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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조선인 카미카제

by Wood-Stock 2012. 4. 22.

벚꽃의 계절, 조선인 '가미카제'를 기억하십니까

 

사쿠라 꽃으로 '산화'한 조선인 가미카제 16인

 

 

주말 전국적으로 강풍과 함께 비가 내려 봄꽃이 다 졌습니다. 지난주 서울 여의도는 벚꽃구경을 나온 인파들로 넘쳐났습니다. 그 벚꽃도 이제는 대부분 지고 꽃받침대만 남았을 겝니다. 이맘때쯤이면 일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쿠라(벚꽃)' 꽃이 한창입니다.

 

한국에서 진해와 서울 여의도가 벚꽃으로 유명하다면 일본에서는 도쿄 우에노(上野)공원의 사쿠라 꽃이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사람들 중에는 사쿠라 꽃을 보면 '가미카제(神風)'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를 맞춰 기획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일요일(15일) 밤 KBS 1TV <역사스페셜>에서 '조선인 가미카제 탁경현의 아리랑'을 방영한 바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탁경현'이란 이름은 낯설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제법 익숙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는 조선인 출신 가미카제였습니다. 1945년 5월11일 자살특공대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미국 함대로 돌진했다가 실패한 그는 그 후 오키나와 해상에서 스물넷의 꽃다운 나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출격 전날 그는 평소 자주 찾던 식당에 들러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지었다고 전합니다.

 

 조선인 가미카제 탁경현 

 
지난 2001년 그의 비극적 삶을 다룬 영화 <호타루>가 상영돼 일본 전역에서 적잖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호타루'는 우리말로 '반딧불이'라는 뜻입니다. 현재 그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일본의 극우파들에게 '군신(軍神)'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2007년 5월 그의 고향인 경남 사천에서 그의 위령비를 건립하려다 친일 논란이 불거지면서 결국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국어사전에서 '산화(散華)'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어떤 대상이나 목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이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봐온 익숙한 용례로는 '조국을 위해 장렬히 산화(散華)하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 수류탄을 들고 산화(散華)한 무명용사들' 등이 그것입니다. 조국을 위해, 혹은 동료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값진 희생을 일컫는 셈이죠.

 

그런데 원래 이 말은 불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관무량수경>에 따르면 극락세계는 마당이 칠보로 덮여 있고 여러 가지 꽃들로 향기가 그윽한데 극락왕생을 바라는 중생들은 꽃을 뿌려 부처를 공양하였다고 합니다. 즉 불전에 꽃(華)을 뿌려(散) 공양하는 것을 '산화(散華)'라고 합니다. 산화 공양은 삼국시대부터 치러졌으며 초기에는 생화(生花)를 뿌리다가 후대로 오면서 연꽃잎 모양의 종이꽃을 뿌렸다고 합니다.

 

한편,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해군 소속 비행기를 몰고 미국 군함에 돌격한 특공대, 즉 '가미카제'들의 죽음을 일러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산화(散華)'라고 불렀습니다. '사쿠라 꽃(華)이 지(散)듯'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 것입니다. 우리 국어사전에서 '산화(散華)'의 의미를 '어떤 대상이나 목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이라고 정의한 것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이 역시 일제 잔재인 셈이지요.

 

'확실한 죽음'을 의미한 자살 특공대... 성공률은 6%

 

 출격하는 가미카제에게 사쿠라꽃을 흔들며 전송하는 여고생들

 

지난 2004년 모멘토 출판사에서는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은 일본인 문화인류학자 오오누키 에미코(大貫惠美子)의 저서를 광운대 일본학과 이향철 교수가 번역한 것으로서, '상징인류학의 관점에서 자연이나 미의식이 국가내셔널리즘에 이용되었을 때의 위험성을 연구'한 내용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일제가 사쿠라 꽃을 어떻게 침략전쟁의 상징으로 활용하였는지를 분석한 것입니다.

 

결론부터 앞세우면 사쿠라꽃은 19세기 말부터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악의 꽃'이 됨은 물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상징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청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청년들의 희생이 필요하게 되자 일제는 '천황, 즉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사생관(死生觀)을 조장하였습니다. 이는 중세의 무사도 정신을 근대화시킨 개념으로, 일본의 근대를 연 메이지 이후에 도입된 신개념이랄 수 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절정에 달하자 일제는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들을 '피어 있는 사쿠라 꽃'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타는 비행기에 사쿠라 꽃을 새기거나 또 출격 때는 여학생들이 사쿠라 가지를 들고 나와 전송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전사(戰死)를 사쿠라 꽃이 진다는 뜻에서 '산화(散華)'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군부가 불교용어의 원래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충혼의 상징용어로 변용한 것입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해군 중장 오오니시 타키지로오(大西瀧治郞)이 고안한 것으로, 당초 이는 미국의 일본 본토 침공에 대비한 방위계획이었습니다. 특공대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10월 20일 창설됐는데, 최초 출격은 1944년 10월 25일(조선인 가미카제 최초의 전사자 '마쓰이 오장'의 출격일보다 한 달 4일이 빠름) 시키시마 부대가 필리핀 레이테만에서 미군 함정에 '몸체공격'(體當たり, 육탄공격)을 가한 것이 그 시초입니다.

 

이때 오오니시는 해군 특공대에게 '신풍(神風, 가미카제)'라는 이름을 부여했습니다.(오오니시는 일제 패망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가미카제 영령들에 대한 사죄를 담은 유서를 쓰고 자살했습니다.) 

 

 오오니시 해군 중장

 

'확실한 죽음'을 의미한 특공작전의 장비는 비행기와 어뢰로 이뤄져 있었는데, 그 어디에도 탑승원을 위한 안전장치는 구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가미카제들이 몰았던 '제로센(零戰)'이라는 단발엔진 탑재 함상전투기는 고도 2만 피트(약 6100m)를 최고시속 372마일(약 600km)로 비행하는 성능을 갖고 있었고, 250kg의 폭탄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제로센은 폭탄의 무게와 가속도로 인해 일단 급강하하기 시작하면 제어가 불가능했습니다. 말하자면 미국 군함을 향해 한번 하강하면 그길로 곧 군함에 부딪히거나 바다에 빠져 죽는 길뿐이었습니다.

 

한편, 가미카제 특공대는 초창기엔 미군을 공포에 빠뜨렸으나 갈수록 그 위력은 미미해졌습니다. 파괴력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도 특공대원들이 탄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비행기에 실은 폭탄이 너무 무겁거나 속도가 너무 빨라 조준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입니다.

 

  가미카제용 공격기 '제로센'

 

또 더러는 마지막 순간에 조종사, 즉 특공대원들이 두려운 나머지 눈을 감아버려 이 역시 표적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일본 패망 때까지 2500여 명의 인간폭탄이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었는데 성공 확률은 겨우 6%. 가미카제는 군사작전이라기보다 적에게 두려움을 주는 심리전적 성격이 더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쿠라 꽃으로 '산화'한 조선인 가미카제 16인

 

당시 특공대원들은 해군 비행예과 연습생이나 학도병들이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조선인 청년들도 더러 포함돼 있었습니다. 위 책에 따르면, 학도병으로 징집된 조선인은 4385명이며, 이 가운데는 '마쓰이 오장'처럼 가미카제에 지원했다가 '산화'한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가미카제 특공대의 공격을 받아 불타고 있는 미군 항공모함

 

이들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천황의 군대'였던 만큼 보기 나름으로는 '친일파'로 낙인 찍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간 우리 역사에서 묻혀져왔는데, 이들 역시 망국으로 인한 피해자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신원이 밝혀진 '조선인 가미카제' 16인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박동훈 : 1928년 조선 출생, 소년비행병 제15기 출신, 마코토 제41비행대 오장(伍長), 1945년 3월 29일 오키나와 중부 카데나 서방해상서 전사, 17세, 전사 후 2계급 특진(소위)

2. 최정근 : 1921년 함북 경흥 출생, 일본육사 56기 졸업, 비행 제66전대 중위, 1945년 4월 2일 오키나와 주변 해상서 전사, 24세, 전사 후 2계급 특진(소좌)

3. 김상필 : 1920년 조선 진남포 출생, 1943년 10월 연희전문 졸업, 특별조종견습사관 제1기, 제32 무극비행대 소위, 1945년 4월 3일 서남해상서 전사, 25세, 전사 후 2계급 특진(대위)

4. 이윤범 : 1921년 조선 출생, 조종후보생, 제80 신부(振武)대 상사(曹長), 1945년 4월 22일 오키나와 주변 해상에서 전사, 23세, 전사 후 2계급 특진(소위)

5. 카와히가시 시게루(河東繁, 한국명 불명) : 조선 출생, 출생연도 불명, 소년비행병 제14기 출신, 제106 신부대 오장, 1945년 4월 16일 오키나와 주변 해상에서 전사, 전사 후 2계급 특진(소위)

6. 키무라 세이세키(木寸正碩, 한국명 불명) : 조선 출생, 출생연도 불명, 소년비행병 제14기 출신, 제77 신부대 오장, 1945년 4월 28일 오키나와 주변 해상에서 전사, 전사 후 2계급 특진(소위)

7. 탁경현 : 1920년 경남 사천 출생, 교토약학전문학교 졸업, 특별조종견습사관 1기생, 제51 신부대 소위, 1945년 5월 11일 오키나와 비행장 서해상에서 전사, 24세, 전사 후 2계급 특진(대위)

8. 이현재 : 1926년 조선 경성부 성동구 출생, 소년비행병 14기 출신, 제431 신부대 오장, 1945년 5월 27일 오키나와 주변 해상에서 전사, 18세, 전사 후 2계급 특진(소위)

9. 김광영 : 1926년 조선 경성부 동대문구 출생, 소년비행병 14기 출신, 제431 신부대 오장, 1945년 5월 28일 오키나와 해상에서 전사, 18세, 전사 후 2계급 특진(소위)

10. 이시바시 시로오(石橋志郞, 한국명 불명) : 1918년 조선 경성부 중구 출생, 특별조종견습사관 1기생, 비행 제20전대 소위, 1945년 5월 29일 오키나와 해상에서 전사, 27세, 전사 후 2계급 특진(대위)

11. 한정실 : 1925년 조선 출생, 소년비행병 제15기 출신, 제113 신부대 오장, 1945년 5월 28일 오키나와 해상에서 전사, 20세, 전사 후 2계급 특진(소위)

12. 노야마 사이코쿠(野山在旭, 한국명 불명) : 1924년 조선 출생, 특별간부후보 1기생, 제15전대, 1945년 1월 30일 필리핀 마닐라 남방 나스구브 해상에서 전사, 21세

13. 노용우 : 조선 수원에서 출생, 경성법전 졸업, 특별조종견습사관 1기생, 비행 제5전대 오장, 1945년 5월 29일 시즈오카현 오마에자키 상공에서 전사, 전사 후 2계급 특진(소위)

14. 임장수 : 1924년 조선 출생, 소년비행병 12기 출신, 근황대 오장, 1944년 12월 7일 올머크만에서 전사, 20세, 전사 후 2계급 특진(소위)

15. 이와모토 미츠모리(岩本光守, 한국명 불명) : 1925년 경남 울산 출생, 조종후보생 12기, 제23독립비행중대 중사(軍曹), 1945년 3월 26일 오키나와 나하 서방 해상에서 전사, 20세, 전사 후 2계급 특진(소위)

16. 마쓰이 히데오(松井秀男, 한국명 인재웅) : 1924년 조선 개성 출생, 소년비행병 13기, 야스쿠니 부대 오장, 1944년 11월 29일 필리핀 레이테만에서 전사, 20세, 전사 후 2계급 특진(소위)

 

 '인간병기'나 다름 없었던 가미카제 특공대원들. 이들 중엔 조선인 청년도 포함돼 있었다.

 

보시다시피 '마쓰이 오장'의 전사가 가장 빠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일제 패망 서너 달 전에 오키나와 부근 해상에서 전사했으며, 계급은 오장(하사, 인재웅)에서부터 중위(최정근)까지입니다. 나이는 대개 20세 전후인데 최연소는 17세(박동훈), 최연장자는 27세(이시바시 시로오)입니다.

 

전사 후 이들은 2계급 특진하였으며, 이들 가운데는 김상필, 탁경현, 노용우 등 3인은 학도병 출신입니다. 학도병의 경우 겉으로는 '지원'이었지만 사실상 강제징집이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이들은 조선인임에도 일본군 신분으로 일황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더러는 일본의 전쟁영웅들과 함께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버젓이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꽃다운 청춘을 이역만리 바다에 던지고 물고기밥이 된 조선인 가미카제 청년들. 일본에서는 조선인이어서 차별대우를 받고, 조선(한국)에서는 일황을 위해 죽었대서 친일파로 낙인 찍힌 그들. 죽어서조차도 고국땅 부모형제의 품에 안기지 못한 채 고혼으로 떠돌고 있는 조선인 가미카제. 이들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한 전쟁 피해자라고 하겠습니다.

 

2012. 4. 22 / 오마이뉴스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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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제 된 식민지 청년, 그는 과연 친일파인가

길윤형의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매일신보>에 실린 서정주의 친일시 "마쓰이 오장 송가"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중략]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런 우리의 하늘이여

 

 - 서정주 <마쓰이 오장 송가>(매일신보 1944. 12. 9) 중에서

 

 

'식민지 시대'를 정리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다. 아주 단순할 듯하면서도 뜻밖으로 꼬이는 게 이른바 '친일파', 부일 인사에 대한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오랜 시간 공들여 내놓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소한도 일제의 권력기관, 군과 경찰, 식민지 관리 업무에 종사한 일정 직위 이상의 관료들의 경우에는 친일부역자로 처리하는 데 지장이 없는 듯하다.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 편입되면서 만주국 장교가 된 박정희가 사전에 오른 것이 그 실례다.

 

조선인 '가미카제',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그런데, 정작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민족문제연구소조차 그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들이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비행기를 타고 미군 함선에 돌격한, 이른바 '자살 특공대'라 불리는 조선인 '가미카제' 대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일제의 조종사 양성기관에 들어가 일본군 하사관이나 장교로 임관해 연합국 전함을 향한 자살공격으로 전사했다. 이들의 행위는 어떤 기준으로도 '민족의 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이들은 마땅히 '친일파'로 분류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한겨레신문> 길윤형 기자가 쓴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는 '일본군 자살특공대원으로 희생된 식민지 조선인'을 본격적으로 다룬 저술이다. 책을 통해서 저자는 "1920년대 초에 태어나 출생과 동시에 일제의 황민화 교육을 받고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10대 중후반의 소년 비행병들에게 '친일파'라는 돌을 던지는 것이 온당한가"라고 묻는다.

 

경남 사천 출신의 특공대원 탁경현(창씨명 미쓰야마 부미히로 光山文博)의 위령비를 사천에 세우는 문제로 불거진 갈등을 전후해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놓은 성명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연구소는 이들이 "철저한 황민화교육 하에서 강요된 지원에 의해 동원돼, 거부할 수 없는 출격명령에 몸부림치다 꽃다운 나이에 비극적 생을 마감"한 피해자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무고한 오키나와 현민이나 연합군의 관점에서는 가해자인 성격도 부정할 수 없다"고 지적한 것이다.

 

연구소는 또 "조선인 특공대원에 대한 진상규명과 역사적 평가를 통해 적절한 방식으로 억울한 원혼을 위로하고 추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마련해 나갈 것을 희망한다"고 전했다. 이 책은 그러니까, 조선인 특공대원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한 한 언론인의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쟁말기의 무모한 전술, '자살특공대'

 

정상적인 군대에서 '자살특공대' 따위를 편성하거나 그런 작전을 감행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작전을 하다 전사할 수는 있지만, 애당초 죽음을 전제하고 짜는 작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작전이 기획·수행되었다는 것은 그 시기가 그런 것을 용인할 수 있는 체제였고 그 시기적 급박성이 높았다는 뜻일 터이다.

 

가마카제 특공대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10월, 필리핀 방어를 위한 레이테 해전에서 처음으로 기획, 집행되었다. 절대 열세인 항공 전력으로 미군과 맞서야 했던 일본군은 해군의 항공모함 탑재기 '제로센'에 250kg의 폭탄을 실은 뒤 적 항공모함의 갑판에 몸체공격을 감행하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 특공대의 정식명칭은 '신푸(神風)특별공격대'였다. 그러나 당시 아나운서가 '신푸'라 음독하는 대신 '가미카제'라고 훈독한 이후에는 '가미카제'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다섯 대의 비행기로 감행된 첫 출격은 믿기 어려울 만큼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는 불행하게도 자살특공대를 전세 역전을 위한 '필승의 전술'로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모두 17명이다. 서정주의 친일시 <마쓰이 오장 송가>의 주인공인 인재웅이 첫 희생자였고 1944년 6월 오키나와 주변 해역에서 사망한 한정실이 마지막 전사자였다.

 

마지막 희생자는 본명 불상의 야마모토 타츠오(山本辰雄). 그는  특공기 방화범으로 몰려 해방 일주일 전인 1945년 8월 8일 총살되었다. 그가 방화범으로 몰린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야마모토 타츠오뿐 아니라, 이들 특공대원들의 죽음은 일본을 위한 전쟁에 자원 참전, 목숨을 바친 조선인 청년들의 죽음을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걸 역설적으로 시사해 준다. 이들의 '원수의 나라'를 위해 군인이 되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죽음을 선택했지만 그 죽음이 일제가 원했듯 '천황을 위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본군이 비행기 조종사를 충원하는 통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하여 육군특별조종견습사관(특조), 육군소년비행병(소비) 등 셋이었다. 육사를 졸업한 조선인 특공대원은 최정근(56기)뿐이고 나머지는 특조 출신의 장교나 소비 출신의 하사관들이었다. 

 

열일곱 명의 조선인 가미카제들

 

특공대원 가운데 첫 전사자인 인재웅(창씨명 마쓰이 히데오 松井秀雄)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인 소학교를 다니며 전형적인 황민화 교육을 받았다. 그는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때문에 일기 시작한 항공열에 들떠 지내다가 소년비행병이 되었다.

 

그는 1944년 11월 29일 여섯 명의 대원과 함께 출격해 레이테 만에 정박 중이던 미군의 수송선단에 몸체 공격을 감행해 숨졌다. 그의 공격으로 연합군의 함선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소심하고 정 많던 소년 인재웅은 스무 살의 생애를 마감하는 대신 일제에 의해 '반도의 영웅'으로 기려졌다.

 

경흥의 수재였던 최정근이 일본 육사를 나와 가미카제 특공대원이 되었듯 특공대원이 되었던 젊은이들은 대부분 식민지 조선의 유능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일본군 비행사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런 선택도 궁극적으로 차별로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지 못했다.

 

이들은 육사와 특조, 소비를 통해 비행사가 되었지만 신분적 차별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며 그예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비행기 조종사는 그들의 선택이었지만 '자살특공대'는 그들의 자발적 선택은 아니었다.

 

가미카제가 되었지만 이들이 일제가 원했던 것처럼 '천황'을 위해서 죽은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 것 같다. 자신의 선택으로 일본군이 되었지만 조국을 식민지로 만든 천황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스스로로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육사 출신의 특공대원 최정근은 '천황을 위해 죽을 수 없다'는 전언을 남겼다. 탁경현과 김상필, 윤응렬은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아리랑'을 불렀다고 했다. 최연소 특공대원이었던 박동훈은 부친에게 '동생들은 절대 군에 보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일본인 동기에게 그렇게 말했다.

 

"내선일체라고 말하지만 거짓말이야. 일본은 거짓말쟁이야. 나는 조선인의 배짱을 보여 줄 거야."

 

그것은 결국 그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을까. 스스로의 모순적 선택을 정당화하는 남루한 명예였을까. 17명의 조선인 가미카제가 희생되고 나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태평양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이 곤혹스런 일군의 젊은이들의 선택은 역사적 과제로 남았다.

 

 

     

  '귀향 기원 위령비'를 세우는 문제로

  논란이 되었던 경남 사천 출신의 가미카제

  특공대원 탁경현(1920∼1945)

  특조 1기로 소위로 임관해 전사한 특공

     대원 노용우(1922∼1945)

  소년비행병 출신으로 살아남아 공군에서

     복무한 민영락

 

 

 

'깻잎 한 장'의 두께로 갈린 운명

 

'운명은 깻잎 한 장 정도의 두께로 갈렸다.'

 

일본군 비행기 조종사로 특공작전에 나가 전사했던 특공대원들은 '친일파'가 되었지만 살아 돌아온 이들은 신생 대한민국의 '항공계 아버지'가 되었다. 최연소 특공대원이었던 박동훈의 소년비행병 동기 가운데 공군참모총장 셋, 작전사령관 다섯, 공군사관학교장 넷이 배출된 것이다. 인생은 참으로 얼마나 역설적인가.

 

조선인 특공대원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없다. 지금까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 피해 사실을 인정해 달라고 서류를 낸 이는 최정근, 박동훈, 인재웅, 노용우 등 넷뿐이다. 이 가운데 육사 출신인 최정근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유족이 지원 신청을 철회했고 박동훈과 인재웅은 피해자로 소정의 위로금을 받았다.

 

노용우는 '일본군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한 경우로 위로금 지급 대상에 제외되었다. 박동훈과 인재웅이 하사관(오장)이었던 반면에 노용우는 경성법전을 나온 특조 1기 출신으로 소위로 임관해 전사했던 것이다.

 

국군의 수뇌부를 역임한 일본 육사 출신 '친일파'들의 인생유전의 한가운데에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도 있다. 그는 한편에선 조국 근대화를 이룬 불세출의 지도자로 기려지지만 다른 한편으론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을 선명하게 올린 '친일파'다.

 

박정희는 사범학교를 나와 소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칼 찬 군인'이 되고 싶어 만주로 갔다.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으로 신경군관학교에 지원했고 뒤에 일본 육사를 나와 만주국 장교가 되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의 종전이 다소 미루어졌다면 앞서 다룬 사람들의 운명도 다시 한 번 뒤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살특공대로 자신의 목숨을 오키나와 인근 해역에 버린 사람이 더 늘 수도 있었을 게고 신생 독립 조국에서 영화를 누리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삶과 운명은 깻잎 한 장의 두께로 갈린다.

 

다행히 종전이 되면서 살아서 돌아온 소년비행병 출신의 민영락은 특공대에 배속된 직후인 1945년 5월에 어머니의 엽서를 받았다. 그러나 한글을 모두 잊은 그는 엽서를 읽을 수 없었고 일본어로 답장을 써 보내고 몹시 울었다고 했다. 민족정체성마저도 부정하고 말살하고자 한 일제 식민지배가 가져온 비극이다.

 

과거의 역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시나브로 화석이 된다. 35년이 넘는 식민지 시기의 기억은 근대사 교과서에서 삭아가고 청산하지 못한 그 시기 역사 앞에 우리의 현재는 참으로 남루하다. 뉴라이트들의 '식민지 근대화론' 따위가 공공연히 운위되는 이 21세기에 다시 되돌아보는 우리 근대사는 아직도 아프고 쓰리기만 하다.

 

2012. 4.16 / 오마이뉴스 - 장호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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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자살특공대의 운명, 깻잎 한장두께 차이로 갈렸다

 

“바다에 가면 물에 잠긴 시체가 되고/ 산에 가면 풀에 묻힌 시체가 되더라도/ 대군주님의 곁에서 죽겠습니다/ 아무것도 돌보지 않고.”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10월, 일본 군부는 군가 ‘우미유카바’와 알코올 없는 물 한잔에 취해 폭탄을 싣고 적 함대에 돌진하는 가미카제특별공격대를 편성한다. 세키 유키오 대위가 이끄는 자살특공대는 항공모함 두 척을 무력화하고, 경순양함 한 척을 침몰시켰다. 5대의 비행기가 거둔 전과는 일본 해군의 양대 축인 구리다 함대가 거둔 전과를 능가했다.

 

그게 문제였다. 일본 군부는 젊은이들을 고성능 폭탄을 탑재한 낡은 전투기에 실어 전선으로 내몰았다. 가장 많은 특공대원이 출격한 곳은 일본 규슈의 지란 비행장이다. 이곳이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 오키나와와 가장 가까운 비행장이었기 때문이다. 자살특공대 사망자는 1036명. 이 가운데 17명이 조선인이었다.

 

박동훈(위), 한정실(아래)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17명을 포함해 태평양전쟁 중 자폭비행으로 숨져간 조선인 젊은이 19명에 얽힌 이야기다. 일본에선 ‘가미카제’ 자체가 신화화되어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한국에선 조선인 가미카제가 친일파로 간주돼 뒷전으로 밀려났던 인물들이다. 덕지덕지 친일파 딱지를 떼니, 대학 등록금이 없어서, 단지 비행기가 좋아서, 제복이 멋있어 보여서 조종사가 되어, 남들의 전쟁에 휩쓸려 사라져간 ‘아무개 집 아들들’이다.

 

지은이 <한겨레> 길윤형 기자는 2010년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기획취재에 참여해 ‘가미카제로 사라진 조선 청년들’ 부분을 맡아 취재했다. 일본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 기사와 가해자 쪽인 일본인들의 저서들. 여기에서 ‘군국주의 영웅’이란 시각을 걷어내고, 한국 유가족의 증언과 생존자 회고록 여기저기에 흩어진 단편들을 모아 조선인 가미카제의 얼개를 짜맞췄다. 그래서 빛을 본 이야기가 이제 책 한 권 분량으로 독자들과 만나게 됐다.

 

조선인 가미카제는 육군소년비행단(소비) 10명, 육군특별조종견습사관(특조) 5명, 항공기승원양성소 3명, 육사 1명이었다. 대부분이 소비, 특조 출신이다.

 

1933년에 마련된 소비 제도는 15~17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3년 반 정도 전문교육을 마친 뒤 조종, 통신, 정비 등 각 분야 오장(하사)으로 임관하는 제도였다. 특조는 대학 또는 전문학교 출신들에게 1년 반 정도 조종기술을 가르쳐 조장(상사) 계급장을 달아주는 속성 조종사양성 프로그램으로, 전쟁 막바지인 1943년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식민지 조선의 청소년들에게는 인생역전의 기회였다. 실업난이 극심했던 당시 시험에 붙으면 월급을 받아가며 조종술을 배울 수 있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2500명을 모집한 특조 1기 경쟁률은 6 대 1이었다. 조선인 최초의 가미카제 특공대였던 인재웅은 재수 끝에 합격했다. 마을에서 합격자가 나오면 소를 잡았다.


왼쪽부터 탁경현, 노용우, 김상필

 

조종사로서 제대로 된 기량을 발휘하려면 최소 3년 600시간 비행이 필요한데, 그들은 250시간 정도의 연습비행을 거친 다음 전장에 투입됐다. 항법장치가 없던 시절이어서 망망대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점으로 존재하는 항모를 육안으로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적 함대의 위치를 안다고 해도 레이더를 갖춘 연합군이 160㎞ 전부터 움직임을 추적해 100㎞쯤에서 요격에 나선 탓에 특공대의 성공률은 6%에 불과했다고 한다.

 

비행기나 제복이 좋아서 입대, 남의 전쟁서 희생된 조선인들... 유족증언 등 통해 사연 읽어내

 

책은 그들이 ‘눈앞에 임박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황군의 전사들’과, ‘그저 비행기를 좋아하던 10대 소년이나 일본의 지긋지긋한 차별에 괴로워하던 20대 엘리트들’ 중간쯤에서 명분도 실리도 없이 헛된 죽음을 맞았다면서, 한국 사회는 꽃다운 나이에 회색의 공간으로 사라진 이 젊은이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여볼 준비가 되어 있을까라고 반문한다.

 

지은이의 문제의식은 조선인 조종사들의 운명이 “깻잎 한장 정도의 두께로 갈렸다”는 사실에 있다. 운이 나쁜 이들은 죽어서 ‘친일파’가 됐지만 살아서 돌아온 이들은 대한민국 공군으로 변신해 ‘한국전쟁의 영웅’, 또는 ‘한국 항공산업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해방은 이들에게 기존 세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됐다. 전투기 조종이 특수한 전문분야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일까. 가미카제의 유산은 ‘군인정신’으로 이어진다. ‘이달의 전쟁영웅’과 ‘이달의 호국영웅’으로 선정된 공군 소속 군인 가운데 10명이 한국전쟁 당시 적의 공격으로 비행기가 추락할 때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대신 자살공격을 택했다.

 

2012. 3. 2 /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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