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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독재권력의 DNA(2) - 5.16

by Wood-Stock 2012. 8. 14.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11> 63년 7.6음모와 79년 12.12반란

5.16 쿠데타 세력 부패상에 학생과 장교들 분기탱천

 

쿠데타 주도세력 40여명 체포 계획, 전두환 하나회'살모사 하극상'습성 노란싹 움터…방첩대장 정승화 싹 자르지 못해

1963년 7월 5일 오전, 육군방첩대 조사실.

군 수사관이 김식 대위(육사 11기, 후에 민정당 의원)를 상대로 '7.6 쿠데타설'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육군본부 주변에서도 그랬고 정규육사 장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혁명주체 중 부패자들을 체포해버리자는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는데?"

김식은 육본 군수참모부에 근무했다. 7.6음모에 대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조사지시를 받은 방첩대는 먼저 육군본부 소속 김식을 불렀다. 김식은 육사 총동창회인 북극성회 서울지회 연락책. 핵심주모자들은 모두 최고회의와 중앙정보부에 소속돼 있어 처음부터 이들을 건드리기엔 부담스러웠다. 또 방첩대로서는 이 사건에 대한 정보도 입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에게 정보보고를 한 것과 공화당 간부들이 수사를 요구한 것이 전부였다.

당시 방첩대장은 정승화 준장. 정승화는 5.16 당시 박정희가 부사령관으로 있던 2군의 작전참모였다가 쿠데타 후 육군 방첩대장에 임명되면서 전두환 노태우와 처음으로 얽히는 인연을 갖게 된다. 방첩대는 중정으로부터 정보보고 자료를 넘겨받아 수사에 나섰다.

방첩대 수사관 앞에서 김식은 동기생들 간에 오간 얘기들을 대충 털어놓았다.

"젊은 장교로서 시국을 걱정하는 얘기를 했지요. 부정부패 척결을 부르짖고 군사혁명에 나선 사람들이 국민으로부터 의혹을 받는 일을 저질러서야 되겠습니까?"

이른바 5.16쿠데타 주체세력의 권력갈등과 부패상은 심각했고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국민여론도 들끓었다. 특히 김종필과 중앙정보부 간부들을 중심으로 공화당 사전조직에 나선 정치참여파는 정치자금 조달 때문에 더욱 의혹에 휩싸였다. 사전조직이란 다른 정치인들은 모두 정치활동금지법으로 묶어놓은 채 쿠데타세력만 비밀리에 자신들의 정치도구가 될 공화당을 조직한 것을 말한다. 완전한 꼼수로 정치경쟁에서 불공정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 박근혜 의원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시절인 1977년 겨울, 아버지 박정희와 함께 육사 재학중이던 동생 박지만 생도를 면회했다. 또한 7.6쿠데타음모와 12.12군사반란으로 숙명과 배은으로 엮인 정승화 당시 육사교장(오른쪽 끝)과 전두환 경호실 작전차장보(왼쪽 세 번째)가 함께 했다.

 


주가조작- 빠친코 수입이권- 새나라자동차 수입이권- 워커힐호텔 건설 등 4대의혹사건으로 검은 돈 챙겨
구국혁명 커녕 부정축재와 내부 권력탐욕으로 이전투구


거기다 공화당 창당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갖가지 비도덕적 이권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권력형 부패의 효시가 된 4대 의혹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주가조작으로 단기차익을 챙긴 결과 금방 증권파동이 일었고 유아기에 불과한 증권시장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관광호텔 사업자들에게 일본으로부터 도박기계인 빠친코를 수입하게 허가해 주고 거기서 거액의 커미션을 챙겼다. 또 일본의 새나라 자동차를 수입하게 허가해 주고 그 대가도 받았다. 아차산 산등성이에 워커힐 호텔 건설을 허가해주고 이권을 먹은 것도 그들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검은 돈을 공화당 창당자금으로만 쓴 것도 아니고 각기 개인적 부정축재도 했다. 누가 5.16 군사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 했던가. 대학가에서 4대 의혹 사건을 규탄하는 학생 성토대회가 전국으로 번졌다. 허울 좋은 군사혁명의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주당 정부가 무능하고 사회혼란상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것을 거사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1년 만에 혼란상을 말하는 것은 억지 트집에 불과하다. 진정한 혁명이란 17~18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에서 보듯이 수십년에서 2백년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자신들의 5.16쿠데타만 해도 수차례의 이른바 '반혁명 사건'으로 내부 권력투쟁은 혼란상 그것이었다.

국민들이 처음에 쿠데타 주모자인 줄 알았던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최고회의 의장을 맡았던 장도영 중장(군사영어학교 출신)도 박정희 중심의 육사8기 세력에 의해 숙청당했다. 또 최고회의 의원으로 건설부장관이던 박임항 소장(만군1기, 8기특임),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이던 김동하 해군소장(만군1기), 최고의원 김윤근 해병준장(만군6기·해사), 최고의원 송찬호 준장(육사5기.고사포여단장), 최고의원 박치옥 대령(육사5기, 1공수여단장), 최고의원 문재준 대령(육상5기, 6군단포병사령관) 등이 차례로 반혁명사건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져 투옥됐다.

이처럼 5.16군사쿠데타는 처음부터 권력을 둘러싼 내부 알력과 음모가 격심했다. 구국의 혁명은커녕 사리사욕과 주도권 싸움이 갈수록 이전투구일 뿐이었다. 언론과 대학생들은 쿠데타세력의 비리부패상을 고발하고 내부에선 연이은 권력투쟁이 터져 나오는 그야말로 혼란상이었다. 이에 주로 정규육사 출신 젊은 장교들이 의분을 토로하고 쿠데타세력에 대한 혁신작업을 꾸미기에 이른 것이다.

부관 손영길 박정희에 친위대 노릇 직소
"내부 혼란으로 일하시기 어려워보여서…"


수사관은 됐다 싶어 김식에게 음모의 내용을 물었다.

"7월 2일 밤 노태우 집에서 정호용 ㆍ 노정기 등과 함께 거세 대상자 명단을 짰다는데 대개 어떤 인물들이었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때 우리는 술 마시면서 개탄이나 했지 누구를 제거한다는 그런 얘기를 한 일이 없습니다."

수사관은 김식에게 정보보고서를 내보였다. 우선 주모자들의 이름이 소속과 함께 적혀 있었다. 최고회의의 최성택 ㆍ 노정기, 중앙정보부의 전두환 ㆍ 권익현 ㆍ 김복동 ㆍ 박갑룡, 방첩대의 노태우 등이었다. 그리고 '7.6 거사설'이라는 제목 아래 이 소문이 전파돼 중앙정보부와 공화당간부에게 입수된 경로를 도표로 그렸다.

정보내용을 들여다본 김식은 크게 놀랐다. 공화당 간부인 육사 8기 출신 김동환, 신윤창, 오학진, 김우경 등이 정보입수자로 적혀 있었다. 이들이 군 장교들로부터 들은 소문은 "육사 출신 장교 일부가 의혹사건에 관련됐거나 정치적 분열을 일삼는 최고위원 및 공화당 간부 40여 명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는 내용이었다.

김식은 이 소문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자 수사관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 사건 별 것도 아닌데 그 친구들이 난리법석을 떠는 것 아닙니까?"

김종필 계 공화당 간부들이 젊은 장교들의 어설픈 음모를 빌미로 중정부장 김재춘에게 역공을 가하는 상황이었다. 하나회의 설익은 야심이 그들과 가까운 김재춘에게 올가미가 될 수 있었다. 김재춘은 육사 5기로 동기생인 정승화 방첩대장을 찾아간다.

"이 친구들이 나한테 와서 그런 얘기를 할 때 내가 경고했지. 그러나 젊은 장교들이 나라를 걱정하다가 혈기로 할 수 있는 얘기 아닌가. 혁명주체 중에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게 문제야. 그것을 척결하려는 청년장교들의 의기는 옳다고 보네. 아까운 장교들이고 하니 경고 정도에서 관용하는 것이 좋겠어."

정승화도 그의 말에 동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사책임자로서 적당한 마무리가 필요했다. 정승화는 박정희의 측근 두 사람을 불렀다. 경호대장 박종규 소령과 전속부관 손영길 소령이다. 박종규에게는 경호실 소속 노정기 대위가 이 음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혹한 처벌은 피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붙였다. 박종규가 명단을 보니 연루자들이 모두 육사 11기 중 군정기구 참여파가 아닌가. 그는 정승화에게 '기합' 선에서 끝내자고 제안했다. 최고회의 경호실로 돌아온 박종규는 즉각 노정기를 호출했다.

"자네 요즘 무슨 음모를 꾸미고 돌아다니나? 그러잖아도 군사정부가 시끄러운데 주제 넘는 짓으로 더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될 줄 알지?"

그는 눈을 부라리며 노정기의 복부를 툭 쳤다. 노정기는 잡아뗐다.
"저희끼리 나라 걱정하는 얘기를 한 일은 있으나 그런 음모란 금시초문입니다."

정승화는 박정희의 부관 손영길에게도 귀띔해주었다.
"자네는 이 음모자 명단에 들어 있지 않지만 모두가 가까운 동기들 아닌가? 이 일이 외부로 확대되면 또 한 번 시끄러워질 텐데…."

손영길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느꼈다. 그는 즉각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에게 직소했다. 바로 하나회가 기대했던 전속부관의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지금 방첩대에서 조사하는 것을 들으니 지나치게 과장됐습니다. 관련자들이 모두 제 동기생이고 처음부터 혁명을 지지한 장교들입니다. 혁명주체 내부가 너무 혼란스러워 각하께서 일하시기가 어렵다는 얘기들을 한 것입니다. 저희가 각하께 어떤 힘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견교환을 해왔는데 이런 분위기는 보호돼야 할 것 같습니다."

손영길은 박정희에게 친위대로서 역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 셈이다. 박정희는 이때 쿠데타세력 내부의 알력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는 손영길에게 일렀다.

"알았다. 아직 젊은 사람들이 다른 생각 말고 위에서 주어지는 일이나 잘하라고 해."

이것으로 더 이상의 수사나 처벌은 없었다. 하나회계가 주도한 어설픈 야심과 14기 행동파의 직설적 발언으로 사전에 노출된 7.6음모는 이렇게 해프닝에 그쳤다.

쿠데타주체 8기에 영남 출신 없어 하나회계가 파고들기 시도

12.12 군사반란에서 합수부장 전두환과 육참총장 정승화는 16년 전의 입장이 뒤바뀐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또한 전두환의 배은의 기록이기도 하다. 1963년 7월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은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것은 그들이 소령과 대위 때 하극상 반란 습성이 이미 노랗게 싹트고 있었다는 표시였다.

이들은 5.16 쿠데타 세력의 내부 권력암투와 부패비리 사건에 대한 국민여론의 비난을 명분으로 삼았다. 당시는 하나회가 완전히 조직화하기 전으로 정규육사 출신 동창회인 북극성회를 이용하려 시도했다. 이들은 증권시장 조작과 빠친코 수입 등 4대 의혹 사건이 터지자 정치에 나서기 위해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던 김종필 등 8기 그룹을 연금하는 일종의 궁정 쿠데타를 논의했다. 그렇지 않아도 영남출신이 주축인 하나회계는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가 동향인데도 측근세력으로 파고들기가 쉽지 않아 불만이었다. 쿠데타의 중심축은 8기생이 틀어쥐었으나 이들 중엔 영남 출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5.16쿠데타에 가담한 8기 그룹의 면면을 보면 하나회 못지않게 권력의지가 강했다.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 임관한 8기는 1263명이었으며 특과까지 합하면 1345명에 달했다. 장교임관 그룹 중에서 전무후무하게 많은 수였다. 그래선지 8기는 군부와 정계, 그리고 권력기관에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12> 5.16군사반란의 원인, 군내 파벌과 승진불만

5.16 세력 '구국혁명'커녕 사리사욕 싸움질

 

5.16군사반란에 대해 구국의 혁명이니 사회혼란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니 하는 역사왜곡이 등장했다. 새누리당의 대통령예비후보인 박근혜 의원이 내놓은 나름의 역사평가다. 그러나 그 발언은 박 의원이 5.16군사반란 주모자 박정희 소장의 딸로서 사인(私人)의 입장과 공당의 대통령예비후보라는 공인의 역사관이 뒤엉켜 있는 것 같다. 일각에서는 박 의원이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계속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으니 자신감이 지나쳐 교만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확고해진 정치적 위상을 이용해 아버지 박정희가 자행한 헌정유린까지도 무리하게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그런 언급은 박정희의 딸로서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몰라도 정면으로 '구국의 결단'이니, '최선의 선택이었다'느니 하는 것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국민여론층에서 그렇게 만만하게 넘어갈 리가 없다. 역사 왜곡이 될 소지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식민지배가 불가피했고 결과적으로 근대화에 밑거름이 됐다고 하는 역사왜곡과 동일한 논리가 아닌가.

헌법전문 '3.1운동과 불의 항거 4.19민주이념 계승'
4.19혁명 짓밟은 5.16군사반란 미화는 헌법정신 유린


박근혜 의원은 그런 발언을 한 후 자신의 말을 지지하는 국민이 50%가 넘는다고 했다. 그 국민만 투표를 한다고 해도 박 의원은 이미 대통령 당선이다. 그러나 그 50%는 허수였다. 한겨레가 사회여론조사연구소와 함께 벌인 정기 여론조사(7월27~28일)에서 박 의원의 5.16군사반란 정당화에 대해 "동의한다"는 응답은 37.2%에 불과했고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훨씬 많은 49.9%로 나타났다.

특히 박 의원의 5.16군사반란 합리화에 대한 반대는 20대에서 64.9%, 30대 61.9%, 40대 57.7%로 높게 나왔다. 50% 이상 동의를 보인 연령대는 60대 이상에서만 58.5%였으며 50대도 47.1%였다.

60대 이상이라면 5.16군사반란 때 10대, 유신 때 20대여서 박정희 정권 아래서 교육받고 또 고도로 통제된 언론을 접하면서 정치의식이 형성된 세대다. 지금도 머릿속에 개발독재와 강권통치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식의 정치교육을 받은 악영향이 유산처럼 남아있는 세대라는 것이다. 반민주적 1인 독재체제인 유신헌정을 강행해 놓고서 그것이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예찬하는 극단적 우민화 조작을 하던 정권이었다. 그에 비해 2040세대는 5.16 군사반란 때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유신 때도 유아기였다.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정치의식 면에서 오염되지 않은 세대다. 이들 중 다수의 자율적인 의식과 판단은 5.16군사반란을 합리화하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여기서 60대 이상 세대 중에서 5.16군사반란에 의해 짓밟힌 당사자 그룹인 4.19혁명 참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 단체로는 4.19혁명 유족회와 부상자회가 국가보훈처에 등록돼 있다. 보훈처에 등록하지 않은 채 광범하게 4.19혁명 참여자들이 자율성을 견지해온 단체가 '사단법인 사월혁명회'(상임의장 정동익)라 할 수 있다.

사월혁명회는 7월26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정례발표회를 갖고 박근혜 의원의 5.16군사반란 미화 발언에 대해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 헌법은 전문(前文)에 딱 두 가지의 역사적 사건과 그 정신을 계승한다고 명기했다. 하나는 항일 자주독립 정신으로 3.1운동을 들었고 두 번째가 반독재 시민혁명 정신으로 '4.19민주이념'이다. 이는 국민 합의의 결과다.

그런데 5.16군사반란은 4.19혁명 정신에 바탕한 제2공화정 헌법과 민주당 정부를 짓밟고 정권을 찬탈했다. 박근혜 의원은 그 4.19혁명 정신을 유린한 군사반란을 불가피하고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미화하고 있다. 그것은 '4.19민주이념'이 명기한 헌법정신에 대한 부정이 아닐 수 없다.

사월혁명회 성명 "5.16군사반란 미화는 제2의 쿠데타 기도"

사월혁명회는 이날 성명에서 "박근혜 의원은 공당의 대통령 예비후보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4월혁명을 짓밟은 5.16 군사반란을 단죄하는 취지로 4.19민주이념을 대한민국헌법 전문에 규정한 헌법정신에 대한 입장을 먼저 명백하게 밝히라."고 요구했다.

성명은 이어 "박 의원의 5.16 군사반란과 유신체제에 대한 망언을 '제2의 쿠데타 기도'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맹비난하고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군사반란을 정당시 하는 위험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는데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새누리당 박근혜의원은 5.16을 군사반란으로 인정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고 규탄했다.

5.16군사반란이 과연 구국의 혁명인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1960년 4.19혁명 이후 1961년 5.16과 63년 이른바 민정이양, 그리고 65년 3차 반혁명사건까지 분석적으로 정리해 보아야 한다. 그들은 총칼을 들고서도 최소한 5년 동안 내부 권력투쟁과 검은 정치자금 조달로 나라 전체를 정치적 혼란과 부패상 아래 추락시켰다. 그러면서 4.19혁명 과정에 대해서는 불과 1년을 혼란상으로 규정하고 정권찬탈의 명분으로 삼았다.

5.16군사반란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군 장교 인사적체와 정치군인 발호였다. 군사반란의 주모자들은 군 인사에서 소외된 그룹이었다. 당시 군내 파벌은 지연과 학연, 장교임관 구분 등을 기반으로 형성됐다.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과 함께 '하극상파' 형성

5.16군사반란이 일어나기 전 4.19혁명 전후 군내 파벌은 크게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 ⧍일본군 ⧍만주군 ⧍동북(함경도)파 ⧍서북(평안황해)파 ⧍중남부(경기충청)파 ⧍정군운동과 하극상파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때 5.16 이후 박정희 정권아래서 기승을 부린 영남(대구경북과 경남)군벌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첫째,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은 해방 후 창군 때 군 수뇌부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다. 중국군(장개석 국민당 군) 소장으로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이 초대 국방장관, 일본육사 출신이지만 광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이 미군정 아래서 초대 통위부장, 중국군 소장으로 1946년 한국군 경비대 총사령관을 맡은 송호성 등이 주요 인물이다.

이범석은 1946년 민족청년단장, 48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자유당 부당수, 4.19혁명 후 참의원 등 정계에서 활동했다. 그는 창군 초기 광복군 정신의 계승 원칙을 천명했으나 실제로는 일본육사 출신들을 많이 등용했다. 그것은 김구 세력에 대한 이승만의 견제 책략을 이범석이 실행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의 주류는 김구가 관여하던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서 교육받은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자연히 김구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조직화할 수 있었다. 이것을 이승만이 그대로 둘리 없었으며 광복군계는 군요직에서 차례로 제거되고 만다. 그 뒷자리를 차지한 것이 일본군 출신들이었다.

유동열은 1919년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에서 군무총장을 역임, 광복군 양성에 주력했으며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독립투쟁을 하다가 해방후 환국했으나 6.25 때 납북당했다. 송호성은 6.25 전쟁 중 자진 월북하여 국군의 발전에 기여한 바 없으며 북한에서 강계 월북자 재교육훈련소의 소장으로 일했다.

둘째, 일본군계는 일본육사와 학도병과 지원병 출신으로 이루어졌고 이 중 주류는 일본육사계였다. 일본육사 출신의 주류는 창군 초기 육군참모총장 채병덕과 4.19혁명 직후 과도정부의 국방장관을 지낸 이종찬, 그리고 6.25전쟁 때 육본 작전국장과 남부지구경비사령관을 지낸 이용문을 3걸로 꼽을 수 있다. 해방후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 그리고 51년 휴전회담 대표와 56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도 일본육사계의 거물이다.

이들은 일본육사에 입학한 후 계림회라는 친목모임을 만들었다. 당시 도쿄에 있던 영친왕은 계림회를 위하여 방을 얻어주고 과자와 과일 등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 계림회 아지트는 조선인 일본육사 출신 선후배들의 친목모임 장소였으며 모임은 해방 때까지 지속됐다.

일본군파 이종찬, 이승만의 군 동원 거부로 육참총장직 해임

이 중 특히 이종찬은 1952년 5월 피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이 재선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참모총장이던 그에게 1개 전투사단의 동원을 명령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종찬은 이승만이 국회의원들과 언론을 협박하기 위해 군을 이용하려 하자 전방 전투부대 부족과 군의 정치적 중립을 내세워 단호하게 거부했다. 대통령이 군 통수권자였지만 부당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자 항명한 것이다. 이종찬은 이 사건으로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고 사실상 미국으로 추방조치 당하고 말지만 그는 군 안팎에서 참군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이승만은 군의 정치적 이용을 거부한 이종찬의 항명 이후 자신이 통제하기 어려운 장성을 중용하지 않았다. 이종찬의 후임은 백선엽이었으며, 52년 부산 직선제 개헌파동 때 이승만의 군 동원 명령을 이행한 사람은 헌병총사령관 원용덕으로 모두 만주군 출신이다.

일본육사파 채병덕은 6.25전쟁 중 하동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이용문도 남부지구경비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53년 비행기 사고로 전사하고 만다.

일본군파는 또 일본육사 출신과 지원병 하사관 출신 간에 알력이 심했다. 하사관 출신으로는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했다가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임관한 송요찬과 최경록이 대표적이었다. 송요찬은 4.19혁명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었다. 육참총장 재직 때 군의 부패 척결에 앞장섰으며 일본군 하사관 출신의 보스로 상당한 군벌을 형성했다. 5.16군사반란 후 국방장관과 내각수반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

최경록은 5.16 때 박정희가 부사령관이던 2군의 직속상관 사령관으로 처음에 군사반란에 반대했다가 차츰 묵인 자세를 취했다. 유신 후에도 교통부장관과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다.

일본군계는 학병 출신도 상당수 군 수뇌부에 진출했다. 5.16군사반란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초기 최고회의 의장에 추대됐으나 반혁명 혐의로 투옥된 장도영, 민주당 정부 때 육참총장 재임시 정군운동의 표적이 됐던 최영희, 그리고 5.16 때 육사교장으로 군사반란에 반대하다가 구금된 강영훈 등이 학병 출신이다.

이승만, 김구 관련된 광복군 거세 후 일본군파 중용
일본군 비대해지자 다시 만주군파 키워 일본군파 견제


셋째, 만주군파는 이승만이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을 거세한 뒤 중용했던 일본군파가 비대해지자 다시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성한 세력이다. 특히 52년 부산 직선제개헌 파동 때 만군 출신이 군의 정치적 이용에 공을 세운 후 육군참모총장을 백선엽(두 번 중임)과 정일권이 독과점하면서 만군계가 급성장했다.

만군파는 초기의 봉천군관학교와 그 후의 신경군관학교로 나뉘지만 함께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으로서 만주에서 일본인이나 중국인과 경쟁하면서 교육받아 동병상련 관계로 단결력이 강하다.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는 정일권과 김백일 송석하 신현준 백선엽 등이 유명인사다. 신경군관학교 출신은 이주일 김동하 윤태일 박임항 방원철 박정희 이한림 강문봉 김윤근 등이다. 이 중 5.16 당시 제1야전군 사령관이던 이한림은 처음부터 군사반란에 반대했으나 나중에 박정희에 회유당하고 공직에 참여한다. 또 5.16에 가담했던 군단장 김동하와 박임항은 나중에 이른바 반혁명 사건으로 고초를 겪기도 한다.

이들 중엔 만주군관학교 우수졸업자로 일본육사에 편입한 경우도 상당수에 이른다. 박정희 이한림 이주일 박임항 강문봉 김윤근 등이 그들이다.

신경군관학교 출신 중에 이주일(감사원장 지냄) 윤태일(중앙정보부 차장 지냄) 등 박정희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인사가 많이 배출됐다.

넷째, 동북(함경도)파로는 정일권, 이한림, 강문봉 등이 중심인물이었고 다섯째, 서북(평안황해)파는 백선엽과 백인엽 형제를 중심으로 파벌을 이루었으며 여섯째, 중남부(경기충청)파로 이형근 박병권 김종오 민기식 최경록 등이 보스 노릇을 했다.

군내 소외된 육사5기와 8기 하극상파가 5.16군사반란 꾸며

일곱째, 4.19혁명과 5.16군사반란을 전후해서 학연과 지연으로 유력한 파벌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군 인사에서 소외된 불만세력이 이른바 정군운동과 하극상사건을 일으킨다. 이들은 만주군 출신내의 비주류, 미군정하 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임관한 육사5기 그룹, 정부수립 후 첫 육사출신 장교가 된 육사8기 그룹이었다.

4.19혁명 이전 이승만 정권아래서 정군운동은 인사적체 때문에 발화됐다. 계급사회인 군대에서 승진이 막혀있다는 것은 가장 심각한 불만사항이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군 수뇌인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직을 소수의 몇 사람이 2~3회씩 중임하는 독과점식 인사정책을 유지했다. 이유는 창군된 지 오래되지 않아 장성들의 나이가 젊었고 또 이승만도 새로운 사람보다는 손에 익은 장군을 계속 중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채병덕 정일권 백선엽은 참모총장을 각각 두 번씩 중임했으며, 함참의장의 경우 김종오는 3대나 연임했다. 또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 최영희 김종오는 합참의장도 하고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 결과 육사5기의 경우 대령에 7~8년이나 머물러야 했고 8기생은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 8년이 소요됐다.

특히 기록적으로 1300여명이 임관한 8기는 승진적체에 위기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임관한 동기생 중 절반 정도가 6.25전쟁을 겪으면서 희생됐음에도 5.16 이전 1차 대령 진급자는 7명에 불과했다.

이들 8기생은 총리와 국방장관을 찾아가 육군참모총장의 임명 기준을 제시하는 등 하극상 행동에 들어간다. 8기생 8명이 하극상을 벌였다 해서 8-8그룹이라 불리는 이들이 나중에 5.16군사반란의 주모그룹이 되는 것이다.

김종필 김형욱 신윤창 길재호 옥창호 석창희 최준명 오상균 등이 그들이다. 이 중 최준명 오상균은 육본에 8기생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소개'방침에 따라 지방에 전보되는 바람에 5.16주체세력에 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8기그룹은 또 5.16군사반란 주모세력 내부에서 김재춘 문재준 박치옥 등의 5기그룹과 치열한 권력투쟁을 치러야 했다.

▲ 5.16군사반란 주모세력 내부 육사5기의 중심인물 김재춘(제3대 중앙정보부장)과 8기의 리더 김종필(초대 중앙정보부장)은 치열한 권력 각축전을 벌였다.

 

 

 

 

<13> 정군파의 역사흐름 외면

8기생 정군파 논란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 전력"

 

1960년 4.19혁명이 발발하자 사회 각 영역에 '혁명'바람이 불었다. 정치권에서는 독재권력에 빌붙었던 구악 정치인을 퇴출시키자는 쇄신운동이 일었고 사회 각 영역에서 기성세대의 무기력한 순종문화를 탈각하자는 구호가 등장했다. 4.19혁명 시기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감은 한국의 현대사회사에서 첫 세대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는 혁명바람이 유행처럼 번지자 혁명을 운위하기 어려운 특수사회인 군에도 예외 없이 바람이 불었다. 군은 1948년 공식 창설된 지 12년 밖에 지나지 않아 역사가 짧은데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자신의 재선을 위한 직선제 헌법개정에 군을 동원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면서 자긍심이 훼손당하고 있었다. 군의 정치적 중립과 명예를 지키려는 직업주의도 확립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창군 과정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걸은 군 인맥이 여러 갈래 파벌을 형성하면서 알력과 갈등이 심각했다.

부패비리 지휘관일수록 부정선거 등 상부명령엔 맹종
병사들 숯 굽고 벌목 시켜 불법 축재…정군운동 발화


고위 장성 중엔 미국의 군사원조를 자신의 재산으로 가로채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대대장이나 연대장 등 영관 장교는 숯을 굽거나 벌목을 시키는 개인적 돈 벌이에 부하 사병들을 노무자로 동원하는 파렴치행위가 허다했다. 병사는 배곯는데 사치생활을 즐기는 부정축재 장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이렇게 부패비리를 저지르는 지휘관일수록 위에서 하달되는 명령은 부당한 것이 있어도 앞장서서 이행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부정선거도 군부대 내에서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군내 쇄신바람은 불가피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부정선거에 앞장 선 장교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큰 명분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과 시민이 몸 던져 4.19혁명을 폭발시키자 주로 육군본부 등 서울지역에 근무하던 군 장교들은 이것을 평소 품어 온 군 수뇌부에 대한 불만 척결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한 부정선거 연루 장교들에 대한 징벌론이 명분으로 작용했지만 실제로는 군내 승진적체와 장래불안으로 인한 발화요인이 더 강했다. 승진적체 등 인사 불만이 가장 강했던 8기생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도 그런 증거 중 하나다. 이것이 4.19 혁명 후 5.16 군사반란 이전까지 벌어졌던 이른바 정군(整軍)운동이다. 정군운동은 자신들의 요구를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육군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 심지어 국정최고책임자였던 총리에게까지 전달하고 압박하면서 하극상으로 치달았다.

4.19 혁명 당시 서울 육군본부에는 육사 8기생이 120여 명이나 근무하고 있었다. 대부분 중령이었으며 대령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4월26일 이승만도 물러난 지 얼마 후인 5월 초 어느날 혁명의 열기기 뜨거워지자 이들 사이에서 사발통문이 돌았다.

"군내 부조리와 부정부패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8기생 모임을 갖고자 하니 일과 후 용산 우체국 옆의 중국집에 모여주기 바랍니다."

첫 모임에 6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시국 상황과 군내 불만요소들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였다.

"이 대통령이 물러나는 바람에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만 영웅 됐어. 송 장군이야말로 무능하고 안일무사한 양반인데 말이지. 시위대에 발포명령을 안 내린 것은 책임전가였고."
"맞아 서울로 투입된 계엄군 지휘관인 15사단장 조재미 준장(육사2기) 쪽 얘기를 들어봐도 송 사령관이 일절 지침을 안 내려 준다는 거야. 그래서 해당 부대의 지휘관들이 발포를 안 하기로 했고 시위 진압은 물 건너 간 거지."

언론들이 연일 쏟아내는 혁명과 민주화 분위기에 군 장교들도 편승하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학생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우리 할 일이 김 빠졌어"

"어쨌거나 학생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김 빠졌어."
"우리가 시민학생과 혁명 경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군에서 우리가 할 일은 따로 있는데, 학생들보다 먼저 선수를 못 쳤다고 의기소침할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군내 정화, 정군운동을 하자는 거군요."
"바로 그거야. 부패분자들을 싹 쓸어내야 해. 군 수뇌부가 똑바로 해야 전쟁이 나도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거 아니요."

이른바 정군운동이 불붙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2차 모임은 숫자가 20여 명 남짓으로 줄었고 이어 3차 모임은 10여 명만이 동참했다. 정의감도 좋고 명분이 있었지만 개인으로 돌아가 보면 자칫 잘못 될 경우 감당해야 할 위험부담이 보통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처자가 있는 처지여서 위험을 감수하고 나서기는 쉽지않았다.

그러나 숫자가 적어진 후 오히려 대화 내용은 깊어졌고 동지의식이 생겼다. 마지막엔 8기의 정군파 8명그룹이 형성됐다. 그래서 붙여진 명칭 '8-8그룹'이 1차 정군운동파였다. 김종필 김형욱 신윤창 길재호 옥창호 석정선 최준명 오상균이 그들이다.

8-8그룹의 리더는 김종필로 논의의 내용을 정리하고 행동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군내부의 부조리들을 학생과 시민이 들어와서 척결해 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 스스로 나서야 할 상황이지."

이들은 5월8일 정군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작성해 동조세력을 모으고 민주당 과도정부의 국방장관인 이종찬(일본육사.이승만 정부 육군참모총장)과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정군 건의문 작성은 김종필이 맡기로 하고 정군의 대상자는 장군들의 명단을 놓고 선정하기로 했다. 정군 대상의 기준은 첫째, 정치관여자 둘째, 부정축재자 셋째, 축첩자 등으로 정리했다.

8-8그룹 리더격인 김종필은 정군운동을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으로 군내 불만 제기가 많은 박정희 소장과 연결시키려 했다. 김종필의 이 같은 계획을 간파한 정군파는 박정희의 전력에 대해 지적하고 나섰다. 정군 주동자들 중엔 이북 출신이 많았고 반공 면에서 확고한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박정희가 남로당의 군사프락치로 1948년10월 여순반란 사건 때 구속돼 옷 벗었던 일에 대해 논란을 벌였다. 또 김종필이 박정희의 조카사위라는 사적인 관계 때문에 그를 내세우려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표출됐다.

그러나 영관급 장교인 자신들의 처지에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군내에 울타리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장군들 몇 명을 업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박정희와 함께 서울지구 계엄분소장인 조재미 준장에게도 자신들의 뜻을 전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 5.16 군사반란의 주동세력인 육사8기생 정군파와 박정희의 결합에는 그의 조카사위로 정군파 리더였던 김종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67년 7월 안양에서 열린 공화당 의원 연찬회에서 김종필이 가수 이미자의 노래를 아코디언으로 반주하고 있다.

 


박정희는 4.19혁명 편승 군내 비판수위 높이며 기회만 엿봐
김종필 등 정군운동파 8-8그룹 전원 육본 방첩대에 체포

박정희는 김종필이 맡기로 하고 조재미에게는 8-8그룹 중 가장 먼저 대령이 된 최준명이 찾아갔다. 최준명은 조재미에게 간곡히 진언했다.

"저희 8기생들이 군내 정화운동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부디 군이 바로 서기 위한 정군운동에 사단장님께 울타리가 돼 주시고 지도해 주십시오."

그러나 조재미는 정치군인이 아니며 강직한 장군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라가 뒤숭숭한 판에 중요한 위치에 있는 중견 장교들은 자중해야 하는데 무슨 짓이야. 경거망동해서 분란을 일으키면 안되네."

이같은 조재미에 비해 박정희는 달랐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나서 군내에서 비판적 발언을 해온 그는 정치성향과 권력의지가 강했다.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 한 판 들어엎을 생각으로 호시탐탐 노려 온 정치군인 박정희와 승진불만이 극에 찬 8기생 정군파는 이렇게 궁합이 잘 맞아떨어졌다. 박정희는 자연스럽게 이들 정군파의 보스로 옹립된다. 여기서 김종필의 연결역도 중요한 몫을 했다.

한편 조재미는 계엄업무차 만난 육본의 소장급 장성에게 별 악의 없이 8기생들이 대표를 보내 왔으며 자신이 타일러서 돌려보낸 일을 얘기했다. 이것은 고스란히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됐다. 그러자 송요찬은 육본 헌병대에 조사를 지시했고 이들 8-8그룹은 전원 국가반란음모죄로 체포당했다.

그러자 육본에 근무 중인 8기생을 중심으로 반발 분위기가 형성됐다. 군내 부정부패를 척결하고자 건의문을 올리려다 체포당한 동료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얘기들이 나돌았다. 더구나 4.19 혁명열기가 타오르고 있던 와중이어서 과도정부와 군 수뇌부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4.19혁명이 발발한지 한 달 만인 5월19일 밤, 송요찬은 체포된 정군운동파 8기생 8명을 유치장에서 불러냈다.
"나도 귀관들의 군내 정화의지엔 뜻을 같이하네. 그러나 장교가 집단행동을 하는 것은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오해 소지가 크니 자제해야 하네."

박정희 1관구사령관으로 좌천당하자 정군파 분기탱천

8-8그룹은 송요찬의 지시로 전원 석방됐다. 그리고 송요찬은 다음날 스스로 육군참모총장직을 사퇴하고 전역하고 만다. 4.19 혁명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지도 불투명하려니와 군내 정군운동도 막 발화하는 양상 아닌가. 자신을 임명한 이승만도 하야했고 혁명열기를 제어하기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송요찬이 물러나자 군 고위장성인 백선엽과 유재흥 등도 옷 벗고 예편했다. 이는 일련의 4.19혁명 여파였다.

8기생의 정군 소동으로 송요찬이 물러나자 허정 과도정부는 후임 육참총장에 최영희 중장을 임명한다. 그러나 최영희는 8-8그룹이 지목한 정군 대상 중 한 명이었다. 문제가 더욱 악화할 수밖에 없었다.

신임 육참총장 최영희는 군내 불만세력으로 정군운동파인 육사8기 그룹을 달래기 위해서 그들이 업고 있는 보스 박정희에게 육군본부의 핵심요직인 인사참모부장 자리를 제의했다. 이에 박정희는 조건을 제시하고 나선다. 부정부패한 장성들을 정리할 실권을 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인사참모부장은 참모이지 장성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군 장성의 인사권은 대통령과 국방장관에게 있으며 육군참모총장은 제청권만 행사할 뿐이다. 박정희의 요구는 육참총장이 받아들이기엔 턱 없이 가당찮은 것이었다.

그러자 육참총장 최영희는 군수기지사령관이던 박정희를 1관구 사령관이란 한직으로 좌천시켰다. 이에 분기탱천한 정군파는 내부 숙의를 거듭했다. 그러는 사이 8월19일 허정 과도정부가 물러나고 민주당 장면 정부가 들어선다. 4.19혁명의 성과로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새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군내 불만세력인 정군파는 역사의 흐름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다.

 

<14> 총무:김종필,작전:옥창호 신윤창

박정희 좌천·하극상 처벌에 정권찬탈 결의

 

4.19혁명으로 새로운 민간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정군운동파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해 오던 관성대로 나갔다. 민주당 정부의 등장은 4.19혁명의 승리로 새로이 만들어진 헌법에 바탕한 성과였고 국민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를 보스로 옹립한 정군파는 4.19혁명과 민주당 정부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무시했다. 오직 자신들의 욕구와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데 주력한 셈이다.

정군파는 국무총리를 만나 담판하기로 했다. 당시 총리는 장면으로 내각책임제 헌법 아래서 국정최고책임자다. 그러나 면담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성사될 리 없었다. 총리 비서실은 그만큼 벽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집권한 지 얼마 안 된 장면 정부가 군부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무리였다.

영관장교들 장면 총리에 '국방장관 임명에 고려사항'
5.16은 전형적인 군사반란…민간정부 간섭하다 전복시켜


면담을 관철시키지 못한 정군파는 장면 총리실에 '국방부장관 임명에 있어서 고려사항'이라는 건의서를 보낸다. 영관 장교들이 국정 최고책임자에게 국방장관의 임명 조건을 요구한 것이다. 장면 총리는 민주당내 신파와 구파의 협상에 따라 신파인 현석호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한다. 정군파의 요구를 반영했을 리 만무했다. 그러자 정군파는 또 국방장관실에 '육군참모총장의 임명 기준에 관한 의견서'를 전달했다. 이는 군 장교들이 이미 정치에 깊이 개입했음을 의미한다. 군내에 암적인 정치장교 그룹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리는 표시이기도 했다.

정치장교 집단이 아직 직접 정부를 통제하지는 못하지만 강력한 압박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정치학적으로 집정관적 조정형 군(praetorian moderators)이라 일컬어지는 일종의 군사반란 초기단계에 해당한다. 이 단계에서 군은 민간 정부에 각료의 해임이나 주요 정책의 수정 등을 요구한다.

정치장교 집단은 자신들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으면 2단계로 돌입, 민간인 정부를 타도하고 직접 정부를 통제하거나 아예 정권 찬탈에 나선다. 이것이 집정관적 지배형 군(praetorian rulers)이며 후진국의 군사쿠데타가 대부분 여기에 해당한다. 반란군은 부정부패 일소와 사회질서 확립, 또는 정치사회적 변화 등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게 통례다. 5.16은 정군운동파 정치장교들이 두 가지 단계를 차례로 거치는 전형적인 군사반란이었다.

장면 정부는 곧 군부 인사에 착수하여 최영희를 합참의장으로 전보하고 신임 육군참모총장에 최경록 중장을 임명했다. 최경록은 충북 음성 태생으로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다. 해방되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헌병사령관과 육사교장을 거쳐 미 참모대학에 유학했다.

울분의 박정희, 장면 정부아래 육본 작전참모부장에 발탁돼
4.19혁명 열기 속에 최경록 육참총장은 군내 정화운동 지지

최경록은 육참총장에 취임하자마자 군내 부정부패자는 제거돼야 하며 정군운동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그는 1관구사령관으로 좌천당해 울분을 삭히고 있던 박정희를 육군본부 핵심요직인 작전참모부장으로 기용한다. 박정희의 상습적 쿠데타 발언을 감안하면 군 병력의 훈련동원과 배치를 담당임무로 하는 작전참모부장 자리는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었다. 정군파는 당연히 사기가 충천했다. 4.19혁명의 덕을 본 셈이었다.

한편 합참의장에 취임한 최영희는 미 국방부 군원국장 파머 대장을 초청한다. 최영희와 접촉하고 한국을 떠나면서 파머는 김포공항에서 최영희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은 "젊은 장교들의 정군운동에 결단코 반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자 정군파의 중심부 격이 된 육군본부가 크게 반발했다. 우선 육군참모총장 최경록이 파머 대장에게 내정간섭이라고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와 육사8기 정군파는 최경록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파머와 함께 매그루더 주한미국 대사까지 가세해 최경록에 대한 반박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렇게 한미 양국의 고위당국자 간에 성명전이 벌어진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군 안팎과 국민감정은 미국을 성명전에 끌어들인 최영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육사7,8,9기 중령 16인 합참의장에 집단 하극상 행동
정군파 김종필 석정선과 합참의장도 예편, 육참총장 좌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군파는 최영희를 공격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8기 정군파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를 중심으로 육사 7,8,9기 출신 영관장교 16명의 대표단을 구성했다. 16명의 중령들은 합참의장 최영희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각하, 파마 대장과 공동성명을 내어 군내 정화운동에 반대한 경위를 밝혀 주십시오."
"미국 장성의 내정간섭을 자초한 일에 책임지셔야 합니다. 합참의장직을 사퇴하십시오."

16인 정군파는 격하게 항의했다. 이에 최영희도 강경 대응했다.

"뭐라고? 너희들이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이건 분명 하극상이야. 어이 부관! 헌병 불러."

결국 헌병대가 출동했고 이들은 모두 군 영창에 구속된 채 징계위원회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이른바 16인 하극상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필과 석정선이 옷을 벗어야 했다. 나중에 김종필은 5.16 군사반란이 성공한 뒤 대령으로 군에 복귀했다가 준장으로 장군이 되어 예편한다.

일이 이렇게 커지자 그때까지 정군운동을 지지했던 육참총장 최경록도 돌연 반대로 돌아섰다. 정치장교 집단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뿐더러 점점 더 격화돼 가는 정군운동에 대해 책임질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극상으로 치달은 정군파 장교들에 대한 처벌로 군 수뇌가 무탈할 수는 없었다. 상황이 4.19혁명 정국인지라 역시 여론이 중요했으며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한 당사자가 된 합참의장 최영희는 옷을 벗었고 또한 정군파의 배후인물인 박정희도 육본 작전참모부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박정희가 옷을 벗어야 할 상황에 2군사령관 장도영은 최경록에게 공석인 2군 부사령관으로 박정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박정희에게 장도영은 또 한번의 은덕을 베푼 셈이었다. 다른 한편 3.15부정선거 때 2군사령관인 장도영으로서는 부대 내의 부정투표에 대해 책임추궁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 심적 부담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승만 정권의 2인자 이기붕과도 부인들끼리 대학 선후배로 긴밀한 사이였다. 장도영은 4.19 혁명 후 자진해서 사표를 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반려됐다. 장도영으로서는 그런 전후사정 때문에 군내서 4.19혁명분위기에 편승하고 있는 정군파를 끌어안을 필요가 있었다. 그는 전에도 자신이 은덕을 베푼 적이 있는 정군파의 보스 박정희를 곁에 두기로 한 것이다.

2군사령부에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시절 1기 선배며 절친한 동지인 이주일이 참모장으로 부대를 장악하고 있어서 좋은 여건이 됐다.

8기생 9명 첫 군사반란 시동 '충무장 결의'
종전의 호소 방식 버리고 정권찬탈로 방향전환


16인 하극상 사건은 사법처리로 외관상 일단락된 듯 했지만 사실은 암적 정치장교들의 불만요인이 더욱 강렬하게 내연하고 있었다. 1960년 9월10일 육본을 중심으로 수도권에 근무하는 8기생 정군파 9명이 서울 퇴계로의 충무장이란 일식집에서 다시 회동했다. 이들은 정군운동의 방법을 논의하고 근본적인 방향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종전처럼 건의문이나 호소로는 자신들이 원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결론짓고 혁명적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하기로 결의한다. 이것이 '충무장 결의'로 5.16 군사반란의 첫 결의였다.

이들은 군사반란을 결행하기 위해 업무분담까지 마무리했다.
⧍총무: 김종필 ⧍정보: 김형욱 정문순 ⧍인사: 오치성 ⧍경제: 김동환 ⧍사법: 길재호 ⧍작전: 옥창호 신윤창

이들은 충무장 결의 후 두 달이 지난 11월6일 서울 신당동의 박정희 소장 집에서 2차 모임을 갖는다. 이때부터 다음해 5.16 군사반란이 행동에 옮겨지기까지 이들은 전군에서 은밀하게 동지규합에 나선다. 장성급은 박정희가 맡았고 영관급을 8기 그룹이 친소관계에 따라 포섭해 나갔다.

장성급을 대상으로 한 박정희의 포섭 계획은 몇 개 갈래로 나뉘어진다.
첫째, 만주 신경군관학교의 선후배 인맥으로 선배인 1기 출신 박임항 군단장과 김동하 전 해병대사령관, 그리고 2군사령부 참모장 이주일이 동참을 약속했다. 박임항은 함남 홍원 출신으로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육사에 편입했으며 해방후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 육군 대좌까지 올랐으나 6.25전쟁 때 월남했다. 사단장과 육본 인사국장, 국방대학 총장, 군단장을 지낸 군 고위인사였다.

후배인 3기 출신 김윤근 해병여단장도 가담했다. 특히 해병대는 4.19혁명 후 육군과 별도로 자체 정화운동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영향력 있는 수뇌부가 박정희와 밀접한 관계여서 5.16 모의에 포섭되고 만다.

둘째, 박정희가 육본 작전참모부장 재직 때 부하였던 작전처장 장경순 준장(후에 공화당 국회의원, 국회 부의장)과 정보학교장 한웅진 준장, 논산훈련소장 최홍희 준장이 합류했다.

박정희 육사 제1중대장으로 지도한 5기출신 다수 포섭
채명신은 '개선장군' 이미지 때문에 실세들이 견제

▲ 5.16 주체세력 중 육사8기 출신과 권력투쟁을 벌인 육사5기의 중심인물인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이 1963년 봄 박정희와 걸으면서 정세 보고를 하고 있다. 김재춘은 63년 2월부터 7월까지 불과 6개월간 중정부장에 재직했으며 그 후임은 8기 친김종필계인 김형욱이 임명돼 69년 10월까지 무려 6년2개월의 최장수 중정부장을 지냈다.

 


셋째, 박정희가 육사 생도대 1중대장 재직 때 생도였던 5기 출신 다수가 포섭됐다. 5사단장 채명신 준장(육사5기)과 6관구사령부 참모장 김재춘 대령(후에 중앙정보부장), 공수특전단장 박치옥 대령,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대령이 그들이다. 6관구사령부는 서울에 인접해 있어서 거사의 지휘본부로 안성마춤이었으며 그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을 육사8기 동기생들이 포섭했다.

6군단에는 또 8기 출신 홍종철이 작전참모로, 충무장 결의 때 작전 담당인 신윤창과 새로이 가담한 구자춘 중령이 포병단 대대장으로 각각 보임돼 있었고 이들이 포병단장 문재준과 의기투합했다. 1군사령부에서도 8기 출신인 작전처 소속 중령들인 조창대, 엄병길, 심이섭이 가담했다.

육사5기 출신은 나중에 박정희와 주로 육본 정보국과 작전처에서 근무인연을 맺은 8기그룹과 권력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중 특히 채명신은 평양사범 출신으로 육사5기와 미 보병학교를 졸업한 후 5.16 당시 5사단장으로 1개연대 병력을 동원했다. 그는 최고회의 감찰위원장으로서 4대의혹 사건을 조사하면서 김종필과 갈등을 빚었다. 그는 1965년 육본 작전참모부장을 하다가 주월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이 됐으나 일종의 '개선장군'이미지로 국민적 인기가 높아지자 박정희와 김종필의 견제를 받는다. 채명신은 후방 2군사령관을 끝으로 중장에서 대장 진급도 못한 채 옷을 벗었다. 그는 예편한 후에도 국내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스웨덴, 스위스, 브라질 대사 등 외국으로 나돌아야 했다.

5.16 군사반란 세력은 민간인 후원자도 많이 모았다. 주요 민간인 협력자로는 김종필의 형 김종락(후에 한일은행장)이 자택을 모임 장소로 제공했고, 역시 김종필의 먼 친척인 김용태(후에 공화당 국회의원, 원내총무)가 후원자로 나섰으며 인쇄소를 경영하던 이학수(후에 고려원양 회장)가 이주일과 동향이어서 홍보전단 등의 비밀 인쇄를 맡았다.

박정희는 군수기지사령관 재직 때 알게 된 부산 기업인 김지태에게도 거사 자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지태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으며 이것이 악연이 돼서 5.16 후 그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구속되고 만다. 김지태는 구속된 상태에서 지금의 정수장학재단으로 둔갑한 부일장학재단과 재산에 대한 포기 각서를 쓰도록 강요받았다. 재산 포기각서를 쓴 후에야 그는 석방된다. 이렇게 군사반란에 협력한 민간인들은 정계와 재계에서 약진한 반면 자금제공 등을 거부한 경우 재산을 강탈당하는 화를 겪어야 했다.

군사반란의 모의에서 가장 중요한 포섭 대상은 육참총장 장도영이었다. 장도영은 평북 용천 태생으로 일본 동양대학 재학 중 1944년 학병으로 입대했다. 45년 남경 일군사관학교를 수료했으나 해방을 맞아 미군정 아래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창군에 참여했다. 1949년 육본 정보국장 재직 때 박정희가 그 부하로 인연을 맺었다. 사단장, 군단장, 2군사령관을 거쳐 장면 정부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됐다. 여순반란사건으로 박정희가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을 때 장도영은 육본 정보국장으로 박정희의 직속상관이었다. 장도영은 정일권 백선엽 등 일본군 출신들과 함께 박정희 구명운동을 벌였고 박정희가 석방되자 문관 신분인 그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취직시킨 은인이었다.

4.19혁명 후 민주당 정부 아래서 육군참모총장에 기용돼 한창 절정기인 장도영이 모험적인 거사에 동참해 줄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군사정부의 최고지도자 자리라도 제의한다면 응할지, 그가 위험한 일에 몸 던질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박정희는 5.16 한 달 여 전인 4월 초 장도영을 찾아 간다.

 

 

<15> 학생 시위 격화되기 기대

박정희, 은인 장도영을 포섭하다

 

5.16 군사반란은 군대의 기본적 규율과 함께 국민이 선택한 정부의 군에 대한 문민통제가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졌다. 국민이 선거로 결정한 정부를 정치군인 집단이 총칼로 무너트렸기 때문에 국민주권에 대한 반란이었다.

국가권력이 정치군인의 선의에 의해 좌우되는 격이었다. 정치군인의 권력욕이 발동하면 언제든 정권찬탈도 벌어지고 승진과 보직 면에서 만족하면 현상유지가 가능한 현실이었다. 객관적인 국가 위기보다도 주관적인 개인의 탐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반란이다. 사적인 권력욕을 그럴 듯한 공적인 명분으로 포장하는 것이 후진국 군사쿠데타 주모자들의 특징이다. 이때 등장하는 '포장지'가 대체로 국가안보와 자유 수호니 도탄에 빠진 민생 구휼이니 하는 공작적 구호다.

반란군 주모자와 정부측 육참총장 간의 격의없는 대화

그러나 5.16 군사반란 당시 국가안보의 경우 세계적 냉전체제에서 자유진영의 전진기지 격인 남한을 주한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사령부가 지켜주고 있었다. 6.25전쟁으로 그런 사실을 경험적으로 배운 북한이 또 다시 전면전을 도발한다는 것은 '상상'에 불과했다. 박정희가 5.16 후 10년 만에 종신집권을 위해 다시 한 번의 유신쿠데타를 감행할 때도 북한의 남침위협론을 들고 나섰다. 그러자 미국에서 발행되는 세계적 권위의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1971년 12월20일자 아시아면에서 박정희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에 대해 '상상적 비상(imaginative emergency)일 뿐'이라고 조롱했다.

5.16반란세력이 내세운 다른 하나의 명분인 경제개발은 이미 장면 정부 때 경제관료들에 의해 계획돼 있었다. 연구자들은 경제개발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로 유능한 개신 관료들의 역할을 꼽는다. 그것을 실천한 리더십으로 박정희의 공을 평가하는 것은 많은 논란을 야기한 것이 사실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원동력이'강권통치자의 개발독재'인가, 아니면 '국민의 투지와 피땀'인가를 둘러싸고 앞으로도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5.16이 국민주권을 무시한 군사반란과 정권찬탈이라는 것은 후세의 역사 평가에 맡길 필요가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역사 평가에 남겨놓을 수 있는 것은 그 이후 경제개발의 공과에 관한 부분일 뿐이다.

5.16 군사반란은 정상적인 군대 조직과 국정 관리 아래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반란군 수괴인 박정희와 그것을 막아야 할 정부 측 대리인격인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사이에 거사 예고와 반대 의견을 놓고 여러차례 대화가 오갔다는 점이 그렇다.

만일 박정희 정권 아래서 어느 군 장성이 쿠데타를 꾀한다는 설이 나돈다고 상상해 본다면 그것은 어김없이 무서운 조사와 징벌의 대상이다. 따지고 보면 권력에 대한 도전이나 정부 전복 음모가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로 감시되고 단죄되는 것은 중앙정보부와 군 보안사령부를 창설한 박정희 정권 이후부터였다. 그것도 권위주의 정권의 특징 중 하나였다.

사회혼란상 보다도 박정희의 권력욕이 주범

박정희 정권 이전까지 군은 상하 계급 간 위계질서나 조직규율에 대한 존엄성이 그다지 엄정하지 않았다. 창군된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장교들의 임관 종류가 잡다했고 상급자가 하급자보다 나이가 적은 경우도 허다했다. 박정희도 육참총장 장도영보다 나이가 4살이나 위였다. 또 만주군과 일본군 시절의 상하계급이 해방 후 조선경비대 임관 순서에 따라 뒤바뀐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대드는 하극상 사건도 종종 일어났다. 군 기강이 확립되지 못한 것은 물론 군 통수권자인 정부 수반에 대해서도 경외심이 없었다. 군에 대한 문민통제가 제도화되지 못했으며 그것을 이행할 장치도 없었다. 말하자면 무력을 보유한 군대가 정부의 통수권과 군내 지휘체계에 복종하지 않고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였다. 이럴 때 권력 야심을 가진 정치군인이 정권찬탈에 나서는 것은 사실상 시간문제였을 뿐이었다.

군내부에서는 박정희가 주변에 쿠데타 계획을 얘기하고 다닌다는 정보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것이 국방장관 현석호와 국무총리 장면의 귀에도 당연히 들어갔다. 장면은 육참총장 장도영을 서너 차례나 불러 군부 쿠데타설이 떠도는 배경에 대해 물었다. 그 때마다 장도영은 "박정희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고 부인하면서 군에 대해서는 자신을 믿으라고 안심시켰다.

그것은 장도영이 장면을 속이려 했다기보다는 박정희가 평소 쿠데타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기 때문에 정말 일을 저지르리라고 믿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동기생으로 막역한 전우라 할 수 있는 이한림 1군사령관도 그에게서 쿠데타 언사를 수차 들었다. 그 때마다 이한림은 박정희에게 위험한 말을 삼가라고 충고하곤 했다.

5.16은 사회혼란상이나 민주당 정부의 무능보다는 박정희의 타고난 권력욕과 정치군인 기질 때문에 터진 정권찬탈이었다. 군사반란을 주도한 박정희와 육사8기 9명의 충무장 결의 집단은 4.19혁명 이후 학생시위가 격화되기를 기대했으며 그것을 거사 명분으로 삼으려 모의했다.

▲ 5.16 군사반란 후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반란군에 동원된 부대 장병들에게 훈시하는 장도영 당시 최고회의의장.


황군 장교 박정희의 금의환향과 첫 위세 과시

박정희의 권력욕은 일제 때 비교적 봉급도 괜찮았고 사회적 지위도 좋았던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충성혈서를 쓴 뒤 입교한 데서 잘 드러난다. 일제하 면서기도 유지노릇을 했다. 그런데 면서기 월급이 20원일 때 사범학교 학생은 그 두 배의 수당을 받았으니 교사가 되면 더 말할 나위 없었다. 박정희는 그런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지원한 것이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황군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고향 방문 길에 오른다. 20대 젊은 장교의 금의환향인 셈이었다. 자신이 교사로 근무하던 문경보통학교가 있는 읍내로 간 그는 군수와 경찰서장, 그리고 교장을 불러모았다.

그는 군 장교의 위풍재와도 같은 긴 칼을 빼어 방의 문턱에 꼽고는 지방 관리들에게 4년여 전의 옛 유감을 따졌다. 세 사람의 문관은 황군 소위 박정희에게 사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 군군주의 체제 아래서 황군 장교의 위세를 보여주는 일화다. 박정희가 교사직을 버리고 어렵게 군관학교에 간 것은 군국주의 체제에서 바로 이처럼 권력의 소재가 어디인지를 잘 알았으며 그것에 따른 출세욕의 발로였다.

4.19 혁명을 보면서 더욱 군사반란에 의한 정권찬탈 의지를 다진 박정희는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자신이 군관학교 시절부터 군장교로 근무하면서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을 포섭했다. 그리고는 최종적으로 거사가 성공을 거두기 위한 관건은 육참총장인 장도영을 끌어들이는 일에 달렸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반란에 대한 진압군 동원을 막을 수 있다. 특히 박정희는 자신의 동기이며 친구이지만 군인의 정치개입과 군사반란에 극력 반대의사를 피력해 온 1군사령관 이한림이 마음에 걸렸다. 전투력과 조직이 강한 야전군이 반란군 진압에 나설 경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을 사전에 견제할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육군 총수인 장도영를 포섭하는 일이었다. 4.19 혁명이 나기 전 장도영이 대구에서 2군사령관으로 있을 때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던 박정희는 이미 그에게 정권찬탈을 위한 거사의 뜻을 얘기한 바 있었다.

그 때 장도영은 "군사혁명이 성공할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인 생각을 밝히면서도 "박 장군이 잘 해 보시오"라고 응대했다.

장도영, 일본군 동지의식과 육참총장 권능 사이에서 혼란

박정희는 그런 장도영이 육참총장에 올랐으니 그를 포섭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61년 4월10일 박정희는 대구 2군사령부에서 상경해 육참총장실로 장도영을 찾아간다.

"각하,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시지요."
"박 장군이 웬 일이요. 이거 반갑습니다."
"최경록 사령관이 미국에 출장 중이니 박 장군이 좀 바쁘겠소 그려."
"아닙니다. 사령관 대리도 와 계시고 하니 저는 그저 한가합니다."

육참총장에서 정군파동 때문에 2군사령관으로 좌천당한 최경록이 미국 방문길에 오르자 육본은 부사령관 박정희가 있음에도 김용배 중장을 사령관 대리로 내려보냈다. 그만큼 군 수뇌들이 박정희에 대해서는 믿음을 갖지 않았다. 박정희는 더 이상 진급할 가능성도 없어서 5월말이면 예편이 예정돼 있었다.

"대구에서 언제 상경했소?"
"어제 올라왔습니다."
"비둘기작전은 잘 준비돼 갑니까. 그것 때문에 좀 바쁘겠구려."

비둘기작전이란 4.19혁명 1주년 때 학생시위 사태가 다시 터질 것에 대비한 진압계획을 뜻한다. 정부와 군은 또 다시 큰 시위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박정희와 육사8기 9명의 충무장 결의 그룹은 거사 날짜를 바로 이 4.19혁명 1주년 기념일로 잡았다. 학생과 시민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 혼란상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선다는 음모였다. 정부와 군 수뇌부는 시위사태가 터지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진압계획을 준비했고 반란 음모세력은 혼란이 불거질 것을 기대하는 동상이몽이었다.

"각하, 좀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래요? 2군에 무슨 일이라도 있소?"
"각하, 지금 이 나라 꼴이 그냥 놔둬도 되겠습니까? 나라를 구할 혁명이 있어야 합니다."
"뭐, 뭐요? 혁명이라니 …"

장도영은 놀랐다. 박정희가 전에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거사를 논의한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는 어안이 벙벙한 장도영에게 몸을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학생들이 남북교류를 하자고 하질 않나, 용공적인 구호도 나오고요, 정부는 무능하고 혼란이 더 짙어지고 민생은 먹고살기조차 더 어려워지고 있잖습니까. 이대로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하다간 나라가 절단나게 생겼습니다. 뜻있는 군 장교들이 나서서 혁명을 해야 합니다."
"박 장군, 지금 혁명을 해 갖고 성공할 수 있겠소?
"결과는 하늘에 맡기더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잘못되는 날이면 그만한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각하께 결로 누가 가지 않도록 할 테니 영도자로 나서 주십시오."

지금까지 박정희에게는 장도영이 상관으로서 여러 차례 은덕을 베풀었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두루뭉수리로 포용력을 보여 온 장도영도 여기서는 무언가 분명하게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군사반란을 함께 하자는 박정희에 대해 일본군 출신으로서 동지의식과 육군 총수의 권능 사이에서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16> 전두환도 군권장악 후 정권찬탈

반란군 3대 타깃은 육군본부, 장면 총리, 방송국

 

박정희는 군사반란에 일부 불만분자들만이 아니라 군부 전체가 참여했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육참총장 장도영을 포섭하는데 공을 들였다. 그것은 무혈 쿠데타를 위해서도 필요했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유엔군 모자를 쓰고 있는 주한미군 사령부 측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박정희에게 장도영은 단순히 상관으로서가 아니라 여러차례 위기에서 구출해준 은인이었다. 장도영 자신은 일본 동양대학 사학과에 재학 중 학병으로 일군에 들어갔지만 일본 육사 출신인 박정희가 군사 지식과 역량 면에서 우위에 있으며 뿐만 아니라 나이도 자신보다 다섯 살 이상이나 많았다. 그런 박정희가 6.25 전쟁 전부터 육군본부 정보국장이던 자신의 부하로 근무했으니 호락호락하게 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1948년 여수순천 반란사건 때 남로당의 군사프락치인 것이 발각돼 구속되자 장도영은 그의 구명운동에 나선다. 당시 일본군 출신 다수가 군 수뇌부를 차지하고 있어서 장도영은 정일권 백선엽 등과 함께 박정희를 구출할 수 있었다. 물론 박정희가 풀려난 것은 군내에 있던 남로당 조직을 진술한 '변신'이 결정적 배경이었지만 다른 한편 장도영 등이 요로에 탄원한 것도 실질적 효과를 보았다. 박정희가 풀려나자 장도영은 예편당해 민간인 신분인 박정희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기용한다. 일본군 계열의 끈끈한 선후배 관계였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육본 정보국의 문관 신분이던 박정희를 다시 현역 소령으로 복귀시켰다.

4.19혁명 후에도 2군사령관이던 장도영은 박정희가 육사8기 정군파 김종필 등의 하극상 사건으로 육본 작전참모부장에서 밀려나 갈 곳이 없을 때 2군 부사령관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어차피 박정희는 소장에서 중장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없었으며 그래서 61년 5월말 옷을 벗게 돼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4.19혁명 후 여론에 편승한 육사8기 정군파의 보스 노릇을 했고 장도영은 3.15 부정선거 때 2군사령관으로 그 부정 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정군운동의 명분 중 하나는 군내 부정선거 책임자 문책이었다. 여기서 장도영은 정군파의 보스 박정희를 끌어안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장도영과 박정희는 상당히 긴밀하게 교유하는 직속 상관과 부하 사이가 된 것이다.

박정희 "협조해 주시든가, 묵인만이라도 해 주십시오."
장도영 "밀고하거나 무력으로 막지는 않겠소."


1961년 4월10일 낮, 육군본부 총장실.
갑자기 찾아와 군사혁명 거사를 말하며 영도자로 모시겠다는 박정희 앞에서 장도영은 당황했다. 우선 육군참모총장이 군사반란에 동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육참총장에게는 정보수사기관으로 육군방첩대와 헌병대가 있다. 언제든 군내에 범죄혐의자가 있으면 체포하고 수사해서 기소하게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를 체포할만한 결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가 행동에 나서지 않도록 설득해 본다.

"이봐요 박 장군, 나는 그런 허무맹랑한 혁명 같은 것에 협조할 수 없어요."
"그럼, 묵인만이라도 해 주십시오."

박정희가 장도영에게 묵인을 요청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뜻이 담겨있다. 자신이 주도하는 군사반란이 벌어져도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진압군 동원을 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러나 장도영은 처음에"묵인해 달라"는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글쎄, 나는 협조도 묵인도 할 수 없소."
"각하, 이 썩어가는 정치와 도탄에 빠진 민생고 때문에 정의감 있는 장교들이 나서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 그 장교들이 각하를 모시려고 합니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끈질긴 요구와 경의 표시에 또 한번 엉거주춤했다. 설마하니 박정희가 나라와 군부를 망가트리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유엔군의 모자를 쓴 주한미군이 5만명이나 있는데다 한국군 전방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권도 유엔군사령관이 쥐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군사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단 말인가. 또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군 부대를 동원하려 해도 유엔군사령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사실 군 작전권이 주한 유엔군사령관에 있기 때문에 진압군의 동원이 육참총장의 전권사항은 아니었다. 장도영은 일단 박정희에게 공을 던지기로 했다.

"나는 들은 얘기를 밀고하거나 무력으로 막지는 않겠소. 박 장군이 알아서 하시오."
"그럼 묵인하시고 거사가 성공하면 저희 지도자가 돼 주시겠다는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박정희는 그 후 장도영에 대해 집중 관리에 들어갔다. 며칠 후엔 장도영의 측근 장성 중 한명인 논산훈련소장 최홍희를 보내 쿠데타군의 규모가 전군에 퍼져 있음을 귀띔하게 했다. 장도영은 최홍희가 박정희에 포섭된 것을 처음으로 본인에게서 확인하고 내심 놀랐다. 쿠데타 동조세력이 얼마나 될지 정확히 헤아려지지도 않았고 더욱 불안해졌다. 얼마 지나 박정희는 또 사람을 보내 정권장악 후 정부 운영의 방향과 정책들에 대한 설명자료도 전달했다. 일련의 심리전이기도 하고 또한 군사반란의 공범으로 만드는 공작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박정희는 상당한 비밀 누설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장도영의 마음을 사로잡느라 무진 애썼다.

채명신 "장도영 총장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박정희 "우유부단한 기회주의자니까, 위험인물은 아니지."


박정희와 육사8기 하극상 정군파는 군사반란 D 데이를 당초 4.19혁명 1주년 기념일로 정했었다. 이들은 혁명기념일 날 학생들의 제2봉기가 터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게 될 때 혼란상과 국가안보 위기를 이유로 군사쿠데타를 거사할 흉계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중했고 서울 거리는 조용했다. 숨죽이며 사회혼란상을 기대하던 군사반란 세력은 혀를 차며 학생들을 원망했다.

1차 거사기회를 놓친 군사반란 세력은 다시 5월12일을 D 데이로 정했다. 그런데 쿠데타 작전의 선봉부대인 박치옥의 공수단이 그 날 서울 외곽지역에서 훈련을 하라는 육군본부의 훈령이 떨어졌다. 박정희는 애가 탔다.

5월11일, 일이 어그러진 상황에서 박정희는 반란군 조직을 점검해야 했다. 그는 서울에서 쿠데타 핵심그룹을 만난 뒤 급거 전방으로 가 5사단장 채명신을 만난다.

"채 장군, 별 일 없지요. 일부 기밀이 새 나가기도 하고 또 공수단이 하필 육본 훈련에 걸리기도 해서 거사 날짜가 차질이 생겼소. 그러나 조속히 날을 다시 잡아서 행동해야 할 것 같소."
"그런데 장도영 총장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장도영에 대한 박정희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반란군 가담자 중 고급 지휘관일수록 육군 총수인 장도영의 의중을 궁금해 했고 박정희에게 그것을 확인하려 했다. 거사 전에 육참총장의 생각은 매우 중요한 변수였다.

채명신은 만약 육참총장인 장도영이 쿠데타를 진압하겠다고 마음먹을 경우 일이 어려워질 것으로 우려했다. 게다가 공수단장 박치옥이나 6군단 포병사령관 문재준 등 육사5기 동기생들과 함께 자신도 장도영과는 가까운 처지였다. 박정희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도영에 대해 심중의 일면을 드러냈다. 그는 장도영의 속마음과 결단력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글쎄, 장 총장은 기밀누설에 대해 정보 보고를 들었을 텐데 별 조치가 없어요. 그가 큰 위험인물은 아닌 것 같소. 장 총장은 원래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자지. 그래서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하면 언제 어떻게 태도가 바뀔지 몰라요. 우리가 그 사람의 변덕에 발목이 잡히지 않도록 빨리 단안을 내려야 하겠소. 내 신속하게 계획 전반을 검토하고 결정을 알려줄 테니 차질 없이 합시다."

우유부단하고 사람 좋은 장도영과 오랫동안 반란을 꿈꾸며 권력욕으로 다져진 박정희, 5.16 군사반란은 두 사람의 기 싸움에서도 승부가 이미 예정돼 있던 셈이다.

▲1961년 5월16일 오전 군사반란군이 서울 중앙청을 점령했다.


D데이는 1군창설 기념일 행사로 지휘관 공백인 5월16일 0시
제1선봉 공수단, 제2선봉 해병여단, 거사 총병력은 4000


전방에서 서울로 온 박정희는 반란군 핵심들을 만나 세 번째로 거사날짜를 검토했다. 두 번째로 어그러진 5월12일은 금요일이었고 여기서 가장 가까운 가능한 날을 잡아야했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군용 카렌다에 '1군 창설기념일'이 쓰여 있는 5월15일, 월요일을 응시했다. 그날 야전군 고급지휘관들은 모두 1군사령부 기념식에 참석하느라 부대를 떠난다. 지휘관의 공백 상태에서 하루만에 주요 점령계획을 완료하고 국민에게 전파하기만 하면 거사는 성공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무총리 장면과 국방장관 현석호도 1군사령부 창설기념식에 참석하게 돼 있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장면은 쿠데타의 주요 행동계획 상 거사 즉시 체포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야 정부가 무력화되고 새로운 '군사혁명위원회'가 들어설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부 전복이었다. 그런 장면이 1군사령부에 가 있을 때 거사를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국무총리가 1군사령부에 앉아서 진압 명령을 내리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매우 작전으로는 패착이 아닐 수 없다.

반란군 지도부는 묘수를 짜냈다. 국무총리 장면이 서울로 귀환하고 야전군 지휘관들은 1군사령부에서 칵테일 파티를 가진 후 잠들었을 시각인 5월16일 0시, 그 시각이야말로 최고의 H 아워였다.

반란군의 제1선봉은 박치옥과 오정근, 차지철 등이 중심을 이룬 공수단이었다. 그리고 전 해병대사령관 김동하와 해병여단장 김윤근 등이 지휘하는 해병대가 제2선봉을 맡았다. 이어 6군단의 포병사령관 문재준과 대대장 신윤창이 지휘하는 포병단, 서울의 김재춘이 참모장인 6관구사령부의 예하 병력과 30사단, 경기도의 33사단, 그리고 전방 채명신의 5사단 등이 주축이었다. 병력을 헤아려 보니 도합 4000여명. 공수단과 해병여단은 한강교를 넘어 오게 돼 있고 6군단 포병단 등 전방부대는 의정부와 미아리를 거쳐 올 것이다.

거사의 핵심 3대 타깃은 육군본부와 국무총리 장면의 거처인 반도호텔 808호실, 그리고 남산의 중앙방송국이었다. 이어 중앙청과 서울시청 앞 광장 등 서울의 관가 요소를 점령한다. 반란군의 작전계획은 주도면밀하게 군권 장악과 정부 전복, 그리고 민심 장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먼저 군 지휘부를 점령해 무력을 장악한 뒤 권력을 찬탈하는 것은 전형적인 수법이다. 박정희의 후예 전두환도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 뒤 정권찬탈에 나섰다.

 

 

<17> 청진동 술집에서 궁정동 안가까지

박정희, 만취상태서 반란군 지휘

 

5.16 군사반란은 박정희가 술을 상당량 마시고 지휘한 '취중 쿠데타'였다. 거사 시점으로 잡은 5월16일 0시가 되기 2시간 전 준비상황에 차질이 생기자 그는 청진동 술집에서 막걸리를 서너 대접이나 마셨다. 이로 인해 박정희는 거의 만취상태였으며 당시 전화 통화한 장도영이 그의 발음에서 취기를 느낄 정도였다.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박 장군, 지금 취한 것 같은데 그만 들어가고 내일 얘기하자"고 말했다. 쿠데타라고 해도 주모자가 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거사에 나선 것이 아니라 초조감과 스트레스를 술로 달래는 행태였다. 그것은 '구국의 결단'이나 '역사적 혁명'을 감행하고자 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될 수 없었다. 이른바'구국의 혁명'이라는 주장과는 턱 없이 거리가 멀었다.

1961년 5월 말 예편 예정 알고 술타령 깊어져

1961년 1월부터 육군본부는 군 장성 인사작업에 착수한다. 장성급에 대한 인사자력표를 놓고 평가작업이 벌어졌다. 인사자력표 중에서도 군 정보수사기관이 제공하는 보안심사자료가 가장 중요했다. 과거 사상이 의심스러운 전력이 있거나 근무 평가가 나쁜 장성 수십 명이 예편 대상자로 정해졌으며 여기에 박정희도 포함됐다. 이들은 그해 5월 말 예편하게 돼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파악한 박정희는 화풀이로 술을 더 자주 마시면서 군사반란 의지를 다졌다.

오랫동안 쿠데타를 꿈꾸었으나 그것이 뜻대로 잘 될 리 없었다. 자연 불만이 쌓여가니 음주량도 늘어만 갔다. 불평분자의 알콜 중독 같은 것이었다.

그가 처음 쿠데타를 생각한 것은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 때였다. 대통령 이승만이 자신의 연임을 위해 무리하게 개헌을 추진하자 야당 측이 저항하면서 정치적 혼란상이 벌어진다. 6.25 전쟁 통에 피난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일이니 권력욕에 사로잡힌 독재자는 참으로 국민의 고난과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것 같다.

이승만은 야당 인사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에게 계엄령과 함께 군대 동원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종찬은 군의 정치개입을 확고하게 반대하면서 이승만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 일로 이종찬은 옷을 벗어야 했다. 그는 군내에 신망이 높았고 일본군 계열이 아니라도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이때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대령 신분인 박정희가 이종찬을 찾아간다.

"각하, 군이 나서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됩니다. 군사혁명으로 나라를 구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승만의 권력욕에 대한 반감으로 정의로운 행동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박정희의 첫 정치군인 행보였다. 그러나 당시 이종찬은 5.16 직전의 장도영과 달리 태도가 분명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군이 정치에 개입하면 일본 군국주의처럼 나라를 망치는 거 몰라 그래? 대통령의 군 동원 명령에도 내 직을 걸고 반대한 건 그래서야."

이종찬은 박정희의 쿠데타 주장이 그저 독재자의 전횡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는 줄만 알았다. 박정희의 마음 속 깊이 군사반란과 정권찬탈에 대한 망상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박정희가 그런 흉계를 남몰래 키우고 있는 암적 정치군인이라는 사실을 이종찬이 간파했더라면 그냥 물리치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박정희의 입에서는 군사혁명 얘기가 수시로 흘러나왔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동기생인 이한림이나 장도영이 육참총장이 되기 전 자신의 직속상관으로 2군사령관일 때부터 군사혁명을 하자고 졸랐다. 그러나 모두가 핀잔을 놓으면서 그냥 흘려 넘기곤 했다. 가까운 장성들 사이에서 소외되자 박정희는 술과 벗을 삼으며 이런 저런 궁리에 빠졌다.

반란군 차질 빚자 청진동 술집에서 막걸리 세 사발 들이켜
"탄로났는데 가 본들 어떡하겠소, 한잔 하며 생각해 보자"


운명의 날로 잡은 5월16일 0시를 기다리던 15일 밤에도 박정희는 반란군의 행동계획이 초기에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초조해 하면서 술을 마셨다.

15일 밤 9시반 경, 서울 신당동 박정희의 자택.
그는 운명의 거사를 하러 나가기 위해 채비하기 시작했다.

"임자, 거기 내 가방에 권총 좀 꺼내 줘"
부인 육영수도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육영수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권총 벨트를 조심스럽게 꺼내 남편에게 건네준다. 육영수는 한 마디 했다.

"여보, 애들은 지금 학교 숙제를 하고 있어요."
"그래 …?"

박정희는 집을 나가면 그 후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들 방으로 갔다. 국민학생인 근혜와 근영이 책상 앞에 엎드려 공부하고 아직 유치원생인 지만은 누워서 잠 잘 준비다. 그는 말없이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막 나가려는 데 전화벨이 울린다. 거사 본부로 정해 놓은 6관구사령부 참모장인 김재춘 대령이었다. 밤 10시까지 6관구에 가기로 돼 있었다.

"그래, 김 대령, 내 지금 6관구로 갈 참인데 …"
"각하, 30사단에서 우리와 함께 일을 도모해 온 부사단장과 참모장이 사단장에게 밀고했습니다. 일이 탄로나서 큰일입니다. 33사단도 장도영 총장의 단속으로 병력 출동이 어려울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여기 6관구사령부엔 지금 장도영 총장이 보낸 헌병대가 와 있습니다."

박정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는 더 미룰 수도 없고 계획이 누설됐다면 진압군 보다 먼저 방첩대와 헌병대가 반란군 주모자를 체포하러 나설 것이다. 그가 집을 나서려는데 육본 작전참모부 차장 장경순 준장(후에 공화당 의원, 국회 부의장 지냄)과 정보학교장 한웅진 준장(3관구사령관 지냄)이 들어선다. 장경순은 4.19혁명 직후 박정희가 작전참모부장일 때 차장이었고 한웅진은 육사2기 동기생이다. 두 사람도 상황이 긴박함을 알고 급히 박정희의 집으로 온 것이다.

"지금 신변이 위험하니 우선 피신해야 하겠습니다. 집에서 빨리 나가시지요."

박정희의 집 앞에는 이미 방첩대 지프차가 와 감시하고 있었다. 장도영의 명령만 떨어지면 체포할 태세다. 박정희는 한웅진과 같은 차를 타고 장경순이 다른 차로 방첩대 차를 교란하기로 했다. 한웅진은 박정희를 자신이 유숙하고 있는 청진동의 여관으로 데려갔다. 여관방에 쭈그리고 앉은 박정희는 애가 탔고 또 장도영에 대한 원망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방첩대 차를 따돌리고 뒤늦게 나타난 장경순은 박정희에게 반란군 지휘본부인 6관구사령부로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미 탄로가 났는데 내가 가본들 어떡하겠소?"
"그래도 동지들이 눈이 빠지게 각하가 오시기를 기다릴 텐데요."

박정희는 한숨을 내 쉬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두 가지 차질을 그대로 놔두고 밀어붙여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다른 핵심부대들은 예정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거사의 제1선봉부대인 박치옥의 공수단도 육본이 지시한 훈련에 참가 중인데 제대로 출동할 수 있을 것인지 … 불안과 초조가 밀려오고 가슴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박정희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대포나 한 잔 하면서 생각해 봅시다."

박정희가 앞서고 장경순과 한웅진이 뒤 따라서 세 장성은 청진동 골목의 한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막걸리 술상이 나오자 박정희는 다른 두 사람을 상관하지 않고 자작으로 연거푸 세 대접이나 들이켰다. 술이 아니라 마치 냉수를 마시는 것 같았다.
여기서 술에 만취한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을 지휘하는 모습은 여러 대표적 다큐멘터리작가들이 묘사해 놓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져 온 군사권위주의 정권이 1990년대 초 종말에 다다르자 어두웠던 시절 제대로 쓰지 못했던 비화들이 봇물 터지듯 신문 방송과 출판가를 휩쓸었다. 독재정권의 힘이 빠질 조짐을 보이니 온갖 증언과 기록문헌들에 바탕한 정치다큐멘터리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다음은 김교식이 쓴 『제3공화국』(하서출판사 1993년2월 출간) 제2권의 기록이다. 김교식은 동양방송(TBC)의 장기 다큐멘터리 드라머'광복20년'을 집필해서 명성을 얻은 대표적 사극 작가다.

1961년 5월16일 0시.
그 0시를 박정희는 청진동의 어느 술집에서 맞고 있었다.
"각하,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정보로 봐서 이 여관도 결코 안전한 곳은 못 됩니다. 일단 여기를 나기시죠."
한웅진의 이같은 권유에 따라 박정희는 청진동 미화여관을 떠나 근처에 있는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정희는 초조한 듯 꽤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 …
자정의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고 나서부터는 지나가는 차량들의 소리도 거의 끊어진 듯했다. 박정희는 어지간히 마신 술에 취해 있었다.


또 다른 다큐멘터리 작가는 그날 박정희의 만취상태에 대해 더욱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다음은 이영신의 대하정치실록 『격동 30년』(고려원 출판사 1992년5월 출간) 1권의 내용이다. 이 책은 이영신이 MBC의 정치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위촉받아 집필했다.

여관에서 나온 세 사람은 청진동의 한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술상이 들어오자 박정희는 마치 기갈들린 사람 모양으로 자작으로 연거푸 세 대접이나 대폿잔을 비웠다.
… …
밤 11시30분, 청진동 대폿집.
박정희는 취했다. 취하자 그의 사고력이 한골수로만 파고 들었다. "쿠데타를 꿈 꾸어 오기 10년, 이제 거사하려는 마당에 탄로났다고 해서 내가 여기 앉아서 대폿잔이나 기울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침내 박정희는 결심을 했다. 취기 덕분이었다.
… …
박정희를 에워쌌던 장교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라 부사령관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박정희의 거동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입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역겨워할 정도로 심하게 술냄새가 풍겨지고 있었다.
… …
"여러분, 우리는 4.19 학생혁명 후 그래도 나라가 바로잡혀지기를 기대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박정희가 입을 열 때마다 술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청진동 대폿집에서 거나하게 취한 박정희는 거사 예정시각인 0시가 지나면서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쿠데타를 꿈 꾸어오기 10년여, 여기서 주저앉으면 이제 더 이상 기회도 없다. 5월 말이면 옷을 벗어야 한다. 실패하고 체포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해봐야 한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장성도 그를 따라 나섰다.

술에 취해 진압군 장교들 대기실로 잘못 들어가 위기일발
장도영 통화 "박 장군, 술 취했으니 내일 만나 얘기하자"

박정희 일행은 0시를 넘겨 6관구사령부에 도착했다. 반란군 핵심들은 김재춘 참모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육군본부와 사령관인 서종철(육사1기, 나중에 육참총장과 국방장관 지냄)의 명령을 기다리며 반란군의 동태를 지켜보던 사령부 참모들은 부사령관실에 모여 있었다. 술에 취한 박정희는 적진에 해당하는 그 부사령관실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반란군 동지들은 안 보이고 낯선 중령 소령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것 아닌가. 박정희는 무언가 방을 잘 못 들어왔구나 느껴졌지만 내친김에 그 앞에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는 4.19 학생혁명으로 정치인들이 각성하고 나라가 바로 잡혀지기를 기대해 왔소. 그러나 나라꼴은 보다시피 이게 되겠습니까. …
우리 군이 궐기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좌시하지 말고 군이 나서서 제대로 혁명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목숨을 걸고 나섰습니다."

뒤따라 들어 온 김재춘, 오치성 대령 등 쿠데타 핵심들은 박정희의 양 옆에 서서 분위기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박정희의 입에서는 옆 사람이 역겨울 정도로 심하게 술 냄새가 풍기는 것 아닌가. 그제야 사태를 알아차린 반란군 핵심참모들은 재빨리 박정희를 에워싸고 나가 지휘부가 차려진 김재춘 참모장 실로 데려갔다. 이곳 사령부 지휘부에 육본의 어떤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체포당하고 말지도 모르는 위기였다.

한편 장도영은 육군참모차장 장창국, 정보참모부장 김용배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다가 육군 방첩대장 이철희와 서울지구 506방첩대장 이희영에게서 쿠데타군 출동 움직임을 보고받는다. 급히 506방첩대로 간 장도영은 박정희의 위치부터 파악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의 반란군 지휘부에 있는 박정희와 전화를 연결하게 했다.

"아니 박 장군,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요?"
"각하, 오늘의 거사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우리 혁명군은 출동했고 서울 요소요소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전화 목소리에서 진한 술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저렇게 술을 마신 상태에서 무슨 혁명을 한단 말인가. 장도영은 박정희를 달랬다.

"박 장군, 오늘은 술도 취한 것 같고 계획이 이미 알려져서 부대 출동을 내가 막았소. 그만 집으로 돌아갔다가 내일 나하고 만나 얘기합시다."
"각하, 여러 부대에서 병력이 움직였습니다. 일을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말겠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글쎄,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박정희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장도영은 빈 전화기에 대고 "이번엔 정부쪽에 경고 정도만 하고 그만 둡시다."하면서 헛수고를 계속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5월16일 이렇게 청진동 술집에서 시작해 79년 10월26일 궁정동 비밀술집에서 막을 내린 셈이다. 10.26 박정희 살해사건도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궁정동 안가의 비밀연회장에서 벌어졌다. 박정희와 그의 최측근 권력자들이 함께 위스키를 마시는 자리였다.

상습음주 독재자 과민한 의심과 변덕으로 측근 고문 다반사
작은 불쾌감과 괘씸죄도 감정과민으로 가혹한 탄압사태 불러

물론 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무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될까. 그 개인적인 성정이 모진 사람일 경우 다른 여러 사람을 해칠 위험성은 크기 마련이다. 독재권력을 쥔 사람이 상습 음주자라면 어떻게 될까. 독재권력이란 총칼보다도 더욱 넓고 깊게 국민을 해친다. 특히 '술 취한'독재자는 심리상태가 불안정하고 기복이 심하며 측근까지도 신경과민일 정도로 의심하면서 변덕을 부린다. 박정희의 이른바 용인술이란 측근 부하들에 대한 의심과 변덕이었다.

▲박정희는 상습 음주벽을 가진 독재권력자로 과민한 의심과 변덕 때문에 측근들까지도 고문당하는 체제폭력의 통치를 폈다. 박정희 권력의 종말을 고한 1979년 10.26사건도 연예계 여자들이 동석한 궁정동 안가의 술자리(사진)에서 벌어졌으며, 1961년 5.16 군사반란을 지휘할 때도 그는 만취상태였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실세노릇을 하던 권력자 중 상당수가 그의 과민한 의심과 변덕에 희생을 당했다. 조그만 실언과 한 치의 불복종도 괘씸죄에 걸려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사건이 한둘이 아니었다.

1971년 10.2 항명파동으로 공화당의 핵심인물들인 김성곤 길재호 의원 등이 박정희의 명령에 따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내무장관 오치성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일사불란하게 부결시키라는 박정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1973년 3월 박정희의 군내 최측근이던 윤필용 수경사령관은 하루아침에 부정축재와 권력남용으로 몰려 구속되고 만다. 그도 여권 인사 몇몇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각하의 후계자를 골라야한다"고 말한 것이 괘씸죄가 됐다.

윤필용 사건이 실세들을 놀라게 하던 그 해 여름 박정희 정권 아래서 최장수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슬쩍 미국으로 도피한다. 언제 박정희나 다른 권력경쟁자들에 의해 희생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유신독재의 문제점들을 진술하기도 했으나 79년 파리에 여행 중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그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의해 희생당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박정희의 속마음을 가장 잘 읽을 줄 아는 복심으로 불리며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조차 퇴임 후 해외 도피를 위해 비밀리에 출국한다. 박정희가 측근 실세들을 차례로 처치하는 것을 보고 그 변덕이 머지않아 자신에게도 향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중앙정보부의 보고에 박정희는 이후락에게 사람을 보내 "내가 설마 임자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달랬다. 이후락은 박정희의 신변보장을 받고서야 귀국해 경기도 이천에서 대외접촉을 일절 차단한 채 야인으로 지냈다.

박정희의 변덕과 측근 징벌은 부메랑과도 같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한 권총 사살로 돌아갔다. 그것은 박정희의 용인술이 실패한 결정판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 때의 권력자들도 어느날 갑자기 몰락하는 박정희 1인 독재 아래서 그의 정치적 반대자와 비판세력에 대한 가혹한 탄압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감시, 미행, 고문, 테러, 암살, 강제해직, 그리고 일상생활의 통제와 검열 … 전체주의 독재정권의 체제폭력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자행됐다. 체제폭력의 대명사는 1970년대 중후반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비델라 정권이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비델라의 가혹한 체제폭력은 세계언론에 의해 "더러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시사용어 사전에 등재됐다. 그러나 그 더러운 전쟁은 비델라보다도 박정희가 훨씬 앞선 선배로 60년대부터 시작됐다.

작은 불쾌감과 괘씸죄가 엄청난 징벌로 이어지는 것이 1인 독재 체제의 특징이다. 더구나 박정희의 이른바 '진노'는 상습 음주벽 때문에 더욱 과민한 감정표출이었으며 그로인해 비인간적 고문 같은 체제폭력이 수시로 자행됐다. 얼마나 많은 대학생, 종교인, 언론인, 야당인사들이 그렇게 박정희의 더러운 전쟁에 시달리고 희생돼야 했던가. 그 회한의 역사를 제대로 파헤치고 국민들에게 알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18> 윤보선은 계엄령 추인 거부

박정희 5.16 계엄령은 장도영의 명의 도용

 

5월16일 새벽 3시반경 반란군의 6군단 포병부대가 맨 먼저 육군본부를 점령했다. 이어 4시반, 임무를 맡은 대로 박정희 경호대의 소령 박종규와 공수단 대위 차지철이 반도호텔 808호실 국무총리 장면의 거처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장면은 소식을 듣고 이미 몸을 피한 뒤였다.

같은 시각 반란군의 중요한 목표물인 남산의 중앙방송국(KBS)을 오정근이 해병대 병력을 이끌고 점령했다.
야근을 하던 아나운서가 겁에 질려 있었다. 오정근이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 직책과 이름이 무엇이오?"
"오늘 야근 담당 박종세 아나운서입니다."
"우리는 군사혁명 부대요. 지금 막 서울 요소들을 장악했소. 이 혁명선언문을 방송하시오."

오정근이 내민 인쇄자료를 들여다 본 박종세는 얼굴이 더욱 하얗게 굳어져 갔다.
"이건, 장교님, 제 맘대로 방송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옆에 섰던 해병대 중사 하나가 소리쳤다.
"아니 이 친구, 지금 상황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혁명이 일어났다고 했잖아. 읽으라면 읽어!"

오정근과 아나운서가 대화하는 사이 반란군 지휘부의 핵심들이 방송국으로 몰려왔다. 박정희를 비롯해 김종필 김재춘 이석제 김윤근 박원빈 윤태일 송찬호 등이 함께 나타났다. 이들은 중앙방송국의 혁명방송을 내보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고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군사혁명 선언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알려지면 잠재적 저항세력의 기를 꺾을 수 있다. 아나운서 박종세는 기세등등한 반란군 지휘부의 분위기에 눌려 이른바 혁명선언문을 읽어야했다.

새벽5시 KBS 첫 방송 군사혁명 선언문 내보내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중장 장도영'은 국민기만책


5월16일 새벽 5시 KBS의 방송시작 시간, 애국가가 울려 퍼진 뒤 '군사혁명 선포문'이 낭독됐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새벽 미명을 기하여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 "

라디오방송은 그렇게 전국의 국민과 군부와 공무원 등에게 반란군이 마치 나라 전체를 장악한 것처럼 착각하게 했다. 전쟁 중의 심리전과도 같은 효과였다. 또한 더 중요한 것으로 새벽 5시 방송은 신호였다. 사전에 짜놓은 전국의 반란군 가담 부대들이 이 방송을 신호로 일제히 행동 개시에 들어갔다.
방송은 계속해서 군사혁명위원회의 이름으로 혁명공약을 내보냈다.

"…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
… …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 …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단기 4294년 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장도영 "

방송시각 직후 서울 상공에서는 항공학교장 이원엽이 광주에서 몰고 온 L-19 다섯 대가 혁명선언문을 담은 전단 수십만장을 살포하고 있었다. 수도 서울의 시민들은 새벽 방송과 함께 길거리 떨어진 군사혁명 삐라를 주워들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 1961년 5월16일 오전 박정희의 끈질긴 요구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직을 수락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반란군의 공개 행사장에 나란히 섰다.


박정희 이름 내건 정정당당한 거사 못하고
'과업 성취 후 군대복귀'공작적 기만술 공약


군사혁명 선포문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장도영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장도영은 군사반란에 동의하지 않고 박정희에게 출동한 군 부대를 원위치시키라고 계속 요구하는 중이었다. 반란군 측은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의 명의를 도용하기로 한 것이다. 처음부터 주모자인 박정희의 이름을 내 걸고 정정당당하게 거사한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구국의 결단을 요구할만한 국가위기 상황이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대의명분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명분 없는 군사행동이기 때문에 안으로는 국민의 압력이 두려웠고 밖으로는 유엔군사령부를 맡고 있는 주한미군과 국제사회의 눈길이 걱정스러웠다. 특히 주한 유엔군사령부는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군 행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진압작전을 육군본부에 요구할 수 있었다. 진압작전이 발동될 경우 무력이 가장 큰 제1야전군을 반란군으로선 감당하기가 불가능한 것이 명확한 현실이었다. 제1야전군 사령관 이한림은 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일본육사까지 함께 다닌 동기생이지만 장면이 신임하는 직계였다. 뿐만아니라 이한림은 박정희의 입에 달린 군사혁명 계획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하면서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하는 소신을 강하게 견지했다.

박정희의 반란군 지휘부가 장도영의 이름을 도용하기로 한 것은 이런 여러 난관들을 돌파하기 위한 기만술이었다. 육군참모총장의 이름을 내걸어야 우선 전국의 군부대들과 주한미군 측의 진압 결정을 막고 국민들에게도 무게감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계산한 것이다. 그러고도 턱 없이 모자란 명분쌓기를 이들은 "과업 성취 후 군대 복귀"로 하나 더 보완하려 했다.

박정희 정권의 그 후 행보를 살펴 보면 군대 복귀란 국민에 대한 기만이었다. 63년 12월 이른바 민정이양이란 박정희와 반란군 장교들 다수가 군복을 벗고 공화당에 입당하고 선거에 출마한 허구적 약속이행이었다. 이어 1969년 3선개헌과 72년 유신쿠데타 등의 독재권력 강화를 보았을 때 처음부터 박정희와 반란군 세력의 군대귀란 난관을 모면하기 위한 공작적 기만책에 불과했다.

군사혁명 방송을 들으며 육군본부에 들어선 장도영은 자신이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 방송되자 박정희를 떠 올렸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자신이 박정희와 반란군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장도영으로선 박정희의 속셈을 다 헤아릴 수 없었지만 최소한 자신의 신변 위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여유는 가질 수 있었다. 다른 한편 반란군이 얼마나 조직화 돼 있으며 어느 정도 목표물들을 장악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는 박정희와 담판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새벽 5시반경 육군참모총장실.
박정희가 장도영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입을 열었다.

"각하, 출동 전에 직접 보고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장도영은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장도영의 옆에 서 있던 미국 군사고문단장 하우스 소장이 박정희를 쏘아보며 힐난했다.
"Are you commander of a rebel army, general Park? (당신이 반란군 지휘관, 박 장군이오?) 지휘계통의 작전명령 없이 출동한 군사행동은 불법이오."

박정희는 하우스가 영어로 말하는 것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그가 무어라고 하는지 짐작했다.
"이건 우리 국내 문제인데 당신들은 관여하지 마시오!"
박정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우스는 제너럴 박이라는 이 반란군 지휘자의 신원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2차대전 때는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적인 일본군 장교였고 또 해방후 에는 공산주의 남로당의 군사 프락치로 미 군정과 남한 민족진영의 적이었던 문제 장교가 어떻게 장성이 돼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는 박정희와 더 이상 언쟁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대로 주한미군 사령관인 매그루더 대장에게 가서 쿠데타 진압을 강력히 건의한다.

미 군사고문단장이 나가버리자 장도영은 박정희를 향해 담판을 시작했다.

"박 장군, 도대체 어쩌려고 이런 일을 벌이는 거요?"
"각하, 계획은 이미 예전에 누차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대로 군사혁명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박 장군, 이 정도 선에서 정부에 경고도 된 것 같으니 한번 더 약속을 받든지 하고 원대복귀하는 게 좋겠소."

여기서 박정희는 언성을 높였다.
"각하, 지금 무슨 말씀 하십니까. 저는 처음부터 각하와 함께 거사하려고 계획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저 젊은 장교들이 목숨을 걸고 이미 출동했는데 어떻게 원대복귀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됩니다."

육본 참모와 반란군 장교들 연석회의 험악

장도영은 계속 평행선을 달리는 박정희와 담판해 봤자 소용이 없음을 느꼈다. 그는 마지막으로 박정희가 말하는 반란군 젊은 장교들을 직접 설득해야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장도영은 육군본부 참모들과 반란군 장교들을 회의실에 모두 모이게 했다. 양측의 연석회의인 셈이다.

아침 8시 육군본부 참모회의실.
육본의 장성급 참모들과 반란군에 가담한 장교들이 마주보고 앉았다.
한 쪽에는 장도영과 참모차장 장창국 중장, 정보참모부장 김용배 중장, 송석하 소장 등 모두가 육본 참모인 장성들이 앉았다. 맞은 편의 반란군 장교들은 박정희를 비롯, 김동하 예비역 해병 소장과 김윤근 한웅진 윤태일 준장 등이 자리했다. 그러나 장성들보다 눈빛이 강렬한 집단은 따로 있었다. 김종필, 옥창호, 길재호, 신윤창, 김형욱, 이석제, 김동환, 홍종철, 오치성 등 육사8기생과 김재춘, 박치옥, 문재준 등 5기생 출신 대령 중령들이었다. 거기에 장성과 영관장교라는 계급 구분도 없었다. 정부군과 반란군, 정규 지휘계통과 정치군인의 구분만이 있을 뿐이었다.

장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새벽 서울에 들어 온 부대 출동은 아무 명령 근거 없이 움직인 불법 행동이고 군무이탈이오. 이것을 수습하는 최선의 방도는 출동부대들이 속히 원위치로 복귀하는 것 뿐이오."
반란군 장교들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관 장교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무리 중에 거친 숨소리를 내며 한 장교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지금 무슨 애들 장난하는 줄 아십니까? 우리는 목숨 걸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혁명을 하러 왔단 말입니다, 혁명을!"
그러자 박정희가 제지하고 나섰다.
"조용히들 하시오!
나는 총장 각하께 그 동안 누누이 군사혁명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드려 왔습니다. 우리의 혁명을 최고지도자로서 지휘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각하, 저희의 지도자가 돼 주십시오."

박정희가 그토록 인내심을 갖고 장도영에게 간청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야전군을 비롯한 전군의 동향과 주한미군 측의 반대가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굴신(屈身)이었다. 그는 이어 위협적 언사를 섞었다.
"총장 각하, 저희가 이렇게 간청하는 것은 앞으로 잘못하면 국군끼리 유혈충돌 사태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혁명이 시작됐는데 원위치로 돌아가라고 하면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각하께서 반대하시더라도 혁명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장도영도 박정희의 유혈사태 발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도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국군끼리 유혈충돌하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막아야 할 것이오. 뿐만 아니라 북괴군 동향과 치안에도 만전을 기해야 하겠소. 이런 것들을 정부와 협의할 시간이 필요하오."

장도영이 정부와 협의하겠다고 하자 즉각 반발이 터져나왔다.
"뭐요? 정부와 협의? 지금 우리가 혁명을 하는 판인데 무슨 정부와 협의한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혁명에 함께 할 것인지, 반대하는지 태도를 분명히 밝히시오!"

영관장교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갑자기 중령 한 사람이 권총을 뽑아들더니 책상을 내리쳤다. 회의장은 고성과 위협적 행동으로 소란스러워졌다. 밖에서는 허공에 대고 포를 쏘아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장도영에게 거듭 요구했다.
"각하, 군사혁명에 최고지도자로 나서 주십시오. 그리고 치안을 위해서도 빨리 계엄령을 선포해야 합니다."
"계엄령을 어떻게 선포합니까? 총리나 대통령의 승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 …"

정부 사전 승인 안 거친 불법적 계엄령 선포
12.12 당시 전두환 합수부의 정승화 체포와 같은 불법반란

박정희는 여기서 다시한번 반란의 결정을 내린다. 그는 김종필을 불러 계엄령 선포와 포고문 발표를 지시한다.
"김 중령, 계엄령을 선포해! 포고문 준비한 것 있지, 발표해!"
반란군 군사혁명위원회는 9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 선포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중장 장도영'의 이름으로 나갔다. 장도영은 합법적 절차를 밟지 않은 계엄령에 반대했지만 박정희가 일방적으로 결정해 발표했다.

정부 실권자로 군 통수권자인 국무총리 장면의 행방이 묘연한 상황에서 이들은 장도영과 함께 청와대로 가 대통령 윤보선을 면담한다. 장면 내각에 불만이 많았던 윤보선은 군사반란을 대하는 태도가 애매했다. 쿠데타를 지지할 수는 없었지만 장면 정부에 반기를 든 데 대해서 문제시하지 않았다. 반란군 수뇌들을 접견한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고 말해 많은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군사반란을 환영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해서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됐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각하께서 추인해 주십시요"라고 요청했다. 이는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 합수부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총격 연행한 뒤 대통령권한대행 최규하에게 사후 결재를 요구한 것과 똑 같은 불법 반란행위였다. 윤보선은 "사전에 승인 절차를 거쳐서 하지 않고 그대들이 결정해서 선포했으니 그대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고 밝히고 "군인들끼리 피를 흘리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되니 잘 수습하기 바라오."라고 당부했다.

당시 반란군 일각에서는 윤보선의 애매한 정치적 언급을 계엄령에 대한 추인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엄령은 헌법상 정부 수반이 국회 동의를 얻어 선포하고 군 동원 명령을 하달하게 규정돼 있다. 군부가 먼저 선포하고 사후에 정부의 승인을 받는 절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군부가 선포한 것을 사후에 정부 수반이 추인한다 하더라도 엄연한 법률행위를 문서로 해야지 구두로 하는 방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정희의 계엄령 선포는 정부 수반은 말할 것도 없고 육군참모총장 조차도 동의하지 않은 불법행위여서 5.16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한 근거로 남아있다.

우여곡절 끝에 장도영은 5월16일 오전 박정희의 끈질긴 요구로 결국 군사혁명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맡는다. 장도영의 직함은 그것 뿐이 아니었다. 내각수반,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등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의 직함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군사정부가 미국과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고 국내적으로도 안정화되지 박정희는 곧바로 장도영을 체포해 버리고 만다. 이른바 '반혁명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는 것이다. 그것은 구국의 결단 보다는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반란이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였으며 이른바 혁명동지들을 차례로 숙청하는 반인륜과 배신행위였다.

 

 

 

<19> 5.16의 성격규명 - 박근혜의 원죄 '혁명과 반란'

 

5.16 군사반란과 유신독재에 대해 "구국의 혁명으로 최선의 선택이었다"며 "역사 평가에 맡기자"는 입장을 고수해 오던 박근혜 후보가 24일 결국 180도 선회했다.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도 "같은 대법원이 서로 다른 두 개의 판결을 내 놓았으니 역사에 맡겨야 한다"고 했던 그였다. 박 후보는 이날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어법은 우회적 레토릭을 써서 최선의 선택이지만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생겼다는 얘기로 들을 수도 있었다. 5.16이 헌법과 민주정부를 유린한 군사반란이었음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지만 그 자신의 종전 입장에 비추어 보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민주진영과 웬만한 야권 인사들도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야권의 반응은 박 후보의 선거전략 상 사과 연설에 대한 또 하나의 전략적 대응이다.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다간 역풍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 있다.

박 후보는 이날 사과 연설에서"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다시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 대목도 피해 당사자들만으로 국한시킴으로써 사과의 대상을 크게 축소시켰다. 이 땅에 18년간 독재권력을 휘두르며 비인간적 고문악행과 체제폭력을 저지른 과거사에 대한 사과라면 당연히 포괄적으로 국민과 역사 앞에 머리숙여야 할 일이다. 그 다음 단계에서 직접 피해자들에게는 사과 뿐 아니라 보상대책 등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야권에서 말하는 후속대책이 그것이다.

후속대책 핵심은 국회의 유신헌법 무효화 조치
2013 새 정부 대통령이 과거사에 공식 사과해야


후속대책으로서 중요한 것은 국회의 유신헌법 무효화 조치와 관련 입법이다. 헌법학자들은 이미 유신체제 기간을 '헌법 부재의 시기'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원내에서 여야 간에 격렬한 논쟁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대안으로 2013년 새 정부의 대통령이 반민주행위에 대해 공식 사과하는 방안이 있다. 대통령이 불미스런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려면 그 만한 국민적 합의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런 국민적 합의는 선거과정에서 공약으로 내 걸고 지지를 받아 당선됨으로써 가장 확실하게 담보된다. 이번 대통령선거가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박 후보는 '국민대통합위원회'를 설치해서 과거사 문제 등을 치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대통합이란 갈등과 대립의 원인 규명을 지나치게 소홀히 하고 정치적 목적만 강조하는 용어다. 바로 박정희 시대 '국민총화'니 '총력안보' 같은 구호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전체주의 독재정권이 즐겨 쓰는 공작적 어법이다.

박 후보의 사과 연설 중 "증오에서 관용으로, 분열에서 통합으로,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원인 없는 증오나 분열이 어디 있겠는가. 또 과거 없는 오늘과 오늘 없는 미래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시간과 역사의 연속성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율법 같은 것이다. 또 과거를 지워버리려 하거나 사실과 다르게 왜곡하려 들다간 바로 역사의 교훈을 거부하는 죄로 역사의 배반에 직면하게 된다는 금언을 명심해야 한다.

박 후보의 사과는 선거전략이었다. 지지율이 계속 고공행진을 하고 대세론이 흔들림 없었다면 과연 사과했을지는 의문이다. 또 사과의 시점을 추석 며칠 전으로 잡은 것도 명절 민심에 영향을 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는 민심을 건드리는 감성적 레토릭을 심도 있게 구사했다.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모두를 흉탄에 보내드리고 개인적으로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가기도 했다"거나 "국민들께서 저에게 진정 원하시는 게 딸인 제가 아버지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특히 50대 이상 장년과 노년 세대의 감성을 크게 자극할 것이다. 영남권은 물론이려니와 어머니 육영수의 고향인 충청권의 표심을 강력히 결집시킬 것으로 보인다.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략적 계산이 여론조사 지지율 하락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이상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박 후보는 지금까지 자신의 높은 지지율에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 지키기를 걸어 옥쇄하려 했다. 그러다가 지지율이 추락세로 돌아섰고 박근혜 대세론은 가볍게 무너져 내렸다. 연달아 터진 측근 비리와 안철수 후보의 출마도 작용했지만 가장 근본적인 지지율 하락의 원죄는 그의 역사 왜곡이었다.

 

5.16은 4.19혁명 바탕한 민주정부 짓밟은 반란
내부 파벌과 권력투쟁도 대의명분 부재를 입증

박 후보의 과거사 발언 중 "5.16은 구국의 혁명으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언명은 역사왜곡의 백미였다. 5.16은 4.19혁명에 바탕해서 국민이 선출한 민주정부를 전복시킨 반란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출세주의와 권력욕, 그리고 육사8기 일부 정치장교들의 장래 불안으로 인한 한탕주의가 결합된 군사반란과 정권찬탈이었다. 5.16 주체세력 내부의 수차에 걸친 권력투쟁으로 인한 이른바 반혁명 사건을 보면 그런 역사 평가가 더욱 명확해진다.

5.16 이후 이른바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군정 내각의 구성을 보면 몇 개의 인맥과 파벌로 분류된다. 가장 핵심은 박정희와 그의 직계부대 노릇을 한 김종필 김형욱 옥창호 등의 육사8기 그룹이다. 둘째, 장도영 중심의 서북파(평안도와 황해도 출신)과 그의 측근세력인 박치옥 문재준 등의 육사5기 그룹이 있었다. 셋째는 김동하 김윤근 중심의 해병대 세력과 동북파(함경도 출신)였다.

이 중 박정희와 육사8기는 불평불만이 가장 많았고 처음부터 군사반란을 음모하고 기획한 세력이다. 그러나 반란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병력 동원은 장도영과 가까운 육사5기 그룹이 맡았다. 공수단장 박치옥,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전방 5사단장 채명신 등이 모두 5기출신이다. 그리고 해병대 세력과 동북파도 병력동원의 일각을 책임졌다.

이중 5.16 후 권력투쟁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육사8기 그룹이 주도하고 지배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김종필이 조직한 중앙정보부가 핵심적인 도구 노릇을 했다. 그 후에도 중앙정보부가 정치공작과 통치권 행사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은 것은 초기의 역할에서 성격지워졌다.

최고회의는 군사반란이 일어난 지 불과 두 달도 안 된 7월9일 장도영을 비롯한 송찬호 박치옥 문재준 방자명 등 44명을 반혁명 음모로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첫 내부 권력투쟁으로 국민들을 경악시켰다. 대부분 병력동원을 맡은 5기출신의 지휘관들로 김종필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그룹이었다. 5기 출신 중 김재춘은 박정희와의 남다른 인연으로 방첩대장을 맡아 중앙정보부와 함께 실세에 속했다.

박정희와 장도영은 처음부터 군정의 성격과 기간, 그리고 쿠데타 집단의 군대 복귀를 두고 생각이 달랐다. 박정희는 김종필 등 육사8기 그룹과 함께 정권장악이 목표였으며 애초에 군대복귀란 그들의 시나리오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장도영은 단기 군정을 거쳐 민정이양을 한 뒤 군대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처음 박정희는 장도영에게 육참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국방장관, 그리고 최고회의 의장과 내각수반직을 내주었다. 그러다가 최고위원은 다른 직책을 겸직할 수 없게 비상조치법을 만들어 장도영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장도영 "6개월~1년 정도로 군정 마무리하고 군 복귀해야"
박정희 "목숨걸고 나섰는데 혁명기간 정해 놓을 수 없어"


5.16 후 한 달 여가 지난 6월 하순 어느날, 최고회의 의장 겸 내각수반 장도영은 집무실에서 비서에게 박정희 부의장에게 면담 의사를 전하라고 지시한다. 전갈을 받은 박정희는 그날 저녁 8시 내각수반 집무실로 나타났다.

두 사람은 수인사를 한 뒤 마주 앉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물었다.

"지금 혁명과업 추진이 너무 크게 일을 벌인다는 얘기들이 있는 것 같은데, 들어 보았소? 농어촌 고리채 정리나 부정축재자 처리 같은 일들은 지나치게 근본적이고 과격한 문제에 손대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처음 정하기로는 이런 비상기간을 좀 압축해서 하고 그런 개혁조치도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성과를 낼 수 있게 하자는 것 아니었소?"

장도영은 군사정부에 대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셈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박정희는 생각이 달랐다.

"각하, 지금 우리가 하는 혁명과업은 손을 대지 않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당장 꼭 필요한 과업을 하고 있습니다."
"박 장군, 그러면 박 장군은 이 군사혁명 기간을 어느 정도로 잡고 있는 거요?"
"지금 우리는 기간 같은 것을 미리 정해놓고 제한적으로 일할 수야 없습니다."
"박 장군, 이 군사혁명이 당초 계획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려면 기간을 정하는 게 좋을 것 같고, 그 기간 내에 완성할 수 있는 과업을 선택해서 꼭 필요한 것만 해야 될 것 같은데 …"
"그럼 각하께서는 혁명의 기간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내 생각으로는 6개월 정도가 좋을 듯싶소만, 이것이 너무 짧다면 1년 이내에 기본 질서를 잡은 뒤 군정은 마무리하는 게 좋겠소."

여기서 박정희는 장도영과 근본적으로 다른 속내를 드러낸다. 박정희는 비상수단으로 군사혁명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장기적인 집권 구상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포승줄 장도영 군사법정으로 계도한 노태우 방첩대 대위 

1961년 7월 반혁명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전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을 노태우 방첩대 대위가 법정으로 계호해 가고 있다.

"1년 동안에 무슨 혁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목숨을 걸고 나선 것은 정치를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지금으로 봐서는 최소한의 혁명 목표가 단기간에 성취될 것 같지 않습니다."
"박 장군, 그러면 박 장군이 처음에 공약한 조기 민정이양과 혁명장교들의 군 복귀는 어떻게 되는 거요? 이게 그대로 이행하는 거 아니란 말이오?"

두 사람은 5.16 거사를 두고 논쟁할 때처럼 기 싸움을 벌였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속셈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이 사람이 정권장악과 장기 집권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솟구쳤다.

"그러면 박 장군은 이 혁명을 한 2년 정도로 생각하는거요?"
"각하, 아까 말씀드린대로 기간을 딱 정해놓고 하기는 어려운 거 같습니다. 어렵게 일을 시작했으니 5년이고 10년이고 혁명과업이 성과를 낼 때까지 해야지, 그냥 중도에 물러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박 장군, 내 역할은 지난 번 겸직 금지를 규정한 비상조치법으로 사실상 끝난 것 같소. 이제 최고회의 의장과 내각수반에서 물러나고 육참총장 일에만 전념하겠소."

장도영은 사실상 혼자서 군대복귀 의사를 통보한 셈이었다. 당초 비상조치법을 작성한 김종필 등의 8기그룹은 장도영에게 육참총장직을 내놓게 함으로써 그의 힘의 원천을 차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장도영은 다른 것은 다 내놓아도 민정이양 후 복귀할 자리인 육참총장직은 고수할 생각이었다. 그는 민정이양이 1년 이내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고 정치에 참여할 의사는 없었다. 두 사람은 그 날 밤 대화에 평행선을 그었고 결국 냉랭하게 헤어졌다.

장도영은 7월2일 중앙정보부와 방첩대에 의해 자택에 연금됐다가 반혁명 음모죄로 군사재판에 회보된다. 이때 포승줄로 묶인 장도영을 군사법정으로 계호해 간 방첩대 장교가 바로 내사과장 노태우 대위였다.

 

 

<20> 국회 해산조치, 사실상 내란

박정희 유신선포 다음날 야당의원들 고문폭행

 

1972년 10월17일 오후 7시,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중대 뉴스가 예고돼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대통령 박정희의 약간 감기 들리고 코 먹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오늘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 …오늘의 이 역사적 과업을 강력히 뒷받침해주는 일대 민족주체 세력의 형성을 촉성하는 대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약 2개월간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하는 바입니다. …"

방송에서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와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그리고 헌법 개정 등을 선언했다.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 정지라고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아무런 근거조항이 없는 국회 해산조치였다. 대통령의 국회 해산은 초헌법적 헌정파괴로 사실상 내란이었다. 국회를 해산한 뒤 정권 측은 야당 국회의원 중 눈엣가시 같은 인물들을 잡아들였다. 박정희가 이른바 특별선언을 발표한 10월17일은 국회가 한창 국정감사 활동을 벌이던 중이었다.

 


일제 경찰에게 전수받은 '통닭구이' 고문수법을 야당 의원들에게
중앙정보부 보안사 헌병대 불법연행…구타 물고문 등에 자결 시도도


박정희가 국회 해산을 발표한 1972년 10월17일 당일 밤, 서울 외곽지역에 자리한 아무런 간판도 장식도 없는 삭막한 콘세트 건물.
군 정보기관 소속의 한 소령이 연행돼 온 남자에게 협조해 줄 것을 나름대로 정중하게 당부한다.
"옷을 다 벗으시지요."

그는 겉옷을 모두 벗고 속내의만 남겼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4명의 점퍼 차림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속내의까지 홀랑 다 벗겼다. 점퍼들은 알몸이 된 남자의 팔과 다리를 교차하여 묶더니 그 사이에 큰 막대기를 끼워서는 두 개의 책상 사이에 걸어 놓았다. 이른바 '통닭구이'고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일본 고등경찰이 우리 독립운동가를 붙잡으면 조직을 캐기 위해 동원했다는 비인간적 고문수법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하수인들이 유신쿠데타 상황에서 야당 인사들에게 그대로 자행했다.

취조 4인조는 '통닭 남자'의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는 주전자로 물을 붓기 시작했다. 숨을 못 쉬고 거의 질식 상태인 그에게 또 사정없이 각목 구타가 가해졌다. 고문에 못 이겨 그는 풀어주면 말하겠다고 했다. 점퍼들은 3,4차례나 다짐을 받고는 그를 풀어 땅에 꿇어 앉혔다.

그때 갑자기 그의 입에서 "우드득, 딱"하는 소리가 났다. 자결하려고 혀를 깨물었으나 의치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취조하던 점퍼들은 놀라면서 그를 제지했다.

비슷한 시각, 남산 중앙정보부의 조사실이 있는 안가.

한 50대 민간인이 연행돼 들어왔다. 옷을 벗기고 군 작업복으로 갈아입힌다. 이어 의사가 건강상태를 점검했다. 의사는 책임자에게 "혈압이 높으니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중앙정보부에 끌려왔으니 누구라도 호흡이 가빠지고 혈압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병이 있을 경우 목숨을 잃는 사고가 터지기도 한다.

담당수사관은 "사실대로만 얘기하면 곧 나갈 수 있어요"라며 점잖게 취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년전 잡혀왔을 때도 심문하던 수사관으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조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진전되지 않았다.

수사관이 바뀌더니 2인조 고문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주먹질과 각목 구타가 이어졌다. 고문자들은 기가 빠진 그를 지하실로 끌고 들어갔다.

의자에 앉혀 손발을 묶고 고개를 뒤로 젖혀 얼굴에 물을 부었다.

그래도 묻는 말에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자 고문자들은 그를 어떤 작은 방에 집어 넣었다. 진공실 고문이었다. 조금 있으니 얼굴과 가슴이 바깥으로 찢어지는 것 같고 몸뚱이 전체가 공중에 둥둥 뜨는 듯했다. 비명을 지르려 해도 목소리가 안 나오고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았다.

역시 같은 시각, 서울의 한 군 헌병대 콘세트 막사.

체격이 건장한 40세 안팎의 남자 한 사람이 연행됐다. 남자가 콘세트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2명의 조사요원이 야전 침대용 각목으로 무자비하게 마구 구타했고 그는 실신해 쓰러져 버렸다. 완력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남자에게 옷을 다 벗겨서 묶으려면 상당한 실랑이가 벌어질 터였다. 그런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 그냥 처음부터 두들겨 패서 기절시켜서 해결해 버린 것이다. 그가 의식을 회복해 보니 알몸이 된 채 손과 발이 묶여 주리를 튼 것 같은 상태에서 두 책상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통닭구이였다. 고문자들 사이에 널리 보급된 기술이었다.

이어 얼굴에 수건을 씌워놓고 주전자로 물을 부으니 그는 다시 실신했다. 정신이 들어 보니 의사가 혈압을 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하는 것이다. 고문은 밤을 새우며 여러 차례 반복됐다.

일제 치하도, 아르헨티나도 아닌 '박정희판 더러운 전쟁'

이 야만적인 고문장면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것일까. 흔히 우리는 일제 식민통치기 고등경찰이나 헌병대가 항일 독립운동가에게 가하는 악행을 연상한다. 아니면 1970년대 중반 남미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가했다는 고문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3개 고문장면은 일제 치하도,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아래서 있었던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도 지금부터 불과 40년 전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가기관에서 벌어진 일이다. '박정희 판 더러운 전쟁'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체제폭력이었다. 고문의 공포 속에 치를 떨었던 야당 인사들은 1975년 2월28일 합동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경험담을 공개했다.

대통령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선포하자 중앙정보부, 보안사, 헌병대가 설치기 시작했다. 국가기관이 조직폭력배나 다름없는 불법 폭력을 구사했다. 그것은 가히 히틀러나 일제 치하에서 자행되던 체제폭력이었다. 명색이 국민의 대표로서 국정감사 중이던 국회를 해산하고는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을 붙잡아다 악행을 가했다. 가진 고문기술을 동원해 비인간적으로 문초했다.

첫 번째 장면은 당시 신민당의 유일한 군 장성 출신 국회의원인 이세규가 당하는 장면이다. 그는 5.16쿠데타 후 군 장성 출신 중에서도 자기 집 한 채 없이 사는 청렴결백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안보특보로 정계에 입문한 것이 죄(?)라면 죄였다. 군 장성 출신인 그가 군 내부 사정에 밝은 것은 당연했고 그것이 야당에 매우 긴요하고 드문 역할이었다. 군 내부에서 익명의 제보도 많았다. 박정희에게는 그것이 더욱 눈에 거슬렸다.

박정희는 자신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서인지 특별히 군 내부의 동향 파악에 신경을 썼다. 자신이 과거 남로당의 군내 프락치였다가 그 조직을 밀고하고 살아남아서인지 내부 밀고자와 정보망을 특히 미워했다. 군 장성 출신으로 야당에 간 이세규 의원이야말로 그런 점에서 박정희와 그 주구들이 눈독을 들일만한 표적이었다.

군 출신 야당의원 혀 깨물고 자결 시도, 의치 부러져 피투성이
"적군의 포로가 돼도 장군에게는 이렇게 안한다"

군 정보수사기관에서 인간이하의 고문에 시달린 이세규는 혀를 깨물고 의치가 부러져 피투성이가 된 입을 겨우 벌려 이렇게 소리쳤다.
"적군의 포로로 잡혀도 장군에게는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장군으로서 최후의 것을 다 잃었다. 더 이상 살아봤자 … "
"왜 이러십니까 … "

이세규는 양쪽 팔을 잡는 놈들에게 입속의 핏물을 내뱉으며 울부짖었다.
"너희 놈들은 군인도, 인간도 아니다!"

이세규는 5일간이나 더 그렇게 고문에 시달렸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이세규의 군부 내 인맥과 제보자 명단이었고 10.17 유신쿠데타에 지지성명을 내 달라는 것. 이세규는 끝까지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더 이상 정치권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평생 허리 통증에 시달리며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두 번째 장면은 조연하 전 국회부의장, 세 번째는 최형우 전 정무장관이 역시 10.17 유신쿠데타 직후 잡혀가 고초를 당한 증언이다. 최형우는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내란 때도 보안사에 끌려가 똑같은 악행을 당한다. 그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 선 후 집권당 사무총장과 내무장관을 지낸 실세가 됐다. 그렇게 못된 악행을 당하고도 가해자들과 손잡고 3당 합당을 한 대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김영삼 정부 아래서 내란과 부정축재로 구속된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그들의 체제가 저지른 고문악행을 되갚아 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군부정권이 끝나고 명색이 문민정부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도 3당 합당의 대가일까.

유신쿠데타 당시 이와 똑같은 박정희의 '더러운 전쟁'에 당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20여명에 이른다. 위의 세 의원 외에 강근호, 김경인, 김녹영, 김상현, 김한수, 나석호, 박종률, 이종남, 조윤형, 홍영기 등이 모두 국가기관에 잡혀가 모진 고초를 당했다.

유신체제는 헌정중단 시기…10.26 이후도'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

유신헌법은 국민 기본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고 민주주의 원리인 권력 분립을 파괴했으며, 개헌 절차를 밟았지만 그 절차가 위헌적이어서 '법적으로 무효'였다. 법적으로 무효인 헌법이 통용된 1972년부터 80년까지 '무헌법의 시기'이며 '헌정 중단상황'이었다. 전두환은 유신헌법 중 대통령 임기만 단임제로 고쳐 87년까지 5공 정권을 유지했으니 본질적으로 유신체제 그대로였다. 따라서 박정희의 유신쿠데타로 시작된 무헌법의 시기는 72년부터 80년을 거쳐 87년까지 이어졌다.

87년 6월 시민항쟁의 승리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해서 6공 노태우 정권이 출범했으나 유신체제의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임시봉합 헌정이었다. 5공과 6공은 박정희의 친위대에 의한 내란정권과 임시봉합 헌정이 이어진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였다. 그 87년 임시봉합 체제가 지금까지 완전 청산되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임기 4년에 2회 연임과 노동3권 보장, 그리고 보편적 복지 등을 규정한 헌법으로 개정해야 민주헌정의 원형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법률과 제도 차원에서 유신체제는 현실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간주돼 왔다. 마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오직 결과론적 법리 해석만 내린 검찰 당국의 입장을 보면서 실감했던 불가항력적인 모순구조의 확대판과도 유사하다. 불법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유효하다는 이런 모순성을 법적으로 해소할 방안은 없을지 논의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한 것은 부당했지만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그 나라 정부와 우익진영의 모순된 입장을 바로잡아야 하는 역사의식을 우리 내부 문제에 먼저 적용해야 한다.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한 초헌법적 체제파괴

유신헌법은 기존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근거한 개헌이 아니었으며 집권세력이 자의로 작성한 것이어서 사실상 '사문서'나 다름없다. 비상계엄이 해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또 헌법안에 대한 찬반 토론이 금지된 가운데 강행된 국민투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국민투표를 통과했다고 해서 위헌적 절차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유신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과 1948년의 제헌 헌법 이후 우리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이념으로 이어져 온 민주주의로부터 이탈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헌법은 우리의 국가 정체성과 국민 주권의 기본 속성을 상실한 이단적 통치규범일 뿐이다.

또한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되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 대표기구인 국회의 권능을 대신한 것도 대의민주주의 원리를 본질적으로 위배한 것이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표가 아니면 입법권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국민 의사를 반영해야 할 입법과정에 행정부가 동원된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대통령이 임명해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가 입안하고 의결한 유신헌법은 집권자가 자기 권력을 자의로 만들어 갖는 절대군주의 행위나 다름없다.

영국의 17세기 민주주의 사상가 존 로크가 가장 타기했던 입법권과 집행권의 결합이 벌어진 것이다. 로크는 그것이 바로 절대권력을 의미하며 권력분립에 의한 견제가 사라진 전체주의 체제의 탄생이 된다고 경계했다. 그런 유신헌법은 민주주의 정치체계에서 법적으로 원천 무효일 수밖에 없다.

군사정권 아래서 자행되는 정치적 비판자와 반대자에 대한 비인간적 고문악행과 암살 등을 '더러운 전쟁'이라고 일컫는다. 더러운 전쟁은 아르헨티나에서 1976년부터 79년까지 군부독재자 호르헤 비델라가 저지른 악행으로 세계 시사용어사전에 등재돼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에 앞서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부터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를 앞세워 더러운 전쟁을 자행해 왔다. 더러운 전쟁에서 박정희는 아르헨티나의 비델라보다 앞선 선배격으로 부끄러운 세계 최고였다.

집권층 내부에서도 유신헌법 제정에는 반대가 적지 않았다. 집권 측의 내부 정보가 야당 인사들에게 전달된 것은 바로 그 불만 때문이었다. 고문 수사관들은 야당 인사들에게 집권측 내부의 정보 소스를 대라고 혹독하게 닦달했다. 유신헌법은 절차적으로 위헌이었으며 자유민주주의에 본질적으로 어긋나는 내용이지만,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서 일반 국민에게는 노출되지 않는 정보기관이 민간 정치인들에게 가한 고문행위가 더 큰 문제였다. 이에 대해서는 과거사 진상규명 차원에서 철저히 조사하고 단죄해야 할 것이다.

 

 

<21> 박근혜 후보, 무지인가 거짓말인가

정수장학회 강탈 스토리, '더러운 전쟁' 능가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지난 21일 기자회견에서 아버지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 쿠데타집단이 부일장학회를 강탈해서 지금의 정수장학회가 됐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박 후보는 "법원에서 강압적으로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해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한 걸로 안다"고 주장했다. 박 후보의 이 주장은 법원의 판결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지난 2월 내린 판결문은 아래와 같다.

"…정부의 강압에 의해 주식을 증여한 사실은 인정되나 당시 의사 결정의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식 증여를 했다고 인정하기엔 부족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박 후보가 정말 법원의 판결 내용을 챙겨보지 않아서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서도 모르는 채 거짓말을 했는지 따져보아야 할 새로운 검증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제도권 언론들은 모두가 박 후보의 '무지'라고 보도했다. 그의 측근들이 제대로 챙겨서 알려주지 못한 탓으로 비판한다. 공보단장인 이정현 의원이 그 자리에서 판결문을 보여주니까 박 후보가 들여다보고 나서 "잘못해서 실언을 했다"고 번복한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이런 보도는 옳지 않다.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 중요한 내용을 기자회견을 통해 밝히겠다고 예고한 뒤 며칠의 여유까지 있었는데 법원의 판결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것이 납득되는 일인가.

박근혜 후보의 기자회견은 모든 언론이 헤드라인으로 보도했다. 이것은 언론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법원의 판결 때보다도 훨씬 더 크게 박 후보의 발언이 보도된 것이다. 여기서 박 후보의 회견 내용이 법원 판결을 거꾸로 뒤집어서 거짓말을 해도 그것이 판결보다 더 크게 국민에게 알려졌다.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거짓말을 해도 말 사진을 보여주며 보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박 후보가 무지를 가장해서 법원 판결을 뒤집는 대중조작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것은 인혁당 피해자에 대해서 대법원의 재심 판결이 무죄로 나왔는데도 "똑 같은 대법원인데 서로 다른 두 개의 판결이 나왔다"고 했던 것과 같은 사례다. 사법체계에 대해 무지한 것처럼 가장하면서 일반 국민의 인식을 오도하는 대중조작이 아니냐는 것이다.

박 후보는 또 정수장학회가 김지태의 부일장학회와 정체성이 다른 단체라고 말했다. 그는 "정수장학회에 대해 고 김지태 씨의 부일장학회가 이름만 바꾼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면서 "정수장학회는 부일장학회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변했다. 5.16 쿠데타집단이 부일장학회를 강탈했다가 거기에 기업인 등의 기부와 헌금을 받아 확대 발전시켰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떤 기부와 헌금이 있었겠는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부일장학회를 빼앗은 재산으로 만든 5.16 장학회, 그리고 그것을 발전시킨 정수장학회가 박정희 정권 아래서 어느 정도 위세를 가졌는지는 여러 말이 필요 없을 터다. 독재권력에 잘 보이려는 기업인과 정치인이 기부해서 키워진 것이다. 그러니까 모태는 부일장학회였고 그것에 떳떳하지 못한 돈이 보태져서 정수장학회로 커진 것인데 그래서 실체가 서로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는지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부산일보와 KBS, MBC, YTN 등 언론 노조의 파업사태는 언론탄압의 박정희 DNA를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에서 언론인 강제해직이라는 탄압은 박정희의 유신 통치기인 1975년 3월 처음 선을 보였다. 동아일보 기자 134명과 조선일보 기자 수 십 명을 중앙정보부가 광고탄압 등의 공작적 수법으로 강제 해직시켰다. 그 후 전두환 정권도 1980년 5.18 광주시민항쟁 유혈진압 때 자유언론 운동을 벌인 기자들과 비판적 논설을 게재한 언론사 간부들을 강제 해직시켰다. 이런 언론탄압의 시조가 박정희였다.

 

박근혜 의원의 겸직이사장 연봉이 2억5천여만원이었다니…
박정희의 재산강탈과 별개로 박근혜 본인의 사회윤리가 문제

부산일보 노조는 "정수재단은 독재시절의 장물이기 때문에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노조가 정수재단을 '장물'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5.16쿠데타 세력이 남의 재산을 강탈해 그 재단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1962년 3월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부일장학회의 재산을 강제 기부받았다"고 이미 밝혔다. 진실위는 "부일장학회가 공적으로 운영돼야 하나 5.16장학회를 거쳐 정수장학회로 이어져 왔으며 그 과정에서 사유재산처럼 관리돼 왔다"고 지적하고 "합당한 시정조치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박근혜 후보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그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을 지냈다. 박 후보가 이사장을 지내면서 받은 연봉을 보면 대기업의 CEO와 맞먹는다. 장학회는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공익재단이다. 그 재단의 이사장은 봉사하는 명예직이어야 한다. 유력 정치인이나 기업인이 이사장을 맡을 경우 자기 사재라도 기부하거나 외부에서 기부금을 끌어와야 할 자리다. 그런데 박 후보는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1995년부터 98년까지는 비상근직으로 연간 1억3천5백만원을, 99년부터 2005년까지는 상근직으로 연간 2억5천350만원을 받았다.

국회의원으로 재임해 억대의 세비를 받으면서, 더구나 매일 출근해 일할 수도 없는 겸직인데도 상근직으로 전환해 거액의 연봉을 수령했다. 본업인 국회의원 세비보다도 많은 돈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는 정치자금을 만드는 자리로 이용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법적으로 죄가 되는지는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우선 유력한 대통령후보까지 된 정치인으로서 기본적인 양식과 사회윤리가 의심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사회봉사를 위해 설립한 장학재단의 이사장이 대기업의 CEO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을 받아 온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일장학회 김지태는 이승만 사사오입 개헌 반대 등 소신파 의원
해외 쇼핑을 밀수로 트집잡아 중앙정보부가 부인 구금해 인질 삼아


5.16 쿠데타 집단의 부일장학회 강탈은 권력남용 외에 공문서 위조와 같은 불법 공작도 있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채 일 년도 안 된 1962년 4월 초 어느날 새벽 5시경.
서울 청운동에 있는 부산 기업인 김지태의 자택, 건장한 남자 둘이서 이른 새벽 시간인데도 거침없이 대문의 벨을 눌렀다. 김지태의 부인 송혜영 씨는 남편이 돌아온다는 연락도 없었는데 새벽부터 누군가 알아보라고 일하는 아이에게 이른다.

두 남자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송혜영에게 함께 갈 것을 요구했다.

"조사할 것이 있으니 부산으로 같이 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른 새벽 시간에 갑자기 부산까지 가자니 무슨 일입니까."
"가 보시면 압니다."


송혜영은 아무 잘못한 일도 없다는 생각에 당당하게 따라 나섰다. 그들은 송혜영을 지프차에 태우고는 여의도 비행장에 가서 부산으로 연행했다.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의 수사관들은 송혜영에게 2년 전 남편과 함께 유럽에 여행 갔을 때 산 다이아몬드 반지와 카메라 한 대가 세금을 내지 않고 들여왔기 때문에 밀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당시 해외여행에서 돌아올 때 몸에 걸치는 장신구 하나씩은 관세 없이 휴대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송혜영을 첫날 7시간에 걸쳐 주로 해외 쇼핑에 대해 조사한 뒤 교도소로 보내 수감했다. 남편 김지태는 사업차 독일을 방문한 뒤 돌아오는 길에 도쿄에서 간경화 증세 때문에 입원해 검사를 받는 중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아내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갔다니 급히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중도에 병원에서 퇴원하고 급거 귀국했다.

김지태는 조선견직을 창업하고 당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실크 생산업체 '한국생사'로 키워 낸 부산 출신의 대표적 기업인이었다. 기계와 방직으로 큰 돈을 번 그는 부일장학회를 설립해 부산지역의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투자했다. 부일장학회는 김지태의 투자 확대에 따라 차츰 자산을 늘려갔다. 부산MBC에 이어 한국MBC를 설립해 국영 KBS 이후 첫 민간방송을 문 열었다. 부산일보도 인수해 장학회에 기부했다.

김지태는 또 2대와 3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더구나 3대 국회 때인 1954년 11월 이승만의 중임제한 철폐를 위한 사사오입 개헌 때 반대하다 자유당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건실한 기업인이며 소신 강한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더욱 박정희의 비위에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재산 강탈 대상자로 김지태를 지목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박정희가 1950년대 말 부산에서 군수기지사령관을 지내면서 모종의 악연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모의하면서 김지태에게 자금지원을 부탁했다. 당시 부산일보 주필이던 황용주가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생이어서 그가 추천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김지태는 단호하게 거절했고 이것으로 그는 쿠데타 세력의 괘씸죄를 샀다.

구금상태서 날인한 기부 날짜를 석방 후로 위조
쿠데타자금 지원요청 거절한 김지태에 정치보복성 구속


아니나 다를까 5.16 쿠데타가 성공한 뒤 그들은 김지태를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한다. 속이 보이는 정치보복이었다. 김지태는 당시 거액인 5억4천5백여 만환을 부정축재 환수금으로 내고 겨우 석방됐다. 그리고는 웬만하면 사업과 신병 치료를 이유로 해외에 많이 체류했다. 박정희 정권은 그런 김지태를 잡아들이기 위해 별 죄도 없는 부인을 인질로 구금한 것이다. 그들이 부인 송혜영을 다이아몬드 반지와 카메라 밀수 혐의로 구금했지만 나중에 물건을 돌려 준 것만 보아도 부인은 김지태의 인질인 셈이었다.

김지태는 4월 중순 귀국하자마자 역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구금된다. 그들이 말하는 죄목은 국내재산 해외도피. 구금과 공포분위기 속 신문 조사는 두 달 이상이나 지속됐다. 그들은 정수장학회의 재산 포기각서를 요구했다.

"어차피 사회적으로 육영사업을 하기 위해서 만든 공익법인 아닌가? 운영권을 내놓으면 혁명주체들이 맡아서 잘 할 거요."

김지태는 우선 살고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으로 정권을 장악한 쿠데타 집단에 의해 구금당한 상황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거부해 보았자 언제 풀려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한편 그때만 해도 박정희 정권이 그렇게 오래 가리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사실 김지태의 눈에 그들은 불법적 조폭이나 다름없는 무법자들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사유재산을 기부해 설립한 공익법인을 되찾을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는 부일장학회의 운영권 포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월20일 장남인 김영구에게 인감도장을 가져 오도록 했다. 김영구가 아버지를 만나러 간 곳은 경찰서도 검찰도 아닌 부산군수기지사령부의 법무관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계엄령 아래도 아니고, 군인이 아닌 민간인인데 그들은 김지태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가두었다가 아들을 만날 때는 군수기지사령부로 옮긴 것이다. 부일장학회 기부동의서에 서명하고 닷새 뒤 김지태는 석방된다.

기부동의서에 원래 서명하고 도장을 찍은 날짜는 분명 그가 구금돼 있던 1962년 6월20일이었다. 그런데 국정원 진실화해위가 조사차 자료를 보니 6월30일로 돼 있었다. 진실위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문서 감정을 의뢰했다. 한자로 타이핑된 六월二十일의 二에 한 획을 더 그어서 六월三十일로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6월20일이면 김지태가 구금 상태여서 자유의사에 의한 기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석방된 이후에 서명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이같은 쿠데타 집단의 문서 위조로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부도덕한지를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독재정권의 '더러운 전쟁'에서 보기 어려운 사유재산 강탈 자행
신문과 방송은 5.16장학회로 귀속, 토지는 국방부 국유재산으로


박정희 권력의 횡포는 모두가 민주주의의 기본규범을 파괴한 것이 핵심 문제다. 야당 인사와 학생운동 간부 등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자행한 고문악행과 테러가 1977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더러운 전쟁'보다 훨씬 앞섰다. 체제폭력에서 세계적 원조였다. 군국주의 일본도 식민지 저항세력에게나 악독하게 했지 자기네 나라 국민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일본에서 배워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는지 야당 인사와 학생운동 간부들에게 꼭 이민족 저항세력 다루듯 했다.

박정희 권력의 전횡 중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 사유재산 강탈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자연권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근대 시민혁명 이후 확립된 생명권, 자유권, 재산권의 수호야말로 국가권력을 포함해서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3대 기본권이다. 이 중에서 반민주적 독재권력이 침해하는 것은 대부분 자유권과 생명권이다. 재산권에 대해서는 웬만한 독재권력도 대부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의 사유재산을 강탈했다. 몰수해서 국가 헌납을 해도 안 될 일인데 강탈해서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고 그것을 후대가 상속재산처럼 운영했다. 박정희에 의한 '더러운 전쟁'의 전리품을 딸인 박근혜 의원이 손에 넣은 모양새가 됐다.

모든 장학재단은 이미 사유재산이 아니며 공익재산으로서 설립자가 운영권을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소유권 행사를 가름한다. 그런 재단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것은 그 운영을 특정 가족이 아니라 공공성을 갖게끔 구성된 이사진에 넘기라는 뜻이다. 박근혜 후보가 재단 이사장을 물러난 뒤 후임을 맡아 온 최필립 씨는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부터 박 후보 담당 비서였다. 박 의원은 정수재단의 사회 환원이나 이번 부산일보 사태에 대해 기자들이 물으면 "나는 이사장에서 물러났다. 나와 관계없는 일이다."고 답변하곤 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박 후보가 물러났지만 자신의 최측근에게 이사장을 맡겨 운영권은 결코 내놓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이 감행한 사유재산 강탈의 특징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언론사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부산의 기업인이며 2선 국회의원인 김지태의 부일장학회 자산을 빼앗을 때 이 장학회는 한국MBC, 부산MBC, 부산일보와 토지 10여만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중에서 3개 언론사를 강압적으로 기부받아 5.16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장학회가 나중에 정수장학회로, 다시 정수재단으로 바뀌었다. '정수'라는 이름은 박정희의 '정'과 육영수의 '수'을 붙여서 만들었다.

그런데 부일장학회가 소유했던 3개 언론사 외에 땅 10여만 평은 국방부에 넘겨 국유재산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그들의 사유재산 강탈은 언론사 장악이 주목적이었다. 정치권력 확립과 강화에 언론이 중요하며 비판적 언론인이 얼마나 장애인지를 정치군인들이 잘 알았던 셈이다.

 

 

<22> 부마-광주항쟁-6월항쟁의 역사

10.26 원인, 부마항쟁과 박정희 사생활 타락

 

현직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권총 살해한 10.26사건은 역사 상 어떤 자리매김을 받을까.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의리와 배신, 권력경쟁과 충동적 행동, 정국대처에서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대립, 망상적 사명감과 소영웅심…. 지금까지 10.26 김재규 거사에 대해 이런 평가들이 유행어처럼 전파돼 왔다.

그런 평가들은 10.26사건과 김재규에 대해 맨 먼저 재단했던 당시의 전두환 합수부가 발표한 수사결과에 주로 의존한 결과다. 김재규가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권력경쟁에서 밀리고 박정희의 신임을 잃으니까 욱하는 충동적 성미에 일을 저질렀다는 수사 발표였다.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은 이유는 당시 선명야당 노선의 신민당 지도부와 부산마산 시민항쟁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학계나 언론계 일각에서 10.26을 집권세력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 간 대립과 갈등이 표면화한 것이라고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김재규 중정의'큰 영애와 최태민 내사보고서'박정희의 역린 건드려
강경파와 온건파 간 권력투쟁론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에 불과


그러나 김재규가 박정희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그런 정치문제보다도 1977년 봄 중앙정보부가 내사해서 작성한 "큰 영애와 최태민에 관한 종합보고서"때문이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이 내사 결과를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건의하자 박정희가 "정보부가 이런 것까지 내사하나?"라며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래도 박정희는 당사자인 큰 영애 박근혜 씨와 최태민,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와 수사국장인 백 모씨를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른바 '친국'을 벌였다. 박근혜 씨와 최태민은 세간에 떠도는 풍문과 중앙정보부의 내사가 음해라면서 강력히 항변했다. 지금 같으면 특검에 맡겨 수사해서 규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자녀관련 문제였지만 박정희의 친국으로 그 근거가 밝혀지지 못한 채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중정의 능력을 고려할 때 내사까지 해서 박정희에게 직보할 정도였으니 이는 그렇게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사보고서는 중정의 문서이니 만큼 당연히 중정의 기밀자료 존안실에 보관돼 있다. 박근혜 후보가 유력한 대선 주자이기 때문에 법률에 의한 정보청구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이다.

10.26사건의 원인에 대해 지금도 웬만한 학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집권층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권력투쟁을 꼽는 것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에 갇힌 결과다. 무엇보다도 전두환 합수부는 훗날 대법원이 판결한 내란집단과 동질적 조직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수사결과 발표란 실체적 진실과는 가장 거리가 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강경파에 밀린 온건파로서의 김재규가 아니라 이성적 판단력을 상실한 절대권력에 대한 국가위기 관리자로서 예방조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10.26사건의 원인은 당시 상황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면밀히 분석해야 실증과학적인 역사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첫째는 물론 극단적 반민주체제인 유신독재정권에 대한 국민으로부터의 저항과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압력이 크게 폭발한 것을 들어야 한다. 직접적으로 부마항쟁이 큰 원인이었다.

둘째, 당시 유신독재정권의 대국민 인권탄압에 대해 도덕적 근본주의와도 같은 노선을 내세운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강력한 민주헌정 회복을 요구했으나 박정희가 반발함으로써 조성된 한미관계의 파국이 또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미국놈들 갈테면 가라고 해"라고 내뱉었다면서 이에 크게 충격 받았다고 밝혔다. 그의 경력을 보면 보안사령관- 군단장-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장관을 거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보기 드문 국가안보주의자였음이 드러난다. 그는 미국이 등을 돌리면 "한국은 태평양 상의 일엽편주와도 같이 위태로워진다"고 군사법정 진술을 통해 강조했다.

셋째, 위의 두 가지 사실만으로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확인사살'까지 한 이유가 잘 납득되지 않는다. 거기엔 바깥의 제3자가 알기 어려운 박정희와 김재규 사이의 인간적 감성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긴다. 당시 김재규 변호인단에 참여한 강신옥, 안동일 변호사들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절대권력자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에 대해 직접 그것을 뒷받침해 왔던 중앙정보부 간부들의 실망감과 인간적 환멸 때문에 김재규의 야수성이 폭발했다는 보아야 한다.

10.26이라는 역사적으로 희귀한 사건의 배경에는 이 같은 3대 원인이 작용했으며 여기서 비로소 설득력 있는 설명이 가능해짐을 느낄 수 있다. 이 중 사생활 문제에 대해서 는 학계 인사들이 별반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10.26사건에 대한 군사법정의 신문과 진술 내용은 비밀재판까지 이미 녹취록으로 출판된 바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1차자료에 속한다. 그런데도 사생활이라는 이유로, 또 남자의 허리 아래 이야기는 역사 평가와 관련 없는 뒷얘기일 뿐이라는 고루한 생각 때문에 소홀히 취급돼 왔다. 그러나 대통령이 국가기관에 전담인력을 두고 권력을 이용해서 외부 여인을 데려다 술자리를 빈번하게 가진 것은 결코 사생활로 가려질 수 없다. 그것은 엄연히 대통령의 권력 행위에 속하며 따라서 사생활이라는 이유로 덮어 두면 안된다. 더구나 10.26 사건도 외부에서 온 두 여인이 동석한 술자리에서 부마항쟁과 이른바 야당 공작을 얘기하다가 터진 것으로 드러났다.

"민주주의와 박정희 각하는 양립할 수 없어"
10.26은 정당방위 "다수 국민 희생 막기 위해 한 사람 죽였다"


당시 태풍전야와도 같은 민심 이반과 전국의 시위 동향에 대한 대책에서 차지철은 무자비한 진압을 주장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즈가 1975~79년 사이 3백만명을 학살한 것을 인용하면서 "우리도 한 1,2백만 쯤 싹 쓸어버리면 문제없다"고 내 뱉었다. 어쩌면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라기보다는 박정희의 복심을 헤아리고 그것에 추종한 결과였을 가능성도 있다.

김재규는 그런 강경책에 반대해 왔고 10.26 현장에서 차지철의 그 말을 듣고선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당시 폭발한 부산마산 시민항쟁이 불순세력과 야당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차지철 등 강경파의 주장과 강압적 진압대책에 극력 반대했다. 그는 부마 시위사태가 유신독재 체제 때문으로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불순세력과 학생운동권의 배후조종이 아니라 일반시민 다수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보고했다. 김재규는 유신체제를 완화해서 민심을 달래야 한다고 박정희에게 건의했다.

이에 박정희는 김재규에 대해 "김영삼을 구속하랬더니 유약한 중앙정보부가 야당 공작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시국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며 질책했다. 전두환 합수부는 이런 정황을 권력투쟁에서 밀렸다고 했다. 그래서 상관이며 은인인 박정희를 살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박정희 신봉자들이 믿어왔고 그렇게 믿고 싶은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김재규 거사의 정당성을 은폐하기 위해 조작된 수사 결과였다. 김재규가 거사 당일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던졌다고 합수부가 발표해서 세간에 회자된 "형님, 나는 한다면 합니다"라는 말도 지어낸 각본이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 인정신문에서 "나는 그런 식의 말을 쓰지 않는다"고 부인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 진술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4.19 혁명이 일어나니까 하야했지만 박정희 각하는 결코 물러날 줄 모르는 분이다"면서 "자유민주주의와 각하는 양립이 불가능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국민들이 얼마나 희생될지 모르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그는 "다수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각하 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비록 그가 법정에 선 피고인으로서 사후 변명을 전혀 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해도 이 대목은 틀린 말이 아니다. 부마항쟁에 대한 계엄령 선포와 그로부터 불과 7개월 뒤에 일어난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살상진압을 보더라도 그렇다. 10.26은 독재권력으로부터 다수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 성격이 있었다는 평가가 그래서 나온다.

10.26으로 유신체제 종식되지 않고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이어져
전두환의 하나회 내란집단 12.12와 5.17광주학살로 잔악한 복고반동


그러나 김재규의 그런 거사 목적은 박정희 친위대인 전두환 하나회 집단의 12.12 군사반란과 5.17 광주학살로 실패하고 말았다. 혁명의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복고반동 그것이었다. 여기서 1인중심 유신체제가 10.26 거사에 의해 박정희가 제거됨으로써 종식됐다는 일부의 평가는 옳지 않다는 근거가 드러난다. 유신체제는 10.26으로 종말을 고하기는커녕 더욱 잔악한 5.17 내란을 거쳐 친위대 전두환 노태우 등의 하나회집단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유신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였다.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기 시작한 계기는 1987년 6월 시민항쟁이었다. 당시 전두환 5공 정권은 시민항쟁을 강압적으로 진압할만한 군대와 경찰력을 충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6.29 항복 선언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당시의 민중적 힘도 작게 평가할 수 없지만, 보다 큰 배경은 그들이 겪은 광주항쟁의 살상진압이라는 '악몽'이었다. 제아무리 '인간 성악설'을 생각하게 하는 내란정권이었지만 그들이 또 한 번의 그런 살상진압책을 검토할 수는 없었다. 광주항쟁은 그런 의미에서 그 당시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좌절했지만 훗날 6월항쟁 때 내란정권을 결국 굴복하게 만든 역사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유신체제의 종식을 분석할 때는 이처럼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시민항쟁을 연계해서 역사적 상관관계에 바탕해야 할 것이다.

10.26의 두 번째 원인으로 민주헌정을 복원하라는 미국 쪽의 압력은 직접적인 박정희 살해 지령설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까지 밝혀진 근거가 없다. 당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그에 걸맞게 유달리 인권과 도덕을 대외정책 기조로 내세웠다. 카터의 그런 기준에서 볼 때 박정희 유신독재는 당연히 방관할 수 없는 '악의 축'이었다. 미국의 언론들도 박정희 정권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신랄하게 비판했다. 1979년 봄, 미국의 영향력 있는 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는 박정희 독재에 대해 한국 군부 내에 미묘한 저항 움직임이 있다는 관측을 보도했다. 이런 기사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검은 먹칠로 칠해지거나 아예 절단된 뒤 잡지의 국내 배포가 가능했다. 그러나 뜻 있는 사람들은 전국 곳곳의 미국문화원 도서실에 비치돼 있는 잡지의 원본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기사는 사실 근거가 약했지만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라는 메시지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느껴졌다. 이런 미국의 분위기가 김재규에게 상당한 시사를 던져주었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김재규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된 뒤 얼마 지나서 교도관들에게 "미국 쪽에서 무슨 소식 없느냐"고 두어 번 물었다. 이것도 10.26에 대한 미국 관련설의 한 배경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1980년 5월24일 김재규가 처형될 때까지 그에 대해 아무런 구원의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카터 행정부의 정책으로 보더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개입할 가능성은 작지 않았다. 전두환 내란집단은 이런 정황을 염두에 두었는지 김재규를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이 재빨리도 사형 집행시키고 말았다. 5월21일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지 불과 사흘만이었다. 당시는 광주항쟁이 진행 중이었다. 단순 살인이 아니라 명분 있는 정치범이며 양심범으로서 김재규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인권단체들에서 구출운동이 벌어질 것을 두려워 한 내란정권에 의해 보복적으로 처형된 것이다.

박정희 뒤통수 정조준해 확인사살한 김재규의 비정한 행동 배경
사생활 타락으로 인간적 환멸감과 정상적 판단력을 의심한 때문

 

▲ 현장검증과 두 여인의 진술을 통해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머리 뒤통수를 정조준해 확인사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10.26사건에서 풀기 어려운 의문은 김재규가 동향 선배로 군 출신 상관이었으며 자신을 중용해 온 은인인 박정희를 살해했다는 점이다. 김재규가 군사법정에서 국민의 요구인 민주회복과 국가안보상 한미관계가 중요하다고 역설했지만 그것만으로 두 사람 관계의 파탄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더구나 김재규는 10.26 사건의 현장검증에서 박정희의 머리 뒤통수를 정조준해 확인사살하는 장면을 재연한다.

10월26일 저녁, 궁정동 비밀연회장 참석자는 박정희 김재규 김계원 차지철과 외부에서 데려 온 두 여인이었다. 여기서 김재규는 먼저 차지철을 향해 쏘았다. 차지철은 팔에 관통상을 입고 화장실로 피신한다. 김재규는 다음으로 박정희에게 첫 발을 쏘았다. 박정희는 가슴을 맞았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김재규가 2차로 권총 방아쇠를 당겼으나 철컥 소리만 들리며 불발, 총은 고장이었다. 밖으로 나간 김재규는 연회장 앞 뜰에 서 있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의 권총을 손에 잡았다. 방안으로 돌아 온 김재규는 한 여인의 무릎에 상반신을 눕히고 있는 박정희 곁으로 다가가 머리 뒤통수에 권총을 정조준했다. 여인은 기겁을 하며 밖으로 튀어 나갔고 김재규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런 확인사살만 안했어도 박정희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재규의 그런 비정한 행동은 박정희에 대한 인간적 증오와 환멸감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박정희에 대한 인간적 환멸감은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서 그의 사생활, 술과 여자를 조달해 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의전과장 박선호가 가질 수 있는 비밀이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정치학적 금언처럼 박정희의 사생활 타락상은 도를 넘은지 오래였다. 궁정동 비밀연회장을 관리한 중앙정보부 사무관 남효주도 10.26 당일 저녁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너무 한다"고 다른 직원과 대화했음이 군사법정에서 알려졌다.

 

 

▲ 10.26사건 당일 박정희의 최후 술자리에서 시중을 든 '그 때 그 여인들'이 군사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됐다. 당시 일류 가수와 여대생 광고모델인

   두 여인이 대통령의 비밀연회장에 동석했던 사실이 법정을 통해 공개되면서 절대권력자의 사생활 타락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 10.26사건 당일 궁정동 비밀연회장에서 술시중을 들었던 두 여인이 법정에 출두해 박정희의 최후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외부의 여인들을

   조달해 오는 일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전담했으며 이것이 알려지자 의전과장 자리가 대통령의 채홍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통령의 채홍사로 불린 박선호는 군사재판 진술에서 "외부에서 여인들을 데려다 술자리를 갖는 대행사 소행사를 한달이면 열 번 한다"면서 "이 때문에 나는 일년 내내 휴일도 없고 쉬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법정에서 변호인의 질문에 "궁정동에 왔다 간 여인들은 지금 시내에서 일류로 활동하는 연예인들로 내가 밝히면 시끄러워 질 것이고 해서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만 말한다"고 답변했다. 당시 강신옥 변호사는 역대 의전과장들과 궁정동 술자리 행사 주변 얘기들을 취재하면서 박선호와 면담을 통해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를 처음으로 재판과정에서 공개했다.

 

궁정동에 온 여인들은 단순히 술 시중만 든 것이 아니었다. 술이 거나해지면 박정희는 좌우에 앉은 두 여인 중 어느 한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그날 밤 잠자리 시중을 들게 되는 낙점이었다. 이런 그의 사생활타락은 1974년8월 육영수 여사가 사거했기 때문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는 인간적 변호도 있다. 그러나 궁정동 비밀연회장의 대행사 소행사는 육영수 생전에 청와대 경호실이 맡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 일을 청와대가 하는 것으로 국민에게 알려지면 큰일이라면서 외부에 완전히 가려진 중앙정보부로 넘겼다는 진술이 군사법정에서 공개됐다.

김재규는 그렇게 술과 여자에 빠진 박정희가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또 그 옆에서 시국대응책을 강경 일변도로 주입시키는 차지철 때문에 큰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10.26 사건은 이렇게 복합적인 배경 아래 거사된 것이다.

 

 

<23> 정치적 유전자의 증거

박근혜 '국민대통합위'는 박정희 용어

 

계엄령 하 찬반토론 금지된 채 실시한 유신 국민투표는 무효
국민기본권 박탈…국회 행정부 사법부의 3권분립 파괴

박정희의 1인 종신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유신체제는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제거됐는데도 종식되지 않았다. 박정희가 키워놓은 군부내 친위대 전두환 노태우 등의 하나회 집단이 내란을 일으켜 국권을 찬탈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유신체제가 얼마나 강고했는지 보여주는 한 지표였다.


유신체제는 수립과정부터 위헌이었고 집권세력의 체제폭력이 난무하는 불법천지였다.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국민투표에서 투표율과 찬성율이 모두 90% 이상으로 매우 높았다는 것 때문에 개헌의 정당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국민투표 과정이 부정선거였기 때문이다. 우선 국회를 해산시키면서 발동한 불법 비상계엄령이 해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국민들에게 군 동원의 공포 분위기를 주면서 투표했으니 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강압 투표였다. 게다가 헌법안에 대한 찬반 토론이 전면 금지된 상황이었다. 국민투표의 내용에 대해 언론도 비판적인 보도가 금지됐다.

군대와 공무원, 관변단체들은 국민투표 95% 찬성운동을 벌였다. 군 영내 투표는 찬성을 강요하는 공개투표였다. 당시 군에 강제징집돼 있던 나도 공개투표의 현장을 똑똑히 보았다. 중대 인사계(상사)가 행정반에서 찬반이 인쇄된 기표용지 중 반대란을 손으로 가려 쥔 채 찬성란 만을 차례로 들어오는 병사들에게 내밀었다. 나는 투표를 거부했는데도 개표 뒤 우리 중대에 기권이 한 표도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행정반원이 대리투표를 한 것이다.

또 국민투표란 직접민주정치의 한 형태지만 그 안건이나 선택지를 합리적 중간집단(intermediate group)이 만들어 제시해야 한다. 정당과 의회, 학계와 언론, 시민단체와 노조 등이 그런 중간집단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국민대표 기구인 국회는 물론이려니와 중간집단의 공론이나 검증 없이 집권측이 어용 학자 두어명에게 맡겨 일방적으로 주도해서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는 언론의 비판도, 국민의 찬반토론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투표율과 찬성율이 모두 90% 이상이었으며, 그 1년여 뒤 재차 실시한 국민투표에서도 압도적인 지지가 나왔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여지를 남겼다. 국민은 현명하고 위대한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는 성찰적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결여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치 1930년대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나 이태리에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모두 대중민주정치를 통해서 등장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위기와 회의론이 대두됐던 것과 같은 경험이라고나 해야 할 것 같다.

유신헌법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한할 수 없게 한 조항과 구속적부심제 등을 폐지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바탕인 시민적 자유를 부정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신체의 자유를 축소한 것은 18세기 유럽 시민혁명이 쟁취한 초기의 자유민주주의 정신보다도 뒤떨어진 통치제도에 해당한다. 박정희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18세기적 이념과 제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헌정으로 국민을 옥죄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임명하고 일반 법관까지 임명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원리인 권력 분립에 어긋난다. 권력 분립론은 절대주의 국가주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존 로크나 몽테스키외 같은 18세기 사회계약론자들에 의해 확립됐다. 박정희 정권이 작성한 권력구조는 그런 권력분립의 원칙을 무시한 것이며 그 결과 대통령의 절대권력 전횡으로 인권탄압, 언론탄압, 노조탄압과 야당탄압으로 야만국가 시대라는 불행한 역사를 남겼다.

 

▲ 1972년 11월21일 유신헌법안 국민투표에서 박근혜 후보가 투표하는 모습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지켜보고 있다. 대통령의 '큰 영애'인 박근혜 후보는 대학생으로서 이 투표 사진이 도하 일간지에 일제히 보도됐으며 당시 가장 강경한 저항세력이던 학생운동권과 묘한 대조를 이루기도 했다.


'국민통합''총력안보''국민총화'는 전체주의 용어
갈등 해소를 전제하지 않는 통합은 독재 시대의 대중조작 수법


박정희 유신체제는 유난히 국민통합을 강조했다. '총력안보'니 '국민총화', '일치단결'과 같은 용어들이 난무했다. 이런 용어들은 후진국 독재권력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대중조작 수법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출마선언부터 국민대통합을 내세우더니 급기야 선거캠프에 '국민대통합위원회'를 설치했다. "5.16은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말했다가 국민여론의 지탄에 직면하고 지지율이 급락하자 사과연설과 함께 긴급 대처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독재정치에 대해 사과하면서 박정희식 대책기구를 설치한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모든 갈등이 다 나쁘지 않은 것처럼 맹목적 통합이 무조건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국민통합은 갈등 해소가 그 전제조건이 돼야 한다. 갈등과 비판의 목소리는 제대로 해소시키지 않은 채 무조건 단결과 총화를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전체주의 독재권력의 특성이다. 박정희가 총력안보와 함께 국민통합을 내세운 근거는 북한의 위협이었다.

유신체제는 대통령 박정희가 그 이전에 견지하던 경제 제일주의로부터 국가안보 지상주의로 전환한 억지 논리에 바탕하고 있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이후 취약한 정통성을 가난 추방과 조국근대화를 내세워 정당화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경제 제일주의가 70년대 들어서는 권력 강화의 명분으로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들고 나온 것이 북한의 남침 위협론과 함께 남북통일의 명분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삼선개헌 때부터 '총력안보'를 구호로 내걸면서 사회 전반을 병영국가 체제로 조직화했다. 대학에도 군사교련을 설치했다. 처음엔 교양과목으로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군 복무기간 단축 혜택을 주었다. 그러다 1971년부터 대학 교련은 모든 재학생들에게 필수과목으로 마수를 드러냈다. 이젠 군 복무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려면 모두 교련과목 학점을 따야 했다. 대학에 교련 교관단이 들어섰고 이들은 필수과목 강의 형식을 빌려 학생들에게 안보강연도 했고, 정권에 대한 옹호 발언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또 향토예비군을 더 강화해 각 직장마다 예비군을 설치했다. 예비군 연대장이나 대대장으로 예비역 대령과 중령들이 각 직장에 자리잡았다. 이들은 비상기획관 노릇까지 맡기도 했다. 군 고위장교들이 전역한 뒤 사회 곳곳에서 핵심요직을 차지했다. 박 정권은 유신쿠데타 준비기에 해당하는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병영체제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는 누가 보아도 세계적으로 냉전적 대립구도가 해소돼 가는 상황이었다. 미국과 중국이 1960년대 말부터 탁구 친선경기 선수단을 주고 받으며 핑퐁 외교로 데탕트에 합의하고 교역과 관광 등 교류를 확대한 끝에 국교정상화를 이룬 시기였다.

타임지, 박정희의 비상사태 선언에 "상상적 비상일 뿐"이라 조롱

박정희는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적 냉전체제의 와해 분위기를 이른바 '국지(局地)안보 위기론'이라는 궤변으로 뒤집었다. 강대국 간의 데탕트는 그 아래 약소국 간의 국지전을 부추기는 역작용으로 나타난다는 억지였다. 남북한을 각각 지원하는 열강인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북한의 군사행동에 대한 보복조치를 막아주기 때문에 한반도 국지안보는 더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1971년 10월15일 위수령과 12월 국가비상사태에 이어 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한 당시 북한의 태도는 긴장완화 분위기가 역력했다. 71년 한 해 동안 북한에 의한 휴전선 침범행위는 종전에 비해 현저히 줄었고,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이어 72년 5월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박정희의 밀사로 평양에 밀행해 김일성을 만나 남북공동성명에 합의했다. 박정희 밀사의 평양 밀행이란 북한 쪽에서 응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은 뻔하다. 그 결실로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3대 합의문서 중 하나인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으며 그것에 바탕해 남북조절위원회가 발족했다. 분단 후 첫 남북간 합동기구였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남침위협설과 국지안보 위기론을 제기하며 국가안보를 수호하기 위한 대통령의 절대권력을 공식화한 유신체제를 세운 것은 국민의 눈을 가리고 아웅한 격이었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권위있는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1971년 12월20일자 아시아면에서 박정희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근거 없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타임지는 박정희의 비상사태 선언에 대해 '상상적 비상(imaginative emergency)'일 뿐이라고 조롱했다.

남북조절위원회가 기능을 상실한 것은 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이어 12월 김일성이 이른바 주체헌법을 제정하여 양쪽이 똑같이 1인 중심 독재권력을 강화한 뒤의 일이다. 그 이후 남북관계는 상당 기간 7.4남북공동성명 이전의 긴장관계로 후퇴하고 말았다. 박정희가 종신집권용 유신체제를 수립하기 위해서 남북관계를 이용한 결과였다.

 

 

<24> 멸망 직전 공산국들과 동점

박정희 시대 언론자유 5등국

 

한국 언론, 파키스탄 이집트 레바논 로디지아보다 뒤져

유신 말기인 1977년 봄,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인권단체로 뉴욕에 위치한 프리덤 하우스가 각국 별 언론자유에 등급을 매겨 발표했다. 프리덤 하우스는 당시 세계 145개국의 언론 상황을 1등국부터 7등국까지로 분류했다. 거기서 박정희 정권 아래 한국의 언론자유는 5등국이었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보니 확연하게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의 후진국, 부끄럽기 짝이 없는 국가위상이었다.


당시 자유화되기 전 공산국가이던 헝가리 폴란드 유고와 같은 나라들과 동점이었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후진국들인 인도네시아 필리핀 케냐 수단 등과 동급이었다. 한국보다 언론자유가 앞선 것으로 평가된 나라들 중에는 파키스탄 이집트 레바논 로디지아도 4등국으로 포함돼 있었다. 한국보다 못한 나라라면 그저 북한 소련 중국 루마니아 캄보디아 베트남 정도의 일당독재 공산국가들뿐이었다.

한편 보수언론이 회원으로 가입한 국제언론인협회(IPI)는 군사독재 아래 신음하는 한국 언론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당초 IPI는 이승만 정권 아래서는 한국에 언론 자유가 없다며 회원 가입신청을 거부했다. 그러다가 1960년 말 가입을 승인했다. 그것은 4.19 혁명 덕택으로 언론자유를 쟁취한 결과였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이승만 정권 때보다 훨씬 더 어둡고 긴 터널 속에 갇혀 있던 한국의 언론 상황에 IPI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언론자유에 문제없음"이라는 보증이었다. 왜냐하면 군사독재가 끝난 후 거의 완전히 민주화가 이루어진 노무현 정부 당시 이 단체가 발표한 '한국에 관한 결의안'은 많은 문제 제기로 돼 있기 때문이다.

오랜 군사독재 시절 아무 말이 없던 그 IPI는 민주화가 확립된 2003년 9월15일 연례 총회에서 이른바 '한국에 관한 결의안'이란 것을 내놓았다. 결의안에 담긴 주요 내용은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나 공정거래위원회의 신문시장에 대한 독과점 현황 조사가 언론 탄압이라는 비판이었다. 그것은 과거 정부가 방조해 오던 언론의 특권과 일탈행위를 실정법에 따라 바로잡는 정당한 법률행위였다. 그런데도 IPI의 결의안을 보면 구체적 상황 진단은 없고 비난만 드러나 있었다. 이는 IPI의 한국 지부가 낸 보고서를 그대로 전재했다는 증거였다. IPI 한국지부는 주류 보수언론이 주도해 왔다. 2003년 IPI 총회에 참석한 대표단도 동아일보, 조선일보, 문화일보, MBC, 연합뉴스의 간부들로 구성됐다. 보수언론들은 IPI의 한국 결의안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언론 탄압과 공작이 횡행하던 박정희 정권 시절 IPI가 침묵했던 것도 또 다른 공작이었고 거기엔 보수언론도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그래 보았자 박정희 정권의 공작과 로비가 통하지 않는 국제단체에서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위상은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버드대, 언론인 연구과정 니만 펠로십에 한국 기자 입학 거부
유신 후 87년 6.10까지 "한국 기자는 자유 언론인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언론인 연구과정인 미국 하버드대의 니만 펠로십도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한국 기자를 추천받기 거부했다. 박정희가 사망하고도 수년 뒤인 87년 6월시민항쟁 덕으로 한국 기자를 다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랜 해직생활 끝에 88년 2월 제자리에 돌아가 95~96년 니만펠로십 유학을 마칠 때 쯤 나는 현지에서 그런 사실을 알게됐다. 당시의 책임자에게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얼굴이 화끈거림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 때의 한국 기자는 자유 언론인이 아니었다"고 분명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선포한 1972년 10월 이후 87년 6.10 시민항쟁이 승리할 때까지 15년간 한국 언론은 그렇게 수모를 겪어야 했다. 유신체제 선포 이전엔 1963년부터 72년 초까지는 매 2년마다 한국의 중견 언론인 중 하버드대 니만 펠로가 선발됐었다.

하버드대 니만펠로십은 1938년 월터 리프만에 의해 설계된 후 세계 58개국에 자유언론인 1000여명을 배출했다. 내가 니만펠로에 선발돼 유학할 수 있었던 것은 1987년 6월 시민항쟁이 승리해 언론자유가 인정된 덕택이었다. 동급생 25명 중에 미국 기자가 13명, 나머지 12명이 영국 프랑스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남아공 체코 폴란드 일본 그리고 한국이었고 중국에서 망명 온 반체제 기자도 자유언론인이었다.

2000년대 들어 프리덤 하우스는 세계 각국의 언론상황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 한국을 2등급으로 분류했다. 이를 두고 보수언론들은 우리의 언론자유가 1등급이 아님을 강조했다. 당시의 김대중 정부가 언론자유를 옥죄었다는 논조가 깔려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언론사에 대해 한 일이라면 탈세행위를 법에 따라 처벌한 것뿐이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오랫동안 부동산 관리와 세금 문제에 대해 정권 측이 특혜를 주거나 묵인해 왔기 때문에 탈세 처벌도 언론 탄압인 것처럼 왜곡했다. 특혜와 반칙의 교정을 반민주적 언론탄압으로 비판했다. 언론은 이미 사회적 공기(公器)가 아니라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사적(私的) 도구였던 셈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에 의한 군사권위주의 정권이 끝나고 하위권이던 언론자유가 상위권으로 올라선 상황에서 언론자유를 침해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보수신문사의 사주와 편집인들은 과거 어두웠던 시절엔 무엇을 했는가. 언론자유를 위해 과연 기여한 일이 있었던가. 유신독재나 5.18 내란 상황에서 정의로운 기자와 논설위원들이 언론자유 운동을 벌였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했는지 조사해 보아야 할 일이다.

당시 자유언론을 실천하려던 기자들을 강제로 해직시킨 사주는 지금 사주의 선대로 같은 족벌이 아니던가. 탈세 처벌을 모면하고 비호하기 위해 언론자유를 들먹이는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방패막이로 삼으려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와 다를 게 무엇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김대중 이름도 못쓰고 '재야인사'로만 표기한 코미디 언론

박정희 정권이 구사한 가장 반민주적인 통치행위는 언론의 비판에 재갈을 물린 공작이었다. 유신독재 아래서는 수시로 긴급조치를 선포해 특정 이슈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보도를 금지했다. 예컨대 1979년 10월 부산마산 시민항쟁도 계엄포고령으로 언론 보도를 금지해 사실 자체의 기록으로 사초(史草)라 할 수 있는 기사가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다. 1973년 8월 도쿄에서 납치돼 온 김대중 씨는 그 후 국내 언론이 이름을 쓰지 못한 채 '재야인사'로만 표기했다. 언론의 암흑기였고 우민화 통치의 극치였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언론 공작 중 가장 비열한 것은 비판적 언론인의 강제해직과 광고탄압이었다. 특정 언론사가 눈밖에 나면 그 광고주들을 겁박해서 수입원을 틀어막았다. 국가안보를 위해 설치한 중앙정보부 같은 국가정보기관이 광고주인 기업인을 겁박하는 야만적 공작을 담당했다.

▲1975년 3월17일 새벽,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편집국에서 자유언론 투쟁을 벌이던 기자들이 회사 측이 동원한 용역 조직원들에 의해 거리로 축출되고 있다. 이때 쫓겨난 130여명의 기자들은 동아투위를 결성해 일관되게 자유언론 운동을 전개했으며 한국 사회의 각계 각 분야에서 개혁적 지식인으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 자유언론 선언을 발표하자 중앙정보부는 이 신문에 광고를 게재해 온 기업들을 압박했다. 동아일보는 곧바로 광고 해약사태에 직면했다. 신문은 광고면을 백지로 둔 채 인쇄됐다. 정권 측의 광고탄압이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성원광고들이 답지했다. 그러나 독자들의 성원광고는 지속적으로 장기화할 수는 없다. 그것으로 신문사의 광고 수입을 대체하기엔 턱 없이 모자랐다.

당시만 해도 동아일보사의 총수입은 대체로 구독료와 광고료가 반반 정도여서 지금에 비하면 광고 수입의 비중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영상 광고료 수입은 매우 중요했다. 광고 수입의 숨통을 조이는 공작으로 신문사 사주 측은 결국 비판적 기자들을 해직시키면서 중앙정보부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130여명의 기자를 해직시켰다.

박정희 체제폭력의 산물 '동아투위' 각 영역에 큰 족적
언론자유의 재확립과 국민화합 위해서도 명예종결 기다려


당시 동아일보에서 거리로 쫓겨난 기자들이 결성한 동아일보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언론 뿐 아니라 한국의 정치, 사회문화, 학계 및 교육 분야에서 실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977~78년 엄혹하던 유신독재 말기에도 이들은 '동아투위소식'이라는 제3의 언론을 만들어 배포했다. 제도권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반독재 시위와 인권탄압 사건들을 게재했다. 정권 측이 가만 둘리 없었고 동아투위는 위원장과 총무 상임위원 전원이 불법 연행, 구속, 기소당했다. 안종필 위원장, 장윤환 이병주 위원장 대리, 안성열 임채정 이부영 김종철 정연주 박종만 이기중 양한수 홍종만 기자들이 그들이다. 유신체제 아래서 언론자유의 말살이었다.

동아투위는 그 후에도 일관되게 민주언론시민연대(민언연) 활동을 통해 제도권 언론에 대한 감시역을 했으며 90년대 전후 성역 없는 자유언론의 기수 노릇을 한 한겨레와 월간 말지 창간을 주도했다. 한겨레의 창간 초기 편집위원장과 논설주간을 맡은 장윤환(후에 대한매일 논설고문) 성유보(후에 방송통신위 부위원장)와 논설주간을 맡은 정연주(후에 KBS 사장)가 동아투위 출신 언론인이다.

사회운동에서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정동익과 민언연 이사장 이명순 등이 중심에 서 왔다. 정계에서는 국회의장을 지낸 임채정과 열린우리당 의장을 역임한 이부영이 정치개혁에 크게 공헌했다. 출판계에서도 한길사 대표 김언호와 전예원 대표 김진홍 등이 출판언론이라 할 만큼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 학계와 교육계에서 많은 대학교수가 배출됐고 이들은 모두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을 전파시키는데 앞장섰다.

이들이 독재정권에 의해 박해받은 지식인 그룹으로서 고난에 굴하지 않고 혁혁한 사회적 공헌을 해 왔다는데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희생당한 체제폭력에 대해 보상은커녕 아직 아무런 명예회복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공작적 언론탄압으로 거리로 쫓겨난 동아투위 멤버들은 지금도 스스로를 제자리에 돌아가고 싶은 기자로 변함없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가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 의한 공작적 해직 또한 체제폭력이었다. 그들은 독재정권의 역사청산과 새 시대의 국민화합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본령인 언론자유의 재확립을 입증하기 위해 명예로운 종결을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제17대 국회에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등원한 나에게 당 지도부는 언론개혁단장을 맡겼다. 2004년 정기국회 내내 나는 신문법과 방송법 개정안을 놓고 한나라당과 줄다리기를 벌여야 했다. 편집권 독립과 신문시장에서 일정한 비율 이상을 점유하는 신문사의 경우 소유지분을 특정 족벌이 독점하지 못하게 분산시키려는 시도는 끝내 실현하지 못했다. 갈수록 당 지도부와 다른 동료의원들은 내게서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작은 신문사들의 배포망을 지원하는 신문유통원과 지방신문발전위원회, 그리고 언론에 의한 피해를 손쉽게 구제할 수 있도록 언론중재위법을 개정한 것 정도가 실적이었다.
▲2006년 4월24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해방 이후 언론탄압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및 배상에 관한 특별법'제정을 위한 토론회에서 김재홍 의원(국회 정치커뮤니케이션연구회 회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이 자리엔 정일용 기자협회장,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 조양진 동아투위 위원,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회 공동대표, 김광석 변호사가 토론자로 참석했다.

그 후 2006년 나는 독재정권의 언론탄압 피해에 대한 명예회복을 위해 특별법 제정에 나섰다. '해방 이후 언론탄압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및 배상에 관한 특별법안'을 작성하고 토론회와 청문회를 거쳐 문화관광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법안은 문광위에서 우선순위에서 밀려 제대로 상정되지도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다. 당 지도부에 매달리고 떼를 써서라도 관철시켰어야 했는데 기가 꺾여 좌절했다. 이 법안이 제정됐어야 동아투위와 80년해직언론인들의 피해구제와 명예회복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텐데 내가 과연 최선을 다했던가 오랫동안 회한이 남는다. 그러나 해직언론인들의 명예는 민주화로 이미 회복됐다. 오히려 남은 문제는 그런 현실과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해당 언론사들의 정신적 부채일 것이다.

한국의 주류 보수언론은 비판과 타협의 줄타기 경영의 달인들
전두환 내란집단의 80년 언론인해직도 '박정희 수법'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 수법은 1980년 전두환의 5.18광주항쟁을 전후한 내란 과정에서도 비판적 언론인에 대한 강제해직 때 그대로 답습됐다. 하나회 집단은 보안사령부를 내세워 정치군인들의 내란행위에 대해 비판한 기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언론사에 내려보냈다.
▲1980년 5월14일 광주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를 끝낸 뒤 200여 교수들이 앞장서고 그 뒤에 전남대 학생들이 질서정연하게 돌아가고 있다. 신군부의 계엄사 검열단은 이런 사진을 보도불가 조치했으며 검열의 정당성과 저의를 의심케 했다.

당시 내가 소속했던 동아일보사에서는 모든 기자들의 일괄 사표를 제출받은 뒤 선별적으로 수리하는 해직조치가 자행됐다. 불과 3년차 기자에 불과했던 나도 선배들과 함께 거리로 쫓겨났다. 기자로서 막내였지만 자유언론 선언문의 초안 작성을 맡았고 광주항쟁을 싣지 않는 신문제작을 거부했기 때문에 당시로선 피할 도리가 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직접적인 언론 탄압은 비판적 언론인들을 수시로 불법 연행해 문초하고 구타하는 방식이었다. 젊은 기자에서 최종 제작 책임자인 편집국장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았다. 편집국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상시로 출입하면서 감시하고 신문의 편집 제작에 간섭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10.24 자유언론 선언의 한 원인도 그런 정보기관원의 편집국 출입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는 재벌기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보수신문사들이 특혜 성장을 누렸다. 정권에 대해 적당히 비판하고 다른 한편 타협하는 줄타기 경영을 하면서 언론의 정치 사회적 영향력과 경제적 부를 함께 얻었다. 그러나 이른바 주류 언론들의 그런 줄타기 시절 한국의 언론 자유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는 바닥 수준이었다.

 

 

<25> 민의는 쿠데타세력 반대

63년 야권단일화 했으면 박정희 정권 없었다

 

역대 대통령선거를 보면 제도가 불비하거나 정치권 잘못으로 국민 의사와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역사 방향이 틀어졌다. 그것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정치권의 책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사례가 1963년 10월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선거였다. 이 대선에서 박정희가 당선돼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한 제3공화정이 출범했다. 그것은 그 후 30여년에 이르는 군부독재의 기나긴 터널을 구축한 불행한 정치사의 씨앗이었다. 69년 3선개헌과 72년 유신 쿠데타, 그리고 박정희가 키워놓은 친위대 하나회 집단에 의한 12.12 군사반란과 5.17 광주시민학살의 뿌리가 닿아 있는 역사의 갈림길, 그것이 63년 대통령선거였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당초 군대로 복귀하겠다는 공약을 식언하고 자신이 오랫동안 품어 온 권력의지 실현에 나섰다. 쿠데타 주체세력 내부에서도 군대 복귀파와 정치참여파로 나뉘어 대립했으나 실권은 정치참여파 쪽에 있었다.

63년 허구적 민정이양이 이루어지기 전에 박정희와 육사8기의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오치성 옥창호 신윤창 등은 이미 정치공작과 권력의 도구를 갖추었다. 그들이 조직한 권력의 도구는 중앙정보부와 공화당이었다. 우선 중앙정보부는 정보통치와 정치공작을 맡는 일종의 비밀경찰에 해당한다. 나치독일 히틀러 정권의 게슈타포와 똑같았다.

쿠데타 세력도 정치에 나서기 위해서는 선거와 국회를 운영할 수 있는 정당이 필요했다. 그들은 쿠데타 포고령으로 다른 정당과 정치인들의 활동을 정지시켜 놓은 채 자신들의 정치적 도구인 공화당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양심불량이며 불공정 게임으로 기록된 공화당 사전조직 사건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그들은 처음부터 군대 복귀를 생각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또한 공화당을 조직하기 위해 비밀자금을 만든 것이 이른바 4대의혹 사건이다. 권력을 장악한 그들은 이권을 나눠주면서 커미션을 챙겼고 그 검은 돈을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투입했다. 증권시장 조작, 도박기계인 파친코 수입허가, 일제 시발택시 수입허가, 워커힐호텔 건설허가가 그것이다. 권력형 부패비리의 원조도 그들이었다.

이렇게 정치일선에 나설 만반의 준비를 끝낸 뒤 이들은 63년 대통령선거에 임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그들은 정치에 초보 운전자였다. 수완있는 공작정치가 자리잡기 전이었다. 민간 정치인들로 구성된 야권이 잘만 했으면 박정희와 정치군인들의 집권은 첫 단계에서 봉쇄할 수 있었다.

박정희 반대표가 다수…후보단일화 잘 했으면 쿠데타정권 무산

63년 대통령선거 후보는 모두 6명. 이 중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외에 윤보선, 오재영, 변영태, 장이석은 모두 민간인 출신 야권 후보였다. 선거 결과 후보들의 득표수는, △박정희 4,702,640 (46.64%) △윤보선 4,546,614 (45.10%) △오재영 408,664 (4.05%) △변영태 224,443 (2.23%) △장이석 198,837표 (1.97%)로 나타났다.

이 득표 분포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5.16 쿠데타 주모자인 박정희에 대한 반대가 다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를 반대하는 후보들의 연합정치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때 지금처럼 야권 후보의 단일화가 이루어졌다면 당선자는 박정희가 아니라 야권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1963년 10월15일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투표하는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부인 육영수,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와 부인 공덕귀.


야권후보가 모두 하나로 단일화되지 않는다 해도 윤보선이 오재영이나 변영태의 표만 흡수하는 연합정치만 했어도 박정희 당선은 막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둘째로 선거과정에서 후보단일화나 연합정치보다도 제도적으로 민의를 정밀하게 반영할 수 있는 장치가 바로 결선투표다. 63년 대선 당시 만일 결선투표제가 있었다면 2차투표에서 박정희와 윤보선이 맞붙게 된다. 거기서 나머지 후보들에 대한 지지표의 대부분은 같은 야권후보인 윤보선에게 옮겨졌을 것이 명확하다.

그러나 당시는 야권후보 단일화 같은 연합정치도 없었고 더구나 결선투표제가 알려지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선거사에서 이렇게 민의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경험하고도 지금껏 결선투표제가 도입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63년에 비해 역사적 의미는 덜하지만 87년 12월 치러진 대선도 똑같은 경우였다. 당시 후보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었다. 박정희의 후예로 민정당 후보인 노태우와 그에 반대하는 야권의 민간인 출신 두 후보가 대결했다. 군정이 연장되는 위기를 느낀 야권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보단일화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양김은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87년 대선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 실패로 군정 연장돼

87년 대선에서 주요 후보의 득표 결과를 보면, △노태우 8,282,738 (36.64%) △김영삼 6,337,581 (28.04%) △김대중 6,113,375 (27.05%) △김종필 1,823,067표 (8.07%) 등이었다.

▲ 1987년 12월 대선에서 단일화에 실패한 야권의 김대중 김종필 김영삼 3김씨가 89년 10월 회동하고 있다. 이로부터 석달 후 김영삼 김종필 씨는 노태우의 민정당과 3당합당을 단행하여 여당으로 흡수됐다.


결과는 뻔히 예상한대로 노태우의 승리, 어부지리 정권이 탄생했다. 불과 36.64% 짜리 대통령, 그것은 정통성의 취약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군정 반대노선인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의 지지표만 합해도 과반선을 넘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당시 민의는 더 이상의 군부정권 연장을 거부했으나 야권이 연합정치에 실패함으로써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정통성 취약을 해결하지 않으면 국정 수행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국회는 이미 집권 민정당이 평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으로 구성된 3야당을 제어하기 불가능했다.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김씨가 합의하지 않고서는 정부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소야대 구조였고 그것이 국민의사였다.

노태우 정권은 이같은 여소야대 국회를 어떻게든 구조 변경시키기 위한 정치공학에 골몰했다. 그 결과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통합하여 민자당을 창당한 3당합당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정치적 상상력을 초월한 기상천외의 구조변경이었다. 총선거에서 국민이 만들어 준 국회 구조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공작정치였다.

노태우와 민정당, 김영삼과 통일민주당은 가치와 정책에서 상반될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 국가권력을 이용한 체제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국민의사에도 반하고 정치적 정당성도 갖지 못한 3당합당은 그 다음 대선에서 또 다시 민의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도출한다.

92년 대선도 국민의사에 반하는 3당합당 결과가 결정지어

다음은 1992년 12월18일 실시된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주요 후보의 득표수.
△김영삼 9,977,332 (41.96%) △김대중 8,041,284 (33.82%) △정주영 3,880,067 (16.32%) △박찬종 1,516,047 (6.38%) △백기완 238,648 (1.00%)

이때도 3당 야합이라고 비난받았던 민자당 후보가 당선됐지만 야권 후보단일화나 결선투표제가 성사됐더라면 선거 결과는 바뀌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정주영이나 박찬종 후보가 김영삼의 표를 잠식했다고 평가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저런 분석보다도 민의를 정밀하게 반영하는 선거제도와 함께 후보들 간의 연합정치가 정립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세계에서 정권의 향배를 단 1회의 투표로 결정짓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다. 미국은 일반 국민이 대통령선거인단을 선출하고 선거인단이 2차투표를 실시한다. 프랑스는 대표적으로 결선투표제를 확립하여 1차투표에서 과반선 득표를 얻는 후보가 없을 경우 2차투표를 실시한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대통령은 2차 결선투표로 확정된다.

의원내각제의 경우도 일반 유권자가 뽑아놓은 원내 의석분포로 과반선에 가까운 정당이 없어서 정치적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2단계의 연합정치가 정치권에서 전개된다. 2~3개의 정당이 연정을 구성해서 전체 의석 중 최소한 40% 이상을 넘겨야 내각 구성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선거사로 보아도 이번 문재인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는 매우 의미있는 정치과정이었다. 남은 문제는 경선 결과에 따라 승복한 것이 아니라 단일화 협상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사퇴한 안철수 후보가 자신의 지지자들을 얼마나 문재인 후보에게 견인해 주느냐로 모아진다. 그러나 그런 조건을 만들어 줄 책임은 결국 문재인 후보에게 돌아간다. 모두가 역사와 국민 앞에 무거운 소명을 다해야 할 상황이다.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