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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월드컵에 출전 못한 비운의 전설들

by Wood-Stock 2009. 10. 15.

월드컵에 출전 못한 비운의 전설들

[GOAL.Com-김현민] 마침내 아프리카 대륙을 제외한 월드컵 각 지역 예선이 모두 막을 내렸다.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크로아티아, 체코, 터키, 이스라엘, 스웨덴, 그리고 에콰도르 같은 팀들이 고배를 마셨고, 이와 함께 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월드컵 본선 출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과거에도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라는 명성을 얻으면서도 정작 월드컵 본선엔 단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한 비운의 선수들이 다수 있다. '세계인의 축구 네트워크' GOAL.com은 월드컵에 단 한 번도 참가하지 못했던 비운의 축구 선수들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 라이언 긱스

 


맨유의 살아있는 전설인 긱스는 35살의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클럽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8번의 리그 우승과 2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비롯해 무수한 우승 트로피를 자랑하고 있지만, 월드컵엔 단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잉글랜드 청소년 대표팀에서 활약한 전력이 있는 그를 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국적인 잉글랜드가 아닌 어머니의 국적인 웨일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언제나 조국을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직도 잉글랜드 국민들은 '긱스가 잉글랜드를 선택했더라면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도 가능했을텐데...'라며 아쉬워하고 있다.

 

 

 

 


# 발렌티노 마졸라

'그란데 토리노(Grande Torino: 위대한 토리노)'의 핵심 멤버였던 마졸라는 1940년대에 토리노의 세리에A 5연패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1949년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당시 비행기에 탑승했던 토리노 선수들 중 단 한 명의 부상을 제외하곤 전원 사망했다).

1940년대 마졸라를 비롯한 토리노 선수들은 이탈리아 대표팀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으나, 그들의 전성기엔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월드컵이 12년간 열리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후에 월드컵이 재개되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 조지 웨아


Samuel Eto'o - Inter (Grazia Neri)
아프리카의 전설적인 공격수이자 라이베리아의 영웅 웨아는 1995년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 도르, 그리고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상을 동시에 석권했으며, 챔피언스 리그 우승도 차지하는 등 명예를 독차지한 선수이지만 그의 조국 라이베리아가 약소국이었기에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는 조국의 월드컵 진출을 위해 식비와 호텔비도 제공하는 등 헌신을 다했으나 번번히 고배를 마셔야 했다.


 

 

# 조지 베스트


벨페스트에서 태어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영원한 등번호 7번 조지 베스트는 1968년 맨유의 유러피언 컵(챔피언스 리그 전신) 우승을 일구었을 뿐 아니라 발롱 도르까지 동시에 석권하며 유럽 최고의 선수로 발돋움했었다.

하지만 클럽에서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유럽 무대의 약소국인 북 아일랜드 출신이었기에 아쉽게도 월드컵 무대에선 그의 활약을 볼 수 없었다.


 

 

# 아르세니오 에리코

파라과이 출신인 에리코는 파라과이 적십자 소속으로 차코 전쟁(편집자 주: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간의 영토 분쟁 전쟁)을 위한 자금 모집을 위해 아르헨티나 투어를 떠났다가 아르헨티나 클럽들의 눈에 띄게 되었고, 결국 아르헨티나의 명문 인디펜디엔테로 이적하기에 이르렀다.

아르헨티나 국내 리그에서 많은 골을 성공시키며 스타 플레이어로 거듭났던 그는 1938년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에 승선할 기회가 있었으나 조국 파라과이를 버릴 수 없다며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는 파라과이 대표팀이 비공식적으로 가진 26경기에 출전해 56골을 성공시켰고, 아직까지도 파라과이 역대 최고의 선수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 던칸 에드워즈

'버스비의 아이들'의 일원인 에드워즈는 1958년 뮌헨 참사로 인해 21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뮌헨 참사가 있기 전까지 맨유에서 5시즌을 활약하며 2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웨인 루니와 티오 월콧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잉글랜드 대표팀 역대 최연소 승선 기록 역시 세운 불세출의 천재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로 인해 월드컵에 단 한 번도 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만약 그가 생존했었다면,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전세계 축구팬들은 잉글랜드가 낳은 천재 플레이어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 파스 윌크스

윌크스는 네덜란드 축구계의 전설로 남아있는 선수로 1940년부터 1964년 사이에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활약했던 축구 초창기 용병 스타 중 하나였다. 그는 네덜란드의 오렌지 유니폼을 입고선 38경기에 출전해 35골을 넣는 경이적인 득점력을 과시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1949년부터 1955년 사이에 네덜란드 축구 협회와 마찰을 빚어 대표팀에서 제명됐었고, 결국 그는 선수 경력 내내 단 한 번도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레알 마드리드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디 스테파노는 무려 5번의 유러피언 컵(챔피언스 리그 전신) 우승을 차지했고, 2번의 발롱 도르를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월드컵엔 단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하는 불운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월드컵 불참은 실력 문제가 아닌 아르헨티나 국내 문제 때문이었다는 게 더 아쉬운 일이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과 함께 1950년 월드컵 유치 신청을 했으나 1938년 월드컵에 불참했다는 사실을 이유로 월드컵 유치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분노한 아르헨티나 정부는 1950년 월드컵 불참을 선언했다. 결국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 정부의 결정으로 인해 월드컵에 출전할 수 없었다.

월드컵 출전 욕구에 가득찼던 디 스테파노는 1954년 월드컵을 앞두고 콜롬비아 국적으로 옮겨탔으나, 이번엔 FIFA의 반대에 부딪쳐 또 다시 월드컵 출전에 실패하게 됐다.

1956년 스페인 국적을 획득한 디 스테파노는 '무적함대'와 함께 1958년 스웨덴 월드컵과 1962년 칠레 월드컵에 연달아 도전했다. 비록 1958년엔 유럽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면서 본선 진출에 실패했으나, 칠레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그는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스페인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가? 그는 월드컵 본선을 1년 앞둔 상황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하며 꿈에도 그리던 월드컵 무대 진출에 실패했고, 결국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 에릭 칸토나

'쿵푸킥'으로 유명한 맨유의 영원한 킹이자 악동 칸토나는 잉글랜드 무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프리미어 리그의 중흥기를 이끈 장본인이다. 그의 존재가 없었다면, 헤이젤 참사 이후 암흑기에 빠졌던 잉글랜드 국내 리그가 이렇게나 빨리 최고의 위치로 다시 올라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의 성공과는 달리 프랑스 무대에서 그는 그리 빛을 발하지 못했다. 문제는 바로 그의 성격이었다. 사실 그가 1992년, 당시 암흑기에 빠져있었던 잉글랜드 리그로 이적을 감행했던 이유도 바로 프랑스 리그에서 많은 마찰을 일으킨 끝에 선수생활 은퇴를 선언했었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 무대에서의 성공과 함께 프랑스 대표팀에 금의환향한 그는 1994년 미국 월드컵과 EURO 1996 당시 프랑스 대표팀 주장이었으나 그의 악동 기질은 변함이 없었고, 결국 그가 이끄는 프랑스 대표팀은 선수들끼리의 마찰로 인해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결국 프랑스는 화려한 선수진에도 불구하고 1994년 미국 월드컵과 EURO 1996 본선 진출에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에메 자케 프랑스 대표팀 감독은 문제아 군단인 칸토나와 다비드 지놀라 같은 선수들을 대표팀에서 쫓아내는 대신 지네딘 지단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EURO 2000을 연달아 재패하며 프랑스의 황금기를 이룩했다.


# 야리 리트마넨

핀란드의 영웅인 리트마넨은 38살의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클럽과 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다. 1995년 아약스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천재 플레이메이커인 그는 핀란드 역대 최다 A매치 기록 역시 세우고 있으나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는 이번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도 도전장을 내밀며 노장투혼을 보였으나 독일과 러시아에 밀려 또 다시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그는 조만간 대표팀 은퇴를 선언할 것으로 보인다.


# 페르난두 페이로테우

스포르팅 리스본의 전설인 그는 1940년대 포르투갈 축구계를 지배하던 독재자였다. 그는 스포르팅 리스본에서 187경기에 출전해 331골을 넣으며 경기당 골 수에서 역대 최고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 내내 포르투갈은 유럽의 축구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 이안 러쉬

1980년대와 90년대 리버풀의 공격수로 활약했던 러쉬는 케니 달글리쉬와 함께 리버풀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선수이다. 하지만 그는 라이언 긱스와 마찬가지로 웨일스라는 국적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고, 결국 단 한 번도 월드컵 본선에 출전할 수 없었다.

# 아베디 펠레

아프리카 역대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는 아베디 펠레는 아프리카 선수들의 유럽 진출을 이끈 선구자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는 프랑스의 명문 올림피크 마르세유에서 활약하며 1993년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도 들어올리는 등 유럽 무대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최초의 아프리카 선수이다.

대표팀에서도 그의 활약은 빛을 발했다. 16년간 가나 대표팀의 플레이메이커로 뛰면서 그는 A매치 73경기에 출전해 33골을 성공시켰고, 1982년 아프리칸 네이션스 컵 우승과 1992년 가나의 네이션스컵 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유난히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고, 결국 그는 단 한 번도 월드컵 본선 무대에 참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안드레 '데데' 아예우는 가나 청소년 대표팀 주장으로 20세 이하 FIFA 월드컵 결승전에 진출했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도 이름을 올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데데는 이미 가나 성인 대표팀 소속으로 A매치 15경기 출전 기록을 세우고 있다).

# 죠니 자일스

리즈의 전설인 그는 1970년대 잉글랜드 무대에서 가장 위협적인 미드필더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아일랜드 대표팀은 언제나 아쉽게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었다. 특히 그의 마지막 월드컵 도전이었던 1978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아일랜드는 승점 2점차로 탈락하고 말았다.

# 아틸라 살루스트로

나폴리의 최초의 신. 그리고 그의 은퇴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폴리는 2번째 신(디에고 마라도나)을 영접하게 되었다. 파라과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이탈리아 부모를 따라 나폴리로 옮긴 그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나폴리의 신으로 군림하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었다. 나폴리에서 그는 258경기에 출전해 107골이라는 놀라운 득점 수치를 보였었다.

하지만 그의 A매치 기록은 단 2경기에 불과하다. 그가 대표팀과 유난히 인연이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것. 그의 동 포지션에는 이탈리아 역대 최고의 선수로 칭송받고 있는 쥐세페 메아짜가 있었고, 그로 인해 그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선 언제나 소외되어야 했다. 결국 그는 이탈리아가 1934년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걸 먼 발치에서 구경만 해야 했다.

# 베른트 슈스터

독일의 천재 미드필더인 그는 스페인의 두 거인인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하며 화려한 클럽 경력을 자랑하고 있다. 독일 대표팀의 일원으로 EURO 1980에 출전해 우승에 일조했던 그는 20살의 어린 나이에 독일 대표팀 동료인 칼 하인츠 루메니게에 이어 발롱도르 2위를 차지하는 영예를 맛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독일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한 채 유프 데어발 감독은 물론 선수들과도 마찰을 빚었고, 결국 24살의 젊은 나이에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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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계 최대 납치극 : 디 스테파노의 56시간



[포포투=Paul Brown]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축구사에서 푸대접을 받는다.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스페인에서 각각 국가대표로 뛰면서도 FIFA월드컵에 출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 세계 최고의 축구스타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센터포워드 포지션을 재정의한 슈퍼스타로 추앙받았다. 레알마드리드에서 뛰던 시기(1953~1964)에는 라리가 우승 8회와 유러피언컵 우승 5회를 이끌었다. 특히 1963년에는 개인통산 300골 고지를 밟으며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당시 디 스테파노를 비롯 스타들이 포진한 레알마드리드는 그 자체로 돈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디 스테파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선수였고, 모든 이가 레알마드리 경기를 보기 원했다. 바다 건너 베네수엘라도 마찬가지였다. 1963년 8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라 페케나 코파 델 문도(작은 월드컵)’라는 축구대회에 레알마드리가 초청받은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베네수엘라의 불안한 정세였다. 정부군과 게릴라 혁명군 사이 다툼이 내전으로 번지고 있었다. 당시 카라카스에는 다이너마이트가 흔했다.


# 눈 뜬 채 당한 납치극

카라카스의 에스타디오올림피코 라커룸. 레알마드리드 선수들이 한창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탕, 탕, 탕.

총소리에 놀란 레알마드리드는 경기장 내부로 긴급 대피했다. 군중의 혼란과 시끄러운 경고 방송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반정부군 시위자 두 명이 하늘을 향해 총을 쏴대는 통에 관중은 그라운드 위로 뛰어 내려왔다. 45분이 지난 후에야 혼란이 정리되었다. 그제야 두려움에 가득 찬 선수들은 그라운드로 나와서 브라질의 상파울루와 경기를 치렀다.

레알은 1-2로 패한 뒤에 숙소인 포토막 호텔로 서둘러 돌아왔다. 이곳에서도 선수단은 옥상으로 피신해야 했다. 호텔 주변 길거리에선 기관총 소리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유럽 최고 클럽이 있을 만한 장소는 아닌 것 같았다. 젊은 선수들은 목을 축이러 호텔 바에 갔지만 디 스테파노는 곧장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디 스테파노의 화려한 업적은 그에게 부와 명예를 선물했다. 아마도 당대 최고 부자선수였을 것이다. 그런 셀럽에게 총알이 날아다니는 카라카스는 디 스테파노에게 영 어울리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6시 반, 디 스테파노는 시끄러운 전화 소리에 잠을 깼다. 호텔 로비에 도착한 경찰이 그를 찾았기 때문이다. 동료들의 장난이라고 여긴 디 스테파노는 전화를 끊었다. 몇 분 뒤, 호텔 직원과 기관총을 든 경찰 두 명이 방문을 두들겼다. 그들은 마약밀매 신고를 접수했으며 해명하려면 경찰서까지 동행해야 한다고 통지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체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잠옷 차림이었던 디 스테파노는 급하게 양치만 한 뒤에 프레드 페리 폴로셔츠와 카키색 바지, 흰색 신발을 신고 방을 나섰다. 경찰과 동행한 디 스테파노는 자동차 뒷자리에 탑승했다. 그리고 “당신 납치되는 중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사내들은 디 스테파노의 눈을 반창고로 가린 뒤에 선글라스를 씌웠다. 한 아파트 앞에서 차를 버리고 밴으로 갈아탔다. 차량은 시내에서 벗어나 농장에 도착했다. 사내들은 디 스테파노에게 바이스로이 담배 두 갑을 건넸다. 한 달 넘게 금연했던 디 스테파노는 주저 없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조금 뒤 일행은 다시 시내의 어느 아파트로 이동했다. 디 스테파노는 무장 괴한이 지키는 방에 갇혔다. 디 스테파노는 자서전 <그라시아스, 비에아(고마워요, 어머니)>에서 “나를 죽일 것 같았다. 혼잣말로 ‘알프레도, 여기서 끝나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라고 썼다.


# 정치 활극 인질 된 ‘금빛 화살’

납치범들은 민족해방무장운동(FALN) 멤버들로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장군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공산주의 게릴라였다. 그들은 침착하게 디 스테파노를 3000톤급 화물선으로 옮겼다. 최근 경찰관 세 명을 사살하고 강탈한 배였다.

납치단은 디 스테파노에게 안전을 보장했다. “당신에게는 원한이 없다. 몇 시간만 우리와 함께 있으면 석방될 것이다.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는다.” 20세의 막시모 카날레스가 납치단의 두목이었다. 군복차림으로 허리에 총을 차고 다녔던 카날레스는 추종자들 사이에서 ‘무자비한 킬러’로 통했다. 디 스테파노에겐 깍듯했다. 디 스테파노는 “내게 계속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라고 회상한다. 카날레스는 음식도 대접했지만 디 스테파노는 “너무 무서워서 입맛이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몸값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다.

납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로물로 베탄쿠르트 대통령의 정부를 내몰겠다는 의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당시 베탄쿠르트 정권이 냉전 상대인 미국 정부와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FALN은 진보 성향지 <클라린>을 통해서 성명을 발표했다. ‘금빛화살’로 명성을 날리던 디 스테파노는 홍보에 좋은 타깃이었다. <클라린>은 디 스테파노의 납치가 정치적 목적으로 행해졌다는 내용을 담은 호외를 발행했다.

디 스테파노는 현역으로 뛰는 동안 불안한 정국과 자주 조우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군부 쿠데타, 콜롬비아에서는 내전, 스페인에서는 분리주의 분쟁을 겪었다. 축구적 관점에서 디 스테파노는 혁명적 존재였다. 조국 아르헨티나의 선수 노동력 착취에 맞서 콜롬비아의 무허가 리그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24세 학생 겸 골키퍼였던 아르헨티나 동향 청년 체 게라바를 만났다.

디 스테파노는 정치판의 노리개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납치범들에게 “나는 이 나라의 정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사정했다. 불안감에 싸인 채 밤을 지새워야 했다.

한편 포토막 호텔에는 클럽 직원의 신고를 받은 완전무장 경찰이 출동한 상태였다. 몇 시간 만에 경찰 5천 명이 동원되어 카라카스 시내를 뒤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클라린>이 호외 발행도 막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익명의 제보자가 여러 신문과 통신사에 “디 스테파노는 안전한 곳에서 구금되어있다”라고 전달한 상태였다.

다음날 아침 전 세계 언론이 디 스테파노의 납치 사건을 일제히 보도했다. 베네수엘라의 <파노라마>는 1면에 “디 스테파노, 테러리스트에 납치”라고 큼지막한 제호를 뽑았다. 잉글랜드의 <선데이 피플>도 “납치단, 축구스타를 잡다”라고 보도했다. 스페인의 <ABC>는 “어제 납치”라는 제호 아래로 디 스테파노의 사진을 실었다. <ABC>는 다음 주 월요일에 개봉될 디 스테파노의 영화 <라 바탈라 델 도밍고>의 스틸컷까지 실었다.


하필 일요일은 아들의 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디 스테파노는 본인의 납치 소식에 가족이 충격을 받을까 봐서 걱정했다. 납치범들은 도미노, 카드, 체스 등으로 인질의 불안감을 없애주려고 애썼다. 납치범 중 한 명은 “축구 실력은 끝내줄지 모르지만 체스는 정말 서툴군”이라고 말했다. 곧이어 라디오도 들을 수 있게 해줬다. 레알마드리드가 포르투를 2-1로 꺾었던 평가전 중계였다.

# 납치 56시간 만에 석방

납치 사흘째 아침 디 스테파노는 안전하게 석방되었다. 다만 그 과정은 디 스테파노에게 큰 스트레스였다. 테러리스트들과 자신이 탄 밴이 무장 경찰로 둘러싸인 포토막 호텔로 접근해야 했다. 그는 납치범들에게 “혹시나 총격전이 벌어지면 나한테도 총을 달라. 토끼처럼 있다가 총맞아 죽기는 싫으니까”라고 말하는 여유를 부렸다.

디 스테파노는 호텔이 아닌 스페인대사관 인근에서 잠시 내려서 환복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납치범들은 디 스테파노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체크 무늬 셔츠, 실크 재킷, 모자를 준비했다. 그는 입고 있던 녹색 셔츠를 가리키며 “이건 버리고 싶지 않아. 정말 좋은 옷이란 말이야”라고 저항했다.

환복한 디 스테파노는 차에 올랐다. 눈이 가려진 채로 약 3km 떨어진 ‘아베니다 리베르타도르(자유로; 절묘한 도로명이다)’에서 최종적으로 풀려났다. 나무 뒤에 숨어 납치범들이 완전히 떠난 것을 확인한 디 스테파노는 길 건너에 있던 택시를 잡고 스페인대사관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불행히 택시 기사는 스페인대사관의 위치를 잘 몰랐다. 길을 헤맨 끝에 오후 2시가 조금 넘어 겨우 도착한 대사관의 문은 이미 닫혀있었다. 디 스테파노는 “초인종을 얼마나 세게 눌러댔는지 벽에 구멍이 날 정도”라고 회상했다. 대사관 직원이 문을 열어줬고, 즉각 대사와 경찰에게 연락이 닿았다. 디 스테파노는 납치된 지 56시간 만에 완전히 자유를 되찾았다.

긴급기자회견에서 디 스테파노는 무사 귀환을 알렸다. 여전히 납치범들이 준 옷차림으로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많은 취재진에 둘러싸인 디 스테파노는 “지금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 베네수엘라 국내 정세에 관심도 없으니까 그들의 납치 목적을 따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나를 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인해줄 수 있다”라고 밝혔다.

디 스테파노는 수많은 취재진 중에서 낯익은 얼굴 두 명을 발견했다. 납치범들이 자신의 발언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디 스테파노는 그 사실을 숨긴 채 대사에게 좀 더 대사관에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장 가족이 있는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은 난관에 부딪혔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이 이틀 뒤에 상파울루와 한 번 더 경기를 치르며 디 스테파노도 꼭 뛰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싸울 생각이 들지 않았던 터라 경기는 무득점으로 끝났다.

이틀 동안 디 스테파노는 대사관 내에 마련된 처소에서 보안요원 2인의 보호를 받으며 머물렀다. ‘셀프 감금’이었다. 디 스테파노는 “납치 중이었을 때보다 훨씬 무서웠다. 문 안쪽에 의자까지 세워뒀다. 밖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신경 쓰였다”라고 떠올렸다.


사흘 뒤엔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 안에서도 불안감이 이어졌다. 스페인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벗어나고서야 디 스테파노의 원초적 공포는 막을 내렸다. 디 스테파노는 “대사가 내게 앵무새를 선물했다. 비행기에서 땀이 계속 흐른 탓에 나는 에어컨을 제일 세게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앵무새는 감기에 걸려 나흘 뒤에 죽었다”라고 썼다. 시간이 흘러 납치를 주도했던 막시모 카날레스는 폴 델 리오라는 새 이름으로 화가와 조각가로 성공을 거뒀다. 납치로 기소되는 일은 없었다.

여기까지가 디 스테파노 납치극의 전체 내용이다. 2005년 레알은 해당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 <레알: 라 펠리쿨라>(레알: 영화)의 시사회에서 디 스테파노와 델 리오의 재회를 성사시켰다. 그러나 제일 중요했던 사진은 남지 않았다. 디 스테파노가 델 리오에게 “당신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공포를 안겼다”라고 말하며 기념촬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기관총을 겨누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댔던 사람에게 우정을 품을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다행히 델 리오의 범행 동기를 이해해주기는 했다. “오늘 여기에 납치범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왔다. 그들은 옳은 일을 한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였다. 하지만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납치되었던 사흘이 3년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납치사건을 볼 때마다 그때 악몽이 떠오른다.”

*** 납치극에 연루된 축구 스타들 ***
# 피해자
1. 퀴니(1981년) 
: 바르셀로나 스타. 25일 동안 구금.
2. 펠레(1970년) : 수 차례 납치될 뻔. 심지어 월드컵 기간 중에도.
3. 알란 풀리도(2016년) : 무장 납치범들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4. 에우제비우(1963년) : 벤피카 이적에 화가 난 모잠비크 소속팀이 시도.
5. 요한 크루이프(1978년) : 납치 협박으로 월드컵 출전을 포기했다.
6. 지미 힐(1964년) : 학생들에게 잡혀 인질 협상 대상이 되기도.

# 가해자
1. 레네 이기타(2003년) 
: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납치 시도를 중개한 적이 있다.
2. 오마르 오르티스(2019년) : 납치 사건에 연루되어 멕시코 법원으로부터 징역 75년 형을 받았다.

사진= 포포투 DB, 게티이미지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