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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과학, 기술, 환경

신기전(神機箭) 다시 날다

by Wood-Stock 2009. 10. 21.

‘종이 화약통’ 단 화살로켓 신기전, 하늘 날았다

연소압력 견디는 한지 약통 복원 시험발사 성공
채연석 박사·허환일 교수 신기전 연구 노력 결실
수차례 실험 결과 '노즐없는 로켓'일 가능성 커

15세기 조선 세종 때 개발돼 압록강변 국경을 지키는 무기로 쓰였던 전통 화살 로켓 '신기전'(神機箭)이 다시 하늘을 날았다.

허환일 충남대 교수(항공우주공학) 연구팀은 지난 15일 세계 우주공학자들이 참석한 대전 국제우주대회(IAC)에서 길이 5.58m, 비행거리 1㎞로, 신기전 중 가장 큰 대신기전을 복원해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1993년 작은 규모의 소신기전(1.15m)과 중신기전(1.45m)을 복원했던 채연석 박사(한국항공우주연구원 전 원장)도 지난 17일 추진체에 해당하는 화약통의 구조를 다시 해석해 만든 새로운 중·소 신기전을 쏘아올렸다.

최근엔 '종이로 감싼 폭탄'을 싣고 날아가다 사방으로 흩어져 터지게 했다는 산화신기전(5.31m)도 복원 작업 중이어서 사료에 전해지는 '신기전 4형제'가 모두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 로켓공학자들 오랜 복원 노력

옛 문헌 < 병기도설 > (1474)에 전해지는 신기전의 위력과 기술을 되살려 널리 알리는 일에는 채 박사의 공이 컸다. 1973년부터 신기전을 연구해온 그는 미국 유학 중인 1983년 국제우주대회에서 신기전의 설계도면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처음 알렸다. 그는 "옛 문헌엔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상세한 설계도가 남아 있다"며 "설계도가 전해지는 로켓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말했다.

복원은 1990년대부터 본격화했다. 채 박사는 1993년 대전 엑스포 개최를 기념해 중·소 신기전과 화차를 처음 복원해 크게 주목받았다. 그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 신기전 > 에 자문을 하기도 했다.

2007년 말부터 허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채 박사의 자문을 받아 가장 규모가 큰 대신기전 복원에 나섰다. 허 교수는 "설계도면을 보니 측량 단위를 촌, 푼과 더불어 리(0.31㎜)까지 썼는데, 이런 정밀도는 정말 놀라울 정도"라며 "요즘으로 치면 나노과학 수준"이라고 말했다.

■ '한지 화약통'이 추진체

로켓공학자들한테 큰 관심을 끈 것은 현대 로켓의 추진체에 해당하는 '약통'(화약통)을 종이로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허 교수는 "종이 약통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자주 발견되지만 대신기전처럼 당대 최대 규모의 로켓 화약통을 종이로 만들었다는 점은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매우 높은 연소 압력을 견디며 터지지 않아야 하는 약통을 종이로 만드는 일은 쉽잖았다.

연구팀은 여러 제조법으로 만든 갖가지 한지들을 대상으로 '인장력'을 측정했다. 여러 무형문화재들의 도움을 받아 약통 제조 기술까지 배웠다. 이들은 국산 닥나무로 만든 한지를 롤러로 누르며 150~160겹이 되도록 둘둘 말아 두께 1.62㎝의 약통을 만들었다. 허 교수는 "외국 공학자들은 종이 약통이 왜 터지거나 타지 않는지 궁금해했는데, 이는 꽉 채운 화약이 다 타들어가기 전까지는 오히려 종이를 보호하는 구실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신기전은 노즐 없는 로켓"

추진 가스를 분사하는 '노즐'도 오래 애를 먹였다. 복원 작업을 벌인 로켓공학자들은 로켓이라면 당연히 분사구를 좁혀 분사 압력을 최대로 높이는 장치인 노즐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실험을 거쳐보니 '신기전은 노즐 없는 로켓'일 가능성이 더 커졌다.

노즐 없이 어떻게 5.58m나 되는 대신기전이 1㎞나 날아갈 수 있을까? 허 교수는 "추진 연료인 흑색화약을 종이 약통에 망치질로 단단히 채워넣고 원뿔형 구멍을 깊게 만들어 그 뾰족한 끝부분부터 타게 하면, 화약이 타들어가며 자연스레 빈 공간이 생긴다"며 "이 공간이 '자연 노즐' 구실을 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복원 연구자들은 '완벽 복원' '원형 재현'을 목표로 내걸지만, '노즐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해석이 뒤바뀌었듯이 문헌 사료만으론 '15세기 원형'을 그대로 되살리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로켓공학자들은 왜 신기전 복원에 애를 쓸까? 국산 로켓 케이에스아르(KSR) 개발의 주역이기도 했던 채 박사는 "신기전의 설계도를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 작동하는 기능을 눈으로 보는 일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며 "복원사업은 조상의 탁월한 과학기술 능력과 재주를 실감하게 한다"고 말했다.

대전/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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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전'(神機箭)

 

1448년(세종 30년) 고려 말기에 최무선이 화약국에서 제조한 로켓형 화기()인 주화()를 개량하여 명명한 것으로 대신기전(), 산화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등의 여러 종류가 있다. 병기도설에 기록된 신기전에 관한 내용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병기의 기록이다.

대신기전은 총 길이 5583㎜, 안정막대 길이는 5310.8㎜이며, 지금의 로켓엔진에 해당하는 약통은 길이 695㎜, 직경 102㎜, 두께 16.2㎜, 내경 63.1㎜, 분사구멍 직경 37.5㎜이다. 대나무로 만든 화살대의 윗부분에 한지로 만든 약통을 부착하고, 폭탄에 해당되는 방화통을 약통 위에 올려놓고 도화선을 약통과 연결하여 신기전이 목표지점에 가까워지면 자동으로 폭발하도록 설계되었다. 약통에는 화약을 채우고 바닥에 지름 37.5mm 크기의 구멍을 뚫어 화약이 연소되면서 가스를 분출시켜 로켓처럼 날아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사정거리는 약 2㎞에 달하였다. 세종 때 90개가 제조되어 의주성에서 사용된 기록이 있다.

산화신기전은 총 길이와 안정막대 길이가 5310.8㎜로 같고, 약통의 제원은 대신기전과 같으나 발화통을 변형하여 윗부분이 지화()와 발화()를 함께 넣어 적을 혼란에 빠뜨릴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중신기전은 총 길이 1455㎜, 안정막대 길이는 1406㎜이며, 약통은 길이 200㎜, 직경 28㎜, 두께 5.7㎜, 내경 16.6㎜, 분사구멍 직경 7.2㎜이다. 약통과 발화통의 구조는 대신기전과 같은 구조로 만들었다.

소신기전은 총 길이 1152㎜, 안정막대 길이는 1103㎜이며, 약통은 길이 147㎜, 직경 22㎜, 두께 4.2㎜, 내경 11.6㎜, 분사구멍 직경 4㎜이다. 신기전 가운데 가장 작은 형태로서 대신기전 ·중신기전과는 달리 폭발물이 장치되어 있지 않다. 사정거리는 중신기전이 150m, 소신기전이 100m 가량으로 추정된다. 중 ·소신기전의 발사는 1개씩 빈 화살통 같은 곳에 꽂아 발사했으나 1451년(문종 1년) 화차가 제작된 이후로는 화차의 신기전기()에서 주로 발사하였다.

 

*국조오례의 병기도설에 실려 있는 화차의 설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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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비밀병기 신기전

최근 '신기전'이란 조선시대 화약무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앞서 말하자면, 그 무기의 정확한 명칭은 '화차'라고 불리는 총통(銃筒)무기의 일종이며, 신기전은 화살에 화약을 매달아 쏘는 무기를 말하는 것이다.

신기전을 로켓으로 본다면 총통기는 일종의 로켓발사틀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형태는 현대의 다연장 로켓포와 상당부분 유사한 점이 있다.

14세기 말은 중국에서는 원왕조과 붕괴되고 명왕조가 성립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와 조선이 왕조교체를 하는 혼란기였다.  그리고 이 혼란기를 틈타 북쪽에서는 유목민족이 남쪽에서는 일본왜구가 극성을 부렸다.
 
그런데 조선은 일찍이 고려말 최무선에 의해 개발된 화약무기로 인해 극에달하였던 왜구의 해상침입을 격퇴한 바 있었기에, 화약무기의 효용과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당시의 화약무기는 해상에 떠 있는 목조군선을 격침시키거나 화염으로 태울 목적으로 개발된 것으로 육상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1392년 왕조교체에 성공한 조선은 세종대왕대에 이르러 차츰 왕조가  안정을 찾아갔고, 그에따라  국방력강화및 육상에서 효율적인 전투를 목적으로 각종 화기를 개발하게 된다.

세계최초의 로켓무기 대신기전



신기전은 조선시대 화약 추진 화살로 고려 말기 최무선(崔茂宣)이 제조한 주화(走火)를 1448년(세종 30)에 개량한 것이다.

처음만들어질 당시에는  일반나무로 대[幹]를 만들고 가죽으로 깃[翎]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무화살은 만들기도 쉽지 않고 가죽은 구하기 어려우므로, 대나무로 대를 만들고 깃[羽]으로 살깃을 만들어 재 시험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 성능이 우수하여 시험자는 다음과 같이 세종대왕에게 아뢰었다.

화살이 멀리 가고 단단하여 나무화살보다 훨씬 나으니,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갑절이나 됩니다. 또 깃털로 살깃을 만드는 것 역시 편하고 쉬우니, 이 뒤로는 이 예(例)에 의하여 만들고, 모름지기 어교(魚膠)로 살깃[翎]을 붙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나무역시 습기나 부패에 약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옻칠을 하여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였다. 

종류에는 크기에 따라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등이 있다. 그 밖에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도 있긴 하지만 대신기전과 같은 규격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이 같은 화약무기를 최초의 로켓 발사포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하여 해석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 할 수 있다.

우선 중국에서는 1232년 등장하는 비화창(날으는 불창)을 최초의 로켓무기로 주장하고 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비화창은 발사하면 200m정도 날아가 떨어져 사방 6∼7m 정도를 불바다로 만드는 위력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금나라 군대가 몽고군에 저항하기 위해 사용한 신무기로 중국이 개발한 무기라고 볼 수 없다.  더구나 이 비화창에 로켓 무기가 적용되었다고 확인할만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그리고 서양 최초의 로켓 발사포는, 인도군이 사용하던 것을 모방하여 영국의 W. 콩그레브가 1805년 제작한 것이다. 물론 콩그레브의 개발품은 살상력이나 효율성면에서 대신기전보다 앞서지만,시기적으로 상당히 늦은 19세기의 발명품이며 중량도 가벼운 편이다. 
평균 길이는 1m, 평균 지름은 10cm, 무게는 1∼2.8kg정도이며, 최대 사정 거리는 2천 7백m 였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신기전 경우  1474년 편찬된 「국조오례서례」병기도설에 그 설명및 설계도까지 정밀하게 나와있어, 로켓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하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선 대신기전은 1448년 제작된 것으로 시기적으로 서양의 로켓무기보다 147년이나 앞설뿐더러,  길이는 무려 5m가 넘는 17자(521cm)이고 무게는 7~8kg이나 된다. 

윗부분에 원통형의 종이통(로켓엔진)이 부착된 형태로 이 속에 화약을 채우며, 아래에는 연소가스 배출을 위해 지름 1치 2푼(36.8㎜)의 구멍을 내게 된다. 바로 신기전에 최초의 로켓원리가 적용되었다고 보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대신기전의 경우 사정거리역시  1천보(800~900m)가량 되어, 19세기 이전까지의 어떠한 로켓형 무기보다도 가장  무거운 중량을 가장 멀리까지 보낼 수 있었다. 여기에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은 대신기전과 같은 규격이지만 발화통 내에 철편(鐵片)을 포함하고 있어 살상 효과를 극대화 하였다
 
대신기전의 사거리가 2km 이상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압록강이나 두만강 너머까지 적을 요격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사거리를 확보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중신기전은 길이 4자 5치(137.9cm)로 역시 휴대하기 어려웠지만 소신기전은 길이 3자 3치(101.1cm)로 병사개인 화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신기전의 경우 대·중신기전과는 달리 폭발물이 부착되지 않았다. 중신기전은 150m, 소신기전은 100m쯤으로 추측된다.

 그림처럼 개인화기로서의 신기전은 발화통에 불인 붙인 후 병사가 직접 활을 쏘아야 했다. 물론 정면으로 맞으면 충분한 살상력을 가지겠지만,  지휘장교가 신호를 보내거나 적을 혼란시킬 목적으로 많이 쓰였다.

 


이렇게 개발된 무기를 최전방인 4군 6진에 배치시켰음은 물론이고, 보다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화기를 다루는 훈련까지 실시하였다. 다만 화약무기 제조가 어려워 원할하게 이루어 지진 못하였다. 따라서 총통및 신기전의 연습은 매우 제한적이고 엄격하게 실시되었는데, 중소 신기전의 경우 국경지대인 함경도와 평안도에서만 매년 1회씩 실시하였으며, 대신기전은 2년에 1회씩 실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신기전을 실전에 사용할 때가 왔다.  1451년 정월 김종서 장군이 지키던 압록강 방면에는, 북방유목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런데 북방유목민들의 주력은 기마병으로, 조선의 단순한 보기병 보충만으로는 그들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 없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이 결빙되어, 기마병으로도 자유자재로 넘어 올 수 있게되면, 조선으로써는 감당하기 매우 어려운 위기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김종서 장군은 조정에 최대한 많은량의 신기전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도 사태의 긴박함을 인식하고 신기 3천과 소 신기전4천을 평안도 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이렇게 김종서장군과 조정의 신속한 화기충원으로 인해 야인들의 적대적인 움직임을 원천봉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징옥등의 변방무장역시 북방야인들을 견제할 무기로 신기전보다 더 뛰어난 것이 없다고 할 만큼 유용한 무기였다. 다만 소신기전의 경우 실용성과 화력에 문제가 되어 생산이 1451년 이후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후 신기전은 중신기전을 주축으로 하여 운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기전의 업레이드 화차

 

 

 조선시대 실전에 사용했던 전차(戰車)로 수레 위에 발사장치를 부착하여, 이동이 순조롭고 단번에 여러 개의 활 또는 총을 쏠 수 있게 고안된 무기이다.

 조선시대에만 5가지 화차가 있었는데, 첫번째 화차는 1409년(태종 9) 군기감소속 이도(李韜)·최해산(崔海山) 등이 화약무기를 연구하던 끝에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를 장탄한 동통을 수레에 장치하여 달리면서 발사하였다. 

두번째 화차는 1451년(문종 1) 문종이 손수 창안한 문종화차이다.


우리에게 흔히 신기전으로 알려진 무기가 바로 문종시대 때 고안된 화차이다. 이는 수레 위에 틀을 만들어 중신기전(中神機箭) 100개와 사전총통 50개를 설치하여 심지에 불을 붙이며 차례로 발사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공들여 만든 신기전및 총통무기는 과연 실전에 사용된 일이 있었으며 그 위력은 어느정도였을까?  재차 언급하자면 총통무기는 지자총통, 천자총통처럼 함포화기까지 포함하는 화포무기의 총칭이다.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는 오직 해전에서만은 화력의 우위를 보였는데,  그러한 우위가 총통무기의 우수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이다.

반면 신기전은 개인화기로서는 별다른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였지만, 신기전이 위력은 역시 화차에 장착하였을 때야 다연장 로켓포로서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 화차는 임란당시 1차적으로 평양성등에 배치되어 일본군의 북진을 상당기간 저지하는데 활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박진(朴晉)장군이 경주 탈환시 사용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으며, 권율(權慄)장군이 행주산성 전투에도 사용하여 그 위력을 보여 주었다.

 

 

 

최대사거리 36km 현재 우리육군이 보유한 K-136 구룡 다연장 로켓포

 

 

조선시대 다연장 로켓포인 화차에서 신기전을 발사하는 모습


 

이처럼 우수한 화약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조선이었지만, 끝내  국력 배양에 대한 적극적인 국방체재의 전환은 이루어 지지 못하였다. 더구나 임란이후 중국에서 청왕조가 성립하면서 극심한 내정간섭이 이루어 졌고, 이것은 열악하였던 조선의 화기개발 및 도입을 더욱 제한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발명품이 세상을 바꾸는 큰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 뒤에 따르는 수많은 개선과 노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사회국가적 지원이 필요한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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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로켓 무기 '대신기전' 개발자 밝혀냈다"

 

조선의 로켓 무기인 '대신기전(大神機箭)'의 개발자가 젊은 과학기술자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채연석 박사는 세종 27년부터 문종 1년 사이의 조선왕조실록을 분석한 결과, 조선왕조전통 로켓 무기인 '대신기전' 연구개발 책임자는 1445년 당시 39살의 과학기술자 박강이라고 14일 밝혔다.

대신기전은 길이 5.6m, 무게 4~5kg, 비행거리가 약 1km에 달하는 1448년 개발된 세계 최초의 2단형 로켓으로, 그동안 개발자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채 박사에 따르면 박강은 세종 27년부터 2년3개월 동안 군기감정(軍器監正)을 지내면서 최무선 때부터 사용돼오던 '주화(走火)'를 개량한 로켓화기인 '중주화', '대주화' 등을 연구개발했다.

군기감은 화약무기를 개발·생산하는 곳으로 지금의 국방과학연구소에 해당된다.

주화는 세종 29년 가을부터 12월초까지 여진족을 격퇴시키기 위해 평안도와 함길도의 4군 6진 지역에 모두 2만4천930개가 배치됐다.

실록에는 박강에게 이 가운데 9천개를 평안도 현장에서 직접 제작하라는 지시가 기록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박강은 세종 29년 6월 이미 군기감정에서 파직된 상태였음에도 세종이 그를 평안도에 파견한 것은 로켓화기의 구조와 제작 방법이 복잡해 전문기술자가 아니면 제조할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채 박사는 설명했다.

'달리는 불'이라는 뜻의 이 로켓 무기 주화는 세종 30년(1448)에 이름이 신기전(神機箭)으로 바뀌었고, 박강이 개발한 중주화와 대주화도 중신기전과 대신기전으로 발전했다.

채연석 박사는 우리의 전통 로켓인 신기전에 애착을 갖고 40여년간 지속적으로 연구를 진행, 2008년 원형 복원에 성공했으며 영화 '신기전'의 자문도 담당했다.

 j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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