 걸 막으면서 입 마름을 해소한다.

오미자탕도 마찬가지다. 오미자는 5가지 맛을 고루 갖췄지만 신맛이 가장 우세하다. 오미자를 쪼개 보면 돼지 콩팥처럼 생겨 신장 기능을 도우면서 침을 잘 만들어 입 마름을 없애준다.

마지막으로 처방된 제호탕은 갈증을 없애는 대표적 약물이다. 제호탕의 효능은 여름의 번열을 없애고 갈증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처방은 불에 구운 오매라는 매이 한 근, 초과 한 냥, 사인, 백단향 각 5돈, 연밀 5근을 가루 내어 꿀에 넣어 끓인 다음 자기그릇에 담가두고 찬물에 타 먹는 방식으로 복용한다.

제호탕의 주 약물인 매실의 약효는 한 편의 시와 같다.

"봄이 오기 전에 매(梅)는 꽃을 피우며 얼음과 눈을 흡수하여 스스로를 적신다. 따라서 매화나무는 얼음처럼 차가운 한수(寒水)로 불꽃 같은 욕망인 상화를 억제한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입이 마른 것을 촉촉하게 하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없애준다."

선비들은 매화꽃으로 안주를 만들어 술을 마시기도 했다. 눈 녹인 물에다 백매를 조금 넣고 매화꽃을 띄워 하룻밤 묵힌 다음 꿀을 넣어 안주를 만드는 것이다.

<본경소증>은 그 부작용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갈증을 느낄 때 매실이라는 말만 들어도 입에 침이 나온다. 매실은 가장 빠르게 진액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그 진액은 공짜가 아니다. 내부에 있는 액을 끌어올리는 것이며, 내부의 액은 우리 몸의 액의 근원인 신장에 있는 생명의 액이다. 자꾸 액을 끌어올리면 신장 기능이 허약해지며, 그 결과 신장이 주관하는 치아가 손상된다. 근육도 상하고 위장도 부식하여 허약해진다.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 치아가 약해지면 호도 육을 씹어 먹어라."


성종의 재위 기간은 25년이다. 24년 말부터 그의 건강은 아주 나빠졌다. 24년 입술 위에 종기가 나서 8월 14일부터 9월 17일까지 낫지 않아 어쩔 줄 몰라 한다. 25년 1월 20일엔 코피가 나오면서 멈추지 않아 경연을 중지하며, 2월엔 감기 증세가 덮친다. 5월부터는 다시 서증으로 두통이 생겨 일본 사신을 접견하지 못하며, 중국 황제의 탄신일에도 배례를 올리지 못한다. 12월 12일엔 다리가 여위고 연약해 마비된 것을 힘들어하다 허리 밑 종기와 갈증으로 운명한다.

<동의보감> 소갈(消渴)문에 따르면 소갈의 종류는 상 중 하 3가지다. 성종의 증상은 하소에 가깝다. 하소는 "하초에 열이 잠복해 있는데 신이 허하여 받게 되면 다리와 무릎이 여위어 가늘어지고 뼈마디가 시큰거리며 정액이 소모되어 골수가 허해지고 물이 당긴다." 소갈의 증상은 지금의 당뇨와 가깝다.

성종이 잠든 곳은 서울 선릉이다. 한평생 풍류를 즐긴 그는 죽어서도 잠들지 못한 채 선릉의 환락가 불빛 속을 거닐고 있는 건 아닐까.




[낮은 한의학] 연산군의 건강학 ① 수박에 딴죽 걸다 능지처참…연산군은 왜?


조선 왕들 중 부모의 비참한 죽음을 알거나 목격한 사람은 3명이다. 연산군, 경종, 정조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는 사약을 받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다 사약을 받고 죽었다. 장희빈이 죽은 시점과 경종의 병력(病歷)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가 복용한 처방들은 간질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평생 화증(火症)에 시달려 인삼은 거의 입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스코틀랜드의 정신과 의사 로널드 데이비드 랭은 광기를 이렇게 평했다.

"광기는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돌파구다."

조선 역사상 성군(聖君)의 길을 가장 극렬히 역주행한 광기의 폭군으로 기록된 연산군, 그를 바라보는 좌표는 바로 어머니다. 연산군을 '있어선 안 됐던 임금'으로 매도하는 것보다 그의 광기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작업이야말로 '왕의 한의학'이 추구하는 지향점이 아닐까.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애착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이론가는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존 볼비다. 그는 신생아는 완전히 무력하기에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어머니에게 애착을 느끼도록 미리 설정돼 있으며, 어머니와 아이를 떼어놓는 상황은 아이에게 불안감과 공포감을 형성한다고 규정했다. 연구 결과, 어머니가 없는 아이들은 훨씬 거칠게 놀았고 과도하게 흥분할 때가 많았으며, 감동 결여성 인격 장애를 앓은 것으로 밝혀졌다.

동물 실험에서도 이런 관점은 증명됐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 심리학과 해리 할로 교수 팀은 원숭이로 실험을 했다. 그때까지의 정설은 갓 태어난 새끼 원숭이가 젖을 먹으려 어미에게 달라붙는다는 것이었다. 실험 결과 새끼 원숭이는 엄마와의 '접촉'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온몸을 철사로 두르고 우유병을 든 가짜 원숭이와 젖병은 없지만 따뜻한 헝겊으로 몸을 감싼 가짜 원숭이를 우리에 놓아뒀다. 그러자 새끼 원숭이들은 후자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나 헝겊 인형 대리모와 함께 있던 새끼 원숭이들도 정상적인 원숭이로 크지는 못했다. 그 원숭이들은 우울했고, 다른 원숭이들과 친밀감을 느끼거나 교류하는 등의 행동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마치 자폐증에 걸린 것 같았다. 할로 교수는 그것이 부모와의 상호 작용 부족 때문이란 걸 밝혀냈다. 중요한 건 엄마가 아기에게 반응하고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와 불행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1476∼1506년, 재위 1494∼1506년)은 폭군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폭군으로서 연산군의 행보는 이전부터 시작됐다. 일화를 보자. 성종이 세자인 연산군을 불러 다가가려 하는데, 난데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세자의 옷과 손등을 핥아댔다. 세자는 사슴이 옷을 더럽힌 것에 화가 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본 성종은 화를 내며 세자를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연산군은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쏘아 죽여 버렸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성종이 승하하자 왕은 상중에 있으면서도 서러워하는 빛이 없으며, 후원의 순록(馴鹿)을 쏘아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며, 놀이 즐기기를 평일과 같이 하였다."

실제로 연산군이 내린 형벌은 전례가 없는 잔인한 것들이었다. 손바닥 뚫기, 불에 달군 쇠로 당근질 하기, 가슴 빠개기, 뼈 바르기, 마디마디 자르기, 배 가르기,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연산군이 특히 좋아한 유희는 탈놀이인 처용무다. 기록을 보자.

"소혜왕후가 늘 왕의 행동이 무도함을 근심하니, 왕이 하루는 얼굴에 처용 탈을 쓰고 처용 옷차림으로 칼을 휘두르고 처용무를 추면서 앞으로 갔다. 그러자 소혜왕후는 크게 놀랐다."

"왕이 풍두무(풍두라는 탈을 쓰고 추는 춤)를 잘 췄으므로, 매양 궁중에서 스스로 가면을 쓰고 희롱하고 춤추면서 좋아하였으며, 사랑하는 계집 중에도 또 사내 무당놀이를 잘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모든 총애하는 계집과 흥청(興淸) 등을 데리고, 빈터에서 야제(夜祭)를 베풀었는데, 스스로 죽은 자의 말을 하면서 그 형상을 다하면 모든 사랑하는 계집들은 손을 모으고 시청하였다. 왕이 죽은 자의 우는 형상을 하면 모든 흥청도 또한 울어, 드디어 비감하여 통곡하고서 파하였다."

흥청은 연산군 10년에 나라에서 모아들인 기녀를 말한다. 탈과 가면은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이나 그로 인해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속 인격체를 숨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어릴 적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경우가 많다. 그때의 상처는 자기보호 기질을 발동시켜 스스로 마음을 닫게 한다. 종종 마음을 열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서둘러 자신을 꽁꽁 감추고 만다는 게 심리학적 분석이다. 연산군은 어쩌면 마음속 깊이 어머니의 부재와 불행을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 영화 <왕의 남자> 속 연산군(정진영). 그는 실제로 춤을 즐겼다. ⓒcinemaservice.com

▲ 영화 <왕의 남자> 속 연산군(정진영). 그는 실제로 춤을 즐겼다. 


천리(天理)보다 인욕(人慾)

본격적인 폭정의 계기가 된 것은 연산군 10년에 일어난 갑자사화다. 그 중심엔 어머니 폐비 윤 씨 문제가 있다. 사실 실록의 관점은 사관의 관점이고, 사관의 관점은 성리학이란 틀 속에서 유학적 성군을 기준으로 정립된 것이다.

조선의 왕도는 근본적으로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추구했다. 내부적으론 성인의 마음가짐을 배워야 하고 밖으론 왕 노릇을 하라는 뜻이다. 중국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의 저서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성인(聖人)의 기준을 이렇게 규정한다.

"성인은 중정(中正)과 인의(仁義)를 본성으로 삼고 마음이 고요하면서 욕심이 없게 함으로써 사람이 걸어가야 할 도리를 세우는 것이다."

중국 원나라 주진형이 편찬한 의서 <격치여론(格致餘論)>에선 욕심을 음식남녀(飮食男女)라고 말한다.

"남녀의 욕정은 인간에게 관계된 바가 크고 음식에 대한 욕심은 몸에 있어 더욱 절실하다. 세상에는 이 둘에 빠진 사람이 적지 않다."

일부 사가(史家)들은 연산군의 잘못에 대해 패자의 기록으로 진실을 은폐한다고 하지만 조선 왕이라는 통념적 기준에서 본다면 연산군은 확실히 패륜적인 왕이다. 주자(朱子)의 어록을 집대성한 책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음식에 대한 기준은 엄격하다. 주자는 제자들이 "음식에서 무엇이 천리(天理)이고 무엇이 인욕(人慾)이냐"고 묻자 "음식은 천리이지만 좋은 맛을 찾는 것은 인욕"이라고 대답했다.

실록 2년 2월 19일 연산군은 "사당(沙糖), 채단(綵緞), 술독을 푸는 빈랑·괘향(掛香)·각양의 감리(甘梨), 용안(龍顔) 등속의 물건을 성절사(聖節使)의 내왕편에 사가지고 오게 하라"고 명한다. 실록 8년 12월 4일엔 중국에 가는 사신을 보고 수박을 구해오라고 시킨다. 이에 장령(사헌부에 속한 정사품 벼슬) 김천령이 아뢴다.

"지금 듣건대, 북경에 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박을 구해오도록 했다고 하는데, 그 종자를 얻으려고 한 것이겠으나, 대체로 먼 곳의 기이한 음식물도 억지로 가져오는 것이 불가하온데, 하물며 중국에서 구하는 일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북경에 갔을 적에 들으니, 중국의 수박이 우리나라 것과 그다지 다른 점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수개월이 걸리는 여정에 반드시 상하게 될 것이니, 우리나라에는 이익이 없고 저쪽 나라에서 비방만 받을 것입니다."

이후 김천령은 능지처참을 당한다. 연산군은 가감 없이 수박에 대한 보복임을 명시한다.

"이는 오로지 곧 천령의 짓인데, 전일에 재주를 믿고 마음을 오만하게 한 자다. 내가 일찍이 중국의 수박을 보고 싶어 하였거늘, 그때 천령이 크게 주장하여 막았다. 과연 임금이 다른 나라의 진기한 물건을 구하면 말하여 막아야 하는가? 이것이 어찌하여 그르다고 감히 말하는가? 아뢴 대로 능지, 적몰(중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까지 처벌하던 일)하고 그 자식은 종을 만들고, 그 나머지 민휘 등은 처음부터 사수(死囚)로 가두라. 또 천령, 덕숭은 효수하여 전시(展屍)하고, 권헌 등의 소는 삭제하여 버리라."

실록 11년 4월엔 "이번 성절사 가는 길에 용안(龍眼), 여지(枝)를 많이 사오고, 수박, 참외 및 각종 과일을 많이 구해오라"고 명한다. 여지는 양귀비가 좋아한 과일로 당나라 현종이 남방에서 생산되던 것을 장안성까지 실어오느라 백성들의 원망을 들었던 대표적 과일이다. 연산군은 거리낌 없이 여지를 구해올 것을 주문한다.




[낮은 한의학] 연산군의 건강학 ② 백모까지 넘본 색정광, 오줌 못 가린 사연은?


연산군이 특히 좋아했던 음식은 소의 태(胎)다. 농업 국가인 조선에선 소를 식용으로 도축하는 걸 엄격히 규제했다. 태조 이성계가 재위 7년 9월의 교지에서 "소와 말의 사사로운 도살을 엄금한다"고 한 것을 비롯해 곳곳에서 우유의 음용마저 제한했다. 더욱이 소 전염병으로 농우(農牛)가 줄면서 경작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왕들마저 반찬으로 쇠고기를 먹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연산군은 완전히 역주행한다. 실록 11년 4월 20일 잔치마다 쇠고기를 쓸 것을 전교한다. 실록의 기록이다.

"이로부터 여느 때의 흥청을 공궤(음식을 줌)하는 데에도 다 쇠고기를 쓰니, 날마다 10여 마리를 잡아 수레로 실어 들였다. 노상에서 수레를 끌거나 물건을 실은 소까지도 다 빼앗아 잡으니, 백성이 다 부르짖어 곡하였고, 또 군현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바치되, 가까운 도에서는 날고기로, 먼 도에서는 포를 만들게 하였다. 또 왕이 소의 태를 즐겨 먹으므로 새끼를 낳은 배부른 소는 태가 없을지라도 잡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연산군은 여색에 관한 한 색골로 악명 높다. 실록 9년 6월 13일 기록을 보자.

"이에 앞서 왕이 미행하여 환자(宦者) 5, 6인에게 몽둥이를 들려 정업원으로 달려 들어가 늙고 추한 여중을 내쫓고, 나이 젊은 아름다운 자 7, 8인만 남기어 음행하니, 이것이 왕이 색욕을 마음대로 한 시초이다."

이후 '흥청망청'이란 신조어의 유래가 된 흥청이 등장한다. 연산군은 음률을 아는 전국의 기생을 골라 궁궐로 불러들인다. 처음에 불러들인 이 기생들은 운평(運平)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연산군은 이에 성이 안 차는지 벼슬아치의 첩, 창기 가운데서도 운평을 추가한다. 처음에 온 운평은 가흥청(假興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시일이 지나면 가흥청을 한 등급 올려 흥청망청의 주인공인 흥청(興淸)으로 승격시켰다. 이때 뒤에 들어온 자들은 속홍(續紅)이라고 했다.

흥청은 두 종류로 나뉘었다. 임금 곁에서 모시는 자는 지과(地科)흥청, 잠자리를 같이하는 자는 천과(天科)흥청으로 구분했다. 실록 11년 6월 18일 기록이다.

"왕이 금중(禁中)에 방(房)을 많이 두어 음탕한 놀이를 하는 곳으로 삼았다. 또 작은 방을 만들어서 언제나 밖으로 나가 즐길 때면 사람들을 시켜서 들고 따르게 하여, 길가일지라도 흥청과 음탕한 놀이를 하고 싶으면, 문득 이것을 설치하고서 들어갔는데, 그 방을 이름 붙여 '거사(擧舍)'라 하였다."

실록 11년 9월 16일 기록은 이렇다.

"그때 장악원에 있는 운평은 천으로 헤아리는 수였으되, 한 순(旬)에 한 번 간택하고 두 순에 두 번 간택하니, 얼굴이 아주 못났을지라도 두어 순이 지나지 않아서 반드시 뽑혔다. 이것을 순간택(旬揀擇)이라 하였다. 밖에서 임신한 흥청은 따로 질병가에 두어 출산하기를 기다려서 곧 묻게 했다. 만약 영을 어겨 묻지 않는 자가 있으면 오작인(지방 관아에 속하여 수령이 시체를 임검할 때 시체를 주워 맞추는 일을 하던 하인)을 중죄에 처하였으므로, 낳는 대로 묻으니 젖먹이의 울음소리가 서로 잇달으매, 듣고 이마를 찌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본인의 노골적 경험도 숨기지 않고 전교한다. 흥청 악인 완화아를 겨드랑이에서 냄새가 난다는 이유를 들어 운평으로 지위를 깎아내리라 명했다. 운평은 장악원의 고친 이름인 계방원(繼芳院)에서 관리하고, 흥청은 원각사에 둔 연방원과 궁궐 안에 둔 취홍원에서 거처했다.

이밖에도 연산군은 채홍준사(採紅駿使)를 두어 전국 각지에서 아름다운 여자와 좋은 말을 찾아내게 했으며 이에 만족하지 않고 채청사(採靑使)를 보내 어린 처녀들을 색출했다. 그런 식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흥청들과 놀아났다. 자신이 말이 되어 흥청들을 태우고 기어 다니고, 반대로 자기가 흥청의 등에 올라타 말놀이를 즐겼다.

심지어 큰아버지의 부인까지 겁탈했다. 연산군의 성욕은 결국 백모이자 박원종의 누이인 월산대군 부인 박 씨를 겁탈한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후 2개월 뒤 중종 반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록 12년 7월 기록은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 부인 박 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이렇게 방탕한 연산군의 질병 기록은 소변이 찔끔거리는 증상으로 시작한다. 실록 1년 1월 8일의 기록이다.

"전하께서 소변이 잦으시므로 축천원(縮泉元)을 드리라 하시는데, 신 등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오래 여차(廬次)에 계시고 조석으로 곡위(哭位)에 나가시므로 추위에 상하여 그렇게 된 것이오니, 만약 바지 안쪽이나 버선에다 모피를 붙여서 하부를 따뜻하게 하면 이 증세가 없어질 것입니다."

남자가 소변을 보기 위해선 양기(陽氣)가 있어야 한다.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은 양적인 면에서 생긴다. 방광에 고이는 소변은 혈관 밖의 물이다. 물은 온도가 4도에 불과하다. 항온 동물인 인간의 몸은 어떤 경우에도 36.5도를 유지해야 세포가 병드는 걸 막을 수 있다. 소변을 36.5도로 부글부글 끓이면서 유지하지 못하면 세포는 병든다. 자기 방어 측면에서 자주 소변을 배출해야만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야간 빈뇨의 원인이다. 이렇게 부글부글 끓이는 전기적 힘을 한의학에선 양기라고 규정한다.

소변은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압축된 힘으로 짜내는 것이다. 물총을 쏘면 물이 발사되는 것과 같다. 짜내는 힘이 약하면 나가던 물이 다시 밀려들어와 잔뇨감이 생기면서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려야 한다. 소변을 데우는 힘과 짜내는 힘, 발기력을 합쳐 양기라고 하며, 남성이 오줌발에 신경 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양기의 통로는 척추 안쪽을 흐르는 독맥(督脈)이다. 힘 있는 사람이나 득의양양한 사람은 등을 뒤로 젖힌다. 반면 양기가 줄어들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앞으로 푹 숙여진다. 바로 고개 숙인 남자가 되는 것이다. 남자들이 정력제에 목숨 거는 이면엔 이런 이유가 있다. 실록의 기록처럼 연산군이 하복부를 따뜻하게 데우고 난 후 증상이 호전됐다는 건 양기가 약하다는 의미다.



[낮은 한의학] 연산군의 건강학 ③ 

시대의 색골 연산, 죽음 앞에서 찾았던 여인은?


정력에 좋다며 백마에 메뚜기까지

사실 연산군은 패륜적으로 성에 집착했던 것치곤 자식 농사가 신통치 않았다. 왕후 신 씨에게서 2남 1녀, 후궁에게서 2남 1녀로 성종이 16남 12녀를 둔 것과 비교할 때 사뭇 왜소해 보이는 건 그의 찔끔거리는 소변 기능과도 관련이 깊다. 실제로 양기가 모자랐던지 연산군 9년엔 양기를 보충하려고 백마를 골라 내수사로 보낼 것을 명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엽색적인 행각을 벌인 것으로 기록된 사람은 고려 시대의 신돈이다. 성현의 <용제총화>엔 신돈의 엽색 행각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신돈의 권세가 커지자 사대부 중에 얼굴이 어여쁜 아내와 첩을 둔 자가 있으면 매번 허물을 씌워 감옥에 넣었다. 그러고는 만약 주부가 찾아와서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면 죄를 면한다고 말하였다. 신돈이 매번 찾아온 주부를 상대로 엽색 행각을 벌였다. 양기가 쇠약해질까 두려워 백마의 음경을 잘라 먹고 지렁이를 회쳐 먹었다."

연산군도 마찬가지였다. 실록 9년 2월 8일 기록은 "백마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 내수사로 보내라고 하였다. 흰 말고기는 양기에 이롭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자오선(子午線)의 '오'는 말을 뜻한다. 자는 북쪽 차가운 것을 의미하고, 오는 남쪽 뜨거운 것을 상징한다. 말은 뜨거운 양기의 상징이다.

<본초강목>에서 소와 말을 음양으로 대조한 대목은 음양론을 읽는 또 다른 재미다. 말발굽은 둥글어서 하나로 있으니 양이고 소의 발굽은 갈라져 둘로 있으니 음이다. 말이 병들면 앉아 있고 소가 병들면 서 있는 것, 말이 일어설 때 앞발을 먼저 일으키고 소가 일어설 때 뒷발을 먼저 일으키는 것 모두가 말이 양이고 소가 음이어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말이 사납게 날뛸 때 쇠고기를 먹이면 온순해진다는 지혜까지 기록했다. <본초강목>은 백마의 음경을 얻는 방법까지 상세히 안내한다. 암말과 교미할 때 세력 강성의 발기된 것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산군 12년 5월엔 "각사의 노복 가운데 총명한 자를 골라 궐문 밖에서 번을 나누어 교대로 근무시키되 이름은 회동역습소라 하고, 이전으로 통솔하게 하되 이름은 훈동관이라고 하여 귀뚜라미, 베짱이, 잠자리 등 곤충을 잡아오게 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린다. 그 속엔 메뚜기도 포함됐다.

잠자리 종류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크고 청색인 것을 청령(??)이라고 한다며, 동쪽의 이(夷)인들은 잠자리가 푸른 새우가 변해 생긴 것으로 믿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다고 설명한다. 날개와 발을 떼고 볶아서 먹으라고 했다. 실제 효능도 양기를 돕고 신장을 데우는 것으로 설명했다. 메뚜기는 위장을 돕고 소화를 잘 시켜주는 약으로 여겨졌다. 뒷다리가 튼실한 메뚜기가 정력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력과 뒷다리를 연결시키는 것이 뜬금없는 발상은 아니다. 인간의 체온은 40% 이상이 근육에서 만들어진다. 그 근육의 70% 이상은 허리와 허벅지 등 다리 근육에 분포한다. 나이 들어 하반신의 활동량이 줄고 근육이 부실해지면 체온을 만드는 힘이 줄어든다. 야간에 소변을 자주 보고 발기 부전의 노화 증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반신의 든든한 근육 힘이 바로 양기를 발생시키는 근원인 셈이다. 미사일을 쏠 때 발사대가 좋아야 하듯 하체가 튼튼해야 오줌발이 세지고 양기도 개선된다. 양기는 찾기 힘든 백마나 물개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실록 11년 8월 7일 기록을 보면, 연산군은 새로 조제한 홍원룡, 흑원룡, 홍갈호, 흑갈호 250환을 재상에게 선물한다. 원룡, 갈호는 도마뱀과 개구리를 약재로 쓴 것으로 양기를 돕는 약이다. 도마뱀은 본래 색을 잘 바꾸는 동물이다. 주역의 역(易)자는 바로 도마뱀을 형상화한 글자다. 동양 철학의 기본 전제는 변화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뿐이다"라는 말에 가장 부합하는 동물이다. 하루 열두 차례씩 때의 변화에 맞춰 색깔이 변한다는 카멜레온의 속성을 형상화한 것이다. 대부분의 뱀 종류가 성기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봤듯, 도마뱀도 정력제로 사용됐다.

재미있는 건 처녀성 증명에 도마뱀이 사용됐다는 사실이다. 중국 고전 <박물지(博物志)>를 보면, 처녀성을 증명하는 수궁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수궁사의 재료가 되는 것은 도마뱀이다. 도마뱀을 그릇에 넣어 기르면서 주사를 먹이면 도마뱀의 몸이 온통 붉은색이 된다. 계속 먹여서 일곱 근이 되었을 때 아주 여러 번 절구질을 해서 여자의 지체에 바르면 죽을 때까지 색깔이 변하지 않게 된다. 오직 성관계를 가질 때만 없어지기 때문에 자궁을 지킨다고 해서 수궁(守宮)이라고 한다. 한무제가 시험해보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정력에 좋다며 백마에 메뚜기까지

사실 연산군은 패륜적으로 성에 집착했던 것치곤 자식 농사가 신통치 않았다. 왕후 신 씨에게서 2남 1녀, 후궁에게서 2남 1녀로 성종이 16남 12녀를 둔 것과 비교할 때 사뭇 왜소해 보이는 건 그의 찔끔거리는 소변 기능과도 관련이 깊다. 실제로 양기가 모자랐던지 연산군 9년엔 양기를 보충하려고 백마를 골라 내수사로 보낼 것을 명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엽색적인 행각을 벌인 것으로 기록된 사람은 고려 시대의 신돈이다. 성현의 <용제총화>엔 신돈의 엽색 행각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신돈의 권세가 커지자 사대부 중에 얼굴이 어여쁜 아내와 첩을 둔 자가 있으면 매번 허물을 씌워 감옥에 넣었다. 그러고는 만약 주부가 찾아와서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면 죄를 면한다고 말하였다. 신돈이 매번 찾아온 주부를 상대로 엽색 행각을 벌였다. 양기가 쇠약해질까 두려워 백마의 음경을 잘라 먹고 지렁이를 회쳐 먹었다."

연산군도 마찬가지였다. 실록 9년 2월 8일 기록은 "백마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 내수사로 보내라고 하였다. 흰 말고기는 양기에 이롭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자오선(子午線)의 '오'는 말을 뜻한다. 자는 북쪽 차가운 것을 의미하고, 오는 남쪽 뜨거운 것을 상징한다. 말은 뜨거운 양기의 상징이다.

<본초강목>에서 소와 말을 음양으로 대조한 대목은 음양론을 읽는 또 다른 재미다. 말발굽은 둥글어서 하나로 있으니 양이고 소의 발굽은 갈라져 둘로 있으니 음이다. 말이 병들면 앉아 있고 소가 병들면 서 있는 것, 말이 일어설 때 앞발을 먼저 일으키고 소가 일어설 때 뒷발을 먼저 일으키는 것 모두가 말이 양이고 소가 음이어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말이 사납게 날뛸 때 쇠고기를 먹이면 온순해진다는 지혜까지 기록했다. <본초강목>은 백마의 음경을 얻는 방법까지 상세히 안내한다. 암말과 교미할 때 세력 강성의 발기된 것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산군 12년 5월엔 "각사의 노복 가운데 총명한 자를 골라 궐문 밖에서 번을 나누어 교대로 근무시키되 이름은 회동역습소라 하고, 이전으로 통솔하게 하되 이름은 훈동관이라고 하여 귀뚜라미, 베짱이, 잠자리 등 곤충을 잡아오게 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린다. 그 속엔 메뚜기도 포함됐다.

잠자리 종류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크고 청색인 것을 청령(??)이라고 한다며, 동쪽의 이(夷)인들은 잠자리가 푸른 새우가 변해 생긴 것으로 믿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다고 설명한다. 날개와 발을 떼고 볶아서 먹으라고 했다. 실제 효능도 양기를 돕고 신장을 데우는 것으로 설명했다. 메뚜기는 위장을 돕고 소화를 잘 시켜주는 약으로 여겨졌다. 뒷다리가 튼실한 메뚜기가 정력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력과 뒷다리를 연결시키는 것이 뜬금없는 발상은 아니다. 인간의 체온은 40% 이상이 근육에서 만들어진다. 그 근육의 70% 이상은 허리와 허벅지 등 다리 근육에 분포한다. 나이 들어 하반신의 활동량이 줄고 근육이 부실해지면 체온을 만드는 힘이 줄어든다. 야간에 소변을 자주 보고 발기 부전의 노화 증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반신의 든든한 근육 힘이 바로 양기를 발생시키는 근원인 셈이다. 미사일을 쏠 때 발사대가 좋아야 하듯 하체가 튼튼해야 오줌발이 세지고 양기도 개선된다. 양기는 찾기 힘든 백마나 물개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실록 11년 8월 7일 기록을 보면, 연산군은 새로 조제한 홍원룡, 흑원룡, 홍갈호, 흑갈호 250환을 재상에게 선물한다. 원룡, 갈호는 도마뱀과 개구리를 약재로 쓴 것으로 양기를 돕는 약이다. 도마뱀은 본래 색을 잘 바꾸는 동물이다. 주역의 역(易)자는 바로 도마뱀을 형상화한 글자다. 동양 철학의 기본 전제는 변화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뿐이다"라는 말에 가장 부합하는 동물이다. 하루 열두 차례씩 때의 변화에 맞춰 색깔이 변한다는 카멜레온의 속성을 형상화한 것이다. 대부분의 뱀 종류가 성기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봤듯, 도마뱀도 정력제로 사용됐다.

재미있는 건 처녀성 증명에 도마뱀이 사용됐다는 사실이다. 중국 고전 <박물지(博物志)>를 보면, 처녀성을 증명하는 수궁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수궁사의 재료가 되는 것은 도마뱀이다. 도마뱀을 그릇에 넣어 기르면서 주사를 먹이면 도마뱀의 몸이 온통 붉은색이 된다. 계속 먹여서 일곱 근이 되었을 때 아주 여러 번 절구질을 해서 여자의 지체에 바르면 죽을 때까지 색깔이 변하지 않게 된다. 오직 성관계를 가질 때만 없어지기 때문에 자궁을 지킨다고 해서 수궁(守宮)이라고 한다. 한무제가 시험해보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낮은 한의학] 고종의 건강학 ① 대원군이 명성황후 아들을 죽였다?


당뇨, 심장 질환 등을 통칭하던 '성인병(成人病)'이라는 명칭이 '생활 습관 병'으로 바뀌었다. 대한내과학회는 2003년 "이른바 성인병은 대부분 흡연, 과식, 과음, 운동 부족 등 잘못된 생활 습관의 반복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므로 올바른 생활 습관을 지녀야 한다는 인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성인병'이라는 명칭을 '생활 습관 병'으로 개명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실 당뇨, 심장 질환뿐만 아니라 질병의 대부분은 생활 습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의 사실상 마지막 왕 고종이 바로 그 증인이다.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은 나름대로 건강한 체질이었다. 조선 말기 대다수 왕이 병과 싸우면서 많은 처방 및 치료 기록을 남겼지만, 고종은 <조선 왕조 실록>과 <태의원 일기> 모두 소화 불량이나 가벼운 피부염 기록밖에 없다. 하지만 생활습관에선 유별나게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오래하면서 야식을 먹었다.

<경성일보> 1919년 1월 24일자엔 덕수궁 촉탁의인 가미오카 가즈유키의 구술담이 실렸다. 고종의 평상시 생활습관에 대한 것이다.

고종은 키는 153센티미터, 몸무게는 70킬로그램 정도였으며 시력은 좋아서 노안이나 근시의 징후 없이 건강했다. 다만 평소 새벽 3시에 침소에 들었고 오전 11시경 기상해 오후 3시경 아침 식사를 하고 점심은 과자나 죽을 먹었으며, 저녁 식사는 밤 11시에서 12시경에 했다. 늦게 자고 야식 먹는 전형적인 현대인의 습관이었다.

고종은 늦게 자고 야식을 반복해 소화력이 떨어지면서 소화제를 복용하고 수면제 격인 온담탕을 복용했다. 하지만 건강은 약이 아니라 생활습관에서 만들어진다. 늦게 자고 야식을 먹는 습관은 결국 중풍을 유발했고, 이는 3·1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한 사람의 생활습관이 세상을 뒤흔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명성황후의 그늘

이렇게 올빼미 생활을 하는 데는 명성황후의 영향이 컸다. 비록 양자로 들어왔지만 자신의 오빠였던 민승호가 폭탄 테러로 사망한 사건 이후 명성황후는 공포와 원망, 두려움으로 잠들지 못했다.

폭탄 테러의 진상은 이렇다. 민승호의 생모가 죽고 나서 상중에 함 하나가 배달됐다. 밀실에서 자물쇠를 열어 함을 확인하려는 순간 폭탄이 터져 민승호와 그의 아들, 할머니가 온몸이 숯처럼 타서 죽었다.

이 사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1895년 8월 6일 이노우에 가오루가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내용엔 그가 고종과 명성황후를 접견했을 땐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이 민승호를 죽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왕실의 관행으로 본다면 왕비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마땅하다. 그러지 않는다는 건 고종의 동의 내지 묵인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한 술 더 떠 같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는 건 명성황후가 고종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방증이다.

고종의 생활습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명성황후의 간택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이 명성황후 민 씨가 고아였다고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점은 <매천야록>에 소개된 글 중 고녀(孤女)라는 표현 탓에 잘못 알려진 것이다. <매천야록>은 "김병학은 흥선대원군과 밀약하여 딸을 왕비로 간택하기로 하였다. 외척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임금이 즉위하자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었는데 곧바로 김병학을 배신하고 민치록의 고녀에게 국혼을 정하였다"고 기록했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민유중의 5대 종손인데 민유중은 인현왕후의 친정 아버지로 가난하지도 않았고 혈혈단신도 아니었다. 또 국혼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편모슬하의 외동딸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민치록은 10촌 형제가 되는 민치구의 둘째 아들 민승호를 양자로 들였다.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 씨와 친누나, 동생 사이였다. 중종 반정 이후 노론의 사대부들이 국혼을 놓치지 말자고 했던 만큼 흥선대원군이 얼마나 치밀하게 며느리를 들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드라마 <명성황후>의 명성황후(이미연). ⓒKBS

▲ 드라마 <명성황후>의 명성황후(이미연). ⓒKBS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아들을 죽였다?

고종 8년 11월 4일 명성황후는 원자를 낳았지만 원자는 항문이 막혀 죽고 만다. 실록의 기록은 간결하다.

"오늘 해시(亥時)에 원자가 대변이 통하지 않는 증상으로 불행을 당하고 말았다. 산실청(조선 시대 왕비와 세자빈의 출산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을 철수시키도록 하라."

호사가들은 이런 원자의 불행이 흥선대원군의 음모로 산삼을 먹인 결과 나타났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태아에게 항문이 형성되는 시기는 임신 10주 이내인데, 명성황후가 산삼을 먹은 시기는 그 후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임신 맥(脈)이 나타나 임신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시기는 임신 6~7주가 지나서이며, 입덧은 아무리 빨라도 5주 정도 지나야 나타난다.

한의학에서 산삼과 성분은 비슷하지만 약효는 훨씬 떨어지는 인삼을 임신부에게 처방할 땐 기와 혈이 부족한 상태라는 진단을 내린 경우다. 팔물탕이란 약제를 처방하는데, 인삼을 비롯해 백출, 백복령, 감초, 숙지황, 백작약, 천궁, 당귀 등의 약재가 들어간다. 인삼을 단독 처방하면 해로울 수 있지만, 8가지 약재가 혼합되면 인삼은 기와 혈을 조절하는 구실을 한다. 물론 임신 기간 중 온몸에 열이 나고 축축해지는 '습열(濕熱)' 상태의 증상엔 인삼을 처방해선 안 된다. 인삼이 임신부에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임신 시엔 함부로 먹어선 안 되는 약재다.

민승호의 죽음과 불면증

아무튼 민승호의 죽음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잠 못 들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잠이 오지 않는 원인 중 가장 큰 건 역시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는 교감 신경을 흥분시키고 혈압을 오르게 하며, 위가 아프고 얹히는 등 열을 받는 상황으로 만든다. 결국 인체엔 양기가 넘치면서 음기가 줄어 불면 상태가 된다. 커피, 콜라 등 음료수도 신경을 흥분시키고 잠이 오지 않게 한다. 현대 의학에서 보면 갱년기나 갑상선질환, 당뇨, 협심증은 음기를 소진해 불면증을 야기하는 원흉이다.

잠들기 힘들어하던 고종이 승하하던 날 점심때까지 처방된 약물도 온담탕이다. 온담탕 속 대표 약물은 반하(半夏)다. 반하는 보리밭에서 많이 자란다. 속이 더운 까닭에 보리밭 사이에 숨어 해를 피하며 보리농사가 끝나 쟁기질할 때 캐낸다.

속이 더운 식물이 어떻게 잠을 잘 오게 할까. 답은 그 이름에 담겨 있다. 반하는 하지까지는 잎을 펼치지만 이후론 잎을 반으로 줄이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반하라는 이름이 붙었다. 반하엔 양이 불타오르는 걸 줄여 음으로 보내는 오묘한 특성이 내재한다. 이는 양을 이끌어 음으로 보낸다는 '도양입음(導陽入陰)'으로, 양을 이끌어 음을 활달하게 한다는 뜻이다. 현대 의학으로 보면 부교감 신경을 활성화해 잠이 오게 하는 것이다.

온담탕에 가미하면서 잠이 잘 오게 하는 대표적 약재는 산조인(酸棗仁)이다. 산조인은 드라마 <대장금>에도 등장해 유명해졌다. 중국 사신이 와서 장금에게 수청을 들게 하자 그에게 먹여 잠재운 약재다. 대추나무 종류인데, 크게 자라는 건 대추이고 빡빡하고 작게 여러 개가 자라는 건 산조인이다..

산조인은 신맛을 지녔으며 간을 보한다. <본초강목>은 그 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이 누우면 피는 간으로 간다(간은 근육을 주관하기에 사람이 활동을 그치면 피는 간으로 돌아오고 활동하면 근육으로 스민다). 피가 안정되지 못하여 누워도 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놀란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을 자지 못한다."

이 점도 음기와 통한다. 간장으로 수렴하는 건 혈액이며, 음기다. 산조인의 산(酸)은 신맛으로 수렴한다는 뜻이다. <동의보감>에서 사과를 먹으면 잠이 잘 온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다. 

해가 떠오르면 환해지면서 만물이 깨어난다. 반면 달이 뜨는 밤이면 사물을 밝히던 빛은 흐려지기 시작해 이내 어두워진다. 태양은 밝은 양기를 주관하고, 달은 어둡고 서늘한 음기를 주관한다. 잠은 달과 같은 음기가 성할 때 잘 오고 음기가 줄면 오지 않는다. <동의보감>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은 음기가 줄어들어 양기가 성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낮은 한의학] 고종의 건강학 ② 커피, 식혜…고종 독살설의 진실은?


식혜 독살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독살설에 휘말리면서 3·1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중요한 사건이다.

1919년 1월 21일 새벽 1시 15분경부터 증상이 시작돼 새벽 6시 30분 중태에 빠지는 과정에서 당시 고종을 가장 먼저 진찰하고 임종을 지킨 의사는 일본인 여의 도가와 기누코다. 당시 주치의였던 가미오카의 몸이 불편해지면서 대신 고종을 진찰한 여의다. 1월 23일자 <경성일보>는 도가와를 인터뷰하고 그의 술회를 게재했다.

고종은 발병하기 4, 5일 전부터 "다소 식욕이 없고 잠이 잘 오지 않네" 하고 몸 상태를 설명했는데, 발병 전 의자에 앉아 있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 도가와는 발병 연락을 받은 후 허둥지둥 전의와 참궁을 했는데, 2회부터 7회까지 고종의 경련이 계속됐다. 맥박이 2, 3회에는 110회, 4회부터는 130에서 140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체온도 37도 7부로 올라갔다. 8회째부터는 의식이 완전히 없어졌다. 경련은 12회까지 계속됐고, 고종은 오전 6시경 훙거(薨去)했다.

고종의 발병에서 임종까지의 시간별 경과를 정리하면 이렇다. 1월 20일 오전 11시 고종은 촉탁의 안상호가 배진한 뒤 아침 식사를 했다. 오후 3시에 가미온담탕을 복용하고 가미오카와 도가와의 진찰을 받았다. 오후 9시엔 소화제로 가미양위탕을 복용했다. 밤 10시엔 저녁 식사를 했고, 전의 김형배와 촉탁의 안상호의 진찰을 받았으며 12시와 1월 21일 새벽 1시 사이에 자다 발병했다. 전의 김형배가 청심환을 처방하고 도가와가 참궁해 진찰했으며 새벽 2시 30분에 안상호가, 4시 53분엔 가미오카가, 5시 30분엔 모리야스 하가가 배진했다.

독살과 관련한 구체적 기록은 윤치영의 일기다. 기록은 고종의 시신을 목격한 명성황후의 사촌 동생 민영달이 중추원 함의 한진창에게 한 말을 듣고 적은 것이다. 1920년 10월 13일자 기록은 독살 혐의를 몇 가지로 분류했다.

① 건강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 후 죽었다.

②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 사람들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③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가 닳아 없어졌음을 발견했다.

④ 30센티미터나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일본은 독살설을 해명하려고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 장문의 해명 기사를 올렸다. 밤 11시경 나인 신응선이 고종에게 은기에 담은 식혜를 바쳤는데 그중 10분의 2를 고종이 마시고 나머지는 나인 양춘기, 이완응, 최헌식, 김옥기, 김정완 등이 나눠 마셨다고 구체적으로 식혜 독살설을 부인했다.

식혜에 독을 탄 궁녀 2명이 함구를 위해 독살됐다는 설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박완기라는 나인은 내전 청소와 아궁이 잡역에 종사하다 폐결핵을 앓아 죽었는데 고종의 음식에 다가갈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으며, 또 한 명의 나인은 창덕궁 침방에 근무하는 자로서 덕수궁에 출입한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또 일본은 ①과 ②의 현상도 반박했다. 시신 팽창 때문에 통상 하루 안에 염을 하는데 고종의 시신은 자연 조건하에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가 이은 왕세자가 도착한 4일 후에 염을 하면서 부패가 진행돼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 독살설의 진실은 무엇일까? 먼저 고종의 심신의 건강 상태부터 살펴보는 게 순서일 듯하다.

커피 독살 미수 사건

▲ 고종. ⓒwikipedia.org

▲ 고종. ⓒwikipedia.org

고종은 서양 문물에 열린 자세를 견지했다. 동시대 최고 실권자였던 청의 서태후가 서양 의학과 약품을 철저히 배제한 반면, 고종은 일찍부터 선교사 호레이스 앨런을 통해 광혜원을 세울 수 있었고 서양인 의사로부터 건강 자문을 받았다. 하지만 이렇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서 쇠락하는 국운을 다시 일으켜보려 했으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고종의 위세는 그 단적인 증거다. 1893년 궁녀를 마지막으로 뽑았는데, 일제에 의해 이태왕이란 이름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뒤론 1890년대 200명에 달한 궁녀가 20여 명으로 줄었다. 궁중 법도는 허물어지고, 궁중 음식에 만족하지 못해 요릿집에 주문해 음식을 시켜먹기도 했다. 1903년엔 쌀에서 돌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해 밥을 먹다 이가 부러지는 불상사를 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숙수 김원근이 유배를 당했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와중에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타서 독살하려던 시도도 있었다. 궁중의 요리를 담당한 숙수들이 돈에 혹해 왕의 커피에 아편을 넣는 엄청난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실록은 1898년 9월 12일 이렇게 기록했다.

"음력으로 올해 7월 10일 김홍륙이 유배 가는 것에 대한 조칙(詔勅)을 받고 그날로 배소(配所)로 떠나는 길에 잠시 김광식의 집에 머물렀는데, 가지고 가던 손 주머니에서 한 냥의 아편을 찾아내어 갑자기 흉역의 심보를 드러내고 친한 사람인 공홍식에게 주면서 어선(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에 섞어서 올릴 것을 은밀히 사주하였다.

음력 7월 26일 공홍식이 김종화를 만나서 김홍륙에게 사주받은 내용을 자세히 말하고 이 약물을 어공(御供)하는 차에 섞어서 올리면 마땅히 1000원(元)의 은(銀)으로 수고에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김종화는 일찍이 보현당의 고지기로서 어공하는 서양 요리를 거행하였는데, 잘 거행하지 못한 탓으로 태거(汰去)된 자였다. 그는 즉시 그 약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찻주전자에 넣어 끝내 진어(進御)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건의 진상은 천민 출신으로 러시아 통역관 역할을 하며 신임을 얻었던 김홍륙이 거액의 착복 사건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유배를 떠나는 길에 돈으로 요리사 김종화를 매수해 고종을 독살하고자 한 것이다. 상궁 김명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고종은 커피 맛이 이상한 것을 알고 바로 뱉었지만 복용량이 많았던 세자의 경우 며칠 동안 혈변을 보았고 치아가 빠져 의치를 18개 해 넣었다."




[낮은 한의학] 고종의 건강학 ③ 고종과 조선, 어쩌면 명성황후가 죽였다


고종 독살설이 끊이지 않은 이유는 고종의 건강 상태 탓이다. 사실 고종은 큰 질병을 앓은 기록이 별로 없다.

연령별로 요약해보면 16세 되던 해에 살쩍(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털), 귀밑 부분에 종기가 나자 당귀고라는 고약을 붙여 나았다. 33세 때 겨울에 세자와 함께 잠깐 감기를 앓았고, 34세엔 중전과 함께 감기를 앓았다. 39세에도 여름 감기와 체증을 앓았는데, 이때부터 소화기 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고종이 가장 많이 호소한 증상은 소화기 질환이었다.

47세에도 담체(담(痰)이 몰려 한곳에 뭉친 것. 또는 그로 인해 생긴 병) 증상을 앓는데, 담체란 소화기가 약해지면서 위장에 불순물이 생겨 쉽게 체증을 앓거나 두통, 어지러움을 느끼고 관절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이론엔 오장육부가 중심이라는 한의학적 사유가 근거가 된다. 한의학적 사유의 핵심은 내면의 질서다. 외면적 형태나 구조가 아닌 내면의 질서를 통해 사물의 본질을 살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연필심과 다이아몬드는 흑연을 기본 소재로 삼지만, 단지 그 소재의 내면 질서가 다르기 때문에 연필심과 다이아몬드로 나눠진다고 파악한다.

한의학의 사유를 좀 더 살펴보자. 봄의 질서는 간, 여름의 질서는 심장, 가을의 질서는 폐, 겨울의 질서는 신장이다. 사계절은 시계와 같다. 시계를 3, 6, 9, 12로 나누면 사계절의 질서는 일목요연하게 시계를 채운다. 그러면 소화기는 무엇일까. 시계의 바닥판이다. 만물이 땅에서 나와 땅으로 돌아가듯 사계절은 모두 땅 위에서 펼쳐지는 가면에 불과한 것이다.

한의학은 사물을 움직이는 힘은 시계의 바닥판 속 축이라고 보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소화기, 즉 토(土)로 추상한다. 소화기에 생기는 불순 대사물인 담은 머리에선 어지러움을, 관절에선 관절염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축이 멈추는 건 체증이다. 팽이가 돌다 멈추려면 좌우로 비틀거리는 상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체증은 축선이 멈추는 상태로 여겨져 비틀거리다 실신하게 되는 것이다.

고종은 55세 무렵엔 바로 이런 소화기의 질환이 오래돼서 위장에 노폐물이 쌓이는 담증(痰症)을 호소한다. 담이 결리는 증후와 가슴에 담이 차서 괴롭고 호흡이 순조롭지 못한 증상으로 괴로워한다. 태의원 도제조 이근명은 고종에게 통순산을 복용하게 한 후 효험이 어떤지 묻는다. 고종의 답변은 이렇다.

"처음에는 가슴에 담이 차서 괴롭고 호흡이 고르지 못하더니 지금은 차도가 있다. 허리와 옆구리가 아직 결리는데 상부에 겉으로 나타나는 증세가 있다."

통순산은 영위반혼탕이란 처방의 다른 이름이다. 이 처방의 효험에 대해 <동의보감>은 이렇게 설명한다.

"담이 가슴, 등, 머리, 겨드랑이, 옆구리, 허리, 허벅다리, 손발로 돌아다니다가 머물게 되면 단단하게 붓고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 이런 여러 가지 담증을 잘 낫게 한다."


조선의 왕들과 친족들이 내의원이란 기관을 통해 건강 관리를 해왔다면, 고종은 태의원을 통해 건강을 관리했다. 사실 격변기를 통해 이름만 바뀌었을 뿐 직제상의 차이점은 크지 않다. 남아 있는 자료는 광무 2년 음력 1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의 1년간의 기록이다. 그날그날 태의원에서 있었던 문안과 오고간 대화 내용, 전의들의 입진, 처방 내용 등을 기록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앞에서 언급한 체증인 담체, 어지러움인 현훈, 체증으로 인한 설사인 체설의 증상들이 기록돼 있다.

대부분의 치료는 약물 처방만 있을 뿐 침구 치료에 대한 부분은 찾을 수 없다. 처방한 약물도 소화기 질환에 쓰는 보약이 대부분이다. 인삼이 든 삼출건비탕, 이공산, 가미군자탕 등의 처방이다. 모두 소화기가 허약하면서 소화력이 떨어진 경우에 쓰는 보약 계통의 약물이다.

<태의원일기>엔 왕의 일상과 관련한 건강 관리법이 나온다. 왕의 일상은 공적 업무 외에도 잦은 국가제례를 주관하는 까다롭고 힘든 것이다. 특히 날씨가 가을로 접어드는 시점에서는 직접 제사에 참여하지 말 것을 건의한다. 기록에 따르면 제사가 9월 2회, 10월 4회, 11월 3회, 12월 3회에 걸쳐 연속으로 겹치면서 친행하지 말 것을 건의한다.

한의학의 기본적인 건강 관리 요점은 예방 의학적 측면에 있다. 이 점에서 눈에 띄는 건 인삼속미음이란 처방으로 미리 체력을 비축한다는 점이다. 보통 인삼과 좁쌀을 물과 함께 끓여 체로 걸러낸 것으로 죽보다 묽은 유동식이다.

좁쌀은 신기(腎氣)를 보하는 음식이다. 조(粟)는 서쪽에서 온 곡식이란 뜻이다. 사실 음양으로 나눌 때 꽃봉오리를 예로 들면 쉽다. 햇볕이 들면 활짝 꽃을 피우고 저녁이 되면 수축한다. 이렇게 수축하고 줄어드는 상태를 음이라 하는데, 가장 수축한 상태를 음이 가장 세게 응축된 상태로 보는 것이다.

좁쌀은 오곡 가운데 가장 작고 단단하기 때문에 가장 음적인 곡식으로 음의 상징인 신장을 돕는 건 당연하다. 인삼은 뜨거운 양을 상징하므로 찬 성질의 좁쌀과 서로 궁합이 맞다. <동의보감>은 좁쌀의 효능에 대해 비위 속 열을 없애고 기를 보하며 오줌을 잘 나가게 한다고 적었다.

<태의원일기> 1898년 8월 15일 기록은 속미음을 어떻게 준비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에 경효전(명성황후)의 3주제를 받들어 모시기가 멀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드실 인삼 2돈을 넣은 속미음과 명헌태후전이 드실 인삼 2돈을 넣은 속미음, 태자궁과 태자비궁이 복용할 인삼 2돈을 넣은 속미음을 18일부터 20일까지 한 첩씩 총 세 첩 달여 드리도록 들어가 아뢰었다."

속미음을 만들 때 감독자의 직책을 기록해 책임 소재를 파악한 걸 보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고종은 자신이 주인인 삶을 살 수 없었다. 즉위 시부터 10년간은 흥선대원군의 섭정 아래 왕으로 살았고, 이후론 명성황후의 입김 아래에서 민 씨 척족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청, 일본, 러시아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지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조선을 이끌어본 적도, 저항해본 적도 없었다.

건강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테러를 당할지 모른다는 트라우마에 이끌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면서 조선의 아침을 열 기회를 놓쳤다. 갑작스럽게 뇌일혈로 죽는 순간까지 그는 자신의 생활방식에 이입된 타인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했다. 어쩌면 조선의 슬픔은 바로 여기서 잉태됐다.




[낮은 한의학] 문종의 건강학 ① 세종은 왜 '단종의 비극'을 막지 못했나?


왕의 질병은 역사를 바꾼다. 종기는 조선 왕들의 단골 메뉴였지만, 제5대 왕 문종(1414∼1452년, 재위 1450∼1452년)의 종기만큼 역사의 흐름을 확실히 바꾼 질병은 없었다. 문종이 종기로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등진 사건이 단종, 세조 사이 권력 쟁탈전의 분수령이 됐던 것이다.

세종 31년 10월 25일 <조선왕조실록>은 세자 이향(문종)의 종기를 처음 기록했다.

"세자에게 등창(背疽)이 생기니, 여러 신하를 나누어 보내 기내의 명산, 대천과신사, 불우에 빌게 하고, 정부 육조 중추원에서 날마다 문안을 드리게 하였다."

11월 15일 기록은 종기가 완치됐음을 알린다.

"동궁의 종기는 의원의 착오로 호전되지 못했음에도 이를 물은 즉, '해가 없습니다' 하여, 동궁으로 하여금 배표(조선 시대에 왕이 중국 황제의 표문(表文)을 받던 일)하고 조참(한 달에 네 번 중앙의 문무백관이 정전(正殿)에 모여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政事)를 아뢰던 일)까지 받게 하였다니, 걸음걸이에 몸이 피로하여 종기의 증세가 다시 성하게 한 것이었다. 또 실지(實地)로서 아뢰지 않아서 갑자기 중함이 이르게 하여 위태로운 증세가 심히 많았으니, 의원의 착오를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느냐, 어쩔 수 없어 생명을 하늘에 맡겼더니, 다행하게도 이제 종기의 근(腫核)이 비로소 빠져나와 병세는 의심할 것이 없게 되어, 한나라의 경사가 이에 지날 수가 없다."

세자의 등에 난 종기인 등창의 크기와 모양은 실록에 자세히 기록됐다. 세종 32년 1월 26일의 기록이다.

"세자가 작년 10월 12일 등 위에 종기가 났는데, 길이가 한 자가량 되고 넓이가 5, 6치(寸)나 되는 것이 12월에 이르러서야 곪아 터졌는데, 창근(瘡根)의 크기가 엄지손가락만한 것이 여섯 개나 나왔고, 또 12월 19일 허리 사이에 종기가 났는데 그 형체가 둥글고 지름이 5, 6치나 되는데, 지금까지도 아물지 아니하여 일어서서 행보(行步)하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의방에 꺼리는 바로서 생사(生死)에 관계되므로, 역시 세자로 하여금 조서(요절)를 맞이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세자의 등창은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길이가 30센티미터, 너비가15~18센티미터 되는 아주 큰 종기였다. 지극한 정성으로 호전됐지만, 12월 19일 허리에서 재발했고, 이 종기는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위협한다.

문종에게 처음 발병한 종기는 배저(背疽)다. <동의보감>은 종기를 옹(癰)과 저(疽)로 나눈다.

"옹은 병이 얕은 곳에서 생기며 급하게 달아오르지만 치료하기 쉽다. 저는 독기가 속에 몰려 있으므로 치료하기 어렵다."

▲ 영화 <관상>의 수양(이정재). 세종은 왜 수양 대신 문종을 선택했을까? ⓒface-reader.co.kr 문종의 종기는 안타깝게도 치료하기 어려운 저에 속하는 배저, 등창이었다. <동의보감>은 옹저가 생기는 부위에 따라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면서 부위를 5곳으로 분류했다. 그 중 한 부위가 바로 등이었다. <동의보감>은 등 부위에 생긴 등창의 원인을 이렇게 지적했다.

"등은 방광경과 독맥(회음부에서 시작해 등의 척추 중앙선을 따라 위로 올라 목을 지나 머리 정수리를 넘어 윗잇몸의 중앙에 이르는 경맥)이 주관하는 곳이지만 오장은 다 등에 얽매여 있다. 혹독한 술이나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거나 성을 몹시 내고 성생활을 지나치게 하여 신수가 말라서 신화가 타오르면 담이 엉키고 기가 막히는데 독기가 섞이면 아무데나 옹저가 생긴다."

▲ 영화 <관상>의 수양(이정재). 세종은 왜 수양 대신 문종을 선택했을까?

문종은 술이나 기름진 음식을 좋아했을까? 문종 2년 2월 14일, 실록은 그가 아우들에게 한 말을 이렇게 기록했다.

"남녀와 음식의 욕심은 사람에게 가장 간절한 것인데, 부귀한 집의 자제들은 이것 때문에 몸을 망치는 이가 많다. 내가 매양 아우들을 보고는 순순히 경계하고 타일렀으나 과연 능히 내 말을 따르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문종의 등창이 독한 술이나 기름진 음식으로 인해 생겼다고 보긴 힘든 대목이다. 당시 실록의 평가도 그의 말과 일치한다.

"희로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음악과 여색을 몸에 가까이하지 않으며,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몸을 수양하였다."

건강은 여러 가지 요건이 합리적으로 맞아떨어질 때 유지된다. 실록은 문종의 건강에 일부 적신호를 보였던 부분도 언급했다.

"임금의 성품에 지극히 효성이 있어 양궁(세자와 세자빈을 아울러 이르던 말)에 조금이라도 편안치 못한 점이 있으면 몸소 약 시중을 들어서 잘 때도 띠를 풀지 않고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세종이 병환이 나자 근심하고 애를 써서 그것이 병이 되었으며 상사(喪事)를 당해서는 너무 슬퍼하여 몸이 바싹 야위셨다. 매양 삭망절제에는 술잔과 폐백을 드리고는 매우 슬퍼서 눈물이 줄줄 흐르니, 측근의 신하들은 능히 쳐다볼 수 없었다. 3년을 마치도록 외전(外殿)에 거처하셨다."

실제로 세종에 대한 그의 효심은 놀랄 만큼 지극했다.

"세종께서 일찍이 몸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임금이 친히 복어를 베어서 올리니 세종이 맛보게 되었으므로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후원에 앵두를 심어 무성하였는데 익은 철을 기다려 올리니 세종께서 반드시 이를 맛보고 기뻐하시기를 외간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기서 복어는 전복을 말한다. 물고기인 복어와 다르다. 실록에선 우리가 익히 아는 복어를 하돈(河豚)으로 표시했다. 이런 사실은 세종 6년 실록의 한 대목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형조에서 계하기를, 전라도 정읍현의 정을손이 그의 딸 대장과 후처 소사가 음란한 행실이 있으므로 이를 구타하고, 또 대장의 남편 정도를 구타하여 내쫓으려고 하니, 정도가 하돈(河豚)의 독을 을손의 국에 타서 독살하였는데, 소사와 대장은 이것을 알면서 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정도는 옥중에서 병사하였으니, 소사 대장만 율에 의하여 능지처사(능지처참)하소서."


세종은 오랫동안 소갈증과 안질로 고생했다. 세종 21년 6월 21일, 그는 자신의 질병과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소갈증이 있어 열서너 해가 되었다. 지난 봄 강무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을 가리는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어두워져서 한 걸음 앞에 있는 사람만 알겠다."

전복은 안질에 가장 도움이 되는 음식이다. 전복은 간의 열을 내리면서 눈을 보호하는 최고의 음식이다. 한의학에서 간은 봄과 나무를 상징한다. 봄은 영어로 'spring'이다. 용수철처럼 압축된 힘으로 튀어 오르는 에너지를 가진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처럼 간의 본질은 튀어 오르는 양기다. 눈은 불꽃으로 이글거리다 심하면 병이 든다. 눈은 간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한의학에선 눈을 불의 통로라고 본다. 어두운 밤길에서 고양이를 보면 눈이 파랗게 불 타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간 질환으로 발생한 분노와 초조함의 화병은 불의 통로에 불을 더해 눈의 신경을 위축시킨다. 화는 위로 타오르면서 어지럼증을 만들고 혈압을 상승시킨다.

이런 한의학의 논리로 보면, 전복은 음이 성질을 가졌다. 생긴 모양도 그렇지만 수축하고 탱글거리는 육질이 응축한 음의 성질을 띤다. 전복의 수축하고 응축한 힘은 튀어 오르는 양기를 진정시키고 열을 내린다. 간의 화로 인한 두통을 개선하고 혈압을 내리면서 눈을 밝혀준다.

<본초강목>은 눈병의 증상을 구체적으로 지목했다.

"햇빛을 보면 눈이 시린 사람은 (전복에) 국화꽃을 같이 달여 먹으면 좋다."

일반적으로 전복 살을 먹지만 시력을 개선하는 효과는 전복 껍데기가 더 크다. 전복 껍데기'석결명(石決明)'이라고 한다. 전복 껍데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구멍이 있다. 보통은 9개의 구멍이 있다고 해서 '구공라(九孔螺)'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본초강목>은 심지어 구멍이 7개나 9개는 괜찮지만 10개는 약물로 사용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기록했다.

전복 껍데기를 데워 눈에 찜질하는 것만으로도 효험이 있다. 전복 껍데기는 거칠고 울퉁불퉁하지만 속껍데기는 색으로 영롱하게 빛난다. <본초강목>은 바로 이런 형태적 특징을 염두에 두면서 이렇게 효능을 설명한다.

"석결명은 담(痰)이라는 불순물과 열로 인한 거친 허물이 가리는 현상을 없애고(각막의 노화나 위축) 찬란하게 빛이 나는 밝은 시력을 회복하는 데 약효가 있다."

소갈이라는 이름도 열로 태워 갈증을 유발한다는 뜻이고 보면, 음의 성질을 띤 전복은 세종에게 좋은 음식 이상의 약선 요리였다. 수많은 음식 중 세종에게 딱 맞는 약선 음식을 찾아냈다는 건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한 문종의 열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세종은 소갈, 건습, 종기, 안질 등을 앓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건강에 적신호가 계속되자 세종 24년 7월 28일 당나라 세자가 정무에 참여했던 첨사부의 전례를 따라 첨사원 설치를 명한다. 세종은 25년 계조당을 만들어 세자인 문종의 섭정 시대를 열었다.

이후 세종 32년까지 문종은 8년여 국왕 권한을 행사하면서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한다. 세종의 태평성대는 아버지 세종과 아들 문종의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낮은 한의학] 문종의 건강학 ② 며느리의 동성애, 세종의 반응은…


등창은 종기로 대표되는 옹저의 한 부분이다. 옹저가 생기는 원인에 대해 <동의보감>은 이렇게 설명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흔히 이 병이 생긴다."

문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 드물게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킨, 정통성에 문제가 없는 왕이다. 그의 스트레스 원인은 바로 부인에게 있었다. 그는 세 번이나 홀아비가 됐던, 개인사가 불행한 왕이었다.

실록은 세종 11년 7월 20일 문종의 첫 부인 휘빈 김 씨를 폐비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문종은 상호군 김오문의 딸과 결혼했다. 김오문은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 씨와 남매지간으로 인척 관계였다.

"내가 전년에 세자를 책봉하고, 김 씨를 누대 명가의 딸이라고 하여 간택하여서 세자빈을 삼았더니, 뜻밖에도 김 씨가 미혹하는 방법으로 써 압승술(주술을 쓰거나 주문을 외어 음양설에서 말하는 화복(禍福)을 누르는 일)을 쓴 단서가 발각되었다. 과인이 듣고 매우 놀라 즉시 궁인을 보내어 심문하게 하였더니, 김 씨가 대답하기를 '시녀 호초가 나에게 가르쳤습니다' 하므로 곧 호초를 불러들여 친히 그 사유를 물으니, 호초가 말하기를 '거년 겨울에 주빈(主嬪)께서 부인이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술법을 묻기에 모른다고 대답하였으나, 주빈께서 강요하므로 비(婢)가 드디어 가르쳐 말하기를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발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멀어져서 배척을 받는다 하오니, 효동 덕금 두 시녀의 신을 가지고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했는데, 효동 덕금 두 여인은 김 씨가 시기하는 자다. 김 씨는 즉시 그 두 여인의 신을 가져다가 자기 손으로 베어내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하여 그 술법을 써보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틈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호초가 또 말하기를 '그 뒤에 주빈께서 다시 묻기를 "그 밖에 또 무슨 술법이 있느냐"고 하기 에비가 또 가르쳐 말하기를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조선왕실 최초 동성애 스캔들의 장본인인 세자빈 봉 씨다. 창녕 현감을 지낸 봉여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는데, 궁중의 여종 소쌍과 동성애를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세종 18년 10월 26일 기록은 이렇다.

"내가 중궁(왕비를 높여 이르던 말)과 더불어 소쌍을 불러서 그 진상을 물으니,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실록에는 봉 씨의 죄목이 질투심이 많고 아들을 낳지 못했으며 남자를 그리는 노래를 불렀다고 적혀 있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동성애는 지금도 터부시하는 이들이 많다. 조선 초에는 이보다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세종도 자신의 며느리가 저지른 죄목을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웠을 것이다.

세 번째 세자빈은 권전의 딸로, 딸을 낳은 후궁이었다. 권 씨는 마침내 아들을 낳는다. 세종은 원손을 얻은 기쁨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그런데 사면령을 발표하는 교지 읽기를 마치자마자 의전용 촛불인 대촉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다. 암시였을지 모르지만 권 씨는 아들을 낳은 바로 이튿날 세상을 떠난다.

세종은 곧바로 동궁전을 헐어버린다.

"궁중에서 모두 말하기를, '세자가 거처하는 궁에서 생이별한 빈이 둘이고, 사별한 빈이 하나이니,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헐어버려 다시 거기에 거처하지 말게 하자'고 한다."

세 번이나 홀아비 신세가 된 문종이 느꼈을 심적 고통과 답답함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문종은 유교 원리주의자에 가까웠다. 기쁨과 슬픔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고 스스로 삭였으니 그 마음속의 화가 종기로 분출된 건 아닐까. 세종이 승하한 사흘 뒤인 2월 20일 문종의 증세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전일 난 종기가 낫지 않았는데, 또 종기가 발생했다. 황보인, 정인지 등은 여막(궤연 옆이나 무덤 가까이에 지어 놓고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살이와 빈객 접대를 하지 말라고 극구 말린다. 아버지의 장례임에도 종기의 증세가 심해 회복을 가늠하기 힘들었다는 방증이다.

즉위년 3월 17일과 22일, 4월 6일, 5월 4일의 기록을 보면 종기에 딱지가 앉으면서 아물어가자 문종은 세종의 빈전으로 가려 하고 승지와 대신들은 만류하면서 옥신각신한다.




[낮은 한의학] 문종의 건강학 ③ 수양의 야심, 거머리가 막을 수 있었다면!


문종 1년 8월 8일엔 다시 허리 밑에 작은 종기가 생긴다. 11월 14일과 15일엔 종기가 난 부위가 쑤시고 아프다면서 두통까지 호소한다. 이런 와중에 등장한 게 거머리 요법이다. 문종은 11월 16일 "어제 아침에는 차도가 있더니, 어제 저녁에는 쑤시고 아파서 밤에 수질(거머리)을 붙였다. 붙인 뒤에는 약간의 가려움은 있으나 어제 저녁 같지는 않다"고 했다.

이후 종기가 많이 회복되면서 정무를 재개하는 효험을 본다. 거머리를 이용하는 치료 방법을 <동의보감>에선 기침법이라고 한다.

"종기가 생겨서 점차 커질 때 물에 적신 종이 한 조각을 헌 데에 붙이면 먼저 마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종기의 꼭대기다. 그곳을 먼저 물로 깨끗하게 씻어서 짠 기운이 없게 한 다음 큰 붓대 1개를 종기 중심에 세워 놓고 그 속에 큰 거머리 한 마리를 집어넣는다. 다음에 찬물을 자주 부어 넣으면 거머리가 피와 고름을 빨아먹는다. 그러면 헌 데의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허옇게 된다. 옹저의 피고름을 빨아먹은 거머리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데, 물에 넣으면 다시 살아난다."

이런 방법은 독이 심하지 않은 곳에만 써야 한다. 심할 때 쓰면 되레 피만 빨려서 이롭지 않다고 경고한다. 문종 2년 4월 23일, 그는 자신의 질병을 언급하며 회례연(설날이나 동짓날에 문무백관이 모여 임금에게 배례한 후 베풀던 잔치)을 중지할 것을 명한다.

"내 병은 급하지 않으니 그 증세(症勢)를 살펴보아서 26일에는 내가 마땅히 친히 나가겠다."

하지만 5월이 되면서 문종의 종기는 다시 악화일로를 걷는다. 당시 일본에서 사신이 왔지만 만나지도 못하고 정무를 모두 정지하면서 병이 낫기만을 기다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문종의 종기를 책임지면서 진료한 의사는 전순의다. <식료찬요> <산가요록> <의방유취>를 편찬한 당시 최고 명의였다. 세종 때는 일본에서 사신 일행으로 온 승려 숭태가 의술에 정통한 사실이 알려지자 흥천사에 데려다 놓고서 전순의로 하여금 직접 의술을 배워오게 할 정도로 국가에서 기른 인재였다.

5월 5일 전순의는 "임금의 종기가 난 곳이 매우 아프셨으나 저녁에 이르러 조금 덜하고 농즙이 흘러 나왔으므로 두탕(豆湯)을 드렸더니 임금이 음식의 맛을 조금 알겠더라고 하셨다"면서 호전의 신호를 알렸다. 전순의는 5월 8일엔 "임금의 종기가 난 곳은 농즙이 흘러나와서 지침(紙針)이 저절로 뽑혔으므로 찌른 듯이 아프지 아니하여 평일과 같습니다"라고 또 한 번 청신호를 알린다.


▲ 영화 <관상>의 문종(김태우). ⓒface-reader.co.kr

▲ 영화 <관상>의 문종(김태우)

지침은 종기 사이에 꽂아둔 종이 심지로 추정된다. 종이 심지에 대한 <동의보감>의 기록은 이렇다.

"침을 찔러 고름이 나오지 않으면 건강한 환자에겐 털 심지를 꽂아 넣고 허약한 환자에겐 종이 심지를 꽂아서 계속 고름이 나오게 해야 한다. 만일 부은 것이 내리지 않고 아픈 것이 멎지 않으면 빨리 고름을 빼낸 다음 탁리하는 탕약을 먹어서 원기를 돋워야 한다."

종이 심지가 빠지고 나자 실제로도 처방에 탁리의 방법을 썼다. 당시 기록을 보면 허후가 5월 12일 종기의 차후 조리법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큰 종기를 앓고 난 후에는 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히 회복되니,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종기 난 곳은 날로 차도가 있으니 신 등은 모두 기뻐함이 한이 없습니다. 다시 날로 조심을 더하시고 움직이거나 노고하지 마시어서 임금의 몸을 보전하소서. 또 듣건대, 전하께서 조금 갈증이 나면 냉수를 좋아하신다 하니, 무릇 종기가 갈증을 당기는 것은 그 보통의 증상입니다. 갈증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약을 먹어서 속을 덥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탁리의 대표적 약물인 십선산을 처방한다. 십선산의 탁리법을 설명한 조문엔 증상이 악화돼 위험해지는 경우를 이렇게 설명했다.

"종기가 초기에는 도드라져 올라오며 부었다가 5~7일이 되면 갑자기 꺼져 들어가서 편평해지는 것은 속으로 몰리는 증상이다. 이 때는 빨리 내탁산과 속을 보하는 약을 써서 장부를 보하여 든든하게 해야 한다. 막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제일 나쁜 증상이다. 막이 뚫리면 열에 하나도 살 수 없다."

문종 2년 5월 14일 기록을 보면, 전순의는 은침으로 종기를 따서 농즙을 짜냈다. 두서너 홉의 농을 짜냈다고 기록돼 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360밀리리터 정도의 엄청난 양이다. 전순의는 의정부와 육조에 "임금의 옥체가 어제보다 나으니 날마다 건강이 회복되는 중이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전순의나 신하들의 바람과는 달리 5월 14일 문종은 세상을 달리했다.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호전되고 있다는 보고만 믿다 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망연자실했다. 대사헌 기건은 전순의를 강력히 탄핵했다.

"대저 독이 있는 종기는 처음엔 미미하게 나타나며 등에 있는 것은 더욱 독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터인데도 이에 말하기를 '해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의 첫째입니다. 몸의 기운을 피로하게 움직이는 것은 등창에서 크게 금하는 것인데도 이를 아뢰지 아니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의 둘째입니다. 음식물의 성질이 반드시 병과 서로 반대되면 해로움이 있고 꿩 고기 같은 것이라면 등창에서 크게 금하는 바인데도 날마다 꿩 고기 구이를 드렸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의 셋째입니다. 등창에서는 농하여 터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그것이 농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를 침으로 찔러서 그 독을 더하게 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의 넷째입니다."

꿩고기 구이를 수라에 올린 건 <식료찬요>를 지은 식치(食治)의 일인자치고는 큰 실수였다. <본초강목>은 꿩 고기를 이화(離火)의 음식이라고 규정한다. 닭과 꿩은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꿩을 야계(野鷄)라고 한다. 그러나 쪄서 요리를 하면 닭은 색깔이 변하지만 꿩은 색깔이 붉게되므로 오행으로 보았을 때 화(火)의 음식이라고 규정한다.

종기는 본래 혈에 열이 심해서 생긴 것으로 화의 작용으로 보는 질병이다. 질병의 양상으로 보았을 때 더 악화할 위험이 있는 음식을 수라에 올린 건 있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전순의는 어의에서 전의감 청지기로 전락한다. 특히 봄에 꿩 고기를 먹는 건 부작용으로 치질, 부스럼, 습진을 유발한다. 마침 이때는 문종이 치질을 앓은 시점이다.

<동의보감>의 '옹저문'은 종기의 원인을 밝히며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흔히 이 병이 생긴다"라고 규정했다. 술과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오직 성군의 길을 가고자 했던 문종에게 세 번의 홀아비 신세가 얼마나 부담이 됐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낮은 한의학] 명종의 건강학 ① 조선에도 여왕이 있었다


문정왕후 윤 씨는 조선 제12대 왕 인종(1515~1545년, 재위 1544~1545년)과 제13대 왕 명종(1534~1567년, 재위 1545∼1567년)의 어머니로, 중종의 계비다.

연산군을 내쫓은 반정 공신은 중종과 그의 첫 부인인 단경왕후 신 씨를 강제로 헤어지게 만든다. 신 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과 처남, 매부 지간으로 반정에 반대했기 때문에 겪은 불행이다. 인왕산의 치마바위는 쫓겨난 신 씨가 구중궁궐에서 중종이 혹시 자신을 바라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바위에 치마를 걸치고 궁궐을 바라봤다는 애달픈 한이 서린 장소다.

중종의 둘째 부인은 장경왕후인데,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출산한 아이가 인종이다. 장경왕후의 출산을 도운 이는 TV 드라마로 유명한 장금이다. 셋째 왕비가 바로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제였던 문정왕후다. 두 딸을 낳은 그는 결혼 17년 만인 중종 29년에 훗날 명종이 되는 왕자를 생산했다.

문정왕후는 인종과 명종 두 왕의 건강과 죽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명종 20년 4월 6일, 사관이 쓴 윤 씨의 졸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윤 씨는 천성이 강한하고 문자를 알았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적에 윤 씨가 그를 꺼리자, 그 아우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의 무리가 장경왕후의 아우 윤임(尹任)과 틈이 벌어져, 윤 씨와 세자 양쪽 사이를 얽어 모함하여 드디어 대윤, 소윤의 설이 있게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인종의 고위(孤危)를 근심하였는데, 중종이 승하하자 인종은 효도를 극진히 하여 윤 씨를 섬겼다. 그러나 삼조할 즈음에 빈번히 원망하는 말을 하고, 심지어 '원컨대 관가(왕)는 우리 가문을 살려달라'고까지 말하였다. 인종이 이 말을 듣고 답답해하고 또 상중에 과도히 슬퍼한 나머지 이어서 우상(憂傷)이 되어 승하하게 되었다."

친아들인 명종도 문정왕후의 압박에 건강을 해쳤다.

"스스로 명종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임금)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 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죽는 순간까지 명종을 괴롭힌 심열증의 뿌리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4월 20일 명종이 지시해 만든 공식 문서는 사뭇 다르다.

"인종이 원자로 있을 때 부지런히 애써 무양(어루만지듯이 잘 돌보아 기름)함이 자기 소생보다 더 나았다. 항상 인종의 학문이 날로, 달로 진취함을 기뻐하여 유모, 보모, 시인(侍人)의 무리에게 자주 상을 주었다. 인종과 효혜공주가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것을 애통히 여겼고, 공주의 자제에 이르러서도 모든 일을 일체 공주의 예에 의하였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문정왕후는 두 번이나 공주를 낳은 끝에 결혼 17년 만에 명종을 낳는다. 그 동안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누르고 쓴 맛 단 맛을 보며 권력의 속성으로 앞날을 파악한 여장부다운 처신이 아니었을까. 문정왕후는 권력을 잡자 자신과 대립했던 대윤파를 일소했다.

이때 윤임과 그 일파가 제거되면서 인종 때 등용된 사림들도 대거 피해를 보았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을사사화는 대윤과 소윤의 정쟁이지만, 그 이면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훈구 세력과 성리학의 원리주의자인 사림 세력 간 갈등이 배경으로 있었다.

사림은 선조 이후 조선의 정치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 때문에 사림과 갈등을 겪으면서 불교를 옹호한 문정왕후를 실록이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문정왕후의 권세를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은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양재역 벽에 대자보 성격의 글이 게시된 것이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여주는 여왕의 권력을 가진 분이라는 뜻이다. 이 사건으로 중종과 희빈 홍 씨 사이에 난 인종과 명종의 이복형제 봉성군 이완이 사사(賜死)당한다. 불교는 세종마저 평생의 위안처로 삼았으면서도 대놓고 절 하나 마음대로 지을 수 없었던 조선의 이단 종교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를 육성하고 도첩제를 만들어 승려 보우를 우대한 문정왕후의 배짱은 조선의 미스터리다. 반면 유학적 소양을 지닌 명종이 얼마나 어머니의 압박에 시달렸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인종의 극단적 도덕성

▲ 2001~2002년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문정왕후(전인화). ⓒSBS

▲ 2001~2002년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문정왕후(전인화). ⓒSBS

사실 이런 경향은 즉위 7개월 만에 사망한 인종 때부터 있었다. 인종은 조선의 국교인 성리학을 뼛속까지 체화했다. 명종 즉위년 7월 27일 인종의 행장은 이렇게 기록됐다.

"왕의 성품이 엄중하여 평소 한가롭게 소일할 적에도 조용히 침묵하면서 희롱하는 말이 없었고, 찡그리거나 웃는 모습을 외형에 나타내지 않았고, 좌우의 근시(近侍)들에게도 일찍이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항상 자신의 미덕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으며, 혹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좋아하지 않는 빛이 있었다. (…) 성색(음악과 여색(女色)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유학이 공자를 조종(祖宗)으로 하여 국가와 사회의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했다면, 성리학은 주자를 조종으로 해 태어난 바 마음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성리학은 유학이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던 불교적 공(空)의 세계와 도교의 도(道)의 세계까지 그 관심사를 확장해 마음의 태극을 닦아가는 공부였다. 인종은 바로 그런 성리학적 세계관에 깊숙이 빠진 그런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왕의 이상형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이다. 안으로 성현 같은 인격을 완성하고 밖으로 왕다운 왕 노릇을 하는 것이다. 성현은 당연히 공자와 주자가 롤 모델이다. 공자는 <논어> '향당 편'에서 자신의 식생활 습관을 밝히면서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했다. 생강이 정신을 소통하고 내부의 탁한 악기를 없앤다고 주석을 달았다.

인종은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조선 전기에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 보던 관아)의 궁료들에게 생강을 하사했다.

"내가 <논어>에 공자의 음식에 대한 절도를 기록한 것을 보니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입과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정신을 소통시키고 입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여러분은 공자를 사모하는 사람들로서 비록 말단인 음식 같은 것에서도 반드시 법을 취하고 있을 것이기에 지금 이 채소를 글 선생인 시강원 궁료에 보내는 것이니, 한 번 맛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매운 생강을 선물하며 극단의 공자 따라 잡기를 한 것이다.

인종과 연산군은 매우 대조적이지만 비슷한 면도 많다. 일찍 세자로 책봉됐고, 어머니가 얼굴도 모르던 시절에 세상을 떠났으며, 계모의 손에 자라 다음 왕위가 계모의 아들로 이어졌다. 어머니가 모두 파평 윤 씨였고, 31세에 사망한 점도 닮았다. 하지만 인종은 사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또 극단적으로 효심을 발휘했으며 도학자로서의 금욕 정신을 실천한 반면, 연산군은 처용무라는 탈춤을 추고 백모를 겁간하면서 소의 태(胎)를 먹는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극단적인 도덕성도, 극단적인 쾌락도 건강을 해친다는 평범한 진리를 역사가 확인해 준 셈이다.

실록은 인종의 효심이 죽음에 이르는 병의 원인이 됐음을 담담히 적고 있다.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별다른 질병이 없었다. 자신의 누님인 효혜공주의 죽음을 슬퍼해 초췌해졌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왕이 성복(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음)에서 졸곡(삼우제를 지낸 뒤에 곡을 끝낸다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까지 죽만 먹고 염장(鹽醬)은 먹지 않았으며 밤에 편히 자지 않고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고 나서도 상차를 떠나지 않았다. 왕이 시질(侍疾) 초두부터 초췌함이 너무 심하였는데, 대고를 당함에 이르러서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철골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날 지경이었으므로 대신이 선왕의 유교를 들어 아뢰면서 권도를 따라 육선을 진어하라고 청하면, '나의 성효가 미덥지 못하여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다' 하면서 더욱 애통해 하였다."

병이 더욱 악화된 것도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무리했기 때문이었다. 이 대목에서 문정왕후의 인종 독살설이 등장한다.



[낮은 한의학] 명종의 건강학 ② 인종 떡 독살설의 진실은…


인종이 마지막으로 언급한 인물은…

인종의 재위 기간은 8개월이다. 인종 1년 윤(閏)1월 1일부터 약방 제조와 의원들은 계속해 진찰을 받고 약을 쓸 것을 왕에게 건의하지만 거절당한다. 신하들은 세종의 경우처럼 고기반찬을 먹을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인종은 1월 29일 이런 신하들의 요청에 이렇게 반문했다. 실록이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기록할 만하다.

"나도 아들인데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한다면 어디에다 나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느냐."

인종 1년 6월 25일 이질(설사) 증세가 시작되면서 왕의 증세가 급격하게 나빠진다.

"상의 증세는 대개 더위에 상한 데다 정신을 써서 심열(心熱)하는 증세로 매우 지치셨는데, 약을 물리치는 것이 너무 심하여 광증을 일으키실 듯합니다."

이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인종은 7월 1일 세상을 떠난다. 하루 전에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죽은 조광조를 언급한 것이 특별히 눈에 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비원을 윤임에게 이렇게 털어 놓는다.

"조광조를 복직시키고 현량과를 부용(復用)하는 일은 내가 늘 마음속으로 잊지 않았으나 미처 용기 있게 결단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평생의 큰 유한이 없지 않다."

야사는 문정왕후가 인종에게 떡을 주어 독살했다고 전한다. 6월 18일의 기록은 이렇다.

"상이 경사전에 나아가 주다례를 지내고 자전(慈殿)에게 문안하였다. 자전이 수가(隨駕)한 시종, 제장에게 술을 먹이고, 또 시종에게 호초를 넣은 흰 주머니를 내렸다."

같은 날 실록은 야사의 추측에 힘을 보태는 기록을 남겼다.

"인종이 이날 이후 원기가 끊어지고 병세가 심해져 다시는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문정왕후가 과연 떡으로 인종을 독살했는지 그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굳이 문정왕후가 독살을 하려 하지 않았더라도, 인종의 심신의 건강 상태가 오래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음은 틀림없다. 아무튼 인종이 이렇게 세상을 뜨면서, 문정왕후는 자신의 친아들을 왕으로 올리는데 그가 바로 명종이다.

조선의 '마마보이' 명종

명종 20년 4월 6일 문정왕후는 자신의 운명할 날이 다가오자 명종의 체력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유언을 남긴다. 아마도 인종의 전례를 염두에 둔 것이었으리라.

"주상은 원기가 본래 충실하지 못하여 오래도록 소선(고기나 생선이 들어 있지 않은 반찬)을 들 수 없으니, 모든 상례(喪禮)는 모름지기 보양하는 것을 선무로 삼아 졸곡까지 기다리지 말고 모든 방법을 써서 조보하는 것이 곧 나의 소망이오."

실제로 명종은 죽기 직전까지 문정왕후가 걱정할 정도로 허약했다. 명종은 즉위 직전에도 역질(疫疾)을 앓았다. '면역'이란 단어의 '역'이 역질의 그것임을 감안하면 현대적으로 볼 때 면역력이 약했던 것이다.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잘 걸리는 감기는 명종의 질병 중 단골 메뉴였다.

명종 8년 환절기에 바람을 쐬어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나른하다고 말한 것을 시작으로, 12년 10월 27일 날씨가 따뜻하지 못해 감기를 오래 앓고 있다면서 궁전 처마 밑에 털로 장막을 쳐서 임금을 추위로부터 보호했다고 할 정도였다.

13년 11월과 14년 1월에도 각각 기침과 어지러움, 감기 증세로 진료를 받는다. 감기에 잘 걸리고 추위를 잘 탄다면 이는 몸속의 보일러인 신장의 양기가 약하다는 신호다. 양기가 약하다는 건 스태미나가 약하다는 의미다. 신장은 차가운 쪽과 뜨거운 쪽 양면이 있다.

차가운 쪽이 물을 상징하는 신수(腎水)라면 신장의 뜨거운 부분인 명문(命門)은 흔히 단전(丹田)과 맥락을 같이한다. 현대 의학의 부신(副腎)이라고 할 수 있는 명문은 비유하자면 생명의 문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내뿜는 일종의 인체의 보일러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체력이 약했던 탓인지 '마마보이' 명종은 엄마 문정왕후의 극성스러운 보호를 받는다.

"주상께서 큰 역질을 겪으신 지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기가 허약하여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한다. 학문과 양기가 모두 중요하나 내 생각으로는 기운을 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실록의 사관은 문정왕후의 이런 지적을 대놓고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과연 기운을 보양하는 것이 학문보다 중요한지 모르겠다"라고 딴죽을 걸었다. 그러나 성리학자 이언적은 의외로 문정왕후의 지적에 힘을 보탠다.

"어제 전교를 들으니 '주상께서는 춘추가 어리신 데다 금년에 또 역질을 앓으셔서 기체가 충실하지 못하니, 학문이 진실로 힘써야 하는 것이지만 신기(身氣)를 보양하는 일 또한 큰일이다. 곡림과 경연은 위에서 헤아려서 조처하겠다' 하셨는데 상교가 지당하십니다."

이언적은 혈기가 안정되지 않을 때 색(여자)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명종의 건강과 스태미나를 최우선 국정 과제로 꼽는다. 당대의 성리학자까지 걱정할 정도로 명종이 약골이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다. 당연히 이언적은 먼저 세상을 뜬 인종의 예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낮은 한의학] 명종의 건강학 ③ 서울 거지들이 갑자기 사라진 엽기적인 사연은?


심약한 왕에 나라는 엉망이 되고…

한의학에선 목소리와 정력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판단한다. 명종 3년 11월 7일 시강관 정유길이 왕의 목소리를 거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옥음을 들으니 여느 때만 못합니다."

신하들의 불안한 예측은 후일 맞아 떨어진다. 명종은 순회세자 하나를 낳았는데, 그 세자가 13세에 죽자 건강에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명종 18년 9월 20일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명종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진다. 이듬해 윤2월 24일 명종은 세자를 잃은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한다.

"나의 심기가 매우 편안하지 않으며 비위가 화하지 않고 가슴이 답답하며 갑갑하다. 한기와 열이 쉽게 일어나며 원기(元氣)가 허약하여 간간이 어지럼증과 곤히 조는 증세가 있고, 밤의 잠자리가 편안하기도 하고 편안치 못하기도 하다. (…)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국가에 경사가 없다. 지난해에 세자를 잃은 뒤, 국가의 형편이 고단하고 약해진 듯하니 심기가 어찌 화평하겠는가."

후계자를 둘러싼 논쟁에서 명종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핏줄을 염두에 뒀다. 그만큼 순회세자의 죽음은 명종의 건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명종 20년 4월 6일 어머니 문정왕후가 죽었다. 외삼촌이자 권력의 핵심인 윤원형은 바로 영의정 자리에서 쫓겨났다. 윤원형의 첩이면서 안방 권력을 흔들었던 정난정은 본처를 독살한 혐의로 고소당했다. 왕후의 작은아버지였던 심통원마저 쫓겨나면서 친위 권력이 모두 사라졌다.

본래부터 심열증을 앓던 명종은 큰 충격을 받아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 명종 20년 9월 15일엔 열이 심해 신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대신들은 후계자 문제를 절박하게 물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명종은 "내전(內殿)에서 생각하여 처리할 것이다." (당시에 상이 하답하기가 어려워서 이같이 하교했으나 실은 후사를 정하겠다는 뜻이 없었다) 대신들은 다시 왕비를 압박했고, 왕비는 마지못해 한글로 하성군 이균(선조)을 지목했다. 이것이 바로 '을축년의하서'다.

심열증은 명종이 가장 자주 호소한 괴로움이다. 그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위세에 눌려 한 번도 왕권을 행사해보지 못한 마마보이의 전형이었다.

윤원형의 전횡을 비롯한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임꺽정이란 의적까지 출현한다. 명종 14년 3월 27일 임꺽정 토벌 방안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재상들의 인식은 사태의 본질을 분명하게 환기시켜 준다.

"도적이 출현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엽기적인 일도 많았다. 명종 21년 2월 29일에 전하는 다음 이야기는 단적인 예다.

"사서(士庶)들이 주색을 즐기다 음창(성병)에 걸린 이가 많았다. 사람의 쓸개로 치료하면 그 병이 즉시 낫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통을 받던 이들이 많은 재물로 사람을 사서 죽이고 그 쓸개를 취했다. 종루, 보제원, 홍제원 등에는 걸인이 많이 모였는데 4~5년 새 이들이 다 사라졌다. 나중에 이들은 평민에게까지 손을 뻗쳐 아이를 잃은 자가 많았다."

음창은 사타구니에 생기는 부스럼으로 일종의 성병 후유증이다. 이것을 사람의 쓸개로 치료하고자 했던 것이다.

내시들에겐 강하고, 신하들에겐 약하고 심약한 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실록의 마지막 졸기다.

"환시(宦侍)를 대할 때에는 매우 질타했지만 외신(外臣)을 대하면서는 조금도 잘못한다고 지적을 못했으니, 공론을 두려워하고 조정을 높이는 것이 지극했던 것이다. (…) 상이 군자를 쓰려고 하면 소인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 죽여 버리고, 상이 소인을 제거하려고 하면 소인이 자기를 좇는 것을 이롭게 여기며 서로 이끌며 보호했다."

이런 졸기를 뒷받침하는 예는 실록 17년 7월 12일의 기록이다.

"상은 성품이 강명(剛明)하여 환시들의 잘못을 조금도 용서하지 아니하고, 항상 궁중에서 조금이라도 거슬리거나 소홀히 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꾸짖고 매를 치기까지 하였다. 희로가 일정하지 않아 아침에 벌을 주었다가 저녁에는 상을 주고 또는 저녁에 파면시켰다가 아침에 다시 서용하니, 환시들이 상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심히 두려워하지 않았다."

외부에 강한 사람은 내부에 약하고 외부에 약한 사람은 내부에 강하다. 심약한 명종은 내시들에게 한없이 강했지만, 외부로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거나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중국 사신이야 오죽했겠는가. 22년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문제로 왕은 지레 겁을 먹고 고민했다. 실록은 당시의 상황을 "상이 평소 심열이 있는 데다 더욱 사신에 대한 생각에 열증을 돕는 징후가 없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왕이 건강할 권리

심열증이 심해지면서 명종의 체질적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실록 20년, 명종은 자신은 본래 약한 체질로 위는 열이 나고 아래는 냉한 증세가 있었는데 더욱 심해져서 가슴과 명치가 막힌 듯해 음식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21년 9월 13일에도 명종은 자신이 약질로 본디 심열이 있어 병을 자주 앓는데 세자를 잃고 매우 상심하고 다시 어머니의 상을 만나 마음이 한없이 괴롭다고 호소한다. 22년 6월 9일에도 위는 뜨겁고 아래는 냉한 증세로 진료를 받는다.

이렇게 명종이 토로하는 괴로움은 한의학에서 자주 언급하는 상열하한증이었다.

음양오행론에서 심장은 우리 몸의 엔진이어서 불꽃(火) 같은 힘을 상징한다. 신장은 겨울을 상징하므로 차가운 물(水)을 나타낸다. 불은 위를 향하고 물은 아래로 흐른다. 상열하한을 치료하는 수승화강(水升火降)은 마음을 다스려 심장의 열기를 하부로 내리고 신장에 저장된 차가운 물을 데워 상승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명종은 스트레스로 심열이 심해져 불이 위로 향하고 정력을 상징하는 신수는 고갈돼 상승할 수 없었다. 평소 의식주 습관도 문제가 있었다. 너무 더운 곳에 거처하고 두꺼운 옷을 입었으며 찬 음식을 즐겼기 때문에 소화 기능이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도 여름에 찬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는 경우가 많은데, 오랜 지병을 앓은 명종의 소화 기능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명종 22년 6월 27일 실록은 마지막 증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상께서 열기가 위로 치받쳐 올라 인사를 살피지 못한다."

<동의보감>은 이런 증상을 간열과 비허로 파악했다.

"몹시 성 내어 간을 상하면 열기가 가슴에 밀려오고 숨이 거칠고 짧아지면서 끊어질 듯하며 숨을 잘 쉬지 못한다." "지나치게 생각하여 비를 상하면 기가 멎어서 돌아가지 못하므로 중완에 적취가 생겨서 음식을 먹지 못하고 배가 불러 오르고 그득하며 팔다리가 나른해진다."

성리학은 본성과 천리를 파악하고 수양함으로써 기질과 욕망을 억제하고 경건하게 살 것을 유일한 해답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치유 체계도 공존할 필요가 있다. 성리학은 왕이 건강하게 살아갈 권리를 빼앗았다. 성리학 원리주의자였던 인종과 심약한 마마보이 명종은 그렇게 조선의 이념적 질곡 속에서 죽어갔다.




[낮은 한의학] 태종의 건강학 ① 정도전 죽인 이방원, 진심은 이랬다


조선 건국을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고, 건국 이후에도 왕권 중심의 권력 재편을 위해 피의 숙청을 단행했던 태종은 어떤 체질이었을까? 우리는 태종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기골이 장대한 후덕한 인상을 떠올린다. 아마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 역할을 한 탤런트 유동근이나, 최근 <정도전>에 나온 안재모의 이미지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의사를 조롱한 똑똑한 왕

하지만 사실 태종은 기골이 장대한 건강 체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록을 하나 살펴보자. 태조 3년 6월 1일, 앞으로 태종이 될 정안군 이방원은 명나라 황제의 조선에 대한 의구심을 풀고자 사신으로 떠난다. 태조는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을 놓고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 여정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이처럼 조선 건국의 현장을 누비며 정몽주, 정도전을 죽이고,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를 살육했던 태종은 의외로 파리하고 허약한 체질이었다. 반면에 그의 성정은 강명(剛明)했다. '강(剛)'은 성격이 칼처럼 날카로웠다는 이야기고, '명(明)'은 머리가 명철했다는 이야기다. 태종이 현직에서 물러난 세종 2년 10월 28일의 기록에 바로 이 말이 나온다.

"일찍이 의원 원학(元鶴)이 상왕전에 시종하였다. (그런데) 상왕이 종하가 의술에 매우 능하다는 말을 듣고, (…) 종하로 하여금 원학과 더불어 번갈아 입직케 하려고 원학을 보내어 종하를 부르니, 종하가 상왕의 강명(剛明)함을 꺼려서 가까이 모시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자신할 만한 경험이 없다 하여 나가지 아니했다.

원학이 다시 사람을 보내서 불렀으나, 또 가지 않으므로 의금부가 (종하를) 신문한즉, 종하가 말하기를, '상감께서 명철하오신데 만일에 방서(方書)를 물으시면 어찌 대답하오리까. 그래서 가지 못했나이다' 하므로, 곧 대역으로 논죄하여 (종하를) 참형에 처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조선 왕조 내내 진료를 꺼렸다가 참형에 처한 유일한 의원이 바로 정종하였다. 사실 정종하가 태종의 치료를 꺼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고금의 서적에 능통한 태종의 지적 능력은 여러 차례 당대 의학에 대한 논평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의원들 공부 좀 더 하라'는 태종의 태도는 오만으로 느껴질 정도다.

태종 15년 1월 16일 궁중에서 여덟 살 되는 아이가 병이 나자 조청이라는 의원이 약을 지었는데, 어른 분량의 약을 지었다. 소아는 약 분량의 반만 짓게 되어 있었으므로, 태종이 조청에게 '몇 살까지를 소아로 규정하는지'를 물었다. 조청이 '5, 6세까지를 소아라고 한다'고 답하자 태종은 <천금방>이라는 책을 찾아서 이렇게 반문하며, 조청을 질책했다.

"2~3세까지를 영아라 하고, 10세까지를 소아(小兒)라 하고, 15세까지는 소아(少兒)로 구분해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파고지(破古紙)'는 <동의보감>에서 신장의 기능이 떨어져서 정액이 저절로 나오고 허리가 아프며 무릎이 차고 음낭이 축축한 것을 치료하는 성기능 개선제다. 이름 자체가 오래된 문창호지를 뚫는다는 뜻이어서 벽지와 착각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태종은 "도벽지(塗壁紙)를 파고지로 우기는 이들이 있다"며 "의학자가 방서에 밝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 <정도전>의 태종 이방원(안재모). ⓒ한국방송

▲ <정도전>의 태종 이방원(안재모). ⓒ한국방송


태종이 앓았던 심신의 병, 풍질

왕권을 강화하여 국가 이성이 되기를 원했던 태종은 정작 궁중 생활을 좋아했을까? 태종 2년 9월 19일의 기록은 궁중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는지 잘 보여준다.

"금년에는 종기가 열 번이나 났다. 의자 양홍달(楊弘達)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깊은 궁중에 있으면서 외출하지 아니하여, 기운이 막혀 그런 것이니, 탕욕(湯浴)을 해야 된다'고 하였다."

간관들은 왕에게 지지 않고 온천 행을 반대한다. 태종의 반응은 그의 성격을 다시 한 번 잘 드러낸다.

"간관들이 '전하는 춘추가 젊어서 반드시 병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20, 30대의 젊은 사람은 반드시 병이 없는가? 간관이 내 병의 치료를 못하게 막으니 나는 가지 않겠다."

태종이 온천을 포기하면서 강무(講武)를 가겠다고 하자 간관들은 다시 한 번 왕의 강무를 막는다. 강무는 사냥을 통해 무예를 익히는 행사인 만큼 말달리기를 포함하는데 태종은 말을 빨리 달리는 스피드광이었기 때문이다. 이 날 말미에 조영무가 나서서 신하들의 걱정을 대변한다.

"여러 아랫사람들이 사냥을 안 했으면 하는 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마음대로 말을 달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태종은 자신의 건강 이상을 토로했으나, 정작 실록은 태종이 즉위한 지 13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인 병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앞에 자신이 지목한 종기가 자주 발생하였다는 것 외에 크게 주목할 만한 질병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재위 8년이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병이 나기 시작한다. 13년 8월 11일에는 태종이 자신의 질병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내가 본디 풍질(風疾)이 있었는데, 근일에 다시 발작하여 통증이 심하다. 지난밤에 조금 차도가 있었으니, 경들은 우려하지 말라."

풍질의 증상은 이후 여러 차례 반복되고, 실록은 그 때마다 구체적으로 태종의 고통을 기록한다. 동년 11월 16일에는 "임금의 손이 회복되지 않아 흙을 잡기가 어려웠다"고 기록했고, 세종 1년 4월 29일에는 "(태종의) 오른팔이 시고 아리며 손가락을 펴고 구부리는 것에 차도가 있어 속히 돌아갈 것을 명했다"는 부분도 있다.

실록의 증상을 종합하면 태종의 풍질은 지금의 목 디스크와 유사한 질환이었다. 그럼, 풍질은 도대체 어떤 질병일까?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자연에서의 대기와 인체 내부에서 흐르는 원기가 그것이다. 자연에서의 대기가 풍이 되면 감기 증상을 유발하여 오한 발열하는 것이고, 내부의 원기가 풍이 되면 뇌혈관 질환이나 관절염 등 풍병을 발한다.

내부의 원기가 풍이 되어 풍질이 생겼다면 어떤 원인으로 풍이 생겼고, 어떤 장부와 관계가 있을까. <난경(難經)>은 풍은 간과 관계가 있으며 끈기 있게 일을 많이 하거나 화를 자주 내고 기가 흥분하여 가라앉지 않으면, 간의 혈이 허해지면서 신경통 신경마비 오십견 등의 절육통(節肉痛)이 생긴다고 경고한다. 애간장을 태운 것이 풍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다.

격변의 건국 현장에서 수많은 피를 뿌리며 애간장을 태웠던 이방원(태종)은 과연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평가하였을까? 태종은 왕권의 강화라는 큰 목적을 위해서 형제, 처가, 사가 모두에게 피를 뿌렸던 인물이다. 조선의 확립이라는 큰 목적의 뒤에서 개인이 겪어야할 인간적 고통은 피할 수 없었다.

태종의 속내를 알 수 있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태종 재위 16년 5월 19일 극심한 가뭄 속에서 기우제를 준비하면서 그는 이렇게 전지를 보낸다.

"가뭄의 연고를 깊이 생각해 보니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무인(戊寅), 경진(庚辰), 임오(壬午)의 사건이 부자(父子), 형제(兄弟)의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음이다. 그러나 (그 일) 또한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지 내가 즐겨서 한 것은 아니다."

가뭄이 하늘이 주는 벌로 생각한다는 격정적인 토로 속에서 자신의 선택에 따른 부담감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볼 수 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태종은 자신을 괴롭힌 풍질 또한 자신의 업보가 낳은 어쩔 수 없는 병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는 약물을 택하기보다는 차라리 온천을 찾았다. 실제로 태종의 풍질은 온천을 오가며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나의 풍질은 약이 효험이 없다. 비록 의서에는 보이지 않지만, 온천에서 목욕하여 병을 고치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내 장차 이천 온천에 가서 목욕하여 시험하려고 한다."




태종의 건강학 ② 정도전의 목은 쳤지만, 이방원도 유학자였다


태종은 드라마 <용의 눈물>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최근에는 또 다른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의 맞상대로 맹활약 중이다. <용의 눈물>에서 태종 역할을 맡았던 배우 유동근 씨가 <정도전>에서는 태조 이성계 역할을, 그리고 당시 세종 이도 역할을 맡았던 안재모 씨가 이번에는 태종 이방원을 맡았다.

<용의 눈물> 드라마의 제작진은 권력 쟁취 과정에서 골육 간에 벌였던 피눈물을 '용의 눈물'로 정의했다. 하지만 태종이 진짜 '용의 눈물'을 보였던 때는 바로 자신의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죽었을 때였다.

태종 12년 6월 23일 중궁인 원경왕후 민 씨는 막둥이 아들을 낳았다. 태종은 막내의 출산 후 내의원에 근무한 어의들에게 각각 상을 후하게 내리는 것은 물론 자신의 기쁨도 숨김없이 표현했다.

"내가 심히 기쁘다."

태종 18년 성녕대군은 갑자기 전염병인 완두창에 걸려 위독해졌다. 우리는 성녕대군의 전염병 치료를 둘러싼 대응을 통해서 조선 초기 의료의 실상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전염병은 무당과 의사의 치료가 공존하는 영향이었다. 완두창의 예후를 알아보는 방법은 의사가 아니라 무당, 점쟁이 등 무속인이 주도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의학(醫學)의 한자인 '醫'의 의미는 본래 받침인 '酉'가 아니라 '巫'로부터 시작된다. 의학의 기원을 무속으로 본 것이다. 역사적인 기록도 이런 견해를 반영한다. <여씨춘추> '진수편'을 한 번 살펴보면, 한(漢) 무제가 병에 걸리자 무당을 불러 제사를 지내고 나서 병이 나았다.

의학에 밝았던 태종도 다를 바가 없었다. 태종은 승정원에 명하여 점을 잘 치는 사람을 모아 병의 예후를 알아보았는데 점치는 무속인은 점을 보고 모두 '길하다'라고 예측하였다. 이후에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이도)도 여기서 등장한다. 정탁을 시켜 주역 점을 쳐서 임금에게 올리자, 충녕대군이 나와서 이 점을 풀이해 모두가 감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쟁이의 예측과 무관하게 성녕대군은 죽고 말았다. 태종은 아끼던 막내의 죽음에 상심이 대단히 컸던 모양이다. 심지어 태종은 아들이 놀던 곳을 지켜보기 힘들어 개성 유후사로 거처하는 곳을 옮기려고 했다("내가 옮겨 거동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애통하고 맺힌 정을 씻으려는 것이다."). 또 곡기를 끊고 걱정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대군이 병을 얻은 날부터 여러 날 옷을 벗고 자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유명(幽明)의 길이 막혀 있으니 비록 수라를 들려 해도 얼굴 모습이 선하여 잊지 못한다."

태종의 아들 사랑은 성녕대군을 치료했던 의원들의 죄를 묻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태종은 우선 경안공주의 갑작스런 죽음부터 언급한다.

"을미년에 경안 궁주(慶安宮主)의 병의 증세가 열이 나고 괴로움이 심하여 눈을 바로 뜨고 손이 뒤틀리니, 양홍달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병의 증세는 의가에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고 하고, 양위탕과 평위산을 바쳤다. (…) 졸(卒)한 뒤에 내가 방서를 보니, 눈을 바로 뜨고 손이 뒤틀리는 것은 바로 발열하는 증세였다.

성녕군의 창진(瘡疹)이 발하던 처음에 (그는) 허리와 등의 고통을 호소했다. (이를 놓고서) 조청과 원학 등이 풍증(風證)이라고 아뢰어서 인삼순기산을 바쳐 (왕자가) 땀을 흘리게 하였다. 뒤에 (내가) 의서의 두진문(豆疹門)을 (직접 읽어) 보니, 허리와 등의 아픈 것은 완두창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또 병이 위독하던 날에 이미 증세가 변하게 되어 안색이 변했는데, 박거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순조로운 증세입니다. 안색이 황랍색(黃蠟色)이 되면 최상의 증세입니다'고 하였다. 이 어의들이 비록 (왕자를) 고의로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마음을 쓰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다."

문제가 된 인삼순기산은 풍을 치료하는 약이다. 오한이 나며 뒷머리와 목이 뻣뻣하고 아플 때 허약한 사람에게 구사하는 처방이다. 땀을 내는 마황과 기를 고르게 하는 진피 천궁 백지 백출 후박 길경 감초 갈근 인삼이 들어 있다. 이런 인삼순기산은 한의학의 논리를 염두에 둬도 명백한 오류였다.

한의학에서는 전염병의 원인을 음액이 마르면서 건조해진 틈에 외부에서 무엇(바이러스나 세균)인가가 침투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전염병에 몸에서 땀이 나게 하는 마황을 처방해 몸을 더 건조하게 하는 것(면역력을 더 약하게 하는 것)은 완주창의 치료와는 거리가 먼 약제였다.

성녕대군이 죽음이 낳은 후폭풍은 무속인이 주도하는 전염병 대응까지 미쳤다. 태종은 성녕대군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판수, 무녀를 모두 내쳤을 뿐만 아니라 밀교 방식의 둔갑술로 질병을 치료하는 초지종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모두 다 끊었다. 이 때 확고해진 태종의 신념은 죽음 앞에서도 바뀌지 않았다.

"세상을 혹하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것 신선과 부처와 같은 것은 없다."

무당으로부터 벗어나 병의 원인을 따지는 치료 방식을 적용한 최초의 명의는 유명한 편작이다. 그는 "무당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자의 병은 낫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으며, 삶과 병의 원리를 음양 이론에 맞춰서 설명했다. 이렇게 편작이 도입한 이성적인 의료 방식을 조선에 자리 잡게 한 최초의 군주가 바로 태종이었다.

이런 태종의 옆에는 그의 어의 평원해가 있었다. 그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일본의 중으로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어의로서 태종을 오랫동안 진료하였다. 불교와 중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던 태종이 중이었던 평원해를 옆에 둔 것도 흥미로운데, 그에 대한 평가는 더욱더 흥미롭다.

"네(평원해)가 의(義)를 사모하여 귀순해 와서, 내가 잠저에 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증상을 진찰하고 약을 조제하되, 날로 더욱 근신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또 나라 사람이 병이 있으면 즉시 의료하여 자못 효험이 있었으니, 공로가 상을 줄 만하다."

이런 태종은 어떤 질병으로 세상을 떴을까? 실록은 여기에 대해 한 마디도 설명이 없다. 세종의 하교를 보면 태종의 병환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으로  전한다. 세종 4년 4월 22일 태종은 아들(세종)과 동교에 나가 매 사냥을 구경하고 와서 갑작스럽게 몸이 불편하면서 위중해졌다.

세종 편에서 밝혔듯이, 세종은 누구보다도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명민한 왕이었지만 무속과 불교에 심취했었다. 태종의 병환이 심해지자 다시 한 번  토속 신앙인 성요법(星曜法)으로 길흉을 점쳤다. 그러나 자신의 능을 만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태종의 신념은 확고했다. 비록 정도전의 목을 친 태종이지만, 그 역시 유학자였던 것이다.

"이 능은 내가 들어갈 데인데 더러운 중들을 가까이 오게 할 수 없다."



[낮은 한의학] 세조의 건강학 - 단종의 어머니가 세조에게 침을 뱉었다면…


흔히 권력을 위해서 핏줄을 희생시킨 태종과 세조를 비슷한 부류로 묶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둘은 겉보기는 비슷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태종은 한 때 자신의 혁명 동지였던 공신들, 그러니까 원경왕후와 처가, 가까운 형제 등을 왕권을 위해서 희생시켰다. 그는 조선이라는 국가권력을 유지하고자 자신의 주변을 희생시켰다. 반면에 세조는 자신의 혁명에 동참한 공신을 위해서 권력을 분배했다. 태종과 달리 세조는 자신의 사적 욕망을 최우선에 뒀다.

이렇게 자신의 끔찍한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그 죄의식은 당연히 공포로 마음을 짓누르기 마련이다. 태종이 피로 점철된 비극의 한가운데서 살아남았음에도 큰 정신 질환에 시달리지 않았던 데 반해서, 세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평생 자신이 죽인 조카 단종과 다른 이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조 3년 7월 27일, 의경세자가 갑자기 병에 걸렸다. 젊은 나이에 걸린 병이었지만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세자는 그 해 9월 2일 세상을 등졌다. 이어서 둘째인 해양대군이 세자가 되고, 세자빈으로 한명회의 셋째 딸이 간택되었다. 세조 7년 11월 1일에는 불안하게도 세자빈이 병들었다. 결국 세자빈은 11월 30일 원자를 낳고 5일 만에 죽었다.

원자 또한 세조 9년 10월 24일 세상을 떠나자, 세조는 공포에 휩싸였다. 계유정난(1953년) 과정에서 죽인 김종서, 황보인 등 대신 또 2년 후에 자신의 측근이 암살한 조카 단종 등 수많은 원혼들이 마음의 공포로 다가온 것이다. 당대의 호사가는 이런 점을 확대 해석해 야사로 윤색했다.

단종의 생모였던 현덕왕후가 꿈속에서 침을 뱉어 세조의 피부병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혹은 세조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쳤다는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실제로 실록은 유사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세조 3년 9월 7일 기록을 보면, 현덕왕후의 묘소에서 일부 훼손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실렸다.

"현덕 왕후(顯德王后) 권 씨의 신주(神主)와 의물(儀物)을 일찍이 이미 철거하였으니, 그 고명(誥命)과 책보와 아울러 장신구를 해당 관사로 하여금 수장(收藏)하게 하소서."

절 짓는 왕을 질타한 신하는…

▲ 영화 <관상>의 수양(이정재). 세종은 왜 수양 대신 문종을 선택했을까? ⓒface-reader.co.kr

▲ 영화 <관상>의 수양(이정재). 세종은 왜 수양 대신 문종을 선택했을까?

세조는 평소 자신의 건강을 자신했다. 그러나 세조 9년 9월 27일 효령대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 방장한 혈기로써 병을 이겼는데, 여러 해 전부터 질병이 끊어지지 않으니, 일찍이 온천에서 목욕하는 것으로 이를 다스렸다."

세조의 온천 예찬은 계속된다. 세조 10년 4월 16일 기록이다.

"내(세조)가 지금 온천욕을 시험하니, 그 효력이 신통한 것 같아서 풍습(風濕)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이 없었다. 다만 내가 출입(出入)할 즈음에 감풍(感風)이 많아서 예전의 병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뒤의 병(病)이 바야흐로 시작되는데, 지나치면 어지럽고 정도에 미치지 못하면 효험이 없으니 (…) 이는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 세조의 병은 실제로 야사에서 전하는 피부병이었을까? 한의학에서 피부 질환은 보통 "습열"로 표현한다. 세조가 직접 언급한 "풍습의 병"은 대부분 관절 질환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러니 당시 세조는 온천욕으로 관절 질환이 유발하는 신경통을 치료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의 질병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세조 12년 10월 2일의 기록이다.

"임금이 한계희(韓繼禧), 임원준(任元濬), 김상진(金尙珍)을 불러서 말하기를, 꿈속에 나는 생각하기를, 현호색(玄胡索)을 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여겨서 이를 먹었더니 과연 가슴과 배의 아픈 증세가 조금 덜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약인가? 이에 현호색을 가미한 칠기탕(七氣湯)을 올렸더니 과연 병환이 나았다."

<동의보감>은 칠기탕의 칠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칠기란 기뻐하고 성내고 생각하고 근심하고 놀라고 무서워하는 것들을 말한다. 이 칠기가 서로 어울려서 뭉친 것이 솜이나 엷은 막 같기도 하고 심하면 매화 씨 같다. 이러한 것이 목구멍을 막아서 뱉으려 해도 뱉어지지 않으며 삼키려 해도 삼켜지지 않는다. 속이 더부룩하면서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기가 치밀어서 숨이 몹시 차게 된다. 심해지면 덩어리가 되어서 명치 밑과 배에 덩어리가 생기며 통증이 발작하면 숨이 끊어질 것 같다. 이럴 때 칠기탕을 쓴다."

세조가 의사를 여덟 종류로 분류하고, 그 중 첫 번째로 마음을 고치는 심의를 꼽은 것도 흥미롭다. 세조 9년의 기록이다.

"심의(心醫)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도록 가르쳐서 병자(病者)가 그 마음을 움직이지 말게 하여 위태할 때에도 진실로 큰 해(害)가 없게 하고, 반드시 그 원하는 것을 곡진히 따르는 자이다. 마음이 편안하면 기운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세조의 질환은 두려움으로 인한 마음병이었다. 잇따른 피붙이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으면서, 세조는 야사들이 전하듯이 구천의 원혼들이 자신을 저주하는 공포에 시달렸다. 세조는 이런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불교에 의존했다. 특히 세조는 아버지 세종이 병에 걸렸을 때 의지했던 중 신미를 다시 불렀다.

세조 10년 2월 18일, 그는 질병 치료를 위해 온양 온천을 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속리산 복천사에 있는 신미를 만나고자, 신미의 동생 김수온을 데리고 충청도로 향했다. 2월 27일 신미를 만나 자문을 구하고 나서, 세조 11년 국가에서 물자를 지원하여 중건한 절이 오대산 상원사다.

심지어 세조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통치자가 불교를 지원하는데 이의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당사자와 자손을 모두 내수사의 노비로 만들었다. 황보인의 손녀사위 김종련이 그 당사자다. ("임금이 일찍이 불설(佛說)을 물었을 때, 김종련이 논대(論對)하는 것이 자못 임금의 뜻에 거슬리었다.")

세조를 짓누른 내면의 병

세조의 질병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약 43회에 걸쳐 나타난다. 세조 10년부터 본격적으로 질병에 시달리는데 즉위 12년, 나이 쉰이 되면서는 상당히 병이 깊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14년 7월 19일에는 신숙주, 구치관, 한명회를 불러 자신의 전위를 심각하게 의논하지만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친다. 그러다 14년 9월 8일 나이 52세로 수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조가 야사에서 거론되는 피부병으로 고통을 받았는지는 실록의 기록으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세조가 관절 질환이나 신경통으로 추정되는 풍습으로 고통을 받았고, 또 칠기탕 등의 처방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음을 짓누르는 병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조의 죽음은 곪을 대로 곪은 내면의 병이 그 원인이었다.




[낮은 한의학] 헌종의 건강학 - 녹용 수천 첩 복용하고도 23세 요절, 왜?


헌종(1827~1849년, 재위 1834~1849년)은 순조(1790~1834년, 재위 1800~1834년)의 아들 효명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와 효명세자는 외척의 발호, 홍경래의 난, 19세기 초의 대기근 등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왕권을 강화하면서 조선 생존의 불씨를 살리려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효명세자(1809~1830년)가 급서하고, 이미 평생 세도가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생하다 기력이 쇠한 할아버지 순조마저 승하하면서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조선 24대 왕으로 등극했다. 처음에는 순조의 왕비이자 할머니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지만, 헌종 7년(1841년) 3월 7일부터 자신이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이미 나라꼴은 엉망이 된 상태였다.

헌종은 23세를 일기로 후사가 없이 승하하고, 그 뒤를 이른바 '강화 도령' 철종이 잇는다. 행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행장은 권도인이 지었다. 추사 김정희의 만년 친구로 기록되는 권도인은 도제조로서 헌종의 질병 진료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당대의 실세 중 한 명이었다.

"봄부터 병환이 들어 점점 시일이 갈수록 피곤함을 보이셨으나 오히려 만기(萬機)를 수작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태묘(太廟)에 전성(展機)하는 일과 기예(技藝)를 시험하고 선비를 시험하는 일 같은 데에 이르러서도 편찮다 하여 행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대개 절제하여 고요히 조섭하시는 방도를 또한 잃은 바가 많았다."


ⓒwikipedia.org 이 행장은 과연 진실일까? 헌종은 17세 되던 해에 두창을 앓았던 기록이 유일하다. 이후 큰 질병을 앓은 예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두창이 헌종에게 치명적인 후유증을 남겼을까? 아니다. 조선 후기 왕실에서는 두창 치료의 노하우가 상당히 축적된 상태였다. 할아버지 순조 역시 두창을 앓았지만 완치되었고, 헌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두창이 시작된 다음 날인 9월 28일 가미활혈탕, 10월 1일 가미귀용탕, 10월 2일 귀용보원탕, 10월 3일 귀용보원탕에 녹용과 계피를 가미하고, 10월 4일 계피를 빼고 녹용과 인삼을 가미하여 처방했다. 10월 6일에는 감로회천음으로 처방을 마무리해 두창을 완치했다. 이는 순조의 두창 치료 방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헌종의 목숨을 앗아간 건강상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헌종 15년(1849년), 23세가 되는 4월 10일, 실록은 도제조 권돈인이 헌종과 나눈 의미 있는 증상을 기록하고 있다.

"옥색이 여위고 색택(色澤)이 꺼칠하시니 아랫사람의 심정이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 괴로운 것은 처음부터 체기(滯氣)가 빌미가 되었고 별로 다른 증세는 없었다. 근일 이래로 체기가 자못 줄었고 잠도 조금 나아졌다."

이 글의 말미에서 권돈인은 헌종에게 약을 대내에서 직접 지어 드시기 때문에 불안하다면서 약방과 제조를 거쳐서 복용할 것을 당부한다. 왕들은 약원의 입진 과정을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에 정식 입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처방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승정원일기>는 이런 내밀한 처방을 왕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일 체기와 설사 증상이 심해지자 의관들은 양위탕을 처방한다. 이때 헌종은 '양위탕을 복용하고 체기와 설사가 나아지면 지금처럼 군자탕을 복용하는데 문제가 없느냐'고 질문하다. 귀용군자탕에 들어가는 녹용, 당귀, 인삼, 숙지황 등이 체증을 유발하지는 않을지 물은 것이다. 이런 기록으로 헌종이 귀용군자탕을 계속 복용해온 점이 드러난다.

헌종은 왜 귀용군자탕을 복용했을까? 권돈인이 식욕을 묻자 '정월보다는 조금 낫다'는 말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헌종은 식욕 부진으로 고생했고, 그에 대한 처방으로 녹용, 당귀, 인삼, 숙지황 등이 들어 있는 귀용군자탕을 복용한 것이다. 그런데 양위탕 처방에도 불구하고 헌종의 병은 잡히지 않는다. 11일에도 복통이 계속되고 체증과 설사가 이어졌다.

헌종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소변을 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오령산이라는 이뇨제를 복용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헌종은 가미이공산 처방으로 치료를 받다가, 13일은 계강군자탕이라는 속을 데우는 약을 투여 받았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네 차례나 반복되던 설사가 그쳤고, 소변도 순조로워지면서 맑아졌다.

하지만 이런 치료는 일시적이었다. 다음 달인 윤4월이 되어서도 헌종의 체기가 이어져 불환금정기산이라는 감기와 소화 불량 증상을 동시에 치료하는 약물을 복용한다. 밥맛이 없어 물에 밥을 말아 겨우 먹었는데도, 식욕 저하와 소화 불량 증세가 이어지며 속이 더부룩한 증상도 계속되었다.

최초로 증상이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난 5월 14일이 되면서 현종의 증상은 다시 악화일로를 걷는다. 우선 얼굴과 발에 부기가 생겼다. 소변을 보기가 곤란해져 이뇨제를 복용한 후에는 밤사이에 요강을 반이나 채울 만큼 많은 소변을 보았다. 이후의 진료 기록은 구체적인 내용이 전혀 없다.

다만 6월 5일에는 가미군자탕을 3첩 복용했으며, 6월 6일 목숨을 잃은 날에는 계부이중탕과 가미이중탕을 각각 한 첩씩 투여 받았다. 점진적으로 설사와 체기의 증상이 반복되면서 악화되는 과정에서 결국 헌종은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권돈인과 현종 사이에는 계속적으로 오가는 의학적 대화가 하나 있다. 바로 녹용, 인삼, 숙지황에 대한 것이다.

4월 11일 헌종은 설사를 놓고서 권돈인과 의논하면서도 귀용군자탕에 들어갈 숙지황 제법을 물으며 어떻게 하면 설사 후에 복용할 수 있을지 묻는다. 4월 13일에도 권돈인이 귀용군자탕이 '몸에 좋다'고 찬사를 하자 왕도 '앞으로 더 자주 복용하겠다'며 다짐하며 장단을 맞추는 장면이 나온다.

14일에도 헌종은 향사군자탕을 복용하여 체증을 가라앉히고 나서는, '귀용군자탕으로 몸의 균형을 맞추고 조리도 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다. 18일에는 헌종이 '치료 후에 녹용과 당귀가 든 보약 100첩을 연달아서 복용하고 싶다'고 밝히자 권돈인이 맞장구를 치면서 1000첩을 복용해야 한다고 한술 더 뜨는 답변을 한다.

권돈인의 죽이 맞는 답변에 헌종은 녹용, 당귀를 극상품으로 준비할 것을 부탁한다. 25일 체증과 설사가 지속되자, 권돈인은 평진탕 처방을 왕에게 먹이면서 녹용이 극상품으로 약방에 들어왔음을 귀띔한다. 녹용 중에서도 무산녹용이 가장 귀한데 뿔의 뿌리까지 각화되지 않은 최고의 품질이 들어왔다고.

헌종은 왜 이렇게 녹용을 강조했을까? <본경소증>은 녹용의 효능은 이렇게 설명한다.

"묵은 뿔이 떨어진 자리에서 피가 쌓여서 솟아오른 것으로 피를 빨아 당기는 힘이 가장 왕성하다. 녹용은 피를 강력히 밀어 보내는 힘으로 위축된 것을 왕성하고 힘차게 변화시킨다."

한의학의 논리를 염두에 두면, 소화는 삭히는 부(腐)와 찌는 숙(熟)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삭히고, 찌기 위해서는 아궁이에서 불을 떼 에너지를 공급해야 한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양기'가 바로 이것인데, 녹용은 바로 이 양기를 보하는 대표적인 약물이었다.

헌종처럼 양기가 허약한 이들은 소화 기능이 약해서 위장의 유동 운동이 느리고, 소화를 충분히 시키지 못해서 설사를 하게 된다는 것이 한의학의 사유였다. <동의보감>이 설사 증상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런 논리다.

"대체로 신기가 허약해지면 진양이 허해져서 비위로 더운 기운을 보내지 못하고, 비위가 허하고 차면서 소화가 잘 되지 않으면서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데 혹 헛배가 부르며 토하거나 설사가 난다. 비유하자면 솥에 쌀을 넣고 불을 때는데 불길이 약해지면 해가 저물도록 익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런데 무엇을 소화할 수 있겠는가."

헌종은 바로 이런 양기를 보하고자 주야장천 녹용 타령을 한 것이다. 하지만 녹용을 아무리 복용한들, 그의 건강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에는 소화기 장애 증상으로 고생하다가 기력이 다해서 목숨을 잃었다. 감히 짐작해보건대, 헌종은 어릴 때 왕위에 오르고 나서부터 약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면서 건강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녹용과 인삼이 든 귀용군자탕 복용은 헌종이 대를 잇고자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정력을 보하려는 목적으로 쓰였을 가능성도 크다. 낮에는 세도가의 등쌀에, 밤에는 쾌락에 몸을 맡기는 생활이 반복되었으니 녹용 수백, 수천 첩을 복용한들 건강해질 리가 없다. 헌종의 건강은 약물에 의존하는 현대인에게도 주는 교훈이 크다.



[낮은 한의학] 철종의 건강학 - 안동 김 씨의 '종마'로 키워진 강화도령


왕이 된 강화도령

정원용이 남긴 <경산일록>을 보면, 헌종이 죽고 이틀 후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을 한양으로 데려오는 부분이 이렇게 담담히 묘사된다.

"갑곶진에 이르렀다. 배에서 내리니 강화유수 조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김새와 연세도 몰랐다. 내가 말했다. '이름자를 이어 부르지 마시고 글자 한 자 한 자를 풀어서 말하십시오.' 관을 쓴 사람이 한 사람(철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은 모(某)자, 모(某)자이고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대왕대비의) 전교에 있는 이름자였다."

사도세자는 한 명의 정실과 두 명의 후궁에게서 모두 5남 3녀를 낳았다. 적장자 정이 어린 나이에 죽자 둘째 산이 왕세손이 되어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가 되었다. 두 번째 후궁 순빈 임 씨의 두 아들 중 첫째 아들 은언군 임의 세 번째 아들 전계군 이광이 바로 철종의 아버지다.

한때 정조의 총예를 한 몸에 받으며 조정을 호령했던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원빈 홍 씨)으로 들였으나 아이 없이 죽고 말았다. 그러자 홍국영은 은언군의 장자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왕위를 잇게 하려 했다. 이런 시도는 결국 외척의 발호를 경계하던 정조가 홍국영과 갈라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불똥은 은언군의 일가로 튀었다. 1786년(정조 10년) 아들 담(湛)이 모반죄로 유폐를 당하자, 그 친아버지 은언군도 강화로 이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은언군은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아내 송 씨와 며느리 신 씨가 가톨릭 신부로부터 영세 받은 일로 아내, 며느리와 같이 죽임을 당했다.

은언군의 손자이자 철종의 이복형 회평군 명도 모반 사건으로 죽임을 당하면서, 은언군 일가는 허울뿐인 왕족으로 전락했다. 그렇다면, 철종이 갑작스럽게 헌종의 뒤를 이은 까닭은 무엇일까?

철종(1831~1863년, 재위 1849~1863년)의 즉위는 안동 김 씨의 장기 집권 책략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 씨의 명으로 왕위를 계승하긴 했지만, 그는 왕위를 이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19세 농부에 불과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은 불가피했다.

철종 2년(1851년) 9월, 순원왕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이 왕후로 들어오면서 안동 김 씨의 위세는 더욱더 세졌다. 1852년부터 철종은 직접 통치를 했지만, 이미 안동 김 씨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은 극에 달해 민생고로 인한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최제우가 주창한 동학이 민심을 파고든 것도 바로 이 때다.

왕이 막걸리를 찾았던 이유


사실 철종은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극적인 삶을 살았다. <왕자와 거지>의 한 장면처럼 강화에서 농사짓던 촌부가 하루아침에 왕으로 변신한 것이다. 하지만 <왕자의 거지>에서 왕궁 생활을 동경하던 톰 캔트가 차라리 구걸하며 살았던 삶이 더 자유롭고 행복했다고 여겼던 것처럼 왕이 된 철종의 삶 역시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복형까지 죽임을 당한 마당에 궁궐 안에 들어와 안동 김 씨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여러 야사는 철종이 왕이 되고 나서도 강화에서 농사지으며 마시던 막걸리와 우거짓국을 잊지 못했다고 전한다. 철종은 왕비가 사가에서 구해온 막걸리를 즐겨마셨다.

이런 철종의 상황은 건강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강화에서는 없었던 온갖 질병이 나타난 것이다. 철종은 왕이 되고 나서 한평생 한약을 먹다가 죽었다 할 정도로 약을 입에 달고 살았다. 심지어 그 약마저도 그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처방된 약물을 살펴보면, 그가 겪었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잘 보여준다.

철종이 복용한 약물은 대부분 보약이다. 조선 후기의 의학 흐름이 질병 치료보다는 예방 위주의 보약이 우선이었던 데다가, 급격한 환경 변화에 노출된 철종 자신이 허약했기 때문이다. 특히 임종이 가까웠던 33세(1863년) 때, 세 번이나 지속적으로 처방된 특별한 처방이 눈에 띈다. 바로 '교감단'이다.

교감단은 교감귀비탕, 교감지황탕, 교감군자탕으로 귀비탕, 지황탕, 군자탕과 합방하여 복용한다. 교감단을 처방하는 병증은 <동의보감> '기울증' 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기울은 기가 몰려서 풀리지 않는 증세다.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이 마음에 맞지 않거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억울하거나 고민하다 보면 칠정이 상하여 음식을 먹고 싶지 않고 얼굴이 누렇게 뜨면서 몸이 여위고 가슴 속이 답답해진다. 교감단은 바로 이른 기울증 증상을 치료하는 처방인 것이다."

탈영증과 실정증이라는 증상에도 교감단은 효과적인 처방이다. 이 증상은 신분 추락에 따른 부담으로 근심 걱정이 생겨 신경증이 된 것이다. 예를 들면, 귀족으로 살다가 천민이 되거나 부자로 살다가 가난해져 심리적인 허탈감이 몸을 수척하게 하거나 기운이 없어지게 하는 증상이다.

이런 처방을 염두에 두면, 철종은 갑작스런 신분 변화와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고통을 받았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왕의 보약은 사실은 강장제

ⓒwikipedia.org 철종이 가장 자주 고통을 호소한 질병은 소화 불량 증세였다.

왕위에 오른 직후인 20세 때도 사군자탕 계열의 가미군자탕이나 향사이진탕을 복용하였고, 26세와 30세가 되면서 체증을 자주 호소하여 향사육군자탕 계열의 처방이나 사군자탕 계열의 처방을 자주 복용하였다. 심지어 공진단 계통의 보약을 처방할 때도 반드시 소화를 돕는 사군자탕 계열의 공진군자탕으로 복용하였을 정도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철종이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 가장 자주 복용한 처방은 의외로 강장 처방이 대부분이었다. <일성록(日省錄)>을 보면, 즉위 이듬해인 1850년 1월 20일부터 철종은 가미지황탕을 지속적으로 복용했다. 가미지황탕은 육미지황탕에 몇 가지 약재를 가감한 것이다. 육미지황탕 복용의 의미를 <동의보감>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이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성생활을 하여 정기가 줄어들거나 타고난 체질이 허약한데도 불과하고 성생활을 많이 하여 원기가 너무 쇠약해져서 식은땀이 나거나 정액이 절로 흐르며 정신이 피로하고 권태감이 심하며 음식을 먹어도 살로 가지 않고 손발바닥에 열이 나는 증세를 말한다."

철종이 꾸준히 보용된 공진단 처방의 의의도 대동소이하다.

"남자가 장년기에 이르러 진기가 몹시 약한 것은 타고 날 때부터 약하고 허한 것이 아니므로 성질이 마른 약재를 쓰지 말아야 한다. 진기를 보하는 약품은 많으나 약효가 매우 약하여 효력을 보기 어렵다. 이럴 때는 바로 이 처방을 쓴다."

철종에게 자주 처방된 귀용원도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음혈(진기)이 고갈되어 얼굴빛이 거무스레하며 귀가 먹고 눈이 어두우며 다리가 약하고 허리가 아프며 오줌이 뿌연 것을 치료한다."

25살이 되는 해 여름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생녹용을 일컫는 수용(水茸)도 복용했다. 녹용의 보양 효과는 정력 강화의 의미가 크다. 즉, 안동 김 씨를 비롯한 외척 세력에게 철종은 일종의 '종마'였던 것이다. 철종은 매일 녹용, 공진단, 귀용탕, 육미지황탕으로 보신하면서 후사를 두는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철종은 철인왕후 김 씨를 비롯하여 8명의 부인과 5남 1녀의 자식을 낳았다. 또 여색을 즐겨서 조정 일을 더욱더 방치했다. 하지만 이런 철종의 자손 중에서 정작 살아남은 유일한 혈육은 박영효에게 시집간 영혜옹주 한 사람이었다. 결국 철종은 19세에 즉위해 33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숨을 헐떡이는 조선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고하는 인물이 바로 강화도령 철종이었다. 그의 불행한 삶은 좋은 약이 건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삶이야말로 건강을 지키는 핵심임을 보여준다.



[낮은 한의학] 인조의 이명 ① - 아들·며느리·손자까지 죽인 왕, "귀가, 왼쪽 귀가…"


소리는 마음을 움직인다. 아침의 새소리, 교회의 종소리, 사찰의 풍경소리는 걱정을 씻어내고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길 가다 혹은 차를 몰고 가다 우연히 들리는 음악에 순식간에 기분이 바뀌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들리는 소음만 제거해도 행복도가 높아진다는 연구까지 염두에 두면, 마음과 소리가 얼마나 밀접한지 알 수 있다.

흔히 '귀 울림'으로 알려진 이명 역시 마음과 밀접한 병이다. 귀의 울림은 곧 자신의 마음이 괴롭다는 신호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명 환자들이 한방과 양방의 온갖 병원을 숱하게 다니면서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음의 괴로움이 여전하니 그 울림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 동안 1년 넘게 '왕의 한의학'을 연재하면서 조선 왕들의 건강과 관련된 기록을 샅샅이 훑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 역시 귀 울림, 즉 이명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 중에서도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1637년)을 겪었던 인조(1595~1649년), 재위 1623~1649년)가 대표적이다.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죽인 마음의 병

인조는 숙부 광해군의 자리를 빼앗아 왕이 되었다. 광해군과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나서 소외당한 서인 세력은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런 권력 교체가 사림 세력을 넘어서 일반 백성에게도 얼마나 명분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듬해(1624년) 반정 공신이었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서 서울에 입성했을 때,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 때 인조는 서울을 떠나 공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는데, 어떤 백성은 한강변의 인조가 탈 배를 숨기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당시 민심의 소재가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던 처지에 사림의 꼭두각시로 왕에 올랐고, 심지어 민심까지 얻지 못했던 새로운 통치자는 항상 불안했다. 인조가 왕에 오르고 나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부인 정원군(선조와 공빈 김 씨의 아들)을 왕으로 추숭(追崇)한 것도 이 때문이다.

▲ 2013년 방송된 <궁중 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 인조(이덕화). ⓒJTBC

▲ 2013년 방송된 <궁중 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 인조(이덕화). ⓒJTBC


이런 내면의 불안은 주변 인물에 대한 의심으로 번졌다. 그 첫 번째 타깃은 인목대비였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권력을 놓고 다퉜던 영창대군의 모이다.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 영창대군 세력을 제거하고(1613년), 나중에는 그의 계모인 인목대비의 존호를 삭탈하고 경운궁에 가두기에 이른다(1618년). (영창대군은 1614년 살해당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사림 세력에 의해서 '패륜'으로 규정되었고, 이들이 인조반정 때 내세운 가장 중요한 명분이었다. 또 형식적으로는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가 왕위를 이은 것도, 존호를 회복한 인목대비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인조는 바로 이런 인목대비를 의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계기도 어처구니없다. 인조 재위 10년(1632년) 인목대비가 죽고 나서 그의 처소에서 비단 백서 세 폭이 발견된다. 이 비단 백서에는 임금을 폐하고 다시 세우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 임금이 광해군을 말하는지, 인조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인목대비가 자신을 폐하려고 저주를 걸었다고 강하게 믿게 되었다.

인조는 인목대비의 측근이자 선조의 후궁이던 귀희와 상궁 옥지가 자신을 죽이려는 저주를 걸었다는 혐의를 씌워 처형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1639년(재위 17년)에는 원손이 거주할 향교동 본궁에서 저주할 때 쓰는 물건이 발견된 것을 빌미로, 인목대비의 딸 정명공주마저 해코지하려 했다. 최명길 등 대신의 만류가 없었으면 또 한 차례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이런 인조의 의심은 소현세자와 며느리 강빈으로 그 타깃이 바뀐다. 1645년(재위 23년) 5월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죽고 몇 달 뒤(1646년 2월 2일), 그는 이렇게 며느리를 의심한다. "강빈이 귀국할 때 금과 비단을 많이 싣고 왔으니, 이것을 뿌린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결국 인조는 강빈도 죽이고, 어린 세 손자를 제주도로 보냈다.

이 와중에도 인조는 강빈의 저주가 자신의 질병의 원인이라고 확신했다. 실록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인조의 고백을 보면, 그의 정신 상태가 얼마나 피폐해 있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강빈의 무리가 곤장을 맞고 죽고 나서부터, 환절기가 되면 으레 아프던 허리와 다리 관절의 통증이 재발하지 않았다."

귀에서 큰물이 흐르는 고통을 너희가 아는가?

1646년(인조 24년), 소현세자와 강빈이 죽은 바로 그 해 겨울부터 이명 증상이 시작되었다. 겨울의 초입인 음력 10월 17일, 인조는 이명 증상을 호소한다. 실록이 전하는 인조의 증상은 한의원을 찾는 수많은 이명 환자의 그것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인조의 하소연을 직접 들어보자.

"전에부터 귓속에서 매미 소리가 났었다. 그런데 금월 13일, 왼쪽 귀에서 홀연 종치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물 흐르는 소리는 가는 소리가 아니라 큰물이 급하게 흐르는 소리다. 어제 아침에도 똑같은 소리가 났다. 침을 맞으면 좀 낫지 않겠는가?"

영의정 김자점을 비롯한 신하와 어의들은 먼저 귀 감기로 진단한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귀가 찬 기울을 만나 감기가 들었고, 그 결과 이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감기약으로 땀을 내면 체력이 떨어져서 증상이 심해질 수도 있다며, 귀에 뜸을 떠서 온기를 더해서 이명의 치료를 돕겠다고 처방한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인조의 이명 증상은 잡히지 않았다. 인조는 "귀에 뜸을 뜨고 나서도 밤에 열이 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4~5일 전부터는 종을 치는 듯한 큰소리가 귀에서 나서 심신이 현란할 정도가 되었다"고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했다. "왼쪽 귀의 압력이 달라서 불쾌한 느낌이 오른쪽으로도 퍼졌다"는 하소연도 덧붙였다.



[낮은 한의학] 인조의 이명 ② - 왕의 비명 "죽은 며느리 탓에 귀에서 홍수가 났다"


귀에서 큰물이 흐르는 고통을 너희가 아는가?

1646년(인조 24년), 소현세자와 강빈이 죽은 바로 그 해 겨울부터 이명 증상이 시작되었다. 겨울의 초입인 음력 10월 17일, 인조는 이명 증상을 호소한다. 실록이 전하는 인조의 증상은 한의원을 찾는 수많은 이명 환자의 그것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인조의 하소연을 직접 들어보자.

"전에부터 귓속에서 매미 소리가 났었다. 그런데 금월 13일, 왼쪽 귀에서 홀연 종치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물 흐르는 소리는 가는 소리가 아니라 큰물이 급하게 흐르는 소리다. 어제 아침에도 똑같은 소리가 났다. 침을 맞으면 좀 낫지 않겠는가?"

영의정 김자점을 비롯한 신하와 어의들은 먼저 귀 감기로 진단한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귀가 찬 기울을 만나 감기가 들었고, 그 결과 이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감기약으로 땀을 내면 체력이 떨어져서 증상이 심해질 수도 있다며, 귀에 뜸을 떠서 온기를 더해서 이명의 치료를 돕겠다고 처방한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인조의 이명 증상은 잡히지 않았다. 인조는 "귀에 뜸을 뜨고 나서도 밤에 열이 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4~5일 전부터는 종을 치는 듯한 큰소리가 귀에서 나서 심신이 현란할 정도가 되었다"고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했다. "왼쪽 귀의 압력이 달라서 불쾌한 느낌이 오른쪽으로도 퍼졌다"는 하소연도 덧붙였다.

여전히 이명의 원인을 감기라고 확신한 어의들은 다시 의논해 감기약(인삼패독산)을 세 첩 처방했다. 그러나 인조가 이 약을 복용하고 나서도, 감기 증세는 나았지만 이명 증상은 변화가 없었다. 결국 당대의 명의로 명성이 자자했던 유후성이 이명 증상만 치료할 처방을 내세우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나섰다.

유후성이 다른 어의와 함께 처방한 약물은 '소시호탕'에 '사물탕'을 합방한 처방이었다. 감기 끝의 열을 없애고, 귓속의 염증을 없애면 이명이 없어지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왕의 이명은 차도가 없었다. 나중에는 <동의보감>에서 막힌 귀를 열어주고 기를 통하게 하는 약으로 규정한 '투관통기약'의 하나인 '투이통'도 처방했다.

<동의보감>은 "갑자기 귀가 들리지 않거나 바람 부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종소리가 날 때" "천초의 검은 씨앗, 석창포, 파두, 송진 등을 가루를 내어 황랍과 섞어 붓대 모양으로 만든 다음 솜에 싸서 귓속에 넣으면" 효험이 있다고 전했다. 인조도 여러 약물을 대추씨 만하게 반죽해 알약을 만들어 솜에 싸서 귀를 막았다.

하지만 유후성을 비롯한 어의는 곧 이런 투이통 처방이 외이도에 상처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로 중지할 것을 건의한다. 이 약 저 약으로도 이명이 잡히지 않자, 어의들은 11월 1일이 되어서야 드디어 애초 인조가 바랐던 침으로 다스릴 방법이 검토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바로 인조가 가장 총애했던 의관 이형익이 등장한다.

이형익은 정식 의관은 아니었지만 사기(邪氣)를 다스린다고 특별히 임시 채용된 의관이었다. 사기는 바로 저주와 같은 요사스럽고 나쁜 기운이고, 이형익은 바로 이런 사기가 초래한 질병을 고치는 의사였다. 요즘으로 따지면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일종의 '퇴마사'인데, 어처구니없게도 인조가 가장 신뢰했던 의사가 바로 이형익이었다.

이형익은 충청도 대흥 지역 출신으로 인조 11년 내의원의 천거로 임시 채용됐다. 사이비 퇴마사를 사관들이 곱게 볼 리가 없다. "대흥 땅에 이형익이란 자가 있는데 침법을 약간 알아 사기를 다스린다고 세상 사람을 현혹했다" 홍문관은 나름의 검증 결과까지 열거하며 그의 진료를 비난했다.

"오래전부터 괴이한 방법과 신통한 비결을 스스로 자랑하고 다녔지만, 사대부 중에 그의 침술로 효험을 본 사람이 없고 오히려 더러 해가 따랐다."

하지만 인조는 이런 이형익을 어떤 의사보다도 신뢰했다. 그렇다면, 이형익의 이명 치료는 어땠을까? 그는 인조의 질환을 저주나 귀신이 일으킨 사기의 질환으로 보았다. 그래서 나쁜 기운을 억누를 수 있는 붉은 양기를 가진 뜨겁게 달궈진 침을 열 곳에 놓자고 인조에게 처방했다.

놀란 어의들이 너무 많다고 반대했지만, 결국 아홉 곳의 혈을 찌르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이형익이 침을 놓는 것과 동시에 약 처방도 변했다. '자신통이탕', '당귀용회환' 등의 약이 새롭게 처방되었다. 자신통이탕은 한의학에서 생명력의 원천으로 보는 명문의 기능을 보하는 것이고, 당귀용회환은 화병으로 귀가 안 들리는 증상을 치료하는 약이다.

귀는 안다, 마음의 병을!

이렇게 여러 처방을 구사하였지만 인조는 죽을 때까지 이명으로 고생하면서 침과 약으로 연명하였다. 인조와 비슷한 이명 증상을 호소하는 중증 환자를 여럿 치료한 한의사로서 이런 실록의 기록은 여러 가지 고민을 던진다. 왜 인조의 이명에는 한방 치료가 효험이 없었을까? <연려실기술>의 기록은 한 가지 답변의 단초를 제공한다.

"왕이 되고 나서도 인조는 분위기가 매우 무겁고 말이 없어 측근에 모시던 궁녀들도 왕이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아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할 정도였다. 표현이 적으니 신하들은 왕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추측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게다가 글을 아주 잘 지었으나, 어떤 글도 잘 쓰지 않았고 신하들의 상소문에 대답하는 비답(批答)도 내시에게 베껴서 쓰게 하여 자신의 필적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이런 기록을 염두에 두면, 인조는 자신의 진짜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는 성향이었다. 나는 인조의 이런 성향이 그를 괴롭힌 이명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특히 인조와 같은 심한 이명의 경우에는 글머리에 언급한 대로 마음의 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평소 자신의 숨소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일정하기 때문이다. 귀 역시 마찬가지다. 귀도 끊임없이 울린다. 하지만 그 울림이 균형이 잡혀 있기 때문에 청신경은 그런 울림에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는다. 이런 균형이 깨질 때, 우리를 덮치는 것이 바로 이명이다.

그런 균형을 깨는 중요한 원인이 바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고통의 소리다. 인조는 갑작스럽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권력의 중심에 섬으로써 끊임없는 번민에 시달렸다. 그런 권력을 지키고자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죽음으로 내몰면서 이런 번민은 더욱더 깊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런 고통을 결코 밖으로 표출하는 대신에 자기만의 가면을 썼다.

인조의 이명은 자신이 만든 깊은 수렁이었던 것이다. 이 수렁을 어떤 명의가 메울 수 있을 것인가? 오늘도 이명으로 한의원을 찾는 환자를 맞는 마음이 무겁다.



[낮은 한의학] 영조의 이명 ① - 영조가 귀지 제거에 집착한 까닭은?


가끔 이명이나 난청으로 내원한 환자와 상담을 하다 보면, 귀지 얘기를 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하도 이명이나 난청이 심해서 귀지를 제거했더니 효과를 보았다는 얘기다. 어떤 환자는 귀지를 제거하는데 병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되레 귀 외이도에 염증을 안고 오는 경우도 있다.

사실 귀지는 만만하게 볼 인체의 배설물이 아니다. 귀지는 귀를 보호하는 점액이 귀를 덮고 있는 피부에서 나온 각질, 외부에서 들어온 먼지 등과 결합해서 만든 것이다. 귀지는 외이도를 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염증이 생기는 것을 사전에 막는 긍정적인 기능이 있으니 함부로 제거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이런 귀지가 비정상적으로 커져서 외이도를 막는 지경에 이르면 난청이 생기거나, 특정 자세에 따라서 고막을 자극해 이명(귀울음) 증상을 유발한다. 즉, 귀지를 제거했더니 난청이나 이명 증상이 완화되었다는 환자의 얘기는 어느 정도 의학적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조선 왕조 실록>을 들여다보면, 영조 때도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영조 때 대비로 모시던 숙종의 세 번째 부인 인원왕후는 난청으로 고생했다. 어릴 때 귀앓이를 하다가 귀지를 파내서 증상이 개선된 적이 있었던 영조는 대비에게 '귀지를 제거하면 이명의 개선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조언한다.

당시 의관 정문항은 귀지를 곡침(휘어진 침)으로 파내서 고친 경험이 많다고 자신하며 나선다. 이 대목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현대 의학에서도 귀지를 제거할 때 글리세린 용액을 넣어서 녹이거나, 귀에 의학용 집게(forceps)를 넣어서 제거하기 때문이다. 정문항의 곡침은 사실 조선 시대의 의학용 집게였다.

귀지를 제거하는 방법 중에는 납지구(蠟紙灸)도 있다. 귀에 한지를 말아 넣고서 불을 붙이면 귀 안과 밖에 압력 차이가 생긴다. 결과적으로 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바람이 부는 효과가 나타나는데 이 때 귀속의 이물질이 일부 배출되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듣고서 '아!'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어 캔들(ear candle)'과 같은 원리다.

실록을 보면 영조 자신이 직접 이 방법을 써 보고 나서 인원왕후에게 권했다. 그럼, 영조의 납지구 후기는 어땠을까?

"처음 하고 나서는 먹먹해 귀가 먹은 것 같았는데, 이튿날이 되자 청력이 좋아진 것 같았다. 날이 더워져 7장이나 하기는 부담스러우니 2장만 먼저 대비 전에 권해보는 게 어떠냐?"

귀앓이 vs. 코골이

의관들은 인원왕후가 약과 침으로 난청 증상이 개선 된 만큼 굳이 위험한 납지구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진언하며, 실제 치료에는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화는 영조 자신이 귀앓이 즉, 이명과 난청 때문에 계속해서 고통스러워했음을 방증한다. 그런데 영조의 병은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박지원이 설명부터 살펴보자. 박지원은 <연암일기>에서 이명과 코골이를 이렇게 비교했다. 이명은 자신만 아는 "내향적 괴로움"이고 코골이는 다른 사람만 괴롭히는 "외향적 괴롭힘"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고서 새삼 무릎을 치면서 그의 천재성에 감탄했다.

한의학의 사유를 염두에 두면, 코골이는 외향적이고 때로는 몸까지 비대한 열이 많은 사람이 잘 걸리는 양적인 성향의 질병이다. 반면에 이명은 내향적이고 소심해서 속을 끓이는 사람이 잘 걸리는 음적인 성향의 질병이다. 영조야말로 그의 삶이 말해주듯이 전형적인 후자였다.

영조의 정치 이력은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어머니 숙빈 최 씨가 천출인 무수리였으며, 왕위 계승에서도 이복형인 경종 아래에서 힘없는 왕세제일 따름이었다. 경종의 어머니가 장희빈이었고, 장희빈의 죽음이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 씨의 고발로 야기된 점을 기억하라. 그를 둘러싼 궁중 암투는 말 그대로 사느냐, 죽느냐의 살얼음판이었다.

정치 이력뿐만 아니라 건강도 최악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 또 정조와의 갈등을 부각하려고 그를 강하게 그리는 드라마가 많다 보니, 많은 사람은 영조가 기골이 장대한 강골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조선 왕의 평균 수명이 47세 정도였던 반면, 영조가 83세 천수를 누린 것도 이런 편견을 부채질한다. 하지만 영조는 평생 약으로 살아간 약골이었다.

영조가 평생 앓은 질병이나 복용한 약물은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가장 애기중지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았던 처방은 바로 '이중탕'이다. 이 처방은 손발이 차고, 위통 복통을 자주 호소하며, 대변은 설사거나 무르고, 소변도 옅은 색으로 자주 보거나 보기 힘들어하는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것이다.

영조는 이 이중탕 처방에 녹용과 우슬 등의 약재를 더해 '건공탕'이라고 부르며 평생을 가까이하면서 늘 복용하였다. 약 이름만 봐도 영조가 얼마나 애착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약 이름을 '나라를 건국한 공로가 있다'고 붙였겠는가? 아무튼 영조가 천수를 누렸으니, 이 약은 이름값은 한 셈이다.






'Art & Culture > 과학, 기술, 환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볼만한 습지  (0) 2014.06.02
김경민의 도시이야기 - 프레시안  (0) 2013.12.08
Watt Balance  (0) 2013.06.29
첨성대의 과학  (0) 2012.11.26
선관위 사이버 테러 전문가 진단  (0) 2011.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