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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남자 100m 세계신기록

by Wood-Stock 2009. 9. 16.

 

  남자 100m 세계신기록 변천사 

 

 10초6 : 도널드 리핀코트(미국) 1912년6월7일

 10초4 : 찰스 패독(미국) 1921년4월24일

 10초3 : 퍼시 윌리엄스(캐나다) 1930년8월10일

 10초2 : 제시 오웬스(미국) 1936년6월21일

 10초1 : 윌리 윌리엄스(미국) 1956년8월4일

 10초0 : 아민 해리(독일) 1960년6월22일

 9초95 : 짐 하인즈(미국) 1968년10월15일

 9초93 : 칼빈 스미스(미국) 1983년7월4일

 9초92 : 칼 루이스(미국) 1988년9월24일

 9초90 : 르로이 버렐(미국) 1991년6월15일

 9초86 : 칼 루이스(미국) 1991년8월26일

 9초85 : 르로이 버렐(미국) 1994년7월7일

 9초84 : 도노반 베일리(캐나다) 1996년7월28일

 9초79 : 모리스 그린(미국) 1999년6월17일

 9초78 : 팀 몽고메리(미국) 2002년9월15일

 9초77 : 아사파 포웰(자메이카) 2005년6월15일

 9초77 : 저스틴 게이틀린(미국) 2006년5월12일

 9초77 : 아사파 포웰(자메이카) 2006년6월11일

 9초74 : 아사파 포웰(자메이카) 2007년9월10일

 9초72 : 우사인 볼트(자메이카) 2008년6월1일

 9초71 : 타이슨 게이(미국) 2009년 8월 17일

 9초69 : 우사인 볼트(자메이카) 2008년8월16일

 9초58 : 우사인 볼트(자메이키) 2009년8월17일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대략 미국의 1930년대 기록...

 

아시아기록은 2007년 사무엘 프란시스(카타르)가 세운 9초99. 일본 기록은 1998년 이토 고지의 10초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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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 믿지 못했던 男 100m

 

"아니 어떻게 된 거야? 10초00이라는 엄청난 세계신기록이 나올 수 없잖아?"

"그러게 말이야. 아무래도 플라잉 반칙을 저지른 것 같아."

"이 기록을 공인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재경기를 시킬 수밖에."

1960년 6월21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국제육상경기대회 남자100m에서 서독(현 독일)의 아르민 하리는 10초00의 세계신기록을 수립, 인류 최초로 100m를 10초에 달린 사나이가 됐다.

그러나 기록은 재경기에서 또 한 번 10초00을 내고서야 공인받을 수 있었다. 첫 경기에서 하리가 10초00을 마크하자 대회본부는 이를 믿지 않았다. 출발신호가 울리기 전에 선수가 튀어나가는 플라잉 반칙이라고 트집을 잡았고 재경기 끝에 기록을 공인해주었다.

첫 경기에서 하리가 플라잉을 저질렀으면 즉시 경기를 중단시켰어야 했다. 경기를 마친 뒤 기록을 보고 놀라서 재경기를 치른 건 하리에게 플라잉 반칙을 덮어 씌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만치 100m 10초00은 당시 믿기 어려운 기록이었다.

1913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남자100m의 세계기록으로 1912년 미국의 리핀코트가 마크한 10초60을 공인했다. 0.60초가 줄어드는데 48년이나 걸린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를 뽑는 올림픽 남자 100m는 온 지구가족의 큰 관심거리가 됐다. 10초00의 세계기록을 세운 하리는 그해인 1960년 로마올림픽 남자100m에서 10초20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올림픽 남자100m의 우승자가 얼마나 크게 국위선양을 하는지를 밝혀주는 좋은 예가 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남자100m의 금메달은 트리니다드 앤드 토바고의 헤이즐리 크로포드(10초06)가 차지했다.

"도대체 남자100m 금메달리스트를 낳은 트리니다드 앤드 토바고란 듣지 못하던 나라는 어디에 있는 어떤 나라냐?"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전 세계의 신문 방송들은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트리니다드 앤드 토바고를 약도까지 넣어 설명했다. 다른 종목의 금메달리스트라면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한다. 크로포드의 금메달이 거둔 선전효과는 광고비로 따진다면 어마어마한 액수가 됐을 것이다.

10초 안팎에 우승이 판가름 나는 100m 선수들이 경기를 앞두고 받는 스트레스는 상당하다. 1964년 도쿄올림픽 남자 100m 금메달리스트 미국의 봅 해이즈는 "경기 전날 밤 잠을 자지 못했다. 깊은 밤 몇 차례나 떨려 성경을 펼쳐놓고 기도했다. 자는 것보다 안자는 것이 훨씬 나았다. 만약 잠들었다면 무서운 꿈에 시달려 숙소 밖으로 튀어나갔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계의 종합체전인 올림픽에서 가장 인기 높은 두 종목은 축구와 육상이다. 이 두 종목은 관중이 가장 많고 따라서 입장수입도 가장 많다. 두 종목 가운데 국제축구연맹(FIFA)은 일찌감치 1930년에 세계축구선수권대회격인 월드컵을 열기 시작했다. 입장수입만으로도 월드컵은 많은 돈을 벌어 들였다.

IAAF가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창설한 것은 축구보다 50년 이상이나 뒤늦은 1983년의 일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TV방영권료와 스폰서 등의 지원으로 적자 없이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개최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었다. 다르게 말하면 육상이 돈이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렇게 되자 '금메달=돈'이라는 등식이 생겨 선수들 가운데는 부정한 수단으로라도 우승을 노리는 사람이 나타나게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가장 큰 이벤트였던 남자 100m 결승에서 미국의 칼 루이스와 대결한 캐나다의 벤 존슨은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으나 도핑테스트에 걸려 금메달과 기록을 모두 박탈당했다. 우승은 2위였던 칼 루이스에게 돌아갔다.

육상을 비롯한 기록경기의 기록은 훈련방법 그리고 장비 및 용구 등의 개선으로 뻗어나가게 마련이다. 반발력이 좋아 뛰어난 기록의 양산이 기대되는 몬도트랙이 깔린 이번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어떤 이야기꺼리들이 쏟아져 나올 지 기대된다.

고두현 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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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총알 탄 사나이 (1)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는 우사인 볼트? 정말로?

 

대구에서는 오는 8월 27일부터 8월 4일까지 '2011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가 개최됩니다. 스포츠 경기가 개최될 때면 새로운 스타가 출현하곤 하는데 이번 대회에서는 또 어떤 선수들이 팬들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인지 기대가 됩니다.

"10초 만에 끝나는 100m 달리기도 금메달이 하나이고, 11명이 예선부터 본선까지 2주일 이상 여러 게임을 치르는 축구도 금메달이 하나이니 이건 불합리하다."
"은메달 세 개는 금메달 한 개로 간주하는 것이 옳다."

혹시 이와 같은 의견에 동의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이건 옳은 표현이 아닙니다. 축구에서 우승을 하면 주전 선수는 물론 벤치에 앉아 한 게임도 출전하지 않은 선수들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기 때문입니다. 메달 집계에서 왜 축구는 하나로 취급하느냐는 질문도 문제가 있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는 메달 집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메달을 집계하는 것은 언론사에서 임의로 하는 것일 뿐, 종합 순위 1위를 차지했다고 해서 전국체전처럼 선수단에게 별도의 상을 주는 법은 없습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이 이야기했듯이 "금메달은 참가 선수에게 영광"일 뿐입니다.

똑같은 금메달이라 해도 팬의 입장에서는 더 관심이 가는 종목과 그렇지 않은 종목이 있을 것입니다. 1990년대를 풍미한 마이클 존슨과 같은 대스타가 출전하는 경우에는 200m와 400m 달리기도 인기를 끌었지만 아무래도 언론이나 팬들은 그 두 종목보다는 100m 달리기에 더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소위 총알 탄 사나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라 할 수 있을까요?

육상 다관왕이 되기 위한 종목 선택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사람이라면 9.58초라는 100m 달리기 세계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가 유력한 후보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며 어느 한 시기에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여 가장 출중한 선수가 누구인가를 선정하려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 "가장 빠르다"는 것이 100m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지만 마라톤과 같이 아주 긴 거리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고, 더 짧은 거리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을 테니 반드시 100m 달리기 기록을 가진 선수가 최고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육상에서 다관왕을 달성한 선수를 중심으로 달리기 실력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차례의 올림픽 대회를 통해 육상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받은 선수는 몇 종목에서 우승했을까요?

육상 팬은 쉽게 예측 가능하듯이 네 개입니다. 100m, 200m, 400m 이어달리기, 넓이 뛰기가 그 네 종목입니다. 육상 대회를 통해 넓이 뛰기 우승자가 세단 뛰기나 7종 경기(남성의 경우는 10종 경기) 우승을 하는 경우도 있고, 400m 우승자가 800m 우승을 하는 경우도 있으며, 인간 기관차 자토펙(1952 헬싱키 올림픽 5000미터, 1만 미터, 마라톤 우승자)이나 누르미(1924년 파리 올림픽 1500미터, 5000미터, 1만 미터 크로스컨트리 우승자)처럼 종목을 바꿔 가며 여러 대회를 통해 여러 번 우승을 하는 경우는 있습니다만 한 올림픽 대회에서 네 개의 금메달을 한 선수가 획득한 것은 100m, 200m, 400m 이어달리기, 넓이 뛰기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올림픽 남자 육상 경기 4관왕의 주인공은 두 차례 있었으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제시 오웬스(미국, 본명은 James Cleveland Owens)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의 칼 루이스(미국)가 그 주인공입니다. 넓이 뛰기는 빨리 달릴수록, 가속이 붙을수록, 발 구르는 힘이 클수록 뛰는 거리가 멀어지므로 뉴턴이 이야기한 운동의 세 가지 법칙, 즉 관성, 가속도, 작용과 반작용이 모두 잘 이용되어야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습니다.

단거리 달리기에는 관성과 가속도가 필요하므로 한 가지 요소만 더 갖추면 넓이 뛰기에서도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나란히 금메달을 딴 200m 달리기의 장재근과 넓이 뛰기의 김종일은 국내 육상 대회에서는 넓이 뛰기와 200m 달리기에 함께 출전하여 경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히틀러의 올림픽에 등장한 영웅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우리에게는 최초의 금메달이라 알려져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일본의 금메달로 기록된 대회는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입니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가 처음 시작된 대회로 유명한 이 대회에서는 아직 보편화되지 않고 있던 항공기 대신 비행선을 이용하여 올림픽에 대한 홍보 및 올림픽 관련 우편물을 전달함으로써 홍보에서는 앞선 대회보다 한층 진보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 히틀러에 의해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목적 하에 올림픽이 개최됨으로써 미국에서는 올림픽 보이콧에 의한 논쟁이 벌어졌고, 스페인에서는 대회를 보이콧하고 자체적인 대회를 열기도 하는 등 전 세계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침체일로를 걷고 있던 독일에 혜성처럼 등장한 실패한 화가가 있었으니 아돌프 히틀러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편협된 사고를 바탕으로 한, 인류 또는 국민의 화합을 깨는 지극히 비민주적인 정치 집단이지만 희망이라곤 전혀 없이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야 했던 당시의 독일 국민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하는 대안 없는 선택의 대상이었습니다.

독일 정치계에 새 바람을 일으킨 히틀러는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독일과 독일 국민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이를 통해 독일 국민들을 단합하여 다시 한 번 세계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위한 기회를 가지기 위해 올림픽 대회 전체를 거대한 정치 쇼로 기획하였습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로 "올림픽은 스포츠일 뿐 정치와 무관하다"고 역설한 쿠베르탱의 선언은 올림픽 시작 후 반세기도 지나기 전에 히틀러에 의해 폐기되어 버렸습니다. 게르만 민족의 위대함으로 과시하기 위한 정치성 짙은 올림픽에서 유색인종으로 히틀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 영웅이 바로 미국의 제시 오웬스입니다.

100m, 200m, 400m 이어달리기, 넓이 뛰기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올림픽 최초로 한 대회에서 남자 육상 4관왕에 오른 그는 이 대회 최고의 영웅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워낙 정치성이 강했던 대회에서 근대 올림픽 시작 4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대스타가 등장했으나 히틀러의 기대와는 다르게 게르만족과 같은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었으므로 히틀러의 정치적 의도에 훼방을 놓은 셈이 되었습니다.

 

  

 


영웅에 대한 잘못된 전설

제시 오웬스의 4관왕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실력은 출중했습니다. 실제로 대회 직전인 6월 20일에 10.2초(수동계시)라는 남자 100m 달리기 세계 기록을 세운 그는 예선 2차전에서 10.2초를 기록하여 세계 타이 기록을 세웠습니다만 아쉽게도 바람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기록을 공인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선 1차전에서 10.3초의 기록으로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을 뿐 아니라 200m에서 세운 20.7초와 400m 이어달리기에서 세운 39.8초는 모두 세계 기록이었습니다. (넓이 뛰기에서는 8.06미터로 세계 기록을 세우지 못했지만 당시 세계 기록은 역시 그가 1935년에 세운 8.13미터였습니다)

이와 같이 히틀러의 콧대를 꺾는 흑인 영우의 등장은 사실과 다른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잘못 알려진 내용 중 가장 유명한 것 하나를 예로 들자면 히틀러와 악수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결론적으로 네 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그가 히틀러와 한 번도 악수를 하지 않았으므로 후대의 호사가들은 제시 오웬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히틀러가 악수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히틀러의 노골적인 백호주의에 맞서서 제시 오웬스가 악수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1970년에 발행된 그의 자서전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시 오웬스가 직접 쓴 내용에 따르면 "4관왕을 차지한 후 육상 경기장의 본부석을 지나갈 때 히틀러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어 주었고, 이를 본 나도 히틀러에게 답례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가 히틀러와 악수를 하지 않은 것은 경기장 분위기와 진행의 흐름상 악수를 하기 곤란했기 때문일 뿐 서로를 경멸하여 악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미확인의 전설이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보다 앞서 발생한 사소한 문제에 대해 정치적인 해석이 가미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일은 근대 올림픽이 시작된 후 40년이 지나도록 육상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8월 2일에 열린 포환 던지기에서 한스 뵐케(Hans Wöllke)가 독일 육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진 히틀러는 그를 본부석으로 불러 격려를 겸한 악수를 했습니다.

그 후로 그 날의 우승자를 계속해서 본부석으로 불러들이자 IOC 위원장이던 베일러 라투어가 "국가 원수가 육상 선수를 자리에 부르는 것은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며 주의를 주었습니다. 이를 받아들인 히틀러는 그 후로 우승자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남자 100m 달리기 경기가 그 후에 개최되었고, 제시 오웬스가 우승을 했지만 불러들이지 않은 것이 와전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요즈음처럼 매스컴이 발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독일을 공격하는 무기로 국민들에게 제시 오웬스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 것도 잘못된 전설이 나타나게 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0초 벽을 깨자!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100m 달리기 기록이 정확한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100년 전에는 100m 달리기 기록을 정확히 잴 수 있었을까요?

기록을 재는 자세한 방법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과거에는 손으로 기록을 쟀으므로 수동계시라 하지만 1960년대부터 사람 대신 기계의 힘을 비는 전자계시가 함께 사용되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는 전자계시만 통용되고 있습니다. 수동계시는 10분의 1초 단위로 기록을 재지만 전자계시는 100분의 1초 단위로 기록을 재는 것이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남자 100m 달리기 기록의 한계는 10.0초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말이 되자 그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남자 100m 달리기에서 10초벽을 깬 최초의 선수는 미국의 짐 하인즈(Jim Hines)입니다. 그는 1968년에 개최된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9.95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대회 남자 넓이 뛰기에서 밥 비몬(Bob Beamon)이 8.90m라는 대기록을 세운 점입니다. 그의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엄청나게 좋은 기록이었으므로 그 후로 해발 1000m 이상의 고지에서 수립되는 기록은 공기 저항이 적어서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오늘날 별도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짐 하인즈의 기록을 깬 선수는 미국의 캘빈 스미스(Calvin Smith)입니다. 1980년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항의하기 위해 미국이 올림픽을 보이콧했을 때 제시 오웬스는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면 지미 카터가 이끄는 미국 정부를 비난했지만 그 대회는 결국 반쪽 올림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미국이 1970년대에 들어와서 경기력이 저하되어 소련은 물론 동독에게도 뒤지게 되자 성적이 나쁠 것을 염려하여 핑계를 댄 것이 아닌가 하는 입방아를 찧기도 했습니다. 한 번의 반쪽 올림픽을 만든 장본인으로써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유치해 놓고 있던 미국은 (비록 소련과 그에 동조하는 나라들의 불참이 우려되기는 하지만)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어야만 할 시점에서 육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100m 달리기에서 새로운 기록을 수립했으나 경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983년에 수립된 9.93초의 기록도 로키산맥에 위치한 고지의 도시 콜로라도스프링스에서 기록된 것이라 오늘날에는 별도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 해에 그는 취리히에서 개최된 9.97초의 기록을 세워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는 했지만 헬싱키에서 개최된 세계 육상선수권 대회에서 200m 달리기에서 우승했을 뿐 100m 달리기에서는 칼 루이스(Carl Lewis)에 이어 2위에 머무름으로써 동갑내기 칼 루이스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 칼 루이스가 절대 강자의 위치로 올라섬으로써 캘빈 스미스는 서울올림픽에서의 100m 동메달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400m 계주의 금메달 이외에 올림픽에서는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습니다. (계속)

 

기사입력 2011-02-18 오전 10:29:11 / 예병일 연세대학교 운동의학센터 교수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총알 탄 사나이 ②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는 칼 루이스 혹은…

지난 글에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남자 육상 경기에서 100m와 200m 달리기, 400m 이어달리기, 넓이뛰기에서 4관왕을 차지한 제시 오웬스가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인류 역사상 최고로 빠른 사나이로 선정될 만한다는 소개를 했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 미국의 캘빈 스미스는 100m 달리기에서 마의 벽이라 여겨졌던 10초벽을 깨뜨림으로써 새로운 스타의 대열에 오를 뻔했으나 동갑내기 동료가 그의 앞길을 막아 버리는 바람에 세계 육상 역사에서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100m 달리기에서 마의 벽을 깨는 선수들은 계속해서 등장했고, 이제는 100m 달리기 기록의 한계가 얼마인가에 대한 논쟁에서 기록이 점점 더 앞당겨지는 추세에 있습니다.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미국의 올림픽

1970년대 올림픽에서 소련은 물론 동독에도 뒤지기 시작한 미국의 경기력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을 선언할 때만 해도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피터 위베로스가 조직위원장을 맡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근대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을 흑자로 마무리했을 뿐 아니라 그 대회에서 종합 2위를 차지한 루마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여러 스포츠 강국이 불참하였으므로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세계 스포츠계의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줄 만큼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흑자 올림픽과 미국의 빛나는 성적 뒤에는 출전국을 쥐어짜다시피 한 얌체 상혼과 미국을 위한 편파 판정이 예전에 올림픽에서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끊임없이 발견되어 대회가 끝난 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미국의 올림픽"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올림픽 개최 10주전부터 시작된 예술 페스티벌(Arts Festival)이 정례화한 올림픽입니다. 이미 23년이나 지난 일이 되었지만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을 기억해 보신다면 올림픽 문화 예술 축제라는 이름으로 7년 전에 대한항공기를 사할린 앞바다로 추락시킨 소련의 볼쇼이 발레단을 초청한 것을 비롯하여 갖가지 문화 예술 행사가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올림픽과 함께 문화 예술 행사가 필수적으로 개최해야 하는 행사로 시작된 것이 바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입니다.

새로운 영웅의 등장

제시 오웬스가 베를린 올림픽을 빛낸 후 47년이 지난 1983년, 미국의 매스컴에서는 안방에서 열리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48년 만에 새로운 영웅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인공은 1961년생으로 캘빈 스미스와 동갑인 칼 루이스였습니다. 1980년에 대학 입학과 동시에 넓이뛰기와 400m 이어달리기 종목에서 미국 대표 선수로 선발된 그는 계속해서 기록을 단축하며 세상에서 가장 빠른 총알 탄 사나이가 되기 위한 기초를 다져갔습니다.

1983년에 캘빈 스미스가 비록 고지대(해발 1000m 이상)이긴 하지만 1968년에 짐 하인즈가 세운 9.95초의 기록을 깬 9.93초의 세계신기록을 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지에서 9.97초의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지만 헬싱키에서 개최된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10.21초라는 부진한 기록에 머무는 바람에 10.07초를 기록한 칼 루이스에게 우승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캘빈 스미스는 200m 달리기 경기에서 20.14초를 기록하면서 우승을 하기는 했지만 이 대회 넓이뛰기 경기에서 칼 루이스는 가볍게 금메달을 손에 넣었고, 그 때부터 칼 루이스의 기록 향상 속도가 가속을 더해 가면서 미국에서는 올림픽이 개최되는 날까지 칼 루이스의 4관왕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간 자신의 기록을 점점 더 단축시켜 간 칼 루이스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기대에 걸맞게 100m, 200m, 400m 이어달리기, 넓이뛰기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올림픽 4관왕이 되었습니다. 불과 23세의 4관왕이었으니 4관왕 2연패가 기대되기도 했고, 실제로 그는 4관왕을 차지한 후의 인터뷰에서 2연패는 물론 서울올림픽에서는 400m 달리기에서도 금메달을 노리겠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100m 달리기에서 10.22초의 기록으로 3위를 차지한 캐나다의 동갑내기 벤 존슨은 (약물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인지) 그 때부터 서서히 기록을 단축시켜 1987년 아테네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9.93초를 기록한 칼 루이스를 2위로 밀어내고 9.83초의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 기록은 훗날 약물 복용 사실이 들통나 취소되고 칼 루이스가 우승한 것으로 뒤늦게 수정되었지만 약물 복용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던 1988년에는 올림픽이 가까워지기는 해도 서울에서 칼 루이스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거둔 것만큼 훌륭한 성적을 올릴 것을 예견하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 올림픽에서 9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딴 칼 루이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인가? ⓒtop-10-list.org

칼 루이스의 명과 암

1984년 올림픽 4관왕에 빛나는 칼 루이스의 최대 약점은 세계신기록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벤 존슨은 1987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칼 루이스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할 때 9.83초라는 대단한 기록을 세워 100m의 절대 강자가 되었고, 서울올림픽에서는 9.79초라는 새로운 신기록으로 우승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기록은 세계신기록일 뿐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했다는 점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합니다. 비록 서울 올림픽에서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들통 나는 바람에 우승의 영광에 대한 환희가 그치기도 전에 도망가듯 한국을 떠나야 했고, 이전에 세운 9.83초의 기록마저 취소되면서 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스캔들중 하나로 남게 되었지만 인간의 한계를 끌어올렸다는 점은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벤 존슨의 100m 우승이 3일 천하로 끝난 서울 올림픽에서 칼 루이스는 9.92초의 기록으로 2위로 들어왔지만 3일 후에 우승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또한 1년 전, 그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할 때 우승자인 벤 존슨이 세운 9.83초의 세계신기록마저 취소되면서 이 기록이 세계신기록으로 인정을 받게 되면서 자신 최초의 세계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넓이뛰기에서는 어렵지 않게 2연패에 성공했으며, 200m 달리기에서는 19.75초를 기록한 조 델루치에 이어 19.79초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400m 이어달리기에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파울을 범하는 미국의 전통이 발휘된 이 대회에서 바통을 떨어뜨리는 실수만 저지르지 않았다면 이 대회에서도 3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예약해 놓았던 금메달 한 개는 허공으로 날려 보내고 말았습니다.

100m 달리기에서는 여러 경쟁자들이 등장하여 그 후로 칼 루이스의 우승 소식을 듣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되었지만 넓이뛰기에서는 출전한 대부분의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꾸준한 성적을 거둠으로써 1992년의 바르셀로나에 이어 1996년 애틀랜타까지 4연패를 했고,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400m 이어달리기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바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올림픽에서 모두 9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차지한 칼 루이스의 기록은 지금까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습니다.

제시 오웬스 대 칼 루이스, 누가 더 위대한가?

어떤 기준을 세우는가에 따라 평가자들의 견해가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만 "1936년의 제시 오웬스와 1984년의 칼 루이스중 누가 더 우수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저는 제시 오웬스가 더 우수한다고 판정합니다.

단순히 기록을 비교하자면 반세기 뒤에 활약한 칼 루이스의 기록이 앞선다고 할 수 있지만 각자가 활약한 시기에 다른 선수들의 능력과 비교해 본다면 제시 오웬스의 우수성이 두드러집니다. 똑같이 4관왕을 달성했지만 제시 오웬스는 네 종목 모두에서 세계신기록을 보유한 것도 제가 칼 루이스보다 제시 오웬스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4관왕을 차지한 칼 루이스의 기록은 100m가 9.99초, 200m가 19.80초, 400m 이어달리기가 37.83초, 넓이뛰기가 8.54m였습니다. 이중에서 400m 이어달리기 기록은 세계신기록이었지만 100m(세계신기록은 400m 계주에서 함께 뛴 캘빈 스미스의 9.93초), 200m(피에트로 매니아의 19.72초), 넓이뛰기(밥 비몬의 8.90m)등 세 종목의 기록은 세계신기록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제시 오웬스의 기록은 100m가 10.3초, 200m가 20.7초, 400m 이어달리기가 39.8초, 넓이뛰기가 8.06m였습니다. 이 중에서 200m와 400m 이어달리기 기록은 세계신기록이었고, 100m 달리기와 넓이뛰기 세계신기록은 이 대회보다 앞서서 그가 기록한 10.2초와 8.13m였으니 제시 오웬스는 1936년 당시에 네 종목 모두에서 세계신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넓이뛰기 기록은 20여 년이 지나도록 깨어지지 않는 불세출의 기록이었습니다. 100m 달리기 기록도 20년이 지나서야 10.1초의 기록이 세워지므로 100분의 1초까지 기록하는 오늘날의 자동계시와 다른 점에서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수동계시기록으로는 20년간 같은 기록을 내는 선수는 등장했지만 그를 능가하는 선수는 나타나지 않을 만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벤 존슨이 1987년 세계선수권 대회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세운 9.83초와 9.79초의 기록이 금지 약물 복용 후 취소되자 칼 루이스가 서울올림픽에서 세운 9.92초의 기록은 잠시나마 그가 세계 신기록 보유자라는 별명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또 400m 이어달리기에서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팀이 37.40초의 새로운 세계신기록을 세울 때 함께 뛴 칼 루이스에게 세계신기록 보유자로 등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이런 기록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주인공에게 신기록 보유자의 위치를 넘겨주어야만 했으므로 저는 개인적으로 칼 루이스보다 제시 오웬스가 더 위대한 선수라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그러나 제시 오웬스는 한 대회에서 반짝 빛을 발한 후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하다시피 한 것과 달리 칼 루이스는 4차례의 올림픽에 미국 대표 선수로 출전하여 인류 역사상 육상에서 가장 많은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한 시기를 기준으로 한 최고의 선수는 아니지만 한 선수의 생애를 기준으로 하면 그가 최고의 육상 선수라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이상 두 차례에 걸쳐서 제시 오웬스와 칼 루이스를 중심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누구인가에 대한 제 견해를 밝혔습니다만 이들 외에도 총알탄 사나이의 후보에 오를 수 있는 선수들이 더 있으므로 다음에도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기사입력 2011-02-25 오전 9:57:00 / 예병일 연세대학교 운동의학센터 교수


[예병일의 '스포츠 뒤집어보기'] 총알 탄 사나이 ③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는 볼트…한국은 누구?

 

앞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육상 4관왕 제시 오웬스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의 육상 4관왕 칼 루이스가 이룬 업적을 소개했습니다. 기록으로는 후대의 선수인 칼 루이스가 더 빠르지만 같은 시대의 다른 선수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칼 루이스보다 제시 오웬스의 기록이 더 대단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라면 반드시 100m를 가장 빨리 뛰는 선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50m, 또는 150m를 빨리 뛰는 선수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의 대열에 오를 수도 있고, 거리에 관계없이 순간속도가 가장 빠른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입니다.

또 마라톤이나 1만 미터 달리기가 가장 빠른 사람을 선택한다 해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준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따라 대상자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육상 종목 중 평균속도가 가장 빠른 종목인 100미터 달리기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100m 달리기의 최고가 진짜 최고인가?

올림픽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바람의 영향을 차단한 실내 육상 경기 중에서는 60m 달리기 또는 60m 장애물 달리기 종목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건 특별한 경우이고, 큰 권위를 가지는 육상 대회에서는 100m 달리기가 최단거리이면서 가장 빠른 경기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알려져 있다"라는 것이 사실은 아닙니다. 작년까지 30년 이상 한국 기록으로 남아 있던 남자 100m 달리기 서말구의 기록은 10.34초였지만 아시안게임에서 두 개의 금메달을 안겨다 준 장재근의 200m 달리기 기록은 20.41초이므로 한국 기록은 반올림하여 30년간 200m를 달린 장재근의 순간기록이 서말구의 기록은 물론 작년 6월 7일에 세워진 김국영의 10.23초보다도 빠릅니다.

마찬가지로 100m 달리기에서 10초벽을 최초로 깬 짐 하인즈의 기록이 9.95초일 때 피애트로 매니아의 200m 달리기 기록은 19.72초였으니 100m의 순간기록이 200m의 순간기록보다 빠를 것이라는 생각은 오로지 생각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칼 루이스가 1984년 올림픽에서 우승할 당시의 기록도 9.99초와 19.80초로 200m의 순간기록이 더 빨랐고, 후에 세계기록을 세우기는 했지만 최고기록이 9.92초에 불과했으니 200m의 순간기록보다는 더 느린 셈입니다.

최근 30년간은 100m 달리기 선수이면서 200m 달리기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선수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물론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가 금지 약물 투여 사실이 발각되어 금메달을 빼앗기고 도망치다시피 한국을 빠져나가야 했던 캐나다의 벤 존슨이나 그의 뒤를 이어 캐나다 선수로 세계 정상에 오른 도노반 베일리 같은 선수는 100m 달리기에서 세계 정상에 오르고 세계 신기록을 세웠지만 정작 200m 달리기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 주지 못했지만요. 그러다 보니 매스컴에서는 100m 달리기 전문 선수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세계 육상계에 이전에 보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400m 달리기 선수가 100m 달리기 선수를 물리치고 200m 달리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주인공은 1967년생으로 올림픽에서 4개의 금메달(2000년 시드니 올림픽 1600미터 이어달리기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으나 훗날 다른 선수의 약물 복용이 드러나 박탈당함)과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8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마이클 존슨입니다.

200m 달리기가 100m 달리기보다 빠르다?

칼 루이스의 맞수였던 벤 존슨은 1987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와 1988년 올림픽에서 두 차례에 걸쳐 9.83초와 9.79초의 기록으로 두 차례에 걸쳐 세계 기록을 갈아치웠지만 금지 약물 복용에 의해 기록이 취소되는 바람에 한동안 세계 신기록 보유자는 칼 루이스로 남아 있었습니다.

9.92초인 그의 기록은 1991년에 9.90초를 기록한 르로이 버렐에게 깨지지만 불과 두 달 후에 칼 루이스는 9.86초를 기록함으로써 노장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았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형님은 이제 물러나라는 듯 르로이 버렐은 1994년에 9.85초를 기록하면서 다시 세계 신기록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벤 존슨이 떠난 후 캐나다 선수로 다시 정상에 오른 선수는 도노반 베일리였습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9.84초라는 세계 기록을 수립하면서 우승을 차지한 그는 400m 이어달리기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면서 당연히 미국의 차지가 될 것으로 예상된 금메달을 캐나다에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또 한 명의 총알 탄 사나이가 등장했으니 400m 달리기에 이어 200m 달리기에서도 우승한 마이클 존슨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미 그는 1991년 도쿄에서 개최된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200m와 400m 달리기에서 우승함으로써 세계 선수권 역사상 최초로 이 두 종목 우승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1992년 올림픽에서 1600m 이어달리기를 제외하면 자신의 주 종목에서는 불운으로 메달을 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200m와 400m 달리기에서 2관왕에 오르면서 1990년대 세계 육상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베일리가 100m에서 세계 기록을 세운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존슨의 200m 기록은 고지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얻어진 19.72초의 기록을 28년 만에 깨뜨린 19.66초였습니다.

19.66/2=9.83이므로 존슨은 "가장 빠른 사나이는 베일리가 아니라 나"라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올림픽 후 불과 38일 만인 1996년 8월 1일, 존슨은 19.32초라는 새로운 세계 기록을 수립함으로써 자신이 최고라는 주장이 헛된 주장이 아님을 증명시켜 주었습니다. 200m와 400m 선수로는 드물게 인기도 높고, 팬들도 많았던 존슨이 200m 달리기에서 19.32초를 기록할 당시 전반부는 10,12초, 후반부는 9.20초가 걸렸으니 순간속도라는 면에서는 베일리를 능가한 것이 분명합니다

▲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알려져 있는 우사인 볼트. ⓒ뉴시스

세기의 이벤트, 150m 달리기!

19.32초라는 200m 달리기 기록의 보유자 존슨의 도전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독자께서 심판이라면 이 둘의 승부는 어떻게 가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존슨의 도전에 대해 베일리는 초기에는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매스컴에서 기사화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스폰서들이 붙기 시작하면서 응해 줄 수도 있다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단 한 번의 달리기에 개런티가 얼마가 책정될 것인가도 화제가 되기 시작했고, 존슨이 제안한 150m 달리기가 어떤 방식으로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도 커져 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 둘의 대결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1997년 6월 1일에 토론토에서 열린 세기의 이벤트, 150m 달리기 시합은 400m 트랙 중 225미터 지점부터 375미터 지점까지 75미터의 곡선 주로와 75미터의 직선 주로를 달리는 방식으로 치러졌습니다. 경기가 열리기 전, 경기 내내 뒷꽁무니를 보게 될 것이라는 베일리의 주장과 결국에는 자신이 앞서서 골인할 것이라는 존슨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으며, 전문가들의 주장도 갈라지는 듯했지만 필자의 기억으로는 존슨의 우세를 점치는 이들이 많았던 걸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승자는 베일리였습니다. 단 두 명의 선수가 참여하여 단 한 번의 경기로 끝나 버린 이 이벤트에서 초기에 뒤져 있던 존슨이 110m를 지날 때쯤 대퇴부 네갈래근에 이상을 느껴 경기를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만약 존슨이 근육 이상을 느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경기를 포기하기 전까지 존슨의 모습은 그리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근육 이상이 발생하지 않았다 해도 그 날 만큼은 베일리가 승자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이 이벤트에서 승자가 된 베일리는 1997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승자인 베일리는 150만 달러, 패자인 존슨은 50만 달러의 대전료를 지급받았으니, 약 15초밖에 안 걸리는 이벤트에서 주어진 개런티는 승자에게 초당 1억 원을 초과하였습니다.

베일리의 뒤를 이은 그린

20세기를 통틀어 단 한 번 열린 150m 달리기를 통해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등극한 베일리의 천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약 두 달 후에 개최된 아테네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9.86초를 기록한 미국의 모리스 그린에게 1위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베일리의 기록은 9.91초였으며, 자신이 세운 9.84초의 기록을 한 번도 깨지 못했으니 이미 100m 달리기에서 여러 차례 자신의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장기간 세계 정상을 차지했던 선수들보다는 한 수 아래로 남아야 했습니다.

1997년에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였던 베일리를 넘어선 그린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3회 연속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100m 달리기에서 우승했을 뿐 아니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1999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200m 달리기에서도 우승했으니 당대에는 최고로 빠른 사나이였다는 데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또 1999년 6월 16일에 아테네에서는 9.79초를 기록하면서 베일리의 기록을 역사의 흔적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세계 기록을 내고, 두 달 후에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우승을 차지할 당시 그린에 대한 일화가 수년의 세월이 흐른 후 국내 한 텔레비전 방송에서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1990년대 말, 스페인을 떠들썩하게 한 도둑을 잡은 것입니다. 이미 경찰에게 익히 얼굴이 알려져 있는 이 도둑은 뛰어난 달리기 실력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을 다녔지만 하필이면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 출전한 그린이 목격하는 사이에 행인의 핸드백을 날치기하다 모린에게 들켜 버린 것입니다.

우연히 도둑질하는 장면을 목격한 그린은 스페인 경찰들이 여러 차례 놓쳐 버린 도둑을 어렵지 않게 따라잡아서 경찰에게 넘겨 버렸습니다. 이에 대한 간단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보기 http://www.independent.ie/world-news/luck-runs-out-for-thief-who-picked-on-wrong-man-400097.html)

현역 최고의 달리기 선수는 볼트

9년 이상 지속된 그린의 100m 달리기 세계 기록은 1982년생인 자메이카의 아사파 포웰에 의해 깨졌습니다. 2005년에 9.77초를 기록한 포웰은 그 후에도 기록을 단축시켜 현재 그의 최고 기록은 9.72초입니다.

동갑이자 그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타이슨 게이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미국 예선에서 9.77초를 기록한 바 있으며, 2009년 상하이에서는 9.69초라는 자신의 최고 기록을 수립한 바 있습니다. 이 두 선수 모두 현역 선수로 활약하면서 100m 달리기 대회가 열릴 때마다 우승 후보로 거론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현역 최고의 달리기 선수는 우사인 볼트라 해야 할 것입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100m와 200m 달리기, 400m 이어달리기 등 세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릴 당시 볼트의 나이는 불과 22세(1986년생)였습니다. 비교적 다른 선수보다 빠른 나이에 정상에 오른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세 종목 금메달을 획득할 당시 그의 100m, 200m, 400m 이어달리기 기록은 각각 9.69초, 19.30초, 37.10초로 전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200m 기록은 마이클 존슨의 기록을 12년 만에 깬 것이며, 100m 우승 당시에는 마지막에 전력을 다하지 않고도 신기록을 세워 보는 이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후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100m에서 9.58초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다시 한 번 세계 신기록을 세움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이 대회에서 자메이카 대표팀은 400m 이어달리기에서 37.31초를 기록함으로써 베이징 올림픽에서 세운 세계 기록을 갈아치우는 데 실패했으나 볼트 자신은 200m 달리기에서 19.19초로 다시 한 번 세계 기록을 세움으로써 100m와 200m 달리기에서 동시에 세계 신기록을 세웠을 뿐 아니라 2위와의 격차도 사상 최고를 기록함으로써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의 위치에 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시 오웬스나 칼 루이스와 다르게 넓이뛰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볼트지만 아직 20대 초반인 그의 나이와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어가고 있는 잠재력을 감안해 볼 때 앞으로도 올림픽과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맹활약을 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사나이의 위치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예상을 해 봅니다.

올해 대구에서 개최되는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볼트와 그에 맞서는 게이와 포웰이 어떤 경기를 보여줄 것인지, 또 어떤 새로운 스타가 출현하여 대회를 즐겁게 해 줄 것인지 기대가 됩니다.

 

기사입력 2011-03-04 오전 10:28:53 / 예병일 연세대학교 운동의학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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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m 인간 한계는?

 

우사인 볼트는 육상 100m의 '인간 한계'에 가장 근접한 선수다. 2009 베를린 세계선수권 결선에서 9초58로 골인, 2008 베이징올림픽 때 본인이 세웠던 종전 세계기록(9초69)을 0.11초 앞당겼다.

 


 

100m 세계기록의 발전사는 볼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짐 하인즈
( 미국 )가 1968 멕시코올림픽에서 9초95로 우승하며 처음 10초 벽을 깼다. 아사파 파월이 2007년 9월 세운 세계기록이 9초74였다. 39년 가까운 기간에 단 0.21초가 줄었다. 그런데 볼트는 2008년 5월 9초72를 시작으로 1년여 사이에 걸쳐 세계기록을 0.14초 단축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볼트는 2008 올림픽 100m 결선 때 결승점을 20m쯤 남긴 상태에서 전력 질주를 하지 않고 승리를 자축하는 몸짓을 해 화제를 모았다. 끝까지 최선을 다했으면 9초69가 아니라 9초65 안팎의 기록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볼트의 2008 올림픽, 2009 세계선수권의 구간별 기록을 비교해보자( 표 참조 ). 2008 올림픽의 경우 출발 반응 시간이 상대적으로 느렸음에도 20m까지 기록은 오히려 0.02초가 앞섰다. 하지만 속도를 최고로 끌어올리는 과정은 2009 세계선수권이 좋았다.

볼트의 운동 능력은 괴물급이다. 그가 달리면서 스텝을 한 번 밟을 때의 최대 압력은 1000파운드(약 453㎏) 정도다. 이 힘을 손실 없이 추진력으로 바꾸려면 발가락 부분을 중심으로 트랙에 터치다운(touch down) 하고 나서 빠르게 다리를 끌어올려 다음 터치다운으로 치고 나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스프린터가 볼트(196㎝)처럼 키가 크면 보폭이 크고 다리를 번갈아 옮기는 데 상대적으로 시간이 더 걸린다. 하지만 볼트는 단거리에 적합하게 발달시킨 특유의 근육 덕분에 터치다운이 강한 데다 발과 지면이 접촉하는 시간도 줄여 효율적인 레이스를 할 수 있다.

볼트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그는 "9초4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여러 과학자도 100m의 인간 한계가 9초3~9초4 정도라고 추산한다. 100m는 워낙 거리가 짧아 개선할 부분이 적다는 단점이 있다.

일단 볼트가 기록 행진을 하는 동안 보였던 장점들을 결합하면 9초5 초반 기록이 가능하다. 2009 세계선수권 준결선의 출발 반응 시간(0.135초), 2008 올림픽 결선의 초반 20m 속도, 2009 세계선수권 결선의 최고 스피드를 합치면 새로운 '꿈의 기록'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 성진혁 기자 | 입력 2011.07.18 03:07