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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정약용 - 탄생 250주년 다시 보는 다산

by Wood-Stock 2012. 6. 1.

탄생 250주년 다시 보는 다산


올해는 조선이 낳은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태어난 지 250년 되는 해다. 갈수록 힘들어지는 민생 현실과 답을 주지 못하는 정치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 개혁의 큰 꿈을 품었던 다산을 떠올리게 만들고 있다. 또 지난해에는 유네스코가 헤르만 헤세, 장자크 루소 등과 함께 그를 2012년 기념할 인물로 꼽아, 다산의 사상이 전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다산 탄생 250년을 맞아, <한겨레>는 다산의 삶과 사상을 다양한 방면에서 조명해보는 기획 시리즈를 연재한다. 모두 8차례 수요일마다 이어갈 기획 시리즈를 통해 피상적으로 막연하게만 알았던 다산의 삶과 사상을 좀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기회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1) 저작으로 본 개혁사상

목민의 벼슬은 구하지 마라뜻이 있어도 밝지 않으면 잘 못한다

 

 

예치 통한 국가 개혁 경세유표·능력 갖춘 공직자 목민심서억울한 죄인 없어야 흠흠신서

현실적인 실학적 독서법 필요

 

“<목민심서>를 베트남 지도자 호찌민이 애독했답니다.”

 

확인되지 않은 얘기다. <경세유표>의 비본이 동학군에게 전해졌다는 것도 개연성이 낮다. 다산 정약용이 서구의 누구와 비견된다 하는 것도 뭔가 외부의 권위에 의탁하려는 것 같아 썩 달갑진 않다. 이제는 그 누구보다 지금 여기사는 우리가 다산의 글 한 줄이라도 읽고 공감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

 

다산의 저서는 실로 방대하다. 500여권으로 분량도 많고 분야도 다방면이다. 시문·경학·정법·역사·지리·언어 등등, 심지어 의학까지 뻗어 있다.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일표이서’(一表二書)라고 부르는데, 일표이서는 다산의 저서들 가운데 어떤 위치에 있는가?

 

 

2009년 전남 강진군이 수묵인물화가인 김호석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에게 의뢰해 제작한 다산 정약용의 새로운 초상화

기존 초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돋보기안경이 이채롭다. 전라남도 강진군청 다산기념관 제공

 


그는 자신의 저서를 총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경사서(<시경><서경><예기><악기><역경><춘추> 등 고대 중국의 6가지 경서와 유교의 네 기본 경전인 <대학><논어><맹자><중용>을 합쳐 일컫는 말)의 연구로 수기(修己, 자신의 몸을 닦음)를 하고, 일표이서로 천하국가를 위했으니, 본과 말이 갖추어졌다.”

 

다산의 학문은 주체의 도덕적 수양을 위한 경학, 치국평천하(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함)를 위한 경세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전통시대 학문과 정치가 수기-치인의 구조를 띠었던 것과 상응했다. 먼저 도덕적 주체로 자신을 확립하고, 사회적 관계와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또한 유학의 패러다임이 도()-(), ()-(), ()-()로 구성된 것과도 통했다.

 

전통시대의 유학자 관료들은 전자를 중시하여 후자를 소홀히 한 흐름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원한 이론과 도덕을 말하지만, 실무와 민생에 밝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다산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양자를 모두 중시했다. 다산은 학문은 수기가 절반이요, 치인이 절반이라말했다. 수기의 학만 한다면, 학문의 절반에 불과한 것이다. 다산이 일표이서를 말()이라 했지만, 결코 소홀히 여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학문적 완성의 의의를 가졌다.

 

 

다산 정약용이 18년의 유배기간 동안 머물렀던 전남 강진군 다산초당의 모습

다산은 이곳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500여권에 이르는 저술들을 완성했다.

 

일표이서는 어떤 책들인가? 다산은 이 책들을 왜 썼는가? 스스로 밝힌 글에 의하면, <경세유표>는 국가제도의 전반에 대한 개혁안으로, “우리의 낡은 나라를 새롭게 하려는 생각에서 저술한 것이다.” “털끝 하나 머리카락 하나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야 말 것이라는 절박한 진단과 사대부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었다.

 

<목민심서>현행 법제에 따라 우리 백성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애초 제도개혁을 목표로 기획된 것이 아니었다. 마냥 제도개혁만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현행 법제도에서라도 현장의 지방행정 책임자가 제대로 잘 운영하기를 기대한 것이었다. “각 편은 6개조로 하여 고금의 자료를 찾아 망라하고 간교함과 거짓됨을 파헤쳐 폭로했다. 목민관에게 주어 부디 한 명의 백성이라도 혜택 입기를 바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목민심서>는 당대까지 등장했던 여러 목민서류와 격을 달리했다. 12개 편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직책을 맡게 되는 부임을 첫 편에 두고, 직책을 마치는 해관’(解官)을 마지막 편에 두었다. 실무 매뉴얼의 모양이지만 그 이상이었다. 앞부분에 율기’(律己:자기 관리)·‘봉공’(奉公:공직에 종사함)·‘애민’(愛民:백성을 사랑함) 3편을 두어 공직자가 꼭 갖추어야 할 세 덕목을 제시했다. 이어서 국가경영체제와 마찬가지로 이·····6전 체제에 따라 지방행정 책임자가 해야 할 업무를 망라했다. 여기에다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돌보는 진황’(賑荒)이라는 편목을 특별히 보강했다.

 

<흠흠신서>는 형사절차에 관한 것이다. 이는 당시 국가경영이나 지방행정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다는 점과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특별히 따로 쓴 것이다. ‘흠흠’(欽欽)이란 신중하고 신중하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옥사를 치르거나 처벌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경영의 전반적인 개혁 마스터플랜인 <경세유표>, 현행제도 안에서의 지방 행정관 지침서인 <목민심서>, 국가경영과 지방행정 가운데 인명과 관련된 형사절차를 특별히 엮은 <흠흠신서> , 일표이서는 체계성을 갖추고 있었다.

 

<경세유표>의 본디 이름은 방례초본이었다. ‘방례주례’, 곧 주나라의 예에 대응한 우리나라의 예란 뜻이다. ‘초본이라 한 것은 꼭 확정적인 것으로 고집하지 않고 얼마든지 손질하겠다는 뜻이다. 한편 <경세유표>의 모델이 된 <주례>는 일찍이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 실학의 비조라 일컬어지는 유형원 등 국가경영의 실제를 중시했던 경세가들이 관심을 갖고 활용했던 책이다.

 

방례초본의 서문은 여기에서 논한 것은 법이다. 법인데도 예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왜인가?”라는 말로 시작된다. 다산은 을 다음과 같이 구별했다. “천리(天理)에 비추어 합당하고 인정(人情)에 어울려 맞는 것을 라고 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것으로 협박하여 백성들이 덜덜 떨며 감히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이라고 한다.” 다산은 폭력적인 국가 작용을 반대하여 예치의 이념을 밝힌 것이다.

 

<경세유표>경세란 국가경영을 뜻하고, ‘유표란 신하가 죽으면서 왕에게 제출하는 글을 이른다. 국가경영의 전반적 개혁 플랜이지만 결코 혁명적일 수 없는 글 형식이다. 그런데 다산의 기본적 정치경제 사상은 이미 탕론’·‘원목’·‘원정’·‘전론등의 짤막한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탕론에서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아래로부터의 정치로 설명했다. ‘원목에서는 민이 목민관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민관이 민을 위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전론에서는 불로소득자가 없이 모든 사람이 일해야 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원정에서는 고른 정치를 주장했다. 이러한 기본 아이디어는 현실을 참작하여 일표이서에 반영되었다.

 

이상을 향한 전진은 현실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을 세우는 것 못지않게 현실과 제도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다산은 가치 내지 큰 원칙을 확실하게 세우고 이를 구체적 상황에 잘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려 했고, 총론과 각론 모두에 충실했다. 바로 <경세유표><목민심서>가 그 증표이자 결실이다.

 

우리는 다산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간 근대라는 관점에 구애되어 시야가 좁았던 문제도 없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도 생명을 잃지 않고 창조적 에너지를 제공해주는 것이 고전이다. 이러한 고전을, 당시의 현실 문제에 대한 궁구와 해법 모색이라는 실천적 관점에서 열린 자세로 읽는 것이 실학이었다. 세계와 소통하며 천하대세를 전망하고 주체를 확립하고 마음을 다하여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것이 실학이었다. 고전에 대한 교조적 해석이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박제와 맹목적 찬양은 반()실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과 실학은 실학적 독법에 의해 읽어야 한다.

 

<목민심서>의 첫 부분을 읽어보자. 다산은 경고로 시작했다. “다른 벼슬은 구해도 좋으나 목민의 벼슬은 구하지 말라.” 수령이 잘못하면 백성들이 겪는 폐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이어 말했다. “비록 덕이 있더라도 위엄이 없으면 잘할 수 없고, 뜻이 있더라도 밝지 않으면 잘할 수 없다.”

공직자는 덕망이 있고 공공을 위해 복무한다는 뜻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저 사람만 좋아서는 안 되고 자기 관리를 바탕으로 한 통솔력이 있어야 하며, 잘해 보겠다는 뜻만으로는 안 되고 잘할 수 있는 업무능력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읽었다. 지금의 공직도 마찬가지다.

 

김태희/다산연구소 기획실장



 

(2) 정조와 어떤 이었나

바람과 구름(정조와 정약용)’ 운명적 만남, 단비의 꿈 못이루고

 

이상적 재상-왕도정치 군주로 서로 알아보고 조선개혁 앞장

총애 질시로 다산 18년 유배도

 

정조는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일 수 있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말이다. 정조와 정약용의 관계를 가장 정확히 드러내 주는 말일 것이다. 이들의 만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두 사람의 만남을 풍운지회’(風雲之會)로 묘사하고 있다. 바람과 구름이 만나 백성에게 이로운 비를 내리는 것이니, 두 사람의 만남은 단순히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아닌 백성을 위한 운명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를 빼놓고 정약용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이장할 당시 (정조의 명을 받아 다산이) 한강을 가로질러 배다리를 놓고 화성을 쌓은 것은 다산과 정조의 특수한 관계를 보여주는 수많은 일화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정조는 화성 축성이 끝난 뒤 다산을 불러 네가 거중기를 만들어 무려 4만냥이나 절감하였구나!’라고 극찬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다산과 정조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 두 역사적 인물의 관계는 화성으로 드러난 인연에 그치지 않는다. 정약용은 정조의 개혁정치에서 실질적인 일을 추진한 인물이다. 정조의 개혁 정책은 척신을 멀리하고 현인을 우대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척신이라 함은 단순히 외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왕과 왕실에 관여된 인물들 전체를 말한다. 정조가 척신을 멀리하고 자신의 세력을 육성해 조선을 새롭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때 그 옆자리에서 정조의 정책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함께 노력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과 정조의 만남은 운명적이다. 정조가 정약용을 처음으로 만난 건 1783년 세자 책봉을 기념해 열린 증광감시의 합격자들을 축하하기 위해 어전으로 이들을 불러들였을 때였다. 처음 정약용을 본 정조는 얼굴을 들라고 말하며 몇 살인가?”라고 물었다. 조선시대 국왕이 대과에 급제한 신하도 아닌, 기껏 생원시에 합격한 미관의 청년에게 자신의 용안을 보여 주는 일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정약용은 임오생이라고 대답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년, 1762년에 태어난 그에게 호감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정조의 의도적 만남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우연한 만남이었는지는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 뒤 특별하게 발전하였다. 성균관 유생들 전체에게 정조는 <중용>에 대한 80여개조의 질문을 내려주었는데, 다산은 중용에 대한 해석에서 퇴계 이황의 학설을 따르지 않고 율곡 이이의 학설을 따라 정리했다. 정조는 이때 최고의 점수를 정약용에게 주었고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 정조가 군복을 입은 모습을 담은 어진봉안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숭무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사도세자가 군복을 입고 행차하던 모습을 본떠 자신도 군복을 입은 초상화를 그렸다. 2004년 수원시에서 제작한 표준영정이다.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 다산이 성균관 유생 시절 정조로부터 하사받은 <당송 팔자백선>(왼쪽)과 문과에 합격한 뒤 받은 <병학지남>. 정조는 다산을 무반으로 키우려고도 생각했는데그런 뜻으로 하사한 책이 바로 <병학지남>이다수원화성박물관 제공


 

일반적으로 남인은 퇴계의 학설을 따르고 노론의 경우는 율곡의 학설을 따르는 것이 조선후기 사회의 일반적 현실이었다. 당쟁은 그렇게 사상의 차이를 가져왔고, 서로 한마을에 살아도 당파가 다르면 평생을 인사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한 시대에 다산은 남인의 명문가 자제였는데도 율곡의 학설이 옳다고 생각해 그를 따랐으니 정조의 눈에 다산은 균형 잡힌 시각을 지닌 신하로서 조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물로 보였던 것이다.

 

정조는 정약용을 훗날 재상감으로 보고 다양한 교육과 체험을 시켜주고 국가에서 편찬하는 서적을 내려주었다.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 사람들을 닮아 살이 쪄서 운동을 잘 못하는 다산에게 활쏘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아예 훈련도감에 들어가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더불어 정조는 정약용을 조선의 군대를 운용할 수 있는 지휘관으로 키우기 위하여 무반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

 

1783년 첫 만남 뒤 17년간 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기, 정조 죽음으로 결국 미완

 

다산에 대한 정조의 사랑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다산은 수시로 보는 성균관 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하여 선물을 받았고, 정조가 주관한 성균관 특별 시험에 합격한 뒤 최종 시험인 전시로 나가 2등을 차지하는 영예도 얻었다. 정조는 조정에서 발간한 여러 책을 모두 주어 더 줄 책이 없자 그렇다면 술이나 한잔 하자꾸나라고 권했다. 창덕궁 세심대에서 꽃구경을 하다 술 한잔 마시고 시를 지을 때 자신의 어탁을 내어주어 다산에게 시를 쓰게 할 정도였다. 다산과 정조의 친밀한 관계는 더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물론 다산에 대한 정조의 총애를 두고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이러한 사랑으로부터 다산의 화란이 시작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과도한 총애를 받은 나머지 정적들이 만들어졌고 18년간의 유배생활까지 했다는 것이다.

 

정조가 다산을 총애한 것은 그가 학문이 높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조는 다산을 통해 암행어사와 목민관의 모범을 세우려고 하였다. 정조는 자신의 신임을 믿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수령들을 다산으로 하여금 탄핵하게 하였고, 금정찰방과 곡산부사로 보임시켜 백성을 위한 목민관의 역할에 충실하게 하였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다산을 채제공의 뒤를 잇는 정승으로 삼아 자신과 국사를 함께 하기 위함이었다.

 

정조의 가장 원대한 꿈은 바로 조선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17786월 발표한 국정개혁안에서 천명한 대로 백성들을 모두 부유하게 만들고, 인재를 육성하고, 외세에 침탈당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조가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국왕이 정통성을 확보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될 수도 있지만, 생부 사도세자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상 이 일은 정조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사안이었다. 따라서 사도세자 추숭 문제는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정조에게는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명분과 논리를 만들 최측근이 필요하였고 그 일을 다산이 수행하였다.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당쟁의 희생자라고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혜경궁 홍씨 회갑연에 맞춰 사도세자의 시호를 추숭해야 한다는 정약용의 주장은 정조를 만족시켰고, 그 주장은 결국 실현됐다.

 

정약용은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의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는 탕론을 통해 어리석은 군주를 내쫓을 수 있다는 역성 혁명론을 폈다. 또한 선양 제도를 통해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현명한 이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곧 다산은 왕도정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러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군주를 위하여 신하는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산이 생각한 왕도정치의 이상적 모델은 정조였다. 정조는 다산을 미래의 재상으로 생각하였고, 정약용은 정조를 고대 중국의 요순 임금과 같은 이상적 군주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를 품고 함께 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기에 헌신했다.

 

하지만 이들의 꿈은 정조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문화의 시대, 변화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풍운지회의 꿈은 사라졌다. 훗날 다산은 자찬묘지명을 쓰며 마지막 구절에 자신과 정조의 특별한 관계를 시로 남겨 놓았다. 그 시는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안고는/ 궁궐의 가장 은밀한 곳에서 모셨으니/ 정말로 임금의 복심이 되어/ 아침저녁 참으로 가까이 섬겼다/ 하늘의 총애 입어/ 소박하지만 정성된 마음이 열리었네/ 육경을 정연하여/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소인이 해성 해치니/ 하늘이 어를 옥성시켰네/ 거두어 간직하고/ 장차 훨훨 노니련다.”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3) 인간관계로 본 다산

아내 치마로 자식 훈육 책자 만든 ‘속정 깊은’ 아비였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인연과 만나고 헤어진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 다산 정약용 또한 그리 짧지만은 않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면서 운명적으로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의 고리 속에서 위대한 인생을 설계해 나갔다. 흔히 학문적 업적과 사상을 통해 다산을 이해하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인간적인 면모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공적인 공간이 아닌 사적인 공간에서 다산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시와 예술을 사랑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 다산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인간적이었고 유쾌한 인물이었다. 학자로서 완벽을 추구하고 철저한 자기관리와 냉철한 삶을 추구했지만, 한편으로 지배층의 탐학과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바라보며 울분과 슬픔을 술로 달래는 감성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18년 강진 유배를 끝내고 고향인 마재(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어 노인이 되어 있었다. 폐족의 아픔과 정치적 좌절을 겪은 다산에게 세상사는 부여잡을 것도, 놓을 것도 없는 허공 같은 것이었겠지만, 자연과 저술을 벗 삼아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하지 않았을까.

 

■ 시짓기 동호회를 만들다


정조와 함께 개혁의 꿈을 다지던 젊은 시절, 다산은 벼슬살이하던 또래 벗들과 함께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시짓기 모임을 만들었다. 죽란은 명례방(현재 서울 명동)에 있던 다산 집 뜰의 화단 난간 이름이다. 시사의 창립 멤버는 당대 재상 채제공의 아들이자 동갑내기였던 채홍원이다. 다산은 조정의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집 정원을 거닐었고 때로 벗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시를 짓기도 했다.

 

다산은 죽란시사 시첩을 만들면서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5천년 가운데 우리가 한 세상에 같이 태어나고 사는 것은 우연이 아니고, 가로세로 3만리 넓은 세상에서 같은 나라에 사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나이 차이가 나고 사는 곳이 멀면, 서로 만나기 어려워 즐거움이 적고 세상을 마칠 때까지 서로 알지 못하곤 한다. 더욱이 곤궁함과 현달함이 같지 않고 취향이 같지 않으면, 비록 나이가 같고 이웃에 살아도 더불어 놀기는 어렵다.” 일생 살면서 인생 교유가 넓지 않은데, 우리나라는 그중 심한 곳이라 본 것이다.

 

당시 죽란시사에 참여한 벗은 모두 15명으로 30~40대 동년배들이었다. 모임에 참여한 채홍원은 “우리보다 위아래로 9살 차이 나는 사람과 벗할 수는 있어도, 서로 만나면 나이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하므로 모임은 벌써 어지러워진다”고 했다. 격의없이 만나 허물없이 즐겁기 위해 4살 차이 벗들로 모임을 만든 것이다. 정약용·채홍원과 시사를 함께한 사람은 이유수·홍시제·이석하·이치훈·이주석·한치응·유원명·심규로·윤지눌·신성모·한백원·이중련 등이다. 이들은 정조 연간에 서울과 그 인근에 살면서 정약용과 초급관리 시절을 함께 보냈다.

 

다산의 유쾌한 발상은 죽란시사 모임에서도 잘 드러난다.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술과 시짓기를 위해서라면 무슨 이유를 대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술 먹는 풍류는 격조가 달랐다. 꽃 피거나 눈 올 때 한 번 모이되 모임 때마다 술·안주·붓·벼루 등을 갖추어 술 마시며 시를 읊었다. 채제공은 죽란시사 이야기를 듣고 “내가 젊은 시절에는 이런 모임이 없었는데, 국왕(정조)이 20년 동안 선비를 기르고 성취시킨 효과”라며 부러워했다.

 

 

다산의 친필이 적혀 있는 <하피첩>. 다산이 강진에 유배를 가 있던 시절 아내 홍씨가 보내온 다홍치마를 잘라 두 아들에게 하고픈 말들을 적어 보낸 책자다.

<하피첩>을 쓰고 난 자투리 조각에는 매화와 새, 시를 등장시킨 <매화병제도>(사진)를 그려넣었다. 강진에 와서 만난 제자와 맺어준 딸에게 준 선물이다.

실학박물관 제공, 고려대 박물관 소장

 

 

유배로 아버지 노릇 못한 마음 ‘하피첩’이란 작은 책자에 담아 “학문에 매진해라” 따뜻한 훈계

 

■ 하피첩에 담은 부정


강진 유배 중에 다산은 가족들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15살에 혼인한 아내 홍씨 사이에 아홉명 자식을 두었으나, 아들 넷과 딸 둘을 천연두와 홍역으로 잃었다. “내가 하늘에 죄를 얻어 당하는 잔혹함인가”라고 할 정도로 자식 잃은 슬픔에 괴로워했다. 특히 네살배기 막내아들은 머나먼 유배지에 있을 당시 잃어 더욱 슬픔이 컸다.

 

1810년 10년째 얼굴도 못 본 채 유배지의 남편을 그리며 마재를 지키던 아내 홍씨는 시집올 때 입은 빛바랜 여섯 폭 다홍치마를 강진에 보냈다.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어언 34년. 병들어 몸도 온전치 못한 홍씨였지만, 남편이 쓴 책 표지에 쓰라며 이 치마를 머나먼 강진으로 보낸 것이다. 붉은 치마는 노을처럼 희미하게 바래 글쓰기에 적당했다.

 

이 치마를 받아든 다산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는 치마를 잘게 잘라 아버지로서 훈계하는 말을 적어 <하피첩>(霞披帖)이란 작은 책자를 만든 뒤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주었다. 자식들을 가까이서 훈육하지 못한 마음을 담은 것이다. 정성스레 하피첩을 만들고 나니 치마 자투리 천이 남았다. 다산에게는 어릴 적 헤어진 딸이 하나 있었다. 그는 시집간 딸을 위해 남은 자투리에, 매화 가지에 앉은 한 쌍의 새를 그린 <매화병제도>를 그려 선물로 주었다. 사위 윤창모는 강진에서 만난 제자였다. 딸과 제자를 맺어 준 뒤 선물로 준 것이 <매화병제도>였다. ‘펄펄 나는 저 새가/ 집 뜰 매화가지에 앉아 쉬네/ 매화꽃 향기 짙어/ 즐거이 날아왔네/ 머물러 지내면서/ 집안에 즐겁게 살려므나/ 꽃이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주렁주렁 달리겠구나.’

 

그 외에 오늘날 또 하나의 <매조도>가 남아 있는데 이는 강진에서 얻은 소실의 딸에게 준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유배로 아버지 노릇 제대로 못한 한을 풀어 자식들에게 진한 부정(父情)을 보여준 것이 하피첩과 매조도이다.

 

젊은시절엔 시짓기 동호회 꾸려 허물없이 만나 술과 시 풍류 즐겨
노년엔 정치색 다른 학자와 교류

 

■ 노년의 교유


다산은 경상도 장기 유배 중에 “서글퍼라 내 인생 좋은 때를 못 만나 가는 앞길 험난하여 자주 죄에 걸리는구나”라고 한탄했다. 이후 그는 강진 유배지에서 18년을 보냈다. 해배 뒤엔 고향 마재에서 18년간 노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강진에서 여생을 보내지 않고 마재로 돌아온 것은, 고향인 까닭도 있지만, 경세(經世)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였다. 유배지에서 쓴 수많은 책을 읽어 줄 곳은 시골 강진이 아니라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이 사는 수도권이었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다산은 자신의 야심찬 저서들이 읽히기를 학수고대했을 것이다. 평소에도 그는 두 아들에게 “내가 죽은 뒤 성대하게 제사 지내준다 해도 내가 기뻐할 것은 내 책 한 권을 읽어주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저술에는 학문만이 아닌 세상과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제국(濟國)의 이상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소망과 달리 세상은 바뀐 것이 없었다. 자신을 탄압하던 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었고,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피땀으로 일군 저술들이 파묻힐지도 모르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다산이 누군가. 돌아온 다산은 유배지에서 쓴 책들을 정리하는 한편 신작·김매순·홍석주·김정희 등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소망을 실현하고자 했다. 특히 다산은 경기도 광주에 사는 신작을 찾아가 자신의 저술인 <상례사전>(喪禮四箋)과 <매씨서평>(梅氏書平)의 논평을 부탁하기도 했다. 신작은 양명학자인 하곡 정제두의 외증손으로 강화학파의 학맥을 이은 인물이다.

 

다산이 노년 교유한 학자들은 노·소론계 출신이었지만, 고정된 정론이나 학설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이어서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으며 백발이 된 다산에게 세상을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정치색은 중요하지 않았다. 실제 그는 교유 관계를 넓혀가며 조정에 다시 나갈 기회도 잡는 듯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한강 물길을 따라 배를 타거나 고기를 잡는 등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의 풍광을 즐기는 한편, 이미 세상을 떠난 이가환·이기양·권철신·정약전 등의 묘지명을 지었다. 만년에는 스스로 ‘사암’(俟菴)이라 일컬으며 자신의 뜻을 실현시켜 줄 다음 시대를 기약했다.

 

정성희/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4) 다산과 한강의 꿈

풍운의 꿈 키운 한강은 학문의 본원이자 마음의 휴식처

 

다산 생가, 묘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문화유적지 전경

 

75년을 산 다산 정약용은 평생 어떤 꿈을 꾸었을까? 다산은 1762년 2월 한강가에서 태어났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되는 바로 그곳, 경기도 남양주 두물머리의 쇠내(苕川: 마재라고도 한다)가 고향이었다. 15살 때, 부인 홍혜원과 결혼하면서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한강과 그 주변은 그의 생활 전부였다. 약현, 약전, 약종, 약용 4형제는 한강가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체득했다. 그러면서 하나로 합쳐지는 거대한 물줄기를 품겠다는 꿈을 키워갔다.

뒷날 스스로 폐족(廢族)임을 자처했던 그는 시대와 민생을 고민하던 젊은이였다. 28살이었던 1789년(정조 7년)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조선사회의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구체적인 설계를 시작한다. 한강에서 이벽과 서학(西學)을 토론하면서도, 그의 머리에는 백성의 삶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낳고 죽이니 인명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격무에 시달리던 벼슬살이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좌부승지로 있던 1797년 5월 단오에 무작정 근무지를 벗어나 고향 마재에서 세 형과 함께 한강의 족자도(남자주)와 천진암을 주유하면서도 그런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였을 것이다. 다산에게 한강은 평생 학문의 본원이자 마음의 휴식처였다.

 


1801년 나이 40에 다다른 유배지 전라도 강진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서툴렀다. 그때마다 그 마음은 한강으로 달렸다. 그곳은 부모형제, 처자식, 그리고 그의 님이 계신 곳이었다. 한강에 대한 향수는 유배지에서 소동파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렸던 <아미도>(峨嵋圖)를 본떠 손수 쇠내를 그리도록 하였다. “나도 지금 그림으로라도 쇠내를 보고픈데 이곳엔 화가가 없으니 누구에게 부탁할거나”라는 푸념도 그 마음을 꺾지 못했다. 그림에 서툴러 몇 번의 실패 끝에 그린 고향의 모습에 흡족해하지는 못했지만, 이것이나마 머물고 있던 집의 윗목에 걸어두고 보았다.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리라.

‘푸른 산에 둘려 철마(鐵馬)가 서 있고/ 깎아지른 절벽 앞 왜가리 날아가며(동쪽에 쌍부암(雙鳧巖)이 있음)/ 남자주(藍子洲) 가에는 향기로운 풀 푸르고/ 석호정(石湖亭) 북쪽에는 맑은 모래 깔려 있네/ 바람맞은 돛배는 필탄(筆灘)을 지나는 듯/ 나루에 댄 배는 귀음(龜陰)으로 가는 듯/ 검단산(黔丹山)은 반쯤 구름에 들어 아득하고/ 백병봉(白屛峰)은 멀리 지는 해에 홀로 솟아 있네/ 하늘 아래 높은 산에는 절집 보이니/ 수종사(水鍾寺)와 잘 어울린다네/ 소나무·회나무 덮인 문은 우리 정자(望荷亭·망하정)이고/ 배꽃 한껏 핀 정원은 우리 집이네’(‘거칠게나마 그려본 쇠내’)

쇠내에 대한 마음을 담을 때, 한강집의 풍경이 머릿속에 펼쳐지는 것은 당연했다. 철마산·쌍부암·남자주·석호정·필탄·귀음·검단산·백병봉·수종사, 그리고 소나무·회나무로 덮인 망하정과 배꽃이 만개한 집,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은 더는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마음만으로 그릴 수 있을 뿐…. “내 집이 저긴데도 갈 수 없으니 나로 하여금 그림 보고 방황하게 한다”는 토로는 유배지에 묶인 처지에 대한 자위였을 게다. 한때 그는 강진에서의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다. 1802년 겨울 세살 난 막내아들이 천연두로 죽었다는 소식이 강진에 들려왔다. 벌써 자식 다섯을 같은 병으로 앞세웠는데, 늦둥이까지 또 그랬으니…. 그것도 가는 길을 지켜주지 못했다. “내가 죽으면 기꺼이 황령(黃嶺)을 넘어 열수(洌水)에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니,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흐느낌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산이 말년 고향인 한강 두물머리 강변에서 그린 <열초산수도>. 16일부터 7월22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다산 탄생 250주년 특별전 ‘천명, 다산의 하늘’에 전시된다. 도판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두물머리서 태어나 자라며 백성들 위한 왕도정치 구상... 거대한 물줄기 품겠다는 꿈

그림으로 향수 달래던 유배, 환갑 다돼 돌아온 고향땅서 미래의 꿈 꿨지만 펴지못해

 

다산에게 ‘왕도정치’란 거대한 담론이 아니었다. 그저 “넉넉하지 않지만 끼니걱정 없이 농사짓고 천륜을 즐기는 생활” 그것이었다. 고향 마을의 어부들과 같이 “두 자식을 데리고 소년 노릇, 동자 노릇 하나씩 맡겨 사는 것”이 꿈이었다. 그것을 해결해주지 못하면 왕정(王政)이 아니었다. “옛 성현들은 인정을 베풀 때 먼저 홀아비와 과부를 돌봤다지만, 그들은 매인 가족이 없었으니 굶어도 자기 한 몸 굶었을 뿐이다. 가족 돌아볼 걱정이 없다면 어찌 근심이 있겠는가?”라는 말에는 왕정의 근본이 가족·백성에 있음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그가 처한 조선사회에서는 이것조차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18년 강진 유배생활 동안 열정을 다해 사유한 이유였다. 평생의 꿈인 민생을 위한 부국강병, 그 방책은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을 만나게 하는 데에 있었다. 그가 이용감(利用監)을 설치하여 북학을 전담하도록 구상한 것은 부국강병을 위해서였다. 따라서 ‘육경사서’(六經四書)와 ‘일표이서’(一表二書)로 수신과 경세(經世)의 본말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치세와 ‘왕정’을 구현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겠다”(新我之舊邦)는 근본적 변법을 위한 작업이었다.

그사이에 몇 차례 해배의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순간순간 절망했겠지만, 매번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래야 한강으로 돌아와 또다른 기약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1818년 9월, 18년 만에 다산은 한강으로 돌아왔다. 50대 후반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미 늙어버린 몸뚱이와 덧없이 흐른 파란의 일생에 만사가 교차하였을 터다. 그러면서도 “남녘 땅 수천리를 노닐었으나, 쇠내와 같은 곳은 찾지 못했다”고 고향에 돌아온 느낌을 읊었다.

다산은 강진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에 근본을 두고 주례(周禮)를 바탕으로 한 유교 경전과 역사, 예법과 음악, 백성을 위한 병법과 농업, 의약의 이치를 아이들에게 깨닫게 해주는 일에 전념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1822년(순조 22년) 다시 태어난 느낌으로 회갑을 맞았다. 평생의 허물과 뉘우침을 씻어버리고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 출발로 삼았다. 그는 매일 한강의 두 물이 큰물로 합쳐지는 것을 보며 자신의 학문 역시 그러하기를 바라고, 그 작업에 열중하였다. 유배에서 풀렸어도 평생 정리한 개혁방책들을 실천할 기회마저 잃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간의 저술을 다시 정리하고 이를 후세에게 전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 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 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 시대를 기다린다는 뜻의 ‘사암’(俟菴)을 자처하면서 거기에 그 절실함을 담아냈다.

고향 한강은 그에게 가족이자 나라였다. 다산은 한강을 통해 조선을 새롭게 발견하고, “나는 조선인이니 기꺼이 조선시를 쓰겠노라”고 선언하였다. 중화 문화에 부속되지 않은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 조선을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강진에서 돌아와 한강에 사는 사람임을 뜻하는 ‘열수’(洌水)를 호로 삼은 것도 그러하다. 생활이 많이 불편한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강가에 남은 이유는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옮겨 다니며 남에게 붙어사는 것은 나라를 잃는 것과 같다”는 데 있었다. 그에게 한강은 조선 자체였고, 민생을 위한 사회로 조선을 변혁시킬 큰물이었다. 다산의 꿈은 한강, 열수에 있었다. 그가 그곳에서 펼쳤던 개방적인 사유와 거대한 담론, ‘다산학’(茶山學)은 바로 ‘조선학’(朝鮮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꿈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후세를 기다려야 했다. 한강에서….

김성환/실학박물관 학예실장

 

(5) 과연 탈중세적 인물인가?

근대 꿈꿨다고? 주자학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주자학(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중국 송나라 때 사상가 주희(1130~1200). 한동안 실학은 성리학에 대한 비판과 반발에서 나왔다는 풀이가 지배적이었지만,

탈중세·근대등을 목표로 삼았던 그런 풀이 자체가 서구 중심주의에서 나왔다는 비판이 최근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

 

 

더할 수 없을 정도의 진지함과 성실성, 이에 바탕한 방대한 학문적 업적은 다산을 경외하게, 아니 숭배하게 만든다. 누가 그에 대해 비평할 수 있을 것인가. 다산에 대한 대부분의 이해와 연구는 다산학의 탁월성을 찬양하는 데 바쳐졌다. 경외와 숭배를 벗어난, 그에 대한 비평적 언술은 일종의 금기다.

다산학에 대한 주류적 해석은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실학’ 개념으로 해석하여, 탈중세적 속성을 도출하는 것이다. 실학의 대척점에 성리학(주자학)이 배치되어 있다. 실학은 자신이 성리학으로부터 이탈하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존재 의의를 밝힌다. 하지만 실학은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한국사 안에서 근대적 행로를 찾기 위해 20세기 한국 역사학이 구성한 것이다. 성리학(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사유, 혹은 그로부터 이탈하는 사유를 찾아 그것이 탈중세적 혹은 근대적 속성을 지닌다고 말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실학이다. 곧 내재적 근대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 실학이란 말이다. 다산은 실학의 집대성자다. 따라서 이제까지 다산학 연구는 성리학(주자학)과의 차별성 혹은 상이점을 최대한 찾아내고 그것을 부조적으로 드러내어 ‘탈중세적’ 혹은 ‘근대적’인 것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성리학 부정한 실학 핵심으로 근대성 부각시킨 다산학 연구
“내부의 근대적 행로 찾기 위해 역사학계가 만든 해석의 산물”

널리 알려진 다산의 한시(예컨대 ‘애절양’(哀絶陽) 같은 작품)를 떠올려 보자. 그의 한시는 18세기 말~19세기 초 지배사족에 의해 생산물을 가차 없이 수탈당하여 생존의 끝에 내몰린 민(民)의 안쓰럽고 처절한 삶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가위 유가적 리얼리즘의 최고봉이다. 다산의 민에 대한 인식은 유가의 애민의식에서 출발한다. 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은 것은 시가 아니”라는 그의 시의식은 유가의 문학관인 재도론(載道論)의 정직한 연장이다. 다산의 민에 대한 사유를 연장하면, 결국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사족 지배체제에 닿는다. 그것이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의 내용이자 주제다. 다산은 현존 지배체제의 타락에 대해 <여유당전서> 전체에 걸쳐 맹렬히 비판하지만, 사족 지배 체제 자체에 대한 반성적 고찰은 없다. 사족이 지배계급으로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민이 지배 대상으로 놓이는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넘어설 어떤 상상력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족 지배체제로 회귀하는 다산의 사상을 과연 탈중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가장 큰 정력을 기울였던, 다산학의 핵심인 경학을 보자. 다산은 경학에 대한 연구 역시 드러나게 혹은 암암리에 주자 경학과의 상이성을 찾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다산의 경학은 주자학에 대한 반발·비판이 아니라, 고염무·모기령·염약거 같은 청대 초기 고증학자의 연구 결과에 대한 반응으로 시작된 것이다. 특히 다산은 모기령의 경학을 예민하게 의식했다. 모기령은 고증학적 방법을 원용해 주자의 경전 해석에 반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주자의 경전 해석이 엄밀한 증거에 의해 반박될 수 있다는 사실에 18세기 조선학계는 충격에 빠졌다. 주자학을 신봉하던 지식인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희한한 저작이 끼어들었다. 염약거는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에서 엄밀한 문헌적 실증적 방법으로 유교의 정치 바이블 <서경>의 절반이 동진시대의 학자 매색이 날조한 가짜임을 반박의 여지 없이 밝혀냈다. 이 결과는 성리학에 치명적이었다. 주자는 매색이 만든 가짜 고문인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해야만 진실로 그 중을 잡을 것이다)이란 16자를 근거 삼아, 장대한 철학적 체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16자는 날조되었기에 원천적으로 의미 없는 문장이다. 그 위에 구축한 체계, 곧 주자 성리학이 붕괴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오로지 주자의 경학을 치열하게 공격했던 모기령은 ‘고문상서원사’(古文尙書寃詞)를 지어 염약거의 ‘상서고문소증’을 반박한다.

 

* 다산 탄생 250년을 기념해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천명, 다산의 하늘전시회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기미어명주시사진첩>.

  다산이 주자의 시를 엄정한 해서로 필사하여 정조에게 바친 서첩이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 다산이 집안에 소장했던 자신의 작품 <매씨서평>의 판본(단국대 소장). 청대 고증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던 다산은 <매씨서평>을 통해 유교의 중요한

  경전인 <서경>의 일부가 위작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고증을 통해 밝혔다. 그러나 다산은 그렇다고 해서 <서경>에 근거한 주자의 철학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며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주자학 철학적 뿌리 이룬 ‘16자’ 날조 알고도 ‘진리의 언술’ 옹호
체제에 근본적 비판 없던 그는 완전한 중세를 꿈꾼 성리학자

다산은 필생의 역작인 ‘매씨서평’(梅氏書評)에서 ‘고문상서원사’의 내용을 다시 반박했다. ‘매씨서평’에서 다산은 염약거의 학설이 옳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였다. 16자는 다시 날조된 문장이 되었다. 다산의 경학이 주자 경학을 비판하거나 따로 맞섰다면, 다산은 이 16자를 날조된 내용이라고 거듭 천명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딴판이었다.

염약거의 책이 발표되었을 때 중국 학계에서는 16자가 날조문이라는 사실이 성리학을 근저에서 붕괴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런데 다산은 ‘매씨서평’에서 별도 논문을 써서 주자가 16자 위에 건축한 장대한 철학은 결코 부정될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부정은커녕 주자가 16자를 근거로 삼아 ‘도통론’(사상의 정통계보를 강조한 이론)과 ‘인심도심론’(인간 마음을 욕망에 따른 인심과 천리에 따른 도심의 상호 작용으로 보는 이론)을 역설했던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를 진리의 언술이라고 재차 역설하였다. 주자학을 극력 옹호했던 것이다. 물론 다산 경학에는 주자 학설을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주자학, 성리학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그 상이함이 전면적으로 주자학을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윤휴와 박세당이 경전 해석에서 부분적으로 주자와 의견을 달리했지만, 여전히 성리학자(주자학자)였고 중세적 인간이었던 것을 떠올려 보라. 따라서 주자학과의 부분적 차이가 반주자학적·반성리학적인 것으로, 탈중세적·근대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다산은 주자에 반기를 들지 않았고, 주자학을 부정하지 않았다. 요컨대 다산학은 주자학과 대립하는 구도로 짜여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주자학에 근거한 정치제도, 가부장적 친족구조, 윤리(충·효·열), 의례(관·혼·상·제), 일상적 행위의 매뉴얼 등 사족 지배 체제를 가능케 한 장치들에 대한 비판은 찾을 수 없다. 도리어 그것들은 다산의 연구로 좀더 엄밀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다산학을 실학이라 부른다면, 실학은 성리학(주자학)과 대립하지 않는다. 우리 상식과 달리 성리학이 사회와 개인에게 온전히 관철되는 유교국가는 임병양란 이후 조선 후기에 완성되었다. 중세가 조선 후기에 완성되었다는 말이다. 조선 후기의 사회모순은 유교국가의 완성과 함께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사족 체제는 스스로 체제에 대한 자기 조정 과정을 경험하는바, 그 과정에서 제출된 다수의 개혁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일부’를 과거 한국 학계는 ‘실학’이란 명사로 포괄하였다. 그것은 철저히 중세적 방법에 의해 중세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었고, 근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나는 다산이야말로 완벽하게 재질서화된 중세를 꿈꾸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산과 다산학은 탈중세 혹은 근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조선 후기사에서 탈중세를 모색하는 것, 근대를 찾는 태도 자체가 이미 서구사를 보편사로 하는 서구 중심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실로 민족사를 서구사로 해석하는 것이다. 다산학을 해독하는 탈중세와 근대란 코드는 실로 무의미하다. 그런 것 없이도 다산은 찬란한 별이고 다산학은 거대한 산맥이다.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6) 다산의 생활공간

다산의 건축학개론 1장엔 ‘도시 탈출’ 욕망이…

 

다산의 제자인 초의선사가 다산이 강진 유배 시절 10년동안 머물던 다산초당(아래)을 그린 <다산초당도>

다산은 이곳에 못을 파고 채마밭을 일구며 자신이 늘 꿈꾸던 이상적 생활 공간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냈다.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도시의 일상은 지금처럼 팍팍했다. 생활 경제는 파탄 나고 주거 환경은 열악했다. 이 시기 ‘전장’(田莊: 개인이 소유한 논밭)과 ‘별서’(別墅: 농토 근처에 지은 한적한 집) 등 이상적 주거공간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것은 도시 탈출의 웰빙 욕구와 무관치 않다.

다산은 젊어서부터 생활 공간 꾸미기에 관심이 많았다. 원예에 대한 취미도 특별했다. 젊은 시절 자신이 살던 서울 명례방의 좁은 마당을 반으로 갈라 난간을 세우고, 그곳에 왜석류와 매화·치자·동백·수선화·파초·벽오동 등 여러 가지 화훼를 가꾸었다. 특히 국화에 대한 집착은 대단해서 수십 종이 넘는 다양한 국화를 길렀다. 절기마다 벗들과 어울려 꽃나무를 감상하며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동인 모임을 열곤 했다.

전라도 강진에 유배 가서 주막집 골방을 겨우 얻어 생활하면서는 직접 가꿀 수 있는 작은 채마밭과 꽃밭에 대한 꿈이 더 간절했다. 그는 이웃의 채마밭에 나가 이런저런 간섭도 하고, 어떡해야 근처 금곡사의 땅뙈기를 조금 구할 수 있을까 싶어 조바심을 쳤다.

한번은 제자 황상이 숨어사는 선비의 거처를 묻자 다산은 신이 나서 ‘제황상유인첩’(題黃裳幽人帖)이라는 긴 글을 써 주었다. 이 글은 주거 공간의 위치 설정과 내부 구성, 주변과 외곽에 이르기까지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항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의 일상과 가계 운영에 대해서도 청사진을 제시했다.

유배 8년 만인 1809년 봄에 다산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그토록 간절하게 꿈꾸었던 이상적 생활 공간을 현실 공간 위에 실현하는 작업을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먼저 채마밭을 조성했다. 비탈에 아홉 단의 돌계단을 쌓고, 층마다 무와 부추, 늦파와 올숭채, 쑥갓, 가지, 아욱, 겨자, 상추, 토란 등 갖가지 채소를 심었다. 못을 넓혀 파고, 산 위 샘물을 홈통으로 이어 끌어왔다. 대나무와 버드나무를 울타리 대신 둘렀다. 못가에는 당귀·작약·모란·동청 등 약초와 화훼를 심었다. 연못 위편에는 바닷가에서 주워온 기암괴석으로 석가산(石假山)을 꾸몄다. 다산은 이렇게 산속의 황량하던 별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다산은 틈만 나면 자식과 제자들에게 생활 공간을 어떻게 배치하고 경영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유거론’(幽居論)이란 글에서도 자신이 구상하고 실천에 옮긴 이상적 주거에 관한 내용을 정리했다. 승려 제자인 철선(鐵船)에게는 승려의 이상적 거처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제안을 남겼다.

 

다산은 “앞에 시내가 흐르고 뒤에는 적당한 높이의 산이 서 있으며, 탁 트인 너른 들이 있지만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을 최적의 택지로 꼽았다.

 

채소밭에 푸성귀, 약초 심고 과수원 둔 이상적 주거 설계, 멋진 집보다 자급에 무게 둬

사대부 경제활동 권했지만 이익추구 속물적 삶은 경계, 고상한 운치 즐길 것도 주문

 이상적 주거의 구체적 조건

다산은 터잡기와 국세(局勢: 어느 장소에서 한눈에 조망되는 땅의 형세), 내부 배치, 주거 주변과 외곽, 가계 경영과 기거일상(起居日常)으로 구분해서 자신이 꿈꾼 이상적 주거의 형상을 구체화했다. 이는 뒤에 제자 초의(草衣)의 일지암(一枝庵)과 황상의 일속산방(一粟山房) 등의 공간으로 구현되어 호남 원림미학의 한 원형으로 남았다.

앞에 시내가 흐르고 뒤에는 적당한 높이의 산이 배경으로 서 있고, 탁 트인 너른 들이 있지만, 밖에서 보면 잘 드러나지 않는 곳을 다산은 택지의 최적 조건으로 꼽았다. 풍속은 순후하며 산천이 맑고 깨끗한 곳이라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내부는 흙손질한 벽에 순창에서 나는 설화지(雪華紙)로 도배를 하고, 문미(門楣: 방문 위에 가로댄 나무)에는 엷은 먹으로 그린 횡폭의 산수화를 붙였다. 방 안에는 서가 두 개를 놓아두고, 1300~1400권의 책을 꽂았다. 책상 위엔 <논어>를 펴놓고, 곁의 탁자에는 여러 시집을 얹어두었다. 여기에 오동(烏銅) 향로와 거문고·바둑판 등 삶의 운치를 더해줄 물건을 더 꼽았다. 소박하나 문아(文雅)한 삶, 지적 탐구욕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의 서책에 대한 욕심만은 굳이 감추지 않았다.

주거 주변 공간도 세분했다. 뜰에 야트막한 담장을 세워 공간을 분할하고 각종 화분을 기르는 안뜰과, 연꽃을 심고 붕어를 기르는 연못, 담장 밖으로 이어진 채마밭과, 사립문과 근처 물가에 세운 휴식공간 등이 있다. 연못은 유사시 화재의 위험에 대비할 수 있고, 연꽃과 물고기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주며, 채마밭에 공급할 수원(水源)도 되는 등 다목적의 포석이었다.

거처의 앞쪽에는 수백 이랑의 논을 마련해, 이곳의 소출로 1년 양식을 삼게 했다. 집 뒤편 채마밭에는 각종 약초 등 특용작물을 길러 가용(家用)으로 쓰고, 남는 것은 내다 팔아 생활에 보탬이 되게 했다. 또 뽕나무 수백 그루를 심고 누에를 쳐서 의복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면화와 삼과 모시도 따로 심었다. 다산의 이상적 주거 공간은 이처럼 관념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자급자족의 삶이 가능한 형태였다.

 소박하나 풍요로운 삶

제자 윤혜관에게 준 글에서는 특별히 ‘원포’(園圃) 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원(園)은 과수원이고 포(圃)는 채소밭이다. 농사는 너무 이문이 박해, 많이 지을수록 더 낭패를 보게 마련이므로 원포 농사로 이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과수 열 그루를 심으면 1년에 엽전 50꿰미를 얻을 수 있고, 좋은 채소 몇 이랑을 길러 20꿰미를 얻고, 누에 5, 6칸에서 30꿰미를 얻는다면 추위와 굶주림을 충분히 구할 수 있으므로, 가난한 선비라면 농사에만 기대지 말고 원포의 경영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산은 이렇듯 과수와 채소 재배, 누에치기를 통해 창출할 수 있는 예상 이득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사대부의 경제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강조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더욱 구체적이다. “국화 한 두둑이면 가난한 선비의 몇 달치 양식을 지탱할 수가 있다. 생지황·반하·도라지·천궁 등속과 쪽풀과 꼭두서니 따위도 마음을 쏟아야 한다. 채마밭을 정돈할 때는 평평하고 반듯반듯하게 해야 한다. 흙손질도 몹시 곱고 깊게 하여 가루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씨를 뿌리는 것은 고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모종은 널찍하게 심어야 한다. 아욱과 배추, 무를 한 구역씩 기르고, 가지와 고추 등속은 각각 구별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마늘과 파를 심는 데 가장 힘을 기울이는 것이 옳다. 미나리 또한 심을 만 하다. 한여름 석 달의 농사로는 참외만한 것이 없다.” 이런 편지 내용은 생계형 원포 경영의 구체적 사례에 해당한다.

다산은 또 사대부로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명확히 구분했다. 장사를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은 엄격히 금하고, 노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생산물을 내다 파는 것은 적극 권장했다. 한편 생활이 경제활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경계했다. 주인은 모든 집안일을 지휘 감독하는 한편, 학문에 몰두하고 풍류를 즐기며 삶 속에 고아한 운치를 깃들이기에 힘써야 한다. 이끗만을 따지는 속물적 삶에 떨어지면 안 된다. 이를 위해 다산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뜻 높은 선비나 시를 아는 승려를 벗으로 두어 왕래하며 교유를 나눌 것을 주문했다.

다산이 제안한 이상적 주거는 관념적이고 심미적인 이상론에 머물지 않고, 자족형 주거론이라 부를 만한 경제적 자급력까지 갖추었다. 다산은 가계 경영의 구체적 방법까지 제시했다. 경제 활동을 통한 이익 추구에만 머물지 않고 삶 자체가 ‘상심락사’(賞心樂事: 즐거운 마음과 즐거운 일)의 고상한 운치로 승화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음미할 만하다. 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 삶과도 아무 거리가 없다.

정민 한양대 교수(국문학) 

 

(7) 배다리와 정조의 화성행차

한강 배다리·화성 축조 아이디어 다듬은 ‘멘토’ 정조

 

 

다산이 작성한 ‘자찬묘지명’을 보면 1792년 겨울에 정조는 “지난 기유년(1789) 겨울 배다리 놓는 일에 정약용이 규제(規制: 설계안)를 올려 그 일을 이루었으니, 그에게 화성의 성곽 제도에 대해 조목별로 지어 바치게 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훗날 정규영은 고조부 다산의 연보를 작성하면서 이 기록을 그대로 인용했다. 북한학자 김석형도 이 기록에 근거해 “다산이 1789년 규장각에 이름을 걸게 된 이후 왕명에 의해 한강의 배다리 설계를 하였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다산은 한강 배다리를 설계한 주인공이 된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일성록> 같은 연대기에는 1789년 겨울 정조가 배다리 설치를 논의하는 자리에 다산의 이름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당시 다산은 규장각의 초계문신(특별히 재교육을 받는 젊은 문신들)에 선발되어 정조가 주관하는 시험에 여러번 참여했으므로, 배다리 설계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오늘날 알려진 것처럼 다산이 배다리 설계 당시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배다리를 통해 한강 노량진을 지나가는 정조의 행차 모습을 담은 <노량주교도섭도>. 노량진은 강 양쪽에 높은 언덕이 있어 선창을 만들기에 적당하고 강의 유속이 평온하고 수심이 깊어 배다리를 설치하기 적당한 곳이었다고 한다. 실학박물관 제공

 

국왕이 된 정조가 처음 한강을 건넌 것은 1779년 8월이었다. 효종이 사망한 지 12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려고 경기도 여주에 있는 효종의 영릉을 방문하는 길이었다. 이때 정조는 광나루 선창에서 용주(龍舟: 임금이 탔던 용이 새겨진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국왕이 배에 오르자 좌우에서 예인선이 국왕이 탄 배를 끌고 나갔고, 선상(임금 행차를 앞에서 호위하는 부대)과 용호영 부대는 왼편 예인선의 밖에서, 후상(임금 행차를 뒤에서 호위하는 부대)과 경기감영의 부대는 오른편 예인선의 밖에서 국왕을 호위했다. 그러나 많은 인원과 물자가 한강을 건너다 보니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육로보다 수로가 발달했다. 산지가 발달한 국토에서 많은 물자를 옮기려면 좁고 험한 산길보다 평탄한 물길을 택하는 쪽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운로를 보면 각지에서 납부한 세곡이 인근 강변이나 해안가에 설치된 창고로 모였다가 배에 실려 한강으로 운반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이동할 때에는 주로 육로를 이용했고 어지간한 물길이라면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한강에는 다리가 전혀 없었다. 이에 대해 정조대의 문신 이헌경은 “남쪽의 금강에서 북쪽의 용흥강까지 모두 다리를 놓아 사람을 건너게 했다. 한강만은 섣불리 의논하기가 어려워 다리가 없이 배를 타고 왕래했다”고 했다. 한강의 수로가 주요 교통로인데다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다는 이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묘 이장 위한 한강다리 설계 참여하며 불필요한 거품 빼
정조의 번뜩이는 창의력 돋보여

1789년 10월에 정조는 한강 뚝섬에 배다리를 건설했다.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상여가 강을 건널 때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한강에 배다리가 놓인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5세기 초에 지금의 서울 송파인 마전포에 배다리를 설치한 기록이 나오고, 1740년에 영조가 개성을 방문하면서 임진강에 배다리를 놓은 적이 있었다. 영조가 배다리를 택한 것은 배를 이용하는 것보다 비용은 많이 들지만 안정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정조가 만든 배다리는 비용을 더욱 줄이면서 안정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정조가 한강에 배다리를 만든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뗏목에 상여를 싣고 폭이 넓은 한강을 건너는 것이 불안했고, 음력 시월의 찬바람에 강 중앙이 얼어붙어 배가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도 고려했다. 이때 만든 배다리는 큰 배 77척을 나란히 배열하여 대나무와 칡 끈으로 연결시키고, 배 위에 모래와 흙을 깔고 잔디를 덮는 방식이었다. 사도세자의 상여가 한강을 건너간 뒤에는 정조 자신이 배다리를 건너 수원을 왕래했다.

1789년 12월에 정조는 배다리를 관리할 관청인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했다.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수원에 조성한 이후 정조는 매년 한 차례 이상 이곳을 방문하려 한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정조는 배다리 설치를 개선하고 제도화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고 안정성을 확보하려 했다. 뒤이어 1790년에 정조는 <주교지남>(舟橋指南)이란 책자를 펴냈다. 원래 담당 관리들에게 배다리 운영의 방책과 제도를 만들라고 했다가 마음에 들지 않자 직접 나서서 만든 책자였다. 1793년에 주교사에서는 이를 수정한 <주교절목>(舟橋節目)을 보고했다.

정조대에 정비된 배다리의 제도를 살펴보자. 배다리를 설치할 장소는 노량진이었다. 강 양쪽에 높은 언덕이 있어 선창을 만들기에 적당하고, 강의 유속이 평온하고 수심이 깊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왕이 조선 초 태종의 헌릉(현재 서울 강남구 내곡동)이나 여주의 선왕릉을 방문할 경우에는 예전처럼 광나루에 배다리를 설치했다.

배다리에 쓰이는 배는 한강을 운항하는 상선 80척을 이용했다. 이 중에서 36척은 배다리 몸체를 만드는 데 들어갔고, 나머지는 좌우에서 다리를 고정시키거나 호위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배다리의 정중앙에 오는 배의 높이가 가장 높고 양쪽으로 갈수록 낮아져서 멀리서 보면 무지개 모양이 되도록 했다. 주교사에서는 각 배가 정박한 장소를 파악하여 장부에 기록함으로써 수시로 배를 소집할 수 있도록 했다.

 

 

 

조선 후기 일종의 젊은 연구직 관료들인 ‘초계문신’들의 이름을 담은 <초계문신제명록>. 오른쪽에서 두번째에 다산 정약용의 이름이 보인다. 1789년께 초계문신이었던 다산은 정조의 배다리 설계에 참여했으며, 그 뒤 수원 화성의 설계를 주도하게 된다. 정조는 서양의 다양한 기계들을 풀이한 책인 <기기도설>을 다산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약용에 수원화성 건설 지시 땐 규장각 책 보내 기중기 발명도와
다산의 과학지식 끄집어낸 조력자

배를 연결하는 방법은 상류를 향해 닻을 내린 상황에서 세로목인 종량과 가로목인 가룡목을 이용했다. 종량의 길이는 배 폭보다 길게 하여 두 배의 종량이 가룡목 위에서 합쳐지게 하고, 겹쳐진 부분에 구멍을 뚫어 빗장을 지르고 칡으로 묶었다. 이때 종량과 가룡목의 규격을 일정하게 하여 배를 조립하고 해체하는 데 편리하게 했다. 앞서 대나무를 이용하여 엮을 때보다 훨씬 개선된 방식이었다. 배가 연결되면 그 위에 판자를 덮고 모래와 잔디를 깔았으며, 판자의 양쪽 끝에 난간을 설치하여 추락을 방지했다.

배다리의 백미는 선창다리였다. 노량진 부근에는 서해의 밀물이 들어와 강의 높이가 오르내렸으므로 배다리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키면 부서질 염려가 있었다. 정조는 강물의 높이를 따라 움직이는 선창다리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먼저 강의 양안에 잡석과 석회를 섞어 선창을 만들고, 다음으로 선창과 배다리 사이를 선창다리로 연결했다. 선창다리는 세로목인 종량 위에 수십 장의 판자를 깔고 선창다리의 종량과 배의 종량을 연결시켰다. 이때 종량은 요철모양으로 깎고 가운데에 빗장을 질러 자유롭게 구부러지거나 펴지게 했다.

배다리가 조립되면 장식을 더했다. 3개의 홍살문을 중앙에 하나, 강의 양안에 하나씩 설치했고, 중앙의 홍살문 양 끝에는 두 개의 큰 깃발을 세웠다. 하나는 황색으로 중심을 표시했고, 다른 하나는 흑색으로 수덕(水德)을 상징했다. 36척의 배에도 깃발이 있었다. 뱃머리의 깃발에는 배의 소속을 표시했고, 꼬리의 깃발에는 새매나 물새 그림을 그렸으며,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살필 수 있는 풍향기도 세웠다. 이제 안전하면서도 화려한 무지개 모양의 배다리가 완성되었다.

정조가 정비한 배다리는 배 숫자가 이전의 77척에서 36척으로 줄어들었고, 경비와 인력도 크게 절감되었다. 배다리 제도를 계속 수정해 나갔기 때문이다. 1792년에 정조는 배다리 설계에 참여한 다산에게 화성 성곽을 설계하라고 명령했다. 다산은 국내외의 자료를 검토하여 성설(城說: 성곽 설계 구상)을 작성해 올렸고, 이를 본 정조는 옹성·포루·현안 같은 성의 주요 시설 축조계획과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했다. 정조가 중국에서 들여와 규장각에 비치했던 당시 서양의 역학 기술 소개서인 <기기도설>을 다산 집으로 보내준 것도 이때였다. 당시 다산은 부친의 삼년상을 치르고 있었다.

배다리나 화성의 제도를 보면, 정조는 사전에 현장 조건을 검토하여 적합한 제도를 마련하고, 사용되는 물품을 규격화하며, 물품 관리에 만전을 기해 소요 비용을 최소화했다. 다산 같은 실무형 관리가 적절한 방안을 만들어 보고하면, 정조는 이를 채택해 수정한 다음 현장에 적용했다. ‘기중가’(起重架)의 설계에서 보듯, 다산은 풍부한 과학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다산 자신의 노력이 있었지만, 정조가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고 결과물을 이끌어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문식/단국대 교수 

 

(8) 건축가로서의 다산 - 200년전 조선에도 잡스가 있었네

‘인문학과 기술’ 융합해 화성 설계

 수원 화성

 

 

28살에 문과에 급제한 정약용은 ‘희릉직장’이란 벼슬에 임함으로써 11년간의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희릉은 조선 초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이며, 직장이란 종7품으로 유적 관리소장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능의 관리란 주로 조경이나 토목 분야의 기술적인 일이었으니, 첫 직책부터 계획가이자 기술자로 활약해야 할 그의 운명을 보여주었다.

그가 관계에서 최초로 두각을 나타낸 업적도 계획과 기술 분야였다. 그해 겨울, 정조의 명으로 서울 노량진에 배다리를 설계하게 되었고,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고대 로마시대의 건축가인 비트루비우스는 훌륭한 건축이란 구조적으로 튼튼하고, 기능적으로 편리하며, 미학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고 했다. 그의 이론은 세계적으로 건축의 보편적 가치가 되었는데, 정약용의 배다리는 그 3대 기준을 모두 통과했다. 고대 로마의 건축은 단지 집짓는 것만 아니라 다리를 놓는 토목술까지 포괄한 광범위한 기술이었다. 정약용은 데뷔 작품부터 건축의 정의와 가치를 훌륭하게 구현한 셈이다.

아직 하급 관리인 홍문관 수찬이던 31살 때, 정조는 정약용을 불러 수원 화성(사진)의 설계를 맡기게 된다. 화성 건설 사업은 정조의 개혁 정책을 집대성한 완결판이었고, 국력을 집중해야 할 대규모 사업이었다. 의욕만큼 정치적·경제적 부담이 막대한 사업이었기에, 지위 고하를 떠나서 능력과 충심에서 가장 믿을 만한 정약용에게 맡긴 것이다.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명을 받은 지 1년 만에 성곽의 기본 설계와 축조 방법을 창의적으로 집대성한 <성설>을 정조에게 바쳤고, 이 결과를 매우 흡족해한 정조는 <어제성화주략>이라 제목을 바꾸어 정조 자신의 작품으로 둔갑시킨 채, 어명으로 반포하여 화성 건설의 지침으로 삼았다. 지금 같으면 대리 집필로 언론 비판의 표적이 되든가, 군신 간의 표절 시비로 소송감이 되었겠지만, 왕조시대의 관행으로는 오히려 최상의 찬사요 영광이었다.

건축서적 탐독에 그치지 않고 철저한 현장조사뒤 연구 거듭
기존 성곽과 전혀다른 성 설계

성곽 축조에 관한 이론인 <성설>은 모두 8개조로 이루어졌다. 성곽의 크기 정하기, 성벽의 재료, 성벽 쌓기와 해자 파기, 기초 쌓기, 석재 마련, 운송로 닦기, 수레 만들기, 성벽 쌓는 기술 등 계획부터 완공까지 중요한 공정들을 모두 다루었다.

성곽의 크기는 1보(약 1.18m)를 기준으로 전체 길이 3600보(4.24㎞)로 계획했다. 1보는 1기의 수레를 배치하여 석재를 옮겨 쌓을 수 있는 적정 단위로서, 총 3600기의 수레가 필요하여 시공 물량 계산에도 용이한 단위이다. 성곽의 재료는 생산하기 어려운 벽돌이나 내구성이 약한 흙을 피하고, 익숙하고 견고한 돌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석재도 대·중·소의 크기로 규격화하여 운반과 축성이 쉽도록 하였다.

정약용은 성곽을 쌓는 작업보다 석재를 공급하고 운반하는 사전 작업을 더 중요시했다. 재료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으면 현장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원리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기존 성곽 공사에서 재료가 불규칙하여 쌓는 데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었고, 운송로를 확보하지 않아 운송에 많은 차질이 있었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한 결과였다. 석재 산지부터 현장까지 미리 도로를 정비하고, 유형거라는 새로운 수레를 고안하여 운송에 사용하는 놀라울 정도의 계획성이 돋보였다.

석성은 견고하기는 하지만, 돌의 자체 무게를 못 견뎌서 무너지기 일쑤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아래 부분은 들여쌓고, 위로 갈수록 수직으로 쌓는 이른바 ‘규(圭)형’ 공법을 제안했다. 규형이란 첨성대의 곡선을 연상하면 되는데, 실제 이 형태로 화성 곳곳을 쌓아 견고함을 유지했다.

당시 관급공사의 임금 지급 방법은 일당제가 일반적이었는데, 전국에서 모집한 일꾼들은 체계적인 관리 감독이 어렵기 때문에 획일적인 일당 지급은 품질을 저하시키고 재정을 낭비할 우려가 컸다. 정약용은 인부 한 사람이 옮기고 쌓은 실적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일종의 성과급제를 제안하여 비용을 절약하고 공정도 단축하도록 했다. 그 결과, 50개월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 기간을 34개월로 앞당길 수 있었다.

아울러 중요한 시설들의 그림까지 그려 해설한 6편의 <도설>을 바쳤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이중성인 옹성, 대포를 장착할 포루, 성 밖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현안, 성문의 불을 끌 수 있는 누조 등 새로운 시설들을 설계하여 자세한 그림과 글로 그 원리를 밝혔다. 또한 무거운 돌을 적은 힘으로 들 수 있는 거중기 등도 도설에 기록해 바쳤다. 옹성이나 포루, 현안, 누조 등은 조선의 성곽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시설들이었으나, 방어용 성곽에는 필수적인 요소들이었다. 정조는 당시 중국의 최신 발명품들을 집대성한 <기기도설>을 하사했는데, 정약용은 이 책에 소개된 기중기의 원리를 응용하여 중국의 것보다 4배나 효율적인 거중기를 발명하여 실제 공사에 사용했다.

아무리 훌륭한 선진 제도라도 우리 현실 안맞으면 수용 거부
인문적 건축가란 뭔지 질문 던져

정약용은 건축이나 토목과 같은 기술교육을 받은 적이 결코 없었다. 그 역시 동시대 여느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사서삼경>을 읽고, 시서예의 훈련을 받은 서생이었다. 박지원·이덕무 등 선배로부터 실학을 전수받은 점이 조금 다르지만, 선배들의 실학 역시 인문학적 지식이었지, 과학기술적 지식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의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배다리 설계나 성곽 설계를 정약용은 어떻게 수행할 수 있었을까?

그는 철저한 인문주의자였다. 조선과 중국의 성곽 제도를 연구했고, 공사와 관련된 수많은 서적과 자료들을 분석했다. 윤경의 <보약>이나 류성룡의 <성설>을 수용하여 화성을 산성과 같이 견고한 방어시설로 계획했다. 또한 중국의 관련 서적들인 <무비지>, <무편>, <기기도설> 등 병서와 기술서들을 섭렵하여 온갖 새로운 시설과 기구들을 발명하고 적용했다. 그가 단순히 과거의 경험을 답습하는 기술자의 수준에 머물렀다면 새로운 성곽은 구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론에만 매달리는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기존 성곽들에 대한 조사와 현장 답사를 통해 문제를 파악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했다. 또한 당시 조선의 기술수준을 정확히 인식하여 가능한 방안들을 강구했다. 예를 들어, 절친한 북학파의 ‘벽돌생산론’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우리나라는 땔나무도 귀하고 벽돌 굽는 방법을 알지 못하니 거론할 바가 못 된다”고 비판했다. 아무리 선진 중국의 제도가 좋다고 해도 현실에 맞지 않으면 수용할 수 없다는 실용적 비판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일찍이 <기예론>에서 인간은 짐승과 달리, 지혜로운 생각과 교묘한 연구 능력이 있어서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지식과 기술은 끊임없이 계승하고 선진 외국의 성과를 받아들여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론에 바탕을 둔 기술을 개발하고, 실천적 목표를 위한 지식을 축적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이러한 이론적, 인문적·개방적·실천적 태도가 화성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인간의 삶과 사회의 공공성을 다루는 건축은 근본적으로 인문학이다. 정약용은 인문적 건축가, 이론적 건축가로서 소중한 역할을 보여주었다. 현재 도시와 건축의 상황은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기술만능주의나, 세계 톱 클래스의 건축이라면 무조건 선호하는 명품주의에 오염되어 있다. 왜 기술이 필요한지, 무엇이 현실에 절실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사라졌다. 이러한 지금의 모순과 위기를 극복할 실마리는 오래전 실험했던 정약용의 태도와 성취에서 찾을 수 있다. <끝>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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