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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독재권력의 DNA(1) - 12.12

by Wood-Stock 2012. 7. 18.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1> 대통령 선거를 위한 물음들

2012년 다시 발호하는 박정희의 유령들

 

전두환 씨의 육사생도 사열과 국가보훈처 산하 골프장에서 VIP 골프, 그리고 강창희 국회의장 후보의 하나회 전력으로 여론층이 부글거린다. 박근혜 의원이 "5.16은 구국의 혁명이다."고 발언한 것을 두고 다시 논란이 일고 있다. 모두가 박정희 권력을 상기시키는 사건들이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는 기획시리즈를 연재한다.<필자주>

<박정희 DNA ①>
지난 6월8일 육사 화랑대 연병장에서 전두환 씨 부부가 생도들의 사열을 받았다. 사열은 군에서 최고의 예우 표시다. 전 씨는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으로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까지 받은 반국가 범죄의 전과자다. 그에게 '명예'를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는 생도들의 사열을 받게 하는 것이 가당하기나 하냐며 국민여론이 들끓었다. 그의 육사 행차는 또 무장 경찰 8명이 경호한 것으로 밝혀졌다.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박정희의 후예 보수정권 아래서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DNA ②>
이렇게 '박정희 프레임'이 대선 이슈로 비화하고 있는 이유는 많다. 최근 화두로 떠오른 이슈 중 11가지 박정희 DNA만 보아도 그렇다. 최근 새누리당은 19대 국회의 의장 후보로 강창희 의원을 선출했다. 별다른 변수가 없으면 다수당의 후보가 그대로 국회의장이 되는 게 상례다. 문제는 강 의원이 하나회 회원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하나회는 전두환이 조직한 정치장교 비밀결사로 박정희 정권의 비호아래 키워진 친위대였다. 박정희 사후엔 전두환이 주도한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에서 핵심집단 노릇을 했다. 어떻게 내란 집단의 회원 출신이 이 시대에 국가지도자 서열 2위인 국회의장을 맡을 수 있단 말인가.

<박정희 DNA ③>

1979년 10월 말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대통령 박정희 살해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 이후 그는 권력자로 떠오르기 시작했으며 12.12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다음해 5.17 내란으로 정권을 찬탈했다.
지난 6월5일 오후 호텔신라에서는 전두환의 손녀 결혼식이 있었다. 언론들이 억대 호화판 결혼식이라고 보도했다. 전두환은 내란죄 말고도 부정부패로 모은 돈 때문에 추징금 2205억원을 내라는 판결을 받았는데 현재 1600여억원 미납이다. 이 천문학적 규모의 검은 돈을 청와대에 앉아서 기업인들로부터 받은 것이다. 법정에서 재판장의 신문에 대해 전두환은"과거부터 내려 온 관행에 따라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과거의 관행이란 그의 전임 청와대 주인인 박정희가 했던 대로 했다는 뜻이다. 권력형 부패의 원조가 박정희였음을 전두환이 증언한 셈이다.

전두환은 추징금을 더 이상 내지 않고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며 배 째라는 식으로 버텨 왔다. 그러면서 손녀의 결혼식을 억대 호화판으로 치르니 국민여론이 들끓지 않을 수 없다. 검찰이 내년 10월까지 추징금을 추가로 환수하지 못하면 그에 대한 추징금 판결의 효력은 종료된다. 벌금의 경우 내지 못하면 노역으로 대체되지만 추징금은 그런 강제규정도 없다.

<박정희 DNA ④>
6월12일 전두환은 국가보훈처 산하 골프장에서 VIP대우를 받으며 골프를 즐겼다. 여기에도 무장한 경호경찰 8명과 차량 2대가 따라붙었다. 경호경찰대의 구성도 경정 1명, 경위 4명, 경사 3명 등 간부로만 이루어진 최고급이었다. 골프장의 관리 사장이 하나회 출신 예비역 장성인지라 최대한 잘 모셨으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반란과 내란 수괴가 어디에 가서도 특혜 특권을 누리는 호화 생활이 계속돼 온 것이다.

전두환 준장이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때 대통령 박정희가 경호실 간부들과 기념촬영했다. 박정희는 경호실에 친위세력의 힘을 주었으며 중앙정보부 못지 않은 정치공작도 맡겼다.오른쪽부터 경호실장 차지철, 전두환, 한사람 건너 박정희, 경호실차장 문홍구 중장, 수경사령관 전성각 소장.

<박정희 DNA ⑤>

전두환과 함께 하나회를 조직하고 2인자 위상을 차지해 온 노태우도 최근 자신이 맡긴 비자금 420여억원을 임의로 처분했다며 사돈인 신명수 전 동방그룹 회장에 대해 수사요청서를 대검찰청에 냈다. 대법원이 지난 97년 노 씨에게 내린 판결은 군사반란과 내란에 대해 징역 12년, 그리고 부정부패 혐의로 2628억 9600만원의 추징금이었다. 우리나라 권력형 부패는 박정희에 의한 개발독재의 산물로 그 후예들에 의해 뿌리깊은 관행으로 이어져 왔음이 드러난 것이다. 노 씨는 이번 비자금을 회수하면 추징금을 완납하고 돈이 조금 남는다고 한다.

이명박 정권의 민간인 불법사찰은 박정희의 정보통치 DNA

<박정희 DNA ⑥>
이명박 정권의 국무총리실이 여야 정치인과 언론인, 기업인 등 자기들이 정한 요주의 인물에 대해 무차별적 사찰 감시를 해 왔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심지어 이용훈 대법원장까지 불법적으로 사찰해 왔다는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사찰 대상자는 정권측이 필요하면 그야말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야당 쪽 뿐아니라 여당인 한나라당 국회의원들도 포함됐다. 언론계 인사와 불교 조계종 간부 스님들도 사찰을 당했다. 이것은 박정희의 정보통치가 되살아난 모습이다. 과거 중앙정보부와 안기부가 했던 국민에 대한 광범한 사찰과 감시를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로 옮겨 교묘하게 해 온 것이다. 바로 박정희식 정보통치 DNA가 흐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박정희 DNA ⑦>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이루어 낸 남북 화해협력은 이명박 정권 아래서 완전히 파괴됐다. 당국간 대화는 물론이고 기업인 등 민간 차원의 교류도 대부분 중단되고 장벽이 높아졌다. 새누리당은 북한인권법을 준비하고 있다. 북한 주민의 인권에 문제가 있는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개선시키느냐는 방법론이 중요하다.

인권은 그 정치체제의 핵심 문제이고 헌법 정신과 직결돼 있다. 그래서 인권문제를 공격하는 것은 총성 없는 전쟁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동서독 분단 시절 서독의 정부나 정치인들은 공산주의 동독의 인권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동독의 공산체제에 저항하다가 투옥되는 정치범을 비선 협상으로 돈 주고 데려오는 측면 지원을 지속적으로 했다. 그렇게 서로의 정치체제를 인정하고 적대감을 없애는 일만 했기 때문에 독일 통일이 조기에 가능했다.

이명박 정권의 가장 큰 실정 중 하나가 남북관계 단절이다. 단절을 넘어서 대북 대결주의로 적대감정을 격화시키고 있다. 이는 보수정권의 특성으로 박정희의 대북 대결주의 DNA가 흐르고 있다는 지표다.

박근혜 "5.16은 구국의 혁명이다"는 박정희 DNA의 결정판

<박정희 DNA ⑧>
박정희 DNA의 결정판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박근혜 의원 자신의 정치 행보다. 박 의원은 "5.16쿠데타는 구국의 혁명이다"고 이미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위원회 토론에서 밝혔다. 그것이 요즘 다시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박 의원은 이어 박정희의 1인 종신독재 체제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유신쿠데타에 대해서도 "역사에 그 평가를 맡겨야 한다"고 했다.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지 1년 후인 1975년 가을 한 행사에서 퍼스트 레이디 자리에 선 박근혜 의원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이 두 언급이야말로 박정희 DNA의 종결자라 할 만하다. 그런 발언은 박 의원이 박정희의 딸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언행으로 검증할 때 민주주의 신봉자가 아니라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5.16과 유신은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파괴한 반란행위다. 박근혜 의원이 이것을 지지한다면 결코 의회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도 괜찮은지 공론에 부쳐보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 DNA ⑨>
박근혜 의원은 또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뽑는 과정에서 부정투표 의혹을 받은 이석기 김재연 의원을 겨냥해 "국가관이 불분명한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것이 신호였는지 새누리당은 부정투표 시비를 받고 있는 두 의원의 국회 제명을 추진하기도 했다.

국회의원을 국가관이라는 사상검증에 의해 축출하려는 것은 박정희의 정치적 DNA가 아닐 수 없다. 박 의원이 통진당의 두 의원에 대해 국가관이 아니라 투표라는 민주적 절차를 지적했다면 문제는 달랐을 것이다.

박근혜 멘토 7인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 핵심들

<박정희 DNA ⑩>

박근혜 의원에게 박정희의 생물학적 부녀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행보가 문제라는 근거는 또 박 의원의 멘토단인 7인회에서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재무장관을 지낸 최측근인 김용환 씨를 좌장 격으로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안병훈 전 조선일보 발행인, 김용갑 전 총무처장관, 김기춘 전 법무장관, 현경대 전 의원, 강창희 의원이 그들이다. 모두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장관 등을 지낸 구시대 인물들이다. 이런 멘토단의 조언을 들으며 내놓는 정치행보가 구시대적일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하다. 박정희의 정치적 DNA가 지금도 살아 움직인다는 증거인 셈이다.

<박정희 DNA ⑪>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부산일보와 KBS, MBC, YTN 등 언론 노조의 파업사태는 언론탄압의 박정희 DNA를 보여주었다. 특히 부산일보의 소유주인 정수장학회는 박정희가 부산 기업인 김지태가 세운 부일장학회 재산을 강탈해서 만들었다. 그 정수장학회의 부산일보에 대한 태도는 언론의 사회적 공기로서 공공성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구체적으로 언론 내부의 편집권 독립을 보장하지 않고 정권이나 소유주에게 불리하게 보도하면 문책 인사를 강행한다. 우리나라에서 언론인 강제해직이라는 탄압은 박정희의 유신 통치기인 1975년 3월 처음 선을 보였다. 그 후 전두환도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과 기사 검열, 언론사 통폐합 등 갖가지 언론탄압을 자행했다.

12월 대통령선거 올바른 선택을 위한 물음들

작년은 5.16쿠데타 50년이었고 올해 10월로 유신쿠데타 40년을 맞는다. 박정희 권력의 등장과 독재화였다. 그리고 1979년 10월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권총 두발로 박정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어서 닥친 12.12군사반란과 5.17 내란으로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가 지속됐다. 박정희가 키워 놓은 군내 친위대 하나회 집단, 이른바 신군부가 정권찬탈로 세운 5공과 6공이었다.

하나회의 수괴 전두환 노태우가 연거푸 대통령직을 거머쥐었다. 대법원은 1997년 4월17일 이같은 일련의 정권찬탈 과정을 반란과 내란으로 판결하고 전두환에게 사형, 노태우에게 징역 12년을 각각 선고했다. 내란에 의한 정권찬탈로 확정 판결이 난 것을 보면 그들의 대통령직이란 참칭한 것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국민이 선거에 의해 뽑은 대통령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97년 12월 대통령선거 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요청했다. 국민 대화합이라는 명분에서였다. 이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는 구속된 지 2년여 만에 석방된다. 그러나 이들에게 내려진 수천억원의 추징금 판결은 그대로 유효하나 아직 다 이행되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의 새누리당이 박정희의 정치적 DNA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차기 재집권을 넘보고 있다. 박정희 집권 50년이 지난 오늘 다시 발호하는 박정희의 정치적 DNA는 무엇인가, 그리고 박정희의 후예들인 전두환 노태우의 내란과정에서 힘을 발휘한 하나회는 어떻게 조직됐고 권력에 접근했는가, 이 모두가 오는 12월 올바른 선택을 위한 물음들이다.

 

 

<2> 박정희 후계, 보안사가 검경 지휘하는 병영국가

'코드 원' 박정희 사망 가장 먼저 안 전두환은…

 

전두환이 권력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시국동향과 정치정보에 야생동물과도 같은 후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후각은 공부해서 얻는 지적 능력과 달리 일종의 체질이다. 정치군인으로서 체질을 타고났던 셈이다. 육사 재학 중 공부보다는 축구 같은 운동부 쪽에 더 열의를 보였다. 군 지휘관으로서도 야전 보다는 청와대를 지키는 수경사 30단장과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같은 박정희의 친위대 노릇을 한 것이 주요 보직이었다.

전두환 육사성적, 156명 중 126등으로 꼴찌 수준
노태우 67등 ㆍ 정호용 86등 ㆍ 권익현 55등 중간 정도


그의 육사 졸업성적은 126등으로 11기 전체 졸업생이 156명이었으니까 거의 꼴찌 수준이었다. 그러나 어떤 동기생보다도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전두환과 함께 군내 정치장교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한 11기생들의 성적은 대체로 중간 정도였다. 대구 출신으로 하나회 회원이었지만 가장 색깔이 약했던 김복동(예비역 중장. 국민당 국회의원 역임)이 13등으로 가장 좋은 편이었다. 나머지는 △노태우(전 대통령) 67등 △ 권익현(민자당 사무총장 역임) 55등 △정호용(국방장관 역임) 86등 △손영길(수경사 참모장 역임) 81등 등으로 중간 정도였다. 하나회는 아니지만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고위직 인사로는 수석졸업한 김성진이 과기처장관을 지냈고 전 국방장관 이기백 59등, 전 국방장관 이상훈 85등이다.

▲10.26사건 합동수사와 12.12군사반란을 지휘한 전두환 보안사령부의 핵심 간부들은 대부분 하나회였다. 앞줄 왼쪽부터 기획조정처장 최예섭, 참모장 우국일, 사령관 전두환, 육군본부 보안부대장 변규수, 대공처장 남종웅, 뒷줄 왼쪽부터 인사처장 허삼수, 군수처장 이차군, 한 사람 건너 정보처장 권정달, 보안처장 정도영, 한 사람 건너 국방부 보안부대장 김병두, 비서실장 허화평, 교육대장 백제구, 감찰실장 이상연.

전두환의 그런 정치적 후각을 높이 사고 친위대장으로 키워낸 장본인이 대통령 박정희였지만 거기에는 영남군벌의 입김도 크게 작용했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10.26거사로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 해가 된 1979년 초 친위대장을 곁에 두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시국이 뒤숭숭할수록 친위대장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오르기 직전 박정희 정권의 권력구조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보안사령관 진종채, 수경사령관 전성각, 그리고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73년 봄 윤필용 사건 이후 주요 군 인사는 서종철(육참총장 국방장관 대통령안보특보 역임), 노재현(육참총장 국방장관 역임), 진종채(보안사령관 2군사령관 역임) 등 영남군벌 3인방에 의해 요리됐다. 이들은 모두 경상도 동향 출신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군 경력을 자랑했다. 이들은 하나회의 후원세력이었다. 하나회는 군 장교들의 성분을 4개로 분류했다. 첫째 핵심세력은 자신들 하나회 회원이고, 둘째로 하나회에 밀접한 후원세력, 셋째는 하나회에 간접적인 지원세력, 넷째가 하나회에 대한 견제세력이었다.

영남 군벌에서 특히 서종철은 군내 성골이라 할만 했다. 그는 1972년 육참총장을 마친 뒤 바로 청와대 안보특보, 73~77년 4년 이상에 걸쳐 국방장관, 78년 재차 청와대 안보특보로 들어갔다. 이같은 군부 고위직에 계속 중용되면서 그는 박정희의 군 통수권행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1군사령관과 육참총장을 지내면서 하나회 핵심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점이다. 전두환 노태우 대령이 그가 육참총장 시절 최측근인 수석부관 자리를 앞뒤로 인수인계했다. 이때 육사17기 하나회의 중심인물인 김진영 소령이 전속부관이었다. 자신의 직계부하가 둘씩이나 대통령에 오른 예도 그 이외에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재현 국방 등 영남군벌이 합의 추천

박정희에게 운명의 해인 1979년 2월 중순경, 국방부장관 노재현이 신임 보안사령관 인사안을 갖고 청와대로 올라갔다. 당시 보안사령관 진종채는 2군사령관 영전이 내정돼 있었다.

박정희는 인사자력표를 들여다보다가 약간 주저했다.
"이제 막 사단장을 마쳤는데, 너무 이르지 않을까 ‧ ‧ ‧ "
그는 특히 윤필용 수경사령관 사건 이후 보안사령관과 수경사령관의 위계서열을 정해야 군부내 질서가 잡힌다고 판단했다.

통상 두 명 이상의 복수안에 순위를 매겨 올려야 하는 인사안이 전두환 단독후보로 돼 있었다. 영남군벌 내부에서 이미 구수회의를 마친 노재현은 소신 있게 밀었다.
"각하, 이만한 적임자를 따로이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서종철 특보나 진종채 사령관도 같은 의견입니다."

박정희는 의심이 많아 막료들이 어느 하나의 안을 강력히 진언하면 그것을 다른 선택안으로 바꾸어 결정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그즈음 그는 주색으로 흐트러진 사생활 때문에 심약해진데다 의욕도 전만 못했다. 그는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인사안에 그대로 결재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임명에 이견

노재현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오자 으레 그랬듯이 좀 만나고 가라는 전갈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보안사령관 인사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각하께서 결재하실 때 뭐라고 안 하시던가요?"
노재현은 사실대로 얘기해 주었다.
"글쎄, 그것은 각하께서 이의를 표시하신 건데 그냥 결재를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차지철은 핀잔투로 말했다. 그는 영남군벌이 아니어서 그쪽 인물이 권력의 한 축인 보안사령관에 오르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노쇠한 박정희가 예전처럼 철저하게 챙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파고들 여지는 많았다. 그러나 영남군벌이 버티고 있는 군부 인사는 관여하기가 쉽지 않았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전방 1사단장에서 일약 보안사령관으로 두 단계 이상 월반시켜 파격 중용했다. 보통은 사단장에서 군단장급 보직을 거쳐 계급도 중장이 돼야 보안사령관에 발탁했다. 그런데 이런 관례를 깨고 보안사령관에 조기 발탁된 것이 전두환의 경우였다. 군내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것이 박정희 권력의 DNA를 후계정권에 이어주는 끈이었음을 당시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진출했을 때 그를 견제해야 할 다른 권력자들은 그 이전 유신1기의 인물들에 비해 '자질'면에서 떨어졌다. 유신1기까지 박 정권의 핵심인사들은 그동안 권력경쟁이나 돌발사건의 와중에서 휩쓸려나갔다. 청와대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으로 박정희의 곁에 가장 오래 있던 이후락은 1973년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으로 실각했다. 종신경호실장처럼 보이던 박종규는 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에 책임지고 물러나야 했다. 군내 책사로 써먹을 만하던 보안사령관 강창성도 하나회 수사를 강행하다가 영남군벌의 반발에 밀려 좌천당했다.

박정희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수족으로서나 통치권 관리의 기술 차원에서 이들 유신1기의 막료들이 일류라면 그 이후엔 핀치히터들이 등장한 격이었다. 거기다 박정희 자신의 심리불안정 상태와 판단력 상실까지 겹쳐졌다. 이것이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한 10.26사건과 반인륜적 군사반란인 12.12사건가 일어난 환경요인이었다.

합수부장 전두환,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불러 회의

전두환이 10.26 이후 권력자로 떠오르는데 결정적인 요인은 합동수사본부장 자리였다. 박정희는 계엄령과 전시에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정보수사기관들의 수장이 되도록하는 대통령령을 하달했다. 이것이 검토돼 오다가 수사기관간의 균형이 안 맞아 보류돼 있었다. 박정희는 이것을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으로 기용한 직후 시행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합동수사본부는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중앙정보부 차장이 참석하도록 돼 있었다. 아무리 비상시라고 해도 이야말로 병영국가 체제였다. 군 보안사령관이 검찰 경찰 정보부를 지휘하는 구조였다.

10.26 다음날인 10월27일 새벽 전두환은 보안사로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중정 차장 등 수사기관장을 불러 합동수사본부 첫 회의를 연다. 새벽 4시, 대통령 유고를 사유로 한 계엄령이 선포됐고 이어 바로 합수부가 구성된 것이다. 전두환이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했다. 이어 그는 청와대로 가 비서실장 김계원으로부터 사건 전모에 대해 경위를 청취한다.

"시신은 코드원"…전두환, 박정희 사망 맨 먼저 알고 대처

그때 전두환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정희 사망을 그날 궁정동 비밀연회장에 참석했던 권력자들 외에 가장 먼저 알았던 사람이 전두환이었다. 그만큼 비상대처에 처신하는 기민성이 남달랐다.

박정희의 시신이 국군수도통합병원 분원에 도착한 것은 그날 밤 7시57분이었다고 병원장 김병수 준장이 법정에서 증언했다. 병원장 김병수는 시신의 얼굴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얼굴이 피로 흠뻑 젖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었고 중정 경비원 둘이서 보안조치라며 들여다보지 못하게 제지했다. 그가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 것은 사망진단을 하기 위해 복부를 들추어 보았을 때였다. 배꼽 아래 흰 반점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박 대통령이 흰 반점을 제거할 수 없겠느냐며 보여 준 일이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하고 숨이 가빠짐을 느꼈다. 사태를 보안사에 알려야 하는데 중정 경비원 둘의 감시가 심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한 시간여 뒤에 전화가 아닌 인터폰이 울렸다. 보안사와 연결된 인터폰이었다. 감시원은 눈을 번득였다. 인터폰 목소리는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었다.

△우국일 : 보안사 참모장입니다. 김 장군, 지금 상당히 위협적이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 같은데요. 곤란하면 설명은 하지 말고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세요. 병원에 들어 온 환자는 돌아가셨습니까?
△김병수 : 네.
△우국일 : 혹시 실장입니까?
△김병수 : 아니, 그런 거 없습니다.
△우국일 : …? 그러면 코드 원입니까?
△김병수 : 네.

우국일은 전화기를 던지듯이 끊고 사령관 전두환의 자동차 무선전화를 호출했다.
△우국일 : 사령관님, 코드 원이 유고입니다. 지금 국군통합병원 분원에서 확인했습니다.
△전두환 : 무어라 코드 원…! 보안조치 철저히 하고, 내 지금 사령부에 들어가겠소.

전두환은 가던 길에서 차를 돌려 급히 보안사로 향하게 했다. 그의 권력 게임과 친위대로서 보복 행보가 시작되는 것이다.

 

 

<3> 10.26 합수부장 전두환의 힘

김재규의 신병을 인수한 전두환 보안사는…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박정희의 사망을 10.26 사건이 발생한 후 불과 3시간 만에 포착했다. 엄청난 사건이 불의에 터진 상황에서도 전두환은 치밀하고 냉철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으로부터 '박정희 사망'을 카폰으로 보고받자마자 사령부로 들어가 상황 파악을 했으나 정보가 매우 제한돼 있었다. 11시경 육군본부 보안부대로부터 국방부 회의실에 국무위원들이 모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는 국방부로 향했다.

당시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와 함께 가장 조직적인 위기관리 촉각을 키워 준 집단이 보안사였다. 그 보안사 수장으로서 우연찮은 기회를 잡은 덕도 있지만 정치장교 전두환의 정세파악 후각은 남달랐다.

5.16쿠데타에 깊숙이 관여… 육사생도 지지시위 이끌어내
30대 장교 때 박정희 최고회의 비서실, 중정 인사과장 근무


그는 이미 5.16쿠데타 당시 국내 여론층과 미국의 반대 태도를 바꾸는데 결정적 단서가 된 육사생도의 지지행진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쿠데타에 반대 입장이던 육사교장 강영훈을 박정희에게 밀고해 구금시킨 뒤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이 가능해졌다.

그런 공으로 대위 전두환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비서실 요원으로 들어간다. 이어 중앙정보부 창설과 함께 그 인사과장으로 파견됐다. 전두환은 30대의 젊은 장교 때 이렇게 5.16쿠데타 속에서 훈련받은 정치장교였다. 전두환이 초급장교 때부터 5.16쿠데타에 깊숙이 관여한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일이다.

이때 육사 11기 전두환과 함께 하나회의 창설자들인 노태우는 방첩대 내사과장으로, 그리고 박정희가 사단장 때부터 전속부관인 손영길은 최고회의의장 비서관으로 일했다.

박정희는 1963년 이른바 민정이양으로 군복을 벗고 정치권에 본격 들어가기 직전인 62년 12월, 전두환에게 국회의원 출마 준비를 주문했다. 이때 5.16쿠데타 주체세력 중 차지철 대위도 군복을 벗고 경기 이천에서 출마해 당선된다. 그러나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지역기반이 약하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사양했다.

"각하, 군에도 충성스런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정희는 전두환의 이 말에 머릿속에서 번득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 군부 내에 측근 친위대가 필요하지 … 박정희는 더 이상 전두환에게 일찍 정치권에 들어갈 것을 권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전두환은 박정희의 군내 친위대로 본격 육성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의 행보는 그 때 박정희에게 했던 말 "군내에 남아 있어야 할 충성스런 친위대"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충성의 대상인 보스 박정희 피격에 대한 법치적 사법처리를 훨씬 넘어선 징벌과 보복 성격이었음이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이 말기에 들어선 1976년12월 경호실장 차지철은 군 장성들을 경호실에 거느리면서 위상을 과시했다. 가운데가 차지철, 그의 우측 두 번째가 작전차장보 전두환 준장.

10.26군사재판, 전두환 합수부가 조정한 '쪽지재판'
김재규 사형 판결 사흘만에 처형…민심동요 소지 없애


79년 12월4일부터 시작된 10.26 군사재판은 국가안보 기밀을 이유로 비공개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재판정 옆방에서 전두환 합수부 팀이 재판부에 메모지를 보내 조정하는 꼭두각시 재판이었다. 그래서 세계의 이목까지 집중된 채 역사적 평가를 기록해야 할 법정은 '쪽지 재판'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그런 재판으로 김재규는 80년 5월21일 사형이 확정되자마자 불과 사흘 후인 5월24일 전격적으로 처형되고 만다. 그렇게 전광석화와도 같이 신속하게 사형을 집행한 이유는 민심 폭발의 대상이 될 소지를 없애야 했고 또 국제앰네스티 등 인권단체들의 구명운동 가능성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쪽에서 정치범으로 규정하면 사후 처리가 골치 아파질 것을 알고 사전에 정리해 버린 것이다. 더구나 광주 시민항쟁이 발화하고 이에 대한 살상진압이 자행되던 와중이어서 김재규 처형은 별로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는 군 지휘관으로서도 청와대를 지키는 수경사 30경비단 단장과 경호실 작전차장보 등을 두루 거치면서 야전보다는 서울에서 정치 감각을 익혀왔다. 그가 10.26 후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던 배경도 바로 전형적인 정치군인의 경험 덕이었다.

초동수사 보고서를 보니 사건 현장에 당시 한국의 권력 기둥이 다 모여 있지 않은가. 대통령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여기서 일이 터진 것이다.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힘을 쓸 만한 실력자들이 함께 있었다. 거기서 빠진 한 사람의 권력자가 전두환인 셈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박정희와 차지철은 죽었다. 김재규가 범인이고 김계원도 현장에서의 행동거지가 수상하다. 권력자들에 대한 사건 수사 자체가 힘의 행사였다. 전두환의 파워는 범죄사건 수사권을 내세워 다른 권력기관들을 모두 평정하는데서 발휘되기 시작한다.

10월26일 자정이 가까운 무렵, 국방부 회의실.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박정희의 시신을 확인한 국무위원들이 모여 비상국무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국방부장관실에 국무총리 최규하와 국방장관 노재현,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과 사건의 장본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함께 있다. 최규하는 김재규에게 비상국무회의가 열리면 상황 설명과 향후 대처에 대해 설명할 것을 요청했다.

김계원은 일이 잘못 돌아간다고 느끼고 조속하게 정리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눈길 때문에 행동이 부자유스러웠다고 나중에 군사법정에서 진술했다.

김계원, 국방장관과 육참총장에게 김재규 체포를 요청

김계원은 화장실에 가는 척 하고 장관실 옆의 보좌관실로 빠져 나왔다. 장관 보좌관 조익래 준장에게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조용히 불러달라고 지시했다. 얼마 후 국방장관 노재현과 육참총장 정승화가 한 사람씩 나타났다. 김계원은 이들에게 처음으로 사건 현장의 진상과 함께 대통령 살해범이 김재규라고 입을 뗀다.

△김계원 = … 각하를 시해한 범인은 김재규 부장이오. 술자리서 권총으로 …
△노재현 = 아니 정말입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

정승화는 몇 시간 전 일이 생각났지만 도무지 무어가 무언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김재규가 궁정동 안가에 불러서 갔다가 기다리는 중 헐레벌떡 달려 온 그가 엄지손가락을 아래쪽으로 가리키면서 비상상황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쓰러졌다는 표시였다. 김재규는 자기 승용차에 정승화와 함께 타면서 안보상황을 체크해야 한다고 했다. 삼일고가에 이르렀을 때 기사가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부(중앙정보부)로 가실까요?"

이때 정승화는 비상상황이라면 육본 벙커로 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아니, 육본 벙커로 갑시다."

김재규와 정승화를 태운 승용차가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들어갔다면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다. 당시 중정은 보안사보다 훨씬 정예화된 정보망과 비상상황에 대비해 가동할 수 있는 동원체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재규의 운명은 삼일고가 갈림길에서 중정이 위치한 남산 쪽으로 좌회전하지 않고 삼각지 육본 벙커 쪽으로 우회전함으로써 판가름났다.

정승화가 잠깐 뒤돌아보는 사이 김계원의 말이 이어졌다.

△김계원 = 김재규는 지금도 무기를 소지하고 있어요. 여기서 체포해야 할 텐데, 서툴게 해서 소란이 일어나면 문제가 커지니까 …. 군인 몇을 불러 조용히 밖에서 무슨 할 얘기가 있는 것처럼 유인해 내서 더 이상 사고가 안 나게 체포하도록, 잘 조치를 해야 하겠어요.

계엄령 선포 전 민간인 중정부장을 군 헌병과 보안사가 체포
육참총장 정승화, 전두환과 헌병감에 김재규 체포작전 지시


당시는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이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장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다. 법적으로 한다면 당연히 군 수사기관이 민간인을 체포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며, 검찰과 경찰에 맡겨야 할 사안이었다. 대통령 살해범이니까 청와대 경호실에서도 직무상 체포에 나설 수 있다. 그러나 김계원은 권력의 위상으로 보아서 워낙 막강한 중앙정보부장을 체포할 수 있는 힘은 군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노재현과 정승화도 이 점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대통령 살해범이라는 말에 법적 절차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법치 질서가 깨지고 물리적 힘이 통치수단으로 등장한다는 징표이기도 했다.

김계원의 진상 설명을 들은 노재현과 정승화는 그 자리에서 김재규 체포와 수사 절차를 논의했다.

△노재현 = 체포는 육본 헌병대가 맡아야 되지 않겠소? 지금 범인이 위치한 곳이 군 관할지역이기도 하고 …
△정승화 =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체포한 뒤 신병처리와 수사는 어떻게…? 헌병대에서 수사를 맡기는 좀 부적절하지 않겠습니까.
△노재현 = 수사와 사법처리 절차는 보안사가 해야겠지.

육참총장에게는 보안사를 지휘할 권한이 없다. '국군보안사'로서 국방장관과 대통령에게만 예속된 직속 기관이었다. 노재현은 보좌관 조익래를 시켜 전두환에게 김재규 체포와 수사 건에 대해 육참총장의 지시를 받으라고 통보했다.

이때 전두환은 육본 보안부대에 상황실을 차리고 정세파악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장관실 바깥의 접견실에 앉아 최규하 국무총리 이하 국무위원들의 회의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이때 국방장관 보좌관이 그에게 다가 와 "정승화 총장에게 가 김재규 체포를 도우라"는 노재현의 지시를 전했다.

한편 정승화는 육본 벙커 총장실로 헌병감 김진기 준장을 불렀다. 김진기는 육사 출신이 아닌 갑종6기로 헌병에서 잔뼈가 굵은 정승화 계 간부였다. 정승화는 김진기에게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 시해범은 중정부장 김재규요. 지금 즉시 헌병 무력을 써서 김재규를 체포하시오."

김진기도 처음엔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안 돼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진상을 알고는 정승화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권총과 실탄을 갖고 있으니 유능한 무도 유단자와 수사관을 동원해서 각별히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하겠소."

정승화는 작전명령을 하달하듯 긴박한 어조로 말했다.
뒤이어 전두환이 정승화 앞에 들어섰다.

"총장님, 부르셨습니까?"

정승화는 다시 두 사람에게 김재규 체포작전을 지시했다. 그때만 해도 정승화는 12월12일 전두환 합수부가 자신에게 가할 총격 체포작전을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헌병감이 김 부장을 만나 내가 여기 벙커 총장실에서 할 얘기가 있다고 끌어내시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복도와 출입문에 헌병들을 증강 배치하고 그를 데리고 나와 조용히 체포하시오. 체포한 뒤에는 전 사령관이 인수해 보안사에서 수사준비를 갖추도록 하시오."

김진기는 헌병 특수부대 1개분대를 차출했다. 이어 몸집이 커 완력이 좋고 무술이 뛰어난 육본 헌병 중대장 이기덕 대위를 불렀다. 그는 이기덕에게도 진상을 이해하도록 사전에 설명을 해야 했다. 체포 후 압송 등에 필요한 승용차와 장비들은 보안사에서 동원했다. 한편 전두환은 김재규를 인수해 올 책임자로 보안처 군사정보과장 오일랑 중령을 지명했다.

헌병감 김진기는 이기덕 대위와 오일랑 중령을 데리고 국방부 장관실로 갔다. 그는 작전 시나리오대로 장관 보좌관 조익래 준장에게 김재규를 불러내도록 부탁했다. 조익래는 장관실 옆의 회의실 소파에 앉아 있는 김재규에게 다가갔다.

"육참총장님께서 잠깐 뵙자고 합니다. 지금 밖에 총장 비서실장이 와 있습니다."

김재규는 "아, 그래"하며 별 의심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에 나온 김재규에게 헌병감 김진기는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육참총장 비서실장입니다. 총장님이 지금 벙커에 계시는데 조용히 뵙자고 하십니다."

김진기는 그의 기색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지하 비밀통로로 나가는 출입문을 열었다. 김진기는 헌병중대장 이기덕 대위와 보안사의 오일랑 중령이 호위하는 가운데 김재규를 안내했다. 이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헌병들이 서 있는 통로를 지나 국방부 청사 후문으로 나왔다. 후문에는 승용차 3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김진기가 가운데 승용차의 뒷문을 열었다.

"타시지요."

이때 김재규는 황황한 김에 따라나서기는 했으나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생각보다 멀리 이동하는데다 동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낯설었다. 그는 승용차에 탈 생각을 하지 않고 "박 대령은 어디 갔지?"라며 두리번거렸다. 수행비서인 박흥주 대령(육사18기, 10.26군사재판 후 처형)을 찾는 것이다. 체포조는 가슴이 섬뜩했다.

순간 몸집 큰 이기덕 대위가 김재규 부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 대위은 점프한 힘으로 그의 허리를 잡아 승용차 안으로 밀어넣었다. 이어 오일랑은 차 안에서 김재규의 권총을 뒤져냈다. 압송차량은 보안사 서소문 분실로 달렸다. 자동차의 시계는 거의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4> 전두환의 12.12군사반란 흉계

박정희 친위대 하나회의 경복궁 회동

 

정치군인 하나회 경복궁 30경비단에 집결하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

한겨울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경복궁에 수도권 인근의 군 실력자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경복궁은 청와대를 호위하는 30경비단의 병영. 이날은 청와대를 호위하는 이른바 '특정지역' 위병소의 위세도 보이지 않았다. 위병장교는 모여드는 손님들에게 깍듯이 경례를 붙였다. 이날 30경비단에 집결한 장성들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초대한 손님들.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육사 16기, 후에 청와대 경호실장, 안기부장)은 이날 오는 손님들에게 전에 없이 잘 모실 것을 특별지시했다.

맨 먼저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5공정권 안기부장, 민정당 민자당 국회의원)과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5공정권 교통부장관)이 들어섰다. 이어 1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 준장(육사 12기, 후에 육군참모총장)과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육사 13기, 후에 합참의장과 국방장관), 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육사 12기, 후에 총무처장관)이 나타났다.

전두환과 함께 이날 군사반란의 또 한 주역인 9사단장 노태우 소장은 직속상관인 1군단장 황영시 중장(후에 육참총장, 감사원장)과 함께 약간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20사단장 박준병 소장(육사12기, 후에 민정당 민자당 사무총장)도 뒤따라왔다.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30경비단장실이 군사반란의 아지트였다. 내로라하는 별자리들이 모인 자리에 영관급은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과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후에 육참총장) 두 사람뿐이었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대령이 들어왔다. 조홍은 전두환의 지령을 받아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을 연희동 비밀요정에 발을 묶어놓는 임무를 수행한 후 곧바로 들어온 것이다.

이날 모인 장성들 중 전두환 노태우보다 위인 중장급들은 정규 육사가 아니어서 하나회가 아니지만 하나회와 가까운 인물들로 후에 5공과 6공에서 출세의 길을 걷는다. 소장 이하 정규육사 출신과 대령인 30단장 장세동과 33단장 김진영도 모두 하나회 핵심이었다.

▲경복궁에서 12.12군사반란 음모에 가담한 정치군인들은 모두 5공과 6공에서 장관과 국회의원 이상의 고위직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80년 7월18일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이 후임인 유학성에게 자리를 인계했다. 유학성은 이어 중정 간판을 바꾸어 단 안기부의 초대 부장이 됐다.

이렇게 군사반란 아지트를 30경비단에 설치한 것은 외부 공격으로부터 방어에 유리하고 비상통신망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12.12 군사반란 계획은 일주일 전인 12월 5일 보안사령관실에서 머리를 맞댄 전두환과 노태우 둘이서 짰다.

전두환은 이때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참총장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결심했다. 정신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올라 있는 상황이었다. 노태우가 먼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우리가 영향력 있는 장성들을 모아놓고 그 자리에 정승화 총장을 초치해 김재규 수사에서 드러난 의문점을 들이대는 거야."
"그렇잖아도 수사관들은 정 총장을 연행해 조사하자는 거야. 그러나 이 판국에 현직 육군총장에다 더구나 계엄사령관인 사람을 수사요원이 막무가내로 연행할 수도 없고…."

말꼬리를 흐리는 전두환은 얼굴 표정이 어두웠다. 두 사람은 결국 자신들이 그동안 상관으로 근무 인연을 맺고 하나회에 우호적인 고위 장성들을 30경비단으로 포섭해 들이기로 했다. 물리력을 동원하기 위한 병력은 정예부대인 30경비단과 공수특전부대에 의존하기로 했다. 30경비단에는 일반 병력 외에 무술특공조가 있는데다 장갑차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청와대와 지근거리에 있는 이 지역을 웬만해서는 다른 군부대가 공격해 오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보안사는 이날 육군본부 정규 지휘계통의 병력 지휘관인 수경사령관 장태완과 특전사령관 정병주, 그리고 육본 헌병감 김진기를 부대에서 이탈시키고 교란시키기 위해 술자리 유인책을 썼다. 연희동 비밀요정에 자리를 마련해놓고 만찬 초대를 한 것이다. 반란군 집단은 수경사령관 장태완을 가장 큰 위협세력으로 보았다. 장태완은 10.26 직후인 11월 16일 정승화 육군총장이 발탁해 수경사 지휘권을 맡긴 그의 직계 야전통이었다.

수경사령관 장태완과 하나회의 악연

장태완은 1973년 3월 윤필용 사건으로 수경사에서 하나회 장교들을 솎아내는 작은 개혁이 없었다면 청와대 근위부대에 발을 들여놓을 처지가 못 되는 '철조망 군인'이었다. 6.25전쟁 때 소대장,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종합 및 갑종 등 그의 동료들은 전쟁이 끝난 후 기습공격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진지 구축과 철조망 공사로 군생활의 태반을 보냈다.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철조망 세대'라고 불렀다. 그러던 장태완이 수경사 참모장이라는 핵심보직을 받아 근위부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윤필용계 장교들이 잘려나간 직후인 1973년 4월 말 수경사의 인사쇄신 덕분이었다.

호랑이 장군으로 유명하던 한신 1군사령관 아래서 작전처차장을 지낸 그는 진지공사 등을 점검하는 지휘검열단장으로 사령관의 암행어사 노릇을 했다.

1971년 1월 준장으로 진급한 장태완은 육본 군사연구실장을 거쳐 5군단장 이병형 중장의 참모장으로 들어갔다. 이때 5군단 예하 8사단 21연대장이던 노태우 대령과 어설픈 인연을 가졌지만 직속 상하관계는 아니었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성격이 괄괄한 장태완의 이름은 이미 야전군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수경사 참모장을 순수 야전 출신으로 물색하는 가운데 그는 별 어려움 없이 그 자리에 발탁된다. 신망 높은 이병형 군단장이 신임 수경사령관 진종채에게 그를 천거한 것이다.

그런데 수경사 참모장으로 부임한 장태완 준장은 하나회와 그만 악연을 맺고 만다. 훗날 12ㆍ12쿠데타에서 전두환계 하나회 장교들과 대결하게 되는 감정의 씨앗이 이때에 뿌려진다.

1976년 6월 어느 날, 부임한 지 두 달이 채 안 된 장태완은 서울 서부지역의 수경사 방공진지 공사현장에 순시를 나갔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별판을 보고 놀란 위병은 뒤늦게야 신호 버튼은 눌렀다. 그래서였는지 장 참모장이 한참 공사판을 걸어서 들어가는 동안 아무도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거의 막사 앞에 이르렀을 때야 방공포 대대장 김상구(호주 대사, 민정당 국회의원 지냄) 중령이 나와 경례를 했다.

김 중령은 육사 15기의 하나회 핵심. 더욱이 그는 박정희의 총애를 받고 있던 하나회의 보스 전두환 당시 1공수여단장과 동서 사이로 중견장교 중 실세였다.

김 중령을 앞세워 벌컨포 설치공사 현장에 가본 장 준장은 울화가 치밀었다. 전방부대 장병들이 순전히 손발로 하는 일을 중장비로 편하게 하면서 진지의 은폐 ㆍ 엄폐를 위한 잔손질은 적당히 얼버무린 태만한 공사로 보였다. 괄괄한 장 준장은 김 중령의 면전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모자란 놈이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됐나?"

그러자 김상구는 자존심이 확 상했다.

"저도 4년제 육사에서 배울 만큼 배우고 임관한 장교입니다. 장교의 명예를 짓밟는 그 말을 취소하십시오."

김상구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대들었다. 장태완은 어이가 없었다. 애송이 중령이 감히 상급부대 장군에게 대드는 것은 하나회라는 뒷배경 때문이려니 생각하니 더욱 괘씸했다. 더 거친 언사가 장장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놈아, 제대로 일도 못하는 놈이 누굴 믿고 건방지게 굴어?"

그러나 김상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개 영관이 장군에게 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대거리를 서슴지 않았다.

"내가 당신보다는 군사학을 더 공부하고 임관했소."

화를 풀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령부로 돌아온 장태완은 사령관 진종채에게 이 사실을 낱낱이 보고하고 '겁 없는 하나회 장교'를 징계위에 회부할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진종채는 영남군맥의 후배인 김상구를 징계할 생각이 없었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장태완을 달랬다.

"내일 내가 불러서 기합을 줄 테니 그만 참아주시오."

하지만 장태완은 강경했다. 화를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이런 군기 문란한 장교들을 그대로 두고선 함께 못 있습니다. 저를 내보내든지 김상구를 구속시키든지 택일하십시오."

결국 김상구는 이 일로 영창에 들어갔다가 전역하고 만다. 하나회 계열 장교들이 장태완에게 깊은 유감을 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 후 장태완은 전두환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1979년 11월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보안사령관인 그를 계엄업무회의에서 만났다. 전두환이 손을 내밀었다.

"형님, 축하합니다."

이에 직선적인 장태완은 과거지사를 넌지시 떠보았다.

"전에 김상구 일로 내게 아직 유감이 있소?"
"아닙니다. 다 지난 일인데요, 뭘. 그 친구가 몸가짐이 좀 그래서…."

그러고 나서 바로 운명의 날 12월 12일에 만찬 초대를 받은 것이다. 이 만찬 초대가 군사반란을 행동에 옮기는 흉계의 시작이었다. 흉계는 이렇게 실행에 옮겨진다.

보안사령부 대 수도경비사령부

1979년 12월 5일 오전 10시, 서울 필동의 수도경비사령부 정문 앞에 세단이 멈춰 섰다. 위병이 다가간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님이시다. 너희 사령관께 방문인사 약속이 있다."

운전석 옆의 수행 장교가 앉은 채로 차창만 반쯤 내린 채 말하자 위병소 헌병은 차를 들여보내고 안에 보고전화를 건다. 허화평(후에 민정당 의원)의 이날 방문은 사전에 연락이 가 있었다.

하루 전인 4일 국방부 군사법정에서 열린 계엄사 보통군법회의가 첫 김재규 재판을 한 날이어서 어수선할 때였다. 박정희 살해사건이 계엄령 이전의 행위라는 사실을 들어 변호인들은 민간법정에서 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보안사 수사관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서울에 위치한 실세부대인 보안사와 수경사의 관계는 사령관들의 개인적 친분에 따라 협조관계 아니면 알력관계로 갈렸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 박정희의 신임도와 총애 여부가 두 군부 권력자의 힘겨루기를 결정지었다.

1970년대 초, 김재규 보안사령관과 윤필용 수경사령관 시절에 두 부대는 갈등이 심했다. 수경사 안에 있던 보안부대 사무실이 정문 밖으로 쫓겨난 일도 있었다. 윤필용의 전화를 보안부대원이 도청하다가 들통이 났는데, 수경사에서 보안부대 사무실에 못질을 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실 병력을 가진 수경사는 물리력에서는 단연 앞서긴 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에서 더 센 보안사보다 늘 한 수 아래였다. 더욱이 1973년 3월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구속사건으로 수경사는 위세가 크게 눌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윤필용 후임으로 영남군맥의 대부 격인 진종채가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하고, 이어 수경사 내 하나회를 조사하던 보안사령관 강창성이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당하면서 수경사의 사기도 그런대로 유지됐다. 그러면서 두 부대 간의 긴장관계도 계속됐다.

수경사에 나와 있는 보안부대 장교로부터 허화평의 방문인사 전갈을 받은 데 이어 그 자신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을 때 장태완은 그런 껄끄러움을 없애보려고 그러려니 생각했다.

 

 

 

<5> 하나회측 허허실실 전술

전두환, 수경사령관 장태완을 요정으로 유인한 뒤…

 

전두환이 보낸 돈 봉투, "형님, 김장에 보태 쓰십시오"

육사 11기인 전두환의 소위 임관이 1955년이고, 종합 11기인 장태완의 소위 임관이 1950년이니, 군 서열상 전두환은 장태완의 한참 후배다. 그러나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한 전두환이 그해 10.26 직후인 11월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 장태완보다 권부 핵심에는 먼저 진입했다.


장태완에게 경례를 붙인 허화평이 자리에 앉아 전두환의 안부 인사를 전한다.

"저희 사령관께서 각별히 안부 인사를 여쭈라고 했습니다."

이윽고 허화평은 흰 봉투 하나를 장태완에게 건넸다. 장태완은 그 자리에서 봉투를 뜯었다.

"형님, 얼마 되지 않지만 집의 김장에 보태 쓰시면 감사하겠습니다"는 전두환의 메모와 함께 100만원권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지금 화폐가치로 치면 아마 1000만원은 족히 넘을 것이다. 수표를 들여다보고 있는 장태완에게 허화평이 덧붙였다.

"저희 사령관께서 장 사령관님의 부임을 환영하는 술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하십니다. 며칠 내로 허락되는 일시를 알아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전두환 하나회 집단의 12.12군사반란을 행동에 옮기기 위한 흉계인줄 장태완은 알 리가 없었다. 장태완은 비상계엄 아래서 부임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데다 계엄사 서울분소장이라는, 경험에 없는 일까지 겸해야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였다. 사령부 본부의 참모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은 데 이어 경복궁 30경비단을 초도순시했다.

그는 윤필용 사건 직후인 1973년 4월부터 2년 3개월간이나 진종채 수경사령관 아래서 참모장을 지냈지만 특정지역인 30경비단에 들어가 본 것은 그때가 두 번째였다. 30경비단 초도순시에 이어 그는 33경비단 외곽진지에 올라가 김진영 단장의 안내로 청와대를 지키는 보초근무 태세를 점검했다.

이제 겨우 현황을 둘러보았으니 실질적 부대 장악을 위해 자신의 구상을 다듬어 병력과 장비의 재배치 및 운용계획을 하달해야 한다. 그는 전두환의 술자리 초대를 유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봉투에 관해서는 내가 직접 자네 사령관에게 얘기하겠네. 우리는 서로 협력할 사이고 서열로 보더라도 내 부임 파티는 부대 파악이 끝나면 내가 먼저 마련해야지, 말이 되는가?"

장태완은 전두환에게 부대 파악이 끝나는 대로 연락해 주겠노라는 뜻을 전하라며 허화평을 돌려보냈다.

허화평이 돌아간 뒤 장태완은 참모장 김기택 준장을 불렀다. 김기택은 육사 11기로 전두환과 동기생이지만 정치장교 사조직인 하나회엔 가담하지 않은 야전통이었다. 장태완은 그에게 수표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보안사가 이렇게 돈이 많은가? 내 평생 이렇게 큰 수표는 받은 적도 줘본 적도 없네. 그러나 저쪽에서 보내준 것을 곧장 그대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이니 적당히 반환할 방법을 찾아보시오."

그러자 김기택은 부대 회식이 많은 연말이 다가왔음을 상기시켰다. 연말연시나 명절 때면 청와대 근위부대인 수경사에는 으레 대통령의 하사금이 내려왔다.

"내가 참모장을 할 때는 부대 창설 기념일 같은 때 대통령 각하께서 장병 1인당 닭 한 마리 꼴로 쳐서 300만~400만 원씩 주셨는데…."

그러나 당시는 최규하 대통령이 삼청동 총리공관을 그대로 쓰고 있어서 근위부대는 '주인'이 없는 상태였다. 장태완은 참모장 김기택에게 다시 일렀다.

"총장님과 장관님한테 가서 100만 원씩 얻어올 테니 이것까지 보태서 연말 특식에 쓰게 보관해두시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장병들에게 특식은 특히 보안사령관의 협조가 많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두 부대 간의 관계가 좋아지도록 합시다."

 

▲ 10.26 사건 후 수경사령관에 임명된 장태완 소장(오른쪽 찻잔 든 이)이 부임 나흘만인 79년 11월20일 청와대를 지키는 근위부대인 수경사 33경비단을 초도순시, 단장인 김진영 대령으로부터 부대현황을 브리핑받고 있다. 이로부터 3주후 일어난 12.12군사반란에서 장태완은 육군본부 지휘부의 진압군으로, 김진영은 반란군측 핵심 지휘관으로 갈라져 적대관계에 섰다.


전두환의 유인책에 걸린 세 육본 직할 부대장

그로부터 사흘 후인 8일 오후, 장태완 사령관의 집무실에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대령이 들어섰다.

"오늘 보안사령관실에 인사하러 갔더니 전 사령관이 12일 저녁에 단합 만찬을 하자고 건의 드려보라고 합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김진기 헌병감님도 함께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수경사과 특전사, 그리고 육군본부 헌병단, 이들은 서울에서 육본이 실병이 필요할 때 직접 써먹을 수 있는 직할부대였다. 그 세 부대의 책임자들을 한 자리에 초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태완은 다른 것을 의심했다. 조홍은 육사 13기로 장군 진급 대상자였다. 장태완은 퍼뜩 진급 청탁을 위한 술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자네가 그걸 연락해? 자네 이번에 진급하겠다고 인사 다니나?"

조홍은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진급 청탁이 아니라 군사반란을 거사하기 위한 계책이니 조홍으로서도 민감하게 대처했다. 장태완은 지난번 허화평도 왔다가고 해서 언젠가 한번 치러야 할 행사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회 신군부집단이 가장 위협적인 인물로 본 수경사령관 장태완의 술집 유인작전은 일단 성공한다.

운명의 12월 12일, 행선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사령부를 나선 장태완은 차가 연희동 쪽으로 달리자 전속부관 천연우 대위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나? 전 장군 집으로 갈 것 같으면 사과라도 한 궤짝 사야 안 되겠는가?"
"아닙니다. 저기 연희동 고급주택가 안쪽에 있는 요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녁 7시 무렵, 전두환이 초대한 비밀요정에 도착한 장태완은 그 호화로움에 내심 놀랐다. '노는 물'이 다른 군부귀족 하나회 장교들의 행태와 그들을 총애해온 박정희 대통령에 생각이 미쳤다.

"종합이나 갑종장교들은 상상도 못할 이런 곳에 하나회 장교라고 거리낌 없이 출입하다니, 윗사람들이 후배들에게 고약한 버릇을 가르쳐 놓았군."

널찍한 정원이 잘 가꾸어진 2층 석조 한옥 저택에 들어서니 한복 차림의 원숙미 넘치는 중년여인이 손님을 맞았다. 먼저 온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본 헌병감 김진기 준장,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 정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우국일이 장태완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저희 사령관께서 갑자기 대통령 각하의 호출을 받아 가셨습니다. 늦어도 8시까지는 돌아오시겠다고 했습니다. 죄송하지만 먼저 주연을 시작하라는 부탁이셨습니다."

그 시각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 재가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는 1차로 재가를 거부당하고 경복궁 30경비단에 돌아가 사후대책을 논의한 뒤 황영시 중장 등과 함께 재차 대통령을 면담하는 중이었다. 같은 시간, 한남동 육참총장 공관에서는 합수부의 허삼수 ㆍ 우경윤 대령이 정 총장에게 동행을 요구하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전화받은 김진기 "뭐, 뭐라고! 총장 공관에서 총격?"

우국일의 공손한 태도와 운치 있는 정원 분위기에 장태완은 잠시 느슨해졌다.

"뭐 서두를 거 있나. 어두워질 때까지 여기서 화초 구경이나 하다가 전 장군이 오면 함께 시작하지."

그러나 전두환을 부하로 거느린 적이 있던 정병주는 퉁명스레 한마디 했다.

"전두환이 지가 늦게 오는 걸 우리가 기다릴 필요 있나. 들어갑시다."

방에 들어서니 뜻밖에도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대령이 와 있는 것 아닌가.
장태완은 그에게 큰소리로 면박을 주었다.

"자네가 여길 왜 왔어? 진급됐다고 술을 한 턱 내려거든 돌아가 부대에서나 조촐하게 해, 이 사람아."

장태완은 직속부하인 헌병단장 조 대령이 보안사령관의 초대만찬에 와 있는 것을 보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조홍이 이 자리에 오는 것을 사전에 알지 못한 것이다. 며칠 전에도 조홍이 전두환의 만찬 연락을 하기에 야단친 일이 있다. 자신의 부하가 외부인사와 직거래하는 거동에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락을 하는 것도 조홍의 직분에 맞지 않으려니와 직속상관의 동료 장성들이 한잔 하는 자리에 사전허락도 없이 동석한 행위가 주제 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요정의 미녀들 앞에서 상관에게 면박을 당한 조홍은 무안했으나 전두환의 밀명을 수행해야 하므로 어떻게든 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가 머뭇거리자 주위사람들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했다.

"수경사령관이 나오니 헌병단장이 직접 호위하는 것 아닙니까? 조 대령도 이번에 별을 달게 됐으니 함께 축하해줍시다."

조홍은 이날 오전 발표된 준장 진급자 명단에 들어 있었으나 장태완은 이 진급 발표가 탐탁지 않았다. 수경사 간부 중 자신이 우선순위로 꼽은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은 탈락하고 헌병단장인 조홍이 진급했기 때문이다. 박 대령이 육사 14기로 조 대령보다 1기 후배이기는 하지만 특과병과인 헌병은 전투병과인 보병보다 진급이 늦은 것이 통례다.

장 사령관은 조 대령이 진급한 것도 하나회 계열과 직거래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 진급에서 보안사령관의 입김은 거의 절대적이었고, 그 다음으로 총장과 심사위원장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풍토였는데, 이때 정승화 총장을 제외하고는 힘쓰는 자리가 대부분 하나회로 채워져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하나회 보스임은 다 아는 사실이며, 심사위원장을 맡은 차규헌 중장도 하나회 후원자로 널리 알려진 터였다.

장태완 등 육본 정규지휘계통의 핵심 장성들은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 등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날의 호스트인 전두환을 기다렸다. 하지만 전두환이 나타날 리 만무했다. 그러던 중 마담이 들어와 김진기 헌병감의 귀에 대고 부관의 전화를 받으라며 속삭였다. 밖으로 나가 부관의 전화를 받은 김진기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뭐, 뭐라고! 총장 공관에서 총격? 그래, 총장님은 어떻게 됐나?"

총장 공관에서 총격사고가 일어났다는 김진기의 말에 장태완과 정병주는 두어 잔째 마시려던 술잔을 놓고 벌떡 일어섰다. 때는 계엄 상황이고 자신들이 바로 계엄사의 가장 중요한 대비병력 지휘관 아닌가.

세 장성의 머리에는 똑같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오랜만의 보안사 측 연락도 이상하다. 더구나 전두환이 초대한 술자리인데 그의 심복들인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은 없지 않은가. 거기에 총장 공관 총격사고라고….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세 사람은 황급히 부대로 향했다.

 

 

<6> 하나회의 반인륜적 하극상 반란

전두환 합수부, 직속상관 계엄사령관을 총격 연행하다

 

 

반란세력의 정승화 계엄사령관 납치 작전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경 육군본부 당직상황실.

국방전화 벨이 울리고 당번병이 수화기를 들었다.

"여기 초, 총장님 공관인데요. 크, 큰일 났어요. 총장님을 사복차림 대령 둘이 와서 끌고 갔습니다."

급보는 즉각 주번총사령인 병참감 이종민 소장(종합 23기)에게 보고됐다. 이 소장은 이를 윤성민 참모차장에게 알리기 위해 전화를 걸었으나 계속 통화중. 이때 윤성민은 납치된 정승화 총장의 부인 신유경 여사로부터 숨 가쁜 전화연락을 받고 있었다. 잠시 후 육본 당직실로부터 윤 차장에게 긴급상황이 보고된다.

"보안사 소속의 사복차림 대령 두 명. 이 중 한 명은 진급이 안 돼 섭섭하다고 했으며 다른 한 명은 녹음할 것이 있으니 어디로 가자고 요구. 둘이 정 총장의 양팔을 끼다가 총격전 발생. 총장부관 이재천 대위와 공관경호대장 김인선 대위 부상. 합수부 헌병들이 공관을 포위. 이 합수부 헌병들을 다시 공관 경비병력인 해병대가 포위. 보안사 대령 둘이서 타고 온 승용차는 일제 슈퍼살롱200 검은색…."

이날 저녁 정승화 총장은 처남 신대진 대령이 준장 진급자로 발표된 날이어서 모처럼 인사차 처가를 방문할 참이었다. 2층 거실에서 아내와 함께 외출준비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아까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불렀을 때 그가 왔다 가면서 보안사 정보처장을 보내 보고할 사항이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정 총장은 아내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응접실로 내려갔다. 육본 범죄수사단장으로 얼굴을 아는 우경윤 대령과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보안사 허 대령입니다."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였다. 그런데 전두환이 낮에 정보처장으로 예고해 놓았기 때문에 정 총장과 공관요원들은 찾아온 사람을 정보처장(당시 권정달 대령)이라고 생각했다. 우경윤이 허삼수와 함께 소파에 앉으며 서두를 뗐다.

"총장님, 이번에는 꼭 진급될 줄 알았는데 안 됐습니다."

이때 차를 가져온 당번병은 이 말에 분위기가 어색하다고 생각돼 두 대령의 수작에 귀를 기울였다.
우 대령은 육사 13기로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대령과 동기이고 같은 헌병병과였는데 진급경쟁에서 밀린 것이다.

"그래 일 년 더 열심히 해봐. 내년에 기회가 되겠지."

정 총장도 당사자로부터 인사 얘기를 듣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돼 간단히 대꾸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보고하겠다는 게 뭐야?"

허삼수가 앞으로 가슴을 내밀었다.

"김재규가 재판에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총장님의 증언이 있어야 재판진행이 되겠습니다."
"증언이라니…."

박정희의 촌지, 육참총장보다 보안사령관에게 훨씬 크게

이때 합수부에 파견 나가 있던 우경윤이 거들었다.

"수사 중에 김재규가 총장님에게 거액의 돈을 주었다고 여러 차례 진술했습니다."
"무어라고, 돈…?."
"정확한 액수는 기억할 수 없으나 수백만 원대라는 겁니다."

당시는 추석이나 연말연시 때면 박정희가 막료들과 근위부대 등에 하사금을 내려주었고, 중앙정보부장도 막대한 정보비 중에서 일부를 떼어 군 간부 등에게 촌지로 나눠주었다. 그러나 중정부장의 촌지는 육군총장보다 보안사령관에게 주는 것이 훨씬 큰 액수였다. 그것을 김재규의 대통령 살해음모와 관련지어 증언하라니…. 정 총장은 크게 불쾌했다.

"이 사람들아, 돈은 무슨 돈을 받아. 몇 번 식사를 같이 한 것밖에 없는데…."
"돈을 받지 않았다면 안 받았다고 확실하게 증언을 해주셔야 합니다."

이야기는 수사관과 혐의자 간의 대화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말하지. 그렇게 쓰면 될 것 아닌가."
"총장님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녹음시설도 필요하고 저희 사무실로 가셔야겠습니다."

그러자 정 총장의 안면근육이 실룩거렸다.

"도대체 자네들 어디서 누구 지시로 왔나? 내가 지금 계엄사령관이야. 너희들이 계엄사령관을 데리고 어디로 가겠다고?"

정 총장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두 대령은 정 총장의 좌우에 달라붙어 각기 겨드랑이를 끼었다. 수사관의 범인 체포 자세 그대로였다. 비상계엄 상황에서 계엄사 휘하의 합수부가 직속상관인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하겠다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국방장관을 거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가능한 일이다.

▲ 12.12 군사반란의 타깃으로 총격 체포된 정승화 당시 육참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1979년 12월 말경 군사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법정에서도 그의 손목에 채워진 철제 수갑이 엄혹한 반란과 권력 투쟁을 말해 준다. 정 총장의 구금은 전두환의 군권장악과 향후 정권 찬탈을 예고했다.


"총장님, 잠깐만 다녀오시면 되는데요."
"경비병!, 경비병 없나?"

정 총장의 고함에 밖에서 네 명의 경비병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유리창 너머에서 권총소리가 들렸다. 그러는 사이 우경윤이 풀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자 허삼수는 권총을 뽑아 정 총장의 머리에 갖다 대고 소리쳤다.

"꼼짝 마라. 움직이면 쏘아버리겠다."

정 총장은 '사격중지'를 외쳤다.

한편,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 대비한 이른바 '후보계획'을 담당한 성환옥 대령(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합수부 파견)과 최석립 중령(수경사 33헌병대대장, 합수부 파견)은 정 총장을 연행해 나오기로 돼 있는 예정시간에서 30분 이상이 지났는데도 허삼수가 나오지 않자 행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합수부 헌병 1개 소대와 함께 공관 안으로 진입했다가 최석립만 허삼수를 호위해 밖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해병대 경비병들에게 포위돼버렸다.

이때 총장공관 평정 임무를 부여받은 수경사의 헌병특공대를 이끌고 신윤희 중령이 공관 앞에 도착했으며, 이윽고 포위된 성환옥 대령과 후보계획조를 구출하기 위해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이 나타났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으로부터 임무를 받은 신 중령은 여기서 김진영을 만나 내막을 처음 알게 된다.

비상시 수경사 실병력 핵심 지휘관들 모두 하나회
30단장 장세동 ‧ 33단장 김진영 경복궁 반란음모 가담


육군본부 지하벙커 상황실.
윤성민 참모차장은 치안본부와 서울시경에 정 총장 납치범과 차량 체포령을 내렸다. 비상계엄이기 때문에 경찰지휘권도 계엄사인 육본이 갖고 있었다. 그는 계엄사령관 납치가 일단 10.26사건에 뒤이은 최대 위기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전군에 비상, 진돗개 하나. 모든 지휘관은 정 위치에서 이상 유무를 보고하라."

한편, 1979년 12월 12일 저녁 전두환의 유인책에 걸려 연희동 비밀요정에 잠시 정신을 앗긴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일행은 김진기 헌병감 부관의 전화를 받고서야 육참총장 공관이 총격을 받은 사태를 알았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즉각 총장공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 속에서는 응대도 제대로 못하고 신음소리만 들려오는 게 아닌가.

"나, 수경사령관이다. 부관 바꿔라."
"… 앰뷸런스, 앰뷸런스… 아아."

앰뷸런스 구조요청을 하던 신음소리마저 이내 끊겼다. 전화선 두절이었다. 어안이 없어 이맛살을 잔뜩 찡그린 장 사령관 앞에 전속부관 천연우 대위가 뛰어들었다.

"사령관님, 부대에서 무전이 왔는데 총장님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아직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돼 누구 소행인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총장님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 상태랍니다."

천 대위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시국이 어수선한 비상계엄 때인지라 요정 사람들을 통해 시중에 루머가 떠도는 것을 경계해야 했다. 김진기 헌병감은 이미 밖으로 나갔고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요정에 오느라 사복 차림인 세 장성은 각기 차로 뛰었다. 김 헌병감은 육본 헌병대로, 정 사령관은 특전사령부로, 장 사령관은 필동의 수경사령부로 각기 숨가쁘게 차를 몰았다.

장 사령관이 차에 오르자 조홍 헌병단장도 말없이 뒤따라 탔다. 장 사령관은 우선 부대상황실을 무전으로 호출하라고 지시하고 사태를 헤아려보았다.

오늘이 준장 진급 발표일이라서 정승화 총장 주변의 진급 탈락자 중 과격한 자가 술김에 난동을 부린 건 아닐까. 이번 인사를 보니 정 총장의 측근 중에서는 처남인 신대진 대령 외에는 진급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신 대령의 경우 비하나회이면서 육사 15기의 대표화랑 출신 선두주자로 누가 보아도 정실이 작용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정 총장을 가까이서 모셨던 사람들은 아무도 혜택을 받은 사람이 없어, 기대를 가졌다면 오히려 불만이 터져 나올 소지도 있었다. 지난 2월 1일 취임한 정 총장은 처음 치르는 장성 진급인사여서 봐줘야 할 측근을 봐주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됐다.

장태완은 혹시 쿠데타일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10.26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아직 군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정국은 불안하고 군내에 파벌 움직임도 있었다. 어떤 세력이 섣불리 육참총장 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장군만 손아귀에 넣거나 제거하면 실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하고 경거망동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문득 옆자리의 조 대령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조 대령은 조금 머뭇거렸다. 그는 혼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일이 무언가 계획대로 순조롭지 않게 돼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글쎄요. 무장간첩 소행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대통령 살해사건 후 어수선해 보이니…."

부대 상황실에서는 상황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다. 정 사령관은 달리는 차 속에서 다급한 마음에 작전지시를 내렸다.

"우선 에이피시(경장갑차) 한 대와 헌병특공대 1개 소대를 총장공관에 보내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긴급사태에 대처하도록 하라. 전 예하부대에 비상을 발령하고 모든 지휘관과 참모들은 상황실에 집합하라."

시계는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태완은 사령부에 도착 즉시 지하의 상황실로 직행했다. 수경사의 주요 실 병력 지휘관은 30경비단장, 33경비단장, 헌병단장, 야포단장, 방공포단장 등이다.

그 중 상황실에 대기해 있는 지휘관은 갑종 출신인 황동환 방공포단장 1명뿐이었고,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과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은 보이지 않았다.

"30단장과 33단장에게 연락했나? 지금 비상계엄이야, 이 친구들 어디 갔나? 그리고 헌병단장 어디 있어?"

"검정색 일제 수퍼살롱200을 잡아라"

사령부까지 차를 함께 타고 온 조홍 헌병단장도 아무 말 없이 어디론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는 참모장 김기택 준장에게 지시했다.

"단장들을 빨리 소집하시오. 서울 외곽 모든 검문소에 검문검색을 강화하도록 하고 수상한 군 병력 이동이나 차량 출입은 일단 제지한 뒤 사령부의 지침에 따르도록 해요."

비상조치를 해놓은 뒤 그는 2층 집무실로 올라가 사복을 벗고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총장공관에 전화를 걸었다. 계속 통신두절 상태다. 육군본부와 국방부에 물어봐도 상황파악이 안 된 채였다.

10여 분이 지나 다시 상황실로 내려가 보았으나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상황실장은 작전참모 보좌관인 김진선 중령(후에 2군사령관)이었다. 육사생도 시절 유명한 럭비선수였다는 그는 충복 괴산 출신으로 하나회와의 관계가 분명치 않아 보였다. 이 날 그는 직속상관인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을 통해 내려오는 사령관의 작전명령과 상황조치를 전달하고 확인하는 실무책임자였다.

장태완은 더 이상 상황실에만 의존할 수 없다고 판단, 총장공관 일대를 장악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기로 했다. 그가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사령부 내의 헌병단 뿐이다. 헌병 1개 소대, 전차 1대, 경장갑차 1대, 2.5톤 트럭 1대, 사이드카 2대, 앰뷸런스 1대로 특수임무조를 편성했다. 지휘관으로 헌병단의 최고책임자를 찾으니 부단장 신윤희 중령이 남아 있었다.

신윤희가 특수임무조를 이끌고 현장에 도착해 보니 총장공관에서 간헐적인 위협사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별달리 손쓸 방도가 없어 병력을 한남동 고가도로 주변에 배치해 놓고 공관 내부 동향을 지켜봤다.

장태완은 신윤희의 보고를 기다렸으나 30여 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정보참모 박웅 대령과 전속부관 천 대위만을 대동하고 직접 현장으로 향했다. 차가 막 장충단 고개를 오르는데 무전기가 울린다.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이 장 사령관을 찾았다.

"여보 장 장군, 지금 어디 있소? 보안사의 권정달 대령과 허삼수 대령이 총장님을 납치해 어디로 가버렸다는 거요. 육본 지휘부도 지금 수경사로 옮겨왔는데 빨리 돌아와서 수습책을 강구합시다."

이날 총장공관에는 보안사 정보처장이 방문하기로 예정돼 있어서 별 의심 없이 권 대령 일행의 면담에 응한 것인데, 총장을 납치한 것이다. 공관 위병소로부터 이들이 타고 온 승용차를 확인한 계엄사는 수경사 및 경찰에 급히 명령을 내렸다.

"일제 슈퍼살롱 200, 검정색 승용차를 모두 검색하라. 범인이 불응하면 사격해도 좋다."

이날 밤 9시경이 돼서야 계엄사인 육본 지휘부와 수경사에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7> 장태완, 반란군에 선전포고

육본 정규지휘부와 전두환 반란군의 대결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육사 7기)은 부관으로부터 육군본부의 '진돗개 하나' 발령을 보고 받고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진돗개는 데프콘과 같은 군 비상경계령이지만 그 내용이 다르다. 데프콘은 대적 경계령으로 주한 미8군 사령관이 겸임하는 한미연합사령관의 통제를 받는다. 이에 비해 진돗개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소요사태나 공비 침투에 대응하는 것으로 한국군의 소관사항이다.

10.26 이후 비상계엄으로 '진돗개 둘' 상태인데 한 단계를 더 올려서 발령하니 서울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이 사령관은 육본에 전화를 대도록 했다.

"전두환의 장난인 것 같아…"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 경기도 소재 3군사령관 공관.

3군사령부는 서울과 근거리에 위치한 야전군으로 청와대 근위부대의 요청이 있으면 병력을 지원하는 특수임무도 띠고 있다. 수도기계화사단, 20사단, 26사단 등 계엄이나 시위진압을 위해 동원되는 '충정부대'들이 대부분 3군 소속이다.

이날 3군사령관 이건영은 공관에서 손재식 경기도지사 등 행정기관장 및 지역유지들과 계엄간담회를 가진 뒤 함께 저녁식사 중이었다.

이건영은 20여 명의 참석자들에게 현 정국의 주도권이 군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기 한달여 전 수경사령관 이취임 축하연이 열렸다. 오른쪽부터 신임 장태완 소장, 정승화 육참총장, 이임 전성각 소장.


"지금 상황은 5.16 때와는 다릅니다. 군부가 나라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잖습니까? 대통령 살해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계엄령이 선포된 것이고 그래서 군이 계엄업무를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행정당국이 일일이 군에 상의하거나 눈치 볼 필요 없이 지금까지 준용해온 법규에 따라 소신껏 일하면 됩니다."

이건영은 행정기관장들에게 지역계엄분소 간판이 붙어 있는 군부대의 눈치를 보지 말라고 격려했다. 그때 부관이 서울의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바꿔주었다.

"참모총장님이 납치됐습니다. 범인은 아직 정확히 모르고 총격전도 있었어요. 우선 병력 장악과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해주십시오."

이건영은 서둘러 만찬을 끝낸 뒤 작전참모 한철수 준장(육사 12기, 대장예편, 후에 브라질 대사), 기획참모 민태구 준장(육사 13기, 후에 충북도지사) 등과 함께 상황실로 갔다. 그는 속으로 학생이나 재야세력이 무슨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계엄사령관을 인질로 삼은 것 아닐까 생각했다.

"4.19 직후처럼 또 '가자 북으로'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판문점으로 향하는 학생들이 나타날지도 모르지."

그는 헌병대장 조명기 대령(육사 13기, 준장 예편)을 불렀다.

"서울에서 휴전선으로 통하는 도로의 검문소에 검색을 강화하도록 지시해야겠어."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육본의 윤 차장과 통화했다.

"정승화 총장을 납치한 사람들은 보안사의 권정달과 우경윤 대령입니다. 지금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아니 뭐라고. 그 친구들 군인 아니오. 무슨 짓들이야. 지금 계엄사령관을 납치하는 놈들을 그냥 놔둘 수 있나요. 병력을 풀어서라도 그 놈들을 다 잡아버려야지."

보안사가 주요 지휘관들의 통화를 도청장치로 녹음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건영은 후에 알았다. 그는 참모들을 모두 소집하는 한편 예하 군단장들을 점검했다. 1군단장 황영시 중장은 오후 3시경 서울에 잠깐 볼일이 있어 갔다 오겠다고 보고했는데 아직 귀대하지 않았다. 1군단사령부와 서울은 근접거리기 때문에 외출ㆍ외박은 허가사항이 아니었다.

또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은 준장 진급 심사위원장을 맡았기 때문에 11일 밤 심사가 끝나는 대로 돌아와 12일에 이 사령관에게 들러 인사 겸 심사내용 등을 보고하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그도 귀대하지 않은 상태였다. 5군단장 최영구 중장(육사 7기), 6군단장 강영식 중장(육사 10기)은 정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주요 참모들이 사령관실에 모여들자 보안부대장 김부연 대령도 평소처럼 동석했다. 그는 상황을 자세히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밤 8시 30분경, 서울의 육군본부 벙커.

육본지휘부를 구성하는 소장급 일반참모들이 속속 벙커로 모여들었다. 하소곤 작전참모부장(갑종 1기), 안종훈 군수참모부장(공병 3기), 황의철 정보참모부장(육사 8기), 천주원 인사참모부장(육사 9기), 신정수 민사군정감(육사 8기) 등이 비상연락을 받고 급히 들어왔다. 이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리가 없었다. 잠시 후 김진기 헌병감이 들어서면서 윤 차장에게 보고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해서 갔다가 오는 길입니다. 자기는 안 나타나기에 정병주, 장태완 장군과 함께 식사를 막 하려다 왔습니다."
"합수부 대령 둘이서 총장님을 납치했소."

그제야 김진기는 사전계략에 의한 유인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윤성민도 사건의 윤곽을 짐작하게 됐다.

"그래, 전두환의 장난인 것 같아."

윤성민은 '보안사의 모반'에 생각이 미치자 이에 대적할 만한 육본지휘부의 옹위세력으로 수경사와 특전사를 떠올렸다.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총장공관 현장에 나가고 자리에 없다. 수경사 상황실에서는 총장공관에 합수부 측이 병력까지 동원했다고 알렸다. 윤성민은 이어 특전사 정병주 사령관을 전화로 연결했다.

"합수부 측에서 총장공관에 병력까지 동원해 들어갔다는데 거기 병력에 이상 없나요?"
"우리 부대에 이동병력 없어요."

정병주는 별로 긴장감을 안 보였다. 윤성민은 다시 물었다.

"지휘관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습니까?"
"1공수여단장 박희도와 3공수여단장 최세창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9공수의 윤흥기 준장은 자리에 있는데…."

윤성민은 점점 불안감이 더 커졌다.

"박, 최는 전두환계 아닌가. 전두환이 총장공관에 병력을 보냈고 총격전까지 벌였다면 다음 표적은 육본이 될 가능성이 크다."

육본을 지켜줄 직할병력은 없다. 10.26 직후 9공수 소속 1개 대대가 육본 옆에 천막을 치고 배속돼 있었는데, 정국이 안정화로 간다고 판단, 원대 복귀시킨 지 10여 일이 지난 뒤다. 육본 지휘부는 당장 신변 위협이 있다는 데에 의견을 함께했다. 돌발적인 테러나 모반군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줄 실 병력은 수경사밖에 없다.

그때 노재현 국방장관이 벙커 종합상황실에 나타났다. 노 장관은 합참본부장 문홍구 중장(육사 9기)에게 지시했다.

"육본 장성들과 함께 실 병력이 있는 수경사로 가서 대처하시오."

반란군 지휘부 명단 드러나…소장급 이하 전원 하나회

12월 12일 밤 9시. 계엄사령관 겸 육참총장 납치라는 돌발사태가 터지자 군 수뇌부는 두 갈래로 나뉘어 대처에 나섰다.

국방장관 노재현과 합참의장 김종환(육사 4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유병현(육사 7특기) 등은 한미연합사가 함께 있는 미8군으로 갔다. 위기 시에는 무엇보다도 북한의 동태를 즉각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군수뇌부 신변이 불순세력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작전지휘를 원활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을 모두 갖춘 곳은 미8군밖에 없었다.

그 이하 합참본부장 문홍구와 육군참모차장 윤성민을 비롯한 육본의 참모부장들은 실 병력이 있고 수도권에서 지원시설이 가장 좋은 근위부대 수경사에 지휘부를 차리기로 했다.

이때만 해도 노재현 등 군 수뇌부는 정승화 총장 납치세력을 응징할 생각이었다. 노재현은 박정희가 갑자기 사라진 권력구조에서 이제 군부통제의 최종적 책임이 국방장관인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요식투표를 거쳐 지난 12월 6일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했지만 그가 군부에 아무런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군부 내 강경파를 정 통제하기 어렵게 되면 이형근, 서종철 예비역 대장 등 군 원로들과 위컴 미8군 사령관의 도움도 받을 생각이었다.

정승화 육참총장의 수석부관 황원탁 대령(육사 18기, 후에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도 수경사로 옮기는 육본 지휘부를 따라 나섰다. 차를 함께 탄 문홍구, 윤성민 두 중장은 손을 마주 잡으며 다짐했다.

"그 전두환이가 무언가 일을 저지를 줄 알았어. 우리가 오늘 힘을 모아 이놈들 버릇을 고쳐놓아야겠어."

이들 일행이 수경사에 도착해 보니 사령관 장태완은 헌병특공조를 신윤희 중령에게 맡겨 총장공관으로 보내놓고 뒤따라 현장으로 나간 뒤였다. 윤성민은 무전을 통해 장 사령관을 급히 불러들였다.

사령부로 돌아온 장태완은 지하상황실로 들어갔다. 그때는 어느 정도 사태의 윤곽이 파악돼 있었다. 참모장 김기택 준장의 상황보고는 놀라운 내용들이었다.

"경복궁 30경비단에 일선부대 고위지휘관들이 모여 있습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거기 함께 있다가 정 총장 연행 재가를 받으러 지금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가서 대통령 각하를 만나고 있답니다."

"그래 30경비단에 들어가 있는 장성들이 누구누구야?"

참모장 김 준장이 메모지를 들여다보았고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 정보참모 박웅 대령, 그리고 상황실장 김진선 중령 등은 장 사령관의 표정 변화만 주시했다.

"1군단장 황영시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 9사단장 노태우 소장, 20사단장 박준병 소장, 71방어사단장 백운택 준장, 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 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

그리고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대령 등도 함께 쿠데타 지휘부에 가담하고 있었다. 정규 육사 11기 이하인 소장급 아래는 조홍만 제외하고 전원이 하나회였다.

장태완은 30경비단장을 전화로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부관이 장세동 대령을 호출해 넘겨준 전화에서는 유학성 중장이 나왔다.

"아니 유 선배님. 지금 남의 부대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어쩌자는 겁니까? 그 부대는 대통령을 모시는 특정지역으로 해가 지면 저도 가지 않습니다. 빨리 총장님을 돌려보내 주시고 그곳에서 나가세요. 이 비상시국에 계엄사령관인 총장님을 납치하면 국가위난을 만드는 꼴 아닙니까?"
"어이 장 장군. 다 사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야. 이리로 와서 얘기하자고. 우리하고 같이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러자 처음에 풀이 죽은 듯했던 장 사령관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 반란군 놈의 새끼."

그는 전화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자 유 중장은 전화를 황영시 중장에게 넘겼다.

"야, 장태완이. 자네 왜 그래. 우리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 아닌가. 흥분하지 말고 이리로 와서 얘기를 들어보라고."

"어떤 일이 벌어져도 헌병감 명령에 따르라
경우에 따라서는 전두환을 잡아야 할지도"


장태완은 자신의 휘하부대가 '모의장소'로 드러났고 평소 부하로서 고분고분하던 장세동 과 김진영이 모의 주모자라는 데 크게 배신감을 느껴 거의 이성을 잃고 있었다.

"네놈들 꼼짝 말고 게 있거라. 내 전차와 포를 갖고 가서 네놈들 대갈통을 날려버릴 테다."

장태완의 불같은 성격을 잘 아는 반란군 장성들은 그의 강경발언에 크게 위협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정승화 총장계로 지목된 세 장성들을 술집으로 유인하는 양동작전까지 폈는데 모의계획이 맞아들어 가지 않고 있었다. 장태완이 반란군 지휘부 측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상황실에 연희동 요정에 함께 갔던 육본헌병감 김진기가 내려왔다.

"제게 헌병 1개 소대병력만 주십시오. 삼청동 총리공관에 가겠습니다."

김진기는 수경사로 이동해 오기 전 육본에서 이미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과 마주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두환이 정 총장을 강제연행한 데 대한 사후재가를 대통령에게 채근하고 있다는 것은 수경사에 와서 분명하게 알게 됐다.

김 헌병감은 육본에서 삼청동 총리공관 경비를 위해 파견한 구정길 헌병 중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 중령, 거기 이상 없나?"
"비상이 걸려서 경계근무를 강화시키고 있는데 아까부터 전두환 장군이 들어가 대통령과 얘기 중입니다. 무슨 중요한 결재를 받으러 왔다고 그러는데요."
"뭐, 전 장군이 거기 가 있단 말이지?"

그때는 정 총장을 납치한 범인이 전 장군 휘하의 합수부 대령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였다. 김진기는 퍼뜩 전두환의 '모반'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구 중령, 내 말 잘 들어야 한다. 오늘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내 명령에 따를 수 있겠나?"
"새삼스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헌병감님 명령을 안 따르고 누구 말을 따르겠습니까?"

김진기는 구정길의 심지를 거듭 확인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 장군을 잡아야 할지도 모르네."
"예에…. 아무튼 저는 헌병감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8> 보안사 지령에 군 지휘계통 마비

하나회 멤버들이 행동대장 맡은 전두환 반란군

 

하나회 반란군 대통령 숙소를 장악하다

육본 헌병감 김진기가 삼청동 총리공관에 출동하겠다며 수경사령관 장태완에게 병력을 요청한 직후의 경복궁 30경비단.


청와대 경호실 작전담당관 고명승 대령(후에 보안사령관, 대장 예편)이 종합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쿠데타 지휘부가 차려진 30경비단장실에 들어섰다. 육사 15기의 하나회 핵심 인물 중 하나. 그는 장태완의 전임 전성각 수경사령관 아래서 33경비단장을 마쳤다. 지금은 경호실로 옮겨 근위부대 사정에 가장 밝았다. 그를 보자 수도군단장 차규헌 등 몇몇 장성이 숨 가쁘게 지시를 내렸다.

"고 대령, 그러잖아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어정거릴 때가 아니다. 전 장군이 가 있는 삼청동 공관을 철저히 지켜야겠어."

그때까지만 해도 최규하 대통령은 청와대에 정식 입주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경호실 근위부대가 아닌 계엄사의 육본 헌병대가 총리공관 경비를 맡고 있었다. 30경비단장실의 쿠데타 지휘부는 장태완의 위협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더욱이 수경사 파견 보안부대원으로부터 헌병감 김진기가 병력을 요청한 사실을 보고받아 자칫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고명승은 경호실로 급히 돌아가 경호실장 대리 정동호 준장과 청와대 내부를 지키는 55대대장 임재길 중령(육사 22기, 청와대 총무수석비서관)과 상의했다. 정동호는 육사13기 하나회 멤버. 이들은 근위부대 중에서도 핵심부대인 55대대병력 1개 소대를 차출, M60 기관총이 탑재된 지프 4대에 태워 총리공관에 급파했다.

이때부터 육본 정규지휘부 소속 병력과 반란군 지후부의 병력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정동호, 고명승 등 하나회 멤버들의 직접 지휘 아래 최 대통령의 숙소는 반란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됐다.

밤 9시 30분 수경사.
장태완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한 병력 동원에 나섰다. 그는 먼저 국방장관실에 연락했다. 노재현 장관은 미8군으로 들어간 뒤여서 자리에 없고 김용휴 차관이 연결됐다.

"차관님, 속히 장관님을 찾아야겠습니다. 제가 배속받아 쓸 수 있는 4개 사단 가운데 우선 26사단 및 수도기계화사단과 서울근교의 9공수여단을 출동시키도록 해주십시오. 3개 공수여단장은 이미 반란군에 가담했습니다."

정규 지휘부는 이렇게 진압군 동원을 위해 규정된 절차를 밟고 있었다. 절차가 필요 없는 반란군 쪽과 비교해 보면 기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장태완의 활기찬 목소리에 국방차관 김용휴는 고무되는 듯했다.
"알았어. 그놈들 당장에 해치워야지."

그는 파이팅까지 외치면서 장태완을 격려했다. 장태완은 이어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의 지휘관을 거느린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전화했다. 이건영도 분개하고 있던 중이었다.

"전두환이가 작당해서 일을 저질렀는가본데, 장 장군이 잘 해줘야겠어. 내가 이곳 부대들은 모두 준비시켜 놓았으니 그놈들을 소탕합시다."

이건영은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을 때 강영식 6군단장(육사 10기)을 통해 그 예하인 배정도 26사단장(종합 6기)에게 비상대기를 지시해 두었다. 그리고 최영구 5군단장과 그 예하 손길남 수도기계화사단장(종합 29기)에게도 연락했다. 서울에 소요사태 등이 발생할 때 투입하기 위해 훈련된 3군 예하 충정부대들 중 20사단의 박준병 사단장(후에 민자당 사무총장)은 이미 쿠데타군 지휘부에 가 있었다. 박준병은 육사12기의 하나회 핵심 중 한명이며, 박희도(12.12반란군에 가담한 1공수여단장, 후에 육참총장) 박세직(후에 수경사령관, 안기부장)과 함께 쓰리 박으로 불리기도 했다.

 

▲ 오른쪽부터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정부군의 진압작전을 지휘한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 박 대령의 작전지시를 하달할 실무책임자였던 상황실장 김진선 중령. 반란군 수뇌였던 노태우 소장(가운데)이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반란군에 대한 정부군의 진압작전을 수행한 수경사 참모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서울 시가전에서 야포를 쏠 수도 없고 …"

수경사와 통화를 끝낸 3군사령관 이건영은 군 수뇌부와 사태수습을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방부에 전화했으나 노재현이 없어 미8군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 그를 찾았다.
"장관님, 빨리 수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대에 출동준비는 해놓았습니다."

이때 노재현은 위컴 미8군사령관으로부터 자신의 작전통제를 받고 있는 전방부대의 군단장, 사단장들이 무단이탈한 데 크게 분개하는 소리를 들었다. 위컴은 10.26 이후 북한이 어떤 생각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전방부대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거듭 우려했다.

노재현은 이건영에게 신중한 대처를 당부했다.
"무엇보다도 전방경계가 중요하니 병력은 아직 움직이지 말아야겠소. 서울 상황을 좀 더 본 뒤 방침을 정합시다."

이건영은 군단장들에게 병력 장악을 재차 지시했다.
"출동준비는 하되 내 '육성명령'을 듣기 전에 병력을 움직여서는 안 돼요."

그는 이어 최전방을 지키는 1군사령관 김학원 중장(육사 5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전군 중 야전군이라는 1군사령부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건영으로부터 얘기를 들은 김 사령관은 매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로서는 서울의 그놈들 짓거리에 할 말이 없소. 병력을 내서 잡으러 갈 수도 없고…. 그러나 이 장군, 우리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큰일이오."

야전군은 서울과 거리도 멀고 정치문제에 관심을 쓸 겨를이 없지만 정국불안 소식에는 가장 민감했다. 이건영은 대구의 2군사령관 진종채 중장에게도 전화했다.
"보안사에서 정 총장을 강제로 잡아갔어요. 총격전까지 벌였다는데, 소식을 알고 있소?"
진 사령관의 반응은 크게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보안사 애들이… 그 안가 관계 때문인가."

혼잣말처럼 10.26 당일 저녁 정승화가 궁정동 안가에 있었던 일을 꺼내는 진종채의 반응에서 이건영은 그가 사건의 상당부분을 알고 있음을 느꼈다. 진종채는 윤필용 수경사령관 사건 이후 그 뒤를 이어 수경사령관을 지내고 보안사령관까지 거친 군부 실력자로 정국 풍향에 밝았다. 진종채도 군 내부에 충돌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의견이었다.

밤 10시 30분 수경사령부.

장태완은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에게 작전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박동원은 하나회가 극성을 부렸던 14기에서 비하나회로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그는 군내 사조직을 만들면 안된다면서 하나회를 비판해 장성 진급에서 탈락한 야전통이었다.

"수도권 외곽의 모든 검문소에 출입 통제령을 내린다. 그리고 전차대대 소속 병력과 장비를 모두 사령부로 집결시켜라. 야포단의 모든 포는 경복궁 30경비단을 목표로 잡도록 작전참모 지시를 하달하라."

박동원은 상황실장 김진선 중령과 검문소반, 방공반, 경비반 등의 4개 반장(소령 급)들을 불러 사령관의 명령을 하달했다. 검문소를 비롯한 수도권의 경계상황은 이들이 점검하게 돼 있다.

박동원은 이어 김포 부근의 야포단장 구명회 대령(포간 57기)에게 전화로 작전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구 대령은 밀집지역인 서울시가전에서 포를 사용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우리가 월남에서도 베트콩 한 명을 잡기 위해 민가에 포를 겨누지는 못하지 않았습니까?"

박동원도 구명회의 이 반론에 할 말을 잃었다. 상황은 심각하지만 수도 한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일 수도 없고….

"포단으로서는 야간에 상황이 벌어지면 필수적인 조명탄이나 준비하겠습니다. 이 조명탄도 탄피가 인가에 떨어질 경우 피해가 적지 않을 겁니다."

박희도, 1공수여단 이끌고 한강을 건너다

수경사 야포단장 구명회 대령은 장태완 사령관이 연희동 요정에서 사령부로 돌아가는 차속에서 내린 지휘관 집결명령을 저녁 8시가 좀 지나 전달받는다. 그는 부단장 이승남 중령(육사 18기)을 부대에 남게 하고 지프에 올랐다. 그의 차가 김포가도 인공폭포 앞에 이르자 무전연락이 다시 왔다.

"단장은 부대에 돌아가 전 병력과 포를 장악하고 출동 준비할 것. 단장 대신 부단장이 우선 사령부로 들어오라."

구명회는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차를 돌려 부대로 돌아가 부단장을 대신 보냈다.
"출동대기라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소. 빨리 사령부로 가서 상황을 파악해 알려주시오."

9시 30분경 구명회는 사령부에 간 부단장 이승남으로부터 종합보고를 받았다.

"단장들이 자리를 이탈한 부대는 부단장이, 부단장도 없으면 작전주임이 지휘권을 행사하라는 사령관의 명령입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판단을 잘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구명회는 10.26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넉 달 전인 지난 7월 1일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의 특명으로 야포단이 창설될 때 귀가 아프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근위부대의 기본자세는 무장공비가 던진 수류탄이 터지려 하면 그 위에 몸을 덮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반란군'을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경사 예하부대 중 병력 수는 야포단이 1500여 명으로 가장 많았다.

105mm 1개 포대만 효창동에 나가 있고 공항동의 단본부에 1000명 이상의 병력과 155mm, 105mm 야포 그리고 수송차량 등이 갖추어진 위력 있는 전투부대였다. 구명회는 작전과장 서종표 소령(육사 25기. 후에 3군사령관, 민주당 국회의원)을 불렀다.
"본부 행정병과 경비병만 남기고 모든 병력과 포를 출동할 수 있게 예령을 걸어두게."

서 소령은 눈을 크게 떴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서 소령, 상황은 알고 있겠지? 사령부에서 출동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사령부에 가 있는 부단장이 다시 상황보고를 해오겠지만 저쪽이 손들고 나오지 않는 한 무력 진압한다는 것이 사령관님 방침이다."

바로 몇 분 전 서종표는 경복궁 측의 전화를 받았다. 장태완이 이성을 잃었으니 사령부에서 병력 동원 지시가 떨어져도 움직이지 말고 수습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얘기였다. 그 날 따라 혼자 파견 나와 있는 보안부대 장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안사는 전화도청으로 야포단의 출동준비를 파악한 듯했다. 그러나 하나회가 아닌 서종표는 수경사와 구 단장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사령부에 가 있는 이승남 부단장은 수시로 상황변화를 구명회에게 알려왔다. 장태완은 김기택 참모장과 박동원 작전참모를 통해 계속 가용병력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밤 10시 30분경, 사령부에서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이 출동명령을 하달해왔다. 박동원은 육사 출신이고 구명회는 포병간부후보생 출신이지만 두 사람은 소령 때인 1970년 육군대학 정규과정에서 연수를 함께 받아 잘 아는 사이다.

"여보 구 대령, 신속히 움직여야겠어요. 저쪽에 30경비단과 청와대 경호실 병력이 있기 때문에 주모자들을 빨리 체포해야겠소."

구명회는 작전과장 서종표와 정보과장 박성빈 소령(3사 3기)을 불렀다.
"작전과장은 병력과 야포를 연병장에 이동대형으로 집결시키고 정보과장은 선발척후대와 함께 사령부로 이동할 도로를 골라 부대를 선도하라. 박 소령, 제2한강교 쪽으로 가라."

잠시 후 선발대로 나간 박 소령이 무전보고를 해왔다.
"단장님, 제2한강교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다리 양쪽 검문소에서 통행을 차단해 다리에 꽉 찬 차량들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럼 제1한강교로 가서 다시 보고해."

제1한강교도 마찬가지였다. 수경사에서 내린 검문소 통금령으로 한강다리가 모두 막혀 있었다. 택시, 버스 등 차량들을 다리 양쪽에서 가두어 놓고 통행차단 장애물로 삼아 시민들이 아우성이었다.

구명회는 사령부에 이 같은 사실을 보고했다.

"행주대교로 돌아서 오라. 행주대교는 우리 관할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통금령을 실시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군과 반란군 간의 내전상태 돌입

행주대교는 수도경비사가 아니라 수도군단 예하 30사단의 관할 아래 있었다. 구명회는 무전으로 정보과장 박성빈을 호출해 행주대교로 보냈다. 그러나 행주대교에 간 박성빈으로부터 날아온 무선보고는 더욱 놀라운 내용이었다.

"행주대교를 지금 1공수여단 병력이 건너고 있습니다. 박희도 장군이 직접 선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구명회는 일이 크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경복궁에 들어가 있다던 박희도 준장이 병력을 인솔해간다면 이미 전투개시가 아닌가?"

그렇다면 상황은 하극상 세력에 대한 체포가 아니다. 이젠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밤 11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구명회는 사령부에 박성빈이 알려온 긴급상황을 보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지금 박희도 준장이 1공수여단 병력을 인솔해 행주대교를 건너고 있습니다. 다리를 1공수가 장악하고 있어 우리는 병력 수송이 불가능합니다."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은 이 사실을 장태완에게 즉각 보고했다. 장태완은 낭패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작전명령을 내렸다.
"야포단은 현 부대위치에서 모든 포를 경복궁에 조준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려라."

그러나 야포는 적군과 아군이 완전 격리돼 있지 않은 시가전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경복궁을 목표로 표적사격을 하려면 그 전 단계에서 관측사격을 한 뒤 관측사격 지점을 표적에 끌어다 맞추어야 한다. 이 관측사격으로 광화문 일대의 효자동, 삼청동, 부암동 지역이 먼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바로 옆에 청와대와 총리공관도 있지 않은가.

구명회는 조명탄이나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명탄도 부스터(추진장치)가 쏟아져 내리면서 행인 살상은 물론이고 웬만한 가옥의 지붕을 뚫는다. 그는 조명탄을 내놓기만 하고 장착 명령은 내리지 않기로 했다.

 

 

<9> 장태완을 사살하라

"12.12는 5.16쿠데타보다 훨씬 치밀했다"

 

믿었던 탱크부대도 반란군이 장악

수경사의 박동원 작전참모는 야포단과 동시에 전차대대에도 출동명령을 하달했다. 그는 사령부 내에 있던 전차대대장 차기준 중령(육사 21기, 후에 합참통합군 기획단 부단장)을 불렀다.

"차 중령, 당장 쓸 수 있는 전차와 기갑병을 모두 사령부에 집결시키게."

상대편에게 위압감을 주어 세를 잡는 데는 전차가 제일이다.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전투 병력을 투입하면 진압작전은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다. 박동원과 차기준은 전차 현황을 파악해보았다. 사령부내 대대본부에 4대가 있다. 그리고 30여 대의 전차가 경복궁 30경비단에 1개 중대, 33경비단 배속으로 독립문 부근에 1개 중대가 나가 있다. 이 중 30경비단에 배속된 것은 이미 반란군에게 넘어가버렸다. 차기준은 33단 배속 전차중대에 필동사령부로 집결할 것을 지시했다.

밤 10시 30분경, 독립문 부근을 나서 서대문을 거쳐 시청 앞으로 향하는 전차들의 육중한 캐터필러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경복궁의 반란군 지휘부는 이 전차 구르는 소리에 아연실색했다.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결재를 받으러 세 번째 가 있으나 하회가 없다. 30경비단 본부를 지키는 9사단장 노태우는 등골이 오싹했다.
"장태완이가 정말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오는구나. 최 대통령은 아직도 정승화 총장 연행을 결재하지 않고 있으니 우리는 모두 불법 하극상 세력으로 체포되고 마는가."

이때 장세동, 김진영 두 대령이 보안사 본부와 수경사 보안대원들에게 전차 소리의 진원지를 물었다.
"그러잖아도 33경비단장에게 비상조치를 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수경사에서 지금 33경비단 배속 전차중대를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빨리 원대 복귀시켜야 합니다."

김진영은 황급히 지프를 몰아 광화문을 통과해서 서대문으로 나아갔다. 김진영은 전차중대장에게 장태완이 비정상 상태여서 잘못하다간 수경사 부대끼리 전투가 벌어질 판이라며 그 지시에 따라서는 안된다고 강력히 제지했다.
전차중대장은 배속부대장인 33경비단장 김진영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 수경사 예하 최적의 진압장비인 전차들은 모두 회군하고 말았다. 반란군의 손에 들어간 셈이다.

이날 진압작전을 위해 수경사가 직접 동원할 수 있는 부대는 야포단과 전차대대, 그리고 33경비단 일부가 전부였다. 30경비단은 쿠데타군의 본부가 돼버렸고, 방공포단은 황동환 단장이 사령부에 대기하고 있지만, 서울의 하늘을 지키는 경계임무에서 빼낼 수가 없다.

▲1979년 11월20일 신임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가운데)이 청와대 외곽진지에서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왼쪽 끝)으로부터 경계상황을 브리핑받고 있다. 불과 20여일 후 두 사람은 '사살'명령까지 주고 받는 적으로 돌변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하나회 공수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는 처음부터 반란군

수경사가 배속 받을 수 있는 충정부대 중에서는 정병주 특전사령관 휘하의 1, 3, 5, 9공수여단과 이건영 3군사령관 휘하의 수도기계화사단 및 26사단 등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는 모두 하나회로 처음부터 반란군 쪽이었다.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합참본부장 문홍구와 육참차장 윤성민과 상의한 뒤 9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갑종 35기)에게 출동지시를 내렸다. 윤 준장은 참모장 신수호 대령(갑종 간부)에게 후발대로 뒤따라오도록 지시하고 자신이 선발대 및 본진을 이끌고 나아갔다. 그러나 본진이 막 부천 톨게이트에 이르렀을 때 아직 본부에 남아 있던 참모장 신 대령으로부터 무전이 날아왔다.

"단장님, 사령부에서 출동지시가 무효라는 전문이 왔습니다. 그리고 보안부대에서도 병력을 복귀시켜야 한다고 야단인데요."

특전사령부에서는 보안사 정도영 보안처장(육사14기, 후에 사회정화위원장, 성업공사 사장)의 전화지시를 받은 보안반장 김정룡 대령(육사16기, 후에 보안사 참모장, 수자원공사 감사)이 작전처장 신우식 대령과 함께 9공수여단 회군공작을 벌였다. 정도영과 김정룡은 하나회로 손발이 잘 맞았으며 회군공작의 수훈을 세웠다. 이들은 정병주 사령관 몰래 '출동지시는 무효'라는 전통문을 띄웠다. 정규지휘관 보다도 보안사가 군을 더 잘 장악하고 이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장태완은 9공수여단의 출발보고만 받았을 뿐 회군 사실을 늦게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야포단 선발대로부터 박희도의 1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넘었다는 보고에 사령부내 모든 지휘관과 참모를 기밀실로 모이도록 참모장 김기택 준장에게 지시했다. 그는 이어 작전참모 박동원을 불렀다.
"우리 헬기로 지금 수도기계화사단이나 26사단까지 갈 수 없겠나?"
그는 직접 사단장들을 만나 병력출동을 담판 지을 생각이었다.

"우선 지휘계통에서 명령을 내려주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일 아닙니까?"
박동원은 장태완을 이건영 3군사령관과 통화하도록 연결시켰다.
"장 장군, 나도 장관께 두 차례나 건의했소. 위에서 승인을 해줘야 하는데…. 더구나 전방 병력을 움직이는 문제가 아니오."

이건영은 초기보다 목소리가 위축돼 있었다. 수경사에 들어와 있는 육본 지휘부는 공수여단 등 예비 병력이나 움직일 수 있을 뿐, 전방 사단 병력 이동은 국방장관과 한미연합사 측의 결심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노재현 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 등 수뇌부는 이때 반란군 지휘부를 포함해 모든 사령부에 '병력이동금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장태완은 분통을 터뜨리며 기밀실에 모인 장교들 앞에 섰다.

"조금 전까지 우리와 정을 나누던 사령부 전 장교는 450여 명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60명 이외의 장교들은 30경비단에서 국가반란을 모의하는 무리들과 작당해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사령관으로서 명령을 하달하니 소임을 다해주기 바란다. 제30경비단장 장세동, 33경비단장 김진영, 헌병단장 조홍은 누구든지 발견 즉시 체포하되 반항하면 사살하라…."

그의 명령은 전투개시 그것이었다. 기밀실은 살얼음을 딛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령관의 노성은 더 이어졌다.
"이 외에도 30경비단에 들어가 역모하는 자들의 명단을 공개하니 체포하거나 사살하라. 그리고 청와대 뒷산 팔각정 주변에 배치된 33경비단의 경비병력은 부단장이 가서 은밀히 사령부로 철수시키라."

"장세동 김진영 조홍을 체포하되 반항하면 사살하라"

수경사 기밀실에서 쿠데타 주모자에 대한 체포 사살명령을 하달 받은 33경비단 작전주임 김달연 소령(육사 28기, 중령 예편, 서울 풍납동 창일침례교회 목사)은 이를 즉각 33경비단 중대장들에게 전달했다.

김 소령은 처음 사건의 전모를 들었을 때 눈앞이 아찔했다. 직속상관인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이 반란군에 가담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군인관에 혼란이 일어남을 느꼈다. 평소 후배장교들에게 존경받았고 자신 또한 믿고 따랐던 '멘토'를 이제 적으로 돌려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그는 군인이란 언제나 정규 지휘계통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진영은 이제 우리 단장이 아니다. 보는 대로 체포하든지 무기를 갖고 반항하면 사살해도 좋다."

이날 아침까지도 가장 가까운 선배이자 상관을 반란군으로 단죄하고, 그는 콧등이 시큰해졌다. 이어 그는 청와대 외곽의 경비진지에 배치돼 있는 3개 중대를 사령부로 철수하도록 지시했다. 33경비단 병력이 경비진지에서 사령부로 오려면 자하문~효자동~광화문을 거쳐야 한다. 김달연은 경복궁의 30경비단이 이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중대장들에게 방향을 바꾸도록 지시했다. 30경비단도 이제 '적군'이 돼 있는 것이다.
"자하문으로 오지 말고 정릉 쪽으로 우회해서 오라."

실제로 30경비단은 33경비단 병력이 사령부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자하문 부근에 저지조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이날 첫 전투가 벌어질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33경비단 병력이 필동 사령부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 30분경. 이때는 경복궁을 향한 수경사의 공격대형이 이미 무너진 뒤였다. 이에 앞서 장태완은 0시 30분 경 사령부가 보유한 병력, 전차, 화포를 정문 앞 퇴계로에 집결시켜 공격개시선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행정병까지 포함한 병력 100여 명과 전차 4대, 그리고 토우 미사일 10여 기 등이 정렬했다. 작전참모 박동원은 토우 미사일 중대장에게 당부했다.
"미사일은 절대 개함하지 말라. 여기서 써먹을 용도가 없다."

토우 미사일은 꽁무니에 명주실 같은 유도선이 달려 있는데 이것이 전깃줄이나 나뭇가지 등에 걸려 끊어지면 포탄이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날아간다. 시가전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을 경호실장 차지철이 억지로 창설해놓은 부대였다.
이때 수경사 사령관실에 차려진 육본 지휘부의 윤성민 참모차장은 수경사 병력의 공격을 개시하기 전 최종방침을 정하기 위해 육본 참모회의를 열었다.

윤성민(참모차장) : 방금 1, 3군사령관과 통화했습니다. 3군 예하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그리고 1군의 11사단 등 전방사단 병력은 장관 지시 없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겁니다. 병력 동원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모아봅시다.
천주원(인사참모부장) : 오늘밤 상황전개를 보니 저쪽에서 5.16쿠데타보다 훨씬 장기간 그리고 치밀하게 준비해온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꼴이고….
황의철(정보참모부장) : 현재 우리에게 별 수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어디서 병력을 동원하기도 어려운 것 아닙니까?
하소곤(작전참모부장) : 병력을 동원할 수만 있으면 동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하 부대들에 명령이 먹혀들지 않고 있어요. 명령해도 저쪽의 방해공작으로 병력이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안종훈(군수참모부장) : 이번 쿠데타가 아무리 세밀하게 오래 전부터 계획돼 진압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군대요, 군인의 사명에 따라야 하는 우리 장성들이 우리만 살겠다고 반란군에 손을 들 수는 없는 일 아니오. 우리 군인은 군인으로서 생사를 초월해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병력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합시다.
신정수(민사군정감) : 반란을 막아야 한다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한 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아군끼리 충돌해서야 되겠습니까?

육본 지휘부는 당초 수경사의 병력으로 군사반란을 진압하려고 왔으나 수경사 직할부대들이 하나씩 등을 돌리자 크게 낙담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충정부대의 출동은 기대하기 어렵게 돼 가는데 쿠데타 지휘부의 공수여단 병력이 행동을 개시했으니 이미 전세가 기울어가는 듯했다.

장태완은 9공수여단이 회군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9공수여단 병력만 도착하면 전차 4대를 앞세워 경복궁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공격개시선에 집결된 부대를 점검해 나가는 그에게 비서실장 김수택 중령이 달려와 귀에 대고 다급하게 보고했다.
"사령관님, 제가 저 앞 전차 소대 쪽에 갔더니 '장태완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빨리 이곳을 떠나 사령부 안으로 피신하셔야겠습니다."

그는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이 갔다.
"뭐라고? 이런 배신자 놈들…."
사령관으로 취임한지 불과 36일. 그는 직감적으로 수경사가 자신의 부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급상황에서 지휘관에게 언제 배신할 지 알 수 없는 부하처럼 무서운 적은 없다. 그는 비서실장과 함께 황급히 집무실로 들어갔다. 상황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작전참모 박동원은 상황실장 김진선 중령에게 '반란군 가담자들에 대한 체포 및 발포명령'을 각 예하 부대와 검문소에 하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김진선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참모님, 지금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군내부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서도 곤란할 것 같고…. 잘 판단해서 대처하셔야 합니다."

박동원은 이 말이 부하로서 상관을 생각해주는 충언이라기보다 사령부의 반란군 진압에 대한 제동이라고 느꼈다. 그는 순간 이날 밤 상황실을 통해 하달됐어야 할 각종 상황조치와 작전지시가 제대로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심이 갔다.
한편, 수경사가 충정부대들을 동원해 진압작전을 서두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보안사는 우선 이건영 3군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에 대한 내부 체포공작과 함께 본격적인 반란군 병력 동원에 나섰다.

 

 

<10> 특전사의 패륜

전두환 노태우 반란군, 옛 상관 정병주를 총격 체포

 

박희도 1공수여단, 국방부를 총격살상 점령

1979년 12월12일 밤 11시경, 경기도 중부의 3군사령부 사령관실. 소파에 앉은 이건영 사령관 옆으로 직할 헌병대장 조명기 대령(육사13기, 후에 육본 헌병감)이 다가갔다.

"잠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조명기는 대구 출신으로 하나회 멤버. 윤필용 수경사령관 아래서 수경사 헌병대대장도 지내 서울 소식에 밝은 편이다. 이건영은 서울의 상황이 또 급전되고 있나 해서 그를 바라보며 긴장했다.

"사실은… 보안사에서 사령관님을 연행해오라는 연락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안부대장 김부연 대령(갑종)과 저는 적전에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합의했습니다."

이건영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불안했다. 그는 사령부와 공관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무장헌병 1개 소대를 증원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부하에게 직속상관을 체포하라는 반란군의 하극상 지령은 서울 특전사령부 옆에 위치한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육사 13기, 후에 합참의장과 국방장관)에게도 직접 떨어졌다. 그러나 처음 최세창은 정병주 특전사령관과의 관계로 보아 선뜻 '패륜행위'를 하기가 어려웠다.

자신뿐 아니라 특전사에서 대대장이나 여단장을 하면서 1급경력 장교로 성장해온 전두환, 노태우, 박희도, 장기오 등 특전사 출신치고 정병주를 상관으로 모시지 않은 이가 없었다. 보안사에서는 정병주를 빨리 체포하고 특전사령부를 장악하라고 독촉했다.

"여단장님, 지금 박희도 장군의 1공수여단은 국방부를 점령했고 노태우 장군의 지시로 9사단 29연대 병력이 중앙청에 진주했습니다. 빨리 특전사 일을 끝내고 3공수 병력을 장충단에 대기시키라는 전두환 사령관님의 지시입니다."

이에 앞서 1공수여단장 박희도가 병력동원을 위해 부대에 도착해 보니 부대에는 육본 지휘부와 사령부의 병력출동 금지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부사령관 이순길 준장(육사 8기)이 와 있었다. 박희도는 부사령관 이순길의 제지를 거부했다.
"나는 전 보안사령관님의 명령에 따르기로 결심했어요."

박희도가 1공수여단 병력을 이끌고 국방부 앞 삼각지 로터리에 도착한 것은 13일 새벽 1시경. 1공수 병력이 도착하기 전 국방부 보안부대장 김병두 대령(갑종 35기)은 국방부 당직총사령인 의무국장 박상빈 소장(군의 16기)과 육본 본부사령 황관영 준장(육사 12기) 준장, 헌병대장 이종민 중령(육사 18기) 등에게 사전공작을 해놓았다.
"새 계엄군이 들어오니 경비병들이 오인사격하지 않게 하라."

그런데 이 사전공작은 국방부와 육본의 당직계통을 통해 전파되느라 국방부 건물옥상에 있는 수경사의 방공포단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1공수여단 병력이 국방부 정문에 접근하자 방공포단의 벌컨포가 불을 뿜었다. 그러나 벌컨포는 대공포여서 공수단의 근접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지 못했다. 공수여단도 건물 옥상을 향해 M16으로 응사했다. 이 교전으로 벌컨포 초소의 정선엽 병장이 목숨을 잃었다.

▲ 1974년 12월 특전사 1공수여단장인 전두환 준장(왼쪽 끝)과 9공수여단장 노태우 준장(왼쪽 세 번째)이 직속 상관인 정병주 사령관의 부대장 접견에 배석해 있다. 훗날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9사단장 노태우가 수괴로 지휘한 12.12 군사반란은 옛 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총격 체포한 비인간적 패륜행위였다.


9사단장 노태우, 구창회-이필섭에 "중앙청을 점령하라"

공수여단 병력은 국방부 건물 2층의 장관실로 올라가 출입문에 M16소총을 쏘아대면서 문을 걷어차고 뛰어들었다.
"쏘지 말라, 이놈들아. 어디다 대고 총질이냐?"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유병현 대장(육사 7특기, 후에 주미대사)이 군통수권 2인자인 국방장관실을 짓밟는 베레모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담력이 있는 장군이었다. 장관실에는 김용휴 차관과 합참의장 김종환 대장, 군수차관보 이범준 중장, 합참정보국장 김용금 중장 등 고위 장성 10여 명이 함께 있었으나 정작 노재현 장관은 보이지 않았다. 공수여단은 국방부를 샅샅이 뒤져 지하계단에 피신해 있던 노재현을 찾아냈다.

1공수여단이 국방부와 육본을 다 평정해갈 무렵 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육사12기, 후에 총무처장관)이 5공수여단을 이끌고 도착했다. 장기오도 하나회 멤버다.
보안사는 5공수를 효창운동장에 대기하도록 했다. 이날 밤 반란군 측은 시가전의 필수전력인 탱크부대로 이상규 준장(육사 12기)의 제2기갑여단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일반 보병병력으로 9사단 29연대와 30사단 90연대를 동원했다.

자정 무렵, 노태우 소장은 자신의 휘하인 9사단 참모장 구창회 대령(육사 18기, 후에 3군사령관) 에게 전화로 병력 이동을 지시했다. 구창회도 하나회 핵심멤버.
"1개 연대를 서울로 출동시켜 중앙청을 점령하라."

구창회는 29연대장 이필섭 대령(육사 16기, 후에 합참의장) 대령에게 노 사단장의 지시를 전달했다. 이필섭 역시 하나회다. 사단 작전참모는 불과 며칠 전 안병호 중령(육사 20기, 후에 수방사령관)에서 표순배 중령(육사 21기, 후에 군단장)으로 바뀌었다. 표순배는 하나회 멤버. 안병호는 12월 5일자로 대령 진급 예정자로 발표돼 다음 보직을 받기 위해 대기상태였다. 그러나 참모장 구창회는 표순배를 남겨 상황실을 지키도록 하고 안병호에게 지시했다.
"사단장님께서 승용차로 서울에 나가셨으니 안 중령이 야전 지프를 갖다드려야겠다."

안병호는 사단장 전속부관 김정진 중위(3사)와 함께 사단장 노태우의 지휘용 지프를 타고 병력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9사단 병력은 일산, 구파발, 박석고개를 거쳐 13일 새벽 1시 30분경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중앙청과 광화문 일대를 점령했다.
서울 근교의 30사단과 90연대장 송응섭 대령(육사 16기, 후에 합참1차장, 대장 예편)도 쿠데타 지휘부로부터 출병 지령을 받았다. 송응섭은 사단장 박희모 소장(갑종 9기)의 방으로 갔다.
"사단장님, 출동하겠습니다."

박 사단장은 초반부터 장태완 수경사령관으로부터 충정부대로서 쿠데타 진압에 협력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에게서도 부대 장악을 잘하고 있으라는 전화가 왔다. 그러나 그는 송응섭의 쿠데타 가담을 제지하지 않았다.

9사단 병력과 제2기갑여단의 탱크는 중앙청, 광화문 등 서울도심지역 관가를 평정하는 데 투입됐고, 30사단 병력은 10.26 이후 박준병 소장의 20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태릉과 고려대학교에 함께 배치됐다. 태릉은 육본 지휘부가 쿠데타 진압군으로 수도기계화사단과 26사단을 서울로 출동시킬 경우 그것을 막아야 할 길목이었다.

패륜의 현장 특전사…직속부하가 사령관실에 M16 난사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 즉사, 정병주는 서빙고분실로 압송


반란군의 작전상황은 밤 11시경 경복궁에서 보안사령부로 옮겨간 주모 장성들과 전두환의 보안사 막료들인 하나회그룹에 의해 치밀하게 짜여졌다.


당시 보안사 지휘부는 참모장 우국일 준장(통역 4기), 보안처장 정도영 대령(육사 14기, 후에 성업공사 사장),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육사 15기, 후에 민정당 사무총장),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육사 17기, 후에 민자당 의원),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육사 17기, 후에 민자당 의원), 대공처 수사과장 이학봉 중령(육사 18기, 후에 민자당 의원), 감찰실장 이상연 대령(통역, 후에 안기부장) 등이었다.

이 중에서도 전두환의 수족으로 기민하게 군사반란을 지휘한 주도세력은 정도영,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 육사 출신 하나회 장교 4인방이었다. 우국일이 참모장이었지만 이날 밤 상황조치에 필요한 정보와 자료들은 그를 거치지 않고 정도영 보안처장과 허화평 비서실장에게 모아졌다. 보안사 내부에서도 사조직 중심으로 움직인 것이다.

이들은 전군에 신경망과도 같이 퍼져 있는 보안사 요원과 하나회원들을 통해 주로 중령, 대령인 실 병력 지휘관들에게 정규지휘 계통의 명령에 따르지 않도록 공작했다. 진압군 출동은 저지하면서 반란군 지원세력을 동원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수경사령관 장태완과 특전사령관 정병주를 체포하는 마지막 작전이었다. 새벽 1시 30분경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은 1공수와 9사단 29연대 등 쿠데타 주력부대가 임무를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는 대대장 박종규 중령(육사 23기, 후에 사단장)을 불렀다.

"할 수 없다. 설득할 대로 해봤는데 말이 안 통한다. 우리만 아직 임무를 끝내지 못하고 있으니 신속하게 사령부를 평정하고 장충단으로 가야겠다."

3공수여단과 특전사령부는 한 울타리 안에 약 1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있다. 3공수여단 예하 박종규가 지휘한 병력은 사령부를 향해 위협사격을 가하면서 달려들었다. 본부중대 내무반은 지붕이 타원형의 철판으로 돼 있었다. 위협사격 총탄이 철판에 튕겨나는 소리가 본부중대 병력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본부중대는 개인화기 소총을 갖고 있었으나 실탄을 지급받지 못했다. 이들은 심야에 모두 잠을 깬 채 자리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사령관실 앞에 이르자 3공수 병력이 건물을 포위한 가운데 대대장 박종규 중령이 M16을 앞에 겨눈 특공조를 양쪽에 거느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령관실로 통하는 비서실문이 잠겨 있었다. 특공조 1명이 나서서 문고리 주위로 M16을 난사해 벌집모양을 만들었다. 문을 군화발로 박차고 들어서니 안쪽의 사령관실 문은 열려 있고 갑자기 권총 탄환이 몇 발 날아왔다. 그 중 한 발이 박 중령의 손목을 스쳤다. 그러자 특공조 2명이 양쪽 문가에 몸을 붙이고 사령관실 안쪽을 향해 M16을 난사했다.

특공조가 우르르 방안에 뛰어들었을 때 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육사 25기)은 이미 절명상태였고 정 사령관도 왼팔에 관통상을 입고 무저항 상태였다. 정병주는 지프에 실려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압송됐다.

장태완, "우리가 졌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
헌병대위 총격에 하소곤 소장 관통상, 평생 휠체어


한편, 특전사가 유혈 평정된 직후인 밤 2시 30경 수경사령부.
공격개시선을 구축하던 중 전차에서 새어나온 '장태완을 사살하라'는 괴무전을 듣고 집무실로 피신한 장태완에게 외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국방장관 노재현이었다.

"장 소장, 왜 자꾸 싸우려고 하나, 말로 하지. 말로 해결 짓자. 병력을 모두 해산시키고 내 지시에 따르도록 해."

박희도 준장의 1공수여단이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해 노재현의 신병도 이들에게 잡혀 있었고 반란군의 작전배치가 완료된 뒤였다. 장태완은 맥이 탁 풀리면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집무실 옆 접견실로 참모들을 불러들였다.

"자네들 오늘밤 고생 많았다. 이 시간부터 일체의 전투행위와 사격을 중지하라. 모든 상황은 끝났다. 우리가 졌다. 군인은 승부에 깨끗해야 돼. 자네들은 그저 사령관이 명령하는 대로 했을 뿐이고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

장태완이 육본 지휘부 방에 가 이 사실을 알리고 접견실로 돌아와 보니 몇몇 참모들이 남아 있었다.
"가서 일들 보고 새로 오는 사령관을 맞을 준비나 하라."

장태완이 말을 마친 순간 육본 지휘부가 자리한 방에서 우당탕하고 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경사의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이 3명의 대위와 무장헌병 등 10여 명을 이끌고 육본 지휘부가 쓰던 사령관실에 들이닥쳤다.

신윤희가 경복궁 30경비단에 가 있는 헌병단장 조홍 대령으로부터 장 사령관 체포 등 수경사 평정 지령을 받은 것은 이날 밤 10시 30분경. 조홍은 그러나 이를 차마 실행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다가 사실상 상황이 끝났으나 반란군 지휘부로부터 추후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신윤희가 이끄는 무장헌병조가 습격했을 때 육본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이 접견실로 나왔다가 막 사령관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장헌병들이 총을 겨눈 채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반사적으로 허리의 권총에 손을 대면서 소리쳤다.

"뭐야, 웬 놈들이냐?"

그러자 헌병대위 하나가 즉각 M16 한 발을 발사했다. 하 소장은 가슴을 관통당하고 쓰러졌다. 문홍구 합참본부장과 육본 장성들은 소파에 앉았고 정승화 총장의 수석부관 황원탁 대령(육사 18기, 후에 남북군사정전위 수석대표)은 양탄자 바닥 위에 앉아 있었다. 순간 황원탁이 바닥에 끌러놓은 권총 벨트에 손을 뻗쳤다. 그러자 문홍구 중장이 그의 팔을 가로막으면서 무장헌병들에게 소리쳤다.

"그만! 쏘지 말아라!"

문홍구 중장과 장태완 소장은 즉각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고 하소곤 소장은 병원으로 실려 갔다. 하소곤은 그 후 한반신 불구가 돼 평생 휠체어에 의지하는 몸으로 살아야 했다.

 

 

<11> 63년 7.6음모와 79년 12.12반란

5.16 쿠데타 세력 부패상에 학생과 장교들 분기탱천

 

쿠데타 주도세력 40여명 체포 계획, 전두환 하나회'살모사 하극상'습성 노란싹 움터…방첩대장 정승화 싹 자르지 못해

1963년 7월 5일 오전, 육군방첩대 조사실.

군 수사관이 김식 대위(육사 11기, 후에 민정당 의원)를 상대로 '7.6 쿠데타설'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육군본부 주변에서도 그랬고 정규육사 장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혁명주체 중 부패자들을 체포해버리자는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는데?"

김식은 육본 군수참모부에 근무했다. 7.6음모에 대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조사지시를 받은 방첩대는 먼저 육군본부 소속 김식을 불렀다. 김식은 육사 총동창회인 북극성회 서울지회 연락책. 핵심주모자들은 모두 최고회의와 중앙정보부에 소속돼 있어 처음부터 이들을 건드리기엔 부담스러웠다. 또 방첩대로서는 이 사건에 대한 정보도 입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에게 정보보고를 한 것과 공화당 간부들이 수사를 요구한 것이 전부였다.

당시 방첩대장은 정승화 준장. 정승화는 5.16 당시 박정희가 부사령관으로 있던 2군의 작전참모였다가 쿠데타 후 육군 방첩대장에 임명되면서 전두환 노태우와 처음으로 얽히는 인연을 갖게 된다. 방첩대는 중정으로부터 정보보고 자료를 넘겨받아 수사에 나섰다.

방첩대 수사관 앞에서 김식은 동기생들 간에 오간 얘기들을 대충 털어놓았다.

"젊은 장교로서 시국을 걱정하는 얘기를 했지요. 부정부패 척결을 부르짖고 군사혁명에 나선 사람들이 국민으로부터 의혹을 받는 일을 저질러서야 되겠습니까?"

이른바 5.16쿠데타 주체세력의 권력갈등과 부패상은 심각했고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국민여론도 들끓었다. 특히 김종필과 중앙정보부 간부들을 중심으로 공화당 사전조직에 나선 정치참여파는 정치자금 조달 때문에 더욱 의혹에 휩싸였다. 사전조직이란 다른 정치인들은 모두 정치활동금지법으로 묶어놓은 채 쿠데타세력만 비밀리에 자신들의 정치도구가 될 공화당을 조직한 것을 말한다. 완전한 꼼수로 정치경쟁에서 불공정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 박근혜 의원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시절인 1977년 겨울, 아버지 박정희와 함께 육사 재학중이던 동생 박지만 생도를 면회했다. 또한 7.6쿠데타음모와 12.12군사반란으로 숙명과 배은으로 엮인 정승화 당시 육사교장(오른쪽 끝)과 전두환 경호실 작전차장보(왼쪽 세 번째)가 함께 했다.


주가조작- 빠친코 수입이권- 새나라자동차 수입이권- 워커힐호텔 건설 등 4대의혹사건으로 검은 돈 챙겨
구국혁명 커녕 부정축재와 내부 권력탐욕으로 이전투구


거기다 공화당 창당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갖가지 비도덕적 이권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권력형 부패의 효시가 된 4대 의혹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주가조작으로 단기차익을 챙긴 결과 금방 증권파동이 일었고 유아기에 불과한 증권시장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관광호텔 사업자들에게 일본으로부터 도박기계인 빠친코를 수입하게 허가해 주고 거기서 거액의 커미션을 챙겼다. 또 일본의 새나라 자동차를 수입하게 허가해 주고 그 대가도 받았다. 아차산 산등성이에 워커힐 호텔 건설을 허가해주고 이권을 먹은 것도 그들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검은 돈을 공화당 창당자금으로만 쓴 것도 아니고 각기 개인적 부정축재도 했다. 누가 5.16 군사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 했던가. 대학가에서 4대 의혹 사건을 규탄하는 학생 성토대회가 전국으로 번졌다. 허울 좋은 군사혁명의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주당 정부가 무능하고 사회혼란상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것을 거사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1년 만에 혼란상을 말하는 것은 억지 트집에 불과하다. 진정한 혁명이란 17~18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에서 보듯이 수십년에서 2백년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자신들의 5.16쿠데타만 해도 수차례의 이른바 '반혁명 사건'으로 내부 권력투쟁은 혼란상 그것이었다.

국민들이 처음에 쿠데타 주모자인 줄 알았던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최고회의 의장을 맡았던 장도영 중장(군사영어학교 출신)도 박정희 중심의 육사8기 세력에 의해 숙청당했다. 또 최고회의 의원으로 건설부장관이던 박임항 소장(만군1기, 8기특임),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이던 김동하 해군소장(만군1기), 최고의원 김윤근 해병준장(만군6기·해사), 최고의원 송찬호 준장(육사5기.고사포여단장), 최고의원 박치옥 대령(육사5기, 1공수여단장), 최고의원 문재준 대령(육상5기, 6군단포병사령관) 등이 차례로 반혁명사건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져 투옥됐다.

이처럼 5.16군사쿠데타는 처음부터 권력을 둘러싼 내부 알력과 음모가 격심했다. 구국의 혁명은커녕 사리사욕과 주도권 싸움이 갈수록 이전투구일 뿐이었다. 언론과 대학생들은 쿠데타세력의 비리부패상을 고발하고 내부에선 연이은 권력투쟁이 터져 나오는 그야말로 혼란상이었다. 이에 주로 정규육사 출신 젊은 장교들이 의분을 토로하고 쿠데타세력에 대한 혁신작업을 꾸미기에 이른 것이다.

부관 손영길 박정희에 친위대 노릇 직소
"내부 혼란으로 일하시기 어려워보여서…"


수사관은 됐다 싶어 김식에게 음모의 내용을 물었다.

"7월 2일 밤 노태우 집에서 정호용 ㆍ 노정기 등과 함께 거세 대상자 명단을 짰다는데 대개 어떤 인물들이었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때 우리는 술 마시면서 개탄이나 했지 누구를 제거한다는 그런 얘기를 한 일이 없습니다."

수사관은 김식에게 정보보고서를 내보였다. 우선 주모자들의 이름이 소속과 함께 적혀 있었다. 최고회의의 최성택 ㆍ 노정기, 중앙정보부의 전두환 ㆍ 권익현 ㆍ 김복동 ㆍ 박갑룡, 방첩대의 노태우 등이었다. 그리고 '7.6 거사설'이라는 제목 아래 이 소문이 전파돼 중앙정보부와 공화당간부에게 입수된 경로를 도표로 그렸다.

정보내용을 들여다본 김식은 크게 놀랐다. 공화당 간부인 육사 8기 출신 김동환, 신윤창, 오학진, 김우경 등이 정보입수자로 적혀 있었다. 이들이 군 장교들로부터 들은 소문은 "육사 출신 장교 일부가 의혹사건에 관련됐거나 정치적 분열을 일삼는 최고위원 및 공화당 간부 40여 명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는 내용이었다.

김식은 이 소문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자 수사관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 사건 별 것도 아닌데 그 친구들이 난리법석을 떠는 것 아닙니까?"

김종필 계 공화당 간부들이 젊은 장교들의 어설픈 음모를 빌미로 중정부장 김재춘에게 역공을 가하는 상황이었다. 하나회의 설익은 야심이 그들과 가까운 김재춘에게 올가미가 될 수 있었다. 김재춘은 육사 5기로 동기생인 정승화 방첩대장을 찾아간다.

"이 친구들이 나한테 와서 그런 얘기를 할 때 내가 경고했지. 그러나 젊은 장교들이 나라를 걱정하다가 혈기로 할 수 있는 얘기 아닌가. 혁명주체 중에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게 문제야. 그것을 척결하려는 청년장교들의 의기는 옳다고 보네. 아까운 장교들이고 하니 경고 정도에서 관용하는 것이 좋겠어."

정승화도 그의 말에 동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사책임자로서 적당한 마무리가 필요했다. 정승화는 박정희의 측근 두 사람을 불렀다. 경호대장 박종규 소령과 전속부관 손영길 소령이다. 박종규에게는 경호실 소속 노정기 대위가 이 음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혹한 처벌은 피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붙였다. 박종규가 명단을 보니 연루자들이 모두 육사 11기 중 군정기구 참여파가 아닌가. 그는 정승화에게 '기합' 선에서 끝내자고 제안했다. 최고회의 경호실로 돌아온 박종규는 즉각 노정기를 호출했다.

"자네 요즘 무슨 음모를 꾸미고 돌아다니나? 그러잖아도 군사정부가 시끄러운데 주제 넘는 짓으로 더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될 줄 알지?"

그는 눈을 부라리며 노정기의 복부를 툭 쳤다. 노정기는 잡아뗐다.
"저희끼리 나라 걱정하는 얘기를 한 일은 있으나 그런 음모란 금시초문입니다."

정승화는 박정희의 부관 손영길에게도 귀띔해주었다.
"자네는 이 음모자 명단에 들어 있지 않지만 모두가 가까운 동기들 아닌가? 이 일이 외부로 확대되면 또 한 번 시끄러워질 텐데…."

손영길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느꼈다. 그는 즉각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에게 직소했다. 바로 하나회가 기대했던 전속부관의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지금 방첩대에서 조사하는 것을 들으니 지나치게 과장됐습니다. 관련자들이 모두 제 동기생이고 처음부터 혁명을 지지한 장교들입니다. 혁명주체 내부가 너무 혼란스러워 각하께서 일하시기가 어렵다는 얘기들을 한 것입니다. 저희가 각하께 어떤 힘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견교환을 해왔는데 이런 분위기는 보호돼야 할 것 같습니다."

손영길은 박정희에게 친위대로서 역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 셈이다. 박정희는 이때 쿠데타세력 내부의 알력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는 손영길에게 일렀다.

"알았다. 아직 젊은 사람들이 다른 생각 말고 위에서 주어지는 일이나 잘하라고 해."

이것으로 더 이상의 수사나 처벌은 없었다. 하나회계가 주도한 어설픈 야심과 14기 행동파의 직설적 발언으로 사전에 노출된 7.6음모는 이렇게 해프닝에 그쳤다.

쿠데타주체 8기에 영남 출신 없어 하나회계가 파고들기 시

12.12 군사반란에서 합수부장 전두환과 육참총장 정승화는 16년 전의 입장이 뒤바뀐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또한 전두환의 배은의 기록이기도 하다. 1963년 7월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은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것은 그들이 소령과 대위 때 하극상 반란 습성이 이미 노랗게 싹트고 있었다는 표시였다.

이들은 5.16 쿠데타 세력의 내부 권력암투와 부패비리 사건에 대한 국민여론의 비난을 명분으로 삼았다. 당시는 하나회가 완전히 조직화하기 전으로 정규육사 출신 동창회인 북극성회를 이용하려 시도했다. 이들은 증권시장 조작과 빠친코 수입 등 4대 의혹 사건이 터지자 정치에 나서기 위해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던 김종필 등 8기 그룹을 연금하는 일종의 궁정 쿠데타를 논의했다. 그렇지 않아도 영남출신이 주축인 하나회계는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가 동향인데도 측근세력으로 파고들기가 쉽지 않아 불만이었다. 쿠데타의 중심축은 8기생이 틀어쥐었으나 이들 중엔 영남 출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5.16쿠데타에 가담한 8기 그룹의 면면을 보면 하나회 못지않게 권력의지가 강했다.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 임관한 8기는 1263명이었으며 특과까지 합하면 1345명에 달했다. 장교임관 그룹 중에서 전무후무하게 많은 수였다. 그래선지 8기는 군부와 정계, 그리고 권력기관에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12> 5.16군사반란의 원인, 군내 파벌과 승진불만

5.16 세력 '구국혁명'커녕 사리사욕 싸움질

 

5.16군사반란에 대해 구국의 혁명이니 사회혼란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니 하는 역사왜곡이 등장했다. 새누리당의 대통령예비후보인 박근혜 의원이 내놓은 나름의 역사평가다. 그러나 그 발언은 박 의원이 5.16군사반란 주모자 박정희 소장의 딸로서 사인(私人)의 입장과 공당의 대통령예비후보라는 공인의 역사관이 뒤엉켜 있는 것 같다. 일각에서는 박 의원이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계속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으니 자신감이 지나쳐 교만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확고해진 정치적 위상을 이용해 아버지 박정희가 자행한 헌정유린까지도 무리하게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그런 언급은 박정희의 딸로서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몰라도 정면으로 '구국의 결단'이니, '최선의 선택이었다'느니 하는 것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국민여론층에서 그렇게 만만하게 넘어갈 리가 없다. 역사 왜곡이 될 소지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식민지배가 불가피했고 결과적으로 근대화에 밑거름이 됐다고 하는 역사왜곡과 동일한 논리가 아닌가.

헌법전문 '3.1운동과 불의 항거 4.19민주이념 계승'
4.19혁명 짓밟은 5.16군사반란 미화는 헌법정신 유린


박근혜 의원은 그런 발언을 한 후 자신의 말을 지지하는 국민이 50%가 넘는다고 했다. 그 국민만 투표를 한다고 해도 박 의원은 이미 대통령 당선이다. 그러나 그 50%는 허수였다. 한겨레가 사회여론조사연구소와 함께 벌인 정기 여론조사(7월27~28일)에서 박 의원의 5.16군사반란 정당화에 대해 "동의한다"는 응답은 37.2%에 불과했고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훨씬 많은 49.9%로 나타났다.

특히 박 의원의 5.16군사반란 합리화에 대한 반대는 20대에서 64.9%, 30대 61.9%, 40대 57.7%로 높게 나왔다. 50% 이상 동의를 보인 연령대는 60대 이상에서만 58.5%였으며 50대도 47.1%였다.

60대 이상이라면 5.16군사반란 때 10대, 유신 때 20대여서 박정희 정권 아래서 교육받고 또 고도로 통제된 언론을 접하면서 정치의식이 형성된 세대다. 지금도 머릿속에 개발독재와 강권통치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식의 정치교육을 받은 악영향이 유산처럼 남아있는 세대라는 것이다. 반민주적 1인 독재체제인 유신헌정을 강행해 놓고서 그것이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예찬하는 극단적 우민화 조작을 하던 정권이었다. 그에 비해 2040세대는 5.16 군사반란 때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유신 때도 유아기였다.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정치의식 면에서 오염되지 않은 세대다. 이들 중 다수의 자율적인 의식과 판단은 5.16군사반란을 합리화하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여기서 60대 이상 세대 중에서 5.16군사반란에 의해 짓밟힌 당사자 그룹인 4.19혁명 참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 단체로는 4.19혁명 유족회와 부상자회가 국가보훈처에 등록돼 있다. 보훈처에 등록하지 않은 채 광범하게 4.19혁명 참여자들이 자율성을 견지해온 단체가 '사단법인 사월혁명회'(상임의장 정동익)라 할 수 있다.

사월혁명회는 7월26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정례발표회를 갖고 박근혜 의원의 5.16군사반란 미화 발언에 대해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 헌법은 전문(前文)에 딱 두 가지의 역사적 사건과 그 정신을 계승한다고 명기했다. 하나는 항일 자주독립 정신으로 3.1운동을 들었고 두 번째가 반독재 시민혁명 정신으로 '4.19민주이념'이다. 이는 국민 합의의 결과다.

그런데 5.16군사반란은 4.19혁명 정신에 바탕한 제2공화정 헌법과 민주당 정부를 짓밟고 정권을 찬탈했다. 박근혜 의원은 그 4.19혁명 정신을 유린한 군사반란을 불가피하고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미화하고 있다. 그것은 '4.19민주이념'이 명기한 헌법정신에 대한 부정이 아닐 수 없다.

사월혁명회 성명 "5.16군사반란 미화는 제2의 쿠데타 기도"

사월혁명회는 이날 성명에서 "박근혜 의원은 공당의 대통령 예비후보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4월혁명을 짓밟은 5.16 군사반란을 단죄하는 취지로 4.19민주이념을 대한민국헌법 전문에 규정한 헌법정신에 대한 입장을 먼저 명백하게 밝히라."고 요구했다.

성명은 이어 "박 의원의 5.16 군사반란과 유신체제에 대한 망언을 '제2의 쿠데타 기도'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맹비난하고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군사반란을 정당시 하는 위험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는데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새누리당 박근혜의원은 5.16을 군사반란으로 인정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고 규탄했다.

5.16군사반란이 과연 구국의 혁명인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1960년 4.19혁명 이후 1961년 5.16과 63년 이른바 민정이양, 그리고 65년 3차 반혁명사건까지 분석적으로 정리해 보아야 한다. 그들은 총칼을 들고서도 최소한 5년 동안 내부 권력투쟁과 검은 정치자금 조달로 나라 전체를 정치적 혼란과 부패상 아래 추락시켰다. 그러면서 4.19혁명 과정에 대해서는 불과 1년을 혼란상으로 규정하고 정권찬탈의 명분으로 삼았다.

5.16군사반란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군 장교 인사적체와 정치군인 발호였다. 군사반란의 주모자들은 군 인사에서 소외된 그룹이었다. 당시 군내 파벌은 지연과 학연, 장교임관 구분 등을 기반으로 형성됐다.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과 함께 '하극상파' 형성

5.16군사반란이 일어나기 전 4.19혁명 전후 군내 파벌은 크게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 ⧍일본군 ⧍만주군 ⧍동북(함경도)파 ⧍서북(평안황해)파 ⧍중남부(경기충청)파 ⧍정군운동과 하극상파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때 5.16 이후 박정희 정권아래서 기승을 부린 영남(대구경북과 경남)군벌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첫째,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은 해방 후 창군 때 군 수뇌부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다. 중국군(장개석 국민당 군) 소장으로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이 초대 국방장관, 일본육사 출신이지만 광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이 미군정 아래서 초대 통위부장, 중국군 소장으로 1946년 한국군 경비대 총사령관을 맡은 송호성 등이 주요 인물이다.

이범석은 1946년 민족청년단장, 48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자유당 부당수, 4.19혁명 후 참의원 등 정계에서 활동했다. 그는 창군 초기 광복군 정신의 계승 원칙을 천명했으나 실제로는 일본육사 출신들을 많이 등용했다. 그것은 김구 세력에 대한 이승만의 견제 책략을 이범석이 실행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의 주류는 김구가 관여하던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서 교육받은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자연히 김구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조직화할 수 있었다. 이것을 이승만이 그대로 둘리 없었으며 광복군계는 군요직에서 차례로 제거되고 만다. 그 뒷자리를 차지한 것이 일본군 출신들이었다.

유동열은 1919년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에서 군무총장을 역임, 광복군 양성에 주력했으며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독립투쟁을 하다가 해방후 환국했으나 6.25 때 납북당했다. 송호성은 6.25 전쟁 중 자진 월북하여 국군의 발전에 기여한 바 없으며 북한에서 강계 월북자 재교육훈련소의 소장으로 일했다.

둘째, 일본군계는 일본육사와 학도병과 지원병 출신으로 이루어졌고 이 중 주류는 일본육사계였다. 일본육사 출신의 주류는 창군 초기 육군참모총장 채병덕과 4.19혁명 직후 과도정부의 국방장관을 지낸 이종찬, 그리고 6.25전쟁 때 육본 작전국장과 남부지구경비사령관을 지낸 이용문을 3걸로 꼽을 수 있다. 해방후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 그리고 51년 휴전회담 대표와 56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도 일본육사계의 거물이다.

이들은 일본육사에 입학한 후 계림회라는 친목모임을 만들었다. 당시 도쿄에 있던 영친왕은 계림회를 위하여 방을 얻어주고 과자와 과일 등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 계림회 아지트는 조선인 일본육사 출신 선후배들의 친목모임 장소였으며 모임은 해방 때까지 지속됐다.

일본군파 이종찬, 이승만의 군 동원 거부로 육참총장직 해임

이 중 특히 이종찬은 1952년 5월 피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이 재선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참모총장이던 그에게 1개 전투사단의 동원을 명령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종찬은 이승만이 국회의원들과 언론을 협박하기 위해 군을 이용하려 하자 전방 전투부대 부족과 군의 정치적 중립을 내세워 단호하게 거부했다. 대통령이 군 통수권자였지만 부당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자 항명한 것이다. 이종찬은 이 사건으로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고 사실상 미국으로 추방조치 당하고 말지만 그는 군 안팎에서 참군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이승만은 군의 정치적 이용을 거부한 이종찬의 항명 이후 자신이 통제하기 어려운 장성을 중용하지 않았다. 이종찬의 후임은 백선엽이었으며, 52년 부산 직선제 개헌파동 때 이승만의 군 동원 명령을 이행한 사람은 헌병총사령관 원용덕으로 모두 만주군 출신이다.

일본육사파 채병덕은 6.25전쟁 중 하동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이용문도 남부지구경비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53년 비행기 사고로 전사하고 만다.

일본군파는 또 일본육사 출신과 지원병 하사관 출신 간에 알력이 심했다. 하사관 출신으로는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했다가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임관한 송요찬과 최경록이 대표적이었다. 송요찬은 4.19혁명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었다. 육참총장 재직 때 군의 부패 척결에 앞장섰으며 일본군 하사관 출신의 보스로 상당한 군벌을 형성했다. 5.16군사반란 후 국방장관과 내각수반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

최경록은 5.16 때 박정희가 부사령관이던 2군의 직속상관 사령관으로 처음에 군사반란에 반대했다가 차츰 묵인 자세를 취했다. 유신 후에도 교통부장관과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다.

일본군계는 학병 출신도 상당수 군 수뇌부에 진출했다. 5.16군사반란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초기 최고회의 의장에 추대됐으나 반혁명 혐의로 투옥된 장도영, 민주당 정부 때 육참총장 재임시 정군운동의 표적이 됐던 최영희, 그리고 5.16 때 육사교장으로 군사반란에 반대하다가 구금된 강영훈 등이 학병 출신이다.

이승만, 김구 관련된 광복군 거세 후 일본군파 중용
일본군 비대해지자 다시 만주군파 키워 일본군파 견제


셋째, 만주군파는 이승만이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을 거세한 뒤 중용했던 일본군파가 비대해지자 다시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성한 세력이다. 특히 52년 부산 직선제개헌 파동 때 만군 출신이 군의 정치적 이용에 공을 세운 후 육군참모총장을 백선엽(두 번 중임)과 정일권이 독과점하면서 만군계가 급성장했다.

만군파는 초기의 봉천군관학교와 그 후의 신경군관학교로 나뉘지만 함께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으로서 만주에서 일본인이나 중국인과 경쟁하면서 교육받아 동병상련 관계로 단결력이 강하다.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는 정일권과 김백일 송석하 신현준 백선엽 등이 유명인사다. 신경군관학교 출신은 이주일 김동하 윤태일 박임항 방원철 박정희 이한림 강문봉 김윤근 등이다. 이 중 5.16 당시 제1야전군 사령관이던 이한림은 처음부터 군사반란에 반대했으나 나중에 박정희에 회유당하고 공직에 참여한다. 또 5.16에 가담했던 군단장 김동하와 박임항은 나중에 이른바 반혁명 사건으로 고초를 겪기도 한다.

이들 중엔 만주군관학교 우수졸업자로 일본육사에 편입한 경우도 상당수에 이른다. 박정희 이한림 이주일 박임항 강문봉 김윤근 등이 그들이다.

신경군관학교 출신 중에 이주일(감사원장 지냄) 윤태일(중앙정보부 차장 지냄) 등 박정희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인사가 많이 배출됐다.

넷째, 동북(함경도)파로는 정일권, 이한림, 강문봉 등이 중심인물이었고 다섯째, 서북(평안황해)파는 백선엽과 백인엽 형제를 중심으로 파벌을 이루었으며 여섯째, 중남부(경기충청)파로 이형근 박병권 김종오 민기식 최경록 등이 보스 노릇을 했다.

군내 소외된 육사5기와 8기 하극상파가 5.16군사반란 꾸며

일곱째, 4.19혁명과 5.16군사반란을 전후해서 학연과 지연으로 유력한 파벌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군 인사에서 소외된 불만세력이 이른바 정군운동과 하극상사건을 일으킨다. 이들은 만주군 출신내의 비주류, 미군정하 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임관한 육사5기 그룹, 정부수립 후 첫 육사출신 장교가 된 육사8기 그룹이었다.

▲ 5.16군사반란 주모세력 내부 육사5기의 중심인물 김재춘(제3대 중앙정보부장)과 8기의 리더 김종필(초대 중앙정보부장)은 치열한 권력 각축전을 벌였다.

 

4.19혁명 이전 이승만 정권아래서 정군운동은 인사적체 때문에 발화됐다. 계급사회인 군대에서 승진이 막혀있다는 것은 가장 심각한 불만사항이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군 수뇌인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직을 소수의 몇 사람이 2~3회씩 중임하는 독과점식 인사정책을 유지했다. 이유는 창군된 지 오래되지 않아 장성들의 나이가 젊었고 또 이승만도 새로운 사람보다는 손에 익은 장군을 계속 중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채병덕 정일권 백선엽은 참모총장을 각각 두 번씩 중임했으며, 함참의장의 경우 김종오는 3대나 연임했다. 또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 최영희 김종오는 합참의장도 하고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 결과 육사5기의 경우 대령에 7~8년이나 머물러야 했고 8기생은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 8년이 소요됐다.

특히 기록적으로 1300여명이 임관한 8기는 승진적체에 위기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임관한 동기생 중 절반 정도가 6.25전쟁을 겪으면서 희생됐음에도 5.16 이전 1차 대령 진급자는 7명에 불과했다.

이들 8기생은 총리와 국방장관을 찾아가 육군참모총장의 임명 기준을 제시하는 등 하극상 행동에 들어간다. 8기생 8명이 하극상을 벌였다 해서 8-8그룹이라 불리는 이들이 나중에 5.16군사반란의 주모그룹이 되는 것이다.

김종필 김형욱 신윤창 길재호 옥창호 석창희 최준명 오상균 등이 그들이다. 이 중 최준명 오상균은 육본에 8기생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소개'방침에 따라 지방에 전보되는 바람에 5.16주체세력에 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8기그룹은 또 5.16군사반란 주모세력 내부에서 김재춘 문재준 박치옥 등의 5기그룹과 치열한 권력투쟁을 치러야 했다.

 

 

 

 

 

필자 김재홍 교수는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니만펠로십을 수료했으며,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제17대 국회의원을 거쳐 현재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에서 한국정치론을 강의하는 학자 언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