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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공산당 창건 90주년, 마오를 다시 말한다(2) - 현이섭

by Wood-Stock 2012.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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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서열 2위 린뱌오, 문화대혁명·덩샤오핑 축출 본격화

 

 

중공중앙 8기11중전회는 1966년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통칭 16조)’을 통과시켰다. ‘결정’은 “우리들의 당면한 목적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타도하고, 자산계급의 반동학술 ‘권위’를 비판하고, 자산계급과 모든 착취계급의 의식형태를 비판하고, 교육을 개혁하고, 문예를 개혁하고, 모든 사회주의 경제기초에 부적합한 상층구조를 개혁해 사회주의 제도의 공고와 발전에 이롭게 한다”고 밝혔다.

 

 

‘결정’은 또 “조반 청년학생들에게 지지와 긍정을 표시한다. 광대한 공농병(工農兵)과 혁명지식분자, 혁명 간부가 문화대혁명의 주력군이다. 대량의 이름 모를 혁명 청소년들이 용감한 맹장이 되었고, 그들의 혁명의 대방향은 정확했다. 이것이 무산자계급 문화대혁명의 주류다”라고 천명했다. ‘결정’은 특히 “운동의 중점은 당 내부의 자본주의 길로 가는 당권파를 정돈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주자파(走資派)’는 ‘천형(天刑)’으로 낙인이 찍혔다. ‘주자파’란 용어가 중국 전역을 떠돌면서 지나가는 강아지도 ‘주자파’를 짖어댈 정도가 됐다. 위로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중공중앙 총서기에서부터 아래로는 농촌생산대장, 상점점원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이 ‘주자파’라고 규탄하면 고깔모자를 써야했고, 비판대에 올라야하는 난세로 급속히 빠져들었다.

 

 

마오는 회의기간인 8월 10일 오후 7시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고 중앙 접대장소로 나아가 홍위병과 혁명 군중들을 만났다. 마오는 이들에게 “당신들은 국가대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철저하게 진행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마오의 이런 선동적 격려는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갔다. (주석 433)

 

 

회의 마지막 날인 8월 12일 중앙전회는 중앙영도기구를 개편해 중앙정치국 위원 6명, 후보위원 3명 등 11명의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을 선출했다. 11명의 서열순위는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타오주, 천보다, 덩샤오핑, 캉성, 류샤오치, 주더, 리푸춘, 천윈 순이었다. 린뱌오가 원래의 서열순위 6위에서 일약 마오 다음의 2위로 뛰어올라 후계자가 되었다. 후계자로 2위였던 류샤오치는 8위로 떨어졌다.

 

 

회의는 중앙 부주석을 새로 뽑지 않았다가 회의가 끝난 얼마 뒤 린뱌오를 유일한 중공중앙 부주석에 임명했다.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은 다시 부주석이 되지 못했다. 애초 중앙정치국 상임위원 서열은 마오가 여전히 덩샤오핑에 대한 호감과 신임을 갖고 있어 덩샤오핑의 서열이 저우언라이의 다음인 4위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서열 인사명단을 본 장칭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장칭은 겨우 3개월 전 ‘중앙문혁 소조’의 부조장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인사에 관여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5. 16 통지’에 따라 ‘중앙문혁 소조’ 설립 때 ‘문혁소조’를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아래에 두도록 해 참관인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장칭은 큰 권력이 부여되지 않았지만 마오 부인의 특수한 관계로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인사서열에 관여한 것이다. 장칭은 “덩샤오핑은 과거 서열 7위였다.

 

 

린뱌오

 

 

류샤오치와 함께 공작조를 파견하는 과오를 범했다. 그런데 어떻게 4위로 올라갈 수 있는가?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고 강탈을 부렸다. 공식 직함이 ‘중앙문혁소조’ 부조장에 불과한 장칭의 이런 인사개입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해괴한 일이었다.

 

 

장칭은 중공8기11중전회에서 후계자로 선정된 린뱌오를 찾아가 덩샤오핑에 대해 중상모략을 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후보자 명단의 서열을 고치기로 한 것이다. 애초 덩샤오핑 보다 아래 서열인 5위의 ‘문혁소조’의 조장 천보다를 덩샤오핑 앞에 배치해 덩샤오핑을 5위로 밀어냈다.

 

 

장칭은 여전히 이런 서열명단에 불만을 터뜨렸다. 장칭은 “라오푸즈(老夫子 노부자; 천보다에 대한 존칭)는 일개 서생에 불과하다. 덩샤오핑을 압박할 수 없다. 타오주가 지독하다. 타오주를 앞 서열로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 11위의 타오주가 덩샤오핑을 견제하기 위해 4위로 치고 들어오면서 덩샤오핑은 4위에서 6위로 밀려났다. 세상을 다 아는 듯해도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장칭이 타오주를 고속승진 시켰지만 장칭은 나중에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타오주를 되레 죽음으로 내 몰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장칭의 잔혹한 권력놀음에 타오주는 5개월도 채 안 돼 실각했다. 타오주는 장칭의 사주를 받은 홍위병에게 야만적 박해를 당한 뒤 세상을 등졌다.

 

 

세상인심은 조변석개다. 중앙전회는 린뱌오를 “인민해방군에 호소해 전군(全軍)이 마오쩌둥 동지의 저작을 학습하도록 하는 군중운동을 전개해 전당을 위해 빛나는 모범을 보였다”고 찬양했다. 중국공산당이 정식 문건에서 후계자로 자리매김한 린뱌오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린뱌오는 얼마 뒤 명문으로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가장 친밀한 전우이자 후계자”로 기록되게 된다. 중공중앙의 최고 영도 권력구조를 좌파 편향으로 대폭 물갈이하고, 법적으로 문화대혁명의 전국적 전개를 공식 확인한 중공8기11중전회는 12일 막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문화대혁명에 돌입했다.

 

 

뿐만 아니라 중공중앙의 공작을 1선과 2선으로 나눠 운용하던 시스템을 끝내고, 그동안 2선에 있던 마오가 1선으로 다시 복귀해 중공중앙을 이끌어 나가는 친정체제로 바꿨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정치국 상임위원으로 뽑혔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앙의 영도공작에서 퇴출돼 근신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린뱌오는 새로운 영도체제가 출범한 뒤 1차 중공중앙 정치국 상임위원회를 소집해 회의를 열었다. 린뱌오가 주재한 회의의 의제는 류샤오치에 대한 계속적인 공격이었으나 린뱌오와 장칭은 류샤오치가 실질적으로 타도된 만큼 목전의 주요 위험인물로 덩샤오핑을 겨냥하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장칭은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이 아니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으나 ‘중앙문혁소조’ 구성원들은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회의에서 비판의 창끝은 린뱌오와 장칭이 최대의 걸림돌이라고 여기고 있는 덩샤오핑을 겨누었다.

 

 

좌파 정치국원들은 조직적으로 덩샤오핑을 맹렬하게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린뱌오가 직접 출격해 덩샤오핑 문제를 ‘적대적 모순(敵我矛盾 적아모순)’이라고 규정했다. 척결해야 할 대상이란 뜻이다. 덩샤오핑은 이들의 집중포화의 비판을 받고 업무를 정지당했다. (주석 434)

 

 

434) 林彪合伙江靑成功扳倒劉鄧; 得意 ‘從小六變成了老二’ 人民網-文史頻道
433) 林彪合伙康靑成功扳倒劉鄧; 得意從小六變成了老二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平生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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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초법적 홍위병들의 행위에 마오 “그들의 열정 인정해야”

 

 

 

 

중공8기11중전회가 끝난 6일 뒤인 1966년 8월 18일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천안문) 광장에서 문화대혁명을 축하하는 군중대회가 백만 군중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이 대규모의 군중대회의 참석자들은 대부분 베이징과 전국 각지에서 올라 온 청년학생들로 톈안먼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신중국 건국 이래 일찍이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마오쩌둥은 건국이후 처음으로 초록색 군복을 입고 톈안먼 성루에 올라 6시간동안 내내 서서 홍위병들의 사열을 받았다. 신화사 통신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다. (주석 435)

 

 

“오늘 새벽 5시, 태양이 동쪽 지평선에서 막 떠오르면서 눈부신 햇살을 뿌리고 있었다. 마오 주석은 사람의 바다와 붉은 깃발(紅旗 홍기)이 숲을 이루는 톈안먼 광장을 뚫고 도착했다. 아침 일찍부터 사면팔방에서 이곳으로 모여든 혁명 군중들을 회견했다. 마오 주석은 초록색 군장을 갖춰 입었고, 주석의 군모에는 붉은 별이 번쩍번쩍 빛났다. 마오 주석은 톈안먼 앞 진수이챠오(金水橋 금수교)를 지나 곧바로 군중들의 대오 속으로 걸어갔다. 주위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굳게 악수를 하고, 손을 흔들며 광장의 혁명 군중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때 광장이 들끓어 올랐다. 사람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마오 주석을 향해 펄쩍펄쩍 뛰며 환호하고 박수를 쳤다. 많은 사람들은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환호하는 목소리로 ”마오 주석이 오셨다! 마오 주석이 우리들 사이로 오셨다!“고 외쳤다.

 

 

붉은 완장을 찬 수 만 명의 홍위병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톈안먼 성루의 동쪽에 있는 두 개의 사열대에는 홍위병의 대표들이 빽빽이 들어찼다. 사대여부중의 한 홍위병이 톈안먼 성루에 올라와 마오에게 ‘홍위병’이라 쓴 완장을 팔에 채워주었다. 마오와 이 학생 홍위병이 악수할 때 성루 위, 아래에 있던 홍위병들이 “마오 주석 만세!”를 부르며 일제히 환호했다. 흥분한 어떤 홍위병은 “마오 주석은 통솔자다, 우리들은 그의 졸병이다”라고 외쳤다. 어떤 홍위병은 “마오 주석이 우리들의 홍위병에 참가했다. 우리들을 최대로 지지하고 고무해 주었다. 마오 주석이 우리들을 후원하고 있다. 우리들은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전 10시 반. 중앙 문혁소조 조장인 천보다의 사회로 대회가 시작됐다. 린뱌오가 단상의 연단에 나와 연설했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자산계급 사상을 소멸하고 무산계급 사상을 수립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을 개조하고 사람의 사상혁명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수정주의의 뿌리를 캐내 없애버리고 사회주의 제도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리들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타도하고, 자산계급 반동권위를 타도하고, 모든 자산계급의 보황파(保皇派 옹호세력을 말함)를 타도하고, 온갖 형태의 혁명을 억압하는 행위에 반대해 모든 마귀와 요귀를 타도하자! 우리들은 모든 착취계급의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을 크게 깨부수고, 모든 사회주의 경제기초의 부적합한 상층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우리들은 인간쓰레기를 쓸어버리고 모든 걸림돌을 제거하자!”

 

 

대회가 끝난 뒤 백만여 명의 군중들은 시위대를 형성해 거리시위를 벌였다. 마오는 시위대의 사열을 받을 때 “이 운동의 규모가 대단히 크다. 확실하게 군중을 발동했다. 전국 인민들에 대한 사상혁명화는 대단히 큰 의의가 있다”고 기뻐했다. 신화사는 이날 행사를 보도하면서 8기11중전회에서 결정한 중앙 영도들의 서열순위와 관련해 류샤오치가 8위로 밀려난 사실을 보도했다. 이 내용은 중공중앙이 전회 공보에 실어 선포하기 전 이어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마오가 톈안먼 성루에서 홍위병을 접견한 ‘8월 18일 대회’는 문화대혁명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홍위병의 문화대혁명 운동이 폭풍처럼 거세게 일어나면서 순식간에 전국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홍위병들은 호호탕탕한 기세로 학교를 벗어나 거리로 진출하면서 4가지 낡은 사상(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을 타파한다는 4구(舊) 타파운동을 맹렬하게 펼쳐 ‘혁명조반(革命造反)’을 신속하게 전 사회에 확대시켰다.

 

 

대다수의 홍위병들은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정당한 ‘혁명행동’으로 여겼다. 정치적 의식이 미성숙한 홍위병들은 열정이 충만한 나머지 광적상태로 돌변해 무정부적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4구타파라는 미명아래 홍위병들은 거리로 나가 전통적인 유명 음식점들은 자산계급이 먹는 음식을 만들어 판다며 폐쇄시키는가 하면 톈안먼 앞을 동서로 관통하는 ‘창안졔(長安街 장안가)’ 거리를 마오의 혁명승리를 찬양하는 ‘둥방홍(東方紅 동방홍)’이란 이름으로 고치는 등 여기저기의 거리이름을 이데올로기적 이름으로 따다 붙였다. 심지어는 신호등의 정지신호인 빨간색은 혁명의 상징인데 정지신호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진행신호와 정지신호를 바꿔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황당한 사건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닥치는대로 파괴와 폭행, 그리고 살인을 일삼았다. 특히 이들은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의 집에 난입하여 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홍위병들은 ‘4구타파’, ‘혁명조반’의 기치아래 일반의 가택을 제멋대로 수색하고 가산을 몰수하는가 하면 ‘반동’이라는 이름아래 사람을 때려죽이는 등 법질서를 파괴하는 초법적 행위를 마구 저질렀다. 이즈음 베이징 시내에서는 ‘낙타상자(駱駝祥子)’ 등을 쓴 유명한 문인이자 지식인인 라오서(老舍 노사), 푸뢔(傅雷 부뢰) 등이 홍위병들의 야만적 행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법천지의 아수라장이었다. (주석 436)

 

 

보다 못한 인민일보는 ‘용문투, 불용무투(用文鬪, 不用武鬪)’ 제목의 사설에서 “마오쩌둥 동지는 되풀이 해 우리들에게 말했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사람의 영혼을 일깨우는 대혁명이다. 또 대혁명의 실현은 글로 투쟁하고 무력으로 투쟁해서는 안 된다”며 홍위병들의 폭력적 행위의 자제를 호소했다. 하지만 마오는 여전히 홍위병 주류의 대부분은 괜찮다는 태도를 보였다. 낡은 사상과 질서를 파괴하는 격렬한 행동은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데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문제가 생기면 잘 유도하고 나중에 다시 해결하도록 해야지, 그들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홍위병을 억압하거나 탄압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린뱌오는 8월 20일 열린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확대회의에서 홍위병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일 때 이렇게 말했다.

 

 

“베이징이 부랑자 세상이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좋은 사람이 항상 다수다. 나쁜 사람은 항상 소수다. 어떻게 부랑자 세상이 된다고 하는가? 결론적으로 우리들은 그들(홍위병)이 몇 개월 동안 난리를 피워도 간섭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견결하게 다수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나쁜 사람들은 백분의 몇 밖에 안 된다.”

 

 

홍위병의 문화대혁명 운동이 8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홍위병들의 전국적 ‘경험교류’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이징 지역의 학생들이 전국 각지로 돌아다니며 문화대혁명의 ‘불씨’를 뿌리고 다녔다. 지방의 홍위병들은 베이징으로 몰려들었다. 8월 28일에는 베이징에 온 지방의 홍위병들이 14만여 명에 달했다.

 

 

마오는 8월 31일 톈안먼 광장에서 2차로 홍위병들을 접견했다. 중공중앙은 ‘경험 대교류’에 참가하는 학생들에게 기차 삯을 면제해주고 음식이나 숙박시설 등도 현지 정부가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비용은 국가재정에서 지출하도록 국무원에 통보했다.

 

이에 따라 ‘경험 대교류’의 물결은 봇물 터지듯 흉맹한 기세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곳곳에 홍위병들이 들끓었다. 마오는 매번 보름사이로 전국에서 몰려오는 홍위병들을 접견했다. 이런 홍위병 접견은 11월 하순이 되어서야 끝났다. 마오는 8차에 걸쳐 모두 1천1백여 만 명의 홍위병을 접견했다. 연말이 되면서 홍위병들의 ‘경험 대교류’가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홍위병들의 ‘경험 대교류’는 마치 메뚜기 떼들이 누렇게 익은 벼를 습격해 낟알을 작살내고 날아간 뒤끝과 흡사했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베이징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홍위병들은 당과 정부기관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을 퍼붓고 당정 책임자들을 끌어 내 비판대회를 열거나 폭행해 정상적 업무가 마비되기 일쑤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과정에서 억울하게 눈을 감았다.

 

 

435)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爲何搞 ‘文革’;

天下大亂達到天下大治 金冲及 人民網-文史頻道
436) 李雪峰; 我所知道的 ‘文革’ 發動內幕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平生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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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문화대혁명 기간 사회 혼란 주범인 ‘개똥참모’ 캉성

 

 

 

 

1966년 7월 베이징대학에 ‘보기만 해도 놀라운 2월 병란’이란 대자보가 나붙었다. 내용은 지난 2월에 베이징 위수(衛戍)구역인 베이징대학에 군대를 주둔시켜 정변(政變)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다. ‘2월 병변(兵變)’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 후 베이징사범대학의 한 학생이 이 대자보를 본 뒤 베이징 위수구역이 런민(人民 인민)대학도 포함된다는 것을 연상해 ‘궈잉추(郭影秋 곽영추)는 누군가?’ 라는 대자보를 써 붙였다.

 

 

궈잉추는 이미 베이징시위원회 문교서기로 전임한 전 런민대학 당위원회 서기였다. 대자보는 궈잉추에게 “펑전(彭眞 팽진)이 런민대학에 군을 주둔시켜 정변을 일으키려고 음모를 꾀했는데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가?”고 썼다. 그 후 이런 천일야화 같은 ‘2월 병변’의 헛소문이 눈덩이 굴러가듯 더욱 부풀어갔다. 캉성은 이런 두 장의 대자보 소식을 듣고 린뱌오가 눈엣가시로 여기는 허룽(賀龍 하룡) 등 군의 혁명원로들을 제거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캉성은 7월 27일 밤 베이징사범대학 군중대회에서 공공연하게 “올해 2월 말에서 3월 초, 펑전의 패거리들이 정변을 획책했다. 그들 계획의 하나는 베이징대학, 런민대학에 주둔하고 있는 1개 대대 병력을 동원하려 했다. 이 사건은 아주 확실하다”고 선동했다. (주석 437)

 

 

중앙의 고위 영도자인 '중앙문혁소조' 고문이 확신을 갖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실체도 없는 '2월 병란'의 문제는 점점 더 크게 불거졌다.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덩샤오핑은 런민대학으로 달려갔다. 덩샤오핑은 자신도 이미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는 상황 이었지만 개인의 안위에 급급할 때가 아니라고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덩샤오핑은 현장에 '중앙문혁소조' 조장인 천보다 등 소조원들이 있었지만 런민대학의 전체 선생과 학생, 직원들이 참석한 비판대회에 나아가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

 

 

덩샤오핑은 “우리들은 2월 군사병변의 문제를 조사했다. 우리들은 일찍 이 일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정식으로 동지들에게 이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고 밝혔다. 덩샤오핑은 “나는 정중하게 동지들에게 말한다. 우리들의 군대는 펑전이 동원할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동원할 수 없다. 나도 동원할 수 없다. 우리들은 이 일을 사실대로 해명하니 다시 이 문제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이 일은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캉성은 음모가 백일하에 들어났지만 철가면을 뒤집어쓰고 안면을 몰수한 채 ‘2월 병변’을 사실인양 떠벌이며 악의적인 모함을 계속 퍼뜨렸다. 폭발성이 강한 헛소문은 날개를 달고 전국 도시와 시골을 뒤흔들면서 급속히 퍼져나갔다. 헛소문은 더욱 보태져 “허룽이 2월 병변을 일으키려고 총과 포, 대포를 준비했다고 하더라-”, “포가 (마오가 있는)중난하이를 겨냥했다고 하더라-”, 심지어는 “허룽이 2월 병변을 일으켰으나 미수에 그쳐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도망갔다고 하더라-”등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카더라 방송’이 횡행했다. 린뱌오는 일찍이 ‘5.18 발언’에서 ‘정변’문제를 제일 먼저 제기해 은근히 마오를 압박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키워왔었다. 마오는 장칭에 보낸 편지에서 ‘린뱌오가 정변을 거론해 일생 처음으로 본심을 어겨가며 린뱌오에게 동의했다.’, ‘나는 늘 불안을 느낀다’ 등의 느낌을 적은바 있었다.

 

 

린뱌오는 쾌재를 불렀다. 자신이 어떤 근거도 없이 제기한 ‘정변’의 실체를 캉성이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결국 캉성의 ‘2월 병변’ 날조사건은 나중에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군사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겸 국가체육위원회 주임, 10대 원수의 한 사람인 허룽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처럼 옌안 정풍운동의 ‘저승사자’ 캉성은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살생부’를 양손에 들고 호풍환우(呼風喚雨)하면서 무수한 피바람을 일으켰다.

 

 

캉성(康生 강생)은 장칭이 옌안에서 마오와 결혼할 때 장칭의 이력 등을 은폐하는 등 비호하면서 일찌감치 ‘보험’을 들었다. 마오의 부인이라는 장칭의 ‘특수한 신분’에 기대어 권력의 줄을 잡은 장칭의 사람이었다. 물가에 있는 누대에 제일 먼저 달빛이 비추듯이(近水樓臺先得月 근수루대선득월), 캉성은 장칭의 곁에 있어야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아래 견마지로를 다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신호탄이 된 ‘해서파관’의 핵심인 파직의 ‘파관(罷官)’ 아이디어를 마오에게 준 사람도 캉성이었다.

 

 

마오가 1966년 2월 8일 우한(武漢 무한)에서 펑전과 캉성으로부터 ‘2월 요강’에 관한 보고를 받을 때였다. 마오는 펑전에게 “해서파관은 펑더화이의 번안(복권)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펑전은 즉시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 그러자 마오는 “내가 말한 우한(吳晗)의 글의 핵심은 파관이라고 한 것은 캉성이 나에게 말한 것이다. 캉성의 ‘발명권’이다”라고 말했다. 캉성은 급히 “아닙니다. 저의 발명권이 아니라 마오 주석의 발명권입니다”라고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그 후 마오는 여러 차례 공개적인 장소에서 캉성의 ‘발명권’이야기를 했다. 문화대혁명의 1호 대자보도 캉성이 자신의 부인 차오이오우(曺軼歐 조일구)를 녜웬즈(聶元梓 섭원재)에게 보내 대자보를 쓰도록 사주한 캉성의 작품이었다. 캉성은 이 대자보를 마오에게 전달해 전국에 방송으로 내보낼 수 있도록 했으며, 인민일보 평론원 문장으로 실은 ‘한 장의 대자보를 환호한다’를 싣도록 막후에서 사주하는 등 문화대혁명의 확장에 동분서주했다. (주석 438)

 

 

캉성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무고(誣告)과 날조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만들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간 캉성의 수법은 독랄하고 악독하기로 유명했다. 교활하고 음흉스러운 캉성은 간교한 계책을 꾸미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캉성에게 붙여진 별칭 중의 하나가 고우터우쥔스(狗頭軍師 구두군사), 즉 사람의 등 뒤에서 온갖 사악한 계책을 꾸미는 ‘개똥참모’다.

 

 

캉성은 장칭에 빌붙어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해 린뱌오에게도 손을 뻗쳐 장칭과 더불어 ‘쌍보험’을 들어 놓았다. 캉성은 린뱌오가 개인숭배 전파로 마오의 두터운 신임을 얻자 일찍이 “류샤오치가 실각하고, 후계자로 열에서 아홉은 린뱌오”라는 확신을 가졌었다. 캉성은 “랸뱌오가 비록 교활하나 천시를 만났으니 마땅히 그에게 투자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보험을 들은 것이다. 린뱌오가 버거운 군의 혁명원로세력을 제거하려는 속내를 잽싸게 읽고 캉성이 ‘2월 병변’을 만들어 린뱌오에게 ‘상납’해 ‘보험금’을 한껏 높였다. ‘개똥 참모’ 캉성은 장칭과 린뱌오를 넘나들면서 사악한 재주를 마음껏 펼치고 있었다.

 

 

이즈음의 권력 지형은 류샤오치와 덩샤오핑 등 1선 영도그룹과 린뱌오의 군부그룹, 장칭의 ‘중앙문혁소조’그룹 등 3분된 형세를 보였다. 그러나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의 1선 그룹은 마오의 공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고 서산일락(西山一落)으로 저물고 있었다. 권력탈취의 기회를 포착한 오월동주(吳越同舟)의 린뱌오와 장칭은 힘을 합쳐 류샤오치와 덩샤오핑 등을 제거하기 위한 화력을 집중해 막바지 총공세를 폈다.

 

 

2인자의 반열에 오른 린뱌오의 측근으로는 부인인 예췬(葉群 엽군), 공군사령관 우파시옌(吳法憲 오법헌),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황융성(黃永勝 황영승), 리줘펑(李作鵬 이작붕), 치우후이줘(邱會作 구회작) 등 군부인사가 주축이었다. 이후 린뱌오와 장칭이 ‘공동의 적’으로 겨냥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축출해 밀월관계가 끝나 본격 권력투쟁에 들어가기 직전에 마오의 정치비서 출신의 이론가인 ‘중앙문혁소조’ 조장 천보다(陳伯達 진백달)가 린뱌오 집단에 가세해 화력을 증강시켰다.

 

 

이때 린뱌오는 “붓과 총(文武 문무)은 정권 탈취의 두 가지 무기이고, 정권을 공고히 하는 두 가지 무기다”라며 천보다의 ‘귀순’을 환호작약했다. ‘총’은 많은 데 ‘붓’이 적어 고민할 때였다. 장칭 집단은 ‘사악한 꾀주머니’인 ‘문혁소조’ 고문 캉성(康生 강생)을 비롯해 장춘챠오(張春橋 장춘교), 야오원웬(姚文元 요문원) 등 상하이파와 왕리(王力 왕력), 관펑(關鋒 관봉), 치번위(戚本禹 척본우) 등 ‘문혁소조’파가 주축을 이뤘다. 이밖에 10대 원수 등 군부 혁명원로들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우려를 보이고 있었다.

 

 

10대 원수로는 주더(朱德 주덕)를 비롯한 류보청(劉伯承 유백승), 정치국원인 허룽, 천이(陳毅 진의), 군사위 부주석이자 정치국원인 쉬샹쳰(徐向前 서향전), 녜룽전(聶榮臻 섭영진), 예졘잉(葉劍英 엽검영) 등이 있었다. 또 탄쩐린(譚震林 담진림), 위추리(余秋里 여추리), 부총리인 리셴녠(李先念 이선념) 등도 이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437) 野心家康生如何用陰謀敲開權力之門 頤保孜 人民網-文史頻道
438) 野心家康生如何用陰謀敲開權力之門? 頤保孜 人民網-文史頻道, 揭秘; 林彪與江靑從合伙到分裂(的全過程 從‘童懷周’ 到審江靑‘ 汪文風 著 當代中國出版社出版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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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잔혹한 문화대혁명, 인간 존재조차도 황폐화시켜

 

 

 

 

그동안 이런 권력의 역학관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상호간의 견제로 어느 정도 평형을 유지했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생판 달랐다. 마오의 1인 통치체제에서 개인숭배로 마오를 떠받들며 세력을 키운 린뱌오와 장칭, 두 쌍두마차의 일방적 권력행사였다. ‘개똥참모’ 캉성이 이들의 ‘군사(軍師)’ 노릇을 톡톡히 했다. 캉성은 류샤오치가 실각하자마자 곧바로 장칭과 짜고 류샤오치를 ‘확인사살’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캉성은 먼저 톈진의 난카이(南開 남개)대학의 홍위병들로 ‘배신자 체포 전투대’를 구성해 국무원 부총리인 보이보(博一波 박일파)를 비롯해 쑹즈원(宋子文 송자문), 류란타오(劉瀾濤 유란도), 양셴전(楊獻珍 양헌진) 등 중공당의 고위간부 61명을 ‘61인 반역자집단’으로 몰아 이들 연고지의 홍위병들과 연대해 잡아들여 비판하고 박해를 가했다. 이 또한 문제가 되지 않는 사건이었다. 보이보 등 61명의 중공당 고위 간부들은 장제스의 국민당 때인 1931년부터 1936년 사이에 베이징의 차오란즈(草嵐子 초람자) 감옥에 갇혀있었다. (주석 439)

 

 

당시 북방국(北方局 북방국) 책임자인 류샤오치는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 옌안의 당중앙의 승인을 받아 61명이 허위 전향서를 쓰고 석방할 수 있도록 공작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이 2차례에 걸쳐 거부하자 류샤오치는 이런 내용을 감옥에 있는 이들에게 비밀리에 연락해 중앙의 뜻을 전하고 설득했다. 61명은 그때서야 허위 전향서를 쓰고 석방됐다. 1943년 보이보는 마오에게 자신들을 감옥에서 구출한 사건을 보고하자 마오는 “이 사건을 알고 있다. 중앙이 완전 책임을 졌다”고 말한바 있었다.

 

 

마오는 또 이들 61명의 감옥에서의 투쟁을 칭찬하기도 했다. 캉성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류샤오치가 ‘내부 간첩’, ‘반역자’, ‘반역 수괴’라며 홍위병을 선동해 들쑤셔 놓은 것이다. 61명의 당 고위간부들은 모두 숙청됐다. 캉성의 류샤오치에게 딱지를 붙인 ‘반역 수괴’ 죄명은 류샤오치가 카이펑(開封)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캉성은 인민해방군의 ‘아버지’로 덕망이 높은 군의 혁명원로인 주더(朱德 주덕)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중앙문혁 소조’ 고문인 캉성은 “주더는 허울뿐인 총사령관이다”라며 당 내외 인사들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다른 ‘문혁’ 소조원들도 “주더는 악독한 총사령관이다”, “야심이 커 영수가 되려고 한다”, “늙은 기회주의자” 등등 악선전을 토해냈다.

 

 

1966년 8월 중공8기11중전회에서 린뱌오의 오른팔 광저우군구 사령관 황융성(黃永勝 황영승) 등이 주더 공격의 신호탄을 쏘았다. 린뱌오와 장칭의 사주를 받은 ‘문혁’ 소조원인 치번위(戚本禹 척본위) 등도 “주더 타도”를 외치며 공격을 퍼부었다. 주더는 1차 중앙회의 때 “문혁 중에 생산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공농업 생산을 대폭 증대해야 한다-현재 군중들이 일어났다. 나는 두렵다-재앙이 될까봐 두렵다. 특히 생산에서의 재앙이 두렵다”고 말했다.

 

 

얼마 뒤 ‘문혁’ 소조원 치번위가 주더를 타도하자는 대자보를 베이징 거리의 벽에 붙였다. 대자보는 다양하게 모함하는 자극적 용어로 도배했다. 주더에게 ‘대군벌’, ‘대야심가’, ‘악독한 사령관’이란 모자를 씌웠다. 심지어는 주더를 “중난하이에서 ㅤㅉㅗㅈ아내자”, “호되게 비판해 다시는 나타나게 하지말자”고 선동했다. 주더는 자신이 공개집회에서 비판대상이란 소식을 듣고 마오를 찾아갔다. 마오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 국민당은 ‘주더를 죽여 마오를 제거’하려 했다. 현재 그들은 당신을 나쁜 총사령관이라고 하고 있다. ‘주마오주마오(朱毛朱毛 주모주모; 주더와 마오)의 사령관이 나쁘다면, 정치위원인 나, 마오는 좋은가? 주더는 비판할 수 없다. 그는 좋은 사령관이다”고 말했다. 마오의 이말 한 마디로 조반파들은 주더를 잡으러 왔다 헛걸음질을 해야 했다. (주석 440)

 

 

린뱌오는 1965년 12월 상하이에서 열린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주더를 마르크스를 빙자해 마오쩌둥을 반대한다고 공격했다. 캉성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캉성은 “린쫑(린뱌오 존칭)이 제기한 마오쩌둥 사상은 최고의 가장 살아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당대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최고봉이라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바로 마오쩌둥 사상을 반대하는 것을 뜻한다. 이 방면에서 펑전(彭眞)등과 마찬가지다”라고 주더를 핍박했다. 주더는 “마오 주석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마오 주석의 책도 읽고, 마르크스-레닌의 책도 읽는다.-”라고 했다. 캉성은 “당신은 린쫑의 이 발언을 학습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조직상으로는 당에 입당했지만 사상적으로는 입당하지 못했다. 여전히 당외 인사다”라고 모욕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주더를 “당내의 가장 위험한 인물”, “당내의 시한폭탄” 등으로 주더를 매도했다.

 

 

류샤오치 주재로 1966년 5월 2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려 참석자들이 주더에 대해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류샤오치가 먼저 펑더화이, 뤄루이칭, 루딩이, 양상쿤 반당집단 처리문제와 관련해 주더의 소극적 자세에 대한 자아비판을 요구했다.

주더: 나는 과거의 잘못을 이미 2차례에 걸쳐 자아비판을 했다. 첫 번째는 ‘가오강-라오수스’ 문제가 발생한 뒤 회의에서 자아비판을 했다. 두 번째는 펑더화이 문제가 발생한 뒤 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자아비판을 했다.

린뱌오: 지난 해 뤄루이칭 문제가 발생한 이후 상하이 회의에서 그는(주더를 가리킴) 마오쩌둥 사상이 세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최고봉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최고봉은 아직도 발전하는가? 대략 최고봉은 마오 주석이 아니라 당신, 주더 스스로를 말한다. 혹자는 (주더를) 흐루시초프라고 말한다.

천이(陳毅 진의): 주더, 내가 당신에게 물어본다. 정변을 하려고 하는가?
주더: 정변을 할 역량도 없고, 담량도 없다.
천이: 내가 보기에 당신은 황제가 되려고 한다(黃抱加身 황포가신), 황제. 당신은 흐루시초프를 크게 칭찬했다. 당신의 야심이 대단히 크다.

우란푸(烏蘭夫 오란부): 대단히 기괴한 것은 그가(주더를 가리킴) 사람이 관 뚜껑을 닫으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반대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수정주의다. 그는(주더) 우리들과 소련은 잘 지내야 하고, 우리들을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보이보(博一波 박일파): 주라오쫑(주더에 대한 존칭)은 늘 난(蘭) 이야기를 한다. 그는(주더) 자고이래로 정치적으로 뜻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난 을 키운다고 말했다.

주더: 내가 야심이 있는 게 아니냐고 말들을 하고 있다. 나는 80살이다. 언덕을 오를 때도 사람들이 이끌어줘야 한다. 길을 걷는 것도 어렵다. 그런데 일을 도모한다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더욱이 내가 황제가 되려고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나는 우리들의 영도부에 대해 늘 아끼는 마음을 갖고 있다. (나는) 항상 영도부가 영원히 지지를 받아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저우언라이: 몇 십 년 역사에서 주더 동지가 장궈타오(張國燾 장국도)와 투쟁을 했을 때 전반부는 류보청(劉伯承 유백승) 동지의 추동(推動)에 공이 돌아가야 한다. 만약 류보청 동지가 그곳에 없었더라면 총수자리를 당신이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후반부는 허룽(賀龍 하룡) 동지, (任 임)비스(弼時 필시) 동지, 관샹잉(關向應 관향응) 동지의 공동 추동이 있어 북상할 수 있었다. 만약에 이런 것들이 없었더라면 당신은 허시(河西 하서)에서 미끄러졌을 것이다. 해방이후 그렇게 많았다. 마오 주석은 늘 당신이 가오, 라오, 펑, 황(가오강, 라오수스, 펑더화이, 황커청)의 사건에 모두 발을 담그고 있다고 말했다. 당신이 도처에 의견을 발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우리들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하나의 시한폭탄이다. 마오 주석도 걱정한다. 당신은 도처에서 함부로 이야기 한다. 당신이 담화하거나 원고를 쓸 때는 우리들과 상의해야 한다. 당신이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신임을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덩샤오핑이 중앙의 펑전, 뤄루이칭, 루딩이, 양상쿤 등에 대한 (반당집단 사건)처리를 회의 참석자들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고 선포했다.

 

 

이 대화는 1966년 5월 23일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 문건에 기록된 내용이다. 중공중앙 당안관(黨案館) ‘19660523’ 번호의 회의기록에 담겨있다. 이런 주더에 대한 비판은 마오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 마오는 군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민해방군의 ‘대부’ 주더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사전에 방어하기 위한 조처였다. 주더를 무차별 공격하는 회의 참석자들의 행태를 보면 인생과 권력무상을 느끼게 한다.

 

 

가관(可觀)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너무나 비정한 처사였다. 그들은 수 십 년 동안 ‘혁명’을 위해 생사를 넘나든 선후배 전우고, 동지였다. 동지는 간데없고 ‘마오의 개인숭배 깃발’만 나부끼는 셈이었다. 주더는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가 억울하게 반당집단으로 처단되는 것을 보며 “우리가 언제 한 솥 밥을 먹었던 동지라 할 수 있겠는가?”라며 절망한 적이 있었다. 인성(人性) 상실의 시대, 잔혹무비한 문화대혁명은 인간존재를 부정하고 말살해 인간을 황폐화시키고 있었다.

 

 

실제적으로 주더가 문화대혁명이 발동되자 가장 우려했던 생산성 저하에 따른 재앙은 불행하게도 적중했다.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이른바 ‘16조(條)’는 문화대혁명은 사회생산력 발전의 강대한 추동력이라고 선언한바 있다. 이런 선언은 완전 허구였다. 문화대혁명이 중국 경제에 미친 부작용에 대해 관계 전문가들은 중국 경제발전의 20년 후퇴를 기정사실화할 정도로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경제전문가들은 문화대혁명의 최소한의 낭비 손실액을 인민폐로 5천억 위안으로 추산한다. 1958년의 대약진 실패 손실액 1천 2백억 위안을 합쳐 마오의 경제정책 실패로 인한 국부(國富) 손실액을 총 6천 2백억 위안으로 추계한다. 이 액수는 중국 정부가 건국 후 30년 동안 기반시설에 투자한 총액보다도 많다고 한다. 경제전문가들은 경제상의 손실도 손실이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잃어버린 10년 세월의 계산할 수 없는 가치가 중국의 발전을 후퇴시켰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 기간 세계경제가 비교적 발전한 시기로 많은 나라들이 전쟁의 상처를 걷어내고 경제도약을 이루면서 새로운 기술혁명의 시대를 열어나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되레 문화대혁명으로 경제발전의 호기를 놓치고 사회와 경제파괴의 야만의 시대로 퇴보해 낙후를 면치 못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주석 441)

어쨌거나 주더는 문화대혁명이 계속되는 동안 많은 괴롭힘을 당했다. 심지어는 ‘국가전복을 기도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황당한 사건에도 휘말렸다. 국가원로인 노 혁명가 주더는 어느 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새벽에 톈안먼 주변에 나붙은 자신에 대한 대자보와 상황을 살피러 나갔다가 중난하이에 있는 집으로 귀가할 때였다. ‘문혁’에 회의적인 주더는 집으로 가는 길에 나라 걱정에 골똘한 나머지 머리를 숙이고 걷다가 자신도 모르게 마오의 집 쪽으로 걸어갔다. 때마침 마오가 산책을 나왔다가 주더를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마오의 집으로 들어간 주더는 망설이다가 마오에게 문혁의 부작용 등을 이야기 했다. 일순간 마오의 얼굴이 굳어지고 두 사람의 대화도 헛바퀴를 돌았다. 마오는 태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놓은 뒤 피울 생각을 하지 않아 생담배 타는 냄새만 응접실에 가득했다. 주더는 아차 싶어 했다. ‘주마오, 주마오(주더와 마오)’라 할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마오가 이야기를 하다 마음에 안 들면 태우던 담배를 재떨이 올려놓고 생담배를 태운다는 습관을 뒤늦게 기억해 낸 것이다. 주더는 하릴없이 자리를 털고 마오의 집을 나왔다고 한다.

 

 

439) 劉少奇如何成 ‘叛徒’之首 人民網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440) 毛澤東‘文革’開路; 授意重重敲打老帥朱德 朱和平 ‘黨史博覽’ 人民

441) ‘文革’ 是一場空前大內亂; 必須徹底否定! 金春明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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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73번째 생일에 마오 “전국적 계급투쟁” 선포

 

 

 

 

1966101일 신중국 건국 17주년 기념식이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백만 명의 군중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린뱌오는 경축대회사에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마오 주석을 대표로 하는 무산계급 혁명노선은 혁명노선에 반대하는 자산계급과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단지 한 줌밖에 안 되는 그들은 인민을 이탈했고, 인민에 반대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반대하고 있다. 그들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다음날 인민일보는 홍기(紅旗)’ 사설을 실어 자산계급의 반동노선을 강력 비판했다. (주석 442)

 

 

마오 주석이 직접 주재하여 만든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 16조는 두 개 노선투쟁의 산물이며, 마오 주석을 대표로하는 무산계급 혁명노선은 자산계급 반동노선에 대한 승리의 산물이다.”

 

그러나 두 개 노선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떤 지방, 어떤 기관에서는 두 개 노선의 투쟁이 여전히 아주 격렬하고, 복잡하게 벌어지고 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새로운 형식으로 군중들을 속이며 ‘16에 대항하고 있다. 완고하게 자산계급의 반동노선을 견지하며 군중과 군중의 투쟁을 선동하면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만약 과거의 잘못된 노선을 계속한다면 되풀이 해 군중들을 억압하는 잘못을 저지르며, 계속적으로 학생과 학생간의 투쟁을 도발해 과거 타격을 입은 혁명 군중을 해방시킬 수 없다.-자산계급의 반동노선의 비판은 문화혁명의 16조 집행을 관철하는 관건이다. 여기서 절충주의는 채택할 수 없다.”

 

 

사설은 자산계급의 반동노선이 군중을 억압하고 일부 지역과 기관에서는 여전히 정부에서 파견한 공작조와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홍위병간의 충돌도 빚어지는 등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사설의 핵심은 군중 억압에 방점을 찍어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격한 행동이나 불법적인 폭력행위 등을 막는 것은 군중을 억압하는 행위로 막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당과 정부기관에게는 방치를, 조반파(造反派)들에게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더욱 혼란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한 줌도 되지 않는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 이른바 주자파(走資派) 우두머리로 낙인이 찍힌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당내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1023일 열린 중앙정치국 전체회의에서 공작조 파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자아비판을 했다. 이들은 자아비판 원고를 먼저 마오에게 보냈다. 마오는 이들의 자아비판을 본 뒤 소감을 적어 보냈다. 마오는 “()샤오치 동지, 기본적으로 잘 썼다. 대단히 엄숙하고, 특히 후반부가 아주 좋다. 초안을 인쇄해 정치국, 서기국, 공작조(영도간부), 베이징시위위원회, 중앙문혁 소조 각 동지에 돌려 토론해 의견을 개진할 것을 건의한다. 수확이 있으면 고치는 것을 참작해 다시 알려 주겠다고 밝혔다. 마오는 덩샤오핑에 보낸 글에서 “()샤오핑 동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9페이지 첫 번째 줄 보과지신(補過之新)’이후에 적극적으로 분발한다는 말을 몇 자 추가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자신의 적극적인 노력과 동지들의 적극적인 도움아래, 나는 잘못을 바르게 고칠 수 있을 것을 믿는다. 동지들이 시간을 주면 나는 일어설 수 있다. 반평생 혁명을 해오다 넘어졌다. 한 번 실패한 뒤 다시 일어서지 못하겠는가? 또 제목의 초보(初步)‘ 2자는 빼버리는 게 좋다고 친절하게(?) 자아비판의 내용을 수정, 보완할 것을 요구했다.

 

 

문화대혁명의 거대한 물결이 이제 농공업과 교통, 재무(財貿), 인민들의 일상생활 등 경제 분야까지도 덮쳤다. 초조해진 저우언라이는 경제 보좌관인 국무원내 유명 경제학자인 위추리(余秋里 여추리), 구무(谷牧 곡목)에게 경제공작에 총력을 기울여 난국을 돌파해 나갈 것을 당부했다.

 

 

당신들은 경제공작이 파탄나지 않도록 나를 도와야 한다. 경제공작이 흔들리지 않으면 국면은 유지해 갈 수 있다. 경제기초가 한번 흔들리면 국면은 수습할 방법이 없다. 때문에 경제공작을 반드시 바짝 챙겨 생산이 절대로 정지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생산이 정지되면 국가가 어떻게 하나? 밭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식량을 먹을 수 없다. 인민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나? 또 무슨 혁명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복잡하게 상황이 악화되고 있던 1110일 중국 최대의 공업도시 상하이(上海 상해)에서 생각치도 못한 큰 사건이 발생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전국을 진동시킨 안팅(安亭 안정)사건이었다.

 

 

11월 초, 상하이 국영방직공장(國棉 국면) 17() 조반파 우두머리 왕홍원(王洪文 왕홍문)을 영도로 한 상하이시 일부 공장의 군중조직이 결탁해 상하이 노동혁명 조반파 총사령부(약칭 工總司 공총사)’ 결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공 상하이시위원회는 규정에 어긋난다며 승인을 하지 않고 군중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했다. 왕홍원은 혁명조반을 억압하고 자산계급의 반동노선이 노동자를 박해하는 행위라며 강력 비난했다. 왕홍원은 1110일 새벽에 2천여 명의 노동자를 이끌고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간다며 상하이 기차역 북쪽 역에서 강제로 열차를 탔다. 이 기차가 베이징으로 향하던 중 철로국의 지시에 따라 안팅(安亭 안정)역에서 정차했다. 왕홍원은 정오께 노동자들을 선동해 철로에 누워 기차운행을 전면 저지해 31시간 동안 기차가 운행하지 못했다.

 

왕홍원 등은 공총사는 혁명의 합법적 조직이라며 상하이시위원회가 승인해 줄 것을 거듭 요구하며 투쟁을 벌였다. 당시 31살의 왕홍원은 나중에 마오의 3번 째 후계자가 되는 인물이었다. 1935년 지린성(吉林省 길림성) 창춘(長春 장춘)시 교외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왕홍원은 가난한데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해 소학교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어린 머슴으로 소와 돼지를 기르다 16살 때 군에 들어가 항미원조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66개월 동안 군에 있을 때 공산당에 입당했다. 왕홍원은 군대를 제대한 뒤 1956년에 상하이 방직공장(國棉 국면) 17() 정비공으로 들어갔다. 1964년 보위과(保衛科) 간사를 맡고 있으면서 공총사를 조직한 것이다. (주석 443)

 

 

저우언라이는 중앙 상임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어 천보다에게 상위부서인 화둥국(華東局)과 상하이시위원회에 전화를 걸어 공총사에 양보해 타협하지 않도록 조처하고 노동자들을 해산시키도록 지시했다. 중앙은 또 상하이시위원회 서기이기도 한 문혁소조 부조장 장춘챠오(張春橋 장춘교)를 상하이로 급파했다. 상하이에 온 장춘챠오는 중앙의 방침과는 달리 화둥국과 상하이시위원회와 상의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공총사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장춘챠오는 상하이 노동자들이 일어났다. 이것은 좋은 일이며, 중앙이 바라는 바다. 상하이 노동자 혁명조반 총사령부는 존재한다고 밝혔다. 장춘챠오는 공총사의 요구에 서명을 했다. 장춘챠오의 이런 행위는 곧바로 한 패거리인 중앙문혁소조의 지지를 받았다. (주석 444)

 

 

 

문화혁명 당시 텐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레드북(red book, 마오쩌둥 어록집)을 흔들며 마오를 숭배하는 홍위병들. ©SOH희망지성국제방송

 

 

 

마오는 14일 오후 댜오위타이(釣魚臺 조어대)에서 열린 부분 상임위원과 문혁소조로 이뤄진 회의에서 정부방침과는 달리 생각을 바꿔 장춘챠오의 해결방안을 인정했다. 마오가 장춘챠오를 지지한 이면에는 마오의 노림수가 깔려있었다. 마오는 사회주의 제도를 공고히 하고 자본주의의 부활을 막기 위해 문화교육 부문만 아니라 당정(黨政)기관에서의 문화대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학교 홍위병운동이 수개 월 동안 벌어지고 있지만 마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데다 홍위병 내부가 분열해 서로 싸우는 등 운동의 열기가 식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주력군을 노동자 대오로 바꿔 혁명조반운동을 계속 펼쳐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상황판단을 한 것이다. 노동자들의 문화대혁명의 참여는 생산성과 맞물려 곧바로 경제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주지만 마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오는 122673살의 생일을 맞아 중난하이 수영장 연회장에서 저우언라이 등 국무원 관계자와 장칭 등 문혁 소조원들과 만찬을 했다. 정부쪽에서 타오주, 리푸춘, 문혁쪽은 천보다, 장춘챠오, 왕리(王力), 관펑(關鋒 관봉), 치번위, 야오원웬 등이 참석했다. 마오는 이날 마치 회의를 하는 것처럼 긴 발언을 했다. 왕리는 마오의 이날 발언을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445)

 

 

사회주의 혁명발전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소련은 복벽(수정자본주의 부활)했다. 10월 혁명의 발상지가 아니다. 소련의 교훈은 무산자계급이 정권을 탈취한 이후 정권을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자본주의 복벽(復辟)을 막느냐 못 막느냐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됐다. 문제는 당 내부에서 나온다. 계급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자산계급, 특히 소자산계급의 당내 대리인들과의 전면적인 대결이다.”

 

중국 현대사상 혁명운동은 모두 학생들이 시작해 노동자, 농민, 혁명지식분자들로 발전해 이들과 결합함으로써 성과를 얻었다. 이것은 객관적인 규율이다. 5.4운동이 그랬고, 문화대혁명도 이렇게 해야 한다.”

 

 

마오는 술잔을 높이 들고 참석자들과 함께 전국에서 전면적인 계급투쟁을 벌이자!”라면서 축배를 들었다. 문화대혁명의 새로운 단계, 즉 전면적인 계급투쟁을 마오는 혼자서 결정하고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67년의 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날 인민일보와 홍치(紅旗 홍기) 잡지가 공동으로 발표한 무산자계급 문화대혁명을 철저하게 진행하자는 제목의 새해 사설이 심상치 않은 한 해를 예고했다. 두 언론매체는 중공중앙의 두 개 주요언론으로 첫 연합해 실은 사설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끌었다.

 

 

“1967년은 전국에서 전면적으로 계급투쟁을 벌이는 1년이다. 1967년은 무산자계급과 기타 혁명군중과 연합해 당내에 한 줌도 안 되는 자본주의의 길을 걸어가는 당권파와 사회상의 마귀, 요귀(牛鬼蛇神)에 대해 총공격을 전개하는 1년이다. 1967년은 더욱 더 심도 깊게 자산계급 반동노선을 비판하고, 그의 영향을 쓸어버리는 1년이다. 1967년은 1(一鬪), 2(二批), 3(三改)로 결정적 승리의 1년을 쟁취하자.”

 

 

이런 내용의 사설은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새해부터 살벌한 팽팽한 긴장감이 중국대륙을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442) 毛澤東傳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43) 毛澤東傳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選過三個接班人, 最後一個爲何是沒資歷的王洪文? 舒 雲 黨史博覽人民網

444) 毛澤東傳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45) 毛澤東傳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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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안팅 사건’ 계기… 문혁, 노동자들까지 가세

 

 

 

 

문화대혁명의 새로운 불길은 중국 최대의 상공업도시 상하이에서 치솟기 시작했다. ‘안팅(安亭 안정)사건’ 이후 ‘중앙 문화혁명소조’의 지원을 받아 합법화한 조직, 즉 왕홍원을 우두머리로 한 ‘상하이 노동자혁명 조반 총사령부(공총사)’가 상하이시위원회를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공총사(工總司)는 상하이지역 노동자 조직의 연합체로 조반파의 총본산이었다. ‘공총사’는 상하이 홍위병 혁명위원회가 1966년 12월 초 상하이시위원회 기관지 ‘졔팡르바오(解放日報 해방일보)’를 습격하자 이에 가세해 신문사 탈취공격을 벌였다. 상하이시위원회는 산하의 노동자 조직인 ‘상하이 노동자 적위대(赤衛隊)’를 동원해 방어에 나서 두 세력은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12월 30일 새벽 왕홍원이 동원한 10만 명의 ‘공총사’와 2만여 명의 적위대가 무력충돌을 벌였다. 오전 6시께 까지 치열한 난타전을 벌인 끝에 수적으로 압도적 우세를 보인 ‘공총사’가 승리를 거뒀다. (주석 446)


상하이시위원회는 조반파의 공격으로 영도력을 상실하고 권력을 탈취 당했다. 상하이의 당정기관이 조반파의 수중에 넘어간 것이다. 마오는 ‘중앙 문혁 소조’ 조사원 자격으로 상하이시위원회 서기를 겸하고 있는 ‘중앙 문혁소조’ 부조장 장춘챠오(張春橋 장춘교)와 조원 야오원웬(姚文元 요문원)을 상하이로 급파했다. 야오원웬은 상하이에 있을 때 해방일보 편집위원 겸 문예주임을 맡은바 있었다. 장춘챠오와 야오원웬은 1967년 1월 4일 상하시위원회가 발간하는 ‘원후이바오(文滙報 문회보)’를 조반파들에게 넘기고, 5일에는 해방일보를 조반파들이 접수해 관리하도록 선포했다.

 

 

장춘챠오는 이날 ‘공총사’가 소집한 회의에서 “기본적인 문제는 영도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들을 적발해 타도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총사’ 등 조반파들은 6일 상하이시 인민광장에서 ‘천페이시옌(陳丕顯 진비현)과 차오훠추(曺獲秋 조획추)를 우두머리로 하는 상하이시위원회 철저타도’ 대회를 열었다. 조반파들은 상하이시를 관할하는 중앙 화둥국 서기 천페이시옌과 상하이시위원회 서기 겸 시장 차오훠추 등 상하이시와 화둥국 책임자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투쟁을 벌였다.

 

 

‘공총사’ 등 조반파들은 상하이시위원회의 모든 당정업무를 장악했다. 사람들은 이런 정부기관 권력탈취 사건을 ‘1월 폭풍’이라고 불렀다. 차오훠추 등 당 간부들은 조반파에 끌려나와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상하이시의 실질적인 권력은 장춘챠오와 야오원웬의 수중에 떨어졌다.

 

 

상하이발 ‘1월 폭풍’으로 문화대혁명(문혁)은 전국적으로 권력탈취가 본격화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마오는 1월 8일 “이것은 하나의 대혁명이다.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엎어버리는 대혁명이다.

 

 

이 대혁명은 모든 화둥지역, 전국의 각 성시(省市)의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대한 발전이며 반드시 거대한 추동구실을 할 것이다”라고 큰 힘을 실어줬다. 마오는 “상하이 혁명역량의 연합은 전국에 희망을 주었다. 혁명은 먼저 여론을 조성해야 한다. 두 신문의 권력탈취는 전국적인 문제로 우리들은 그들 조반을 지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오는 ‘중앙 문혁소조’ 조장인 천보다에게 중앙과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의 공동명의로 상하이 각 혁명조반 단체에 축하전보를 치고, 그들의 방침과 행동이 정확했고, 전국의 당, 정, 군, 민에게 상하이의 경험을 배워 모두가 함께 궐기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인민일보는 1월 12일 마오의 지시에 따라 중공중앙,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중앙 문혁소조가 공동명의로 상하이 ‘공총사’ 등 32개 조반파 단체에 보내는 축하전보의 전문(全文)을 실었다. 축하전보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주석 447)

 

 

“당신들은 무산자계급 혁명파 조직의 대연합을 실현했다. 일치단결해 혁명역량의 대연합을 이룩했고, 일치단결해 혁명역량의 핵심을 이루었다. 무산계급독재의 명운(命運)을,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명운을, 사회주의 경제의 명운을 자신들의 손에 단단히 장악했다. 당신들의 이런 일련의 혁명행동은 전국 노동자계급과 노동인민을 위해, 모든 혁명 군중을 위해 빛나는 본보기를 수립했다. 우리들은 전국의 당, 정, 군, 민간 각계에 호소하고, 전국의 노동자, 농민, 혁명학생, 혁명지식분자, 혁명 간부들에게 호소한다. 상하이시 혁명조반파의 경험을 배워 모두가 궐기해 자산계급 반동노선의 새로운 반격을 물리치자.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마오 주석을 우두머리로 하는 무산계급 혁명노선의 승리를 따라 전진하자.”

 

 

이런 축하전문은 당정군이 공식적으로 상하이 조반파의 권력탈취를 거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전국에 권력탈취를 한 ‘상하이시 혁명조반파의 경험을 배워-’ 를 호소한 것은, 실질적으로 전국 각지의 조반파가 소재지의 당정 영도기관의 권력을 탈취하라고 선동하고 고무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처럼 당정군이 독려하고 나서자 전국 각지의 조반파의 권력탈취 무장폭동이 들불처럼 번져가기 시작했다.

 

 

인민일보는 1월 25일 ‘산시(山西) 혁명노동자 조반결사 종대’ 등 25개 단체가 ‘산시 혁명조반 총지휘부’를 결성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30일에는 ‘칭다오(靑島 청도)시 혁명조반 위원회’가 결성돼 권력탈취의 ‘제1호 통고’를 선포했다고 보도했다. 2월 1일에는 ‘구이저우(貴州)성 조반파’가 탈권 투쟁에 나섰고, 2일에는 ‘헤이룽장(黑龍江 흑룡강) 조반파’가 권력탈취 투쟁을 벌이는 등 당정기관의 권력탈취 행위가 공공연하고,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그런가 하면 조반파 상호간에 무력충돌을 벌이는 등 혼란이 가중되면서 무정부상태로 빠져들었다. 무정부적 사조(思潮)가 범람해 조반파들의 파벌주의가 생겨나고 서로가 ‘핵심’, ‘정통’, ‘주류’ 등을 내세워 빈번한 무장충돌을 벌여 급기야는 전국이 내전(內戰)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이런 과정에서 당정군의 영도간부들이 ‘주자파’, ‘반역자’, ‘간첩’,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비판투쟁 대회에 끌려나와 조리돌림 등으로 박해를 당해 목숨을 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66년 12월 26일 새벽, 승용차 한 대가 중난하이(中南海 중남해; 국무원 정부청사와 주택이 있음) 서북문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시내 쪽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이 차는 시내 이곳저곳을 몇 차례 돈 뒤 추격하는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방향을 꺾어 완서우(萬壽 만수)로 신6소(新六所) 쪽 한 주택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10대 원수의 한 사람인 허룽(賀龍 하룡) 부부였다. 이들은 전날 밤 25일에 총리 저우언라이의 공작원이 안내한 댜오위타이(釣魚臺 조어대)에 도착해 한 거소에 머물다 새벽에 총리 판공실의 전화를 받고 화급히 짐을 챙겨 임시 거처인 신6소의 한 주택으로 이동한 것이다. 허룽 부부가 머물렀던 댜오위댜오에는 원래 캉성과 장칭이 있어 이들을 피하기 위해 중난하이를 빠져 나왔다. 조반파들이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자 국가체육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는 허룽에 대한 비판수위를 한층 높이자 저우언라이는 12월 24일 허룽을 만나 잠시 직을 떠나 쉴 것을 제의했다.(주석 448)

“당신은 혈압이 높다. 휴식이 필요하니 당분간 쉬는 게 좋다.”
저우언라이의 제의는 허룽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 하지만 허룽은 체육위원회 조반파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등 문화대혁명의 발동과 전국적으로 난동화하는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허룽은 이럴 때 일수록 자리를 지키며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 평생 혁명을 했다. 왜 군중을 겁내나? 나를 보존하기 위해 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공작을 해야 한다.”

저우언라이는 의구심을 갖고 있는 허룽을 진심어린 말로 설득했다.

“공작은 당신 대신 내가 잘 챙기겠다. 걱정할 필요 없다. 잠시 쉬어라. 몸을 보중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저우언라이는 체육위원회 조반파들이 허룽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공격한다는 소리를 듣고, 허룽이 직을 떠나 잠시 쉴 것을 권고한 것이다. 허룽은 저우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어 총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저우언라이는 허룽 부부에게 안전한 도피처를 마련하기 위해 25일 밤 댜오위타이로 보냈다가 캉성과 장칭이 있는 것을 알고 급히 신6소의 한 거처로 옮기도록 한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린뱌오와 장칭은 허룽 제거에 발 벗고 나섰다. 린뱌오는 허룽이 반당집단으로 처벌된 뤄루이칭(羅瑞卿 나서경)의 배후인물로 당권과 권력을 탈취하려고 한다는 음모를 꾸몄다. 장칭은 캉성이 날조한 '2월 병변'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홍위병을 부추겨 허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조반파들과 홍위병들은 허룽이 살고 있는 둥자오민샹(東交民巷 동교민항; 정부 고위관리들의 주택지구)을 점거하고 허룽 비판 투쟁대회를 계속 열고 있었다.

 

 

446)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47)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48) 周恩來與賀龍的訣訣 時政頻道 新華網
賀龍夫人薛明 ; 周恩來說他了解賀龍 比我還多 時政頻道 新華網, 不盡的思念 作者 薛 明 中央文獻出版社
林彪爲何決心整垮賀龍; 擔心底細被曝光影響奪權大業? 尹家民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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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허룽, 문혁 ‘1월 폭풍’에 세상과 마지막 영결

 

 

 

 

1967년 1월 상하이 ‘공총사’의 ‘탈권투쟁’, 이른바 ‘1월 폭풍’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지면서 당정군의 고위 영도자들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하자 저우언라이는 허룽 등 혁명원로들에 대한 보호조처에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조반파와 홍위병들은 허룽이 신6소의 주택으로 옮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곳으로 달려가 ‘적발 투쟁’ 대회를 열어 허룽을 공격했다.

 

 

허룽의 안전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저우언라이는 1월 11일 새벽에 허룽 부부를 몰래 빼돌려 자신의 거처인 중난하이 시화팅(西花廳 서화청)으로 옮겨 함께 생활을 했다. 린뱌오와 장칭은 허룽에 대한 비판의 고삐를 더욱 옥죄며 공격을 퍼부었다. 이들은 저우가 허룽을 보호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저우언라이에 대해서도 공격을 시작했다. 저우의 심리적 압박이 커져갔다. 19일 오후, 마침내 조반파와 홍위병들이 중난하이로 몰려와 담 밖에서 ‘허룽 타도’을 외쳤다.

 

 

이들은 저우언라이가 허룽을 자신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며 난동을 벌였다. 이때 마오는 허룽에 대한 태도를 바꿔 공개비판을 승인했다. 정치국 회의에서 고위 영도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공식 대화’를 갖는 절차를 밟게 되어 있었다. 정치국은 허룽과 대화할 상대로 저우언라이, 장칭, 리푸춘(李富春 이부춘)을 지명했다. 장칭은 이날 허룽과의 대화에 참석하지 않는 대신 홍위병들을 사주해 중난하이 담 밖에서 확성기를 틀어놓고 허룽 타도를 외치도록 했다. 이런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공식 심문자가 된 저우언라이가 허룽에게 물었다. (주석 449)

 

 

“린뱌오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당신이 장정 중에 그를(린뱌오) 헐뜯는 나쁜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는가?”

“나는 단지 옌안에 있을 때 어떤 사람에게 린뱌오의 역사과정을 모른다고 했을 뿐이었다.”

“린뱌오는 당신이 총참모부, 해군, 공군, 기갑부대, 통신부대 등 부대 도처에 손을 뻗쳐 마오쩌둥 사상을 선전하지 않았고, 마오 주석의 사후에 그(허룽)에 대해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허룽은 얼굴이 굳어지고, 마음이 격동했으나 꾹 참고 저우언라이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또, 당신은 홍후(洪湖 홍호) 반혁명분자 숙청 확대문제에 대해 당신과 샤시(夏曦 하희), 관샹잉(關向應 관향응) 모두 책임이 있다. 당신은 잘 생각해 보라.”

 

 

허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수십 년 동안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를 하면서 한 평생 군인으로 살았다. 공산당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해 모든 것을 당과 공산주의에 바쳤다. 식칼 두 자루를 갖고 혁명에 나서 북벌과 난창기의, 후난-후베이 서쪽 소비에트 근거지를 세웠다. 제2의 장정인 2만 리의 장정을 하면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다. 그런 극단적 어려움 속에서도 당과 함께 했다. 허룽의 눈에서는 불똥이 이글이글 타올라 몇 차례 일어나 말을 하려했으나, 저우는 손을 흔들어 제지했다. 저우언라이는 정치국의 위임을 받아 공식적 질문을 하면서도 허룽을 대하는 눈빛은 온화하고 믿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마오 주석은 아직 당신을 보호하고 있다.!”
저우언라이는 이어 허룽의 손을 꼭 잡고 진지하면서도 대단히 근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의 안전은 내가 책임을 진다. 나는 당신을 보호할 것이다. 내가 당신을 거둬야 하는 데 중난하이, 이곳은 두 파가 있어 안전하지 못하다. 주라오쫑(주더에 대한 존칭)의 집도 (홍위병들에 의해) 뒤 짐질을 당했다. 내가 조용한 곳을 물색해 놓았다. 당신은 그곳에 가서 쉬어라. 당신이 익숙하지 않겠지만 시간이 가면 괜찮아 질 것이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나에게 말하라. 당신이 줄곧 이런 환경에 적응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본다. 당신은 이런 시간을 이용해 마르크스-레닌과 마오 주석의 저작을 읽어라. 붓글씨도 쓰고, 태극권도 연마해라.”

허룽은 이런 위난지경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저우언라이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평상심을 찾았다. 허룽은 지금 집에 돌아갈 수도 없고, 아무런 힘이 없어 베이징의 큰 도시에 자신의 몸 하나 부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 허망했다. 또 눈자위가 푹 꺼지고 날로 수척해 가는 저우언라이의 모습을 보고 울컥하는 마음이 솟구쳐 올라 몇 번 이야기하려 했지만 말이 목울대로 넘어오지 않아 한 마디도 못했다. 문화대혁명의 천하대란의 천근만근의 무게가 저우언라이의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느꼈다. 허룽은 저우의 집에서 묵는 동안 일에 치인 저우언라이가 칼바람이 부는 한 겨울에 매일이다 시피 파김치가 되어 새벽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가슴이 저리다 못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허룽 부부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저우언라이가 항상 피곤에 찌들어 있었기 때문에 볼 때마다 측은한 마음뿐이었다. 시간에 쫓기면서도 저우는 틈틈이 자신을 찾아와 위로와 격려도 잊지 않았다. 저우언라이가 일부러 찾아와 식사를 할 때는 시간에 쫓기는 저우는 자신의 부인 쉐밍(薛明 설명)이 읽어주는 신문의 소식을 들으면서 식사를 할 정도였다. 저우는 린뱌오와 장칭의 혁명 원로들에 대한 독랄(毒辣)한 공격과 자신에 대한 비판공세를 막아야 하기 때문에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허룽은 이런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부담이 되는 자신이 못내 가슴이 아팠고 저우의 관심과 배려에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허룽의 심사를 눈치 챈 저우언라이가 허룽의 손을 꽉 잡고 헤어지기 아쉬운 듯 비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먼저 가 있어라. 가을이 되면 내가 데리러 가겠다. 오래지 않아 우리들은 만난다. 집안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당신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잘 조처해 놓았다. 당신은 너무 조급해 하지 말기 바라오. 양더중(楊德中 양덕중)이 당신을 호송할 거다. 밤에 떠나시게.”

 

 

저우언라이(왼쪽)와 허룽

 

 

 

 

허룽이 오열하며 저우언라이와 악수를 했다. 허룽은 눈물을 글썽이며 “총리, 당신은 우리들 2대(兩代 양대)를 가르쳤다”고 감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룽은 저우언라이가 가을이면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적이 마음이 놓이며 처연했던 마음도 서서히 풀렸다. 저우언라이와 허룽은 가을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이들 두 사람은 누구도 이 길이 40년 동안 함께 투쟁하면서 친밀한 전우여, 동지이자 친구로서의 마지막 길이 될 줄은 몰랐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인 영결(永訣)이었다. (주석 450)

 

 

저우언라이와 허룽은 1927년 8월 1일 난창기의(南昌起義 남창 기의)를 며칠 앞둔 7월 28일 저녁 무렵에 처음으로 만났다. 허룽은 당시 국민혁명군 제20군 군단장이었다. 저우이췬(周逸群 주일군)이 저우언라이를 데리고 허룽의 주둔지를 찾아와 알게 됐다. 허룽은 난창기의에 참여해 주더, 류보청 등과 함께 기의군(起義軍)을 총지휘했다. 중국은 난창기의가 일어난 날을 건군절(建軍節)로 삼고 있다. 허룽이 난창기의가 실패한 뒤 1927년 9월 초 루이진(瑞金 서금) 소비에트지구에서 공산당에 입당할 때 저우가 입당선서식에서 축하연설을 했다. 저우언라이와 허룽 등은 기의군을 이끌고 광둥(廣東 광동)으로 진출해 폭동을 일으켰으나 중과부적으로 실패해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달아났다. 허룽은 먼저 상하이에 온 저우언라이를 만났다.

 

 

국민당은 이때 허룽에게 10만 다양(大洋 대양)의 거금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에 나섰다. 중공중앙에 있던 저우언라이는 허룽의 안전을 고려해 소련 유학을 제의했으나, 허룽은 저우이췬과 함께 후난-후베이 서쪽에 소비에트 혁명근거지를 만들 뜻을 타진했다. 저우언라이의 지원을 받아 허룽은 1928년 봄에 후난-후베이 변계에 있는 상즈(桑植 상식)일대에서 홍4군을 조직했다. 허룽은 이후 홍2군단을 창설하고 제2의 2만리 장정을 거쳐 당중앙과 홍군 총사령부가 있던 옌안에 합류해 저우언라이와 해후했다. 허룽은 그 후 항일전과 국공내전인 해방전쟁, 신중국을 건국하는 등 저우와 40년을 같이 하면서 돈독한 관계를 맺어오다 문혁을 만나 헤어지게 된 것이다.

저우언라이의 시화팅(西花廳 서화청)에서 11일 동안 묵었던 허룽 부부는 1월 20일 새벽 3시께 훙치(紅旗 홍기) 승용차를 타고 양더중과 허룽의 경호원 양칭청(楊靑成 양청성)의 호위를 받으며 베이징 교외에 있는 위취안산(玉泉山 옥천산)으로 달렸다. 허룽 부부는 이곳에서 지프로 갈아타고 샹산(香山 향산) 부근의 샹비거우(象鼻子溝 상비자구)에 도착했다. 산언덕에 경호병이 지키고 있는 조그만 단층집 한 채가 있었다. 허룽 부부는 이곳에서 세상과 절연하고 지냈다. 허룽의 나이 71살이었다. 틈틈이 저우언라이가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생활필수품을 보냈다. 저우언라이가 몰래 허룽 부부를 빼돌리자 린뱌오와 장칭 등은 혈안이 되어 허룽 부부의 종적을 추적하고, 저우를 닦달하고 나섰다. 린뱌오와 장칭은 조반파와 홍위병을 사주해 여러 차례 허룽을 타도하는 ‘적발투쟁 대회(揪鬪 추투)’를 열었다. 국가체육위원회 조반파들은 저우언라이에게 ‘비판투쟁 대회(批鬪 비투)’를 열도록 압박했지만 저우는 중앙이 승인하지 않았다며 계속 거부했다.

 

 

449) 賀龍夫人薛明; 周恩來他了解賀龍 比我還多 時政頻道 新華網, ‘不盡的思念’ 作者 薛明 中央文化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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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모함에 쫓기던 허룽, 마오와 직접 만나는데…

 

 

 

 

린뱌오는 캉성이 ‘2월 병변’을 날조해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허룽을 공격하는 것과는 달리 직접 음모를 꾸며 허룽을 제거할 계략을 짰다. 린뱌오는 1966년 8월 28일 당시 공군 정치위원인 우파셴(吳法憲 오법헌)을 자신의 집 마오자완(毛家灣 모가만)으로 불렀다. 린뱌오는 우파셴에게 “허룽은 야심이 있어 도처에 개입하고 있다. 총참모부, 해군, 공군, 정치학원 모두에 손을 뻗치고 있다. 당신들 공군은 기름진 고깃덩어리다. 누구든지 먹고 싶어 한다. 당신은 그(허룽)가 당신의 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린뱌오는 우파셴에게 이런 내용의 자료를 만들어 자신에게 보내도록 지시했다. 린뱌오는 또 9월 2일 해군 부사령관 리줘펑(李作鵬 이작붕)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은 허룽을 주의하라. 허룽은 실제상 뤄루이칭(羅瑞卿 나서경)의 배후조종자다. 사람을 끌어들여 나를 반대했다. 군사위원회는 빨리 회의를 열어 그(허룽)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한 재료를 빨리 만들어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린뱌오의 수하인 이들 두 사람은 허룽에 원한을 갖고 있었다. (주석 451)

린뱌오가 뤄루이칭을 무고(誣告)로 제거한 뒤 특히 문혁(文革)이 막 시작되었을 때 리줘펑은 린뱌오의 지지를 업고 허위자료를 만들어 해군의 일단의 고위 지휘관들을 '뤄루이칭 분자'라고 음해해 제거하고 해군의 권력을 장악했다. 우파셴도 부정한 수단을 동원해 그를 따르지 않는 공군 고위 지휘관들을 '반당집단'으로 몰았다. 두 사람의 이런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행위가 중앙군사위원회에서 문제가 돼 허룽은 이들 두 사람을 호되게 비판해 노(老) 원수들도 이들을 집중 비판한 적이 있었다. 우파셴과 리줘펑은 그때부터 허룽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린뱌오는 또 부인 예췬을 시켜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 경위처장 쑹쯔궈(宋治國 송치국)를 사주해 허룽을 무고(誣告)하도록 했다. 쑹쯔궈의 허룽에 대한 음해(陰害)와 무고는 이랬다.

“뤄루이칭의 집, 탁자 위에 깐 유리판 깔개 밑에 사진이 있는 데 허룽 부부와 뤄루이칭 부부의 사진이 있었다. 주석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허룽과 뤄루이칭, 펑전(彭眞 팽진), 양상쿤(楊尙昆 양상곤) 반당분자들이 자주 왕래할 정도로 밀접하다는 것을 느꼈다.”


“허룽은 집에 성능이 뛰어난 수입 권총을 보관하고 있었다. 밤에 잠잘 때는 자신의 베개 밑에 넣고 잔다. 외출할 때 갖고 나가는 데 왜 그러는지 몰랐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밀고했다. 허룽이 총을 중난하이에 있는 국가 부주석 둥비우(董必武 동필무)의 딸의 방에 숨겨 놨다. 이 총으로 허룽이 화이런탕(懷仁堂 회인당)에서 회의가 열릴 때 마오 주석을 암살하려고 했다.”

쑹쯔궈가 둥비우의 집에 숨겼다고 말한 수입한 총은 10여 년 전에 둥비우의 딸 둥추칭(董楚靑 동초청)과 예ㅤㅈㅖㄴ잉의 아들 등 어린아이들이 허룽의 집에 놀러갔을 때였다. 둥비우의 딸이 문제의 권총을 보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한참 쳐다보자 허룽이 이 총을 둥추칭에게 주었다. 이 총은 완구(玩具) 총이나 다름없는 낡은 총이었다. 둥비우의 딸은 이 총을 집에 갖고 가 어머니에게 보여줬다. 둥비우의 부인은 전투를 한 여성으로 총을 보자 딸아이로부터 총을 건네받아 자신이 보관해왔다. 그 후 쑹쯔궈의 무고소문을 들은 둥비우는 깜짝 놀라 딸에게 총에 관해 물어 자초지종을 알게 됐다. 둥비우는 황급히 부인한테서 총을 넘겨받아 중난하이 경위국(警衛局)에 반납했다. 쑹쯔궈가 허룽이 둥비우의 집에 맡겨놓은 총으로 마오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무고를 했으니 둥비우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이처럼 린뱌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허룽을 제거할 틈새를 노리고 있었다. 린뱌오가 허룽을 눈엣가시로 여긴 것은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하나는 국방부장이자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인 린뱌오가 잦은 양병(養病)으로 군사위원회 공작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마오가 허룽에게 린뱌오의 군사위원회 공작을 대신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총참모장인 뤄루이칭이 업무관계로 허룽과 자주 접촉해 린뱌오가 이들의 관계를 의심했고, 급기야는 뤄루이칭을 반당집단으로 제거하는 사건을 조작했다. 허룽과 뤄루이칭이 실시한 여러 차례의 대규모 군사훈련이 마오의 인정을 받게 되자 허룽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본 것이다. 또 하나는 1934년 허룽이 옌안에서 연방군사령관을 맡고 있을 때 마오와 자주 접촉했다. 어느 날 마오와 허룽이 린뱌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마오는 린뱌오가 겉으로는 자신의 영도를 따르는 척 하지만 뒤에서는 불만을 퍼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린뱌오는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오랜 동안 긴장하면서 마음속으로 늘 불안해했다.

게다가 1937년 1월 국공합작 이후 8로군의 몇몇 장령들이 주더를 수행해 장제스가 소집한 뤄양(洛陽 낙양)에서 열린 제2전구(戰區) 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린뱌오는 산시(山西 산서)로 돌아오는 길에 허룽에게 “장제스가 철저하게 (일본)에 항전할 결심을 한 것 같다. 우리들이 부대를 이끌고 돌아가는 것(귀순)이 어떨지-” 라는 쪽지를 써 보낸 적이 있었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이 쪽지 글로 린뱌오는 생전에 항상 마음의 부담이 되어 가슴앓이를 해오고 있었다. 한 번 입 밖으로 쏟아낸 말을 없었던 일로 주워 담을 수 없어 전전긍긍해 한 것이었다. 린뱌오로서는 자신의 내밀한 약점을 훤히 꿰고있는 허룽이 권력탈취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린뱌오는 허룽을 두려워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꼽고 있었다. 린뱌오는 우파셴과 리줘펑, 쑹쯔궈가 허룽을 음해하고 모함해 작성한 문건을 넣은 ‘절대비밀(絶密 절밀)’이라고 쓰인 봉투를 마오에게 은밀하게 전달했다. (주석 452)

그때만 해도 마오는 허룽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모함하는 투서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쑹쯔궈가 음해한 허룽이 항상 총을 갖고 다닌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었다. 마오는 1966년 9월 5일 오전에 중난하이 수영장으로 허룽을 불렀다. 허룽이 수영장 응접실로 들어섰을 때 마오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허룽은 예의 군인본분의 태도인 부동자세를 취하며 마오에게 “주석”이라고 호칭한 뒤 경례를 하며 인사했다. (주석 453)

“허라오쫑(허룽에 대한 경칭), 왔구먼. 이쪽에 앉지.”

마오는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허룽이 앉을 곳을 가리켰다. 마오는 이런저런 한담을 한 뒤 차(茶)탁자 위에 놓여 있는 투서 꾸러미 봉투를 허룽에게 건넸다. 허룽이 봉투를 열어보니 우파셴(吳法憲 오법헌)이 허룽을 모함하는 문건들이었다. 이 문건은 공군에 허룽을 우두머리로 하는 비선조직이 있어 당의 권력을 찬탈하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허룽은 난감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허룽은 읽던 문건을 덮어놓고 마음을 가라앉힌 뒤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마오에게 물었다.

“주석, 우파셴을 찾아가 이야기를 할까요?”

“무슨 좋은 이야기를 한다고? 두려워 마오. 나는 당신의 바오황파이(保皇派 보황파; 여기서는 비호하거나 두호하는 사람을 뜻함)다.”


마오는 담담하게 말했다. 허룽은 침묵을 지켰으나 끓어오르는 분노와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오는 허룽을 한 번 쳐다보고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긴장할 필요가 없다. 당신을 이해한다. 나는 당신이 과거에 행했던 3가지(원칙), 당에 충성하고, 인민에게 충성하고, 불굴의 투쟁으로 적과 싸워 군중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3가지 원칙은 30년 전 1937년 항일투쟁 초기에 허룽이 고수한 것으로, 허룽이 반드시 마오의 독립자주 원칙을 지켰다는 것을 뜻한 것이다. 1937년 코민테른 집행위원인 왕밍(王明 왕명)이 소련에서 귀국한 뒤 12월 9일부터 14일까지 열린 중공중앙 정치국회의, 이른바 ‘12월회의’에서 ‘어떻게 전국항쟁을 계속하고 항전승리를 쟁취할 것인가?‘의 보고에서 왕밍은 “모든 것은 항일투쟁전선을 통해서, 모든 것을 통일전선에 복종한다”라고 주장했다. 왕밍의 이런 주장은 장제스에 대한 투항주의 노선으로써 중공중앙이 결정한 뤄촨(洛川 낙천)회의의 독립자주 원칙을 부정한 것이었다.

전선에서 ‘12월회의’를 전달받은 허룽은 대단히 못마땅해 했다. 허룽은 8로군 12사단을 이끌고 산시(山西 산서) 항일전선에서 전투를 벌이며 통일전선의 공작을 중시해 국민당군의 옌시산(閻錫山 염석산)과 푸줘이(傅作義 부작의) 등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허룽은 ‘뤄촨회의’의 독립자주 원칙을 견지해 장제스와 옌시산의 8로군 제한조처에 견결하게 반대해 군중을 발동해 인민들의 역량을 확장하고 8로군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허룽의 이런 조처에 대해 사단 정치위원 관샹잉(關向應 관향응)은 허룽의 방식이 통일전선을 훼손한다며 중공중앙에 편지를 보내 허룽을 옌안으로 소환해 학습시킬 것을 건의했다. 마오는 이런 의견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허룽이 “1) 적과 견결하게 투쟁하고 2) 당에 충성하며 3) 군중과 연계하고 있다”면서 높이 평가했다.

451) 林彪爲何決心整垮賀龍; 擔心底細被曝光影響奪權大業? 尹家民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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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 ‘文 革’中毛澤東替賀龍撑腰; ‘我做你的保皇派’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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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허룽, 결국 반혁명 수정주의자 낙인 감옥에서 생을 마감

 

 

 

 

마오가 우파셴의 모함투서와 관련해 허룽과 이야기하며 다시 ‘허룽의 3개 원칙’을 말한 것은 허룽에 대한 믿음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마오는 이어 허룽의 신해혁명 초기의 호국(護國)투쟁과 호법(護法)운동 등도 칭찬했다. 허룽이 마오와 이야기한 지 3일 째 되던 날인 9월 8일 린뱌오는 허룽이 참가하지 않은 군사위원회 확대회의, 이른바 ‘소형의 경고회의’를 열었다. 린뱌오는 “허룽의 문제가 대단히 엄중하다. 마오쩌둥 백년 후(죽은 뒤)가 걱정이다. 허룽이 일을 벌일 수 있다. 허룽의 ‘탈권음모’에 대해 ‘경계를 제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오는 9월 9일 밤 비서 쉬예푸(徐葉夫 서엽부)를 시켜 허룽에게 전화를 걸어 “린뱌오가 몇 명의 노 동지들과 협의를 통해 일을 매듭지었다. 당신이 그를 찾아가 관련 동지들의 의견을 알아보라”는 마오의 뜻을 전달했다. 얘기를 전해들은 허룽은 심기가 불편해 혼잣말로 “뒤에서 쑥덕공론을 펴면서 무슨 정황을 알아보라는 것인가?”라며 불만스러워 했다. 허룽은 다음날인 10일 인민대회당 저장청(浙江廳 절강청)에 판공실이 있는 린뱌오를 찾아갔다. 린뱌오와 함께 있던 예췬(葉群 엽군)은 허룽이 왔다는 전갈을 받고 린뱌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석 454)

“수장(首長; 예췬이 남편 린뱌오를 부르는 호칭)이 8일 군사위원회 상임위원회의를 열어 허룽의 문제를 경고했다. 비밀이 샜나? 허룽이 수장을 만나러 온 것은 분명히 이 일 때문에 온 것이다. 허룽은 수장을 원망해 죽이고 싶어 한다. 쑹쯔궈의 말로는 허룽이 작은 권총을 갖고 다닌다고 한다. 만약에 그가 권총을 차고 왔다면 만났을 때 열 받으면 총을 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만일 수장의 안전에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주석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예췬은 임전태세를 갖춰 탄알을 장전한 경호원 몇 명을 데리고 회견실 뒤에 있는 장막에 숨었다. 만약에 허룽과 린뱌오가 대화를 하다 돌발적인 사태가 발생해 예췬이 손을 흔드는 신호를 하면 경호원들이 곧바로 ‘돌격’해 뛰쳐나가기로 ‘작전’을 짰다. 허룽이 공작원을 따라 린뱌오가 있는 회견실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한담을 나눈 뒤 허룽이 성의 있는 태도로 말했다.

“린쫑, 오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 당신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다.”
“허 라오쫑, 당신에 대해 별다른 의견이 없다.”


린뱌오는 거짓으로 두려워 당황한 듯한 어투로 말했다.

“아니요. 린쫑, 회의에서 일이 있었을 것이요!”

 

 

중국 장가계 천자산 자연보호구역 내에 있는 허룽공원 내에 세워진 허룽의 동상.

 

 

 

 

린뱌오는 잠시 침묵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양 위엄스러운 모양을 갖추고 목에 힘을 주며 위협적인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 하겠소. 당신 문제는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주요한 것은 이후 누구를 지지하고, 누구를 반대하는 지의 문제에 주의해야 한다.”

허룽은 린뱌오가 비열한 수법으로 뤄루이칭을 제거하고, 이제 우파셴 등을 사주해 음모를 꾸며 자신을 올가미에 씌우려 한다는 생각을 하며 쓴 웃음을 지으면서도 솔직하게 말했다.

“린쫑, 내가 이렇게 오랜 동안 혁명을 하면서 누구를 지지하고, 누구를 반대하는 지 당신은 아직도 분명히 모르고 있소? 어떤 사람이 당중앙과 마오 주석을 반대하면 나는 그 사람을 반대한다. 어떤 사람이 당중앙과 마오 주석을 옹호하면 나는 그 사람을 지지한다.”

허룽의 이 말은 린뱌오가 늘 마음속에서 불안해하고 근심스러워했던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렸다. 린뱌오는 홍군이 어려웠던 시절 홍군의 앞날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여러 번 드러낸 적이 있었다. 린뱌오가 징강산에 있을 때 홍군의 투쟁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마오는 린뱌오에게 ‘조그마한 불씨가 광활한 들판을 태울 수 있다(星星之火, 可以燎原 성성지화, 가이요원)’라는 제목의 편지를 보내 비판하고 설득했다. 린뱌오는 또 준이(遵義 준의)회의 이후 마오의 군대지휘를 못마땅해 했고,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마오가 ‘싼간닝(陝甘寧 섬감녕; 싼시-간쑤-닝샤지역)’에 병력을 주둔시켜 방위하는 전략을 반대했다. 린뱌오는 매번 혁명의 주요한 전환점에서 마오와 의견이 엇갈려 손발이 맞지 않았다. 린뱌오의 이런 전력을 잘 알고 있는 허룽이 구체적인 사례를 들지 않은 말이었지만 린뱌오는 등허리에 진땀이 흘렀다. 허룽과 린뱌오의 대화는 겉으론 평온하고, 치열한 쟁론을 벌이지 않았지만 속에서는 격렬한 불꽃이 일렁거렸다. 린뱌오는 허룽이 결코 자신을 지지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허룽에 대한 음모책략을 서둘러 하루빨리 제거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적막한 시산(西山) 산속인 샹비쯔고우(象鼻子溝 상비자구)에 숨어 지내 던 허룽은 1967년 10월 1일 건국절이 지난 어느 날 40도의 고열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다. 부인 쉐밍(雪明 설명)은 급히 저우언라이에게 연락해 저우의 지시로 당정군 고위 영도들의 전용병원인 301병원에 입원키로 했으나, 장칭의 거센 반대로 시설이 낙후한 267병원에 이송돼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허룽은 퇴원 후 다시 샹비쯔고우로 돌아 왔으나 은신처가 드러나 린뱌오와 장칭의 감시아래 놓이게 됐다. 린뱌오는 수하들을 시켜 허룽이 살고 있는 집의 창문을 모두 밀폐시키고, 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물을 공급하면서 문 밖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잔혹한 박해를 가했다. 생지옥과 다름없었다. 중환자로 겨우 목숨만 붙어있던 허룽은 그나마 저우언라이가 가을이 되면 데리러 온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어 힘든 하루하루를 버텼다. 만사휴의였다. 허룽은 마오의 결정에 따라 신분이 심사대상자로 바뀌어 이들 부부는 9개월 동안 숨어살았던 샹비쯔고우에서 비밀리에 감옥으로 강제 구인됐다. 저우언라이와 허룽의 연락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허룽은 1968년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낙인찍혀 감옥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다 1969년 6월 9일 73살을 일기로 깊은 한을 품은 채 끝내 세상을 떠났다. (주석 455)

린뱌오와 장칭 집단은 허룽의 주검을 극비에 붙였고, 허룽의 주검은 장례절차도 없이 비밀리에 화장됐다. 허룽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1년 9월 린뱌오가 소련으로 달아나다 몽골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뒤였다. 마오와 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제1차 중앙회의를 열어 허룽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핑판(平反 평반)을 논의할 때 마오는 “판안(飜案 번안; 명예회복, 복권)! 판안! 판안!”이라고 잇따라 외쳤다고 한다. 뒤늦은 과오의 회한이었다. 허룽은 숨진 뒤 4년이 지나 마오 생전인 1974년에 공식적으로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허룽이 죽고 6주년이 되는 1975년 6월 9일 베이징 근교 혁명 열사들의 묏터인 바바오산(八寶山 팔보산)에서 중공중앙이 거행하는 ‘허룽 유골 안장식’이 열렸다. 저우언라이는 몇 차례의 암 수술을 하고 입원한 병원에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안장식에 참석했다. 저우언라이는 허룽의 부인 쉐밍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쉐밍, 쉐밍아! 내가 그(허룽)를 지켜주지 못했다! 6년이 지났다. 라오쫑의 유골을 바바오산 묏터에 안장시키지 못했다. 모진 세월이었다. 대단히 견디기 어려웠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저우언라이는 허룽의 유골함 앞에서 일곱 번 절을 올렸다. 이런 애도(哀悼)는 허룽과 40년 동안 생사를 같이 하며 깊은 우정을 쌓아온 허룽을 지켜주지 못한 가책을 느낀 통절한 회한과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었다.

454) 林彪爲何決心整垮賀龍; 擔心底細被曝光影響奪權大業? 尹家民 人民網-文史頻道
455) 賀龍夫人薛明; 周恩來說了解賀龍 比我還多 時政頻道 新華網, ‘不盡的思念’ 作者 薛明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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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홍위병에 붙잡힌 펑더, 중앙문혁과 저우의 대립

 

1966년 12월 24일 오전 6시.

시난(西南) 건설위원회 양베이(楊焙 양배)가 총리 판공실에 장거리전화를 걸어 저우언라이의 비서 저우자딩(周家鼎 주가정)에게 긴급한 상황보고를 하고 있었다. 양베이는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가 이날 베이징에서 온 홍위병들에게 납치당해 끌려갔다며 화급히 총리에게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저우자딩은 저우언라이에게 달려가 상황을 보고했다. 저우언라이가 물었다. (주석 456)

 

“펑더화이 동지가 현재 어는 곳에 있는가?”
“이미 홍위병들이 납치해 갔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저우언라이가 놀라서 물었다.

“어디의 홍위병인가?”

“베이항(北航 북항) ‘훙치(紅旗 홍기)’라고 합니다.”

“그들은 대단히 빠르게 움직인다!”

 

저우언라이가 짙은 눈썹을 찌푸리고 순간 깊은 생각에 빠졌다. 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빨리 시난 건설위원회와 청두쥔취(成都軍區 성도군구)에 전해라. 즉시 펑더화이 동지를 찾고, 찾는 대로 그(펑더화이)를 보호하고 신속하게 중앙에 보고하도록 하라!”

 

저우언라이의 지시 구술을 저우자딩이 진지한 자세로 받아 적고 있었다.

“중앙과 나의 이름으로 베이항 ‘훙치(紅旗)’의 학생들, 청두군구, 베이징 위수지역에 전보를 보내라. 중앙은 펑더화이 동지의 베이징 귀환을 동의한다. 단, 3개항을 엄격히 집행한다. 하나, 청두 군구가 부대를 파견해 홍위병과 함께 펑더화이 동지를 베이징으로 호송한다. 연도에서 탈취해 억류하는 어떠한 조처도 불허한다. 그(펑더화이)에 대해 어떠한 모욕적인 언행을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안전을 절대로 보증해야 한다. 둘, 비행기 탑승을 불허하고, 청두군구가 파견한 부대를 통해 베이징 역에서 대기한다. 셋, 펑더화이 동지의 생활과 학습에 대한 안배를 책임진다. 이상 3개항을 베이항 ‘훙치(紅旗 홍기)’의 학생들에게 동시에 보낸다. 각 부서에서 반드시 엄격하게 집행하고, 펑더화이 동지의 안전을 절대로 보증해야 한다. 그의 생명안전에 대해 각 부서는 중앙에 책임을 져야한다.”

 

관련 부서에 총리의 지시사항을 타전한 저우자딩은 특별히 베이항 ‘훙치’ 홍위병 조직에 전화를 걸어 총리 지시사항에 잘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고 총리 판공실로 돌아왔다. 저우자딩은 저우에게 “청두군구 누구와 통화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황신팅(黃新廷 황신정) 사령관에게 전화하게.”
“그는 이미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면, 간웨이한(甘渭漢 감위한) 정치위원을 찾아봐!”
“그도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어? 그러면, 웨이졔(韋杰 위걸) 동지가 책임자인가?”
“웨이졔 부사령관이 잠시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럼, 빨리 웨이졔 동지에게 통지하게.”

 

저우자딩은 또 베이징 위수사령관 푸충비(傅崇碧 부숭벽)에게 총리실로 와 업무지시를 받도록 통지했다. 푸충비가 회의를 주재하고 있어 정치주임 저우슈칭(周述靑 주술청)이 총리 판공실로 달려왔다. 저우언라이는 저우슈칭에게 “당신들 위수사령구(衛戍司令區)는 빨리 조직을 꾸려 근일 내 펑더화이 동지를 인도할 준비를 하게. 그(펑더화이)의 생활과 학습을 책임지도록 하되 전문 인력이 책임을 맡도록 하라.

 

기차역에 가서 신병을 인도하되 절대로 홍위병들에게 빼앗기거나 펑더화이 동지를 가해해서는 안 된다. 문제가 있을 때는 즉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1966년 12월 27일 밤 8시께 펑더화이가 탄 열차가 베이징 역에 도착했다. 베이징 위수사령구에서 파견한 경위처 참모 왕진링(王金嶺)과 저우슈칭이 베이징 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펑더화이가 청두에서 홍위병에 붙잡혀 베이징으로 호송하고 있다는 소문이 광범하게 퍼져 홍위병들이 베이징 역에 몰려들어 진을 치고 있었다. 홍위병들은 펑더화이를 끌고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베이징 위수군구 왕진링 등과 홍위병들이 서로 펑더화이 신병을 확보하려고 다툼을 벌여 1시간 동안 팽팽한 대치상태가 계속됐다. (주석 457)

 

 

전선을 시찰하고 있는 펑더화이.

 

홍위병 우두머리가 ‘중앙문혁’의 지시를 받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이때 중앙문혁소조와 정치국원들이 간담회를 하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문혁소조 치번위(戚本禹 척본우)는 희색이 만면해 회의 참석자들에게 “펑더화이가 이미 홍위병에게 압송돼 베이징 역에 와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습니까?”라고 물었다.

 

저우언라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 일은 내가 이미 위수사령구에 조처를 취했다. 그들이 데려가 펑더화이의 생활과 학습을 관장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처번위는 “위수사령구에서 전화가 안 왔다. ‘둥팡훙’의 동지가 전화했다”며 다시 의견을 물었다. 저우가 다시 “위수사령구에서 (펑더화이를) 인도하러 안 왔나?”고 물었다. 저우언라이는 일이 잘 안 풀린다는 생각이 들어 회의장을 빠져나와 급히 위수사령관 푸충비에 전화를 걸었다.

 

저우는 통화를 하면서 치번위가 중앙의 지시라며 위수사령구에게 펑더화이를 홍위병들에게 넘겨주도록 하라는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우언라이는 푸충비에게 즉시 병력을 파견해 홍위병들로부터 펑더화이의 신병을 인도하도록 지시했다. 회의장으로 돌아온 저우언라이는 큰소리로 치번위에게 “치번위 동지, 당신이 이렇게 일을 처리하면 어떠한 악영향이 오는지 아는가? 당신의 권력이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끼면 총리직을 빼앗아 가라! 중앙의 대권을 모두 빼앗아 가라!”고 호통을 쳤다.

 

베이징 위수군구 사령관 푸충비는 28일 새벽 ‘중앙 문혁소조’로부터 “펑더화이를 베이징 위수군구와 홍위병이 공동 관리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저우언라이는 29일 오전 푸충비에게 전화를 걸어 펑더화이의 ‘감호(監護)’ 상황을 물은 뒤 펑더화이의 거주지에 대한 비밀을 지키고 안전을 절대 보장할 것을 지시했다.

456) 毛澤東與彭德懷的最後一面 理論頻道 新華網
457) 毛澤東與彭德懷的最後一面 理論頻道 新華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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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펑더마저 문혁의 격랑에 보호감호 신세 전락

 


반당집단으로 몰려 실각한 뒤 울분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펑더화이는 1965년 9월 21일 마오에게 농촌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열흘 전인 9월 11일 중앙을 대표해 펑전(彭眞 팽진)이 펑더화이를 찾아와 중앙이 쓰촨성의 시난(西南 서남)지역 청두(成都 성도)로 가 3선 건설위원회 부 총지휘로 공작하도록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펑더화이는 공산당원으로서 당의 지시에 마땅히 복종하는 게 도리이나 자신은 과오를 범해 다른 사람들이 따를 지 우려가 데는데다 공업 분야는 문외한으로 차라리 농촌으로 가 조사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뜻을 전달했다.

 

그 후 이렇다 할 소식이 없자 마오에게 직접 편지를 쓴 것이다. 마오의 비서가 23일 아침 7시 반 펑더화이에게 전화를 걸어 마오가 오전 8시 30분께 접견하겠다는 뜻을 통보 했다. 펑더화이가 오전 8시 10분께 이녠탕(頤年堂 이년당)에 도착했을 때 마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루산(廬山 여산)회의 이후 6년 만에 처음으로 악수를 했다. 마오의 눈이 시커멓게 바짝 여윈 펑더화이의 얼굴과 두 볼에 피어오른 검버섯을 훑고 지나갔다. 마오는 만감이 교차한 듯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당신, 많이 늙었다”고 말했다. 펑더화이는 마지못해 웃으며 “나는 3보전(三寶殿 삼보전;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를 일컬음-필자 주)에 오르지 못해 일없이 지냈다”고 대답했다. 마오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주석 458)

 

“일찍부터 당신을 기다렸다. 잠을 잘 수 없었다. 어제 오후 당신의 편지를 받았다. 기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쇠고집이다. 몇 년 동안 편지도 쓰지 않았다. 편지를 쓴 것은 8만언서(言書)다. 오늘 (류)샤오치, (덩)샤오핑, 펑전 동지가 조금 있으면 온다. 저우 총리는 시아누크(캄보디아 국왕)를 접견하느라 오지 못한다. 우리들 함께 이야기 하자.”

 

마오는 “현재 전쟁에 대비해 대3선(大三線)을 건설하고 있다. 비례에 따르면 시난(西南 서남)에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다. 전략적 후방도 대단히 중요하다. 당신이 시난지역에 가는 것이 적당하다. 앞으로 병력을 이끌고 싸워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펑더화이는 “공업 분야는 문외한이다. 완전 백치다. 정치상으로도 공작하는 데 좋지 않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마당을 거닐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마오는 “당신의 문제는 역사가 결론을 내릴 것이다. 루산회의는 역사의 소극(笑劇)이었다. 이미 지나갔다. 정신을 진작시켜 앞을 보고 가야 한다”고 다독였다.

 

오전 8시 40분께 류샤오치, 덩샤오핑, 펑전이 잇따라 도착했다. 한담을 나누다 마오가 “펑더화이 동지를 3선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고 3선 건설 총지휘부를 만들어야 한다. 리징취안(李井泉 이정천)을 총지휘부의 정(正), 펑더화이를 부(副)로 하자. 청쯔화(程子華 정자화)도 추가하고-”라고 말했다.

 

펑더화이는 “내가 공업 분야에서 일하는 것은 무리다. 시간도 없고, 나는 변경에 가서 농사를 지었으면 한다”고 여전히 사양했다. 마오는 “펑더화이 동지는 시난지역으로 가야 한다. 이것은 당의 정책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이야기하자. 나는 과거에 적극적으로 펑더화이 동지를 반대했다. 지금은 그를 충심으로 지지한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마오의 이 말이 펑더화이의 마음을 움직였다. 마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주석 459)

 

“리리산 노선 때 3군단의 간부들은 깐장(竷江 감강)을 건너는 것을 반대했다. 펑더화이는 깐장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한 마디로 결정하고 곧바로 깐장을 건넜다. 장제스의 1, 2, 3차 포위소탕전 당시 우리들(마오와 펑더화이)의 협력은 아주 잘 됐다. 반혁명의 ‘푸톈사변(富田事變 부전사변)’ 때 3통의 이간계의 편지를 써 주더와 펑더화이, 황공뢔(黃公略 황공략) 3명에 보냈다.

 

펑은 즉시 사람을 파견해 이 편지를 보냈고, 3군단 전적위원회를 열어 ‘푸톈사변’을 반대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장궈타오(張國燾 장국도)의 분열투쟁을 굳건하게 반대했다. 해방전쟁 당시 서북전장에서의 업적도 인정받았다. 그렇게 적은 군대로 국민당 후중난(胡宗南 호종남) 등의 그런 강대한 군대도 물리쳤다. 나는 이 일을 항상 생각한다. 나의 선집(選集)에 당신의 이름을 보존한다. 왜, 항상 사람이 잘못을 범하면 반드시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하는가?-”

 

마오는 머리를 돌려 곁에 있는 류샤오치를 쳐다보면서 “샤오치, 샤오핑 동지는 시난지구 관련 동지들을 소집해 1차 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명확하게 말하시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동의하지 않으면 나를 찾아와 이야기 하라고 하시오”라고 말했다. 이야기는 점심을 먹으며 5시간 동안 계속됐다.

 

6년 만에 동지들을 만난 펑더화이는 헤어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오와 참석한 사람들에게 고별인사를 하고 나왔다. 집이 있는 우자화웬(吳家花園 오가화원)으로 돌아 온 펑더화이는 감격을 이기지 못해 붓을 들어 마오와 이야기했던 내용들을 기록했다. 펑더화이는 “마오 주석이 나를 이해했다”고 적었다.

 

펑더화이는 며칠 뒤 중난하이 저우언라이의 집인 시화팅(西花廳 서화청)에서 저우와 부인 덩잉차오(鄧穎超 덩영초)의 환대를 받았다. 저우언라이는 “루산의 일은 6년 저편으로 지나갔다. 교훈이 우리들을 일깨웠다. 우리들은 진지하게 총결해야 한다. 주석의 말이 맞다. 끝까지 헤어져서는 안 되고, 단결해야 한다. 우리들 앞에는 아주, 아주 많은 큰 사업들이 우리들이 완성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펑더화이는 “6년 동안 나는 밤낮으로 아침부터 일하는 것을 기대해 왔다. 나는 실제적으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미가 아닌가!”라고 감개해 했다. 저우언라이는 3선의 건설상황 등을 설명하면서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하고, 인민을 위해 새로운 공헌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펑더화이를 격려하고 고무했다.

 

 

펑더화이는 가슴에 벅차오르는 감회와 뜨거운 열정을 품고 시난지구의 청두(成都 성도) 3선 건설현장으로 달려갔다. 펑더화이는 자신의 여생을 이 지역에서 보내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공작하겠다고 작정했었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꿈속에서도 갈구했던 공작에 대한 열정과 포부를 펴보지도 못하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문화대혁명의 격랑에 휩쓸려 홍위병들에 붙잡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또 다시 굴욕적인 시련과 좌절을 겪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마오가 ‘나의 유일한 대장군’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 대륙을 누비며 용맹을 떨쳤던 펑더화이가 어린 홍위병들에게 폭행과 온갖 수모를 당하며 베이징으로 개 끌리듯이 끌려왔을 때 그의 나이 68살이었다.

 

 

그나마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펑더화이는 홍위병들로부터 더 이상의 패악을 당하지 않았지만 베이징 근교 선팡웬(什仿院 십방원) 감호소에 갇히는 감호 대상자가 됐다. 펑더화이는 이곳에서 뤄루이칭, 황커청(黃克誠 황극성), 완리(萬里 만리) 등 10여 명의 혁명 원로들과 함께 사상개조 교육을 받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주석 460)

 

 

458) 揭秘; 廬山會議之後的彭德懷 理論頻道 新華網
毛澤東與彭德懷的最後一面 理論頻道 新華網, ‘紅墻見証錄’ 作者 尹家民 當代中國出版社
459) 毛澤東與彭德懷的最後一面 理論頻道 新華網, ‘紅墻見証錄’ 作者 尹家民 當代中國出版社
460) 毛澤東與彭德懷的最後一面 理論頻道 新華網, ‘紅墻見証錄’ 作者 尹家民 當代中國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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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문혁 중심 ‘조반파’, 군 부대까지도 습격

 

 

조반파(造反派)들이 당정기관의 권력탈취 투쟁과 고위 간부들에 대한 적발비판대회, 불법 체포행위 등의 ‘1월 폭풍’은 군부대도 덮쳤다. 조반파 학생들과 군사학교 조반파들은 각 군구(軍區)의 군사시설을 습격하고, 고위 지휘관들을 비난하고 군 지휘관들을 불법적으로 체포해 비판대회를 여는 등 군부대도 무법지대로 돌변하고 있었다. 항일전과 국공내전에서 용맹을 떨쳐 맹장(猛將)으로 이름난 쉬스여우(許世友 허세우) 난징군구(南京軍區 남경군구) 사령관이 조반파에 붙잡혀 베이징으로 강제 호송됐다. 중공중앙 전용 숙박, 회의시설로 베이징군구(北京軍區 북경군구)가 관할하는 징시빈관(京西賓館 경서빈관)에 끌려온 쉬스여우는 마오쩌둥에게 전달해 달라며 이렇게 울분을 터뜨렸다. (주석 461)

“오늘, 조반파들이 나, 쉬스여우를 잡아왔다. 나는 한 평생 혁명을 해왔다. 전쟁터에서 총칼이 숲을 이루고 총탄이 빗발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늘 나를 잡아왔지만 나는 추호도 겁내지 않는다. 누가 감히 나를 잡으려 한다면, 나는 누구를 막론하고 총을 쏘겠다!”

저우언라이는 쉬스여우가 대담하게 말하고, 대담하게 행동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쌍방이 충돌해 사고가 발생할 것을 크게 우려했다. 저우는 급히 베이징 위수군구 사령관 푸충비(傅崇碧 부숭벽)와 10대 원수(元帥)인 쉬샹쳰(徐向前 서향전)을 징시빈관으로 보내 쉬스여우 문제를 잘 처리하도록 요청했다. 마오도 ‘중앙 문혁소조’가 관펑(關鋒 관봉)을 빈관에 파견해 조반파 설득공작을 하도록 지시했다. 쉬스여우는 쉬샹쳰을 보고 감정이 복 바쳐 “나는 혁명을 위해 생사를 넘나들었다. 나, 쉬스여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중앙이 나를 비판하면 바꿀 수 있다. 왜, 나를 잡아오나? 왜, 나를 욕보이는가?”라고 울부짖었다. 만약 이날 저우언라이가 적시에 조처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인명이 살상되는 등 큰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문혁소조는 징시빈관을 둘러싸고 있던 조반파 홍위병들을 설득해 철수시키고, 난징에서 쉬스여우를 잡아온 조반파들을 난징으로 돌려보냈다. 소용돌이치는 문화대혁명의 거친 격랑 속에서 군부도 일엽편주의 위태로운 처지에 빠지게 된 것이다.

1967년 1월 6일 총참모장 대리 양청우(楊成武 양성무)가 쉬샹쳰(徐向前 서향전)을 만나 마오의 지시를 전달했다. 전군(全軍) 문화대혁명 조장(組長)을 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쉬샹쳰은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문혁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걱정이 태산(泰山)인터였다. 자신은 혁명가와 군인으로서 ‘복종’ 두 글자로 살아왔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부분적인 공작만 해왔다. 자신의 건강상태를 마오와 당중앙이 잘 알고 있고, 그것도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전군 문혁소조의 공작을 하라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또 자신의 임명이 신임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지도 석연찮았다. 침묵을 깨고 쉬샹쳰이 양청우에게 “나는 오랫동안 병을 달고 살아 간부들도 잘 모른다. 아무래도 이 공작은 내가 감당할 수 없다”며 이런 뜻을 마오에게 전해주기를 바랐다. 양청우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장칭이 제의하고 주석이 비준한 것입니다”라며 당황스러워했다. 쉬샹쳰은 장칭이 제의했다는 말을 듣고 믿을 수가 없었다. 장칭과는 함께 일한 적도 없었고, 개인적인 접촉도 없어 더욱 어리둥절해 했다. (주석 462)

쉬샹쳰은 마오를 만난 자리에서 “주석, 이런 중요한 자리를 실제적으로 떠맡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다른 유능한 사람을 선발하라”고 고사했다. 마오는 미소를 지으면서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당신이 하라!”고 말했다. 일단의 군사학교 조반파들이 군대 영도기관을 습격하고 고위 지휘관들을 끌고 가 비판대회를 여는 등 극심한 혼란을 겪던 1월 11일 마오가 중앙정치국 회의에 참석했다. 주더를 비롯한 쉬샹쳰, 예졘잉 등 군 혁명 원로인 원수들이 잇따라 발언하면서 군대 내부에서 벌어지는 혼미한 상황을 걱정했다. 이들은 하나 같이 군대의 안정을 절대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쉬샹쳰은 “군대는 반드시 안정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방의 경우 한꺼번에 무너져 통제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예졘잉은 “군대는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 지방이 혼란하면 혼란할수록 군대는 더욱 안정을 기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중공중앙과 국무원, 중앙 군사위원회는 연명으로 통지를 발송해 각 지역의 중요시설에 대해 군사관제를 하고 은행은 인민해방군과 공안기관에서 보호하도록 조처했다.

1월 12일 새로운 전군(全軍) 문혁소조가 정식으로 설립됐다. 쉬샹쳰이 조장을 맡고, 장칭이 고문, 부조장에는 샤오화(蕭華 소화), 양청우, 왕신팅(王新亭 왕신정), 쉬리칭(徐立淸 서립청), 관펑 등 7명이고 조원은 린뱌오의 부인 예췬(葉群 엽군) 등 9명으로 모두 18명이었다. 해군사령관 샤오진광(蕭勁光 소경광)이 북해함대의 조반파에 붙잡혀 톈진(天津 천진)으로 끌려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분기탱천한 쉬샹쳰은 해군 문혁소조에 전화를 걸어 단호하게 샤오진광을 즉시 풀어줄 것을 지시해 조반파들이 기가 꺾여 방면했다. 1월 중순에는 천보다와 장칭이 계략을 꾸며 정치부 주임이자 문혁소조 부조장인 샤오화 제거에 나섰다. 천보다는 조반파 군중대표를 만난 공개적 자리에서 “샤오화는 전사(戰士)가 아니라 토호 같다”고 선동했다. 즉시 샤오화를 타도하는 대자보가 총정치부 기관 건물에 나붙었다. 저우언라이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소문을 반박했다. 이 소식이 마오에게까지 알려지자 장칭은 놀라서 대자보를 떼도록 긴급 지시하기도 했다. (주석 463)

군사위원회 간담회가 1월 19일 징시빈관(京西賓館 경서빈관)에서 열려 4대 문제, 즉 크게 이야기하는 대명(大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대방(大放), 대자보(大字報), 대변론(大辯論) 등의 군대 내 전개여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군부에서는 쉬샹쳰, 예ㅤㅈㅖㄴ잉, 녜룽전(聶榮臻 섭영진) 등 3명의 원수(元帥)와 문혁소조에서는 장칭, 천보다, 캉성, 예췬, 야오원웬(姚文元 요문원) 등이 참석해 격돌을 벌였다. 군 원로 원수들은 군대는 무산계급 독재의 초석으로 군대의 문화대혁명과 지방은 마땅히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로간의 주장이 엇갈리며 진전이 없자 장칭이 엉뚱한 문제를 들고 나와 양쪽은 격렬한 공방전을 펼쳤다. 장칭은 샤오화를 거론하며 “샤오화는 류즈졘(劉志堅 유지견; 전 군 문혁소조 조장)의 막후인물이다. 샤오화는 총정치부 주임으로서 문건을 발송하는 데 총정치부와 군사위원회를 연결시키고 있다. 무슨 뜻인가?”라고 묻자, 옆에 있던 예췬이 호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원고를 꺼내 놓았다. 예췬은 건너편에 있는 샤오화를 가리키며 “당신은 왜 장칭 동지를 반대하는가? 당신은 린(뱌오) 부주석을 반대하고 문화대혁명을 파괴하고 있다. 오늘 밤에 반드시 전군 군사학교 선생과 학생들 앞에 나아가 당신의 엄중한 잘못을 비판받아야 한다”고 핏대를 올렸다.

예졘잉이 예췬에게 “예췬 동지에 묻겠소. 린 부주석의 어떤 새로운 지시가 있소?”라고 비아냥거렸다. 예췬은 “누구든지 장칭 동지에 반대하면 나는 그 사람을 반대할 것이다. 수장(린뱌오)도 견결하게 장칭 동지를 지지한다”고 말한 뒤 벌떡 일어나더니 “장칭 동지를 학습하고, 장칭 동지에 대해 경의를 표하자!”고 구호를 외쳤다. 모두들 일어나 함께 구호를 외치자, 샤오화도 구호를 따라하자 예췬이 즉시 “당신은 자격이 없다”며 제지했다. 천보다는 “샤오화, 당신은 대단히 교만하다. 당신 눈에는 장칭 동지도 안중에 없다. 당신은 토호고, 전사가 아니다. 마오 주석과 린 부주석의 전사가 아니다. 당신은 해방군을 개인 군대로 바꾸고, 자산계급 군대로 바꿔 버렸다. 당신의 과오는 대단히 엄중하다”고 비판했다. 장칭이 손으로 샤오화의 코를 가리키며 “오늘 밤 노동자 체육관에서 열리는 10만인 대회에 당신 안 갈 거요?”라고 시비를 걸었다. 회의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샤오화가 말문을 열었다. 샤오화는 “당신들 말 다했소? 내가 발언해도 괜찮겠소? 나는 수십 년간 혁명에 참가했다. 나는 공산주의를 최고의 신앙으로 여겨왔다. 마오 주석은 항상 내가 열렬하게 사랑하는 영수다. 만약 공작 중에 결점이 있고, 잘못이 있으면 나는 인정한다.-”고 말했을 때 장칭이 말을 끊고 들어왔다.

장칭은 “헛소리 하자 마라. 밤에 노동자 체육관에 와 10만 군중 앞에서 말하라!”고 소리쳤다. 예졘잉이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회의장을 빠져나와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했고, 저우는 마오에게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마오는 “이렇게 큰일을 왜 보고하지 않았나? 빨리 제지하라. 총정치부 주임을 멋대로 비판해도 되는 일인가?”라고 화를 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지시를 예졘잉에게 전달하며 “그들에게 이야기 하라. 나의 명령이 아니다. 마오 주석의 명령이다. 샤오화는 대회에 나가 비판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회의를 주재하던 쉬샹쳰은 예췬 등 문혁소조 사람들이 발언할 때 모두 원고에 의존하는 것을 보고 이들이 사전에 치밀하게 모의해 역할분담을 한 사실을 알았다. 쉬샹쳰은 회의를 끝내며 샤오화에 대한 비판을 군사위원회에서 토론한 적이 없기 때문에 회의 내용의 보안을 엄격히 지키고 외부에 발설하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베이징군구 사령관 양용(楊勇 양용)이 간부회의에서 회의 내용을 전달했고, 이 내용을 기록한 정치부 부주임 위안쯔친(元子欽 원자흠)이 필기장을 조반파들에게 탈취 당했다. 장칭의 지시를 받은 베이징군구 전우문공단(戰友文工團)의 조반파들이 밤에 샤오화의 집을 쳐들어가 가택수색을 하는 등 난동을 버렸다. 샤오화는 소식을 듣고 시산(西山 서산)에 있는 예졘잉 집으로 달려가 구원을 요청했다. (주석 464)

 

 

461)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開國將帥 ‘文革’之痛; 周恩來下令築墻阻擋造反派 尹家民 ‘黨史博覽’ 人民網 ‘文革’ 漩渦; 江靑搞亂軍隊, 老帥大發火 人民網-文史頻道
462)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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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文革’漩渦; 江靑搞亂軍隊, 老帥大發火 人民網-文史頻道 開國將帥‘文革’之痛; 周恩來下令築墻阻擋造反派 尹家民 ‘黨史博覽’ 人民網
464) 開國將帥‘文革’之痛; 周恩來下令築墻阻擋造反派 尹家民 ‘黨史博覽’ 人民網 ‘文革’漩渦; 江靑搞亂軍隊, 老帥大發火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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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2월 역류(逆流)’에 저항 원로들 하나둘씩 뒤안길로

 

 

다음날인 20일 오전 군사위원회 간담회가 징시빈관에서 속계 됐다. 어젯밤 상황을 알고 있는 장칭이 샤오화가 보이지 않자 음흉스럽게 “총정치부 주임이 어째서 보이지 않지? 어디로 도망갔나?”라며 이죽거렸다. 이때 샤오화가 회의장에 들어왔다. 쉬샹쳰이 “어젯밤 어디 갔었나?”라고 물었다. 샤오화가 조반파들에게 가택수색을 당한 사실을 보고했다. 쉬샹쳰은 짐짓 샤오화를 혼내는 척 하면서 장칭을 겨냥했다. 쉬샹쳰은 “겁쟁이 같으니라구! 뭐가 겁나는가? 그들이 당신을 잡아먹기라도 하는가?”라며 손으로 탁자를 치는 바람에 찻잔이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천보다는 샤오화가 끌려가지 않은 게 의외란 듯 “당신, 당신 어떻게 도망쳤나?”라고 물었다. 천보다는 이어 “보아하니, 어떤 사람이 보호해 주었구먼. 누구요?”라고 추궁했다. 줄곧 한 마디도 않고 꼬락서니를 지켜보던 예졘잉이 “그가 어제 한 밤중에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습디다. 내가 그를 거둬 주었소. 숨겨준 죄가 있으면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탁자를 세게 치다 손을 다쳤다. 장칭 등은 원수들이 거칠게 대하자 단번에 기가 꺾여 더 이상 샤오화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마오는 1월 22일 군사위원회 확대 간담회를 열어 고위 장령들을 접견했다. 많은 고위 장령들은 마오가 접견할 때 조반파들이 군사기관을 공격하는 사건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어 매우 분노하면서 감정이 격앙됐다. 난징군구(南京軍區 남경군구) 사령관 쉬스여우(許世友 허세우)는 “큰 모자를 씌우려고 한다. 우리들은 수십 년의 노 간부들에 대해 이렇게 대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라며 분개했다.

 

 

제2포병 정치위원 리톈환(李天煥 이천환)은 “우리는 현재 근본적으로 공작을 할 수 없다. 주석께서 우리가 공작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고, 잘못이 있다면 자아비판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마오는 “조반파를 지지해야 한다. 그들은 소수다. 견결하게 지지해야 한다. 우리들의 기본 방침은 혁명 좌파 쪽에 서서 지지해야 한다. 과거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실 거짓말이다”라고 말했다. 마오는 조반파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마오는 “군대 안에서 야오한성(요漢生 요한생), 류즈졘(劉志堅 유지견), 쑤전화(蘇振華 소진화) 등이 ‘펀치스(噴氣式 분기식; 비판대상자의 상반신을 구부리게 한 뒤 두 사람이 옆에서 손으로 목덜미를 누르고, 팔을 뒤로 꺾어 올리는 사형(私刑)을 말함)’를 4~5시간 동안 당한 것은 인격을 모욕하고, 체벌로 이런 방식은 비문명적 행위이다”고 말했다. 문혁 당시 ‘제트기를 탔다’고 하면 조반파나 홍위병들에게 끌려가 사적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쉬샹쳰은 야간회의를 마치고 1월 23일 아침 7시께 집으로 돌아갔다. 고희(古稀)가 다 된 쉬샹쳰으로서는 밤낮없이 일한다는 게 버겁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이날도 피로를 풀기 위해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담장 밖에서 “우리들은 쉬샹쳰을 만나야 한다” “쉬샹쳰은 나와라”는 등의 구호가 귓전을 찢었다. 쉬샹쳰은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조반파들이었다. 늙었지만 원수의 풍모를 간직한 쉬샹쳰의 늠름하고 근엄한 모습을 본 조반파들은 시끄럽게 난동을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경직된 채 멍하니 쉬샹쳰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풋내기 전사들이었다. 베이징군구 사령관 양융의 일을 따지기 위해 왔지만 쉬샹쳰에게 압도당한 조반파들은 어영부영하다 돌아갔다.

 

 

이러는 사이 중앙의 고위 장령인 샤오화, 양융 등이 잇따라 비판당하고, 군부대가 습격당하는 등 혼란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런대도 군부의 책임자인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이자 국방부장인 린뱌오는 되레 조반파들을 쑤석거리며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쉬샹쳰은 1월 24일 밤에 린뱌오의 집으로 쳐들어가 린뱌오를 압박해 ‘군대는 전투대 건립을 불허한다’, ‘군대의 혼란을 방치하지 않는다’, ‘이른 시일 안에 조항과 규정을 만든다’ 등의 원칙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이것은 군대 안정화 방침의 ‘8조 명령’을 만드는 기초가 됐다. 쉬샹쳰은 1월 28일 마오를 찾아가 ‘8조 명령’의 세부적 내용을 보고했다. 쉬샹쳰은 못마땅해 하는 마오를 설득해 비준을 받았다. 그나마 대혼란기의 군을 어느 정도 안정화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주석 465)

 

 

저우언라이는 당의 숙박, 회의시설로 군이 관할하고 있는데도 조반파들이 무시로 드나들며, 툭하면 당정군 고위 간부들을 끌고나가 비판대회를 여는 등 무법지대로 바뀐 징시빈관(京西賓館 경서빈관)의 안전 확보를 위한 조처를 내렸다. 저우언라이는 베이징 위수군구(衛戍軍區) 사령관 푸충비에게 2월 7일 0시를 기점으로 징시빈관을 직접 관장해 위수사령부의 허가 없이는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통제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장칭 등 중앙 문혁파들이 집단으로 징시빈관 앞에서 조반파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는 등 공격을 퍼부어 실제적 통제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2월 8일 화이런탕(懷仁堂 회인당)에서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하자’ 내용의 군사위원회 간담회를 열었다. 군 원로 쪽에서는 천이, 리푸춘, 예졘잉, 쉬샹쳰, 녜룽전, 탄쩐린 등이, 중앙문혁 소조 쪽에서는 천보다, 캉성 등이 참석했다. 양쪽은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해 다음날인 13일 오후에 다시 회의가 속개됐다. 예졘잉은 천보다를 가리키며 “당신들은 당을 어지럽히고 정부를 어지럽히고, 공장을 어지럽혔다. 당신들은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군대를 어지럽히려고 한다. 이렇게 해 당신들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맹렬하게 비판했다. 쉬샹쳰도 화가나 책상을 치며 천보다를 질책했다. 쉬샹쳰은 “군대는 무산계급 독재의 초석이다. 당신들이 이렇게 군대를 어지럽히면 이 지주를, 우리들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보호를)할 수 없지 않겠나? 콰아이다푸(蒯大富 괴대부), 이 인간이 군대를 지휘해 보았는가?”라고 따졌다. (주석 466)

 

 

이때 캉성이 “군대는 당신, 쉬샹쳰 것이 아니다. 당신이 뭐 대단하다고-” 비아냥거렸다. 얼굴을 붉히며 헤어진 이들은 16일 오후 화이런탕에서 다시 간담회를 열어 또 한 차례 격렬하게 충돌했다. 회의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탄쩐린이 장춘챠오에게 상하이 ‘1월 폭풍’ 때 상하시위원회 서기 천페이시엔(陳丕顯 진비현)의 권력을 멋대로 탈권한 문제를 들어 강도 높게 비판했다.

 

 

장춘챠오는 상하이 군중들과 상의해 처리했다고 대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노기충천한 탄쩐린은 곧바로 장춘챠오의 말을 끊고 “무슨 군중인가, 항상 군중은 당의 영도다! 항상 군중은 자기 자신을 해방하고, 자기 자신을 혁명한다. 무슨 헛소리를 하나. 이것이 형이상학이다! 장칭은 나를 반혁명으로 몰고 있다. 장칭은 내 면전에서 말했다- 나는 장칭을 위해 일을 하지 않는다. 나는 당을 위해 공작한다”고 대갈일성 했다. 탄쩐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신들끼리 하라, 나는 (공작을)하지 않겠다”며 회의장을 나가려고 했다. 이때 천이가 “나가지 마시오. 여기서 투쟁을 해야 합니다!”라고 만류했다. 천이는 이어 옌안정풍 때 자신과 저우언라이 총리가 조짐을 당했다고 분노를 털어놨다.

 

 

천보다와 캉성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예민한 옌안정풍 운동을 거론하는 것은 마오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천이의 옌안정풍에 관한 말을 ‘소설’로 풀어썼다. 회의가 끝난 뒤 장춘챠오 등은 장칭을 찾아가 회의 내용을 보고하고, 조작해 모함하는 자료를 만들어 마오에게 보고했다. 마오는 천이가 옌안정풍 문제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듣고 곧바로 얼굴 표정이 바뀌면서 “옌안정풍도 잘못된 것이라고? 또 왕밍(王明 왕명)이 돌아와서는 되지 않겠는가?”라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마오의 지시에 따라 2월 25일부터 3월 8일까지 화이런탕(懷仁堂 회인당)에서 간담회인 7차 ‘정치국 생활회’가 열렸다. 군부 원로 쪽에서는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자 부총리 겸 외교부장, 10대 원수인 천이(陳毅 진의), 부총리인 탄쩐린(譚震林 담진림), 전군 문혁소조 조장이자 10대원수인 쉬샹쳰, 부총리 리푸춘(李富春 이부춘), 부총리 리셴녠(李先念 이선념),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비서장이자 10대 원수인 예졘잉, 군사위원회 부주석이자 10대 원수인 녜룽전 등이 참석했다.

 

 

중앙 문혁소조 쪽은 장칭, 캉성, 천보다, 예췬, 장춘챠오, 야오원웬 등이 참가했다. 군의 안정을 수호하기 위해 저항해왔던 원로 그룹과 조반파를 동원해 군의 권력을 탈취하려는 린뱌오와 장칭 등 중앙문혁소조 그룹은 그동안 수없이 격렬한 투쟁을 벌여왔다. 이날 회의에서 마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장칭 등 문혁 소조원들의 맹렬한 공격은 독랄했다.

 

 

이들은 군 원로들의 저항을 ‘자산계급 복벽(復벽; 부활, 복귀) 역류(逆流)’라며 악다구니로 물고 뜯었다. 이쯤 되면 결판이 난 것이다. 이날 회의는 노(老) 원수 등의 원로들이 문화대혁명의 흐름을 역류시키려는 반혁명 행위라 하여 장칭 등은 ‘2월 역류(逆流)’라고 불렀다. ‘2월 역류’ 사건으로 중앙정치국의 활동이 정지되고 실제적으로 중앙문혁 소조가 정치국을 대신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됐다. 린뱌오와 장칭이 권력을 오로지하고, 문혁의 역풍을 맞은 천이 탄쩐린 쉬샹쳰 예졘잉 등 저항 원로들은 직책을 박탈당한 채 정치무대의 뒤안길로 하나 둘씩 사라졌다.

 

 

465) ‘文革’漩渦; 江靑搞亂軍隊, 老帥大發火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開國將帥‘文革’之痛; 周恩來下令築墻阻擋造反派 尹家民 ‘黨史博覽’ 人民網
466)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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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류샤오치 “난 영원히 마오를 반대하지 않는다!”

 

 

1967년 1월, 왕홍원(王洪文 왕홍문)을 우두머리로 하는 ‘상하이 노동자 혁명조반 총사령부(工總司 공총사)가 ‘1월 탈권(奪權)’투쟁을 막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13일 밤 마오는 인민대회당에서 류샤오치를 단독으로 만났다. 류샤오치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주석 467)

“첫째, 이번 노선의 과오는 나에게 책임이 있다. 많은 간부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특히 많은 노 간부들은 당의 귀중한 자산이다. 주요 책임은 내가 지겠다. 이른 시일 안에 광범하게 간부들을 풀어줘 당이 손실을 덜 받도록 해야 한다. 둘째, 국가주석,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마오쩌둥 선집’ 편집위원회 주임 직무 등을 사임하고,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옌안(延安 연안)이나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다.”

마오는 류샤오치가 이야기하는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연신 담배만 피웠다. 화를 내거나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면담을 끝낸 마오는 문 앞에서 류샤오치를 전송할 때 “잘 학습하고, 몸을 보중하기 바란다”고 고별인사를 했다. 마오의 후계자로 충실하게 마오를 보필했고, 1922년 9월 안위안루쾅(安源路礦) 탄광 파업 때 마오를 알게 돼 45년 동안 공산혁명을 함께 이끌어 온 류샤오치와 마오의 이날 만남은 마지막 작별이 됐다.

집에 돌아 온 류샤오치는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왕광미)에게 “주석이 나의 잘못을 비판하지 않았다. 대단히 겸손했다. 단지 군중이 발동됐다. 주석 자신도 통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즈음 류샤오치는 울분과 회한 속에 불면(不眠)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오를 만나는 전 날만해도 밤에 조반파들이 중난하이에 있는 류샤오치의 집 푸루쥐(福祿居 복록거)로 몰려와 대자보를 붙이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개(保皇狗 보황구)’라는 등의 욕설을 퍼붓고 가재도구를 내팽개치는 행패를 부렸다. 국가주석의 경비초소는 있으나마나였다. 류샤오치는 홍위병과 조반파들의 잇따른 난동과 관련해 저우언라이에 편지를 보냈다.

류샤오치는 “조반파들의 대자보를 보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고위급 동지들이 적으로 간주돼 걱정되고 불안하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류샤오치는 다음날 저우언라이가 보낸 짧은 답신을 보고 맥이 풀렸다. 편지에는 “당신은 잘 쉬면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기 바란다. 당신의 의견은 이미 마오 주석에게 보고했다”는 내용뿐이었다.

얼마 뒤 장칭의 사주를 받은 중난하이 정부기관의 조반파들이 또다시 류샤오치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다짜고짜 류샤오치 부부를 마당으로 내쫒고 사무실과 침실, 실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대자보와 큰 표어를 붙였다. 일부의 조반파는 백회가루 통을 들고 마당의 큰 벽돌담에 류샤오치를 타도한다는 내용 등의 글씨를 쓰고 다녔다. 이들은 국가주석도 안중에 없었다. 오만방자한 행태를 보이며 류샤오치와 왕광메이에게 질문을 하고 타도구호를 외쳤다. 류샤오치가 질문에 대답을 하면 “불성실하다, 허튼소리다, 교활한 궤변이다, 악의에 찬 언동이다”라고 비난했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이치에 맞지 않아 말을 못한다, 묵비권으로 저항한다”고 트집을 잡는 등 생떼를 부렸다.

어떤 조반파가 “류샤오치는 마오 주석에게 머리를 숙여 사죄하라”는 구호를 외치자 류샤오치의 머리를 강제로 굽히고 린치를 가하는 ‘제트기 태우기’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조반파들은 왜 마오 주석에 반대하는냐며 끈질기게 괴롭혔다. 류샤오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나는 이미 마오 주석에 대해 여러 차례 말했다. 나는 과거에도 반대하지 않았고, 현재에도 반대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마오 주석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주석 468)

조반파들은 왕광메이를 거칠게 공격했다. 이들은 “당신은 동남아를 방문했을 때(류샤오치의 국빈방문) 왜 치파오(旗袍 기포; 다리 옆줄이 터진 중국여성의 전통의상)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목걸이를 했는가”라며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을 퍼부었다. 왕광메이는 결연하게 “나는 이런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응수했다. 왕광메이가 당당하게 말하자 열 받은 조반파들은 “자산계급 분자 왕광메이를 타도하자”고 일제히 소리쳤다. 이들은 뒤에 있는 조반파들이 비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이유로 다리가 하나뿐인 화분 받침대 위에 왕광메이를 올려놓고 조롱하며, 욕설을 퍼붓고 모욕을 가했다.

 

 

칭화대학 홍위병들은 4월 10일 왕광메이를 중난하이 복록거 집에서 붙잡아 칭화대학으로 끌고 가 오전 6시 반부터 밤 10시 넘어 까지 장장 16시간에 걸쳐 적발 비판대회를 열었다. 왕광메이를 질투한 장칭의 사주였다. 장칭은 왕광메이가 국가주석의 부인으로 해외 순방을 할 때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질투하고 시기해 왔었다. 홍위병들은 왕광메이에게 치바오를 강제로 입히고 탁구공으로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어 놓고 욕설을 퍼붓고, 모욕을 가하는 등 온갖 패악을 저질렀다.

7월에 들어 류샤오치에 대한 공격은 더욱 거칠어 졌다. 거의 매일이다 시피 조반파와 홍위병들이 쳐들어와 비판대회를 열고 류샤오치에 대한 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왕광메이를 인근의 다른 건물에 격리시켰다. 방안에 홀로 감금당한 류샤오치는 한 집에 있는 아이들도 만날 수 없었다.

이처럼 류샤오치, 덩샤오핑에 대한 홍위병과 조반파들의 공격은 지난해 8월 7일 마오가 쓴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가 중앙전회 문 입구에 나붙은 뒤 본격화했다. 린뱌오는 그 해 10월 1일 건국절 17주년 경축 군중대회에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마오 주석을 대표하는 무산계급 혁명노선과 자산계급 반동노선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끼어 얹었다.

린뱌오의 이런 선동적 연설은 류샤오치, 덩샤오핑의 노선을 자산계급 반동노선으로 규정해 홍위병과 조반파들은 적개심을 불태우며 류-덩 공격에 핏발을 곤두세웠다. 장칭(江靑 강청)은 10월 6일 베이징홍위병 제3사령부가 주최해 10만 명이 참석한 ‘전국 재경 혁명 선생-학생의 자산계급 반동노선에 대한 맹렬한 공격 궐기대회’에서 “나는 당신들의 이런 두려움이 없는 무산계급 혁명에 대한 영웅적 행위를 지지한다”고 선동했다. 대회는 ‘자산계급 운동노선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자’라는 결의문을 채택해 전국에 호소하는 전보를 발송했다. (주석 469)

당 중앙 조직부가 11월 2일 처음으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질책하는 대자보를 붙인 것을 신호탄으로, 톈안먼(天安門 천안문) 앞거리 곳곳에 류와 덩을 타도하라는 대자보가 홍수를 이루기 시작했다. 대자보는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타도하는 것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제1목표”라고 써 붙여 전 세계에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실각이 알려지게 되었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 타도의 배후세력은 ‘중앙문혁’이었다.

중앙문혁 부조장 장춘챠오는 12월 18일 칭화대학의 홍위병 우두머리인 콰이다푸(蒯大富 괴대부)를 중난하이로 불러 2시간에 걸쳐 밀담을 나눴다. 장춘챠오는 “전국적으로 말하면 자산계급 반동노선은 여전히 상당할 정도로 발호하고 있다. 지금 더욱 강도 높게 자산계급 반동노선을 비판해야 한다. 중앙에서 제기하고 있는 반동노선의 그 한, 두 사람이 지금까지 투항하지 않고 있다. 자네들 혁명 소장(小將; 홍위병)들은 연합해 혁명정신을 철저하게 발휘하여 물에 빠진 개를 때려잡아야 한다. 그들을 완전 매장시켜야지 중도에서 포기하면 안 된다”고 사주했다. 콰이다푸는 중앙의 한, 두 사람이 국가주석 류샤오치와 당 총서기인 덩샤오핑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467) 1967年劉少奇與毛澤東最後的訣別;後者內心蘊藏巨大苦衷 重慶晩報 人民網
王光美回憶; 劉少奇與鄧小平最後1次對話 時政頻道 新華網

‘文革’中劉少奇爭辯; 林彪江靑都反過主席, 我從來沒反過 人民網-文史頻道
468) ‘文革’中劉少奇爭辯;林彪江靑都反過主席, 我從來沒反過 人民網-文史頻道
劉少奇抑制滿腔的怒火; “我永遠不反對毛主席” 人民網-文史頻道
469)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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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문혁 피로감·무장투쟁 확산… "3년 안에 끝낸다" 선언

 

 

음울한 날씨에 북풍이 몰아치는 12월 25일 오전 칭화대학 5천여 명의 선생과 학생, 교직원과 노동자들이 칭화웬(淸華園 청화원)을 출발해 호호탕탕한 기세로 거리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톈안먼 광장에 도착해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대표로 하는 자산계급 반동노선을 철저하게 타도하자는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집회를 마친 뒤 왕푸징(王府井 왕부정), 시단(西單 서단), 베이징 역 등 번화한 시내를 돌아다니며 대자보를 붙이고 전단을 뿌리며 구호를 외쳤다. 순식간에 베이징의 크고 작은 거리에 ‘타도 류샤오치!’, ‘타도 덩샤오핑!’, ‘류-덩과 끝까지 혈전을 벌이자!’ 등의 대자보가 지천으로 나붙었다.

 

 

톈안먼 성루에도 빼곡하게 들어찼다. 한 해가 넘어갈 즈음에는 ‘중앙문혁’이 조종하는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에 대한 타도광풍이 전국적으로 더욱 거세게 번져 그 누구도 제어하거나 반대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해가 바뀐 1967년 3월 유명 민주인사인 장스자오(章士조 장사조)가 마오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냈다. (주석 470)

 

 

“신중국 건국이후 국가가 번창하고 발전했다. 모두가 공산당의 영명한 영도 덕택이다. 마오, 류(샤오치)의 단결은 공산당 영도핵심의 굳건한 보증이다. 만약에 류샤오치 동지가 확실하게 잘못을 범했다면, 바라건대 마오, 류 두 사람이 진심으로 대하고, 잘 이야기해 류가 반성하도록 했으면 한다. 류샤오치를 타도해서는 안 된다.”

 

 

마오는 3월 10일 보낸 답신에서 “대국적으로 볼 때 서로 같은 마음이지만 다른 사람(류샤오치)의 정황이 복잡하다. 일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귀하께서 천천히 생각해보는 게 나을 듯하다”고 밝혔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는 21일 류샤오치가 20년대 체포됐을 때의 자료를 부인인 ‘왕광메이(王光美 왕광미) 전담 조사반’에 넘겨 중앙문혁 부조장 장칭과 고문 캉성, 공안부장 셰푸즈(謝富治 사부치) 등이 통제하는 ‘류샤오치-왕광메이 전담 조사반’을 구성했다.

 

 

마오는 23일 중앙문혁 조원인 치번위(戚本禹 척본우)가 쓴 ‘애국주의냐 매국주의냐’의 글을 수정한 뒤 “읽어보니, 아주 잘 쓴 글”이라고 칭찬했다. 이 글은 실명을 거론하지 않고 “당내 최대의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 “흐루시초프 같은 야심가와 음모가”라고 썼지만 누가 보아도 류샤오치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중앙문혁은 이 글을 ‘훙치(紅旗 홍기)’ 잡지와 인민일보 등 신문에 실어 류샤오치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더욱 높여 갔다.

 

 

67년 6월 이후 전국 각지에서 조반파들이 공안기관이나 군부대의 무기고를 습격해 기관총, 수류탄 등의 무기와 탄약을 대량으로 탈취해 무장을 하고 극열한 탈권(奪權)투쟁에 나섰다. 조반파들은 정부기관과 군부대를 공격하는가 하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조반파 조직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등 곳곳에서 유혈충돌이 발생해 내란상황을 방불했다.

 

 

후난성(湖南省 호남성) 우한(武漢 무한)에서 4월 19일부터 무장충돌이 잇따르면서 6월 6일에는 창사(長沙 장사)에서 무력투쟁이 벌어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어 6, 7월엔 장시성(江西省 강서성) 깐저우(竷州 감주)에서도 유혈충돌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생겨나고, 교통이 두절되는 등 후난, 후베이(湖北 호북), 허난(河南 하남) 등지의 치안상황이 극도로 악화돼 긴장을 고조시켰다.

 

 

당시 후난성 부성장인 저우스자오(周世교)는 마오의 후난 제1사범학교 동기 동창의 친한 사이였다. 저우스자오는 무장충돌이 잇따라 발생해 치안상황이 통제 불능에 이르자 중앙정부 차원에서 해결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 베이징으로 올라와 마오를 만났다. 저우스자오는 창사에서 발생한 ‘6.6 참상’ 사건을 보고하고 무장투쟁을 막아줄 것을 건의했다. 마오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의식형태 영역에서 진행되는 하나의 대혁명이다. 이것은 광대한 인민군중에 대해 정치교육을 진행하는 운동이다. 싸움을 하거나 더욱이 무장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소극적 반응을 보였다. (주석 471)


“문제는 현재의 무장투쟁 상황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데 있습니다. 주석!”

저우스자오는 마오가 명령해 이런 혼란한 상황을 막아주기를 바랐다.

 

“무장투쟁 현상은 마땅히 제지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의 내부에 근본적인 이해충돌은 없다. 무산계급 독재아래에서 노동자 계급의 내부가 분열해 양대 세력이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는 더욱 있을 수 없다.”

“후난의 상황은 비교적 복잡하다. 무장투쟁의 주요 정황이 노동자 계급 내부에 있지 않고, 그리고-”

“나도 알고 있다. 후난의 군중조직은 대단히 많다. 이런 조직들이 합쳐 양대파를 형성했다. ‘가오스(高司 고사)’와 노동자 연합인 ‘공롄(工聯 공련)’이다. ‘가오스 파’는 후난의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군중조직이다. 그 중에는 선생들도 있고 고등학교 학생과 소수의 노동자, 기타 군중들이 참여하고 있다. 내가 알기에 (당정)기관의 간부들이 참가해 이 조직의 대다수를 장악하고 있다. ‘공롄’은 공장의 노동자를 주체로 한 군중조직이다. 조직의 주요 구성원은 노동자들이다. ‘가오스’의 구성원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대학생, 고등학생과 일단의 기관 간부들이 참가하고 있다. 맞지요?”

 

 

저우스자오가 머리를 끄덕이자 마오는 “가오스 파가 됐든 공롄 파가 됐든 이들은 모두 혁명 군중조직이다. 가오스의 군중기초는 학생이다. 학생은 혁명의 선봉대다. 공롄 파의 군중기초는 노동자다. 노동계급은 혁명 영도계급이다. 양자는 각자의 결점과 과오를 말하고 비판해 대동(大同)을 구하고 조그만 차이(小異 소이)를 인정해야 한다. 양파는 모두 혁명의 군중조직으로 혁명의 원칙아래 대연합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오는 7월 13일 오후 인민대회당에서 린뱌오, 저우언라이, 중앙문혁 소조 간담회 구성원과 군사위 정치부 주임 샤오화(蕭華 소화), 총참모장 대리 양청우(楊成武 양성무) 등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마오는 “문화대혁명의 군중발동 단계는 지나갔다”면서 “1년은 (문혁을)시작하면서 넓혔고, 2년은 희망을 보면서 기초를 다졌다. (3년차인) 내년에 끝낸다. 이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이다”라고 선언했다. (주석 472)

 

 

마오는 ‘문혁’을 3년 안에 끝나겠다는 생각을 이날 처음 밝혔다. 마오의 이런 결심은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 자신이 걸림돌이라고 여긴 ‘주자파’들의 영도들을 실각시켰고, 당정군 기득세력과 군중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운 만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무장투쟁으로 까지 확대돼 극도로 혼란한 무정부적 사회질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데다 ‘문혁의 피로감’을 해소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마오는 문혁을 3년 안에 끝내려고 했으나 이제는 ‘문혁’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 부메랑이 되어 무서운 형세로 발전하고 있었다.

 

 

470)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71)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72)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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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우한' 마오의 중재에도 극한 대립…7·20 사건

 

마오는 이어 무력투쟁이 격화하고 있는 후베이와 후난을 현장 시찰하겠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회의 참석자들은 마오가 우한에 가는 것을 반대했다. 우한의 무력투쟁 양상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어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한은 우한 군구사령관 천자이다오(陳再道 진재도)가 지지하고 있는 당정군, 일부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백만 정병(百萬雄師 백만웅사)’과 린뱌오와 장칭이 지원하는 조반파 노동자들이 주축인 ‘노동자 총부(總部)’ 사이에 무장충돌이 밤낮없이 벌어져 긴박한 상황이었다. 마오는 “혼란을 겁내지 않는다. 나는 간다. 양청우는 나와 함께 간다”고 말한 뒤 왕둥싱(王東興 왕동흥)에게 즉시 전용열차를 준비하도록 지시하고, 베이징 군구 부사령관 쩡웨이산(鄭維山 정유산)이 수행토록 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신변안전을 위해 미리 비행기 편으로 우한으로 떠났다. 마오는 7월 14일 오전 3시 전용열차로 베이징을 출발해 밤 9시 우한에 도착했다. 마오에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곳곳에 붙어있는 천자이다오를 타도하자는 ‘따다오 천자이다오(打倒 陳再道 타도 진재도)’의 큰 표어였다. 우한 군구사령관 겸 후베이성(湖北省 호북성) 사령관인 천자이다오는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중웬(中原 중원)탈환을 위해 다비예산(大別山 대별산)으로 진군했을 때 주력 중의 하나인 제2군단 사령관을 지냈다. (주석 473)

천자이다오는 성품이 바르고 곧으며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는 인물로 꼽혔다. 저우언라이가 2월에 우한에 왔을 때 천자이다오는 3가지 일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나는 중앙정부의 방침에 따라 혁명을 다잡으며 생산을 촉진하고, 둘째는 생업을 챙기면서 체계적인 혁명대연합을 추진하고, 셋째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업을 통해 혁명사상을 고취할 수 있도록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우한 군구 안팎에 있던 조반파들이 급진적 좌경사상을 퍼뜨리며 가택수사, 무기탈취, 무력투쟁 등을 선동했다. 천자이다오는 3월 21일 우한의 최대 조반파 조직인 ‘노동자 총부(總部)’에 대해 해산명령을 내리고, 그들이 잡아간 지방간부들을 석방할 것을 촉구하는 ‘통고(通告)’를 발표했다.

 

 

이런 우한 군구의 조처에 불만을 품은 조반파들은 4월 6일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는 ‘3월 역류(逆流)’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조반파들은 천자이다오가 중앙의 ‘2월 역류’ 때 탄쩐린(譚震林 담진림)처럼 반혁명적 행위를 한다며 우한의 탄쩐린, 즉 ‘우라오탄(武老譚 무로담)’으로 규정하고 타도에 나섰다. 린뱌오와 장칭의 사주를 받은 ‘노동자 총부’ 조반파들은 천자이다오가 류보청-덩샤오핑 군단의 중원작전에 참여한 것을 들어 ‘류보청-덩샤오핑’ 노선을 싸잡아 공격했다. 이에 맞서 천자이다오를 지지하는 ‘백만 정병’이 ‘노동자 총부’를 공격하는 등 두 파가 시도 때도 없이 무력투쟁을 벌여 우한은 급속히 내란상황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렇게 극도로 혼란한 때에 마오가 우한에 온 것이다.

우한에 먼저 내려온 저우언라이는 우한 교외 둥후(東湖 동호)에 있는 공군 초대소인 둥후빈관(東湖賓館 동호빈관)의 매이링(梅嶺 매령) 1호를 마오의 숙소로 잡았다. 저우는 둥후빈관 바이화(百花 백화) 1호, 쓰촨성 청두(成都 성도)에서 공작을 끝내고 마오에게 보고하기 위해 우한에 온 공안부장 셰푸즈(謝富治 사부치), 중앙문혁 소조원 왕리(王力 왕력)는 바이화 2호에 각각 방을 정했다.

천자이다오와 우한군구 정치위원인 중한화(鍾漢華 종한화)는 마오의 경비를 위해 둥후빈관 별관에 묵기로 했다. 마오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느꼈다. 둥후빈관의 복무원 등 공작원들도 두 파로 쫙 갈라져 서로가 협조를 하지 않아 객실도 엉망진창이었다. 저우가 미리 점검해 마오가 묵을 방을 가까스로 청소하고 복무원들이 공동으로 일할 수 있도록 수습을 했다.

마오는 18일 밤 우한군구 사령관 천자이다오, 정치위원 중한화를 자신이 묵고 있는 방으로 불러 상황을 보고 받았다. 이 자리에는 저우언라이, 린뱌오 파의 셰푸츠, 해군 제1 정치위원인 리줘펑(李作鵬 이작붕), 장칭 파의 왕리(王力 왕리), 그리고 마오를 수행한 양청우, 왕둥싱, 쩡웨이산, 위리진(余立金 여립금) 등이 모였다. 마오는 셰푸즈, 왕리, 위리진에게 “당신들은 더 많은 공작을 해야 한다. (우한)군구를 옹호하도록 조직해야 한다. 타도해서는 안 된다. 성명을 발표하기 전에 쌍방 모두 회의를 열어 발표해 단결하도록 해야 한다. 모두 노동자다. 이쪽 파가 우(右)고, 저쪽 파가 좌(左)냐? 우리들 이 초대소도 두 파로 갈라져 있다. 앞으로 모두 합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석 474)

마오는 천자이다오, 중한화에게 “현재 주요한 것은 군대와 ‘백만 정병’에 대한 공작이다. 빨리 바꿔야지 그렇지 않으면 피동적이 된다. 하나, 중앙이 책임이 있다. 둘, 당신들도 책임이 있다. 군대가 ‘백만 정병’을 지지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것은 군대의 군중문제다. ‘백만 정병’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다수는 좋은 사람들이다. 개별적으로 나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마오가 천자이다오, 중한화를 배웅하기 위해 회랑으로 나왔을 때 초대소 복무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마오는 이들을 불러 천자이다오, 중한화와 악수하도록 권했다. 마오는 웃으면서 복무원들에게 “다시는 당신들의 사령관을 타도해서는 안 된다. 나도 그를 타도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오는 천자이다오에게 “그들(노동자 총부)이 자네를 타도하려 하면, 내가 그들이 자네를 타도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천자이다오에게 힘을 실어줬다. 사태가 잘 풀려 나가는 모양새를 보였다.

저우언라이는 19일 이른 아침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낙관적인 상황은 하루 만에 뒤집어 졌다. 린뱌오와 장칭파인 셰푸즈와 왕리가 사태를 악화시키는 기폭제 구실을 했다. 셰푸즈와 왕리는 19일 오전 ‘노동자 총부’의 거점인 우한 수리전력 학원의 총부를 찾아가 조반파의 완장을 차고 무력투쟁을 벌이다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문했다. 이어 열린 대회에서 왕리는 이들을 ‘강철대오의 무산계급 혁명파’라 부르며 “당신들은 억압을 받고 있다. 타격을 받은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현상을 바꿔야 한다”고 선동했다. ‘노동자 총부’ 조반파는 왕리가 연설한 내용을 녹음해 확성기를 탑재한 차를 타고 시내 곳곳을 누비며 틀어댔다. 왕리의 ‘4가지 지적’, “군구의 좌파 지지의 큰 방향이 틀렸다. ‘노동자 총부’에 대한 억울한 조처를 바로잡아야 한다. 조반파는 혁명좌파다. ‘백만 정병’은 보수조직이다”라고 한 연설내용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격노한 ‘백만 정병’들은 왕리를 규탄하는 대자보를 거리 곳곳에 붙이고 타도대회를 열었다.

‘백만 정병’의 2백여 명의 대표들은 7월 20일 새벽 왕리가 투숙하고 있는 둥후빈관 바이화 2호로 쳐들어갔다. 이들은 왕리가 나와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 천자이다오와 셰푸즈가 나와 이들에게 오후에 접견하기로 약속하는 등 설득해 돌아갈 무렵 또 다른 수백 명의 ‘백만 정병’ 군인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흥분한 나머지 상관인 천자이다오를 구타하고 방 안으로 난입해 숨어있던 왕리를 붙잡아 군구 앞마당으로 끌고 가 비판대회를 열었다. 이들 ‘백만 정병’ 군인들은 마오가 둥후빈관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매이링 1호에 있던 마오가 사건의 자초지종을 보고 받은 뒤 천자이다오에게 왕리를 데려오도록 명령했다. 천자이다오가 왕리를 구출해 둥후빈관으로 돌아왔다.

시시각각 우한으로부터 급박한 상황을 보고받고 있던 베이징의 중앙 영도부들은 바짝 긴장했다. 린뱌오와 장칭은 연명으로 상황을 과장해 겁주는 투의 편지를 마오에게 썼다. "우한의 형세가 좋지 않다. 마오 주석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빨리 이동해야 한다" 는 내용이었다. 린뱌오와 장칭은 이 편지를 린뱌오의 심복인 군사위원회 총후방부(總後勤部 총후근부) 부장 치우후이줘(邱會作 구회작)에게 준 뒤 급히 우한으로 내려가 마오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저우언라이도 마오의 안전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다시 우한으로 갔다. 이날 오후 우한에 도착한 치우후이줘는 마오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다른 지방으로 이동할 것을 권유했다. 상황이 대단히 심각하다고 판단한 마오도 천자이다오에 대한 회의(懷疑)와 ‘백만 정병’의 ‘폭란(暴亂)’을 우려해 우한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문혁의 무력투쟁 상황에서 마오가 몸을 피한 이른바 ‘7.20사건’이다. (주석 475)

473) 毛澤東生平全 紀錄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中央文獻出版社
474)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75)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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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정권 농단 ‘문혁 4인방’ 중 한 명 왕홍원의 등장

 

마오는 21일 오전 2시 둥후빈관을 출발해 비행장에 도착한 뒤 오전 11시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떠났다. 비행기 탑승을 꺼리는 마오가 이날 비행기를 탄 것은 1958년 이후 9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일 상하이에 도착한 마오는 24일 밤 수행한 양청우(楊成武 양성무)와 우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양청우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476)

 

“자네는 과거에 천자이타오(陳再道 진재도)를 알았나? 어떤 사람인가?”
“이전에는 몰랐고, 해방 후에 알게 됐습니다. 사람이 좋아 우리들과의 관계도 좋습니다.”
“자네는 우한 사태에 어떤 방법이 있다고 보나? 그가(천자이다오) 나를 반대하는 것인가?”

“주석, 누구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옛 홍군, 옛 간부, 옛 당원, 일반 백성들 모두 주석을 큰 구원의 별로 보고 있습니다. 군대에 있는 옛 동지들 모두 주석과 혁명을 했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천자이다오도 나를 반대하는 게 아니야. 만약에 천(천자이다오), 중(중한화)이 나를 정리하려 했으면 우리들이 우한을 빠져나올 수 없었을 걸세!”


양청우는 이때 마오가 이틀간 냉철하게 숙고해 우한 군구 영도에 대한 해결방법을 비교적 실제에 맞도록 해법을 찾았다고 회상했다. 양청우는 마오에게 다시 한 번 “그들이 주석에게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마오는 “맞아! 맞아! 맞아!”라고 흐뭇해하며 잇따라 “맞아(對 대)!”를 3번 말했다고 한다.

“천자이다오는 (지금)어디에 있나? 중한화, 니우(牛 우) 사단장, 차이(蔡 채) 정치위원은 모두 어디에 있나?”
“정확히 모릅니다.”
“자네는 저우 총리에게 천자이다오, 중한화, 니우 사단장, 차이 정치위원 모두를 (베이징의)징시빈관(京西賓館 경서빈관)으로 불러 만나도록 하라고 말하게. 천자이다오에게 3마디, 하나, 잘못을 자아비판하고 둘, 학습에 유의하고 셋, 안전에 주의하도록 전달하라고 말하게.”

 

마오는 다음날 중앙을 대신해 우한군구 당위원회에 보내는 문서를 기초해 전보로 보냈다. 마오는 전보에서 “엄중한 과오를 저지른 간부, 자네들과 광대한 혁명 군중을 포함해 천자이다오 동지를 타도한 사람들에 대해 다시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하고, 진심으로 바르게 고치도록 하라. 아울러 광대한 혁명 군중들의 양해아래 일어나 혁명대열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린뱌오와 장칭은 ‘7.20 사건’을 ‘철두철미한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하고 천자이타오를 ‘괴수(魁首)’로 지목해 죽이려 했다. 그러나 마오가 전보에서 천자이다오를 ‘동지(同志)’로 표현해 천자이다오의 목숨을 살리는 보호막이 됐다. 천자이다오는 회고록에서 “만일 마오쩌둥 주석이 쓴 ‘동지’라는 이 두 글자가 없었더라면 린뱌오 일당이 우리들을 죽이려 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쉬웠을 것”이라고 서술했다.

 

마오는 1개월 뒤 양청우 등과 이야기를 하면서 우한에서 ‘노동자 총부’를 선동해 ‘7.20 사건’을 야기한 장칭파의 왕리(王力 왕력)를 비판하고, 왕리에게 자아비판을 하도록 지시했다. 1967년 8월 25일 오전 1시 저우언라이는 상하이에서 온 양청우와 최근 발생한 장칭파의 중앙문혁 소조원 왕리의 ‘8.7발언’과 관펑(關峰 관봉)이 기초해 ‘훙치(紅旗 홍기)’에 실은 ‘군내의 한 줌을(수정 자본주의자) 적발 비판하자’의 글 등 일련의 사건에 대한 해결방법에 관해 이야기 했다.

저우는 이들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극좌 사조의 범람으로 인한 연쇄반응을 우려하며 관펑이 쓴 글을 마오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왕리의 ‘8.7 발언’은 왕리가 8월 7일 외교부 조반파들에게 국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인 천이(陳毅 진의)를 적발 비판대회에 끌고 나가 비판하도록 선동한 내용이다. 왕리의 선동으로 외교부에 대한 ‘탈권 투쟁’이 본격화하고 급기야는 8월 22일 밤 외교부 조반파와 홍위병들이 치외법권 지대인 영국의 공관에 쳐들어가 방화해 건국 이래 최대의 심각한 외교문제로 비화됐다. 양청우는 이날 오전 상하이로 돌아가 마오에게 저우언라이의 전언을 전달했다. 양청우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477)

“마오쩌둥 주석은 (보고를)들으면서 연신 담배를 피웠다. 말도하지 않고 물어보는 일도 없었다. 보고가 끝나자 마오 주석은 ‘청우야! 자네 피곤하겠다. 먼저 돌아가 쉬어라! 내가 자료를 살펴보고 숙고를 해보겠다. 일이 있으면 자네를 찾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마오 주석이 ‘자네가 즉시 베이징에 갈 수 있도록 비행기 편을 알아보고 준비가 되는대로 다시 오라고 말했다.”

“베이징으로 갈 준비를 끝내고 주석을 찾아갔다. 마오 주석은 나에게 구술을 하며 받아 적도록 했다. 마오는 ‘왕(왕리), 관(관펑), 치(치번위)는 문화대혁명을 파괴했다. 좋은 사람이 아니다. 자네는 총리 한 사람에게 총리가 책임을 지고 그들을 체포하라고 보고하라’고 말했다. 마오 주석은 기록을 훑어본 뒤 ‘자네는 돌아가 이렇게 총리에게 즉시 처리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응접실을 나왔을 때 마오 주석이 불러 세웠다. 주석은 ‘고려할 것이 있다. 치(치번위)는 잠시 놔두고 자아비판을 시키도록 하라’고 말했다.”


양청우는 정오께 베이징에 도착해 곧바로 댜오위타이(釣魚臺 조어대)로 달려가 저우언라이를 단독으로 만나 마오의 결정을 전달했다. 저우언라이는 결심을 한 뒤 일이 늦지 않도록 곧바로 회의를 열었다. 그날 밤, 댜오위타이에서 저우언라이의 주재로 중앙의 소형 간담회가 열렸다. 천보다, 캉성, 장칭 등이 참석했다. 저우언라이가 오늘의 회의는 마오 주석의 중요 결정을 전달하는 회의다. 그는(저우언라이) 한 글자 한 문구씩 마오의 지시를 낭독했다. 뒤이어 왕리, 관펑을 체포해 격리시켰다. 나중에 마오의 1차 회의의 지시에 따라 치번위를 체포했다.”

중앙문혁 소조원인 왕리(王力 왕력), 관펑(關峰 관봉), 치번위(戚本禹 척본우) 3명은 문혁이 시작된 뒤 조반파가 극단적 행동을 취하도록 사주하면서 온갖 패악을 저지르는 데 선봉구실을 했다. 특히 왕리는 우한에서 조반파를 선동해 사태를 악화시킨 장본인이지만 베이징에 돌아온 뒤 장칭과 린뱌오파의 대대적인 환영으로 영웅대접을 받은바 있었다. 마오가 이들을 체포해 격리 심사하는 조처를 취하면서 장칭(江靑 강청)과 중앙문혁 소조는 큰 타격을 입었다.
 
한편 마오가 허겁지겁 상하이로 피신했을 때 왕홍원(王洪文 왕홍문)에게는 일생일대의 ‘벼락출세’의 기회가 되었다. 왕홍원은 이때 30여만 명의 노동자들을 동원해 긴 창과 곤봉으로 노동자들을 무장시켜 트럭, 지게차, 소방차를 타고 다니며 상하이시 혁명위원회 ‘노동자 혁명조반 총사령부(工總司 공총사)’에 반대하는 세력을 깨부수고 있었다. 마오는 한 밤중에 완전무장한 차를 타고 상하이 와이탄(外灘 외탄) 거리를 순시한 적이 있었다. 마오는 노동자들이 손에 긴 창을 들고 무장한 채 안전모를 쓰고 상하이시 혁명위원회 문 앞을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상하이 형세가 우한(武漢 무한)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노동자 조반파들이 상하이를 완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흐뭇해했다.

마오는 장춘챠오에게 상하이 민병(民兵)을 다시 조직해 10만 명을 무장시키도록 지시했다. 장춘챠오는 총기무장을 타진했으나 마오는 곤봉 등으로 무장하도록 했다. 장춘챠오는 마오가 특별히 노동자 조직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고 상하이 텔레비전에 노동자들의 프로그램을 방영하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텔레비전에서 왕홍원이 비판대회에서 총결발언을 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보았다. 장춘챠오는 마오가 상하이 노동자 계급에 의존하려는 뜻을 간파하고 왕홍원과 ‘공총사’를 자신의 출세 수단으로 삼을 계책을 짰다. 장춘챠오는 마오에게 왕홍원의 ‘홍색(紅色; 공산주의) 경력’을 설명했고, 마오는 대단한 흥미를 보였다. (주석 478)

이를 계기로 왕홍원은 다음 해 건국절인 1968년 10월 1일 당 중앙과 국무원이 초청한 전국 노동자와 노동자 선전대의 대표들이 베이징에 왔을 때 상하이 대표단을 이끌고 중난하이에서 묵게 되었다. 왕홍원은 한 밤에 많은 노동자 대표들 가운데 유일하게 마오쩌둥을 단독으로 접견하는 ‘행운’을 얻었다. 마오의 배려였다. 톈안먼 광장에서 건국절 행사를 끝내고 분열식을 할 즈음 장춘챠오는 왕홍원을 톈안먼 성루의 귀빈실로 데리고 갔다. 장춘챠오는 마오가 중앙의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왕홍원만 남겨 둔 채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했다. 마오는 왕홍원을 곁에 있는 린뱌오에게 소개시켰다. 마오는 이곳에서 왕홍원을 접견하면서 직접 왕홍원의 경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건국절 참관행사가 끝난 뒤 상하이 대표단들은 상하이로 돌아갔지만, 마오는 왕홍원을 베이징에 잔류시켜 10월 13일부터 열리는 확대한 중앙8기12중전회에 참관인으로 참석하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전체회의에서 왕홍원을 표창하고, 120만 명의 노동자가 국면을 장악하고 있는 상하이가 베이징 보다 강하다고 말하면서 왕홍원을 한껏 추켜세웠다.

마오는 10월 31일 폐막식에서 회의 참석자들에게 왕홍원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마오는 “저사람(왕홍원)이 ‘공총사’ 책임자고, 상하이시 혁명위원회 위원”이라고 소개한 뒤 왕홍원이 이끈 ‘안팅(安亭 안정)사건’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왕홍원은 일약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상하이로 돌아 온 왕홍원은 마오와 함께 찍은 사진을 상하이 전람관에 전시해 환골탈태한 자신의 위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마오가 이처럼 왕홍원을 중시하자 장춘챠오는 곧바로 상하이시 혁명위원회 서열을 조정해 자신과 야오원웬의 뒤 서열인 3위에 올려 왕홍원이 서열 3위라는 “왕라오싼(王老三 왕로삼)”으로 불렸다. 어쨌든 이런 마오의 운명적 지우를 얻은 왕홍원은 나중에 마오의 3번째 후계자가 되고, 상하이방인 장칭, 장춘챠오, 야오원웬과 악명 높은 ‘4인방(四人幇)’을 형성해 문혁을 이끌면서 정권을 농단하게 되었다.

476)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77)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78) 毛澤東選過三個接班人, 最後一個爲何是沒資歷的王洪文?  舒 云   ‘黨史博覽’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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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죽음의 문턱서 류사오치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

 

1967년 8월 5일 300만 명에 이르는 홍위병들이 톈안먼 광장에 구름처럼 몰려들어 사람의 바다를 이루었다. 홍위병들은 류샤오치-덩샤오핑 타도대회를 열었다. 이 장면은 전국에 방영됐다. 일단의 홍위병들과 조반파들은 중난하이로 몰려가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에 대한 적발 비판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비판대로 류샤오치와 왕광메이를 끌고나왔다. 류샤오치를 2시간에 걸쳐 ‘제트기를 태우는’ 등 고문과 폭행도 서슴지 않아 병고에 시달리는 류샤오치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류샤오치는 홍위병과 조반파들에게 필사적인 저항을 하며 절규했다.(주석 479)

 

“제군들이 나 개인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중화 인민공화국 주석의 존엄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군들의 행동은 자기 나라를 모욕하는 것이다. 나도 한 사람의 공인이다. 왜 나에게 얘기를 못하게 하는가? 헌법은 전공민(全公民)에게 인격권이 침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장하고 있지 않은가? 헌법을 파괴하는 것은 엄한 제재를 받아야 한다.”

 

이 광경은 류샤오치의 어린 자녀들도 보게 되었다. 부모를 비판하도록 강요당해 온 자녀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처참하게 일그러진 모습의 부모를 바라보며 가슴을 쥐어뜯어야 했다. 국가주석에 대한 모욕과 패악은 개인 류샤오치 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엄에 대한 모독이자 패륜행위, 그 자체였다.

 

최소한의 인권마저 팽개친 인민의 존재를 부정한 슬픈 초상이었다. 국가원수인 국가주석 류샤오치의 권위와 위엄은 깡그리 무너지고 말았다. 덩샤오핑 부부도 이날 비슷한 수난을 당했다. 홍위병과 조반파들은 덩샤오핑과 부인 줘린(卓琳 탁림)을 마당으로 끌어내 격렬하게 비판했다. 조반파들은 덩샤오핑과 줘린을 강제로 허리를 굽히게 하고 머리를 숙여 죄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등 온갖 욕설을 퍼붓고 모욕을 가하는 행패를 부렸다.

 

덩샤오핑과 줘린은 이후 자녀들과 헤어져 중난하이 집에 연금돼 비판을 받으며 린뱌오와 장칭의 감시를 받게 됐다. 베이징대학 기술물리학과 4학년에 다니던 덩샤오핑의 큰 아들 덩푸팡(鄧朴方 등박방)은 1968년 8월 조반파 학생들이 부친인 덩샤오핑에 대한 비판을 강요하며 폭력을 휘두르자 이에 대한 항의수단으로 학교건물에서 뛰어 내렸다. 덩푸팡은 목숨은 건졌지만 척추를 다쳐 평생 장애인이 되었다.

 

‘류샤오치-왕광메이 전담 조사반’은 장칭의 직접 통제아래 1967년 5월부터 1968년 10월까지 ‘류샤오치의 변절문제’ 조사에 전력투구했다. 전담 조사 조장인 셰푸즈는 “대반역자 류샤오치 사건은 주요 공작 모두를 장칭 동지가 직접 관장한다. 이후 모든 중요 상황보고와 지시받을 사항은 모두 직접 먼저 장칭 동지에 보고 하라”고 조사요원들에게 지시했다.

 

전담 조사반은 관련자들을 고문해 거짓자백을 강요하고, 자신들의 입맛대로 조서의 일부를 끌어다 왜곡하는가 하면, 기만적인 수법으로 대량의 위증자료를 만들어 냈다. 류샤오치에 대한 조사가 얼마나 혹독했는지는 류샤오치의 ‘억울한 날조, 오심(誤審)사건’에 연루된 사건이 2만2천여 건으로 2만8천여 명의 연루자가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장칭 등은 전담 조사반들이 허위로 날조한 위증자료를 마오에게 보냈다. (주석 480)

 

마오는 외국의 주요 인사들에게 “류샤오치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우경적 사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는 과거 국민당 통치지역에서 최소 4차례 체포된 일이 있었다. 현재 어떤 사람은 그가 적들에게 자수했다고 증언했다. 때문에 1936년 북방국에 있을 때 반역자들의 출옥을 담보했다. 우연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마오는 류샤오치가 1946년 겨울에 미국과 결탁해 반공 동맹군을 조직하고, 미군이 대규모로 출병할 때 공산당을 공격하려고 했다는 내용은 너무도 황당한 일이라 믿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항일전을 앞두고 류샤오치가 난징(南京 남경)에서 쑨커(孫科 손과), 쑹쯔원(宋子文 송자문) 등 국민당 고위 인사를 만났다는 자료도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왕광메이는 9월 13일 간첩죄로 체포되어 11월 27일 베이징 친청(秦城 진성)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류샤오치와의 생이별은 끝내 영결(永訣)이 되고 말았다. 류샤오치는 이날 헤어지는 부인 왕광메이에게 “우리들 어떻게 하든 꽃가마를 탓 던 그런 날을 기다립시다”라고 말해 두 사람은 모처럼 웃었다. 류샤오치는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라며 부인을 위로했다.

 

류사오치.

 

 

류샤오치는 왕광메이가 감옥으로 끌려가고 아이들도 모두 중난하이 집에서 쫓겨나 보살피는 사람 없이 홀로 생활하며 홍위병과 조반파들의 모멸적인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류샤오치는 정신적 고통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외로움과 물질적 결핍 속에 서서히 '식물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족의 불행도 잇따랐다.

 

바오터우(包頭 포두) 국방공창(國防工廠) 부 수석기사로 있던 류샤오치의 큰 아들 류윈빈(劉允斌 유윤빈)은 12월 말 홍위병들의 비판을 받은 뒤 자살했다. 내몽골 자치주에서 일하던 장녀 류아이친(劉愛琴 유애금)은 조반파들에게 비판을 받고 흠씬 두들겨 맞은 뒤 문혁 당시 비판대상자를 격리시켜 가두는 ‘외양간(牛棚 우붕)’에 장기간 동안 감금됐다.

 

둘째 아들 류윈뤄(劉允若 유윤약)는 장칭이 1967년 초 이름을 거명한 뒤 체포돼 8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류윈뤄는 감옥에서 괴롭힘을 당해 병을 얻어 출소했으나 얼마 뒤 사망했다. 류샤오치와 함께 생활하다 쫓겨난 4명의 자녀 중 가장 나이 어린 6살 된 딸은 보모가 키웠고, 학교에 다니던 3명 중 18살의 딸 핑핑(平平 평평)과 16살 된 아들 웬웬(源源 원원)은 나중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하는 고초를 겪었다. 류샤오치는 하루아침에 집안이 풍비박산하는 처참하고 참혹한 꼴을 당해야 했다. 

 

1968년 10월 30일 열린 중공 확대 8기 12중전회는 중앙 전담 심사조가 10월 18일 건넨 ‘반역자, 내부간첩, 노동계급의 배반자 류샤오치 죄행에 관한 심사보고’를 비준해 통과시켰다. 전회(全會)는 류샤오치를 당에서 영구 제적시키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철회했다. 전회는 또 류샤오치와 관련한 사람들에 대한 반당, 국가배반죄를 계속 청산하는 내용을 선포했다. 전회에서 린뱌오와 장칭파들이 덩샤오핑의 당적 제적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마오의 반대로 무산됐다. 마오는 폐막사에서 이 문제를 특별히 강조했다.

 

마오는 “덩샤오핑에 대해 모두들 제명하자고 하나 보류해야 한다. 나는 이 사람(덩샤오핑)과 류샤오치는 구별해야 한다고 본다. 사실상으로도 구별된다. 나는 이 사람이 다소 보수적이긴 하지만 당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덩샤오핑을 바꿔야 한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덩샤오핑은 직무정지를 당한 채 심사대상자가 되어 덩샤오핑 문제는 잠시 잠복상태로 들어갔다. (주석 481)

 

사실 마오는 덩샤오핑의 됨됨이와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의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그러난 두 사람의 현실 대처방식이 달라 밀착관계를 이루지 못했다. 마오는 삼면홍기(三面紅旗)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때도 덩샤오핑이 반대하는 것을 안타까워 한 적도 있었다. 마오는 “덩샤오핑은 귀머거리다. 회의가 열리면 덩샤오핑은 나한테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는다. 1959년 이래 6년 동안 나한테 보고공작을 하지 않았다. 서기처는 그가(덩샤오핑) 펑전이나 리푸춘을 장악해 기율을 엄격히 지킨다. 어떤 일이 있어 (내가)서기처에 말하면 서기처는 나에게 일언반구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나를 경원한다(敬而遠之 경이원지)”고 불만을 터뜨렸다.

 

마오는 1965년 1월 열린 중앙공작회의 때 회의를 주재하던 덩샤오핑이 자신에게 “회의에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며 크게 노여워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오는 자신에게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덩샤오핑을 서운해 했지만 아끼는 마음이 앞서 린뱌오와 장칭파가 강력하게 당적삭제를 요구한 것을 반대한 것이었다. 

 

조반파와 홍위병으로부터 정신적 육체적으로 시달리고, 병고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힘들게 부지한 채 중난하이 집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류샤오치는 당이 영구 제적한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항거할 어떤 힘도 없었다. 오르지 울분과 회한을 마음속에 삭이며 하루 종일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침묵하는 것만이 유일한 저항이었다. 돌보는 이 없는 류샤오치는 폐렴, 당뇨병, 고혈압 등의 합병증으로 1968년 급성 기관지염이 발생해 39도를 오르내리는 고열로 죽음의 문턱에 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적도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이미 탈진상태에 이른 류샤오치는 침상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데다 수시로 발생하는 폐렴과 당뇨병 등으로 회복불능의 중환자가 된지 오래였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곁에 어른 거렸다.

 

479) 모택동비록(下)  산케이신문특별취재반 지음/ 임홍빈 옮김  문학사상사 
480) 劉少奇是迫害致死的  李 超   人民網  ‘文革’中劉少奇爭辯;林彪江靑都反過主席,我從來沒反過!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81) 毛澤東平生全 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公開指責鄧小平; 他什麽事也不找我, 幾年不找我!  人民網-文史頻道

      最後的‘’政治碰撞’使毛澤東下定決心進行‘批鄧’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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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류사오치, 71세 일기로 한원을 가슴에 묻고…

 

 

1969년 3월 중국과 소련의 국경지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흑룡강성) 전바오다(珍寶島 진보도)에서 중-소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는 등 중소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10월 23일, 29일 잇따라 첫 지하핵실험과 새로운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를 전후해 중-소, 중-미 긴장관계가 고조되면서 마오는 전쟁준비 태세를 갖추는 등 고도의 비상상태에 들어갔다.

 

중공중앙은 10월 14일 베이징에 있는 중앙 당정군의 주요 영도자들과 주요 감호 대상자들을 10월 20일 이전에 전국에 분산 소개(疏開)하는 통지를 발동했다. 저우언라이가 베이징에 남아 공작을 총지휘하고 마오를 비롯한 영도자들을 전국 각 지역에 분산 배치했다. 이때 류샤오치와 덩샤오핑도 각각 허난성(河南省 하남성) 카이펑(開封 개봉)과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 남창)으로 옮기게 되었다.

 

중환자인 류샤오치는 17일 밤 코에 산소 호흡기를 끼고 링거를 꽂은 뒤 들것에 실려 1명의 의사와 2명의 간호사, 2명의 전담 조사반원 등의 호송아래 군용기에 태워져 카이펑으로 이송했다. 밤 9시 30분에 카이펑 비행장에 도착한 류샤오치는 곧바로 시 혁명위원회가 관리하는 감호시설에 수감됐다. (주석 482)

 

애초 중환자인 류샤오치의 카이펑 이송은 ‘미필적 살인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류샤오치는 병세가 더욱 나빠졌으나 베이징에서 수행한 의사와 간호사들은 나 몰라라 하며 11월 6일 전부 돌아갔다. 현지 군부대의 의료진이 돌보도록 했으나 있으나 마나였다. 12일 오전 1시께 병세가 악화돼 혼수상태에 빠졌다.

 

당직 간호사가 형식적 치료만 했을 뿐 의료진은 5시간 40여 분이 지난 뒤에야 나타났다. 류샤오치는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12일 오전 6시 45분에 심장박동이 멈췄다. 71살을 일기로 한원(恨怨)을 가슴에 묻은 채 피안(彼岸)의 세계로 떠난 것이다. 죽음은 극비에 붙여졌고, 주검은 13일 비밀리에 카이펑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했다. 류웨이황(劉衛黃 유위황)이라는 이름으로 화장됐다. 유골은 카이펑 화장터 유골 안치소에 보관되어 있었다.

 

1970년 12월 미국의 저명한 신문기자 에드가 스노우가 마오에게 류샤오치를 실각시킬 결심을 언제부터 했는지를 물은 적이 있었다. 마오는 “23조 때”라고 말했다. 23조는 ‘농촌사회주의 교육운동 중 목전에 제기된 일단의 문제’를 가리킨다. 이 23조의 결정은 사회주의 교육운동이 시작된 1963년 초가 된다. 마오는 이때부터 류샤오치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장칭 등 ‘4인방’이 체포된 뒤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는 12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끝내고 1978년 12월 22일 출옥했다. (주석 483)

 

“류샤오치 동지는 위대한 마르크스-레닌 주의자이고, 공산주의를 위해 평생을 분투한 무산자 계급 혁명가이다. 과거 류샤오치 동지를 중상모략, 모함, 위조한 자료와 모든 사실에 맞지 않는 주장은 완전히 무너졌다.”

 

1980년 2월 29일 밤. 텔레비전에서 십 수 년 만에 ‘류샤오치 동지’를 호칭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문혁’ 중 최대의 ‘억울한 날조 오심사건’인 류샤오치에 대한 핑판(平反 평반; 복권)이 이뤄진 내용을 보도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들의 학대에 시달리다 1969년 11월 71세의 나이로 사망한 류사오치. 그의 죽음은 절대 비밀에 부쳐졌고 시신은 '류웨이황'이라는 가명에 '무직'의 노인으로 화장됐다. 이후 장칭 등 문화대혁명 '4인방'이 체포된 뒤 1980년 2월 명예회복 됐다. 사후 12년이 지나 수습된 유골은 부인 왕광메이와 유족들의 유언에 따라 1980년 5월 북해함대에 실려 보슬비 속을 헤치고 청도 앞바다에 뿌려졌다. 젊은시절 류사오치(사진 왼쪽)와 노년의 류사오치, 류사오치를 기념하는 우표(맨 오른쪽).

 

류샤오치 추도대회는 5월 17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장중하게 거행됐다. 추도사를 마친 덩샤오핑은 왕광메이의 손을 꼭 잡고 “좋은 일입니다. 이겼습니다! 울지 마십시오!”라며 위로했다.

 

장칭(江靑 강청)이 갇혀있던 친청(秦城 진성) 감옥소 관계자에 따르면 장칭은 이날 라디오방송에서 류샤오치의 복권소식을 들었다. 중공중앙이 전국에 국기를 반기로 게양하고, 모든 문예활동을 중지한 채 류샤오치를 추도하는 날 장칭은 감옥에서 큰 목소리로 경극(京劇)의 노래를 부르며 연기흉내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류샤오치의 유골은 5월 19일 왕광메이와 자녀들이 유언에 따라 칭다오(靑島 청도) 앞 바다에 뿌려졌다.

 

바닷물에 흩날린 유골은 ‘만파안식(萬波安息)’을 찾아 세상사 포폄훼예, 시비곡직, 사랑과 미움도 한바탕 꿈인 양 파도에 실려 굼실굼실 사라져갔다. 물비늘에 부서지는 인린(人燐)이 그날을 떠올렸다. 류샤오치가 1942년 옌안(延安 연안)을 찾아갈 때였다. 1941년 9월회의 이후 중앙과 마오는 당시 화중(華中 화중)에서 공작하고 있는 류샤오치를 옌안에서 열리는 7대회의에 참석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마오는 소련과 코민테른을 업고 있는 왕밍 등 이른바 ‘28인의 볼셰비키’파들과 사상논전을 벌이면서 버거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론무장이 된 뛰어난 지원자가 필요했다. 마오는 류샤오치를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 마오는 류샤오치를 긴급 호출했다.

 

당시 쑤베이(蘇北 소북) 푸닝(阜寧 부녕) 단자강(單家港 단가항)에 있던 류샤오치가 옌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3천리에 이르는 130여 겹의 일본군의 봉쇄선을 뚫어야 했다. 류샤오치가 1942년 3월 19일 단자강을 출발하기 전 마오는 류샤오치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무전기를 휴대하고 무장한 호위대를 동행할 것을 주문했다. 마오는 “(류)샤오치를 호위하는 무장 경호반은 반드시 능력 있는 골간에서 골라 뽑고 훈련을 하도록 지시”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마오는 또 펑더화이에게 전보를 보내 “화중에서 화베이(華北 화북)에 이르는 길에 대한 적들의 봉쇄상황과 안전보증 상태”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류샤오치가 경유하는 지역의 홍군에게 전통을 보내 류샤오치의 경호에 만전을 기하도록 명령했다. 이처럼 마오가 류샤오치의 신변안전을 위해 홍군에게 전보를 보낸 것만도 십여 통에 이를 정도로 류샤오치를 극진하게 생각했다. (주석 484)

 

류샤오치가 10월 9일 북방국과 8로군 총사령부가 있는 산시성(山西省 산서성) 랴오(遼 요)현에 도착했을 때 옌안의 졔팡르바오(解放日報 해방일보)는 류샤오치가 쓴 ‘논 당내투쟁’의 글 전문을 실었다. 마오는 직접 이 글을 실으면서 편집자 글을 썼다. 마오는 편집자 글에서 “이 글은 류샤오치 동지가 1941년 7월 2일 화중국 당교(黨校)에서 연설한 내용으로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당내투쟁에 관한 중대 문제를 해결한 해법이다. 모든 동지들의 필독을 바란다. 현재 정풍학습 전개가 심화되고 있는 기간에 특별히 발표하니 전당 동지들은 유의해 연구하고 토론하기 바란다”며 류샤오치의 글을 높게 평가했다.

 

마오는 또 이 시기의 연설에서 여러 차례 류샤오치가 쓴 ‘논 공산당원의 수양’ 등의 저서를 거론하며 “아주 잘 쓴 글”이라고 칭찬했다. 9개월에 걸쳐 1943년 1월 1일 옌안에 도착한 류샤오치는 다음날 양자링(楊家嶺 양가령) 대강당에서 성대하게 열린 신년 단배회(團拜會)에서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류샤오치는 1945년 7대에서 1966년 8기 11중전회 때까지의 ‘중공 제1대 영도집체’에서 ‘제2인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면서 마오의 굳건한 신뢰를 받았다.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마오쩌둥의 중공중앙 주석 직무를 담당한 사람은 류샤오치가 유일(唯一)했다. 류샤오치는 마오가 충칭회담과 소련방문, 그리고 1953년 말 항저우에서 신헙법 기초 공작을 주재할 때 3번에 걸쳐 중공중앙 주석 직무대리를 했다. (주석 485)

 

1961년 9월 24일 마오가 우창(武昌 무창)에서 영국의 버나드 로우 몽고메리 원수를 접견할 때였다. 몽고메리가 “당신의 후계자는 누구냐?”고 물었다. 마오는 “분명하다. 류샤오치다. 그는 우리당의 제1부주석이다. 나의 사후에는 바로 그다”라고 대답했다. 몽고메리는 “류샤오치 다음은? 저우언라이인가?”고 물었다. 마오는 “류샤오치 이후의 일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 류샤오치가 마오의 후계자라는 것이 서방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마오와 류샤오치는 그런 관계였다. 좋은 역사든 나쁜 역사든 서로가 몸을 섞으며 흘러가는 게 현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류샤오치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인민들이 좋은 역사를 써 나아가기를 굳은 신념으로 믿었고, 간절히 바랐다.

 

482) 揭秘 1969年在京中央領導大疏散  人民網/   王光美回憶; 劉少奇與鄧小平最後一次對話  時政頻道  新華網   劉少奇是被迫害致死的  李 超  人民網
483) 鄧小平陳云等如何推動爲劉少奇平反   時政頻道  新華網
484) 黨內‘二把手’ 劉少奇是毛澤東的指定接班人?   ‘黨的文獻’  文史-人民網
485) 毛澤東生平全 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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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장칭-린뱌오, 문혁시대 ‘비극적 코미디’의 주인공

 

전군이 전쟁대비에 들어간 린뱌오의 ‘제1호 명령(命令)’에 따라 덩샤오핑은 1969년 10월 22일 베이징을 떠나 장시성(江西省 강서성) 난창(南昌) 부근의 한 공장에서 노동단련을 하게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평소 자신의 후계자로 여기는 덩샤오핑의 능력과 재능을 아껴 많은 관심과 배려를 해왔다.

 

주자파(走資派 주자파)의 ‘제2과녁’으로 찍혀 실각을 했지만 마오는 그의 당적 삭제를 유보시켰다. 마오의 덩샤오핑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알고 있는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을 보호하기 위해 린뱌오의 사람이지만 장시성 혁명위원회 주임 청스칭(程世淸 정세청)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 주석은 9대 회의에서 덩샤오핑의 문제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말했다. 덩샤오핑은 그곳에 내려가 농촌에서 단련을 한다- 60여 살이 넘었다(당시 덩샤오핑은 65살이었음). 몸이 별로 좋지 않다. 노동력을 감당할 수 없다. 잘 살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저우는 “현재 지방상황은 대단히 복잡하다. 현지 군중들이 덩샤오핑 부부를 알아볼 수 있다. 혹시 어떤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 번거롭게 할 수 있다. 당신들 성 혁명위원회는 그들의(덩샤오핑 부부) 안전을 보호해야 한다. 당신들은 많은 관심을 갖고 그들을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특별히 당부했다. (주석 486)

 

성 혁명위원회 주임 청스칭이 린뱌오 계열의 인물이지만 총리 저우언라이가 직접 전화한 만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청스칭은 애초 덩샤오핑 부부의 절대 안전을 위해 조반파와 홍위병들이 괴롭히지 못하도록 깐저우(竷州 감주)의 소형차 부품공장에 보낼 계획으로 이런 내용을 저우에게 보고했다. 저우언라이는 깐저우가 난창에서 비교적 멀고, 교통이 불편한 산간지대로 생활조건도 좋지 않아 난창 부근에 거처를 마련해 줄 것을 부탁했다.

 

저우언라이는 “집은 2층집을 구해 2층에는 덩샤오핑 부부가 거주하고 아래층은 (덩샤오핑을 보호하는)공작원들이 지낼 수 있도록 하면 좋다. 제일 좋은 것은 대문 하나에 마당 하나가 딸린 독채다. 마당에서 활동할 수 있고 안전을 보증할 수 있어 좋다”고 안전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성 혁명위원회는 난창시 교외의 신졘(新建 신건)현 왕청깡(望城崗 왕성강)에 있는 전에 난창 보병학교 교장의 사택이었던 건물을 물색했다. 혁명위원회는 덩샤오핑 부부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농기구 수리공장에서 노동단련을 하도록 배려했다. 덩샤오핑 부부는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조반파나 홍위병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비교적 안온한 생활을 하면서 때를 기다릴 수 있었다.

 

린뱌오와 장칭이 홍위병과 조반파를 사주해 주더(朱德 주덕)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공격하다가 마오가 ‘공개 비판투쟁(批鬪 비투)’을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자 주더에 대한 공격이 한 풀 꺾였었다. 앙앙불락하며 기회를 엿보던 린뱌오와 장칭은 1969년 4월 1일부터 열리는 제9차 전국대표대회를 앞두고 ‘주더 타도’를 위한 잰 발걸음을 놓기 시작했다.

 

 장칭(왼쪽)과 린뱌오

 

이들은 수도 종합대학과 단과대학 조반파 학생들로 반동분자를 적발해 내어 비판하는 ‘지우더오우 빙퇀(揪鬪兵團 추투병단)’을 꾸려 남하해 주더의 고향인 쓰촨성(四川省 사천성) 이룽(儀隴 의롱)현으로 가 ‘조반(造反)’을 펴도록 했다. 또 전국에 일단의 조반파를 파견해 주더를 공격할 ‘자료 포탄’을 찾도록 지시했다. (주석 487)

 

캉성은 1968년 7월에 별도로 제8기 중앙위원, 후보 중앙위원의 분류명단을 만들어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 89명을 ‘특무(特務 특무; 간첩)’, ‘반도’, ‘외국내통 분자’, ‘반당분자’로 나누었다. 또 주더, 천윈(陳云 진운) 등 29명을 ‘과오 또는 이력조사 대상자’, ‘직무 정지자’ 7명, 환자 3명, 사망자 28명, 기타 37명 등 구체적으로 성향분석과 신변 분류작업을 마쳤다. 이런 분류작업은 다가오는 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과 후보 중앙위원 61%이상을 장악하기 위한 사전 정비작업이었다.

 

공안부장 셰푸즈(謝富治 사부치)는 장칭과 캉성의 지시에 따라 공안부에서 700명의 인력을 뽑아 개인경력을 철저하게 조사해 청산하는 조직을 꾸렸다. 셰푸즈는 이들 조사원들에게 “자료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은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 한 줌밖에 안 되는 주자파의 반혁명 범죄행위를 철저하게 가려내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했다. 린뱌오와 장칭의 당정군의 권력 ‘탈권(奪權)’ 방침아래 이들은 잇따라 주더 등 14명의 당과 국가 영도자들을 모함하는 자료를 정리하고, 44명의 중앙과 지방 당정군의 책임자들을 음해하는 400여 건의 자료를 추려냈다.

 

그러던 11월 어느 날 베이징 거리에 갑자기 ‘중공중앙 비상위원회’ 이름의 몇 장의 전단이 뿌려졌다. 전단에 서명한 사람들은 새로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성립했다고 밝혔다. 린뱌오와 장칭 등은 이런 소식을 듣고 긴장은 고사하고, 대단히 흥분하며 기뻐 날뛰었다. 이들은 당과 국가 영도자들을 적발 비판 투쟁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만큼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대규모 타도의 돌파구로 여겼다.

 

공안부장 셰푸즈가 직접 물샐틈없는 수사망을 펼치며 일망타진을 호언했다. 공안부는 12월 10일 수사에 들어가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경제연구소의 실습연구원 저우(周) 아무개 여성을 체포해 자백을 받아 배후를 밝혀냈다. 저우 아무개 연구원은 강압에 못 이겨 주더, 국가 부주석 둥비우(董必武 동필무), 군사위위원회 부주석 예ㅤㅈㅖㄴ잉(葉劍英 엽검영), 부총리 리셴녠(李先念 이선념), 부총리 리푸춘(李富春 이부춘), 부총리 천이 등 수십여 명의 중앙과 지방의 영도자들이 ‘중국(마르크스-레닌) 공산당’을 만들었다고 자백했다. 진술내용은 이렇다. (주석 488)

 

“비밀 대표대회는 지난 67년 7월 15일 전후해 웬중즈(原中直 원중직) 기관 9호 소강당에서 비밀리에 소집됐다. 대표들은 사전에 개회시간과 장소를 알고 있었다. 대회는 오전 9시 반에 시작했다. 회의장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먼저 대회에 참석한 사람은 주더, 천이, 예졘잉, 쉬샹쳰, 리셴녠, 리푸춘, 류닝이(劉寧一 유영일), 둥비우, 녜룽전 등이었다. 이밖에 총참모장 대리 양청우(楊成武 양성무), 위리진(余立金 위립금), 샤오화(肖華 초화), 베이징 군구 위수사령관 푸충비(傅崇碧 부숭벽), 자오이민(趙毅敏 조의민), 류샤오(劉曉 유효), 류장성(劉長勝 유장승) 등이 모두 주석대에 앉았다.”

“대회대표 성원보고에 따르면 각계 각 부문에서 선출된 200여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비밀대회는 주더가 회의를 주재했고 그가 개막사를 했다. 천이가 대회에서 현재의 형세와 임무에 대한 보고를 했다. 회의가 끝나기 전 주더가 총결을 했다. 회의에서 당 중앙을 결성했는데 중국(마르크스-레닌)공산당이라고 했다. 영도자는 주더가 ‘괴뢰 총서기’, 천이가 중앙의 부서기 겸 국방부장, 리푸춘이 총리가 됐다. 상무위원은 주더, 천이, 리푸춘, 쉬샹쳰, 예졘잉, 허룽 등 9명이다. 중앙위원은 왕전(王震 왕진), 샤오화, 우슈취안(伍修權 오수권) 등 16명이다.”

 

진술내용으로만 보면 린뱌오와 장칭 집단의 인사들만 빼고 중앙의 주요 영도자들이 죄다 끼다시피 했다. 어마어마한 대형사건이었지만 누구도 믿지 않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황당한 조작사건이었다. 하지만 린뱌오는 ‘중국(마르크스-레닌)공산당’이 ‘외국과 내통하고, 정변을 일으키려 했다’는 두 개의 큰 모자를 씌워 눈엣가시로 여기는 주더를 제거하려고 백방으로 손을 뻗쳤으나 만사휴의였다.

 

여기저기에 뿌려진 가공한 ‘중국(마르크스-레닌)공산당’의 전단이 주더의 손에도 들어왔다. 주더는 이 전단을 보다 가가대소(呵呵大笑)했다. 웃음을 잃다시피 한 주더가 큰 소리로 웃자 곁에 있던 부인이 화들짝 놀라 연유를 물었다. 주더는 웃음을 거두며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세상이 넓다보니 온갖 기묘한 일이 생깁니다, 그려. 지금 중국에 괴이한 일이 너무 많아요. 그들은 이제 낮 가죽도 모두 벗어 버렸어요. 중국에 ‘마르크스-레닌당’이 나타났다고 새빨간 거짓말까지 합니다. 내가 서기고, 천라오쫑(천이)이 나의 조수 겸 국방부장이라고 합니다. 또 상무위원회, 중앙위원회, 총리, 부장 등등 원로들의 명단을 줄줄이 늘어놨어요.”

 

이처럼 린뱌오와 장칭은 제9차 전국대표대회를 앞두고 당의 찬탈과 권력탈취를 노리면서 주더의 ‘9대 진입’을 막으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린뱌오와 장칭의 지시에 따라 광저우(廣州 광주) 군구사령관 황융성(黃永勝 황영승)은 대거 인력을 동원해 허위 당안(黨案)을 조사한다는 이름아래 국민당이 주더에 대해 모함한 광범한 자료를 수집해 주더 공격의 자료로 활용했다.

 

한 예로 주더와 천이가 난창기의 실패 후 패전부대를 이끌고 1927년 11월 깐난(竷南 감난)으로 가 주더의 동기생인 국민혁명군 제16군 군단장 판스성(范石生 범석생)에게 의탁해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었다. 린뱌오와 장칭은 황융성이 보낸 이 자료를 근거로 주더가 판스성에 투항한 적이 있다며 마오에게 보고했다. 마오는 당시 실제내막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주더와 천이를 ‘반역자’로 몰아붙이려 했으나 사실과 너무 달라 미수에 그쳤다.

 

이들은 또 1968년 10월 13일 베이징에서 열린 제8기 12중 전회에서 주더가 ‘2월 역류’로 매도한 군 원로들에 우호적 발언을 하자 우파셴과 장춘챠오가 주더를 집중 비판했다. 우와 장은 주더를 “일관되게 마오 주석을 반대한 야심가이고 황제를 꿈꾸는 자”라고 맹공격을 퍼부었다.

 

주더 제거에 혈안이 된 린뱌오는 역사적 사실을 조작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장시성(江西省 강서성) 징강산(井岡山 정강산) 혁명박물관에 ‘린뱌오와 마오가 징강산에서 부대를 합류(會師 회사)’하는 장면의 유화(油畵)를 크게 그려 걸어 놓았다. 박물관 해설원은 관람객들에게 “1928년 봄 린뱌오 동지가 난창기의 부대를 이끌고 징강산에 와 이곳에서 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을 만났다”고 설명했다. 난창기의 부대를 이끌고 마오 부대와 만난 ‘주더’를 ‘린뱌오’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이때 마오와 주더의 부대합류 이후 ‘주-마오(朱毛 주모; 주더와 마오)’시대를 열어 홍군투쟁의 상징이 됐는데도 린뱌오는 ‘주-마오’를 ‘주-린(林 임; 린뱌오)’이란 호칭으로 바꿔 부르도록 했다. (주석 489)

 

쿠바 중국 대리 대사인 가르시아가 장시성 징강산 혁명박물관에 들린 적이 있었다. 그는 중국역사를 잘 알뿐 아니라 베트남 대사를 지냈기 때문에 징강산 부대합류 사실을 훤히 꿰고 있었다. 가르시아는 해설원의 설명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그는 장시를 떠날 때 중국 외사(外事) 관계자들에게 역사왜곡을 바로 잡을 것을 건의했다. 가르시아는 상하이에 도착한 뒤 중국 외교부 관계자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가르시아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주-마오 회사(會師)’를 다 알고 있다. 주더 장군이 난창기의 군대를 이끌고 징강산에 올라 부대를 합류시켰다. 린뱌오 부주석이 아니다. 이런 사실은 마오쩌둥 선집과 에드가 스노우가 쓴 ‘중국의 붉은 별’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땅히 역사적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 멋대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중국공산당과 마오 주석의 위대한 이미지를 훼손하는 행위”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린뱌오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었고, 국가적 망신도 모르쇠였다. 문화대혁명 시대에 볼 수 있었던 ‘비극적 코미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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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 ‘文革’風 暴;林彪爲奪權搶朱德的扁擔  劉學民   人民網-文史頻道
489) ‘文革’風暴;林 彪爲奪權搶朱德的扁擔  劉學民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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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마오 “이렇게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냐”

 

린뱌오와 장칭 등 ‘인간 하이에나’들이 ‘인간 사냥’을 하는 그런 혼돈의 동란시대에 저우언라이는 원로와 노 간부들 보호에 온갖 지모를 짜내면서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베이징 군구 위수사령관 푸충비(傅崇碧 부숭벽)에게 린뱌오와 장칭 등에 쫒기고 있는 원로와 노 간부들에 대한 보호를 부탁했다.

 

푸충비는 당시 베이징 군구 위수사령관이었지만 린뱌오나 장칭에 대항할 만한 힘이 없었다. 새발에 피였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목숨 또한 어는 한 순간에 날아갈지 모를 그런 험악한 시국이었다. 린뱌오와 장칭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그런 위세를 떨치며 행동부대인 홍위병과 조반파를 떡 주무르듯이 했다.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푸충비는 저우언라이의 간곡한 부탁을 헤아려 원로와 노 간부들을 보호하는 데 어떤 때는 교묘하게 어떤 때는 그렇지 못해 장칭 패거리로부터 의혹의 시선을 받으며 위험한 곡예를 넘나들어야 했다.

 

저우언라이는 어느 날 깊은 밤에 푸충비를 중난하이(中南海 중남해)로 불렀다. 저우는 지치고 피곤에 찌든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저우는 푸충비에게 이름을 쓴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여기 (명단에 적힌) 동지들이 공격을 받고 있다. 조반파의 나쁜 인간들이 그들을 붙잡아 적발 비판대회를 열 수 있다.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대책을 강구해 보라”고 말했다. 푸충비는 저우가 건넨 종이에 적힌 명단을 살펴보니 리징취안(李井泉 이정천), 왕런중(王任重 왕임중) 등 30여 명의 부장(장관)급 이상의 고위간부들이었다. 푸충비는 잠시 생각하다 “(부대의)동쪽 높은 지대에 병영의 막사가 있습니다. 비교적 외진 곳으로 조용한 편입니다. 우선 그들을 그곳으로 이동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저우의 의견을 구했다.

 

푸충비는 지도의 한 지점을 저우언라이가 볼 수 있도록 손으로 가리켰다. 저우언라이는 “좋을 것 같네.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한다. 한 올이라도 소문이 새나가서는 안 된다. 빨리 조처하라”고 재촉했다. 푸충비는 궁여지책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할 수 밖에 없음을 알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저우언라이는 “그들이 식사는 스스로 해먹도록 하고 포커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주석 490)

 

푸충비는 3대의 차량과 수십 명의 정예 경위병(警衛兵)들을 은밀하게 동원해 구체적 임무를 준 뒤 동이 트기 전에 30여 명의 노 고위간부들이 사는 집을 찾아가 이들을 집결장소로 안전하게 호송하도록 지시했다. 이들 노 고위간부들은 새벽녘에 들이닥친 군인들을 보고 홍위병들이 가택수사를 나온 줄 알아 혼비백산했으나 경위병들의 설명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들이 몰고 온 차를 타고 피신했다.

 

이들은 애초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위수지역 병영의 막사에 도착한 뒤 푸충비가 찾아와 자세히 설명해 전후사정을 알 수 있었다. 얼마 뒤 푸충비는 ‘중앙문혁’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푸충비가 댜오위타이(釣魚臺 조어대)의 회의 장소에 들어섰을 때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회의실에는 저우언라이를 비롯해 캉성, 천보다, 장칭, 장춘챠오, 야오원웬 등이 있었다. 푸충비가 이들에게 경례를 하자마자 천보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푸졘(福建 복건) 어투로 천보다가 뭐라고 소리쳤으나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던 푸충비가 귀를 곤두세웠다. 천보다가 물었다.

 

“당신은 그들을 어디에다 감추었나?”

천보다가 왜장을 치며 압박하자 푸충비는 시치미를 떼고 모르쇠로 나왔다.

“사람들이라니요?”

장칭이 일어서며 악을 써댔다.

“푸충비, 당신 멍텅구리인 척 하지 마라. 그들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들이다. 항상 반혁명을 하는 그자들을 어디로 빼돌렸나?”

“모르는 일입니다.”

“당신은 위수사령관이다. 당신이 어떻게 모른다고 말할 수 있나?”

두 눈이 금붕어마냥 툭 튀어나온 야오원웬(姚文元 요문원)이 화가 난 두꺼비가 왝왝대듯이 큰소리로 따져 물었다.

“나는 정말로 모릅니다.”

‘개똥 군사(軍師)’ 캉성이 안경 밑으로 훔쳐보던 음험한 눈이 흉악스러운 눈빛을 섬광처럼 뿌리며 손으로 차 탁자를 잇따라 내려치면서 험악한 말투로 추궁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당신은 알고 있어!”

천보다는 협박하고 을러대면서 물었다.

“감쪽같이 속이려고 하지 마! 우리들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누가 당신을 시켜 그들을 빼돌렸는지 말해! 누구야?”

푸충비는 물 한 잔을 마시고 담배를 꺼내 태우면서 머릿속으로 재빨리 위기탈출 방법을 곰곰이 따져봤다. 역시 이들이 열 뻗쳐 소리치게 하고 ‘나 잡아 잡수’하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방법이 제일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다. 묵묵부답으로 대응했다.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 캉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그들을 혁명 군중들에게 넘겨야 한다! 홍위병 소장(小將)들에게 넘겨!”
“당신은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시켰는지 반드시 말해야 한다.”


장칭이 이렇게 말하고 푸충비 쪽으로 걸어가 한 보 남짓한 거리에서 손으로 푸충비의 코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떠들었다.

“푸충비, 당신 말해야 돼! 누가 당신에게 이렇게 하라고 시켰어?”
“위쪽에서.”


푸충비는 장칭이 강하게 몰아치자 어쩔 수 없이 위쪽(上邊 상변)이라는 두 글자를 내뱉었다.

“어느 위쪽? ‘중앙문혁’? 웃기는 소리하네!”

캉성은 음험한 냉소를 흘렸다. 푸충비는 다시 담배 한 대를 꺼내 태우면서 난감해 했다. 푸충비는 저우언라이가 시켰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야수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치켜세우며 흉포하게 위협하는 이들과 맞서 싸울 수 없어 진퇴양난이었다. 장칭이 무지막지한 여자처럼 고함을 질러대며 협박했다. (주석 491)

“푸충비! 당신은 완고한 보황파(保皇派)모양 그런 반혁명분자들을 보호하려 한다. 당신이 그들을 보호하면 절대로 말로(末路)가 좋을 수 없다!”

푸충비가 궁지에 몰려 진땀을 흘리고 있을 때 저우언라이가 문서를 뒤적이며 “이렇게 우리가 토론해야 할 많은 문건이 있다. 우선 문건부터 토론합시다!”라고 분위기를 잡아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다음날 회의가 계속되자 장칭은 푸충비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이때 마오의 판공실에서 마오가 푸충비를 찾는다고 전화가 오는 바람에 장칭의 악다구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칭은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푸충비의 등에 대고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돌아온 뒤에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분명하지 않으면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쏘아 붙였다. 회의장을 나온 푸충비의 앞이마에는 얼마나 긴장했는지 굵은 땀방울이 알알이 솟구쳤다. 푸충비는 마오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마오는 짙은 후난(湖南 호남) 발음으로 “충비 동지, 식사했느냐?”고 물었다.

“식사했습니다, 주석.”
“앉아, 앉아. 오늘 자네를 오라고 한 것은 베이징 상황을 알고 싶어서네. 무력충돌은 그쳤는가?”


마오가 담뱃불을 붙인 뒤 천천히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자연(紫煙)을 뿜어냈다.  

“베이징 상황이 호전은 됐습니다만 두 파간에 싸움은 여전합니다.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주더(朱德 주덕)동지의 대자보는 붙어있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 총사령관을 타도하자고 합니다.”
“좋지 않아. ‘주마오 주마오(朱毛朱毛 주모주모; 주더와 마오)’, 주더와 마오쩌둥은 뗄 레야 뗄 수 없어. 자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막 나온 만화입니다. 오늘 오후 처음 보았습니다.”
“내가 봐도 되겠나?”

푸충비는 컬러로 그린 풍자만화 ‘백축도(百丑圖)’를 마오에게 건넸다. 그림은 가마에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 앉아 있고 혁명 원로들이 가마꾼으로 분장해 가마를 메고 있는 모습이었다. 탄쩐린(譚震林 담진림)은 양손에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뤄루이칭(羅瑞卿 나서경)은 입에 칼을 물고 있는 모습이었다. 푸충비는 ‘중앙문혁’이 홍위병들을 시켜 만화를 그린 것을 알고 있었다. 마오는 ‘백축도’를 펼쳐보다 얼굴이 굳어지더니 담뱃불을 끄면서 “함부로 이렇게 공산당을 풍자하다니!”라며 분노를 터뜨렸다. 마오는 곁에 있는 비서에게 “자네는 즉시 천보다에게 전화해 이 ‘백축도’는 우리들을 욕하는 것이라고 전하게. 이런 짓거리를 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을 풍자하는 것들이 여기저기 마구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마오는 비서가 전화하러 나가자 푸충비에게 다시 물었다. (주석 492)

“홍위병들은 아직도 간부들을 (적발해)비판하고 있는가?”
“대단히 사납게 비판합니다.”

“어떤 사나운 방법인가?”

푸충비는 고양이 허리모양으로 등을 구부리고 두 팔을 뒤로 해 올리는 시늉을 하면서 홍위병들이 ‘제트기 태우는’ 린치 모습을 재연해 보였다. 

“이렇게 하고, 또 목에다가 철로 만든 팻말에 이름을 써서 겁니다. 또 손을 X자로 꺾어 포갭니다.”

마오는 아미를 찌푸리면서 또 물었다.

“당년(當年)에 자네들이 토호를 타도하기 위해 투쟁대회를 할 때의 그런 모습인가?”
“그때는 그래도 ‘제트기를 태우는’ (고문 같은)것은 하지 안 했습니다. 머리에 큰 모자를 씌워 조리돌림을 합니다.”
“그래, 맞아! 이렇게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냐. 좋은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몸이 아픈 사람은 죽게 하는 거야!”


푸충비는 마오가 이렇게 이야기하자, (마오가) 확실한 상황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제트기를 태우는 고문 등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으리라고 여겨 대담하게 몇 가지 사례를 보고했다. 푸충비는 부총리 겸 외교부장(장관)인 천이(陳毅 진의)의 부인 장쳰(張茜 장천)이 아픈데도 조반파들이 그녀를 거리로 끌고 나가 조리돌림을 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또 단중앙(團中央)의 ‘3후(三胡 삼호)’인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 후커스(胡克實 호극실), 후치리(胡啓立 호계립)도 조반파에 끌려 나가 적발 비판대회에서 비판을 받았고, 후야오방은 고열 속에서도 비판받은 사실을 보고했다.

마오는 매우 진지하게 들으면서 몇 명의 성위원회 서기, 부장(장관)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은 어떠냐?”고 묻기도 했다. 엉거주춤하던 푸충비는 확신을 갖고 저우언라이가 노 고위간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시켜 이동시킨 사실을 마오에게 보고했다. 마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모습으로 “잘했다! 총리가 배려를 잘 했다! 자네도 잘했네!”라고 말했다. 마오의 이 한마디로 푸충비는 천근만근의 무게로 자신을 짓누르던 근심, 걱정거리가 싹 가셔 날아갈 것 같이 홀가분했다. 힘을 얻은 푸충비가 한 마디 보탰다.

“주석! 만약에 그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홍위병들이 그들을 비판해 죽일 수도 있습니다!”
“자네들이 한 것이 맞아!”


마오는 비서에게 “중앙문혁에 말해 사람들을 죽이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푸충비는 깜짝 놀라 “주석, 제가 말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자네는 무얼 겁내나?”
“노 동지들을 이동시킨 일로 제가 비판을 받아 죽을 지경입니다.”


푸충비는 억울한 듯한 어조로 마오에게 하소연했다.

“누가 자네를 비판하나?”

푸충비는 입을 벌려 하마트면 ‘장칭’이란 이름을 꺼낼 뻔했다. 장칭과 마오는 부부가 아닌가. 푸충비는 얼른 말을 바꿔 ‘치번위(戚本禹 척본우) 등이 비판했다고 둘러댔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게!”

 

490)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491)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492)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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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마오, 문혁 3년 만에 홍위병 ‘5대 영수’와 직접 면담

 

다음날 밤 푸충비는 장칭의 비서한테서 장칭이 있는 쪽으로 한 번 오라는 전화 전갈을 받았다. 푸충비는 장칭이 또 한 바탕 난리법석을 떨 것으로 보고 잔뜩 긴장해 장칭의 방으로 들어갔다. 헌데, 장칭은 푸충비를 보더니 엄청 반가운 기색을 하며 “충비 동지, 빨리 이쪽으로 와 앉으라”고 간살을 떨었다. 

“어젯밤에 주석이 찾아서 갔는데 무슨 얘기를 했소?”
“별 얘기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
“주석이 현재 베이징의 두 파간에 벌어지고 있는 무장투쟁에 대해 물었습니다.”
“어디에 무슨 무장투쟁?”

장칭은 본능적인 반감을 들어냈다.

“주석께서 거리시위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보고 드렸습니다.”
“다른 얘기는 없었소?”
“없었습니다.”
“좋습니다. 갑시다. 8호층에 그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앙문혁’ 전체 구성원들이 회의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캉성은 원래 맨 먼저 공격을 펴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오늘은 전례를 깨고 푸충비를 공격하는 데 선봉장으로 나섰다.

“어제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은 당신이 명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명확하게!”

푸충비는 어제의 푸충비가 아니었다. 마오라는 최고의 빽이 있는 데 무얼 두려워하겠는가. 느긋하게 소파에 앉으며 군모를 벗었다. 캉성의 질문에도 급할 필요가 없었다. 보다 못한 장칭이 여러 차례 화를 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캉라오(康老 강로; 캉성에 대한 존칭)가 당신에게 물었지 않았나? 당신, 빨리 말해.”

푸충비는 회의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한 번 쭉 훑어보고 여유 있는 폼새로 “무엇이 명확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이런 투로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완고한 보황파가 아닌가”

천보다가 위협적으로 을러댔다. 푸충비는 찻잔을 들어 올려 향을 음미하며 천보다의 물음에 개의치 않았다.

“누가 당신에게 이렇게 하라고 시켰나?”

참다못한 천보다는 사나운 표정과 말투로 다시 추궁했다.

“위에서 시켜서 했소.”
“위에서? 어떤 위쪽?”


푸충비는 세월아 네월아 하는 식으로 연신 차만 마셔댔다. 열 받은 ‘개똥 참모’ 캉성이 화가 나 어쩔 줄 몰라 노호했다. 저우언라이는 가슴이 철렁해 푸충비를 쳐다보았다.

“당신 말해, 당신 꼭 말해야 돼! 말하지 않으면 끝장을 보지 않을 수 없다!” 

푸충비는 화가 치밀어 찻잔을 세게 탁자에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말 하라고? 내가 무엇을 말해? 당신들이 주석을 찾아가 물어 보시오!”


회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긴장에 휩싸였다. 천보다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석에게 물어 보라고? 왜, 주석에게 물어?”
“주석이 시켰소이다! 나는 위에다 말하면 돼. 당신들은 나 보고 말하라고 할 수 없소. 주석을 찾아가 물어 보시오!”
“동지들, 모두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이야기 합시다.”


저우언라이가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나섰다.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장칭이 서둘러 의제를 바꿨다. 회의가 끝난 뒤 가슴이 철렁했던 저우언라이는 푸충비를 자신의 차에 태웠다. 댜오위타이로 가는 차안에서 근엄한 얼굴을 한 저우가 푸충비에게 “자네, 오늘 어떤 짓을 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푸충비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주석이 총리를 칭찬했습니다. 총리가 잘 처리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저우언라이는 그제 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968년 여름, 문화대혁명은 이미 만 2년이 지나고 있었다. 햇수로는 3년차 였다. 전국 각지에서 무장투쟁은 갈수록 치열하게 벌어져 군대 기관과 부대에 대한 조반파들의 공격이 잇따르고 무장장비를 탈취하는가 하면 장병들을 살상하는 사례도 늘어갔다. 또 무장대들이 국가은행과 창고, 상점 등을 털고 공공건물과 인민들의 집에 방화하며 철로와 우편운송을 방해하는 등 무법천지로 돌변했다. 국가행정도 마비돼 인민들의 생활이 극단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보다 못한 중공중앙,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중앙문혁이 공동으로 7월 3일 무력투쟁 중지를 명령하는 ‘포고(布告)’를 발표했다. (주석 493)

1. 즉시 무장투쟁을 중지하고 거점에서 철수한다. 먼저 철로교통의 각 거점에서 철수한다.
2. 무조건적이고 신속하게 류저우(柳州 유주; 무장투쟁이 극심한 광시성 도시) 철로국 전선(全線)의 철로교통 운수를 회복시킨다. 모든 방해와 경험교류(홍위병들의 지역이동)를 중단하고 운송수단의 원활한 소통을 보증한다. 
3. 무조건적으로 약탈해 간 물자를 돌려준다.
4. 무조건적으로 약탈해 간 인민해방군의 무기와 장비를 반환한다.
5. 모든 외지인과 (홍위병들의)도시간 교류하는 청년들은 즉시 본 지구나 본 단위로 돌아간다.
6. 확실한 증거에 의한 살인방화, 교통운수 파괴, 감옥공격, 국가기밀 절도, 사설방송 등은 현행 반혁명분자로 반드시 법에 따라 처리한다.


약발이 먹히지 않자 중공중앙,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중앙문혁은 공동명의로 7월 24일 다시 무장투쟁을 엄금하는 ‘포고’를 발표했다. 이런 가운데 마오는 베이징 조반파 학생들의 우두머리를 직접 만나 엄중 경고하기로 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이래 장칭과 중앙문혁의 지지와 지원을 받고 있는 베이징의 대학교 조반파 조직들은 전국 각 지역과 결탁하기 위해 인원을 파견해 연락소를 설치하고 문혁을 선동하면서 온갖 풍파를 다 일으켰다. 각 지역 조반파들이 베이징에 설립한 ‘베이징 연락소’는 1967년에 이미 수 천 개에 이를 정도였다. 이것이 무장투쟁이 그치지 않는 중요 원인이었다. 이때 베이징 각 대학의 조반파 학생 우두머리인 베이징 대학 여강사 녜위안즈(聶元梓 섭원재), 칭화대학 콰아이다푸(蒯大富 괴대부), 베이징 사범대학 탄호우란(譚厚蘭 담호란), 베이징 항공학원 한아이징(韓愛晶 한애정), 베이징 지질학원 왕다빈(王大賓 왕대빈) 등 5명을 ‘5대 영수’라고 불렀다. 

이들이 대규모 무장투쟁을 지휘해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고 이런 행위는 전국에 악영향을 끼쳤다. 마오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7월 27일 무장투쟁이 가장 심한 칭화대학의 칭화웬(淸華園 청화원)에 ‘수도 노동자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를 파견해 교내 양파 학생들의 무장투쟁을 제지하고, 무기를 회수하는 등 학생선무 공작을 펴도록 했다. 2만 8000~9000명의 노동자 선전대가 칭화웬에 진입하자 콰아이다푸 등은 무장 학생들을 동원해 이들을 공격했다.

쌍방은 치열한 무장투쟁을 벌여 노동자 선전대원 5명이 숨지고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부상당했다.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마오는 인민대회당에 녜위안즈 등 홍위병 ‘5대 영수’를 직접 면담할 수 있도록 긴급 호출 지시를 내렸다. 7월 28일 새벽 3시 반에 시작돼 오전 8시까지 4시간 30분에 걸친 마오와 ‘5대 영수’의 면담자리에는 린뱌오, 저우언라이, 천보다, 캉성, 장칭 등이 배석했다. (주석 494)

493)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94)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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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마오 “때가 됐다”… 홍위병들 ‘용도폐기’ 선언

 

마오의 면담은 일찍이 전례가 없었다. 마오는 사회혼란의 주범이 된 홍위병과 조반파의 무장투쟁을 강력하게 근절할 방침이었다. 노동자들이 사망하자 도피했다가 면담자리에 늦게 참석한 콰아이다푸(蒯大富 괴대부)가 '노동자 선전대'의 막후의 검은 세력을 거론하자 마오는 "홍위병을 진압하도록 한 막후의 검은 세력은 나야!"라며 호되게 질책했다. 마오는 "자네들은 어떻게 할 작정인가? 대학의 무장투쟁은 해결돼야 해! 자네들은 (문화대혁명을) 2년 동안 해오면서 첫째, 투쟁하지 않았고 둘째, 비판하지 않았고 셋째, 개혁하지 않았다. 투쟁은 해왔지만 자네들은 단지 무장투쟁만 했다"고 일갈했다.

 

마오는 "자네들은 군중을 이탈했다. 군중들은 내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광시(廣西 광서)의 포고는 광시에만 적용되고 베이징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싼시(陝西 섬서)에 포고를 내리면 싼시만 적용된다고 한다. 그럼 전국에 통고를 내리겠다. 어떤 지방을 막론하고 열거한 죄를 범한 자는 모두 반혁명분자로 처리하겠다. 해방군을 공격하고, 교통시설을 파괴하면 나는 그들을 소멸시키겠다! 이것은 토비(土匪)고 국민당이야! 중무기로 교통시설을 파괴하면 병력을 동원해 포위 소탕전을 벌이겠다!"고 강경하게 말했다.

 

마오는 마지막으로 "현재 학생들의 결점은 어디에 있는가? 학생들의 가장 심각한 결점은 바로 농민을 이탈하고, 노동자를 이탈하고, 군대를 이탈하고, 공농병(工農兵)을 이탈한 것이다. 바로 생산자를 이탈한 것이다"라고 '5대 영수'들을 매섭게 질타했다. 홍위병의 '용도폐기'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오는 8월 8일 중앙문혁 간담회 구성원, 우더(吳德 오덕) 등을 접견했을 때  대학교 문제 해결방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에게 기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역대(歷代)로 이와 같았다. 학생들은 하나, 공업을 파악하지 못하고 둘, 농업을 파악하지 못하고 셋, 교통을 파악하지 못하고 넷, 병(兵)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소란만 떨 뿐이다. 이른바 '5대 영수'에 대해 군중들은 그들을 믿지 않는다. 노동자, 농민, 병사들은 그들을 불신한다. 학생들도 그들을 불신한다. 그들이 속한 파의 대부분도 그들을 불신한다. 단지 몇 백 명이 간신히 통제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학생들이 인민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군중의 신임을 얻을 수 있겠는가? 20년, 30년 좋은 일을 할 때 비로소 군중의 신임을 받을 수 있다."

 

마오는 8월 19일에도 중앙문혁 간담회 구성원들과 이야기하면서 또 대학교의 해결방안을 거론했다. 마오는 "교원과 학생, 노동자들 가운데의 적극분자에 의존하되 그들을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 어떤 학교는 투쟁, 비판, 개혁(鬪批改 투비개)을 하지 않고 내전(內戰; 내부싸움)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있다고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마오는 특히 학생들 가운데 (문혁)운동을 방관하고 있는 소요파(逍遙派)들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소요파들이 시일이 갈수록 점점 늘어나 이제는 다수가 됐다. 이들 소요파들은 내부싸움을 반대하며 무장투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운동의 흐름과 민심의 소재를 파악하라는 얘기였다.

 

마오는 "올해 하반기에 (운동을)정돈하고, 교육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가 됐다"고 말해 새로운 운동방향을 시사했다. 이것이 당정(黨政) 기관의 간부, 지식분자, 학생들을 농촌이나 공장에 보내 노동단련을 하게 하는 '샤팡(下放 하방)'과 학생들을 변경지역의 산간지대나 농촌으로 보내 현장경험을 쌓도록 하는 '상산샤샹(上山下鄕 상산하향)’운동이었다. 문혁의 추동세력은 이제 홍위병에서 '노동자 선전대'로 바뀌고 있었다.

 

1966년 8월 중국 하얼빈에서 홍위병들이 펼친 ‘반란은 정당하다(造反有理)’ 공연. 중국 사진작가 리전성의 작품

 

마오는 8월 22일 야오원웬이 쓴 '노동자 계급의 영도아래 성실하게 투쟁, 비판, 개혁하자' 제목의 글을 비준하면서 '노동자 계급은 반드시 모든 것을 이끌어 가자'라고 제목을 고쳐 '훙치(紅旗)' 잡지에 실었다. 마오는 글을 고치면서 "우선적인 임무는 3자 결합(해방군 군구 대표, 군중 조반조직, 당정 간부; 필자 주)의 혁명위원회 건립이다. 이것은 대 비판과 대체적으로 계급대오를 정리하는 임무와 결합해야 한다"고 했다.

 

마오는 또 문혁의 선전이 너무 지나치다고 지적하고 '문화대혁명'의 글자 앞에 관용적으로 쓰고 있는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史無前例的 사무전례적)' 관용구를 삭제하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비준 글에서 "이후 '역사상 전례가 없다'는 관용사를 써서는 안 된다. 역사상 최대의 몇 차에 걸친 문화대혁명은 불을 발명하고, 증기기관차를 발명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건립했다. 우리들의 혁명이 아니다"라고 썼다. 마오는 얼마 뒤 여러 차례 문화대혁명은 "공산주의 운동사상의 선구적인 일"이라거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새로운 발전"이라는 유(類)의 어법 사용을 반대했다. (주석 495)

 

마오를 지키는 위병(衛兵)이자, 문화대혁명의 '전위대'였던 홍위병(紅衛兵)은 9월부터 시작한 '샤팡(下放 하방)', 즉 기관의 간부나 학생들이 지방에 내려가 노동자, 농민과 함께 노동하는 현장학습을 하게 되었다.

 

홍위병들은 12월 부터는 변경지역의 산간지역이나 농촌으로 들어가 농민들과 생활하며 단련하는 '상산샤샹(上山下鄕 상산하향)'운동에 참가했다. 마오를 비롯한 린뱌오, 장칭의 노회한 극좌파 집단의 꼭두각시로 '우귀사신(牛鬼蛇神; 마귀와 요귀, 온갖 악인/ 수정 자본주의 지칭)'을 척결하는 선봉으로 나서 온갖 패악을 저질렀던 홍위병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재난을 가져다주는 '혼세마왕(混世魔王)'으로 낙인이 찍혀 시나브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마오가 8월 19일 발언에서 "때가 됐다"고 한 것은 마오의 심경을 잘 드러내고 있는 데, 이것은 지난해(1967년) 1월 상하시에서 기존 성시(省市)위원회의 권력을 탈취한 이른바 '1월 폭풍'으로 새로운 권력기관을 구성한 '혁명위원회(革命委員會)'를 일컬음이었다. 상하이발 '1월 폭풍'으로 전국 각 지역에서 하나, 둘씩 혁명위원회가 구성되면서 1968년 9월 1일 당시 타이완(臺灣 대만)을 제외한 29개 성, 자치구, 직할시에 모두 혁명위원회가 건립돼 새로운 통치기구로 자리매김했다.

 

문혁이 시작 된지 2년여 만에 마오가 주장한 '당권파'와 '수정 자본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중앙과 지방의 당정조직을 '혁명파'들이 탈권(奪權) 투쟁을 벌여 완전 장악하게 됐다. 인민일보와 해방군보는 9월 7일 혁명위원회 구성완료를 기념하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전면승리 만세' 제목의 공동 사설을 실었다. 이들은 사설에서 이른바 '(혁명위원회의 구성으로) 전국이 붉게 물들었다(全國山河一片紅 전국산하일편홍)'는 상징적 의미를 내세워 "그것(혁명위원회)은 모든 운동이 전국적인 범위 안에서 투쟁, 비판, 개혁의 단계에 들어선 것을 상징한다"고 밝혔다.

 

495)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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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문화대혁명에 대한 ‘보고’ 집필 지시

 

1968년 10월 13일 중공 8기 확대 12중전회가 마오의 주재로 열렸다. 이 회의는 1966년 8월 중공 8기 11중전회에서 문화대혁명을 공식 결정한 이래 2년여 만에 열린 1차 중앙 전체회의였다. 전회에 참석한 133명 중 중앙위원과 중앙 후보위원은 단지 59명에 불과했다. 참석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8기의 중앙위원은 애초 97명이었으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타도되거나 비판을 받아 현직에서 물러난 사람이 57명이나 됐기 때문이다. 회의가 성원 정족수에 미달해 중앙 후보위원에서 10명을 추려 중앙위원으로 임명해 겨우 회의를 열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할퀴고 간 참상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저우언라이는 개막사에서 "이번 전체회의는 우리 당의 9차 대표대회를 앞두고 준비공작을 하기 위해 열렸다"고 밝혔다. 저우언라이는 전체 회의의 의사일정을 1)9대 대표를 어떤 원칙과 방법으로 선출하고 2)당장(黨章) 초안 수정을 하며 3)형세 분석 4)전담 심사 보고 등 4가지를 집중 토의하기로 했다고 선포했다.

 

회의가 후반에 들어서면서 린뱌오와 장칭 등은 연합해 이른바 '2월 역류'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했다. 분조(分組)회의에 참석한 원로 원수들인 천이, 쉬샹쳰, 녜룽전, 예졘잉 등은 집중적으로 포위공격을 받았다. 린뱌오는 전체회의에서 "2월 역류는 11중전회 이후 발생한 첫 번째 가장 심각한 반당(反黨)사건으로 자본주의 복벽(부활)의 예행연습"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마오도 폐막식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으나 린뱌오의 시각과는 사뭇 달랐다. (주석 496)

 

"이 일은(2월 역류) 작은 문제라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큰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대단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고, 뭐가 대단하냐고 말할 수도 있다. 일종의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들이 다른 의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있다. 그들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다. 어떤 비밀도 아니다. 몇 사람이 함께 했다. 모두 정치위원이고, 부총리다. 일부는 군사위원회 부주석도 있다. 당내 생활에서 허가할 수 있는 일이다."

 

회의가 끝난 뒤 캉성은 '2월 역류'의 자료를 엮어 9대 회의에 사용할 것을 제기해 장칭의 지지를 받았으나 마오가 동의하지 않아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회의에서 관심의 초점이 된 '문화대혁명'의 평가와 관련해 비상한 주목을 끌었으나 마오는 매우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마오는 전회에 발표한 '공보(公報)’에서 "이번 무산계급의 문화대혁명은 무산계급 독재를 공고히 하고 자본주의의 복벽을 방지해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대단히 적시에 이뤄졌다"고 높게 평가했다. 이 회의에서 류샤오치는 영원히 당적이 박탈됐고, 모든 직무가 철회됐다. 덩샤오핑은 마오의 보호로 당적박탈은 보류됐으나 모든 직무는 철회돼 심사 대상자가 되었다. 회의기간에 '훙치(紅旗 홍기)' 잡지가 '무산계급의 새로운 피 수혈-당(黨) 정비 공작에서의 하나의 중요문제' 제하의 사설을 발표했다.

 

조반파들의 권력탈취 과정에서 타도된 당정 간부들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오는 당을 개선하고 정비하기 위해서는 '묵은 공기를 뱉어버리고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 한다(吐故納新 토고납신)'는 특유의 물갈이론을 내세웠다.

 

마오는 "사람은 동맥과 정맥이 있어 심장을 통해 혈액순환을 하게 된다. 또 폐를 통해 호흡을 한다. 이산화탄소를 내뱉고 호흡을 통해 신선한 산소를 받아들인다. 묵은 공기를 뱉어버리고 신선한 공기를 마셔 몸의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산계급의 당(黨)도 '토고납신'을 할 때 생기발랄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마오는 문혁을 통해 새롭게 떠오른 신진기예의 인물, 즉 새로운 피를 수혈해 활력이 넘치는 당으로 개조하려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권력을 농단하고 있던 린뱌오와 장칭은 자파(自派)세력을 강화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경쟁적으로 세력 확대에 나섰다. 이에 따라 함량미달의 조반파의 골간들이 대거 당에 진입해 심지어는 하루아침에 영도직에 오르는 폐해가 속출했다. 이를 계기로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던 린뱌오와 장칭은 경쟁적 관계로 바뀌면서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마오는 1969년 1월 3일 중앙 군사위원회 판사조(辦事組)에 보낸 문건에서 "2월 역류에 관련한 노(老) 동지와 그 가족들에 대한 비판을 하지 말고 그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할 것"을 지시했다. 마오는 2월 19일 중앙문혁 간담회에 '2월 역류'로 정치무대를 떠났던 원수들과 국무원 부총리를 지냈던 원로들을 복권시켜 정치활동을 재개하도록 해 회의에 참석토록 했다.

 

이날 회의에는 천이(陳毅 진의), 리푸춘(李富春 이부춘), 리셴녠(李先念 이선념), 쉬샹쳰(徐向前 서향전), 녜룽전(聶榮臻 섭영진), 예졘잉(葉劍英 엽검영) 등이 실각한지 2년 만에 공식회의에 참석했다.

 

마오는 "당신들 몇 사람의 원수들은 국제문제를 연구하는 공작을 했으면 한다. 천이가 수장을 하고 쉬샹쳰, 녜룽전, 예ㅤㅈㅖㄴ잉이 참가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마오는 또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리푸춘, 리셴녠 등에게는 경제 5개년 계획 등 경제 분야에서 공작하도록 했다. 마오는 1969년 4월 1일부터 24일까지 베이징에서 12년 만에 열리는 중공 제9차 전국대표대회를 앞두고 준비 작업을 독려하면서 회의 보고에 최대의 관심을 쏟았다.

 

마오는 2월 7일 중앙문혁 간담회를 열어 린뱌오를 '보고(報告)' 집필 수장으로 하고 집필진은 천보다(陳伯達 진백달), 장춘챠오(張春橋 장춘교), 야오원웬(姚文元 요문원)으로 구성해 천보다가 팀장을 맡도록 했다. 구체적 내용은 린뱌오와 상의해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보고' 작성이 지지부진하자 화를 내면서 린뱌오파인 천보다와 장칭파인 장춘챠오, 야오원웬이 각각 별도로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보고에 담을 대강의 내용에 대해 "총괄적으로 말하면 모순을 제기하고, 무산계급, 자산계급 투쟁, 왜 문화대혁명을 해야 하는지, 군중운동을 방해하는 것들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 등"을 지적하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최종적으로 장춘챠오, 야오원웬이 작성한 보고를 채택하고 천보다가 기초한 보고를 폐기했다. 천보다의 보고는 린뱌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린뱌오파인 우파셴(吳法憲 오법헌)은 훗날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주석 497)

"천보다가 (보고를)쓸 때 날마다 린뱌오의 집으로 찾아와 어떻게 쓸지를 린뱌오와 상의했다. 린뱌오가 큰 줄거리를 말해줘 천보다는 전적으로 린뱌오에 의지했다. 주석이 천보다의 보고를 부정하자 린뱌오는 대단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보고를 린뱌오와 천보다가 상의해 썼기 때문이다. 장춘챠오 등이 기초한 보고가 채택되자 린뱌오는 '어떻게 썼던지 간에 나, 린뱌오는 한 자도 고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9대 보고 때 린뱌오는 회의에서 원고를 읽기만 했다."

 

496)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97)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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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린뱌오파와 장칭파, 권력욕에 ‘빙탄지간’으로 변절

 

마오는 4월 1일 열린 9대회의 개막식에서 “나는 우리들의 대회가 충분히 잘 진행돼 단결의 대회가 되고 승리의 대회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히고 공산당 성립 이래 역대 전국대표대회를 회고한 뒤 이렇게 말했다.

 

“8대에서 현재까지의 경과는 비교적 명확하다. 정치노선이나 조직노선, 사상방면에서 모두 뚜렷하다. 이로 인해 우리들은 이 (9대)1차대회를 충분히 단결하는 대회로 이룰 수 있다. 이런 단결의 기초위에서 우리들은 승리를 할 수 있겠는가? 이 대회를 승리의 대회로 이룰 수 있겠는가? 대회이후 전국에서 더욱 더 큰 승리를 이룰 수 있겠는가?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단결의 대회, 승리의 대회를 열 수 있고, 대회이후 전국에서 더욱 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마오가 이처럼 단결과 승리를 강조한 것은 근 3년간 계속되고 있는 문혁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마오는 문혁의 지도사상인 ‘무산계급의 독재아래 계속 혁명의 이론’의 잘못된 이론과 실천을 더욱 합법화시켜, 9대 대회의 정치노선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린뱌오는 8기 중앙위원회를 대표해 정치보고를 했다.

린뱌오는 8개 부문으로 나눠,

1)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준비
2)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과정
3) 성실한 투쟁, 비판, 개혁을 잘 수행하는 데 관하여
4)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정책
5) 우리나라 혁명에 관한 최후 승리
6) 당의 정돈과 건설에 관하여
7) 우리나라와 외국에 관한 관계
8) 전당, 전국 인민이 단결해 더욱 더 큰 승리 쟁취 등의 보고를 했다.

 

4월 2일부터 시작한 분조(分組)회의에서 본격적으로 정치보고와 공산당 당장(黨章) 개정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당장 개정에서 가장 참석자들의 눈길을 끈 것은 ‘린뱌오 동지는 마오쩌둥 동지의 친밀한 전우이자 후계자’라는 규정이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중공중앙 판공청 부주임이었던 장야오츠(張耀祠 장요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주석 498)

“1968년 10월 17일 중공 8기 12중전회에서 당장을 토론할 때였다. 장칭(江靑 강청)이 이렇게 제기했다. ‘린뱌오 동지는 대단한 무산계급 혁명가의 풍격을 지녔다’, ‘그는 그렇게 겸손하다. 마땅히 당장(黨章)에 써야한다’, ‘후계자로서 당장에 써 넣어야 한다’. 장칭은 한 발 더 나아가 ‘반드시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1968년 10월 27일 당장을 토론할 때 장칭은 린뱌오를 마오 주석의 후계자로 당장에 기입해야 한다는 뜻을 견지했다. 장칭은 1969년 4월 중앙의 당장 개정 토론회에서 ‘린뱌오의 이름을 기입해야 한다, 우리들은 기입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다른 사람이 넘겨다 볼 수 없고, 전국 인민이 마음을 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장춘챠오가 찬성했다. 장춘챠오는 ‘이렇게 당장에 기입해야 마음은 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주석은 린뱌오의 이름 당장에 기입하느냐 여부에 관한 문제를 밤에 고려했다. 주석은 마지막으로 ‘이왕에 대다수 동지들이 모두 동의한다면 린뱌오를 써 넣어라!’고 말했다.”


마오는 4월 14일 9대의 2차 회의를 주재하면서 상하이 ‘1월 폭풍’의 주역 왕홍원(王洪文 왕홍문)을 저우언라이 등 9명의 발언자에 포함시켜 상하이 노동자 계급의 대표로 발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마오의 이례적인 이런 조처는 왕홍원을 후계자의 일원으로 마음속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오는 왕홍원을 몇 차례 밖에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9대회의 이후 자신의 곁에 두기로 결정한 계기가 되었다. 9대 회의는 당장에 린뱌오를 미래권력인 후계자로 정해 기입하는 공산당사상 전무후무한 진풍경을 보였고, 1958년 삭제한 ‘마오쩌둥 사상’을 다시 당장에 삽입하고 4월 24일 폐막했다.

 

 장칭(왼쪽)과 린뱌오

 


회의가 끝난 4일 뒤인 4월 28일 마오의 주재로 중공중앙 9기 1중전회가 열려 새로 출발하는 중앙 영도기구를 구성하는 중앙 정치국위원을 선출했다. 이날 무기명투표로 선출한 25명의 중앙 정치국위원에는 린뱌오, 장칭파의 주요 인물들이 거의 진입했다. 중앙위원 투표자 277명의 전표(全票)를 얻은 사람은 마오, 린뱌오, 저우언라이, 캉성 등 4명이었다. 천보다 275표, 황융성(黃永勝 황영승) 274표, 장칭 270표를 얻었다.

린뱌오파인 우파셴, 린뱌오 부인 예췬(葉群 엽군)이 장칭파인 장춘챠오, 야오원웬 보다 많은 표를 얻어 뽑혔다. 정치국 상무위원에는 마오, 린뱌오, 저우언라이, 캉성, 천보다 5명이 선출됐다. 마오가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다시 당선됐으며, 린뱌오가 부주석으로 선출됐다. 투표결과 린뱌오파와 장칭파인 중앙문혁 소조파가 정치국위원의 과반수이상을 차지했다. 린뱌오파가 장칭파를 압도하는 양상을 보여 두 파간의 권력쟁탈전은 더욱 심화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오는 9기 1중전회에서도 계속 단결과 문화대혁명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나의 말은 항상 하는 말이다. 모두들 알고 있는, 새로운 말이 아니다. 단결이다. 단결의 목적은 보다 더 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들이 말하는 승리는 무산계급 영도를 보증하는 아래 전국의 광대한 군중을 단결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계속해야 한다. 이 혁명은 끝나지 않았으며 현재 예를 들면 투쟁, 비판, 개혁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

“보건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기초는 공고하지 않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상당히 큰 다수의 공장의 우두머리, 영도권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있지 않다. 노동자 군중의 수중에 있지 않다. 무산계급 독재를 공고히 해 공장, 농촌, 기관, 학교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단결해야 한다.”


마오는 또 한달 전인 3월 2, 15일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흑룡강성) 전바오다오(珍寶島 진보도)지구 중-소국국경에서 발생한 대규모 무장충돌 사건을 언급하면서 전쟁준비 강화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 만든 중앙정치국은 이날 군사위원회를 새롭게 구성했다. 마오가 군사위원회 주석을 맡고, 린뱌오, 류보청, 천이, 쉬샹쳰, 녜룽전, 예졘잉이 부주석에 임명됐다.

실제적으로 군사위원회 일상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 군사위원회 판사조(辦事組) 조장에 린뱌오파의 두 팔인 총참모장 황융성, 부조장에 공군사령관 우파셴을 임명했다. 9대의 권력지형도를 보면 정치국 상무위원 5명 중 마오와 저우언라이를 제외하면 린뱌오파는 천보다를 비롯해 린뱌오와 장칭 집단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캉성 등 린뱌오파가 ‘2.5 명’으로 우세를 나타냈다.

정치국위원 중 린뱌오파는 부인인 예췬을 비롯해 황융성, 우파셴, 리줘펑(李作鵬 이작붕), 치우후이줘(邱作會 구작회) 등 5명이다. 장칭파는 장칭을 비롯해 장춘챠오, 셰푸즈(謝富治 사부치), 야오원웬 등 4명이다. 행정과 군 원로 그룹은 주더를 비롯해 둥비우(董必武 동필무), 류보청, 리셴녠, 예졘잉 등 5명이며, 새로 중앙위원에 진입한 군부의 쉬스여우(許世友 허세우), 천시롄(陳錫聯 진석련)이 있었다.

정치국위원 16명 가운데 장칭, 예췬 등 12명이 이른바 ‘새로운 피’로 수혈한 인물로 문화대혁명을 통한 대폭적인 물갈이가 이루어졌다. 후계자로 당장에 기입한 ‘미래권력’ 린뱌오파가 대거 약진해 권력의 중추를 장악하게 됐고, 장칭을 우두머리로 한 중앙문혁파가 바짝 추격하는 형세였다. 여기에 세력은 미약하지만 저우언라이를 축으로 하는 행정실무파와 ‘2월 역류’에서 복권한 원수들을 위요한 원로 그룹들이 느슨한 연대를 형성하며 제3의 세력을 구축해 ‘3분 양상’을 보였다.

야심만만한 미래권력의 독주를 그냥 눈 뜨고 지켜 볼 장칭파가 아니었다. 이들 또한 ‘대권의 꿈’을 안고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가는 권력욕을 주체하지 못했다.

린뱌오와 장칭은 공동의 적으로 여겼던 류샤오치, 덩샤오핑의 당권파를 무너뜨린 이후에는 서로에 대한 적으로 돌아섰다. 9대 이후 권력이 재편되면서 이리와 승냥이가 권력이란 먹을거리를 놓고 으르렁대면서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다. 장칭의 군사(軍師) 장춘챠오는 린뱌오파의 오른팔인 총참모장 황융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막지 한 자”라고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런가하면 린뱌오는 측근 참모인 장칭파에서 투항한 천보다와 황융성, 우파셴 등과 회의할 때 “장춘챠오와 야오원웬은 무명소졸(小卒)로 천둥에 개 뛰어들듯이 뛰어든 자들로 어떤 큰일을 도모할 수 없는 일개 조그만 기자 나부랭이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두 파가 낮이나 밤이나 죽자 사자 물고 뜯는 형국이 빈번해지면서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관계로 치닫고 있었다. (주석 499)

498)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99)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揭秘; 林彪與江靑從合伙到分裂的全過程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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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린뱌오, 주석 자리 호시탐탐… 마오와 ‘엇박자’

 

마오는 9대 회의가 끝난 뒤 1969년 5월 31일 가벼운 마음으로 지방순시를 하기 위해 전용열차로 베이징을 떠나 우한(武漢)으로 내려갔다. 마오는 공군 초대소인 ‘7.20 사건’ 당시의 둥후빈관(東湖賓館 동호빈관) 매이링(梅嶺 매령) 1호에 묵었다. 마오는 둥후빈관 회랑에서 응접실, 서재, 침실 곳곳에 자신의 화상(畵像)과 어록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모두 떼어내도록 지시했다.

어느 날 마오는 린뱌오가 자신과 관련해 ‘(마오 주석의)한 마디가 만 마디에 필적한다’고 말한데 대해 공작원에게 “사람의 한 마디의 말이 어떻게 만 마디 말에 상당할 수 있는가? 한 마디는 한 마디일 뿐이다. 만 마디가 될 수 없다. 맞먹을 수가 없다. 더욱이 그렇게 많은 것과 필적할 수 없다. 나의 한 마디가 어떻게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나. 그러면 신이 아닌가? 이것은 유물주의가 아니고, 변증법도 아니다”라고 씁쓸해 했다. 

또 한 번은 마오가 중공 9대 대회 기록영화를 봤을 때였다. 스크린에 여러 차례 자신의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대표들이 장시간 환호하는 모습이 비쳤다. 마오는 화가 나 기록영화를 보다 퇴장하면서 “어떻게 한 사람이 늘 자신의 영화를 보는가? 나의 장면이 너무 많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마오는 공작원에게 “린뱌오가 자신을 숭배하는 ‘4가지 위대함(위대한 스승, 지도자, 통솔자, 조타수)’은 아주 혐오스럽다”고 불쾌해 했다. 마오는 린뱌오가 그동안 인민들에게 자신을 숭배하도록 부추긴 것들에 대해 점점 실증을 느끼고 역겨워하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조짐이었다.

중공중앙은 6월 12일 마오의 비준에 따라 ‘마오 주석 형상(形象; 이미지) 선전에 관해 주의해야 할 몇 가지 문제’의 문건을 하달했다. 문건은 “현재 국내 선전에 있어 형식을 추구하고 과장,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이후부터 중앙의 비준 없이 마오 주석의 얼굴이 들어 있는 휘장제작을 할 수 없다. 각 신문은 평시에 마오 주석의 초상을 1면에 쓸 수 없으며, 충성운동에 사용할 수 없다. 봉건적인 건축을 건립할 수 없다. 밥 먹기 전에 (마오)어록을 읽고, 마오 주석 초상에 대한 예를 행하는 등의 형식적인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등의 내용이었다. 마오는 자신을 숭배하는 개인숭배에 헛구역질을 하며 린뱌오의 권력에 대한 탐욕을 은연중 경계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마오는 오랜 동안의 고려 끝에 1970년 3월 8일 중앙에 4기 전국 인민대표 대회와 헌법 개정에 관한 의견을 개진하면서 국가주석직을 설치하지 않을 것을 제의했다. 국가주석은 류샤오치가 1968년 10월 당에서 영구제적 되고 모든 직책이 철회된 이후 공석으로 남아있었다.

마오는 1959년 대약진 등 ‘3면 홍기’ 실패와 관련해 국가주석 자리를 류샤오치에 물려주고 2선으로 후퇴한바 있었다. 당시 마오는 우한에 있었고, 린뱌오는 쑤저우(蘇州 소주)에 머물며 중앙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정치국 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한 린뱌오의 부인 예췬에게 정치국 위원들이 ‘국가주석 직제를 설치하지 않기로 한 마오의 의견과 마오의 제의를 찬성한다는 뜻을 린뱌오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린뱌오는 3월 9일 예췬을 통해 정치국의 린뱌오파인 황융성과 우파셴에게 “린 부주석은 국가주석 직제 설치를 찬성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3월 17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중앙과 지방 당정군 책임자들이 참석한 중앙공작 회의에서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마오의 국가주석 직제를 설치하지 않는다는 제의에 찬성했다. 린뱌오는 비서를 통해 마오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린뱌오 부주석이 마오 주석이 국가주석을 맡아야 한다”는 뜻을 마오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마오가 명확하게 국가주석직을 설치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린뱌오는 여전히 국가주석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마오와 린뱌오의 이견(異見)은 문혁이후 중대한 문제에서 공개적으로 처음 나타난 것으로 비상한 주목을 끌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마오주석 만세"라는 글귀가 새겨진 마오쩌둥 휘장(왼쪽)과 린뱌오와 마오쩌둥이 그려진 포스터.

 

마오는 4월 초 레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신문에 실을 글을 비준하면서 글 가운데 ‘마오 주석은 당대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참신한 단계로 제고시켰다’, ‘마오쩌둥 사상은 제국주의가 전면 붕괴로 가고, 사회주의가 전 세계 승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마르크스-레닌주의다’, ‘마오쩌둥은 당대의 레닌이다’ 등등의 글귀를 삭제했다. (주석 500)

마오는 “내가 삭제한 몇 단락은 모두 쓸데없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반감을 사는 것들이다. 이런 유(類)의 말을 쓰지 말라고 내가 수도 없이 많이 말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이게)무슨 도리인지 모르겠다. 중앙의 각 동지는 연구하기 바란다”라고 비준 글을 썼다. 마오가 삭제한 이런 내용의 문장은 린뱌오가 마오를 개인숭배 하는 데 사용했던 글들이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비준 글을 즉시 중앙정치국 범위 안에서 열람하도록 했다. 쑤저우에 있던 린뱌오도 마오의 비준 글을 보았으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1주일이 지난 4월 11일 밤 린뱌오는 돌연 침묵을 깨고 비서를 통해 정치국에 전화를 걸어 린뱌오의 3가지 의견을 전달했다.

1. 이번 인민대표대회 국가주석에 관한 문제에 대해 린뱌오 동지는 여전히 마오 주석이 (국가주석을)겸임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이렇게 해야 당내, 당외, 국내, 국외 인민의 심리상태에 적합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민의 심리상태에 부적합한 것이다.

2. 부주석 문제에 관하여 린뱌오 동지는 설치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부주석을) 많이 둬도 되고, 적게 둬도 된다. 큰 문제가 아니다.

3. 린뱌오 동지는 그 자신이 부주석의 직무를 맡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저우언라이는 다음날 정치국회의를 주재해 린뱌오가 제기한 의견을 토론에 부쳤다. 상당수 정치국 위원들이 린뱌오의 의견, 마오가 국가주석을 맡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저우언라이는 이런 토론결과를 마오에게 보고했다. 마오는 보고를 받은 당일인 4월 12일 “내가 이 일을 다시 할 수 없다. 이 의견은 타당하지 않다”고 밝혔다. 마오의 이런 의견표시는 린뱌오가 제의한 이른바 ‘3가지 의견’에 대한 명확한 거부의사의 답신이었다.

4월 하순, 지방에 있던 마오와 린뱌오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베이징으로 왔다. 마오는 중앙 정치국 회의에서 자신이 국가주석을 맡는 것은 맞지 않으며, 국가주석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3번 째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다. 마오는 린뱌오가 있는 자리에서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孫權)은 (위나라의) 조조(曺操)에게 황제가 되라고 권했다. 조조는 손권이 나를 화롯불 위에 놓고 구워 죽이려고 한다. 나는 당신들에게 내가 조조가 되지 않기를 권한다. 당신들도 손권이 되지 말라”고 당부했다. (주석 501)

마오가 이처럼 견결한 뜻을 밝혔음에도 린뱌오는 뒤에서 계속 반대논조를 펼쳤다. 당의 주석과 부주석이 엇박자를 놓았다. 이것은 대단히 비정상적 상태로 일종의 도전이었다. 린뱌오는 5월 중순 우파셴에게 “국가주석을 세워야 한다. 국가주석을 세우지 않으면 국가에 머리가 없는 것이다. 명분이 정당하지 않으면 말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名不正言不順 명부정언불순)”라고 강조했다.

린뱌오가 왜 이렇게 국가주석직 설치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일까? 린뱌오의 부인 예췬은 7월 우파셴에게 몰래 내막을 털어 놓았다. 예췬은 “만약에 국가주석을 세우지 않으면 린뱌오는 어떻게 하나? 어디로 가야하나?”라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린뱌오가 국가주석직 설치에 다 던지기(올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린뱌오파는 7월 중순 린뱌오와 예췬의 지시에 따라 중앙 헌법 개정 기초위원회 회의기간에 다시 국가주석직 설치를 요구하는 ‘외침’을 토해냈다.

마오는 이 소식을 듣고 “국가주석을 두자고 하는 그런 형식적인, 사람에 따라 설치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한 사람에 따라 설치한다는 것은 거의 바로 ‘어떤 사람이 국가주석을 하고 싶다’는 뜻과 같은 말이다”라고 일갈했다. 장칭은 린뱌오파와 동반자 관계일 때는 자신이 직접 나서 린뱌오를 당장에 후계자로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죽기 살기로 권력을 다투고 있는 지금의 처지에서는 린뱌오파의 국가주석 설치 주장은 자파세력의 약화를 의미해 반대를 해야 했다. 게다가 마오의 반대 속내를 간파한 장칭은 마오를 업고 린뱌오파를 공격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장칭은 린뱌오파의 권력독주를 막고 자파세력을 넓히기 위한 정면승부에 나섰다. 

500)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林彪被選定爲接班人後爲何仍不滿意?  人民網-文史頻道
501)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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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마오, 린뱌오 권력욕심 의심하면서 불쾌감 표출

 

7월 하순 마오가 베이징을 떠나 남방지역으로 간지 얼마 안 되어 린뱌오파와 장칭파가 한바탕 예봉을 겨뤄 풍파를 일으켰다. 8월 1일 건군절을 앞두고 신문에 실을 사설 내용을 놓고 린뱌오의 책사로 변신한 천보다(陳伯達)와 장칭의 ‘지낭(智囊)’으로 통하는 군사(軍師) 장춘챠오가 일합을 겨뤘다.

 

천보다는 원고 가운데 ‘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이 직접 창건하고 영도한, 마오 주석과(毛主席和 모주석화) 린뱌오 부주석이 직접 지휘한 중국인민해방군’이라고 쓴 글에 대해 ‘마오 주석과(毛主席和)’의 4글자를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장춘챠오는 삭제해서는 안 된다며 팽팽하게 맞섰다.

 

저우언라이는 이틀 뒤 마오 접견을 위해 외빈을 대동해 상하이에 갔을 때 천보다와 장춘챠오의 다툼을 이야기하며 마오의 지시를 청했다. 마오는 정치국에서 이미 토론을 거친 문제로 개의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의견을 정치국 성원들에게 전달했다. 마오는 이 문제에 개의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마오는 중앙 판공청 주임인 왕둥싱(汪東興 왕동흥)에게 “쟁론을 벌인 두 가지 의견에 나는 모두 찬성하지 않는다. 창건자가 지휘할 수 없는 게 가능한가? 창건자는 나 혼자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있다!”며 천보다가 자신의 이름을 삭제한 데 대해 마음속으로는 괘씸하게 여겼다.

 

이것은 마오가 나중에 여러 차례 언급한데서 엿볼 수 있다. 마오는 1969년 10월 전쟁대비와 관련해 린뱌오가 갑자기 국가의 중대사인 ‘제1호 명령’을 발동하면서 중앙영도들을 지방에 소개할 때 사전에 마오에 알리지 않은 사실을 대단히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마오는 불편한 속내를 털어놓지 않고 계속 린뱌오를 관찰해오다 린뱌오의 수하인 천보다가 ‘마오주석과(毛主席和 모주석화)’를 빼버렸으니 어찌 마음이 좋을 수 있었겠는가? 이 역시 마오는 마음속에 켜켜이 쌓아 놓은 채 린뱌오를 더욱 의심하기 시작했다. (주석 502)

 

마오는 린뱌오가 더욱 더 높은 지위와 더욱 더 많은 권력을 바라고 있다는 야심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헌법 개정 문제는 4기 인민대표회의를 준비하는 의제 중 중요한 과제로 마오를 주임, 린뱌오를 부주임으로 하는 헌법기초위원회를 꾸렸다. 9기 2중전회 개회 10일 전인 8월 13일 오후 캉성 주재로 헌법초안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초안 서론부분에 “우리들 사상을 지도하는 이론의 기초는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이다. 마오쩌둥 사상은 전국의 모든 공작의 지도방침이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장춘챠오는 “이미 ‘이론의 기초’라는 구절이 있는 만큼 뒤의 구절인 ‘(마오쩌둥 사상은 전국의 모든 공작의 지도방침이다)’는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장춘챠오는 또 “‘천재적으로 창조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발전시켰다’는 풍자적 글귀”라며 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린뱌오파의 우파셴은 “천재적으로, 전면적으로, 창조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발전시켰다는 것은 8기 11중회 공보(公報)와 ‘마오 주석 어록’ 재판 머리말에 실어 인정한 것이다. 이것을 부정하려는 것인가?”라며 공격했다. 우파셴은 또 “(이것은) 어떤 사람이 마오 주석의 위대한 겸손과 마오쩌둥 사상을 평가절하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회의가 끝난 뒤 황융성은 전화를 걸어 이런 사실을 베이다이허(北戴河 북대하)에서 휴양하고 있는 예췬에게 보고했다. 예췬은 전화에서 “린 부석(린뱌오)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린뱌오가) 우 땅딸보(우파셴은 키가 작고 뚱뚱함)가 끝내주게 공격을 잘 퍼부었다고 칭찬했다”고 말했다.

 

예췬은 14일 저우언라이 주재의 정치국 회의에서 헌법수정 초안에 대한 상의 결정을 앞두고 천보다와 황융성에게 각각 전화를 걸었다. 예췬은 전화에서 “(마오에 대한) ‘천재(天才)’와 ‘4가지 위대(偉大)함’ 방면에 관한 어록을 준비해 정치국 회의에서 장춘챠오 등과 계속 투쟁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장칭파의 꾀주머니 장춘챠오는 이들의 의표를 찔러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않아 헌법초안은 순조롭게 넘어갔다. 린뱌오는 황융성, 우파셴 등에게 암암리에 “아주 조심해야 한다. 이 일은 끝나지 않았다. 루산(廬山 여산)회의(곧 열릴 중공 9기 2중전회를 말함) 때 크게 투쟁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며 투쟁을 고취시켰다.

 

린뱌오는 마오 숭배를 내세워 국가주석직을 헌법에 명기할 경우 국가주석을 지낸 마오가 여러 차례 주석을 겸하지 않겠다고 밝힌 만큼 당장(黨章)에 후계자로 명기된 자신의 차지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린뱌오는 국가주석이 돼야 명실상부한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여겨 여기에 모든 것을 걸고 ‘임전태세’를 갖춘 것이다. 또 한 차례의 격렬한 정치적 풍파를 예고하고 있었다.

 

중공 9기 2중전회가 1970년 8월 23일 오후 3시 장시성(江西省 강서성) 루산(廬山 여산) 강당에서 개막됐다. 원래의 의제는 4기 전국 인민대표대회에 제출할 헌법초안 개정과 국민경제의 년도계획, 전쟁준비 공작에 대한 토론이었다. 여기에 마오가 제의한 국내외 형세(形勢)문제를 추가해 논의하기로 했다. 회의에서 토론할 분임조를 지구별로 6개조로 구성했다. 회의 개막 전에 마오, 린뱌오, 저우언라이, 천보다, 캉성 등 5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소회의실에서 간담회를 열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와 캉성에게 “당신들 중 누가 먼저 발언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마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린뱌오가 돌연 “제가 할 말이 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저우언라이와 캉성이 “그럼, 좋습니다. 당신이 먼저 발언을 하시오”라고 했다.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린뱌오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내용을 몰랐다. 상무위원들이 회의 의사일정을 논의할 때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오가 린뱌오를 보며 “당신들 셋이서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이때 회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마오가 개회를 선포했고, 린뱌오가 제일 먼저 발언에 나섰다. (주석 503)

 

“어제 오후 주석이 상무위원회를 소집해 이번 회의에 대해 중요지시를 했다. 요 몇 개월 동안 주석은 헌법에 대한 문제와 인민대표대회(인대)의 문제 모두 큰 관심을 보였다. 헌법 개정과 인대회의 소집문제는 모두 주석이 제의한 것이다. 나는 대단히 필요하고, 대단히 시의에 적절하다고 본다. 국내외의 아주 좋은 형세에서 인대를 열고 헌법을 개정하는 것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성과를 공고히 하고, 무산계급의 독재를 공고히 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반제(反帝)반수(反修; 수정주의 반대) 투쟁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대해 모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마오쩌둥 동지는 당대에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다. 마오쩌둥 동지는 천재적으로, 창조적으로, 전면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하고 지키면서 발전시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하나의 참신한 단계로 제고시켰다. -마오쩌둥 동지는 광대한 노동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하고, 마오 주석은 우리 당, 정부, 국가, 군대의 창건자이다.-우리들의 오늘 승리의 결정적 요소는 바로 마오 주석이다.”

“내가 이번에 이 헌법초안을 연구하면서 이렇게 하나의 특징을 표현할 수 있다. 바로 마오 주석이 위대한 영수이고, 국가원수이며, 최고 통수의 지위가 확실하고, 마오쩌둥 사상이 전국 인민의 지도사상으로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고, 매우 중요하다.-마오 주석의 이런 영도는 우리들 승리의 각종 요소 중에서 결정적 요소다.-이런 영도지위는 국내외의 극단적 반혁명분자를 제외하고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우리들의 공작이 전진이냐 후퇴냐, 승리냐 실패냐 모두가 마오 주석이 중앙의 영도지위를 공고히 하느냐, 공고히 하지 못하냐에 달려있다.”

“우리들은 마오 주석을 천재라고 말한다. 나는 여전히 이런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이번 헌법 안에는 마오 주석의 영도지위를 규정하고, 마오쩌둥 사상이 지도사상이라는 것을 규정한다. 내가 가장 흥미를 느끼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중공중앙 판공청 주임 왕둥싱(汪東興 왕동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504)

“린뱌오는 되풀이 해 이런 관점을 1시간 30분 동안 이야기했다. 그는 분명히 준비를 했다. 그가 이야기할 때 연설대에 놓인 원고를 보고 이야기했다. 린뱌오의 연설은 형세나 다른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비록 연단 아래에서는 뜨거운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연단에 앉아 있던 마오 주석은 (린뱌오의 연설을)들으면서 점점 참지 못하고 불쾌한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저우 총리와 캉성도 근심스러운 기색이었다. 천보다는 아주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린뱌오가 연설을 끝냈을 때 이미 4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마오가 저우언라이와 캉성에게 “당신들 말하시오!”라고 퉁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우언라이는 “(경제)계획문제는 (배포한)인쇄물에 있고 자료도 모두 있다. 발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캉성도 “헌법 설명은 이미 모두에게 인쇄물을 배포했다.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마오는 산회를 선포했다.

 

이날 밤에 저우언라이는 각조 소집인이 참석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헌법초안과 (경제)계획문제를 토론하도록 안배했다. 우파셴이 “린뱌오 부주석의 개막식 연설은 매우 중요하다. 각 조는 먼저 학습토론을 해야 한다”며 린뱌오 연설 녹음을 다시 틀어 줄 것을 요구했다. 우파셴의 요구가 회의에서 통과됐다.

 

502)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03)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揭秘; 林彪與江靑從合伙到分裂的全過程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504)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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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린뱌오, 천재어록 선동질… 장칭파 반동분자 몰아

 

린뱌오는 우파셴이 정치국 회의에서 (린뱌오의 발언녹음을 다시 틀어 줄 것을)제기한 것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린뱌오는 예췬을 산에 있던 아들 린리궈(林立果 임립과)에게 보내 우파셴이 “또 공을 세웠다”고 칭찬하는 말을 전했다.

 

천보다와 우파셴은 이날 밤 회의에 앞서 린뱌오와 예췬이 지시한 내용을 협의를 한 뒤 엥겔스, 레닌, 마오 및 린뱌오에 대한 ‘천재’라는 어록자료를 만들어 다음날 정오에 인쇄해 자파인 예췬, 해군 제1정치위원 리줘펑(李作鵬 이작붕), 총병참부(總後勤部 총후근부) 부장 치우후이줘(邱會作 구회작)에게 배포했다. 린뱌오파의 오른팔인 총참모장 황융성은 이때 베이징에 있었다가 8월 29일 루산회의에 참석했다. 이들은 또 국가주석직을 설치하는 헌법초안 조문을 준비했다. 이런 것들은 전부 마오와 저우언라이를 속이며 몰래 이루어졌다.

 

8월 24일 오전 8시 마오와 린뱌오를 제외한 9기 2중전회 전체 참석자들이 루산 강당에서 린뱌오의 연설 녹음을 듣고 오전 11시 30분에 산회했다. 참석자 중 어떤 사람이 린뱌오의 연설 녹음내용을 인쇄해 모든 사람에게 배포해 줄 것을 요구했다. 참석자들은 박수로 지지를 표시했다.

 

저우언라이는 왕둥싱에게 마오의 지시를 받아오도록 했다. 왕둥싱이 이런 내용을 마오에게 말했다. 마오는 “그들이 모두 인쇄 배포를 동의한다면 나는 의견이 없다. 자네가 인쇄해 배포하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에 있을 각조의 토론을 앞두고  예췬은 이미 우파셴 등과 협의해 각조에서 토론할 때 린뱌오 연설을 지지하기로 행동통일을 하는 전략을 짰다.

 

각조 토론 때 린뱌오파인 천보다, 우파셴, 예췬, 리줘펑, 치우후이줘는 각각 화베이(華北 화북), 시난(西南 서남), 중난(中南 중남), 시베이(西北 서북)조 등에서 일제히 린뱌오 연설을 옹호하고, ‘천재(天才)’어록을 선전, 설명하면서 국가주석직을 설치할 것을 요구하는 공세를 펴기로 했다. 이들은 또 ‘어떤 사람’이 마오 주석을 반대한다고 강열하게 선동해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도록 했다.

오후 3시 천보다(陳伯達 진백달)는 화베이조에 참석해 발언을 했다. (주석 505)

 

“나는 린 부주석(린뱌오)이 어제 발표한 것은 대단히 좋고, 매우 중요하며 의미심장한 연설로 절대적으로 옹호한다. 린 부주석은 이번 헌법에서 마오 주석의 위대한 영수, 국가원수, 최고통치자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전국 인민의 지도사상으로 확고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고,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쓸 수 있는 것은 많은 투쟁을 통해서 이뤄졌으며, 투쟁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현재 ‘어떤 사람’은 뜻밖에도 ‘마오쩌둥 동지가 천재적으로, 창조적으로, 전면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하고 보위하며 발전시켜왔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하나의 참신한 단계로 제고시켰다’는 이 말을 풍자적이라고 허튼 소리를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마오 주석의 겸손을 이용해 마오쩌둥 사상을 평가절하 하려는 망령된 생각을 하고 있다.-‘어떤 사람은’ 세계상에 근본적으로 천재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들은 엥겔스가 여러 차례 마르크스를 위대한 천재라고 칭한 것을 알고 있다. 그의(마르크스) 저작은 천재적인 저작이다. 레닌은 여러 차례 마르크스가 천재라고 칭찬했다. 스탈린도 마르크스, 레닌이 천재라고 한바 있다. 우리들도 스탈린은 천재라고 칭했다. 천재를 부정한다고 마르크스, 레닌을 전반적으로 부정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당대의 가장 위대한 천재를 단번에 없애버리겠다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보기에 이런 천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역사를 모르는 바보 같은 자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장춘챠오를 지목한 것으로, 장칭파를 정면 조준했다. 천보다는 다른 사람의 발언에 끼어들면서 “어떤 반혁명분자는 마오 주석이 국가주석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고 장칭파를 은연중 ‘반혁명 집단’으로 수위를 높여 강도 높게 비난했다.

천보다가 발언할 때 푸졘화(福建話 복건화; 복건성 말)로 말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푸졘말을 아는 사람들이 통역을 했다. 천보다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다(手舞足蹈 수무족도; 너무 기뻐 덩실덩실 춤추다)’를 말할 때는 손짓발짓으로 춤추는 형용을 하며 통역하는 웃지못할 소극도 벌였다.

 

중년의 린뱌오(1949년, 왼쪽)와 1967년 린뱌오의 모습.

 

 

린뱌오의 부인 예췬도 중난(中南 중남)조 발언에서 분전했다. 예췬은 “린뱌오 동지는 많은 회의에서 마오 주석이 가장 위대한 천재라고 말했다. 마오 주석은 마르크스나 레닌이 아는 것보다 많고, 이해하는 것도 많다. 이런 모든 것을 철회해야 하는가? 견결하게 철회할 수 없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철회할 수 없다!”고 사자후를 토했다.

시난(西南 서남)조에 참석한 우파셴은 “이번 헌법 개정 토론에서 ‘어떤 사람이’ 마오 주석이 천재적이고, 창조적이고, 전면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하고 보위하며 발전시킨 것을 ‘풍자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치가 떨렸다. 이것은 당의 8기 11중전회가 인정했고, 린 부주석이 ‘마오 주석어록’ 재판의 머리말에서 인정한 것이다. 어떻게 쓰지 않을 수가 있는가?”라며 핏대를 올렸다.

우파셴은 “(이것을)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로 8기 11중전회의 결정을 뒤집고, 린 부주석이 쓴 ‘(마오의 어록)재판 머리말’을 뒤집어엎는 것이다.-천재에 관한 표현법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모두가 이렇게 논술했다. 마오 주석은 마르크스와 레닌에 대해서 이렇게 논술했다. 린뱌오 부주석이 마오 주석을 천재라고 논술한 것은 한 번이 아니고 여러 차례였다”고 강조했다.

우파셴은 이어 마오, 린뱌오 및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천재에 관한 어록을 읽었다. 우파셴은 “모두들 이 어록을 들어보면 어떻게 천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어떤 사람이’ 마오 주석의 위대한 겸허를,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을 평가절하 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방지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주석 506)

중난(中南 중남)조에 낀 리줘펑도 뒤질세라 “본래 린 부주석은 일관되게 마오쩌둥 사상이 위대한 공적이라는 것을 선전해왔다. 당장(黨章)에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헌법상에 린 부주석을 거론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당내에 한 줄기의 바람이 불고 있다. 어떤 바람인가? 마르크스를 반대하는 바람이고, 마오 주석을 반대하고, 린뱌오 부주석을 반대하는 바람이다. 이런 바람이 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바람을 불러일으키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치우후이줘도 시베이(西北 서북)조에서 “마오 주석 사상에 대한 태도에서 린뱌오 부주석은 ‘마오 주석이 천재고, 마오쩌둥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전면적으로 계승 보위하며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린뱌오)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 하나의 관점이다. 왜, 이번 전회에서 그가 또 이 문제를 이야기했는가? ‘어떤 사람이’ 이런 표현법을 반대했기 때문이다.-이것은 바로 창끝을 마오 주석과 린뱌오 부주석에게 들이대는 것이다”라고 왜장을 쳤다. 베이징에 있던 황융성도 이들과 비슷한 서면발언 원고를 보내왔다. 이처럼 린뱌오파의 총공세는 천편일률적인 판박이 발언이었다. 주도면밀한 각본에 따라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마오는 8월 25일 정치국 회의가 열리기 전 각각 린뱌오와 저우언라이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국가주석 설치를 반대하고 자신이 국가주석을 맡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 번 밝혔다. 마오는 이날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국가주석 설치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마라! 내가 일찍 죽기를 바라면 나를 국가주석에 세워라! 누가 (국가주석)설치를 견지한다면 그 사람이 맡도록 하라! 어쨌든 나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오는 린뱌오에게 "나는 자네도 국가주석을 하지 않기를 권한다. 누가 (국가주석 회복을) 고수하면 그 사람을 시켜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날 천보다가 발언한 화베이(華北 화북)조의 토론상황을 모은 '졘바오(簡報 간보; 속보)'가 인쇄돼 각조에 배포했다. 속보에는 "린 부주석의 연설은 이번 9기 2중전회에 대해 가장 큰 지도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속보는 극열한 용어로 선동하면서 험악하게 성토했다. 선혈(鮮血)이 뚝뚝 떨어졌다. (주석 507)

 

"(모두들 천보다의 발언을 들은 뒤)우리들 당내에 ‘어떤 사람이’ 우리들의 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이 당대의 가장 위대한 천재라는 것을 부인하려는 망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가장 크고 가장 강렬한 분노를 표시한다. 이런 인간은 야심가, 음모가로 극단적인 반동분자이며, 진짜로 반혁명 수정주의분자다. 류샤오치 없는 류샤오치 반동노선의 대리인이고 제국주의 수정주의의 주구이며 악당이고 반혁명분자다. (우리들은)마땅히 군중 앞에 끌고나가 본때를 보이고 마땅히 당적을 박탈하고 마땅히 철저하게 비판하고 마땅히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한다. 전당이 모두 처형하고, 전국이 함께 토멸해야 한다."

삽시간에 회의 분위기가 바뀌어 긴장감이 고조됐다. 또 다시 멀쩡하던 루산 하늘에 뇌성벽력이 치며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린뱌오파의 우파셴과 리줘펑, 치우후이줘 등은 '천재'어록을 들고 각조에서 선동적 발언으로 들쑤셔놓자 일단의 중앙위원과 후보 중앙위원들이 연명으로 마오쩌둥을 국가주석으로 옹호한다는 편지를 써 마오와 린뱌오에게 보냈다.

린뱌오파의 국가주석직 회복과 ‘천재론’의 선동적인 돌연한 공세는 애초 루산회의 의제를 모두 삼켜버리고 장칭파에 대한 광기적 비판의 창끝을 겨눠댔다. 25일 정오께 놀란 장칭은 불안해 허둥대는 장춘챠오와 야오원웬을 데리고 마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속보를 통해 회의 중 발생한 엄중한 비정상적 현상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던 마오는 장칭 등의 보고를 들은 뒤 중대 결단을 내렸다. 마오는 이날 오후에 왕둥싱을 불러 각조 소집인이 참가하는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즉시 소집하는 통지를 보내도록 지시했다. 

505)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林彪被選定爲接班人後爲何仍不滿義?   人民網-文史頻道
506)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07)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廬山會議上毛澤東對話林彪; “我勸你也別當國家主席”   齊魯晩報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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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천보다 ‘6호속보’ 선동짓에 린뱌오파 자아비판

 

마오는 회의에서 현재 각조에서 토론하는 문제가 원래의 3가지 회의의제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 뒤 국가주석 설치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마오는 린뱌오에게 "나는 자네도 국가주석이 되지 않기를 권하네!"라고 말했다. 화가 치민 마오는 만약에 계속 이렇게 한다면 나는 산을 내려가겠다. 자네들이 분란을 일으키면 당 중앙 주석직도 사퇴하겠다고 경고했다.

회의는 마오의 의견에 따라 전회 각조회의는 즉시 린뱌오의 연설에 대한 토론을 중지하고 제6호 속보를 회수하도록 했다. 회의는 또 책임을 물어 천보다 등이 자아비판을 하도록 결정했다. 마오의 한 마디로 고삐 풀린 망아지 모양 제멋대로 날뛰던 린뱌오파는 졸지에 심대한 타격을 받고 비틀대기 시작했다. 8월 26일 예췬, 우파셴, 리줘펑, 치우후이줘 등은 각조에서 자신들이 한 발언을 기록한 원고를 회수하느라 난리법석을 떨었다.

예췬은 몰래 속보를 만드는 조(組)에 들어가 자신이 중난(中南)조에서 발언한 기록을 찢어버리는가 하면, 치우후이줘는 자신이 한 발언부분을 가위로 잘라버리는 등 '증거인멸'에 진땀을 흘렸다. 황융성도 루산에 온 뒤 자신의 발언원고를 불태워 없앴다.

저우언라이와 캉성은 26, 27일 우파셴, 리줘펑, 치우후이줘와 이야기를 나눈 뒤 우파셴이 자아비판을 하도록 했다. 우파셴은 28일 밤 이런 내용을 린뱌오에게 보고했다. 린뱌오는 "당신은 잘못을 하지 않았다. 자아비판을 하지마라"고 지시했다. 예췬은 여러 차례 우파셴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하면서 "긴장할 필요가 없다. 아직 린뱌오와 황융성이 있다! 린뱌오, 황융성을 연루시키지 않으면 된다. 큰 솥에 밥이 있으면 작은 솥은 해결된다"고 쫄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마오는 8월 31일 천보다(陳伯達 진백달)가 논술한 '천재'어록에 대한 의견을 표시하는 '피스(批示 비시)'글인 '나의 약간의 의견(我的一点意見 아적일점의견)'제목의 글을 써 인쇄해 회의 참석자들에게 배포했다. 이 글은 7백자에 이르는 비교적 단문이지만 문혁 이래 많지 않은 마오의 이론적인 글이다. 이때 마오의 나이 77살이었다. (주석 508)

"이 자료(엥겔스, 레닌, 마오쩌둥을 천재로 칭했던 몇 개의 어록을 가리킴; 필자 주)는 천보다 동지가 쓴 것으로 많은 동지들을 기만했다. 하나, 여기에는 마르크스의 말이 없다. 둘, 단지 엥겔스의 한 마디, '루이 나폴레옹 정변기'에서 (나오는 말을)찾아 썼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주요 저작이 아니다. 셋, 레닌의 5조(條)를 끌어다 썼다. 그 중 다섯 번째에 시련을 겪으면서 전문훈련과 장기교육을 받아야 하고, 아울러 서로 충분하게 잘 조화롭게 어울리는 영수, 이것이 레닌이 열거한 4개의 조건이다. 다른 사람들은 놔두더라도 우리들 중앙위원들에게 충분한 조건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예를 들면 나와 천보다, 이 천재 이론가와는 30여 년 동안 함께 일해 왔다. 일단의 중대 문제에 있어 종래 협력을 이루지 못했다. 더욱 더 협력이 잘 이뤄졌다고 말할 수 없다. -이번에 그는(천보다) 협력을 아주 잘 이루었다. 갑자기 기습을 취해 (여기저기에) 불을 놓고 다니며 선동했다. 천하가 어지럽지 않을까봐 걱정하고, 루산을 폭파해 평지로 만들고, 지구가 도는 것을 정지시키려 하는 기세다. 나의 이 말은 우리들의 천재 이론가의 마음(어떤 마음인지 나는 모른다. 대개 양심이 있다. 결코 야심이 아니다)이 넓다는 것을 형용한다. 무산계급의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루산을 폭파해 평평하게 하고, 지구를 멈추려고 한다. 내가 보기에 그렇게 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루산에 올랐던 한 옛날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기(杞)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 까 걱정했으나 기 나라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우리들은 그런 기 나라 사람을 배워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말하면 그가(천보다) 대단히 바쁘게 움직였지만 확실히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주요한 것은 천재가 아니라 사회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나와 린뱌오 동지는 의견을 교환해 우리 두 사람은 견해가 일치했다.”

“이것은 역사가와 철학자들의 쟁론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제다. 즉 일반적으로 말해서 영웅이 역사를 창조하느냐, 아니면 노예들이 역사를 창조하느냐, 사람의 지식(지식범위에 속함)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냐, 아니면 후천적으로 생겨난 것이냐, 유심론적 선험론이냐, 아니면 유물론적 반영론이냐, 우리들은 단지 마르크스-레닌주의 입장에 서서 결코 천보다의 헛소문이나 궤변에 뒤섞여서는 안 된다. 동시에 우리들 두 사람(마오와 린뱌오)은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 문제에 대해 우리들 스스로가 계속 연구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일이 이미 연구가 끝났다고 여기지 않는다. 동지들에 바란다. 우리들은 이런 태도를 취해 단결하고 더욱 더 큰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마르크스를 이해한다고 떠들면서 실제적으로 근본 마르크스와 같은 그런 사람들을 알지 못해서는 안 된다.”


마오는 자신의 정치비서 출신이자 이론가로 꼽히는 천보다를 ‘천재 이론가’운운하고 비비꼬면서 시쳇말로 개 박살을 냈다. 천보다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권력을 쥐락펴락했던 중앙문혁 조장에, 당 서열 4위인 천보다는 권력의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다.

마오는 천보다 등 린뱌오파들의 선동 짓거리가 린뱌오와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린뱌오는 건드리지 않았다. 린뱌오가 문화대혁명 이래 ‘부 총수’로 마오를 열렬히 지지한데다 9대 당장(黨章)에 ‘후계자’로 규정돼 있고, 린뱌오파가 꾸민 루산의 풍파를 쉽게 정리할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견지한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린뱌오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것이다.

마오는 9월 1일 각조 소집인이 참석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루산회의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자아비판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오가 실명을 거론한 천보다는 말할 것도 없고, 우파셴, 예췬, 리줘펑, 치우후이줘 등이 줄줄이 자아비판을 했다.

린뱌오파의 몰락을 예고한 9기 2중전회 폐막식이 9월 6일 오후에 열렸다. 마오, 린뱌오, 저우언라이에 이어 당내 서열 4위였던 천보다는 주석대에서 사라졌다. 전회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개정 수정초안’을 통과시키고, 국무원이 제출한 전국 계획회의와 1970년 국민경제계획에 관한보고, 중앙군사위원회의 강화한 전쟁준비 공작에 관한보고를 각각 비준했다.

전회는 또 천보다에 대한 심사(審査) 진행을 선포했다. 천보다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벌여 응징하겠다는 뜻이다. 천보다의 정치생명은 이로써 끝장나고 말았다. 마오는 폐막 연설에서 단결을 역설한 뒤 격한 감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주석 509)

“루산을 폭파해 평평해 지지 않는다. 지구도 여전히 이렇게 돌아간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런 느낌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대(천보다)가 루산을 폭파해 평평하게 한다고 말하면 나도 그대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지금 인민을 대표하고 있는가? 나는 십 수 년 이전에 인민을 대표하지 않았다. 그들(린뱌오파; 필자 주)은 인민을 대표하는 상징이 국가주석을 맡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십 수 년 이전에 (주석직) 맡지 않았다. 어찌 십 수 년 이래 인민을 대표하지 않은 게 아니겠는가? 누구도 인민을 대표하고 싶으면 그 사람이 하면 된다. 나는 안 하겠다. 그대가 루산을 폭파해 평평하게 한다고 해도 나는 안 한다. 당신은 무슨 방법이 있는가?”

린뱌오는 “이번 회의의 전 진행과정의 모든 것은 주석이 직접 지도한 것이다. 회의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는 주석이 대단히 날카롭게 발견해 순리적으로 해결했다. 이 회의는 단결의 회의가 되었고 승리의 회의가 되었다”고 얼버무렸다. 린뱌오는 예췬과 우파셴에게 “잘못은 천보다에게 미루고 (천보다에게),속았다고 강조하라”고 지시하고 위험한 고비를 넘겨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회의가 끝난 뒤 얼마 안 되어 장칭은 린뱌오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예췬이 찾아뵙겠다는 내용이었다. 장칭은 득의만만했다. 예췬이 방문하는 것은 사죄를 뜻했고, 권력투쟁에서 일단 자신이 유리한 고지에 섰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계략을 구사한 린뱌오는 호화 진사(陳謝)사절단을 꾸렸다. 예췬을 필두로 이른바 린뱌오 수하의 ‘4대 금강(金剛)’으로 불리는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황융성, 공군사령관 우파셴, 해군 제1정치위원 리줘펑, 총병참부 부장 치우후이줘가 찾아와 머리를 숙였다. 예췬은 “이번에 우리는 천보다에게 속아 과오를 저질렀다. 린 부주석(린뱌오)이 여러 차례 우리들을 비판했다. 주석의 가르침을 저버렸다. 장칭 동지에게 사죄드린다. 린 부주석이 꼭 우리들이 장칭 동지를 찾아가 사과드리라고 말했다. 장칭 동지가 용서해주기를 바란다”고 죽는 시늉을 했다.

장칭은 승자로서의 거드름을 한껏 피우며 점잖하게 이들을 타일렀다. 이들 이리와 승냥이의 언사는 겉으론 화해분위기를 연출했으나 속내는 더욱 더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원한과 복수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508)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509)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林彪被選定爲接班人後爲何仍不滿意?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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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천보다 비판 ‘비진정풍’ 돌입 린뱌오파 몰락 예고

 

루산회의에서 ‘천재론’을 내세우며 국가주석 부활에 다 던지기(올인)를 하다 된서리를 맞은 린뱌오파는 천보다, 우파셴, 예췬 등이 줄줄이 자아비판을 했으나 마오는 더욱 옥죄어 갔다. 린뱌오는 분노가 치밀었으나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런 린뱌오에 불만을 품은 마오는 한 발 더 나아갔다.

1970년 11월 중순 마오는 중공중앙이 발표한 ‘천보다 반당문제 전달에 관한 지시’를 비준하는 글에서 “당의 9기 2중 전회에서 천보다는 돌연 기습을 해 불을 놓고 다니며 선동하고, 헛소리로 동지들을 기만하는 아주 나쁜 수단으로 당을 분열시키는 음모활동을 벌였다”고 호되게 비판했다. 마오는 또 자신이 쓴 ‘나의 약간의 의견’을 당내와 (군의) 사단장급 이상의 영도소조 또는 핵심소조에 인쇄, 배포해 당의 고위급, 중급 간부들이 루산회의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천보다를 비판하고 당의 기풍을 바로잡는다는 ‘비진정풍(批陳整風)’운동이 펼쳐지게 되었다.

마오는 12월 18일 자신의 서재에서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가 스노우와 ‘개인숭배’, ‘문화대혁명’의 문제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나눴다. (주석 510)

마오; 지금은 다르다. (개인)숭배가 지나치고, 대단히 형식적이다. 예를 들면 ‘4가지 위대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위대한 스승, 위대한 영수, 위대한 통솔자, 위대한 조타수라고 한다. 혐오스럽다. 모두 없애 버리고 ‘선생(스승)’ 하나만 남겨 놨다. 나는 예부터 선생이다. 현재도 여전히 선생이다. 다른 것은 모두 버렸다.

스노우; 과거에는 이러한 것이 필요했나?
마오; 과거 몇 년은 개인숭배를 하는 게 필요했다. 현재는 필요 없다. 열기를 식혀야 한다.
스노우; 나는 사람들이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를 말하는 것은 한 개인이 국가역량을 인격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문화대혁명이 진행되는 이 시기에 마오쩌둥과 그의 선생은 하나의 표상이고, 투쟁의 끝이다. 

마오; 이것은 류샤오치를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과거는 장제스를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고, 나중에는 류샤오치를 반대하기 위한 거였다. 그들은 장제스를 내세웠다. 우리들 곁에도 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 천두슈(陳獨秀 진독수)를 세우는 것은 안 된다. 취치우바이(瞿秋白 구추백)도 안 된다. 리리산(李立山 이립산)을 세워도 안 되고, 왕밍(王明 왕명)도 세워서는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반드시 한 사람을 세워서 왕밍을 타도해야 했다. 왕밍이 타도되지 않으면 중국혁명은 승리할 수 없었다. 우리당은 재난이 많았다.

스노우; 현재는 어떤가?
마오; 별다른 것은 없다.
스노우; 좀, 괜찮다는 것인가?

마오; 그렇다. 당신이 말한 좀, 괜찮다는 말에 찬성한다. 당신이 어찌, 어찌해 좋아졌다고 말하면 찬성하지 않는다. 투쟁에는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진보고, 하나는 낙후다. 나는 문화대혁명의 두 가지를 대단히 찬성하지 않는다. 하나는 거짓말로, 입으로는 ‘글로 투쟁을 하고, 무력으로 투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실제적으로 아래에서는 사람의 다리를 걷어 찬 뒤에 발을 거두어들인다. 사람들은 너, 왜 나를 걷어 찼냐?고 한다. 그는 또 나, 차지 않았어. 봐라, 내 발이 여기 있지 않느냐?고 한다. 거짓말이다. 뒤에서는 긴 창을 들고, 총과 박격포로 싸움을 한다. 또 하나는 내가 대단히 좋아하지 않는 것인 데 포로로 잡아 학대하는 것이다. 홍군, 인민해방군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포로를 우대했다. 때리지 않고, 욕하지 않고, 돈 주머니를 수색하지 않고, 노잣돈을 줘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총살하지 않았다. 장교들도 모두 총살하지 않았고, 장군처럼 고위 군관들도 총살하지 않고, 무장을 해제시켰다. 왜 학대하는가? 나는 예부터 이런 규칙을 세웠다.


마오는 개인숭배가 주자파(走資派) 우두머리라고 규정한 류샤오치를 제거해 수정주의의 출현을 반대하고 막기 위한 당의 상징으로 필요했으나, 류샤오치가 제거된 만큼 형식화하고 있는 개인숭배는 필요 없다는 얘기였다. 문혁에 대해서는 내전양상으로 번지고 있는 무력투쟁과 비인간적 폭력행위에 대해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중공중앙은 이때의 마오와 스노우의 대화를 문건으로 정리해 당의 기층지부에 인쇄, 배포해 전체 당원들에게 학습하도록 했다. 마오의 개인숭배를 주도하며 문혁을 이끌고 있던 린뱌오의 위상이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린뱌오는 루산회의 이후 요양(療養)을 내세워 거의 베이다이허(北戴河)에 칩거하면서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마오는 린뱌오의 오른팔인 총참모장 황융성(黃永勝 황영승)을 우두머리로 한 린뱌오파가 주축인 중앙 군사위원회 판사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마오는 중앙 군사위원회가 개최한 ‘비전정풍(批陳整風)’ 좌담회가 1971년 1월부터 1개월간 열렸으나 황융성 등이 천보다를 비판하지 않고 (본인 스스로)자아비판을 하지 않자 군사위원회 판사조를 정면 비판하고 나섰다.

마오는 2월 19일 “‘비전정풍’ 전개의 중점은 천(천보다)을 비판해야 그 뒤에 비로소 기풍을 바로잡을 수 있다. 1개월이 지났으나 군사위원회 좌담회(중앙 군사위원회가 개최한 ‘비전정풍’ 좌담회; 필자 주)에서 배울 게 없다. 근본적으로 천보다를 비판하지 않고 있다”고 매섭게 질타했다.

마오는 두 달 전인 12월 16일 38군 당위원회가 천보다를 반당행위로 고발한 보고서 비준에서 “그(천보다)는 베이징 군구에 직무가 없고, 중앙도 그를 베이징 군구 소속의 군정(軍政)문제에 위탁한 일도 없는 데 어떤 이유로 천보다가 베이징 군구와 화베이(華北 화북)지구의 태상황이 됐는가?”라며 황융성 등의 비호를 겨냥했다. 마오는 얼마 있다가 황융성과 리줘펑의 이름을 거론하며 베이징 군구의 천보다 비판회의(통칭 화베이 회의)에 참가하도록 지시한 뒤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석 511)

마오의 비판에 놀란 군사위원회 판사조는 마오에게 “우리들은 ‘비진(批陳 비진; 천보다 비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비진정풍’ 때 천보다 비판에 중점을 두지 못했다. 이것은 엄중한 과오”라는 내용의 서면 자아비판을 제출했다. 마오는 이에 대한 비준 글에서 “그대들 몇몇 동지들은 천보다를 비판하는 문제에서 왜 항상 피동적인가. 재촉하지 않으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잘 생각해 절차에 따라 피동적 위치에서 주동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왜, 늘 인식이 부족하다고 하나? 원인이 어디 있는지 마땅히 연구해야 한다”고 질책했다.

마오는 황융성 등이 솔직하고 명쾌하게 자아비판을 하지 않으려는 이면에는 린뱌오가 직접 연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마오가 다시 질타하자 황융성 등은 어쩔 수 없이 2월 22일 군사위원회 각 총부와 각 군 병과 및 관련 군사부문 책임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자아비판을 했다. 황융성, 리줘펑, 치우후이줘 3명은 서면으로 자아비판을 했으나, 당시 장쑤성(江蘇省 강소성) 쑤저우(蘇州 소주)에 머물고 있던 린뱌오는 한 마디의 의견표시도 하지 않았다. 린뱌오는 다시 요양을 구실로 베이다이허로 날아가 침묵모드로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3월 29일 마오의 지시에 따라 황융성 등 군사위원회 판사조 구성원들과 함께 린뱌오가 있는 베이다이허 별장을 방문해 마오의 천보다 비판에 대한 일련의 지시와 중앙이 준비하고 있는 ‘비진정풍 보고회’ 소집 등에 관해 보고를 했다. 저우언라이는 이와 관련해 “(내가 린뱌오를 찾아) 간 목적은 마오 주석이 곧 소집할 ‘비전정풍 보고회’에 린뱌오가 참가해 몇 마디 말을 하면 그(린뱌오)에게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기위한 조처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512)

저우 언라이는 베이다이허에서 이틀 동안 린뱌오와 잇따라 회견했다. 린뱌오는 겉으로 천보다에 대한 비판에 “완전 동의한다”, 최근 서면으로 자아비판 한 황융성, 리줘펑, 치우후이줘 문제에 대해 “잘 했다”, 우파셴과 예췬에 대한 서면 자아비판 요구에 대해서도 “완전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곧 열리는 중앙의 ‘비전정풍 보고회’ 참석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마오는 베이징으로 돌아 온 저우로부터 린뱌오와의 베이다이허 면담상황을 들은 뒤 큰 분노를 터뜨렸다. 마오는 곁에 있던 린뱌오파의 황융성, 우파셴, 리줘펑, 치우후이줘를 호되게 질책했다. 마오는 “너희들은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다! 뛰어 내리느냐, 떠밀리느냐, 또는 되돌아 가느냐의 문제에 있다. 되돌아 가느냐하는 것은 전적으로 너희들 스스로에 달려있다!”고 노호(怒號) 했다.

510)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11)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12)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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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린뱌오 아들 린리궈, 공군 지휘권 받자 쿠데타 계획

 

중공중앙은 4월 15일부터 29일까지 베이징에서 천보다를 비판하고 기풍을 바로잡는 ‘비진정풍(批陳整風) 보고회’를 열었다. 마오는 보고회에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천이, 쉬샹쳰, 녜룽전 등 3명의 원수들이 참가하도록 지시했다. 천이는 이때 병원에 입원하고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보고회는 군사위원회 판사조의 황융성, 우파셴, 예췬, 리줘펑, 치우후이줘 등 5명의 자아비판을 청취했다. 중앙 정치국의 위탁을 받은 저우언라이는 총결발언에서 황융성 등이 정치적으로 노선상의 과오를 범했고, 조직상으로 종파주의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저우언라이는 4월 19일 회의기간 중 베이징으로 온 린뱌오에게 회의기간의 문건과 마오의 관련 지시내용을 송부하고 회의에서 발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린뱌오는 발언하지 않을 것임을 견결하게 밝히고 회의 참석여부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도 말하지 않았다.

실제적으로 린뱌오는 루산회의 이래 전개되고 있는 ‘비진정풍’과 특히 오른팔인 총참모장 황융성을 마오가 비판한데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으며, 공개적인 장소에서도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중앙이 ‘비진정풍’을 끝냈을 즈음 노동절인 ‘5.1절’을 맞게 됐다.

이날 밤 톈안먼에서 기념행사가 있었다. 마지못해 행사에 참석한 린뱌오는 2인자로서의 당당한 기세와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풀이 죽어 있었다. 린뱌오는 성루에서 마오와 시종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다가 간다는 말도 없이 자리를 떠 이를 본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 하기도 했다. 린뱌오는 쫓기는 심정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린뱌오는 이때 마오에 대한 결정적 타격과 권력탈취를 골똘하게 강구하고 있었다.

 

1949년경 하얼빈에서의 린뱌오와 그의 부관들(왼쪽). 린뱌오와 그의 가족.

 

린뱌오가 천재라고 아끼던 아들 린리궈(林立果 임립과)는 베이징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23살 때인 1967년 3월에 공군에 입대해 공군사령관 우파셴의 안배로 공군사령부 당위원회 판공실 비서가 됐다. 린리궈는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가 4개월 뒤 우파셴의 소개로 입당하게 됐다.

우파셴은 1969년 10월 린리궈를 공군사령부 판공실 부주임 겸 작전부 부부장이란 요직에 임명했다. 우파셴은 이후 아예 공군의 지휘권을 린리궈에 넘겼다. 말도 안 되는 엄청난 권력이양이었다. 군 입대이후 2년 반만의 초고속 승진이었다. 공군 안에서 불만이 많았지만 누구도 내놓고 불평을 토로하지 못했다. 

그러나 뒤에서는 “1년에 병사, 2년 만에 당원, 3년 만에 부부장, 4년 만에 태상황(太上皇; 황제의 아버지, 배후인물이란 뜻)”이라며 비아냥거리는 풍자가 널리 퍼졌다. 린뱌오 가족이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달아나다 1971년 9월 13일 몽골 운두르칸에서 추락사하면서 “5년 만에 염라대왕을 만나다”라는 한 마디 풍자가 더 늘어났다. (주석 513)

린리궈의 이런 수직상승 출세는 주위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린리궈는 공군사령부 판공실 부주임 저우위츠(周宇馳 주우치), 공군 부참모장 왕페이(王飛 왕비) 등과 함께 공군사령부에 린뱌오에 충성하는 별동대로 ‘조사연구 소조’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나중에 이들이 일본 영화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산본오십육;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전사), ‘아, 해군(啊, 海軍)’을 보고 감명을 받아 린리궈가 “우리들도 연합함대다, 우리들도 에타지마(江田島 강전도; 일본 해군 군사학교가 있는 곳) 정신이 필요하다”며 ‘연합함대’로 이름을 바꿨다.

린리궈는 1971년 2월에 쑤저우에서 이 조직을 린뱌오, 예췬과 몰래 협의해 만일에 대비한 조직으로 키우기로 하고 항저우 상하이 일대에서 활동했다. 린리궈는 3월 21일 상하이에서 연합함대의 주요 구성원인 저우위츠, 공군사령부 부처장 위신예(于新野 우신야), 7341부대 정치부 부처장 리웨이신(李偉新 이위신) 등과 쿠데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부분 30대 젊은 장교들이었다. 

린리궈는 형세를 분석하면서 “현재 수장(린뱌오)의 (대권)계승은 3종류가 있다. 하나는 평화적인 계승이다. 5~6년을 기다려야 하는 데 변화는 대단히 크다. 수장의 지위가 꼭 보장된다고 말하기 어렵다. 두 번째는 후계자 지위를 빼앗길 수 있다. 수장이 실각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사전에 (대권을) 계승하는 것으로 방법은 B-52(린리궈 등이 마오를 가리키는 암호명)를 제거하는 것이다. 무장기의(武裝起義)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린리궈는 사전 대권계승 방법과 관련해 “지금 형세로 볼 때 수장이 먼저 계획을 요구할 것”이라며 위신예에게 “이 일은 나와 수장이 이미 이야기를 나눴다. 당신이 먼저 계획을 짜라”고 말했다. 이들은 쿠데타 계획을 토론하면서 ‘쿠데타 작명(作名)’을 논의했다. 린리궈는 무장기의를 뜻하는 ‘우치이(武起義 무기의)’와 발음이 같은 ‘571’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 이들은 이틀 뒤 쿠데타 계획 강령을 만들고 암호를 ‘571공정(工程)’ 기요(紀要)라고 명명했다. (주석 514)

쿠데타 계획서인 이른바 ‘기요(紀要)’는 9기 2중 전회 이래 ‘정국이 불안’하고 ‘군대가 압력을 받고 있다’, ‘상대방의 목표는 후계자를 바꾸는 데 있다’고 서술했다. 또 ‘속수무책으로 생포되는 것 보다 죽을 각오로 임하는 만 못하다(破釜沈船 파부침선)’며, 군사행동으로 먼저 선수를 쳐 기선을 제압한다(先發制人 선발제인)’, ‘상층부 집회를 통해 일망타진 한다’ 등의 결의를 다졌다.

‘기요’는 또 ‘특별한 수단을 이용’해 ‘폭격, 543(암호로 일종의 로켓포를 일컬음), 자동차 사고, 암살, 납치, 도시유격대 소분대’ 등으로 ‘전국 정권을 탈취’하거나 ‘할거 국면’ 등을 제시하고, ‘소련의 힘을 빌려 국내외 다른 역량을 견제한다’ 는 등의 의견을 제기하기도 했다.

린리궈는 ‘기요’의 ‘지휘부’ 건립 계획에 따라 3월 31일 심야에 상하이에서 장텅챠오(江騰蛟 강등교), 왕웨이궈(王維國 왕유국), 천리윈(陳勵耘 진려운), 저우ㅤㅈㅖㄴ핑(周建平 주건평) 등이 참석한 이른바 ‘3국 4방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난징(南京 남경)은 저우ㅤㅈㅖㄴ핑, 상하이는 왕웨이궈, 항저우는 천리윈을 각각 우두머리로 하는 난징, 상하이, 항저우 거점을 설치하고, 장텅챠오가 ‘3거점’을 연락하며 협력해 총괄지휘하면서 ‘협동작전’을 펴도록 결정했다. 

513) 林彪公開對峙毛澤東; ‘文’的較量後企圖‘武’的進攻 人民網-文史頻道 林彪夫婦在北戴河的最後時刻   人民網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514) 揭秘; 林彪父子策劃刺殺毛澤東行動的全過程 人民網-文史頻道 林彪公開對峙毛澤東; ‘文’的較量後企圖‘武’的進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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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마오, 린뱌오 겨냥 “음모를 꾸미고 있다” 잇단 발언

 

1971년 4월 9일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저우언라이와 총참모부 부부장 슝샹후이(雄向暉 웅향휘)가 중난하이에 있는 마오의 집 응접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미-중 관계 정상화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중국방문을 협상하기 위해 비밀리에 이날 낮 12시 15분 중국에 온 미국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 헨리 키신저와의 밤늦게 끝난 1차 회담 결과를 마오에게 보고하러 온 것이었다.

키신저의 비밀방문 이틀 전인 4월 7일 중국은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제31회 세계탁구대회 마지막 날 신중국 건국 후 국교관계가 없는 미국 탁구선수단을 중국에 초청한다고 미국 선수단에 전달해 미 국무성은 이날 이런 사실을 공식 발표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핑퐁외교’로 불린 미-중 비밀 교섭은 그동안 물밑에서 진전된 바 있었다. (주석 515)

저우언라이가 킨신저와의 회담결과를 보고하려 하자 마오는 손을 흔들며 “그것은 급한 일이 아니다”며 보고를 받는 대신 슝샹후이에게 “자네는 총참모부 부부장을 맡고 있나”고 물었다. 슝샹후이는 “예”라고 대답했다. 마오는 짙은 후난 발언으로 물었다.

“그, ‘참모총장(원래는 총참모장)’ 성함이 뭐야?”
“황융성입니다.”


슝샹후이는 왜, 뻔한 이런 것을 물어 보고 엉뚱하게 ‘총참모장’을 ‘참모총장’으로 부르는 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자네, 황융성을 잘 아나?”
“총참모부에 근무한 이후 회의할 때 알게 됐습니다.”


마오는 슝샹후이에게 황융성이 천보다 비판 소회의를 열어 발언한 내용, 루산회의를 언급했는지의 여부 등에 대해 자세하게 물었다. 마오는 시거를 피우며 깊은 생각에 젖어있다 왼손으로 차 탁자를 치면서 돌연 목소리를 높여 “그들(황융성 등)의 자아비판은 거짓이다. 루산의 일은 아직 안 끝났다. 아직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여기에 ‘음모’가 있다. 그들은 배후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내 분위기는 갑자기 얼어붙은 듯했다. 마오가 말한 그들의 배후가 누구이겠는가? 바로 린뱌오를 거론한 것이 아닌가? 저우언라이는 분위기를 누그려 트리기 위해 황융성 등이 비판교육과 자아비판을 통해 과오를 고칠 것이라며 좋은 말로 말했다. 하지만 마오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견결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 당신이 잘못을 범한 것은 양모(陽謀)고, 그들은 음모(陰謀)다. 그들의 자아비판은 가짜고, 음모다. 슝샹후이 같은 간부도 알지 못하는 데 음모가 아닌가? 나는 예부터 당내에 공개적인 반대파를 허락해 왔다. 절대로 숨기는 반대파를 허락하지 않았다. 황융성 그들은 음모를 꾀하고, (당을) 분열시키려 하고 있다. 그들은 숨기는 반대파다. 음모와 분열을 꾀하는 것은 수정주의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는 단결을 말하고, 광명정대하다. 황융성, 그들이 광명정대한가? 완전히 그렇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해 루산(廬山 여산)의 일은 근본적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오는 슝샹후이에게 비서가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슝샹후이는 비서가 없어 직접 보고서를 쓰고, 기초문건 등을 챙긴다고 말했다. 마오는 자신도 문건을 담당하는 비서 1명이 있지만 글을 쓸 때 비서에게 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공산당원은 첫째, 손을 움직이고, 둘째, 입을 움직인다. 손과 입을 움직이는 것은 머리를 쓰게 하는 것이다. 현재 일부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미관말직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손과 입을 움직이려 하지 않고, 머리를 쓰려고 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지 비서에게 시킨다. ‘비서 독재정치’를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부인을 자기 판공실 주임으로 임명하고 있다. 이것은 공산당의 기풍이 아니고, 국민당의 작풍이다. 마오가 비판하고 있는 자신의 부인을 판공실 주임으로 임명한 사람은 바로 린뱌오가 아닌가? 마오의 린뱌오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언사(言辭)였다. 마오와 후계자로 당장에 기록한 린뱌오와의 관계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형국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마오는 말을 마친 뒤 비로소 저우언라이로부터 키신저와 회담한 1차 결과의 내용을 보고 받았다. 저우언라이와 슝샹후이가 마오의 집을 나왔을 때는 오전 2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저우는 슝샹후이와 함께 호텔로 가면서 마오가 했던 이야기를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말도록 신신당부했다.

마오는 지방 당정군(黨政軍) 책임자들이 9기 2중 전회에서 있었던 상황을 명확히 이해시키고 소상한 내용을 알리기 위해 남쪽지역을 순시하기로 결정했다. 마오는 비꼬는 어투로 “천보다가 화베이(華北 화북)지역을 주유하며 곳곳에서 유세하고 있다. 나도 그의 방법을 배워 남쪽으로 내려가 각로의 제후(지방의 당정군 책임자)들을 만나 유세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78살의 마오는 8월 15일 오후 1시 전용열차를 타고 베이징을 떠나 16일 남순(南巡)의 시발점인 후베이성(湖北省 호북성) 성도 우한(武漢 무한)에 도착했다. 마오는 9월 중순까지 20여 일 동안 창사(長史 장사), 난창(南昌 남창), 항저우, 상하이 등지를 돌면서 후베이, 허난(河南 하남), 후난, 광둥, 광시, 장쑤, 푸졘(福建 복건), 저장(浙江 절강)성과 상하이의 주요 영도자들을 만나 담화를 나눴다. 마오는 곳곳에서 중국공산당 노선투쟁의 역사, 루산회의의 문제 등을 이야기했다. 마오는 되풀이 해 이들 책임자에게 말했다. (주석 516)

“우리당은 이미 50년의 역사를 지녔다. 큰 노선투쟁이 10차례 있었다. 10차례 노선투쟁에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당을 분열시키려 했으나 모두 분열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 1970년 루산회의는 그들(린뱌오, 천보다 등)이 갑자기 기습하고 지하활동을 했다. 왜, 공개하려 하지 않았나? 보건데 마음속에 음모가 있었다. 그들은 먼저 속이고 나중에 돌연 기습했다. 5개 상위에서 3개를 속여 몇 명의 대장(大將)을 제외하고는 정치국의 대다수 동지들을 속였다. 그런 대장은 황융성을 포함해 우파셴, 예췬, 리줘펑, 치우후이줘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데는 목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돌연한 기습, 지하활동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이고, 강령(綱領)이 있다. 강령은 국가주석 설치고, 바로 ‘천재’를 말함이다.”

“어떤 사람이 급히 국가주석이 되려고 생각한다. 당을 분열하고, 급하게 권력을 탈취하려고 한다. 린뱌오는 그 발언을 하면서 나와 상의하지 않았다. 내가 볼 수 있도록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할 말이 있으면 먼저 말하지 않는다. 대개 무엇을 파악하면 성공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또 허둥지둥해서는 안 된다. 이번 루산회의는 단지 천보다가 문제를 제기하고, 린뱌오를 거론하지 않고 개인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당연히 일단의 책임이 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나? 교육의 진정한 방법은 ‘징전비후(懲前毖後; 지난날의 잘못을 후일의 거울로 삼음), 치병구인(治病救人; 남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치도록 함)’이다.”


마오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천보다는 화베이를 주유하며 곳곳에서 유세를 한다. 나의 이번 (순시는) 바로 그의 방법을 배운 것이다. 나는 당의 주석이고, 군사위원회 주석이다. 내가 곳곳에서 유세를 할 수 있지 않나? 중앙에 젊은이들을 배양해야 한다. 예를 들면 리더성(李德生 이덕생; 베이징군구 사령관), 지덩쿠이(紀登奎 기등규; 중앙 정치국 후보위원), 화궈펑(華國鋒 화국봉; 후난성 성장) 같은 사람들이다. 노장은 안 된다. 상하이 왕훙원(王洪文 왕홍문; 상하이 혁명위원회 부주임) 이런 동지를 당신들은 잘 아는가, 이해하는 가? 이 동지는 어떤가?”

마오는 남쪽지역을 돌며 해당지역의 당정군 책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르크스주의를 해야 하고, 수정주의를 해서는 안 된다. 단결을 하고 분열을 해서는 안 된다. 광명정대하게 하고, 음모와 모략을 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마오의 ‘남순담화(南巡談話)’ 내용은 마오가 지정한 전달 범위와 마오를 수행한 중앙 판공청 주임 겸 경호국장인 왕둥싱(汪東興 왕동흥)이 베이징의 저우언라이에게 전송한 것 이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괄적으로 엄격하게 비밀을 지키도록 했다.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 발해만의 휴양지 베이다이허(北戴河 북대하)에 있던 린뱌오와 예췬 등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마오의 행적과 담화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총력을 쏟았다. 마오는 남순 도중에 비정상적인 의심스러운 징후들을 날카롭게 감지했다. 

마오가 난창에서 장시성(江西省 강시성) 책임자로부터 보고를 받을 때 3가지의 내용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하나는 지난 7월에 ‘연합함대’의 일원인 저우위츠(周宇馳 주우치)가 두 차례에 걸쳐 몰래 장시에 내려와 활동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루산회의 기간에 예췬이 확실하게 “국가주석을 세우지 않으면 린뱌오는 어디로 가나?”라는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셋째는 린뱌오의 딸 린리헝(林立衡 임립형)이 “우리 집안사람들(린뱌오 집안)과 내왕을 하면 머리가 떨어지는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경고였다.

마오를 수행한 경호 대장 장야오츠(張耀祠 장요사)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뒤 “마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창밖을 바라보며 한 마디의 말도 안 했다”고 회상했다. 마오는 항저우에 있을 때 잇따라 예췬과 린리궈 등과 관련한 일단의 의심스러운 정황을 포착하고 더욱 더 경각심을 갖게 됐다. (주석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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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린뱌오 “마오 제거하라”… ‘9.8 수령’ 명령

 

린뱌오 등이 애타게 마오의 ‘남순담화(南巡談話)’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9월 5일 린리궈에게 광저우(廣州 광주)부대 공군 참모장 구통저우(顧同舟 고동주)로부터 밀보(密報)가 날아들었다. 마오가 창사에서 이야기한 내용이었다. 구통저우는 마오의 대화내용 전달에 관한 비밀엄수의 기율을 깨고 이날 밤 베이징에 있는 위신예와 저우위츠에게 전화를 걸어 대화의 중요 내용을 전달했다. 저우위츠는 6일 위신예가 정리한 마오의 담화내용을 갖고  베이다이허에 머물고 있는 린뱌오를 찾아가 전달했다. 

구통저우는 또 마오의 담화내용을 정리한 장장 50페이지에 달하는 기록문건을 자신의 부인 장야칭(張亞靑 장아청)을 시켜 베이징에서 치료한다는 핑계를 대고 베이징으로 날아가 저우위츠와 린리궈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9월 6일 새벽 6시 우한군구 정치위원 류펑(劉豊 유풍)도 마오의 당부를 어기고 마오가 우한 둥후빈관에서 담화한 내용을 조선군사대표단과 함께 우한을 방문한 리줘펑에게 상세하게 전달했다.

린뱌오와 예췬은 잇따라 마오의 ‘남순담화’의 주요 내용을 파악한 뒤 마오를 순시도중에 살해하고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린리궈는 7일 ‘연합함대’에 ‘1급 전투준비’지령을 내렸다. 연합함대 구성원은 주로 30대 청년장교였지만 마오에 반감을 갖고 있던 난징군구 정치위원 50대 장군 장텅쟈오(江騰蛟 강등교)는 린뱌오와 린리궈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상하이에서 마오를 제거하는 ‘제1선 지휘’ 책임을 맡았다. 장텅쟈오는 9월 8일 린리궈의 지시에 따라 베이징 시쟈오(西郊 서교)비행장으로 날아와 린리궈를 만났다.

시쟈오 비행장에는 린리궈의 아지트가 있었다. 린리궈는 한 장의 종이를 꺼내 장텅쟈오에게 건넸다. 종이에는 붉은 연필로 “(린)리궈, (저우)위츠 동지가 전달하는 명령에 따라 집행하기 바란다”라고 씌어 있었다. 장텅쟈오는 린뱌오가 직접 쓴 글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이 종이를 다시 린리궈에게 돌려주었다. 이것이 린뱌오가 반혁명 무장 쿠데타를 직접 명령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 ‘9.8 수령(手令; 친히 내린 명령)’이다. (주석 518)

이 린뱌오의 ‘수령’이 적힌 종이는 나중에 ‘쿠데타 모의’가 들통 나 ‘연합함대’ 구성원인 저우위츠, 위신예, 리웨이신이 헬리콥터로 소련을 향해 달아 날 때 휴대하고 있었다. 이들이 탄 헬리콥터가 강압적으로 착륙 했을 때 저우위츠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이 종이를 찢어버렸다. 그러나 나중에 현장조사관들이 주위에서 찢어진 종이를 수거한 뒤 복원과정을 거쳐 법정에 증거로 제시되었다.

장텅쟈오는 린뱌오가 쓴 ‘수령’을 본 뒤 린리궈에게 “정의를 위해, 혁명을 위해, 견결하게 한다”고 충성맹세를 했다. 린리궈는 대단히 기뻐하며 “당신은 상하이로 내려가 제1선을 지휘해 주시오. 이 임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반드시 잘 처리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 린리궈, 장텅쟈오, 왕리, 저우위츠 등 4명은 이날 밤 마오를 모해(謀害)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연구하며 상의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 9일 오전 논의를 계속했다. 린리궈는 3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주석 519)

1. 화염방사기와 로켓 발사기로 마오가 탄 전용열차를 공격한다.
2. 고사포를 수평으로 쏴 마오가 탄 열차를 공격한다.
3.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는 공4군(空4軍)의 정치위원인 왕웨이궈(王維國 왕유국)가 마오를 접견할 때 휴대한 총으로 열차 안에서 총을 쏜다.

그러나 이 3가지 방안은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부결됐다. 저우위츠가 일본군이 장줘린(張作霖 장작림)을 열차에서 폭살(爆殺)한 것처럼 철로를 폭파해 마오를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마오의 전용열차가 반드시 쑤저우(蘇州 소주) 숴팡(碩放 석방) 철교를 지나는 만큼 철교를 폭파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장텅쟈오는 “만약 이 방법을 택하면 리스잉(李世英 이세영)이 적임자”라고 했다. 리스잉은 당시 숴팡에 주둔하는 15사단 사단장이었다. 이들은 또 폭격기로 열차를 폭격하는 방안과 전용열차가 정차하는 부근의 기름탱크를 폭파해 화재로 혼란한 틈을 이용해 마오를 제거하는 등 마오가 순시중인 남쪽지역인 ‘남선(南線)’에서의 방안을 논의했다. 린리궈 등은 또 베이징 등 지역의 ‘북선(北線)’계획을 짜면서 고위 영도자들이 거주하는 중난하이와 댜오위타이를 공격해 저우언라이, 주더, 예ㅤㅈㅖㄴ잉, 녜룽전, 쉬샹쳰, 류보청 등 혁명원로와 문혁파인 장칭, 장춘챠오, 야오원웬 등을 제거하는 방안도 연구했다. 하지만 갑론을박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해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린뱌오 집단이 마오를 제거하기 위한 방안을 놓고 이처럼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남쪽 지역을 순시하던 마오는 어떤 낌새를 차리지 못하고 8일 항저우로 갔다. 항저우의 경비를 총괄하고 있던 사람은 이곳에 주둔한 공5군(空5軍) 정치위원인 천리윈(陳勵耘 진려운)이었다. 마오의 호위경비를 책임지고 있었다.

천리윈은 ‘연합함대’ 일원이어서 마오가 호랑이굴로 들어 온 꼴이 되었다. 마오는 이날 밤 이상한 조짐으로 보이는 몇 가지 정보를 보고 받았다. 항저우에서 어떤 사람이 비행기 정비를 하고 있고, 마오를 비난하는 사람이 전용열차가 정차하는 항저우 지옌챠오(筧橋 견교)비행장 지선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려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런 상황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마오는 중앙 판공청 주임 겸 경호국장인 왕둥싱(汪東興 왕동흥)을 불러 열차를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마오의 전용열차는 상하이 쪽인 사오싱(紹興 소흥)방면으로 방향을 꺾어 9일 새벽에 사오싱의 한 열차지선에 정차했다.

마오는 9월 10일 정오께 왕둥싱을 불러 천리윈에게 연락하지 말고 상하이로 가도록 지시했다. 왕둥싱은 “주석, 그들에게 연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마오가 왕둥싱에게 물었다. (주석 520)

“왜 그런가?”
“주석은 일반인이 아닙니다. 올 때 통지했으면, 갈 때도 통지해야 합니다. 노상의 안전과 지방의 보위를 위해 섭니다.”
“그럼, 천리윈을 열차에서 볼 필요는 없다. 전송할 필요가 없다고 하게.”
“그럼 안 됩니다. 상대방을 경계하게 끔 할 수 있습니다.”
“자네의 뜻은-”
“난핑(南萍 남평)으로 가서 천리윈을-”


마오는 왕둥싱의 말을 끊고 “또 하나, 공5군의 군단장 바이중산(白宗善 백종선)도 보자고 하라. 왜 이번에 만날 수가 없었나?”고 물었다. 왕둥싱은 “바로 통지 하겠다”고 대답했다. 마오는 난핑에서 이들을 만났다. 마오는 바이중산과 악수를 하면서 “왜, 나를 보러오지 않았나?”라고 묻자 곁에 있던 천리윈이 급히 “그는 그날 당직이었다”고 설명했다. 마오는 이들에게 다른 지방에서처럼 루산회의의 진상을 밝히고 단결을 강조했다.

면담이 끝나자 왕둥싱이 마오에게 “상하이 어디에 정차할까요?”라고 물었다. 마오는 “상하이 교외 훙챠오(虹橋 홍교)비행장 전용선에 정차하고, 구자화웬(顧家花園 고가화원)에 진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왕둥싱이 “상하이에 있는 왕훙원에게 통지할까요?”라고 묻자, 마오는 “그래, 자네가 전화를 걸어라”라고 말했다. 마오의 전용열차는 10일 오후 1시 40분께 사오싱에서 항저우로 되돌아 와 오후 2시 50분께 항저우 역에 정차했다. 천리윈은 마오가 항저우에 도착하자 마오와 악수를 하려고 하거나 마오에게 접근하는 것을 꺼렸다. 어디가 켕겨서 그런지 표정이 대단히 부자연스러웠다. 나중에 왕둥싱은 천리윈이 말한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521)

“(마오가 항저우에 도착한)9월 8일 밤 (연합함대 일원인)위신예(于新野 우신야)가 항저우에 도착했다. 위신예는 천리윈을 찾아 모종의 임무를 주었다. 단, 위신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약간의 의혹을 갖고 있었다. 위신예는 마오가 항저우에 와서 한 이야기가 어떤 내용인지를 천이윈에게 물었다. 천리윈은 마오와의 담화내용을 위신예에게 보고했다. 당시 위신예는 천리윈에게 항저우, 상하이, 난징 사이에서 마오 주석을 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들이 나중에 파악한 상황에 따르면 천리윈은 위신예를 접대하는 방에 걸려 있는 마오 주석의 초상을 보고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근심스러워 했다고 한다. 나중에 ‘연합함대’ 구성원의 진술과 우리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마오 주석을 모해할 준비를 했다.”

당시 위신예가 천리윈에게 준 임무는 항저우에서 개조한 소련제 비행기 일류신-10으로 마오의 전용열차를 폭격하기 위해 비행기에 폭탄을 적재하는 것이었다. 위신예는 9월 9일 상하이에서 왕웨이궈(王維國 왕유국)에게 “우리들이 비행기로 폭격할 때 비행기에 있는 무기뿐 아니라 고사포를 다시 배치해 열차에서 뛰어나오는 사람들을 기총 소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신예와 왕웨이궈가 모의할 때 왕웨이궈는 “만약 마오의 전용열차가 구자화웬에 정차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위신예는 “왕웨이궈가 ‘교도대’를 부근에 매복시켰다가 기관총으로 경호대의 앞뒤를 차단해 먼저 경호대를 소멸시키고 돌진하면 된다”고 응답했다. 위신예와 왕웨이궈는 지형으로 볼 때 항저우 보다 상하이에서 손을 대는 것(마오 살해)이 그들에게 한결 유리하다고 여겼다. 

위신예는 그날 오후 비행기로 베이징 시쟈오(西郊 서교) 비행장에 도착해 린리궈에게 상세한 상황을 보고했다. 시쟈오 비행장의 일반 사무실과 곁에 있는 공군학원에는 이들의 거점이 있었다. 린리궈는 곧바로 베이다이허에 있는 린뱌오와 예췬에게 진전 상황을 보고했다.

린리궈와 저우위츠는 장텅쟈오에게 “북쪽 지역(北線 북선)은 왕페이(王飛 왕비)가 지휘하고 남쪽지역(南線 남선)은 당신이 지휘하니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지시했다. 왕페이는 당시 공군사령부 부참모장으로 ‘연합함대’의 골간이었다. 애초 왕페이는 베이징 상공이 비행금지 구역이기 때문에 탱크로 중난하이와 댜오위타이로 밀고 들어갈 계획이었다. 어떤 사람은 로켓포로 중난하이를 가격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타격방안을 놓고 합당한 방안을 찾지 못한 채 설왕설래하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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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마오, 이상한 낌새에 병력이동 명령…린뱌오 쿠데타 수포로

 

베이다이허에 있던 린뱌오는 예췬을 시켜 전화를 통해 황융성, 우파셴, 리줘펑, 치우후이줘 등과 (인력)동원문제를 긴밀하게 상의했다. 9월 10일 예췬과 황융성은 5차례 전화통화를 했다. 그중 두 차례는 장장 90분과 135분 동안 통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린뱌오는 황융성에게 보낸 편지에서 “융성 동지; 대단히 당신이 그립다. 어떤 때라도 항상 낙관적이고, 몸을 보중하기 바란다. 일이 있을 때는 왕페이 동지와 만나 상의하기 바란다”라고 적었다. 예췬은 우파셴과 통화하면서 ‘B-52(마오에 대한 암호)’의 상황에 대해 물었고, 우파셴은 항저우에서 마오와 천리윈 등과 나눈 대화내용 등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주석 522)

마오의 전용열차는 9월 10일 오후 3시 35분 항저우를 떠나 오후 6시 10분께 상하이에 도착했다. 왕둥싱은 상하이의 현지 경호부대를 전부 외곽방위로 철수시키고, 마오의 경호요원으로 열차 안에 항상 수행하는 경호단 간부 100명을 마오가 탄 열차 주위에 배치했다.

열차가 정차한 지점에서 15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훙챠오 비행장의 항공용 연료저장고가 있었다. 왕둥싱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곳을 경호원들이 철통같이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난징군구 사령관 쉬스여우(許世友 허세우)와 왕훙원이 마오를 면담하고 진장판티옌(錦江飯店 금강반점)으로 식사를 하러 떠난 뒤 ‘연합함대’ 골간인 왕웨이궈가 찾아와 마오를 면담하려 기다렸다. 그러나 마오는 끝내 왕웨이궈를 만나주지 않았다.

마오의 전용열차는 11일 오후 1시 12분 상하이를 출발해 오후 5시 35분 난징에 도착해 15분간 정차했다. 난징군구 사령관 쉬스여우가 환송 나왔으나 마오는 “안 만난다. 누구도 안 만난다. 쉬겠다”고 말해 왕둥싱이 쉬스여우를 대신 만났다.

난징을 출발한 마오의 전용열차는 밤 9시 45분 방부(蚌埠 방부)에 도착해 5분을 쉬고, 12일 0시 10분 쉬저우(徐州 서주)에서 10분간 정차했다. 왕둥싱은 새벽 5시 지난(濟南 제남)역에 도착해 50분간 쉬는 동안 베이징 군구사령관 리더성(李德生 이덕생), 지덩쿠이(紀登奎 기등규), 우더(吳德 오덕) 등에게 전화를 걸어 마오가 펑타이(豊臺 풍대)역에서 면담하겠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마오는 펑타이에서 이들을 면담하면서 “검은 손은 천보다 한 사람만 아니다. 또 다른 검은 손이 있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마오는 면담이 끝난 뒤 리더성을 별도로 불러 38군을 베이징 북쪽 교외의 난커우(南口 남구)에 배치하도록 명령했다. 어떤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마오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병력이동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유비무환이었다. 마오는 오후 4시가 넘어 베이징에 도착해 안전하게 중난하이로 돌아갔다. (주석 523)

 

 린뱌오(왼쪽)와 마오쩌둥

 

린리궈 등이 마오를 살해하려던 계획은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린뱌오 집단은 허둥대기 시작했다. 상하이에 있던 왕웨이궈는 린리궈, 저우위츠에게 전화를 걸어 “마오가 이미 상하이를 떠나 북상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린리궈는 “완전히 끝났다!-수장(首長; 린뱌오)이 맡긴 중요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수장은 목숨을 나에게 맡겼다. (수장에게)뭐라고 말할 수 있겠나!”라며 탄식했다.

린리궈 등은 ‘기요’에서 “현대판 진시황제를 타도하자!”고 담대하게 외쳤지만 허술한 쿠데타 계획으로 우물쭈물하다 힘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제풀에 무너지고 말았다. 9월 11일 밤 린뱌오와 예췬, 린리궈는 광저우(廣州 광주)로 달아나 마오에 항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광저우에서 별도의 분할국가인 ‘중앙’을 세워 “만약 무력으로 소련과 연합하면 남북에서 협격을 벌일 수 있다”고 여겼다. 공군사령부 부참모장 왕페이는 급히 이런 계획에 따라 남쪽으로 달아날 명단을 짰다. 여기에는 린뱌오 일가를 제외하고 황융성, 우파셴, 리줘펑, 치우후이줘 등을 포함시켰다.

왕페이는 광저우로 갈 몇 대의 비행기 중 256호 트라이던트 비행기를 베이다이허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하이관(山海關 산해관) 비행장에 몰래 떠날 채비를 해 놓았다. 이 비행기는 린뱌오 일가가 전용으로 쓰도록 준비한 것이었다. 이 일은 극비로 추진해 린뱌오의 딸인 린리헝(林立衡 임립형)조차도 몰랐다. (주석 524)

허베이(河北 하북)성 발해만 연안 베이다이허(北戴河 북대하) 서쪽 해변 모래사장에서 2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롄펑산(聯峰山 연봉산)자락 소나무 숲에 2층으로 지은 조그만 집이 있다. 바로 린뱌오와 예췬이 거주하는 중앙요양소 62호러우(樓 루; 원래는 96호러우)다.

1971년 9월 12일 날이 어둑어둑할 무렵 린뱌오와 예췬은 (광저우로 달아날) 인원을 이동하고 배치하느라 몹시 분주했으나 겉으론 평온해 보였다. 린뱌오와 예췬은 막 린리궈로 부터 베이다이허에 돌아왔다는 전화를 받고 속임수를 썼다.

이들은 이날 밤 딸인 린리헝과 애인인 장칭린(張淸霖 장청림)의 약혼식을 한다고 밝혔다. 예췬은 비서와 공작원들에게 사람들을 초청해 식사는 하지 않지만 사탕과 차 등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대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 공작원들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려 자신들의 음모를 숨겼다. 

522) 林彪夫婦在北戴河的最後時刻   人民網  揭秘; 林彪父子策劃刺殺毛澤東行動的全過程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23) 九大後毛澤東調動兵防林彪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524) 林彪夫婦在北戴河的最後時刻   人民網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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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9월 13일 새벽 린뱌오 탈출 시도…‘9.13 사건’ 서막

 

밤에 예췬은 린리헝 등과 ‘행복(甛甛蜜密 첨첨밀밀)’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린리궈가 밤 8시가 넘어 비행기로 산하이관 비행장에 도착해 9시께 부모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린리궈는 누나인 린리헝에게 꽃다발을 주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린리헝은 어머니 예췬과 사이가 좋지 않아 예췬은 항상 린리헝을 따돌렸었다.

애초 린리헝은 부모들이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린리헝은 이때 비로소 가족들이 무언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낌새를 느꼈다. 영화를 보다 예췬이 나갔다. 린리헝도 슬그머니 뒤를 따라 나섰다. 린리헝은 린뱌오의 방 바깥에서 린뱌오와 예췬, 린리궈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렴풋하게 어느 지방으로 간다는 소리가 들렸다. 린리헝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긴장해 곧바로 린뱌오의 안전을 경호하는 8341부대의 부단장인 장홍(張宏 장굉)과 2대대 대장 장줘서우(張作壽 장작수)에게 신고했다. 이때가 밤 9시 20분 안팎이었다.

장줘서우는 즉시 베이징의 중앙 경호국 부국장 장야오츠(張耀祠 장요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내용을 보고했다. 장요츠는 곧바로 경호국장인 왕둥싱(汪東興 왕동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이 대단히 긴급하다”며 처리방안을 물었다. 왕둥싱은 전화로 저우언라이를 찾았다. 저우는 이때 인민대회당에서 회의를 열어 4기 전국 인민대표대회에 보고할 ‘정부공작 보고’ 초안에 대한 토론을 주재하고 있었다. 저우가 왕둥싱에게 물었다. (주석 525)

“믿을 만한 보고인가?”
“믿을 만합니다.”
“당신이 즉시 전화를 장홍에게 걸어 알리고, 새로운 정황이 있으면 곧바로 보고하시오.”

왕둥싱은 장야오츠와 함께 자신의 사무실에 있었다. 장홍이 왕둥싱에게 전화를 걸어 린리헝이 신고한 린리궈의 운전병이 말했다는 새로운 정보를 보고했다. 린리궈가 베이징에서 타고 온 전용 비행기가 지금 산하이관 비행장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왕둥싱은 즉시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했다. 저우는 회의장을 빠져나와 둥다청(東大廳 동대청)의 조그만 방으로 옮겨 베이다이허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저우는 토론회에 참석한 공군사령관이자 린뱌오의 측근인 우파셴을 불렀다. 저우는 우파셴에게 비행기 한 대가 베이다이허로 갔는지를 물었으나 모르고 있었다. 저우는 공군 비행통제실에 전화해 상황을 파악하도록 우파셴에게 지시했다. 이때 장홍은 산하이관 비행장에 비행기 1대가 있고, 비행기의 조종사 등 승무원들이 휴식중이며 비행장 관리는 해군에서 하고 있다는 내용을 왕둥싱에게 보고했다. 밤 11시 30분께 저우는 직접 베이다이허의 예췬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석 526)

“린 부주석은 잘 지내고 있지요.?”
“린 부주석은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우언라이는 예췬이 베이다이허에 전용기가 있는지를 물었다. 예췬은 저우를 속이기 위해 모른다고 했다가 잠시 뒤 “비행기가 있는데 우리 아들(린리궈)이 타고 온 것이다. 아이 아버지(린뱌오)가 내일 날씨가 좋으면 상공을 한 번 돌겠다고 말했다”며 거짓말을 했다. 저우가 물었다.

“다른 곳으로 갑니까?”
“원래는 다롄(大連 대련)을 갈려고 했는데 날씨가 조금 찹니다.”
“밤에 비행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밤에 비행하지 않아요. 내일 날이 밝거나 오전에 날씨가 좋으면 다시 비행할 겁니다.”
“비행하지 말아요. 안전하지 않습니다. 꼭 기상상태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내가 베이다이허로 린뱌오 동지를 보러 가겠습니다.”


저우가 베이다이허에 가겠다고 말하자, 예췬은 단박에 놀래버렸다. 예췬은 저우에게 베이다이허에 올 필요가 없다고 권했다.

“당신이 베이다이허에 오면 린뱌오가 긴장해 더욱 불안합니다. 총리께서 오지 마세요.”

저우는 이때 베이징군구 사령관 리더성(李德生 이덕생)을 공군사령부 작전당직실에 파견해 임시 지휘를 맡도록 지시했다. 저우는 또 자신이 믿는 양더중(楊德中 양덕중)이 우파셴을 수행해 베이징 시쟈오(西郊 서교)비행장으로 가 상황을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양더중을 파견한 것은 우파셴을 감시하기 위한 조처였다. 저우는 정치국 후보위원이자 중앙 군사위원회 행정소조원인 지덩쿠이(紀登奎 기등규)가 베이징 군구를 감독하도록 지시했다. 린뱌오는 예췬의 보고를 받고 저우가 베이다이허로 올 것으로 알았다.

린뱌오는 “나도 쉴 수 없다. 오늘 밤 잠을 잘 수 없다. 빨리 준비하라. 우리들은 곧바로 떠난다”고 서둘렀다. 예췬도 당황해 하면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화답했다. 갑자기 집안이 부산해지자 공작원들은 왜 이렇게 빨리 떠나는 지를 아리송해 했다. 린뱌오의 차가 문 앞에 곧바로 대기하자 린뱌오가 막 차에 올라탔을 때 예췬은 공작원들에게 딸인 린리헝을 찾아오라고 했다. 린리헝은 부대에 신고하러 갔다가 다시 돌아 올 생각이 없어 귀가하지 않았다. 린뱌오의 요양소 경비를 선 2대대 초병근무자는 대대에 “린뱌오 거소가 대단히 혼란하다. 물건을 옮기는 사람들이 북적 댄다”고 보고했다.

예췬, 린리궈가 잇따라 차에 탔다. 린뱌오는 린리궈와 경호비서에게 “비행기로 (소련의)이르쿠츠크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리는가?”를 물었다. 린리궈가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린뱌오는 한때 광저우로 달아나 ‘분할 국가’를 세워 마오에게 항거할 ‘꿈’도 꿨으나 지금은 그저 목숨이 우선이라고 여겼다. 소련으로 탈출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운전병 옆 좌석에 경호비서가 타고 뒷좌석엔 린뱌오, 예췬, 린리궈, 공군사령부 처장 류패이펑(劉沛豊 유패풍)이 탔다. 차가 검문초소를 막 지나려 할 때 초병이 막아섰다. 예췬이 운전병에게 돌진하라고 명령했다. 경호비서는 운전병에게 차를 세우라고 말했다. 운전병은 단지 차의 속도를 조금 줄여 달리기 시작했다. 경호비서가 문을 열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차안에서 린리궈가 총을 쏘았다. 린뱌오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고 온 장홍과 장줘서우 등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

이들은 차를 타고 추격에 나섰다. 린뱌오 훙치(紅旗 홍기)차량은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어 장홍과 장줘서우가 탄 지프는 속력이 늘여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맹렬한 속도로 달려 산하이관 비행장에 도착한 린뱌오와 예췬 등은 중형 제트기 트라이던트 256호 비행기에 트랩이 치워져 조종석에 걸쳐진 사다리를 타고 황급히 기내로 올라갔다.

린뱌오와 예췬은 황망하고 긴장한 나머지 린뱌오는 모자를 땅바닥에 떨어뜨렸고, 예췬은 스카프를 날려 보냈다. 비행기에는 원래 2명의 조종사가 있었으나 1명만 있었고, 항법사, 통신사 등은 탑승하지 않았다. 린리궈와 류패이펑은 총을 들고 “빨리, 빨리, 빨리 비행기 시동 걸어!”라고 마구 소리쳤다.

강제로 황급히 시동을 걸어  활주로로 향하다 오른쪽 비행기 날개가 급유차 뚜껑에 부닥쳐 날개에 달린 유도등 마개유리가 깨졌다. 린뱌오 등이 탄 비행기는 칠흑 같은 밤을 뚫고 9월 13일 0시 32분 활주로를 속력을 내어 달리다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행기는 기수를 서북방향으로 돌려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충격적인 유명한 ‘9.13 사건’이다. (주석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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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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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마오, “어쩔 수 없는 일, 린뱌오 가도록 놔둬라”

 

저우언라이는 레이더로 상공을 감시하면서 비행방향을 계속 추적해 무선으로 호출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저우는 또 전국에 항공금지령을 하달하고 모든 비행장을 폐쇄시키는 한편 비행기의 비행을 금지시켰다. 중난하이에 있던 마오는 린뱌오가 달아난 상황을 저우의 보고를 통해 신속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후 마오는 안전을 고려한 저우의 안배로 중난하이에서 비밀리에 인민대회당 남쪽 118호실로 잠시 거소를 옮겨 상황을 보고받았다. 왕둥싱이 마오에게 후속 상황을 보고하려 할 때 시쟈오 비행장 지휘통제소에 나가 있던 우파셴의 전화가 걸려왔다. 우파셴은 왕둥싱에게 린뱌오가 탄 비행기가 30분 전에 이륙해 북쪽으로 기수를 돌려 장자커우(張家口 장가구) 일대에서 허베이 상공을 걸쳐 내몽골 쪽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우파셴은 비행기의 진로를 강제로 가로막을 지 여부에 대해 지시를 청했다. 왕둥싱은 “내가 즉시 마오 주석에게 지시를 받겠다. 당신은 자리를 뜨지 마라”고 말한 뒤 마오에게 달려갔다. 왕둥싱은 이런 내용을 마오와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하면서 강제로 비행항로를 막거나 격추시킬지 여부에 대해 지시를 청했다.

마오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마오는 한 참을 생각하다 말문을 열고 “린뱌오는 우리당 중앙의 부주석이다. 비가 오려는 것과 (과부가 된)어머니가 시집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天要下雨, 娘要嫁人, 不要阻攔( 천요하우, 낭요가인, 불요조란)’.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도록 놔두게!”라고 말했다.

저우언라이도 마오의 의견에 동의했다. 왕둥싱은 우파셴에게 린뱌오가 탄 비행기의 진로를 막지 말라는 마오의 뜻을 전달했다. 이 비행기는 13일 오전 1시 55분 몽골국경을 넘으면서 레이더망에서 모습이 사라졌다. (주석 528)

저우언라이는 비밀전화로 직접 전국의 대군구(大軍區)에 전화를 걸어 완곡하게 린뱌오가 도주한 사실을 알렸다. 저우는 “루산회의에서 제일 먼저 연설한 그 사람이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나라를 배반하고 도망갔다! 비행기를 타고 몽골 인민공화국 방향으로 달아났다. 각 부대는 즉시 1급 전쟁준비 태세에 들어가 모든 발생가능한 일에 대처한다”고 선포했다.

9월 13일 오전 3시께 베이징 샤허(沙河 사하)비행장에서 한 대의 헬리콥터가 갑자기 깜깜한 밤하늘로 날아올라 동북방면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왕둥싱은 공군사령부로부터 긴급전화를 받고 이 헬리콥터의 실체를 파악했다. 헬리콥터 3685기에는 ‘연합함대’의 핵심요원인 공군사령부 판공실 부주임 저우위츠, 공군사령부 부처장 위신예, 7341부대 정치부 부처장 리웨이신과 정, 부 조종사 2명 등 5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 3명은 긴급임무라며 당직 헬리콥터 조종사를 속인 뒤 몽골 울란바토르로 갈 것을 명령했다.

왕둥싱은 곧장 마오와 저우언라이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마오와 저우는 이구동성으로 “공군에 비행기를 출격시켜 헬리콥터의 항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전투기들이  긴급 발진해 상공에서 헬리콥터를 찾아 나섰으나 하늘이 온통 먹물을 뿌려 놓은 듯 깜깜한데다 헬기가 비행등을 켜지 않아 목표물을 찾지 못했다.

헬기 조종사 천슈원(陳修文 전수문)은 이들로부터 속았다는 것을 알고 항공연료가 충분했지만 기름이 거의 떨어져 착륙해 급유를 해야 한다고 속임수를 썼다. 하지만 저우위츠는 착륙을 허락하지 않았다. 저우위츠는 린뱌오가 울란바토르에 도착했다며 겁내지 말고 몽골국경을 넘으면 된다고 조종사를 강박했다.

조종사 천슈원은 속으로 헬기가 크게 요동치도록 조종해 흔들리는 틈을 이용해 항로를 바꿀 심산이었다. 이때 날이 밝아 오면서 헬리콥터 위로는 전투기들이 헬기를 찾아 날아다니고 있었다. 천슈원은 헬기가 요동을 치도록 조종하는 순간 재빨리 나침반을 부수고 항로를 바꿨다.

저우위츠가 항로가 바뀐 것을 알고 추궁했다. 천슈원은 머리위로 전투기가 수색하고 있어 발견되지 않기 위해서는 저공비행으로 항로를 헛갈리게 하며 비행해야 한다고 꾸며댔다. 저우위츠는 나침반이 부서진 것도 추궁했다. 천슈원은 고장이 났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저우위츠는 감각적으로 항로가 바뀌었다는 것만 알뿐 헬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천슈원은 목측판단으로도 항로의 정확한 진로방향을 알고 있었다. (주석 529)

천슈원은 베이징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천슈원은 베이징 교외 화이로우(懷柔 회유) 지역의 빈터 공중에서 5바퀴를 돈 뒤 착륙했다. 화가 난 저우위츠는 권총으로 천슈원을 사살했다. 천슈원의 옆에 있던 부조종사 천스인(陳士印 진사인)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천스인은 얼른 총에 맞아 죽은 척하며 쓰러졌다. 그렇게 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저우위츠 등 3명은 산위로 달아나려 했으나 뛰어봤자 벼룩이란 것을 알고 자살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갖고 있던 린뱌오의 ‘수령(手令)’문건과 린뱌오가 황융성에게 보낸 편지 등을 찢어 날려 보냈다. 나중에 현장조사반이 찢어진 문건들을 수거해 복원시켜 린뱌오의 쿠데타 음모지시를 밝혀내는 결정적 증거로 제시됐다.

3명은 하나, 둘, 셋을 세면서 동시에 권총자살을 하기로 했다. 저우위츠, 위신예는 자살했으나 리웨이신은 죽는 게 두려워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 리웨이신은 달아나려 했으나 이때는 벌써 민병들이 추격해 오고 있어 끝내 잡히고 말았다.

528)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汪東興; 林彪集團準備了八種辦法謀害毛澤東  汪東興 人民網-文史頻道  澤東傳 1949-1976(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529) ‘9.13’慘烈的空中搏殺; 3685號直升機如何被劫持   舒雲/整理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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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린뱌오 죽음에 마오 충격… 군부 후임엔 예젠잉 낙점

 

9월 14일 오전 8시 30분 몽골 주재 중국대사관에 몽골정부 외교부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내용은 몽골 외교부 차관 올턴 빌리가가 중국대사를 만나고 싶다는 얘기와 중국 비행기 한 대가 몽골에 추락한 사실을 통보했다. 이날 낮 12시 20분 몽골 주재 중국대사가 중국외교부에 비행기 추락사실을 보고했다. 린뱌오가 탄 비행기로 추정했다.

외교부장 대리 지펑페이(姬鵬飛 희붕비)는 곧바로 당 중앙에 보고했다. 린뱌오 도주문제를 지휘하느라 이틀 동안 꼬박 한 숨도 자지 못한 저우언라이는 보고를 받고 왕둥싱에게 “대단히 중요한 소식을 받았다. 마오 주석에게 보고하라”고 보고내용을 알려줬다. 왕둥싱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530)

“당시 마오 주석은 인민대회당 베이징청(北京廳 북경청)에 있었다. 나는 베이징청으로 뛰어가 이 소식을 마오 주석에게 보고했다. 마오 주석은 조금 생각하더니 ‘이 소식은 믿을 만 한 것인가? 어째서 (비행기가) 초원에 추락했는가? 기름이 떨어졌나? 아니면 비행장으로 착각했나?’라고 물었다. 나는 마오 주석에게 ‘비행기가 어떤 상황인지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모릅니다. (몽골 주재)대사가 현지조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비행기가 어떤 원인으로 추락했는지는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오 주석은 또 ‘비행기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없냐?’고 물었다. 나는 ‘이런 상황은 모두 뚜렷하지 않습니다.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현장조사를 벌인 중국대사관과 몽골정부는 사고원인에 대해 같은 의견을 보였다. 이들 양국은 린뱌오 등이 탄 트라이던트 256호가 9월 13일 오전 2시께 몽골 운두르칸 지역 서북쪽으로 70킬로미터 떨어진 초원에 추락한 것으로 확인했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린뱌오, 예취, 린리궈와 조종사 등 9명(8남1녀) 모두 사망했다.

사고원인은 착륙당시 랜딩기어 등을 가동하지 않은 채 불시착을 시도하다 화재로 비행기가 폭발해 발생한 것으로 조사결과 밝혀졌다. 일대 ‘효웅(梟雄)’소리를 듣던 린뱌오는 반당집단의 반도(叛徒)이며, 매국적(賣國賊) 등의 오명을 쓰고 가족과 함께 비행기 추락으로 처참하게 죽었다. 며칠 뒤 린뱌오의 수족으로 ‘4대 금강(金剛)’으로 불렸던 해방군 총참모장 황융성, 공군사령관 겸 부참모장 우파셴, 해군사령관 겸 부참모장 리줘펑, 총병참부장 겸 부참모장 치우후이줘 등의 처리문제가 논의됐다.

마오는 저우언라이에게 “10일간 지켜보면서 그들이 솔직하게 진술하면 관대하게 처리하라. 노 동지들이다. 과오를 범한 것을 인정하고, 과오를 고칠 것을 인정하고, 진술을 (솔직하게)잘하면 그것으로 됐다”고 했다. 그러나 황융성 등은 정확한 진술을 거부하고 증거자료 등을 불태우다 적발됐다.

저우언라이는 이들 4명을 격리심사 대상자로 결정한 뒤 체포했다. 중공 중앙은 1973년 8월 20일 ‘린뱌오 반혁명 집단의 죄상 심사보고’를 승인하고 린뱌오를 비롯해 천보다, 예췬, 황융성, 우파셴, 리줘펑, 치우후이줘의 당적을 영원히 박탈한다고 결정했다. (주서 531)

린뱌오가 소련으로 달아나다 추락사한 ‘9.13 사건’으로 충격과 심대한 타격을 받은 사람은 마오쩌둥이었다. 마오가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수정주의를 막기 위한 이른바 ‘반수방수(反修防修)’를 목적으로 발동한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린뱌오는 마오의 충실한 협력자로 충성을 바쳤다.

당장(黨章)에 후계자로 기록된 린뱌오가 어느 날 갑자기 국외로 도망가다 죽었으니 마오의 위신과 권위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5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문혁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파산(破産)을 맞게 되는 중요한 변곡점이 됐다. 깊은 충격을 받은 78살의 마오는 눈에 띄게 노쇠현상을 보였다. 마오는 감기에 걸렸다가 기관지염으로 전이되고 급기야는 폐렴을 앓게 되면서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다.

마오는 ‘9.13 사건’이후 예정되어 있던 건국절인 국경절 경축행사를 취소해 죽을 때까지 톈안먼(天安門 천안문) 성루에 오르지 못했다. 마오는 다음해 1월에는 쇼크충격으로 죽음 문턱에 이르렀다가 살아나기도 했다. 거동이 불편해 져 실내에서는 부축을 받으며 생활해야 할 정도로 ‘9.13 사건’은 마오에게 깊고도 넓고 크게 영향을 미쳤다.

저우언라이는 군부를 장악했던 린뱌오가 사라지면서 혼란을 방지하고 군권을 확립하기 위해 린뱌오의 죽음을 확인한 9월 14일 밤 마오에게 10대 원수인 예젠잉(葉劍英 엽검영)이 군사위원회 일상 업무를 주재할 수 있도록 적극 추천했다. 덩샤오핑과 예젠잉은 문혁에 비판적이었지만 마오는 정무에서 덩샤오핑, 군무에서 예젠잉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아껴 왔다. 마오가 승낙하자 중공중앙은 10월 3일 예젠잉이 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신분으로 군사위원회의 업무를 주재하도록 선포했다. (주석 532)

이때 예젠잉은 74살이었다. 예젠잉은 이날 집에 돌아 온 뒤 비서에게 “이전에 내가 다시 군복을 입고 군대를 관리할 줄은 생각지 않았다. 지금 관리하게 되는 구나!”라며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예젠잉이 다음날 군대 고위 간부회의를 주재했다. 예젠잉은 회의에 참석한 원수들과 장군들에게 린뱌오가 달아나다 죽었다는 내용을 설명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회의장이 순간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자 어떤 사람이 갑자기 “들었습니까? 린 대머리(린뱌오)가 죽었습니다! 린 대머리가-죽었다!”고 외쳤다. 모두들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회의 중인 것도 잊어버린 채 환호하면서 기뻐했다. 어떤 노(老) 장군은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해 그 자리에서 혼절하기도 했다. 

 

예젠잉

 

예젠잉은 10대 원수(元帥) 중에서 당정군(黨政軍) 고위영도 자리에 진입한 시기가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1966년 70살 때 중공중앙 서기처와 정치국에 들어갔다. 1973년에 중공 10대에서 당 중앙 부주석에 당선됐다. 예젠잉은 문혁 동란 중에 ‘2월 역류’ 등으로 실각하는 등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예젠잉은 ‘4인방’을 척결하고 중공중앙의 2세대 영도자인 덩샤오핑 지도체제를 구축하는 등 중국 현대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는 데 주도적 구실을 했다.

야전보다는 주로 중앙 군사위원회의 참모장으로서 군 생활을 하면서 ‘명 참모’라는 소리를 들어 1955년 유일한 ‘참모’ 군사경력의 원수가 됐다. 외유내강 형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해 국공합작 시절에는 저우언라이를 도와 국공협상에 참여하고, 미국과 국교정상화 비밀협상 과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1960년 당시 북베트남 국가원수인 호치민(胡志明 호지명)이 베이징에서 마오와 회담을 한 적이 있었다. 호치민이 마오에게 예라오(葉老 엽노)가 베트남에 놀러 오도록 안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마오는 ‘예라오’가 누구인지 몰라 기이하게 여겨 호치민에게 “예라오가 누구인가?”고 물었다. 호치민은 “예젠잉 원수!”라고 말했다. 마오는 “아이고, 당신은 지금 베트남의 주석이다. 그를 ‘예라오’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했다. 호치민은 “아닙니다. 예라오는 나의 옛날 영도입니다. 언제라도 나는 그를 존경해 ‘예라오’라고 부를 겁니다”고 말했다. 호치민의 인품도 그러하지만 예젠잉의 인간 됨됨이를 말해주는 일화다. 이들은 1930년대 깊은 친분을 나눈 바 있었다.

예젠잉은 1897년 4월 28일 광둥(廣東 광동)성 매이(梅 매)현 옌양바오(雁洋堡 안양보)의 빈한한 소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예이웨이(葉宜偉 엽의위)였다. 1919년 윈난(雲南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한 예젠잉은 쑨원(孫文 손문)을 따라 민주혁명에 투신했다. 1921년 대총통 쑨원의 수행원으로 광시(廣西 광서)성으로 갔다가 해군 육전대(陸戰隊; 해병대) 대대장이 되었다. 1924년 황푸(黃埔 황포)군관학교 창설에 참여해 교수부 부주임에 임명됐다. 1924년 5월 광둥군 2사단 참모장이 되었고, 1925년 군벌 천지융밍(陳炯明 진형명) 토벌작전에 참여했다. 1926년 7월 북벌전쟁에 참여해 국민혁명군 제1군 총예비대 지휘부 참모장으로 있다가 신편 2사단 사단장 대리가 되었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반장(反蔣) 무장폭동을 벌이다 실패한 뒤 우한으로 가 국민혁명군 제4군 참모장이 되었다. 7월 비밀리에 공산당에 가입했고 난창기의(南昌起義)에 참여했다. 기의가 실패하자 12월 11일 장타이뢰(張太雷 장태뢰), 예팅(葉挺 엽정)과 함께 광저우(廣州 광주)기의를 벌였다. 1929년 모스크바로 가 동방노동자 공산주의대학 특별반을 마치고 1930년 귀국했다.

1931년 초 루이진(瑞金 서금) 소비에트지구에 들어가 중앙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겸 총참모부장(총참모장)을 맡았다. 홍1방면군 참모장을 거쳐 1934년 10월 장정에 참여해 군사위원회 1종대 사령관, 중앙종대 부사령관 겸 군사위원회 제1국장을 역임했다. 1935년 7월 홍군 전적위원회 총지휘부 참모장에 임명되었고, 9월 9일 장궈타오(張國燾 장국도)가 북상을 거부하고 천창하오(陳昌浩 진창호)에게 우로군을 남하시킬 것을 전보로 밀명을 보냈었다. 예젠잉은 이때 전보를 미리 챙겨 곧바로 마오에게 보고해 홍1방면군 주력이 무사히 북상을 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마오는 누차 예젠잉이 긴박했던 이때 민첩하게 업무를 처리해 당과 혁명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고 칭찬했다. 

항일 전쟁이 터진 뒤 1937년 8월 8로군 참모장이 되었고, 1941년 2월 중앙군사위원회 참모장에 임명돼 마오와 주더를 도와 항일전쟁을 벌였다. 1945년 6월 중공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에 당선되었고, 8월에 중앙 군사위원회 위원, 군사위원회 부 총참모장에 임명됐다. 1945년 12월 충칭(重慶 중경)정치협상회의에 참석했다. 1947년 4월 중공중앙이 국민당군 후중난에 쫓겨 중앙을 3갈래로 쪼개 달아날 때 예젠잉이 중앙 후방위원회 서기로 양상쿤 등 젊은 층을 이끌고 산시 서북쪽으로 들어가 공작을 폈다.

1948년 12월 베이핑(北平 북평; 베이징)시 군사관제위원회 주임 겸 시장이 되었다. 신중국 건국 후 잇따라 광둥성 인민정부 주석 겸 광저우 시장, 광둥군구 사령관 겸 정치위원, 화난(華南 화남)군구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59년 9월 중공중앙 군사위원회 상무위원, 1966년 1월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5월에 중공중앙 서기처 서기, 중앙 군사위원회 비서장에 임명돼 군사위원회 일상 업무를 주재했다. 8월 제8기 11중 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에 임명된 바 있었다. 

예젠잉은 ‘4인방’ 천하였던 1976년 9월 마오가 죽기 직전 비‘4인방’으로  마오의 ‘탁고(托孤)’를 받은 옛 왕조 때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었다. 중국 공산당사에서 예젠잉이 없는 마오와 덩샤오핑은 어떤 모습 이었을까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이들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덩샤오핑은 예젠잉을 생전에 ‘따거(大哥 대가; 큰형)’로 극진하게 대했다고 한다.

중공중앙은 예젠잉의 군사위원회 일상 업무 주재를 결정하면서 린뱌오파 일색이었던 군사위원회 판사조를 없애고 ‘군사위원회 판공회의’를 만들어 운영하도록 했다. 마오는 10월 4일 새로 만든 군사위원회 판공회의 구성원을 회견하는 자리에서 “린뱌오와 천보다의 음모활동은 오래됐다. 그들의 반당(反黨) 목적은 권력탈취다. 문혁에서 몇 명의 원로 원수들을 못살게 한 것은 린뱌오가 했다”고 책임을 떠다 박질했다. 마오는 “개인숭배는 내가 스노우에게 말했던 것처럼 당신들 미국에도 개인숭배를 한다. 당시에는 조금 필요했다. 그런데 그렇게 많았다! 나, 마오는 당의 주석으로 일할 때 나를 마오 주석이라고 부르면 대단히 편하게 들린다. 무슨 ‘4대 위대(偉大)’하다고 하면 혐오스럽다! (마오를 떠받드는)최고봉 문제는 66년 7월에 린뱌오에게 경고를 했는데도 그는 듣지 않고 그렇게 썼다”고 린뱌오를 비난했다. (주석 533)

530)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31)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532) 沒有葉劍英的毛澤東, 鄧小平是會什麽樣子?   文/袁小倫   ‘黨史縱覽’  人民網  毛澤東因何欣賞葉劍英   人民網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33) 沒有葉劍英的毛澤東, 鄧小平會是什麽樣子   文/袁小倫   ‘黨史縱覽’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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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천이 장례식 참석, ‘2월역류’를 ‘2월항쟁’으로 재평가

 

마오는 린뱌오 사건이 발생한지 2개월이 되는 11월 14일 베이징에서 청두(成都 성도)지구 좌담회에 참석한 장궈화(張國華 장국화), 량싱추(梁興初 양흥초) 등을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마오는 “그때, 누구도 그(린뱌오)가 반혁명을 할 것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부 통수(副統帥; 부 통솔자)이고 후계자였다!”고 말했다.

마오는 루산회의 때 자신이 쓴 ‘나의 약간의 의견’과 관련해 “당시는 제목이 없었고, 일단의 문제는 그냥 넘어갔다. 중심은 주석 문제였다. 나는 그냥 접어두려 했다. 그 사령부(린뱌오 집단)가 내가 국가주석을 맡아야 한다는 것은 가짜고, 린(린뱌오)이 주석이 되어 린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게 진짜다. 일단의 사람들이 진심으로 내가 주석이 돼야 한다는 것과 린뱌오가 (주석을)해야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마오가 이야기하는 중에 예젠잉이 들어오자 ‘2월 역류’에 대해 말했다. (주석 534)

“자네들은 다시는 그(예젠잉)를 ‘2월 역류’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2월 역류는 어떤 성질인가? (그것은) 그들(예젠잉 등 혁명 원로들)이 린뱌오, 천보다, 왕리, 관펑, 처번위 등에 맞선 것이다. 노(老) 원수들이 화가 나서 불평을 터뜨린 것이다. 그들은 당의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크게 소란을 일으켰다. 결점은 있다. 말다툼을 할 수 있다. 나와 이야기하면 괜찮다. 그때는 우리들도 잘 몰랐다. 왕(리), 관(펑), 처(번위) 등의 (음모)가 폭로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면서 비로소 뚜렷이 알게 됐다.”

마오는 ‘9.13 사건’의 정신적 충격과 노년의 질병에 시달려 육체적으로 몸이 급격하게 쇠약해지면서 혁명투쟁을 함께 했던 옛 동지들에 대한 정(情)이 더욱 그립고 기대는 마음이 생겨났다. 비바람을 뚫고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대륙을 누비면서 남정북전(南征北戰)하고, 환난을 같이했던 혁명 동지들이 그래도 가장 의지할 만하고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강렬해 진 것이다.

마오는 그래서 ‘9.13 사건’이후 제일 먼저 저우언라이가 중공중앙의 일상 공작을 주재하도록 결정했다. 저우언라이는 나라의 위난을 맞아 병을 달고 살면서도 초인적 의지력을 발휘해 린뱌오파가 파괴한 국정운영 정상화 작업에 총력을 쏟았다. 저우는 문혁 중에 린뱌오와 장칭파의 발호(跋扈)로 파탄으로 치닫고 있던 ‘좌(左)’ 편향의 과오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 정치, 조직, 외교 등 영역에서 파괴됐던 정책과 폐단을 하나하나씩 제거하면서 새로운 전기마련에 박차를 가했다.

마오가 저우언라이의 제의로 예젠잉을 중앙 군사위원회 판공회의를 주재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일환의 하나였다. 

역시 세찬 바람이 불어봐야 어떤 풀이 억센 풀인지를 알 수 있는 법이었다. 마오는 ‘9.13 사건’이후 문혁과정에서 타도된 옛 동지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고 그들에 대한 복권과 정치적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공작을 펴게 된 것이다.

마오는 1972년 1월 초 저우언라이와 예젠잉에게 “2월 역류는 시련의 시간이 지나갔다. 근본적으로 아무런 일이 아니었다. 다시 2월 역류를 말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마오는 “지금 나는 일이 있다. 당신들이 천이(陳毅 진의) 동지에게 가서 전달해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저우와 예ㅤㅈㅖㄴ잉은 일을 명확하게 처리하기 위해 천이에게 전달할 내용을 정리해 예졘잉이 마오 앞에서 읽고 승인을 받았다. (주석 535)

 

천이는 문혁 중에 조반파들로 부터 ‘반당(反黨), 반 사회주의, 반 마오쩌둥 사상’, 이른바 ‘3반 분자(三反分子)’로 몰려 혹독한 시련을 당했고, ‘2월 역류’로 실각하는 등 숱한 좌절을 겪었다. 울분의 나날을 보내던 천이는 1970년 초 대장암에 걸려 암 치료를 하느라 1년여 동안 301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천이는 1971년 12월 26일 마오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수면’을 먹은 얼마 뒤 병이 악화돼 위독한 상태였다.

 

젊은 시절 천이


예젠잉은 천이가 임종을 앞둔 1972년 1월 6일 오후 4시 20분께 병실을 찾았다. 예졘잉은 ‘2월 역류’를 바로잡고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마오가 전달한 내용의 글을 읽어내려 갔다. 천이는 2월 역류라는 ‘정치적 부담’을 떨치고 그날 밤 11시 55분 숨을 거뒀다. 70살이었다.

마오는 1월 8일 중앙 정치국이 보낸 천이 장례식 문건을 비준하면서 천이가 죽은 것을 알았다. 애초 천이의 장례식은 천이가 이미 당과 국가의 영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중앙 군사위원회가 주관하고 규모는 군의 원로 등이 참석하는 500명 안팎의 조촐한 행사로 치르기로 했다.

장례식장은 바바오산(八寶山 팔보산) 혁명열사 묏터였다. 마오는 1월 10일 오후 갑자기 비서에게 “지금, 몇 시인가?”고 물었다. 비서가 오후 1시 반이라고 대답했다. 마오는 즉시 “차를 준비하라. 천이 동지의 추도회에 참가 하겠다”고 말했다. 비서는 곧바로 차를 준비시키고, 마오가 추도회에 참석하겠다는 내용을 중앙 판공청 주임과 관련 영도자들에게 통보했다. 마오는 이때 잠옷 차림이었다. 공작원은 중산복으로 갈아입히려고 했으나 마오는 그냥 잠옷 위에 은회색 외투만 걸친 채 차를 탔다. 

저우언라이는 마오가 천이 추도회에 참석한다는 통보를 받고 군 원로 1급 규모의 장례규모를 당과 국가영도자의 1급 규모로 급을 올려 대규모로 치르기로 과감하게 결정했다. 저우는 중앙 판공청에 지시해 모든 중앙 정치국원, 후보위원과 전국인대, 전국정협, 국방위원회 위원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했다.

저우는 또 쑹칭링과 쿠데타로 추방돼 베이징에 체류 중인 캄보디아 국왕 노르돔 시아누크, 외교관 등이 참석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마오는 10일 오후 3시 천이 장례식이 거행되기 전에 도착했다. 마오는 천이의 부인 장첸(張천 장천)의 부축을 받으며 휴식실로 들어갔다. 저우언라이, 덩잉챠오, 리더성(李德生 이덕생)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장첸이 마오에게 “주석,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마오는 “나도 천이 동지를 추모하기 위해 왔소. 천이 동지는 좋은 사람이고, 좋은 동지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오가 관심 있게 천이 자녀들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주석 536)

“아이들은? 들어오라고 하시오.“

마오는 아이들이 들어오자 일일이 악수를 하며 그들을 위로하면서 말했다. 

“천이 동지는 좋은 사람이다. 공로를 세웠다.”


장첸이 말했다.

“천이 동지는 26살 때 처음으로 주석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어른께서 이끌어 주시고, 지도해 줘 정확한 혁명의 길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 우리들은 일가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혁명을 위해 세계혁명을 위해 공헌을 했소. 이것은 이미 결론이 난 일이오.”


이때 저우언라이가 끼어들었다.

“인민을 위한 복무에 노력하고, 전투를 견지하고, 공작을 했으며-”


마오가 머리를 끄덕이며 “인민을 위해 복무하고-”라고 말하면서 자녀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마오는 “천이 동지와 나는 여러 차례 쟁론을 벌였다. 그것은 별개 아니었다. 그(천이)와 샹잉(項英 항영)은 다르다. 샹잉은 중앙의 노선을 따르지 않아 신4군 9000명이 무너졌다. 당연히 나중에 9만 명으로 발전했다. 천이 동지는 중앙의 노선을 집행해 단결을 시켰다. 만약에 린뱌오의 음모가 성공했다면 그(린뱌오)는 우리들 모두를 제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장례식에 참석한 시아누크와 이야기하면서 “린뱌오가 9월 13일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달아나다 운두르칸에서 추락사했다”며 외국원수에게는 처음으로 린뱌오가 달아나다 죽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마오는 “린뱌오는 나를 반대했지만, 천이는 나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마오는 장례식에 참석한 중앙 영도들에게 ‘2월 역류’는 천이 등 노 동지들이 린뱌오와 왕리, 관펑, 치번위 등에 맞선 것이라며 ‘2월 역류’의 성질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천이 등 노 동지들의 ‘2월 항쟁’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장례식이 거행되기 직전 마오는 검은 완장을 달라고 해 공작원이 마오의 왼팔에 채워줬다. 당과 국가영도자, 각계인사, 간부, 전사 등 1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이 성대하게 거행됐다. 마오는 선홍색 중공 당기로 덮은 천이의 유골함에 3번 절을 올렸다. 이것은 마오의 일생 중 마지막 장례식 참석이 됐다.

534)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35) 毛澤東在陳毅追悼會上; 林彪是要把我們這些人都搞掉的    薛慶超   人民網-文史頻道
536) 毛澤東在 陳毅追悼會上; 林彪是要把我們這些人都搞掉的   薛慶超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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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장칭, 마오 사후(死後) ‘홍도 여황’ 꿈꾸며 세력 결집

 

장칭(江靑 강청)은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후계자 린뱌오가 사라지자 재빨리 린뱌오의 권력공백을 자파의 세력으로 확장하면서 ‘대권(大權)’의 꿈을 향한 채비에 나섰다.

최대 권력집단이었던 마오자완(毛家灣 모가만; 린뱌오의 주택지역 이름으로 그의 계보를 통칭 함)은 반당집단으로 몰려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이제 그동안 제 3의 권력집단으로 문혁의 광풍에 휩싸여 힘겹게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중난하이(中南海 중남해; 저우언라이 등 혁명원로들의 거주 지역)의 저우언라이 등 혁명원로들 뿐이었다. 

마오의 부인 장칭은 1966년 문혁을 발동하면서 마오가 있는 중난하이를 떠나 댜오위타이(釣魚臺 조어대)로 집을 옮겨 별도의 둥지를 틀었다. 이곳에는 장칭파인 캉성, 장춘챠오, 야오원웬 등 문혁 소조원들이 집단거주하고 있었다. 이른바 ‘철의 삼각지’로 불리던 중난하이, 마오자완, 댜오위타이 등 권력 삼각지대의 한 축인 마오자완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해 폐족이 된 것이다. 

장칭이 가장 두려워하는 덩샤오핑은 장시(江西 강서)성 난창(南昌 남창)에서 노동단련으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때 중공중앙의 권력서열은 마오, 저우언라이, 캉성, 장칭 등 순이었다. 유일한 당 부주석 린뱌오가 소련으로 달아나다 죽었다는 소식이 2개월 뒤인 1971년 10월 중순께부터 일반 인민들에게 조금씩 알려졌다.

중공중앙이 12월부터 린뱌오를 비판하는 ‘비림(批林)운동’을 펼치면서 베이징에서는 “장칭이 당 부주석이 될 것이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장칭은 이때 57살로 마오 보다 21살, 저우언라이와 캉성보다는 16살 아래로, 노쇠한 중앙 영도층에서는 연부역강한 나이였다. 게다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마오쩌둥의 부인’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은 강력한 라이벌인 린뱌오가 사라지자 '홍도여황'을 꿈꾸며 재빨리 세 결집에 나선다.

란핑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배우 활동하던 시절 모습(왼쪽)과 마오쩌둥과 함께 찍은 사진.

 

장칭은 툭하면 “마오 주석을 대표해 여러분들께 인사를 드립니다”라는 식으로 ‘마오=장칭’의 권위를 내세워 ‘비장의 무기’를 한껏 활용해 다른 영도자들을 압도했다. 헌데 무슨 연유인지 장칭 진영의 사악한 꾀주머니인 ‘개똥 참모’ 캉성(康生 강생)이 ‘장칭 홍도여황(紅都女皇; 붉은 도시의 여 황제) 프로젝트’에서 이탈했다. 

캉성은 린뱌오가 사라진 어느 날 자신이 살던 댜오위타이를 떠나 베이징 옛 구러우(鼓樓 고루) 큰 길 서쪽의 샤오스챠오(小石橋 소석교) 골목(胡同 호동)어귀로 이사를 갔다. 캉성이 댜오위타이에 집은 그냥 놔뒀지만 칭병하고 떠난 것은 괴이쩍은 일이었다.

권력의 화신(化身)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른 노회한 캉성으로서는 당 서열 3위인데다 장칭이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수 있는 권력상승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캉성은 실제로 이때 암 초기증상을 보여 사람들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캉성은 병도 병이지만 속내는 장칭 진영에서 벗어나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동물적 감각이 작동했든, 죽음을 감지한 회개(悔改)로 선한 마음으로의 회귀가 됐든, 사후를 대비한 교토삼굴(狡免三窟)을 위한 음험한 간지(奸智)가 발동했든, 캉성은 장칭과 장춘챠오의 좋지 않은 은폐한 이력과 권력찬탈의 음모를 저우언라이에게 몰래 폭로했다. (주석 537)

캉성은 임종을 앞둔 1975년 초 겨울 해방군 35병원으로 저우언라이를 찾아가 1시간 동안 단독면담을 하면서 이런 내용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캉성은 3주 뒤 세상을 떠났다. 캉성이 평생 척결대상으로 투쟁을 벌였던 정적(政敵) 저우언라이에 장칭 등의 비밀을 폭로한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도 미스터리로 통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갈 때는 말이 선하다”고 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죽어 가면서도 독랄한 계략이다”라고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캉성은 고종명(考終命)했지만 ‘4인방’이 척결 된 뒤 공산당에서 부관참시라 할 수 있는 영구적 당적박탈을 당했다. 교토삼굴로도 막을 수 없는 인과응보(因果應報)였다.

어쨌거나 캉성은 칭병을 빌미로 자라가 목을 안으로 집어넣듯 광풍이 몰아치는 권력투쟁 현장에서 발을 빼고, 문혁의 기수(旗手) 장칭은 풍장구를 치며 진군했다. 권력투쟁의 전선은 이제 두 갈래로 쫙 갈렸다. 장칭의 타도대상은 저우언라이를 주축으로 한 혁명원로와 국무원 실무파 집단이었다.

1972년 1월 11일 인민일보는 ‘수도에서 천이(陳毅 진의) 동지 장례식 성대하게 치러, 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 장례식 참석’ 표제의 기사에서 장칭의 정치적 위상이 약여하게 드러났다. 기사는 장례식에 참석한 중앙 영도자들을 열거하면서 ‘위대한 영도자 마오 주석’,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저우언라이’에 이어 세 번째로 ‘정치국원 장칭’이라고 소개했다.

당 서열 3위 캉성이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자 인민일보는 거침없이 장칭을 당 서열 ‘3호 인물’로 보도한 것이다. 장칭에게 천이의 사망은 정적 한 명이 줄어든 것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장칭은 2개월 뒤인 3월 26일 수족으로 부렸던 유력한 정치동반자 한 명을 잃었다. 중앙 정치국원으로 국무원 부총리 겸 공안부장, 베이징시 혁명위원회 주임인 셰푸즈(謝富治 사부치)가 병사했다. 

장칭 진영의 돌격장은 ‘좌 춘챠오(左春橋 좌춘교), 우 원웬(右文元 우문원)’, 즉 자신이 배양한 상하이방의 장춘챠오와 야오원웬이었다. 이들은 문혁으로 발딱 일어서 중앙 정치국원으로 진입해 권력의 정상권에 합류했다.

장춘챠오는 당의 부주석 또는 국무원 총리를 노리고 있었다. ‘해서파관(海瑞罷官)’으로 수직상승한 야오원웬은 중앙문혁 조장 천보다가 실각해 중국의 여론을 쥐락펴락하며 당의 선전을 총괄해 언론을 장악한 ‘문(文) 총참모장’이 되었다. 여기에 상하이 ‘1월 폭풍’의 주역 왕훙원이 괄목상대(刮目相對)로 몸집을 불려가고 있었다.

이들은 곧이어 ‘4인방’을 결성하게 된다. 장칭 진영은 중앙 영도자들이 ‘마르크스를 보러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미래의 권력이 자신들의 수중에 떨어질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장칭은 일찍이 9대(大) 전에 “국가의 전반적 영도를 장악할 능력이 있는 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었다.

장칭은 린뱌오가 사라진 이후 마오 사후(死後)의 ‘홍도 여황’을 꿈꾸고 있었다. 장칭 진영의 대척점에 있던 저우언라이는 장칭파의 권력탈취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예ㅤㅈㅖㄴ잉을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포진시킨데 이어 마오의 ‘2월 역류’ 명예회복을 계기로 덩샤오핑의 복권을 추진하는 등 혁명원로와 국무원 실무파들을 빠르게 결집시키고 있었다.

537) 1972年政治 ‘鐵三角’消失; 江靑差点當上主席   人民網-文史頻道
     揭秘;康生對江靑的態度爲何急轉直下?  楊銀祿(作者中共中央辦公廳老幹部, 曾任江靑秘書)   人民網
     1973年毛澤東穩定中國政局的願望爲何落空?  秦九鳳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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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마오-닉슨 미 대통령 역사적 만남 뒤 장칭, 대권 호시탐탐

 

1972년 2월 21일 오전 11시 30분. 미국 대통령 전용기 ‘공군 1호기’가 베이징 상공을 날아 공항에 착륙해 트랩을 내려 온 미국 대통령 닉슨과 환영 나온 저우언라이가 악수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보도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20여 년 동안 국교가 없던 세계 최대의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세계 최대의 인구를 보유한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국교정상화의 새로운 시대 개막을 알렸다.

마오는 닉슨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을 9일 앞두고 있던 2월 12일 새벽에 갑작스러운 쇼크로 혼수상태에 빠졌었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끊겼다. 기겁을 한 의료진들이 심폐소생술 등 긴급 응급처치로 마오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때문에 마오와 닉슨의 회담은 애초 불투명한 상태였다. 나중에 마오가 만나겠다는 뜻을 밝혀 중-미 정상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닉슨은 이날 오후 2시 40분께 마오가 있는 중난하이를 방문해 1시간 정도 회담을 했다. 닉슨은 회고록에서 마오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서술했다. (주석 538)

“그(마오)의 몸이 대단히 허약해 보였다. 내가 (방안에)들어갈 때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악수할 때 마오는 ‘말을 잘 하지 못하게 됐다’며 미안해했다. 피부에 주름살은 없었으나 누런 피부색은 거의 담황색을 띠었다. 그의 얼굴은 인자해 보였으나 표정이 없었다. 차게 보이는 두 눈은 날카로운 눈빛을 뿜었다. 그의 두 손은 노쇠한 사람답지 않게 뻣뻣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나이는 속이지 못하는 듯했다. 중국인들은 우리들의 만남을 단지 15분으로 안배했다. 마오는 완전히 이야기 속으로 빠져 한 시간 정도 이어졌다. 나는 저우언라이가 자주 시계를 보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마오는 이미 피곤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의 대외관계에서 닉슨의 중국 방문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공항에서 닉슨을 영접하는 저우언라이(왼쪽)와 이미 건강이 악화된 마오쩌둥이 닉슨을 만나는 모습

 

마오와 닉슨은 정상회담에서 세계정세와 중-미관계의 새로운 형세변화 등에 관해 폭넓은 의견을 나눴다. 닉슨이 “주석의 저작이 전국을 감동시켰고 세계를 바꿨습니다”라고 덕담을 건네자 마오는 “세계를 바꾼 게 아니라 단지 베이징 부근의 몇 개 지방을 바꿨을 뿐 입니다”라고 겸손해 했다. 저우언라이와 장칭은 닉슨 부부 등을 초청해 2월 24일 밤 베이징에서 혁명투쟁을 형상화 한 발레 무용극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을 함께 관람했다. 장칭은 이날 처음으로 참석한 외교행사였다. 장칭은 ‘무산계급 문예혁명의 기수’로 미국 대통령에게 중국의 혁명극을 보여줬다는 데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다. 닉슨은 장칭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술회했다. (주석 539)

“나는 사전에 우리들이 준비한 자료를 통해 장칭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열광하고, 나의 이번 방중을 극력 반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오의 부인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용해 자신의 개인파벌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칭은 우리들이 무용극을 보기 전에 나에게 자신이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다는 것을 말했다. 그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재미있게 읽었고, 영화도 보았다고 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나와 이야기 할 때 자유롭게 유머가 있고 따뜻한 마음으로 이야기 했는데 장칭은 조금도 그런 게 없었다. 장칭의 말에는 가시가 있어 사람을 압박해 대단히 불쾌했다. 그날 밤 그녀는 한 번 나를 돌아보면서 도발적인 어투로 당신은 왜 일찍 중국에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닉슨은 25일 밤 인민대회당에서 답례만찬을 베푸는 자리에 사전에 장칭을 초대하지 않았다. 장칭은 만찬이 시작되기 전인 이날 밤 6시 30분께 닉슨이 대기하고 있던 인민대회당으로 예고도 없이 찾아와 면담을 요구했다. 닉슨 부부는 예의상 장칭을 만났으나 장칭은 한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이때 저우언라이 등 많은 손님들이 연회장인 신장실(新疆廳 신강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닉슨이 손목시계를 계속 들여다보자 장칭은 만찬연회 시작시간이 지난 것을 알고 그때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칭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인사를 한 뒤 인민대회당을 떠났다. 장칭은 미국의 대통령 부부가 베푼 답례만찬에 중국의 ‘퍼스트 레이디’인 자신을 빼놓은 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장칭은 저우언라이에게 잔뜩 불만을 품었다. 장칭은 이 사건을 계기로 ‘퍼스트 레이디’에 걸맞은 국제적 지명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장칭은 마오가 세계적로 유명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인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가 쓴 ‘중국의 붉은별’이라는 책이 큰 몫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칭은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제2의 스노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장칭은 작가들의 영향력은 ‘무관의 제왕’으로 큰 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장칭은 자신을 서방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전기(傳記)가 필요했고, 이 전기를 써줄 마땅한 작가를 찾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장칭이 처음 선택한 작가는 영국 국적의 중국인 혼혈로 중국 이름은 한수인(韓素音 한소음)이었다. 장칭보다 3살 아래인 한수인은 중국 철도 엔지니어인 중국인 아버지와 벨기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칭은 한수인을 마음에 두고 장춘챠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장춘챠오는 한수인을 만나 장칭의 전기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한수인은 일반 인민들이 장칭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거절했다.

한수인은 저우언라이의 조수인 외교부 부부장 챠오관화(喬冠華 교관화)의 부인 공펑(龔澎 공팽)과 옌칭(燕京 연경)대학 동창이었다. 한수인은 공펑의 초청으로 1956년 5월에 신중국을 방문해 처음으로 저우언라이를 만나 잇따라 8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해 이즈음 ‘저우언라이 전(周恩來傳 주은래전)’을 완성했다. (주석 540)

538) 揭秘;周恩來對 鄧小平做最後的 ‘政治交代’  何立波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毛澤東傳 1949-1976(下)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39) 1972年政治 ‘鐵三角’消失; 江靑差点當上主席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傳 1949-1976(下)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40) 1972年政治 ‘鐵三角’消失; 江靑差点當上主席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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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마오, 죽음의 문턱서 겨우 생존… 장칭, ‘여황의 꿈’ 가시화

 

중국과 미국은 1972년 2월 28일 상하이에서 국교정상화 공동 코뮤니케를 발표함으로써 중-미 관계가 정상화 궤도에 들어섰다. 7월 19일 미국의 보잉 여객기 한 대가 베이징공항에 착륙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현대적인 젊은 여성들이 하이힐을 신고 트랩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중-미 수교이후 첫 번째 미국 여성 대표단의 중국방문이었다. 그 중에 34살의 여교수로 프린스턴 대학에서 중국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역사학자인 록샌 위트케가 있었다. 위트케는 중국의 현대 여성운동을 이해하고 ‘중국 여권(女權)운동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한 준비’로 방문했다고 했으나, 사실은 장칭을 취재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위트케는 중국 현대 여성운동의 영도자인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鄧穎超 등영초), 주더의 부인 캉커칭(康克淸 강극청)을 만난 뒤 중국 여성운동과 관계없는 장칭 면담을 요구했다. 당시 중국정부는 장칭이 미국 여성대표단과 만나는 것을 극력 꺼려 보안을 유지한 채 극소수의 외사부문 관계자들이 안내했다. 장칭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허풍을 떨며 설칠 경우 누구도 말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위트케가 면담을 요구한 사실이 나중에 알려질 경우 후유증을 감당하기가 만만찮아 저우언라이는 마지못해 장칭에게 “만약 당신이 이틀사이에 컨디션이 좋으면 이 사람(위트케)을 만나 볼 수 있는 데 시간은 1시간 정도다. 만나고 싶지 않으면 안 만나도 된다”는 내용의 문건을 보냈다.

이때 장칭은 광저우(廣州 광주)로 휴양을 떠날 준비를 하다 위트케의 이력을 보고 자신이 물색하고 있던 ‘제2의 스노우’라고 판단해 야오원웬과 함께 8월 12일 오후 인민대회당 장쑤실(江蘇廳 강소청)에서 위트케를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 ‘타산(打算)’이 맞아 떨어져 장칭은 자서전 집필을 요청했고, 위트케는 바라던 바라 곧바로 승낙했다. 저우언라이는 이들의 만남을 1시간 정도로 잡았으나 두 사람은 첫 대면에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장칭은 광저우로 휴양을 가면서 위트케를 동반하기로 했다. (주석 541)

 

1977년 3월21일 미국판 '타임즈' 표지 모델로 나온 마오와 장칭.


저우언라이는 극구 말렸으나 장칭은 외사관계자를 통해 “문예 이야기만 하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내 일이다. 당신들은 관여하지 말라”며 막무가내로 위트케를 데리고 갔다. 위트케는 8월 25일부터 8월 31일까지 7일 동안 60시간에 걸쳐 장칭의 성장과정과 상하이의 여배우 시절, 공산당 가입과 옌안행, 마오와의 결혼, 문혁을 통해 권력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생애 전반에 관해 인터뷰를 했다. 

베이징에 돌아 온 장칭은 7명의 공작원을 동원해 3일에 걸쳐 녹음한 내용을 풀어 글로 정리한 내용을 보고 불만스러워 했다. 장칭은 야오원웬에게 원고수정 지원을 요청했고, 야오원웬은 떡 주무르듯 주물러 자서전 원고를 완성했다. 장칭은 당의 허락을 받기 위해 인쇄한 원고를 저우와 정치국원인 장춘챠오, 야오원웬에게 각각 1부씩을 송부했다. 

저우는 이 인쇄본을 마오에게 보내면서 급히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마오의 동의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회의에서 “마오 주석의 지시를 청한 바 기록물을 위트케 여사에게 보낼 필요가 없다. 이 일과 관련한 모든 공작을 즉시 정지한다. 모든 기록, 녹음, 자료는 깨끗하게 정리하고 봉인한다. 절대로 이 자료를 외부로 유출해서는 안 되며, 이미 유출된 자료는 추적해 회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으로 돌아 간 위트케는 비록 장칭이 꾸린 공작원들이 정리한 기록과 녹음한 내용을 복제한 녹음테이프를 건네받지 못했지만 인터뷰하면서 기록한 자료를 바탕으로 장칭의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한수인(韓素音 한소음)은 장칭 자서전을 쓰고 있던 위트케와 관련해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542)

“1973년 4월, 내가 미국 뉴욕에 갔을 때 옌칭대학 동창생인 황화(黃華 황화)가 유엔주재 대표를 맡고 있었다. 황화가 나에게 위트케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고 알려줬다. 나는 동의했고, 위트케를 만나 ‘중국의 일반 인민들은 장칭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은 조심해야 한다’고 말해 줬다. 위트케는 ‘장칭이 제멋대로 횡포하게 날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장칭)의 주변에서 돕는 사람들은 장칭을 자희태후(慈禧太后; 청조 말 서태후), 야오원웬을 태감(太監; 환관의 우두머리)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트케는 ‘장칭이 중국에서 극히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위트케는 장칭이 반당, 반혁명 집단인 ‘4인방’의 우두머리로 체포돼 감옥에 수감된 1년 뒤인 1977년 미국에서 장칭의 전기 ‘Comrade Chiang Ching’, 즉 ‘장칭 동지’(江靑同志; 강청동지)를 펴냈다. 위트케는 책을 내면서 중국정부가 황화를 통해 출판금지를 요청했고, 그 대가로 금전을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해 왔다고 폭로했다.

위트케가 쓴 이 책은 영국 출판사가 잇따라 찍어 내면서 많은 서방신문과 잡지들이 추려 싣거나, 전재하면서 급속히 번져갔다. 장칭이 수감됐지만 당시 서방에서는 중국의 주요인물로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앞서 문혁중기 홍콩에서 출판된 ‘홍도여황(紅都女皇; 붉은 도시의 여 황제)’은 위트케가 쓴 ‘장칭 동지’와는 다른 책으로 마오쩌둥 사후에 장칭이 ‘홍도(紅都; 붉은 도시, 즉 중국)’를 주무르며 중국의 ‘여황(女皇; 여 황제)’이 될 것을 고취한 내용의 책이라고 한다. 

마오는 이 책을 홍콩에서 긴급 입수해 본 뒤 장칭에게 “각기 제 갈 길을 가자. 정치국에서 내ㅤㅉㅗㅈ겠다-”라며 분노를 터뜨리며 대갈일성 했다고 한다. 이 책은 현재 찾아볼 수 없고, 저자가 밝혀지지 않아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 있다고 한다.

장칭의 ‘여황의 꿈’은 1972년에 들어 점점 가시화 하는 듯 했다. 그해 1월 마오가 돌연한 쇼크에 빠져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는 등 남은 삶이 손꼽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지척에 있었다. 4월에는 저우언라이가 신체검사결과 암에 걸린 사실이 밝혀져 그의 목숨도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암 치료를 받고 있던 당 서열 3위의 캉성은 명재경각(命在頃刻)에 달려, 서열 4위인 장칭은 미래의 당 주석을 예약한 듯 보였다. 

541) 1972年政治 ‘鐵三角’消失; 江靑差点當上主席  人民網-文史頻道
542) 1972年政治 ‘鐵三角’消失; 江靑差点當上主席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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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덩샤오핑, 노동단련 해제… 문혁 후 3년 4개월만에 복권

 

저우언라이가 ‘9.13 사건’ 이후 린뱌오에게 박해받아 숙청되었던 당, 정, 군 인사들에 대한 복권을 마오에게 진언해 잇따라 명예회복이 되어 공작에 복귀하고 있었다. 저우가 공을 들였던 국무원 부총리이자 정치국원 이었던 천윈(陳云 진운)은 장시(江西 강서)성 석유 화학공장 기계창에서 ‘노동단련’을 하다 마오의 비준을 받아 1972년 4월 하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천윈은 린뱌오를 비판하고 당의 기풍을 바로잡자는 ‘비림정풍(批林整風)’에 참가하는 등 공식적 활동에 나섰다. 천윈은 7월 21일 마오에게 편지를 보내 공작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고, 마오는 ‘동의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장시성 신젠(新建 신건)현 농기구 트랙터 수리공장에서 ‘노동단련’을 하던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은 8월 3일 린뱌오가 죽은 이후 마오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내 공작 참여를 요청했고, 마오는 이런 지시 글을 내렸다. (주석 543)

“총리가 읽어 본 뒤 왕 주임(汪主任; 왕둥싱 중앙판공청 주임)에게 보내 인쇄해 중앙의 각 동지에게 배포하기 바란다. 덩샤오핑 동지가 과오를 범한 것은 엄중하다. 단, 마땅히 류샤오치와는 구별해야 한다. 

1. 그(덩샤오핑)는 중앙 소비에트지구에서 핍박을 받았다. 덩(鄧 등), 마오(毛 모), 셰(謝 사), 구(古 고) 4명의 죄인(덩샤오핑, 마오 동생인 마오쩌탄(毛澤覃 모택담), 셰웨이쥔(謝唯俊 사유준), 구바이(古柏 고백)를 일컬음; 필자 주)중의 하나로 이른바 마오파(모택동 파)의 우두머리다. 그(덩샤오핑)를 핍박한 자료는 ‘두 가지 노선’, ‘6대 이래’의 두 책에 보인다. 그를 핍박한 사람은 장원톈(張文天 장문천)이다.

2. 그는 이력에 문제가 없다. 즉, 적에게 투항한 적이 없다.

3. 그는 류보청(劉伯承 유백승) 동지를 도와 싸우는 데 힘을 보탰다. 전공을 세웠다.

이밖에 건국 후 좋은 일도 했다. 예를 들면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에 가)모스크바에서 담판할 때 그는 소련 수정주의에 굴복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일을 과거에 여러 차례 언급했다. 지금 다시 한 번 말한다.”

 

마오가 다 던지기 한 문혁에 비판적인 ‘류샤오치, 덩샤오핑 자산계급 사령부’의 2인자이자, ‘당내 제2호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권파’로 찍혀 당적박탈 직전까지 몰렸던 덩샤오핑을 복권하는 조처를 내린 것이다. 마오가 덩샤오핑의 재능을 아끼고 얼마나 신뢰하는 지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저우언라이는 이런 기회를 십분 활용해 마오의 ‘지시 글’을 정치국원들에게 회람 시켰다. 저우는 또 장시성 당 위원회에 덩샤오핑의 감시와 ‘노동단련’를 해제시키고, 덩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조사연구를 할 수 있도록 편의제공을 하라고 지시했다. 덩샤오핑은 이듬해인 1973년 2월, 장시성으로 ‘유배’ 당한 지 3년 4개월 만에 베이징에 돌아왔다. 저우언라이는 중앙 영도자의 핵심 구성원이었던 천윈과 덩샤오핑의 복권뿐 아니라 당정군의 고위 간부들에 대한 ‘해방’을 적극 발 벗고 나섰다.

인민일보는 4월 24일 저우언라이가 심사 결정한 ‘징전비후 치병구인(懲前毖後 治病救人; 과거의 잘못을 교훈삼고, 병을 고쳐 사람을 구한다)’ 제목의 사설을 실어 문혁기간에 숙청된 사람들에 대한 폭넓은 복권을 추진했다. 사설은 “적아모순(敵我矛盾)과 인민내부의 모순, 이 두 종류는 서로 다른 모순으로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극소수 혁명대오에 잠입한 계급의 적들과 여러 차례 고치지 않거나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과오를 범한 동지, 노 간부, 신 간부, 당 내외 동지뿐만 아니라 모두 ‘단결-비판-단결’의 공식에 따라 교육위주의 방침을 채택한다. 장티푸스병이 면역력을 얻는 것처럼 과오를 범한 사람들이 진실하게 과오를 고치고, 과오로부터 교훈을 얻으면 면역력이 생겨 더욱 더 공작을 잘 할 수 있다”고 밝혔다. 7월 31일 밤 국방부가 주최한 ‘8.1 건군절’ 경축연회에 실각했던 천윈, 리푸춘(李富春 이부춘), 천자이다오(陳再道 진재도) 등 일단의 노 간부들이 참석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1월 폭풍’의 주역으로 상하이에 있던 왕훙원(王洪文 왕홍문)이 9월 장춘챠오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베이징에 올라와 학습하면서 다른 공작을 하게 됐다며 간단한 생활용품과 의복을 챙겨 곧바로 출발하라는 내용이었다.

왕훙원은 돌연한 이야기라 이유를 제대로 묻지도 못한 채 전화기를 놓았다. 왕훙원은 상하이시 고위 간부들인 쉬징셴(徐景賢 서경현), 마톈수이(馬天水 마천수), 왕슈전(王修珍 왕수진) 등과 상의했다. 쉬징셴은 “왕라오(왕훙원에 대한 존칭)가 학습하러 가는 이번 중앙의 방침은 분명히 마오 주석의 결정이 틀림없다.

마오 주석은 9대 때 공농(工農; 노동자, 농민)의 적극적 분자에서 간부를 발탁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며 왕훙원의 베이징 행은 마오의 발탁이라고 분석했다. 왕슈전이 “야, 라오왕이 중앙 정치국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큰 소리로 떠들자 왕훙원은 “쉬!”하며 급히 왕의 말을 제지했다. 마톈수는 머리를 끄덕이며 “린뱌오 집단이 무너진 뒤 중앙의 사람이 점점 적어졌다. 왕홍원 동지가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쉬징셴의 말대로 마오는 왕훙원이 사회주의 국가의 성골인 ‘공농병(工農兵; 노동자, 농민, 군인)’을 두루 경험한 이력을 높이 샀다. 이때 왕훙원은 38살이었다. (주석 544)

9월 7일 베이징 공항에 도착한 왕훙원은 이후 마오의 후계자가 되어 서열 2위로 저우언라이를 비롯해 혁명원로 등 정치국원들을 거느리는 수직상승의 ‘벼락출세’를 하게 된다. 왕훙원 자신을 비롯해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왕훙원은 상하이방의 장춘챠오, 야오원웬을 추월해 중공중앙 당 부주석에 오르게 된다.

저우언라이는 왕훙원에게 댜오위타이(釣魚臺 조어대)에서 장춘챠오, 야오원웬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조처했다. 마오는 왕훙원이 중앙 정치국 소형회의 뿐 아니라 중앙이 처리하는 각종 회의와 심지어는 극비의 회의에도 참석해 토론하도록 지시했다. 왕훙원은 이렇게 후계자 수업을 받는 학습을 하면서 중앙 공작에 참가했다. 중앙 판공청은 왕훙원에게 마르크스, 엥겔스와 마오쩌둥의 저작 등을 보내 학습하도록 했다. 상하이방들은 자신들의 출세가 걸려있는 만큼 왕훙원을 적극 돕기 위해 상하이시 위원회 ‘집필실’의 주력인 샤오무(肖木 초목)를 파견해 왕훙원의 학습을 지도하도록 했다. 

543)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9.13’事件後, 鄧小平寫信揭發林彪的五個問題   人民網-文史頻道
544) 毛澤東5次苦選接班人; ‘公子哥’王洪文也曾入選  薛慶超   ‘湘 潮’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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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덩샤오핑의 등장에 ‘문혁의 담’ 붕괴 초읽기

 

저우언라이는 중앙의 일상적인 공작을 수행하면서 간부정책, 경제정책 등 각종 국가정책을 어느 정도 정상화시키는 초보적 효과를 거두었다. 저우는 이런 토대에 기반 해 전국적으로 폭넓게 번지고 있는 ‘비림정풍(批林整風)’을 문혁세력인 장칭, 장춘챠오 등의 극좌경향을 비판하고 제거하기 위한 계기로 십분 활용했다.

저우는 1972년 8월 “극좌사조(極左思潮)는 세계적(경향성을) 띄고 있다. 중국에도 극좌사조가 있다. 우리들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각 단위의 극좌사조는 모두 린뱌오가 방임해서 일어났다. (극좌사조는)공허하고 극단적이고 형식주의로 헛되게 무산자계급의 정치우선을 외쳤다. 대단히 추상적인 것으로 마오쩌둥 사상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우리들이 잘 처리하지 않으면 또다시 과오를 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저우는 “(비림정풍)운동은 정책과 업무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무산계급의 정치우선의 ‘우선’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바로 업무에 있어야 한다”고 부연 설명했다. 극좌사조에 대한 비판이 교육, 과학, 문학, 출판 등 영역으로 점차 번지면서 당 내외 간부와 군중들의 절대다수가 옹호하고 국내 상황도 호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주석 545)

그동안 문혁의 쌍두마차였던 장칭 집단과 린뱌오 집단은 자신들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극좌사조를 선동하고 부추겨왔었다. 때문에 저우언라이의 극좌사조 비판은 장칭 집단의 비판을 뜻했다. 11월 말 당 중앙연락부와 외교부가 극좌사조와 무정부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해 마오의 혁명 외교노선을 더욱 잘 관철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전국 외사공작회의를 개최한다는 보고를 당 중앙에 제출했다.

저우언라이는 11월 30일 이 보고를 동의한다고 비준했다. 그동안 좌불안석(坐不安席)으로 지켜보던 장칭과 장춘챠오, 야오원웬은 벌떼처럼 반격에 나섰다. 장춘챠오는 12월 1일 “현재의 주요문제가 극좌사조인가? 비림(批林; 린뱌오 비판)은 극좌와 무정부주의를 비판하는 일인가?”라며 저우언라이의 비준 글에 물음을 제기했다. 장칭도 비준 글에서 “응당 린뱌오 매국적(賣國賊)의 ‘극우’를 비판함과 동시에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승리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장칭은 이때까지 린뱌오를 ‘극좌’라고 비판하다 ‘극우’로 180도 방향전환을 했다.

문혁 8년 동안 이런 꼴 저런 꼴 온갖 풍랑을 다 겪어 단련한 저우언라이는 이들과의 정면충돌을 피해 형식상 양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저우는 우회적 방식을 택해 극좌사조와 무정부주의 퇴치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문제는 마오였다. 마오는 유언에서도 밝혔듯이 자신이 평생에 걸쳐 한 2가지 일 중 하나로 ‘문혁’을 들었다. 인민일보 사장 왕뤄수이(王若水 왕약수)는 12월 5일 저우언라이가 얼마 전 인민일보사 등 기관이 극좌사조를 비판한 의견에 “대단히 동의 한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마오에게 보냈다. 마오는 12월 중순 자신의 사무실에서 저우언라이와 장춘챠오, 야오원웬 등이 참석한 소규모 회의를 열었다.

문혁에 목을 매고 있는 마오는 “내가 보기에 이 편지는 옳지 않다. 린뱌오 노선의 실질은 ‘극우’다. 수정주의, 분열, 음모와 위계, 당과 국가를 배반했다”고 말했다. 마오는 그동안 여러 차례 ‘극좌사상’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었고, 린뱌오 노선을 ‘극좌’로 비판하기도 했었다. 그러 던 마오가 마음을 바꿔 린뱌오를 ‘극우’라고 규정해 장칭 집단의 손을 들어줬다. 마오는 극좌사조에 대한 비판을 허용할 경우 문혁의 지도사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저우의 견해에 반대한 것이다. 마오는 저우와 장칭 집단에 대한 상호견제를 통해 권력균형의 국정운영 방식을 꾀하고 있었다.

1973년 4월 12일 밤 톈안먼(天安門) 건너편에 있는 인민대회당. 저우언라이가 주재한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 환영 만찬연회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연회에 참석한 중국 고위 영도자들 중에 5척 단구의 수척한 한 노인이 눈길을 끌었다. 문혁 초기인 6년 전에 모든 권력을 박탈당하고 타도 당했던 ‘당내 제2호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권파’로 지목된 전 중공중앙 총서기 덩샤오핑이었다.

68살의 덩샤오핑이 국무원 부총리의 신분으로 연회에 참석한 것이다. 연회장에 있던 중국주재 외교관과 기자들은 깜짝 놀랐다. 연회장은 금방 발칵 뒤집혔다. 각국의 기자들 뿐 아니라 외교관들은 후다닥 자리를 박차고 앞을 다투어 바깥으로 뛰어나가 가까운 우체국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들은 “덩샤오핑이 부활했다!”는 빅뉴스를 타전했다. 

기자들은 이때의 덩샤오핑을 “혈혈단신, 침묵을 지키다”, “유럽인들의 눈과 같은 큰 눈으로 장내의 모든 사람들을 ㅤㅎㅜㅀ어 보았다”, “고독한 그(덩샤오핑)의 모습은 추호도 난감해 하거나 불안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등으로 묘사했다. 앞서 덩샤오핑은 2월에 저우언라이가 백방으로 힘써 중앙으로부터 베이징으로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복권이었다. 장시(江西 강서)로 ‘유배’당한 지 3년 4개월, 정치무대에서 추방당한지 6년 만이었다. 덩샤오핑은 장시를 떠날 때 “20년이 된 것 같다!”고 감개해 했다. 문혁의 광풍은 덩샤오핑을 거꾸러뜨리지 못했고, 더욱이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덩샤오핑은 이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주석 546)

“린뱌오, ‘4인방’은 항상 나를 죽이려 했다. 마오 주석이 나를 보호해 주었다. 나는 낙관주의자다. 문제는 어느 날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마오 주석 영도아래에서 일을 해왔다. 나 개인의 마음속에는 마오 주석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나는 마오 주석이 나를 이해할 것으로 믿었다. 사실이 증명했다. 1973년 그(마오)는 또 나를 다시 데려와 매우 빨리 나에게 대단히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저우언라이는 3월 9일 ‘중공중앙 덩샤오핑 동지의 당 조직생활과 국무원 부총리 직무회복에 관한 결정’을 마오에게 보냈다. 장칭과 장춘챠오 등이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마오의 “동의”한다는 뜻을 꺾지 못했다. 중앙은 10일 정식으로 덩샤오핑의 직무복귀를 결정해 덩이 다시 정치무대에 서게 됐다.

마오가 금기시하는 문혁의 한 귀퉁이를 허문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1973년 5월 10대 전국 대표대회 주비를 주제로 한 회의를 주재했다. 저우는 단결, 승리의 대회를 강조하고 덩샤오핑 복권과 관련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우는 “중앙의 덩샤오핑 동지의 직무에 관한 문건은 대표적 문건으로 절대다수의 동지들이 만족해하고 있다. 샤오핑 동지가 회의에 출석했다. 같은 상황으로 다른 일부의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다른 일부의 사람들’은 문혁기간 중에 박해를 당한 일단의 노 간부들로 이들이 복권돼 앞으로 열릴 10대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의미했다.

마오는 이 해 상반기에 탄전린(譚震林 담진림), 허창공(何長工 하장공) 등 문혁에서 핍박받은 많은 노 간부들을 복권시켜 직무복귀 조처를 내리고 있었다. 이처럼 마오는 스스로 문혁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쪽으로 문혁에서 나타난 많은 혼란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조처를 내리면서도, 또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문혁을 부정하는 데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마오는 10대 회의를 앞두고 린뱌오 집단의 붕괴로 사라진 후계자를 비롯한 중앙 정치국원 등 영도층의 인원충원과 인적쇄신 문제 등에 대해 몇 가지 잣대를 고려하고 있었다. 후계자는 노동자, 농민 계급에서 젊은이를 직접 선발할 심산이었다. 

545)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46)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1973년毛澤東穩定中國政局的願望爲何落空?  秦九鳳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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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마오 “젊은 층이 희망”…왕훙원, 하루아침에 당 서열 3위

 

마오는 1972년 7월 “외국인들은 우리들이 현재 나이가 너무 많다고 말한다. 젊은 층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우리들이 죽은 뒤 수정주의로 변하면 어떻게 하나? 나의 의견은 젊은이들이 공산당의 부주석,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젊은이들은 30살에서 40살의 연령대로 노동자와 농민 속에서 나와야 한다. 노년과 중년도 필요하다. 당신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이 찾아봐야 한다. 가방끈이 짧아도 지식분자들이 돕도록 하면 된다”고 말한 바 있었다.

이런 기준에 따라 왕훙원, 우구이셴(吳桂賢 오계현), 니즈푸(倪志福 예지복) 등이 새로운 영도부 진입에 우선적 고려대상이 되었다. 마오는 이들 중에 중공 중앙위원, 상하이시위원회 서기, 상하이 혁명위원회 부주임인 왕훙원을 가장 중시했다. 왕훙원은 1932년생으로 이때 40살로 농민, 노동자, 군인의 이력을 지녔고, 상하이 노동자 조반파의 우두머리였다. 마오는 왕훙원에 대한 큰 기대를 걸고 1972년 9월에 이미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후계자 수업을 시키고 있었다.

마오는 1973년 7월 17일 양전닝(楊振寧 양진영)과의 회견에서 ‘유법(儒法; 유가와 법가)투쟁’에 관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오는 “우리들은 궈라오(郭老 곽로; 궈모뤄(郭沫若 곽말약)에 대한 존칭; 필자 주)의 역사의 시기구분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찬성한다. 그러나 그는 ‘십비판서(十批判書)’ 안에 유가(儒家)를 존숭하고 법가(法家)에 반대하는 관점을 갖고 있다. 법가의 도리는 현재를 중시하고 옛것을 경시한다. 사회가 앞으로 발전하는 것을 주장하고 후퇴노선을 반대한다. 전진하려 한다”고 말했다. 마오는 8월 5일 장칭(江靑 강청)에게 중국역사의 ‘유법투쟁(儒法鬪爭; 유가와 법가의 투쟁)’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주석 547)

“역사에서 능력을 발휘하거나 성공한 정치가는 모두 법가다. 그들 모두 법치(法治)를 주장하는 데 현재를 중시하고 옛것을 경시한다. 유가들은 온통 인의도덕(仁義道德)을 말한다. 옛것을 중시하고 현재를 경시하는 것을 주장해 역사의 흐름에 역행한다.”

마오가 이처럼 10대 회의를 앞두고 중국역사의 ‘유법투쟁’을 거론하는 것은 현실생활에서 문혁을 회의(懷疑)하고 부정하는 데 대한 대응책으로 착안한 것이다. 당시 마오의 최대 관심사는 여전히 문혁에 미련을 두면서 문혁이 “사회 발전을 추동하고 역행에 반대한다”는 것을 주창하는 것이었다. 10대 회의에서 꺼져가는 문혁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한 마오의 안간힘이었다.

10대 주석단 부주석 인선문제를 놓고 뜻하지 않은 파란이 일었다. 저우언라이는 8월 21일 밤 중앙 정치국 회의를 열어 마오쩌둥의 의견에 따라 제10기 중앙위원회 주석과 부주석 인선을 논의했다. 주석단 주석으로 마오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부주석 인선이었다. 부주석으로 저우언라이, 왕훙원, 캉성, 예ㅤㅈㅖㄴ잉 4명이 올라왔다. 

이때 난징군구 사령관 겸 정치국원인 쉬스여우(許世友 허세우)가 “내가 보기에 부주석은 1명이면 된다!”고 제의를 했다. 1명은 저우언라이였다. 나중에 쉬스여우는 “저우언라이, 캉성, 예ㅤㅈㅖㄴ잉 3명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벼락출세한 왕훙원이 당 중앙 핵심에다 10대 회의 주비공작에 참여하는 게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쉬스여우의 제의는 많은 노 간부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

정치국은 10대 중앙과 지방의 책임자가 참석하는 회의를 다시 열어 논의하기로 했다. 저우언라이는 8월 23일 밤 회의를 소집해 마오가 발탁한 왕훙원의 중앙 공작상황을 설명하면서 청년간부의 발탁에 동의해 주기를 바랐다. 쉬스여우가 여전히 불복하면서 여러 차례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장춘챠오가 “주석의 의견에 반대한다”며 쉬스여우를 질책했다. 쉬스여우는 “당신이 뭐 대단하냐!”며 장춘챠오를 질타했다. 마오는 이미 10대의 정치보고는 저우언라이가, 당장 개정보고는 왕훙원이 하도록 결정했다. 이런 왕훙원에 대한 불만은 결국 마오에 대한 불만이자 문혁에 대한 비판으로 회의 참석자들이 불만을 분출한 것이다. (주석 548)

1973년 8월 24일 밤 중국공산당 제10차 전국대표대회가 베이징에서 개막됐다. 마오가 개막식을 주재하면서 주석단 영도 구성원들의 명단을 통과시켰다. 주석은 마오쩌둥, 논란이 됐던 부주석은 저우언라이, 왕훙원, 캉성, 예ㅤㅈㅖㄴ잉, 리더성(李德生 이덕생)이 선출됐다. 총서기인 비서장(秘書長)에는 장춘챠오가 뽑혔다. 마오는 저우언라이가 정치보고를 하고 왕훙원이 개정한 당장보고를 끝내자 산회를 선언했다. 인민대회당을 가득 메운 1200여 명의 참석자들이 기립해 단상의  마오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박수를 쳤다. 그러나 마오는 일어나지 못했다. 간호 장(長) 우쉬쥔(吳旭君 오욱군)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549)

“마오 주석의 몸이 좋지 않았다. 다리가 좋지 않아 걸을 때 안전하지 않았다. 걷는 데 힘이 들어 숨이 찼다. 대회가 개막됐을 때 주석이 참석했고, 대표들이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분위기는 상당히 좋았다. 나중에 산회를 했을 때 내가 보니 주석이 두 손으로 의자를 짚고 일어서려 했다. 그(마오)는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곧바로 사람을 불러 마오를 부축해 의자를 뒤로 빼고 안전하게 일으켜 세우도록 말했다. 이때 단상단하에서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소리가 10분 정도 계속됐다. 나는 주석의 다리가 떨리고 있다고 추측하고, 부축하는 사람에게 주석을 자리에 앉히도록 했다.”

“주석도 거리낌 없이 의자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단상 아래의 대표들이 여전히 힘차게 마오 주석을 향해 환호했다. 총리가 손을 들어 대표들이 빨리 퇴장하라고 흔들었으나 대표들은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마오 주석은 ‘당신들이 안 가면, 나도 안 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주석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대단히 힘들 것으로 판단했다. 대표들이 주석의 몸 상태를 알게 해서도 안 되었다. 나는 총리에게 ‘마오 주석이 눈으로 각 대표들을 전송하려고 한다'고 하자고 건의했다. 총리은 나의 의견을 받아 들였다.”


저우언라이는 얼른 마이크를 잡고 “주석께서 여러분을 전송하시겠다고 합니다. 각 통로를 따라 신속하게 퇴장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대표들이 출구로 나가기 시작했다. 웃음을 지으며 대표들을 전송하던 마오는 대표들이 다 나간 뒤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회의장을 떠났다.

8월 28일 대회에서 정치보고와 당장 개정보고, ‘중국공산당 장정(章程)’을 통과시켰다. 대표들은 이어 무기명 투표방식으로 중공 제 10기 중앙위원들을 뽑았다. 새로 당선된 195명의 중앙위원과 124명의 후보 중앙위원 중에는 마오, 저우언라이, 예졘잉, 주더, 둥비우, 천윈 등 원로혁명 그룹이외에 9대에서 실각했던 덩샤오핑, 왕자샹, 탄전린, 우란푸(烏蘭夫 오란부), 리징취안, 쑤전화(蘇振華 소진화), 양융(楊勇 양용), 랴오청즈(廖承志 요승지), 타오루쟈(陶魯笳 도로가), 예페이(葉飛 엽비) 등이 진입했다.

 

 사진왼쪽부터 장칭과 야오원웬, 장춘챠오, 왕훙원.

 

저우언라이는 1기 중앙위원회에서 “노동자, 농민, 현역 군인 및 기타 노동인민이 전체 67%를 차지하고, 기타는 33%에 그치고 있다. 다수가 혁명 간부고 이들의 다수가 군인이다”라고 10대 중앙위원들의 성향을 밝혔다. 문혁 때 숙청당했던 노 간부들이 새로 진입했지만 적지 않은 문혁 조반파들이 중앙위원에 진출했다. 10기 1중 전회는 마오를 중앙위원회 주석, 5명의 부주석에 저우언라이, 왕훙원, 캉성, 예졘잉, 리더성(李德生 이덕생)을 선출했다. 전회는 중앙 정치국원 21명, 정치국 후보위원 4명을 뽑았다. 정치국 상무위원에는 주석과 5명의 부주석 이외에 주더, 둥비우, 장춘챠오 등 3명이 새로 들어갔다. 장칭파의 주요 인물들이 중앙 정치국에 모두 진입해 장칭과 왕훙원, 장춘챠오, 야오원웬 4명은 이때 ‘4인방’을 결성해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을 공격하며 본격적인 탈권투쟁에 나섰다.  

마오의 발탁으로 하루아침에 당 서열 3위에 오른 왕훙원은 이때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지만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란 뜻의 ‘공즈꺼(公子哥 공자가)’로 불렸다. 왕훙원은 놀고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해 술고래라는 ‘술통(酒桶 주통)’으로 통했다.

술이 있으면 반드시 마시고(有酒必喝 유주필갈) 주량이 두주불사 형이라 술을 마시면 끝장을 봐야했다. 밤새워 포커, 마작을 하거나 낚시, 사냥,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의 ‘공즈꺼’ 왕훙원은 댜오위타이(釣魚臺 조어대)에서 중난하이(中南海 중남해), 심지어는 예졘잉의 집이 있는 곳까지 누비며 사냥을 하기도 했다.

왕훙원은 상하이시 당 위원회에서 보내 준 신식 엽총을 들고 다니며 군용 비행장에서 사냥을 하는가 하면 밤에는 지프의 라이트를 켜놓고 가을에는 꿩, 겨울에는 토끼사냥에 열을 올렸다. 마오는 1973년 9월 12일 프랑스 대통령 퐁피두 회견에 왕훙원을 배석시킨 것을 시작으로 1974년 5월 말까지 16차에 걸친 외국원수 등 외빈을 회견하는 자리에 저우와 왕훙원을 배석시켜 전 세계에 후계자 ‘이름 알리기’에 적극 나섰다. (주석 550)

마오는 1973년 12월에 전국의 8대 군구(軍區) 사령관을 맞바꾸는 인사를 단행했다. 8대 군구 사령관들은 해당 지역에 뿌리를 내리면서 문혁으로 붕괴된 당 조직 대신 정치권력을 휘두르면서 당나라 때 절도사마냥 막강한 권한을 갖고 ‘독립왕국’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마오는 지역 간 군구 사령관을 맞바꿔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약화시키면서 이들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조처였다.

마 오는 의도적으로 왕훙원의 권위확립을 위해 왕을 시켜 8대 군구 사령관들을 호명해 명부를 직접 건네도록 지시했다. 왕훙원은 난징군구 사령관 쉬스여우(許世友 허세우)와 광저우군구 사령관 딩성(丁盛 정성)이 서로 군구를 맞바꾸게 됨에 따라 제일먼저 쉬스여우를 호명해 명부를 전달하려 했다. 단상에서 왕훙원이 “쉬스여우”라고 호명하자 단상 아래에 있던 쉬스여우는 얼굴을 들어 천정을 쳐다보면서 못들은 척했다. 왕훙원이 목소리를 높여 “쉬스여우”라고 다시 이름을 불렀다. (주석 551)

왕훙원의 호명이 끝나자마자 쉬스여우는 앞에 있는 찻잔을 바닥에 내팽겨 쳐 찻잔 깨지는 소리가 장내의 정적을 깨뜨렸다. 왕훙원은 순간 당황하면서 난감해 했다. 이때 저우언라이가 재빨리 왕훙원이 갖고 있는 8대 군구 사령관의 명부를 낚아 채 군구 사령관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군구 사령관들이 큰 목소리로 복명했다. 저우언라이가 “쉬스여우”라고 불렀다. 쉬스여우는 좀 전에 왕훙원에게 했던 태도와는 정반대로 큰 목소리로 복명한 뒤 일어나 단상의 주석대를 향해 공손하게 경례를 했다. 군부의 원로들이 벼락출세한 왕훙원에 대한 거부반응을 엿볼 수 있는 사례였다.

547)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48) 周恩來對鄧小平做最後的 ‘政治交代’ 何立波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549)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50) 毛澤東5次苦選接班人; ‘公子哥’ 王洪文也曾入選  薛慶超  ‘湘 潮’  人民網
551) 1973年毛澤東穩定中國政局的願望爲何落空? 秦九鳳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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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4인방, ‘비림비공 문혁 공격’에 저우, 덩샤오핑 승부수

 

1973년 말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이 중앙과 군사위원회 영도공작을 맡도록 하는 중앙의 통지를 기초해 발 빠르게 전당(全黨), 전군(全軍), 전국(全國)에 알렸다. 이때 덩샤오핑은 이미 당정군(黨政軍)의 3요직의 책임자로 당과 국가의 중요 정책결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1974년 새해 벽두에 장칭 등이 장악하고 있는 중공중앙의 핵심 당 기관지인 2개 신문 1개 잡지(兩報一刊 양보일간) 인민일보, 해방군보 두 신문과 잡지 훙치(紅旗 홍기)가 공동 발표한 사설에서 “‘존공반법(尊孔反法 존경반법; 공자를 떠받들고 법가에 반대; 필자 주)’사상비판을 계속 전개하자”, “공자 비판은 린뱌오 비판의 하나의 구성부분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린뱌오 비판’을 ‘공자비판’과 연계시켜 저우언라이 비판을 겨냥한 논지(論旨) 전개였다. 또 다시 심상치 않은 한 해를 예고하는 신호탄이 됐다. (주석 552)

장칭은 10대 이후 전문 집필진을 조종해 ‘비공(批孔; 공자 비판)’, ‘비유(批儒; 유가 비판)’의 글을 잇달아 실어 창끝을 저우언라이에게 들이밀기 시작했다. 이 글들은 “당내 기회주의 노선의 우두머리는 공자를 우러러 모시고 공자사상을 그들의 반혁명 활동의 정신적 무기로 이용한다. 제멋대로 ‘공맹(孔孟)의 도’를 선양해 반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원리를 반대하고, 우경 투항의 기회주의 노선을 추진 한다”고 비판한 바 있었다.

1974년 1월 12일 왕훙원과 장칭은 연명으로 마오에게 편지를 보내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이 편찬한 ‘린뱌오와 공맹의 도(道)’라는 자료를 전국에 배포할 것을 건의했다. 이 자료는 린뱌오의 가택수사에서 압수한 물품 속에 있던 공자와 맹자의 어록을 들어 “중용의 도를 주창하고 계급투쟁 철학을 반대했다” 는 등으로 린뱌오와 ‘공맹의 도’를 한데 엮어 비판해 편찬한 것이다. 마오는 전국배포를 동의했다.

중앙은 1월 18일, 그해 1호 문건으로 전국배포를 지시한 ‘통지(通知)’에서 “이 자료로 계속 심도 깊게 린뱌오 노선의 극우적 실체를 비판하고, 계속적으로 ‘존공반법(尊孔反法; 공자를 존경하고 법가에 반대)’사상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면 사상과 정치노선 방면의 교육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통지’ 중에는 ‘비림비공(批林批孔; 린뱌오와 공자 비판)’의 표현법은 없었다. ‘린뱌오와 공맹의 도’ 편집에 참여한 칭화대학 당위원회 서기이자 혁명위원회 주임인 츠췬(遲群 지군)은 장칭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이 직접 ‘비림비공’을 틀어쥐고 부대와 국가기관의 정치사상 건설을 틀어쥐고, 교육혁명과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上山下鄕)’ 등의 큰일을 틀어쥐어야 한다”고 자문했다.

장칭은 춘제(春節 춘절; 설)기간인 1월 23일 집필진인 츠췬 등에게 “당신들 모두가 나의 포(炮)부대다. 나는 당신들을 내보내 나 대신 포를 쏘기 바란다”고 격려했다. 장칭의 주도로 설 연휴기간인 1월 25일 오후 베이징의 수도체육관에서 당 중앙 직속기관과 국무원 각 조직에서 1만여 명이 참가한 ‘비림비공’ 동원대회가 열렸다. 장칭은 대회에 앞서 츠췬 등에게 연설을 할 때 많은 부분을 저우언라이 공격에 할애할 것을 노골적으로 주문했다.

대회에는 저우언라이, 예젠잉 등 주요 영도자들이 참석했다. 츠췬, 셰징이(謝靜宜 사정의) 등의 연사들은 "당내에서 이제까지 매번 기회주의의 우두머리들은 모두 공맹지도(孔孟之道)를 널리 추진했다. 수정주의는 여전히 당면한 주요 위험요인이다"라며 선동적 연설을 이어나갔다. 장칭과 야오원웬은 이들이 연설하는 동안 수시로 끼어들어 "공자비판을 비준하지 않는 것은 린뱌오 비판을 비준하지 않는 것이다", "절충주의를 반대해야 한다", "무릇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주장하는 사람은, 기실 대단히 악랄한 사람이다" 등등 선동적 추임새를 넣었다.

장칭 등이 말한 '절충주의', '중용지도' 등은 예로부터 저우언라이를 지목하는 대명사였다. 츠췬 등은 또 "비림비공과 실제적으로 연계되는 문제는 '뒷거래' 문제다. (부당한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는 등의) '뒷거래'는 바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배반행위다"라며 예젠잉 등 혁명 원로들을 비판했다. (주석 553)

이때 예젠잉의 아들이 공군조종사가 되고, 딸이 베이징 외국어학원에 들어간 것을 '뒷문거래'로 빗댄 것이다. 예젠잉의 자녀는 문혁초기 비판을 받아 감옥에 수감되는 박해를 받다 예젠잉이 복권된 뒤 풀려났다. 장칭은 현장에서 직접 저명한 역사가이며 철학자, 시인 유학자인 궈모뤄(郭沫若 곽말약)를 거명해 비판하기도 했다. 궈모뤄는 한 시(詩)에서 장칭 등 '4인방'을 일일이 풍자적으로 촌평을 한 적이 있었다. (주석 554)

"정치건달의 으뜸 왕훙원, 곡학아세 저질문인의 으뜸 야오원웬, '개똥 군사(軍師)'의 으뜸 장춘챠오, 일자무식 빈 깡통의 으뜸 장칭 등으로 풍자했다."

사람들은 적절한 비유라며 '4인방'을 궈모뤄가 '작명'한 빗댄 말로 비아냥거렸다. 왕훙원은 비록 중공중앙의 부주석으로 존귀한 몸이 되었으나 본질적으로 '문혁' 조반(造反)에서 몸을 일으킨 용맹한 자 일뿐 정치수준이 낮아 큰 국면을 이끌어 갈 인물로는 걸맞지 않는다는 뜻풀이였다.

야오원웬은 문단의 이단아로 타인을 해코지하는 비평을 일삼는 '정치 몽둥이'로 좌경노선의 여론선전을 추진하는 데는 장기가 있으나, 정치적 재간은 형편없다는 비판이었다.

장칭은 문혁파의 영도인물이지만 지식이나 교양이 없어 입을 단속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소동을 벌이며 생떼를 잘 부리고 자신을 과시해 남의 이목을 끌어 대중을 현혹시킨다. 주석 부인이라는 특수신분에 기대어 일을 성사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망치는 인물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장춘챠오는 함부로 지껄이거나 웃지 않는 등 소홀치 않은 면이 있어 이들 3명보다는 정치경험이 풍부한 편이다. 붓놀림이 빠르고 '이론수준'이 야오원웬 보다 높고 지모가 있어 꿍꿍이셈이 뛰어나 권모술수 또한 노회하다고 평했다. 장춘챠오는 '좌경'을 추진하는 담력과 기백이 있어 문혁발동의 공격수이자 전면 탈권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붙여줬다. 장춘챠오는 문혁노선의 적극 지지자로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을 '좌' 쪽에서 제거해야 할 인물로 거론하고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이들 '4인방'은 일사분란하게 '뒷거래'를 들고 나와 사안이 다른 '비림비공'에 불을 지폈다. 이들은 인민들이 당 간부들의 부당한 '뒷거래'에 불만을 갖고 있는 점을 이용해 중앙과 지방의 당정군 간부들을 숙청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궁극적으로는 '비림비공'의 창끝을 문혁 때 숙청됐던 당정군의 간부들을 복권시키고 '탈 문혁(脫文革)' 정책을 추진하는 저우언라이를 정조준 해 '비림비공'을 '제2차 문혁'으로 끌어올려 타도공세를 본격화 할 속셈이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방광암의 증상이 심해지면서 연일 혈변을 쏟아 병원에 입원해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암세포 억제치료를 받아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장칭 등 '4인방'이 '비림비공'으로 문혁을 활성화시켜 공격을 하고 있어 쉴 형편이 아니었다. 저우는 이미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쓰러지기 전에 '4인방'을 견제하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들어 줘야한다는 생각에 더욱 광범한 일에 전념해 건강을 크게 해쳤다.

저우언라이가 염두에 둔 사람 중 한 사람이 덩샤오핑이었다. 덩샤오핑이 당정군에 막 복귀했기 때문에 덩의 권력기반을 넓혀주고, 당 내외와 국내외에 덩샤오핑의 성망(聲望)과 권위를 높이는 작업이 중요하고 필요했다. 저우언라이는 이런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총력을 쏟고 있었다. 

552)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53)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54) ‘九大’後林彪心生疑懼; 擔心毛澤東換張春橋爲接班人  王海光   ‘學習時報’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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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덩샤오핑, 유엔총회 3개의 세계론… 차기 지도자 부상

 

장칭은 '1.25 비림비공' 대회가 끝난 뒤 츠췬, 셰징이 등의 녹음한 연설내용을 수정해 전국 각 지역에 보내 방송할 심산으로 대회자료 등을 마오에게 보내면서 면담을 요청했다. 마오는 장칭이 제멋대로 대회를 소집하고 각 지역에 자료를 보내려는 데 큰 불만을 터뜨리고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저우언라이는 대회에서 장칭이 거론한 '뒷거래'와 관련해 마오에게 "비림비공 운동 중에 '뒷거래' 문제를 '단지 연구'하는 것은 너무 좁은 것으로 부정은 결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뒷거래'는 분석하고 별도로 구별해 처리할 때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보고했다. 마오는 2월 25일 예젠잉이 '1.25 대회'가 끝난 뒤 보낸 답신에서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주석 555)

"예젠잉 동지; 이 일은 대단히 크다. (뒷거래 문제는)지부에서 베이징에 이르기까지 수백 만 명에 영향을 미친다. 뒷문으로 들어간 사람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고, 앞문으로 들어간 사람 중에는 나쁜 사람도 있다. 현재 형이상학이 창궐하고 있다. 편면성이다. 비림비공이 또 뒷거래 문제와 뒤섞이면 희석될 수 있다. 샤오셰(小謝 소사; 셰징이 필자 주), 츠췬 연설은 결점이 있다. 배포가 적당치 않다. 내 의견은 이렇다."

저우언라이는 2월 16일 츠췬, 셰징이를 불러 "마오가 '형이상학 창궐'이라고 말한 것은 장칭을 비판한 것"이라는 뜻을 전달했다. 심리적 압박을 받은 장칭은 부득불 마오에게 자아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칭은 "제가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주석에게 죄송합니다! 이후로는 학습에 노력해 형이상학과 편면성을 극복 하겠다"고 스스로를 비판한 뒤 마오 면담을 또 다시 요청했다. 마오는 3월 20일 장칭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보지 않는 것이 좋다. 과거 여러 차례 당신과 이야기했지만 당신은 실천하지 않았다. 많이 만나 봐야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마르크스 레닌 서적에도 있고, 내 책에도 있다. 당신은 연구하지 않는다. 나는 중병인 몸으로 81살이다. 이해할 수가 없다. 당신은 특권이 있지만, 내가 죽으면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당신도 큰일은 토론하지 않고 작은 일만 날마다 보내는 사람이다. 잘 생각하기 바란다."


장칭의 기획에 따라 '량샤오(梁效; 츠췬 등이 이끌고 있는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의 비판조인 전문 집필진은 나중에 '량샤오(梁效 양효)라는 필명을 씀; 필자 주)'는 '공구(孔丘; 공자의 이름) 그 사람'이란 글에서 "말로는 인의(仁義)를 내세우며 입으로는 중용(中庸)을 떠나지 못한다. 중병으로 병상에 있는 노(魯)나라의 대리 재상"이라며 공자를 비방하고 중상했다. ‘량샤오는’는  공자 비판과 관련해 "역사에 역행하고 복벽의 역류를 반격하는 것으로 큰 의의가 있다"고 공언했다. 공자를 빗대 저우언라이를 비판한 것이다. 장칭은 이 글이 생동감이 있다고 칭찬하며 '훙치' 잡지와 인민일보 등에 싣도록 했다.

장칭 등 ‘4인방’은 4월에 열리는 유엔총회 제6차 특별회의에 참석하는 중국대표단 단장 인선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덩샤오핑의 선출에 강력 반발했다. 강력한 권력쟁투 상대인 덩샤오핑이 복권돼 당정군의 영도층에 진입한 데 이어 세계무대인 유엔총회에 나가 중국을 대표해 연설하면 덩샤오핑의 권위와 입지가 한층 강화되는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마오는 3월 20일 외교부 부부장 왕하이롱(王海容 왕해용)을 시켜 덩샤오핑을 중국대표 단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저우에게 전하도록 하면서 먼저 외교부에서 논의하도록 지시했다. 외교부는 22일 덩샤오핑을 단장으로 하고, 챠오관화(喬冠華 교관화), 황화(黃華 황화)를 부단장으로 하는 인선 보고를 저우에게 제출했다. 저우언라이는 24일 마오에게 ‘보고’를 보내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장칭은 이날 밤 왕하이롱 등 외교부 관계자들을 집으로 불러 인선 안의 ‘보고’를 회수해 다시 단장 선정해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장칭은 24일 밤에도 잇달아 왕하이룽에게 전화를 걸어 외교부 인선보고 철회를 종용하다 거부당하자 악담을 퍼붓기도 했다. 저우언라이가 26일 밤 중앙 정치국회의를 주재할 때도 장칭은 계속 소란을 떨며 반대했다. 장칭은 절대 다수 정치국원들이 덩샤오핑의 유엔 참석을 지지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자 “의견을 보류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마오는 다음날 장칭에게 편지를 보내 “덩샤오핑 동지의 출국은 나의 의견이다. 당신은 반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조심하고 신중하게 생각해 나의 제의에 반대하지 마라”고 경고했다. 마오가 나서자 장칭은 마지못해 생떼를 접었다. (주석 556)

‘4인방’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덩샤오핑이 유엔총회에 참석하게 된 것은 국내외의 중대한 사안으로 복권한 지 얼마 안 된 덩샤오핑에게는 중앙의 영도자로서 위상을 강화하고 공고하게 다지는 절호의 기회였다. 저우언라이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자신을 대신할 덩샤오핑이 이른 시일 안에 당정군을 장악할 수 있도록 권위를 높여주기 위해 덩샤오핑의 출국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저우는 특별기인 민간항공기의 비행안전을 위해 여러 차례 직접 점검하는가 하면 출국행사도 성대하게 치르도록 지시했다. 저우는 덩샤오핑이 비행기 트랩에 오를 때 외국 원수들에 준하는 붉은 카펫을 깔도록 하는 등 당시 중국 외교의전 상 최고의 예우를 갖춰 덩샤오핑의 위망을 높이는 데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4월 6일 오전 7시께 대표단이 출국할 때는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베이징 서우두(首都 수도) 비행장으로 달려가 수천 명의 군중들과 함께 대표단 일행을 환송했다. 덩샤오핑은 4월 6일 유엔 6차 특별회의에서 중국정부를 대표해 마오의 ‘3개의 세계론’과 중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연설을 했다. 마오는 ‘3개의 세계론’을 이렇게 구분한 바 있었다. (주석 557)

“미국과 소련은 제1세계다. 미국과 소련은 원자탄이 많고 비교적 부유한 나라다. 제2세계는 유럽, 일본, 오스트리아, 캐나다로 원자탄은 그리 많지 않고 그렇게 부유하지 않다. 그러나 제3세계 보다는 부유하다. 우리들은 제3세계다. 제3세계는 인구가 대단히 많다. 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외하면 모두 제3세계다. 전 아프리카는 모두 제3세계다. 라틴 아메리카도 제3세계다. 중국은 제3세계에 속한다. 중국은 정치, 경제, 각 방면에서 부국과 대국이 아니라 일단의 비교적 가난한 국가와 함께 할 것이다.”

덩샤오핑은 마오와 저우언라이의 기대에 부응해 세계 각국 대표들과 보도진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아 첫 국제무대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외신들은 “저우언라이 총리의 친밀한 동료”, “저우언라이의 가장 좋은 대리인”, “줄곧 가장 중대한 공작을 해온 제 1류의 고참 영도자”,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한 사람” 등으로 덩샤오핑을 높이 평가했다.

저우언라이는 4월 19일 덩샤오핑 일행이 귀국할 때도 병든 몸을 이끌고 공항에 나가 성대한 환영행사에 참석했다. 저우는 3월 중순부터 매일 100밀리리터의 혈뇨가 나오는 등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 의사들이 입원해 수술 받을 것을 건의했으나 계속 거부하고 하루에 10여 시간동안 일을 하는 등 초인적인 의지로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누적된 피로를 익이지 못하고 6월 1일 중난하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민해방군 305병원에 입원해 곧바로 수술을 받았다.

저우는 이때부터 숨질 때까지 1년 7개월 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당의 영도자와 총리로서의 직무에 마지막 불꽃을 사르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저우가 병원에 입원해 수술 받을 것을 거부한 것과 관련해 저우가 세상을 뜬 몇 년 뒤 부인 덩잉챠오(鄧穎超 등영초)는 신변 공작원에게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주석 558)

“그때 (저우)언라이는 줄곧 (덩)샤오핑의 일에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는 장칭, 그 사람이 (자신이) 입원했을 때 그 틈을 타 샤오핑에게 손을 쓸까봐 걱정했다. 때문에 부득불 공작현장에서 떠날 수 없었다.”

555)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56) 江靑夜闖西花廳 ‘逼宮’; 妄圖整垮重病的周恩來  武健華  ‘今晩報’  人民網
     揭秘; 周恩來對鄧小平做最後的 ‘政治交代’  何立波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毛澤東1974年推出鄧小平, 給江靑組閣夢當頭一棒!  人民網-文史頻道
557)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58) 揭秘; 周恩來對鄧小平做最後的 ‘政治交代’  何立波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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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마오, 고위급 회의서 첫 4인방 문제 지적

 

장칭은 저우언라이가 입원한 지 얼마 안 된 6월 중순에 “역사상의 ‘유법투쟁은 줄곧 지금까지 이어내려 오고 있다. 즉 복벽(復辟; 폐위된 황제가 다시 제위에 오르는 것, 반대세력의 부활)과 반 복벽, 전진과 후퇴의 투쟁이다. 현재도 있다.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분란을 암시했다. 장칭은 또 “지금의 글은 현대의 ‘유(儒; 유가)’를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 현재는 유가가 없는 것인가? 린뱌오, 천보다 이외에도 많은 유가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큰 운동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장칭은 6월 17일 톈진(天津 천진)으로 달려가 몇 군데의 공장과 농촌, 부대를 돌아다니며 “현대의 큰 유가를 끄집어 내자”, “당 안에 있는 큰 유가를 비판하자”고 선동하면서 아주 노골적으로 저우언라이를 공격했다. ‘4인방’들은 ‘비림비공’의 공간을 적극 활용해  주공(周公; 기원전 12세기 서주‘西周’의 성왕을 보필한 명재상으로 공자가 존경하는 이상적인 인물)까지 끄집어내 비판하면서 ‘주공=저우’ 등식으로 몰아붙여 저우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이때 노쇠현상으로 건강이 좋지 않던 마오는 봄에 백내장까지 걸려 휴양을 하다 7월 17일 중난하이 수영장인 마오의 거처에서 정치국회의를 소집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저우언라이도 수술한 몸을 이끌고 회의에 참석했다. 마오는 회의에서 엄숙한 어투로 장칭과 왕훙원, 장춘챠오, 야오원웬을 비판했다. 마오는 이렇게 장칭에게 경고했다. (주석 559) 

“장칭 동지, 당신 주의하시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할 말이 있지만 얼굴을 맞대놓고 말하는 게 거북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모르오. 두 개 공장을 세우지 마시오. 하나는 ‘강철공장(鋼鐵工廠 강철공창; 완고하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모자공장(죄를 뒤집어씌우거나 딱지를 부치는 것)’이요. 사람에게 큰 모자를 씌우는 것은 좋지 않소. 주의하시오!”

장칭은 조금도 지지 않고 맞은편에 앉아있는 덩샤오핑을 쳐다보며 “하지 않겠어요! 강철공장은 샤오핑 동지에게 보내겠습니다!”라고 대거리를 했다. 장칭은 마오가 얼마 전에 덩샤오핑에 대한 두터운 신뢰를 표시한 것을 잘 알고 있어 반은 비위를 맞추고 반은 원망스러운 투로 마오에게 대꾸한 것이다. 장칭은 마오가 자신을 비판한 완고하다는 뜻의 ‘강철공장’과 마오가 덩샤오핑을 칭찬한 과묵하면서 속이 꽉 차있다는 뜻의 ‘강철공장’의 함의가 다르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화가 난 마오가 말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시오!”
“됐습니다!”

장칭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콩라오얼(孔老二 공노이; 공자의 둘째 아들로 공자를 비꼬는 말)은 말은 믿을 수 있어야 하고, 행동은 결과가 있어야 한다고 했소!”

마오는 공자의 말을 따다 쓴 뒤 좌중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들었소? 그(장칭)는 나를 대표하지 않고, 그녀 자신을 대표합니다.”

마오는 어투를 누그러뜨리면서 말했다.

“그녀에게는 양면성이 있어요. 좋은 면도 있고, 그리 좋지 않은 면도 있습니다!”
“그리 좋지 않다면 고치겠어요!”

장칭이 서둘러 말했다.

“당신은 고쳐지지 않아!”

마오의 어투가 다시 높아졌다.

“지금 강철공장을 문 닫겠습니다-.”

장칭이 한 발 물러섰다.

“(공장을) 문 닫으면 됐소.”


마오가 호되게 손으로 때리는 시늉을 했다. 장칭은 또 다시 “모자점”하며 마오의 옆에 앉아있는 저우언라이를 흘낏 쳐다보더니 “바로 영화 ‘중국’이 대단히 나쁩니다! 그러나 한간(漢奸; 매국노)이란 모자를 아직 씌우지 않았는데 누가 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라고 뜸을 들였다. 마오는 무슨 얘기인지 어리둥절했다. 이 영화는 중국에 온 외국기자가 촬영한 것으로 저우가 허락한 것이었다. 장칭은 그것을 걸고넘어진 것이다. 곁에 있던 저우언라이가 미소를 지으며 “이 일은 저도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설명한 뒤 화제를 바꿔 장칭이 동원한 ‘1. 25 비림비공’ 대회 상황을 말했다. 마오는 장칭이 저우언라이를 공격한 것을 알고 있었다. 마오는 장칭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 사람은 부딪치면 튀어 오른다”며 우물가의 어린이마냥 항상 아슬아슬하다는 뜻으로 말했다.

 

 장칭(왼쪽)과 마오쩌둥

 

장칭이 또 뭐라고 씨부렁거리자 마오는 손으로 제지하며 “한 마디로 말하면 그녀(장칭)는 그녀 자신을 대표한다”고 볼멘소리로 말했다. 장칭이 말하는 것은 마오를 가탁하지만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마오는 “그녀(장칭)는 상하이방이다! 자네들은 조심해야 한다. 4명이 소종파(宗派; 파벌)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며 실명은 거론하지 않았지만 곁에 있는 왕훙원과 장춘챠오, 야오원웬이라는 것을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마오가 당내 고위 영도회의에서 처음으로 ‘4인방’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이날 정치국회의는 마오와 장칭이 마치 여염집 부부싸움을 하는 것처럼 진행돼 쇠잔해 가는 마오와 꼬박꼬박 말대꾸하고 설쳐대는 장칭을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마오는 서둘러 회의를 끝내고 심야에 전용열차를 타고 창장에 위치한 우한(武漢 무한)으로 내려갔다. 마오는 우한에 머물면서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우한에 있던 마오는 10월 4일 기밀담당 비서를 시켜 베이징의 왕훙원에게 전화를 걸어 덩샤오핑을 국무원 제1부총리에 임명하겠다는 뜻을 전달하도록 했다. 당시 마오와 저우가 병에 시달리고 있어 당의 업무는 왕훙원, 국무원의 공작은 덩샤오핑이 전담하다시피 했다. 마오가 덩샤오핑을 제1부총리에 임명할 뜻은 암수술이후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고 있는 저우언라이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포석이었다.

왕훙원은 마오의 지시를 당 중앙 부주석인 저우와 예ㅤㅈㅖㄴ잉, 중앙 정치국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장칭, 장춘챠오, 야오원웬에게만 통보했다. 이날 이후 ‘4인방’은 마오의 지시에 저항하는 모의를 꾸며, 1975년 1월에 10년 만에 열리는 제4기 전국 인민대표대회에 대비한 ‘조각(組閣)’에 적극 개입하면서 덩샤오핑에 대한 공격을 퍼붓기로 했다.

마오의 인사복안을 알고 있는 장칭은 서둘러 10월 6일 밤 저우언라이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으로 찾아가 병색이 짙은 저우를 압박해 인민대표대회의 인사안배와 해방군 총참모장 인선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다. (주석 560)

인민대표대회 주비(籌備) 전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선제공격 이었다. 악다구니 장칭은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저우언라이를 압박하며 2시간 동안 ‘설전(舌戰)’을 벌였지만, 저우는 추호의 흔들림 없이 장칭의 ‘의견’을 무력화시켰다. 장칭은 자신이 병원에 오기 전에 이미 저우와 덩샤오핑이 만나 1차 단독담화를 나눈 사실을 몰랐다.

저우와 덩샤오핑은 또 다시 이틀 뒤 저우가 입원한 병원에서 인민대표대회 인사안배에 대해 의견을 조율했다. 중공중앙은 10월 11일 마오의 의견에 따라 정식으로 제4기 인민대표대회에 관한 통지를 발표했다. 누가 ‘조각’할 것인지 인사문제를 놓고 공개적인 권력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559)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60) 揭秘;周恩來對鄧小平做最後的 ‘政治交代’  何立波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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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마오 “장칭, 너무 나서지마라. 당신에 원한이 많다”

 

‘4인방’은 인민대회 이후 덩샤오핑이 제1부총리가 되어 국무원이 ‘저우-덩샤오핑 체제’가 되는 것을 극력 저지하기로 했다. 장칭은 10월 13일 국내의 움직임을 담은 ‘국내동태(動態) 최종 대장’을 보다 원양 화물선인 ‘펑칭(風慶 풍경)호 사건’ 보도를 보았다. 보도내용은 “배를 만드는 것보다 사는 게 낫고, 사는 것보다 빌리는 게 낫다고 하는 것은 이른바 ‘서양노예 철학’이다”고 비판한 것이었다.

장칭은 “옳다구나!”하고 환호작약했다. 저우와 덩샤오핑을 공격할 최고의 무기가 됐기 때문이었다. 펑칭호는 중국이 해운수송력 강화와 자립화를 위해 건조한 1만 톤급 화물선이었으나 엔진, 레이더 등 장비의 성능이 선진국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저우는 해운수요를 위해 필요할 경우 외국선박을 사들여도 괜찮다는 의견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 장칭 등 ‘4인방’은 이것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장칭은 “(조선 사업을 관장하는)교통부는 마오 주석, 당 중앙 영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1개 부서가 아닌가?”, “외국문물을 숭배하고 외국 사람에게 아첨하는 소수의 매판 자산계급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의 정치를 독재하고 있다”, “정치국은 이 문제에 대해 마땅히 태도를 밝히고 필요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등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이를 신호탄으로 왕훙원, 장춘챠오, 야오원웬은 ‘노선문제’와 ‘노선교육’으로 비화시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주석 561)

장칭은 10월 17일 밤에 열린 중앙 정치국회의에서 ‘펑칭호 사건’은 ‘외국문물 숭배와 외국인에 대한 아첨’, ‘서양 노예철학’의 전형이라며 공격의 창끝을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이끌고 있는 국무원을 향해 들이 밀었다. 장칭은 자리에서 일어나 덩샤오핑을 향해 “이 사건에 대해 당신은 지지합니까, 반대합니까? 아니면 중간 입장인가요? 당신은 태도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덩샤오핑은 “이 사건에 대해 나는 조사를 해야 합니다. 우격다짐으로 당신들의 의견에 찬성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되받아 쳤다. 이것은 덩샤오핑이 1973년 복권한 이래 처음으로 ‘문혁의 기수’ 장칭과 정면충돌한 사건이었다. 장칭은 의외로 덩샤오핑이 거칠게나오자 잠시 멍청히 서있다 가 전열을 가다듬어 특기인 무지막지하고 표독스러운 언사로 덩샤오핑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참다못한 덩샤오핑은 화가 치밀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이때 장춘챠오가 덩샤오핑의 등에 대고 “일찍이 당신이 튀어나올 줄 알았다. 오늘 과연 튀어나왔다!”고 야지를 놓았다. 회의는 파장이었다.

이날 밤 ‘4인방’은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왕훙원을 창사(長沙 장사)에 머물고 있는 마오에게 파견해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를 헐뜯기로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덩샤오핑이 국무원 제1부총리를 맡는 것을 극력 저지하기로 했다. 왕훙원은 10월 18일 창사로 날아가 이날 밤 마오를 면담해 덩샤오핑, 저우언라이, 예졘잉, 리셴녠 등을 무고(誣告)했다. 왕훙원은 ‘펑칭호 사건’을 놓고 장칭과 덩샤오핑이 대판 싸웠다고 일러바치고 덩샤오핑을 헐뜯었다.

덩샤오핑의 이런 태도는 제4기 인민대표대회를 앞두고 무르익어가고 있는 총참모장 인선과 관련이 있다고 중상했다. 왕훙원은 또 “제가 이번에 이곳에 오는 것을 총리와 정치국의 다른 동지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위험을 무릅쓰고 왔습니다. 베이징은 지금 1970년 루산회의 때의 분위기입니다. 저우언라이는 병을 앓고 있지만 밤낮으로 사람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느라 대단히 바쁩니다. 덩샤오핑, 예ㅤㅈㅖㄴ잉, 리셴녠 등이 늘 총리를 찾아갑니다. 그들의 왕래가 이렇게 빈번한 것은 4기 인민대회의 인사배치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마오를 충동질했다. (주석 562)

왕훙원은 저우와 덩샤오핑이 야심을 갖고 음모로 꾸미고 있는 양 은근히 마오와의 이간질을 부추겼다. 언짢은 모습으로 왕훙원의 이야기를 다 들은 마오는 되레 왕훙원을 호되게 비판했다. 마오는 “의견이 있으면 (저우와 덩샤오핑에게)맞대놓고 이야기하라. 이렇게 하는 것은 좋은 게 아니다! 덩샤오핑 동지와 단결해야 한다. 자네는 돌아가면 총리와 (예)ㅤㅈㅖㄴ잉 동지를 찾아가 이야기하라. 장칭과는 함께 어울리지 마라. 자네는 그녀(장칭)를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풀이 죽어 베이징에 돌아 온 왕훙원은 장칭과 장춘챠오, 야오원웬에게 마오와의 면담내용을 보고했다. 이들은 체념하지 않고 끝까지 덩샤오핑을 끌어내리기 위해 다각적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장칭은 왕훙원이 온 날 밤인 10월 18일 밤 댜오위타이로 외교부 부부장인 왕하이롱과 외교부 부국장 탕원성(唐聞生 당문생)을 불러 국무원의 ‘외국문물 숭배와 외국인에 대한 아첨’ 문제, 덩샤오핑이 정치국에서 소란을 피운 것은 또 하나의 ‘2월 역류’라며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예ㅤㅈㅖㄴ잉 등을 험담했다. 장칭은 이들이 결탁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등의 내용을 마오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마오와의 연락업무도 맡고 있는 왕하이롱과 탕원성은 10월 20일 덩샤오핑을 수행해 덴마크 총리 부부를 마오가 있는 창사로 안내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왕하이롱과 탕원성은 장칭의 횡포에 반감을 갖고 있었고, 이들은 창사에 가기 전에 305병원에 입원해 있는 저우언라이를 찾아가 장칭의 의도를 저우에게 보고했다. 20일 창사에 내려 온 왕하이롱과 탕원성은 마오가 외빈을 면담한 뒤 마오에게 베이징 상황을 보고하면서 장칭 등의 비정상적 행위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화가 난 마오는 이들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석 563)

“돌아가서 총리에게 말하라. 총리는 여전히 우리들의 총리다. 몸이 괜찮으면 왕훙원 동지와 각 방면을 상의하면서 4기 인민대표대회 준비와 인사안배의 명단을 작성하라고 하라. 덩샤오핑을 당의 부주석과 제1부총리,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총참모장으로 임명하라는 나의 뜻을 전하라. 왕훙원과 장춘챠오, 야오원웬에게 (이런 내용을)전해주고, 그들이 장칭과 함께 뒤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라. 위원장 1, 2(전국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1, 2인자; 필자 주)인자를 다시 고려하라고 하라. 결론적으로 (나의)방침은 단결해야 하고 안정을 기해야 한다는 뜻을 전해라.”

마오는 이렇게 명확하게 국무원 총리, 제1부총리, 총참모장의 3개 주요 직무를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에게 주고, 4기 인민대회 주비공작과 구체적 인사안배의 중요업무를 저우언라이에게 맡겨 장칭 등 ‘4인방’이 4기 인민대회를 앞두고 ‘조각(組閣)’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꿈’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반면 천군만마(千軍萬馬)와 같은 힘을 얻은 저우언라이는 예ㅤㅈㅖㄴ잉, 리셴녠 등과 함께 덩샤오핑 지지공작을 계속 펼쳐 나아갔다. 덩샤오핑은 11월 12일 외빈을 대동해 창사로 내려가 마오를 면담했다. 마오는 외빈과의 회견이 끝난 뒤 덩샤오핑과 담화를 나누면서 덩샤오핑이 지난 10월 17일 정치국회의에서 장칭과 말다툼을 벌이고 퇴장한 일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했다. 마오가 덩샤오핑이 공개적으로 장칭을 제어한 것을 칭찬하면서 농담 삼아 큰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강철공사(鋼鐵公司; 의지가 굳건함을 뜻함)’를 차렸다면서!”
“주석도 알고 계셨군요.”
“좋아!”
“정말로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자네를 지지하네!”
“그녀(장칭)는 정치국에서 7, 8차례나 (소동을)피웠습니다.”
“사람을 윽박지르는 것은 나도 좋아하지 않아. 그녀들(곁에 있던 왕하이롱, 탕원성을 가리킴; 필자 주)도 모두 좋아하지 않아요.”
“정치국 분위기가 정상이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없이 그녀가 ‘강철공사’로 나오자 ‘강철공사’로 대응했습니다.”
“잘했어.”


이때 장칭은 인사안배인 ‘조각’과 관련해 심복인 중앙위원으로 베이징시 혁명위원회 부주임 셰징이를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에, 칭화대학 당 위원회 서기인 츠췬을 국무원 교육부장, 외교부 부부장인 챠오관화를 부총리로 임명하고, 마오의 조카인 랴오닝성 당 위원회 서기인 마오웬신(毛遠新 모원신) 등을 정치국 회의에 참석시켜 발탁할 것 등을 제의한 편지를 왕하이롱 편에 마오에게 보냈다. 마오는 11월 12일 장칭이 보낸 편지에 이렇게 비판하는 서신을 써 보냈다. (주석 564)

“너무 나서지 마시오. 문건에 의견을 달지 마라. 당신이 ‘조각(組閣; 인사문제의 배후 조종자)’에 끼지 말라. 당신에 대한 원한이 많다. 많은 사람들과 단결해야 한다. 당부하는 바이오. 사람은 자신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오.”

561) 毛澤東1974年推出鄧小平, 給江靑組閣夢當頭一棒!   人民網-文史頻道
     1973년毛澤東穩定中國政局的願望爲何落空?  秦九鳳   中國共産黨新聞網
562) 長沙決策; 周恩來狙擊江靑 ‘組閣’陰謀  江明武   人民網-文史頻道
     周恩來抱病赴長沙面見毛澤東 完成最後使命  顧保孜   人民網-文史頻道
     揭秘; 周恩來對鄧小平做最後的 ‘政治交代’  何立波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563)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64)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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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4인방’ 저지하며 덩샤오핑 군사위 부주석 임명

 

마오는 최근 1개월 동안 여러 차례 ‘4인방’에 대한 비판을 하고 경고를 했지만 장칭의 본성은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다. 장칭은 또 11월 19일 ‘자아비판’이라는 이름의 편지를 마오에게 보냈다.

장칭은 편지에서 “저는 주석의 기대를 저버린 데 대해 부끄럽게 여깁니다. 제가 자신을 정확히 아는 지혜가 모자라 자아도취에 빠져 머리가 멍청해 졌습니다. 객관적인 현실에 대해 유물론적으로 정확하게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이분법적인 분석을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장칭은 이어 “1969년 9대 이후 저는 기본적으로 할 일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어떤 일도 주어지지 않았어요. 지금은 더욱 심합니다. 노선투쟁 시에는 주도적으로 일을 했어요. 이후 조심하며 근신하겠습니다. 당과 주석을 위해 사고를 일으키지 않겠어요. 당연히 투쟁이 필요하고, 희생이 필요한 때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썼다. 

마오는 다음 날인 20일 장칭에게 보낸 답장에서 “당신의 직무는 바로 국내외 동태를 연구하는 일이오. 이것은 큰일이오. 이 일은 내가 여러 차례 당신에게 말했소. 일이 없다고 말하지 마시오”라고 따끔하게 경고했다. 장칭은 또 마오가 전국인대 1, 2인자 인선에 대해 ‘다시 고려하라’는 것과 관련해 마오에게 인편으로 왕훙원을 전국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해 줄 것을 거론했다. 마오는 “장칭은 야심이 있다. 그는 왕훙원을 (전인대)위원장에 앉히고 그녀 자신은 당 주석이 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장칭 등 ‘4인방’은 마오 사후(死後)에 장칭이 당 중앙 주석이 되고, 왕훙원을 전인대 상위 부위원장에 임명해 88살의 주더가 세상을 뜨면 그 자리를 승계한다는 야무진 권력 장악의 프로젝트를 갖고 있었다. 장춘챠오는 저우언라이 사후에 국무원 총리를 꿈꾸고 있었다. 이들은 미리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에게 사람을 보내 전인대 상무위원회의 영도자인 주더와 둥비우 사후 쑨원의 부인인 쑹칭링(宋慶齡 송경령)을 안배하고, 덩샤오핑, 장춘챠오, 리셴녠 등을 국무원 부총리, 그리고 나머지 인사는 저우가 주재해 결정하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장칭이 ‘조각’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하고 나선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그 밖의 인사안배 문제를 놓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며 몹시 고심했다. 저우는 덩샤오핑, 예ㅤㅈㅖㄴ잉, 리셴녠 등과 협의를 거쳐 '4인방'이 요구하는 문화부, 교육부, 체육위원회 등에서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교육부를 제외한 나머지의 자리를 보장하면서 타협해 '4인방'의 큰 야욕을 막으려 했다. (주석 565)

이처럼 10년 만에 열리는 제4대 전국 인민대표자회의를 앞두고 장칭, 왕훙원, 장춘챠오, 야오원웬 등 '4인방'의 권력탈취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저우언라이, 예졘잉, 덩샤오핑 등 혁명원로들은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일단 마오가 장칭을 묶어 놔 한 숨을 놓았지만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마오의 마음을 확실하게 잡아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예졘잉은 마오를 가장 잘 이해하고 마오의 의도를 가장 잘 아는 저우언라이가 마오가 머물고 있는 창사(長沙 장사)로 내려가 4기 전인대 인사문제를 최종 결정하는 것이 당과 국가의 앞날의 명운에 결정적 관건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문제는 여러 차례의 암수술로 극도로 허약해진 저우언라이의 몸 상태였다. 예졘잉은 저우의 주치의인 장줘량(張佐良 장좌량)과 여러 차례 협의를 거쳐 심장내과 전문가와 비뇨기과 전문 의사 등 의료진이 수행해 저우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도록 조처했다.

저우언라이가 12월 23일 창사로 출발하기 전 의료진들이 또 다시 저우의 혈변을 발견하고 즉시 검사치료를 받도록 권유했으나 저우언라이는 치료를 뒤로 미루고 출발을 강행했다. 애초 저우언라이는 이날 당 부주석인 왕훙원과 함께 창사에 내려가 마오에게 4기 전인대 준비상황과 인사문제 등을 보고하기로 해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왕훙원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공항에서 왕훙원을 기다리는 동안 혈뇨가 나와 의료진은 이런 몸으로 비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며 다시 창사행을 말렸으나 저우는 듣지 않았다.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저우의 공작원이 민망해 왕훙원과 통화했으나 왕은 "총리가 먼저 가면 곧 뒤 따라 가겠다"며 각각의 비행기로 출발하자는 뜻을 밝혔다.

저우언라이는 "전세기 1대로 같이 가면 국가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 텐데-"하며 미소를 지으며 비행기에 올라 창사로 출발했다. 왕훙원은 이때 저우와 함께 가기로 한 약속을 깨고 장칭, 장춘챠오, 야오원웬 등과 마오 면담에 대비한 최종대책을 협의하고 있었다.

마오가 묵고 있는 후난성 9소(所)호텔 6층 방에서 저우언라이와 왕훙원은 마오를 만나 23일부터 27일까지 잇따라 4차례 담화를 나눴으며, 저우는 마오와 새벽까지 이야기하는 한 차례 단독 면담을 했다.

마오는 장칭이 더욱 심하게 파벌활동을 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왕훙원에게 "'4인방'을 하지 마라! 중앙의 많은 사람과 단결해야 한다. 파벌을 하지 마라, 파벌을 하면 자빠진다. 장칭은 야심이 있다. 당신들은 알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 있다. 당신들 보다 내가 (장칭을)더 잘 안다"고 했다. 마오는 또 "장칭에게 3가지를 하지마라고 권했다. 하나는 함부로 의견을 달지 마라. 둘째는 주제넘게 나서지 마라. 셋째는 정부의 '조각'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다"고 밝혔다. 마오는 "비림비공을 제2차 문화대혁명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장칭은 마땅히 자아비판을 해야 한다”고 제의하고 왕훙원에게는 서면으로 자아비판을 하라고 명령했다. 왕훙원은 순간 현기증을 느끼며 사색이 되고 말았다. 만사휴의였다. 마오는 이처럼 '4인방'을 강력 비판한 것과는 달리 덩샤오핑은 높이 평가하고 칭찬했다. (주석 566)

"그(덩샤오핑)는 정치사상(政治思想)이 우수하다."

마오는 손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politics(정치)가 그(왕훙원)보다 낫다."

마오는 곁에 있는 왕훙원을 가리켰다. politics는 영어의 '정치'로 저우언라이는 당연히 마오의 말을 이해했다. 마오는 "그(왕훙원)는 덩샤오핑보다 강하지 못하다"고 말하면서 종이에다 '강(强; 우수하다)'하다고 썼다. 왕훙원은 곤혹스러워하며 대단히 긴장했다. 이어 저우언라이가 마오에게 4기 인민대회 인사 안배를 보고하면서 예졘잉을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국방부장을, 덩샤오핑을 제1부총리 겸 총참모장이라고 말하자 마오가 저우의 말을 끊고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보기에 (덩)샤오핑을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해야 한다. 군사위원회 부주석, 제1부총리 겸 총참모장을 시켜야 한다."


565) 長沙決策; 周恩來狙擊江靑 ‘組閣’陰謀  江明武   人民網-文史頻道
     揭秘; 周恩來對鄧小平做最後的 ‘政治交代’  何立波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566)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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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영원한’ 총부사령관 펑더, 파란만장한 삶 마감

 

건강이 좋지 않은 마오는 연필로 힘겹게 종이에다 '인재난(人才難)'이라고 썼다. 저우언라이가 "얻기 어려운 인재(人才難得 인재난득)"라고 말하자, 마오는 웃으면서 연필을 놓았다. 저우가 부총리 명단을 보고하면서 "덩(鄧; 덩샤오핑), 장(張; 장춘챠오), 리(李; 리셴녠)-"라고 읽자 마오가 말을 끊고, "천(陳; 천시롄 陳錫聯)"이라고 말해 천시롄을 넣을 것을 주문했다.

마오는 얼굴을 돌려 왕훙원을 쳐다보며 거듭 "총리는 여전히 우리의 총리다"라고 강조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에게 "당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 4기 인민대회 후 안심하고 병을 치료하시오! 국무원의 일은 덩샤오핑을 대신 시키면 된다"고 저우의 건강을 걱정했다.

12월 26일은 마오의 생일이었다. 81살이 된 마오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날 밤 마오는 돌연 저우언라이를 불러 두 노인은 새벽까지 긴 이야기를 나눴다. 근 반세기에 이르는 두 노(老) 전우의 마지막이 된 긴 이야기는 나중에 저우언라이가 요점을 정리하고, 마오가 수정할 때 '무산계급 독재아래 계속 혁명론'을 보충해 엮어 전체 정치국원들에게 열람시켰다. 나중에 중앙이 인쇄해 당 간부들에게 배포했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인사안배와 이론문제'였다. 마오가 말한 이론문제는 대충 이랬다. (주석 567)

"레닌은 왜, 자산계급의 독재에 대해 글을 써야만 한다고 말했나.-이 문제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수정주의로 바뀔 수 있다. 전국에 알려야 한다.-우리나라가 현재 실행하고 있는 상품제도, 임금제도 등도 불평등하다. 8급 임금제 등등. 무산계급 독재아래에서 더욱 제한되고 있다.-무산계급 중에서, 기관 공작원들 중에서 모두 자산계급 생활의 작풍이 생겨나고 있다."

마오의 이런 견해는 마오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과 탐색을 반영한 것으로 등급제도와 특권의식을 타파해 현격한 빈부차이와 양극 분화의 사회현상을 없애고, 자산계급을 번식시키는 토양과 조건을 제거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마오가 시종 힘써 해결하려고 한 중요한 문제였으나 인성과 인간존재를 부인하는 인위적인 사회주의는 머나먼 이상향의 세계였다. 마오는 4개월 동안 창사에 있으면서 6차례 외국 원수와 정당 지도자들을 회견했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한 마오는 저우와 왕훙원에게 내년(1975년)부터는 외빈들을 일률적으로 만나지 않을 것이며, 상대방 쪽에서 회견을 요구해도 만나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펑더화이와 마오쩌둥.

 

제4기 전국 인민대표 대회를 앞두고 장칭 등 ‘4인방’과 저우언라이 등 혁명원로들이 권력투쟁의 힘겨루기를 하던 1974년 11월 29일 오후 3시 35분 베이징 301병원. 중국혁명에 큰 족적을 남긴 10대 원수인 시대의 풍운아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76살이었다. 펑더화이가 숨을 거둘 때 곁에는 가족이나 친척, 혁명동지 그 누구도 없었다. 흰 천으로 덮여 있는 싸늘한 주검 위에는 ‘왕촨(王川 왕천)’이라는 위장한 이름이 씌어 있었을 뿐, 그의 비참한 죽음에 눈물을 뿌려 줄 추모객 한 사람도 없었다.

중공중앙은 펑더화이의 죽음은 철저하게 통제하고 은폐했다. 주검은 12월 17일 화장장으로 비밀리에 옮겨져 한 줌의 재가 됐다. 화장비용은 그가 매달 받아 온 아주 적은 월급에서 지불됐다. 펑더화이가 쓰촨성 청두에서 1966년 12월 24일 홍위병들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끌려와 스팡위안(什仿院 십방원)에서 외부와 격리돼 1959년 1차 루산(廬山 여산)회의 때 ‘반당 반마오(反毛 반모), 외국과의 내통 죄’로 몰려 감호(監護)생활을 한지 8년 만이었다. ‘나의 유일한 대장군’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마오와는 끝내 화해를 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펑더화이는 수없이 마오의 면담을 요구했지만 마오는 만나주지 않았다. (주석 568)

펑더화이는 임종을 앞두고 주더(朱德 주덕)를 몹시 보고 싶어 했다. 펑더화이는 죽기 전에 주더를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감호관들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누구도 주더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주더와 펑더화이는 전쟁 년대에 ‘영원한’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이었다.

신중국 건국 후 10대 원수 서열도 1, 2위였다. 펑더화이는 주더를 큰 형(大哥 대가)으로 존경한 친밀한 전우이자 형제였다. 펑더화이가 죽은 뒤 이런 이야기를 들은 88살의 주더는 눈물을 비오듯 쏟았다고 한다. 주더는 텅 빈 방안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너희들은 왜 내가 펑라오쫑(彭老總 팽노총; 펑더화이에 대한 존칭)을 보지 못하게 했느냐? 죽어가는 사람이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이 두려웠느냐!"고 절규했다.

주더는 펑더화이가 1차 루산회의에서 반당집단으로 몰려 모든 직무를 박탈당하고 비판당할 때 “우리가 언제 한 솥밥을 먹었던 사람들이라고 하겠느냐”며 마오의 매몰찬 행위를 개탄하기도 했다. 펑더화이가 자택에 연금되는 암울했던 시절 주더는 마오나 린뱌오 등 문혁세력을 의식하지 않고 수시로 찾아가 ‘장기 친구’가 돼 펑더화이의 울분을 삭여주며 위로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장기를 둘 때는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어린이들처럼 장기판에서 치고받고 생사가 갈리는 말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무아지경에 빠졌다. 이들은 성격이 확연히 달라 장기를 두는 스타일도 판이했다. 주더는 펑더화이의 말을 잡을 때는 차분하게 밀어 내 잡은 뒤 장기판에 전리품을 전시하듯 잡은 말들을 늘어놓는 심리전을 펼쳤다. 그런가하면 펑더화이는 주더의 말을 잡을 때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잡는 말 위에 자신의 장기 말로 위에서 내리쳐 ‘쾅’소리가 요란했다.

기세로 상대방의 혼을 빼 제압하는 전술을 구사하고 잡은 말들은 ‘포로’처럼 장기판 아래 한 군데로 쓸어 모았다. 권력의 감시로 찾는 사람이 없던 낙척시절에 여보란 듯 찾아와 일부러 스스럼없이 대해주던 주더가 어찌 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펑더화이는 죽기 두 달 전 중앙 군사위원회에서 파견한 ‘특별 조사반원’들이 심문할 때 나눈 ‘임종(臨終) 담화’에서 이렇게 자신의 결백을 밝혔다. 당시 펑더화이는 암 투병으로 기진맥진한 상황에서 혀가 굳어져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펑더화이는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안간 힘을 다해 끊어졌다 이어지는 단속적인 말로 진술했다. 펑더화이를 감호하면서 심문과정에 입회했던 마오페이(茅飛 모비)는 그렇게 증언했다. 

“마오 주석은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켰다-. 저우 총리는 나와 30여 년을 같이 지냈다. 그는 우리들의 당 안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파악하고 운용한 전술가이다. 우리들 사회주의 사업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내 스스로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그러나 나는 음모와 위계를 꾸미지 않았다. 추호도 나는 결백하다-. 우리의 국방건설, 전략방어시설은 완전히 갖추지 못했다. 국방공업과 과학적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가장 걱정했다. 단지 우리들의 계획과 준비만이 적들의 물질적 역량을 이길 수 있다. 이미 나를 8년 동안 심사했다. 지금까지 결론이 없다.”

567)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68) 彭德懷被監護的日子; 每天放風兩次 動一動要先喊報告  柳守忠   人民網-文史頻道
 彭德懷的最後歲月; 我得活着, 還寃屈沒有搞淸楚!  沈國凡   人民網
 歷史的見證; 爲習仲勛, 彭德懷飜案   人民網-文史頻道
 朱德聽聞彭德懷遺願遭拒老淚縱橫; 要死的人, 還能做啥子  朱 敏   ‘鄭州日報’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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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펑더의 죽음 이후에야 명예회복 복권 단행

 

펑더화이는 베이징 위수지구(衛戌地區)인 스방위안에서 8년 동안 감호생활을 당하면서 심사를 받아오다 1973년 봄에 직장암에 걸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으나 치료를 받지 못해 암이 온 몸으로 전이 되었다. 큰 출혈이 있던 날 저우언라이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당 고위 간부들을 치료하는 해방군 301병원으로 후송해 치료하도록 지시했다.

펑더화이는 감호소에서 병원으로 옮겨왔으나 철통같이 통제하는 바람에 감호생활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외부와 차단하기 위해 유리창에 종이를 발라 한 줄기의 햇빛도 들어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글을 쓰거나 라디오를 듣는 것이 금지됐다. 단지 몇 권의 책만 읽을 수 있었다. 펑더화이는 창밖을 전혀 볼 수 없어 의사들에게 유리창에 바른 종이를 제거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의사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크게 화가 난 펑더화이는 탁자를 치며 노호하고 절규했다. (주석 569)

“나는 루산의 그 펑더화이다! 병이 생겨 입원했다. 움직이지 못한다. 왜, 마음을 놓지 못하는가? 견디기 어려우니 다시 감옥으로 보내 달라.” 

일점혈육이 없는 펑더화이는 펑매이쿠이(彭梅魁 팽매괴) 등 조카딸들이 면회를 왔을 때 “내가 죽은 뒤 나의 유골을 땅에 묻고 그 위에 과실수를 심어 라. 유골이 비료역할을 한다”며 유언을 했다. 펑더화이는 7월 21일 암세포가 전신으로 전이되면서 견딜 수 없는 통증에 시달렸다. 견디다 못한 펑더화이는 병실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에게 “통증을 어찌할 방법이 없다. 견디기 힘들다. 나를 도와 총으로 쏴 달라”고 외쳤다. 펑더화이는 그동안 암수술을 거부해 왔다. ‘전담 조사반’의 심사원이 펑더화이에게 “당신은 왜 수술을 받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펑더화이는 고통을 참으며 큰소리로 “나는 너희들을 믿을 수 없다. 나는 살아야 한다. 나의 누명이 명확하게 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사반원; 당신은 뭐라 해도 반당분자다. 무산계급 천하를 전복하려 했다.

펑더화이; 이 천하는 우리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것이다. 내가 어떻게 엎어버릴 수 있나? 나는 결백하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나는 나가서 이 국가를 위해 공작을 해야 한다. 이 나라를 건설하고 부국강병을 하는 것이 내 일생의 바람이다.

조사반원; 당신은 이미 이 꼴이 됐다. 살려고 하는 것은 좋으나, 나가서 일을 하겠다고?

펑더화이; 나는 단지 하루만 살면 된다. 인민들을 위해서 하루만 일하면 된다. 이것은 나의 권리다. 너희들이 박탈할 수 없다. 내가 수술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수술대에서 죽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펑더화이는 의료진에게 “나, 펑더화이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혁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여전히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반드시 살아서 내 문제를 명확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절규했다. 펑더화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솟구쳤다. 펑더화이의 “아~”하는 장탄식이 허공에 맴돌았다. 펑더화이가 수술대에 올랐을 때 갑자기 곁에 있던 ‘조사 반원’에게 큰소리로 “수술 전에 마오 주석을 봐야 한다. 나는 마오 주석을 만나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오늘 마오 주석을 만나야 한다. 나에 대한 문제의 방법을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펑더화이는 (의료진을)뿌리치고 수술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고 문 밖으로 나가려 했다. ‘조사 반원’들이 막았다. 펑더화이는 분노해 손을 휘두르며 “누명을 쓰고, 근거 없이 죄를 날조해 많은 죄명을 붙였다. 죽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죽더라도 체념할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의사인 조카딸 펑매이쿠이가 “큰 아버지, 수술이 가장 좋은 방법 이예요. -마오 주석을 만나려면 지금 의사들에게 잘 협조해야 해요. 더 사시려면 조금이라도 나쁜 곳이 없어야-큰 아버지, 냉정해야 해요. 어떤 일도 단박에 해결할 수 없어요. 큰 아버지 병은 더 늦출 수 없어요. 빨리 수술하는 것이 좋아요!”고 설득했다. 펑더화이는 한 참 침묵하다 펑매이쿠이를 바라보며 “나, 그럼 수술하겠다”고 응낙했다. 펑더화이는 수술이 끝난 뒤 깨어나 처연한 목소리로 “나는 폐인이 됐다!”고 말했다. 펑더화이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펑더화이의 죽음은 ‘4인방’이 체포되고, 펑이 죽은 뒤 4년만인 1978년 12월 24일 펑더화이 추도회가 열려 전국에 알려지게 됐다. 덩샤오핑은 이날 추도회를 통해 펑더화이의 업적을 이렇게 평가했다. (주석 570)

“펑더화이는 우리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원로 무산계급 혁명가이다. 핑장(平江 평강)기의의 주요 영도자이고, 홍3군의 창립자이다. 당, 국가와 군대의 걸출한 영도자로 당, 정, 군의 많은 중요 직책을 역임했으며 국내외로 저명한 군사가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린뱌오와 ‘4인방’의 박해를 받아 1974년 11월 29일 베이징에서 서거했다. 오늘 당 중앙은 실사구시의 정신과 당의 정책 실천에 입각해 펑더화이 동지에게 전면적으로 공정한 평가를 내리고 명예를 회복시킨다. 그는 당을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고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 사업에 충성을 했다.-그는 근 반세기의 혁명투쟁 과정에서 남정북전(南征北戰)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해, 인민군대의 장대한 성장을 위해, 사회주의 조국을 보위하고 건설하기 위해 탁월한 공헌을 했다.”

펑더화이는 생전에 “역사는 가장 무정(無情)하면서도 공정(公正)하다. 역사는 종국에 나에 대해서 공정한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그의 굳건한 역사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확인하듯 중국공산당 제11기 6중 전회는 1981년 6월 27일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 결의는 “루산회의 후기에 마오쩌둥 동지는 펑더화이 동지에 대한 비판을 잘못 발동해 전당(全黨)이 잘못을 저질러 ‘반 우파’투쟁을 전개했다. 8기8중 전회가 한 이른바 ‘펑더화이, 황커청(黃克誠 황극성), 장원톈(張聞天 장문천), 저우샤오저우(周小舟 주소주) 반당집단’의 결의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라며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복권을 단행했다.  

569) 彭德懷的最後歲月; 我得活着, 還有寃屈沒有搞淸楚!  沈國凡   人民網   解密彭德懷被監護的日子   理論頻道  新華網
570) 歷史的見證; 爲習仲勛, 彭德懷飜案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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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덩샤오핑, ‘탈 문혁(脫文革)’ 정책 박차

 

문화대혁명 9년차를 맞은 1975년 1월 5일 중공중앙은 덩샤오핑을 중공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장춘챠오를 중국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에 각각 임명하는 1호 문건을 발포했다. 1월 8일부터 10일까지 저우언라이 주재로 중공 10기 2중 전회가 베이징에서 열려 4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덩샤오핑을 당 부주석,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했다.

중화 인민공화국 제4기 전국 인민대표대회(전인대) 1차회의가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렸다. 문혁이후 처음 열린 전인대는 국가권력의 상징이자 법률상 최고 권력기구였으나 문혁기간에는 사실상 폐지된 상태였다. 저우언라이는 병원에서 나와 10년 만에 열린 이 회의에서 ‘정부공작 보고’를 했다. 

저우는 10년 전 3기 전인대에서 제기한 것처럼 경제건설을 두 단계로 나눠 설명했다. 저우는 “첫 단계는 1980년 이전까지 독립적이고 비교적 정비된 공업체계와 국민경제 체계를 구축한다. 두 번째 단계는 이번 세기(20세기)안에 농업과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현대화를 전면적으로 실현해 우리나라 국민경제를 세계의 선두에 세운다”는 웅대한 목표를 제시했다. (주석 571)

저우언라이는 내전을 방불한 문혁10년의 허송세월로 참담한 상황이었지만 다시 중국을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겠다는 야심찬 ‘4개 현대화’의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 회의는 저우를 다시 총리로 선출했고, 12명의 부총리를 새로 뽑았다. 부총리의 출신성향을 보면 제1부총리 덩샤오핑을 비롯해 리셴녠, 천시롄(陳錫聯 진석련), 왕전(王震 왕진), 위치우리(余秋里 여추리), 구무(谷牧 곡목) 등 6명이 원로간부였다. 

4인방은 창춘챠오 1명이었으며, 지방간부는 화궈펑(華國鋒 화국봉), 지덩쿠이(紀登奎 기등규) 2명, 기타출신이 천융구이(陳永貴 진영귀), 우구이셴(吳桂賢 오계현), 쑨젠(孫健 손건) 등 3명이었다. 덩샤오핑은 이에 앞선 당 인사에서 당 부주석, 중앙 군사위회 부주석 겸 총참모장에 임명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당, 정, 군의 최고 영도기구의 영도자가 되었다. 또 주더가 전인대 위원장에, 둥비우와 쑹칭링(宋慶齡 송경령)이 부위원장에 각각 선출됐다.

이런 ‘조각(組閣)’구성은 ‘4인방’의 입지를 대폭 줄이고 원로들의 입김을 강화하는 인사 안배였다. 마오가 폐막식에서 저우를 통해 ‘안정과 단결’을 강조한 것은 애초 3년 만에 끝내기로 한 문혁이 9년차에 접어들면서 극도의 피로증후군에 빠진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저우언라이는 잇따라 국무원 상무회의와 국무원 전체회의를 열어 “이후 국무원의 공작은 덩샤오핑 동지가 주재”한다고 밝히고, 마오가 덩샤오핑을 ‘정치사상이 강하다’, ‘얻기 어려운 인재’라고 평가한 말을 전달하며 덩샤오핑 띄우기에 열을 올렸다. 저우언라이는 2월 초 국무원 부총리들의 공작분담을 보고하고 비준을 받았다. 이때부터 덩샤오핑이 중병을 앓고 있는 저우를 대신해 국무원 공작을 이끌어 갔다. 

마오는 왕훙원에게 ‘4인방’ 에 가담해 파벌행위를 하는 것을 여러 차례 경고했지만 왕훙원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마오가 이에 대한 실망과 회의로 덩샤오핑을 차기 후계자로 삼기위한 배려도 깔려있었다. 중공중앙은 2월 초 중앙 군사위원회 판공회의를 폐지하고 중앙 군사위원회 상무회의를 만들어 예졘잉이 주재하도록 했다. 구성원은 덩샤오핑, 류보청, 쉬샹쳰, 녜룽전 등으로 예졘잉 등 혁명 원로인 원수들이 군권(軍權)을 장악하게 됐다. 

덩샤오핑은 린뱌오의 군권장악으로 야기된 각종 파벌과 부패, 비대화(肥大化)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성하게 군대 편제개편, 전투력 강화 등 군대 정돈(整頓)문제를 과감하게 추진했다. 저우언라이의 비원(悲願)사업인 경제건설의 ‘4대 현대화’에도 박차를 가했다. 덩샤오핑은 린뱌오가 숙청했던 군관계자와 문혁에서 추방된 관료, 기술자 등을 대거 복권시켜 실용주의 노선을 강화하면서 ‘탈 문혁(脫文革)’ 정책을 펴나갔다. 위기의식을 느낀 ‘4인방’은 저우와 덩샤오핑을 공격할 돌파구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해방군 총정치부 주임을 겸하고 있는 장춘챠오가 포문을 열었다. 장춘챠오는 3월 1일 전군 각 부대단위 정치부 주임들을 소집한 회의에서 “무산자계급 독재이론을 학습해야 한다. 해방이후 경험주의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아 경험주의의 위험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불을 지폈다. 장춘챠오는 노골적으로 1972년 저우언라이가 극좌사조를 비판한 성과는 “류샤오치 노선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장춘챠오는 “(저우가) 4기 전인대에서 제기한 ‘웅대한 목표’는 무산자계급 독재이론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소련은)위성은 쏘아 올렸지만 붉은 깃발은 땅에 떨어졌다”며 소련의 수정자본주의를 빗대 맹비난했다. 

야오원웬도 같은 날 ‘논 린뱌오 반당집단의 사회기초’를 발표해 “현재 가장 위험한 것은 경험주의다”라고 주장했다. 4인방의 우두머리 장칭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경험주의’를 비판하고, 군 개혁과 경제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덩샤오핑을 공격하며 왕밍노선의 과오를 끌어다 에둘러 저우언라이를 비방했다.

마오는 조선의 주석 김일성을 회견하기 위해 4월 14일 9개월간의 남방체류를 끝내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덩샤오핑은 4월 18일 마오와 김일성의 회견이 끝난 뒤 마오에게 장칭과 장춘챠오 등이 주장하는 “경험주의는 현재 가장 위험”하다는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다. 마오는 덩샤오핑의 의견에 동의하고 4월 27일 중앙정치국 회의를 소집했다.

덩샤오핑은 회의에서 장칭 등의 경험주의 비판과 관련해 “이것은 (경험주의 비판)은 분명히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총리에 반대하는 행동이다”라고 장칭 등을 비판했다. 장칭 등은 덩샤오핑과 예졘잉의 비판을 “돌연한 기습”과 “포위공격”으로 치부하고 1970년 “루산회의의 재판”이라며 덩샤오핑 등을 공격했다. 마오는 5월 3일 밤 11시에 중난하이 자신의 거처에서 정치국 회의를 소집했다. 305병원에 입원중인 저우언라이도 참석했다. 마오는 이 회의에서 다시 ‘4인방’을 비판하고 안정과 단결을 강조했다. (주석 572)

“분열하지 말고 단결을 해야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하고 수정주의를 하지 말아야 한다. 단결을 하고 분열을 하지 말아야 한다. 광명정대 하고 음모와 모략을 하지 말아야 한다. ‘4인방’을 하지 마라. 자네들은 (4인방을)하지 말라. 왜, 여전히 하는가? 왜, 200여 명의 중앙위원과 단결을 하지 못하는가? 소수는 좋지 않다. 예로부터 좋지 않다. 이번에 과오를 저지른 것은 자아비판을 해야 한다. 이번과 루산회의는 서로 다르다. 루산회의는 린뱌오에 반대한 것으로 옳았다.” 

571)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72) 鄧小平主持1975年整頓的歷史機緣   人民網-文史頻道
     揭秘; 周恩來對덩鄧小平做最後的 ‘政治交代   何立波   中國共産黨新聞網  人民網
     ‘四人幇’預謀給葉劍英‘算總帳’ 鄧小平挨毛澤東批   劉志靑   ‘黨史博覽’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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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장칭, 4인방 자아비판…덩샤오핑 지휘 이후 경제지표 호전

 

마오는 ‘3가지 할 것과 3가지 해서는 안 되는 원칙을 말하면서 ‘4인방’의 자아비판을 요구했다. 마오는 이 3가지를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장칭을 호되게 비판했다.

“내가 보기에 장칭은 아주 하찮은 경험주의자다. 제멋대로 하지 말고 기율을 지켜야 한다. 근신하고 자신의 주장만 하지 말고 정치국에서 토론해야 한다. 의견이 있으면 정치국에서 토론하고 문건을 만들어 인쇄해 배포하면 된다. 중앙의 명으로 해야지 개인의 명의로 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나의 명의로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종래 어떤 자료를 보내지 않는다.”


마오의 이런 ‘4인방’에 대한 비판은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등을 지지하고, 장칭 등의 위세를 꺾는 구실을 했다. 이 회의는 마오가 마지막으로 주재한 정치국 회의가 됐다. 장춘챠오와 야오원웬이 자아비판을 한데 이어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던 장칭은 6월 28일 마오와 중앙정치국에 서면 자아비판의 글을 보냈다.

장칭은 “주석과 정치국 동지들에게 미안하고, 덩샤오핑 동지에 더욱 미안하다”면서 1년 동안 범했던 과오, 즉 ‘11차 노선투쟁’, ‘비림비공, 뒷거래 문제’, ‘주요 위험은 경험주의다’ 등에 대해 자아비판을 했다. 장칭은 자아비판 글에서 ‘4인방’의 존재를 인정했다. (주석 573)

“나는 ‘4인방’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비로소 (4인방이)당 중앙을 분열하는 파벌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깨달았다. 나는 비로소 주석이 왜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3, 4차례씩이나 말씀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것은)원래 하나의 중대한 원칙에 대한 문제로 주석은 원칙문제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서 나는 주요한 책임이 있다. 연루 된 그들(왕훙원, 장춘챠오, 야오원웬) 3명의 동지가 비판을 받은 데 대해 그들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상의 과오는 엄중한 것으로 주석이 말씀한 안정과 단결, 3가지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방침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잘못의 주요 원인은 세계관을 개조하지 못해 개인주의 주관주의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스스로를 명확히 알지 못해 근신하고 겸손하지 못했다. 주석의 지도에 따르고 당의 요구에 부응해 잘못을 고치겠다.”

장칭이 문혁 이래 마오에게 자아비판은 몇 번 했으나 직접 당 중앙에 서면으로 자아비판의 글을 제출한 것은 처음으로 그만큼 장칭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마오에 눈 밖에 난 것은 장칭뿐 아니라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왕훙원도 마찬가지였다. 왕훙원은 덩샤오핑이 7월부터 중앙의 일상 공작을 주재하면서 겉돌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이 의욕적으로 국정(國政)을 전면에서 진두지휘하면서 문혁의 파괴를 딛고 각종 경제지표가 호전양상을 보였다. 7월 어느 날, 덩샤오핑은 마오에게 국정현황을 보고했다. 전국의 생산성 현황의 추세가 좋은 편이다. 철강생산은 완전히 목표 치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희망이 있다. 올해 농업부문은 여름곡식 생산량이 풍년을 이뤘으며, 추곡생산량도 전망이 좋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덩샤오핑은 문혁으로 공직에서 추방됐던 간부들의 사면과 복권현황에 대해 보고하면서 일부(4인방)에서 복벽이며 류샤오치의 하부조직들이 일어서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는 내용을 전했다. 마오는 "(일을 하다보면)욕을 먹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예부터 욕을 먹어왔다"며 덩샤오핑을 신뢰하고 격려했다. 4인방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예ㅤㅈㅖㄴ잉 등 원로 진영과 행정 실무파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덩샤오핑의 국정전반에 대한 정돈작업은 마오가 말한 '3항 지시사항의 지도사상'을 기치로 해 전개되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7월 4일 중앙독서반 제4기반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석 574)

"마오쩌둥 동지는 3가지 중요지시를 했다. 하나는 이론을 학습하고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수정주의를 방지하는 것이다. 둘째는 안정과 단결이다. 셋째는 국민경제를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지시는 서로 연계돼 있는 전체로 어느 한 개를 떼어낼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이 시기에 추진해 나가야 할 지도사상이다. 마오쩌둥 동지는 지난해 문혁은 이미 8년이 됐다. 안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1년을 보태 9년이 됐다. 단결하고 안정을 해야 한다. 우리들은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국제방면의 투쟁과 일도 대단히 많다. 국내도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특별히 국민경제를 향상시키는 일이다."

 

 사진왼쪽부터 장칭과 야오원웬, 장춘챠오, 왕훙원

 

덩샤오핑은 '국민경제 향상'에 정책추진의 무게중심을 두면서 과단성 있게 전면적으로 추진해 뚜렷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4인방' 등에게는 '수정자본주의'의 빌미를 주는 양날의 칼로 작용했다. 이때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마오의 건강상태는 갈수록 더욱 나빠져 하반기 이후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날이 많았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몇 사람과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기도 했다.

7월 하순에 백내장 수술을 한 뒤 마오는 한 눈으로 볼 수 있었지만 눈을 보호하기 위해 중요한 문건이외에는 신변 공작원들이 읽어주었다. 문건 등의 자료를 읽는 것은 통상적으로 기요 여비서인 장위펑(張玉鳳 장옥봉)이 도맡아 했다. 마오는 특히 중국 고전문학 작품을 좋아했는데 고대 한문이 많아 장위펑이 해득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 베이징 대학 중문학과 여강사인 뤄디(蘆荻 노적)를 뽑아 마오에게 고전을 읽어 주는 일을 시켰다. 뤄디가 '수호(水滸)'를 읽어주다가 1974년에 학계에서 수호지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학술논쟁을 이야기하면서 마오가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한 평가를 물은 적이 있었다. 108명의 영웅호걸들이 양산박(梁山泊)에 모여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내용의 수호지에 대해 마오는 이렇게 평가했다. (주석 575)

"수호는 탐관오리들에게는 반대하나 황제에게는 반대하지 않는다. 송강은 투항하고 수정주의를 했다. 조개(송강이전의 우두머리)의 취의청(聚義廳)을 충의당(忠義堂)으로 바꾸고 사람들을 (황제에게)귀순하도록 했다. 송강과 고구의 투쟁은 지주계급 내부의 한 파가 다른 한 파에 대한 투쟁이었다. 송강은 투항해 방랍(方臘)을 처부셨다. 이 농민기의(農民起義) 대오의 영수들은 좋지 않다. 투항했다. 이규, 오용, 완소이, 완소오, 완소칠은 좋았다. 투항하지 않았다."


루디와 마오가 수호지를 이야기 할 때 곁에 있었던 여비서 장위펑은 마오의 수호지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회상했다.

"64년 우한에서 내가 수호지를 볼 때 주석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송강은 투항파로 수정주의를 했다. 귀순은 투항으로 황제를 대신해 일을 처리했다. 그런데 그들은 현재 또 이 책이 좋은 책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어디가 좋은가? 이때 주석이 이렇게 말했다. '좋은 것은 투항에 있다. 반면교사로 사람들이 모두 투항파를 알도록 해 준다고 말했다."

573) 毛澤東傳(下0 1949-1976  逢 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最後的‘政治碰撞’ 使毛澤東下決心進行 ‘批鄧’   人民網-文史頻道
     ‘四人幇’ 惡毒誣蔑鄧小平;江靑的話使毛澤東震怒   人民網-文史頻道
574)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75)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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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4인방, 마오 ‘수호지 담화’로 덩샤오핑 공격해보지만…

 

루디는 마오가 자신과 이야기를 하면서 평가한 수호지 담화(談話)를 정리해 마오에게 보내 출판을 건의했다. 마오가 승낙해 이 담화기록은 선전, 출판 당담인 야오원웬에게로 보내졌다. 마오의 '4인방' 비판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야오원웬은 이 수호지 평론을 읽어 보고 '만세'를 불렀다. 정치적 꼼수가 발달한 야오원웬은 마오의 수호지 평론을 빌려 '4인방'이 활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낸 것이다. 야오원웬은 곧바로 붓을 들어 마오의 수호지 평론과 마오가 좋게 평가한 루쉰(魯迅 노신)의 수호지 평론을 함께 실어 인쇄해 배포할 것을 제의하면서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오의 수호 평론은) 중국 공산당원, 중국 무산계급, 빈농, 하층 중농과 모든 혁명군중이 현재와 미래, 본세기와 21세기에 마르크스주의를 견지하고 수정주의에 반대해 마오 주석의 혁명노선을 견지해 나아가는 데 중대하고 심오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교사의 작용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습니다."

마오의 비준이 떨어지자 장칭 등 4인방은 "짝! 짝! 짝!"박수를 치며 일제히 '수호(水滸)의 전사'가 되어 칼을 갈기 시작했다. 장칭은 먼저 자신과 친밀한 사람들과 '수호의 현실적 의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수호'의 요체는 조개를 떠받드는 척 하는 겁니다. 현재 당내의 어떤 사람은 마오 주석을 떠받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배척하고 있습니다"라고 '어떤' 사람을 공격했다. '어떤' 사람은 바로 덩샤오핑이었다.

오랫동안 얼굴을 비치지 않았던 장칭은 '수호 평론'을 계기로 각종 공개 장소에 출몰해 곳곳에 이런 비방을 퍼뜨렸다. 야오원웬은 '4인방'이 장악하고 있는 인민일보를 비롯한 신문에 투항파의 참모습을 알리자 등의 '수호 비판'을 싣고, 수정주의를 막고 무산자계급 독재 아래에서 계속혁명을 위해서는 투항파에 반대해야 한다는 논지를 펴며 공격의 창끝을 덩샤오핑에게 들이 밀었다.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수호 비평'을 빗댄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인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국무원은 9월 15일 산시성(山西省 산서성) 시양(昔陽 석양)현에서 당, 정, 군 영도자들과 각 성, 시 책임자 등 3천 7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농업학 대채(大寨)회의를 열었다. 덩샤오핑은 개막사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주석 576)

"이번 회의는 1962년 7천인 대회의 회의에 버금할 만큼 중요하다. 저우 총리가 4기 전인대에서 거듭 밝힌 '4개 현대화'의 웅대한 목표를 완성하기 위해 우리들은 반드시 깨어있는 머리로 현재의 낙후한 현상을 바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큰 힘을 발휘해 농업 현대화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현재 전국 각 방면에서 정돈(整頓)하는 문제가 진행되고 있다. 마오 주석은 군대를 정돈하고 지방을 정돈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방의 정돈은 또 여러 방면으로 공업, 농업을 정돈하고 상업도 정돈해야 하며 문화교육, 과학기술 대오도 정돈해야 한다. 마오 주석은 조정(調整)이라고 부르는 데 실제상으로 '조정'은 바로 '정돈(整頓)'이다."

여기서 정돈은 쇄신 또는 혁신, 개혁을 뜻했다. 장칭은 회의의 주제인 농업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수호 평가'와 '두 노선투쟁'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장칭은 일부러 과격한 용어를 구사하며 연설해 참석한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고 뜨악해 하며 놀랐다. 장칭은 연설이 끝난 뒤 녹음한 자신의 발언내용을 방송하고 인쇄해 배포할 것을 요구했다.

"'수호'를 평론하는 것은 단순한 문예평론이나 역사평론이 아니다. 그것은 당대의 의미가 있는 큰일이다. '수호'의 요체는 조개를 배척하고 조개를 받드는 척하며 투항하는 것이다. 송강은 토호와 악랄한 지주, 탐관오리를 받아들여 각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수호'의 비판은 바로 모두가 우리들 당 내에 투항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덩샤오핑은 9월 24일 마오와 만났을 때 장칭의 수호비판 이야기를 했다. 마오는 화가 나 "헛소리 했구만! 이야기가 맞지 않아. 농업을 배워야 할 자리에서 그녀(장칭)가 '수호'비판을 하다니.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위(중앙 정치국; 필자 주)에서 장칭이 말한 원고를 배포와 녹음한 내용을 방송하지 말고, 발언원고를 인쇄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마오는 이때까지도 덩샤오핑이 추진하고 있는 정돈공작을 지지하며 계속 신뢰를 보였다. 하반기에 들어 국민경제 상황이 계속 호전되고 있었다. 공, 농업 생산 각 부문의 지표가 안정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1975년 국내생산총액은 지난해 보다 8.7% 증가했고, 그 중 공업 총생산은 15.5% 늘어났다. 농업 총생산도 3.1% 증가했다. 덩샤오핑이 이끌어 나가고 있는 전면 정돈은 실질적으로 '문혁' 이래 나타난 '좌'경적 과오를 바로잡아 나가는 것이었다. 당의 정책이 뿌리를 내리면서 당과 국가의 공작도 점차 정상궤도로 들어섰다. 덩샤오핑은 나중에 이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1975년은 내가 중앙의 일상적인 공작을 주재했다. 정돈(整頓)이라고 불렀던 그때의 개혁은 경제를 강화하는 것으로 먼저 생산 질서의 회복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방에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돈이란 개혁을 추진했지만 국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576) 鄧小平主持1975整頓的歷史機緣  人民網-文史頻道   ‘四人幇’ 惡毒誣蔑鄧小平; 江靑的話使毛澤東震怒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1975年對鄧小平; ‘四人幇’現在不行了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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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마오의 조카 ‘마오웬신’ 등장에 정책국면 혼돈  

 

문혁의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덩샤오핑의 정돈으로 경제상황이 호전되고 사회가 안정화의 틀을 잡아갈 즈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정치국면을 한꺼번에 역전시키는 일이 발생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9월에 마오의 조카 마오웬신(毛遠新 모원신)이 파킨슨병으로 건강이 악화한 마오의 몸을 돌보며 마오와 중앙 정치국과의 연락업무를 위한 비공식 직책인 '마오쩌둥 판공실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4인방'은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마오웬신은 이때 36살로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을 졸업한 뒤 문혁에 참가한 조반파로 랴오닝(遼寧 요령) 성위원회 서기, 성 혁명위원회 부주임, 선양(沈陽 심양)군구 정치위원을 지냈다.

마오웬신은 마오의 첫째 동생인 마오쩌민(毛澤民 모택민)의 아들이다. 마오쩌민이 1943년 신장(新疆 신강)에서 군벌 성스차이(盛世才 성세재)에게 비밀리에 살해된 뒤 마오웬신은 어렸을 때부터 마오의 집에서 자랐다. 때문에 장칭(江靑 강청)과 가까웠고, 사상이나 정치적 성향이 장칭과 일치했다.

마오는 만년에 장칭을 대단히 혐오해 장칭을 멀리하고 마오의 뜻을 당정군에 전달할 연락원으로 마오웬신을 곁에 두게 된 것이다. 마오의 상방보검을 가진 마오웬신이 4인방의 편들고 덩샤오핑을 깔아 뭉개기 시작했다. (주석 577)

마오웬신은 9월 27일 마오에게 "사회에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바람)입니다. 긍정이냐 부정이냐 입니다. 성과가 7개 손가락(백분율로 70%)이냐 과오가 7개 손가락이냐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마오웬신은 특히 "이 바람은 72년에 극좌를 비판한 것(저우가 린뱌오를 극좌로 비판한 것을 일컬음; 필자 주)보다 더 사납습니다"라고 마오를 충동질했다.

마오웬신은 11월 2일에는 "저는 덩샤오핑 동지의 발언을 대단히 주의 깊게 듣다가 하나의 문제점을 느꼈습니다. 그(덩샤오핑)는 문혁의 성과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고 류샤오치의 수정주의 노선을 별로 비판하지 않습니다"고 마오에게 말했다. 마오웬신의 이런 덩샤오핑에 대한 비판은 마오의 중요한 관심을 끌었다.

마오는 건강악화로 마오웬신이 자신과 중앙 정치국을 잇는 연락원으로 일하면서 외부와의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아 정확한 정치상황을 판단하지 못한 채 마오웬신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근거로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이즈음에 발생한 '편지사건'은 마오가 덩샤오핑을 의심하는 또 하나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칭화(淸華)대학의 당 위원회 부서기 류빙(劉氷 유빙)이 8월에 칭화대학을 거점으로 한 '4인방'의 전담 집필진으로 장칭을 추종하는 학교 당 위원회 서기 츠췬(遲群 지군)과 부서기 셰징이(謝靜宜 사정의)의 공작기풍과 사상의식  문제를 비판하는 서신을 마오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이 편지는 덩샤오핑을 통해 마오에게 전달됐다. 류빙 등은 10월에 쓴 두 번째 편지도 덩샤오핑을 거쳐 마오에게 건네졌다. 류빙 등이 덩샤오핑을 통해 전달한 것은 마오에게 직접 보낼 경우 비서들이 문질러 버릴까봐 하는 우려에서였다. 편지를 본 마오는 비서들에게 류빙 등이 8월에 보낸 편지를 찾아오도록 했고, 두통의 편지를 읽은 마오는 큰 불만을 터뜨렸다. 마오는 류빙 등의 편지가 '문혁'에 대한 불만을 대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마오는 10월 19일 부총리 리셴녠, 중앙판공청 주임 왕둥싱과 류빙 등이 보낸 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석 578)

"현재 한 줄기 바람이 불고 있다. 나는 장칭을 비판했다. 비판받은 장칭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칭화대학 류빙 등이 츠췬과 셰징이를 고발하는 편지를 보았다. 동기가 불순하다. 츠췬과 셰징이를 타도하려는 생각이다. 그들 편지의 창끝은 나를 겨누고 있다. 츠췬이 반혁명인가? 틀렸다. 비판은 비판이어야 한다. 비평으로 타도하려한다. 타격을 주는 비평으로 죽이겠다?"

"내가 베이징에 있는 데 편지를 왜 직접 나에게 보내지 않고 (덩)샤오핑을 통해서 전달했나. 당신들은 샤오핑에게 주의하라고 말하라. 샤오핑은 류빙을 편들고 있다. 당신들 6명(덩샤오핑, 리셴녠, 왕둥싱, 우더(吳德 오덕), 셰징이, 츠췬)은 먼저 회의를 열어 처리하라."

베이징 시 당위원회 책임자는 류빙 등의 편지에 대한 마오쩌둥의 의견을 칭화대학에 전달했다. 칭화대학은 '교육혁명'에 관한 대토론회를 벌여 이른바 '우경 번안풍(右傾飜案風; 덩샤오핑이 문혁의 오류를 바로잡아 추진한 명예회복과 복권을 극좌파인 4인방은 오른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비판해 부름; 필자 주)'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마오는 11월 2일 이 사건과 관련해 마오웬신에게 "두 가지 태도다. 하나는 문혁에 대한 불만이고, 두 번째는 문혁을 청산하려 하는 것이다. 그들(류빙 등) 편지의 창끝은 나를 겨누는 것이다. 칭화대학의 문제는 독립된 것이 아니다. 현재의 두 가지 노선투쟁의 반영이다. 너는 샤오핑과 왕둥싱, 천시롄을 찾아가 너의 의견을 전부 말해라. 우물쭈물하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라. 너는 그(덩샤오핑)를 제고시키는 데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오는 덩샤오핑이 1973년에 부활한 이래 이런 용어로 덩샤오핑을 비판한 적이 없었다. 

마오가 말한 '두 가지 노선투쟁'은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근본적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마오는 '문혁'은 자신이 일생 중 추진한 두 가지 일 중의 하나로 사회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신앙에 가까운 신념을 갖고 있었다.

마오는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어떤 사람들이 '문혁'을 뒤집으려 한다는 걱정과 불안을 점점 더 많이 느꼈다. 마오는 덩샤오핑이 1975년 중앙의 일상 업무를 주재하면서 전면적 정돈을 추진한데 대해 깊은 신뢰와 지지를 보내며 의지했다.

덩샤오핑이 '문혁'을 옹호하는 전제아래 당과 국가를 잘 통치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마오는 장칭 등 '4인방'이 여러 차례 덩샤오핑을 비판해도 견결하게 덩샤오핑을 지지하고 바람막이가 돼 왔다. 헌데 이제는 덩샤오핑을 믿을 수 없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577) 毛遠新被捕時拒絶交出手槍; 大喊 ‘主席尸骨未寒   人民網-文史頻道
578)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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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덩샤오핑, 마오와 ‘문혁 충돌’ 실각 위기

 

마오웬신은 이날(2일) 마오의 지시에 따라 덩샤오핑과 왕둥싱, 천시롄을 찾아가 이야기하다 덩샤오핑과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덩샤오핑은 "자네(마오웬신)가 중앙이 수정주의 노선을 집행하고 모든 부문에서 주석의 노선을 집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전국의 형세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실천이 증명할 것이다"라고 했다. 덩샤오핑은 그러면서 자신도 자아비판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중앙 정치국은 11월 20일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회의를 열어 '문혁'의 평가문제를 토론하고 '문혁' 평가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덩샤오핑의 과오에 대한 비판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마오는 여전히 덩샤오핑이 마음을 바꿔 '문혁'을 평가하는 데 자신의 뜻에 따라 인식을 같이하기를 바랐다. 마오는 '문혁'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를 '3대7 평가(三七開 삼칠개)', 즉 '70%는 성과가 있었고, 30%는 과오가 있었다'는 식으로 '문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기를 원했다. 마오는 덩샤오핑이 이런 기조에 따라 정치국 회의를 주재해 '문혁'에 관한 결의를 해주기를 바랐다. 마오의 이런 생각은 장칭 등의 '입'을 틀어막고 자신과 덩샤오핑이 계속 정치적 연대의 틀을 유지하면서 국정운영을 이끌어 갈 마음이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문혁'에 대한 자신의 원칙적 입장을 고수했다. 덩샤오핑은 "내가 이 결의를 주재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나는 도화원(桃花源 도화원;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말로 별천지를 일컬음; 필자 주)의 사람으로서 한(漢)나라를 모르는 데 어찌 위(魏)나라와 진(晉)나라를 논할 수 있겠는가(不知有漢, 何論魏晉 불지유한, 하론위진)"라며 완곡하게 마오의 뜻을 거절했다.

덩샤오핑이 저우언라이가 입원한 301병원을 찾아가 마오와 이야기한 내용을 저우에게 보고했다. 저우언라이는 눈을 크게 떠 덩샤오핑을 바라보면서 "자네는 (그것도) 참지 못한단 말인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우는 앞으로 닥칠 역풍(逆風)을 걱정하며 덩샤오핑에게 쓴 소리를 했다. 마오에 대한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성격과 인생관에 따른 대응방식의 차이였다. 정치국 위원이었던 지덩쿠이(紀登奎 기등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579) 

"마오 주석은 본래 문혁을 3년에 끝내려고 했다. 조종하지 못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미 9년이 됐다. 안정과 단결을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문혁'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룰 수 없었다. 린뱌오 사건이후 이미 '문혁'이 이론적이고 실천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마오 주석의 뇌리에는 의문부호가 찍혔다. (덩)샤오핑이 정치를 이끌면서 '문혁'에 대한 일련의 조처를 시행했다. 류빙의 편지사건 이후 마오 주석의 뜻은 덩샤오핑이 '문혁'에 관한 결의를 해 주기를 바랐다. 마오 주석은 '3대7 평가'를 말했다. 샤오핑은 나는 도화원 중의 사람으로 잘 모른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덩샤오핑의 막내딸 덩룽(鄧榕 등용)은 자신이 쓴 '나의 아버지 덩샤오핑, 문혁의 세월'에서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마오쩌둥이 덩샤오핑으로 하여금 이 결의를 하도록 주관하게 한 것은 첫째 덩샤오핑 같은 (문혁에 부정적 시각을 가진) 사람이 결의를 하게 함으로써 문혁에 대해 이의(異議)를 가진 사람들의 입을 막고, 사람들이 감히 다시는 반대의 논조를 외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둘째는 마오쩌둥이 덩샤오핑에게 기회를 주어 덩샤오핑이 관점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에 대해 정말로 '모든 성의를 다했다(仁至義盡 인지의진)'고 말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마음을 분석해 보면 그는 진심으로 덩샤오핑의 재능과 성품을 알아주었고, 또 덩샤오핑의 '문혁'에 대한 태도에 대해 분노하고 원망했다."

"그(마오쩌둥)가 덩샤오핑을 다시 이해한 것은 덩샤오핑이 타협해 마오쩌둥의 마지막 바람에 순종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정말 너무 늙었고, 너무 지쳐있었다. 이번 '안정단결'의 정치구조는 그(마오쩌둥)가 오랫동안 고려하고 선택한 것으로 부득이한 상황이 아닌 한 그는 다시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비애(悲愛)는 덩샤오핑이 마오쩌둥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고, 원칙적인 문제에 있어서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이런 간절한 기대에도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명확하게 내가 이 결의를 이끌어내는 회의를 주재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도화원에 있었던 사람으로 한(漢)나라를 모르는데 어찌 위(魏)나라와 진(晉)나라를 논할 수 있겠는가. 덩샤오핑은 명명백백하게 말했다."

그랬다. 덩샤오핑은 9년간의 '문혁' 중에 6년 동안 타도되어 이른바 '세상 밖(世外人)' 사람으로서 '문혁'에 참가하지 않아 이해하지 못한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문혁 중의 과오를 자아비판해 부활한 만큼 이런 논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덩룽이 기술한 것처럼 덩샤오핑이 '문혁'을 긍정하는 결의를 이끌어내는 회의를 주재하는 것은 원칙을 지키려는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로 원치 않았다는 것이 한결 설득력을 갖는다.

마오라는 '사람'은 유한하지만 '역사'는 무한한 만큼 정치인으로써 역사에 기록될 정치적 신념과 소신을 지키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인내심 있게 덩샤오핑을 회유하려던 절대적 카리스마로 군림한 마오는 큰 상처를 입었다. '문혁'에 대한 긍정이냐, 부정이냐를 놓고 벌어진 마오와 덩샤오핑의 정치적 갈등은 두 사람의 살아생전에 마지막 충돌이었다. 마오의 덩샤오핑에 대한 지원과 믿음은 이제 분노와 증오로 줄달음질 쳤다. 

중공중앙은 11월 26일 덩샤오핑의 자아비판과 문혁에 부정적인 원로들에 대한 '주의' 등을 뼈대로 한 '담화요점(講話要点 강화요점)'을 전국 성, 시, 자치구, 각 대 군구, 군사위원회 총부(總部) 등에 발송해 토론을 하도록 했다. 이 문건 토론을 신호탄으로 서리 맞은 풀잎처럼 축 쳐져 있던 장칭 등 4인방들은 미친 듯이 환호하며 '우경 번안풍(右傾飜案風)'에 대한 반격의 포문을 열었다. '우경 번안풍'에 대한 반격운동은 곧바로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갔다.

12월 8일 덩샤오핑은 병상에 누워있는 저우언라이를 찾아갔다. 저우언라이는 '우경 번안풍' 반격운동에 분개했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다. 저우는 이때 덩샤오핑에게 정치적 태도를 물었고, 덩샤오핑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겁니다!"라는 자신의 굳건한 신념을 밝혔다. (주석 580)

마지막이 된 이들의 대화에서 저우언라이는 "나는 안심했다!"며 덩샤오핑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를 '형님(兄長 형장)'으로 모시면서 평생 공경하고 존경했다. 덩샤오핑이 정력적으로 추진했던 9개월 동안의 '정돈(整頓)'이름의 개혁은 전면 중단됐다. '정돈'의 주역 덩샤오핑은 12월 20일 정치국 회의에서 자아비판을 한데 이어 1976년 1월 3일 두 번째 서면 자아비판의 글을 마오에게 보냈다. 덩샤오핑은 1, 2차에 걸친 자아비판을 하면서 마오를 면담해 진술할 기회를 요청했으나 마오는 만나주지 않았다. 마오는 외교 부문 이외에 덩샤오핑의 모든 국가행정 업무를 정지시켰다. 덩샤오핑은 실각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579) 毛遠新幇鄧小平 ‘轉彎子’; ‘文革’ 應當三七開   霞 飛   ‘黨史博覽’  人民網
     最後的 ‘政治?撞’ 使毛澤東下定決心進行‘批鄧’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及   中央文獻出版社
580) 1975年周 恩來斥責鄧小平; ?就不能忍一忍?  秦九鳳   ‘黨史博覽’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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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저우의 죽음… 후계엔 4인방 아닌 화궈펑 임명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 마오와 함께 중국혁명을 이끌어 온 저우언라이가 ‘너 죽고, 나 살기’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또 다시 몰아치고 있는 소용돌이 속에서 78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우언라이는 1974년 6월 1일 입원한 이래 13번의 크고 작은 수술을 받았다.

저우는 중병을 앓으면서도 문건을 비준하고 처리하는 것 이외에 중앙 책임자들과 161차례나 이야기를 나눴으며, 63차례에 걸쳐 외빈을 만났다. 저우는 죽음을 앞두고도 헌신적으로 국가와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자세를 보여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덩샤오핑은 이탈리아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저우 총리의 일생은 근면하고 성실했으며,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일한 분이다. 그(저우)는 하루 일하는 시간이 12시간이 넘었으며 어떤 때는 16시간 이상을 일했다. 일생이 그러했다. 나는 아주 일찍 프랑스에서 ‘근공검학(勤工儉學 노동하며 공부하는 유학생)’할 때 총리를 알게 되었다. 나에게 그는 시종 형님(兄長)이었다. 우리들은 거의 동시에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동지들과 인민이 대단히 존경하는 분이다”라고 저우언라이를 높이 평가했다. (주석 581)

신중국 건국 후 죽을 때 까지 26년 동안 총리를 한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후계자뿐 아니라 마오 사후 후계자로 지목하는 등 덩샤오핑의 재능과 인품을 무척 아끼고 좋아했다. 저우는 건국초기 부총리 보이보(博一波 박일파)와 한담을 하면서 덩샤오핑에 대한 공작을 평가한 적이 있었다.

저우는 덩샤오핑의 일하는 스타일이 대담하고 과단성이 있어 큰일을 간단하게 처리하는 “거중약경(擧重若輕)’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칭찬한 바 있었다. 저우언라이의 사망으로 덩샤오핑에 대한 비판회의는 잠시 유보됐다. 저우언라이의 죽음은 다음날인 9일 새벽 신화사 통신이 마오쩌둥을 우두머리로 하는 107명의 저우언라이 장례위원회 명단을 발표하면서 국내외에 알려졌다.

당시 외국기자들은 저우언라이의 죽음이 알려진 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모두 침통한 표정”을 지었으며, “열차에 탄 군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기관, 아파트, 학교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흐느껴 울었다” 등의 스케치 기사를 타전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의 부음을 듣고 양미간을 찌푸리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감았던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마오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중국의 대외관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되는 닉슨의 중국 방문 때 공항에서 닉슨을 영접하는 저우언라이(오른쪽).

 

 

마오의 여비서 장위펑(張玉鳳 장옥봉)은 장례식 때 마오에게 “총리의 추도식에 참석하시겠느냐”고 물었다. 중병으로 병상에 누워있던 마오는 “나도 가야하는 데 움직일 수가 없다”며 끝내 참석하지 못한 채 ‘하늘이 맺어 준 동반자’인 옛 전우, 저우언라이를 그렇게 보냈다. 90살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주더(朱德 주덕)는 공작원이 저우언라이가 유언에서 자신을 화장해 조국의 산하에 뿌려달라고 했다는 보고를 들은 뒤 이렇게 말했다. (주석 582)

“죽은 뒤에 화장하는 것은 하나의 혁명이다. 총리는 당과 국가, 인민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화장으로)죽을 때 까지 (혁명을)다하는 것은 정말로 철두철미한 혁명가이다.”

주더는 1월 11일 오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베이징 병원에 마련한 저우언라이의 빈소를 찾아가 영전(靈前)에서 눈물을 흘리며 낮게 오열하는 목소리로 “언라이! 언라이!”하며 저우의 이름을 불렀다. 노 원수 주더는 천천히 떨리는 오른손을 들어 이제는 볼래야 볼 수 없는 혁명의 맹우이자 인생의 한참 후배인 저우에게 정중하고 엄숙하게 경례를 올렸다.

1월 11일 저우언라이의 주검은 바바오산(八寶山 팔보산) 혁명열사 묏터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서도 전국 각지에서 몰려 온 백만 명에 이르는 인민들이 톈안먼 동서를 가로지르는 창안졔(長安街 장안가) 양쪽 길가에서 저우언라이 영정을 실은 영구차를 향해 ‘사랑하는 총리’를 눈물로 배웅했다.

마오는 14일 오후, 다음날 열릴 저우언라이의 장례식에서 중공중앙을 대표해 추도사를 할 덩샤오핑의 추도 원고를 비서가 읽어주자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목메어 통곡했다. 3천자에 이르는 추도사는 저우언라이의 수십 년 동안의 혁명생애를 자세하게 회고하고 그의 역사적 공헌을 높게 평가했다.

저우언라이 서거이후 국내외의 최대의 관심은 누가 저우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느냐에 쏠려있었다. 본래는 국무원 제1부총리인 덩샤오핑이 이어받도록 되어있으나 ‘우경번안풍’ 반격운동이 2개월 째 계속되고 있었고, 덩샤오핑은 비판을 받고 있어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장칭 등 4인방은 국무원 부총리 서열 2위인 장춘챠오의 총리 승계를 따 놓은 당상으로 여겼다. 중공중앙은 2월 2일, 1976년 ‘1호 문건’인 ‘통지’를 발표했다. 통지는 이랬다. (주석 583)

1. 중앙 정치국은 마오 주석의 제의에 따라 화궈펑(華國峰 화국봉)을 국무원 총리대행으로 임명하는 것을 일치해 통과시켰다. 

2. 중앙 정치국은 마오 주석의 제의에 따라 예ㅤㅈㅖㄴ잉이 병이 난 기간 동안 천시롄(陳錫聯 진석련)이 중앙 군사위원회 공작을 책임지도록 일치해 통과시켰다.             

마오의 이런 인사조처는 ‘문혁’에 대한 어떤 도전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강고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자신이 제의한 ‘문혁 평가’, 즉 ‘70% 공적, 30% 과오’를 거절한 덩샤오핑 뿐 만 아니라 문혁에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는 예ㅤㅈㅖㄴ잉도 ‘병이 났다’는 구실을 붙여 군사 주재공작에서 손을 떼도록 한 것이다. 마오는 그러면서도 당, 정, 군의 ‘대권(大權)’을 문혁을 추진하고 옹호하는 장칭 등 4인방에게 넘기지 않았다. 4인방들은 큰 실망을 하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자신이 총리가 될 줄 알았던 장춘챠오는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어 노트에 ‘유감(有感)’이란 제목아래 이렇게 소회를 적었다.

“또 하나의 1호 문건이다. 지난 해 1호 문건을 발표했다. 그 뜻을 이루어 더욱 미쳐 날뛰었다. 오는 것이 빨랐고, 오는 것이 흉맹스럽고, 무너진 것 역시 빨랐다. 인민이 결정적 요소다.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고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인민 군중의 편에 서고 선진분자의 편에 서면 승리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여기서 장춘챠오가 ‘오기도 빨랐고, 무너진 것도 빨랐다’는 것은 덩샤오핑을 가리킨 것이지만 장춘챠오는 덩샤오핑과 함께 화궈펑이 ‘오기도 빨랐고, 무너지기도 빠르다’고 저주한 것이다. 장춘챠오는 인민이 결정적 요소라고 하면서 인민의 이익과 인면의 편에 설 것을 다짐했지만, 그것은 사이비 정치꾼들이 항용 하는 소리로 실제적으로는 인민을 팔아 ‘4인방’의 권력탈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마나한 소리였다. 마오에 대해 불만을 품은 4인방들은 덩샤오핑과 예ㅤㅈㅖㄴ잉이 힘을 쓰지 못하게 돼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면서 이런 계기를 이용해 이들을 ‘확인사살’하고 화궈펑을 타도하기 위해 새롭게 전열을 정비했다.

화궈펑은 당시 55살로 1921년 산시성(山西省 산서성) 자오청(交城)현 출신으로 193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신중국 건국 후 대부분 후난(湖南 호남)에서 공작을 하면서 마오의 고향인 상탄(湘潭 상담)현 위원회 서기, 지방위원회 서기 등을 거쳐 성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마오가 50, 60년대 후난에 자주 현지시찰을 내려갔을 때 공작보고와 수행 등으로 지우를 얻었다. 이때 마오는 화궈펑에 대해 ‘충실하고 성실하다’는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문혁 때 후난성 혁명위원회 부주임이었던 화궈펑은 마오의 배려로 1969년 9대회의 때 처음으로 중공중앙 중앙위원에 진입했다. 화궈펑은 그 후 후난성 혁명위원회 주임, 후난성 제1서기, 인민해방군 광저우 군구 정치위원 겸 후난성 군구 제1정치위원을 역임해 후난성의 당, 정, 군의 주요 영도자로 명실상부한 후난의 ‘제1인자’가 되었다.

화궈펑이 후난이외의 중국인과 외국인들에게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진 것은 마오가 1970년 12월 18일 미국의 저명한 신문기자 에드가 스노우와 인터뷰할 때 나왔다. 마오는 고향 이야기를 하다 “후난성에 몇 명의 인물이 나왔다. 첫 번째로 후난성 제1서기 화궈펑은 ‘노인(老人; 후난 성위원회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란 뜻)’으로 성실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인터뷰에서는 중미관계와 닉슨 방중 등 극히 민감한 문제 등이 거론됐었다. (주석 584)

스노우는 이런 내용을 정리해 미국 ‘라이프’지에 실어 전 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을 때 화궈펑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나중에 ‘비림정풍’운동이 거세게 불 때 마오와 스노우의 인터뷰 내용을 묶은 ‘마오 주석이 미국 우호인사 스노우와 회견한 담화기요’를 당내외의 군중들에게 배포해 중국인들도 화궈펑의 이름을 알게 됐다. 린뱌오가 달아나다 추락사한 ‘9.13’사건 이후 화궈펑은 마오의 제의에 따라 처음으로 중앙의 공작에 참여해 잇따라 국무원 업무조 부조장, 조장을 맡았다.

화궈펑은 1973년 5월 왕훙원(王洪文 왕홍문), 우더(吳德 오덕)와 함께 중앙 정치국 회의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해 중앙 정치국의 공작에 참가하게 되었다. 화궈펑은 중공 10대 때 중앙 정치국 위원에 당선됐고, 1975년 1월 제4기 전인대에서 국무원 부총리 겸 공안부장으로 임명된 바 있었다. 마오를 충실하게 추종하는 화궈펑은 중앙에 정치적 기반이 없어 4인방과 혁명원로 집단 사이에서 중간자적 입장을 고수했다.

581)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爲什?不選周恩來做接班人?  葉永烈   人民網-文史頻道
     在周總理, 朱總司令, 毛主席相繼逝世的日子  ?言成  口述  王凡  整理   人民網
582) 在周總理, 朱總司令, 毛主席相繼逝世的日子   ?言成  口述  王凡  整理   人民網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及   中央文獻出版社
583) 毛澤東生平全 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四人幇’ 惡毒誣蔑鄧小平; 江靑的話使毛澤東震怒   人民網-文史頻道
584) 1976年葉劍英和華 國峰是如何聯手的   時政頻道  新華網
     毛澤東爲何下定決心將華國峰作爲自己最後選定的接班人?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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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덩샤오핑 비판 지시에 전국 또 다시 대혼란 속으로

 

4인방은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언론을 활용해 저우언라이의 서거를 애도하는 인민들에게 찬물을 끼어 얹는 사설들을 실어 저우언라이를 평가절하하고 덩샤오핑을 비판했다. 4인방의 사주를 받은 전문 집필진들은 1976년 2월 13일 ‘광밍르바오(光明日報 광명일보)’에 ‘공자의 걱정(孔丘之憂 공구지우)’이란 제목의 사설을 실어 “구제도의 ‘곡을 하는 부인(哭喪婦 곡상부)’은 공자의 해골을 끌어안고 근심 걱정으로 애가 타 땅을 치며 대성통곡 한다”고 악랄한 용어를 구사하며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고, 저우의 죽음을 슬퍼해 애도하는 인민들을 ‘곡을 하는 부인’으로 묘사해 멸시하며 빈정댔다. 인민들의 4인방에 대한 분노는 분출구를 찾아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중공중앙은 3월 3일 ‘우경 번안풍을 반격하고 덩샤오핑을 비판하라는’ 내용을 뼈대로 한 ‘마오 주석의 중요지시’를 배포했다. 주요내용은 이랬다. (주석 585)

“사회주의 시기의 계급투쟁에 관하여. 사회주의 사회는 계급투쟁이 있는가? ‘3항 지시의 벼리(綱 강)’는 무엇인가. 안정과 단결은 계급투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이 벼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세목(細目)이다. 1949년(신중국 건국 후)에 제기한 국내 주요 모순은 무산계급의 자산계급에 대한 모순이다. 13년 후 다시 제기한 계급투쟁 문제는 형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문화대혁명은 무엇을 한 것인가? 계급투쟁이다.”

“어째서 일부의 사람들은 사회주의 사회의 모순문제를 분명히 보지 못하는가? 문제는 자신이 속한 소자산계급의 사상이 우경화가 용이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자산계급을 대표하면서 오히려 계급모순을 분명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일부 동지, 즉 주요한 것은 노(老) 동지들의 사상이 아직도 자산계급 민주혁명 단계에 머무르고 있으며, 사회주의 혁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위화감을 느끼고, 심지어는 반대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하면서 자산계급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공산당 내에 자본주의 길을 걷는(주자파) 당권파들이 있다. 주자파들은 여전히 (자본주의의 길을)걷는다. 1백년 후에 혁명이 필요 한가, 아닌가? 1천년 후에 혁명이 필요 한가, 아닌가? 항상 혁명을 해야 한다.”

“문화대혁명 평가에 관하여. 문화대혁명에 대한 견해는 기본적으로 정확하지만 다소 부족하다. 현재 연구할 것은 다소 부족한 방면이다. 3대7 평가로 70%는 업적이고 30%는 과오로 견해가 일치할 필요는 없다. 문화대혁명은 두 가지 과오를 범했다. 첫째는 모두를 타도한 것이고, 둘째는 전면 내전이다. 모두를 타도한 그중의 일부분, 예를 들면 류샤오치와 린뱌오 집단의 타도는 옳았다. 일부는 잘못 타도되었다. 예를 들면 많은 노(老) 동지들이다. 이들 또한 과오가 있어 비판할 수 있다.”

“전면내전은 총을 빼앗아 싸움을 한 것으로 하나의 단련이다. 단, 사람을 죽게 하거나 부상자를 구조하지 않은 것은 좋지 않았다. 덩샤오핑, 이 사람은 계급투쟁을 틀어쥐지 않았고, 예부터 이것을 벼리(綱 강)로 삼지 않았다. ‘흰고양이, 검은 고양이(白猫黑猫 백묘흑묘)’하며 제국주의든 마르크스주의든 구분하지 않는다. 그(덩샤오핑)는 아직 인민내부 문제로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그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비판해야 하지만 몽둥이로 죽여 버려서는 안 된다. 서로 돕고 과오를 고쳐 잘 단결하고 일을 잘 해야 한다.”


마오쩌둥의 이 ‘지시’의 가장 주요한 목적은 생명이 꺼져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이 직접 발동한 ‘문혁’(의 성과)을 후인들이 뒤집지 못하도록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마오는 ‘문혁’을 지키기 위해 ‘우경 번안풍을 반격’하고 ‘덩샤오핑을 비판하라’고 직접 지령을 내렸다. 총리 대리 화궈펑은 전국의 성, 시, 자치구와 대군구의 책임자들에게 ‘우경 번안풍 반격투쟁’을 전개할 것을 지시했다.

장칭 등 4인방은 물 만난 고기마냥 덩샤오핑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도 높게 퍼부으며 화력을 집중했다. 장춘챠오는 여러 차례 덩샤오핑이 ‘자산계급을 농단하고’, ‘매판 자산계급’, ‘대내적으로는 수정주의를 하고, 대외적으론 투항주의를 한다’고 맹공을 펼쳤다.

장칭은 3월 2일 제멋대로 12개성 자치구 영도간부 회의를 소집해 악랄하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거침없이 내뱉으며 덩샤오핑을 공격했다. 장칭은 당나라 때 철권통치로 독재정치를 한 측천무후(則天武后; 중국 유일의 여황제)와 여후(呂后;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의 부인으로 유방 사후 전제정치를 함)를 추켜세우며 찬당탈권(纂黨奪權)을 위한 여론을 조성했다.

장칭은 “덩샤오핑은 헛소문을 만드는 회사의 사장으로 그가 퍼트린 소문이 대단히 많다. 그는 반혁명의 늙은 우두머리로, 대역적으로 매판과 자산계급을 대표하는 중국의 국제 자본가의 대리인이다. 우리들은 공동으로 대적하고 타도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장칭은 측천무후와 여후를 끌어들여 교묘하고 은근하게 자신을 높이며 ‘홍도여황(紅都女皇)’의 야욕을 들어냈다. (주석 586)

“어떤 사람은 나를 측천무후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나는 계급문제에 있어서는 그녀(측천무후) 보다 선진적입니다. 단 (그가) 재간이 높기 때문에 내가 그녀에 미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린뱌오에게 편지를 써 내가 측천무후라고 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또 (내가)여후(呂后)라고 말합니다. 나도 대단히 영광스럽습니다. 여후는 황제의 모자를 쓰지 않았지만 실제로 정권을 자신의 손으로 장악해 법가 노선의 (정책을)집행했습니다.”

“측천무후는 일개 여자지만 봉건사회에서 황제였습니다, 동지들.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간단한 일이. 그녀의 남편도 대단했습니다만 병에 걸려 그녀가 남편의 국가경영을 도와주면서 능력을 단련시켰습니다. 그녀가 간단합니까? 그러나 공자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이런 사람을 공격했습니다. 사실 춘추전국시대 때도 대단했던 여인이 있었어요, 쟈오(趙 조)태후라고. 동지들도 내가 말한 이런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덩샤오핑 등 원로 영도자들) 저속한 말로 측천무후를 비방하고, 여후를 비방하고, 나를 비방하고 있습니다.”


마오는 3월 10일 장칭의 이런 방자한 강연내용을 보고를 받은 뒤 분노를 터뜨리며 “장칭의 간섭이 너무 많다. 12개 성(책임자)를 소집해 강연회를 열었다”고 크게 질책했다. 하지만 장칭은 마오의 비판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덩샤오핑과 원로간부들을 계속 공격했다. 장칭 등 4인방이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죽은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등 원로 간부들을 마구잡이로 비방하고 공격한 것은 되레 인민들의 큰 분노를 샀다.

덩샤오핑이 추진했던 개혁이 중단되면서 국민경제가 다시 곤두박질치고 축출됐던 장칭 등 4인방을 추종하는 조반파들이 복귀해 무장투쟁을 벌여 시들버들 하던 ‘문혁’을 되살려 전국이 다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대동란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침내 거대한 인민의 바다가 출렁거리며 민심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585) 毛澤東傳(下) 1949-1976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86) 毛澤東晩年極 度厭惡江靑, 却爲何不處置她?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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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텐안먼 광장의 200만 인민들 “저우 추도·4인방 반대” 물결

 

3월 19일 베이징시 챠오양(朝陽 조양)구 니우팡(牛坊 우방)소학교의 어린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인민들이 ‘경애하는 총리’,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추도화환을 바쳤다. 이 어린이들의 헌화(獻花)를 신호탄으로 다가오는 4월 4일의 청명절 인민 대투쟁이 예비 되고 있었다.

난징(南京 남경)의 학생과 시민들이 3월 24일 위화타이(雨花臺 우화대)에서 저우언라이 추도 기념식을 열고 ‘4인방’을 반대하는 시위를 거리 곳곳에서 벌였다. 28일에는 난징대학생들이 저우언라이의 대형 영정을 들고 ‘4인방’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벌인데 이어 29일에는 난징시 곳곳에 “저우언라이를 보위하자”, “타도 장춘챠오” 등의 표어가 나붙었다. 장칭 등 ‘4인방’은 크게 놀라 대책마련에 머리를 쥐어짰다.

왕훙원은 30일 인민일보 책임자에게 “난징 사건의 성질은 중앙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 대자보를 붙인 것은 반혁명 부활을 위하여 여론을 조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공중앙은 4월 1일 전국 각지에 전화로 ‘통지’를 보내 “난징 사건은 마오 주석을 우두머리로 하는 중앙을 분열하고, 덩샤오핑을 비판하는 큰 방향을 바꾸려는 정치사건”이라고 규정하고, 난징시위원회에 ‘배후 조종자’와 ‘유언비어 날조자’를 추적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주석 587)

베이징시 총공회(總工會; 노동조합 총연합회) 노동자 이론조 29명은 3월 30일 중국혁명 투쟁을 하다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세운 톈안먼(天安門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남쪽에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4인방을 비판하는 애도사를 붙였다. 이를 시작으로 저우언라이를 추도하는 헤아릴 수 없는 화환, 꽃바구니, 꽃다발, 애도사, 대자보, 시 등이 기념비 주위에 빼곡하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톈안먼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앞에서 인민들이 ‘경애하는 총리’,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추도화환을 바치고 있다.

 

며칠 앞으로 다가 온 청명절(淸明節)은 중국의 전통적인 절기로 선조의 묏터를 정돈하고 돌아간 사람들을 추모하는 날이다. 이날을 전후해 인민 군중들이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공개적으로 4인방을 비판하는 움직임이 난징에 이어 톈진, 우한, 시안, 타이위안(太原 태원), 칭다오, 쩡저우(鄭州 정주), 푸저우(福州 복주), 충칭, 쿤밍(昆明 곤명), 구이양(貴陽 귀양), 창사(長沙 장사) 등지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다.

중공중앙 부주석,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국방부장 예ㅤㅈㅖㄴ잉은 4월 1일 판공실 공작원이 톈안먼 광장에서 베껴온 시 한 수를 되풀이 해 읊조리며 “좋은 시다, 좋은 시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군사위원회의 일상 업무 주재에서 배제됐지만 시국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예ㅤㅈㅖㄴ잉이 감개하며 되 뇌였던 오언시는 이랬다. (주석 588)

“슬픈 마음 귀신이 들으라고 외치고 싶구나, 나는 통곡하고 승냥이와 이리는 웃고 있다. 눈물 흘려 영웅을 제사지내고, 떨치고 일어나 칼집에서 검을 빼들자.

欲悲聞鬼叫, 我哭豺狼笑. 洒泪祭雄杰, 揚眉劍出鞘. 
욕비문귀규, 아곡시랑소. 쇄루제웅걸, 양미검출초.”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4인방을 비판하는 군중들의 물결이 톈안먼 광장과 인민영웅기념비 앞을 뒤 덮어 이 일대는 해방구로 변해버렸다. 혼비백산한 4인방은 화궈펑을 압박해 4월 2일 톈안먼 광장 동남쪽에 있는 3층 건물에 베이징시 공안국 공안경찰, 수도 노동자민병, 베이징 위수구 부대 등 3천명으로 ‘연합 지휘부’를 구성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3일 새벽 4시 40분 왕훙원은 사복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몰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톈안먼 광장을 둘러보았다. 왕훙원은 손전등을 비추면서 기념비 주위의 추도화환과 애도시, 대자보 등을 살펴보다 4인방을 비판하는 글귀 등을 보고 열을 받아 허둥대며 공안부에 있는 심복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왕훙원은 다짜고짜 “너희들 아직도 자고 있나, 그런 반동적인 시와 글들을 사진으로 찍어놨나? 안 찍어 놨으면 어떻게 하나? 말짱 도루묵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에 가서 이들을 찾을 것인가? 너희들이 사람을 보내 사진을 찍어 놔야 나중에 증거인멸을 막을 수 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주석 589)

왕훙원의 호령 한 마디에 공안부는 곧바로 사복경찰을 파견해 증거물로 애도시와 대자보 등의 사진을 찍은 뒤 화환을 철거하고 시와 대자보를 찢어버렸다. 그날 저녁 공안경찰에 항의하던 시민 26명이 잡혀가면서 톈안먼 광장의 처참한 유혈진압은 그 서막이 열렸다.

청명절인 4월 4일은 공교롭게도 일요일이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오전 8시께 베이징 수광(曙光 서광)전기창 3천여 명의 노동자와 베이징 칭윈(靑雲 청운)측정기구(儀器 의기)공장 노동자 천여 명이 각각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형성해 ‘사랑하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충심으로 추도한다’는 대형 플래카드를 높이 들고 정성스럽게 제작한 화환을 앞세우며 톈안먼 광장에 도착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군중들의 행렬이 4면8방에서 톈안먼으로 몰려들었다. 이어 1,400여 개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인민영웅기념비 주위에 2,073개의 화환을 받쳐 저우언라이를 추도했다. 오전 10시께 청년 노동자 한 사람이 기념비 앞에 펼쳐 놓은 흰 비단에 ‘경애하는 저우 총리 우리들은 피와 목숨을 바쳐 당신을 보위할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혈서를 썼다. 

이날 하루 동안 200여 만 명의 인민 군중들이 몰려든 톈안먼 광장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다. 이들 군중은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 등 흰꽃과 화환, 꽃바구니, 애도시, 대자보, 표어 등을 기념비 주위에 바쳤다. 말 그대로 ‘꽃 산과 시의 바다(花山詩海 화산시해)’를 이뤘다.

예졘잉은 며칠 전부터 톈안먼 광장에 나가 현장을 직접 살펴보려고 했으나 판공실 공작원들이 4인방에 빌미를 줄 수 있다며 극구 말려 가지 못했다. 예졘잉은 청명절인 이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승용차를 타고 톈안먼 광장으로 나가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며 인민 군중들이 진심으로 저우 총리를 추모하는 모습과 ‘화산시해’를 이룬 장엄한 광경을 목도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예졘잉은 인민 군중들이 “덩샤오핑의 정돈을 옹호한다”는 함성과 “4인방 반대”의 노호하는 외침을 듣고 전율했다. 이때 예졘잉이 ‘4인방’ 분쇄를 결심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인민들이 톈안먼 광장에 스스로 찾아와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면서 덩샤오핑을 옹호하고, 4인방을 반대하는 외침은 이미 거대한 ‘민심의 바다’를 이뤄 노호(怒號)하고 있었다. 

이날 밤 화궈펑은 중앙 정치국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4인방이 주도한 이날 회의는 “톈안먼 사건의 성질은 분명하다. 바로 반혁명을 하려는 사건이다. 군중을 선동한 반혁명은 주석을 반대하고, 중앙을 반대하고 교란, 파괴투쟁의 대방향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베이징 혁명위원회 주임 겸 시장이자 정치국 위원인 우더(吳德 오덕)는 “이것은 계획적인 행동이다.

덩샤오핑은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대량의 여론을 준비했다. 이 사건은 덩샤오핑이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해 조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칭 등 4인방은 “인민영웅기념비에 헌화한 화환을 모두 수거하고 반혁명 관련자들을 체포해야 한다”고 방방 떴다.

마오웬신은 마오에게 회의내용과 관련해 “정치국은 베이징의 상황은 대다수가 총리를 추모했는데 소수가 에둘러 중앙을 공격한 대단히 악독한 행위라고 분석했습니다. 정치국은 반혁명의 반격이고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으로 보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주석 590)

5일 오전 1시 공안 경찰 등이 화환과 대자보 등의 철거작전에 나서 200여 대의 트럭을 동원해 2천여 개의 화환과 꽃다발을 실어갔고 화환 등을 지키고 있던 57명을 붙잡아 조사하고 7명을 구속했다. 날이 밝자 군중들이 톈안먼 광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 군중은 화환이 철거되고 군중들이 체포된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했다. 성난 군중들은 민병과 공안 경찰 등이 설치한 봉쇄선을 뚫고 들어가 기념비 앞에 다시 헌화하는 과정에서 충돌했다. 군중들은 “화환을 돌려 달라”, “전우를 돌려 달라”며 인근의 ‘연합 지휘부’로 몰려갔다. 흥분한 시위 군중들은 지휘부 건물에 방화하는 등 더욱 격렬하게 항의했다. 

587)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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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8) 毛澤東爲何下定決心將華國峰作爲自己最後選定的接班人?   人民網-文史頻道
589) 毛澤東爲何下定決心將華國峰作爲自己最後選定的接班人?   人民網-文史頻道
590)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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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톈안먼 사태’ 계기, 덩샤오핑 직무 철회… 화궈펑은 총리 자리에


이날 밤 6시 30분께 톈안먼 광장에 나타난 우더는 확성기를 들고 “톈안먼 사건은 반혁명 사건”이라고 선언하고 군중들이 광장에서 즉시 떠날 것을 요구했다. 밤 9시 30분께 1만여 명의 민병과 3천여 명의 경찰, 베이징 위수구 부대 5개 중대병력이 곤봉을 들고 출동해 톈안먼 광장을 봉쇄했다.

이들은 광장에 남아있던 군중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곤봉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동안 군중들이 하나 둘씩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수많은 군중들이 마구 구타당해 광장은 선혈이 낭자했다. 이것이 국내외에 충격을 준 1976년의 ‘톈안먼 사태’였다. 중앙 정치국은 6일 새벽 회의를 열어 군중들의 행동을 “반혁명의 폭란”이라 규정하고 무력진압을 정당화했다. 이날 마오를 찾아 온 장칭은 ‘톈안먼 사태’의 경과를 보고했다. 마오의 여비서 장위펑(張玉鳳 장옥봉)은 이때를 이렇게 술회했다.

“그녀(장칭)가 주석의 침대 앞에서 주석에게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특별히 톈안먼 광장을 한 바퀴가 둘러보았습니다. 길에는 초연(硝煙)이 가득하고 집이 불타고 차가 불탔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가 산자를 억압하는 것입니다. 덩샤오핑은 그들의 총 배후인물입니다. 저는 고발합니다. 저는 덩샤오핑의 당적을 박탈할 것을 건의합니다.’ 주석은 장칭을 쳐다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년 들어 마오는 장칭의 면담을 계속 거절해 이날의 만남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마오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마오는 ‘덩샤오핑 비판, 우경 번안풍에 대한 반격’이 전국에서 특히 수도 베이징에서 저항 받을 줄은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오는 용인할 수 없었고, ‘톈안먼 사건’은 마오에게 더욱 더 격렬한 ‘계급투쟁’의 확신을 심어주었다. 4월 7일 오전 마오는 마오원웬으로부터 야오원웬(姚文元 요문원)이 정리한 톈안먼 사건에 대한 보고를 들은 뒤 결단을 내렸다. 정치국에 두 가지 결의사항을 제의했다. (주석 591)

1. 화궈펑을 당 중앙 제1부주석과 국무원 총리에 임명한다. 
2. 덩샤오핑의 당 내외 모든 직무를 철회한다. 당적은 남겨두고 태도를 지켜본다. 


마오는 이 두 가지 사항과 관련한 톈안먼 사건을 공개적으로 발표할 것을 지시했다. 마오는 톈안먼 사건은 첫 째 수도에서, 둘째 톈안먼에서, 셋째 방화, 폭력이 있었다. 이 세 가지로 (저우언라이 추모) 성격이 바뀌었다. 이에 의거해 (덩샤오핑을) ㅤ쫓아내라고 마오원웬에게 지시했다. 

이 두 가지 결의안 발표는 마오쩌둥이 화궈펑(華國鳳 화국봉)을 자신이 마지막으로 선정한 후계자라는 것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었다. 마오는 이때 83살로 파킨슨병에 시달려 살날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해 뒷일(後事 후사) 처리가 급한 처지였다. 4번째로 선정했던 예비 후계자 덩샤오핑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린 것이다.

마오는 지난 2월에 화궈펑을 총리 대행으로 임명하면서 화궈펑의 중공중앙의 지위를 높여 주지 않고 중앙 정치국 위원의 신분으로서 국무원 총리를 대리토록 했다. 이것은 마오가 일정한 시간 화궈펑을 관찰하고 고찰하면서 경험을 쌓도록 한 뒤 최후에 결심하겠다는 뜻을 내포했다. 뿐만 아니라 덩샤오핑에 대한 마지막 기대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오는 화궈펑을 5번째 후계자로 선정하는 결단을 내리면서도 덩샤오핑의 당적을 보류시켜 여지를 남겨두었다. 또 판공청 주임인 왕둥싱에게 덩샤오핑이 신변안전을 위해 보호조처를 하도록 하는 등 복잡한 심리적 상태를 보였다.

덩샤오핑은 부인 쭤린(卓琳 탁림)과 함께 가족과 떨어져 정부가 관리하는 둥쟈오민샹(東交民巷 동교민항)에서 보호조처를 겸한 사실상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정국이 얼어붙자 예젠잉은 칭병하고 군부가 관리하고 있는 시산(西山 서산) 15호 거주지로 들어갔다.

중공중앙의 ‘두 개의 결의’와 ‘톈안먼 광장의 반혁명 정치사건’이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문에 연일 보도되면서 덩샤오핑에 대한 비판공세의 수위가 한층 높아져 전국적으로 ‘덩샤오핑 비판’, ‘우경 번안풍에 대한 반격’의 광풍이 휘몰아쳐 사회 모든 영역을 강타했다. 중국천지가 4인방의 세계로 바뀌면서 민심은 더욱 흉흉해 져 갔다. 권력 구도도 크게 재편되고 있었다. 화궈펑은 후계자로 선포되지 않았지만 중공중앙 주석인 마오에 이어 서열 2위인 당 제1부주석과 국무원 총리에 임명돼 제2인자가 되었다.

장칭 등 4인방은 후계자로 거론됐던 왕훙원이 서열은 떨어졌지만 덩샤오핑의 실각으로 원로 집단과 국무원 ‘실권파’들의 세력이 대폭 줄어들고, 자파 세력을 심어 중앙의 정치기반이 허약한 화궈펑을 추월하는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4인방들은 화궈펑을 앞에 내세워 세력을 확대하면서 권력을 탈취해 대권을 장악하는 ‘대세론’ 전략을 펴나가기로 했다. 마오는 5월 27일 중난하이 자택 사무실에서 파키스탄 총리 부토 부부를 접견하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일어날 수 없어 소파에 앉은 채 환영을 표시했다.

마오의 마지막 외빈회견이 되었다. 중공중앙은 마오가 외국원수 등 외빈들을 접견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마오의 건강이 크게 나빠져 내일 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오는 6월 초 갑자기 심근경색을 일으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났다. 살날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고 느낀 마오는 6월 15일 화궈펑과 4인방인 왕훙원, 장칭, 야오원웬, 왕하이롱(王海容 왕해용) 등을 집으로 불러 임종을 앞두고 당부하는 식의 담화를 했다. (주석 592)

“인생 칠십 고래희(古來稀)다. 내 나이 80이 넘었다. 사람들은 늙으면 뒷일을 생각한다. 중국의 옛말에 ‘(사람은) 관 뚜껑을 닫으면 공과를 평가한다(盖棺定論 개관정론)’고 한다. 나는 아직 관 뚜껑을 닫지 않았지만 곧 닫는다. 총체적인 평가를 하게 된다! 나는 평생에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장제스와 몇 십 년을 싸워 그를 몇 개 되지 않는 섬으로 내쫓았다. 8년 동안 항전해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 일에 대해 이의를 달 사람들은 많지 않다. 단지 몇 사람들이 내 귀에 대고 반드시 내가 이른 시일에 그 몇 개의 섬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고 속삭였다. 다른 하나는 자네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바로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것이다. 이 일은 옹호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이 두 가지 일은 끝나지 않았다. 유산으로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한다. 어떻게 물려줘야 하나? 화평할 때 넘겨주지 못하고 (정세가)불안할 때 넘겨주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게 된다. 자네들은 어떻게 할 텐가? 단지 하늘만 알 뿐이다.”

591)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592) 毛澤東臨終囑咐 ‘絶不允許否定 ’文革‘?   人民網 -文史頻道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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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마오, 83세 일기로 서거… 주검 영구보존 처리

 

7월 6일 마오쩌둥의 노(老) 전우였던 중국혁명의 원훈이며 인민해방군의 ‘아버지’인 주더(朱德 주덕)가 ‘주-마오(朱-毛; 주더와 마오)’의 전설을 뒤로하고 90살로 세상을 등졌다. 저우언라이와 주더 등 혁명 1세대들의 잇따른 죽음은 한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음을 알렸다. 두 거인을 잇달아 잃은 인민들은 4인방이 전횡을 부리고 있는 중국의 앞날이 어찌될지 깊은 수심에 빠져들었다.

주더 사망 22일 뒤인 7월 28일 새벽 3시 42분, 백만 인구의 공업도시 허베이(河北 하북)성 탕산(唐山 당산)일대에 진도 7.8의 강진이 발생해 24만여 명이 사망했다. 당산 대지진으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었으나 4인방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권력탈취에만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9월 2일 마오는 세 번째의 심근경색 발작을 일으켜 위독한 상태를 가까스로 벗어났다. (주석 593)

중앙의 관계자들은 마오의 건강이 염려돼 장칭이 산시성 시양(昔陽 석양)현 농업마을인 다자이(大寨 대채)에 가는 것을 만류했으나 장칭은 들은 채도 않고 다자이에 가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며 “공산주의도 여황제가 필요하다”는 등의 경악할 발언을 쏟아냈다. 마오의 사후 대권을 틀어쥐겠다는 욕망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장칭은 9월 5일  마오의 병세가 또 다시 악화돼 급하다는 중앙의 전화를 받고서야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9월 8일 밤 마오는 혼수상태를 넘나들었다. 예젠잉이 마오가 누워있는 침대 앞에 갔을 때 마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손을 꿈틀 거렸다. 예젠잉에게 무슨 말을 할 듯싶었다. 예젠잉은 미처 살피지 못하고 병실을 나갔다. 이때 마오는 있는 힘을 다해 손짓으로 예젠잉을 불러오라는 표시를 했다.

곁에 있던 마오의 여비서 장위펑이 예젠잉을 불러들였다. 마오는 한 손을 내밀어 예젠잉의 손을 잡고 쳐다보면서 입술을 조금 움직여 말을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떠나는 길,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오랜 혁명 전우였던 예젠잉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게 다였다.      

9월 9일 0시 10분, 일세를 풍미했던 마오쩌둥의 심장고동이 멈췄다. 83살이었다. 중공중앙, 전국인민대표 상무위원회, 국무원, 중앙 군사위원회 명의로 이날 ‘전당 전군 전국 각 족 인민에게 고하는 글(告人民書 고인민서)’을 발표했다. 부고(訃告)였다. (주석 594)

“마오쩌둥은 당대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다. 반세기 이래 그(마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적 진리와 혁명을 구체적 실천으로 서로 결합한 원칙에 따라 국내외, 당내외의 계급의 적들과 오랜 동안 투쟁을 하고, 계승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키고 발전시켰다. 무산계급 혁명운동의 역사에 대단히 찬란한 한 페이지를 썼다. 그는 자신의 필생의 정력을 모두 중국인민을 해방시키는 일과 전 세계 피압박민족과 피압박민족의 해방 사업, 공산주의 사업에 모두 바쳤다. 그는 무산계급 혁명가의 위대한 굳센 의지력으로 병마와 완강한 투쟁을 벌였고, 병중에도 계속 전당과 전군, 전국의 공작을 영도하면서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줄곧 전투를 벌였다.”

“그(마오)가 중국인민을 위하여, 국제 무산계급과 전 세계 혁명인민을 위하여 세운 위대한 공적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는 중국인민과 전 세계 혁명 인민들로부터 충심에서 우러나는 열렬한 사랑과 무한한 존경을 받았다. 마오쩌둥 주석의 서거는 우리 당, 우리 군과 우리나라 각 민족 인민에 대해, 국제 무산계급과 각국 혁명 인민에 대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다.”

 

 마오쩌둥 서거 당시 참관인들 모습.

 

마오쩌둥 장례위원회가 이날 화궈펑과 왕훙원, 예젠잉, 장춘챠오 등 375명으로 구성됐다. 마오의 장례식은 9월 18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각계 군중 백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됐고, 그의 주검은 영구보존 처리돼 톈안먼 건너편 마오 주석 기념당에 안치되었다.

마오가 떠난 중공중앙 영도부의 권력판도는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문혁이후 마오가 직접 배양한 정치세력으로 화궈펑(華國峰 화국봉)을 우두머리로 한 '실권파', 즉 당정군(黨政軍)에 포진한 고위 간부들을 일컫는다.

여기에는 마오의 경호국장이자 중앙 판공청 주임이며 정치국원인 왕둥싱(汪東興 왕동흥), 중앙 군사위원회 일상 업무를 주재하는 정치국원 천시롄(陳錫聯 진석련), 정치국원 지텅쿠이(紀登奎 기등규), 베이징시 혁명위원회 주임 겸 시장이자 정치국원인 우더(吳德 오덕) 등이 포진했다.

또 한 축은 당 부주석,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국방부장 예젠잉(葉劍英 엽검영), 부총리를 지낸 정치국원 리셴녠(李先念 이선념) 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원로파'들이 있었다. 나머지 한 축은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 강청)을 우두머리로 하는 '문혁파', 즉 4인방으로 왕훙원(王洪文 왕홍문), 장춘챠오(張春橋 장춘교), 야오원웬(姚文元 요문원) 등이었다.

이 세 진영은 겉으로는 서로 견제와 균형을 취하면서 권력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4인방은 마오의 유업(遺業)인 '문혁'을 계승하는 적통(適統)을 내세워 대권탈취에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우더는 회고록 '10년 풍우기사(十年風雨紀事)'에서 당시를 이렇게 술회했다. (주석 595)

"마오 주석은 만년에 '문혁파(4인방)'를 여러 차례 훈계하면서 '4인방'이 200여 명의 중앙위원과 단결하도록 했다. (마오는) '상반기에 해결하지 못하면 하반기에 해결하고, 올해에 해결하지 못하면 내년에 해결하고, 내년에도 해결하지 못하면 후년에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마오 주석은 정치국이 그들(4인방)을 도와주도록 정중하게 재촉했다. 마오 주석은 정치국 동지들에게 특히 왕훙원, 장춘챠오, 장칭, 야오원웬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나는 10대 후 마오 주석이 수영장 거주지에서 우리들을 불러 이야기할 때 정치국이 그들(4인방)을 도와줘야 한다고 제의했던 것을 기억한다. 마오 주석은 창밖의 채소밭에 있는 청록색의 채소를 가리키며 (4인방을 밭의 채소에) 비유해 그들이 자랄 수 있도록 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오가 만년에 '실권파'와 '원로파'들이 '문혁파'를 도와주기를 희망한 것은 그가 '문혁파'를 후계자로 내정하려는 뜻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쨌거나 장칭은 마오가 죽기 직전부터 마오의 병상을 지키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정권탈취를 위한 여론조성에 광분하고 있었다. 야오원웬은 마오가 죽던 날 새벽 인민일보 총편집 루잉(魯瑛 노영)에게 '마오 서거'관련 보도지시를 하며 밀담을 나눴다. (주석 596)

야오원웬; 이 며칠 동안 무슨 일이 발생해 당신과 전화연락이 안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만약 전화연락이 안 되면 당신이 독자적으로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루잉; 마오 주석 서거이후 먼저 군대를 주의해야 한다. 군대를 잘 장악해야 한다. 당신도 특별히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들고 날 때 조심해야 한다.

야오원웬; 군대를 주의하고, 또 민병(民兵)이 있다. 주석 서거 후 국내외의 계급의 적들이 이 틈을 타 교란하거나 파괴활동을 할 수 있다. 당신들은 예의 상황을 주시하다 적시에 반영해야 한다. 내부에 준비를 철저히 하고 당신을 포함해 책임자들의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593) 在周總理, 朱總司令, 毛主席相繼逝世的日子   鄔言成  口述  王凡  整理   人民網
594)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毛澤東生平全紀錄(下)  主編  柯 延   中央文獻出版社
595) 揭秘; 毛澤東逝世前已內定 ‘文革派’ 爲接班人   錢伯城   北京日報  人民網
596) 毛澤東 ‘臨終囑咐’ 引發高層鬪爭; 事關誰來接班   人民網-文史頻道  ‘四人幇’ 興亡   葉永烈 著   人民日報出版社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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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실권파’와 ‘원로파’, 4인방의 ‘문혁파’ 척결에 합의

 

루잉은 언론을 총괄 장악하고 있는 '여론총관(與論總管)'인 야오원웬의 지령에 따라 4인방의 거점인 인민일보를 철통같이 지키기 위해 민병들을 동원해 주야로 경비를 강화하는 등 비상상황에 들어갔다. 마오가 사망한 뒤 1시간이 지난 새벽 2시께 중앙 정치국은 장례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긴급회의를 열었다. 

장칭은 회의에서 마오가 덩샤오핑 때문에 열 받아 죽었다며 울고불고하며 난리를 피웠다. 장칭은 정치국이 계속 덩샤오핑을 비판하고, 덩샤오핑의 당적 박탈을 결정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예졘잉이 '장례 우선'을 내세워 장칭의 소란을 잠재웠다.

왕훙원은 비서 야오주캉(廖祖康 요조강)을 시켜 마오가 사망한 3일 째인 11일 밤부터 12일까지 은밀하게 당 중앙 판공청 명의로 전국의 성, 시, 자치구 책임자들에게 전화통지문을 보내도록 지시했다. 야오주캉의 수하인 미스치(米士奇 미사기)가 가짜의 중앙 통지문을 전화를 걸어 전달했다. 중공 싼시성(陝西省) 위원회 서기 리루이산(李瑞山 이서산)은 중공중앙 판공청의 미스치라고 한 인물로부터 걸려온 전화내용을 받아 적었다. (주석 597) 

"주석의 상중에 중대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보고하라. 중요 문제를 처리할 수 없을 때는 즉시 지시를 청하라. 미스치 동지를 찾아 연락하라."

이 무렵 중공 후난성위원회 서기 장핑화(張平化 장평화)도 미스치로부터 이런 내용의 전화를 받고 괴이하게 생각했다. 후난은 마오가 태어나 자란 곳이고 화궈펑이 성위원회 제1서기로 일한 곳인데 모르는 인물이 전화한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장핑화는 곧바로 화궈펑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내용을 보고했다.

"뭐야? 중대한 문제가 있으면 미스치에게 연락하라고? 나는 모르는 일이다!"

화궈펑은 깜짝 놀랐다. 화궈펑은 장핑화에게 "미스치는 왕훙원이 있는 곳에서 일하는 공작원이다"라고 말했다. 화궈펑은 당 제1부주석이자 국무원 총리인 자신이 모르는 '중앙의 지시'를 확인하기 위해 부주석의 한 사람인 예졘잉에게 물어봤으나 예졘잉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화궈펑은 마오의 후계자인 자신을 무시하는 4인방의 월권행위에 대해 의구심과 함께 분노를 터뜨렸다. 화궈펑은 곧바로 비서에게 중앙의 명의로 전국의 각 성, 시, 자치구에 전화를 걸어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 화궈펑에게 지시를 청하도록 하라는 통지를 내리도록 지시했다.

미수에 그친 왕훙원은 부득불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4인방은 또 권력탈취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조작한 '민의(民意)'를 내세워 '충성 편지(效忠信 효충신)' 쓰기 운동을 펼쳤다. 4인방은 칭화대학을 거점으로 한 자파인 츠췬, 셰징이 등을 동원해 전문 필진들이 쓴 편지와 학생들을 사주해 장칭을 비어있는 '당 주석'에 임명해 줄 것 등의 편지를 중공중앙에 보내 화궈펑을 압박했다. 편지내용은 주로 이랬다. (주석 598)

"마오 주석의 중공중앙, 장칭 동지;

나는 아주 비통한 심정으로 이 편지를 당 중앙에 보냅니다. 우리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마오 주석 서거이후 당 중앙의 영도권이 누구의 손에 넘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간절하게 당 중앙에 건의합니다. 장칭 동지를 중공중앙 주석과 군사위원회 주석에 임명하고, (장)춘챠오 동지를 중공중앙 부주석과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하고, 왕훙원 동지를 군사위원회 제1부주석에 임명하여-"

마오의 상중임에도 권력탈취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설쳐대는 4인방들의 작태를 보면서 혁명 원로들은 근심과 걱정 속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불안과 초조가 교차하고 있었다. 천윈, 쉬샹쳰, 녜룽전, 덩잉챠오, 왕전 등은 은밀하게 연락을 취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4인방을 제압할 인물로 예졘잉을 꼽았다.

당시 예졘잉은 중앙 군사위원 회의 주재권을 천시롄에게 넘겨주었지만 군부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 인물로 당 부주석,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국방부장을 맡고 있는 백전노장의 원로였다. 군대의 후배 장군들도 예졘잉을 찾아와 앞날을 걱정하고 4인방 징치를 건의했다.

예졘잉도 자신의 시대적 소임과 사명을 잘 알고 있었다. 예졘잉은 마오의 사망 직전에 원로들과 장군들이 4인방 척결을 거론할 때 '투서기기(投鼠忌器; 쥐새끼를 때려잡고 싶어도 기물을 깰까봐 두렵다는 뜻으로 마오를 염두에 둬 결행을 미룸)'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졘잉은 이제 '투서기기'할 필요가 없으므로 결행할 시기를 가늠하면서 4인방을 분쇄할 거사계획을 짜고 있었다. 예졘잉은 대장출신인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 책임자 수위(粟裕 속유), 총참모부 주요 책임자 양청우(楊成武 양성우), 총정치부 주요 책임자 량비예(梁必業 양필업), 공군 주요 책임자 장팅파(張廷發 장정발), 해군 주요 책임자인 전 해군사령관 수진광(蕭勁光 소경광), 베이징 군군 주요 책임자 푸충비(傅崇碧 부숭벽), 베이징 위수군구 주요 책임자 우중(吳忠 오충) 등 기라성 같은 군부 각 부문의 핵심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졘잉은 이들에게 전비태세를 강화시키고 확실한 부대 장악으로 돌발 사태에 대비해 경계태세를 제고토록 지시했다. (주석 599)

군부를 틀어쥐고 있는 예졘잉은 언제든지 무력동원이 가능했지만 상책은 평화적 해결책이라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선 마오가 없는 지금, 최고 권력자인 화궈펑을 끌어들여 4인방을 척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예졘잉은 마오의 추종세력으로 중도적 입장인 '실권파' 진영의 우두머리 화궈펑의 결단과 판공청 주임 왕둥싱을 끌어들이는 데 공을 들이고 있었다. '실권파'인 화궈펑도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장칭 등 4인방 타도의 뜻을 갖고 있었지만 중앙에 기반이 없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런 행보를 하고 있었다.

화궈펑은 9월 11일 '실권파'인 우더를 불러 왕둥싱과 4인방 해결을 논의한 결과 견결하게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일러줬다. 화궈펑은 화궈펑대로 '원로파'의 지지가 4인방 척결의 관건이라 보고 군부에서 덕망이 높은 예졘잉과의 연락을 모색했다. 원로파들과 별 접촉이 없는 화궈펑은 그나마 리셴녠과는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결단을 내린 화궈펑은 11일 4인방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몸이 불편해 병원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마오의 빈소를 지키는 장례위원회를 빠져나와 리셴녠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석 600)

"제가 찾아뵙고 싶은 데 어디에 계십니까. 5분이면 됩니다."

"오시오. 많은 시간 이야기해도 괜찮습니다."

"미행을 당할 수 있어 많이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몇 말씀만 드리고 가야합니다."


화궈펑은 급히 승용차를 타고 시황청(西黃城 서황성)에 있는 리셴녠 집으로 달려갔다. 리셴녠은 자택 사무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화궈펑과 마주 앉았다. 화궈펑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는 (마오의)빈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병원에 간다고 핑계를 대고 이곳에 왔습니다. 우리들은 4인방과의 투쟁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에 긴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당이 망하고, 나라가 망하고, 목이 날아갑니다. 저를 대신해서 예(졘잉) 원수님을 찾아뵙고 예 원수의 의견을 물어봐 주시고 예 원수께서 어떤 방법이 있는 지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4인방 문제를 언제 해결하는 게 좋은지, 이런 문제들을 예 원수께 주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리셴녠은 4인방 해결문제를 듣자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마음을 표시하고 곧바로 화궈펑의 방법과 의견을 지지했다. 예졘잉을 찾아가 화궈펑의 뜻을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10분 정도 이야기했을 때 화궈펑이 손목시계를 보며 "가봐야 겠습니다"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4인방 척결 제의와 관련해 리셴녠이 1977년 1월 1차 회의 때 "지난해 10월 4인방을 분쇄한 것은 화궈펑 동지가 제의를 했고, 중앙의 다수 동지들이 동의해 실행한 것"이라고 밝혀 화궈펑이 처음 제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4인방 분쇄 전 과정에서 볼 때 예졘잉을 우두머리로 하는 혁명 1세대 원로들이 일찍이 행동에 나섰고, 예졘잉이 화궈펑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등 그에 기반 해 4인방을 척결했다고 당사 연구가들은 폭넓게 해석하고 있다.

화궈펑과 예졘잉 두 사람의 생각이 마치 삼국시대 적벽대전을 앞두고 조조군을 쳐부술 때 제갈량과 주유가 동시에 '화공(火攻)' 전략을 내놓은 것처럼 4인방 분쇄에 일치한 의견을 보여 '실권파'와 '원로파'가 결합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됐다. 4인방 척결의 총지휘자는 예졘잉이 맡았다. 정국의 흐름은 이제 3파전에서 4인방 진영과 '실권파+원로파' 진영으로 양분(兩分)양상을 보였다. '너 죽고, 나 살기'의 혈전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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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4인방, ‘기정방침에-’ 문구 빌미 권력 쟁취 혈안

 

예졘잉은 9월 15일 실권파인 왕둥싱의 지지를 얻어냈다. 왕둥싱은 4일 앞선 11일 화궈펑과 4인방을 치기로 이미 합의한 바 있었다. 정치국원인 왕둥싱은 오랜 동안 중앙 판공청 주임 겸 (마오의)경위국장을 맡아 주요 영도자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중앙 경위부대 8341부대의 주요 책임자였다. 때문에 4인방 분쇄에는 관건적 인물이었다.

대권에 눈이 먼 4인방들은 '실권파'와 '원로파'가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계획을 짜고 있는 동안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언론기관을 통해 죽은 마오를 내세워 선전전으로 밀어붙이면 권력탈취를 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마오의 유업인 '문혁'을 계승하는 명분을 앞세워 조작된 여론을 조성하면 '만사형통'이라고 자만했다. 

청명절 때 톈안먼 광장에서 분출했던 진정한 민의(民意)를 읽지 못하고 시대흐름을 잘못 판독한 4인방의 앞날은 불길로 뛰어드는 부나방 형국이었다. 단지 권력의 탐욕에 빠진 4인방만 모르고 있었다. 마오는 죽음의 문턱에서 인사불성에 빠져 어떤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4인방의 '여론총관' 야오원웬은 '마오 주석의 임종분부(臨終囑附 임종촉부)'를 날조해 냈다. 야오원웬은 중앙의 '양보일간(兩報一刊)'인 인민일보, 해방군보와 훙치(紅旗 홍기) 잡지에 '마오 주석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라는 제목의 공동 사설을 실어 '마오 주석의 임종분부'와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라(按旣定方針辦 안기정방침판)'는 두 가지의 꼼수를 부렸다. 4인방은 자신들이 마오가 지정한 정통 후계자인 것처럼 위장한 것이었다. (주석 601)

"마오 주석은 세상을 떠났지만 마오쩌둥 사상은 영원히 빛을 발하고, 마오 주석의 혁명노선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릴 것이다. 마오 주석이 세운 무산자계급 혁명 사업은 계속될 것이다. 마오 주석은 우리들에게 분부하셨다.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라'. 비통한 마음으로 마오 주석의 서거를 애도하면서 우리들은 비통한 마음을 딛고 영원히 마오 주석의 가르침에 따라 계급투쟁의 벼리를 견지하고, 당의 기본노선을 견지하고, 무산계급독재 아래에서의 계속혁명을 견지하고, 무산계급 국제주의를 견지하고,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 사업을 철저하게 진행해야 한다."

예졘잉은 인민일보에 난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라'는 구절 아래에 붉은 연필로 밑줄을 긋고 옆에 큰 의문부호 '?'를 붙였다. 예졘잉은 화궈펑에게 이 구절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 마오의 후계자가 된지 얼마 안 된 화궈펑은 1976년 4월 30일 밤 마오가 뉴질랜드 총리 로버트 데이비드 멀둔을 회견할 때 배석했다. 회견이 끝난 뒤 훠궈펑은 마오에게 업무를 보고하면서 "저는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일이 있을 때 정치국의 많은 동지들과 상의합니다. 주석께서 어떤 의견이 있으신지요?"라고 자문을 구했다. 마오는 "국제적인 일은 이미 큰 틀이 정해졌다. 문제는 크지 않다. 국내의 일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을 마친 마오는 종이에 세 문장의 글을 적어 화궈펑에 주었다. (주석 602)

1.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라(慢慢來, 不要招急 만만래, 불요초급).
2. 과거의 방침에 비추어 처리하라(照過去方針辦 조과거방침판).
3. 자네가 일을 처리하면 나는 안심한다(你辦事, 我放心 니판사, 아방심).


화궈펑은 그 뒤 정치국 회의에서 1, 2항만 공개했다. 그래서 예졘잉은 애초 '과거의 방침에 비추어 처리하라'가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라'로 변조된 사실을 알았고, 화궈펑은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이다. 마오가 화궈펑에 준 이 세 구절은 많은 파란을 낳았다. 2항은 4인방이, 3항은 화궈펑이 4인방을 척결 뒤 공개해 (마오가)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한 명확한 '증거'라고 제시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화궈펑은 나중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자신이 마오가 지정한 정통 후계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호신부'로 쓰기 위해 당시에 공개하지 않은 것이다.

마오가 화궈펑에게 글귀를 써 줄 때 현장에 있던 마오의 여비서 장위펑은 "'과거의 방침에 비추어 처리하라'가 임종 당부라거나 '자네가 일을 처리하면 나는 안심한다'가 후계자를 지정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에 부합한 것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단지 화궈펑의 업무처리에 대한 지침으로 마오가 자문한 내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4인방은 자신들이 마오의 정통 후계자라는 것을 인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변조한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라'를 선전하는 데 광분했다. 이에 따라 4인방이 선전도구로 활용한 '기정방침에-'는 글귀는 마오가 죽은 뒤 중국 전역을 누빈 최대의 선전문구가 됐다. 야오원웬은 9월 18일 마오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19일 신화사에 전화를 걸어 (10월 1일) 국경절 보도와 관련해 주석의 임종 당부인 '기정방침에-'는 문구를 강조하라는 보도지침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주석 603)

"당신들은 각 성시(省市)에서 열리는 추도회에서 중요 발언이나 태도를 표명할 때 중복되는 것을 신경 쓰지 말고 모두 써 넣어라. 예를 들면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라'이다. 이 말을 따다 모두 보도하고 없으면 비슷한 말을 집어넣도록 하라."

9월 17일 4인방의 거점인 상하이의 해방일보는 '마오 주석의 당부를 받들어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자'라는 통단 제목의 기사를 싣고 눈에 확 띄는 4개의 표제를 달았다.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자, 마오 주석의 혁명노선을 견지하자"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자, 주자파와의 투쟁을 견지하자"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자, 진지하게 학습하고 깊이 있게 덩(샤오핑)을 비판하자"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자, 생산을 촉진하고, 공작을 촉진하고 전비(戰備)를 촉진하자"

1980년 7월 9일 4인방이 체포돼 최고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왕훙원은 심문에서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라'는 글귀는 장춘챠오가 집어넣었을 수 있다. 이 말이 나오기 전에 그(장춘챠오)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주석을 만났을 때 주석이 자신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라'고 했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사실 '기정방침에-'이나 '과거의 방침에-'이나 두 가지 말의 본뜻의 구별은 큰 차이가 없다. 문제는 마오가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느냐로, 이 말의 상대방이 마오의 후계자라는 핵심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왕둥싱은 9월 29일 정치국 회의에서 '기정방침에-'의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4인방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화궈펑은 10월 2일 외교부 부장 챠오관화(喬冠華 교관화)가 심사를 요청한 '중국 대표단 단장의 국제연합 제31차 회의상의 발언' 원고 중에 '기정방침에-' 글귀를 발견하고 삭제했다. 

화궈펑은 예졘잉, 왕훙원, 장춘챠오에게 보내 비준 글에서 "글에서 인용한 마오 주석의 당부는 마오 주석의 친필과 3글자가 틀렸다. 마오 주석이 쓰고, 내가 정치국에서 전달한 것은 모두 '과거의 방침에 비추어 처리하라'였다. 잘못 전해지지 않도록 내가 그것을 빼버렸다"고 밝혔다. 예졘잉은 당연히 동의했고, 왕훙원과 장춘챠오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하지만 장춘챠오는 "화궈펑 동지의 주석은 불필요한 분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하달하지 않을 것을 건의한다"고 밝혔다. 장춘챠오는 입으로는 동의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반대한 것이다.

601) 毛澤東 ‘臨終囑咐’ 引發高層鬪爭; 事關誰來接班   人民網-文史頻道
602)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603) 毛澤東 ‘臨終囑咐’ 引發高層鬪爭; 事關誰來接班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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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더 늦출 수 없다” 4인방 체포 작전 돌입

 

화궈펑과 리셴녠은 9월 26, 27일 잇따라 만나 4인방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 화궈펑은 "우리들과 4인방과의 투쟁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리셴녠은 화궈펑의 의견에 찬성하고 해결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체포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앙 정치국 회의를 열어 투표로 4인방이 맡고 있는 직무를 해제시키는 거였다.

우더는 회의에서 해결하는 방안에 무게중심을 뒀다. 화궈펑과 리셴녠은 두 가지 방안을 놓고 심사숙고한 끝에 투표로 해결하는 방안은 모험이 따른다고 보고 체포해 죄를 추궁하는 격리심사를 하는 방안이 상책이라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행동 시기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는 데 견해를 같이 했다. 장춘챠오는 9월 28일 왕훙원의 비서 수무(숙木 숙목)를 4인방의 거점인 상하이에 파견해 상하시위원회에 "경계를 제고해야 한다. 린뱌오와 덩샤오핑은 상하이에서 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린뱌오가 도모했다면 (상하이는) 큰 시련을 겪어 전투를 해야 했을 것"이라는 내용을 전달하도록 했다. 장춘챠오가 말한 '전투를 해야 한다(要打仗 요타장)'는 말은 실제적으로 패거리들에게 동원령을 내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상하이의 4인방 패거리들은 더욱 더 여론을 조성하고 민병들에게 총과 탄약을 지급하면서 무력행동을 취할 준비에 들어갔다. 나중에 4인방과 함께 체포된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인 쉬징셴(徐景賢 서경현)은 당시 진술서에서 "장춘챠오는 우리들에게 전투동원령을 내렸다"고 썼다.(주석 604)

 

 사진 왼쪽부터 장칭과 야오원웬, 장춘챠오, 왕훙원.

 

장칭은 국경절인 10월 1일 자신의 거점인 칭화대학 강연에서 "덩샤오핑이 마오 주석을 박해했다. 덩샤오핑의 당적을 박탈해야 한다"고 선동하고 "몸을 잘 단련해 그들과 싸움을 벌여야 한다"며 고도의 경계태세를 갖출 것을 암시했다.

왕훙원은 10월 2일, 114장의 '표준사진'을 찍어 저우언라이의 표준사진마냥 만들도록 7차례에 걸쳐 수정하도록 지시했다. 권력탈취 후 즉위에 대비한 사진이었다. 애초 4인방들은 이미 권력탈취 이후의 '자리 순서(座次 좌차)' 명단을 작성해 놓았다. 4인방들은 장칭이 당 주석, 왕훙원이 제1부주석 겸 군사위원회 주석, 장춘챠오가 총리, 야오원웬이 전인대 위원장 등 식으로 스스로 내정하고 개인 '표준사진'을 준비하거나 '역사적 단체사진'을 찍었다. 

왕훙원은 다음날인 3일 베이징 교외의 핑구(平谷 평곡)현으로 달려가 "중앙에 수정주의가 나타났다. 당신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타도!"라고 힘주어 말했다. 왕훙원은 "건국 이래 중앙에 가오강(高崗 고강), 야오수스(饒漱石 요수석),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 류샤오치(劉少奇 유소기), 린뱌오(林彪 임표), 덩샤오핑이 나타났다. 이후에 탕(唐 당)샤오핑, 왕(王 왕)샤오핑 등과 같은 제2의 덩샤오핑이 나타날 수 있다. 경계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고 대담하게 공격하고 화궈펑과 예졘잉 등이 수정주의자라고 넌지시 암시했다.

자만해 우쭐증에 걸린 장칭은 이날 3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고궁(古宮) 북쪽의 징산(景山)공원으로 사과를 따러갔다. 군복을 입은 장칭은 사과나무 밑에서 교태를 부리고 아양을 떨며 사진을 찍으면서 "사과는 남겨놓자. 성대한 축제 때 다시 따먹자"고 말했다. 장칭은 이른 시일안의 '여황(女皇)' 등극을 꿈꾸고 있었다.

4인방들은 이날 밤 칭화대학 당위원회 서기 츠췬(遲群 지군)을 독촉해 '전문 집필진'이 당정군 영도자들과 관련한 '비밀자료'를 밤을 도와 정리하고 있었다. 이것은 4인방들이 '탈권(奪權) 전장'에서 원로파 등을 수시로 공격할 때 쓸 '포탄'이었다. (주석 605)

광밍르바오(光明日報 광명일보)는 10월 4일 1면 머리기사로 칭화대학과 베이징대학의 4인방 전문 집필진의 명칭인 '량샤오(梁效 양효)' 명의로 '영원히 마오 주석의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하자'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마오 주석의 기정방침을 왜곡하는 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를 배반하고, 사회주의를 배반하고, 무산계급 독재 아래에서의 계속혁명의 위대한 학설을 배반하는 것이다. 어떠한 수정주의 우두머리가 감히 마오 주석의 기정방침을 왜곡하려고 하면 절대로 말로가 좋을 수 없다"고 겁박했다.

이글의 창끝은 화궈펑과 예졘잉을 가리키고 있었다. 언론동향을 담당하고 있는 리신(李鑫 이흠)은 곧바로 화궈펑에게 "형세가 더욱 위험해 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4인방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권력이 손에 들어 온 것처럼 큰 소리를 치고 다닐 때 4인방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시산(西山)과 위취안산(玉泉山) 거처를 옮겨 다니던 예졘잉은 10월 2일 오후 3시께 왕둥싱의 사무실을 찾았다. (주석 606)

예졘잉은 왕둥싱에게 "4인방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당과 국가는 출로가 없다"고 말한 뒤 목소리를 죽여 "잘 고려해 봤느냐?"고 재촉했다. 왕둥싱은 "형세가 압박하고 있습니다. 다시 늦출 수 없습니다. 결단을 내릴 때가 됐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예졘잉은 즉시 "실기를 해서는 안 된다. 군사행동은 귀신같이 빨라야 한다"며 서둘렀다. 예졘잉은 이어 왕둥싱에게 "우리들이 바로 화궈펑 동지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자. 빨리 과단성 있는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밤 예졘잉과 왕둥싱은 개별적으로 둥쟈오민샹(東交民巷 동교민항)에 있는 화궈펑의 집을 찾아가 자택 사무실에서 최종적으로 4인방 문제를 논의했다. 예졘잉은 화궈펑에게 행동개시의 결단을 촉구했다. 왕둥싱은 이날 중난하이 사무실에서 회의를 열고 중앙 판공청 부주임 겸 중앙 경위국 부국장 장야오츠(張耀祠 장요사), 8341부대 정치위원 우젠화(武健華 무건화) 등에게 "중앙은 이미 결심을 했다. 4인방에 대해 행동을 취하기로 했다"고 통보했다. 왕둥싱은 4인방을 일망타진할 방책을 논의하면서 명분과 행동 장소 등 4가지 문제를 거론했다. (주석 607)

1. 4인방의 심리상태를 파악해 보면 요즘 장춘챠오는 '마오쩌둥 선집(毛選 모선)' 출판의 권한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장춘챠오가 '모선(毛選)' 5권 출판 공작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이용한다. 만일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내용을 확정해 '모선' 5권 출판문제를 연구한다고 하면 장춘챠오를 끌어들이는 것은 여반장이다.

2. 관례적 행사에 따르면 중앙이 '모선'의 출판 문제를 연구할 때 특히 원고문제를 거론하면 예부터 모두 화이런탕(懷仁堂 회인당)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 규정에 대해 장춘챠오, 왕훙원 모두 알고 있다.

3. 마오 주석의 기념당 터 선정문제를 내세운다.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장춘챠오, 왕훙원은 미루거나 고의로 휴가를 낼 수 없다.

4. 화이런탕에서 행동을 취하면 비교적 편리하고 유리하다.

이 방안을 확정해 4인방을 순서대로 처리하기로 했다. 화이런탕에서 왕훙원과 장춘챠오, 야오원웬을 체포하고, 장칭과 마오웬신을 각각의 주거지에서 신병을 확보하기로 했다. 마오웬신(毛遠新 모원신)의 처리는 4인방과 구별해 한 단계 아래인 '보호심사'를 하기로 했다. 이런 행동방안 중에는 행동시간, 조직역량, 격리지점, 비밀보안 조처, 전투대비 예비안에서 베이징 위수군구와의 역할분담, 협력문제, 구체적이고 명확한 세부 시행규칙 등을 논의했다.

왕둥싱은 3일 밤 9시에 화궈펑을 찾아가 구체적인 행동방안과 부서 등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화궈펑은 "제정한 행동방안과 방법은 시행할 수 있다고 본다. 시간을 다시 단축하느냐 여부를 고려하고 사전에 해결해야 한다. 당신이 다시 예(졘잉) 원수와 이야기 해 보시오. 예 원수가 어떤 새로운 의견이 있는 지 알아보고. 만약에 예 원수가 이곳에 오실 수 있으면 나와 이야기하고, 예 원수가 당신이 있는 곳에 간다면 당신과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졘잉은 4일 오후 왕둥싱의 중난하이 남쪽 사무실에서 왕을 만났다. 

왕둥싱은 4인방 체포 행동부서와 실시방안 등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예졘잉은 "이 계획은 비교적 여물다. 안배도 상당히 주도면밀하다. 이 실시방안대로 집행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칭찬했다. 예졘잉은 "비밀이 새어 나가 실패한 역사적 사건이 대단히 많다"면서 비밀엄수를 강조했다. 이날 밤 화궈펑은 리셴녠, 우더, 천시롄과 국무원 소강당에서 회의를 열어 4인방 체포의 격리심사의 방식과 디데이를 6일로 잡았다고 통보했다. 

604) 毛澤東去世, 葉劍英抓捕‘四人幇’不再‘投鼠忌器   人民網  毛澤東 ‘臨終囑咐’引發高層鬪爭; 事關誰來接班   人民網-文史頻道
605)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606) 毛澤東去世, 葉劍英抓捕‘四人幇’不再‘投鼠忌器   人民網
607) 毛澤東去世 , 葉劍英抓捕‘四人幇’不再‘投鼠忌器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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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4인방 중 장춘챠오, 왕훙원, 야오원웬 먼저 체포


왕둥싱은 3일 밤 9시에 화궈펑을 찾아가 구체적인 행동방안과 부서 등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화궈펑은 "제정한 행동방안과 방법은 시행할 수 있다고 본다. 시간을 다시 단축하느냐 여부를 고려하고 사전에 해결해야 한다. 당신이 다시 예졘잉 원수와 이야기 해 보시오. 예 원수가 어떤 새로운 의견이 있는 지 알아보고. 만약에 예 원수가 이곳에 오실 수 있으면 나와 이야기하고, 예 원수가 당신이 있는 곳에 간다면 당신과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는 4일 오후 왕둥싱의 중난하이 남쪽 사무실에서 왕을 만났다. 

왕둥싱은 4인방 체포 행동부서와 실시방안 등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예졘잉은 "이 계획은 비교적 여물다. 안배도 상당히 주도면밀하다. 이 실시방안대로 집행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칭찬했다. 예졘잉은 "비밀이 새어 나가 실패한 역사적 사건이 대단히 많다"면서 비밀엄수를 강조했다. 이날 밤 화궈펑은 리셴녠, 우더, 천시롄과 국무원 소강당에서 회의를 열어 4인방 체포의 격리심사의 방식과 디데이를 6일로 잡았다고 통보했다. 

4인방 체포의 행동책임자는 왕둥싱이 맡고 츠췬, 셰징이 등의 격리심사는 우더와 베이징시 서기 겸 위수구 사령관 우중(吳忠 오충)이 책임지고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화궈펑은 애초 계획대로 '마오쩌둥 선집' 5권 문제를 토론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6일 밤 8시 중난하이 화이런탕에서 중앙 정치국 상무회의를 소집한다고 장춘챠오, 왕훙원, 야오원웬에게 통보했다.

장칭은 정치국 상무위원이 아니기 때문에 마오웬신과 함께 체포하기로 했다. 왕둥싱은 6일 오후 중앙 경위단 단장 겸 중앙 경위국 부국장 장야오츠, 중앙 판공청 부주임 리신, 우졘화를 판공청 사무실로 불렀다. 왕둥싱은 이들에게 "중앙은 4인방을 분쇄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하고, 장야오츠에게 장칭과 마오웬신을 체포하도록 지시했다. 왕둥싱은 본인이 직접 왕훙원 등을 체포하기 위해 화이런탕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는 등 구체적 작전배치를 끝냈다. 

화궈펑과 예졘잉은 밤 7시 55분 화이런탕 거실에 앉아 왕훙원 등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한 장춘챠오가 먼저 화이런탕에 들어왔다. 장춘챠오가 의자에 앉으려 했으나 그곳엔 의자가 없었다. 장춘챠오가 "의자가 없잖아-"라고 말하며 서성일 때였다. 화궈펑이 일어나 장춘챠오에게 "너는 장칭, 왕훙원 무리와 패거리를 지어 반당(反黨), 반사회주의의 용서하지 못할 중죄를 저질렀다. 중앙은 격리심사를 결정했다. 즉시 집행한다"며 미리 준비한 선포문을 읽었다.

아연실색한 장춘챠오가 당했다고 느꼈을 땐 이미 속수무책이었다. 4인방의 '책사'로 위풍당당했던 면모는 온데간데 없고 다리에 힘이 풀려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장춘챠오는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행동소조의 경호원들에게 끌려 나갔다. 이어 왕훙원이 도착했다. 왕훙원이 회랑으로 걸어올 때 행동소조 경호원들이 가로막아 왕훙원을 연행하려 하자 왕훙원은 큰 목소리로 "너희들 무슨 짓이야? 나는 회의에 왔다"며 소리쳤다. 상하이에서 무력투쟁을 이끌었던 왕년의 조반파 왕훙원은 녹록치 않았다. 왕훙원은 연행하려는 경호원들을 발로 차고 주먹을 휘두르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주석 608)

그러나 뛰어봤자 벼룩이었다. 경호원들에게 제압돼 화이런탕 거실로 끌려왔다. 화궈펑은 일어나 왕훙원에게 중공중앙의 격리심사 결정을 통고하는 선포문을 읽어 나갔다. 화궈펑이 읽는 것을 채 마치기 전에 왕훙원이 갑자기 경호원들을 뿌리치고 5미터 남짓 앞에 앉아 있는 예졘잉을 향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곁에 서있던 왕둥싱이 권총을 꺼내 왕훙원을 쏘려했으나 너무 가까워 총을 쏠 수 없었다.

왕훙원이 두 손으로 예젠잉의 목을 조르려는 위기일발의 순간에 한 경호원이 잽싸게 달려들어 왕훙원을 쓰러뜨리고 수갑을 채웠다. 선포문을 읽던 화궈펑은 깜짝 놀라 황망소조 했으나 백전노장 노 원수 예졘잉은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체포된 왕훙원은 경호원들에게 끌려 나가며 "이렇게 빨리 움직이다니-"라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언론을 쥐락펴락했던 '여론총관' 야오원웬이 들어왔다. 왕훙원을 체포 할 때 한바탕을 소동을 벌인 뒤끝이라 야오원웬을 거실로 들이지 않고 대기실로 경호원들이 연행했다. 격리심사 통보는 화궈펑이 아닌 중앙 경위국 부국장이 선포했다. 붓방아를 흉기로 삼아 무수한 사람들을 도륙했던 금붕어 눈의 '문약한 서생' 야오원웬은 격리심사 통보를 듣는 순간 개구리처럼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바닥에 엎어졌다. 야오원웬은 경호원들이 부축해 연행하는 꼴사나운 몰골을 보였다.

608) 毛澤東去世, 葉劍英抓捕‘四人幇’不再‘投鼠忌器   人民網
     華國峰和葉劍英深夜報捷;; 把 ‘四人幇’ 統統抓起來了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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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4인방 우두머리 장칭,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연행


왕둥싱으로부터 장칭과 마오웬신 체포명령을 받은 장야오츠는 우젠화와 10여명의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밤 8시께 먼저 마오웬신이 거주하고 있는 중난하이 펑쩌웬(豊澤園 풍택원)의 이녠탕(이年堂 이년당)으로 갔다. 펑쩌원은 마오가 거처했던 곳으로 조카인 마오웬신이 잠시 살고 있었다.

장야오츠는 마오웬신에게 중앙이 '보호심사'를 결정했다고 통보하고 순순히 연행에 응할 것을 요구했다. 마오웬신은 "주석 주검의 온기가 채 사라지지도 않았는데-너희들이-"하며 고함을 치고 권총반납을 거부하며 저항했으나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해 연행됐다.

장야오츠는 리신, 우젠화 등과 2명의 여 경호원을 이끌고 밤 8시 30분께 이녠탕에서 아주 가까운 장칭이 살고 있는 중난하이 201호에 도착했다. 장야오츠 등이 들이 닥쳤을 때 장칭은 실크 잠옷을 입고 소파에서 수입영화를 보고 있었다. 장칭은 노기를 띠고 장야오츠를 쳐다보며 "무슨 일인가?"라고 물었다. 장야오츠는 경칭을 생략하고 장칭에게 격리심사 한다는 내용을 통보했다. (주석 609)

"장칭, 나는 화궈펑 총리의 전화지시를 받았다. 당신은 지금 당 중앙을 분열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당 중앙은 당신을 격리심사하기로 했다. 즉시 집행한다. 당신을 다른 곳으로 연행하겠다. 당신은 당에 대해 성실하고, 죄를 솔직하게 진술해 기율을 준수해야 한다. 문서함의 열쇠를 주시오."

장야오츠는 당시 장칭을 격리심사 할 때 "당신은 당에 대해-준수해야 한다"는 대목은 장칭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폭발해 자신이 임시 만들어 장칭에게 한 말이라고 회고했다. 장칭은 장야오츠가 격리심사를 통보할 때 소파에 앉아 두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았지만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장칭은 일찍이 이런 일을 예상한 듯 바닥에 구르며 울고불고하거나 고함을 치는 등의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장칭은 일어나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내 연필로 봉투 위에 '화궈펑 동지 친계(親啓)'라고 쓴 뒤 그 안에 넣어 밀봉해 장야오츠에게 넘겨주었다. 장칭의 마지막 자존심의 발로였다.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온갖 전횡과 패악으로 미증유의 재앙을 불러 일으켰던 4인방의 척결은 총알 하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1시간 만에 이뤄졌다. 마오가 죽은 뒤 27일 째 되는 날이었다. 화궈펑과 예졘잉은 4인방이 장악하고 있던 인민일보, 중앙 인민방송국, 신화사 등 언론기관을 통제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 접수했다.

1976년 10월 6일 밤 10시 30분 베이징시 북서쪽에 자리 잡은 위취안산(玉泉山 옥천산)자락 9호관 예졘잉의 집. 긴급 정치국 회의가 그의 주거 사무실에서 열릴 예정이어서 중앙 정치국 위원과 후보 위원들이 잇달아 도착했다.

이들은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른 채 달려와 긴급회의 소집이유를 서로 물어보며 웅성댔다. 예졘잉이 별세한 줄 알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밤 11시께 화궈펑과 예졘잉이 손을 맞잡고 미소를 지으며 회의실로 들어왔다. 회의가 시작되자 화궈펑은 중공중앙 제1부주석 겸 총리로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면서 먼저 발언에 나섰다.

화궈펑은 "동지들, 오늘 밤 여러분들을 이 자리로 오도록 연락한 것은 중요한 일을 통보하기 위해섭니다. 왕훙원, 장춘챠오, 장칭, 야오원웬이 마오 주석 서거의 틈을 노려 비밀리에 결탁해 당과 국가의 최고 영도권을 탈취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중국인민에게 엄중한 재난을 가져다 준 이 반혁명 집단을 적시에 분쇄하기 위해 10월 6일 밤 8시 당 중앙은 부득불 단호한 조처를 취해 4인방을 격리심사 시켰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화궈펑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예졘잉이 큰 소리로 "그들을 모두 체포했다"고 말했다. 순간 짧은 침묵에 이어 열렬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석 610)

화궈펑의 보고가 끝나자 예졘잉은 화궈펑을 중공 중앙위원회 주석,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해 나중에 중앙 전체회의에서 추인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제의했다. 이튿날인 7일 새벽까지 계속된 긴급 정치국 회의는 화궈펑을 당 중앙 주석과 군사위원회 주석에 임명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로써 화궈펑은 명실 공히 당정군의 최고 지도자가 됐다.

609) 1976; 我負責的‘四人幇’抓捕行動   張耀祠   人民網
     毛遠新被捕時拒絶交出手槍; 大喊‘主席尸骨未寒’   人民網-文史頻道
610) 華國峰和葉劍英深夜報捷; 把‘四人幇’ 統統抓起來了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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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덩샤오핑 다시 복권 “마오의 공적은 1위, 과오는 2위” 역사적 위상 인정


4인방의 분쇄는 마오 노선을 추종하는 '실권파'와 '원로파'들의 합작품이었다. 예졘잉 등 원로파들은 연부역강한 새 세대의 화궈펑을 우두머리로 하는 정치집단이 '문화대혁명이 조성한 혼란'의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갈 것을 바랐다. 하지만 화궈펑 등 '실권파'들은 극좌 과오의 산물인 '문혁'의 종결처리와 덩샤오핑 복권, 톈안먼 사건에 대한 명예회복 조처 등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예졘잉과 화궈펑의 사이도 점점 소원해졌다. 예졘잉은 1976년 10월 8일 화궈펑이 소집한 예비회의 때 화궈펑에게 "(덩)샤오핑 동지는 당과 국가를 운용하는 경험이 풍부하다. 우리 당내에서 얻기 어려운 인재다. 마오 주석과 저우 총리는 여러 차례 덩샤오핑을 칭찬했다. 당과 군내의 다수 동지들과 전국의 인민들이 덩샤오핑 동지가 나와서 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른 시일 안에 그가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덩샤오핑의 복권을 요구했으나 화궈펑은 거절했다. 

화궈펑은 4인방들이 벌였던 덩샤오핑 비판과 '우경 번안풍' 반격운동을 계속 펼쳐나갔다. 예졘잉은 덩샤오핑이 복권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신이 매일매일 보는 국가의 중요문건 등을 덩샤오핑에게 보내 국가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각별하게 배려했다.

예졘잉은 3차에 걸쳐 끈질기게 덩샤오핑의 복권을 요구했다. 그때마다 덩샤오핑을 경계하는 화궈펑은 "마오 주석이 결정한 것과 마오 주석이 지시한 것은 다 지켜야 한다", 이른바 ‘두 가지 모두 지켜야 한다’는 '양개범시(兩個凡是)'를 내세워 거부했다.

예졘잉은 물러서지 않고 4번째 덩샤오핑의 복권을 요구했다. 천윈, 왕전, 리셴녠 등도 예졘잉의 의견에 동의하는 견해를 발표해 화궈펑은 궁지에 몰렸다. 원로파의 압박에 밀린 화궈펑은 마지못해 덩샤오핑의 복권을 제기하기로 했다.


화궈펑은 1977년 8월 12일에서 18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린 제11차 전국대표대회 보고에서 "문화대혁명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하고 "모든 역량을 단결해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건설하기 위해 분투하자"고 발표해 많은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주석 611)

11대 회의에서 화궈펑이 중공중앙 주석에, 예ㅤㅈㅖㄴ잉, 덩샤오핑, 리셴녠, 왕둥싱이 중앙 부주석에 각각 선출됐고, 정치국 상무위원은 이들 5명이 임명됐다. 복권된 덩샤오핑은 11차 대표대회 폐막사에서 "실사구시의 우량 전통과 기풍을 발양하자"고 역설했다. 이 발언은 덩샤오핑이 '좌'경 사조를 비판하고 '양개범시'를 깨는 것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8월 25일 새로운 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에는 화궈펑, 부주석에는 예졘잉, 덩샤오핑, 류보청, 쉬샹쳰, 녜룽전이 임명됐다. 군사위원회 상무위원은 리셴녠, 왕둥싱, 천시롄, 웨이궈칭(衛國淸 위국청), 쑤전화(蘇振華 소진화), 장팅파(張廷發 장정발), 수위(粟裕 속유), 뤄루이칭(羅瑞卿 나서경)이 뽑혔다.

이때 예졘잉이 군사위원회의 일상 업무를 주재하고, 덩샤오핑이 해방군 총참모장을 겸했다. 또 린뱌오에게 잔혹한 박해를 받아 자살미수로 다리가 부러진 뤄루이칭이 복권돼 중앙 군사위원회 비서장이 됐다. 이때 인사는 살아있는 4명의 원수들이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아 원로파들이 군권을 장악하는 등 대거 당정군에 진입했다. 이들은 견결하게 4인방에 저항하면서 문화대혁명을 반대하고, 덩샤오핑을 굳세게 지지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덩샤오핑은 1978년 9월 14일부터 지린성(吉林省 길림성) 등 동북 3성 순시에 나서 화궈펑이 신주단지처럼 떠받들고 있는 마오의 결정과 지시를 지키는 '양개범시'에 대해 비판하고 나섰다.

덩샤오핑은 "'양개 범시'는 진정한 마오쩌둥 사상이 아니다. 마오 주석이 우리들에게 준 실사구시의 우량 전통과 기풍을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4개 현대화는 희망이 없다. 또 우리들은 매우 가난하다. 매우 낙후되어있다. 솔직히 말해서 인민들에게 죄송하다. 우리들의 인민은 매우 훌륭하다"고 밝히고 '양개범시'는 이미 중국 인민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지도이념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했다. (주석 612)

'원로파'의 지지를 얻고 있는 덩샤오핑과 마오를 추종하는 '실권파'인 화궈펑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1978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린 제11기 3중 전회는 예졘잉과 화궈펑, 덩샤오핑, 리셴녠 등이 함께 회의를 주재했다.


덩샤오핑은 이 회의에서 마오에 의해 반혁명 사건으로 낙인찍힌 '톈안먼 사건'을 극적으로 '혁명적 사건'으로 명예회복을 시켜 마오를 추종하던 화궈펑에게 결정적 패배를 안겼다. 이 회의는 또 저우언라이가 염원했던 사회주의 4개 현대화 건설을 1979년부터 본격화하는 발판을 마련해 중국이 개혁개방의 새로운 시대로 가는 획기적인 정책결정을 했다. 이런 결정은 덩샤오핑이 추구하는 실사구시에 기반한 지도사상의 결과물이었다. 

1980년 말, 예졘잉은 중앙 정치국 회의에서 화궈펑이 중공중앙 주석,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직 사퇴를 강하게 제의하고 덩샤오핑을 또 다시 높이 평가했다. 예졘잉은 "샤오핑 동지는 역사상 당에 많은 공헌을 했다. 4인방 분쇄이후 매 중요한 고비마다 예리하고 과단성 있게 정확한 정책결정과 주장을 한다. 샤오핑 동지는 국가를 잘 통치할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는 전당의 '군사(軍師)'고 전군의 통솔자로 손색이 없다"고 극찬했다.

4인방 분쇄를 총지휘해 문혁을 끝낸 종결자로서의 예졘잉은 당정군 뿐만 아니라 인민들의 두터운 신망과 존경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예졘잉의 한 마디는 전반적 국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예졘잉이 전폭적으로 덩샤오핑을 지지해 덩이 중공중앙의 제2대 영도 집단체제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시대를 잘못 판독한 화궈펑은 끝내 권력투쟁에서 패해 1981년 6월 27일 개막한 11기 6중 전회에서 당 주석 자리를 내놓았다. 

덩샤오핑은 이 회의에서 중국과 중국인민에게 미증유의 재앙을 가져다 준 문화대혁명을 부정하고 마오의 과오를 인정하는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덩샤오핑은 이 결의안을 장장 1년여에 걸쳐 준비하고, 4천여 명(실제로는 5천 6백여 명이 토론했으나 '4천인 토론'이라고 함; 편집자 주)의 당 고급 간부들의 토론을 걸쳐 확정했다.

 

 


 

이 '역사결의'는 애초 '4000천인 토론' 당시에는 5만자였으나 몇 차례 수정 보완을 거쳐 8항, 3만 5천자 로 결정했다. 이 '역사결의'는 5항 '문화대혁명의 10년'에서 문혁은 마오가 발동했고, 문혁 10년 동안 당과 국가와 인민은 가장 큰 좌절과 손실을 입었다. 문혁은 반혁명 집단에 이용돼 큰 재난을 일으킨 내란이었고, 마오는 과오를 범했고, 과오는 적지 않았다고 규정해 마오의 '무오류성'을 비판했다. 

그러나 '역사결의'는 "마오쩌둥 동지는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고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이며 전략가이고 이론가이다. 그는 '문화대혁명'에서 엄중한 과오를 범했지만 그의 일생을 통해서 볼 때 그의 중국혁명에 대한 공적은 그의 과오를 훨씬 능가한다. 그의 공적은 제1위고, 과오는 제2위다"라고 규정해 마오의 위상을 여전히 인정했다.

덩샤오핑은 직계인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과 자오쯔양(趙紫陽 조자양)을 각각 당 주석과, 총리에 임명했다. 세 번째 화려하게 부활한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은 당정군(黨政軍)을 총괄 지휘하면서 '마오쩌둥 시대'를 끝내고 중국의 제2세대 영도 시대를 활짝 열었다.

4인방의 우두머리 장칭은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형으로 감형됐으나 1991년 5월 14일 새벽에 자살했다. 77살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왕훙원은 복역 중 간암에 걸려 1992년 8월 5일 58살로 생을 마감했다. 장춘챠오는 만기출소를 앞두고 병사했고, 4인방 중 야오원웬만 유기징역 20년을 선고받고 유일하게 1996년 10월 6일 만기 출옥했다.

아! 세상사(世上事), 다! 포폄훼예를 뒤로하고, 저 흘러가는 물처럼 그렇게 흘러가는 구나. <끝>

※ 그동안 변변치 못한 글을 애독하고 성원해 주신 독자님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독자님들의 건강과 무궁한 행운을 기원합니다. 마침 인카운터에서 이 연재 글을 책으로 엮기로 했습니다. 잘 다듬어 독자님들을 다시 뵙기를 기대합니다. 귀중한 지면을 내주신 미디어오늘 이완기 사장과 미디어오늘 구성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611) 毛澤東傳(下) 1949-1976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沒有葉劍英的毛澤東, 鄧小平會是什麽樣子?  文/袁小倫   ‘黨史博覽’   人民網
612) 1978年 鄧小平到處 ‘點火’; 毛主席究竟哪里偉大?   人民網-文史頻道
     毛澤東去世及粉碎 ‘四人幇’后, 階級鬪爭爲何愈演愈烈?   人民網-文史頻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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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중국지, 피로 물든 미완의 혁명… 대륙을 지배했던 마오, 그도 결국 사람이었다

불굴의 혁명가와 무지막지한 폭군, 두 얼굴의 마오

 

마오쩌둥은 1966년 6월, 세 번째 부인 장칭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하대란(天下大亂)은 천하대치(天下大治)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을 남긴다. “세상이 한 바탕 큰 난리를 겪어야만 큰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의미다. 문화대혁명의 격랑을 헤쳐 나가는 마오의 심리변화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눈길을 끄는 건 마오가 “중대한 문제에서 내 본심을 어겨가며 다른 사람에게 동의하는 것은 내 일생에 처음”이라며 “불안하다”고 털어놓은 부분이다.

최근 출간된 마오쩌둥의 평전 ‘중국지’는 이 편지를 두고 “젊은 날 혁명가로서 불굴의 신념과 기개, 전쟁터에서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며 투쟁했던 마오의 흔적은 한 터럭도 찾아볼 수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인생 정리를 지척에 둔 73세의 무한 권력자가 내려놓고 비워야 할 권력에 대해 끝없는 집착을 드러내고 정변에 불안해 하는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허허로움을 더한다”는 평가도 의미심장하다.

마오도 절대 권력은 절대 패망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심연에 빠진 마오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957년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2천만명 이상이 굶어죽은 뒤였다. 자급자족적 공산주의를 건설한다면서 철강 생산을 독려했지만 품질이 낮아 아무데도 쓸 수 없었다. 농업 생산이 급감해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했지만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마오는 대약진운동의 책임을 지고 주석에서 물러나야 했다.

펑더화이 부주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당내에 일단의 좌경 편향성이 두드러졌다. 이를 테면 허풍이 생겨났다. 과학을 대신한 열정만으로 일거에 전국의 모든 사람이 돈 없이 밥을 먹을 수 있고 어떤 지방에서는 며칠 사이에 수없이 많은 집들을 철거해버렸고 짧은 시일 안에 문맹을 퇴치하겠다고 주장하는 등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소자산계급의 열광으로 나타났다.”

‘중국지’를 쓴 현이섭씨는 “역사는 만약을 허용하지 않지만 만약 이때 마오가 펑더화이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했다면 중국의 퇴보적 역사발전과 문화대혁명의 처참한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애석한 생각이 든다”고 평가하고 있다. 펑더화이는 결국 호된 비판을 받고 부주석에서 물러나고 마오는 흔들리는 권력을 잡기 위해 수정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그게 문화대혁명이었다.

   
중국지 / 현이섭 지음 / 인카운터 펴냄.

 

조반유리(造反有理). 마오를 지지하는 학생들이 “조반하지 않으면 수정주의가 된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보내자 마오가 답신에 쓴 말이다. 반역에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다. 마오는 “나는 그대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는 말로 실권을 잡고 있었던 류사오치 주석과 덩샤오핑 총서기 등에 맞서라고 부추긴다. 전국적으로 이른바 홍위병들이 들고 일어났고 마오는 다시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글을 써서 이들을 자극한다.

문화대혁명의 절정은 1966년 8월18일 베이징 텐안먼 광장에서 열린 군중대회였다. 마오는 전국에서 몰려든 100만 홍위병들 앞에서 사열을 받았다. 초록색 군복을 입은 마오가 연단에 서서 손을 들어 인사를 하자 홍위병들은 펄쩍펄쩍 뛰며 환호하고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홍위병들은 혁명조반이라는 명분으로 일반인들의 가택을 수색하고 가산을 몰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반동으로 매도해 때려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조반파들은 공안기관의 무기고를 탈취해 곳곳에서 극렬한 유혈 충돌을 빚었다. 그러나 마오는 “노동자 계급의 내부에 근본적인 이해 충돌은 없다”며 조반파의 만행을 방치했다. 중국 법원은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공식적으로 문화대혁명 기간에 72만9511명이 박해를 받았고, 이 가운데 3만4800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 피해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추산된다. 연구 결과에 따라 최대 300만명이 죽었다는 분석도 있다.

문화대혁명의 경제적 손실은 5000억위안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약진 운동의 피해 규모를 더하면 6200억위안으로 불어난다. 중국 정부가 건국 이후 30년 동안 기반시설에 투자한 총액보다 큰 천문학적인 규모의 금액이다. 경제상의 손실도 손실이지만 잃어버린 10년의 계산할 수 없는 가치가 중국의 발전을 후퇴시켰다는 비판도 쏟아진다. 경제 발전의 호기를 놓치고 야만의 시대로 퇴보했다는 비판이다.

“혁명은 밥을 사는 일이 아니다. 글을 짓는 것이 아니다. 그림 그리고 수를 놓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우아하고 점잖고 고상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온화, 선량, 공경, 검약, 양보 등의 미덕으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 혁명은 봉기다. 하나의 계급이 다른 하나의 계급을 엎어버리는 격렬한 행동이다. 농촌혁명은 농민계급이 봉건지주계급의 권력을 뒤집는 것이다.” 마오의 이 말은 많은 농민들의 좌우명이 됐고 문화대혁명을 이끄는 이론적 바탕이 됐다.

‘중국지’는 마오의 불굴의 혁명가로서의 면모와 타락한 독재자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담아낸다. “적을 공격할 때 10개의 손가락을 상처 내봤자 손가락 하나를 확실하게 절단하는 것만 못하다. 같은 이치로 적의 10개 사단을 흠집 내봤자 1개 사단을 몰살시키는 것만 못하다.” 마오의 섬멸전 전술전략은 중국 혁명전쟁에서 뿐만 아니라 권력을 잡은 뒤 반대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활용된다.

스물다섯에 중국 공산당을 창립하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수립, 서른넷에 주석이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정은 웬만한 드라마나 대하소설보다 흥미진진하다. 장제스 총통이 이끄는 국민당 군대의 추격을 피해 장장 9600km를 걸어서 탈출한 장정은 세계를 경악시켰다. 운하를 건너고 설산을 넘고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368일의 고난의 행군. 8만6000명 가운데 8500명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그 험난했던 역정을 설명해준다.

마오가 이끄는 홍군이 창사성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화도 흥미롭다. 완벽 방어를 한 적군에 맞서 마오는 전국 시대의 화우충진 전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물소의 꼬리에 폭죽을 매달아 불을 붙이면 소들이 돌진해 적군의 방어망을 뚫을 수 있다는 발상에서였는데 폭죽 소리에 놀란 소들이 아군 진영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의 뿔에 받히거나 깔려 죽는 병사들이 부지기수였고 결국 맨몸으로 적군에 돌진했다가 성문 앞에서 널브러지고 말았다.

 

 

 

병사의 10분의 1을 잃으면서 추위와 배고픔에 쫓기는 고된 여정이었지만 이 때 지은 마오의 시는 기백이 넘친다. “높은 하늘에 엷은 구름 흘러가고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아득히 멀어 보이지 않네. 만리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사내 대장부가 아니지. 손가락을 꼽아보니 2만리 노정일세. 류판산 봉우리에 홍기가 서쪽 바람을 받아 펄럭이니, 오늘 내 손에 있는 긴 끈, 어느 때 적장을 결박지을 수 있을 거나.”

마오의 전략전술은 다음의 16자결 대련으로 응축된다.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퇴각한다(敵進我退). 적이 멈춰 진을 치면 우리는 교란한다(敵駐我擾).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한다(敵疲我打).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격한다(敵退我追). 유격전에 승산이 있다. 빠르게 진격하고 퇴각한다(大步進退). 적을 깊숙이 유인한다(誘敵深入). 병력을 집중한다(集中兵力). 각개 격파한다(各個擊破). 운동전으로 적을 섬멸하자.”

마오는 장제스에 쫓겨 궁벽진 만리장성 언저리 산베이 지역으로 도망가면서 두보의 시를 읊기도 했다. “번거로운 삼고초려 천하계책 받들어 두 대를 거쳐 보필한 늙은 신하의 마음.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몸 먼저 가니, 길이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 흘려 옷깃 적시게 하네.” 마오는 제갈량을 애도하는 이 시에 감정 이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섯 번이나 기산을 공략했으나 결국 실패했던 제갈량이 남 같지 않았던 것일까.

에드거 스노는 ‘중국의 붉은 별’이란 책에서 장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홍군은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넜다. 그 산맥 가운데 5개는 만년설로 덮여있었다. 그들이 통과한 성이 12개, 점령한 도시와 마을이 62개, 돌파한 지방 군벌군의 포위망이 10개였다. 한니발의 알프스 원정이나 모스크바에서 대패한 나폴레옹군의 퇴각 따위는 여기에 비하면 휴일의 소풍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사적으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장기적이고 대규모적인 내전은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대 진영의 대리전 양상을 보였다. 결국 장제스는 질 수 없는 전쟁을 졌고 마오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겼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도 시대정신을 판독하지 못해 부패하고 민심을 얻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1945년 8월 일본이 퇴각한 뒤 마오는 3년여의 전투 끝에 장제스를 몰아내고 1949년 3월 베이징에 입성했다.

흥미로운 건 현대 중국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 못지않게 권력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암투를 관찰하는 일이다. “오로지 나의 펑 대장군뿐이네”란 시를 써서 건네기도 했던 장정의 동지, 펑더화이가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수정주의자로 내몰려 퇴출된 뒤 홍위병들에 붙잡혀 폭행과 조리돌림을 당하는 과정은 소설과도 같다. 펑더화이는 암으로 죽고 난 뒤에야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된다.

첫 번째 부인 양카이후이의 마지막 장면도 감동적이다. 마오가 창사성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을 때 감옥에 붙잡혀 있던 양카이후이를 찾아간 기자가 묻는다. “마오와 부부 관계를 끝낸다고만 말하면 됩니다.”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마오를 사랑하는 것은 내 스스로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보다 고귀합니다.” 기자가 다시 말한다. “당신은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자 양카이후이가 하는 말. “우리는 부부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전우입니다. 부부 관계를 끊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믿음에 비춰보더라도 배반행위입니다. 나의 인격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믿음은 절대로 바뀔 수 없습니다.” 양카이후이는 결국 스물아홉의 꽃다운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마오는 양카이후이의 죽음을 전해 듣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마오는 1959년 주석에서 물러났으나 린뱌오 등을 사주해 류사오치를 실각시키고 죽기 직전까지 막후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문화대혁명이 마오의 권력 유지 수단이었다는 사실이 제대로 알려진 건 한참 뒤의 일이다. 한때 후계자로 불렀던 린뱌오가 마오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마오와 갈등을 빚고 소련으로 망명하던 도중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도 영화 같은 스토리다.

텐안먼 광장에서 100만 홍위병을 호령했던 마오가 1976년 텐안먼 사건으로 물러났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한때 숙청당할 위기에 몰렸던 덩샤오핑이 마오가 죽고 난 뒤 정권을 잡고 문화대혁명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학살과 소요사태의 책임이 마오에게 있다고 인정한 것도 권력무상을 실감하게 한다. 덩샤오핑은 그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자제하면서 공은 공이고 과는 과라고 선을 그었다.

마오의 71세 생일 때 일이다. “나는 늙었다, 얼마 있다가 마르크스를 보러 갈지도 모른다”고 말을 꺼낸 마오는 “전국 기층의 3분의 1의 영도권이 나의 수중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수정주의의 출현은 자산계급이 정치무대에서 흥기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회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마오는 “자본주의의 길로 가는 영도자는 노동자들의 피를 빠는 자산 계급분자가 됐다”면서 “이들은 투쟁의 대상이고 혁명의 대상”이라고 비판했다.

마오는 죽기 직전까지 권력을 탐했다.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신념을 거슬러 대중을 선동하고 전장에서 함께 살아 돌아왔던 동지들을 내쳤다. 평생 혁명을 팔았지만 민중의 피로 얼룩진 혁명은 길을 잃었고 그의 사후 중국은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붉은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마오에게서 미완의 혁명의 향수를 느끼지만 이 책은 말년의 마오가 결국 욕망으로 가득 찬 탐욕스런 늙은이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마오가 진시황을 평가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기록을 살펴보면 마오는 1926년 강연에서는 진시황의 악정을 견디다 못해 깃발을 들고 일어선 농민들의 투쟁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1958년 연설에서는 진시황을 옹호한다. “그는 단지 460명의 유가를 땅에다 묻었지만 우리는 4만6000명의 지식인을 묻었다. 우리가 반혁명분자를 진압할 때 일단의 반혁명 지식분자들을 죽이지 않았나. 우리를 진시황이라고 욕하는 것은 독재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르크스와 진시황을 결합해야 한다”거나 “민주와 집중을 결합해야 한다”면서 진시황의 절대 권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진시황이 공자보다 더 위대하다”고도 했다. “중국의 지난날 봉건군주들 중에서 그를 초월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수천 년 동안 욕을 얻어먹고 있다. 욕을 먹는 것은 두 가지다. 460명의 지식인을 죽이고, 책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말년의 마오는 진시황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꿨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마오쩌둥과 그의 부인 장칭.


‘중국지’는 용쟁호투편과 대란대치편으로 나뉜다. 용쟁호투편이 구국제민(救國濟民)과 새로운 중국 건설을 열망하는 중국공산당의 생성과정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벌이는 혁명투쟁을 그렸다면 대란대치편은 건국 이후 균열하는 노선상의 이념갈등과 권력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다툼을 파고든다. 음모와 배리, 잔혹 무비한 권력투쟁과 숙청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해 혁명을 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1980년 해직 기자 출신으로 한겨레 기자와 편집부국장을 거쳐 미디어오늘 사장을 지냈던 현이섭씨는 장장 원고지 7000매 분량의 이 책에서 “권력의 노예가 되어 동지를 주살하는 권력의 부나비들과 그들의 하수인인 인간 사냥꾼들이 벌이는 권력놀음은 인간 존재를 부정하게 한다”면서도 “비정한 권력의 세계에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 인간애는 여전히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한다”고 지적한다.

중국지 / 현이섭 지음 / 인카운터 펴냄.

 

 

 “말년의 마오는 권력 금단현상을 겪고 있었다”
[인터뷰] ‘중국지’ 저자 현이섭씨


미디어오늘에 1년 가까이 주 5회 연재됐던 '중국지'는 원고지 7000매 분량의 대서사시다. 현이섭씨는 ‘초한지’가 유방과 항우의 용쟁호투를 중심으로 한나라의 건국과정을 그렸듯이 공산혁명투쟁을 벌이며 항일전쟁과 내전을 승리로 신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과 주변 인물들의 생애를 일화를 중심으로 쉽게 풀어냈다. 그래서 책 제목도 '중국사'가 아니라 '중국지'다. 현씨는 마오의 공산당과 장제스의 국민당이 펼친 인맥 대결을 주축으로, 사회주의 신중국의 성립과 문화대혁명의 광풍,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줄달음쳤던 파란만장한 역사는 ‘초한지’나 ‘삼국지’에 뒤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중국지>의 저자 현이섭 씨. ©민중의소리

 

- 마오쩌둥을 장정을 이끈 불굴의 혁명가로 찬양하거나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무지막지한 폭군으로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 어느 것이 마오의 진짜 모습인가. 

“안타까운 부분인데 그게 권력의 속성인 것 같다. 건국하기까지의 혁명 투쟁, 이른 바 신중국에 대한 열정, 혁명을 해야 하는 당위성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데, 건국 이후로 넘어가면 노선 투쟁이 시작된다. 급진적 사회주의 국가를 형성하려는 열정이 앞서다 보니 당권파라고 할 수 있는 류샤오치나 덩샤오핑처럼 점진적 개발 계획을 꿈꾸는 게 아니라 일거에 뒤집는 공산 사회를 꿈꿨던 거다. 이론과 현실의 괴리현상이다. 수정주의에 대한 감정적 반발이 있었다. 반수방수라고 해서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수정주의를 방어해야 한다, 그게 마오의 일관된 계획이었다.” 

- 훌륭한 혁명가였지만 경제를 몰랐던 것 아닌가. 대약진운동이 실패하면서 폭군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어긋난 욕망이 끔찍한 학살을 불러왔다. 
“대약진운동에 실패하고 린뱌오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난 뒤 좌절을 겪고 나니까 권력에 대한 금단현상이 있었던 것 같다. 류사오치나 덩샤오핑 같은 실무그룹들이 마오의 새로운 중국에 대한 설계에 걱정을 많이 했고 마오는 마오대로 수정주의를 의심하고 부정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무리수를 두게 됐던 것 같다. 절대권력을 비판하던 그가 나중에는 진시황이 공자보다 더 기여한 게 많다며 절대권력을 옹호하게 된 것도 권력의 속성, 인간의 속성인 것 같다. 강력한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마오가 50년대에 물러났더라면 신과 같은 대접을 받았을 거라는 평가도 있더라. 
“그런 평가도 가능하다. 학자들 이야기는 문화대혁명이 중국의 발전을 20년 이상 후퇴시켰다고 본다. 1960~1970년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경제가 성장하던 도약 시기인데 중국은 멈춰있었으니까.” 

- 문화대혁명을 야만의 시대라고 평가했다.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나. 
“중국 사람들도 99%는 문화대혁명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좌파진영에서도 인정을 한다.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나 다들 정치적인 가치관이 있는데 그걸 포장해서 수정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하고 노선투쟁도 하고 하지만, 인성 문제로 본다면 사회주의나 민주주의나 같지 않을까. 권력을 행사하면서 권력을 쥔 사람이 유혹을 받는 건 공산사회나 민주사회나 같다는 이야기다. 마오도 그러 함정에 빠진 거다.” 

- 위안화 모델은 여전히 마오다. 텐안먼 광장에는 여전히 마오의 초상이 걸려있다. 중국 사람들이 아직도 마오를 숭배하는 이유가 뭔가. “
“청나라 말년에 제국주의 열강에 침탈 당하면서 대국의 자존심이 찢겼는데 마오가 중국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운 거다. 마오에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여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오 역시 자신의 공이 7이고 과가 3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공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권력의 포로가 돼서 철권을 휘둘렀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 책에서 마오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당신은 어떻게 평가하나. 
“젊은 시절의 마오에게는 구국제민의 이상과 혁명의 열정이 있었다. 전략가적인 머리가 있고 용병술에 뛰어났다. 그런데 말년의 마오는 쫓기는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다. 후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는 걸 보고 후손들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두려워 했다. 사후의 문제까지도 고려하지 않았을까. 장칭에게 쓴 편지에도 나온다. 실권의 두려움이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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