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 Culture/세상 이야기

9.11 10년

by Wood-Stock 2011. 9. 21.

 

프레시안과 참여연대는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마련했다.

지난 5일 시작된 이번 강좌는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에서 5회에 걸쳐 열린다.

 

 

 

[9.11 기획 강좌]<1> 김민웅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

"테러와의 전쟁, '美 헤게모니' 지키기의 마지막 안간힘"

 

9.11의 역사적 기원과 테러와의 전쟁 10년

한국 언론에 국제뉴스가 1면에 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다 보니 국제적인 문제가 우리의 현실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얽혀 돌아가는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

100년 전 동아시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던 당시와 비교해 보면, 정보의 양은 많아졌을지 몰라도 이해력은 오히려 후퇴한 측면이 있다.

김구 선생이나 여운형 선생은 조선의 운명을 사고할 때 '상해는? 모스크바는? 동경은?' 이런 변수들을 고민하면서 세계적인 네트워크가 머릿속에서 작동했다. 그런 고민을 해야 조선의 정세를 풀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평양에서는? 워싱턴은? 북경에서는?' 이런 고민을 별로 안 한다. 정보 공개 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몇 년 뒤에 알려주는 정보만을 가지고 뒷북이나 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9.11 테러는 왜 터졌고, 그 후 10년 동안의 정세는 어떠했는지를 정리하지 못하면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정체를 알기 어렵다. 9.11 이후 미국이 밀어붙인 '테러와의 전쟁'은 우리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는 게 어려웠던 것도 9.11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군사력의 지배에서 자본의 직접 지배로

좀 긴 시선으로 9.11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세계적 패권의 상층부에는 미국과 소련이 있었다. 세계대전 당시 두 나라는 연합군을 형성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그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할 이유가 없어지면서 각기 가진 체제적 본질상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

1945~48년 한국은 미군정이 지배하고 있었다. 미국은 점령체제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질서를 한국에 만들었다. 일본 식민지 체제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복권시키고, 그걸 기반으로 미국이 원하는 질서를 만들었다. 거기에 치열하게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좌파들은 제거했다. 파시스트의 정치적 복원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한국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일본,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이 전쟁 후에 제거됐다. 이런 나라들에서 좌파가 집권하면 미국에 불리하니까 좌파를 제거하고 파시스트들을 다시 세운 것이다. 일본에서는 우파들을 결집시켜 자민당을 만들었다. 이처럼 냉전 체제는 파시스트 세력을 복구시켜 미국과 결합해 소련과 대치하는 체제였다. 이 시기 미국의 영향권에 있던 제3세계의 정권은 대부분 파시스트 군사정권이었다.

또한 2차 대전에 참전해 대공황을 극복했던 미국에 있어 전후의 평화는 미국 자본주의 체제에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평화의 시기에도 전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냉전체제다.

그런데 1980년대 말 냉전이 무너지면서 그러한 질서에 의지하는 방식이 의미가 없어졌다. 제3세계에서 군사정권 체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내부의 심각한 반발과 반미운동의 성장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또한 군사력을 앞세워 자본주의의 패권을 유지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게 됐다. 따라서 냉전이 끝나면서는 자본이 직접 세계를 통치하는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다. 노동은 통제하고 자본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면서 자본이 직접 세계를 통치하는 시스템이다.

한국이 걸어온 길도 정확히 그 추세와 일치한다. 냉전 시기였던 박정희-전두환 시절은 군사력이 중심이 되던 때였다. 노태우 시절은 군사력과 자본의 힘이 균형을 이뤘고, 김영삼 정부 시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자본시장을 개방함으로써 한국도 자본의 통치 시스템으로 들어갔다. 그 때문에 IMF 구제금융을 겪었고, 김대중 정부 시절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마침내 '권력이 자본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했다. 이명박 정부는? 자본 자체가 권력이 된 것이다.

냉전이 끝나면서 신자유주의는 복음이라고 선전됐다. 미국의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얘기하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로 오기 위한 변증법적 몸부림의 과정이었고,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역사를 꿈꿀 필요가 없다고 선전했다.

그렇게 해서 자본이 중심이 되는 시스템이 돌아가게 되었으나, 결국 도처에서 문제가 생겨났다. 중남미 국가들의 금융 위기가 잇달았고, 1997년에는 동아시아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투기 자본이 활개를 치고, 과잉생산이 구조화되면서 문제가 터진 것이다. 빚으로 쌓아올린 부채경제의 파산이었다.

한편으로 사람들이 이런 시스템의 문제를 알기 시작했다. 1999년 미국 시애틀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 회의를 열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시위가 일어났다. 자본의 통치가 부를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더 가난해지고 경제는 망가진다는 걸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 2003년 5월 1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항공모함 애이브라험 링컨호에서 이라크 전쟁 종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 진짜 의도한 것은?

그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의 지배자들은 세계자본주의의 패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다시 주먹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다. 10여 년간 뒷방에서 쉬고 있던 조폭들이 조지 부시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됐다.

네오콘들의 핵심 세력은 베트남전쟁 당시 정책 결정자와 이론가들이었다. 베트남전에 대해서는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이 실패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네오콘들은 '우리가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본다. 세계는 갈등과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없는데, 그걸 위해서는 어느 한 나라가 중심에서 군사적 헤게모니를 강하게 확보해야 한다고 본다.

그 와중에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이 통합되고 유로화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이 탄생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그리고 중국이 부상했다.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이 많아지고, 체제의 비밀을 다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단숨에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길은 에너지원 장악이다. 독수리(미국)가 날개를 펴서 한 쪽 날개로는 유럽을, 한쪽으로는 중국을 압도하고, 발톱으로는 중동의 원유를 장악하면 유럽과 중국의 성장을 일정하게 저지할 수 있다. 프랑스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던 것은 그 나라가 정의로워서가 아니다. 미국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다.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란 것은 미국의 바로 그러한 전략에 따라 진행된 것이다. 9.11 테러 사건 자체가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계기가 됐던 것인지는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확실한 것은, 9.11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과 네오콘의 전략은 미국 헤게모니의 동요를 차단하고 유럽·중국의 성장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 행동의 원칙은 정신이나 자본의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군사력을 확실히 장악하는 것이었다.

9.11 이후 미국은 안보국가(Security State) 시스템으로 전환됐다. 9.11이 미국인들에게 준 엄청난 충격은 2차 대전 후 미국에서 불었던 매카시즘 열풍보다 더 강력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줬다.

매카시즘은 한 마디로 냉전 체제가 들어서면서 미국 자본주의 체제와 그 대외정책에 반기를 들 좌파를 제거한 사건이다. 그러나 9.11 이후에는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졌다. 미국의 시민적 자유가 축소되고, 안보를 위해 민주주의가 축소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의회의 승인 없이 대통령과 소수의 정책결정자들이 전쟁 개시를 결정해 전 인류의 운명을 쥐고 흔들었다. 비판을 봉쇄하고 표현의 자유를 막음으로써 언론들은 숨을 죽였다.

네오콘들은 그렇게 해서 이라크를 침공했는데, 사람들은 이라크 다음엔 동아시아의 북한을 손 볼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자 북한은 핵과 미사일 전략을 더욱 강화하는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이라크 전장에서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력했기 때문이다. 이라크인들의 치열한 저항이 역설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의 평화를 가져다줬다고 할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도 생각보다 어려웠다. 미군 병사들은 전장 투입 주기가 길어지면서 지쳐갔고, 전쟁의 트라우마를 가지게 됐다.

또한 사람들은 전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됐다. 결국 미국은 전 세계에서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다고 큰 소리쳤던 '두 개의 전선전략'(Two Fronts Strategy)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제국의 군대는 하나의 지점에만 집중되어야 했다. 그러나 국가적 부담은 덜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해졌다.

그 정치적인 결과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었고, 체제적 부담은 2008년 금융위기로 드러났다. 그러나 오바마가 이 문제를 한 번에 풀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오바마가 급진적인 선택을 하기가 어려운 시스템이다. 그래서 오바마 개인으로는 정치적으로 희생당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미국의 정치 현실을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한반도, 미국의 양대 지배 전략이 중첩된 곳

동북아시아와 한반도로 시각을 좁혀 보자. 앞서 설명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반도에는 미국이 요구하는 전쟁 시스템이 구축됐다. 6.15 공동선언과 2007년 10.4 남북 정상선언 같은 것들은 그 시스템을 돌파하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부시 정부는 한미 FTA를 통해 한국 내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하는 등 한반도를 그냥 놔두려 하지 않았다.

한반도는 미국의 네오콘적인 군사 시스템과 미국 자본의 질서가 지배하는 방식이 중첩되는 곳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에 대한 문제 제기나 저항의 강도는 상대적으로 낮다. 유럽처럼 진보적 사회운동의 결과로 형성된 높은 사회의식 속에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힘이 약하다.

한국은 세계 1~2위를 다투는 미국의 중요한 무기 시장이다.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게 안 되는 이유를 미국의 군수산업적 이해와 관련해서 보면 당연하다. 평화체제를 만드는 순간 미국은 최대의 무기 시장을 잃게 된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 자본의 이익과 군사적 이익이 중첩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남북관계도 안 되고, 우리의 살림살이도 거덜나는 것이다. 대학 등록금도 화끈하게 낮출 수 없고, 제대로 된 복지정책을 펴는 것도 힘들다.

교육비, 병원비, 노후 보장 같은 걸 하려면 우리의 재정 구조가 평화적인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엄청난 군사 시스템을 돌리기 위해 돈이 쏟아 부어져서는 복지가 실현될 수 없다. 복지 문제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도 마찬가지다. 제주 해군기지 논란을 보면 환경, 평화, 복지의 문제가 같이 돌아간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시스템을 개혁하고 변화시키려면 미국의 패권 시스템을 정확히 이해하고 분석하고, 그것과 우리의 관계를 잘 짚어 내서, 그 문제를 풀어나갈 고리를 하나씩 풀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분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연평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는 작년에 충분히 경험했다.

한반도의 분단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군사적 장치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이걸 풀어내는 과정은 이 땅에 여러 가지로 중첩되어 있는 미국의 패권적 지배체제의 압박을 해결하는 것이며, 평화체제가 가져올 새로운 미래의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가 세계적 시민의 권리와 위상을 획득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이걸 도외시하는 일체의 정치와 운동, 그리고 교육과 학문은 이 시대 동아시아가 얽혀 있는 모순을 타파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황준호 기자(정리)

-------------------------------------------------------------------------------------------------------------------------------------------------------

 

[9.11 기획 강좌]<2> 김재명 성공회대 교수

"'테러와의 전쟁' 뒤에는 석유와 군산복합체가 있다"

 

2007년에 만들어진 <워 메이드 이지(War Made Easy)>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말 그대로 전쟁이 쉽게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 다큐는 미국이 2001년과 2003년 각각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 제작돼 미국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당했던 베트남 전쟁의 아픈 기억을 되살려냈다.

전쟁은 쉽게 만들어진다. 실제로 전쟁을 하는 사람은 미군들이지만, 전쟁을 기획하고 결정하는 건 미국의 대통령이다. 문제는 안 해도 될 전쟁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워 메이드 이지>는 그런 점을 짚었고 오늘 강의 역시 전쟁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가 주제다. 결국 나오는 답은 교과서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애족애국과 동떨어진, 본질적으로 비즈니스 성격에 해당하는 전쟁을 미국이 벌였다는 것이다.

테러는 '정치적 동기를 지닌 폭력'이라고 정의된다. 우리는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나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같이 국가가 아닌 조직이나 개인에 의한 정치적 폭력을 테러라고 본다. 하지만 테러의 개념을 실제로 들여다보면 국가 테러로 인한 희생자가가 국가가 아닌 조직이나 단체에 의한 테러 희생자보다 훨씬 많다. 대표적인 게 나치 독일 시절 아돌프 히틀러가 수백만 명의 유대인과 동성애자, 장애인 등 이른바 '열등인간'을 살해한 것이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들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지만, 이 용어 뒤에 숨은 국가적 폭력을 비즈니스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팍스 아메리카'는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소프트 파워' 이론으로 유명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인류가 경험인 세 가지 국제정치제체가 있다고 했다. 로마 시절의 세계제국제체, 중세시대 봉건체제, 무정부적 국제정치체제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무정부적 국제정치제체다. 각국이 자기 나라를 자신이 지킨다고 하면서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세계정부가 없기 때문에 강대국이 국제법을 어겨도 제재를 할 수 없다.

유엔(UN)은 세계정부가 되지 못하고 갈등조정 능력도 허약하다.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안도 없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오늘은 국제사회가 슬픈 날"이라고 한탄만 했을 뿐 국제법에 의해 미국을 전쟁범죄 혐의로 법정에 세우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이 됐다.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자본력,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연성(소프트) 파워로 세계를 지배했다. 미국은 로마제국 시절 누렸던 평화를 20세기로 가져와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미국이 세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끌어가는 세상을 꿈꿨다.

미국의 논리는 패권 체제가 안정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에 대항했던 카르타고 입장에서 보면 그 평화는 로마인들의 것이었고 자신들은 노예 처지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팍스 아메리카나는 미국의 평화이지 다른 국가의 평화는 아니다. 그래도 미국은 자비로운 패권국을 자처하며 가난한 나라를 도와주고 국제질서를 안정적으로 끌어간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배경에 기초해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전쟁을 벌였지만 비판적 지식인들은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미국이라고 지적한다. 이라크 바그다드로 진격하는 탱크에 이라크 국민들이 꽃을 던지리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미국에 대한 감정만 나빠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파 지식인들은 미국의 패권이 없다면 세계는 암흑시대로 돌아간다고 반박하고 있다.

미국의 숨어 있는 국방 예산

군사력을 보면, 9.11 이후 현재 미국은 총 63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많게는 한국처럼 몇만 명이 주둔하는 경우도 있다. 142만 명의 미군 중 25만 명에 해외에 있다.

미국의 국방비는 지난해 약 7000억 달러였다. 9.11 테러 전인 1999년에는 3000억 달러 수준이었다. 약 10년 동안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그럼 그 10년 동안 미국 경제가 두 배로 성장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미국의 정부 예산이 두 배로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현재 미국의 국가부채가 총 14조 달러다. 지난 10년간 엄청난 부채가 누적됐고 지금 미국의 경제가 힘든 것 역시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쓴 돈 탓이 크다.

미국의 국방비는 2001년부터 계속 상승곡선을 그렸고 오바마 행정부는 앞으로 국방비를 2010년 6980억 달러에서 2011년 6710억 달러, 2012년에는 6310억 달러로 줄이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국방예산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지출이 그 정도나마 줄어들게 된 것이다. .

게다가 미국에는 숨어있는 국방예산도 있다. 집계되는 국방예산은 국방부만 대상으로 할 뿐 미 중앙정보국(CIA) 등에 있는 대테러 전문가들이 쓰는 예산은 들어 있지 않다. 이 숨은 예산을 합치면 미국의 실제 국방관련 예산은 최소 3000억에서 7000억 달러까지 늘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 에너지부에서 핵무기 제조 및 관리에 편성한 200억 달러가 있다. 국무부는 '테러와의 전쟁' 대신에 '해외비상작전'으로 이름을 바꾼 분야에 85억 달러를, 전 세계 친미 국가들의 군 장성을 관리하는 비용인 대외군사기금(FMF)으로 55억 달러를 쓴다. 미 연방수사국(FBI)과 CIA도 테러 대비 및 해외비상작전 예산이 있다. 이런 돈들은 일반인들이 열람할 수도 없다. 미국의 국방예산이 줄었으니 앞으로 평화롭게 갈 것이라는 예상은 단면적인 얘기다.

또 미국의 국방부 예산은 기본예산과 해외비상작전 예산으로 갈려 있는데, 정부가 줄이겠다고 한 예산은 후자다. 5100억 달러에 달하는 기존 예산 중 3000억 달러는 미국 군수업체들이 받아간다. 그 돈은 줄어들지 않는다. 내년도 예산도 마찬가지다.

 

▲ 2004년 바그다드 남부 카나세 마을의 이라크인들이 폭격된 가옥의 폐허 속에서 쓸만한 물건들을 찾고 있다.

 


미국의 중동정책 목표, 민주주의 확산이 아니다

냉전 시절 미국의 대소련 전략은 한마디로 봉쇄였다. 세력이 커지는 걸 막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대외전략을 물으면 대답이 각각 다르다. 한마디로 말하기 힘든 것이다.

<미국의 거대전략>이라는 책을 쓴 로버트 아트 미 브랜다이스대 교수는 미국의 대외전략에 대해 △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 방어 △ 유라시아 지역에서 강대국들의 전쟁 방지 △ 값싼 석유의 안정적 공급 등을 들었다. 이 거대전략의 목표는 미국의 지구적 지배력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는 것이었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진단이었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중동지역을 책임졌던 앤서니 지니 미군 중부군 사령관은 전 세계 석유매장량의 62% 이상이 페르시아만 일대에 있는 만큼 미국과 연합국들은 걸프지역 석유자원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20세기 전반까지는 강대국들이 식민지를 소유해 자원을 가져갔지만 이제는 자유로운 접근, 즉 '효율지배'를 통해 주권은 허울로 남겨놓고 경제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이 추진한 중동정책의 본질은 민주주의의 확산이 아니었다. 그 나라가 독재국가인지 여부가 아니라 친미 국가인지 여부가 중요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의회도 없는 독재국가지만 미국이 사우디에 민주주의를 얘기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반면에 이란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않았는데 핵무기 사찰을 해야한다고 미국 지도자들은 열을 낸다.

이집트의 경우 주요 산유국도 아니고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은 독재자였지만 오바마 입장에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미국의 중동정책을 지지하느냐 여부가 문제였다. 무바라크는 미국의 친 이스라엘 일방주의와 석유 정책을 지지했다. 이것이 미국의 이중 잣대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중동 평화를 위협하는 나라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팔레스타인계 지식인으로 몇 년 전 사망한 에드워드 사이드 전 콜롬비아대 교수는 미국의 중동 전략을 '친미국가 만들기'라고 지적했다. 이라크의 경우 미국이 후세인을 제거한 이유는 단순히 석유 확보 차원이 아니라 후세인이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랍을 연구하는 미국의 전문가들이 미국의 중동정책을 잘못 이끌어간다는 비판도 있다. 일례가 버나드 루이스 미 프린스턴대 명예교수의 동심원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동심원의 맨 바깥에는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이란 등 정권과 국민 모두 미국을 싫어하는 국가가 있다. 그 안 동심원에는 요르단, 사우디, 이집트, 모로코 등 친미 성향의 정권이 있지만 국민들은 반미 성향인 국가가 있다.

마지막으로 동심원 가운데에는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같이 상대적으로 정권과 국민 모두 친미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그 중심부를 확장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단순 명쾌한 논리를 좋아하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성격과 맞아떨어졌다. 이에 따라 공격을 당한 게 후세인과 카다피다.

미국의 중동 민주화 논리는 모순이다.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다른 국가들을 바라보진 않았다. 미국은 우방인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가진 채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는 것을 감싸면서 이란을 친미 국가로 둘러싸 포위하고 있다. 중동의 반미 감정이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통 미국인들은 중동이 왜 자신들을 미워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과 석유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둘 다 독재자이고 각 나라에서 국민적 저항이 일고 있지만, 알아사드는 리비아의 독재자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로부터 정권을 이어받아 나라를 공포로 몰아넣은 2대 독재자다. 어찌 보면 카다피보다 더 악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두 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토(NATO)는 리비아 인들의 인권을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공습을 가했다. 시리아는 찬밥 신세다. 이 두 독재자의 운명을 가른 변수는 석유의 유무다. 석유 때문에 카다피는 운명이 고단해진 처지가 됐지만 알아사드는 그렇지 않다.

이익이 있으면 개입하고 없으면 안하는 게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이다. 리비아 석유가 리비아에서는 하루 16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한다. 시리아에서 나오는 석유는 이보다 훨씬 작다. 유럽국들은 리비아의 석유를 탐내지만 미국은 원래 리비아 석유는 별로 수입하지 않았다. 이번 리비아 사태에서 미국은 그다지 개입하지 않은 반면, 프랑스나 영국 등이 있는 나토군이 열심이었던 이유다.

미군은 전 세계 7개의 사령부를 두고 있는데, 이중 산유국이 많은 중동 지역을 관장하는 곳에 중부군 사령부다. 미국 경제의 숨통을 쥐고 있는 중동의 석유 확보를 군사적 물리력으로 뒷받침하는 게 중부군 사령부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영화를 보면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잘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블러드 오일'이라는 말도 존재한다. 20세기 들어 석유는 국제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도 미국이 일본의 중국 침공을 이유로 석유 공급을 끊으려고 하자 동남아 지역의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거치적거리던 미군을 공격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문제는 석유가 유한 자원이라는 점이다. 석유 지질학자인 킹 허버트에 따르면 미국은 1970년대 석유 생산량이 정점을 찍었다. 2011년에 세계가 '오일 피크(석유생산량 최정점)'을 찍었다는 말도 있다. 2011년이 정점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세계가 오일 피크 시대로 접어든 건 사실이다. 새로운 석유 매장층을 발견한 횟수도 1950년대 이후 계속 줄어왔다.

미국 내 석유 생산량이 정점을 찍고 내려온 반면 수입량은 점점 늘어났다. 미국과 유럽 국가의 석유 시추량은 10년 이내로 바닥이 날 수 있는 반면, 중동 지역은 앞으로 50~100년 동안 석유 생산이 가능하다. 그래서 중동 석유에 대한 실효적 지배가 필요하다는 말이 자꾸 나온다.

미국은 전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지만 석유 소비량은 21%에 달한다. 하루 석유 소비량이 2000만 배럴이다. 연간 70억 배럴인데 석유 매장량은 전 세계의 2.2%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석유 수입량 역시 전 세계의 21%에 달한다.

미국으로선 안정적인 석유 공급원을 찾는 게 최대 과제다. 부시 대통령 시절 이전에도 미국 대통령의 가장 큰 관심사는 석유 확보였다. 당시 캘리포니아주 등에서 대규모 정전이 일어나 에너지 문제가 대두되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반미 독재자로 부상해 원유 판매 대금을 달러가 아닌 유로로 받겠다고 나선 후세인의 이라크에게 대량살상무기라는 누명을 씌우고 점령한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라크에 석유가 없었다면 미국의 침공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반미 정권이 들어선 베네수엘라나 이란은 몇 년 전부터 미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석유의 무기화가 필요하다고 예기한다. 러시아나 중국도 석유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미국의 심기를 적잖게 건들이고 있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석유가격 상승 원인으로 신흥 경제국인 중국의 수요 증가를 꼽지만 본질은 석유의 수요와 공급 차원에서 경제 외적인 정치 위기가 대두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잘못될 경우 지구촌에 엄청난 석유파동이 닥칠 수 있다. 한국도 미국과 동맹으로 묶여 있는데 이에 따른 유탄을 맞지 않을지 걱정되는 부분이다.

또 하나의 미국 경제, 군수산업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밀어붙이는 까닭에 대해 미국의 군수업체와 석유회사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의 국방예산과 마찬가지로 무기생산 기업의 매출 역시 전쟁이 일어난 이후 배로 뛰었다. 일례로 록히드마틴이 올리는 매출은 한국의 국방예산보다 많다. 전 세계 100대 군수기업 중 미국 기업이 45개다.

미국의 무기 수출량도 엄청나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주요 재래식 무기 수출국을 보면 미국은 국제 시장에서 30%를 차지한다. 미국산 무기의 주요 수입국은 한국이 1위고 호주, UAE가 뒤를 잇는다. 파키스탄, 그리스같이 가난한 국가들도 미국의 무기는 엄청나게 들여온다. 중동국가의 국방비 비율은 국민총소득(GNP) 대비 6.8%에 달해 전 세계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높다. 친미 성향의 정권이 '오일 머니'로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여 중동을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으로 만들고 있다.

9.11 테러 이전에는 소련의 붕괴로 재고가 쌓여 경영이 엉망이었던 미국 군산복합체는 전쟁으로 호기를 맞았다. 군산복합체란 군부와 방위산업체의 상호의존체제를 일컫는 용어다. 군부와 민간기업, 정치가가 각각의 이익을 위해 유형 무형의 제휴를 유지하면서 때때로 언론까지 끼어들어 국방 지출의 증대를 도모하는 사회적 유착구조를 말한다.

군산복합체 체제에서 퇴역 장성이 군수기업에 입사해 시장을 개척하거나 정계에 로비를 해 새로운 군사 프로젝틀 진행하는 게 대표적인 예다.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부 장관이 물러난 건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재정 지출을 줄이려는 오바마 대통령의 심기를 건들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현재 리언 파네타 국방장관은 연방정부 예산회계를 맡던 인물이다.

'죽음을 파는 상인'들은 정부에 끝없는 로비를 벌인다. 록히드마틴이 개발하는 스텔스 전투기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오바마 대통령이 지원금을 줄이려고 하자 250명의 의원들이 서한을 보내 말혔다. 군수업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세력이 그만큼 많다는 걸 의미한다.

칼라일 그룹은 전현직 정부 고위층을 영입해 '안면 자본주의'를 실현한 대표적 예다.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 프랭크 칼루치 전 국방장관,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 등이 퇴임 후 이곳에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했다. 딕 체니 전 미국 부통령은 에너지기업 핼리버튼의 회장을 겸하면서 이라크 석유시설 복구 사업을 수의계약해 해마다 15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1800만 달러의 스톡옵션을 보유했다.

미국이 국방예산 중 기본예산은 감축하지 않은 탓에 군산복합체를 당장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을 평화 지향적으로 바꾸고 군수업계가 무기가 아닌 다른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함으로써 미국의 경제구조를 개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석유와 무기 산업을 뒤에 업은 미국의 패권주의적 대외정책의 희생자는 민초 뿐 아니라 일반 미군 병사들이다. 앞으로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미국이 계속 이러한 정책으로 반미 국가를 건들여 제3차 석유파동이 일어나고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계속해서 비판해야 하는 이유다.

/김봉규 기자(정리)

-------------------------------------------------------------------------------------------------------------------------------------------------------

 

[9.11 기획 강좌]<3>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위키리크스, 미국 정부 '막가파식' 전쟁몰이의 부메랑"

 

▲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26일 '새로운 수퍼파워 : 초국적 시민운동과 민주화 도미노'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9.11 이후 미국의 대처, 국제·국내법에 모두 위배"

9.11 이후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일성은 '이것은 전쟁행위'라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테러는 경찰 소관인 치안 문제였다. 그러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나 딕 체니 부통령 등 공화당 군사전략통들은 '미국을 지키는데 국제법이 방해가 돼서는 곤란하다'며 기존의 규범에 대한 예외주의를 정당화했다. 이 때문에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두 가지 논리적 문제가 생겨났다.

첫째, 국제법과의 충돌이다. 쌍둥이 빌딩에 대한 공격을 수행한 자들은 제복을 입은 군인이 아니었고 국가의 공인된 명령체계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는 정규전 세력도 아니었다. 따라서 비(非)국가 세력에 전쟁 선포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비국가 세력과의 '전쟁'은 전쟁의 기본 사항을 정한 유엔 헌장과도 배치되고 제네바협정에도 맞지 않는다.

일단 부시가 전쟁을 선포하긴 했는데 상대방을 과연 뭐라고 규정할 것이냐도 문제였다. 군인? 미국은 그렇게 하긴 싫었다. 상대방이 군인이라면 제네바협정에 따라 생포했을 때 전쟁포로로 인정하고 제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테러범? 그렇게 하기도 싫었다. 반인륜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국제경찰(인터폴)이 수사해야 하고 국제형사재판소(ICC)를 통해 처벌해야 한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적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는 개념이다.

둘째, 국내적으로 미국의 헌법 질서에 배치된다는 문제다. '적 전투원'으로 규정한 자들을 잡아서 미국으로 데려오면 미국 헌법에 의해 미국 법을 적용해 재판받아야 하고 변호사 선임권, 묵비권 인정, 고문받지 않을 권리, 3심제 적용 등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

이 때문에 미국 국외에 지어진 것이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다. 법률상으로 고문을 허용하는 다른 나라에 비밀 감옥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비밀 감옥의 존재와 수 등은 공식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랍권과 동유럽 등지에 여러 개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송도 '특별이송'이라고 매우 비밀스럽게 했다. 미국 인권단체가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사라진 수감자들'이라는 리스트가 있는데 이들이 비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일명 '강화된 심문기법'으로 이름붙여진 사실상의 고문 방안을 도입했다. 잠을 안 재우거나 종교적·인간적·성적 수치심을 주는 등 '스트레스를 주는 취조 방법'을 사용했고 물고문도 허용됐다. 또 아프간을 침공해 테러 용의자를 잡아들일 때 '저 사람이 탈레반이다'라는 증언만으로도 증거 효력을 인정해 체포할 수 있게 했다. 피의자는 증거의 효력을 다툴 권리도 박탈당했고 심문 기한도 '무기한'으로 정해졌다. 미국 헌법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국 시민의 권리도 제약받았다. 먼저 '애국자법'은 영장주의의 예외를 인정해 이주민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했고 비밀리에 가택수색을 할 수 있게 했다. 애국자법은 또 연방수사국(FBI)이 통신업체나 도서관 사서들에게서 영장 없이도 통신기록, 도서 열람기록 등을 요구할 수 있게 했다.

다음은 군사력 사용권한의 문제다. 미국 법에 따르면 전쟁 선포는 대통령이 아닌 의회의 권한이다. 의회의 전쟁 선포는 그 요건도 매우 까다롭다. 하지만 부시는 뭔가를 해야 했다. 그러니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비상시 군사력을 사용할 권한이 있다는 개념을 빌려 전쟁을 치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이런 방식이었다. 의회는 부시의 군사력 사용을 추인해줬고 이로써 전쟁을 시작하는 방식이 의회의 선전포고에서 대통령의 군사력 사용을 의회가 승인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라크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버락 오바마 등 일부는 반대했지만 의회는 부시의 군사력 사용을 조건부로 승인했다. 부시는 의회가 내건 조건도 지키지 않았지만 말이다.

시민운동은 어떻게 싸웠나

미국 내 반전운동은 9.11 테러 이후에는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2003년 이라크전 반대 운동은 거세게 일어났다. 이후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는 아부그레이브 수용소의 인권 실태가 <CBS> 방송에 의해 폭로된 것이나,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와 '매닝 메모'의 공개는 반전 운동에 동력을 공급했다.

2005년 공개된 이른바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는 영국 고위관리들이 2002년 7월 부시를 만난 후 작성한 것이다. 부시를 만난 영국 관리들은 "군사행동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부시는 군사행동을 통해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길 원하고 테러 연계와 대량살상무기(WMD)를 근거로 내걸고 싶어했다. 정보와 사실관계는 정책에 꿰맞춰지고 있었다"고 적었다.

2006년 <뉴욕타임스>에 공개된 '매닝 메모'는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의 외교보좌관 데이비드 매닝이 작성한 것으로 부시와 블레어의 대화를 담고 있다. 부시는 침공을 앞두고 이라크의 적대행위를 촉발할 몇 가지 방안을 블레어 총리에게 제시했는데, 유엔의 비행기처럼 위장 페인트칠을 한 미국 정찰기를 이용해 공격을 유도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라크에서 WMD가 발견되지 않자 미국은 후세인이 충분히 국제적인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는 '이해할 만한 실수'라고 설명했지만 이같은 메모들은 이라크전이 결코 '실수'가 아님을 보여줬다.

또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반전 운동의 계기가 됐다. 허리케인 때문에 9.11 당시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문제는 이것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재해였는데 주방위군이나 구급대원들이 이라크로 차출돼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는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에 대해 반대 운동을 펼친 미국 단체는 여러 부류로 나뉜다. 첫째, 전국적인 반전운동 단체다. '앤서'(Act Now to Stop War and End Racism : ANSWER)나 '낫인아워네임'(Not In Our Name) 같은 단체들이 대표적이다. '낫인아워네임'은 일종의 연대체였는데 '평화로운 내일을 위한 9.11 희생자 가족 모임'도 포함하고 있었다. 9.11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우리 이름을 앞세워 전쟁하지 말라'고 한 것은 미국에 큰 충격과 감동을 줬다.

둘째, 군인 및 피해자 가족들의 단체다. 일종의 당사자 운동인데,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반전 운동에서 예비역 단체의 역할이 크다. 이라크나 아프간에 파견됐다가 전사해 훈장까지 받은 병사의 유가족도 반전 운동에 나섰다. 셋째, 시민권 단체다. 이들은 주로 변론이나 소송 등을 통해 활동했다.

넷째, 국제적 반전운동 단체다. 특히 2003년 2월 15일의 국제 반전 공동행동은 전세계 800개 도시에서 3600만 명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같은해 5월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세계반전모임에서는 26개국 60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자카르타 평화 합의'를 열었고 2004년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부시 등 전범들에 대한 '국제민중재판'을 열기도 했다.

이같은 국제적인 반전 운동은 세계 정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전 운동을 통해 급격히 성장한 것이 세계사회포럼(WSF)이다. 2005년 브라질 WSF를 제안한 브라질의 노동자당(PT)는 나중에 급격히 성장해 룰라 대통령을 배출한다.

그러나 이슬람권의 상황은 사뭇 달랐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슬람권에서는 극단주의가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전쟁 전에는 이라크의 알카에다 세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전후 오히려 급성장했다. 이란의 경우도 테러와의 전쟁 전 개혁파가 다수였고 심지어 의회에서 개헌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이 일어나고 부시가 이란을 (이라크,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하자 개혁파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강경파의 입지가 넓어졌다.

법률적 대응

법률적인 방법에 의지한 미국 내의 반전 운동 사례들 중 주목할 만한 것 몇 가지만 살펴보겠다. 첫째, 헌법권리센터(CCR)가 시작한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이다. 일련의 소송이 2002년부터 2008년까지 6년 간 계속됐는데, 2004년 6월 미국 대법원이 관타나모 수감자라 해도 영장에 의하지 않은 구속은 불법이며 구속영장 발행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고 판결하면서 싱겁게 이기는 듯 했다.

그러나 미국이 국방부에 구속 여부를 심사하는 재심 위원회를 만들고 의회에서 '수감자처우법'을 통과시키면서, 관타나모 수감자는 자신의 구속을 국방부 소속 위원회에 다시 심사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학대로부터 법률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게 됐지만 영장이 무제한 청구와 무기한 구금 또한 법으로 보장됐다. '법률에 의하지 않고 구속하면 안 된다고? 그럼 법을 만들지 뭐' 하는 식이었던 거다.

CCR은 또 국방부의 특수군사위원회가 '적 전투원'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권을 갖는 것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아 위법하며 제네바협정에도 위반된다는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2006년 9월 이들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러자 의회는 또다시 '군사위원회법'을 만들어 이를 합법화했다. CCR은 이에 다시 군사위원회법의 위헌 여부를 다투는 소송을 냈고 미 대법원은 2008년 6월 위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유사한 많은 사건들이 현재 각급 법원에 계류돼 있다.

둘째, 역시 CCR이 이끈 것으로 부시 행정부 고위관료들을 '전쟁범죄자'로 처벌하기 위한 소송이었다. CCR은 럼즈펠드를 고문 등 수감자 학대 혐의로 고발했지만 미국 국내에서는 모두 기각됐다. 전범은 국적에 관계없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여러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3월 스페인 판사 한 명이 관심을 가지고 럼즈펠드를 조사할 용의를 밝혔지만 스페인 법무부의 만류로 좌절됐다.

셋째,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이 제기한 불법 사찰 및 도청에 대한 소송이다. ACLU는 2006년 12월 <뉴욕타임스>에 폭로된 미 국가안보국(NSA)의 도청사건에 문제를 제기했다. NSA가 영장 없이 미국 시민들의 전화를 도청한 이 사건에 대해 디트로이트 지방법원은 ACLU 측의 승소를 선언했으나 항소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혔다.

또 2007년 미 의회가 기존의 '외국정보사찰법'을 개정해 '미국보호법'을 만들고 해외와 통화하는 미국 시민의 전화에 대해서도 영장 없는 감청을 가능케 하자 ACLU는 이 법률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현재 진행 중이다.

넷째, 역시 ACLU가 제기한 '국가기밀특권'에 대한 도전이다. 2003년 7월 ACLU는 다른 인권단체들과 공동으로 테러혐의 수감자들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를 접수했으나 미국 정부는 거부했다. 그러자 ACLU는 2004년 6월 관련 자료의 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했고 같은해 9월 승소했다. 그러나 공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또 ACLU는 이른바 '특별이송'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CIA의 항공기 운항을 대신해 주는 일종의 용역업체 '제퍼슨 데이터플랜' 사(社)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진행중인 이 소송에서 ACLU는 해당 회사가 '특별이송'의 비인도적 실체를 알고도 영리를 위해 이를 돕는 조달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적 대응

대의민주주의적 수단에 호소한 사례도 있다. 첫째, 대통령 탄핵 운동이었다.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가 공개된 이후 2005년 결성된 '애프터 다우닝 스트리트'는 2007년과 2008년 각각 체니 부통령과 부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기 위해 1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민주당 데니스 쿠치니치 의원이 탄핵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도왔다.

둘째, 예산을 무기로 이라크 철군을 이끌어내기 위한 활동이었다. 1400개 반전단체의 연대체 '평화와 정의를 위한 연합체'(UFPJ)가 여론을 이끌었고 결국 이 문제를 의회로 가져왔다. 그러나 2005년 국방 예산을 빌미로 부시 행정부로부터 '철군 일정표'를 받아내려는 시도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2006년 중간선거 후 다수당이 된 민주당은 이라크 철군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방예산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이라크에서 철군을 시작하라고 부시 행정부를 압박했다. 그러나 2007년부터 철군을 시작할 것을 의무화한 '이라크책임법'은 부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부딪혔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미국의 '자업자득'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식 이후 발표한 최초의 4개 대통령령에서 관타나모 수용소를 1년 안에 폐기하고 고문을 중단하며 CIA의 '비밀 감옥'을 포함한 구금정책 수단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의회의 반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또 오바마는 고문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던 자신의 약속에 대해서도 말을 바꿨고 고문에 연루된 CIA 조사관들도 처벌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라크, 아프간 철군도 어떻게 될지 불확실한 상태다. 아프간에서는 탈레반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고 있지만 협상을 주도해온 부르하누딘 라바니 전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앞날을 알 수 없게 됐다. 또 오바마는 파키스탄 남부 파슈툰족 거주 지역까지 공습 지역을 늘렸는데, 미국이 파키스탄과 개전 선언을 한 게 아니니 이는 불법이다.

이런 면에서 위키리크스 사태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테러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사실상 (가능성이) 내재돼 있던 것이다. 테러를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헌법 질서와 시민권, 국제 규범 등에 대해 온갖 예외를 인정한 것이 부시의 논리였다.

이것이 시민권 진영이 전쟁에 대항하는 운동에도 온갖 수단이 동원될 수 있다고 믿게 했을 수 있다. 국가가 지정한 1급비밀을 대중이 모두 알 수 있도록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위키리크스는 테러와의 전쟁에 대응한 시민들의 자구적 대응과 시민 불복종 운동, 안보 민주화 운동의 아이콘이 됐다.
-------------------------------------------------------------------------------------------------------------------------------------------------------

 

[9.11 기획 강좌]<4>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 

"9.11의 시대, 월스트리트에서 종언을 고했다"

 


"9.11 테러, 미국이라는 비행기를 떨어트렸다"

9.11은 미국 역사를 그 전후로 나눌 만큼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뉴욕에서 직접 목격한 나도 한동안 비행기만 보면 그 앞에 불타는 빌딩이 서 있는 게 보이는 등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같은 증상에 시달렸다. 특히 9.11은 미국 시민들로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 대학에서 정치학 강사로 일할 때였는데, 학생들에게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 <비상계엄>을 언급하면서 '이런 일이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하면 다들 웃었다. 말이 안 된다는 게 그 당시의 정서였다.

그 시기에 9.11 테러를 보면서 장 폴 사르트르가 적군(赤軍)파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했던 평인 '가장 견고한 체제에 대한 가장 무모한 도전'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러시아 혁명을 이끈 레닌도 자신의 형을 비롯한 (나로드니키파) 테러리스트들이 차르 암살을 시도하다가 좌절된 것을 보면서 '그들이 증오한 체제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줬다'고 비판했다.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도 민주주의를 가져온 게 아니라 전두환 정권이라는 더 견고한 체제로 이어졌다. 이처럼 테러리즘은 무모한 도전이고 오히려 체제를 더 강화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 당시 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생각이 들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뭘 의도했든 간에 미국은 견고하지 않은 체제였다는 것이다. 9.11 테러는 미국이라는 비행기를 경착륙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특히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은 좌파적 관점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의 관점에서 봐도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국은 당시 '가장 견고한 체제'처럼 보였지만 이미 건국 당시부터 이같은 추락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물론 미국 체제의 발생은 놀라운 민주주의적 혁명이었고 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미국의 건국은 유럽의 잔혹한 봉건성을 뚫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추구한 위대했던 실험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건국을 찬양했던 지성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은 미국이 또한 '자기 혼자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시장'이 실현된 최초의 사례였다는 것이다.

한 사람씩 돈을 모아서 합작회사 형태로 모험을 시작한 것이 미국의 초기형태다. 배[메이플라워호 : 편집자]도 그렇게 띄웠고 서부 식민시(市)도 그렇게 세워졌다. 그야말로 투기적 '카지노 자본주의'의 원형으로 세워진 나라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출범 자체에 시장만능주의의 뿌리가 있다. 사회에 뿌리내린 연대의 정신이 아니라 자수성가, 독립, 자기 노동, 이런 정신이 미국의 정신이다. 심지어 미국에선 노숙자들조차 그냥 돈을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은행에서 돈 찾아 나오는 사람들한테 은행 문을 열어주고 손을 내민다. 노동해야 돈을 번다는 관념이 뿌리깊은 거다.

칼 폴라니가 '자기조정적 시장'이라고 표현한 것은 결국 시장이 독립적으로 자기 혼자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시장은 곧 스스로 괴물이 되어 가고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될 잠재성이 있다. 칼 맑스의 '자본은 스스로를 파괴한다'는 예언이 21세기 들어 다시 조망을 받는 것이나 누리엘 루비니 교수의 비관적 전망이 호응을 얻는 것은 그래서다.

"부시 행정부가 신자유주의? 지나치게 후한 평가"

그러나 폴라니에 따르면 사회는 시장이 혼자 이렇게 괴물처럼 움직이도록 놔두지 않고 필연적으로 보호운동을 펼친다. 균형을 잡기 위한 사회의 거대한 시계추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는 시장만능주의의 힘이 너무 강하다 보니 빌 클린턴 전 대통령 같은 진보성향의 인사들조차 시장의 '자기 조절적' 힘을 너무 믿었다. 또는 믿는 사람들에게 힘으로 밀렸거나. (나라는 다르지만) 노무현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빌 클린턴은 사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 약자에 대한 공감도 있고 존 F. 케네디처럼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집권하자 재정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미국 자본의 건전성이 사라질 것이라는 연방준비제도(Fed) 등의 우려에 부딪혔다. 대통령도 Fed는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담대한 의제들을 다음으로, 다음으로 미루다 보니 한 것이라고는 고작 약간의 증세가 전부였다. 그것도 의회에서 피 흘려 가며 싸워서 한 거다. 나머지는 공화당과 적당히 타협했고 결국 클린턴 지지층은 좌절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금융위기의 대재앙의 씨앗도 클린턴 정부 당시 뿌려졌다. 클린턴은 약자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지만 Fed 등의 반대로 케인스적인 정책은 할 수 없었다. 그럼 남은 건? 부자증세? 더더욱 안 된다. 그래서 한 게 서브프라임 모기지다. 이는 보수적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위험한 것이지만, 신용등급이 낮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도 대출을 해 줘서 저소득층에 집 살 기회를 주고 경기도 부양하려는 클린턴의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지 W. 부시도 9.11 이후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계속했다. 그나마 클린턴 때는 눈치라도 봤지만 부시는 그런 것도 없었다. 온갖 규제를 다 풀었다. '정글자본주의'라는 게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면 부시 행정부를 보면 된다. 부시의 경제정책은 흡사 이명박 정부와도 유사하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부시 행정부 정책을 신자유주의라고 하는데 이는 너무 우아하고 세련되게 평가하는 것이다. 시장만능주의, 연고자본주의, 천민자본주의, 강압적 패권주의 등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전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괴물이 탄생했다.

원래 미국은 한국과는 달리 (권력자들도) 약간의 눈치는 보는 나라이고 특히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은 한국보다 훨씬 많이 존재하는 나라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 때는 이런 원칙이 무너진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들이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9.11로 인한 경기침체를 만회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다 풀고 서브프라임을 확대하는 등 위험한 '폭탄 돌리기'가 시작됐다.

부시의 안보정책도 무모한 맹동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군사력으로 겁을 주면 공포를 느낀 상대방이 알아서 미국에 고개를 숙일 것이라는 식이었다. 이는 불안하고 허약한 마초들의 심리를 보여주는 신경발작이었고 빈 라덴을 파괴하기는커녕 스스로를 망치는 어리석은 짓이 됐다. 원래 마초들의 말로라는 게 그렇다. (웃음)

이런 이유들로 부시는 미국 역사학자들이 선정한 '최악의 대통령' 명단에서 꼴찌 가까운 순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단지 진보적인 사람들만이 부시를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철학적 인물 오바마, '다크 나이트'를 자처하다"

그래서 버락 오바마의 당선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선될 때부터 오바마는 진보적인 요구만을 반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스스로 중도주의자라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오바마가 이라크전에 반대한 것은 진보라서가 아니다. 보수라도 이라크전은 말린다. 왜냐? 그렇지 않아도 쇠퇴하던 미국의 국력이 이라크전을 거치며 급전직하했기 때문이다.

안보정책 측면을 보면 오바마는 스스로 전지구적 제국의 질서와 정의를 지키는 수호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게 얼마나 실현 가능하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말이다. 그런 오바마의 꿈이 잘 나타난 것이 그의 2009년 노벨평화상 수락 연설이다. 당시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평화상을 받으러 와서 굉장히 강경한, 전쟁에 대한 연설을 했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평화상 연설에 녹아 있는 테제는 3가지다. 첫째, '악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설득할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절멸시켜야할 대상인 '악'(the evil)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간디의 평화운동은 위대하지만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이는 자신에게 간디에게 가졌던 것 같은 기대를 갖지 말라는 뜻이다. 셋째, 이라크전은 '정의롭지 않은' 전쟁이라고 말했지만 아프간전에 대해서는 계속 '필요한 전쟁'이라고 암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악'에 대한 오바마의 대처방식은 (부시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탈법 또는 비(非)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영화 <다크나이트>를 보면 배트맨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악역을 자처한다. 지금 오바마의 입장이 그렇다. 거기에 오바마의 비극과 고뇌가 있다고 본다. 노벨평화상 연설을 좀 거칠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나도 간디처럼 멋있게 살고 싶지만 이 자리는 그럴 수 없는 자리다'는 얘기다.

실제로 오바마는 부시조차 감히 하지 못했던 암살 작전을 대놓고 펴고 있다. 빈 라덴 뿐 아니라 미국 시민권자인 안와르 알올라키도 죽였다. 미국의 아프간 전략도 바뀌고 있다. 미군 인명 피해를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무인정찰기를 통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대통령 권한도 더 제왕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오바마는 파키스탄에 대한 무인정찰기 공격에 대해 '미군 병사가 적의에 노출되지 않았으므로' 이는 '전쟁'이 아니고 따라서 의회의 승인 없이도 이같은 군사행동을 계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 편집자]

심지어 오바마는 민권단체들 앞에서 '법리적으로 예방적 구금을 검토해 봐야 하지 않겠나'하고 말해 참석자들을 까무라칠 만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핵폭탄 설계도도 내려받는 시대인 21세기의 제국 운영은 오바마 같은 철학적 인물조차 '예방적 구금'을 검토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미 미국의 힘은 쇠퇴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건국 정신 때문에 '청년기의 나라'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청년기에서 노년기로 접어드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의 수장이 된 오바마는 패권을 안정시켜야 하지만 힘은 없다. 그의 고민과 딜레마는 여기서 생긴다.

"오바마가 상징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은 깨졌다"

그럼 (부시 행정부 당시) 오바마는 왜 이라크전에 반대했었나? 미국은 제국이긴 하지만 영국과는 달리 식민지가 없는 나라다. 결코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오바마가 이라크전을 반대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상식'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바마가 진보주의자라는 착시현상에 빠졌다. 미국의 진보‧중도‧자유주의자들은 오바마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을 되살리려 했다. [부시 같은 비상식적 체제를 벗어나 정상국가 미국을 회복하려 했다는 뜻 : 편집자] 문제는 지금은 그게 가능하지 않은 세상이라는데 있다. 오바마를 지지하던 자들은 환상을 본 것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안철수 현상도 부분적으로는 환상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될 때 사람들이 '그래도 잘 했잖아, 그래도 능력은 있잖아' 하는 반응이었지만 그런 기대가 깨지면서 나타난 것이 안철수 현상이고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다. 안철수 현상은 '건강한 한국을 회복하겠다'는 일종의 '코리언 드림'이 반영된 것이다. 안철수는 '진보'가 아니라 '상식'의 아이콘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오바마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하지만 [역시 오바마와 마찬가지로] 잘 될까?

오바마 자신은 억울할 수 있다. 자신은 그런 환상을 심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누가 심어줬든 간에 미국인들이 가졌던 환상은 깨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타난 것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말한 것처럼 이 시위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넘어서 새로운 체제로 가는 이행의 시작이다. 오바마를 통해 '건강한 자본주의'를 회복하려고 했지만 그게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미국인들이 '이행'을 시작한 것이다.

"월스트리트 시위는 '포스트 9.11의 시대'에 종언을 고한다"

그런 면에서 월스트리트 시위는 지속 가능하다. 시위 자체는 끝나더라도 그 의미는 5년, 10년도 더 이어질 것이다. 이는 오바마를 탄생시켰던 '무브온' 등 시민정치와는 궤가 완전히 다르다. 무브온은 아메리칸 드림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기반하고 있다. 건강한 진보의 시대를 꿈꿨고 클린턴을 탄핵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리고 오바마를 통해 건전한 자본주의를 실현하려 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 점령은 무브온이 주도한 것이 아니다. 한국으로 치자면 참여연대나 경실련 같은 온건 개혁 시민단체가 주도한 게 아니라 더 좌파적인 세력이 주도한 것이다. 미국에서 좌파들의 운동이 강력하게 힘을 발휘할 정도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김진숙 현상과도 비슷하다. 김진숙은 민주노총의 전투적 활동가다. 옛날 같으면 '희망버스'에 탈 사람들은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에서 온 사람들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진보-보수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도 희망버스에 탄다. 김진숙 현상은 수십 년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와도 연관돼 있다. 그런 면에서 이는 월스트리트 시위와 무관한 사건이 아니다.

월스트리트 시위대가 요구한 것은 정의에 기초한 체제, 정의로운 것이 이윤을 버는 체제, 그러면서도 소련이나 북한 같은 괴물들 말고 자유로운 상상력과 시장 속에서의 가장 자유로운 교환이 존재하는 체제, 그러면서도 가장 약한 자와 가난한 자를 위한 체제다.

이는 오바마를 넘어서는 체제다. 거대한 지구적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진정 안타까운 지점이 여기다. 예를 들어 지금 Fed를 맡고 있는 벤 버냉키는 원래 경제학자로 대공황 시기 루스벨트 정부의 위기극복 정책에 대한 세계 최고의 전문가다. 그런 사람이니 믿을 만할까? 천만에. 대공황과 지금의 경제위기는 문법이 전혀 다르다. '뉴딜 정책'을 추진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미국의 헤게모니 상승기에 대통령직을 맡았다. 지금은 퇴조기다. 루즈벨트를 100년 연구해 봐야 소용없다. 그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

어쨌든 이행은 시작됐다. 빈 라덴의 암살로 한 시대가 끝났다. 9.11의 시대다.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 자본주의 시스템의 새로운 진화의 시대가 시작된게 아닌가 한다. 케인스가 언급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liberal socialism) 등 새로운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곽재훈 기자(정리)

----------------------------------------------------------------------------------------------------------------------------------

 

[9.11 기획 강좌]<5>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 - "이명박식 '원교근공'은 틀렸다"

 

프레시안과 참여연대는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마련했다.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에서 5회에 걸쳐 열린 강연은 17일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의 'G2 시대의 세계질서와 한반도'라는 주제로 열린 강연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날 강연에서 이남주 교수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추락과 중국의 부상으로 동북아 안보 상황이 변화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한국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요약·재구성했다. <편집자>


▲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G2 시대를 논하기에 앞서 과거 중국의 위상에서부터 출발해보자. 근대화 이전 시기 세계 차원에서 힘의 분포를 보면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인구의 규모와 경제력이었다. 인구 규모를 보면 중국이 압도적 1위였다. 당시 경제력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경제사가들이 합의한 바로는 전 세계 경제의 약 3분의 1의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유럽이 산업화를 하면서 1952년 기준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전 세계 5.8% 수준으로 하락했고 중국의 쇠퇴와 맞물려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확대됐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함에 따라 미국은 단일 패권의 시대를 맞았다.

이를 보여주는 지표가 군사력이다. 특히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미국의 군사력 우위가 강해졌다. 미국이 전 세계 군비의 45%(2008년 기준)를 지출했다. 미국은 2000년대 들어 약 1700억 달러의 전비를 들여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수행했는데 이 전쟁이 'G2'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중국의 위상이 확대되고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한 중요한 사건이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국이 성장하면서 미국을 추격하고 있지만 한동안 미국을 앞서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지구적 차원에서 G2를 얘기하려면 빨라도 앞으로 15~20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북아 지역에서 G2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미국에 대한 중국의 추격이 가장 빨리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원자바오 중국 총리 ⓒAP=연합뉴스

중국이 대외적 팽장을 할 수 없는 까닭

중국의 성장을 보여주는 몇 가지 지표를 보자. 달러로 환산한 GDP로 보면 2010년에 일본을 추월했다. 미국과 비교해도 중국의 성장률은 높은 수준이다. 1990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경제가 61% 성장하는 사이 중국은 536% 성장했다. 골드만삭스는 2000년대 초반 브릭스(신흥 경제국인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보고서에서 중국이 미국을 2041년경 추월할 것이라 예측했지만 2000년대 후반기가 되자 2027년으로 시기를 앞당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군비 증강률을 봐도 미국은 9.11 테러 이전 GDP 대비 3% 선까지 떨어졌던 군비 지출을 테러 이후 2009년에는 5%에 가깝게 끌어올렸다. 반면 중국은 군비 증강률에 급격한 변화가 없다. GDP가 성장하면서 정부의 조세 수입이 느는데 따른 자연적인 증가만 있을 뿐 자원 배분상의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중국이 이러한 기조를 유지한다고 가정하면 미국을 경제력에서 추월할 2025~2030년이 되면 중국의 군비는 미국의 50%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격차만 줄어들 뿐 중국이 미국을 대체할 하드 파워나 외교적 역량까지 능가하기는 쉽지 않다.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는 내부 문제다. 중국은 경제성장의 과도기에 있어서 시스템을 안정되게 관리하는 것이 중국 지도부의 부담으로 남아 있다. 과도기 현상 중 하나가 소득 불균형이다. 소득 불평등 지수인 지니계수가 2007년 기준 0.47~0.48인데 아시아에서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준이고 웬만한 자본주의 국가도 이 정도는 아니다. 농촌과 도시 사이의 소득 격차도 심해서 최근에는 약 1:3.3 수준까지 벌어졌다. 사회적 갈등이 유발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중국이 지금과 같은 성장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우선 1980년대 산아제한 정책을 시행해 중국의 고령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또 서방국이 과거 공업화 시기에 자원의 제약을 덜 받은 반면 중국은 자원 수요에 따라 세계 시장에 영향을 주는 구조에 놓여있다.

이러한 대내외적 제약으로 인해 중국은 성장하고 있는 힘을 대외에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중국을 고려할 때 중요하게 여길 변수다. 이러한 객관적 상황을 고려하면 우리도 중국과의 관계를 풀어갈 조건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상황이 이런데 G2라는 개념이 퍼진 이유는 이 용어를 미국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금융위기를 거치며 미국이 혼자 국제 질서의 변화를 관리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중국이 국제사회에 참여해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데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담론을 유발하기 위한 의도로 G2를 들고 나왔다.

중국 입장에서도 싫어할 일은 아니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비용을 부담하면서까지 뛰어들 필요는 없다. 앞으로도 미중관계는 예전 미소관계처럼 전면적인 대치로 가진 않겠지만 세계 질서를 공동 관리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현실적인 중국의 대외전략은 내부적 불균형과 미국과의 격차를 조정하는 시간벌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심각한 갈등 유발을 피하면서 핵심 이익에 선택적으로 집중하고, 국제질서의 안정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힘을 사용하거나 재편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이 질서 유지를 위해 개입하면, 중국은 이에 편승해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할 것이다. 쫓는 사람의 이점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의 격차를 좁히는 방식은 그렇게 능력을 점진적으로 증진시키는 것을 통해 이뤄질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푸는 게 중요하다.

동북아 지역에서의 미중관계

하지만 앞서 말했듯 동북아 지역은 조금 다르다. 미중의 경쟁이 가장 먼저 시작될 지역이 동북아이기 때문이다. 일단 힘의 관계를 보면 동북아에서는 빠르게 두 나라의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 미국은 자신의 힘을 전 세계 곳곳에 다 사용하고 있지만 중국이 당장 전략적 집중을 하고 있는 곳이 동북아다.

한국의 국가별 무역 비중만 봐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이 차지하는 부분이 20년 동안 10배로 늘어 22.7%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일본과 미국의 비중을 합친 것보다 많다. 구조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미국이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니다. 중국 무역의 순환 고리가 결국 미국과의 교역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서 가장 큰 안보 우려는 대만 문제와 남중국해 해상 교통로(sea lane) 문제다. 대만 문제에 대해 중국은 아직까지 무력을 사용한 통일을 전면 배제하고 있지는 않다. 대만 독립파들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양안관계가 약화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됐다. 여기에 미국이 개입하면 중국의 민족주의적 타깃이 될 가능성이 있다.

남중국해 문제도 중요성이 강화되고 있다. 중국은 예전에 석유를 자급했지만 지금은 50%를 수입한다. 수입 석유 중 70%가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남중국해를 통해 들어온다. 이 때문에 남아시아 국가 및 미국과 이익 충돌이 나타나 갈등이 커지고 있다. 그 전환점을 보여준 때가 지난해다. 천안함 사건 이후 미국 항공모함이 서해로 진입하려고 해 힘겨루기 국면이 조성됐고, 조어도, 남중국해, 남사군도 문제까지 연속해서 발생했다.

이 때문에 미중관계가 동북아에서 협력으로만 가지 않으며 갈등도 발생할 거라는 예측이 힘을 얻고 있고 이게 동북아 국가들에게 딜레마로 다가오는 상황이다.

'헤징 전략'과 다자안보협력 체제

미중관계가 경쟁 관계로 바뀌었을 때 동북아 국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은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 어떤 정체성을 갖는 국가가 될지 예측할 수 없는 나라다. 예컨대 중국에서 민주화 과정이 진행된다면 대외정책이 평화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은 없다. 과거의 민주화 사태를 봤을 때 중국 지도부가 다양하게 표출될 요구와 갈등을 통제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 민족주의적 요구가 강화되면서 대외적 쟁점에 대해 공세적 태도로 나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이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번에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솔직하게 얘기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의 변화를 위협으로 느끼고 있어서 미국의 개입을 환영한다고 했다. 또 중국 견제를 위해 한미동맹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중국이 들으면 열 받을 얘기다.

한미동맹이 외교적인 자산일 수 있지만 레토릭(수사)을 그렇게 하면 중국 입장에서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의 레토릭 중 하나가 한미동맹 강화로 중국과의 관계를 잘 풀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교적으로 미국도 중국도 전적으로 믿을 만한 국가가 아니고 활용할 수 있는 지점도 양쪽에 다 있다. 그런 차원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걸 말로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이 작동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 초기에도 그런 레토릭이 제기됐는데 지금 그렇게 됐나?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5월 중국을 국빈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한미동맹은 냉전시대의 낡은 유산"이라는 레토릭으로 반격하지 않았나. 그래서 지금까지 중국과 경제 문제에서는 잘 되는 편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잘 풀리지 않았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일종의 원교근공(遠交近攻)론이다. 미국을 가까이하고 중국을 친다는 건데, 문제는 '공(攻)'에 있다. 원교근공은 가까이 있는 적을 소멸하기 위한 전략이고 격파 순위를 정하는 문제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중국을 격파하는 문제가 아니다. 중국의 성장을 막는 게 바람직한가를 논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발상이다. 먼 곳의 물로 가까운 불을 끄지 못한다(遠水不救近火)는 한비자의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

중국과 친해져도 부담이 있고, 미국과의 관계만 강화하는 것도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게 동북아 국가의 딜레마이고 외교적으로 상당히 심각한 도전이다.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인데, 특히 힘의 균형 차원에 한반도는 중요한 위치에 있기에 더욱 그렇다.

선택이 어려운 상황에서 단기적 대응과 중장기적 대응을 고려해볼 수 있다. 단기적 전략은 일종의 위험분산, 즉 헤징(hedging) 전략이다.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관계가 중국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다고 (중국에) 설명해야한다. 중국은 그런 논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본다. 중국도 단기적으로 미국과 경쟁이 전면화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시간이 있는 셈이다.

한미 군사 동맹을 강화하는 것은 길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인데 MD가 만들어지는 건 한미동맹이 중국을 봉쇄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묶는 군사동맹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미국이 바라는 대로 비용을 전가시키면서 군사적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다. 이 역시 중국에 대한 제스처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당분간은 위험분산 전략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위험분산 전략이 장기적인 동북아 질서로 이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근본적인 접근 방식은 동북아에서 다자안보협력 체제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한다. 지역 안보는 지역의 소속 국가들이 공동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일종의 집단안보체제인데, 지금까지는 이상적인 체제로 받아들여져 왔다. 각 나라별로 핵심 이익이 달라서 위협이 발생해도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결국 강대국의 협력이 없으면 다자안보협력 체제도 만들어지기 어려운데 패권국들은 이에 나서는데 소극적이다. 자기 의도대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은 다자협력 체제를 통한 관리의 필요성을 느껴왔다. 그래서 주도적으로 한 게 상하이협력기구(SCO)다. 러시아, 중국,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함께 만든 SCO를 통해 중국은 국경 지역의 병력 축소에서 시작해 지금은 경제협력 논의로까지 발전시켰다.

미국 역시 장기적으로 동북아 지역에서 힘의 약화를 인정할 상황이 생길 수 있는데 그럴 때 우리가 다자협력 체제를 설득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끼리의 논의만이 아니다. 이미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서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안보 체제를 갖추기로 6자 당사국들이 합의한 바 있다. 6자회담이라는 출발할 수 있는 무대가 있는 셈이다. 이런 방식의 접근을 위해서는 동북아의 개별 국가들이 지역 문제를 스스로 협력해서 풀려는 주체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

 

/김봉규 기자(정리)

 

Copyright ⓒ PRESSian Corp. All rights reserved.
프레시안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므로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


 

========================================================================================================================================================

 

 

[9.11 10주년, 세계의 시각]<1> "미국, 빈라덴도 상상 못했을 피해 자초"

"9.11과 對테러전쟁, 일상화된 테러위협과 빚만 남겨" 

 

9·11 테러 사태가 오는 11일로 10주년을 맞는다. 20세기 양차 세계 대전의 비극을 거쳐 21세기에는 '평화의 밀레니엄'의 시대가 열리길 기대했던 인류는 미국 본토에서 일어난 이 사건으로 곧바로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에 휘말렸다.

문제는 '테러와의 전쟁'은 '선제공격 독트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20세기 이전의 전쟁과 다르다는 점이다. 미국은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를 소탕하겠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비호하거나 연계된 것으로 의심되는 국가나 세력들을 대상으로 곧바로 전쟁을 벌였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의 경우는 시간이 지나면서 미.영 동맹이 진정한 의도를 숨긴 채 '거짓 명분'에 의해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유엔의 결의를 거치지도 않은 그야말로 '힘에 의한 일방적 전쟁'이었다.

▲ 9.11 테러 10주년을 맞아 미국에서는 세계무역센터 재건이 한창이다. 하지만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미국과 전세계에 준 피해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AP=연합

"9.11에 대한 미국의 대응, 자신과 세계에 비싼 대가 초래"

이때문에 '테러와의 전쟁'에서 누가 테러의 주체인지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테러와의 전쟁'으로 미국과 세계가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러왔는지,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논쟁이 되고 있다.

이라크 침공의 최대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WMD)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미국과 영국 정부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됐고, 테러 용의자 색출을 위해서는 고문을 허용해야 한다는 등 인권의 기준이 허물어졌다.

9.11 테러로 시작된 미국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001년 10월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 됐으며, '일상적인 테러의 위협'이 존재하게 된 지금 '테러와의 전쟁'이 과연 승리 가능한 전쟁이냐는 본질적인 의문에 답을 못하고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지난 10년간 이라크·아프간전과 대테러 작전에 따른 비용으로 미국은 국내총생산(GDP)가 넘는 부채더미에 올라앉게 됐다.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희생된 미군 및 다른 연합군들의 사망자수만 7500명에 달하고, 부상자들을 포함한 인적,물적 피해는 집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국제경제학계의 존경받는 석학 조지프 스티글리츠 콜럼비아대 교수는 "생각하지도 않고 행동부터 한 미국의 어리석음 때문에 미국과 세계가 엄청나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중"이라고 지적했다.

스티글리츠 교수의 이런 지적은 1일(현지시각) <프로젝트신디케이트>에 게재된 '9.11의 대가(The Price of 9.11)'이라는 글에 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담겨있다. 다음은 이 글의 주요내용이다.<편집자>

퇴역군인 매일 18명 자살, 가정 해체 등 사회적 비용은 계산도 못해

9.11 테러는 알카에다가 미국에 타격을 가하려고 저지른 공격이고, 실제로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오사마 빈 라덴도 이 공격이 여러 측면에서 이렇게 큰 타격을 초래하게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 공격에 대한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의 대응은 미국의 기본적 원칙을 훼손하고, 경제를 파탄내고, 안보를 약화시켰다.

9.11 공격 직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이라크에 대한 침공은 알카에다와 전혀 관계가 없다. 이런 전쟁들로 미국은 엄청난 전쟁비용을 부담하게 됐다.

3년전 린다 빌름즈와 함께 미국이 벌이는 전쟁 비용을 계산해보니, 보수적으로 잡아도 3~4조 달러에 달한다. 이후 비용은 더욱 증가했다.

전쟁에서 복귀한 군인 중 거의 절반은 상이용사로서 일정수준의 연금을 받아야 하고, 지금까지 60만명 이상이 퇴역군인으로서 국군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이 비용만 앞으로 6000억~90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자살(최근 몇년 동안 매일 18명이 자살할 정도로 늘고 있다)하고 가정이 해체되는 등 사회적 비용은 계산도 할 수 없다.

'부시의 전쟁'은 역사상 최초의 완전 빚더미 전쟁

부시가 미국, 그리고 세계를 거짓 명분으로 자행된 전쟁으로 끌어들이고, 이런 무모한 행위의 비용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축소한 죄를 용서해줄 수 있다고 해도, 그가 전쟁비용을 조달한 방식만큼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부시가 벌인 전쟁은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빚으로 치러진 전쟁이었다. 2001년 감세정책으로 이미 재정적자를 급증시킨 부시는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인 와중에도 부자들에 대한 추가 감세까지 결정했다.

요즘 미국은 실업과 재정적자 문제가 큰 현안이 되고 있다. 미국의 미래를 위협하는 두 현안 모두 부시가 벌인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부시가 취임할 때만 해도 GDP의 2%에 달하는 재정흑자였던 미국이 오늘날 GDP와 맞먹는 부채더미에 오른 가장 큰 원인은 국방비 지출 증가와 부시의 감세 정책이다.

두 전쟁에 정부의 직접적인 지출만 2조 달러 정도인데, 미국의 한 가구당 1만7000달러의 부담을 준 것이고, 앞으로 50% 이상 부담이 더 커질 것이다.

게다가 두 전쟁은 미국의 경제를 취약하게 만들어 부채에 대한 부담이 더욱 커지게 만들었다. 중동 지역의 불안을 초래해 미국인은 석유수입에 더 많은 돈을 쓰게됐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면 미국인들은 다른 곳에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의 중앙은행은 소비 부족을 주택가격 거품을 일으켜 메우려 했다. 주택가격 거품에 기반을 둔 과도한 부채 문제가 해소되려면 몇 년이 걸릴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두 전쟁은 미국(그리고 세계)의 안보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취약하게 만들었다. 빈 라덴도 이런 정도로 될지 몰랐을 것이다.

수백만명의 인명피해, 난민 양산한 전쟁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은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주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전쟁에서 무고한 주민들의 희생은 엄청났다. 관련 조사들에 따르면 이라크에서는 10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전쟁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죽었다. 지난 10년간 두 전쟁에서 폭력사태로 죽은 주민만 최소 13만7000명에 달한다.

이라크에서만 180만명의 난민과 이라크 내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170만명의 주민들이 발생했다.

미국의 국방비는 냉전이 끝난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전세계 다른 나라들의 국방비를 합친 것과 맞먹을 정도다. 늘어난 국방비 중 일부는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비용에 들어갔다. 하지만 상당부분은 존재하지 않는 적에, 사용하지도 않는 무기 구입에 낭비됐다.

알카에다는 이제 더 이상 9.11 테러 때처럼 위협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런 단계에 오기까지 치른 대가는 엄청나고, 대부분이 피할 수 잇었던 것이다. 9.11의 유산은 오랫동안 우리 곁에 남아있을 것이다.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기사입력 2011-09-04 / 이승선 기자


 

 

[9.11 10주년, 세계의 시각]<2> 피스크

"알카에다가 미국을 반대하는 근본 원인은 이스라엘"

"9.11 테러가 일어난 진짜 이유를 알고 있는가?"

 

21세기의 첫 가을을 비극으로 물들인 9.11 테러가 발생한지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테러리스트들을 발본색원하겠다고 나섰다. 실제로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과 아이만 알자와히리 등 알카에다의 지도자들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테러가 줄어들었다고는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영국 첩보기관인 보안정보국(MI5)의 수장을 지냈던 엘리자 매닝햄-불러 전 국장의 최근 '양심선언'은 그래서 눈길을 끈다. 매닝험-불러는 지난 1일 영국 <BBC> 방송의 석학 초청 강연에서 "9.11 테러는 '범죄'일 뿐 '전쟁행위'는 아니었다"며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용어 사용 자체가 넌센스라고 비판했다.

매닝험-불러는 이 자리에서 또 중요한 말을 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젊은 아랍인들을 단합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중동 문제의 역사적 뿌리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짚어낸 것은 첩보기관의 전직 수장다운 정확한 지적이었다.

<인디펜던트>의 중동 전문 기자 로버트 피스크도 지난 3일 칼럼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야말로 반미‧반서방 정서와 테러리즘에 동력을 공급하는 진원지라고 지목했다. 진짜 뿌리는 남겨둔 채 테러리스트를 잡겠다며 들쑤시고 돌아다녀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이다.

피스크는 9.11 테러가 발생한지 10년이 됐지만 누구도 테러의 '동기'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꺼린다면서 노골적인 이스라엘 편들기 등 미국의 중동 외교정책에 대한 반감이 이슬람 극단주의라는 요인 못지않게 중요한 9.11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9.11 테러에서 몇 명이 희생됐는지, 납치된 4대의 비행기 중 세계무역센터(WTC)로 향하지 않은 1대의 운명은 어찌 됐는지, 과연 펜타곤(미 국방부) 건물에 대한 항공기 테러공격은 실재했는지 등의 각종 음모론에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이같은 '근본적 원인'에는 관심이 없다고 피스크는 개탄했다. 다음은 이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
원문 보기) <편집자>

▲ 9.11 테러 당시 붕괴되기 직전 화염에 휩싸인 세계무역센터(WTC)의 모습.

10년간의 거짓말에 감춰진 단 하나의 '진짜 질문'

9.11 테러에 대해 수없이 많은 책이 쏟아졌다. 많은 책들은 사이비 애국주의나 자존심으로 채워졌고, 다른 책들은 미 중앙정보국(CIA)과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신화를 담고 있다. 또 몇몇 책들은 9.11 테러를 저지른 살인자들이 '소년'들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모든 책들은 단 하나의 항목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한다. 거리에서 일어난 사소한 범죄에 대해서도 순경들이 빼먹지 않고 묻는 항목, 즉 '동기' 말이다.

왜일까? 10년 동안 전쟁을 했고 수십만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됐다. 미국과 탈레반에 의해 거짓말과 위선, 배반과 고문이 행해졌다. 세계는 공포로 가득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아직도 침묵해야만 하나? 9.11을 저지른 19명의 살인자들은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중동이라 불리는 지방에서 왔다. 거기 무슨 문제가 있나?

2001년 미국에서는 수많은 사진이 실린 9.11 서적들이 발간됐다. 제목이 이 책들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신성한 땅 위에서>(Above Hallowed Ground),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은 살아남을 것이다>(So Others Might Live), <강력한 진심>(Strong of Heart), <우리가 본 것>(What We Saw), <최후의 전선>(The Final Frontier), <신을 향한 분노>(A Fury for God), <무기의 그늘>(The Shadow of Swords) 등등. '새로운 기준'을 논하고 있는 이런 책들을 보면 누구나 미국이 곧 전쟁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전에도 또 한 무더기의 책들이 나왔다. [아프간에 이어 이라크에서도] 계속되는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들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케네스 폴락 전 CIA 국장의 <위협적인 폭풍>(The Threatening Storm)이다. 윈스턴 처칠의 회고록 2권인 <심해지는 폭풍> (The Gathering Storm)에 빗댄 것이었다. 폴락은 장차 사담 후세인과 미국이 치를 전투를 1938년 영국과 프랑스가 맞이했던 [독일의] 위협에 비유했다.

폴락의 책에 담긴 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WMD)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WMD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이라크 전쟁이] "이라크 문제와 아랍-이스라엘 분쟁" 사이의 "연결고리"를 차단할 기회라는 것이었다. 즉 이라크의 강력한 지지를 잃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지배에 대항한 투쟁에서 더욱 약화될 것이라는 얘기다.

폴락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사악한 테러"를 저지르고 있다며 비난했지만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하지 않았다. 폴락은 철저히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서술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편견은 아랍인들의 '믿음'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폴락의 책은 엉터리이고 되는 대로 쓴 것이긴 하지만 최소한 9.11 테러가 (심지어 후세인과는 관계없다 해도) 팔레스타인 문제와 뭔가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9.11이 남긴 상처에 대한 저작은 홍수를 이뤘다. 로렌스 라이트의 달필로 쓴 <문명 전쟁>(The Looming Tower)에서부터 9.11의 진실을 추적한 학자들의 [음모론적] 저서들까지 쏟아졌다. 몇몇 사람들은 펜타곤 밖의 비행기 잔해는 [미 공군의] C-130 수송기가 실어나른 것이라거나, WTC를 들이받은 비행기는 무인 조종됐다거나, [납치된 또 한대의 비행기] '유나이티드 93'편은 미군의 미사일에 격추됐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백악관의 비밀주의적이고 둔감하고 때때로 부정직한 발표 내용이나 사고조사위원회가 했던 거짓말을 생각해 보면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음모론을 믿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가장 큰 거짓말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미국은 9.11의 배후에 사담 후세인이 있다고 말했다. 신임 CIA 국장인 리언 파네타는 올해에도 이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관련기사 보기)

영화도 나왔다. [9.11을 다룬 미국 영화] <플라이트93>은 왜 이 비행기가 펜실베이니아주 숲속에 떨어졌는지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편다. TV 스페셜 시리즈도 나왔다. 모든 시리즈는 9.11이 실제로 세계를 바꿔놓았다는 거짓말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암살부대원들에게 침공·살인·고문을 허용하는 결과를 낳은,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 식의 위험한 주장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 중 어디에도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 미국 <ITV>의 브라이언 래핑은 '이라크'를 한번 언급했지만 2003년 이라크전이라는 전쟁범죄가 9.11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9.11에서 죽었나? 약 3000명이다. 그럼 이라크전에서는? 누가 신경이나 쓰겠나?

안토니 서머즈와 로빈 스완의 신간 <열한번째 날>(The Eleventh Day)은 서방 국가들이 9.11 이후 몇 해 동안 한사코 돌아보지 않으려 했던 문제들을 지적한다. 저자들은 "모든 증거는 이들 음모자[9.11 테러리스트]들을 단결시킨 요인이 팔레스타인 문제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적었다. 이들에 따르면 테러를 기획한 자들 중 하나는 이 공격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지지함으로써 미국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미국인들은 깨닫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저자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야말로 "독일 함부르크에 살았던 젊은 아랍인들을 [테러로] 몰아가는 불만의 씨앗"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9.11 테러의 동기를 심지어 공식 보고서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고 지적한다. 사고조사위원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다. 몇몇 위원들은 후일 "이는 민감한 부분"이라며 "알카에다가 (미국 외교정책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종교적 이념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한 위원들은 이-팔 분쟁을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알카에다가 미국에 반대하는 근본적 원인으로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를 꼽는 것은, 그들에게는 미국이 [이스라엘 지지] 정책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서머즈와 스완은 "(테러의) 동기 부분에 대해서는 헛된 말들만이 맴돌았다"고 지적했다. 공식 보고서에 [테러의 동기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는 (아무도 안 보는) 각주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계를 영원히 변화시켰다'(고 믿도록 강요되)는 범죄의 진실에 대해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다. 그러니 지난 5월 오바마가 네타냐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들 놀라울 것도 없다. (☞관련기사 : 5월 19일 오바마의 중동정책 연설에 대한 피스크의 칼럼 바로보기)

미 의회조차 이스라엘 총리에게 비굴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한, 미국인들이 9.11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도 '민감한' 문제에 대한 답을 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문제란 "왜 9.11이 일어났나?"라는 것이다.

* ( )는 원저자의 표기이며 [ ]는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임.

 

기사입력 2011-09-06 / 곽재훈 기자(번역)


 

 

[9.11 10주년, 세계의 시각]<3> 촘스키 "파키스탄 핵무기가 위험해져"

"미국이 빈 라덴의 최종 목표를 달성해주고 있다"

 

9.11 테러 이후 10년 동안 계속된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두 개의 정권을 붕괴시키고 빈 라덴의 시체를 수장시킨 미국의 승리로 끝나는가?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은 수십만의 직접적 인명 피해를 낳았을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격렬한 반미주의와 보복 테러공격, 미국의 막대한 국가부채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콜럼비아대 교수를 비롯한 일부 분석가들은 이 때문에 9.11 테러는 '성공한' 공격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스티글리츠 교수의 칼럼 보기)

세계적인 석학 노암 촘스키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미국 정부는 9.11 직후부터 (미국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빈 라덴의 소망을 들어주지 못해 안달이 난게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촘스키는 '미국을 멸망시키기 위한 빈 라덴의 무기는 파산'이라는 주장보다 더 섬뜩한 경고의 목소리도 전했다. 그는 10년에 걸친 전쟁의 결과 핵 보유국인 파키스탄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졌다면서 "런던이나 뉴욕에서 핵폭탄이 폭발하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촘스키는 9.11 10주년을 맞아 펴낸 저서 <9-11>(2001)의 증보판에 새로 덧붙인 칼럼에서 "전쟁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나?"라는 물음을 던지며 테러와의 전쟁을 통렬히 비판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9.11을 '미국 본토에 가해진 공격'이라며 격분했지만, 언어학자인 촘스키 교수는 9.11에 대한 정명(正名)은 '반인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이며 그에 대한 대응은 '전쟁'이 아닌 '수사'였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다음은 촘스키 교수의 칼럼 주요내용을 발췌·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 2001년 9월 11일 납치된 항공기의 자폭테러 공격을 받은 미 국방부(펜타곤) 건물에 소방차가 물을 뿌리고 있다. 세계 최강 미군의 지휘부와 미국 경제력의 상징 세계무역센터(WTC)에 대한 공격은 10년 동안의 '테러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로이터=뉴시스

전쟁만이 9.11에 대한 유일한 대응이었나?

9.11 테러가 10주년을 맞는다. 9.11은 끔찍하고 잔혹한 일이었으며 '세계를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방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9.11의 충격은 의심할 여지없이 컸다. 아프가니스탄은 간신히 숨만 붙이고 있고, 이라크는 황폐화됐으며, 파키스탄은 대재난으로 발전할지도 모를 재앙의 가장자리에 있다.

지난 5월 1일, 9.11의 주모자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이 파키스탄에서 사살됐다. 이에 대한 즉각적이고 명료한 반응들이 파키스탄을 둘러싸고 터져나왔다. 미국은 파키스탄 정부가 빈 라덴을 숨겨왔다며 분노했다. 이보다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미국이 정치적 암살작전을 위해 자신들의 영토를 침공했다는 파키스탄인들의 분노도 대단했다. 이미 파키스탄에서 거세게 타오르던 반미의 불길에 이 사건은 기름을 부었다.

파키스탄 전문가인 영국 역사학자 아나톨 리븐은 지난 2월 미국 격월간지 <내셔널 인터레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아프간 전쟁으로 인해 "파키스탄이 불안정화‧급진화되고 있으며 이는 미국(과 전세계)에 지정학적 재앙이 될 것"이라며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파키스탄에서 일어날 일에 비하면] 작아 보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리븐에 따르면 파키스탄 사회 전반에서는 아프간 탈레반에 대한 동정적인 반응이 압도적이다. 이는 파키스탄인들이 탈레반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탈레반이 외세의 자국 지배에 맞서는 정통성을 가진 저항군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소련의 지배에 맞서 싸운 아프간 무자헤딘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파키스탄 군부 지도자들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탈레반에 대한 '미국의 전쟁'에 자신들의 희생을 요구한 미 정부의 압력에 매우 화를 냈다. 이들이 분노하는 더 큰 이유는 파키스탄 내에서 미국이 테러 공격, 즉 무인정찰기 전쟁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 인해 더더욱 잦은 빈도로)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미국이 심지어 영국의 식민지배 시절에도 가만히 놔두었던 파키스탄의 부족 지대[파키스탄 북부] 내에서 '미국의 전쟁'을 수행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군부는 안정적인 조직이며 국가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리븐은 미국의 행위로 인해 "[군부 내의] 반란이 일어날 수 있다"면서 그 경우 "파키스탄이란 국가는 급속히 붕괴할 것이며 이는 재앙을 수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파키스탄의 거대하고 급속히 성장한 핵무장력 때문에, 또 파키스탄 내에 잠복해 있는 지하드 운동 때문에 잠재적인 재앙의 수준은 극도로 높을 것이다.

이 둘 [핵무기와 지하드 운동] 모두는 레이건 행정부의 유산이다. 레이건 정부는 악명높은 파키스탄의 군사독재자였지만 워싱턴의 사랑을 받았던 지아 울-하크[1978년 쿠데타를 일으킨 파키스탄 장군으로 선거를 통해 수립된 부토 정권을 붕괴시키고 줄피카르 부토 총리를 처형했다]가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돈을 받아 급진 이슬람주의화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모르는 척 눈감아줬다.

[파키스탄에] 잠재돼 있는 대재앙은 이 두 가지 유산이 결합된 것이다. 즉 핵물질이 지하드주의자의 손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런던이나 뉴욕에서 '더러운 폭탄' [재래식 폭탄에 방사능 물질을 채운 기초적 수준의 핵무기] 등 핵무기가 폭발하는 광경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리븐은 이에 대해 "미국과 영국 국민들에게 더 위험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미국과 영국 군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평했다.

미국 정부는 소위 '아프팍'으로 명명된 아프간-파키스탄 지역에서 펼치고 있는 작전으로 인해 파키스탄이 불안정화‧급진화될 수 있다는 점을 물론 알고 있다. 지금까지 공개된 위키리크스 문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앤 패터슨 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가 보낸 외교전문이다. 패터슨 대사는 아프팍 지역에서의 미국의 행동을 지지하면서도 이런 행동이 "파키스탄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민간 정부와 군 지도부의 사이를 벌려놓을 수 있으며, 파키스탄에서 광범위한 통치력(거버넌스)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패터슨은 "(파키스탄 정부 내) 핵시설에 근무하는 누군가가 무기를 제조하기에 충분한 핵물질을 지속적으로 몰래 빼돌렸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서술했다. 그는 "[핵]무기들은 이동 중에 특히 취약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위험성이 더 크다고 덧붙였다.

많은 분석가들은 빈 라덴이 미국에 대항한 전쟁에서 몇 가지 주요한 성공을 거뒀다고 관측한다. [캐나다 기업인이며 칼럼니스트인] 에릭 S. 마고리스는 지난 5월 미국 월간지 <아메리칸 컨저버티브> 기고에서 "(빈 라덴은) 이슬람 세계에서 미국을 몰아내고 패퇴시키기 위해서는 소규모지만 돈이 많이 드는 일련의 전쟁들로 미국을 끌어들여 최종적으로 파산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9.11 직후부터 빈 라덴의 소망을 들어주지 못해 안달이 난게 분명하다.

1996년부터 빈 라덴을 추적했던 미 중앙정보국(CIA) 분석가 마이클 슈어는 2004년 발간된 <제국의 오만>에서 "빈 라덴은 자신이 왜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지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말했다"면서 "그는 이슬람 세계에 대한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빈 라덴은 그의 목표를 대부분 성취했다.

슈어는 "미국의 군대와 정책은 이슬람 세계의 급진화를 완성했다"며 "이는 바로 빈 라덴이 1990년대 초부터 이루려고 노력했지만 불완전한 성공만을 거두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미국이야말로 빈 라덴의 유일하고 필수불가결한 동맹자였다고 결론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빈 라덴은 죽었지만 이런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난 10년 동안 계속된 공포는 우리를 다음 질문으로 이끈다. 9.11 테러에 대한 서방의 [전쟁이 아닌] 다른 대안은 없었나?

지하드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다수는 빈 라덴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9.11이] 만약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라는 정명(正名)을 얻었다면, 그래서 범죄로서 취급됐다면, 용의자들을 체포하기 위한 국제 공조로 이어졌다면, 지하드 운동은 일찌감치 약화될 수 있었다. 당시에도 이런 얘기는 나왔지만 [미국이] 전쟁터로 서둘러 달려가는 바람에 검토조차 되지 않았다. 빈 라덴은 과거의 테러행위로 인해 많은 아랍 국가에서도 비난받던 인물이라는 점을 짚어봐야 할 것이다.

빈 라덴은 죽기 전에도 이미 오랫동안 존재감이 없었으며 특히 사망 직전 몇 달간은 '아랍의 봄'에 가리워졌다. 아랍 세계에서의 빈 라덴의 존재감은 <뉴욕타임스>에 실린 중동 전문가 질 케펠의 글 제목에 의해 가장 적절하게 묘사됐다. '빈 라덴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런 제목이 달린 글은 훨씬 빨리 나올 수도 있었다. 미국이 아프간과 이라크에 복수전을 감행해 지하드 운동에 동력을 공급해주지 않았다면 말이다.

지하드 운동 내부에서 빈 라덴이 존경받는 상징적 인물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가 알카에다를 위해 많은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분석가들이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라고 부르는 이 조직[알카에다]은 대부분 [빈 라덴과는] 독립적인 작전을 펼쳤다.

9.11과 그에 대한 대응, 그리고 이들이 예고하는 미래의 전조를 살펴보면, 지난 10년에 대한 어떤 뚜렷하고 기초적인 사실들조차 암울한 전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기사입력 2011-09-07 / 곽재훈 기자(번역)


 

[9.11 10주년, 세계의 시각]<4>"테러와의 전쟁, 금융위기 등이 원인"

"9.11 최대 유산, '중국의 시대'를 열다"

 

다음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미주판 편집인 라이오넬 바버가 쓴 '미국 패권의 종말: 9.11의 유산(The end of US hegemony: Legacy of 9.11)'의 주요 내용이다.

그는 이 글에서 9.11 이후 지난 10년에 가장 중요한 용어는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앞으로의 10년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중국이 장악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마디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9.11에 과도한 대응을 하고,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되면서 미국의 위상이 중국에 밀리는 상황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편집자>

▲ 지난 2006년 3월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이 테러용의자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담은 애국법 개정안에 서명을 마치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걸어나고 있다. 하지만 부시는 9.11 테러에 대한 강경 대응으로 미국의 국력과 위상을 크게 위축시킨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AP=연합


테러와의 전쟁은 지나친 자원 낭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대응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전쟁 개시였다. 국제적인 동맹과 국제법을 무시한 호전적인 일방주의였다. 또한 중동에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한다는 선교행위에 가까운 것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강경책은 유럽과의 동맹관계에 균열을 초래했고, 세계에서 미국의 위상을 급격히 추락시켰다.

부시의 대응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미국 본토에 또다른 테러 공격을 지금까지 막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테러 공격을 막아낸 것은 아니다. 발리(2002), 마드리드(2004), 런던(2005) 등의 폭발 사건은 규모 면에서는 9.11에 미치지 못하지만 수백명의 희생자를 냈다.

알카에다의 세력이 약화됐지만 완전히 제거된 것도 아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에 발견된 컴퓨터 자료들을 보면, 9.11 10주년이 되는 이번 주말 대규모 테러를 계획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랍권에서 확산된 민중봉기는 중동이 원래 민주주의의 불모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여기서 그동안 중동의 독재정권들이 이슬람 과격 테러리즘의 토양이며, 미국에게 현존하는 위협이 되고 있다는 부시의 주장이 옳으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긍정이라면, 부시 행정부의 실패는 잘못된 진단 탓이 아니라, 실천력 탓이라고 할 만하다.

9.11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군사적 대응은, 중국 등에 의해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자원과 역량을 지나치게 사용한 것이냐는 질문도 나온다.

미국, '악의 축' 제거한다면서 스스로 '불량국가'로 전락

미국은 1년만에 도덕적 입지를 상실했다. 부시의 실책은 이라크의 정권 교체를 위한 침공을 감행했지만, 이른바 이란과 북한을 포함한 '악의 축'을 처리하는 첫 단계에 불과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점이다. 하룻밤 사이에 미국은 '불량국가'가 돼버렸다.

2002년 발표된 국가안보독트린 수정판에 대해 우려가 제기됐다. 봉쇄와 억제라는 냉전 개념에 따라 선제적 군사행위, 정권교체, 테러 용의자들에게 고문을 정당화하고, 제네바 협정을 부정하는 새로운 전쟁방식이 채택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라크 전쟁은 캐나다, 프랑스, 독일 등 전통적인 동맹국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수행됐다. 유엔 안보리의 승인도 없었고, 사담 후세인이 미국에 즉각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도 없이 감행됐다.

동맹국으로는 당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충성스럽게 미국을 지원하고 나섰지만, 정작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영국군은 군사적으로 별 도움이 안된다"고 볼멘 소리를 했다.

전쟁 하느라 금융에서 중대한 위기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유럽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통화동맹의 성공적인 출발에 고무돼 유럽연합을 세계 최강의 경제권으로 만들자는 계획에 합의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유로화 동맹은 닷컴버블의 붕괴 시기와 일치했다.

10년후 유럽의 통화동맹은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재정적 규제를 강제하는 규정은 회원국 모두에게 무시됐다. 그리스와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 유로존 주변국들은 유로화 체제의 저금리에 힘입어 경제가 떠받쳐졌다가 경쟁력이 없는 체제가 된 것으로 드러났다. 채권시장의 부실 위기는 유로존 중심국인 이탈리아까지 확산되고 있다.

부시는 재집권 이후 보다 완화된 노선으로 나갔다. 미국은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점령군으로서 재건활동에 나서는 모순된 상황을 연출하게 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도 재건활동 역시 군사적으로 중요하다면서, 신중하게 철군을를 고려하고 있다는 식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이 아프간과 이라크에 들인 돈만 2조 달러에 달할 것이다. 미 국무부 차관 출신의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 같은 부유한 나라에게 이런 비용은 충분히 감당할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1948년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지금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인들은 막대한 비용에도 불구하고 유럽을 재건하고 공산주의와 맞서는 트루먼 독트린을 지지했다.

이라크에 민주적인 변혁의 싹이 뿌리를 내릴지는 미지수다. 이라크 주둔 병력을 늘려 이라크의 혼란과 분열을 막고 있지만, 쿠르드와 수니파, 다수인 시아파 등 이라크의 종족간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다.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가 이라크의 시아파 정부에 대한 이란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이 지역의 맹주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이란의 핵무기 추진계획도 제어되지 않고 있다.

9.11 사태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 난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강화되지 못했다. 부시와 오바마 모두 가자와 서안 지구, 그리고 예루살렘을 둘러싼 교착 상태를 해소하지 못했다.

아리엘 샤론에서 벤자민 네타냐후에 이르는 이스라엘 총리들은 테러와의 전쟁을 자신들을 위해 이용했다. 그들은 영토 문제에서 어떠한 양보도 이스라엘의 안보와 하마스(2005년 가자 지구 선거에서 낙승) 등 팔레스타인 무장정파는 합법적 정부를 가장한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 집중하면서도 지정학적 변동에 대해 신경을 써왔다. 2008년 인도와 민간 분야의 핵 협력을 맺은 것은 가장 중요한 전략적 타결이었다.

이 협정은 중국에 대한 견제일 뿐아니라, 미국의 오랜 동맹이지만 점점 통제가 안되는 핵보유국 파키스탄에 대한 균형추를 제공하는 것이다.

반면 중국과 미국의 관계는 '불편한 동거'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미국은 기껏해야 '친구도 아니고 적도 아닌'것이고,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도전에 뒤늦게 대응하고 나섰다.

중국은 핵보유국이 된 북한에 대해 마지못해 압력을 넣고 있지만, 대만과의 관계 문제와 일본, 남한, 베트남과의 영토분쟁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 위축, 유럽 열외, 중국 등 아시아 부상

지난 10년간 지정학적 변화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전장이 아니라 금융체제에서 일어났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부실한 규제와 갚을 능력이 없는 서민에게까지 모기지를 팔도록 만든 잘못된 인센티브 제도,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레버리지 등으로 초래됐다.

또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어떤 측면에서는 미국은 값싸게 돈을 빌릴 수 있고, 중국은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쌓게 되는 불균형한 글로벌 교역체제에서 비롯됐다.

중국은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로 모자른 자금을 미국의 국채를 매입하는 형식으로 공급했다. 3년 뒤 또다시 세계는 금융위기에 빠졌다. 미국은 위축되고, 유럽은 열외 신세가 된 반면 아시아는 떠오르고 있다.

구매력 기준으로 보면 아시아 경제의 비중은 1980년의 8%에서 지난해 24%로 꾸준히 늘었다. 아시아 증시의 시가총액은 전세계 증시의 31%에 달해, 유럽의 25%를 앞섰고, 미국의 32%에 근소한 차이로 적다.

중국은 지난해 독일을 누르고 세계 최대 수출국가가 됐다. 중국의 대형 국영은행들은 시가총액에서 세계 최대 은행들이 됐다.

수입시장에서도 아시아 등 개발도상 경제권은 글로벌 경제를 이끌고 있다. 시멘트에서 계란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수입대국이다. 자동차 분야에서도 중국은 미국을 따라잡아 세계 최대의 자동차시장이 되었다.

중국은 상품 수요가 급증해 브라질과 긴밀한 무역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해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브라질 최대 교역국가가 되었다. 라틴아메리카는 경제가 불안정하기로 악명이 높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를 별 탈없이 넘겼다.

부시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는 "필요악으로서 다극체제론을 언급한 적이 있다. 다극체제는 상호의존이 규범이 되는 새로운 질서이며, 미국은 더 이상 패권국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세상이다.

9.11의 유산과 관련해 스탠더드차터드 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제러드 라이언스는 "지난 10년간 가장 중요한 어휘는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지금의 추세로 보면 향후 10년 기간에 가장 중요한 어휘는 '중국이 장악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사입력 2011-09-08 / 이승선 기자


 

[9.11 10주년, 세계의 시각]<5> 조지프 나이 "'테러와의 전쟁', 잘못된 이름"

"벌에 쏘이고 장검 빼든 미국, 헛힘만 썼다"

 

다음은 '소프트 파워'(문화적 영향력 등의 연성권력)라는 개념을 창안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가 9.11 10주년을 맞아 지난 1일(현지시간) 발표한 칼럼의 내용이다.

나이 교수는 노암 촘스키 교수나 <인디펜던트>의 로버트 피스크 중동전문 기자 등의 다른 평자와는 달리 9.11 이후 안보 개선을 위한 미국 정부의 노력에 비교적 우호적인 시선을 보낸다. '테러와의 전쟁'에 대해 범세계적인 관점이나 전쟁터가 된 중동 민중의 관점을 앞세우기보다 미국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나이 교수는 알카에다 등 소규모의 비국가 행위자들에 맞서 미국이라는 거인이 칼을 빼드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한 방법이라고 비판하며 중동에 특수부대나 항공모함을 보내기보다는 미국의 정당성과 이념을 설파하는데 더 힘을 쏟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칭 또한 '이슬람교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졌다며 이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실수였다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미국 중심주의에서 탈피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지만 현재 워싱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중의 하나인 나이 교수의 글은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정책적 실용주의 관점에서의 비판을 보여준다. 아래는 나이 교수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
☞원문 보기) <편집자>

▲ 아프가니스탄 판지시르 지방의 건설 현장에서 아프간 노동자들이 미군 헬기를 바라보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고양이에게 쥐가 덤벼들었던 날, 그 후의 10년
(Ten years after the mouse roared)


10년 전 미국에 대한 알카에다의 공격은 미국과 전세계에 크나큰 충격을 던졌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뭘까?

미국 정부 건물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은 9.11이 미국의 안보 시스템을 어떻게 바꿨는지 알게 된다. 하지만 테러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와중에도, 엄격해졌던 이민 제한은 다소 완화됐고, 9.11 직후의 히스테리적인 반응도 가라앉았다. 미 국토안보부와 국가정보국(DNI), 대테러센터(CTC) 등 새로 설립된 기구들이 미 정부를 바꿔놓은 것도 아니다. 대부분 미국인들의 개인적 자유는 별 영향을 받지 않았고 미국 내에서는 더 이상의 대규모 공격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민들의 일상생활은 복구됐다.

그러나 이 때문에 9.11이 가지는 장기적 의미가 간과돼서는 안된다. 필자가 <권력의 미래>(The Future of Power, 2010)에서 주장했듯 세계 정보화 시대의 주요 변화 중 하나는 비국가 행위자의 위상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알카에다는 1941년 일본 정부가 진주만에서 죽인 것보다 더 많은 미국인들을 죽였다. '전쟁의 사유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냉전 시기 미국은 소련으로부터의 핵 공격에 [오늘날 알카에다의 공격에 대해서보다] 기술적으로 더 취약했다. 그러나 '상호확신파괴'(MAD) 전략이 이 취약성을 보완해 균형을 맞췄다. 강력했던 소련의 군사력도 미국보다 더 강하지는 않았다. [MAD 전략이란 두 강대국 중 한쪽이 핵무기 선제공격을 가한다면 이는 상대방의 보복공격을 불러와 둘 모두 파멸할 것이 뻔하기에 오히려 평화가 유지된다는 개념. '공포의 균형'(balance of the terror)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2001년 9.11 테러에서는 두 가지 불균형이 알카에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첫째, 정보 불균형이다. 테러범들은 자신들의 목표물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지만 미국은 9.11 이전까지 테러 조직의 정체성이나 위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미 정부의 몇몇 보고서에서는 비국가 행위자들이 거대한 국가를 상대로 얼마나 큰 손해를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한 예견도 있었지만 이들의 결론이 정책에 반영되지는 않았다.

둘째, 집중력에서의 불균형이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목표를 가진 거대한 국가는 소규모 행위자들에게 집중하는데 종종 어려움을 겪는 반면, 소규모 행위자들은 뚜렷하게 [목표에] 집중할 수 있다. 미국의 정보 시스템 내에는 이미 알카에다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있었지만 미국은 다양한 기관들로부터 수집된 이 정보를 적절히 처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보와 집중력의 불균형이 테러리스트들에게 부여한 강점이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완벽한 안보' 같은 것은 없으며 역사적으로 봐도 테러의 물결이 사라지는 데는 한 세대가 소요된다. 하지만 알카에다 최고지도자의 제거나 미국의 정보역량 강화, 국경 보안 강화, 미 연방수사국(FBI)과 중앙정보국(CIA)의 협력 강화 등은 분명히 미국(과 그 동맹국들)을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9.11이 우리에게 주는 더 큰 교훈은 정보화 시대에서의 '서사'[narrative, 설득력]와 소프트 파워의 역할이다. 전통적인 분석에 따르면 [상대방보다] 더 강한 군대나 더 큰 국력이 승리를 가져온다. 하지만 정보화 시대의 결과는 누가 더 나은 서사를 갖고 있느냐에도 영향을 받는다. 중요한 것은 서사의 경쟁이다. 테러리즘 또한 서사이며 정치적 드라마다.

소규모 행위자는 거대한 행위자와 군사력으로 경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은 폭력을 이용해 그 타격 대상이 되는 국가의 소프트 파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서사를 생산해 내고 세계적인 의제(agenda)를 설정할 수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서사를 만드는 데 능숙했다. 빈 라덴은 자신이 바랐던 만큼 미국에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지만 10년 간 세계의 의제를 지배하는 데는 성공했다. 또 미국이 초기에 보인 무능 때문에 빈 라덴은 미국에 필요 이상의 비용 지출을 강요할 수 있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 선포라는 전술적 실수를 저질렀다. 미국에 전쟁을 선언한 알카에다만을 대상으로 한 구도를 잡는 것으로 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은 이라크 전쟁을 포함해 미국의 폭넓은 행동 모두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여졌다. 이라크전은 비싼 대가를 치른 어리석은 전쟁이었고 미국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게다가 많은 무슬림들은 '테러와의 전쟁'을 이슬람교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미국의 의도가 아니었지만 빈 라덴의 적절한 노력으로 인해 핵심적인 이슬람 국가들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은 악화됐다.

전쟁 비용으로 지출한 수 조 달러는 오늘날 미국을 병들게 한 재정 적자 사태를 불러왔다. [이로써] 빈 라덴은 미국의 '하드 파워'에도 손상을 입혔다. 9.11의 진정한 대가는 기회 비용이다.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세계 경제는 서서히 그 중심지를 아시아로 옮겼지만 미국은 중동에서 전쟁을 선택한 실수에 발이 묶여 있었다.

9.11의 핵심적 교훈은 빈 라덴과 같은 테러리스트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군사력도 필수적이지만 정통성과 사상이라는 소프트 파워 또한 승리의 필수적 요소라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알카에다가 자신들의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했던 주요 이슬람 국가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스마트 파워'[역시 나이 교수가 창안한 개념으로 하드 파워와 스마트 파워의 조화를 강조한다. 오바마 행정부 외교정책의 근간으로 평가된다] 전략은 소프트 파워를 무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의 외교정책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이 반세기 전 주장한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적어도 미국에 있어서 9.11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말했다.

"점령을 위한 전쟁(land war of occupation)에 개입하지 말고 미국의 경제력을 유지하는데 초점을 둘 것!"

* ( )는 원저자의 표기이며 [ ]는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임.

 

기사입력 2011-09-09 / 곽재훈 기자(번역)


 

[9.11 10주년, 세계의 시각]<6> 타리크 알리 "미국의 적, 그때 그때 달라"

"'테러와의 전쟁' 10년, 미국은 '저질국가'가 됐다"

 

'테러와의 전쟁' 10년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낳았고 세계경제의 중심지 미국에 어마어마한 부채를 남겼다. 그러나 이같은 실질적인 피해 못지않게 세계의 정치문화에도 심각한 해악을 끼쳤다는 비판이 나온다.

중동 출신 지식인으로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과 역사소설 <석류나무 그늘 아래>, <술탄 살라딘> 등을 통해 한국에도 잘 알려진 타리크 알리는 6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 기고를 통해 전쟁 이후 10년 동안 미국과 서방의 정치문화가 '저질'(debasement)로 변했다고 날을 세웠다.

알리는 '테러와의 전쟁'으로 인해 미국 시민들의 안보도 오히려 취약해졌다고 분석했다. 이는 테러범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테러범을 잡겠다는 명목 하에 국가권력이 시민들에게 가하는 억압 때문이다.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와 위키리크스에 정보를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는 브래들리 매닝처럼 미국의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공의 적'으로 지목됐다. 특히 알리는 지난 5월 2일 알카에다 지도자 빈 라덴 사살 직후 터져나온 미국 시민들의 반응은 미국 정치문화 '저질화'의 정점을 찍었다고 말했다.

또 알리는 "인도주의라는 미명하에 (세계에 대한) 미국의 섭정 정치가 행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주권'이란 국가의 정상 상태와 비상 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권한인데, 현재는 어떤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건 판단은 미국이 한다는 것이다. 중동‧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들은 물론 유럽 국가들마저 온전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실상 미국의 '부하'가 됐다고 그는 지적했다.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
원문 보기) <편집자>

▲ 빈 라덴 사살에 열광하는 미국인들 ⓒ영국 일간지 <가디언> 화면캠쳐

 

 

정의를 위한 미국의 '묻지마' 전쟁이 더 많은 적을 만들 것

한 세기 전 [독일 정치학자] 칼 슈미트는 "주권이란 '예외적 상황'이 뭔지를 정하는 권한이다"라고 말했다. 당시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군대가 세계 대부분을 지배했고, 미국은 고립주의를 표방할 때였다. 슈미트의 말에 대한 보수적 해석에 따르면, '예외'란 비상 사태, 즉 헌법 효력의 정지나 국내적인 억압, 전쟁 등을 수반하는 정치‧경제적 격변사태다.

9.11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은 수렁에 빠져있다. 2001년 일어난 일들은 세계를 개조하고 [미국에] 복종하지 않는 국가들을 처벌할 구실로 이용됐다. 하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미국‧유럽 국민들은 도덕의 결여라는 몸살을 앓고 있다. 이들은 전쟁으로 인해 불행해졌고, 체념했으며, 좋은/나쁜 전쟁에서의 지배적 제국주의 전략에 선동당했다.

[미군의 중동 지방 사령관이었던] 퍼트레이어스 장군(현 CIA국장)은 "우리가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 상황은 마치 이라크와 같다. 이라크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아직도 공포스러운 공격이 계속되고 있고 따라서 우리는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남은 인생, 또는 우리 아이들 세대의 인생 동안 계속될 그런 종류의 싸움이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예외'를 규정하는 주권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전쟁이라는] 예외가 곧 정상 상태다.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인권과 보편성에 대한 주장은 미묘하고 기만적인 서구의 지배 도구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서 '미묘한'이란 말은 불필요하다. 지배당하는 나라들의 경험을 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10년 동안 전쟁이 계속된 아프간에서는 교착상태가 이어지면서 잔혹한 유혈 참극이 벌어지고 있고, 부패한 꼭두각시 정권은 제 주머니 채우기에 여념이 없으며, 미군과 나토(NATO)군은 저항세력에 고전하고 있다.

저항세력은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의 부패한 형제를 살해했으며 나토의 핵심 정보 당국자를 자살폭탄 테러로 노리거나 [미군] 헬리콥터를 미사일로 떨어뜨렸다. 몇 년 전부터 미국과 탈레반 사이의 물밑 협상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탈레반을 새로운 정부로 끌어들이려 할 만큼 미국과 카르자이 정부가 절망에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자이거나 보수주의자이거나,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들은 여전히 벽에 그려진 낙서도 보지 못할 만큼 눈이 가려져 있다. 이들은 테러리스트들의 폭력에 대해서는 위선적으로 거부하면서도 [그들 스스로의] 고문과 신병구속, 암살, 아무나 잡아다 재판도 없이 구속시킬 수 있는 자국 내에서의 '법치주의의 예외' 상황은 거리낌없이 변호한다. 전쟁에 반대하는 유럽과 미국의 선량한 시민들조차 이라크‧아프간‧리비아‧파키스탄 등등의 사망자와 부상자, 고아들에 대해서는 시선을 돌린다.

[국제법상의] 교전권(jus belli)은 이제 미국이 승인하거나 그 자신에 의해 행해지는 전쟁에 대해서만 정당한 법적 장치다. 최근에는 [전쟁에] '인도주의적' 필요가 있다고 한다. [리비아에서] 한 쪽은 범죄를 저지르느라 바쁘고 자칭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쪽은 [그에 대한] 처벌만을 하고 있다. 패배할 국가[카다피 정권]는 주권을 부정당했고 그 대체 세력은 돈과 [서방의] 군사 기지로 질서를 유지할 것이다. 이런 21세기형 식민화 또는 지배 전략은 정치‧군사적 작전의 필수 요소인 글로벌 미디어의 조력을 받는다.

미국의 국내 안보상황을 보자. 2008년 11월[버락 오바마의 대선 승리] 이후 자유주의자들이 상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미국 정치문화가 급속히 '저질화'하고 있다. 변호사 출신 [오바마]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이런 흐름을 바로잡는 대신 고의적으로 가속화시켰다. 조지 부시 행정부 때보다 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추방당했다. 재판도 없이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힌 수감자들도 부시 때보다 풀려난 숫자가 더 적다. 오바마 자신이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겠다고 했으면서도 말이다. '애국법'(Patriot Act)도 연장됐다. 리비아에서는 의회의 승인 없이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이에 대해서는 주권국가에 대한 폭격이 '적대행위'로 해석돼서는 안 된다는 취약한 근거만이 제시됐을 뿐이다. 내부고발자들에 대한 기소도 강화됐다.

정치와 권력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했다. 아직도 '부시 정부는 법을 어겼지만 민주당은 원리원칙대로 하고 있다'고 믿는 자유주의자들이 있다면 이들은 진영 논리에 빠져 장님이 된 것이다. 오바마의 화려한 말솜씨로도 이제 현 정부를 부시 행정부와 뚜렷이 구분짓지 못한다. 권력자들과 선동가들은 자신들의 금기와 편견을 미국 사회에 강요하고 있다. 권력은 반대자들을 무자비하게 침묵시켰다. 브래들리 매닝, 토머스 드레이크, 줄리안 어산지, 스티븐 김 등은 범죄자, 공공의 적으로 취급된다.

[미국 정치의] 저질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빈 라덴 사살 작전이다. 빈 라덴은 사로잡혀 재판을 받아야 했지만 아무도 그럴 의도는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의 분위기도 뉴욕에서 들려온 함성과 다르지 않았다. "미국! 미국! 오바마가 오사마를 잡았다! 빈 라덴은 더 이상 우리를 공격할 수 없다! (짝짝짝짝짝) 엿 먹어라, 빈 라덴!" 제국주의의 군소 협력자들이며 스스로는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자들인 유럽 지도자들의 반응 또한 좀더 외교적인 언어로 포장됐을 뿐 이와 동일했다. 위선은 정치문화의 새로운 흐름이 됐다.

'인도주의적 개입'의 최신 사례인 리비아를 보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이름으로 이뤄진 미국과 나토의 리비아 개입은 독재자를 몰아내기 위한 운동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또한 아랍 반군들에게 서방의 지배를 강요하고 그들의 힘과 자율성을 훼손해 현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이제 명백해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6개월간 공습의 대가로 그들이 리비아 석유자원을 통제할 것이라면서 성공했다고 떠벌리고 다닌다.

시민사회는 전투기를 보내 시민들을 폭격하라는 무아마르 카다피의 잔혹함에 크게 동요했다. 하지만 카다피의 잔혹함은 미국이 이 아랍 국가의 수도를 폭격하도록 하는 구실이 됐다. 한편 오바마의 아랍 동맹국들은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데 열심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군대는 국민들이 학대받고 있고 대규모 체포 사태가 일어난 바레인에 들어갔다. 이는 <알자지라> 방송에 보도되지 않았다. 왜일까? 방송국이 후원자[카타르 왕실]의 정치적 노선에 맞춰졌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싫어하는 예멘의 독재자는 사우디에서 원격조종으로 매일매일 국민들을 죽이고 있다. 그런데도 예멘에 대해서는 비행금지구역이 설치됐을 뿐 무기금수 조치도 행해지지 않았다. 리비아는 미국과 그 사냥개들의 '선택적 사적 제재'의 사례일 뿐이다.

서방이 창설하려 하고 있는 비열한 섭정 정치는 미국 정부에 의해 결정된다. [카다피 정권에 대한] 절망 때문에 나토의 폭격을 지지했던 리비아인들도 (이라크에 있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같이) 그들의 선택을 후회할 것이다. 이는 ['아랍의 봄'의] 제3막을 열 것이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는 사우디와, 사우디 왕가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미국을 향할 것이다. 사우디를 잃는다면 미국은 걸프만을 잃게 된다. 카다피 정권의 바보짓으로 인해 많은 도움을 받았던 서방의 리비아 공습은 오히려 [반군에 대한] 지지를 떨어뜨릴 것이다. 바레인, 이집트, 튀니지, 사우디, 예멘도 [서방의 공습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고 미국‧유럽 내에서도 반대가 심할 것이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19세기의 독일 시인 테어도어 도이블러는 이렇게 말했다.

"적이란 우리 스스로의 질문이 구체화된 것
적들은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우리도 같은 방법으로 적을 괴롭힐 것이다"


오늘날, 문제는 '적'의 범주다. 적은 미국의 정책적 필요에 의해 결정되지만 너무 자주 바뀐다. 지난날 카다피와 사담 후세인은 서방의 친구였고 정기적으로 서방 정보기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후세인과 카다피의 적이 서방의 친구가 됐고 그들은 적이 됐다. 전지구적인 혼란이 계속된다. 유럽 지도자들은 빈 라덴이 사살되어 세계가 좀 더 안전한 곳이 된 것처럼 축하의 인사를 건넸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 ( )는 원저자의 표기이며 [ ]는 옮긴이가 덧붙인 내용임.

 

 

기사입력 2011-09-10 / 곽재훈 기자(번역)


 

[9.11 10주년, 세계의 시각]<7> 반전 영화감독이 겪은 미국

마이클 무어 "부시가 나를 구원했다"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중 하나가 마이클 무어다. 미국의 유명 다큐멘터리 감독인 무어는 <볼링 포 콜럼바인>, <화씨 9/11>, <식코> 등으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영화인이다. 특히 부시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9.11 테러 관련 의혹을 다룬 <화씨 9/11>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2004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

미국의 치부를 예리하게 들춰내는 마이클 무어의 작품에 대한 지지와 비난은 극단으로 갈린다.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클린튼 이스트우드 감독마저도 무어 앞에서 "그가 카메라를 들고 내 집으로 찾아온다면 총으로 쏴 버릴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마이클 무어에 대한 비난은 부시 미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이후 극에 달했다. 무어는 2003년 <볼링 포 콜럼바인>으로 아카데미상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에 선정된 자리에서 당시 이라크 전쟁에 나선 부시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비난해 찬물을 끼얹었다. 테러의 충격 속에 대다수가 전쟁을 지지했던 미국인들은 곧 그에게 광기에 가까운 비난을 쏟아냈다. 반대로 그를 '미국의 양심'으로 추앙하는 여론도 강력했다.

<가디언>은 오는 13일 발간되는 무어의 새 책 <히어 컴스 트러블(Here Comes Trouble)>의 일부 내용을 입수해 7일 공개했다. 무어는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미국에서 가장 미움 받는 남자가 됐고,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공격했는지, 그리고 그 비난에 못이겨 은둔하게 된 사정과 어떻게 다시 일어서게 됐는지를 밝혔다. 공교롭게도 마이클 무어가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된 계기는 부시 전 대통령이었다. <가디언>이 공개한 책 내용을 요약해 싣는다. <편집자>
(☞원문 보기)'


▲ 팬들과 만나고 있는 마이클 무어 감독(완쪽) ⓒ뉴시스

난 미국에서 가장 미움 받는 남자였다.

"전 마이클 무어를 죽이는 걸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죽일지, 아니면 누군가를 고용해야 하는지…아니죠, 제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겁니다. 그리고 전 그의 목을 졸라 죽일 것입니다.

전 이제 선악을 구분하는 감각도 잃어버렸습니다. 전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래, 난 마이클 무어를 죽일 거야.' 그리고 이어서 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글을 봤죠. 그리고 전 깨닫습니다. '오, 넌 마이클 무어를 죽이지 못할 거야. 아니면 적어도 넌 그의 목을 졸라 죽이지 못할 거야'. 아시겠지만, 음, 잘 모르겠네요."(2005년 5월 17일 극우 방송인 글렌 벡이 라디오 쇼에서 한 말)

내(마이클 무어)가 빨리 죽어버리길 바라는 마음은 어디에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바람은 2004년 7월의 어느 화창한 아침 <CNN>의 아나운서 빌 헤머의 마음속에도 있었다. 그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는 내 면전에 마이크를 들이대고 "사람들은 마이클 무어가 죽길 바란다는 말을 한다"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헤머는 사람들이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듯이 말했다. 그는 해가 동쪽에서 뜨고 옥수수가 옥수숫대에서 열리는 것처럼 시청자들이 이미 그 말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내 영화가 많은 이들을 미칠 듯이 화나게 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난 아직도 살아있는가? 1년이 넘도록 위협과 협박, 괴롭힘을 당했고 심지어 백주 대낮에 폭행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던 첫해였다. 당시 정부와 함께 일하던 최고의 안보 전문가는 내게 "당신보다 더 위험한 사람은 부시 대통령 말고는 없다"라고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나? 내가 자초한 것인가? 물론 그렇다. 그리고 난 그 시작을 기억한다.

2003년 3월 23일 밤이었다. 그로부터 4일 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불법이었고, 부도덕했으며 멍청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국민의 70%가 전쟁을 지지했다. 이 전쟁이 벌어진지 4일 후 내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이 아카데미상 후보로 올랐다. 난 시상식에 참석했지만 레드 카펫을 걷는 동안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전쟁을 비판하는] 무엇인가를 말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전시에는 모두가 전쟁을 뒤에서 지원하고 합심해야 하니까.

영화배우 다이앤 레인이 무대로 올라가 최우수 다큐멘터리 후보작 명단을 읽어 내려갔다. 봉투가 개봉됐고 그는 고소함을 감추지 못하며 내가 상을 타게 됐다고 발표했다. 객석을 채운 배우와 감독, 작가들은 벌떡 일어나 내게 오랫동안 기립박수를 보냈다. 나는 경쟁작을 만든 다른 후보들에게도 무대로 올라올 것을 요청했고, 그들은 응했다. 박수가 잦아들고 난 수상 소감을 말했다.

"저와 경쟁했던 이들을 무대로 초청했습니다. 저의들은 논픽션[실화]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은 저와 연대해 이곳에 섰습니다. 우리는 논픽션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린 지금 소설같은 시대에 삽니다. 거짓된 선거가 가짜 대통령을 선출한 시대에 삽니다. 우리는 가짜 이유를 대며 우리를 전쟁에 내보내는 남자[대통령]가 있는 시대에 삽니다. 이 소설이 무엇에 대한 소설이든 우리는 이 전쟁을 반대합니다. 부시, 부끄러운 줄 아시오. 부끄러운 줄 알라고! 당신의 시대는 끝났어! 감사합니다."



 

소감을 절반 정도 밝힐 즈음 모두가 큰 혼란에 빠졌다. 무대 뒤와 일반 객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마틴 스콜세지 감독이나 여배우 메릴 스트립 등 소수만이 날 격려했지만 야유에 묻혔다) 시상식 제작자는 날 끌어내기 위해 오케스트라에게 음악을 연주하라고 지시했다. 마이크가 바닥으로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커다란 스크린에 붉은 색 글자가 내 앞에서 번쩍였다. "수상 소감 발표 시간 종료"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그것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난 급히 무대 밖으로 내보내졌다.

몇 명만 아는 사실이 있다. 아카데미상 수상자가 [소감을 마치고] 무대 뒤로 내려오면 커튼 바로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매력적인 젊은이들로부터 두 가지 말을 듣게 된다. 한 젊은 여성은 "샴페인 드릴까요?"라고 물으며 샴페인 한 잔을 건넨다. 옆에 있는 남성은 이어서 "구취제 드릴까요?"라고 물으며 구취제를 건낸다. 모든 수상자들이 처음에 이 두 마디를 듣지만 난 운 좋게도 다른 말을 들었다. 화가 난 무대 담당자가 바짝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있는 힘껏 "얼간이!"라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쏟아지는 비난들

그날 밤 난 잠을 이루지 못해 텔레비전을 켰다. 1시간 동안 지역방송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장면을 보여줬다. 채널 사이를 오가고 있을 때 한 전문가가 나의 분별력에 의문을 던지며 내 수상 소감을 비판하다가 "그가 제정신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런 멍청한 행동을 하고나서 마이클 무어는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이다!" "누가 그와 다른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겠는가?" "경력을 스스로 끝장냈다." 이런 비난이 1시간 동안 이어진 후 난 텔레비전을 끄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미국 전역에서 비슷한 종류의 비난이 더 쏟아지고 있었다. 난 몸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난 컴퓨터와 조명을 끈 뒤 어둠 속에 앉아 계속해서 내가 한 일을 생각했다. 잘했어 마이클. 속 시원해.

내가 미시건주 북부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지역 미화(美化) 위원회가 트럭 세 대 분량의 거름을 집 앞 도로에 허리까지 잠길 정도로 쏟아 부어놔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집은 "꺼져! 쿠바로 가버려! 빨갱이! 배신자!" 등의 낙서로 장식됐다. 수상 소감에 항의하는 편지와 전화가 쏟아졌다. 가장 최악의 순간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올 때였다. 지역 보안관은 우리에게 사설 경호원을 고용하라고 제안했다. 위협과 살해 협박은 끊이지 않았고, 난 그해 말 전직 미 해군 특수부대원 9명을 고용해 24시간 지키게 했다.

<화씨 9/11>로 반격하다

'오스카[아카데미상] 폭동' 으로 기피 인물로 낙인찍힌 뒤 난 미국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남자가 됐다. 나는 나 같은 위치에 있는 누구라도 했을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미합중국 대통령은 전범임을 밝히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다.

왜 쉬운 길을 가지 않았냐고? 어쨌든 이미 끝난 일이다. 내게 다음 영화의 제작비를 대겠다고 약속했던 제작사는 오스카 사건 이후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알려왔다. 다행히 다른 제작사에서 제안이 왔다. 하지만 그 제작사는 내게 관객들이 화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 제작사의 소유주는 이라크 침공을 지지했다. 난 그에게 난 이미 관객들을 열 받게 했다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최고의 영화를 함께 만들지 않겠냐고 했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 <화씨 9/11>을 찍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스텝들에게 우리가 영화계에서 한 마지막 작업을 하는 것처럼 일하라고 했다. 감동적인 말은 아니었지만 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우리는 11개월 동안 미쳐가고 있는 미국과 미국 정부에 대한 고발 영화를 만들었다.

2004년 영화가 개봉됐을 때 전쟁은 시작된지 1년을 조금 넘었고, 미국인 대다수는 여전히 전쟁을 지지했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됐고 우리는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지난 50년 동안 칸에서 다큐멘터리가 이 상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화씨 9/11>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으로 백악관은 겁을 먹었다. 부시의 재선 캠페인을 맡은 이들은 이 영화가 선거에서 패배할 '티핑 포인트[아이디어나 경향이 한꺼번에 번지는 극적인 순간]'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이 영화가 유권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여론조사를 벌였다. 떨어져 있는 도시 세 곳에서 영화가 상영됐고, [부시의 선거 참모] 칼 로브가 접한 뉴스는 좋지 않았다. 이 영화는 민주당 지지자 뿐 아니라 공화당을 지지하던 여성 유권자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영화 제작사측은 이미 자체 조사를 통해 공화당 지지자 3분의 1이 이 영화를 본 후 다른 이들에게 영화를 추천했다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백악관의 여론조사에는 더 위험한 징후가 보였다. 공화당을 지지하는 여성 유권자의 10%가 영화를 본 후 [민주당 대선후보] 존 케리에게 투표하거나 그냥 투표하지 않고 집에 있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몇 표 차이가 당락을 가르는 선거에서 이는 엄청난 소식이었다.

이 영화는 미국 북부지역에서 개봉 첫 주 흥행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백악관에겐 안 된 일이지만 미국 모든 주에서 개봉 첫 주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도 영화를 보러 갔고 이라크에 파병된 군인들이 보는 불법 복제 영화 순위에서도 1위였다. <스타워즈 6>의 개봉 첫 주 흥행기록도 깨트렸다.

이 모든 일을 하면서 난 타깃이 됐다. 소설같은, 미친, 꾸며낸 작품이라는 공격이 뒤따랐지만 나는 대응하지 않았다. 그런 비난이 중요하게 비춰지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문 칼럼과 인터넷 등 모든 곳에서 마이클 무어는 미국을 싫어하고, 거짓말쟁이이며 음모론자라는 비난이 제기됐다. 공화당 지지자들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을 막으려는 반대 캠페인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건 먹혀들었다. 물론 민주당의 존 케리가 형편없는 후보였다는 점도 있다. 부시는 [2004년 대선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오하이오주에서 이김으로써 재선에 성공했다.

공화당 쪽 전문가들이 내게 쏟아낸 비난은 상처를 남겼다. 그런 비난은 이미 이성을 잃은 이들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증오하는 말을 휘갈긴 쪽지를 보내다가 이제 전면적인 물리적 공격을 가했고 상황은 더 나빠졌다.


보디가드와 함께 생활

[경호원으로 고용한] 전직 특수부대원들은 우리와 함께 살았다. 내가 거리를 걸으면 그들은 내 주위를 빙 둘러싸야만 했다. 밤이 되면 그들은 야간 투시경 같은 특수 장비를 착용했다.

나를 보호하는 경호회사는 내게 위협을 가할만한 이들을 조사했다. 난 파일을 보여 달라고 했다. 담당관은 내게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가하려던 위협의 강도에 대해 읽어내려 갔다. 그가 수십 명을 열거한 후 멈춘 뒤 내게 물었다. "정말 계속 할까요? 429개가 더 있습니다."

공공장소에 나갔을 때 사고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처음엔 사람들이 레스토랑에서 내게 다른 자리로 옮겨달라고 요청하거나 택시 기사가 도로 한가운데서 차를 멈추고 내게 소리를 지르는 정도였다. [하지만] 언어폭력은 곧 물리적[폭력]으로 바뀌었고 경호원들은 고도의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이에 대해선 보안상의 이유로 자세히 말할 수 없다. 경호기관의 충고도 있지만, 그들의 흥미를 끌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격의 예를 들면] 내쉬빌에서 칼을 소지한 한 남성이 무대에 올라가 내게 다가왔다. 경호원들이 그를 붙잡고 무대 앞 시멘트 바닥에 내던졌다. 그를 내쫓은 후 누군가 바닥의 피를 치웠다.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에서는 잘 차려입은 한 남성이 거리에서 날 보더니 미쳐버렸다. 그는 들고 있던 뜨거운 커피를 내 얼굴에 뿌리려 했다. 경호원들이 이 남자를 제지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때리려 했다. 그의 안면은 커피로 화상을 입었고 우린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했다.

<화씨 9/11>이 상영되고 있는 뉴욕의 한 극장 밖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걸어가던 한 남자가 날 보더니 흥분해서 주머니에서 날카롭게 깎인 연필을 꺼냈다. 날 찌르려고 달려들었을 때 경호원 한 명이 나와 그 사이를 손으로 막았고 연필은 경호원의 손을 관통했다.

그리고 리 제임스 헤들리가 있다. 그는 오하이오에 있는 자기 집에 홀로 앉아서 거대한 계획을 짰다. 그의 일기를 보면 세계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망가지고 있었다. 그가 적은 말들은 [극우 방송인] 러시 림보의 라디오 쇼에서 다루는 주제 같았다. 그리고 헤들리는 명단을 만들었다. '보내버려야 할' 사람들이 적힌 짧은 명단이었다. 명단의 맨 꼭대기에는 그의 최우선 타깃이 올라가 있었다. 마이클 무어. 내 이름 뒤에 그는 '표적'이라고 적었다.(나중에 그가 설명하길 '죽음의 표적'이라고 했다)

2004년 봄 내내 헤들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를 모았다. 수천 개의 탄약과 다양한 폭탄 재료들. 그는 무기 제작법이 쓰여 있는 책을 샀다. 그의 노트에는 로켓 발사기와 폭탄의 도해가 그려져 있었고 그는 계속해서 "싸워, 싸워, 싸워, 죽여, 죽여, 죽여!"라고 적었다.

그러나 2004년 어느 날 밤 그는 실수로 가지고 있던 AK-47 소총 중 하나를 집 안에서 발사했고 총소리를 들은 이웃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도착해 집 안에서 무기와 탄약, 폭탄 재료를 찾아냈다. 그가 적어놓은 명단도.

며칠 뒤 난 경비업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경찰이 당신의 집을 날려버리려고 계획했던 남자를 구금하고 있습니다. 이제 안전합니다."

숨을 죽였다. 내가 들었던 것을 이해하려고 해봤다. 내게 이건 최후의 결정타였다. 난 무너져 내렸다. 내 아내는 이미 우리가 함께 했던 삶을 잃어버린데 절망하고 있었다. 나는 자문했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했나? 영화를 만든 것? 누군가가 내 집을 날려버리고 싶게 만든 영화?

몇 달이 흐르고 부시가 재선에 성공한 후에도 나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은 더 격렬해졌다. 글렌 벡이 라디오에서 날 죽이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방송 규제당국에 의해 벌금을 물거나 뉴욕 경찰에 체포되지도 않았다. 그는 결국 나를 죽이겠다는 전화를 했고, 당시 언론은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외출했을 때 누군가 집에 무단 침입해 침실 창문 바깥에 무엇인가를 놓고 갔다. 내 아내를 소름끼치게 했다. 그는 심지어 이런 일을 저지른 자신의 모습을 비디오로 찍기도 했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 다큐를 '마이클 무어 쏘기'라고 불렀다. 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화면에 이 단어가 뜨고 총소리가 들린다. 미디어가 이를 보도했고, 그는 <폭스뉴스>를 비롯한 많은 프로그램에 초대받았다. 그는 그가 어떻게 내 집에 불법으로 침입했는지를 설명하는 비디오와 지도를 제공했다.

이 사건이 내 사생활에 가져다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내 작품이 실제로 가치가 있는지 자문해봤다. 내가 또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아카데미 수상 소감을 철회하고, 무대를 내려가 내 에이전트와 턱시도를 입은 이들에게 감사를 보낸 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떠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까? 그게 내 가족이 안전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내가 상시적인 위험 속에서 살지 않는 길이라면 말이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답을 알고 있다.

"부시가 나를 구했다"

이후 2년 반 동안 난 집을 자주 비우지 않았다. 2005년 1월부터 2007년 5월까지 난 텔레비전에 출현하지 않았다. 대학 초청강연도 중단했다. 도시에서 멀어졌다. 이전에 50개가 넘는 대학에서 강연했지만 그 2년 동안 단 1곳에서만 했다. 집 근처에만 머물렀고 내가 살고 있는 미시건주의 몇몇 지역 사업에서 일했다.

이런 나를 구한 것은 부시 대통령이었다. 부시가 한 말에 난 기운을 차렸다. 이전에도 그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 그 말을 들었을 땐 부시가 나에게 직접 얘기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우리가 테러리스트에게 굴복한다면, 테러리스트가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맞았다. 그의 테러리스트가 이기고 있었다. 나를 상대로! 내가 집 안에 앉아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난 창문의 블라인드를 걷고 일에 복귀했다. 이후 3년간 3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을 돕는데 몸을 던졌다. 그리고 미시건주의 두 공화당 의원을 실업자로 만들었다. 인기 좋은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내게 야유를 보냈던 아카데미 위원회의 이사회 멤버로 뽑혔다.

나는 굴복하지 않는 편을 선택했다. 사실은 굉장히 굴복하고 싶었다. 대신에 건강해졌다. 당신이 내게 펀치를 먹인다면, 난 당신에게 세 가지 일이 벌어질 것을 보장한다. 첫 번째, 당신은 손이 부러질 것이다. 둘째, 난 당신 위로 넘어져 당신을 깔아뭉갤 것이다. 셋째, 내 경호원들이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집에서 직접 만든 고추 성분 스프레이를 당신의 눈에 직접 뿌릴 것이다. 평화주의자로서, 미리 하는 나의 사과를 받아드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결코, 나나 다른 이들에게 다시는 폭력을 쓰지 말라.

얼마 뒤 난 [제이 레노가 진행하는 미국 <NBC> 방송] <투나잇 쇼>에 출연했다. 내가 무대를 밖에 있을 때 붐 마이크를 잡고 있던 한 사내가 다가왔다. "아마 절 기억 못할 거예요"라고 그가 주뼛주뼛 말을 걸었다. "전 결코 당신을 다시 보거나 말을 걸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러고 있는 것도 믿기지 않네요"

이러고 있는 게 뭔데? 난 생각해봤다. 나는 이 남자의 '곧 부러질 손'을 떠올리며 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그는 "제가 당신에게 사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 당신의 오스카상을 망친 사람입니다. 전 당신이 무대를 내려오자마자 당신의 귀에 대고 '얼간이'라고 외쳤어요. 전 당신이 부시 대통령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맞았어요. 그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건을 마음속에 담고 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난 한껏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사과를 받아드릴게요. 그러나 내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대통령을 믿었어요! 당신은 대통령을 지지해야만 했어요! 우리가 어떤 대통령이든 재직 중에 최소한의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다면, 젠장, 우린 운이 다한 거죠."

그가 안도하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나는 말했다. "이해? 이건 이해해 관한 게 아니에요. 난 이 웃긴 이야기를 몇 년간 들려줬어요. 오스카 수상자가 됐을 때 듣는 첫 두 마디에 대해서요. 그리고 난 어떻게 제3의 말을 들었는지도요. 이봐요, 이 이야기를 내게서 빼앗아 가지 말아요. 사람들이 좋아한단 말이에요." 그가 웃었고, 나도 웃었다.

"네." 그가 말했다. "그만큼 재밌는 이야기는 별로 없네요."

* ( )는 원저자의 표기이며, [ ]는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입니다.

 

기사입력 2011-09-12  / 김봉규 기자(번역)


 

 

 

[9.11 10주년, 세계의 시각]<8> 마이크 데이비스 "<美제국쇠망사>를 쓴다면…"

"쌍둥이 빌딩의 붕괴, 21세기 '사라예보 사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국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와 <슬럼, 지구를 뒤덮다>, <한권으로 읽는 자동차 폭탄의 역사>의 저자 마이크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교수(역사학)는 미국의 쇠퇴라는 관점에서 '미래의 역사가들은 미국을 어떻게 기억할까?'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데이비스 교수는 9.11 테러 이후 10년 동안 있었던 테러와의 전쟁이 미국의 국력을 약화시킨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국은 전쟁에 발목이 잡히는 바람에 아랍과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주요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또 9.11 테러라는 사상 초유의 참극이 일어난 것은 명백한 불행이지만 전쟁은 피해갈 수 있는 일이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전쟁이 일어난 것은 9.11 테러 때문이 아니라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이미 이라크 침공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미국이 '무고한 희생자들'의 이름을 앞세워 불법적인 침략전쟁을 벌인 것은 미국 역사를 뒤돌아보면 늘상 있어온 일이었다고 꼬집었다. 다음은 13일(현지시간) 미국 웹사이트 '톰디스패치'에 실린 데이비스 교수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원문 보기) <편집자>

▲ 마크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특수부대를 투입한 비밀작전과 무인정찰기 전쟁 등을 '부시의 유산'으로 지목하며 "오바마 대통령이 부시의 유산 관리인이 됐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쇠망은 어떻게 기억될까?

1. 쌍둥이 빌딩

2년 후면 미국 잡지 <베니티 페어>과 <뉴요커> 제작진은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건물[새로 지어질 세계무역센터]에 입주할 것이다. 거기서 미국의 유명 사진작가와 가십 칼럼니스트, 잡지 편집자들은 무시무시한 새로운 뮤즈[영감의 원천]를 만날지도 모른다.

세계무역센터 건물의 고층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빈 공간은 유령이 나올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들의 유리창으로부터 불과 몇 미터 밖은 지난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6분, 많은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 있었던 그 자리니까 말이다.

걱정할 것은 없다. 후원자들이 강조하듯이 새 세계무역센터(WTC)는 9.11 희생자들의 가족들에게 지속적인 위로가 될 것이며 시민적‧국가적 부활의 상징이 될 것이다. 그 일대의 자산 가치도 다시 치솟을 것은 물론이다.

(장엄한 기념관과 부동산 시세 전망의 결합이라니, 끔찍할 뿐이다. 마치 [진주만 공습에 침몰한 미국 전함] 애리조나 호가 가라앉은 지점 위에 요트 마리나 클럽을 짓거나 뉴올리언스 주에 '카트리나 테마 파크'를 세우는 것과 뭐가 다른가?)

새 WTC는 원래 맨해튼에서 가장 높은 것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지어질 계획이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지난해 완공된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가 됐다. 또 몇 년 후면 두바이는 그 우승컵을 사우디 아라비아와 빈 라덴 일가에게 내줘야 할 것이다. '아랍의 워렌 버핏' 알왈리드 빈 탈랄 사우디 왕자가 돈을 댄 사우디 남부 항구도시 제다의 '킹덤 타워'는 홍해변의 구름을 뚫고 무려 1km 높이로 세워질 예정이다.

이 빌딩을 짓는 몇십억 달러짜리 건설 계약을 수주한 것은 중동의 건축업자이자 고층빌딩 설계 전문가 집단인 빈 라덴 그룹[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일족들]이다. 다음 세기 내내 그들 가족의 이름이 남을 것이다.

2. 공모

10년 전 맨해튼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났다. [1차대전의 도화선이 됐던] 1914년 6월 28일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 암살 사건과 3000명의 미국 시민에 대한 학살을 견줄 수는 없겠지만, 앞뒤 정황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두 사건 모두 비주류‧소규모지만 잘 조직된 음모가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자신들에 눈에 비친 지역의 불평불만을 터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공격 대상은 [그 불만에] 책임이 있는 제국의 상징이었다. 이들의 분노는 큰 격변을 낳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음모가들의 어두운 상상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한 국제정치적 폭발의 강도는 단순히 그들이 저지른 행위 그 이상이었다. 예를 들어 1890~1940년 사이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국왕과 오스트리아의 황후, 3명의 스페인 총리, 2명의 프랑스 대통령 등 20명 이상의 국가 수반이 암살됐지만 [사라예보에서의] 프란츠 페르디난드 황태자 내외의 암살 외 어떤 것도 전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마찬가지다. 1983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트럭을 이용한 자폭테러로 241명의 미 해병대원과 수병들이 사망했다. (58명의 프랑스 공수부대원들도 같은날 목숨을 잃었다) 민주당 출신 미국 대통령이었다면 아마 틀림없이 대규모 보복을 가하고 레바논 내전에 본격 개입하라는 압력을 받았겠지만, [공화당 출신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매우 신속하게 사람들의 관심을 그레나다 침공으로 돌렸다. 중동에 파견된 나머지 해병대 병력은 철군했다.

사라예보 사건과 9.11 테러가 전지구적 학살과 혼돈을 가져왔다면 이는 공격하는 쪽과 공격받는 쪽의 사실상 공모 때문이다. 발칸반도에서 영국군의 역할에 대한 것이나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들이 쌍둥이 빌딩을 폭파했다는 음모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사실들을 말하는 것이다.

1912년 독일 제2제국의 군 지도부는 이미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지 W. 부시 정권의 네오콘들도 2000년 대선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이라크와 이란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호엔촐레른가[독일 제2제국 왕가]와 텍사스 파벌들은 군사적 침공을 정당화하고 국내 반대파들을 침묵시킬 개전 사유(casus belli)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프러시아의 군국주의가 페르디난드 대공 부부를 살해한 세르비아 극우 민족주의 단체 흑수단(黑手團)의 도움을 받았다면, 알카에다의 '9.11 호러 쇼'는 백악관의 우파들이 고문과 비밀 체포, 리모콘으로 살해 작전을 펼치는 것을 정당화했다. 당시에는 부시와 체니가 헌법에 대한 쿠데타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었지만, 정확히 보자면 전례를 따른 것에 불과하다.

3. '무고한 희생'과 침공

미국이 [국외로] 세력을 확장시켰을 때, 그 부분들을 다룬 역사책의 모든 장(章)은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무고한 미국인들이 공격당했다."

1898년 쿠바의 아바나에서 274명의 미국 해병대원들이 사망한 것을 기억하는가? [이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이 벌어져 스페인 식민지였던 쿠바에는 친미 성향 독립정권이 세워졌고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은 미국 영토가 됐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1915년 미국 상선 루시타니아 호가 침몰한 사건은? (128명의 미국인을 포함해 1198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1차대전에 참전했다.]

1916년 뉴멕시코주 콜럼버스시에 대한 [멕시코의 혁명가] 판초 비야의 습격 사건은?(18명의 미국 시민이 죽었다) [미국은 판초 비야 토벌을 위해 기병대를 파견해 멕시코 국내까지 진격했다] 진주만은? (2402명이 죽었다) 늘 비슷하게 은밀한 공격이 가해졌고, 정당한 전 국가적 분노가 터져나온 것도 비슷했다.

역사가들은 그 외에도 1899년 [의화단의 난 당시] 중국 베이징에서 미국 외교관들이 포위된 사건과 [미군에 체포된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마닐라 외곽에서의 '배반' 행위, 1900~30년대 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에서 벌어진 미국 은행‧사업가들에 대한 다양한 범죄행위들 [이후 미국은 도미니카와 아이티 등 카리브해 인근 국가에 군대를 파견해 세관을 접수하고 군사통치를 폈다] 역시 떠올릴 것이다.

1938년 일본 공군이 미 경비정 파나이 호를 폭격해 침몰시킨 사건, 1950년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 1964년 통킹 만 사건, 1968년 북한의 푸에블로 호 나포 사건, 1975년 캄보디아의 마야구에즈 호 나포 사건, 1979년 이란의 미국 대사관 인질사태, 1983년 그레나다에서 미국 의대생들이 위험에 처했던 일[그레나다 침공의 빌미], 1989년 파나마에서 미국 군인들이 공격받은 일[파나마 침공의 빌미]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똑같다. [공격받은데 대한] 스스로에 대한 동정심과 [그 보복으로서] 침공의 조합은 미국 역사를 통틀어 되풀이됐다.

'무고한 미국인들'의 이름으로 미국은 하와이와 푸에르토리코를 병합했고, 필리핀을 식민지화했으며, 북아프리카와 중국에서 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했다. 멕시코를 (두 번이나) 침공했고 아이티와 도미니카, 니카라과의 애국자들을 학살했다. 일본의 [2개] 도시를 절멸시켰고 한국과 인도차이나 반도에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중남미에서는 군사 독재를 지원했고, 아랍 민간인들에 대한 일상적인 살해 행위에서 이스라엘의 파트너가 됐다.

4. 쇠퇴와 몰락?

언젠가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일찍) 중국이나 인도에서 [18세기 영국 역사가로 <로마제국 쇠망사>를 집필한] 에드워드 기번의 후예가 나타나 <미 제국 쇠망사>를 집필할 것이다. 이 책이 미국에 말려든 인류의 미래에 대한 추도사가 아니라, 더 크고 진보적인 작업(아마 <아시아의 부활> 정도?)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마 에드워드 기번의 후예는 미국의 '무고한' 희생과 자기 정당화를 국가적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할 것이다. 지금 오바마 대통령에게서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경향 말이다. 실제로 미래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것이 더 중대한 범죄일까? 관타나모 수용소를 처음 새운 것? 아니면 아니면 국제 여론과 스스로 내세운 공약을 무시하고 수용소를 그대로 보전시킨 것?

미군을 철수시키고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시키기 위해, 미국의 권리장전(Bill of Right)을 회복시키기 위해 대통령에 선출된 오바마는 [오히려] 으뜸가는 '부시의 유산 관리자'가 됐다. 그 유산이란 특수작전, 무인정찰기 공격, 막대한 정보 예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나 나올 것 같은 감시 기술, 비밀 감옥,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된 전쟁영웅(페트레이어스)에 대한 숭배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의 '반전' 대통령은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만큼 미국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가 [미군 특수부대] '델타 포스'와 '네이비 실'의 최고사령관 역할을 더 열심히 수행할수록, 미래의 민주당이 미국의 적을 비밀리에 감금하고 살해할 미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거나 애국법을 개정할 가능성은 더 줄어들 것이다.

전쟁의 수렁에 빠진 미국 정부는 지난 10년간 주요 [국제정세] 흐름에 장님이 됐다. 아랍 민중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 완전히 잘못 읽었고, 주류 '이슬람 대중주의'의 중요성도 간과했다. 독일에 대한 영향력도 약화됐고 이스라엘은 점점 더 오만하게 행동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가장 큰 채권자이자 중요한 경쟁상대인 중국에 대한 일관성 있는 정책 기조를 유지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이는 '미래의 기번'의 관점이기도 할 것인데) 미국은 실패한 국가로 가는 초기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다. 미 의회가 부채 상한 증액 협상에서 '위험할 정도로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질책한 중국 관영 <신화> 통신이나 공개적으로 미국의 정치‧경제 제도의 불안정성에 우려를 표시한 중국 고위당국자들은 문제를 잘못 짚었다. 진짜 문제는 손에 성경을 들고 무대에 서있는 9.11의 미친 후예들(spawn)이다. 공화당 대선 후보들 말이다.

* ( )는 원저자의 표기이며 [ ]는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임.

 

기사입력 2011-09-15 / 곽재훈 기자(번역)

 

Copyright ⓒ PRESSian Corp. All rights reserved.
프레시안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므로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