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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5.16쿠데타 50년 박정희 권력 평가

by Wood-Stock 2011. 10. 14.

5·16쿠데타 50년, 박정희 권력 평가 ①

청와대가 좋은 여자를..."야 그 얘기 하지마!"
김재규는 왜 박정희 뒤통수 '확인사살' 했나

 

 

 

대통령 박정희의 독재권력을 공식화한 10·17 유신체제 선포일과 그가 최측근 부하의 총탄에 맞아 숨진 10·26이 곧 다가온다. 더구나 올해는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50년, 그래서 권력을 총구에서 만들어 낸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역사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 시점이다.

 

어떤 시인은 4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더 잔인한 달은 10월인 것 같다. 우리 현대사를 보면 4월이나 10월은 대학가에 민주화 학생운동이 불붙는 시점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여 동안 토론과 함께 준비의 시간을 갖다가 마침내 폭발하는 것이다. 어두웠던 독재정권 시절을 살면서 우리가 숱하게 겪어 온 계절적 악순환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1972년, 그 반독재 학생운동의 계절 한복판에 노골적인 독재정권을 세우는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그 1년 전인 1971년 10월15일 전국 대학가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학생 간부 177명을 체포해 중앙정보부, 군 보안사, 경찰에서 고문 조사한 뒤 전원을 군대로 강제 입영시켰다. 대학에서 모두 제적 처분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학생운동 세력을 '소탕'한 뒤 박정희는 민주화운동의 계절 한복판에 거리낌 없이 유신 쿠데타를 감행했다. 5·16과 함께 두 번째 쿠데타였다.

 

민간법정이 아닌 군사법정에 선 김재규... 타당한가

 

그로부터 7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권총에 맞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10·26에 대해 김재규 자신은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계엄사 군사재판에서 '민주회복 혁명'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군사법정은 그에게 혁명을 일으킨 정치범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란 목적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정치범이나 단순 살인이라면 반드시 극형을 선고하지는 않는 게 상례다. 김재규는 "다수의 희생을 막기 위해 국민이 갈구하는 민주회복 혁명을 했다"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포로 된 장군 심정"이라고 군사법정을 비판했다.

 

10·26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다시 따져 보아야 할 문제가 김재규를 민간 법정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세운 것이 타당한지 여부다. 또 사형집행이 상례를 현저하게 벗어나 과도하고 신속하게 진행된 점, 특히 정치범에게 흔히 적용되는 감형이나 사면의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는 점이다.

 

첫째,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을 쏜 10월 26일 당일 서울은 계엄령 상태가 아니었다. 부산 마산만 지역 계엄령이었으며 전국적으로 평상 상태였다. 계엄령은 10·26이 일어난 다음날 발동된다. 따라서 평상시에 발생한 10·26사건의 중심인물인 김재규는 헌법상 민간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를 계엄사 군사법정에 세운 것은 소급 적용으로 위헌이었다. 10·26사건 관련자들 중 군사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로 현역 대령인 박흥주 한 사람뿐이었다.

 

둘째, 김재규에 대한 재판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것은 1980년 5월 20일이며, 그로부터 불과 나흘만인 5월 24일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는 전두환의 하나회 세력이 중심인 신군부가 5·18광주항쟁을 살상 진압하고 있을 때였다. 신군부는 5월 27일 광주의 전남도청에 발포, 점령함으로써 진압작전을 마무리했다. 이 격동의 와중에 신군부는 김재규를 처형함으로써 그가 정치범으로서 감형될 기회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왜 김재규는 박정희를 냉혹하게 확인사살 했나

 

10·26과 관련해 중요한 의문 중의 하나는 김재규가 왜 그렇게 박정희를 단호하고 냉혹하게 확인사살 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후에 군사법정에서 중정요원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박정희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것을 알았으면 제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박정희가 사라져야 할 권력자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쏜 총알은 딱 두 발이다. 첫 발은 가슴을 관통했으나 치명타가 아니었다. 재차 발사하려 했을 때 김재규의 콜트사 제품 권총은 찰칵 소리만 낼 뿐 불발이었다. 김재규는 고장난 권총을 들고 밖에 나가 박선호가 서 있자 그의 권총과 바꾸어 갖고 다시 방에 들어간다.

 

박정희는 모 대학 재학 중인 패션모델 정혜선(가명)양의 무릎에 상반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다가가 머리 뒤통수에 권총을 겨눴다. 군사법정 진술과 현장검증에서 확인한 바로는 50cm 이내의 거리였다. 정혜선은 비명을 지르며 실내 화장실로 튀어 들어 피신했고 동석했던 가수 손금자(가명)양은 밖으로 뛰쳐 나갔다. 김재규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최후의 일발을 가격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확인사살이었다.

 

김재규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박정희와 동향이고 육사 2기 동기생으로 군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핵심 자리를 맡길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사이에 확인사살이란 인간적 환멸과 증오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김재규의 그런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옛말에 "소인은 혁면(革面)하고 군자는 표변(豹變)한다"고 했다. 혁면이란 얼굴, 즉 안면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변덕 부리는 사람을 소인이라 하고 그 변덕의 한 단면을 혁면이라고 묘사했다. 그에 비하면 군자는 말이 없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번 마음 먹으면 얼굴 표정 바꾸는 변덕에 그치지 않고 몸 전체를 돌려버리는데 그것이 '표변'에 해당한다.

 

박정희는 김재규가 자신의 속마음까지 잘 헤아려 주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내치지는 않았다. 일종의 변덕으로 신임을 거두어들이는 혁면이지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는 표변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김재규는 유신 이후 박정희의 무자비한 인권탄압과 함께 "미국 놈들 갈테면 가라고 해" 등의 반미 발언으로 국가안보 위기를 절감했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와의 관계에서 혁면에 그치지 않고 표변하기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박정희가 권력자로서 변덕과 주색에 빠진 사생활 문란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환멸을 느꼈고 그것이 그의 '야수'와 같은 표변을 불러 일으켰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술자리 여자를 구해오던, 그 시절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유신독재의 문제와 한미관계의 파탄을 주로 비판하면서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비밀스런 마음 속 창고에는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에 대한 환멸감이 쌓여 있었다. 녹음테이프에 담긴 군사법정의 문답내용을 분석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것을 처음 감지한 사람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담당한 변호인이었다. 박선호 담당 변호인인 강신옥 변호사는 그의 사건 가담 동기와 그날의 행적 등을 정리하다가 처음부터 품었던 의문이 풀려감을 느꼈다. 유신체제의 핵심권력자들이 모인 술자리에 동석했다는 여인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바깥에서 술자리 여자를 구해 오는 '채홍사' 역할을 고정적으로 해야 할 만큼 박정희의 주색은 병들어 있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궁정동 현장.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정부장의 총탄에 숨을 거뒀지만,

유신정권은 1970년대 내내 각종 위기상황을 겪어야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1979년 12월11일 오후 계엄사 보통군법회의 제4회 공판.

 

 

강신옥 변호인 : "피고인이 관리하는 다섯 개의 연회장은 대통령이 혼자 사용하시거나 이번에 사건이 생겼을 때와 같이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정보부장, 이 네 사람이 연회를 가질 때 사용하는 장소라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 "네, 그렇습니다."

변호인 : "… 대통령이 혼자 오실 때는 '소행사'라고 말하고,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중정부장이 올 때는 '대행사'라고 한다는데…."

박선호 : "그렇습니다만, 그 행사 관계는 참고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박선호의 답변은 목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소리가 됐다. 무언가 꺼리는 말투가 역력했다. 강 변호사는 여기서 더 바싹 다그쳤다. 박정희의 부도덕성과 타락상이 부각될 수록 '10·26거사'는 그만한 명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인 : "아까 검찰관 신문 시 얘기하다 말았는데 당일 몇 시 몇 분에 플라자 호텔에 간 일이 있죠?"

박선호 : "… 네."

변호인 : 거기에 간 것은 그 날 연회를 도와 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군사법정을 울린 김재규의 한 마디..."야, 그 얘긴 하지마!"

 

군사법정에 긴장이 흐르는 사이 작은 외침이 울려 나왔다.

 

"야, 그 얘긴 하지마!"

 

피고인석 맨 앞 줄에 앉아 있던 김재규가 박선호의 답변을 제지하기 위해 소리쳤다. 이에 박선호도 '양심선언'의 기회를 유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박선호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변호인 : "그날 플라자 호텔에서 내자 호텔로 간 것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박선호 :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변호인 : "피고인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여자 문제를 더 힘들게 하고, 피고인 자신이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괴로워서 김 정보부장에게 수차 '도저히 이 일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고 하소연 하면서 그만두게 해 달라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김 부장이 '궁정동 일은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사의를 만류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 "제가 근무를 몇 번 꺼렸습니다. 그래서 하기 어렵다는 여러 가지 사유를 부장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신임하시고 자꾸 계속 근무를 원하셨습니다."

 

변호인 : "차 실장은 '돈을 얼마든지 줄 테니까 좋은 여자를 구해 달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돈을 한 푼도 도와주지 않고 하도 말만 많아서 피고인이 경호처장인 정인형한테 '그러면 당신이 골라서 해라'고 했다면서요? 그랬더니 '청와대에서 고른다는 걸 국민이 알게 되면 큰일 난다'며 안된다고 하기에 피고인은 '골라놓은 사람들에게 좋든 싫든 말이나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항의까지 했더니, 그 이후에는 차 실장도 잔소리가 적어졌다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 "…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국가정보기관의 간부로서 대통령의 채홍사라는 오명까지 쓰게 된 박선호는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갔다. 이에 강신옥 변호사는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교도소 접견 때 이미 그에게서 확인한 대통령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를 공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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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 50년 박정희 권력 평가 ② 독재자의 사생활

"술자리 여자 최종심사는 대통령 경호실장, '0순위'는 연예계 지망생...일류배우까지도"

 

 

박정희 권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 왜 술과 여자 같은 사생활 문제를 들추어내느냐는 비판적 지적도 있다. 경제성장이나 국가안보 수호 같은 거룩한 의제(?)를 중심으로 따져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대부분 그 측근의 후예들이거나 과장된 신화에 대한 신봉자들이 그런 얘기들을 한다. 우리가 이 만큼 먹고 살게 해놓은 사람이 누군데 그런 공로를 말하지 않고 개인의 사생활을 건드리느냐고 항변한다. 이는 마치 박정희 시대 권력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남자의 배꼽 아래 문제는 건드리지 말라"는 얘기나 똑 같다.

 

대통령이 술을 좋아하고 그 자리에 여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을 국가 권력을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해왔다면 그것이 과연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인가. 더구나 박정희의 그런 술자리 여자는 중앙정보부의 의전과장이 연예계와 요정 마담들을 동원해 조달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항상 내세우는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국가정보기관으로서 일반에게 베일에 가려진 기밀부서다. 그런 허울좋은 비밀보호 속에 국민의 눈이 가려진 채 대통령은 은밀하게 술과 여자를 즐긴 것이다.

 

"국가정보기관이 여자 조달했다면 사생활이라 할 수 없어"

 

한 이름 있는 역사학자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들어 박정희의 술과 여자 얘기를 부득이 더 이어나가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가 최고권력자였던 시대는 불행하게도 그의 일거수일투족 뿐 아니라 표정과 기분까지도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지닌 시대였다. 그의 사생활이 평범한 개인의 사생활처럼 보호받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사생활은 이미 권력게임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그가 측근들과 나눈 사적인 대화는 권력의 풍향계였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되어 민주적으로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라면 그의 공적 활동과 사생활은 엄격히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통해 다시 한번 헌법을 짓밟고 절대권력자가 되었을 때 공과 사의 경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권력의 사유화, 인격화가 이루어지고, 국가기관인 중앙정보부의 의전과장이 여자를 조달해야 하는 불행한 시대에 독재자의 사생활은 더 이상 개인의 사생활이 아니었다."

 

유신체제 말기 대통령 박정희의 비밀요정 행사는 그 빈도가 매우 잦았다. 대통령이 혼자서 하는 소행사나 측근 권력자 3~4명이 함께 하는 대행사가 한달이면 열 번 정도씩 열렸다. 그러니까 사흘에 한 번 꼴로 주연을 벌였다는 얘기다. 그때마다 외부에서 술시중 드는 여자들을 불러 왔다. 대통령의 주연 담당이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일요일을 포함해 하루도 쉴 수가 없었다.

 

박정희 권력이 황혼녘에 들어 선 79년 가을 어느날 박선호와 비밀연회장 담당 사무관 남효주는 은밀하게 탄식조 말을 주고 받았다. 그래도 공직자라는 자신들이 하는 일이 부끄럽기도 하려니와 또 한편 국정 최고책임자의 행실이 한심했다.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

 

1979년 12월11일 보통군법회의 4회 공판. 강신옥 변호사는 박선호 피고인에게 계속 '양심선언'을 유도했다.

 

강 변호인(이하 강): "피고인은 이제 말한 소행사 대행사의 빈도가 하도 심해서 남효주 사무관과 함께 앉아서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

 

그러자 담당 검찰관이 재판부에 급히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지금 본건 변호인은 본건 공소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 없는 사실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제한해 주십시오."

 

그러나 재판부의 법무사는 "재판과 관련 있는 것은 신문해 주십시오"라며 변호사를 직접 제한하지 않았다. 법무사는 다른 한편 박선호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피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무상 비밀 등에 대해 진술거부권이 있다는 것은 고지한 바와 같습니다."

 

이때만 해도 전두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12.12 군사반란 이전이어서 그 후보다는 비교적 재판 진행은 원칙대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 변호사가 재차 물었다.

 

"소행사, 대행사 이런 빈도가 너무 심해서 남효주 사무관과 같이 앉아서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는 불평을 주고 받았다는데 …?"

 

박선호(이하 박):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강 변호사는 박선호 피고인이 교도소에서 접견할 때 얘기하던 것과 달리 재판부가 주입하는 대로 따라 진술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어 변호사의 "… 있죠?" 하는 물음과 피고인의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는 숨바꼭질식 신문이 반복됐다.

 

1977년 7월 수해를 입은 구로공단 복구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화대는 지금 돈으로 100~200만 원 정도...10.26날도 "돈 다 줘서 보냈다"

 

그러나 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난 뒤 고등군법회의에서 박선호 피고인은 태도가 달라졌다. 약간의 심경변화를 보인 그는 박 대통령의 술자리 여자에 대해 조금씩 운을 떼기 시작한다.

 

10.26이 일어난 해를 넘긴 80년 1월23일, 고등군법회의 2회 공판.

 

강 : 피고인은 1심에서 변호인이 당일 여자 두 사람을 인솔해 온 데 대해 물었을 때 대답을 않겠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렇습니까?

박 : 그 문제는 제가 답변하게 되면 … 지금 시내에서 일류 배우들로 활동하고 있는데… 역효과가 나서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또 고인을 욕되게 하므로 피했습니다.

 

이 답변에서 강 변호사는 중앙정보부 간부였던 피고인이 비밀을 지키려는 직업의식 같은 것이 있다고 느꼈다. 강 변호사는 직답보다는 우회적으로 박정희의 술자리에 여자들이 동원됐다는 사실 자체를 확인하기로 마음 먹었다.

 

강 :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박 : 지금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강 : 이번에 한 행동의 숨은 동기 중 혹시 그런 사정이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박 : … 저는 동기라든가 이런 것보다는 존경하는 부장님의 지시면 무조건 한다는 것 외에는 없고, 만약 그 때 다른 짓을 했어도 응했을 것입니다.

강 : 만찬에 참석한 여자들을 몇 시에 보냈나요?

박 : 11시경에 …

강 : 거사가 끝난 뒤였나요? 돈도 주고 보냈죠?

박 : 돈도 다 계산해서 보냈습니다.

 

당시 군사법정에서의 심문과 변호인 접견록에 따르면 중앙정보부에서 대통령의 술자리 여자들에게 주는 '화대'는 지금 돈 가치로 쳐서 보통 100만 원 정도였고 유명세를 계산해 더 주는 경우는 200만 원이었다. 당시 재벌이나 정치인들이 요정에서 이름 있는 모델이나 연예인들에게 뿌리는 팁에 비하면 꽤 짠 편이었다.

 

그 이유는 권력의 힘도 작용했겠지만 시중의 유명한 마담들이 거느리는 화류계 여인 중엔 대통령의 술자리에 가고 싶어하는 지원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그런 지원자들을 골라 보내주는 마담이 장충동 모 요정의 '김 마담'이었다.

 

특히 연예계에서 유명해지기 전인 20대 초의 나이 어린 신참들이 김 마담으로부터 은밀한 제의를 받으면 대부분 쾌히 응낙했다. 이들은 그 자리에 갔다 온 '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것으로 연예계의 정상에 한 발 다가 간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박선호는 급할 때 종종 김 마담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항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권력 정당성이 취약해져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술자리 여자 최종 심사는 차지철이, 0순위는 연예계 지망생"

 

술자리 여자를 최종 심사했던 사람은 경호실장 차지철이었다. 그는 요정에 소속돼 있는 여자들은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고위층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연예계 지망생이 0순위였다. 그 중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 학과 재학생도 있었다.

 

차지철은 또 하나의 원칙으로 같은 여자를 두 번 이상 들여보내지 않았다. 단골을 만들면 보안상이나 기타 부담스러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반강제 차출도 있었다. 박정희가 국산영화를 시사하거나 TV연예프로 등을 보다가 마음에 든 배우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번 보고 싶다"고 하면 큰 물의가 없는 한 대개 불러왔다.

 

갑작스레 궁정동 비밀연회장 차출지시로 영화나 TV프로 촬영 중 일정이 펑크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자세한 설명 없이 연예계에서 힘깨나 쓰는 무슨 협회 같은 곳에서 무조건 출두하라는 연락이 가는 것이다. 이런 일로 한두 차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 연예계의 제작진 사이에서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채홍사'가 구해 온 여자들은 대통령 박정희의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과 함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우선 이 자리에 왔던 사실을 밖에 나가 일절 발설하면 안된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고위인사들의 대화내용에 관심을 표하지 말 것, 특히 대통령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응석을 부리지 말 것 등이다.

 

박정희의 사생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증인인 박선호 피고인은 결국 80년 5월24일 김재규 등 다른 5명의 피고인과 함께 사형당한다. 형장에서 그의 마지막 표정은 의연했다. 이미 그의 최후진술 때 엿보인 의연함이었다.

 

80년 1월 24일 고등군법회의 마지막 재판인 3회 공판. 재판정에서 하는 것으로는 마지막인 최후진술에서 박선호는 김재규의 명령에 따라 엄청난 일에 가담한 배경과 박정희의 술자리 여자들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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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 50년, 박정희 권력 평가 ③ 절대권력 박정희는 왜 부패했나

대통령 비밀안가에 다녀간 여자만 200명, 유명 여배우도 포함돼...육영수 얼굴엔 멍

 

10·26에 대한 계엄사 보통군법회의가 끝난 뒤 1980년 1월 중순부터 담당 변호사들은 대통령 박정희의 술자리 여자로 시중에 나도는 여배우들의 이름을 은밀하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법정진술에서 박정희의 사생활에 대해 일절 함구하던 김재규는 어느날 담당 변호사 한 사람을 보자고 연락했다.

 

그는 변호사에게 여러 비화를 털어놓았다.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심경의 변화를 보인 모습이었다. 중앙정보부 비밀안가를 거쳐 간 은막의 스타들에서부터 대통령의 자녀에 대한 얘기까지 공개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박정희의 비밀안가에 다녀 간 외부 여자가 어림잡아 200명 이상에 달한다는 얘기였다. 김재규는 또 자신이 박정희로부터 신임을 잃기 시작한 이유가 그의 자녀들 문제를 직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탤런트들, '더 깊은 곳' 들어갔다 울고 사정해 빠져나오기도

 

변호사들은 박선호의 전임 의전과장들을 찾아 청와대 안가 술자리와 여자에 대해 검증하기로 했다. 전임 '채홍사'들인 윤아무개, 이아무개, 김아무개씨(육사15기, 예비역 대령)로부터 김재규의 접견 내용을 검증했다. 누구나 한 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 만한 TV 드라마와 은막의 스타들인 C, C', C", L, L', W씨 등이 비밀안가의 깊숙한 곳까지 거쳐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모의 H, K씨는 안가의 깊은 곳까지 갔다가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빠져 나왔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박정희의 주색 행사는 꼭 부인 육영수씨가 서거한 뒤부터 외로워서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육씨가 살아 있을 때도 박정희의 여자 문제 때문에 부부싸움이 잦았다. 육씨의 얼굴에 멍 들어 있는 것이 청와대에 접견 차 갔던 외부 여성인사에 의해 목격되기도 했다. 출입기자들이 넌지시 묻지만 박정희의 언짢은 헛기침 하나로 그냥 지나가기 일쑤였다. 

 

 

1973년 청와대에서는 경호실장이 사정수석비서관의 방에 가 엽총을 난사한 사건이 벌어진다. 경호실장은 박종규, 사정수석은 홍종철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육영수씨가 사정수석을 시켜 경호실장의 뒷조사를 한 것이었다. 육씨는 박정희의 옆에 딱 붙어서 술과 여자까지 챙겨주는 박종규를 어떻게든 떼어놓으려 했다.

 

육씨는 사정수석이던 홍종철에게 박종규의 부동산 보유 현황과 사생활 등을 조사하도록 부탁했다. 우선 박종규의 비리를 캐야 그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수석실의 움직임은 박종규의 정보망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를 알아 챈 박종규는 엽총을 들고 홍종철의 방에 뛰어들어 소리쳤다.

 

"야, 홍종철. 당신이 내 뒷조사를 한다며!"

 

격분한 박종규는 엽총을 두어 발이나 쏘았지만 총알은 천장에 맞고 튀어 나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진은 박 전 대통령이 한 행사장에서 차지철 경호 실장 등과 함께 자료를 보고 있다. (왼쪽에서 2번째부터 차지철, 박정희,이상열,박종규씨)

 

육씨가 생전에 가장 미워했던 사람이 박종규였던 것도 박정희의 술과 여자 때문이었다. 박종규는 육씨가 1974년 8·15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의 흉탄에 맞아 숨진 뒤에야 그 책임으로 경호실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아이러니 이상의 기구한 운명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에 관한 비화는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만 해도 훨씬 더 많다. 비화를 더 들출 것도 없이 "절대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금언을 그대로 입증한 셈이다. 민주정부의 기본 조건은 견제와 균형이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장이든, 대법원장이든, 아니면 중앙정보부장이든 검찰총장이든 모든 국가권력은 견제받는 장치가 있고 상호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을 제 멋대로 휘두르지 못한다. 견제 없는 절대권력자는 반드시 탐욕을 채우기 위해 전횡하고 결국 인간의 약점인 도덕적인 금도를 벗어나 쾌락 추구에 빠지고 만다. 

 

유신은 국민기본권 말살한 '현대 절대주의' 체제

 

 

박정희가 강행한 유신체제야말로 대통령의 절대권력을 영구히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주정치의 조건인 권력분립과 국민기본권 보장이 무시되고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절대주의 체제였다.

 

첫째, 유신헌법은 기존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근거한 개헌이 아니었다. 집권세력이 자의로 작성한 것이어서 사실상 '사문서'나 다름없다. 국민투표도 온갖 부정 투표였다. 그런 국민투표를 통과했다고 해서 그 이전의 위헌적 절차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특별선언과 비상조치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것은 초헌법적 체제 파괴로 사실상 '내란행위'였다. 헌법 어디에도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은 규정돼 있지 않았다. 이는 대통령제를 운영하는 민주 헌정이라면 어느 나라든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인 규범이다.

 

유신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과 1948년의 제헌 헌법 이후 우리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이념으로 이어져 온 자유민주주의로부터 이탈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헌법은 우리의 국가 정체성과 국민 주권의 기본규범을 상실한 이단적 통치규범일 뿐이다.

 

둘째,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한 뒤 비상국무회의에 유신헌법안을 회부해 의결했다.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되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 대표기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국무회의가 국회의 권능을 대신한 것은 대의민주주의 원리를 본질적으로 위배한 것이다. 행정부가 입법권까지 행사했으니 이야말로 민주주의 사상가들이 우려한 국가권력의 독점이며 전제체제였다.

 

비상국무회의가 의결한 유신헌법은 집권자가 자기 권력을 자의로 만들어 갖는 절대군주의 행위나 다름없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정치 코미디는 일찍이 없었다. 그런 유신헌법은 법적으로 원천 무효일 수밖에 없다.

 

 1972년 12월 27일 중앙청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유신헌법 국민투표 90% 이상 지지는 공포정치의 산물

 

셋째, 박정희의 후계 진영은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국민투표에서 투표율과 찬성률이 모두 90% 이상으로 매우 높았다고 내세운다. 이른바 개헌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국민투표는 헌법안에 대한 찬반 토론이 금지된 가운데 실시됐다. 언론의 비판적 보도도 금지됐다. 더구나 비상계엄령이 지속되고 군 탱크가 진주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이러고도 무슨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니, 국민의 눈을 가리고 아웅하는 행태다. 세계 정치사에 그런 선거나 투표가 있은 적이 없다. 또 중앙정보부와 보안사가 이른바 '95% 이상 찬성률 공작'이라는 지침을 행정부 공무원들과 관변단체, 그리고 군 간부들에게 강요했다.

 

나는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재학 중 반독재 학생운동을 하다가 1971년 10월 15일 대학가에 내려진 위수령으로 제적당한 채 군대에 강제입영된 소총수였다. 박정희 정권은 전국 대학의 학생간부 177명을 체포, 고문조사한 뒤 모두 제적시키고 군대로 끌어 넣었다. 그것은 다음해 유신체제를 강행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그 유신헌법의 국민투표를 군대에서 맞은 나는 강압, 공개, 대리 투표의 현장을 똑똑히 보았다. 투표일 아침부터 기표장소는 비밀보호 장치는 아예 없었고 중대 인사계가 한 명씩 들어가는 사병들에게 투표용지를 들이밀었다. 인사계는 투표지의 반대란을 아예 손으로 가린 채 찬성란만 펴서 내밀고 기표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투표할 것을 미루고 있다가 대대장 앞에 불려갔다. 철책선 아래 중대장 막사에 나타난 대대장과 오전 내내 면담이란 것을 했다. 나는 그래도 독대하는 자리여서 대대장에게 항변했다.

 

"이런 국민투표는 역사적으로 후대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대대장은 구구하게 얘기하지 않았다. 워낙 골치 아픈 존재가 하나 자기 부대에 와 있는 것이고 또 보안부대도 그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시끄럽게 사고만 치지 않게 관리하면 될 터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 상병, 차라리 투표하지 말지."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기권한 내 표는 어디로 가고 우리 대대는 1명의 무효표만 빼고 100% 찬성이었다. 내 표를 누군가 찬성으로 기표한 것이다. 무효표 하나는 어느 고참 하사가 인사계의 손에서 투표지를 나꿔채 반대란을 찍었으나 행정요원이 다시 찬성란에 기표한 것이었다. 그 하사는 보안부대에 불려가 폭행당한 뒤 후방으로 전출되고 말았다.

 

제대한 뒤 만난 학생운동의 동료들은 국민투표를 모두 그렇게 경험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따위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의 지지율을 조작한 것이다. 나는 34개월 이상을 휴전선 철책에서 보초서는 '저항력 없는' 사병이었지만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내 손으로 하지 않은 것을 그래도 천만다행이라고 여긴다.

 

 

국민투표란 직접민주정치의 한 형태지만 그 안건이나 선택지를 합리적 중간집단이 만들어 제시해야 한다. 정당과 의회, 학계와 언론, 시민단체와 노조 등이 그런 중간집단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국민대표 기구인 국회는 물론이려니와 중간집단의 공론이나 검증 없이 집권측이 일방적으로 주도해서 작성한 것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의 사례는 1930년대 유럽에서 나치와 파시스트 체제가 대중민주정치의 형식을 통해서 배태된 것과 똑같다. 유럽에서 전체주의의 성립과정이 곧 민주주의의 불신과 위기론을 야기한 것도 바로 국민대중은 정치권력의 공작 대상이라는 사실이 인식됐기 때문이었다.

 

넷째, 유신헌법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한할 수 없게 한 헌법조항을 없애 버렸다. 헌법에서 시민적 기본권을 삭제함으로써 후에 독재권력이 긴급조치로 제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유신헌법은 또 형사법 절차에서 인권보장 장치인 구속적부심사제를 폐지했다.

 

이것만 보아도 유신헌법은 시민 민주주의의 기본 규범를 부정했다는 증거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신체의 자유를 축소한 것은 18세기 유럽 시민혁명이 쟁취한 초기의 자유민주주의 정신보다도 뒤떨어진 통치제도로 전락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18세기적 이념과 제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사고에 젖어 있었다.

 

 

1972년 1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이 신교 궁정동투표소에서 부인 육영수씨와 장녀 박근혜씨와 함께 국민투표를 하고 있다.

1979년 12월 20일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제10회 선고 공판에서 김재규 피고인이 법정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 사실상 임명해 의회정치 유린

 

다섯째, 유신헌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임명하고 일반 법관까지 임명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해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인준받아 국회의원으로 임명했다. 또 본래 헌법에서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일반 법관은 법관추천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하도록 규정했으나 이것도 대통령에게 맡겨졌다. 국회와 사법부가 모두 대통령의 손아귀에 들어간 셈이고 민주주의의 원리인 권력 분립은 없었다.

 

권력 분립론은 절대주의 국가주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존 로크나 몽테스키외 같은 18세기 민주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확립됐다. 박정희 정권이 작성한 권력구조는 권력분립의 원칙을 무시한 결과물이다. 그 귀결은 대통령의 절대권력 전횡으로 인권탄압, 언론탄압, 노조탄압과 야당탄압으로 야만국가 시대라는 불행한 역사였다.

 

결국 대통령 박정희는 아무런 견제 장치 없는 절대권력자가 됐으며 그 결과 인간적 탐욕의 노예로 전락하는 전형적인 길을 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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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 50년, 박정희 권력 평가④] 박정희의 '더러운 전쟁'

"옷을 다 벗으세요"...비극의 시작이었다

 

 

# 장면 ①

 

아무런 간판도 장식도 없는 삭막한 콘세트 건물. 군 정보기관 소속의 한 소령이 연행돼 온 남자에게 협조해 줄 것을 나름대로 정중하게 당부한다.

 

"옷을 다 벗으세요."

 

그는 속내의만 남기고 겉옷을 모두 벗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4명의 점퍼 차림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속내의를 벗겼다. 점퍼들은 알몸이 된 남자의 팔과 다리를 교차하여 묶더니 그 사이에 큰 막대기를 끼워서는 두 개의 책상 사이에 걸어 놓았다. 마치 통닭구이처럼 사람을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았다. 취조 4인조는 '통닭 남자'의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는 주전자로 물을 붓기 시작했다. 숨을 못 쉬고 거의 질식 상태인 그에게 또 사정 없는 각목 구타가 가해졌다.

 

고문에 못 이겨 그는 풀어주면 말하겠다고 했다. 점퍼들은 3, 4차례나 다짐을 받고는 그를 풀어 땅에 꿇어 앉혔다.

 

갑자기 그의 입에서 "우드득, 딱"하는 소리가 났다. 혀를 깨물었으나 의치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취조하던 점퍼들은 당황해 하면서 그를 제지했다.

 

# 장면 ② 

 

국가정보기관의 수사 안가에 밤 11시경 한 50대 민간인이 연행돼 왔다. 옷을 벗기고 군 작업복으로 갈아입힌다. 이어 의사가 건강상태를 점검했다. 의사는 책임자에게 "혈압이 높으니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담당수사관은 "사실대로만 얘기하면 곧 나갈 수 있어요"라며 점잖게 취조하기 시작했다. 수사관은 수년 전 잡혀왔을 때도 심문하던 그 사람으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조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수사관이 바뀌더니 2인조 고문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주먹질과 각목 구타가 이어졌다. 고문자들은 기가 빠진 그를 지하실로 끌고 들어갔다. 의자에 앉혀 손발을 묶고 고개를 뒤로 젖혀 얼굴에 물을 부었다.

 

그래도 묻는 말에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자 고문자들은 그를 어떤 작은 방에 집어 넣었다. 진공실 고문이었다. 조금 있으니 얼굴과 가슴이 바깥으로 찢어지는 것 같고 몸뚱이 전체가 공중에 둥둥 뜨는 듯했다. 비명을 지르려 해도 목소리가 안 나오고 가슴이 미어 터질 것 같았다.

 

# 장면 ③ 

 

체격이 건장한 40세 안팎의 남자 한 사람이 군 헌병대에 연행됐다. 콘세트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2명의 조사요원이 야전 침대용 각목으로 무자비하게 마구 구타했고 남자는 실신해 쓰러져 버렸다. 완력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남자에게 옷을 다 벗겨서 묶으려면 상당한 실갱이가 벌어질 터였다. 그런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 그냥 처음부터 두들겨 패서 기절시켜서 해결해 버린 것이다.

 

그가 의식을 회복해 보니 알몸이 된 채 손과 발이 묶여 주리를 튼 것 같은 상태에서 두 책상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이어 얼굴에 수건을 씌워놓고 주전자로 물을 부으니 그는 다시 실신했다. 정신이 들어 보니 의사가 혈압을 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하는 것이다. 고문은 밤을 새우며 여러 차례 반복됐다.

 

드라마 <에덴의 동쪽>의 한 장면. 드라마에서 남영동 대공분소로 강제연행되어 물고문 받는 모습.

 

일제 치하도, 아르헨티나도 아닌 박정희 치하의 만행

 

이 야만적인 고문장면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것일까. 흔히 우리는 일제 식민통치기 고등경찰이나 헌병대가 항일 독립운동가에게나 가하는 악행을 연상한다. 아니면 1970년대 중반 남미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가했다는 고문을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벌인 악행은 '더러운 전쟁'으로 시사용어 사전에도 올라 있으며 지금까지 세계인의 저주 대상이다.

 

그러나 위의 3개 고문장면은 일제 치하도,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아래서 있었던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도 지금부터 불과 40년 전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가기관에서 벌어진 일이다. '박정희 판 더러운 전쟁'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벌인 '더러운 전쟁'은 1976년부터 시작됐다. 박정희 정권은 그보다 훨씬 앞선 '더러운 전쟁'의 선배 격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유신쿠데타였다. 그러자 중앙정보부, 보안사, 헌병대가 설치기 시작했다. 국가기관이 조직폭력배나 다름없는 불법 폭력을 구사했다. 그것은 가히 히틀러나 일제 치하에서 자행되던 체제폭력이었다. 명색이 국민의 대표로서 국정감사 중이던 국회를 해산하고는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을 붙잡아다 악행을 가했다. 갖은 고문기술을 동원해 비인간적으로 문초했다. 그 고문기술은 일제로부터 전수해 내려 온 것이라고 했다. 

 

 1977년 10월 7일 국군보안사령부 창설식 장면

 

장면 ①은 당시 신민당의 유일한 군 장성 출신 국회의원인 이세규가 당하는 장면이다. 그는 5·16쿠데타 후 군 장성 출신 중에서도 자기 집 한 채 없이 사는 청렴결백으로 소문난 사림이었다. 그런데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안보특보로 정계에 입문한 것이 죄(?)라면 죄였다. 군 장성 출신인 그가 군 내부 사정에 밝은 것은 당연했고 그것이 야당에 매우 긴요하고 드문 역할이었다. 군 내부에서 익명의 제보도 많았다. 박정희에게는 그것이 더욱 눈에 거슬렸다.

 

박정희는 자신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서인지 특별히 군 내부의 동향 파악에 신경을 썼다. 자신이 과거 남로당의 군내 프락치였다가 그 조직을 밀고하고 살아남아서인지 내부 밀고자와 정보망을 특히 미워했다. 군 장성 출신으로 야당에 간 이세규 의원이야말로 그런 점에서 박정희와 그 주구들이 눈독을 들일만한 표적이었다.

 

야당의원 자결 시도, 의치 부러져 피투성이... "적군 포로 돼도 이렇게 안 해"

 

군 정보수사기관에서 인간 이하의 고문에 시달린 이세규는 혀를 깨물고 의치가 부러져 피투성이가 된 입을 겨우 벌려 이렇게 소리쳤다.

 

"적군의 포로로 잡혀도 장성에게는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장군으로서 최후의 것을 다 잃었다. 더 이상 살아봤자…."

 

제아무리 악랄한 군 취조관이라 해도 장군의 처절한 저항에 잠시 어쩔줄 몰라했다.

 

"왜 이러십니까…."

 

이세규는 양쪽 팔을 잡는 놈들에게 입속의 핏물을 내뱉으며 울부짖었다.

 

"너희 놈들은 군인도, 인간도 아니다!"

 

이세규는 5일간이나 더 그렇게 고문에 시달렸다. 그들의 요구는 이세규의 군부 내 인맥과 제보자 명단이었고 10·17 유신쿠데타에 지지성명을 내달라는 것. 이세규는 끝까지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그는 더 이상 정치권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평생 허리 통증에 시달리며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장면 ②는 조연하 전 국회부의장, 장면 ③은 최형우 전 정무장관이 역시 10·17 유신쿠데타 직후 잡혀가 고초를 당한 증언이다. 최형우는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내란 때도 보안사에 끌려가 똑같은 악행을 당한다. 그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 선 후 집권당 사무총장과 내무장관을 지낸 실세가 됐다. 그렇게 못된 악행을 당하고도 가해자들과 손잡고 3당합당을 한 대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지난 2010년 10월 6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한반도선진화재단 주최로 열린

한선국가전략포럼 창립기념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최형우 전 의원이 참석하고 있다.

 

그 후 김영삼 정부 아래서 내란과 부정축재로 구속된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그들의 체제가 저지른 고문악행을 되갚아 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군부정권이 끝나고 명색이 문민정부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도 3당합당의 대가일까. 

 

유신쿠데타 당시 이와 똑같은 박정희의 '더러운 전쟁'에 당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20여 명에 이른다. 위의 세 의원 외에 강근호, 김경인, 김녹영, 김상현, 김한수, 나석호, 박종률, 이종남, 조윤형, 홍영기 등이 모두 국가기관에 잡혀가 모진 고초를 당했다.

 

이들 중 13명의 야당 의원들은 훗날 1975년 2월 28일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들이 겪은 고문에 대해 증언했다. 그러나 종교인과 학생운동 간부들은 아직 이렇다 할 고문악행에 대한 증언을 남겨놓지 않았다. 나 자신도 유신쿠데타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1971년 10월 15일 대학가 위수령 때 교정에서 체포돼 일주일 이상 경찰서와 중앙정보부에서 공포의 고문악행을 당했다. 나는 이제야 그 전모를 증언한다. 

 

박정희 정권 '한국판 더러운 전쟁'으로 학생운동 소탕... 1889명 연행

 

당시 박정희는 가장 비타협적인 저항세력이던 학생운동을 소탕하기 위한 '더러운 전쟁'을 벌였다. 전국 대학가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연대장급 지휘 아래 군대를 투입했다. 서울대학교 본부와 문리대 법대 등이 있던 동숭동에는 김복동 대령, 서울대학교 상과대학과 고려대학교가 위치한 종암동 지역에 전두환 대령, 그리고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등이 있는 신촌에 정병주 준장의 부대가 각각 진주했다.

 

지휘관은 박정희의 친위대인 하나회와 그 후원 장성이었다. 그러나 정병주는 후에 전두환의 12·12군사반란 때 반대하다가 하나회인 부하에 총격 체포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군 부대가 진주하기 전 관할 경찰서는 대학 캠퍼스에 사복형사대를 투입해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그날 하루만 전국에서 1889명을 붙잡아 갔다가 그 중 92명의 간부만 유치장에 구금하고 모두 석방했다. 그후 캠퍼스에서 붙잡히지 않은 학생간부까지 포함해 전국 각 대학에서 모두 177명이 제적당한 채 군대로 강제입영 조치됐다.

 

우리는 논산훈련소를 거쳐 일선 철책부대에서 34개월 내내 행정반 근무가 금지된 채 소총수로만 군 복무를 했다. 박정희에 의한 '더러운 전쟁'의 희생자들은 당연히 남다른 유대를 갖게 됐고 제대 후 '71동지회'를 결성해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서울대학교 개교기념일인 10월 15일, 나는 이틀 전 1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연합 학생총회의 사회자였기에 일단 서울의 교외에 숨어야 했다. 그런데 대학본부에서 열리는 총장 주재의 개교기념 행사에 학생 대표가 참석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전갈이 왔다. 당시 나는 서울대 문리대 대의원회 의장으로, 그리고 김상곤(현 경기도 교육감)은 총학생회장으로 개교기념 행사장에 가야 했다. 그때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제적과 강제입영은 못 면하더라도 모진 고문을 경험하진 않았을 텐데….

 

대학본부 총장실에 막 들어가려 하자 안에서 보직 교수들이 밖으로 나오면서 "김군, 큰일 났네. 곧 10시에 정부가 위수령 발동을 발표한다고 하네"라고 전한다. 교수들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나왔다. 나는 위수령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겠다며 대학 본부를 나서다가 건너 편 의과대학 구내에서 동대문 경찰서 형사 팀에 체포되고 말았다.

 

경찰서에 들어가자마자 두 형사가 뺨을 때리면서 욕지거리와 함께 일종의 '야료'가 시작됐다. 평소에는 그렇게 못 하던 정보과 형사들이 위수령 발동에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 후에 김상곤이 붙잡혀오고 이어 다른 몇 동료들이 또 잡혀왔다. 김상곤도 벌써 뺨을 몇 대 맞았는지 벌겋게 부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는 당시 관할이던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 그리고 성균관대 학생 간부들이 불법 감금됐다.

 

취조실과 고문실이 있던 옛 안기부 지하실

 

경찰 조사반, 암실서 폭행 고문... 새벽녘 검정 지프에 실려 간 곳은?

 

경찰 조사반은 항상 밤 12시가 넘어서야 우리를 불러냈다. 지하 취조실이었다. 맨 뒤에 조사반장이 있고 그 앞쪽에 취조 형사의 책상이 자리했다. 취조 형사의 책상에는 각목이 하나씩 준비돼 있었다. 취조 형사는 수시로 그것을 들어 어깨와 팔을 두들겨 패며 "빨리 불어 인마!"라고 소리쳤다.

 

그러다가 "아, 이 자식 안 되겠네. 어이!"하고 부르면 건장하고 늘씬한 사내가 나를 끌고 컴컴한 암실로 들어갔다. 사내는 나에게 온갖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그러고는 녹초가 되게 폭행당한 나를 다시 취조 형사 앞에 앉힌다.

 

"야 인마. 너 버텨봐야 고생만 해. 불지 않으면 절대 안 끝나. 우리도 죽겠어."

 

경찰서에서 그렇게 시달린 지 한 사나흘쯤 되는 날 새벽 2시경. 취조 형사는 책상에서 몽둥이를 들어 나를 다시 후려 팰 기세였다. 그때 뒤쪽의 조사반장이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예? 아 예, 그 놈 여기 있습니다. …"

 

그러더니 반장은 나를 노려보며 몽둥이를 드는 형사에게 말했다.

 

"어이, 그 놈, 그냥 놔 둬라. 그 놈 A에서 올려 보내라고 한다 야."

 

나는 그 A라는 말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이게 과연 시중에서는 남산이라 불리는 중앙정보부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당시 중앙정보부는 공포의 화신이었다. 제발 그곳만은 피해야 하는데….

 

그때 내 앞의 취조 형사가 그것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말했다. 그는 몽둥이를 내려놓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너 인마, 거기 가면 진짜 고생하는데. 내가 뭐라고 그랬어. 여기서 빨리 불라고 할 때 끝내 버리지 참…."

 

그의 짐짓 동정어린 말투가 나를 더욱 공포 속에 몰아 넣었다. 순간 그래도 경찰이 내 편이고 중앙정보부는 악의 소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악행의 정도가 다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나에게 취조반 한쪽에 앉아 쉬라고 했다. 그리고 서너 시간이나 흘렀을까, 새벽녘에 나는 검정색 지프차에 실려졌고 두 사내가 양쪽에서 팔을 잡았다. 차가 퇴계로 쪽을 향하자 그들은 내 머리를 앞 의자 등받이 밑으로 쳐박았다. 나는 바깥을 내다 보지 못한 채 끌려가 그 '남산'의 어느 독방에 던져졌다.

 

덧붙이는 글 |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자가 반대자들에게 고문하고 압살한 '더러운 전쟁'은 시사용어 사전에도 올라 있으며 세계인의 저주 대상이다. 그러나 그 '더러운 전쟁'은 사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치하의 대한민국에서 먼저 자행됐다. 부끄러운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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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 50년, 박정희 권력 평가⑤] 측근실세들의 항명과 배신

쌍용 창업주는 왜 '콧수염 뽑기' 당했나 / 측근도 예외 없었던 박정희의 '공포' 정치

 

서울시장 재보궐선거는 20·40의 주도로 새로운 정치를 탄생시키고 마무리됐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 이 시점에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 때문이라고 보아선 안 된다. 반독재, 반부패,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연속선상에서 그 새 바람의 연원을 찾아야 한다.

 

20·40이라고 하지만 실제 투표참가로 보았을 때 중심역할을 한 세대는 40대, 30대, 20대의 순서다. 그 40·30은 청년기에 1987년 6·10 시민항쟁을 보았다. 정치의식이 가장 치열하게 형성된다는 나이에 격동적인 역사를 체험했다.

 

당시 이들 앞에서 역사적 역할을 해 보였던 선배 세대는 이른바 '넥타이 부대'다. 그리고 그 넥타이 부대는 정치의식 형성기에 10·26 박정희 권력 타도와 함께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의 회오리를 직접 보았다. 오늘날의 새로운 시대 조류도 박정희 권력의 끝자락에 가 닿아 있다는 얘기다. 역사란 사람들의 삶의 족적이고 사람은 정신에 의해 그 행동이 지배되는 동물이기에 정신사적 맥락을 따라 연결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케케묵은 것 같은 박정희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다시 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지나가 버린 과거가 아니라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는 역사 이야기다.

 

어린 대학생들에게 자행된 물고문과 구타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와 12월 대통령 선거를 좌우할 키워드가 여기에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박정희 권력의 후예가 다름 아닌 한나라당이며 그 딸인 박근혜씨가 그 쪽에서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후예들이 저지른 정치적 죄과와 비자금 도적질 또한 심각하다. 전두환, 노태우만 보아도 그렇다. 그들에게 최소한의 사죄를 통한 '역사적 세례' 절차가 이행돼야 할 것이다.

 

박정희 권력의 야만적 고문악행은 비단 야당 국회의원들만 당한 게 아니었다. 어린 대학생들을 잡아다 몽둥이 구타와 물고문을 자행한 것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1987년 6·10 시민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도 바로 박정희 정권의 후예들에 의해 저질러진 '계승 사건'이다.

 

고 박종철 열사 20주기를 맞이한 지난 2007년 1월 14일 오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509호실에 고인의 영정과 국화꽃이 놓여 있다.

 

1971년 10월 15일 대학가 위수령 때 교정에서 체포돼 동대문경찰서를 거쳐 중앙정보부로 압송된 나는 처음부터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박정희 공포통치의 본산에 끌려 왔다는 생각에 혼비백산이었다. 압송조 2명이 나를 데리고 들어가자 책상에 발을 걸치고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선다. 그다지 크지 않은 방은 아무런 비품도 없이 삭막했다. 그들은 나를 벽 앞 가까이에 무릎을 꿇려 앉히고는 앞만 쳐다보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나 지났을까, 다른 3인조로 교대됐다. 이들이 나를 다룰 맹수들이었다.

 

엎드려 뻗쳐를 시키더니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뭘 묻기도 전에 매질부터 하는 것은 기를 빼놓고 신문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정신적 공포감과 함께 매질에 못이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XX, 엄살이 심하구만."

 

그들은 나를 붙잡아 앉히더니 정강이에 두꺼운 장작 같은 것을 넣고는 무릎 위를 구둣발로 밟아댔다. 무릎 관절이 절단 나는 고문이었다. 후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나는 무릎 위쪽 대퇴부 뼈를 3분의 1 가량이나 깎아내는 대수술을 해야 했다. 군대에 강제입영된 뒤 관절통에 시달렸지만 군 병원 후송도 허가되지 않았다. 야전 의무대에서 받는 소염진통제로 떼우며 그럭저럭 지내야 했다.

 

고문은 육체적 고통 못지않은 공포심으로 사람을 항복 시켜 버린다. 나는 모진 고통에 눈물 범벅이 되어 두 손으로 빌었다. 평생에 잊지 못할 가장 처참하고 굴욕적인 몰골이었다.

 

나는 1993년 이른바 문민정부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뒤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기부의 수장이 된 권영해씨와 독대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국방부 출입기자 시절 취재원이었다. 그는 나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노라면서 원하는 것을 물었다. 나는 내가 고문 받던 방을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빙긋이 웃더니 "무슨, 쓸데 없이…"하면서 그냥 넘기고 말았다.

 

"여기서 죽여버려도 자살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1971년 10월 당시 중앙정보부는 무언가를 짜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이라는 해괴한 각본이었다.

 

"김대중과 김상현이를 만난 게 언제, 어디서지?"

 

정말이지 이들과 만난 사실이 있다면 불지 않고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생운동을 하면서 학교밖 정치인이나 종교계와 접촉한 적이 없다. 일종의 역할 분담으로 대외접촉은 주로 선배 복학생들이 맡았으며 나는 학교 내부 장악이 주 임무였다.

 

그들의 또 다른 요구는 돈 줄을 대라는 것. 포괄적으로 배후세력을 캐기 위한 고문이었다. 위수령 직전 나는 이른바 지하신문이라 불리는 미등록 간행물을 두 번 발행했으며 반응이 좋아 세 번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의단(議壇)'이라는 제호의 이 지하신문은 서울대 문리대 대의원회의 기관지 격이었다. 대의원회 의장이던 내가 발행인으로 유일하게 이름을 내걸었고 편집진은 모두 비밀이었다. 편집위원으로는 홍세화(현 한겨레 기획위원), 임진택(마당극 연출가), 이동진(가야대학교 교수) 등 9명이 활동했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지하신문의 편집진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오로지 돈을 댄 배후를 대라는 거였다. 이 문제도 사실 투명하게 입증되는 내용이었다. 법적으로 등록만 안 했을 뿐 문리대 대의원회 기관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산은 학생 자치경비 중에서 사용했다.

 

이런 뻔한 사실을 입증하는 데만도 험한 고문악행에 시달려야 했다.

 

"너, 이 방이 어떤 곳인지 알아? 여기서 죽여버려도 저 산에 던지고 투신 자살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인마."

 

그해 대통령선거가 있던 4월 직전, 육군 대령 한 사람이 김대중 신민당 후보에 대해 지지하는 말을 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의문사한 사건이 떠올랐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상태가 되는 듯했다.

 

책상 앞에 앉아 신문받는 동안 옆방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고문하는 자의 저주하는 욕설과 바닥에 나뒹굴고 쿵쾅거리며 절규하는 목소리가 뒤엉켜 정녕 인간 이하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당하고는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동료들과 얘기해 보니 대개 비슷한 경험이었고 공포감을 주기 위한 녹음소리인 것 같았다.

 

박정희 측근들도 시키는대로 안 하면 고문·폭행

 

1975년 3월 1일, 국민대학 구내에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불교의식으로 엄수된 고 김성곤 회장 영결식.

 

박정희는 자신의 측근 실세들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항명자로 몰아 중앙정보부를 시켜 고문·폭행했다.

 

1971년 위수령 직전인 10월 2일, 국회에서는 당시 오치성 내무장관(육사8기, 5·16쿠데타 가담)에 대한 신민당의 해임결의안이 상정됐다. 박정희는 일사불란하게 반대표를 던져 이를 부결시키라고 공화당 지도부에 지시했다. 그런데 표결 결과는 공화당 의원들 중에 상당한 반란표가 생겨 해임안이 통과되고 말았다. 박정희의 이른바 '진노'가 표출됐다.

 

반란 주동자들을 색출해 징벌하라는 엄명이 중앙정보부에 떨어졌다. 이른바 10·2 항명파동의 시작이다. 그날로 공화당의 거물급 의원인 김성곤 재정위원장(쌍용그룹 창업자)과 길재호 사무총장(육사8기, 5·16 가담) 등이 중정에 잡혀 들어갔다. 집권세력의 중심 역할을 하던 이들도 하루 아침에 고문자들의 먹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성곤은 중정 고문자들에게 온갖 수모를 겪었다. 그는 카이젤 수염을 기르는 정치인으로 유명했고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야, 네가 카이젤이야? 콧수염이 근사한데 그래. 이게 네 위신이냐?"

 

고문자들은 그의 카이젤 콧수염을 뽑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존심과 인격을 말살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카이젤 콧수염의 절반만 뽑고 한 쪽은 일부러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코미디도 아니고 비열과 야만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김성곤은 그 후 일절 바깥출입을 금하다가 1975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불과 62세였으니 고문 후유증과 화병으로 병사한 것이다. 동양통신을 창간한 언론인으로, 쌍용양회를 창업한 기업인으로, 집권여당의 중진 실세로 남부러울 것 없던 거물이 불시에 박정희의 '역린'에 걸려 몰락한 것이다.

 

김성곤과 함께 중정에 연행된 길재호도 몽둥이 찜질을 당했다. 5·16쿠데타 주체세력 중 한 사람이던 그는 여생을 지팡이 짚는 몸으로 지내야 했다.

 

집권세력 중심인물도 박정희 앞에선 파리목숨

 

박정희의 측근 실세에 대한 징벌로는 1973년 4월 터진 윤필용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윤필용은 육사8기로 박정희의 오랜 측근이었다. 군대시절 부관으로 인연을 맺은 뒤 계속 데리고 다녔으며 5·16 후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과 육군 방첩대장 등을 거쳐 1970년 수경사령관이 된 오른팔이었다. 그런 그도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말았다. 윤필용 사건은 직계 부하였던 전두환의 밀고를 비롯해서 박정희 권력 내부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을 남겨놓고 있어서 따로 써야 한다.

 

10·2 항명파동과 윤필용 사건에서 박정희 권력이 측근에게까지 보인 악행은 또 다른 측근의 '배신'을 낳았다. 박정희의 측근들 중에 배신이 많았던 이유는 언젠가 당한다는 불안감과 무서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측근 실세들이 박정희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배신이라고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박정희 권력이 워낙 1인 중심으로 횡포를 부려서 기본적 정당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아래서는 집권세력의 중심인물조차 갑자기 희생양이 되기 일쑤였고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공식적으로 권력의 5대 기둥은 국무총리, 국회의장, 공화당 의장, 청와대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다음의 실제 권력은 언제나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 그리고 보안사에 있었다. 다른 공식적 자리는 그저 '대독 총리'로 희화화되듯 힘 없는 얼굴 마담에 불과했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권력실세를 찾으라면 중앙정보부장으로 김형욱, 이후락, 김재규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박종규와 차지철이었다. 군부에서는 단연 수경사령관 윤필용이었다.

 

이중 맨 먼저 박정희에 등을 돌린 사람은 김형욱이었고 그 다음에 이후락은 외국에 도피했다가 박정희의 신변보장 언질을 받은 뒤 귀국했다. 박정희의 측근 중에서 결정적으로 등을 돌린 사람은 말할 것 없이 김재규였으며 그것은 역사적 대의명분을 갖추었다고 보아야 한다.

 

 

[5·16쿠데타 50년, 박정희 권력 평가⑥] 김재규의 최후진술에 담긴 '민주주의'

'절대권력' 카다피와 박정희는 닮은꼴 / "대통령 희생, 국민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최근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가 시민군에 붙잡혀 총살된 것을 보고 박정희와 10·26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나도 새삼 놀랐다. 그런데 곰곰 따져 보니 실제 카다피와 박정희가 닮은 점이 생각보다 많은 게 사실이다.

 

우선 두 사람은 색안경을 좋아한다. 언론에 보도된 카다피는 늘 검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박정희도 보도 사진이나 책에 진한 색안경을 쓴 모습으로 캐릭터화 돼 있다.

 

독재권력자와 색안경이 어떤 상관관계라도 있을까.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살펴보는 자신의 눈초리가 드러나지 않게 감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특히 박정희는 정보장교 출신이어서 본색을 위장하려는 잠재의식이 있을 것이다.

 

또 대형 토목건설 공사를 벌인 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그런 토목공사가 영웅주의적 카리스마를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흔히 독재자들이 장기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큰 일을 벌인다. 박정희는 1960년대 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그리고 카다피는 리비아의 사막지대에 지중해의 물을 끌어들이는 대수로 공사를 벌여놓았다. 이 공사는 나일강의 수량을 200년 동안 공급할 수 있는 양인 35조 톤에 이르는 물을 지중해 연안으로 송수, 한반도 면적의 약 6배에 해당하는 3억6800만 평에 이르는 사막을 옥토화 시킨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세계 최대규모의 이 토목공사는 우리나라의 동아건설이 맡아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거대 토목공사와 독재권력은 상당한 상관 관계가 있다. 고대 중국의 진시황이 중국 내륙에 운하를 건설한 것도 그런 예 중 하나다. 물론 우리의 경부고속도로나 고대 중국의 운하, 그리고 리비아의 대수로가 경제적 기여를 한 것에 대해서는 부인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거기에는 얼마나 많은 국민의 피땀이 들어가야 하는가. 독재자가 그것을 장기집권의 명분으로 이용하는 것이 문제다.

 

세 사람 모두 개발독재자라고 할 수 있지만 국가 위상을 높인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지 결코 지속적인 국가 발전을 가져올 수가 없다는 점이 문제다. 더구나 국민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가혹한 탄압과 퇴행적 정치제도로 타락하는 공통점이 있다.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하는 것이다.

 

 

 

 

박정희와 카다피는 닮은 꼴 독재권력

 

카다피와 박정희가 닮은 꼴인 것은 역시 민심의 이반으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다. 누구의 총에 맞아 죽었느냐는 것은 직접적인 사인에 해당하지만 궁극적인 원인은 장기독재에 대한 국민의 항거였다. 카다피도 붙잡히는 순간 경호원이 총을 쏘아 죽였다는 얘기가 보도되기도 했다. 민중의 손에 의해 처참해지기 전에 차라리 측근이 처리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일까. 김재규의 법정 진술에서도 그런 생각이 묻어나 있음을 느낀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권총으로 살해한 10·26사건에 대한 군사재판은 1979년 12월 4일 첫 공판을 시작했다. 사건 발생 후 합수부가 수사를 개시한 지 39일 만에 재판이 열린 것이다. 1심 재판은 12월 18일 9회 공판으로 피고인들에 대한 사실심리와 증인신문, 증거조사 등을 끝내더니 20일 선고까지 초고속으로 치달았다. 김재규와 박선호는 물론이려니와 청와대비서실장 김계원과 중정부장 수행부관 박흥주 대령 등 7명 모두 사형이었다. 이 중 김계원은 나중에 무기로 감형된다.

 

재판이 시작된 지 불과 16일 만에 선고까지 모든 절차를 마친다는 것은 사법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속도전이었다. 대통령 살해라는 엄청난 사건임을 생각하면 법조인이 아니라도 누구든지 혀를 내두를 만큼 정신 못차리게 밀어 붙인 재판이었다.

 

항소심인 고등군법회의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 1월 22일, 23일, 24일 연달아 3회 공판을 연 뒤 28일 선고해 버리고 말았다. 10·26 재판은 1심, 2심, 3심이 형량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 재판이 처음부터 이미 정해 놓은 결론을 실천하기 위한 요식행위가 아니었느냐는 시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거기다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이 나오자 24일 김재규와 그 부하들을 함께 처형해 버리고 만다. 문명사회의 성찰과 고민이 눈꼽만큼도 담기지 않은 보복조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박정희 친위대 출신인 전두환 노태우의 하나회가 내란을 일으켜 국가권력을 찬탈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김재규의 변호인단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이 구명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내란집단의 조치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정치범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여론이 반영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10·26 군사재판 내용 중에서 중요한 역사 사료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정부장 김재규와 중정 의전과장으로 채홍사 역할을 한 박선호의 법정 최후진술이다. 두 사람의 최후진술은 1심과 2심에서 행한 것으로 모두 4개다. 이것이 다행히도 당시 계엄사 법무감실의 녹음테프에 담겨 이미 오래 전 기자 손에 입수됐다.

 

김재규의 최후진술 중 1979년 12월 18일 1심 재판정에서 행한 것은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대한 종합적인 비판이 눈길을 끈다. 당시 그의 최후진술은 기자들을 포함해서 방청객을 내 보낸 뒤 비공개 법정에서야 이루어졌다.

 

1980년 1월 24일 2심 재판정에서 행한 김재규의 두 번째 최후진술은 10·26 거사의 정당성을 명쾌하게 역설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우선 그의 2심 최후진술을 녹음으로 정리한다. 당시 정치상황은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가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사실상 박정희 후계권력을 장악한 뒤다.

 

박정희 "서울에서 사태 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

 

김재규는 이런 바깥의 사정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그의 최후진술은 조금도 더듬거나 중언부언하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한 편의 서사시와 같은 문장처럼 전개됐다. 어떤 숙련된 정치인의 연설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둔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토해 내는 웅변이었다. 사람이 죽으면서 거짓을 말하지는 않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증언인 셈이다.

 

법무사 : "김재규 피고인께서는…"

변호사 : "피고인이 몹시 불편한 모양인데, 앉아서…"

법무사 : "앉아서 이야기 하십시오. 피고인은 아까 변호인의 신문, 이제 막 변호사의 변론, 또한 피고인의 진술을 통해서, 또한 앞으로 제출될 항소이유보충서에 의해서 그것은 약속대로 공판기록에 틀림없이 찾아 놓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김재규 : "네. 그동안 충분히 얘기했고, 변론도 있었고, 대부분 얘기는 됐지만, 이것이 최후의 진술이기 때문에 그저 몇 마디 마무리를 위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이 혁명의 필연성, 이것이 여러분들께서는 혹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정보를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이제는 도리가 없다, 모든 방법이 다 끊어졌다, 이런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에 이 혁명을 결행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짐작은 했겠지만, 유신체제가 출범한 지 7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점 누적된 유신체제에 대한 항거하는 국민의 생각은 전국민에게 아주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부마사태는 좋은 증거입니다. 이것은 삽시간에 5대 도시로 번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자유당 때 이승만 박사는 마지막에 가서 물러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출신이고 또 너무 완벽한 분입니다. 모든 면에서, 그러니까 어떤 저항이 있더라도 기어이 방어해 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됩니다. 부산사태를 돌아보고 와서 보고를 드렸더니, 각하의 결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만일 서울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이때 재판을 주관하는 법무사가 참지 못하고 제지에 나선다. 그대로 나가다가는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과 단둘이 만나는 이른바 '독대'자리에서 오간 얘기가 나올 판이다. 그것을 놔 둘리 없었다. 사형을 면치 못할 줄 뻔히 아는 피고인의 최후진술인데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 다 똑같아... 이 방법밖에 없어" 

 

법무사 : "저, 피고인 말이죠…"

김재규 : "네, 알았습니다. 그러나, 4·19 때 심한 불행이 있었습니다. 이 완벽한 성격의 이 분이 위에서 방어를 할 때, 어떤 험한 결과가 올지 상상해 보십시오. 이 결과가 몇 사람의 희생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급기야는 국기(國基)를 흔들어 놓는다, 미국도 우리하고 등집니다. 그러면 사상적으로도, 국가방위에서도 문제가 된다, 그래서 더 이상 늦출 길이 없다, 방법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대통령과의 관계가, 심판관님께서도 아시지겠지만, 친형제간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생각했지만, 야수의 마음으로 돌렸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나는 내 목숨이 이 혁명과 바꾼다는 것을 각오하고 한 일입니다. 그래서 법무사 말씀도 있고 해서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습니다만, 하여튼 이런 필연성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알아주셔야 합니다.

 

보다 많은 희생을 막았습니다. 대통령 한 분을 희생시켰다는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이고, 역사적으로도 엄청난 일이 되기는 했습니다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다 아깝습니다. 다 똑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불행을 막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었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김재규는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방법 밖에 없었다고 강조한다. 비록 박정희가 대통령이지만 민주국가에서는 모든 국민이 다 똑 같기 때문에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였다. 이는 10·26의 역사적 의미로서 매우 핵심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실제 1979년 10월 19일 시민항쟁이 터진 부산·마산에서 진압군의 발포 가능성은 역사에서의 가정이 아니다. 7개월 뒤의 광주시민항쟁과 상황 변수들로 비교하더라도 동일한 것이어서 살상진압 음모를 부인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진압군으로 투입된 부대가 박희도 준장이 지휘하는 1공수여단,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장기오 준장의 5공여단이었다. 이들이 어떤 부대인가. 지휘관이 모두 전두환을 수괴로 하는 하나회 소속으로 1980년 5월 광주시민항쟁을 살상 진압한 바로 그 공수부대들이다.

 

뿐만 아니라 부산·마산에 강경진압을 건의하고 사나운 공수부대를 투입한 '지옥의 사자'도 다름 아닌 차지철과 함께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이었다.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국민을 상대로 한 이들의 살상진압 음모는 1차로 김재규에 의해 저지됐다. 그러나 다음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발포까지 막지는 못한 셈이다.

 

한미 합동 군사작전을 마치고 참가한 미 특전사 장병들을 격려하는 전두환 공수여단장.

 

차지철 "우리는 100만~200만 명쯤 희생 문제없어"

 

또 김재규는 1979년 12월 8일 열린 1심 2회 비공개 공판에서 "차지철 경호실장 같은 사람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는 100만~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는 얘기가 나옵니다, 들으면 소름 끼칠 일들입니다"라고 증언했다.

 

이어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김재규는 민주정치와 여야 관계에 대해 견해를 밝힌다.

 

김재규 : "그 다음으로 가볍게 얘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만, 너무 완벽하면 곤란합니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는 헐렁헐렁하게 좀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구멍이 너무 완벽해서 어디를 눌러도 손톱이 들어가지 않으니, 마지막 길로 치닿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20~25년 앞당겨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은 당돌한 얘기입니다만, 제가 제 목을 걸고 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에 할 사람 없습니다. 결국은 20~25년 동안 자유의 맛 못보고 그냥 갑니다. 그리고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야당을 긴급조치로 죄인을 다 만들어 놓고, 매일 같이 왜 빨리 입건하지 않느냐고 하니, 이거 다 입건하면 뭘로 정치를 합니까?

 

김영삼이란 사람, 국회에서 제명하면 됐지, 사법처리 하라고 하니, 이래 가지고야 누구를 믿고 누가 삽니까? 야당도 여당 믿고, 대통령 믿고 정치를 해야 하는데, 믿을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사지가 완전히 봉쇄된 상태다, 그래서 원컨대, 앞으로 어떤 분이 정치를 하든 간에, 민주주의 정치는 찬성이 있으면 반드시 반대가 있게 마련입니다. 대통령도 99.9% 지지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당도 필요하고 야당도 필요한 것이고,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는 것은 전체가 지지하면 오히려 몇 사람이 일어나서 "난 반대요"하는 것이 난 민주주의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얘기는 더 장황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법무사 : "예, 이유보충서에…."

 

재판부는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자꾸 끊으려 했다. 갈수록 박정희 권력의 치부가 드러나는 증언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재규의 최후진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5·16쿠데타 50년-박정희 권력 평가⑦] 브루투스 같은 김재규, 그가 살리려 했던 사람들

"각하는 내 은인... 죽일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쏜 김재규, 최후진술에 담긴 '경고'

 

10·26 박정희 살해사건과 그 거사자인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엇갈린다. 김재규의 거사 동기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탓이다. 박정희 권력의 후예들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은총을 입은 제2의 권력자가 내부 불만 때문에 배신한 '모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수록 10·26 거사가 많은 국민의 희생을 사전에 막은 정당방위라고 보고 김재규를 '의인'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늘어나는 추세다. 특히 10·26 군사재판에 참여한 변호인단은 모두 김재규에 대한 역사 재평가를 주장해 왔다. 이들은 김재규를 고대 로마시대 공화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의 은인이며 직속상관인 카이사르(시저)를 살해한 브루투스에 비유했다.

 

 

 

박정희와 김재규, 카이사르와 브루투스

 

1979년 12월 18일 계엄사 보통군법회의 제9회 결심공판.

 

사실심리가 모두 끝나고 변호인단의 변론과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을 듣는 차례다. 변호인들은 김재규의 행동이 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권 행사와 국민희생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임을 들어 한결같이 사형만은 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동일 변호사 : "본건은 역사상 그 유례를 굳이 찾아본다면 시저와 브루투스의 예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대통령과 가까웠던 한 나라의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태윤기 변호사 : "옛날 로마에서 절대 권력을 가졌던 시저가 부하로부터 칼에 찔려 쓰러질 때, '너마저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브루투스는 '나는 로마를 더 사랑한다. 속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사죄할 뿐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사감(私憾)에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바로 로마의 공화정을 회생시키기 위해서 절대 권력자를 제거했다는 뜻일 겁니다."

 

'박정희 - 김재규 관계'를 로마시대의 '카이사르- 브루투스'로 비견하는 것은 꼭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그만큼 사건 자체가 드라마틱하기 때문이었다. 브루투스가 로마 공화제를 수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은인인 카이사르를 찌른 것처럼, 김재규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박정희를 쏘았다는 변론이었다.

 

여인과의 사랑에선 물불 안 가린 호색한 카이사르

 

기원전 44년 3월 15일 10시, 로마 시내의 폼페이우스 대회랑에서 600여 명의 귀족들이 참석하는 원로원 회의가 열리기로 공지됐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55년 전의 이야기다.

 

카이사르는 사흘 뒤 다시 먼 원정길에 나설 예정이었다. 로마의 3월 날씨는 그때도 변덕스럽고 거칠었던 모양이다. 3월 14일 밤부터 15일 새벽까지 폭풍우가 거리를 휩쓸었다. 평소 볼 수 없던 엄청난 규모의 새떼가 날아들기도 했다. 게다가 아내 칼푸르니아는 아침 일찍 이상한 악몽을 이야기하며 꺼림칙하다는 표정이었다.

 

당시 로마에는 카이사르의 애인인 클레오파트라가 와 있었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를 쫓아 알렉산드리아에 원정 온 카이사르를 사랑으로 사로잡았다. 클레오파트라가 오늘날까지도 미녀의 대명사로 불리듯 그녀는 절세의 아름다움을 타고 난데다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로서 권력의지도 남달랐다. 마치 가시 있는 장미꽃이라고나 할까, 정복왕 카이사르에게는 좋은 연애 상대였던 셈이다.

 

기원전 45년 카이사르는 국내외 반대세력과 분란을 모두 평정한 뒤, 로마에 돌아와 절대 권력자로서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도 이때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태어난 3살된 아들 카이사리온(훗날 이집트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 15세)과 함께 로마로 들어왔다. 이것 역시 로마 귀족들 사이에 카이사르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을 조성했다. 카이사르는 전쟁을 비롯한 일에는 냉정하고 합리적이었지만, 여인과의 사랑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호색한이었다.

 

모처럼 아침식사를 함께 한 아내가 불길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이 카이사르의 일정을 변경시키지는 못했다. 그런 전조들은 평생을 험한 전쟁터에서 보낸 그에게 별 부담감으로 작용하지 못한 셈이다. 카이사르에게는 언제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유명한 승전고가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의 관용, 결국 본인의 비운을 재촉하다

 

그날 관저에서 원로원 회의장까지 카이사르를 수행한 사람은 그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 장군인 데키무스 브루투스였다. 그는 20대부터 갈리아 등 수많은 전투에서 카이사르와 함께 한 충성스런 장수였다. 카이사르는 그를 트란살피나갈리아의 총독으로 중용하기도 했다.

 

원로원 회의장은 격론이 벌어지기 일쑤여서 무기를 휴대하는 것이 금지됐다. 그러니까 카이사르 파는 모두 맨 몸이었고 암살 모의자들만 옷 속에 단도를 숨겨 입장한 것이다. 암살파는 카이사르의 측근들 중 안토니우스의 완력이 걱정이었다. 비록 무기를 안 가졌다고 해도 안토니우스는 힘이 장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안토니우스를 회의에 참석하지 않도록 지략을 써 다른 곳으로 유인했다.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의원들이 왔다 갔다 하며 인사도 나누고 어수선할 때, 수십 명의 원로원 암살자들이 카이사르를 에워쌌다. 그들은 순식간에 단검을 꺼내 들어 카이사르를 찔러 댔다. 너무도 긴장되고 서두른 나머지 자기들끼리 찌르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그들 중 두 사람의 브루투스가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사람은 아침부터 수행해 온 데키무스 브루투스였으나, 다른 한 사람은 마르쿠스 브루투스였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미망인으로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다. 카이사르는 애인의 부탁으로 마르쿠스를 관직에 임명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부르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항하는 적의 진영으로 들어간다. 카이사르는 적들을 모두 평정한 뒤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용서했으며, 계속해서 요직에 기용했다. 이것은 카이사르의 관용이었으나 자신의 비운을 재촉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제2의 상속자인 브루투스, 카이사르를 찌르다

 

카이사르는 마지막 순간에 탄식했다.

 

"오, 브루투스, 너 마저 …!"

 

카이사르는 모두 23곳이나 칼에 찔렸다. 그는 비참한 최후를 감추려는 듯 붉은 망토로 상체와 얼굴까지 휘감은 채 쓰러졌다.

 

훗날 역사가들 사이에 카이사르의 탄식이 어떤 브루투스를 두고 외친 말인지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배신감을 토로한 것임은 분명하고, 그렇다면 두 부루투스 모두 이에 해당된다. 이 논란에 대해서는 카이사르의 유언장 공개가 해답이 될 것이다. 카이사르는 죽기 6개월 전 써 둔 유언장에 제1의 상속자로 옥타비아누스를, 그리고 제2의 상속자로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지정했다. 유언장이 공개된 장소에서 브루투스는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니까 카이사르가 충격적으로 느낀 배신감은 자신이 제2의 상속자로까지 지정해 놓은 테키무스 부루투스로 향했다는 이야기다.

 

카이사르의 원망에 대한 브루투스의 답변과 해명은 그 다음날 카이사르의 관저가 있던 시내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브루투스는 연설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카이사르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로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그를 죽였다. 카이사르를 그대로 두면 로마인은 모두 그의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로마인의 자유를 빼앗으려 한 카이사르를 쓰러트렸다. 속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사죄할 뿐이다."

 

"민주화 지연시키다간 80년 4, 5월께 국가적 혼란 사태"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박 대통령 각하는 나에게 동향 출신으로, 은인이며 상관이다. 친형제 간도 그럴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관계다. 그러나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통령 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를 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1980년 1월 24일 오전, 법정에서 하는 것으로는 마지막인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1980년 5월 광주시민항쟁을 예언했다. 이 예언은 불과 석 달 뒤 정확히 적중했다. 그는 "민주화를 지연시키다간 80년 4, 5월 경 국가적 혼란사태가 야기된다"고 경고했다. 그 최후진술의 육성녹음은 가히 역사적 증언이다.

 

김재규의 이 같은 예언은 이미 1979년 12월 18일 1심 최후진술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그는 조속히 민주회복을 해야 하는 것이 국민의 요구며 이것을 하지 않으면 민심이 폭발할 수밖에 없는 한계점에 도달해 갈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다.

 

"빨리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안 하고 인위적으로 자꾸 끌다가는 내년 3, 4월이면 틀림없이 민주회복 운동이 크게 일어납니다. 그 때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 핵이 없습니다. 정부가 통제력이 없고 국민은 자제력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큰일을 당하면 뭐가 될지 모릅니다."

 

한편 전두환의 정치장교 비밀조직 하나회가 주도한 신군부 집단은 민주화는커녕 민심에 불을 댕기는 짓만 골라서 했다. 김재규의 경고는 우선 김대중·김영삼·김종필, 3김의 정치활동 재개와 함께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학생운동권의 시위 등 '서울의 봄'으로 나타났다. 전두환 집단은 학생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면서 민심을 더욱 자극했다. 특히 신군부가 1980년 5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강행하며 김대중과 언론인 등을 전격 체포한 것은 울고 싶은 국민의 뺨을 때려 준 격이었다.

 

특히 광주의 시민학생들이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치고 나서자 신군부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들은 사납기로 소문난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들을 투입했다. 1979년 10월 부산·마산에 보냈던 바로 그 부대들이었다. 10·26으로 저지된 발포명령과 가혹한 진압작전이 몇 달 뒤 광주에서 자행된 것이다.

 

김재규는 항소심 최후진술 후반부에서 이같은 사태를 우려하면서 조속하게 민주회복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으나 헛수고였다.

 

궁정동 만찬장의 시해 현장을 재연하고 있는 김재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달라"

 

"다음에, 원컨대 이 사건 처리가 재판장님께서는 여러 면에서 유능하신 분이니까 잘 알아서 하시겠지만,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군인인 여러분들은 역시 보시는 눈이 또 사회이기 때문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처리가 군 내부에 미치는 정도라면 별 것이 아니지만, 이 결과가 정치에 미칩니다. 앞으로 계엄이 해제되든지 장기화되면 반드시 4·19 같은, 4·19가 좋은 예입니다만, 경우가 생기면 매우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자칫 잘못해서 마지막에 가서 잘못해서 결과가 아주 나빠지면, '김재규가 나라 망쳐 놨다'는 소리 듣기 딱 알맞게 생겼습니다. 나는 죽어도 이 소리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상되는 기상도가 잘은 몰라도 얼멍얼멍한 것으로 압니다, 국내외적으로.

 

 

그러니 제 몸뚱이 처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리 졸속하게, 또 잘못 편견을 갖고 처리했다가 나중에 되돌릴 수 없는 결과가 온다면, 땅 속에 들어간 저도 불행한 것이고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불행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지배적으로 뚜렷한 재판이니만큼, 국민들이 앞으로 어떤 문제를 삼는 데 그 이슈가 되지 않도록 저스스로 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달라, 그래서 아무런 요인을 만들지 말아라,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이 사건은 전적으로 저 한 사람이 이 혁명사건의 전부입니다. 누구에게도 의논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사전모의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전체가 저요, 책임질 전부가 저입니다. 저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안된 이야기입니다만, 정승화 육참총장 정말 억울합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억울합니다. 이렇게 육군대장이 목이 달아나서야 육군대장을 누가 하겠습니까. 그러니 장성이란 신분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계획적으로, 의도적으로 사전에 불러다가 대기시켜 놓고, 처음부터 접촉을 계속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개인이 좋고 안 좋고가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의 불행입니다. 이런 역사나 판례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김계원 실장이 그 자리에 있든 없든, 혁명은 결행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김계원 실장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총을 쾅, 쾅 쏴서 문제를 다 만들어 놓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날더러 이야기하라고 하면 이번의 실패는 김계원 실장 때문에 있는 겁니다.

 

김계원 실장이 24시간만 입만 막아줬더라도 모릅니다, 상황이 어떻게 됐을지. 그런데 김계원 실장이 지금 사형 언도를 받고 있다는 것은 내가 볼 때는 지위의 고하라든가 그 때의 형편이라든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건 난센스다', '무섭다' 이렇게 보입니다. 원컨대 이 유신헌법은 대통령 한 분을 제거하니까 완전히 무너지듯이 이 10·26 혁명사건에 저 하나 처리하면 완결됩니다. 그러니 제발 여타의 생명에 대해서는 본인도 본인이려니와 거기에 딸려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박흥주라고 내가 중위 때부터 전속 부관으로 데리고 있다가 포병 대대장을 끝마치고 대령이 되어서 날 좀 도와달라고 하고 데려다 놨다가 이 지경을 당했습니다. 내가 아는 바로는 그 가족과 면회하는 광경을 보고 옆에 있는 모든 사람이 눈물을 안 흘릴 수가 없을 정도여서 모두 다 울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이 비참한 불행을 더 이상 파급시켜 주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호적으로 한두 살 적게 되어 있지만 사실 쉰여섯입니다. 병든 몸이고 거의 다 살았습니다. 잘 해야 3~4년, 4~5년 더 사는 것뿐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문제가 안 됐으면 몰라도 문제가 된 한은 저는 죽어야지요. 여러분이 죽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저 스스로 목숨을 끊든지, 저도 군인으로서 중장까지 됐던 사람입니다. 제 목숨 하나 스스로 끊지 못할 정도의 사생관이 아직 확립되지 않을 정도의 졸장부는 아닙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고 깨끗이 마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부탁드립니다. 불행을 최소로 해 주시고,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불쌍한 가족들 심정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10·26에 연루된 부하와 동료들을 걱정했다. 특히 자신의 수행 부관으로 현역 대령인 박흥주에 대해서는 거듭 가슴 아파했다. 박흥주는 육사 18기의 선두주자였다. 전형적인 야전 출신이었으나 김재규와의 인연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다가 비운을 겪었다. 박흥주는 산동네의 허름한 판잣집에 살고 있었다. 그는 당시 힘깨나 쓰는 하나회 장교들과 판이하게 청렴한 가정을 꾸려 온 것으로 알려져 많은 이들이 탄식을 금치 못했다.

 

[오디오] 김재규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제거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 부장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통령 한 사람을 제거했다"고 밝혔다. 이 오디오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1980124일 계엄사 고등군법회의 결심공판 최후진술을 담고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50363&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1)

 

덧붙이는 글 | 변호인단은 김재규를 고대 로마의 권력자 카이사르를 칼로 찔러 죽인 브루투스에 비유했다.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유사한 역사를 찾아 낸 셈이다. 무엇보다도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죽인 이유를 밝힌 연설 내용이 김재규의 최후진술과 그대로 닮은 꼴이다. 그만큼 10·26은 한편의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오마이뉴스 김재홍 (jaehongk)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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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금년도 9월달에 부산에 계엄이 있지 않았습니까?(※1979년 10월16일 부마항쟁이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함)

변호사: 그렇죠.

김재규: 그 이후에 대통령하고 같이 식사를 했어요. 자유당 발언이 있어가지고. 내무장관 최인규(※1960년 3·15 부정선거를 지휘한 혐의로 투옥된 뒤 사형됨)가 발포 명령을 해가지고는.

변호사: 다 죽였지요.

김재규: ‘나는 그런 짓 안 한다. 나는 내가 직접 한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 물러가면 그만이지. 나를 사임까지 시키겠느냐?’ 이런 정도의 강경한 분입니다.

변호사: 아! 발포 명령을 자기가 하겠다고 그래요?

김재규: 내가 직접 발포 명령 한다.

변호사: 박정희가?

김재규: 예.

 

 

1979년 10·26 직후 ‘김재규 최초의 진술 육성 테이프’(사진)를 32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한다. ‘재야 민주화운동의 산증인’ 김정남(69) 선생이 18일부터 <한겨레>에 연재하는 ‘10·26 32돌 특별기획-박정희 시대를 증언한다’를 통해서다.

 

매주 1회씩 연재할 증언의 첫회는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와 독재자 박정희 최후의 순간’으로 시작한다. 김재규의 육성 테이프는 재판에 앞서 그해 11월30일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찾아간 류택형 변호사와 맨 처음 대화한 내용을 녹음한 것이다. 법정 최후진술과 사형 전날의 유언 등 지금까지 이미 공개된 김재규의 녹취록과 비교할 수 없는 ‘10·26의 생생한 진상’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 김 전 중앙정보부장의 최초 육성 진술이 담긴 녹음테이프로, ‘김재규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79-11-30’이란 류택형 변호사의 메모가 적혀 있다.

 

이어 연재는 1970년대 초 유신 태동기로 되돌아가 ‘긴급조치’란 악법을 무기 삼은 독재정권의 탄압사와 이에 맞선 민주진영의 지난한 투쟁사를 하나하나 반추해 나갈 예정이다. “망각된 군사독재의 실상과 그에 맞서 피와 땀과 눈물로 이뤄낸 민주화의 가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고 밝힌 그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그 초심을 잊지 말자”고 했다.

 

 

김정남의 ‘증언, 박정희 시대’ - 김재규 10·26 육성테이프 첫 공개

(상) “박정희, 서울서 항쟁땐 직접 발포 명령하겠다 말해”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1181.html

 

독재정권 종식 위한 ‘거사’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유신의 심장 겨눠 날 도적 몰지말라” 당부

전두환 군부가 진실 왜곡 “대통령 되겠다는 야욕에 김재규 내란 일으켜” 미국 조종설 등 유포도

대법 판결 나흘만에 사형 “나는 즐겁게 갑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시오”

 

■ 김재규 ‘최초의 육성 진술’을 듣다

 

변호사: (중략)그런데 이거 필연성 문제, 어째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 필연성 문제를 말이죠. 뭐 잡다한 얘기는 하지 마시고, 하나둘 간추려서 간단간단하게 얘기를 해 주세요.

김재규: 자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변호사: 옳지. 좀 큰 소리로 해 주세요.

김재규: 대통령께서 희생이 되지 않고는 자유민주주의는 없다. 에~,

변호사: 예. 그러고 또?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두번째로? 요점만 딱딱 하셔야 돼요.

김재규: 대통령께서 희생이 되어야만 결국은 내가 생각하는 혁명 목표를 달성할 수가 있다,

변호사: 응~.

김재규: 다시 말해서 민주회복을 위한,

변호사: 민주회복을 위한 혁명이다, 이 말이죠?”

 

 

고문을 많이 당한 탓인지, 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있는 힘을 다해 10·26의 진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녹음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 1973년 3월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으로 예편하게 된 김재규 3군단장이 전역식에서 자작 애송시 ‘통일송’을 써서 소개하고 있다. 보안사령관 시절 전방 시찰을 한 뒤 지었다는 이 시를 그는 ‘10·26 사건’ 때 변론을 맡은 강신옥 변호사의 면담 노트에 직접 써 보이기도 했다.

 

1979년 12월 초 나는 김재규의 육성을 듣고 있었다. 바로 며칠 전 11월30일에 녹취된 테이프였다. 이른바 ‘10·26’ 이후 김재규 최초의 진술이었다. 첫 공판일로 예정된 12월4일을 앞두고 강신옥·홍성우·황인철 등 인권변호사들과 함께한 자리였다.

 

‘궁정동의 거사’ 6시간 만인 이튿날 새벽 전두환의 보안사로 끌려가 모진 고문과 함께 조사를 받은 김재규는 11월6일 합동수사본부의 수사 발표 이후 군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류택형 변호사(당시 민주통일당 대변인 겸 인권위원장)는 무작정 교도소로 찾아가 김재규를 만나고 녹음까지 하는 데 성공했다. 김재규 역시 매우 적극적으로 ‘거사 이유와 총격 상황’을 설명했다.

 

 

김재규: (각하가) 그러면서 돌아가시려고 그런 건지, 그 시간에 자기가 돌아가시려고 그런 건지. 보통 식사 자리에서는 그런 얘기 잘 안 나오는데. 어떻게 또 그게 또 그 얘기가 나왔는지,

변호사: 김영삼 (구속) 얘기를 그때 하더라 이 말이에요?

김재규: 예.

변호사: 쏴버렸는데, 그러면 차지철이를 먼저 쐈다매요?

김재규: (총 가진 사람 먼저) 일단 뭐, ‘빵-! 빵-!’ 이렇게,

변호사: 차지철이한테는 이 버러지 같은 놈, 그랬습니까?

김재규: 그게 아니죠. 여기 보고는, 대통령을 똑똑히 모시시오, 라고.

변호사: 옳지.

김재규: 그러니까 (차지철이) 뭐라고?, 총 뽑아가지고 맞서려고 해서.

변호사: 옳지, 옳지.

김재규: 나는 이 버러지 같은 새끼, 하고 이 말을 하고 ‘빵-! 빵-!’ 하고.”

 

무엇보다 이 녹취록의 의미는 김재규의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 속에 스스로 규정한 ‘10·26 민주혁명’의 진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는 박정희를 위해,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첫 진술을 마지막 유언 때까지 수미일관했다.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를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나였지만, 그날 그 목소리의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녹음기에 흘러나오는 김재규의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진정성 있는 말이야말로 잘 쓰여진 글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인권변호사들도 그의 인품에 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김수환 추기경의 주선에 따라 마지못해 변호를 맡기로 했던 이들은 김재규를 만나기 전 이 육성을 듣고 ‘반드시 구명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나는 그 즉시 김재규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녹음을 복사해 인편을 통해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협의회로 몰래 보냈다. 이것이 다시 미국과 유럽 쪽으로 퍼져 국외에서부터 김재규 구명운동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1979년 12월8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부하인 박선호 의전과장과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

 

■ 김재규의 ‘고독한 혁명’

 

“이승만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에 국민의 희생을 염려하여 물러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고 또 모든 면에서 완벽한 분입니다.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어이 방어해서 권력을 유지하려 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내가 부마 사태의 본질과 그것이 전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고드렸더니 각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만일 서울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겠다.’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4·19의 불행을 우리는 겪었습니다. 그러나 완벽한 성격의 이분이 위에서 방어를 할 때 어떤 결과가 올지 상상해 보십시오. 급기야는 국기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미국도 우리와 등집니다. 국가방위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더이상 늦출 길이 없다,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80년 1월 2심 최후진술에서)

 

나는 10·26을 ‘김재규의 고독한 혁명’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것은 그의 말처럼 오직 그 자신만이 혁명의 처음이요, 끝이며 전부였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그의 혁명을 혁명으로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10월26일이 70년 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일과 겹친다는 것도 묘한 여운을 더해준다. 무엇보다 그는 그 자신의 ‘10·26 민주회복국민혁명’에 대해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변호사: 그런데 기자들이 말이죠. 전두환 그 수사관한테 심문, 저기 물어본 것 중에서 미국의 중앙정보부(CIA)가 좀 한 거 아니냐? 이런 걸 물어봤거든. (중략) 그까짓거 미국놈들이 그거 합니까? 못해.

김재규: 미국놈들이 하려고 하면 저 밑에 있는 하빠리 얘들 시키지. 미쳤다고 중앙정보부장 하고 있는 제가 직접 하수인 노릇을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는 혁명이란 “기존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가 말하는 기존의 체제는 유신체제요, 새로운 질서란 자유민주주의 새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훗날 법정에서 밝힌 그 혁명의 목적은 다섯가지다. 첫째가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이요, 둘째로 더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는 것이며, 셋째로는 민주주의로서만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는데 적화방지가 그 목적의 하나라는 것이다. 넷째는 한-미의 건강한 선진우호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이요, 다섯째는 국제사회에서 독재국가라는 오명을 씻고, 민주한국의 명예를 되찾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녹취록에서 자신이 혁명을 74년부터 오랫동안 구상했고 79년에도 이미 몇차례 ‘거사’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 흔적은 곳곳에 증거로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민주·민권·자유·평등·위민주정도·비리법권천·위대의·자유민주주의 등 그가 필묵으로 남긴 휘호이고, 자작시 ‘통일송’, ‘나와 자유’ 등이다.

 

 

■ 전두환 신군부의 새치기

 

그러나 유신의 원천을 두들겨 부순 김재규의 혁명은 민주화의 출발이 되지 못하고, 전두환 군부의 등장을 가져오는 빌미가 되었다. ‘궁정동의 거사’ 직후 국군서울지구병원을 통해 박정희 서거 사실을 맨 먼저 탐지한 것도 전두환이었다. 육군본부 벙커에서, 국방부에서 최규하 총리를 비롯한 이 나라 정부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전두환은 이미 그의 참모들과 더불어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계엄하의 보도통제를 통해서뿐 아니라 합동수사본부라는 막강한 권한을 이용해 김재규의 진실을 왜곡·음해했다.

 

박정희가 살해된 10·26 이튿날, 유신정부는 새벽 4시10분에는 유고로, 그리고 아침 7시20분에는 대통령 서거로 발표하였다. 사건의 전모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그로부터 1주일 이상 지난 11월6일이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고 어처구니없는 허욕으로 빚어낸 내란 목적의 살인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대해 김재규는 녹취록에서 단호한 어조로 “거짓말”이라고 항변한다.

 

변호사: 그리고 대통령을 하려고 했다고, 전두환 그 저기 그 사람이 말이지, 발표를 했어요.

김재규: 예.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스스로가 독재정치에서 혁명을 한 사람이,

변호사: 옳지.

김재규: 나는 군인이고 혁명가입니다. 내가 지금 (대통령)하게 되면 보다 더 지독한 독재거든요. 그런 내가 스스로 그런 데를 내가 왜 합니까?”

 

‘범행’ 동기에 대해서 전두환은 “평소 이권개입이 많다는 개인적 비리로 대통령의 경고친서를 받았고, 정국 수습책의 실패로 무능이 노정된데다 군 후배이며 연하인 차지철 경호실장이 업무에 간섭하는 방자한 월권으로 수모를 당하고 있음에도 대통령이 차 실장만을 편애한다는 생각에서 불만이 누적되었으며, 특히 요직 개편설과 함께 부산과 마산의 소요사태와 관련해 자신에 대한 인책 해임설이 파다하여 불안하던 차에 대통령으로는 현 정계 인물 중에서 자신이 가장 적임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주요 인사와 군 지휘관이 자기 영향권 안에 있다는 오판”을 하게 되었다고 몰아갔다.

 

김재규: 대신에 훗날, 저를 갖다가 흉측한 천하의 없는 흉측한 도둑놈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변호사: 아, 물론이지요.

김재규: 나는 신문에 그 얘기 듣고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내가 치가 떨렸어요.”

 

재판은 요식이었고, 사형은 기정사실이었다. 사건이 최종판결을 받기 위해 대법원에 계류중이던 80년 3월6일, 김재규의 수행비서관이던 박흥주 대령은 군인이란 이유로 단심 만에 서둘러 총살형에 처해졌다. 4월29일 전두환은 기자회견에서 “대법원 심리는 법 적용만 다루는 것이어서 형량의 변동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 미리 사형 판결을 기정사실화했다.

 

 

■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1980년 5월24일 새벽 4시 김재규는 군 교도소에서 서대문의 서울구치소 지하독방으로 이감된 뒤 3시간 만에 교수대에서 최후를 맞았다.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 뒤 나흘 만에,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살인적인 진압이 준비되는 바로 그때였다.

 

사실 김재규는 이미 생사를 초월해 있었다. 그는 어렴풋하게 80년 1월9일(음력 11월22일) 낮, 헌병이 감방의 문고리를 만지는 우연한 순간에 견성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죽을 때까지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도 평화스러웠다. 사형집행을 예감한 듯 바로 전날 군 교도소에서 가족과 변호인을 불러 국민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그래서 나는 아무 누구의 염려 없이 아주 유쾌하고 또 명예스럽고 또 이런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그 자부와 내가 이렇게 감으로써 자유민주주의는 확실히 보장되었다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나는 즐겁게 갑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발전과 10·26 민주회복 혁명, 이 정신이 영원히 빛날 것을 믿고 또 빌면서 갑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오.”

 

 

 

(하) “박정희 쐈지만 그 무덤위에 설 만큼 타락하지 않았다”

김재규 “4월에 결행하려다 10월로 연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2245.html

 

김재규 유신헌법을, 이것은 반드시 개정돼야 된다, (1973년 3군단장 시절부터) 이렇게 생각을 했지만은…. (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으로 가고 난 이후에 잘됐다, 이 기회에 순리적인 방법으로 한번 대통령의 머리를 한번 돌려 보자. …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또다시 내렸습니다.

변호사 그렇게 내린 것이 언제쯤 내렸습니까?

김재규 그러니까 작년(1978년)…, 도저히 안 되겠다 생각한 것은 작년 12월…. 생각을 해가지고서 금년 4월에 결행을 할려고 하다가 그거를 여러가지 여건이 안 맞아서 연기한 것이 10월26일.

변호사 아니, 4월달에 결행한 거는 어떤 방법으로 결행했습니까?

김재규 이거랑 마찬가지 방법입니다. 조건이 똑같습니다.

변호사 아, 그런 방법으로 했는데 그때 기회를 놓쳤다?

김재규 예. 그때는 경비가 너무 강화돼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연기가 된 겁니다.

(김재규가 1979년 11월30일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류택형 변호사에게 진술한 내용을 녹음한 ‘김재규 최초의 진술 육성 테이프’에서)

 

 

◇ 궁정동의 거사와 한계

 

김재규 그때(1974년 건설부 장관 취임식) 당시에… 가슴에 딱 품고 몸 안에다가 총 메고 갔습니다. 만에 하나…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변호사 예.

김재규 그때는 혁명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하고 나하고 둘이 그냥 같이 없어지자, 그렇게 해서 없앤다, 생각이었습니다.

변호사 예~.

김재규 여기에 건설부 장관 차를 타고 가는 그 자리가 바로 나하고 대통령 끝내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변호사 참~나.

김재규 그것이 1974년 9월14일입니다. 그다음에 75년 정월 27일, 건설부 장관으로 있을 적에도, … 그때부터 사실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 1979년 ‘10·26 사건’ 당시 계엄사령부의 각본대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김재규를 살려내고자 재야와 재외동포 단체들은 구명운동을 펼쳤다.

김정남 선생이 ‘김재규 최초 진술 육성 테이프’를 바탕으로 제작해 몰래 내보낸 자료집이 촉매제가 됐다. 사진은 재미 김재규구명위원회 준비위원회에서

만들어 배포한 유인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김재규 마지막 소회

“전쟁에서 이긴 장군이 적의 포로가 된 기분 그래도 민주주의는 온다”

 

1979년 11월30일 류택형 변호사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만나 녹음해온 ‘첫 육성 진술 테이프’에서 김재규는 이미 수년 전부터 ‘박정희 제거’를 계획해왔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날짜와 상황까지, 듣는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고 있었다. 김재규가 ‘차지철과 충성 경쟁에 밀리자 우발적으로 박정희를 쐈다’는 신군부의 발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72년 선포 직후부터 유신헌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73년 3군단장에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이어 중앙정보부 차장을 거쳐 6개월 만인 74년 9월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되자 장관 취임식 때 ‘동반폭사’를 구상했다가 포기했다. 또 79년 4월에도 궁정동 안가에서 결행을 모의했다가 박 대통령에 대한 경호 강화 때문에 미뤘다. 그리고 마침내 79년 10월26일, 오후 6시 무렵 궁정동 안가에 대통령과 경호실장, 비서실장이 도착하자 예정대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두 여인’으로 불리던 대학생과 가수가 동석해 흥을 돋웠다.

 

7시40분께 김재규는 옆에 앉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통령을 똑똑히 모시라”고 질책한 뒤, 차지철에게 “이 버러지 같은 새끼”라며 먼저 한 발을, 다음으로 박정희를 향해 한 발을 쏘았다. 총알이 명중되지 않아 차지철이 화장실로 도망가자 그는 방 밖으로 나와 박선호의 권총을 받아들고 들어와 차지철을 다시 쏘고, 이어서 여자 가수가 무릎으로 받치고 있던 박정희의 머리에 결정적인 한 발을 쏘았다.

 

유신의 심장은 이렇게 멈췄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그 이후의 사태를 장악하지 못했다. 몇시간 뒤 그는 유신체제와 전두환 군부의 포로가 된다. 그것이 ‘10·26 혁명’의 한계였다.

 

전두환 군부의 음해에 대해 김재규는 자신이 비록 대통령을 희생시켰지만, 그 무덤 위에 올라설 만큼 타락하지 않았다며, 10·26 민주혁명으로 자유민주정권이 안전하게 출범하면 자신은 박 대통령의 묘소에 묘막을 짓고, 시묘하면서 여생을 바치겠다고 했다.

 

김재규의 말대로, 그때 박정희와 3700만 국민의 자유민주주의는 숙명적인 관계에 있었다. 부마민중항쟁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때 박정희가 국민의 광범한 저항과 희생 끝에 물러났다면 오늘처럼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고 아주 영명했던 지도자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박정희 향수’는 그쯤에서 박정희가 죽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렇다면 박정희 향수는 역설적으로 김재규의 ‘10·26 혁명’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인기의 배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역사란 참 묘하게 흐른다.

 

» 1979년 12월4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1차 공판을 시작으로 12월18일 9차 결심의 사형 구형까지 ‘10·26 사건’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시종일관 의연한 태도로 자신의 ‘민주혁명 성공’을 주장했다. 어느날 재판정에서 피고인석으로 다가오는 가족들을 보고 환한

얼굴로 말을 건네는 김재규. <격동의 80년대> 중에서

 

 

박정희의 사생활

부인 육영수 피살된 뒤 여성·측근들과 ‘황음’ 빠져 궁정동 안가서 잦은 술판

 

◇ 궁정동의 대행사·소행사

 

유신 말기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하는 일은 중앙정보부 궁정동 본관 및 부장 집무실, 그리고 대통령이 사용하는 구관의 가동·나동·다동(한옥)의 관리와 특히 대통령의 저녁 대소연 행사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1974년 8월15일 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의 흉탄에 쓰러진 뒤, ‘황음’에 빠진 박정희는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이들 안가에서 주연을 벌이고 주흥을 돋우기 위해 젊은 여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이런 술판은 소행사와 대행사로 구분되는데, 대행사는 두 명 이상의 여인과 비서실장·경호실장·정보부장 등 권력자 3~4명이 참석해 벌이는 연회였고, 소행사는 대통령 혼자서 한 여인만을 불러서 즐기는 밀회를 말한다. 한 달에 대행사가 2~3회, 소행사가 7~8회, 도합 10회 안팎의 대소연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 여인을 공급하는 것도 의전과장의 몫이었다.

 

당시 의전과장 박선호가 서울 장충동에 있는 요정의 한 마담에게 소개받아 공급한 여인만도 100명을 넘는다. 이런 일에 신물이 난 박선호와 사무관 남효주가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는 말을 나눈 적도 있었다. 특히 박선호는 자식을 키우고 있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너무 괴로워 김재규에게 여러 번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어떻게 하느냐”며 그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10·26은 나동에서 대행사를 벌이다 일어난 사건인 만큼,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들이 대소연 행사에 대한 집중적인 신문을 펼쳤지만, 박선호의 답변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김재규였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했고, 인간적 타락상이 공개되는 것을 한사코 저지했다. 그는 박정희를 지칭할 때는 꼭 “각하께서는 … 하셨습니다”라고 최상의 경의를 표하고 있었으며, 재판중에는 물론 죽는 날까지 그런 자세에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평소에도 대통령을 만날 때면 먼저 몸과 머리를 단정히 손질하고, 보고하는 서류 한장 한장에도 정성과 경의를 다 담았다.

 

이처럼 박정희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잃지 않았던 김재규가 변호인에게 구술해 자신의 이름으로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에서 ‘구국여성봉사단과 큰 영애(박근혜)의 문제’를 언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때 김재규가 지시해서 작성한 보고서(박근혜 파일)는 지금도 중앙정보부 어딘가에 보관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 1975년 10월 영동고속도로 개통식 때 박정희 대통령 일행. 왼쪽부터 차지철(경호실장), 박정희, 김재규(건설부장관), 전경환(경호실 근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박근혜. 김재규는 1974년 9월 건설부장관 취임식 때 권총을 품고 가는 등 ‘10·26’ 이전부터 여러 차례 ‘박정희 제거’를

모의했다고 진술했다

 

‘박정희 향수’의 연원

독재 심장 쏜 10·26의 역설. 국민저항에 물러났다면 박정희 찬양 가능했을까

 

◇ 김재규 구명운동의 실패

 

김재규 나 하나, 나 지금 현재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요. … 누가 무슨 소리 하더라도 혁명은 성공했습니다.

변호사 알겠습니다. 예예.

김재규 이제는요, 아무리 물리적으로 막아도 이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오지.

변호사 그렇죠.

김재규 자유민주주의 안 오지 않습니다. 시간이 문제입니다.

 

김재규의 10·26으로 긴급조치는 해제되고, 간헐적이기는 했지만 구속자는 석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11월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유신헌법의 개폐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김재규의 공이었다. 그러나 김재규는 묶인 몸이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는 승리한 장군이 적에게 포로가 된 기분입니다. 저는 혁명을 성공시켜 놓고 심판받고 있습니다. 재판은 유신의 배경을 가지고 있고, 저는 자유민주주의의 배경을 가지고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79년 12월초 김재규의 첫 육성 진술 녹음을 들으면서 ‘김재규를 우리가 구해낼 수 있다면 10·26에서 민주화로의 이행이 가능하지만, 만약 그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민주화는 군부세력에 가로채기당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도움으로 김재규 구명을 위한 자료집을 엮었다. 김재규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 김재규의 진면목, 그가 누구이며, 왜 10·26을 일으켰는지 진실 그대로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김재규가 어머니에게 바친 시, 재판 과정, 1·2심 최후진술, 항소이유서, 항소이유보충서, 강신옥 변호사의 접견록을 바탕으로 내가 작성한 ‘인간 김재규’, 이돈명 변호사가 쓴 변호인단 상고이유서, 구명을 위한 각종 성명과 진정서·기도문 등 관계자료를 한 권으로 묶었다.

 

그때 구명운동이 성공하지 못한 데는 전두환 군부의 탄압과 정치권이 구명을 외면했던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80년 안개정국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가 죽었으니 이제 민주화가 되겠지 하는 기대 속에 안주했고, 정치권은 대권경쟁을 벌이거나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전두환 신군부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구명운동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10월26일 그 궁정동의 만찬에서 여러 번 박정희가 꺼낸 화제의 대상이었던 김영삼과 신민당이 그랬고, 복역중이던 김대중을 서울대병원으로 입원시킨 뒤 “어머니,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는 한 분을 따뜻한 방으로 옮겨 모셨습니다” 하며 김재규가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던 그 김대중 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학과 국외에서는 구명운동이 계속 확산되었지만, 국내에서는 천주교회와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한 일부 재야만이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을 뿐이다. 거기다 전두환 군부의 탄압이 조여오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김재규와 그 일행을 서둘러 처형했다. 전두환은 김재규 구명운동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본인은 구명운동에 극소수 종교인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 사회의 기본적 도덕심의 마비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 아프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공개적으로 협박했다.

 

다시금 ‘10·26’이 가까워오는데,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한번쯤 멈춰서서 생각해볼 일이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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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 문란' 박정희, 이 노래는 못 참았다

방탕 정권의 아이러니,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장발족'들을 한낮 대로에 줄 세워놓고 가위질을 해대고, 길거리를 지나가는 여성들의 미니스커트가 짧아 보이면 무릎 위 몇 센티인가를 자로 재서 허용치가 넘으면 과태료를 물렸다. 건전한 미풍양속을 해치고 퇴폐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경찰이 나서서 경범죄 위반행위를 단속한 것이다.

 

소설과 영화에 대한 심의에서는 사회윤리와 풍기문란을 엄격하게 따져 삭제했다. 시에 체제비판이나 허무주의의 내용이 담겨 있으면 출판을 금지했다. 심지어 불신풍조나 퇴폐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1965년부터 민주정부 수립 이전까지 32년 동안 금지곡으로 묶어놓은 대중가요가 840여 곡에 이르렀다.

 

독재정권 콤플렉스로 노랫말의 속뜻을 의심하다

 

문화적 자유보다는 정권의 주관적 가치에 바탕을 둔 획일적 잣대로 선을 긋는 식의 통제가 횡행하던 시대였다. 국민의 생각과 문화 양태를 자신의 주관에 따라 획일적으로 통제하겠다는 독재자의 발상이 사회를 옥죄었다. 자율과 다양성이 창의를 만들어낸다는 철학은 없고, 오로지 통치자의 생각대로 다스린다는 '교도 민주주의'만 횡행했다.

 

그렇게 국민에게 미풍양속을 강요하며 억압했던 박정희 정권의 권력자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는가? 그들의 사생활은 참으로 추잡하기 짝이 없었다. 공인으로서의 윤리의식은 고사하고 일반인의 기본윤리에도 못 미친 패륜 그 자체였다. 최고권력자 박정희뿐 아니라 그의 측근 부하들이 요정 호스티스 등을 상대로 벌인 섹스 탐닉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이었다. 그것은 '사생활 문란'이고 '방탕'이었다.

 

박정희가 10·26사건으로 최후를 맞았을 때, 연예계의 여인 둘이 동석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탄식했다. 그동안 그렇게 박정희의 술자리에 다녀간 여인들이 200명도 넘으며 일류 여배우와 탤런트만 수십 명에 이른다는 얘기들이 나오자 많은 국민이 경악했다. 그야말로 주지육림과 황음으로 자신뿐 아니라 나라까지 말아먹은 부패권력의 전형을 보여줬다.(관련기사)

 

그런 박정희 정권이 유달리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고, 대중가요까지 건전성을 내세워 마음대로 규제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아예 똥통 속에 빠진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송창식의 <왜 불러>는 장발 단속을 조롱한 죄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장면 재연. 2005년 광주 충장로 축제 중

 

특히 인기가요 중에서 금지곡을 정해 '철창'에 가둔 죄목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가관이고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초반 국민가수 반열에 오른 송창식이 부른 <왜 불러>는 장발 단속에 저항하고, 이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당시 장발 단속을 맡은 경찰은 요즘의 음주운전 단속처럼 대로를 막은 채 머리가 긴 젊은이들이 지나가면 붙들어다 줄 세워놓고 가위질을 해댔다. 이런 풍경이 외신을 타고 해외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과연 일본군 장교 출신다운 획일주의적 발상이다.

 

장발이 유행하던 당시 젊은이들은 길을 가다가 단속 경찰을 발견하면 그냥 돌아서서 내빼곤 했다. 그럼 경찰은 돌아서서 가는 장발을 소리쳐 부르기도 했다. 노랫말에 있는 것처럼 경찰이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강제구인이 아닌 바에야 돌아서서 가는 사람이 오라고 한대서 갈 리도 없는 데 말이다. 어쨌든 이 노래가 그런 장면을 희화화하고, 저항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된 것은 그 시대에나 가능한 코미디였다.

 

당시 젊은 세대의 우상이던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도 금지곡 선고를 받았다. 가사에 담긴 의미가 늘 문제였다. 당시 철학적 대중음악인으로 인기가 높은 김민기가 작사·작곡한 <아침이슬>. 이 노래의 노랫말 중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타오르고"가 단속에 걸렸다. "묘지위에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무엇을 뜻하느냐는 것이다. '묘지는 남한이고 태양은 북한의 김일성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또 "긴 밤 지새우고"는 마치 기존체제를 들어 엎는 '혁명 전야'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정말 작사자가 그런 의미를 담았는지 진의를 밝힌 적도 없는데도 말이다. 검열 당국의 해석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허무주의·친북성향 때문에 빨간 딱지 받은 노래는?

 

셰익스피어가 살아나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문학박사들의 해설을 들으면 기절초풍할 것이라는 말이 있다. 원작자는 생각지도 않은 상상력을 발동해서 기가 막힌 이유를 뽑아내 빨간 딱지를 붙이니 이런 것도 '꿈보다 해몽'이라고 해야 할까.

 

특히 김민기가 작사한 노래는 공안당국의 의심을 많이 받았다. 그가 작사·작곡하고 양희은이 부른 <늙은 군인의 노래>도 금지곡으로 묶였다. 그가 운동권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김민기는 '71동지회' 회원들과 친분관계가 있었다. '71동지회'는 1971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전국 대학가에 위수령을 선포한 뒤, 붙잡아 고문하고 학교에서 제적시킨 후 강제징집한 학생운동 간부들의 모임이다.

 

군대에 강제징집 당했다가 돌아온 이들은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해 반독재 학생운동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었다. '늙은 군인'이란 그때 군에 강제징집 당했다가 전역해서 돌아온 학생운동 간부들을 상징했다. 이 노랫말도 뭔지 모르게 거슬렸던 모양이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고 어언 사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이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우리 손주 손목 잡고 금강산 구경일세

꽃 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그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 내 청춘 다 갔네

- <늙은 군인의 노래> 중

 

노랫말에 담긴 의미를 굳이 짚어본다면, 무욕과 달관 그리고 유토피아를 꿈꾸는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이 내 청춘"을 허무주의적 항변으로, 그리고 "금강산 구경"은 친북 성향쯤으로 간주하는 것이 검열 당국의 자의적 잣대였다.

 

 

"잠 못 이루는 밤"도 죄가 된 이장희의 <그건 너>

 

양희은이 불러 젊은이들의 18번이 된 <작은 연못>도 그런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

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 <작은 연못> 중 

 

이 노래의 가사는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내용이라는 이유로 금지됐다. 열강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분단된 남북한이 서로 싸워 공멸하는 것을 은유한다는 것이다. 가사에서 '작은 연못'은 한반도를,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는 남북한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설령 이것이 사실이라 한들 그것이 금지해야 할 만한 불온사상이란 말인가. 우리가 겪는 약소국의 비극을 알려주는 노랫말이 누구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인가. 정권이 미국, 일본 같은 '빅 브라더'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민족주의 감정을 노래하면 안 된다는 말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또 이장희가 부른 <그건 너>를 두고는 "늦은 밤까지 잠 못 이루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시비를 걸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워하며 잠을 못 이루는 이유가 "너 때문이야"라고 돼 있는데도, 그것이 불만 어린 독재정권 때문이라고 외치는 것 아니냐면서 금지시켰다. 청춘 남녀의 사랑 노래마저도 제발이 저린 나머지 빨간 딱지를 갖다 붙인 것이다.

 

 

 

 

<동백아가씨>, 뭘 그렇게 그리워하느냐며 금지곡으로

 

말도 안 되는 이유도 많았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와 <섬마을 선생님>은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그리워하느냐며 금지 딱지를 붙였다. 특히 <동백 아가씨>은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라는 대목에 시비를 걸었다. 아마도 "빨갛게 멍이 들었소"가 문제가 됐을 것이다. 당시 빨간색은 공산주의를 연상시키는 것이어서 무조건 반체제와 동일시됐다.

 

한대수의 <행복한 나라>도 비슷한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행복한 나라가 어디냐' '박정희 치하에서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냐' '어떤 유토피아를 노래하는 것이냐'는 지적이었다.

 

이런 정치적인 이유 말고 괴상한 억지로 금지시킨 곡도 적잖았는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코미디였다. 

 

코미디성 시비를 당한 대표적인 노래가 김추자의 <거짓말이야>이다. "거짓말이야!"를 외쳐서 불신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였다. 참 소가 웃을 일이다. 배호가 부른 <0시의 이별>은, 통행금지 시간이 0시인데, 그 시각에 이별해서 어디로 간단 말이냐고 다그치면서 금지곡으로 묶어버렸다. 이후, 1980년대 심수봉이 부른 <순자의 가을>은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서 금지곡이 된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

 

당시의 획일적인 기준으로 오늘날의 대중가요 가운데 금지곡을 뽑는다면 어떨까. 백지영의 <사랑 안 해>는 심각한 사회 문제인 '저출산'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원더걸스의 <소 핫(So Hot)>은 세계적 난제인 온난화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선정의 영예를 안을 것이라고들 한다.

 

시와 소설, 대중가요와 영화, 심지어 머리와 옷차림에 이르기까지…. 독재정권이 사회문화 통제를 감행하면서 들이댄 사유를 보면 하나같이 그 의미가 모호하기 짝이 없다.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다. 문화의 적은 획일성이고, 자율의 적은 통제다.

 

핀란드의 국민기업으로 세계적 휴대전화 생산업체인 노키아의 현관에 들어서면 벽에 사시(社是)가 걸려 있다. '총화단결'이나 '조기달성' 따위의 구호가 아니라 '서로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ly)'고 쓰여 있다. 아하, 이것이 바로 인구 530만 명도 안 되는 나라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 부국이 된 바탕이다. 우리는 그처럼 다양성과 자율성이 존중받는 사회 환경에서 가치 창조의 에너지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랜 개발독재 정권 아래서 찌들어버린 우리의 사고와는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2012.1.10 / 오마이뉴스 / 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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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이젠 평가해야 할 때 -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법정은 일순 숨소리 하나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2006년 12월23일, 서울 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 문용선 재판장은 그 침묵을 깨고, 31년8개월여 전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죄 없는데도 목숨을 빼앗긴 8명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부르기 시작했다. "피고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송상진, 우홍선, 여정남에 대해 판결을 선고합니다. 원심을 파기합니다. 피고 각 무죄!"

거의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참고 또 참아왔던 진하디 진한 흐느낌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흐느낌은 금세 통곡이 되어 법정을 휘감았다. 민주화된 세상이라 예상되던 재심 판결이었으나, 막상 판사의 육성으로 듣는 "무죄" 소리가 유족들은 기막히게 서러웠다. 31년 전에 그렇게 들었어야 할 선고였다. 그날 그 법정에서는 유족이 아니었어도 다들 울었다.

이 판결은 검찰이 법정항소 시한인 1개월을 넘기면서, 상급심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2007년 1월23일 최종 판결로 확정되었다. 몹쓸 세월에 대통령 한 사람 잘못 만나 죄도 없이 목숨을 잃었으나, 세상이 정상적으로 굴러 가기만 했다면 당연히 벌써 와야 할 그런 날이었다.

그 1년 8개월 뒤인 2008년 9월26일 이용훈 대법원장은 사법 60주년 기념식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사법부의 과거사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했다. "사법부가 헌법상 책무를 충실히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드렸다"며 "민족일보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 민청학련 사건,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사건 등에 대해 과오를 사과 한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이들 사건은 사법부의 잘못이라고 못 박을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대통령의 뜻'에 따라 판결한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그런데도 이날 공식 사과문에서 "미래를 향해 새로 출발하려면 먼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도덕적 용기와 자기 쇄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가족들이 새누리당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대법원장이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구체적으로 거론해 사과하면서 그랬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가 직접 관련된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놓고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는 '미래'를 말하면서도 선문답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라를 이끌겠다면서도 사과 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인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관련자들이 범했다는 죄목은 사형선고가 가능한 긴급조치 4호 위반과 내란 선동 등이다. 훗날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의 후신)의 과거사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이 사건이 "유신체제에 대한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당시 박정희 정권이 학생시위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고자 조작한 사건이었다"고 지적했다. 진실위는 특히 "당시 권력의 정당성이 없는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했다"고 진상 조사결과를 밝혔다.

뒷날 줄줄이 위헌판결을 받은 그 긴급조치들은 사실 박정희씨 개인이, 방해 받지 않고 대통령 오래하려고 일방적으로 정해 놓은 '개인의,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기준이었다. 장기 집권을 위한 기준이었다. 그가 정한 기준과 요건에 적합하지 않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유신의 기준'이었다. 그 기준 어겼다고 생사람 잡아다 죄 뒤집어 씌워 8명이나 죽인 게 인혁당재건위 사건이었다. 긴급조치 1·4·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만도 1000명이 넘었다.

대학졸업­교사­학원강사 경력의 임구호 씨는 1969년의 3선 개헌 반대운동을 한 전력 때문에 1974년 인혁당재건위 관련자로 엮여 들어갔다. 징역 15년을 선고 받고 7년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임 씨는 당초 잡혀 들어갔을 때, 중앙정보부 조사에서도 인혁당이란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검찰에 가서야 처음 들었다.

그는 서울 남산의 정보부에서 매일 길이 90㎝되는 각목으로 얻어맞으면서 척추 꼬리뼈가 부러지면서, 시키는 대로 인혁당 관련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만들어 주었다. 동물농장에서 '인혁당 만들기'를 했다. 그는 현재 그 후유증으로 5급 장애자가 되어 병원을 들락거린다. 사형선고까지 받은 이철 씨도 인혁당이 뭔지도 몰랐다고 했다. 이 나라의 70년대는 그렇게 박정희 씨의 장기집권 목표 하나 때문에 피 맺히고 한과 눈물이 질펀하게 깔리던 시절이었다.

특히 인혁당재건위 희생자 유족들의 한과 눈물은 요즘에야 조금씩 알려지지만 처참하기가 비할 바 없었다. "목욕탕 간다고 나간 남편이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간첩이 되어 TV에 나왔다"고도 했다. 남편에게 일생을 걸던 곱던 아낙이 남편을 빼앗긴 뒤 이제 한 세대가 지나 쭈글쭈글한 노파가 되었다.

한 희생자의 부인인 A 씨는 악에 받쳤던 때를 회상한다. "남편이 사형 당한 후 신문에 나는 박정희 사진을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어서 뱉곤 했다"고 했다. 남편 산소에 매주 꽃을 들고 찾아갔다가 발길을 돌릴 때마다 "살인마 박정희 천벌을 받으라"고 외쳤다고 했다. 박정희 씨가 피격된 1979년까지 계속 그랬다고 했다.

다른 희생자의 부인 B 씨는 남편에 대한 조사를 받던 중 기관원이 주는 물을 마셨다가 흥분되면서 온몸이 꼬이는 참혹한 경험을 했다. 그때 '남편은 간첩'이라는 진술서를 쓰고, 죄책감으로 아이들과 극약을 먹으려 했으나 친정어머니에게 들켰다. 본인과 아이들은 죽음을 면했지만 친정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한 달 만에 눈을 감았다.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 다른 희생자의 부인 C 씨의 눈물겨운 이야기. 저녁때가 되어도 아들이 집에 오지 않았다. 동네 놀이터에 가봤더니 동네 아이들이 아들의 목에 새끼줄을 매고 '총살놀이'를 하고 있었다. "빨갱이 자식"이라 놀리고 있었으나 놀이터의 몇몇 어른들은 보고만 있었다. "저 아이와 함께 놀면 너희들도 잡혀 간다"는 소리도 들렸다. 경찰관 시험에 합격했으나 합격 취소 통지를 받은 친척도 있고, 친척들 여권도 내 주지 않았다.

진술 내용과는 정반대되게 조서가 조작돼 있기도 했고, 심지어 희생자들의 유언도 교수형 입회 교도관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만들어져 있었다. 진실을 보도해 달라고 그토록 발이 닳게 언론사에 쫓아 다녔으나, 진실 보도는커녕 억장 무너지는 기사도 나왔다. <대법원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심혈을 기울여 심리하고 선고한 것이므로 더 이상 불복할 여지가 없다.> (교수형 다음날 인) 1975년 4월10일자 어떤 신문의 사설이었다.

대법원 판사 D 씨의 기절할 이야기도 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판결이 나온 것은 1975년 4월8일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D 씨는 자기도 서명한 것으로 되어있는 그 때의 판결문을 본적이 없다. 2002년 12월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발표가 있고 나서야 그 판결문을 보았다고 실토했다는 증언이 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그런 사건이었다. 박정희 씨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그렇게 이끌고 갔다.

독재자였다는 평판 때문에 잊혀져가던 박정희 씨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일보 때문이었다. <한겨레 21>의 보도에 따르면 10ㆍ26이후 13년간 박정희 씨의 이름을 올리지 않던 조선일보가 김영삼 씨의 대통령 취임 후부터 집중적으로 박정희 씨를 찬양하기 시작한다. 10ㆍ26이후 2009년 10월까지 실린 박정희 기사 3459건 중 93.6%인 3231건이 김영삼 씨 취임 이후 보도됐다고 했다. 인기가 바닥인 김영삼 씨의 '무능'과 대비되는 '강력한 리더십의 유능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억의 형태로 기사가 등장했다고 <한겨레 21>은 보도했다.

1995년 3월부터는 '가장 훌륭한 정치지도자는 누구입니까'를 묻는 여론조사를 시작했다. '1위 박정희'일 개연성이 많은 시점이었다. 집중적인 찬양보도가 줄기차게 계속되다가 1997년 10월부터 3년 동안 연재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박정희 부활'의 결정판이 된다. 박정희 씨는 생전에 기자들을 만났을 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한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지만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한 것을 역사는 제대로 평가해 줄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가 느껴지는 말이다. 지난 10일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도 박근혜 후보는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는 말 속에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던 아버지의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의 연재기사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박정희 씨는 부활됐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과오도 덮어지는 양상을 보였고, 심지어 "어느 누가 '박통(박정희대통령)'의 허물을 말 할 수 있느냐" "누가 박통에게 침을 뱉을 수 있느냐"는 눈 부라림까지 느껴지는 상태가 되었다. 박정희 씨는 그렇게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일보가 그렇게 만들었다. 더구나 역대 정권을 살펴볼 때 여건도 좋았다.

전두환 씨의 광주학살이 너무 잔인하고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박정희 씨의 혹독한 인권탄압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박정희 씨에 대해서는 정색을 하고 역사를 바로 잡는 평가가 시도되지 못한 측면까지 있다. 김영삼 정부는 박정희 씨의 조카사위인 김종필 씨와 3당 합당으로 손을 잡고 출발한 정권이었다.

김대중 씨는 김종필 씨와 연합한 소수정권이면서, 오히려 '용서'를 내세워 박정희 기념관까지 짓도록 지원해 주었다. 노무현 씨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데다 '박근혜와의 대연정'까지 생각하던 정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해봐야 할 때다. 겸손한 마음으로 냉정한 눈으로 평가하고 정리해야 할 때다. 역사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 특히 이번에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계기로 그런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다.

보리고개를 없애고 경부고속도로와 중화학공업 등의 업적을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집권 18년 동안 늘어난 1인당 극민소득이 1600달러에 불과하고, 대기업 수출 밀어주기의 그늘에서 혹독한 저임금으로 고통 받던 근로자들의 희생을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역대 대통령 중 IMF 때를 빼고는, 소득에서 박정희 대통령 때보다 못한 대통령이 하나도 없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공(功)과 과(過)를 있는 대로 늘어놓고 각각 다른 서랍에 집어넣으면서, 과대 포장된 것도 포장 벗겨 내용을 확인 할 필요가 있다. 공정하고 준엄한 평가가 필요한 때다. 그는 과연 사심없이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만 일 했는가. 근대화와 산업화만을 위해 몸을 던졌는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호통 칠만한 삶을 살았는가.

부산일보와 정수장학회와 영남대학교를 개인 소유로 돌려놓은 것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유신반대 데모한다고 서울문리대 해체한 것도,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가 1000명 넘도록 인권을 탄압한 것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일도, 근대화나 산업화의 과정도 아니었다.

허나 그런 것 다 양해한다 치더라도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통해 드러난 참혹한 사법 살인사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숨이 막힌다. 참을 수가 없다. 절망한다. 그 무덤에는 침을 뱉어야 한다.

 

2012.9.18 / 프레시안 / 오홍근 /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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