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인간 돕는 ‘도구’에서 종속시키는 ‘기계’로 세상을 변형시킬 ‘인간 의지’ 각인되지만
때론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발전, 꼼짝없이 예속 당한다. 때문에 ‘기술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
» 산업혁명 당시에 공장 시스템을 분석한 앤드류 유어는 공장이 노동자들의 생활수준과 교육수준을 향상시키며, 기계가 비싼 숙련노동을 값싼 비숙련노동으로 대체함으로써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주장했다. 그의 기술철학에서 기술발전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이 완전히 배제된 채로 가동되는 공장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기술 속 사상/① 기술이란 무엇인가
“문자기능을 없애주세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시 긴 연애편지를 쓰도록.”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무선통신회사의 광고 카피다. 광고는 “기술은 언제나 사람에게 지고 맙니다.”라는 가슴 찡한 메시지를 남기며 끝난다.
이 광고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것의 진실성에 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편지지에 꾹꾹 눌러 쓰는 연애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다. 우리들 대부분이 중독이라고 할 만큼 핸드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기술이 사람에게 진다는 광고 카피가 감동을 준다. 통신 서비스로 이익을 남기는 회사가 스스로의 서비스를 구매하지 말아 달라는 역설은 기술에 휴머니즘의 외피를 입힘으로써 이에 대한 작은 거부마저도 무력하게 만든다.
기술이란 대체 무엇인가? 핸드폰과 같은 형체가 있는 대상이나 통신 회사가 제공하는 무형의 서비스도 기술이다. 이러한 대상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이 기초가 되는 공학 지식도 기술의 일부이다. 핸드폰이 상징하는 우리가 사는 세상도 넓은 의미의 기술로 포함되며, 핸드폰을 통해서 사람들의 관계를 바꾸려는 의지도 기술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술에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의지가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술은 대상, 과정, 지식, 상징, 의지라는 다섯 가지 층위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
이 중 ‘의지로서의 기술’은 조금 낯선 개념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기술을 “인간이 자연세계와 관계를 맺는 특정한 방식” 혹은 “세상을 드러내는 양식”으로 정의했다. 기술의 본질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인데, 하이데거는 기술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계산가능성, 유용성, 효율성의 잣대로 평가해서 결국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자원(리소스)으로 만드는 ‘의지’라고 간주한다. 존재들을 인간에게 유용한 자산으로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데,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과학이다.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보면 기술이 과학을 낳았으며, 따라서 기술은 과학보다 선행한다.
기술, 사회적 권력관계 바꿔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서 꼭 하이데거의 입장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20세기 기술은 연관 과학의 발전을 기반으로 해서만 발전하는 것이 많다. 그렇지만 지금의 기술이 상당 정도 과학화되었다고 해도 기술에는 아직도 과학과 다른 점이 있다. 기술은 물질적 생산에 관련되어 있으며, 인위적으로 무엇을 만들고, 이를 통해서 인간의 가능성과 목적하는 바를 확장한다. 기술은 자원에 기초해서 자원을 확장하고, 과학의 응용만이 아닌 시행착오에서 복잡한 실험에 이르는 나름대로의 지식을 활용한다. 기술 디자인과 선택에는 경제, 정치, 문화적 고려가 개입하고, 이러한 경제, 정치, 문화적 요소는 기술에 의해 다시 형성되면서 변화한다.
우리가 기술을 만들지만, 기술은 우리 경험과 인간관계 및 사회적 권력관계를 바꿈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 어떤 기술은 인간 사회를 더 민주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지만, 다른 기술은 독재자의 권능을 강화한다. 라디오와 같은 동일한 기술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어떤 환경에서 사용하는 가에 따라서 이렇게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민주적으로 사용하고 싶어도 그렇게 사용할 수 없는 기술도 있다. 핵무기를 평화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낙타를 바늘구멍에 넣는 것 보다 힘들다. 내가 시계태엽을 감아야 시계가 작동하듯이 인간은 어떤 기술에 대해서는 이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시계로 상징되는 시간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 듯이, 어떤 기술에게는 꼼짝달싹 못하게 예속되어 버린다. 모든 기술이 예측불능인 것은 아니지만, 일부 기술의 궤적은 그것을 발명한 사람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발전한다.
19세기 독일의 기술철학자 에른스트 캅은 모든 기술이 인간 몸의 연장(延長)이라고 주장했다. 갈고리, 그릇, 칼, 창, 노, 삽, 괭이와 같은 기술이 인간의 손, 이빨, 팔이 연장된 것이며, 철도는 인간 순환계의 연장이고, 전신과 같은 통신기술은 인간의 신경계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유명한 미디어학자 마샬 맥루헌도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나 컴퓨터가 인간의 대뇌와 신경계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1964)에는 ‘인간의 연장’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 19세기 독일의 사상가 에른스트 캅은 전신 케이블과 같은 기술이 인간 신경계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기술과 인체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모든 기술을 인간 몸의 연장으로 볼 수는 없다. 기술 중에는 해시계나 철조망처럼 자연을 모방하거나 자연을 체화한 기술도 있다. 그러나 캅이나 맥루헌의 기술관은 전근대적인 기술과 근대 기술의 차이를 무시한다는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전근대적 기술은 화살처럼 인간의 육체를 대체하고, 망치처럼 인간을 강화시키거나, 바퀴처럼 인간을 편하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근대기술은 자연적인 물질을 인공적인 물질로 대체하거나(제련기술), 자연적인 힘을 기술의 힘으로 대체하는 것(증기기관)이다. 간단히 말해서 근대 기술은 인간 몸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자연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근대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도와주는 ‘도구’였다면, 근대 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기계’의 외양을 지닌다.
기술은 개별 기술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되어 ‘기술 시스템’(technological system)을 이루기도 한다. 19세기 이후 철도와 전신, 전력의 보급 이래 기술은 점차 통합된 시스템을 이루면서 확산되었다. 여기서 보듯이 기술 시스템 속에서는 기술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의 경계가 희석된다. 기술과 사회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기술의 진보가 사회의 진보로 자동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 거대한 기술 시스템은 이미 그것에 투여된 수많은 사회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 발전 방향을 바꾸지 않으려는 관성을 가지게 된다.
기술의 진보-사회의 진보 혼동
개별 기술처럼 보이는 것이 시스템의 일부인 경우도 많다. 우리가 매일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개별 기술이 아니라 자동차 시스템의 한 구성물이다. 자동차 시스템은 자동차의 디자인 및 연구, 핵심 부품 및 기타 사양 생산, 조립, 도로 건설, 도시·토목 공학, 국토개발에 관한 장단기 계획, 도시구조, 주택구조, 주유·정유체계, 신호체계, 주차 등 수많은 제도와 인적 자본이 얽혀있는 시스템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현대 산업사회의 직장 중 20%가 자동차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자동차가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지금까지 대체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이유도 자동차 시스템이 가진 엄청난 관성 때문이다.
기술 시스템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에게 거역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듯 보인다. 자크 엘룰이나 루이스 멈포드와 같은 초기 기술철학자들은 이러한 거대 기술 시스템의 특성을 인지하고 이를 각각 ‘테크닉’(technique)이란 개념과 ‘독재적 기술’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이를 ‘자율적 기술’(autonomous technology)이라고 불렀다. 최근에는 기술 시스템의 불확실성과 위험이 강조되고 있다. 기술 시스템이 복잡해지면서 그것이 세분화되고 쪼개져서 그 각각이 전문가들에 의해 다루어지는데, 이러한 전문화와 파편화는 종종 전체를 볼 수 없는데서 기인한 큰 사고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경우 책임이 실종되는 결과가 종종 생긴다.
» 홍성욱/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과학기술학
기술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기존의 가능성 중 일부를 소멸시킨다. 따라서 이렇게 도입된 기술은 우리를 둘러싼 ‘기술 환경’을 바꾸고, 결과적으로 사회 세력들과 조직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바뀐다. 새로운 기술 때문에 더 힘을 가지게 된 그룹과 힘을 잃게 된 그룹이 생기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구조의 변화가 수반된다. 이렇게 변화된 사회구조는 다시 새로운 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하는 조건을 만든다. 기술 중에는 우리가 잘 이해하고 통제하는 기술도 있지만, 대규모 기술 시스템은 한 두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 이럴 경우에 기술은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고, 자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술이 언제나 사람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믿다가는 기술의 지배와 통제를 벗어나기 힘들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술에 대한 철학과 사상이, 그것도 비판적이면서 균형 잡힌 철학과 사상이 필요한 것이다.
하이데거 ‘도구 이상의 그 무엇’ 첫 사유 “현대기술의 본질은 닦달(강요)” 주장 자연에게는 자원 내놓으라고 인간에게는 부품이 되라고 채근 씨를 다그치지 않는 농부처럼 겸손하게 ‘존재의 드러냄’ 기다려야
»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이 존재가 아닌 존재자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음을 비판하면서, 그 존재의 망각이 도달한 극단의 모습이 현대 기술이라고 보았다.
기술 속 사상/② 하이데거의 기술철학
돌도끼로부터 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손에서 기술이 떠났던 적은 없다. 하지만 수천 년 철학사에서 기술이 철학적 탐구의 주제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묻지 않아도 될 법한 당연한 일들에 대해서도 “~란 무엇인가” 혹은 “왜 ~한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철학자들이 기술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기술은 인간이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라고 하면, 더 이상 물을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용의 주체인 인간이나 사용의 목적에 대해서는 몰라도, 사용되는 기술에 대한 철학이란 무의미해 보이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 (1889-1976)가 기술의 문제를 자기 철학의 한 축으로 삼은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20세기 서양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친 대사상가다. 1927년에 출간된 <존재와 시간> 이후의 철학자들은 하이데거의 사상을 알든 모르든 그의 그림자를 피해갈 수는 없다. 이렇게 중요한 철학자가 여태껏 외면당하던 기술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니 철학의 무대에서 기술도 마침내 한 번 뜬 셈이다.
물론 그가 아무 계기도 없이 기술을 주제로 삼은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산업혁명 이후 현대기술의 급격한 발달을 온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다. 그가 태어나기 7년 전인 1882년에 에디슨은 뉴욕시에서 최초의 전등을 켰고, 1886년에는 최초의 자동차가 제작되었으며,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와 무성영화는 그가 태어난 뒤에 각각 발명되었다. 이들 분야에서의 눈부신 발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외에도 핵폭탄, 컴퓨터, 텔레비젼 등 우리 시대를 바꾼 수많은 기술들이 그가 살았던 시절을 장식했다.
산업혁명기 체험이 ‘탐구’ 계기
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시각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다. 하이데거 이전에도 여러 사상가들이 현대기술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우려를 표명했지만, 정밀한 이론적 철학에 근거해서 현대기술이 비인간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기술에 대한 논구>라는 비교적 짧은 글에서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의 본질이 “닦달”(Ge-stell)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 말의 의미는 현대기술이 존재하는 것들의 특성과 다양한 측면들을 무시하고 그들 각각의 의미를 기술적 맥락에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기술은 자연에게 에너지와 원자재를 내 놓으라고 강요(닦달)한다. 현대 기술 앞에서 모든 존재자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갖다 쓸 수 있고 대체 가능한 “부품”이 되어 버린다. 강물은 수력 댐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하는 자원일 뿐이고 울창한 숲은 신문을 만들 종이의 재료일 뿐이다.
옛날의 기술은 그렇지 않았다. 농사를 지을 때 농부들은 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씨가 절로 나서 자라는 것을 잘 돌보는 것이다. 강 위에 다리를 놓는 것은 강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리는 강을 건너기 위해 만들지만 그것은 강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하고, 전에는 익명의 존재였던 강 건너 마을을 이웃으로 드러나게도 한다. 기술은 인간이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맞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하이데거는 기술을 인간의 도구로 보는 인간적, 도구적 정의가 맞기는 하지만 기술의 본질을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한다. 기술은 예술과 더불어 숨겨진 진리가 드러나는 통로, 혹은 존재가 자기 자신을 내 보이는 한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 기술이 현대에 와서 닦달의 성격을 가지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현대기술과 하이데거 존재철학의 연결점을 보게 된다. 하이데거의 핵심 사상은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이다. 그는 플라톤 이래로 서양 형이상학이 언제나 존재자, 즉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었지 동사적 의미에서의 존재, 즉 있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고 비판한다. 플라톤 이래로 서양 형이상학은 신, 인간, 자연을 인간 인식의 대상이 되는 “있는 것”들로만 파악하였다. 그러면서 동사적 “있음”에 대한 관심, 즉 그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점점 약해졌다. 플라톤이 모든 사물의 이데아, 곧 불변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이나, 중세의 신학자들이 신의 본성을 물으려 했던 것은 “있음”보다는 “있는 것”에 치중한 대표적인 예이다.
파시즘·나치즘, 인간을 도구화
이러한 태도는 근대에 와서 훨씬 더 심화되었다. 근대의 사상가들은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질서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진리가 있음을 부인하고, 이성적인 인간 주체를 절대화했다. 존재자들의 진리를 인간이 밝혀내고, 그 상호연관성과 전체적인 질서까지 인간이 부여한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렇게 존재의 드러냄을 망각한 것의 최종 결과가 바로 현대기술이다. 현대기술의 태도는 씨가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을 돌보는 농부보다는 농약을 뿌리고 온도를 포함한 모든 조건을 임의로 조절해서 생산량을 억지로 높이는 식품생산 시스템에 비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기술의 “닦달”이다.
문제는, 이 닦달의 대상이 자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술사회에서는 사람들 역시 부품으로, 에너지의 출처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 부속처럼 인간도 잔뜩 쌓아놓고 필요하면 가져다 사용하고 시간이 지나면 버린다. 근대 이후의 인간은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하지만, 그 지배의 대가는 자기 자신의 철저한 대상화다. 그 결과 현대의 인간은 눈부신 성취 가운데 공허하고 지배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 속에 권태롭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다른 존재자를 대상화했는데, 결국 주체는 없어지고 지배하려는 의지만 남았다. 존재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은 존재를 망각함으로써 그 특별함을 잃고 말았다.
기술사회의 끊임없는 닦달과 팽창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닦달이, 존재가 기술시대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에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부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스탈린주의나 파시즘, 그리고 그가 잠시 몸담았던 나치즘과 현대 시장 자본주의에서 현대기술의 닦달을 본다. 이들은 끊임없는 발전과 지배의 추구 속에 인간이 인간을 비인격적 도구로 취급하게 된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도덕률은 하이데거의 눈에는 별로 유용하지 않다. 존재의 드러냄을 망각하고 인간의 주체성만을 강조한 결과가 현대기술이라면, 도덕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다시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필요한 태도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씨가 자라 열매를 맺는 과정을 돌보는 농부처럼 겸손하게 그 드러냄에 참여하는 것이다.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처럼 존재자들이 스스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태도, 존재자들을 드러나게 하는 빛과도 같은 존재를 사유하려는 노력을 통해 인간은 그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예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깊은 애착은 이러한 생각에 기반한다. 예술을 통해 예술가를 초월하는 진리의 장이 열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상반된 평가에도 ‘기술철학’ 핵심
» 손화철/성균관대학교 강사·기술철학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에 대한 평가와 반응은 극과 극을 달린다. 현대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정통으로 지적한 사상이라고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기술에 대한 아무 실증적 근거도 없이 비관주의, 회의주의에다 신비주의까지 엮었다는 혹독한 평가도 있다. 존재의 드러냄을 기다리고 가꾸라는 말의 의미가 명확하지도 않거니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로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을 환경윤리적으로 해석하여 모든 존재자의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여러 상반된 해석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이데거를 통하여 철학에서 기술의 문제가 문제라는 사실을, 그리고 기술이 단순히 인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그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하이데거처럼 현대기술의 중요성을 즉각 인지하고 정면으로 씨름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그를 기술철학의 핵심 사상가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술비관론자’ 자크 엘륄의 진단 “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 기술은 인간 통제 벗어나 자유 억압하면서 ‘효율성의 법칙’ 따라 발전 더 빠른 컴퓨터, 더 얇은 휴대폰 기술이 필요 창출…그의 대안은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하라
» 기술비관론자로 알려진 프랑스 보르도 출신 학자 자크 엘룰은 현대 기술이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고 자율적이 되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기술 속 사상/③ 기술 시스템과 자율적 기술 - 쟈크 엘륄
인간복제나 생각하는 로봇의 생산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가?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면서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바램과 무관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 다른 문제다. 실제로 대학 수업 시간에 물어보면 학생들 중 2/3 이상은 인간복제같이 찬반이 분분한 기술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은 개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긍정인데, 그 가운데 묘한 체념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술발전과 그에 따른 변화들은 ‘시대의 흐름’이고 거기에 잘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지하철 곳곳에 붙은 소프트웨어 광고가 심상치 않다. “당신도 OOOOO만큼 진화하셨습니까?”
기술발전이란 시대의 흐름 앞에 수동적이 되는 것은 과학자, 공학자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기술발전을 직접 이끌어가는 전문가들에게도 기술발전의 완급이나 방향을 조절한 권한은 없다. 자기의 전문 영역 외에는 잘 모를 뿐 아니라 자기가 개발하는 기술이 장차 어떻게 쓰일지도 모른다. 설사 안다 하더라도 살벌한 시장 경쟁의 한복판에서 어떤 기술을 개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 혹은 ‘인간은 기술의 주인’이라는 말이 좀 허탈하게 들린다.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사용하는 것이 맞긴 한데, 발전시키지 않을 자유도 사용하지 않을 자유도 없다면 인간은 기술의 주인인가, 하인인가?
프랑스 보르도 출신의 학자 쟈크 엘룰(Jacques Ellul, 1912-1992)은 이러한 현대사회의 상황을 “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뒤틀려진 기독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등 1990년대 젊은 기독교인들이 많은 읽었던 책들의 저자로만 알려졌으나, 엘룰은 과격한 현대기술 비판론자로 더 유명하다. 1964년 미국에서 <기술사회>(The Technological Society)가 출판된 이래 엘룰은 ‘기술비관론자’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1954년에 나온 프랑스어판 <기술 혹은 우리 세기의 도박(내기)>(Technique ou l'enjeu du siecle)을 번역한 것으로, 프랑스에서는 별로 빛을 못 보았지만 영문판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팔리고 있다. 제목의 번역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기술사회(technological society)’라는 말이 현대를 표현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되었고, 이후 출판된 <기술 시스템>(The Technological System)과 <기술담론의 허세>(The Technological Bluff)도 프랑스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많이 읽혔다고 한다.
엘룰은 현대기술은 과거의 기술과 전혀 다른 특징들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우선 전통 기술은 상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의 다른 활동들 (예를 들어 종교적 활동)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는데, 현대에는 기술의 발전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또 기술의 제작에 있어서는 자동화를 통해 인간의 개입을 배제하면서, 사용에 있어서는 사용하지 않을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엄청난 발전의 속도와 지역의 문화와 상관없이 전지구적으로 사용가능한 보편성, 그리고 여러 기술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는 것도 현대기술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 시스템은 자연을 대상으로 했던 전통적인 기술의 영역을 넘어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으로 침투해 간다. 엘룰은 정부의 조직이나 회사의 마케팅과 광고, 그리고 대도시의 놀이시설 같은 것들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기술’이라 부른다.
이러한 현대기술에 대한 분석은 철저히 관찰에 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철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관심은 추상적인 본질에 있지 않고 현실의 정확한 파악에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는 기술사회의 현실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물론 전통적 기술의 발전도 한 개인이나 집단이 완전히 통제한 적은 없다. 그러나 과거 기술의 발달은 매우 느렸고 공간적 제약이 많아서 사람들은 그 변화에 억지로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현대 기술사회의 문제는 컴퓨터와 핸드폰과 은행카드를 사용해야만 하고, 때가 되면 바꿔야만 하고, 바꾸면서 나의 삶이 더욱 나아진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술이 ‘자율적’이라는 표현은 자동차가 운전자 없이 혼자 돌아다닌다거나 기계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기술발전이 기술 시스템의 관성에 의해 지속되고, 그 과정에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기술사회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기술 시스템은 인간들에 의해 조정되기보다는 ‘효율성의 법칙’에 따라 운영되고 발전한다. 인간의 가치나 필요는 효율성의 논리 앞에 무력하다. 더 빠른 컴퓨터와 더 얇은 핸드폰이 꼭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에 의해 기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필요를 창출한다. 누가 지하철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그렇게 간절히 소망했던가?
물론 기술 개발에 소비자의 의견이 반영되기도 하고, 특정 기술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두 기술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 그와 같은 개별 사례들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아가, 앞서 본 것과 같이 기술발전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뿐 아니라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까지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사회 전반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술발전을 모두 포기하고 산업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기술이 자율적이라면, 인간의 자율성은 어떻게 되는가? 엘룰은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보았다. 말년에는 “이제 기술사회에 사는 인간에게는,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자유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술사회의 문제를 극복할 현실적인 대안도 없고, 그 구성원은 이미 자유롭지도 못하다고 하니, 그를 따라다니는 ‘기술비관론’의 꼬리표는 거의 정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엘룰 자신은 비관론자를 자처하지도 않았고, 비관론자의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가 남긴 50여 권의 저서와 1000여 편의 논문은 자기의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열정의 산물이다. 그 외에도 엘룰은 90 평생을 시골 목사, 레지스탕스, 보르도 대학 교수, 사회학자, 정치학자, 평신도 신학자, 보르도 시장, 청소년 운동가, 환경운동가 등으로 활약하며 그야말로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갔다.
기술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우울한 시각과 그의 적극적인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삶을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하라 (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말로 정리했다고 한다. 학자로서 현대 기술사회 전체를 폭넓게 조망하고 분석한 결과 비관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 결론 때문에 자기가 속한 삶의 터전에서 해야 할 일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평생을 보낸 고향 보르도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운동가의 삶을 살면서 작은 일에 보람을 느끼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기술사회가 확 변할 것이라는 환상을 경계하면서도, 자신의 작은 노력들을 통해 기술사회가 위협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개인적으로나마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엘룰의 사상과 행적을 그가 믿었던 기독교와 연관시키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자신은 기술사회에 대항하는 개인적 노력이 신앙과 상관없이 행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엘룰의 저서를 읽고 평생을 자기 마을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 사람도 있다.
“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후에 일본 소니(SONY)의 세계 경영 전략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같은 제품을 팔더라도 각 지역의 문화와 전통, 구매자의 요구사항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대기술을 비판한 대표적 학자가 좌우명으로 삼은 말이 첨단 전자기술 회사의 모토로 둔갑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엘룰이 경고하는 기술 시스템의 무서운 힘이다.
기술은 목적 위한 중립적 수단이 아니다... 인간과 세계 사이 개입하며 ‘실존’ 변형 경험을 확대하는 동시에 축소하고 때론 새로운 세계에 접근할 통로가 되며 공기처럼 숨어있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 인간과 기계가 융합된 사이보그 이미지. 기술이 인간 삶의 양식에 필수적인 존재가 된 이제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유토피아냐 디스토피아냐는 단순이분법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기술시대엔 인간과 기술의 관계, 그리고 인간이해도 달라져야 한다.
기술 속 사상/④ 인간과 기술 공생 강조-돈 아이디
오늘날 인간의 문제, 특히 인간의 실존과 관련된 문제는 기술을 배제하고 더 이상 논의될 수 없다. 주위를 둘러보라. 초음파 기기의 인체 질환 진단, 전자 현미경의 물질 나노구조 분석, 전파 망원경의 우주 현상 관찰, 대중매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 등등 기술을 통하지 않고 과연 우리가 세계와 의미 있게 만날 수 있겠는가? 오늘날 기술은 인간 삶의 양식에서 매우 필요한 존재가 돼버렸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술시대에 인간과 기술의 관계, 그리고 그에 기초한 인간이해도 분명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는 그동안 주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기술에서 인간 삶의 질을 개선할 유용성과 함께 궁극적으로 인간을 해방시킬 조건을 보았던 유토피아적 입장이 한쪽 끝에 있었다면, 다른 쪽 끝에 환경 파괴적 속성과 인간의 존재방식을 지배하려는 억압성을 현대 기술에서 발견한 디스토피아적인 입장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은 오늘날 인간과 기술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로 만난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관한 설득력 있는 입장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돈 아이디(Don Idhe, 1936~)는 이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오랜 동안 연구해 온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컴퓨터와 정보기술이 발달한 1970년대부터 이 문제에 접근함으로써, 기존 논의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실천적 논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의 출발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디스토피아적 관점을 고집한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다. 아이디는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기술을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 인간이 존재자들과 교섭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규정하였다. 기술이 야기한 결과들 혹은 효과들보다는, 기술현상 그 자체 곧 현상적 차원에서 생생하게 감지되는 기술의 본성과 그 역할에 주목한 것이다. 또한 현대의 기술은 단순히 목적을 위한 중립적 수단이 아니며, 인간과 세계 사이에 개입하여 그 관계를 굴절시키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실존방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다는 점도 동일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하이데거와 달리 현대 기술의 부정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 기술의 편재함을 깊이 고려한 상태에서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인간학의 새로운 주제를 던져 주었다. 그렇다면 그의 생각은 무엇이며, 그러한 분석이 오늘날 기술에 대한 성찰에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비관론자 하이데거 사유 출발점
아이디는 기술과 인간이 맺는 전형적인 관계들로 체현관계, 해석관계, 배경관계를 주장하고 있다. 체현관계(embodiment relation)란 기술이 우리의 신체 기능을 확장시키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관계다. 망원경으로 달 표면을 관측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 경우 기술은 외부세계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확장된 신체의 일부로 체현되어 ‘확대된 나’ 혹은 ‘유사-자아’가 된다. 세계와 맞선 나와 공생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렇게 체현된 기술을 통한 경험이 반드시 투명한 것만은 아니다. 기술로 인한 변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달 표면에 관한 특정한 시각 경험은 확장되고 부각되겠지만, 동시에 달에 관한 다양한 포괄적 경험들-가령 색깔, 깨끗함, 처량함 등-은 축소되고 간과된다. 즉 기술로 인해 나의 경험에서 확장과 축소가 동시에 발생하게 된다. 한마디로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기술로 인해 세계에 대한 나의 경험, 곧 나와 세계와의 관계가 일부 변형되고, 나의 실존적 의미도 일부 굴절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과학에서의 도구 사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중매체나 정보 통신기기들의 활용과 같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동일하게 발생할 수 있다.
해석관계(hermeneutic relation)란 기술이 해석을 요하는 텍스트를 제공할 때 성립하는 관계다. 전자현미경으로 미시입자의 원자구조를 탐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전자 현미경에서 특정의 전파를 발생시켜 입자에 쏘고 입자의 어떤 성질이 그것과 반응하여 특정의 물리적 신호를 산출하면, 전자현미경이 이 신호를 수신하여 컴퓨터의 정보처리 과정을 거쳐 그 결과를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화면에 그림으로 재현해 낸다. 그러니까 화면 속의 그림은 기술에 의해 재구성된 세계에 관한 텍스트인 셈이다. 이는 미시세계에 불가능성 때문에 생긴 결과다. 기술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은 미시세계에 전혀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기술을 사용했는가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는데 직접적인 조건이 된다. 그래서 기술이 구현해 낸 텍스트만이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가 된다. 정리하면 기술은 더 이상 나의 신체의 연장이 아니며, 오히려 내가 탐구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 곧 텍스트로 다가 온다. 한편 사용된 기술에 따라 텍스트들이 달라지므로, 기술은 세계에 대해 매우 불투명하거나 세계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서 해석학적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는 일상생활 속에 보편화된 컴퓨터의 가상공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주장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차단이 아니라 처음부터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관측 망원경’ 시각경험만 확장
배경관계(background relation)는 기술이 배경으로 숨어 있으면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그런 관계다. 가령 컴퓨터의 제어기술로 불빛이 조절되고 난방이 통제되며 실내 공기가 통풍되는 인공지능 건물에,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여기서 기술은 더 이상 신체의 연장 혹은 세계에 접근하는 통로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 곧 대기권에 대비되는 ‘기술권’(techosphere)으로 인간과 관계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기술사이의 배경관계다. 여기서 우리는 기계들과 직접 관계하지 않으면서 이들을 배경으로 하여 살아가게 된다. 이런 현상은 미래의 유비쿼터스 사회처럼 사회가 고도로 기술화될수록 한층 확대·심화될 것이 자명하다. 한마디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는 이처럼 인간이 기술을 통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가에 따라 구분되고, 그 본질 또한 달라진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아이디의 이러한 분석은 고도 기술시대의 인간을 이해하고자 할 때, 기존과 다른 새로운 해명을 제공해 준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관한 전통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체현관계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오늘의 인간이 과거의 인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인간적 기능이 확대되고 인간과 세계가 만나는 영역도 훨씬 깊고 넓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해석관계도 기존에는 도달할 수 없었던 영역(미시세계나 우주 등) 혹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가상공간 등)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인간적 가능성의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나아가 배경관계에서 논의된 기술권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간 삶의 패러다임이 새롭게 바뀔 것임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적 가능성의 확대는 기술시대의 인간이해에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요소임에 분명하다. 실제로 현대 기술을 온전히 긍정하는 낙관론의 입장은 바로 이러한 측면들을 배타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해 축소시킨 기술 반성적 비판
그러나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인간적 가능성의 이 같은 확대가 필히 또 다른 가능성의 축소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가능성의 확대가 주로 자연현상의 정밀한 관측에 용이한 시각적 혹은 청각적 경험 등과 같은 특정한 경험들에 국한된 반면, 축소는 인간의 정서적 감성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경험 전반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는 세계를 그 자체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특화된 그것도 몇몇 단일-감각적인 도구들에 의거해서만 제한적으로 보도록 함으로써, 결국 세계 혹은 현상에 대한 축소된 이해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 이중원/서울시립대 교수·과학철학
특히 이것이 인간의 자기이해와 관련된 현상들인 경우, 인간의 자기이해에 있어서도 축소가 불가피해진다. 한편 기술의 개입으로 인한 특정 경험의 확장은 인간에게 매우 극적이고 환영할 만한 것으로 언제나 강하게 각인되지만, 다른 포괄적 경험들의 축소는 흔히 무시되거나 간과되어 이를 자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자각할 수 있는 반성적 비판도 뒤따라 주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기술시대에 새롭게 드러난 이 양자의 측면을 동시에 고려할 때, 기술시대의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기술과의 공생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아이디 기술철학의 중요한 함축이 아닌가 생각한다. jwlee@uos.ac.kr
총(비인간)과 사람이 만났을 때 쏘는 행위는 총도 사람도 아닌 총과 사람의 합체인 새 ‘행위자’가 하는 것 사회결정론·기술결정론 모두 비판... 인간과 기술, 주체-객체 아닌 대칭관계로
» 요르단강 서안 헤브론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이스라엘군 병사 앞으로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지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총이 사람을 죽이는가 아니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가를 놓고 논쟁하곤 했다. 라투르는 총과 사람을 따로따로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총을 쥔 사람’이라는 잡종적 존재가 사람과 총 모두의 목적을 바꾸면서 새로운 행위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갈파했다. 헤브론/ 로이터 연합
기술 속 사상/⑤ 급진주의자-브뤼노 라투르
기술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인간은 의지를 가진 살아 있는 주체이고 기술은 자체 생명력이 없는 기계덩어리다. 인간은 자신의 뜻에 따라서 기술을 바꾸고 목적을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가 간파했듯이 어떤 기술은 인간을 옭죄고 지배한다.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이렇게 자체 생명력을 가진 기술을 ‘자율적 기술’이라고 명명했다.
프랑스의 과학기술학(STS)자인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는 기술이 사회적 필요에 따라서 마음대로 바뀔 수 있다고 보는 시각과 기술이 자율성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한다는 시각을 모두 비판한다. 전자는 기술이 사회적 필요에 따라서 전적으로 구성된다는 사회구성주의적 시각이고 후자는 기술이 거꾸로 인간의 필요와 행동을 결정한다는 기술결정론적인 시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라투르의 비판은 이 두 입장의 중간을 취하는 식이 아니다. 그는 기술을 이해하는 훨씬 더 급진적 시각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기술과 같은 비인간(nonhuman)을 인간과 같은 행위자(actor)로 보는 것이다.
과속방지턱 고통경찰 대체
라투르가 좋아하는 예는 우리가 아파트 단지나 학교 앞에서 자주 보는 과속방지용 둔턱이다. 마음이 급한 운전자들은 “이웃이나 학생들을 위해서 과속을 하지 맙시다”라는 도덕적인 문구가 씌어진 표지판을 무시하고 속도를 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골목골목마다 교통경찰을 배치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발명된 것이 과속방지용 둔턱인데, 운전자들은 둔턱 앞에서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인다. 그런데 운전자가 이렇게 속도를 줄이는 이유는 그가 이웃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속도를 내서 둔턱을 넘었다가는 자기 차의 서스펜션에 무리가 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즉 둔턱은 “이웃이나 학생들을 위해서 과속을 하면 안된다”라는 (사람들이 잘 지키지 않는) 도덕적 심성을 “과속을 하면 내 차의 서스펜션이 고장날 수도 있다”라는 (사람들이 잘 지키는) 이기적 태도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둔턱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라투어는 둔턱을 “잠자는 경찰”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둔턱은 교통경찰이 했던 역할을 대신한다. 그 결과 교통경찰은 다른 일을 하거나 다른 곳에 투입될 수 있다. 또 둔턱은 훌륭한 도덕선생님의 역할도 수행한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과속을 하는 운전자들과 주민 사이의 갈등과 싸움을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이렇게 기술은 인간이 했던 역할을 대신 수행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역할을 바꿈으로써 우리 사회의 훌륭한 행위자가 되는 것이다.
라투르는 총기의 예도 즐겨 사용한다. 미국에서 총기의 사용을 엄격하게 규제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총이 사람을 죽인다”라고 외친다. 총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을 살인 사건이 총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총기 사용의 규제에 반대하는 그룹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총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강조하는데, 이들의 얘기는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총은 중립적인 도구이고 용도에 따라서 좋은 목적으로도 혹은 나쁜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는 총이 아니라 사람에 있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전자를 기술결정론, 후자를 사회결정론으로 분류하면서 이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비판한다. 그의 해법은 사람이 총을 가짐으로써 사람도 바뀌고 총도 바뀐다는 것이다. 총을 가진 사람은 총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달라지고, 마찬가지로 총도 사람의 손에 쥐어짐으로써 옷장 속에 있는 총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즉 총과 사람의 합체라는 잡종이 새로운 행위자로 등장하며, 이 잡종 행위자는 이전에 사람이 가졌던 목표와는 다른 목표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원래는 다른 사람에게 겁만 주려 했는데, 총이 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식이다.
‘비인간’의 번식 깨닫는 게 근대
라투르는 서양의 학문이 자연, 사회, 인간만을 다루어왔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사회과학은 (자연의 일부로서의) 사회를 다루고, 철학과 같은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했는데, 라투르에 따르면 여기에는 모두 기술과 같은 ‘비인간’이 빠져 있다. 과학은 자연을 탐구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든 기기와 실험실에 의존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기술인데, 사회과학자들은 기술에는 관심이 거의 없다. 철학자들은 주체/객체의 이분법에 빠져서, 기술을 저급하고 수동적인 대상으로만 취급한다.
기술과 같은 비인간이 빠져버린 자연과 사회는 ‘근대성’의 골자이다. 결국 라투르에게 기술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행위자로서의 이들의 능동적인 역할을 드러내는 것은 서구의 ‘근대적’ 과학과 철학이 범했던 자연/사회, 주체/객체, 인간/비인간의 양분법을 극복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라투르에게 근대를 극복하는 방법은, 탈근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시작되던 시점부터 자연과 사회 모두에 기술과 같은 비인간이 엄청난 속도로 번식했음을 인식하는 것, 즉 “우리가 근대인 적이 없었다”(We have never been modern!)는 것을 깨닫는 것부터 시작한다.
과학/기술의 이분법도 라투르의 비판의 화살이 꽂히는 과녁이다. 라투르는 과학과 기술을 대체하는 용어로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기술이 과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과학과 엔지니어링의 접점이 확산되는 것을 생각하면 과학/기술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주체/객체의 구별도 비판한다. 사람은 대상과 관계를 맺고 대상은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에만 진정한 의미의 행위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을 주체, 대상을 객체라고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액터’(actor, 행위자)라는 말 대신에 ‘액탄트’(actant)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이분법 외려 강화했다 비판도
프랑스 과학기술학자 라투르는 미국 소크 연구소에서의 인류학적인 관찰 경험을 바탕으로 1979년에 <실험실 생활>이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화려하게 학계에 데뷔했고, 이후 <행동하는 과학> <우리는 근대인 적이 없었다> <아라미스> <판도라의 희망> <자연의 정치학> 등 주목받는 연구업적을 끊임없이 출판했다. 최근에 그는 인간과 사물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집중한 예술전시 기획을 총괄하기도 했고, 그 결과를 <아이코노클래시>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안타깝게도 라투르의 책은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것이 없다.
라투르의 관심은 실험실의 민속지학에서 파리의 실패한 지하철 프로젝트를 거쳐 아마존의 열대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그렇지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비판하는 그의 입장은 초기 연구에서 가장 최근의 연구까지를 관통하고 있다. 물론 그의 주장에 대한 비판도 많이 제기되었다. 라투르는 기술이 마치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자신을 대변하는 주체처럼 서술하지만, 사실 그런 서술은 라투르라는 인간이 기술에게 부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라투르가 기술에게 부여한 특성은 ‘인간다운’ 특성, 즉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고, 반응하고, 실행하는 특성이라는 것이다. 비판가들은 라투르의 이러한 시도가 인간의 역할을 더 강조함으로써 라투르가 부숴버리려고 했던 주체/객체의 구분을 더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라투르의 기술철학은 아직 미완이다. 그의 업적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인간/비인간의 구별을 없애고 이 둘을 대칭적으로 생각하자는 라투르의 주장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이 인간/기계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사이보그들이 급속도로 번식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잘 보여주는 것은 인간사회가 기술 없이는 구성될 수도 없고 유지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인간관계, 권력관계)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기술과, 무생물과, 비인간과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우리가 더 민주적이고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의 기능과 역할에, 즉 “물건의 정치학”(politics of things)에 훨씬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이점이 라투르의 기술철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메시지다.
조직·법규·자원을 포함한 ‘사회기술시스템’ 발명·개발·혁신·경쟁·공고화 단계로 진화 서로 겹치거나 거꾸로 진행되기도 한다... 성공한 기술에 주목 특정인 지나치게 영웅시
» 기술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기술을 넘어 기술시스템을 구성한 사람들이다. 백열등뿐 아니라 발전기, 배전기, 계량기, 축음기 등을 발명하고 가전업체 GE를 창립한 에디슨이 대표적이다. 사진은 지난 2월13일 에디슨 탄생 160주년을 맞아 서울 롯데백화점에서 열린 기념 특별행사전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기술 속 사상/⑥ 기술시스템이론-토머스 휴스
시스템 접근은 많은 학문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구성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전체가 부분의 합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시스템 접근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몇몇 구성요소를 중심으로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을 설명할 경우에는 항상 부분적인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 세상은 특정한 구성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변화와 관련된 대표적인 시스템 접근으로는 ‘기술시스템’(technological system) 이론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유명한 기술사학자인 토머스 휴즈(Thomas P. Hughes)가 제창한 이래 과학기술사와 과학기술사회학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는 전력시스템에 관한 사례연구를 수행한 후 기술시스템의 개념을 일반화하면서 기술과 사회의 변화를 분석하는 데 적용해 왔다.
전력시스템 사례 연구로 시작
기술시스템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술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휴즈가 개념화한 기술시스템은 물리적 인공물뿐만 아니라 조직, 과학기반, 법적 장치, 자연자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술시스템에는 ‘기술적인 것’(the technical)과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술시스템은 ‘사회기술시스템’(sociotechnical system)으로 불리기도 한다.
기술시스템을 구성하는 각 요소는 다른 요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시스템 전체의 작동에 기여하게 된다. 만약 어떤 구성요소의 특성이 변화한다면 시스템 내부의 다른 요소들도 바뀌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전력시스템에서 저항이 변하면 그에 따라 발전, 송전, 배전에 필요한 구성요소들도 바뀌게 된다. 사회적인 요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투자은행이 제조업체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할 경우에 그 은행은 제조업체의 의사결정이나 기술개발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기술시스템에 포함되지 않은 요소들은 ‘주변환경’(surroundings)에 해당한다. 기술시스템과 주변환경은 정태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기술시스템이 진화하면서 주변환경의 일부를 구성요소로 포섭하기도 하며 반대로 기술시스템의 구성요소가 주변환경으로 해체되기도 한다. 어떤 요소가 특정한 맥락에서 기술시스템을 구성한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기술시스템은 일종의 열린 시스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휴즈에 따르면, 이러한 기술시스템은 몇몇 단계를 걸쳐 진화하게 된다. 그것은 발명(invention), 개발(development), 혁신(innovation), 이전(transfer), 성장(growth), 경쟁(competition), 공고화(consolidation)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기술시스템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각 단계가 반드시 순서대로 등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 단계가 서로 겹칠 수도 있고 특정한 단계가 생략될 수도 있으며 몇몇 단계는 거꾸로 진행될 수도 있다.
발명에는 급진적인 발명과 보수적인 발명이 있는데, 전자는 새로운 시스템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며 후자는 기존의 시스템을 개선하거나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개발단계는 실험환경을 더욱 복잡하게 하여 발명품이 실제 세계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혁신단계에서는 개발된 기술을 바탕으로 실제적인 생산과 판매가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복잡한 기술시스템이 만들어진다. 발명, 개발, 혁신의 단계를 거치면서 특정한 기술시스템이 탄생하는 셈이다.
기술시스템이 이전될 때에는 상이한 시공간의 특성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적응의 과정에서는 각 지역의 정치적 가치 체계, 지리적 조건, 규제 법령, 역사적 경험 등이 개입되어 ‘기술스타일’(technological style)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전력시스템의 경우에 런던과 베를린은 상당 기간 다른 스타일을 보여 왔다. 런던이 소규모 발전소를 많이 두었다면 베를린에는 몇 개의 대규모 발전소가 있었다.
시스템끼리 경쟁한 ‘전류전쟁’
» ‘사회기술시스템’ 이론을 주창한 토머스 휴스.
기술시스템은 불균등하게 성장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휴즈는 ‘역돌출부’(reverse salients)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역돌출부는 군사작전에서 비롯된 용어로서 기술시스템의 성장이 지체되는 영역을 지칭한다. 기술시스템의 지속적인 성장은 역돌출부를 ‘결정적 문제’(critical problems)로 환원하고 물적·인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동원하여 풀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것은 전쟁 중에 장군이 군사력을 역돌출부에 집중적으로 배치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기술시스템은 때때로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한 경우에는 새로운 기술시스템이 출현하면서 기존의 기술시스템과 경쟁을 벌인다. 19세기 말에 전력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직류 시스템과 교류 시스템이 벌였던 ‘전류전쟁’(current war)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시스템 사이의 경쟁은 많은 경우에 승리자와 패배자가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다. 기술의 표준화와 기업간 합병을 매개로 두 시스템이 연결되면서 일종의 ‘포괄적 시스템’(universal system)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술시스템은 내·외부적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점차적으로 공고화된다. 공고화의 단계에 진입한 기술시스템은 ‘모멘텀’(momentum)을 가지며 변경하기 어렵게 된다. 모멘텀은 해당 기술시스템에 이해관계를 가진 조직과 사람들이 변화에 저항함으로써 생겨난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시스템이 주변환경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닫힌 시스템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외부적 충격이 발생하거나 여러 가지 사건이 동시에 결합될 경우에는 기술시스템의 모멘텀이 굴절되거나 파괴될 수 있다.
기술시스템 이론은 기술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하고 있다. 기술의 역사에서 거론되는 유명한 인물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기술을 넘어 기술시스템을 구성한 사람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에디슨(Thomas Edison)은 백열등만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발전기, 배전기, 계량기 등과 같이 전력시스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기술적 요소들을 마련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전등의 연구개발, 전력의 공급, 발전기의 생산 등을 담당하는 기업을 잇달아 설립하여 전기에 관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전기에 국한되지 않으며, 인쇄술과 자동차를 포함한 다른 사례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나 포드(Henry Ford)도 단순한 발명가가 아니라 ‘시스템 구축가’(system builder)였던 것이다. 그러나 기술시스템 이론은 주로 성공한 기술에 주목하면서 특정한 인물을 지나치게 영웅시하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기술시스템 이론이 군사적 유비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나 대기업의 성공을 합리화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기술시스템 이론은 기술변화에 관한 대안적 해석에 해당한다. 즉, 기술이 사회변화를 결정한다는 기술결정론과 사회적 이해관계가 기술을 형성한다는 사회결정론을 모두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기술시스템 내에 기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녹아 있으며 기술과 사회는 동시에 진화하는 것이다.
기술과 사회는 동시에 진화
물론 기술시스템이 진화하는 단계에 따라 기술과 사회가 가진 영향력의 상대적 비중이 달라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초기 단계의 기술시스템에는 사회적 요소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반면, 성숙한 기술시스템의 경우에는 외부환경의 개입이 축소되면서 자신의 발전 경로를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숙한 기술시스템은 기술결정론에서 자주 거론되는 ‘자율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휴즈는 “기술시스템은 공고화된 이후에도 자율성을 가지지 않는다. 대신에 모멘텀을 가지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성숙한 기술시스템을 변경하기는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술이 인간과 무관한 독자적인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휴즈의 신념과 직결되어 있다. 그가 2004년에 발간한 저작이 <기술이 만든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세계>(Human-Built World)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고무 타이어의 속도감·여성에 맞는 작은 앞바퀴, ‘안전 자전거’ 보편화에 결정적 영향 줬듯 기술 발전은 사회집단간 이해관계 따라 결정... 기술 자체 논리보다 사람들 합의과정 중요하다
» 초기에 남성 스포츠 자전거 애용자들이 선호했던 앞바퀴가 큰 자전거. 이 자전거는 치마를 입은 여성들을 위해서 변형된 모델을 만들어야 했다.
기술 속 사상/⑦ 기술의 사회구성론
‘기술의 사회 구성론’은 기술변화의 과정에 정치적, 경제적, 조직적, 문화적 요소가 개입하는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기술이 사회과정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기술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왜 150볼트가 아닌 110볼트 또는 220볼트 전기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한때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가 발전해서 결국 누구나 소형 자가용 비행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비행기의 크기는 커졌는가? 자전거가 처음 만들어진 19세기 말에는 다른 형태의 자전거도 많이 있었는데 어째서 다이아몬드 형태의 틀과 고무 타이어를 쓰고 두 바퀴의 크기가 비슷한 안전자전거(safety bicycle) 모델이 지금은 보편적이 되었는가?
핀치와 바이커의 ‘자전거’ 연구
이런 문제에 대한 상식적인 답은 대체로 지금 우리가 쓰는 모델이 다른 모델보다 편하고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지금 살아남은 기술이 다른 기술보다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성이란 좋은 것, 합리적인 것, 추구해야 할 것, 심지어 운명지어진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런 관점은 논쟁적인 기술을 분석할 때 문제를 발생시킨다. 핵무기와 독가스도 효율적인 기술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인간복제 기술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지금 우리가 가진 기술이 다 효율적인 것이라면, 왜 재앙에 가까운 기술적 실패가 종종 발생하는가?
기술 결정론에서는 기술의 발전은 물론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이미 기술 속에 결정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기술의 사회구성론은 기술 발전의 궤적이 이미 기술 내에 결정되어 있다는 식의 ‘본질주의’(essentialism)를 비판하면서 기술의 발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사회 집단들을 강조한다. 기술의 사회구성론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연구를 한 과학기술학자 핀치와 바이커는 자전거의 변천에 관한 사례연구를 통해 기술의 구성 과정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자전거의 발전 과정을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전거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집단이다. 여기에는 자전거를 만든 기술자, 남성 이용자뿐 아니라 여성 이용자, 스포츠 자전거 이용자, 심지어 자전거 반대론자도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 특정한 자전거 디자인에 대해 그들 나름의 선호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스포츠 자전거 이용자들은 56인치짜리 커다란 앞바퀴가 달려서 페달을 밟아 격한 운동을 할 수 있는 모델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앞바퀴가 큰 자전거는 여성 이용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설계된 모델을 개발해야 했는데, 당시 여성들은 보통 긴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앞바퀴가 작은 자전거를 선호하던 여성들은 자전거의 모델이 지금의 안전자전거로 종결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식으로 자전거의 발달을 이를 둘러싼 사회 집단의 맥락 속에서 분석해보면, 자전거의 초기 발전단계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표준 자전거로의 단선적 발전을 반영한다기보다, 오히려 자전거라는 기술과 여러 사회집단, 그리고 풀어야 할 기술적 문제들의 분산된 네트워크를 반영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은 공기 타이어가 자전거에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초기에는 아무도 공기 타이어가 자전거 설계에 결정적인 요소라고 생각지 않았다. 기술자들에게 공기 타이어는 매우 골치 아픈 문제였고, 스포츠 자전거를 즐겼던 사람들에겐 쿠션을 제공하는 공기 타이어가 오히려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회집단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일한 기술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서로 다르게 파악하며 이에 대한 해결책도 다르게 제시한다. 따라서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회집단들 사이에는 그 기술이 가진 문제점과 해결책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
이러한 갈등이 사법적, 도덕적, 정치적 성격을 띠는 복잡한 협상을 통해 해소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합의에 도달하게 되면 안정적인 기술적 인공물의 형태가 선택된다. 그런데 사회 구성론자들은 이 합의의 과정이 다시 ‘사회적’ 과정임을 강조한다. 자전거 변천 과정에서도 자전거 경주와 같은 사회적 요소가 논쟁의 종결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자전거 경주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공기 타이어를 장착한 안전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보다 빠르다는 것이 경주를 통해 입증되었다. 이 과정에서 초기 자전거 설계에서 중요하지 않던 속도가 자전거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새로이 부각되었는데, 그 결과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안전 자전거 쪽으로 경쟁이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큰 앞바퀴 치마입고 타기에 불편
기술 디자인을 종결하는 데 중요했던 또 다른 요소는 여성 자전거 애호가들이었다. 자전거를 격렬한 스포츠로 여기던 남성들은 큰 앞바퀴가 있는 자전거를 선호했지만, 여성들은 치마라는 복장 때문에 앞바퀴가 작고 타이어가 쿠션 기능을 해주는 안전 자전거를 선호했다. 그러므로 안전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은 기술적 논리(가령 효율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 집단, 이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자전거라는 인공물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나온 여러 가지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안전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담론은 논쟁이 종결된 후에 그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재구성되었다는 것이 사회 구성론자들의 주장이다.
조금만 일반화시켜보자. 기술적 인공물을 둘러싼 사회집단에는 이를 만들고 판매하는 엔지니어와 기업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소비자도 있다. 이 각각의 사회집단은 어떤 한 가지 기술과 관련해서 자신들이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을 가진 사람들이며, 이러한 문제 각각에는 다양한 해결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한 가지 문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기술적 유연성’(technological flexibility)이라고 부른다.
‘기술의 영향에 무관심’ 비판도
이런 다양한 유연성들은 기술을 둘러싼 사회집단들 사이의 해석차와 갈등으로 나타난다. 갈등은 핵심적인 문제가 새로운 기술에 의해서 해결됨으로써 해소되며, 그 결과는 특정 기술이 표준으로 채택되는 것이다. 논쟁의 종결은 기술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일종의 합의과정이다. 즉 기술의 방향, 내용, 그 결과가 사회 그룹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주장이다.
기술의 사회구성론이 모든 과학기술학자들을 설득한 것은 아니다. 비판자들은 우선 사회구성론이 기술의 출현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영향에는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하곤 했다. 즉 기술이 선택된 이후에 그것이 개인의 경험이나 사회관계를 바꾸는 양식은 기술의 사회구성론에서 논의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의 사회구성론자들은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와 관련된 몇몇 사례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포드가 생산한 자동차가 처음에는 운송수단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농촌지역에 확산되면서 다른 기계를 작동시키는 동력의 역할도 담당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들은 기술변화에 수반되는 사회구조나 권력관계를 무시하며, 기술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즉 기술의 사회구성론은 기술변화에 대한 서술에 그치고 있으며, 기술변화의 방향을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자들은 기술철학과 기술사회학의 핵심적인 문제가 “기술이 어떻게 구성되는가”가 아니라 “우리의 기술중심적인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술의 사회구성론이 이러한 문제에 전적으로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기술의 사회구성론은 기술이 가진 유연성을 드러냄으로써 기술결정론을 비판하고 “기술이 지금과 다를 수도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사회구성론자들은 이러한 이론적 틀을 논쟁적인 기술을 평가하는 ‘기술평가’나 엔지니어를 위한 교육의 개혁에 적용하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사회구성론자들이나 비판자들 모두는 기술결정론이 지배하는 기술사회의 문제를 극복함으로써 더 바람직한 사회의 발전에 공헌하는 기술철학을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별도 자동차도 휴대폰도 심지어 머리 모양까지 기술 변화를 생물 진화론 개념으로 은유 돌연변이처럼 기술도 다양한 변수로 선택돼 자연·인공물 본질 달라도 작동원리 같지 않은가
» 화려하지만 버거워보이는 깃털을 가진 수컷 공작의 모습은 쓸데없는 화소 경쟁과 두께 경쟁에 집착하는 휴대폰 제조업체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수컷 공작과 휴대폰 업체는 각각 암컷의 선택과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그런 값비싼 신호들을 보내고 있다.
기술 속 사상 /⑧ 기술 진화론
휴대폰 전쟁이 점입가경이다. “카메라 화소를 OO로 늘였다. OO 기능을 추가로 탑재했다. 두께를 몇 mm로 줄였다”라는 소식이 거의 한 달 단위로 들려온다. 바로 얼마 전에는 국내의 모 회사가 출시한 1천만 화소 휴대폰, 7mm 초박형 휴대폰이 세계 최초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기사들의 제목은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똑같다. “휴대폰 진화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사실, ‘진화’라는 단어가 생물학의 울타리를 넘은 지는 꽤 오래됐다. 우리는 ‘별의 진화, ‘자동차의 진화’, 심지어 ‘머리 모양의 진화’를 말하기도 한다. 이때 ‘진화’는 진화생물학자들이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용어가 아니다. 그저 어떤 대상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휴대폰의 ‘진화’는 휴대폰의 ‘변화’와 다를 바 없는 싱거운 제목이다. 하지만 여기에 기자들이 굳이 ‘진화’라는 단어를 쓴 것은 휴대폰이 ‘진보’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아닐까? 그러면 진화는 진보인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통념일뿐
기술을 진화론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기술 진화론’)은 기술의 본성과 역사, 그리고 트렌드를 이해하기 위한 매우 의미있는 시도이다. 이때 ‘진화’란 생물학 영역에서 주로 사용되는 좁은 의미의 개념이다. 약 150년 전 다윈은 ‘종의 기원’(1859)에서 자연선택에 의해 생물이 진화한다는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자연선택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변이들(다양성)이 존재해야하고, 그 변이들이 환경과의 적응 측면에서 정도차를 보여야 하며,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유전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자연선택의 원리가 생물계에서만 작동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기술 진화론’이라고 하면 대체로 진화생물학에 등장하는 주요 용어와 개념들을 은유적으로 사용하여 기술 영역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지칭한다. 즉, 기술 변화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인 셈이다. 하지만 언뜻 보면 생물 진화론이 기술 현상에 곧바로 적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생물 영역에서는 변이가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기술 영역에서는 의도적으로 설계되지 않는가? 또한 생물계에서는 자연선택이 일어지만 인공계에서는 인위선택이 일어나지 않는가? 또한 생명의 역사를 꼭 진보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반면, 기술은 점점 더 진보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기술 진화론에 시큰둥한 사람들은 기술의 출현과 생명의 변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동 중에도 통화를 할 필요성이 생겨서 휴대폰이 의도적으로 발명되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라마르크 진화론이 아닌 다윈 진화론에 따르면, 짧은 목, 긴 목, 좀 더 긴 목은 환경에 더 잘 적응할 필요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생겨났고, 목이 긴 기린이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그렇다면 “필요는 (생물) 변이의 어머니”는 아니지 않는가?
기술사학자인 바살라는 ‘기술의 진화’(1988)라는 책에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가 통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19세기 중엽에 영국의 한 도시에서는 500종의 망치가 있었고 미국에서는 굴뚝 불꽃 장치가 무려 1000종이나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발명에 집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까운 예들도 있다. 사용자 입장에서 휴대폰의 카메라를 천만 화소까지 늘려야 할 필요가 있는가? 용도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오륙백만 화소면 충분하다. 또한 두께가 7mm인 초박형 휴대폰이 과연 사용자에게 필요한가? 너무 얇으면 오히려 만족도가 떨어질 수 있다. 그런데도 휴대폰 회사들은 서로 군비경쟁을 한다. 바살라의 말대로 인간의 기술은 필요의 산물이 아니라 “잉여의 산물”이다. 따라서 통념과는 달리 변이가 발생하는 방식은 생물체나 기술이나 비슷하다.
폰카 경쟁은 수컷공작 꼬리 자랑
» 오징어 눈(왼쪽)은 시신경이 망막 뒤에, 인간의 눈은 시신경이 망막 위에 놓이도록 진화해 기능 차이가 난다.
오히려 진화론적 관점은 쓸데없어 보이는 이런 화소 경쟁과 두께 경쟁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통찰을 준다. 화려한 색조의 깃털을 자랑하는 수컷 공작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버겁고 거추장스럽기까지 한 깃털을 겨우 퍼덕이며 어딘가로 날아가는 수컷의 뒷모습은 정말로 측은하기까지 하다.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필요치 않은, 아니 있으면 오히려 불리할 것 같은 이런 형질들이 왜 자연계에는 만연해 있을까? 마치 최근의 휴대폰 경쟁처럼 말이다.
이스라엘의 진화생물학자 자하비는 자연계에 만연해 있는 잉여의 산물들을 ‘핸디캡 이론’으로 설명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생산비용이 많이 드는 신호일수록 정직한 신호다. 왜냐하면 그것을 생산해낼 자원과 능력이 없는 사람은 결코 그 신호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신자는 송신자의 신호가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여 표현된 것인지를 가늠하여 그 신호의 진실성을 파악한다. 수컷 공작이 거추장스럽고 사치스럽게만 느껴지는 길고 아름다운 꼬리를 달고 다니는 이유는 암컷에게 ‘나는 이런 값비싼 깃털을 만들어낼 만큼 건강하고 능력있다’라는 사실을 광고하기 위한 것이다. 즉 핸디캡(거추장스러운 꼬리)을 극복하고 잘 생존할 만큼, 값비싼 신호를 만들어내도 까딱없을 만큼 대단한 존재라는 사실을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만 화소와 7mm 휴대폰은 공작의 버거운 꼬리와도 같다. 그 화소와 두께는 사용 면에서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수 있으나 선택을 하는 소비자에게 계속해서 ‘우리는 다른 경쟁 업체와는 달리 이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라는 신호를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합하는 기술들이 실제로 어떻게 선택되거나 멸절했는지는 이런 기술력의 차이만으로는 모두 다 설명될 수 없다. 선택압이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바살라에 따르면 기술은 크게 경제?군사적 요인과 사회?문화적 요인에 의해 선택된다. 예컨대 수차와 증기기관, 자동수확기 등은 경제적 요인에 의해 선택된 경우이고, 트럭과 원자력 기술은 군사적 요인에 의해 선택받은 사례이다. 반면 1960년대의 초음속 여객기 개발 사업과 같은 사례는 정부와 대기업의 전폭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비판 여론으로 무산된 경우이다. 바살라는 일본역사에서 ‘검→총→검’으로 기술 선택이 옮겨갔던 현상을 기술 선택에 있어서 문화가치가 실용가치를 앞지른 사례로 들고 있다. 또한 목판 인쇄가 심미적 이유에서 서양보다는 동양에서 더 널리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기술 선택이 기술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들의 복합 작용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 실용적인 기술을 택하라”등과 같은 전반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기술 선택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런 '트레이드 오프(trade off)'는 생물 진화에서도 보편 현상이다. 인간의 눈과 오징어의 눈을 비교해보자. 인간의 눈은 놀라운 적응이긴 하지만, 시신경이 망막의 앞쪽에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신경 다발이 묶인 지점에 맹점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다발이 흘러내렸을 때 실명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최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반면 시신경이 망막 뒤에 위치한 오징어의 눈은 이 점에서 훨씬 더 잘 설계된 경우이다.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은, 척추동물의 진화 과정에서 ‘어쩌다가’ 시신경이 망막 앞에 놓이게 되었고 그것이 모든 후세 척추동물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기 때문에 최적이 아닌 적절한 선에서 트레이드 오프가 일어난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술의 진보 문제에 진화론적 관점을 적용해보자. 화소수나 두께 경쟁에서 볼 수 있듯이 적어도 특정 목표에 한해서는 기술의 진보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전반적인 기준에 대해 진보를 말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생물학자들도 국소적인 진보와 전반적인 진보를 나눠서 진화와 진보의 문제를 보고 있지만, 아직도 합의된 견해가 없다. 진보의 기준에서부터 의견이 갈리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의미에서 아인슈타인이 박테리아보다 더 진보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똑같이, 어떤 기준에 의해 컴퓨터가 손도끼보다 더 진보한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컴퓨터가 손도끼보다 진보인가
언뜻 보면 인공물인 기술과 자연물인 생명은 본질적으로 달라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이 각각 어떻게 생겨나고 선택되며 전달되는지를 살펴보면 둘 간의 차이가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대상만 다를 뿐 작동 원리는 똑같은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기술 진화론은 바로 그 원리에 주목하여 기존의 기술학 분야에 새로운 통찰을 준다. 기술 영역으로까지 자신의 진화론이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다윈은 얼마나 흐뭇해할까?
타자기 등장으로 여성 비서들 단순기능공 전락... 세탁기 냉장고 보급에도 가사노동시간 그대로 인공수정 개발로 여성 임신·출산·압박감 더해... 기술 자체가 아니라 발전과정 여성 참여가 중요
» 세탁기·냉장고 등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줄지 않았다. 여성이 혼자 해야할 일은 더 많아졌고 남성은 외려 자유로워졌다. 기존 성관념이 바뀌지 않는 한 기술도입만으로 요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바뀌진 어렵다. 사진은 ‘대한민국 남편들 다 벗어라’는 카피를 단 삼성전자 세탁기 광고. <한겨레> 자료사진
기술 속 사상/⑨ 기술과 여성
타자기라는 새로운 사무기술이 보편화되면서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던 비서들은 능동적인 지위에서 지시받은 문서를 기계적으로 작성하는 수동적 처지로 전락했는가? 가사노동을 돕거나 대체할 수 있는 세탁기와 같은 수많은 기술의 발전으로 여성은 가정에서 해방되어 사회 각 분야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는가? 피임법을 비롯한 각종 생식보조기술은 여성에게 출산과 양육의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해줌으로써 여성해방에 일조했는가?
이상의 질문들을 인터넷 토론방에 올려놓는다면 다양한 답변과 그에 대한 재반박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처럼 기술과 여성의 관계는 중층적이면서 논쟁적이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대강 ‘기술결정론적’ 시각에서 제시되었다. 기술결정론이란 기술은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기술이 그렇지 못한 기술을 대체하는 내부 논리에 의해 발전하는데 비해 사회는 그렇게 선택된 기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여러 변화를 겪게 된다는 생각이다.
로봇 주치의·자가용 비행기 ‘환상’
2040년이 되면 나노로봇이 몸 안을 돌아다니며 건강을 점검하고 문제가 있는 곳을 즉시 고쳐서 평균수명이 100살을 돌파할 것이라는 최근의 기대에 찬 미래기술 시나리오나, 필자가 어린 시절 들었던, 2000년에는 각 가정마다 날아다니는 자가용 비행기를 한 대씩 갖추어서 전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여행하게 되리라는 꿈같은 이야기가 대강 이런 시각을 따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기술과 여성을 바라 본 20세기 중반까지의 연구들은 특정 기술이 성불평등을 강화하거나 약화하는 양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를 들어 타자기의 도입은 상당한 자율성을 가진 비서로서의 여성의 적극적 지위를 단순한 타자수의 지위로 강등시켰는데 비해, 세탁기는 여성을 힘든 빨랫감으로부터 해방시켜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이나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는 분석이 이에 해당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1970년대 여성해방의 시기에 각종 피임기술은 여성이 자신의 출산능력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획득할 수 있게 해준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피임기술의 도움으로 성생활과 출산 사이의 필연적 고리를 거부하고 보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구체적인 여러 사례연구를 통해 기술과 여성의 관계를 외부적으로 결정된 기술이 여성의 활동이나 지위에 고정된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에서 워드프로세서 등의 사무자동화 기술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여성과 기술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았음에 대한 연구가 한 예이다. 사무자동화가 여성 사무원들 전체에게 동일한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원래 존재하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단순한 문서작성에 요구되는 숙련도가 사무자동화 기술의 도입으로 낮아지자, 단순 타자수의 지위는 더욱 낮아지고 전문 비서의 지위는 오히려 높아진 것이다. 이처럼 여성을 동질적인 어떤 집단으로 상정하고 이에 대해 기술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방적 영향을 끼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컴퓨터 조판기술의 발전과정에 대한 신시아 콕번의 연구 또한 이 점을 강조한다. 현재 컴퓨터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쿼티(QWERTY)체계(키보드의 왼쪽 위 여섯 글자를 따서 이름붙인 문자배열 체계)는 원래 타자기 자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를 사용한 조판기술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쿼티 체계는 강력한 라이벌이자 쿼티와는 매우 다른 라이노타이프 체계와 경쟁해야 했다. 최종적으로 쿼티 체계가 승리를 거두게 된 데는 당시 높은 임금을 받으며 강력한 조직력을 자랑하던 라이노타이프 식자공의 힘을 무너뜨리고 노동의 통제권과 비용절감을 달성하려는 관리자의 이해관계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부부 함께 하던 일도 아내 몫으로
» 가사기술과 가사노동 관계를 분석한 코완의 책.
이 과정에서 낮은 임금에 오직 타자기만 다룰 줄 아는 여성 타자수들은 비자발적 동맹자 구실을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남성 노동자들도 표준조판을 지나치게 크게 만듦으로써 조판기술과 근육사용을 본질적으로 결합시키고 결국 여성을 식자공 지위에서 배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성과 노동자, 관리자 계층은 각자가 지닌 복잡한 사정에 따라 사무기술의 도입과정에서 복잡한 동맹관계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맺으며 기술의 발전경로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세탁기와 냉장고와 같은 가사기술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1860~1960년 사이 미국의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줄지 않았다는 루스 코완의 연구는 가사기술의 해방적 기능을 맹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다. 세탁기를 사용하여 빨래를 하는 것이 손으로 빨래판을 이용하여 빨래를 하는 일보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의 절감을 가져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코완은 가사기술이 널리 보급되는 과정에서 함께 일어난 몇 가지 변화가 평균 가사노동 시간을 일정하게 묶어두었다고 지적한다.
우선 세탁기와 같은 가사보조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실질적으로 큰 힘이 드는 가사노동은 남편과 아내가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 혼자 빨기 어려운 큰 이불 같은 것은 남편이 거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사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힘든 일들이 이제는 여성 혼자 할 만한 일이 되었고, 남편들은 더 이상 가사노동에 힘을 보태지 않게 된다. 또한 세탁기의 등장은 가족구성원의 ‘기대 수준’을 높여서 결국 자주 빨래를 하게 했다. 빨래하기가 무척 힘든 일이었던 시절에는 웬만큼 더러워도 대강 참고 지냈던 가족들이 이제는 새하얀 셔츠와 깨끗한 속옷을 당연히 하게 되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변화에는 1930년대 이후 세균설이 의학계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지면서 청결의 생활화가 전면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했다는 점도 주효했다. 게다가 이런 청결을 책임지고 가정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 행복한 주부의 사명이라는 생각도 널리 퍼지면서, 주부들은 전통적으로 주부의 가사노동에 포함되지 않던 자녀의 교육문제나 스트레스를 주는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가정이라는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구실까지 당연히 떠맡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통적인 의미의 좁은 가사노동은 줄어들었지만 주부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임무로서의 가사노동 총량은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여성 특수성 고려한 기술발전을
이 점은 아무리 노동의 한 측면을 간편하게 해주는 기술이 도입되더라도 여성과 남성의 관계나 여성의 구실과 지위에 대한 기존 관념이 바뀌지 않는 한 기술만으로 여성과 관련된 사회적 변화가 이루어지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통상 ‘시험관 아기’로 알려진 체외수정 등의 생식보조기술도 마찬가지 양상을 보인다. 생식보조기술은 흔히 아기를 갖고자 하는 부부의 열망을 이루어줄 수 있는 꿈의 기술로 선전되었다. 하지만 이 기술에 대해 여성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자손을 낳아 기르려는 선택을 담당하는 구실과 함께 생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존재하면 마땅히 그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릴 수 있는 피해자로서의 구실 모두를 담당하곤 한다. 그러므로 생식보조기술 자체가 여성을 출산의 우연적 성격에서 해방시킨다는 단순한 분석보다는 동일한 기술 내용도 사회적 맥락이 달라짐에 따라 다르게 수용될 수도 있고, 기술이 발전되는 과정이나 내용도 여성의 적극적인 선택에 의해 달라질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실제로 서양에서 여성들은 자신에게 본질적인 행위인 출산에 참여하는 권리로부터 남성과 기술의 연합의 의해 배제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7세기 말까지도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산파의 도움을 받아 자연분만했다. 하지만 핀셋이 발명되면서 남성 의사는 ‘과학적인 방식으로’ 출산을 주도할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실제로는 핀셋이 득보다 해를 가져올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산파를 몰아내고 출산과정에서 여성을 수동적인 지위로 강등시켰다.
이처럼 여성과 기술의 관계는 기술이 여성에게 주는 영향이 아니라 여성이 기술의 발전과정에 때로는 주연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참여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이해에 기반한다면 최근 의학계에서 시도되고 있는 성인지의학(gender-specific medicine)처럼 기술의 발전방향을 보다 여성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여성의 참여를 장려하는 방식으로 조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기술도 정치적’ 애매모호한 논쟁 정리한 위너 흑인 버스 못오게 설계한 해수욕장 진입로처럼 인종차별·자본·엘리트 같은 정치적 요인 예시 기술이 ‘양날의 칼’ 되는건 주변 상호작용에 달려
»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뉴욕의 유명한 건축가 모지스가 자신이 설계한 존스비치공원을 백인들만의 쾌적한 공간으로 만들려고 공원으로 진입하는 고가도로를 흑인이 주로 이용하는 버스가 지날 수 없도록 낮게 설계했다고 주장했다. 이때 기술은 당시 미국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를 담는 식으로 디자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술 속 사상/⑩ 기술과 정치
기술이 정치적이라는 말은 논쟁적이다. 그렇지만 기술사, 기술철학, 기술사회학과 같은 기술학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다른 전공자들이나 심지어 엔지니어들도 어떤 특정한 기술이 정치적일 수 있다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핵무기, 정찰 인공위성, 지뢰와 같은 살인 병기, 감시카메라가 정치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과학이 가치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기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고 서슴없이 주장한다.
그런데 기술이 정치적이라는 명제를 조금 뜯어보면 그 의미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분명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공물인 기술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을까? 정치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권력관계, 아니 넓게 보아도 사람들 사이의 행위를 의미하지 않나? 핵무기가 정치적 기술이라고 했는데, 핵무기를 구성하는 여러 부품들 중에 (핵탄두, 미사일유도장치, 로켓, 발사장치, 운반장치, 제어 시스템, 통신 시스템 등) 어느 것이 정치적인가? 기술 디자인을 잘게 쪼갤수록 기술이 정치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호해진다. 그렇다면 기술이 정치적이라는 얘기는 기술을 수단으로 사람들의 정치적 행위가 강화(혹은 약화)되거나, 변형되거나, 매개되는 것만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Langdon Winner)에 의해서 주어졌다. 그는 기술의 사용만이 아니라 기술 그 자체가 정치적일 수 있다는 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주장한다. 첫 번째는 발명이나 디자인이 특정한 그룹의 이해를 대변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다. 미국의 건축가 모제스(Robert Moses)는 뉴욕의 존스비치 공원 진입고가도로를 흑인이 주로 이용하는 버스가 지나다닐 수 없도록 낮게 설계했는데, 이런 경우는 기술이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를 담는 식으로 디자인된 경우다.
핵발전 독재적·태양열 민주적 기술
» 뉴욕의 유명한 건축가 모지스가 설계한 존스비치공원.
이런 예는 기술사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기술사학자 데이빗 노블(David Noble)은 2차대전 이후에 MIT(매사추세츠 공대) 엔지니어들이 개발한 수치제어 공작기계가 특정한 정치적 이해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 공작기계는 숙련노동자의 작업을 테이프에 입력해서 작동되는 방식과 숙련노동자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수치제어 방식이라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개발 가능했는데, 숙련노동자들의 노조를 무력화하길 원했던 GE(제너럴 일렉트릭)사와 기계가 인간보다 훨씬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던 MIT 엔지니어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서 공작기계가 전자동 방식인 수치제어 쪽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발된 수치제어 공작기계는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들의 이해를 충족했다고 할 수 있다.
기술이 정치적일 수 있는 두 번째 경우는 “선천적으로 정치적인 기술”이다. 위너는 이를 다시 두 가지로 나누는데, 그 첫 번째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을 필요로 하는 기술이며, 두 번째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과 더 잘 부합하는 기술이다.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은 반드시 중앙에서 이를 통제할 “과학기술자-군인”이라는 강력한 엘리트 그룹을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경우가 전자의 예다. 반면에 태양력 발전이라는 기술은, 비록 분산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이런 사회와 더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예가 위너의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기술이다. 기술철학자 루이스 멈포드는 1960년대에 기술을 민주적 기술과 독재적 기술로 나누었고 현대사회가 점점 독재적 기술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개탄했는데, 위너가 예로 든 핵발전소와 태양열 발전은 각각 멈포드의 독재적, 민주적 기술에 해당하는 것이다.
노블이 분석한 수치제어 공작기계는 군산학복합체의 산물이었다. 이를 도입한 GE사는 숙련노동자들의 힘을 약화시키길 꾀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의도가 생각대로 관철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계가 도입된 뒤 매니저들은 기계공들의 임금을 삭감하였는데, 그 결과 기계공들은 일할 동기를 잃었다. 또한 기계의 속도에 따른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해 예기치 못했던 여러 문제가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생산라인의 비효율이 초래되었다. 그리하여 GE사는 고참 공작기계공들에게 기계와 프로그램을 조작, 통제,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수치제어 공작기계는 이 기계를 조작하고 통제하는 고급 숙련 노동자들을 낳았고, 이들은 오히려 그 이전의 노동자들에 비해서 더 높은 임금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기술사의 곳곳에서 나타난다. 핵전쟁을 대비해서 만든 미국 고등군사연구국의 아르파넷(Arpanet)이 세상을 이어주는 인터넷으로 발전한 것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핵전쟁을 대비한 분산적 네트워크가 포스트모던 세상에 적합한 통신수단이 된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영향
» 랭던 위너.
노동자들을 감시, 통제하기 위해 도입된 작업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이, 노동자들에 의해서 매니저들의 사적인 판단을 감시하는 역감시의 기제로 발전된 역사적 사례도 있다.
이렇게 기술은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정치적 영향을 낳곤 한다. 그 이유는 기술의 궤적이, 기술이 새롭게 열어주고 힘을 부여하는 사회세력들과 동시에 그 기술 때문에 힘을 잃는 사회 세력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때그때 형성되는 불안정한 균형에 따라 불규칙하고 가지치기 식의 경로를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한 기술이 특정한 궤적을 그리도록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를 들어 정보기술은 반드시 감시기술을 낳는다는 식의) 자칫 비관적인 결정론으로 귀결되기 쉽다. 기술의 궤적에 더 중요한 것은 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세력들 사이의 힘의 관계이지, 기술의 초기 디자인에 각인된 발전 방향성이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명백하게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적이지 못한 정치적 기술을 놓고 이 기술이 가져올 수도 있는 미래의 역설적인 결과만을 기다리는 것 또한 위험한 태도이다. 이럴 경우 기술의 궤적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궤적을 결정하는 것은 항상 기술과 사회세력들의 다양한 개입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이러한 인식 위에 기술이 매개하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자. 기술에는 양날의 칼 같은 기술이 있다. 즉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선한 결과를 낳기도 하고 해로운 결과를 낳기도 하는 기술이다. 라디오와 TV는 민주주의 미디어가 될 수도 있으며, 전체주의를 강화할 수도 있다. 그 기술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고 사용되는가가 중요한 경우다. 이런 기술은 “정치적인 해석 유연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기술의 사용과정에 대한 시민들의 각성과 참여가 기술의 정치성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틀어준다. 그렇지만 모든 기술이 양날의 칼 같은 기술은 아니다. 정치적인 해석 유연성이 크지 않은 기술도 많이 있다. 통제와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소수 엘리트들에게 더 큰 권력을 부여하는 기술도 존재한다. 이런 기술의 경우에는 대안 기술을 개발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식이다.
시민 각성·참여가 방향 길잡이
기술의 정치화에 대한 논의는 기술결정론을 피할 수 있는 한 가지 인식적 토대를 제공한다. “기술은 양날의 칼이다”는 주장은 보통 “기술은 가치중립적이다”는 얘기로 이어지는데, 이미 보았듯이 이는 기술에 대한 단순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기술은 자동적으로 양날의 칼이 되는 것이 아니며, 가치중립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의식적인 노력이 없다면 기술은 그것을 디자인하고, 개발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의 의도대로 발전하기 십상이다. 기술의 발전방향을 두 갈래로, 아니 여러 갈래로 만드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그룹의 개입과 실천이다.
기술의 궤적은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기술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발전의 경향성과 그 기술을 둘러싼 사회집단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며, 이는 “시민 참여의 기술정치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기술이 어디에 속하는가를 밝혀내고 그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 기술사회를 살아가는 ‘기술시민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군사 기술과 민간 기술 다를까 같을까? 르네상스 이래 전쟁사 되짚어보면 답은 명백 절대군주들 군비경쟁 위해 신무기 기술자 환대, 19세기 ‘과학 애국주의’로 끔찍한 살인기계 발명
원자력·인터넷도 전쟁 기술을 일상화한 것
» 기술발전은 전쟁의 파괴력을 가속도로 증대시켰고 전쟁은 기술발전을 가속화했다. 근대 이후 군사기술과 민간기술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졌다.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들은 최첨단 기술과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돼 있다. 발사 직후 표적을 향해 날아가는 미사일.
기술 속 사상/⑪ 기술과 전쟁
기술과 전쟁을 묶어 생각해보면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전투기나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대포동 미사일 정도가 쉽게 떠오를 것이다. 조금 더 역사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버섯구름으로 상징되는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력과 히로시마·나카사키의 참상을 기억할 것이다. 실제로 원폭은 2차대전 이후 과학기술자들이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평화적 목적을 위한 과학기술 연구활동에 나서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에만 주목하다보면 기술과 전쟁의 연관이 20세기 이후의 현대 기술문명 사회의 독특한 특징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기술발전이 상상을 초월하는 신무기의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현대에서야 기술과 전쟁이 복합적으로 관련을 맺게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도 해 볼 수 있다. 또한 최신예 전투기나 원폭을 전형적인 전쟁기술로 생각하다 보면 전쟁과 관련된 기술과 그렇지 않은 기술이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도 F15 전투기를 해외여행 가는 데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며 (전투기를 타본 경험은 없지만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 것이기에), 원폭을 건축현장에서 땅을 파내는 데 이용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위 군사기술과 민간기술은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생각 모두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다. 유사 이래로 기술적 발전과정과 전쟁의 수행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러지 않았다면 이상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무의미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전쟁을 일으킨 군주나 지휘관들은 모든 방법과 자원을 동원해서라도 꼭 이겨야 할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전쟁에서 꼭 이기겠다는 집념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의 가능성은 늘 매력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신무기가 적군을 효과적으로 죽이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도와주는 일 말고 인류복지에 보탬이 될 가능성은 낮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자들은 신무기에 비싼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늘 되어 있었다.
권력자들 이기려고 얼마든지 지불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는 엄청난 자원의 투자와 집중이 필수적이다. 우리에게 기술은 ‘발명가 신화’와 너무 깊게 연관되어 있다. 강력접착제를 개발하던 한 연구원이 실패한 실험재료를 버리려다가 우연히 몇 번이고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편리한 메모지를 발명했다는 이야기 따위가 그런 생각을 부추긴다. 그러나 접착력과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는 특징을 겸비한 접착제의 우연적 발견이 실제로 광범위한 환경에서 사용될 수 있는 제품으로 실용화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의 시행착오와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했다는 점은 종종 간과된다. 마찬가지로 전쟁기술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우연한 발견의 결과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용화되고 전장에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에 걸친 집중적인 자원 투여와 집단적인 기술연구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보통 활보다 훨씬 큰 활을 사용하면 아주 먼 곳의 사냥감도 정확하게 쏘아 잡을 수 있다는 12세기 웨일즈 농민의 깨달음이 1415년 10월25일 아쟁꾸르 전투에서 헨리 5세 원정군의 압도적인 숫적 열세를 극복한 승리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웨일즈 침공 중에 배운 장궁의 위력을 여러 재료를 동원한 시험으로 배가시키고 장궁부대의 형태로 집중화시킨 에드워드 1세 휘하 기술자들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 1차대전 당시 한 잡지에 실린 풍자화. 기관총 발명자가 전쟁희생자들을 내려다보며 가소로운듯 웃고 있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 절대왕권이 강화되면서 대부분의 유럽 군주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유럽 각지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기술자들을 높은 연봉을 주고 모셔와 일종의 군사기술 연구팀을 꾸몄다. 그 결과 투석기와 대포처럼 효과적으로 성을 공략할 수 있는 신무기와 그 신무기를 무력화할 수 있는 진흙 축성법, 화승총과 같은 대항 신무기가 놀라운 속도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신무기를 독자적으로 가졌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었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무기를 개발해야만 적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소모적인 군비경쟁은 냉전 시기 이전에도 이미 상당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자들은 환상적인 군사기술을 자신에게만 알려줄 기술자들을 수소문했고, 기술자 역시 자신이 지닌 독창적 축성법이나 적의 보병을 순식간에 전멸시킬 수 있는 비법을 암시하는 편지를 자신의 후원자가 될 잠재적 군주에게 끊임없이 쓰곤 했다. 이런 과학기술자 중에는 기술지식이 전쟁이라는 끔찍한 죄악에 사용되는 것을 증오하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베네치아의 안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포탄의 정확도를 높이는 군사연구를 수행한 타르탈리아 같은 사람도 있었고,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이 새로운 장치의 군사적 장점을 간파한 뒤 베네치아 총독에게 자신이 직접 제작한 망원경을 비싼 값에 판 갈릴레오 같은 이도 있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시대를 앞서간 전쟁용 철갑마차(탱크)에 대한 구상도 밀라노의 군주 스포르차 공작의 후원을 얻기 위해 쓴 편지에서 처음 제시되었다. 요약하자면 전쟁과 관련 기술의 발전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기술발전에서 전쟁관련 기술이 차지하는 부분은 대부분의 경우 주변적이기보다는 중심적이었다. 다소 서글픈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생각해 볼 점은 전쟁 관련 기술과 과학지식의 본격적인 결합이다.
망원경 발명해 군사용으로 한몫
19세기 이전까지 기술발전은 대체적으로 과학과 오직 부분적으로만 영향을 주고받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므로 항해술에서 천문학이 이용되거나 탄도학에서 수학이 응용되는 정도를 제외한다면 전쟁기술의 변화는 과학이론의 변화와는 비교적 독자적으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은 19세기에 들어 화학공업과 전기공업의 발전을 계기로 긴밀하게 연관되기 시작하였고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은 서로 협력하며 좀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1차대전 초에 모즐리라는 당시 전도 유망하던 젊은 영국 과학자가 일반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가 숨진 일을 계기로 영국 과학계는 자신들이 (일반인과는 달리) 과학과 연계된 군사기술 연구를 통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조국에 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때까지도 반전주의는 소수 의견이었으며 과학자들도 다른 사람 못지않게 매우 애국적이었다. 이러한 추세는 영국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 퍼졌으며 이 과정에서 전쟁의 양 당사자는 끔찍한 신무기를 경쟁적으로 전장에 도입한다.
전쟁기술이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1차대전의 경험은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1차대전중 개발된 탄환 중에는 적군 병사를 즉시 죽이지 않고 엄청난 고통을 느끼되 오래 살아남아 처절한 몸부림과 비명으로 동료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도록 특수제작된 것도 있었다. 독가스의 주된 목적도 직접적으로 적군을 순식간에 죽이기보다는 병사들의 공황상태를 유발하여 전투력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고 발목만 선택적으로 날려버리는 지뢰, 파괴력보다는 폭발시 굉음에 초점을 맞춘 포탄 등이 개발되어 사용되었다. 이중에서도 기관총은 용감하게 적진으로 돌격하는 전통적인 전투자세를 ‘비겁하게’ 기어가는 자세로 순식간에 바꾸게 만든 공포의 신무기였다. 1차대전에서 사용된 전쟁기술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우리는 그 후 등장한 ‘인도적인 무기’라는 다소 역설적인 개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인도적인 무기’ 등장의 역설
일상생활에서 이런 끔찍한 무기들이 사용되지는 않지만 군사기술과 민간기술의 차이는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최근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있던 원자력 발전소의 핵심기술은 군사용으로 개발된 원자력 잠수함의 동력기술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고,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인터넷 기술은 핵전쟁에 대비한 미군의 대응전략 개발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각종 감시기술과 제어기술처럼 기술의 속성상 군사적으로 개발된 내용이 약간의 변형을 거쳐 사회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은 기술도 많다. 이처럼 전쟁과 관련된 기술발전은 부지불식간에 우리 생활 곳곳에 침투할 수 있다. 과학기술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전쟁기술의 내용과 활용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름사진을 기술이라 거부한 보들레르, 필름사진을 예술이라 고집한 현대작가 기술이 갱신될 때 과거의 것은 예술로 재인식... 기술-예술, 갈등하면서 보충하고 인간세상 이루니 공존의 상상력 ‘디지털 아트’ 위대함이여!
» 전위예술가 백남준은 현대 기술매체와 예술이 화해하는 마당을 마련해주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돼 있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다다익선>. 1988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1003대의 텔레비전 수상기를 다슬기 모양으로 18.5m 높이까지 쌓아올렸다.
기술 속 사상/⑫ 기술과 예술
서양 역사에서 인간에게 ‘창조성’을 인정해준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창조성은 오랫동안 신의 권능으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바뀌려면 적어도 르네상스를 거쳐야 했다. 그제야 비록 신의 수준은 아니지만 인간도 나름대로 창조력을 가진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발상이 처음 나타난 영역은 예술이다. 사람들은 미켈란젤로를 ‘신과 같은 예술가’라고 불렀으며, 화가 알베르티는 예술가를 가리켜 ‘제2의 신’이라고 불렀다.
르네상스 이전에 그나마 ‘생산성’을 인정받던 것은 ‘시’였다. 조각이나 회화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으로 괄시받은 셈이다. 예술가들은 여기서 이중적인 전략을 마련했다. 미술도 시처럼 교양과 창의성을 요구한다고 내세우는 한편 장인들의 기술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때 기술은 ‘기능’으로 폄하되었다. 이를테면 평생 목공일을 익힌 목수는 어김없이 통달한 규칙에 따라 집을 짓지만, 예술가는 집 짓는 규칙 자체를 바꾸며 새 양식을 만들어낸다는 식이었다. 그리하여 근대예술은 기술과의 차별성 위에서 출발한다. 예술은 끊임없는 창조활동인 반면, 기술은 단순히 전통을 답습하는 실용 기능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창조/모방, 혁신/답습, 정신/물질의 이분법이 고스란히 예술/기술의 관계에 적용되었다.
여기에 걸맞은 상징이 있는데, 바로 ‘프로메테우스’이다. 특히 ‘제우스’에 맞서는 측면을 부각한 것이다. 영국의 문인 ‘샤프츠베리’를 비롯하여 괴테, 셸리에서 절정을 이룬 프로메테우스 상징은 기존 양식을 무너뜨리는 예술가의 독창성을 대표했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지 않았던가? 더욱이 불은 인류 최초의 기술혁명과 연관되지 않는가? 근대 예술가들은 이 점에 주목하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기술이 발달할수록 ‘기술혐오’를 보여주었다.
물론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에 일어난 현상이다. 알다시피 한자 ‘예’(藝)와 라틴어 아르스(ars)는 예술과 기술을 포괄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로 번역된 격언이 히포크라테스 학파에서 나왔으며, 이때 예술이 기술(의술)이라는 점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테크닉의 어원 테크네 ‘예술+기술’
» 보들레르.
사실 ‘예’는 식물을 ‘심다’ ‘기르다’라는 동사이다. 그러니 기술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작물을 키우려면 응당 ‘방법’이 필요할 테니까. 고대 서양에도 비슷한 낱말이 있는데, 콜레레(colere)이다. ‘밭을 갈다’는 이 동사에서 종교적 경배의 ‘컬트’가 나왔고, 인격의 교화를 뜻하는 ‘문화’가 나왔다. 이로부터 우리는 문화예술과 기술이 더불어 ‘사람 농사’라는 것, 즉 인간성 도야를 목표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정신/물질의 분리를 찾기는 어렵다.
‘테크닉’의 어원이 되는 고대 그리스의 ‘테크네’(techne)도 마찬가지이다. 후자는 이론적인 관조와는 달리 ‘실천’이다. 말하자면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깨달아 익히는 것이다. 그러니 예술과 상통한다. 예술작품의 ‘미묘한 무엇’은 이론만으로 배울 수 없는 것이니까. 경험적이고 신체적이니까. 그래서 시를 짓는 방법도 테크네로 분류되었다. 테크네는 예술과 기술을 포괄하는 실천적 인식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과연 기술혐오에 빠진 근대예술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은 이미 예술적 창조가 모든 기술적 요소를 넘어선 순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어버렸으니 말이다. 급기야 19세기 낭만주의에서 과학기술은 우주를 폐허로 만드는 괴물로 인식되었고, 20세기 초현실주의 작가 벨머에 이르기까지 자동기계와 인형은 예술에서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자동기계의 ‘자동성, 반복성’은 원래 인간 속에 있던 요소이기도 하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독립시켜 놓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기계는 인간에게 타자가 아니다. 사람을 닮았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기계의 인간적인 면모를 밝힌다 해도, 예술가들은 여전히 말하리라. 바로 그 때문에 기술을 경멸한다고. 기계가 인간의 저급한 특성을 모방한다면, 그런 기계를 받들어 모시는 가운데 창의성 같은 고급 능력은 마비되고 말 것이라고. 그래서 시인 보들레르는 예술사진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사진이 ‘과학의 시녀’라는 본분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했다.
이것은 기술혐오의 심층적인 형태이다. 기술을 단순한 도구로만 보지 않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좌우하는 매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필름 카메라만을 고집하는 작가들도 비슷하다. 문제는 해상도가 아니라 작가의식이다. 쉽게 수정 편집할 수 있는 ‘디카’를 쓸 때 그들은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안이해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여기서 기술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구성하는 매체로 이해되고 있다.
비교해보라. 필름사진의 예술성을 부정한 보들레르와 필름사진의 예술성을 고집하는 현대작가. 두 입장은 대조적이지만, 저마다 새로운 매체와 대결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필름 카메라를 고집하는 작가는 사진 매체를 받아들여 예술로 만든 반면, 디지털 매체를 거부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는 분명하다. 예술과 기술의 대결은 지속적이라는 것. 또한 둘은 그 대결 속에서 서로를 보충해왔다는 것.
‘순수’ 예술가의 믿음과는 달리 기술은 종종 예술을 보충한다. 심지어 표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인식 차원에서 말이다. 가령 원근법과 ‘카메라 옵스큐라’의 발명이 예술에 미친 영향이 그렇지 않은가? 문화이론가 맥루언은 말했다. “기계는 자연을 예술형식으로 전환시켰다.” 일리가 있는 얘기이다. 기차여행을 생각해보라. 빠르게 흘러가는 바깥 풍경은 객실 안의 시공간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가까운 풍경은 잡히지 않고 먼 풍경만이 시선에 들어온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멀리 놓인 자연이 영화 장면처럼 되어버렸다. 관객이 풍경에 속하지 않은 채 마치 현실을 ‘극장 화면’처럼 바라보게 되었다. 오늘날 인류를 사로잡은 ‘파노라마’적 지각은 기차여행의 대중화와 더불어 발달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기술이란 그 자체로 인간과 세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단순히 자연의 모방에서 그치지 않는다. 도구의 제작에서 그치지도 않는다. 인간이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을 구현하는 매체로서 기술은 나름대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러니 예술을 보충해줄 수 있다.
인터넷이 종이 매체 예술화 촉발
아니, 그 이상인 경우도 있다. 한 기술체계가 곧장 예술형식으로 바뀌기도 한다. 인쇄매체가 나오자 ‘육필’은 ‘서예’로 자리 잡았고, 인터넷 ‘웹진’이 나오자 종이신문과 책 인쇄는 예술 차원으로 진입했다. 한 기술체계가 새 체계와 만날 때 우리는 종종 과거의 것을 미적 수준에서 재인식하는 것이다. 기술은 이렇게 예술을 촉발할 수도 있다.
근대예술이 기능이 아니라면, 근대기술도 마찬가지이다. 중세 때처럼 일생을 바쳐야 습득되는 기능은 근대기술에서 별 의미가 없다. 한편 예술이 교양과 이론을 요구한다면 기술도 그렇다. 과학이론과 연결되지 않는 기술은 거의 없으니까. 또한 예술이 창조적이라면 기술도 창조적이다. 다만 양상이 다를 뿐. 기술이 능동적이고 조작적인 양상으로 세계에 참여한다면, 예술은 보다 정서적이고 주관적인 양상으로 세계에 개입한다.
» 이지훈 한국 해양대 강자
우리는 물론 기술 발달에 거의 무관한 예술작품들을 알고 있으며, 그 작품들의 위대한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다. 나아가 새로운 기술의 남용이 예술적 진정성의 통속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술과 예술은 인간이 세계 속에 살아가는 두 가지 훌륭한 양상이다. 하나라도 빠지면 사람은 제대로 살 수가 없다. 그만큼 우리 문명 속에는 둘이 공존할 마당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둘은 여전히 맞서고 갈등하며, 서로를 보충해줄 것이다. 이러한 공존의 상상력이 없을 때 우리는 현대 기술매체를 예술화했던 백남준의 가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미래영화 속 건축물은 왜 모두 폐허같을까... ‘테크네’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였던 ‘짓는 고통’... 로마제국·중세·르네상스까지 시대정신 상징 근대 이래 ‘설계-건설’ 나뉘더니 컴퓨터가 재통합... 환경위기 주범 멍에까지 썼으니 고민스럽다
»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것으로 위상기하학과 비선형 방정식을 통해 구현된 건축물의 대표작이다.
기술 속 사상/⑬ 기술과 건축
미래세계를 그리고 있는 영화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은 폐허가 된 도시의 음산함과 무너질 것 같은 건축물들이다.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 시리즈, 터미네이터, 토탈리콜 등 예외없다. 이처럼 감독들은 왜 미래세계가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번쩍번쩍하는 건축물들로 채워진 도시가 아닌, 늘 비인지 안개인지 앞을 구분할 수 없는 어둠과 서치라이트만 번쩍이는 폐허를 생각하는가?
에너지 고갈 이후 암울한 세상
현대기술문명의 큰 문제점은 물질문명의 발달속도를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 따라가지 못하는데 있다. 현대과학기술은 인간이 사회와 자신의 이성의 통제하에 둘 수 없을 만큼 일방향적이다. 기술이 과거와 달리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매개가 되는 도구적 성격을 지나 인간의 삶 전체를 파악하고 관리하는 방식이 되고, 인간이 전적으로 의지하는 절대적이고도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이른 것을 현대과학문명의 본질이라고 하이데거는 갈파하였다. 이같은 맥락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계산 가능하고 기술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에너지’로, 존재자 전체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의 저장소로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금처럼 원하는 에너지를 제공하도록 자연이건 사람이건 닦달해 낸 뒤 고갈되면 영화 속과 같은 암울한 환경으로 갈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지녀야 하는가?
현대기술과 상반된 의미로 그리스의 테크네(τεχνη)를 들 수 있다. 그 어원을 보면 ‘나무로 만드는 일’, ‘목수일’ 등 무엇인가 고안하고 만들어내는 솜씨 혹은 모든 가능한 기술, 방법 등을 의미한다. 철학적으로 테크네란 사물이 만들어지는 데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나 정확한 지식(episteme, theoria, logos)을 바탕으로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능력(ars, praxis)뿐만 아니라 지식까지 포함한다. 테크네 중에서 가장 높은 위계에 속했던 건축(archi-tec-ture)은 처음부터 실무(praxis)와 이론(theoria)을 같이 병행하여야 한다는 속성을 지니고 출발한다. 생활세계의 기반을 만들어온 ‘짓는 전통’(building tradition)은 단순히 물리적 실체를 구성하고 공간을 만들어내는 행위 이상으로 각 시대 각 지역의 우주관과 종교관, 자연관, 그 사회의 구조적 특성, 기술수준까지 반영된 총체적 결과물이었으며 이는 존재자가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 카티아에 의한 3차원 표면 드로잉 기법으로 건물 전체의 윤곽을 보여준다.
하드리안 황제의 건축가였던 비트루비우스(P.Vitruvius, BC 25)는 <건축10서(Ten Books on Architecture)>를 통해 당시 건축에 관한 이론과 실무를 정리하였다. 그 일례로 로마제국의 인프라스트럭처-로마가도, 교량, 상하수도 시스템, 공공사업, 병영기지 및 신도시의 건설 등-는 하드에어뿐만 아니라 국방, 치안, 조세, 의료, 우편 등의 소프트웨어적 인프라를 모두 포괄하였다. 이는 제국을 다스리고 유지해나가기 위한 고차원의 통치기술이었으며 이를 담당해나간 것은 관료뿐만 아니라 전문화된 공병대였다.
중세의 번성기를 주도해나간 강력한 동인은 대성당 건립이었다. 성당 건설자들은 11세기 12세기의 유럽 첫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기술, 농업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각 도시의 성당건설 현장에서 마력을 이용한 수차, 거중기 등의 새로운 기구를 개발하고 만들어 시험하면서 제련기술을 통한 철기구 등을 개선을 시켜나가는 작업은 장인 계층과 건설기술자들을 통해 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고딕시기의 대성당들은 중세의 지적 르네상스, 스콜라티시즘, 사회적 변동, 기술적 수준이 어우러진 시대정신의 총체적 작품이었다.
대성당 건립 유럽 번성의 동력
르네상스기부터 근대 이전까지도 건축은 도시계획, 축성, 치수, 건설, 건축뿐만 아니라 기계장치의 고안부터 여러 가지 군사용 무기를 개발하는 일을 포괄하는 엔지니어링의 최상위 영역에 속하던 지식체계였다. 이 과정에서 건축의 영역에 참여해서 건축가로 역사적 작품을 남긴 많은 예술가, 과학자, 특히 수학자가 많았으며 이들의 작업은 이론과 현장이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18세기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토목기술자들이 전문화하고, 건축을 학교에서 예술과 과학으로 구분해 가르치고 건축가와 엔지니어가 분리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건축의 경계가 점차 구분된다. 건축적 근대성은 근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건축생산의 합리화와 산업화를 통해 확보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건축은 설계와 짓는 행위가 분리되고 설계는 기술적 프로세스와 기능적 프로그램으로 치환된다. ‘건축은 살기 위한 기계’임을 주장한 르꼬르뷔제의 선언처럼 건축은 존재자의 존재나 생활세계의 기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기계처럼 오브제화된다. 그 결과 건축가는 건설자본에 종속되면서 건축이 최종 결과물이 구축되는 현장에서 소외되며 건축은 사회 내 존재양식 자체가 변한다.
» 미래 건축의 암울한 풍경을 엿볼 수 있는 리들리 스콧이 감독한 영화 <블레이드러너>.
건축 자체가 점차 대형화, 복잡화되면서 건축은 기술시스템, 정치적 기술, 복합기술의 결과물로 이루어진다. 현대건축은 첨단기술을 끌고나가지는 못하지만 현존하는 기술을 복합적으로 선택해내는 과정에는 깊이 관여한다. 그 중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박물관은 세계 최초로 건축가의 간단한 개념 스케치와 구긴 종이 뭉치, 컴퓨터가 합력하여 생성시켜낸 작품이다. 게리는 개념을 나타내는 석고나 종이 등으로 만든 모형을 카티아라는 자동차·항공기를 만들던 3D 스캔 소프트웨어와 X-ray 3차원 스캐너를 설계과정의 주 동인으로 삼았다. 카티아는 표면의 x, y, z 좌표를 데이터로 읽어 들인 뒤 3차원 모형을 깎아낸다. 이에 대한 구조해석을 거친 뒤 도면화과정 없이 3차원의 윤곽 속에서 프로그램을 충족시키는 작업이 진행되면 (사진 1) 디지털화된 정보는 바로 부재 생산과정으로 넘겨진다. 휘어진 철골부재들은 CAM(computer aided manufacturing)을 거쳐 자동밴딩머신으로 절곡되거나 수치제어 공작기계로 금형에 따라 프레스돼 만들어진다.
자동차 조립하듯 조각 맞춰 완성
정밀기계, 자동차와 항공기를 만드는 것과 유사한 절차다. 현장에서는 이렇게 가공된 부재들이 순서에 따라 조립되기만 하면 된다.
컴퓨터공학과 비선형이론, 위상기하, 다양한 입체에 관한 고차원 구조해석, 이에 따른 참단의 부품생산, 이러한 모든 실험을 가능케 하는 건축주의 자본과 의지가 빌바오 뮤지엄과 같은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사진 2) 수직수평이 완전히 해체된 조각과 같은 건축물이 컴퓨터를 통해 형태 생성부터 시공직전 단계의 부품화까지 완결되면서 전통적 건축생산 방식을 다시 변모시켰다. 이 작업의 함의를 ‘근대건축으로 단절된 건축의 고유한 전통, 설계와 건설의 통합과정으로서의 건축으로 회복될 가능성’을 보는 건축가도 있다.
» 류전희/경기대 교수·건축학
그러나 건축가의 자발적 의지로 프로세스에 투입한 기술이 건축가의 고유한 영역인 공간생성자로서의 역할조차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뉴턴과학의 완성 이후 전지전능한 신의 역할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우주시계의 감시자로 전락한 것처럼 무에서 유의 공간을 창조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텨온 건축가들이 컴퓨터 프로그램과 기계작동을 위한 관리자가 되면서 밥줄을 놓게 만드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이길 바란다.
이처럼 21세기의 건축은 첨단기술이기에는 너무 전통적이고 예술이기에는 너무 공공적이고 과학이기에는 너무 다의적이고 철학이기에도 너무 현실적이다. 이것이 비트루비우스 이래 건축이 지녀온 업보이자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지구환경위기의 주범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메달까지 목에 걸게 되었다. 과연 건축은 미래사회를 위해 어떤 고민을 해야 영화의 암울한 미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스럽다.
인간이 만든 과학기술의 상징이었던 ‘괴물’ 정체를 몰라 이름도 없고 험오스러웠다 차가운 기술에 따뜻한 숨결 주자는 이분법에 시몽동은 “기계-인간 맞물리며 진화” 반박 중요한 건 ‘인간적’ 문명에 이바지 여부
»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 1931년 미국 제임스 웨일 감독 작품.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은 과학기술에 대한 19세기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이 괴물은 ‘익명’이며, 파괴되지 않는다.
기술 속 사상/⑭ 기술과 상징
어떤 노인이 밭일을 하고 있었다. 항아리를 안고 힘들게 물을 떠오고 있었다. 이를 본 젊은이가 왜 편리한 ‘기계’를 쓰지 않는지 물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기계는 기계로서의 기능과 효율이 있다. 여기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사람의 본성을 망치게 된다.” 중국의 고전 ‘장자’에 나오는 얘기이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근대적 기술비판의 원점을 찾을 수 있다. 기술의 편리함을 추구하다보면 사람이 기계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타나 있다.
그런데 물동이는 일종의 기술적 산물이다. 흙을 반죽하여 불로 구워낼 줄 알아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노인 역시 기술을 이용하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은 이때 물동이처럼 소박한 도구와 수차(水車) 같은 기계의 차이를 지적할 것이다. 도구가 자연에 순응한다면 기계는 자연을 이용하거나 거스른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장자 시절의 기계란 모두 자연력에 순응하는 것들이니까. 현대철학자 하이데거를 떠올려보라. 20세기를 무시무시한 ‘원자력의 시대’로 정의할 때 그는 수차 같은 옛 기계들을 얼마나 정겹게 묘사했던가? 여기에 물음이 있다. 장자에게는 괴물이던 기계가 하이데거에게는 낭만적인 사물로 바뀐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자에게 괴물 하이데거에겐 낭만
하나는 분명하다. 대상의 정체를 모를수록 더 두렵고 혐오스러울 수 있다는 것. 근대기술을 둘러싼 이미지에도 이런 측면이 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1818년)를 생각해보라. 여기서 괴물은 과학기술의 상징이기도 하다. 몸은 ‘자연재료’로 되어있지만, 그 생명은 기술의 결과이니까. 그런데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름을 붙여줄 마음도, 여유도 없었다. 이것은 결국 괴물을 만든 박사조차 기술의 정체를 몰랐다는 것, 그리하여 기술의 산물을 혐오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럴수록 괴물은 더욱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끝내 파괴되지 않았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마치 산업혁명과 기계파괴 운동 사이에서 표류하던 19세기 기술의 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지금도 사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과학기술을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추켜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성 파괴의 주역인 것처럼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다. 혼란스럽다. 우리는 아직도 기술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못한 것이다. 이런 혼란은 어쩌면 인류가 처음 겪는 일이다. 전통사회에서 기술에는 나름대로 분명한 위치가 있었다. 가령 ‘사농공상’이라는 질서는 어쨌거나 당시 사회에서 기술이 차지하던 위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과학기술의 의미는 괄호 속에 들어있으며 다만 그 효용과 부작용만 논의되고 있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철학자 멈포드는 이런 문제를 지적하며 상징 개념을 제기했다. 여기서 상징이란 인간의 정서적 소통을 비롯해 개성, 창의성, 상상력과 연관된 문화 활동을 포괄한다. 그가 볼 때 문제는 상징 능력과 기술 사이에 균형이 무너진 데에 있다. 기술이 너무 빨리 성장한 바람에 그 문화적 의미를 소화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상대적으로 뒤쳐진 인간의 상징 능력을 북돋우어 다시 균형을 되찾자고 제안했다.
‘능동’적인 제안이다. 실질적으로 인문 예술을 좀더 발달시키자는 주장이니까. 그래서 ‘종합’적이다. 기술을 제한하기보다는 그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내성’을 길러, 한결 풍성한 문화를 만들자는 얘기이니까.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술과 상징이라는 이분법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상징은 주관적, 개성적인 반면 기술은 객관적, 기계적이다. 즉, 기술 속에는 ‘의미 있는 상징’이 없고 기계에는 인간적인 요소가 없다. 이렇게 차가운 기술에게 따뜻한 숨결을 불어주는 것이 상징 능력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람처럼 기술 잠재력도 미지수
» 기술과 기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질베르 시몽동(1924-89). ‘포스트 구조주의’에 까지 영향을 줬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의 철학자 시몽동(Simondon)은 대조적인 얘기를 했다. 기계도 인간적이라고 한 것이다. 이 생각을 이해하려면 먼저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언뜻 보기에 기계는 마치 생물의 기능 가운데 하나를 고정해놓은 듯하다. 안테나는 곤충의 더듬이, 음파탐지기는 박쥐를 본 땄으며,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한 기능을 확정하는 것은 단지 처음 단계일 뿐이다. ‘인공지능’을 보라. 오히려 외부 환경에 따라 기능을 조절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어떤 상황에도 똑같이 작동하는 기계는 초보단계이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외적 정보(상황)에 민감하며 상호작용하는 기계가 나온다. 기능이 다원화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른 기계들, 나아가 인간들과 접속하는 관계도 다원화된다. 서로 끊임없이 연결, 해체, 수렴한다. 이런 측면을 두고 시몽동은 ‘비결정성’이라고 불렀다. ‘열려있다’는 뜻이다.
그는 기계의 진면목이 이런 비결정성에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기계의 잠재성은 끝이 없다. 새로운 관계망 속에서 연이어 변화, 생성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 또한 그렇지 않은가? 사람의 손은 악수를 할 수도 있고 컴퓨터를 다룰 수도 있다. 한 가지 기능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게다가 사람에 잠재된 능력은 아직도 미지수이다. 한계를 확정할 수 없다. 기계 속에 인간적인 요소가 있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특정 기능을 닮은 게 아니라 인간의 비결정성과 생성을 닮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과 기계는 모두 생성한다. 더욱이 함께 ‘공진화’한다. 가령 네 발로 기던 사람이 직립하여 도구를 쓴다고 하자. 여기서 ‘앞발’은 이동 기능에서 벗어났지만 다시 특정한 도구와 연결되었다. 인간/기계는 이런 식으로 접속하며 변화한다. 혹은 서로 헤어져 또 다른 접점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이것을 시몽동은 변환(transduction)이라고 불렀다. 이후에 들뢰즈가 ‘탈영토화’ ‘재영토화’ 등으로 발전시킨 개념이다.
인간/기계가 이렇게 맞물리며 진화한다는 말은 결국 인간의 정신활동이 기술과 더불어 형성된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은 인간/기계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주관/객관, 기술/상징의 이분법도 벗어난다.
너무 낙관적인가? ‘장자’와 같은 심오한 비판을 너무 쉽게 여기는가? 물론 장자에는 일리가 있다. 지나치게 기능과 효용에 매달리면 인간성이 메마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직 기능과 효용을 위한 괴물로서 기술을 바라본다면 이것 역시 지나치다. 실제 장자의 생각도 그렇지는 않을 듯하다. 어떤 백정의 우화를 기억해보라. 사물의 자연스런 ‘결’을 거스르지 않았기에 19년이 넘도록 칼날을 갈지 않고 소를 잡았다는 이야기. 어쩌면 인간/기술의 창조적 공존을 보여준다. 그는 사물을 저마다 본성에 맞추어 대접하자고 했다. 기계의 고정된 기능에 맞춰 사물을 획일적으로 대하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시몽동과 통하지 않는가? 자신의 ‘외부’에 맞춰나가는 기술, 혹은 비결정성 개념과 닮지 않았는가?
기술문명 전체 그물망 성찰해야
기술도 세계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래서 기술은 이미 하나의 상징체계이며 주관성을 띤다. 실제로 기술은 석기시대 이래로 다양한 상징과 아름다움을 표현해왔으며 상상력, 종교적 의미, 미적 유희를 기술혁신의 중요한 동력으로 삼았다. 요컨대 기술에도 개성과 주관성이 있다. 그리고 사람은 기술이라는 상징체계와 더불어 세계를 파악하며 살아간다. 그럼으로써, 세계와 맺는 관계망을 바꿔나간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체’의 관점이다. 전체로서의 인간/기술 그물망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 그물이 엮어내는 문명이 말 그대로 ‘기계’적인지 ‘인간’적인지, 다시 말해 세계를 고정된 관점에서 획일화하는지 아니면 인간의 창조적 자유와 생성에 이바지하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그럴 때야 기술은 익명의 괴물이 아니라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갈릴레오 ‘진자의 등시성 원리’ 발견, 100년 뒤 하위헌스 첫 자동 진자시계 발명 산업혁명 이래 ‘시간은 금이자 돈’... 두 도시 시간 맞추기 고민하던 특허국 청년 ‘시간 상대성’ 알아냈으니
그가 바로 아인슈타인
» 아인슈타인이 특허국 직원으로 일했던 스위스 베른의 시계탑. 아인슈타인은 여러 시계의 시간을 맞추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특수상대성이론의 결정적 단초를 찾아냈다.
기술 속 사상/⑮ 시계의 역사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표준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각도와 시간. 각도의 표준은 360도에서 얻어지고, 시간의 표준은 천체의 운행에서 1년과 하루를 정함으로써 얻어진다.
예전에는 천체의 운행이 자고로 하늘의 뜻과 관련이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시간을 정하고 기록하는 일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였다. 세종시대에 장영실과 함께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든 김빈은 “제왕의 정사에 때를 바로잡고 날을 바르게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하면서, “천 년을 헤아리는 것도 한 시각도 틀리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며 모든 치적의 빛남도 촌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고 적고 있다. 하늘의 뜻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던 역대 왕들이 시간에 정성을 다했던 이유기 이것 때문이었다.
기원전 4천년 바빌로니아 해시계
시계의 역사는 기원전 4천년 바빌로니아 해시계에서 시작되었다. 그 다음 물시계가 개발되었고, 모래시계도 만들어졌다. 중세 시대에는 초를 태워서 시간을 알리는 초시계도 생겼다. 기계 시계가 만들어진 것은 대략 13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기계시계의 개발에는 탈진기(脫進機 escapement)라고 기어의 회전을 일정하게 하는 장치가 필수적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시계들은 정확하지 않았다. 하루에 한 시간이 틀리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세종대왕이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를 개발한 것도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당시에 쓰던 시각장치가 정확하지 못해서 시간을 알리는 관리들이 중벌을 받는 경우를 염려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시각에 따라 스스로 알릴 수 있는 시계”를 만든 것이 자격루였다. 자격루는 시간을 알리는 나무인형이 물시계를 지키는 관리의 노고를 덜어주는 자동 기계였다.
16세기 말에 갈릴레오가 진자의 등시성 원리를 발견하면서 시계의 자동화의 역사에 결정적 계기가 생겼다. 추의 길이가 같으면 진폭에 관계없이 추가 진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일정하다는 것이 갈릴레오의 원리였다. 그렇지만 이 원리를 추시계에 적용하는 데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보통 추의 경우 등시성이 정확하게 만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네델란드의 물리학자 호이겐스에 의해서 17세기 후반에 해결되며, 호이겐스는 정확한 진자시계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 유럽 전역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이로부터 100년이 더 지난 18세기 후반, 영국의 기계공 해리슨은 80일 동안에 5초가 틀리는 정밀 시계 크로노미터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된 데이바 소벨의 <경도>에 소개되어 잘 알려진 에피소드로, 해리슨의 시계는 오랫동안 항해하는 배에서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 쓰였다. 19세기 말엽에는 수정시계의 원리가 개발되었고, 20세기 초엽에는 손목시계가 등장했다. 20세기 중엽에는 원자시계가 만들어져서 시간의 표준으로 설정되었으며, 1970년대에 액정시계가 개발되어 디지털시계의 시대를 열었다.
시계가 확산되면서 생긴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사람들이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시계가 광범위하게 보급되던 산업혁명 이전의 방적공들은 “당신은 월요일을 일요일의 형제로 알고 있어요/화요일도 마찬가지고요… /금요일에 실을 잣기에는 너무 늦어요/토요일, 다시 절반만 일하지요”라는 노래를 부를 정도로 시간에 대해 무심했다. 농촌에서는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리듬이 지배적이었다.
그렇지만 공장의 기계가 시계에 맞추어 돌아가고, 인간의 노동이 기계의 시간에 맞추어지면서 노동은 시간 단위로 쪼개졌다. 산업혁명 당시 한 공장은 오전 5시에서 오후 8시, 또는 오전 7시에서 오후 10시까지를 노동시간으로 공표하면서, 이중 1시간 30분을 아침과 점심식사 등에 할당했다. 또 다른 제철소는 감시원에게 노동자들이 시계를 바꿀 수 없도록 잠가놓으라고 명령했다. 이 제철소에서는 매일 아침 5시에 감독관이 근무 시작을 알리는 벨을, 8시에는 아침 식사 벨, 한 시간 반 뒤에는 다시 근무 벨, 12시에는 점심식사 벨, 1시에는 작업재개 벨을 울리며, 8시에 작업 종료 벨을 울리고 모든 문을 잠갔다.
출근시간 찍던 펀치카드사 IBM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계시계 중 하나인 영국의 솔스베리 시계 (1386).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고.
작업장에서 노동자들과 관리자들은 시간을 놓고 싸우기 시작했다. 감독관은 시계의 분침에 추를 달아서 30분의 휴식시간을 27분으로 줄이는 방법을 개발했고, 노동자들은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다시 9시간으로 줄이기 위해서 투쟁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금이자 돈이 되었으며, 상품이 되었다. 1분1초는 이제 아껴 써야 할 것이 되었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죄악시되었다. 소중한 시간이 휴식에 낭비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잠을 많이 자는 것도 창피한 것이 되었으며, 옷도 재빨리 입어야 했다.
20세기 초엽, 미국의 ‘과학적 경영’의 아버지 프레드릭 테일러는 시간을 통제함으로써 작업장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에 대한 그의 집착은 극단적이었다. “서류를 찾지 않고 서류함을 열고 닫는데 0.04초, 책상 가운데 서랍을 여는 데 0.026초, 가운데 서랍을 닫는 데 0.027초, 옆 서랍을 닫는 데 0.015초, 의자에서 일어나는 데 0.033초, 의자에 앉는 데 0.033초, 회전의자에서 한 바퀴 도는 데 0.009초, 옆에 있는 책상이나 파일함까지 의자에서 앉아 움직이는 데 0.050초.” 당시 작업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출근 시간을 펀치 카드로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이 펀치카드기를 판매하던 회사는 나중에 IBM이라는 공룡기업으로 성장했다.
작업장의 시간이 과학적으로 통제되고 상품화되던 20세기 초엽에도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여러 도시들의 시간을 어떻게 하나로 맞추는가라는 문제였다. 마을마다 쓰는 시간이 다르고, 또 한 마을에서도 현지 시간과 표준 시간이 차이가 나서 웃지못할 해프닝이 많이 벌어졌다. 투표 시간의 마감을 놓고 분쟁이 생기기도 했으며, 법정 개시 시간의 기준이 달라서 판사의 판결이 무효가 되기도 했다. 발명가들은 여러 마을들의 시간을 표준시에 맞추는 발명품들을 만들어 특허를 신청했다. 이런 특허 신청은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유럽에서 급증했다.
‘느리게 살기’ 책 단숨에 읽는 삶
1905년, 스위스 베른이라는 작은 도시의 특허국에서 시간을 맞추는 기계의 특허를 심의하던 청년이 있었다. 이 특허들은 보통 전신을 이용해서 도시 사이의 시간을 맞추는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이 청년은 두 도시의 시간을 하나로 맞추는 방법에 대한 특허를 곰곰이 들여다보다가,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빛을 발사하고 돌아오는 빛의 시간을 측정함으로써 두 도시의 시간을 맞추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두 도시 중 하나가 움직이는 경우를 상상했다. ‘이 경우 어떻게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운동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이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던 청년은 결국 “시간은 시계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이 생각은 시간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시간의 상대성을 제창한 것으로, 특수 상대성 이론의 핵심이었다. 특허국의 청년이 알버트 아인슈타인이었음은 물론이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 논문의 첫 머리에는 시계를 가지고 시간을 맞추는 방법이 등장하는데, 이렇게 4차원 시공간의 신비를 규명한 실마리는 열차 역들 간의 시간이 맞지 않아 짜증을 내던 당시의 일상에서 출발했다.
1870년대 뉴욕 버팔로 역에는 시계가 세 개가 있었다. 하나는 버팔로 시의 시계였고, 다른 두개는 철도회사가 자기들의 열차시간을 맞추는 시계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시간의 불일치에 대해서 이 정도의 관용이 존재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일본 영화 <철도원>에 보면 전혀 다른 정서가 지배적이다. 시간 엄수는 철도원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거스릴 수 없는 것이며, 여기서 철도원 오토는 딸아이의 죽음마저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처럼 수신호를 보낸다.
시계의 역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보다 더 정확하게 측정하게 한 역사이다.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함으로써 우리는 시간을 더 세밀하게 통제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시간을 통제하면서 우리는 시간에 더 얽매이고 시간에 의해 더 지배당하게 되었다. ‘느리게 살기’가 유행이라지만, 느리게 살자고 주장하는 책을 단숨에 읽어야 하는 것이 “시간이 돈”인 세상의 지금 우리의 삶이다.
최고 시속 150㎞와 300㎞ 수치상의 차이 뒤엔 공학적 패러다임의 차이가 있고 공학적 패러다임의 차이 뒤엔 열차를 타고 바라보는 경관의 차이가 있다 기관차가 근대의 풍경을 보존했다면 KTX에서 풍경은 영화의 스크린처럼 사라진다
» 서구에선 옛날 철도모델을 그대로 쓰는 등 과거 테크놀로지가 잊혀지지 않고 있는 반면, 한국은 과거의 테크놀로지가 현재와 연속성을 갖고 있지 않다. 사진은 독일 쾰른 역에서 1년에 한번 운행되는 증기기관차.
기술 속 사상/(16) 시대의 경관으로서의 철도기술
한국의 유일한 철도박물관인 경기도 의왕의 철도박물관에 가면 두 가지 흥미로운 전시물이 눈에 띈다. 하나는 철도기술연구원에서 만든 철도의 미래에 대한 모형이다. 도시의 일부를 재연하고 있는 이 모형은 항구와 고속도로, 고층빌딩을 한 장면 속에 묘사하고 있다. 철도는 이 것들을 연결하는 혈관 같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항구에 내려진 화물과 승객은 철도편으로 도시로, 더 넓은 세계로 옮겨 가며, 그 세계는 고층빌딩들이 솟아 있는 첨단의 장소이다. 철도가 꿈 꾸는 미래의 모습은 철도가 도시의 주요부분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회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자동차와 항공기가 보편화된 이후 철도는 항상 주변화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기존 선로의 미래철도 ‘틸팅 열차’
또 하나 눈에 띄는 전시물은 자기부상열차에 대한 것이다. 독일, 일본, 프랑스 등 각 나라가 개발하고 있는 자기부상열차를 소개하고 있는 게시물에 부속된 전시물은 자기부상열차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본의 신칸센 500계 열차의 모형이다. KTX가 자기부상열차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로 있는 걸로 봐서, 일반인들의 뇌리 속에는 ‘미래의 고속첨단 열차=자기부상 열차’라는 등식이 이미 성립되어 있는 것 같다. 박물관이 이런 일반인들의 선입견적 오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운데, 그것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철도기술의 현황과 실제 현장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인에게는 철도의 미래는 자기부상 열차라고 알려져 있지만 당장 실용예정인 다음 기술은 차체가 기울어져 기존선로에서도 시속 200킬로미터까지 안정성 있게 달릴 수 있는 틸팅 열차이다. TTX(Tilting Train eXpress)라 불리는 이 기술은 새로 선로를 깔아야 고속으로 달릴 수 있는 KTX와는 달리, 기존 선로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주요한 철도기술로 세계 각국에서 각광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7년부터 충북선에서 TTX의 시험운행이 있을 예정이다. 철도기술이 향상하면서 우리 생활에서 철도가 가지는 위상도 변한다.
지금은 철도여행의 낭만이 많이 줄었지만, 어릴 적에는 기차를 올라타는 순간부터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진입로 같이 느껴졌다. 실제로 1980년대에 용산역에서 출발하던 목포행 호남선 완행은 열차 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전라도였다. 옆자리의 아저씨는 요즘 젊은 것들은 농촌으로 시집 오면 당장 죽기라도 할 듯 꺼린다면서 혀를 끌끌 차셨고, 차장은 안내방송에 대고 막걸리 같은 목소리로 울고 넘는 박달재를 읊었다.
호남선 완행 타는 순간 전라도
» 2004년 개통된 케이티엑스(KTX)가 힘차게 달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철길이라는 구조, 일정한 주기로 철커덕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우리를 향수의 세계로 밀어 넣는 열차 바퀴의 오묘한 음률, 버스와는 다른 느낌의 객차 내부, 그리고 삶은 달걀과 사이다, 천안의 명물 호도과자.... 지금은 열차에서 내리면 바로 다른 교통수단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철도여행이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라는 느낌은 많이 사라졌다. 거기다가 용접해 붙여서 이음매 없이 긴 장대레일 때문에 더 이상 규칙적인 철커덕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삶은 달걀과 사이다는 다른 메뉴로 대체되었고 모든 창과 문은 밀폐형이라 시골의 공기냄새를 맡을 수 없다.
사실 정보의 고속도로를 따라 정보들이 아무런 물리적 이동수단에 의존하지 않고도 순간이동을 하는 시대에 실제의 땅 위에 무거운 쇳덩어리를 써서 사람과 물건을 나른다는 것은 더 이상 급변하는 시대를 대표하는 표상도 아닌 것 같으며, 그에 대해 글을 쓰거나 학문적으로 접근한다는 것도 별로 신선한 주제가 아닌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탈근대의 첨단기술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요즘이야말로 근대의 기술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같은 세기가 철도와 사진을 발명했다고 한다. 양자는 근대의 시각장치(vision machine)이며 이동성과 깊이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870년대 미국 서부에서 활동했던 윌리엄 헨리 잭슨은 사진과 철도를 결합한 사진가였다. 그는 철도를 이동수단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객차를 개조해 자신의 작품을 고객들에게 선보이는 갤러리로 쓰기도 했다. 사진과 철도의 이런 결합은 남북전쟁 이후 백인들이 미국 서부를 더 왕성하게 개척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잭슨에게 철도는 시작장치이기도 했다. 그는 무거운 사진장비를 나르기 위해 노새를 쓴 경우가 많았지만, 그가 사진 찍은 땅의 범위는 기본적으로 철로를 따라 나 있었다.
자동차와 항공기의 발달이 근대의 풍경을 빠른 속도로 지워버린 것이라면, 철도가 근대의 풍경을 보존했다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워 보인다. 누구나 잘 알다시피, 철도는 철저하게 근대의 산물이고, 근대를 가져 온 원동력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과 재화를 포함하는 물질의 순환이 빨라지고 규칙적이 되고 능률적이 되었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인간이 느끼는 속도감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1825년 조지 스티븐슨이 만든 로코모션이란 이름의 증기기관차가 영국의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를 시속 24킬로미터로 주파했을 때 이는 이 세계를 다르게 보이게 할 만큼 경이로운 속도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속도가 어지러웠다고 하니 말이다.
한국의 철도는 1960년대 이래로 지금까지 디젤 동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현재는 급속하게 전력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2004년의 KTX의 개통에 이은 전력화와 고속화 추세에 따라, 한국형 고속철도인 G7의 개발이 진행 중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발전이 현재 한국의 철도를 디젤동력으로 표상되는 과거와 전력화, 지능화, 고속화로 표상되는 미래로 갈라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는 디젤동력은 1960년대에 영원한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진 증기동력과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옛날 철도모델을 그대로 쓰고 있는 서구와는 달리, 과거의 테크놀로지와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국의 철도 기술의 특성이기도 하다.
실제로 디젤기관차와 KTX는 아주 다른 패러다임에 속하는 기계이다. 그것은 최고속도 150킬로미터와 300킬로미터의 차이이기도 하고, 3천 마력과 1만6천8백마력의 차이이기도 하다. 디젤과 KTX는 단지 수치상의 차이일 뿐 아니라, 공학적 패러다임의 차이이기도 하다. 공기역학적 고려는 전혀 없이 직사각형의 딱딱한 디자인에 동력대차와 브레이크, 연료탱크 등 많은 기계부분들을 겉에 노출시키고 있는 디젤기관차와는 달리, 고속의 KTX의 설계에서는 공기역학적 구조가 아주 중요하게 고려되어, 차체는 항공기를 닮은 매끈한 유선형으로 되어 있으며, 전기를 받아들이는 펜타 그래프 외에는 어떤 것도 노출시키지 않고 있다. 고속으로 달리는 KTX의 특성상 조그만 장애물도 큰 사고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주행상태를 점검하는 많은 수의 센서들이 열차 내외부와 선로 주변에 장치되어 있는 것도 KTX가 기존의 철도와 다른 점이다.
과거과 단절된 한국 철도기술
» 이영준/기계비평가
이런 차이는 열차를 타고 바라보는 경관의 차이로 나타난다. KTX에서는 더 이상 지리적 참조점을 알아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풍경은 그냥 영화의 스크린처럼 사라질 뿐이다. 기계적 패러다임의 차이가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기존 선로를 훨씬 빠른 속도로 달릴 틸팅 열차가 실용화되면 새로운 양상을 띨 것이다. KTX 만한 성능의 고속열차는 없지만 많은 연구자료를 담고 있는 철도박물관이 수도 없이 산재해 있는 미국이나 영국과는 달리, 제대로 된 철도박물관은 없지만 최첨단의 철도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한국에서의 철도기술은 분명히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837년 전신 발명으로 ‘통신-교통’ 첫 분리, 해저전신 깔린 덕분에 대영제국 통치도 가능 비싼 전신료 탓 ‘신문기사 6하원칙’ 발달, 인공위성 뜨자 전화요금 800달러→0.2달러로 국제화·지구촌·세계화…보이지 않는 줄에 꽁꽁
» 지금 서로 떨어져 있는 연인들이 인터넷 채팅을 통해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듯이 19세기에 전신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어주기도 했다.
기술 속 사상/(17) 통신기술의 발달
근대 유럽에서 마차가 다니는 도로가 수도와 지방을 연결하고, 특히 철도가 생기면서 사람이 물건을 나르는 속도가 비할 수 없이 빨라졌다. 이에 비례해서 사람이 메시지를 전송하는 속도도 빨라졌지만, 메시지의 전송 속도는 교통수단의 최대 속도 이상을 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메시지가 항상 ‘메신저’라는 사람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837년 영국의 엔지니어 쿡과 휘트스톤, 그리고 미국의 가난한 화가 모스에 의해 동시에 발명된 전신(電信, telegraphy)은 통신을 교통에서 분리시킨 최초의 발명품이었다. 전신이 발명되면서 메시지는 구리 도선 속을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843년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를 따라 슬로(Slough)와 런던 사이에 첫 전신선이 놓였다. 전신이 놓인 직후에 슬로에서 살인을 저지른 존 타월이라는 사람은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도망쳤는데 그가 런던에 도착하기 전에 살인을 알리는 급전이 먼저 도착했다. 타월은 런던에서 기다리던 경찰에 의해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고 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신 덕분에 경찰은 기차를 무대로 한 소매치기들도 쉽게 검거할 수 있었다. 메시지가 가장 빠른 교통수단인 기차보다도 더 빨리 전달되기 시작했음을 극적으로 보인 사건들이었다.
전신, 기차보다 빨라 살인범 체포
초기에 전신에 대해서는 오해가 난무했다. 어떤 사람들은 전신선 속이 텅 비어서 그 속에 편지를 넣어 날려 보낸다고 생각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전신선을 통해서 대화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했다. 전신선을 통해서 액체 상태의 메시지가 흐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전기의 효과를 이용해서 순식간에 메시지를 주고받는다는 생각은 당시 일반인들에게 무척이나 기묘한 것이었다.
누가, 왜 돈을 내고 메시지를 빨리 보내야 할 필요가 있었는가? 전신의 첫 고객은 신문사였다. 영국의 <타임즈>는 1844년에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아들의 출산을 전신을 이용해서 속보로 보도했고, 이 소식을 담은 신문을 공식 발표 40분 만에 런던 시내에 가판으로 깔 수가 있었다. 미국의 경우에도 언론이 첫 고객이었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소식을 전달하는 데에는 7일 정도가 걸렸는데, 1846년에 발발한 멕시코 전쟁은 전신 덕분에 실시간 보도가 가능했다. 전신의 고객은 신문사로부터 주식가격 정보를 좀더 빨리 알기를 원하는 은행, 투자기관으로 확산되었고, 곧이어 군부, 정부, 철도회사로 늘어났다.
전신의 용도는 상상하지 못했던 곳에서도 발견되곤 했다. 사기꾼들은 경마대회 우승마에 대한 정보를 전신을 통해 지방으로 보냄으로써 경마 사기를 치기도 했다. 이러한 정보의 송수신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사기꾼들은 자신들만이 알아보는 암호를 사용해서 법망을 피해갔다. 체스광들은 전신을 이용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체스를 두기도 했으며, 부모의 반대를 피해서 전신 메시지를 이용해 결혼한 부부도 당시 유명한 사건이었다.
» 19세기 말엽에 세계를 거미줄처럼 덮었던 전신은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를 가능케 했다.
1850년이 되면 영국 내에 이미 2000마일의 전신이 가설되었으며, 미국에도 1만 마일이 넘는 전신이 가설되었다. 게다가 1852년 영-불 사이의 해저전신을 시발로 1860년대에는 영국-인도, 영국-미국 사이에 해저전신이 개통되었다. 초기 해저전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보내는 메시지는 단어 한자 당 1파운드를 받았는데, 지금 돈으로 따지면 대략 10만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또 전신은 모국과 식민지를 연결함으로써 식민지 통치에 결정적인 수단을 제공했다. 19세기 말엽, 영국과 인도 사이에는 매년 2백만 통의 전보가 송수신될 정도였다.
전신은 국제기구를 출범시켰다. 1865년 국제전신연합(ITU)이 서로 다른 나라들 사이에 전신의 절차, 표준, 가격을 결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ITU는 1870년대 이후에 출범한 우편연합, 국제도량형기구, 국제선로협약, 국제저작권협의기구, 국제철로협약, 국제무선협약의 모델이 되었다. 1850~70년 사이에는 17개에 불과했던 국제협약이 1900~10사이에는 108개로 늘어났다. 이러한 국제협약은 세계를 하나로 묶는 출발이었다.
경마 사기·전신 데이트도 등장
전신이 활성화되면서 떠오른 것이 이른바 ‘정보산업’이라 불리던 통신사들이다. 프랑스 의 전신인 <아바스(Havas)>가 1835년에 설립되고 이후 독일의 통신사 <볼프(Wolff)>와 영국의 <로이터(Reuters)>가 뒤를 이었다. 미국의 와 통신사는 각각 1848년, 1907년에 설립되었다. 이 통신사들은 전지구적인 ‘정보시장’을 분할해서 독점했다. 1차대전 이후에는 미국의 와 (이후 UPI)가 부상했고, 2차 대전 이후 지금 우리가 보는 <로이터>, , , 그리고 4대 통신사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전신은 글쓰기에도 변화를 가지고 왔다. 특히 신문의 ‘6하 원칙’이라는 독특한 문체는 전신 때문에 발달했다. 원래 신문기사는 소설처럼 늘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기자들이 비싼 전신을 이용해서 기사를 송고하는 일이 잦아지고 특히 미국의 남북전쟁 중에 전신선이 자주 절단되자 기자들은 기사 첫머리에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 간단히 요약하고, 그 다음 문단에 이를 조금 서술하고, 다음 문단에 더 자세한 서술을 붙이는 피라미드 형태의 문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신과 같은 새로운 통신기술은 정치, 외교 행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14년 6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Archduke Ferdinand)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후에 유럽의 위기가 고조되었는데, 이 시점에서 세르비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독일, 영국의 지도자들과 외교관들은 전신을 통해서 각국의 의견을 전달했다. 그런데 외교관들이 서로 만나서 복잡한 문제를 협상하던 과거와는 달리 전신을 통해서 전달되는 뉴스는 각국의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고,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은 이러한 여론에 떠밀려서 상대에 대한 최후통첩을 급박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신중하게 생각하거나 흥분을 냉각시킬 기회를 잃어버린 채로 신속하게 최후통첩을 주고받던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다.
전신은 경제활동의 스피드를 증가시켰으며, 경제를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를 반영하듯이 19세기 말엽에 경제신문들이 창간되었고, 1899년에는 미국의 현대적 광고회사 <제이 월터 톰슨>이 유럽의 기업가를 겨냥해서 영국 런던에 지부를 냈다. 미국의 본부와 영국의 지부는 전신을 이용해서 정보를 교환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국제화가 어느 정도로 진척이 되었는가하면, 독일 주식 시장의 주가가 전신을 타고 송신되어 러시아의 한 시골에서 반시간마다 그 동향이 게시될 정도였다.
19세기 경제의 국제화에 필수불가결했던 것이 전신이었다면, 20세기 후반의 세계화는 라디오, TV, 전화, 팩스, 데이터 네트웍, 컴퓨터 네트웍 등 미디어와 정보통신 네트웍의 세계화에 의해 가속되었다. 1962년 통신위성 텔스타(Telstar)가 유럽과 미국을 위성으로 처음 연결했으며, 1964년 미국과 유럽의 19개국이 서명한 인텔샛(Intelsat)이 발족했다. 얼리 버드(Early Bird)로 불린 인텔샛 1호가 1965년 발사되었고, 같은 해에 소련도 공산권 국가들과 인터코스모스(Intercosmos)라는 독자 위성체계를 만들었다. 인공위성은 그 이전까지는 일국에 국한되던 TV와 전화를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빠른 통신이 ‘1차 대전’ 부채질
1956년에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해저 전화선이 놓였고, 전화선이 놓인 지 불과 10년 뒤에 100여년 맹위를 떨치던 대서양 전신 케이블이 해체되었다. 인공위성과 해저 전화 케이블 덕분에, 1950년께 3분에 800달러이던 미-유럽 전화는, 지금 0.2달러로 떨어졌다. 위성을 통해 미국에 방송된 월남전 실황을 보고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헌이 ‘글로벌 빌리지’(global village) 즉 ‘지구촌’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이미 1970년대에 세계 경제를 ‘글로벌 쇼핑 센터’, ‘글로벌 공장’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묘사했다. 통신기술이 지구의 곳곳을 실시간으로 연결하기 시작하면서 세계화 즉 글로벌라이제이션은 실질적으로 가능해졌던 것이다.
날 수 없어 더 날고픈 인간욕망의 산물 ‘항공기’ 무수한 실패의 연료가 타서 내뿜는 불꽃, ‘편리-재난’ 양날의 칼도 어쩔 수 없는 운명 음속도 돌파했던 콩코드기는 은퇴했지만 탄생 100년 만에 레이더에서도 사라져 속도만
» 1953년의 대한국민항공사 광고. 항공기가 갈 수 있는 만큼이 이 세계의 범위다. 당시 유럽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술 속 사상/(18) 항공기술의 발달
얼마 전 런던에서 미국으로 가는 여객기에 액체폭발물을 실어 공중에서 폭파시키려는 테러기도가 발각된 데서 보듯이, 항공기는 참으로 편리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끔찍한 재난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양날의 칼 같은 것이다.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항공기라는 것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항공기의 제물이 되고 만다. 자신이 만든 글라이더로 2천회나 비행에 성공했던 독일의 항공기술 선구자 오토 릴리엔탈은 추락사고로 죽었으며, 최초로 동력비행에 성공한 오빌 라이트는 자신이 만든 비행기가 추락하여 크게 다쳤다.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발을 땅에 디디고 살게 되어 있는 한 하늘을 날고자 한다는 것은 운명에 대한 거역이요, 이는 죽음이라는 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2차원의 평면을 떠나 더 크고 넓은 차원을 개척하고자 열망하는 것이 또한 인간의 운명이라면, 항공기를 개발하는 것도 인간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보잉747’ 괴물의 한국 상공 출현
항공기란 언제나 이 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도구이자 삶의 방식이었으며, 또한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숱한 재난의 표상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테러리스트들이 항공기를 테러의 표적이자 수단으로 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지도 모른다. 항공기란 매력적인 기계는 편리와 재난, 혹은 동경과 공포라는 이율배반을 항상 품고 있었다. 항공기의 이미지는 항상 거대한 괴물과 문명의 이기라는 두 가지 면에서 시소게임을 했는데, 꼭 시커멓고 무시무시한 폭격기만 그런 게 아니라, 대형 여객기도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
지금이야 보잉747은 전세계의 공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비행기가 돼버렸지만, 1968년에 처녀비행을 하고, 1973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운항을 시작했을 때는 센세이셔널했다. 열명의 승객을 한 줄에 태울 수 있을 정도의 폭 넓은 와이드 바디에 2층으로 된 구조, 70t의 연료를 싣고 최대이륙중량 400t이나 나가는 이 괴물비행기는 전세계의 공항의 시설기준을 바꿔 놓을 정도로 파격적인 규모였으며, 이 비행기의 디자인, 역사, 운용에 대해 수 많은 책과 다큐멘타리 영화들이 나와 있다. 김포공항도 점보기의 취항으로 2468m의 활주로를 3200m로 확장하고 공항청사도 부분적으로 확장해야 했다. 점보기의 취항은 비행기가 커졌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간 항공여행의 보편화와 대중화를 의미했고, 보트피플에서부터 미국으로 언어연수를 떠나는 대학생, 노트북 컴퓨터를 든 비즈니스맨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를 체험하게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비행기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가는 관문인 것이다.
사실, 테크놀로지의 역사는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 끊임없이 놀라운 쇄신을 이루며 새롭고 깜짝 놀랄 성과를 보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근저를 흐르는 모티브는 반복이다. 예전에 쓰였던 기술이 겉모습만 바꿔서 다시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양차 세계대전을 겪고, 20세기 후반의 컴퓨터 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힘입어 항공기 자체는 엄청 나게 발전한 것이 사실이지만, 항공기 이미지를 둘러싼 패러다임은 형태를 바꿔서 반복하여 나타난다. 꼬리날개와 동체가 따로 없이 오로지 날개로만 된(flying wing) 스텔스 폭격기 B2 스피릿의 형태는 실은 1929년 노드롭에서 만든 플라잉 윙 X216H로 시작하여, 1945년의 YB49로 다시 나타났다가 계속 되는 실패 끝에 다시 한번 더 나타난 것일 뿐이다. 사실 플라잉 윙은 이미 1910년 독일의 항공학자 후고 융커스(Hugo Junkers)가 실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융커스의 1910년대의 플라잉 윙과 오늘날의 스텔스 폭격기 B2의 차이는 무엇인가. 많은 차이가 있지만, 중요한 차이를 요약하자면 플라잉 윙의 불안정한 비행특성을 바로 잡아줄 컴퓨터가 옛날에는 없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플라잉 윙과의 큰 차이다.
억세게 운 좋았던 라이트 형제
» 석양을 배경으로 날으는 여객기. 항공여행이 보편화되면서 이 세계를 보는 우리의 눈도 바뀐다.
<항공기>라는 책을 쓴 데이빗 패스코가 항공기를 엔지니어링의 기적이라고 했을 때 ‘기적’이라는 말에는 긍정적인 함의도 있지만, 항공기술발달의 역사는 곧 뼈아픈 실패의 역사이기도 하다. 2003년에 라이트형제의 최초의 동력비행 100주년을 기념하여 미항공우주국의 엔지니어들이 그들의 비행기 ‘플라이어(Flyer)’를 원형 그대로 만들어서 풍동실험을 했을 때, 엄청난 첨단기술로 무장한 그들은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플라이어를 날게 할 수 없었다. 플라이어는 비행특성이 극도로 불안정하여, 곧바로 날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엔지니어는 라이트형제가 비행실험 도중 목을 부러트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극도로 운이 좋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라이트형제의 앞뒤로는 운 나쁜 발명가, 엔지니어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이 항공 엔지니어링의 역사이다. 라이트형제 이전에 무동력 글라이더를 가지고 2천여회의 시험비행을 한 끝에 1896년 사고로 죽은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에서부터, 초음속 폭격기 발키리를 개발하다 수 많은 트러블 끝에 죽은 조종사들, 초음속 여객기 TU144를 미소합작으로 개발하려다 엄청난 돈만 쓰고 실패해버린 프로젝트, 그 여파로 직장을 잃거나 엉뚱한 곳으로 전보발령된 엔지니어 등, 항공 엔지니어링의 역사에는 뼈아픈 실패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찬란한 항공기의 이미지는 실패라는 연료가 타서 내는 불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항공기는 나는 기계일 뿐 아니라 보는 기계이고 꿈의 기계이며 폭력과 파괴의 기계이기도 하다. 항공기의 미래는 무엇인가? 항공기는 나날이 빨라지고 커지고 더 안전해지고 있지만, 또 한가지 특징은 우리의 시각장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항공기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라지고 있다. 항공여행이 보편화됨에 따라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고, 사람들은 어떤 항공사의 표를 어떻게 사면 싸다는 것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들이 이번에 태평양을 건너 뉴욕에 가는데 최초로 플라이 바이 와이어 방식으로 조종되며 최초로 종이에 설계도를 그리지 않고 전적으로 컴퓨터상으로만 설계된 항공기 보잉777을 탄다고 해서 특별히 흥분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항공여행이 흔해지는 정도에 비례하여 항공기의 모습은 우리의 시각장에서 사라진다.
군용기도 사라진다. 항공기라는 대상으로서는 훤히 드러나는 가시성을 가지고 있는 민간항공기와는 달리, 군용기는 훨씬 미묘한 가시성의 전략을 가지고 사라진다. 군용기는 적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눈이란 것이 인간의 육안 만이 아니라 첨단 레이더와 센서로 발달해 가자, 눈에 띄지 않기 위한 기술도 첨단화된다. 오늘날 생존을 위한 비가시성은 스텔스 기술이라는 형태로 결정화되어 있다.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군사적 가시성의 궁극적 목표인 것이다. 그것은 육안에서만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텔스 기술의 핵심은 레이더 스크린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더 빨리 더 크게 더 안전하게
항공기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속도다. 세계유일의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는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그 속도는 숫자로 남아 있다. 총알보다 빠른 비행기 SR71도 마찬가지이다. 마하3.5의 속도에서 한번 유턴하려면 회전반경이 수백㎞에 이른다는 이 전설적인 비행기의 속도도 숫자상의 전설로만 남아 있다. 프랑스의 평론가 폴 비릴리오가 어릴 적의 전쟁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독일군이 라디오 방송이 전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격해 오는 것에 공포를 느꼈다고 했던 전격전(Blitzkrieg)의 속도처럼, 항공기의 속도는 우리가 그것을 지각하기 전에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지각했을 때는 이미 사라진다.
‘월드 와이드 웹’ 정보망 10년만에 지구촌 중독... 개발 의도 상관없이 무한 진화의 ‘럭비공’으로 전세계 서버 관리하는 장치는 미국 손안에... ‘쌍방향 교류도 민주 발전’ 착각일 수도...
세살부터 배우는 클릭클릭, 우려스럽다
»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정보의 장, 모든 정치적·물리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공간, 쌍방향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보의 보고라는 인터넷에 대한 찬사는 과연 언제나 타당할까? 서울 시내버스 안에서 휴대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해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삶은 인터넷으로 묶여있다.
기술 속 사상/(19) 인터넷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어린이들은 평균 만 3세에 인터넷을 시작해 5세 이상의 어린이 중 절반 이상이 많게는 일주일에 10시간 이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며, 중고교생의 반 이상이 인터넷 중독 증상을 보인다 한다. 2003년 1월 25일 국내 인터넷이 컴퓨터 바이러스로 인해 한동안 마비되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외부와 단절된 것 같은 공포감이나 금단현상을 경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일반에 널리 보급된 지 10여 년 만에 인터넷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2000년을 전후해서는 닷컴 열풍이 세계를 흔들었고, 얼마 전 우리나라의 인터넷 뱅킹에서의 거래량이 은행 창구의 거래량을 추월했다. 기업과 정부기관, 정당과 각종 단체들 뿐 아니라 개인들도 홈페이지를 제작, 관리하는데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아파트 청약은 사이버 모델 하우스를 본 뒤 온라인에서 처리한다. 실제 공간인 지하철에는 인터넷 쇼핑몰과 인터넷 게임과 같은 가상공간의 세계로 오라는 광고가 붙어있다. 이런 세상에서 어린이의 인터넷 사용이나 인터넷 중독을 굳이 문제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1960년 군사·학술용 네트워크로
인터넷은 1960년 대 미국에서 군사 및 학술적 목적의 정보교환을 위해 몇몇 컴퓨터들의 통신 네트워크를 만든 것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흔히 ‘인터넷’이라 칭하는 것은 World Wide Web(WWW)이라는 정보망이다. 웹(Web)이라고도 불리는 이 정보망에 컴퓨터를 연결하면 자신의 위치에 상관없이 거기에 올라있는 웹페이지, 문서, 사진 등 여러 형태를 가진 정보들에 접근할 수 있고, 자신도 웹에 원하는 자료를 올릴 수 있다.
인터넷의 세계는 컴퓨터, 모템, 통신케이블, 여러 소프트웨어의 복합체 이상의 그 무엇이다. 전 세계의 컴퓨터가 서로 연결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종류의 자료를 교환하면서 만들어지는 가능성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미국 철학자 허버트 드레퓌스의 말처럼, 인터넷은 처음의 개발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진화하는 새로운 종류의 기술 혁신이다. 그래서 그 완성된 모습에 대한 상도 없고 그 발전의 방향도 알 수 없다. 학술 및 군사용 정보 교환이라는 최초의 목적은 이제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행위들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발전해 간다는 두 가지 특성만 고려하더라도, 정책 입안자들이나 미래학자들이 역설하는 인터넷에 대한 기대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인터넷 중독에 대해 막연히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인터넷의 여러 혜택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가 필요하다. 인터넷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만이라도 살펴보자.
첫째, 인터넷을 ‘정보 고속도로(Information Highway)’라 부르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정보의 장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필요한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어 혜택을 누리게 된다. 광범위한 정보의 공유는 세상을 더욱 투명한 곳으로 만들어 불합리한 억압을 없애기도 한다. 저소득층이나 저개발국에 인터넷을 보급하는 것이 곧 그들에게 경제적 도약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주장이나, 독재국가의 국민들이 인터넷을 통해 해방의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이런 견해에서 비롯된다.
필요 아닌 좋아하는 정보만 축적
» 월드 와이드 웹(WWW) 정보망의 발명자 팀 버너스리.
이러한 관점에도 일리가 있지만 일반적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엄청난 양의 정보 중에 꼭 필요하고 정확한 정보를 찾아내기도 어렵고 정확성을 판단하기도 힘들다. 모든 사람이 같은 정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정보의 희소성과 가치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설사 좋은 정보만 골라낸다 해도 개인이 소화하지 못할 만큼 많다는 것도 문제다.
인터넷이 정보의 보고라는 사실은 자주 강조되지만 그 정보들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별로 없다. 웹에는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게 되는 하이퍼링크(hyperlink) 기능이 있어서 전쟁으로 죽어가는 아이의 이야기에서 포르노 사이트로의 이동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정 정보의 검색이 아닌 막연한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유는 하이퍼링크를 통해 수많은 가능성들이 제시되고 나는 그 순간 나의 관심을 끄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움이 되는 정보보다 내가 좋아하는 정보를 축적하게 될 가능성이 더 많다.
둘째, 인터넷이 모든 정치적, 물리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를 반박하는 견해는 인터넷 상에서 좋은 정보와 유해한 정보가 뒤섞여 교환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할 수 있다. 지금 인터넷 관련 기술의 개발에서 컴퓨터 보안 및 유해 정보의 차단이 중요한 이슈가 되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노력이 결과적으로 인터넷 상에서 오가는 정보들에 대한 통제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해킹, 바이러스 유포, 스팸메일의 발송, 불법 복제 등과 같은 인터넷 상의 범죄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통제 수단의 개발이 불가피한데, 이러한 기술들은 언제든지 다른 정보들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 발전 무비판적 수용은 금물
» 인터넷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파넷(ARPANET) 지도.
이와 관련하여 인터넷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관리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기억되어야 한다. 전세계의 인터넷 트래픽을 관리하는 컴퓨터들인 루트 서버(Root Server)를 관리하는 ICANN이란 단체는 사실상 미국 정부의 영향력 하에 있다. 물론 미국 정부가 인터넷 상의 모든 정보들을 감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인터넷이 완전한 자유의 공간이라는 인터넷 낭만주의자들의 생각은 착각이다.
셋째, 풍부한 정보의 보고라는 점과 더불어 쌍방향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도 인터넷의 특징으로 자주 거론된다. 이전의 미디어들은 정보의 제공자와 수용자의 관계가 일방적이었고, 수용자는 채널을 돌리거나 신문을 바꾸는 선택의 권한만을 가졌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정보의 공급자가 될 수 있다. 개인 홈페이지는 물론, 댓글 달기나 토론게시판 등을 통해 누구나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기존의 모든 미디어가 인터넷에서 통합되면서 쌍방향 의사소통의 방법도 다양해지고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모두가 말할 수 있다고 해서 모두의 말이 들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접속자가 많은 홈페이지는 따로 있고, 내가 쓴 댓글을 남들이 보길 원한다면 제목도 색다르게 붙여야 한다. 인터넷 상의 토론이 찬반이 명백히 갈리거나 감정적인 주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차분하고 논리적인 토론보다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논쟁으로 치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사소통이 쉬워질수록 소통의 질은 오히려 떨어져 시간만 낭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인터넷 보급률이 세계 최고인 우리나라에서 사실왜곡과 여론호도가 끊임없이 시도되고 비합리적인 보수진보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쌍방향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민주적 의사소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인터넷 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과 그 변화무쌍한 발전의 모든 측면을 다 열거하고 그것이 초래한 변화들과 혜택을 일일이 논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노릇이다. 하물며 그 다양한 측면들 중 위에서 언급한 몇몇 문제점들이 있다고 해서 이미 우리 생활의 필수적인 일부가 된 인터넷의 사용을 중단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인터넷을 필수적인 일부로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고, 인터넷이 제공하는 기회만을 강조하면서 그 기회에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인터넷으로 인해 촉발된 수많은 가능성들이 혹시 우리의 반성적 능력을 저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술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되짚어 반추할 여유를 잃고 막연한 기술발전의 신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기술은 인간의 자율성을 넘어선다. 더욱 발전된 미래의 기술사회를 살아가게 될 3세 어린이의 인터넷 사용과 청소년의 인터넷 중독이 우려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술로 인한 인간해방을 긍정한 마르크스 계급사회에서는 노동자 억압 도구가 된다고 봤다 자본가에게서 기계 빼앗아 사회가 소유하라... 사회관계와 기술의 변증법 꿰뚫은 통찰력 혁명 실패했지만 ‘기술 인간화’ 지표로 유효
» 18~19세기 산업혁명기의 방직공장을 묘사한 그림. 자동방직기(power loom)이 설치되어 작동되고 있다.
기술 속 사상/(20) 산업혁명과 마르크스
산업혁명은 공장제 생산에 기초한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힘으로 등장했던 사건이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공장제 산업이 농업과 수공업을 대체하고 사회의 발전동력으로 부상했다. 공장을 운영하는 자본가 계급이 기존에 권력을 잡고 있던 토지귀족 계급을 몰아냈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 계급은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자본가 계급에 맞서기 시작했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19세기 유럽 각국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었고, 노동자계급을 대변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이념이 혁명의 열기를 배가했다. 1848년에 <공산주의 선언>을 써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열변을 토했던 마르크스(Karl Marx)는 당시 불과 서른 살의 젊은이였다.
기계와 분업 선구적 연구
산업혁명을 기술혁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산업혁명을 출범시킨 것은 몇 가지 사소해 보이던 기술 발전이었다. 1770년대부터 면사를 생산하는 방적기계가 발명되었고, 곧이어 면사를 이용해서 옷감을 짜는 방직기계의 발명이 뒤를 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엔지니어 제임스 와트는 증기기관의 효율을 획기적으로 개선했고, 이렇게 개량된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사용한 공장이 공업도시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기 시작했다. 기차는 원자재 생산지와 공장을 연결했고, 생산품을 소비지로 수송했다. 영국의 경우, 1750년에서 1800년 사이에 면화수입은 30배, 면제품수출은 120배가 증가했다.
자동기계 수백 대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공장은 산업혁명의 심볼이었다. 수력 자동방적기계를 발명한 발명가 아크라이트는 면사 사업가로 변신했는데, 그의 공장은 무려 19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이 중 3분의 2가 미성년자였으며, 개중에는 6살 난 소년 노동자도 있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8초 이상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율 속에 11시간 이상의 노동에 종사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에 맞추어서 기계를 다루는 대신에 기계의 규칙적인 운동에 자신들의 노동을 맞추어야 했다. 산업혁명기의 몇몇 사상가들은 이미 인간이 거대한 기계의 ‘수족’이 되었음을 감지했다. “우리 시대의 표식”(1829)이라는 에세이에서 카알라일은 “인간의 손뿐 만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도 점차 기계가 되었다”라고 개탄했다. 당시 기계와 공장 시스템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앤드류 유어는 <매뉴펙쳐의 철학>(1835)이라는 책에서 공장을 “기계적이고 지적(知的)인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 모두가 스스로 제어하는 동력에 종속되어 하나의 공통된 물건의 생산을 위해 쉴새없이 함께 움직이며 작동하는 거대한 자동기계”라고 평가했다.
마르크스는 당시 기계와 분업, 공장 시스템에 대해서 선구적인 연구를 했던 유어, 찰스 배비지, 아담 스미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유어와 배비지가 공장제를 낙관적으로 높게 평가했음에 비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공장제에 대해서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는 “(공장 시스템에서) 우리는 각각 고립되어 있는 개별적인 기계들 대신에, 하나의 기계괴물을 만난다”면서, “이 괴물의 몸은 공장 전체를 채우고, 이 괴물의 악마적 힘은 처음에는 그의 거대한 다리의 느릿느릿하고 절도 있는 움직임에 의해 가려져 있지만, 마침내 빠르고 격렬하게 작동하는 무수히 많은 그 기관의 혼돈 속에서 나타난다”라고 기계화된 공장을 괴물로 묘사했다.
마르크스가 기계를 괴물로 보았던 데에는 그가 공장의 기계를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투쟁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는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당시 뮬 방적기를 다루던 숙련 노동자들의 힘을 무력하게 할 방도를 꾀하던 자본가들은 리처즈라는 유명한 발명가에게 의뢰해서 자동 뮬 방적기를 만들어 보급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와 같은 계급사회에서 기술이 노동자를 억압하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계급이 타파된 사회주의사회에서는 기계가 노동자의 지겨운 육체노동을 해방시키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기술결정론자’ 오해
» 자동기계와 공장제의 모순을 타파하는 방법이 기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의 사적 소유를 없애는 것이라고 설파한 칼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기술의 발전에 의해 인류의 문명이 진보했고, 지금도 진보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에게 기술을 포함한 생산력의 발전은 철학적인 의미에서 긍정적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관계가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이 숙련노동자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노동자들을 장시간 노동에 종사시키며, 거기서 얻어진 이윤을 자본가들에게 귀속시키는 도구라고 직시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산업혁명 초기의 러디스트(Luddist) 운동에서처럼 기계를 파괴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을 자본가의 손에서 빼앗아 와서 사회적 소유로 바꾸는 데에 있었다.
마르크스의 기술관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그가 기술결정론자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실제로 <철학의 빈곤>에서 “손방아는 봉건영주의 사회를 낳고 증기방아는 자본가의 사회를 낳는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고, <정치경제학 비판>에서는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구조를 구성하며, 그 위에 법률적·정치적 상부구조가 성립하고 그것에 조응하여 사회적 의식의 특정한 형태가 발생한다”고 하면서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사회적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고 설파했다. 이러한 구절들은 그를 기술결정론자로 평가하는 근거가 되곤 했다.
마르크스를 기술결정론자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생산력=기술”로 간주했다고 본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생산력이란 기술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었다. 특히 마르크스의 생산력은 노동자의 노동력, 숙련지식, 경험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이렇게 생산력이 인간의 노동을 포함한다면 이는 역사의 변동 요인으로서 의식적인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이는 기술결정론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주장이 된다.
또 마르크스는 기술의 발전을 무조건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하지도, 기술을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보지도 않았다. 방직기술, 제련기술, 증기기관과 같은 몇몇 기술의 발전이 산업혁명을 촉발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산업혁명기에 나타난 핵심적인 기술혁신은 자본가들의 이윤을 더 증대시키기 위한 동기에서 이루어졌다. 마르크스는 자동기계와 같은 기술이 노동자들의 숙련 노동을 무력화시킴으로써 노동계급의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점을 통찰했다. 이렇게 생산력의 발전은 계급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며, 이러한 계급투쟁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또 다른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계급간 착취 없어야 기술도 유용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과 사회변동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기술변화를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서 많은 논의를 할애했다. 그는 기술이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는 활동임을 지적했으며, 사회적 관계와 기술변화가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음을 강조했다. 기술의 변화는 계급관계의 변화를 포함한 사회적 변동을 가져오고, 사회는 기술을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시킨다. 기술의 발전 그 자체는 인간의 복지와 평화를 위해서 사용될 수 있지만, 그것의 사용은 항상 사회의 계급구조에 의해서 좌우된다. 따라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기술이 가진 잠재적 가능성을 가장 잘 표출하고 이를 인류 전체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길이다.
20세기의 역사는 마르크스가 예언한 대로 바뀌는 듯 했다가 지금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공장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선 밖으로 사라지고 우리 눈에는 그 작동조차 잘 드러나지 않는 팬시한 핸드폰과 무선 인터넷이 현대 기술을 대표하는 지금, 계급간의 투쟁을 강조했던 마르크스의 기술론은 그 의미를 상실한 듯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그의 통찰력의 대부분은 아직도 유효하다. 마르크스의 기술관은 우리에게 기술에 내재한 사회성과 사회를 구성하는 기술적 특성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미래의 기술구조를 더 인간적인 방향으로 정립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철강회사 노동자로 출발 수석엔지니어로 승진 ‘은밀한 태업’ 해법 연구 경영컨설턴트로 나서 ‘테일러주의’ 핵심은 노동자별 ‘과업’ 할당…노동력 착취 수단·인간 노예화 비판 받기도
» 테일러가 스톱워치를 통해 시간연구를 하는 모습을 그린 스케치. 연구 대상인 노동자가 볼 수 없도록 스톱워치가 감추어져 있다.
기술 속 사상/(21)테일러주의와 엔지니어의 꿈
요즘에 구인 광고란을 보면 새로운 직종이 많이 생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기술관리’다. ‘관리’라는 단어 앞에 붙일 수 있는 업무가 인사, 조직, 재무, 회계, 생산, 판매를 넘어 기술로 확장된 것이다. 기술이 점점 복잡해지고 급속히 변화함에 따라 그것을 관리하거나 기획하는 업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할 사람이 필요해졌다는 뜻이다.
역사상 기술과 관리를 결합시킨 선구자로는 과학적 관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W. Taylor, 1856~1915)를 들 수 있다.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배경은 테일러가 기업의 관행을 개혁할 수 있는 기술자 및 관리자로 성장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철강산업과 기계산업의 중심지였고, 테일러의 집안은 기업가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청교도적인 품성은 실용적인 활동을 장려하고 게으름을 죄악으로 받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기술과 관리 결합시킨 선구자
테일러는 1878년에 미드베일 철강회사에 일반노동자로 입사한 후 기계공, 조장, 직장, 주임을 거쳐 수석 엔지니어로 승진했으며, 스티븐스 공과대학을 야간으로 다니면서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의 철강산업과 기계산업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던 ‘은밀한 태업’(soldiering)의 관행에 직면하면서 관리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은밀한 태업은 공식적 태업(sabotage)과 달리 적당히 일함으로써 산출고를 제한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생산과정에 대한 실제적인 권한이 숙련노동자들에게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테일러는 이러한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제도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미드베일 철강회사에서 금속절삭작업을 대상으로 새로운 관리법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부터는 ‘경영 컨설턴트’라는 직함을 내걸고 다양한 기업의 기술적·경영적 문제에 대한 자문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테일러는 1898~1901년에 베들레헴 강철회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자신의 관리법을 체계화하였다. 그 이후에는 현업에서 은퇴하여 자문, 강연, 저술 활동에 몰두하면서 <공장관리>, <금속절삭의 기술에 관하여>, <과학적 관리의 원리들> 등의 저작을 남겼다.
테일러리즘의 핵심적인 관념은 과업(task)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되는 하루의 공정한 작업을 뜻한다. 테일러는 작업도구와 작업방법에 관한 시간연구(time study)를 통해 과업을 설정하였고, 노동자에게 과업 실행의 유인을 제공하기 위해서 차별적 성과급제(differential piece rate)를 개발했으며, 과업이 제대로 실행되고 관리될 수 있도록 기획부(planning department)와 기능별 직장제(functional foremanship)를 고안하였다.
테일러주의는 금속절삭작업의 도구와 방법을 표준화하기 위한 시간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테일러는 작업도구의 칼날의 형태와 사용방법을 개량하고 도구를 규격화하여 노동자들이 사용할 도구를 자세히 지시하였다. 또한, 그는 노동자들의 작업을 기본동작으로 분해한 후 쓸모없는 동작을 제거하고 각 동작별로 최선의 것을 찾아낸 후 스톱워치(stop watch)로 단위시간을 측정하였다. 이런 식으로 특정한 작업에 대하여 도구, 동작, 시간을 결합하여 테일러는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할 수 있는 과업을 구성하였다.
시간연구의 초보적인 형태는 19세기 영국의 과학자이자 기술자인 배비지(Charles Babbage)가 이미 시도한 바 있었다. 그러나 배비지가 업무 수행의 총 시간에 만족했던 것에 반해 테일러는 작업을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분해하여 분석한 후 이를 다시 결합시켰다. 또한 배비지는 실제로 행해졌던 시간을 측정했던 반면 테일러는 작업이 수행되어야만 하는 시간에 초점을 두었다. 테일러는 “한 사람이 주어진 일정량의 작업을 하는 데 걸리는 전체 시간에 대한 단순한 통계는 시간연구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20세기초 도마에 오른 테일러주의
» 기술과 관리를 결합시킨 선구자 프레더릭 테일러.
차별적 성과급제는 노동자가 과업을 달성한 경우에는 임금에 높은 비율을 적용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낮은 비율을 적용하는 임금제도였다. 그것은 과업을 달성한 노동자가 이전에 비해 30~100%의 임금을 추가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특히, 테일러는 차별적 성과급제의 성패가 기계와 작업에 관한 정밀한 시간연구를 통해 적절한 과업을 구성하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기획부는 이전에 숙련 노동자들이 가졌던 작업에 대한 지식을 관리자의 손으로 옮기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그것은 ‘구상과 실행의 분리’ 혹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로 상징된다. 기능별 직장제는 참모 기능이 강화된 수평적 조직으로서 기획부와 작업장에 각각 4명씩 배치된다. 그들은 각각 작업 순서의 결정, 작업지시카드의 작성, 임금 산출의 내역 계산, 업무의 조정, 작업 방법의 교육, 작업 속도의 설정, 기계의 관리 빛 정비, 제품의 품질 검사를 담당하였다.
테일러주의는 20세기 초 미국 사회에서 두 번의 커다란 시험대에 올랐다. 1910년에 동부철도회사가 운임 인상을 요구했을 때 당시에 ‘민중의 변호사’로 불린 브랜다이스(Louis D. Brandeis)는 테일러의 방법을 적용하여 비능률적 요소를 제거하면 운임을 인상할 필요가 없다고 맞섰다. ‘과학적 관리’라는 용어는 그 때 만들어져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각광을 받았다. 테일러는 워터타운 병기창(Watertown Arsenal) 사건을 매개로 1911~1912년에 청문회에 불려가기도 했다. 워터타운의 경영진은 테일러주의를 적용하려고 했지만 노동조합이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노동조합은 테일러주의를 도입하면 작업속도가 빨라지고 일자리가 줄어들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 청문회는 과학적 관리를 위해 별도의 예산을 사용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노동조합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처럼 테일러주의가 반드시 경영진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테일러주의를 경영진과 노동자의 이분법적 구도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사실상 테일러는 자신의 관리법을 개발하면서 엔지니어를 핵심적인 주체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임금 산출의 기준이 되는 작업속도를 엔지니어가 정했다는 점, 시간연구를 통해 작업에 대한 지식을 엔지니어에게 집중시켰다는 점, 기능별 직장제를 통해 기획부나 작업장의 주요 업무를 엔지니어가 담당하였다는 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엔지니어가 전문성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공장관리를 주도함으로써 노사양측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테일러는 엔지니어를 중심으로 한 공장관리에 관심을 기울였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엔지니어의 사회적 지위가 변화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테일러 이전 세대의 엔지니어들은 공장의 소유주인 경우가 많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독립적인 사업가에 가까웠다. 그러나 테일러 세대의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대기업의 고용인이었고 이에 따라 이전과 같은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지위하락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엔지니어 자신이 독자적인 사업을 하는 방법과 공장관리의 문제를 공학의 한 분야로 취급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의 방법은 통로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자의 방법이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테일러가 주목했던 것도 공장관리의 문제를 엔지니어가 담당하는 방법이었다.
엔지니어를 주체로 설정했으나
그러나 테일러주의의 이상이 실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엔지니어가 경영진에 종속되는 정도가 심해지면서 공정한 전문가로 기능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테일러주의의 철학적 기반은 무시하고 단순한 기법만을 도입하는 사례도 속출하였다. 특히, 제3세계의 경우에는 노동력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어 “출혈적 테일러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테일러주의는 기술적?조직적 측면에만 중점을 둠으로써 인간적?사회적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테일러주의가 인간적인 요소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집단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 주목하고 있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화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치중하다보면 인간의 사회적 측면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기 마련이다. 테일러주의가 인간을 기계와 조직의 노예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이러한 측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누구나 싸게 살 수 있게 하겠다” 컨베이어 공정으로 대량생산 길트고 파격 임금으로 대량소비 지원한 포드 노동 비인간화·한가지 차종 고집으로 쇠퇴
» 1930년대 포드 공장 전경. 노동조합의 성장과 노동운동의 강화를 배경으로 ‘포드주의’는 노동을 비인간화하는 상징으로 부각되면서 극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기술 속 사상/(22) 대량생산 대중소비, 포드주의
철도가 19세기를 상징하는 교통수단이라면 20세기 이후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은 자동차이다. 내연기관을 이용한 가솔린 자동차는 1880년대 독일에서 처음 발명되었지만 1910년대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만 해도 자가용을 굴리는 사람이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자동차의 소유가 보편화되는 이른바 ‘마이카 시대’에 접어들었다.
역사상 최초로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바로 ‘자동차의 왕’으로 불리는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이다. 포드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기계공의 길을 걸었고 청년 시절부터 자동차에 도전하였다. 그는 1896년에 자동차를 제작하는 데 성공한 후 기술자 겸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1903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포드자동차회사가 설립되었는데, 그 회사는 오늘날에도 제너럴 모터스, 크라이슬러와 함께 미국 자동차업계의 ‘빅 3’로 불리고 있다.
포드사의 급속한 성장은 ‘모델 T’에서 비롯되었다. 포드는 모델 T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나는 수많은 일반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생산할 것이다. 최고의 재료를 쓰고 최고의 기술자를 고용하여 현대 공학이 고안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한 디자인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지만 가격을 저렴하게 하여 적당한 봉급을 받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입해서 신이 내려주신 드넓은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만 해도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만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자동차는 기술자가 힘들여 제작한 고가품으로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의미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드는 생활필수품으로서의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의 출발점은 동일한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핀은 다른 핀과 똑같고, 성냥 또한 그렇다. 이것은 자동차도 마찬가지다”고 힘주어 말했다.
조립라인 완성→작업 단순화
1908년 10월에는 검정 색상의 소형자동차인 모델 T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새로운 합금강을 사용하여 견고할 뿐만 아니라 가벼우면서도 강력한 엔진을 탑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모델 T는 825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미국 사람들은 모델 T에게 ‘틴 리치’(Tin Lizzie) 혹은 ‘플리버’(Flivver)라는 애교스러운 별명을 붙였다. 틴 리치는 ‘털터리 자동차’를, 플리버는 ‘싸구려 자동차’를 뜻한다.
포드주의의 두 기둥: 컨베이어 벨트와 일당 5달러
포드사는 1910년에 4층으로 된 하이랜드 파크(Highland Park) 공장을 신설하였다. 그것은 작업이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된 최신 공장이었다. 4층에서는 차체가 만들어지고, 3층에서는 바퀴에 타이어가 부착되면서 차체에 페인트가 칠해졌다. 2층에서 모든 조립이 끝난 자동차는 경사면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와 최종 검사를 받았다. 모델 T의 생산대수는 1910년의 19,000대에서 1913년에는 248,000대로 크게 증가하였다.
하이랜드 파크를 건설하면서 포드는 생산과정을 연속화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당시에 그는 시카고로 여행하던 중에 푸줏간 주인이 도살한 소를 손수레로 이동시키면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부위별로 고기를 발라내는 것을 목격하였다. 포드는 유사한 기능을 가진 기계들을 그룹별로 묶어 본 후 나중에는 생산물을 중심으로 기계체계를 구성하였다. 결국 포드사의 생산과정은 1913년에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로 연결된 조립라인(assembly line)이 구축됨으로써 완성되었다. 이에 따라 공작물이 이동하고 노동자의 작업 위치는 고정되었는데,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영화인 <모던 타임즈>(Modern Times)는 이러한 상황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사회부’ 만들어 노동자 생화 조사
» 대중용 자동차의 효시, 포드의 ‘모델 T’. 1908년 10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검정 색상의 소형자동차 ‘모델 T’는 가볍지만 견고한 차체, 강력한 엔진, 싼 값으로, 그때까지 부자들의 사치품이던 자동차의 대중화에 길을 열었다.
조립라인이 완성되자 포드사의 생산성은 급속히 향상되었다. 그것은 1914년의 자동차 생산량과 노동자의 수를 비교해 보면 단번에 드러난다. 당시에 포드사에서는 13,000명의 노동자들이 26만 720대의 자동차를 생산했던 반면, 미국의 나머지 299개 자동차업체들은 28만 6,770대를 생산하기 위하여 66,350명의 노동자를 투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작업의 단순화는 높은 이직률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하루 종일 나사를 조이는 작업만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무슨 노동의 즐거움이 있겠는가? 1913년 한 해 동안 포드사는 100명의 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무려 936명을 고용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포드는 1914년 1월 5일에 ‘일당 5달러’(Five-Dollar Day)라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하루 8시간 노동에 대하여 최소한 5달러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미국의 노동자들이 하루 9시간 일한 대가로 2.38달러를 받았으니, 포드사는 통상적인 임금의 2배 이상을 보장했던 셈이다. 포드는 이를 가리켜 “내가 한 것 중에서 가장 멋진 비용절감 운동”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와 동시에 포드사는 노동자의 규율을 확립하기 위하여 ‘사회부’(Sociological Department)라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었다. 사회부는 노동자의 가정을 방문하여 노동자의 인간관계, 경제적 여건, 생활습관 등을 조사하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포드사의 경영진은 해당 노동자가 일당 5달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였다. 음주나 도박에 문제가 있는 노동자들은 경고를 받았고 그것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에는 해고되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포드사는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움직임을 막을 수 있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을 자동차 고객층으로 확보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20년대 중반에 모델 T의 가격은 290달러에 불과했는데 그것은 포드사에 근무했던 일반 노동자의 3달치 봉급과 비슷하였다. 이제 일반 노동자들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포드사는 컨베이어 벨트와 일당 5달러 정책을 통해 ‘대량생산’(mass production)과 ‘대중소비’(mass consumption)의 결합을 추구하였다. 1920년대부터 미국 사회는 풍요한 경제와 모델 T를 배경으로 자동차 대중화 시대에 돌입하여 1930년에는 가구당 1대의 자동차를 보유하게 되었다.
대량생산과 대중소비를 연결하기 위한 포드사의 실험은 이후에 ‘포드주의’(Fordism)로 불렸다. 그러나 포드사의 온정주의적 정책도 경영 환경이 나빠지자 계속해서 유지될 수 없었다. 경영 환경이 악화된 이유 중의 하나는 포드사가 한 가지 차종에 집착함으로써 소비자의 새로운 기호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24년은 포드에게 역설적인 한 해였다. 1924년은 모델 T의 생산량이 1천만 대를 넘어섰던 해이자 제너럴 모터스에서 시보레(Chevrolet)가 출시한 해였다. 시보레는 모델 T의 단점을 보완하면서도 신선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크랭크 대신에 전자 시동장치가 부착되었으며, 무거운 톱니바퀴식 변속기 대신에 부드러운 3단 기어가 장착되었다. 시보레는 자동차 시장을 급속히 잠식했지만, 포드는 자신에게 신이나 다름없는 검정색의 모델 T에 끝까지 집착하였다. 그는 자신의 차가 팔리지 않는 이유를 몰랐으며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포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고객은 누구나 원하는 자동차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이 까만 색깔인 한.”
“까만 차가 아니면 차가 아니다”
포드사의 상대적 쇠퇴와는 별도로 포드주의는 오랫동안 호평을 받았다. 예를 들어 공상과학소설의 백미로 평가되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에서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현대사회에 ‘A.F.’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After Ford’의 약칭으로서 포드가 현대사회를 건설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사실상 자본주의 경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고도 전례 없는 고도성장을 구가했으며, 거기에는 포드주의의 확립과 확산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포드주의는 상당한 위기를 맞이하였다. 포드주의는 소비자의 수요가 다양화되는 추세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으며, 그것은 막대한 설비투자나 임금의 상승과 결부되어 자본의 수익성을 감소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노동조합의 성장과 노동운동의 강화를 배경으로 포드주의는 노동을 비(非)인간화하는 상징으로 간주되어 극렬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결국 포드주의는 1970년대에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급속히 쇠퇴하였고 다양한 형태의 ‘포스트 포드주의’(post Fordism)가 모색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50년 봄 포드사 공장견학한 도요타 에이지, “포드식 대량생산은 일본에 맞지 않다” 결론 6년 뒤 미국 방문한 엔지니어 오노 다이이치는 슈퍼마켓 진열시스템을 차 생산라인에 도입 30년 뒤 미국 전문가들 도요타 배우려 일본으로
»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제조공정의 유연화로 미국 자동차회사들의 포디즘적 한계를 넘어섰으나 그에 따른 소비패턴 변화와 노동시장 유연화 등 급속한 환경변화로 유연화 자체가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됐다. 신뢰, 영구성, 안전성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즐거움을 더해서 만들어졌다는 새턴자동차의 광고 사진. 노동자를 영웅화함으로써 노동자의 권한을 강화했다고 선전하는 포스트 포디즘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기술 속 사상/(23) 포스트 포드주의
고급 기술을 배우기 위해 기술 선진국의 공장을 방문하는 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문은 가끔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뜻밖의 결과를 낳곤 한다.
1950년 봄, 일본이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시기에 도요타 회사의 자동차 생산을 담당하던 도요타 에이지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포드사의 로그공장을 방문했다. 그의 목적은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조립라인에서 작업을 하던 거대한 로그공장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직접 보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공장을 방문한 뒤에 도요타 에이지가 내린 결론은 포드사의 대량생산 방식이 일본에서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선 일본의 자동차 수요는 미국처럼 대량 소비가 가능할 정도로 많지 않았다. 또 일본 사람들은 한가지 모델에 만족하기보다 다양한 모델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전후의 일본 경제에서는 거대한 공장과 같은 높은 설비투자를 할 수가 없었으며, 공장의 노동자들도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단순 조립 노동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부품을 정교하게 깎고 여러 종류의 금형을 제작해야 했다. 원래 이 모든 것은 숙련된 장인과 노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나 (지금도 최고급 스포츠카는 수제품임을 기억하라), 헨리 포드는 인간으로부터 이 숙련을 빼앗아 이를 기계에 부여했다. 즉 포드의 공장에는 ‘숙련된’ 기계인 전용기계들과 탈숙련된 단순 조립 노동자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숙련노동을 대체한 포드의 전용기계는 매우 복잡하고 비쌌으며, 이를 설치하거나 바꾸는 데에 많은 설비투자가 필요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포드회사가 모델 T에서 모델 A로 생산라인을 바꾸는 데 오랜 시간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미국의 절반만 투자해 생산 두배로
도요타 에이지는 미국과 일본을 비교한 뒤에 ‘미국의 절반만 하자’고 판단했다. 전쟁 때문에 황폐화된 일본에는 자원이 부족했고, 자원이 없는 상태에서 생산에 투입되는 모든 것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생각이었다. 절반의 장비와 기계, 절반의 노동력, 절반의 공장부지, 그렇지만 하나의 제품에서 새로운 제품으로 옮겨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도 절반으로! 절반의 설비투자로 신제품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생각은 얼핏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포드사의 혁신이 거대한 설비투자 때문에 늦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했다.
도요타 회사의 엔지니어들은 이를 가능하게 할 기술혁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우선 새로운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새로운 금형을 만드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도요타사의 엔지니어 오도 다이이치는 이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프레스 공정에서 간단한 금형교환기술을 찾는데 성공했다. 이는 생산을 유연하게 만들면서 새로운 모델을 원하는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었다. 신속하게 많이 생산해서 원가절감을 이루었던 포드식의 대량생산의 이점에, 유연성과 양질의 제품 생산이라는 수공업생산의 이점을 결합한 혁신이었다. (도요타의 생산체계는 이후 대량mass생산과 대비되어 린lean생산으로 이름 붙여졌다).
도요타 생산방식의 핵심은 유연성에 있었다. 그렇지만 유연한 금형제작기술은 도요타 혁신의 끝이라기보다는 그 시작에 불과했다. 또 한번의 새로운 혁신은 전혀 예상치 않던 방향에서 찾아졌다.
오노 다이이치는 1956년에 미국을 방문했는데, 미국의 자동차 공장보다는 수퍼마켓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수퍼마켓은 물건을 고르는 구매자가 자신이 원하는 수량만큼의 물건을 집어 들고 계산을 하면 매니저가 빈 진열대를 재빨리 파악하고 이를 다시 채워넣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얘기지만, 일본에서 수퍼마켓을 구경하지 못했던 오노에게 미국의 수퍼마켓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는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서 물건이 채워지는 방식을 주시했고, 일본에 돌아와서 이를 자동차 생산에 응용했다.
기존의 자동차 생산은 부품의 공급에서 시작했다. 생산라인은 공급받은 부품을 조립해서 다음 라인으로 넘겼고, 그 다음 라인은 이를 받아서 다음 단계의 조립을 완성하는 식이었다. 앞 라인이 뒷 라인의 부품에 의존하다보니 속도가 조금이라도 늦어질 경우에 항상 재고가 문제가 되었다. 재고 혹은 낭비(muda むだ)를 줄이는 것은 ‘카이젠’이라고 불리던 도요타 공장의 오랜 경영철학이었는데, 미국에서 돌아온 오노는 공장의 생산라인을 수퍼마켓의 진열대 식으로 바꾸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소비자가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을 수퍼마켓 진열대에서 골라 들듯이, 한 생산라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부품만을 이전 생산라인으로부터 취사선택한다는 개념이었다. 모든 생산라인은 다음 생산라인을 위한 수퍼마켓이 되는 셈이었다.
‘저스트 인 타임’과 ‘간판’ 효과
‘저스트-인-타임’(Just-in-Time 혹은 JIT) 생산방식으로 불리게 된 이 시스템은 뒷 공정에서 필요한 만큼만 앞 공정의 부품들을 인수함으로써 재고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도요타 회사가 시장의 변화에 더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이러한 공정상의 혁신이 존재했다. 물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후공정에서 전공정에 생산량, 시기, 방법, 순서, 운반량, 운반시기와 같은 정보가 정확히 전달되어야 하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간판(kanban)’이었다. 간판은 조그만 사각형의 비닐 봉투에 종이쪽지를 집어넣는 것으로, 이는 생산과 조립에 대한 지침을 전달하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간판 스스로가 부품과 함께 움직임으로써 생산 공정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했다. 간판이 쌓여있는 곳은 당장 관리를 해야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도요타 회사의 생산체계는 노동자에게 더 큰 권한을 부여했다. 포드 공장을 희화화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와 같은 영화에서 보듯이, 포드의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기계의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와 같은 생산의 과정에 잘 적응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불량부품을 만들어 내거나 조립과정을 제대로 마무리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컨베이어 벨트를 비롯한 공장의 생산라인은 24시간 계속 돌아갔고, 여기에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요타 키운 ‘유연성’이 위험으로
반면에 도요타 회사의 노동자들은 불량 부품이 만들어졌거나 조립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생산라인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기계를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시스템은 ‘지도카’(Jidoka - 자동화)라고 명명되었다. 이를 영어로 번역할 경우, 일반적인 자동화를 의미하는 automation이 아니라 autonomation이라는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인간의 지능과 손길을 기계에 부여하는 자동화라는 뜻이다.
일본이 독특한 생산방식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의 회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만 1970년대와 특히 1980년대를 통해서 일본의 자동차들이 미국 시장에서 미국차를 밀어내기 시작하면서, 포드나 GM과 같은 미국의 거대 자동차 제국들은 일본의 도요타의 모델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도요타 에이지와 오노 다이이치가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미국 공장을 방문한 지 30년 만에, 미국의 엔지니어와 경영학자들이 도요타의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서 일본 공장을 찾아왔다. MIT의 경영학자들은 5백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받아서 5년간 일본의 도요타를 연구했다. 이들의 책은 1990년에 <세상을 바꾼 기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무렵부터 ‘유연성’은 생산은 물론 경영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유연한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변화하는 소비자들의 욕구가 충족되었지만, 이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더 급변하게 만들었다. 소비자의 수요를 안정적으로 예측한다는 것이 어려워지고 신제품의 생산 주기는 더 단축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산품, 소비패턴, 노동과정만이 아니라 노동 시장 자체도 유연해졌다. 범세계적인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평생직장을 보장하던 도요타 회사마저도 임시직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종업원들의 해고를 감행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어느덧 유연한 것은 불안정한 것, 심지어 위험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
거짓말탐지기까지 속인 샤론 스톤도 뇌영상 찍어 ‘P300’ 파를 잡아냈다면 꼼짝 못해 사랑도 우울증도 ‘정직한 뇌’로 판별하고 뇌 향상시키는 ‘똘똘한 약’이면 A학점도 거뜬 그렇지만 ‘뇌 프라이버시’는 누가 지켜주나
» 쇠파이프가 머리를 통과한 후에 급격한 성격 변화를 보인 피니어스 게이지의 사례는 인간의 성격이나 행동이 뇌의 특정 부위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했다. 이렇게 신경과학의 발전은 ‘뇌가 곧 나인가?’라는 심각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기술 속 사상/(24) 신경과학과 윤리
첩보영화는 거의 언제나 배신자에 대한 응징으로 끝난다. 손에 땀을 쥐면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끝날 때까지 누가 범인인지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 중 적어도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을 테지만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처럼 자신의 땀샘까지 통제해 거짓말 탐지기마저 무용지물로 만드는 경우들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의 땀샘이나 심장 대신 뇌의 반응을 찍어보면 어떨까? 샤론 스톤은 자신의 뇌마저도 거짓말을 하게 만들 수 있을까?
거짓말 탐지기 기능을 하는 뇌영상 기법은 몇몇 특수 기관에서 시범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뇌파(EEG) 중 ‘P300’이라 명명된 파의 경우 피험자가 친숙한 소리, 냄새, 광경을 지각할 때 그 진폭이 달라진다고 알려져 있다. 가령 희한한 모자를 보게 되면 맨날 쓰는 모자를 볼 때보다 그 파의 진폭이 작아진다. 그래서 이 기법은 용의자가 특정 범죄 조직의 세부사항에 대해 친숙한지를 알아내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뇌영상 기법 특수기관에서 시범
실제로 미국의 신경학자 파웰은 그것을 ‘뇌지문’이라 칭하고 최근 10여 년 동안 FBI와 공동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FBI 훈련을 이수한 사람들에게만 친숙한 상황을 주고 피험자의 P300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었는데 이 실험에서 실제 요원과 가짜 요원이 95%의 신뢰도 하에서 정확히 분류되었다. 물론 이들은 기존의 거짓말 탐지기를 모두 통과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법정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DNA지문과는 달리 뇌지문은 아직 중요한 증거로서 채택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관련 분야의 과학자 공동체가 그 기법의 신빙성을 아직까지는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래 뇌영상 기법은 뇌손상이나 뇌이상을 탐지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였다. 하지만 거짓말 탐지의 경우처럼 응용분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뇌영상으로 사람들의 능력, 성격, 감정 상태 등을 알아내려는 분야이다.
<사례 1> 한 부부가 이혼 법정에서 논쟁을 하고 있다. 부인은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갈라서자고 하지만, 남편은 부인에게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으면서 왜 그러느냐?”고 호소한다. 결말이 날 것 같지 않자 판사가 부인의 머리에 어떤 장치를 갖다 댄다. 그리고 모니터의 영상을 살피더니 곧 판결을 내린다.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로 검사한 결과 부인의 뇌가 부인의 사랑이 식었음을 입증함으로 남편은 부인의 요구를 들어줄 의무가 있다”
물론 이것이 가상의 법정이긴 하지만 사랑에 빠진 뇌에 특징적 변화가 생긴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예컨대 런던 대학의 인지신경학자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뇌가 애인의 사진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fMRI로 찍었다. 17명의 참가자에게 자신의 애인 사진과 동성 친구 사진을 보여주고 각 경우에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일어났는지를 9점 척도 상으로 점수를 매기게 했다. 그 결과 애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평균 7.46점, 친구의 경우는 3.2점이 나왔는데,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내측 도, 전측 대상피질, 그리고 미상핵과 피각 등의 활동이 증가하는 영상이 fMRI로 포착되었다.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뇌영상이 사랑과 같은 내밀한 프라이버시까지 제공할 수 있는 날이 곧 올지도 모른다.
유전자 말고 뇌 프로파일도 입수
정직한 뇌, 사랑에 빠진 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뇌영상 기술이 제기하는 윤리적 쟁점 중 하나는 바로 뇌 프라이버시에 관한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유전정보의 프라이버시 문제와 몇 가지 면에서 비교될 만하다. 우선, 뇌정보는 유전정보에 비해 더 구체적이다. 유전정보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에 그 최종 산물을 정확하게 예측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데 반해, 뇌정보는 관련 유전자들이 이미 몇 차례 발현된 후의 정보이다. 가령 유전정보는 “네가 우울증에 걸릴 개연성은 80%”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뇌정보는 “너는 지금 우울한 상태”라고 말한다.
» 드라마의 단골 소재 중 하나인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도 결국 달라진 뇌로 인해 생기는 관계의 혼란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대박을 터뜨린 <겨울 연가>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금 추세로 신경과학이 유전공학과 함께 발전하게 되면 머지않아 직장이나 보험회사에서 유전 프로파일뿐만 아니라 뇌 프로파일까지도 입수하려 들지 모른다. 그러면 뇌의 특정 부위가 남들보다 더 잘 활성화된다는 이유만으로 학업, 취업,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차별받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프라이버시 문제가 유전공학의 전유물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지 않을까? 유전적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유전적 조성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궁극적으로는 맞춤아기가 그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뇌의 경우는 어떤가?
<사례 2> 정주는 ㄱ대학 의대 본과 2학년 학생이다. 정신약물학 기말시험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일명 ‘똘똘한 약’으로 불리는 프로버길(provigil) II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이 약은 원래 집중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약으로 처방전이 필요한 경우인데, 요즘은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게도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다. 정주는 결국 A학점을 받았다.
그동안 정신약물들은 주로 치료 목적으로 개발돼 왔다. 예컨대 항우울제인 프로작과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처방되는 약이다. 수면 장애, 식욕 장애, 성기능 장애 등을 치료하기 위한 약물들도 흔하다.
하지만 기억, 학습, 집중력 등을 강화하는 정신자극제처럼 정신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약물들도 최근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이 연구되고 사용된 약이 집중력을 높여주는 리탈린과 아데럴인데, 원래는 이 약들도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를 겪는 아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일반인의 집중력 향상을 위해서도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고등학생 10%, 대학생 20%가 이미 리탈린을 불법으로 구입해서 복용한 경험이 있으며, 전세계적으로는 리탈린의 판매가 지난 10년 사이에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니 <사례 2>는 지금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뇌 다쳐 돌변한 범죄자의 윤리는
이런 약물들을 복용하는 문제는 유전자 강화프로그램에 몸을 맡기는 경우와 몇 가지 면에서 비교될 수 있다. 먼저, 후자는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는 변화를 꽤하는 경우이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둘째, 후자는 변화의 원천(유전자)을 조작하는 것이라면 전자는 변화의 매개자(뇌)를 조작하는 것이다. 셋째, 약물 복용에는 늘 ‘중독’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삼킬 수도 있었던 파란약처럼 말이다.
하지만 두 강화프로그램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윤리적 쟁점은 그것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차별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 프로그램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원래 두뇌’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늘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차별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들도 있다.
<사례 3> 민수는 원래 다정다감하고 친구들이 많은 대학생이었다. 여학생들에게도 매너 좋은 남학생으로 인기가 많았었다. 하지만 어느 날 큰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치고 나서는 친구들과 말다툼을 자주 하고 가끔씩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사고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을 성추행하다 입건된 적도 있다.
» 장대익/미국 터프츠대 인지연구소 객원교수
만일 민수의 변호사가 신경과학의 지식을 동원하여 나쁜 행동의 원인이 민수에게 있지 않고 민수의 손상된 뇌에 있다고 강변한다고 해보자. 당신이 판사라면 어떻게 판결하겠는가? 사실, 이 사례는 그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 버몬트 주의 철도노동자인 게이지는 1848년 어느 날 건설 현장에서 큰 폭발 사고를 당해 뇌의 전두엽 부분에 쇠파이프가 관통하는 큰 부상을 당했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지만 그 이후로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괴팍하고 무책임한) 성격의 소유자로 돌변했다. 그렇다면 사고 전의 민수와 게이지는 사고 후의 그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인가? 민수와 게이지의 행동은 도대체 누가 (혹은 무엇이) 책임져야 하는가?
이렇게 신경과학의 발전은 뇌 프라이버시 문제, 뇌 차별 문제, 행동의 도덕적?법적 책임 문제 등의 윤리적 쟁점들을 던져줄 뿐만 아니라 ‘뇌가 곧 나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도 제기한다. 이 모든 쟁점들은 ‘신경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뤄질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아는가? 복제된 인간만이 아니라 복제된 뇌, 강화된 뇌들도 미래를 활보하게 될지.
» 중합효소 연쇄반응을 설명하는 그림.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달은 이제 생물-무생물의 기존 개념조차 허물어뜨리는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 삶의 한계를 돌파하는 가능성을 열어줄 미래 신기술로 각광받고 있는 생명공학의 길은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으로 상징되는 디스토피아 세계로도 열려 있다.
생명공학은 흔히 미래의 신기술로 표상된다. 인류의 수명이 비약적으로 연장되고 모든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을 모르고 살 수 있는 유토피아적 세계가 생명공학의 발전과 더불어 도래하리라는 장밋빛 전망이 널리 유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 부풀려진 전망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생명공학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사람들이나 생명공학에서 미래 산업동력을 찾으려는 세계 여러 나라의 정책입안자에게는 생명공학의 이러한 비전이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생명공학은 다른 종류의 비젼도 가지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무명의 괴물이 상징하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그것이다. 통상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인간이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함부로 생명현상에 개입하다가는 감당하지 못할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이자 생명공학의 위험성에 대한 생생한 표식으로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기에 최근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맞춤아기’나 ‘수정란 줄기세포’ 등은 자연스럽게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의 이런 상징성과 연관되곤 한다.
오래된 첨단 바이오식품, 된장
이렇게 상반된 이미지가 생명공학과 관련되어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지만 실제로 생명공학은 이보다 훨씬 일상적인 수준에서 우리 곁에 있어왔던 기술이다. 생명공학을 생명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목적에 맞게 생명체를 변형하거나 이용하는 기술로 이해할 때 생명공학은 실은 매우 오래된 기술이다. 온갖 종류의 미생물을 사용하여 원래 재료가 가지고 있지 못한 특성, 특히 우리 몸에 이로운 특성을 갖도록 하는 발효기술은 이렇게 ‘오래된’ 생명공학 기술의 대표적인 예이다. 결국 된장이나 맥주는 좀 더 색다르게 들리는 이종장기 이식이나 유전자 은행만큼이나 생명공학의 대표적인 생산품인 것이다.
유토피아-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란 전망 사이
생명공학은 이미 친숙해 된장·맥주가 대표적
문제는 예측불가능한 복잡기술융합의 ‘산물’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 묻게 될 것
최첨단의 생명공학 담론에 익숙해진 우리가 된장의 발효기술을 생명공학 기술로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발효기술이나 누에를 이용한 양잠기술 등은 생명공학의 근간이 되는 생물학의 발전이나 생명공학적 발상을 가능하게 한 이론틀의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크나큰 공헌을 했다. 현대 생물학의 형성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파스퇴르나 코흐 모두가 포도주의 발효과정이나 맥주의 발효과정 그리고 누에 전염병이나 소의 탄저병에 대한 연구에서 자신들의 혁신적인 연구를 시작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은 미생물이 눈에 보이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수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그 중 어떤 것은 우리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조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이후 생명공학의 발전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패턴이었다.
이와 더불어 현대 생명공학의 발전에 기초가 되었던 생각은 생명이 우리에게 친숙한 다른 물질과 질적으로 무척 다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원리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생명체는 무생물과 달리 ‘생기(vitality)’라는 비물질적인 생명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생명체와 무생물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법칙과 설명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했던 사건은 그 전까지 생명체와 무생물의 구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여겨지던 몇 가지 결정적 증거들이 경험적으로 반박된 일이다. 대표적인 예가 생명체 내에서만 합성이 된다고(그러므로 생명체에 고유한 ‘생기’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성될 수 있는) 알려졌던 몇 가지 유기화합물이 실제로는 생명체 밖에서도 생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1828년 프레드리히 뵐러가 무기물인 사이안산암모늄으로부터 유기물인 요소를 합성한 것이 가장 유명하다. 이 합성을 계기로 전통적으로 생명체만이 생성할 수 있는 유기물질을 다루는 분야로 정의되었던 유기화학이 탄소-수소 결합물의 화학으로 다시 정의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도 이처럼 생명체와 무생물 사이의 원리적 구분이 정당성을 잃어가던 시대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물질적인 생명의 힘 ‘생기’ 작용
20세기 이후 샘명공학은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발전이 결합되면서 비약적인 도약의 시기를 갖는다. 처음에는 박테리아처럼 비교적 단순한 유전과정을 갖는 원핵생물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한 분자유전학은 점차적으로 보다 복잡한 유전기작과 유전정보 오류수정 및 편집과정을 거치는 진핵생물에 대한 연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원하는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유전자 조각을 엄청나게 대량으로 복사할 수 있는 중합효소 연쇄반응(PCR) 기법과 이를 다시 다른 생명체에 거꾸로 주입시켜 그 생명체의 유전정보 내용을 변형시킬 수 있는 역전사(RT) 기법의 발견은 이후 유전공학 발전의 필수적인 기술을 제공해주게 된다. 이 두 과정을 결합하면 원리적으로는 원하는 형질을 발현시키는 유전정보를 한 생물체에서 빼 낸 다음 이를 대량으로 증폭시킨 후 이 유전정보가 발현되기를 원하는 다른 생명체에 주입하여 원하는 형질이 발현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병충해에 강한 토마토나 우유를 더 많이 생산하는 젖소처럼 원하는 형질을 유전공학적 기법으로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이 출현하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런 생명공학의 전능성에 대한 기대는 표준적인 생명공학 교과서를 조금만 살펴봐도 지나친 것임이 드러난다. 우선 위의 절차는 우리가 원하는 형질(예를 들어, ‘병충해에 강한’)에 해당되는 유전자가 정확히 하나 존재하고 그 유전자가 토마토에게 병충해에 대한 저항성을 강화시키는 일 이외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는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매끈하게 성립한다. 그러나 실제로 유전학의 상식적 사실은 한 유전자는 대개 하나 이상의 형질 발현에 관여하고 역으로 한 형질의 발현에는 대개 하나 이상의 유전자가 관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충해에 강하도록’ 토마토의 특정 유전자를 조절했는데 원하지도 않게 토마토의 독성이 강화되는 결과를 얻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역으로 ‘병충해에 강하도록’ 유전자를 분명히 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병충해의 저항성과 관련된 다른 유전자의 영향으로 우리가 원한 효과를 충분히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책임있는 유전공학자라면 병충해에 충분히 강하지 못한 토마토나 병충해에는 강하지만 독성이 높은 토마토를 제품으로 내놓을 리는 만무하다. 정직한 연구자로서 유전공학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노력하여 원하지 않는 형질이 발현되는 것을 막고 원하는 형질이 안정적으로 발현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부작용 ‘섬뜩’
문제는 우리가 유전자의 복잡한 네트워크 상호작용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현재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이나 장기적으로만 발현되는 부작용에 대해서는 미리 알아낼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유전공학의 산물이 진정으로 안전한지 여부는 궁극적으로는 직접 사용해봄으로써만 검증이 가능하다는 다소 섬뜩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마치 자동차가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인명살해 수단으로 돌변할 것이라는 점을 상당기간 사용해보고서야 알 수 있었듯이 말이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니까 자동차 사용을 당장 그만 두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할 사람이 많지 않듯이 이상의 고려가 유전공학 연구가 당장 중단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전공학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수많은 잠재적 혜택과 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많은 경우 미리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다양한 위험 사이에서 사회적 공감대에 기초한 적절한 선택을 수행하는 일이다. 생명공학이 우리에게 기술적인 도전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을 제기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전학의 중대한 영향만큼이나 현대 생명공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갖는 존재론적 측면이다. 현대 생명공학은 다른 첨단기술들과 융합되어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극미세계를 다루는 나노공학과 연계하여 나노바이오 소자가 건강진단이나 질병치료에 광범위하게 사용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고 정보공학과 생명공학의 결합도 인간 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점차 활용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러한 나노-바이오-정보 기술의 결합이 인체의 많은 영역을 기계와 유기물질로 이루어진 각종 인공장치로 채울 가능성이 높다. 좀 더 먼 미래에는 뇌의 일부조차 진화한 생명공학적 컴퓨터가 대체할 수도 있다. 어쩌면 좀 더 극단적으로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전망하듯 아예 자신을 웹상의 적당한 곳에 ‘내려놓고’ 온라인에서의 삶을 추구하려는 사람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커다란 물음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생명공학이 형이상학과 만나게 될 미래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그때가 되었을 때 우리가 잘 준비되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인간과 감정 통하는 로봇 ‘휴머노이드’ 진화중 반대로 로봇 닮은 인간 ‘사이보그’ 연구도 활발 뇌까지 대체된다면 누가 진짜 인간일까 갈 길 멀지만 ‘인간-기계’ 공존시대 대비해야
» MIT 미디어랩의 휴머노이드 연구그룹에서 개발한 키즈멧은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도 표현한다. 가령 기쁨, 슬픔, 역겨움, 놀람, 화가난 표정등을 할 수 있다.
기술 속 사상/(26) 휴머노이드와 사이보그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2004년에 개봉된 윌 스미스 주연의 <아이 로봇 i, Robot> 속으로 들어가보자. 2035년 어느 날, 시카고 경찰 스프너(윌 스미스 분)는 로봇 모델 NS-5를 창조한 래닝 박사의 살인용의자로 ‘써니’라 불리는 로봇을 체포한다. 취조실에 앉아있는 써니 앞에서 스프너는 상관에게 ‘윙크’를 하며 들어온다. 그 광경을 신기하게 지켜본 써니는 그 윙크가 무엇을 의미하냐고 다그치지만 스프너는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린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로봇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라고. 물론, 영화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무안하게도 써니가 감정을 진화시킨 최초의 로봇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스프너의 목숨을 살린 것은 써니가 배운 그 윙크였다.
윌 스미스에게 윙크하던 ‘써니’
하지만 감정이라니! 그것은 인류의 지성사에서 거의 언제나 이성의 적이지 않았던가? 실제로, 불과 20년 전만 해도 감정이 인공지능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인간의 독특성을 인지능력(전통적 의미에서 이성)에서 찾았으며 그 능력은 감정과 거의 언제나 길항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전제했다. “이성을 잃었다”는 그래서 나온 부정적 표현이다. 그 순간 그 사람은 잠시 짐승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정을 잃었다”는 표현은 쓰지 않으며 게다가 감정을 잃었다고 해서 짐승(혹은 로봇) 취급을 당하지도 않는다. 감정은 동물의 본성을 설명하는 키워드일 뿐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감정에 대한 인지과학적 연구들로 인해 기존의 관념들이 도전을 받고 있다. 예컨대 감정을 담당하는 안와전두엽 피질에 손상이 생기면 이성적 판단도 함께 흐려진다는 결과가 보고되는 등, ‘이성 대 감정’이라는 전통적 이분법이 재고되기 시작했으며, 감정 교류가 가능한 ‘사회 로봇(sociable robot)’을 만드는 일이 인공지능 로봇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되었다.
<아이 로봇>외에도 최근의 <에이 아이>, <바이센테니얼 맨>, 그리고 고전적인 <블레이드 러너> 같은 SF 영화들은 이미 감정과 의식을 가진 로봇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영화 속에서 로봇은 우리 인간과 감정적 교감을 나누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여느 인간보다 더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이다.
현실의 로봇은 어떤가? 우리는 혼다의 아시모와 KAIST의 휴보가 인간과 똑같은 운동능력을 가지도록 진화한다 해도 여전히 그것은 운동신경이 발달한 기계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물론 그것을 구현하는 과제가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터넷 채팅을 통해 재밌는 대화를 나눈 상대방이 진짜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이었다고 하면 우리는 깜짝 놀란다. 즉 의사소통, 혹은 감정교감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대상에게 단지 ‘기계’라는 이름을 달아주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로봇 연구의 메카로 알려져 있는 MIT 미디어랩의 몇몇 실험실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의 감정을 ‘읽고’ 그에 맞게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로봇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가령 아이들의 수학 문제 풀이를 도와주는 로봇이 있다. 이 로봇은 아이에게 문제를 내주고 풀이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아이가 계속 틀리거나 막혀도 “땡! 다시 시도해 보세요.”라고만 하지 않는다. 대신 “나도 이런 문제가 나오면 너무 화가 나. 잠시 만화 좀 보다가 다시 해볼까?”라고 대답한다. 그 로봇에게는 아이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장치가 부착되어 있어서 그가 화가 났는지, 긴장하고 있는지, 지겨워하는지, 흥미로워하는지에 따라 적절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이 로봇의 궁극적 목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자폐증 환자를 돕는 것이다.
로봇이 부적절한 대우 느낄 수도
» 영화 <아이로봇>에서 스프너는 써니에게 윙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로봇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아냥댄다. 감정은 인간과 로봇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와도 같다.
이와 비슷한 로봇인 ‘키즈멧(Kismet)’은 상대방의 얼굴 표정뿐만 아니라, 시선, 몸동작, 말을 분석하여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또한 ‘리플리(repley)’라는 로봇은 바이센테니얼 맨의 농담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렇게 로봇 연구의 뒤에는 전자 및 기계공학뿐만 아니라 언어학, 발달심리학, 인지심리학, 컴퓨터과학, 동물행동학 등이 매우 중요한 이론적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로봇이 진정으로 감정을 얻게 되는 날은 동물, 인간, 기계가 한 직선 위에 올려지는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로봇은 자신이 (부)적절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까지 갖게 될지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심각하게 묻는 로봇이 생겨날 수도 있다. 똑같은 모델로 양산되었다는 사실 앞에 깊은 좌절감을 느끼는 로봇도 있을 것이다. <에이 아이>의 데이빗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영화 <애니 매트릭스>에서처럼 로봇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인간과의 공존을 희망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들에게 선거권을 줘야 하는가? 그들을 위한 노동법을 만들어줘야 하는가?
혹자는 이런 질문들이 SF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불과 20-30년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물의 권리’라는 단어에 대해 황당함을 느꼈는지를 떠올려 보자. 동물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이 쌓이면서 우리는 이제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느낌이 우리와 교감하는 동물에 대해서만 작동하리라는 법은 없다. 우리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로봇이 생기면 우리는 틀림없이 훨씬 더 심각한 고민에 빠질 것이다. 대화가 불가능한 동물들보다 대화가 가능한 로봇들이 우리의 정서에 더 깊은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사이보그엔 정체성 물음 뒤따라
한편 인간을 닮은 로봇, 즉 ‘휴머노이드(humanoid)’를 만들려는 인간의 꿈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또 다른 욕망이 있다. 그것은 로봇을 닮은 인간, 즉 ‘사이보그(cyborg)’가 되려는 욕망이다. 사이보그는 짧은 유통기한을 가진 신체의 여러 부분들을 그렇지 않은 기계 및 전자 장치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생긴 산물이다.
몇 달 전 저명한 과학 전문지 <네이처>는 뇌에 칩을 이식한 20대 척수마비 환자(매튜 네이글)의 사진을 표지로 올렸다. 그는 ‘뇌-컴퓨터 연결장치(BCI)’를 개발하는 한 회사로부터 ‘브레인케이트’라는 칩을 운동 피질에 이식받아 자신의 생각을 전자 신호로 다른 컴퓨터에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전달된 신호를 통해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고도 뭔가를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이 실험은 몇 년 전 원숭이에게 신경칩을 심어 원숭이의 생각만으로도 로봇 팔을 움직이게 하는 실험보다 한 단계 진보한 것이었다.
사실, 사이보그는 주로 손, 팔, 다리, 심장, 망막 등 이식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신체 기관들에 대해 인공 보철물을 만드는 식으로 진화해왔다. 가령, 심장에 문제가 많은 사람에게 튼튼하고 수명이 긴 인공 심장을 이식함으로써 생명을 연장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매튜의 사례에서처럼 뇌의 부분에 직접적으로 인공물을 삽입하는 사이보그 연구가 활발히 진행중이다.
뇌에 신경칩을 이식받은 매튜는 아직은 매튜이다. 즉, 그 칩은 매튜의 두뇌가 하는 일을 돕는 보조 장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십, 수천, 수만 개의 그런 신경칩이 뇌 속에 이식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뇌의 생체조직이 오히려 그 칩들의 보조장치가 되는 때가 온다고 해보자. 그 때도 우리는 그 사이보그를 매튜라고 불러야 하는가? 인간이 사이보그가 되려는 욕망 뒤에는 이렇게 자기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 뒤따른다.
사이보그가 보편화되는 시대가 오면 인류는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이보그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기계의 하이브리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를 문자 그대로 기계부품처럼 취급하게 되면 온갖 형태의 하이브리드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모든 신체를 중성화해 성별을 없앤 사이보그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뇌가 모두 기계로 대체되지 않는 이상 수십 만 년의 진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 우리의 뇌와 마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SF에 등장하는 휴머노이드와 사이보그까지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시간이 걸릴 뿐이지 언젠가는 그들과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체세포 복제술과 줄기세포 연구 등은 불과 10년 전만해도 소수의 생명공학자들에게만 쟁점이 되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명공학에 대한 사회윤리적 쟁점들이 대학 입시 문제에 단골이 되었을 정도로 당면한 과제가 되었다. 휴머노이드와 사이보그에 대한 연구도 이와 비슷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바로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로봇 윤리학을 학교에서 배워야만 할지도 모른다. 옆 자리의 사이보그와 함께?
‘머리카락 만분의 1’ 최소단위 물질 ‘나노’... 입자 작아지면 물질의 색깔·속성까지 바뀌어 때 덜타는 유리·안 지워지는 페인트 등 이미 친숙, 하지만 너무 작아 위험 일으킬 우려도 크다
» 원자 수준 크기의 물질을 다루는 나노 세계를 이해하고 조작할 수 있다면 공업 생산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생긴다. 1993년 IBM(아이비엠)의 과학자들이 구리 표면 위에 철 원자를 하나씩 배열해서 만들어낸 나노 크기의 스타디움 모양. 나노 수준에서의 물질 제어가 원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걸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술 속 사상/(27) 나노기술의 세계
나노(nano)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난장이를 뜻하는 나노스(nanos)에서 왔다고 한다. 아주 작은 길이 단위로 적절한 유래라고 생각된다. 1 나노미터는 10억분의 1 미터이다. 이렇게 말해서는 엄청 작은 단위라는 것은 알겠는데 느낌이 잘 안 올 수 있다. 그래서 나노 연구자들이 흔히 드는 예가 머리카락과의 비교이다. 가는 머리카락이 대개 10 마이크로미터 정도니까 1 나노미터에 비하면 가는 머리카락도 만 배나 더 두껍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원자(atom)이라는 말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궁극단위를 의미했고 실제로 꽤 오랫동안 원자는 물질의 최소단위로 여겨졌다. 지금도 현실적으로 핵분열이나 핵융합이 아니고서는 원자를 쪼개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런데 1 나노미터는 원자 서너 개의 크기에 해당되니 나노의 세계는 안정적인 물질의 최소단위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정말 엄청나게 작은 세계다.
그리스어 ‘난쟁이’에서 유래
현재 대다수의 산업 선진국은 이렇게 작은 나노 영역을 과학적으로 탐구하여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고자 자국의 연구자원의 상당 부분을 투자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이미 정부는 2002년에 ‘나노기술개발촉진법’을 제정하여 나노기술에 매년 상당한 연구비를 투여하고 있고 민간 기업의 투자도 활발하다. 도대체 나노의 세계에 무엇이 있기에 이렇게 기술개발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일까?
통상적으로 제시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재 우리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물품의 제조방식은 조각 작품을 만드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즉, 충분한 크기의 물질을 잘 깎아서 원하는 조각만 골라내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실제 조각처럼 큰 물건의 경우만이 아니라 색종이를 잘 오려서 토끼를 만들거나 반도체 웨이퍼를 잘 녹여내어 반도체 칩을 만드는 과정 모두에 작용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도 원하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블럭쌓기를 떠올려 보라. 만약 우리가 블럭처럼 적당한 단위의 물질을 개별적으로 조립할 수 있다면 이 방식으로 원하는 형태의 원하는 기능을 가진 물질을 만드는 것이 원칙적으로는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이런 일을 나노 수준에서 원자들을 가지고 할 수 있다면 물질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원하는 물건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단위 물질을 조립하는 과정에는 깎아내는 과정과 달리 버리는 부분이 거의 없으니 자원낭비와 환경오염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볼 수 있다. 또한 원자를 조립하는 일은 원칙적으로는 매우 적은 에너지만으로도 할 수 있을 것이므로 에너지 또한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나노의 세게를 이해하고 잘 조작할 수 있다면 현재 공업 생산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1959년 한 강연에서 유명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했다는 “밑바닥에는 충분한 공간이 있다”는 말이 자주 인용된다. 나노 세계(밑바닥)에는 우리가 아직 탐험하지 않았던 충분한 가능성과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가능한 재료의 특성과 공간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나노기술이 추구하는 지향점이 기존 기술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설명해주지만 실제로 나노 기술에 왜 그토록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현재 나노기술의 연구의 대부분은 여전히 블럭쌓기의 방식보다는 깎아만들기의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각국이 나노기술에 열광하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다른 데서 즉, 물질이 특정 크기 이하가 되면 평소와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노란 색을 띄는 금은 사금이라고 하는 모래 알갱이 수준에서도 여전히 노란색을 띤다. 그래서 아예 황금색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20 나노미터 정도가 되면 빨간 색이 된다. 금이라는 물질은 분명히 동일한 데 단순히 입자 크기가 작아진다고 해서 색깔과 같은 친숙한 속성이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색깔은 물질 고유의 속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사실은 이미 갈릴레오 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현대 과학의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빨간 장미는 여러 파장의 빛이 섞인 백색광에서 정확히 빨간 색만 제외하고는 장미가 모두 흡수하기 때문에 빨갛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빨간 장미는 빨간 속성 빼고 다른 모든 색깔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빨갛다는 다소 역설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색깔의 이런 특징은 질량과 같은 물리적 속성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갈릴레오의 영향을 받은 근대 경험주의 철학자 로크는 물질이 가진 속성을 질량처럼 물질 본유적인 성질과 색깔처럼 우리 지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 나눌 정도였다.
하지만 나노 영역에서 달라지는 것은 색깔만이 아니다. 로크조차 물질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인정했을 화학적, 전자기적 속성도 달라지는 것이다. 화학적 속성이 달라지는 이유는 동일한 물질이라도 잘게 쪼갤수록 표면적이 커진다는 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화학작용이 보다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티타니아 입자 크기가 20 나노미터 정도 되면 갑자기 약한 빛 아래서도 샬균력, 세척력, 김서림 방지효과 등의 특성을 나타낸다. 우리에게는 나노기술을 친숙하게 만든 은나노 세탁기라든가 잘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 ‘스스로 청소하는(때가 잘 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리창 등은 모두 이처럼 적당한 크기 이하에서 일상적인 물질이 특별한 성질을 나타낸다는 사실에 이용한 것이다.
일상-양자역활 세계의 중간계
» 2001년 일본 오사카 대학 연구팀이 만든 나노 개. 구리 표면에 원자를 하나씩 입혀서 만든 일종의 ‘작품’이다.
비슷한 이유로 약품을 나노입자로 만들면 체내에서 흡수되는 정도나 약효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게다가 코발트와 같은 나노 입자를 적당히 규칙적으로 배열한 후 강한 자성으로 조정하면 하나하나의 입자를 기억장소로 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적당한 나노 구조물을 차세대 기억장치로 개발하려고 노력하는 근거가 된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물질의 근본적인 속성이라고 여겨지는 물리화학적 속성조차 실은 길이 척도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나노기술자들은 이런 현상을 이용하여 각종 유용한 소자나 물질을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나노의 세계가 우리에게는 익숙한 세계와 매우 다르다는 사실은 실은 충분히 에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리학자들은 세계를 기술하는 두 가지 방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우리의 일상세계를 기술하는 고전역학이고 다른 하나는 극히 작은 소립자의 세계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이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양자역학이 이 모든 세계를 모두 다 기술하는 이론이고 고전역학은 일상세계에서 양자역학을 근사적으로 적용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실제로 일상세계에서는 양자역학적 효과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각자는 단단한 벽을 상처하나 없이 지나 순식간에 다른 방으로 이동할 수 있는 양자역학적 확률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세계에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일상세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양자역학적 효과는 길이 척도가 작아질수록 점점 더 커지다가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경우처럼 삶과 죽음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될 수도 있다.
나노의 세계는 우리의 일상적 직관이 잘 통용되는 세계와 별의별 희한한 일이 일어나는 양자역학의 세계 중간쯤에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일상세계와는 달리 기묘한 양자역학적 효과가 상당히 강하게 나타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이 효과를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어쩌면 미래에는 과학소설에 등장하듯 나노기계를 이용하여 뇌 세포 사이의 시냅스 연결을 재배열하는 방식으로 특정 정신적 능력을 강화하거나 몸속을 돌아다니며 인체 곳곳의 문제를 해결하는 나노 의료로봇의 혜택을 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현재 기술 수준으로 볼 때 이런 일들은 설사 장차 가능하더라도 앞으로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처럼 나노기술의 장밋빛 전망은 궁극적으로는 나노 물질의 작은 크기에서 나온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나노기술의 위험성도 역시 나노물질의 작은 크기에서 나온다.
몸의 여과장치마저 그대로 통과
우리 인류는 나노 수준의 입자가 대량으로 떠도는 환경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우리의 코 점막이나 폐의 여과장치 등은 나노입자보다 천배나 더 큰 마이크로 입자를 걸러내기에 적당하게 발달해왔다. 그러므로 나노물질은 우리 몸의 여과장치를 그대로 통과하여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쥐 폐 조직에 주입된 탄소나노튜브가 폐 조직을 손상시킨 실험결과가 있고 입자의 크기를 달리해서 쥐에게 흡입시켰을 때 오직 나노수준의 미세한 입자만이 치명적이었다는 실험결과도 있다. 게다가 나노소자는 워낙 작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물류에 부착하여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의 신상정보가 광범위하게 수집되는 조지 오웰적 비젼을 실현시키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
신기술에 대한 인류의 역사적 경험을 살펴볼 때 나노기술이 인류에게 아무런 위험도 제기하지 않으면서 혜택만 가져다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볼테르 소설에 등장하는 팽글로스 교수만큼이나 순진한 태도이다. 우리도 깡디드가 그랬던 것처럼 나노기술에 대해 균형있는 관점을 찾아내야 한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유비쿼터스 컴퓨팅 환경은 ‘양날의 칼’ 내가 타자의 정보에 무한히 접근할 수 있다는 건 타자도 내 정보에 무한히 접근할 수 있단 뜻이므로
» 유비쿼터스란 말은 ‘언제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시공간적인 제한을 받지 않고 네트워크에 접속해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고 사용할 수 있음을 지칭한 것이다. 사진은 달리는 차 안에서 초고속 인터넷을 쓸 수 있는 무선 휴대인터넷 와이브로를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
기술 속 사상/(28)유비쿼터스 기술의 양면성
1988년 미국 제록스사 팰로알토(Palo Alto)연구소에서 일하던 마크 와이저(Mark Weiser) 박사는 미래 정보사회의 특성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주장을 하였다. “사용자가 네트워크나 컴퓨터를 의식하지 않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음 없이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정보통신 환경”, 소위 “유비쿼터스 컴퓨팅(ubiquitous computing) 환경”이 미래 정보사회를 규정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당시는 핸드폰과 같은 정보통신 기기조차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PC나 인터넷 사용도 널리 보편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임을 생각한다면, 와이저의 주장은 매우 혁명적인 발상이었고 실현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의 말은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18년전 와이저 박사의 놀라운 예견
핸드폰을 사용하여 원격으로 자신의 집에 켜있는 불을 끄거나 실내 공기를 정화하고 온도를 조절하는 일, GPS를 통한 교통관제 서비스에서처럼 장소나 사물 또는 사람에 센서 혹은 태그(일종의 전자 바코드)를 부착시켜 대상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추적?파악하고 정보화하는 일, 옷이나 안경 등에 부착된 소형 바이오-컴퓨터를 통해 나의 건강 상태를 무선 네트워킹으로 병원에 수시로 알리고 원격으로 진료를 받는 일, 이동하면서 개인 정보기기로 음성·영상·데이터의 융합 정보를 받아 보거나 은행 업무를 보고 쇼핑을 하는 일, 생산 단계에서부터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농산물이나 축산물의 이동 및 관리 과정을 모니터링 하는 일 등등. 우리 생활 속에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이 적용될 영역은 이처럼 무궁무진하다.
유비쿼터스란 말은 원래 시공을 초월해 ‘언제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마크 와이저가 이를 정보사회에 적용한 것인데,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시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고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고 사용할 수 있음을 지칭한 것이다. 이러한 환경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다. 하나는 우리 주변의 모든 대상들에 정보 처리 능력을 갖춘 소형화된 컴퓨터 또는 지능적인 센서나 태그를 부착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기술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는 모든 사물에 전자태그를 부착하여 사물의 정보 및 주변 상황정보를 감지하고 인식하는데 필요한 기술이다. 사물에 상황 인지능력을 부여하는 것인 만큼 사물에 부착시킬 컴퓨터, 전자태그, 센서 등을 소형화하고 지능화하는 것이 기술적 관건이 된다. 다른 하나는 이들 상호 간에 정보 교환이 가능하도록 이들은 물론 사이버 공간까지 연결한 유기적인 통합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모바일 무선통신망, 초고속인터넷 등이 최근 개발 중에 있는데, 다양한 네트워크들 간의 통합이 관건이다.
기술은 ‘배경’으로 사라지게 돼
이러한 기반 기술들로 인해 유비쿼터스 컴퓨팅 환경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기존의 정보화 작업이 컴퓨터 속의 가상공간에서 전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유비쿼터스 컴퓨팅 작업은 현실세계와 가상공간이 결합한 공간 곧 확장된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기존 정보화는 현실세계를 컴퓨터 내의 가상공간 안에 재현하고 현실세계는 배제한 채 그 공간 안에서만 필요한 정보화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두 공간 사이의 단절을 오히려 강화시켰다. 그러나 유비쿼터스 컴퓨팅 작업은 사이버공간의 중요한 특성과 작동원리를 현실세계의 물리적 공간에 확대?적용하는 방식으로 두 공간의 융합을 추구함으로써 두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이는 정보사회의 발전과 관련하여 하나의 획기적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현실세계 속에 남아 컴퓨터 속으로 들어올 수 없는 대상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한 대상들의 경우 우리가 직접 조사하기 전에는 그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잘못되고 있으며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 그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없다. 또한 인터넷과 같은 사이버공간에 지금처럼 접속하는 방식도 때와 장소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항상 컴퓨터를 들고 다니는 것도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일이다. 따라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가 디지털 정보의 흐름을 매개로 통합하는 새로운 공간의 창출은 정보화의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 분명히 필요하다.
둘째, 기술이 사물 속에 은닉(혹은 은폐)된다. 컴퓨터 칩이나 센서들, 대부분의 통신 장치들은 소형화되어 사물들 속에 보이지 않게 내재한다. 그리고 사물 속에 심어진 장치들은 스스로 주위에 존재하는 다른 사물의 정체성을 식별하고, 주변 환경 및 사물들의 변화를 지각·감시·추적한다. 사물이 지능화되는 것이다. 여기서 얻은 정보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컴퓨터나 네트워크와 같은 정보 장치들에 의식적으로 접근하지 않고도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이러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수많은 컴퓨터들이 한 사람을 위해 움직이는 꼴이다. 이는 인간과 컴퓨터의 관계에서 컴퓨터 중심의 환경이 사용자인 인간 중심의 환경으로 바뀌는 중요한 변화를 예고한다. 한편 같은 이유에서 역으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정보장치들에 의해 감시와 추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새로운 환경에서 “기술은 배경으로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피부로 느끼거나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확산되는 것이다.
셋째, 컴퓨터가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물과 언제 어디서나 연결되어 있다. 사물 속에 내재된 컴퓨터들끼리 무선 네트워크로 연결돼 서로 정보를 주고받음으로써 사물들 간에 자율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나아가 정보-사람-사물-기기를 연결하는 유기적 통합 네트워크가 구축된다면 이들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연결은 사실상 디지털 기술이 지니는 중요한 특성인 융합가능성, 곧 디지털 컨버전스(convergence)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음성·영상·문자와 같은 정보 데이터들의 통합, 방송·통신·인터넷과 같은 네트워크들의 통합, 컴퓨터·통신·정보가전과 같은 정보기기들의 통합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유비쿼터스 컴퓨팅 환경이 지닌 이와 같은 특징들을 고려해 볼 때,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은 미래의 인간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 분명하다. 디지털 네트워크 체계를 현실세계에까지 확대 적용하는 것이므로, 가령 시공간적 제약의 극복이라든가 정보에의 무한한 접근성 그리고 의사소통의 용이성과 같은 가상세계만의 독특한 장점들을 현실세계에서도 그대로 구현하여 누리는 새로운 삶의 양식, 곧 디지털 라이프(digital life)가 등장할 것이다.
정보권력 빅브러더 사회 올 수도
우리가 많이 들어 왔던 스마트홈(smart home), 유비쿼터스-건강(u-healthcare), 유비쿼터스-도시(u-city) 등이 그 좋은 예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생활의 편의성을 엄청나게 증대시킨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용자 개인의 상황에 부합하는 맞춤형 서비스를 중심으로 편의성에서의 혁명이 예상된다.
그러나 유비쿼터스 기술의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 뒤에는, 우리가 결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부정적인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가 전자감시사회의 출현이다. 은닉된 기술과 무선 네트워크의 보편화로 개인이 보호받지 못하고 개인정보가 심각하게 유출될 가능성이 높다. 개인은 언제 어느 곳에 있든 고성능 CCTV, GPS, 무선전화위치 감응기 등에 의해 자신의 모든 행적이 낱낱이 기록되고 분석되는 완벽한 감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현재 영국 런던의 경우 15만대의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한 사람이 하루 평균 300번 정도 카메라에 노출되고 있음을 볼 때, 이 보다 훨씬 정보노출이 심한 유비쿼터스 컴퓨팅 환경에서 그 감시능력이 얼마 만큼일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또한 막강한 정보 권력의 등장도 예상된다. 첨단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국가나 어떤 조직이 축적과 유통이 용이한 디지털 정보들을 장악함으로써 개인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교묘한 방식으로 실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수의 빅브라더들(Big Brothers)이 통치하는 전자 파놉티콘 사회가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심각한 우려가 아니더라도 개인 프라이버시의 침해 및 개인 정보의 악용 문제가 시도 때도 없이 제기될 것이다. 전자체계에 대한 인간의 종속이 심화되고 그에 따른 위험도 증가할 것이다. 정보 및 네트워크 시스템에 대한 보안 문제가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해결되지 못한다면, 유비쿼터스 사회는 편리성이 증대하는 만큼 재앙도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
내가 타자에 관한 모든 정보에 무한히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역으로 타자가 나에 관한 모든 정보에 무한히 접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면에서 두 상황은 대칭적이다. 이는 유비쿼터스 사회에서 공유와 감시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음을 말해 준다.
문서 구술용도를 기대했던 발명가는 실망했지만 축음기의 살아남은 기능은 기술개발자가 예측하지 못했던 ‘소리로서 즐거움’ 개발자가 원하는 대로만 기술이 사용되지 않기에 기술연구·개발에 일반인의 참여가 중요해
» 특정 기술에 대한 시장규모를 예측할 때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기술개발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 기술을 사용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다. 하지만 이 기대는 종종 충족되지 않는다.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한 축음기가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든지 문서를 구술시키는 용도로 사용될 것이라 기대했으나 현재 축음기의 중요한 용도는 기술개발자가 예측하지 못한 음악재생이다.
기술 속 사상/(29) 현대 기술연구와 사회적 합의
기술연구와 사회적 합의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진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은 기술연구와 사회적 ‘필요’일 것이다. 현대 기술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단지 100년 전과만 비교해도 놀라울 정도로 비약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변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과거에는 ‘꿈’에 지나지 않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전신과 철도로 무장하고 자신만만하게 전 세계를 누볐던 19세기 유럽 열강의 시민들조차 현재 우리가 걸어가면서 조그만 금속장치에 대고 중얼거리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마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을 현실로 바꾸어 놓는 기술발전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공물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술연구는 개인적 필요와 사회적 수요에 부응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신기술은 개인·사회적 수요의 결과
신기술에 대한 개인적 필요는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취향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개인적 필요를 적절하게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발명가와 기술자들이 자유롭게 개인의 신기술에 대한 욕망을 파악하여 새로운 인공물로 제작해내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다양한 색깔을 동시에 사용하며 문서를 작성해야 하는 필요성에 주목하고 다색볼펜을 만든 사람처럼 소위 ‘아이디어 상품’을 만들어 큰돈을 번 사람들의 ‘전설’에 우리는 어느덧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신기술 연구가 이런 개인적 필요만 충족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매우 큰 규모의 연구자금이 특정 기술에 집중적으로 투입되고 이러한 투자가 성공적인 신기술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지 여부가 국가의 미래 경쟁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 현대 기술연구의 배경적 상황이다. 이 점을 고려할 때 국가가 신기술에 대한 사회적 수요를 미리 예측하고 그 예측에 적절히 대응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처럼 사회적 수요에 대비하는 기술연구는 전문적인 시식과 식견이 필요하기에 기술 전문가와 행정 전문가가 협의해서 결정할 일처럼 보인다.
기술 ‘전문가주의’가 갖는 위험
기술개발 과정은 관련 전문가만이 참여해야 한다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회적 합의를 기술 개발에 도입하는 것은 참여민주주의를 지나치게 확대 적용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개인의 취향과 같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한다는 것은 어딘지 비효율적이고 전체주의적으로 들릴 수 있다. 또한 국가의 기술적 미래와 같은 복잡한 사안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한다는 것은 어딘지 아마추어적이고 무책임해 보일 수 있다. 실제로 필자가 참여했던 신기술에 대한 여러 형태의 사회적 논의 과정에서 기술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 DDT 항공방제 모습. 살충제 DDT도 경이로운 신물질에서 심각한 환경오염물질로 순식간에 지위가 강등당했다.
하지만 기술연구에 대한 이런 전문가주의는 결정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현대 기술연구에 필수적인 ‘전문성’을 기술 연구자만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고, 둘째는 현대 기술연구의 특징을 고려할 때 사회적 합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나노기술 연구자는 분명 특정 물질을 나노 수준에서 어떻게 처리하면 우리가 원하는 특성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런 지식만으로 성공적인 기술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술 연구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 기술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잠재적인 이득이 잠재적인 손해보다 크다는 분석이 나와야 한다. 물론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현대 기술연구는 경제성 분석이나 미래사회 기술수요 예측 등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 기술에 대한 시장 규모를 예측할 때 암묵적으로 가정되는 것은 사람들이 기술개발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 기술을 사용한다는 낙관적 기대다. 이 기대는 종종 충족되지 않는다.
에디슨은 축음기를 발명하고서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든지 문서를 구술시키는 용도로 사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처음 축음기가 음악을 재생하는 기구로 사용되기 시작할 때 에디슨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축음기의 중요한 용도는 기술개발자가 예측하지 못했던 소리로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전화기의 개발자도 처음에는 친구와 수다를 떠는 일과 같은 하찮은 일에 전화처럼 첨단기기가 사용되는 데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기술 사용자는 기술의 용도만이 아니라 이후의 기술방향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이 시리즈의 다른 글에서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되었다.
축음기와 전화기의 경우는 기술의 예기치 못한 용도가 그래도 ‘생산적인’ 다른 용도로 전환된 것에 불과하지만 기술연구의 결과가 항상 이렇게 행복한 결말을 갖는 것은 아니다. 플라스틱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인류는 플라스틱의 내구성에 찬탄을 보냈다. 이 놀라운 문명의 이기가 가진 ‘썩지 않는’ 성질이 미래 환경문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리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사용이 금지된 DDT라는 살충제도 경이로운 신물질에서 혐오물질로 순식간에 지위가 강등당한 현대 기술연구의 대표적 산물이다. 처음 DDT가 개발되었을 때 다른 살충제에 비해 살충효과가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장점으로 생각되었다. DDT를 한 번 뿌린 벽에는 1년 후에도 모기가 앉으면 죽어서 떨어졌으니 이 기술에 사람들이 왜 그토록 환호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DDT가 한 번도 직접 사용된 적이 없는 남극의 외딴 지역에서도 이 기적의 물질이 검출되어 생명체의 내분비계를 교란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기술연구 과정에는 기술 자체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할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기술에 반응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고려와 잠재적인 부작용에 대한 명시적 고려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는 기술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분석이 요구되고 광범위한 의견조사 결과가 참조되어야 한다. 현대 기술연구 과정에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전문성과 함께 자신의 삶에 신기술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신기술의 발전방향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반인의 역할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점을 무시하고 단순한 기술적 전문성과 행정적 편리함만을 추구하다보면 방사능 물질 폐기장 건설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겪은 예기치 못한 사회적 비용의 상승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기술 개발 과정마다 떠안게 될 수도 있다.
사회적 합의는 선택 아닌 ‘필수’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나라에서는 생명공학 연구를 중심으로 그것의 윤리적, 법적, 사회적 영향을 살펴보고 바람직한 기술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ELSI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또한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라 국가가 지원하는 신기술에 대해 2003년부터 기술영향평가도 실시하고 있다. 현재까지 나노기술과 RFID 기술, 줄기세포 기술처럼 미래의 주요 기술로 주목받고 있으면서 사회문화적 영향이 클 기술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기존의 기술영향평가는 신기술 관련 전문가나 시민단체와 같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집단의 의견만이 반영될 수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달 유비쿼터스 기술을 대상으로 실시된 시민공개포럼은 큰 의의를 갖는다. 시민합의회의 형식으로 전개된 이 포럼은 앞으로 일반 시민의 목소리를 보다 대표성 있게 담아낼 수 있는 방식으로 확대 실시될 필요가 있다.
기술개발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는 기술이 가진 잠재적 혜택만이 부각되고 불확실한 위험은 축소되거나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기술이 가져올 위험이 불확실할 때조차 기술 연구자들은 사회적 수준에서 그 위험에 대해 설명하고 그 위험에도 불구하고 기술 개발을 계속할 것인지 여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확보하려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는 반드시 의사로부터 가능한 부작용에 대한 설명과 치료가 가져다 줄 수 있는 효과에 대한 설명을 동시에 들은 후 치료를 받을 것인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이는 자신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치료에 대해 우리가 충분한 설명을 들을 권리와 그 설명에 입각하여 자율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신기술 중에서 국가적 규모에서 상당한 자원을 투자하여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기술이라면 그 파급효과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우리 국민 모두에게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병원의 치료와 마찬가지 도덕적 근거에서 우리 국민 모두는 자신의 미래 삶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회적 차원의 기술연구에 대해 충분하고 공정한 설명을 듣고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과정을 통해 기술개발 여부에 대해 합의나 최소한의 공감대를 확보할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현재 개발 중인 기술이 미래의 우리 후손들에게도 중대한 영향을 주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권리는 진지하게 떠맡아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기술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이 증대될 수록 현대 기술연구에서 사회적 합의과정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만 주체적이라는 인간중심주의가 인류의 존속 위협하는 환경위기 불러와 인간-환경 생태적 관계로 엮여있음을 인식할때 현재와 미래 동시에 충족시키는 기술 선택해
» 위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노만포스트가 설계한 커머셜 플라츠 빌딩인데 전형적인 하이테크·친환경 기술을 도입한 사례다. 아래 사진은 커머셜 플라츠 빌딩 내부의 모습으로 태양광을 충분히 활용해 에너지를 절약하도록 설계돼 있다.
기술 속 사상/(30) 지속가능한 기술
# 1.HP는 지난해 영업이익 5조3000억원 중 약80%를 프린터 소모품 판매로 벌어들였다. HP나 캐논이 리필 잉크나 재생 토너업체를 상대로 잇따라 특허소송을 벌이는 것도 소모품 시장 잠식 우려 때문이다.
# 2.미래형 자동차를 선점하기 위한 세계적 자동차 업계 간 대격돌이 치열하다. 도요타의 하이브리드형 엔진, GM의 수소 연료전지, BMW의 액화수소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하이드로젠 7’, 폴크스바겐 등의 ‘수소연료 전지차’ 등 수소를 연료로 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중이다.
# 3.타워형 고층아파트나 주상복합아파트의 경우 베란다와 같은 완충지대도 없고 고정된 통유리창이 많아 더워지면 열기가 집안에 가득 차서 그 열기를 밖으로 빼거나 식히기 위해서 에너지가 또 투입되어야 하는 악순환의 구조를 가진다.
위의 서로 무관해 보이는 세 기사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HP는 프린트 토너나 카트리지를 재활용할 기술이 없어서 그 많은 폐기물을 만들면서 재사용을 못하게 하는 것인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에너지 소모가 작은 판상형 아파트가 아닌 에너지 비용이 몇 배 높은 타워형 고층 아파트 일변도로 변해가는 것의 이유는 무엇인가? 대형승용차 판매율이 미국 다음 세계 2위인 한국의 수소자동차 개발은 어디까지 와 있는가?
환경위기의 맥락
1960년 이후 냉전이 첨예화되고 월남전 등으로 국제정치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풍요로운 서양을 중심으로 산업사회의 부산물인 쓰레기, 오염된 공기와 물, 지구온난화, 자연자원의 고갈, 생태계파괴 등의 환경오염 문제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1958)’을 통해 DDT 등 유기합성 농약류 사용으로 인한 위험성을 처음 제기했다.
30여년 전에 예견된 인류의 위협
1972년 로마클럽은보고서 ‘성장의 한계’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인구, 자원, 쓰레기, 에너지 등을 분석한 결과, 21세기 중반, 인류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한다고 경고하였다. 환경오염은 유기화합물로 인한 수질오염과 토양오염(1970년대), 핵겨울과 산성비, 오존층 파괴(1980년대), 지구온난화(1990년대), 유전자 조작과 생명복제(1990년대 후반), 해양 및 내수 오염, 유해물질의 부주의한 사용 및 폐기, 동식물 종의 절멸 등의 이슈로 변환하면서 끈질기게 제기되어 왔다. 한국은 급속한 개발도상국의 압축적 성장과 팽창의 폐해가 지속적으로 나타난 뒤 80년대부터 환경문제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환경문제는 국경이나 빈부격차, 산업화 정도와 상관없이 전지구적 현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의 의미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21세기의 화두이다. 1987년 브룬트란트 위원회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인류사회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개념으로써 미래세대가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으로 정의하였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국제간의 협력을 체계화한 리우선언(1992)과 그 실행계획인 의제 21은 1)환경자원의 독점적 사용불가와 형평성있는 이용, 2)생태계의 수용능력을 고려한 경제성장과 개발전략, 3)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개발전략 등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환경자원의 보호 및 소비와 생산, 개선을 위한 관리, 이를 위한 정책까지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일례로 1998년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온난화를 극복하기 위한 교토의정서는 선진국간 온실가스 배출권을 파는 거래시장을 제안했고 연간 거래규모는 연 250억~300억 달러에 이른다. 국제협약을 통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정하고 그 배출권을 거래함으로써 ‘탄소 달러’를 만들어 독립국가의 경제 운용방식에까지 제한을 가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 갖는 한계
이처럼 지속가능한 발전은 환경 그 자체를 보전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개발,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며 저개발, 미개발 지역 혹은 국가의 개발가능성까지 선진국들이 통제하겠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더욱 위험한 것은 지속가능성의 전제로서 다음 세대를 위한 환경보전을 강조하지만 다음 세대의 입장을 대변할 아무런 주체가 없다는 점에서 공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제들은 국가 간에 환경문제에 대한 구속력과 미래사회를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강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속가능한 기술의 사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기술이란 화석연료대신 대체에너지를 활용하며, 환경효용을 고려한 기술적 발전을 도모하는 방향을 포괄한다. 또한 재활용기술을 개발하여 폐기물을 줄이면서 보관처리 문제해결 및 천연자원의 보호까지 도모한다. “3R(reduce, reuse, recycle)”을 반영하는 지속가능한 디자인과 기술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국제적 다국적 기업들이 이러한 친환경 정책으로 경제성은 물론 기업이미지까지 제고하는 사례는 많다.
특히 화석에너지의 2/3 이상을 차지하는 수송부문과 건물부문에서 기후, 대기보전, 에너지효율화 등에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필요로 한다. 이중에서 정치경제적 고려부터 기술적 고려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건축을 살펴보면 지속가능성은 각기 내재된 철학적 입장과 적용하는 기술의 복잡도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나타난다. 예를 들면 세계적 대도시에 자본주의의 상징인 산재하는 하이테크건축물들은 고도의 집약된 첨단기술과 정책의 산물이다.(사진 5-6) 반면 폐타이어, 흙, 태양열 집열판을 이용하여 전통적 집짓기로 전세계 여러 곳의 집없는 이들의 거주문제를 해결해 주는 지구선(Earthships)의 사례들을 들 수 있다. 위의 두 입장은 대조적인 만큼 지속가능하다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결국 지속가능한 기술이란 적용할 기술 자체가 완전치 못하거나 불충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인식하고 사용하는 국가와 사회, 민간과 공공의 선택, 그 아래 내재된 개인의 윤리적 소신까지 관여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환경위기 극복을 위한 실천적 인식
환경오염을 유발하고 생태계를 교란시킨 주범인 현대 과학기술이 그 행위의 결과에 따른 폐해를 진단하고 예측하며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란 점은 이 시대가 처한 역설적 상황을 함축해서 보여준다. 이처럼 목적의 합리성과 가치합리성의 사이에 대한 혼동과 부조리함은 현대 과학기술의 기초를 이룰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가 처한 환경위기와 일방향성의 근본적 원인이 되고 있다. 환경위기를 야기한 많은 결정들은 과학기술상의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적 조치들로만 해결될 수 있는 차원은 벗어나 있다. 그 이유는 인간만 자율적이고 주체성을 갖는 동물이고 그 외 존재는 인과적으로 작동하는 타율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간중심주의적 형이상학적 신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자연정복과 지배를 정당화시켜왔기 때문이다. 근대과학 이후 자연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저장소로 인식된 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는 더욱 보편화되고 강화되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환경위기는 인류의 생물학적 존속마저 위협할 만큼 전면적이고 총체적이기 때문에 문명의 위기와 동일시되고 있는 점 역시 환경을 철저히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인식하고 파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을 역사발전의 일부로 이해해야
» 류전희/경기대 교수
자연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계층, 세대, 시대를 초월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터전이다. 자연환경을 지키고 그 가치를 모두가 향유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기계, 인간과 동식물, 인간과 물리환경이 서로 ‘생태적 관계’를 통해 하나의 '존재의 사슬(the Great Chain of Beings)'로 엮여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것을 복원하기 위한 대안적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실천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인간역사를 망라하여 살아 온 인간보다 현재 더 많은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깊이 고려해 본다면 현재의 승리는 자연과 역사라는 자신의 과거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포괄적 역사발전의 일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 시대의 본질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업과 엔지니어는 숙명적 대립관계... 이윤만 생각하는 기업을 일차적으로 견제해야 자기 기술에 도덕적 책임 지는 게 수동적 의무라면 사회 이상을 실현하는 기술 개발하는 건 능동적 책무
» 기술은 사회를 발전시키는가? 기술은 통제 가능한가? 기술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가? 생명 복제기술과 지능로봇 등장으로 우리는 기술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지난 1월 줄기세포 논문조작 사실이 밝혀진 뒤 서울 언론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에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황우석 교수. 이정아 기자 leej2@hani.co.kr
기술 속 사상/(31)연재를 마치며- 기술의 사회적 책임
‘기술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지난 4월13일부터 시작하여 30회에 걸쳐 연재된 기술속 사상을 통하여 그동안 기술의 의미, 최근 기술발전의 방향, 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보는 관점들, 기술이 이 사회에 가져다 주는 순기능과 역기능, 그리고 기술과 정치, 기술과 예술, 기술과 건축 등 기술과 그 인접 분야 사이에 주고 받는 영향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러한 글들을 통하여 기술이 현대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강조되었다. 기술은 사회를 발전시키는가? 기술은 통제가 가능한가? 기술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면서 기술속 사상을 끝맺음하려 한다.
지난 40년 간 우리나라의 산업, 경제가 발전된 것을 본다면 기술이 우리 사회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일인당 국민총생산이 105달러에서 1만4000 달러로 증가했으며, 평균수명이 52살에서 77살로 늘어난 수치가 말해주듯 40년 전에 비하여 우리 삶은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되었고 또한 편리해진 것이다.
편리한만큼 대가 치르게 하는 기술
동네에 텔레비젼 및 전화를 가진 집이 몇 안 되었고 자가용을 가진 집은 찾아 보기가 힘들었던 시절로부터 시작하여 기술 발전과 더불어 산업이 일어나 경제가 성장되고 좀 더 싼 값에 대량으로 공급되는 각종 공산물이 등장하면서 살림이 눈에 띄게 달라졌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앞으로 생활이 점점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왔다. 이러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사회도 선진화되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급진적인 산업화와 더불어 부작용 또한 생기기 시작했다. 공기와 땅이 오염되고 시냇물은 물고기가 살 수 없는 죽은 물로 변해갔다. 더러워진 물과 공기를 마시면서 배만 부르면 되는 것인가?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대형사고를 경험하면서 기술이 발전되면 될수록 사고는 대형화되며 기술 속에 뭍혀 사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목표 없는 사회는 기술에 휘말려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사람이 내일이라도 인간생명을 복제할 수 있는 것처럼 떠들고 지능을 가진 로봇이 등장하여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올 것처럼 예언하는 것을 들으면서 언젠가 내가 기술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기술이 나에게 풍요로움과 편리함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과연 기술은 사회를 발전시키는가 되물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두렵게 다가오는 기술은 인간에 의해 통제가 가능한 것인가? 소박한 생각으로는 기술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니 모든 기술은 인간의 손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미국의 기술사학자 토머스 휴즈는 에디슨의 전력시스템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면서 기술시스템과 관성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에디슨은 단순한 발명가가 아니라 전기의 발전, 송전, 소비 및 측정 기술이 네트웍화된 전력시스템을 건설한 시스템건설자이며, 그가 구축해 나간 기술시스템은 발전소, 변전소, 전등, 모터 등과 같은 인공물의 집합체만이 아니라 전력회사, 투자회사, 법적인 제도, 정치, 과학, 자원을 모두 포함하는 거대한 사회기술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시스템은 탄생, 성장, 확장 및 경쟁 단계를 거치게 되며 경쟁에서 이긴 시스템은 관성을 가지고 공고화된다고 말한다. 관성이 붙은 기술시스템은 어마어마한 힘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막거나 그 코스를 돌릴 수가 없을 것이다. 전기, 자동차, 컴퓨터, 인터넷과 같이 이미 관성이 붙은 대형기술은 쉽게 발전방향을 되돌리거나 제거할 수 없으므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더불어 사는 수밖에 없다.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났다고 곧 우리가 기술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야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어디까지나 도구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이지 이 사회가 추구하는 목적이나 이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40년 전 우리가 너무 가난했을 때 가난에서 벗어나 선진화된 사회를 건설해 보자는 목표를 정하고 우리는 매진했으며 기술은 이와 같은 목표 달성에 조력자로써 훌륭한 역할을 해 내었다.
» 사진은 축전기와 영사기, 축음기 등 1000여가지를 발명한 에디슨. 하지만 에디슨이 만들어낸 것은 단순히 이들 발명품 뿐만이 아니라 이것들이 사회에서 이용되면서 필요하게 된 법적 제도까지 포괄한다. 즉 사회기술시스템도 그가 만든 것이다.
이제 선진화된 사회를 건설한 지금 우리는 어떠한 사회적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있는가? “더 잘 살아보자”고 외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되는 뚜렷한 이상을 정하고 그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목표와 희망적 열정을 가지고 미래 사회 발전에 대한 비젼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한 목표가 있어야만 여러 가지 선택 가능한 기술 중에서 합리적이고 인간에게 유익한 기술을 택할 수 있는 규범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기술의 사회적 책임은 이 사회가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도구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다루기 쉬운 도구는 아니다. 높은 사회적 이상과 목표가 설정되고 이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희망적 열정이 있을 때 기술이 훌륭한 조력자가 되는 것이지 사회가 목표없이 표류한다거나 저급한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을 따라 가려한다면 거대한 기술의 힘에 사회가 오히려 휘둘리고 말 것이다. 기술이 자체의 힘으로 도덕적인 사회를 만든다거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술을 잘 선택하고 발전시킴으로써 도덕적인 사회,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조직에 묻힌 기술자는 비판받아야
지금까지 비인격체인 기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이야기했는데 기술을 만들고 그것을 활용하여 사회와 접목시키는 엔지니어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글을 마치려 한다. 엔지니어는 어려운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엔지니어는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데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가 만들어진 사회적 배경이나 역사를 파악하고 필요하면 직접 문제를 제기하거나 만들어내야 한다. 하는 일이 사회적 안전과 직접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거대한 기업이나 조직에 묻힌 엔지니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보다 주어진 조건에서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몰두하는 엔지니어를 비판한 기술정치학자 랭든 위너의 말에 엔지니어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 이장규/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
사회의 전문인 집단으로서 엔지니어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이상과 목표를 찾는 데 동참하며, 사회적 이상과 목표에 입각하여 자기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면밀히 분석하고, 프로젝트의 결과가 이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고민해야 한다. 기존에 존재하거나 새로이 등장하는 자기 분야의 기술이 사회적 이상과 목표에 부합하도록 연구 방향이나 정책을 바꾸어나가는 데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엔지니어는 의사, 변호사와 같은 다른 전문직과 비교할 때 단독으로 개업을 하기보다 일반적으로 기업이나 연구소 같은 큰 조직에 소속되어 일하는 경우가 많다. 기업은 일차적으로 최대한 이윤을 추구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속성을 가진 기업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는 기업이 지나치게 이윤만 앞세운 나머지 사회안전을 해치지 않는지 견제하여야 한다. 엔지니어는 기업이 만들어낸 제품에 대해 일차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가장 정확히 그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기술사학자 에드윈 레이튼이 주장한 것처럼 사업가와 엔지니어는 항상 대립관계에 놓여 있는 숙명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엔지니어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이 사회의 안전과 시민의 안녕을 위하여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면서 필요하면 자기가 속한 조직이나 기업의 잘못된 관행에 맞서 고쳐 나가야 한다. 엔지니어가 자기 기술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는 것이 수동적인 의무라고 한다면 사회복지, 평화, 평등과 같은 지고한 이 사회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도움이 되는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은 엔지니어가 사회에 대하여 갖는 능동적인 책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