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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과학, 기술, 환경

한국의 최초 비행사들 (안창남, 권기옥, 박경원, 이정희...)

by Wood-Stock 2009. 9. 4.

식민지 조선의 여자비행사로 산다는 것

[발굴] 비행사이자 무용가 · 운전사였던 이정희의 인생유전

 

 

"안창남이라는 청년이 일본에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다. 매우 장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엄청난 일은 아니다. 안군이 새로운 형태의 비행기를 발명했거나 1만 명 중에 1명 나올까말까 한 출중한 비행사가 되었다면, 우리 조선인들은 그를 자랑스럽게 여길 만하다.

그러나 안군은 그저 다른 사람이 발명한 비행기의 조종술을 배운 1천 명 중의 1명일 뿐이다. 따라서 호들갑을 떨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지난 몇 주 동안 많은 지면을 할애해 그를 치켜세웠다. 안군이 비행기를 몰고 조국을 방문하는 걸 도우려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성금이 걷혔다. 멍청이들 같으니!"

이 무슨 심통이 난 독설인지 아니면 탁견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지만, 1922년 12월 9일자 <윤치호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사실이지 윤치호의 말마따나 비행사 안창남의 명성은 분명 <동아일보>의 과분한 찬사가 만들어낸 측면이 없지는 않았다. 마치 그 이듬해에 이기연(李基演) 비행사가 등장했을 때 이번에는 <매일신보>가 그 역할을 고스란히 떠맡았던 것처럼 말이다.

안창남, 제일 유명한 조선인 비행사

▲ 1922년 12월 10일 안창남 비행사는 처음으로 조선의 하늘을 날아올랐다. 왼쪽은 그가 가져온 비행기 '금강호(金剛號)'이고, 오른쪽은 창덕궁 위를 나르는 금강호의 모습이다. 이 당시 창덕궁 전하 즉 순종임금은 후원금으로 금일봉을 하사했으며, 그 보답으로 안창남은 두 번째 비행에서 창덕궁 위를 날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땅의 숱한 조선인들에게는 '비행기'가 확실하게 희망이자 감격으로 다가왔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안창남은 단연코 제일 유명한 조선인 비행사였다. 그러니까 살아서는 조선인 비행사의 대명사로 통했고, 죽어서까지 하나의 전설이 된 이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그의 등장을 경이감과 동경심을 너머 하나의 열망과 포부로 받아들인 조선의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안창남의 고국방문비행은 또 다른 선구적 비행가들을 많이 만들어냈고, 거기에는 두 명의 여자비행사도 들어있었다.

그 대열의 앞쪽에는 박경원(朴敬元)이 있었고, 이내 이정희(李貞喜)가 그 뒤를 이었다. 흔히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알려진 대구 출신의 박경원은 일본비행학교를 거쳐 1927년 1월에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다시 1928년 7월에는 이등비행사의 자격을 취득했고, 이어서 1933년 8월 7일에 '푸른 제비호'를 몰고 향토방문 및 일만(日-滿) 친선 연락비행에 올랐다가 추락사했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만큼이나 그의 생애에는 파란만장한 구석이 적지 않았다. 일찍이 하늘의 자유를 꿈꾸었지만 넉넉하지 못한 집안의 형편에 늘 발목이 잡히곤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가난이 꼭 문제이다. 그런데 어찌 이러한 일이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을까?

여류비행사의 가난은 숙명?

박경원과 더불어 식민지 조선이 배출한 선구적인 여류 비행사의 하나였던 이정희 역시 이 문제에 관한 한 전혀 예외는 아니었다. 다치카와의 일본비행학교를 거쳐 1927년 11월에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취득했던 이정희의 인생역정에는 확실히 박경원의 그것보다 훨씬 더 기구하고 극적인 데가 있었다.

도대체 그는 어떠한 삶을 살았던 것일까?

일본의 제국비행협회가 발간한 <소화5년 항공연감>을 보면 이정희는 조선 경성부 누상동 75번지가 주소지이고, 1910년 1월 26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얻은 것은 고작 열여덟 살 소녀시절의 일이 된다. 아버지는 이순규(李洵珪)였고, 위로 이용구(李龍求)라는 오빠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다른 기록들을 보니까 토월회의 배우였던 이소연(李素然) 역시 그의 오빠였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학교경력은 조금 복잡하다. 처음에는 진명여학교 초등과에 들어가 중도에 그만 두었고, 일년을 놀다가 다시 배화여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내 숙명여학교로 옮겨가는 과정을 거쳤다. 여기저기로 떠돈 것은 모두가 집안의 살림살이가 빈한했던 탓이었다.

숙명여학교 보통과 4학년 때에는 가정교사 생활로 근근히 월사금을 감당했다고 적혀 있다. 열다섯의 나이에 겨우 보통과를 졸업했고, 곧이어 숙명여학교 고등과에 진학하였으나 이마저도 학비를 감당하기가 벅찼던지 2학년 과정을 마치고 끝내 학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대신 그가 선택한 진로는 '내선자동차주식회사'의 사무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 식민지 시대에 이정희는 박경원과 더불어 여자비행사의 쌍벽을 이뤘다. 1926년 9월의 대구모험비행으로 처음 그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뒤부터 일본비행학교를 거쳐 삼등비행사와 이등비행사의 자격을 따내던 시절의 모습들이다. 마지막의 것이 1929년이니, 모두가 10대 후반 때에 촬영된 장면들이다.
하지만 이 무렵에는 벌써 그가 비행사 되기를 단단히 작정한 뒤였다. 아닌 게 아니라 숙명여학교 고등과 1학년 때에는 이 일로 병을 얻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까지 해야 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매일신보> 1927년 11월 25일자에는 이정희가 비행사의 꿈을 갖게된 경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이정희, 드디어 비행기를 타다

"이리하여 그의 가슴에는 불타는 울분이 피어오를 때 마침 안창남 비행사가 고국방문비행을 하게 되었다. 안창남의 인기가 조선전국에 끓고 적연하던 경성의 창공을 용장히 프로펠러 소리로 정복하는 것을 볼 때 빈곤과 불운에 눌려 살던 이정희양의 가슴은 시원하였고 정신을 쇄락하였었다.

이것이 동기로 이정희양은 자나깨나 비행기 타령만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안은 빈한하고 의뢰할 곳조차 없으니 그에게는 오직 초조와 노심만 더하여 갈 뿐이었다. 그가 얼마나 비행사 되기를 동경하였는가 그가 일찍이 기록한 일기를 뒤져보면 이런 글이 있다. (후략)"


그런데 그러던 차에 정말 그에게 기막힌 기회가 다가왔다. 미하라 후쿠히라(御原福平)가 이끄는 일본 나고야비행학교의 모험비행단이 조선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때가 1926년 7월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정희는 다짜고짜로 미하라 교장을 찾아가서 자신의 열망을 간청하였고, 마침내 비행기에 올라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용산연병장에서 벌어졌던 모험비행은 물론이고 남선지방의 순회비행 때에도 계속하여 비행단에 동행하는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 실제로 이정희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도 바로 그 일이었다. 그것이 나름의 행운이기는 한데, 알고 보면 굉장히 위험스런 행운이었다.

<동아일보> 1926년 9월 24일자에 '숙명출신의 신비행가, 이정희양의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내용은 바로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최초의 신문기사였다. 그제껏 아무런 비행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단지 비행기에 동승했을 뿐이었던 그에게 과연 비행사라는 명칭이 합당했던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러한 그에게 날아가는 비행기의 날개 위에 올라서는 묘기를 부리도록 했던 미하라 교장의 호의는 정녕 호의가 아니라 차라리 만행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실제로 모험비행대회가 끝난 뒤 일본으로 따라가려는 이정희를 짐짓 '수일 내로 전보를 칠 터이니 그 전보를 받고 곧 오라'를 말로 떼어놓고 훌쩍 떠나버린 데서도 그네들의 속내가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물론 그 후로도 그러한 전보는 결코 오지 않았다. 애당초 그네들의 눈에는 비행기를 향한 이정희의 열정이 그저 제 정신이 아닌 무모한 조선처녀의 그것으로 비쳐졌을 것이 뻔했다. 결국 오지도 않을 전보를 기다리면서 이정희는 또 한번의 좌절과 더불어 가난이 주는 고통을 그렇게 맛봐야만 했다.

드디어 삼등비행사 자격증을 따다

그러한 잠시 그해 11월이 되자 이번에는 정말로 의미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진짜 후원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충남 천안 출신의 비행사 서웅성(徐雄成)이 그 주인공이었다. 일본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연마하던 그가 잠시 귀국하던 차에 이정희의 딱한 처지를 전해듣고 그의 후원자 되기를 자청했던 것이다. 둘 사이에는 이기연 비행사가 매개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역시 아주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던 모양인데, 무슨 심산인지 비행기를 사려고 모아둔 돈으로 이정희의 학비를 대겠다는 뜻밖의 제의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비행학교에 동행하기를 권했는데, 혹여 청춘남녀의 일이라 공연히 세상의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하여 둘이서 양가의 허락 하에 의남매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리하여 기대치 않았던 서웅성의 호의와 배려로 이정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카미타에 있던 일본비행학교 정과에 입학하였는데, 그때가 1926년 11월 19일이었다. 이듬해 1월에는 이 과정을 마치고 다시 다치카와에 있는 조종과로 옮겨 수련을 계속한 결과 일본에 건너온 지 딱 일년이 지난 시점에서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다.

앞서 박경원이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딴 것과는 대략 10개월 가량 뒤졌으나, 박경원이 이정희보다 9년이나 연상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정희의 비행사 입문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른 나이였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이정희가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취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제야 후원회를 조직한다는 움직임이 있었고, 실제로 1928년 3월에는 후원음악회까지 열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같은 도움이 어느 정도의 보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이등비행사가 목표였다.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또한 궁핍한 그로서는 여전히 그것을 감당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 고민거리였다. 그러한 형편 때문인지 1929년 7월에 가서야 이정희는 다시 이등비행사의 시험에 겨우 응시할 수 있었다.

비행사에서 무용가로 변신하다

▲ <동아일보> 1929년 9월 21일자에 소개된 '무용가' 이정희의 모습이다. 이렇듯 가난한 비행사 이정희는 땅으로 내려왔으나 이마저도 '패트론' 최씨와의 마찰 덕분에 이내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무렵 참으로 엉뚱한 듯이 보이는 기사 하나가 <매일신보>에 등장했다. 그토록 갈망하던 이등비행사의 시험에 합격한 이정희가 이번에는 난데없이 무용가로 변신한다는 소식이었다. <매일신보> 1929년 7월 18일자에는 그 내막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경성이 낳은 여류비행가로서 다치카와비행장에서 업을 닦은 지 만 3개년, 청공을 동경하고 일도 사계에 정진하던 이정희양은 이번 7월 5일의 2등비행사 시험에 훌륭히 합격되었다. 그러나 현재 아국 제도로서는 그 기술에 있어서 아무리 우수할지라도 여자는 이등비행사 이상이 될 수 없다.

이에 비애를 느낀 이양은 드디어 다년의 지망을 다른 방면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생활의 길을 밟기로 되었다. 그리하여 신흥예술로 전도의 광채가 찬란한 무용가가 되고저 석정막, 소랑(小浪)을 중심으로 한 석정막무용연구소에 꽃다운 일생을 바치게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석정막(石井漠) 즉 이시이 바쿠는 유명한 무용가 최승희(崔承喜)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물론 최승희 역시 이 무용연구소 소속이었다. 하늘을 날던 비행사가, 그것도 이등비행사의 자격을 막 취득한 직후에 무용가로 입문한다는 것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나름의 재능이 없지는 않았던지 불과 두 달만에 성공적으로 첫무대에 데뷔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무용가로서 새로운 인생진로의 돌파구를 열어보겠다는 이정희의 시도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패트론'이었던 최씨와의 충돌이 말썽이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에서 '최씨'라고 하였으니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최승희 혹은 그의 오빠인 최승일과 모종의 마찰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자동차 운전사로 변신한 여류비행가

이시이무용연구소에서 밀려난 그가 하릴없이 서울로 되돌아온 것이 1930년 봄이었다. 말하자면 그가 갓 스물을 넘긴 때의 일이다. 그리고 다시 세상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그가 이번에는 자동차 운전사로 나섰다는 소식이었다. 1930년 5월 이후 중국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이 번번이 좌절된 데다 비행계로 복귀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해보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 <매일신보> 1931년 3월 13일자는 다시 택시운전사로 변신한 이정희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1931년 3월부터 종로에 있던 아세아자동차부(亞細亞自動車部)에 나가 택시를 몰며 기꺼이 핸들을 잡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 또한 그다지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무렵 주체할 수 없는 열망은 그것에 멈추질 않았고, 그의 생각은 미국으로 건너가 비행수업을 계속하겠다는 데에 미치고 있었다.

이윽고 영어공부를 핑계삼아 중국 상해로 건너간 것이 1932년 10월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도미준비를 하면서 자동차운전도 계속하였다는데, 그곳에서도 어김없이 의외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 자신의 로맨스가 문제였다.

미국진출을 위해 건너간 상해 땅에서 그는 독일부인을 얻어 살고 있던 의학박사 이성영(李成榮, 가명)을 우연히 만났고,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에 두 사람은 부부되기를 약속하고 이 박사는 독일부인과 이혼까지 하였는데, 1933년 6월 무렵 이정희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을 한 뒤로는 이 박사가 변심하여 둘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고 알려진다.

실연의 충격으로 자살을 기도하다

아마도 그것이 상당한 충격이 되었는지 이정희는 마침내 극단의 선택을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매일신보> 1933년 8월 6일자에는 '변화 많은 생애의 주인, 이정희양 음독빈사, 비행가요 무용가요 운전수, 그는 어찌하여 독약을 마시게 되었나, 실연설, 사업실패설'이라는 제목의 급보가 실렸다.

여기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그가 쓰러진 것은 '레미놀'이라는 마취제를 다량으로 복용한 탓이라 하였다. 그는 비행기 공부에 실패하면 죽겠다고 하여 항상 약을 품고 있었다고도 하는데, 약을 먹은 직접적인 이유가 실연에 따른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짐작컨대 거기에는 분명 물질적 여유가 없어 비행기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자기의 신세한탄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도 싶다.

▲ 중국 상해에서 돌아온 직후 이정희의 음독사실을 전하고 있는 <매일신보> 1933년 8월 6일자이다. 그가 죽음을 생각한 것은 과연 실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궁핍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탓이었을까?
▲ 우연찮게도 이정희가 죽음을 생각하던 며칠 뒤에 또 다른 여자비행사 박경원이 고향방문비행을 시도하다가 추락사했다. <매일신보> 1933년 8월 9일자에 수록된 사진자료 속에는 박경원(가운데)과 이정희(오른쪽)가 나란히 선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일이란 게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이정희의 음독자살 소동이 벌어진 며칠 뒤 이번에는 정말로 '단짝인' 여자비행사 박경원의 추락사 소식이 들려온다. 비행을 꿈꾸던 누구는 죽음을 생각하고 그 앞으로 다가갔으나 정작 그 죽음은 살짝 비켜나 하늘을 날던 다른 이의 몫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더구나 궁핍한 처지로 따지자면 누구 하나 더 나을 것도 없는 처지였기에 박경원의 죽음이 그야말로 결코 남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정희 자신이 가련했던 처지를 추스르는 전환점이 된 듯했다. 궁핍이 가져다준 심리적 압박감을 말끔히 떨쳐내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그 후로는 일탈된 인생역정을 조금씩 수습해나가려는 자취들이 역력했던 탓이다.

이듬해 즉 1934년 봄에는 본연의 비행수업을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고, 비록 그곳에서 하네다 비행장 앞에 있는 오카다상회(岡田商會)의 비행장 안내계로 일했을 망정 그는 묵묵히 다시 하늘을 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동안 땅으로 내려갔던 가난한 비행사는 그렇게 하늘로 되돌아 왔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의 의미는?

1935년 10월이 되자 그의 오랜 열망은 마침내 실현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박경원이 못다 이룬 고향방문비행의 기회가 성사단계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일선만(日鮮滿)친선비행이라는 명칭이 나붙은 것이 마뜩찮은 일이었을 테지만, 그게 무슨 대수였을까? 하지만 모질게도 출발 직전 비행기의 고장으로 이 비행계획은 취소되고 만다.

그리고 그 후로도 그의 고향방문비행이 실행에 옮겨졌다는 소식은 없었다. 어느 듯 세상은 식민지 시대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매일신보> 1936년 신년특집기사로 나온 '신년 활약이 기대되는 조선청년'의 면면에 이영민, 최승희, 손기정, 현제명, 백남운, 장혁주 등과 더불어 이정희의 동향이 소개된 적이 있었으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와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이 더 이상 드러난 것은 없다.

다만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1937년판과 1938년판 <항공연감>에 연거푸 그의 소속기관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경무국 소속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또 어떠한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어쨌거나 그러한 행적은 여러모로 미심쩍은 부분이라 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다.

우연찮게도 그가 태어난 것이 1910년이었으니 그의 삶은 오롯이 식민지 시절의 길이만큼 겹쳐진 셈이다. 비행사에 뜻을 세우고 어쩌다가 어린 나이에 삼등비행사의 자격을 따내는 행운을 누리긴 했으나 더 이상 그의 꿈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대의 틀을 깨겠다는 당찬 포부에도 불구하고 뉘라서 타고난 빈곤의 굴레를 쉬이 벗어 던질 수 있었을 것인가 말이다.

자동차회사의 사무원이었다가, 얼결에 모험비행대를 따라다녔다가, 서웅성의 도움으로 비행사가 되었다가, 그마저 벗어 던지고 무용계에 입문했다가, 택시 운전사가 되어 길거리에 나섰다가, 미국에 진출하겠다고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가, 거기에서 의학박사와 사랑에 빠졌다가, 마침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비행장 안내원이 되었다가, 드디어 고향방문비행의 성사를 눈앞에 두었다가, 뭔지 모를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의 이력을 남겼던 사람, 바로 그가 이정희 비행사였다.

해방후 공군대위가 되다

그런데 그의 기구한 인생유전은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해방이 되고 1949년이 되었을 때 한참이나 잊혀진 듯했던 그의 이름은 다시 신문지상에 등장했다. 이름하여 '여자항공대', 이곳의 책임자가 이정희였다. 해방 4년만에 그는 어느덧 공군 대위로 변신해 있었다.

이 조직에 관해서는 약간 증언이 엇갈리긴 하지만, <동아일보> 1950년 4월 22일자에 "창립 일주년 기념식이 22일 하오 두 시에 김포공항에서 거행된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1949년 상반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에 걸쳐 대원모집이 있었고, 흔히 최초의 여자공군비행사로 일컫는 김경오(金璟悟) 대위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마음껏 하늘을 날기를 그토록 갈망하던 이정희였으니만큼 여자항공대의 대장은 그에게 딱 제격인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그 즈음의 나라 형편이란 게 전투기는커녕 연습기 하나조차 변변히 마련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 진작에 그가 상해와 도쿄를 떠돌아다닐 때에 비해 별반 나을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안창남 비행사가 자기에게 하늘을 향한 꿈을 심어주었듯이 이제는 그 자신이 후배비행사들의 꿈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나름의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회마저 그것은 아주 짤막한 순간의 영광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군부에 있어서 가장 이채를 끌고 있는 여자항공대의 성과도 날로 여실이 보이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창공을 이며 매로 나를 수 있는 조인(鳥人)으로의 충분한 소양과 기개도 예비되어 명일의 희망도 크려니와

공군 당국에서는 이들에 대한 앞날에 대비하여 현 여자항공대장 이(李貞喜) 대위를 예비역으로부터 현역에 편입시키는 한편 대원특무상사 강(姜○業)과 이(李明珍) 양을 일약 각각 소위로 임관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이정희 여자항공대장의 현역편입을 알리는 <동아일보> 1950년 6월 15일자이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나기 딱 열흘 전의 소식인 동시에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록이다. 전쟁의 시작과 더불어 그는 피랍자가 되어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진다.

그가 피납된 사실은 김경오의 증언에 의하더라도 그러하고, 실제로 1956년에 대한적십자사 신고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나이가 47세로 표기되어 있고 주소지가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 111번지라고 적혀 있으니, 바로 비행사 이정희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고작 열 두어살의 나이로 "남자가 손이 둘이면 여자도 마찬가지로 둘인 이상 여자라고 안될 리가 없다" 하여 당돌하게도 하늘을 꿈꾸었고, 커서는 비록 비행사의 포부를 이루었으나 번번이 가난에 몸부림을 쳐야했던 그가 삼팔선 너머의 저쪽에서는 또 어떻게 하늘의 꿈을 이어나갔던 것일까?

 

200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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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의 치어걸, 누가 미화하는가
[초기 비행사들 ①] 영화 <청연> 실제인물 박경원 친일 논란
정혜주 (bridalpink) 기자

 

최근 영화 <청연> 개봉을 앞두고 주인공 박경원의 '최초' 문제와 친일행적에 대한 시비가 불거지고 있다. 이 문제는 독립유공자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비행사'로 대한민국 공군기념관에 자료가 기록·전시되어 있는 권기옥씨의 유족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스포츠조선 2005년 10월 14일자).

'최초'와 '친일' 문제 중 이번 기사에선 먼저 친일행적을 중심으로 박경원의 삶과 죽음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최초의 여자비행사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선 권기옥에 관한 후속 기사를 통해 다룰 예정이다.

고이즈미 총리 할아버지와의 염문설

박경원의 친일행적은 김정동(목원대·문화재 전문위원) 교수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김 교수는 '일본 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하늘재·2001년)에서 박경원과 당시 체신장관이던 고이즈미 마타지로(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할아버지)와의 염문설, 그녀의 죽음을 불러온 마지막 비행이 만주국 승인을 기념하는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日滿親善 皇軍慰問 日滿連絡飛行)'이었다는 사실 등 친일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박경원이 고이즈미 체신장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28년 관동비행구락부 주최로 열린 제4회 비행경기대회에서 그녀가 고도상승 부문 3등으로 입상하게 되면서부터인 듯하다. 이 무렵 박경원은 최린, 고이즈미 체신장관과 함께 내선일체의 상징인 고려신사를 참배하고 방명록에 나란히 이름을 남겼다. 당시 신문에는 박경원과 고이즈미 체신장관의 염문설이 심심찮게 가십란을 장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이즈미 마타지로는 당시 민간비행 업무를 총괄하는 체신장관으로 막강한 권력과 부를 소유한 인물이었다. 일본에서 출간된 박경원 평전에 의하면 '고이즈미는 그의 생가가 요코스카에서 난폭한 남자들을 부려 건축업을 경영하고 있어, 그 자신도 온몸에 먹물을 뿌린 듯 모양새를 갖추지 못한 장관인데다가 누구 못지않게 여자를 좋아했다. 그의 부인은 화류계 출신이었지만, 결혼 후에도 그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따라 다녔다'고 한다(<건널 수 없었던 해협>·카노 미키요·시사통신사. 1994년). 한 마디로 야쿠자 출신의 늙은 호색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경원은 자신의 비행기 '청연(푸른제비)'을 소유하게 되는 과정에서 고이즈미의 큰 은혜를 입었다. 고이즈미는 일본 제국비행협회 회장이자 중앙조선협회 회장이기도 한 시카야와 항공국 인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박경원이 군용기를 불하받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또 불하받은 군용기의 수리 보증금까지 지원해주었다. 1931년 11월 20일 항공국에 박경원 소유 비행기로 등록된 '청연'은 고이즈미 체신장관의 선물이었던 셈이다.

▲ 고이즈미의 초청으로 제국호텔에 모인 여자 비행사들. 깃털 모자를 쓴 박경원이 고이즈미 앞에 앉아 있다. ⓒ <일본 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日滿親善 皇軍慰問 日滿連絡飛行)

▲ 일만친선 황군위문 비행을 위해 이륙하기 직전 일장기를 흔드는 박경원 ⓒ <일본 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일대를 장악한 일본은 1932년 봄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다. 1932년 9월 15일 <나고야신문>은 '일만의정서 조인' 및 '만주국 승인'을 기념하여 민간 비행사에 의한 연락비행 계획을 발표했다.

박경원은 <나고야신문>에 일만연락비행에 참가하겠다고 신청했다. 그러나 애초 신청 자격은 1등 비행사인 남자로 제한되어 있었고, 게다가 일본부인항공협회에서는 여류비행사에 의한 일만연락비행을 계획하면서 우에다 스즈코를 후보자로 밀고 있었다. 이 비행에 조선인 여성 박경원이 선정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용돌이치는 정치적 상황은 박경원을 이 역사적인 비행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1932년 정초, 이봉창 의사가 천황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가 일어났다. 4월 29일에는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천황의 생일 겸 상해사변의 승전을 축하하는 일본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고위관료와 장성급 15명이 사상하게 된다. 그해 두 의사는 모두 처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반도를 병참기지화하고, 조선민중을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일본-조선-만주의 일체화를 강조하게 된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대륙정책 진전에 즈음하여 조선반도의 병참기지로서의 중요성은 점점 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여성이 일본과 만주의 가교가 되어주는 일은 일본과 조선, 만주를 일체화 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라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관동군 사령부의 시마다 중좌의 연설. <박경원 평전>에서 인용).

1933년 5월 4일은 박경원에게 운명의 날이었다. 공군 창설 25주년을 맞아 천황이 타치가와 제5비행연대에 왔고 비행학교 교장인 아이바타 모츠가 제국비행협회에 호출되어 갔다. 제국비행협회가 박경원의 만주비행을 후원하겠다는 결정을 했던 것이다.

박경원은 일본제국주의 비행사 최고의 영예인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日滿親善 皇軍慰問 日滿連絡飛行)'의 비행사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박경원은 일본 예복을 입고 제국비행협회와 외무성, 체신성 등의 은인들에게 사례 인사를 하러 다녔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5월 19일 경원은 일본항공 정기편을 타고 경성으로 날아가서 총독부와 각 신문사를 방문하여 협력을 요청했다. 그리고 만주 신경으로 날아가서 관동부 사령부를 방문하고 시마다 류이치 중좌와 만주군, 만주협화회 등의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협력을 요청했다.

이즈음 제국비행협회 총무이사는 애국기 헌납과 방공(防空) 사상을 보급하기 위해 박경원의 고향인 대구에 가서 박경원의 '일만친선 황군위문 연락비행'의 의의를 강연회 석상에서 선전했다. 군국 일본의 대륙을 향한 진군에 2000만 조선민중을 끌어들이기 위한 무대에서 박경원은 치어걸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던 셈이다.

청연의 추락과 박경원의 죽음

▲ 하코네 산중에 추락한 박경원의 비행기 '청연" ⓒ <일본 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

1933년 8월 7일 하네다공항 근처는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했다. 그러나 비행은 연기될 수 없었다. 바로 이틀 후 일본 역사상 최초로 관동방공대연습이 실시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축 일만친선 황군위문 비행'이라고 쓴 빨간 리본이 달린 꽃다발을 받은 박경원은 청연호에 탑승했다. 뒷좌석에는 아라키 육군대장이 히시카리 관동군 참모총장에게 보내는 메시지, 체신장관이 만주국 교통부 총장에게 보내는 메시지, 우시츠카 도쿄시장이 신경, 봉촌, 하얼빈 시장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그녀는 관중들을 향하여 일장기를 흔들며 조종석에 앉았다. 1933년 8월 7일 오전 10시 35분, 멋진 이륙이었다. 그러나 청연호는 이륙한 지 50분 만에 짙은 구름 속에서 하코네 산 중턱에 부딪혀 추락했다. 8월 9일 박경원은 유골이 되어 도쿄로 돌아왔다. 11일 제국비행협회 강당을 장례식장으로 하여 일본비행학교에 의한 성대한 고별식이 행해졌다.

관민 항공관계자 150여명이 늘어선 제단에는 출발 직전 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었다. 비행기 조종석에 서서 일장기를 손에 들고 흔들며 웃고 있는 모습. 그 뒤에는 아라키 육군장관, 미나미 체신장관, 나가이, 조선총독부 정무장관, 오이시 관동군 참모장으로부터 받은 화환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만주국협회와 고이즈미 전 체신장관이 보낸 화환도 있었다.

그 해 11월에는 일본비행학교 이름으로 <2등 비행기 조종사 고 박경원양 추도록>이 출간되었다. 추도록에는 각계로부터 받은 메시지들, 고별식에서의 조사, 박경원의 유고 2편, 항공인ㆍ군인ㆍ저널리스트 등 관계자 68명의 추도문이 실려 있었다.

"이 작은 책자를 편찬하게 된 동기는 박 비행사의 명복을 빌고, 동시에 비록 불운하게 죽었지만 항공계의 진보를 위해서 일본-조선-만주의 친선을 위해서 희생의 귀감이 된 것을 후세에 영원히 일깨워주고자 하는 것이다."

일본비행학교 교장인 아이바타 모츠가 쓴 발간사의 한 구절이다. 사고 1주년이 되던 날에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하코네 산 현장에 '쇼와 8년 박경원양 조난 위비' 위령비가 세워졌다.

"항상 나라의 은혜를 갚겠다는 큰 뜻을 품고 고국방문과 만주에 있는 장사들의 위문을 위해 일만친선이라는 큰 사명을 띠고 1933년 8월 7일 오전 10시경 용맹하게 하네다 비행장을 날아갔는데… 일본 여류 비행사로서 최초의 희생이 되어 후배 비행사에게 큰 교훈을 주리라.……부디 아름답게 빛나는 여신이 되어서 영원히 항공계를 수호해 주시기를."

이날 위령비 제막식을 위해 일본비행학교에서는 비행기를 파견하여 추모비행을 했다. 이 추모비가 세월의 풍화 탓인지 인위적인 훼손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허물어지자 1981년 우에타카 마을회는 새로운 비석을 세웠다.

박경원을 추모하는 일본인들

▲ 박경원의 고려신사 참배. 최린, 이등비행사 박경원, 그 옆에 체신대신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郞)라고 쓰여 있다. ⓒ 안창규

1983년 8월 7일 박경원 추락사 50주년 추모제가 아타미시에 있는 한 절에서 행해졌다. 이때도 제단에는 일장기를 쥔 박경원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주일 한국대사와 일본 외무장관, 운수장관 등이 보낸 화환에 섞여, '일한(日韓) 우호회 회장', '참의회 의원 미나모토'라고 쓰여진 화환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들은 A급 전범들이고 특히 미나모토 참의원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항공전략의 지도자로 가미가제 작전을 입안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옛 군인이었다. 이 장면을 평전작가 카노 미키요는 '50년이 지났어도 박경원은 일장기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것'이라고 씁쓸하게 표현하고 있다.

카노 미키요가 쓴 '박경원 평전'은 10년 넘는 취재와 퇴고를 거쳐서 <건널 수 없었던 해협-여성비행사 박경원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1994년 일본 시사통신사에서 출간되었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꽃 박경원, 그리고 영화 <청연>

자신의 조국인 대한민국보다 일본에서 더 많이 알려지고 애도받는 인물 박경원, 그녀의 미완의 비행은 일제 침략으로 신음하던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에게 어찌 보면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날개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몸과 마음을 팔아 제국주의 일본의 치어걸이 된 그녀는 불행했던 조국의 아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은 그녀의 모국비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국도 그녀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녀의 극적인 삶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신사참배를 강행하는 고이즈미의 나라 일본에게 '영원한 하늘의 여신'으로 기억될 뿐이다. 내선일체와 일만친선의 상징으로 일본 A급 전범들의 여신으로 추모되고 있는 것이다.

박경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부활시키려는 노력은 그녀를 다시 한번 고국에서 매장시키는 아픔이 될 것이다. 고이즈미와 일본제국주의의 양날개로 하늘을 난 최초의 조선 여성으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참고 박경원의 창씨개명 : 박경원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항일의식을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조선인의 창씨개명은 박경원 사후 7년 뒤인 1940년 2월에 시행되었다.

※ 정혜주 기자는 현재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비행사' 권기옥평전을 집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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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는 누구인가
[초기 비행사들 ②] 영화 <청연>의 주인공 박경원의 '최초' 논란

 

 

▲ 여류비행사 권기옥
ⓒ 정혜주

영화 <청연>의 개봉을 앞두고 평소에 관심도 두지 않았던 우리나라 여류비행사의 '최초' 문제에 깊은 관심이 일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안창남부터 그 이전에 비행기를 탔던 서왈보에 이르기까지 한 번 쯤은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그늘에 가려 있었던 봉건시대, 더구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의 여성이 하늘을 날았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영화 <청연>은 일제시대 하늘을 날았던 그 한 여성에 주목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화 속의 주인공 박경원의 모습이 실존했던 인물 박경원의 시대적 삶과 너무도 달랐기에 현실에서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됨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도전의 핵심은 '최초'와 '친일' 문제이다. 여기서는 '최초'의 문제를 다루어 본다.



▲ 1926년 비행학교시절 박경원

 

 

 

일제시대 하늘을 날았던 우리나라의 여성은 세 명이었다. 식민지시대 암울했던 민중들에게는 영웅과 구경거리가 필요했다. 당시 유행가 중에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여성들이 있었다. 박경원, 권기옥, 이정희. 그들은 모두 마음속에 날개의 꿈을 품었던 진취적인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의 미래를 철저하게 갈라놓았다. 나이는 박경원이 제일 많았고 권기옥, 이정희가 뒤를 잇는다.

 

최초의 공군기 조종사? 최초의 민간인 비행사?

▲ 1925년 2월 28일 운남항공학교 졸업장. 1911년 신해혁명을 원년으로 민국 14년이다. ⓒ 정혜주
권기옥은 3ㆍ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1924년 초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생으로 들어간다. 1925년 2월 28일 항공학교를 졸업하자,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쏟아붓겠다는 일념으로 상해로 돌아온다. 그러나 임시정부에는 비행기를 살 돈이 없었다. 고민 끝에 원로 독립운동가의 추천으로 중국 군대의 항공대에 들어가서 비행기 조종사로 10년 넘게 활동한다.

한편 박경원이 일본비행학교를 졸업하고 3등 비행사 자격증을 딴 것은 1927년 1월 28일이었다. 따라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난 것으로 치면 권기옥이 박경원보다 2년 정도 앞선 것이 된다.

▲ 1926년 4월 20일 항공처 부비행사 임명장 ⓒ 정혜주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박경원 측에 '최초'의 리본을 달아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펴고 있다.

"권기옥씨의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권씨는 군인의 신분으로 비행사가 된 것이며, 영화에서 조명한 것은 민간인 신분으로 비행사 자격증을 딴 박경원의 입지전적 스토리… 엄밀히 말하면 민간인 최초의 여류비행사가 맞겠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라고 표현한 것은 불필요한 혼동을 막기 위해서이다."(스포츠조선 기사 중 영화 <청연> 마케팅팀장의 말).

즉 민간인과 군인 신분을 나누고, '비행사'라는 자격증에 큰 의미를 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비행사 자격증이란 무엇인가?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1921년부터 시행한 민간인 비행사 자격시험에서 주는 자격증을 말한다. 즉 '비행사'라는 명칭은 일본으로 유학 가서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시행하는 시험제도를 통과한 사람만이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2년이나 먼저 날았지만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인정하는 자격증이 없는 권기옥은 비행사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 '중국창공에 조선의 붕익, 중에도 여류비행가'(1926.5.21,동아일보) ⓒ 정혜주
당시의 신문자료를 살펴보면 그 시절 사람들은 권기옥과 박경원을 똑같이 '여류비행사'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1926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는 '中國 蒼空에 朝鮮의 鵬翼- 中에도 女流飛行家'라는 제목으로 권기옥을 소개하고 있다. 1928년 5월 25일자 <중외일보도> 권기옥을 '女飛行士'로 호칭하고 있다. 박경원을 소개한 <동아일보> 1926년 9월 4일자 기사 역시 '朝鮮의 女流飛行士 박경원 양'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민간인 비행사와 전투기 조종사를 구분하는 것은 비행기가 무기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훨씬 후대에 와서이다.

▲ '풍군진중에서 활동하는 여비행사 권기옥'(1928.5.25, 중외일보). ⓒ 정혜주
권기옥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많은 자료가 있다.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충북 청원 소재)의 자료실에는 "권기옥은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 졸업(1925년)으로 한국인 최초의 여류 비행사이며 중일 전쟁 참가, 총 7000시간을 비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초창기 여자 비행사로 권기옥-이정희-김경오를 기록하고 있고, 박경원은 아예 기록에도 없다. 국가보훈처 자료집에서도 권기옥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서술하고 있다.

▲ '중국하늘을 날은 애국소녀의 얼'(1970년, 여성지) ⓒ 정혜주
정부 관련 자료만이 아니다. 권기옥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소개하고 조명하고 있는 수많은 언론 보도들이 있었다. '중국 하늘을 날은 애국소녀의 얼- 최초의 우리 여류비행사 권기옥 여사와의 인터뷰' '한국 최초의 여자파일럿 권기옥씨의 슬픈 8ㆍ15 (<주간여성> 1969년 8월 27일자)' 등….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78년 2월부터 24회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된 회고록 '나의 이력서'이다. 여기에서는 권기옥을 우리나라 최초일 뿐만이 아니라 '동양 최초의 여류 비행사'로 표현하고 있다. 1981년에는 KBS 라디오 방송국에서 권기옥의 일대기를 '인물 춘추 -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이라는 제목으로 46회에 걸쳐서 방송했다.

▲ '동양 첫 여류 비행사 권기옥 여사'(1978.2 한국일보 연재기사) ⓒ 정혜주

권기옥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는 것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대한민국이 공인하고 대중적으로 인정되어온 사실이다. 최근 영화 <청연> 제작사 측은 박경원과 관련 '최초' 시비가 일자 '최초의 민간인 여류 비행사'라고 홍보 문구를 바꾸었다.

'최초'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내용이다

누가 '최초'인가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최초' '최고'를 중시하는 것은 물질만능 시대의 속도주의, 성과주의의 산물일 수 있다. '최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다.

사실 '누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흔히 안창남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1919년 가을 중국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풍옥상군의 항공대 대장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서왈보를 최초의 비행사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대한민국 공군박물관은 1920년 임시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이 미주교포들의 후원을 받아 캘리포니아에 세운 윌로스비행학교의 졸업생 6명이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는 자료를 기록 전시하고 있다.

안창남과 서왈보, 윌로스비행학교의 졸업생들 중 과연 누가 우리 민족 최초의 비행사인가? 이견은 있겠지만 이 문제는 그리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비행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한민족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우리의 하늘을 최초로 날았던 비행사 안창남'… 윌로스비행학교를 졸업한 6명의 1기 졸업생들도 모두 우리 민족에게는 자랑스런 하늘의 용사들이다.

그러나 박경원과 권기옥은 다르다. 박경원은 일본이 인정한 최초의 조선인 여자 비행사일 뿐이다. 일장기를 흔들며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을 위해 날아오른 박경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권기옥, 둘 중 누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인가?

 

200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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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궁 폭파 위해 '날개의 꿈' 꾸다
[초기 비행사들 ③] 독립운동의 날개꽃 권기옥

 

갈례와 스미스의 곡예비행 = 1901년 1월 11일 평안남도 평양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1남 4녀 중 둘째딸로 태어난 권기옥의 어릴 적 이름은 갈례였다. 두 번째 딸을 낳자 아버지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어서 가라고' 갈례라고 지었다고 한다. 11살에 숭현보통학교에 입학한 권기옥은 1917년 5월 미국인 아트스미스의 평양 곡예비행을 구경한 순간부터 '날개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

▲ 숭현보통학교 졸업사진, 위에서 세번째줄 맨 왼쪽 권기옥(1918. 3. 25) ⓒ 정혜주
송죽결사대와 3ㆍ1만세운동 = 1918년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 권기옥은 박현숙 선생님의 권유로 비밀 항일조직인 '송죽결사대'에 가입한다. 1919년 3ㆍ1만세운동을 앞두고 권기옥은 친구들과 기숙사에서 몰래 태극기를 만들어서 비밀리에 운반하는 일을 한다.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죄로 권기옥은 체포되어 3주간 구류를 살게 된다.

임정 군자금 모금으로 옥고를 치르다 = 권기옥은 대한애국부인회의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머리채를 잘라 파는 등 모금운동을 전개한다. 또한 평양청년회원 김재덕의 권총을 운반하고 숨겨준 일로 잡혀가지만 '증거 없음'으로 풀려난다. 여름 들어서는 임시정부 연락원인 임득삼 선생이 가져온 임정공채를 비밀리에 판매하여 1만원을 상해로 보낸다. 그해 가을 결국 임정공채 판매사건이 발각 나서 체포된 권기옥은 심한 고문과 함께 재판에서 6개월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다.

브라스밴드단과 평양 도경 폭파사건 = 1920년 봄 감방에서 출소한 권기옥은 브라스밴드단을 만들어서 평안도와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민중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연락활동을 한다. 여름에는 평남도경 폭파를 위해 잠입한 임정 산하 청년단원 문일민, 장덕진을 숭현보통학교 석탄창고에 숨겨두고, 당일 현장까지 폭탄을 운반하는 일을 돕는다.

▲ 기독여자전도대 활동 기사(1920. 6. 13. 동아일보) ⓒ 정혜주
날개와 폭탄 = 평남도경 폭파사건과 대한애국부인회의 임정 군자금 모금 사건이 발각나면서 검거선풍이 불자, 권기옥은 체포 직전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와 조만식 선생이 몰래 보내준 여비로 중국 멸치배를 얻어 타고 중국으로 밀항한다. 1920년 11월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인 손정도 목사의 집에 머물면서 권기옥은 비행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3ㆍ1만세운동 이후 권기옥의 낭만적인 날개의 꿈은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서 조선총독부와 천황궁을 폭파하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변해 있었다. 권기옥의 뜻을 알고 김규식 선생 부인 김순애 여사가 중국어와 영어를 터득하도록 항주의 홍도여학교를 소개해준다.

멀고먼 운남행, 담판을 벌여 입학을 허락받다 = 비행술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던 권기옥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명근의 도움을 받는다. 중국의 군벌들이 세운 4개의 비행학교 중 보정항공학교와 남원항공학교에서는 권기옥이 여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고, 손문이 설립한 광동항공학교에는 비행기가 한 대도 없었다. 남은 것은 중국 서남단의 외진 운남성의 운남항공학교뿐이었다. 서류로는 거절당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권기옥은 임정 이시영 선생의 추천서를 품고 비적들이 들끓는 중국대륙을 가로질러 한 달 만에 운남성 곤명에 도착한다. 1923년 12월 기옥은 추천서를 들고 성장인 당계요와 직접 담판을 짓는다.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군벌인 당계요 성장은 비행사가 되겠다고 이국만리를 찾아온 조선 소녀의 용기에 탄복하여 전격적으로 입학을 허가해준다.

▲ 운남항공학교 전경 사진, 동그라미 안 인물은 유시천 교장(1924년) ⓒ 정혜주
청부살인업자 처단과 자랑스런 WING 배지 = 1924년 연초 드디어 운남항공학교에 입학한 권기옥은 훈련비행 9시간 만에 단독비행이 허가될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다. 한번은 권기옥이 타려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을 겪기도 한다. 한편 권기옥을 감시하며 행방을 쫒던 일본영사관은 권기옥이 운남항공학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청부살인업자를 시켜서 권기옥을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를 눈치챈 권기옥은 함께 항공학교에 다니던 조선청년인 이영무, 장지일 등과 밀정을 공동묘지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처단한다. 1925년 2월 28일 권기옥은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자랑스러운 윙 배지를 단다. 이후 교장의 부탁으로 후배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하며 원없이 견습비행을 한다.

천황궁을 폭파할 비행기를 찾아서 = 1925년 5월 상해로 돌아온 권기옥은 임정의 어른들에게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겠으니 비행기를 사달라고 호기롭게 말하지만, 임정으로선 비행기를 살 돈은커녕 임대료도 못 낼 지경이었다. 임정에 실망한 권기옥은 1년 가까이 의열단원,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며 비행기 살 돈을 만들기 위한 무장행동을 숙의한다. 1925년 가을 광동의 국민혁명정부가 북벌전쟁을 시작하자 조선 청년들은 국민혁명정부가 만주까지 장악하면 그 여세를 몰아 조선으로 밀고 들어가서 조국을 해방시키리라는 희망을 품고 광동으로 몰려간다.

그 무렵 권기옥도 비행단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광동으로 향한다. 광동항공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국민혁명정부에 비행단이 창설되기를 기다리지만, 당시 국민혁명정부는 항공부대를 만들 여력이 없었다. 1926년 봄 권기옥은 의열단의 배후 실력자인 손두환 선생의 소개로 북경에 있는 개혁성향 군벌 풍옥상군의 항공대에 들어간다. 1926년 4월 권기옥은 동로군 항공대의 부비항원으로 임명된다.

내몽고에 꽃핀 사랑 = 권기옥은 남원항공학교 교장 겸 동로군 항공대 대장인 서왈보의 소개로 독립운동가인 유동렬 장군과 이상정을 만나게 된다. 풍옥상군이 친일군벌 장작림군에게 밀려서 내몽고로 퇴각하게 되자 유동렬 선생과 이상정은 권기옥을 따라서 내몽고로 함께 피난한다. 이 어려운 시기에 권기옥은 이상정과 결혼한다. 결혼식 하객은 함께 피난 온 몇몇 동지들이었고, 유동렬 장군이 주례를 서주고 붉은색 헝겊에 결혼증서를 써주었다.

▲ 1937년 여름 남경을 방문한 시동생 이상화 시인과 남편 이상정(오른쪽)
중국 국민혁명군의 공군 비행사가 되다 = 1927년 봄 국민혁명군이 공군을 창설하자 권기옥은 상해로 가서 중국 공군 비항원으로 임명받는다. 이 무렵 권기옥은 서왈보의 도움으로 비행사가 된 최용덕(당시 중국 공군의 비행사, 해방 후 공군참모총장 역임)과 김홍일(당시 중국 육군 대령, 해방 후 육군 참모총장 역임)을 만나게 된다. 이후 이들 세 사람은 해방과 대한민국 건국, 한국전쟁을 함께 겪으며 죽는 날까지 우정을 지속한다.

상해전쟁에서 일본군에게 기총소사를 하다 = 1931년 만주를 기습 점령한 일본이 1932년 상해전쟁을 일으키자, 권기옥은 비행기를 몰고나가 일본군에게 기총소사를 한다. 권기옥은 중국이 승리하면 조선도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지만 장개석 중국 정부가 만주를 일본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정전협정을 맺자 통탄한다. 이 상해전쟁에서 활약한 공로로 권기옥은 무공훈장을 받는다.

▲ 1935년 중국 선전비행을 준비하던 무렵의 권기옥(왼쪽에서 두번째). 가운데 이탈리아인 교관과 중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이월화와 함께. ⓒ 정혜주
선전비행과 일본 천황궁 폭격 계획 = 1935년 당시 항공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송미령 부인이 권기옥에게 선전비행을 제안한다. 비행기가 무서워서 공군에 자원하지 않는 중국 청년들을 독려하기 위해 여류비행사 권기옥의 선전비행을 계획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전비행은 상해에서 북경까지 날아가는 화북선, 화남선,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일본까지 날아가는 남양선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권기옥은 남양선 비행의 마지막 순간 일본을 폭격하겠는 뜻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선전비행 출발 당일 북경의 대학생 시위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선전비행이 무산되고 만다.

▲ 중경에서 재건된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함께(오른쪽에서 두번째) ⓒ 정혜주
육군참모학교 교관과 대한 애국부인회 재건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이 격화되자 권기옥은 육군참모학교의 교수직을 맡아 영어와 일본어, 일본군 식별법과 성격 등을 강의한다. 1939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와서 정착하자 권기옥은 좌우로 분열되어 있던 부인들을 설득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선전부장을 맡는다.

조국으로 진격할 꿈에 부풀다 = 1943년 여름 권기옥은 중국공군에서 활동하던 최용덕, 손기종 비행사등과 함께 한국비행대 편성과 작전계획을 구상한다. 1945년 3월에 임정 군무부가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한국 광복군 건군 및 작전 계획> 중 '한국광복군 비행대의 편성과 작전'이 그 결실이었다. 미국과 중국에서 비행기를 지원 받아서 한국인 비행사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한다는 것이 주요내용이었다. 권기옥은 이제야말로 비행기를 타고 조선총독부를 폭격하리라던 오랜 꿈이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해방은 독립운동가들의 꿈을 앞질러서 너무 빨리 와버렸다.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산파역할을 하다 = 해방 후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이 된 권기옥은 '공군의 아주머니'로서 한국 공군창설의 산파역할을 했다. 남편 이상정이 해방 직후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했고, 공군에는 독립운동을 했던 비행사들과 친일파들이 공존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서 권기옥의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 한국전쟁 당시 전방을 시찰하는 권기옥과 지청천 장군 ⓒ 정혜주
<한국연감> 발행과 극일(克日) 장학금 = 올바른 역사기록에 대한 신념으로 권기옥은 1957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연감>을 발행한다. 재정이 어려웠지만 역사의 기록이 중요하다는 신념 하나로 꾸려갔던 것이다. 196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일한 여성 출판인으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1975년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가 내 자식이고, 극일(克日)을 하는 젊은이들을 키워내고 싶다는 소망으로 전 재산을 장학사업에 기탁했다.

독립유공자로 애국지사묘에 묻히다 = 1966년부터 1975년 한중문화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1968년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88년 4월 19일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에 안장되었다. 2003년 8월 국가보훈처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200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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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하늘을 지배하려 했는가

[초기 비행사들 ④] 식민의 하늘을 수놓았던 선구자

 

 

▲ 안창남이 중고 부속으로 직접 제작하여 타고 다닌 비행기 금강호 ⓒ 공군박물관
한반도의 하늘을 최초로 비행한 자는 불행하게도 일본인이었다. 1913년 8월 29일 일본 해군의 기술 장교인 나라히라가 우리 민족의 국치일에 맞춰 용산 일본군 사령부 연병장에서 비행시범을 보였다. 일본의 기계문명을 과시하는 공개적인 시위행사였다. 이즈음 일본은 이미 만주대륙을 향한 포석으로 울산, 대구, 서울, 평양, 신의주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들을 빼앗긴 민족이 하늘마저도 일본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비행기로 세계일주를 하는 서구의 비행사들이 한반도를 거쳐 갔다. 그중 1917년 봄 미국인 조종사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은 조선 청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곡예비행은 당시 20만 서울 인구 중에서 4분의 1인 5만 명이 여의도에 운집할 정도로 엄청난 이벤트였다. 1901년 동갑내기인 안창남과 권기옥 역시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날개의 꿈을 품게 된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청년들에게 비행기는 낭만적인 꿈일 수만은 없었다. 날개를 향한 꿈의 상징이던 비행기가 이내 전쟁무기로 발전했듯이, 나라를 잃은 청년들은 일찍부터 비행기를 독립투쟁의 무기로 인식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청년들이 비행사의 꿈을 안고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소련, 미국으로 비행술을 배우러 갔다.

이제 대륙의 하늘을 새벽별처럼 수놓았던 젊은 그들의 꿈과 기개, 이역만리에서 유성처럼 스러져간 비행용사들의 숨겨진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여보자.

▲ 독립군 공군 최초의 훈련비행기와 독립신문 1920년 4월호 ⓒ 공군박물관
미국 윌로스의 조선항공대 - 태극마크를 단 비행기

1913년 평양 출신의 청년 한장호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가 여의치 않자, 191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다. 그는 "앞으로의 전쟁의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한 독립운동가 노백린 장군과 재미동포 김종림의 지원으로 1919년 초 몇몇 교포 젊은이들과 함께 미국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는다. 그리하여 한장호는 레드우드 비행학교 졸업생인 장병훈 이초 오림하 이용선 이용근 등과 함께 비행사 자격으로 하늘을 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한인 비행사 양성소인 윌로스 비행학교는 1920년 2월 임시정부 군무총장이 된 노백린 장군과 이들 6인의 비행사들이 주축이 되어 캘리포니아에 있는 김종림의 농장에 세워졌다. 이들은 연습용 비행기 3대를 사들이고 농장 한 쪽에 활주로까지 만들었다. 비행기에는 태극 마크와 함께 '조선항공대'를 의미하는 'KAC'라는 표지가 그려져 있었다. 조선 각지에서 모여든 청년들은 조국의 자주독립이라는 비원을 품고 일본천황궁을 폭격하리라는 기개로 비행훈련에 전념했다.

윌로스 비행학교는 1920년 7월 제1회 졸업생 27명을 배출했으며, 1923년에는 1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3회에 걸쳐서 40여명의 비행사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미국 서부지역에 몰아닥친 풍수해로 인해 동포들의 재정후원이 어려워지자 해체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 윌로스 비행학교 최초의 비행사들 ⓒ 공군박물관
민심 격발 위해 비행기 구입 시도했던 안창호

윌로스 비행학교가 폭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도산 안창호는 비행기를 민중을 선전·선동하는 도구로서 인식했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연락과 조선 민중에게 선전물을 살포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구입하려고 했던 것이다.

1920년 1월에 기록한 안창호 선생의 일기에는 비행기 구입과 관련한 노력들이 상세하게 언급돼 있다.

"비행기를 수입할 방법인 바 그의 얘기가… 미국인 혹은 톨트와 페페 삼인을 소개하고 비행기 수입은 러시아국과 교섭하라고 말하다."(민국 2년 1월 4일)

"또 20만원 사용하라는 비밀내용을 말하여 이는 비행기를 사용하여 국내민심을 격발하고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라고."(민국 2년 2월 17일)


일기에 의하면 안창호 선생은 1920년 연초에 비행기 구입과 조종사를 구하기 위해서 미국, 필리핀, 러시아, 중국인들과 다각적인 교섭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성사되지 못했다.

대륙의 하늘을 수놓았던 하늘의 선구자들

앞의 두 시도가 실패하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국의 항공학교에 조선 청년들을 추천해 비행사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군벌들이 경쟁적으로 항공학교를 설립하고 공군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조선 청년들은 임정의 추천서만 있으면 중국의 항공학교에 무료로 입학할 수 있었다. 서왈보 권기옥 최용덕 장지일 이영무 김은제 이병운 등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에서 활동했다.

한편 비행기가 없어서 이론만 가르쳤던 광동항공학교를 나온 청년들은 다시 소련의 모스크바 항공학교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박태하 장성철 김진일 차정신 유철선 등은 광동항공학교를 거쳐서 모스크바 비행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에 돌아와 활동한 경우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 국민혁명당 정부 공군 창설의 핵심이 되었고,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전투기를 몰고나가 일본군과 직접 싸운다.

▲ 운남항공학교 초급과정 훈련기(위) 와 고급과정용 훈련기(아래) ⓒ 정혜주
마적단 출신 비행사 서왈보= 중국에서 활동한 비행사들 중에서 우리민족 최초의 비행사라고도 일컬어지는 서왈보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들이 전해져온다.

서왈보는 188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평양 대성학교에서 수학하다 1910년 한일병합 직전에 신채호, 유동열 등 신민회 인사들과 중국으로 망명한다. 만주와 내몽고 등지에서 반일 마적단 활동을 하기도 했던 서왈보가 처음 비행사가 될 결심을 한 것은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던 1913년 여름이었다. 국치일에 맞춘 일본 해군 출신의 나라히라의 시범비행을 목격했던 것이다. 만주지역을 내달릴 마차와 말을 사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 중이던 그는 눈이 번쩍 뜨였다. 마차가 아니라 비행기다!

중국에 돌아와 곧바로 비행술을 배우려고 했던 그는 1차 세계대전으로 당시 유일한 국립 항공학교인 북경의 남원항공학교가 폐쇄되자,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1월 28일 풍옥상의 추천으로 남원항공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다. 그는 33살이라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망친 조선 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쏟았다.

조국에서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그가 한창 비행술을 익히고 있을 즈음이었다. 일본의 잔인한 탄압소식에 분개한 그는 '내 언제고 동경으로 날아가서 너희 놈들 머리위에 폭탄을 퍼부어 오늘의 한을 풀리라'고 결심했다.

1919년 5월 30일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한 서왈보는 임정의 안창호를 만나 비행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조종사 자격으로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3년에는 신의단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24년 풍옥상의 항공대 대대장으로 소절(蘇浙)전투에 20여 차례 출격하여 무공을 세웠으며, 남원항공학교의 교관으로 재직했다.

그는 최용덕을 보정항공학교에 추천하여 비행사가 되도록 도와주었고, 풍옥상 항공대에 들어온 여류비행사 권기옥과 나이를 초월한 동지애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 독립군에 이런 비행기 한 대만 있었어도 내가 폭탄을 싣고 서울로 날아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박살내 버리는 건데." 그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 서왈보 추모기사 (동아일보1926년7월6일) ⓒ 정혜주
그러나 1926년 6월 28일 서왈보는 내몽고 접경 공가장의 비행장에서 새로 수입된 이태리제 언살도 비행기를 시승해보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소식은 국내에도 큰 충격을 주어서 동아일보는 두 차례에 걸쳐서 추모기사를 내보냈고, 원산과 평양, 간도 용정 등지에서 추모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안창남과 대한독립공명단의 현금수송차량 탈취 사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대륙의 하늘을 날았던 비행사들이 단지 중국이나 소련 비행학교 출신들만은 아니었다.

윌로스 비행학교 출신인 김자중은 중국으로 와서 활동하다가 1922년에 추락 사망했다. 신용인 비행사가 1920년대 말 여의도에 세운 조선비행학교 출신 이한설도 중국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일본의 비행학교를 나와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한 비행사들도 많았다. 안창남 김치한 권태용 민성기 정우섭 전상국 등…. 여기서는 대표적인 인물로 안창남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 최초로 조국의 하늘을 날았던 안창남
안창남은 1901년에 태어나 1920년 일본 오쿠리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처음 실시한 비행면허시험에서 수석 합격한다. 그는 일본의 여러 비행대회에 나가 우승함으로써 무시험으로 1등비행사 자격을 취득한다. 1922년 12월 안창남은 중고 부속을 조립하여 자신이 직접 만든 복엽기 금강호를 타고 서울에서 비행시범대회를 열어서 민족의 영웅이 된다.

안창남은 고국방문 비행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도 늘 민족적 울분과 항일의식을 품고 있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일어난 조선인 대학살에서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그는 일본을 벗어날 결심을 하게 되고, 1924년 연말 비밀리에 중국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다.

1925년 남방혁명군 곽송령 휘하의 육군 중장으로 임명되어 전투에 참전하고 전과를 세우는 등 중국혁명을 통한 민족해방을 도모했다. 또한 북평에서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1926년에는 여운형의 소개로 산서성의 군벌 염석산 군대에 참가하여 항공중장과 산서비행학교 교장으로 재임한다.

1928년 10월 안창남은 산서비행학교 교장이자 항공중장이라는 유리한 직책을 이용하여 중국 산서성 태원을 근거로 최양옥 신덕영 김정련 등과 함께 대한독립공명단(大韓獨立共鳴團)을 조직한다. 그리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한독립공명단 조직 내에 한국인 비행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한다.

이듬해인 1929년 비행학교 설립과 비행기 구입, 그리고 군자금 확보를 위해 최양옥과 김정련 등에게 600여원을 제공하면서 이들을 국내로 잠입시켜 일본은행의 현금수송차량을 탈취하는 거사를 벌인다. 최양옥 김정련 등이 경기도 마석에서 피체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당시 이 사건은 그 대담성으로 신문 지상을 도배할 만큼 큰 파장을 일으켰다.

▲ 대한독립공명단 현금 탈취 및 검거장면(조선일보 1929년4월21일)과 대한독립공명단 사건 재판기사(조선일보1929년12월13일). ⓒ 정혜주
안창남은 1930년 4월 2일 오후 4시에 태원 산서비행학교 앞에서 뜻하지 않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태원 상공을 비행 도중 홍진으로 시계가 불량해지자 비행장으로 귀환하다가 산에 충돌해 사망했다.

친일과 항일, 역사는 기억한다

혹자는 박경원의 친일이 식민지 하에서 비행기를 타기 위한 피치 못할 행위였다고 옹호하기도 한다. 그녀의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조차도 고국방문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수동적인 친일행위였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창남을 비롯한 그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비행사들은 삶 자체로 그런 항변이 한낱 궤변에 불과함을 증거하고 있다.
 
박경원이 마지막 비행을 했던 1933년은 아직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 일본의 대륙침략의 초반부로서 민간인 비행사들이 군대와 깊은 관련을 맺는 것은 강요나 의무가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였다. 일본에 있는 민간인 비행사들이 전쟁물자 수송이나 군인수송에 차출되는 것은 1940년대, 거의 종전에 임박해서이다.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1925~1933년까지의 박경원의 친일행위는 자신의 적극적인 선택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내선일체와 만주국 승인을 기념하는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에 스스로 자원했다는 것은 유일무이하고 독보적 친일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조국의 자주독립이라는 비원을 품고 이역의 하늘에서 청춘을 불사르다 유성처럼 스러져간 이름 없는 비행사들이 있었음을, 오늘을 사는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0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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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에 조국 광복 염원 띄운 '공중 여왕'

한·중 첫 여성 비행사·독립운동가 권기옥 지사 미공개 사료 본지 독점 공개


“도산 선생 앞에. 20여년 구속받든 아픈 마음과 쓰린 가슴을 상제주(하느님)께 호소하고 공중여왕(자신 지칭) 면류관(왕관)을 빼앗스려가나이다. (선생께서 저를) 길이 사랑하여 주신 바라 삼가 이꼴을 눈앞에 올리나이다 사랑하시는 기옥 올림. (단기)4257년 7월 5일 재운남(운남항공학교 재학 중).”

한국과 중국 양국의 첫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 권기옥(1901~1988) 지사의 1924년 첫 단독 비행 기념사진과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편지가 24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권 지사는 동향(평양) 출신인 도산 선생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조국 광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싶다는 각오를 다진 것으로 풀이된다. 권 지사는 비행 시간만 1300시간에 달하는 베테랑으로, 1932년 상하이사변에서 비행기를 몰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달 말 출간되는 권 지사 평전 ‘날개옷을 찾아서’를 집필한 소설가 정혜주(52)씨가 최근 도산기념사업회를 통해 편지 등을 발굴했다.

평양 출신인 권 지사는 우리 공군이 인정하는 첫 한국인 여성 비행사다. 2005년 영화 ‘청연’을 통해 박경원이 첫 한국인 여성 비행사로 알려졌지만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된 바 있다. 실제로 권 지사는 1925년 중국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하며 비행 자격을 취득했지만 박경원은 1927년 일본 제국비행협회에서 3등 비행사 면허증을 받았다. 그동안 박경원은 대중적으로 알려졌지만 우리 역사 속 첫 여성 비행사로 권 지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 작가는 2005년 박경원의 묻혀 있던 친일 행적을 끄집어낸 주인공이다. 그는 “권 지사에 관한 평전 집필을 위해 지난 13년 동안 중국을 3차례 방문해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며 “당시 중국에서 항공 학교는 4개였지만 여성 입학생은 권 지사가 처음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천하고 권 지사가 대일 독립투쟁 의지를 밝혀 입학이 허가됐다”고 설명했다.

권 지사는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시절인 1917년 평양에서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의 꿈을 품었다. 17세 소녀가 하늘을 날고 싶은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서 조선총독부와 천황궁을 폭파하리라.” 권 지사가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도산 선생과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지낸 노백린 장군에게 한 말이다. 권 지사는 숭의여학교 시절 항일 비밀 결사대인 ‘송죽회’ 활동을 하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신흥식 목사의 지휘를 받아 평양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이듬해에는 임시정부 연락책으로 활동하다 체포 직전 상하이로 밀항했다. 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육군 항공대 창설을 구상해 온 터라 권 지사를 조종사로 만들기로 했다. 특히 도산 선생은 1923년 12월 권 지사를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생으로 추천하고 격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작가는 “1921년부터 임시정부가 심각한 재정난을 겪으면서 비행기를 살 돈이 없었고, 항공대 창설 계획이 무산됐다”면서 “비록 청사진에 그쳤지만 여성 최초 비행사로 주권을 침탈한 일본과 싸우겠다는 권 지사의 삶은 한국 여성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