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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마지막 황제 푸이

by Wood-Stock 2012. 5. 22.

‘황제에서 평민까지’ 파란만장했던 풍운아

 

생의 마지막에 평민으로 돌아간 마지막 황제 ‘푸이’

 

 

2012년은 국내에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있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중국의 만주국(滿洲國)이 새삼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만주국의 육군사관학교였던 신경군관학교의 2기 졸업생으로 만주군 보병장교를 거쳤다.

만주국의 탄생배경과 역할 등 전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 광푸루(光復路) 5호에 있는 위만황궁(僞滿皇宮, 꼭두각시 만주국 황궁이란 뜻)이다. 

이곳은 중국의 마지막황제인 푸이(溥儀, 1906-1967)가 1932-1945년에 황제로 생활하며 직무를 본 곳이다. 베이징에 있는 청황실로 72만㎡인 쯔진청(紫禁城)에 비하면 훨씬 적은 20만㎡의 규모에 푸이가 주로 생활한 지시러우(緝熙樓, 강희황제의 뜻을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명명)에는 푸이의 침실과 사무실, 서재, 불당과 접견실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위만황궁은 1962년에 세워졌으나 2001년 2월에 위만황궁박물원(僞滿皇宮博物院)으로 개명돼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위만황궁(僞滿皇宮)내 지시러우(緝熙樓)에 있는 탄위링의 서재로 탄위링은 왕비가 된 뒤 5년만에 병사한다.ⓒ하성봉
 

 

   
위만황궁(僞滿皇宮)내 지시러우(緝熙樓)에 있는 탄위링의 침실.ⓒ하성봉
 

안쪽에는 일본의 동북지역 침략사를 보여주는 ‘9.18 만주사변전람관’이 있어 푸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국내외 50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간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은 이곳을 일본의 중국침략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삼고 있다. 
 

   
푸이는 만주국 황제가 되어 청나라 황제들을 모신 펑셴뎬(奉先殿)에서 제를 올리며 만주족 정권의 부활을 노렸지만 일본에 이용당하는 결과로 나타났다.ⓒ하성봉
 

만주국에 대해서는 1987년 제작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란 제목의 영화가 국내에서 상영된 적이 있다.

 

   
1987년 서양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에 의해 제작된 영화 '마지막 황제의 포스터.
 

<마지막 황제> 영화 보기→http://v.pptv.com/show/wzwJhib9VxQNm5Ew.html

푸이는 영화에서 철저히 일본의 대륙침략에 이용당한 것으로 나온다. 마찬가지로 위만황궁을 둘러보면 만주국의 비애와 함께 권력의 무상함이 깊게 느껴진다. 
 

   
위만황궁(僞滿皇宮)내 지시러우(緝熙樓)에는 영화 '마지막 황제'에 나오는 황제즉위식 장면이 밀납인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뒤에 금이 간 용무늬가 눈길을 끈다.ⓒ하성봉
 

만주국은 친일 꼭두각시 정부…마지막 황제와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진 만주족

만주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부여, 고구려, 발해의 땅이었다. 또한 요(遼), 금(金), 후금(後金), 청(淸) 등 중국의 중원을 위협하거나 통치한 왕조가 일어난 곳이다.

만주족은 숙신(肅愼), 읍루(邑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족(女眞族)에서 이어진 민족이지만 신중국이 들어서면서 한족 동화로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다. 만주족은 2000년 통계로 1068만명의 소수민족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만주어의 흔적조차 희미해지고 있다. 실제 푸이는 중국 동북지역이 배경인 만주족의 ‘마지막 황제’가 된 셈이다. 

만주국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꼭두각시 정권이었다. 푸이는 일본의 힘에 의지해 만주족 정권의 부활을 노렸지만 일본은 푸이를 철저히 이용했다.

만주국은 국기(國旗)와 국가(國歌)에 화폐도 발행하고 일본, 독일,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 스페인, 헝가리, 폴란드 등 8개국이 존재를 인정했을 정도로 명목상의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실질적인 통치행위는 일본총독부가 관할했다. 

푸이는 1911년 10월 쑨중산(孫中山)의 신해혁명으로 황제의 실권을 잃게 된다. 이로써 260년동안의 청왕조 통치도 막을 내렸다. 

푸이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중국통인 가정교사 존스턴(Jhonston)의 영향으로 유럽식 생활방식에 익숙해졌다. 변발을 자르고 양복입기와 가죽구두를 신기를 좋아했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해 고궁의 문턱을 모두 없애도록 했다. 16살의 푸이는 동갑인 완룽(婉容)과 혼인을 하게 된다. 이후 14살의 원슈(文绣)를 둘째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 

 

   
푸이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외국인 가정교사의 영향으로 유럽식 생활방식에 익숙했는데 정장차림을 좋아하고 골프, 테니스, 승마 등을 즐겼다.ⓒ하성봉
 

푸이는 1924년까지 쯔진청에서 생활하게 된다. 1924년 11월 5일 쯔진청에서 쫓겨나오며 1925년 2월 23일 톈진의 일본공사관으로 가게된다. 그는 기차로 베이징을 떠나 톈진(天津)에서 7년동안 아파트 생활을 한다. 그는 톈진에서 서양인들의 고급 연회장소에 참석해 골프를 배우기도 했다. 푸이는 중국역사상 골프를 칠 줄 아는 유일한 황제였다. 

푸이는 왕조 회복을 위해 일본군인, 정치인들과 접촉하고 일본이 왕정복고의 가장 확실한 지원군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을 했다. 이것이 푸이가 일본제국주의의 품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일본은 푸이를 이용해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 동북지역을 독차지할 생각을 하게 된다.

푸이는 1932년 3월 8일 오후 3시 일본특무의 엄밀한 감시하에 창춘(長春)에 오게 된다. 이 때 연호를 대동(大同)이라하고 집정을 선언했다. 1932년 9월 15일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하면서 동북지역의 주권과 영토를 조건없이 일본에 넘기게 된다. 푸이는 1932년 5월 3일 국제연맹 조사단에 일본이 원하는대로 답변을 한 뒤 1934년 3월 1일 황제로 즉위한다. 푸이는 일본을 두차례 방문했는데 1935년 4월 3일 제1차 방문에서 신사참배를 하고 전쟁중에 부상당한 일본군을 위문하기위해 병원을 방문했다. 1940년 6월에는 두번째 방일을 했다. 

 

   
푸이는 1932년 9월 15일 이 탁자에서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하면서 동북지역의 주권과 영토를 일본에 넘기게 된다. ⓒ하성봉
 


만주국은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만주의 물자를 일본에게 지원하는 전쟁보급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푸이는 일본이 패망한뒤 1945년 8월 19일 푸이가 일본으로 도주하는 도중 선양(瀋陽)공항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돼 소련에서 5년의 감옥생활을 한다. 푸이는 1950년 7월 21일 중국에 돌아온뒤 10년동안 하얼빈(哈爾賓)과 푸순(撫順)에서 사회주의 정신 개조를 받았다. 
 

위만황궁은 푸이의 인생박물관…… 롤러코스터 같은 파란만장한 삶 살아

위만황궁은 푸이의 인생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푸이는 롤러코스터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푸이는 위만황궁에서 13년 4개월간 머물렀다. 푸이가 생활하던 공간은 황궁내 지시러우(緝熙樓)에 집중되어 있다. 거실, 서재, 이발실, 불당, 화장실 등 푸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다. 푸이는 방에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왕비를 포함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푸이는 잠을 잘 때 수건을 얼굴에 덮고 자는 습관이 있었다. 방에는 나체 남녀 인형을 두었는데 평상시는 천으로 덮어 두었다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푸이가 주로 생활한 위만황궁박물원의 러시아풍으로 건축된 지시러우(緝熙樓) 건물로 만주국 운명의 회한이 서린 곳이다.앞에 '잊지 말자 9.18'이란 장쩌민 전주석의 글씨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중국의 마지막황제인 푸이(溥儀)가  13여년동안 생활하며 직무를 본 위만황궁박물원이 당시의 유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하성봉
 

일본인은 푸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푸이는 매달 관동군사령관을 만나 보고를 해야 했다. 일본은 푸이가 자손이 없는 점을 이용해 1937년 체결한 ‘제위계승법’(帝位繼承法)에 “황제가 아들, 동생, 손자가 없으면 동생의 아들이 황위를 계승한다”라는 규정을 넣었다. 그러면서 일본은 푸이의 동생인 푸제(溥杰)에게 강요해 일본여성을 부인으로 맞도록 했다.

 

   
일본관동군은 위만황궁에서 푸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지시했다.ⓒ하성봉
 

푸이는 이발을 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다른 사람이 자기의 머리를 만지는 것을 특히 싫어했다. 중요한 인물을 만나거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이발을 했다. 그는 전문이발사를 두고 있었다. 이발한 머리카락은 노란 명주손수건에 싸서 날짜를 명기한 뒤에 보전하게 했을 정도로 그는 ‘용의 머리카락’(龍髮)를 소중히 여겼다. 그는 불당안에서 길흉을 점쳤다. 불당에 검은색 피아노를 두고 불사가 없을 때는 ‘황제’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울려퍼졌다. 화장실이 있는데 푸이는 나중에 일본이 멋대로 통치를 하자 변기에 앉은 채 문건을 검토하고 지시를 내리는 방식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래서 나중에 ‘변기 황제’란 별명이 붙었다.

어려서부터 신체가 허약했던 푸이는 황국내에 중약 조제실을 두고 있었는데 날마다 전문의사에게서 진찰을 받았다. 만주국 말기에는 대량의 양약을 구입했는데 푸이는 날마다 호르몬 조사를 맞았다. 푸이는 외출전에 옷에 먼지하나도 용납하지 않았다. 셔츠는 매일 세탁을 해야했으며 식탁보와 냅킨도 매일 세탁을 하고 다림질을 해야했다. 수저는 반드시 뜨거운 물에 삶아야했으며 나중에는 소독을 하기까지 했다. 외부 손님들이 올때는 반드시 소독실을 거쳐야 했다. 푸이는 ‘세균’을 가장 무서워했다.

푸이는 불교를 신봉했는데 매달 1일과 15일은 채소를 먹다가 나중에는 대형연회를 제외하고는 평상시에도 채식을 했다. 나중에는 고기만 봐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가 됐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길흉화복을 점치고 미신을 신봉했다. 만약 불길하게 나오면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보였으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중얼거리면서 예배를 드렸다. 

푸이는 개 키우는 것을 좋아해 100마리 정도를 길렀다. 개마다 이름이 있었는데 ‘신분증’을 발급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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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이가 당시 타고다닌 고급승용차.ⓒ하성봉
 

마지막 황제의 여인들……. 황후 완룽(婉容) 아편 중독으로 비참한 삶 마쳐

푸이가 61년의 일생동안 거친 여성은 모두 5명이다. 

첫번째 왕비 완룽은 아편 중독으로 사망했다. 완룽이 머문 곳은 황궁내 지시러우의 2층 동편이었는데 침실, 거실과 아편 흡연실이 당시의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베이징 쯔진청의 쿤닝궁(坤寧宮)에 비견된다. 쿤닝궁은 푸이와 완룽이 결혼한 신혼방이었는데 명조말대 황후가 목매 자살한 곳이기도 하다. 완룽은 지시러우에서 목을 매 자살하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청춘시기를 아깝게 보냈다. 푸이와 같은 층에서 살았지만 완룽은 고독하고 적막한 시간을 보냈다. 푸이의 마음속에 완룽은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했다.

 

       

푸이의 첫번째 황후 완룽(婉容)은 미모가 빼어났으나 아편 중독으로 비참한 삶을 마친 불운의 마지막황후가 됐다. 

푸이와 완룽의 다정했던 때의 사진으로 둘은 창춘(長春) 위만황궁에 들어온 뒤 관계가 멀어진다. 출처=중국포털 바이두

 

둘이는 다른 식탁에서 밥을 먹었고 다른 침대에서 잠을 잤다. 완룽은 장기간의 정신적인 공허와 스트레스로 궁중의 시종과 불륜의 관계에 빠졌는데 푸이가 알고 난 뒤 격노해 완룽을 독방에 감금했다. 완룽은 이때부터 연금생활을 하게 된다. 완룽은 당시 만주족중에서 소문난 미인이었고 보기 드문 재능을 지닌 여성이었다. 악기, 바둑과 서화에 정통했고 수리, 물리, 화학과 외교 방면을 이해할 정도였다. 또 유창하게 영어도 구사할 줄 알았다. 그러나 방에 감금된 뒤 정신적인 우울증에 빠지면서 ‘미인 황후’는 아편에 의존하면서 중독됐다. 완룽의 아편 중독증은 갈수록 심해져 매일 8차례 총 2량(1량은 37g)씩을 피우고 87개피의 담배까지 피워대는 지경이 됐다. 만주국 후기에 그녀는 두 눈을 정상적으로 뜰 수 없고 두 다리로 걸을 수도 없었으며 심각한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만주국이 붕괴된 뒤 완룽은 푸이와 지린성 퉁화(通化)의 다쑤쯔거우(大粟子溝)로 도피했으며 1946년 옌지시(延吉市)에서 40살의 나이로 숨졌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황후 완룽은 푸이와 봉건제도의 희생물로 비참한 결말을 맺었다.

푸이와 완룽의 만남은 우연적이다. 푸이가 16살이 되자 명문규수들을 물색하게 됐는데 몽고왕족 혹은 만주족 귀족의 자녀중에서 간택하기로 했다. 마지막에는 4명으로 압축이 됐는데 푸이는 작은 흑백사진을 보고 먼저 원슈(文绣)를 낙점했으나 가난하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황실에서 반대가 심해 다시 완룽의 사진을 골랐는데 의견이 분분한 끝에 최종적으로 완룽이 황후가 되고 원슈가 숙비가 되었다. 


 

청나라 마지막황제 푸이(溥儀)의 침실로 푸이는 나중에 황비 완룽과 잠자리를 하지 않고 혼자 기거했다.

 

황비 완룽(婉容)은 독방에서 감금생활을 하면서 아편에 빠져든 뒤 중독돼 정신분열증으로 40살의 나이에 비참한 생을 마감한다.

 


푸이는 완룽의 불륜사실을 안뒤 황후의 칭호를 폐지하고 눈에 안보이도록 랴오닝성(遼寧省) 뤼순(旅順)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유배를 보내려했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로 완룽이 스스로 황후에서 물러나고 완룽의 궁에는 친족들을 포함해 남자들이 한명도 얼씬못하도록 했으며 돈을 한푼도 주지 않고 외부출입을 금지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그뒤 푸이는 1937년 베이징에서 만주족의 몰락한 귀족집안 출신의 여성으로 17살인 탄위링(譚玉齡)을 입궁시켰다. 탄위링은 성격이 활발하면서 마음씨가 고와 푸이가 총애했다. 둘이 같이 바둑을 둘 때는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탄위링은 1942년 22살의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푸이는 법정에서 일본인이 살해했다고 주장했지만 푸이가 남방과 북방의 의사 두명에게 진단을 하도록 한 뒤 서로 엇갈리는 처방을 내리게 한 탓으로 허약한 탄위링의 병세를 악화시켰다는 설 등 정확한 사인을 모르는 상태다.

 

   

 

 

푸이(溥儀)는 세번째부인인 탄위링(譚玉齡)을 가장 총애했는데 탄위링은 22살의 나이로 병사한다.출처=중국포털 바이두

푸이(溥儀)는 탄위링을 잊지 못해 사진뒤에 '내가가장사랑하는 위링'이라는 글을 적어두었다. 출처=중국포털 바이두

 

탄위링은 당시 일본에서 전해진 서양꽃인 군자란(君子蘭)을 좋아했는데 이를 안 푸이는 장례식때 사람을 시켜 탄위린의 관위에 군자란을 놓도록 했다. 이 군자란은 뒤에 탄위린이 묻힌 창춘시에 있는 사찰 반뤄쓰(般若寺)의 스님(화상,和尙)들이 정성껏 재배해 유명해졌으며 이후 민간에 전해진 이 군자란의 이름이 ‘화상’으로 불리는 이유가 됐다. 푸위는 만주국이 망한뒤 탄위린의 유골을 화장해 가족들에게 보내도록 했는데 1959년 특별사면이후 집에 보관하다가 1962년 재혼한 리수셴(李淑賢)이 집안에 두는 것을 꺼려 조카에게 맡겼다가 1994년 현재의 위만황궁 박물원으로 옮겨와 보존되고 있다. 푸이는 탄위링의 사후 그녀를 ‘명현귀비’(明賢貴妃)로 추서했다. 푸이는 탄뤼링의 사진을 수첩에 담아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사진에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위링”(我的最親愛的玉齡)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쯔진청에서 숙비가 된 원슈는 푸이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완룽과도 사이가 좋지않았다. 결국 푸이와 완룽의 모욕과 비난을 견디다못해 1931년 푸이에게 이혼을 요구한뒤 청빈한 생활을 하다가 1953년 44살의 나이로 병사한다. 

또다른 푸이의 여인은 리위친(李玉琴)으로 탄위린이 죽자 일본쪽의 권유로 마지못해 선택한 여인이다. 일본은 푸이에게 일본 여성과 결혼하도록 요구했는데 푸이가 결단코 반대하자 여러 중국 여성의 사진을 놓고 그중에서 한명을 고르도록 했다. 그래서 고른 여성이 15살의 리위친으로 우선 나이가 어리고 교육수준이 낮고 가난해 푸이가 통제하기 편할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다. 푸이는 리위친에게도 인신의 자유를 구속하고 무엇보다 가족들이 황궁을 찾지 못하도록 가혹하게 대했다. 리위친은 한마리 작은 새처럼 황궁에서 2년동안 갖혀있다가 만주국이 망한이후 창춘에서 평민생활로 돌아가 2001년 4월에 74살의 나이로 숨졌다.
 

중국인들은 푸이를 정신개조했고 살해하지 않음…..말년에 정협위원까지 지내

‘9.18 만주사변전람관’내에 진열된 ‘황제에서 평민까지’라는 코너를 둘러보면 권력의 무상함과 인간적인 비애가 느껴진다. 푸이는 두차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3살때는 청나라 황궁인 쯔진청에서, 28살때는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로 등극했다. 40살에 전범이 되었고 54살에 중국정부의 특별사면로 풀려났다. 최후로 중국의 보통평민이 되었다. 이 코너에서는 푸이의 파란만장했던 풍운아로서의 인생역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처음에 푸이는 중국 정부가 혹시 자신을 죽이지나 않을까 매우 두려워했다. 중국정부는 그에게 사상개조를 시키는 학습의 방법을 택했다. 푸이도 이를 통해 많은 사상적인 변화가 있었다. 빨래를 직접하고 구멍난 양말을 꿰메어 신고 밥을 직접 배급받아 먹는 일상적인 일을 할수 있게 됐다. 1956년에는 친척들이 푸이를 만날 수 있었다. 푸이는 장기간 동안의 노동과 사상개조를 통해 인생관과 세계관이 달라졌다. 푸이는 1959년 12월 4일 중국 건국 10주년 특사로 새로운 인생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푸이에 대해 특별사면을 내렸고 푸이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푸이는 5일뒤에 35년 만에 고향인 베이징에 돌아오게 된다. 다음날 호적수속을 밟고 베이징의 보통 평민이 되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푸이는 1960년 3월 베이징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을 시작하게 됐으며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1961년 직접 푸이 가족을 접견했다. 푸이는 1961년 3월부터 식물원을 떠나 정식으로 정협문사자료위원회(政協文史資料委員會) 전문위원으로 임명됐다. 이때 ‘나의 앞 절반인생’(我的前半生)을 저술했다. 이 책은 11개국의 문자로 번역돼 전세계로 배포됐다. 푸이는 1964년 제4회 정치협상위원(政治協商委員)이 되어 만주족 대표로 전국민족업무좌담회에 참석했다.

 

   
푸이는 중국정부의  사상개조 학습을 통해 스스로 양말의 구멍을 기우는 평민으로 돌아갔다.위만황궁에 있는 밀납인형. ⓒ하성봉
 

푸이는 56살때인 1962년 5월 1일 노동절 전날 리수셴(李淑賢,당시 37살)과 결혼을 하게 된다. 리수셴은 베이징관상의원(關廂醫院)의 간호사로 둘은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연인으로 발전했고 인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리수셴은 1997년 7월 병에 걸려 사망했으며 당시 72살이었다.

 

   
푸이의 마지막 5번째 부인인 리수셴((李淑賢)은 간호사 출신으로 푸이의 임종을 지켰다
 

푸이는 1967년 10월 17일 베이징 인민의원에서 신장암 치료를 받다가 61살로 병사했다. 당시 문화대혁명 기간이어서 사망뒤 어떠한 추도회도 없었다.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1980년 5월 29일 푸이 등 3명의 정협위원들을 위한 추도회를 개최했다. 그의 화장한 유골은 중국의 국립묘지인 바바오산(八寶山)에 묻혀야 하지만 친척들이 원해 청나라 황제들이 묻힌 허베이성(河北省)의 칭시링(淸西陵)으로 옮겨갔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푸이를 두고 “우리는 마지막 황제를 개조했다. 이것은 세계에서 기적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