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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과학, 기술, 환경

한국인의 DNA 혈통

by Wood-Stock 2009. 9. 16.

한국인의 핏줄, 누구와 더 가깝나?

 

동북공정의 연구물인 ‘고대 중국 고구려 역사 속론’(2003년)에는 고구려인이 중국의 고대 국가인 은나라와 상나라의 씨족에서 분리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인과 중국 한족은 혈연적으로 한 핏줄이란 얘기인데, 과연 그럴까?

 

2003년 단국대 생물과학과 김욱 교수는 동아시아인 집단에서 추출한 표본을 대상으로 부계를 통해 유전되는 Y염색체의 유전적 변이를 분석했다. 이 결과 한국인은 주로 몽골과 동․남부 시베리아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전자 형, 그리고 동남아시아 및 중국 남․북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전자형이 모두 발견되었다.

 

한국인은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 가운데서 동남아시아인인 중국 동북부 만주족과 유전적으로 가장 유사했고, 중국 묘족이나 베트남 등 일부 동남아시아인과도 비슷했다. 이는 한민족이 크게 북방계와 남방계의 혼합 민족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2300여 년 전 농경문화와 일본어를 전달한 야요이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이주했음을 나타내는 유전학적 증거이기도 하다.

 

2006년 김 교수는 모계유전을 하는 미토콘드리아 DNA도 분석했다. Y염색체가 아버지를 통해 아들에게만 전달되는 부계유전을 하는 것과 달리 미토콘드리아 DNA는 어머니를 통해 아들과 딸 모두에게 전달된다. 더욱이 미토콘드리아 DNA는 돌연변이율이 높고, 교차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 정보인 하플로타입 상태를 분석해 조상을 추적해 낼 수 있다.


하플로타입이란 일련의 특이한 염기서열이나 여러 유전자들이 가깝게 연관돼 한 단위로 표시될 수 있는 유전자형을 가리킨다. 하플로그룹은 같은 미토콘드리아 DNA 유전자형을 가진 그룹으로 보면 된다. 한국인은 3명 가운데 1명꼴로 몽골과 중국 중북부의 동북아시아에 많이 분포하는 하플로그룹D 계통이 가장 많았고, 전체적으로 한국인의 60% 가량이 북방계로, 40% 가량이 남방계로 분류됐다.

 

유전적인 분화 정도를 통해 분석한 결과, 한국인은 중국 조선족과 만주족 그리고 일본인 순으로 가까웠다. 그러나 중국 한족은 베트남과 함께 다른 계통에 묶여 한국인과는 유전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였다. 동북아시아에 속한 중국 북경의 한족은 한국인과 다소 비슷한 결과를 보였지만 중국 남방의 한족과는 유전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특히 만주족과 중국 동북 3성인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중국 한족보다는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더 가까웠다. 이 때문에 김 교수는 “과거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활동했던 고구려인의 유전적 특성은 중국 한족 집단보다 한국인 집단에 더 가깝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중국 한족을 물리치고 중원을 점령했던 금나라의 여진족(훗날 만주족)이 신라인의 후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金史)에는 “금태조가 고려에서 건너온 함보를 비롯한 3형제의 후손이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 금을 계승한 청나라의 건륭제 때 집필된 ‘흠정만루원류고’에는 금나라의 명칭이 신라 김(金)씨에서 비롯됐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 한국인의 유전체 염기서열을 분석해 보면 우리의 유전자가 누구와 가까운지 알 수 있다. 사진은 생명공학기업인 마크로젠이 소개한 한국인 유전자 지도 초안 이다. 사진 제공 동아일보

청나라 황실의 만주어성 ‘아이신줴뤄’ 중 씨족을 가리키는 아이신은 금(金)을 뜻한다. 이는 아이신줴뤄를 한자로 가차한 애신각라(愛新覺羅)에 “신라(新羅)를 사랑하고, 기억하자”는 뜻이 담겼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이런 결과로 볼 때 한국인의 유전자는 북방계가 다소 우세하지만 남방계와 북방계의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섞여있다. 4000~5000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동일한 언어와 문화를 발달시키고 역사적인 경험을 공유하면서 유전적으로 동질성을 갖는 한민족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만주에 살던 이들은 중국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발원한 한족과는 달리 한반도에 살던 이들과 깊은 혈연관계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나아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웠던 여진족과 만주족의 역사를 한국사에 새로 편입시켜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 ‘단일민족’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단일민족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유전적 동질성을 획득했다는 의미이지 한국인의 기원이 하나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한국인은 동아시아 내에서 남방과 북방의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이뤄져 형성된, 다양성을 지닌 민족이다.

 

유전적으로 다양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집단 구성원이 갖고 있는 유전적 다양성이 세대를 통해 유지될 확률이 크다. 그리고 집단의 안정성도 높아진다. 다양한 유전자를 보유한 집단은 단순한 집단에 비해 집단이 유지되고 진화하는데 유리하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인은 ‘잡종강세’의 전형적인 집단이다. 어쩌면 중국이 동북공정을 서두르는 이유도 한국인의 유전적 다양성을 두려워해서가 아닐까?

 

글 :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기사등록 : 2009-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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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뿌리는 남방? 북방?

 

“아시아인 동남아서 북쪽 이주”
10개국 과학자, 남방계설 제기
북방계·두갈래 이주설과 ‘충돌’

 

아프리카에서 나온 인류는 아시아 대륙에서 어떤 길을 따라 퍼져나갔을까? 아시아인이 동남아시아 지역을 거치는 ‘단일한 이주 경로’를 통해 각지로 퍼져나갔다는 유전체 연구 결과(지도)가 나옴에 따라, 한국인의 뿌리가 남방계에 주된 기원을 두고 있다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북방계의 한반도 유입도 상당했다는 다른 연구들도 있어, 한국인의 기원에 관한 결론을 내리려면 더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아시아 10개국 과학자 90여명은 개인별 유전자 변이(SNP)를 비교해 73개 민족집단의 유전자 다양성이 아시아 각지에 어떻게 분포하는지 분석해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이번 연구에선 유전자 다양성이 동북아시아인보다는 동남아시아인한테서 더욱 크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아시아인의 이주가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음을 뜻한다”고 연구에 참여한 생명공학기업 테라젠의 박종화 바이오연구소장은 말했다. 동아시아인의 이주 경로는 하나이며 그 기원은 동남아로 보인다는 학설이다. 박 소장은 “이번 분석은 지금까지 연구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데이터 분석의 신뢰성도 높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번 연구의 결론이 단정적으로 제시되진 않았다. 연구팀은 논문 말미에서 “이번 연구가 (북방계의 또다른 이주 경로가 있었다는) ‘두 갈래 이주 가설’이 틀렸다고 입증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편에선 남방계와 북방계의 ‘두 갈래 이주’ 가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도 여전히 여럿 있다. 서정선 서울대 교수는 “이번 연구가 현재 6억명이 넘는 북방계 알타이족의 이주 경로를 설명해주진 못한다”며 “현대·고대 한국인의 게놈을 분석한 데이터에선 한국인이 주로 북방계의 후손이거나 남·북방계의 혼합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이 남방계로 이뤄졌다는 중국 학자의 가설이 크게 반영된 해석”이라며 “북방계에 대한 충분한 분석 없이 한국·일본인의 이주 경로를 얘기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논문의 결론을 수긍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한반도에는 북방계 집단이 빙하기를 피해 먼저 들어왔고 이후에 농경문화 확산과 더불어 중국 남부에 머물던 남방계가 들어와, 다수의 남방계와 소수의 북방계가 섞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김욱 단국대 교수 연구팀은 아시아 민족집단들을 대상으로 모계 혈통을 보여주는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와 부계 혈통을 보여주는 와이(Y)염색체 유전자를 분석해보니 한국인의 이주가 다단계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는 연구논문을 지난 1월 국제학술지 <플로스 원>에 냈다. 김 교수는 “흥미롭게도 남방계 이주 때 남성의 이주가 두드러졌음을 보여주는 데이터도 있는데 당시에 농경 인력인 남성이 많이 이주했던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오철우 기자 ~ 200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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