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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민주주의자 김근태

by Wood-Stock 2012. 1. 3.

김근태 (1947~2011)

[인포그래픽]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연보

 

 

민주화 역사에 가장 굵은 글씨로 새겨질 이름, 김근태

일대기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빌던” 끔찍한 고문 고발하고 ‘세계의 양심수’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노무현 대통령과 “계급장 떼고 논쟁”, 국민연금 주식투자 막아내

 

 

 

 

 

이 땅의 민주화가 한두명의 피땀으로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 역사에 김근태라는 이름은 가장 굵은 활자로 아로 새겨질 것이다. 김근태(1947~2011)는 암흑의 시기였던 19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민주화 운동을 앞장서 이끌어온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자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었다. 온몸으로 역사를 진보시킨 진정한 투사였다.

 

그를 운동가로 만든 것은 박정희 독재체제가 낳은 암울한 시대상황이었다. 서울대 상대(경제학과) 3학년 때인 1967년 김근태는 대통령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교내 시위에 참가했다가 군에 강제로 끌려가면서 저항의 길을 걸었다. 70년 복학한 뒤에는 동기생인 고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손학규 등과 함께 교련반대(1971) 등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 71년 공안당국이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서울대생 국가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수배받는 처지가 돼, 박정희 정권이 끝나는 1979년 말까지 쫓겨 다녔다.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김근태는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을 주도함으로써 독재타도 운동의 선봉에 선다. 당시 우리 사회는 1980년 5·18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에 눌려 학생운동도 움추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청련은 ‘민주화의 길’이란 소식지 발간과 각종 집회를 통해 민주화 투쟁의 불길을 당겼다. 그 중심에는 초대 및 2대 민청련 의장을 맡은 김근태가 있었다.

 

김근태를 눈엣가시로 여긴 전두환 정권은 1985년 9월4일 구류에서 풀려나 서울 서부경찰서를 나오던 그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곧바로 끌고갔다. 이때부터 김근태를 서울대 학생운동권 조직인 ‘민추위(민주화추진위원회)’와 그 투쟁문건이었던 ‘깃발’의 지도자인 문용식의 배후 인물로 만들기 위한 권력 차원의 조작이 시작됐다. 김근태는 9월25일까지 이근안 등 고문기술자들로부터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모두 10차례나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지 고문기술자를 돕던 사람조차 김근태가 홀로 남았을 때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를 떠나라”고 울먹일 정도였다. 민청련 간부였던 이을호, 김병곤 등도 함께 고문을 당했다. 이을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앓았으며, 김병곤은 1990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 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그해 12월19일 법정에서 ‘짐승의 시간’을 이렇게 증언했다.

 

하지만, 김근태는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 고문 폭로를 위한 법정투쟁에 나섰다. 그는 전기고문 때 발뒤꿈치에 생긴 주먹만한 상처 딱지를 수거해 감옥에 따로 보관했다. 그해 12월13일 접견온 이돈명 변호사와 목요상 의원에게 상처딱지를 건네려했지만, 교도관에 의해 제지당하고 끝내 중요 증거물을 이들에게 빼앗겼다. 망가진 신체를 증거로 채택하기 위해 법원에 낸 ‘신체감정 증거보전’ 신청도 정권의 압력으로 기각당했다.

 

그러자 부인 인재근이 투쟁을 이어갔다. 검찰청 복도에서 김근태로부터 고문의 실상을 기적적으로 잠깐 들은 인재근은 이 사실을 감옥 밖에 널리 알렸다. 특히 그는 이미자 노래테이프 중간에 고문 내용을 녹음한 다음 이를 미주 한국일보 기자인 심기섭을 통해 해외로 내보냈다. 이 사실은 뉴욕타임즈 등에 크게 보도됐으며, 전두환 정권은 궁지에 몰렸다.

 

그 공로로 김근태와 인재근은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87년)을 받았으며, 독일 함부르크 자유재단으로부터는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88년)됐다. 그는 1988년 중반 석방된 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집행위원장으로 민주화와 평화운동을 하다가 1990년에서 92년까지 다시 구속됐다.


재야의 대표적 인물이던 김근태는 1995년 민주당 부총재로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이후 김대중이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으며,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됐다. 이후 17대까지 세번 연속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당의장,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지냈다.

 

그는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불의에는 강하되 약자에게는 따뜻한 기품을 유지했다. 항상 진지하고 정직한 그에게 동료들은 “국제신사”란 별명을 붙여줬다. 1999년 백봉 나용균 선생을 기려 제정한 제1회 ‘백봉신사상’에 선정되고, 같은 해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차세대 지도자’에도 1위에 올랐다.

 

하지만, 타협보다는 원칙을 중시했던 그는 자주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쳤다. 2002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세를 얻지 못해 중도에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정치판의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2000년 전당대회때 권노갑 고문에게 2천만원을 받았으며, 2억4천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원칙주의자로서의 김근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2004년 6월 아파트 분양원가 논쟁 때는 김근태는 당시 대통령 노무현과 맞서기도 했다. 노무현이 그해 4월 17대 총선공약으로 열린우리당이 내걸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시장논리에 어긋난다”며 반대하자 개인성명을 내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정면으로 항의했다. 그해 11월 보건복지부장관 시절 정부의 국민연금 주식투자 동원 움직임에 반대해 김근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해내겠다”며 국민연금 지키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2008년 18대 총선에서 서울을 휩쓴 ‘반 노무현 정서’와 뉴타운 열풍은 민주화운동의 대부도 비껴가지 않았다. 김근태는 뉴라이트 출신인 신지호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난 3월 민주당 진보개혁모임을 꾸려 공동대표를 맡는 등 재기를 꿈꿨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2008년의 촛불국민들은 2009년엔 조문 행렬을 이었고 지금은 희망버스를 타야 한다.…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지난 10월18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인 ‘김근태가 살아온 길’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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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고문 유지는 “2012년을 점령하라”

병원에 입원하기 전 블로그에 마지막 글 올려 “참여로 만든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2011년 10월 김근태)

 

그의 블로그(http://gtcamp.tistory.com) 에는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는 유언이 담겨 있었다. 30일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끝내 세상을 등진 ‘민주화 운동의 대부’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병마와 싸우는 순간에도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고민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김 고문은 뇌정맥혈전증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기 전인 지난 10월 18일 자신의 블로그(김근태, 희망을 말하다)에 마지막으로 글을 썼는데, 제목이 “2012년을 점령하라”로 돼 있다.

 

김 고문은 글 들머리에 미국의 월가 시위 등 세계 각국의 민주화 운동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는 월가 시위의 배경과 관련해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뒤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고문은 미국 정치상황과 관련해 “금융권력구조 개편을 통해 월가의 과도한 권력을 견제하지 못한 오바마와 민주당에 대한 실망과 티파티의 압력에 굴복해 길을 잃은 공화당과 의회에 대한 절망의 몸짓”이라며 “드디어 미국인들이 기존 정치를 불신하고 스스로 정치를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김 고문은 이어 국내정치와 관련해 “흔한 말로 정치권의 위기, 야당의 위기, 민주당의 위기라고 하지만 비난은 비난일 뿐 비난이 승리는 아니다”며 “미국의 티파티나 한국의 뉴라이트의 공통점은 적극적 참여와 정당과의 연계다. 비호감일 지 모르지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고문은 이어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며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김 고문은 “운 좋게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라며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호소했다. 아래는 김 고문의 블로그 글 전문이다.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김근태의 요즘 생각 - 2012년을 점령하라

 

세계는 격동하고 있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그리스 구제금융으로 상징되는 잔혹한 유럽의 여름, 월가를 점령하자는 뉴욕의 가을, 그리고 월가점령에 대한 다른 도시들의 공감, 급기야 10월 15일 전 세계 곳곳에서 월가점령시위 동참......

 

월가점령시위가 확산되자 미국의 언론, 학계,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다. 보수 쪽에서는 폭도라는 말까지 사용해가면 월가점령운동을 폄하하고 있고, 진보 쪽에서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알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역사의 순간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월가점령에 나선 사람들이 폭도로 여겨지지도 않고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가 당장 붕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양 진영의 주장이 워낙 강력하고 방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관계로 자칫 생각과 판단의 길을 잃을 확률이 높아졌다. 월가점령운동에 대한 양극단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차분히 묻고 냉철하게 대답해야 한다. 우선 미국인들은 왜 월가를 점령하자고 외치고 있을까.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서 왜 월가점령에 공감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인지 5%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었다는 증거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의 구분 없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대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 금융권력구조 개편을 통해 월가의 과도한 권력을 견제하지 못한 오바마와 민주당에 대한 실망과 티파티의 압력에 굴복해 길을 잃은 공화당과 의회에 대한 절망의 몸짓이기도 하다.

 

드디어 미국인들이 기존 정치를 불신하고 스스로 정치를 시작했다. 그들은 티파티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마지막 발악에 맞서 어깨에 어깨를 걸고 있다. 너무나 가슴 벅차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는 냉혹해서 그들이 공화당을 장악한 티파티 정도의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면 미국은 한 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부자감세가 중지되거나 약간 다시 오르거나 다음 선거에서 오바마가 재선되거나 일뿐이다. 이런 사실을 2008년 촛불집회를 했던 우리는 너무 잘 안다. 2008년의 촛불국민들은 2009년엔 조문행렬을 이었고 지금은 희망버스를 타야한다.

 

흔한 말로 정치권의 위기, 야당의 위기, 민주당의 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비난은 비난일 뿐 비난이 승리는 아니다. 방법은 두 가지다. 미국 티파티나 한국의 뉴라이트처럼 경선에 뛰어들어 직접 후보를 내거나 특정 후보를 지지해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정치결사체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전자가 쉽고 확률도 높다. 비호감일지 모르지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미국의 티파티나 한국의 뉴라이트의 공통점은 적극적 참여와 정당과의 연계다.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2011년 10월 김근태

 

 

1964년 경기고 재학 시절 서울대 의대 외국인교수 숙소에서 캐나다 출신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가운데 왼쪽 둘째가 김근태 고문, 뒷줄 왼쪽 첫째가 정운찬 전 국무총리.

 

1965년 서울대 재학 시절 가을축제에서 학생들에게 물건을 파는 김근 태 고문

 

 1978년 4월 서울 동숭동 흥사단에서 열린 부인 인재근씨와의 결혼식 장면

 

1983년 9월3일 서울 돈암동 카톨릭 상지회관에서 초대의장을 맡은 김근태 고문이 부의장이었던

장영달 전 민주당의원과 함께 민주화운동청년연합 현판을 내걸고 있다.

 

1998년 7월 석방된 김근태 고문이 부인 인재근씨와 경북 김천교도소 앞에서 “양심수 전원 석방” 구호를 외치고 있다.

 

1990년 5월13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를 받던 김근태 고문이 제주에서 붙잡혀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수사관들이 그를 강제로 승용차에 태우고 있다.

 

1996년 4월12일 15대 국회의원(서울 도봉갑)으로 당선이 확정된 김근태 고문이 지지자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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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를 그리며/함세웅

‘착한 사람들이 상을 받는구나 하게 하소서’

유신 독재와 신군부 독재 당사자들, 그들에게 직간접으로 동조한 반민주 부류는 모두 속죄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12월29일 아침 김근태 형제의 부인 인재근님의 전화를 받고 곧 서울대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의 침대 주변에서 자녀와 후배, 동지들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작은 십자가를 인재근님의 손에 쥐여 드리고 그와 함께했던 30여년의 삶을 기억하며 정성껏 세례성사를 베풀었습니다.

 

“여보, 힘내요!”를 계속 반복하며 남편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인재근님에게서 저는 성령의 힘을 확인했습니다. 부인은 남편의 귀에 대고 “하늘나라에 가시면 형님께서 기쁘게 맞이하실 거예요. 하늘나라에 가시면 아름다운 완결을 확인하실 거예요!”라는 작별인사의 기도를 고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의 거친 숨결을 지켜보면서 우리 민족의 처절한 삶을 압축하여 선열들과 모든 의인들을 그리며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김근태! 그는 참으로 우리 민족과 공동체를 위하여 태어난 사람입니다.

 

1960년 3월15일 부정선거의 현장을 지켜본 한 영국 기자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이뤄진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보도한 내용을 읽고 그는 분노와 모멸감으로 몸서리쳤습니다. 중학생 시절 4·19 민주혁명 체험이 바로 그 일생의 길잡이였고, 61년 5·16 박정희 군사반란에서 그는 더 큰 분노와 시대의 정체성을 체험했습니다.

 

김근태는 오로지 정직한 나라, 민주공화국, 평화의 한반도를 꿈꾸며 살아왔습니다. 이 아름다운 꿈의 첫 장애물이 박정희 유신 군부독재였고, 두번째 장애물이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 신군부 독재였습니다. “죽음 앞으로 내몰렸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라는 고백에서 확인하듯 그의 청년시절은 이 두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로 압축됩니다.

 

김근태의 덕목과 이상은 평화·정의·지혜입니다. 평화는 다양한 이들을 하나로 묶는 사랑의 끈입니다. 그는 청년학생, 노동자, 농민 등 모든 계층의 동지를 하나로 모으며 평화를 지향했습니다. 그가 지향한 평화는 늘 정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정의 때문에 그는 분노하고, 정의 때문에 그는 용기있게 싸웠습니다.

 

83년 살벌했던 전두환 신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해 불의한 권력과 맞서 싸우다가 결국 체포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무서운 전기고문을 당하며 죽음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칠전팔기의 투사로서 다시 일어나 군사정권을 꾸짖고 타파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전기고문 후유증 때문입니다. 유신 독재와 신군부 독재 당사자들은 물론 그들에게 직간접으로 동조한 반민주 부류는 모두 속죄하고 뉘우쳐야 합니다. 그들이 바로 김근태를 죽인 장본인들입니다.


저는 지금 성서 작가의 시편 기도를 떠올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착한 사람들이 악인의 피로 발을 씻고 그 보복당함을 보고 기뻐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르기를, “과연 착한 사람이 상을 받는구나. 하느님이 계셔, 세상을 다스리시는구나” 하게 하소서.’(시편 58.10~11)

 

어떻게 감히 역사를 왜곡하여 일본의 침략을 미화하고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를 찬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감히 국사 교과서를 왜곡하여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습니까? 이들이 바로 제2의 친일 매국노, 군부독재의 잔당입니다.

 

친일 매국노와 독재 잔재를 청산하고 친미 사대주의를 극복하는 일, 이것이 바로 김근태의 삶입니다. 진실을 왜곡하고 국민을 속이는 신문·방송을 퇴치하는 것이 김근태를 기리는 일입니다. 김근태님! 님이 행하신 일을 계속하여 후배 동지들이 이어갈 것입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님께서 뛰신 것처럼 저희 모두 최선을 다해 달리겠습니다.

 

하느님, 김근태 형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우리 민족의 염원을 이루어 주소서. 아멘.

 

함세웅 신부·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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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문 당한 남영동 대공분실에 경찰관이 바친 ‘김근태 추모 조화’

 장례기간 복도에 불 켜놓기로

 

한 경찰관이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고문을 당한 서울 용산구 남영동 옛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에 조화를 바쳤다. 앞서 또다른 한 경찰관은 같은 장소에 김 고문의 분향소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등 김 고문의 별세를 계기로 경찰 일부에서 ‘과거사에 대한 자성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김아무개 경사는 1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김 고문이 별세한 지난 30일 고인이 조사를 받던 취조실 문 앞에 조화를 바쳤다”고 밝혔다.

 

김 경사는 옛 조사실 문 앞 탁자 위에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라고 쓰인 근조리본을 매단 조화 바구니를 놓아뒀다. 센터 관계자는 “25년 전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안타깝다”며 “너무 쓸쓸하니 조화라도 놓자고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인권보호센터 쪽은 김 고문의 5일장이 진행되는 동안 옛 조사실 복도 쪽 불을 항상 켜 놓기로 했다.

 

김 고문은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실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을 당했으며, 박종철씨는 1987년 이곳 509호실에서 물고문을 당해 사망했다. 경찰은 불행한 과거를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이곳에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를 만들고, 509호 취조실을 그대로 보존한 채 일반인에 공개하고 있다.

 

앞서 경찰청 기획조정관실 이준형 경위도 지난 30일 경찰 내부망과 소셜네트워크 ‘위키트리’에 글을 올려 “과거 경찰의 불법 행위를 자성하는 차원에서 센터에 김 고문의 분향소를 설치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한편, 경찰청은 김 고문 빈소에 조현오 경찰청장 명의의 조화를 보냈으며, 이로써 경찰의 입장 표명을 갈음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충신 기자 cslee@hani.co.kr

 

 

"김근태 유죄?…'검사는 사냥개', '판사는 괴물'"

민주화 대부 김근태 영면에 페이스북 통해 검찰과 법원 통렬히 비판

 

고문 후유증으로 타계한 '민주화의 대부' 김근태 의장과 관련, 최강욱 변호사가 고문수사를 촉구하는 '김근태'의 호소를 외면한 채 고문경관을 처벌하기는커녕 공산주의자로 몰아간 검사와 유죄를 인정했던 판사 그리고 반성 없이 그들이 검사장과 대법관까지 오르게 한 검찰과 법원을 통렬히 비판했다.

 

국방부 검찰단 고등검찰부장을 역임한 최 변호사는 최근엔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의 피해자인 김종익 씨 변호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동안 사법부에 대해 쓴소리를 해왔다.

 

최강욱 변호사는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먼저 "영웅은 떠나 별이 되었다. 한 때 그의 동지였던 이들, 심상정과 박노해의 거처를 불지 않는다는 이유로 알몸상태에서 갖은 고문을 당했던 오늘의 '실세' 김문수와 이재오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이어 "김근태의 영정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을까? 변절에 대한 숱한 변명과 궤변을 이제는 진솔하게 마음속으로나마 사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는 고인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펼쳤던 이들이 현재인 고인과 대척점에 있는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최 변호사는 특히 고문피해자인 '김근태'를 오히려 '빨갱이'로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내렸던 검사와 검찰 그리고 판사와 법원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는 "고문 피해를 밝히며 수사를 촉구하는 김근태의 호소를 애써 외면한 채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라며, 고문경관을 처벌하기는커녕 김근태를 속속들이 빨갛게 물든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던 정권의 개. 사냥개로서의 사명에 충실해 결국 검사의 별이라는 검사장으로 출세를 거듭한 검사 K씨"라고 실명을 거론하며 '정권의 사냥개'로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어 "후일까지 '고문사실에 대하여는 피의자 김근태의 주장만이 있을 뿐 이를 뒷받침할 하등의 자료가 없었으며 관련 재판부에서도 이러한 피의자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변명한 대단한 K씨"라고 지적하며 "물론 이근안의 고문사실이 밝혀져 처벌받은 뒤까지 단 한 번도 반성하지 않은 대한민국 검찰"이라고 비판했다.

 

또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호소하는 피고인 김근태의 진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그에게 유죄를 인정해 징역 7년을 선고한 판사 S씨. 그리하여 K씨가 변명하고 기댈 언덕을 만들어 준 괴물"이라며 "그토록 탁월한 '재판 능력'을 바탕으로 사법부의 요직을 섭렵하며 후일 대법관까지 지낸 사람"이라고 질타했다.

 

아울러 "과거사를 반성한다면서도 검찰의 잘못일 뿐 법원은 어쩔 수 없었다며 짐짓 헛기침만 날리는 대한민국 법원"이라고 일갈했다.

 

최 변호사는 "이들은, 이 조직은 김근태의 죽음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라는 질문을 던진 뒤 "설마 자신들의 '품위 넘치는 삶'과 김근태의 신산한 삶을 비교하며 안도감에 휩싸이진 않았겠지. 그저 덮이고 말았을 일을 굳이 밝혀내 자신들의 명예에 흠집을 낸 사람으로 김근태를 기억하진 않겠지. 그들이 누리는 달콤한 삶과 권력이 결국 김근태의 헌신과 희생을 딛고 이루어진 것이란 점을 부인하진 않겠지. 최소한의 도리를 아는 인간이라면, 설마 지금은 진심으로 천벌을 두려워하겠지"라고 자답했다.

 

그는 또 "자신을 알아 달라며, 출세한 자신에게 즉각적인 존경과 복종을 표현하라며 아랫사람을 을러대다 결국 억지 화해까지 만들어낸 변절자들은 지금도 자신의 삶이 김근태의 그것보다 나은 것이라 자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건 아니겠지. 심문을 했을 뿐 고문을 하지 않았으며, 예술의 경지에까지 승화시킨 기술로 빨갱이를 잡았을 뿐이라 간증하신다는 이근안 목사님도 김근태의 서거를 보며 이제 고통이 끝났다고 기꺼워하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꼬집었다.

 

최 변호사는 그러면서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사람이라면. 최소한 사람의 탈을 쓴 생물이라면"라고 간절히 바랬다.

 

그는 "다시 사마천의 탄식이 떠오르는 날이다. 묵은해는 이토록 안타까운 별을 하늘로 보내며 저물어간다"고 고인을 그리워하며 "그래서 나는 저기에 등장한 것들의 삶을 기억할 것이다. 절대 잊지 않고 지켜볼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탄식은 과연 천도(天道)라는 것은 있는 것인가?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라는 것이다.

 

"하늘의 도(天道)는 사사롭지 않고 늘 착한 이와 함께 한다고 하는데,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 그들은 행실이 그토록 고결해도 굶어죽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진정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안연이라 했지만, 안연은 자주 궁핍하여 굶주리다가 끝내 요절했다. … 극악무도한 도척은 날마다 무고한 이를 죽이고 사람의 간을 꺼내 먹었으며 무리 수천 명을 모아 포악방자하게 천하를 횡행했지만 끝내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 이른바 하늘의 도라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是邪非邪)?"

 

최 변호사는 끝으로 "김근태 의장님. 이제 편히 쉬세요. 남은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라고 영면을 기원했다.

 

한편, 최 변호사의 이 글에는 220명이 넘는 친구들이 추천했고, "멋진 글이어서 더 서럽군요"라는 등 30개가 넘는 공유 댓글이 달렸다.

 

2011.12.31 / 오마이뉴스 신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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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의 마지막 말 "2012년을 점령하라" -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 하늘로 가다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 달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광주 경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로의 개혁 후보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며 남긴 말이다.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심정으로 지금은 죽는다"고도 했다. 두 마디는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드라마틱한 말이었다. '6.3 세대'로 386 운동권 '대부'로 불렸던 김근태, 그는 현실정치에서 만년 비주류였다. '비주류의 정점'이라는 게 있다면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에서 출생한 김근태는 중학교 3학년 때 5.16쿠데타를 목격했다. 강제로 교직을 그만두게 된 그의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고 곧 심장판막증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어머님은 동대문 시장에서 여자 스타킹과 양말을 받아다 팔아 김근태를 키웠다.

그는 경기고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71년 박정희 정권 부정선거 파동 반대 활동, 교련 데모에 적극 참여했고, 서울대 내란 음모 사건으로 수배를 당하게 된다. 당시 친구였던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은 감옥에 들어갔다. 이후 74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또 다시 수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렇게 도망하기를 7년,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

▲ 학창 시절의 김근태 ⓒ김근태 미니홈피
▲ 민청련 시절 김근태(오른 쪽은 장영달 전 의원)) ⓒ김근태 미니홈피

김 근태는 새로 들어선 전두환 군부 독재에 맞서 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했고 초대, 2대 의장을 지냈다. 후배들인 386세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 세력의 기획자이자 동지로 살았다. 그러나 민청련 활동으로 인해 그는 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이 전무'로 통하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전기와 물이 그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후 그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남은 생을 살아야 했다.

이 사건에 관한 진술은 이미자의 '노래 테입' 중간에 녹음된 채로 미국 인권단체에 건네졌다. 이후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세계의 양심수'라는 수식이 김근태 이름 앞에 붙었다. 87년 로버트 케네디 국제 인권상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그를 가두고 고문했던 국가보안법은 21세기 하고도 11년이 지난 오늘, 아직도 살아있다.

그는 자신의 책 <남영동> 에서 '인간도살장' 안에 있던 느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 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는 인권상 수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김근태 미니홈피

87 년 6월 항쟁을 감옥에서 맞은 그는 88년이 돼서야 석방됐다. 세상은 변했지만 '천지개벽'은 없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을 주도하고 정책기획실장, 집행위원장을 지냈지만 시대는 그를 또 다시 구속했다.

노태 우 정권이 끝난 뒤 3당 합당을 지켜본 그는 현실정치로 눈을 돌린다. 95년 민주당에 입당한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복귀와 함께 새정치국민회를 꾸렸고, 부총재 직을 맡았다. 이 때 15대 총선을 치렀고,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돼 내리 3선을 지냈다. 98년 출범한 국민의 정부 탄생에 힘을 보탠 그는, 곧바로 새천년민주당 쇄신 운동에 돌입했다. 역시 '비주류'였다.

2002 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선 경선에서 맞붙었다. 이인제 후보와 경쟁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힘을 실어주면서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른바 '노풍'이 불기 시작한 광주 경선 직전이었다. 두 번째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 노무현 탄핵 열풍을 딛고 '주류'로 올라선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참여했지만 여전히 그는 '비주류'의 길을 걸으며 열린우리당을 지배했던 '중도실용노선'과 '투쟁'을 이어갔다.

▲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내던 시절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낼 때는 부동산 원가 공개에 반대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계급장 떼고 토론해보자"고 맞섰다. 그런 그를 노 전 대통령은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장관을 지내면서도 그는 영리병원을 반대하며 청와대와 각을 세웠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여전한 '비주류'였다.

2011년 12월 29일 그가 떠나기 전, 지난 10월 18일 마지막으로 그의 블로그에 'posted by 김근태'로 남아 있는 글 역시, 그의 '인생'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었다.

" (월가 시위의 요인은)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인지 5%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었다는 증거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의 구분 없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대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
...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의 제목이다.

"2012년을 점령하라"

 

기사입력 2011-12-30 / 박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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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된 김근태 의장, 안녕히 가시오

[추모글] 보이나요? 수백만 '김근태'가 행진하는 역사의 물결이…

 

 

김근태 의장, 아니 김 형!
이렇게 떠나시다니,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지난 12월 10일 병원에 입원한 김 의장이 사랑하는 딸 병민이의 결혼식에 나오기 어렵다는 전갈을 듣고 미어지는 마음을 안은 채 장영달 동지의 함안 출판기념식장으로 향했지요. 아내가 대신 병민이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장영달 동지는 김 의장의 바램을 위해서도 꼭 승리를 거두겠다고 다짐하더군요.

 

한 시대의 장을 넘기고 떠나는 김 의장, 김 형!

김 의장이 대학에 입학하여 시작한 굴욕적인 6·3한일협정 체결 반대투쟁은 47년째로 접어듭니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계속된 김 의장의 민주화와 통일을 향한 행진은 온전히 우리 운동사 그 자체였습니다. 그 운동사가 이제 한 장을 넘기는 겁니다. 김 의장은 그 운동사의 무거운 짐을 가혹하게 짊어졌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의 대부분을 투쟁과 이론을 접목시키면서 치열하게 살아냈습니다.

 


▲ 촛불집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는 김근태 의장. ⓒ뉴시스

 

김 의장이 떠나가시는 자리에 한두 가지 제 심경을 밝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1981년 전두환의 이른바 취임특사로 풀려나오니 아내는 청와대 뒤편 10평짜리 청운아파트로 집을 옮겨 놨더군요. 부근의 같은 아파트에는 동아투위 이계익 선배의 동생 이계안 화백이 살고 있었는데 그 분은 나와 마주치면 무언가 말할 듯 하다가는 미소를 짓고 헤어지곤 했습니다. 제 자신도 집 앞에 정보형사와 중정직원들이 진치고 있던 처지라 이 화백과 눈인사만 하고 지나쳤습니다. 1984년 이른바 유화국면이 온 다음, 김 의장이 이 화백의 집에 피신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지척이 천리라는 말을 실감했었습니다. 김 의장은 '잠행'에 철저했습니다. 그래서 정보수사기관에서는 월북했다느니 뭐니 하면서 저들이 김 의장을 체포하지 못하는 무능을 그런 식으로 발뺌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저에게 회한으로 남아있는 일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개신교 측이 함께 참여케 하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온전히 결성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견해를 조정하여 함께 발족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마음의 응어리로 내내 남아있습니다. 1985년 전두환 군부집단은 2·12 총선에 패배한 뒤 재야와 야당의 직선제 쟁취투쟁이 본격화할 기세를 보이자 민청련과 김 의장을 제1 목표로 공격했습니다. 시대의 의제와 투쟁의 근원이 민청련이고 그 가운데 김근태가 있다고 지목했던 것이죠. 그래서 김 의장에 대한 테러, 살인적 고문이 자행되었던 것입니다. 확대되는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초기에 끄지 못하면 서울에서 '광주'와 같은 항쟁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김 의장에 대한 만행으로 표면화한 것이었죠. 우리가 한 덩어리로 그 국면을 맞았으면 김 의장에게 십자가를 지우지 않았으리라는 회한이 두고두고 남는 이유입니다.

 

김 의장, 김 형!

왜 지금 떠나야 합니까. 이제 민주개혁진보 진영이 장기적으로 민생을 안정시키고 평화통일의 기반을 다져야 할 <2012년의 큰 일>을 앞두고 이렇게 홀연히 떠나야 합니까.
김 의장의 깊고 멀리 내다보는 지혜와 경륜이 지난날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이 때 왜 떠나야 합니까.
통탄스럽고 안타깝고 슬프고 허전합니다.
그러나 김 의장도 아실 겁니다. 김 의장이 뿌려놓은 씨앗이 싹트고 자라 수백만 '김근태'들이 촛불이 되고 '나꼼수'가 되어 <2012년의 큰 일>을 치러내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김 의장, 들리십니까, 촛불로 빛나는 저 함성이!!
보이십니까, 수백만 '김근태'들이 행진하는 저 장엄한 역사의 물결이!!
김 의장, 김 형!! 이미 역사가 된 김 형, 그들에게 뒷일 맡기시고 편히 잠드소서.

 

2011년 12월 30 일

김근태 의장과 한 시대를 살았던 이 부 영

(이부영 대표는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해직기자 출신의 정치인으로, 김근태 의장과는 오랫동안 재야운동을 함께 했습니다. 또 열린우리당에서 함께 의원을 지낸 정치적 동지이기도 합니다.)

 

2011-12-30 / 이부영 민주·평화·복지포럼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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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후유증에 의수처럼 굳어버렸지만…

生의 끝까지 '세상'을 놓지 않았던 '김근태의 손'

 

▲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손. 그의 손은 마치 의수처럼 어색하게 놓여 있었다.

 

그의 손은 마치 의수처럼 굳어 있었다. 손가락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고문 후유증이었다. 김근태의 몸은 부끄러운 우리 시대의 어제를 증언하고 있었다.

" 젊은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제도를 물려주어 미안하다"고 그는 말했다. "분노하고 도전해야 문제를 알고 극복할 힘이 생긴다"고도 말했다. 굳어버린 입에서 느릿느릿 흘러나온 말에 결기가 서려 있었다. 그로부터 그는 불과 6개월을 더 살았다.

손 아래로 '주간 정세'가 보인다. 왼편에는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의 사진이 보인다. 그는 인생의 끝까지 '세상'을 놓지 않고 있었다. 2011년 6월 22일 도봉구 그의 사무실에서 찍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11.12.30 / 프레시안 최형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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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민주주의자’를 보내며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했던 ‘민주주의자’ 김근태씨가 오늘 안식의 땅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호칭이 낯설게 느껴졌다. 봉건주의자나 사회주의자처럼 널리 쓰이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급작스레 열린 장례 준비모임에서 그의 일생을 규정할 단어 선택을 둘러싸고 논의가 있었다. 민주화운동의 대부, 민주열사, 지사 등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민주주의자로 정리됐다고 한다.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란 뜻일 것이다. 근래에 타계한 사회인사 가운데 처음으로 사용되는 사례가 아닌지 싶다. 담백하고 겸손한 성격에 유연하면서도 불굴의 투지로 불의에 맞서온 그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가장 적합한 말을 고른 것 같다.


공기와 물이 만물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지만, 우리가 평소 고마움을 모르고 지나치듯이 민주주의자란 말도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홀대를 했던 것은 아닐까? 부보가 전해진 뒤 유명 정치인들이 앞다퉈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감상을 쏟아내고 빈소를 찾았다. 언론 매체도 이들의 반응을 중심으로 보도했다. 고인과 40년 가까이 동고동락했던 다른 ‘민주주의자들’은 빈소의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고인의 삶과 전혀 인연이 없었을 인사들의 발언이 매체에서 크게 취급되는 것과는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빈소의 모습은 아주 고무적이었다. 장례 일정이 세밑, 새해맞이와 겹치면서 조문객들의 발길이 뜸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일반 시민들의 조문 열기는 내내 식지 않았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빈소를 찾는 이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그 엄혹했던 시절 용감하게 싸웠던 사람들의 기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리라.


이제 고인을 보내며 몇 가지 상기해볼 것들이 있다. 첫째, 그는 1990년대 중반 정치에 뛰어들어 3선의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내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고지식하리만치 결백해서 불필요한 논란을 자초하고 생전에는 대중적 인기를 폭넓게 누리지 못했다. 2008년 총선에서는 뉴라이트 계열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를 당했다. 두 사람의 살아온 경력이나 삶의 자세를 비교할 때 나로서는 선거 결과가 충격적이었다. 고인을 당선시킨 것도, 버린 것도 같은 지역구의 유권자들임에는 변함이 없다.


둘째, 과거 독재정권 아래서 가혹한 탄압을 했던 권력기관은 근본적으로 사죄를 하지 않았고 가혹·조작행위와 관련해 처벌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고인은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한 고문의 실태를 사법사상 처음으로 모두(첫머리)진술권을 활용해 1시간에 걸쳐 생생하게 폭로했다. 당시 홍성우 변호사는 공판 개시에 앞서 고문 얘기를 전해 듣고 고인을 접견하기 위해 서울구치소로 찾아갔으나 12번이나 거절당했다고 회고했다. 검찰이 변호사의 접견권조차 봉쇄한 것이다. 심지어는 고인이 고문 경찰관을 적시해 법원에 낸 탄원서조차 한동안 실종되는 기괴한 일까지 벌어졌다. 그럼에도 최근 검찰이 시국사건 재심에 임하고 있는 자세를 보면 당시를 반성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셋째, 고인의 일생은 옛 민주화운동 인사 가운데 그나마 나은 축에 들어간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운동권들이 한자리씩 해먹었다는 인식이 사회 일각에 있다.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그런 처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정신병원에 갇혀 있거나 극빈층에 속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부의 출세 사례가 생활고에 시달리는 많은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게 하는 구실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넷째, 이왕 민주주의자라는 말이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됐으니 판단의 기준으로 널리 사용됐으면 좋겠다.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 대비하자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지만, 역사의 역류에 대한 근원적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수구세력들이 그토록 미화하려 하는 이승만·박정희에게 민주주의자라는 잣대를 적용해보자. 도저히 그렇다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역사왜곡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민주주의자의 무한증식을 기대해본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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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추모의 벽’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64)의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김근태 추모의 벽’이 등장했다.

조문을 온 지인들과 시민들이 지난 31일부터 접착 메모지(포스트잇)에 김 고문을 떠나 보내는 애절한 마음을 글로 써서 벽에 붙이기 시작했다.

1일 오후에는 장례식장 복도 양쪽 벽면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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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넘어 분노를 넘어…그는 희망의 푯대가 되었다

김근 시인이 본 ‘민주주의자 김근태’ 영결식


조금 늦게 도착한 나는 서울 명동성당 본당 뒤 입구 쪽에 서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결미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제 추모식도 그랬지만 오늘(3일) 아침 영결 미사에도 추모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영하 7도의 추운 아침이었다. 거리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명동성당으로 가는 길이 더디고 더뎠다. 그러나 거기 모인 1000여명은 날씨 따위 그런 무거운 공기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슬픔과 동시에 슬픔을 넘어선 좀더 단단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함세웅 신부는 미사 강론에서 “그가 고문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잊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생전에 김 고문에게 ‘더 싸우라’고 요구했다”는 것을 반성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시대 폭압적인 정권 밑에서 처절한 고문을 당했던 분들을 위한 치유센터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것이 국가의 의무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함세웅 신부는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은 우리 모두의 “연대적 삶”을 강조했다.


함세웅 신부는 그가 앓고 있다는 걸 잊고 더 싸우라고 요구했다며 반성한다 했다. 영결식에서는 슬픔과 울분·분노도 넘어선 희망이 가슴에서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운구차는 멀어져갔지만 희망 하나씩 나눠가진 사람들은 2012년을 점령하고 99%의 희망을 열어젖힐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미사의 마침 노래로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함께 불렀다. 김근태 고문이 생전에 즐겨 부르던 노래란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두 구절쯤 따라 부르다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제 추모제에서 누군가 김근태 고문의 삶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라고 그는 노래했을 것이다. 대중가요 하나가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올 때 그가 지닌 삶의 무게와 깊이 때문에 고결한 노래로 탈바꿈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고결한 노래를 함께 불렀다. 부르다 목이 메었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의 시대도 잘 알지 못한다. 선배들로부터 그 시대가 얼마나 엄혹한 시대였는지를 다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가 어떻게 몸부림치며 아파하며 자신의 시대와 맞서 싸웠는지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의 품성이 어떠했을지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의지가 얼마나 결연했는지 들었을 뿐이다. 그를 처음 실제로 본 것은 한참 뒤, 모 문학지 송년회 자리에서였다. 문인들 앞에서 수줍어하며 축사를 하는 그의 얼굴은 정치인답지 않게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의 얼굴에서 또 그의 말에서 어떤 권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그의 삶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그때 짐작했을 뿐이다.


내 짐작은 맞았다. 나중에 선배로부터 들으니, 그는 그 어떤 권위적인 것도 쉽게 무시하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측근을 챙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또 그 고통스러웠던 고문의 기억을 훈장처럼 드러내 이용하지도 않았다. 그가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불법자금 수수를 시인하는 양심선언을 하고 ‘아름다운 꼴찌’를 했을 때, 문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걷어 그에게 술을 사줬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의 양심을 믿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결식은 거룩했다. 함께 참석한 김형수 시인이 ‘거룩’이라는 말을 꺼내자, 그 말은 이 영결식에 무척이나 적확한 말처럼 느껴졌다. 거룩한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의 장엄함이 가슴으로 밀려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의 영결식에서는 울분이나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슬픔과 울분과 분노도 넘어선 어떤 희망 하나가 가슴에서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어제 추모식도 그랬다. 슬픔과 함께 그것은 한바탕 희망의 잔치 같았다. 그의 죽음이 만든 희망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불 켜지는 느낌이었다. 영결식에 와 있던 사람들 표정 속의 단단한 그 무엇이 희망이었음을 나는 확신한다.


영결식 추도사에서 지선 스님은 김근태를 초월성의 존재로 규정하면서, “초월은 세상으로부터의 회피가 아니라 민족의 모순, 민중의 모순을 정면으로 마주 서고 극복해버린 자리”라고 말했다. 이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희망 역시 그런 것은 아닌가, 그 삶도 죽음도 초월한 자가 우리에게 무수히 보내고 있는 메시지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에 그의 마지막은 거룩하고 거룩했다.


노제는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에서 진행되었다. 그의 영정이 전태일 동상 앞에 세워지자, 전태일 열사의 삶과 김근태 선생의 삶이 내 삶으로 나의 시대로 고스란히 전이되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나의 시대, 나의 삶이 그의 시대가 공급해준 자양분으로 커나가고 있음을 새삼 알겠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희생 덕분에 나는 조금이나마 민주주의를 경험했다는 사실이었다. 너무도 당연해서 경험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 그 경험은 그러나 쉽게 되돌려질 수 없는 강력한 경험이었다. 후배 세대들의 민주주의의 경험은 누가 뭐래도 어느 권력자가 무수한 폭력으로 무너뜨리려고 해도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경험으로 커나갈 것이다.


김근태 선생은 생전에 마지막으로 블로그에 유언 같은 글을 남겼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글의 제목은 “2012년을 점령하라”였다. 김근태 선생은 죽어 스스로 희망의 푯대가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장례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의 촛불 하나씩을 켜놓을 수 있었을까. 운구차는 멀어져갔지만, 오늘 가슴에 켜진 이 희망 하나를 안고 나는 2012년으로 발걸음을 뗀다.


3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유가족과 조문객들이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정을 앞세우고 장지로 들어서고 있다.

김 고문은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문익환 목사, 이소선씨, 조영래 변호사 등과 이곳에서 영면하게 됐다


오늘 여기 모였던 가슴과 가슴은 다시 모이고 모일 것이다. 여기 오지 않았지만 김근태라는 희망 하나씩을 나눠 가진 많은 사람들은 또 모이고 모일 것이다. 2012년을 점령하고 모순으로 얼룩진 한국을 점령하고 아직도 타파하지 못한 분단의 모순을 점령하고 마침내는 99%의 거대한 희망을 열어젖힐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믿음을 안고 나는 비로소 2012년으로 간다. 지금 그 거룩한 죽음을 넘어 자꾸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성큼성큼 나는 간다.


한국작가회의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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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영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