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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Black Swan - Natalie Portman

by Wood-Stock 2011. 3. 9.

흑조를 탐한 백조의 핏빛 도발과 균열 <블랙 스완>

불멸의 춤 '블랙 스완' 관객을 압도하다

 

 

차이코프스키의 대표적인 발레곡인 '백조의 호수'는 발레의 교과서로 불립니다. 불명의 사랑과 불멸의 춤을 추는 '백조의 호수'는 곧 발레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세 독일의 전설에 바탕을 둔 '백조의 호수'는 전 4막 29장 36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지금은 전곡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6곡을 뽑아 모음곡 형태로 공연하고 있습니다.

 

'백조의 호수'가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한 명의 발레리나가 청초하고 순수하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백조(오데트)와 함께 정반대의 캐릭터인 도발적이고 사악하며 격정적이고 치명적인 흑조(오딜)를 동시에 연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다보니 오데트와 오딜은 발레리나가 선망하는 최고의 배역으로 손꼽힙니다.

 

모든 발레리나들의 꿈과 목표는 하나입니다. 절대적 경지에 올라 완벽한 춤을 추는 발레리나, 즉 '발레리나 아졸루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클래식 발레와 로맨틱 발레의 결정체로 평가받는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와 흑조를 통합하는 여왕 백조로. 그 '발레리나 아졸루타'가 되기 위한 한 발레리나의 욕망과 균열의 잔혹한 비극을 환상적인 춤사위에 펼쳐 놓으며, 숨 막히는 긴장감과 서스펜스로 관객들을 압도하는 영화 <블랙 스완>이 지난 11일 시사회를 가졌습니다.  

 

 

절대적 경지의 춤을 추기 위한 발레리나의 욕망

 

영화는 '백조의 호수'의 애잔한 서곡이 흐르는 가운데 오데트가 마법사 로스바르트로의 마법에 걸려 백조로 변하는 프롤로그로 오프닝을 엽니다. 이윽고 여왕 백조를 염원하는 발레리나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간절한 꿈에서 깨어 나 백조와 같은 우아한 차림으로 지하철을 타고 뉴욕시립발레단으로 갑니다. 터널 창문에 흑조와 같이 검게 비치는 니나의 모습은 영화의 헤드카피, '흑조를 탐한 백조의 핏빛 도발'을 상징적으로 암시합니다.

 

'백조의 호수' 공연을 앞두고 예술감독 토마스(뱅상 카셀)는 이전의 여왕 백조 베스(위노나 라이더) 대신 새로운 프리마 돈나를 캐스팅하겠다고 발표합니다. 베스는 분장실의 집기를 때려 부순 뒤 문을 박차고 나가고 니나는 몰래 베스의 빨간 립스틱을 슬쩍 챙깁니다. 여왕 후보들끼리 오디션을 받는 가운데 토마스는 니나에게 백조로는 최고지만 흑조는 무리라며 일갈합니다.

 

스완 퀸을 발표하는 날. 흑조 연기를 제대로 못 해 캐스팅에서 떨어진 줄 알았건만 니나는 새로운 여왕 백조로 뽑히며 찬사와 시기를 한 몸에 받습니다. 화장실로 가 엄마에게 이 사실을 전화로 알리며 울먹인 뒤 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거울에 빨간 립스틱으로 '매춘부'라고 써 놓았습니다. 과연 누가 니나의 등 뒤에 비수를 꽂으려 하는 걸까요?

 

이때부터 영화는 프리마 돈나가 된 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클로즈업합니다. 하지만 신이 빚어낸 초월의 경지에서 완벽한 춤을 추기 위한 니나의 열정이 비등해질수록 '발레리나 아졸루타'에 짓눌린 그녀의 욕망은 끔찍한 정신분열로 증폭되며 예상치 못한 비극을 향해 치닫기 시작합니다. 그와 함께 영화는 엄마와 딸의 집요한 애증을 한 축으로 삼고 한 떨기 백합같은 발레리나들의 살의(殺意)를 또 다른 축으로, 욕망의 민낯을 씻어냅니다.  

 

흑조를 탐하는 백조의 도발과 균열

 

절대적 경지의 무용수가 되기 위한 니나의 욕망은 중압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망각과 강박에 시달리며 끔찍한 자기 분열을 낳는다.

 

영화는 시종일관 잔잔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백조의 호수'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정경을 OST로 차용합니다. 그리고는 교교한 달빛이 반사된 호숫가를 거닐듯 아득한 날개 짓을 펼치는 백조가 어떻게 거친 폭풍이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사악한 정기를 내뿜는 흑조로 변신해 가는지를 발레와 스릴러의 조합이라는 낮선 질감으로 빚어냅니다.

 

신입단원으로 '백조의 호수'에 합류하는 릴리(밀라 쿠니스)는 첫 만남에서부터 니나를 자극합니다. 흑조의 양 날개를 등에 문신한 릴리는 정교한 기교나 연기력은 부족하지만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함과 관능미로 토마스의 시선을 빼앗아갑니다. 반면 니나는 뛰어난 표현력과 테크닉으로 순수하고 우아한 백조를 소화해 내지만 교과서적인 춤은 그녀의 흑조를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 니나를 향해 토마스는 릴리를 대입하며 사사건건 몰아붙입니다. 마치 한 번 발길이 닿으면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거미줄을 쳐 날벌레를 집어 삼키는 것 같은 릴리처럼 온 세상을 유혹하라고 주문합니다. 이윽고, 수도승 같은 엄격함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온 니나는 릴리와 함께 술과 마약에 흠뻑 절은 광란의 밤을 보내며 스스로를 향해 유혹과 금기의 손길을 뻗칩니다.

 

또한 이 대목은 니나와 엄마 간의 애증의 사슬이 끊어지는 분기점이 되기도 합니다. 다 큰 딸을 '이쁜이'로 부르는 엄마는 니나의 세계를 설계한 장본인이자 모든 통제와 절제와 금욕의 뿌리입니다. 28살에 니나를 갖고 싱글맘이 되면서 발레리나를 포기한 엄마에게 니나는 존재의 이유이자 삶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니나가 여왕 백조에 대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 자해를 일삼고, 긁은 등에서 검은 깃털이 돋으며 흑조로 분한 자신의 환영을 목격하면서 백조에서 흑조로 변신하고 있다는 망각은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니나는 '발레리나 아졸루타'로서 절대적 춤사위를 펼치고, 그녀를 해체하는 균열과 파괴도 개시됩니다.  

 

마침내 '발레리나 아졸루타'를 현현하는 니나

 

청초하고 순수하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백조에서 도발적이고 사악하며 격정적이고 치명적인 흑조로 변신한 니나는 발레리나 아졸루타를 완성한다.

 

 

불멸의 역작 '백조의 호수'를 제 것으로 탐하기 위한 니나의 강박과 혼돈은 베스를 향한 집착으로 전이됩니다. 프리마 돈나로서 '백조의 호수'의 모든 것이었던 베스는 니나에게 여왕 자리를 물려주고 신경질적인 발작을 일으킵니다. 니나가 프리마 돈나로 등극하는 밤, 베스는 차도에 뛰어들어 두 다리가 부러지고 갈가리 찢기는 중상을 당합니다.

 

베스는 니나의 결말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니나와 똑같은 길을 걸어 온 베스에게 '백조의 호수'를 떠난다는 것은 절망이자 악이며 죽음입니다. 마치 '백조의 호수' 원곡에서 오데트와 지크프리트 왕자가 이승에서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듯이. 춤과 다리 등 모든 것을 잃어버린 베스는 병실에서 침잠한 부유물마냥 잿빛 흔적으로만 남습니다.

 

한편 니나는 베스가 프리마 돈나 시절 아꼈던 소지품을 쓰면서 베스에 대한 흠모와 존경을 대신합니다. 하지만 강박과 망각의 불길한 기운이 그녀를 휘감으면서 베스는 끔찍한 최후를 맞습니다. 니나는 "릴리가 여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한다"며 울먹이고, 베스는 "넌 내 걸 빼앗아 갔다"며 손톱손질 칼을 집어 들고 오히려 자신의 얼굴을 쑤셔댑니다. 그런데, 기겁을 하고 도망쳐 엘리베이터에 오른 니나의 피 범벅이 된 손에 칼이 쥐어져 있습니다. 

 

다음 날, '백조의 호수' 첫 공연입니다. 간밤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니나의 분열은 가속도를 높이고 공연 중 환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실수를 저지릅니다. 분장실로 쫓아 온  릴리는 자신이 대신 하겠다며 몸싸움을 벌이고 니나는 깨진 거울조각으로 릴리를 찔러 죽입니다. 그와 동시에 니나의 눈과 손끝부터 점차 흑조로 변하면서 2막의 마지막, 발레리나 기술 중 최고라는 연속 32회전 푸에테를 춥니다.

 

흑조가 백조를 압도하면서 마침내 니나는 '발레리나 아졸루타'를 현현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백조와 흑조의 합일은 예술적 승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완벽을 향한 강박으로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과정이며, 젊은 예술혼의 붕괴이자 백조의 죽음입니다. 그만큼 엔당 크레딧을 앞둔 반전은 충격적이며, 잔혹합니다.

 

극찬을 해도 아깝지 않은 나탈리 포트만의 열연

 

뛰어난 표현력과 테크닉으로 촉망받는 발레리나 니나로 분한 나탈리 포트만은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충혈된 눈빛에 균열이 가고 이윽고 검붉은 피눈물을 흘리며 산산이 부서져가는 니나 역의 나탈리 포트만은 메소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영화 <레옹>의 꼬마 숙녀였던 마틸다가 단지 배역을 연기하거나 정형화된 연기를 뛰어 넘어 니나의 정신과 육체에 완전히 합일해 내뿜는 포트만의 카리스마는 영화의 진실성을 극대화시키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녀의 연기는 소름끼치도록 압도적입니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뛰어 넘으며 형식을 구축하고 또 다시 형식을 파괴하는 춤의 역사는 그것이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든 반(反) 발레의 기치를 내건 이사도라 덩컨의 현대무용이든 가사에 고깔을 쓰고 긴 장삼을 휘날리며 소매 자락을 흩뿌리는 승무든 치열한 육체의 기록이자 살아 있는 예술이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습니다.

 

영화 <블랙 스완>은 인간의 맨몸뚱이로 인간의 혼을 담아내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 춤이라는 사실을 니나의 발끝과 손끝에서 이른 아침 호숫가에서 실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고혹적인 백조와 관능적인 흑조로 증명해 냅니다. 그것은 최종 리허설 때, 토마스가 니나에게 격정적으로 주문했듯이 '자신의 꿈을 만져 본 마지막 춤이며, 가슴이 산산조각이 나 으스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보에의 아름답고 애절한 선율로 시작해 하프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화음이 흐르는 '정경'을 따라 오데트와 지그프리트의 영혼이 영원한 사랑으로 합일되는 마지막에 이르러 니나는 마지막 숨을 토해 내듯이, 말합니다.    

 

"난 느꼈어요, 완벽함을 느꼈어요. 나는 완벽했어요."

 

2011.2.15 / 오마이뉴스 / 박호열(tkaenao)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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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완벽했다 -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빛난 <블랙스완>

 

좋은 감독의 연출이 좋은영화를 만들지만...

 

좋은 감독의 전술이 좋은 팀을 만들지만 결국 팀의 승리를 결정짓는 건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다. 바르셀로나가 지구 최강의 팀이 된 것은 과르디올라의 완벽한 전술이 있지만 결국 관중이 기억하는 건 메시의 골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좋은 감독의 연출이 좋은 영화를 만들지만, 당장 관객들이 눈에 접하는 건 주연 배우들의 연기다. 그런 연기에 결정력이 있어야 작품은 관객들에게 좋은 영화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엄청난 걸작에는 보이지 않는 연출 이상으로 보이는 연기나 그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임팩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블랙스완>은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천재적 연출력이 영화전체를 지탱하지만 이 작품이 관객 마음에 전율의 'goal을 넣은 것은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 지대한 공을 세운 대런의 연출력과 그 외 여러 가지를 폄하하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나탈린 포트만이 보여준 연기의 결정력은, 잘 다듬어진 배경의 바탕 안에 재능있는 배우가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는지, 궁극의 그것을 보여준 작품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는 거울,물등을 통해 빚어지는 공포감이 영화의 압권.

 

 

작품을 지배한 그녀의 미친 연기

 

리뷰를 적으면서 한국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는 왈가왈부를(?) 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일단 이들의 연기는 같은 한국어를 쓰기에 어느 정도 기술적이나 감정적으로 잡아낼 수 있는 의미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영화 리뷰를 쓸 때는 가급적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편이다. 우리한테는 어색할지 몰라도 그 나라 그 문화에서는 통하는 그런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깐,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의 그 감칠 맛 나는 대사와 표정연기를 어디 한국인이 아니고서야 공감할 수 있으리.

 

하지만 <블랙스완>의 나탈리 포트만은 외국 배우 연기 내공이 부족한 기자 조차도 사로잡을 광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어떤 상처를 지닌 소심한 발레리나가 스완퀸[즉 <백조의 호수>주인공]이 되면서 빚어지는 연기에 대한 압박감, 소유욕, 성욕[?],일탈들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심리 스릴러다. 어떻게 보면 내러티브는 간단하다. 영화가 극단적으로 그녀의 모습을 담아서 그렇지, 이건 어디까지나 주인공 니나(나탈리포트만) 개인의 심리가 빚어지는 1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본 분들은 지금 나의 말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1인 이야기라고? 그렇다.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는 이야기 자체의 사이즈를 다르게 만들었다.

 

영화는 의외로 무섭고, 탐욕적이며 노골적이다. 소심하고 여린 니나는 화이트 스완으로 대변하는 순수는 잘 표현하지만 유혹하고 파멸로 이끄는 블랙 스완의 연기는 늘 부족하다고 지적 받는다. 그런 강박관념에서 화이트 스완으로 대변되는 니나가 어떻게 블랙스완으로 파괴(혹은 성장?)되는지를 영화는 그린다. 하지만 그 내러티브가 보통이 아니다. 몇몇 깜짝 놀랄 연출은 기본이며,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는 거울을 통한 이미지는 섬뜩하다. 대런의 미칠듯한 편집[?]과 기괴한 영상은 예사롭지 않은 영화를 더 무섭게 만들어 관객을 숨통을 조인다. 물론 이런 압박감과 공포는 심리 드라마 이상으로 스릴러의 재미를 발생한다.

 

하지만 대런이 멋지게 전술(?)을 짠다고 관객의 냉정한 골문은 쉽게 열어지지 않는다. 어째든 그는 영화속에는 밖에 있는 타자다. 현재 그는 카메라를 들고 그가 짠 전술을 고스란히 담고있는 것이다. 그렇담 영화라는 게임에서 경기를 이끌고 있는 건 원톱 나탈리 포트만이다. 화이트스완에서 블랙스완으로 변모되는 그녀의 광기처럼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그녀의 광기에 그만 매혹되어 버린다.

 

도대체 나탈리 포트만은 이 영화에서 몇 역을 했는지 모른다. 일단 니나라는 주인공, 가끔 등장하는 자신의 내면, 그리고 블랙스완 등등 영화 속 나오는 모든 캐릭터들을 나탈리포트만은 한 차례 거쳐 간다. 물론 영화 속에 이런 역을 한 것을 직접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지만 시시각각 그녀의 심리에서 변하는 모습을 보면 이들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고작 내가 이렇게 글로서 느낄 수있다라는 한 줄을 위해 그녀는 영화 내내 지배하고 우리에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어떤 표면적인 감정을 넘어 그 이상을 보여주는 능력에 우리는 놀랍다 보다는 무섭다라는 수식어를 쓴다. 나탈리 포트만이 <블랙스완>에서 보여주는 연기가 그렇다. 그녀의 연기는 잘한다가 아닌 무섭다.

 

그렇게 대런이 다져 준 무대에 나탈리 포트만은 프리마돈나 역을 맡았던 영화에서처럼 관객의 마음에도 백조의 날개 짓을 펼쳐보인다. 순수의 순수에서 탐욕의 극단까지 같은 배우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감정의 온도를 제대로 지배하며 조절한다. 그래서 영화가 주는 몰입감은 대단하다. 어느 순간 나탈리 포트만은 우리에게 또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라는 기대가 몇 초 상간으로 나타나고 보는 이는 또 한 번 충격을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꽤 깜짝 놀라는 효과가 기호의 차가 있지만 그런 효과마저 심리의 일부분으로 흡수 해 영화의 중심을 잃지 않고 어지럽지만 또박또박 걸어가는 후반부의 속도감은 가히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블랙스완>은 나탈리포트만의 극단적 희노애락을 한 꺼번에 볼 수 있는 선물세트다.

 

나탈리 포트만, 그녀는 완벽했다

 

결국 영화는 그토록 니나를 괴롭혔던 블랙스완의 알을 깨고 절정을 거친 뒤 막을 내린다. 영화는 초반부 니나에게 묻는다, "완벽한 연기와 통제는 다르다"고. 어떤 연기 테크닉으로 관객에게 잠시의 눈속임은 정석 같은 통제일 뿐이지만 때로는 혼란스럽고 극단적이어도 그런 카오스에서 오는 정제된 균형은 오히려 관객에게 더 큰 감흥을 준다. 그럴 때 영화에서도 그렇고 지금 <블랙스완>을 본 관객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탈리 포트만, "나는 느꼈어요, 그녀는 완벽했습니다."

 

마지막에 터져 나오는 박수갈채는 비단 영화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대런, 이 짓궂은 사람, 영화를 만들면서 그 역시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를 보며 느껴지는 전율을 이 장면으로 대체 한 것은 아닐까?

 

이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강력한 후보 나탈리 포트만, 아카데미 트로피를 누가 줄것인가도 어려운 일이지만,

나탈리 포트만에게 여우주연상을 안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인듯 하다.

 

2011.2.26 / 오마이뉴스 / 황홍선(i2krs)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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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포트만, 욕망의 절정에서 흑조를 연기하다

<블랙 스완>, 나탈리 포트만의 완벽 연기...감독의 연출력도 뛰어나

 

<블랙 스완>은 지난해 12월 북미박스오피스의 진정한 승자라고 불릴만한 영화다. 비록 북미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초기 18개 극장에서 959개 극장으로, 계속해서 2407개 극장으로 확대 개봉됐기 때문이다. 1300만 불 제작비로 북미박스오피스 극장수입만 현재 1억불 이상을 기록 중이며, 전 세계 극장수입은 2억 불을 넘어섰다. 북미 인디영화 <더 레슬러>로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감독으로 큰 주목을 받게 됐다. 

 

 

이 작품은 할리우드 톱스타 나탈리 포트만,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배우 밀라 쿠니스와 뱅상 카셀 등이 출연함에도 불구하고 1300만불 제작비로 만들어졌다는 것 역시 어떤 면에서 부러운 점이다. 북미에서 상당히 저예산 영화에 속하는 제작비이기 때문이다. 잘 구축된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기에 이런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18개 극장에서 개봉하여 관객들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2407개 극장으로 확대개봉 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다면 할리우드 톱스타들이 인디영화에 출연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지독한 연습벌레로 통하는 발레리나다. 그녀가 가진 매력은 순수함. 그래서 백조연기에 있어서는 최고란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긴다. 완전히 새롭게 각색한 '백조의 호수' 공연을 앞두고 감독 토마스(뱅상 카셀)가 백조와 흑조를 모두 연기할 1인 2역의 주연으로 니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니나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백조 연기에서 최고란 수식이 아깝지 않지만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표현하는 흑조 연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여기에다 새로 입단한 릴리(밀라 쿠니스)는 요염한 매력을 뽐내면서 니나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니나가 가지지 못한 매력을 완벽하게 몸으로 표현해내는 것. 흑조 연기에서는 어떤 면에서 오히려 니나보다 앞서나간다. 이때부터 니나의 마음 한구석에 자신의 위치를 릴리에게 뺏기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걱정은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에 대한 표출이 니나의 내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백조는 흑조가 될 수 있을까?

 

 

<블랙 스완>은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니나 중심으로 흘러간다. 우아하고 순수한 백조연기에 있어서 최고란 칭호를 받던 그녀의 일상생활은 성실함 그 자체다. 그녀는 아름다운 연기를 위해 힘든 연습도 마다하지 않고 성실하게 임한다. 관객들 앞에서는 너무나 우아한 연기를 펼치는 백조의 그녀이지만 실제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고통의 연속이다. 발레란 것이 온 발가락 끝에 자신의 체중을 모두 실어야하기 때문이다.

 

니나가 최고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과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어머니를 위해서 좋은 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강박관념들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관객들 마음에 와 닿기에 그녀의 변화가 더더욱 극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녀가 감독으로부터 1인 2역의 주연으로 뽑혔단 이야기를 듣고 발레니라로서 행복을 느끼지만 그런 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녀의 마음속에 내재된 상처가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최고 행복한 위치에 선 그녀이지만 마음은 점점 어둠으로 물들어간다. 그녀는 생각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행복을 위협하는 요소들에 대해서 말이다. 릴리가 감독 토마스를 유혹해서 자신의 배역을 탐내고 있다는 생각, 어머니마저도 자신을 옥죄는 불편한 존재로 느끼기 시작하는 것. 그리고 한때 최고의 발레니라로 인기를 구가했던 베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순수하고 연습벌레이기만 했던 그녀의 내면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한다.

 

잊을 수 없는 마지막 장면, 그리고 나탈리 포트만의 100점 연기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마지막 장면을 언급할 수 없지만 <블랙 스완>을 본 관객들이라면 누구나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에 전율을 느낄 것이다. 흑조가 된 그녀는 이제 다시 순수하고 열정이 가득했던 백조로 돌아갈 수 없다. 그녀 스스로도 공연을 통해서 이것을 충분히 깨닫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이런 것을 깨달으면서 처음으로 완벽하게 자유로움을 느꼈단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압박감과 주위의 눈에서 벗어나서 영혼이 자유로워진다.

 

<블랙 스완>에는 거울 속에 비친 니나의 모습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백조와 흑조의 이미지를 함께 가지고 싶어 하는 니나의 욕망을 거울 속에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탈리 포트만이 백조에서 흑조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안함과 욕망의 뒤틀린 감정을 얼마나 잘 표현하는 가에 달려있었다. 이런 부분을 고려하면 그녀의 연기에 100점 만점을 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나탈리 포트만은 순수한 내면의 모습과 욕망으로 뒤틀린 내면을 모습을 모두 잘 표현했다.특히 그녀의 마스크에서 이렇게 내재된 욕망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한 관객들이라면 그녀의 연기를 보면서 더 큰 전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감독의 정교한 카메라워크와 편집 그리고 뛰어난 조명 위에서 그녀의 연기가 불꽃처럼 타올랐기에 <블랙 스완>은 하나의 예술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란 속담이 있었다. 최소한 <블랙 스완>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속담은 예외라고 해두어야 할 것 같다. 북미 인디영화의 힘과 수준을 완벽하게 느껴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더 레슬러>와 <블랙 스완>을 통해서 2011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 <로보캅>과 <엑스맨: 울버린 2> 감독으로 낙점 받았다. 그에게 거는 할리우드 제작사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2011.2.28 / MovieJoy / 제상민(moviejoy)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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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포트만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예술가 탄생 그린, 매혹적인 성장 스릴러 <블랙 스완>

 

흥행과 거리가 있던 영화 <블랙 스완>이 소생했다.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 덕택이었다. 평일 6만 내외, 주말 10만 정도의 관객을 모은 <블랙 스완>은 아카데미 시상식 다음날인 지난 1일 13만 관객(누적 90만)을 모았다. 물론 예외도 있다. 작년에 작품상과 감독상, 편집상을 비롯해 아카데미 6개 부문에 빛나는 <하트 로커>는 고작 17만 한국관객을 동원했다.

 

이라크 참전 미군병사를 소재로 한 <하트 로커>는 바그다드에서 폭발물 제거를 전담하는 병사를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폭풍 속으로>의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은 전쟁에 중독된 인간의 실체를 제임스를 통해 보여준다. 이라크 전쟁 배후에 있는 조지 부시와 딕 체니 같은 희대의 전쟁광과 그들의 뒤를 봐주는 미제국의 추악한 군산복합체를 고발한다. 

 

<하트 로커>의 분위기는 무겁고 신랄하다. 반면 <블랙 스완>은 차이코프스키의 대표적인 발레곡 <백조의 호수>와 배우 나탈리 포트만으로 관객에게 다가서고 있다. <레옹>(1994)에서 마틸다로 데뷔한 포트만은 <클로저>와 <천일의 스캔들> 등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얼굴이다. <블랙 스완>에서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은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을까.

 

에리카와 니나 : 착한 딸의 틀을 부숴라

 

 

발레리나로 4년을 살아온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평범하고 선량한 인물이다. 매사에 순응적이고 맑고 투명한 하나의 맨얼굴만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꿈은 있다. 세계적인 발레 작품에서 주역을 연기하고 싶은 아찔한 꿈. 니나 뒤에는 엄마 에리카가 있다. 전직 발레리나였던 에리카는 니나를 임신하자 발레를 그만둔 전력이 있다. 스물여덟 나이에.

 

우리에게는 에리카의 인생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다. 결혼은 했었는지, 미혼모였는지, 이혼을 했는지, 그랬다면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도통 알 수 없다. 하지만 에리카가 니나에게 쏟는 혼신의 배려와 헤아리기 어려운 기대치는 이내 알 수 있다. 에리카에게 니나는 그녀가 존재하는 의미의 처음이자 끝이다. 그들 모녀의 유대는 지나칠 만큼 견고하다.

 

나날이 성장하여 이제는 성숙한 여인이 된 니나. 하지만 에리카에게 니나는 여전히 어린아이다. 니나의 갈등은 여기서 비롯한다. 한편으로는 절대적으로 기대고 싶은 엄마 에리카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꼭 벗어나고 싶은 귀찮고 지겨운 엄마 에리카가 있다. <블랙 스완>은 모순되는 엄마의 실체와 대결하는 어린 딸 니나의 갈등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니나 방과 침대에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인형이 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엄마는 자동인형이 돌아가는 음악을 들려준다. 어느 날 니나가 인형들을 쓰레기장에 버린다. 어린 소녀가 아니라, 성숙한 인격을 가진 여인으로 태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니나는 이제 더 이상 엄마의 착한 딸이 아니다. 풍부한 상징을 내포한 잘 만들어진 장면이다.   

 

베스와 니나 그리고 릴리와 니나

 

발레단의 예술 감독 토마스(뱅상 카셀)가 '공주 my little princess'라 부르는 여인이 있다. 베스(위노나 라이더)다. 토마스와 연인관계를 맺어오면서 발레단의 얼굴이었던 베스. 이제 그녀는 작별의 시각을 맞는다. 모든 시작과 더불어 공존하는 끝이 다가온 것이다. 니나의 시작은 베스의 끝과 함께 한다. 언젠가 윤동주 시인이 말한 것처럼, '시작은 끝이고, 끝은 시작'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작은 어렵고, 그래서 옛사람들은 '시작이 절반'이라고 말하곤 했다. 시작을 어렵게 하는 것은 니나의 순진무구다. 나이만큼 성숙하지 못한 자아와 엄마의 기대를 만족시키려는 바람, 치열한 사회관계에서 비켜나있는 니나. <블랙 스완>에서 사건의 중심은 그래서 니나의 일면성이 양면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에 맞춰진다.

 

니나와 경쟁관계이자 친구로 등장하는 릴리(밀라 쿠니스). 릴리의 삶은 니나와 확연히 대비된다. 소소한 규율을 어기는 것부터 시작하여 자유분방한 섹스와 일상화된 마약복용, 알코올에 대한 탐닉. 니나에게는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를 파멸로 몰고 가는 흑조배역이 잘 어울린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니나의 흑조와 릴리의 백조가 서로 취약하다는 사실.

 

흑조를 연기하는 릴리를 질투하고, 릴리보다 완벽한 흑조를 연기하려는 니나의 거대한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난다. 대형화재 현장에서 일어나는 시커먼 연기처럼. 니나의 욕망 앞에 기존의 세상과 인간관계는 파탄 직전이다. 니나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 착하고 여렸던 니나에게 폭풍처럼 몰아닥친 강렬한 욕망 덩어리.  

    

토마스와 니나 : 예술 감독과 남녀관계

 

 

여자를 밝히는 인물이자 동시에 유능한 예술 감독으로 칭송받는 토마스. 그에게는 베스를 대신하여 발레단의 미래를 이어나갈 새얼굴이 필요하다. 그는 <백조의 호수>에서 주인공 배역을 연기할 발레리나를 공모하기에 이른다. 그가 보기에 니나는 나무랄 데 없이 백조를 연기한다. 니나가 백조와 상극인 흑조를 연기할 수 있는가, 그것만이 문제다.

 

성공과 명성, 시끌벅적하고 은성한 파티와 세상의 부러움을 온몸으로 즐기는 토마스. 니나의 연기를 보면서 그는 언제나 부족한 무엇을 본다. 그가 니나를 향해 던지는 말은 사태의 핵심을 찌른다.

 

"네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너야. 이제 그걸 보내줘야 할 때야."

 

성공에 도취한 인간이든, 색마든, 무정한 예술 감독이든 토마스는 니나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하게 찌른 것이다. 순수하되 미성숙하고, 욕망하되 주저하면서 나약하고 여린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던 니나를 일깨운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니나에게 잠들어있던 '여성성' 혹은 섹스를 향한 욕망을 뒤흔들어 놓는다. 흑조의 내면이 그러한 것처럼.

 

니나라고 육체적인 욕망이 없겠는가. 물에 떠있는 백조의 보이지 않는 발처럼 니나에게도 욕망은 잠재하고 있었다. 영화는 곳곳에서 그런 욕망의 폭발적인 분출을 보여준다. 우리가 알고 있던 니나의 실체가 저토록 잔인하고 선정적이며 공격적이었는가, 하고 혀를 찰 만큼. 이제 니나는 백조와 흑조, 선과 악, 순수와 비순수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흑과 백, 그 영원한 모순과 대결

 

영화 <블랙 스완>은 발레 <백조의 호수>와 모순적이다. 기실 흑과 백은 태곳적부터 상호대립하고 충돌하면서 지금껏 존재해왔다. 가장 단순하고 위험한 논리를 우리는 흑백논리라 부른다. 등소평은 '흑묘백묘론'을 내세워 21세기 중국경제의 초석을 놓았다. 바둑에서 두 진영은 흑과 백으로 갈린다. 순수와 비순수의 정점에 백과 흑은 서있다.

 

<레슬러>로 호평을 받은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은 <블랙 스완>에서 흑과 백의 대결뿐 아니라, 양자의 조화를 강조한다. 어느 하나만 있으면 불충분한 인간세계와 예술의 본질을 제시한다. 세상은 순진무구로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며, 격렬한 욕망과 치열한 의지 또한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생과 역사의 모순이자 통일의 변증법적 자장이다.

 

<블랙 스완>에서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호평을 받은 까닭도 거기 있다. 여리고 순수한 영혼과 청초한 육신의 소유자 니나가 그것과 대립되는 세계로 다가서는 양상을 촘촘하고 사실적으로 연기하여 객석의 동의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본래적인 자아와 전혀 상반되는 모습의 또 다른 자아를 손에 잡힐 듯 그려냄은 재능 이상의 것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백조의 호수>에서 관객은 아름다운 동화 이상의 세계를 알지 못했다. 감독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상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발레의 고전을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묘사와 친숙한 음악, 속도감 있는 연출로 새로이 선보인다. 그리고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상호모순과 대립의 양상을 흑과 백의 대결과 통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예술가 탄생 그려낸 스릴러 영화 <블랙 스완>

 

 

발레리나들은 '완벽'에 다가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베스가 그러하고, 니나 또한 그러하다. '완벽'을 추구함은 모든 예술가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완벽은 불가능한 목표이기도 하다. 그것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가는 예술가들의 모습은 처연할 만큼 아름답고 숭고하다. 영화에서 니나의 최종목표도 완벽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완벽한 연기를 하고자 니나가 겪어야 했던 허다한 난관들은 니나에게 큰소리로 말한다.

 

"부숴라. 부수고 또 부수어라. 그러면 완벽해지리니."

 

<블랙 스완>은 낯선 형식의 스릴러다. 스릴러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발레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앳되고 여린 발레리나가 강인하고 성숙한 발레리나로 커가는 성장 스릴러이기 때문이다. 정신착란과 자위행위까지 경험하면서 마침내 완벽한 세계에 도달하는 예술가의 탄생을 그려낸 스릴러 영화가 <블랙 스완>이다.

 

2011.3.8 / 오마이뉴스 / 김규종(satira)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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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은 정말 나의 꿈이 맞는가

나탈리 포트만의 명연기에 푹 빠졌던 <블랙스완>

 

며칠 전 어떤 갤러리에서 하는 사진 전시회에 구경을 갔었다. 유명한 사진가는 아니지만 오로지 나무만을 찍는 그의 노력과 뚝심 그리고 사진의 분위기가 좋아서 찾아갔는데 뜻박에 그 사진작가를 직접 보게 됐다.

 

전시회가 자기 인생에서 처음 가져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는 그만 중간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진하디 진하게 느껴지는 한 사진가의 눈물. 그가 살아온 50여 년의 시간이 이 찰나의 예술속에 녹아드는 감동적인 순간이었고, 인간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 시간이었다.

 

영화 <블랙스완>은 가장 높은 수준의 완벽한 예술성을 구현하기 위해,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바치려 하는 한 예술가의 비극을 그려내고 있다. 그 주인공은 잊기 힘든 영화 <레옹>에서 참으로 인상적인 아역 연기를 펼쳤던 '마틸다'의 나탈리 포트만. 굳이 주인공을 강조하는 건 그녀가 아름답고 완벽한 발레 연기를 추구하면서도 늘 무언가에, 혹은 어딘가에 갇힌 인물을 너무나도 잘 표현했다는 것 때문이다.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수도승처럼, 완벽한 예술을 위해 작디 작은 발레복에 몸을 끼워 맞추어 앙상하기 그지없게 된 주인공 니나의 애처로운 몸이 아직도 눈 앞에 생생하다. 성공과 완벽에 대한 혼돈에 찬 불안한 눈빛과 꿈을 이루려다 강박에 빠지고 만 니나의 슬픈 표정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향해 내달리는 현대인을, 아니 나를 보는 것 같아 불편하면서도 몰입하게 한다.

 

I just want to be perfect.

 

나의 그림자는 우리 인간이 전향적인 면과 똑같은 만큼의 비뚤어진 면을 가진 존재이다. 우리가 선량하고 우수하며 완벽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림자 쪽에서는 어둡고 비뚤어지고 파괴적으로 되려는 의지가 뚜렷해진다. 인간이 스스로의 용량을 뛰어넘어 완전해지고자 할 때, 내 그림자는 지옥으로 내려가 악마가 된다. 왜냐하면 이 자연계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 이상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 이하의 존재가 된다는 것과 똑같은 만큼의 깊은 죄악이기 때문이다.

- 카를 융 ;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1875~1961)

 

"I just want to be perfect"  영화속 갓 20대 초반의 주인공 발레리나의 이 맹랑한 외침에 단장이자 발레 코치는 완벽함이란 컨트롤 (control) 할 수 있는 게 아닌 흘러가게 두는 것 (letting go) 이라고 말해준다. 완벽함에 대한 감독의 통찰과 철학이 담겨있는 대사다. 결국 주인공 니나는 죽음의 늪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홀로 속삭인다 "That was perfect" 

 

우리나라의 옛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속에 실수라고 하기엔 이해할 수 없는 허술한 점을 꼭 남겼다고 한다. 일제 치하 또는 현대의 예술인들도 그런 점을 들어 한국인은 마무리가 치밀하지 못한 민족성을 가졌다라고 비하하기도 했다(70년대 나의 국민학교 시절 이 얘기를 선생님들한테 많이도 들었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위의 '카를 융' 박사처럼 굳이 이론적으로 묘사하지 않아도 '완벽이라는 불경함'을 유전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완벽함을 위해 서서히 미쳐가는 주인공 니나의 모습이 악마로 변하는 장면은 마치 카프카의 '변신'을 보는 듯한 충격을 준다. 완벽주의는 일반인 사이에서는 어떤 정신적인 증세로 간주되지만 현대 예술가에게는 직업적인 일상이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정말 완벽해야만 진정한 예술을 할 수 있는걸까? 그런데 예술에 있어서 완벽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판단하고 인정하는 것일까.

 

비단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돈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인생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속삭임이 사방에서 특히 TV의 전 채널을 통해 들려온다. 한국의 수많은 니나들은 아름다운 외모를 위해 서슴없이 얼굴과 몸에 칼을 대고, 성공을 위해 성(SEX)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렇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불행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나의 무능력으로 변질된다.  

 

내 꿈은 정말 나의 꿈이 맞는가?

 

"당신이 누군지 아직 말 안 해줬어요." "난 댄서예요." "아니, 당신 이름 말이예요."

 

우연히 술집에서 어울리게 된 낯선 청년이 주인공 니나에게 묻는 장면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니나는 즉각 자신의 이름을 답으로 떠올리지 않는다. 그녀의 끝없는 결핍과 강박의 원천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급기야 상상과 꿈속의 자아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는 사태가 온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발레리나의 꿈을 접어야 했던 니나의 어머니는 딸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 원하지 않기에 딸의 외출을 막고, 심지어 딸을 찾아온 친구까지 문전박대한다. 자신의 꿈을 딸에게 과도하게 투사하여 딸 니나를 감시하고 목죈다. 마치 우리나라의 알파맘처럼.. 영화속에서 주인공은 오직 꿈을 이루기 위한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다른 무리속에 속하지 못하고 친구도 한 명 없어 보인다.  

 

아직 초등학생인 어린 조카에게 네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국제 변호사'란다. 세상은 꿈과 야망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래야 그 꿈의 성공 가능성이 커진단다. 하지만 꿈을 꾸기 전에 꼭 명심해야할 말이 있다.

 

"내 꿈은 정말 나의 꿈이 맞는가?"

 

2011.3.9 / 오마이뉴스 / 김종성(sunny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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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을 '무서운 영화'라고 평가하는 이유

'흑조' 나탈리 포트만을 보며 엄기영을 떠올리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스완>은 '무서운 영화'입니다. 그 '무서움'은 공포나 놀라움이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 들어 있는 '악마성'이 언젠가는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기인합니다. 아니, 그 악마성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에 기인한다는 게 더 맞는 말 같습니다.

 

백조와 흑조. 극과 극의 캐릭터를 한 명의 발레리나가 연기해야 합니다. 지고지순한, 맑은 영혼을 가진 백조는 어느 순간 관능적이고 유혹적인 흑조로 변하죠. 그리고 흑조의 날갯짓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백조는 스스로 몸을 던집니다.

 

<블랙스완>은 영화 속 <백조의 호수>와 그 맥을 같이합니다. 흑조의 날갯짓이 펼쳐지는 세상에서 백조는 결국 그렇게 자신의 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발레리나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백조 역할에 정말 어울리는 발레리나입니다. 열정도 있고 실력도 있는 발레리나지만 흑조 역을 하기에는 뭔가 모자라 보입니다. 도발적이지도 않고 치명적인 매력을 표현하기에도 부족해 보입니다.

 

그러나 감독인 토마스(뱅상 카셀)은 과감하게 니나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흑조로 변하기 위한 니나의 몸부림이 시작되죠.

 

 

백조의 몸부림과 발레리나의 발

 

호수에 떠 있는 백조를 보면 참 아름다워 보이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속에서 계속 다리를 움직이는 백조의 모습이죠. 그냥 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물밑에서는 끊임없이 발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발레도 비슷합니다. 춤을 추는 발레리나의 모습을 보면 정말 아름답고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춤을 보여주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예전에 본 발레리나 강수진씨의 발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춤을 보여주는 발레리나의 발은 뭉툭합니다. 상처투성이입니다.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야 아름다운 춤동작이 나오는 거죠. 니나의 발도 그렇습니다.

 

영화는 발레의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추악한 무대 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토마스는 니나에게 흑조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능을 깨우라고 하지요. 그리고는 니나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칩니다. 처음엔 거부하던 니나도 흑조가 되려는 마음으로 기꺼이 감독의 유혹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자신의 숨겨졌던 성적 본능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나탈리 포트만은 강박에 시달리는 발레리나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합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와 나탈리 포트만, 두 괴물을 만나다

 

발레단의 동료인 릴리(밀라 쿠니스)는 흑조의 캐릭터와 잘 어울립니다. 니나보다 실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관능과 유혹을 나타내는 데는 수준급의 실력을 보여줍니다. 니나는 릴리에게 자신의 배역을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기용하면서 토마스에게 버림받은 선배 발레리나 베스(위노나 라이더)의 흉측한 모습을 본 니나는 자신 또한 똑같이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죠.

 

그렇게 니나는 흑조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그의 몸과 마음은 점점 피폐해지고 심지어 자신의 곁에 있는 엄마마저 자기를 위협한다고 생각합니다. 니나는 백조에서 흑조로, 아니 괴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는 끔찍한 모습으로 자신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블랙스완>에서 우리는 두 명의 괴물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강박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대런 아로노프스키와 그가 만든 괴물을 소름 끼치도록 제대로 표현한 나탈리 포트만입니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주인공의 심리를 제대로 표현한, 직접 발레를 하면서 변해가는 니나의 모습을 200% 보여준 나탈리 포트만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로노프스키의 연출력과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제대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이 <블랙스완>의 최대 장점입니다.

 

 

 

흑조가 되어야만 하는 니나의 비극

 

"사람 되긴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 나온 명대사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사람보다는 괴물이 나오기를 원하고 사람들에게 괴물이 되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백조의 우아함보다는 흑조의 관능과 유혹을 더 중시한 토마스의 연출처럼 말이죠.

 

그 속에서 니나는 자신의 실력을 과시해야 함은 물론 자신의 단점까지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대체할 사람이 없도록, 베스처럼 내쳐지는 일이 없도록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한 흑조로 변해야지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누군가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니나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공연은 끝나고 관객들의 함성이 터져 나오지만 니나는 더 이상 과거의 우아한 백조가 아닙니다. 흑조의 삶에 지배당한 괴물의 모습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흑조가 되기를, 아니 흑조가 되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성공을 위해선 유혹에 굴복해야 하고 그 유혹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것을 노린 돈 많은 남자들의 놀음을 견디다 못한 한 연기자는 끝내 스스로 세상을 등지면서까지 추악함을 알리려 했지만 그것은 결국 권력과 결탁한 이들의 수수방관 속에 또다시 묻혀가고 있습니다.

 

니나의 비극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질 지도 모릅니다.

 

 

흑조의 본색을 드러낸 이들이 떠오른다

 

학교에서부터 이어지는 끝없는 경쟁. 그 경쟁은 결국 남을 짓밟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논리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 이에게는 낙오자의 딱지를 미리 씌웁니다. 무엇을 위한 경쟁일까요? 그 경쟁 속에서 또 다른 니나가 탄생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접하는 소식들 중에는 백조에서 흑조로 변해가는, 아니 백조인 척하면서 결국 흑조의 본색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당한 후배들을 지켜준다고 하면서 결국 권력의 유혹에 굴복해 지켜주겠다던 후배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시청자들에게 백조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결국 권력의 유혹 속에 흑조의 본색을 드러낸 전직 방송사 사장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두 번이나 큰절을 하고 후배들을 비난하면서까지 '여당인'이라고 내세우는 것도 일종의 강박관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괜한 생각도 해 봅니다.

 

<블랙스완>은 무섭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악마가 되어야 한다는 현실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득세하는 사회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흑조의 날갯짓을 보이기 위해 결국 스스로 흑조의 삶을 택하고 마는 니나의 비극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시 보일 지도 모릅니다.

 

'아름답고 무서운' 영화가 지금 관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2011.3.19 / 오마이뉴스 / 임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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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에 선 찰나의 아름다움, <블랙 스완>

 

‘찰나’의 아름다움. <블랙 스완>은 이 찰나를 위해 날아오르는 이카로스의 날갯짓을 닮은 영화다. <레퀴엠>의 원제였던 ‘Requiem for a Dream’은 그의 이후 영화를 압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블랙 스완>은 아름다움을 위한 진혼곡, 또는 도약하며 완성한 아름다움이 칼날 위로 발을 내딛는 순간의 비극적 운명을 담는다. 어쩌면 그것은 공연 예술이 지닌 아름다움의 본질이기도 하다. 완성된 순간 사라지고 마는. <블랙 스완>이 스스로를 죽여야만 완성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아름다움 그 자체가 영화의 목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분명 <블랙 스완>은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아름다움이 완성되는 과정을,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백조와 흑조간의 끊임없는 자리다툼을 비추는 ‘거울’의 영화다.

아름다움을 비추는 신체 잔혹의 거울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는 백조의 자리를 훔친다. 즉,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흑조가 차지했음을 깨달았을 때 백조는 호수 속으로 몸을 던진다. <블랙 스완>은 <백조의 호수>를 단지 영화에서 공연되는 하나의 작품으로 차용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영화는 로스바르트가 마술을 걸어 오데트를 백조로 변신시키는 니나(내털리 포트먼)의 꿈으로 시작해 호수에 몸을 던져 스스로 죽음을 맞는 공연 속 장면으로 끝맺음으로써 내러티브 전체를 <백조의 호수>와 조응시키려 한다. 이러한 면에서 보자면, <백조의 호수>를 해체해서 노골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하겠다는 토마스(뱅상 카셀)의 선언은 <블랙 스완>을 연출하는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영화적 야심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토마스가 <백조의 호수>를 어떻게 변형했는지 구체적으로 전달받지 못하지만, <블랙 스완>의 전개 과정은 토마스의 새로운 시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보여준다.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보기에 발레의 아름다움이란, 마치 창에 비친 모습을 보려면 그 바깥이 어두워야 하는 것처럼, 그 세계가 바깥으로 내몰며 감추거나 부정했던 것들에 비쳐질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보여주려는 것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작들이 펼쳐지는 무대 위 발레의 세계가 아니다. 그가 <백조의 호수>(또는 발레)에서 발견한 것은 아름다움이라는 꽃이 전혀 아름답지 못한 것에 뿌리를 둘 때만이 만개할 수 있다는 사실이고, 그렇기에 그는 무대 위의 아름다움을 조탁하는 무대 뒤편의 사건에 집중하려 한다.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의 자리를 흑조가 탐하는 것처럼, 이전의 발레 스타였던 베스(위노나 라이더)의 자리는 니나가 ‘훔치고’(오디션 바로 직전에 니나는 베스의 분장실에 몰래 들어가 베스의 립스틱을 훔친다), 니나의 자리는 그녀의 동료들뿐 아니라 전세계의 발레리나들이 넘본다. 대런 애로노프스키에게 백조는 자신의 자리를 탐하는 수많은 발레리나들(흑조)에 대해 히스테리적 불안에 시달리는 유리처럼 깨어지기 쉬운 연약함의 표상일 뿐이다.

 

하지만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발레를 소재로 택한 이유는 발레의 아름다움이 근본적으로 극한의 신체적 고통을 대가로 해야만 실현 가능한 예술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통은 결코 아름답지 않지만 그것이 없다면 발레의 아름다움은 존재할 수 없다. 대런 애로노프스키에게 예술적 아름다움과 신체 한복판에 ‘시뻘겋게 아가리를 벌린 상처’(심리적, 신체적 모두의 의미에서)는 분리할 수 없다. 물론 <블랙 스완>은 이러한 발레의 특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심리적 환각을 통해 드러내는 작품이다. 영화에 환각의 형태로 등장하는 모든 신체적 변태(metamorphosis), 즉 손가락의 살갗이 벗겨져 피가 뚝뚝 떨어지고, 느닷없이 관절이 골절되고, 어깻죽지의 발진에서 깃털이 새어나오다 못해 이내 온몸이 흑조로 변하는 등의 호러영화적인 신체적 변형은 발레 특유의 특성을 알레고리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신체적 아름다움의 표현인 발레라는 예술이 신체를 가장 잔혹하게 다루는 호러영화의 표현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블랙 스완>이 보여주려는 세계다. 무대에서 ‘보여지는 것’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다시 말하지만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관심은 후자다.

흑조와 백조의 자리바꿈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블랙 스완>에서 좀더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니나의 심리적 세계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블랙 스완>은 니나가 화면에서 생략되는 순간이 거의 없을 만큼 시종일관 니나를 좇는다. 이는 <블랙 스완>이 클로즈업의 영화라는 것, 즉 발레를 소재로 하면서도 무대에서의 신체적 동작 전체를 강조할 수 있는 롱숏보다는 ‘심리적 미로’에 갇힌 니나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뒤따르는 영화로 완성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과 환각 사이에서 길을 잃은 니나는 그리 신뢰할 만한 화자가 아니다. 우리가 니나의 심리적 필터에 여과된 세계에 대해 그것이 현실인지 환각인지 구분하려는 유혹을 느낀다 해도, 그러한 구분이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주된’ 관심은 아닌 듯하다. 그는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사라지며 미로가 되어버린 니나의 ‘심리적 현실’을 우리가 유사 체험하기를 바란다.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상상하게 하기보다는 (시청각적인 연출을 통해)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감독이고, 이는 그의 최고의 작품이었던, 하지만 이제 그 자리를 <블랙 스완>에 물려줘야 할 <레퀴엠>에서 충분히 증명한 바 있다.

 

우리는 <블랙 스완>에서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지워진 니나의 심리적 미로가 흑조를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결과물이라 생각하기 쉽다. 즉, 어둠의 충동을 대변하는 흑조를 연기하면서 흑조가 되어가는 니나. 틀리지는 않지만,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그녀가 백조/흑조 역을 맡기 전부터 그녀 내면에는 흑조의 잔영이 날갯짓하며 파닥거리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비유가 아니다. 지하철이 처음 등장하는 신을 보고 들어보라). 그러니까 니나는 원래 백조였는데 흑조로 변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녀는 애초부터 이중적 상태에 있었다. 니나에게 발생하는 백조와 흑조의 자리바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가 히스테리적 주체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타자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무의식적 질문에 빠져 있는 주체다. 우리는 니나가 춤을 추는 장면에서 곧잘 그녀의 시점숏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초반부 프리마돈나를 뽑는 오디션에서 그녀가 춤추는 장면부터 영화 말미의 공연에서 그녀가 실수하는 장면까지, 춤추는 장면에서 니나의 시점숏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카메라는 니나와 함께 춤을 추듯 그 주변을 돌다가도 그녀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의식할 때마다 그녀의 시점숏을 잡으며, 그녀의 히스테릭한 질문을 시각화한다. 그것이 백조이든 흑조이든 간에 니나의 정체성은 그 질문, 즉 ‘타자’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응답으로 형성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제시됐던 백조로서의 니나에게 그 ‘타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그녀의 엄마(바버라 허시)였을 것이다. 집안을 가득 채운 인형과 화이트와 핑크 중심의 옷들과 공간 구성뿐만 아니라 불감증 같은 그녀의 성격 역시 그 응답의 결과다(그녀 등 뒤의 발진은 그 응답의 실패이자 그녀의 엄마도 니나처럼 결핍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징표일 것이다).

 

하지만 <백조의 호수>의 백조/흑조의 프리마돈나를 맡으면서 니나가 직면한 것은 새로운 타자의 욕망이다. 질문 자체는 동일하지만, 토마스가 그 질문의 ‘타자’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결국 그녀를 헤매게 하는 심리적 미로는 토마스와 엄마가 벌이는 자리다툼의 결과이고, 궁극적으로는 현실과 환각이 아니라 두개의 허구적 세계가 대립하며 뒤섞인 결과이다. <블랙 스완>이 발레를 소재로 하는 이상, 더군다나 완벽을 꿈꾸는 니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상, 그 대결의 승자는 이미 정해진 것이다. <백조의 호수>에서 왕자를 유혹하는 것이 흑조이듯, 토마스는 흑조의 유혹을 그녀에게 요구한다. 유혹한다는 것이 누군가의 환상 안으로 들어가 욕망의 대상-원인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면, 이는 발레리나의 필연적 숙명이자 그들이 좀더 충동에 가까이 다가서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술과 마약이라는 단순한 차원뿐만 아니라, 지하철에서 니나에게 추파를 던지는 노인의 추악한 행동이나 스스로 차도에 몸을 던지고 손톱손질 칼로 얼굴을 찍어대는 베스의 행위를 추동시키는 충동과 아름다움을 완성시키는 충동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아름다움은 자신이 부정하는 것들로부터 완성된다. 혹은 그에 자신을 비춘다. <블랙 스완>이 무대 위에 올린 아름다움이 우리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아름다움 속에 자신의 파멸이 잉태된 내적 긴장을 너무도 처절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환각에서 벗어난 실재의 아름다움

이 단락부터는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영화가 늘 무언가에, 혹은 어딘가에 갇힌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해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파이>에서 수의 세계에 갇힌 자에서부터, <레퀴엠>에서 마약과 TV에 중독되어 갇힌 자들, <천년을 흐르는 사랑>에서 영원한 사랑이라는 족쇄에 묶인 자들, <더 레슬러>에서 1980년대의 향수를 가득 담은 링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리는 자까지, 그의 인물들은 마치 운명처럼 구원의 길에서 파멸의 길을 만나곤 한다. <더 레슬러>에서 랜디(미키 루크)는 그 운명을 회피하지 않음으로써 숭고함의 영역으로 도약한다. 물론 그가 선택한 것은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허구(환상)의 세계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블랙 스완>에서 백조처럼 순수하고 연약한 니나의 몸은 흑조를 가둔 감옥이다. 또는 그녀는 백조의 세계에 갇혀 있다. 실제로 영화는 흑조로 표상되는 사악하고 자기 파멸적인 힘을 때로는 자유 의지와 등가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영화의 흐름상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해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영화의 어느 순간부터 흑조를 가두는 감옥은 백조의 몸이 아니라 흑조가 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강박관념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니나는 릴리(밀라 쿠니스)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깨닫기 전까지는 자신만의 환각 속에 존재했다. 무대에서 함께 춤을 추던 카메라는 무대 뒤쪽으로 물러나서 흑조가 된 그녀를, 아니 흑조의 환각에 빠져 있는 그녀를 ‘객관적인 숏’으로 잡아낸다. <블랙 스완>이 니나의 심리적 세계를 주관적으로 보여주는 데 치중했음을 주목한다면, 그 환각이 최고점에 달한 순간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환각 속에서의 유혹의 성공(토마스에게 키스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발을 보라), 혹은 주관적 환각의 객관적 승인. 하지만 자신이 완벽했다고 말할 때, 그녀는 여전히 환각 속에 있는가, 환각에서 깨어난 것인가? ‘깨진 거울 조각’으로 강박관념의 소산인 릴리를 찌른 것이 자신의 환각임을 그녀가 깨달았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그녀가 환각에서 깨어났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특히 엄마를 향한 그녀의 마지막 시점숏을 고려할 때) 그녀는 상처받은 백조라는 또 다른 환각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토마스의 말을 다소 수정해서),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을 인정하고 그에 몸을 맡긴 채 그저 흘러가게 놔두는 초월의 경지에 이른 것인가?

 

혹시, 니나의 찢겨진 상처만이 그 해답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가 죽인 것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내털리 포트먼이 오로지 얼굴의 힘만으로 무성영화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듯한 인식의 순간, 카메라는 그녀의 시뻘겋게 벌어진 상처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상처는 그녀가 무대에서 춤을 출 때 그 입을 더 크게 벌린다. 우리는 이 상처가 상징화된 육체, 즉 신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상징화해야 하는 발레리나의 상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미 주어진’ 상징화된 육체를 스스로 찢어버릴 때 완성될 수 있는 실재의 아름다움. 물론 이와 함께 제기되어야 할 질문은 무엇이 니나에게 그 상처를 남겼는가, 하는 것이다. 거울의 파편. 지금껏 그녀가 타자의 욕망에 대한 반영으로서만 존재했다는 것의 흔적. 만약 완벽함을 느꼈다는 니나의 말이 이에 대한 인식의 결과라면, 그녀는 환각 너머의 실재로 도약한 것이다. 그것이 비록 칼날 위로 떨어지는 찰나의 아름다움이라 할지라도.

 

2011.3.3 / 안시환(영화평론가) / Cine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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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 소름은 어떻게 전율이 되었나? 예술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OSEN=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느꼈어요. 저는 완벽했어요.”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무대 마지막에 이런 얘기를 건넬 때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들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그 완벽함에 대한 전율을.

 

‘블랙스완’. 발레를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제목처럼 백조가 아닌 흑조를 다룬다. 그러니 발레라는 백조의 겉모습을 생각하고 극장문을 들어선 관객이라면, 그 충격적인 흑조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할 지도 모른다. 휴먼드라마 같은 장르를 기대했다면, 심지어 공포에 가까운 파격적인 영상으로 주인공의 이상 심리를 포착한 이 작품을 과잉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예술의 겉면이 아니라 그 뒷면을 경험하거나 목도한 적이 있는 관객이라면 그 소름끼치게 충격적인 장면들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과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니나에게서 전율을 느낄 지도 모른다.

 

백조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우아함을 보여주는 발레리나 니나. 솔로이스트로서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게 그녀의 꿈이지만, 그 우아함 이상의 욕망의 흑조를 더불어 연기해야 하는 (재해석된)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어떤 역이든 완벽하게 연기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또 늘 완벽해지고 싶은 그녀에게 이 공연을 총감독하고 있는 토마스 르로이(뱅상 카셀)는 말한다. “완벽함이란 통제하는 것만이 아니야, 흘러가게 두는 것이기도 해.” 즉 겉면으로서의 백조가 아닌 내면에 잠재된 욕망으로서의 흑조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통제하려는 자신을 버리고 본능을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끝없이 통제되도록 훈련되어져 왔다. 발레리나를 꿈꾸었지만 자신을 임신한 것 때문에 그 꿈을 포기했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늘 죄책감에 빠뜨리는 엄마는 그녀를 오르골을 열면 돌아가는 발레리나 인형처럼 통제하려 한다. 게다가 솔로이스트로 서 있다가 자신에게 밀려난 절망감에 자동차로 뛰어든 베스(위노나 라이더)에 대한 죄책감과, 친구처럼 다가와 “즐기면서 살라”는 릴리(밀라 쿠니스)에 대한 경쟁심리와 두려움은 그녀를 끝없이 괴롭힌다.

 

백조로서 우아한 척 살아가는 그 세계에 머물렀다면 느끼지 않았을 고통을 그녀는 솔로이스트가 되면서 갖게 된다. 즉 흑조를 받아들이기 위해, 그간 통제해 왔던 자신의 본능을 열어젖혀야 하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본능의 분출은 그것을 통제하려는 자신과 그 주변의 상황들(특히 인물들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공격성으로 복잡하게 얽힌 심리)과의 일대 전쟁을 의미한다. 영화는 니나가 흑조가 되기 위해 겪는 예술가적 투쟁의 과정을 일일이 보여줌으로써 그 내면을 시각화한다.

 

엄마의 통제를 부정하고, 숨겼던 성적 본능을 분출하며, 베스에 대한 죄책감과 릴리에 대한 경쟁심리를 이겨내는 과정은 그래서 피와 살점이 튀는 끔찍한 장면들로 그려지지만, 그것이 고스란히 한 예술가가 자기 성장을 통해 예술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어떤 감동에 도달하게 만든다. 특히 몸을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발레라는 예술형식의 속성상 이 껍질을 깨고 나오는 몸의 고통스런 장면들은 끔찍하다기보다는 작품의 메시지를 머릿속이 아니라 감각적으로도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등짝을 파고 나오는 날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피부를 뚫는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것은 백조가 흑조가 되는 이 성장과정을 ‘백조의 호수’라는 작품 속에서의 니나의 발레리나로서의 성장과정과,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니나라는 캐릭터의 성장과정, 그리고 이를 연기한 연기자 나탈리 포트만의 성장과정을 중첩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과정을 하나로 묶어낸 영화 역시 예술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블랙스완’은 한 예술(가)의 탄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작업인가를 보여준다. ‘블랙스완’은 멀리서 바라보면 우아한 백조처럼 보이지만 아주 가까이서 보면 피와 눈물이 철철 넘치는 흑조들의 고군분투를 소름에서 전율로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mansuri@osen.co.kr 블로그 http://thek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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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받은 미녀 과학자 - ‘블랙 스완’의 주인공 나탈리 포트만

 

정신분열과 광기에 시달리는 발레리나를 다룬 심리스릴러 영화 ‘블랙스완(Black Swan)’이 예매순위 상위권을 유지하며 관객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게다가 주인공을 맡은 미모의 여배우 나탈리 포트만(Natalie Portman)이 각종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어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카데미상, 골든글로브상, 미국배우조합상, 영국아카데미상, 크리틱스초이스상, 시카고비평가협회상 등 6개의 유명 영화제가 포트먼에게 여우주연상을 선사했다.

포트만은 1994년 영화 레옹(Leon)에서 킬러와 동행하는 깜찍한 소녀 마틸다를 연기해 존재를 알렸고, 이후 영화 스타워즈(Star Wars) 시리즈에서 다스베이더의 배우자인 아미달라 여왕을 연기해 다시 한 번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더구나 영화 블랙스완 촬영 중 안무가와 눈이 맞아 약혼을 했고 현재 만삭의 몸이 되어 화제를 낳았다.

그런데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이 여배우가 어렸을 때부터 과학 영재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또 다른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뉴욕타임즈(NYT)를 비롯해 각종 과학매체들은 포트먼의 과학 사랑을 보도하느라 열을 올렸다.

 

▲ 지난달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가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나탈리 포트만 

 

 


인텔 과학영재 발굴대회 준결승까지 올라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3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포트먼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졸업 때까지 한 번도 A학점을 놓친 적이 없다. 게다가 미국 시오셋(Syosset)고 재학 중에는 세계 최고의 과학경시대회라 불리는 인텔 과학영재 발굴대회(Intel Science Talent Search)에 출전해 준결승에까지 올랐다.

인텔대회는 반도체 개발로 유명한 미국 인텔사가 후원하는 과학행사로, 모든 과학 꿈나무들이 입상을 간절히 원하는 과학영재들의 아카데미상과 마찬가지다. 지난 1월 제70회를 맞은 인텔대회 출신 중에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만 7명에 달하며,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Fields Medal) 2명, 미국 국가과학기술훈장(National Medal of Science and Technology) 6명을 비롯해 과학천재들에게 지급되는 미국 맥아더 재단의 장학금 수혜자가 줄을 잇는다.

국내에서는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지난 2009년 인텔과 MOU를 체결한 이후 아태지역에서 과학기술, 공학, 수학 분야 영재들을 선발해 인텔대회에 출전시킨다.

 

▲ 전 세계 과학 꿈나무들이 입상을 열망하는 인텔 과학영재 발굴대회(Intel STS)

 


포트만은 1998년 ‘효소를 이용해 설탕으로 수소를 만드는 간단한 방법(A Simple Method To Demonstrate the Enzymatic Production of Hydrogen from Sugar)’이라는 논문을 써서 인텔대회 준결승에까지 오른다. 논문은 버려지는 쓰레기를 유용한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환경친화적인 처리법을 담고 있다. 또한 친구들과 ‘지구를 감시하는 아이들(World Patrol Kids)’이라는 그룹을 조직해 ‘재활용을 합시다(Recycle It)’라는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유튜브에서 노래 제목을 검색하면 앳된 모습의 포트먼이 등장하는 뮤직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다.

인텔대회에 출전은 대부분의 자유시간을 과학실험에 투자해야 하며 주말이나 방학 중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만큼 힘든 일이다. 그러나 포트먼의 끈기는 남달랐다. 그녀를 지도했던 교사와 교수들은 “똑똑하면서도 추진력이 있고 집중력이 높다”는 평을 내린다.

하버드대에서 포트먼을 지도한 애비게일 베어드(Abigail Baird) 미국 바사대 심리학 교수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포트먼은 마감을 늦춰달라거나 실험에서 빼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며, “TV에 출연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 전에 레포트를 완성할 만큼 학업에 열심인 학생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 과학 강연회에서 실험을 시연해보이는 배우 나탈리 포트만 


이후 포트만은 하버드대 심리학과에 진학해 뇌신경과학자의 길을 걸었다. 2002년 완성한 졸업논문의 제목은 ‘사물 연속성을 지각할 때의 전두엽 활성화(Frontal Lobe Activation During Object Permanence)’이다. 이는 뇌세포가 기억에 미치는 영향을 밝힌 논문으로, 공동 연구논문이 신경과학 학술지인 뉴로이미지(NeuroImage)에 포트만의 본명인 나탈리 허슐랙(Natalie Hershlag)의 이름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아이의 눈 앞에서 인형을 감췄을 때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 과정이 전두엽 내 혈중 산소농도와 관련이 있는지를 근적외선으로 검출해내는 내용이다.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마음이 어떻게 생겨나고 발전해왔는지가 궁금하다”고 밝힌 그녀는 영화계 은퇴 후에는 신경과학과 심리학을 계속 연구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미모와 두뇌 겸비한 여배우들의 계보

숨막히는 미모와 과학적 두뇌를 모두 겸비한 여배우가 포트먼이 처음은 아니다. 1940년대 헐리우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로 꼽히던 헤디 라마(Hedy Lamarr, 1913-2000)는 군 통신 분야에서 수많은 발명을 해냈고 그만큼 많은 특허를 보유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해 1949년 영화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의 주인공을 맡았던 그녀의 전공은 특이하게도 ‘로켓 과학’이다. 특히 어뢰나 미사일 등의 무기를 무선으로 조종할 때 주파수 교란에 방해받지 않고 진로를 유지하게 하는 방식을 연구했다. 대표적으로는 주파수 도약(frequency hopping)과 대역 확산(spread spectrum)에 대한 혁신적인 연구성과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Hedy Lamarr

Danica McKellar

 

Mayim Bialik

▲ 1940년대 헐리우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우로 꼽히던 과학자 헤디 라마 / ▲ 신경생물학자를 연기하면서 실제 신경생물학 박사학위를 소지한 배우 마임 비알릭

 

 

현재 헐리우드에는 라마의 뒤를 잇는 미녀 과학자들이 더 있다. 드라마 ‘케빈은 열두살’에서 시작해 ‘웨스트윙’, ‘뉴욕경찰 24시’, ‘영 저스티스’ 등의 드라마에도 연이어 출연 중인 대니카 맥켈러(Danica McKellar)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LA의 캘리포니아대 재학 중 ‘자기장의 특정 성질을 증명할 수 있는 수학공식’을 고안해 최고성적인 숨마쿰라우데(summa cum laude)를 받으며 졸업했다. 이후로도 수학을 쉽게 풀이한 과학교양서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

과학자 연기를 하면서 실제로도 과학자인 여배우가 있다. 과학괴짜들을 다룬 인기 시트콤 ‘빅뱅이론(Big Bang Theory)’에서 촌스런 신경과학자 파울러 역을 맡은 마임 비알릭(Mayim Bialik)이다. 1990년대 인기 시트콤 ‘블라섬’으로 데뷔한 그녀는 실제로 UCLA에서 신경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과학자다. 유전체 희귀질환인 프래더윌리증후군(Prader-Willi Syndrome) 환자들과 연관된 뇌화학 분야를 연구했다.


연기와 과학은 자부심과 긍지 높아야 가능

영화나 드라마에서 과학자를 연기하는 대부분의 배우들은 애석하게도 과학전공자가 아니다. 인기 드라마 ‘스타트렉(Stark Trek)’ 시리즈에서 뾰족귀 외계인 스팍 박사를 연기한 레너드 니모이(Leona Nimoy)는 연극영화과 출신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스타트렉을 보며 꿈을 키워온 과학자들은 지금도 니모이를 ‘자기 연구실로 초대하고 싶은 유명인’으로 꼽는다.

과학도 출신 연기자들의 자부심은 높은 편이다. 비알릭은 “과학과 연기가 완전히 동떨어진 분야가 아니다”라며 그 이유로 “두 분야 모두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긍지가 높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분석했다. 그만큼 쉽지 않은 분야이기도 하다. 비알릭은 “연기자가 오디션을 볼 때는 초라한 파이를 손님들에게 내놓는 제빵사가 된 기분”이라면서도 “대학 졸업 후에도 과학자의 길을 걸으려면 눈물이 쏙 빠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그만큼 과학과 연기를 병행하는 일은 쉽지 않다.

게다가 ‘얼굴이 예쁘거나 잘생기면 머리가 나쁠 가능성이 높다’는 편견도 존재한다. 헤디 라마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던 리사 퍼킨스(Lisa Perkins) 감독은 편견의 원인으로 ‘열등감’을 지목한다. 그는 “미모가 굉장한 사람과 마주하면 자신이 초라하다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며, “자신의 기분을 상대방에게 심리적으로 투사하는 것이 미녀 과학자들을 편견으로 바라보는 이유”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쉽지 않은 길을 걸으며 하나씩 꿈을 이뤄가는 나탈리 포트만처럼 우리나라에서도 과학도 출신의 연기자들이 속속 등장하기를 기대해본다.

 

2011.3.7 / 사이언스 타임즈 / 임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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