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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최종길 교수 의문사

by Wood-Stock 2012. 8. 25.

최종길 교수 의문사(상) 중앙정보부 엘리트 동생도 설마했던 ‘형의 죽음’


 

1973년 10월19일 새벽, 남산 중앙정보부 마당에 떨어진 최종길 교수의 주검. 중앙정보부가 현장검증 사진이라면서 공개한 것이다.

최종길 교수의 미국 하버드 옌칭연구소 연수 시절. 1970년대 초반의 모습이다.



누렇게 빛이 바랜 흑백사진 속에 한 남자가 있다. 양복 웃옷까지 갖춰 입은 채 땅바닥을 베고 하늘을 바라보고 누웠다. 한 남자의 삶 전체가 저렇게 땅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마흔둘, 중년의 나이에도 얼굴에는 아직 청년의 싱그러움이 남아 있다. 흐트러진 머리칼. 그 주위 땅바닥엔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넓게 번졌다. 저 남자는 왜 저기 저리 슬픈 모습으로 누워 있는 걸까. 달랑 사진 한 장, 그것도 흑백사진으로.

반유신 시위가 번지던 1973년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동생 손을 잡고 중정에 왔다
중정 감찰실에 근무하던 동생은 ‘설마 무슨 일 있겠나’ 했지만…

동생은 형을 안내한 10월16일 저녁 퇴근때 출입자 통제소에서 주민등록증 보관함을 살폈다
주민증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덜컥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허허! 말로만 듣던 남산엘 다 와보는구나”

1973년 10월19일 새벽. 남산 중앙정보부 마당이었다.

나는 그 사진을 뚫어지게 보고 또 보았다. 2001년 여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으면서, 간첩으로 몰려 죽은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 사건을 조사하던 때 일이다. 그 ‘피 묻은 사진’을 보면서 성서 창세기 한 대목이 떠올랐다.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받아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왕조시대의 전제군주보다 더한 권력을 누리기 위해 중정을 통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게 똑같이 묻고 싶었다. ‘당신들이 저 사람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저 사람의 피가 땅바닥에서 울부짖고 있다.’ 하긴 그래, 이미 당신도 저 피를 받아낸 땅에서 쫓겨났지.

어떤 영감이라도 떠오를까, 혹시 어떤 단서라도 있을까.

사진은 중앙정보부가 검사 입회 아래 현장검증을 하면서 찍은 거라 했다. 중정 남산 청사 7층에서 조사를 받던 최 교수가 화장실 변기를 밟고 창문에 올라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했다.

그 바로 3일 전 최 교수는 동생 손을 잡고 남산 중정에 왔다. 동생 최종선은 중정 공채에 수석으로 합격해서 ‘중정 안의 중정’이라는 감찰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감찰실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위세가 높던 중정 직원들을 감시하는 부서였다.

동생은 당시를 이렇게 썼다.

“73. 10. 16. 오후 1시45분, 나와 형은 아스토리아 호텔 지하 다방에서 만나 차 한잔 마시고 웃으며 걸어서 남산 청사 정문에 도착했다. 나는 담당과에 전화를 걸어서 형님께서 오셨음을 알렸다. 형님이 안내 직원을 따라 들어가기 전에 나는 ‘그들을 믿어도 좋을까’ 하는 불안을 감추고 ‘형님, 이 못난 동생의 직장, 이때 한번 봐 두십시오’ 하며 웃었다. 형도 ‘허허! 말로만 듣던 남산에를 다 들어가 보게 되었구나’ 하면서 같이 웃으시더니…. 이것이 나와 형의, 우리 형제의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 줄이야.”

최 교수는 서울법대를 졸업한 후, 쾰른 대학에서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민법 전공으로 독일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중정은 최 교수와 제물포고등학교 동창인 이재원이라는 친구를 북과 내통하고 있는 첩자로 지목했다. 그러던 차에 역시 독일에서 유학하다 돌아온 이아무개가 중정 조사를 받으면서 자신이 동베를린에 갔다 온 죄를 면제받으려고 최 교수 이름을 댔다.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50~60년대 베를린은 유학생들의 무덤이라 할 만했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에서 비롯된 극단의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사람들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일본이나 독일, 그 밖에 유럽 여러 나라들은 사회당, 공산당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 사상적으로 자유로웠다. 그리고 1961년 베를린 장벽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을 타면 동베를린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가 있었다. 호기심에서, 지하철 타고 서울에서 인천 가듯 동베를린에 갔다 온 유학생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중정에서 볼 때 이들은 너무너무 훌륭한 먹잇감들이었다. 아마 이랬을 거다. ‘어이구, 내 밥이 득시글득시글하는구나.’

 

‘밀고자’가 된 유학생들 운명, 그리고 천상병

최 교수를 조사했던 중정 수사관 차철권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지 마라. 당시 한국에서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 있은 다음이라 동베를린에 갔다 왔다는 자백만 받아도 바로 간첩으로 볼 때였다.”

중정은 동베를린에 갔다 온 유학생들을 간첩으로 몰아 겁을 주고는, 다른 유학생들을 불면 봐주겠다고 회유를 했다. 이렇게 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간첩 후보자’들이 중정 그물망에 걸려들었다. 중정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수많은 유학생들이 프락치가 되었으니 그들의 신세 또한 너무도 딱했다. 내가 살기 위해 친구, 지인의 이름을 대야 하는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평생 동안 그들은 ‘배신자’라는 양심의 가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을 테니 그들 또한 박정희 중앙정보부의 피해자였다.

대학 1학년 시절 나는 정치학 개론 수업시간에 뒷자리에 앉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었다. 이 소설을 쓴 도스토옙스키 평전을 번역했고, 헤겔을 소개하던, 그래서 너무 존경스러웠던 어떤 선생님도 나중에 들으니 젊은 시절, 이 밀고자 중의 한 사람이었단다. 아아, 마음이 아팠다.

그는 1967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동베를린에 갔다 온 주변 사람들 이름을 중정에 털어놓았다. 당시 박정희는 대통령을 두번만 연임하게 되어 있는 헌법 조항을 바꾸려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대적인 총선 부정이 있었다며 학생과 국민들이 저항했다. 그러자 중정은 이 밀고를 빌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과 이응노 화백 등 예술가, 교수, 학생, 공무원 등 194명을 엮어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귀천’(歸天)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던 시인 천상병도 이 사건의 희생자였다.

몇 년 전, 인사동에서 찻집 ‘귀천’을 운영하던, 천상병의 부인 목순옥이 나를 찾아와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애소했다. 1967년 당시 중정은 천상병을 공갈죄로 엮었다. 그가 친구인 아무개 교수로부터 유학 시절 동베를린에 갔다 온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를 당국에 알리지 않을 테니 막걸리 값 백원만 달라고 공갈을 쳤다는 거였다. 천상병이 이렇게 친구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뜯어낸 돈이 도합 5만원이었다나? 그가 늘 어린애 같은 천진함으로 이 친구, 저 친구에게 ‘막걸리 값 하게 백원만’ 하고 다녔었다. 그런데 중정은 터무니없이 그를 잡아다가 매질하고 코에 물을 들이부었다. 그는 3개월 만에 풀려나서 행방불명이 된 뒤로 4년을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되었다. 이 삶을 이렇게 만든 죗값은 대체 누가 받아야 하는 건가. 박정희? 중정? 검사? 판사?

나는 목순옥 여사를 여러 번 만나 천상병 시인의 재심을 준비했다. 그런데 문제는 천상병에게 공갈을 당했다는 친구가 아예 동백림 사건의 ‘동’ 자도 듣기 싫다며 도무지 만나주질 않는 거였다. 차일피일 세월만 가던 어느 날, 그만 목 여사가 갑작스레 남편을 따라 귀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상병에게는 한점 혈육이 없었으니 나는 재심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이 세상 소풍이 아름다웠다’는 천상병 시인이 어디 구질구질하게 이 세상 면죄부를 바라기나 했겠나.

데모 막는 게 주임무였던 학생과장이었는데…


1971년 유학생 이아무개로부터 최종길 교수 이름을 듣고 ‘존안부’에 올려놓았던 중정은 1973년 이를 다시 꺼내 들었다. 만약 처음 제보를 받았을 때 그 내용이 상당히 알맹이가 있는 것이었다면 2년 동안 묵혀 둘 까닭이 없었다. 이아무개의 제보는 그저 최 교수가 북한 첩자로 의심받고 있는 이재원의 친구이고, 그로부터 800마르크를 빌린 적이 있다는 수준이었다.

간첩 혐의가 있으면 중정 수사과 담당이었는데 최 교수는 수사과가 아니라 수사공작과에서, 수사가 아닌 심사를 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죄를 추궁하는 게 아니라 정보를 얻고 앞으로 최 교수를 공작에 활용할 수 있는지를 조사하려 한 것이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1969년 삼선개헌을 통해 대통령을 세번째 하면서도 이번에는 아예 영구집권을 하려고 ‘10월 유신’이란 걸 선포하고 제가 만든 헌법을 스스로 파괴해 버렸다. 1973년에 접어들면서 이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시작되고 10월2일 서울대를 시작으로 반유신 시위가 대학가에 번졌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억누를 빌미가 필요했다.

최 교수는 서울법대 학생과장이었다. 말이 학생과장이지 학생 데모 막는 게 주 업무였다. 최 교수가 간첩이면 서울대 학생들이 빨갱이에게 조종당한 거라 몰 수 있다. 1967년 삼선개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백림 사건을 이용하고, 1974년 민청학련 학생들을 빨갱이 조종을 받은 걸로 몰기 위해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낸 거와 거의 같은 상황이었다.

사실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위해 ‘빨갱이’ 카드를 수시로 빼들었지만 오히려 그야말로 그 분야의 원조였다. 최 교수의 동생은 2001년, 지금 내가 운영하고 있는 출판사 ‘공동선’에서 형의 죽음 전말을 밝히는 <산 자여 말하라>라는 책을 냈다. 그 책에서 그는 박정희의 전력을 길게 인용했다.

거기에 따르면 박정희는 일제 때 교사 생활 3년에 출세를 위해 일본군 소속 만주신경군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942년 우등으로 졸업하면서 이런 답사를 읽었단다. “만주국의 왕도 낙도를 지키고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는 성전에 나는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 그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 졸업을 한 그는 일본군 소대장으로 중국 팔로군 게릴라 토벌에 나섰다. 팔로군에는 수많은 우리 독립군들이 배속되어 싸우고 있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1949년 대구폭동을 일으킨 좌익세력의 우두머리였다. 박정희 그 자신도 그 무렵 국방경비대 소령으로, 좌익의 여수·순천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1949년 2월13일 서울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최 교수의 동생은 형을 중정에 안내해 간 날인 10월16일 저녁, 퇴근하면서 중정 출입자 통제소에서 주민등록증 보관함을 살폈다. 그런데 형이 낮에 들어가면서 맡겨놓은 주민증이 보관함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나. 친구 이재원과의 관계에 대해서 몇마디 물어보고 서너 시간 지나면 내보내 주겠지. 이렇게 낙관했던 동생에게 덜컥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다음날인 10월17일 아침 출근길에 동생은 다시 보관함을 살펴보았다. 아, 그날 아침에도 형의 주민증은 그 자리에 꽂혀 있었다. 저녁에 퇴근하면서 다시 거길 쳐다보았다. 그때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형님이 겪고 계실 고초를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으며 당장 형님이 계신 지하실로 달려가 강제로라도 형님을 구출해 나오고 싶었다.’

10월18일 아침과 저녁에도 여전히 형의 주민증은 거기 있었다.

 


최종길 교수 의문사(하) 아, 그들은 진실을 무덤까지 가져가겠단다


1973년 10월21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직계가족들만 모여 치른 최종길 교수의 장례식. 

이 기막힌 순간에도 영문을 모르는 여섯살짜리 딸 희정(맨 왼쪽)은 무덤가를 웃으며 뛰어다녔다. 그 옆으로 아들 광준군, 동생 종선씨, 부인 백경자씨.



2002년 의문사위 조사 결과 최 교수가 간첩자백을 하고 양심 가책 못 이겨 자살했다는 등 중정 발표는 거짓으로 드러났다

당시 수사관 증언에 따르면 “7층 비상계단에서 최 교수 미는 걸 보았다며 김종한 계장이 시늉을 했다”
그러나 김종한은 이미 사망, 화장실 추락사 주장한 김상원은 캐나다로 이민가 입을 닫았다

 

“존경하는 중앙정보부장님,

우리는 나라를 배신한 천인공노할 간첩 최종길의 가족으로서 그가 간첩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조국을 배반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결국은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은 최종길이 한없이 밉고 원망스러우나 살아있는 가족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부디 살아남은 우리 가족을 불쌍히 여겨서 부장님께서 저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며 최종길의 죄상을 신문에 보도하지 않고 호적에 기재하는 등 사상적 제한을 가하지 않음으로써 자손들이 밝게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간첩 최종길’ 표현까지 써야 했던 유족들

최 교수가 중정에서 조사받다 죽은 10월19일 그날 저녁. 그의 처와 형, 동생 최종선은 중정의 요구로 이런 내용의 각서, 아니 탄원서를 썼다.

최 교수의 처와 형제들은 자신의 남편, 동생, 형인 죽은 최 교수를 향해 ‘천인공노할 간첩’이라고 했고, ‘조국을 배반했다’고도 했고, ‘최종길이 한없이 밉고 원망스럽다’고도 했다.

가족들은 최 교수가 간첩 자백을 했다는 중정의 이야기를 듣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사건이 신문에 나지 않게 해 달라, 가족들이 연좌제 피해를 받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을 중정이 들어주는 대가로 이 탄원서를 썼다. 그 절망의 시간들….

10월21일 아침, 주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가족 몇이 모여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 최 교수를 묻었다. 최 교수의 6살짜리 딸은 이 기막힌 순간에도 아버지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채 무덤가를 웃으며 뛰어다녔다.

나흘 뒤인 10월25일 중정은 유럽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공무원, 교수 등 총 54명이 정부 주요 기관, 학원, 기업체에 침투하여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연합전선을 형성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최 교수는 ‘구라파 거점 학원침투 거물간첩’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간첩 최종길은 1957. 11. 인천중학교 동창인 북한 공작원 노봉유에게 포섭되어 김일성 선집 등을 탐독하여 오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흠모하여 오다가 1958. 10. 하순 동백림 비밀 아지트에서 유학생을 포섭할 것을 지령받고, 1960. 5. 평양에 가서 20일 동안 체류하면서 사상교양과 간첩교육을 받았고, 1962. 8. 국내에 잠입하여 서울법대 학생과장 등을 역임하면서 북한의 지령을 15차례에 걸쳐 받은 후 한일회담 반대, 삼선개헌 반대 등의 학생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해 왔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2000년 12월,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가족들의 진정으로 조사를 개시했다. 나는 상임위원으로서 조사를 총괄했고, 조사관들은 약 800명의 관련자들을 탐문, 조사했다.

무엇보다 터무니없었던 것은 그 어마어마하게 그린 유럽 간첩단 사건의 54명에 이르는 간첩 중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단 2명이라는 거였다.

의문사위원회에서 이들을 소환하자 대부분은 30년 전 일을 다시 돌이키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다. 상당수는 내 앞에 와서 자신들이 그 사건으로 조사받은 내용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신이 불기소 처분을 받은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니, ‘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에 연합전선을 형성하려 했다’는 간첩들이 거의 다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거니와, 자기가 간첩으로 수사를 받고 불기소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그런 간첩도 다 있나.

재판을 받은 단 두 명도, 한 명은 무죄고, 다른 한 명, 김장현은 당시엔 징역 4년형을 받았으나 최근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김장현은 당시 경제기획원에서 촉망받던 관료였다. 그의 동료들은 후에 경제부처 장관, 대기업 고위 임원 등을 지냈다. 김장현도 최 교수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 최고 엘리트의 길을 걸어갔을 거였다. 그래도 최 교수처럼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말할 수 있으려나.

중정은 최 교수가 10월19일 새벽 1시40분경 평양에 갔다 온 간첩이라는 사실을 자백하고는 ‘끊었던 담배를 7년 만에 피워본다’며 연거푸 두 개비를 피우고, 용변을 구실로 7층 화장실에 가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변기를 밟고 창으로 올라가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했다. ‘국내 조직의 파괴로 북 당에 대한 사명감과 자신은 물론 가족 친지 등에까지 불명예스러운 오점을 남기게 됨을 비관한 자살.’

차철권의 ‘천지신명과 어머니와 양심’

의문사위원회 조사에서, 사건 당시 중정부장 이후락을 비롯한 차철권의 상급자나 동료, 같이 조사했던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최 교수가 간첩이라고 자백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이를 확실히 뒷받침하는 사실 하나. 당시 중정 관계자들은 최 교수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대책회의를 열었다. 10월16일 최 교수를 동생을 시켜 중정에 데려다 놓고 19일 새벽까지 3박4일 동안 최 교수로부터 어떤 범죄사실에 대한 진술서 한 장 받아낸 게 없었다. 간첩임을 입증할 만한 어떤 증거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다급해진 그들은 마치 최 교수에 대해 상당 부분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처럼 서류들을 소급해서 허위 작성했다. 긴급 구속장, 피의자 신문 조서, 압수수색 조서 등.

현장검증 조서도 허위로 꾸몄다. 19일 새벽 4시40분 검사 입회 아래 현장검증을 하고 추락 사진을 찍은 양 서류가 꾸며져 있었지만 위원회 조사 결과 현장검증은 없었고, 시신은 새벽 4시5분에 이미 국과수에 안치되었다.

10월25일자 중정의 신문보도 발표문 작성자는 이리 증언했다. “신문보도문에 최 교수가 평양에 가서 노동당에 가입하고 공작금을 받았다는 내용은 진술서나 피의자 신문 조서 같은 어떤 근거자료를 보고 작성한 것이 아니고 아무개가 메모해서 주면 짜깁기 식으로 작성을 한 것입니다.”

의문사위원회 조사의 핵심은 고문 여부와 사망 경위였다. 차철권은 위원회에서 고문 사실을 강하게 부인했다.

“잠재우지 않은 것을 빼고는, 제 생명을 걸고 천지신명께 맹세코 최 교수를 고문하지도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자유당 시절 제가 육군 특무부대장교로 복무할 때 어머니는 ‘남의 눈에 눈물 나오게 하면 너나 네 자손 대에서 반드시 피눈물 흘리게 될 것이니 절대로 남에게 악행을 하지 말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제일 중요한데 저는 양심껏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살 만큼 살아서 머지않아 저승에서 최 교수를 만나게 될 터인데, 더구나 형사처벌 시효가 끝난 지금 뭐가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하늘에 맹세코 저는 최 교수의 뺨을 한 차례도 때린 일이 없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도 할 말이 많습니다. 그 기구는 대통령 직속으로 국민 혈세로 움직이는 조직입니다. 그런데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공산당과 싸워온 나를 허무맹랑하게 모함하고 있어요. 세상이 바뀌면 내가 진짜로 진상규명을 요구할지도 몰라요. 누가 국민 혈세를 낭비했는지 따질 때가 올지도 모른단 이야기입니다. 두고 보세요.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천지신명과 어머니와 양심’을 걸었다. 하지만 최 교수 신문에 간여했던 중정 직원 양아무개의 증언은 이랬다. “최 교수는 지하 조사실에서 조사받을 때 런닝, 팬티만 입고 있었습니다. 차철권은 ‘이 새끼 제대로 불지 못해’ 하면서 발로 걷어차고 변아무개는 야전침대에서 뺀 몽둥이로 빠따를 때렸습니다.”

그 밖에 여러 간부와 직원들이 최 교수에 대한 고문 사실을 시인했다. 최 교수의 둔부 사진에는 엄청난 멍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게 그들 손바닥 안에 있던 중정 사람들이 30년이 지나 의문사위원회에 나와서는 정말 초라한 모습을 보였다.

내 앞에서 서로 책임을 떠밀었다. 아래는 위에서 시켜서 그랬다는 거였고, 위는 아랫사람들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멋대로 저질렀다는 식이었다. “부하들을 믿었는데 이럴 줄은 몰랐다. 인간 이하의 짓을 저지른 것이다. 엉덩이의 상처는 몽둥이로 심하게 매질을 해서 생긴 상처다. 이런 몸으로는 걸어다니는 것도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타살이 분명하다, 타살이 분명하다…

7층 화장실 상황에 대한 진술들은 더 의심스러웠다. 최 교수를 화장실에 데리고 갔다는 김상원은 최 교수가 소변기에서 토하기에 비위가 상해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이에 소변기를 딛고 창문에 올라서 아래로 떨어졌다 했다. 그런데 자신이 최 교수 발목을 잡았었다고 했다가 또 그냥 스치기만 했다고 번복했다. 차철권도 최 교수가 투신하려 할 때 한동안 설득을 했다고 했다가, 자신이 화장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떨어졌다고도 했다. 심한 고문으로 거동이 어려운 사람이 소변기 앞 창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창문을 열고, 창문 턱을 잡고 소변기 아래 부리 쪽에 한 발씩 차례로 올려 올라서고, 다시 소변기 맨 위로 올라서고, 거기서 창틀 위로 올라가고, 아래로 몸을 던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마련. 그동안 옆에서 밀착감시를 하던 김상원은 무얼 했다는 건가.

일본 법의학자는 최 교수 앞이마와 왼쪽 발바닥, 양팔의 골절 부위는 피가 응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은 다음에 추락해서 생긴 상처라는 소견을 냈다.

당시 7층 조사실 옆방에서 자고 있던, 차철권의 직속 상관 안아무개는 의문사위원회에서 이런 증언을 했다.

“1973년 10월18일 밤 12시경쯤 차철권의 추궁 소리와 최종길 교수의 비명 소리를 들었고, 그 이후 다급하게 화장실 쪽에서 조사실 방향으로 2명 정도가 뛰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뒤 약 30분에서 1시간 후쯤 김종한 계장이 내가 취침하고 있는 조사실로 들어와 7층 비상계단으로 데리고 가 손짓으로 미는 흉내를 내면서 ‘여기서 최 교수를 밀어 버렸어’라고 해서 그 즉시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와 비상출구로부터 약 2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시체를 확인하였던 것으로, 타살이 분명하다.”

그런데 불행히도 김종한은 이미 사망해서 이 증언의 신빙성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사건의 마무리를 보지 못하고 의문사위원회를 떠났다. 몇 년 뒤 법원이 국가에 유족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명하면서 내린 결론은 이랬다.

‘최종길은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하여 사망하였거나, 고문 등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하여 이를 피하려는 과정에서 사망하였거나, 또는 고문 등 가혹행위에 따라 의식불명 상태에 이른 최종길이 이미 사망한 것으로 오인한 수사관들이 건물 밖으로 던졌을 것으로 인정된다.’

최 교수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었던 중정 직원 김상원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그리고 진실을 들으러 멀리까지 찾아갔던 조사관을 주거침입으로 경찰에 신고했다. 기자에게는 ‘진실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

차철권도 나이가 들어 자기 말마따나 머지않아 저승에서 최 교수를 만날 게다. 최 교수의 아들은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걸어 대학에서 민법을 가르치고 있다. 형 손잡고 남산 중정에 갔고, 형을 천인공노할 간첩이라고 적은 용지에 서명을 했던 슬프디슬픈 동생도 이 땅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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